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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처님께서 최승(最勝)보살에게 말씀하셨다. “보살마하살은 쇄신정(碎身定)에 들어가나니, 보살이 이 정(定)에 들게 되면 열 가지 여여하게 머무름을 두루 갖추느니라. 무엇을 열 가지라 하는가? 온갖 세계에서 여여하게 머무르며, 온갖 방향에서 여여하게 머무르며, 온갖 겁수에서 여여하게 머무르며, 중생에서 여여하게 머무르며, 모든 법에서 여여하게 머무르며, 온갖 보살행에서 여여하게 머무르며, 온갖 보살의 가운데서 여여하게 머무르며, 온갖 정(定) 가운데서 여여하게 머무르며, 모든 부처님 세존에게서 여여하게 머무르며, 온갖 지계(地界)에서 여여하게 머무느니라..만일 어떤 보살이 이 쇄신정을 얻으면 곧 이 열 가지 여여하게 머무름[如如住]을 획득하느니라. 어떻게 보살이 중생의 쇄신정에 들어가는가?
이에 최승아, 보살마하살이 쇄신정에 들어갈 때에는 먼저 몸 안의 정(定)에 들어가서 몸 바깥을 좇아 일어나고 몸 바깥의 정에 들어가서 몸 안을 좇아 일어나며, 동일한 몸[一身]의 정에 들어가서 다른 몸[異身]을 좇아 일어나고 다른 몸의 정에 들어가서 동일한 몸을 좇아 일어나며, 사람 몸의 정에 들어가서 야차 몸을 좇아 일어나고 야차 몸의 정에 들어가서 용의 몸을 좇아 일어나며, 용의 몸의 정에 들어가서 아수라의 몸을 좇아 일어나고 아수라의 몸의 정에 들어가서 천의 몸[天身]을 좇아 일어나니라. 천의 몸을 좇아 정에 들어가서 범천 몸을 좇아 일어나고 범천의 몸의 정에 들어가서 욕계의 몸[欲界身]의 정을 좇아 일어나며, 천도의 몸[天道身]의 정에 들어가서 지옥의 몸[地獄身]의 정을 좇아 일어나고 지옥의 몸의 정에 들어가서 인도의 몸[人道身]의 정을 좇아 일어나며, 인도의 몸의 정에 들어가서 그 밖의 도[餘道]를 좇아 일어나고 천 몸[千身]의 정에 들어가서 한 몸[一身]을 좇아 일어나며, 한 몸의 정에 들어가서 천 몸을 좇아 일어나고 억 몸의 정에 들어가서 한 몸을 좇아 일어나나니라. 한 몸의 정에 들어가서 억 몸을 좇아 일어나며, 염부리(閻浮里) 땅의 형상 있는[有形] 중생의 정에 들어가서 구야니(瞿耶尼)의 형상 있는 중생의 정을 좇아 일어나며, 구야니의 형상 있는 중생의 정에 들어가서 울단왈(鬱旦曰)의 형상 있는 중생의 정을 좇아 일어나고 울단왈의 형상 있는 중생의 정에 들어가서 불우체(弗于逮)의 형상 있는 중생의 정을 좇아 일어나며, 동방(東方)의 형상 있는 중생의 정에 들어가서 삼방(三方)의 형상 있는 중생의 정을 좇아 일어나고 삼방의 형상 있는 중생의 정에 들어가서 사방의 형상 있는 중생의 정을 좇아 일어나나니라. 사방의 형상 있는 중생의 정에 들어가서 온갖 바다의 목숨과 몸[命形]이 있는 것의 정을 좇아 일어나고 모든 바다의 목숨과 몸이 있는 것의 정에 들어가서 해신의 몸[海神身]의 정을 좇아 일어나며, 해신의 몸 정에 들어가서 바다의 수종(水種)의 정을 좇아 일어나고 바다의 수종의 정에 들어가서 바다의 지종(地種)의 정을 좇아 일어나며, 바다의 지종의 정으로 들어가서 바다의 화종(火種)의 정을 좇아 일어나고 바다의 화종의 정에 들어가서 바다의 풍종(風種)의 정을 좇아 일어나며, 바다의 풍종의 정에 들어가서 4대의 정을 좇아 일어나고 4대의 정에 들어가서 무유법(無有法)의 정을 좇아 일어나나니라. 