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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진리와실천
불기2565-01-16_아비달마법온족론-K0945-003 본문
『아비달마법온족론』
K0945
T1537
제3권
● 한글대장경 해당부분 열람I
● 한글대장경 해당부분 열람II
○ 통합대장경 사이트 안내
○ 해제[있는경우]
● TTS 음성듣기 안내
※ 이하 부분은 위 대장경 부분에 대해
참조자료를 붙여 자유롭게 연구하는 내용을 적는 공간입니다.
대장경 열람은 위 부분을 참조해주십시오.
『아비달마법온족론』 ♣0945-003♧
제3권
❋본문
◎[개별논의]
○ 2020_1125_144356_nik_bw4_s12
○ 2019_0801_080933_can_CT28
○ 2019_0731_192133_can_ab41_s12
○ 2019_0731_172401_can_bw0_s12
○ 2019_0113_155758_can_CT27
○ 2019_0113_154210_can_AB7_s12
○ 2019_0113_133921_can_AB7_s12
○ 2019_0113_130450_nik_ct8_s12
○ 2019_0113_125242_can_CT28
○ 2019_0113_124134_can_BW22
○ 2019_0113_111957_nik_ct9_s12
○ 2019_1104_171551_nik_fix
○ 2019_1104_105904_nik_exc
○ 2019_1104_122929_can_bw24_s12
○ 2020_1114_143333_can_ab41_s12
○ 2018_1022_170424_can_ar24
○ 2020_1017_162713_can_CT33
○ 2020_1017_155758_can_exc
○ 2020_0909_155914_can_CT33
○ 2019_1106_153152_nik_ct9_s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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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기록문화유산 아카이브
阿毘達磨法薀足論卷第三
K0945
아비달마법온족론 제3권
존자 목건련 지음
삼장법사 현장 한역
송성수 번역
3. 증정품 ②
‘이 승(僧) 가운데서’라 함은 부처님 제자들 가운데서이니,
이것은 곧 모임[聚]을 나타내고 쌓임[蘊]을 나타내며 부류[部]를 나타내고 요약하는 뜻[義]을 나타낸다.
‘예류향(豫流向)’이라 함은 이미 무간도(無間道)를 얻고 예류과(豫流果)를 증득[證]할 수 있는 이이니,
이는 끊임없이 예류과를 증득한 이이다.
그는 욕계(欲界)의 탐냄[貪欲]과 성냄[瞋恚]에 대하여 세간의 도[世間道]로 말미암아 앞서 아직 많은 부분의 품류를 끊지 못했으며 4성제(聖諦)에 대하여 앞서 아직 현관(現觀)하지 못하고 이제 현관을 닦고 있으므로 ‘예류향’이라 한다.
‘예류과(豫流果)’라 함은 현재의 법 가운데서 이미 3결(結)을 영원히 끊고 두루 안 것이니,
유신견(有身見)과 계금취(戒禁取)와 의(疑)가 그것이다.
그는 이 끊어진 것[斷] 가운데 머무르면서 아직 더 나아가 일래과(一來果)의 증득을 구하고 있지 않는 이이므로 ‘예류과’라 한다.
‘일래향(一來向)’이라 함은 이미 무간도를 얻고 일래과를 증득할 수 있는 이이니,
이는 끊임없이 일래과를 증득하고 있는 이이다.
그는 욕계의 탐냄과 성냄에 대하여 세간의 도로 말미암아 혹은 먼저 이미 많은 부분의 품류를 끊었으며 4성제에 대하여는 먼저 아직 현관하지 못하고 이제 현관을 닦고 있으며 혹은 예류과에 머무른 뒤에 나아가 일래과의 증득을 구하고 있으므로 ‘일래향’이라 한다.
‘일래과(一來果)’라 함은 현재의 법 가운데서 이미 3결(結)을 영원히 끊고 두루 알았으며 그리고 많은 부분의 탐냄과 성냄을 끊은 이이다.
그는 이러한 끊어진 것에 머무르면서 아직 나아가 불환과의 증득을 구하고 있지 않는 이이므로 ‘일래과’라 한다.
‘불환향(不還向)’이라 함은 이미 무간도의 불환과를 증득할 수 있는 이이니,
이는 끊임없이 불환과를 증득하고 있는 이이다.
그는 욕계의 탐냄과 성냄에 대하여 세간의 도로 말미암아 혹은 먼저 영원히 끊게 되었으나 4성제에 대하여는 앞에서 아직 현관하지 못했고 여기에서 현관을 닦고 있으며 혹은 일래과에 머무른 뒤에 더 나아가 불환과의 증득을 구하므로 ‘불환향’이라 한다.
‘불환과(不還果)’라 함은 현재의 법 가운데서 5순하분결(順下分結)인 유신견(有身見)ㆍ계금취(戒禁取)ㆍ의(疑)ㆍ탐욕(貪欲)ㆍ진에(瞋恚)를 이미 영원히 끊었고 두루 안다.
그는 이 끊어진 것에 머무르면서 아직 나아가 아라한과의 증득을 구하고 있지 못하므로 ‘불환과’라 한다.
‘아라한향(阿羅漢向)’이라 함은 이미 무간도를 얻고 아라한과를 증득할 수 있는 이이니,
이는 끊임없이 최상의 아라한과를 증득한 이이다.
혹은 불환과에 머무른 뒤에 더 나아가 아라한과의 증득을 구하고 있으므로 ‘아라한향’이라 한다.
‘아라한과(阿羅漢果)’라 함은 현재의 법 가운데서 탐냄ㆍ성냄ㆍ어리석음 등 온갖 번뇌를 모두 이미 영원히 끊었으므로 ‘아라한과’라 한다.
‘4쌍(雙)의 보특가라(補特伽羅)’라 함은 예류향ㆍ예류과가 곧 첫 번째의 쌍이요,
일래향ㆍ일래과가 곧 두 번째의 쌍이며,
불환향ㆍ불환과가 곧 세 번째의 쌍이요,
아라한향ㆍ아라한과가 곧 네 번째의 쌍이다.
‘8척(八隻)의 보특가라’라 함은 예류향 등의 보특가라를 여덟 가지로 벌여 세워 저마다 따로따로 나타낸 것이다.
‘부처님의 제자들[佛弟子衆]’이라 함은 부처님의 제자들은 뛰어난 공덕을 갖추고 있다는 것을 나타내 보여 알아듣도록 말한 것이다.
‘계율이 구족하다[戒具足]’고 함은 학(學)ㆍ무학(無學)의 승가[僧]로써 배울 것이 있는 이[學]와 배울 것이 없는 이[無學]의 계율을 성취하고 두루 갖추었다는 것이다.
‘선정이 구족하다[定具足]’고 함은 학ㆍ무학의 승가로써 배울 것이 있는 이와 배울 것이 없는 이의 선정을 성취하고 두루 갖추었다는 것이다.
‘지혜가 구족하다[慧具足]’고 함은 학ㆍ무학의 승가로써 배울 것이 있는 이와 배울 것이 없는 이의 지혜를 성취하고 두루 갖추었다는 것이다.
‘해탈이 구족하다[解脫具足’]고 함은 학ㆍ무학의 승가로써 배울 것이 있는 이와 배울 것이 없는 이의 해탈을 성취하고 두루 갖추었다는 것이다.
‘해탈지견이 구족하다[解脫智見具足]’고 함은 학ㆍ무학의 승가로써 배울 것이 있는 이와 배울 것이 없는 이의 해탈지견을 성취하고 두루 갖추었다는 것이다.
‘청(請)에 응(應)한다’고 함은 보시에 응하고 공양에 응하며 제사[祠祀]에 응하기 때문에 ‘청에 응한다’고 한다.
‘굴(屈)에 응한다’고 함은 이미 보시하였고 잘 보시하며 이미 공양하였고 잘 공양하며 이미 제사 지냈고 잘 제사 지내면서 적은 공로(功勞)를 지으면서도 큰 과보와 이익을 얻기 때문에 ‘굴에 응한다’고 한다.
‘공경(恭敬)에 응한다’고 함은 아는 이거나 모르는 이거나 간에 모두 마땅히 일어나 맞이해야 하고 몸을 굽혀 합장하고 머리 조아려 발에 대고 찬탄하면서 “바르게 행하면서[正行] 안락하십니까?”라고 문안해야 되나니,
이 때문에 ‘공경에 응한다’고 한다.
‘위없다[無上]’는 말은 마치 세존께서 필추들에게 말씀하시되 “온갖 화합한 부류(部類)의 대중 가운데서 부처님의 제자들을 맨 첫째로 삼나니,
가장 높고[最尊]ㆍ가장 수승하며[最勝]ㆍ맨 위[最上]이고 보다 더 높은 이가 없다[無上]”고 하신 것과 같나니,
이 때문에 ‘위없다’고 한다.
‘복전(福田)’이라 함은 세존께서 아난타에게 말씀하시되 “나는 모든 하늘ㆍ악마ㆍ범(梵)ㆍ사문ㆍ바라문 등의 모든 하늘과 사람들 가운데서 이미 보시하였고 잘 보시하며 이미 공양하였고 잘 공양하며 이미 제사 지냈고 잘 제사 지내는 것을 받을 만한 이로서 나의 승가[僧]와 같은 이들이 있음을 보지 못한다.
아난아,
그러므로 알아라.
만일 나의 승가에 대하여 이미 보시하였고 잘 보시하며 이미 공양하였고 잘 공양하며 이미 제사 지냈고 잘 제사 지내면 적은 공로를 지으면서도 큰 과보와 이익을 얻느니라”고 하신 것과 같다.
또 하늘의 제석(帝釋)이 취봉산(鷲峰山)으로 와서 묘한 게송으로써 부처님을 찬탄하면서 물었다.
모든 법으로 저 언덕[彼岸]에 이르는 것을
잘 분별하여 연설하시고
온갖 두려움을 초월하신
대교답마(大喬答摩) 높은 이께 머리 조아립니다.
한량없는 중생들이
복을 좋아하여 보시를 닦고
항상 지성껏 신심(信心)을 내며
모든 의지가 있는[有依] 복을 닦고 있습니다.
원컨대,
부처님은 가엾이 여기셔서
참되고 훌륭한 복전(福田)을 설하시어
한량없는 중생들로 하여금
적은 보시로도 큰 과보를 얻게 하소서.
세존께서 모든 중생들을 가엾이 여기셔서 묘한 게송으로써 하늘 제석에게 말씀하셨다.
만일 한량없는 중생들이
복을 좋아해서 보시를 닦고
항상 지성껏 신심을 내어
의지가 있는 복을 닦으면
나는 이제 너희들을 위하여
참되고 뛰어난 복전을 설하여
한량없는 중생들로 하여금
적은 보시로써 큰 과보를 얻게 하리라.
만일 사성향(四聖向)을 행하는 이와
사성과(四聖果)에 머무른 이면
그가 곧 응공(應供)의 진실한 승가[僧]이니
훌륭한 계율ㆍ선정ㆍ지혜를 두루 갖추었다.
