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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진리와실천

불기2565-02-21_사리불아비담론-k0969-016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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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기2565-02-21_사리불아비담론-k0969-016

진리와 가치를 고루고루 2021. 2. 21. 15:32



®

『사리불아비담론』
K0969
T1548

제16권

● 한글대장경 해당부분 열람I
● 한글대장경 해당부분 열람II
○ 통합대장경 사이트 안내

○ 해제[있는경우]
● TTS 음성듣기 안내
※ 이하 부분은 위 대장경 부분에 대해
참조자료를 붙여 자유롭게 연구하는 내용을 적는 공간입니다.
대장경 열람은 위 부분을 참조해주십시오.

자료출처 불교학술원 기금 후원안내페이지





『사리불아비담론』 ♣0969-016♧





제16권







♥아래 부분은 현재 작성 및 정리 중인 미완성 상태의 글입니다♥
❋본문
◎[개별논의]

○ [pt op tr]






○ 2019_1106_131026_can_Ab31_s12




❋❋본문 ◎[개별논의]

불교기록문화유산 아카이브
舍利弗阿毘曇論卷第十六
K0969


사리불아비담론 제16권

○ [pt op tr]















○ 음악공양, 나무불, 나무법, 나무승 mus0fl--Gilles Vigneault - Pendant Que.lrc

◎◎[개별논의] ❋본문
● 글로 익히는 정려 이론


정려 수행은 수행자가 직접 실천해야 한다.
정려 수행과정에서 겪거나 증득해가는 내용도 마찬가지다.

어떤 이가 아주 특별한 차를 마셨다고 하자.
이 맛을 다른 이에게 언어표현으로 전달하려고 한다고 하자.
아무리 그 맛에 대해 표현을 해도 상대가 그 맛을 직접 얻기는 곤란하다.
그 차 맛을 느끼려면 직접 그 차를 맛보아야 할 것이다.
그래도 그 차에 대한 언어적 설명이나 표현이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 것은 아니다.
다만 그것만으로 자신이 그 차맛을 알게 되었다고 여기면 곤란하다.

정려 수행은 욕계에서 색계 무색계로 들어가는 수행이 된다. 

이 정려 수행을 이론적으로 이해하려면 평상시 행하는 다음내용을 검토해야 한다. 

 

평소 눈을 뜨면 일정한 모습을 보게 된다. 

이 과정에서 영희가 어디 있는가라고 묻는다고 하자. 

그러면 그는 이리저리 초점을 맞추어 영희가 어디 있는가 찾아보게 된다. 

그러다가 영희로 여겨지는 부분을 찾게 된다. 

이제 그는 손가락으로 그 부분을 영희라고 가리키게 된다. 

 

욕계와 색계 무색계의 차이와 정려수행을 이론적으로 이해하려면 이 과정을 잘 살펴야 한다. 

 

우선 앞과 같이 영희가 어디 있는가라고 물을 때 손가락으로 일정부분을 가리킨다고 하자.

이 현상을 망집현상이라고 한다. 

 

여기서 그가 손가락으로 가리키는 부분이 어떤 성격을 갖는가를 먼저 살펴보자. 

그것은 그 주체의 마음안 내용이다. 

눈을 뜨면 나타나고 감으면 사라진다. 

그래서 그것은 그 주체의 마음안 내용이다. 

 

이 사정을 이해하려면 옆에 자신과 비슷한 철수를 놓고 검토해보면 이해하기 쉽다. 

철수가 눈을 감으면 보이지 않는다고 보고한다. 

다시 눈을 뜨면 앞에 바위나 꽃이 보인다고 보고한다. 

철수 눈을 숫가락 등으로 가리고 열고 해도 마찬가지로 보고하게 된다. 

이 상황에서 그런 변화는 오직 철수에게만 일어나는 변화다. 

그래서 철수가 눈을 뜰 때 보인다는 그 내용은 철수 안의 변화다.

