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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진리와실천
불기2564-11-06_선견율비바사-K0937-016 본문
『선견율비바사』
K0937
T1462
제16권
● 한글대장경 해당부분 열람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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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통합대장경 사이트 안내
○ 해제[있는경우]
● TTS 음성듣기 안내
※ 이하 부분은 위 대장경 부분에 대해
참조자료를 붙여 자유롭게 연구하는 내용을 적는 공간입니다.
대장경 열람은 위 부분을 참조해주십시오.
『선견율비바사』
♣0937-016♧
제16권
♥아래 부분은 현재 작성 및 정리 중인 미완성 상태의 글입니다♥
○ 2019_1105_161841_nik_exc_s12 순천_선암사_송광사_풍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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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9_1104_112413_nik_ab41_s12 구례_화엄사_연곡사_풍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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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0_0904_135534_nik_ab41 원주_구룡사
○ 2019_1105_155240_can_ar38 순천_선암사_송광사_풍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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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0_0908_145420_can_BW25 합천_해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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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9_1201_161154_can_CT27 원주_구룡사_풍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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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9_1105_172103_can_ar45_s12 순천_선암사_송광사_풍광
○ 2019_1201_153735_can_Ab31_s12 원주_구룡사_풍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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善見律毘婆沙卷第十六
K0937
선견율비바사 제16권
승가발타라 한역
“이제 반타(般陀)의 근본 인연을 말하겠습니다.
반타는 한(漢)에서 길가에서 태어났다는 말입니다.
왜냐하면 반타의 어머니는 본래 큰 부자 장자의 딸이었습니다.
장자는 오직 이 하나의 딸만을 두었으며 7층의 누각을 지어서 이 딸을 편히 두고 한 종을 보내서 필요한 것을 공급하게 하였습니다.
종은 크게 자라서 이 딸과 사통을 하였습니다.
곧 종과 함께 의론하면서 ‘나는 지금 그대와 함께 배반하고서 딴 나라에 가겠습니다’고 이렇게 세 번이나 종에게 물었으나,
종은 ‘떠나갈 수 없다’고 하였습니다.
딸은 종에게 ‘그대가 만약 떠나지 않으면 나의 부모가 알고 반드시 그대를 죽일 겁니다’라고 하자
종은 ‘내가 만약 다른 지방에 가면 가난하여 돈과 보물이 없는데 어떻게 생활하겠습니까?’라고 대답하였습니다.
딸은 종에게 ‘그대는 나를 따라서 갑시다.
나는 값진 보물을 훔쳐서 그대와 함께 가지고 갈 것입니다’고 하니,
종은 ‘만약 그렇다면 나도 함께 떠나가겠습니다’고 하였습니다.
이 딸은 날마다 값진 보배를 훔쳐서 종과 함께 가지고 나가서 밖에다 감추었습니다.
모두 헤아려서 두 사람이 지닐 중량이 되어서야 종을 먼저 내보내 밖에서 함께 만날 약속을 하고,
이 딸은 거짓으로 종의 의복을 입고 자물쇠 문을 비틀어서 나갔습니다.
종과 함께 서로 따르며,
멀리 다른 나라에 도착하여 안정할 만한 곳에서 머물렀습니다.
1, 2년 동안에 곧 잉태하여 해산하려 할 적에
‘내가 이제 여기에 있으면 해산할 때에 바라지 할 사람이 없구나’라고 생각하면서
어머니를 기억하고 집으로 돌아가기를 바라며 남편과 함께 상의하였습니다.
‘내가 만약 해산할 때면 우리 어머니만이 계시면서 바라지를 할 수 있을 터이니 나는 이제 떠나가려 합니다.
그대도 떠나가겠습니까?’라고 하니,
종인 남편은 ‘떠날 수 없습니다.
우리들은 배반하고서 왔습니다.
어떻게 돌아가겠습니까?
상전은 반드시 우리들을 죽일 것입니다’라고 대답하였습니다.
부인은 남편에게 ‘여인의 법에서 비록 화가 난다 하더라도 자식을 죽일 수는 없습니다.
그 때문에 떠나가려 합니다’고 하였지만 남편은 ‘만약 그대를 죽이지 않으면 반드시 나를 죽일 것이니,
떠날 수는 없습니다’고 하였습니다.
남편이 산에 들어가 땔나무를 하느라 없자 뒷문을 닫아놓고 떠났습니다.
남편이 돌아오니 그의 부인이 안 보이기에 이웃에게 ‘나의 아내를 보았습니까?’ 하니,
‘그대의 아내는 이미 떠나갔습니다’고 하였습니다.
그 남편은 듣자마자 뒤를 따라 쫓아가 중로에서 그 부인에 미쳤더니 벌써 하나의 사내를 낳았습니다.
남편은 부인에게 ‘그대는 해산 하려고 떠났는데 그대는 이제 해산해버렸으니 무어 떠나갈 필요가 있겠습니까?’고 하자 부인은 이 말을 들고 부모에게 부끄러워 함께 집에 돌아와서 바라지하며 생활하였습니다.
그 후 오래지 않아서 다시 잉태하였습니다.
해산하려 할 적에 어머니가 생각나 다시 배반하고 집으로 돌아갔습니다.
중로에 이르러서 다시 하나의 사내를 낳았는데,
그 남편이 쫓아 왔으므로 중로에서 함께 돌아갔습니다.
그 두 아이를 길가에서 낳았기 때문에 이름을 반타라고 하였습니다.
반타 형제는 동무들과 함께 장난하는 데 두 아이는 힘이 세어서 동무들을 때렸습니다.
동무들은 ‘너희는 육친 권속들도 없이 고단하게 홀로 여기에 있으면서 어찌 감히 우리를 때리느냐’고 욕하였습니다.
아이들은 이 꾸짖음을 듣고 집에 돌아가 울면서 어머니에게 물었습니다.
‘다른 사람들은 모두가 육친 권속들이 있는데 우리들만이 어째서 없습니까?’
그 어머니는 잠자코 대답하지 않자 그 아이들은 울면서 마시거나 먹으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어머니는 먹지 않고 울면서 그렇게 함을 보고 그 어머니는 두 아이를 사랑하는 생각 때문에 그 사실을 말하였습니다.
‘나는 아무 나라 큰 부자인 장자의 딸이었다.
너희 아버지는 장자의 집 종이었는데,
나를 공급하도록 보낸 것을 나는 그와 사통하여 서로가 떨어질 수 없었다.
나는 그와 함께 도피하여 여기에 있으면서 너희들을 낳은 것이다.’
두 아이는 어머니의 말을 듣고 어머니에게 ‘우리를 보내주시면 외가에 돌아가겠습니다.
여기에 머무르면서는 생활할 수 없습니다’고 하였지마는 그 어머니는 허락하지 않았습니다.
두 아이는 울기를 그치지 않자 어머니는 곧 남편과 함께 상의하며 ‘이 아이들은 울면서 여기서는 살려하지 않으니,
우리들은 어떻게 해서라도 함께 그 외가에 보내주십시다’고 하였습니다.
남편은 ‘그렇게 합시다’고 하였습니다.
곧 같이 가서 도착한 뒤에 부모와 아이 모두가 문 밖에서 있다가 집사람이 나오므로 ‘그대는 돌아가서 장자에게 ≺장자의 딸이 아내와 남편을 데리고 지금 문 밖에 있노라≻고 이르라’고 하였습니다.
부모는 듣고 ‘두 아이는 들게 할 수 있지만 너는 서로 만날 필요가 없노라’하고,
장자는 곧 사람을 보내서 두 아이를 마중하여 들였습니다.
아이가 들어온 뒤에 곧 향탕에 목욕시키고 향을 몸에 바르고 옷에 영락을 붙이고 장자는 두 아이를 안아서 두 무릎 위에 놓고 물었습니다.
‘너희 어머니는 다른 지방에 있으면서 어떻게 생활하느냐?
매우 가난하지는 않느냐?’
두 아이가 대답하였습니다.
‘저희 부모는 다른 지방에 있으면서 가난하여 땔나무를 해다가 팔며 살았습니다.’
어머니가 이 말을 듣고 마음에 애처로운 생각을 내어 즉시 곳집을 열고 주머니에 금을 담아서 사람에게 보내면서 딸에게 말하도록 하였습니다.
‘너는 저 두 아이를 머물게 하라.
내가 스스로 기르겠다.
너는 이 금을 가지고 먼저 살던 곳으로 돌아가 잘 살아라.
나와 서로 만날 필요는 없다.’
두 아이가 나이가 들고 크자 그들을 위하여 아내를 맞이하였습니다.
부모가 나이 늙어서 죽으려고 할 때에 집안일은 다 두 아이에게 부탁하였고 그 부모는 목숨을 마쳤습니다.
그때 부처님은 4중을 위하여 설법하시는데 그 때 마하 반타는 곧 부처님께 나아가 설법을 들었습니다.
법을 듣고 나서 마음에 출가하기를 바라고 집에 돌아가 아우와 함께 상의하며 ‘나는 이제 출가하려 하니,
집일은 너에게 부탁하노라’고 하였습니다.
아우는 형의 말을 듣고 마음속으로 괴로워하면서 형에게 ‘나는 이제 외로워서 의지할 곳이 없습니다.
형이 지금 나를 버리고 출가하면 나는 어떻게 살 수 있겠습니까?’라고 하였습니다.
그 아우는 이렇게 세 번을 청하였지마는 형의 마음은 견고하여 물리치거나 변함이 없었습니다.
집안일을 아우에게 부탁하고 곧 출가하니,
출가한지 오래지 않아서 아라한을 얻었습니다.
그 아우는 오랜 뒤에 ‘나의 형이 집안일을 버리고 나에게 주기를 마치 사람이 구토(嘔吐)함과 같이 하여 다름이 없었다.
나는 어찌하여 받아서는 탐착을 낼까?’라고 생각하고,
세상을 싫어하여 즉시 형에게 가서 출가하기를 바랐습니다.
형은 제도하여 출가하게 하고 그에게 한 게송을 가르쳤는데 넉 달을 터득하지 못하고 앞을 잊기도 하고 뒤를 잃어버리기도 하였습니다.
형인 마하 반타는 ‘이 사람은 부처님 법에 인연이 없구나.
집으로 돌려보내야 겠구나’라고 생각하고,
주라(周羅) 반타에게 ‘너는 이제 근기가 둔하구나’라고 하면서,
즉시 가사를 끌고 내쫓아 문을 나가게 하였더니,
문 밖에서 울면서 집으로 돌아가려 하지 않았습니다.
그때 세존은 하늘눈으로 중생들을 살피시다가 주라 반타가 제도될 인연임을 보시고 세존은 그곳에 나아가셔서 주라 반타에게 물으셨습니다.
‘어찌하여 울면서 여기에 있느냐?’
부처님에게 대답하였습니다.
‘제가 둔한 근기여서 하나의 게송을 외우면서 넉 달이나 되었지만 터득하지 못하였습니다.
형 마하 반타는 제가 둔한 근기이기 때문에 저를 내쫓아 절에서 내보냈습니다.’
부처님은 ‘너는 그치고 괴로워하지 말라.
내가 가르쳐 주리라’고 하셨습니다.”
법사가 말하였다.
“마하 반타는 그가 도를 인연을 못 보았습니까?
어찌하여 그를 끌어내었습니까?”
대답하였다.
“주라 반타는 성문으로서는 제도할 수 없고 부처님만이 제도할 수 있었으므로 끌어낸 것입니다.
세존은 그의 마음을 편안히 위로하시고 곧 조그마한 흰 모전을 주라 반타에게 주시면서 ‘너는 이 모전을 붙잡고 해를 향하여 쪼이면서 ≺때[垢]가 없어져라.
때가 없어져라≻라고 하는 생각을 하라’고 하셨습니다.
부처님은 가르친 뒤에 마을에 들어가시어 비사거(毘舍佉) 어머니의 청을 받으셨습니다.
부처님은 정오일 적에 주라 반타가 도를 얻으려 함을 살피시고 곧 게송으로 말씀하였습니다.
적멸에 들면 기뻐지고
법을 보면 안락함을 얻으니
세상에 성냄 없으면 가장 즐겁고
중생에게 해가 되지 않느니라.
세간에 욕망과 즐거움이 없으니
애욕에서 벗어나고
만약 아만(我慢)을 조복하면
이것이 첫째 즐거움이니라.
주라 반타는 멀리서 이 게송을 듣고 바로 아라한의 과위를 얻었습니다.”
물었다.
“어느 비구가 비구니 절에 가서 8경계법을 말하는데도 세 가지 바야제가 될 수 있습니까?”
대답하였다.
“있습니다.
첫째는 상가에서 차출되지 않았고,
둘째는 비구니 절에 갔고,
셋째는 날이 저물기까지 있는 것이니,
이것이 세 가지 바야제입니다.
비구니 절에 가서 딴 법을 말하면 하나의 바야제와 두 개의 돌길라가 됩니다.
어떤 것이 그것이냐 하면,
첫째 상가에서 차출되지 않음과,
둘째 비구니 절에 간 것이 두 개의 돌길라요,
날이 저물기까지 있는 것이 하나의 바야제입니다.
‘제바달다(提婆達多)ㆍ삼문타달다(三文陀達多)ㆍ건타달다(騫馱達多)ㆍ구가리가(俱伽利伽)ㆍ가류제사(迦留提舍)가 찬탄한다’ 함은 그 이름을 나타낸 것입니다.
‘무리와 따로 먹음[別衆食]’에서 무리와 따로 먹음에 두 가지가 있습니다.
첫째는 청(請)이요,
둘째는 빌음[乞]입니다.
어떻게 무리와 따로 먹음이 이루어지느냐 하면,
어느 한 우바새가 네 비구의 처소에 가서 바른 밥[正食]으로 비구들에게 ‘대덕은 받으소서’라고 청하는 것이니,
이것이 청으로 무리와 따로 먹음이 이루어진다고 합니다.
일시에 청을 받고 혹은 다음 날 혹은 뒷날에 일시에 한 곳에서 음식을 받으면 무리와 따로 먹음이 이루어지니,
네 사람 모두가 죄가 됩니다.
일시에 청을 받고는 각기 단월의 집에 가서 일시에 음식을 받고 돌아와 각 처소에서 먹어도 죄가 됨은 앞 것과 같습니다.”
법사가 말하였다.