이 참되고 뛰어난 승가의 밭[僧田]은
공덕이 심히 넓고 커서
한량없는 이익을 주는 것이
마치 저 사대해(四大海)와 같다.
조어사(調御士)의 훌륭한 제자들은
이미 법의 광명을 놓으면서
뛰어난 공양을 받을 수 있고
뛰어난 제사를 받을 수 있다.
적은 승가에게 보시하여도
모든 승가에게 보시한 것이 되며
반드시 큰 과보를 얻게 되나니
나 일체지(一切智)가 칭찬하는 바이다.
모든 복전 가운데서
승전(僧田)을 가장 뛰어나다 하며
모든 부처님이 찬탄하신 바이니
그 보시는 최상의 복을 얻게 된다.
부처님의 제자들에 대하여는
적은 보시로도 큰 과보를 얻나니
그러므로 모든 슬기로운 사람들은
마땅히 승가 대중[僧衆]에게 공양해야 한다.
성인 대중들은 묘한 법을 지니고
명(明)ㆍ행(行)ㆍ등지(等持)를 두루 갖추었나니
그러므로 승보(僧寶)에 대하여
보시하는 것이 최상이 된다.
세 가지 청정한 마음으로써
승가에게 옷과 음식을 보시하면
반드시 뛰어난 과보를 얻게 되어
인간과 천상의 착한 사람[善士]이 되며,
결정코 세상마다 사는 동안에
티끌[塵]과 때[垢]와 독화살을 여의고
모든 악한 세계[惡趣]를 뛰어넘어
인간ㆍ천상의 훌륭한 쾌락 받으리라.
스스로 보배와 재물 바르게 모아
자신과 다른 이를 이롭게 하기 위해
자기 손수 보시를 행하라.
그러면 반드시 큰 과보를 얻게 된다.
총명하고 슬기로운 모든 사람은
청정한 신심으로 보시를 하라.
장차 안락한 세계에 나서
묘한 쾌락과 총명을 받을 것이다.
이와 같이 말씀하셨기 때문에 ‘복전’이라고 한다.
‘세간의 공양에 응한다’고 함은 성스러운 제자들은 청정하게 세간의 공양에 응할 수 있는 그릇[器]이기 때문이요 이미 공양에 응할 만한 세 가지 청정한 업[三淨業]을 성취했기 때문에 ‘세간의 공양에 응한다’고 한다.
만일 성스러운 제자가 이와 같은 모양[相]으로써 승가(僧伽)를 따라 염할[隨念]때의 소견[見]을 근본으로 삼아 증득한 지혜[證智]와 상응하는 모든 믿음과 믿는 성품과 현전에서 믿는 성품과 따르고 인가(印可)하고 애모(愛慕)함과 사랑하고 사모하는 성품과 마음이 맑고 마음이 깨끗함을 승증정이라 한다.
만일 이것에 대하여 권하고 격려하고 벌여 세우면 이것을 ‘방편으로 권하고 격려하고 벌려 세워서 승증정 가운데에 머무르게 한다’고 하는 줄 알 것이다.
어떤 것이 성인이 사랑하는 계율[聖所愛戒]인가?
무루(無漏)의 몸의 율의[身律儀]와 말의 율의[語律儀]와 생활이 청정함[命淸淨]을 성인이 사랑하는 계율이라 한다.
무엇 때문에 성인이 사랑하는 계율이라 하는가?
모든 부처님과 그 제자들을 성인이라 하는데 그 분들은 바로 이 계율을 사랑하고 사모하고 기뻐하며 참고 순종하면서 거역하지 않나니,
이 때문에 성인이 사랑하는 계율이라 한다.
만일 이 법에 대하여 권하고 격려하고 벌여 세우면 이것을 ‘방편으로 권하고 격려하며 벌여 세워서 성인이 사랑하는 계율 가운데 머무르게 한다’고 하는 줄 알아야 할 것이다.
4. 사문과품(沙門果品)
어느 때 박가범은 실라벌(室羅筏) 서다림(逝多林)의 급고독원(給孤獨園)에 계셨다.
그때 세존께서 필추들에게 말씀하셨다.
“4사문과(沙門果)가 있나니,
어떤 것이 네 가지인가?
예류과(豫流果)와 일래과(一來果)와 불환과(不還果)와 아라한과(阿羅漢果)이니라.”
어떤 것이 예류과인가?
예류과에는 간략히 두 가지가 있나니,
첫째는 유위(有爲)요,
둘째는 무위(無爲)이다.
유위의 예류과라고 말함은 그 과(果)에 매달리는 득(得)과 그 득에 다시 매달리는 득과 유학(有學)의 근(根)ㆍ력(力)과 유학의 시라(尸羅)와 유학의 선근(善根)과 8유학법(有學法)과 그에 따르는 종류의 모든 유학의 법이니,
이것을 유위의 예류과라 한다.
무위의 예류과라고 말함은 이 가운데서는 3결(結)을 영원히 끊고 그리고 그에 따르는 종류의 결법(結法)을 영원히 끊는 것이니,
곧 그것은 여든여덟[八十八]의 모든 수면(隨眠)을 영원히 끊고 그리고 그에 따르는 종류의 결법을 영원히 끊는 것이다.
이것을 무위의 예류과라 한다.
어떤 것이 일래과인가?
일래과에는 대략 두 가지가 있나니,
첫째는 유위(有爲)요,
둘째는 무위(無爲)이다.
유위의 일래과라고 말함은 그 과(果)에 매달리는 득(得)과 그 득에 다시 매달리는 득[得得]과 유학의 근ㆍ력과 유학의 시라와 유학의 선근과 8유학의 법과 그에 따른 종류인 모든 유학의 법이니,
이것을 유위의 일래과라 한다.
무위의 일래과라고 말함은 이 가운데서는 3결을 영원히 끊고 그리고 그의 종류인 결법(結法)을 영원히 끊나니,
곧 그것은 여든여덟의 모든 수면을 영원히 끊고 그 종류인 결법을 영원히 끊는 것과 아울러 탐냄ㆍ성냄ㆍ어리석음의 많은 부분을 영원히 끊으며 그리고 그 종류인 결법의 많은 부분을 영원히 끊게 된다.
이것을 무위의 일래과라 한다.
어떤 것이 불환과인가?
불환과에는 대략 두 가지가 있나니,
첫째는 유위(有爲)요,
둘째는 무위(無爲)이다.
유위의 불환과라고 말함은 그 과(果)에 매달리는 득(得)과 그 득에 다시 매달리는 득[得得]과 유학의 근ㆍ력과 유학의 시라와 유학의 선근과 8유학의 법과 그에 따른 종류인 모든 유학의 법이니,
이것을 유위의 불환과라 한다.
무위의 불환과라고 말함은 이 가운데서는 5순하분결(順下分結)을 영원히 끊고 그리고 그 종류인 결법을 영원히 끊는 것이니,
곧 그것은 구십이(九十二)의 모든 수면을 영원히 끊고 그리고 그 종류인 결법을 영원히 끊게 된다.
이것을 무위의 불환과라 한다.
어떤 것이 아라한과인가?
아라한과에는 대략 두 가지가 있나니,
첫째는 유위요,
둘째는 무위이다.
유위의 아라한과라고 말함은 그 과(果)에 매달리는 득(得)과 그 득에 다시 매달리는 득[得得]과 무학(無學)의 근ㆍ력과 무학의 시라와 무학의 선근과 10무학법(無學法)과 그 종류인 모든 무학의 법이니,
이것을 유위의 아라한과라 한다.
무위의 아라한과라고 말함은 이 가운데서는 탐냄ㆍ성냄ㆍ어리석음 등의 온갖 번뇌를 모두 이미 끊었고 온갖 세계[趣]를 초월하였으며 온갖 길[道]을 끊었고 3화(火)가 영원히 고요해졌으며 4폭류(瀑流)를 건넜고 교만과 방일[憍逸]을 영원히 끊었으며 초갈(燋渴)이 영원히 쉬었고 굴택(屈宅)이 영원히 파괴된 최상의 마지막[究竟]이요 최상의 고요함[寂靜]이며 최상의 애욕이 다하고 여의고 사라진 열반(涅槃)이니,
이것을 무위의 아라한과라 한다.
5. 통행품(通行品)
어느 때 박가범께서 실라벌(室羅筏) 서다림(逝多林)의 급고독원(給孤獨園)에 계셨다.
그때 세존께서 필추들에게 말씀하셨다.
“4통행(通行)이 있나니,
어떤 것이 네 가지인가?
고지통행(苦遲通行)과 고속통행(苦速通行)과 낙지통행(樂遲通行)과 낙속통행(樂速通行)이니라.“
어떤 것을 고지통행(苦遲通行)이라 하는가?
세존께서 말씀하시되 “모든 필추들은 5취온(取蘊)으로 말미암아 능욕을 당하고 훼상을 입는다.
그들에게 이와 같은 5취온이 몹시 핍박하고 얽매이는 것은 마치 무거운 짐을 걸머진 것 같나니,
이에 목숨을 마치기까지 항상 붙어 따르고 있으므로 곧 이와 같은 5취온에 대하여 몹시 싫어하고 천히 여기고 꾸짖고 헐뜯고 거역하게 된다.
곧 이와 같은 5취온에 대하여 싫어하고 천히 여기고 꾸짖고 헐뜯고 거역하게 되는 것을 고(苦)라 하며 이로 말미암아 곧 어둡고 무디고 연약하고 하열한 신근(信根) 등 5근(根)을 일으킨다.
이와 같은 5근은 어둡고 무디고 연약하고 하열하기 때문에 최상의 누진(漏盡)을 더디게[遲] 증득하게 된다”고 하신 것과 같다.
이 ‘더디다[遲]’는 말은 급하게도 하지 아니하고 빠르게도 하지 아니하며 달리지도 아니하고 쉽게도 아니하며 빠르지도 않게 진행하여 증득하는 것이다.
‘최상[無上]’이라는 말은 세존께서 말씀하시되 “모든 유위(有爲)와 무위(無爲)의 법 가운데서 나는 잡염을 여읜 것[離染]을 제일이라고 하나니,
가장 높고 가장 뛰어나고 최상의 무상(無上)인 것이니라”고 하신 것과 같다.
무상법에서 얻고 따라 얻으며 접촉하고 함께 접촉하며 증득하고 증득을 짓기 때문에 증득이라고 말한다.
‘누진(漏盡)’이라고 함에서 누(漏)에는 세 가지가 있으니,
곧 욕루(欲漏)와 유루(有漏)와 무명루(無明漏)이다.
이 3누를 다하고 평등하게 다하며 두루 다하고 영원히 다하며 없어져 다하고 원만히 다하기 때문에 ‘누진’이라 한다.