그래서 그 내용은 철수 마음안의 내용일 뿐이다. 

 

그런데 그 철수와 바로 옆에 서 있는 자신도 상황이 같다. 

자신이 눈을 감으면 보이지 않는다. 

다시 눈을 뜨면 보인다. 

이 순간에 눈을 떠 보게 된 내용 전체가 다 자신 마음안 내용이다. 

즉 자신이 감각과정을 통해 얻게 된 감각현실이다. 

 

이 내용을 평소 대부분 자신의 밖에 있는 외부 세계의 내용이라고 잘못 이해한다. 

또 한편 이 내용을 자신의 감관이 상대하는 외부 대상이라고 잘못 이해한다. 

또 한편 이 내용은 자신의 마음밖에 있고, 마음과는 별개의 것으로서, 외부의 물질이라고 잘못 이해한다. 

또 한편 자신이 얻는 그런 내용은 영희나 철수를 비롯해 모든 생명이 다 함께 대하는 외부의 객관적 실재인 것으로 잘못 이해한다. 

 

물리학자가 어떤 물리현상을 기술한다고 하자. 

그 물리학자는 자신의 감관으로 일정한 내용을 관찰해 그처럼 보고한다. 

그래서 물체의 모습이나 크기 무게 운동 변화과정을 그처럼 기술한다. 

물리학자의 의식에는 자신이 관찰한 내용들이 하나같이 외부의 객관적 실재임이 당연히 전제되어 있다. 

그런데 물리학자가 하나의 현상을 관찰하는 과정도 앞의 경우와 사정이 같다. 

그래서 그것은 그 일체가 잘못된 판단이다. 

 

이제 경전에서 욕계, 색계 무색계로 구분하는 사정을 살펴보기로 하자. 

 

현실에서 눈을 떠서 모습을 본다. 또 손으로 촉감을 얻는다. 

이런 형태로 볼 수 있거나 대할 수 있는 내용이 있다. 

이것을 색이라고 표현한다. 

오늘날 표현으로는 감각현실이 여기에 해당한다. 

그런데 물리학자 입장에서는 이러한 마음안의 감각현실을 잘못 이해한다.

즉, 마음안의 감각현실을 붙잡고 이를 외부 세계나 외부물질, 외부대상, 외부의 객관적 실재로 잘못 이해한다. 

 

즉, 하나의 내용을 놓고 각 입장 따라 표현도 달리하고, 그 성격도 달리 이해한다. 

 

한편 그런 감각현실을 얻는 상황에서 한 주체는 느낌도 얻고 생각도 하고 분별도 한다. 

그런데 이러한 내용은 앞과 달리 볼 수도 없고 대할 수 없다. 

그래서 이를 무색이나 명이라고 표현한다. 

불교에서 수,상,행,식이라고 표현하는 부분이다. 

 

 

이제 다시 평소 눈을 뜨면서 일정한 모습을 보는 과정을 놓고 살펴보기로 한다. 

역시 이 과정에서 영희가 어디 있는가라고 묻는다고 하자. 

그러면 그는 이리저리 초점을 맞추어 영희가 어디 있는가 찾아보게 된다. 

그러다가 영희로 여겨지는 부분을 찾게 된다. 

이제 그는 손가락으로 그 부분을 영희라고 가리키게 된다. 

 

이 부분에서 손가락으로 가리킨 부분은 감각현실이다. 

한편, 그가 손가락으로 가리키기 전에 영희를 찾는 과정에서도 영희라는 생각은 갖고 있었다. 

이 내용은 관념내용이다. 

이 관념내용은 눈을 감고도 떠올릴 수 있다. 

 

이제 이렇게 영희에 대한 생각을 떠올려 관념내용을 잘 붙잡아 둔다고 하자. 

이 경우 이 관념내용과 손으로 가리킨 부분의 관계를 먼저 잘 살펴야 한다. 

 

그런 감각현실 부분을 대해서 그가 그런 분별을 일으킨 것은 사실이다. 