“왜냐하면 일시에 음식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일시에 청을 받고 각기 가서 각기 받아 각자가 먹음은 죄가 되지 않지만 따로따로 청하고 따로따로 가서 단월의 집에 이르러서는 일시에 받으면 죄가 되는 것이니,
이것을 청을 받아서 죄가 되는 것이라 합니다.
무엇을 빌음에서 죄가 되느냐 하면,
어느 네 걸식하는 비구가 혹은 앉고 혹은 서서 우바새를 보면서 우바새에게 ‘우리들 네 사람에게 밥을 주시오’라고 하거나,
한 사람 한사람이 빌면서 ‘나에게 밥을 주십시오’라고 하는 것도 그와 같습니다.
혹은 함께 가거나 각기 가거나 일시에 밥을 얻으면,
이것을 빌음에서 죄가 된다 합니다.
‘병’이라 함은 다리가 부르터 모래와 흙이 속에 들어가서 다닐 수가 없었기 때문에 받아서 무리와 따로 먹게 되는 이것을 병이라 합니다.
‘의복을 지을 때’라 함은 옷의 마름을 하게 되거나 먼저 쪼개서 옷을 짓기도 하는 것이니,
이것을 의복을 지을 때라고 하며 옷 위에 갈고리나 끈을 놓는 것까지도 그러합니다.
‘다닌다’ 함은 최하 반 유순까지이니,
배로 다님도 그와 같습니다.
‘흉년일 때[饑儉時]’라 함은 이에 음식이 네 사람 먹기에도 부족함에 이르름이니,
큰 흉년일 때라고 합니다.
‘사문에게 밥을 먹임’이라 함은 같은 법인 사문이기도 하고 외도 사문이기도 하니,
일곱 가지 일이 있어서 무리와 따로 먹게 되는 것은 범함이 아닙니다.
청하지 않은 이로써 넷을 채우는 경우[不請足四],
둘째 걸식하는 이로써 넷을 채우는 경우[乞食足四],
셋째 구족계를 받지 않는 이로써 넷을 채우는 경우[未受具戒],
넷째 바리로써 넷을 채우는 경우[鉢盂足四],
다섯째 병인으로써 넷을 채우는 경우[病人足四]이니,
이 다섯 가지의 넷을 이제 자세히 말하겠습니다.
무엇을 청하지 않는 이로써 넷을 채우느냐 하면,
어느 단월이 네 사람을 청했는데,
한 사람은 알면서도 단월의 집에 가지 않았습니다.
단월이 ‘상좌는 오셨습니까?’하니,
세 비구가 ‘오지 않았습니다’고 대답하였습니다.
단월이 정오가 되려 할 적에 한 비구를 만나 곧 불러 들여서 밥을 주는 것이니,
네 사람 함께 먹은 것이므로 범함이 아닙니다.
이것을 청하지 않은 이로써 넷을 채웠다고 합니다.
어찌하여 죄를 범하지 않았느냐 하면,
한 분은 청한 이가 아니지만 채웠기 때문입니다.
무엇을 걸식하는 이로써 넷을 채우느냐 하면,
세 사람은 청을 받았고 한 사람은 걸식한 것이요,
청을 받지는 않았지만 그 때문에 죄가 되지 않습니다.
사미로써 넷을 채우는 경우는 세 도인과 한 사미를 청한 것이니 범함이 아닙니다.
바리로써 넷을 채우는 경우는 어떻게 바리로 넷을 채우느냐 하면,
세 도인을 청하고 하나의 바리에 밥을 청하는 것이니,
범함이 아닙니다.
병인으로써 넷을 채우는 경우는 세 도인과 한 병든 비구를 청하여 채워서 네 사람이 된 것이니,
범함이 아닙니다.
네 사람을 청했는데 어느 한 계율 아는 비구가 함께 먹으려 하였지만 죄를 범할까 두려워서 곧 방편을 써서 단월이 밥을 줄 때에 바리를 덮고 받지 않고 단월이 ‘무엇 때문에 받지 않습니까?’라고 하면 ‘세 사람만 밥을 주십시오.
나는 주언(呪願)을 하려고 합니다’라고 대답합니다.
세 비구가 먹기를 마친 뒤에 곧 밥을 받음은 범함이 아닙니다.
또 밥을 주겠다고 청하여 집에 갔는데 고기를 주어도 범함이요,
밥을 주겠다고 청하여 집에 갔는데 죽을 주는 것은 범함이 아닙니다.
혹은 어떤 단월이 상가에서 밥을 주려고 사람을 시켜 절에 가서 상가에게 청하면서 ‘저희들의 밥을 받으소서’라고 하게 하였습니다.
상가 안의 어느 계율 아는 비구가 ‘이 상가 안에는 두타법을 행하는 이가 많은데 심부름꾼이 법을 알지 못한 까닭에 이런 청을 하는구나’라고 생각하고,
율을 아는 비구는 ‘내일 알아서 하십시오’라고 했습니다.
심부름꾼이 다시 와서 전과 같이 말을 이해하지 못하고 상가를 청하였습니다.
법을 아는 비구가 ‘내일 알아서 하십시오’라고 해서 이렇게 차츰 반달까지 이르렀습니다.
아직도 이해하지 못하므로 법 아는 비구가 ‘만약 단월이 이렇게 상가를 청하면 오직 사미만은 될 수 있을지언정 큰 스님은 될 수 없을 것입니다’고 하였습니다.
심부름꾼은 ‘대덕들은 또한 딴 집의 청을 받았습니까?
이제 어찌하여 저의 청은 받지 않습니까?’라고 하였습니다.
대답하였습니다.
‘청을 받지 않는 것은 아닙니다.
아직 그대가 법을 모르기 때문이니 상가를 청한다고 만하고 밥ㆍ미싯가루ㆍ생선ㆍ고기 등을 주겠다고 말하지 마시오.
오직 상가를 청한다고 만하면 비구가 받을 수 있으며 범함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만약 이렇게 가르쳐서 보이는데도 심부름꾼이 오히려 말을 이해하지 못하면 사람들의 헐뜯음과 싫어함을 두려워하여 ‘그대는 가기나 하십시오’ 하고,
대중 스님들은 다음 날 마을에 들어가 걸식하면서 청했던 단월의 집에 가서 밥을 받는 것이 범함이 아닙니다.
무리와 따로 먹는 계율을 널리 말하여 마칩니다.
이것은 제정한 죄요,
몸과 마음에서 일어납니다.
‘여기저기 다니면서 먹음[展轉食]’이라 함은 어떤 비구가 청을 받았는데 단월이 아직 오지 않기에 비구는 해가 저물어질까 두렵고 단월이 오지 않을 것을 염려하여 곧 마을에 들어가서 걸식합니다.
걸식하고 돌아오자 청하였던 단월이 왔음을 보고 비구는 먹지 않았습니다.
청한 시주가 ‘대덕은 어찌하여 잡숫지 않습니까?’ 하니,
비구가 ‘단월의 청을 받았기 때문에 먹지를 못합니다’고 합니다.
단월은 ‘잡수십시오’ 하고,
이렇게 말을 하면 먹어도 범함이 아닙니다.
또 많은 단월들이 같이 일시에 청하여 이렇게 먹으면 범함이 아닙니다.
여기 저기 다니면서 먹는 계율을 마칩니다.
이것은 제정한 죄요,
몸과 마음에서 일어납니다.
길거리에서 친정에 가는 음식과 장사꾼의 음식[歸婦賈客道路糧]을 만약 한 바리를 받아 오면 뜻대로 자신이 먹고 남에게 주거나 하며,
만약 두 바리를 받으면 한 바리는 자신이 먹고 한 바리는 비구승에게 줍니다.
만약 세 바리를 받으면 한 바리는 자신이 먹고 두 바리는 비구승에게 줄 것이요,
아는 속인이거나 친척에게는 주지 못합니다.
혹은 마음대로 갖기를 청하는 단월에게서도 세 바리를 넘게 갖지 못합니다.”
법사가 말하였다.
“나머지 문구는 쉽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이것은 제정한 죄요,
몸과 마음에서 일어납니다.
모른다고 벗어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길거리에서 친정에 보내는 음식과 장사꾼의 음식을 받는 계율을 마칩니다.
‘다섯 가지 바른 밥[五正食]’이라 함은 멥쌀밥ㆍ기장밥ㆍ좁쌀밥ㆍ수수밥ㆍ보리밥입니다.
이 다섯 가지의 쌀로 죽을 쑤어서 처음 솥에서 나오면 그려봐서 글자가 되면 먹지 못합니다.
또 쌀과 남새를 합해서 죽을 쑨 것도 그와 같습니다.
만약 적은 밥에 많은 물을 섞어서 먹으면 위의에 어그러지는 것이므로 남은 밥 먹는 법[殘食法]을 지어야 합니다.
쌀에 고기와 생선을 섞어 죽을 쑤어서 만약 나타난 것이 개자(芥子)만큼이라도 크면 남은 밥 먹는 법을 지어야 합니다.
고기가 문드러져서 물과 구별할 수 없는 것이면 남은 밥 먹는 법을 지을 필요가 없습니다.
온갖 풀뿌리와 나무 열매로 밥을 지은 것이면 남은 밥 먹는 법을 지을 필요가 없습니다.
‘마른 밥’이라 함은 조로 마른 밥을 만들거나 혹은 멥쌀로 만들고 보리로 만들기도 하는데,
마른 밥이란 햇볕에 쪼여서 말린 것입니다.
콩과 나무 열매로 마른 밥을 만들면 남은 밥 먹는 법을 지을 필요가 없습니다.
‘미싯가루’라 함은 멥쌀 미싯가루ㆍ좁쌀 미싯가루ㆍ보리 미싯가루이니,
먹기를 마치면 남은 밥 먹는 법을 지어야 합니다.
미싯가루에는 두 가지 종류가 있습니다.
첫째는 가루 미싯가루요,
둘째는 사탕과 꿀로써 뭉치어 서로가 붙게 한 미싯가루입니다.
쌀은 부스러지지 않기 때문에 쌀은 남은 밥 먹는 법을 지을 필요가 없습니다.
또 미싯가루와 쌀로 밥을 만든 것이면 남은 밥 먹는 법을 지을 필요가 없습니다.
만약 다섯 가지 바른 밥을 받아서 바리 가운데와 손 가운데에 밥이 있는데,
사람이 밥을 돌리면 편 손안에 있어서의 거절[遮]은 위의에 어그러지므로 남은 밥 먹는 법을 지녀야 합니다.
편 손 밖의 거절은 거절이 되지 않습니다.
편 손안에 있으면 입속의 밥을 삼키기를 다하고 거절함은 거절이 되지 않지만
만약 입속에 밥이 있으면서 편 손안에서의 거절이면 거절이 됩니다.
또 부정한 고기를 둘로 잘라서 먹기에 알맞지 않아서 거절함은 거절이 되지 아니합니다.
왜냐하면 부정하여 먹기에 알맞지 않기 때문이니,
만약 부정한 고기를 먹으면서 편 손안에서 거절하면 거절이 되지 아니합니다.
또 거절하여 남에게 주어도 거절이 되지 않습니다.
왜냐 하면 아직 먹으려는 생각을 그만 두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또 바른 밥을 거절하여 남에게 줌도 거절이 되지 아니합니다.
‘편 손안[申手內]’이라 함은 몸에서 떨어지기 2주(肘) 반 안이니,
거절은 거절이 되지만 2주 반 밖의 거절은 거절이 되지 아니합니다.
혹은 밥을 가지고 와서 땅에 놓고 하나의 편 손안에서 비구에게 주지 아니 하면서 거절하면 거절이 되지 않습니다.
혹은 정인이 손으로 잡고 있는 밥을 거절하면 거절이 됩니다.
혹은 다른 비구에게 준 밥이 자기가 준 것이라 생각하면서 거절하면 거절이 되지 아니합니다.
거절[遮]에는 두 가지가 있습니다.
하나는 몸으로의 거절이요,
둘째는 입으로의 거절입니다.
어떻게 몸으로 거절하느냐 하면,
손으로 막거나 머리를 흔들거나 하며 손으로 바리를 덮기도 하는 것입니다.
입으로의 거절이라 함은 그만두고 받지 않겠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혹은 나물과 여러 가지 생선과 고기로 국을 끓인 것을 만약 나물국을 받는다고 하면서 거절하면 거절이 되지 않지만 만약 고기 국을 받는다고 하면서 거절하면 거절이 됩니다.
또 바른 것과 바르지 않는 것을 섞어 쑨 죽을 만약 바른 이름으로 말하면 거절이 되지만 바르지 않은 이름으로 말하면 거절이 되지 아니합니다.
‘위의를 행한다’ 함은 오직 배와 수레에 타는 것만은 제외 되니,
범함이 아닙니다.
‘병인이 남긴 밥’이라 함은 혹은 밥이 남기도 하고 아직 먹지 않은 것이기도 되니,
역시 남긴 밥입니다.
남은 밥의 계율을 널리 말하여 마칩니다.
이것은 제정한 죄요,
몸과 입에서 일어납니다.
온갖 나무와 풀을 음식으로 삼는 데에는 멋대로 하는 것이 아닙니다.
뿌리ㆍ줄기ㆍ꽃ㆍ열매는 목숨이 다하기까지 받아먹을 수 있습니다.
나무와 풀의 전체를 때에 먹는 것이 있으며,
나무 열매의 가운데 것을 때에 먹는 것이 있습니다.
나머지 것은 목숨이 다하기까지의 받는 약이며,
어느 나무 전체는 목숨이 다하기까지의 받는 약입니다.
때 아닌 적에 먹는 계율[非時食戒]을 널리 말하여 마칩니다.
만약 좋은 음식인 젖ㆍ타락ㆍ생선ㆍ고기를 빌면 바야제가 되며,
딴 음식을 빌면 돌길라입니다.
병든 사람을 위하여 비는 것만은 제외되니,
범함이 아닙니다.
좋은 음식을 비는 계율을 마칩니다.
물과 이쑤시개는 제외됩니다.
천인(天人)이 음식을 주거나 귀신이 음식을 주거나 축생과 날 짐승이 음식을 주는 것은 모두가 받게 됩니다.
머리에 인 음식이거나 어깨에 멘 음식이거나 간에 비구에게 주고 비구로 하여금 스스로가 갖게 함은 받게 되는 것이 아닙니다.
만약 몸을 굽혀서 비구의 손안에 떨어뜨리면 받게 됩니다.
