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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진리와실천
불기2564-12-08_종경록-K1499-073 본문
『종경록』
K1499
T2016
제73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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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경록』
♣1499-073♧
제73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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宗鏡錄卷第七十三 ...
K1499
종경록 제73권
연수 지음
송성수 번역
무릇 여덟의 식(識)안에서 진실을 덮고 허망을 익히지만,
어느 식이 업(業)을 짓고 어느 식이 인(因)이 되며 어느 식이 의지[依]가 되어서
그 허망한 종자를 이루는 것인가.
【답】 앞의 다섯 식[前五識]은 대경[塵]을 취하고
제6식은 인이 되며
제7식은 나[我]를 헤아리면서 업을 짓고
제8식은 의지가 되나니,
이로써 생사(生死)의 괴로운 결과가 끊이지 아니한다.
능가경(楞伽經)의 게송에서 말하였다.
마치 물이 다 흘러버리면
물결이 일어나지 않게 되나니
이와 같아서 의식(意識)이 소멸하면
갖가지 식이 생기지 않는다.
해석[釋]에서 말하였다.
“다섯의 식이 대경을 취하여 6식에 굴러 들어가면
6식은 그 법을 기억하므로 인이 되고
7식은 연(緣)을 끌어당기며
6식은 선악의 업을 지어 미래 세상의 생사를 짓게 되므로
8식을 가려서 나타나지 못한다.
만일,
다섯의 식이 대경을 취하지 않으면 곧 6식이 없고,
6식이 없기 때문에 7식이 생기지 아니하며,
7식이 생기지 않기 때문에
선업(善業)ㆍ악업(惡業)이 없다.
선업ㆍ악업이 없기 때문에 생사가 없으며,
생사가 없기 때문에 여래장(如來藏)인 마음이 잔잔하나니,
바로 이것이 6식ㆍ7식이 소멸하여 8식을 이룩하는 것이다”라고 했다.
또 8식은 5ㆍ6ㆍ7식의 의지할 바[所依]가 되므로
모든 식의 인이 되어 주는 것으로
곧 제6식의 마음은 모든 식이 의지하게 됨은
마치 물이 다하면 물결이 없는 것과 같다.
6식이 소멸하면 7식 또한 생기지 않기 때문에
‘한생각인 무명(無明)의 바람이 불어서 진여(眞如)의 바다를 움직인다’고 하나니,
무명의 바람이 다하여 식(識)의 물결이 생기지 아니하면
각(覺)의 바다 성품이 근원을 맑게 하고 근원이 맑으면 그 각은 원래부터 묘하다.”
【문】 온갖 세간의 인과(因果)는 서로 갚으면서 생사가 끊이지 아니한데,
모든 식 가운데서 어느 식이 주(主)가 되는가.
【답】 나고 소멸하는 인연(因緣)은 맨 처음에 아뢰야식(阿賴耶識)을 의지하여 체성[體]으로 삼고
의식(意識)으로써 작용[用]을 삼는다.
이렇게 하여 3세(世)의 인과는 유전(流轉)하면서 끊이지 않나니,
그 공(功)이 의식에 있다는 이런 이치 때문에 뜻[意]을 상속식(相續識)이라고 한다.
기신론(起信論)에 말하였다.
“다시 나고 소멸하는 인연이란,
모든 중생이 마음에 의지하여 의식이 구르는 것이다.
이 뜻은 무엇인가 하면,
아뢰야식에 의지하여 무명이 있어서 불각(不覺)이 일어나 능히 보고 능히 다투며 능히 경계를 취하여 분별하며 상속(相續)하므로 뜻이라 하느니라.
이 뜻에는 다시 다섯 가지의 다른 이름이 있다.
첫째 이름은 업식(業識)이다.
즉 무명의 힘으로 불각의 마음이 움직인다.
둘째 이름은 전식(轉識)으로서,
움직이는 마음에 의지하여 경계를 능히 보는[能見] 모양이다.
셋째 이름은 현식(現識)으로서,
온갖 경계와 모양을 나타낸다.
마치 밝은 거울이 색상(色像)을 다투는 것처럼 현식도 그와 같아서 그 다섯 가지 대경이 이르면 이내 나타나서 앞과 뒤가 없으며,
공력을 들이지 아니한다.
넷째 이름은 지식(智識)으로서,
물들거나 깨끗함[染淨]의 모든 차별된 법을 분별한다.
다섯째 이름은 상속식(相續識)으로서,
항상 짓는 뜻과 상응하여 끊어지지 않으며,
과거의 선업ㆍ악업 등을 맡아 지녀서 잃거나 파괴되지 않게 하고 현재와 미래의 고락(苦樂)의 과보를 성숙시켜 어김이 없게 하며,
전에 겪었던 일은 홀연히 기억하고 아직 겪지 않은 일은 망령되이 분별을 낸다.
그러므로 삼계(三界)의 온갖 것은 모두가 마음으로 제 성품[自性]을 삼나니,
마음을 여의면 여섯 가지 대경이 없다.
왜냐하면 온갖 모든 법은 마음을 주인으로 삼아 허망한 생각으로부터 일어나기 때문이다.
무릇 분별한 바는 모두가 자기 마음을 분별하는 것이로되 마음이 마음을 보지 못하며 모양을 얻을 수 없다.
그러므로 알아야 한다.
온갖 세간의 경계와 모양은
모두가 중생의 무명인 허망한 마음에 의지하여 건립되게 된다.
마치, 거울 속의 형상과 같아서 체성이 없으며
오직 허망하게 분별하는 마음으로부터 생길 뿐이므로,
마음이 생기면 갖가지 법이 생기고
마음이 소멸하면 갖가지 법이 소멸한다”고 하였다.
그러므로 해석에서 말하였다.
“다섯 가지 식을 통틀어 논하여 모두 뜻[意]이라고 하지만,
근본에 나아가서 말한다면 업식(業識)만을 취하나니,
가장 미세하여 모든 식의 근본이 되기 때문이다”라고 했다.
이와 같은 업식은 견분(見分)ㆍ상분(相分)으로 나누어지지 않으나,
모든 보살들은 마음의 허망한 동요임을 알기에 앞의 경계가 없고
온갖 법은 이 식의 헤아림뿐임을 아는지라
앞과 바깥의 집착을 버리나니,
업을 따르는 식이라는 뜻이기 때문에 업식이라고 한다.
“마음이 마음을 보지 못하며 모양을 얻을 수 없다”고 함은,
바로 모든 법은 있는 것이 아니라는 이치를 밝힌 것이다.
입능가경(入楞伽經)의 게송에서 말하였다.
몸이 삶을 돕고 머물러 유지함은
마치 꿈속에서 사는 것과 같나니
두 가지 마음이 있어야 하는데도
마음에는 두 가지 모양이 없다.
마치 칼이 제 몸을 베지 못하고
손가락이 제 손가락을 만져보지 못하듯
마음이 그 마음을 보지 못하는
그 일 역시 그와 같으니라.
만일 꿈속에서 보게 되는 일들이 실제로 존재한다면,
곧 능히 봄[能見]과 본 것[所見]의 두 모양이 있어야 할 터인데도
그 꿈속의 것은 실로 두 가지 법이 없나니,
삼계의 모든 마음은 모두가 이 꿈과 같다.