‘통행(通行)’이라 함은 곧 이 행(行)은 뛰어나고 용맹하며 정진하고 책려(策勵)하며 의욕을 내고 몹시 힘써서 4성제(聖諦)에 대하여 현관하는 행[現觀行]을 닦고 예류과ㆍ일래과ㆍ불환과ㆍ아라한과에 대하여 증을 짓는 행[作證行]을 닦으며 탐(貪)ㆍ진(瞋)ㆍ치(癡)ㆍ만(慢)ㆍ교(憍)ㆍ구(垢) 등에 대하여 영원히 다하는 행[永盡行]을 닦고 극히 공경하고 편안히 머무르며 은근한 사유(思惟)로써 두루 모든 심소(心所)를 가다듬은 뒤에 인(因)이기 때문에,
문(門)이기 때문에,
이치[理]이기 때문에,
모양[相]이기 때문에 통달하는 행[通達行]을 닦나니,
이 때문에 ‘고지통행’이라 한다.
또 이와 같은 행(行)은 구하는 뜻에 대하여 닦아 익히고 많이 닦아 익힘으로 말미암아 능히 얻고 따라 얻으며 능히 접촉하고 평등하게 접촉하며 능히 증(證)하고 증을 짓나니,
이 때문에 말하여 ‘고지통행’이라고 한다.
또 이와 같은 행(行)은 말[語]과 비유적인 말[增語]로 말미암고 생각[想]과 평등한 생각[等想]과 시설(施設)과 언설(言說)로 말미암아 고지통행이 되는 것이니,
이 때문에 말하여 ‘고지통행’이라고 한다.
어떤 것을 고속통행(苦速通行)이라고 하는가?
마치 세존께서 말씀하시되 “모든 필추들은 5취온(取蘊)으로 말미암아 능욕을 당하고 훼상을 입는다.
그들에게 이와 같은 5취온이 몹시 핍박하고 얽매이는 것은 마치 무거운 짐을 걸머진 것 같나니,
이에 목숨을 마치기까지 항상 붙어 따르고 있으므로 곧 이와 같은 5취온에 대하여 몹시 싫어하고 천히 여기고 꾸짖고 헐뜯고 거역하게 된다.
곧 이와 같은 5취온에서 생겨나는 싫어하고 천히 여기고 꾸짖고 헐뜯고 거역하게 되는 것을 고(苦)라 하고 이것으로 말미암아 곧 밝고 날카롭고 강하고 왕성한 신근(信根) 등 5근(根)을 일으키나니,
이와 같은 5근은 밝기 때문에,
날카롭기 때문에,
강하기 때문에,
왕성하기 때문에 빠르게[速] 위없는 누진(漏盡)을 증득하게 된다”고 하신 것과 같다.
여기서 ‘빠르게[速]’라고 말함은 급하고 빠르며 달리고 쉬우며 빠르게 증득한다는 말이다.
‘위없다[無上]’고 함은 마치 세존께서 말씀하시되 “모든 유위(有爲)와 무위(無爲)의 법에서 잡염을 여읨[雜染]을 맨 첫째라고 하나니,
가장 높고 가장 뛰어나며 맨 위이고 보다 위없는 것이다”라고 하신 것과 같다.
무상법에서 능히 얻고 따라 얻으며 능히 이해하고 평등하게 이해하며 능히 증(證)하고 증을 짓기[作證] 때문에 ‘증득’이라고 한다.
‘누진(漏盡)’이라는 말은 3루(漏)이어서 이 3루에 대하여 능히 다하고 평등하게 다하며 두루 다하고 영원히 다하며 소멸하여 다하고 원만하게 다하기 때문에 ‘누진’이라고 한다.
‘통행(通行)’이라 함은 곧 이 행(行)은 초월하고 용맹하며 정진하고 책려(策勵)하며 의욕을 내고 몹시 힘쓰면서 4성제에 대하여 현관하는 행[現觀行]을 닦고 예류과ㆍ일래과ㆍ불환과ㆍ아라한과에 대하여 증을 짓는 행[作證行]을 닦으며 탐ㆍ진ㆍ치ㆍ만ㆍ교ㆍ구에 대하여 영원히 다하는 행[永盡行]을 닦고 극히 공경하고 편안히 머무르고 은근한 사유(思惟)로써 모든 심소(心所)를 두루 가다듬은 뒤에 인(因)이기 때문에,
문(門)이기 때문에,
이치[理]이기 때문에,
모양[相]이기 때문에,
통달하는 행[通達行]을 닦는 것이니,
이러므로 ‘고속통행’이라 한다.
또 이와 같은 행은 구하는 뜻에 대하여 닦아 익히고 많이 닦아 익힘으로 말미암아 능히 얻고 따라 얻으며 능히 접촉하고 평등하게 접촉하며 능히 증(證)하고 증을 짓나니,
이 때문에 ‘고속통행’이라 말한다.
또 이와 같은 행은 말[語]과 비유적인 말[增語]로 말미암고 생각과 평등한 생각과 시설과 언설로 말미암아 고속통행이 되는 것이니,
이 때문에 ‘고속통행’이라 한다.
어떤 것을 낙지통행(樂遲通行)이라 하는가?
세존께서 말씀하시되 “모든 필추들은 욕계의 악한 법[欲惡不善法]을 떠나 거친 생각[尋]도 있고 세밀한 생각[伺]도 있으며,
여윔으로 기쁨[善]과 즐거움[樂]이 생기는 초정려(初靜慮)에 구족하게 안주(安住)하며,
거친 생각과 세밀한 생각이 그쳐 쉬고 안으로 평등하고 청정하며,
마음이 한 갈래[一趣]로 되며,
거친 생각도 없고 세밀한 생각도 없고 선정[定]에서 기쁨과 즐거움이 생기는 제2 정려에 구족하게 안주하며,
기쁨을 여의고 평정[捨]에 머물러서 바르게 기억[正念]하고 바르게 알며[正知] 즐거움을 느끼되 성인이 말한 버림의 생각[捨念]을 갖추어서 안락하게 머무르는 제3 정려에 구족하게 안주하며,
즐거움도 끊고 괴로움도 끊어 먼저 있던 기쁨과 근심이 없어져서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아 버림의 생각이 청정해지는 제4 정려에 구족하게 안주한다.
그는 그러할 때에 자신을 해치려는 생각도 아니하고 다른 이를 해치려는 생각도 아니하며 나와 남을 다 같이 해치려는 생각도 아니한다.
자기 자신을 이롭게 하려고 생각하고 다른 이를 이롭게 하려고 생각하며 많은 중생을 이롭게 하고 세간을 가엾이 여기며 모든 하늘과 사람들을 이익되게 하고 즐겁게 하려는 것이니,
모든 해침이 없는[無害] 것 등을 여기서 낙(樂)이라고 한다.
이로 말미암아 곧 어둡고 무디고 연약하고 하열한 신근(信根) 등 5근(根)를 일으키는 것이니,
이와 같은 5근은 어둡기 때문에,
무디기 때문에,
연약하기 때문에,
하열하기 때문에,
더디게[遲] 위없는 누진(漏盡)을 증득하게 된다”고 하신 것과 같다.
여기서 ‘더디다[遲]’는 말은 급한 것이 아니요 빠른 것이 아니며,
달리는 것이 아니요 쉬운 것이 아니며,
빠르게 증득하는 것이 아니다.
‘위없다[無上]’고 함은 세존께서 말씀하시되 “모든 유위와 무위의 법 가운데서 나는 잡염(雜染)을 여의는 것을 맨 첫째라 하나니,
가장 높고 가장 뛰어나며 맨 위이고 보다 위없는 것이다”라고 하신 것과 같다.
무상법을 능히 얻고 따라 얻으며 능히 이해하고 평등하게 이해하며 능히 증(證)하고 증을 짓기 때문에 ‘증득’이라 한다.
‘누진(漏盡)’이라 함은 누(漏)란 3루(漏)를 말하는 것이어서 이 3루에 대하여 능히 다하고 평등하게 다하며 두루 다하고 영원히 다하며 소멸하여 다하고 원만하게 다하기 때문에 ‘누진’이라고 한다.
‘통행(通行)’이라 함은 곧 이 행(行)은 초월하고 용맹하며 정진하고 책려하며 의욕을 내고 몹시 힘써서 4성제에 대하여 현관하는 행[現觀行]을 닦으며 불환과(不還果)와 아라한과(阿羅漢果)에 대하여 증을 짓는 행[作證行]을 닦고 그리고 신경지작증통(神境智作證通)과 천이지작증통(天耳智作證通)과 심차별지작증통(心差別智作證通)과 숙주수념지작증통(宿住隨念智作證通)과 사생지작증통(死生智作證通)과 누진지작증통(漏盡智作證通)에 대하여 증을 짓는 행을 닦으며 탐(貪)ㆍ진(瞋)ㆍ치(癡)ㆍ만(慢)ㆍ교(憍)ㆍ구(垢) 등에 대하여 영원히 다하는 행[永盡行]을 닦고 극히 공경하고 편안히 머무르고 은근한 사유(思惟)로써 모든 심소를 두루 가다듬은 뒤에 인(因)이기 때문에,
문(門)이기 때문에,
이치[理]이기 때문에,
모양[相]이기 때문에,
통달하는 행[通達行]을 닦는 것이니,
이러므로 ‘낙지통행’이라 한다.
또 이와 같은 행은 구하는 뜻에 대하여 닦아 익히고 많이 닦아 익힘으로 말미암아 능히 얻고 따라 얻으며 능히 접촉하고 평등하게 접촉하며 능히 증하고 증을 짓는 것이니,
이 때문에 ‘낙지통행’이라고 한다.
또 이와 같은 행은 말과 비유적인 말을 말미암고 생각과 평등한 생각과 시설과 언설로 말미암아 낙지통행이 되는 것이니,
이러므로 ‘낙지통행’이라 한다.
어떤 것을 낙속통행(樂速通行)이라 하는가?
세존께서 말씀하시되 “모든 필추들은 욕계의 악한 법을 여의고,
(자세한 설명은 생략함) 나아가 제4 정려에 구족하게 안주한다.
그들은 그럴 때에 자신을 해치려는 생각도 아니요 다른 이를 해치려는 생각도 아니고 나와 남을 다 같이 해치려는 생각도 아니며 자기 자신을 이롭게 하려고 생각하고 다른 이를 이롭게 하려고 생각하며 많은 중생을 이롭게 하고 세간을 가엾이 여기며 모든 하늘과 사람들을 이익되게 하고 즐겁게 하려는 것이니,
모든 해침이 없는[無害] 것 등을 여기서 낙(樂)이라고 한다.
이로 말미암아 곧 밝고 날카롭고 강하고 왕성한 신근(信根) 등의 5근(根)을 일으키는 것이니,
이와 같은 5근은 밝기 때문에,
날카롭기 때문에,
강하기 때문에,
왕성하기 때문에 빠르게[速] 위없는 누진(漏盡)을 증득하게 된다”라고 하신 것과 같다.
여기서 ‘빠르다[速]’라고 함은 급하고 빠르며 달리고 쉬우며 빠르게 증득한다는 것이다.
‘위없다[無上]’는 말은 마치 세존께서 말씀하시되 “모든 유위와 무위의 법 가운데서 나는 잡염(雜染)을 여의는 것을 맨 첫째라 하나니,
가장 높고 가장 뛰어나면 맨 위이고 보다 위없는 것이다”라고 하신 것과 같다.