또 메는 것이 길이서 스무 심(尋)까지 되는 양끝에 음식을 놓고 정인과 합력하여 메다가 비구에게 주어서 한 끝 것을 받아 얻으면 한 끝 것도 받게 됩니다.
혹은 걸식하다가 풍우를 만나 티끌이 바리 가운데 떨어져 비구가 ‘사미를 위하여 걸식하리라’고 생각하며,
밥을 얻고 돌아와서는 사미에게 ‘나는 이제 걸식하다가 비바람을 만나 티끌이 바리 가운데에 떨어지므로 받은 것이 아니라서 너를 위하여 걸식하였으니,
이제 너에게 준다’라고 합니다.
사미가 받은 뒤에 비구에게 ‘이것은 사미의 밥입니다.
이제 대덕에게 드립니다’라고 하고,
이렇게 보시하면 먹을 수 있으니,
범함이 아닙니다.
어떤 비구가 손에 바리를 잡고 밥 때에 졸고 있는데 사람이 밥을 가져다 바리 가운데 넣더라도 비구가 깨닫지 못하면 받게 된 것이 아닙니다.
또 밥을 받으려 할 때에 졸고 있는데 사람이 밥을 가져다 바리 가운데 놓아두면 받게 됩니다.
왜냐하면 밥을 받게 된다는 뜻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또 티끌이 커서 제거하고 먹으면 범함이 아닙니다.
만약 티끌의 가는 것이 떨어져서 제거할 수 없으면 사람을 시켜서 던져 버려야 합니다.
두 사람이 함께 먹는데 밥을 돌리다가 남은 밥이 비구의 바리 가운데에 떨어지면 받게 됩니다.
또 밥 때에 이마와 머리의 땀이 흘러서 바리 가운데 떨어지면 다시 받아야 합니다.
또 팔 가운데서 땀이 흘러 손에 들어오면 받을 필요가 없습니다.
흔들어 던진 것이 땅에서 굴러 와서 비구의 손 위에 떨어지면 받게 됩니다.
혹은 정인이 나무 위에 있으면서 새끼로 과일을 매어 비구에게 주면 받게 되는 것이 아닙니다.
어떤 사람의 긴 손이 10유순까지 되는데 밥을 건네서 비구에게 주면 받게 됩니다.
어떤 비구가 병들었는데 사미거나 정인이 비구를 안고 가다가 과일을 보고 비구는 정인에게 빌므로 정인은 과일을 딴 뒤에 손을 돌려 몸 위로 올려서 비구에게 건너 주면 받게 됩니다.
어떤 비구가 더위를 두려워하여 과일 나무 가지를 붙잡고 가면서 차일(遮日)을 삼았다가 뒤에 가지 속에 과일이 있음을 보고도 움직일 수가 없으므로 사미를 시켜서 과일을 따게 하여 비구에게 주면 받게 됩니다.
배거나 수레에 음식이 실렸는데 비구가 배에 상앗대질을 하고 수레를 끌어서 음식을 움직여 먹게 되면 죄가 없습니다.
여러 비구들이 함께 갈 적에 오직 한 작은 사미가 있는데 비구 각자가 멘 양식으로 밥 때가 되어 각자가 몫을 나눕니다.
사미도 몫을 얻은 뒤에 비구에게 ‘이제 사미의 몫을 가지고 대덕과 바꾸겠습니다’ 하고 바꾼 뒤에 다시 가지고 제2 상좌와 바꿉니다.
제2 상좌의 음식을 얻은 뒤에 다시 제3 상좌와 바꿉니다.
이렇게 차츰차츰하여 많은 이들까지에 이르니,
이렇게 한 음식은 모두 죄가 없습니다.
만약 사미가 법을 알지 못하면 비구 스스로가 음식 몫을 가지고 사미와 바꾸며 제1 상좌가 바꾼 뒤에는 제2 상좌가 다시 사미와 바꾸고 제2 상좌가 바꾼 뒤에는 제3 상좌가 다시 바꿀 것을 청구하고 이렇게 차츰차츰 많은 이들까지에 이르니,
모두가 바꾼 음식을 얻는 것은 범함이 아닙니다.
함께 밤을 지내면 좋지 않습니다.
또 비구가 쌀을 메고 가다가 사미가 작아서 밥을 짓지 못하면 비구 자신이 지을 수 있으며,
오직 불은 때지 못합니다.
사미를 시켜서 불을 지피게 하고 밥이 된 뒤에 나누어서 앞과 같이 차례로 사미와 바꿔서 먹으면 범함이 아닙니다.
자신이 짓는 밥을 밥이 끊어서 넘어 나오더라도 비구는 숨으로 불거나 물건을 가져서 젓지 못하니 모두 돌길라 죄를 범합니다.
또 먹다가 토할 적에 아직 목구멍에서 내놓지 않고 도로 삼키면 범함이 아니지만 구멍에서 나온 것을 입에 넣어서 도로 삼키면 바야제를 범합니다.
혹은 생강을 받았는데 뒤에 싹이 나오면 받은 것을 잃어버린 것은 아닙니다.
또 불살라서 깨끗이 한 이후에 싹이 나오면 싹이 나온 곳을 다시 깨끗이 하여야 하며,
싹이 나오지 않아서 먹게 되면 죄가 없습니다.
먼저 소금을 받았다가 소금이 변하여 물이 되면 먼저 받은 것을 잃어버린 것은 아닙니다.
만약 급한 병이든 일이면 대소변과 재와 흙을 스스로가 가져다 먹을 수 있으며,
만약 재가 없으면 나무를 베고 불을 피워서 재를 만들 수도 있습니다.
어떠한 병이냐 하면,
독이 들었거나 뱀에 물림과 같은 것입니다.”
법사가 말하였다.
“나머지 문구는 쉽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이것은 제정한 죄요,
몸과 입에서 일어납니다.
이 두 가지 밥 있는 집안에 앉는 계율[食家中坐戒]은 두 가지 결정할 수 없는 법[二不定法]에서 이미 해설했습니다.
‘여인과 홀로 한데서 앉은다’ 함은 두 사람이 같이 앉은 평상에서 말하되 피차가 서로 이해하면 편 손안으로 부터는 바야제가 되고,
말을 서로 이해하지 못하면 편 손안으로부터는 돌길라 죄를 범합니다.
‘석마남(釋摩男)’이라 함은 부처님 숙부의 아드님으로서 성불하신 뒤 한 달만에 사다함의 도를 얻었습니다.
어떤 단월이 약을 보시하면 약용에 써야 하고 식용으로 쓰지 말 것입니다.
기름을 주고 소(酥)를 빌면 돌길라를 범합니다.
‘상군(象軍)’이라 함은 코끼리의 위에 네 사람이 있고 아래에 여덟 사람이 있으니,
이것을 상군이라 합니다.
‘마군(馬軍)’이라 함은 한 사람이 말위에 있고 두 사람이 아래에 있으니,
이것을 마군이라 합니다.
‘거군(車軍)’이라 함은 네 사람이 수레를 따르니,
이것을 거군이라 합니다.
‘보군(步軍)’이라 함은 네 사람이 서로가 따르니,
이것을 보군이라 합니다.
만약 술에 밥을 찌고 약을 쪄 넣었기 때문에 술 향기와 맛이 있으면 돌길라를 범하지만 술 향기와 맛이 없으면 먹을 수 있습니다.
물이 깊어서 다리와 등이 빠지고 물속에서 장난하면 바야제가 됩니다.
만약 배를 흔들어서 물을 희롱하면 돌길라가 됩니다.
‘푸른 빛깔’이라 함은 혹은 구리에 생긴 녹 빛깔이며 혹은 남빛이며 목란 빛깔이기도 하니,
목란 빛깔은 흐린 먹빛 입니다.
이 세 가지의 빛깔로써 검정(點淨)을 하는데 최하로는 삼씨만큼씩 크기도 합니다.
만약 점정을 하지 않으면 바야제가 됩니다.
어떤 비구가 물에 벌레가 있는 줄 알면서 마시면 숨을 따라서 삼키는 것마다 바야제 죄입니다.
물을 벌레가 있는 줄 알면서 불의 열로써 끓이는 것도 그와 같습니다.
벌레 있는 물의 계율을 말하여 마칩니다.
어떤 비구가 다른 비구의 추한 죄를 알면서 덮고 감추어버리고,
둘째의 비구도 덮고 감추어버리고 이렇게 하여 백천 사람이 다 같이 덮고 감추어버리면 모두가 바야제를 범합니다.
이것은 성죄요,
몸과 마음으로 인하여 일어납니다.
남의 죄를 감추는 계율을 마칩니다.
만약 나이 20이 차지 않았는데 구족계를 받고자 하면 태월(胎月)112)과 윤달의 수를 세는 것을 허락하니 14일 포살에 20세가 차면 계를 받을 수 있습니다.
‘도둑들과 의논하며 같이 길을 간다’ 함은 이것은 제정한 죄입니다.
‘비구니와 의논하며 같이 간다’ 함은 이것은 제정한 죄인데 율문에서 이미 말하였습니다.
‘아율타(阿栗陀)의 삿된 견해’라 함은 ‘부드럽고 윤택한 것[細滑]113)을 만지거나 대는 것은 하늘 길을 막는 것이 아니며 해탈의 도를 막는 것도 아니다’라고 함이니,
아율타가 이런 삿된 견해를 내는 까닭은 ‘수다원ㆍ사다함은 부인과 아이가 있어도 도를 장애하지 않는다’라는 이것을 끌어 대어 스스로가 견주면서 ‘부드럽고 윤택한 것을 만지고 대는 것은 도를 장애할 수 없다고 합니다.
만약 부드럽고 윤택한 것이 도를 장애한다면 온갖 모전 이불과 은낭도 부드럽고 윤택한 것인데 어찌 홀로 여인의 부드럽고 윤택한 것만이 도를 장애한다고 말하겠는가’라고 하는 것입니다.
아율타의 삿된 견해의 계율을 널리 말하여 마칩니다.
비니를 배우면 5덕(德)이 있고 6덕이 있고 7덕, 8덕, 9덕,
10덕, 11덕이 있습니다.
무엇이 5덕이냐 하면,
첫째 몸 스스로가 계율을 지님이요,
둘째 다른 이의 의심을 끊음이요,
셋째 대중에 들어도 두려움이 없음이요,
넷째 원수를 조복함이요,
다섯째는 바른 법을 오래 머물게 함입니다.
어떻게 몸 스스로가 계율을 지니느냐 하면,
계율 지님이 청정하여 빠뜨림이 없는 것이,
이것을 계율을 수호한다고 합니다.
율사는 여섯 가지 법으로 죄를 짓지 아니합니다.
첫째 나아감이 있고,
둘째 무지(無知)하고,
셋째 의심하지 아니하고,
넷째 부정한 것을 깨끗하다고 하고,
다섯째 깨끗한 것을 부정하다고 하고,
여섯째는 헷갈리지 아니합니다.
무엇이 나아감이 있는 것이냐 하면,
알면서도 일부러 짓는 이것을 나아감이라고 합니다.
율본에서 말씀함과 같이 ‘알면서도 일부러 지어서 죄를 얻고 알면서 덮고 감춤으로서 가지 말아야 할 곳을 가니,
이것을 나아감이라 한다’고 하였습니다.
무엇이 무지냐 하면,
이 사람은 계(戒)의 형상을 모르며 지으려 하고서 지으니,
이것을 무지하여 죄를 얻는다고 합니다.
무엇의 의심으로 죄를 얻느냐 하면,
지으려 하되 마음에 의심을 내면서 지으니,
이것을 의심으로 죄를 얻는다고 합니다.
무엇이 부정한 것을 깨끗하다고 하느냐 하면,
이 곰의 고기는 부정한 것이로되 이것은 돼지고기라고 하면서 먹으니,
이것은 부정한 것을 깨끗하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범 고기를 사슴 고기라고 하고 때 아닌 적의 밥을 때의 밥이라고 하니,
이것도 부정한 것을 깨끗하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무엇이 깨끗한 것을 부정하다고 말하느냐 하면,
실제로 사슴 고기인데 범의 고기라는 생각을 하면서 먹는 것이며,
이와 같이 때를 때가 아니라고 하면서 먹는 것이니,
이를 깨끗한 것을 부정한 것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무엇이 헷갈림이냐 하면,
아직 구족계를 받지 못한 사람과 두 밤을 지내면서도 모르는 것이니,
이것을 헷갈려서 죄를 얻는 것이라 합니다.
헷갈림이 있어서 때와 때 아닌 적을 모르며 옷을 떠나서 자면서도 모르니,
이것을 헷갈림이라 합니다.
어떻게 다른 이의 의심을 끊느냐 하면,
어떤 비구가 죄를 범하였으면서도 의심하여 결판을 내지 못한 것을 만약 와서 물으면 계율에 의지하여 결판하니,
이것을 다른 이의 의심을 끊는다고 합니다.
무엇이 대중에 들어도 두려움이 없느냐 하면,
계율을 알기 때문에 일에 따라서 지을 수가 있으니,
이것을 대중에 들어도 두려움이 없다고 합니다.
무엇이 원수를 조복하느냐 하면,
마치 리차자(離車子)가 열 가지 잘못된 법을 일으킨 것을 계율에 의하여 없앤 것과 같으니,
이것을 원수를 조복하였다고 합니다.
무엇이 바른 법을 오래 머물게 하느냐 하면,
첫째 몸 스스로가 법을 따르며,
둘째 남으로 하여금 법을 얻게 함이니,
법을 얻음으로 말미암아 바른 마음으로 계율을 지니며,
계율을 지님으로 말미암아 선정에 들게 되고 선정으로 말미암아 도의 과위를 얻으니,
이것이 바른 법을 오래 머물게 한다고 합니다.
율본에서 말씀한 것처럼 부처님은 아난에게 ‘내가 멸도한 뒤에는 비니가 너의 큰 스승이다’라고 하셨습니다.
이것이 바른 법을 오래 머물게 함이라 합니다.
최하 다섯 비구가 계율을 알아 세상에 있더라도 바른 법은 오래 머물게 됩니다.
만약 중천축(中天竺)에 부처님이 법이 소멸했더라도 변두리 땅에 다섯 사람만이라도 계를 받은 이가 있으면 열 사람을 채워서 중천축에 가서 사람들에게 구족계를 줄 수 있으니,
이것이 바른 법을 오래 머물게 하는 것이라 하며 이렇게 하여 내지 스무 사람이 죄를 벗어나게 되니,
이것을 바른 법이 오래 머물게 한다고 합니다.
