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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진리와실천

잡아함경-0001 본문

아함부(1-151)

잡아함경-0001

Prajna Puntarika 진리와 가치를 고루고루 2010.11.25 10:20




『잡아함경』(신수, 2. p.001a)

1. 무상경



● 한글대장경 해당부분 열람I
● 한글대장경 해당부분 열람II
○ 통합대장경 사이트

※ 이하 부분은 위 대장경 부분에 대해
참조자료를 붙여 자유롭게 연구하는 내용을 적는 공간입니다.
대장경 열람은 위 부분을 참조해주십시오.



● 잡아함경-00001





[그림] 08pfl--image\Pitaka-K0650V18P0707a.jpg




<0001>

K0650V18P0707a03L; 如是我聞一時佛住ㅒ舍衛國祇樹給

K0650V18P0707a04L; 孤獨園爾時世尊告諸比丘當觀色

K0650V18P0707a05L; 無常如是觀者則爲正觀正觀者則

K0650V18P0707a06L; 生厭離厭離者喜貪盡喜貪盡者說

K0650V18P0707a07L; 心解脫如是觀受想行識無常如是

K0650V18P0707a08L; 觀者則爲正觀正觀者則生厭離厭

K0650V18P0707a09L; 離者喜貪盡喜貪盡者說心解脫如

K0650V18P0707a10L; 是比丘心解脫者若欲自證則能自

K0650V18P0707a11L; 證我生已盡梵行已立所作已作自

K0650V18P0707a12L; 知不受後有如觀無常苦空非我亦

K0650V18P0707a13L; 復如是時諸比丘聞佛所說歡喜奉行



『잡아함경』(신수, 2. p.001a)

1. 무상경

신수장경 : 2-1a

한글장경 : 잡-1-1

남전장경 : s.22.12~14

팔리어본, 산스크리트본, 독일어본, 영역본, 참조 http://suttacentral.net/


#0001. 무상경(無常經)1) 


이와 같이 나는 들었다.


어느 때 부처님께서 

사위국(舍衛國) 기수급고독원(祇樹給孤獨園)2)에 계셨다. 


그 때 세존께서 

모든 비구들에게 말씀하셨다.


"색(色)은 

무상하다고 관찰하라. 

이렇게 관찰하면 

그것은 

바른 관찰[正觀]이니라. 


바르게 관찰하면 

곧 싫어하여 떠날 마음이 생기고, 

싫어하여 떠날 마음이 생기면 

기뻐하고 탐하는 마음이 없어지며, 

기뻐하고 탐하는 마음이 없어지면 

이것을 심해탈(心解脫)이라 하느니라. 


이와 같이 

수(受)·상(想)·행(行)·식(識)도 

또한 무상하다고 관찰하라. 


이렇게 관찰하면 

그것은 바른 관찰이니라. 


바르게 관찰하면 

싫어하여 떠날 마음이 생기고, 

싫어하여 떠날 마음이 생기면 

기뻐하고 탐하는 마음이 없어지며, 

기뻐하고 탐하는 마음이 없어지면 

이것을 심해탈이라 하느니라. 


이와 같이 비구들아, 

마음이 해탈한 사람은 

만일 스스로 증득하고자 하면

곧 스스로 증득할 수 있으니, 


이른바 

'나의 생은 이미 다하고 

범행은 이미 섰으며, 

할 일은 이미 마쳐 

후세의 몸을 받지 않는다'고 

스스로 아느니라. 


'무상하다[無常]'고 관찰한 것과 같이, 

'그것들은 괴로움[苦]이요, 

공하며[空], 

나가 아니다[非我]'3)라고 관찰하는 것도 

또한 그와 같으니라." 


그 때 모든 비구들은 

부처님의 말씀을 듣고 

기뻐하며 받들어 행하였다. 



1) 고려대장경에는 경명(經名)이 없다. 

편의상 경 안에 있는 온타남과 경의 내용을 의거하여 경명을 붙였다. 


2) 부처님께서 머무셨던 도량의 하나이다. 


수달다(須達多) 장자가 기타(祇陀) 

태자(太子)에게 토지를 사서 

정사를 지어 부처님께 보시하자, 


기타 태자는 

그 동산의 숲을 부처님께 보시하였다. 


수달다 장자는 

항상 가난하고 외롭게 사는 이들에게 

보시하기를 좋아하였으므로 

급고독 장자라 불렸다. 


따라서 두 사람의 이름을 따서 

기수급고독원이라 하였다. 


3) 7번째 소경인 어색희락경 말미의 

올타남(嗢拕南)에 의하면 

5온의 고(苦)·공(空)·비아(非我)를 관찰하는 것이 

낱낱의 소경으로 분류되어 있다. 

 


s.22.12~14


http://suttacentral.net/sn22.12/pi#12-14

12. Aniccasutta


MS SC 


Evaṃ me sutaṃ—​   sāvatthiyaṃ. 

Tatra kho … pe … 

“rūpaṃ, bhikkhave, aniccaṃ, vedanā aniccā, saññā aniccā, saṅkhārā aniccā, viññāṇaṃ aniccaṃ. 

Evaṃ passaṃ, bhikkhave, sutavā ariyasāvako 

rūpasmimpi nibbindati, vedanāyapi nibbindati, saññāyapi nibbindati, 

saṅkhāresupi nibbindati, viññāṇasmimpi nibbindati. 

Nibbindaṃ virajjati; virāgā vimuccati. 

Vimuttasmiṃ vimuttamiti ñāṇaṃ hoti. 

‘Khīṇā jāti, vusitaṃ brahmacariyaṃ, 

kataṃ karaṇīyaṃ, 

nāparaṃ itthattāyā’ti pajānātī”ti.

 

Paṭhamaṃ



http://suttacentral.net/sn22.12/en


Thus have I heard. At Savatthi…. There the Blessed One said this:

 

“SC Bhikkhus, 

form is impermanent, 

feeling is impermanent, 

perception is impermanent, 

volitional formations are impermanent, 

consciousness is impermanent. 

Seeing thus, bhikkhus, the instructed noble disciple experiences revulsion 

towards form, revulsion towards feeling, revulsion towards perception, 

revulsion towards volitional formations, 

revulsion towards consciousness. 


Experiencing revulsion, he becomes dispassionate. 

Through dispassion his mind is liberated. 

When it is liberated there comes the knowledge: 

‘It’s liberated.’ He understands: 

‘Destroyed is birth, the holy life has been lived, 

what had to be done has been done, 

there is no more for this state of being.


≤1




요약- 

현상의 일체 즉 오온(색, 수, 상, 행, 식)은 

무상한 것이고 

괴로운 것이며, 

공하며 

나가 아니라고 

관찰하라.


이렇게 하는 것은 

바른 관찰이며, 

이렇게 바르게 관찰하면 

현상 일체 오온에 대한 기쁨과 탐욕을 끊고 

심해탈을 얻게 되며

나아가 

해탈지견을 얻는다.

========





● 정관과 염리의 마음의 관계에 대한 의문


잡아함경 0001. 무상경(無常經)이라는  

이 짧은 경전 내용은 

불교의 근본적 진리판단과 

수행 목표상태와 그 수행방안에 대해서 

가장 기본적인 내용을 제시하는 부분이다.





○ 경전내용 요약


내용을 요약해보면 이렇다.


1 현상의 일체 즉, 오온(색, 수, 상, 행, 식)이 

무상, 고, 공, 비아 (無常,苦,空,非我)인 사실을 보라.


1 이렇게 보면 올바로 진리를 보는 것이다. [정관]


1 이렇게 올바로 본다면 어떤 삶의 자세를 취해야 하는가.

=> 싫어하여 떠나고[염리]

    즐거워함과 탐욕을 다해야 한다. [희탐진]


=> 그래서 마음의 번뇌에 묶이어

구속된 상태로부터 벗어나야 한다. [심해탈]


=> 그래서 해탈상태로서 

바라보는 세계관을 얻게 된다. 

[ 해탈지견(=아생이진 범행이립 소작이작 자지불수후유 我生已盡 梵行已立 所作已作 自知不受後有)]





○ 5온과 현상의 범주


앞부분 5온은 

일체 현상세계를 나눈 범주이다.


일체 현상세계는 

이 색, 수, 상, 행, 식에 포함된다.


이는 현실 현상세계에서 

생각할 수 있는 것들 가운데 

이 5개의 범주에 들지 않는 것은 

없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또한 이 5온은 

곧 자신과 타인, 타 생명을 구성하는 

5요소이기도 하다.





○ 불교의 기본적 진리의 내용


일체 현상의 내용인 5온을 토대로 

생각하여 볼 때 

다음과 같은 기본적인 진리판단이 얻어진다.


1 그 현상적인 모습은 영원하지 않다 [무상]

1 그 가치적인 측면은 일체의 생멸하는 현실이 모두 고통과 관련된다. [고]

1 그 실재의 내용은 얻을 수 없어 공하다. [공]

1 그것은 영원불변한 실체가 아니며, 실체는 존재하지 않는다. [비아, 무아, 무자성]


위 네 가지 판단은 

일체 모든 것에 

공통적으로 성립하는 가장 기본적인 진리다. 


또 위와 같은 기본적인 진리판단은 

열반적정과 함께 

불교의 가장 기본적인 진리가 된다. [법인 法印= 법의 도장] 


아함경은 불교의 근본 경전으로서 

부처님의 가르침에 입문한 이들이 

처음 배우게 되는 경전이다. 


그리고 이 아함경 처음에서 

이 내용들이 모두 다 나열되고 있다.


심지어 

자칫 대승경전만의 

특유한 내용이라고 잘못 생각하게 되는 

공, 무아의 내용도 

근본경전이라고 할 

잡아함경의 첫부분에 제시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이를 통해 

대승경전과 근본경전의 내용이 

상호 관통되어 연결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고 본다. 





○ 일체에 공통된 내용


현상 내 그 어떤 것에 대해서도 

위와 같은 내용 즉 

무상, 고, 공, 비아(무아), 

및 열반적정은 공통되게 적용된다.


호랑이는 어떠어떠하고 

소나무는 어떠어떠하고 

이런 식으로 각 현상별로 

개별적으로 각기 다른 내용이 있다. 


그러나 위 내용은 

모든 현상 각각에 

공통된다는 점에 의미가 깊다.


따라서 위 내용을 안다는 것은 

일체에 대해서 공통적으로 성립하는 

가장 기본적인 진리의 내용을 

안다는 것을 의미한다.


간단한 듯하지만, 

모든 현상에 대해 

이 사실이 성립하는 것을 깨달아 앎으로써 


곧 일체에 대해 

가장 기본적인 내용을 깨달아 알게 됨을 의미한다. 


달리 말하면 우주 어느 곳에 가거나, 

사후 어느 세계에 태어나더라도, 

위 진리의 내용만은 

여전히 옳은 내용임을 의미한다.





○ 개인적인 삶의 기본목표


위와 같은 기본적인 진리판단을 기초로 

어떤 개인적인 삶의 방향 목표가 나올 수 있는가.


그 다음에 제시된 내용이 그것이다.


바르게 관찰하면 

싫어하여 떠날 마음이 생기고,   

기뻐하고 탐하는 마음이 없어지며, [염리, 희탐진]


탐욕 등의 온갖 번뇌를 끊어 

마음의 해탈을 얻고, [심해탈]


최종적으로는

'나의 생은 이미 다하고 

범행은 이미 섰으며, 

할 일은 이미 마쳐 

후세의 몸을 받지 않는다'

는 사실을 증득하는 것이 

목표가 된다.


이렇게 되면 

번뇌의 묶임으로부터 벗어나 해탈을 얻고 

번뇌를 완전히 제거하여 

삶과 윤회의 고통이 제거된 

니르바나(열반)의 상태에 이른 

아라한이 된다.


아라한은 개인적으로 

최종적인 목표 상태를 

성취한 상태를 의미한다.


그래서 아함경의 

가장 첫 부분에 나오는 이 내용은

비록 짧은 경전이지만, 

이 안에 불교의 가장 기본적이고 

핵심적인 진리의 내용을 담고 있고, 


개인적으로 달성해야 할 

가장 기본적인 핵심목표를 

제시하고 있는 부분이라고 할 수 있다. 


아함경은 불교의 근본 경전으로서 

부처님의 가르침에 입문한 이들이 

처음 배우게 되는 경전이다. 


세속에서 어떤 생활을 하고 

어떤 견해를 가졌건간에 

부처님의 가르침을 배우고자 

출가한 이들이나, 재가 신도들이나, 

이와 같은 가르침을 

처음 받아 배우기 시작하는 것이다. 


그리고 

부처님이 방대한 설법을 통해 

앞으로 전해주시고자 하시는 

불교의 가장 핵심되는 내용이 

이 짧은 경전 내용 안에 

모두 포함되어 나열되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이 부분이 이해가 잘 되면,  

이후 불교 수행을 제대로 시작 할 수 있고


반대로 이 부분이 이해가 안 되고 

납득이 안 가면,


부처님의 다른 가르침들도 같이 이해하기 힘들게 되고 

불교수행을 하고자 하는 마음을 포기하거나, 

불교수행을 하더라도 수행이 어려워지거나, 

또는 수행의 방향을 엉뚱한 방향으로 

잡아나아갈 수 있다고 본다.





○ 의문내용


이 간단한 경전내용은 내용은 

매우 짧지만, 

이 안에 불교의 가장 핵심적 내용들이 

모두 포함되어  

제시되고 있다. 


그래서 내용의 이해가 

쉬운 것만은 아니다. 


또한, 상식적인 입장으로 

세계와 자신을 생각하고 살아오다가 

불교에 처음 관심을 갖고 대하는 입장에서는 


부처님께서 제시하는 

이런 내용에 대해 

쉽게 그 내용을 이해해 받아들이지 못하고, 

많은 의문을 가질 수 있다. 


그래서 이렇게 일반적이고 상식적인 입장에서 

이 내용에 대해 의문을 가질 만한 내용을 

다음에 나열하여 정리해보기로 한다.





● 색, 수, 상, 행, 식의 의미


우선, 경전에서 

"색(色)은 

무상하다고 관찰하라. 

...

수(受)·상(想)·행(行)·식(識)도 

또한 무상하다고 관찰하라. 

...

라고 제시된다. 


그런데 여기에서 

불교에서 사용하는 색, 수, 상, 행, 식이란, 

낯선 표현을 처음 만나게 된다. 


그래서 우선 이 색, 수, 상, 행, 식이란 표현이 

무엇을 가리키는 표현인가에 대해 

의문을 가질 수 있다. 





● 색, 수, 상, 행, 식의 분류의 의미 


불교에서 색, 수, 상, 행, 식을 제시하는 것은 

자신과 현실 세계가 바로 이 색, 수, 상, 행, 식으로 

구성되어 있다고 보는 것이다. 

그래서 다시 다음과 같은 의문을 가질 수 있다. 


왜 자신과 세계는 모두 

색, 수, 상, 행, 식으로 분류할 수 있는가. 


반대로 색, 수, 상, 행, 식에 대해 판단함은 

왜 곧 일체에 대해 판단함이 되는가?

하는 의문을 가질 수 있다. 


더 나아가 자신을 포함한 

세계 일체에 대해 판단할 때 

왜 이렇게 색, 수, 상, 행, 식으로 나누어 

관찰을 하는가 하는 의문을 가질 수 있다. 





● 일체를 무상, 고, 공, 비아라고 보는 근거 


한편, 

경전에서는 다시 

현실 내용 일체, 즉, 

색, 수, 상, 행, 식에 대하여 


'무상하다[無常]'고 관찰하라. 

...

그리고 

'그것들은 괴로움[苦]이요, 

공하며[空], 

나가 아니다[非我]'라고 관찰하라고 

제시한다. 


그런데 

왜 일체(색, 수, 상, 행, 식)을 

무상, 고, 공, 비아라고 볼 수 있는가? 


그러한 내용이  왜 옳고 

또 왜 자신과 세상에 대해 

이렇게 관찰하면 

그것을 바른 관찰이라고 할 수 있는가. 

하는 의문을 가질 수 있다. 


경전에서는 짧게 그 결론적 내용만 

제시되고 있지만, 

그 의미와 그렇게 보아야 하는 

근거는 여기에는 자세히 제시되지 않고 있다. 


그래서 이들 내용이 무엇이며 

그렇게 보아야 하는 근거는 무엇인가에 

대해 의문을 가질 수 있다. 





● 무상, 고, 공, 비아를 근거로 싫어하여 떠날 이유


앞과 같이 일체의 내용 즉 색, 수, 상, 행, 식이 

무상, 고, 공, 비아라고 관찰한다고 하자. 

그렇다고 해서 

싫어하여 떠날 마음이 생기는가. 


또 일체가 무상,고, 공,비아라고 하여 

싫어하여 떠날 마음을 일으키고 

기뻐하고 탐하는 마음이 없어질[염리厭離, 희탐진喜貪盡] 

필요가 있는가. 


무상, 고, 공, 비아라고해서, 

반드시 그런 상태로 나아가야 하는가. 


또 그럴 필요가 있고 

반드시 그렇게 나아가야 한다고 하더라도, 

무상, 고, 공, 비아임을 관하여, 

그처럼, 싫어하고 떠남과 탐하는 마음이 

없어짐[염리, 희탐진]이 잘되는가?


이런 의문을 가질 수 있다. 



경전에서는 

"색(色)은 

무상하다고 관찰하라. 

... 

수(受)·상(想)·행(行)·식(識)도 

또한 무상하다고 관찰하라. 

...

괴로움, 공, 나가 아님도 같다. 


이렇게 관찰하면 

그것은 바른 관찰이니라. 


바르게 관찰하면 

싫어하여 떠날 마음이 생기고, 

싫어하여 떠날 마음이 생기면 

기뻐하고 탐하는 마음이 없어지며, 

기뻐하고 탐하는 마음이 없어지면 

이것을 심해탈이라 하느니라. 


라고 제시한다. 


그런데 물론 

일체가 무상, 고, 공, 비아라고 관찰하여 

싫어할 마음을 일으켜 갖는 경우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현실에서 

일체가 무상, 고, 공, 비아라고 관찰하여, 

이를 통해 싫어할 마음을 일으켜 갖는 경우는 

드물다. 


예를 들어 어떤 이가 

현실에서 맛있는 음식을 먹고 

아름다운 이성을 만나 사랑한다고 한다면, 

그 음식이나 상대가 

영원하다고 생각하여 좋아했다거나, 


반대로 그것이 영원하지 않다고 하여 

그것에 대해 싫어하는 마음을 갖는 이는 

드문 것이다. 


현실에서는 

영원하지 않고 일시적이고, 

어떤 것이 한 순간밖에 얻을 수 없는 덧없는 것이더라도, 

그렇기 때문에 그럴수록 

더 그런 것들에 갈증을 일으켜 

애착을 갖는 경향이 더 강하다. 


예를 들어 영원하지는 않지만, 

딱 한 번만이라도 

어떠어떠한 소원을 이루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는 경우가 더 많은 것이다. 


현실에서 애착을 갖는 많은 것들이 사정이 같다. 


그래서 무상, 고, 공, 비아 등을 관한다고 하여 

반드시 싫어하여 떠날 마음이 생기는가에 대해서는  

의문을 갖기 쉽다. 



더 나아가 무상, 고, 공, 비아라고 하여 

싫어하여 떠날 마음을 갖고 

기뻐하고 탐하는 마음을 없앨 필요가 있는가에 대해서도 

상식적인 입장에서는 많은 의문을 갖게 된다. 


즉, 현실에서 자신이 

좋아하고 애착을 갖는 것이 많고, 

이것들이 자신에게 살아가는 기쁨과 즐거움을 주는데 

왜 이것에 대해 굳이 싫어하여 떠나야 하는가. 

또 기뻐하고 탐하는 마음을 없애야 하는가. 

이렇게 생각하게 된다. 



그리고 만일 일체의 현상에 대해 

이런 기쁨과 즐거움을 없애고 대해야 한다면, 

자신은 어떻게 앞으로 살아갈 것인가에 대한 

걱정도 갖게 된다. 


그런 입장에서는 비록 무상, 고, 공, 비아의 내용을 

관한다 하더라도 집착을 갖던 것에서 

집착을 잘 버리지도 못한다. 



그래서 

이런 입장에서는 

부처님이 하신 말씀을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게 된다. 


그래서 위와 같은 의문을 제기하고 

이에 관해 살펴야 할 필요가 있다. 





● 무상, 무아, 공과 수행목표의 관계 


한편, 경전에서는 

바르게 관찰하면 

싫어하여 떠날 마음이 생기고, 

싫어하여 떠날 마음이 생기면 

기뻐하고 탐하는 마음이 없어지며, 

기뻐하고 탐하는 마음이 없어지면 

이것을 심해탈이라 하며, 


이렇게 마음이 해탈한 사람은 

만일 스스로 증득하고자 하면

곧 스스로 해탈을 통해 얻는 지혜의 내용[해탈지견]를 

증득할 수 있다고 밝히고 

해탈지견의 내용을 제시한다.


즉, 

'나의 생은 이미 다하고,

범행은 이미 섰으며, 

할 일은 이미 마쳐 

후세의 몸을 받지 않는다'[아생이진... 불수후유]

는 내용이 그것이다. 


결국 마음의 해탈(심해탈)과 

심해탈을 통해 증득하게 되는 

'나의 생은 이미 다하고,

...

후생의 몸을 받지 않는다[아생이진... 불수후유]라는 

해탈지견의 내용은 

불교에서 성취해야 할 

수행의 목표 상태의 하나라고  

이해할 수 있다. 


그런데 이렇게 얻게 되는 

수행 목표 상태는 

과연 어떤 상태인가에 대해 

다음과 같은 의문을 가질 수 있다. 



● 해탈지견의 내용 


우선 심해탈을 통해 증득할 수 있다는 해탈지견의 내용

즉, 나의 생은 이미 다하고,...후생의 몸을 받지 않는다

[아생이진... 불수후유]가 

의미하는 내용은 무엇인가? 


그것은 부처님이 윤회를 말하는 데 

후생의 몸을 받지 않는다고 하였으니, 


죽은 뒤에는 윤회를 하지 않고 

죽은 뒤에는 ‘아주 없어져 

그와 관련된 것은 아무 것도 없게 된다는’ 견해 

즉, 단견(斷見)인가?

아니면 이와는 다른 의미인가?




● 수행목표 상태와 일반 상태의 차이점


한편, 수행목표 상태와 일반 상태의 차이점에 

대해 다음과 같은 의문을 가질 수 있다. 


즉, 수행을 하여 

최종적으로 마음의 해탈을 얻고  

위와 같은 사실을 증득하면, 

수행을 하지 않은 일반의 상태와는 

어떤 점에서 차이가 있게 된다고 할 것인가?



수행목표가 일반 상태와 갖는 차이점에 대해서는  

특히 앞에서 제시한 

일체에 대한 근본적 판단

즉, 무상, 고, 공, 비아의 판단과 

관련하여 

다음과 같은 의문을 가질 수 있다. 



● 무상, 고, 공, 비아와 수행목표 상태의 관계 


일체는 무상, 고, 공, 비아라고 하는데, 

만일 수행을 하여 심해탈의 상태가 되고 

해탈지견을 얻으면 

그렇지 않은 상태가 되는 것인가? 

이런 의문을 가질 수 있다. 


만일 불교의 수행목표 상태인 

심해탈이나 열반과 같은 상태는 

무상, 고, 공, 비아의 상태가 아니라면, 


무상, 고, 공, 비아가 아닌 경우도 있다는 것이 되어서, 

처음에 일체가 모두 무상, 고, 공, 비아라고 판단한 것은 

이로 인해 자체적으로 잘못이라는 것이 된다. 


그러나 해탈과 열반이 일반 상태와 같이 

역시 무상, 고, 공, 비아라고 한다면, 

수행을 통해 이런 수행목표를 실현하는 것이 

일반 현실과는 어떤 의미있는 차이를 갖는 것인가 하는 

의문을 갖게 된다. 



그런 전제에서 다시 다음과 같은 

의문을 이어서 가질 수 있다. 



● 수행목표와 염리, 희탐진


만일 심해탈의 상태가 되더라도, 

여전히 무상, 고, 공, 비아의 상태라고 한다면, 

이 역시 무상, 고, 공, 비아를 이유로 

다시 염리 희탐진의 대상이 되어야 할 것인가?

이는 수행목표 상태도 역시 다른 내용과 같이 

염리 희탐진의 대상이 된다고 볼 것인가 하는 문제이다. 


● 수행의 근거 


또 만일 심해탈에 이르러도 여전히 

무상, 고, 공, 비아여서, 

처음의 상태와 차이가 없다면, 


일반 현실 상태와 달리 

수행을 통해 

심해탈을 얻어야 할 근거는 무엇인가. 

이런 의문을 함께 가질 수 있다. 

-

생각해보면 

수행을 통해 얻는 상태는 

일반의 상태와 어떤 의미있는 차이가 있어야 

부처님의 가르침을 받아들이고 

수행을 해야 할 필요성이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래서 불교를 처음 대하는 이는 

수행목표의 상태가 과연 일반 상태와 

어떤 차이를 갖는가에 대해 

이런 여러 가지 의문을 제기하게 된다고 본다. 


따라서 

이를 살필 필요가 있다고 본다. 











○ 의문의 의미 


잡아함경은

세속에서 생활하다가 

불교에 처음 입문한 수행자를 대상으로 

가르침이 베풀어진 근본 경전으로서 

아주 간결한 경전이지만,  


그 내용은 불교의 핵심적인 사항이 

들어 있는 것이며 

그 이해가 쉽지만은 않다. 


그래서 

일반 상식적인 입장에서 생활하다가 

불교를 처음 접한 이가 

불교경전의 가장 근본이라고 할 

잡아함경의 첫 부분을 읽고 나서 


상식적인 견해를 바탕으로 

의문을 가질 수 있는 내용을 

대강 나열해보았다. 


이는 곧 부처님이 

말씀하신 내용에 대해 

일일이 의문을 제기하며, 

질문해보는 것이다. 


물론 부처님의 말씀이  

당장 이해가 잘 되지 않더라도 

그대로 믿고 받아들여 

곧바로 실천 수행하는 것이 

바람직할 것이다. 


이해가 되지 않지만, 

이 내용을 믿어 받아들이고 

'실천 수행하면' 

그 '실천 수행'에 따른 

결과를 얻는다. 


그러나,  

만일 어떤 내용이 이해가 안 된다고 하여 

그것을 이해하기 위해 열심히 노력한 끝에 

그 내용을 이해하게 되었지만, 

그러나 그렇게 이해만 하고 그친다면, 

즉 내용을 이해만 함에 그치고, 

그에 따른 '실천 수행'은 하지 않는다면, 

앞과는 달리 

그 결과를 얻지 못한다. 


그래서 불교의 내용이  

하나같이 이해가 어렵지만, 

부처님의 가르침을 믿음을 통해 수행실천하는 종교로 

받아들인다면, 

우선 당장은 이해가 되지 않더라도, 

경전의 가르침을 믿어 받아 가지고 

우선 실천 수행을 시작하는 것이 

필요하다. 


그리고 그 내용의 이해는 

그렇게 실천수행을 하는 가운데 

이후에 천천히 시간을 내어 

묻고, 이해하고, 증득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본다. 


내용의 이해가 필요없다는 것이 아니라, 

그 순서가 

그렇게 되어야 하는 것이 

더 바람직하다는 의미다. 


그래서 불교에 관심을 가진 이는 

우선 이 내용을 통해 

현실에서 애착과 

탐욕을 가졌던 수많은 대상들에 대해서 

그것들을 경전에서 제시된 방식으로 관하여, 

집착을 내려 놓고 

마음의 해탈을 얻는 노력을 

하는 것이 필요하다. 


우리가 생각하고, 애착을 갖는 것은 

그것이 무엇이던간에 

색, 수, 상, 행, 식 가운데 

하나에 포함된다. 


그래서 그것에 대해 올바로 관하고 

그것에 대해 싫어하여 떠날 마음을 일으키고 

기뻐하고 탐하는 마음을 없애도록 

노력할 필요가 있다. 


이는 반대로 

그간 애착과 집착을 가졌던 것들,

자기 자신, 자신의 생명, 신체, 재산, 가족...등을 포함하여  

자신과 자신의 것, 그리고 세계를 구성하는 일체 

즉, 색, 수, 상, 행 식에 

집착을 버림으로써 


지금까지 그것들에 묶여 있던 상태에서 벗어나 

그것들이 모두 다 사라지고 없어진다고 해도 

아무렇지도 않고 평안한  

마음을 갖는 것도 의미한다. 


그렇게 마음을 바꾸어 가짐으로써 

마음의 해탈을 이루게 되는 것이고 

또 해탈지견을 얻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이런 내용들에 

의문을 제기하더라도 

그렇게 노력하는 가운데 

의문을 제기하고 

그 내용의 이해를 해나가야 한다고 본다. 





○ 한편 

이처럼 부처님이 하신 말씀에 대해 

무조건 믿어 따르지 않고 

하나하나 

그것이 왜 옳은가. 

그렇게 왜 해야만 하는가 하고 

묻고 따지는 작업은 


불교에서는 

이 자체만으로 불경스럽고 

허용되지 않는 일로 

보지는 않는다.


위 내용들은 

그저 부처님이 

그렇다고 주장하기에 진리인 것이 아니고, 


또 부처님이 말씀하셨기에 

무조건 믿고 따르라고 

부처님이 권위적으로 

제시한 내용이 아니기 때문이다. 


다만, 앞과 같은 이유로 

그 내용에 대해 이해가 되지 않더라도 

그 내용을 우선 실천하고 

그렇게 정진하면서, 


그 내용에 대해 이해를 해나가는 것이 

더 바람직하다는 의미일 뿐이다. 





○ 한편, 위 내용이 

왜 진리이고 옳은가라고  

의문을 갖고 탐구하여 

그 이유와 의미 내용을 

모두 올바로 깨닫는 것은  

사실은 불교의 수행의 하나이기도 하다. 


처음에는 

이해가 되지 않아도 

부처님의 말씀이기에 

무조건 믿고 받아들이고 

실천하여 그 결과를 얻었다면, 


그 뒤에는 천천히 

그 의미와 그 이유를 

하나하나 '깨달아' 나가는 것이 

필요한 일이다. 


그리고 이처럼 각 경전의 내용을 

스스로 잘 이해하고 깨달아 나가는 것이 

곧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진리에 의존하고 자신에 의존하라’는 

말씀을 따르는 길이기도 하다.


따라서 앞과 같이 

일반인이 처음 불교를 대하면서 

제기할만한 이들 의문사항을  

나열한 가운데 

이들 내용을 살피기로 한다. 


이들 내용은 

단지 본 잡아함경을 이해함에도 

기본적으로 필요할 뿐만 아니라,  

다른 대승경전의 내용을 이해하는 데에도 

기본적으로 필요하다고 본다. 


다만, 여기서 관련된 내용을 

모두 나열해 살필 수 없으나, 

이런 의문과 관련된 범위에 한정해 

다른 대승 경전에서 제시되는 내용도 

함께 제시하여 살피기로 한다. 


그러나 불교를 처음 대하는 일반인의 

입장에서 되도록 쉽게 이해가 되도록 

불교에서만 사용되는 특수용어를 사용하는 것을 

가급적 피하고, 


또 각 의문사항마다 

논의 부분을 각기 구분하는 가운데, 


내용이 길게 되더라도 

해당 내용을 설명하는 데 필요한 부분은 

반복 설명하기로 한다. 

앞부분 내용을 편의상 반복 서술하는 경우는 

해당부분을 [반복] [반복끝]으로 

표시하기로 한다. 



한편 이들 문제와 관련된 

좀 더 자세한 내용은 

이후 관계되는 부분에서 

기회가 될 때 다시 살펴나가기로 한다. 









[반복]


● 색, 수, 상, 행, 식의 의미


우선, 경전에서 

"색(色)은 

무상하다고 관찰하라. 

...

수(受)·상(想)·행(行)·식(識)도 

또한 무상하다고 관찰하라. 

...

라고 제시된다. 


그런데 여기에서 

불교에서 사용하는 색, 수, 상, 행, 식이란, 

낯선 표현을 처음 만나게 된다. 


그래서 우선 이 색, 수, 상, 행, 식이란 표현이 

무엇을 가리키는 표현인가에 대해 

의문을 가질 수 있다. 





● 색, 수, 상, 행, 식의 분류의 의미 


*pt* 시작 to k0020sf--♠○ 색,수,상,행,식 오온에 대하여 


불교에서 색, 수, 상, 행, 식을 제시하는 것은 

자신과 현실 세계가 바로 이 색, 수, 상, 행, 식으로 

구성되어 있다고 보는 것이다. 

그래서 다시 다음과 같은 의문을 가질 수 있다. 


왜 자신과 세계는 모두 

색, 수, 상, 행, 식으로 분류할 수 있는가. 


반대로 색, 수, 상, 행, 식에 대해 판단함은 

왜 곧 일체에 대해 판단함이 되는가?

하는 의문을 가질 수 있다. 


더 나아가 자신을 포함한 

세계 일체에 대해 판단할 때 

왜 이렇게 색, 수, 상, 행, 식으로 나누어 

관찰을 하는가 하는 의문을 가질 수 있다. 


[반복끝]



○ 부처님의 가르침에는  

세계의 모든 내용 일체를 

분류하는 여러 방법이 있다. 


5온, 6대, 12처, 18 계 등의 내용이 그런 것이다. 


그리고 색, 수, 상, 행, 식 5 온의 항목이 

그런 분류 범주 가운데 대표적인 내용의 하나이다. 


색, 수, 상, 행, 식은 그래서 

세계와 자신의 모든 내용을 이 안에 

포함해 넣을 수 있는 분류범주가 되는 것이다. 


그런데 색, 수, 상, 행, 식이 의미하는 내용은 무엇인가.  



우선 이는 사실 간단한 내용은 아니다. 

여기에는 각 단어가 

다른 분류에서도 사용되는 데 

각 경우에 각 표현이 가리키는 의미가 조금씩 

넓고 좁은 차이가 있게 된다는 사정도 있다. 


그래서 각 표현에서 각 단어가 

구체적으로 어떤 의미를 갖는 것인가에  

주의를 기울여야 할 필요도 있다.


그리고 이는 오늘날 

물질과 정신으로 

세계를 크게 구분하는 분류방법과는 조금 차이가 있다. 


그렇다고 부처님이 대한 세계와 

오늘날이나 과거의 일반인들이 대하는 세계가 

서로 다른 것은 아니다. 


다만, 올바로 볼 때와 그렇지 않을 때, 

그 의미와 범주의 구분에서 

차이가 있게 되는 것뿐이다.



가장 간단하게 본다면, 

색, 수, 상, 행, 식은 

세계와 자신의 내용을 모두 포함하는 것이며

또 살아가는 동안 애착을 갖는 내용이기도 하다. 


그래서 현실에서 자신이 

무언가 얻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이 색, 수, 상, 행, 식 가운데 

어느 하나가 되는 것이라고 

그 의미를 이해할 필요가 있다.


○ 예를 들어 

만일 누군가 눈을 감고 있다가 

눈을 뜨는 순간 감각하여 얻게 되는 내용이 있다면 

그것은 무엇이던 다 색의 범주에 속하게 된다. 


또 귀를 막고 있다가 

귀를 열어 얻게 되는 내용이 있다면 

그것이 무엇이던 역시 다 

여기서 말하는 색의 범주에 속하게 된다. 


원래 좁은 의미로 말하면, 

눈으로 감각해 얻는 내용은 색[색깔], 

귀를 통해 감각해 얻는 내용은 성[소리]

코를 통해 감각해 얻는 내용은 향[냄새]

혀를 통해 감각해 얻는 내용은 미[맛]

몸을 통해 감각해 얻는 내용은 촉[촉감]

이라고 표현하는데 


5 온의 분류로서 색, 수, 상, 행, 식을 나열할 때의 '색'은 

앞의 '색', 성, 향, 미, 촉을 모두 포함해서 

가리키는 표현이 된다. 



○ 한편, 이런 감각을 얻고 

좋은 느낌, 싫은 느낌, 좋지도 않고 싫지도 않은 느낌을 

갖는다고 하는 경우 

그런 느낌 및 그런 느낌을 얻는 작용을 '수'라고 표현한다. 



○ 그리고 감각기관을 통해 얻는 감각내용이나 

좋고 나쁜 느낌과 달리, 

자신의 마음 안에서 생각하여 갖는 관념적 내용이 있다. 


예를 들어 

눈을 떠 나무나 바위의 모습을 보는 경우, 

눈을 감으면 그 나무나 바위의 모습은 볼 수 없게 된다. 


그런데 이처럼 

눈을 감아서 무언가를 보지 못하는 상태이더라도, 

이와는 관계없이 

마음 안에서 떠올리게 되는 

나무나 바위에 대한 내용이 일정하게 있다면, 

그것은 눈을 떠 얻는 감각내용이 아니고 

생각인 것이다. 


그런 관념은 

눈을 떠 감각을 하고 있는 경우에도 감각내용과 함께 

얻을 수 있지만, 

눈을 감아도 이에 관계없이 

얻을 수 있는 것이다. 


이런 관념 및 관념을 얻는 작용을 상(想)이라고 표현한다. 



○ 한편 어떤 생각을 하면 

그 생각을 통해 다음의 다른 생각을 연상해 불러 일으키게 되고  

또 그 생각을 말로 표현하게도 되고 

또 그 생각을 바탕으로 일정한 행위나 태도를 취하게도 된다. 


이와 같이, 다음의 변화, 반응으로서 나타나는 

생각, 말, 행위, 태도 등을 

행(行)이라고 표현한다. 



○ 한편 우리가 어떤 것의 의미를 분명하게 

인식하는 경우에는 


단지 그것만을 일으켜 얻는 것으로는 부족하고 

문제가 되는 내용을 다른 것과 함께 병존시킨 가운데 

이것을 서로 대비하여 구별하는 가운데 

그 의미를 분명히 인식하게 된다. 


이런 인식 분별 및 분별작용은 식(識)에 해당한다고 할 수 있다. 



다만 이런 내용은

이들 표현의 대강의 의미이다. 

각 표현에 관련되어서는 

보다 복잡한 내용과 논의가 있다. 


예를 들어 식과 같은 경우 

무명-행-식-명색-... 등의 12 연기과정에서의 식이나 

세계를 색, 수, 상, 행, 식 5온으로 분류할 때의 식이나 

또는 세계를 지,수,풍,화,공,식의 6대로 분류할 때의 식이나 

또는 12처와, 18계를 분류해 나열할 때의 안식, 이식, 비식, 설식, 신식, 의식에서의 식이나, 

또는 심,의,식을 나열해 말할 때의 식 또는  

제 7식 제 8 아뢰야식 등으로 주제를 옮겨 

각각의 식의 의미에 대해 논의하면 

한층 더 그 논의가 복잡해지는 것을 피할 수 없다. 


특히 식의 의미를 

정신 기관의 의미로 이해할 것인가. 

정신 기관이 행하는 정신작용이나 기능의 의미로 이해할 것인가. 

아니면 이런 정신이 정신 작용을 통해 얻어낸 결과물로서 

정신적 내용을 의미한다고 이해할 것인가가 문제될 수 있다. 


수, 상, 행에서도 이런 논의가 모두 제기될 수 있다. 


참고로 수에 관해서도 다음과 같은 여러 

논의가 가능하다. 


예를 들어 수라고 하면 

즐거운 느낌, 괴로운 느낌과 같이 느껴진 느낌만을 의미하는가. 

또는 그런 느낌을 얻는 정신작용이나 기능을 의미하는가. 

아니면 이 둘을 함께 의미하는가. 


또는 수는 느낌을 얻는 내용 외에도 

눈으로 색을 얻는 일반감각이나 감각작용도 함께 포함해 나타내는 것인가.  

등의 논의가 있을 수 있다. 


만일 감각이나 감각한 내용을 수에 포함시키면, 

감각작용을 통해 얻는 내용인 색은 이미 앞에서 색으로 살폈는데, 

이처럼 감각한 내용을 다시 수에 넣어 분류한 것이 되어 적절하지 않게 된다. 


이 경우 앞에 나열한 색은 감각한 내용이 아니라, 

그런 감각을 얻게 한 실재의 색을 가리킨다고 볼 수도 있지만, 

그러나 오온의 분류는 실재에 대한 분류가 아니고, 

또한 불교에서는 실재는 공하다고 보므로 적절하지 않다. 


또 만일 감각한 내용으로서 색은 따로 색으로 분류하고, 

감각하는 작용만 떼내어 수에 포함시킨다면, 

느낌과 느낌을 얻는 작용도 그처럼 따로 별개로 보아야 하는가의 

문제가 생긴다. 

또 그렇다면 느낌과 느낌을 얻는 작용 가운데 

수는 어느 것을 가리키는가 등의 복잡한 문제가 있게 된다.  


한편, 단순히 색과 같은 감각을 얻는 작용은 촉으로 보고 

이는 여기에서 제외시키는 것으로 볼 수도 있다. 


이처럼, 불교의 가장 기본적인 단어라고 할 수 있는 

색, 수, 상, 행, 식의 의미는 언뜻 간단해 보이지만, 

자세히 보면 매우 복잡하여 간단히 살필 수 있는 내용은 

아니다. 


다만, 여기서는 위에 제시한 것처럼 

아주 기초적으로 간단히 대강의 의미만 살피고 

이런 상세한 논의는 앞으로 기회가 되면, 

관계되는 곳에서 자세히 살펴나가기로 한다. 



● 색, 수, 상, 행, 식의 분류의 의미 


앞과 같이 색, 수, 상, 행, 식의 의미를 대강 이해한 다음 

이 색, 수, 상, 행, 식이 현실 일체의 내용을 

포함하는 범주로 사용됨을 생각할 필요가 있다. 


현실에서 얻고 생각하는 

온 세계의 내용과 자신의 모든 내용이 

다 이 다섯 범주안에 포함되어 들어간다. 


만일 이에 대해 의문이 생긴다면, 

자신이 현실에서 얻고 

생각할 수 있는 것 가운데 


이 색, 수, 상, 행, 식 가운데 

포함되지 않는 것이 

무엇이 있을 것인가를 

곰곰히 생각해보아야 할 것이다. 


그래서 현실에서 얻는 것, 그리고 

생각하는 것 일체는 

결국 색, 수, 상, 행, 식의 범주에 

포함되어 들어간다는 사실을 

이해할 필요가 있다. 



한편 자신도 마찬가지다. 


자신이 상식적인 입장에서 

자신을 생각할 때는 

그것이 비록 옳은 판단은 아니지만, 

여하튼 이 색, 수, 상, 행, 식을 가지고 

자신이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이와 관련해서는 

다음의 그림을 참조할 필요가 있다고 본다. 



○ 마음과 색의 의미에 관한 논의 





[그림]  08pfl--image\진리의오류55.jpg

fr http://thegood007.tistory.com/1172

03fl--ghpt\r1030.htm


이 전체 그림은 1 인칭 자신 

즉 1 이라는 사람이 눈을 떠 바라본 모습을 그려 놓은 것이다. 


먼저 1 자신은 눈을 떠 세상을 바라볼 때 

자신의 눈이나 이마, 뒷머리, 허리 등이 보이지 않고 

자신의 손과 발 등 자신의 몸으로 생각하는 것 가운데 일부만을 보게 된다. 


그리고 2 와 3 이라는 사람의 모습과 

꽃이라는 4 의 모습을 보게 된다. 


이렇게 전체적으로 

1 자신이 눈을 떠 바라보는 모습을 

큰 사각형 그림 안에 담아 보았다. 


결국 이 그림은 자신이 눈을 떠 

무언가를 바라볼 때 

얻는 내용 가운데 대표적인 것을 나열해 

그림으로 표현한 것이다. 


그리고 이것은 앞에서 말한 

색, 수, 상, 행, 식 가운데 

색의 일부이다. 


즉 이 그림 내용은 

넓은 의미의 색(색,성,향,미,촉)  가운데 

좁은 의미의 '색'을 나타낸 것이다. 


예를 들어 

자신이 눈을 떠 하늘의 별도 보고 

산 위에서 아래의 넓은 도시의 모습을 바라본다고 하더라도 

이것은 1차적으로 모두 색의 내용인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또 

자신의 마음 안의 내용물인 것이다. 


불교에서 색이라 표현하는 것은 

이렇게 눈을 떠 바라보게 된 일체의 모습

즉 좁은 의미의 색이 

이 안에 포함된다. 



또 이와는 별도로 귀로 얻는 내용

코로 얻는 내용 등도 마찬가지다. 


이들은 모두 감각하여 마음 안에 

얻어 놓은 현실내용인데 

이렇게 감각하여 얻는 현실내용을 

모두 색이라고 표현하는 것이다. 



한편 이 그림에서는 

색 가운데에서도 눈으로 얻은 색만 표현되고 

나머지 성, 향, 미, 촉의 내용은 

그림에서는 표현되지 않고 있음을 주의할 필요가 있다. 


또한 색, 수, 상, 행, 식 5 온 가운데 

나머지 수, 상, 행, 식 역시 표현되지 않고 있다. 


그러나 위 그림을 통해  

적어도 색이 

무엇을 가리키는 것인가에 대해 

이해를 할 수 있다고 본다. 



>>>>>


○ 5온 색, 수, 상, 행, 식의 분류와 다른 일반적인 분류방식과의 관계 


사람들은 상식적인 입장에서 

세계를 분류할 때는 

세계를 물질과 정신으로 나누고 


자신이나 생명체를 분류할 때는 

또 비슷한 방식으로 

육체(자신을 구성하는 물질)과 정신으로 분류한다. 


그런데 부처님의 분류방식은 

이런 분류방법과는 조금 차이가 있다. 


이런 차이는 단순히 일반인들이 

물질과 정신으로 분류하는 내용을 

부처님은 

물질을 '색'이라 표현을 달리 하고 

정신은 좀 더 세분하여 

수, 상, 행, 식으로 분류한 차이만 있는 것은 아니다. 


만일 이렇다면 이는 단지 분류의 세분 정도의 차이와 

표현의 차이에 불과한 것이라고 보아야 한다. 


그러나 이런 분류의 차이는 사실은 

사람들이 일반적으로 갖게 되는 착각과 관련된 것이라고 본다. 


즉, 사람들이 상식적으로 물질과 정신으로 분류를 행하는 것은 

물질은 정신 밖의 외부의 내용이라는 판단이 전제가 되어 있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물질과 정신을 상대적인 개념으로 이렇게 양분해 

구분하는 것이라고 이해할 수 있다. 


그러나 이런 이해방식은 잘못이고 

사람들이 물질로 이해하는 내용은 모두 

자신의 마음 안의 내용물임을 먼저 주의해야 한다. 


사람들은 일반적으로 갖는 이런 판단은 

기본적인 잘못된 망상 분별의 하나이다. 

여기에는 이와 관련하여 많은 기본적인 착각과 오류가 전제되어 있고 

따라서 중요한 의미 차이가 있다.  


따라서 다음의 그림을 다시 보고 이 차이를 음미해보기로 하자. 






[그림]  08pfl--image\진리의오류55.jpg

fr http://thegood007.tistory.com/1172

03fl--ghpt\r1030.htm





어떤 1 이란 사람이 눈을 떠 위와 같은 모습을 얻었다면, 

이것은 1 이란 사람이 눈을 떠 얻은 감각내용으로써 

1 이란 사람의 마음 안의 정신 내용물들인 것이다. 


기본적으로 이들 내용은 눈으로 얻는 감각내용이고 

또 눈으로 얻은 감각내용은 색인 것이므로 

이것을 부처님은 색이라고 칭한 것이라고 쉽게 이해할 수 있다. 


이런 내용은 부처님이 행한 다른 분류방식 12처나 18 계의 분류에서도 

살필 수 있다. (안-색, 이-성, 비-향, 설-미, 신-촉, 의-법 眼耳鼻舌身意 色聲香味觸法)


물론 여기 5 온에서의 색이 다른 감각내용들  

즉 소리(성), 냄새(향), 맛(미), 촉감(촉)을 다 포함하여 나타낼 때에도 

그것이 감각기관을 통해 얻은 감각내용임을 나타내는 의미는  

잃지 않는다고 할 것이다. 


그런데 사람들은 이렇게 눈을 떠 얻은 내용을 놓고 

이것들이 정신 '밖의' 외부의 내용이라는 판단을 전제로 

이를 물질이라고 구별해 관념하고 표현하는 것이다. 


만일 물질이란 표현으로 가리키는 내용이 

자신의 정신 안의 감각내용들을 가리키는 것이라면, 

이런 경우 부처님이 사용하는 '색'이란 표현과 

일반인이 사용하는 '물질'이라는 표현은 

단지 표현의 차이 밖에는 갖지 않는 것이다. 


그러나 그렇지 않은 것이다. 


그래서 어떤 사람이 눈을 떠 보게 되는 위 그림과 같은 내용을 놓고 

이를 색, 수, 상, 행, 식의 분류에서 색으로 분류하는 것과 

물질, 정신으로 분류에서 물질로 분류하는 일반적인 방식은 

서로 크게 다른 의미를 갖는 것이다. 


일반적인 생각은 어떠한가를 잠시 살펴보자. 


예를 들어 어떤 사람이 눈을 떠 2, 3, 4 와 같은 모습을 보게 될 때 

그는 이런 내용을 자신의 외부의 내용, 자신의 정신 밖의 내용으로 보고 

그래서 이런 내용을 정신과 구분되는 표현을 사용하여 

물질이라고 관념하는 것이다. 


그런 가운데 사람들은 일반적으로 

자신이 감각하여 얻는 마음 안의 내용 가운데에서 

일부 즉 1 의 부분을 자신을 구성하는 물질이며 자신의 육체로 관념한다. 


그리고 한편 자신이 눈을 떠 얻은 내용 전체 가운데 

자신의 육체에 해당하는 1 부분을 제외한 나머지를 

자신의 밖에 놓여 있는 외부 대상(물질<-색...)으로 생각한다. 


더 나아가 2, 3, 4 와 같은 내용을 정신 밖의 내용으로 물질로 보는 것은 

곧 이런 내용을 정신적 내용을 얻게 한 대상(객체)으로 잘못 생각하게 만든다. 


즉, 자신이 눈을 떠 얻은 내용 전체 가운데 

자신에 해당하는 부분의 색을 자신의 육체로 생각하고  


그외 수, 상, 행, 식에 해당하는 

느낌, 관념, 생각, 분별, 판단 등을 정신내용으로 보며 


이런 정신내용은 자신의 육체로 보는 1 의 부분이 

외부의 물질 즉 2, 3, 4 등과 관계하여 반응해 얻는 내용으로 생각한다. 


그래서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2, 3, 4 와 같은 내용을 자신의 감각기관(1 의 일부)이 상대하는 대상 자체라고 이해하게 된다. 


더 나아가 1 이라는 사람이 4 와 같은 꽃을 1의 손(1 의 일부)로 만져 촉감을 얻는 경우에도, 

1 의 일부분을 자신의 감각기관이라고 보고 

4 라는 내용을 1 이 손을 대 접촉하는 대상(객체)  

즉, 손을 대 촉감을 얻는 대상이라고 이해하는 것이다. 


더 나아가 자신의 정신은 자신의 육체로 보는 1 의 부분에 

위치한다고 생각하고 

이처럼 육체와 정신이 결합된 것을 자기 자신이라고 관념하는 것이다. 


이런 생각들이 모두 일반적으로 상식적으로 갖는 생각들이며 

잘못된 오류의 판단이다. 


사실상 일반인이 눈을 떠 위 그림과 같은 내용을 얻을 때 

그 내용을 두고 부처님은 이를 색이라 표현하고 

일반인은 물질이라고 표현하는 것이어서,  

이 둘은 사실 같은 내용을 가리키는 것이다. 


그래서 일반인의 입장에서는 

부처님이 색이라고 표현한 내용이 갖는 의미는 

자신이 물질이라고 표현할 때 그 표현에 담는 의미와 같은 것이라고 

쉽게 생각할 수 있다. 


그 표현이 가리키는 내용이 

실질적으로는 위 그림과 같은 내용이라는 점에서는 차이가 없지만, 


그러나 일반인은 '물질'이란 표현을 사용할 때는 

위 그림과 같은 내용을 놓고 

이들 내용은 마음안의 정신 내용물로서 주관적 감각내용이 아니라, 

이들은 모두 정신 밖에 존재하는 외부 객체와 대상으로서 

외부 내용이고 객관적 내용이라는 의미를 함께 담는 것이다. 


따라서 이는 일반인이 뒤바뀐 전도된 망상분별을 통한 판단내용을  

이미 그 표현에 담아 나타낸다는 점에서 

부처님의 색이라는 표현에 대해 전도된 망상분별에 바탕한 

잘못된 해석이 되는 것이다. 


이런 혼동이 발생할 때에는 색이란 표현의 의미가  

일반인이 사용하는 물질이라는 표현이 갖는 의미와 

같다고 이해하지 말고, 


부처님이 사용한 색이라는 표현을 그대로 표현하고, 

이 색은 자신의 감각기관이 얻은 감각내용들을 가리키며 

따라서 마음 안에 이미 들어온 정신적 내용물을 가리키는 내용이라고 

이 둘을 구분해 이해해야 할 것이다. 


이에 관한 보다 자세한 내용은 

정신의 위치에 관한 논의로 미루기로 하지만, 

=> http://thegood007.tistory.com/1172

03fl--ghpt\r1030.htm


여기서는 위에 나열한 여러 상식적인 판단들이 

왜 잘못된 망상 분별인가를 

간단히 살펴보기로 하자. 






[그림]  08pfl--image\진리의오류55.jp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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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3fl--ghpt\r1030.htm


이것이 오류라는 사실은 위 그림에서 1 이 2 라는 다른 사람을 놓고 

이 관계를 판단해 보면 그 오류를 쉽게 이해할 수 있다. 


우선 1 이 실험을 위해 2 라는 사람에게 눈을 뜨고 감음을 반복시킨다고 하자. 


이 때 2 라는 사람은 눈을 뜨면 꽃과 그외 여러 모습이 보인다고 하고 

눈을 감으면 그런 모습이 보이지 않는다고 말로 보고할 것이다. 


이처럼 2 가 눈을 뜨고 감고를 반복하는 실험과정에서 

2 가 보인다고 하고 보이지 않는다고 변화를 보고하지만, 

1 이 계속 눈을 뜬 상태에서 볼 때는 별다른 변화가 없음을 보게 될 것이다. 


즉 2 가 보인다고 보고할 때 없던 어떤 것이 새로 나타나고 

2 가 보이지 않는다고 할 때 있던 어떤 것이 사라지는 변화를 

1 은 보지 못한다. 


그래서 2 가 무엇이 보인다거나 보이지 않는다는 등의 변화는 

1 은 직접 그 내용을 확인할 수 없지만, 일단, 

2 의 영역 내부에서 일어나는 변화라고 추리하게 된다. 


그래서 엄밀하게 보면 이 역시 오류의 판단이지만, 

1 은 이런 실험을 통해 

2 가 보인다고 할 때 2 가 얻는 내용은 

2 의 영역에서 5^의 내용처럼 얻게 되는 것이라고 추리하게 된다. 


위 그림은 이런 추리의 내용을 위 그림과 같이 표시한 것이다. 


이것은 상식적으로 2 가 눈을 떠 보게 되는 내용은 

2 의 정신(뇌) 안에 5^ 의 내용처럼 존재함을 추리해 나타내는 것이다. 


이제 이렇게 추리한 바탕에서 

2 가 다음과 같이 생각한다면, 

1 의 입장에서는 그런 판단들이 모두 오류임을 쉽게 파악할 수 있다. 


그 내용이 우선 앞에 나열한 것 같은 상식적인 판단내용들이다. 


예를 들어 2 라는 사람이 눈을 떠 1^, 3^, 4^ 와 같은 모습을 보게 될 때 

2 가 이런 내용을 자신의 외부의 내용, 자신의 '정신 밖의' 내용으로 보고 

그래서 이런 내용을 정신과 구분되는 표현을 사용하여 

물질이라고 관념한다면 그것은 오류다. 


1 의 입장에서는 

그런 내용이 모두 2 의 정신 안에 있는 정신 내용물임을 

쉽게 알 수 있는 것이다. 


한편, 2 가 감각하여 얻는 마음 안의 내용 가운데에서 

일부 즉 2^ 의 부분을 자신을 구성하는 물질이며 자신의 육체로 관념한다면 

이 역시 오류다. 

역시 1 의 입장에서는 그것이 오류임을 쉽게 알 수 있다. 


나머지 내용들도 사정이 같다. 예를 들어, 


2 가 1^, 3^, 4^ 와 같은 내용을 

2 자신의 감각기관(2^ 의 일부)이 상대하는 '대상' 자체라고 이해한다면 

이 역시 오류다. 


더 나아가 2 라는 사람이 

4 와 같은 꽃을 2 의 손(2 의 일부)로 만져 촉감을 얻는 경우에도, 

2^ 의 일부분을 자신의 감각기관이라고 보고 

4^ 라는 내용을 2 가 손을 대 접촉하는 대상(객체)

즉 손을 대 촉감을 얻는 대상이라고 이해한다면 

이 역시 오류인 것이다. 


더 나아가 2 자신이 생각하기를 

2 자신의 정신은 2 가 자신의 육체로 보는 2^ 의 부분에 

위치한다고 생각하고 

이처럼 육체와 정신이 결합된 것을 자기 자신이라고 관념한다면 

이 역시 오류인 것이다. 


이처럼 1 은 2 가 행하는 판단이 잘못임을 쉽게 알 수 있다. 


2 가 행하는 이런 판단은 내용을 잘못 뒤바꿔 이해하는 

전도된 망상 분별이라고 할 수 있다. 

2 의 판단에서 기본적으로 무엇이 어떻게 뒤바뀌었는가하면 

2 가 스스로 바라보아 얻은 2^의 내용이 곧 2 자체인 것으로 

또 예를 들어 4^ 의 내용이 4 자체인 것으로 

2 가 생각하는데에서 이들 오류가 모두 출발한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2 가 얻는 5^ 와 같은 내용은  

1 에게서는 어떤 내용인가를 1 의 입장에서 다시 확인해보자. 


그것은 1 자신이 2 처럼 눈을 뜨고 감음을 반복하면서 

눈을 감을 때 사라졌다가 눈을 뜰 때 나타나는 내용이 

무엇인가를 확인함으로써 확인할 수 있다. 


그것은 1 의 입장에서는 5 안에 들어 있는 모든 내용이 

바로 그런 것이다. 

즉, 1 의 입장에서 눈을 떠 보게 되는 내용 전부 

즉 5 안의 내용 전부가 바로 앞의 2 에게서 5^ 와 같은 내용인 것이다. 


따라서 1 의 입장에서 앞에서 처음 행한 모든 판단들이 

바로 2 가 행한 판단처럼, 모두 오류의 내용임을 확인할 수 있는 것이다. 


한편, 처음 행한 추리

즉 2 가 얻는 내용은 2 의 영역에서 5^의 내용처럼 얻게 되는 것이라고 

추리한 것이 오류라는 것은 

사실은 2 라는 내용도 모두 1 의 정신 안 내용이기 때문이다. 


이것은 마치 2 가 1 을 보면서 

자신이 얻은 1^ 의 모습 안에 1 의 정신내용이 그처럼 자리잡고 있다고 

추리하는 것처럼 잘못인 것이다. 


그리고 이런 추리의 오류는 

마치 오늘날 어떤 외과 의사가 2 라는 사람을 해부한 상태에서 

2 의 뇌를 바라보며 2 의 뇌 안에 2 의 정신이 담겨 있었던 것이라고 

추리하는 것과 같은 잘못된 추리인 것이다. 



대강 이러한 내용들이 바로 색, 수, 상, 행, 식의 분류를 

물질과 정신의 분류와 같은 의미를 갖는 분류라고 잘못 뒤바꿔 이해하는 

전도 망상 분별의 일부 내용이라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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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색, 수, 상, 행, 식의 분류가 갖는 의미차이 


색, 수, 상, 행, 식의 분류가 

물질과 정신의 분류와 갖는 의미 차이를 간략히 보았다. 


그런데 일반인의 입장에서는 여전히 이에 대해 

혼동을 일으킬 수 있다. 


이 내용을 다시 간단히 언급해보자. 


누군가 자신이 눈을 감았다가 

눈을 떠 얻게 되는 어떤 내용이 있다면 

그런 내용은 자신이 무엇을 대해 그런 내용을 얻었는가를 묻는다면 

보통 무엇이라고 대답하는가?


누군가 이 과정에서 

눈앞에 책상, 그릇 이런 것이 있다고 나열하고 

자신이 그런 것을 대해 그런 모습을 얻었다고 답한다면, 

그는 앞의 기본 범주와 관련하여 

무언가 기본적으로 착각을 일으키고 있는 것이다. 


무엇이 그런 착각인가를 

잘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다시 누군가 귀를 통해 무슨 소리를 듣게 된다고 하자. 

그는 또 이를 무엇으로 생각하게 되는가?


만일 그 소리가 

앞에서 본 그릇이 떨어질 때 

바닥과 부딪혀 낸 소리라고 이해한다고 하자.


그런데 여기에도 다시 

아주 중요한 착각이 들어 있다.


그래서 이 간단한 생각들의 차이가 

세계의 내용들에 대한 

기본적인 파악을 아주 달리하게 만든다.




우선 눈을 떠 보니 

눈앞에 책상, 그릇 이런 것이 있기에 

그런 것들이 있다고 나열했는데, 

그것이 무엇이 잘못인가라고 

묻는다면, 

다음과 같이 생각해보아야 한다. 


우선, 

자신이 눈을 떠 얻은 모습에 

과연 책상이나, 그릇 등이 

그 범주[눈을 떠 얻는 감각내용들]에 들어 있는가. 


이것부터 우선 깊게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이 문제만 잠깐 언급한다면, 

우리가 눈으로 본 모든 내용은 색(색깔)이다. 


그 색 가운데 일부를 

자신이 책상이라고 생각한다면, 

이런 생각[책상의 관념내용]은, 

우선 감각으로 얻은 색이 아니다. 


이는 사실은 감각을 얻고 나서 

그 감각내용을 바탕으로 

각 부분을 마음에서 다시 나누고 묶어 가며  

생각으로 만들어 가진 관념내용인 것이다. 


그리고 이처럼 생각한 내용은 

비록 자신이 감각하여 얻은 내용을 향하여 

만들어 내세운 것이지만, 

이 자체는 감각을 통해 얻는 감각현실이 아니고 

자신의 마음 안에 만들어 갖는 또 다른 내용 

즉 상[想]에 해당하는 내용이다. 


이제 다시 앞의 질문을 던져 보자. 


자신이 눈을 떠 어떤 색깔을 감각한다고 여길 때 

자신이 앞과 같은 관념을 대상으로 놓고 

그런 색깔을 얻은 것인가? 

그렇지 않은 것이다. 


그렇다면, 이제 자신이 눈으로 얻은 그 색깔을 놓고 

그 색깔을 대상으로 눈이 관계하여 

그 색깔을 얻은 것인가?