마음을 여의고서 그 밖에 분별할 만한 것이 없기 때문에
‘온갖 분별은 곧 자기 마음을 분별한다’고 말했다.
그러나 자기 마음에 나아가서 보면
자기 마음을 볼 수 없는 것이 마치 칼과 손가락 따위와 같다는 것이다.
따라서 ‘마음이 마음을 보지 못한다’고 한다.
이미 다른 이가 볼 수 없기에 역시 자기도 볼 수 없나니,
본 것이 없기 때문에 능히 봄이 이루어지지 아니하며
주관[能]과 객관[所]의 두 모양에 모두 얻을 바가 없기 때문에
‘모양을 얻을 수 없다’고 말한다.
또 한 마음이 무명을 따라 움직여서
다섯 가지 식[五識]을 짓기 때문에
‘삼계는 마음으로 굴릴 뿐이다’라고 설명하나니,
이 마음을 따라 훈습하여 비슷하게 나타남이 비록 갖가지가 있기는 하지만
그 인연을 궁구하면 마음으로 지을 뿐이다.
현식(現識)을 여의면 여섯 가지 대경이 없나니,
도리어 여섯 가지 대경을 증험해 보라.
이것은 한 마음일 뿐이기 때문에
‘마음을 여의면 경계 등이 없다’고 말한다.
【문】 현재 여섯 가지 경계가 실제로 있거늘,
어째서 마음뿐이라고 하는가.
【답】 온갖 법은 모두 이 마음을 따라 훈습하며 일으키는 것이라,
다시는 다른 체성이 없기 때문에 마음뿐이라고 설명한다.
(의심하여 말한다.) 무엇이 모든 법을 짓는 것인가.
【답】 망령된 생각으로 훈습하기 때문에 모든 법을 일으킨다.
이 때문에 “망령된 생각으로부터 일어난다”고 하는 것이 역시 옳다.
(의심하여 말한다.) 법이 마음뿐이라면 나는 어째서 보지 못하며,
내가 보는 것은 바로 다른 마음일 뿐인가.
해석에서 이르되,
“다른 마음[異心]이란 바로 망령된 생각으로 분별하면서 짓기 때문에
‘망령된 생각으로 생긴다’고 한다.
이미 경계가 식일 뿐[唯識]이요 그 밖에 다른 법이 없으므로
이 때문에 갖가지의 분별이 모두 자기 마음이며,
곧 대경에 마음이 없으면 식이 스스로 반연하지 않으므로
이 때문에 대경이 없어서
식이 생기지 아니하면 마음이 마음을 보지 못하는 것이다”고 했다.
섭론(攝論)에서 말하였다.
“따로의 법이 있어서 따로의 법을 능히 취하는 것이 없다.”
즉 주관과 객관이 이미 다하였기 때문에 모양을 얻을 수가 없다.
마음이 생기면 갖가지의 법이 생기고
마음이 소멸하면 갖가지의 법이 소멸한다고 함에 대해,
유가론(瑜伽論)에서 물었다.
“관행(觀行)을 닦는 모든 이들이 변계소집(遍計所執)에 모양이 없음을 보는 때에는
어떠한 성질[性]에 들었다고 말해야 겠는가.” 대답했다.
“원성실성(圓成實性)에 들어간 것이다.” 물었다.
“원성실성에 들어간 때에는 어떠한 성질을 버렸다고 해야겠는가.” 대답했다.
“의타기성(依他起性)을 버린 것이다”라고 했나니,
그러므로 알아야 한다.
유식관(唯識觀)이 성립되면 식(識)이 없는 것이다.
능가경(楞伽經)의 게송에서도 말하였다.
“마음이 없는 심량(心量)인데/
나는 심량이라고 말하도다.”
이것은 이를 두고 한 말이다.
만일 이 논(論)에 의한다면,
무명(無明)이 진여(眞如)를 움직여서 생멸하는 연기[生滅緣起]를 이루므로
무명의 바람이 사라지면 식(識)의 물결이 이내 그치나니,
이 진여는 평등하고 평등할 뿐이다.
이 경계는 마음을 여의고서 그 밖에 체성을 얻을 수 없으며,
또한 이것이 바로 마음이기 때문에 다시는 체성이 없다.
마치 거울 밖에는 체성이 없고 거울 안에도 체성이 없는 것과 같다.
(의심하여 말한다.) 이미 체성이 없다면 어째서 분명하게 나타나는가.
해석에서 이르되,
“이는 다 같이 참 마음[眞心] 위에서 허망하게 나타난 것이다.
어디에 체성이 있어서 얻을 수 있겠는가.
(의심하여 말한다.) 무엇으로 마음 위에서 나타난 줄 아는가.
해석에서 이르되,
“마음이 생기면 갖가지의 법이 생긴다”고 했기 때문이니,
무명의 힘으로 불각(不覺)의 마음이 움직여서 온갖 경계가 나타나면 마음이 따라 훈습하며 움직이기 때문에 ‘생긴다’고 한다.
만일 무명이 소멸하면 경계가 따라 소멸하고 모든 분별의식이 모두 소멸하여 남는 것이 없기 때문에 “마음이 소멸하면 갖가지 법이 소멸한다”고 했나니,
이야말로 마음 근원이 도리어 깨끗해지기 때문에 ‘소멸한다’고 한다.
이미 마음이 불각을 따르는지라 모든 경계가 망령되이 나타나면 모든 경계를 증험해 보라.
마음일 뿐이요 체성이 없다.
또한 무릇 마음이란 아직 나타나지 않은 징조를 나타내며 동정(動靜)이 자기 마음에 응(應)하지 아니함이 없다.
마치 시(詩)에서 이르되,
“나를 생각하면 재채기가 난다[願言則嚔]”고 함과 같나니,
원(願)이란 생각한다[思]는 것이요 언(言)이란 나[我]라는 것이다.
말하자면,
“다른 사람이 혹시 자기를 생각하면 재채기가 나온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알아야 한다.
마음은 천 리(千里)까지 응하며 설령 먼 곳에 있으면서 생각한다 해도 나는 모두 다 안다.
그러므로 온갖 일은 마음이 먼저 알기 때문에 심령(心靈)이라 일컫게 되는 것이니,
이를 두고 한 말이다.
마치 태산(太山) 오백무(吳伯武)가 아우를 잃어버린 지 20여 년이 되었는데,
서로가 우연히 저자에서 만나 서로 싸우면서 때리다가 백무의 마음이 어쩐지 슬퍼졌으므로 물어보았더니 형제였었다고 하는 사실과 같다.
【문】 생멸하는 인연[生滅因緣]은 특별히 무엇으로 인(因)을 삼고 무엇으로 연(緣)을 삼으면서 생기게 되는가.
【답】 옛 스님의 해석에서 이르되,
“생멸하는 인연에는 체성[體]과 모양[相] 둘이 있다.
첫째는 아뢰야(阿賴耶)인 마음의 체성이 제 성품[自性]을 지키지 않고 변하면서 모든 법을 지으므로 이것이 생멸하는 것의 인이요,
근본 무명(根本無明)이 마음의 체성을 움직이므로 이것이 생멸하는 것의 연이다.