무상법에서 얻고 따라 얻으며 접촉하고 평등하게 접촉하며 증득하고 증득을 지으므로 증득이라고 말한다.
‘누진(漏盡)’이라 함은 누(漏)란 3루(漏)이니 3루에 대하여 능히 다하고 평등하게 다하며 두루 다하고 영원히 다하며 소멸하여 다하고 원만하게 다하는 것이다.
‘통행(通行)’이라 함은 곧 이 행(行)은 초월하고 용맹하며 정진하고 책려하며 의욕을 내고 몹시 힘써서 4성제에 대하여 현관하는 행[現觀行]을 닦으며 불환과와 아라한과에 대하여 증을 짓는 행[作證行]을 닦고 신경지작증통과 천이지작증통과 심차별지작증통과 숙주수념지작증통과 사생지작증통과 누진지작증통에 대하여 증을 짓는 행을 닦으며 탐ㆍ진ㆍ치ㆍ만ㆍ교ㆍ구 등에 대하여 영원히 다하는 행[永盡行]을 닦고 극히 공경하고 편안히 머무르고 은근한 사유(思惟)로써 모든 심소(心所)를 두루 가다듬은 뒤에 인(因)이기 때문에,
문(門)이기 때문에,
이치[理]이기 때문에,
모양[相]이기 때문에 통달하는 행[通達行]을 닦는 것이니,
이 때문에 ‘낙송통행’이라 한다.
또 이와 같은 행은 구하는 뜻에 대하여 닦아 익히고 많이 닦아 익힘으로 말미암아 능히 얻고 따라 얻으며 능히 접촉하고 평등하게 접촉하며 능히 증(證)하고 증을 짓는 것이니,
이러므로 ‘낙송통행’이라 한다.
또 이와 같은 행은 말과 비유적인 말[增語]로 말미암고 생각과 평등한 생각과 시설과 언설로 말미암아 낙속통행이 되는 것이니,
이 때문에 ‘낙속행’이라 한다.
이 가운데서 만일 고지통행(苦遲通行)에 대하여 닦아 익히고 많이 닦아 익히면 고속통행(苦速通行)으로 하여금 빨리 원만할 수 있게 하고,
만일 낙지통행(樂遲通行)에 대하여 닦아 익히고 많이 닦아 익히면 낙속통행(樂速通行)으로 하여금 빨리 원만할 수 있게 한다.
또 저 고지통행에 대하여 닦아 익히고 많이 닦아 익히면 낙지통행으로 하여금 원만할 수 있게 하고,
만일 고속통행에 대하여 닦아 익히고 많이 닦아 익히면 낙속통행으로 하여금 빨리 원만해지게 할 수 있다.
6. 성종품(聖種品)
어느 때 박가범께서 실라벌(室羅筏) 서다림(逝多林)의 급고독원(給孤獨園)에 계셨다.
그때 세존께서 필추들에게 말씀하셨다.
“4성종(聖種)이 있나니,
이것은 가장 뛰어나고 이것은 종성(種姓)이며 이것은 즐길 만하면서 현재에도 잡된 더러움[離穢]이 없고 전에도 잡된 더러움이 없었고 미래에도 잡된 더러움이 없을 것이며 온갖 사문이나 혹은 바라문이나 하늘ㆍ악마ㆍ범이나 혹은 그 밖의 다른 세간(世間)에서는 능히 그 법을 헐뜯거나 비방할 이가 없다.
어떤 것이 네 가지인가?
나의 견문이 많은[多聞] 성현 제자는 의복(衣服)을 얻는 대로 곧 기뻐하고 만족하게[善足] 여기며 기뻐하고 만족하게 여기는 것을 찬탄하고 의복을 구하는 인연 때문에 모든 세간으로 하여금 비난이 일게 하지 않는다.
설령 구하다가 얻지 못해도 끝내 원통히 여겨 한탄하거나[懊歎] 목을 빼고 바라거나[引頸希望] 가슴을 치며 답답해[拊胸迷悶] 하지 않으며,
또 구하여서 얻은 뒤에도 법답게 받아쓰면서 염착(染著)하거나 즐겨 빠지거나 헷갈리거나 감추어 두거나 저장하지 않으며,
받아 쓸 때에도 그 허물[過患]을 보아서 벗어날 것[出離]을 바르게 안다.
그는 의복을 얻는 대로 기뻐하고 만족하게 여김으로 말미암아 끝내 자기 자신을 뽐내거나 해서 다른 이를 업신여기지 않으며 그러면서 다잡아 힘쓰고[策勤],
바르게 알며[正知],
생각을 잡아매나니[繫念],
이것을 안주고석성종(安住古昔聖種)이라 하느니라.
이와 같은 제자는 음식(飮食)을 얻는 대로 곧 기뻐하고 만족하게 여기나니,
자세한 설명은 앞에서와 같으니라.
이와 같은 제자는 침구[臥具]를 얻는 대로 곧 기뻐하고 만족하게 여기나니,
자세한 설명은 앞에서와 같으니라.
이와 같은 제자는 끊는 것[斷]을 사랑하고 끊는 것을 좋아하여 부지런히 힘쓰고 따라 배워서 끊는 것에 대하여 사랑하고 좋아하며,
닦는 것[修]을 사랑하고 닦는 것을 좋아하여 부지런히 힘쓰고 따라 배우면서 닦는 것에 대하여 사랑하고 좋아한다.
그는 이와 같이 끊는 것과 닦는 것을 사랑하고 좋아함으로 말미암아 끝내 스스로 뽐내거나 다른 이를 업신여기지도 않으며 그러면서 다잡아 힘쓰고,
바르게 알며,
생각을 잡아매나니,
이것을 안주고석성종이라 하느니라.
나의 견문이 많은 성현 제자로서 이와 같은 4성종을 성취한 이는 동쪽ㆍ서쪽과 남쪽ㆍ북쪽에 의지하여 살면서도 그는 그곳에 사는 것을 즐기지도 않고 그러면서도 그는 즐거이 살고 있나니 즐거운 것과 즐겁지 않은 것에 대하여 다같이 참고 견디느니라.”
그때 세존께서는 앞의 뜻을 정리하기 위하여 게송으로 말씀하셨다.
용감한 이는 그곳에 살기 좋아하지 않으면서
그는 즐거이 용감하게 사나니
즐겁거나 즐겁지 않은 가운데서
용감한 이는 다 같이 참고 견딘다.
이미 모든 욕심을 버리고
물건에 구애(拘礙)가 없는 이거늘
섬부주(贍部洲)의 진금(眞金)을 가져다준들
누가 다시 그런 이를 비방하겠는가.
‘4성종(聖種)이 있나니,
그것은 가장 뛰어나다[最勝]’고 함은 4성종은 곧 모든 부처님과 제자들이 다 함께 시설(施設)하여 가장 뛰어난 것으로 삼기 때문이다.
‘그것은 종성(種姓)이다’라고 함은 4성종이니,
이것은 모든 부처님과 그 제자들이 옛적부터 집안 종성[家種姓]은 같이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것은 즐길 만하다[可樂]’고 함은 4성종이니,
이것은 모든 부처님과 제자들이 아득히 먼 오랜 옛날부터 밤이나 낮이나 언제나 즐길 만한 법이었기 때문이다.
‘현재에도 잡된 더러움이 없다’고 함은 4성종은 현재의 악한 법[惡不善法] 때문에 친근하거나 물이 들지 않으며 그 성품됨이 그것과 뒤섞이지 않아서 멀리 여읠 수 있기 때문이다.
‘전에도 잡된 더러움이 없었다’고 함은 이 4성종은 과거에도 악한 법에 친근히 하거나 물이 들지 않았으며 그 성품 됨이 그것과 뒤섞이지 않아서 멀리 여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미래에도 잡된 더러움이 없을 것이다’라고 함은 이 4성종은 미래에도 악한 법에 친근히 하거나 물이 들지 않을 것이며 그 성품 됨이 그것과 뒤섞이지 않아서 멀리 여읠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모든 사문 등도 그 법을 헐뜯거나 비방할 이가 없다’고 함은 이 4성종은 모든 부처님과 그 제자들이나 혹은 어질고 귀한 모든 이거나 혹은 모든 훌륭한 사람[善士]들이 ‘이 성종은 바로 착하지 않은 법이요 하천[下賤]한 이의 것이다.
믿고 이해하거나 받아 지니면 자기 자신을 해치게 되고 다른 이를 해치게 되고 자기와 남을 다 같이 해치게 되며 지혜를 소멸하게 하고 그러한 종류를 장애하게 하며 열반을 장애하게 된다.
이 법을 받아 지니면 통혜(通慧)가 생기지 않고 보리(菩提)를 이끌지 못하며 열반을 증득하지 못한다’라고 비방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니,
이와 같은 성종은 그분들이 비방할 법이 아니기 때문이다.
‘의복은 얻는 대로 곧 기뻐하고 만족하게 여긴다’고 함은 누더기[糞掃衣]를 얻거나 혹은 시주(施主)의 의복을 얻거나 좋건 나쁘건 간에 얻는 대로 곧 기뻐하고 만족하게 여기며 취득하여 몸을 가리는 것이니,
그것은 추위 등을 막아주기 때문이다.
‘기뻐하고 만족하게 여기는 것[喜足]을 찬탄한다’고 함은 의복은 얻는 대로 곧 기뻐하고 만족하게 여기는 일을 자주자주 찬탄한다는 것이다.
이를테면 ‘기뻐하고 만족하게 여기는 일은 오랜 세월 동안 욕심을 적게 하는 것[少欲]과 기뻐하고 만족하게 여기는 것[喜足]과 만족하기 쉽게 하는 것[易滿]과 기르기 쉽게 하는 것[易養]을 잘 이끌며,
모든 악을 줄이고 모든 선을 더욱 자라게 하며 두다(杜多)의 공덕을 속히 원만하게 하고,
모든 살림[資具]에 대하여 그 분수를 잘 알게 하며 자기 자신과 다른 이의 몸과 마음으로 하여금 엄숙하고 청정하게 한다’라고 하는 것이다.
자주 찬탄한다고 함은 자주 말을 꺼내는 것이 아니요,
다만 이러한 소견을 지니고 있어서 인연 따라 말을 해주어 다른 이로 하여금 기뻐하고 만족하게 여기는 일[喜足]을 공경하고 중히 여기게 할 뿐이다.
‘의복을 구한 인연 때문에 모든 세간으로 하여금 비난이 일게 하지 않는다’고 함은 부처님의 제자는 한 종류의 의복을 구하기 위하여 시주의 집에 가서 거짓으로 위의를 나타내고 거짓말을 늘어놓으며 모양을 닦고 꾸미고는 이익으로써 이익을 구하면서 모든 세간으로 하여금 많은 비난을 일게 하는 그런 일들과는 같지 않은 것이니,
모든 부처님의 제자들은 그것과는 서로 어긋나기 때문에 다른 이로 하여금 모든 비난을 일게 하지 않는다.