그것도 아닌 것이다. 


이 색깔은 자신의 마음이 얻어 놓은 내용이지, 

그런 색깔이 그런 색깔을 얻게 한 '대상'은 아닌 것이다. 


그런데 대부분 자신이 색깔 감각내용을 얻을 때 

예를 들어 책상이나 그릇의 색깔을 얻는다면, 

그는 그 감각내용을 

자신이 대하는 대상 자체로 여긴다. 


즉 자신이 감각내용을 얻게 된 대상이 

바로 그 감각내용(책상이나 그릇의 색깔)이라고 

여기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자신이 그런 책상과 그릇의 색을 대해서 

그런 책상과 그릇의 색을 얻은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아마 어떤 이가 책상이나 그릇이 앞에 있고 

그것을 자신이 대해 그런 그런 모습을 얻었다고 답할 때에는 

그런 책상이나 그릇이란 말로써 

위에 나열한 둘 가운데 어느 하나를 나타내기 위하여 

그런 말을 한 것일 것이다. 

그러나 이는 위와 같이 잘못된 내용이다. 


그리고 이런 생각들로 인해 

대부분이 자신이 눈을 떠 감각내용을 얻고 그 내용을 

곧 정신 밖의 외부의 객관적 물질이자 대상의 내용으로 

착각하게 되는 것이다. 


따라서 이런 내용을 

위 색, 수, 상, 행, 식이란 각 범주가 갖는 의미와 

관련하여 각기 음미해 볼 필요가 있다. 





한편 눈으로 본 색깔 외에 

귀로 들은 소리나 

기타 코로 맡은 냄새, 

혀로 맛본 맛, 

손발로 얻는 촉감 등도 사정이 마찬가지다. 


이 가운데 눈으로 본 색깔도 색[色]이라고 표현하지만,  


각 감각기관으로 얻은 정신적 내용물인 

색깔, 소리, 냄새, 맛, 촉감을 모두 다 합쳐서 

다 함께 색[色]이라고 하는 것도 

주의를 기울일  필요가 있다. 




한편, 우리가 귀를 통해 소리를 얻을 때 

예를 들어 

자신이 본 그릇이 떨어지고 

소리가 난다고 여길 때 


그릇의 모습은 

자신의 눈으로 본 내용(색깔감각)이다. 


그런데 이 관계에서 

자신의 눈으로 본 시각적 감각내용이 

그런 청각적 감각내용을 일으키는 것은 아니다. 


눈으로는 색깔을 볼 때 

귀로는 소리를 함께 듣고 

이 내용을 결합시켜 

그런 생각을 하게 된 것이지만, 


이들의 관계를 이해할 때, 

눈으로 본 그런 색깔이 

그런 소리를 일으키는 것[대상]이라고 

이해하는 것도 

앞에서 나타난 잘못된 착각의 하나이기도 하다. 


이는 귀로 들은 소리를 눈이 대하여 

어떤 색깔을 얻는 것이 아닌 것과 사정이 같다. 


그런데 이런 착각은 

자신이 얻은 감각내용을 

곧 대상 자체로 이해하는 착각과도 

관련된다. 


자신이 눈을 통해 본 색깔은 색(色)이고 

자신이 귀로 듣게 된 소리는 성(聲)인데, 


자신이 눈으로 그런 모습을 보면서 

소리가 들렸기에 

그릇(색깔)이 소리를 낸 것이라고 말하는 것이지만, 

여기에는 이런 기본적인 착각이 

들어 있는 것이다. 


더욱이 자신이 생각으로 만들어 가진 관념[想](예; 그릇)이 

이런 감각들을 얻게 한 대상도 아닌 것이다. 


이런 착각의 내용을 정확히 이해하면 

색, 수, 상, 행, 식의 의미를 

좀 더 분명하게 파악할 수 있다. 




여기서 색이 가리키는 의미가 

자신이 감각하여 얻은 감각내용이라는 점에 

주의하면, 

이 표현이 가리키는 의미의 차이를 

구별해낼 수 있을 것이다. 


간단히 말한다면, 

그릇이 떨어지는 상황에서 

눈을 감아, 그릇의 모습을 보지 못하더라도, 

소리는 들을 것이다. 


자신이 눈을 통해 얻은 색깔의 감각내용이 

소리의 감각내용을 일으키는 것이 

아니라는 것은 

이들이 그런 감각내용을 얻게 하는 

실재 대상이 아니라는 의미다. 


여기서 살피는 색은 

우리의 마음 안에 얻어 놓은 

정신적 내용물이다. 




우리는 물론 

눈으로 색(色)이란 감각내용을 얻게 하고 

귀로 소리(聲)란 감각내용을 얻게 하는 

'실재'의 무엇을 추리해 생각할 수 있다. 


즉 실재의 그 무엇[실재의 대상]을 

실재의 눈이 대하여 마음에서 그런 색을 얻는 것이고 

실재의 귀가 대하여 마음에서 그런 소리를 얻는 것이라고 

추리할 수 있다. 


그러나 이런 실재내용들은 여기서 제시하는 

색, 수, 상, 행, 식과는 

조금 다른 차원임을 이해할 필요가 있다. 


실재내용과 관련된 문제는 

뒷 부분에서 실재내용의 공함을 살필 때 

다시 살피기로 한다. 


실재내용의 문제에서는 

각 개인이 마음에서 얻은 감각내용이나 관념내용을 가지고 

그것이 곧 실재내용이라고 착각하거나, 

또는 그런 내용을 얻게 한 실재내용은 

자신이 얻는 감각내용이나 관념내용과 일치하는 내용이라거나, 

또는 적어도 그와 비례하는 어떤 내용이라고 

생각하는 것 등이 오류이다. 


실재내용은 어떤 주체도 그 내용을 직접 얻지 못하기에 

이런 추리는 모두 타당하지 않다. 

따라서 앞에서 본 것처럼 감각을 통해 얻는 색의 내용을 가지고, 

이를 물질이나 객관적 외부 대상이라고 생각하거나, 

또는 이런 판단을 다시 실재 내용에 연장해 적용하는 것도 모두 

역시 오류가 된다. 


여하튼 여기서는 색, 수, 상, 행, 식의 문제를 주로 살피며 

이를 얻게 한 실재대상이나 실재의 주체의 문제는 

뒤에서 별도로 좀 더 자세히 살피기로 한다. 





여하튼 사람들은 

이런 기본적인 착각을 바탕으로 해서 

자신이 감각한 내용(감각현실)과 함께 


다시 마음에서 관념내용을 얻고, 

이들 관념을 다시 서로 분해하고 결합해가면서, 

심지어 한 번 보지도 만지지도 못한 내용을 

관념으로 무수히 만들어 내기도 한다. 


날개달린 말, 

뿔달린 도깨비 그런 것들도 

그와 사정이 비슷하다. 


이제 그런 것은 

위 분류 가운데 어디에 들어갈 것인가.


이는 색이 아니라, 

상(想)에 해당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한편 

색, 수, 상, 행, 식 이 5가지 요소는 

어떤 한 주체가 얻는 일반 현상의 내용이기도 하지만, 

자신, 타인, 다른 생명체를 무엇으로 볼 것인가라는 

문제를 가지고 살필 때도 

사용되는 내용이다.


이 역시 올바른 판단은 아니지만, 

상식적인 입장에서 자신을 자신이 살필 때 

자신으로 보는 내용, 또는 자신을 구성하는 요소라고 생각하는 것이 

바로 이 색, 수, 상, 행, 식이기 때문이다. 


즉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이 색, 수, 상, 행, 식을 가지고 

그것이 곧 자신이라고 관념을 세워 갖는 것이다. 


앞에 제시한 그림을 놓고 

자신이 직접 눈을 감고 뜨면서 

그 내용을 다시 검토해 보기 바란다. 





[그림]  08pfl--image\진리의오류55.jpg

fr http://thegood007.tistory.com/1172

03fl--ghpt\r1030.htm



자신이 현실에서 눈을 떠 바라보는 세계의 모습 가운데 

자신이라고 생각하는 내용은 무엇인가. 

이는 자신이 눈을 떠 바라본 모습을 위 그림과 같이 나타낸다면 

이 가운데 어느 부분을 자신으로 생각하는가 하는 문제다. 


또 그렇게 자신이 자신으로 생각하는 내용들은  

사실 그 내용들이 무엇들인가를 생각해 보는 것이 

기본적으로 필요한 것이다. 


여하튼 이런 내용들을 통해 

색, 수, 상, 행, 식의 의미를 

올바로 잘 이해할 필요가 있다. 




여하튼 색, 수, 상, 행, 식 5온은 

곧 현실 현상내 

세계와 자신의 요소로 제시되고  

세계와 자신의 기본 분류 범주로 된다. 


결국 모든 현상의 일체 내용이 

색, 수, 상, 행, 식의 5 요소로 분류되어 

포함된다. 


그래서 이 색, 수, 상, 행, 식을 나열하여 살피면, 

그것은 곧 현실 세계 일체를 나열해 

살피는 것과 같게 된다. 


일체를 나누는 방법에는 

이외에도 6대, 12처, 18계와 같은 방식도 

있다. 


그런데 5온을 가장 먼저 제시해 살피는 것은 


현상에서 한 주체가 얻는 일체의 내용은 

그 내용을 얻는 단계별로 

그 내용의 성격이 다르고 

이를 통해서 현상에서 얻는 일체의 내용을 

분류할 수 있기 때문이다. 


즉 한 주체는 

감각하여 색을 얻고 

그리고 수를 일으키고 

그리고 상을 일으켜 얻고 

그리고 행을 일으키고 

그리고 식을 일으킨다. 

그리고 이것이 현실에서 얻는 일체의 

내용이 되는 것이다. 


따라서 이와 같이 분류해 그 내용을 살피면 

한 주체가 얻는 현상적 내용 일체를  

모두 이 범주안에 포함시켜 살필 수 있게 되는 것이다. 


또한 여러 범주 가운데 색, 수, 상, 행, 식을 

기본적으로 살피는 것은 

사람들이 가장 집착하는 것이 자기 자신이고 

이 자신을 살피는 데 있어서

이 색, 수, 상, 행, 식의 분류방식이 

보다 기본적인 분류방식이 되기 때문이라고 본다. 





한편 

현실 현상의 내용을 색, 수, 상, 행, 식으로 

제시할 때 


이런 현실 현상의 내용을 얻게 하는 

기본 바탕으로서 

실재대상과 실재 주체가 무엇인가가 문제된다. 


이것이 곧 실재의 공함과 관련된 내용이다. [ 공한 실재]



한편, 이런 현실 현상안에

그런 현상을 나타나게 하는 진짜라고 할 

영원불변한 본체가 있는가의 문제도 제기된다. [비아, 무아, 무자성] 



그래서 이 색, 수, 상, 행, 식과 관련하여 

경전에서 제시하는 

기본적인 판단이 여러 차원에서 

제시되는 것이다. 


즉, 

1 그 현상적인 모습은 영원하지 않다 [무상]

1 그 가치적인 측면은 일체의 생멸하는 현실이 모두 고통과 관련된다. [고]

1 그 실재의 내용은 얻을 수 없어 공하다. [공]

1 그것은 영원불변한 실체가 아니며, 실체는 존재하지 않는다. [비아, 무아, 무자성]


*pt* 끝 to k0020sf--♠○ 색,수,상,행,식 오온에 대하여 




이들 내용은 

다음에 관계되는 부분에서 

다시 살피기로 한다. 





[반복]


● 일체를 무상, 고, 공, 비아라고 보는 근거 


[반복끝]


앞에서 현상을 색, 수, 상, 행, 식으로 나누어 

살피는 것을 제시하였다. 


그리고 부처님은 

이 색, 수, 상, 행, 식과 관련되어 

그 현상적인 측면, 

그리고 가치적인 측면, 

그리고 그 실재의 내용, 

그리고 그 영원불변한 본체의 존부 문제 등에 

관해 


가장 기본적인 무상, 고, 공, 비아의 판단을 

제시한다. 


이들은 일체에 관해 공통적으로 

성립하는 판단이다. 


이에 추가한다면 열반적정도 

그와 같은 기본적인 판단의 하나가 된다. [5법인]


일체에 대해 공통적으로 성립하는 

이들 내용은 가장 기본적인 내용이지만, 

이 내용의 이해는 의외로 어려울 수 있다. 


여기에서도 당장 간단히 설명할 수는 없다. 


불교의 많은 논서들이 

이 문제에 대해 깊은 논의를 전개하고 있다. 


이 부분은 불교의 가르침을 크게 

실상론[세계는 무엇인가에 대한 가르침], 

연기론[세계는 어떻게 나타나는가], 

수행론[무엇을 목표로 하고 어떻게 실천해야 하는가]으로 나눌 때 

실상론에 속하는 부분이다. 


여하튼 앞에서 본 것처럼 

무상, 고, 공, 비아라고 간단히 제시되는 

이 명제가 갖는 의미에 대해서는 

별도의 경전과 논서 내용을 참조해야 하고 

또 앞으로 계속 연구해야 할 내용이 된다.



다만 위 내용은 

엄격하게 모두 그 내용의 참을 

증명할 수 있는 내용이다. 


즉, 사실은 참이 아닌데, 

단지 부처님이 그렇게 주장했기에 

그렇다고 그저 믿고 

부처님을 따라 그렇게 봐야 한다고 

제시된 내용은 결코 아니다. 


또 그것은 누가 세계가 그렇게 되었으면 하고 바라고 

희망하기 때문에 

그렇게 받아들이고 믿어야 한다고 

주장되는 내용도 아니다. 


위 내용들은 사실은 

대부분 사람들이 바라고 희망하는 내용과는 

거리가 멀다. 


그럼에도 사실이 그러하기에 

그렇다고 제시되는 내용인 것이다. 



사람들은 

특히 자신이 애착하고 집착하는 내용이 있으면 

그것이 영원히 존속하기를 바란다. 


또 세상에 괴로움보다는 

즐거움이 가득하기를 바라고 

자신이 즐거움을 느낄 때 

세상은 모두 즐거움이라고 여기고 싶어한다. 

그리고 그 즐거움이 장차 자신에게 고통을 

가져다 주는 것이 아니라고 생각하고 

또 그렇게 되기를  바란다. 


또 자신에게 

자신의 진짜내용이라고 할 영원불변한 자신의 본체가 있기를 바라고 


또 자신의 실재 내용도 

자신이 현실에서 얻는 내용과 

같은 내용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부처님이 제시하는 내용은 

사람들이 갖는 이런 희망과는 

모두 반대되거나 

일치되지 않는 내용들인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는 일단, 

일체에 대해 성립하는 

가장 기본적인 이런 판단의 내용들이 

왜 옳은가를 스스로 깨달아 

남에게 설명할 수 있어야 

일체에 대한 가장 기본적인 진리를 

올바로 깨달은 상태가 되었다고 할 것이다.


여하튼 누군가 

이런 기본적 진리의 내용 자체가 이해가 되지 않는다거나 

납득이 되지 않는다거나, 

의문이 일어난다면, 

그에 대해 답을 얻어야 한다. 


이들 각 명제의 의미는 무엇이고 

그것은 무슨 근거로 

그것이 옳은 판단이라고 주장할 수 있는가하고 

스스로 묻고, 

그리고 그 답을 얻는 것이 

곧 불교에서 말하는 

가장 기본적인 깨달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다만 이에 관한 내용을 자세히 살피면 

그 내용이 매우 길게 되므로 

여기서는 아주 간단하게만 

살피기로 한다. 


좀 더 자세한 내용이나 

보다 엄격한 증명은 관계되는 부분에서 

다시 논의하기로 한다. 





○ 왜 현상 일체가 영원하지 않다고 하는가. 


앞에서 살핀 것처럼 

우리가 현실에서 

현상적으로 얻는 모든 내용은 

색, 수, 상, 행, 식으로 분류할 수 있다. 


그런데 이들 색, 수, 상, 행, 식 일체는 

우리의 주관이 관계하여 얻는 내용으로서 

우리의 주관이 관계하면 얻고 

그 관계를 떠나면 사라지고 얻지 못한다. 


그래서, 어떤 현상의 내용을 놓고 생각하더라도 

이런 주관과의 관계를 떠나면 

그것이 사라지고 존재하지 않는 것임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우리가 현상의 모든 내용을 다 경험하는 것은 아닐지라도 

어느 한 순간 현상의 내용을 얻다가 

그 관계를 떠나면 그 내용이 사라지는 것을 통해서 

지금 얻는 내용, 과거에 얻은 내용, 다음 미래에 얻을 내용을 포함하여 

현상의 일체 내용은 모두 

영원한 것이 아님을 이로써 간단히 밝힐 수 있다. 


현상 일체는 그래서 영원하지 않은 것이다. 





○ 왜 모든 현상을 고통이라고 보는가. 


사람들은 세상을 살면 

좋은 일도 있고 나쁜 일도 있는 법인데 

왜 일체를 다 고통이라고 제시하는가에 대해 

의문을 갖기 쉽다. 



이는 다음과 같은 사정으로 

일체의 현상이 

모두 고통과 관련됨을 밝히는 내용이다. 


우선, 불교의 목적은 

불교의 4성제가 제시하는 것처럼 

고통을 없애고 

해결하는 것이 목적이다. 

[고제-고집제-고멸제-고멸도제] 


물론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현실에는 

좋음과 나쁨이 섞여 있는 것이며, 

또 즐거움과 괴로움도 섞여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래서 

현실의 일체 내용을 

나쁜 것, 좋은것, 

나쁘기도 하고 좋기도 한 것, 

또는 나쁘지도 않고 좋지도 않은 것으로 

나눈다고 할 때 

이 가운데 문제점이 되는 것은 결국 나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래서 삶에서 이 나쁨을 제거하고  

이후 그것이 다시 발생하지 않도록  

원인을 제거하는 것이 

목적이 되는 것이다. 


그래서 불교의 목적은 

고통과 

고통을 불러 일으키는 원인[탐욕, 분노, 어리석음,  번뇌, 집착- 망상분별 ]을 

제거하여 

다시는 고통이 발생하지 않게 하는 것을 

목표로 하게 된다. 


그리고 그것이 성취된 상태를 

심해탈, 혜해탈, 열반 등으로 

표현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런 입장에서 

제거해 없애고  

앞으로 발생시키지 않아야 할 고통이란 현상을 기준으로 

일체 현상을 살핀다면,  

현실의 일체의 현상이 

다 이 괴로움과 관련되었음을 관찰하게 된다. 


그래서 이런 내용을 

현상의 일체는 모두 고통이라고 표현하는 것이다. [일체개고] 



일체현상은 다음과 같이 

모두 고통과 관련된다. 


우선, 고통스러운 것은 그 자체가 고통이기에 

괴로움이다. [ 고고(苦苦)] 


한편, 좋은 것은 그것이 영원하지 않고 

언젠가는 무너지고 사라지기에 

고통을 주게 된다. 따라서 이를 고통으로 본다. [ 괴고(壞苦)] 


그리고 그외 것도 그것은 변화하는 것이기에 

고통을 주게 된다. [행고(行苦)]


그래서 일체 현상은 이처럼 괴로움과 관련되는 것이며 

따라서 일체 현상이 이런 괴로움과 관련된 

현상이라는 점을 제시한 것이다. 


그리고 불교에서 해결하고자 하는 목적상태은 

이런 괴로움을 

제거하여 다시는 발생하지 않게 하는 것이며, 


그 방안이 곧 지금 경전에서 제시하는 

심해탈의 방안과 함께 

경전 안에서 이어 제시하는 

여러 수행방안들인 것이다.[고멸제-고멸도제]


세속의 일반적인 입장은 생멸하는 현상 가운데 

그것이 비록 일시적인 것이더라도 좋음을 준다고 여겨지는 상태를 

목표상태로 정하고 살아가는 것이 대부분이다. 


그러나 불교에서는 생멸하는 일체 현상은  

비록 그것이 일시적으로 좋음을 주는 것이더라도 

궁극적으로 긴긴 고통을 가져다주는 불완전한 좋음이며, 문제현상으로 보고 

이 고통을 모두 근본적으로 해결하는 것을 목표로 한다는 점에서 

세속의 일반적인 입장과는 크게 다르다. 


따라서 이런 입장에서 

현실의 문제를 살피고 

일체를 고통으로 관하는 것임을 

이해할 필요가 있다. 





○ 한편, 이런 일체 현상, 즉 

색, 수, 상, 행, 식을 나타나게 하고 얻게 하는 

본 바탕으로서 실재는 어떠한가. 


그 실재는 얻을 수 없고 공하다는 것이 

불교의 입장이다. 


이 실재의 문제는 

만일 어떤 이가 꽃을 보았다면, 

이 꽃은 자신이 그 모습을 보던 보지 않던간에 

있을 그대로의 실재모습은 어떤 것인가라고 

의문을 제기하는 경우의 문제이다. 


이 실재의 문제를 

좀 더 자세히 설명하면 다음과 같다. 


우선 

자신이 눈을 떠 어떤 꽃의 모습을 보았다고 하자. 

그런데 자신이 눈을 감으면 

이제 그 꽃의 모습은 보이지 않는다. 


그런데 이 경우 

눈을 감아 꽃의 모습이 보이지 않는다고 하여서 

자신이 앞 순간에 본 꽃이 그 순간 

아주 사라져 없어진 것인가. 


아니면, 

자신이 꽃의 모습을 보던 또는 보지 않던 관계없이 

꽃은 꽃대로 그대로 있다고 해야 하는가. 

이런 문제가 제기된다. 


그래서 이런 문제와 관련하여, 

자신이 꽃을 보던 안 보던 

자신과 관계없이 있다고 할 꽃의 실재의 내용은  

무엇인가 하는 의문을 갖게 된다. 


이처럼, 현실에서 얻는 내용을 

색, 수, 상, 행, 식이라고 할 때 

이들 일체의 것에 대해 

그것들이 자신과 관계하지 않을 때,  

그것들이 있는 그대로 실재하는 내용은 

무엇인가 하며 의문을 갖는 것이다.  


그리고 이런 실재내용을 생각한다면, 

눈을 떠 자신이 꽃의 모습[색]을 보는 것은 

다음과 같이 추리하게 된다. 


즉 

실재의 자신과 자신의 실재의 눈(감각기관)이 

이런 실재하는 내용을 대상으로 

관계하여 자신의 마음에 

그런 꽃의 모습[색]을 얻게 된 것이라고 

추리하게 되는 것이다. 


그런데 과연 그 실재내용들은 

무엇인가? 


그러나 모든 이는 

자신의 주관과 감각기관, 인식기관이 관계하여 

얻는 내용만 자신의 마음으로 얻을 수 있다. 


그래서 이 실재 내용은 

앞과 같이 추리만 할 뿐 

그 실재 내용 자체는 끝내 

직접 얻을 수 없다. [불가득(不可得) ] 



>>>>>



이제 실재내용이 무엇인가의 추리 문제를 

다음과 같이 좀 더 자세하게 살펴보자. 


이미, 앞에서 색, 수, 상, 행, 식을 살피는 과정에서 

 '색'은 감각기관을 통해 얻는 감각내용을 의미하며, 

정신 안의 정신적 내용물임을 보았다. 


그리고 이런 감각내용으로서 색은 

그 색을 얻게 하는 정신 외부의 객관적 대상이 아님을 보았다. 


따라서 정신과 별개의 

외부의 객관적 대상이란 의미를 나타내기 위해 

'물질'이란 표현을 사용하는 가운데, 

색을 그런 물질과 같은 표현이라고 이해하면 곤란함을 보았다. 


그렇다면 이런 색을 얻게 하는 실재내용은 

무엇인가가 문제된다. 


또 이런 경우 색을 얻게 하는 실재내용은 

앞에서 살핀 '물질'인가의 의문도 

함께 제기될 수 있다. 


앞에 제시한 그림을 놓고 

실재내용과 감각내용의 관계를 그림을 통해서 다시 살펴보기로 하자. 






[그림]  08pfl--image\진리의오류55.jpg

fr http://thegood007.tistory.com/1172

03fl--ghpt\r1030.htm


이는 1 이라는 사람이 눈을 떠 보게 되는 내용을 

그림으로 나타낸 것이다. 


1 이라는 사람이 2 를 관찰할 때 

2 라는 사람은 눈을 뜨면 무엇이 보인다고 하고 

눈을 감으면 무엇이 보이지 않는다고 한다. 


그래서 우리는 이렇게 그림과 같이 추리한다. 

2 가 보는 모든 내용은 1 로서는 직접 알 수 없지만, 

여하튼 2 의 머리(정신영역) 안에 

위 그림에서 5^ 의 내용과 같이 존재할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관련 글에서 밝혔지만 이런 생각은 상식적인 생각이며 

사실은 오류의 내용이다. 


여하튼 이런 상식적 내용을 통해 생각해보면 

2 가 감각하는 모든 감각현실은 

우선 5^ 와 같은 내용으로 2 가 얻는다고 추리된다. 


1 이 꽃을 하나 본다면 그 꽃은 4 와 같은 것이다. 

그런데 2 가 그 꽃을 본다면, 

2 도 역시 그의 마음 5^ 안에서  4^ 와 같은 내용으로 

얻으리라고 추리하게 되는 것이다. 


이렇게 놓고 보면 

2 가 얻는 4^ 와 같은 꽃에 대한 감각내용은 

그 꽃의 실재내용이 아님을 생각하게 된다. 


그리고 2 가 눈을 떠 그의 마음 5^ 에 감각내용으로 꽃모습 4^ 를 얻는다면, 

2 가 얻는 꽃 모습 4^ 와는 별개로 

그런 꽃모습을 얻게 한 내용이 2 외부에 4 와 같은 형태로 

별도로 있다고 1 은 생각하게 된다. 


그래서 2 가 눈을 감으면 꽃의 모습이 사라지고 

눈을 뜨면 꽃의 모습이 나타난다고 1 에게 보고할 때 

그렇게 사라졌다 나타났다 하는 것은 

2 의 마음 5^ 에서 2 가 얻는 감각내용으로서 

4^ 와 같은 내용이 그런 변화를 보인 것이지,  


1 이 관찰할 때 2 의 밖에 있다고 보는 4 의 내용이 

그렇게 사라지고 나타난 것이 아님을 보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위 그림만 놓고 보면 

2 가 꽃의 모습 4^ 을 감각할 때는 

그것은 2 마음 밖의 4 라는 내용과 

2 의 눈이 관계하여 그의 마음에 

4^ 와 같은 꽃의 감각내용을 얻게 된 것이라고 이해하게 되는 것이다. 


이것은 2 가 스스로 생각하기를 

자신이 4^를 2^의 일부분(2가 스스로 생각하는 자신의 육체에 있다고 보는 눈)이 관계하여 

4^의 모습을 얻는다고 생각하는 것과는 

우선 크게 다른 내용이다.  


여하튼 이런 추리를 바탕으로 

2 가 어떤 감각내용(현실)을 얻게 될 때는 

그 감각내용에 대응해 적어도 

그런 감각내용을 얻게 한 실재내용과 실재의 주체의 감각기관이 

그 외부에 따로 존재할 것이라고 추리하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1 의 입장에서는 

2 가 2 의 마음에서 어떤 내용 4^ 를 얻게 된 것은 

2 의 마음 밖에 있는 

실재의 대상으로서 4 와 

실재의 주체 2 의 감각기관이 서로 관계하여 

그런 내용을 2 의 마음 5^ 에서 얻는 것이라고 생각하게 된다. 


즉 1 의 입장에서는 

2 가 그의 마음에서 4^ 와 같은 모습을 얻게 한 

실재대상과 실재의 주체의 내용은 

4 와 2 의 일부분(2의 감각기관)이라고  

잘못 이해하기 쉽다. 


그런데 이것이 또 하나의 상식적인 생각이고 

오류의 생각이기도 하다. 


여하튼 그것이 오류의 내용이기는 하지만, 

이제 2 에 대해서는 

일단 위와 같이 추리했다고 하자.  





그런데 정작 2 가 마음에서 얻는 감각내용은 

1 자신의 입장에서는 무엇인가를 다시 생각해보자. 


1 자신의 입장에서 생각하면 역시 

자신이 눈을 떴다 감았다를 반복하는 가운데 

나타나고 사라지는 그 내용은 

바로 위 그림에서 5 라는 상자 안에 그려 놓은 

내용 전부인 것이다. 


결국 자신이 감각현실로 얻는 내용 전체가 

바로 그런 것이다. 


이제 자신이 얻는 내용이 

자신의 마음 안의 감각현실이라고 하면, 

1 의 감각현실을 얻게 한 실재내용은 

무엇일까를 

앞의 2 의 관계처럼 놓고 생각해보자. 


일단 1 이 얻은 감각현실 전체 

즉 5 안의 내용은 그런 실재내용이 아니다. 


그래서 이런 감각현실을 얻게 한 실재내용은  

5 밖에서 찾아야 하는 것이다. 


그래서 실재내용이 무엇인가는 

이런 입장에서 다시 그것이 새로 

논의되어야 할 필요가 있게 된다. 





앞에서 2 에 대해 2 가 감각내용을 얻는 과정을 추리한 내용은 

상식적으로 생각하게 되는 내용이지만, 

이런 추리가 기본적으로 오류라는 것은 

이들 내용이 기본적으로 1 이 얻은 1 의 감각현실이고 

1 의 마음 안 내용이라는 점 때문이다.


이것이 오류임은 다음의 사실을 생각하면 쉽다. 


만일 1 이 4 라는 감각현실을 얻는 과정을 놓고 

2 가 추리하기를 

1^ 와 4^ 가 서로 관계하여 

1^ 가 어떤 감각내용을 1^ 내부 영역(1의 마음)에서 얻는 것이라고 

추리해 생각한다면, 

그것이 잘못된 추리인 것과 마찬가지다. 


1 은 2 가 행하는 이런 추리가 잘못된 추리임을 쉽게 알 수 있다. 


이와 마찬가지로 

1 이 앞에서 행한 2 가 감각내용을 얻는 과정에 대한 

추리도 이처럼 잘못된 것이다. 


즉 2 나 4 는 모두 1 이 얻은 감각내용으로서 

1 의 마음 안 내용물이다. 


따라서, 2 나 4 는 

2 가 어떤 감각내용을 얻을 때 관계하는 

'실재대상'이나 '실재주체'가 모두 아닌 것이다. 


즉, 

1 의 마음안 내용들인 2 와 4 가 서로 관계하여 

2 의 영역 안에서 2 의 감각내용이 존재하는 것이 

아닌 것이다. 


그래서 앞에서 행한 추리는 상식적인 판단이기는 하지만, 

이런 오류를 기본적으로 갖는 것이다. 

 


그러면 실재 내용은 과연 무엇인가? 

앞에 제시한 그림을 놓고 

실재내용과 감각내용의 관계를 그림을 통해서 다시 살펴보기로 하자. 




○ 감각현실과 실재내용의 관계 





[그림]  08pfl--image\진리의오류55.jp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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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t* 시작 to k0020sf-- ♠○ 오온의 공함의 의미


어떤 감각내용을 얻을 때 그런 감각내용을 얻게 한 

실재내용은 무엇인가? 


대부분 상식적으로 추리할 때는 

어떤 이가 4 라는 꽃의 모습을 얻으면 

그 꽃의 모습을 얻게 한 외부의 실재내용도 

그 꽃의 모습과 똑같이 일치한 내용이거나, 

적어도 그와 비슷하거나 또는 비례하는 그 무엇이라고 추리하게 된다. 


또는 어떤 주체가 위와 같은 감각내용을 얻을 때 

이것이 마음 안의 정신 내용물 즉, 감각내용이라고 생각하지 않고 

이런 내용 자체가 곧바로  

외부의 객관적 대상이라고도 생각하기도 한다. 

그리고 이런 의미로, 

'물질'이란 표현을 사용하기도 함을 보았다. 


이제 이것이 잘못이라고 생각하는 경우에도 

다시 그런 내용이 감각내용 밖에 

그런 감각내용을 얻게 하는 내용으로 

물질적으로 존재한다고 추리할 수도 있다. 

이것도 결국 앞의 추리와 같은 추리라고 할 수 있다. 




우리는 이미 앞 그림에서 2 가 어떤 감각현실을 얻을 때, 

비록 위 그림과 같이 나타내는 것은 잘못된 추리임을 보았지만, 

대강 위 그림과 같이 관계를 나타내는 것도 

이와 같은 생각을 바탕으로 한 것이다. 


즉 위 그림에서 

2 의 마음에서 얻는 4^ 의 내용은 

그 외부에 있는 꽃의 모습 4 와 서로 비슷한 형태로 

그가 얻는 관계로 그려 놓은 것이다. 


물론 이런 그림과 같은 추리는 

앞에서 이미 본 것과 같이 다음과 같은 오류가 있다. 


우선 1 의 입장에서는 2 가 마음 안에서 어떤 감각내용을 얻는지 

정확히 직접 그 내용을 얻을 수 없다. 

그래서 일단 4^ 와 같은 내용을 얻는다고 그렸지만, 

일단 그것을 정확하게 확인할 도리는 없다. 


그렇지만, 만일 2 가 그의 마음 안에서 얻는 4^ 의 꽃의 모습이 

1 이 마음 안에서 얻는 꽃의 모습 4 와 정확히 똑같다고 가정하자. 


그런데 그렇다고 하여 위 그림에서 2 의 외부에 있다고 표시된 

4 의 꽃의 모습이 

2 가 그런 감각내용을 얻게 한 실재대상은 아닌 것이다. 

여기에서 2 나 4 는 모두 1 이 얻은 감각내용인 것이기 때문이다. 

이런 사정을 이미 앞에서 보았다. 


그래서 모든 주체가 다 동일하게 마음에서 

4 와 같은 감각내용을 얻는다고 가정하더라도, 

이런 감각내용을 얻게 한 실재내용은 무엇인가는 

이와는 모두 별도의 문제가 되는 것이다. 


그래서 각 주체별로 자신이 얻어 놓은 감각내용을 놓고 

이런 내용을 얻게 한 실재대상이나 실재의 주체의 모습이 

과연 무엇인가의 문제는 모두 

독립적으로 추리해야 하는 문제가 된다. 





그런데 이 문제에서는 어떤 주체도 이런 실재내용을 

직접 얻어낼 수 없는 것이다. 

경전에서는 과거 현재 미래의 모든 부처님 즉 삼세제불도 

그 내용을 직접 얻지 못한다고 제시한다. 


그 이유는 간단하다. 

모든 주체는 마음 안에서 얻는 내용만을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정작 마음 안에서 얻는 내용이 

어떤 실재내용을 대상으로 그런 내용을 얻었는가는 

끝내 얻을 수 없는 것이다. [불가득 不可得]  


그래서 어떤 감각내용을 얻을 때 

그것을 얻게 한 실재내용이 그 감각내용과 

완전히 일치하는 내용이라거나, 

또는 적어도 비슷하다거나, 

또는 일정한 비례관계를 갖는 그 무엇일 것이라는 등의 이 모든 추리는 

그것의 옳고 그름을 판단할 증거나 자료를 

기본적으로 하나도 얻지 못한다. 


그 내용을 하나도 결코 얻지 못하기 때문에 

같다거나 다르다거나, 

적어도 이와 비례한다거나 하지 않는다 등의 

일체의 판단을 행할 수 없는 것이다. 





또한 이러한 추리는 

이미 얻어 놓은 현상 내용 안에서도 

모두 설득력을 잃게 된다. 


우선 위 그림과 같은 관계에서 

어떤 2 라는 사람이 

눈을 통해 꽃의 모습을 4^와 같이 얻는다고 가정하면 


그는 그것을 얻게 한 실재 내용도 

그 모습과 같은 내용이라고 추리하게 된다. 


그런데 이제 2 라는 사람이 

4 라는 꽃을 손으로 대하여 만질 때는 

꽃의 모습이 아닌 꽃에 대한 '촉감'을 얻게 된다. 


이제 또 이 경우에는 그 4 라는 꽃의 실재내용은 

그 '촉감'과 같은 내용이라고 추리해야 한다. 


즉, 손으로 촉감을 얻을 때 

그 촉감의 내용을 얻게 한 실재내용도 

역시 그런 촉감이라고 하게 된다. 


그러면 결국 그런 촉감은 

자신의 손과 관계하지 않는다 해도 

그대로 있는 실재 내용이라고 하는 것이 된다. 


그런데 각 감각기관을 관련시킬 때마다 

이처럼 서로 차원이 다른 내용을 얻게 되기 때문에 


자신이 어떤 감각내용을 얻을 때 

실재내용도 그 감각내용과 같은 내용이라고 추리하는 것이 

오류가 된다는 사정을 이를 통해 쉽게 이해할 수 있다. 


즉 이 추리에서 

실재내용이 자신이 감각한 꽃의 모습이라고 한다면, 

촉감을 얻는 경우에는 

꽃의 모습(색)을 놓고 촉감을 엉뚱하게 잘못 얻은 내용이라고 하게 된다. 


반대로 이제 촉감을 그 실재내용이라고 이해하면 

눈으로 본 모습은 

그런 촉감과 같은 실재내용을 대하면서 

꽃의 모습과 같은 엉뚱한 내용을 얻어 가진 것이라고 이해해야 한다. 



눈으로 본 시각적 감각내용이 

손으로 얻은 촉감과 전혀 차원이 다른 것이고 엉뚱한 내용인 것처럼 

자신이 감각으로 얻는 내용을 

곧바로 실재내용이라고 추리하는 것은 

서로 다른 차원의 내용에 대해 

전혀 엉뚱한 추리를 한 것이 될 수 있는 것이다. 


촉감 영역에서는 있다고 하는 내용이 

시각의 감각영역에서는 없다고 하는 내용이 되고 

그 구체적 내용도 전혀 다른 것도 이런 추리의 약점이 된다. 


이런 추리가 현상내 각기 다른 감관 영역 사이에서도 

통용되지 않는다는 사실은 

이를 넘어 실재의 영역에 대해 적용시키는 것이 

매우 곤란한 추리임을 의미한다. 



한편 이제 실재내용은 이런 감각내용을 

다 함께 모아 놓은 것이라고 이해해도 

각 감각내용이 다 함께 엉뚱한 관계가 되는 것은 마찬가지다. 


각 감각은 적어도 실재내용 가운데 그 일부와 

일치된 내용을 얻는 것이 아닌가 생각할 수도 있지만, 

전체적인 내용과 관련해서 각기 다 엉뚱하게 

얻어간 것이 되기 때문이다. 


우리는 위와 같이 실재내용과 감각현실(시각적 내용)의 관계를 살폈는데, 

이는 감각현실과 실재내용과의 관계만 그런 것이 아니고 

관념내용과 실재내용도 이런 관계를 갖는 것이다. 


관념내용은 감각현실을 다시 바탕으로 하여 

마음에서 얻게 되는 것임을 생각한다면 

실재내용과 관념내용은 더욱 거리가 멀다고 이해할 수 있다. 


물론 이런 추리의 가장 근본적인 문제는 

이런 추리에 대해 그 옳고 그름을 판단할 

실재내용을 단 한 부분의 내용도 직접 얻어낼 방안이 없다는 점이다. 



또 다음 내용을 생각해보면 이런 추리가 갖는 

또 다른 문제를 볼 수 있다. 


오늘날 과학적으로는 

어떤 물체의 모습을 보는 것은 

그 물체가 우리에게 그런 파장의 빛을 반사시키고 

그 파장을 신경이 반응해서 

뇌 영역안에 그런 모습을 비추인 것이라고 이해한다. 


이렇게 놓고 볼 때도 이 사정을 쉽게 추리해 이해할 수 있다. 

우리가 사과의 붉은 모습을 볼 때 

정작 사과의 실재내용은 붉은 모습은 아니고 

단지 붉은 빛 파장을 반사시킨 그 무엇일 뿐이다. 


더욱이 붉은 빛 파장을 반사시킨 실재 내용 

-  반사된 붉은 빛의 파장 

- 이로 인해 흥분한 시신경의 상태 

- 이 신경의 자극을 전달받은 뇌세포 

이들은 서로 일치관계가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이들 추리의 한계는 물론 

앞에서 가장 처음 본 것처럼 

실재내용 자체를 직접 어떤 주체도 얻어낼 수 없다는 점이다.  [불가득 不可得]


그래서 실재내용은 

결국 무엇이 있다, 없다,  

-이다, - 아니다, 

같다, 다르다, 

좋다, 나쁘다, 

깨끗하다, 더럽다,....등의 

모든 이분법적인 분별을 떠나고 할 수 없는 것이다. [불이(不二)법]


그리고 이런 사정으로 

어떤 것의 실재에 대해 말하고자 할 때는 

이를 공하다라고 표현하게 되는 것이다. 


그것은 전혀 아무것도 없다는 것을 나타내는 것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무엇이 어떤 내용과 성질로 적극적으로 있다는 것을 

나타내는 것도 아니다. 


그래서 이렇게 분별을 떠나고 

언어로 표현할 수 없는 실재의 내용을 

공하다고 표현하는 것이다. 


그래서 주체와 객체나 그 실재는 

모두 공하다고 표현하게 된다. [일체개공] 


*pt* 끝 to k0020sf-- ♠○ 오온의 공함의 의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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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편 비아, 또는 무아, 무자성은 

다음의 문제이다. 


여기서 아란 표현은 진짜의 나,

곧 영원불변한 나라는 의미를 갖는다. 

현실에서 자신이 생각하는 나는 

진짜의 나, 영원불변한 나의 본체가 아니며 

그런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의미다. 



현실의 내용은, 그것이 무엇이던 

그와 관계하는 주관과 상황에 따라 

그 때마다 다른 모습으로 파악된다. 


예를 들어 바위 하나를 자신이 본다면, 

자신이 아침에 보는 바위나 

저녁에 보는 바위의 모습은 다르다. 

가까이 다가서 본 모습과 

멀리서 본 모습이 또 다르다. 


또 색안경을 쓰고 보는 모습이 다르고 

안경을 벗고 보는 모습이 다르다. 


또한 눈으로 대하는 내용이 다르고 

귀나 코 혀 손과 발과 같은 몸으로 

대하는 내용이 다르다. 


이렇게 다 다르고 변화하는 내용이기에 

매 순간 현실에서 얻는 내용은 

그것이 

자신이 대하는 것의 진짜의 내용이라거나 

그 대표의 내용이라고 인정할 수 없게 된다. 



그래서 현상의 내용은 하나같이 

진짜가 아니라고 하게 된다. 


그런데 현상의 내용이 

매번 대할 때마다 다른 내용이지만, 

그래도 현실에서 얻는 현상의 모습은 

어느 정도 골격을 유지하여 

얻어지는 것처럼도 생각된다. 


예를 들어 

어떤 이가 바위를 대한다면, 

바위로 부터 얻는 내용은 매번 다르지만, 

그래도 그 바위는 바위로서 일정한 

형체나 골격을 유지하고 있는 것처럼 

생각되는 것이다. 



그래서, 현실의 여러 현상은 비록 진짜가 아니고 

일시적이고 변화하는 거짓된 내용들이지만, 

이런 일시적이고 거짓된 변화한 현상이 

일정한 골격을 가지고 나타난다고 생각되는 것은 

그 안에 그런 현상을 일정하게 나타나게 하는 

영원 불변하고 고정된 본체가 있어서 

그런 것이 아닌가하는 추리를 하게 된다. 


이런 입장에서 영원불변하고 고정된 본체가 

있는가 여부가 의문으로 제기된 것이다. 


그러나 

그런 것이 나 자신에 있어서도 

외부 내용에 대해서도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 

불교의 무아, 무자성의 내용이다. 



한편, 영원불변하고 고정된 본체의 문제는 

과연 진짜의 내용은 무엇인가 하는 

문제와도 관련된다. 


현실 현상은 모두 각 조건과 상황에 따라 

다른 내용을 얻게 되고 

또 그 내용은 그 조건과 상황을 떠나면, 

변화되고 사라지는 것이다. 

또 현실에서 얻는 내용은 그 관계를 떠나면 

다른 관계에서는 그 내용을 주장할 수 없는 

내용이 된다. 


그래서 현상에서 얻는 내용(색, 수, 상, 행, 식) 일체는  

모두 마치 꿈과 같이 

진짜가 아니라고 보게 된다. 


꿈을 꾸는 동안은 

꿈이 마치 진짜인 것처럼 여겨지지만, 

그것이 진실된 내용이 아니라고 여기는 것은 


꿈에서만 그 내용을 얻고 

꿈을 깨면 그 내용은 사라지고 

또한 그런 꿈은 

그로부터 기대되는 다른 내용들을 

현실에서 얻지 못하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꿈 속에서 집에 금이 묻혀 있는 것을 꾸었어도 

꿈을 깨면 그 꿈에서 본 내용은 사라지고 

꿈에서 본 금이나 그 금이 묻힌 장소를 

현실에서는 찾아 볼 수 없다. 


그래서 꿈의 내용은 진실된 내용이 

아니라고 하는 것이다. 


그런데 그것은 

현실에서 얻는 내용도 그러하다. 



현실에서 얻는 내용들은 

그 관계에서만 그런 내용을 얻는 것이고 

비록 시간의 길고 짧음의 차이는 있지만, 

그것은 모두 변화하는 것이다. 

또 그 관계를 떠나면 

다른 관계에서는 그 내용을 주장할 수 없다. 


현실 내용은 우선 그 내용이나, 

그로부터 기대되는 다른 내용을 

실재의 영역에서 얻을 수 없다. 


또한 예를 들어 

자신이 눈으로 얻는 색깔은 

귀의 영역에서는 얻을 수 없다. 

반대로 귀로 얻는 소리는 

눈의 영역에서는 얻을 수 없다. 


이처럼 현실에서 얻는 내용은 

그것을 얻는 관계에 따라 

매번 다른 내용이 되며, 


또 그것을 얻는 관계를 떠나면 

그 내용을 다른 영역에서 

주장할 수 없는 것이다. 


마치 강물에 비친 달 모습이 

아무리 진짜 달처럼 보여도 

거기에서는 달에서 기대되는 다른 내용을 얻을 수 없고 

강물을 떠나서는 그것은 사라지고 마는 것이기에 

달 그림자는 진짜 달이 아니라고 하는 것과 같다. 


그래서 현상에서 얻는 내용(색, 수, 상, 행, 식) 일체는  

모두 마치 꿈과 같고 환영과 같은 것이어서 

진짜가 아닌 내용이라고 하는 것이다. 


현실에서 얻는 내용은 

모든 내용이 이와 같다. 


사람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사람은 아주 어릴 때 갓난 아이의 모습에서 

청년의 모습 그리고 노인의 모습으로 변화하며 

결국 죽음을 맞이하게 되는데 

이렇게 변화하는 수많은 모습 가운데 

어느 것이 참된 진짜의 자신의 모습인가하는 

질문도 이와 관련된다. 



문제는 현실 현상은 그렇다 하고 

이런 현실 현상을 나타나게 하는 

진짜의 내용 즉 영원불변한 본체는 

이 안에 존재하는 것인가가 문제된다. 


영원불변하고 고정된 것을 

진짜의 내용이라 관념하고 

이것을 찾는 것은 

그것을 정말 찾아서라기 보다는 


앞에서와 본 것과 같이 

현실에서 얻는 현상적 내용(색, 수, 상, 행, 식)이 

모두 꿈과 환영처럼 

변화하고 그 관계를 떠나면 사라지고 

다른 관계에서는 그 내용을 주장할 수 없는 내용들이기에 

거짓이라고 보고, 


따라서 이와는 반대로 

영원히 변화하지 않고 고정된 내용을 

진짜라고 관념하고 그것을 찾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그런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 

무아, 무자성의 판단이다. 


무아, 무자성을 밝히는 방법은 

관념으로 진짜의 관념을 영원불변한 본체라고 

정한 가운데 그것을 찾아 나서면, 


그렇게 정한 관념의 내용이 

현실의 내용과는 모순이 발생함을 통해 

밝힐 수 있다. 


즉, 그런 것이 존재한다고 가정하면,  

오히려 현실의 모습은 얻을 수 없는 모순관계를 밝혀서 

그 부존재를 밝히는 것이다. 


그래서 그렇게 관념으로 정해 찾은  

영원불변한 본체는 단지 관념으로 주장될 뿐 

그에 해당하는 내용은 

존재하지 않음을 밝힐 수 있는 것이다. 



한편, 이런 논의와 관계없이 


현실의 존재는 

변화하는 내용이기에 

이런 변화하지 않고 영원불변한 내용과는 

본래 관련될 수 없다. 


즉 영원불변한 내용은 

현실에서 변화하는 존재가 

변화를 통해 얻거나, 

변화를 통해 이룰 수 없는 내용임이 

이미 명백하다. 


그래서 결국 이 영원불변한 본체는, 

그것이 설령 있다고 가정한다해도, 

현실의 존재에게 어떤 실익도 없는 것이다. 


여하튼 이런 무아, 무자성의 내용은 

현실에서 얻는 내용이 

그런 영원불변한 본체로서 진짜 내용이 아니며, 

또 이런 현실내용을 나타나게 하는 

영원불변한 본체가 

이 안팎에 따로 있는 것도 아님을 

의미한다. 


그리고 현실 내용은 

어떤 진짜인 영원불변한 본체가 따로 있어서 

이와 상대하여 가짜라고 하는 것은 아니지만, 


현실내용은 현실내용대로 

진짜에 기대되는 여러 성질을 

갖지 못하기에 

역시 진짜가 아니라고 보게 되는 것이다. 



한편 이는 앞에서 살핀 실재의 문제에서 

실재가 공하다는 판단과도 관련된다. 


즉, 어떤 것을 놓고 그것이 

주관과 관계없이 

실재하는 내용은 무엇인가 하는 문제에서 

만일 영원불변한 본체가 있다면 

그런 영원불변한 본체를 

그런 실재의 내용으로 제시하면 될 것이다. 


그러나 영원불변한 본체가 존재하지 않으므로 

실재의 내용으로 그런 내용을 제시할 수 없는 것이고 

그 실재의 내용은 직접 얻을 수 없으므로, 

실재는 공하다고 표현하게 된다. 


그래서 공하다는 표현은  

실재의 내용을 얻을 수 없을 뿐 아니라, 

영원불변한 본체가 없다는 것도 

함께 나타내는 것이라고 이해할 수 있다. 



좀 더 자세한 설명은 

앞으로 관계되는 곳에서 

다시 살피기로 하고 

여기에서는 이처럼 불교의 가장 기본적인 판단에 

대해 약술하고 마치기로 한다. 


이제 다음의 의문을 살피기로 하자. 








[반복]


● 무상, 고, 공, 비아를 근거로 싫어하여 떠날 이유



앞과 같이 일체의 내용 즉 색, 수, 상, 행, 식이 

무상, 고, 공, 비아라고 관찰한다고 하자. 

그렇다고 해서 

싫어하여 떠날 마음이 생기는가. 


또 일체가 무상,고, 공,비아라고 하여 

싫어하여 떠날 마음을 일으키고 

기뻐하고 탐하는 마음이 없어질[염리厭離, 희탐진喜貪盡] 

필요가 있는가. 


무상, 고, 공, 비아라고해서, 

반드시 그런 상태로 나아가야 하는가. 


또 그럴 필요가 있고 

반드시 그렇게 나아가야 한다고 하더라도, 

무상, 고, 공, 비아임을 관하여, 

그처럼, 싫어하고 떠남과 탐하는 마음이 

없어짐[염리, 희탐진]이 잘되는가?


이런 의문을 가질 수 있다. 



경전에서는 

"색(色)은 

무상하다고 관찰하라. 

... 

수(受)·상(想)·행(行)·식(識)도 

또한 무상하다고 관찰하라. 

...

괴로움, 공, 나가 아님도 같다. 


이렇게 관찰하면 

그것은 바른 관찰이니라. 


바르게 관찰하면 

싫어하여 떠날 마음이 생기고, 

싫어하여 떠날 마음이 생기면 

기뻐하고 탐하는 마음이 없어지며, 

기뻐하고 탐하는 마음이 없어지면 

이것을 심해탈이라 하느니라. 


라고 제시한다. 


그런데 물론 

일체가 무상, 고, 공, 비아라고 관찰하여 

싫어할 마음을 일으켜 갖는 경우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현실에서 

일체가 무상, 고, 공, 비아라고 관찰하여, 

이를 통해 싫어할 마음을 일으켜 갖는 경우는 

드물다. 


예를 들어 어떤 이가 

현실에서 맛있는 음식을 먹고 

아름다운 이성을 만나 사랑한다고 한다면, 

그 음식이나 상대가 

영원하다고 생각하여 좋아했다거나, 


반대로 그것이 영원하지 않다고 하여 

그것에 대해 싫어하는 마음을 갖는 이는 

드문 것이다. 


현실에서는 

영원하지 않고 일시적이고, 

어떤 것이 한 순간밖에 얻을 수 없는 덧없는 것이더라도, 

그렇기 때문에 그럴수록 

더 그런 것들에 갈증을 일으켜 

애착을 갖는 경향이 더 강하다. 


예를 들어 영원하지는 않지만, 

딱 한 번만이라도 

어떠어떠한 소원을 이루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는 경우가 더 많은 것이다. 


현실에서 애착을 갖는 많은 것들이 사정이 같다. 


그래서 무상, 고, 공, 비아 등을 관한다고 하여 

반드시 싫어하여 떠날 마음이 생기는가에 대해서는  

의문을 갖기 쉽다. 



더 나아가 무상, 고, 공, 비아라고 하여 

싫어하여 떠날 마음을 갖고 

기뻐하고 탐하는 마음을 없앨 필요가 있는가에 대해서도 

상식적인 입장에서는 많은 의문을 갖게 된다. 


즉, 현실에서 자신이 

좋아하고 애착을 갖는 것이 많고, 

이것들이 자신에게 살아가는 기쁨과 즐거움을 주는데 

왜 이것에 대해 굳이 싫어하여 떠나야 하는가. 

또 기뻐하고 탐하는 마음을 없애야 하는가. 

이렇게 생각하게 된다. 



그리고 만일 일체의 현상에 대해 

이런 기쁨과 즐거움을 없애고 대해야 한다면, 

자신은 어떻게 앞으로 살아갈 것인가에 대한 

걱정도 갖게 된다. 


그런 입장에서는 비록 무상, 고, 공, 비아의 내용을 

관한다 하더라도 집착을 갖던 것에서 

집착을 잘 버리지도 못한다. 



그래서 

이런 입장에서는 

부처님이 하신 말씀을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게 된다. 


그래서 위와 같은 의문을 제기하고 

이에 관해 살펴야 할 필요가 있다. 


[반복끝]

 




○ 마음의 해탈(심해탈)의 효용


*pt* 처음 to ○ 잡아함-수행-심해탈 K0650sf-- ♠● 심해탈의 효용


일반 생명이나 세속의 사람이나 

부처님 가르침을 따르는 수행자나 모두 

삶에서 나쁨과 고통을 없애고 

좋음을 구하는 것은 같다고 할 것이나, 

그 방안에서는 서로 다르다. 

왜 그러한가. 


이 의문을 해결하기 위해서는 

우선 부처님의 가르침의 내용을 이해하는 것이 

가장 기본적으로 필요하다. 


부처님의 가르침은 이미 앞에서 살핀 것처럼 

삶에서 나타나는 고통을 제거하고 

그 고통의 원인을 근본적으로 제거하여 

고통을 앞으로 다시 나타나지 않게 하는 것에 

1차적인 목적을 두고 있다. 


한편 불교에서는 고통이 이번의 삶에서만 

나타나는 것이 아니고 

윤회의 긴긴 과정을 통해 반복해 나타난다고 본다. 


그리고 그런 삶과 윤회의 긴긴 고통은 

탐욕, 분노, 어리석음의 번뇌와 집착에 바탕하여 

뜻, 말, 행위, 태도 등의 업을 일으킴으로써, 

발생한다고 본다. [혹(惑, 번뇌)-업(業)-고(苦)]


따라서 삶과 윤회의 긴긴 고통을 제거하려면 

이런 번뇌와 집착을 제거해야 한다고 본다. 


그리고 이런 번뇌와 집착을 제거하기 위해, 

이런 집착을 일으키는 바탕이 되는 

잘못된 견해와 망상분별, 어리석음을 

제거해야 된다고 본다. 


그래서 이런 내용들이 모두 

수행 목표가 되는 것이다. 


즉 부처님은 

삶과 윤회를 통한 긴긴 고통은 

모두 탐욕, 분노, 어리석음의 번뇌에 대한 

집착 때문에 발생하고 


다시 그런 집착은 

자신이 집착을 갖는 자신, 자신의 것 등이 

집착을 가질만한 실다운 내용이 아님에도 

그것이 집착을 가질만한 실다운 내용이라고 

잘못 분별하기 때문에 갖게 된다고 본다.   


따라서 부처님은 

잡아함경 처음에 제시한 것처럼 

올바른 진리의 내용을 

올바로 관함으로써, 


자신이 집착을 갖던 자신과 자신의 것들이 

모두 사실은 집착을 가질만한 실다운 내용이 아님을 

깨닫고 집착을 버려서, 

탐욕과 분노, 어리석음의 번뇌의 묶임에서 벗어나 

마음의 해탈을 얻고 


모든 고통이 소멸된 니르바나의 상태에 

이를 것을 가르치는 것이다. 


즉, 

자신이 집착하는 자신, 자신의 것을 포함한 

일체 현상은 무상하여 변화하는 것임을 관함으로써, 

그런 덧없고 무상한 현상들에 탐욕이나 분노를 일으키거나,  

집착을 갖지 않아야 함을 가르치고, [무상]


또한 자신이 집착하는 자신, 자신의 것을 포함한 

일체 생멸하는 현상은 

그것이 아무리 좋은 것이라 하더라도 

그것은 무너지고 사라져 고통을 주게 될 뿐만 아니라,[괴고] 


그것은 또 다음의 긴긴 고통의 윤회의 결과를 

가져오는 징검다리가 되는 일시적인 좋음일 뿐이므로, 

자신과 자신의 것 등 일체 생멸하는 현상이 

모두 다 고통임을 관하여 

그에 대한 집착을 버릴 것을 가르치고, [고]


또한 

자신이 집착을 갖는 자신, 자신의 것 등은 

비록 자신이 자신과 자신의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그 모두는 자신의 마음 안 현상 내용으로서, 실재가 아니며 

그 실재는 얻을 수 없고 공함을 관하여 

집착을 버릴 것을 가르치며, [공] 


또 자신이 집착을 갖는 

자신이나 자신의 것 모두는 

진짜라고 할 영원불변한 실체의 내용이 아님을 관하여 [무아,비아,무자성]


자신이 집착을 갖는 자신이나 자신의 것 모두는 

마치 꿈과 환영과 같은 것들이어서 

진짜가 아니지만, 마치 진짜인 것처럼 나타나는 

실답지 않은 것임을 관하여 

집착을 갖지 않아야 함을 가르치는 것이다. 



이렇게 올바른 깨달음으로 

자신이 망상 분별을 바탕으로 집착을 갖던 

자신과 자신의 것, 

자신의 생명, 신체, 재산, 가족, 지위, 명예...등에 

모두 집착을 버리게 되면, 


그로 인해 그 동안 묶여 있던 

탐욕, 분노, 어리석음의 번뇌의 묶임에서 풀려나고 

또 그에 바탕하여 행하던 악을 중지하여, 행하지 않게 되고, 

또 그로 인해 받을 삶과 윤회를 통한 

긴긴 고통의 결과를 받지 않게 된다. 


그리고 그런 상태에서 이후 

잘못된 망상 분별에서 풀려나 

올바른 깨달음을 얻고 [지혜의 해탈]


자신이 지금껏 집착하던 것보다 

훨씬 더 가치있는 

복덕과 지혜가 원만히 성취된 선한 상태를 

아무런 집착과 번뇌를 갖지 않고 

원만히 성취해나갈 수 있게 되는 것이다. 







그런데 사람들은 

비록 삶에서 나쁨과 고통을 제거하고 

좋음을 구한다고 하지만, 

이와는 반대의 방향으로 생활하고 있다. 


즉, 일반의 사람들은 

잘못된 망상 분별에 바탕하여 

자신이 자신과 자신의 것, 또는 세계의 내용이라고 잘못 보는 

일정한 내용에 대하여 


탐욕과 분노 어리석음의 번뇌를 일으켜 

집착하여 행위함으로써 

살아가면서도 고통을 받고  

또 이로 인해 

긴긴 윤회의 고통을 받아 나가게 되는 것이다. 


결국 진리와 가치에 대해 잘못된 판단을 하고, 

이로써 잘못된 목표를 설정하고  

이에 집착을 갖고 

잘못된 방식으로 추구하므로서 

살아가는 동안 고통을 받고 

또 이로 인해 세세생생 고통의 윤회에서 

벗어나오지 못하게 된다. 


그래서 이것을 시정하는 것이 

수행의 목표가 되는 것이다. 




현실의 삶에서 사람들이 

고통을 받게 되는 과정은 다음과 같다. 


현실의 삶에서 

대부분의 생명은 태어나 생활하면서 

스스로 자신이 자신과 자신의 것으로 보는 내용 

즉, 자기 자신, 그리고 

자신의 생명, 신체, 재산, 가족, 명예, 지위...등에 

강한 애착을 갖고 

집착을 갖게 된다. 


그리고 각 생명은 그런 집착을 바탕으로, 

우선 자신의 생존과 생계를 해결할 방편을 찾고 

또 이것을 계속 유지해나갈 방편을 찾는다. 


그리고 이것이 해결되면, 

다시 좋음을 준다고 보는 또 다른 것들 

예를 들어 더 많은 재산과 명예나, 지위...등에 

애착을 가지며 추구해나간다. 


그러한 것을 모두 나열한다면, 

자기 자신, 신체, 건강, 시간, 장수, 즐거움, 지혜, 지식, 아름다움, 인격, 

직업, 지위, 물질적 부, 명예, 인간관계, 사랑, 결혼, 가정, 자손, 권력, 자유

타인, 다른 생명, 사회, 자연...


이런 것에 갖는 희망들이 모두 그런 것이다. 




또 세상사람들은 이외에도 

그것이 진정 가치가 없는 경우에도 

가치가 있다고 잘못 가치에 대해 판단하고 

집착을 갖고 추구하는 경우도 많다. 


예를 들어 사람들은 

어떤 것이 진정 가치가 있어서라기 보다는 

그것에 관심과 초점을 맞추고 

그것만 바라보고 생각하기 때문에 

어떤 것을 가치있다고 잘못 여기고 

집착을 갖기도 한다. 


또 사람들은  

시장에서 가격이 매겨지지 않는 것은 

그것이 진정 가치가 있더라도 

가치가 없다고 잘못 생각하고 


반대로 

시장에서 높은 가격으로 거래되는 것이면 

그것이 진정 가치가 없더라도 

그것이 가치가 있다고 잘못 여기고 

이를 집착하기도 한다. 


또 

어떤 것이 영원하지 않고 

잠깐만 유지되고 사라지거나, 

단지 특이하거나 희소하여, 

누구나 가질 수 없으면, 

곧 그것이 가치가 있다고 생각하여 

이에 집착하기도 한다. 


