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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진리와실천
불기2564-11-16_대반열반경-K1403-007 본문
『대반열반경』
K1403
T0375
제7권
● 한글대장경 해당부분 열람I
● 한글대장경 해당부분 열람II
○ 통합대장경 사이트 안내
○ 해제[있는경우]
● TTS 음성듣기 안내
※ 이하 부분은 위 대장경 부분에 대해
참조자료를 붙여 자유롭게 연구하는 내용을 적는 공간입니다.
대장경 열람은 위 부분을 참조해주십시오.
『대반열반경』 ♣1403-007♧
제7권
♥아래 부분은 현재 작성 및 정리 중인 미완성 상태의 글입니다♥
○ 2020_0909_122705_can_ct23 무주_백련사
○ 2019_1105_162245_can_AB7 순천_선암사_송광사_풍광
○ 2020_0909_142236_can_ct13 무주_백련사
○ 2019_1105_121837_can_Ar26_s12 순천_선암사_송광사_풍광
○ 2019_1105_152957_can_ar35 순천_선암사_송광사_풍광
○ 2019_1105_154552_can_AB7 순천_선암사_송광사_풍광
○ 2020_0909_174709_can_CT27 무주_백련사
○ 2020_1017_152447_can_BW25 삼각산_화계사
○ 2020_0905_130004_nik_BW28 오대산_상원사
○ 2020_0910_111811_can_ct18 속리산_법주사
○ 2020_0907_130550_nik_Ab27 양산_통도사
○ 2020_0904_085515_nik_BW17 여주신륵사
○ 2020_0904_144653_can_CT28 원주_구룡사
○ 2020_0930_143512_nik_CT34 용주사
○ 2019_1106_115646_can_ar47 화순_운주사_쌍봉사_풍광
○ 2019_1105_131023_can_Ab35 순천_선암사_송광사_풍광
○ 2020_0909_125203_can_CT33 무주_백련사
○ 2020_0905_140705_can_Ab31 오대산_상원사
○ 2020_0211_135354_can_Ab31_s12 불암산_천보사_풍광
○ 2019_1106_153725_nik_bw24_s12 화순_운주사_쌍봉사_풍광
불교기록문화유산 아카이브
大般涅槃經卷第七
K1403
원문 번역문
대반열반경 제7권
송대 사문 혜엄 등이 니원경에 의거하여 덧붙임
9. 정도와 사도[邪正品]
이때에 가섭보살이 부처님께 여쭈었다.
“세존이시여,
위에서 말한 네 종류 사람들에게 마땅히 의지해야 합니까?”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그러하다.
선남자야,
나의 말과 같이 의지하여야 하나니
왜냐 하면 네 가지 마군이 있는 연고니라.
무엇이 네 가지인가,
마군이 말한 경전과 계율을 받아 가지는 것이니라.”
“세존이시여,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네 가지 마군과,
마군의 말한 것과 부처님의 말한 것을 저희들이 어떻게 분별하오며,
어떤 중생이 마군의 행을 따르는지,
부처님의 가르침을 따르는지,
그런 무리를 어떻게 압니까?”
“가섭이여,
내가 열반한 지 7백 년 뒤에 마왕 파순이 점점 나의 법을 혼란케 하리니,
마치 사냥꾼이 몸에 가사를 입듯이
마왕 파순도 그와 같이 비구ㆍ비구니ㆍ우바새ㆍ우바이의 모양을 가장하기도 하고,
또 수다원의 몸과 아라한의 몸과,
내지 부처님의 몸을 꾸미되 마왕의 유루한 형상으로 무루한 몸을 가장하고,
나의 바른 법을 파괴하며 파순이 바른 법을 파괴하면서 말하기를
‘보살이 옛날에 도솔천에서 없어지고 이 가비라성의 정반왕궁에 올 적에
부모의 애욕으로 접촉함을 의지하여 이 몸을 낳아 기른 것이니,
만일 어떤 사람이 인간에 나서 모든 세간의 인천 대중에게 공경을 받는다고 말한다면 있을 수 없다’고 하며,
또 말하기를
‘옛적에 고행할 때에 머리와 눈과 골수와 나라와 처자까지 여러 가지로 보시한 까닭으로 지금에 불도를 이루었으며,
그런 인연으로 천상 사람ㆍ세간 사람ㆍ건달바ㆍ아수라ㆍ가루라ㆍ긴나라ㆍ마후라가의 공경을 받는다’ 하리라.
만일 이런 말을 한 경전이나 계율이 있으면 마군의 말인 줄을 알지니라.
선남자야,
만일 경과 율에 말하기를,
‘여래는 벌써부터 불도를 이루었건만 지금 성불하는 일을 보이는 것은
중생들을 제도하기 위하여
일부러 부모의 애욕으로 인하여 났으며,
세상을 따르기 위하여 이렇게 나타난다’고 하면,
이런 경과 율은
참으로 여래의 말인 줄을 알지니,
만일 마군이 말한 것을 따르는 이는 마군의 권속이요,
부처님의 말한 것을 따르는 이는 보살이니라.
또 말하기를,
‘여래가 처음 났을 적에 10방으로 일곱 걸음씩 걸었다는 것을 믿을 수 없다’ 하면
그는 마군의 말이요,
여래가 세상에 나서 10방으로 일곱 걸음씩 걸은 것은 여래의 방편으로 보인 것이라고 말하면
이것은 여래가 말씀한 경전과 율이니,
만일 마군이 말한 것을 따르는 이는 마군의 권속이요 부처님이 말한 것을 따르는 이는 보살이니라.
만일 말하기를 ‘보살이 탄생한 뒤에 부왕이 사람으로 하여금
태자를 데리고 천신의 사당에 갔을 적에 천신들이 보고 내려와서 예경하였으므로
부처님이라 한다’고 하고,
다시 논란하여 말하기를
‘천신은 먼저 났고 부처님께서는 나중 났는데
어찌하여 천신이 부처님께 예경하였으랴’ 하면,
그것은 파순의 말인 줄을 알 것이니라.
경에 말하기를 ‘부처님이 천신의 사당에 갔을 적에
마혜수라천ㆍ대범천왕ㆍ제석천왕들이 모두 부처님 발에 합장하고 예경하였다’ 하면
이런 경과 율은 부처님이 말씀한 것이니,
마군이 말한 것을 따르는 이는 마군의 권속이요,
부처님이 말한 것을 따르는 이는 즉시 보살이니라.
어떤 경이나 율에
‘보살이 태자로 있을 적에 음욕으로 말미암아
사방에서 아내를 맞아 궁중에 두고 5욕으로 즐기며 기뻐하였다’고 말하였으면,
그러한 경과 율은 마군의 말이요,
만일 ‘보살은 이미 오래전에 탐욕과 처자의 생각을 여의었으며,
내지 33천의 훌륭한 5욕락도 침 뱉듯이 버렸거늘 하물며 인간의 욕락이리요.
머리를 깎고 출가하여 도를 닦았느니라’고 말하였으면
그런 경과 율은 부처님의 말씀이니 마군의 경과 율을 따르면 마군의 권속이요,
부처님의 경과 율을 따르면 곧 보살이니라.
또 ‘부처님이 사위성 기타정사에 계실 적에 비구들에게 종ㆍ하인ㆍ소ㆍ양ㆍ코끼리ㆍ말ㆍ나귀ㆍ노새ㆍ닭ㆍ돼지ㆍ고양이ㆍ개ㆍ금ㆍ은ㆍ폐유리ㆍ진주ㆍ파리ㆍ자거ㆍ마노ㆍ산호ㆍ호박ㆍ보패ㆍ보석ㆍ구리ㆍ가마ㆍ솥ㆍ쟁반 따위를 받아 두라 허락하였고,
밭 갈고 나무 심고 장사하고 곡식을 쌓아 두는 일들을
부처님이 자비심으로 중생을 사랑하여 허락하였다’고 말하였으면
그런 경과 율은 모두마군의 말이요,
‘부처님이 사위성 기타정사의 나리루(那梨樓) 귀신 있는 곳에 계실 적에 여래께서 바라문 고저덕(羖羝德)과 바사닉왕(波斯匿王)에게 말씀하시기를 비구들은 금ㆍ은ㆍ폐유리ㆍ파리ㆍ진주ㆍ자거ㆍ마노ㆍ산호ㆍ호박ㆍ보패ㆍ보석ㆍ종ㆍ하인ㆍ동남ㆍ동녀와 소ㆍ양ㆍ코끼리ㆍ말ㆍ나귀ㆍ노새ㆍ닭ㆍ돼지ㆍ고양이ㆍ개 따위의 짐승과 구리ㆍ가마ㆍ솥ㆍ쟁반 따위와,
가지각색의 평상ㆍ포단과 살림에 필요한 집 따위를
받아 두지 말라 하였고,
밭 갈고 나무 심고 무역하고 손수 음식 만들고 방아 찧고 맷돌질하는 것과
몸을 다스리는 주술과 매를 길들이는 방법과 천문 보고 역서 만들고 점치고
남녀의 상보고 해몽하고 남자다 여자다 남자 아니다 여자 아니다 하는 따위의
64능(能)과 사람을 의혹케 하는 18주술과 여러 가지 공교한 일을 하지 말라 하였느니라.
혹 세간의 한량없는 세속 일을 말하되,
흩는 향ㆍ가루향ㆍ바르는 향ㆍ쐬는 향ㆍ꽃다발ㆍ화만ㆍ머리 빗는 방법을 숭상하거나,
간사하고 아첨하여 이양을 탐내거나,
복잡하고 분주한 데를 좋아하며,
희롱하고 웃고 이야기하거나,
고기 생선을 즐겨 먹거나,
독약을 만들거나 향유를 짜거나
일산 받고 갖신 신고 부채 만들고 상자 만들고 화상 그리고
쌀ㆍ곡식ㆍ밀ㆍ보리ㆍ콩ㆍ과실 따위를 저축하거나,
국왕ㆍ왕자ㆍ대신이나 여인들을 가까이하거나 소리를 높여 웃거나 잠잠하거나,
법에 대하여 의심하거나,
잘하고 못하고 좋고 나쁘고 선하고 악하고 좋은 신 좋은 옷을 부질없이 이야기하거나,
가지가지 부정한 물건을 시주들의 앞에서 칭찬하거나,
술집ㆍ기생집ㆍ놀음판 따위의 부정한 곳에 출입하는 사람은
비구들 중에 섞이지 못하게 하였으니,
이런 이는 마땅히 비구를 그만두고 속세로 돌아가서
국민의 구실을 극진히 할 것이니,
마치 돌피와 가라지를 뽑아버리듯 하라’ 하였으면,
이런 경과 율을 제정한 것은 모두 부처님의 말이니라.
마군의 말을 따르는 이는 마군의 권속이요,
부처님의 말을 따르는 이는 보살이니라.
만일 말하되,
보살이 천신에게 공양하기 위하여 천신의 사당에 들어갔으니 그 천신은 범천ㆍ대자재천ㆍ위타천ㆍ가전연천이라.
들어간 까닭은 모든 하늘들을 조복하기 위함이니,
그렇지 않다고 말하는 것은 옳지 않다 하거나,
만일 말하기를 보살이 외도들의 잘못된 언론에 들어가서 그의 위의와 문장과 기예(技藝)를 알지 못하여 하인들의 투쟁을 화합하지 못하며 남녀ㆍ국왕ㆍ대신의 공경을 받지 못한다 하거나,
또 말하기를 여러 가지 약을 화합할 줄을 모르나니,
모르는 까닭으로 여래라 하거니와,
만일 안다면 나쁜 소견을 가진 무리라 하거나,
또 말하기를 여래는 원수나 친한 이에게 마음이 평등하여서,
칼로 몸을 베거나 향으로 바르거나 그런 두 사람에게 이익하고 해롭다는 마음을 내지 아니하고 중도에 머물러 있으므로 여래라고 일컫는다 하면,
이런 경과 율은 마군의 말인 줄을 알 것이며,
만일 말하기를 보살이 일부러 천신의 사당에 들어갔고,
외도의 법에서 출가하여 도를 닦으면서 그의 위의와 예절을 알기도 하고 모든 문장과 기예를 이해도 하며,
글방과 재주를 배우는 곳에 일부러 들어가서 하인들의 투쟁을 잘 화합하며,
여러 대중과 동남ㆍ동녀와 후궁ㆍ후비와 백성ㆍ장자ㆍ바라문ㆍ국왕ㆍ대신과 빈궁한 사람들 중에 가장 높으시며
또 그들의 공경을 받아서 이러한 일들을 나타내기도 하며,
비록 여러 가지 소견 속에 있더라도 애착하는 마음을 내지 아니함이 연꽃에 티끌이 묻지 않는 듯하며,
중생들을 제도하기 위하여서 이런 방편을 행하여 세상 법을 따른다고 말하면,
이러한 경과 율은 여래의 말씀인 줄을 알아야 하나니,
마군의 말을 따르는 이는 마군의 권속이요,
부처님의 말씀을 따르는 이는 대보살이니라.
만일 말하기를,
여래께서 나에게 경과 율은 해설할 적에,
나쁜 법 중에서 가볍고 무거운 죄와 투란차(偸蘭遮)의 성질이 중대한 것은
우리의 율문에서 하지 못하게 하였으며,
내가 오래전부터 그런 법을 익혀 왔는데,
너희들이 믿지 않거니와,
내가 어찌 우리 율을 버리고 너희의 율을 따르겠느냐.
너희의 율은 마군이 말한 것이고
우리의 경과 율은 부처님이 제정한 것이다.
여래께서 먼저 아홉 가지 법인(法印)을 말하고
그 아홉 가지 인으로 우리의 경과 율을 인가하였으며,
당초부터 방등경전이라고는 한 구절 한 글자도 듣지 못하였으며,
여래가 말씀한 한량없는 경과 율에 방등경이 어디 있느냐.
그런 중에서 열 가지 경이란 이름이 있다는 말을 듣지 못하였고,
만일 있다면 그것은 조달(調達)이 지었을 것이며,
조달은 나쁜 사람으로 선한 법을 없애려고 방등경을 지은 것이니,
우리는 믿을 수 없으며,
그런 경전은 마군의 말이니 왜냐 하면 불법을 파괴하고 시비하려는 것이므로
그런 말이 너희의 경에만 있고 우리의 경에는 없으며,
우리의 경과 율에는 여래께서 말씀하기를
‘내가 열반한 후 나쁜 세상에 반드시 부정한 경과 율이 있을 것이니,
소위 대승 방등경전이며,
오는 세상에는 이런 나쁜 비구가 있으리라’고 말하였다.
나는 또 말하기를 아홉 가지 경전보다 뛰어난 방등경전이 있으니
어떤 사람이나 그 뜻을 아는 이가 있으면
이 사람은 경과 율을 바르게 아는 이로서
온갖 부정한 것을 멀리 여의고 미묘하고 청정하기가 보름달 같으리라.
만일 말하기를,
여래가 비록 낱낱 경과 율에서 이치를 연설하기를
항하의 모래와 같다 하더라도 우리의 율에는 없으니 없는 줄을 알아야 하고,
만일 있다면 어째서 여래께서 우리의 율에서는 말하지 아니하였으랴.
그래서 나는 믿을 수 없노라 하면
그 사람은 죄를 얻을 것이며,
그 사람이 또 말하기를 ‘이런 경과 율을 내가 받아 지닐 것이니,
그 이유는 나를 위하여 욕심을 적게 하고 만족함을 알게 하였으며
번뇌를 끊고 지혜와 열반의 좋은 법의 인연을 지은 까닭이라’ 하리니,
이렇게 말하는 이는 나의 제자가 아니요,
만일 여래가 중생을 제도하려고 방등경을 말하였다 하면,
이런 사람은 진정한 나의 제자려니와,
방등경을 배우지 않는 이는
나의 제자가 아니며 불법을 위하여 출가한 것이 아니고,
잘못된 소견을 가진 외도들의 제자니라.
이러한 경과 율은 부처님이 말한 것이요,
이렇지 아니한 것은 마군의 말이니,
마군의 말을 따르는 이는 마군의 권속이요,
부처님의 말을 따르는 이는 곧 보살이니라.
또 선남자야,
만일 말하기를,
‘여래는 한량없는 공덕으로 성취한 바가 아니므로 무상하고 변역하는 것이며,
공한 법을 얻어서 내가 없다고 하고 세상을 따르지 않는다’ 하면 이런 경과 율은 마군이 말한 것이요,
만일,
여래의 정각은 헤아릴 수 없으며 한량없는 아승기 공덕으로 성취하였으므로 항상 머물고 변역하지 않는다고 말하면 이런 경과 율은 부처님이 말한 것이니,
마군의 말을 따르는 이는 마군의 권속이요 부처님의 말을 따르는 이는 보살이니라.
또 만일 말하기를,
어떤 비구가 바라이(波羅夷) 죄를 범하지 않았는데,
뭇 사람이 모두 이르되 바라이 죄를 범하여 다라나무를 끊은 것이 같다고 하더라도,
이 비구는 실상 범한 것이 아니니라.
왜냐 하면 내가 항상 말하기를 4바라이에서 한 가지만 범하여도 쪼갠 돌을 다시 붙일 수 없음과 같다고 하였거니와,
만일 남보다 지나가는 법을 얻었노라고 스스로 말하면 그것은 바라이를 범한 것이니,
그 이유는 실지로는 얻은 것이 없으면서 겉으로 얻은 듯이 꾸미는 것이므로 이런 사람은 사람 되는 법을 잃은 것이어서 바라이라 하느니라.
만일 어떤 비구가 욕심이 적고 만족함을 알며 깨끗이 계행을 가지면서 고요한 곳[阿練若]에 있는 것을 임금이나 대신이 보고서 이 비구가 아라한과를 얻은 줄 생각하고 앞에 나아가 찬탄하고 공경하고 예배하면서 말하기를,
‘이 스님은 이 몸을 버리고는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으리라’ 하거든,
비구가 듣고 임금께 말하기를,
‘나는 참으로 사문의 도과(道果)를 얻지 못하였으니 대왕은 나에게 도과를 얻었다고 말하지 마십시오.
바라건대 대왕은 나에게 만족함을 모르는 법을 말하지 마소서.
만족함을 모르는 사람은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었다 하더라도 잠자코 듣거니와,
내가 이제 잠자코 듣는다면 부처님들의 꾸중을 받게 되나이다.
만족함을 아는 행실은 부처님이 칭찬하는 것이오매 나는 몸이 맞도록 즐거운 마음으로 만족함을 아는 행을 닦으려 하나이다.
또 만족함을 안다는 것은 도과를 얻지 못한 줄을 스스로 아는 것이니,
대왕께서 나더러 도과를 얻었다 하더라도 내가 그대로 받지 아니하여야 만족함을 아는 것입니다’ 하였다.
임금이 대답하기를,
‘스님은 참으로 아라한과를 얻어서 부처님과 다름이 없다’ 하면서 널리 선전하여서,
나라 안팎의 사람들과 중궁의 후비들로 하여금 모두 사문과를 얻은 줄 알게 하였으므로,
들은 이들이 공경하고 믿는 마음을 내어 공양하고 존중하였다 하면 이 비구는 참으로 범행이 청정한 사람이니,
이런 인연으로써 여러 사람들이 큰 복덕을 얻게 되었으므로 이 비구는 바라이 죄를 범한 것이 아니니라.
왜냐 하면 사람들이 스스로 환희한 마음을 내어 찬탄하고 공경한 것이니 이 비구가 무슨 죄가 있겠느냐.
이 사람이 죄를 얻으리라고 말한다면 이런 것은 마군의 말이니라.
또 어떤 비구가 부처님의 비밀하고 깊은 경전을 말하면서,
모든 중생에게 모두 불성이 있으며,
이 성품이 있으므로 한량없는 억천의 번뇌를 끊고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이루는 것이니 일천제(一闡提)는 제할 것이라 하였다.
임금이나 대신들이 말하기를,
‘스님은 부처님이 될 수 있습니까,
없습니까?
불성도 있습니까?’라고 하자,
비구가 대답하되 ‘나의 몸에는 불성은 결정코 있지만 부처가 되고 안 되는 것은 알지 못합니다’라고 하였다.
왕이 말하되 ‘스님이 만일 일천제가 아니라면 부처가 될 것은 의심이 없으리라’고 하자,
비구가 말하되 ‘진실로 왕의 말씀과 같습니다’ 하였다.
이 사람이 결정코 불성이 있다고 말하였으나,
바라이 죄를 범한 것은 아니니라.
또 어떤 비구가 출가할 적에 생각하기를 ‘내가 결정코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이루리라’ 하였다면,
이 사람이 비록 위없는 도과는 이루지 못하였더라도 복을 얻은 것은 한량없고 끝이 없어 헤아릴 수 없으리라.
만일 어떤 사람이 말하기를 이 사람이 바라이 죄를 범하였다 하면 모든 비구들도 모두 범하였을 것이니,
왜냐 하면 내가 옛날 80억 겁 전에 모든 부정한 물건을 항상 여의고 욕심이 적고 만족함을 알고 위의가 성취되어 여래의 위없는 법장을 닦으면서 이 몸에 불성이 있는 줄을 알았으므로,
지금 내가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이루어 부처라 하며 대자비가 있다 하느니라.
이와 같은 경과 율은 부처님의 말씀이니,
이러한 것을 따르지 못하는 이는 마군의 권속이요,
따르는 이가 있으면 곧 대보살이니라.
또 말하기를 4바라이ㆍ13승잔(僧殘)ㆍ2부정법(不定法)ㆍ30사타(捨墮)ㆍ91타(墮)ㆍ4참회법(懺悔法)ㆍ중다학법(衆多學法)ㆍ7멸쟁(滅諍) 등도 없고,
투란차와 다섯 역적죄와 일천제도 없거늘,
만일 비구가 이런 것을 범하고 지옥에 떨어진다면 외도들은 천상에 날 것이니,
왜냐 하면 외도들은 범할 계율이 없는 까닭이니라.