그렇다고 해서 

감각현실은 관념분별내용이 아니다. 

또 관념분별 내용은 감각현실이 아니다. 

 

감각현실 안에는 관념분별내용이 들어 있지 않다. 

관념분별 내용 안에는 감각현실이 들어 있지 않다. 

 

그래서 이 두 내용의 관계를 있는 그대로 잘 파악해야 한다. 

 

비유로 이 상황을 잘 이해해야 한다. 

 

연필이란 생각을 떠올리고 나서, 기차를 연상해 떠올릴 수도 있다. 

사정이 그렇다고 해서 

연필이 기차는 아니다. 

기차가 연필인 것도 아니다. 

연필에 기차가 들어 있는 것도 아니다. 

또 기차안에 연필이 들어 있는 것도 아니다. 

 

사정이 그러하다. 

그러함에도 기차가 어디 있는가라고 물을 때 

연필을 가리키면 곤란하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현실에서 대부분 이처럼 망상분별을 일으킨다. 

즉 영희가 어디 있는가라고 물으면 감각현실 일정부분을 가리킨다. 

 

이것이 경전에서 말하는 망상분별 현상이다. 

그런 내용은 그 부분에서 얻을 수 없다. 

그럼에도 그런 부분을 그런 내용이라고 잘못 여기고 가리키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런 바탕에서 온갖 업을 행해나간다. 

그리고 이것이 일반적이고 일상적인 생사현실의 상황이다. 

 

 

정려 수행은 이런 망집을 떠나는 기초적 수행이다. 

정려 수행에 들어가면 이런 상태를 떠나 색계에 진입하게 된다. 

그리고 좀더 깊게 수행하면 무색계에 진입하게 된다. 

 

이 사정을 위 상황을 놓고 잘 검토해야 한다. 

 

먼저 그가 눈을 떠서 손가락으로 영희를 가리키는 상황을 놓고 살펴보자. 

 

이 상태에서 그는 일정부분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이 부분이 중요하다. 

그가 일정 부분에 초점을 맞추어야 그런 망상분별이 진행된다. 

즉 그렇게 초점을 맞춘 부분이 영희라고 잘못 여기게 된다.

그런 현상이 그처럼 초점을 맞춘 이후에 나타나게 된다. 

 

이제 그가 초점을 그렇게 계속 맞추고 있다고 하자. 

그리고 그 초점을 움직이지 말것을 요구한다고 하자. 

그리고 그 상태에서 그에게 갑자기 왼쪽 끝 부분에는 무엇이 있는가를 묻는다고 하자. 

그런데 그가 초점을 왼쪽 끝으로 이동시켜 분별을 행하지 않는다고 하자. 

그러면 그는 그 부분에 무엇이 있는가를 답하기 곤란하게 된다. 

 

이 상황을 놓고 다시 잘 검토해야 한다. 

위 질문에 그는 답을 잘 하지 못할 수 있다. 

그렇다해도 그런 부분이 전혀 감각되지 않는 것은 아니다. 

 

그런데 감각되는 전체 부분에서 각 부분의 성격이 다르다. 

즉 그가 초점을 맞춘 부분은 그 부분이 무엇이라는 분별을 일으켜 대응시킨다. 

그러나 초점을 맞추지 않는 부분은 그런 현상이 없다. 

이후 다른 부분에 초점을 맞추면 다시 그 부분에 대해 분별을 일으켜 대응시키게 된다. 

 

이 부분을 놓고 잘 검토해야 한다. 

현실에서 초점을 맞추지 않고 대하는 감각현실 부분이 있다. 

그리고 그에 대한 분별도 일으키지 않고 있다. 

그래도 감각현실은 얻어지고 있다. 

 

이 부분이 갖는 성격이 '색' 이라고 경전에서 표현하는 부분에 해당한다. 

 

 

이제 다시 다음 실험을 해보자. 