이런 이유 등으로 

예를 들어 

대부분 누구나 갖고 있는 눈과 손발과 

어떤 희귀한 도자기나 금, 은, 보석을 놓고 

사람들이 평소 이 가운데 

어떤 것에 더 관심과 집착을 갖는가 하면, 

사람들은 대부분 희귀한 도자기나   

금, 은, 보석에 더 관심과 집착을 갖는 

경향을 보인다. 


그리고 이처럼 뒤바뀐(전도된) 가치판단에 의해 

성취하기 힘들고 가치가 적은 것에 

오히려 더 집착을 갖고 

이를 추구하게 되고 

또 그런 사정으로 

이를 성취하는 경우도 드물게 된다.  


그래서 대부분 고통의 상황에 

직면하게 된다. 




또한 인과관계를 잘못 파악하여 

잘못된 수단과 방안을 통해 좋음을 구하므로, 

얻고자 하는 최종적인 좋음을 

잘 얻어내지 못한다. 


예를 들어 병을 치료하기 위해 

바위에 머리를 부딪히면 낫는다는 식으로 

인과관계에 맞지 않은 잘못된 처방을 

따르는 것과 같다. 


또한 좋음을 얻기 위해 

그것을 얻을 수 있는 일정한 수단을 구하지만, 

그 수단을 얻는데 너무 집착한 나머지 

좋음을 얻어낼 수단은 얻지만, 

정작 그를 통해 최종적인 좋음을 

얻지 못하는 경우도 많다. 


예를 들어 평안히 살기 위해 집을 구하여, 

집을 얻더라도, 

정작 그 집에 너무 집착함으로 인해 

그를 통해 얻고자 한 좋음과 평안함은 얻지 못하고 

오히려 그 집으로 인해 온갖 근심, 걱정 등 번뇌에 

싸여 살아가기도 하는 것이다. 


이런 관계로 좋음을 준다고 생각되는 온갖 

수단을 다 갖고도 오히려 늘 

번뇌와 고통 속에서 살아가는 경우가 많다. 


이처럼 잘못된 뒤바뀐 망상 분별에 바탕해  

애착과 집착을 가져서는 

이런 삶의 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할 수는 없다고 할 것이다.  




○ 집착이 불러 일으키는 고통의 

모습은 다음과 같다. 


사람들은 처음 어떤 것이 

자신에게 좋음을 주는 것이라고 생각하여 

그에 집착을 갖게 된다. 


또 사람들은 좋음을 구할 때 

집착을 많이 가질 수록 

자신이 그 좋음을 잘 얻어낼 수 있다고 생각하게 된다. 


그러나 그런 집착은 약간의 좋음을 주고 

긴긴 고통을 가져다 주게 된다. 


집착이 불러 일으키는 고통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우선 어떤 이가 어떤 좋음에 집착을 가질 때 

그 집착하는 것이 성취되지 않으면, 

성취되지 않는 긴긴 시간 동안, 

갈증과 불만, 불쾌와 고통을 받게 된다. 


또 그것이 성취되면 잠시 좋음을 얻고 

그 좋음은 오래가지 않고 곧 소멸되고, 

또 다른 것에 관심을 갖고 집착을 갖게 된다. 


그리고 성취를 한 후에도 

그에 대해 애착과 집착을 갖는 경우

그것이 없어지고 사라질 것에 대해 

강한 두려움을 갖고 불안에 빠지게 된다. 


또한 그것이 정말 사라지거나, 

또는 욕구를 끝내 뜻대로 성취하지 못하는 경우에는 

그 애착한 정도에 비례하여 

강한 불쾌와 불만, 슬픔 고통 등을 받고  

삶을 살아가게 된다. 


이처럼 집착하기에 

집착하는 것을 얻기 전까지는 갈증과 불만, 불쾌, 고통에 시달리게 되고 

집착하는 것을 얻으면 그것이 사라질 것을 생각하여 두려움과 불안에 시달리고, 

또 그것이 사라지면 고통을 받게 된다. 


또한 자신이 집착하면 

그 집착으로 인해 눈이 가리워져 

훨씬 가치있는 것을 보지 못하게 되며, 


집착하는 좋음 때문에 

온 생명을 위해 다른 생명에게 널리 좋음을 베풀지 못하여 

공덕을 쌓지 못하게 되고, 


더 나아가 자신이 집착하는 좋음 때문에 

다른 생명이 집착하는 좋음을 함부로 침해하고 나쁨을 가하게 되고 


또 자신이 좋아하는 좋음이 침해될 때 

그것을 좋게 해석해 평안히 참지 못하고 

분노를 일으키며 상대에 대한 미움과 원망을 갖고 

그 상대에게 다시 나쁨을 가하여 해치고 보복을 가하게 되고 


이후 무한한 시간에 걸쳐 서로 나쁨을 주고 받으며 

이 나쁨을 키워 나가는 관계가 된다. 


이처럼 집착 때문에 

탐욕, 분노, 어리석음의 많은 번뇌를 일으키고 

이에 바탕하여 행위하고 

다른 생명의 좋음을 침해하고 나쁨을 가하는 등 악을 행하고 

또 그로 인해 긴긴 고통을 받게 된다. 







집착하는 대상이 예를 들어 

재산이나, 명예, 지위, 권력과 같이 

가치가 적은 것들일 때에도 

그것에 대하여 집착을 갖게 되면, 

그 상실로부터 강한 고통과 두려움을 

갖게 되는 것이 보통이다. 


다만, 세속 생활에서 

작은 것에 초점을 맞추고 

집착을 가졌던 경우는 

넓은 세상을 관찰하여 

그보다 가치가 많은 것을 살펴 

그 집착을 벗어날 수도 있다. 


또 실질적으로 가치가 적은 것에 

집착을 가졌을 때는 

가치가 큰 다른 것과 비교하여 

그것이 실질적으로 가치가 적은 것임을 

올바로 관하고 

그에 대한 집착을 벗어날 수 있다. 


예를 들어 

수많은 재산이나 지위에 집착을 가질 때는 

이런 수많은 재산과 지위를 비롯하여 

우주 전부를 준다해도 

이것과 자신의 생명을 바꿀 수 없음을 관할 수 있다. 


그래서 자신이 평소 집착하는 것들은  

자신의 생명을 기준으로 가치를 비교 평가해보면, 

이들은 상대적으로 

옷에 붙은 작은 먼지나 티끌처럼 가치없는 것임을 관하게 되고 

이로써 그것들에 갖는 집착을 버릴 수 있다. 


이렇게 집착을 버리게 되면, 

그 부분만큼은 

그것을 잃거나 얻음에 관계없이 

평안한 마음에 머무를 수가 있다. 


그런데 그렇게 현실의 많은 것에 

집착을 버린다고 해도, 

자신의 생명이나, 신체에 대해서는  

여전히 강한 집착을 갖고 임하게 된다. 


그리고 그런 경우에는 

역시 삶의 번뇌와 윤회의 고통으로부터 

끝내 벗어날 수 없다. 




특히 그것이 자신이라고 여기며 

소중하게 여기는 색, 수, 상, 행, 식, 

그리고 자신의 

생명, 목숨, 신체, 가족 등인 경우에는 

왠만해서는 집착을 버리기 힘들며 

그것이 상실될 위험에 처하게 되면,  

강한 고통과 두려움을 느끼게 된다. 


특히 일반적으로 

자신의 생명, 신체에 대단히 강한 

집착을 갖는데, 


늙음, 질병, 사고, 죽음 등은 

이런 자신의 신체를 허물어 사라지게 하며, 

자신이 살면서 애착을 갖던 것을 함께 모두 

허무화시킨다. 


또한 이런 늙음, 질병, 사고, 죽음 등은 

그것을 아무리 피하려고 노력해도 

끝내 피할 수 없기에  


생, 노, 병, 사의 고통과 두려움은 

살아가면서 겪는 

다른 고통과 두려움보다  

한층 더 심한 고통과 두려움을 주게 된다. 


그래서 삶의 고통에는 

사랑하는 이와 헤어지거나[애별리고]

미운 이와 만나거나[원증회고] 

구하는 데 구하는 바를 얻지 못하는 고통[구부득고] 등등  

여러가지 고통이 있지만, 

그 가운데서 가장 대표적인 것으로  

생, 노, 병, 사의 고통을 들게 된다. 


그리고 이런 고통과 두려움은 

수행을 통해 이러한 번뇌로부터 

해탈을 얻지 못하는 경우, 


이번 한 생에서 뿐만 아니라 

윤회를 통해 매 생마다 

반복해 받게 된다. 


그리고 불교 수행의 목적은 

바로 이런 모든 

고통과 두려움을 근본적으로 제거하는 데 있는 것이다. 





그리고 이 문제에 대해서 부처님은 

그 고통의 원인을 


자신의 마음으로 얻는 색, 수, 상, 행, 식을 

잘못된 분별로서 

자신과 자신의 것 그리고 세상의 내용으로 보고, 


이런 망상분별을 바탕으로 

애착과 탐욕 등의 번뇌와 집착을 일으키고 

그에 바탕하여 행위를 해나감에 있다고 보고, 


그 해결방안으로서 

이런 원인을 제거해야 함을 제시하는 것이다. 



상식적으로 생각하면, 

태어남과 늙음과 질병, 죽음의 고통과 같은 

여러 문제를 해결하려면, 

그런 현상을 아예 없게 하는 것이 

원천적인 해결방안이 아닌가 생각하기 쉽다. 


그러나 

세상을 올바로 보고 

일체가 무상, 고, 공, 무아, 무자성을 관하는 입장에서는 

그런 방안으로 이런 고통과 두려움을 

해결할 수 있다고 보지 않는다. 




탐욕을 떠나 집착을 끊고 

마음이 거기서 해탈하면, 

이 문제가 해결된다고 보는 것은 

다음과 같은 이치다. 


오늘도 세상 이곳 저곳에서 무수한 생명이 

태어나고 또 늙고 병들고 죽어가고 있다. 


그런데 그런 가운데 

자신이 늙고 병들고 언젠가는 

죽을 것을 두려워하는 이도 


예를 들어 

자신이 애착을 갖지 않고 

집착을 갖지 않는 다른 생명이 

어디에서 늙고 병들고 

죽는다고 하는 사실 앞에서는 

아무런 고통이나 두려움을 느끼지 않는다. 


이런 차이는 왜 일어나는가. 


그것은 단순하다. 


그 어떤 생명이 자신이 애착을 갖는 

자신의 생명, 

또는 자신의 가족 등의 생명인 경우에는 

바로 그런 애착과 집착 때문에 

그것이 상실되는 것에 대해 

강한 고통과 두려움을 느끼게 되는 것이다. 


반면 다른 생명이 늙고 병들고 죽는 일에 대해 

아무렇지도 않고 평온함을 유지하는 것은 

그가 그런 다른 생명에 대해 

크게 애착과 집착을 갖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사실, 태어남, 늙음, 병듦, 죽음의 

고통과 두려움에 대해 

가장 근본적인 방안은 

바로 그에 대해 갖는 애착과 집착을 

내려 놓는 것이다. 






○ 한편, 그런 애착과 집착을 벗어나기 위해서는 

그런 애착과 집착을 갖게 한 

기본 바탕이 되는 

잘못된 망상 분별을 먼저 버려야 한다. 


그것은 크게 보아, 

자신과 세계에 대해 갖는 

온갖 잘못된 분별이 다 포함된다. 





이는 우선 이렇게 생각할 수 있다. 


즉, 자신이 자신과 자신의 것으로 보는 내용이 

잘못된 망상 분별이 아니고, 

설령 '실다운' 진짜의 내용으로서, 

자신이고 자신의 것이라고 가정한다해도, 


그것이 뜻대로 얻어지지 않고 

또 얻어도 언젠가는 결국 무너지고 사라지는 것이어서 

그로 인해 고통을 받게 될 수 밖에 없다면, 


그런 고통을 없애기 위해서는 

그렇게 무너지고 사라지는 자신과 자신의 것에 대해 

집착을 버리는 것이 현명하다고 할 것이다. 


그렇게 자신과 자신의 것에 대해 집착을 버림으로써 

그것을 자신의 뜻대로 얻지 못함으로 인해 갖는 

갈증과 불쾌에서 벗어날 수 있고, 

또 그것이 장차 무너질 것을 두려워 하는 마음에서 벗어나고 

또 그것이 무너지고 사라져도 고통을 받지 않을 수 있기 때문이다. 


또 그런 집착으로 인해 좋음을 베풀지 못하고 

다른 생명에게 나쁨을 가하고 또 나쁨에 나쁨을 되돌려주며 

나쁨을 계속 주고 받는 악행을 피하고 

그로 인해 받을 고통도 피할 수 있을 것이다. 




문제는 자신이 자신과 자신의 것으로 보는 것이 

실다운 것이라고 가정해도 

이런 이유로 집착을 버려야 마땅한데, 


정작 자신과 자신의 것으로 보는 내용이 

사실은 망상 분별에 의한 내용이며, 

그렇게 집착을 가져야 할 실다운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자신이 자기 자신과 자신의 것으로 보는 내용들은 

하나 같이 한 주체가 현실에서 얻는 내용으로서,  

색, 수, 상, 행, 식이며, 

이들은 자신이 자신의 마음으로 얻는 마음안 내용이고, 

현상의 내용이다. 


이들은 하나같이 실답지 않은 것인데도 

각 생명은 어리석음에 바탕하여 

그런 사실을 올바로 관하여 깨닫지 못하고 


자신의 마음 안에 들어온 내용을 놓고 

여기에 대해 나다, 나의 것이다라는 등으로 

잘못된 망상 분별을 일으켜, 

그러한 것을 자신과 자신의 것이라고 생각하며 

그에 대한 애착과 집착을 일으켜 갖고 


이에 바탕해 행위를 일으켜서 

그로 인해서 살아서 고통을 받고 

또 그로 인해 고통의 윤회를 하게 되는 것이다. [혹-업-고]


따라서 올바른 관찰로서 

그런 잘못된 분별을 없애고 

그 대신 올바른 깨달음을 채워 넣어야 


이런 잘못된 분별에 바탕한 

애착과 집착이 함께 없어지고 


그렇게 애착과 집착이 없어짐으로써 

그런 것이 무너지고 없어지는 사태에 대해서도 

고통과 두려움을 받지 않고 

평안한 상태에 머무르고, 

마음이 번뇌의 묶임에서 풀려나는 상태 

즉 마음의 해탈[심해탈]의 상태에 

이르게 되는 것이다. 


또 이로 인해 번뇌와 집착에 바탕한 

악업을 행하지 않게 되고 

집착을 벗어나 

올바르고 선한 수행을 닦아 행할 수 있게 되며, 

이로 인해 또 고통의 윤회에서 

벗어날 수 있는 것이다. 


따라서, 자신이 집착을 갖는 

자기 자신과 자신의 것으로 보는 내용들이 

하나같이 집착을 가질만한 실다운 내용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는 것이, 

고통을 일으키게 되는 근본 원인인 

집착을 제거하는 데 

필요한 일이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자신이 자신과 자신의 것이라고 보는 

현실의 일체의 내용[색, 수, 상, 행, 식]은 

영원하지 않아 

일정한 조건에 의해 인연이 화합하여 

나타나고 변화하는 덧없는 것이고 [제행무상] 


그것은 변화하여 소멸되는 것이기에 

그것에 집착을 가지면, 

그것은 잠시 좋음을 주고 나서 

그로 인해 긴긴 고통을 안겨주는 것[일체개고]임을 

올바로 관하고 


또 그런 색, 수, 상, 행, 식은 실재의 내용이 아니며, 

그 실재의 내용  

즉 그런 현상들이 자신과 주관과 관계하지 않는 상태에서 

있을 그대로의 실재의 모습은 끝내 얻을 수 없어서 

있다, 없다, 이다, 아니다, -과 같다, -과 다르다, 좋다, 나쁘다,...등의 

모든 이분법적인 분별을 행할 수 없어 

공한 것임[일체개공]을 

올바로 깨달아 관하고, 


또 이들에는 

집착을 가질만한 실답고 진짜라고 할 

영원불변하고 고정된 실체의 내용이 없음[무아, 무자성]을 

올바로 관하는 것이  

필요하다.  


그외, 자신과 자신의 것에 대한 관념적 분별이 

잘못된 망상분별인 이유에 대해서는 

뒤 부분에서 다시 좀 더 자세히 따로 살피기로 한다. 



여하튼 이렇게 올바로 관함으로써 

이런 현실의 모습은 

마치 꿈과 같고 환영과 같은 것이어서  

영원불변한 본체가 아니고, 

실체가 없어 진짜가 아닌데, 

마치 진짜인 것처럼 

나타나는 것이어서 

집착을 가질 만한 실다운 것들이 아님을 관해야 한다. 


그리고 그런 관찰을 통해 

자신이 현상에서 갖는 집착에서 

벗어날 수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올바로 

모든 현실을 올바로 관하게 되면, 


다음의 잡아함경-0004-무지경2 에서

제시하는 것처럼 


색, 수, 상, 행, 식에 대하여 

잘 알고, 

밝으며, 

잘 끊고, 

탐욕을 떠나 

마음이 거기서 해탈하여서, 


그는 결국 

수행의 목표 상태라고 할 수 있는 

태어남·늙음·병듦·죽음에 대한 고통과 두려움을 

초월할 수 있게 된다. 









○ 수행목표와 수행방편에 대한 집착의 제거 


한편 이처럼 집착을 버리고 

심해탈을 얻고 

생노병사를 초월하는 것은 


일반 세속의 내용에 대해서 뿐만 아니라,  

부처님이 제시하는 

수행 목표나 수행 방편에 대해서도 

모두 동일하게 적용된다. 



이 경전이 세속을 떠나 

수행을 처음 시작한 이들을 

대상으로 한 가르침이므로 

그 비중은 물론 

기존의 세속에서 가졌던 집착을 버려야 함을 

강조한 것이라고 이해할 수 있다. 


그러나, 일반 현실 상태나 

수행의 목표상태나 모두 

집착을 버리고 대해야 한다는 것은 

차이가 없다. 




처음 세속에서 집착을 가지고 

생활하던 이는 

앞에서 살핀 것처럼, 


자신이 집착하던 것이 

실질적으로는 가치가 적은 것임을 관하고 

집착을 버리기도 한다. 


그러나, 그렇게 집착을 많이 버린다해도 

모든 집착의 근본이 되는 

자신과 자신의 것에 대한 망상 분별과 

이런 망상 분별을 바탕으로 한 집착은 

잘 버리지 못하고, 


따라서 생사의 번뇌의 묶임에서 벗어나 

생사를 초월하지 못하고,  

또 고통의 윤회에서 벗어나지도 못한다. 


그래서 

이를 벗어나기 위하여 

부처님의 가르침을 받아들여 

수행을 시작하게 되고, 


그래서 부처님의 가르침대로 

자신과 자신의 것 그리고 세계라고 본 

색, 수, 상, 행, 식 일체에 대하여 

집착을 버리는 수행을 하게 된다. 



그런데 수행을 통해, 

세속에서 집착을 가졌던 것들에 대해  

모두 집착을 버리고 

더 나아가 이 모든 집착의 근본이 되는   

자신과 자신의 것에 대해 

잘못된 분별과 집착을 버릴 때, 


그런 것에 대해 집착을 버리는 대신 


반대로 이렇게 집착을 버리게 하는 

수행목표나 수행방편

또는 부처님의 가르침에 대해서는 

오히려 거꾸로 

다시 집착을 일으켜 갖는 경우가 있다. 


그런데 이는 잘못이다. 


집착은 그것이 세속의 삶에 관한 것이던, 

수행목표에 대한 것이던 

모두 집착의 독과 고통을 불러 일으키기 때문이다. 


그래서 

불교에서 제시하는 

수행목표나 수행방편에 대해서도  

역시 집착을 버리고 


이들 수행목표나 수행방편 역시 

모두 '얻을 것이 없음을 방편으로 해서' 

추구하고 정진해 나가는 것이 

또한 요구된다. 


- 참고 대반야바라밀다경 제 402권 환희품 등 - 







○ 집착을 버림과 적극적 수행과의 관계 


한편 집착을 버림을 자칫 오해하면, 

그에 대해 

아무 것도 행하지 않는 것이라고 오해하기 쉽다. 


그러나 집착을 버리고 

마음의 해탈을 얻는다는 것은 

그것이 무엇이건 그에 대한 희망을 거두고 

그것을 행하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물론 집착을 버린 가운데 

그것이 가치가 없는 것일 때는 

당연히 그것을 끊고 중지하게 될 것이다. 



그러나 앞에서 본 것과 같이 

수행 목표나 수행방편에 대해서는 

그에 대한 집착을 버린 가운데 

그 실천을 위해 정진해나가게 된다. 


따라서 이들 수행목표나 방편은 

집착을 버리지만, 

그렇게 집착을 버린 가운데 

그 성취를 위해 정진해 나간다는 점에서 

차이가 있는 것이다. 


결국 마음의 해탈을 얻은 바탕에서 

행하지 않아야 할 것과 

행해야 할 것이 있다. 


행하지 않아야 할 것은 

그간 세속에서 집착을 갖고 추구해오고, 

고통의 윤회를 불러 일으키는 

모든 행위라고 할 것이다. 


반대로 행해야 할 것은 

가치있고 선한 열반과 깨달음을 얻고 

그것을 유지하기 위한 노력이다.  


그런데 이 모두를 집착을 갖지 않는 가운데 

행위를 중지하거나 또는 행위를 해나가야 하는 것이다. 


그래서 모든 것에 대해 집착을 버리고 

임해야 함을 제시하지만, 


그 가운데에서 수행목표는 

집착을 버린 가운데 수행 정진해야 함을 제시하게 되는 것이고, 

일반 현실에서 집착을 갖던 것은 

집착을 버리고 끊고 중지해야 한다고 제시하는 것은 


그것이 각각 고통을 멸한 상태로 향하는 것인가. 

아니면 고통을 일으키는 상태로 향하는 길인가의 

차이에 있다. 


그리고 여기서는 일체에 대해 올바로 관해서 

이 모두에 대해 기본적으로 집착을 버려야 함을 

제시한 것이다. 






○ 마음의 해탈과 염세주의나 허무주의와의 관계 



한편, 본 경전에서 제시하는 것처럼 

현상의 일체, 즉 색, 수, 상, 행, 식에 대하여 

무상, 고, 공, 비아를 올바로 관하여 

싫어하고 떠날 마음을 일으키고 

기뻐하고 탐하는 마음이 없어지면, 

이것을 마음이 번뇌의 묶임에서 풀려 벗어남(심해탈)이라고 하게 된다. 



그런데 이렇게 현실의 현상적 내용 일체에 대해 

애착과 집착을 버려 

마음의 해탈을 얻어야 함을 제시하는 내용을, 

자칫 염세주의적 삶의 자세와 

혼동하기 쉽다. 


즉, 마음의 해탈을 얻기 위하여 

지금껏 자신과 자신의 것이라고 잘못 보고 

애착을 가졌던 현상 일체(색, 수, 상, 행, 식)에 대해 

싫어하고 떠날 마음을 일으켜 

집착을 버려야 함을 제시하는 내용을,  


마치 

세상의 모든 내용을 부정하고 

싫어하고 혐오하면서 

삶을 비관적으로 생각하고 

모든 것을 체념 포기하며 

아무 것에도 의미를 두지 않고 

아무 것도 추구하지 않고 살아가는  

허무주의나 염세주의로 

혼동하는 것이다. 


그런데 부처님께서  

집착을 버려야 함을 제시하는 것은 

그처럼 모든 것을 혐오하고,  

모든 것을 체념 포기하면서 

아무 것도 추구하지 않고 

살아가라는 가르침이 아니다. 


현실의 일체 즉 색, 수, 상, 행, 식에 대해 집착을 

버리라는 것은 


집착을 통한 번뇌의 묶임과  

그 번뇌에 바탕한 행으로부터 받게 되는 

고통스런 윤회의 고통에서 벗어나 


모든 고통이 사라진 

니르바나의 청정한 즐거움을 

얻게 하는데 목적이 있는 것이며, 


또 그렇게 

망상 분별을 없애고  

집착과 번뇌를 없앤 상태에서 

올바른 깨달음을 바탕으로 

자신과 자신의 것, 세계에 대해 올바로 관하고 

맑고 깨끗한 서원을 올바로 일으켜 갖고 

그 성취를 위해 무한히 정진해 나아갈 것을 

강조하시기 위함이다. 


그래서 집착을 버린 가운데 

행하여야 할 일은 

모든 것을 싫어하고 혐오하며 

모든 것을 체념 포기하며 

아무 것도 추구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번뇌와 집착을 버린 가운데 

얻을 것이 없음을 방편으로 하여 

맑고 깨끗한 마음으로 

원대하고 무한한 서원을 일으키고 

이를 유희 신통력을 가지고 

정진해 실천해나가야 한다. 


그래서 집착을 버린 가운데 

행해야 할 일은 오히려 그 전보다 

더 광대해지고 

무한히 넓어지는 것이라고 할 것이다. 



집착을 버린 가운데 

행하여 할 내용으로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있다.  


우선 

모든 상태는 본래 

청정한 진여 실재의 니르바나의 상태다. 


그런데 이 청정한 진여 니르바나의 상태는  

현실의 잘못된 망상, 분별 

그리고 이에 바탕한 번뇌 집착, 

그리고 그로 인해 행위와 

그 결과로 발생하는 악과 고통이 

덮어 가리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이런 현실에서 

깨달음을 통해 

원래의 청정 진여 니르바나를 덮어 가리우고 있는 

이런 망상분별과 

번뇌 집착, 악과 고통을 

지우고 없애서,  

원래의 청정 진여 니르바나를 

드러내게 하는 것이 

1차적 수행목표가 된다. 



그 다음  

이런 청정 진여의 니르바나에 상응하여  

현실에서도 그와 상응한 니르바나의 상태를  

만들고 채워 나가는 것이 

제 2차적 수행 목표가 된다. 


즉, 망상, 분별, 번뇌, 집착을 버린 상태에서  

올바른 깨달음을 바탕으로 


아름답고 깨끗하고 맑고 선하며 

좋고 좋은 서원을 일으키고  

정진하여 서원을 성취하고 

이를 유지해나가는 것이 

제 2차적인 수행목표가 된다. 


그리고 이러한 수행목표를 

실천해나감에 있어서도 

역시 집착을 갖지 않은 가운데 

'얻을 것이 없음'을 방편으로 

정진해 나가야 함이 요구되는 것이다. 


그래서 

만일 색, 수, 상, 행, 식에 대해서 

잘 알고, 

밝으며, 

잘 끊고, 

탐욕을 떠나 

마음이 거기서 해탈한다면, 


그는 결국 

태어남·늙음·병듦·죽음에 대한 고통과 두려움을 

초월한 상태에서 

앞과 같은 수행 목표들을 향해 

노력해나가게 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pt* 끝 to ○ 잡아함-수행-심해탈 K0650sf-- ♠● 심해탈의 효용






[반복]


● 무상, 무아, 공과 수행목표의 관계 


한편, 경전에서는 

바르게 관찰하면 

싫어하여 떠날 마음이 생기고, 

싫어하여 떠날 마음이 생기면 

기뻐하고 탐하는 마음이 없어지며, 

기뻐하고 탐하는 마음이 없어지면 

이것을 심해탈이라 하며, 


이렇게 마음이 해탈한 사람은 

만일 스스로 증득하고자 하면

곧 스스로 해탈을 통해 얻는 지혜의 내용[해탈지견]를 

증득할 수 있다고 밝히고 

해탈지견의 내용을 제시한다.


즉, 

'나의 생은 이미 다하고,

범행은 이미 섰으며, 

할 일은 이미 마쳐 

후세의 몸을 받지 않는다'[아생이진... 불수후유]

는 내용이 그것이다. 


결국 마음의 해탈(심해탈)과 

심해탈을 통해 증득하게 되는 

'나의 생은 이미 다하고,

...

후생의 몸을 받지 않는다[아생이진... 불수후유]라는 

해탈지견의 내용은 

불교에서 성취해야 할 

수행의 목표 상태의 하나라고  

이해할 수 있다. 


그런데 이렇게 얻게 되는 

수행 목표 상태는 

과연 어떤 상태인가에 대해 

다음과 같은 의문을 가질 수 있다. 



● 해탈지견의 내용 


우선 심해탈을 통해 증득할 수 있다는 해탈지견의 내용

즉, 나의 생은 이미 다하고,...후생의 몸을 받지 않는다

[아생이진... 불수후유]가 

의미하는 내용은 무엇인가? 


그것은 부처님이 윤회를 말하는 데 

후생의 몸을 받지 않는다고 하였으니, 


죽은 뒤에는 윤회를 하지 않고 

죽은 뒤에는 ‘아주 없어져 

그와 관련된 것은 아무 것도 없게 된다는’ 견해 

즉, 단견(斷見)인가?

아니면 이와는 다른 의미인가?




● 수행목표 상태와 일반 상태의 차이점


한편, 수행목표 상태와 일반 상태의 차이점에 

대해 다음과 같은 의문을 가질 수 있다. 


즉, 수행을 하여 

최종적으로 마음의 해탈을 얻고  

위와 같은 사실을 증득하면, 

수행을 하지 않은 일반의 상태와는 

어떤 점에서 차이가 있게 된다고 할 것인가?



수행목표가 일반 상태와 갖는 차이점에 대해서는  

특히 앞에서 제시한 

일체에 대한 근본적 판단

즉, 무상, 고, 공, 비아의 판단과 

관련하여 

다음과 같은 의문을 가질 수 있다. 



● 무상, 고, 공, 비아와 수행목표 상태의 관계 


일체는 무상, 고, 공, 비아라고 하는데, 

만일 수행을 하여 심해탈의 상태가 되고 

해탈지견을 얻으면 

그렇지 않은 상태가 되는 것인가? 

이런 의문을 가질 수 있다. 


만일 불교의 수행목표 상태인 

심해탈이나 열반과 같은 상태는 

무상, 고, 공, 비아의 상태가 아니라면, 


무상, 고, 공, 비아가 아닌 경우도 있다는 것이 되어서, 

처음에 일체가 모두 무상, 고, 공, 비아라고 판단한 것은 

이로 인해 자체적으로 잘못이라는 것이 된다. 


그러나 해탈과 열반이 일반 상태와 같이 

역시 무상, 고, 공, 비아라고 한다면, 

수행을 통해 이런 수행목표를 실현하는 것이 

일반 현실과는 어떤 의미있는 차이를 갖는 것인가 하는 

의문을 갖게 된다. 



그런 전제에서 다시 다음과 같은 

의문을 이어서 가질 수 있다. 



● 수행목표와 염리, 희탐진


만일 심해탈의 상태가 되더라도, 

여전히 무상, 고, 공, 비아의 상태라고 한다면, 

이 역시 무상, 고, 공, 비아를 이유로 

다시 염리 희탐진의 대상이 되어야 할 것인가?

이는 수행목표 상태도 역시 다른 내용과 같이 

염리 희탐진의 대상이 된다고 볼 것인가 하는 문제이다. 


● 수행의 근거 


또 만일 심해탈에 이르러도 여전히 

무상, 고, 공, 비아여서, 

처음의 상태와 차이가 없다면, 


일반 현실 상태와 달리 

수행을 통해 

심해탈을 얻어야 할 근거는 무엇인가. 

이런 의문을 함께 가질 수 있다. 

-

생각해보면 

수행을 통해 얻는 상태는 

일반의 상태와 어떤 의미있는 차이가 있어야 

부처님의 가르침을 받아들이고 

수행을 해야 할 필요성이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래서 불교를 처음 대하는 이는 

수행목표의 상태가 과연 일반 상태와 

어떤 차이를 갖는가에 대해 

이런 여러 가지 의문을 제기하게 된다고 본다. 


따라서 

이를 살필 필요가 있다고 본다. 


[반복끝]







앞에 나열한 의문들은 

모두 수행의 목표 상태와 관련한 의문이다. 


부처님의 가르침은 

현실에서 얻는 내용 일체(색, 수, 상, 행, 식)에  

분별을 일으키고 생활하면서 

그전까지 애착을 갖던 것에 

모두 집착을 버려야 한다는 내용이 된다. 


그래서 일반적인 입장에서는 

그전까지 애착을 갖던 것에 대해 

집착을 버리는 것을 몹시 어려워하는 동시에, 

오히려 불안을 느끼기도 한다. 


그리고 

부처님의 가르침에 대하여 

다시 다음과 같은 의문을 제기하게 된다. 


자신이 부처님의 가르침을 따라 

지금껏 애착을 갖던 것,

자신과 자신의 것, 

자신, 자신의 생명, 신체, 재산, 가족, 지위, 명예...등등에 

모두 애착을 버리면, 

그로 인해 자신은 무엇을 대신 얻는가 . 


만일 이에 대해 집착을 버리고 수행을 한다해도 

일반 현실의 상태와 어떤 본질적인 차이가 없다면, 

자신이 애착을 갖던 것에 

애착을 버리고 힘들게 

오랜 수행을 해야할 필요가 없지 않은가. 


어렵게 애착을 버리고 수행을 한다면, 

수행을 하는 것과 하지 않는 것는  

어떤 차이가 있어야 하지 않겠는가

생각하는 것이다. 


그래서 위와 같은 의문을 제기하게 된다. 


따라서 그에 관한 내용을 

다음과 같이 살펴보기로 한다. 



[반복]


● 해탈지견의 내용 


우선 심해탈을 통해 증득할 수 있다는 해탈지견의 내용

즉, 나의 생은 이미 다하고,...후생의 몸을 받지 않는다

[아생이진... 불수후유]가 

의미하는 내용은 무엇인가? 


그것은 부처님이 윤회를 말하는 데 

후생의 몸을 받지 않는다고 하였으니, 


죽은 뒤에는 윤회를 하지 않고 

죽은 뒤에는 ‘아주 없어져 

그와 관련된 것은 아무 것도 없게 된다는’ 견해 

즉, 단견(斷見)인가?

아니면 이와는 다른 의미인가?


[반복끝]



○ 해탈과 단견의 차이 


부처님 당시에도 수행을 통해 얻는 최종상태 및 

그 이후 상태에 대해 위와 같은 의문을 갖는 이들이 많았고 

그에 대해 다음과 같이 이해하는 입장도 있었던 것 같다.


즉 후생의 몸을 받지 않는다는 불수후유의 의미를, 

수행을 시작하여 

수행자로서 최고상태 아라한이 되면, 

이후 죽은 뒤 아무 것도 없고 

아주 없어지게 된다. 

이런 식으로 이해하는 이도 있었던 것 같다.


그러나 

그와 같은 생각은  

잘못된 이해라는 사실을 

명백히 밝히는 부분은 

본 아함경 안에서도 나온다. 


참고 0104. 염마경(焰摩經), 0966. 부린니경(富隣尼經) 



또 부처님은 이렇게 경전에서 말씀하신다.


이와 같이 비구들아, 

마음이 해탈한 사람은 

만일 스스로 증득하고자 하면

곧 스스로 증득할 수 있으니, 

나의 생은 이미 다하고,.....


라고 설한다. 


그래서 이 구절만 보아도 

'생은 다했다', '후세의 몸을 받지 않는다'는 

표현에 대해 일반인이 생각하는 이해가 

잘못된 내용임을 쉽게 알 수 있다. 


마음이 해탈했다고 

곧 죽은 것인가? 


아니다.

그런데 그렇게 살아 있는 상태에서 

‘나의 생은 이미 다하였음’

'후생의 몸을 받지 않음'을 

증득할 수 있다고 한다.


그렇다면, 

나의 생이 이미 다하였다, 후생의 몸을 받지 않는다는 표현이 


곧 우리가 생각하는 

‘생이 이미 다하였다, 후생의 몸을 받지 않는다 => 

죽고 아무 것도 없다’라는 의미는 

적어도 아님을 쉽게 알 수 있는 것이다. 


따라서 이들 표현이 

현재, 자신이 죽은 뒤 아무 것도 없고 

아주 없어져 자신과 관련된 것은 아무 것도 없게 된다는 

의미를 나타낸 것이 아님을 이해할 필요가 있다. 





○ 윤회


한편, 부처님은 윤회를 말씀하신다. 

위 해탈지견의 내용 가운데 

후생의 몸을 받는다, 또는 받지 않는다는 표현은 

바로 이런 윤회를 전제로 하는 내용이다. 


그리고 수행의 목표 상태를 이해하려면 

부처님이 설하시는 이 윤회의 내용을 먼저 이해할 

필요가 있다. 

그래야 윤회와 관련하여 부처님이 설하시는 

수행목표가 어떤 상태를 의미하는가를 

이해할 수 있기 때문이다. 


윤회는 죽어서 후생 몸을 받아 

계속 다른 생명의 형태로 이어 살게 된다는 

부처님의 가르침이다. 


부처님의 가르침을 믿고 따르는 한, 

이와 같은 사실을 

당연한 전제로 받아들이게 되는데, 


그런데 수행을 하여 마음의 해탈을 얻으면, 

‘후생의 몸을 받지 않음’을 

스스로 증득한다고 한다. 


그렇다면, 

마음의 해탈을 얻은 수행자는 

그로 인해 다른 일반인이 윤회하는 상태와는 

어떻게 다른 상태가 되었고 

어떤 내용을 증득한다는 것인가? 

이에 대해서 답을 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런데, 

이 부분을 별 생각 없이 그냥 읽어가다 보면 

일반인들의 삶과 죽음에 대한 생각과 

중요한 차이를 쉽게 의식하지 못하고 

그냥 지나갈 수 있다.


무슨 말인가?


우선 일반인들의 

삶과 죽음에 대한 생각은 어떠한가? 



일반인들의 전부는 아니더라도 

많은 이가 이렇게 생각한다.


생명은 그저 물질이 이리저리 결합해서 

어쩌다가 우연스럽게 생명체를 이루어 

외부 물질변화에 자극을 받아 반응하는 것이 

생명체의 정신이고 

그런 가운데 생명체는 살아가는 것이고, 

한 생명체가 그처럼 태어나 살아가다가 

죽게 되면 그 뿐인 것으로 생각한다. 




그런데 부처님은 

이와 달리 윤회를 한다고 밝히신다.


윤회란, 

한 생명체가 생-노-병-사의 한 번의 생을 마치고 

모든 것이 끝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의미한다. 


죽은 이후에는 

또 다른 세계[6도-지옥,아귀,축생,인간,수라,하늘] 

생명체의 형태로 변화해 

다시 1 생을 살고, 


또 죽으면 

그 이전의 번뇌와 업(뜻, 말, 행위)에 따라 

또 다른 세계에 태어나 1 생을 살고 

그렇게 끊임없이 생명의 형태를 바꾸어 

살게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또 이미 모든 생명체가 

지금껏 그와 같이 살아 왔음도 밝힌다. 



아함경에서도 다음과 같이 

윤회에 대해 설하는 부분이 많다. 



....

그 나쁜 인연을 지음으로 말미암아 

몸이 무너지고 목숨이 끝난 뒤에는 

나쁜 세계인 지옥에 떨어지느니라.  

....

몸으로 착한 행동을 하고, 

입으로 착한 말을 하며, 

뜻으로 착한 생각을 하기 때문에, 

그 인연으로 말미암아 

몸이 무너지고 목숨이 끝난 뒤에는 

천상에 화생한다. 


참조 잡아함경 0094. 승가라경(僧迦羅經)




불교 전반을 통해서 

윤회의 내용이 제시되는데, 

이에 의하면, 

지금 이 글을 읽거나 쓰는 이 역시, 

자신이 일일이 기억을 못 한다해도, 

그와 같이 무한한 시간 동안 

윤회의 과정을 거쳐 살아왔음을 의미한다. 



그래서, 

한 번 죽을 때 흘리는 피를 정하고, 

지금까지 죽을 때마다 흘린 피와 

바닷물 가운데 

어떤 것이 더 많을 것인가를 묻고  

그 동안 윤회의 과정 동안 

흘린 피가 더 많다고 이야기 하신다. 


참조 잡아함경 0937. 혈경(血經)


또 이는 반대로 말하면 

앞으로도 그와 같다는 의미도 된다.



그러나 윤회는 

많은 이가 

쉽게 증명하거나 

이를 사실로 받아들이지 못 한다.






○ 윤회와 삶의 목표 


한편 윤회를 한다고 하더라도 

이 윤회에 대한 생각도 

부처님은 일반인과 다르다. 


상식적인 입장에서는 

죽어서 아무것도 없다고 생각하고, 

또 그래서 죽음은 

안타까운 일이고 

허무하다고 생각하게 된다. 


그런데 일단 윤회한다면 

죽은 후에도 

또 다른 생을 또 다른 형태로 살아가는 것이니, 

죽음으로 끝이 아니라는 점에서 좋고 

그것도 무한히 윤회한다니, 

무한히 또 다른 생을 살아서 더 좋은 일 아닌가

또 윤회한다면, 

비록 좋은 상태만 만나지 않더라도, 

앞으로 좋은 상태로 후세의 생을 이어가는 것을 

목표로 삼으면 될 일 아닌가하고 생각하기 쉽다.


그래서 윤회에 대해서 

부처님과는 반대로 생각하고 

부처님 말씀을 

이해를 못하게 된다. 


부처님은 윤회가 비록 그런 측면이 있지만, 

윤회는 기본적으로 

고통을 가져오는 불행한 측면으로 

제시하는 것이다. 


부처님은 

윤회의 과정 동안 예를 들어 

하늘에 태어나 그 수명이 매우 장구하여 

수십억년의 수명을 갖고 행복하게 살아가게 되거나, 

또는 겁으로 헤아리는 긴 수명을 갖고 살 수 있음도 제시한다. 


잡아함경에는 이런 내용이 나온다. 


인간의 1,600년은 타화자재천(他化自在天)3)의 하루 낮 하룻밤이다. 

이와 같이 30일을 한 달, 

열두 달을 1년으로 계산하면, 

타화자재천의 수명은 1만 6,000년이다. 

참고 잡아함경 0863. 타화자재천경(他化自在天經) 


1600년*365* 16000=

9,344,000,000 년 = 93억 4천4백만년


그 외의 다른 하늘들의 사정도 이와 유사하다. 


그런데 

이런 경우, 

비록 하늘에 태어나 긴 수명을 갖고 

행복하게 사는 것은 

그것만 놓고 보면 

나쁘다고 볼 수 없으나, 


부처님은 그것이 영원하지 않은 것이고 

무상한 까닭에 다시 끝이 있고 

그 이후에는 또 다시 고통을 받는 윤회의 과정을 받게 됨을 

말씀하시는 것이다. 


그래서 윤회란 비록 부분 부분에 

좋음이 있어도 

기본적으로 고통을 불러 일으키는 현상이며, 

따라서 이 윤회의 내용을 

끊고 벗어나야 할 내용으로 제시하는 것이다. 


그것도 매우 어렵고 어려운 긴 수행을 통해 

마음의 해탈을 얻고 

“...다음 생의 몸 즉 후세의 몸을 받지 않는다'”[불수후유]는 

사실을 증득할 수 있다고 제시하는 것이다. 


즉 일반인이 당연하다고 여길만한, 

후세의 몸을 받지 않는다는 사실이 

부처님 입장에서는 

당연한 일이 아니다. 


단지 어려운 수행을 통해 

증득할 수 있는 상태로 

제시되는 것이다. 



그래서 이런 입장이 

원래 일반인의 생각과는 동 떨어지게 되는 것이다.



간단히 다시 말하면, 

일반인이 일반적으로 죽으면 

이후 자연스럽게 아무것도 없고 

다음에 이어가는 삶이 없다고 믿는데, 


부처님께서는 오히려 그렇지 않고 

이후로도 긴긴 고통의 윤회과정이 있다고 제시하고, 

이런 긴긴 고통의 윤회를 벗어나는 것은 

어려운 수행을 통해 

비로소 겨우 얻고 증득할 수 있는 

목적 상태로 제시하시고 있는 것이다.





○ 윤회의 증명 문제 


그러나 여하튼 사후의 윤회의 문제는 

일반인의 입장에서는 

이해가 쉽게 안 될 문제라고 본다.


그것은 지금 이 생을 살고 있는 상태에서 

태어나기 전의 상태나 

죽은 후의 상태를 직접 볼 수 없다는 한계 때문이다. 


윤회의 문제는 사실 

생전 현생 사후의 상태를 이어서 

생명이 어떻게 변화해가는가를 

관할 수 있고 

다시 그것도 몇생을 계속 이어 

그 인과관계를 볼 수 있어야 

그 가운데 무엇이 무엇보다 낫고 

못한가를 판단할 수 있다고 할 것이다. 


비록 부처님은 이런 입장에서 

윤회의 내용을 제시하고 

또 그런 전제에서 향해 나아갈 목표를 제시한 것이지만, 


스스로 자신이 그런 내용을 직접 볼 수도 없고 

또 부처님이 깨달은 바를 그대로 믿지도 못하는 경우에는 

결국 자신이 현실에서 경험한 내용만을 

진실로 알고 고집하며, 

스스로 그 안에 갇히게 된다. 


비유하면, 

자신이 직접 아프리카를 갈 수도 없고, 

또 아프리카를 가서 보고 온 

어떤 다른 이의 말도 못 믿는 경우, 


그저 자신이 좁은 경험 범위에서 직접 경험한 것만을 의존하여 

아프리카라는 곳은 없다고 생각한다면, 

그는 그런 판단에 갇혀 살아가게 되는 

것과 같다. 



이 한계를 벗어나려면, 

우선 부처님이 가르쳐준 수행을 통하여 

자신이 직접 과거 생의 내용을 

돌아볼 수 있는 능력[숙명통]을 가져 

스스로 이런 관계를 관할 수 있게 되도록 

노력할 필요가 있다. 


그러나 일단 그렇지 못한 상태에서는 

부처님이 그런 내용을 굳이 

거짓으로 만들어 제시할 이유가 

부처님에게 과연 있는 것인가를 묻고 

그럴 이유가 없는 부처님의 말씀을 

믿음으로 받아들이는 것이 필요하다. 


우선 부처님의 말씀을 믿지 못하고, 

의문을 제기할 경우를 생각해보자. 


어떤 이가 진실과 다른 내용을 

말하게 되는 여러 경우가 있을 수 있다. 


예를 들어 

우선 잘못된 내용을 진실로 알고 

악의 없이 진실이 아닌 내용을 

말하는 경우도 생각할 수 있다. 


또는 현실에서건 또는 사후에서건 

타인의 행위나 부당한 결과를 끌어 내기 위하여 

또는 어떤 이득을 얻기 위하여 

또는 단지 상대를 부당하게 괴롭히기 위하여 

거짓을 꾸며 말하는 경우도 있다. 


그러나 부처님이 윤회에 대해서 이야기를 하실 때, 

사람들이 쉽게 확인할 수 없는 사후의 내용으로 

사람을 거짓으로 이끌어들이기 위함이 아니고 

오히려 그 반대로 그런 윤회의 내용을 

끊어야 함을 말씀하시는 입장이다. 


또 부처님의 윤회설을 살필 때는 

부처님이 하신 다른 말씀도  

같이 검토해 볼 필요가 있다. 


그래서 윤회와 관련하여 

이들 내용을 검토해 본다면, 

부처님의 입장은 

그런 경우에 모두 해당되지 않음을 

알 수 있다고 본다. 


이 문제는 나중에 기회가 되면 

좀 더 자세히 검토하기로 한다. 


그러나 여하튼 

가장 좋은 방법은 

자신이 직접 윤회의 내용을 볼 수 있는 능력을 

갖도록 노력하는 것이라고 본다.  


그런 가운데 

생명이 살고 죽는 문제와 관련하여 

각 생명은 태어나기 전에는 

어떤 상태에 있었던 것이고 

사후에는 다시 어떻게 되는 것인가.  

또 그런 가운데 

목표로 삼아야 할 상태는 

무엇이 되어야 하는가 등을 

깊게 생각해야 한다고 본다.  


그리고 이런 문제에 대해 

그 답을 스스로 얻도록 

노력해야 한다고 본다.


그리고 이런 내용을 스스로 관할 수 

있게 되기 위해서라도 

수행은 필요한 것이라고 하겠다. 



>>>>>[상세 보충부분]


○ 윤회의 주체와 나의 문제 


윤회는 A - B - C .. 등으로 한 생명이 매 생마다 

여러 다른 생명의 모습으로 변화하는 것을 의미한다. 

예를 들어 축생에서 사람으로 또는 하늘사람의 모습으로 

변화하는 것을 의미한다. 


그런데 사람이 죽어 사람의 육체가 소멸되면 

다음 생에 이전 생과 공통한 내용을 발견하기 힘든데 

도대체 무엇이 주체가 되어 이런 윤회를 계속 한다고 

보는 것인가 의문을 갖게 되기 쉽다. 


또 윤회를 무한히 이렇게 한다면 원래 불교에서 가르치는 

무아의 가르침과 서로 모순되는 내용은 아닌가 의문을 

갖게 되기 쉽다. 


그래서 여기서는 윤회를 한다고 할 때 윤회의 주체를 

무엇으로 보는가, 그리고 나의 정체성은 이런 경우 

어디에 두어야 하는가, 그리고 그것은 또 불교의 

무아, 무자성의 가르침과는 어떤 관계가 있는가를 

좀 더 자세히 살피기로 한다. 




윤회의 과정에 대해서는 

12 연기의 설명이 관련된다. 


무명-행-식-명색-6입-촉-

수-애-취-유-생-노사

로 12 연기가 제시되는데, 


이는 현상 안의 세계와 모든 모습은 한 생명의 마음 안에서 

얻는 내용이므로, 현상의 모든 내용이 나타나는 과정을 

설명한 것도 되고, 

또 한편, 그렇게 한 생명이 나타나는 과정을 설명한 것도 된다. 


12 연기에서 처음의 무명은 

생명이 갖는 어리석음을 의미한다. 

그리고 어리석음에 의해 행을 행하는 가운데 

식이 다음 생의 명색에 의탁하여 

다음 생을 출발하는 관계로 설명되고 있다. 


여기서 식은 결국 전생과 후생을 

이어주는 근본 정신(근본식, 아뢰야식)을 의미한다고 본다. 


유가사지론에서는 

한 생에서 죽음을 맞이하면 중유로 머무르다, 

윤회과정에서 다음 생의 생명으로 태어나게 되는데 

그 과정을 근본 정신인 아뢰야식의 의탁과정으로 

다음과 같이 제시하고 있다. 



K0570V15P0471b19L; 血二滴和合住母胎中合爲一段猶

K0570V15P0471b20L; 如熟乳凝結之時當於此處一切種

K0570V15P0471b21L; 子異熟所攝執受所依阿賴耶識和

K0570V15P0471b22L; 合依託云何和合依託謂此所出濃

K0570V15P0471b23L; 厚精血合成一段與顚倒緣中有俱

K0570V15P0471c01L; 滅與滅同時卽由一切種子識功能

K0570V15P0471c02L; 力故有餘微細根及大種和合而生

K0570V15P0471c03L; 及餘有根同分精血和合摶生於此

K0570V15P0471c04L; 時中說識已住結生相續卽此名爲

K0570V15P0471c05L; 羯羅藍位此羯羅藍中有諸根大種


...

둘의 방울은 뒤섞여져서 

어머니의 태 안에 머무르며 합하여 

한덩이가 되나니, 

마치 끓인 젖이 엉기어 맺혀진 때와 같다. 


이 곳에,

온갖 종자의 이숙이 소속되고 

집수(執受-바깥경계를 대하여 감각을 낳는 것)의 의지할 바인 

'아뢰야식'이 섞여서 의탁하게 된다.


어떻게 섞여서 의탁하느냐 하면, 

여기에 나온 짙은 정혈이 

한덩이로 합쳐서 이루어지면 

뒤바뀐 인연과 함께 

중간몸(中有)은 같이 없어지는데, 

없어짐과 동시에 

곧 일체종자식(一切種子識)의 공능의 힘으로 말미암아 

다른 미세한 감관[根]과 원소[大種]는 섞여지며 생기고, 

그 나머지 감관의 동분(同分-많은 물건 가운데서 공동한 부분)은 정혈(精血)과 섞여서 

뭉쳐지며 생긴다. 이러한 동안을 

「의식이 이미 머무르고 맺혀 생긴 것이 계속한다」고 하나니, 

곧 이를 칼랄라[羯羅藍]의 자리라고 한다. 


참고 유가사지론 본지분중 의지 제2-1 本地分中意地第二之一 


결국 유가사지론에 의하면, 

전생과 후생을 이어주는 요소는 

결국 근본 정신인 아뢰야식으로 제시되는데, 

이 근본정신(근본식)은 

현실에서 상식적으로 자신이 생각하는 

정신의 내용이나 위치와는 조금 다르다. 




○ 현실에서 생각하는 나의 정체의 문제점


이미 앞에서 색, 수, 상, 행, 식의 의미와 

무상, 고, 공, 비아 등의 내용을 살피는 과정에서 

보았지만, 


이것은 곧 현실에서 나와 나의 것으로 보는 것들의 

정체에 대한 설명이기도 하다. 


한 주체가 현실에서 자신이나 자신의 것으로 보는 내용은 

결국 색, 수, 상, 행, 식을 가지고 자신이란 관념을 갖게 된다. 


그리고 현실에서 사람은 

자기 자신, 자신의 생명, 신체, 재산, 가족, 지위, 명예...등에 

가장 강한 집착을 갖는데, 그 근본에는 '자기자신'에 대한 

분별이 바탕하게 된다. 


따라서 '나'의 정체를 올바로 관하는 것이 

이 모든 것에 대한 집착을 버리고 

마음의 해탈을 얻는데에도 필요하고 


또 여기서 살피는 윤회의 주체를 살피는 데에도 

필요하다. 



이미 앞에서 살핀 것처럼 현실에서 

나와 나의 것으로 생각하는 것들은 모두 


진짜라고 할 영원불변한 본체가 아니어서 

참된 진짜의 내용이 아니다. [비아, 무아, 무자성]


또한 이들은 단지 마음으로 얻는 마음 안의 현상 내용으로서, 

실재의 내용이 아니며, 

그 실재내용은 얻지 못하여 공한 것이다. [공]


그래서 현실에서 마음으로 얻는 

색, 수, 상, 행, 식의 현상 내용은 

기본적으로 실답지 않은 내용인 것이다. 


한편 이에 대해 

그것이 나다, 또는 나의 것 무엇이다...등등으로 분별할 때 

그러한 관념적 분별은 분별대로 위와 같은 사정 외에도, 

감각현실과 같은 자상을 갖지 않는 것이고 [변계소집상의 상무자성]

감각현실에는 그런 관념과 같은 내용은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변계소집상의 상무자성에 관한 내용은 

뒤에서 관계되는 부분에서 다시 자세히 살피기로 한다. 





○ 현실에서 자기자신으로 보는 내용의 검토 


사람들이 색, 수, 상, 행, 식을 놓고 관념적인 분별을 행할 때 

이들은 모두 뒤바뀐 전도 망상 분별의 성격을 갖지만, 


여기서는 특히 현실에서 '자기자신'이라고 생각하는 내용을 

아래에서 자세히 살펴보기로 한다. 


이를 위해 다음 그림을 보고 이 문제를 생각해보자. 





[그림]  08pfl--image\진리의오류55.jpg

fr http://thegood007.tistory.com/1172

03fl--ghpt\r1030.htm


통상적으로 어떤 1 이라는 사람이 눈을 떠 세상을 

위와 같이 보게 되었다고 하자. 


이런 경우 1 은 그림에서 1 과 같은 부분을 

자기 자신으로 관념하게 된다. 


일반인이 나라고 생각하는 것은 

이런 색(색의 일부분)의 내용을 가장 기초내용으로 한다. 

그리고 이런 색과 함께 수, 상, 행, 식을 가지고 

이들 내용이 자기 자신, 즉 나라고 관념을 갖는 것이다. 


우선 이렇게 1 이라는 사람이 눈을 떠 1 의 부분을 

자기 자신이라고 관념을 갖는 것은

현실에서 다음과 같은 점에서 타당성을 갖는다고 생각하게 된다.  


우선, 자신이 위와 같이 눈을 떠 세상을 보고 있는 상태에서 

손을 든다거나 발을 움직이겠다고 생각하고 움직이거나, 

장소를 옮겨 어디로 가고자 하면 

위 여러 내용 가운데에서 1 의 부분이 따라 변화를 하게 된다. 

이는 이 순간 다른 부분이 이에 따라 변화하지 않는 것과

크게 구별되는 내용이다. 


한편 그간의 경험을 통해 반성해보면, 

1 외의 다른 부분은 매 시기 매 상황마다 

그 내용이 달라지는 것인데 반해 

1 의 부분은 자신이 지금까지 살아온 순간 

늘 그 위치에 비교적 일정하게 자리잡고 

있었던 것으로 생각되는 것이다. 


그래서 이 1 외의 내용은 

그 때 그 때 내용이 달라지는 손님과 같은 것이고 

이와 달리 이 1 의 내용은 

이 이 내용 가운데 늘 일정하게 머무르는 주인이 되고 

또 자기 자신이 된다고 생각하게 되는 것이다. 



또 이런 내용은 이런 시각적 감각내용과 함께 

다른 감각을 통해서도 지지받게 된다. 


예를 들어 자신의 손을 들어 자신의 신체부분을 만지면 

손과 그 신체부분이 촉감을 양쪽으로 느끼게 됨을 경험한다. 


반면, 1 의 부분 밖의 부분에 손을 대면 손 부분에만

촉감을 느끼는 것을 경험한다. 

예를 들어 책상에 손을 대면, 손에서만 촉감을 느끼고 

책상쪽에서는 촉감을 느끼지 못하는 것이다. 


이는 다른 사람의 경우도 마찬가지여서 

이런 경험들을 바탕으로 각기 1 과 같은 부분을 

자기 자신이라고 생각하고 2 와 같은 부분을 

다른 이라고 생각하면서 살아가는 것은 

정당한 생각으로 지지받게 된다. 


그래서 우선 이를 통해 

자신이 눈으로 감각한 전체 감각내용 가운데 1의 부분 

즉, 색 가운데 1의 부분에 대해 -> '나'라는 관념을 대응시키고 

또 다른 부분들은 일정한 부분에 대해 -> '꽃'이나 '다른 이' 등으로 관념하는 것은 

잘못이 아닌 것으로 지지받는 것이다. 


그리고 이런 내용이 현실에서 대부분의 사람이 

상식적으로 생각하는 내용이다.  



이 사정을 이제 다른 이 2 를 놓고 판단해보자. 

이미 앞에서 이 실험을 반복했지만 

다시 되풀이하면 다음과 같다. 



[반복]


1 이 2 를 놓고 2 에게 눈을 감고 뜸을 반복하게 하고 

그 때마다 변화하는 내용을 자신에게 복하게 하자. 


2 는 눈을 감으면 보이지 않는다고 하고 

눈을 뜨면 보인다고 보고할 것이다. 


그런데 이를 지켜보는 1 의 입장에서는 

2 가 무엇이 보인다거나 보이지 않는다고 함에 따라 

그처럼 2 가 보고하는 내용이 새로 나타나거나 있던 것이 사라지는 

변화를 관찰할 수 없다. 


따라서 그런 변화는 오직 2 의 영역에서 

2 의 마음에서만 일어나는 변화로 추리하게 되는 것이다. 


2 가 무엇이 보인다고 할 때 정확히 무엇이 보이는가는 

1 은 직접 그 내용을 알 수 없지만, 언어보고를 통해 

대강 위의 그림과 같은 내용을 2 가 본다고 추리할 수 있다. 

이제 그 내용이 2 의 영역 안에서만 있는 변화이므로, 

그가 본 내용들이 2 의 머리(마음)에 위치한다고 추리하고 

위 그림처럼 추리해 그려 넣은 것이다. 


[반복끝]






[그림]  08pfl--image\진리의오류55.jp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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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이렇게 그려 놓은 상태에서 

만일 2 가 자신이 본 2^ 의 부분을 자기 자신이라고 

생각한다면, 

1 의 입장에서는 그것이 무언가 잘못된 판단임을 

쉽게 알 수 있다. 


우선 1 의 입장에서는 2 가 자신의 마음 안에서 얻는 2^ 를 

자기라고 생각하기 보다는 

1 이 보는 2 의 내용을 자기 자신으로 생각하는 것이 

더 정당한 판단이라고 생각하게 될 것이다. 


1 이 볼 때는 1 이 본 2 가 2 의 실재내용이고, 

2 는 2 라는 자신의 실재내용을 놓고 

그의 마음 안에서 2^ 와 같은 내용을 얻는 것으로 추리하게 된다. 


이런 추리는 어떤 주체가 마음에서 어떤 감각현실을 얻을 때 

그것을 얻게 한 실재내용이 따로 있다는 판단을 하게 한다. 


그러나 2 는 2^ 란 내용을 얻을 뿐 

2 와 같은 마음 밖의 내용들은 직접 얻지 못한다. 


그러나 이상과 같은 1 의 추리도 

역시 오류를 갖는 잘못된 추리 임은 이미 

앞의 실재내용의 공함을 살피는 부분에서 살핀 바 있다. 

그것은 1 이 보는 2 와 같은 내용도 사실은 

1 의 마음에서 얻는 1 의 감각내용이기 때문이다. 


이런 내용은 어떤 주체도 실재 대상이나 실재 주체와 같은 

실재내용을 얻을 수 없다는 문제로 이미 앞에서 살핀 바 있다. 




○ 현상적 내용으로서 자신의 정체성 


이런 경우 1 은 생각하기를, 사정이 그렇다 해도 

2 의 입장에서 자신이라고 보아야 할 현상적인 내용은 

2 자신의 마음으로서 5^ 와 같은 내용과 

그의 마음 안에서 얻은 2^ 와 같은 모습의 둘이 

분리되어 있음을 보게 된다. 


이렇게 되는 사정은 다음과 같다. 


현실적으로 마음은 마음 자신을 직접 볼 수는 없다. 

그래서 자신의 마음 안에 단지 2^ 와 같은 모습만 얻을 뿐 

자신의 마음이 자신의 마음의 내용을 얻지는 못한다. 

그렇기에 2 는 그의 마음에 들어온 2^ 와 같은 모습만을 자신이라고 보고 

심지어 자신의 마음도 2^ 와 같은 모습에 자리잡는 것이라고 

잘못 생각하게 되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그래서 상식적으로는 2 는 5^ 와 같은 내용이 

자신의 마음이며 그 안의 내용이 자신의 마음 안의 내용물이라는 

사실을 잘 인식하지 못하게 된다. 


그러나 1 의 입장에서 본다면, 현상내용에서 2^ 와 5^ 가 

다 2 의 정체와 관련이 됨을 보게 된다. 

그리고 이 가운데 어떤 내용을 2 가 자신의 현상적인 자신의 정체로 

보는 것이 적절한가가 다시 제기된다고 할 것이다. 




여하튼 이런 내용을 바탕으로 

이제 1 의 문제로 돌아와 보자. 