율사로 말미암아 바른 법이 오래 머물게 되므로 이것을 계율을 지니는 5덕이라고 합니다.
무엇이 계율을 지니는 6덕이냐 하면,
첫째 바라제목차를 수호하고 다스림이요,
둘째 포살을 앎이요,
셋째 자자를 앎이요,
넷째 남에게 구족계의 법을 수여할 줄 앎이요,
다섯째 남의 의지(依止)를 받음이요,
여섯째 사미를 기르게 됨입니다.
이것을 6덕이라 합니다.
어떻게 바라제목차를 수호하고 다스리느냐 하면,
14일 포살ㆍ15일 포살ㆍ화합(和合) 포살ㆍ승(僧) 포살ㆍ중(衆) 포살ㆍ일인(一人) 포살ㆍ바라제목차를 말하는 포살ㆍ정(淨) 포살ㆍ칙(勅) 포살을 아니,
이것을 아홉 가지 포살이라 합니다.
이것이 율사의 알 바입니다.
아홉 가지의 자자가 있습니다.
첫째 14일,
둘째 15일 자자,
셋째 화합 자자,
넷째 승 자자,
다섯째 중 자자,
여섯째 일인 자자,
일곱째 삼어(三語) 자자,
여덟째 이어(二語) 자자,
아홉째 등세(等歲) 자자입니다.
이것이 율사의 알 바입니다.
대중 스님들에게 네 가지 법이 있습니다.
첫째 상가에 아룀[白僧],
둘째 아뢰고 갈마[白羯磨]하고,
셋째 아뢰고 한 차례 갈마하고[白二羯磨],
넷째 아뢰고 세 차례 갈마[白四羯磨]입니다.
이 네 가지 법은 율사가 알 바이고 수다라사나 아비담사가 알 바는 아닙니다.
만약 계율을 이해하지 못하고 다만 수다라와 아비담만을 안다면 사미를 제도하고 남의 의지를 받지 못합니다.
5덕과 6덕이 있어서 곧 율사의 11덕을 이루니,
율사가 계율을 지님으로써 부처님 법이 세상에 5천세를 머무릅니다.
그러므로 많은 비구들은 우파리에게 나아가 계율을 배웁니다.
어떻게 계율을 배우느냐 하면 읽고,
외우고 이치를 이해하는 것이니,
이것이 계율을 배움이라 합니다.
‘잡쇄(雜碎)’라 함은 두 가지 결정할 수 없는 [二不定]법에서 중학(衆學)까지이니,
이것을 잡쇄라 합니다.
만약 큰 비구를 향하여 계율을 헐뜯으면 바야제가 됩니다.
아직 구족계를 받지 못한 이를 향하여 계율을 헐뜯으면 돌길라 죄가 됩니다.
나머지 문구는 쉽게 이해할 수 있으므로 자세히 말하지 않습니다.
헐뜯는 계율을 마칩니다.
이것은 성죄요,
몸과 입에서 일어납니다.
‘때린다’ 함은 여섯 무리 비구들을 항상 열일곱 무리 비구들을 몰아 부리면서 말을 따르지 않는다고 하여 곧 때렸습니다.
성낸 마음으로 때리거나 내지 죽게 되면 바야제 죄가 됩니다.
‘성낸 마음으로 때린다’ 함은 머리가 깨지고 손,
다리가 부러지는 것이니,
바야제 죄입니다.
아직 구족계를 받지 못한 이를 때리거나 이에 축생까지라도 때리면 돌길라가 됩니다.
만약 음탕스런 마음으로 여인을 때리면 승잔이 됩니다.
호랑이와 사자며 내지 맑은 행의 환난에 손으로 때려서 벗어나기를 구한 것은 범함이 아닙니다.
‘손을 움켜 쥠’114)이라 함은 손은 몸에 대지는 않고 손을 움키어 쥐는 것입니다.
손을 움켜 쥐는 계율을 마칩니다.
‘으슥한 곳에서 듣는다’ 함은 벽장이거나 그늘진 곳이니 가고 있는 걸음마다 돌길라 죄가 되며,
들을 곳에 가서 닿으면 바야제 죄가 됩니다.
자신이 고치기 위하여 가서 들으면 범함이 아닙니다.
어떤 비구가 욕(欲)115)을 준 뒤에 후회하는 계율은 해설이 없습니다.
또 상가에서 결단하는 일이 아직 끝나지도 않았는데 잠자코 일어나서 떠나가는 계율은 해설이 없습니다.
어떤 비구가 먼저는 기뻐하며 허락하였다가 뒤에 ‘비구들이 친한 벗에 따라서 대중 물건을 돌려주는구나’라고 하는 계율은 해설이 없습니다.
부처님은 아난에게 ‘왕궁에 들면 열 가지의 과실이 있다.
무엇이 열 가지냐 하면,
첫째 왕은 부인이 같이 한군데 앉았다가 부인이 비구를 보고서 웃고 비구도 부인을 보고서 웃으면,
왕은 보고 ≺이 비구는 틀림없이 부인과 함께 사통할 것이다≻라고 의심하니,
이것이 첫째의 과실이다’라고 하셨습니다.
부처님은 아난에게 ‘왕궁에 들면 또 과실이 있다.
왕이 궁중 채녀(婇女)와 같이 성교를 하고서는 잊어버렸다가 뒤에 아이를 낳으면 왕은 ≺나는 이 채녀를 가가이하지 않았는데 어찌하여 아이가 있을까?
이는 비구가 한 일이다≻라고 하니,
이것이 둘째의 과실이다’라고 하셨습니다.
부처님은 아난에게 ‘또 과실이 있다.
궁중에서 보물을 잃고 찾다가 찾지 못하면 왕은 ≺달리 딴 사람이 없다.
비구가 가졌을 것이다≻라고 하니,
이것이 셋째의 과실이다’라고 하셨습니다.
부처님은 아난에게 ‘또 과실이 있다.
왕의 궁중에서 한 사사로운 말이 벌써 소문이 밖에 났으면 왕은 ≺비구가 밖에다가 전해 퍼뜨렸다≻라고 생각하니,
이것이 넷째의 과실이다’라고 하셨습니다.
부처님은 아난에게 ‘또 과실이 있다.
왕이 큰 것을 물리치고 작은 것을 하며 작은 것을 옮기고 큰 것을 하면,
왕궁에 들어갈 수 있는 사람이 없을 것이므로 ≺그 비구가 왕을 시켜서 하는 일이다≻라고 하리니,
이것이 다섯째의 과실이다’라고 하셨습니다.
부처님은 아난에게 ‘왕궁에 들면 또 과실이 있다.
왕이 장자의 자리를 물리치고 아들로 대신하게 하면 사람들은 헐뜯고 싫어하면서 ≺그 비구가 왕궁에 출입하며 왕을 시켜서 하는 일이다≻라고 하리니,
이것이 일곱째의 과실이다’라고 하셨습니다.
부처님은 아난에게 ‘비구가 왕궁에 들면 또 과실이 있다.
왕이 때가 아닌 적에 군대를 파견하면 여러 사람들이 헐뜯고 싫어하면서 ≺그 비구가 왕을 시켜서 하는 일이다≻라고 하리니,
이것이 여덟째의 과실이다’라고 하셨습니다.
부처님은 아난에게 ‘왕궁에 들면 또 과실이 있다.
왕이 때 아닌 적에 군대를 파견했다가 중도에서 물리쳐 돌아오게 하면 여러 사람들이 헐뜯고 싫어하면서 ≺그 비구가 왕을 시켜서 하는 일이다≻라고 하리니,
이것이 아홉째의 과실이다’라고 하셨습니다.
부처님은 아난에게 ‘왕궁에 들면 또 과실이 있다.
왕이 코끼리와 말 수레를 길들이면서 보물로써 장식하면 여러 사람들이 헐뜯고 싫어하면서 ≺그 비구가 왕을 시켜서 하는 일이다≻라고 하리니,
이것이 열째의 과실이다’라고 하셨습니다.
왕궁에 들어가는 계율을 널리 말하여 마칩니다.
만약 부처님과 승가를 위하여 보물을 잡거나 들면 돌길라 죄가 됩니다.
승방 안이거나 살고 있는 곳 안에서 떨어져 있는 보배를 얻었으면 관장해서 보호하기 위하여 만약 떠나갈 때면 법을 알고 죄를 두려워하는 이에게 부탁하고 주어야 합니다.
부탁하며 ‘주인이 와서 찾거든 돌려주어야 합니다.
만약 오래 되어도 주인이 와서 찾지 않으면 방사의 소용으로나 못과 우물의 소용으로 할 수 있지만 자신의 소용으로 삼아서는 안 됩니다’고 합니다.
만약 오래된 후에 주인이 와서 찾거든 승방이거나 못과 우물에 데리고 가서 보이면서 ‘이것이 단월의 물건입니다’고 하여 만약 보시하면 좋지만 만약 보시하지 아니하고 본래 물건을 돌려 줄 것을 바라면서 비구는 마을에 들어가서 신심 있는 단월을 향하여 말해야 합니다.
‘아무 달 아무 날 절에 떨어져 있는 보배를 얻어서 맡아서 보호한지 오래였으나 와서 찾는 사람이 없기 때문에 그것을 이용하여 승방과 못과 우물을 지었습니다.
주인이 이제 와서 찾기에 본래 값어치를 돌려 주려하는데 단월은 물건으로 대신하여 대중 스님들께 보시할 수 있겠습니까?’
만약 대신하여 보시하면 좋지만 대신하는 사람이 없으면 비구는 널리 교화하면서 구하여 값어치를 돌려주어야 합니다.
보배를 쥐는 계율을 널리 말하여 마칩니다.
이것은 제정한 죄요,
몸의 업에서 일어납니다.
때 아닌 적에 마을에 들어가는 계율은 해설이 없습니다.
높은 평상 계율은 해설이 없습니다.
투라 솜을 넣은 방석의 계율은 해설이 없습니다.
바늘 통 계율은 해설이 없습니다.
니사단의 모전은 길이 두 뼘과 너비 한 뼘 반으로 올을 더한다 함은 한 뼘을 더함이니,
길이 여섯 자인 것은 끝을 끊되 한 뼘씩으로 세 번을 끊으니,
올 수가타(修伽陀) 뼘이라고 합니다.
나사단의 계율을 마칩니다.
종기를 덮는 옷의 계율은 해석이 없습니다.
비 올 때 목욕하는 옷의 계율은 해석이 없습니다.
첫째 바라제제사니(波羅提提舍尼)는 해설하지 않습니다.
만약 부부가 모두 수다원의 도를 얻었으면 백천량의 금전을 보시함이 있더라도 다 도를 얻는다는 이유 때문에 재산에 아껴함이 없으므로 보시가 지나쳐서 살고 있는 집이 가난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부처님은 ‘음식을 받지 못한다’라고 제정하셨습니다.
‘시사(尸沙)’라 함은 배움[學]입니다.
‘가라니(迦羅尼)’라 함은 배우고 지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혹은 다리가 크고 넓적다리가 작으면 아래옷을 입을 수 있습니다.
‘바리 씻은 물을 속인 집안에 버린다’ 함은 밥알을 처리하여 중생들에게 주고 나머지 물만을 버림은 범함이 아닙니다.
혹은 부스러뜨려서 물과 합쳐서 버리면 범함이 아닙니다.
깨끗이 사용하는 물에 대소변을 하지 못합니다.
‘범한 것이 아니다’ 함은 물을 사람들이 쓰지 않은 것이거나 바닷물이면 범함이 아닙니다.
물이 쓰기에 알맞은 것이라 하더라도 넓고 멀어서 쓰는 사람이 없으면 범함이 아닙니다.
부처님 탑 안에 머물며 잠자거나 물건을 감추는 이 두 가지 계율은 범본(梵本)에는 없습니다.
없는 까닭은 부처님이 세상에 계실 적에는 탑이 없었으며,
이 계율은 부처님께서 세상에 계시면서 제정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가죽신을 신고 부처님 탑에 들어가며,
가죽신을 손에 들고 부처님 탑에 들어가며,
목 짧은 가죽신[腹羅]을 신고 부처님 탑에 들어가며,
목 짧은 가죽신을 손에 들고 부처님 탑에 들어가며,
부처님 탑 아래서 밥 먹거나 송장을 메며,
탑 아래서 송장을 불사르며,
탑을 향하여 송장을 불사르며,
탑의 둘레서 송장을 불사른다고 하는 것이 없습니다.
죽은 사람의 옷과 평상을 메고 탑 아래를 지나가거나,
부처님 탑 아래서 대소변을 하거나,
부처님 탑을 향하여 대소변을 하거나,
부처님 탑을 돌면서 대소변을 하지 못합니다.
불상을 지니고 대소변 하는 곳에 이르지도 못합니다.
부처님 탑 아래서 이를 쑤시지 못합니다.
부처님 탑을 향하여 이를 쑤시지 못합니다.
부처님 둘레에서 이를 쑤시지 못합니다.
부처님 탑 아래서 코풀고 침뱉지 못합니다.
부처님 탑을 향하여 코풀고 침뱉지 못합니다.
부처님 탑 둘레에서 코풀고 침뱉지 못합니다.
부처님 탑을 향하여 다리를 펴거나 부처님을 아랫방에 모시지도 못합니다.
이 위에 스무 가지 계율은 범본에 없습니다.
여래가 세상에 계실 적의 탑은 부처님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때에 부처님은 여섯 무리 비구를 꾸짖으셨으니,
‘어찌하여 자신은 아래에 있고 사람은 높은 데에 있는데 설법을 하느냐?’라고 하셨습니다.
부처님은 비구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옛날 파라내국에 한 거사가 있었는데 이름은 차파가(車波加)였다.
그의 부인이 잉태하였는데 암라 과일[菴羅果]이 생각났으므로 그 남편에게 ≺나는 암라 과일이 생각나는데 당신은 나를 위하여 구해 주십시오≻라고 하였다.
그 남편은 ≺요새는 암라 과일이 나는 때가 아닌데 내가 어떻게 구하겠소≻라고 하였다.
부인은 남편에게 ≺당신이 만약 암라 과일을 얻지 못하면 나는 반드시 죽을 것입니다≻라고 하자 남편은 부인의 말을 듣고 ≺오직 왕의 동산에 만은 때가 아닌 적에도 암라 과일이 있을 터이니 나는 가서 훔쳐 오리라≻고 생각하였다.