 

눈을 뜨니 앞에 꽃과 바위가 보인다고 하자. 

그런데 그 상황에서 자신은 이와는 엉뚱하게 

경전에서 본 내용을 마음에서 떠올린다고 가정해보자. 

 

예를 들어 아미타부처님의 모습이나 아미타부처님의 광명을 떠올릴 수 있다

또는 극락세계의 모습을 상상으로 그리고 떠올릴 수 있다. 

그런데 이는 성격상 관념영역에서 연상해 떠올리는 생각들이다. 

이제 이런 내용에 대응하는 감각현실을 찾아본다고 하자. 

앞에서 꽃과 바위가 보이는 감각현실에서는 찾기 힘들 것이다. 

즉 감각현실과 대응되지 않는 관념내용들이다. 

 

그리고 이 부분이 갖는 성격이 경전에서 '명' '무색'이라는 표현에 해당한다. 

 

이를 통해서 정려 수행의 과정을 이론상 이해할 수 있다. 

 

 

정려 수행은 처음 마음을 하나의 대상에 집중하는 것을 요소로 한다. 

그래서 처음 들숨과 날숨을 세면서 이에 집중한다. 

그리고 이후 4 념처나 일정 주제에 집중해간다. 

 

처음 눈을 뜨고 일정 부분에 초점을 맞춘다고 하자.

그리고 그에 집중한다고 하자.

이렇게 집중하는 상태를 심일경성이라고 표현한다. 

 

이 상황에서 초점을 맞추지 않고 대하는 부분은 그대로 색계 상태와 성격이 같다. 

욕계 상태에서는 초점을 맞춘 부분에 대해 일정 분별을 일으켜 대응시킨다. 

그래서 초점을 맞춘 부분을 놓고 바위라거나 꽃이라고 분별한다. 

그리고 이 상황에서 바위가 어디 있는가라고 물으면 초점을 맞춘 부분을 손으로 가리킨다. 

 

그래서 이 상황에서 망상분별이 남은 부분은 바로 그렇게 초점을 맞춘 그 부분만이다. 

 

만일 집중하지 않은 상태라고 하자. 

그러면 그는 대단히 산만하다. 

자극이 일어나는 대로 초점을 이동시킨다. 

저기는 영희가 있다 여기는 음식이 있다 저기는 책상이 있다. 

이런 식이다. 

 

그래서 초점을 산만하게 이동시키는 각 순간마다 망집이 산만하게 일어난다. 

이제 하나의 대상에 집중하면 이런 증상이 사라진다. 

 

그리고 하나의 대상에 집중한 이후로 관상법을 병행한다고 하자. 

 

4 념처를 놓고 예를 들어보자. 

자신의 발에 초점을 맞추었다. 

처음에는 그것이 자신의 발이라고 여기고 대한다. 

이것은 일반적인 욕계의 상황과 큰 차이가 없다. 

다만 욕계에서 산만하게 일으키던 망상분별만 제거된 차이가 있다. 

어느 하나에 집중하면 나머지 산란한 망상분별은 부수적으로 제거된다. 

 

그 상태에서 마음 속으로 발속의 뼈를 관한다고 하자. 

일반적으로 X-RAY 투시안이 없다. 

그래서 뼈를 관하고자 한다고 해서 뼈가 보일리는 없다. 

그래도 발을 대하면서 발 속의 뼈를 보고자 노력한다고 하자. 

이제 그의 마음에 뼈에 대한 관념이 떠올른다고 하자. 

 

그렇게 되면 이 상태의 성격은 색계의 상태가 된다. 

 

즉 욕계에서 손가락으로 영희라고 일정부분을 가리키는 망집상태에서 벗어난 것이다. 

그 상황에서 이렇게 상을 취하는 현상이 남아 있는 부분은 없게 된다. 

 

초점을 맞추고 집중시킨 부분에서도 감각현실과 관념내용이 분리된 상태가 된다. 