앞에서 2 가 눈을 뜨면 보고 눈을 감으면 보지 못한다는 

그런 내용을 5^로 표시했다면, 

그런 내용이 1 의 입장에서는 무엇인가를 

다시 확인해보자. 


이것은 1 이 스스로 눈을 뜨고 감음에 따라 

사라지고 나타나는 내용이 무엇인가를 확인해봄으로서 

확인할 수 있다. 


이제 그 내용을 붙잡아 놓는다면, 

그것은 바로 위 그림에서 5 안에 들어 있는 내용 전체임을 

알 수 있다. 


그래서 1 의 입장에서는 이제 

자신이 보는 1 을 자신으로 생각한 것이 

바로 앞에서 2 가 2^ 를 자신의 정체로 판단할 때와 같은 문제점을 

갖는 것임을 확인할 수 있다. 


이런 상태에서 1 은 이제 

앞에서 2 가 행한 판단에 자신이 제기한 의문을 

다시 자기 자신에게 제기할 필요가 있다. 


즉, 자기 자신의 실재 내용은 무엇인가. 


또 현상내 자신의 정체와 관련하여, 

현재 자신이 눈을 떠 바라본 모든 내용이 

사실은 자신의 마음 안 내용이어서 

이 모든 내용을 담고 있는 어떤 그릇과 같은 것을 

자신의 마음이라고 추리한다면, 

이 마음을 '현상내' 자신의 본 정체라고 볼 것인가. 


아니면 기존처럼 

이 마음이 얻어낸 내용 가운데 

일부 부분 즉 그림에서 1 의 부분을 

여전히 자신이라고 볼 것인가의 

문제를 판단해야 한다. 



○ 자신의 실재적 정체성 


앞에서 현실에서 1 의 내용을 자신이라고 보는 것이 

타당하게 생각되는 근거를 여러가지로 설명했다. 


눈을 뜨면 늘 어느 상황에서도 자신의 모습을 얻게 된다거나, 

자신이 움직이면 그 부분만 변화한다거나 하는 등의 

내용이 그것이다. 


그리고 이런 생각을 바탕으로 

사람들은 눈을 떠 자신과 세계의 모습을 볼 때 

그런 내용을 외부의 객관적 사실이라고 

잘못 착각하게 된다. 


이는 앞에서 색, 수, 상, 행, 식과 물질의 관계를 

살피면서도 보았다. 



그런데 이런 판단은 

앞의 내용을 통해 보면 잘못임을 알게 된다. 


그리고 이런 내용은 모두 1 의 실재내용을 바탕으로 

자신의 마음이 그와 같은 내용을 그와 같은 관계로 얻어오기 때문에 

현실에서 그런 관계를 얻게 되는 것이라고 추리하게 된다. 


그래서 이런 바탕에서 과연 자신의 실재내용은 무엇인가가 

문제되고 논의되는 것이다. 


이 경우, 현실에서 보는 자신의 현상적인 모습이나 관계는 

매우 일정하고 정연하게 반복된다고 여겨지기 때문에 

대부분 이 내용 자체가 곧 실재의 자신의 내용이라고 

추리하게 되기 쉽다. 


그래서 자신의 실재내용은 

현상에서 자신의 모습으로 보는 1 과 같은 내용 그 자체라거나, 

또는 이와 완전히 일치하는 내용이라거나, 

또는 적어도 이와 유사하거나, 

또는 이와 비례하는 어떤 내용일 것이라고 추리하게 된다. 


그러나 비록 현실에서는 그렇게 추리하지만, 

이런 내용을 현상 안에서도 

다른 영역(청각, 후각, 미각, 촉각) 과 관련시켜 보면, 

그런 내용이 동일하게 성립하거나 있음을 주장하기 힘들고 

또 실재내용이 현상내용과 곧바로 일치하는 내용이라고 추리하기 힘든 사정이 있으며, 

궁극적으로 실재내용은 어떤 주체도 끝내 얻지 못하기에 

이런 여러 추리는 그 옳고 그름을 단정할 수 없고, 


결국 실재내용에 관해서는 

어떤 내용이 있다거나 없다거나, -이다, -아니다, -와 같다, -와 다르다..

는 등으로 분별할 수 없어, 공하다고 표현하게 되는 사정을  

이미 실재내용의 공함을 살피는 과정에서 보았다. 


결국 실재의 자신은 전혀 아무것도 없는 것이라고 할 것은 아니지만, 

그러나 반대로 어떤 특정한 내용이라고 단정할 수 없는 상태로 남는다. 


다만 일단 현실에서 자신이 자신이라고 보는 내용은 

실재의 자신은 아닌 것이며, 

그 실재의 내용은 끝내 얻을 수 없고 공하다고 해야 한다. 


따라서 현실에서 상식적으로 

자신이 보는 자신의 모습을 

곧 외부 객관적 내용이라고  생각하거나, 

더 나아가 이 내용이 곧 실재의 자신의 내용이라고 보는 입장은 

잘못 뒤바뀐 전도된 망상 분별인 것이다. 




○ 자신의 현상적 정체성 - 자신의 정신의 위치 


한편 앞과 같은 내용을 검토해보면 

현실에서 사람들이 갖는 생각은 

또 다음과 같은 점에서 뒤바뀐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우선 사람들은 눈을 떠 

자신이 자신과 세계의 모습을 볼 때 

그렇게 자신이 스스로 보게 된 자신의 모습을 자신이라고 생각하고 

이 자신의 몸 안에 자신의 정신도 존재하는 것이라고 

상식적으로 잘못 생각한다. 


그러나 앞과 같은 내용을 통해 살펴보면, 

자신의 정신은 자신이 보는 자신의 모습에 담겨 있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이런 자신과 세계의 모습을 모두 

그 안에 모두 담고 있는 하나의 그릇

또는 이 모습들을 모두 비추고 있는 하나의 거울과 같은 것이라고 

이해해야 하는 것이다. 







[그림]  08pfl--image\진리의오류55.jp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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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우리 자신으로 이해하는 1 과 같은 내용을 놓고 

볼 때도 이런 사정을 쉽게 이해할 수 있다. 


현재 자신이 눈을 떠 자신의 모습을 볼 때 

자신이 다른 2 를 볼 때와는 달리 

1 자신의 뒷 머리나 눈을 스스로 볼 수는 없다. 

이것은 자신이 자신의 모습을 본 

자신의 마음안 내용이기 때문에 그렇다. 


그래서 일단 상식적으로 

자신의 정신은 자신이 자신의 육체로 보는 부분에 

위치한다고 판단하는 내용은 

뒤바뀌어 전도된 잘못된 망상 분별인 것이다. 


이 상황을 비유하면, 

바다 전체가 자신의 마음인데, 

바다 가운데 물방울 하나를 놓고 

이 안에 자신의 마음이 위치한다고 

잘못 뒤바뀌어 본 전도된 망상 분별이 되는 것이다. 


>>>[반복]


반복되지만, 이 내용을 위 그림을 놓고 다시 자세히 살펴보자. 


위 그림을 자신이 

눈을 떠 본 얻게 되는 모습들이라 놓고 생각한다면, 

사람들은 보통 상식적으로 

자신의 몸이 1 이라고 생각하고 

그리고 자신의 마음은 이 1 ( 자신이 본 자신의 몸) 안에 

머물러 있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또 다른 이의 정신은 

자신이 보는 다른 이의 몸 안에 있다고 여긴다. 

예를 들어 그림에서 2 라는 사람의 정신은 

그 2 의 몸 안에 5^ 의 형태로 

머물러 있다고 추리한다. 


상식적으로는 이렇게 생각하지만, 

이것이 오류의 판단이며 잘못된 착각이라는 내용임을 

이미 앞에서 보았다. 


여기에서 결론만 간단히 말한다면, 

자신이 눈을 떠 얻은 모습이 그림과 같다면, 

이 모두는 자신의 정신 안의 내용물이다. 


그리고 이 정신 안의 내용물을 

모두 담고 있는 그릇과 같은 것이 

자신의 정신이라고 할 수 있다. 


그래서 비록 상식적으로는 

자신이 눈을 떠 얻게 되는 내용 가운데, 

1 을 자기 자신이라고 여기고 

2 를 2 라는 사람으로 여기지만, 

이는 실재의 자신도 아니고 

실재의 타인 (2 라는 사람)도 아니다. 


이것이 잘못임은 

2 라는 사람을 놓고 생각하면 

좀 더 쉽게 이해할 수 있다. 

이미 이 내용을 앞에서 보았지만 다시 반복하면 다음과 같다. 


우리는 2 라는 사람을 놓고 실험하면 

2 가 눈을 뜨면 꽃을 포함해 무언가 보인다고 하고 

2 가 눈을 감으면 꽃을 포함해 그 모두가 보이지 않는다고 

말하는 것을 관찰하게 된다. 


그러나 2 가 눈을 뜨고 감음을 반복하는 이런 과정에서 

우리는 2 의 외부에서 그로 인해 새로 나타나거나 사라지는 것이 

없음을 관찰하게 된다. 


결국 2 가 눈을 감아 무엇이 나타나 보인다거나 보이지 않게 된다는 등의 

변화는 모두 2 의 영역 안에서 

일어나는 변화일 뿐이라고 추리하게 된다. 


그래서 2 의 마음은 

우리가 보는 2 의 몸 안에 5^ 처럼 있고 

그 안에서 그런 변화가 있었다고 추리하게 되는 것이다. 


다만, 우리가 보는 2 의 모습은 

사실은 우리가 본 마음안의 내용물이므로 

2 의 정신이 2 의 몸 안에 5^ 처럼 있다고 추리하는 것은   

오류인 것이다. 


여하튼 이런 상식적인 추리를 바탕으로 생각할 때 

다음과 같은 문제를 발견할 수 있다. 


만일 2 라는 사람의 정신이 

내가 바라본 2 의 모습 안에서 

그림의 5^ 와 같은 위치에 있다고 할 때, 


그 2 가 생각하기를 

나 1 의 정신은 

2 가 나를 바라볼 때의 모습 1^ 안에 

자리잡고 있다고 생각하기 쉽다. 

그러나 이런 2 의 생각이 잘못임은 

1 의 입장에서는 쉽게 생각할 수 있다. 


또 만일 2 가 자신의 정신이 

자신이 스스로 바라본 모습 (그림에서 2^)

안에 머물러 있다고 여긴다면, 

이 역시 잘못된 내용임을 

1 의 입장에서는 쉽게 알 수 있을 것이다. 


이제 2 가 눈을 감으면 사라지고 

2 가 눈을 뜨면 나타났다고 하는 내용은 

1 의 입장에서는 정확히 그것을 알지 못하고 

5^의 내용이라고 추리하지만, 


1 의 입장에서는 그것이 어떤 내용일 것인가를 

생각해보자. 


1 이 눈을 뜨면 나타나고 눈을 감으면 사라지는 내용은 

어떤 것인가. 


그것은 바로 5 안에 들어 있는 그 모든 내용인 것이다. 


그래서 이 5 안의 모든 내용이 

2 의 입장에서 5^ 라고 추리한 내용과 

그 사정이 같다는 것을 이해해야 한다. 



그리고 이렇게 놓고 볼 때 

1 자신의 정신은 

1 자신이 바라본 모습 (그림에서 1)에 

자리잡고 있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도 

앞의 2 의 경우와 마찬가지라고 이해해야 한다. 


그래서 1 자신의 정신은 

그림에서 자신이 본 자신의 모습 1 에 있는 것이 아니고, 

오히려 이 모든 내용을 얻어 놓은 영역 전체 5 가 

바로 이런 모습[색]을 얻어 놓은 

자신의 정신임을 이해할 필요가 있다. 


이를 그림에서 5 라고 표현하고 있는데 

상식적으로는 

이 5 를 자신의 마음 안의 내용이라고 생각하지 못하고 

자신이 대하는 실재의 세계와 실재의 자신이라고 

잘못 생각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 5 는 

사실은 1 의 정신 영역이고 

이 안에 담긴 내용은 자신의 정신내용물들인 것이다. 


>>>[반복끝]






○ 자신의 현상적 본 정체성 - 정신과 육체



그런 가운데 1 의 입장에서 본다면, 

현상내용에서 자신의 정체로 볼 부분이 

자신이 자신의 모습으로 보는 1 과 

자신의 마음으로 보아야 할 5 와 같은 내용이 

분리되어 있게 된다. 


그것은 물론 마음이 마음을 직접 보지는 못하기에 

1 의 내용처럼 마음을 얻어 놓지는 못하기 때문이다. 


마음은 비록 마음 안의 내용을 얻어 보여주지만, 

정작 마음은 형체가 없어서 그것을 직접 볼 수는 없다. 

그래서 이를 비유하여 이들 모습을 담고 있는 그릇이나, 

이를 비춰 보여주는 거울과 같은 것이라고 비유하지만, 

위와 같은 내용으로 마음을 추리하는 것일 뿐 

그릇이나 거울이 자기 자신(마음)을 

담거나 비춰 보여주지는 못하는 것이다. 


또 마음이 자신과 세계의 모습을 보여줄 때는 

그것을 모두 담고 있는 테두리와 같은 것으로 

마치 그림에서 5 와 같이 생각하지만, 

그러나 마음은 그런 크기나 형체를 갖지 않는 것이다. 


또 사람들은 모습을 볼 때만 그 마음이 있고 

보지 않을 때는 마음이 없다고 생각하지만, 

마음은 그런 내용을 얻건 얻지 않건 

일정하게 존재하는 것이다. 


그것은 눈을 감아 보지 못하다가 눈을 떠 보는 경우에 

만일 눈을 감아 보지 못하는 순간 보지 못한다고 하여 

마음이 없는 것이라면 그 상태에서 

눈을 떠도 마음이 없는 상태이기에 

보지 못한다고 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렇지 않은 것은 

이런 내용을 얻던 얻지 않던 마음은 마음대로 

일정하게 유지되는 것이라는 것을 의미한다. 


여하튼 이렇게 마음의 존재를 생각할 때는 

마음이 스스로 보게 되는 자신의 모습과 

마음을 놓고 

이 두 내용 가운데 어떤 내용을 

자신의 현상적인 자신의 본 정체로 

보는 것이 적절한가가 다시 제기된다고 할 것이다. 



수능엄경과 같은 경전에서는 이를 

주인과 손님의 비유를 들어 이 관계를 설명한다. 


어느 집에 늘 머물러 있는 것은 주인이고 

그 집안에 잠시 머물렀다 사라지는 것은 손님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자신의 마음 5 와 자신이 본 자신의 모습 1 가운데 

어느 것이 주인이고 손님인가를 따진다면 

1 의 모습은 살아가는 동안 

변화하고 잠시 정신 안에 맺혔다가 사라지는 것이어서 

손님과 같은 내용인데 반해 

5 는 그 안에 모습이 맺히거나 맺히지 않거나 관계없이 

살아 있는 동안 늘 유지되는 것이서 

이것을 주인이라고 보는 것이다. 


현실에서 각 사람이 1 의 부분을 

자신이라고 이해하고 

나머지 모습 부분을 남이나  외부 내용으로  

이해하는 것도 사실은 사정이 같다. 


만일 어떤 이가 미국을 가고 영국을 가더라도 

심지어 어느 상황에서도 눈을 뜨면 

5 에 그려진 내용을 모두 늘 일정하게 얻는다면 

이들 전체 내용은 마음안에 들어온 일시적인 

손님이 아니다. 


그러나 

1 자신이 몸을 움직여 어디로 오고 간다고 할 때 

다른 내용들은 다 변화하는데 

자신이라고 생각하는 1 의 내용은 

비교적 늘 일정하게 유지되는 것처럼 생각되는 것이다. 


그래서 현실에서 상식적으로 대부분의 사람들이 

이렇게 자신의 부분을 1 이라고 찾은 것이기도 하다. 


그리고 1 의 부분은 상식적으로 단기간을 놓고 보면 

비교적 일정하다. 

하루 잠 자고 난 사이에 

1 의 모습이 아이 모습에서 순식간에 

장년이나 노인의 모습으로 변화한 것은 아니다. 


물론 자기 자신이 본 1 이라는 모습은 

자신의 눈을 통해 본 

자신의 현재의 모습이라고 할 수는 있다. 


그러나 부처님은 이것도 근본적으로 

일시적이고 흔들리는 내용이어서 

마음 안의 손님이어서 

주인이 아니라고 보는 것이다. 


오히려 주인은 그 모든 변화 속에서 

비록 형체와 크기는 갖지 않지만, 

늘 꾸준하게 유지되어온 

마음 자체를 자신의 주인으로 보아야 한다고 

설하시는 것이다. 


그래서 이런 입장에서 

현실에서 대부분이 상식적으로 

자신이 본 자신의 모습을 자신의 본 정체라고 보고 

이 모습을 보는 자신의 마음은 스스로 보지 못하고 

또 자신의 마음을 자신의 본 정체라고 생각하지 못하는 것은  

이런 면에서 또 하나의 뒤바뀐 전도 망상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 가운데 다시 다음의 문제가 발생한다. 



○ 정신과 육체의 관계 


한편 자신이 본 자신의 모습을 1 이라고 

자신의 마음을 5 라고 할 때, 


우선 자신의 마음 5는 과연 

자신의 육체로 보는 1 의 내용에 종속적인 내용인가. 

아니면 마음은 1 의 육체와는 

일단 독립되는 어떤 내용인가하는 점이 논의될 수 있다. 

이 문제는 뒤에서 살피는 윤회의 주체와도 관련되는 문제가 된다. 


현실적으로 많은 이들이 

자신의 정신은 육체에 종속되는 것이라고 본다. 

즉 정신은 육체에서 정신기관이 

외부의 대상과 자극 반응관계를 보이는 

변화관계로 나타난다고 이해한다. 


그러나 정신이 오히려 주체가 된다고 보는 입장이 있다. 



이에 대해 간략하게 살펴보자. 


이미, 앞에서 본 것과 같이 

자신이 자신의 육체(물질)라고 보는 내용은 

사실은 자신의 마음 안에 들어온 마음안 내용물이다. 


상식적으로는 이들 내용들이 자신의 마음 밖에 존재하는 

일정한 객관적 외부적 내용으로서 

이들이 일정한 원인-결과의 관계를 갖는다고 생각하지만, 

그러나 사실은 이들은 객관적 외부 내용이 아니고 

마음 안 내용으로서 

이들이 서로 영향을 미치고 작용하는 관계에 있는 것은 아니다. 


이는 마치 종이 위에 붓으로 

나무와 불을 그려 놓고 다음에 재를 그려 놓는다고 하여 

종이에 그려 놓은 나무나 불이 

종이에 그려진 재를 만들어 내는 것은 아닌 것과 같다. 


그러나 이런 관계를 마음 안에서 반복해 보기에 

이들이 서로 이런 관계를 갖는 것으로 보고 

인과관계로 생각하는 것뿐이다. 


이 내용을 다음 그림을 놓고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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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그림에서 2 가 생각하기를 자신의 마음 5^ 가 

2^ 에 종속되어 생성되고, 작용하는 관계에 있다고 생각한다면 

무엇이 잘못인가를 쉽게 알 수 있다. 


한편 2 가 인과관계로 이해하는 내용도 사정이 같다. 

2 는 생각하기를 2^ 가 꽃 4^ 를 붙잡거나, 꺽거나 하는 모습을 보고, 

이들 2^ 나 4^가 서로 직접 작용하는 관계가 있다고 여기지만, 

사실은 이들은 마음안 내용으로 

이들이 직접 작용하는 관계에 있지 않은 것이다. 


그런데, 2 가 이들 각 모습이나 각각의 관계를 이처럼 볼 때 

다시 실재에도 이런 내용이나 관계가 그대로 있는 것인가의 의문은 

역시 실재내용이 무엇인가의 문제가 된다. 

이에 대해서는 이미 앞에서 본 바와 같다. 


위 그림에서는 1 의 입장에서는 

2 가 본 자신의 모습 2^ 와 그 외부의 내용 2 를 

거의 같은 형태라고 그려 놓고 

이 2 가 곧 2^ 의 실재내용인 것으로 이해하게 되기 쉽다. 


그러나 앞과 같은 추리는 잘못된 추리이며, 

이들은 모두 1 의 마음안에서 얻는 내용으로서 

이것이 실재내용이 아니라는 사실은 

실재내용의 공함에 대해 살피는 과정에서 보았다. 


결국 이들 실재내용은 그 내용을 끝내 얻지 못하여 

-있다, -없다, -이다, -아니다, 

-와 같다, -와 다르다,...등으로 분별하지 못하고 

그것은 공하다고 표현하게 된다. 


따라서 이들 관계도 역시 사정이 같다. 


비록 마음 안에서 본 모습이나 

그 모습에서 보는 일정한 인과관계가 

실재와 아주 무관한 것이 아니고 

또 실재에 이와 관계된 내용이 전혀 없다고 단정할 수는 없지만, 


그러나 현실에서 파악한 이들 내용은 

역시 실재내용은 아닌 것이며 

실재내용이 이와 같은 어떤 구체적 내용이나 관계를 갖는다고 

단정할 도리는 없는 것이다. 


그것이 곧 실재의 공함이 의미하는 내용이다. 

이런 점에서 상식적으로 갖는 이런 견해는 

불완전한 이해가 되는 것이다. 



한편, 육체와 마음의 관계는 

윤회의 주체를 무엇으로 보는가의 문제와도 관련된다. 

이를 이어서 살피기로 한다. 




○ 윤회의 주체와 마음의 관계 


노년에 든 사람이나 장년에 든 사람은 

위 그림에서 다음과 같은 사실을 하나 발견하게 된다. 


현재는 분명 자신이 눈을 떠 보게 되는 

자신의 모습 1 과 같은 모습을 자기 자신이라고 생각하며 

일상생활을 하고 있는데 

그러나 기억을 되살펴 보건대 


어릴 때의 모습이나 청년일 때의 모습 

그리고 10 년 전의 모습은 이와 같지 않았다는 점이다.

그래서 사실 자신이 보는 자신의 모습 1 은 

시시각각 꾸준히 변화해가고 있고 

하루하루 늙어가고 있고 죽음을 향해 가고 있는 것이다. 


그런 가운데 

현재의 모습과 인과 관련을 갖는 내용을 현실에서 찾는다면 

자신이 섭취하는 외부 음식물이나 

자신이 배설해내는 것들이 모두 다 자신과 

그런 인과관련을 갖는 것이라고 해야 한다. 


이 변화 과정에서 어느 하나만을 자신의 대표나 

진짜 모습으로 정할 수 없다. 


또 그런 가운데 

현실에서 사람들은 상식적으로 

이런 자신이 육체를 유지하다가, 죽게 되면, 

지금 보는 1 의 모습은 사라져 없어지고 

또  1 과 관련된 모든 내용은 허무화되리라 생각하게 된다. 


즉, 자신이 죽게 되면 

자신이라고 생각한 1 의 모습은 허물어져 사라져 없어지고 

자신이 살면서 애착을 가진 

자신의 생명, 신체, 재산, 가족, 지위, 명예,,,등은 

모두 자신과 관계없는 것이 되어 버린다는 점에서 

근심과 걱정과 고통을 느끼게 된다. 


현실에서 생사문제가 

사람에게 일으키는 걱정과 두려움 공포의 내용은 

대강 위와 같다. 


그리고 자신이 죽으면 이후에는 

자신과 관계되는 것이 아무것도 전혀 없게 되는 것인가 

하는 의문을 갖게 된다. 



경전에서는 이에 대해 

간단히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수능엄경에서는 

이와 같은 걱정과 근심을 토로하는 

파사닉왕에게

다음과 같이 설한다. 


...

변하는 것은 변하여 없어질지라도 

저 변하지 않는 것은 본래 생멸이 없다. 

...


즉 어릴 때부터 늙을 때까지 

자신이라고 보는 1 의 모습은 

변하는 것이지만, 그 동안에 보는 정기 자체는 

변함이 없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이 보고 듣는 마음이 결코 생멸(生滅)하지 않음을 

이해시키고 있는 것이다. 





○ 윤회의 주체로서 근본정신(아뢰야식) 


이미 앞에서 정신의 위치를 살폈지만, 

윤회의 주체로서 근본정신(아뢰야식)을 이와 관련해 살피면 다음과 같다. 





[그림]  08pfl--image\진리의오류55.jpg

fr http://thegood007.tistory.com/1172

03fl--ghpt\r1030.htm



위 그림은 자신이 눈을 떠 바라본 모습이다. 

이미 앞에서 이들 전체 내용이 1 의 마음안에 들어온 내용임과 

1 의 마음은 이들 내용을 담고 있는 하나의 그릇이나 

이들 내용을 모두 비추고 있는 거울과 같은 것으로 

생각해야 함을 보았다. 


그래서 위 그림에서 5 를 1 의 마음이라고 보아야 함을 보았다. 


그러나 이는 1 의 모든 정신 영역을 나타내는 것이 아니고 

오직, 눈으로 얻는 내용(색)만 담는 정신 영역이다. 


따라서 이 그림은 근본식의 영역을 나타낸 것이 아니다. 

이 그림은 결국 불교에서 말하는 

색을 맺혀 얻고 있는 식으로서 

다섯가지 식(안식, 이식, 비식, 설식, 신식) 가운데 하나인 안식을 나타낸다. 


한편, 불교에서 말하는 근본정신(근본식-아뢰야식)이란, 

이런 여러 정신들을 변화시켜 만들어 내기 이전의 

보다 근본적인 정신을 

의미한다. 






[그림]  q:\G\G\08\image\제8식의구조.p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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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 근본 식이 변화시켜 만들어낸 

제 7 말나식을 제2능변(第二能變), 

제 6 의식과 나머지 5 식(안식, 이식, 비식, 설식, 신식)을 제3능변(第三能變)이라 표현한다. ] 


눈으로 보는 안식은 위와 같은 그림으로 그려 

대강 그 내용을 표현할 수 있다지만, 

다른 정신은 이와는 사정이 다르다. 


그러나 여하튼 이 그림을 통해서 

우리가 살아서 얻는 

세계와 자신의 모습으로서 모든 감각현실과 관념 등 그 모든 내용이 

모두 정신 안의 내용물이라는 것을 

이해하고 


불교에서 말하는 아뢰야식은 

위와 같은 그림을 통해서 

다시 그 내용을 유추해 이해해야 할 것이다. 




그래서 결국 우리가 

현재 보는 것과 같은 세계의 모습은 

우리의 생명이 현재의 모습과 같이 생겨나기 전에 

전생의 아뢰야식이 

현재의 자신을 이루는 명색에 의탁한 가운데  


분별을 담당하는 의식(제6식)과 

색, 성, 향, 미, 촉 등의 감각을 담당하는 5 식을 

변화시켜 만들어내서 


그 후 이 5식을 통해서 

거꾸로 자신과 세계의 모습을 

위의 그림과 같은 모습으로 얻고 

이 내용을 결국 현재의 자신과 세계의 모습이라고 

생각하게 되는 것이라고 이해할 수 있다. 



한편 앞 그림에서 5 로 나타낸 눈과 관련된 정신(안식)은 

본래 근본정신(아뢰야식)이 변화해 나타난 것이어서, 

비록 눈과 같은 기관이 사후 소멸되어 

안식이 전혀 기능을 하지 못하게 되어 소멸해도 

근본정신(아뢰야식)은 소멸하지 않는 것이라고 제시한다. 


물론 5 와 같은 것을 자신의 마음이라고 볼 때 

이는 눈과 관련된 정신(안식)으로서 

정신의 일부이고 근본 정신(아뢰야식)은 아니다.

그러나 이런 안식이나 

다른 이식, 비식, 설식, 신식 등이나 의식은 

근본정신(아뢰야식)이 변화하여 나타난 정신(전식)으로서  

그 근본 성질은 같다고 제시하고 있다. 


그리고 

살아 있을 동안 

자신이 자신의 모습이라고 본 1 의 내용이 

아이의 모습에서 소년, 청년, 장년, 노년의 모습으로 변화한 것처럼 


생사를 거치면서도  

자신이 자신의 모습으로 보게 되는 내용은 

다른 생명 형태로 변화하지만, 


그러나 이 생사과정에서 근본 정신(아뢰야식)은 

죽음으로 인해 육체가 허물어진다고 해서 

사라지지 않고 

다음 생으로 계속 이어진다고 제시한다. 


이런 내용이 불교의 윤회에 대한 설명이기도 하다. 


이는 마치 정신이 세계의 모습을 파악할 때, 

이들은 순간 순간 그 모습을 변화해가지만, 

그 모습을 구성하는 기본재료라고 보는 근본요소들은 

이들 모습의 변화와 관계없이 

늘 일정하게 유지된다고 보는 것과 사정이 같다. 


이는 마치 종이가 불에 타 재가 되는 과정 전후를 통해 

종이는 없어지고 재는 나타나더라도 

이들을 구성하는 질량, 에너지의 총량은 일정하게 

변함이 없다고 보는 과학의 상식과 사정이 같다. 


또 이 관계는 지금 전 후의 과정에서 그러하듯, 

무한한 앞 시간에서도 다시 그 앞과 뒤의 관계가 또 그러하고 

또 무한한 뒷 시간에서도 다시 그 앞과 뒤의 관계가 또 그러한 것이다. 


불교는 여기에서 이들 현상의 재료 외에 

이들 현상을 담고 있는 정신을 

이런 근본 요소에 추가해 이해하는 것이 다른 것뿐이다. 

그래서 불교에서는 지, 수, 풍, 화, 공(공간), 식의 6 대를 

이런 근본 요소로 제시하는 것이다. 


그래서 근본정신(아뢰야식)은 무한한 시간대에 걸쳐 

존속하는 것으로 제시하는 것이다. 


다만, 근본 정신이 다른 요소와 다른 점은 

매 생에서 얻는 내용이 그 안에 씨앗(종자)로서 저장되고

또 다음 생에서 이 안에 저장된 씨앗(종자)이 다른 정신들을 생성시키고 

현실의 모습을 나타내는 등[훈습, - 전변, 현행]의 

특수성을 근본정신에 인정하는 점이라고 할 것이다. 


여하튼 이런 이유로, 생사 윤회를 통해 변화하는 현상 속에서 

현상적인 자신의 정체를 찾는다면 

이 근본정신(아뢰야식)을 주인으로 보고 

윤회의 주체와 자신의 정체을 찾아야 한다는 것이 된다. 


부처님의 이런 가르침에서 혼동을 겪기 쉬운 것은 

이런 근본 정신으로서 아뢰야식이나 

또는 이런 모든 현상을 나타내는 바탕으로서 공한 실재가 

진짜의 나나 나의 내용을 의미하는 것이라고 

혼동을 일으키기 쉽다는 점이다. 


이렇게 되면 이 역시 또 하나의 뒤바뀐 잘못된 망상 분별에 

해당된다. 


부처님은 경전에서 근본정신(아뢰야식)에 대해 설명하면서 

이것이 비록 생멸을 떠난 것이지만, 

자칫 이것을 진짜의 나라고 잘못 분별하고 또 집착해서는 안된다고 

주의를 주시고 있다. 


이들 모두에 진짜라고 할 영원불변한 실체는 

공한 진여 실재(원성실상)나 

감각현실(의타기상)이나

관념(변계소집상)이나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승의무자성, 무아, 무자성] 


무아, 무자성과 윤회의 관계는 따라서 

이런 근본정신(아뢰야식)을 윤회의 주체로 볼 때도 

무아, 무자성이라는 사실을 

혼동하여서는 안 된다. 




여하튼 현상 안에서 근본정신이 소멸되지 않고 

무한히 존속하며 윤회를 해나감을 전제로 할 때의 문제는 

자신의 존재나 근본 정신이 소멸되는 것이 문제라기 보다는 


다음 생에서 근본정신(아뢰야식)이 

어떤 형태의 생명형태에 얹혀져서 

다른 정신(눈과 관련된 안식, 귀와 관련된 이식,,,,등)을 분화시키고 

그런 가운데 다음 생에서는 

어떤 모습을 자기 자신의 모습으로 

보면서 어떤 형태로 살아가게 되는가가 더 문제인 것이다. 


사람의 입장에서는 

자신의 살아서 행한 업(뜻, 말, 글, 행위, 태도)에 의해 

다음 생에 축생이나 곤충의 형태에 자신의 근본정신이 얹혀져 

이후 그 축생이나 곤충의 눈으로 세계와 자신을 보고 살아가야 한다면, 

이것이 큰 문제라고 보는 것과 같은 것이다. 


그리고 이런 내용이 곧 불교에서 제시하는 수행목적과 수행방안과 

깊이 관련되는 것이다. 


여하튼 근본정신(아뢰야식)과 관련한 좀 더 자세한 내용은 

관련된 부분에서 살피기로 하고 

대강 불교에서 말하는 윤회와 근본 식(아뢰야식)과의 관계에 대한 설명을  

마치기로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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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복]


● 수행목표 상태와 일반 상태의 차이점


한편, 수행목표 상태와 일반 상태의 차이점에 

대해 다음과 같은 의문을 가질 수 있다. 


즉, 수행을 하여 

최종적으로 마음의 해탈을 얻고  

위와 같은 사실을 증득하면, 

수행을 하지 않은 일반의 상태와는 

어떤 점에서 차이가 있게 된다고 할 것인가?


[반복끝]



여기에 대해 간단히 먼저 답을 한다면, 

다음과 같다. 



○ 수행의 어려움과 수행의 가치의 인식 필요성  


수행은 참으로 어렵다고 본다. 


위 아함경 구절은 처음 

부처님의 가르침에 들어온 

수행 입문자를 대상으로 한 법문이다. 


그래서 불교의 수많은 경전 가운데 

가장 기본적인 경전이 된다.  

그렇지만, 쉽게 이해되고 

실천되는 내용은 아니다. 


경전은 짧지만, 

이후 팔만대장경의 모든 법문을 통해 

제시되는 내용에서  

가장 핵심적인 내용이 이 안에 함께 들어 

있기 때문이다. 



여하튼 처음 불교의 가르침을 

대하는 수행자가 

이 경전의 내용을 통해 다음을 요구받게 된다. 


먼저 부처님의 가르침의 핵심인 

무상, 고, 공, 비아 등의 내용을 이해하고 

이를 통해 색, 수, 상, 행, 식을 올바로 관한 다음에 


지금까지 세상에서 애착을 가졌던 것을 

모두 끊는 것이 첫 출발단계가 된다. 


생계를 위해 해왔던 많은 일들 

살면서 애착을 갖고 집착을 가졌던 많은 것

그리고 더 나아가 

자신의 생명, 신체, 재산, 가족, 명예...

등 일체가 다 색, 수, 상, 행, 식이며 

결국 이 모두에 대한 애착과 집착을 

내려 놓는 것이 경전에서 요구된다. 


쉬울 것인가? 

결코 그렇지 않다고 본다. 


애착을 가지면 그것은 당장은 약간의 좋음을 주지만,  

대신 그로 인해 많은 악을 행하게도 되고  

이후 긴긴시간 많은 괴로움을 얻게 되므로

그에 대한 애착을 버리라는 말씀이지만, 


그러나 사람들은 애착을 갖는 것으로부터 

당장 많은 좋음을 얻는다고 생각하며,  

그래서 이런 것들에 대해 애착을 버리는 것을 

두려워하게 된다. 


애착과 집착을 버린다는 것은 

설령 자신이 애착을 갖는 것이 없어지고 사라진다 해도 

괜찮고 무방하다는 마음 상태가 되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자신이 지금까지 망상분별에 바탕하여 

자신과 자신의 것으로 보아 온 내용, 

자기 자신, 자신의 생명, 신체, 재산, 가족, 명예...를 놓고 

그런 마음을 갖는 것은 쉬운 것이 아니다. 


그래서 애착을 버리는 것도 힘들지만, 

애착을 버리면 곧 애착했던 정도에 비례해서 

많은 상실감과 우울함을 느끼며 무력해지고 

앞으로 대신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 

망연해 하거나 오히려 불안을 느끼게도 된다. 


그리고 자신이 지금껏 가장 소중하게 생각하던 

자기 자신, 자신의 것, 세상의 일체 

즉, 색, 수, 상, 행, 식에 대해 

애착을 버리는 대신

자신은 무엇을 구하고 무엇을 얻어야 하는가. 

망연해지고 무기력해지기 쉽다. 


그래서 이는 

마치 마약 중독자가 마약을 끊는 것을 

어려워하는 것과 상황이 같다. 


마약은 비록 자신의 몸을 점점 해쳐도 

당장은 즐거움을 준다. 

그래서 매순간 그것을 버리는 것을 어려워하고 

또 그것을 버리면 그 대신 자신이 

무엇을 해야 하는지를 막막하게 

여기는 것이다. 


그래서 자신과 자신의 것 세계를 구성하는  

색, 수, 상, 행, 식 일체에 깨달음을 얻고, 

집착과 번뇌를 버리고, 

고통을 소멸시키고 

다른 생명을 구제하는 서원을 일으켜 

실천하라는 가르침을 

따르기 어려워한다. 


한편, 버리기 힘든 애착과 집착을 버리고 

여하튼 이런 어려운 수행을 

계속 정진한다고 할 때 

도대체 최종적으로 어떤 상태를 얻기 위해서 

그런 수고를 아끼지 않는가 하는 

의문도 갖게 된다. 


결국 자신이 그렇게 어렵게 수행을 하면, 

최종적으로 어떤 상태가 되고 

그것은 일반의 삶과는 무엇이 다르기에 

그렇게 하려 하는가? 


이에 대한 답을 스스로 얻지 못하면, 

스스로에게도 수행은 무익한 일로 느껴지고 

또 다른 이들도 

역시 그처럼 생각하게 될 것이다. 


따라서 수행을 시작하려면, 

왜 굳이 그렇게 힘든 수행을 해야 하는가에 대해 

가장 먼저 답을 얻어야 할 것이다. 


이미 앞에서 

이에 관련하여 기본적인 내용을 살폈지만, 

수행의 목표가 갖는 의미를 파악하기 위해 

이를 다시 살펴보기로 한다. 





○ 수행의 목표의 가치 


이미 앞에서 밝힌 것처럼 

불교의 수행목표는 

고통스런 현상을 멸하여 

모든 고통을 소멸시키고 

나아가 장차 고통을 일으키는 원인이 되는 

번뇌를 소멸시켜  

안온한 해탈과 열반을 얻는데 

목적이 있는 것이다.  


그것은 이번 생에서의 고통을 

소멸시키는데에도 목적이 있는 것이지만, 

다시 무한한 시간에 걸친 윤회의 고통을 

모두 소멸시키는 데 1차적 목적이 있다. 


그래서 오직 맑고 밝은 깨달음을 통해 

자신도 윤회의 고통의 묶임에서 벗어나고[해탈]


더 나아가 다른 생명도 

그런 묶임에서 모두 벗어나게 하는 

광대무변한 서원을 실천해가고 

지혜와 복덕을 원만히 성취하여 

안락한 니르바나에 머무르는 것이 

목적이라고 할 것이다. 


따라서 이런 수행의 목표 상태가 

일반 현실과 차이가 있다면, 

바로 이런 내용이 그 차이라고 할 것이다. 


그리고 이 수행목적을 이루기 위하여 

현상 일체(색, 수, 상, 행, 식)에 대하여 

무상, 고, 공, 비아 등을 올바로 관하고 

탐욕과 분노 어리석음의 번뇌와 

집착을 버려야 함을 제시하게 된다. 



다만 이미 앞에서 본 것처럼 

애착을 갖는 것들에 대해 

그 참된 모습을 모두 올바로 관하고 

집착을 버리는 것은 쉽지 않고 


또한 불교에서 제시하는 윤회나 

무상, 고, 공, 비아 등의 근본 가르침의 내용을 

이해하기가 쉬운 것은 아니다. 


따라서 여기서는 

윤회를 전제하지 않은 일반적인 경우와 


윤회를 전제한 상태로 나누어 

수행의 효용에 대하여 살펴보고자 한다. 





○ 수행의 현실에서의 가치 


우선 현실 생활에서 

가치가 적은데, 

자신이 그에 초점을 맞추기 때문에 

또는 그것이 희소하다는 이유 등으로 

그 가치가 크다고 잘못 생각하는 

경우가 많다. 


우선 이런 경우를 생각해보자. 


예를 들어 가정하여 

자신이 별로 가치없는 어떤 천 조각에 

강한 집착을 갖고 있다고 가정하자. 


그런 경우 그 천 조각이 바람에 날려 

길가로 떨어질 때 그것을 주으려 

들어가다가 사고를 당해 

몸을 다칠 수도 있을 것이다. 


이런 경우 가치가 없는 천 조각을 얻는 대신에 

가치가 더 큰 자신의 신체나 생명을 

희생한 것을 쉽게 알 수 있다. 


그런데 이런 비유처럼 현실에서는 

실질적으로는 가치가 적은 것에 

집착을 갖고 추구하는 나머지 

가치가 없는 것만 얻고 

대신 훨씬 가치가 많은 것을 

희생시키는 경우가 많다. 


예를 들어 더 많은 재산, 더 높은 지위, 명예 등을 

탐하여 추구하다가 그보다 훨씬 소중한 

자신의 생명이나 신체를 희생시키는 경우가 많다. 


한편 생명이 

우주를 포함하여 그 어떤 수단들보다 훨씬 소중하다지만, 

예를 들어 거꾸로 매달려 고문을 당하는 상황에서 

고통이 계속되면 

그 소중한 생명마저 포기하는 것이 낫다고 보통 생각하게 된다. 


그래서 이처럼 생명을 포기할만큼 심한 고통이 없고 

평안하고 안온한 행복을 누리는 것은 

다시 이렇게 가치있는 생명보다 훨씬 가치가 있는 것이다. 


더 나아가 다시 생명을 해치지 않고 

이런 평안하고 안온한 행복을 다른 생명에게 나누어 주는 선과 

그런 선을 실현할 수 있게 하는 지혜는 

다시 이보다 더 가치가 큰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들 각 가치의 내용들에서, 

뒤의 내용이 갖는 가치를 앞의 내용이 갖는 가치와 비교한다면, 

각기 산수의 비율로 그 비율을 표현할 수 없을 만큼 

그 가치의 정도가 높은 것임을 알 수 있다. 


예를 들어 대부분 

우주의 재산이나 지위를 다 주어도 

자신의 신체나 생명과 바꾸지 않는다고 한다면, 

그런 자신의 생명이 갖는 가치를 1 이라고 표현하면, 

1000 조의 재산이나 지위는 얼마라고 숫자로 표시해야 할 것인가. 

0.0000000........1 과 같이 산수로서는 

그 비율을 표시하기 힘든 정도의 작은 가치를 갖는다고 

해야 할 것이다. 


이를 비유로 말하면 자신의 생명이 갖는 가치를 

옷에 비유하면, 

1000 조의 재산이나 지위는 

그 옷에 붙은 실오라기에 붙은 티끌의 티끌에도 

미치지 못한다고 비유해야 한다. 


또 반대로 자신의 생명이 갖는 가치가 

우주보다 더 가치있다고 생각한다면 

이제 그것을 화폐로 표현하면 얼마로 표현해야 할 것인가. 

100000000........원과 같이 산수로서는 그 비율을 표시하기 

힘든 정도의 큰 가치를 갖는다고 할 것이다. 


이와 같이 여러 가치의 서열에서 

앞 단계의 내용들은 비록 가치가 있더라도 

뒤의 단계가 갖는 가치는 앞의 내용보다 

각기 산수로 표시할 수 없는 비율로 

그 가치가 훨씬 높은 것이라고 해야 한다. 


그러나 이미 앞에서 본 것과 같이 

현실을 살아가는 이들은 

어떤 것에 눈이 가리워지고 

그에 관심과 초점을 맞춘 뒤에는 

그에 집착을 일으키고 

그 집착으로 인해 그것이 갖는 가치에 대해 

올바로 판단하지 못하고 

가치가 적은 것을 놓고 

그것이 마치 가치의 전부인 것처럼 

착각 망상을 일으키고 이를 잘못 추구해나가게 된다. 



이외에도 

현실에서는 대부분 

자신의 생명, 신체, 재산, 가족, 명예..등에 

강한 집착을 갖기 때문에 

그런 수단을 통해 

최종적으로 얻어내려고 한 

평안하고 안온한 행복을 얻지도 못하고 

또 이로써 악을 행하게 된다. 


현실에서 보게 되는 악행은 

모두 탐욕과 분노 어리석음이라는 번뇌와 

그에 대한 집착이 원인이 됨을 볼 수 있다. 


그리고 그런 악으로써 

각 생명은 다시 길고 긴 시간에 걸쳐 

고통을 그 결과로 되돌려 받게 된다. 



그래서 일반적으로 

집착을 갖고 임하면, 

그 집착을 갖는 것은 얻을 지 몰라도 

그로 인해 더 큰 가치가 있는 것을 잃고 

많은 악을 행하고 

긴긴 시간 고통 속에서 헤매이게 된다고 할 수 있다. 



한편, 이미 앞에서 본 것처럼 

집착을 가진 이는 

그것이 성취되어도 또 다른 것에 

집착을 갖고 임하고 


뜻이 성취되어도 집착으로 

그것이 상실될 것을 두려워하고 

불안해 하며 살아가게 된다. 


또 집착하는 것을 얻지 못하거나, 

상실하면 역시 

집착한 정도에 비례하여 

강한 슬픔과 고통을 겪게 마련이다. 




그에 반해 집착을 갖지 않는 이는 

이런 모든 경우에 

평안한 마음을 유지할 수 있다. 


이는 자신이 애착을 갖지 않고  

자신과 관계없는 일인 경우에는 

그것이 아무리 큰 사고라고 해도 

아무런 고통이나 동요도 일으키지 않고 

평안한 마음으로 지내게 되는 것과 

사정이 같다. 


그래서 현실에서 집착을 버리고 생활하면, 

집착으로 인해 

어떤 악을 함부로 행하지 않게 되고, 

걱정과 불안을 갖지 않고 

집착없이 평안한 마음을 유지한 가운데 

아름답고 가치있는 목표를 추구하며 

행복한 삶을 살게 된다. 


이런 내용은 사실 처음 한 주체가 

그 모든 수단을 다 차지하여 

최종적으로 얻고자 한 내용이었던 것이다. 


그런데 집착을 버림으로써 

그 수단들을 차지하지 않고서도 

그 최종 상태에 쉽게 이르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이런 것이 집착을 버리는 수행이 

현실에서 갖는 작은 효용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현실에서는 비록 

많은 것에 대해 집착을 버린다해도 

자기 자신, 그리고 자신의 생명, 목숨, 신체나, 

자신이 가장 소중하게 여기는 

재산, 가족 등에 대해 

집착을 버리기는 쉽지 않다. 


그래서 많은 것에 대해 집착을 버려도 

집착을 좀처럼 버리기 힘든 이런 부분과 관련해서는 

역시 앞에 나열한 문제를 여전히 갖게 된다. 


즉, 그런 애착과 집착때문에 

악을 행하고 고통을 받고 

이에 묶이어 끌려 다니게 되는 것이다. 


불교 수행목표가 

생사에 대한 집착을 버리면서 

추구해야 할 목표가 되는 이유는 

다음에서 살펴야 한다. 




○ 윤회를 전제로 한 수행의 가치 


그런데, 

자신과 세계의 정체에 대해서 

불교에서 가르치는 내용과 같이 

올바로 관하게 될 때는 

앞과는 또 다른 내용을 보게 된다. 


즉, 이렇게 집착하며 

자신과 자신의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들은 


색, 수, 상, 행, 식의 내용에 대한 올바른 

관찰에서 보듯, 


영원하지 않고 무상한 것이며, 

잠깐 좋음을 주고 

긴 고통을 불러 가져오는 내용이며, 


또한 그 실재는 공하고, 

이런 내용들은 실재의 나나 실재의 대상이 아니며


또 영원불변한 참된 진짜의 내용들이 아님을 

관하게 된다. 


그래서 이런 내용은 자신이 

집착할 만한 실다운 것이 

아님을 깨닫게 된다. 




또한, 윤회와 관련하여서는 

다음과 같은 내용을 보게 된다. 


즉, 자신이 지금껏 

자신이나 세계로 본 내용(색, 수, 상, 행, 식)은 

자신의 정신 안에 들어온 내용일 뿐이며, 

이 모든 내용을 담고 있는 것이 

사실은 자신의 마음(정신)이었던 것이다. 


그리고 자신의 실재는 

자신의 마음이 본 그런 내용 또한 아니다.  


또한 

자신이 죽은 후 

자신과 관련된 것은 

아무 것도 전혀 없게 되는 것이 아니고, 

자신의 근본 정신(아뢰야식)은 소멸되지 않고 

자신의 업에 따라 

다시 무한히 윤회해 나아간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이렇게 되면, 

단지 현재의 생만 고려하던 경우와는 

사정이 또 달라지게 된다. 


앞에서는 한 생 안에서 생명의 가치가 큼과, 

그런 삶에서 고통이 없고 

더 나아가 다시 생명을 해치지 않고 

이런 평안하고 안온한 행복을 다른 생명에게 나누어 주는 선과 

그런 선을 실현할 수 있게 하는 지혜가 가치가 큼을 보았다면, 


이제 여기서는 

무한한 기간 윤회 동안 

한 생명이 어떤 상태로 태어나 삶을 살아가며 

고통을 제거하고 행복과 선을 실천하게 되는가의 

관점에서 이를 살피게 된다. 


100 년을 기준으로 한 한 생의 가치가 크지만, 

1000 년, 10000 년, 

1000..................... 년 

1 겁, 10 겁..이런 식으로 이어나가고 

더 나아가 이런 기간도 찰나에 가깝다고 할 

무한으로 나아간다면, 

한 생에서의 생사에 집착하여 

나머지 기간의 가치를 잃을 수는 없는 것이다. 



윤회를 전제로 하여 이 차이를 보면 

그 차이가 크다. 


현실에서 자신과 자신의 것에 집착을 가지면, 

비록 잠시간 현생에서 그 집착대로 

자신과 자신의 것으로부터 

현재의 생애 동안 좋음을 얻을 지 모르지만, 


그로 인해 현생에서도 악을 행하고 

고통을 받게 될 뿐만 아니라, 

다시 죽어서도 

기나긴 윤회의 고통을 받아나가게 된다. 


반면, 집착을 버리면, 현생에서도 

악에서 벗어나고 고통을 받지 않으며, 

다시 죽어서도 

긴긴 윤회의 고통으로부터 벗어나 

평안한 니르바나의 상태에 머무르게 된다.  


그래서 윤회와 관련하여, 

수행을 통해 얻는 이런 차이가 

부처님의 가르침에 따라 수행을 해 얻는 

효용이라고 할 수 있다. 





[반복]


수행목표가 일반 상태와 갖는 차이점에 대해서는  

특히 앞에서 제시한 

일체에 대한 근본적 판단

즉, 무상, 고, 공, 비아의 판단과 

관련하여 

다음과 같은 의문을 가질 수 있다. 



● 무상, 고, 공, 비아와 수행목표 상태의 관계 


일체는 무상, 고, 공, 비아라고 하는데, 

만일 수행을 하여 심해탈의 상태가 되고 

해탈지견을 얻으면 

그렇지 않은 상태가 되는 것인가? 

이런 의문을 가질 수 있다. 


만일 불교의 수행목표 상태인 

심해탈이나 열반과 같은 상태는 

무상, 고, 공, 비아의 상태가 아니라면, 


무상, 고, 공, 비아가 아닌 경우도 있다는 것이 되어서, 

처음에 일체가 모두 무상, 고, 공, 비아라고 판단한 것은 

이로 인해 자체적으로 잘못이라는 것이 된다. 


그러나 해탈과 열반이 일반 상태와 같이 

역시 무상, 고, 공, 비아라고 한다면, 

수행을 통해 이런 수행목표를 실현하는 것이 

일반 현실과는 어떤 의미있는 차이를 갖는 것인가 하는 

의문을 갖게 된다. 



그런 전제에서 다시 다음과 같은 

의문을 이어서 가질 수 있다. 



● 수행목표와 염리, 희탐진


만일 심해탈의 상태가 되더라도, 

여전히 무상, 고, 공, 비아의 상태라고 한다면, 

이 역시 무상, 고, 공, 비아를 이유로 

다시 염리 희탐진의 대상이 되어야 할 것인가?

이는 수행목표 상태도 역시 다른 내용과 같이 

염리 희탐진의 대상이 된다고 볼 것인가 하는 문제이다. 


● 수행의 근거 


또 만일 심해탈에 이르러도 여전히 

무상, 고, 공, 비아여서, 

처음의 상태와 차이가 없다면, 


일반 현실 상태와 달리 

수행을 통해 

심해탈을 얻어야 할 근거는 무엇인가. 

이런 의문을 함께 가질 수 있다. 

-

생각해보면 

수행을 통해 얻는 상태는 

일반의 상태와 어떤 의미있는 차이가 있어야 

부처님의 가르침을 받아들이고 

수행을 해야 할 필요성이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래서 불교를 처음 대하는 이는 

수행목표의 상태가 과연 일반 상태와 

어떤 차이를 갖는가에 대해 

이런 여러 가지 의문을 제기하게 된다고 본다. 


따라서 

이를 살필 필요가 있다고 본다. 


[반복끝]




우선, 색, 수, 상, 행, 식 일체에 대한 판단으로서 

무상, 고, 공, 비아(무아, 무자성)은 

마음의 해탈을 얻기 위하여 

기본적으로 깨달음을 얻어야 할 내용이다. 


다만 무상, 고, 공, 비아(무아, 무자성)은 

색, 수, 상, 행, 식 일체에 관련된 내용이기 때문에 

수행의 목표 상태와 혼동을 불러 일으키는 측면이 있다. 


즉 수행목표도 결국은 

현실 현상 안에서 행하고 성취하는 것이기 때문에 

역시 무상, 고, 공, 비아(무아, 무자성)인 것이라고 해야 하는가. 


만일 수행목표를 성취한 경우는 그렇지 않다면, 

일체가 무상, 고, 공, 비아(무아, 무자성)라고 제시한 것은 

처음부터 잘못된 것 아닌가 하는 의문을 가질 수 있다. 


여기서는 일단 무상과 고의 내용과 

공, 비아(무아, 무자성)을 나누어 살피기로 한다. 


무상과 고는, 현상을 현실에서 얻는 현상의 측면에서 살핀 내용이며, 

공과 무아는, 현상을 실재와 실체의 측면에서 살핀 내용이기 때문이다. 






○ 무상, 고와 수행목표로서 해탈과 열반의 성격 

*pt* 시작 to k0650sf-- ♠● 무상과 고의 관계성


먼저 현상 일체를 영원하지 않다고 보고 

또 이처럼 생멸하는 현상 일체를 고통으로 보는 

무상과 고의 내용과 수행목표의 관계를 살피려면  

우선 수행목표인 해탈과 열반의 성격에 대해서 

살펴야 할 필요가 있다. 


수행의 목표 상태는 

현실의 삶과 사후 윤회과정에서 발생하는 고통을 멸하는데  

1차적 목표를 두게 된다.


그것은 삶에 있는 여러 내용 가운데 

고통이 문제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고통의 내용을 살피고[고제] 

다시 고통의 원인을 살피고 [고집제] 

고통이 모두 소멸되고 다시 발생하지 않는 상태[고멸제]를 목표로 하여 

그 상태를 얻을 수행 방안을 살피게 된다. [고멸도제]- 4 성제 


따라서 수행 목표인 해탈과 니르바나(열반)은 

모든 악과 고통이 소멸되는 상태라는 점에 

가장 큰 의미가 있다.  


그런데 악과 고통을 제거하고자 하는 점에서는 

일반 현실에서 사람들이 갖는 목표와 공통되지만, 


그러나, 

생멸하는 '현상 일체'를 고통으로 보고 

이러한 고통을 근본적으로 제거하고자 한다는 점에서 

현실 가운데 좋음을 추구하며 

일반적으로 세우는 목표점과는 크게 다르게 된다. 


또한 불교에서 제시하는 해탈과 열반은 

생멸현상을 모두 떠난 상태로써 

현실의 현상 내용처럼 생겨나고 없어지는 것이 아니며, 

무상함도 고통도 아니다. 


그러나 그런 해탈과 열반은 또 한편 

모든 현실 상황에 기본적으로 

이미 갖추어져 있는 내용으로 본다는 점에서 

현실에서 사람들이 없는 상태를 새로 만들어내 

얻어내는 것을 목표로 하는 것과는 또 사정이 다르다. 


그래서 불교의 목표 상태에 대해서는 

이런 점을 잘 이해할 필요가 있다. 




그런데 우선 이런 불교의 목표와 관련하여 

일반의 입장에서는 다음과 같은 여러 의문을 제기하게 된다. 


우선 앞에서 본 것과 같이 

무상한 가운데에는 즐거움도 있는데 

왜 모두를 괴로움이라고 보아 부정하는가 하는 의문이 제기된다. 


또 만일 이를 받아들여 일체가 괴로움이라면, 

목표로서 열반이나 해탈은 

이런 일체를 떠나 어떤 상태에서 구하는가 하는 의문을 갖게 된다. 


한편 해탈과 니르바나는 생멸을 떠난 상태에서 

구하게 되는데, 

그러나 또 불교에서는 니르바나가 그 생멸현상 일체에 

본래 갖추어져 있는 것이라고 제시한다. 


그래서 불교에서는 하나의 현실을 놓고 

한편으로는 그 일체를 고통이라고 제시하면서도 

또 한편으로는 그 일체가 고통이 본래 없는 니르바나라고도 제시하는 것이어서 

많은 혼동을 일으키게 된다. 


특히 생사 현실이 곧 니르바나라고 하는 

부처님의 가르침에서는 좀 더 많은 혼동을 갖게 된다. 


그래서 처음에는 현실이 모두 괴로움의 문제라고 보다가 

다시 이런 가르침을 통해서는 

현실 그대로가 아무 문제가 없다거나, 

현실에서 아무렇게 살아도 된다고 또 잘못 생각하게 되기도 한다. 


그래서 종국적으로 어떤 상태를 향해 어떻게 수행해야 하는가에 대해서 

그리고 그 근거에 대해서 

모두 심한 혼동을 일으키기 쉽다. 


이렇게 되면, 불교를 수행하는 방향을 잘못 잡기 쉽다. 

따라서 이하에서는 이런 내용을 상세하게 살피기로 한다. 





○ 왜 무상한 것은 곧 고통인가?



상식적으로 

세상에는 좋음도 있고 나쁨도 있고 

또 '좋지도 않고 나쁘지도 않은 것'도 있다. 


부처님도 

이미 출가 이전에 왕자로서의 향락을 누린 바 있어, 

삶 안에는 즐거움이 들어 있음을 

당연히 알고 있다고 할 것이며, 


또한 부처님도 경전에서도 

사람이 느끼는 감수에는 

즐거움의 느낌이 있음을 밝히고 있다. 


예를 들어 

잡아함경 0298. 법설의설경과 0466. 촉인경 등에서는 

수[느낌]에는 세가지 감수[三受]가 있어 

괴로움[苦受], 즐거움[樂受], 

괴롭지도 않고 즐겁지도 않음[不苦不樂受]의 느낌들이 

있다고 부처님이 제시하고 있다. 


따라서 현상이 영원하지 않고 변화해 나간다고 할 때, 

이런 현상은 이런 세가지 감수를 주면서 

변화해 가는 것이어서 

괴로움도 있지만, 즐거움도 있고 또 '괴롭지도 않고 즐겁지도 않은 상태'도 

함께 있다고 할 것인데. 

그런데도 왜 무상한 것은 모두 곧 괴로움이 된다고 

부처님은 설하는가? 



잡아함경 0009. 염리경(厭離經) 에서는 다음과 같이 설한다. 


"색(수,상,행,식)은 무상하다. 

무상한 것은 곧 괴로움이요, 

괴로움은 곧 나[我]가 아니며, 

나가 아니면 

또한 내 것[我所]도 아니다. 

이렇게 관찰하는 것을 

진실한 바른 관찰이라 하느니라. 

...


위 경전의 내용에서 

'무상하다'는 것은 영원하지 않음을 의미한다. 

일반 현상 색, 수, 상, 행, 식은 모두 영원하지 않은 것이다. 


그리고 '괴로움(苦)'는 괴로움의 느낌, 감수작용 

또는 그에 대한 가치의 판단으로서 

'일체현상(색, 수, 상, 행, 식)은 괴롭다'라는 판단을 의미한다. 



부처님이 무상한 일체 현실을 괴로움이라고 보는 것은 

무상한 현실에 집착하여 일으키는 괴로움을 문제현상으로 보고 

그 괴로움을 근본적으로 제거하는 것을 

수행목표로 한다는 측면과 관련된다. 


즉 부처님은 수행을 통해 도달할 목표상태를 

고통의 완전한 제거 소멸에 두고 

고제-고집제-고멸제-고멸도제라는 사성제로서 

가르침을 베푸는 것이다. 


이런 가운데, 

일체 현상(색, 수, 상, 행, 식)을 괴로움이라고 보는 것은 

괴로운 현상은 그 자체가 괴롭기 때문에 괴로운 것이고 [고고]


세상에서 좋다고 보아 집착하고 추구하는 것도 

그것은 영원하지 않기 때문에 

언젠가는 무너지는 것이고 

따라서 괴로움을 주는 것이라 보며, [괴고] 


괴롭지도 않고 즐겁지도 않은 것은 

그것이 변화하는 것이기 때문에 

괴로움을 주게 되는 것이라고 보아, [행고]

현실의 일체 모든 현상이 

모두 괴로움과 관련되는 것으로 보는 것이다. 


결국 무상한 것은 그 안에 아무리 좋은 것이 있어도 

그것이 무상한 이상 괴로움과 관련되게 되는 것이다. 



한편, 이는 문제현상으로서 괴로움이란 감수현상은 

무상성(변화)를 바탕으로 얻어지는 것이기 때문에 

무상과 고는 괴로움(고)이 그런 무상함을 바탕으로 

무상함을 원인으로 얻어지는 관계에 

놓인다는 것을 밝히는 측면도 갖는다. 




- 현실을 모두 즐거움으로 본다는 반대 주장 


그런데 위와 같은 내용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은 반대 주장이 

가능하다. 


즉, 앞의 명제들을 전부 즐거움과 관련시켜 

반대뱡향으로 적용하면, 

위 내용을 모두 반대로 제시할 수도 있다. 


즉, 

당장 즐거움을 주는 현상은 그것이 즐거움을 주기 때문에 즐거움이고 

괴로움을 주는 것은 그것이 영원하지 않고 언젠가는 무너져 사라지기 때문에 

따라서 즐거움을 주는 것이고, 

괴롭지도 않고 즐겁지도 않은 것은 그것이 변화하는 것이기 때문에 

즐거움을 주게 되는 것이라고 모두 반대로 볼 수도 있다. 


한편 즐거움이란 감수작용도 역시 

변화(무상함)을 바탕으로 얻을 수 있기 때문에 

무상함을 원인으로 즐거움을 얻는 것이라고 할 수 있지 않은가. 

하고 반론을 제기할 수도 있다. 