‘설령 구하다가 얻지 못해도 끝내 원통히 여기어 한탄하는[懊歎] 등의 일은 하지 않는다’고 함은 부처님의 제자는 의복을 구하다가 뜻을 이루지 못했을 때에도 끝내 원통하게 여겨 한탄하거나 목을 빼고 바라고 있거나 가슴을 쓰다듬으며 답답해하거나 하지 않는 것이다.
‘오(懊)’라 함은 마음에 열(熱)이 나고 평등하게 열이 나고 두루 열이 나며 속에서 분이 끓어오르고 불에 타듯 당황해 하며 근심하고 걱정하며 뉘우치고 원망하는 화살과 같은 것이 염통으로 들어가 어쩔 줄 모르게 되고 번거로우면서 원한이 극심한 것을 통틀어서 ‘오’라고 하는 것이요,
‘탄(歎)’이라 함은 이와 같이 마음이 타고 괴로운 뒤에 생각하기를 ‘나에게는 의복이 없는데 어떠한 방법을 써야 저절로 얻게 될까’고 하는 것이니,
이로 인하여 생각하고 있는 일을 여러 가지 말로써 늘어놓는 것을 통틀어서 ‘탄’이라 한다.
‘목을 빼고 바라고 있다[引頸希望]’고 함은 원통하게 여겨 한탄하고 나서는 다시 시주의 뜻을 돌리려고 희망하는 것이다.
‘가슴을 치며 답답해한다[捬胸迷悶]’고 함은 오래 기다려도 얻지 못하면 절망해서 가슴을 치며 답답해하는 것이다.
모든 부처님의 제자들은 모두 이러한 일들이 없다.
‘만일 구해서 얻은 뒤에는 법답게 받아쓰면서 염착(染著) 등을 내지 않는다’고 함은 부처님 제자는 의복을 구하여 얻으면 법답게 수용해서 마음에 염착하거나 즐겨 빠지거나 헷갈리거나 감추어 두거나 저축하지 않는다.
염착 등에 관한 말은 모두 탐애(貪愛)의 앞뒤와 경중과 분위(分位)와 차별을 나타낸다.
‘수용할 때에는 그 허물[過患]을 보면서 벗어날[出離] 것을 바르게 안다’고 함은 부처님의 제자가 얻게 된 의복을 받아 쓸 적에는 그의 허물을 보는 것이니,
이를테면 ‘이 의복은 무상하여 바뀌고 움직인다.
구할 때에는 피로하게 되고 수용하는 것이 도리가 아니면 오래가는 질병이 생기게 된다.
이것은 곧 잃고 파괴되는 법이요 이것은 증가하고 손감되는 법이다.
잠깐 동안 얻었다가 도로 잃게 되는 것으로 날쌔고 빨라서 멈추지 않으며 본래는 없던 것이 지금 생긴 것이요 생긴 뒤에는 도로 없어지게 된다.
그리고 보존하거나 믿을 수가 없다’고 하는 것이다.
또 수용할 때에는 벗어날 것을 바르게 아는 것이니,
벗어날 데로 향해 나아가는 지혜를 성취한 까닭이다.
그리고 다만 열반에 나아가기 위하여 의복을 수용할 뿐이다.
또 수용할 때에는 먼저 탐욕을 조복하고 다음에는 탐욕을 끊으며 나중에는 탐욕에서 벗어난다.
이런 인연으로 말미암아 마음은 의복에 대하여 염착을 여의고 해탈한다.
‘그는 의복을 얻는 대로 기뻐하고 만족하게 여김으로 말미암아 끝내 스스로 뽐내거나 남을 업신여기지 않는다’ 함은 부처님의 제자는 비록 얻게 된 의복에 대하여 기뻐하고 만족하게 여기더라도 스스로 뽐내면서 다른 이를 업신여기지 않는다.
어느 한 무리가 기뻐하고 만족하게 여김으로 말미암아 스스로 뽐내면서 말하기를 ‘나는 이와 같이 욕심이 적고[少欲],
기뻐하고 만족하게[喜足] 여기며,
맡아보는 일이 적고,
하는 일들이 적으며,
잊지 못하거나 그리는 일이 적고,
쉬이 만족하게 여기며,
기르기가 용이하다.
그리고 모든 악을 줄이고 모든 선을 더욱 자라게 하며 빨리 두다(杜多)의 공덕을 원만하게 하고 모든 생활하는 도구에 그 분량을 잘 알며 다른 이를 위하여 기뻐하고 만족하게 여기는 일을 잘 찬탄한다’고 하는 그런 이들과는 같지 않다.
또 어느 한 무리가 기뻐하고 만족하게 여김으로 말미암아 다른 이를 업신여기면서 말하기를 ‘그 밖의 다른 필추들은 모두가 이와 같이 욕심이 적거나 기뻐하고 만족하게 여기거나 맡아보는 일이 적거나 (자세한 설명은 생략함) 나아가 다른 이를 위하여 기뻐하고 만족하게 여기는 것을 잘 찬탄하는 일이 없다’고 하는 그런 이들과는 같지 않나니,
모든 부처님의 제자들은 모두 이런 일이 없다.
‘잘 다잡아 힘쓰고[策勤],
바르게 알며[正知],
생각을 잡아맨다[繫念]’고 함은 부처님의 제자는 의복을 얻는 대로 기뻐하고 만족하게 여기며 법답게 수용해서 염착하지 않을 뿐더러 그의 허물을 보고 벗어날 것을 바르게 알아 스스로 뽐내지도 않고 다른 이를 업신여기지도 않는다.
그리고 다시 다잡아 힘쓰고,
바르게 알며,
생각을 잡아매는 것이다.
다잡아 힘쓴다[策勤]는 말은 바른 정진[正精道]을 나타내는 것이요 바르게 안다[正知]는 말은 바른 소견[正見]을 나타내는 것이며 생각을 잡아맨다[繫念]고 함은 바른 염[正念]을 나타내는 것이니,
이것은 요약하여 세 가지 도의 갈래[道支]를 나타내 보인 것이다.
‘이것을 안주고석성종(安住古昔聖種)이라 한다’고 함에서 처음의 ‘이것을’이라는 말은 부처님의 제자가 앞에서 설명한 고르고 착한 의요(意樂)를 성취한 것을 나타낸 것이며,
나중의 ‘고석성종이라 한다’는 말은 과거ㆍ미래ㆍ현재의 온갖 성현이 모두 이와 같은 성종에 대하여 닦아 익히고 그리고 많이 닦아 익히고서야 비로소 구경(究竟)에 이르렀다는 것을 나타내는 것이다.
그 가운데 ‘안주(安住)’라는 말은 부처님의 제자가 의복을 얻는 대로 기뻐하면서 만족하게 여길 때에 증상(增上)으로 생기는 착한[善] 유루의 도[有漏道]와 무루의 도[無漏道]에 대하여 편안히 머무르고 평등하게 머무르며 두루 머무르고 가까이 머무른다는 것을 나타낸다.
‘이와 같은 제자는 음식(飮食)을 얻는 대로 곧 기뻐하면서 만족하게 여긴다’고 함은 부처님의 견문이 많은[多聞] 성현 제자는 구걸하여 얻게 된 음식이거나 혹은 청(請)하여 얻게 된 음식이 좋거나 나쁘거나 얻는 대로 곧 기뻐하고 만족하게 여기는 것이니,
취득하여 몸을 지탱하고 굶주림을 제거하여 주기 때문이다.
‘자세한 설명은 앞에서와 같다’고 함은 기뻐하고 만족하게 여기는 것을 찬탄하는 등의 일에 대한 자세한 설명은 앞에서 ‘의복은 얻는 대로 곧 기뻐하고 만족하게 여긴다’는 데서의 설명과 같다는 것이다.
‘이와 같은 제자는 침구[臥具]를 얻는 대로 곧 기뻐하고 만족하게 여긴다’고 함은 부처님의 견문이 많은 성현 제자는 나무 아래서 수용하는 침구나 혹은 방 또는 집에서 수용하는 침구가 좋거나 나쁘거나 얻는 대로 곧 기뻐하고 만족하게 여긴다는 것이니,
취득하여 몸을 돕고 피로를 제거하여 주기 때문이다.
‘자세한 설명은 앞에서와 같다’고 함은 기뻐하고 만족하게 여기는 것을 찬탄하는 등의 일에 대한 자세한 설명은 앞에서 ‘의복은 얻는 대로 곧 기뻐하고 만족하게 여긴다’는 데의 설명과 같다는 것이다.
‘이와 같은 제자는 끊는 것[斷]을 사랑한다’는 등은 견문이 많은 성현 부처님의 제자는 끊는 것을 사랑하고[愛] 닦는 것[修]을 사랑하며 끊는 것을 좋아하고[樂] 닦는 것을 좋아하여 부지런히 힘쓰고 따라 배워서 끊는 것과 닦는 것을 사랑하고 좋아한다.
어떤 것이 ‘끊는 것을 사랑하고 닦는 것을 사랑하는 것’인가?
만일 아직 악한 법[惡不善法]을 끊지 못했고 아직 착한 법[善法]을 닦지 않았으면 그는 끊는 것과 닦는 것에 있어서 사랑[愛]도 없고 훌륭한[勝] 사랑도 없으며 목을 빼고 바라기만[引頸希望] 하고 있겠지만,
만일 이미 악한 법을 끊었고 이미 착한 법을 닦은 것이 있다면 그는 끊는 것과 닦는 것에 대하여 사랑도 있고 훌륭한 사랑도 있으며 목을 빼고 바라는 일이 없을 것이다.
어떤 것이 ‘끊는 것을 좋아하고 닦는 것을 좋아한다’고 하는 것인가?
끊는 것과 닦는 것에 대하여 좋아함[樂]도 있고 뛰어나게 좋아함도 있다는 것이다.
어떤 것이 ‘부지런히 힘쓰고[精勤] 따라 배워서[隨學] 끊는 것과 닦는 것을 사랑하고 좋아한다’고 하는가?
끊는 것과 닦는 것에 대하여 더욱더 향상시키기 위하여 부지런히 힘쓰고 따라 배우는 것이다.
‘그는 이와 같이 끊는 것과 닦는 것을 사랑하고 좋아함으로 말미암아 끝내 스스로 뽐내거나 다른 이를 업신여기지 않는다’고 함은 부처님의 제자는 비록 끊는 것과 닦는 것에 대하여 사랑하고 좋아해서 부지런히 힘쓰고 따라 배운다 하더라도 자기 자신을 뽐내면서 다른 이를 업신여기지 않는다.
어느 한 무리가 사랑하고 좋아함으로 말미암아 스스로 뽐내면서 말하기를 ‘나는 이와 같이 욕심이 적고,
기뻐하여 만족하게 여기며,
맡아보는 일이 적고,
하는 일들이 적으며,
잊지 못하거나 또한 일이 적고,
쉬이 만족하게 여기며,
기르기가 용이하다.
그리고 모든 악을 줄이고 모든 선을 더욱 자라게 하며 끊는 것을 사랑하고 닦는 것을 사랑하며 끊는 것을 좋아하고 닦는 것을 좋아하여 부지런히 힘쓰고 따라 배워서 끊는 것과 닦는 것을 사랑하고 좋아한다’고 하는 그런 이들과는 같지 않다.