다만 색계 정려 상황에서는 초점을 맞춘다는 활동은 계속 이어진다. 

 

이후 감각현실 일정부분에 초점을 맞추는 활동까지 제거된다고 하자. 

그 상태에서 감각현실이 무엇인가를 다시 검토해본다고 하자. 

 

처음 눈을 떠 일정 부분에 초점을 맞춘 상황을 놓고 비교해보자. 

그 부분이 영희라고 여겼다고 하자. 

 

그런데 초점을 맞추지 않은 부분이 있었다. 

그 부분은 무엇이라고 할 것인가가 처음 문제다. 

감각은 되지만 무엇인지 알지 못하는 부분이다. 

 

이제 눈을 떠 대하면서 하늘을 본다고 하자. 

중간에 아무 것도 파악되지 않는 부분이 있다. 

이른바 허공이다. 

그 부분에 초점을 맞출 때 그런 부분은 허공이라고 한다. 

 

이 세 가지를 놓고 서로의 성격을 비교해 보아야 한다. 

 

그러나 여하튼 이런 이론적 내용은 자신이 직접 정려 수행을 하면서 

자신이 경험하는 마음안 상태와 상응시켜가며 이해해가야 한다. 

즉 맵핑문제를 잘 검토 해야 한다. 

즉 경전이나 논서에서 표현하는 내용과 자신이 마음에서 겪는 각 내용을 서로 잘 대응시켜 나갈 필요가 있다. 

 

그러기 위해서 우선 이론적으로 내용을 검토한 이후에는 

직접 숨을 세면서 마음을 하나의 대상에 집중시킨 다음 정려 수행을 닦아 나갈 필요가 있다. 

이 정려 수행이 거두는 효과가 대단히 많다. 

그래서 다양한 표현이 또 이에 대해 제시된다. 

지관, 정려, 사마타, 비발사나, 사마파티, 사마히타, 삼매 등등이 이와 관련된다. 

 

또 정려 수행을 하면 분노라는 독이 우선 제거된다. 

또한 계율도 자연히 구족될 수 있다. 

무언가를 하지 말라는 내용을 정려수행과 병행시키기 곤란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정려 수행은 색계 하늘이나 무색계 하늘에 태어나게 하는 원인행도 된다. 

다만 중생제도를 위한 수행자는 이렇게 되면 오히려 곤란하다. 

그래서 방편상 그렇게 될 수 있다해도 다시 생사고통을 받는 중생이 처한 욕계로 방향을 잡아야 한다. 

 

정려 수행을 정진하여 생사과정에서 이후 색계 무색계천등에 태어나게 된다고 하자. 

그러면 수명이 대단히 긴 하늘 중생이 된다. 겁이란 시간 단위로 그 수명을 헤아리게 된다. 

그래서 그 수행자 개인으로 보면 다행일 수도 있다. 

생사현실에서 생사고통을 극심하게 받게 되는 3 악도가 문제된다.

이 3 악도는 욕계 안에만 있다. 

그래서 이 3 악도를 임시적으로 벗어나는 방편도 된다. 

그러나 그렇게 되면 욕계에 남은 중생제도가 곤란해진다. 

 

어떤 이가 잠을 잔다고 하자. 

이 경우 다음날이 휴일이라고 가정해보자. 

그러면 다음날 몇시에 일어나 무엇을 해야 한다는 의식이 없이 잠에 들게 된다. 

그러면 다음날 아주 편하게 자고 일어날 수는 있다. 

그런데 다음날이 휴일이 아니어서 어딘가에 나가서 일을 해야 한다고 가정해보자. 

그러면 잠 들기 전에 미리 내일 일어날 시간을 확인하고 잠에 들게 된다. 

그러면 다음날 그 시각 즈음에 일어나 잘 활동할 수 있게 된다. 

 

정려 수행도 사정이 같다. 

색계나 무색계 정려 수행을 깊이 들면 욕계현실과 분리된다. 