한편, 이처럼, 현실에 좋음과 나쁨이 섞여 있음에도 

이 모두를 괴로움이라고 보는 것은 

지나친 비관주의 또는 허무주의적 입장은 

아닌가하는 의문을 가질 수 있다. 


현실에 좋음(즐거움, 희망)과 나쁨(괴로움, 두려움)이 함께 섞여 있다고 할 때, 

이 가운데, 좋음(즐거움, 희망)의 측면을 주로 찾아 

긍정적으로 바라보려는 입장과 


나쁨(괴로움, 걱정 두려움)의 측면을 주로 찾아 

부정적으로 바라보려는 입장을 

현실에서 취하는 낙관주의와 비관주의의 입장이라고 한다면, 


불교는 마치 나쁨과 괴로움만을 일부로 찾아 강조하는 비관주의적인 입장, 

또는 삶에서 가치나 의미를 인정하지 않고 현실을 모두 부정하려는 

허무주의적인 입장으로 오해되기 쉽다. 

과연 그런가. 


그러나 그렇지 않다. 


불교의 입장은 이렇게 단순하게 

현실적 낙관주의와 비관주의의 관계로 

살필 수는 없다고 본다. 


불교가 제시하는 여러 수행방안과 목표를 검토해보면, 

불교는 단지 현실을 부정하는데 목적이 있는 것이 아니다.


앞에서 보듯 분명 삶에서 좋음이 있는 것은 사실이나, 

이는 괴로움이 결합되어 있는 불완전한 좋음으로서, 

괴로움으로 이끌어가는 징검다리로서 기능을 하는 좋음인 것이다. 


즉, 무상한 현실 속에서 사람들이 집착하며 추구하는 좋음, 

또는 단순히 현실에서 낙관적 입장으로 찾아내는 좋음은,

사람들이 좋음을 집착해 좋음을 찾고 바라보는 것이지만, 


사실 그 안에는 좋음보다는 나쁨을 더 많이 갖고 있고, 

또 장기간에 걸쳐 더 많은 나쁨과 악을 일으키며 

무한한 윤회의 고통을 반복해 받게 하는 것으로써, 

결국 결함을 갖고 있는 불완전한 좋음인 것이다. 


자신이 좋음에만 초점을 맟주어 그것만 본다고 하여 

그 안에 들어 있고 그에 결합된 나쁨이 제거되는 것은 아니다. 


따라서 좋음과 나쁨이 뒤섞여 있는 현실에서  

이 일체를 모두 괴로움으로 보는 것은 

현실에 있는 좋음의 불완전함을 보는 것이며, 

이를 통해 보다 완전한 좋음을 이상적으로 제시하며 

추구하고자 하는 것이다. 


현실에서 좋음을 집착한 가운데 나쁨을 받게 되는 것을 

이야기를 통해 비유하면 다음과 같다. 


이런 이야기가 있다. 

어느 사람이 지옥에 붙잡혀 갔는데 

자신은 그 이유를 모르고 억울하다고 말한다. 

자신은 길을 가다가 아름다운 끈이 있어 

그것을 들고 갔는데 그 끈에 묶인 소가 따라오고 

그 뒤에 소 주인이 쫒아와 자신을 때린 다음 

자신이 지옥에 잡혀 왔다는 것이다. 


이에 대해 염라대왕이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생각하면 억울하겠다. 

나도 끈을 좋다고 보고 가져간 그 생각과 손만 문제로 보고 

그것만 잡아 끌고 왔는데 

네가 몽땅 여기까지 함께 끌려 온 것이다. 

...


세상에 좋은 것과 나쁜 것이 섞여 있는데 

이 가운데 좋음에 집착해 궤변을 내세우면 

그 궤변을 따라, 지옥에 도달하게 된다는 

이야기라고 본다. 



그래서 부처님의 가르침은 

좋음과 나쁨이 뒤섞인 상태에서 좋음을 찾아내 

여기에 초점을 맞추는 낙관주의나 

나쁨을 찾아내 여기에 초점을 맞추는 비관주의가 아니며, 


좋음이 나쁨과 뒤섞인 현실을 

모두 다 함께 괴로움으로 평가하고  

완전한 이상적인 좋음을 추구하는 입장인 것이다. 


이하에서는 현실에서 사람들이 추구하는 좋음이 

왜 불완전하고 결함이 있는 좋음인가를 살피기로 한다. 






○ 무상한 현상에 목표를 설정하는 일반의 경우와 불교의 목표의 차이 


*pt* 시작 to k0020sf-- ♠○일반의 경우와 불교의 목표의 차이 


먼저 부처님에 제시하는 목표상태는 

현실에서 사람들이 일반적으로 세우는 목표점과는 

다음의 측면에서 기본적으로 크게 다르다. 


이는 불교에서 해결하고자 하는 고통의 내용과 

현실에서 사람들이 해결하고자 하는 고통의 

범위가 서로 다르기 때문이라고 이해할 수 있다. 



삶에는 좋음과 나쁨이 뒤섞여 있고 

그런 가운데 원치 않는 생, 노, 병, 사의 현상, 

또는 사랑하는 이와 헤어지거나, 

미운 이를 만나거나, 

기타 구하는 것을 뜻대로 얻지 못해 

가지가지 고통을 만난다. 


그런데 이런 경우 일반적이고 상식적인 입장에서는 

그것이 비록 무상하여 무너지는 현상이더라도, 

일단 자신이 좋아하는 어떤 좋은 상태를 

뜻대로 다 성취해 얻는 것만을 

목표상태로 설정하기 쉽다. 


세속에서 원하는 많은 것을 성취해 얻고  

그리고 건강히 살아가는 것 등을 목표상태로 정하고 

추구하는 것 등이 그런 예이다. 


건강, 재산, 지위, 명예...등등 현실에서 

애착을 갖고 추구하는 것이 

짧은 견해에서는 대단히 좋은 내용으로 

보인다. 


또 사람들은 그것도 주로 현실의 생에 국한해 

그 목표를 설정하게 된다. 


그러나, 이처럼 사람들이 일반적으로 

애착과 집착을 갖고 추구하는 것은 

사실은 그 생명이  

가치가 대단히 적고 보잘것 없는 것을 위해 

한 생을 살아가게 하고 


다른 생명도 긴긴 고통을 받게 하고 

또 이로 인해 

자신도 긴긴 시간 윤회의 

고통을 얻게 만드는 것으로써  

결과적으로 잠시간 좋음을 주고 

긴긴 시간 고통을 받게 되는 

일종의 삶의 덫에 빠진 상태가 되는 것이다. 


현실에서 설정하는 목표와 

부처님이 제시하는 목표가 

달라지는 것은 이런 사정 때문이다. 



일반적으로 당장 나쁨을 겪고 있고 

또 아직 얻지 못한 좋음을 집착해 구할 때는 

그것이 비록 영원한 것이 아니더라도 


그 나쁨을 잠시라도 벗어나고 

뜻하는 바를 단 한순간이라도 성취하여 

좋음을 맛보는 것을 

삶의 목표라고 생각하기 쉽다. 


그런데 이는 정작 그 뜻을 성취한 이후에 

만나게 되는 또 다른 문제를 

미리 보지 못하고 생각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현실에서 얻는 좋은 상태는 

그것만 보면 좋음을 주므로, 

좋은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그것은 영원하지 않아 무너지고 

소멸되게 된다. 


한편 그 좋음이 악한 방식으로 얻은 것일 때는 

그로 인해 또 다른 나쁜 결과를 받게 된다. 


사정이 이러함에도  

당장의 좋음에만 초점을 맞추어, 

그 좋음만 얻어내면 되지, 

그것이 영원하지 않아 언젠가는 무너져 

다시 고통을 받는 것이 

무슨 큰 문제인가 생각하기 쉽다. 


또 그로 인해 나중에 

어떤 고통의 결과를 받던지 

당장 자신이 집착하는 것을 얻기를 갈구하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세상의 고통은 바로 이처럼 

영원하지 않은 좋음에 집착하여 행위하고,  

그렇게 집착한 좋음들이 무너지고 

나쁜 결과가 발생함으로써 

발생하는 것이다. 


하나의 현상은

그 원인과 이후 이어지는 결과가 

모두 같이 묶여져 있는 종합세트와 같다. 


그래서 이 가운데 어느 하나를 취하면 

이 모두를 받게 되며, 

이 가운데 자신이 좋아하는 어느 하나만 취하고 

다른 것을 빼내기 곤란한 것이다. 





한편, 일반인들은 현실모습이 나타나는 인과관계를   

단지 한 생에 국한해 살피는 것이 보통이다. 


그리고 사람들은 

자신의 삶이 이번 한 번의 생만으로 

모든 것이 끝난다는 것을 두려워한다. 


그러나 부처님은 이와 달리 

생명이 무한한 시간 윤회해 감을 설하며, 

하나의 현상을 무한한 시간에 걸친 윤회의 과정과 관련시켜 

전체적으로 살핀다. 


그래서 부처님의 입장은 일반인의 입장과 

또 달라진다. 


이런 입장에서 부처님은 

비록 여러 하늘들의 수명이 사람이 생각하기에는 

상상하기 힘든 긴 시간에 걸쳐 있다고 제시하지만, 

그러나 그런 좋음을 얻는 것을 

목표점으로 제시하지는 않는다. 


참고 잡아함경 0863. 타화자재천경(他化自在天經) 


예를 들어 불교에서 제시하는 

1 겁이라는 시간은 

상상하기 힘든 매우 긴 시간에 해당한다. 

그러나 이 역시 무한한 시간에 비교하면 

역시 찰나의 순간 쪽에 가깝다고 해야 한다. 


이는 마치 3 이 1 보다는 큰 수지만, 

9 에 비교할 때는 9 보다는 1 쪽에 가까운 것과 

마찬가지다. 


그래서 아무리 긴 시간을 나열해도 

무한한 시간과 비교하면 그것은 늘 찰나 쪽에  

가까운 시간이라고 관할 수 있어야 한다. 


그리고 부처님의 입장은 이처럼 

무한한 기간에 걸친 윤회 과정에서의 

고통을 전체적으로 문제삼고 

해결하고자 하는 입장인 것이다. 


그래서 어떤 좋음을 비록 

상당히 긴 기간에 걸쳐 얻는다해도 

그것이 영원하지 않고 무너지고 

또 그로 인해 다른 고통을 받게 되는 것이라면, 

그것은 마치 현실에서 잠시간 좋음을 얻고 

그후 그로 인해 긴 고통을 받게 되는 경우와 같아서, 

그것을 문제로 삼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이는 비유하면, 마치 물에 빠지면, 

그후 잠시 물에 떠오르거나, 

또는 바람이 빠지는 튜브에 잠시 몸을 실어 

좋음을 느낄 순간도 있다고 하여 

그렇게 물에 빠진 상태에서 숨을 내쉬는 

상태를 목적으로 할 수 없는 것과 같다. 


물론 물에 빠져 있는 가운데, 

잠시라도 물 밖으로 몸을 내어 숨을 쉬는 것은   

숨을 못 쉬는 것보다는 나은 것이라고 보지만, 


그러나 부처님의 입장에서는 

이렇게 물에 빠진 전체 상황 자체가  문제이며 

물에 빠져 있는 이상 그 어느 것이나 

모두 고통의 문제라고 보는 차이가 있는 것이다. 


이런 이유로 

현실에서 일반적으로 좋다고 생각하는 상태들을  

그 안에 문제가 들어 있으며 

따라서 불완전한 목표점이 된다. 




그러나 이는 부처님만 특이하여 문제삼게 되는  

특이한 관점의 문제가 아니다. 


모든 생명들이 비록 당장의 좋음에 집착하여  

좋음을 얻는 순간 그 내용을 미리 보지 못하고, 

또 그 관계를 일일히 이해하지 못하더라도, 


그것이 영원하지 못하기에 

그것이 무너지고 사라지는 상태에 처하면 

그에 집착한 만큼 고통을 겪게 되며, 

또 그런 집착에 바탕하여 행위하면, 

또 다른 고통의 결과를 얻게 되어   

결국 이런 내용들에서 

모두 고통을 받게 되는 것이다. 


즉 윤회 과정이나 하나의 생 안에는 

분명 좋은 내용이 일부 포함되어 있지만, 

그것은 영원한 좋음을 주지 못하고, 

그것이 다시 징검다리가 되어 

또 다른 고통을 받는 것이므로, 

결국 이 전체 상황이 

모두 해결해야 할 문제가 되는 것이다. 


그리하여 색, 수, 상, 행, 식 5온으로 구성된 존재는 

그 일체가 고통의 현상과 관련되므로 

이를 오음성고로 표현하여 제시하게 된다. 


결국 부처님이 해결하려는 고통은 

일반 현실에서 생각하는 고통보다 

더 근원적인 고통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현실에서 사람들이 집착하는 좋은 상태가 

갖는 이런 문제점을 해결하지 못하면, 

그것은 고통을 없애는 완전한 방편이 

되지 못한다. 



그리고 부처님의 이런 입장은 

부처님이 세속에서 가장 높은 위치인 

왕위에 오를 왕자의 입장에서

삶의 문제점을 이처럼 관하고 

출가를 했다는 점을 통해서도 볼 수 있다. 


즉, 왕위는 세속의 사람들이 

대부분 부러움을 갖고 

삶의 목표로 할 상태라고 할 수 있지만, 

이런 상태는 

결국 고통을 없애는 완전한 해결방안이 못되는 것임을 

간접적으로 나타내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래서 윤회과정이나, 한 생에 들어 있는 

좋은 상태를 성취하는 것을 

목표로 추구하는 일반적인 입장과 


이 모두를 고통의 현상으로 보고 

이런 고통을 제거하는 것을 목표로 하는 

부처님의 입장은 차이가 있게 된다. 



현실에서 해결해고자 하는 고통과 

부처님이 해결하고자 하는 고통의 범위의 차이는 

다음의 비유와 같다. 


몸에 종기가 난 경우, 

사람들은 이 종기만 제거하여 낫는 것을 

목표로 의사를 찾게 된다. 


그런데 어떤 의사가 말하길, 

몸도 영원하지 않아 결국 무너지고, 

그 몸이 무너지면 역시 현재의 종기처럼 

큰 고통을 안겨주므로 


근본적으로 몸 자체를 제거해야 한다는  

처방을 내린다면 

누구나 우선 놀라게 된다. 


종기의 치료를 원했는데, 

그 고통을 없애려고 몸을 없애고 죽으라는 것인가. 

이런 오해를 하게 된다. 


그러나 부처님은 

결국 무상하여 영원하지 않는 현상에 집착하는 경우, 


그것이 현재 당장 고통을 주는 종기거나, 

당장은 좋음을 주는 자신의 몸이거나 

색, 수, 상, 행, 식 일체가 다 고통과 관련되고 

그리고 그 고통이 윤회를 통해 무한히 반복되어 

감을 말하는 것이다. 


그래서 궁극적으로 안온한 열반에 이르러야 하고 

그렇지 못하면 모든 것이 임시방편이 되고 

불완전한 해결책이 됨을 설하는 것이다. 


즉 바다에 빠져 있는 상태라면, 

더 이상 빠지지 않을 섬에 도착하는 것을 

목표로 나아가야 하며, 

바람빠지는 튜브를 목표로 나아가서는 

안 된다는 의미다. 


부처님은, 현실의 모든 내용은 

일정한 나쁨을 지금 받고 있거나 

아니면 지금 당장 좋음을 얻거나, 


그것이 생멸하는 현상으로서 무상한 것인 이상 

그 일체가 결국 고통의 현상에 

속한다고 보는 것이다. [일체개고]


부처님의 이런 고통에 대한 입장은 

다음의 구절에서도 간단히 볼 수 있다. 


"색(수상행식)은 무상하다. 

무상한 것은 곧 괴로움이요,...


[참조 잡아함경 0009. 염리경(厭離經) ]



부처님은 한편으로는 

현실에서 자신이라고 생각하는 그 모든 내용에 

진짜의 자신이란 존재는 본래 없으며, [무아]

또 한편, 자신은 이번 한 번의 생으로 

삶을 마치는 것이 아니고 무한한 시간 동안 

윤회를 하며 삶을 이어가는 것이라고 설한다. [윤회]

그런 가운데 진리를 올바로 관하고 

집착을 버린 가운데 임하면, 

앞에서 문제라고 보았던 그 모든 것은 

또 하나같이 문제가 되지 않는 것이다. 


앞에서 소개한 타화자재천경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나온다. 


..

타화자재천의 수명은 1만 6,000년이다. 

그런데 어리석고 들은 것이 없는 무식한 범부들은 

거기서 목숨을 마치면 지옥·축생·아귀 가운데에 태어난다. 

그러나 많이 들어 아는 것이 많은 거룩한 제자들은 

거기서 목숨을 마치더라도 

지옥·축생·아귀 가운데에는 태어나지 않느니라. 

...

[참고] 잡아함경 0863. 타화자재천경(他化自在天經) 


즉 위 경전의 내용과 같이 해탈하고 

진실한 지혜를 얻어 수행을 하면, 

비로써 이들은 문제가 되지 않게 되는 것이다. 


그것은 설령 하늘의 경우가 아니고 

지옥의 경우라고 하더라도 

사정이 다르지 않다. 


5무간지옥이 보리라는 가르침은 

바로 이런 사정을 함께 말하는 것이다. 

[참고] 대반야바라밀다경 제 574 권 만수실리본



일반적인 경우는 이와는 어떻게 다른가. 


사람들이 작은 번뇌에 시달리고 있을 때는 

그 문제만 해결되면 그것으로 좋고, 

문제가 없으리라 생각한다. 


그런데 정작 다른 상태가 되면 

또 그에 대해 번뇌를 일으켜 갖는다. 


예를 들면, 이렇다. 


하루하루의 생계를 걱정할 때는 

이 생계만 해결되면 

걱정이 없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질병 때문에 고통받는 이는 

그 질병만 해결되면 

아무런 걱정이 없을 것이라 생각한다. 


그런데 앞의 나쁜 방향으로 뒤로 좋은 방향으로 

무한히 확대해도 그 관계나 성격은 달라지지 않는다. 


예를 들어 현실에서는 

자신의 힘으로 소대변도 보기 힘든 

중환자의 상태도 있다. 


번뇌와 고통의 범위를 넓혀 생각하면, 

현실적으로 나라 전체가 전쟁에 휩싸이고 

기아와 빈곤에 휩싸이어 

극심한 고통을 겪는 상태도 있다. 


앞의 상황에서는 미처 보지 못한 더 큰 문제가 아닐 수 없다. 


또 한편, 이들 문제가 해결되어 

큰 재산을 갖고 건강하게 살고 

나라도 풍요롭게 사는 경우도 있다. 


앞의 입장에서는 

이는 걱정이 해결된 안락한 상태라고 보겠지만, 

그런데 재산이 많고, 건강하다고 

아무런 문제가 없다고 생각하며 

근심 걱정없이 살아가는 경우는 거의 없다. 

또 나라 전체가 풍부하고 

안락하게 산다해도 

역시 해결해야 할 문제는 수없이 

생겨나는 것이다. 


그래서 번뇌란 

주체나 시간적으로 공간적으로 

그리고 양적으로 질적으로 

그 내용과 범위가 달라질 뿐, 

고통의 정도가 지옥에 이르거나, 

즐거움의 정도가 하늘에 이르러도 

그 사정은 달라지지 않는 것이다. 


그리고 

부처님은 일반 사람들이 미처 볼 수 없는 

욕계, 색계, 무색계의 수많은 세계를 나열하고 

다시 무한한 기간을 놓고 관찰하는 가운데 

생명이 윤회하는 이 모든 세계의 상태가 전체적으로 

다 같은 성격의 고통의 문제에 있음을 제시한 것이다.


그리고 이처럼 모든 문제를 관찰하고 

이를 근본적으로 해결할 방안을 찾은 것이다. 


그래서 이처럼 일체 무상한 것은 

모두 괴로움이라는 것을 올바로 보고 

이런 올바른 관찰과 깨달음을 통해 

그에 대한 탐욕과 집착을 버려야만, 

이런 번뇌와 집착으로 부터 생겨나는  

독과 고통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음을 설하신 것이다. 


그런데 이처럼 3계 6도의 모든 상태

세상의 색, 수, 상, 행, 식 일체를 

괴로움이라고 올바로 관하고 

집착을 버리고 해탈과 열반을 증득하면 

이후 이들은 다 문제가 되지 않게 된다. 



결국 일반적인 생각과의 

부처님의 가르침의 차이는 다음과 같은 점이다. 


일반적인 입장에서는 

비유하면, 지금껏 자신이 몸에 난 종기 하나 때문에 고민하고 

그것만 해결되면 삶에는 문제가 없다고 보는 것이다. 


그러나 불교에서는 사실은 그렇지 않음을 보는 것이다. 


일반사람들이 문제라고 보는 종기도 문제지만, 

일반사람들이 문제가 없다고 본 몸도, 

문제를 미처 보지 못한 것인 것일뿐 

그 안에는 역시 수많은 문제가 있는 것이다. 


그런데, 이들을 집착하면서 추구하면, 

몸은 좋아지지 않고 더 악화된다. 

또 몸은 그런 집착으로 당분간 유지해도, 

그로 인해 윤회의 고통은 더욱 증가되는 것이다. 


그런데 이 모든 번뇌를 그 근원부터 해결하면, 

그 때는 비로소 그 모든 번뇌와 고통이 

다 없어지는 것이다. 


그런 경우는 

일반사람들이 처음에 문제라고 본 종기도 

역시 문제가 되지 않고, 

또 더 큰 문제라고 볼 몸도 문제가 되지 않고 

지옥도 문제가 되지 않고 

또 하늘도 그 때야 비로소 

정말 문제가 없게 되는 것이다. 


이렇게 되기 위해서는 

먼저, 일반적인 입장에서 처음에 

아무 문제가 없으리라고 본 상태들이 왜 문제인가를 살펴야 한다. 


즉 종기가 나면 종기가 문제인데 

왜 종기가 없는 몸이나 삶까지도 또 심지어 

하늘까지도 함께 문제라고 보아야 하는가를 관할 수 있어야 한다. 


그리고 나서 

종기나 현실의 몸이나, 

또 생명의 기간이나 좋음이 극한에 이른 하늘이나, 

그 모든 것은 다 무상한 것이어서 문제이고, 

고통을 안겨주는 것임을 올바로 관해야 한다. 


그러나 이에 대해 그 정체를 올바로 살펴 

그 실재가 공하며, 

이들이 본래 모두 생멸이 없고 

본래 니르바나의 상태라는 사실을 깨닫고 


그리고 그 모두에 대해 집착을 버리고 임하여, 

해탈을 얻음으로써 

그 모든 상황이 다 문제가 본래 없는 것이 된다. 


실제로 집착을 버린 가운데, 

자신이 그전까지 집착했던 것을 생각하면 

그것이 아무런 괴로움을 주지 않게 

바뀐 것을 알 수 있다. 


그래서 수행자는 

집착을 버려 번뇌를 제거한 상태에서 

우선 과거에 자신이 집착하던 것들이 

성취되지 않는 현실에서도 그대로 

평안하고 안온하게 머무를 수 있다. 


그리고 그런 상태에서 

3계6도에서 윤회하는 수많은 생명의 고통과  

자신의 문제를 함께 대비해 생각하면, 

자신의 문제는 

매우 작은 티끌과 같은 것임을 깨닫게 된다. 


그리고 이런 티끌에 집착하며 추구하는 것은 

안온한 즐거움을 주는 것이 아니고 

또한 크고 오랜 이익이나 즐거움을 가져다주는 것도 

아님을 알게 된다.  


따라서 그런 상태에서 

자신과 자신의 생명, 신체, 재산, 명예, 지위..등에 대한 

집착을 버리고 

아상, 인상, 중생상, 수자상을 갖지 않은 가운데, 


모든 생명들을 

자신과 같은 안온한 니르바나의 상태로 이끌고자,  

원대한 서원을 일으키고 

수행을 시작해 나가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런 상태는 다음과 같은 점이 다르다. 


우선 자신의 생명, 신체, 재산, 가족, 명예, 지위 등에 

집착을 갖고 

그 집착하는 바가 얻어진다고 해서 

자신의 괴로움의 문제가 

근본적으로 해결된다고 

잘못 보지 않는다는 점이 다르다. 


또한 자신의 번뇌의 해탈 니르바나 뿐만 아니라, 

자신을 포함한 온 생명의 해탈과 니르바나를 

위해 노력하지만, 

그러나 이 역시 

얻을 것이 없음을 방편으로 

집착을 갖지 않고 추구해나간다는 점이 또한 다르다. 


살아가면서 

무상하고 가치없는 것에 집착하여 

번뇌를 일으키고 괴로움을 받는 경우는 


이런 점을 잘 파악하여 

자신과 온 생명이 다함께 해탈하고 

안온한 니르바나를 얻을 수 있게 하는데, 

노력을 기울이고 

수행에 정진해나가야 하리라 본다. 



부처님은 가장 기본적으로 이러한 고통이 발생하는 원인을  

현상(색, 수, 상, 행, 식)이 영원하지 않아 무상함과 함께 

또 그런 무상한 것에 대해 생명들이 

탐욕과 분노 어리석음의 번뇌로 집착하고, 

그 번뇌에 바탕해 행하기 때문에 

고통의 윤회과정이 발생하는 것으로 본다. 


따라서 부처님의 입장을 기본적으로 이해하지 못하고, 

이처럼 일체 생멸하는 현상을 고통으로 관하지 못하고, 

현실에서 얻는 많은 좋음들마저도 

왜 모두 고통의 내용으로 보아야 하는가. 

그리고 현실에서 자신이 집착해 추구하는 좋음이 

왜 목적상태가 될 수 없는가를 이해하지 못하면, 


수행의 목표점도 올바로 세울 수 없고 

수행목표로서 열반의 성격도 이해하지 못하게 된다. 

그리고 그를 얻을 방안도 올바로 찾을 수 없게 된다. 






○ 고통과 열반의 관계 

-  생멸 즉 고통이 없어진 상태로서의 열반 


불교 수행자가 수행의 목표점에 대해 

정확히 이해하는 것은 

수행자가 처음 수행을 시작함에 있어서 

앞으로 자신이 향해 나아갈 방향을 찾는 처음 단계가 된다. 


현실의 문제가 무엇이고, 

자신이 나아갈 목표 상태가 무엇인가를 정확히 모르면 


앞으로 자신이 무엇을 끊고 중지하여 떠나고 

다시 무엇을 향해 어떻게 수행하고 

정진해야 하는가도 정확히 알 수 없다. 


불교의 목표상태는 결국 

현실의 고통과 그 고통의 원인을 제거하고 

이 고통이 소멸되는 해탈, 열반 등의 상태가 된다. 


무상하여 생멸하는 현상 일체를 

고통으로 보는 것이므로, 

결국 이런 생멸하는 현상을 모두 떠난 상태를 

고통이 소멸된 열반으로 보게 된다. 


특히 앞에서 처음 살핀, 

일체에 관한 판단 내용으로서, 

무상, 고, 공, 비아(무아, 무자성) 등의 내용과 함께 

목표상태로서 열반 적정의 내용도 

역시 일체법에 대해 성립하는 내용임도 

이와 관련하여 주의깊게 이해할 필요가 있다. 



이런 입장에서 다음과 같은 게송을 이해할 수 있다. 


다음은 설산동자의 게송으로 유명한 

무상게라는 게송이다. 


제행무상(諸行無常) 이 세상 모든 일은 영원하지 않으니,

시생멸법(是生滅法) 이는 나타나고 멸하는 현상이다. 

생멸멸이(生滅滅已) 나타나고 멸함이 없어지고 나면, 

적멸위락(寂滅爲樂) 적멸이 즐거움이 된다. 



그런데 위 게송과 관련하여 

생멸이 멸해 없어진 상태는 어떤 상태를 말하는가.


여기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은 여러 입장을 

생각할 수 있다. 


본래 현상과 달리 실재 진여에서는 

생멸이나 고통을 얻을 수 없다. 


따라서, 우선, 현상의 생멸현상과 윤회생사를 일으키는 원인을 

근본적으로 제거하여, 

진여 실재만 남기는 상태를 

그런 열반으로 생각할 수 있다. [회신멸지의 니르바나]


한편, 깨달음의 입장에서 보면, 

현실 자체에 생멸이란 본래 없는데, 

생멸한다고 보는 것은 망상분별에 의한 것이므로, 


이런 망상분별과 번뇌 집착을 제거하고 

생사가 곧 열반과 다르지 않음을 관하고 

생멸현상에 머무르는 것도  

생멸이 멸해 없어진 상태로 볼 수도 있다. [생사 즉 열반의 입장]


그러나 이 두 경우 모두 수행목표로서 

니르바나는 현실에 모두 본래 이미 갖추어져 있는 상태로 

보는 것은 다르지 않다. 


근본불교와 대승불교에서 

이런 여러 입장이 제시되고 있으므로 

이들 내용을 함께 차례대로 살피기로 한다. 





○ 생멸을 멸하는 방안 - 회신멸지의 니르바나



생멸현상 일체를 고통으로 관할 때에는 

이런 생멸현상을 모두 멸하는 것을 

곧 고통이 소멸된 열반으로 볼 수 있다. 


잡아함경 0051. 괴법경(壞法經)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나온다. 


...

색은 무너지는 법이다. 

그 색이 소멸하면 열반이니, 

이것은 무너지지 않는 법이다. 


수·상·행·식은 무너지는 법이다. 

그것들이 소멸하면 열반이니, 

이것은 무너지지 않는 법이니라. 

...



또한 잡아함경 0039. 종자경(種子經)에는 

집착을 끊음과 해탈과의 관계에 대해 

다음과 같은 내용이 나온다.  


...

색(色)의 경계에 대해서 탐욕을 떠나면... 

수(受)·상(想)도 마찬가지이며, 

행(行)의 경계에 대해 탐욕을 떠나면 


탐욕을 떠난 뒤에는 

행에 대한 집착과 마음에서 생긴 접촉[觸]이 끊어지고, 

행에 대한 집착과 마음에서 생긴 얽맴이 끊어진 뒤에는 

반연(;마음이 대상에 의존하여 일어나는 것)이 끊어진다. 

반연이 끊어지고 나면 


그 식(識)은 머무를 곳이 없게 되어 

다시는 성장하거나 뻗어나가지 못한다. 


성장하지 못하기 때문에 행동하지 않고, 

행동하지 않은 뒤에는 머무르며, 

머무른 뒤에는 만족할 줄 알고, 

만족할 줄 안 뒤에는 해탈하며, 

해탈한 뒤에는 


모든 세간에 대해서 

전혀 취할 것도 없고 집착할 것도 없게 되며, 

취할 것도 없고 집착할 것도 없게 된 뒤에는 

스스로 열반을 깨달아 


'나의 생은 이미 다하고 범행은 이미 섰으며, 

할 일은 이미 마쳐 후세의 몸을 받지 않는다'고 

스스로 아느니라. 

라고 밝히고 있다. 




이처럼 현상의 무상함과 생멸현상을 

모두 고통의 현상으로 본다고 하면, 

그런 생멸과 고통이 없는 

니르바나는 과연 어디에 있는가. 


이 경우, 우선 모든 현상을 나타내는 본 바탕이라고 할 

공한 실재, 진여의 상태는 

그 안에 생함과 멸함이나, 고통과 번뇌도 세울 수 없고 

이들이 있다고 할 수 없다. 

이렇기에 우선 이런 공한 실재 진여를 

니르바나의 상태로 보게 된다.


이처럼, 공한 실재, 진여를 니르바나로 볼 때는 

어느 현실도 공한 실재의 바탕을 떠나 있는 것이 아니고, 

공한 실재는 본래 어느 상태에나 갖추어진 것이라 보지만, 


단지 이 공한 실재를 바탕으로

생멸현상이 나타나 이 실재를 덮어 가리는 것만이 문제라고 보고, 

생멸하는 현상, 즉, 감각현실과 관념을 모두 소멸시키고 

이를 이후 더 이상 발생시키지 않게 하는 것을 

니르바나에 도달하는 방안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즉, 공한 실재, 진여를 바탕으로 나타난 현상은 

청정하고 공한 진여를 덮어 가리우는 것이며 

따라서 이 현상을 모두 제거한 후 

그것이 발생하게 될 원인을 제거하여 다시 나타나지 않게 하면, 

본래 있던 공한 진여 상태와 니르바나만 

드러나 남게 된다고 보는 것이다. 




이 무상한 현상을 지워 내는 일을 

쉽게 생각하면, 

자신이 보고 생각하는 모든 세계의 모습은 

자신의 감각기관과 인식기관을 통해서 얻는 내용이니, 

이 감각기관과 인식기관에 독을 발라 

그 기능을 정지시키면 되지 않겠는가 하고 단순하게 생각할 수도 있다. 


또는 살아서 얻는 모든 현상이 고통이라고 보는 것이니, 

죽음이 그 해결방안이 아닌가 하는 것도 

같은 생각이라고 할 수 있다. 


만일 생명이 죽게 되면, 

그 생명이 이후 전혀 존재가 없게 된다면, 

생멸현상이 없어지는 상태는 

이런 죽음으로 인해 자연적으로 이루어진다고 볼 수 있다. 

이런 입장에서는 생명이 죽게 되면 

그와 관련하여서는 아무런 생멸현상도 

남지 않는다고 보기 때문이다. 


현실에서 사람들이 해결할 수 없는 고통에 직면할 때 

이의 탈출방안으로 죽음을 생각하는 것도 

이런 상식적 입장에 바탕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불교에서는 이런 식으로 

문제가 자연적으로 해결된다고 보지 않는다. 


이미 앞에서 윤회의 내용을 살핀 것처럼 

생명이 죽는다해도 그 생명의 근본 정신(아뢰야식)은 

소멸하지 않기 때문에 여전히 근본정신은 남아서 

그 이전 생에서 가진 번뇌와 그에 바탕해 

행한 업(뜻-말-행위,태도)에 의하여 

다음 생을 받아 또 다시 살아가게끔 된다고 보는 것이다. 


즉, 모든 세계의 모습은 

마음 안에 들어온 내용물이라고 밝히는데, 


우리가 현생에서 얻는 내용들은 

근본 정신(아뢰야식)이 이번 생에서 변화하여 만들어 낸 

정신들(제 2능변, 제 3능변[안,이,비,설,신 5식, 제 6 의식,])에 의해 

얻는 것으로 본다. 


즉 우리가 감각기관을 통해 얻는 내용들은 

감각기관을 통한 5식 안의 내용들이고 

우리의 관념 판단 등은 제 6식 안의 내용들인 것이다. 

그리고 이것이 곧 제 3 능변에 해당한다. 


그리고 이런 정신을 변화시켜 만들어낸 

근본정신은 5식과 제 6의식이 소멸하고 

그 안에 내용물이 얻어지거나 얻어지지 않더라도 

소멸하지 않고 계속 이어져 나가는 것으로 본다. 


관련내용 참조 해심밀경 3. 심의식상품(心意識相品) 


따라서 근본 정신(아뢰야식)에서  

기본적으로 세세 생생 반복해온 망상 분별과 

탐욕 분노 어리석음의 번뇌와 집착의 쌓임이 

제거되지 않으면, 


사후에도 그런 상태로 근본정신이 다른 생명에 얹혀져서 

새로운 감관과 인식기관 및 정신(전 5식과 제 6 의식 등)을 분화시켜 

다음 생에서 또 다른 현상을 얻어 내게 되고 

또 다음 생에서 또 다른 고통과 번뇌를 지금의 생과 같이, 

반복해 받게 된다고 제시한다. 



또 현실에서 악행을 한 이는 자신이 

원하지 않아도 감옥에 붙잡혀 끌려가는 것과 마찬가지로 


잘못 전도된 망상 분별과 번뇌와 집착에 바탕하여 

행위를 하는 경우 

그 업력에 의해 근본 정신은 

원하던 원하지 않던, 

다음 생에 지옥, 아귀, 축생의 악한 세계에서 

다음 생을 시작하게 된다. 


또 이런 업력은 이번 생에 한해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이전의 무한한 기간 동안 만들어진 것이다. 


사정이 이와 같기에, 

단지 이번 생에서 자신의 감관과 인식기관을 

독을 발라 기능을 정지시키거나 

단지 목숨을 마치고 죽는다고 

이 윤회의 고통을 자연히 벗어날 수 있는 것이 아닌 것이다. 


그래서 경전에서 설한 것처럼 

본래의 상태가 니르바나임에도 불구하고 

생명들은 실재[원성실상, 진여]를 바탕으로 

나타난 감각현실[의타기상]과 

이에 대해 갖는 관념[변계소집상]을 집착하여 행함으로써, 

이러한 인연으로 오는 세상의 감각현실[의타기상]을 일으키는 현상이 

장구한 세월동안 지속되는 것이라고 이해할 수 있다. 



그래서 

이 근본정신이 다음 생에 또 다른 식(정신)을 변화시켜 

나타내지 않게 하기 위해서는 


수행을 통하여 

기존에 가진 전도된 망상 분별과 

번뇌, 집착의 근본을 모두 말끔히 제거하고 

더 이상 번뇌와 애착이 발생하지 않는 상태가 되도록 

노력해야 하는 것이다. 


따라서 현실에서 감각현실과 관념을 얻는 상태에서 

가장 먼저 필요로 하는 것은 

앞과 같은 망상 분별과 이를 바탕으로 해서 갖는 

자신과 자신의 것에 대한 집착의 제거라고 할 것이다. 



한편 이런 집착을 벗어나면, 우선 그 자체로 

현실이 무상하더라도 고통의 상태에서 벗어나고, 

고통의 윤회를 불러일으키는 악행도 

중지할 수 있다. 


즉 집착을 벗어나면, 

당장 고통을 주는 것이거나, 

또 있는 좋음이 사라지는 경우에도 

고통에서 벗어날 수 있다. 


가장 집착을 버리기 힘든 

자신, 자신의 생명, 목숨에 대해서도 

역시 집착을 버림으로써 그것이 무너지고 

사라지는 상태에 대하여 고통과 두려움을 받지 않을 수 있다. 


그래서 현실은 여전히 무상한 가운데에서도 

망상분별과 집착을 제거하면, 무상한 생멸현상은 

고통을 주지 않는 생멸현상으로 남게 된다. 


또한 이로써 집착에 바탕한 악행을 중지하고 

올바른 수행에 정진할 수 있는 것이다. 


잡아함경 처음부터, 불교 전반을 통해서 

집착을 버리고 마음의 해탈을 얻는 것이 

강조되는 것은 이런 사정 때문이다. 



그리고 이런 수행을 통하여 

망상 분별과 번뇌 집착을 제거하여 

마음의 해탈(심해탈)과 지혜의 해탈(혜해탈)을 

완전히 얻게 되면, 

근본 정신(아뢰야식)이 맑게 정화된 상태로써 

그로써 이후 애착으로 인한 후생의 식(정신)을 발생하지 않게 되고 

따라서 현상을 얻는 감각과 인식도 발생하지 않고 

진여 실재를 덮을 현상 내용도 나타나지 않게 되어 

그 생명은 니르바나의 상태에 머무르게 된다고 볼 수 있다. 


이는 몸과 마음이 함께 아주 없어져서 [회신멸지(灰身滅智)]

청정한 근본 정신과 진여 실재만 남고, 

이후 세세생생 생멸현상이나 생사윤회가 완전히 남김없이 소멸되는 

상태로써 '남김이 없는 니르바나'[무여열반]이라고 표현한다. 





한편 잡아함경에서는 

윤회 과정에서 수행자가 수행을 통해 

이런 열반을 최종적으로 얻게 되는 과정과 단계에 대해 

여러 형태의 열반을 다음과 같이 제시하고 있다. 


.... 

그 사람이 이와 같이 알고 이와 같이 보면, 

욕유루(욕계에서의 번뇌)에서 마음이 해탈하고, 

유유루(색계,무색계의 번뇌)에서 마음이 해탈하며, 

무명유루(3계의 어리석음)에서 마음이 해탈하고, 

해탈한 줄을 알고 보아 

'나의 생은 이미 다하고 범행은 이미 섰으며, 

할 일은 이미 마쳐 후세의 몸을 받지 않는다'고 

스스로 아느니라. 


만일 해탈하지 못하더라도 

법을 탐하고 법을 기억하며 법을 좋아하기 때문에 중반열반을 취하게 될 것이다. 

만일 또 그와 같이 되지 않으면 생반열반을 취하고, 

만일 그와 같이 되지 않으면 혹은 유행반열반을 취하고, 

또 만일 그와 같이 되지 않으면 혹은 무행반열반을 취하기도 하며, 

또 만일 그와 같이 되지 않으면 상류반열반을 취한다. 

 

또 만일 그와 같이 되지 않으면 

그는 곧 법을 탐하고 법을 기억하며 법을 좋아한 공덕 때문에 

자성광음천(自性光音天)에 태어나고, 

또 만일 그렇게 되지 않으면 무량광음천(無量光音天)에 태어나며, 

또 만일 그렇게 되지 않으면 소광천(少光天)에 태어날 것이니라. 

...


참조 잡아함경 0868. 해탈경(解脫經) 


이는 수행자가 윤회과정과 관련하여 

열반을 얻는 과정과 단계를 설한 내용이다. 


윤회하는 세계는 크게 욕계와, 색계, 무색계로 나누는데 

수행자가 현생에서 수행을 완전히 성취하여, 열반을 얻지 못하는 경우, 

욕계에서 죽고 색계에 가서 

그 중유(中有)의 상태에서 

남은 번뇌를 끊고 반열반하는 경우를 중반열반이라고 하고, 


수행정도에 따라, 

색계에 태어난 후 오래지 아니하여 곧 남은 번뇌를 끊고, 반열반하는 것을 

생반열반이라고 하며,  


색계에 난 후 그 하늘에서 오랜 시간을 노력 수행하여 

남은 번뇌를 끊고 바야흐로 반열반하는 것을 

유행반열반이라고 하고,  


색계에 난 후 그 하늘에서 수행하지 않고, 

게을러서 장구한 시간을 지내면서 남은 번뇌를 스스로 벗고 반열반하는 것을 

무행반열반이라 하며,  


색계에서 아래단계의 하늘[下天]에서 윗 단계의 하늘[上天]로 나아가면서 

그 사이에 남은 번뇌를 끊고 반열반하는 것을 상류반 열반이라 한다. 


그리고 그보다 수행정도가 더 낮은 경우에는 

위에 설한 것과 같이 여러 색계의 하늘 가운데, 

또 태어나게 됨을 설한 내용이다. 





○ 회신멸지(灰身滅智) 니르바나의 문제점 


- 일반인의 입장에서의 문제점 


불교에서는 기본적으로 

생멸하는 현상 일체를 모두 고통으로 보기 때문에, 

이 생멸 현상이 모두 멸해 없어진 상태를 

니르바나로 보게 된다. 


그래서 불교에서 추구하는 니르바나의 상태는 

세상에서 생멸하는 현상 안에서 

일정한 좋음을 찾고 

이에 애착과 집착을 갖고 추구하는 것과는 

입장이 다르다. 


예를 들어 현실을 살아가는 생명은 

대부분 자신의 생명, 신체, 재산, 가족, 지위, 명예...등이 

비록 영원하지 않고 

결국엔 소멸되어 없어지는 것이더라도 

이것을 좋은 것으로 보고 애착을 갖고 

이를 얻어 유지하려는 마음을 갖고 

이를 집착하며 살아간다. 


그러나 불교에서는 이렇게 자신이 애착을 갖는 

이들 생멸하는 현상 일체가  

고통이나 고통의 원인이 되는 것이라고 보고 

애착을 갖는 이들 현상이 모두 멸해 없어진 상태를 

니르바나라고 하여 구하는 것이므로, 


이들에 대해 애착을 갖는 일반적인 입장에서는 

오히려 이런 니르바나에 대해 

좋다는 생각보다는 두려움을 더 느낄 수도 있다. 


불교에서 생멸하는 현상 가운데 

나쁜 내용만 고통으로 보고 해결할 문제로 보지 않고

생멸현상 일체를 모두 다 함께 고통으로 보고 

이 모두를 멸해 없애야 한다고 보는 이유에 대해서는 

이미 앞에서 살폈다. 


생멸 현상에 나쁨이 있다면 그것은 당연히 문제이고 

아무리 좋은 것이더라도, 

그것이 영원하지 않고 생멸하는 것인 이상 

결국 멸해 없어지는 것이므로 끝내 고통을 주게 되는 것이고, 

또 집착을 갖고 추구하는 좋음은 인과관계상 또 다른 나쁨을 

이후 세세 생생 불러 일으키고 가져다 주는 원인이 된다고 보기 때문이다. 


즉 그 좋음은 그것만 보면 좋은 것이라 할 것이지만, 

그것은 인과관계상 또 다른 나쁨을 당연히 불러오기 때문에 

현상 안의 좋음은 세세생생 

길고 긴 고통으로 이끌고 가는 징검다리가 되는 것이고, 

따라서 생멸하는 현상 일체는 

그것이 좋은 것이나 나쁜 것이나 가리지 않고 

모두 다 함께 고통으로 보는 것이다. [일체개고] 


그래서 앞에서 살핀 것처럼 

생멸현상 일체가 멸한 상태를 니르바나로 보고 

이 적멸한 상태가 곧 즐거움이 된다고 말하는 것이다. 




그런데 일반인의 입장에서는 다음과 

같은 의문을 갖게 된다. 


생멸현상이 모두 멸해 없어진 적멸한 상태에 

과연 즐거움이 있을 것인가. 


생멸이 멸해 없어진 상태는 

그 안에 고통이 있을 수 없다고 할 것이지만, 

그렇다고 현상 안에서 얻는 좋음도 

생멸현상이 없어진 이상 있을 수 없다고 할 것이다. 


그러나, 생멸하는 일체를 고통으로 보기에 

이 고통에 상대하여

생멸이 없는 적멸을 즐거움이 된다고 보는 것이다. 


다만, 이처럼 몸과 마음이 아주 없어진 상태를 

무여열반의 상태로 보면, 

생멸현상은 아무 것도 없기 때문에 

그 안에 고통이 있을 수 없겠지만,


현실 안의 좋음에 애착을 갖는 입장에서는 

그렇게 아무 것도 없다는 사실로부터 

오히려 두려움을 느끼게 된다. 


마치 죽으면 아무 것도 없다고 생각하는 이가 

죽음 이후에는 

살아서 자신이 애착을 갖던 것들이 

아무 것도 없게 된다고 생각하여 

죽음에 대해 두려움을 갖는 것과 마찬가지다. 


다만 불교에서는 

죽음으로 인해 그렇게 당연히 되는 것이 아니고 

수행을 통해 번뇌를 완전히 제거해야 

회신멸지의 남김이 없는 니르바나[무여열반]의 상태에 

비로소 이르게 된다고 보는 것이므로, 

이 점만 차이가 있는 것이다. 


여하튼 현실의 생멸하는 현상에 애착을 갖고 있던 

입장에서는 

이런 회신멸지의 니르바나는 

비록 그 안에 고통이 없다 하여도 

애착하는 좋은 것도 역시 없는 것이기에 

그로 인해 두려움을 느끼게 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즉, 개똥밭에서 구른다 해도 이승이 좋다고 하고 

비록 삶이 고달퍼도 죽음보다는 삶이 좋다고 여기며 

삶에 집착을 갖고 살아가는 것이 보통이고 


특히 살면서 좋음을 만끽하며 살아가고 있는 경우는 

생멸현상이 모두 사라진 이런 회신멸지의 니르바나는 

모든 고통이 제거된 축복이 아니라 

오히려 두려움을 주는 상태라고 할 수 있다. 


이는 물론 생멸하는 일체 현상은 

그것이 좋은 것이더라도 

세세생생 고통을 받게 되는 원인이 되기에 

고통으로 보아야 한다는 

불교의 입장에 동의하지 못하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여하튼 현실에 애착과 집착을 갖는 만큼 

이들 생멸 현상이 모두 사라진 니르바나는 

바로 그렇게 생멸현상이 모두 사라져 없다는 사실 자체가 

오히려 공포와 두려움을 줄 수도 있다. 


그리고 자신의 생명, 신체, 재산, 가족, 지위, 명예...등에 대해서는 

그것이 세세생생 고통을 불러 일으킨다해도 

우선 당장은 좋다고 보고 여전히 애착을 갖고, 


그 안에 비록 고통이 소멸되어 없더라도 

이런 생멸현상 일체가 모두 소멸되어 없는 니르바나의 상태를  

향해 나아가는 것을 주저하게 된다. 


이는, 만일 죽으면 아무 것도 없고 

그 안에 고통이나 고통을 느낄 주체마저도 없다고 생각하더라도, 

그렇다고 고통을 피해 죽음을 곧바로 선택하지 못하고 

주저하는 것과 마찬가지다. 


또 바위나 모래는 그 안에 정신이 없어, 

망치로 부순다해도 고통을 느끼지 못한다 하더라도 

그런 고통을 전혀 느끼지 않기 위해 

바위나 모래가 되기를 원하지는 않는 것과 마찬가지다. 


따라서 공한 실재는 내용을 얻을 수 없어 

생멸이나 고통을 그 안에 세울 수 없기에,  

공한 실재를 니르바나라고 하지만, 


이 사실만으로 공한 진여, 실재만 남기고 

이를 덮고 있는 모든 생멸현상을 소멸시켜 없애는 것을 

주저하는 마음을 일반의 입장에서는 갖게 된다고 본다. 



- 수행자의 입장에서의 문제점 


수행자는 다만, 기본적으로 일반인과 달리 

일반인이 보지 못하는 무한한 생사 윤회의 고통을 관하게 되므로, 

이 생사윤회의 고통을 멸하는 회신멸지의 니르바나를 

일반인처럼 두렵게 여기지 않고 

오히려 이를 수행목표로 삼게 된다. 


그러나 또 한편, 

수행자가 망상분별과 집착을 제거하게 되면, 

굳이 회신멸지(灰身滅智)의 니르바나에 들지 않더라도 

생멸하는 현상이 곧 청정한 니르바나와 다르지 않음을 관하게 되고 

생사를 받고 생멸하는 현상에 머물러도 

이런 생사와 고통에 물들지 않고 머물 수도 있다. 


그리고 수행자가 

만일 자신만의 깨달음과 고통의 소멸을 원하지 않고 

다른 모든 생명의 깨달음과 고통의 소멸을 원하고, 

더 나아가 복덕과 지혜를 원만히 성취하여 

부처님과 같은 법신의 상태를 증득하는 것을 

목표로 할 때는 


앞과 같이 자신만 생사 윤회를 피해 

회신멸지의 니르바나에 들게 되면 

이런 중생제도와 성불의 서원을 성취할 수 없음을 

문제점으로 보게 된다. 


그래서 이런 입장에서는 오히려 

무한한 생사 윤회의 고통을 피해 

회신멸지의 니르바나에 들지 않고 

생사를 받으며 중생제도와 성불을 위한 

보살 수행을 행하게 된다. 


이는 간단히 말하면 생사 즉 열반임을 깨닫는 것을 

그 바탕으로 한다. 


더욱이 이런 자비심을 갖고 중생제도를 위해 

끝내 성불하지도 않고 열반에 들지 않으며 

생사를 피하지 않는 보살도 있다. 



..

"보살 일천제는 항상 열반에 들지 않는다. 

무슨 까닭인가? 

능히 모든 법이 

본래부터 열반인 것을 잘 알기 때문에 

열반에 들지 않는다. 

...

K0160V10P0846c23L; 不入涅槃佛告大慧菩薩摩訶薩一

K0160V10P0846c24L; 闡提常不入涅槃何以故以能善知

K0160V10P0847a02L; 一切諸法本來涅槃是故不入涅槃

...

[참조 입능가경 집일체불법품(集一切佛法品)] 

라고 경전에서 밝히는 내용이 

이와 관련된다. 


여기서 '일천제'란 본래 부처가 될 수 없는 이를 의미한다. 

그래서 보살 일천제란 

보살 가운데 자비의 마음으로 중생을 제도하기 위하여 

모든 중생을 제도하기 전까지는 성불하지 않겠다는 서원을 세워 

성불하지 않는 경우를 의미한다. 


여하튼 이런 보살 일천제는 중생을 제도하기 위해 

무한히 생사를 피하지 않고, 

끝내 성불하지 않고 열반에 들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이유가 보살은 

모든 생멸하는 현상이 

본래부터 열반인 것을 잘 알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생멸하는 현상이 그대로 생멸이 없고 

니르바나라는 것은 

처음 생멸하는 현상에 생멸과 고통이 있다고 보고 

이를 제거해야 한다고 본 처음의 입장과는 

언뜻 모순되는 내용처럼 생각된다. 


따라서 어떤 근거로 생멸하는 일체현상에 

생멸이 본래 없고 고통도 본래 없는 것이어서 

본래 니르바나라고 하는 것인가를 

좀 더 자세히 이해할 필요가 있다. 




○ 보살의 생사 즉 열반 



분별과 집착을 제거하고 깨달음을 얻게 되면, 

굳이 회신멸지(灰身滅智)의 니르바나에 들지 않더라도 

그 이후에는 

생멸하는 현상이 곧 청정한 니르바나임을 관하고 

생멸하는 현상에 관계없이 

이에 물들지 않고 이에 머물 수도 있다. 


생멸하는 현상이 

그에 대한 망상분별과 집착을 떠나면 

그 자체가 곧 청정한 니르바나(열반)이라는 것은 

다음과 같은 여러 내용을 근거로 한다. 


가장 먼저 

현실에서 망상 분별과 번뇌, 집착을 벗어나면 

생멸하는 현상을 굳이 멸하지 않고 

생사 윤회를 하더라도 

그로 인한 고통과 악에 물들어 오염되지 않게 된다. 


즉, 애착과 집착을 갖던 것에 집착을 갖지 않으면, 

무언가를 추구할 때에도 집착하지 않음으로 인해  

그것을 얻기 전까지 그것을 얻지 못하여 일으켜 갖던 

갈증과 불만, 불쾌, 고통에 시달리지 않게 된다. 


또 무엇을 얻은 후에도 그에 집착하지 않음으로써 

그것이 사라질 것을 생각하여 두려움과 불안에 시달리지 않게 된다. 

또 그것이 사라진다해도 집착하지 않기에 

그로 인해 고통을 받지 않게 된다. 

또 집착을 갖지 않기에 이로 인해 

다른 생명을 해치는 악행을 중지하고 끊고, 

올바른 수행에 정진할 수 있는 것이다. 


이처럼 망상분별과 집착을 갖지 않기에 

무상한 생멸현상은 그대로 고통을 주지 않는 

생멸현상으로 남게 된다. 

그래서 망상분별과 집착을 제거하면 

현실은 곧 고통이 소멸된 

니르바나와 같은 상태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한편 다음과 같은 근거에서도 

생멸하는 생사 현실이 곧 니르바나라고 보게 된다. 



우선 이미 앞에서 본 것처럼 

공한 실재에는 생멸이나 고통을 얻을 수 없어 

니르바나라고 함을 보았다. 


그런데, 공한 실재와 차별적인 생멸현상에 대하여 

대반야바라밀다경에서는 다음과 

같이 그 관계를 설명한다. 


...

왜냐 하면 

사리자여, 


이 색은 색의 공함이 아니고, 

이 색의 공함은 색이 아니나, 


색은 공을 떠나지 않고 

공은 색을 떠나지 않으며, 

색이 곧 공이요 

공이 곧 색입니다. 


수, 상, 행, 식도 

이와 같습니다. 

...

라고 밝히고 있다. 



K0001V03P0916b13L; ...              何以故舍利子是色

K0001V03P0916b14L; 非色空是色空非色色不離空空不

K0001V03P0916b15L; 離色色卽是空空卽是色受想行識

K0001V03P0916b16L; 亦復如是乃至是十八佛不共法非

K0001V03P0916b17L; 十八佛不共法空是十八佛不共法

K0001V03P0916b18L; 空非十八佛不共法十八佛不共法

K0001V03P0916b19L; 不離空空不離十八佛不共法十八

K0001V03P0916b20L; 佛不共法卽是空空卽是十八佛不

K0001V03P0916b21L; 共法舍利子如是菩薩摩訶薩修行

K0001V03P0916b22L; 般若波羅蜜多有方便善巧故能證

K0001V03P0916b23L; 無上正等菩提...


참조 대반야바라밀다경 제 2분 행상품



즉, 공한 실재는 

현실의 색, 수, 상, 행, 식 오온은 아니지만, 

현실은 공한 실재와 떨어져 있는 것이 아니고,(色不'離'空)  

또 공한 실재는 그런 현실과 떨어져 있는 것이 아니다. 


그렇기에 

현실은 곧 공한 실재이고 

공한 실재는 곧 현실이라고 관할 수 있는 것이다. 


결국 현실은 이런 색즉시공과 같은 관계로써 

그 현실을 곧 공한 실재, 니르바나의 상태로 

관할 수 있는 것이다. 



반야심경에서도 이와 같은 내용을 

볼 수 있다. 


반야심경에서는 

색불이공 공불이색

색즉시공 공즉시색, 수상행식 역부여시...

시고 공중무색 무수상행식...

라고 하여 


현실의 내용과 실재의 공함의 관계에 대해, 

제시한다. 


즉, 색불이공 공불이색 색즉시공 공즉시색...의 구절에서는 

대반야바라밀다경과 같이 

색,수,상,행,식의 현실 내용이 공한 실재와 다르지 않고(色不'異'空) 

곧 공한 실재로 볼 수 있는 관계성을 밝힌다. 


또한 이어지는 

공중무색무수상행식(空中無色無受想行識)...이하의 구절에서는 

공한 실재에는 색,수,상,행,식이 있다 할 수 없음을 밝혀서, 

공한 실재는 색,수,상,행,식이 아니고 색,수,상,행,식과 다르며, 

서로 구별되는 사정을 밝히고 있는 것이다. 

또한 이는 공한 실재의 입장에서 본다면, 

현상의 모든 차별적인 내용을 세울 수 없음을 밝히는 

내용으로도 볼 수 있다. 


..

K0020V05P1035a05L; 色不異空空不異色色卽是空空卽

K0020V05P1035a06L; 是色受想行識亦復如是舍利子是

K0020V05P1035a07L; 諸法空相不生不滅不垢不淨不增

K0020V05P1035a08L; 不減是故空中無色無受想行識無

K0020V05P1035a09L; 眼耳鼻舌身意無色聲香味觸法無

...

참조 반야바라밀다심경 현장역 






한편 다음과 같은 근거로, 

생멸하는 현상에는 생멸이 본래 없고 

고통이 본래 없음을 말하기도 한다. 


즉, 생멸이나 고통으로 보는 내용은 

이미 본 바와 같이 

본래 진짜라고 할 영원불변한 실체의 내용이 아니고[무아, 인무아, 법무아, 승의무자성] 

또한 그런 현실내용은 실재의 내용이 아니고 [의타기상의 생무자성]

한편 이런 생멸과 고통에 대한 관념적 분별에는 

감각현실과 같은 자상이 없는 것이고 [ 변계소집상의 상무자성]

또 반대로 감각현실에는 그런 관념에 해당하는 내용이 없는 것이므로, 


생멸이나 고통이라는 것은 본래 실다운 내용이 아니고, 

오직 망상 분별 안에서 있는 내용이어서 

이런 망상분별을 떠나면 

이런 생멸과 고통은 얻을 수 없기에 

현실 자체가 곧 니르바나라고 하는 내용이 제시된다. 


예를 들어 대승경전 가운데 하나인 해심밀경에서는 

다음과 같이 본래 일체법이 

다 열반임을 제시하는 내용이 나온다. 


...

일체 법이 

생함도 없고 멸함도 없으며 본래 고요하여 

자성이 열반이라고 말한다. 


무슨 까닭인가? 

만일 법의 자상(自相)이 도무지 있는 것이 없으면 

곧 생기는 것이 없을 것이요, 

생기는 것이 있지 않으면 

곧 멸하는 것이 있지 않을 것이요, 

생함도 없고 멸함도 없으면 

곧 본래 고요할 것이요, 

본래 고요하면 

곧 자성이 열반이다. 


그 가운데는 다시 그로 하여금 

열반에 들게 할 것이 

아예 조금도 없는 까닭이다. 


그러므로 상무자성성의 밀의에 의지해, 

일체 법이 생함도 없고 멸함도 없으며 

본래 고요하여 자성이 열반이라고 말한다. 

...


...

K0154V10P0717c05L; 說言一切諸法無生無滅本來寂靜

K0154V10P0717c06L; 自性涅槃何以故若法自相都無所

K0154V10P0717c07L; 有則無有生若無有生則無有滅若

K0154V10P0717c08L; 無生無滅則本來寂靜若本來寂靜

K0154V10P0717c09L; 則自性涅槃於中都無少分所有更

K0154V10P0717c10L; 可令其般涅槃故是故我依相無自

K0154V10P0717c11L; 性性密意說言一切諸法無生無滅

K0154V10P0717c12L; 本來寂靜自性涅槃...


참조 해심밀경(解深蜜經) 무자성상품(無自性相品) 




위에서 살핀 것처럼, 

현실이 공한 실재를 떠나지 않은 것이어서 

현실이 곧 공한 실재이고(색즉시공..)


또 한편, 생멸이나 고통이 

본래 실체가 없고, 실재가 아니고 

그 관념은 자상을 갖지 않고 

또 그 관념은 감각현실에 없는 것으로서, 

실답게 있는 것이 아니므로 

생멸하는 현상과 생사가 본래 니르바나라고 하여도, 


생멸하는 현상 속에서  

뭇 생명이 윤회의 고통을 받게 되는 것은 


그가 그러한 사실을 올바로 관하지 못한 가운데 

망상 분별을 일으키고 

그에 집착을 일으키기 때문인 것이다. 


따라서 생사 즉 열반이라는 말은 

그것만으로 망상분별과 집착에 바탕하여 살아가는 

뭇 생명들의 생사의 현실이 그 상태 그대로 

아무런 문제도 없고 고통이 없음을 

나타내는 것은 아니다. 


즉, 색,수,상,행,식의 현상과 생멸현상의 차별을 

공한 실재와 관련시켜 살피지 못하거나, 

그런 관념들이 모두 실답지 못함을 깨닫지 못하고 

생멸현상에 망상분별을 일으키고 집착을 갖게 되면, 

그런 바탕에서 고통이 존재하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현실이 곧 공한 실재와 다르지 않고, 

생사가 곧 본래 청정한 니르바나인 상태에서 


생멸하는 현상에 관계없이 

윤회의 고통을 받지 않고 

청정한 니르바나에 머물기 위해서는 


바로 이런 사실을 깨닫고 

망상 분별과 집착을 버리고 

현실을 곧 공한 실재 니르바나로 깨달아 관하여 

집착없이 임하는 것이 요구된다. 