이것은 여래가 일부러 사람들을 두렵게 하기 위하여 이런 계율을 말한 것이라 하며,
또 부처님 말씀에 비구들이 음행을 하려면 법복을 벗고 세속 옷을 입은 뒤에 음행을 하라고 하였으니,
음행할 인연을 생각하더라도 나의 허물이 아니며,
여래가 세상에 계실 때에도 비구가 음행을 하고 해탈을 얻은 이가 있으며,
혹은 목숨이 마친 뒤에 천상에 태어나기도 하였으니,
옛날이나 지금에 있는 일이라,
나만이 하는 일이 아니며,
혹은 네 가지 중대한 죄를 범하고 혹은 다섯 가지 중대한 계를 범하며 혹은 온갖 부정한 일을 행하고도 진정한 해탈을 얻었으며,
여래의 말씀에 돌길라(突吉羅) 죄를 범하면 도리천의 세월로 8백만 년을 지옥에 떨어진다 하였으나 역시 여래께서 사람을 공포케 하는 말이며,
또 바라이로부터 돌길라까지의 가지가지 죄가 가볍고 중대한 차별이 없건만,
율사들이 부질없이 이런 말을 지어내어 부처님이 제정하였다고 하지만 필경에는 부처님의 말씀이 아님을 알 것이라 하면,
이런 말은 마군의 경과 율이니라.
또 말하기를 모든 계율에서 작은 계율을 범하나 내지 하잘것없는 것이라도 괴로운 과보를 한없이 받을 것이니 이렇게 알고 내 몸을 방비하되 거북이 여섯 군데 감추듯 하라 하였거늘,
어떤 율사가 ‘무슨 계를 범하더라도 아무 죄보도 없다’고 하면,
이런 사람은 가까이하지 말 것이니라.
부처님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셨다.
한 법만을 그저 지나도
이를 망어(妄語)라고 이름하나니
뒷세상 보지 않으면
짓지 않을 죄가 없으리.
그러므로 이런 사람은 가까이하지 말아야 하느니라.
나의 부처님이 이렇게 청정하거늘
하물며 투란차 죄를 범하거나 승잔 죄ㆍ바라이 죄를 범한 것이 어찌 죄가 아니랴.
그러기에 이런 법들을 매우 깊이 방비하고 수호할 것이니,
만일 수호하지 않는다면 무엇으로 계율이라 하겠는가.
나의 경전 중에도 말하기를 4바라이나 내지 미세한 돌길라를 범하더라도 마땅히 엄하게 다스리라 하였나니,
중생이 계율을 수호하여 지니지 않고서야 어떻게 불성을 보겠는가.
모든 중생에게 비록 불성이 있다 하지만 계행을 잘 지니고 볼 것이며,
불성을 보고서야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이루느니라.
아홉 가지 경에는 방등경이 없으므로 불성이 있다고 말하지 않았거니와,
경에는 말하지 않았더라도 참말 있는 줄을 알아야 하리니,
이런 말을 하는 이는 참으로 나의 제자니라.”
“세존이시여,
앞에서 말씀한 대로 모든 중생에게는 불성이 있다는 말을
아홉 가지 경전에서는 듣지 못하였거늘 만일 있다고 말하오면
어찌하여 바라이 죄를 범함이 아닙니까?”
“선남자야,
그대의 말과 같아서 실로 바라이 죄를 범함이 아니니라.
선남자야,
마치 어떤 이가 말하기를
바다에 일곱 가지 보배만 있고 여덟 가지는 없다 하여도 이 사람은 죄가 없듯이,
아홉 가지 경전 가운데 불성이 없다고 하여도 죄가 없나니,
왜냐 하면 나는 대승의 지혜 바다에 불성이 있다고 말한 것이고,
2승 사람들은 알지 못하는 것이므로 없다고 하여도 죄가 없으며,
이런 경지는 부처님들이 아는 것이고
성문이나 연각으로는 미칠 바가 아니니라.
선남자야,
어떤 사람이 여래의 깊고 비밀한 법장을 듣지 못하였으면
어떻게 불성이 있는 줄을 알겠는가.
어떤 것이 비밀한 법장인가.
방등 대승경전이니라.
선남자야,
외도들은 혹은 내가 항상하다 말하고 혹은 내가 아주 없다 말하거니와,
여래는 그렇지 아니하여
내가 있다고도 말하고 내가 없다고도 말하나니
이것을 중도라 하느니라.
만일 부처님이 중도를 말할 적에
온갖 중생이 모두 불성이 있건만
번뇌가 가리워서 알지도 보지도 못하나니,
그러므로 부지런히 방편을 닦아서 번뇌를 끊어야 한다고 하였다 하면
이런 말을 하는 사람은 4바라이를 범함이 아니고,
이런 말을 하지 않는 이가 바라이 죄를 범한 것이며,
만일 내가 이제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성취하였으니 그 이유는 불성이 있는 까닭이다.
불성이 있는 이는 반드시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이루는 것이니,
이 인연으로 내가 이제 보리를 성취하였노라 하면 이 사람은 바라이 죄를 범하였다 하리라.
왜냐 하면 비록 불성이 있더라도 좋은 방편을 닦지 못한 연고로 보지 못하는 것이며,
보지 못한 연고로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이루지 못한 것이니,
이러므로 부처님 법이 깊고 깊어서 헤아릴 수 없다는 것이니라.”
가섭보살이 부처님께 여쭈었다.
“세존이시여,
어떤 임금이 묻기를 ‘어떤 것이 비구가 과인법(過人法)에 떨어짐인가?’라고 하였습니다.”
부처님이 말씀하셨다.
“가섭이여,
어떤 비구가 이익과 음식을 위하여
모든 아첨과 간사와 거짓말을 꾸미되
‘어찌하면 세상 사람들로 하여금
내가 참말 비구인 줄을 알게 하며
그 인연으로 내가 많은 이익과 큰 명예를 얻게 되랴’ 하면,
이 비구는 매우 어리석은 연고로 밤낮으로 생각하기를
‘내가 실로 네 가지 사문의 과를 얻지 못하였지만,
어떻게 하면 세상 사람들로 하여금 내가 도과를 얻은 줄로 알게 하며,
어떻게 하면 모든 우바새ㆍ우바이들이 나를 보고 이 사람의 복덕은 참말로 성인이라고 하게 하리요’ 하고는
법은 구하지 않고 이익만 구하면서
그때부터 다닐 때마다 점잖을 빼고 가사와 발우를 가지며 위의를 차리고
참말 아라한처럼 고요한 곳에 혼자 앉아 있어
사람들이 보고는 이 비구는 가장 거룩한 이며
고행을 부지런히 하여 적멸(寂滅)한 법을 닦는다고 칭찬하도록 하여,
이런 인연으로 나의 제자들이 많아지고,
사람들도 의복ㆍ음식ㆍ포단ㆍ탕약 등으로 공양할 것이며,
여러 여인들도 나를 존중하고 애경하리라 생각하나니,
이런 일을 하는 비구ㆍ비구니는 과인법(過人法)에 떨어지느니라.
또 어떤 비구가 위없는 바른 법을 세우기 위하여
고요한 곳에 머물러 있으면서
아라한이 아니지만,
사람들이 보고는 이 스님은
‘아라한이다,
좋은 비구다,
착한 비구다,
고요한 비구다’라고 생각하게 하여,
많은 사람들이 신심을 내게 되면,
이 인연으로 한량없는 비구들을 권속으로 삼게 될 것이며,
이 일로 말미암아 파계한 비구와 우바새들로 하여금 계행을 가지게 하면,
그 인연으로 바른 법을 세우고
여래의 위없이 훌륭한 이치를 빛낼 것이며
방등의 대승법으로 교화함을 나타내고
많은 중생들을 해탈케 하여,
여래가 말씀한 경과 율에 대하여 가볍고 무거운 뜻을 이해하게 하리라 하며,
다시 말하기를
‘나에게도 불성이 있고,
여래비장(如來秘藏)이라는 경이 있는데
이 경에서 마땅히 부처님 도를 이루어 한량없는 번뇌의 결박을 끊으리라’ 하면서,
한량없는 우바새들을 위하여
‘너희들도 모두 불성이 있으니
나와 네가 함께 여래의 경지에 머물러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이루어
한량없는 번뇌의 결박을 끊으리라’ 한다면,
이 사람은 과인법(過人法)에 떨어진다고 이름하지 않고
보살이라 이름하느니라.
또 돌길라 죄를 범하면 도리천의 세월로
8백만 년 동안에 지옥에 떨어져 모든 죄보를 받는다 하였거늘,
하물며 일부러 투란차 죄를 범함이랴.
대승법 중에 투란차 죄를 범한 비구가 있으면 가까이하지 말아야 하나니,
어떤 것이 대승경 중의 투란차 죄인가.
만일 장자가 절을 짓고 화만으로 부처님께 공양할 적에
어떤 비구가 꽃을 꿴 실을 보고 묻지 않고 가지면 투란차 죄라 하나니,
알거나 모르거나 범죄가 되는 것이며,
만일 탐내는 마음으로 부처님 탑을 파괴하면 투란차 죄를 범하는 것이니
이런 사람은 친근하지 말아야 하며,
국왕이나 대신이 탑이 낡은 것을 보고 중수하며 사리에 공양할 적에
탑 속에서 보배를 얻어 비구에게 맡긴 것을 비구가 제 마음대로 사용하면
이런 비구는 부정이라 하며,
많은 투쟁을 일으키게 되리니,
선한 우바새들은 그 비구에게 친근하거나 공경하거나 공양하지 말아야 하느니라.
또 이런 비구는 근(根)이 없다, 근이 둘이다, 근이 일정치 않다 하나니,
근이 일정치 않다는 것은 여자를 탐하려는 때는 몸이 여자가 되고, 남자를 탐하려는 때는 몸이 남자가 되는 것이매,
이런 비구는 나쁜 근[惡根]이라 하여
남자라 하지도 않고 여자라 하지도 않으며,
출가라고도 않고 재가(在家)라고도 않나니,
이런 비구는 친근하거나 공양하거나 공경하지 말아야 하느니라.
부처님 법에는
사문의 법이 자비한 마음으로 중생들을 어루만져 기르는 것이며,
내지 개미 따위라도 두려움 없는 보시를 하는 것이 사문의 법이요,
술을 마시거나 냄새를 맡는 것까지 여의는 것이 사문의 법이며
거짓말을 하지 말며
꿈에서도 거짓말을 생각하지 않는 것이 사문의 법이며,
애욕의 마음을 내지 말고 꿈에서까지도 그렇게 하는 것이 사문의 법이니라.”
“선남자야,
만일 비구가 꿈에 음행을 하면 범계가 됩니까?”
“아니다.
음욕에 대하여 더럽다는 생각을 하고
잠깐이라도 깨끗하다는 생각을 내지 말아야 하며,
여인을 사랑하는 번뇌를 멀리 여읠 것이니,
만일 꿈에 음욕을 행하면 깨어서 뉘우칠 것이니라.
비구가 걸식하다가 공양을 받을 적에는
흉년에 아들의 고기를 먹는 생각을 하여야 하며
만일 음욕을 내었으면 빨리 버려야 하나니,
이런 법문은 부처님이 말한 경과 율이라,
마군의 말을 따르는 이는 마군의 권속이요,
부처님의 말을 따르는 이는 이름이 보살이니라.
만일 여래가 비구에게 한 다리를 항상 들고 있으며 잠자코 말하지 아니하며
못에 빠지며 불에 뛰어들며 높은 바위에서 떨어지며 험한 데를 피하지 아니하며
독약을 먹으며 밥을 썩히며 재나 먼지 위에 누우며 제 손발을 결박하고 중생을 살해하는 방법과 주문을 허락하였다 하며,
전다라들과 근이 없는 이,
근을 둘 가진 이,
근이 일정치 않은 이,
몸이 불구한 이들이 출가하여 수도하는 일을 여래가 허락하였다 하면 이는 마군의 말이며,
다섯 가지 우유와 유밀(油蜜)과 교사야(명주ㆍ비단)옷과 가죽신 따위를 여래가 먼저 허락하였고,
그 밖에 마하릉가(摩訶楞伽)를 입으며 모든 종자를 저축하며 풀이나 나무 따위도 목숨이 있다고 허락하였으며.
이런 말을 하고 열반에 들었다 하면 그런 말을 적은 경과 율은 마군의 말이니라.
나는 한 다리를 항상 들라고 허락하지 않았으며,
법을 위하여 가고 머물고 앉고 누움을 허락할 뿐이며,
독약을 먹고 밥을 끊고 다섯 가지 뜨거움으로 몸을 태우고
손발을 결박하고 중생을 살해하는 방법과 주문을 허락하지 않았으며
옥이나 상아로 가죽신을 단장하고 종자를 저축하고 초목도 목숨이 있고 마하릉가를 입으라고 허락하지 않았거늘,
만일 세존이 이런 말을 하였다고 하는 이는
외도의 권속이고 나의 제자가 아니니라.
나는 다만 다섯 가지 우유와 유밀 따위를 먹고 교사야옷을 입을 것을 허락하였을 뿐이요,
4대는 목숨이 없다고 말하였으니,
만일 경과 율에 이런 말을 적은 것은 부처님의 말이니,
부처님이 말한 것을 따르는 이는 나의 참 제자려니와
부처님의 말을 따르지 않는 이는 마군의 권속이며,
부처님의 경과 율을 따르는 이는 대보살인 줄을 알지니라.
선남자야,
마군의 말과 부처님의 말의 다른 것을 지금 그대에게 자세히 베풀어 말하였노라.”
“세존이시여,
제가 지금에야 마군의 말과 부처님의 말이 서로 다름을 알았으니
이것으로 부처님 법의 깊은 이치에 들어갈 수 있나이다.”
“그렇다. 선남자야,
그대가 이처럼 분명하게 분별하니,
매우 지혜롭다.”
10. 네 가지 진리[四諦品]
부처님께서 또 가섭보살에게 말씀하셨다.
“괴로운 것[苦]을 괴로움에 대한 성스러운 진리[苦聖諦]라 이름하지 않나니,
무슨 까닭이냐.
만일 괴로운 것을 괴로움에 대한 성스러운 진리라 한다면,
온갖 축생과 지옥 중생에게도 성스러운 진리가 있으리라.
왜냐 하면 알지 못하므로 법을 법이 아니라 보고,
법 아닌 것을 법이라고 보는 연고니,
이 사람은 나쁜 갈래[惡趣]에 떨어져 생사에 헤맬 것이며,
번뇌[結]가 많아져서 여러 가지 고뇌(苦惱) 받으려니와,
만일 여래가 항상 머물고 변하지 아니함을 알거나,
혹은 항상 머문다는 말을 들어 귀에 한번 지나가면 천상에 태어날 것이요,
뒤에 해탈을 얻을 때에 여래의 항상 머물고 변치 않는 이치를 증득할 것이며,
증득하고 말하기를 ‘내가 옛날에 이런 이치를 들었더니 이제 해탈을 얻어 증득하여 알았노라.
나는 당초에 이 이치를 몰라서 생사에 헤매면서 그지없이 돌아다녔더니,
오늘에야 참 지혜를 얻었노라’ 하면,
이렇게 아는 것은 참으로 괴로움을 닦는 것이어서 이익이 많으려니와,
만일 알지 못하면 아무리 부지런히 닦아도 이익이 없으리니,
이것은 괴로움을 아는 것이며 괴로움에 대한 성스러운 진리라 하겠지만,
만일 이렇게 닦지 못하면 괴로움이라고는 하려니와
괴로움에 대한 성스러운 진리는 아니니라.
괴로움의 발생에 대한 진리[苦集諦]란 것은
참 법 가운데서 참 지혜를 내지 못하고
종과 하인 따위의 부정한 것을 받으며,
잘못된 법을 바른 법이라 하고 바른 법을 끊어버리어 오래 머물지 못하게 하나니,
이런 인연으로 법의 성품을 알지 못하고,
알지 못하므로 생사에 헤매면서 많은 고통을 받고,
천상에 나거나 바른 해탈을 얻지 못하는 것이요,
만일 깊은 지혜가 있어 바른 법을 무너뜨리지 않으면
그 인연으로 천상에도 나고 바른 해탈을 얻으려니와,
만일 괴로움의 발생에 대한 성스러운 진리를 알지 못하여,
바른 법이 항상 머무는 것이 아니고 모두 없어지는 법이라 하면,
이 인연으로 한량없는 세월에 생사에 헤매면서 모든 고통을 받나니,
만일 법이 항상 머물고 변하지 않는 줄을 알면 이것은 괴로움의 발생을 아는 것이며,
괴로움의 발생에 대한 성스러운 진리라 하련만,
만일 이와 같이 닦지 못하면 괴로움의 발생이라고는 하려니와,
괴로움의 발생에 대한 성스러운 진리는 아니니라.
괴로움의 소멸에 이르는 진리[苦滅諦]란 것은
설사 공한 법을 많이 닦아도 그것은 선하지 못한 것이니,
왜냐 하면 온갖 법을 없애는 연고며
여래의 참 법장을 무너뜨리는 연고니라.
이렇게 닦는 것은 공한 법을 닦는 것이니라.
괴로움의 소멸을 닦는 것은
모든 외도들과는 어기는 것이거늘,
공한 법을 닦는 것으로 괴로움의 소멸에 대한 진리라 한다면,
모든 외도들은 공한 법을 닦으니
역시 괴로움의 소멸에 대한 진리가 있다고 하리라.
만일 말하기를 여래장(如來藏)이 있음을 보지 못하더라도
온갖 번뇌를 없애 버리면 들어갈 수가 있다 하면,
잠깐 동안 이 마음을 낸 인연으로 모든 법에 자재함을 얻으려니와,
만일 여래의 비밀한 법장은
내가 없고 공적하다고 닦는 이가 있으면,
이런 사람은 한량없는 세월에 생사 중에 헤매면서 고통을 받을 것이요,
그렇게 닦지 않는 이는 번뇌가 있더라도 빨리 멸할 수 있으리라.
왜냐 하면 여래의 비밀한 법장을 아는 까닭이니,
이것을 괴로움의 소멸에 대한 성스러운 진리라 이름할 것이며,
이렇게 괴로움의 소멸을 닦아 익히는 이는 나의 제자라 하려니와,
이렇게 닦지 못하면 공한 법을 닦는다 할지언정,
괴로움의 소멸에 대한 성스러운 진리는 아니니라.
괴로움의 소멸에 이르는 길에 대한 성스러운 진리[道聖諦]라 함은
불보ㆍ법보ㆍ승보와 바른 해탈을 말함이니,
어떤 중생이 뒤바뀐 마음으로 삼보와 바른 해탈은 없고,
생사에 헤매는 것이 환술과 같다고 말하며 그런 소견을 익히면,
그 인연으로 삼계에 헤매면서 오래오래 고통을 받으리라.
만일 바른 마음을 내어 부처님이 항상 머물러 변치 아니하며,
법보ㆍ승보와 바른 해탈도 그러함을 보면,
이 한 생각으로 말미암아 한량없는 세월에 자재한 과보를 마음대로 얻으리라.
왜냐 하면 내가 지난 옛적에 네 가지 뒤바뀐 마음으로
법 아닌 것을 법이라 여기고,
한량없는 나쁜 업의 과보를 받았거니와,
지금 그런 소견을 없애었으므로 부처님의 정각을 이루었으니,
이것을 괴로움의 소멸에 이르는 길에 대한 진리라 하느니라.
진실한 소견으로 네 가지 성스러운 진리를 닦는 것을 4성제(聖諦)라 이름하느니라.”
가섭보살이 부처님께 아뢰었다.
“세존이시여,
지금에야 깊고 깊은 성인의 네 가지 성스러운 진리를 닦을 줄을 알았나이다.”
11. 네 가지 뒤바뀜[四倒品]
부처님께서 가섭보살에게 말씀하셨다.
“선남자야,
네 가지 뒤바뀜이라 함은
괴로움이 아니라는 것은 여래요,
괴롭다는 생각을 내는 것은
여래가 무상하고 변이(變異)한다는 것이니라.
여래가 무상하다고 말함은 큰 죄와 괴로움이요,
여래가 이 괴로운 몸을 버리고 열반에 드는 것이
마치 나무가 다하면 불이 꺼지는 것과 같다고 하면,
그것은 괴로움이 아닌데
괴롭다는 생각을 내는 것이므로 뒤바뀜이라 하느니라.
이렇게 말하면 내가 즐거움을 받는다 하거니와,
여래의 무상함이 괴로움이니,
만일 괴로움이라면 어떻게 즐거움을 내겠는가.
괴로운데 즐겁다는 생각을 냄으로써 뒤바뀜이라 하는 것이며,
즐거운데 괴롭다는 생각을 내는 것도 뒤바뀜이라 하나니,
즐겁다는 것은 여래요,
괴롭다는 것은 여래가 무상하다는 것이니라.
세간 사람도 내가 있다 말하고
부처님 법에서도 내가 있다 말하거니와,
세상 사람은 비록 내가 있다 말하나 불성은 없다는 것이니
이것은 내가 없는데 나라는 생각을 내는 것이므로 뒤바뀜이라 하느니라.
부처님 법에서 내가 없다고 말하니,
이것은 나라는 데서 내가 없다는 생각을 내는 것이니라.
깨끗하다 함은 여래는 항상 머무는 것이어서
잡식하는 몸이 아니고 번뇌 있는 몸이 아니고,
육신의 몸이 아니고 힘줄과 뼈로 얽힌 몸이 아니거늘,
부정한데 깨끗하다 생각함을 뒤바뀌었다 함은
만일 나의 몸에는 한 가지도 부정한 것이 없나니
부정한 것이 없으므로 결정코 닦으리라.
청정한 곳에 들어갈 수 있거늘,
여래는 부정관(不淨觀)을 하셨으니,
이 말은 허망한 말이라고 말하면 이것을 뒤바뀌었다 하나니,
이것은 넷째 뒤바뀜이니라.”