또 무명이 머무는 자리는 모든 물듦[染]의 근본이어서 모든 생멸을 일으키므로 인이라고 하며,
여섯 가지 대경은 7식(識)의 물결을 움직여 생멸하므로 이것은 생멸하는 것의 연이다”라고 했나니,
이 두 가지 뜻에 의지하여 인연을 나타낸다.
모든 생멸은 서로가 모여서 생기기 때문에 ‘중생’이라고 한다.
그러나 따로 체성이 없고 마음인 체성에 의지하기 때문에 ‘마음에 의지한다[依心]’고 하나니,
바로 이 아뢰야식이 자기 마음의 모양이다.
또 진실[眞]과 허망[妄]이 화합하여 모든 식의 인연이 생기나니,
네 가지 글귀로 말한다.
첫째 여래장(如來藏)은 오직 생멸하지 않을 뿐이므로 마치 물의 축축한 성질[濕性]과 같다.
둘째 일곱 가지 식[七識]은 오직 생멸할 뿐이므로 마치 물의 물결과 같다.
셋째 아뢰야식은 생기기도 하고 소멸하기도 하며,
또한 생멸하지 않기도 하므로 마치 바다가 움직임과 고요함을 다 포함한 것과 같다.
넷째 무명의 뒤바뀐 집착은 생멸이 아니기도 하고 생멸하지 않는 것도 아니므로 마치 물결을 일으키는 사나운 바람이 물도 아니고 물결도 아닌 것과 같다.
【문】 아뢰야식은 움직임과 고요함에 다 통하는 것이라 생멸문(生滅門)에만 있지 않아야겠다.
【답】 고요함이 일어나게 됨으로써 움직임을 이루는 것이라 따로 움직이는 체성이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고요한 성질은 움직임에 따르는 것이라 역시 생멸문 안에 있다.
아뢰야식이 움직임과 고요함을 다 갖추어서 이 생멸문에 있을 뿐만 아니라,
역시 여래장은 움직이지 않는 것이로되 그 역시 이 문 안에 있다.
왜냐하면 저 생멸에는 따로 체성이 없기 때문이니,
마치 물에 물결이 이는 것과 같다.
또 기신론(起信論)에서 설명한다.
“무명이 인(因)이 되고 경계가 연(緣)이 되어 세 가지의 세밀한 식[三細之識]과 여섯 가지의 거친 모양[六麤之相]을 내면 헷갈려서 어두운 연을 따르면서 육취(趣)에 잠기고,
시각(始覺)이 인이 되고 5도(度)가 연이 되면 깨쳐서 아는 연을 따르면서 1승(乘)에 오른다”고 했다.
또 설명하였다.
“헷갈리면 항하(恒河) 모래보다도 많은 망령된 물듦[妄染]의 법이 있어서 이내 물든 연(緣)이 생기면서 깨끗한 연은 소멸하며,
깨치면 항하 모래보다도 많은 깨끗한 공덕들이 있어서 이내 깨끗한 연이 일어나면서 물든 연은 소멸한다”고 했다.
그러나 한 마음으로 짓게 될 뿐이요 다시는 두 개의 근원은 없나니,
이치로는 깨침을 좇고 미혹을 좇는다고 설명하나 실은 능히 좇는 것[能遂]이나 좇을 바[所遂]가 없다.
그러므로 논(論)에서 말하였다.
“온갖 법은 모두가 마음으로부터 망령된 생각을 일으키면서 생기며,
무릇 분별한 것은 모두 자기 마음을 분별한 것이로되 마음이 마음을 보지 못하며 모양을 얻을 수 없다”고 했다.
마치 고덕(古德)의 해석에,
물결과 물의 비유는 진여문(眞如門)과 생멸문(生滅門)의 두 문이니,
물의 습기로는 심진여(心眞如)에 비유하고 물결의 움직임으로는 심생멸(心生滅)에 비유한 것과 같다.
물결이 습기와 다름이 없는 움직임이라면 진여와 다름이 없는 생멸이라 곧 물로써 물결을 말하므로 변하지 않는 성질이면서 인연의 생김이요,
물이 움직임과 다름이 없는 습기라면 생멸을 여읨이 없는 진여라 곧 물결로써 물을 밝히므로 인연을 떨어 버리면서 진실과 다름없는 것이다.
【문】 기억하는 일은 반드시 어느 법에 속하여 생기는가.
【답】 대승의 설명[大乘說]으로는 “기억하는 법에 세 가지가 있다.
첫째 자증분(自證分)이 견분(見分)을 기억한다.
둘째 별경(別境) 안의 생각이 전에 겪었던 일들을 기억한다.
셋째 식(識) 안의 종자(種子)는 망령되이 생기지 않고 스스로 현행(現行)한다”고 했다.
유식소(唯識疏)에서 이르되,
“마치 전에 겪었던 경계가 아니면 반드시 기억할 수 없는 것과 같다”고 했나니,
현행(現行)의 물질로서 일찍이 견분(見分)의 연을 입었다면 뒷날에 반드시 기억할 수 있지만,
만일 일찍이 상분(相分)의 연이 되지 않았다면 뒷날에 반드시 기억할 수 없는 것과 같다.
능히 반연하는[能緣] 견분은 과거의 때와 현재 세상에서 상분을 반연할 뿐이므로 일찍이 스스로가 반연하지 않았다면 전에 이미 소멸된 마음이라 벌써 지나가버렸거늘 오늘날의 견분이 무슨 까닭이 있기에 스스로 기억될 수 있겠는가.
옛날에 대해서도 일찍이 반연으로 돌아가지 않는 제 견분이기 때문이다.
이미 오늘날의 심심소법(心心所法)이 스스로 기억할 수 있다고 인정한다면,
분명히 옛날에는 자증분(自證分)이 견분을 반연함이 있었으므로 그 경계를 증명하는 양과(量果)가 되기 때문이니,
그러므로 오늘날에 기억하는 것이다.
【문】 생멸문(生滅門)의 유루위(有漏位)에서,
교(敎)에서 논한 바를 보면 몇 가지 생사가 있는가.
【답】 대략 두 가지가 있다.
첫째는 분단생사(分段生死)요,
둘째는 변역생사(變易生死)이다.
식론(識論)에서 말하였다.
“첫째는 분단생사이다.
모든 유루의 선업(善業)과 불선업(不善業)이 번뇌장(煩惱障)의 연(緣)을 돕는 세력으로 말미암아 삼계(三界)의 거친 이숙과(里熟果)를 받게 되고 몸과 수명의 장단이 인연의 힘을 따라 정해진 분한(分限)이 있기 때문에 분단이라고 한다.
둘째는 부사의(不思議)한 번역생사이다.
모든 무루(無漏)의 분별 있는 업이 소지장(所知障)의 연을 돕는 세력으로 말미암아 뛰어나고 미세한 이숙과를 받게 되고 몸과 수명을 바꾸며,
고쳐서 정해진 제한이 없기 때문에 변역이라고 하며,
무루의 정력(定力)과 원력(願力)이 바로 돕고 받게 하는 것이라 묘한 작용이 헤아리기 어려우므로 부사의라고 하며,
혹은 의생신(意生身)이라고도 하나니,
뜻과 원하는 대로 이루어지기 때문이다”라고 했다.