현실을 곧 공한 실재 니르바나로 관하며, 

생멸과 고통이 본래 없음을 관하는 것은 


현실을 관할 때 

이 현실의 내용을 

곧 실재의 공함에 상응한 상태로 관하고, 

현실에서 갖는 생멸, 고통 등의 여러 관념이 실답지 않음을 깨달아, 

망상 분별을 일으키지 않고 

그에 대해 집착을 하지 않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고 그렇게 실재에 상응한 상태로 올바로 현실을 관하면서 

현실에서 망상 분별과 번뇌, 집착을 벗어나면 

역시 생멸하는 현상을 굳이 멸하지 않고 

생사 윤회를 하더라도 

그로 인한 고통에서 벗어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결국 생사 즉 열반이라고 말하지만, 

뭇 생명의 현실은, 

본래의 니르바나의 상태가 망상분별에 덮이어 

고통을 받아가는 상태이므로, 


현실에서 실제로 각 생명이 

생사의 고통에 물들지 않고 

니르바나의 상태에 머무르기 위해서는 

이러한 깨달음을 통해 

망상분별과 번뇌, 집착을 제거하는 수행이 

갖추어져야 비로소 가능한 것이다. 



이와 같이 보면 

열반의 의미는  

번뇌와 집착을 소멸한 상태에 

그 비중을 높게 두게 됨을 이해할 수 있다.  


이처럼 열반을 

번뇌와 집착을 소멸한 상태와 관련해 이해하는 내용으로 

다음과 같은 내용을 볼 수 있다. 


...

색은 본래부터 그 일체가 무상하고, 괴로우며, 

변하고 바뀌는 법이다. 


이렇게 알고 나면 

그 색으로 말미암아 생겼던 

모든 번뇌의 해로움과 불꽃, 

근심과 번민은 모두 끊어져 없어진다. 


그것이 끊어져 없어진 뒤에는 

집착할 것이 없게 되고, 

집착할 것이 없게 된 뒤에는 

안락하게 머무르게 되며, 

안락하게 머무른 뒤에는 

반열반(般涅槃)을 얻게 된다. 


수·상·행·식도 그와 같으니라." 


참조 잡아함경 0035. 삼정사경(三正士經) 


..

염부차가 사리불에게 물었다. 

어떤 것을 열반(涅槃)이라고 합니까? 


사리불이 말하였다. 


열반이라는 것은 

탐욕이 영원히 다하고, 

성냄이 영원히 다하며, 

어리석음이 영원히 다하고, 

일체 모든 유루(有漏 : 번뇌)가 영원히 다한 것이니, 

이것을 열반이라고 합니다. 


참조 잡아함경 0490. 염부차경(閻浮車經) 



이처럼 

열반은 수행의 목표상태로서 

경전에 많은 가르침이 있는데 

이는 모두 앞에서 본 것처럼 

각 생명이 

망상분별과 번뇌 집착을 제거하여 

생멸과 고통에서 벗어난 상태를 의미하는 것이다. 



다만, 생멸하는 현상을 놓고 

여기에서 생멸과 고통이 본래 없다는 내용은 

일반인의 입장에서 이해하기 어려울 수 있다. 

이하에서는 이에 관해 좀 더 자세히 설명하기로 한다. 



◆flower 

>>>>>[생멸하는 현상에 생멸이 본래 없음에 대한 자세한 설명]


○ 생멸현상에 본래 생멸이 없음


일체 현상이 영원하지 않아 생멸하고 

생멸하는 것 일체는 고통이이서 

문제라는 것이 무상, 고의 판단인데, 


그러나 또 일체가 본래 생멸이 없고 

고통이 없는 열반의 상태여서, 

그런 문제가 해결된 상태이기도 하다는 것은 

쉽게 이해하기 힘든 내용이기도 하다. 


그래서 이 문제를 다음과 같이 

조금 더 자세하게 살펴나갈 필요가 있다고 본다. 


우선 현실의 문제점은 고통이다. 

현실이 어떠하든 그 안에 고통이 없다면, 

수행자가 수행을 통해 해결해야 할 문제도 

본래 없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현실의 삶에는 

여러가지 고통이 있는 것이며 

따라서 이미 본 것처럼 

고통의 정체를 자세히 살핀 것이다. 


그것은 우리가 살면서 직접적으로 

고통으로 느끼는 고통도 고통이지만, 

좋음으로 느끼는 내용도 

그것이 영원하지 않고 결국 무너지는 것이어서 

그에 집착하면 역시 고통이 됨을 보았다.

또 분별과 집착으로 일으킨 행은 고통의 윤회를 

불러 일으키는 것이다. 


이런 결과 생멸하는 현상 일체는 

모두 고통으로 관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미 앞에서 하나의 현상을 

다양한 측면에서 살펴 

일체는 무상하고, 고이며, 

공하고 무아, 무자성이라는 판단을 한 바 있다. 


그런데 이 고통의 문제를 살피기 위해서는 

생멸하는 현상의 정체를 

좀 더 자세히 살필 필요가 있다. 



그래서 우선 존재하는 모든 존재의 영역을 

다시 3 가지로 나누어 살피게 된다. 


우선 모든 존재는 

어떤 존재가 주관과 관계하지 않은 상태에서 

본래 있는 그대로의 상태(진여)인 실재내용을 하나 생각할 수 있고 


한편 주관이 관계하여 얻는 내용으로서 

감각현실로 얻는 내용을 생각할 수 있고 


다시 관념으로 만들어 갖는 내용을 

생각할 수 있다. 


예를 들어 바위를 하나 놓고 생각한다면, 

우선 주관이 관계해 얻는 어떤 내용이 아니고 

바위가 바위 있는 그대로(진여)의 내용이라고 할 

실재 내용으로서의 바위가 있다. [원성실상]


또 한편 눈을 뜨면 보는 모습이나 

손으로 만져 얻는 감각하는 현실내용으로서 바위도 있다. [의타기상]


한편 자신이 눈을 뜨지 않더라도 

말이나 생각만으로 떠올리는 바위란 존재가 있다. 

이것은 관념적 내용으로서의 바위다. [변계소집상]


존재의 진실성이 문제되는 내용을 

이렇게 존재의 영역을 3 가지 영역으로 나누고, 

그 정체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그런 가운데 일체는 본래 생멸현상과 고통이 있다고 할 수 없으며  

따라서 열반의 상태라는 판단이 나오게 되는 것이다. 


어떻게 보면 현실에서 고통을 경험하고 

이 고통을 해결하려 노력하여  

그 목표상태를 열반이라고 표현하여  

이를 힘들여 찾는 것인데 

이미 일체가 다 그런 열반의 상태에 있다는 판단은 

약간 이해하기 힘든 내용일 수 있다. 


이것은 다음 사정 때문에 발생한다. 


예를 들어 어떤 이가 눈을 떠 감각현실[색]을 얻고 

어떠어떠한 부분은 '나', 어떤 부분은 '다른 사람'이거나 '꽃'이라는 등으로 생각할 때 

이런 생각은 모두 감각내용이 아니라 

마음 속의 생각이고 관념이다. 


이런 관념은 

눈을 뜨거나 눈을 뜨지 않고 감아도 

마음 안에서 떠올릴 수 있는 내용이다. 


그래서 예를 들어 

눈을 떠야만 그 모습을 얻는 감각내용과는 구별된다. 


한편, 이런 관념은 각 생명이 

희망을 갖고 이를 집착해 추구하고 

이로 인해 고통을 받는 과정에서 

모두 관련되고 문제된다. 


예를 들어 어떤 이가 희망을 갖고 이에 집착하는 경우는 

공통적으로 다음 내용이 그 안에 담기게 된다. 


즉 어떤 이는 

일정한 관념으로 희망을 만들어 갖고 

이런 희망의 내용과 같은 관념을 얻을 감각현실을 노력하여 구하고 

감각현실 안에서 그런 감각현실을 얻게 되어 

그에 따라 처음의 희망의 내용(관념)과 일치하는 관념을 얻게 되면 

이런 경우에 자신의 희망이 성취되었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런 상태를 구하고 

이런 상태를 얻지 못하면, 괴로움을 얻게 되는 것이다. 


예를 들어 현실에서 어떤 꽃을 찾는 이는 

먼저 마음에서 꽃의 관념으로 희망을 만들어 갖는 것이고 

감각현실에서는 그런 꽃의 관념을 얻을 수 있는 감각현실을 찾아 구하고, 

그런 감각현실을 얻어 그런 꽃의 관념을 얻게 되면 

이로써 자신의 원래 희망이 성취된 것으로 생각하는 것이다. 

그리고 자신이 그 꽃에 크게 집착하는 경우에는 

그 꽃을 얻지 못하면 이로써 그는 괴로움을 받는 것이다. 


그래서 이 관념은 현실의 고통의 문제와 

모두 기본적으로 관련이 되는 것이다. 


그런데 사람들은 

어떤 감각현실에서 이런 관념을 갖게 되면 

자신이 생각한 관념의 내용이 감각현실에도 그와 같이 

존재하는 것으로 잘못 생각하게 된다. 


더 나아가 실재내용도 그런 것이고 

더 나아가 그런 내용이 영원불변한 실체로서 

진짜의 내용이라고도 생각하게 된다. 


그러나 그렇지 않은 것이다. 


사람들이 어떤 감각현실에서 

일정한 관념을 갖고 생각하지만, 

그러나 실제는 그런 감각현실에 

그런 관념이 없다는 것을 우선 기본적으로 이해할 필요가 있다. 


이를 위해 다음 사진과 같이 꽃이 져 있는 모습과 피어 있는 모습이 

함께 찍힌 사진을 보기로 하자. 



[IMG2--09] [그림] 꽃 08pfl--image/꽃의핌과생멸.jpg



우리는 분명히 눈을 떠 이와 같은 감각현실을 얻고 

그것이 꽃이라는 생각을 일으키고 

또 꽃이 피지 않은 상태였다가 핀 상태를 보고 

꽃이 핀다는 생각을 갖는 것이기에 


그렇게 생각한 내용이 1차적으로 

감각현실(현상- 눈을 떠 얻는 감각현실) 안에 없다고 누군가 이야기하면 

대단히 이상하게 여기게 된다. 


지금 내가 꽃을 보고 있고 꽃이 없다가 새로 생겨난 것을 다 보았는데 

왜 꽃이 여기에 없고 

더 나아가 그런 꽃이 피고 짐(생멸, 생사)이 본래 없다고 이야기하는가

하면서 의아하게 여기게 되는 것이다. 


이는 그렇게 생각하는 이가 

그런 생각을 할 때 눈을 떠 꽃의 모습을 같이 보면서 

그런 생각을 하는 경우 더 강하게 의문을 갖게 된다. 

내가 지금 보고 있는 저 부분이 꽃이 아니고 무엇이란 말인가. 


꽃이 진 상태에서 오늘 피었음을 보는데 

이것이 핀 것(생겨난 것)이 아니고 무엇이란 말인가.  

이렇게 의문을 갖는 것이다. 


이런 경우에 어떤 이가 이 모습을 보고 

어떤 부분을 꽃이라고 생각하고 

또 핀다거나 진다거나 등으로 생각하는 것을

불교 전문 용어로는 변계소집상이라고 표현한다. 


오늘날 우리가 사용하는 말로 표현한다면 

관념, 분별, 판단 이런 내용들이 

모두 이에 해당한다고 할 수 있다. 


우리는 눈을 감고서도 그런 생각을 할 수 있다. 


그런데 그런 생각이 가리키는 감각현실에 해당하는 

그 모습은 눈을 감고서는 떠올릴 수 없다. 


예를 들어 이처럼 눈을 감았을 때는 얻지 못하다가 

눈을 뜨는 순간 마음 안에서 얻는 내용을 

감각내용(시각적 감각현실)이라고 할 수 있다.  

그래서 우리가 외부현실로 이해하는 것은 

사실은 그것은 감각내용이고 감각현실인 것이다. 


이제 실험을 해보자. 

눈을 떠 꽃의 모습(사진과 같은 모습)을 보고 있다가 

방금 본 그 꽃의 모습을 

눈을 감은 상태에서, 

마음에서 그대로 떠올려 얻어낼 수 있는가를 실험해보자. 


그것이 가능하지 않다. 


그래서 눈을 떠야만 보이는 그런 내용을 감각현실이라고 하고 

이와 관계없이 즉 눈을 뜨고 있거나 감고 있거나 

마음에서 얻는 내용이 있다면 

그것을 마음 안의 관념이라고 이해할 수 있다. 


지금 실험을 한다면 

눈을 감고서도 꽃이란 관념과 

있다, 없다라는 관념, 그리고 생겨난다 멸한다 등의 관념을 

떠올릴 수 있다. 


경전에서 '변계소집상에는 자상이 없다'는 내용[상무자성]은 

바로 이 경우를 놓고 이해하면 쉽다. 


우리가 마음 안에서 꽃이나 구름, 별,...

있음, 없음, 생겨남, 멸함... 등을 생각한다면, 

생각할 수 있다. 

그래서 관념은 마음의 관념 내용 차원에서는 

그런 내용을 얻을 수 있고 그런 내용이 있다고 하게 된다. 


문제는 꽃이란 관념을 아무리 생각해 떠올려 놓고 

앞 순간에 본 꽃의 감각현실을 찾아 보아도 

그런 감각현실은 그 안에서 찾아낼 수 없는 것이다. 


더욱이 있음, 없음의 경우와 같이 그것이 추상 관념일 때는 

더더욱 그렇다. 


더 나아가 있음과 없음을 묶은 복합관념이라고 할 수 있는 

생겨남의 관념은 사정이 더더욱 그렇다. 


감각현실은 한 순간에 받아들이는 내용인데 

이 하나의 감각현실에는 

있고 없음을 같이 얻을 수는 더더욱 없기 때문이다. 


꽃이 없다가 피는 내용을 

위 사진 처럼 하나의 내용으로 

같이 한 화면에 찍어 놓는다고 해도 역시 같은 문제를 보게 된다. 



관념(변계소집상)에는 자상(감각현실과 같은 내용)이 없다는 내용은 

이런 의미를 갖는다. 


여기서 자상(自相)이란 공상(共相)과 상대되는 말이다. 

자상은 우리가 감각을 통해 감각현실로 얻는 내용으로서 

낱낱 물건 모습 자체를 자상(自相)이라고 하고, 

예를 들어 꽃이 푸르고, 과일이 푸르고, 옷 빛깔이 푸르다고 할 때 

푸른 색과 같은 내용은 이들 여러 내용에 공통하게 적용되는 내용이므로 

공상이라고 하는 것이다. 


그런데 관념은 

그것이 감각현실 하나에만 관련시키는 구체적 관념이라고 하더라도 

관념은 공상(共相)인 것이다.

꽃이란 관념은 여러가지 꽃에 대하여 적용되는 관념인데 

'그 꽃'이란 관념과 같이 위 사진 하나에만 

그리고 단 한순간의 감각현실에만 적용시킬 때에도 

관념은 공상이며, 자상이 되지는 못한다. 

이미 관념은 감각현실의 부분을 나누거나 묶어서 

그에 대응시킨 것임을 이해하면 이 관계를 이해하기 쉽다. 


여하튼 관념은 감각현실과 같은 자상이 이 안에 없다. 


자신이 눈을 감고 관념을 아무리 떠올려 봐도 

그 안에 그 관념이 가리키고자 한 내용으로서 

감각현실은 찾아낼 수 없는 것이다. 


이것이 우선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위 내용을 반대로 이해하면 

감각현실에는 관념의 내용이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감각현실을 얻을 때 

그 감각현실에서 

자신이 생각한 관념 내용에 상응한 내용을 또 얻어낼 수 있다면 

우리는 눈을 감고 꽃이란 생각을 하다가 

눈을 떠서 꽃의 모습을 감각내용으로 얻게 될 때는 

그 꽃의 모습 안에서 

자신이 생각한 꽃의 관념도 다시 또 하나 얻어야 할 것이다. 

그러나 그렇지 않은 것이다. 


있고 없음의 추상관념이나, 

생겨남 멸함, 오고 감의 복합 관념에선 이런 내용은 더더욱 그렇다. 

그래서 쉽게 이 내용을 알 수 있다. 


그러나 꽃과 같은 구체적 관념에서는 

혼동을 갖게 된다. 


자신이 분명 꽃을 보고서 꽃이란 생각을 하고 있는 것이므로 

저 감각현실이 그 꽃이란 관념에 해당하는 내용이 아니고 무엇인가 

하며 반문하기 쉽다. 


이 관계를 이해하려면 앞의 경전내용과 같은 내용을 

다시 살펴보는 것이 도움이 될 수 있다. 


우리는 꽃이란 관념을 가질 때 

관념 영역에서 감각현실의 일정부분을 위 사진의 붉은 선처럼 

일부분을 묶고 나누어서 그런 관념을 갖는다고 이해한다. 


그런데 감각현실에서는 그런 관념을 갖는다고 

그 부분이 그처럼 묶이거나 나누어지지 않는다. 


한 순간에 어떤 감각현실을 얻을 때 

그 감각현실은 관념과 같이 그렇게 일정 부분을 묶고 나누어 얻는 것은 아니다. 


그래서 이렇게 일정 부분을 묶고 나누는 것은 

관념 영역에서의 문제이지 감각현실에서의 일이 아님을 우선 이해해야 한다.  

이것이 한마디로 변계소집(遍計所執)이란 한자단어가 의미하는 내용인 것이다. 

두루두루 헤아려 집착을 갖는 작용((遍計所執)인 것이다.


우리가 꽃이란 감각현실을 얻고 나서 꽃이란 관념을 가지면 

이 감각현실과 이 관념은 무언가 서로 엇비슷하다고 생각하게 된다. 


그런 상황을 비유하여, 

변계소집상은 노끈을 놓고 뱀이라고 여기는 경우와 같다고 비유한다. 

즉 감각현실과 관념은 

마음에서는 이 둘이 매우 유사하고 관련이 있는 것이라고 생각하게 되지만, 

정작 뱀이란 내용(관념내용)은 

노끈(감각현실)에서는 찾을 수 없는 상황이 되는 것이다. 

[당정현상(當情現相) 또는 중간존경(中間存境)]

그래서 감각현실과 관념은 이런 관계에 있음을 기본적으로 이해해야 한다. 


한편, 우리는 눈을 떠 위 사진같이 꽃의 모습을 하나 보면서도 

꽃이란 관념 외에 다양한 관념을 가질 수 있음을 스스로 실험할 수 있다. 


예를 들어 저 여러 꽃을 다 묶어 식물이라고 이해하거나, 

또는 물질이라고 이해하거나, 

전체 부분을 보고 풍경 또는 존재라고 이해하거나 하는 등이다. 


이런 경우에 원래 저 하나의 모습에 

이런 여러 내용이 다 들어 있어서, 

이런 생각을 가질 때마다 그런 관념내용이 있게 되는 것이 아니다. 


만일 어떤 망상증 환자가 저 모습을 보고 엉뚱한 생각을 일으켜 

꽃 모습을 보고 포크를 연상해내거나, 

또는 시인이 꽃에서 여인이나 소년의 모습을 연상해낸다고 하여 

저 사진에 그런 포크나 여인, 소년이 

들어 있다고 할 수 없는 것과 사정이 같다. 


그런데 대부분의 사람이 저 사진을 보고 꽃이라고 생각하더라도 

감각현실과 관념이 갖는 그 기본관계는 

그와 같다는 것을 기본적으로 이해해야 한다는 의미다. 


앞에서 여러 관념을 나열했는데,

꽃, 식물, 물질, 풍경, 존재, 포크, 여인, 소년...등의 관념을 모두 놓고서 

하나하나 생각해볼 때 

역시 그 관념 안에는 감각현실로서 자상을 찾을 수 없다. 

반대로 말하면 저 사진과 같은 감각현실엔

관념과 같은 내용이 본래 없는 것이다. 


이런 이유로 생멸이나 생사나 꽃의 관념 등은 

우리가 대하는 감각현실에는 본래 없다고 이야기하게 되는 것이다. 


분명 꽃이란 관념을 갖고 

저 사진으로 얻는 감각현실의 일정부분을 가리키고 

그 내용과 대응시키는 것이지만, 


정작 그 감각현실에는 자신이 가진 꽃이란 관념은 

들어 있지 않은 것이다. 


그렇다고 감각현실을 그와 같은 내용으로 얻지 못한다는 것이 아니며, 

또 그런 꽃이나 생멸, 생사와 같은 관념이 

마음안에서 나타나지 않는다는 것이 아니며,  

그런 관념을 얻지 못한다는 것이 아니다. 


다만 감각현실과 관념의 관계는 

기본적으로 그와 같다는 것을 이해해야 하는 것이다 .




대보적경에서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나온다. 


... 

구름 덩어리라 함은 

덩어리가 아니언만 

구름 덩어리라고 이름한 것이니 

어찌하여 구름 덩어리라 하는가. 


그것은 본래 각기 다른 부분이 모여 이룩된 

형상인 까닭이니라. 


어떤 것이 갖가지 다른 형상인가. 


그것은 갖가지 형상으로서 

모두 광대하다고 미혹되어 상속한 것으로, 

그 가운데 작고 큰 모양을 얻을 수 없느니라. 


네가 저 구름 덩어리를 보아라. 

광대한 모양[廣大相]을 일으켰지만 

그것이 모양이 아니니라. 


만일 생각이 없으면 

다만 궁극적으로 보아, 

광대한 모양이라 함은 

실로 구름 덩어리가 아닌 것이다. 

...


K0022V06P0005b13L; 言雲聚者則爲非聚故名雲聚何名

K0022V06P0005b14L; 雲聚以其各別起相狀故云何種類

K0022V06P0005b15L; 各別相狀以種種相皆是廣大迷惑

K0022V06P0005b16L; 相續而於其中無少大相以爲可得

K0022V06P0005b17L; 汝觀雲聚起廣大相則爲非相若非

K0022V06P0005b18L; 想者但由畢竟廣大之相非實雲聚


[대보적경 삼률의회(三律儀會)]


또 이어서 다음과 같은 내용이 나온다. 

... 


가섭아, 

비유하면 어떤 사람이 다른 사람에게 말하기를 

'같이 그늘진 곳에 나아가 앉겠는가.' 


슬기로운 이는 말하기를 

'그늘이란 형상 없는 것이니 어떻게 가서 앉겠느냐?' 


그 사람은 말하기를 '

나는 그늘의 형상을 말한 것이 아니요, 

다만 이 그늘진 곳이라고 말하였노라.' 


그때에 슬기로운 이가 다시 말하기를 

'네가 말한 그늘이란 것이 곧 그늘이 아니니라'고 하느니라. 


가섭아, 

네가 저 사람을 보아라. 

오히려 이렇게 세속을 따라서 

능히 깨우쳐 주기를 이와 같이 하도다. 


이와 같이 가섭아, 

여래는 여실히 

모든 법의 진실 이성(眞實理性)을 깨달아 알고 

대중 가운데서 사자후(獅子吼)를 하느니라. 


가섭아, 

여래가 

법에 수순하여 머무르기를 즐겨하지만 

상(想)에 따르지는 않느니라. 


모든 중생이 지닌 아상은 

여래에 있어서는 

이것이 제일의(第一義)가 되나니, 

그 까닭은 여래는 

이제 이미 저 생각을 알고 

일체 중생의 생각이 곧 생각 아님을 아느니라. 

이것이 가장 그윽한 비밀의 말이니라. 


혹 어리석은 사람이 

이 이치를 등지고 

여래와 다투려 하나니, 


그러므로 내가 말하기를 

'세상이 나와 다툴지언정 

내가 세상과 다투는 것은 아니라'고 하느니라. 


[참조 대보적경 삼률의회]




우리는 관념과 감각현실의 관계를 살폈는데 

관념에는 감각현실의 내용(자상)이 없고 

또한 관념의 내용은 감각현실 안에서 찾을 수 없음을 보았다. 


그런데 이런 관계는 이런 감각현실과 관념 등을 갖게 한 본 바탕이라고 할 

실재내용과 실체에 대해서도 역시 적용된다. 


즉 그 관념은 감각현실과 함께 실재의 내용이 아니고 

실재는 얻을 수 없어 공하여 

이들 내용은 실재에서 얻을 수 없다. 


또 그런 관념이나, 감각현실이나 실재는 

모두 그에 해당하는 진짜라고 할 영원불변한 본체가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따라서 일반인은 현실에서는 분명 

생멸함이 있고 

영원함이나 아주 없어짐이나, 

같고 다름이 있고 

여기저기 오고 감이 있다고 사람들이 여기지만,  


그러나 위와 같은 이유로 

그런 관념과 달리 

감각현실이나 실재에는 모두 

그런 생멸이나 내지 

오고감이 본래 모두 없다고 말하게 된다. 


중론과 같은 논서에서는 현실에서 사람들이 

관념으로 분별해 주장하는 여러 내용들이  

감각현실에서, 또 실재에서, 또 실체의 내용으로도 

그대로 있다는 주장을 깨뜨리기 위하여 

여러가지 방식으로 논증을 펼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이런 상대의 주장에 대해서는 

그런 주장을 세우면 

관념 영역안에서도 형식 논리적으로 

자체적으로 모순된 결론을 얻게 됨을 제시하거나, 

그런 내용은 감각현실을 얻는 여러 영역에서도 그 내용을 찾아보아도 

그런 내용을 얻을 수 없음을 제시하거나, 

현상내 내용과 관계없이 자체적으로 그런 내용이 실재한다면 

그로 인해 갖게 되는 모순점을 밝히거나, 

그것을 영원불변한 실체의 내용이라고 전제하면 얻는 모순을 

밝힘으로써 그런 주장을 깨뜨릴 수 있을 것이다. 



관념으로 가진 분별내용이 실답지 않음은 

이런 여러 설명으로 충분하다고 보지만, 

일반인이 상식의 바탕에서 생각하면 

이런 결론을 이해하여 받아들이기 힘들 수 있다. 


그래서 이해를 쉽게 하기 위해 

다음과 같은 비유를 통해 이 사정을 이해해보기로 한다. 


예를 들어 어느 환자가 사고를 당하여 

식물인간이 되어 눈만 깜박거리고 있을 뿐 

가족이 찾아와도 가족을 알아보지도 못하고 

의식을 상실한 상태로 있다고 하자. 


그래서 환자가족들은 이 환자를 보고 

크게 상심하여 슬퍼하고 걱정하며 

고통을 겪고 그 고통을 호소한다. 

더 나아가 그 바탕에서 환자의 치료를 위해 노력하고 

치료비 마련을 위해 분주히 활동한다고 하자. 


이런 비유의 상황은 감각현실의 의타기상과 

관념적 내용으로서 변계소집상을 구별하기 위함이다. 


이런 상황에서 의사는 

그 고통을 해결하기 위해 

고통이 어디에 있는가를 찾아나서게 된다. 


그래서 이미 앞에서 본 것처럼 여러 존재의 측면에서 

고통의 정체를 찾아 나서는데 

실재(진여, 원성실상)-감각현실(의타기상)-관념(변계소집상)의 측면이 

바로 그런 내용들이다. 


그런데 이런 여러 내용을 살핀 결과 

이들은 하나같이 실다운 내용이 될 수 없다는 

3 무자성의 내용을 보게 되는 것이다. 


즉, 앞의 비유적 상황에서 고통을 찾아 나선 의사는 

다음과 같이 각 영역에서 

고통의 정체를 찾아 나선다. 


우선 환자 가족인, 당신들은 비록 환자의 상태를 보고 

여러가지 슬픔과 걱정을 말하며, 

또 생각으로 환자의 고통을 간접적으로 느낀다고 하지만, 

그것은 생각일 뿐이고

이들 환자 가족에게는 

환자가 직접 느끼는 감각현실은 없다. [변계소집상의 상무자성]


환자 가족들이 말하길 

그래도 자신들이 겪는 고통은 

환자가 처한 그 현실 때문에 얻는 것이 아닌가 

그렇게 말하므로, 

의사는 다시 환자를 살핀다. 


이제 그 환자의 감각 현실을 살피니, 

반대로 그 환자는 의식이 상실되어 

환자가족들의 생각하는 내용이 없다.  


더 나아가 그 감각현실은 인연화합으로 나타난 것이며 

자연적으로 있는 실재의 내용도 아니다. [의타기상의 생무자성]


또 현실의 현상내용이나 실재내용은 

모두 진짜라고 할 영원 불변한 본체의 내용이 아니고 

그런 진짜의 내용은 없다. [원성실상의 승의무자성]


이런 결과 처음 고통의 문제를 찾아 

해결하려 나선 의사는 

모든 존재의 영역에서 

해결해야 할 고통이 본래 있다고 할 수 없음과 함께 

이들 모두가 니르바나의 상태임을 보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의사는 단지 그런 고통은 

망상분별에 싸여 있다고 할 

환자 가족들의 관념 영역안에서만 

존재하는 망상적 내용임을 제시하는 것이다. 


그래서 이런 입장에서 

일체는 본래 니르바나(열반)의 상태임을 

제시하는 것이다. 


다만, 일반 상식적인 입장에서는 

분명 환자가 처한 상황이 있고, 

환자가족은 이로 인해 고통을 호소하는데, 

그러나 이 현실 상태가 모두 그 자체로 

본래 고통이 없는 니르바나(열반)의 상태라는 사실을  

위의 예를 놓고서도 여전히 쉽게 이해할 수 없게 된다. 




그것은 사실은 다음 이유때문이다. 


일반적인 경우 한 주체가 얻는 내용은 

앞의 비유에서 환자가 얻는 감각현실과 

환자가족이 그를 바라보고 생각하는 내용이 

함께 결합되어 있는 상태다. 


그래서 사람들은 일반적으로 자신이 

어떤 감각현실을 바탕으로 관념을 가지면, 

그 관념에 해당하는 내용이 감각현실에도 그대로 있고 

더 나아가 그 관념은 

그런 감각현실과 같은 내용이라고 이해한다. 


그래서 그 주체는 그렇게 얻은 일정한 관념을 

감각현실에 관통시키고 결합해 이해하고 

더 나아가 그것을 실재의 내용이며 

또 진짜의 내용이라고 여긴다. 


즉 그런 진짜의 실체가 있고 

또 그런 실재내용도 있어서, 

자신이 그런 감각현실도 얻는 것이고 

감각현실에도 그런 내용이 정말 있는 것이기에 

그런 생각을 하게 되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래서 자신이 가진 생각이 

감각현실과 실재도 그러할 뿐 아니라, 

그것이 변하지 않는 참된 진짜의 내용으로서 

실다운 내용이라고 고집하며 

집착을 갖게 된다. 


이처럼 일반의 입장에서는 

관념(변계소집상)을 가질 때 

이를 감각현실(의타기상)과 실재내용(원성실상)의 

내용에 모두 관통시켜 결합하여 이해하므로 

앞과 같은 내용을 이해하기 힘들게 된다. 



그러나 부처님은 

우리가 문제삼는 내용들이 있다고 할 때 


비록 이들 각각의 내용이 각기 전혀 없는 것이 아니고 

또 이들이 서로 관계가 전혀 없는 것은 물론 아니지만, 


그러나 이들은 본래 서로 분리되는 내용이고 

어떤 한 영역의 내용은 다른 영역에서 찾을 수 없는 내용이어서, 

이들이 서로 일치되어 관통시켜 이해할 내용이 아님을 본다. 


이는 마치 현실에서 사람이 잠을 자며 꿈을 꿀 때 

현실 안에서 잠을 자며 꿈을 꾼 것이고, 

꿈을 꾸는 동안 꿈은 마음에서 마치 진짜처럼 얻는 내용인 것이지만, 

그러나 꿈의 내용은 현실과는 별개의 내용이며 

꿈의 내용을 현실에 관통시켜 이해할 수 없는 것과 같다. 


즉, 꿈에서는 

어떤 집을 보고 그 안에 물건이 있음을 보았다고 하더라도 

꿈을 깬 현실에서는 

그런 집도 물건도 찾아 볼 수 없는 것이다. 


그래서 꿈은 꿈꾸는 동안 꿈에서는 '있는' 내용이고 

또 진짜처럼 여겨지지만, 

이런 현실과 관련시켜 볼 때는 

그 내용은 현실에서 찾을 수 없고, 

따라서 그것은 실답지 않고 

허망한 내용으로서 '없는' 내용이라고 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런 관계가 

앞에서 본 각 존재의 영역에서도 성립하는 것이다. 


그래서 이들 각 내용은 각 영역에서는 나타나 존재하지만, 

다른 영역과 관련해서는 하나 같이 실답지 않음을  

승의무자성, 생무자성, 상무자성의 내용으로 

제시하는 것이다. 


즉 실재의 내용을 바탕으로 [원성실상]

각 주체가 현상 안에서 감각현실[의타기상]과 

관념[변계소집상]을 얻어 갖지만, 

그것은, 그 성격이 서로 각기 다르며, 

실다운 것이 아니다. 


우선 진여실재나 감각현실 관념에 걸친 

이 모든 내용들은  

진짜라고 할 영원불변한 본체가 아니며 

그런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승의무자성]


어떤 내용이 변화하는 것이라면, 

이들 어느 것이나 다른 것의 대표가 될 수 없고, 

이들은 모두 마치 꿈이나 환영처럼, 진짜라고 볼 수 없다. 

그래서 반대로 영원불변한 내용을 진짜라고 관념하고 

그런 진짜의 내용을 찾아 나서는데 

승의무자성은 그런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판단이다. 

이는 앞에서 살핀 무아, 무자성의 내용과 같다. 


한편, 그럼에도 여러 조건이 화합하여 

감각하는 현실을 얻는데, [의타기상]

이처럼 감각하여 얻는 감각현실은 

여러 조건이 화합하여 얻는 것일 뿐 

그것은 실재의 내용이 아니라는 것을 관하게 된다. [생무자성]


그리고 다시 현실에서 

마음으로 생각하고 만들어 내는 모든 관념은 

또한 그 안에 감각현실과 같은 자체의 모습[자상]이 

없음을 관하게 된다. [상무자성]


결국 존재하는 모든 내용을 놓고 판단할 때 

그것들은 하나같이 

그것을 실다운 내용으로 인정할 만한 성품을 

여러 측면에서 갖추지 못한 것임을 

보게 되는 것이다. 


그것이 곧 승의무자성, 생무자성, 상무자성이라는 

3 무성의 내용이다. 


일체의 사정이 바로 위와 같기에 

생멸이나 해결해야 할 고통이 본래 

실답게 존재하지 않음을 관하게 되고, 

따라서 이런 입장에서 

앞에서 설한 내용이 

제시되는 것이다. 




해심밀경에는 다음과 같은 구절이 나온다. 


...

K0154V10P0717c04L; 勝義生當知我依相無自性性密意

K0154V10P0717c05L; 說言一切諸法無生無滅本來寂靜

K0154V10P0717c06L; 自性涅槃何以故若法自相都無所

K0154V10P0717c07L; 有則無有生若無有生則無有滅若

K0154V10P0717c08L; 無生無滅則本來寂靜若本來寂靜

K0154V10P0717c09L; 則自性涅槃於中都無少分所有更

K0154V10P0717c10L; 可令其般涅槃故是故我依相無自

K0154V10P0717c11L; 性性密意說言一切諸法無生無滅

K0154V10P0717c12L; 本來寂靜自性涅槃...


승의생이여, 

마땅히 알라. 


나는 상무자성성(相無自性性)의 밀의에 의지해, 

일체 법이 생함도 없고 멸함도 없으며 

본래 고요하여 자성이 열반이라고 말한다. 


무슨 까닭인가? 

만일 법의 자상(自相)이 도무지 있는 것이 없으면 

곧 생기는 것이 없을 것이요, 

생기는 것이 있지 않으면 

곧 멸하는 것이 있지 않을 것이요, 

생함도 없고 멸함도 없으면 

곧 본래 고요할 것이요, 

본래 고요하면 

곧 자성이 열반이다. 


그 가운데는 다시 그로 하여금 열반에 들게 할 것이 

아예 조금도 없는 까닭이다. 



그러므로 '상무자성성'의 밀의에 의지해, 

일체 법이 생함도 없고 멸함도 없으며 

본래 고요하여 자성이 열반이라고 말한다. 

....


선남자여, 

나는 또한 법무아(法無我)의 성품으로 나타난 것인 

'승의무자성성'의 밀의에 의지해, 

일체 법이 생함도 없고 멸함도 없으며 

본래 고요하여 자성이 열반이라고 말한다. 


무슨 까닭인가? 

법무아의 성품에 의지해 나타난 승의무자성성은 

언제나 어느 때나 모든 법의 법성(法性)에 머무는 무위(無爲)이니, 

일체 잡염(雜染)과 어울리지 않는 까닭에, 

언제나 어느 때나 모든 법의 법성에 머무는 까닭에 무위이다. 

무위인 까닭에 

생함도 없고 멸함도 없으며 

일체 잡염과 어울리지 않는 까닭에 본래 고요하며 자성이 열반이다. 


그러므로 나는 법무아의 성품으로 나타난 

승의무자성성의 밀의에 의지해, 

일체 법이 생함도 없고 멸함도 없으며 

본래 고요하여 

자성이 열반이라고 하는 것이다. 

...




상식적으로 감각현실을 비롯한 현상의 내용이 

생겨나고 멸함을 반복하는 것이라고 보는 입장에서는 

이 부분은 이해하기 힘든 내용일 수 있다. 


이는 다음과 같이 이해하면 쉽다. 


생멸이란 것은 그 자체가 

관념 영역에서 갖는 관념(변계소집상)이다. 


그런데 그런 관념(변계소집상)은 

감각현실과 같은 자상을 갖지 않기 때문에 

상무자성이라고 한다. 


그래서 비록 생멸이란 관념이 마음 안에 나타나 머무르고 

그 관념은 감각현실을 가리키는 것이지만, 

관념에는 감각현실과 같은 자상이 없고 

또 한편, 

그 관념이 가리키는 감각현실에도    

그런 관념 내용과 같은 것은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결국 관념은 

그 내용이 마음 안에 나타나 머무르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것은 감각현실의 내용과 같은 자상을 갖는 것이 아니고 [상무자성]

또한 실재의 내용도 아닌 것이고 

진짜라고 할 영원불변한 실체의 내용도 아닌 것이어서 [법무아, 승의무자성]

진실되다거나 실답다고 볼 만한 내용이 아닌 

망상인 것이다.


따라서 생멸함은 비록 허망한 망상 분별 속에는 

있는 것 같으나, 

일체법은 본래 생멸을 떠난 것이고 

따라서 그 자체를 곧 니르바나라고 본다는 것이다. 



한편 승의무자성의 밀의에 의지해 자성이 열반이라고 본다는 것은 

일체법은 본래 모두 진짜라고 할 영원불변한 실체의 내용이 

없는 것이므로, 

이런 측면에서 생함도 멸함도 본래 있을 수 없다고 본다는 것이다. 


결국 사람은 생멸을 분별하고 그 안에서 고통을 보는 것이지만, 

그것은 모두 진짜의 내용이 아니므로 

이런 측면에서 일체법은 그대로 열반이라는 것이다. 





이제 앞에 살핀 내용을 다시 전체적으로 요약하면, 

모든 법이 본래부터 열반이란 말의 의미를 이해할 수 있다. 


생멸하는 현상이 그 자체가 

곧 니르바나라는 것은 다음과 같은 내용을 근거로 한다. 


우선, 생멸하는 현상은 공한 실재 진여는 아니지만, 

이들 현상은 공한 진여와 떠나 있는 것이 아니고, 

공한 진여는 현상과 떠나 있는 것이 아니다. 


그렇기 때문에 

공한 진여는 생멸하는 현상과 다른 것이 아니고 

생멸하는 현상은 공한 진여와 다른 것이 아니다. 

따라서 공한 진여는 곧 생멸하는 현상이고 

생멸하는 현상은 곧 공한 진여로 보게 된다. 


색불이공 공불이색 색즉시공 공즉시색의 

표현이 바로 이런 내용을 가리킨다. 


이런 입장에서는 

생멸하는 현상을 곧 공한 진여로 보게 되며 

따라서 생멸하는 현상을 

곧 니르바나로 관하게 된다. 


그리고 현상은 또 다음을 이유로 

그 자체로 생멸이 없는 니르바나로 본다. 


그것은 모두 진짜라고 볼 영원불변한 실체가 아니고 

또 실재의 내용은 끝내 얻지 못하여 공한 것이고 

그것은 실재의 내용이 아니며 

또 관념은 감각현실(자상)이 없고 

감각현실에는 그런 관념과 같은 내용을 얻을 수 없는 것이다. 


그래서 생멸이나 생사, 고통 등은 

모두 실답지 않는 내용으로서, 

진짜라고 할 실체도 아니며, 

실재나, 감각현실에서도 모두 내용을 얻을 수 없는 것이어서 

실다운 것이 아니다. 




여하튼, 생멸하는 현상은 

본래 생멸과 고통이 없는 것이어서, 

이를 니르바나라 할 수 있는데, 


그렇다면 현실 그 자체로 

아무런 문제도 본래 없는 것이어서 

아무런 수행도 필요없다고 할 것인가. 


그렇지는 않다. 


생멸하는 현상이 본래 니르바나인데도 

이것이 문제가 되고 

수행이 필요한 이유는 


결국 본래 생멸이 있다고 할 수 없는 실재와 현실을 놓고 

이를 생멸한다고 보는 분별과 관념 영역(변계소집상)

때문이다. 


그리고 그런 망상 분별을 바탕으로 

집착을 갖고 현실에 임하기 때문에, 

현실에서 업(뜻, 말, 글, 행위, 태도)를 일으키고 

그 업으로 인해 현실에서 세세생생 

고통의 윤회과정을 밟아 나가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생멸하는 현상은 본래 니르바나임에도, 

현실 자체는 고통의 문제상황에 놓여 있고, 

이 해결이 필요한 것이다. 


현실이 이러한 상태에 있으므로 

이 해결을 위해서는 

이와 반대로 현실을 올바로 깨달아 

망상 분별을 제거하여 

현실이 곧 생멸이 없는 니르바나임을 관하고, 

현실의 내용에서 집착을 일으키지 않게 되면, 

이로 인해 본래의 니르바나의 상태를 

찾고 회복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이런 관계로 수행을 통해 니르바나를 얻는다고 하지만, 

그러나, 이 니르바나 자체는 수행을 통해 

비로소 새로 얻게 되는 결과로 보지 않고 

본래부터 이미 갖추어진 내용으로 보는 것이다.  

[이계과(離繫果), 택멸무위(擇滅無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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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이처럼 일반적으로 생멸한다고 보는 현상에 

본래부터 생멸이 없다는 내용은 

처음 설산동자의 게송과도 관련시켜 

음미해 볼 수 있다. 


설산동자의 게송은 다음과 같다. 


제행무상(諸行無常) 이 세상 모든 일은 영원하지 않으니,

시생멸법(是生滅法) 이는 나타나고 멸하는 현상이다. 

생멸멸이(生滅滅已) 나타나고 멸함이 없어지고 나면, 

적멸위락(寂滅爲樂) 적멸이 즐거움이 된다. 



이에 대해 부처님은 처음 일반인이 보듯, 

일체 현상이 생멸하며 고통이 있다고 보며, 

중생들이 고통을 겪게 되는 현상을 문제라고 제시하는 한편, 


부처님은 다시  

이런 생멸하는 일체 현상을 놓고 

그것이 일체 법이 생함도 없고 멸함도 없으며 

본래 고요하여 자성이 열반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이렇게 되면 혼동이 일어날 수 있다. 


처음 생멸하는 현상이 무상하여 모두 고통과 관련되기에 

이 고통의 해결을 위해 생멸 현상의 정체를 찾아 나섰는데, 

결국 일체는 본래 생멸이 없는 것임을 다시 관하게 된 것이다. 

그리고 곧 일체는 열반 적정이라고 제시하는 것이다. 


그러면 일체 현상에는 문제도 들어 있지만, 

그 문제가 본래 해결된 상태이기도 하다는 것을  

함께 제시하는 것이어서  

이해하기 힘든 내용이 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결국 해결해야 할 문제가 있다는 것인가. 

본래 없다는 것인가. 


부처님은 결국 이 둘을 함께 

말씀하시고 있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본래 생멸과 고통이 없지만, 

상식적인 일반인의 입장에서는 

망상분별에 싸여 생멸과 고통이 있다고 보는 것이며 

이런 망상분별과 집착을 떠나 


한편으로 생멸하는 현상을 멸해 없애거나, 


또는 생멸현상을 깨달음을 통해 관하면, 

이 자체가 본래 생멸과 고통이 없는 것임을 깨닫게 되고 

그런 깨달음을 통해 고통을 멸하고 

열반을 얻게 됨을 말씀하시는 것이다. 



따라서 수행을 시작하는 입장에서는 

부처님의 설법을 통해 

하나의 현상을 다양한 측면에서 관하고 

그 관계를 잘 이해해야 마땅하다. 



이 내용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본래 현상이 일어나는 바탕이라고 할 실재는 

그 내용을 얻을 수 없고 

따라서 -이 있다, 없다, -이다, -아니다, 같다, 다르다,  

좋다, 나쁘다, 깨끗하다, 더럽다, 생한다, 멸한다 ... 등의 

온갖 분별을 할 수 없으며, 공하다. [원성실상] 


그런데 이런 실재를 바탕으로 

각 생명은 감각현실을 인연 화합으로 얻고 [의타기상]

그 안에서 관념을 일으켜 

온갖 분별을 행하게 된다. [변계소집상]


그리고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이런 내용을 얻고 

이 모두를 다 관통시켜 결합해 이해한다. 

즉, 일반적으로 자신이 감각한 현실을 놓고 

스스로 그에 여러 관념을 만들어 갖고 

이 둘을 함께 결부시켜 이해하는 것이다. 


감각현실에서 관념을 일으켜 가진 후 

그 관념을 감각현실에 관통시켜 이해하는 예는 


마치 먹물을 마구 흩뿌려 놓은 그림에서 

어떤 이가 사람의 형체를 보거나 어떤 동물의 형체를 보고 

생각하면, 

그 먹물 그림에 마치 사람이나 동물이 

있는 것처럼 생각되는 것과 같은 현상이다. 


그래서 이 안에서 생멸현상을 보고 

망상분별을 일으키고 집착을 갖고 

행하는 가운데 

또 고통을 얻게 되는 것이다. 


그런 결과 처음에 먼저 

일체 변화하는 현상이 

이런 관계로 모두 고통과 관련됨을 살피고 

이 해결을 찾아 나서게 된다. 


그런데 이 고통의 정체를 살피는 과정에서 

이들 내용이 각 영역에서 서로 일정한 관련성은 있지만, 

그러나 본래 떨어진 별개의 내용임을 이해할 필요가 있다. 


이 이해를 위해서는 앞에서 비유로 든 의식 상실의 환자와 

환자의 가족의 관계를 다시 생각해 볼 필요도 있다. 


물론 일반적인 경우는 앞의 비유에서 

의식이 없는 환자의 입장(감각현실)과 

이를 걱정하는 환자 가족의 입장(관념)을 

함께 다 갖고 있는 상태가 된다. 


그래서 관념의 영역에서는 분명 

영원하지 않아 나타나고 멸한다는 현상[생멸]과 

고통이 이 모든 영역에 존재하는 것처럼 생각된다. 


그런데 앞과 같이 다양한 측면에서 살핀 결과, 

이 각각은 

진짜라고 할 영원불변한 본체가 없고[승의무자성]

실재의 내용도 아니며[생무자성]

또 현실에서 생각하는 모든 관념에는 

감각현실과 같은 자상이 없어서[상무자성]

각 내용이 모두 실답다고 할 만한 성품이 

결여된 내용들임을 관하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본래는 생멸과 고통이 모두 

실답게 있는 것이라고 할 수 없는 것이다. 

따라서 본래 니르바나의 상태인 것이다. 


그럼에도 현실에서 문제가 있는 것은 

결국 이런 본래의 상태에 상응하지 않게 


각 주체의 정신 안에 감각현실이 나타나고, 

또 이를 바탕하여 관념영역에서 

잘못된 망상과 분별을 일으켜 갖고 

이를 고집해 이 모두에 관통시켜 이해하는 

자세가 문제라고 할 것이다. 


더욱이 이런 망상 분별을 바탕으로 

번뇌와 집착을 일으켜 갖고 

다시 이에 바탕하여 행위해나감으로써 

이후 온갖 현실의 고통과 윤회의 고통이 

다시 이어져 나가게 된다. 


결국 해심밀경에서는 

현실의 고통과 고통의 윤회과정이 나타나는 과정을 

다음과 같이 설한다. 


... 

이처럼 의타기의 자성과 원성실의 자성 위에서 

변계소집의 자성을 집착하니, 

이러한 인연으로 오는 세상의 의타기의 자성을 일으킨다. 


이 인연을 말미암아 

번뇌잡염(煩惱雜染)에 물들며, 

혹은 업잡염(業雜染)에 물들며, 

혹은 생잡염(生雜染)에 물들어 

나고 죽는 가운데서 오래도록 헤매고 

오래도록 굴러다니며 쉴 사이가 없고, 

혹은 지옥[나락가那落迦]나 축생[傍生]이나 아귀(餓鬼)나 

하늘이나 아수라[阿素洛]나 

혹은 사람 가운데 태어나 

온갖 괴로움을 받는다. 


K0154V10P0718a13L;                     .... 如是於依他

K0154V10P0718a14L; 起自性及圓成實自性上執著遍計

K0154V10P0718a15L; 所執自性由是因緣生當來世依他

K0154V10P0718a16L; 起自性由此因緣或爲煩惱雜染所

K0154V10P0718a17L; 染或爲業雜染所染或爲生雜染所

K0154V10P0718a18L; 染於生死中長時馳騁長時流轉無

K0154V10P0718a19L; 有休息或在那落迦或在傍生或在

K0154V10P0718a20L; 餓鬼或在天上或在阿素洛或在人

K0154V10P0718a21L; 中受諸苦惱


참조 해심밀경  5. 무자성상품(無自性相品) 


이는 근본불교에서 

고통의 윤회가 나타나는 관계를 

혹-업-고[惑-業-苦; 번뇌,집착-행위(업)-고통]의 관계로 

제시하는 것과 같다. 




한편, 금강경에서는 

일반적으로 사람들이 가장 집착을 갖는 

나, 사람, 생명, 목숨에 대한 

이런 관념적 집착을 갖는 이는 

보살이 아니라는 내용이 다음과 같이 나온다. 


...

수보리야, 만일 어떤 보살이 

아상(我相)ㆍ인상(人相)ㆍ중생상(衆生相)ㆍ수자상(壽者相)이 있으면 

보살이 아니기 때문이니라.

...


K0013V05P0979b04L; ....                     須菩提若菩薩

K0013V05P0979b05L; 有我相人相衆生相壽者相卽非菩薩


참조 금강반야바라밀경 


이런 내용도 위와 같은 의미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이는 생명이 가장 집착하는 내용으로서 

모든 집착의 근원이 되는 내용을 

나, 사람[윤회의 주체], 생명, 목숨으로 나열하는 가운데 

이들에 대해 망상분별을 일으켜 

이들이 실답게 감각현실이나, 실재에서 얻을 수 있다고 여기고 

또 실체가 있는 진짜의 내용이라는 생각을 갖고 

집착을 일으키면 안 된다는 의미로 이해할 수 있다. 




○ 다양한 열반에서의 선택 문제 


결국 현실의 문제상황의 원인은 이렇다. 


본래 실재는 생멸현상이나 고통이 있다고 할 수 없는 

청정한 니르바나의 상태이어서 

본래 문제가 없다 할 수 있다. 


그러나 이 실재를 덮어 나타나는 현상안에서 

망상 분별을 행하고 집착을 가짐으로써 

그 안에서 생멸과 고통의 문제가 존재하는 것이다. 


즉, 본래 문제가 없음에도 

현실은 이런 연유로 그 바탕에서 

수많은 심각한 고통과 악의 문제가 있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본래의 니르바나의 상태를 덮고 있는 

이 생멸 현상만 걷어내면 

원래의 니르바나의 상태가 

드러나게 되는 것이라고 이해할 수 있다. 


이는 비유하면 마치 현실은 아무 문제가 없이 평온한데 

자면서 꿈을 꾸며 악몽에 시달린다면, 

그 꿈을 깨어나면, 

본래 꿈에서 겪은 악몽이 없는 현실을 맞이하는 것과 같다. 


그런데 꿈속의 악몽이 사라지고 맞이하는 현실은 

꿈에 의해 새로 만들어진 것이 아니며  

현실은 본래 악몽과 같은 내용이 있지 않고 

본래부터 평온한 상태에 있었던 것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현실의 생멸현상을 멸하고 

열반을 증득한다고 할 때 

그 증득하는 내용은 

생멸현상에 생멸을 떠나 본래 있었던 것이다. 


그것이 곧 설산동자의 게송에서 


생멸멸이(生滅滅已) 나타나고 멸함이 없어지고 나면, 

적멸위락(寂滅爲樂) 적멸이 즐거움이 된다. 

는 게송내용이 의미하는 바라고 이해할 수 있다. 


물론 엄밀하게 보아 본래 실재의 상태 등은  

모든 이분법상의 분별을 떠나고 

언어로서 표현할 수 없는 상태이므로 

청정하다거나 즐겁다라는 표현을 할 수는 없다. 


그러나 처음 생멸하는 현상 모두를 

문제현상으로서 고통의 현상, 

그리고 더럽고 깨끗하지 않은 오염된 내용으로 보는 것이므로, 

그것을 떠난 실재의 상태는 이런 내용과 상대하여 

청정하며 또 안온하며 즐겁다라고 표현하는 것이다. 


결국 본래 바탕이 청정한 진여 니르바나임에도 

그 실재의 니르바나의 상태를 뒤 덮고 있는 

생멸 현상이 문제인데, 

이 문제현상을 구체적으로 어떤 방안들을 통해 

해결할 것인가가, 지금까지 논의한 수행방안과 

경전에서 앞으로 살펴 나갈 내용과 모두 관련된다. 



이 상황을 비유한다면, 다음과 같다. 


본래 본 바탕은 깨끗한데, 

여기에 어떤 천을 덮어서 

그 안에 온갖 잘못된 내용을 쓰고 

그로 인해 번뇌를 일으키고 행위하여 

이후에도 또 다음 천을 마련해 

계속 잘못된 내용을 써가며 

고통을 받는다면 이는 본바탕과 관계없이 

문제라고 할 수 있다. 


그래서 이 문제를 해결하는 방안으로 

다음과 같은 세가지 방향의 노력을 생각할 수 있다. 


우선 가능한 그 천을 걷어내

깨끗한 바탕만 남기고 

그 위에 다시 그런 천을 앞으로 더 이상 만들어 내지 않는 

근본적인 방안을 생각할 수 있다. [회신멸지의 니르바나]



또 하나의 방안은 

천 위에 쓰여진 잘못된 내용 위에 선을 그어 

잘못된 내용이라고 표기해 지우고, 


원래 깨끗한 본 바탕에 상응하는 

깨끗하고 올바른 내용만을 

그 안에 적어 넣고, 

그 안의 내용이 무엇이던 집착을 버려 

그 천과 그 안의 내용이 주는 고통에서 

벗어나는 방안을 생각할 수 있다. 


한편, 개인적인 수행의 목표만을 생각하면 

이것으로 충분하다고 할 수 있지만, 

그러나 자신의 해탈 열반만 목적으로 하지 않고 

다른 생명들의 해탈과 열반을 목적으로 하고 

복덕과 지혜를 원만히 성취하여 

법신을 증득하고 성불하고자 할 때는 

다시 또 다른 수행방안이 필요하다. 



불교에서 해탈을 이루고 

열반을 증득한 상태로는 

아라한과 연각, 부처를 제시한다. 


그런데 이들이 모두 

해탈과 열반을 증득한 점에서는 차이가 없으나, 


자신의 해탈, 열반에만 목적을 두는 아라한과 연각의 경우와 


모든 생명을 고통의 윤회에서 제도하여 

열반을 얻게 하기 위해 수행하는 보살과 부처의 경우는 

그 복덕과 지혜에서 다시 차별이 있으며, 


따라서 보살과 부처의 상태를 보다 수승한 상태라 하고, 


더 나아가 가장 수승한 상태로 

복덕과 지혜를 원만히 성취 완성한 

부처의 법신의 상태를 제시하게 된다. 


따라서 수행목표는 

이런 여러가지 차별적인 상태를 다시 나누어 

수행의 방향을 찾아 나가야 한다고 본다. 



이는 자신이 병이 걸려 있을 때는

당장 자신의 병만 낫는 것을 목표로 하기 쉽지만, 


그러나 좀 더 뛰어난 상태로는 

자신의 병도 치료할 뿐 아니라, 

다른 이들의 병도 치료하는 의사가 되는 것을 목표로 할 수 있고 


더 나아가 모든 의사들을 통솔하여 

환자를 치료하는 병원장이나 

또는 의사를 가르치고 교육하는 의과대학의 교수나 

의대 총장이 되는 것을 목표로 할 수 있는 것과 

사정이 같다. 


또 이들 모든 의사는 다 다른 사람이지만, 

그러나 각 개인이 일정한 성품을 지닐 때 

의사의 자격을 얻으면 의사라고 부르게 되듯, 


의사가 되는 각 사람과는 별도로 

의사가 되기 위해 갖추어야 할 성품은 

별개로 또 있다고 보게 된다. 


그래서 각 개인이 그런 상태를 증득하면 

개개인의 사람은 서로 다 다르지만 

또 같은 의사가 된다고 말할 수 있다. 


이처럼 각 개인이 처음 고통을 없애기 위하여 

수행을 하고 수행 목표를 증득해 나간다고 하지만, 

그로 인해 얻는 목표 상태는 또 조금씩 차이가 

난다고 할 것이다. 


가장 처음 수행을 시작하는 상태에서는 

이미 앞에서 본 것과 같이 

본래 청정한 진여 니르바나의 상태임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현실 속에서 

자신의 마음 안에 얻는 색, 수, 상, 행, 식의 내용 가운데 

일부를 자신이고 나머지를 대상이나 외부 세계라 잘못 생각하여 

이에 집착하고 이런 집착에 바탕해 행위해나가며 

그로 인해 고통의 윤회를 하는 상태에 놓여 있다. 


이런 경우 이미 앞에서 살핀 것처럼 

니르바나를 얻는 방안에는 

기본적으로 두 가지 방안이 있게 되는 셈이다. 


즉 앞에서 본 것처럼 


윤회 과정에서 

생멸하는 현상을 보고 

이를 분별하고 집착하는 식을 근본적으로 모두 멸해 나타나지 않게 함으로써 

근본정신과 공한 실재, 진여만 남겨 

회신멸지의 상태로 니르바나를 얻을 수 있다. 


그러나, 

굳이 생멸하는 현상을 없애지 않더라도, 

이 현상이 본래 생멸이 없고 니르바나임을 관하여 

분별과 집착을 버리면 

그 상태 그대로에서 번뇌와 고통에 물들지 않고 

머무를 수 있다. 

 


그런데 이 두 방안 가운데 

과연 어떤 방안이 더 나은 것인가 

의문이 생기게 된다. 


생각하건대, 

자신의 고통의 소멸만을 목적으로 할 때는 

회신멸지의 니르바나를 

더 완전한 니르바나로 볼 수 있지만, 

그러나 자신이 회신멸지의 상태가 되면, 

다른 생명을 구제하는 행위를 할 수 없게 된다. 


그래서 중생을 구제하는 것에 목적을 둘 때는 

뒤의 방안이 좀 더 낫다고 볼 수 있다. 


자비심을 갖고 

중생을 제도하는 것에 목표를 두는 보살 일천제가 

열반에 들지 않는다는 것도 

바로 이런 의미라고 본다. 


또한 

생멸하는 현상을 그대로 두고서도 

그것이 본래 니르바나임을 관하여  

그에 집착을 두지 않고 

그로부터 번뇌와 고통을 받지 않는 것이므로 

이것이 좀 더 낫지 않은가 하는 생각을 갖게 된다. 


여하튼 이 두 경우가 

모두, 니르바나는 현실에 본래 갖추어진 것으로 보는 것은 같지만, 

현실에서 이런 니르바나의 상태에 이르는 것은 

번뇌와 집착을 없애는 수행을 통하여 가능하다고 보는 점은 

공통하다. 


결국 본래 니르바나는 갖추어져 있는 것이지만, 

수행자의 입장에서는 니르바나는 수행을 통해 

그 상태에 도달할 수 있는 것이다. 


망상분별과 번뇌와 집착을 없애야 

근본 정신(아뢰야식)은 다음 생의 식을 

만들어 내지 않을 수 있는 것이며, 


생멸하는 현상을 그대로 니르바나로 보는 경우에도 

망상분별과 번뇌와 집착을 없애야 

생멸하는 현상에서 

번뇌와 집착으로 인한 고통에서 벗어날 수 있기에 

이는 두 경우에 모두 공통된 내용인 것이다.  


따라서, 수행을 통해 

망상 분별과 탐욕, 분노, 어리석음의 번뇌와 

집착을 제거하면, 

이로서 이 두가지 니르바나 가운데 

하나를 선택할 수 있다고 보게 된다. 


따라서 그런 상태가 되면 

이 가운데 어느 방향으로 나아갈 것인가를 

잘 생각해야 할 필요가 있다고 본다.  







○ 생사 즉 열반에서의 문제점 



- 망상분별과 집착의 상태로 다시 물러남[퇴전]의 잘못


생사에 머물면서 

생사가 곧 열반임을 관하고 

수행을 하는 입장에서는 


매번 현실에서 얻게 되는 감각현실과 관념에서 

번번히 망상분별과 집착을 일으켜 갖게 되기 쉬우므로,  

앞과 같은 깨달음과 수행을 통해 

망상분별과 집착을 반복하여 제거하면서 

망상분별과 집착을 떠난 상태에 

늘 임하여 머무르려 노력하는 자세가 요구된다. 


처음 보살 수행을 하는 입장에서는 

이처럼 수행하다가도, 

그간의 오래된 습관[훈습된 습기(習氣)]로 인해 

다시 망상분별과 번뇌 집착의 상태로 

물러나는 경우가 자주 있게 된다. 


그래서 수행을 꾸준히 정진하여 

더 이상 망상분별과 번뇌 집착의 상태로 

물러나지 않게 되는 상태에 이르러 머물러야 할 

필요가 있다. [불퇴전위] 




- 현실 그대로가 아무 문제가 없다고 착각하는 잘못 


한편, 일체 현상이 모두 본래 니르바나이며, 

생사 즉 열반이라고 할 때 


이 내용을 자칫 잘못 이해하면, 

생사현실은 곧 니르바나인 것이므로, 

이 내용을 통해 

아무런 수행 노력이 필요없고, 

원래 현실에서 살던 것처럼 별다른 수행 노력없이, 

그냥 살아가는 것이 모두 그대로 니르바나여서, 

원래 현실에서 살던 내용 그대로 아무렇게 살아가도 

다 무방하고 좋다고, 잘못 생각하는 경우도 있다. 