이런 생각을 하고는 그날 밤에 왕의 동산에 들어가 암라 과일을 훔치는데,
과일을 아직 따지도 못해서 날이 밝아왔다.
동산을 나올 수가 없기에 나무 위에 숨어 있었다.
때에 왕과 바라문은 동산에 들어와 암라 과일을 먹으려 하면서 바라문은 아래에 있고 왕은 높은 자리에 있는데 바라문은 왕을 위하여 설법하였다.
과일을 훔치던 사람은 나무 위에 있으면서 ≺나는 지금 과일을 훔치는 일로 죽어야 했는데 왕이 바라문의 설법을 들음으로 말미암아 나는 이제 벗어나게 되었다.
나도 법다움이 없지만 왕도 법다움이 없고 바라문도 법다움이 없다.
왜냐하면 나는 여인을 위하여 왕의 과일을 훔치고 왕은 오히려 교만한 탓으로 스승이 아래 있는데 자기는 높은 자리에 있으면서 법을 듣고,
바라문은 이끗을 탐한 탓으로 자기는 아래 앉아 있으면서 왕을 위하여 설법하기 때문이다.
나와 왕과 바라문은 서로가 법다움이 없으므로 나는 이제 벗어나게 되었다≻라고 생각하였다.
이런 생각을 하고는 나무에서 내려가 왕 앞에 이르러 게송으로 말하였다.
한 사람은 법을 모르고
한 사람은 법을 못 보았네
가르친 이도 법에 의지 아니하고
듣는 이도 법을 알지 못하네.
멥쌀밥을 먹기 위해서는
나머지 반찬에까지 미치니
이 음식 때문에
나는 법이 없다고 하지만
이름과 이끗 때문에
그대들 집 법도 깨뜨려졌네.
나는 범부였을 때에도 사람이 위에 있고 설법하는 이가 아래에 있는 것을 보면 그것은 잘못된 법이라 했는데 하물며 내가 이제 너희 제자들이 높은 데 있는 사람을 위해서 자신은 아래 있으면서 설법하는 것이겠느냐.
때에 과일을 훔치던 사람은 지금의 나 몸이니라.’
중학(衆學) 계율을 널리 말하여 마칩니다.
일곱 가지 다툼 없애는 법[七滅諍法]은 뒤에 건타가에서 자세히 말하겠습니다.
다음은 비구니 계율을 말하겠습니다.
‘만지고 댄다’ 함은 겨드랑이 아래로부터 무릎 위이니,
만지고 대면 바라이입니다.
어떤 비구니가 비구를 만지고 댈 적에 비구가 즐거움을 느끼면서도 몸을 움직이지 않으면 비구는 죄가 되지 않지만,
만약 비구가 와서 비구니를 만지고 댈 적에 비구니의 몸이 움직이지는 않으나 즐거움을 느끼면 그 곳마다 죄가 됩니다.
뒤의 네 가지 바라이를 마칩니다.
어떤 비구니가 소송하는 사람[言人]과 함께 관청에 가서,
만약 비구니가 거사에서 ‘그대가 먼저 이유를 말하시오’라고 하여 거사가 이유를 말할 때는 비구니는 돌길라가 됩니다.
거사가 말한 뒤에 비구니는 다시 벼슬아치를 향하여 말하면 비구니는 투란차가 됩니다.
또 거사가 다시 말하면 비구니는 심리하게 되어도 승잔이요,
심리하게 되지 않아도 승잔을 범합니다.
어떤 거사가 비구니에게 ‘관청에서 비구니를 부르니 오시오’라고 하여 온 뒤에 비구니에게 ‘돌아가시오.
관청이 스스로 심판한답니다’라고 하면,
심리를 했거나 심리를 하지 않았거나 간에 비구니는 범함이 아닙니다.
만약 비구니가 벼슬아치 앞의 소송하는 사람에게 이르자 벼슬아치가 ‘무슨 사람이냐?’라고 물으면 이름을 말하지 아니합니다.
또 관청에서 벌로 물건을 바치게 하면 값어치의 많고 적음에 따라 죄를 범하고 값을 갚아야 합니다.
또 벼슬아치가 물어도 이름을 말하지 않으면 범함이 아닙니다.
만약 벼슬아치가 뒤에 찾아와서 주인을 알고 벼슬아치 스스로가 벌하면 범함이 아닙니다.
어떤 사람이 비구니의 옷을 훔치면 도둑이라고 말하지 못하고 다만 ‘이 사람이 빈도(貧道)의 옷을 가지고 갔습니다’라고 만합니다.
어떤 사람이 비구니를 겁탈할 적에 왕에게 나아가서 몸의 보호를 빌 수 있되 이름을 일컫지는 못합니다.
만약 이름을 말하면 범한 것이니,
앞에서 말한 것과 같습니다.
왕은 비구니가 몸의 보호를 청함을 듣고 왕은 북을 두드려 널리 명령하였다가 만약 비구니를 범한 이가 있으면 법에 의지하여 죄를 다스립니다.
뒤에 어떤 사람이 비구니를 범하면 왕 자신이 법에 의지하여 죄를 다스려도 비구니는 범함이 아닙니다.
어떤 사람이 비구니 절에 들어와서 나무를 베면 칼과 도끼를 빼앗거나 때리고 부수지 못합니다.
만약 때리고 부수면 값어치를 반환하여야 하며 값어치의 많고 적음을 헤아려서 반환하지 않으면 죄를 범한 것입니다.
나머지 문구는 이해하기 쉽습니다.
소송하는 사람의 계율을 널리 말하여 마칩니다.
도둑인 여자를 출가시키는 계율은 해설하지 아니합니다.
도량 밖에 나가서 갈마하여 죄를 풀어주는 계율은 해설이 없습니다.
어떤 비구니가 혼자 배로 물을 건너도 승잔입니다.
열일곱 가지 승잔을 마칩니다.
서른 가지 일116)은 해설이 없습니다.
‘마늘’이라 함은 오직 큰 마늘만이니 먹어서 삼킬 적마다 바야제입니다.
나머지 작은 마늘이나 파는 범함이 아닙니다.
또한 큰 마늘을 음식 속에다가 요리해서는 먹을 수 있으니,
범함이 아닙니다.
소변하는 곳을 씻을 적에는 두 손가락을 한 마디씩만 넣어야 하고 더 넣지 못합니다.
만약 한 손가락으로 씻으면 두 마디까지 넣은 수 있으며 더 넣지 못합니다.
세 손가락을 써서 씻을 수 없으니,
넣으면 곧 죄를 범합니다.
만약 곡식을 빌면 바야제입니다.
콩과 오이와 나물을 빌면 범함이 아닙니다.
방사를 짓기 위하여 곡식을 비는 것은 범함이 아닙니다.
온갖 생채소와 과일 나무와 벼 곡식이 있는 위에 대소변을 하지 못하니,
바야제 죄가 됩니다.
온갖 다른 과일 나무와 곡식의 씨가 아직 나오지 않았는데 대소변을 하면 돌길라입니다.
‘가서 풍악을 구경한다’ 함은 원숭이며 공작이 같이 희롱하는 것까지이니,
가서 보면 바야제입니다.
만약 절 안에서 풍악을 잡히면 가서 보아도 범함이 아닙니다.
만약 여름 안거를 마치면 절에서 6유순은 떨어져 가야 하니,
만약 가지 않으면 바야제 죄입니다.
여덟 가지 바라제제사니는 해설이 없습니다.
비구니 계율을 마칩니다.
건타가[騫陀伽:한에서는 잡건도(雜揵度)라고 함]입니다.
그때 부처님께서 이레가 지난 뒤에 선정에서 일어나시니,
하늘 제석이 오가라륵(呵羅勒) 과일을 바쳤습니다.
여래는 받아 잡수신 뒤에야 대소변을 하셨는데,
하늘 제석은 다시 이쑤시개와 깨끗한 물을 드렸습니다.
때에 상인 형제 두 사람은 우가라(優伽羅) 마을에서 왔습니다.
수레에 재물을 싣고 중천축을 가려고 보리수가에 이르렀는데,
수레가 저절로 멈춰 앞으로 나아가려 하지 않았습니다.
형제 두 사람은 수레가 나아가지 않음을 보고 상서롭지 못하다고 여겨 곧 음식을 차려놓고 귀신에게 고사를 지냈더니,
때에 나무 귀신이 반 몸을 나투고 상인들에게 ‘너희 수레가 가지 못하는 것은 내가 멈춘 것이다.
상인은 알아야 하리라.
백정왕(白淨王)의 아들이 출가하여 도를 배워 지금 보리수 아래 계시는데 일체지를 얻으셨다.
이레 동안을 아직 잡수신 것이 없으니 너희들은 미싯가루와 꿀을 여래께 받들어 올려라.
너희들에게 오랜 세월 동안 이익과 편안과 쾌락을 얻게 할 것이다’고 하였습니다.
형제 두 사람은 나무 귀신의 말을 듣고 곧 미싯가루와 꿀을 부처님께 받들어 올렸습니다.
이 다음 문구는 율에서 이미 말했습니다.
‘맨 처음에 3귀(歸)를 받았다’ 함은 부처님께 미싯가루와 꿀을 바친 두 상인입니다.
이 형제는 귀의를 받고 돌아가려 하면서 부처님께 ‘저희들 두 사람은 어떻게 부처님을 공양할 수 있습니까?’라고 아뢰었습니다.
부처님은 손으로써 자신의 머리를 어루만지시니 머리카락이 곧 손을 따라서 떨어졌습니다.
상인들에게 ‘너희는 이 머리카락에 공양하여 너희 큰 스승으로 삼아라’고 하셨습니다.”
물었다.
“먼저 받으신 우유 죽의 바리는 지금 어디에 있기에 이제 다시 사천왕이 바치신 바리를 받으셨습니까?”
대답하였다.
“부처님께서 전에 받으셨던 우유 죽 바리는 니련선하(尼連禪河)를 건너시면서 그 때에 바리가 빠져서 물속에 있는데 바다의 용왕이 가지고 가서 공양했습니다.
그러므로 다시 사천왕이 바친 바리를 받으셨으니,
바리 빛깔은 마치 옥과 같았습니다.
어떤 사람이 출가를 구하고 원할 적에 부모가 이미 허락하고 모든 질병을 떠나고 장애가 없으면 와서 상가 안에 이르러서 만약 대중들이 모였으면 상가에게 아뢰야 하고,
만약 모이지 않았으면 사람마다 말하여 알게 합니다.
상가에게 아뢰고는 먼저 목욕을 합니다.
목욕을 마치면 화상은 아들이라는 생각을 내고 더럽거나 천하다는 마음을 내지 않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만약 그와 같이 좋은 마음으로 다루면 제자도 화상 아사리에 대하여 곧 아버지라는 생각을 내기 때문입니다.
머리를 깎으려 할 적에 화상은 다섯 가지 법을 말하여야 합니다.
무엇이 다섯 가지 법이냐 하면,
첫째 머리카락,
둘째 털,
셋째 손톱,
넷째 이,
다섯째 가죽입니다.
이 다섯 가지 법을 말하는 까닭은 어떤 사람이 전신(前身)에 일찍이 이 다섯 가지 법을 관하였으면 이제 머리를 깎아 땅에 떨어질 적에 곧 먼저의 업이 일어나서 아라한을 얻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먼저 다섯 가지 법을 가르친 뒤에 머리카락을 깎게 됩니다.
마치 라후라가 머리카락이 떨어지지도 아니해서 곧 아라한이 됨과 같고,
종기가 곪아서 사람이 따기를 기다린 뒤에 터지게 됨과 같고,
연꽃이 해돋기를 기다려서 피게 되는 것과 같습니다.
이것은 출가를 바라는 사람도 그와 같아서 다섯 가지 법을 말함으로 인하여 곧 도를 깨치게 됩니다.
머리를 깎을 때에 정수리에서 다섯 개나 세 개의 머리카락을 남겨 놓았다가 향탕으로 목욕을 하고 속인의 기색을 없애고 와서 화상 앞에 이르러 무릎을 꿇습니다.
화상이 ‘이제 너는 정수리의 머리카락을 깎아버려야 할 터인데 허락하느냐?’고 합니다.
그렇다고 대답하면 화상은 자신이 그를 위하여 정수리의 머리카락을 깎아 버립니다.
정수리의 머리카락을 깎은 뒤에 화상 앞에 있으면서 무릎을 꿇으면 화상은 가사를 주며 정수리로 이며 받습니다.
받은 뒤에는 화상에게 돌려주니,
이와 같이 두 번 세 번하여 받습니다.
정수리에 이며 받은 뒤에는 화상이 입혀 주며,
자신이 가져다 자신이 가사를 입지 못합니다.
화상이 해주기를 기다려야 합니다.
차례로 여러 비구들에게 예배하고 아사리에게 가서 발에 예배하고 무릎 꿇고 합장하면 아사리가 가르쳐 말하기를,
‘너는 나의 말을 따라야 한다.
너에게 가르치노니,
3귀를 받으라’고 합니다.
‘그러하겠습니다’고 하면 3귀를 수여하여 마치고 다음은 열 가지의 계율을 수여 합니다.”
“어떻게 3귀를 수여합니까?”
“3귀를 받음에는 두 가지가 있습니다.
첫째는 따로따로 받음[別受]이요,
둘째는 통틀어 받음[總受]입니다.
어떻게 따로따로 받느냐 하면,
따로따로 받음이란 ‘부처님께 귀의합니다.
부처님께 귀의합니다.
부처님께 귀의하기를 마쳤습니다’고 하고,
‘법에 귀의합니다.
법에 귀의합니다.
법에 귀의하기를 마쳤습니다’고 하고,
‘상가에게 귀의합니다.
상가에게 귀의합니다.
상가에게 귀의하기를 마쳤습니다’고 합니다.이것을 따로따로 받는다고 합니다.
통털어 받는다 함은 ‘부처님께 귀의합니다.
법에 귀의합니다.
상가에게 귀의합니다.
부처님께 귀의하기를 마쳤습니다.
법에 귀의하기를 마쳤습니다.
상가에게 귀의하기를 마쳤습니다’고 하니,
이렇게 세 번을 말합니다.
이것을 통틀어 받음이라 합니다.
먼저 ‘상가에서 귀의합니다’고 하고 뒤에 ‘법과 부처님께 귀의합니다’고 하지 못합니다.
또한 섞여서 말하지 못합니다.