예를 들어 정려 수행을 깊게 들면 옆에서 천둥 벼락이 치고 소떼가 다 죽어도 관계없게 된다. 

또 머리 위에 까치가 날라와 집을 짓고 살아도 관계없게 된다. 

그런데 욕계내 중생을 제도할 수행자가 이런 상태가 되면 곤란하다. 

 

수행자가 이런 수행을 닦은 후 활동할 세계는 욕계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욕계에서 자비 희사의 마음으로 생사고통을 받는 중생을 상대해 제도해 나가야 한다. 

그래서 욕계 중생과 눈높이를 맞추어 임해야 한다. 

그리고 욕계내에서 중생을 제도할 방편을 무량하게 함께 닦아야 한다. 

그래서 마냥 색계와 무색계에 머무르게 되면 곤란하다. 

그래서 색계에서 무색계로 진입할 단계에서는 자비희사의 4 무량심을 주제로 집중해 정려를 닦아야 한다. 

그래야 그런 문제를 예방할 수 있다. 

 

정려 수행은 오늘날 의학계에서 행하는 마취와 성격이 비슷하다. 

마취 상태에서 수술을 잘 마치면 이후 깨어날 때 회복이 쉽다. 

그러나 수술이 잘못 되면 깨어나기도 힘들게 된다. 

그렇지만, 어느 경우나 마취 상태만 놓고 보면 별 차이는 없다. 

욕계에서 정려 수행에 들어 색계 무색계로 진입한다고 하는 경우도 마찬가지다. 
본래 욕계에서 문제삼는 내용은 일체가 망상분별이고 엉터리다. 

그렇더 해도 수행자는 정려 수행을 마치고 욕계로 되돌아와야 한다. 

중생제도를 위해서도 그렇다.

또 욕계에서 생사고통을 벗어나기 위해 필요한 다른 수행을 위해서도 그렇다.

그런 사정으로 정려 수행도 이런 욕계사정을 미리 고려해야 한다. 

그래서 중간에 자비희사의 4 무량심을 닦는 것이 요구된다. 

그리고 중생제도를 위한 수행자는 정려 수행을 통해 그 결과까지 증득하면 곤란하다. 

욕계 내 중생제도가 1겁 이후로 미뤄진다고 가정해보자. 

그 만큼 욕계 내 중생이 겪어야 할 고통이 증폭되게끔 된다. 

따라서 이런 사정을 미리 잘 헤아려 정려 수행에 임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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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pzw1263

◈Lab value 불기2565/02/21


○ 2020_0606_181012_can_bw17.jpg



○ [pt op tr] 예술작품 사진 공양, 나무불, 나무법, 나무승 John Singer Sargent-venetian-doorway.jpg!H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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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aldives ,Addu City


○ [pt op tr] 아름다운 풍경사진 공양, 나무불, 나무법, 나무승 With the image 'Google Earth & Map data: Google, DigitalGlobe'




Description English: Equatorial Convention Center, Addu City, Maldives, where SAARC summit will be held on 2011 Date 29 October 2011 Source https://www.maldivestoday.com Author maldives today
Permission & Licensing : Wikipedia


○ 음악공양, 나무불, 나무법, 나무승 mus0fl--Pierre Groscolas - Ophelie.lrc

Pierre Groscolas - Ophelie


♥단상♥갓난아이에게 할퀴면 아이보다 어른이 잘못이다. 

수행은 일반 생사현실에서 행한다.
일반 생사현실은 망집에 바탕해서 진행된다.
그래서 수행자는 이 생사현실을 바탕으로 수행해가야 한다.

수행자 입장에서는 생사현실이란 비정상적인 병적 상태와 같다.
그래서 수행을 통해 치유하고 벗어나야 한다.
그런데 생사현실 측면을 99% 기준으로 붙잡고 살피면 오히려 수행자가 이상하다.

그래서 어떤 측면이 보다 더 신뢰할 내용인가가 문제된다.