생사 즉 열반이라는 말은 

본래 일체 생멸현상이 '본래' 니르바나이어서 아무런 

문제가 없음을 말하는 것이지만, 


그러나 한편, 이 내용은 

현실에서는 그런 사실을 깨닫지 못하고, 

각 생명이 '망상분별과 집착을 갖고 살아가기에' 

고통을 받고 고통의 윤회를 받게 된다는 사실도 

함께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이런 사실을 올바로 깨닫지 못하고,  

현실에서 갖는 망상분별과 집착을 문제로 보고 

이를 제거하려 노력하지 않고,   

집착없이 올바른 수행을 해나가지 않으면, 


본래 생사 즉 열반이어서 문제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그와 관계없이 그 망상분별과 집착을 바탕으로, 

현실에서 생사의 고통을 받아나가게 됨을 말하는 것이다. 


그래서 이는 

생사현실이 곧 니르바나이기에 

이런 상태의 생사현실이 그대로 아무런 문제가 없고 

또 아무런 수행이 필요없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즉 생사 즉 열반임에도 이를 깨닫지 못하고 

망상분별과 집착을 갖고 살아가는 생사현실은 문제이므로,  

생사 즉 열반임을 올바로 깨닫고 

수행에 정진해나감으로써 이 문제를 

해결해나가야 함을 제시하는 것이다. 


따라서 생사 즉 열반이라는 말이, 

현실에서 각 생명이 망상분별과 집착 속에 살아가도 

그 상태 그대로 아무런 문제가 없음을 

말하는 것은 아님을 주의해야 한다. 


현실에서 대부분의 생명은, 

상식적이고, 이성적이고, 감성적인 분별(망상분별)을 행하고  

이에 바탕하여 탐욕, 분노, 어리석음을 갖고, 


1- 자신의 좋음을 집착하여 추구하면서 

다른 생명에게 좋음을 베풀 생각을 갖지 못하게 되고, 

2- 또 그렇게 자신의 좋음을 집착하여 추구하는 가운데 

다른 생명이 집착하는 좋음(생명, 신체, 재산, 가족...)을 

함부로 침해하게 되고, 또 이것이 무방하다고 생각하게 된다. 

3- 또 반대로 자신이 집착하는 좋음이 침해되고 나쁨을 받게 되면, 

분노(슬픔, 원한, 억울함..) 미움과 원망을 일으키고, 

상대에 대한 보복 가해를 행하고자 하게 된다. 


그런 이런 상태는 모두 문제의 상태이고, 

각 생명이 행하는 이런 행위 반응은 

본래 생사가 니르바나의 상태임에도 불구하고, 

현실을 고통과 악의 상태로 만들어 

나가는 원인인 것이다. 


따라서 생사 즉 열반의 가르침은 오히려 그런 깨달음으로 

이런 행위를 일으키는 망상분별을 제거하고, 

그런 바탕에서 이런 집착을 갖는 것들의 의미나 가치를 모두 부정하고 

그런 바탕에서 이런 행위를 모두 중지하고 

끊어야 하는 것을 강조하는 것이다. 


따라서 생사 즉 열반의 가르침이 앞과 같은 현실을 

그대로 긍정하는 내용이라고 이해하면 

곤란한 것이다. 



- 현실의 문제 상태에서 좋은 부분만 보고, 낙관적으로 안주하는 잘못


한편 현실에서 행하는 

상식적이고, 이성적이고, 감성적인 분별(망상분별)과 집착을 바탕으로 하면서, 

그러면서도 좋음과 나쁨이 뒤섞인 현실에서 

주로 좋음만을 찾아 긍정적으로 임하려는 

낙관주의적인 자세가 있다. 

이 역시 문제가 된다고 본다. 


좋음과 나쁨이 뒤섞인 현실을 놓고 

단순한 낙관주의 입장에서 본다면, 

모든 현실을 그대로 놓고 

나쁨의 측면을 무시하고 이를 긍정적으로 바라볼 수도 있다. 


즉 좋으면 좋아서 좋고 

나쁜 것은 영원하지 않고 무상하여 언젠가 사라지기에 좋고 

좋지도 않고 나쁘지도 않은 것은 변화하는 것이므로 좋은 것이라고 볼 수도 있다. 


또는 현실에서 

숨겨져 있는 좋은 면을 찾아내 그 부분에 초점을 맞추거나, 

그것을 좋게 생각할 입장에서 바라보고 좋다고 생각하거나, 

비록 그것이 나쁜 것이더라도 

그것을 더 큰 나쁨, 또 다른 나쁨, 또는 그것이 없었으면 대신 있었을 나쁨 등과 

비교하여 좋다고 여기거나, 

이미 이루어진 좋음에만 초점을 맞추어 바라보거나, 

나쁜 측면을 무시하고 외면할 수도 있다. 


또 앞으로 좋음을 가져다 줄 측면을 보고 

미리 그 성취를 그리거나 

그 성취 가능성에 초점을 맞추거나, 

성취의 원인을 보거나, 

아직 이루어지 않은 상태를 성취된 부분으로 보는 등 

현실에서 긍정적인 자세로 임하여 

낙관주의적인 입장을 견지해나갈 수 있다. 


이들은 모두 나쁨과 좋음이 뒤섞인 현실의 내용에서 

좋은 측면을 찾아내 긍정적으로 바라보는 방안이 된다. 


주어진 현실에서 

올바른 수행목적과 관련하여 이상적인 기준에서 

좋음을 찾고 긍정적인 자세로 임하는 것 자체는  

현실 속에서 주어진 내용을 긍정하며 살아가게 하는 기능이 있고, 

바람직한 측면도 있다. 


예를 들어 이런 경우는 비록 현재는 많은 번뇌와 집착을 갖고 있지만, 

모든 생명은 장차 부처가 될 가능성을 갖고 있다고 관하는 경우와 같다.  


그러나 단순한 낙관주의는 

현실의 망상분별과 집착을 바탕으로 하여 좋음을 찾고 

낙관주의에 머무르는 것이어서, 

현실의 잠재된 문제점을 그대로 방치하고 

문제를 증가시키는 것이 되어 문제가 된다. 


예를 들어 현재 가난한 이가 물질에 집착한 가운데 

언젠가는 자신도 큰 부를 이루어 잘 살 수 있으리라고 낙관하거나, 

또는 지금 원한을 갚지 못하지만, 

언젠가는 복수를 할 수 있으리라고 낙관하면서 살아가는 것은 

그런 탐욕이나 분노의 집착에 바탕한 

잘못된 낙관주의의 형태가 되는 것이다. 

현실에서 취하는 단순한 낙관주의란, 이처럼 기본적으로 

망상분별과 집착에 바탕한 것이어서 

문제가 있는 것이다. 


단순한 현실적 낙관주의는 

비유하면 어떤 물건을 훔쳐 가진 자가 

자신이 당장 그 물건을 가져서 좋고 

다른 이가 피해를 보아 나쁘고 

그로 인해 장차 교도소에 갈 수도 있다는 점은 문제점이지만, 

이를 외면하고 그런 일이 없으리라고 기대하고 낙관하며 보내고 

붙잡혀 교도소에 갇히게 되면, 

자신이 영원히 갇혀 있지 않고 언젠가는 풀려나

다시 도둑질을 하게 될 수 있다고 생각하며 

낙관적으로 모든 것을 해석하며 현실에 안주하려는 경우와 같다. 



또한 이는 불교에서 현실에서 나쁨을 부각시켜 

집착을 제거하려는 입장과는 오히려 반대된다. 


불교에서는 좋음과 나쁨이 섞인 현실에서 

오히려 이를 모두 고통으로 보는 입장이다. [일체개고]

즉, 나쁨은 나뻐서 나쁘고,[고고]

좋은 것도 그것이 무상하여 사라지기에 나쁘다고 관하고 [괴고]

좋지도 않고 나쁘지도 않은 것은 변화하는 것이므로 나쁘다[행고]고 

보는 것이다. 


이는 불교가 특별한 비관주의적인 입장에 있기 때문은 아니다. 


현실에는 나쁨 외에도 좋음이 섞여 있고, 

그래서 앞의 낙관주의 입장처럼, 

현실을 정반대 방향으로 관하여 

각 현실에서 좋음을 찾아 낼 수 있다해도, 


그러나 그러한 좋음은 나쁨을 그 안에 갖고 있으며,  

장차 나쁨을 불러 일으키는 불완전한 좋음으로써, 

목적 상태로 볼 수 없기 때문이다. 


현실에서 오로지 좋은 면을 찾아 응시한다고 하여 

그 안에 들어 있는 나쁨이 

근본적으로 제거되는 것은 아니다. 


즉, 현실을 올바로 관찰하여 

괴로움이란 문제현상을 직시하여 

깨달음을 얻고 망상분별을 떠나고, 집착을 버리고 

이상적인 상태를 추구해야 함에도, 


현실의 문제를 올바로 보지 못하고 

현실에서 일부 좋은 점을 찾아내고 

이에 집착하여 안주하는 것은 문제인 것이다. 


따라서 이런 문제점을 직시하기 위해, 

불교에서는 현실 일체가 고통이라는 입장을 제시하고 

근본적인 문제해결을 취하고자 하는 것이다. 


불교의 생사즉 열반관에 의할 때에도 

현실 긍정적인 측면을 가질 수 있다. 

그러나 단순한 낙관주의와는 차이는 

현실에서 나쁨에 대해 어떤 입장을 취하는가에서 볼 수 있다. 


생사 즉 열반의 입장에서는 

이 나쁨이 본래 생멸현상 안에 

실답게 있지 않음을 관하여 

망상분별과 집착을 근본적으로 제거하여 

본래 생사현실이 곧 니르바나임을 관하는 것이다. 


이에 반해 

단순한 낙관주의의 입장은 

좋음과 나쁨에 대해 망상분별과 집착을 바탕으로 

나쁨을 외면하고 좋음을 집착하여 찾고 구하는 입장에서 

이루어지는 것이어서, 

앞에서 본 것과 같이 망상분별과 집착이 갖는 

부정적인 면을 지니고 있다. 


그리고 이 경우에는 그런 망상분별과 집착으로 인해 

집착하는 바를 이루기 전까지 갈증과 불쾌를 느끼고 

집착하는 바가 무너질 까 두려움과 불안에 시달리며

또 집착하는 바가 무너져 사라지면 고통과 불쾌를 

받게 되는 구조를 그 안에 함께 갖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이는 

현실에 존재하는 나쁨을 없애지도 못하고 

당장의 좋음에 집착하여 

더 큰 나쁨을 불러 일으키고 

윤회의 고통을 더 증가시킨다는 점에서 차이가 있다. 


부처님의 가르침은 바로 이런 문제점을 

올바로 보라는 것이다. 

따라서 이런 입장에서 생사 즉 열반의 내용을 

단순한 낙관주의로 현실의 좋음을 찾고 

단순히 긍정하여 임하는 자세와는 구별하여야 한다고 본다. 





- 개인적으로 망상분별 집착을 떠나지만, 다른 생명의 고통의 현실을 외면하는 잘못 


한편, 자신이 생사현실이 곧 니르바나임을 관하게 되어,  

망상분별과 집착을 제거하여 

그로 인해 그 자신의 입장에서는 

이제 어떤 현실도 문제가 없게 되었더라도, 

그것만으로는 현실 그대로 

아무런 문제가 없는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다른 생명들은 여전히 그렇게 깨닫지 못하고 

망상분별과 집착을 갖고 살아가기에 

그 망상분별과 집착의 바탕에서 

여전히 다른 생명들이 고통을 받는 그 현실은 

문제가 있는 것이다. 


그리고 현실이 그처럼 다른 생명들 입장에서는 

여전히 문제가 있기에 

수행자는 자신의 입장에서는 비록 문제가 없다하여도 

다른 생명들의 입장에서 다른 생명들이 

이런 망상분별과 집착으로 인해 받게 되는 고통을 

제거해줄 수 있도록 

수행을 계속해나가야 하는 것이다. 




- 집착이 없으면 아무렇게 행해도 된다고 생각하는 잘못(악취공견)


모든 생멸현실은 본래 생멸이 없는 것이고 니르바나이며, 

모두 차별없이 공하다. 


그래서 이런 사실을 관하고 

망상분별과 집착을 버려야 함을 강조하게 된다. 


그런데 이처럼 모든 것이 차별없이 공함을 관하고, 

망상분별과 집착을 버리면 

이제 해야 마땅한 일을 아무것도 하지 않거나, 

또는 반대로 아무 것이나 아무렇게 행해도 

무방하다는 생각을 하기 쉽다. 


선취공견은 

이래도 저래도 모두 차별없이 공한데, 

왜 굳이 가장 좋고 좋은 상태를 향해 나아가지 않을 것인가라고 

생각하여 수행에 정진해나가는 입장이라면, 

악취공견은 

이래도 저래도 모두 차별없이 공하므로, 

아무렇게 행해도 무방하다는 입장이라고 할 수 있다. 


그래서 모든 것이 공하여 본래 생멸이나, 생사도 없고 

선악의 차별도 본래 없고, 지옥과 극락이 둘이 아니며, 

일체가 다 니르바나임을 깨닫고 

망상분별과 집착을 버렸다고 하면서도 

실제로 행하는 일은 기존에 행하던 습관[훈습된 습기]에 따라 

평소에 집착하던 내용을 그대로 고집하며 나아가며, 

거침없이 악행을 저지르기도 한다. 

이런 입장을 악취 공견이라고 표현한다. 


이런 악취공견을 취하고 고집하며 

탐욕을 갖던 것을 그대로 탐욕을 갖고 행하고, 

분노를 갖던 것에 그대로 분노를 일으켜 행하는 식으로 나아가면 

그 결과로 만나는 현실은 

역시 고통스럽고 악한 현실이 나타나게 된다. 


물론 이론적으로는 이런 현실도 

니르바나의 바탕에 본래 있는 것은 같다. 

본래 공하고 니르바나라는 것은 

이런 경우에도 그렇다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론상으로는 

이런 경우 그가 실제로 망상분별과 집착을 버렸다면, 

그 결과 지옥과 같은 현실을 만나게 되어도 그 혼자만은 

그 상태에서 여전히 니르바나의 상태에 머물 수 있다고 할 것이다. 

그렇지만, 다른 생명에게는 그로 인해 

고통과 악을 증가시키는 결과를 초래하게 되는 점이 문제다. 


또한 악취공견을 취한 이는 사실은 

수행과 깨달음의 부족으로 

공과 현실의 관계에 대해 올바로 깨닫지 못하고,  

공에 대하여 오직 있지 않음(차별 없음 등)이라는 한쪽에 치우친 견해를 갖고 

없지 않음(같지 않음 등)의 면을 보지 못한 것이며, 

또한 기존의 습관[훈습된 습기]을 완전히 떠나지 못하고 

악행을 행하게 된 것이므로, 


자신이 마음대로 행함으로 인해 

지옥과 같은 상황에 처하게 되면, 

자신이 마음대로 행하던 때와는 달리, 그 상황에서는 

망상분별과 집착을 버리지 못하고 

그대로 그 고통을 모두 받게 되는 것이다. 


한편, 실재의 바탕에서 

비록 선과 악이 본래 다름이 없고 

차별이 없다 하지만, 

그러나 또 한편 실재의 바탕에서 

이들이 완전히 동일하고 같은 것이라고 

볼 수 없음을 생각해야 한다. 


유가사지론에서는 

이러한 악취공견을 갖느니, 

차라리 내가 실답게 있다는 망상분별 즉 아견을 갖고 

사는 것이 차라리 낫다고도 말한다. 


즉, 다음과 같이 제시하고 있다. 


... 


세존은 비말한 뜻[密意]에 의하여 말씀하시되, 

'차라리 한 종류의 나라는 소견[我見]을 일으키는 이와 

같게 될지언정, 

한 종류의 나쁘게 공을 취하는 이[惡取空者]와 

같게 되지 말라'고 하셨다. 


무슨 까닭이냐 하면, 

나라는 소견을 일으키는 이는 

다만 알 바의 경계에 대해서만 헷갈린 것이요, 

온갖 알 바의 경계는 비방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런 인연으로 말미암아 

모든 나쁜 길에는 떨어지지 아니하며, 

다른 법을 구하여 괴로움에서 해탈하려 하는데도 

헛되이 속지 않고 

머물러 있지도 아니하며, 

법에 대해서나 진리에 대해서 

역시 잘 이룩하고, 

모든 배울 곳에서도 느즈러지지 아니한다. 


그러나 

나쁘게 공을 취하는 이는 

알 바 경계에 대해서도 헷갈리고, 

온갖 알 바의 경계 역시 비방하나니, 

이런 원인으로 말미암아 

모든 나쁜 길에 떨어지며, 

다른 법을 구하거나 괴로움에서 해탈하려 하는 데서도 

헛되이 속고 

역시 머물러 있으며, 

법에 있어서나 진리에 있어서도 

잘 이룩하지 못하고, 

모든 배울 곳에서도 지극히 느즈러짐을 낸다. 


이와 같이 실제 있는 일을 

덜하고 줄이는 이는 

부처님의 말씀하신 법과 비나야에 대하여 심히 무너지게 한다.


무엇을 나쁘게 공을 취하는 이라고 하느냐 하면, 

어떤 사문이거나 바라문이 

그것으로 말미암아 공 또한 믿어 받지 아니하고, 

여기에서 공도 믿어 받지 않는 것이니, 

이와 같은 것을 나쁘게 공을 취하는 이라고 한다.


왜 그러냐 하면, 

그것으로 말미암아서 

공은 저 실로 이는 없는 것이요, 

여기서의 공은 

이는 실로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런 도리로 말미암아 공이라고 말하나니, 

만약 온갖 것이 도무지 아무 것도 없다고 말하면 

어디서 누가 무엇 때문에 공이라고 하였겠는가. 


역시 이로 말미암아 

여기서 곧 말하여 공이라 함은 

마땅하지 아니하다. 


그러므로 나쁘게 공을 취하는 이라고 한다.

...


K0570V15P0771a06L; 彼見者世尊依彼密意說言寧如一

K0570V15P0771a07L; 類起我見者不如一類惡取空者何

K0570V15P0771a08L; 以故起我見者唯於所知境界迷惑

K0570V15P0771a09L; 不謗一切所知境界不由此因墮諸

K0570V15P0771a10L; 惡趣於他求法求苦解脫不爲虛誑

K0570V15P0771a11L; 不作稽留於法於諦亦能建立於諸

K0570V15P0771a12L; 學處不生慢緩惡取空者亦於所知

K0570V15P0771a13L; 境界迷惑亦謗一切所知境界由此

K0570V15P0771a14L; 因故墮諸惡趣於他求法求苦解脫

K0570V15P0771a15L; 能爲虛誑亦作稽留於法於諦不能

K0570V15P0771a16L; 建立於諸學處極生慢緩如是損減

K0570V15P0771a17L; 實有事者於佛所說法毘奈耶甚爲

K0570V15P0771a18L; 失壞

K0570V15P0771a19L; 云何名爲惡取空者謂有沙門或婆

K0570V15P0771a20L; 羅門由彼故空亦不信受於此而空

K0570V15P0771a21L; 亦不信受如是名爲惡取空者何以

K0570V15P0771a22L; 故由彼故空彼實是無於此而空此

K0570V15P0771a23L; 實是有由此道理可說爲空若說一

K0570V15P0771b01L; 切都無所有何處何者何故名空亦

K0570V15P0771b02L; 不應言由此於此卽說爲空是故名

K0570V15P0771b03L; 爲惡取空者云何復名善取空者謂

...


참조 유가사지론 보살지(菩薩地) 지유가처(持瑜伽處) 진실의품(眞實義品)





- 없음에 지나치게 치우쳐 모든 것을 부정하는 잘못 


한편 수행자가 

생사 즉 열반 즉, 일체 현상이 모두 본래 니르바나임을 깨달아, 

망상 분별과 집착을 제거하려고 노력할 때 


이를 바탕으로 집착을 제거함에 그치지 않고, 

자칫 일체가 없다는 견해에 치우쳐 

모든 것을 없다고 부정하여, 

고요함에만 머무르려 하고 

지혜를 키우고 중생을 제도하는 

많은 수행을 외면하는 잘못을 일으키기 쉽다. 


그것은 생멸하는 현상이 

영원불변한 실체가 없고 [무아, 무자성] 

그 실재가 공하며, 

실답지 않은 내용임을 보고 


또 이에 대해 관념을 세우고 분별하는 것이 

모두 망상 분별임을 관하여 

집착을 버리고 

니르바나에 도달하기 때문이다. 



이는 현실 안의 감각현실(의타기상)과 

관념의 세계(변계소집상) 등이 


모두 무아, 무자성이며(승의무자성)

실재가 아니며(생무자성) 

관념에는 감각현실(자상)이 없음(상무자성)을 관하여 

이들이 실다움이 '없음'을 관하여  

집착을 제거하는 것을 말한다. 


그러나 이처럼, 

없음(승의무자성, 생무자성, 상무자성)의 측면을 통해 

그것들이 실답지 않음을 관하여 

그에 갖는 집착을 제거하는데 그치지 않고 

오로지 '없다'는 견해에만 지나치게 치우치게 되면, 

오히려 현실에서 없음의 측면만을 강조하고 


반대로 실재를 바탕으로 

감각현실과 관념이 나타나 존재한다는 

'있음'의 측면을 외면하기 쉽다. 


그리고 온 생명을 구제하고자 하고 

지혜를 키워 지혜의 장애[소지장]을 제거하는 

많은 수행을 외면하고 

자신의 고요함에만 빠지기 쉽다. 


자신만 회신멸지의 열반에 드는 것을 목적으로 하지 않고, 

온 생명을 제도하고자 하는 입장에서는 

이는 문제가 아닐 수 없다. 


승의무자성, 생무자성, 상무자성의 3가지 없음[3무성]에 의해 

오로지 없다는 견해에만 치우치고 

원성실상과 의타기상 변계소집상을 오로지 부정해버리는 

경우의 폐해에 대해 

해심밀경에서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나온다. 


...

그들은 자비가 박약하기 때문에 

모든 중생을 이롭게 하는 일을 저버리며, 

한결같이 뭇 괴로움을 두려워하기 때문에 

지어야 할 모든 행을 일으키는 것을 저버린다. 


나(부처님)는 

중생들을 이롭게 하는 일을 한결같이 저버리는 자와 

지어야 할 모든 행을 일으키는 것을 한결같이 저버리는 자도 

도량에 앉아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을 수 있다고 끝내 말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그를 한결같이 고요함에만 빠지는 성문이라 한다. 


'''


만일 모든 생명[유정]들이, 

널리 말하건대 

내지 아직 상품(上品)의 복덕과 지혜 두 가지 자량을 쌓지 못했고 

성품이 강직하지 못하다면, 


성품이 강직하지 못해 

비록 폐하고 세울 것을 생각하고 선택할 힘과 능력이 있긴 하지만 

아직도 자기의 견취(見取)에 머물러 있다면, 

그들은 이와 같은 법을 듣더라도 

나의 매우 깊은 밀의의 말을 

여실히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이러한 법에 믿는 마음을 낸다고 해도 

그 뜻을 말을 따라 집착해 

‘일체 법은 단정코 모두 자성이 없으며, 

단정코 생하지도 멸하지도 않으며, 

단정코 본래 고요하며, 

단정코 자성이 열반이다’라고 할 것이다. 


이런 까닭에 모든 법에 대하여 

없다는 견해와 

모습이 없다는 견해를 얻을 것이다. 


없다는 견해와 모습이 없다는 견해를 얻었음으로써 

일체 모습은 모두 무상(無相)이라고 부정해 버리며, 


모든 법의 변계소집상과 의타기상과 원성실상을 

비방하고 부정할 것이다. 


무슨 까닭인가? 


의타기상과 원성실상이 있는 까닭에 

변계소집상도 시설할 수 있는 것이니, 

만일 의타기상과 원성실상을 없는 모습이라고 본다면 

그는 또한 변계소집상도 

비방하고 부인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런 사람은 세 가지 모습을 비방하고 부인한다’고 말하니, 

비록 나의 법에 대하여 법이란 생각을 일으키긴 하지만 

뜻이 아닌 것 가운데서 

뜻이란 생각을 일으키는 것이다. 


나의 법에 대하여 법이란 생각을 일으키고 

뜻 아닌 가운데 뜻이란 생각을 일으키는 까닭에, 

옳은 법 가운데서 옳은 법이라 지니고 

잘못된 뜻 가운데서 옳은 뜻이라고 지닌다. 


그는 법에 대하여 믿음을 일으킨 까닭에 

복덕이 증장하긴 하지만 


뜻이 아닌 것에 대하여 집착을 일으킨 까닭에 

지혜를 잃으며, 

지혜를 잃는 까닭에 

광대하고 무량한 좋은 법에서 물러난다. 


다시 어떤 유정이 

법을 법이라 하고 

뜻 아닌 것을 뜻이라고 하는 말을 남에게서 듣고 

그 소견에 따른다면, 


그는 곧 법에서 법이란 생각을 일으키고 

뜻 아닌 것에서 뜻이란 생각을 일으켜, 

법을 집착하여 법이라 하고 

뜻 아닌 것을 집착하여 뜻이라고 할 것이다. 


이런 까닭에 마땅히 알라, 

그들은 함께 선법(善法)에서 물러나리라. 

'''

참조 해심밀경  5. 무자성상품(無自性相品) 




결국 부처님은 

승의무자성, 생무자성, 상무자성을 말할 때 

이를 통해 

원성실상과 의타기상, 변계소집상을 모두 

무시하라고 가르치는 것이 아니다. 


3 무성을 통하여 집착을 버린 가운데 

없음과 있음 양 극단에 치우치지 않아야 함을 

강조하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따라서 본래 청정한 니르바나를 바탕으로 

나타나는 무상한 현실 속에서 

이에 대해 3 무성을 관하여 

집착을 버리게 되면, 

무상한 현실의 고통에서 벗어날 수 있게 되고 


그렇게 집착을 버린 가운데 

현실 안에서 올바른 관찰과 함께 

수행에 정진하여 지혜를 키움으로써 

생명을 구제하는 

광대무변한 서원을 실천해나갈 바탕이 

마련되는 것이다. 



결국 해탈과 니르바나를 얻는 것이 기본적으로  

중요하므로, 

망상분별과 집착을 제거하여 

해탈과 니르바나를 얻어야 한다고 보지만, 


생멸하는 현상, 생사가 모두 그대로 

니르바나임을 깨달은 상태에서는 

이 니르바나를 바탕으로 


중생을 제도하기 위하여 

복덕과 지혜를 함께 갖추고 

법신을 이루고 성불하는 데 

목표를 두어

수행을 정진하여 나아가야 한다고 할 것이다. 




해심밀경에서는 이런 각 수행으로 얻는 

차별을 다음과 같이 설한다. 

...

해탈신에 의지하는 까닭에 

일체 성문이나 독각과 모든 여래는 

평등하고도 평등하다고 말하며, 


법신을 말미암는 까닭에 차별이 있다고 말하며, 

여래의 법신에 차별이 있는 까닭에 

무량한 공덕과 가장 수승한 차별이 

산수(算數)와 비유로도 미치지 못한다.” 

...

...

K0154V10P0738c14L; 男子名解脫身由解脫身故說一切

K0154V10P0738c15L; 聲聞獨覺與諸如來平等平等由法

K0154V10P0738c16L; 身故說有差別如來法身有差別故

K0154V10P0738c17L; 無量功德最勝差別筭數譬喩所不

K0154V10P0738c18L; 能及曼殊室利菩薩復白佛言


참조 해심밀경 8. 여래성소작사품





○ 생사 즉 열반에서의 망상분별의 제거와 수행방안 


생사 즉 열반의 입장이란, 


일체 생멸현상은 그 안에 아무리 좋음이 있다고 해도 

그것이 결국 멸해 없어지기에 

모두 고통으로 보고, [일체개고]

반대로 공한 실재에는 그런 생멸이나 고통이 있다 할 수 없기에 

청정한 니르바나로 보는 전제에서 출발한다. 


그런데, 다시 

현실은 그런 공한 실재를 떠나지 않은 것이어서 

현실이 곧 공한 실재라고 할 수 있다. (색즉시공..)


또 한편, 생멸이나 고통이란 관념은   

본래 실체가 없고, 

실재가 아니고 


그 관념은 자상을 갖지 않고 

또 그 관념은 감각현실에 없는 것으로서, 

실답게 있는 것이 아니고 

망상분별인 것이다. 


따라서 생멸하는 현상에는 

본래 생멸과 생사, 고통이 실답게 없는 것이어서, 

본래 니르바나라고 보는 것이다. 


그런데도 현실이 문제인 것은 

바로 각 생명이 일으켜 갖는 

망상분별과 집착 때문인 것이다. 


따라서 이런 망상분별과 집착을 갖고 살아가는 

현실은 본래의 니르바나를 덮어 가리우기 때문에 

위 내용만으로 곧 현실 그대로를 

문제가 없는 상황으로 볼 수는 없는 것이다. 



그런데 생사 즉 열반을 강조하다보면, 

자칫 망상분별과 집착을 갖고 살아가는 현실이 

그 상태 그대로 아무 문제가 없는 것이라고 

잘못 생각하기 쉽다. 


또 생사가 모두 본래 니르바나이기 때문에 

심지어 어떻게 행하던 아무 문제가 없다고 

생각하기도 쉽다. 


그러나 그렇지 않은 것이다. 


그래서 위에서 

생사 즉 열반의 입장을 취할 때, 

가질 수 있는 문제점들을 나열해 살핀 것이다. 


그것은 

- 망상분별과 집착의 상태로 다시 물러남[퇴전]의 잘못

- 현실 그대로가 아무 문제가 없다고 착각하는 잘못 

- 현실의 문제 상태에서 좋은 부분만 보고, 낙관적으로 안주하는 잘못

- 개인적으로 망상분별 집착을 떠나지만, 다른 생명의 고통의 현실을 외면하는 잘못 

- 집착이 없으면 아무렇게 행해도 된다고 생각하는 잘못(악취공견)

- 없음에 지나치게 치우쳐 모든 것을 부정하는 잘못 

등으로 요약할 수 있다. 


이런 상태에서 수행자가 

생사 즉 열반의 입장에서 망상분별과 집착을 제거하지만, 

그렇다고 완전히 회신멸지의 니르바나에 드는 것도 아니어서, 

생사를 피하지 않고 

각 생에서의 감각현실과 관념을 일으켜 가질 때 

위와 같은 입장을 취하지 않고 

어떤 입장에서 무엇을 목표로 임해야 하는가 하는 것이 

문제가 되는 것이다. 


우선 생사 즉 열반의 입장은 

본래 현실에서 행하는 

생사나 고통 등 여러 관념적 분별이 모두 망상분별이며, 

이에 대해 집착을 갖는 것이 고통을 불러 일으킨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처럼 대부분의 관념적 분별 판단이 

망상분별의 성격을 갖기 때문에 

현실에서 행하는 판단 가운데 

망상분별이 아닌 판단으로는 

'이런 분별판단이 망상분별이라고 하는 판단' 정도만을 생각할 수 있다.



입능가경에는 다음과 같은 부처님 말씀이 나온다. 



여래께서 말씀하시기를, 


'나는 어느 밤에는 큰 보리를 증득하였으며, 

어느 밤에는 반열반(般涅槃)에 들겠으며, 

나는 그 중간에 한 자(字)도 말하지 아니했으며, 

부처님의 말씀은 말씀이 아니다'라고 하셨으니, 

...

대혜여, 

어떤 것이 자신이 안으로 증득하는 법에 의함인가? 


저 과거의 여러 부처님·여래께서 증득하신 법이니, 

나도 또한 이와 같이 

'더하지도 줄지도 않는 자신이 안으로 증득하는 모든 경계'를 증득하여 

언어(言語)로 분별하는 상을 떠나고, 

두 가지 명자(名字)를 떠났노라. 

...



K0160V10P0867a06L; 我何等夜證大菩提何等夜入般涅

K0160V10P0867a07L; 槃我於中閒不說一字佛言非言世

K0160V10P0867a08L; 尊依何等義說如是語佛語非語佛

K0160V10P0867a09L; 告大慧言大慧如來依二種法說如

K0160V10P0867a10L; 是言何者爲二我說如是一者依自

K0160V10P0867a11L; 身內證法二者依本住法我依此二

K0160V10P0867a12L; 法作如是言大慧云何依自身內證

K0160V10P0867a13L; 法謂彼過去諸佛如來所證得法我亦

K0160V10P0867a14L; 如是證得不增不減自身內證諸境

K0160V10P0867a15L; 界行離言語分別相離二種字故大

K0160V10P0867a16L; 慧何者本住法大慧謂本行路平坦

...


[참조 입능가경 4. 불심품(佛心品)]


부처님께서 수많은 설법을 하셨음은 

중생들이 대부분 아는 내용인데 

부처님이 한 자(字)도 말하지 아니했다고 밝히는 

내용은 위와 같은 내용과 관련하여 

이해해야 한다고 본다. 




그러나 분별이 망상분별이라고 하여 

생사현실 속에서 감각현실과 분별 자체가 나타나는 것을  

부정하는 것은 아니다. 


단지 관념의 내용(변계소집상)을 감각현실과 

실재에 관통시키고 그것이 진짜의 내용으로서 

영원불변한 실체의 내용이라고 잘못 분별하여 

집착을 일으키고 행하면 

이것을 문제라고 하는 것이다. 


따라서 수행자가 생사현실을 피하지 않고 

행하는 분별은 비록 망상분별이라고 해도 

수행자가 그것이 망상분별임을 깨달은 상태에서 그 분별을 행하고, 

또 망상분별과 집착에 바탕해 아무렇게 분별을 행하는 것이 아니고, 

중생 제도의 목적하에 공한 실재에 상응하여 집착을 떠나 분별함은 

망상분별의 독을 일으키지 않는다고 할 수 있다. 


분별이 망상분별이고 희론임을 깨달음이 

망상분별로 인한 독을 제거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수행자는 

모든 것이 꿈과 같고 환영과 같은 것이어서 

진짜가 아니지만 마치 진짜인 것처럼 나타나는 것이며, 

분별판단이 망상분별임을 깨달은 바탕에서, 

비록 일체의 분별판단이 

실답지 않은 관념(변계소집상)에 바탕한 

희론(戱論- 이치에 맞지 않는 실없는 말장난과 같은 논의)이라고 할 것이지만, 


현실에서 각 생명이 갖는 

망상분별과 집착을 제거하고 

온 생명을 제도하기 위한 방편으로 


공한 실재에 상응하여 집착을 떠나 

얻을 것이 없음을 방편으로 하여 

분별하고 실천하는 것이 요구되는 것이다. 


이런 사정에 대해 

대반야바라밀다경 도토품에서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나온다. 


...

선현아, 

네가 말하기를 만일 온갖 법이 모두가 제 성품이 공할진대 

보살마하살이 어떻게 무엇을 배울 수 있겠느냐. 


만일 배울 곳이 있다면 

세존은 희론(戱論)이 없는 곳에서 희론을 말하되 

모든 법에서 이것이다, 저것이다, 이 까닭이다, 이 때문이다, 

내지 여래의 법이다 하는 것이 아닌가 하였거니와, 


만일 모든 생명(유정)들이 

온갖 법의 제 성품이 모두 공한 것을 '알면' 

모든 보살마하살은 온갖 법을 배워서 일체지지를 증득하여 

모든 생명들을 위해 건립하고 연설하지 않으리라. 


그러나 모든 생명이 

모든 법의 제 성품이 모두 공한 것을 '알지 못하는 까닭에' 

모든 보살마하살은 결정코 온갖 법을 배워서 

일체지지를 증득하여 

모든 생명들을 위해 건립하고 연설하여야 하느니라. 

...

K0001V04P0210c03L; 菩薩摩訶薩能證無上正等菩提善

K0001V04P0210c04L; 現如汝所言若一切法皆自性空云

K0001V04P0210c05L; 何菩薩摩訶薩於何處學若有所學

K0001V04P0210c06L; 將無世尊於無戲論而作戲論謂有

K0001V04P0210c07L; 諸法是此是彼由是爲是廣說乃至

K0001V04P0210c08L; 是如來法者善現若諸有情知一切

K0001V04P0210c09L; 法皆自性空則諸菩薩摩訶薩不應

K0001V04P0210c10L; 學一切法證得一切智智爲諸有情

K0001V04P0210c11L; 建立宣說以諸有情不知諸法皆自

K0001V04P0210c12L; 性空故諸菩薩摩訶薩定應學一切

K0001V04P0210c13L; 法證得一切智智爲諸有情建立宣

K0001V04P0210c14L; 說善現當知諸菩薩摩訶薩於菩薩

...

[참조 대반야바라밀다경 도토품]


심밀해탈경에서도 다음과 같은 내용이 나온다. 

...

“이른바 성인이 성인의 소견을 알고 

성인의 지혜로 성인의 지견(智見)을 아니, 

증득한 바를 말할 수 없건만 

그 언어가 없는 법을 말씀하려 하여 

형상에 의지하여 저러한 유위ㆍ무위를 말씀합니다.

...

K0153V10P0674a08L; 說事佛子何者爲事而言不空說所謂

K0153V10P0674a09L; 聖人知聖人見聖智知聖見見無言所

K0153V10P0674a10L; 證爲欲說彼無言語法依相說彼有爲

K0153V10P0674a11L; 無爲善男子言無爲者惟是如來名

...

[참조 심밀해탈경 2. 성자선문보살문품(聖者善問菩薩問品)]




그리고 보살은 이런 중생제도의 목적을 위해 

생사를 피하지 않고 

올바른 수행을 즐겁게 잘(유희, 신통) 실천해 나가는 것이다. 


그리고 이런 목적을 위한 보살의 수행은 

현실에서 일반 생명이  

망상분별과 집착에 바탕하여 고통을 발생시키고 증가시켜나가는 방식의 

분별과 행위를 중지하고 

그와는 반대로 행해 나가는 것을 의미한다. 


즉, 수행자는 현실에서 일반적으로 생각하고 행하는 방식과는 반대로, 

집착없이 얻을 것이 없음을 방편으로 

제한없이 온 생명을 위하여 

1`- 다른 생명에게 다른 생명이 집착하는 좋음을 베풀기 위한 분별과 실천

2`- 다른 생명이 집착하는 좋음을 침해하지 않고 나쁨을 주지 않기 위한 분별과 실천 

3`- 다른 생명이 자신의 좋음을 침해하고 나쁨을 줄 때 좋게 해석하여 평안이 참고 

미움과 원망을 버리고 용서하고 사랑을 하기 위한 분별과 실천을  

해나가는 등으로 

보시-정계-안인-정진-정려-반야-방편-원-력-지의 수행을 해나가는 것이 

요구되는 것이다. 


아래에서 수행자가 생사 즉 열반의 입장을 

바탕으로 생사현실을 피하지 않고 

수행을 해나가는 내용을 좀 더 자세히 살피기로 하자. 




○ 종교 일반의 현실부정 공상주의적 이상성과 불교


현실에 존재하는 종교는 대부분 

현실에서 추구하는 세속적 가치를 부정하고 

대신 천국이나 하늘, 지옥과 같은 세계를 제시하며 

하늘에 태어나 살아가는 것을 목표로 제시한다. 


예를 들어 

지옥은 고통과 두려움이 극심한 상태로 장구하게 지내는 상태이고 

반대로 하늘은 즐거움과 희망이 가득한 상태로 장구하게 지내는 상태이다. 

그리고 각 종교는 각 종교에서 제시하는 절대자를 믿고 따르며 

선을 실천하여 사후에 하늘에 태어나 살아가는 것을 

주된 목표로 제시한다. 


그러나 이런 내용은 현실의 사람들이 

직접 보거나 경험하지 못하고 

쉽게 인정해 받아들일 수 없는 내용이다. 


이처럼 종교가 제시하는 하늘이나 지옥 등의 세계는 

살아 있는 동안, 현실에서 경험하고 확인할 수 없는 사정이 있기 때문에, 


현실 내용만을 사실로 받아들이며  

각 종교에서 제시하는 그런 내용을 사실로 받아들이지 않는 입장에서는 

이런 내용들은 모두 

비현실적이며, 공상적이고 허구의 종교적 내용으로 볼 여지가 있다. 



부처님의 가르침은 어떤가. 


부처님도 현실을 무상하고 괴로움이라고 부정하는 한편, 

공상적 내용을 제시하며 

이를 추구할 것을 제시하는 것인가?  


불교도 물론 다른 종교와 유사하게 

지옥, 아귀, 축생, 인간, 아수라, 하늘과 같은 

여러 초경험적인 세계를 

3계6도의 내용으로 제시함과 함께 


또 다른 종교와는 다르게, 

각 생명이 무한한 시간 동안 

이런 세계를 윤회하며 고통을 받게 된다는 윤회설을 제시한다. 


따라서 자칫 불교는 현실을 부정하면서 

사람들이 경험할 수 없는 여러 내용을 제시하고 

한편으로는 이처럼 윤회하는 3계6도의 여러 상태 가운데 

가장 좋은 상태인 하늘의 상태에 

태어나는 것을 목표로 수행하는 것이라고 오해할 수 있다. 


따라서 현실만을 중시하는 입장에서 본다면, 

불교 또한 현실을 부정하면서 공상적 허구 내용을 

제시하는 종교라고 오해받을 여지가 있다. 


그러나 불교는 사람들이 쉽게 믿고 받아들일 수 없는 

지옥, 아귀, 축생, 인간, 아수라, 하늘의 세계를 제시하지만, 

그렇다고 이런 상태를 목표로 추구하라고 가르치지 않는다. 


예를 들어 색계의 하늘 범천의 수명은 

1겁을 넘는 것으로 

제시되고 있다. 


그러나 불교에서는 이런 하늘 등에 태어나면 

그처럼 장구한 시간동안 

안락하고 즐거운 생활을 할 수 있음을 제시하지만, 


그러나 한편, 이런 하늘에서의 안락함도 

그것이 무상하여 끝이 있다고 설하며, 

불교가 제시하는 궁극적 목표상태는  

이와는 다르다고 제시하는 것이다. 


그러나 일반인의 입장에서는 

타화자재천이나 범천과 같은 하늘이 존재함도 인정하기 힘들고 

이런 여러 세계를 생명이 윤회하며 무한히 살아간다는 것도 

역시 받아들이기 힘든 데, 

불교에서는 공상적이라고 할 이런 내용들을 

사실이라고 제시하는 한편, 

다시 이를 목표상태로 제시하는 것이 아니라, 

이를 초월한 더 높은 상태를 목표상태로 제시한다는 점에서 

불교는 한층 더 공상적인 종교라고 볼 여지도 있다. 


산수로 헤아리기 힘든 1겁에 가까운 수명과 복을 

받는 하늘을 제시하면서도 

이 역시 모두 무상한 것이어서 

전체적으로 생명이 괴로움을 받고 윤회하는 과정의 

일부로 관하며 

이런 상태를 모두 벗어나야 한다는 부처님의 가르침은 

일반인의 입장에서는 

상상을 초월하는 내용이 아닐 수 없다. 


그러나 불교는 오히려 이렇게 세계를 관하는 것을 

올바른 관찰이라고 한다. 


비유하면 사람이 누리는 수명과 복이 

일반 세균이나 곤충의 삶에 비한다면, 

비교하기 힘들 정도로 복이 많고 수명이 긴 것이지만, 

그렇다고 하여 사람이 번뇌와 고통에서 

끝내 자유롭지 못한 것과 사정이 같은 것이다. 


이처럼 현실도 무상하다고 부정하고, 

복과 수명이 수승한 하늘을 목표로 하는 것도 아닌 가운데 

부처님이 제시하는 목표는 

고통의 윤회를 끊고 

해탈과 니르바나에 이르는 것이다. 


그런데 이 니르바나의 상태는 

현실을 부정하는 한편, 

현실을 긍정하는 이중적인 측면을 갖는다. 


같은 현실을 놓고 

한편으로는 괴로운 윤회과정이라고 제시하고, 

또 한편으로는 이 현실이 

본래 그런 괴로움이 소멸된 니르바나의 상태라고 제시하는 것은 

분명 서로 이중적이고 

모순되는 내용으로 볼 수 있다. 


물론 현실에 본래 니르바나가 갖추어져 있다지만, 

현실에서 괴로움을 떠나 니르바나에 머무르려면, 

현실이 본래, 

그 실재가 공하며, 무아, 무자성이어서 생멸이 본래 없고, 

니르바나의 상태임을 관할 수 있는 깨달음과 

이런 깨달음을 통해 현실에서 망상분별과 

번뇌에 대한 집착을 버린다는 것이 요구된다. 


그래서 같은 현실을 놓고 

괴로움을 받는 상태를 벗어나, 

본래의 니르바나의 상태를 확인하고 안온함을 누리게 되는 계기는 

현실의 정체에 대해 올바로 관하는 지적 깨달음(혜해탈, 소지장의 제거)과 

번뇌와 집착을 버리는 수행(심해탈, 번뇌장의 제거)에 있다고 

이해할 수 있다. 


이렇게 불교의 궁극적인 목적인 해탈과 

니르바나가 제시되기 때문에 


진리에 바탕한 가운데 

불교는 깨끗하지 못한 현실을 부정하면서도 

또 가장 현실을 깨끗한 형태로 긍정하는 측면을 갖게 되고 

더 나아가 현실 속에서 윤리적인 측면으로 

가장 원대하고 올바르며 이상적인 목표를 추구하며 향해 나아가는  

이상적이면서 현실적인 측면을 함께 갖게 된다. 


이런 측면을 우선 

부처님의 모습을 통해서 모두 찾아 볼 수 있다. 



○ 현실부정적인 측면 - 깨끗하지 못한 현실의 부정


우선 부처님은 현실 속에서 향락을 누리고 

장차 왕이 될 수 있는 왕자의 신분에서 

왕궁의 생활을 버리고 출가를 한다. 


이는 현실에서 사람들이 집착을 갖고 추구하는 세속적 가치를 

부정하고 떠나며 버리는 것으로서 

곧 현실을 부정하는 측면으로 이해할 수 있다. 


그리고, 현실의 일체가 무상하며 괴로움이라고 관하고 

이에 대한 탐욕을 버리고 집착을 버려야 한다는 가르침은 

바로 이런 측면과 직접 관련되는 것이다. 



○ 현실긍정적인 측면 - 깨끗한 형태로 현실의 긍정


그런데 부처님이 깨달음을 구하는 과정 

그리고 깨달음을 얻은 이후 

현실에서 살아가는 모습은 

낡은 옷을 입고 구걸을 하면서 살아가시는 모습이다. 


이처럼 일반적으로 

사람들이 생활하기 힘들다고 여기고 

곤란함을 느낄 그런 현실상황에서도  

부처님은 가장 지극한 안온함과 행복을 

자신이 얻는다고 강조한다. 


증일아함경 41. 막외품(莫畏品)에는  

석존이 빈비사라왕과 자신을 비교하며 

왕으로 향락을 누리며 지내는 빈비사라왕보다 

자신이 더 즐거움을 누린다고 설하는 부분이 나온다. 


상식적으로 볼 때 

향락과 권세를 누리며 살아가는 현실의 왕이 

낡은 옷을 입고 구걸하며 살아가는 석존보다 

더 즐거움을 누리며 살아간다고 보는 것이 일반적이다. 


그러나 생각해보면, 

빈비사라왕이 왕으로서 누리는 즐거움은 

향락과 즐거움을 누릴 수 있는 조건이 충족된 상태에서만 

한시적으로 느끼는 즐거움에 불과하다. 


현실에서 왕이 왕으로서 누리는 즐거움이란 그런 

제한된 조건이 충족된 잠시간만 가능한 것이다. 


반면 석존이 느끼는 즐거움이란, 

가장 힘들고 고통스러운 상황에서부터 

얻고 누리는 즐거움이 된다. 

따라서 이는 다른 모든 경우에도 항시

즐거움을 얻을 수 있음도 함께 의미한다. 


이런 측면에서 본다면 

석존이 누리는 즐거움은 

극도로 궁핍하고 악조건인 현실도 

가장 안온한 즐거움과 행복으로 받아들이는 

극단적인 현실긍정적인 측면을 갖는다고 할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즐거움을 얻을 수 있는 것은 

앞에서 본 것과 같이 

생멸하는 현상이 본래 생멸을 떠난 것이며 

본래 니르바나라는 깨달음과 함께 

현실 일체에 대하여 집착을 갖지 않고 

번뇌를 끊어 해탈을 얻는 측면과 관련한다. 


그래서 

깨달음을 통해 집착과 번뇌를 끊으면, 

가장 극단적으로 고통스런 현실에서도 

그 고통과 두려움을 벗어날 수 있게 된다. 


그리고 이런 측면이 바로 

가장 극단적으로 고통스런 현실에 처해서도 

수행자가 그 모두를 긍정하여 

평안하게 받아들이게 하는 요소다. 


그리고 이런 측면이 곧

불교가 극단적인 현실 긍정적 측면을 띄게 하는 

요소라고 할 수 있다. 



경전에서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나온다. 


탐욕을 떠나면 

괴로움을 끊을 수 있느니라.

... 

[참고 잡아함경 0003, 무지경]  

  

탐욕을 떠나 

마음이 해탈한다면, 

그는 태어남·늙음·병듦·죽음에 대한 두려움을 

초월할 수 있느니라. 

... 

[참고 잡아함경 0004, 무지경2]


이런 경전의 내용은 결국 

앞에서 제시한 상태를 나타내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즉 현상의 일체(색, 수, 상, 행, 식)에 대해 

탐욕을 떠나 

번뇌와 집착에서 벗어나면, 


그는 현실에서 이들이 침해될 때 겪는 괴로움과 

이들이 위협받는 상황에서 받는 두려움을 

모두 끊고 초월할 수 있게 됨을 제시하고 있는 것이다. 


실제로 탐욕과 집착을 떠나면 

가장 극단적으로 고통을 주는 현실 상황에서도 

평안히 머무를 수 있게 된다. 


또한 이런 깨달음은 

설령 지옥에 처하더라도 

그것은 지옥이 아니며 

니르바나의 상태임도 의미한다. 


그래서, 대반야바라밀다경 제 574 권 만수실리본에서

설하는 것처럼, 

...

무간지옥에 나아가는 이도 

긴 밤에 생사에 헤매는 것이 아니요

..

5무간지옥이 곧 보리요

...

라는 등의 내용이 제시되는 것이다. 


이는 번뇌즉 보리라는 대승의 가르침과도 

관련된다. 



즉 깨달음을 얻은 상태에서는 

이들이 모두 차별이 없이 공하고 

생멸이 없는 것이며, 

본래 니르바나의 상태임을 관할 수 있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한편, 이처럼 올바른 관찰과 깨달음을 통해 

생멸하는 현상 자체가 

본래 생멸이 없는 니르바나임을 깨닫고 

집착을 버리고 해탈을 얻는다면, 

굳이 무상하고 생멸을 반복하는 현실을 지우고 떠나야 할 

필요도 없어지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래서 경전에서 반복해 제시되는 것처럼 


마음이 해탈한 사람은 

만일 스스로 증득하고자 하면

자신이 처한 현실 상황에서 

곧 스스로 해탈지견을 증득할 수 있으니, 


그것은 곧 

'나의 생은 이미 다하고 

범행은 이미 섰으며, 

할 일은 이미 마쳐 

후세의 몸을 받지 않는다'고 

스스로 아는 것이 된다. 


그리고 이렇게 깨닫고 집착을 버리면 

가장 극심하고 극악한 현실 상황에서도 

그것을 최상으로 안락한 니르바나의 상태로서 

긍정해 받아들이게 되고 

평안하고 안온하게 머무르게 됨으로써, 

이미 앞에서 본 것과 같은 

극단적인 현실 긍정적인 

모습을 보이게 되는 것이라고 

이해할 수 있다. 


또한 이런 현실 긍정은 

단순히 좋음과 나쁨이 뒤섞인 현실에서 

좋은 측면만을 찾아 응시함으로써 

좋음을 얻어내는 낙관주의적인 자세와는 

차이가 있다. 


또한 세속에서 추구하는 

가치나 집착을 부정하여 

단순히 현실부정적인 면을 갖는 것과는 

다르다. 


이처럼 

불교의 현실 긍정적 측면은 어디까지나 

현실을 올바로 관찰하고  

괴로움이란 문제현상을 직시하여 

집착을 버리고 깨달음을 얻고 

이상적인 현실을 추구하여 수행하는 가운데 

갖는 입장인 것이다. 




○ 윤리적 이상추구 실천행의 측면


불교가 갖는 현실 부정적인 측면은 

사람들이 일반적으로 집착을 많이 갖는 부분들

즉, 탐욕과 분노, 어리석음에 대한 측면이다. 


즉, 일체가 무상하며 괴로움이라고 하여 

이에 대한 탐욕과 집착을 버림을 강조하는 것은 

이러한 현실의 측면에 대해 

집착을 버리고 떠날 것을 강조하는 

현실 부정적인 측면으로 나타난다. 


그리고 

부처님의 가르침에 따라 

올바로 현실을 관하고 집착을 버리면, 

마음의 해탈과 니르바나의 상태에 이르러, 

현실의 생멸현상이  

본래 생멸이 없는 니르바나의 상태임을 관하고 

반대로 현실의 어떤 극악한 조건에서도 

평온한 니르바나의 상태에 머무르게 된다. 


이는 망상분별과 집착을 버리는 수행이 갖는 

현실부정적 측면이 

반대로 갖게 만드는 

극단적인 현실 긍정적 측면이라고 

이해할 수 있다. 


처자와 가족을 버리고 출가하여 수행을 하는 상태에서도 

안온하고 평안함을 얻는 것은 

바로 그런 긍정적 측면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그리고 이 모두가

가장 이상적인 목표 상태로서 

자신과 중생 모두의 해탈과 니르바나를 향해 수행하는 과정을 통해 

실천된다는 점에서 

윤리적이고 이상을 추구하는 실천행으로서 

성격을 갖는 것이다. 




○ 불교의 생사즉 열반의 현실긍정적 측면과 단순한 현실긍정과의 차이 


부처님의 가르침을 따라 

현실에 대해 올바로 관하고 

집착을 버리고 

해탈과 니르바나를 얻기 위해 

수행을 하는 것은 


한편으로는 세속의 탐욕을 포기하는 부정적 측면을 갖고 

그런 세속의 욕구가 실현되지 않는 상황을 그대로 

평안하고 안온하게 받아들이는 긍정적 측면을 갖지만, 


그와 동시에 이런 수행은 

가장 이상적인 상태를 향하고 실천하는 

이상추구 실천행의 측면도 함께 갖는 것이다. 


정견, 정사유, 정어, 정업, 정명, 정정진, 정념, 정정과 같은 

37도품(보리분법)의 수행이나, 

보시, 정계, 안인, 정진, 선정, 반야와 같은 

6 바라밀다의 수행도 역시 

현실 속에서 수행되는 이상추구 실천행이다. 


더 나아가 보살이 

다른 생명을 제도하고자 하고,  

함께 번뇌를 끊고자 하고, 

함께 법문을 배우고자 하고 

함께 불도를 이루기 위하여, 

생사 윤회를 피하지 않으며  

수행을 계속하는 것도 

이와 같다. 


또한 석존 자신도 깨달음을 얻은 이후 

그 깨달음을 중생들에게 열어 보이고 

중생들이 깨달아 

그 깨달음에 들어오게 하기 위하여 

많은 설법과 함께 

적극적인 노력을 하신 것도 

사정이 같다. 


이들은 모두 역시 무상한 현실 속에서 

적극적으로 

이상적 상태를 추구하는 

이상추구 실천행의 성격을 갖는 것이다. 


따라서 

생멸하는 현상을 무상하고 

괴로운 것이라고 관하여 

이에 대한 집착을 버리고 떠나는 것은 

현실을 부정하는 측면을 갖지만, 


이는 어리석음으로 

번뇌와 집착을 일으켜 

괴로운 생사 윤회의 고통을 받게 하는 

현실 측면들에 대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이와는 반대로 

세계를 올바로 관하고 집착을 버리는 수행을 비롯하여 

위에 나열한 여러 수행방안들은 


주어진 현실이  

기존에 집착하던 세속적 욕구가 실현되지 않고  

낡은 옷과 구걸로서 삶을 유지하는 

극악한 상황이더라도, 

이를 모두 본래 니르바나의 상태로 긍정하여 받아들이는 한편, 


동시에 

그 현실에서 가장 이상적인 상태를 실현하기 위해 

이상적인 목표를 향해 

추구해나가는 적극적인 실천행의 성격을 갖는다. 


이는 비유하면 

길가에 떨어진 동전이나 낙엽을 바라보지 않고 

이에 집착하지 않고 지나치며 

동전과 낙엽이 없어도 이를 신경쓰지 않는 가운데, 

황금을 바라보고 

황금을 얻고 황금을 다른 이에게 나누어 주기 위해 

황금을 향해 달려나가는 것과 상황이 같다. 


즉, 

현실의 탐욕, 분노, 어리석음의 번뇌(동전과 낙엽)을 버리고 

집착을 버리고 지나치며 [현실부정적인 측면] 

해탈과 니르바나(비유의 황금)를 얻고 

이를 다른 생명도 얻게 하기 위해 

어떤 극단적인 현실에서도 평안히 머물러 정진 노력하는 것은 

현실에서 평안히 머무르는 수행임과 함께 [현실긍정적인 측면]

적극적인 이상 추구 실천행이 되는 것이다. [이상 추구실천행의 측면]


결국 하나의 수행이 이런 성격을 

모두 현실에서 동시에 갖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물론 이런 수행도 역시 무상한 현실속에서 

행하는 일이므로 역시 괴로운 것 아닌가. 

그래서 현실이 무상하고 괴로움이라고 관하여 

탐욕과 집착을 버리듯 

이런 수행도 그처럼 버려야 하는 것 아닌가 하는 

의문을 제기할 수 있다. 


물론 이런 수행목표와 수행방안에 대해서도 

역시 집착을 갖지 않고 

추구하고 임해야 하는 것은 당연하다. 


그러나, 

이들 수행은 

집착을 버린 가운데, 

현실적으로 '평안히 머무름'과 함께 

'정진하여 추구해 나가는' 내용이며, 


수행을 하기 전 가졌던 

세속에서의 이기적이고 악한 집착은 

집착을 버린 가운데 

현실적으로도 '끊고 버리는' 내용들이라는

점에서 서로 구별된다. 


한편, 수행이나 현실의 생활이나, 

모두 현실 안의 내용이라는 점에서는 같다. 


그러나 이미 앞에서 본 것처럼, 

현실의 생멸하는 현상이 

본래 생멸이 없는 니르바나임을 깨닫기 위하여 행하는 수행과 

중생을 제도하기 위하여 행하는 실천행들은 

모두 기존의 현실의 삶과는 다른 의미를 갖는다. 


다 같은 현실에서 이뤄지는 내용이더라도 

이들의 의미를 서로 다르게 만드는 것은 

생멸하는 무상한 현실이 괴로움이고, 

무아, 무자성이고, 공하며 

본래 생멸이 없는 니르바나임을 관하는 올바른 깨달음과 

그 깨달음에 바탕하여 집착을 버려 얻는 해탈에 

있다고 할 것이다. 


이런 깨달음과 해탈은 

기존에 일반이 집착을 갖고 대하던, 

자신의 생명, 신체, 재산, 가족, 명예, 지위..등에 대해, 

번뇌와 집착을 벗어나게 하여 


아상, 인상, 중생상, 수자상

즉 나에 대한 생각, 사람에 대한 생각, 생명에 대한 생각, 목숨에 대한 생각을 갖지 않고, 

수많은 생명을 자신과 함께 

가장 안온하고 평안한 해탈, 니르바나, 보리의 상태에 

이르게 하고자 하는 

광대무변한 서원을 일으키고, 

그 실천에 나서게 만드는 계기도 된다. 



여하튼 이런 모든 노력은 

공상과 망상을 바탕으로 추구하는 것이 아니고, 

가장 올바른 진리 판단으로 세상의 정체를 올바로 관한 가운데 

자신을 포함한 온 생명의 구극적인 

니르바나와 보리의 이상적이고 원만한 성취를 향하고 있는 것이다. 


결국 현실에서

이런 이상을 향하여 수행 실천하는 행위는  


한편으로는 

현실의 탐욕, 분노, 어리석음과 같은 현실에 대해서는 

번뇌를 제거하고 집착을 제거하는 

현실 부정적 측면으로 작용하고 


또 한편, 그런 번뇌와 집착을 제거하고 

현실이 어떻든 그것이 지옥이던 극락이던 모두 차별없이 

생멸이 본래 없는 니르바나의 상태임을 관하여 

평안히 현실에 머무르는 극단적인 현실 긍정적 측면을 갖고 


현실을 긍정한 가운데 현실 속에서 

가장 올바르고 옳은 이상적인 상태의 실현을 위해 

광대 무변한 서원을 세우고 

일반 생명이 집착하고 행하는 방식을 중지하고 

그와는 반대의 방향으로 

보시-정계-안인-정진-정려-반야-방편-원-력-지 등의 

수행방안을 실천해나감으로써, 


현실을 바탕으로 가장 이상적인 상태를 

이상적인 방안으로 추구하고 실천하는 성격을 

함께 갖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와 같이 일체(색, 수, 상, 행, 식)은 무상하며 

괴로움이라는 측면과 

이를 통해 탐욕과 집착을 버려 

해탈을 얻는 수행이 갖는 관계를 살폈다. 


이하에서는 보살의 수행목표에 대해 

좀 더 자세히 보기로 한다. 




○ 보살의 수행 목표


수행자가 

만일 이렇게 무상하고 고통스런 현실에서 

집착을 버려 고통을 받지 않게 되고, 

더 나아가 원래의 니르바나의 상태를 

확인해 찾아낸다면, 

더 이상 생멸현상을 걷어낼 필요조차 없음을 

깨닫게 될 것이다. 


왜냐하면 이미 있는 생멸현상을 놓고 

자신은 그로부터 고통을 받지 않고 

또한 이 생멸현상이 본래 생멸이 아니고 

본래 니르바나의 상태임을 

그대로 보기 때문이다. 




한편, 이렇게 집착을 버리기 위해서는 

자신의 관념안에 써 넣은 잘못된 분별을 

지우는 노력이 필요하다. 


즉, 자신의 잘못된 망상 분별을 통해 

자신이나 세계에 대한 관념을 갖고 

더 나아가 이런 내용이 실재하는 내용이라고 생각하고 

또 이들이 영원불변한 진짜의 내용이라거나 

그런 내용이 있다는 등의 잘못된 견해를 

떠나고 지우는 노력이 필요하다. 


반대로 그 안에 올바른 내용을 써 넣는 것이 

필요하다. 

즉, 자신이나 세계로 본 색, 수, 상, 행, 식 일체는 

자신의 마음안 내용물이고 

이들은 모두 무상하고 고통의 현상이며, 

또 자신과 세계의 실재는 공하며,  

영원불변한 본체가 없다는 등의 올바른 견해를 

가질 필요가 있다. 