만약 스승이 ‘부처님께 귀의합니다’고 가르치면 제자의 말이 바르지 못하지만 ‘부처님께 귀의합니다’고 말하면 역시 받은 것입니다.
또 스승이 ‘부처님께 귀의합니다’고 말하면 제자가 ‘부처님께 귀의합니다’고 하면 역시 3귀를 받은 것입니다.
만약 스승과 제자의 말이 모두 바르지 못하면서 ‘부처님께 귀의합니다’고 하면 3귀를 받은 것이 아닙니다.
또 스승이 ‘부처님께 귀의합니다’고 가르쳤는데,
제자가 ‘그렇게 하겠습니다’고 하거나 혹은 말이 입에서 나오지 아니하거나 말을 따르되 완전히 갖춘 것이 아니면 모두 다 3귀를 받은 것이 아닙니다.
3귀 받는 것을 마칩니다.
다음에 열 가지 계율을 수여합니다.
열 가지 계율을 받는 데는 두 가지가 있습니다.
첫째는 따로따로 받음이요,
둘째는 통틀어 받음입니다.
어떻게 따로따로 받느냐 하면,
‘나는 불살생(不殺生)을 받습니다.
나는 불살생을 받습니다.
나는 불살생 받기를 마쳤습니다’고 합니다.
이렇게 차례로 역시 이렇게 말하니,
이것을 따로따로 받는다고 합니다.
어떻게 통틀어 받느냐 하면,
‘나는 첫째 불살생,
둘째 불투도(不倫盜),
셋째 불음(不婬),
넷째 불망어(不忘語),
다섯째 불음주(不飮酒),
여섯째 정오가 지나면 먹지 아니하고 [不過中食],
일곱째 노래하고 춤추거나 지어서 부르거나 장엄하게 꾸미거나 악기를 뜯지 않으며 일부러 가서 보고 듣지도 않으며 싸움까지도 다 보지 아니하고,
여덟째 향ㆍ꽃ㆍ영락을 부치거나 향을 몸에 바르지 아니하고,
아홉째 높고 넓고 큰 평상 위에 앉거나 눕지도 아니하고,
열째 생상(生像)을 잡거나 가지지도 아니하는 계율을 받습니다’고 하는 것입니다.
‘생상’이라 함은 금과 은과 온갖 보물인데 모두 붙잡지 못합니다.
‘말과 소리가 같지 않다’ 함은 미련하게 떠드는 것처럼하여 상대방이 이해하지 못하는 것이니,
그 이치를 가르쳐 주어야 합니다.
이렇게 이해하지는 못하지만 제자가 ‘잘 지니겠습니다’고 하면 계율을 받은 것이 됩니다.
만약 근기가 둔한 이로서 옷 입을 줄도 모르고 바리 잡을 줄도 모르고 먹는 것도 모르며 다니거나 서거나 앉거나 눕거나 하는 것을 다 모르면 화상을 떠나지 못하니,
낱낱이 화상을 따르면서 배워야 합니다.
화상은 제자 보기를 아들처럼 생각합니다.
사미 제도하는 법을 마칩니다.
제자의 법으로서는 날이 밝으면 일찍 일어나서 양치질을 하고 손과 얼굴을 씻고 가죽신을 벗고 화상에게 갑니다.
스승이 일어나면 스승에게 세 가지의 이쑤시개의 대ㆍ중ㆍ소를 드립니다.
일시에 스승에게 세 가지의 이쑤시개를 드리되,
만약 스승이 날마다 언제나 큰 것을 가지면 중간 것과 작은 것은 놓아두고 항상 큰 것만 드립니다.
만약 스승이 중간 것을 가지면 큰 것과 작은 놓아둡니다.
만약 스승이 작은 것을 가지면 큰 것과 중간 것을 놓아둡니다.
또 어느 때에는 큰 것을 가졌다가 어느 때는 중간 것을 가졌다가 어느 때는 작은 것을 가지기도 하면 세 가지 것을 뜻대로 드립니다.
물을 드려야 하니,
물에는 두 가지가 있습니다.
첫째는 찬물이요,
둘째는 따스한 물입니다.
만약 스승이 언제나 찬물을 쓰면 따스한 물을 그만두고,
만약 스승이 언제나 따스한 물을 쓰면 찬물은 그만둡니다.
만약 스승이 어느 때는 찬물을 쓰다가 어느 때는 따스한 물을 쓰면 두 가지의 물을 뜻대로 드립니다.
물을 공급한 뒤에 만약 화상이 뒷간에 들어가면 곧 가서 화상의 방에 들어가 소제를 하여야 합니다.
평상과 자리를 처리하고 옷을 갭니다.
승가리를 준다 함은 먼저 승가리와 속옷을 놓았다가 화상에게 건네주는 것이니,
만약 화상이 가지고 가서 옷을 입고 바리를 가지면 화상의 뒤를 따를지니,
가까이도 말고 멀지도 말아야 합니다.
화상과 일곱 자를 떨어져서 갑니다.
스승은 제자에게 계율 지닐 것을 가르쳐야 하며,
만약 죄를 범함이 있으면 참회를 가르쳐야 합니다.
가외 옷과 바리가 있을 적에 제자에게 없다면 주어야 하고,
만약 제자가 병들면 바라지를 하여야 합니다.
만약 화상에게 제자가 많이 있으면 한 사람을 시봉시키고 나머지는 뜻대로 읽히고 외우도록 합니다.
그때 바라문이 출가하기를 원하는데 비구들이 허락하지 않아 바라문은 울면서 괴로워하였습니다.
때에 부처님은 바라문의 형체가 파리함을 보시고 비구들에게 ‘이 바라문은 어찌하여 파리하느냐?’라고 물으시자 비구들은 ‘이 바라문이 출가하기를 원하는데 비구들이 허락하지 않자 그 때문에 파리합니다’라고 대답하였습니다.
부처님은 비구들에게 ‘이 바라문은 누구와 은혜가 있었느냐?’라고 하시자 사리불이 ‘이 바라문은 왕사성에 있을 적에 저에게 밥을 준 적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저와 아옵니다’고 하였습니다.
부처님은 사리불에게 ‘네가 이 바라문을 제도하라’고 하시자,
때에 사리불은 부처님께 ‘어떻게 이 바라문을 제도해야 합니까?’라고 아뢰었습니다.
부처님은 사리불에게 ‘너는 아뢰고 세 차레의 갈마를 하여 이 바라문을 제도하라’고 하셨습니다.
그때 부처님은 비구들을 모으시고 설법하신 뒤에 비구들에게 ‘지금으로부터는 3어(語)로 계를 받는 것을 끊고 대중 가운데 똑똑하고 지혜 있는 비구가 아뢰고 세 차례의 갈마를 지어서 계율을 받도록 하라’고 하셨습니다.
계율을 받고는 여러 악을 많이 짓고 위의를 살피지 않으므로 어느 욕심이 적고 족한 줄 아는 비구가 ‘그대들은 어째서 나쁜 행동을 짓고 위의를 살피지 않습니까?’라고 꾸짖자 비구들이 ‘누가 대덕에게 나에게 계를 주라고 청했습니까?
누가 대덕에게 화상이 되라고 청했습니까?’라고 대답하였으므로,
때에 욕심이 적은 비구가 부처님께 아뢰었습니다.
‘비구들이 화상 되기를 청하지 않았고 계율을 빌지도 않았는데 구족계를 주었다고 하옵니다.’
부처님은 이로 인하여 계율을 제정하셨으니,
‘남이 청하지 않으면 화상이 되지 못하고 계율을 빌지 않으면 구족계를 수여할 수 없다.
만약 주고받으면 돌길라가 된다’라고 하셨습니다.
화상에게 청하고 계율을 비는 것은 율문에 있습니다.
그때 비구들은 혹은 두 사람 혹은 세 사람이 아뢰고 세 차례의 갈마를 하여 남에게 구족계를 주었습니다.
그 중에 어느 욕심이 적고 족한 줄 아는 비구는 꾸짖은 뒤에 가서 부처님께 아뢰었습니다.
부처님은 이 일로써 비구승들을 모아 ‘지금부터 열 사람의 중이 남에게 구족계 주는 것을 제정한다.
만약 열 사람에서 부족한데 구족계를 주면 돌길라가 된다’라고 하셨습니다.
혹은 한 살,117) 두 살이 되어서 남에게 구족계를 주어서 교수할 줄도 모르고 제자의 위의도 살피지 못하는데,
제자들을 거느리고 부처님에게 나아가 땅에 엎드려 발 아래 예배하고 물러나 한 쪽에 앉았습니다.
그때 부처님께서 ‘너희들은 4대가 고르고 온화하느냐?
걸식하는데 얻기가 쉽더냐?’라고 위문하시니 부처님께 ‘4대가 고르고 온화하오며,
걸식하는데 얻기가 쉽습니다’라고 하였습니다.
이에 부처님은 아시면서도 일부러 ‘이 비구들은 누구의 제자냐?’라고 하자 ‘저의 제자이옵니다’라고 하였습니다.
‘너는 몇 살이냐?’라고 하자 ‘두 살이옵니다’라고 하였습니다.
‘너의 제자는 몇 살이냐?’고 하자 ‘한 살이옵니다’고 하니,
부처님은 ‘너 스스로가 아직 젖을 끊지 못했는데 어찌하여 남을 제도하느냐?’라고 꾸짖으셨습니다.
꾸짖기를 마치시고 비구들을 모으시어 ‘지금부터 열 살이 차지 않으면 남을 제도하거나 구족계를 줄 수 없다.
만약 계를 주면 죄가 된다.
비록 열 살이 찼더라도 어리석고 지혜가 없으면 남에게 구족계를 줄 수 없다’라고 하셨습니다.
주고받는 계율을 마칩니다.”
법사가 말하였다.
“이제 의지(衣止)를 잃음과 의지를 잃지 않는 법을 밝히겠습니다.
제자가 의지사(依止師)와 함께 가는데 멀리서 화상을 보면 의지를 잃습니다.
만약 화상을 보면서도 화상이 아니라는 생각을 지으면 의지를 잃지 않습니다.
만약 화상이 도량 내에 들어오거나 집안에 들어올 적에 제자가 모르면 의지를 잃습니다.
또 화상이 도량 내에 들어오거나 집안에 들어오며 혹은 마을에서 걸식하는데 소리를 듣고 형상을 보지 않았더라도 모두 의지를 잃습니다.
만약 소리를 들었지만 화상 아니라는 생각을 지으면 의지를 잃지 않습니다.
만약 외도가 처음 부처님 법에 들어오면 파리바사(波利婆沙)118)를 부여하여야 합니다.
파리바사를 얻은 뒤에 만약 다섯 가지의 가지 말아야 할 곳을 잘 가며 게을러 부처님 법을 배우려 하지 아니하거나 혹은 부처님 법을 헐뜯음을 듣고 기쁜 마음을 일으키거나 상가 헐뜯음을 듣고 기쁜 마음을 내면 구족계의 행을 수여하지 못합니다.
파리바사의 외도가 4선을 닦아 얻고 허공을 날아오를 수 있어도 구족계를 수여하지 못합니다.
넉 달이 차고 만약 부처님 법에서 수다원의 도를 닦아 얻으면 바로 그 날에 구족계를 받게 되며 파리바사를 수여할 필요가 없습니다.
가령 외도에 있었더라도 혹은 설법을 듣고 수다원의 도를 얻고 와서 상가 중에 이르러 출가하기를 바라면 곧 출가를 허락하고 구족계를 수여하며 파리바사를 수여할 필요가 없습니다.
또 파리바아사로서 거의 네 달이 찼는데도 부처님 법 헐뜯음을 듣고는 기쁜 마음을 내고 외도 헐뜯음을 듣고는 성을 내며,
다섯 가지의 가지 말아야 할 곳을 잘 가면 다시 넉 달을 주어야 합니다.
만약 머리칼을 맺는[結髮] 외도와 불을 섬긴[事火] 외도면 파리바사가 필요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이 두 외도는 업과 믿음과 인과가 있어서 과거의 모든 부처님이 보살이었을 적에 출가와 바라밀을 모두 이 도에서 배웠기 때문입니다.
외도의 파리바사를 마칩니다.
‘문둥이’는 적라(赤癩)가 있고 백라(白癩)가 있고 흑라(黑癩)가 있는데 옴도 모두가 문둥이에 포함되니,
또한 출가할 수 없습니다.
문둥이와 옴이 가령 손톱만큼 크더라도 출가하지 못하며 손톱만큼 큰 것이 드러난 곳에 있으면 더 자라거나 자라지 않거나 다 출가하지 못합니다.
만약 으슥한 데서 나타나지 않으나 자라면 출가하지 못합니다.
만약 자라지 않으면 출가할 수 있습니다.
또 병적으로 나온 혹이 드러난 곳에 있으면 더 자라거나 자라지 않거나 출가하지 못합니다.
만약 으슥한 데서 더 자라지 않으면 출가할 수 있습니다.
혹은 작을 때에 군더더기의 살로서 나온 혹은 항문에 있더라도 제도되어 중이 될 수 있으니,
이것은 병적으로 나온 혹은 아닙니다.
그 때문에 출가할 수 있습니다.
또 몸에 가늘게 일어나서 마치 가시처럼 되면 모두가 문둥이류에 포함되니 출가하지 못합니다.
‘왕의 사람을 제도한다’ 함은 때에 비구들이 싸움하는 장수를 제도하여 출가시켰습니다.
뒤에 도둑이 일어나자 왕은 여러 싸움하는 장수들을 찾아서 도둑을 깨뜨리게 하려 하여 사람을 보내어 승방까지 와서 찾다가 비구들이 벌써 제도하여 출가시켰음을 보고 심부름꾼이 와서 왕에게 ‘비구들이 벌써 제도하여 출가시켰습니다’라고 하였습니다.
왕은 듣고 여러 신하들을 모아 함께 의논하면서 왕은 신하에게 ‘관리를 제도하면 그 죄는 어떠한가?’라고 하니,
신하가 왕에게 ‘만약 화상이면 머리를 베야 하고 갈마 스승이면 혀를 끊어야 하고,
나머지 단(檀)에 임한 사람들은 갈빗대를 때려서 부수어 합니다’고 하였습니다.
때에 왕은 수다원의 도를 얻었었는데,
신하들의 말을 듣고 부처님에게 나아가서 부처님께 ‘지금부터는 왕의 사람을 제도하지 마십시오.
미래 세상의 왕으로서 만약 삼보를 믿지 않으면 비구들이 혹시 왕의 사람을 제도하면 곧 법에 의하여 죄를 다스릴 것입니다’고 하였습니다.