계경(契經)에서 설명한다.
“취(取)와 같은 것이 연(緣)이 되고 유루의 업인(業因)이면 후유(後有)가 계속 되는 이라 3유(有:三果)에 나게 되고,
이 무명습지(無明習地)와 같은 것으로 연이 된다.
무루의 업인이면 아라한(阿羅漢)과 독각(獨覺)이 있으며,
이미 자재함을 얻은 보살의 세 가지 이생신도 변화신(變化身)이라 한다.
무루의 정력으로 차츰차츰 본래와 다르게 함이 변화와 같기 때문이다”라고 함과 같다.
【문】 논에서 이르되,
“소지장이 해탈(解脫)을 장애하지 아니함은 발업(發業)과 윤생(潤生)의 작용이 없기 때문이다”라고 했거늘,
무슨 작용으로 나고 죽는 고통을 돕고 받게 되는가.
【답】 두 가지 이익이 이룩되기 때문에 다시금 삶[生]을 도와야 한다.
논에서 말하였다.
“자신이 보리(菩提)를 증득하면 남을 이롭게 하고 즐겁게 하기 때문이니,
부정성(不定性)의 독각ㆍ성문과 자재함을 얻은 큰 원력 보살이다.
이미 영영 번뇌장을 끊고 조복했기 때문에 다시는 장차 분단(分段)의 몸을 받음이 없지만,
오랜 세월 동안 닦을 보살행(菩薩行)을 그만둘까 두려우므로 드디어 무루의 훌륭한 정력과 원력으로 마치 수명을 늘려 오래 사는 법처럼 현재 몸의 인(因)을 도와 그로 하여금 오랜 세월 동안 결과를 부여하여 끊어지지 않게 한다.
자주자주 이와 같은 정력과 원력으로 도우면서 위없는 보리를 증득하기까지에 이르거늘,
또한 그에게 왜 소지장의 도움이 필요하겠는가.
아직 모양 없는[無相] 대비(大悲)를 원만히 증득하지 못한지라,
보리와 유정(有情)이 실제로 존재한다고 집착하지 아니하면 날카로운 대비원력[悲願]을 일으킬 수 없다.
또 소지장은 큰 보리를 장애하므로 영원히 끊고 없애기 위해서 몸을 멈추어 오래 사는 것이며,
또 소지장은 유루의 의지[依]가 되므로 이 소지장이 없다면 그는 결정코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니,
몸의 머무름에서 크게 돕는 힘이 있다.
만일 멈추고 있는 몸이 유루의 정력과 원력으로 돕게 되는 이라면 분단의 몸에 속하나니 2승(乘)의 이생(異生)이면 소지장의 경계이기 때문이며,
무루의 정력과 원력으로 돕게 되는 이면 변역의 몸에 속하나니,
저 경계가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변역생사의 성질은 바로 유루의 이숙과에 속하며 무루의 업에서는 바로 증상과(增上果)인 줄 알아야 한다.”
해석에서 말하였다.
“자재함을 얻은 큰 원력 지닌 보살은 이미 영영 번뇌장을 끊고 조복했다 함은 8지(地) 이후의 보살을 말하는 것이니,
비록 번뇌를 지닌 생사를 빌려서 태어났다고 하더라도 범부와 2승에서 설명하는 현행(現行)ㆍ종자(種子) 및 윤생(潤生)과는 같지 않다.
번뇌를 일으켜 유정들을 이익되게 하는 업의 세력으로 말미암아야 비로소 생사의 과보를 받게 되므로,
번뇌가 만일 조복되면 업의 세력이 이내 다하기 때문에 모름지기 법집(法執)으로 원력을 도와 삶을 받아야 하기 때문이니,
이미 영영 끊고 조복했다면 다시는 미래의 분단 과보를 받을 수 없게 된다.
두 가지 이익이 있지만 분단생사의 과보가 끝났음을 관하여 알면 오랜 세월 동안 닦을 보살행을 그만둘까 두려운지라 드디어 무루의 뛰어난 정력과 원력에 들어가서 마치 아라한의 수명을 늘리는 법처럼 현재 몸의 인을 돕는 것이니,
곧 과거를 도와서 몸으로 하여금 업을 받게 하고 그 업으로 오랜 세월 동안 과보를 부여하면서 끊어지지 않게 한다.
아직은 모양 없는 대비[無相大悲]를 원만하게 증득하지 못한지라 보리와 유정이 실제로 존재한다고 집착하지 아니하면 날카로운 대비 원력[悲願]을 일으킬 수 없다고 함은,
아직은 부처가 되어서 모양 없는 대비의 한 맛[一味]이요 평등하다고 함의 이해를 원만하게 증득하지 못한지라 만일 ‘보리는 구해야 한다.
유정은 제도해야 한다’고 하면서 실제로 존재한 것이라고 집착하지 않는다면 날카로운 대비와 날카로운 원력을 일으킬 수가 없는 것이니,
소지장으로 구해야 하고 제도해야 한다는 집착이 우선해야 비로소 무루의 업을 일으키기 때문이다.
업(業)을 말하여 인(因)으로 삼음은 이것이 뛰어나기 때문이요 무명을 연(緣)으로 삼음은 소원(疎遠)하기 때문이니,
번뇌와 같은 것이 유루의 업을 돕는 것이 아니요 연의 이치가 동일할 뿐이며 서로가 조금 비슷하다.
또 소지장이 큰 보리의 장애가 됨은 바로 지혜의 장애가 되기 때문이니,
이 소지장을 영영 끊어 없애기 위하여 몸을 멈추어 오래 사는 것이며,
그것을 말하여 연이라 함은 끊을 것의 연이 되기 때문이다.
또 이 소지장은 온갖 유루의 의지[依]가 되나니,
이 장애가 있음으로 말미암아 모든 변천하는 법을 함께 하면서 무루를 이루지 않기 때문이다.
이 의지할 바[所依]의 장애가 만일 없다면 저 능히 의지함[能依]의 유루는 결정코 있는 것이 아니다.
이제 몸을 멈추어서 오래 삶은 소지장이 있음으로 말미암아 연을 삼는다.
따라서 이 장애를 말하는 것이며,
몸의 머무름에서 크게 돕는 힘이 있게 되므로 연이라고 말한다.
이 변역생사라야 바로 보살이 대비 원력을 성취하고 보리가 원만하게 되나니,
만일 분단생사라면 이것은 범부의 망령된 마음에서 짓는 바라 생각생각마다 즐겨 빠져서 크게 고통받는 바퀴에 들어가 휴식함이 없게 된다.”
대열반경(大涅槃經)에서 말하였다.
“부처님께서 가섭(迦葉)에게 말씀하셨다.
‘세간의 중생들은 뒤바뀌어 가려진 마음으로 태어남의 모양을 탐착하면서 늙고 죽음을 싫어하느니라.