이는 모든 존재 

즉 원성실상과 의타기상과 변계소집상에 대해 

승의무자성과 생무자성, 상무자성을 관하는 활동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이런 올바른 관찰을 통해 

집착을 버릴 수 있게 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런 올바른 관찰은 

우선 무상한 현실 현상에 집착하여 고통을 받는 상황에서 

그것들이 집착할 만한 실다운 것이 아님을 관하여 

집착을 버리게 하고 고통을 제거하는 방안이 된다. 


동시에 이런 올바른 관찰은 

일체가 본래 생멸을 떠나고 고통이 있지 않아 

현실 상태가 곧 니르바나의 상태에 있음을 

관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물론 이렇게 관찰하거나, 관찰하지 않거나, 

본래 니르바나인 상태가 니르바나인 것은 

같으며 달라지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본래 니르바나의 상태에 있지만, 

그것을 자신이 관찰할 수 없는 경우는 

그 니르바나에 상응한 상태를 현상 안에서 얻을 수 없다. 



마치 술에 취해 지갑이 옷 속에 있지만, 

지갑이 옷 속에 있음을 알지 못하는 이는 

지갑이 있어도 그 지갑의 돈을 꺼내 사용할 수 없는 것과 같다. 


그러나 현상 속에서 이렇게 올바로 관할 수 있게 되면, 

본래 니르바나의 상태에 상응한 지혜를 갖추고 

현상 세계에서도 본래의 니르바나의 상태에 상응한 상태에 

머무를 수 있게 된다고 할 수 있다. 

그것이 곧 해탈지견의 내용에 해당한다고 본다. 


즉 해탈을 이룬 이는 현실 상태에서 그 올바른 관찰을 통해 

곧바로 본래의 상태가 생멸현상이 없고 

니르바나의 상태임을 깨달아서 

곧 다음과 같은 내용을 스스로 증득할 수 있으니, 

이른바 

'나의 생은 이미 다하고 

범행은 이미 섰으며, 

할 일은 이미 마쳐 

후세의 몸을 받지 않는다'고 

스스로 아는 상태가 되는 것이다. 


그러나 그렇게 관할 수 없는 경우는, 

본래의 상태는 니르바나임에도 불구하고 

그가 현상 속에서 만들어 가진 망상 분별에 따라 

자신과 세계가 자신이 잘못 생각한 내용처럼 그러하고 

이들의 생멸현상도 그러하다고 집착을 하고 

그 집착으로 인해 행위한 가운데 

고통의 윤회를 겪는다는 차이가 있는 것이다. 


이는 앞의 술취한 사람의 비유에 의하면 

본래 자신의 옷 속에 지갑이 들어 있는데도 

그것을 사용하지 못하고 

반대로 그가 술에 취해 허공에서 헛것을 본다면, 

그 헛것을 마치 진짜인 것처럼 착각하고 행동하게 만든다. 

그래서 온갖 망상 속에서 고난을 겪으며 

머나먼 길을 걸어 나아가는 것과 사정이 같다. 


이 술취한 사람이 먼 훗날 술을 깨어서 생각한다면, 

술에 취해 겪은 고난은 공연한 것이었고 

옷에서 찾은 지갑은 원래 있었던 것임을 

알게 되는 것과 사정이 같다. 




한편 모든 생명이 감각현실과 관념의 세계에서 

이리저리 고통을 받고 헤매는 상황에 있기 때문에

이 생명들을 열반에 이르기 위해서는 

이 감각현실과 관념의 세계를 부정하지 않고 

이 안에서 니르바나에 상응한 상태를 만들어 

나가는 적극적인 노력도 필요하다. 


보살이 다른 생명들을 구제하기 위하여 

생사를 싫어하지 않고 열반에 끝내 들지 않는 가운데, 

다른 생명들을 구제하는 행을 해나가는 것도 

바로 이런 연유라고 할 것이다. 


현상의 무상함과 생멸현상 그리고 윤회가 

모두 고통이더라도, 

이 상황에서도 본래 니르바나의 상태인 것이며, 

그것을 관하고 

또한 현상 안에서 앞과 같이 올바로 관찰하고 

집착을 버리고 선을 행하는 것은 


비록, 감각현실과 관념이 청정한 진여 니르바나를 

덮고 있는 것처럼 보여도 

그것은 본래 니르바나의 상태에 머물러 있는 것과 

하등 다르지 않은 것이다. 


마치 술에 취하거나 

눈병이 나서 허공에서 헛것이 보인다 하더라도, 


스스로 자신이 술에 취하고 눈병에 걸린 것을 자각한 상태에 있어, 

허공에 보이는 것들이 실재하는 것이 아님을 

관할 수 있다면, 


그런 분별은 실재에 상응한 분별이며, 

또 그로 인해 그 헛것에 끌려 행하지 않고 

본래 있는 니르바나도 그로 인해 덮어 가리지 

않게 되는 것과 마찬가지다. 



한편, 무상한 현상과 고통의 현상은 

그것을 그대로 인식한다고 하여 

무상과 고통이 달라지는 것은 아니다. 

무상과 고통의 현실 안에서 

그 고통을 벗어나는 방안은 

무상한 현실에 대한 집착을 버리는 것이다. 


그리고 현상안에서는 추구하는 올바른 수행목표도 

역시 집착을 떠남으로써 

그 집착으로 갖는 독을 제거한다는 점에서는 

차이가 없다. 



관념적 분별이 망상분별이라는 것을 깨닫는 것은 

이런 보살의 수행에 

무슨 효용이 있는가부터 살펴야 한다. 


관념적 분별은 집착의 발생 원인이 되고 

고통의 원인이 된다. 

더 나아가 불교에서는 

이 관념적 분별로 인한 행위(뜻, 말, 글, 행위,태도)가  

감각현실을 변화시키고 

다음 생의 고통의 현실도 만들어내게 됨을 제시한다. 


그래서 관념적 분별이 망상 분별인 것을 깨닫고 

집착을 버리고 임하는 것이 갖는 효용은 

위와 같은 내용을 제거하는 효과를 갖는 것이다. 

그래서 중요한 것이다. 


보살이 수행을 하고 서원을 실천하는 과정에서 

보살은 일반 생명과 같은 상황에 노출된다. 


실재를 바탕으로 현상적 내용으로서 

감각현실을 얻고 관념도 얻게 된다 .

일반 생명이 병에 들고 죽음을 맞이한다면 

그와 같은 현상에 보살도 노출되는 것이다. 


문제는 보살이 이와 같은 현상에 같이 노출되면서 

일반 생명이 그로 인해 번뇌와 고통을 얻고 

고통의 생사윤회를 받게 되는 것과 달리, 

보살은 그로 인해 번뇌와 고통을 받지 않는다는 점에 

차이가 있다. 


무엇이 이런 차이를 발생시키는가. 

앞과 같이 이런 내용들이 망상분별임을 깨닫고 

집착을 갖지 않음으로써 여기에 물들지 않는 것이다. 


또한 고통의 과보를 불러 일으키는 행위 반응방식을 

따르지 않고 그것을 중지하고, 

집착을 갖지 않고 그 반대의 수행방안을 행하기에, 


일반 생명들이 자신은 원치않는데 불구하고 

어쩔 수 없이 고통의 윤회를 하게 되는 것과는 달리, 

보살은 비록 생사를 받더라도 일반 생명의 생사와는 달리 

보살의 자비의 원에 의한 윤회, 

즉, 변역생사(變易生死)를 행한다는 점이 차이가 된다. 


이런 차이는 결국 

현실에서 행하는 분별이 망상분별인가 아닌가를 

깨닫는 데에서 출발한다고 본다. 


현실이 실답지 않기에 꿈이나 환영과 같다고 말하게 된다.  


그래서 보살이 생사를 받고 수행을 하는 상태를 

영화에 비유할 수 있다. 


어떤 영화를 예로 들어 본다면, 

현실에서 영화처럼 

어떤 범인이 보석을 훔치고 다른 이를 죽이고 했다면, 

이들 모두가 그 분별과 집착으로 인해 

크게 고통을 받고, 이후 이후의 내용들도 이에 바탕하여 

그 당사자들이 원하던 원치 않던 그에 따른 과보의 

현실 내용이 전개되어 나감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이 영화에서 

반대로 현실을 영화와 같다고 보는 전제에서 

영화 속에서 죽임을 당하고 재물을 뺏긴 것으로 보이는 배우들을 

하나하나 찾아가 그 영화속 사건에 대해 물어보면 


이들은 그로 인해 죽거나 다친 것도 아니고 

재물도 뺏겨 손해를 입은 바도 없음을 말한다. 

오히려 영화에 출연해서 수익을 거두고 보람이 있었다거나, 

다음 영화에 어떤 조건에 어떤 배역으로 나올 것인가를 

각자 계획 중일뿐 별 영향을 받지는 않는다고 

보는 것이다. 


현실이 꿈과 같고 환영과 같고 영화와 같다고 말할 때 

이 내용에서 

영화는 현실과 같음 ->  현실의 실다움 -> 집착을 취해 나아가면 

앞의 내용이 되고 

현실은 영화와 같음 -> 영화의 실답지 않음 -> 집착이 없음을 취해 나아가면 

뒤의 내용에 가깝게 된다. 


참고로 현실의 영화배우는 

이 두 측면을 다 갖고 사는 것이라고 보기에 

가깝다고 표현한 것이다. 


그리고 

색즉시공 공즉시색의 표현이 이와 관련이 되는 내용이라고 본다. 

즉 이 내용에서 색의 현상적 차별과 집착을 취해 나가는 것과 

공함의 무분별을 이와 관련시켜 망상 분별과 집착을 떠난 

자세로 임하는 것의 차이인 것이다. 



한편 이와 같이 집착을 버린 바탕에서는 

현실은 본래 실재를 바탕으로 

나타난 것임도 깨닫게 되고, 

굳이 현실을 앞과 같은 방식으로 부정해 없애야 할 

필요조차 느끼지 못하게 된다. 


그보다는 집착을 떠난 상태에서 

그동안 자신이 집착한 것들이 가치가 적은 것임을 깨닫고, 


과거의 자신처럼 무상한 현실 속에서 

집착을 일으켜 고통받는 다른 생명들을 

구제하고 제도해나가야 할 필요성을 깨닫고 

이를 위해 광대 무변한 서원을 일으키고 

추구해 나갈 필요성을 깨닫게 된다. 


그것은 현실에서 일반 생명이 행하는 

망상분별과 집착에 바탕하여 고통을 발생시키고 증가시키는 방식의 

분별과 행위를 중지하고 

그와는 반대로 행해 나가며 수행해 나가는 것을 의미한다. 


그것이 곧 망상분별과 집착을 버리고, 

온생명을 제도하기 위하여 

'얻을 것이 없음'을 방편으로 

보시-정계-안인-정진-정려-반야-방편-원-력-지의 

바라밀행을 실천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로 인해 

수행자가 생사하는 현실에서 생사윤회하며 

수행을 해나가더라도, 

현실의 번뇌에 물들지 않고 살아가는 

상태가 된다. 


이는 마치 연꽃이 

더러운 연못에서 더러움에 물들지 않고 

아름다운 꽃을 피우는 상황에 비유된다. 


그래서 그런 수행자의 노력은 

온 생명을 제도하기 전까지는 성불하지 않겠다고 서원하여 

끝없이 중생구제행을 실천해나가는 형태가 될 수도 있다. 




그래서, 

무한한 기간에 걸쳐 

중셍들의 제도와 성불을 위해 서원을 일으켜 

중생을 구제하는 

문수보살이나 보현보살, 관세음보살, 지장보살처럼 

수행해 나가고,  


예를 들어 법장비구가 왕위를 버리고 48 대원을 일으켜 

수행에 정진하여 끝내 극락정토를 만들고 

무량한 중생을 깨달음과 니르바나의 상태에 이끌어 

제도시키는 무량수불(아미타불)처럼 되거나, 


또는 약사유리광여래나, 

문수사리보살이 수행을 통하여 이루는 보견여래나, 

보광상다공덕해왕((普光常多功德海王)여래처럼 


질병의 고통은 없고, 그 수명은 무량하고 

성취하는 불국토의 장엄은 한없이 뛰어나며 

그 세계에 태어나는 중생은 

보살이 성취할 수행결과를 기본적으로 성취한 상태에서 

성불의 결과를 보다 쉽게 성취하게 할 수 있다. 


그리고 이 모든 여래가 공통적으로 증득하는 

법신의 상태를 증득하는 것도 

수행의 목표로 생각할 수 있다. 



이런 여러 수행목표를 생각하면 

다음과 같이 그 관계를 이해할 수 있다. 


고통의 문제를 해결함에 있어서는 


가장 기본적으로 

고통을 없애기 위해 

망상 분별과 집착을 버리면, 

생사현실에서 번뇌로 인한 고통을 벗어나게 되며, 



그런 가운데, 

이후 다음 생의 윤회 생사를 멸해 

나타나지 않게 하고, 

공한 실재, 진여와 근본정신만 남겨 

회신멸지의 상태로 니르바나를 얻거나, 


또는 굳이 생멸하는 현상을 없애지 않더라도, 

이 현상이 본래 생멸이 없고 니르바나임을 관하여 

분별과 집착을 버린 상태에서 

생사에 그대로 머물러서도 번뇌와 고통에 물들지 않고 

중생제도와 성불을 목표로 수행을 계속 행할 수 있다. 


이런 내용이 석가모니 부처님이 

사바세계의 중생들에게 

가장 기본적으로 가르치는 내용이기도 하다. 


한편, 보살이 수행을 통하여 법신을 증득하고자 할 때 

그가 세우는 서원의 내용에 따라, 

중생들이 고통을 겪게 되는 원인을 근본적으로 제거하여 

중생의 고통을 해결해주고 중생을 깨달음과 성불의 

상태로 이끄는 다양한 방안을 생각할 수 있다.  


이는 각 부처님의 서원에 따라 다 내용이 다르지만, 

예를 들어 아미타불이나 약사유리광여래, 

보견여래, 보광상다공덕해왕여래.... 등 

무수한 여래의 상태와 같은 것이다. 


그래서 이런 방안이 다 좋고 

종국적으로 고통을 제거하는 효과가 같은데 


뒤의 방안은 

수행을 통하여 성취하는 데 시간이 많이 걸리니 


일단 기본적으로 

어느 상황에서나 가장 먼저 적용하여 실천하면 

효과를 얻는 방안으로서 

석가모니 부처님이 가르친 가장 기본적인 방안을 

실천하는 것이 필요하며 


그런 가운데, 

예를 들어 중생제도와 깨달음을 구하는 마음을 일으키는 가운데 

자신이 성취할 서원을 세워 

예를 들어 아미타불과 같은 여래의 상태를 이루는 것을 

목표로 수행 정진해 나가고, 


그 중간에 아직 그와 같은 여래가 

직접 되지 못한 상태에서는 

아미타부처님 등과 같이 중생의 수행을 도와주는 

많은 부처님에게 도움을 요청하는 것이 

좋다고 볼 수 있는 것이다. 





물론 이런 행위도 어떻게 보면 

과거의 좋음과 나쁨이 뒤섞인 무상한 현실 가운데 

어떤 좋음을 추구해 나가는 행위와 

결국 같은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할 수 있다. 


그러나 이는 그 가치가 훨씬 큰 동시에 

이 역시 집착을 벗어나서 

행해 나가게 된다는 점에서 차이가 있다. 


즉 집착을 갖고 무언가 좋음을 추구할 때는 

그것이 삶의 고통과 윤회의 고통과 관련되지만, 


망상분별과 집착을 버리고 

모든 생명의 최상의 상태의 실현을 위해서 

'얻을 것이 없음'을 방편으로 

추구하는 자세는 앞에서 본 

망상분별과 집착이 일으키는 문제와는 

기본적으로 관련되지 않는 상태가 되는 것이다. 


보살이 중생을 제도하기 위해서 

생사를 피하지 않는다는 것은 바로 이와 

관련되는 내용이라고 본다.  



이상 수행의 목표와 무상, 고의 관계를 먼저 살폈다. 


다시 이를 정리하면 

일체 현상은 무상하고 고이며 

일체의 생멸현상이 모두 문제상황임을 기본적으로 살피고 


이에 반해 

수행 목표 상태인 해탈과 니르바나의 상태는 

이런 생멸 현상과 고통을 떠난 것임을 보았다. 


그런데 한편 

생멸하는 현상은 본래 생멸과 고통을 떠난 것이며 

따라서 본래 니르바나(열반)의 상태임을 

함께 살폈다. 


이는 일체 현상을 놓고 

서로 모순된 내용을 제시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이는 하나의 현상을 놓고 

세속의 분별을 바탕으로 이를 고통으로 대할 때의 문제의 내용과 


이런 망상분별을 떠나 깨달음으로 대할 때의 내용을 

이처럼 각기 다른 측면에서 제시한 것이다. 


그리고 현실의 일체가 무상하며 

괴로움이라는 독의 측면은 

탐욕과 집착을 버리는 수행이 

제거하여 주는 것이다. 


즉, 무상하고 괴로운 현실의 독을 제거해주는 약은 

무상하여 괴로운 현실을 

무상하여 괴롭다고 올바로 관하고, 

이런 올바른 관찰을 통해 

그 무상한 현실에 대하여 집착을 제거하고 

해탈을 얻는 것이 

그 집착의 독을 해독해주는 약이 된다는 의미다. 



따라서, 역설적으로 


올바른 관찰과 깨달음을 통해 

망상분별과 집착을 버림으로써, 


망상분별과 집착을 바탕으로 얻게 되는 

생사 고통을 멸해 없애는 것이 중요한 의미를 

갖는 것이다. 


그리고 불교의 수행이 현실과의 관계에서 갖는 성격으로 

현실부정적 측면 

그리고 현실긍정적 측면 

그리고 이상추구실현적 측면 등으로 나누어 살폈다. 



아래에서는 다시 일체에 대한 근본판단인 

공, 비아(무아, 무자성)과 수행목표의 관계를 살피기로 한다. 





*pt* 끝 to k0020sf-- ♠○일반의 경우와 불교의 목표의 차이 

*pt* 끝 to k0650sf-- ♠● 무상과 고의 관계성





● 공, 비아와 수행목표의 관계 


한편, 이제 공과 비아, 무아, 무자성의 판단과의 

관계를 살피기로 하자. 


앞에서 본 것처럼 

현실이 무상하고 고통의 상태인데 반해 

열반은 생멸을 떠난 점에서 차이가 있다. 


그러나 이 현실과 열반은 

공하며 무아 무자성인 점에서는 차이가 없다. 


이는 모두 실재의 측면에서의 판단, 

그리고 영원불변한 본체가 있는가의 측면에서의 

판단들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공과 무아, 무자성과 관련하여 

수행의 목표는 어떤 관계를 갖는가를 

살필 필요가 있다. 



해탈이나 열반과 같은 수행 목표 상태를 성취해도  

일반 현실처럼 공, 무아 무자성인 점에서는 

다르지 않다. 


따라서  

공하지 않고 무아 무자성이 아닌 어떤 다른 상태가 있어서 

이런 상태가 수행 목표상태가 되는 것은 아니다. 


번뇌 즉 '보리(깨달음)'이라는 

대승의 가르침이 있는데, 

번뇌의 상태나 

또는 보리[깨달음]을 얻어 번뇌를 벗어난 상태나 

그 실재는 공하고 무아 무자성이라는 점에서는 

서로 다르지 않다는 것을 의미하는 말이기도 하다. 



○ 공과 수행목표에 대한 잘못된 이해의 문제점


그러나 이 말은 

일체가 공하고 무아 무자성이니, 

아무것이나 아무렇게 해도 된다는 

악취공견을 의미하거나,  

또는 어차피 다 공하니 아무것도 하지 말자는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또는 이미 본래 공하더라도 

새로 노력하여 공한 상태를 증득하자. 

아니면 공하지 않고 무아 무자성이 아닌 어떤 것을 얻자. 


이런 의미가 아니다. 


우선 일체가 공하고 무아 무자성이며, 

본래 니르바나의 상태이기에 

현실의 모든 상태가 

다 아무런 문제가 없는 것은 아니다. 


그래서 번뇌인 상태가 단지 

무아, 무자성이고 본래 니르바나의 상태라는 점에서 

차별이 없다고 

그 상태 그대로 살아도 된다고 이해하면 안 된다. 


본래 공하고 무아 무자성인 점에서 다르지 않고, 

본래 니르바나의 상태임에도 불구하고 


현실에서는 이런 니르바나의 상태에 

상응하지 못한 상태로 

일체에서 생멸을 보고 

자신과 세계에 대해 망상 분별을 일으키고 

또 이로 인해 고통의 윤회를 겪는다. 

그리고 이것은 문제인 것이다. 


그리고 이렇게 생사 윤회의 고통 속에 빠지는 것은 

결국 잘못된 망상 분별과 그로 인한 집착

그리고 그 집착에 바탕한 행위 때문이라고 

제시할 수 있다. 


그리고 앞에서 본 것처럼 

수행의 목표는 1차적으로 

고통과 고통의 원인을 멸하여 

해탈과 열반의 상태를 얻는 것이 목표가 된다. 


그리고 공, 비아 등의 내용은 

현실에서 집착을 제거하고 

일체가 본래 니르바나의 상태임을 깨닫기 위해서  

기본적으로 깨달아야 할 내용이다. 



한편, 공과 무아 무자성이란, 

본래가 그렇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고 


어떤 수행을 통해서 비로소 

어떤 상태가 공해지고 

무아, 무자성의 상태가 되는 것은 아니다. 


또 이와 같은 번뇌나, 고통의 상태도 

그 본바탕은 역시 공하고 무아 무자성의 상태인 것이므로, 

공과 무아 무자성 그 자체가 

그것만으로 곧바로 수행 목표가 되는 것은 아니다. 



다만 그것을 현실 안에서 깨닫게 되면, 

현실에서 갖던 집착을 벗어날 수 있고 

또 현실의 생멸현상과 고통이 

모두 본래 실답지 않고, 진짜의 내용이 아니어서 

일체가 본래 니르바나의 상태임을 깨달을 수 

있게 되는 것이다. 



반야심경에서 다음과 같은 내용이 나온다. 


...

관자재보살은 깊은 반야바라밀다를 행하여 

색, 수, 상, 행, 식 오온이 모두 공함을 관하고 

온갖 괴로움과 재앙을 벗어나 건너느니라

...


K0020V05P1035a03L; 觀自在菩薩行深般若波羅蜜多時

K0020V05P1035a04L; 照見五薀皆空度一切苦厄舍利子



여기서 공함을 관하는 것이 

어떻게 온갖 괴로움과 재앙을 벗어나 건너는 

방안이 되는가. 


그것은 곧 공함을 관하여 

현실의 모든 괴로움과 재앙이 

실답지 않음을 관하여 

이에 망상분별과 집착을 버림으로써

가능한 것이다. 


공한 가운데에는 

생멸과 더러움이 없음은 다음과 같이 나온다. 


...

사리불이여, 이 모든 법의 공한 모양은 

나지도 않고[不生] 없어지지도 않으며[不滅] 

더럽지도 않고[不垢] 깨끗하지도 않으며[不淨] 

늘지도 않고[不增] 줄지도 않느니라[不減]. 

그러므로 공 가운데는 색, 수, 상, 행, 식이 없으며, ...


K0020V05P1035a06L; 是色受想行識亦復如是 舍利子是

K0020V05P1035a07L; 諸法空相不生不滅不垢不淨不增

K0020V05P1035a08L; 不減是故空中無色無受想行識無


참조 반야바라밀다심경 




한편, 수행을 하건, 하지 않건 

그로 인해 공, 무아, 무자성과  

'본래의 니르바나의 상태'가 달라지는 것은 아니지만,  

그러나 수행을 하지 않는 것과  

수행을 하는 것이 차이가 있다면, 

그것은 다음이다. 


수행을 하지 않으면, 


본래 상태는 

청정한 니르바나의 상태임에도 불구하고 


그는 그것을 스스로 깨닫지 못하고, 

자신의 망상 분별에 갇혀서 

험악한 고통의 윤회를 겪어 나가게 된다. 


그러나 수행을 하면, 그 수행을 통해 

올바른 관찰을 하고 

집착을 버리고 

현실에서 갖던 고통을 없애게 된다. 


그 다음 보시, 계율, 인욕, 정진, 정려, 반야 등으로 

복덕과 지혜를 닦는 수행을 행하고 

생명을 제도하는 등 

무량한 선을 실천하여, 


현실 안에서도 

본래의 청정한 진여의 니르바나의 상태에 

상응한 상태를 얻고 

무량한 복덕과 지혜의 광명을 얻게 된다는 점에 

차이가 있다. 



이 둘의 경우가 

모두 공과 무아, 무자성이며 

어느 경우나 본 바탕이 

니르바나의 상태에 있다는 점에서는 

차이가 없다고 할 것이지만, 

이런 현실 속의 차이는 크다고 하지 않을 수 없다. 


마치 꿈을 꾸는 경우 

악몽을 꾸나 좋은 꿈을 꾸나 

그로 인해 현실이 달라진다고 볼 수는 없지만, 

그 꿈의 세계에서는 이 둘의 차이가 큰 것과 

같다고 할 것이다. 


그리고 바로 이런 점이 

모두 다 무아, 무자성임에도 

현실에서 고통이 없는 열반의 상태를 

목표로 수행을 하는 이유라고 할 것이다. 


특히 모든 것이 다 함께 그 실재가 공함을 말하여, 

본래 있음과 없음을 떠나고 

차별이 있을 수 없음을 말하게 되지만, 


그러나 이는 모든 것이 

전혀 아무 것도 없음을 의미하거나, 

또는 아주 똑같음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본래 실재의 공한 가운데 현상의 차별적이 모습이 나타날 때, 

중생이 있음에 치우친 견해를 가짐으로써,  

망상 분별과 집착에 의한 고통을 일으키므로 

이를 떠나야 함을 강조하는 것이며, 


반대로 없음에 치우친 견해가 

올바른 서원을 실천하는 수행노력을 게을리하게 하므로, 

없음에 치우친 견해도 떠나야 함을 

강조하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실재의 공함은 이처럼 

있고 없음의 양극단을 

모두 떠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반야바라밀다심경에서는 

앞과 같이 기본적으로 공함에 대한 깨달음을 통해 

망상 분별과 집착을 떠나 

일체의 온갖 괴로움과 재앙을 벗어나 건넘을 제시하는 한편, 


이런 깨달음을 바탕으로 

수행을 하여 

보살이 수행 목표를 성취해 얻는 과정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이 나온다.


... 

보살은 반야바라밀다를 의지하므로 마음에 걸림이 없고, 

걸림이 없으므로 두려움이 없어서 

뒤바뀐 헛된 생각을 아주 떠나 

완전한 열반[究竟涅槃]에 들어가며, 


과거 현재 미래의 모든 부처님도 

이 반야바라밀다를 의지하므로 

위없이 올바른 깨달음[아뇩다라삼먁삼보리(阿耨多羅三藐三菩提)]를 

얻느니라. 

...


K0020V05P1035a12L; 集滅道無智亦無得以無所得故菩

K0020V05P1035a13L; 提薩埵依般若波羅蜜多故心無罣

K0020V05P1035a14L; 㝵無罣㝵故無有恐怖遠離顚倒夢

K0020V05P1035a15L; 想究竟涅槃三世諸佛依般若波羅

K0020V05P1035a16L; 蜜多故得阿耨多羅三藐三菩提故


참조 반야바라밀다심경 


이런 내용은 

일체가 모두 다 공하여 

차별이 있을 수 없다고 하지만, 


그러나 보살이 반야바라밀다 등의 수행을 통하여 

보살은 

니르바나와 깨달음을 증득함으로써, 

부처의 상태를 이루는 반면, 



이러한 깨달음을 얻지 못하면, 

망상분별과 집착을 일으키고 

번뇌에 바탕하여 업(뜻, 말, 글, 행위, 태도)를 일으키고 

그로 인해 고통을 받는 

일반 범부 중생의 상태가 되어,  


공한 실재의 바탕에서도 

일반 중생과 보살과 부처가 

각기 다른 차별을 얻게 되는 면을 

드러내고 있는 것이다. 




○ 집착없는 수행의 중요성 



한편 목표상태인 열반이나 

깨달음(보리), 또는 부처의 상태가 

번뇌의 상태와 마찬가지로 

역시 공하며 무아 무자성이라는 것은 

수행목표에 대해서도 역시 

집착을 갖지 않고 얻을 것이 없음을 

방편으로 수행을 해나가야 함을 의미한다. 


수행자는 수행을 통해 

지금껏 가진 번뇌와 집착을 제거하지만, 


반대로 수행목표나 방안에 대한 

집착을 갖게 되기 쉽다. 


그런 경우에는 역시 그 집착은 

일반의 경우에서 살핀 것과 같은 

동일한 문제를 갖게 된다. 


처음 수행을 시작한 것이 

이런 집착으로 인한 고통을 없애는 것이 

목표였다는 점을 생각한다면, 

수행목표나 수행에 집착을 하는 것은 

그 자체가 문제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그래서 최종 목표상태인 

부처나 열반에 대해서도 

역시 다른 상태와 마찬가지로 

무아 무자성임을 관하여 

집착을 벗어나는 것이 필요한 것이다. 


그리고 이를 통하여 

수행하는 과정에서도  

번뇌에 얽매이지 않고 

수행을 원만하게 성취할 수 있게 된다. 



이렇게 열반의 상태에 대해 살핀다면, 

처음 수행을 시작하는 입장에서 

나아가야 할 수행을 다음과 같이 정리할 수 있다. 



우선 1차적으로는 

무상한 현실과 고통의 윤회과정을 올바로 관하여 

이런 현실에서 무상, 고, 공, 비아 (승의무자성, 생무자성, 상무자성) 등의 

올바른 깨달음을 통해 


원래의 청정 진여 니르바나를 덮어 가리우고 있는 

망상분별과 

번뇌 집착, 악과 고통을 

지우고 없애서,  


원래의 청정 진여 니르바나를 

드러내고, 

번뇌- 업 - 고통의 관계를 벗어나게 되서 

윤회의 고통에서 벗어난다. 


이것이 1차적 수행목표가 된다. 



그 다음  

이런 청정 진여의 니르바나에 상응하여  


현실에서도 그와 상응한 니르바나의 상태를  

만들고 채워 나가는 것이 

제 2차적 수행 목표가 된다. 


즉, 올바른 깨달음을 바탕으로 

망상, 분별, 번뇌, '집착을 버린 상태'에서  

얻을 것이 없음을 방편으로 하여 

아름답고 깨끗하고 맑고 선하며 

좋고 좋은 서원을 일으키고  

정진하여 


서원을 성취하고 

이를 유지해나가는 것이 

제 2차적인 수행목표가 된다. 



그리고 이처럼 

세속의 번뇌에서 벗어나고 

다시 그 이후 

올바른 진리와 가치의 판단에서 

올바로 수행해 나가는 것이 

바로 아라한과 보살의 

번뇌를 떠난 선한 행위들이 된다. 



이러한 수행방안은 

근본불교에서는 다음과 같이 제시된다. 



크게 보면 

계율-선정-지혜의 방안[3학]이 그런 방안이라고 볼 수 있다. 


한편, 널리 제한없이 온 생명을 대상으로 

선(善)과 지혜(智慧), 행복(幸福)과 이익을 베풀어 

고통과 악으로부터 중생을 구제하고자 하는 무한한 사랑의 마음을 일으키고  


다른 이들의 악, 어리석음, 고통, 불행, 손해에 대하여 

슬픔을 느끼는 무한한 슬픔 

그리고 다른 이들이 깨달음과 선을 성취함에 대하여 

기쁨을 느끼는 무한한 기쁨 

그리고 평등함을 느끼는 가운데 무한한 버림의 마음 

즉 자-비-희-사의 사무량심을 바탕으로 


37 가지 수행방안[보리분법-깨달음의 일부를 이루는 법]을 행하는 것이  

수행방안으로 제시된다. 


즉, 

몸과 감수와 마음과 법(나머지 모든 것과 관념)에 대하여 

그 깨끗하지 못함(부정), 고, 무상, 무아 등을 관하는 4념처(四念處, 四念住) 


이미 있는 악은 더 키우지 않고, 

아직 나타나지 않은 악을 만들지 않고 

아직 나타나지 않는 선을 행하고 

이미 있는 선을 키우는 4정단(四正斷, 四正勤) 


그리고 이를 성취하기 위한 수단으로서, 

희망[욕(慾)], 노력[정진(精進)], 기억[념(念),심(心)] 지혜[혜(慧), 사유(思惟)]의 

4여의족(四如意足, 四神足) 


믿음[信], 노력[진(進)] 기억[념(念)] 선정[정(定)] 지혜[혜(慧)] 의 

5근(五根)과 5력(五力) 


기억-선택-노력-기쁨-몸과 마음의 경쾌함 - 선정 - 버림으로서 평정을 얻는 상태 

[념(念)- 택법(擇法)-정진(精進)-희(喜)-경안(輕安) 또는 제(除)- 정(定) -사(捨)] 로 이루어진 

7각지(七覺支, 七覺分) 


그리고 

고통과 고통의 원인 고통을 멸한 상태-그 방안[고집멸도 4 성제] 등 진리의 내용을 올바로 보고, 

탐욕과 분노, 어리석음을 떠나 올바로 생각해야 하고 

거짓말과 서로 싸움을 일으키는 말, 욕설 등의 거친말, 쓸데없는 말을 하지 않으면서 올바로 말하고 

살아 있는 생명을 죽이지 않고, 주지 않는 것을 훔치지 않고, 바르지 않은 음행을 행하지 않으면서 올바로 행하고 

부처님의 가르침과 어울리지 않는 직업을 갖지 않고 삶의 방편을 올바로 취해 살아가고 

깨달음을 얻어 번뇌와 고통을 없애기 위하여 부지런히 수행하며 

수행하고 배운 바를 올바로 기억하고 

올바로 집중하여 번뇌를 제거하고 사색하는 선정에 드는 등의 

[정견(正見)-정사유(正思惟)-정어(正語)-정업(正業)-정명(正命)-정정진(正精進)-정념(正念)-정정(正定)]    

8정도(八正道)가 

이들 내용을 이룬다. 


이런 37 가지 수행방안은 

결국 전체적으로 

올바른 사실과 가치에 대한 판단을 행하고 [4념처], 

올바른 목표설정을 하여 올바른 서원을 갖고[4정근]  

올바른 목표를 성취하기 위한 방법을 얻어[4여의족] 

올바른 목표를 성취하기 위한 기초와 능력을 갖춘 바탕에서[5근, 5력] 

올바른 지혜를 얻기 위한 방안을 수행하고[7각지]  

그리고 올바로 살기 위한 종합적인 올바른 길을 취해 수행하며 살아가는 방안[8정도]

으로 내용이 이루어져 있다고 본다.  

 


한편 생사를 곧 니르바나로 관하고 

중생을 제도하고 성불을 목표로 수행을 하는 

보살의 수행방안은 

크게 통상 10 바라밀다로 정리할 수 있다. 



이들은 결국 그 구체적 내용은 각기 달리 제시되지만, 

결국 일반 생명들이 망상분별과 

집착을 바탕으로 

일반적으로 행위해가는 방식을 중지하고 

그와 반대되는 방향으로 행해 나아가는 것이라고 

이해할 수 있다. 



일반적인 생명의 행위 반응 방식과 

보살의 수행방안을 놓고 비교해 보면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일반의 생명은 

우선 망상분별에 의해 

자신과 자신의 것이라는 분별을 일으키고 이에 바탕하여 


1- 자신의 좋음을 집착해 추구하게 된다. 그래서 다른 생명에게 좋음을 베풀 마음을 일으켜 갖지 못한다. 

2- 그런 가운데 다른 생명이 집착하는 좋음(생명, 신체, 재산, 가족, 지위, 명예...) 등을 함부로 침해하고 

나쁨을 가하게 된다. 

3- 그리고 자신이 반대로 다른 생명으로부터 자신이 집착하는 좋음을 침해받고 나쁨을 받게 되면, 

평안히 참지 못하고, 분노를 일으키고, 미움과 원망을 갖고, 용서하거나 사랑하지 않고 

그 상대에게 해를 가하며 보복을 가하게 된다. 



각 생명이 이렇게 반응하며 살아가기에 

이들 생명이 부딪히는 곳에는 

서로의 이런 1-2-3 의 반응이 서로 얽혀 

그 고통을 증가시키고 확대시켜 나가게 된다. 


예를 들어  모기는 자신의 좋음을 위해 사람의 피를 빨고 

사람은 모기가 물면 아프고 고통스럽기에 

모기를 잡아 죽이는 것과 같다. 

사람에게 좋은 것은 모기에게는 나쁨이고 

모기에게 좋은 것은 사람에게는 나쁨이다. 


이는 마치 경기에서 어떤 한쪽이 통쾌하게 여기는 승리는 

다른 쪽에게는 억울한 패배가 되는 관계와 같다. 


1-2-3 의 한 장면만 본다면, 

이들의 관계는 그렇게 한쪽에게 그런 반응을 통해서 

좋음을 가져다 주고 그치는 것 같지만, 


그러나 생명이 행하는 작용-반작용의 관계는 

다른 한쪽의 1-2-3 의 반응은 

또 다른 한쪽의 1-2-3 의 반응을 일으키는 원인이 되고 

또 그렇게 행하게 되는 1-2-3의 반응은 

다시 한쪽의 1-2-3 의 반응을 일으키는 원인이 되는 것이어서 

이들의 관계는 계속 그와 같이 얽히어 반복되어 나간다. 


그러니 원칙적인 해결방안으로는  

이렇게 1- 2-3 의 반응이 서로 오가는 상태에서 

어느 한쪽이 그것을 중지하고 

그 반대로 행하는 가운데, 

결국 모두가 그와 같이 행해 나가는 것을 방안으로 제시하게 된다. 


모두가 다 그렇게 행하지 않더라도 

여하튼 어느 한쪽이 1-2-3의 반응을 중지하고 그 반대로 행하면, 

그는 일단 앞의 고통의 관계에서 벗어나게 된다고 보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역시 각 주체가 

이 모든 1-2-3의 반응으로 행하게 된 근본 원인인 

망상분별과 집착을 제거하는 것이 

그 전제로 요구되는 것이다. 


보살이 수행하는 내용은 바로 이와 같은 내용을 

출발점으로 한다. 


즉, 보살은 자신과 자신의 것에 대한 망상분별과 집착이 없기 때문에 


1- 온 생명을 위해 

다른 생명에게 재산이나 진리, 기타 다른 이의 두려움을 없애 주는 등 

좋음을 베푸는 행위를 행하고, [보시(布施)]


2- 다른 생명이 집착하는 좋음[생명, 신체, 재산, 가족,...] 등을 함부로  침해하지 않으며 

올바른 계율을 지키며, [정계(淨戒)-불살생, 불투도, 불사음, 불망어, 불음주...]


3- 다른 생명이 자신을 침해하더라도 

이에 대해 망상분별을 일으키지 않고 

좋게 해석하여 이를 평안히 참고 

분노를 일으키지 않고 

상대에 대한 미움과 원망을 일으키지 않으며 

상대를 용서하고 사랑하는 마음을 갖는다. [안인(安忍)]


4- 그리고 위와 같은 보시와 계율, 인욕의 행을 

꾸준히 정진해 나감으로써 [정진]

보살은 복덕을 얻게 되며, 

이러한 복덕을 바탕으로 지혜를 얻어 나가게 된다. 


5- 즉, 마음을 집중시켜 번뇌를 마음에서 몰아내고 

집중된 마음으로 깊이 사색하며 관하는 선정과 [정려(靜慮)]


6- 현상을 실재 진여와 관련시켜 깊은 실상을 꿰뚫어 관하는 

분별을 떠난 무분별의 깊은 지혜의 수행을 통해 [반야] 


지혜의 장애(소지장)을 제거해 나갈 수 있고 

깨달음을 얻을 수 있게 된다. 



7- 그리고 중생제도와 성불의 서원을 실천할 수 있는 

가지가지 수단과 방편을 찾고 마련한 가운데 [방편(方便)] 


8- 자신도 번뇌를 벗어나 머무르고 

다른 생명들도 모두 번뇌를 벗어나게 하고 

자신도 깨달음을 얻어 머무르고 

다른 생명들도 모두 그와 같이 얻게 하고 


또 그 다른 생명들도 

또 다른 생명들을 대상으로 

그와 같이 행해나갈 수 있도록 하는 서원을 

실천하는 것을 목표로 하고, [원(願)] 


9- 이런 선한 행을 실천하며  

옳고 그름을 가리는 힘을 갖고 [력(力)]


10- 현실의 내용과 인과에 대해 

분별의 지혜를 얻어 [지(智)]

이를 바탕으로 서원을 현실에서 실천하며 

수행을 정진해가게 된다. 


이상과 같은 보시-정계-안인-정진-정려-반야-방편-원-력-지의 10 가지 내용이 

보살이 행하는 바라밀다행의 기본적 내용이라고 할  것이다. 


그리고 보살이  

이런 수행을 통하여 궁극적으로 

법신을 증득하고 성불하는 것이  

구극적인 목표점이 된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 댓글 정리 내역 -- 

기존 사이트에서 글이 이전되어 

글들이 깨져 있으므로 재정리하여 붙입니다. 


진리를 고루고루 2010/11/25 12:53 [ address ] [ edit & delete ] [ reply ]



* 원래 경전 내용을 

페이스북에서 조금씩 복사해 가며 

공부해보려고 했으나, 

페이스 북 공간이 

약간은 대화형태의 사이트여서 

공부에는 적절하지 않은 느낌이 든다. 


조금 힘이 든다. 

그래서 블로그에서 공부하기로,


언제 공부하고 다시 정리할 시간이 있을까. 

그래서 한 번 올릴 때, 잘 올리기로, 



진리를 고루고루 2010-11-25 오후 12:55 


경전 내용 원문은 

각 사이트에 무료로 공개되어 있다. 


이 내용을 그대로 복사해 붙이는 것이 

목적이 아니고, 

내용을 이해하고 

그것이 옳고 올바른 내용이라면 

경전 내용도 외우고 더 나아가 

현실생활에서 실천하려는 것이 목적이다



진리를 고루고루 2010/11/25 13:17 [ address ] [ edit & delete ] [ reply ]


초기 불교의 근본적 진리판단과 

목적상태의 설정간의 관계에 있어서 

가장 기본적인 내용을 제시하는 부분이다. 


불교에 대해 

그 목적과 기본 진리의 내용을 

이해하지 못하는 경우 

근본적인 의문을 일으키게 하는 부분이기도 하다. 


이에 대해 의문을 일으킬 만한 내용과 

그에 대한 내용을 적어보기로 한다. 


--- 

내용을 코멘트로 처음 붙였으나, 

수정 편집을 용이하게 하기 위해, 

수정을 마친 다음 

일괄적으로 본문에 넣어 붙였습니다. 

---



진리를 고루고루 2011/01/02 10:24 [ address ] [ edit & delete ] [ reply ]


질문만 제시하고 

답을 일일히 명료하게 제시하지 않아서, 

답답함이 있을 수 있다고 봅니다. 


그러나 일단 이런 기본적인 의문을 갖고 

경전을 대하면 

쉽게 그 답을 

찾아나갈 수 있으리라고 봅니다. 


그리고 그것이 곧 경전 공부이고 

수행의 시작이라고 할 수 있다고 봅니다.



Mun Tokyun 2012/09/05 01:12 [ address ] [ edit & delete ] [ reply ]


오래 간만에 들러 보았는데, 

역시 글이 어렵습니다. 


세계에는 종교가 많이 있는데, 

힌두교, 유대교, 기독교, 이슬람교 

이런 종교들이 


강력한 신을 믿고 따르자. 

그러면 뜻이 이뤄진다. 


이렇게 강력한 신의 존재를 전제로 하여 

신에게 세상의 어려운 일을 맡기고 

의지하는 신앙이라면, 


불교는 그에 반해 

굉장히 이해하기 힘든 

철학적 깊이가 들어 있는 동시에 

단순한 철학 이론이 아니라, 

자신과 다른 모든 생명을 

자비로써 선과 행복 지혜의 상태에 도달하고 

도달하게 해야 함을 강조하는 

윤리적 종교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역시 

매우 어려운 종교가 아닌가. 

생각해봅니다.



Prajna Citta 2012/09/05 15:34 [ address ] [ edit & delete ]


MUN님이 개인적으로 물은 내용에 대하여 

아래 부분에 답을 올립니다. 

http://essay007.tistory.com/754#comment11368700


[ http://essay007.tistory.com/754#comment11368700의 내용은 수정하여 위에 반영하여 포함시키고 삭제합니다. ] 

ori - http://buddhism007.tistory.com/228 ♠● 무상,무아,공과 수행목표의 관계

K0650sf-- ♠● 무상,무아,공과 수행목표의 관계


[tr] http://essay007.tistory.com/754 ♠● 무상,무아,공과 수행목표의 관계

[tr] 10gfl--2012-09\2012-09월_댓글보전.txt ♠● 무상,무아,공과 수행목표의 관계
















○ 경전의 불설 비불설 논의 


경전에는 여러 판본이 있다. 

지금 본 잡아함경의 여러 판본에서 보듯 

한문판본, 한글번역본, 팔리어 판본과 영어판본 등 

다양한 판본을 볼 수 있다. 


이런 경우, 어느 것이 더 원형에 가까운 것인가가 의문이 생기기 쉽다. 


자신이 보는 경전의 내용이 과연 원형의 경전인가하는 의문은 

자신이 보는 경전에 대해 

어느 정도 신뢰를 둘 것인가 하는 의문과도 같다. 


그런 의문이 잘 해결되지 않으면 자신이 대하는 경전에 대해 

신뢰를 두기 어렵고 믿음을 갖기도 힘들게 된다. 


석가모니 부처님은 북인도에서 설법을 처음 하셨다. 

그 설법이 원형이 잘 보이지 않고 

대신 그것이 전파되어 기록된 다른 판본들만 주로 남아 있는 형태가 

오늘날 대하는 여러 경전의 사정이다. 



우선 팔리어경전이 남아 있는 스리랑카와 

한문 번역경전이 남아 있는 중국 등과의 위치관계를 살펴보자. 





08pfl--image\경전의전파경로.jpg


팔리어 경전은 스리랑카를 비롯하여 

남방 불교의 원전으로 취급되고 있으나, 

팔리어 자체가 스리랑카의 언어는 아니다. 


팔리어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은 사전의 풀이를 참조하자. 


팔리어 

소승불교경전의 언어로서 다량의 문헌을 가지며, 

중기 인도 • 아리아어, 프라크리트어를 대표하는 언어. 

그 역사는 오래되었는데, 

불타의 교설을 설교한 성전의 게(偈) 중의 오래된 것은 

기원전 3세기경의 것으로도 추정된다. 

이어서 성전의 산문, 

나아가서는 그 주석이 기원후 5~6세기 이후까지 미치며, 

그후도 오늘날까지 스리랑카를 중심으로 

새로운 문헌이 남아있다. 

팔리어는 소승경전을 위한 문헌인데, 

본래 인도의 어느 곳의 방언이었는지에 대해서 

크게 논의되고 있다. 

오래된 전설에서는 마가다어라고 하는데, 

언어적으로 보면 중부 인도, 마디야 프라데시의 

서부의 방언이었다는 설이 유력하다. 

가장 오래된 불교의 문헌은 불타의 고향인 

마가다 지방의 동부 방언에서 

팔리어로 번역되었다고 추정된다. 

팔리어는 아소카왕 비문중 서부의 길나르의 언어와 가장 유사한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중에 마가다어적인 요소가 지적되는 것은 

그 때문이다. 

가령 팔리어의 a어간의 남성 단수주격은 -o, 

중성은 -am인데 대해서, 

마가다어는 -e만을 가져, 

그 흔적이 때로 팔리어에도 나타나고 있다.


[네이버 지식백과] 팔리어 [Pali] (종교학대사전, 1998.8.20, 한국사전연구사)



대강 지리적 위치로 보나, 그 언어적 계통으로 보나, 

팔리어 경전과 한역 경전 등에서 그것만으로 어느 것이 

원형의 경전이라고 단정할 근거는 없다. 


A라는 원형이 있고 여기에 무언가 빠진 것이 B이고 

또는 무언가가 더해진 것이  C 라고 하자. 


만일 원형이 전 세계적으로 골고루 퍼져 나갔다면, 

어느 곳에서 발견되는 경전도 같은 형태의 A만 볼 수 있어야 할 것이다. 


그런데 유감스럽게도 오늘날 남아 있는 

여러 경전을 대하면, 

약간의 공통성을 찾을 수 있지만, 

그 체계나 형태가 서로 많이 다른 경전들을 

만나게 된다. 


또 어떤 것을 기준으로 하면 

어떤 것은 다른 것에 비해 더해진 내용이 있는 것 같고 

또 어떤 것은 빠진 내용이 있는 것처럼 생각된다. 


이 때 더해진 것이 잘못된 것일까, 

빠진 것이 잘못된 것일까 하는 의문을 갖게 된다. 


만일 자신이 대하는 경전만을 원본으로 단정한다면, 

여기에 더해진 것도 잘못이고 빠진 것도 잘못이라고 보게 된다. 


그러나 만일 다른 쪽 경전을 원본으로 단정한다면, 

그것은 또 반대로 해석하게 된다. 


문제는, 이런 양 해석 가운데, 어느 입장도 

그렇게 그것이 원본이라고 단정할 근거를 갖지는 못한다는 점이다. 


처음 석가모니 부처님이 설법한 이후 

경전이 전해지기 까지 거리상으로나 시간상으로나 

시간이 흘렀고 

그것은 팔리어 경전이거나, 산스크리트 경전이거나, 

또는 한역 경전이거나 사정이 엇비슷하다. 


여하튼 오늘날 다른 형태로 각지에 남아 있는 경전만으로는 

오늘날 그런 변형 과정을 정확히 판단할 수는 없다. 

어디까지나 추정이고 추리에 의하여 

주장되는 내용들인 것이다. 


결국 불교의 다양한 판본에 대해서 

어느 것이 원본이라고 볼 것인가에 대해서는 

판단을 보류해야 한다고 본다. 


소승경전 대승경전에 관해서도 같은 문제가 발생한다. 

그래서 대승경전은 후기 불교 신자들이 창작해 만들어낸 것이라는 

학자들의 주장이 많다. 


그러나 이는 모두 근거가 부족한 

추리에 의한 것으로 보아야 한다. 


특히 스리랑카에 대승경전들이 남아 있지 않은 것은 

당시 대승경전이 인도에 없었다는 사정에 기인하는 것이 아니며, 

스리랑카에 처음 근본 경전들이 들어간 이후 

다시 대승 경전이 들어갔으나, 

스리랑카에서 이를 받아들이지 않고 거부했다는 

사정에 의한 것이다. 




이처럼 여러 판본을 놓고 어느 것이 원본인가의 문제가 

갖는 어려운 사정은 

다음과 같은 상황을 놓고 가정해 생각해보면 쉽다. 


삼국지는 원래 삼국의 역사에서 비롯한다. 

그것이 1000여년이 훨씬 경과한 후 원나라시대에 

나관중이 소설화한 것이 삼국지의 기원으로 알려진다. 

그래도 여하튼 소설 삼국지의 원형은 

나관중에서 찾아야 할 것이다. 


그 삼국지의 판본이 오늘날 한국에서도 여러 판본이 존재한다. 

때로는 초등학생 용으로 짧게 줄인 판본도 있고 

만화로 그린 것도 있다. 


이런 가운데 어느날 세계 대지진이 일어나는 등으로 인해 

모든 문명의 기초가 없어졌다고 하자. 


아주 많은 시간이 지나 후대의 사람들이 

이제 남아 있는 판본만으로 

이 가운데 어느 것이 원본인가를 판단해 나간다고 하자. 


이 가운데에서 짧은 것이 원본이고 

긴 삼국지는 이 짧은 것을 늘려서 만들어 낸 위본으로 

보는 것이 옳은가. 


아니면 반대로 길게 길게 늘인 삼국지가 원본이고 

짧은 것은 이것을 축약한 것이기에 아니라고 보아야 하는가. 


또 정사에 나오는 삼국지는 이런 경우에 어떤 판단을 

받아야 하고 

원래 있었던 삼국지 소설은 또 어떤 판단을 받게 될 것인가. 


이런 예는 

하나의 소설을 쓰는 사람의 입장을 놓고 보아도 

사정이 같다. 


어떤 경우는 소설을 쓸 때 소설가가 미리 구상한 

어떤 짧은 골격을 가지고 

여기에 내용을 붙여 길게 늘여 써가는 경우도 있다. 


반대로 인생의 가지가지 경험을 기록한 다음 

나중에 이것을 묶고 묶어서 짧게 줄여 

소설로 쓰는 경우도 있다. 


또 어떤 이가 말하고자 하는 주제가 

하나 있다고 하자. 

그것은 착하고 올바르게 살아야 한다는 내용이라고 하자. 


그러나 이 내용을 가지고 

초등학생을 만났을 때는 이렇게 이야기하고

중학생을 만났을 때는 이렇게 이야기하고 

또는 학자들의 논문 발표회에서는 이렇게 이야기하고 

다른 형태로 이야기할 수 있다. 

아마 이런 사람도 갓난아이를 대할 때는 

그저 갓난아이를 달래는 일만 했을 지 모른다. 


그러나 그 사람은 늘 같은 주제를 가지고 

그렇게 이야기하고 행위를 했다는 경우도 생각할 수 있다. 



이런 다양한 경우를 생각한다면, 

현재 남아 있는 경전의 형태나 내용 분량 표현 등의 문제만을 

가지고 그 선후나 원본 여부를 판단하는 것은  

무모한 추리임을 쉽게 알 수 있다. 


본인은 하나의 작은 논문을 

약 1년여에 걸쳐 작성해본 경험이 있는데 

처음 출발한 논문의 골격에서 최종 완성본을 제출한 시기까지 

매일 매일 내용과 형태가 바뀌어져갔음을 기억한다. 

어제 본 내용을 오늘 검토해보면 

또 수정해야 할 부분이 발견되는 것이 일반적이다. 


한편, 제출시점이 되어서는 

제출할 수 있는 분량에 제한이 있기 때문에 

같은 의미도 최대한 표현을 줄여 표현할 방안을 찾게 되고 

자세한 내용은 생략하고 압축해 

최종 완성본을 제출한 경험이 있다. 


그 이후로도 

그 내용을 다시 살펴 보면 조금 더 수정하고 

내용을 변경해야 할 부분을 발견하게 된다. 


지금 여기에 올려 놓은 글도 

처음 글을 올린 후 4년간 읽을 때마다 

조금씩 내용을 변경하고 바꾸어 놓은 것이다. 


사정이 이러한데, 

만일 이 과정에서의 원고들을 다 나열해 놓고 

이 가운데 어떤 것이 정말 원본인가를 묻는다면, 

답하기 곤란하게 된다. 


한 사람이 원고를 쓸 때도 이와 같은 사정이 있는데, 

이는 경전에서도 그 사정이 유사하다고 본다. 


부처님의 입장에서는 하나의 내용을 

상대의 각 경우에 맞추어 다양한 방식으로 

설한다는 점이 있고 

그 이후 그 내용은 

여러 경로를 통해 전파되고 번역되고 

정리되는 과정에서 

수없이 많은 변화를 거치게 된다는 사정은 

쉽게 짐작할 수 있다. 


번역의 경우에서는 그 변화가 훨씬 심하다. 

오늘날 한문 경전을 놓고 10 사람에게 번역을 맡기면 

동일한 내용으로 번역되지 않는 모습을 보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다. 


그런 차이는 중국의 번역과정에서도 

살펴볼 수 있다. 


이 가운데 어느 번역본을 정말 원본과 같은 의미를 

보존하고 있는 형태라고 

보아야 할 것인가도 역시 어려운 문제다. 


이에 관해 보다 자세한 내용은 

대승 경전 불설 비불설에 관한 논의로 미룬다. 


다만 경전을 공부하는 입장에서는 

어느 판본이 원본이라는 입장에서 연구한다기 보다는 

이 경전이 자신에게 실질적으로 주는 내용이 무엇인가. 

그리고 자신이 이 내용을 토대로 하여 

어떤 진리나 가치의 깨달음을 얻어야 한다면 

그것은 무슨 내용인가 하는 입장에서 

경전을 대하는 것이 보다 낫다고 본다. 


경전의 내용을 부처님의 가르침의 내용으로 믿고 

그대로 외우는 것도 

바로 그런 입장에서 요구되는 내용이라고 본다. 


한편, 부처님은 

자신을 의지하고 진리를 의지하라는 

가르침을 주시는데

그런 입장에서 경전을 대한다면, 

어느 경전을 대하던 

그것은 크게 문제되지 않는다고 본다. 


또 이런 입장에서는 경전 뿐만 아니라, 

모든 색상문자가 진리와 가치를 담고 있으며, 

또 다 자신에게 

그런 진리와 가치의 깨달음을 일으키는 데 

도움을 주는 것임을 쉽게 알 수 있다. 



● 정관과 염리의 마음의 관계에 대한 의문 




Ω♠문서정보♠Ω

™[작성자]™ Prajna Citta

◑[작성일]◐ 2010-11-25-10-20

♨[수정내역]♨ 2014-03-12-수-01-04 내용 보충 수정 편집 

~ Lab value 2014/10/07/화/09:39 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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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디스크 ]▩ [DISK] ○ 근본불교 K0650sf-- ♠● 정관과 염리의 마음의 관계에 대한 의문 

구 h:/개인_불교공부/잡아함경_0001.HTM

ж[ 웹 ]ж [web] http://buddhism007.tistory.com/228 ♠● 정관과 염리의 마음의 관계에 대한 의문

구 web: http ://blog.paran.com/buddhism007/41677206

⇔[ 관련문서]⇔

보충 추가 참조 

fr http://story007.tistory.com/959 ♠우리가 우리 자신으로 이해하는 1과 같은 내용

fr http://story007.tistory.com/959 ♥생사에 생사가 없다는 이상한 명제

fr http://story007.tistory.com/956 ♠불교에서는 근본 정신(아뢰야식)이

fr http://story007.tistory.com/955 ♠믿기지 않는 사실- 나의 분실 사건


일부내용 *pt* to k0020sf--

*pt* to http://blog.naver.com/thebest007/220108740395


{!-- 관련 문서 링크--}

인터넷상의 목록 http://buddhism007.tistory.com/604

디스크상의 목록 ●불교 08fl--budr\budr-catalog.htm

Ш[ 관련 문서 인용 부분 ]Ш

ㅹ[ 코멘트 등 정리 내역]ㅹ





○ 경전의 불설 비불설 논의 

◈Prajna Citta 2014/03/22/토/09:58 

● 경전의 판본의 문제 



Ω♠문서정보♠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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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2014/03/22/토/09: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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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디스크 ]▩ [DISK] ○ 경전의 불설 비불설 논의 k0650sf-- ♠● 경전의 판본의 문제

ж[ 웹 ]ж [web] http://buddhism007.tistory.com/228 ♠● 경전의 판본의 문제

⇔[ 관련문서]⇔

{!-- 관련 문서 링크--}

인터넷상의 목록 http://buddhism007.tistory.com/604

디스크상의 목록 ●불교 08fl--budr\budr-catalog.htm

Ш[ 관련 문서 인용 부분 ]Ш

http://kabc.dongguk.edu/Combine/Index?ccode=01&volcode=K0650001&isimg=1&isorg=1&iskor=1

http://kabc.dongguk.edu/Contents?ctype=01&dcode=K0650001001&tcode=00

ㅹ[ 코멘트 등 정리 내역]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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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Comments
  • Favicon of http://blog.paran.com/happiness007 BlogIcon 진리를 고루고루 2010.11.25 12:53 신고 * 원래 경전 내용을 페이스북에서 조금씩 복사해 가며 공부해보려고 했으나, 페이스 북 공간이 약간은 대화형태의 사이트여서 공부에는 적절하지 않은 느낌이 든다. 조금 힘이 들다. 그래서 블로그에서 공부하기로,,,&lt;br&gt;&lt;br&gt;언제 공부하고 다시 정리할 시간이 있을까.. 그래서 한 번 올릴 때, 잘 올리기로,,&lt;br&gt;&lt;br&gt;진리를 고루고루 2010-11-25 오후 12:55 &lt;br&gt;경전 내용 원문은 각 사이트에 무료로 공개되어 있다. &lt;br&gt;이 내용을 그대로 복사해 붙이는 것이 목적이 아니고,,내용을 이해하고 그것이 옳고 올바른 내용이라면 경전 내용도 외우고 더 나아가 현실생활에서 실천하려는 것이 목적이다
  • Favicon of http://blog.paran.com/happiness007 BlogIcon 진리를 고루고루 2010.11.25 13:17 신고 초기 불교의 근본적 진리판단과 목적상태의 설정간의 관계에 있어서 &lt;br&gt;가장 기본적인 내용을 제시하는 부분이다. &lt;br&gt;&lt;br&gt;&lt;br&gt;불교에 대해 그 목적과 기본 진리의 내용을 이해하지 못하는 경우 &lt;br&gt;근본적인 의문을 일으키게 하는 부분이기도 하다. &lt;br&gt;&lt;br&gt;이에 대해 의문을 일으킬 만한 내용과 그에 대한 내용을 적어보기로 한다. &lt;br&gt;&lt;br&gt;--- 내용을 코멘트로 처음 붙였으나, 수정 편집을 용이하게 하기 위해, 수정을 마친 다음 일괄적으로 본문에 넣어 붙였습니다. ---
  • Favicon of http://blog.paran.com/happiness007 BlogIcon 진리를 고루고루 2011.01.02 10:24 신고 질문만 제시하고 답을 일일히 명료하게 제시하지 않아서, 답답함이 있을 수 있다고 봅니다. 그러나 일단 이런 기본적인 의문을 갖고 경전을 대하면 쉽게 그 답을 찾아나갈 수 있으리라고 봅니다. 그리고 그것이 곧 경전 공부이고 수행의 시작이라고 할 수 있다고 봅니다.
  • Favicon of http://essay007.tistory.com BlogIcon Mun Tokyun 2012.09.05 01:12 신고 오래 간만에 들러 보았는데, 역시 글이 어렵습니다.

    세계에는 종교가 많이 있는데, 힌두교, 유대교, 기독교, 이슬람교 이런 종교들이 강력한 신을 믿고 따르자.
    그러면 뜻이 이뤄진다. 이렇게 강력한 신의 존재를 전제로 하여 신에게 세상의 어려운 일을 맡기고 의지하는
    신앙이라면,

    불교는 그에 반해 굉장히 이해하기 힘든 철학적 깊이가 들어 있는 동시에 철학 이론이 아니라,
    자신과 다른 모든 생명을 자비로써 선과 행복 지혜의 상태에 도달하고 도달하게 해야 함을 강조하는 윤리적 종교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역시 매우 어려운 종교가 아닌가. 생각해봅니다.
  • Favicon of http://buddhism007.tistory.com BlogIcon Prajna Citta 2012.09.05 15:34 신고 MUN님이 개인적으로 물은 내용에 대하여
    아래 부분에 답을 올립니다.

    http://essay007.tistory.com/754#comment11368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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