“세존이시여,
저는 오늘부터 바른 소견을 얻었사오니,
세존이시여,
이전의 우리는 모두 잘못된 소견을 가진 사람이라 이름할 것입니다.”
○ [pt op tr]
○ 음악공양, 나무불, 나무법, 나무승 mus0fl--Karpatt - L'etiquette.lrc
● 무상, 고, 무아 등의 망상과 상락아정
불교의 법인설에 무상, 고, 무아, 열반적정, 공과 같은 가르침이 있다.
이 내용을 통해서 그것이 부처님 말씀인가를 판정한다.
그런데 나중에는 『대반열반경』 등에서 무상, 고, 무아 등과는 정반대되는 상락아정을 설한다.
그래서 일반적으로 혼동을 일으킨다.
그리고 심지어 이것은 부처님 말씀이 아니라고도 여기기 쉽다.
그래서 이 부분에 대해 이해를 잘 해야 한다.
이는 알고보면 망집 때문에 생기는 현상이다.
그 망집을 해결해주기 위해서 부처님이 무상, 고, 무아 등으로 일정한 내용을 위처럼 설한다.
그런데 이런 취지로 이처럼 설한 내용을 다시 망집으로 대하면 위와 같은 상태가 된다.
그래서 이 내용을 잘 이해해야 한다.
처음에는 일체가 무상하다. 일체가 고다. 일체가 무아다. 이런 내용부터 이해하기 힘들다.
그런데 이제 이 내용을 이해하면 다시 혼동을 일으킨다.
일체에 여래 부처님은 포함되지 않는가.
만일 포함되지 않는다면 처음부터 왜 일체가 무상하다고 설했는가.
그런데 포함된다면 왜 여래는 무상한 존재가 아니라고 하는가.
이런 식으로 오해를 불러 일으킨다.
이것이 망집현상에 바탕한 이해다.
그래서 이 문제를 처음부터 잘 살펴야 한다.
처음 이 논의에서 무엇을 A 라고 한다고 하자.
그것은 여래일 수도 있고 영희나 철수일수도 있다.
그리고 무정물인 물이나 바위일수도 있다.
그런 가운데 앞 내용을 살핀다.
그런데 이렇게 살피는 상태 자체가 망집상태다.
그 망집상태에서는 큰 병이 있다.
그런 것이 있다고 여기면서 그것을 문제삼는 상황이다.
그래서 자신이 살피는 것의 생멸도 그처럼 있다고 여긴다.
그리고 그런 망집에 바탕해 업을 행한다.
그렇게 되면 그로 인해 극심한 생사고통을 받는 상태에 처하게 된다.
그리고 생사현실의 문제는 바로 이 부분이다.
만일 그렇게 망집을 일으켜 업을 행해도 그런 상태에 처하지 않는다고 하자.
그렇다면 문제되지 않는다.
그런데 그렇지 않다.
그래서 이 생사고통을 해결하려면 그 상황에서 그것을 제거하던가.
아니면 먼저 앞 단계에서 그 근본원인을 제거해야 한다.
그런데 앞 단게에서 원인을 제거하는 것이 훨씬 낫다.
낭떨어지에서 떨어진 다음 다리나 허리를 수술해 고통을 없앨 수도 있다.
그런데 처음 그런 곳을 향해 걸어가지 않는 것이 훨씬 낫다.
그리고 그것보다 더 나은 것은 그렇게 업을 행하게 하는 망집을 없애는 것이 훨씬 낫다.
그런데 현실에서는 이 자체를 대단히 힘들게 여긴다.
그래서 처음 자신이 대하는 것이 왜 그런 것이 아닌가부터 잘 이해하지 못한다.
처음 일체가 무상하다. 고통이다. 무아다. 부정하다. 이런 내용을 제시하는 것은
생사고통을 제거하기 위함이다.
즉 현실에서 망상분별을 일으킨다.
이 상태에서 망상분별을 제거하는 것이 근본방책이다.
그런데 힘들다.
그렇다면 그 상태에서 일단 각 중생이 집착을 일으키지 않도록 하는 것이 차선책이다.
그래서 그가 있다고 여기는 것이 무상함을 강조하게 된다. => 그러니 그렇게 집착을 가질 필요가 없다.
또 마찬가지로 그것이 결국 고통으로 귀착됨을 강조하게 된다. => 그러니 그렇게 집착을 가질 필요가 없다.
또 알고보면 그것은 참된 진짜의 내용이 아님을 강조하게 된다. => 그러니 그렇게 집착을 가질 필요가 없다.
또 알고보면 그것은 깨끗한 것이 아니고 더러운 것임을 강조하게 된다. => 그러니 그렇게 집착을 가질 필요가 없다.
이런 내용이다.
그래서 이 내용을 통해 집착을 제거하면 이후 부작용이 제거된다.
그래서 근본적인 망상분별의 제거에 이르지 못해도 고통에서 일단 벗어날 수 있다.
그런데 이런 상태에서 좀 더 근본적으로 망상분별을 제거하지 못하면
위와 같은 가르침으로 오히려 또 다른 망집을 일으키게 된다.
그래서 이것도 문제가 된다.
병을 낫게 하려고 일단 약이나 진통제를 처방할 수 있다.
그런데 그 약이나 진통제가 근본적인 치료를 못할 수가 있다.
그런 경우 그 약이나 진통제를 장기적으로 복용하면 오히려 그 약으로 인해 부작용이 생길 수 있다.
그래서 처음 급한 문제를 해결한 상태에서는
다시 근본 치유를 하도록 노력해야 한다.
위 문제는 무슨 문제인가를 이해하려면
처음 그런 가르침이 시설된 사정부터 이해해야 한다.
망집 상태에 빠진 상대가 아무리 말을 해도 잘 이해하지 못한다.
그래서 그 상태에 일단 눈높이를 맞춘다.
그리고 우선 당장 번뇌 - 집착 => 업 => 생사고통 이 과정의 전개를 중지시키게 된다.
즉 그 상태에서 상대가 이해할 수 있는 형태로 내용을 제시해 위 단계의 전개를 중지시키는 것이다.
그래서 일단 그런 업이 중지된다고 하자.
그리고 과거의 업의 장애도 마찬가지로 수행을 통해 제거해야 한다.
그렇게 되면 일단 생사고통을 극심하게 받는 상태에서는 벗어나게 된다.
그런데 처음의 망집의 근본 치유가 되지 않으면 곤란하다.
그래서 이 상태에서 다시 근본 치유를 꾀하게 된다.
그것은 처음 상대가 이해하기 힘들어 했던 내용을 놓고
다시 깊게 관해서 그 사정을 이해시키는 노력이 된다.
이 문제는 결국 여래가 무엇인가하는 내용과 관련된다.
여래는 본래 생사현실에 생멸을 얻을 수 없다고 가르치는 분이다.
그런데 앞의 내용을 취한 경우는 여래의 열반을 맞이하면 달리 생각한다.
여래도 그렇게 죽는다. 그래서 없어진다.
이런 식으로 생각한다.
그것은 근본 망집이 제거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 문제를 처음부터 잘 살펴야 한다.
그것은 처음 꽃이나 바위가 무엇인가하는 주제도 마찬가지다.
앞에 화분이 있고 장미꽃이 피어 있다고 하자.
이 상황에서 장미꽃이 어디 있는가.
또 장미꽃은 무엇인가라고 묻든다고 하자.
현실에서 거의 99% 가 이 상황에서 자신의 눈으로 보는 화분의 꽃을 손가락으로 가리킨다.
이것이 망집 증상이다.
그리고 그렇게 망집을 일으킨 바탕에서는
부처님은 무엇인가 어디 있는가 라고 물을 때도 마찬가지로 반응한다.
또 자신은 무엇인가 자신은 무엇을 자신이라고 하는가라고 물을 때도 마찬가지로 반응한다.
일체가 무상하다. 이런 내용을 제시받을 때도 마찬가지다.
당신이 이해하는 일체는 무엇인가.
그 가운데 하나만이라도 가리켜보라고 요구받으면 앞과 똑같이 반응한다.
이것이 문제다.
그래서 이 내용을 이해하려면 이 현실 단면하나를 붙잡고
위 문제를 잘 살펴야 한다.
여래가 무엇인가.
또는 현실에서 스스로 생각하는 자신의 정체는 무엇인가.
이런 질문의 성격이 다 같다.
...
...
『금강반야바라밀경』 1권(K0013 v5, p.983c05-c06)
이런 구절이 있다.
이 내용이 여기에 해당한다.
그런데 현실에서는 대부분 위와 같이 임한다.
그래서 여래가 무엇인지 알지 못하고 보지도 못한다.
그런 상태에서 자신이 영희나 철수라고 평소 여기고 대하는 내용처럼
여래를 이해한다.
또 마찬가지로 자신의 정체도 그렇게 이해한다.
다음은 약간 이상한 질문일 수 있다.
그런데 스스로 자신이라고 여기는 부분을 손가락으로 가리켜보시오.
라고 요청한다고 하자.
그러면 자신이 가리키는 부분들이 있다.
이는 색, 수, 상, 행, 식의 일부거나 그 전부일 수 있다.
현실에서 일으킨 망집상태가 이와 같다.
그래서 그런 부분을 손가락으로 가리킨다고 하자.
그런 경우는 또 여래가 무엇인가 하는 문제도 그렇게 이해한다.
그래서 이 근본문제가 해결되지 않으면 곤란하다.
그런데 현실에서 이 문제 해결이 쉽지 않다.
그런 가운데 그 상태를 전제로 일단 급한 불을 끄기 위해서
방편시설이 제시된 사정이 있다.
일단은 극심한 고통을 받는 상태에서는 벗어나야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적어도 인천을 오가는 상태가 되어야 그 다음이 가능하다.
그리고 그런 상태에서
여래나 자신의 본 정체가 무언가를 살펴야 한다.
그런 경우는 처음 무상이다 또는 영원하다. 이런 식으로
제시하는 내용에 어떤 문제가 본래 있는가부터 잘 살펴야 한다.
처음 영희가 어디 있는가 하는 질문을 한다고 하자.
이 때 평소 행하듯 손가락으로 거리에 서 있는 영희를 가리키기 쉽다.
자신은 어디 있는가의 질문도 이와 성격이 같다.
그리고 여래는 어디 있는가.
이 질문도 성격이 같다.
이 모든 질문에 위처럼 망집에 바탕해 임하는 자세부터 제거해야 한다.
이것이 현실에서 엉터리 망상분별로 현실에서 상을 취하는 상황이다.
그리고 이 제거를 위해서
망집 상태에서 일으키는 유무 분별의 극단을 모두 벗어나야 한다.
또 그렇게 하기 위해서
위와 같은 내용이 제시되는 사정이 있다.
처음에는 무상, 고, 무아, 부정의 가르침으로
일단 급한 불을 끈다.
그런데 그렇게 방치하면 그로 인해 또 다른 부작용을 갖게 된다.
그래서 다시 상 락 아 정의 가르침을 베풀게 된다.
그런데 최종적으로 이를 통해 망집을 제거하는 데 이르러야 한다.
이런 취지다.
● 여래와 자신의 본 정체 확인 문제
앞에서 무상-상, 고-락, 무아-아, 부정-정을 오락가락하는 내용을 보았다.
그런데 이 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하려면
현실의 한 단면에서 대하는 현실 내용의 정체를 먼저 잘 확인해야 한다.
이 문제를 처음 이렇게 살펴보자.
현실에서 영희가 어디 있는가라고 묻는다고 하자.
그러면 철수가 자신이 눈으로 보는 가운데 일정부분을 손가락으로 가리킨다.
그리고 이렇게 말하게 된다.
저기 영희가 있습니다.
스스로 자신은 무엇인가라고 물을 때도 이와 사정이 같다.
그리고 부처님 열반 당시에 부처님은 어디 있는가라고 물을 때도 사정이 이와 같다.
이 상황은 성격이 같다.
망집을 일으킨 상태에서는 예외없이 위와 같이 손가락으로 일정부분을 가리킨다.
이 상황에 기본 문제가 들어 있다.
그래서 이 현실 한 단면을 붙잡고 문제를 살펴야 한다.
이 내용 이해를 위해서
책상 위에 사과를 하나 올려 놓는다.
그 상황에서 사과를 손으로 붙잡고
눈으로 사과를 본다.
그리고 사과를 두드리면 소리를 듣는다.
그리고 사과를 코로 냄새 맡는다.
그리고 사과를 입으로 맛본다.
그리고 사과를 만지면서 촉감을 느낀다.
이 상황에서 누군가 사과가 어디 있는가라고 묻는다고 하자.
이 때 자신이 붙잡은 사과를 가리키던지 내밀게 된다.
바로 이 상황이 앞 상황과 성격이 같다.
따라서 이 상황에서 사과의 정체를 잘 파악하면
같은 방식으로 문제되는 자신이나 여래의 본 정체도 잘 확인할 수 있다.
사과를 위처럼 대하는 상황에서 문제를 살피자.
우선 자신이 사과를 한 손으로 붙잡고 있다고 하자.
그리고 사과는 이것이라고 다른 한손으로 가리킨다고 하자.
이 상황에서 그가 붙잡고 있다고 여기는 것,
그리고 손가락으로 가리킨 그 부분은 사과가 아니다.
그렇게 여기고 대하는 상황이 현실에서 상을 취하는 상태다.
그리고 그것이 망집 증상의 하나다.
따라서 이 문제를 잘 살펴야 한다.
그런데 이렇게 제시하면 다음 의문을 일으키게 된다.
그렇다고 하자.
그러면 그가 손가락으로 사과라고 가리킨 그 부분은 과연 그 정체가 무언가.
또 하나 의문이 있다.
그렇다면 자신이 사과라고 가리킬 부분은 무엇인가.
이런 의문을 동시에 함께 해결해야 한다.
거리에 지나가는 영희를 가리킬 때도 사정이 마찬가지다.
자신이나 여래의 정체를 파악할 때도 이와 사정이 마찬가지다.
그래서 사과를 하나 놓고 살피면서 이 문제를 다 함께 살펴야 한다.
자신이 사과라고 여기며 손가락으로 가리킨 부분은 사과가 아니다.
그리고 사과는 그런 부분에서 얻을 수 없다.
이 내용부터 먼저 잘 이해해야 한다.
이전에 경전 부분을 인용하려다가 전체 내용이 없어진 일이 있다.
그래서 조금 더 주의를 기울인다.
...
...
...
『금강반야바라밀경』 1권(K0013 v5, p.983c05-c06)
이 문제도 마찬가지다.
나는 어디 있는가라고 할 때
자신이 눈으로 보는 색에서 그런 나를 찾는다.
또는 자신이 귀로 듣는 음성으로 찾는다.
이런 경우는 망상분별을 행하는 상태다.
그리고 그런 망상에 바탕해 현실에서 상(相)]을 취하는 상태다.
그런데 처음 그렇게 찾는 내용으로서 분별한 내용 자체 즉 상(想]은 관념영역에 있다.
그런데 그런 생각을 바탕으로 일정부분이 그런 내용이라고 가리킨다.
이 부분이 망상분별이다.
그가 가리키는 부분에는 그런 내용은 본래 얻을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와 같은 망상분별을 일으키면
그런 생각[상(想]에 바탕해서
일정 부분[상(相)]을 그런 내용이라고 여기면서 취하게 된다.
손가락으로 일정부분을 가리킨다는 행위가 의미하는 내용이 그것이다.
즉, 그는 그가 가리킨 그 부분을 마치 가위로 오리듯 오려낸다.
그리고 바로 그 부분이 지금 문제삼는 사과다. 영희다. 자신이다. 부처님이다.
이런 식으로 생각하고 그렇게 행한다.
그래서 망집 증상을 일으킨 상태에서 상을 그처럼 취한다.
그리고 그에 바탕해서 평소 분주하게 행한다.
상을 취하고 상에 머물고 상을 행한다.
그런 가운데 생사고통을 겪게 된다.
여기서 가장 근본적으로 처음 부분이 잘못이다.
그래서 그 사정을 이해해야 한다.
여기서 우선 다음 각 영역을 잘 구분해야 한다.
실상(實相 dharmatā ; dharma-svabhāva) - 상(相 Lakṣaṇa ) - 상(想 Saṃjña)
그리고 처음 문제를 대해야 한다.
그렇게 손가락으로 가리킨 그 부분이 사과나 영희나 자신이나 여래가 아니라고 하자.
그러면 그렇게 가리킨 그 부분의 본 정체는 무언가.
또 그 부분이 그런 것이 아니라고 하자.
그러면 자신이 찾는 사과나 영희 자신 또는 여래는 어디에 있는 무엇인가.
이 문제를 함께 해결해야 한다.
이 문제를 해결해야 생사로부터 근본적으로 벗어나게 된다.
그런데 이 해결이 생각처럼 쉽지 않다.
현실에서 어떤 이가 차를 운전하는 상태에 있다고 하자.
그런 상태에서 그에게 위 내용을 이해시키려 한다고 하자.
그러면 바로 사고가 발생할 수도 있다.
마찬가지로 현실에서 이 내용을 현실에 적용해서 임하려 한다고 하자.
거의 현실 활동 대부분을 할 수 없게 된다.
그런데 현실에서 그처럼 상을 취하고 임하면 수행자 자격이 박탈된다.
금강경에서 이런 사정을 제시한다.
...
그렇게 상을 취해 임하는 것 자체가 망집 현상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망집 때문에 그에 바탕해 생사고통을 겪기 때문이다.
그래서 수행자 자신이 그런 망집에 바탕하고 있다면 그는 수행자가 아니라는 뜻이다.
그런데 일단 일반의 경우를 놓고 살피면 대단히 어려운 요구사항이다.
그래서 이는 처음 수행을 시작하는 단계에서는 제시하기 힘든 내용들이다.
그렇지만, 일단 기본 수행을 통해 어느 정도 업의 장애를 제거한 상황에서는
이 내용을 이해하고 실천해야 한다.
그리고 그런 바탕에서 상락아정과 무상고무아부정 사이를 오가면서
혼동을 일으키면 안 된다.
● 자신 및 여래의 정체 확인
무상-고-무아-부정과 상락아정의 문제부터 시작해서
여래나 자신의 정체 확인문제를 함께 살펴보자.
그런데 이 문제를 살피는 상황을 비유로 먼저 이해해보자.
어떤 이가 대단히 좋아하고 집착하는 여인으로 영희라는 이가 있다고 하자.
그런데 이 여인이 다른 어떤 남자와 가깝게 지낸다.
그런 상태에서 지금 영희와 남자가 만나는 현장을 향해 가는 상황이라고 가정하자.
그래서 지금 대단히 빠른 속도를 차를 몰고 도로를 달리고 있다.
한마디로 철수가 탐욕과 분노를 바탕으로 임하는 상황이다.
그런데 이 생사현실에서 그런 내용 일체를 얻을 수 없다.
그런데도 생사현실에서 위와 같은 상황에 처한 철수는 대단한 고통을 느낀다.
더욱이 차를 빠른 속도로 몰고 나가는 상태는 더욱 위험하다.
그런데 그대로 방치하면 우선 도로에서 교통사고를 일으킬 가능성이 높다.
또 설령 그렇지 않아도 이후 영희나 다른 남자를 상대하면서
다양한 범죄 상황에 처하기 쉽다.
그래서 예를 들어 몸싸움을 벌인다면 이후 중환자실 아니면 교도소로 들어갈
가능성이 대단히 높다고 하자.
이제 이런 상황에서 철수가 겪을 고통을 미리 예방하려고 한다고 하자.
그런데 이를 위해 철수 옆에 앉아서 이 현실에 그런 내용을 본래 얻을 수 없다고 말한다고 하자.
그러면 그것이 효과를 발휘하지 못한다.
일단 철수가 그 말을 들어주지 않는다.
들으려고도 하지 않는다.
그리고 듣는다 해도 이해를 하지 못한다.
이런 문제가 있다.
그래서 철수 옆에서 일단 그렇게 내달리게 하는 배경 사정을 제거해주려고 하게 된다.
즉 이 상황에서 철수가 집착하는 그것이 하나같이
집착을 가질만한 내용이 아님을 부각시키는 것이다.
그런 일은 잠시 있다가 사라지는 일일 뿐이다.
그리고 그렇게 임하면 다양한 고통의 상황에 처한다.
그리고 알고보면 그렇게 집착하는 것은 가짜다.
즉 밤에 보는 가짜 달과 성격이 같다.
돗수 색안경을 쓰거가 벗으면 그 때마다 모습과 색이 달라지는 것이다.
진짜가 아니다.
그리고 아름답다고 여기는 상대도 알고보면 똥 오줌이 가득한 가죽과 성격이 같다.
이런 식으로 그 집착을 제거해주려고 노력하게 된다.
그래서 그것이 성공하면 일단 교통사고나 폭행 범죄가 예방된다.
그래서 일단은 자신의 집 아니면 좋은 휴식처 또는 좋은 전문 심리상담자가 있는 시설 좋은 병원
이런 곳으로 이끌어야 한다.
그런 상태가 되어야 비로소 근본 치유가 가능해진다.
그런데 생사현실 상황의 성격이 이와 같다.
대부분 쉼없이 분주하게 오가면서 이렇게 임하는 상황이다.
그래서 처음은 차선책으로 그렇게 일단 제시하는 사정이 있다.
그런데 본래는 그렇게 말할만한 내용 자체를 얻을 수 없다.
그래서 약간 여유가 있는 상황에서는 이 내용을 놓고
현실의 본 정체를 깊게 살펴서 깨달음을 얻어야 한다.
그래야 근본적으로 생사의 묶임에서 온전히 벗어날 수 있게 된다.
이런 문제다.
그런 가운데 현실에서 처음 문제삼은
사과나 영희 그리고 자신의 본 정체를 살펴야 한다.
처음 사과로 여기고 가리킨 그 부분은 사과가 아니다.
그렇다면 그것은 도대체 무엇인가.
또 사정이 그렇다면 자신이 사과라고 가리킬 부분은 그것이 아니고 도대체 무엇인가.
이 두 문제가 사과의 본 정체와 관련된다.