가섭아,
마치 어떤 여인이 다른 사람의 집으로 들어가는데 이 여인이 단정하고 얼굴이 고우며 좋은 영락(瓔珞)으로 그 몸을 장식했으므로,
집 주인이 보자마자 물었느니라.
그녀의 이름은 무엇이며,
누구에게 속해 있느냐고 묻자,
여인은 대답하기를,
그녀의 몸은 바로 공덕대천(功德大天)이라고 하였다.
주인이 묻기를,
그녀가 와 있는 곳에서는 하는 일이 무엇이냐고 하였다.
여인은 대답하기를,
그녀가 가 있는 곳에서는 갖가지 금ㆍ은ㆍ유리(琉璃)ㆍ파려(玻瓈)ㆍ진주(眞珠)ㆍ산호(珊瑚)ㆍ호박(琥珀)ㆍ자거(硨磲)ㆍ마노(瑪瑙)ㆍ코끼리ㆍ말ㆍ탈 것ㆍ종이ㆍ심부름꾼 등을 주게 된다고 했느니라.
그 주인은 듣자마자,
마음으로 한량없이 기뻐 뛰면서,
그가 지금의 복덕으로 그녀를 그의 집으로 오게 하겠다고 하면서,
곧 향을 사르고 꽃을 뿌리며 공양 공경하면서 예배하였느니라.
다시 문 밖에서 한 여인을 보게 되었는데 그 모양이 누추하고 옷은 해졌으며 때가 잔뜩 끼고 살갗은 얼어 터져서 새하얗게 되어 있었으므로,
보고 묻기를,
그녀의 이름은 무엇이며,
누구의 집에 속해 있는가 물었다.
여인은 대답하기를,
그녀의 이름은 흑암(黑闇)이라고 하므로 다시 흑암이라고 이름한 까닭을 묻자,
여인은 대답하기를,
그녀가 있는 곳에서는 그 집에 있는 온갖 재산과 보물이 다 없어지게 한다고 하였느니라.
주인은 그 말을 듣고 나서 이내 날카로운 칼을 가지고 말하기를,
그녀가 만일 가지 않는다면,
그녀의 목숨을 끊어야겠다고 하였다.
여인이 대답하기를,
주인이야말로 참으로 어리석고 지혜가 없는 이라고 하였다.
주인은 그녀에게 어째서 어리석고 지혜가 없다고 하는지 물었다.
여인은 대답하기를,
주인집 안에 있는 이가 바로 그녀의 언니이며,
그녀는 언제나 언니와 행동을 같이하고 있으므로,
만일 주인이 그녀를 쫓아낸다면 그 언니도 쫓아내야 한다고 하였느니라.
주인은 도로 들어가서 공덕천에게,
밖에 한 여인이 있는데,
그녀가 공덕천의 동생이라고 하는데 사실이 그러한지 물었다.
공덕천은 그렇다고 말하였다.
그녀는 공덕천의 동생이며 자신은 그 동생과 함께 행동하면서 서로가 떨어진 일이 없다고 하였다.
가 있는 곳마다 그녀는 언제나 좋은 일을 하고 동생은 언제나 나쁜 짓을 하며 그녀는 언제나 이익되게 하고 동생은 언제나 손해를 끼친다고 하였다.
만일 그녀를 사랑한다면 동생도 사랑해야 하고 그녀가 공경받는다면 동생도 공경받아야 한다고 하였다.
주인은 또한 말하기를,
만일 그렇게 좋은 일과 나쁜 일이 있다면,
그에게는 모두 필요 없다고 하며 각자 마음대로 가라고 하였느니라.
이때 두 여인은 서로 함께 그들의 갈 곳으로 떠나갔으므로,
주인은 그들이 돌아가는 것을 보고 마음으로 기뻐하며 뛸 듯이 좋아하기가 한량없었느니라’ ”라고 하였다.
해석하여 보자.
‘공덕천(功德天)’이란 태어남[生]에 비유하고 ‘흑암(黑闇) 여인’은 죽음에 비유한 것이다.
이 세간에서 나고 죽는 두 법은 모든 악(惡)의 근본이요 뭇 고통의 근원일 뿐이므로,
현인과 성인들은 다 같이 꾸짖었고 어리석은 이들은 가리어 보이지 않는다.
‘주인이 보자마자’라 함은 마음이 경계를 보는 것이므로 본다[見]고 한다.
‘이내 물었다’고 함은 앎으로써 태어나기를 관(觀)하고 태어나기의 진실을 구하는 것이니,
묻는다[問]고 한다.
‘여인이 대답했다’고 함은 경계가 마음을 대(對)한다는 뜻이니,
대답한다[答]고 한다.
공덕대천이란 태어나기는 바로 출생하는 모양[出相]에 비유한 것이며,
공덕천이 주인에게 보답할 것은 6식(識)의 광명을 갖추어서 6진(塵)의 경계를 비추는 것이니,
공덕천이라고 한다.
‘누구에게 속하는가’라고 함은 혹업(惑業)에 속한다고 말해야 한다.
‘제가 지금의 복덕으로’라고 함은 전생에 착한 원인을 닦은지라 금생에 하늘[天]의 과보를 받는 것이므로,
나의 집에 오게 한다[令至我宅]고 한다.
‘다시 문 밖에’라고 함은 죽음은 몸과 집을 버린다는 뜻으로 문 밖[門外]이라고 하며,
‘누구의 집에 속했느냐’고 함은,
연(緣)이 죽게 되면 소속이 없어져야 한다는 것이다.
‘나의 이름은 흑암이다’라고 함은 죽음 이것은 침몰하는 모양이니,
비록 다섯 가지 감각이 있기는 하나 깨닫고 아는 바가 없으므로 흑암이라고 한다.
‘나는 언제나 언니와 행동을 함께 한다’고 함은 나고 죽게 하는 행동을 함께 한다는 것이요,
‘주인이 이내 말하기를,
만일 그렇게 좋은 일과 나쁜 일이 있다면 그에게는 모두 필요 없다’고 함은 무릇 나기에 대해서 기뻐하지 않는 이면 죽음을 당해도 근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때 주인은 그들이 돌아가는 것을 보고 마음으로 기뻐하며 뛸 듯이 좋아하기가 한량없었다’라고 함은 초지(初地)를 증득할 때는 분단(分段)의 죽음을 여의고서 환희지(歡喜地)에 들어가는 것이므로,
기쁨이 한량없다고 한다.
【문】 안의 식[內識]이 있을 뿐이요 바깥 연[外緣]은 없거늘,
어째서 또 여섯 곳[六處]에 바퀴 돌듯 하면서 생사가 상속한다고 하는가.
【답】 식론(識論)의 게송에서 말하였다.
모든 업의 습기(習氣)로 말미암아
두 가지 취[二取]의 습기는 함께 하며
앞의 이숙(異熟)이 다하고 나면
다시 그 밖의 이숙이 생긴다.
모든 업이란 복업(福業)ㆍ죄업(罪業)ㆍ부동업(不動業)이며,
곧 유루(有漏)의 착하거나 착하지 않은 사업(思業)이요 사업의 권속들도 업이라는 이름을 붙이고 있나니,
똑같이 이숙과를 부르고 당기고 가득 채우기 때문이다.