무유법의 정에 들어가서 수미산(須彌山)의 정을 좇아 일어나고 수미산의 정에 들어가서 칠보산(七寶山)의 정을 좇아 일어나며, 칠보산의 정에 들어가서 온갖 풀과 수목과 산천과 석벽(石壁)의 정을 좇아 일어나고 온갖 풀ㆍ수목ㆍ산천ㆍ석벽의 정에 들어가서 정결한 향과 꽃과 온갖 보배 그릇의 정을 좇아 일어나며, 정결한 향과 꽃과 온갖 보배 그릇의 정에 들어가서 사방(四方)과 상방(上方)ㆍ하방(下方)에 있는 온갖 중생의 탈것과 의복과 음식거리의 정을 좇아 일어나고 온갖 사방ㆍ상방ㆍ하방에 있는 온갖 중생의 탈 것ㆍ의복ㆍ음식 거리의 정에 들어가서 삼천세계 국토의 형상 있는 중생의 몸의 정을 좇아 일어나나니라. 삼천세계 국토의 형상 있는 중생의 정에 들어가서 삼천대천세계 국토의 형상 있는 중생의 정을 좇아 일어나고 삼천대천의 형상 있는 중생의 정에 들어가서 억백천과 삼천대천 국토의 형상 있는 중생의 정을 좇아 일어나며, 억백천 삼천대천의 세계의 형상 있는 중생의 정에 들어가서 한없는 세계의 형상이 있는 중생의 정을 좇아 일어나고 한없는 세계의 형상 있는 중생의 정에 들어가서 수없는 세계의 형상 있는 중생의 정을 좇아 일어나느니라. 수없는 세계의 형상 있는 중생의 정에 들어가서 한량없는 부처님 세계의 형상 있는 중생의 정을 좇아 일어나고 한량없는 부처님 세계의 형상 있는 중생의 정에 들어가서 그지없는 부처님 국토의 형상 있는 중생의 정을 좇아 일어나며, 그지없는 부처님 세계의 형상 있는 중생의 정에 들어가서 일컬을 수 없는[無稱] 부처님 세계의 형상 있는 중생의 정을 좇아 일어나고 일컬을 수 없는 부처님 세계의 형상 있는 중생의 정에 들어가서 불가사의한 부처님 세계의 형상 있는 중생의 정을 좇아 일어나나니라. 불가사의한 부처님 세계의 형상 있는 중생의 정에 들어가서 한없고 한량없고 불가사의한 부처님 세계의 형상 있는 중생의 정을 좇아 일어나며, 지극히 먼 형상 있는 중생의 정에 들어가서 지극히 먼 중생의 정을 좇아 일어나고 지극히 가까운 중생의 정에 들어가서 지극히 가까운 중생의 정을 좇아 일어나며, 안입(眼入)의 정에 들어가서 안입의 정을 좇아 일어나고 이입(耳入)의 정에 들어가서 이입의 정을 좇아 일어나며, 안입의 정에 들어가고 비입(鼻入)의 정에 들어가서 설입(舌入)의 정을 좇아 일어나며, 설입의 정에 들어가서 비입의 정을 좇아 일어나며, 신입(身入)의 정에 들어가서 의입(意入)의 정을 좇아 일어나나니라. 자입(自入)의 정에 들어가서 자입의 정을 좇아 일어나며 타입(他入)의 정에 들어가서 타입의 정을 좇아 일어나며, 자입의 정에 들어가고 온갖 형상 있는 중생의 정에 들어가서 아승기(阿僧祇) 세계와 다시 한없고 수없고 헤아릴 수도 없는 세계의 정을 좇아 일어나고 아승기 세계와 다시 한없고 수없고 헤아릴 수도 없는 세계의 정에 들어가서 온갖 형상이 있는 중생의 정을 좇아 일어나며, 성문의 정에 들어가서 벽지불의 정을 좇아 일어나고 벽지불의 정에 들어가서 성문의 정을 좋아 일어나나니라. 