자신이나 여래의 본 정체도 마찬가지다.
오늘날 부처님은 찾기 힘들다.
그렇지만, 부처님이 설법을 하거나 열반에 임할 당시는 그렇지 않았다.
그 경우는 현실에서 영희를 놓고 영희의 본 정체는 무언가를 문제삼는 것과 성격이 비슷하다.
그래서 이를 함께 잘 이해해야 한다.
우선 현실에서 손에 사과를 쥐고 만지면서 이것이 사과라고 가리키는 상황을 놓고 살펴보자.
그것은 사과가 아니다.
그런데 현실에서 거의 99% 가 그것이 사과라고 여긴다.
그래서 그 사과를 누군가 뺏어가면 앞처럼 행동하게끔 된다.
이것이 근본 문제다.
그래서 이 사과를 놓고 잘 살펴야 한다.
결론만 말하면 그것은 자신 마음안에 얻어진 마음내용이다.
그 상황에서 자신이 사과를 영희에게 건넨다고 하자.
그러면 영희도 증상이 비슷하다.
영희도 그 사과를 받고 그것이 사과라고 여긴다.
그리고 그것을 먹으면 맛이 있다거나 배가 부른다고 여긴다.
그런데 그 상황에서 자신이 건넸다고 여기는 그 부분은 일단 그런 사과가 아니다.
정확히 말하면 철수나 영희 각각의 마음 내용이다.
그런데 그 현실에서 철수가 영희에게 사과를 건네는 상황도 사실은 그렇지 않다.
즉, 철수가 철수의 마음 내용을 그처럼 떼어서 영희에게 건네주는 것은 또 아니다.
영희도 마찬가지다.
다른 사람 즉 철수의 마음안 내용을 그처럼 떼어서 받는 것이 아니다.
그렇지만, 그 상황을 영희나 철수가 그렇게 파악하지 못한다.
이 상황을 일단 그림으로 살펴보자.
https://buddhism007.tistory.com/228#056 ☞○ 마음과 색의 의미에 관한 논의
https://thegood007.tistory.com/1172 ☞○ 진리에 관한 수많은 오류와 착각
03fl--ghpt/r1030.htm
[img2] [그림] 08pfl--image/진리의오류55.jpg
과거에 대단히 많이 반복한 내용이다.
그림에서 2 가 철수라고 하자.
4 를 사과라고 일단 가정해보자.
그리고 철수가 4 를 붙잡는 상황을 놓고 살펴보자.
그 상황에서 철수는 위 그림에서 2^ 가 4^ 를 붙잡는 모습을 보게 된다.
그리고 그 상황에서 동시에 부대상황으로 촉감을 얻게 된다.
그래서 철수는 마치 4^를 대상으로 2^ 라는 부분이 닿아서 촉감을 얻는 것처럼 잘못 여기게 된다.
그리고 4^ 를 사과라고 잘못 여기면서 대하게 된다.
그런데 이 상황을 1 이 지켜본다고 하자.
그러면 그것이 사실이 아님을 쉽게 이해할 수 있다.
그 상황에 철수의 눈을 손으로 가리거나 떼거나 하면
더욱더 쉽게 그 사정을 이해하기 쉽다.
그런데 이 문제가 조금 더 복잡하다.
이 상황에서 철수 2가 눈을 떠 대하면 마음안 내용으로 5^ 내용 전체를 얻는다.
그리고 그 일정부분을 사과라고 가리키는 상태가 된다.
그런데 위 상황에서 1 이 보는 4라는 내용과
철수가 보는 4^ 라는 내용은 서로 일치하지 않는다.
그런데 여기에 다시 혼동의 원인이 있다
이 모습을 옆에서 관찰하는 갑수는
2 라는 철수가 4 라는 사과를 대상으로 만져서 촉감을 얻는다고 잘못 여긴다.
그런데 그런 것도 사실이 아니다.
그 내용은 갑수의 마음 내용일 뿐이다.
그래서 이 문제를 먼저 잘 살펴야 한다.
그래서 현실에서 한 주체가 사과나 영희라고 여기고 대하는 부분의 본 정체가 무언가부터
잘 확인해야 한다.
그것이 여래의 정체를 확인할 경우에도 기본적으로 문제된다.
그런데 여래의 정체 확인은 또 조금 성격이 다르다.
그래서 현실에서 무엇을 여래라고 하는가부터 먼저 검토해야 한다.
현실에는 옆에 개나 고양이 소 말도 있고
그리고 영희와 철수도 있다.
또 아예 글자도 모르는 갓난아이도 있다.
그런 가운데 어떤 특성을 갖는 이를 부처님이나 여래라고 하는가부터
먼저 살펴야 한다.
이 문제는 간단한 문제가 아니다.
다만 기존에 대단히 많이 반복해 살폈다.
여기서는 그 내용을 짧게 요약해 제시하고 마치기로 한다.
현실에서 철수가 사과를 손에 쥐고 영희에게 건넨다고 하자.
철수가 사과를 손에 댈 때마다 촉감을 느낀다.
그리고 철수가 영희에게 사과를 건넬 때마다 영희도 마찬가지로 촉감을 느낀다.
이 실험을 지금 100 번 행한다고 하자.
그러면 예외없이 100 번 전부 다 동일한 경험을 할 것이다.
그것은 10 년전을 놓고 보아도 마찬가지다.
10 년후도 마찬가지다.
오늘 사과를 책상위에 놓았다고 하자.
그러면 별일 없으면 내일 다시 책상 위를 보면 사과가 그대로 있을 것이다.
현실 사정이 이렇다.
사정이 이렇기 때문에 현실에서 철수나 영희는 거의 99%
자신이 대하는 이들 내용이 대단히 실답다고 잘못 여기게끔 된다.
그리고 거꾸로 왜 자신이 만진 그 부분이 사과가 아니라고 하는가 의아하게 여기게 된다.
그런데 영희나 철수를 포함해 어떤 주체가 생사고통을 겪는 상황은
바로 여기에 바탕한다.
그런데 경전은 그런 현실 상황에 그가 문제삼는 그런 내용이 본래
거기에 얻을 수 없음을 제시한다.
이 두 입장이 극단적으로 상반한다.
경전의 입장을 취하면 현실의 생사고통은 본래 얻을 수 없다.
그래서 문제삼을 내용 자체를 얻을 수 없다.
그런데 문제는 생사현실 안에서 거의 대부분 그렇지 않다.
그리고 오히려 그가 대하는 현실 내용이 실답게 그처럼 있다고 여기는 상태다.
여래란 존재는 이런 생사현실에서
본 사정이 그렇지 않음을 깨달은 이다.
그리고 그에 바탕해 고통을 겪는 중생을 제도하기 위해 활동하는 이다.
그래서 여래의 입장을 100% 취하면
생사현실에는 중생들이 문제삼는 내용 자체를 얻을 수 없다.
그리고 그 생멸이나 생사고통도 역시 그러하다.
그런데 생사현실에 임하는 각 중생의 상태를 100% 취하면 사정이 정반대다.
그렇게 생사고통을 대단히 실답게 겪는다.
그래서 그 입장을 받아들이면
생사현실에는 그런 생사고통을 실답게 겪는 주체도 있고
또 사정이 그렇지 않다고 가르치는 부처님도 있다.
이 두 입장을 잘 살펴야 한다.
부처님도 사정이 마찬가지다.
부처님이 중생을 제도한다고 할 경우에는 바로 이런 상태의 중생을 제도하고자 하는 것이다.
부처님의 본 입장은 다음과 같다.
현실에서 어떤 이가 사과라고 여기는 그 부분은 그 주체의 마음안 내용이다.
그리고 엄격하게 보면 그가 손가락으로 사과라고 가리키는 부분은
그 마음안 내용 가운데 감각기관을 통해 얻는 감각현실이다.
시각이거나 청각이거나 후각이거나 미각이거나 촉각이다.
그런데 그런 내용을 얻고 그가 일으키는 분별 생각은 관념내용이다.
이 둘은 서로 그 성격이나 내용이 다르다. 엉뚱하다.
다만 그런 감각현실을 얻는 상태에서 그런 분별을 일으킨 것 뿐이다.
자신이 눈을 감고 사과를 떠올린다고 하자.
그 상황에서 사과란 생각을 할 수 있다.
그런데 그 상황에서 직전에 눈을 뜨고 본 사과 모습이 단 하나라도 얻어지는가를 살펴보자.
그렇지 않다.
다시 눈을 떠 보자.
그러면 생생하게 사과 모습을 본다.
또 촉감도 얻을 수 있다.
이 내용은 앞 순간에 마음으로 떠올린 그 사과가 결코 아니다.
그런데 그런 시각이나 촉각을 얻는 상황에서 그런 분별을 일으킨다.
그리고 이 둘을 함께 얻는 상황에서 그가 망상분별을 다음처럼 행한다.
즉 그런 감각현실의 일정부분에는 그가 생각하는 그런 내용이 '있다.''
또 그런 사정으로 그 감각현실 그 부분은 바로 그런 내용'이다'
이렇게 잘못 여긴다.
그런데 정작 그 부분에는 그런 내용을 얻을 수 없다.
또 그 부분은 그런 내용이 아니다.
사정이 그런데도 그런 내용이 없고 아닌 그 부분을 대하면서
그런 내용이라고 여긴다.
그런 사정때문에 망상분별이라고 칭한다.
치솔에는 영희가 없다.
그런데 망상증상을 일으킨 이는 그 치솔만 대하면 그 치솔이 영희라고 여긴다고 하자.
그러면 망상 환자다.
이 경우와 사정이 같다. .
바나나는 길다 길은 것 기차 이렇게 생각을 연이어 떠올릴 수 있다.
그래서 바나나를 보고 기차란 생각을 떠올린다고 하자.
그렇다고 해서 바나나는 기차가 아니다.
바나나에 기차가 있는 것도 아니다.
그런데 눈을 떠서 어떤 색상(모습)을 본다고 하자.
그 상황에서 일정부분을 대하는 가운데 그 부분은 영희라고 생각한다고 하자.
그러면 이 경우 그는 그 부분에 영희가 있다고 여긴다.
또 그 부분은 영희다라고 여긴다.
그 상황에서 영희가 어디 있는가라고 묻는다고 하자.
그러면 그는 손가락으로 그 부분을 가리킨다.
이 증상이 바로 망상 분별 현상이다.
앞에 제시한 것과 성격이 같다. 잘못된 분별이다.
그런데 욕계 생사현실은 바로 이와 같은 상태를 바탕으로 일체가 진행된다.
그리고 그 안에서 생사고통을 겪는다.
그래서 이를 해결하려면 근본적으로 이 망상분별을 기본적으로 제거해야 한다.
그래서 그렇게 현실에서 상을 취하고 임하면 곤란하다.
그런데 이미 보았듯 그 해결이 쉽지 않다.
밤에 눈을 떠서 하늘을 보면 별과 달이 보인다고 하자.
이 상황도 마찬가지다.
그렇게 보이는 그 부분이 별과 달이 아니라고 이해하는 이가 현실에 과연 얼마나 되는가.
천문학자나 과학자를 포함해 일반인 대부분이 그것은 진짜 별과 달이라고 여긴다.
경전 입장과 완전히 정반대다.
그리고 이것이 문제다.
이 부분에서 가장 기초적으로 자신이 영희나 철수라고 여기는 그 부분
또는 별이나 달이라고 여기고 대하는 그 부분이
자신의 마음안 내용임을 먼저 확인해야 한다.
돗수가 들어간 안경을 구해서 실험해본다고 하자.
자신이 그 안경을 쓰고 벗을 때마다 그 크기나 모습 색상이 달라진다.
그 상황에서 그렇게 되지 않는 별개의 영희나 철수 달이나 별이 있다면 찾아내야 한다.
그런 것이 그 상황에 없다.
만일 자신이 안경하나를 쓰고 벗어서 정말 그 모습과 색상이 달라진다면
대단한 일이다. 그런데 그렇지 않다.
자신이 그렇게 영희나 달 별로 여기고 대하는 그 내용은 진짜가 아니다.
그 상황에서 옆에 있는 철수에게 확인해도 마찬가지다.
자신이 안경을 쓰고 벗음에 따라 모습이나 색상이 달라진다고 해서
철수가 보는 달도 그렇게 되는 것이 아니다.
그래서 자신이 평소 대하는 영희나 달을 포함해 세상 일체가 그렇다.
그래서 그 일체는 마음안에 얻는 마음 내용일 뿐이다.
이런 사정을 먼저 이해하는 것이 기본이다.
그리고 그 이후 본 바탕의 내용은 그러면 무엇인가를 다시 살펴야 한다.
이 사정은 침대에서 바다나 황금꿈을 꾸는 상황과 성격이 같다.
현실에서 자신이 평소 영희나 달로 여기고 대하는 내용이 마음내용임을 이해한다고 하자.
그런 경우 그런 마음 밖에는 자신이 본 그런 내용과 일치한 내용이 있다고 또 다시 잘못 여기게끔 된다.
그렇게 잘못 여기게 되는 사정이 있다.
이미 그 사정을 살폈다.
100 번 사과를 영희에게 건넨다고 하자.
그러면 100 번 모두 영희도 비슷한 경험을 보고 한다.
이런 사정으로 현실에서 얻는 내용은 대단히 실답다고 여기게 된다.
그런데 사정이 그렇지 않다.
처음 사과를 하나 놓고 실험했다.
자신이 사과를 보고 두드려 소리를 듣고 냄새맡고 맛보고 만졌다.
이 상황에서 자신은 하나의 사과를 그렇게 대한 것이라고 여긴다.
그런데 이 각 내용을 놓고 서로 비교해 본다고 하자.
서로 대단히 엉뚱하다.
그리고 이런 상태에서 그는 그가 대한 내용이 '사과'라고 분별한다.
그런 이 분별내용은 앞에 나열한 여러 감각현실과도 대단히 엉뚱하다.
이 각 내용을 각기 놓고 비교하면 그 사정을 쉽게 이해한다.
현실에서 얻는 어느 내용도 각 영역에서 서로 일치하지 않는다.
이 상황은 마치 침대에서 누어 꾼 바다나 황금꿈과의 관계와 같다.
꿈에서 꾼 바다나 황금을 침대에서 찾아보아도 얻을 수 없다.
그런데 이상하게 침대에 누어 그런 꿈을 꾼다.
이 상황과 성격이 같다.
실상이 공하다는 것을 이해하는 것은 현실의 정체가 이런 성격이라는 사정을 이해하는데 필요하다.
○ 유무의 극단을 떠남
○ 일체가 차별없이 공함 그 자체와 그 사정을 이해함의 차이
바위나 꽃이나 소 돼지나 여래가 다 차별없이 공하다. - 그러나 공한 그 자체만으로 소나 돼재를 여래라고 하지는 않는다.
꽃이 공하다. - 그렇다고 꽃을 여래라고 하지는 않는다.
여래는 공하다. - 공한 것은 모두 여래라고 하지는 않는다.
○ 일체가 차별없이 공함을 깨닫고 망집을 제거하여 해탈을 이룬 상태와 중생을 제도하려 생사현실에 드는 상태
○ 법신을 증득한 여래와 회신멸지에 이른 아라한의 차이
공하다는 측면에서는 일체가 다 차별없다.
그런 사정을 깨닫고 생사의 묶임에서 벗어나 해탈했다는 점에서는 아라한과 부처가 차별이 없다.
그러나 여래와 부처는 중생을 제도하고 법신을 증득했는가의 차별이 있다.
○ 부처님이라고 일반이 여기도 대하는 색상과 법신의 관계
법신을 증득한 여래의 정체
있음의 극단 - 무언가가 있다고 할 때, 그것이 참된 진짜의 내용으로 영원하게 있는 것이라고 치우친 경해
없음의 극단 - 무언가 실답게 있는 것이 아니라고 할 때, 그것이 아주 전혀 없는 것이라고 치우친 견해
이 양 극단을 떠나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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ॐ मणि पद्मे 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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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반열반경_K1403_T0375 [문서정보]- 일일단상키워드
무엇이 네 가지인가,
마군이 말한 경전과 계율을 받아 가지는 것이니라.”
“세존이시여,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네 가지 마군과,
마군의 말한 것과 부처님의 말한 것을 저희들이 어떻게 분별하오며,
어떤 중생이 마군의 행을 따르는지,
부처님의 가르침을 따르는지,
그런 무리를 어떻게 압니까?”
“가섭이여,
내가 열반한 지 7백 년 뒤에 마왕 파순이 점점 나의 법을 혼란케 하리니,
마치 사냥꾼이 몸에 가사를 입듯이
마왕 파순도 그와 같이 비구ㆍ비구니ㆍ우바새ㆍ우바이의 모양을 가장하기도 하고,
또 수다원의 몸과 아라한의 몸과,
내지 부처님의 몸을 꾸미되 마왕의 유루한 형상으로 무루한 몸을 가장하고,
나의 바른 법을 파괴하며 파순이 바른 법을 파괴하면서 말하기를
‘보살이 옛날에 도솔천에서 없어지고 이 가비라성의 정반왕궁에 올 적에
부모의 애욕으로 접촉함을 의지하여 이 몸을 낳아 기른 것이니,
만일 어떤 사람이 인간에 나서 모든 세간의 인천 대중에게 공경을 받는다고 말한다면 있을 수 없다’고 하며,
또 말하기를
‘옛적에 고행할 때에 머리와 눈과 골수와 나라와 처자까지 여러 가지로 보시한 까닭으로 지금에 불도를 이루었으며,
그런 인연으로 천상 사람ㆍ세간 사람ㆍ건달바ㆍ아수라ㆍ가루라ㆍ긴나라ㆍ마후라가의 공경을 받는다’ 하리라.
만일 이런 말을 한 경전이나 계율이 있으면 마군의 말인 줄을 알지니라.
선남자야,
만일 경과 율에 말하기를,
‘여래는 벌써부터 불도를 이루었건만 지금 성불하는 일을 보이는 것은
중생들을 제도하기 위하여
일부러 부모의 애욕으로 인하여 났으며,
세상을 따르기 위하여 이렇게 나타난다’고 하면,
이런 경과 율은
참으로 여래의 말인 줄을 알지니,
만일 마군이 말한 것을 따르는 이는 마군의 권속이요,
부처님의 말한 것을 따르는 이는 보살이니라.
또 말하기를,
‘여래가 처음 났을 적에 10방으로 일곱 걸음씩 걸었다는 것을 믿을 수 없다’ 하면
그는 마군의 말이요,
여래가 세상에 나서 10방으로 일곱 걸음씩 걸은 것은 여래의 방편으로 보인 것이라고 말하면
이것은 여래가 말씀한 경전과 율이니,
만일 마군이 말한 것을 따르는 이는 마군의 권속이요 부처님이 말한 것을 따르는 이는 보살이니라.
만일 말하기를 ‘보살이 탄생한 뒤에 부왕이 사람으로 하여금
태자를 데리고 천신의 사당에 갔을 적에 천신들이 보고 내려와서 예경하였으므로
부처님이라 한다’고 하고,
다시 논란하여 말하기를
‘천신은 먼저 났고 부처님께서는 나중 났는데
어찌하여 천신이 부처님께 예경하였으랴’ 하면,
그것은 파순의 말인 줄을 알 것이니라.
경에 말하기를 ‘부처님이 천신의 사당에 갔을 적에
마혜수라천ㆍ대범천왕ㆍ제석천왕들이 모두 부처님 발에 합장하고 예경하였다’ 하면
이런 경과 율은 부처님이 말씀한 것이니,
마군이 말한 것을 따르는 이는 마군의 권속이요,
부처님이 말한 것을 따르는 이는 즉시 보살이니라.
어떤 경이나 율에
‘보살이 태자로 있을 적에 음욕으로 말미암아
사방에서 아내를 맞아 궁중에 두고 5욕으로 즐기며 기뻐하였다’고 말하였으면,
그러한 경과 율은 마군의 말이요,
만일 ‘보살은 이미 오래전에 탐욕과 처자의 생각을 여의었으며,
내지 33천의 훌륭한 5욕락도 침 뱉듯이 버렸거늘 하물며 인간의 욕락이리요.
머리를 깎고 출가하여 도를 닦았느니라’고 말하였으면
그런 경과 율은 부처님의 말씀이니 마군의 경과 율을 따르면 마군의 권속이요,
부처님의 경과 율을 따르면 곧 보살이니라.
또 ‘부처님이 사위성 기타정사에 계실 적에 비구들에게 종ㆍ하인ㆍ소ㆍ양ㆍ코끼리ㆍ말ㆍ나귀ㆍ노새ㆍ닭ㆍ돼지ㆍ고양이ㆍ개ㆍ금ㆍ은ㆍ폐유리ㆍ진주ㆍ파리ㆍ자거ㆍ마노ㆍ산호ㆍ호박ㆍ보패ㆍ보석ㆍ구리ㆍ가마ㆍ솥ㆍ쟁반 따위를 받아 두라 허락하였고,
밭 갈고 나무 심고 장사하고 곡식을 쌓아 두는 일들을
부처님이 자비심으로 중생을 사랑하여 허락하였다’고 말하였으면
그런 경과 율은 모두마군의 말이요,
‘부처님이 사위성 기타정사의 나리루(那梨樓) 귀신 있는 곳에 계실 적에 여래께서 바라문 고저덕(羖羝德)과 바사닉왕(波斯匿王)에게 말씀하시기를 비구들은 금ㆍ은ㆍ폐유리ㆍ파리ㆍ진주ㆍ자거ㆍ마노ㆍ산호ㆍ호박ㆍ보패ㆍ보석ㆍ종ㆍ하인ㆍ동남ㆍ동녀와 소ㆍ양ㆍ코끼리ㆍ말ㆍ나귀ㆍ노새ㆍ닭ㆍ돼지ㆍ고양이ㆍ개 따위의 짐승과 구리ㆍ가마ㆍ솥ㆍ쟁반 따위와,
가지각색의 평상ㆍ포단과 살림에 필요한 집 따위를
받아 두지 말라 하였고,
밭 갈고 나무 심고 무역하고 손수 음식 만들고 방아 찧고 맷돌질하는 것과
몸을 다스리는 주술과 매를 길들이는 방법과 천문 보고 역서 만들고 점치고
남녀의 상보고 해몽하고 남자다 여자다 남자 아니다 여자 아니다 하는 따위의
64능(能)과 사람을 의혹케 하는 18주술과 여러 가지 공교한 일을 하지 말라 하였느니라.