이것이 비록 겨우 일어나자마자 사이 뜰 틈도 없고 차별의 상태[義]가 없으면서 장차의 이숙과를 부른다 하더라도 본식(本識)에 훈습되어 제 공능(功能)을 일으키므로,
곧 이 공능을 습기라 한다.
이 업의 기분(氣分)이 훈습되어 이룩되는 것이요 전의 것과 현재의 업을 간별(簡別)하기 위하여 습기라 한다.
이와 같은 습기는 차츰차츰 상속하면서 성숙된 때가 되면 이숙과를 부르는 것이다.
이것은 그 결과[果]에 대한 뛰어난 증상연(增上緣)을 드러낸 것이다.
상(相)과 견(見)ㆍ이름[名]과 물질[色]ㆍ마음[心]과 심소(心所]ㆍ근본[本]과 끝[末]의 취(取)들은 모두 두 가지 취에 속하는 것이니,
소훈(所熏)이 친함[親]을 내어 본식 위의 공능을 생기게 하므로 두 가지 취의 습기라 한다.
이것은 오는 세상에서 받는 이숙과의 마음과 그와 상응한 모든 인연의 종자를 드러낸 것으로 업(業)과 종자(種子)가 함께 하되 두 가지 취의 종자가 함께 하는 것이니,
이는 성근 연[疎緣]과 친한 연[親緣]이 서로서로 돕는다는 뜻이다.
업은 나기[生]를 부르면서 드러나기 때문에,
게송에서도 먼저 앞의 이숙[前異熟]이라고 말한 것이니,
전전생(前前生)에 지은 업의 이숙과이다.
그 밖의 이숙[餘異熟]이라 함은 후후생(後後生)에 지은 업의 이숙과를 말하는 것이며,
비록 두 가지 취는 종자로 받는 과보는 그지없다고 하더라도 업의 습기로 받는 과보는 다함이 있다.
이숙과로 말미암아 성질은 구별되어 초래하기가 어려운 것인데 등류과(等流果)와 증상과(增上果)의 성질은 같아서 쉽게 받으며,
그 밖의 생(生)에서 받게 되는 업 등의 종자가 성숙됨으로 말미암아 앞의 이숙과를 다 수용(受用)했을 때에는 뒤에 따로 그 밖의 이숙과가 생기는 것이니,
이로 말미암아 생사가 바퀴 돌 듯하며 끝이 없다.
어찌 바깥 인연을 빌어서 비로소 상속하게 되겠는가.
이 게송의 뜻으로 설명하면,
업의 두 가지 취로 말미암아 생사에 윤회하는 것이며,
모두가 식(識)을 여의지 않나니,
심심소법(心心所法)은 그의 성품이기 때문이다.
해석에서 이르되,
“이것이 비록 겨우 일어나자마자 사이 뜰 틈도 없고 차별의 상태가 없으면서 장차의 이숙과를 부른다고 함은,
비록 현재의 작용에 과거의 체성이 없으면서 장차 오는 세상의 진이숙과(眞異熟果)를 초래한다고 하더라도,
현행(現行)하는 업이 지어질 때에 본식(本識)에 훈습되어 제 업의 공능을 일으키는 것으로 그 공능이 곧 습기이니,
습기가 차츰차츰 서로 이어지면서 성숙하게 되는 때에 이숙과를 초래하는 것이다.
상(相)과 견(見),
이름과 물질,
마음과 심소,
근본과 끝의 취들은 모두 두 가지 취[二取]에 속한다고 함은,
첫째가 상과 견이니,
그것을 취함에서 진실로 능히 취함[能取]과 진실로 취할 바[所取]이므로 두 가지 취라 한다.
둘째의 취는 이름과 물질이니,
물질이란 색온(色蘊)이요 이름이란 4온(蘊)이다.
바로 이것이 5온을 집취(執取)한다는 뜻이 된다.
앞에서 말한 상(相) 중에서도 무위(無爲)를 취하는 것에 통함은 본질(本質)로 삼기 때문이지만 지금 여기서는 취의 친한 소연[親所緣]만을 드러내므로 능연(能緣)으로는 마음 밖의 법을 얻지 못하기 때문이다.
또 무위(無爲)의 영상분(影相分)이 변하는 것도 이름에 속하므로,
마음 등을 여의지 않기 때문이다.
셋째의 취는 마음과 심소이니,
온갖 5온의 법은 이 두 가지의 법을 여의지 않았기 때문이다.
넷째는 근본과 끝이니,
취의 친한 결과[親果]이다.
제8식 이것은 모든 이숙의 근본이기 때문이요.
또 총보(總報)의 품류이기 때문에 근본이라 하며,
그 밖의 식(識) 등은 이숙의 별보(別報)의 품류이기 때문에 끝이라 하나니,
곧 취는 하나의 이숙이다.
다섯째 저 취들[彼取]이라 함은 바로 그 위의 네 가지 취들이다.
이 모든 취는 모두가 두 가지 취에 속하는 것으로 이것이 바로 현행(現行)의 취이다.
비록 두 가지의 취는 종자로 받는 과보가 그지없다고 하더라도 업의 습기로 받는 과보는 다함이 있으며,
이숙과로 말미암아 성질은 구별되어 초래하기가 어려운 것인데 등류과와 증상과의 성질은 같아서 쉽게 받는다고 함의 두 가지 취가 종자로 받는 과보는 그지없다는 것은 섭론(攝論)의 설명이지만,
습기는 다함이 있다[習氣有盡].
그 까닭이 무엇인가 하면,
이숙과로 말미암아 첫째의 성질의 구별[性別]이니,
업의 성질과는 달라서 대개 서로 순종하지 아니한다.
둘째는 초래하기가 어려운 것[難招]이니,
업이 비록 초래되어 얻어졌다고 하더라도 반드시 다른 세상에서의 결과라야 비로소 성숙되기 때문이며 업의 습기가 다함이 있음은 마치 사향노루가 빠져 있는 더러운 풀은 시들어 버린 것과 같기 때문이다.
그 등류과(等流果)와 증상과(增上果)는 첫째 성질이 같으므로 체성(體性)이 서로 순종하며,
둘째는 쉽게 받는 것[易感]이니 동시에 생기기 때문이요,
이 생각이 훈습되고 나면 이내 결과를 내기 때문에 두 가지 취의 종자는 결과를 쉽게 받는다.
무엇이 등류(等流)며 무엇이 증상(增上)인가 하면,
증상은 관대한 것이므로 등류에서만은 반드시 힘을 주어 증진[增上]하게 한다.
등류라 함은 종자(種子)와 현행(現行)과 제 종자[自種]가 본래부터 갖추어진 동류인(同類因)이기 때문이며,
증상의 것에서는 따로의 체성이 없음은 곧 같은 종류[等流]의 성질이기 때문이다.
또 이것이 등류과이기 때문에 성질이 같고,
이것이 증상과이기 때문에 쉽게 받는다.
또 종자를 현행에서 보면 이것이 증상이요,
제 종류에서 보면 이것이 등류이다.
업의 종자를 저 현행과 종자에서 보면 모두 성질을 달리하기 때문이며,
이것은 이숙일 뿐이다.