왕의 사람이거나 대신이거나 아래로 왕의 녹봉을 먹는 이면 모두 왕의 사람입니다.
만약 아버지가 왕의 녹을 먹고 아들이 왕의 녹을 먹지 않으면 아버지는 출가하지 못하지만 아들은 출가할 수 있습니다.
만약 녹을 먹되 기한이 있는데 아직 다하지 않았으면 출가하지 못하지만 녹을 다 먹고 난 뒤에는 출가할 수 있습니다.
만약 반드시 출가하려면 녹을 옮겨서 형제거나 아들에게 준 뒤에는 출가할 수 있습니다.
만약 녹은 먹되 왕에게 아뢰어 왕이 허락하면 또한 출가할 수 있습니다.
‘도둑’이라 함은 노략질하고 훔치며 길을 끊고 사람을 죽이는 것이니,
성씨와 이름을 알면 제도하여 출가시키지 못합니다.
또 나라를 도모하는 도둑이 만약 나쁜 마음을 버리고 출가하려 하면 제도하여 출가시킬 수 있습니다.
나라를 위하여 근심을 없앰이니 왕도 출가를 듣고 크게 기뻐합니다.
또 나쁜 일을 버리고 왕에게 항복하여 왕이 허락하면 제도하여 출가시킬 수 있습니다.
채찍이나 매질 상처로 앓는 사람을 제도하지 못하니,
만약 상처가 나으면 제도할 수 있습니다.
만약 죄를 범한 사람이 불에 달군 쇠도장으로 글자를 찍혔으면 제도하여 출가시키지 못합니다.
만약 치료하여 낫게 되면 출가할 수 있습니다.
‘빚을 진다’ 함은 자기가 빚을 졌거나 할아버지가 빚을 졌거나 아버지가 빚을 졌거나 아들이 빚을 졌거나 하는 것이니,
만약 빚이 자기로 말미암으면 출가할 수 없습니다.
어떤 사람이 상으로 빚을 값아 주면 출가할 수 있습니다.
‘종’이라 함은 네 가지의 종이 있습니다.
첫째는 집에서 태어난 종이요,
둘째는 사서 얻은 종이요,
셋째는 적을 깨뜨려서 얻은 종이요,
넷째는 스스로가 종이 된 이입니다.
스스로가 종이 된 이라 의복과 음식 때문에 자신이 청구하여 종이 된 것이니,
이것을 스스로가 종이 된 이라고 합니다.
만약 종의 주인이 종을 놓아 주어 출가 시키면서 비구들에게 ‘종이 도의 마음이 있으면 놓아 주겠지만 만약 도의 마음이 없으면 도로 다시 종을 만들겠습니다’고 이렇게 말하면 출가시킬 수 없습니다.
때에 어느 한 거사의 집에 어떤 역병(疫病)이 일어나서 처음에 파리와 지네를 죽이고 다음에 닭과 돼지를 죽이고 다음에 소와 염소를 죽이고 다음에 남종과 여종에게 미치고 뒤에는 좋은 사람에게까지 미쳤습니다.
이 역병이 일어나는 때에는 문 가운데로부터 나가지 못하며 벽을 부수고 나가서 바로 떠나가며 돌아보지 않아야 합니다.
만약 돌아보면 즉사합니다.
만약 즉사하지 않으면 다른 지방에 이르러도 죽습니다.
때에 부자 세 사람은 벽을 부수고 나서 바로 떠나가며 돌아보지 않았으므로 살게 되었습니다.
다른 지방에 이르러 가난하여 자립할 수가 없으므로 비구의 처소에 가서 출가하기를 바랐습니다.
비구는 곧 제도하여 출가시켰습니다.
출가한 뒤에 두 아들을 거느리고 걸식하였습니다.”
112)
어머니 뱃속에 있었던 기간이다.
113)
여자의 아름다운 용모이다.
114)
남을 때리려는 시늉으로…….
115)
찬성(위임)하는 의사이다.
116)
니살기파일제이다.
117)
법납(法臘)으로 한 해이다.
118)
따로 살린다는 뜻이다.
○ [pt op tr]
○ 음악공양, 나무불, 나무법, 나무승 mus0fl--Rue De La Muette - Funambules.lrc
◈Lab value 불기2564/11/06 |
마쳐야 할 일이 계속 밀려 있다. 논의하고 살펴야 할 내용도 밀려 있다. 과거에 적은 글도 정리해야 한다. 한편 어제는 3 년전에 올렸던 『삼무성론』 글을 정리해서 다시 올렸다. 현재 가치 회계 문제와 함께 인명론의 문제점도 정리하려고 한다. 또 오래전 카드 형태로 수기로 적어두었던 내용들도 스캔해 정리해야 한다. 그런 가운데 요즘은 바빠서 sns 를 거의 대부분 정리했다. 그런데 연구실을 나간 인턴연구원로부터 sns 상으로 질문이 왔다. 살펴보니 과거에 반복해서 올렸던 내용이다. 그런데 인턴연구원은 그간 읽지 않았기에 다시 정리해 보냈다,. 생각해보니 이것이 중요하기도 하다. >>> 어제의 나와 오늘의 내가 동일하다면! 그 근거는 무엇일까? >>> 이런 질문이다. 그래서 그간 살핀 내용을 압축해서 다음처럼 답했다. => 사실은 동일하지 않다. 현실에서 눈을 떠서 보는 모습 가운데 자신이 스스로 자신이라고 여기는 부분을 손가락으로 가리킬 수 있다. 또 보이지 않지만 그처럼 자신이라고 스스로 여기는 부분을 나열할 수 있다. [색,수,상,행,식] 예를 들어 나는 지금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 이런 식으로 생각하고 있는 작용을 자신으로 여길 수도 있다. 그런데 이런 내용은 사실은 자신이 아니다. 그러나 자신과 완전히 무관한 것도 아니다. 비유하면 자신이 걸친 옷과 성격이 같다. 이것을 그림으로 나타내볼 수 있다.
나에 대한 잘못된 판단 = 옆에 철수를 세워 놓고 눈을 떳다 감았다를 반복하게 한다. 이 때 2는 모습을 보기도 하고 보지 못하기도 한다. 2 가 눈을 뜰 때 보는 내용 가운데 2는 그림 속의 2^를 자신으로 여기면서 살아간다. 그런데 이는 진짜 자신이 아니다. 1 도 마찬가지로 그림에서 1 과 같은 내용을 자신이라고 가리키게 된다. 여기서 자신의 눈썹이나 허리는 보이지 않는다. 이 경우도 2 의 경우와 상태가 같다. 위 그림에서는 그것이 진짜 자신이 아님을 보였다. 눈으로 보는 달이 진짜 달이 아닌 것과 사정이 같다. -> 돗수색안경을 썼다 벗었다 하면 그 크기나 색상 모습이 바뀐다. 자신이 안경 하나를 썼다 벗었다하여 이처럼 바뀌는 것은 진짜 달이 아니다. 그러나 이 상황에서 그처럼 바뀌지 않고 그대로 있는 것은 없다. 여기에 평소 자신으로 여기고 대하는 내용도 사정이 같다. 이들은 모두 한 주체의 마음에 맺혀 얻어진 내용이다. ○ 평소 일정부분을 자신으로 잘못 파악하게 되는 사정 그런데 이들 내용을 그처럼 오해하게 되는 사정이 있다. - 2^와 같은 내용은 눈을 뜨면 늘 보게 되기에 그가 늘 대하는 내용이라고 잘못 여기게 된다. [상] -또 자신이 어디론가 움직이려고 하면 2^ 와 같은 부분만 따라 움직이는 것을 보게 된다. 이처럼 그 부분이 자신뜻처럼 되어 즐거움을 준다고 여긴다. [락] - 한편 2^ 와 같은 부분을 다른 부분에 대면 그 때 촉감을 느낀다. 또 손으로 2^ 부분을 만질 때와 다른 부분을 만질 때 촉감의 상황이 다르다. 그래서 2^ 이외의 나머지 부분은 자신이 대하는 객체 대상으로 잘못 여기게 된다. 그리고 2^와 같은 부분은 자신의 주관이 위치한 자신의 몸으로 잘못 여기게 된다. [아] - 그런 가운데 이런 부분이 다른 부분과 달리 대단히 깨끗하다고 여기며 집착하고 대하게 된다. [ 정 ] 그리고 현실에서 그런 부분과 관련해 이런 특성을 반복 경험한다. 그래서 2^와 같은 부분을 평소 자신으로 잘못 여기게 된다. 그러나 이들은 자신의 마음안 내용이다. 그리고 자세히 보면 위와 같은 특성도 잘못된 판단이다. ○ 상- 즉 자신이 늘 일정하고 동일하다는 판단의 오류 우선 어제와 오늘 파악한 자신의 내용이 서로 동일한 것처럼 잘못 여긴다. 그런데 사정은 그렇지 않다. 철수가 100m 앞에 서있다가 자신에게 달려온다고 가정해보자. 처음에는 손가락 마디보다 작게 보인다. 그러나 자신에게 가까이 올 수록 점점 커져 보인다. 그 형태도 매 순간 다르다. 그래서 글자로 표현하면 다음과 같다. αβγδεζηθικλμνξο 이 내용이 갓난아이부터 노인이 될 때까지 사정이 같다. 엄밀하게 보면 호흡을 한번 할 때 그 전후가 다르다. 식사 - 소화 - 흡수 - 배설의 과정을 놓고 보면 사정이 다음과 같다. 자신의 외부라고 보는 곳에 배추밭과 축사가 있다. 여기서 식사할 식품을 구해 섭취한다고 하자. αβγδεζηθικλμνξο 가 처음의 자신이다. 그런데 밖에서 123456789 가 있다. 조금씩 섭취하고 배설한다고 하자. αβγδεζηθικλμνξο βγδεζηθικλμνξο1 γδεζηθικλμνξο12 δεζηθικλμνξο123 εζηθικλμνξο1234 ζηθικλμνξο12345 ηθικλμνξο123456 θικλμνξο1234567
이런 식으로 변화하게 된다. 이는 레고블록으로 무언가를 만드는 과정과 같다. 처음에는 a 와 b 가 별개로 있었다. 그런데 b 에서 하나의 블록을 떼내 a에 붙인다. 그리고 a 에서 하나의 블록을 떼내 b에 붙인다. 그렇게 조금씩 한다고 가정하자. 그러면 나중에는 처음에 a 외부에 있던 b가 a 를 모두 구성하게 된다. 처음에 a 와 b 는 다르고 별개라고 보았다. 그런데 조금씩 부품을 떼어 옮겨 붙이다 보니 그렇게 된 것이다. 몸과 마음의 구성요소가 다 사정이 같다. 마음안도 어떤 책을 읽으면 그 내용이 섭취된다. 또 어떤 내용은 사라져간다. 이처럼 몸과 마음의 구성요소가 조금씩 변화하는 과정에서 무엇이 핵심이고 동일한 것인가를 살피면 그런 것을 얻을 수 없다. αβγδεζηθικλμνξο βγδεζηθικλμνξο1 γδεζηθικλμνξο12 δεζηθικλμνξο123 εζηθικλμνξο1234 ζηθικλμνξο12345 ηθικλμνξο123456 θικλμνξο1234567 위와 같이 다 다르다. 그런데 이것을 무엇때문에 하나의 자신으로 여기는가. 이것은 인과문제로 따지어 이어 하나의 동일한 자신으로 관념하는 것이라고 여긴다면 지금 자신이 섭취하는 음식물 [원인]을 자신으로 볼 듯 하다. 또 자신이 배설해 버리는 배설물 [결과]도 자신으로 볼 듯 하다. 그런데 현실에서 그렇게 하지 않는다. ○ 자신의 뜻대로 되어 즐거움을 준다는 판단오류 [락] 또한 이들은 마음안 내용으로서 자신 뜻대로 되는 것도 아니다. 예를 들어 현실에서 자신이 병들고 죽기를 원해서 그렇게 되는 이는 드물다. 일부 자신 뜻처럼 된다고 보이지만 그렇지 않다. ○ 아와 외부대상에 대한 판단오류 [아]
한편 이는 자신의 주관이 위치한 부분도 아니다. 오히려 평소 자신으로 보는 내용은 자신의 마음에 얻어진 마음내용이다. 그리고 자신이 대상으로 여기는 것도 외부대상이 아니다. 다만 그렇게 여겨질 뿐이다. 손을 사과에 ;대고 두드리면 촉감을 느끼고 소리를 듣는다. 그래서 눈으로 보는 손이 그런 대상을 접촉한 것으로 보이게 된다. 그렇지만, 눈을 감고 두드려도 촉감을 느끼고 소리를 듣는다. 그래서 눈으로 본 내용은 사실은 동시 부대 상황에서 그렇게 보여지는 것 뿐이다. ○ 실재와 현실의 관계 현실에서 자신의 몸으로 대하는 내용은 자신의 마음안 내용이다. 한편 마음안 내용 밖 본 바탕에 현실 내용과 그대로 일치한 내용이 실재하는 것도 아니다. 현실에서 얻는 내용에서부터 그런 관계는 파악되지 않는다. 예를 들어 각 감관에서 얻는 내용과 관념내용 어느 것을 보아도 서로 대단히 엉뚱하다. 사과를 책상에 놓고 눈으로 보고 손으로 두드리며 소리를 듣고 냄새맡고 맛보고 손으로 만진다고 하자. 이 때 각 감관에서 얻는 각 내용은 서로 엉뚱하다. 눈으로 본 내용은 귀고 듣는 소리와 전혀 엉뚱하다. 나머지들도 다 마찬가지다. 그리고 이에 대해 분별하는 내용은 또 이와 엉뚱하다. 눈을 감고 마음으로 떠올리는 관념내용은 눈으로 직전에 본 내용과 일치하지 않는다. 현실에서 얻는 내용들의 관계가 이와 같다. 그런데 유독 이 마음 밖 본 바탕의 실재 내용만 이들 내용과 일치한다고 볼 수 없다. 그리고 마음 밖의 본 바탕 실재 내용은 얻지도 못한다. 그래서 이런 사정을 불가득 공이라고 표현한다. 그래서 평소 자신으로 여긴 내용은 앞에 나열한 특성을 본래 갖지 않는다는 것을 먼저 살펴야 한다. ○ 시공간 변화상의 자신 그런데도 현실에서 위와 같은 특성[상-락-아-정]에 바탕해 일정부분을 자신으로 여기게끔 된다. 우선 이것이 진짜 자신이 아님은 다음 실험을 추가하면 쉽게 파악할 수 있다. 1 자신의 모습을 위와 같이 보는 상황에서 눈을 감는다. 그러면 2^와 같은 모습은 더 이상 볼 수 없다. 설령 그렇다 해도 여전히 자신은 존재한다. 그래서 눈을 감거나 감지 않거나 여전히 어느 경우에나 존재하는 내용이 무언가를 찾아야 한다. 