혹 세간의 한량없는 세속 일을 말하되,
흩는 향ㆍ가루향ㆍ바르는 향ㆍ쐬는 향ㆍ꽃다발ㆍ화만ㆍ머리 빗는 방법을 숭상하거나,
간사하고 아첨하여 이양을 탐내거나,
복잡하고 분주한 데를 좋아하며,
희롱하고 웃고 이야기하거나,
고기 생선을 즐겨 먹거나,
독약을 만들거나 향유를 짜거나
일산 받고 갖신 신고 부채 만들고 상자 만들고 화상 그리고
쌀ㆍ곡식ㆍ밀ㆍ보리ㆍ콩ㆍ과실 따위를 저축하거나,
국왕ㆍ왕자ㆍ대신이나 여인들을 가까이하거나 소리를 높여 웃거나 잠잠하거나,
법에 대하여 의심하거나,
잘하고 못하고 좋고 나쁘고 선하고 악하고 좋은 신 좋은 옷을 부질없이 이야기하거나,
가지가지 부정한 물건을 시주들의 앞에서 칭찬하거나,
술집ㆍ기생집ㆍ놀음판 따위의 부정한 곳에 출입하는 사람은
비구들 중에 섞이지 못하게 하였으니,
이런 이는 마땅히 비구를 그만두고 속세로 돌아가서
국민의 구실을 극진히 할 것이니,
마치 돌피와 가라지를 뽑아버리듯 하라’ 하였으면,
이런 경과 율을 제정한 것은 모두 부처님의 말이니라.
마군의 말을 따르는 이는 마군의 권속이요,
부처님의 말을 따르는 이는 보살이니라.
만일 말하되,
보살이 천신에게 공양하기 위하여 천신의 사당에 들어갔으니 그 천신은 범천ㆍ대자재천ㆍ위타천ㆍ가전연천이라.
들어간 까닭은 모든 하늘들을 조복하기 위함이니,
그렇지 않다고 말하는 것은 옳지 않다 하거나,
만일 말하기를 보살이 외도들의 잘못된 언론에 들어가서 그의 위의와 문장과 기예(技藝)를 알지 못하여 하인들의 투쟁을 화합하지 못하며 남녀ㆍ국왕ㆍ대신의 공경을 받지 못한다 하거나,
또 말하기를 여러 가지 약을 화합할 줄을 모르나니,
모르는 까닭으로 여래라 하거니와,
만일 안다면 나쁜 소견을 가진 무리라 하거나,
또 말하기를 여래는 원수나 친한 이에게 마음이 평등하여서,
칼로 몸을 베거나 향으로 바르거나 그런 두 사람에게 이익하고 해롭다는 마음을 내지 아니하고 중도에 머물러 있으므로 여래라고 일컫는다 하면,
이런 경과 율은 마군의 말인 줄을 알 것이며,
만일 말하기를 보살이 일부러 천신의 사당에 들어갔고,
외도의 법에서 출가하여 도를 닦으면서 그의 위의와 예절을 알기도 하고 모든 문장과 기예를 이해도 하며,
글방과 재주를 배우는 곳에 일부러 들어가서 하인들의 투쟁을 잘 화합하며,
여러 대중과 동남ㆍ동녀와 후궁ㆍ후비와 백성ㆍ장자ㆍ바라문ㆍ국왕ㆍ대신과 빈궁한 사람들 중에 가장 높으시며
또 그들의 공경을 받아서 이러한 일들을 나타내기도 하며,
비록 여러 가지 소견 속에 있더라도 애착하는 마음을 내지 아니함이 연꽃에 티끌이 묻지 않는 듯하며,
중생들을 제도하기 위하여서 이런 방편을 행하여 세상 법을 따른다고 말하면,
이러한 경과 율은 여래의 말씀인 줄을 알아야 하나니,
마군의 말을 따르는 이는 마군의 권속이요,
부처님의 말씀을 따르는 이는 대보살이니라.
만일 말하기를,
여래께서 나에게 경과 율은 해설할 적에,
나쁜 법 중에서 가볍고 무거운 죄와 투란차(偸蘭遮)의 성질이 중대한 것은
우리의 율문에서 하지 못하게 하였으며,
내가 오래전부터 그런 법을 익혀 왔는데,
너희들이 믿지 않거니와,
내가 어찌 우리 율을 버리고 너희의 율을 따르겠느냐.
너희의 율은 마군이 말한 것이고
우리의 경과 율은 부처님이 제정한 것이다.
여래께서 먼저 아홉 가지 법인(法印)을 말하고
그 아홉 가지 인으로 우리의 경과 율을 인가하였으며,
당초부터 방등경전이라고는 한 구절 한 글자도 듣지 못하였으며,
여래가 말씀한 한량없는 경과 율에 방등경이 어디 있느냐.
그런 중에서 열 가지 경이란 이름이 있다는 말을 듣지 못하였고,
만일 있다면 그것은 조달(調達)이 지었을 것이며,
조달은 나쁜 사람으로 선한 법을 없애려고 방등경을 지은 것이니,
우리는 믿을 수 없으며,
그런 경전은 마군의 말이니 왜냐 하면 불법을 파괴하고 시비하려는 것이므로
그런 말이 너희의 경에만 있고 우리의 경에는 없으며,
우리의 경과 율에는 여래께서 말씀하기를
‘내가 열반한 후 나쁜 세상에 반드시 부정한 경과 율이 있을 것이니,
소위 대승 방등경전이며,
오는 세상에는 이런 나쁜 비구가 있으리라’고 말하였다.
나는 또 말하기를 아홉 가지 경전보다 뛰어난 방등경전이 있으니
어떤 사람이나 그 뜻을 아는 이가 있으면
이 사람은 경과 율을 바르게 아는 이로서
온갖 부정한 것을 멀리 여의고 미묘하고 청정하기가 보름달 같으리라.
만일 말하기를,
여래가 비록 낱낱 경과 율에서 이치를 연설하기를
항하의 모래와 같다 하더라도 우리의 율에는 없으니 없는 줄을 알아야 하고,
만일 있다면 어째서 여래께서 우리의 율에서는 말하지 아니하였으랴.
그래서 나는 믿을 수 없노라 하면
그 사람은 죄를 얻을 것이며,
그 사람이 또 말하기를 ‘이런 경과 율을 내가 받아 지닐 것이니,
그 이유는 나를 위하여 욕심을 적게 하고 만족함을 알게 하였으며
번뇌를 끊고 지혜와 열반의 좋은 법의 인연을 지은 까닭이라’ 하리니,
이렇게 말하는 이는 나의 제자가 아니요,
만일 여래가 중생을 제도하려고 방등경을 말하였다 하면,
이런 사람은 진정한 나의 제자려니와,
방등경을 배우지 않는 이는
나의 제자가 아니며 불법을 위하여 출가한 것이 아니고,
잘못된 소견을 가진 외도들의 제자니라.
이러한 경과 율은 부처님이 말한 것이요,
이렇지 아니한 것은 마군의 말이니,
마군의 말을 따르는 이는 마군의 권속이요,
부처님의 말을 따르는 이는 곧 보살이니라.
또 선남자야,
만일 말하기를,
‘여래는 한량없는 공덕으로 성취한 바가 아니므로 무상하고 변역하는 것이며,
공한 법을 얻어서 내가 없다고 하고 세상을 따르지 않는다’ 하면 이런 경과 율은 마군이 말한 것이요,
만일,
여래의 정각은 헤아릴 수 없으며 한량없는 아승기 공덕으로 성취하였으므로 항상 머물고 변역하지 않는다고 말하면 이런 경과 율은 부처님이 말한 것이니,
마군의 말을 따르는 이는 마군의 권속이요 부처님의 말을 따르는 이는 보살이니라.
또 만일 말하기를,
어떤 비구가 바라이(波羅夷) 죄를 범하지 않았는데,
뭇 사람이 모두 이르되 바라이 죄를 범하여 다라나무를 끊은 것이 같다고 하더라도,
이 비구는 실상 범한 것이 아니니라.
왜냐 하면 내가 항상 말하기를 4바라이에서 한 가지만 범하여도 쪼갠 돌을 다시 붙일 수 없음과 같다고 하였거니와,
만일 남보다 지나가는 법을 얻었노라고 스스로 말하면 그것은 바라이를 범한 것이니,
그 이유는 실지로는 얻은 것이 없으면서 겉으로 얻은 듯이 꾸미는 것이므로 이런 사람은 사람 되는 법을 잃은 것이어서 바라이라 하느니라.
만일 어떤 비구가 욕심이 적고 만족함을 알며 깨끗이 계행을 가지면서 고요한 곳[阿練若]에 있는 것을 임금이나 대신이 보고서 이 비구가 아라한과를 얻은 줄 생각하고 앞에 나아가 찬탄하고 공경하고 예배하면서 말하기를,
‘이 스님은 이 몸을 버리고는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으리라’ 하거든,
비구가 듣고 임금께 말하기를,
‘나는 참으로 사문의 도과(道果)를 얻지 못하였으니 대왕은 나에게 도과를 얻었다고 말하지 마십시오.
바라건대 대왕은 나에게 만족함을 모르는 법을 말하지 마소서.
만족함을 모르는 사람은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었다 하더라도 잠자코 듣거니와,
내가 이제 잠자코 듣는다면 부처님들의 꾸중을 받게 되나이다.
만족함을 아는 행실은 부처님이 칭찬하는 것이오매 나는 몸이 맞도록 즐거운 마음으로 만족함을 아는 행을 닦으려 하나이다.
또 만족함을 안다는 것은 도과를 얻지 못한 줄을 스스로 아는 것이니,
대왕께서 나더러 도과를 얻었다 하더라도 내가 그대로 받지 아니하여야 만족함을 아는 것입니다’ 하였다.
임금이 대답하기를,
‘스님은 참으로 아라한과를 얻어서 부처님과 다름이 없다’ 하면서 널리 선전하여서,
나라 안팎의 사람들과 중궁의 후비들로 하여금 모두 사문과를 얻은 줄 알게 하였으므로,
들은 이들이 공경하고 믿는 마음을 내어 공양하고 존중하였다 하면 이 비구는 참으로 범행이 청정한 사람이니,
이런 인연으로써 여러 사람들이 큰 복덕을 얻게 되었으므로 이 비구는 바라이 죄를 범한 것이 아니니라.
왜냐 하면 사람들이 스스로 환희한 마음을 내어 찬탄하고 공경한 것이니 이 비구가 무슨 죄가 있겠느냐.
이 사람이 죄를 얻으리라고 말한다면 이런 것은 마군의 말이니라.
또 어떤 비구가 부처님의 비밀하고 깊은 경전을 말하면서,
모든 중생에게 모두 불성이 있으며,
이 성품이 있으므로 한량없는 억천의 번뇌를 끊고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이루는 것이니 일천제(一闡提)는 제할 것이라 하였다.
임금이나 대신들이 말하기를,
‘스님은 부처님이 될 수 있습니까,
없습니까?
불성도 있습니까?’라고 하자,
비구가 대답하되 ‘나의 몸에는 불성은 결정코 있지만 부처가 되고 안 되는 것은 알지 못합니다’라고 하였다.
왕이 말하되 ‘스님이 만일 일천제가 아니라면 부처가 될 것은 의심이 없으리라’고 하자,
비구가 말하되 ‘진실로 왕의 말씀과 같습니다’ 하였다.
이 사람이 결정코 불성이 있다고 말하였으나,
바라이 죄를 범한 것은 아니니라.
또 어떤 비구가 출가할 적에 생각하기를 ‘내가 결정코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이루리라’ 하였다면,
이 사람이 비록 위없는 도과는 이루지 못하였더라도 복을 얻은 것은 한량없고 끝이 없어 헤아릴 수 없으리라.
만일 어떤 사람이 말하기를 이 사람이 바라이 죄를 범하였다 하면 모든 비구들도 모두 범하였을 것이니,
왜냐 하면 내가 옛날 80억 겁 전에 모든 부정한 물건을 항상 여의고 욕심이 적고 만족함을 알고 위의가 성취되어 여래의 위없는 법장을 닦으면서 이 몸에 불성이 있는 줄을 알았으므로,
지금 내가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이루어 부처라 하며 대자비가 있다 하느니라.
이와 같은 경과 율은 부처님의 말씀이니,
이러한 것을 따르지 못하는 이는 마군의 권속이요,
따르는 이가 있으면 곧 대보살이니라.
또 말하기를 4바라이ㆍ13승잔(僧殘)ㆍ2부정법(不定法)ㆍ30사타(捨墮)ㆍ91타(墮)ㆍ4참회법(懺悔法)ㆍ중다학법(衆多學法)ㆍ7멸쟁(滅諍) 등도 없고,
투란차와 다섯 역적죄와 일천제도 없거늘,
만일 비구가 이런 것을 범하고 지옥에 떨어진다면 외도들은 천상에 날 것이니,
왜냐 하면 외도들은 범할 계율이 없는 까닭이니라.
이것은 여래가 일부러 사람들을 두렵게 하기 위하여 이런 계율을 말한 것이라 하며,
또 부처님 말씀에 비구들이 음행을 하려면 법복을 벗고 세속 옷을 입은 뒤에 음행을 하라고 하였으니,
음행할 인연을 생각하더라도 나의 허물이 아니며,
여래가 세상에 계실 때에도 비구가 음행을 하고 해탈을 얻은 이가 있으며,
혹은 목숨이 마친 뒤에 천상에 태어나기도 하였으니,
옛날이나 지금에 있는 일이라,
나만이 하는 일이 아니며,
혹은 네 가지 중대한 죄를 범하고 혹은 다섯 가지 중대한 계를 범하며 혹은 온갖 부정한 일을 행하고도 진정한 해탈을 얻었으며,
여래의 말씀에 돌길라(突吉羅) 죄를 범하면 도리천의 세월로 8백만 년을 지옥에 떨어진다 하였으나 역시 여래께서 사람을 공포케 하는 말이며,
또 바라이로부터 돌길라까지의 가지가지 죄가 가볍고 중대한 차별이 없건만,
율사들이 부질없이 이런 말을 지어내어 부처님이 제정하였다고 하지만 필경에는 부처님의 말씀이 아님을 알 것이라 하면,
이런 말은 마군의 경과 율이니라.
또 말하기를 모든 계율에서 작은 계율을 범하나 내지 하잘것없는 것이라도 괴로운 과보를 한없이 받을 것이니 이렇게 알고 내 몸을 방비하되 거북이 여섯 군데 감추듯 하라 하였거늘,
어떤 율사가 ‘무슨 계를 범하더라도 아무 죄보도 없다’고 하면,
이런 사람은 가까이하지 말 것이니라.
부처님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셨다.
한 법만을 그저 지나도
이를 망어(妄語)라고 이름하나니
뒷세상 보지 않으면
짓지 않을 죄가 없으리.
그러므로 이런 사람은 가까이하지 말아야 하느니라.
나의 부처님이 이렇게 청정하거늘
하물며 투란차 죄를 범하거나 승잔 죄ㆍ바라이 죄를 범한 것이 어찌 죄가 아니랴.
그러기에 이런 법들을 매우 깊이 방비하고 수호할 것이니,
만일 수호하지 않는다면 무엇으로 계율이라 하겠는가.
나의 경전 중에도 말하기를 4바라이나 내지 미세한 돌길라를 범하더라도 마땅히 엄하게 다스리라 하였나니,
중생이 계율을 수호하여 지니지 않고서야 어떻게 불성을 보겠는가.
모든 중생에게 비록 불성이 있다 하지만 계행을 잘 지니고 볼 것이며,
불성을 보고서야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이루느니라.
아홉 가지 경에는 방등경이 없으므로 불성이 있다고 말하지 않았거니와,
경에는 말하지 않았더라도 참말 있는 줄을 알아야 하리니,
이런 말을 하는 이는 참으로 나의 제자니라.”
“세존이시여,
앞에서 말씀한 대로 모든 중생에게는 불성이 있다는 말을
아홉 가지 경전에서는 듣지 못하였거늘 만일 있다고 말하오면
어찌하여 바라이 죄를 범함이 아닙니까?”
“선남자야,
그대의 말과 같아서 실로 바라이 죄를 범함이 아니니라.
선남자야,
마치 어떤 이가 말하기를
바다에 일곱 가지 보배만 있고 여덟 가지는 없다 하여도 이 사람은 죄가 없듯이,
아홉 가지 경전 가운데 불성이 없다고 하여도 죄가 없나니,
왜냐 하면 나는 대승의 지혜 바다에 불성이 있다고 말한 것이고,
2승 사람들은 알지 못하는 것이므로 없다고 하여도 죄가 없으며,
이런 경지는 부처님들이 아는 것이고
성문이나 연각으로는 미칠 바가 아니니라.
선남자야,
어떤 사람이 여래의 깊고 비밀한 법장을 듣지 못하였으면
어떻게 불성이 있는 줄을 알겠는가.
어떤 것이 비밀한 법장인가.
방등 대승경전이니라.
선남자야,
외도들은 혹은 내가 항상하다 말하고 혹은 내가 아주 없다 말하거니와,
여래는 그렇지 아니하여
내가 있다고도 말하고 내가 없다고도 말하나니
이것을 중도라 하느니라.
만일 부처님이 중도를 말할 적에
온갖 중생이 모두 불성이 있건만
번뇌가 가리워서 알지도 보지도 못하나니,
그러므로 부지런히 방편을 닦아서 번뇌를 끊어야 한다고 하였다 하면
이런 말을 하는 사람은 4바라이를 범함이 아니고,
이런 말을 하지 않는 이가 바라이 죄를 범한 것이며,
만일 내가 이제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성취하였으니 그 이유는 불성이 있는 까닭이다.
불성이 있는 이는 반드시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이루는 것이니,
이 인연으로 내가 이제 보리를 성취하였노라 하면 이 사람은 바라이 죄를 범하였다 하리라.
왜냐 하면 비록 불성이 있더라도 좋은 방편을 닦지 못한 연고로 보지 못하는 것이며,
보지 못한 연고로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이루지 못한 것이니,
이러므로 부처님 법이 깊고 깊어서 헤아릴 수 없다는 것이니라.”
가섭보살이 부처님께 여쭈었다.
“세존이시여,
어떤 임금이 묻기를 ‘어떤 것이 비구가 과인법(過人法)에 떨어짐인가?’라고 하였습니다.”
부처님이 말씀하셨다.
“가섭이여,
어떤 비구가 이익과 음식을 위하여
모든 아첨과 간사와 거짓말을 꾸미되
‘어찌하면 세상 사람들로 하여금
내가 참말 비구인 줄을 알게 하며
그 인연으로 내가 많은 이익과 큰 명예를 얻게 되랴’ 하면,
이 비구는 매우 어리석은 연고로 밤낮으로 생각하기를
‘내가 실로 네 가지 사문의 과를 얻지 못하였지만,
어떻게 하면 세상 사람들로 하여금 내가 도과를 얻은 줄로 알게 하며,
어떻게 하면 모든 우바새ㆍ우바이들이 나를 보고 이 사람의 복덕은 참말로 성인이라고 하게 하리요’ 하고는
법은 구하지 않고 이익만 구하면서
그때부터 다닐 때마다 점잖을 빼고 가사와 발우를 가지며 위의를 차리고
참말 아라한처럼 고요한 곳에 혼자 앉아 있어
사람들이 보고는 이 비구는 가장 거룩한 이며
고행을 부지런히 하여 적멸(寂滅)한 법을 닦는다고 칭찬하도록 하여,
이런 인연으로 나의 제자들이 많아지고,
사람들도 의복ㆍ음식ㆍ포단ㆍ탕약 등으로 공양할 것이며,
여러 여인들도 나를 존중하고 애경하리라 생각하나니,
이런 일을 하는 비구ㆍ비구니는 과인법(過人法)에 떨어지느니라.
또 어떤 비구가 위없는 바른 법을 세우기 위하여
고요한 곳에 머물러 있으면서
아라한이 아니지만,
사람들이 보고는 이 스님은
‘아라한이다,
좋은 비구다,
착한 비구다,
고요한 비구다’라고 생각하게 하여,
많은 사람들이 신심을 내게 되면,
이 인연으로 한량없는 비구들을 권속으로 삼게 될 것이며,
이 일로 말미암아 파계한 비구와 우바새들로 하여금 계행을 가지게 하면,
그 인연으로 바른 법을 세우고
여래의 위없이 훌륭한 이치를 빛낼 것이며
방등의 대승법으로 교화함을 나타내고
많은 중생들을 해탈케 하여,
여래가 말씀한 경과 율에 대하여 가볍고 무거운 뜻을 이해하게 하리라 하며,
다시 말하기를
‘나에게도 불성이 있고,
여래비장(如來秘藏)이라는 경이 있는데
이 경에서 마땅히 부처님 도를 이루어 한량없는 번뇌의 결박을 끊으리라’ 하면서,
한량없는 우바새들을 위하여
‘너희들도 모두 불성이 있으니
나와 네가 함께 여래의 경지에 머물러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이루어
한량없는 번뇌의 결박을 끊으리라’ 한다면,
이 사람은 과인법(過人法)에 떨어진다고 이름하지 않고
보살이라 이름하느니라.
또 돌길라 죄를 범하면 도리천의 세월로
8백만 년 동안에 지옥에 떨어져 모든 죄보를 받는다 하였거늘,
하물며 일부러 투란차 죄를 범함이랴.
대승법 중에 투란차 죄를 범한 비구가 있으면 가까이하지 말아야 하나니,
어떤 것이 대승경 중의 투란차 죄인가.