앞에 영희가 사과를 들고 서 있다.
이런 경우에 그 상황에 영희가 사과를 들고 서 있다고 여긴다고 하자.
이렇게 임하면 그는 생사현실 내에서 적어도 정상적이다.
그러나 수행 측면에서 보면 그는 망집을 일으켜 전도된 상태다.
그래서 이 상태에서 빨리 벗어나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그에 바탕해 업을 행하다가 극심한 생사고통을 장구하게 겪게 된다.
그런 생사고통을 직접 당장 겪게 된 상태에 처한후 이를 벗어나려면 늦다.
그리고 이를 예방하고 벗어나는 것이 수행의 목표다.

그래서 매 현실 단면마다 입장이 달라진다.
수행자가 목표로 하는 측면을 99% 를 붙잡고 대한다고 하자.
그러면 앞 경우에서부터 판단을 달리 해야 한다.

수행자 입장에서는 앞 상황을 다음과 같이 관해야 한다.
이는 자신이 망상을 일으켜서 지금 영희가 사과를 들고 있다고 여기게 된 것이다.
그래서 일반의 입장과 수행자의 두 입장은 서로 엇갈린다.
그래서 이 가운데 무엇이 옳은 내용인지를 먼저 잘 판단해 내야 한다.

그리고 그런 바탕에서 수행을 해나가야 한다.
그렇지만 여전히 생사현실에서는 대부분 망집 상태에 처한 이를 상대하게끔 된다.
그래서 또 다시 주의를 해야 한다.
자칫 잘못하면 수행자가 취하는 기준을 일반인에게 요구하기 쉽다.

그러나 수행자가 놓인 사정이 그렇지 못하다.
거의 대부분 99% 가 망집 상태에 놓여 있다.
그래서 이 상태를 전제로 해서 생사현실에 임해야 한다.
다만 그 상태가 바람직한 것은 아니다.
그렇다해도 수행자는 망집 상태에 놓인 일반적인 경우를 비난하면 안 된다.
그런 생사현실에서 벗어나도록 점차적으로 이끌어야 한다.

현실은 침대에 누어 꾸는 바다나 황금꿈의 상황과 같다. 
꿈의 측면을 99% 붙잡는다고 하자.
그러면 꿈에서 본 바다나 황금이 실답게 여겨진다.
그리고 그런 내용은 침대에도 그대로 있어야 할 듯 하다. 
그러나 침대의 측면을 99% 붙잡는다고 하자. 
그러면 꿈에서 본 바다나 황금은 실답지 않다. 
단지 꿈에서만 생생하게 얻는 내용일 뿐이다. 

현실 상황은 본 바탕과의 관계에서 꿈의 비유와 같다. 
그러나 현실은 또 꿈은 아니다. 
다만 꿈과 성격이 같을 뿐이다. 
그래서 생사현실 내용은 수많은 주체가 일정 시기와 상황에서 일정 조건에 따라
무량하게 반복해 엇비슷한 내용을 생생하게 얻게 된다. 
이런 특성 때문에 생사현실은 꿈과 달리 대단히 실답게 여기고 대하게 된다. 
그리고 그런 바탕에서 한번 행한 업은 무량겁을 두고 그 과보를 받게 된다. 

따라서 수행자는 생사현실에서 겪는 극심한 고통은 실상의 측면을 취해 이를 극복한다. 
비록 그것이 아무리 생생하고 명료해도 본 바탕에서 얻을 수 없음을 관한다. 
그래서 그것을 평안하게 참고 받아들여야 한다. 
상을 취하지 않고 임해야 그런 안인을 성취할 수 있다. 

한편 수행자는 생사현실 안에서 중생을 제도할 무량한 복덕과 지혜를 갖추어야 한다. 
이는 생사현실에서 현상이 나타나는 인과에 의존해야 한다. 
그래서 이 두 측면을 모두 골고루 갖추어야 한다. 