또 어느 한 무리가 이것을 사랑하고,
좋아함으로 말미암아 남을 업신여기면서 말하기를 “그 밖의 다른 필추들은 모두 이와 같이 욕심이 적거나 기뻐해서 만족하게 여기거나 맡아보는 일이 적거나,
(자세한 설명은 생략함) 나아가 끊는 것을 사랑하고 닦는 것을 사랑하며 끊는 것을 좋아하고 닦는 것을 좋아하여 부지런히 힘쓰고 따라 배워서 끊는 것과 닦는 것을 사랑하거나 좋아하는 일이 없다”고 하는 그런 이들과는 같지 않나니,
모든 부처님의 제자는 모두 이러한 일이 없다.
‘잘 다잡아 힘쓰고[策勤],
바르게 알며[正知],
생각을 잡아맨다[繫念]’고 하는 것과 ‘이것을 바로 안주고석성종(安住古昔聖種)이라 한다’는 것 등에 대한 자세한 해석은 앞에서와 같다.
차별이 있는 것은 그 안의 안주(安住)라는 말은 부처님의 제자가 끊는 것과 닦는 것을 사랑하고 좋아할 때에 증상(增上)으로 생기는 착한[善] 유루의 도[有漏道]와 무루의 도[無漏道]에 대하여 편안히 머무르고 평등하게 머무르며 두루 머무르고 가까이 머무른다는 것을 나타낸다.
7. 정승품(正勝品) ①
어느 때 박가범은 실라벌(室羅筏) 서다림(逝多林)의 급고독원(給孤獨園)에 계셨다.
그때 세존께서 필추들에게 말씀하셨다.
“4정승(正勝)이 있느니라.
어떤 것이 네 가지인가?
어떤 필추가 이미 생긴 악한 법[惡不善法]을 끊기 위하여 욕(欲)을 일으키고
근(勤)을 내어 정진하며 마음을 다잡고[策心] 마음을 지니는[持心] 것을 바로 첫째라 하고,
아직 생기지 않은 악한 법을 생기지 않게 하기 위하여 욕을 일으키고 근을 내어 정진하며 마음을 다잡고 마음을 지니는 것을 둘째라 하며,
아직 생기지 않은 착한 법[善法]을 생기게 하기 위하여 욕을 일으키고 근을 내어 정진하며 마음을 다잡고 마음을 지니는 것을 셋째라 하고,
이미 생긴 착한 법을 굳게 머무르고 잊지 않으며,
닦고 원만하며,
갑절 더하고 광대해져서 지혜로 증득을 짓게[作證] 하기 위하여 욕을 일으키고 근을 내어 정진하며 마음을 다잡고 마음을 지니는 것을 넷째라 하느니라.”
그때 세존께서 앞의 뜻을 정리하기 위하여 게송으로 말씀하셨다.
처음 정승(正勝)을 닦을 때에
벌써 나고 죽는 유(有)를 이기고
만일 닦아서 저 언덕[彼岸]에 이르면
악마의 군사들을 꺾고 부수게 되며,
티끌[塵]과 때[垢]의 모든 악을 여의고
그른 것[非]과 나쁜 인연[惡緣] 물리치게 되나니
저 언덕의 열반에 이르러
남음 없는[無餘] 극락(極樂)을 증득하느니라.
‘이미 생긴 악한 법[惡不善法]을 끊어지게 하기 위하여
욕(欲)을 일으키고 근(勤)을 내어 정진하며 마음을 다잡고 마음을 지닌다’고 함에서
어떤 것이 ‘이미 생긴 악한 법’인가?
과거ㆍ현재의 5개(蓋)이니,
첫째는 탐욕개(貪欲蓋)요,
둘째는 진에개(瞋恚蓋)며,
셋째는 혼침수면개(惛沈睡眠蓋)요,
넷째는 도거악작개(掉擧惡作蓋)며,
다섯째는 의개(疑蓋)이다.
어떤 것이 ‘이미 생긴 악한 법을 끊어지게 하기 위한 정승(正勝)’인가?
어떤 필추가 이미 생긴 탐욕개(貪欲蓋)를 끊어지게 하기 위하여 그 탐욕개에 있는 모든 허물[過患]이 많은 것을 이치대로 사유(思惟)하는 것이니,
이를테면 ‘이것은 착하지 않은 법이요 이것은 하천(下賤)한 것이다.
믿고 이해하거나[信解] 받아 지니는[受持] 것을 부처님과 그 제자나 어질고 귀한 이나 훌륭한 사람[善士]이 다 같이 꾸짖고 싫어하는 것이다.
그것은 자기 자신을 해치게 되고 다른 이를 해치게 되고 남을 다 같이 해치게 되며 지혜를 소멸시키고 그런 종류를 장애하게 되며 열반을 장애한다.
그 법을 받아 지니면 통혜(通慧)를 내지 못하고 보리(菩提)를 이끌지 못하며 열반을 증득하지 못한다’라고 한다.
이와 같이 사유하면서 근(勤)을 내어 정진하되 세차고 날래고 왕성하게 하여 제어하기 어려운 격려하는 뜻으로 쉬지 않으면 이 도(道)를 말하여 ‘이미 생긴 모든 탐욕개를 영원히 끊어지게 하는 정승(正勝)이다’라고 한다.
그는 이 도를 생겨나게 한 뒤에 닦아 익히고 많이 닦아 익히기 때문에 곧 이미 생긴 모든 탐욕개를 끊게 된다.
‘욕(欲)을 일으킨다’고 함은 이미 생긴 탐욕개를 끊어지게 하기 위하여 곧 바라고 원함[欲樂]과 기뻐함[欣喜]과 구하여 나아감[求趣]과 희망(希望)을 일으키고 평등하게 일으키며 그리고 내고 평등하게 내며 쌓아 모으고 출현하게 하는 것이니,
그는 이 모든 욕을 일으킴으로 말미암아 곧 이미 생긴 모든 탐욕개를 끊게 된다.
‘근(勤)을 일으켜 정진한다’고 함은 이미 생긴 탐욕개를 끊어지게 하기 위하여 근을 내어 정진하며,
(자세한 설명은 생략함) 나아가 격려하는 뜻으로 쉬지 않는 것이니,
그는 이로 말미암아 이미 생긴 모든 탐욕개를 끊는다.
‘마음을 다잡는다[策心]’고 함은 이미 생긴 탐욕개를 끊어지게 하기 위하여 부지런히 힘써서 기쁨을 함께 하는 마음[喜俱行心]과 기꺼움[欣]을 함께 하는 마음과 다잡아 격려함[策勵]을 함께 하는 마음과 하열하지 않음[不下劣]을 함께 하는 마음과 어둡지 않음[不闇昩]을 함께 하는 마음과 평정[捨]을 함께 하는 마음과 선정[定]을 함께 하는 마음을 닦아 익히는 것이니,
그는 이와 같은 마음을 닦아 익히기 때문에 곧 이미 생긴 모든 탐욕개를 끊게 된다.
‘마음을 지니다[持心]’고 함은 이미 생긴 탐욕개를 끊어지게 하기 위하여 마음을 지녀서 8지성도(支聖道),
이른바 정견(正見) 나아가 정정(正定)을 닦아 익히는 것이니,
그는 이 도(道)에 대하여 마음을 지녀서 닦아 익히고 많이 닦아 익히기 때문에 이미 생긴 모든 탐욕개를 끊게 된다.
또 어떤 필추가 이미 생긴 탐욕개를 끊어지게 하기 위하여 출가(出家)의 공덕을 이치대로 사유하나니,
‘이와 같은 출가는 바로 참되고 착한 법[眞善法]이요 곧 높고 뛰어난 것[尊勝者]이다.
믿고 이해하거나 받아 지니는 것을 부처님과 그 제자나 어질고 귀한 이나 훌륭한 사람이 다 같이 기뻐하고 찬탄하는 것이다.
그리고 자기 자신을 해치지 않고 다른 이를 해치지 않으며 나와 남을 다 같이 해치지 않으며 지혜를 더욱 자라게 하고 그런 종류를 장애하지 않으며 열반을 장애하지 않으면서 통혜를 내고 보리를 이끌며 열반을 증득하게 한다’고 한다.
이와 같이 사유해서 근을 내어 정진하며,
(자세한 설명은 생략함) 나아가 격려하는 뜻으로 쉬지 않으면 이런 도(道)를 말하여 ‘이미 생긴 모든 탐욕개를 영원히 끊어지게 하는 정승(正勝)’이라고 한다.
그는 이런 도를 낸 뒤에 닦아 익히고 많이 닦아 익히기 때문에 이미 생긴 모든 탐욕개를 끊게 된다.
‘욕(欲)을 일으키고 나아가 마음을 다잡고 마음을 지닌다’는 등은 모두가 앞에서 설명한 것과 같다.
또 어떤 필추가 이미 생긴 탐욕개를 끊어지게 하기 위하여 이치대로 사유하기를 ‘저 탐욕개는 마치 병(病)과 같고 종기와 같으며 화살ㆍ고뇌ㆍ상해와 같다.
그리고 무상(無常)하고ㆍ괴롭고[苦]ㆍ공(空)하고ㆍ나가 아니며[非我] 바뀌어 움직이고 피로하며 몹시 파리한 것이다.
이것은 잃게 되고 무너지는 법이요 신속하고 멈추지 않으며 썩는 것이요 항상 있는 것이 아니며 보존하거나 믿을 수도 없고 이것은 변하고 파괴되는 법이다’라고 한다.
이와 같이 사유해서 근(勤)을 내어 정진하며,
(자세한 설명은 생략함) 나아가 격려하는 뜻으로 쉬지 않으면 이런 도를 말하여 ‘이미 생긴 모든 탐욕개를 영원히 끊어지게 하는 정승(正勝)’이라고 한다.
그는 이런 도를 낸 뒤에 닦아 익히고 많이 닦아 익히기 때문에 이미 생긴 모든 탐욕개를 끊게 된다.
‘욕(欲)을 일으키고 나아가 마음을 다잡으며 마음을 지닌다’는 등은 모두 앞에서 설명한 것과 같다.
또 어떤 필추가 이미 생긴 모든 탐욕개를 끊어지게 하기 위하여 이치대로 ‘사라짐[滅]은 적정(寂靜)이 되고 도(道)는 벗어나게[出離] 한다’고 생각하는 것이니,
이와 같이 생각하고서 근(勤)을 내어 정진하며,
(자세한 설명은 생략함) 나아가 격려하는 뜻으로 쉬지 않으면 이런 도를 말하여 ‘이미 생긴 모든 탐욕개를 영원히 끊어지게 하는 정승’이라 한다.
그는 이런 도를 낸 뒤에 닦아 익히고 많이 닦아 익히기 때문에 이미 생긴 모든 탐욕개를 끊게 된다.
‘욕(欲)을 일으키고 나아가 마음을 다잡고 마음을 지닌다’는 등은 모두 앞에서 설명한 것과 같다.
탐욕개(貪欲蓋)에서와 같이 나머지 네 가지도 또한 그러하다.