만일 장자가 절을 짓고 화만으로 부처님께 공양할 적에
어떤 비구가 꽃을 꿴 실을 보고 묻지 않고 가지면 투란차 죄라 하나니,
알거나 모르거나 범죄가 되는 것이며,
만일 탐내는 마음으로 부처님 탑을 파괴하면 투란차 죄를 범하는 것이니
이런 사람은 친근하지 말아야 하며,
국왕이나 대신이 탑이 낡은 것을 보고 중수하며 사리에 공양할 적에
탑 속에서 보배를 얻어 비구에게 맡긴 것을 비구가 제 마음대로 사용하면
이런 비구는 부정이라 하며,
많은 투쟁을 일으키게 되리니,
선한 우바새들은 그 비구에게 친근하거나 공경하거나 공양하지 말아야 하느니라.
또 이런 비구는 근(根)이 없다, 근이 둘이다, 근이 일정치 않다 하나니,
근이 일정치 않다는 것은 여자를 탐하려는 때는 몸이 여자가 되고, 남자를 탐하려는 때는 몸이 남자가 되는 것이매,
이런 비구는 나쁜 근[惡根]이라 하여
남자라 하지도 않고 여자라 하지도 않으며,
출가라고도 않고 재가(在家)라고도 않나니,
이런 비구는 친근하거나 공양하거나 공경하지 말아야 하느니라.
부처님 법에는
사문의 법이 자비한 마음으로 중생들을 어루만져 기르는 것이며,
내지 개미 따위라도 두려움 없는 보시를 하는 것이 사문의 법이요,
술을 마시거나 냄새를 맡는 것까지 여의는 것이 사문의 법이며
거짓말을 하지 말며
꿈에서도 거짓말을 생각하지 않는 것이 사문의 법이며,
애욕의 마음을 내지 말고 꿈에서까지도 그렇게 하는 것이 사문의 법이니라.”
“선남자야,
만일 비구가 꿈에 음행을 하면 범계가 됩니까?”
“아니다.
음욕에 대하여 더럽다는 생각을 하고
잠깐이라도 깨끗하다는 생각을 내지 말아야 하며,
여인을 사랑하는 번뇌를 멀리 여읠 것이니,
만일 꿈에 음욕을 행하면 깨어서 뉘우칠 것이니라.
비구가 걸식하다가 공양을 받을 적에는
흉년에 아들의 고기를 먹는 생각을 하여야 하며
만일 음욕을 내었으면 빨리 버려야 하나니,
이런 법문은 부처님이 말한 경과 율이라,
마군의 말을 따르는 이는 마군의 권속이요,
부처님의 말을 따르는 이는 이름이 보살이니라.
만일 여래가 비구에게 한 다리를 항상 들고 있으며 잠자코 말하지 아니하며
못에 빠지며 불에 뛰어들며 높은 바위에서 떨어지며 험한 데를 피하지 아니하며
독약을 먹으며 밥을 썩히며 재나 먼지 위에 누우며 제 손발을 결박하고 중생을 살해하는 방법과 주문을 허락하였다 하며,
전다라들과 근이 없는 이,
근을 둘 가진 이,
근이 일정치 않은 이,
몸이 불구한 이들이 출가하여 수도하는 일을 여래가 허락하였다 하면 이는 마군의 말이며,
다섯 가지 우유와 유밀(油蜜)과 교사야(명주ㆍ비단)옷과 가죽신 따위를 여래가 먼저 허락하였고,
그 밖에 마하릉가(摩訶楞伽)를 입으며 모든 종자를 저축하며 풀이나 나무 따위도 목숨이 있다고 허락하였으며.
이런 말을 하고 열반에 들었다 하면 그런 말을 적은 경과 율은 마군의 말이니라.
나는 한 다리를 항상 들라고 허락하지 않았으며,
법을 위하여 가고 머물고 앉고 누움을 허락할 뿐이며,
독약을 먹고 밥을 끊고 다섯 가지 뜨거움으로 몸을 태우고
손발을 결박하고 중생을 살해하는 방법과 주문을 허락하지 않았으며
옥이나 상아로 가죽신을 단장하고 종자를 저축하고 초목도 목숨이 있고 마하릉가를 입으라고 허락하지 않았거늘,
만일 세존이 이런 말을 하였다고 하는 이는
외도의 권속이고 나의 제자가 아니니라.
나는 다만 다섯 가지 우유와 유밀 따위를 먹고 교사야옷을 입을 것을 허락하였을 뿐이요,
4대는 목숨이 없다고 말하였으니,
만일 경과 율에 이런 말을 적은 것은 부처님의 말이니,
부처님이 말한 것을 따르는 이는 나의 참 제자려니와
부처님의 말을 따르지 않는 이는 마군의 권속이며,
부처님의 경과 율을 따르는 이는 대보살인 줄을 알지니라.
선남자야,
마군의 말과 부처님의 말의 다른 것을 지금 그대에게 자세히 베풀어 말하였노라.”
“세존이시여,
제가 지금에야 마군의 말과 부처님의 말이 서로 다름을 알았으니
이것으로 부처님 법의 깊은 이치에 들어갈 수 있나이다.”
“그렇다. 선남자야,
그대가 이처럼 분명하게 분별하니,
매우 지혜롭다.”
10. 네 가지 진리[四諦品]
부처님께서 또 가섭보살에게 말씀하셨다.
“괴로운 것[苦]을 괴로움에 대한 성스러운 진리[苦聖諦]라 이름하지 않나니,
무슨 까닭이냐.
만일 괴로운 것을 괴로움에 대한 성스러운 진리라 한다면,
온갖 축생과 지옥 중생에게도 성스러운 진리가 있으리라.
▸ 선남자야,
어떤 사람이 여래의 깊고 깊은 경계가
항상 머물고 변치 않는 비밀한 법신임을 알지 못하고 밥 먹는 몸[食身]이요,
법신(法身)이 아니라 하면,
이는 여래의 도덕(道德)과 위력을 모르는 것이니,
그것을 괴로움이라 이름하느니라. ◂
어떤 사람이 여래의 깊고 깊은 경계가
항상 머물고 변치 않는 비밀한 법신임을 알지 못하고 밥 먹는 몸[食身]이요,
법신(法身)이 아니라 하면,
이는 여래의 도덕(道德)과 위력을 모르는 것이니,
그것을 괴로움이라 이름하느니라. ◂
왜냐 하면 알지 못하므로 법을 법이 아니라 보고,
법 아닌 것을 법이라고 보는 연고니,
이 사람은 나쁜 갈래[惡趣]에 떨어져 생사에 헤맬 것이며,
번뇌[結]가 많아져서 여러 가지 고뇌(苦惱) 받으려니와,
만일 여래가 항상 머물고 변하지 아니함을 알거나,
혹은 항상 머문다는 말을 들어 귀에 한번 지나가면 천상에 태어날 것이요,
뒤에 해탈을 얻을 때에 여래의 항상 머물고 변치 않는 이치를 증득할 것이며,
증득하고 말하기를 ‘내가 옛날에 이런 이치를 들었더니 이제 해탈을 얻어 증득하여 알았노라.
나는 당초에 이 이치를 몰라서 생사에 헤매면서 그지없이 돌아다녔더니,
오늘에야 참 지혜를 얻었노라’ 하면,
이렇게 아는 것은 참으로 괴로움을 닦는 것이어서 이익이 많으려니와,
만일 알지 못하면 아무리 부지런히 닦아도 이익이 없으리니,
이것은 괴로움을 아는 것이며 괴로움에 대한 성스러운 진리라 하겠지만,
만일 이렇게 닦지 못하면 괴로움이라고는 하려니와
괴로움에 대한 성스러운 진리는 아니니라.
괴로움의 발생에 대한 진리[苦集諦]란 것은
참 법 가운데서 참 지혜를 내지 못하고
종과 하인 따위의 부정한 것을 받으며,
잘못된 법을 바른 법이라 하고 바른 법을 끊어버리어 오래 머물지 못하게 하나니,
이런 인연으로 법의 성품을 알지 못하고,
알지 못하므로 생사에 헤매면서 많은 고통을 받고,
천상에 나거나 바른 해탈을 얻지 못하는 것이요,
만일 깊은 지혜가 있어 바른 법을 무너뜨리지 않으면
그 인연으로 천상에도 나고 바른 해탈을 얻으려니와,
만일 괴로움의 발생에 대한 성스러운 진리를 알지 못하여,
바른 법이 항상 머무는 것이 아니고 모두 없어지는 법이라 하면,
이 인연으로 한량없는 세월에 생사에 헤매면서 모든 고통을 받나니,
만일 법이 항상 머물고 변하지 않는 줄을 알면 이것은 괴로움의 발생을 아는 것이며,
괴로움의 발생에 대한 성스러운 진리라 하련만,
만일 이와 같이 닦지 못하면 괴로움의 발생이라고는 하려니와,
괴로움의 발생에 대한 성스러운 진리는 아니니라.
괴로움의 소멸에 이르는 진리[苦滅諦]란 것은
설사 공한 법을 많이 닦아도 그것은 선하지 못한 것이니,
왜냐 하면 온갖 법을 없애는 연고며
여래의 참 법장을 무너뜨리는 연고니라.
이렇게 닦는 것은 공한 법을 닦는 것이니라.
괴로움의 소멸을 닦는 것은
모든 외도들과는 어기는 것이거늘,
공한 법을 닦는 것으로 괴로움의 소멸에 대한 진리라 한다면,
모든 외도들은 공한 법을 닦으니
역시 괴로움의 소멸에 대한 진리가 있다고 하리라.
만일 말하기를 여래장(如來藏)이 있음을 보지 못하더라도
온갖 번뇌를 없애 버리면 들어갈 수가 있다 하면,
잠깐 동안 이 마음을 낸 인연으로 모든 법에 자재함을 얻으려니와,
만일 여래의 비밀한 법장은
내가 없고 공적하다고 닦는 이가 있으면,
이런 사람은 한량없는 세월에 생사 중에 헤매면서 고통을 받을 것이요,
그렇게 닦지 않는 이는 번뇌가 있더라도 빨리 멸할 수 있으리라.
왜냐 하면 여래의 비밀한 법장을 아는 까닭이니,
이것을 괴로움의 소멸에 대한 성스러운 진리라 이름할 것이며,
이렇게 괴로움의 소멸을 닦아 익히는 이는 나의 제자라 하려니와,
이렇게 닦지 못하면 공한 법을 닦는다 할지언정,
괴로움의 소멸에 대한 성스러운 진리는 아니니라.
괴로움의 소멸에 이르는 길에 대한 성스러운 진리[道聖諦]라 함은
불보ㆍ법보ㆍ승보와 바른 해탈을 말함이니,
어떤 중생이 뒤바뀐 마음으로 삼보와 바른 해탈은 없고,
생사에 헤매는 것이 환술과 같다고 말하며 그런 소견을 익히면,
그 인연으로 삼계에 헤매면서 오래오래 고통을 받으리라.
만일 바른 마음을 내어 부처님이 항상 머물러 변치 아니하며,
법보ㆍ승보와 바른 해탈도 그러함을 보면,
이 한 생각으로 말미암아 한량없는 세월에 자재한 과보를 마음대로 얻으리라.
왜냐 하면 내가 지난 옛적에 네 가지 뒤바뀐 마음으로
법 아닌 것을 법이라 여기고,
한량없는 나쁜 업의 과보를 받았거니와,
지금 그런 소견을 없애었으므로 부처님의 정각을 이루었으니,
이것을 괴로움의 소멸에 이르는 길에 대한 진리라 하느니라.
▸ 어떤 사람이 삼보가 무상하다 말하면서 그런 소견을 닦으면
그것은 허망하게 닦는 것이요,
괴로움의 소멸에 이르는 길에 대한 성스러운 진리가 아니며,
법이 항상 머문다고 닦는 이는 나의 제자니라. ◂
그것은 허망하게 닦는 것이요,
괴로움의 소멸에 이르는 길에 대한 성스러운 진리가 아니며,
법이 항상 머문다고 닦는 이는 나의 제자니라. ◂
진실한 소견으로 네 가지 성스러운 진리를 닦는 것을 4성제(聖諦)라 이름하느니라.”
가섭보살이 부처님께 아뢰었다.
“세존이시여,
지금에야 깊고 깊은 성인의 네 가지 성스러운 진리를 닦을 줄을 알았나이다.”
11. 네 가지 뒤바뀜[四倒品]
부처님께서 가섭보살에게 말씀하셨다.
“선남자야,
네 가지 뒤바뀜이라 함은
▸ 괴로움이 아닌데 괴롭다는 생각을 내는 것을 뒤바뀜이라 하나니, ◂
괴로움이 아니라는 것은 여래요,
괴롭다는 생각을 내는 것은
여래가 무상하고 변이(變異)한다는 것이니라.
여래가 무상하다고 말함은 큰 죄와 괴로움이요,
여래가 이 괴로운 몸을 버리고 열반에 드는 것이
마치 나무가 다하면 불이 꺼지는 것과 같다고 하면,
그것은 괴로움이 아닌데
괴롭다는 생각을 내는 것이므로 뒤바뀜이라 하느니라.
▸ 내가 만일 여래가 항상하다고 말하면
곧 나라는 소견[我見]이니,
나라는 소견으로는 한량없는 죄가 있는 것이므로,
여래가 무상하다고 말하여야 하며, ◂
곧 나라는 소견[我見]이니,
나라는 소견으로는 한량없는 죄가 있는 것이므로,
여래가 무상하다고 말하여야 하며, ◂
이렇게 말하면 내가 즐거움을 받는다 하거니와,
여래의 무상함이 괴로움이니,
만일 괴로움이라면 어떻게 즐거움을 내겠는가.
괴로운데 즐겁다는 생각을 냄으로써 뒤바뀜이라 하는 것이며,
즐거운데 괴롭다는 생각을 내는 것도 뒤바뀜이라 하나니,
즐겁다는 것은 여래요,
괴롭다는 것은 여래가 무상하다는 것이니라.
▸ 만일 여래가 무상하다고 말하면
이는 즐거운데 괴롭다는 생각을 내는 것이니라.
여래의 항상 머무는 것이 즐거운 것이거늘,
만일 내가 말하기를 여래가 항상하다고 한다면
어찌하여 열반에 들며,
만일 여래가 괴로움이 아니라면 어찌하여 몸을 버리고 열반을 취한다 하는가.
즐거운데 괴롭다는 생각을 냄으로써 뒤바뀜이라 하나니,
이것은 첫째 뒤바뀜이니라. ◂
이는 즐거운데 괴롭다는 생각을 내는 것이니라.
여래의 항상 머무는 것이 즐거운 것이거늘,
만일 내가 말하기를 여래가 항상하다고 한다면
어찌하여 열반에 들며,
만일 여래가 괴로움이 아니라면 어찌하여 몸을 버리고 열반을 취한다 하는가.
즐거운데 괴롭다는 생각을 냄으로써 뒤바뀜이라 하나니,
이것은 첫째 뒤바뀜이니라. ◂
▸ 무상한데 항상하다는 생각과
항상한데 무상하다는 생각을 하는 것을 뒤바뀜이라 하나니, ◂
항상한데 무상하다는 생각을 하는 것을 뒤바뀜이라 하나니, ◂
▸ 무상하다는 것은 공한 법을 닦지 않는 것이며,
공한 법을 닦지 아니하므로 목숨이 단명한 것이거늘,
만일 공적한 법을 닦지 아니하고 장수한다고 하면 이것이 뒤바뀜이라 하나니,
이것은 둘째 뒤바뀜이니라.◂
공한 법을 닦지 아니하므로 목숨이 단명한 것이거늘,
만일 공적한 법을 닦지 아니하고 장수한다고 하면 이것이 뒤바뀜이라 하나니,
이것은 둘째 뒤바뀜이니라.◂
▸ 내가 없는데 나라 생각하고,
나에 내가 없다고 생각하는 것을 뒤바뀜이라하나니, ◂
나에 내가 없다고 생각하는 것을 뒤바뀜이라하나니, ◂
세간 사람도 내가 있다 말하고
부처님 법에서도 내가 있다 말하거니와,
세상 사람은 비록 내가 있다 말하나 불성은 없다는 것이니
이것은 내가 없는데 나라는 생각을 내는 것이므로 뒤바뀜이라 하느니라.
부처님 법에서 내가 없다고 말하니,
이것은 나라는 데서 내가 없다는 생각을 내는 것이니라.
▸ 만일 말하기를,
부처님 법에는 결정코 내가 없으므로
여래가 제자들에게 명령하여 내가 없는 것을 닦으라 하셨다고 하므로
뒤바뀜이라 하나니,
이것은 셋째 뒤바뀜이니라.◂
부처님 법에는 결정코 내가 없으므로
여래가 제자들에게 명령하여 내가 없는 것을 닦으라 하셨다고 하므로
뒤바뀜이라 하나니,
이것은 셋째 뒤바뀜이니라.◂
▸ 깨끗한데 부정하다고 생각하고
부정한데 깨끗하다고 생각하는 것을 뒤바뀜이라 하나니, ◂
부정한데 깨끗하다고 생각하는 것을 뒤바뀜이라 하나니, ◂
깨끗하다 함은 여래는 항상 머무는 것이어서
잡식하는 몸이 아니고 번뇌 있는 몸이 아니고,
육신의 몸이 아니고 힘줄과 뼈로 얽힌 몸이 아니거늘,
▸ 만일 말하되
여래는 무상하여 잡식하는 몸이요 내지 힘줄과 뼈로 얽힌 몸이며,
법보ㆍ승보와 해탈도 없어지는 법이라 하면,
그것을 뒤바뀜이라 하고, ◂
여래는 무상하여 잡식하는 몸이요 내지 힘줄과 뼈로 얽힌 몸이며,
법보ㆍ승보와 해탈도 없어지는 법이라 하면,
그것을 뒤바뀜이라 하고, ◂
부정한데 깨끗하다 생각함을 뒤바뀌었다 함은
만일 나의 몸에는 한 가지도 부정한 것이 없나니
부정한 것이 없으므로 결정코 닦으리라.
청정한 곳에 들어갈 수 있거늘,
여래는 부정관(不淨觀)을 하셨으니,
이 말은 허망한 말이라고 말하면 이것을 뒤바뀌었다 하나니,
이것은 넷째 뒤바뀜이니라.”
“세존이시여,
저는 오늘부터 바른 소견을 얻었사오니,
세존이시여,
이전의 우리는 모두 잘못된 소견을 가진 사람이라 이름할 것입니다.”
○ [pt op tr]
○ 음악공양, 나무불, 나무법, 나무승 mus0fl--Karpatt - L'etiquette.lrc
● 무상, 고, 무아 등의 망상과 상락아정
불교의 법인설에 무상, 고, 무아, 열반적정, 공과 같은 가르침이 있다.
이 내용을 통해서 그것이 부처님 말씀인가를 판정한다.
그런데 나중에는 『대반열반경』 등에서 무상, 고, 무아 등과는 정반대되는 상락아정을 설한다.
그래서 일반적으로 혼동을 일으킨다.
그리고 심지어 이것은 부처님 말씀이 아니라고도 여기기 쉽다.
그래서 이 부분에 대해 이해를 잘 해야 한다.
이는 알고보면 망집 때문에 생기는 현상이다.
그 망집을 해결해주기 위해서 부처님이 무상, 고, 무아 등으로 일정한 내용을 위처럼 설한다.
그런데 이런 취지로 이처럼 설한 내용을 다시 망집으로 대하면 위와 같은 상태가 된다.
그래서 이 내용을 잘 이해해야 한다.
처음에는 일체가 무상하다. 일체가 고다. 일체가 무아다. 이런 내용부터 이해하기 힘들다.
그런데 이제 이 내용을 이해하면 다시 혼동을 일으킨다.
일체에 여래 부처님은 포함되지 않는가.
만일 포함되지 않는다면 처음부터 왜 일체가 무상하다고 설했는가.
그런데 포함된다면 왜 여래는 무상한 존재가 아니라고 하는가.
이런 식으로 오해를 불러 일으킨다.
이것이 망집현상에 바탕한 이해다.
그래서 이 문제를 처음부터 잘 살펴야 한다.
처음 이 논의에서 무엇을 A 라고 한다고 하자.
그것은 여래일 수도 있고 영희나 철수일수도 있다.
그리고 무정물인 물이나 바위일수도 있다.
그런 가운데 앞 내용을 살핀다.
그런데 이렇게 살피는 상태 자체가 망집상태다.
그 망집상태에서는 큰 병이 있다.
그런 것이 있다고 여기면서 그것을 문제삼는 상황이다.
그래서 자신이 살피는 것의 생멸도 그처럼 있다고 여긴다.
그리고 그런 망집에 바탕해 업을 행한다.
그렇게 되면 그로 인해 극심한 생사고통을 받는 상태에 처하게 된다.
그리고 생사현실의 문제는 바로 이 부분이다.
만일 그렇게 망집을 일으켜 업을 행해도 그런 상태에 처하지 않는다고 하자.
그렇다면 문제되지 않는다.
그런데 그렇지 않다.
그래서 이 생사고통을 해결하려면 그 상황에서 그것을 제거하던가.
아니면 먼저 앞 단계에서 그 근본원인을 제거해야 한다.
그런데 앞 단게에서 원인을 제거하는 것이 훨씬 낫다.
낭떨어지에서 떨어진 다음 다리나 허리를 수술해 고통을 없앨 수도 있다.
그런데 처음 그런 곳을 향해 걸어가지 않는 것이 훨씬 낫다.
그리고 그것보다 더 나은 것은 그렇게 업을 행하게 하는 망집을 없애는 것이 훨씬 낫다.
그런데 현실에서는 이 자체를 대단히 힘들게 여긴다.
그래서 처음 자신이 대하는 것이 왜 그런 것이 아닌가부터 잘 이해하지 못한다.
처음 일체가 무상하다. 고통이다. 무아다. 부정하다. 이런 내용을 제시하는 것은
생사고통을 제거하기 위함이다.
즉 현실에서 망상분별을 일으킨다.