따라서 본래 중생을 얻을 수 없는 가운데 무량한 중생을 제도해야 한다. 
또한 상에 머물지 않고 보시를 행해야 한다. 
금강경에서 제시하는 이 두 내용은 이 두 측면을 모두 함께 사용한 것이다. 
이 두 측면을 엇갈려 사용하면 대단히 곤란하다. 
또는 이 가운데 한 측면만 취해도 곤란하다. 

그러면 생사현실에서 극심한 고통을 겪거나, 
아니면 생사현실에서 무량한 선법을 구족 성취하지 못하게 된다. 

생사현실에서 자신이라고 여기고 대하는 내용도 사정이 같다. 
망집에 바탕하면 그런 내용을 평소 자신이라고 여기고 임하게 된다. 
그리고 그런 내용이 손상되고 없어지면 모든 것이 끝이라고 여기기 쉽다. 
그러나 그것은 그런 내용을 자신이라고 여기게 한 마음의 기제 때문이다. 
그리고 그 기제는 그와 관계없이 이어지게 된다. 

그리고 평소 자신이라고 여긴 부분은 그에 바탕해 자신이 매순간 걸치는 옷과 같다고 여겨야 한다. 
명확히 보면 그런 부분을 자신으로 여기는 판단은 망상분별이다. 
그런 망상분별을 제거해야 한다. 
설령 그렇다고 해도 그 부분이 사라지는 것도 아니다. 

이는 비유하면 마치 남의 지갑이나 길가의 벽돌을 자신으로 잘못 여기는 상황과 같다. 
그런 망상분별을 제거해도 그 지갑이나 벽돌은 당장 영향받지 않는다. 
다만 그런 지갑이나 벽돌을 자신으로 잘못 여긴 망상분별만 제거된다. 
그리고 그런 망상분별에 바탕해 행하던 업만 중단되게 된다. 
그리고 그로 인해 장차 자신으로 여기게 되는 부분도 점차 영향을 받게 된다. 
생사현실에서 자신으로 여기고 대하는 내용은 그 사정이 이와 같다. 
그렇지만, 그런 가운데 자신으로 여기고 대하는 내용이 축생이나 아귀 지옥 중생의 형태로 점차 변하게 되어서도 곤란하다. 

그래서 이런 측면에서도 평소 자신으로 여긴 부분은 좋아져야 한다. 
한마디로 3 악도를 벗어나 인간과 하늘 세계를 오가는 상태는 되어야 한다. 
그래야 중생의 제도를 원만히 성취해갈 수 있다. 
이것이 두 측면을 골고루 바람직한 형태로 취해 수행에 임하는 방식이다. 




○ 음악공양, 나무불, 나무법, 나무승 mus0fl--Marie Laforet - Mon Village Au Fond De L'eau.lrc


다만 생사현실에서 일반적으로 망집에 바탕해 생활해간다.
수행자가 이들을 대할 때 그 상태를 그대로 두고 점차 망집을 벗어나도록 이끌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일반적으로 문제상황에 처하게끔 된다. 

우선 일반적 입장에서 수행자 입장을 쉽게 이해하지 못한다. 
그렇다고 일반적 입장을 자꾸 비난하거나 분노로 대하면 중생과 거리가 멀어지게 된다. 
결국 중생을 제도하기 힘들게 된다. 
그래서 중생의 망집 상태를 문제로 보더라도 과도하게 탓하면 곤란하다. 




문서정보 ori https://buddhism0077.blogspot.com/2021/02/2565-02-21-k0969-016.html#1263
sfed--사리불아비담론_K0969_T1548.txt ☞제16권
sfd8--불교단상_2565_02.txt ☞◆vpzw1263
불기2565-02-21
θ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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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생의 근기와 부처님의 교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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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교(機敎)
기원(祈願)

길상천(吉祥天)
나반존자(那畔尊者)
낙바라밀(樂波羅蜜)
난타(難陀)
남돈북점(南頓北漸)




ॐ मणि पद्मे 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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