차별이 있다면 마땅히 제 이름[自名]을 설명해야 된다.
또 어떤 필추가 이미 생긴 어느 한 종류의 나쁜 법을 끊어지게 하기 위하여 그 악한 법에 있는 모든 허물[過患]이 많은 것을 이치대로 사유(思惟)하나니,
이를테면 ‘이것은 착하지 않은 법이요 이것은 하천한 것이다.
믿고 이해하거나 받아 지니는 것이요,
(자세한 설명은 생략함) 나아가 열반을 증득하지 못하게 한다’고 한다.
이와 같이 사유해서 근(勤)을 내어 정진하며,
(자세한 설명은 생략함) 나아가 격려하는 뜻으로 쉬지 않으면 이 도(道)를 말하여 ‘이미 생긴 어느 한 종류의 악한 법으로 하여금 영원히 끊어지게 하는 정승’이라고 한다.
그는 이런 도를 낸 뒤에 닦아 익히고 많이 닦아 익히기 때문에 어느 한 종류의 이미 생긴 악한 법을 끊게 된다.
‘욕(欲)을 일으킨다’고 함은 이미 생긴 어느 한 종류의 악한 법을 끊어지게 하기 위하여 곧 나아가 구하여 나아감과 희망을 일으키고 평등하게 일으킨다.
(자세한 설명은 생략함) 그는 이 모든 욕을 일으키는 까닭에 곧 어느 한 종류의 이미 생긴 악한 법을 끊게 된다.
‘근(勤)을 발하여 정진한다’고 함은 이미 생긴 어느 한 종류의 악한 법을 끊어지게 하기 위하여 근을 발하여 정진하며 (자세한 설명은 생략함) 나아가 격려하는 뜻으로 쉬지 않는 것이니,
그는 이로 말미암아 곧 어느 한 종류의 이미 생긴 나쁜 법을 끊게 된다.
‘마음을 다잡는다[策心]’고 함은 이미 생긴 어느 한 종류의 악한 법을 끊어지게 하기 위하여 정진해서 기쁨을 함께 하는 마음[喜俱行心]과 (자세한 설명은 생략함) 나아가 선정을 함께 하는 마음[定俱行心]을 닦아 익히는 것이니,
그는 이와 같은 마음을 닦아 익히기 때문에 어느 한 종류의 이미 생긴 악한 법을 끊게 된다.
‘마음을 지닌다[持心]’고 함은 이미 생긴 어느 한 종류의 악한 법을 끊어지게 하기 위하여 마음을 지니어 8지성도(支聖道)를 닦아 익히는 것이니,
그는 이런 도를 마음을 지니어 닦아 익히고 많이 닦아 익히기 때문에 어느 한 종류의 이미 생긴 악한 법을 끊게 된다.
또 어떤 필추가 이미 생긴 어느 한 종류의 악한 법을 끊어지게 하기 위하여 출가(出家)의 공덕을 이치대로 사유하나니,
‘이와 같은 출가는 바로 참되고 착한 법이며 이것은 높고 뛰어난 것이다.
믿고 이해하거나 받아 지니는 것을 (자세한 설명은 생략함) 나아가 열반을 증득하게 한다’고 한다.
이와 같이 사유해서 근(勤)을 내어 정진하며 (자세한 설명은 생략함) 나아가 격려하는 뜻으로 쉬지 않으면 이 도(道)를 이름하여 ‘이미 생긴 어느 한 종류의 악한 법으로 하여금 영원히 끊어지게 하는 정승(正勝)’이라고 한다.
그는 이런 도를 낸 뒤에 닦아 익히고 많이 닦아 익힘으로 말미암아 곧 어느 한 종류의 이미 생긴 악한 법을 끊게 된다.
‘욕(欲)을 일으키고 나아가 마음을 다잡고 마음을 지닌다’는 등은 모두 앞에서 설명한 것과 같다.
또 어떤 필추가 이미 생긴 어느 한 종류의 악한 법을 끊어지게 하기 위하여 이치대로 사유하기를 ‘저 악한 법은 마치 질병과 같고 종기와 같으며,
(자세한 설명은 생략함) 나아가 이것은 곧 변하고 파괴되는 법이다’라고 한다.
이와 같이 사유해서 근(勤)을 내어 정진하며,
(자세한 설명은 생략함) 나아가 격려하는 뜻으로 쉬지 않으면 이 도를 이름하여 ‘이미 생긴 어느 한 종류의 악한 법을 영원히 끊어지게 하는 정승’이라 한다.
그는 이런 도를 낸 뒤에 닦아 익히고 많이 닦아 익히기 때문에 곧 어느 한 종류의 이미 생긴 악한 법을 끊게 된다.
‘욕(欲)을 일으키고 나아가 마음을 다잡고 마음을 지닌다’는 등은 앞에서 설명한 것과 같다.
또 어떤 필추가 이미 생긴 어느 한 종류의 악한 법을 끊어지게 하기 위하여 이치대로 사유하기를 ‘사라짐[滅]은 적정(寂靜)이 되고 도(道)는 벗어나게[出離] 한다’고 한다.
이와 같이 사유해서 근(勤)을 내어 정진하며,
(자세한 설명은 생략함) 나아가 격려하는 뜻으로 쉬지 않으면 이 도(道)를 이름하여 ‘이미 생긴 어느 한 종류의 나쁜 법으로 하여금 영원히 끊어지게 하는 정승(正勝)’이라 한다.
그는 이런 도를 낸 뒤에 닦아 익히고 많이 닦아 익히기 때문에 곧 어느 한 종류의 이미 생긴 악한 법을 끊게 된다.
‘욕(欲)을 일으키며 나아가 마음을 다잡고 마음을 지닌다’는 등은 모두가 앞에서 설명한 것과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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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범】añjalikarma 두 손바닥을 합하여 마음이 한결같음을 나타내는 인도의 경례하는 법의 일종. 그 모양이 같지 않다. 보통으로는 두 손바닥과 열 손가락을 합하는 것인데, 손가락만을 합하고, 손바닥을 합하지 않는 것은 마음이 거만하고 생각이 흩어졌기 때문이라 하여 꺼린다. 밀교에서는 두 손을 합하는 것은 정혜상응(定慧相應)ㆍ이지불이(理智不二)를 나타내는 것이라 하여 그 공덕이 광대무량하다 한다.
답 후보
● 합장(合掌)
해탈도(解脫道)
행(行)
행자(行者)
향대(香臺)
허공장(虛空藏)
현량상위과(現量相違過)
ॐ मणि पद्मे 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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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비달마법온족론_K0945_T1537 [문서정보]- 일일단상키워드
어떤 것이 ‘이미 생긴 악한 법’인가?
과거ㆍ현재의 5개(蓋)이니,
첫째는 탐욕개(貪欲蓋)요,
둘째는 진에개(瞋恚蓋)며,
셋째는 혼침수면개(惛沈睡眠蓋)요,
넷째는 도거악작개(掉擧惡作蓋)며,
다섯째는 의개(疑蓋)이다.
어떤 것이 ‘이미 생긴 악한 법을 끊어지게 하기 위한 정승(正勝)’인가?
어떤 필추가 이미 생긴 탐욕개(貪欲蓋)를 끊어지게 하기 위하여 그 탐욕개에 있는 모든 허물[過患]이 많은 것을 이치대로 사유(思惟)하는 것이니,
이를테면 ‘이것은 착하지 않은 법이요 이것은 하천(下賤)한 것이다.
믿고 이해하거나[信解] 받아 지니는[受持] 것을 부처님과 그 제자나 어질고 귀한 이나 훌륭한 사람[善士]이 다 같이 꾸짖고 싫어하는 것이다.
그것은 자기 자신을 해치게 되고 다른 이를 해치게 되고 남을 다 같이 해치게 되며 지혜를 소멸시키고 그런 종류를 장애하게 되며 열반을 장애한다.
그 법을 받아 지니면 통혜(通慧)를 내지 못하고 보리(菩提)를 이끌지 못하며 열반을 증득하지 못한다’라고 한다.
이와 같이 사유하면서 근(勤)을 내어 정진하되 세차고 날래고 왕성하게 하여 제어하기 어려운 격려하는 뜻으로 쉬지 않으면 이 도(道)를 말하여 ‘이미 생긴 모든 탐욕개를 영원히 끊어지게 하는 정승(正勝)이다’라고 한다.
그는 이 도를 생겨나게 한 뒤에 닦아 익히고 많이 닦아 익히기 때문에 곧 이미 생긴 모든 탐욕개를 끊게 된다.
‘욕(欲)을 일으킨다’고 함은 이미 생긴 탐욕개를 끊어지게 하기 위하여 곧 바라고 원함[欲樂]과 기뻐함[欣喜]과 구하여 나아감[求趣]과 희망(希望)을 일으키고 평등하게 일으키며 그리고 내고 평등하게 내며 쌓아 모으고 출현하게 하는 것이니,
그는 이 모든 욕을 일으킴으로 말미암아 곧 이미 생긴 모든 탐욕개를 끊게 된다.
‘근(勤)을 일으켜 정진한다’고 함은 이미 생긴 탐욕개를 끊어지게 하기 위하여 근을 내어 정진하며,
(자세한 설명은 생략함) 나아가 격려하는 뜻으로 쉬지 않는 것이니,
그는 이로 말미암아 이미 생긴 모든 탐욕개를 끊는다.
‘마음을 다잡는다[策心]’고 함은 이미 생긴 탐욕개를 끊어지게 하기 위하여 부지런히 힘써서 기쁨을 함께 하는 마음[喜俱行心]과 기꺼움[欣]을 함께 하는 마음과 다잡아 격려함[策勵]을 함께 하는 마음과 하열하지 않음[不下劣]을 함께 하는 마음과 어둡지 않음[不闇昩]을 함께 하는 마음과 평정[捨]을 함께 하는 마음과 선정[定]을 함께 하는 마음을 닦아 익히는 것이니,
그는 이와 같은 마음을 닦아 익히기 때문에 곧 이미 생긴 모든 탐욕개를 끊게 된다.
‘마음을 지니다[持心]’고 함은 이미 생긴 탐욕개를 끊어지게 하기 위하여 마음을 지녀서 8지성도(支聖道),
이른바 정견(正見) 나아가 정정(正定)을 닦아 익히는 것이니,
그는 이 도(道)에 대하여 마음을 지녀서 닦아 익히고 많이 닦아 익히기 때문에 이미 생긴 모든 탐욕개를 끊게 된다.
또 어떤 필추가 이미 생긴 탐욕개를 끊어지게 하기 위하여 출가(出家)의 공덕을 이치대로 사유하나니,
‘이와 같은 출가는 바로 참되고 착한 법[眞善法]이요 곧 높고 뛰어난 것[尊勝者]이다.
믿고 이해하거나 받아 지니는 것을 부처님과 그 제자나 어질고 귀한 이나 훌륭한 사람이 다 같이 기뻐하고 찬탄하는 것이다.
그리고 자기 자신을 해치지 않고 다른 이를 해치지 않으며 나와 남을 다 같이 해치지 않으며 지혜를 더욱 자라게 하고 그런 종류를 장애하지 않으며 열반을 장애하지 않으면서 통혜를 내고 보리를 이끌며 열반을 증득하게 한다’고 한다.