이 상태에서 망상분별을 제거하는 것이 근본방책이다.
그런데 힘들다.
그렇다면 그 상태에서 일단 각 중생이 집착을 일으키지 않도록 하는 것이 차선책이다.
그래서 그가 있다고 여기는 것이 무상함을 강조하게 된다. => 그러니 그렇게 집착을 가질 필요가 없다.
또 마찬가지로 그것이 결국 고통으로 귀착됨을 강조하게 된다. => 그러니 그렇게 집착을 가질 필요가 없다.
또 알고보면 그것은 참된 진짜의 내용이 아님을 강조하게 된다. => 그러니 그렇게 집착을 가질 필요가 없다.
또 알고보면 그것은 깨끗한 것이 아니고 더러운 것임을 강조하게 된다. => 그러니 그렇게 집착을 가질 필요가 없다.
이런 내용이다.
그래서 이 내용을 통해 집착을 제거하면 이후 부작용이 제거된다.
그래서 근본적인 망상분별의 제거에 이르지 못해도 고통에서 일단 벗어날 수 있다.
그런데 이런 상태에서 좀 더 근본적으로 망상분별을 제거하지 못하면
위와 같은 가르침으로 오히려 또 다른 망집을 일으키게 된다.
그래서 이것도 문제가 된다.
병을 낫게 하려고 일단 약이나 진통제를 처방할 수 있다.
그런데 그 약이나 진통제가 근본적인 치료를 못할 수가 있다.
그런 경우 그 약이나 진통제를 장기적으로 복용하면 오히려 그 약으로 인해 부작용이 생길 수 있다.
그래서 처음 급한 문제를 해결한 상태에서는
다시 근본 치유를 하도록 노력해야 한다.
위 문제는 무슨 문제인가를 이해하려면
처음 그런 가르침이 시설된 사정부터 이해해야 한다.
망집 상태에 빠진 상대가 아무리 말을 해도 잘 이해하지 못한다.
그래서 그 상태에 일단 눈높이를 맞춘다.
그리고 우선 당장 번뇌 - 집착 => 업 => 생사고통 이 과정의 전개를 중지시키게 된다.
즉 그 상태에서 상대가 이해할 수 있는 형태로 내용을 제시해 위 단계의 전개를 중지시키는 것이다.
그래서 일단 그런 업이 중지된다고 하자.
그리고 과거의 업의 장애도 마찬가지로 수행을 통해 제거해야 한다.
그렇게 되면 일단 생사고통을 극심하게 받는 상태에서는 벗어나게 된다.
그런데 처음의 망집의 근본 치유가 되지 않으면 곤란하다.
그래서 이 상태에서 다시 근본 치유를 꾀하게 된다.
그것은 처음 상대가 이해하기 힘들어 했던 내용을 놓고
다시 깊게 관해서 그 사정을 이해시키는 노력이 된다.
이 문제는 결국 여래가 무엇인가하는 내용과 관련된다.
여래는 본래 생사현실에 생멸을 얻을 수 없다고 가르치는 분이다.
그런데 앞의 내용을 취한 경우는 여래의 열반을 맞이하면 달리 생각한다.
여래도 그렇게 죽는다. 그래서 없어진다.
이런 식으로 생각한다.
그것은 근본 망집이 제거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 문제를 처음부터 잘 살펴야 한다.
그것은 처음 꽃이나 바위가 무엇인가하는 주제도 마찬가지다.
앞에 화분이 있고 장미꽃이 피어 있다고 하자.
이 상황에서 장미꽃이 어디 있는가.
또 장미꽃은 무엇인가라고 묻든다고 하자.
현실에서 거의 99% 가 이 상황에서 자신의 눈으로 보는 화분의 꽃을 손가락으로 가리킨다.
이것이 망집 증상이다.
그리고 그렇게 망집을 일으킨 바탕에서는
부처님은 무엇인가 어디 있는가 라고 물을 때도 마찬가지로 반응한다.
또 자신은 무엇인가 자신은 무엇을 자신이라고 하는가라고 물을 때도 마찬가지로 반응한다.
일체가 무상하다. 이런 내용을 제시받을 때도 마찬가지다.
당신이 이해하는 일체는 무엇인가.
그 가운데 하나만이라도 가리켜보라고 요구받으면 앞과 똑같이 반응한다.
이것이 문제다.
그래서 이 내용을 이해하려면 이 현실 단면하나를 붙잡고
위 문제를 잘 살펴야 한다.
여래가 무엇인가.
또는 현실에서 스스로 생각하는 자신의 정체는 무엇인가.
이런 질문의 성격이 다 같다.
...
▸ 약이색견아, 이음성구아
시인행사도 불능견여래
若以色見我 以音聲求我
是人行邪道 不能見如來
겉모양에서 <나>를 찾거나
목소리로써 <나>를 구한다면
이 사람은 삿된 도를 행하는지라
끝끝내 여래를 보지 못하리.◂
시인행사도 불능견여래
若以色見我 以音聲求我
是人行邪道 不能見如來
겉모양에서 <나>를 찾거나
목소리로써 <나>를 구한다면
이 사람은 삿된 도를 행하는지라
끝끝내 여래를 보지 못하리.◂
...
『금강반야바라밀경』 1권(K0013 v5, p.983c05-c06)
이런 구절이 있다.
이 내용이 여기에 해당한다.
그런데 현실에서는 대부분 위와 같이 임한다.
그래서 여래가 무엇인지 알지 못하고 보지도 못한다.
그런 상태에서 자신이 영희나 철수라고 평소 여기고 대하는 내용처럼
여래를 이해한다.
또 마찬가지로 자신의 정체도 그렇게 이해한다.
다음은 약간 이상한 질문일 수 있다.
그런데 스스로 자신이라고 여기는 부분을 손가락으로 가리켜보시오.
라고 요청한다고 하자.
그러면 자신이 가리키는 부분들이 있다.
이는 색, 수, 상, 행, 식의 일부거나 그 전부일 수 있다.
현실에서 일으킨 망집상태가 이와 같다.
그래서 그런 부분을 손가락으로 가리킨다고 하자.
그런 경우는 또 여래가 무엇인가 하는 문제도 그렇게 이해한다.
그래서 이 근본문제가 해결되지 않으면 곤란하다.
그런데 현실에서 이 문제 해결이 쉽지 않다.
그런 가운데 그 상태를 전제로 일단 급한 불을 끄기 위해서
방편시설이 제시된 사정이 있다.
일단은 극심한 고통을 받는 상태에서는 벗어나야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적어도 인천을 오가는 상태가 되어야 그 다음이 가능하다.
그리고 그런 상태에서
여래나 자신의 본 정체가 무언가를 살펴야 한다.
그런 경우는 처음 무상이다 또는 영원하다. 이런 식으로
제시하는 내용에 어떤 문제가 본래 있는가부터 잘 살펴야 한다.
처음 영희가 어디 있는가 하는 질문을 한다고 하자.
이 때 평소 행하듯 손가락으로 거리에 서 있는 영희를 가리키기 쉽다.
자신은 어디 있는가의 질문도 이와 성격이 같다.
그리고 여래는 어디 있는가.
이 질문도 성격이 같다.
이 모든 질문에 위처럼 망집에 바탕해 임하는 자세부터 제거해야 한다.
이것이 현실에서 엉터리 망상분별로 현실에서 상을 취하는 상황이다.
그리고 이 제거를 위해서
망집 상태에서 일으키는 유무 분별의 극단을 모두 벗어나야 한다.
또 그렇게 하기 위해서
위와 같은 내용이 제시되는 사정이 있다.
처음에는 무상, 고, 무아, 부정의 가르침으로
일단 급한 불을 끈다.
그런데 그렇게 방치하면 그로 인해 또 다른 부작용을 갖게 된다.
그래서 다시 상 락 아 정의 가르침을 베풀게 된다.
그런데 최종적으로 이를 통해 망집을 제거하는 데 이르러야 한다.
이런 취지다.
● 여래와 자신의 본 정체 확인 문제
앞에서 무상-상, 고-락, 무아-아, 부정-정을 오락가락하는 내용을 보았다.
그런데 이 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하려면
현실의 한 단면에서 대하는 현실 내용의 정체를 먼저 잘 확인해야 한다.
이 문제를 처음 이렇게 살펴보자.
현실에서 영희가 어디 있는가라고 묻는다고 하자.
그러면 철수가 자신이 눈으로 보는 가운데 일정부분을 손가락으로 가리킨다.
그리고 이렇게 말하게 된다.
저기 영희가 있습니다.
스스로 자신은 무엇인가라고 물을 때도 이와 사정이 같다.
그리고 부처님 열반 당시에 부처님은 어디 있는가라고 물을 때도 사정이 이와 같다.
이 상황은 성격이 같다.
망집을 일으킨 상태에서는 예외없이 위와 같이 손가락으로 일정부분을 가리킨다.
이 상황에 기본 문제가 들어 있다.
그래서 이 현실 한 단면을 붙잡고 문제를 살펴야 한다.
이 내용 이해를 위해서
책상 위에 사과를 하나 올려 놓는다.
그 상황에서 사과를 손으로 붙잡고
눈으로 사과를 본다.
그리고 사과를 두드리면 소리를 듣는다.
그리고 사과를 코로 냄새 맡는다.
그리고 사과를 입으로 맛본다.
그리고 사과를 만지면서 촉감을 느낀다.
이 상황에서 누군가 사과가 어디 있는가라고 묻는다고 하자.
이 때 자신이 붙잡은 사과를 가리키던지 내밀게 된다.
바로 이 상황이 앞 상황과 성격이 같다.
따라서 이 상황에서 사과의 정체를 잘 파악하면
같은 방식으로 문제되는 자신이나 여래의 본 정체도 잘 확인할 수 있다.
사과를 위처럼 대하는 상황에서 문제를 살피자.
우선 자신이 사과를 한 손으로 붙잡고 있다고 하자.
그리고 사과는 이것이라고 다른 한손으로 가리킨다고 하자.
이 상황에서 그가 붙잡고 있다고 여기는 것,
그리고 손가락으로 가리킨 그 부분은 사과가 아니다.
그렇게 여기고 대하는 상황이 현실에서 상을 취하는 상태다.
그리고 그것이 망집 증상의 하나다.
따라서 이 문제를 잘 살펴야 한다.
그런데 이렇게 제시하면 다음 의문을 일으키게 된다.
그렇다고 하자.
그러면 그가 손가락으로 사과라고 가리킨 그 부분은 과연 그 정체가 무언가.
또 하나 의문이 있다.
그렇다면 자신이 사과라고 가리킬 부분은 무엇인가.
이런 의문을 동시에 함께 해결해야 한다.
거리에 지나가는 영희를 가리킬 때도 사정이 마찬가지다.
자신이나 여래의 정체를 파악할 때도 이와 사정이 마찬가지다.
그래서 사과를 하나 놓고 살피면서 이 문제를 다 함께 살펴야 한다.
자신이 사과라고 여기며 손가락으로 가리킨 부분은 사과가 아니다.
그리고 사과는 그런 부분에서 얻을 수 없다.
이 내용부터 먼저 잘 이해해야 한다.
이전에 경전 부분을 인용하려다가 전체 내용이 없어진 일이 있다.
그래서 조금 더 주의를 기울인다.
...
...
▸ 약이색견아, 이음성구아
시인행사도 불능견여래
若以色見我 以音聲求我
是人行邪道 不能見如來
겉모양에서 <나>를 찾거나
목소리로써 <나>를 구한다면
이 사람은 삿된 도를 행하는지라
끝끝내 여래를 보지 못하리.◂
시인행사도 불능견여래
若以色見我 以音聲求我
是人行邪道 不能見如來
겉모양에서 <나>를 찾거나
목소리로써 <나>를 구한다면
이 사람은 삿된 도를 행하는지라
끝끝내 여래를 보지 못하리.◂
...
『금강반야바라밀경』 1권(K0013 v5, p.983c05-c06)
이 문제도 마찬가지다.
나는 어디 있는가라고 할 때
자신이 눈으로 보는 색에서 그런 나를 찾는다.
또는 자신이 귀로 듣는 음성으로 찾는다.
이런 경우는 망상분별을 행하는 상태다.
그리고 그런 망상에 바탕해 현실에서 상(相)]을 취하는 상태다.
그런데 처음 그렇게 찾는 내용으로서 분별한 내용 자체 즉 상(想]은 관념영역에 있다.
그런데 그런 생각을 바탕으로 일정부분이 그런 내용이라고 가리킨다.
이 부분이 망상분별이다.
그가 가리키는 부분에는 그런 내용은 본래 얻을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와 같은 망상분별을 일으키면
그런 생각[상(想]에 바탕해서
일정 부분[상(相)]을 그런 내용이라고 여기면서 취하게 된다.
손가락으로 일정부분을 가리킨다는 행위가 의미하는 내용이 그것이다.
즉, 그는 그가 가리킨 그 부분을 마치 가위로 오리듯 오려낸다.
그리고 바로 그 부분이 지금 문제삼는 사과다. 영희다. 자신이다. 부처님이다.
이런 식으로 생각하고 그렇게 행한다.
그래서 망집 증상을 일으킨 상태에서 상을 그처럼 취한다.
그리고 그에 바탕해서 평소 분주하게 행한다.
상을 취하고 상에 머물고 상을 행한다.
그런 가운데 생사고통을 겪게 된다.
여기서 가장 근본적으로 처음 부분이 잘못이다.
그래서 그 사정을 이해해야 한다.
여기서 우선 다음 각 영역을 잘 구분해야 한다.
실상(實相 dharmatā ; dharma-svabhāva) - 상(相 Lakṣaṇa ) - 상(想 Saṃjña)
그리고 처음 문제를 대해야 한다.
그렇게 손가락으로 가리킨 그 부분이 사과나 영희나 자신이나 여래가 아니라고 하자.
그러면 그렇게 가리킨 그 부분의 본 정체는 무언가.
또 그 부분이 그런 것이 아니라고 하자.
그러면 자신이 찾는 사과나 영희 자신 또는 여래는 어디에 있는 무엇인가.
이 문제를 함께 해결해야 한다.
이 문제를 해결해야 생사로부터 근본적으로 벗어나게 된다.
그런데 이 해결이 생각처럼 쉽지 않다.
현실에서 어떤 이가 차를 운전하는 상태에 있다고 하자.
그런 상태에서 그에게 위 내용을 이해시키려 한다고 하자.
그러면 바로 사고가 발생할 수도 있다.
마찬가지로 현실에서 이 내용을 현실에 적용해서 임하려 한다고 하자.
거의 현실 활동 대부분을 할 수 없게 된다.
그런데 현실에서 그처럼 상을 취하고 임하면 수행자 자격이 박탈된다.
금강경에서 이런 사정을 제시한다.
...
▸ 만일 어떤 보살이 아상(我相)3)ㆍ인상(人相)4)ㆍ중생상(衆生相)5)ㆍ수자상(壽者相)6)이 있으면
보살이 아니기 때문이니라.”
如是滅度無量無數無邊衆生,實無衆生得滅度者。何以故?須菩提!
若菩薩有我相、人相、衆生相、壽者相,卽非菩薩。”◂
보살이 아니기 때문이니라.”
如是滅度無量無數無邊衆生,實無衆生得滅度者。何以故?須菩提!
若菩薩有我相、人相、衆生相、壽者相,卽非菩薩。”◂
...
그렇게 상을 취해 임하는 것 자체가 망집 현상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망집 때문에 그에 바탕해 생사고통을 겪기 때문이다.
그래서 수행자 자신이 그런 망집에 바탕하고 있다면 그는 수행자가 아니라는 뜻이다.
그런데 일단 일반의 경우를 놓고 살피면 대단히 어려운 요구사항이다.
그래서 이는 처음 수행을 시작하는 단계에서는 제시하기 힘든 내용들이다.
그렇지만, 일단 기본 수행을 통해 어느 정도 업의 장애를 제거한 상황에서는
이 내용을 이해하고 실천해야 한다.
그리고 그런 바탕에서 상락아정과 무상고무아부정 사이를 오가면서
혼동을 일으키면 안 된다.
● 자신 및 여래의 정체 확인
무상-고-무아-부정과 상락아정의 문제부터 시작해서
여래나 자신의 정체 확인문제를 함께 살펴보자.
그런데 이 문제를 살피는 상황을 비유로 먼저 이해해보자.
어떤 이가 대단히 좋아하고 집착하는 여인으로 영희라는 이가 있다고 하자.
그런데 이 여인이 다른 어떤 남자와 가깝게 지낸다.
그런 상태에서 지금 영희와 남자가 만나는 현장을 향해 가는 상황이라고 가정하자.
그래서 지금 대단히 빠른 속도를 차를 몰고 도로를 달리고 있다.
한마디로 철수가 탐욕과 분노를 바탕으로 임하는 상황이다.
그런데 이 생사현실에서 그런 내용 일체를 얻을 수 없다.
그런데도 생사현실에서 위와 같은 상황에 처한 철수는 대단한 고통을 느낀다.
더욱이 차를 빠른 속도로 몰고 나가는 상태는 더욱 위험하다.
그런데 그대로 방치하면 우선 도로에서 교통사고를 일으킬 가능성이 높다.
또 설령 그렇지 않아도 이후 영희나 다른 남자를 상대하면서
다양한 범죄 상황에 처하기 쉽다.
그래서 예를 들어 몸싸움을 벌인다면 이후 중환자실 아니면 교도소로 들어갈
가능성이 대단히 높다고 하자.
이제 이런 상황에서 철수가 겪을 고통을 미리 예방하려고 한다고 하자.
그런데 이를 위해 철수 옆에 앉아서 이 현실에 그런 내용을 본래 얻을 수 없다고 말한다고 하자.
그러면 그것이 효과를 발휘하지 못한다.
일단 철수가 그 말을 들어주지 않는다.
들으려고도 하지 않는다.
그리고 듣는다 해도 이해를 하지 못한다.
이런 문제가 있다.
그래서 철수 옆에서 일단 그렇게 내달리게 하는 배경 사정을 제거해주려고 하게 된다.
즉 이 상황에서 철수가 집착하는 그것이 하나같이
집착을 가질만한 내용이 아님을 부각시키는 것이다.
그런 일은 잠시 있다가 사라지는 일일 뿐이다.
그리고 그렇게 임하면 다양한 고통의 상황에 처한다.
그리고 알고보면 그렇게 집착하는 것은 가짜다.
즉 밤에 보는 가짜 달과 성격이 같다.
돗수 색안경을 쓰거가 벗으면 그 때마다 모습과 색이 달라지는 것이다.
진짜가 아니다.
그리고 아름답다고 여기는 상대도 알고보면 똥 오줌이 가득한 가죽과 성격이 같다.
이런 식으로 그 집착을 제거해주려고 노력하게 된다.
그래서 그것이 성공하면 일단 교통사고나 폭행 범죄가 예방된다.
그래서 일단은 자신의 집 아니면 좋은 휴식처 또는 좋은 전문 심리상담자가 있는 시설 좋은 병원
이런 곳으로 이끌어야 한다.
그런 상태가 되어야 비로소 근본 치유가 가능해진다.
그런데 생사현실 상황의 성격이 이와 같다.
대부분 쉼없이 분주하게 오가면서 이렇게 임하는 상황이다.
그래서 처음은 차선책으로 그렇게 일단 제시하는 사정이 있다.
그런데 본래는 그렇게 말할만한 내용 자체를 얻을 수 없다.
그래서 약간 여유가 있는 상황에서는 이 내용을 놓고
현실의 본 정체를 깊게 살펴서 깨달음을 얻어야 한다.
그래야 근본적으로 생사의 묶임에서 온전히 벗어날 수 있게 된다.
이런 문제다.
그런 가운데 현실에서 처음 문제삼은
사과나 영희 그리고 자신의 본 정체를 살펴야 한다.
처음 사과로 여기고 가리킨 그 부분은 사과가 아니다.
그렇다면 그것은 도대체 무엇인가.
또 사정이 그렇다면 자신이 사과라고 가리킬 부분은 그것이 아니고 도대체 무엇인가.
이 두 문제가 사과의 본 정체와 관련된다.
자신이나 여래의 본 정체도 마찬가지다.
오늘날 부처님은 찾기 힘들다.
그렇지만, 부처님이 설법을 하거나 열반에 임할 당시는 그렇지 않았다.
그 경우는 현실에서 영희를 놓고 영희의 본 정체는 무언가를 문제삼는 것과 성격이 비슷하다.
그래서 이를 함께 잘 이해해야 한다.
우선 현실에서 손에 사과를 쥐고 만지면서 이것이 사과라고 가리키는 상황을 놓고 살펴보자.
그것은 사과가 아니다.
그런데 현실에서 거의 99% 가 그것이 사과라고 여긴다.
그래서 그 사과를 누군가 뺏어가면 앞처럼 행동하게끔 된다.
이것이 근본 문제다.
그래서 이 사과를 놓고 잘 살펴야 한다.
결론만 말하면 그것은 자신 마음안에 얻어진 마음내용이다.
그 상황에서 자신이 사과를 영희에게 건넨다고 하자.
그러면 영희도 증상이 비슷하다.
영희도 그 사과를 받고 그것이 사과라고 여긴다.
그리고 그것을 먹으면 맛이 있다거나 배가 부른다고 여긴다.
그런데 그 상황에서 자신이 건넸다고 여기는 그 부분은 일단 그런 사과가 아니다.
정확히 말하면 철수나 영희 각각의 마음 내용이다.
그런데 그 현실에서 철수가 영희에게 사과를 건네는 상황도 사실은 그렇지 않다.
즉, 철수가 철수의 마음 내용을 그처럼 떼어서 영희에게 건네주는 것은 또 아니다.
영희도 마찬가지다.
다른 사람 즉 철수의 마음안 내용을 그처럼 떼어서 받는 것이 아니다.
그렇지만, 그 상황을 영희나 철수가 그렇게 파악하지 못한다.