앞의 이숙을 다 수용했을 때에 다시는 그 밖의 이숙과가 생길 수 없다는 것의 뜻은,
장차 오는 다른 세상을 받게 됨으로 말미암아 업 등의 종자가 성숙되기 때문이니,
지금의 몸속에서 앞의 이숙과를 다 받아 써버렸을 때는 바로 그것이 이 몸의 마지막 죽는 자리이다.
저 성숙된 업은 다시 따로 그와 다른 과보를 일으키므로 곧 먼저의 업이 다할 때가 뒷날의 과보 종자가 성숙되는 때이니,
그것이 다르게 성숙된 과보[異熟果]로서 다시 생기게 된다.
그런 까닭에 나고 죽는 것이 끊어지지 아니한다.
이로 말미암아 업의 과보는 끊임이 없어서 생사가 서로 이어지면서 바퀴 돌듯 함이 끝이 없거늘,
어찌 마음 밖의 인연을 빌려서 비로소 생사가 상속되겠는가.
이 상속식(相續識)이 끊어짐이 없을 때에,
만일 부딪치는 곳마다 관(觀)을 이루어서 진실로 자기 마음임을 아직 모른다면 모두 대(對)하는 경계마다 의심이 날 것이요,
앞 법의 온갖 생사에 집착되어 이것이 다 의심일 것이니,
마음일 뿐임을 분명히 알면 저절로 허물이 없게 될 것이다.
만일 법이라 의심하다가 병에 걸렸다면,
어찌 실제 경계야 붙좇음이 있겠는가.
마치 달려있는 모래주머니가 고픈 배를 가시게 함과 같나니,
이것은 자기 마음으로 낸 생각일 뿐이다”라고 했다.
진서(晋書)의 악광전(樂廣傳)에,
“광(廣)에게 친한 객(客)이 있었는데 오랫동안 발을 끊고 오지 않았으므로 광이 그 까닭을 물었더니,
대답하기를 ‘전에 자리에서 내리신 술잔을 받아 보니 뱀이 있었습니다.
몹시 기분이 나쁘더니 그를 마시고는 병이 들었습니다’라고 하였다.
그때 하남(河南) 청서(廳署)의 벽 위에는 뿔이 있었고 그 뿔 가에 뱀이 그려 있었다.
광은 잔 속의 뱀이란 바로 그 뿔 그림자라 생각하고,
다시 전의 그 자리에다 술을 놓았더니,
객은 그만 깨닫고 마음이 풀리면서 그 고질병이 단번에 나았다”고 한 것과 같다.
또 율(律) 중의 사식장(四食章)과 옛 스님의 의문수초(義門手鈔)에서 이르되,
“사식(思食)이라 함은,
마치 흉년 때에 어린아이가 어머니에게 밥을 달라고 울면서 그치지 않으므로,
어머니는 드디어 모래주머니를 달아 놓으면서 속이며 이르기를,
‘이것이 밥이다’라고 했다.
이 아이는 7일 동안 그 주머니를 자세히 쳐다보면서 ‘장차 이 밥을 먹게 되겠구나’라고 여겼는데,
그 어머니가 7일 후에 그것을 풀어서 내려 보여주자,
그 아이는 그것이 모래임을 보고 낙심하면서 그로 인해 죽어버린 것과 같다”고 했다.
나고 늙고 병들고 죽는 것을 견주며 증험하라.
이는 모두가 자기의 마음이니,
땅ㆍ물ㆍ불ㆍ바람[地水火風]이 끝내 따로 체성이 없다.
그러므로 중생은 생사에 빠져 집착하고 2승은 생사를 두려워하나니,
모두가 마음 밖에는 법이 없음을 환히 모른 탓으로 경계에 걸려 있다.
가지고 버림[取捨]이 비록 다르나 모두가 해탈이 아니다.
왜냐하면 중생은 생사의 속박을 받고 2승은 열반의 속박을 입고 있기 때문이다.
능가경(楞伽經)에서 말하시기를 “대혜(大慧)야,
모든 성문들이 생사의 망령된 생각의 고통을 두려워하면서 열반(涅槃)을 구함은 생사와 열반의 차별된 모양을 모름에서이니,
온갖 모두는 허망한 분별이라 아무것도 없기 때문이니라.
미래의 모든 감관[根]과 경계의 소멸을 망령되이 헤아리면서 열반을 삼음은 스스로가 아는 경계를 증득하여 차츰차츰 의지할 바[所依]의 장식(藏識)이 큰 열반이 되는 줄 알지 못함에서이며,
저 어리석은 사람들은 과거ㆍ미래ㆍ현재의 모든 부처님들이 말씀하신 자기 마음의 경계를 모르고 마음 밖의 경계를 취하는지라 언제나 생사의 윤회가 끊이지 않느니라”고 하셨다.
【문】 생사의 상속이 두 가지 취[二取]의 유지(有支)와 아집(我執)ㆍ명언(名言)의 두 가지 습기로 말미암아 이숙과를 이룬다면 그 생사하는 업이 먼저 오고 뒤에 가는 것은 결정코 어느 식(識)에 속하는가.
【답】 제8식일 뿐이니,
이것이 모든 이숙의 근본이다.
만일 이 식이 없다면 생사라는 것이 성립되지 아니한다.
앞의 7전식(轉識)은 간단이 있고 주(主)가 아니기 때문에 이 식 또한 집지식(執持識)이라 하지만 종자와 감관인 몸[根身]을 능히 붙잡고[執] 지님[持]에서이다.
처음 한 생각에 집취(執趣)와 결생(結生)이 있어서 상속한다는 뜻이니,
바로 이것이 삼계(三界)와 6취(趣)로 가서 난다는 뜻이다.
이 집취와 결생은 과위(果位)에 통하지 않으므로,
8지(地) 이상은 집취와 결생이 통하지 아니한다.
여기서는 종자와 감관 몸을 붙잡고 지닌다는 뜻을 취할 뿐이므로 집지라고 한다는 뜻이지만 이것은 온갖 지위에 다 통하나니,
바로 나는 지위[生位]에서 맨 처음 어머니의 태(胎)를 잡고 몸을 이루는 것에서부터 죽을 때에 이르러서 앞의 모든 식이 모두 혼미해지면서 옮아 사라지기까지이다.
이숙식(異熟識)만은 최후까지 온몸을 집수(執受)하므로 집수를 버리는 곳에서는 차가운 감촉이 생기게 되며,
수명[壽]ㆍ온기[煖]ㆍ식(識)의 세 가지는 서로 여의지 않기 때문에 차가운 감촉이 일어날 때는 이것은 유정(有情)이 아니니,
비록 변하는 것도 연(緣)이기는 하나 집수가 아니기 때문이다.
이로 말미암아 범부를 위하고 성인을 위하여 언제나 의지할 바[所依]가 되고,
생(生)을 버리고 생에 나아가는 데서는 항상 그 주인이 된다.
【문】 생사가 의지하는 곳[依處]은 요약하여 몇 가지 일이 있는가.
【답】 생사에 헤맴[流轉]의 의지할 바 일에는 세 가지가 있다.
경(經)에서 말하였다.
“세 가지의 헤맴이 있다.