시각내용이 그렇듯 다른 감각들도 사정이 같다. 2 한편 감각이나 분별을 아예하지 못하는 경우가 있다. 술을 많이 마셔 의식을 상실하거나 사고로 식물인간이 되는 상태 등이다. 그렇다해도 여전히 일정한 활동을 한다. 그리고 깨어나면 그는 계속 이어서 생활한다. 그래서 감각하거나 분별하지 못해도 여전히 그 자신은 존재한다. 바빠서 미처 자신의 손과 발을 생각하지 못하고 모임에 갔다고 하자. 그렇다고 자신의 손과 발을 떼 놓고 모임에 가게 되지는 않는다. 그래서 감각과 분별을 못해도 여전히 그 상황에서도 존재하는 것을 찾아야 한다. 감각과 분별을 통해 파악한 자신은 그렇지 못하다. 3 한편 사람이 죽어서 화장을 한다고 하자. 이 때 화장하기 전과 후에도 사정이 같다. ○ 현실에서 일정 부분을 잘못 자신으로 파악하게 되는 사정 ] 그런데 평소 이런 내용을 자신으로 여기고 대하게 하는 것은 다음과 같은 기제로 인해 그렇게 판단하게끔 된다. 우선 분해는 조립의 역순이다. 자신을 찾을 때는 앞과 같은 순서로 하나씩 찾아간다. 그러나 원래 발생한 순서는 위와는 반대다. 근본정신인 제 8 식이 매 생을 시작할 때 7가지 정신을 분화 생성시킨다. 그래서 그런 바탕에서 현실을 대하게 된다. 그런 상태에서는 앞과 같은 잘못된 판단을 하게끔 된다. 그리고 매 순간 그런 기제를 바탕으로 자신을 파악한다. 이 사정을 다음 그림으로 나타낸다. [img9] >>> 위과 같은 기제에 바탕해 현실에서 매순간 일정 내용[그림에서 a!와 같은 부분]을 붙잡아 자신으로 여기면서 대하게끔 된다. 그리고 그 내용을 그 안에 기억해 저장한다. 그래서 이렇게 매 순간 다른 내용들을 모두 묶어 자신으로 여기게 된다. 그래서 굳이 매 순간 다른 내용을 하나의 자신으로 여기게 하는 사정은 그런 기제 때문이라고 해야 한다. ○ 생사과정에서의 자신에 대한 현실적 방안 이 내용은 생사과정에서도 그대로 유지된다. 그래서 생사과정에서 무엇이 계속 보존되고 가치있게 유지되는 것인가를 잘 파악해야 한다. 처음 눈으로 보는 것은 그 순간은 가치가 있다. 그런데 보존되지 않는다. 눈을 감는 상황(세계)로 옮겨 갈 수도 없다. 의식상실이나 화장터 전후도 마찬가지다. 그런데 그것이 가능한 것이 있다. 그래서 현실에서 눈으로 본 것을 통해 수익을 얻더라도 곧바로 이런 형태로 옮겨 놓아야 한다. 그래야 무량겁에 걸친 생사과정에서 가치가 있게 된다. 처음 우유가 1톤 있었다고 하자. 1 주일되면 다 썩는다. 썩기전에 분유나 현금으로 바꿔야 한다. 그것도 또 어느 곳에서나 사용가능한 달러나 금으로 바꾸는 것이 낫다. 그런데 이 역시 생사 여행에서는 또 사정이 마찬가지다. 이는 한국에서 태국에서 홍콩을 거쳐 파리로 여행하는 것과 사정이 비슷하다. 한국에서는 부자였다. 그런데 태국 가는 비행기를 탈 때 가방만 들고 탔다. 부동산이나 건물 냉장고 등을 가지고 갈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태국에서 지내다 이제 옷만 남은 상태로 홍콩으로 갔다. 그리고 홍콩에서 파리로 갈 때는 이제 겨우 몸만 가지고 갔다고 하자. 이렇게 되면 곤란하다. 그래서 어느 상황에서도 유지되고 보존되는 것이 무언가를 찾아야 한다. 그리고 그 가운데 그 가치를 높이 갖는 형태로 매 순간 바꿔야 한다. 방금 눈으로 본 내용은 눈을 감고 다음 순간 다시 떠올릴려고 해도 안 된다. 그런데 그렇지 않는 것이 있다. 그리고 그 가운데 어느 세계에서나 가치를 갖는 것들이 있다. 그래서 평소 생활에서 이런 형태로 자산을 보유하려고 노력해야 한다. 그것이 10 개의 창고로 정리되어 제시된다. 10 무진장이다. 신장(信藏)ㆍ계장(戒藏)ㆍ참장(慚藏)ㆍ괴장(愧藏)ㆍ문장(聞藏)ㆍ시장(施藏)ㆍ혜장(慧藏)ㆍ염장(念藏)ㆍ지장(持藏)ㆍ변장(辯藏). 이 가운데 이런 수행을 하는 것은 처음에는 믿음으로 시작된다. 잘 몰라도 믿고 행하면 그로 인해 복이 축적된다. 그런데 그렇지 못하면 행하지 못해서 복을 쌓지 못하게 된다. 한편 좋음을 베풀고 나쁨을 가하지 않는다. 그리고 나쁨을 받아도 평안히 참는다. 이것이 계행이다. 이렇게 하면 자연스럽게 복이 쌓인다. 자신은 잊어도 남들이 기억하고 다시 되돌려주게 마련이다. [계장] 한편 자신이 잘못하거나, 남이 잘못한 내용을 잘 기억하면 그로 인해 같은 실수를 안 하게 된다. 시행착오를 되풀이하지 않게 된다. 이것이 참장 괴장이다. 그러면 무량겁에 걸쳐 받을 손해가 제거된다. 나머지도 비슷한 성격을 갖는다. 다른 것들은 현실에서 사는 동안은 그럴 듯하게 보일 수 있다. 매순간 감각하며 의미를 가질 수도 있다. 그러나 감각을 못하거나, 생사를 겪는 과정에서는 하나도 가져가지 못한다. 따라서 주의해야 한다. 수행자가 매 생을 출발할 때마다 원만하게 중생을 제도하려면 역시 이 자산을 풍부하게 지녀야 한다.
바삐 적다보면 두서가 없이 우선 적게 된다. 글을 적고 다시 살피면 조금 재정리하게 된다. 그래서 약간 순서를 바꾸어 정리했다. 한참 후에 인턴연구원이 다음 답신을 보내왔다. 동일성이 존재한다는 가정하에 동일성이 존재한다면 그 근거가 뭔지 찾아야 된다고 한다. 그래서 다시 추가해 보았다. 만일 동일성이 존재한다면 그 근거가 무언가 동일성이 존재한다면,( => 그러나 존재하지 않는다. 불생불멸 불상부단 불일불이 불래불출 ... ) 그런데도 그 근거를 찾아야 한다면 그처럼 잘못된 판단을 하게 되는 사정을 제시하면 될 듯 하다. 즉 현실에서 망상분별에 바탕해 상을 취하는 현상이 그것이다. 물론 이는 과학 공부나 실험하는 입장에서는 쉽게 이해하기 힘든 내용이기도 하다. 그래도 현실의 본 정체를 파악하는 측면에서는 이를 잘 살펴야 한다. ● 동일성 판단은 중요하다. 어제 본 꽃과 오늘 본 꽃은 언뜻 보아 같은 꽃이라고 여기게 된다. 그리고 방금 전 본 고무지우개와 지금 보는 고무지우개도 동일하다고 여긴다. 그런 가운데 실험이 진행된다. 그런데 동일성 판단이 확고화게 확립되지 않으면 실험결과를 신뢰하기 힘들다. 만일 한 번은 무우에 대해 실험하고 한번은 홍당무에 대해 실험하고 한번은 포도에 대해 실험한 다음 이것을 모두 무우에 대한 내용이라고 보고하면 엉터리다. 그런데 엄밀하게 보면 사정이 이와 같다. 현실에서 일정부분을 A , 예를 들어 무우나 홍당무 또는 자기자신, 또는 영희나 철수로 여기는 현상이 망상증상이다. 즉 무우가 어디 있는가라고 물으면 손가락으로 자신이 무우라고 여기는 부분을 가리키는 현상이 이것이다. 그렇게 일정부분을 상을 취해 대하는 현상이 문제이다. 동일성 판단은 바로 그런 판단(잘못된 망상분별)을 바탕으로 제시된다. 그런데 엄밀하게 보면 동일성의 근거를 획득할 수 없다. 왜 그런가는 다음 사정을 보면 이해가 된다. 자신이 어제 본 사과와 지금 보는 사과가 같다고 판단하려면 우선 어제 본 사과모습을 지금 떠올려서 비교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런데 사고 모습은 눈을 감고 방금 직전에 본 모습을 되살려 떠올리려고 해도 되지 않는다. 감각으로 얻는 내용은 모두 사정이 같다. 지금 직전의 것도 되지 않는데, 무엇으로 과거와 지금의 것이 동일하다고 판단하게 되는 것인가. 여기에서는 일단 감각현실을 사용하지 않음을 알 수 있다. 즉 자신이 과거의 사과와 지금의 사과가 같다거나 다르다는 판단과정에서 사용하는 것은 감각현실이 아니다. 이것을 가지고 둘을 비교해서 같다 다르다 판단하는 것이 아니다. 지금 한 단면 안의 각 부분을 비교할 때도 사정이 같다. 동일성 판단에 사용하는 재료는 결국 관념내용들이다. 과거에 감각한 내용 => 이를 바탕으로 일으킨 관념 지금 감각하는 내용 => 이를 바탕으로 일으키는 관념 그 가운데 관념을 가지고 동일성 판단을 행한다. 그런데 감각현실과 관념 사이에는 일치관계가 없다. 관념은 감각현실이 아니다. 또한 감각현실은 관념이 아니다. 그런 가운데 예를 들어 지금 눈을 감고 직전에 본 모습을 떠올리려 해보자. 떠오르지 않는다. 단 한 부분이라도 일치한 부분을 찾아본다고 하자. 찾아지지 않는다. 그래서 앞에서 행한 판단은 관념 사이의 비교일 뿐이다. 즉 자신이 현실 단면에서 감각하는 내용을 대상으로 행한 판단은 아니다. 다만 망집 상태에서는 이 둘의 지위를 혼동하는 것 뿐이다. 그래서 자신이 관념을 가지고 판단한 내용을 감각현실에 대한 판단이라고 오해하고 판단한다. 그것은 현실에서 영희가 어디있는가라고 물으면 감각현실의 일정부분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는 현상과 관련된다. 이것이 망집현상이다. 그 부분은 감각현실이다. 그래서 그런 관념내용은 그 부분에서 얻을 수 없다. 감각현실은 관념내용이 아니다. 그럼에도 그 감각현실부분을 대해 그러한 관념을 반복해 일으킨다는 사정 때문에 이 둘을 접착해서 이해한다. 즉 그런 내용이 없는 부분을 붙들고 자신이 생각한 내용이라고 여기며 대하는 현상이다. 바나나를 보면서 기차를 떠올렸다고 하자. 그렇다고 바나나에 그런 기차가 있는 것이 아니다. 또 바나나가 그런 기차인 것도 아니다. 그런데도 무엇을 대해 무언가를 떠올린다고 그 부분이 그런 내용이라고 이해하면 망상분별이라고 한다. 현실에서 행하는 99%의 판단이 모두 이와 같다. 다만 과학에서는 이런 판단을 바탕으로 진행한다. 그리고 그런 바탕에서 유효하다. 마치 수학이 일정한 공리를 바탕으로 진행하고 쌓여 올려지는 것과 같다. 그러나 본래의 본 바탕 사정은 그렇지 않다는 것도 함께 잘 이해해야 한다. 이 부분이 현실의 본 정체와 실상에 대한 올바른 깨달음을 강조하는 불교의 입장이기도 하다. 그래서 현실은 전도된(거꾸로 뒤집힌 ) 망상을 바탕으로 한 세계다. 이 점을 참조해야 한다. 이는 짧게 줄이면 다음과 같다. 본래 사실은 그렇지 않고 그런 부분에서 그런 내용을 얻을 수 없다.
♥단상♥ 삼진 아웃제도의 적용여부 현재 문서작업에 사용하는 컴퓨터는 대단히 오래되었다. 그래서 자율신경을 획득했다. 이유없이 꺼지기도 하고 다시 이유없이 제대로 작동이 되기도 한다. 자율신경과 인공 지능을 획득한 컴퓨터와 공동작업을 하는 상태다. 그런데 너무 작업에 장애가 된다. 그래서 최근에는 앞으로 3회만 시스템이 이유없이 정지되면 시스템을 새로 구해 교채하려고 방침을 세웠다. 대강 세보니 이미 3 회를 넘었다. 그런데 새 제품 구매가 쉽지 않다. 너무 시간이 오래 되어서 사양들이 낯설다. 무엇이 좋은지 모르겠다. 문서 작업용이라서 최소한 사양으로 구하려고 한다. 시간도 걸린다. |
문서정보 ori
https://buddhism0077.blogspot.com/2020/11/2564-11-06-k0937-016.html#8397 sfed--선견율비바사_K0937_T1462.txt ☞제16권 sfd8--불교단상_2564_11.txt ☞◆vzgj8397 불기2564-11-06 θθ |
■ 선물 퀴즈
방문자선물 안내페이지
다음에 해당하는 단어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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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유의 생멸 변화를 설명하는 데 4상(相)을 말하는 중, 만유가 생기는 모양을 말함.
답 후보
● 생상(生相)
석교(釋敎)
선가(禪家)
선교방편(善巧方便)
선바라밀(禪波羅蜜)
선업(善業)
설교(說敎)
불기2564-11-06_선견율비바사_016
ॐ मणि पद्मे हूँ
○ [pt op tr]
○ [pt op tr]
● 선견율비바사_K0937_T1462 [문서정보]- 일일단상키워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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