이 상황을 일단 그림으로 살펴보자.
https://buddhism007.tistory.com/228#056 ☞○ 마음과 색의 의미에 관한 논의
https://thegood007.tistory.com/1172 ☞○ 진리에 관한 수많은 오류와 착각
03fl--ghpt/r1030.htm
[img2] [그림] 08pfl--image/진리의오류55.jpg
과거에 대단히 많이 반복한 내용이다.
그림에서 2 가 철수라고 하자.
4 를 사과라고 일단 가정해보자.
그리고 철수가 4 를 붙잡는 상황을 놓고 살펴보자.
그 상황에서 철수는 위 그림에서 2^ 가 4^ 를 붙잡는 모습을 보게 된다.
그리고 그 상황에서 동시에 부대상황으로 촉감을 얻게 된다.
그래서 철수는 마치 4^를 대상으로 2^ 라는 부분이 닿아서 촉감을 얻는 것처럼 잘못 여기게 된다.
그리고 4^ 를 사과라고 잘못 여기면서 대하게 된다.
그런데 이 상황을 1 이 지켜본다고 하자.
그러면 그것이 사실이 아님을 쉽게 이해할 수 있다.
그 상황에 철수의 눈을 손으로 가리거나 떼거나 하면
더욱더 쉽게 그 사정을 이해하기 쉽다.
그런데 이 문제가 조금 더 복잡하다.
이 상황에서 철수 2가 눈을 떠 대하면 마음안 내용으로 5^ 내용 전체를 얻는다.
그리고 그 일정부분을 사과라고 가리키는 상태가 된다.
그런데 위 상황에서 1 이 보는 4라는 내용과
철수가 보는 4^ 라는 내용은 서로 일치하지 않는다.
그런데 여기에 다시 혼동의 원인이 있다
이 모습을 옆에서 관찰하는 갑수는
2 라는 철수가 4 라는 사과를 대상으로 만져서 촉감을 얻는다고 잘못 여긴다.
그런데 그런 것도 사실이 아니다.
그 내용은 갑수의 마음 내용일 뿐이다.
그래서 이 문제를 먼저 잘 살펴야 한다.
그래서 현실에서 한 주체가 사과나 영희라고 여기고 대하는 부분의 본 정체가 무언가부터
잘 확인해야 한다.
그것이 여래의 정체를 확인할 경우에도 기본적으로 문제된다.
그런데 여래의 정체 확인은 또 조금 성격이 다르다.
그래서 현실에서 무엇을 여래라고 하는가부터 먼저 검토해야 한다.
현실에는 옆에 개나 고양이 소 말도 있고
그리고 영희와 철수도 있다.
또 아예 글자도 모르는 갓난아이도 있다.
그런 가운데 어떤 특성을 갖는 이를 부처님이나 여래라고 하는가부터
먼저 살펴야 한다.
이 문제는 간단한 문제가 아니다.
다만 기존에 대단히 많이 반복해 살폈다.
여기서는 그 내용을 짧게 요약해 제시하고 마치기로 한다.
현실에서 철수가 사과를 손에 쥐고 영희에게 건넨다고 하자.
철수가 사과를 손에 댈 때마다 촉감을 느낀다.
그리고 철수가 영희에게 사과를 건넬 때마다 영희도 마찬가지로 촉감을 느낀다.
이 실험을 지금 100 번 행한다고 하자.
그러면 예외없이 100 번 전부 다 동일한 경험을 할 것이다.
그것은 10 년전을 놓고 보아도 마찬가지다.
10 년후도 마찬가지다.
오늘 사과를 책상위에 놓았다고 하자.
그러면 별일 없으면 내일 다시 책상 위를 보면 사과가 그대로 있을 것이다.
현실 사정이 이렇다.
사정이 이렇기 때문에 현실에서 철수나 영희는 거의 99%
자신이 대하는 이들 내용이 대단히 실답다고 잘못 여기게끔 된다.
그리고 거꾸로 왜 자신이 만진 그 부분이 사과가 아니라고 하는가 의아하게 여기게 된다.
그런데 영희나 철수를 포함해 어떤 주체가 생사고통을 겪는 상황은
바로 여기에 바탕한다.
그런데 경전은 그런 현실 상황에 그가 문제삼는 그런 내용이 본래
거기에 얻을 수 없음을 제시한다.
이 두 입장이 극단적으로 상반한다.
경전의 입장을 취하면 현실의 생사고통은 본래 얻을 수 없다.
그래서 문제삼을 내용 자체를 얻을 수 없다.
그런데 문제는 생사현실 안에서 거의 대부분 그렇지 않다.
그리고 오히려 그가 대하는 현실 내용이 실답게 그처럼 있다고 여기는 상태다.
여래란 존재는 이런 생사현실에서
본 사정이 그렇지 않음을 깨달은 이다.
그리고 그에 바탕해 고통을 겪는 중생을 제도하기 위해 활동하는 이다.
그래서 여래의 입장을 100% 취하면
생사현실에는 중생들이 문제삼는 내용 자체를 얻을 수 없다.
그리고 그 생멸이나 생사고통도 역시 그러하다.
그런데 생사현실에 임하는 각 중생의 상태를 100% 취하면 사정이 정반대다.
그렇게 생사고통을 대단히 실답게 겪는다.
그래서 그 입장을 받아들이면
생사현실에는 그런 생사고통을 실답게 겪는 주체도 있고
또 사정이 그렇지 않다고 가르치는 부처님도 있다.
이 두 입장을 잘 살펴야 한다.
부처님도 사정이 마찬가지다.
부처님이 중생을 제도한다고 할 경우에는 바로 이런 상태의 중생을 제도하고자 하는 것이다.
부처님의 본 입장은 다음과 같다.
현실에서 어떤 이가 사과라고 여기는 그 부분은 그 주체의 마음안 내용이다.
그리고 엄격하게 보면 그가 손가락으로 사과라고 가리키는 부분은
그 마음안 내용 가운데 감각기관을 통해 얻는 감각현실이다.
시각이거나 청각이거나 후각이거나 미각이거나 촉각이다.
그런데 그런 내용을 얻고 그가 일으키는 분별 생각은 관념내용이다.
이 둘은 서로 그 성격이나 내용이 다르다. 엉뚱하다.
다만 그런 감각현실을 얻는 상태에서 그런 분별을 일으킨 것 뿐이다.
자신이 눈을 감고 사과를 떠올린다고 하자.
그 상황에서 사과란 생각을 할 수 있다.
그런데 그 상황에서 직전에 눈을 뜨고 본 사과 모습이 단 하나라도 얻어지는가를 살펴보자.
그렇지 않다.
다시 눈을 떠 보자.
그러면 생생하게 사과 모습을 본다.
또 촉감도 얻을 수 있다.
이 내용은 앞 순간에 마음으로 떠올린 그 사과가 결코 아니다.
그런데 그런 시각이나 촉각을 얻는 상황에서 그런 분별을 일으킨다.
그리고 이 둘을 함께 얻는 상황에서 그가 망상분별을 다음처럼 행한다.
즉 그런 감각현실의 일정부분에는 그가 생각하는 그런 내용이 '있다.''
또 그런 사정으로 그 감각현실 그 부분은 바로 그런 내용'이다'
이렇게 잘못 여긴다.
그런데 정작 그 부분에는 그런 내용을 얻을 수 없다.
또 그 부분은 그런 내용이 아니다.
사정이 그런데도 그런 내용이 없고 아닌 그 부분을 대하면서
그런 내용이라고 여긴다.
그런 사정때문에 망상분별이라고 칭한다.
치솔에는 영희가 없다.
그런데 망상증상을 일으킨 이는 그 치솔만 대하면 그 치솔이 영희라고 여긴다고 하자.
그러면 망상 환자다.
이 경우와 사정이 같다. .
바나나는 길다 길은 것 기차 이렇게 생각을 연이어 떠올릴 수 있다.
그래서 바나나를 보고 기차란 생각을 떠올린다고 하자.
그렇다고 해서 바나나는 기차가 아니다.
바나나에 기차가 있는 것도 아니다.
그런데 눈을 떠서 어떤 색상(모습)을 본다고 하자.
그 상황에서 일정부분을 대하는 가운데 그 부분은 영희라고 생각한다고 하자.
그러면 이 경우 그는 그 부분에 영희가 있다고 여긴다.
또 그 부분은 영희다라고 여긴다.
그 상황에서 영희가 어디 있는가라고 묻는다고 하자.
그러면 그는 손가락으로 그 부분을 가리킨다.
이 증상이 바로 망상 분별 현상이다.
앞에 제시한 것과 성격이 같다. 잘못된 분별이다.
그런데 욕계 생사현실은 바로 이와 같은 상태를 바탕으로 일체가 진행된다.
그리고 그 안에서 생사고통을 겪는다.
그래서 이를 해결하려면 근본적으로 이 망상분별을 기본적으로 제거해야 한다.
그래서 그렇게 현실에서 상을 취하고 임하면 곤란하다.
그런데 이미 보았듯 그 해결이 쉽지 않다.
밤에 눈을 떠서 하늘을 보면 별과 달이 보인다고 하자.
이 상황도 마찬가지다.
그렇게 보이는 그 부분이 별과 달이 아니라고 이해하는 이가 현실에 과연 얼마나 되는가.
천문학자나 과학자를 포함해 일반인 대부분이 그것은 진짜 별과 달이라고 여긴다.
경전 입장과 완전히 정반대다.
그리고 이것이 문제다.
이 부분에서 가장 기초적으로 자신이 영희나 철수라고 여기는 그 부분
또는 별이나 달이라고 여기고 대하는 그 부분이
자신의 마음안 내용임을 먼저 확인해야 한다.
돗수가 들어간 안경을 구해서 실험해본다고 하자.
자신이 그 안경을 쓰고 벗을 때마다 그 크기나 모습 색상이 달라진다.
그 상황에서 그렇게 되지 않는 별개의 영희나 철수 달이나 별이 있다면 찾아내야 한다.
그런 것이 그 상황에 없다.
만일 자신이 안경하나를 쓰고 벗어서 정말 그 모습과 색상이 달라진다면
대단한 일이다. 그런데 그렇지 않다.
자신이 그렇게 영희나 달 별로 여기고 대하는 그 내용은 진짜가 아니다.
그 상황에서 옆에 있는 철수에게 확인해도 마찬가지다.
자신이 안경을 쓰고 벗음에 따라 모습이나 색상이 달라진다고 해서
철수가 보는 달도 그렇게 되는 것이 아니다.
그래서 자신이 평소 대하는 영희나 달을 포함해 세상 일체가 그렇다.
그래서 그 일체는 마음안에 얻는 마음 내용일 뿐이다.
이런 사정을 먼저 이해하는 것이 기본이다.
그리고 그 이후 본 바탕의 내용은 그러면 무엇인가를 다시 살펴야 한다.
이 사정은 침대에서 바다나 황금꿈을 꾸는 상황과 성격이 같다.
현실에서 자신이 평소 영희나 달로 여기고 대하는 내용이 마음내용임을 이해한다고 하자.
그런 경우 그런 마음 밖에는 자신이 본 그런 내용과 일치한 내용이 있다고 또 다시 잘못 여기게끔 된다.
그렇게 잘못 여기게 되는 사정이 있다.
이미 그 사정을 살폈다.
100 번 사과를 영희에게 건넨다고 하자.
그러면 100 번 모두 영희도 비슷한 경험을 보고 한다.
이런 사정으로 현실에서 얻는 내용은 대단히 실답다고 여기게 된다.
그런데 사정이 그렇지 않다.
처음 사과를 하나 놓고 실험했다.
자신이 사과를 보고 두드려 소리를 듣고 냄새맡고 맛보고 만졌다.
이 상황에서 자신은 하나의 사과를 그렇게 대한 것이라고 여긴다.
그런데 이 각 내용을 놓고 서로 비교해 본다고 하자.
서로 대단히 엉뚱하다.
그리고 이런 상태에서 그는 그가 대한 내용이 '사과'라고 분별한다.
그런 이 분별내용은 앞에 나열한 여러 감각현실과도 대단히 엉뚱하다.
이 각 내용을 각기 놓고 비교하면 그 사정을 쉽게 이해한다.
현실에서 얻는 어느 내용도 각 영역에서 서로 일치하지 않는다.
이 상황은 마치 침대에서 누어 꾼 바다나 황금꿈과의 관계와 같다.
꿈에서 꾼 바다나 황금을 침대에서 찾아보아도 얻을 수 없다.
그런데 이상하게 침대에 누어 그런 꿈을 꾼다.
이 상황과 성격이 같다.
실상이 공하다는 것을 이해하는 것은 현실의 정체가 이런 성격이라는 사정을 이해하는데 필요하다.
○ 유무의 극단을 떠남
○ 일체가 차별없이 공함 그 자체와 그 사정을 이해함의 차이
바위나 꽃이나 소 돼지나 여래가 다 차별없이 공하다. - 그러나 공한 그 자체만으로 소나 돼재를 여래라고 하지는 않는다.
꽃이 공하다. - 그렇다고 꽃을 여래라고 하지는 않는다.
여래는 공하다. - 공한 것은 모두 여래라고 하지는 않는다.
○ 일체가 차별없이 공함을 깨닫고 망집을 제거하여 해탈을 이룬 상태와 중생을 제도하려 생사현실에 드는 상태
○ 법신을 증득한 여래와 회신멸지에 이른 아라한의 차이
공하다는 측면에서는 일체가 다 차별없다.
그런 사정을 깨닫고 생사의 묶임에서 벗어나 해탈했다는 점에서는 아라한과 부처가 차별이 없다.
그러나 여래와 부처는 중생을 제도하고 법신을 증득했는가의 차별이 있다.
○ 부처님이라고 일반이 여기도 대하는 색상과 법신의 관계
법신을 증득한 여래의 정체
있음의 극단 - 무언가가 있다고 할 때, 그것이 참된 진짜의 내용으로 영원하게 있는 것이라고 치우친 경해
없음의 극단 - 무언가 실답게 있는 것이 아니라고 할 때, 그것이 아주 전혀 없는 것이라고 치우친 견해
이 양 극단을 떠나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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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fgd1991
◈Lab value 불기2564/11/16 |
○ 2020_0930_143925_nik_CT9.jpg ○ [pt op tr] 예술작품 사진 공양, 나무불, 나무법, 나무승 Theophile Steinlen-les-trois-compagnons-1915 ○ [pt op tr] 꽃 공양, 나무불, 나무법, 나무승 Rose_Juliette_Greco_20070601_1 ○ [pt op tr] 아름다운 사진 공양, 나무불, 나무법, 나무승 Vallee-brouillard ♡만호사 ○ 아름다운 풍경사진 공양, 나무불, 나무법, 나무승 With the image 'Google Earth & Map data: Google, DigitalGlobe' ○상세정보=> https://buddhism007.tistory.com/3930 ○ 음악공양, 나무불, 나무법, 나무승 mus0fl--Jacques Dutronc - L'espace D'une Fille.lrc Jacques Dutronc - L'espace D'une Fille ♥단상♥정없는 깔끔모드로 변신- 일반적으로 깔끔하면 정이 없다고 말한다. 깔끔하지 않지만 깔끔한 척 하는 경우는 더 심하다 그런데 깔끔하면 외관상 보기는 좋다. 그런데 마음은 그 자신부터 편하지 않게 되기 쉽다. 조금 무언가 흘려도 무방해야 마음이 편해진다. 그런데 그렇지 않아야 깔끔해진다. 그래서 깔끔해지려면 잔신경을 많이 기울어야 한다. 그래서 불편해진다. 지나치면 신체 안 점막들이 스트레스로 궤양이 발생하기도 쉽다. 연구하는 수행자 입장에서도 청결이 중요하다. 그런데 청결해서 깔끔하게 임하는 것보다 우선되는 일이 많다. 더 중요하게 먼저 해결할 일이 많다. 예를 들어 외관보다 마음안을 청결하게 유지하는 일 등이 그것이다. 그것을 먼저 해결하려다 보면 외관을 깔끔하게 유지하는 일은 뒤로 미루어 놓게 된다. 그것은 그보다는 덜 중요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렇게 지내다보면 주변에서 무시당한다. 조금 심하면 따돌림과 배척을 당한다. 그리고 경전에도 그런 일화가 많이 나온다. 가섭존자가 두타행을 행한다. 예를 들어 숲에서 옷 세벌로 지내며 수행을 한다. 그러다가 부처님을 뵈러 온다. 그러니 출가한지 얼마되지 않은 스님들을 비롯해 다수가 가섭존자를 잘 몰라보고 무시한다. 그런데 부처님이 이런 사정을 알아채고 자신의 자리를 반절 나누어 앉힌다. 그러자 나머지 제자들도 다 함께 가섭존자를 존중하게 되었다는 일화가 있다. 성경에도 비슷한 내용이 나온다. 중요한 이야기를 하는데 듣지는 않고 다른 일에 분주하다. 그런데 그렇게 식사나 청소에 열중하는 것보다는 중요한 것에 대한 내용을 듣고 실천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 어제 숙왕화님이 나타나 연구실에서 썩은 냄새가 난다고 했다 그래서 냄새의 원인을 열심히 찾으면서 청소를 했다. 냄새의 진원지로 다음을 혐의를 둔다. 오래된 양말 조각. 오래된 문서 오래동안 걸어두고 빨지 않은 커텐 아니면 오래된 의류 그래서 열심히 정화작업을 했다. 최종적으로 숙와화님에게 검사를 맡았다. 청소를 다 마치니 냄새가 안 나고 괜찮다고 한다. 그런데 한번 청소를 시작하니 끝이 없다. 중국 시에도 비슷한 심정을 읊은 시가 있다. 목욕을 하고 나면 멀쩡한 갓도 다시 털게 된다. 이런 내용이다. 그러다가 건전지도 남은 전류를 일일히 체크해서 사용못할 건전지까지 분류해 버리게 된다. 그런데 이런 일은 정말 중요한 일은 아니다. 여하튼 모처럼 깔끔모드로 변신하게 되었다. 깔끔모드를 계속 유지하면 조금 정이 떨어지게 된다. 누군가 휴지를 함부로 버린다. 그러면 바로 잔소리하게 된다. 그리고 그런 바탕에서 모기들도 모두 체포해 방생조치하게 되었다. 그간 그런대로 참고 지냈었다. 그런데 이번 기회에 모기를 유리컵으로 하나하나 체포해 방생 중이다. 일일히 세지는 않지만, 대단히 수가 많다. 이제 다 체포해 방생했겠지라고 생각하면 또 보인다. 그런데 한번 체포할 때마다 문을 열고 밖에 날려 보낸다. 그러다 보니 힘들다. 그래서 잠수함 도크식 방생법을 고안했다. 유리컵 2 개를 가지고 한번 체포하면 일단 다른 유리컵으로 옮겨 놓는 방식이다. 그래서 한번에 5,6 마리의 모기를 함께 모아서 방생조치하는 방식이다. 모기 습성인지 몰라도 두 컵을 놓고 두드리면 아래쪽으로 간다. 열심히 방생하고 다시 보면 또 있다. 그래서 또 체포해 방생라게 된다. 그런데 그런 노력을 하는 만큼 연구가 뒤로 밀린다. 그런데 그간 모기가 쉴 때 달려 들었던 것은 쉬지 말고 조금 더 노력하라고 도움을 준 것이기도 했다. 그래서 연구에 또 지장이 발생할 수 있다. 믿거나 말거나 이야기 속에서는 자신의 피를 빨던 모기나 이와 같은 흡혈귀가 나중에 자신의 아리따운 부인이나 애첩이 된다는 이야기가 있다. 자신이 피를 공급해 식량과 생식 수단을 베풀어주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어떤 이가 중간에 너무 가려워서 손으로 이를 잡아 튕겨 날려 보냈다고 한다. 그것이 마침 옆에 있던 개로 옮겨 갔다고 한다. 그런데 나중에 세월이 지나 한 높은 관리가 애첩이 있었다고 한다. 그러다가 어느날 집에 장삿꾼이 방문했는데 곧바로 애첩이 그 장삿꾼에 정을 느껴 도망가게 되었다고 한다. 그래서 그 뒤로 열심히 찾아 다녔는데 그렇게 된 내력을 나중에 알고보니 그런 사정이었다는 이야기다. 그런데 오늘까지 모기를 한 50 마리 정도 방생조치를 취하다보니 그런 이야기가 떠오른다. 한편으로 아쉬운 점도 있다. 그러나 생각해보면 대단히 바람직한 상태이기도 하다. 글을 적다가 인용을 붙이는 것처럼 조금 복잡한 작업을 하면 글이 갑자기 없어지는 경험을 하게 된다. 그러면 힘이 없어진다. 그래서 다시 글 쓰는 것을 일단 포기하기 쉽다. 최근에 그런 경험을 한번 했다. 상당히 중요한 내용이라고 본다. 그런데 한편 생각해보면 과거에 비슷한 내용을 많이 반복했다. 그런데 여하튼 다시 쓸 기력을 잃어 버렸다. 최근에 prince 님과 등산을 갔다가 비슷한 경험을 또 했다. 내러오는 길에 어느 지점에 등산스틱을 놓고 온 것을 알았다. 그것을 찾으려면 다시 올라갔다가 내려와야 한다. 그런데 prince 님은 그냥 놓고 가자고 극구 반대했다. 그래도 본인이 시간도 많이 남았고 체력 관리 차원에서 다시 올라가서 찾아가지고 내려오자고 했다. prince 님은 영 못 마땅하지만 어쩔 수 없이 동행을 했다. 그런데 그 뒤로 prince 님이 상당히 힘들어 하는 한편 반응도 거칠게 변했다. 그 사정은 마찬가지다. 한번 갔던 길을 다시 되돌아가서 또 한번 수고를 해야 한다는 성격이 마찬가지다. 대단한 짜증을 불러 일으키는 성격의 일이다. 모기를 그렇게 많이 방생했는데도 여전히 글 쓰는 지금 모니터 앞에 출몰한다. 어이가 없어서 웃음이 나온다. |
문서정보 or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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ॐ मणि पद्मे 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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