이와 같이 사유해서 근을 내어 정진하며,
(자세한 설명은 생략함) 나아가 격려하는 뜻으로 쉬지 않으면 이런 도(道)를 말하여 ‘이미 생긴 모든 탐욕개를 영원히 끊어지게 하는 정승(正勝)’이라고 한다.
그는 이런 도를 낸 뒤에 닦아 익히고 많이 닦아 익히기 때문에 이미 생긴 모든 탐욕개를 끊게 된다.
‘욕(欲)을 일으키고 나아가 마음을 다잡고 마음을 지닌다’는 등은 모두가 앞에서 설명한 것과 같다.
또 어떤 필추가 이미 생긴 탐욕개를 끊어지게 하기 위하여 이치대로 사유하기를 ‘저 탐욕개는 마치 병(病)과 같고 종기와 같으며 화살ㆍ고뇌ㆍ상해와 같다.
그리고 무상(無常)하고ㆍ괴롭고[苦]ㆍ공(空)하고ㆍ나가 아니며[非我] 바뀌어 움직이고 피로하며 몹시 파리한 것이다.
이것은 잃게 되고 무너지는 법이요 신속하고 멈추지 않으며 썩는 것이요 항상 있는 것이 아니며 보존하거나 믿을 수도 없고 이것은 변하고 파괴되는 법이다’라고 한다.
이와 같이 사유해서 근(勤)을 내어 정진하며,
(자세한 설명은 생략함) 나아가 격려하는 뜻으로 쉬지 않으면 이런 도를 말하여 ‘이미 생긴 모든 탐욕개를 영원히 끊어지게 하는 정승(正勝)’이라고 한다.
그는 이런 도를 낸 뒤에 닦아 익히고 많이 닦아 익히기 때문에 이미 생긴 모든 탐욕개를 끊게 된다.
‘욕(欲)을 일으키고 나아가 마음을 다잡으며 마음을 지닌다’는 등은 모두 앞에서 설명한 것과 같다.
또 어떤 필추가 이미 생긴 모든 탐욕개를 끊어지게 하기 위하여 이치대로 ‘사라짐[滅]은 적정(寂靜)이 되고 도(道)는 벗어나게[出離] 한다’고 생각하는 것이니,
이와 같이 생각하고서 근(勤)을 내어 정진하며,
(자세한 설명은 생략함) 나아가 격려하는 뜻으로 쉬지 않으면 이런 도를 말하여 ‘이미 생긴 모든 탐욕개를 영원히 끊어지게 하는 정승’이라 한다.
그는 이런 도를 낸 뒤에 닦아 익히고 많이 닦아 익히기 때문에 이미 생긴 모든 탐욕개를 끊게 된다.
‘욕(欲)을 일으키고 나아가 마음을 다잡고 마음을 지닌다’는 등은 모두 앞에서 설명한 것과 같다.
탐욕개(貪欲蓋)에서와 같이 나머지 네 가지도 또한 그러하다.
차별이 있다면 마땅히 제 이름[自名]을 설명해야 된다.
또 어떤 필추가 이미 생긴 어느 한 종류의 나쁜 법을 끊어지게 하기 위하여 그 악한 법에 있는 모든 허물[過患]이 많은 것을 이치대로 사유(思惟)하나니,
이를테면 ‘이것은 착하지 않은 법이요 이것은 하천한 것이다.
믿고 이해하거나 받아 지니는 것이요,
(자세한 설명은 생략함) 나아가 열반을 증득하지 못하게 한다’고 한다.
이와 같이 사유해서 근(勤)을 내어 정진하며,
(자세한 설명은 생략함) 나아가 격려하는 뜻으로 쉬지 않으면 이 도(道)를 말하여 ‘이미 생긴 어느 한 종류의 악한 법으로 하여금 영원히 끊어지게 하는 정승’이라고 한다.
그는 이런 도를 낸 뒤에 닦아 익히고 많이 닦아 익히기 때문에 어느 한 종류의 이미 생긴 악한 법을 끊게 된다.
‘욕(欲)을 일으킨다’고 함은 이미 생긴 어느 한 종류의 악한 법을 끊어지게 하기 위하여 곧 나아가 구하여 나아감과 희망을 일으키고 평등하게 일으킨다.
(자세한 설명은 생략함) 그는 이 모든 욕을 일으키는 까닭에 곧 어느 한 종류의 이미 생긴 악한 법을 끊게 된다.
‘근(勤)을 발하여 정진한다’고 함은 이미 생긴 어느 한 종류의 악한 법을 끊어지게 하기 위하여 근을 발하여 정진하며 (자세한 설명은 생략함) 나아가 격려하는 뜻으로 쉬지 않는 것이니,
그는 이로 말미암아 곧 어느 한 종류의 이미 생긴 나쁜 법을 끊게 된다.
‘마음을 다잡는다[策心]’고 함은 이미 생긴 어느 한 종류의 악한 법을 끊어지게 하기 위하여 정진해서 기쁨을 함께 하는 마음[喜俱行心]과 (자세한 설명은 생략함) 나아가 선정을 함께 하는 마음[定俱行心]을 닦아 익히는 것이니,
그는 이와 같은 마음을 닦아 익히기 때문에 어느 한 종류의 이미 생긴 악한 법을 끊게 된다.
‘마음을 지닌다[持心]’고 함은 이미 생긴 어느 한 종류의 악한 법을 끊어지게 하기 위하여 마음을 지니어 8지성도(支聖道)를 닦아 익히는 것이니,
그는 이런 도를 마음을 지니어 닦아 익히고 많이 닦아 익히기 때문에 어느 한 종류의 이미 생긴 악한 법을 끊게 된다.
또 어떤 필추가 이미 생긴 어느 한 종류의 악한 법을 끊어지게 하기 위하여 출가(出家)의 공덕을 이치대로 사유하나니,
‘이와 같은 출가는 바로 참되고 착한 법이며 이것은 높고 뛰어난 것이다.
믿고 이해하거나 받아 지니는 것을 (자세한 설명은 생략함) 나아가 열반을 증득하게 한다’고 한다.
이와 같이 사유해서 근(勤)을 내어 정진하며 (자세한 설명은 생략함) 나아가 격려하는 뜻으로 쉬지 않으면 이 도(道)를 이름하여 ‘이미 생긴 어느 한 종류의 악한 법으로 하여금 영원히 끊어지게 하는 정승(正勝)’이라고 한다.
그는 이런 도를 낸 뒤에 닦아 익히고 많이 닦아 익힘으로 말미암아 곧 어느 한 종류의 이미 생긴 악한 법을 끊게 된다.
‘욕(欲)을 일으키고 나아가 마음을 다잡고 마음을 지닌다’는 등은 모두 앞에서 설명한 것과 같다.
또 어떤 필추가 이미 생긴 어느 한 종류의 악한 법을 끊어지게 하기 위하여 이치대로 사유하기를 ‘저 악한 법은 마치 질병과 같고 종기와 같으며,
(자세한 설명은 생략함) 나아가 이것은 곧 변하고 파괴되는 법이다’라고 한다.
이와 같이 사유해서 근(勤)을 내어 정진하며,
(자세한 설명은 생략함) 나아가 격려하는 뜻으로 쉬지 않으면 이 도를 이름하여 ‘이미 생긴 어느 한 종류의 악한 법을 영원히 끊어지게 하는 정승’이라 한다.
그는 이런 도를 낸 뒤에 닦아 익히고 많이 닦아 익히기 때문에 곧 어느 한 종류의 이미 생긴 악한 법을 끊게 된다.
‘욕(欲)을 일으키고 나아가 마음을 다잡고 마음을 지닌다’는 등은 앞에서 설명한 것과 같다.
또 어떤 필추가 이미 생긴 어느 한 종류의 악한 법을 끊어지게 하기 위하여 이치대로 사유하기를 ‘사라짐[滅]은 적정(寂靜)이 되고 도(道)는 벗어나게[出離] 한다’고 한다.
이와 같이 사유해서 근(勤)을 내어 정진하며,
(자세한 설명은 생략함) 나아가 격려하는 뜻으로 쉬지 않으면 이 도(道)를 이름하여 ‘이미 생긴 어느 한 종류의 나쁜 법으로 하여금 영원히 끊어지게 하는 정승(正勝)’이라 한다.
그는 이런 도를 낸 뒤에 닦아 익히고 많이 닦아 익히기 때문에 곧 어느 한 종류의 이미 생긴 악한 법을 끊게 된다.
‘욕(欲)을 일으키며 나아가 마음을 다잡고 마음을 지닌다’는 등은 모두가 앞에서 설명한 것과 같다.
○ [pt op tr]
●어떻게 변화하는가
★1★
◆vyhi63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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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9_1004_141920_nik_ct18.jpg ○ [pt op tr] 예술작품 사진 공양, 나무불, 나무법, 나무승 pablo-picasso-woman-in-a-shawl-1902 ○ 2020_0606_174509_can.jpg ○ [pt op tr] 꽃 공양, 나무불, 나무법, 나무승 ○ [pt op tr] 아름다운 사진 공양, 나무불, 나무법, 나무승 Summer_Palace_at_Beijing_13 ♥Somalia ,Hargeisa English: A residential area in Hargeisa, the capital of the northwestern Somaliland region of Somalia. Date 3 November 2010, 16:40:34 Source Flickr Author Retlaw Snellac Photography Permission & Licensing : Wikipedia ○ [pt op tr] 아름다운 풍경사진 공양, 나무불, 나무법, 나무승 With the image 'Google Earth & Map data: Google, DigitalGlobe' ○ 음악공양, 나무불, 나무법, 나무승 mus0fl--Edith Piaf - Mon Ami M'a Donne.lrc Edith Piaf - Mon Ami M'a Donne ♥단상♥그 때 그 자리 |
문서정보 ori
https://buddhism0077.blogspot.com/2021/01/2565-01-16-k0945-003.html#6392 sfed--아비달마법온족론_K0945_T1537.txt ☞제3권 sfd8--불교단상_2565_01.txt ☞◆vyhi6392 불기2565-01-16 θ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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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범】añjalikarma 두 손바닥을 합하여 마음이 한결같음을 나타내는 인도의 경례하는 법의 일종. 그 모양이 같지 않다. 보통으로는 두 손바닥과 열 손가락을 합하는 것인데, 손가락만을 합하고, 손바닥을 합하지 않는 것은 마음이 거만하고 생각이 흩어졌기 때문이라 하여 꺼린다. 밀교에서는 두 손을 합하는 것은 정혜상응(定慧相應)ㆍ이지불이(理智不二)를 나타내는 것이라 하여 그 공덕이 광대무량하다 한다.
답 후보
● 합장(合掌)
해탈도(解脫道)
행(行)
행자(行者)
향대(香臺)
허공장(虛空藏)
현량상위과(現量相違過)
ॐ मणि पद्मे 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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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비달마법온족론_K0945_T1537 [문서정보]- 일일단상키워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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