첫째는 이 처소[處]에서 헤맴이니,
삼세(三世)의 처소에서 나[我]로 말미암아 분별한다.
둘째는 이 일[事]에서 헤맴이니,
바깥 여섯 처소[外六處]에서 나로 말미암아 분별한다.
셋째는 이와 같이 하면서 헤맴이니,
모든 업의 이숙의 상속으로 헤맨다.”
【문】 두 가지 취(取)의 습기로 생사가 이루어진다면 반드시 현행(現行)의 공능으로 인하여 습기가 성립된다.
그렇다면 현행은 어느 법의 훈습으로 생사를 이루는가.
【답】 처음은 무명(無明)으로 인하여 발업(發業)을 알지 못하고,
다음에는 정애(情愛)로 인하여 윤생(潤生)을 탐착한다.
그러므로 이르되,
“어리석음에서부터 정애가 있다면 나라는 병이 생긴다”고 했다.
어리석음과 정애 때문에 생각생각마다 상속하는 것이니,
생각이 큰 생사인 줄 알아야 한다.
경에서 말하였다.
“한 생각의 선(善)을 일으키면 인간과 천당의 몸을 받고,
한 생각의 악(惡)을 일으키면 3악도(惡道)의 몸을 받는다.” 그러므로 알아야 한다.
밤과 낮의 생각과 생각이 미래의 생사하는 몸을 짓고 있는 데,
어찌 다하는 때가 있겠는가.
안반수의경(安般守意經)의 서문(序文)에서 말하였다.
“손가락 튕기는 잠깐 동안에 마음은 9백60번 변한다.
하루 낮 하룻밤 사이에는 13억의 뜻[意]이 있고 그 뜻에는 하나의 몸이 있되,
마음이 스스로를 알지 못함은 마치 종자의 크기와 같다.”
보살처태경(菩薩處胎輕)에서 말하였다.
“한 번 손가락을 튕기는 동안에 32억 백천의 생각이 있고 그 생각생각마다 형상을 이루고 그 형상형상마다 모두 식(識)이 있는데,
부처님의 거룩한 신력으로 그 미세한 식 가운데로 들어가서 모두 제도되게 한다.
이 식으로 교화하는지라 식이 없는 것이 아니다.”
【문】 생사의 법은 있는 것인가,
없는 것인가.
【답】 있는 것도 아니고 없는 것도 아니다.
왜냐하면 만일 있다고 한다면 하나의 몸 안과 바깥의 땅ㆍ물ㆍ불ㆍ바람은 저마다 성품이 공해서 일찍이 모이거나 흩어진 일이 없기 때문이다.
그런 까닭에 생김이 없는 생김[無生之生]을 생김이라 할 수 있고 소멸이 없는 소멸[無滅之滅]을 소멸이라 말할 수 있다.
암제차녀사자후요의경(菴提遮女師子吼了義經)에서 말한 것과 같다.
“만일 땅ㆍ물ㆍ불ㆍ바람의 네 가지 연(緣)이 마침내 스스로 화합한 바가 있는 일이 없음을 분명히 알면서 그 근기에 따라 설명한 바가 있다면 그것이 태어남[生]이라는 뜻이 되며,
또한 만일 땅ㆍ물ㆍ불ㆍ바람이 필경에는 스스로 흩어져 무너지는 일이 없음을 알면서 그 근기에 따라 설명한 바가 있다면 그것이 죽음[死]이라는 뜻이 된다.”
만일 이것이 없다고 한다면,
물들거나 깨끗함의 진여(眞如)가 제 성품을 지키지 않고 모르는 결에 인연을 따라 허깨비[幻]를 일으키면서 생기고 소멸하기 때문에 “법신(法身)이 다섯 가지 갈래[五道]를 헤매므로 이름하여 중생이라 한다”고 했다.
위에서 설명한 바와 같아서,
범부와 성인의 두 가지 생사는 모름지기 생사의 중도(中道)를 알아야 아주 없음[斷]과 항상함[常]을 여읜다.
그러므로 생김에서의 생김이 없는지라 참 성품은 잔잔하고 생김 없음에서의 생김이라 업의 과보가 뚜렷하다.
참 성품이 잔잔하므로 항상하다고 집착할 수 없고,
업의 과보가 뚜렷하므로 아주 없다고 집착할 수 없다.
또 모든 부처님들이 세상에 나오는 것도 오히려 허공 꽃이 어지러이 생겼다가 어지러이 소멸한 것과 같거늘,
하물며 중생의 뒤바뀐 생사이겠는가.
다만,
허망한 꿈과 같고 미치고 취한 것과 같을 뿐이니,
어찌 이것이 진실이겠는가.
융 대사(融大師)가 말하였다.
“온갖 범부와 성인으로서 3악도 이상으로부터 종지(種智) 이내까지는 모두가 허망한 생각인데도 있는 것이라고 말하지만,
이것은 다 같이 꿈속의 것이다.
마치 꿈속에서 지옥에 와 있는 것을 보고 여러 가지 방편을 쓰면서 벗어나려고 쓸데없이 애를 쓰는 것과 같나니,
모두 떨어버리고 깨나기만 하라.
이내 온갖 일이 모두 없다.
지금의 이것들은 다 같이 꿈속에서 하는 일들인데 도리어 꿈의 과보를 받고 있다.
또 미치고 취한 사람은 항상 사물을 따라 움직인다.
그런 까닭에 온갖 중생들은 무명의 술을 마시고 5주(住)의 자리에 누워서 오랜 겁 동안 흐리멍덩해 있거늘,
그 누군들 깨어난 이가 있겠는가.
홀연히 견성(見性)하게 될 때에는 마치 같이 취해 있다가 깨어나는 것과 같다.
경의 게송에서 말하였다.
비유하자면 취해서 흐리멍덩한 사람이
술이 녹은 뒤에야 깨나는 것처럼
부처의 위없는 몸을 얻으면
이것이 나의 참된 법신일세.
또 만일 종경(宗鏡)에 들어가서 진실한 성품이 단번에 밝아지면,
도리어 세간의 생사라는 이름과 모양의 거짓됨이 마치 어린아이 장난과 같고 또 재주부리는 사람과 같다고 보리라.
그러나 비록 고치고 바꾸어져서 천 가지로 틀리다고 해도 하나의 성품만은 뚜렷이 움직이지 않으리니,
초당화상(草堂和尙)이 게송으로 말한 것과 같다.
즐겨 노는 아이가 본시 몸은 하나인데
벼슬아치도 되고 종도 되는 구나
이름ㆍ눈ㆍ복장이 아무리 변했어도
끝까지 종과 주인 다른 아이 아닐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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염불하면 극락정토에 왕생한다는 것을 의심하면서 염불한 사람은
정토의 변두리인 해만계(懈慢界)에 나서 3보를 보지도 듣지도 못하는 것이,
마치 어머니의 태 안에 있어 해와 달을 보지 못하는 것과 같으므로 이렇게 말함.
답 후보
● 태생(胎生)
통달(通達)
투도(偸盜)
파문(破門)
파사현정(破邪顯正)
팔경계(八敬戒)
팔난(八難)
ॐ मणि पद्मे हूँ
○ [pt op t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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