자기 몸[自身]의 정에 들어가서 부처님 몸[佛身]의 정을 좇아 일어나고 부처님 몸의 정에 들어가서 자기 몸의 정을 좇아 일어나며, 한 생각[一念]의 정에 들어가서 백억 겁(劫)의 정을 좇아 일어나고 백억 겁의 정에 들어가서 한 생각의 정을 좇아 일어나며, 현재의 정에 들어가서 현재의 정을 좇아 일어나고 과거의 정에 들어가서 과거의 정을 좇아 일어나며 미래의 정에 들어가서 다시 삼세의 정에 들어가나니, 이와 같이 보살은 들어가는 정(定)에 따라 좇아 일어나는 바를 따르며 허공계의 정에 들어가서 허공계로부터 일어나느니라. 최승아, 알아야 하느니라. 마치 어떤 사람이 귀신에게 홀리면 그 귀신이 몸을 가지고 나아가는 바에 따르나 자신은 깨달아 알지 못하며, 그러나 그 귀신은 그 사람의 몸에 의탁했지만 스스로 형상을 나타내지 않는 것처럼 보살마하살도 역시 그와 같아서 뜻은 안의 정[內定]에 들어가서 바깥 정[外定]을 좇아 일어나고 바깥 정에 들어가서 안의 정을 좇아 일어나느니라. 마치 어떤 사람이 몸이 죽어서 신식(神識)이 떠날 때에는 의지하는 바도 없고 또한 동요하지도 않으며 몸도 또한 신식이 있는 데를 알지 못하고 신식은 스스로 형(形)을 받아도 옛 몸이 지금 어디에 있는가를 모르는 것과 같으니라. 최승아, 알아야 하느니라. 보살마하살도 그와 같아서 처음 유의 정[有定]에 들어가서 분별하고 평등하게 관하며 다시 공정(空定)에 들어가서 영원히 존재[有]를 보지 못하나니 앞에 생겼다가 나중에 소멸하는 것을 각각 서로 알지 못하느니라. 보살은 또 마치 마음이 자재하여 저 언덕에 이른[度無極] 사람을 관찰할 때에 하나의 몸이 능히 변화하여 여러 몸이 되고 여러 몸이 도로 합쳐 하나가 되며 식(識)은 하나의 몸을 좇지 않나니 없어져서 즉시 여러 몸을 내고 또한 다시 식은 여러 몸을 좇아 얻지 못하고 하나의 몸 가운데 없어지고 생기느니라. 하나를 좇지 않고 여러 많음에 이르며 여러 많음을 좇지 않고 하나에 이르느니라. 보살마하살도 그와 같아서 한 몸의 정(定)에 들어가 여러 많은 정에서 일어나고 여러 많은 정에 들어가 한 몸의 정에서 일어나느니라. 비유하면 마치 땅의 경계[地界]가 윤택하게 되는 것은 물로써 근본을 삼되 생장하는 만물은 저마다 동일하지 않으며, 사람의 세계도 귀신의 세계도 모두 다 똑같이 윤택하게 하되 그 만물은 역시 스스로 ‘나는 생장하고 있다’는 것을 알지 못하고 물도 역시 ‘나는 적셔 주고 있다’는 것을 알지 못하는 것처럼 보살마하살도 그와 같아서 이 삼매를 얻고서는 하나가 수없는 것이 되고 수없는 것이 하나가 되지만 수없는 것이 하나가 되는 까닭을 알지 못하고, 하나가 또한 수없는 것이 되는 까닭을 알지 못하느니라. 이것이 바로 최승아, 보살마하살과 온갖 중생의 쇄신(碎身)삼매이니, 제8의 보살이 수행할 바이니라. 이 삼매에 머무르면 보살은 곧 부처님의 열 가지 명호를 얻고 열 가지 공덕을 더하여 칭찬을 받느니라. 어떤 것이 열 가지인가? 이른바 여래라 하나니 여여(如如)하게 여(如)를 수행함이며, 불(佛)이라 하나니 모든 법을 다 깨달아 알고 이 언덕으로부터 저 언덕에 이르게 됨이며, 최승(最勝)이라 하나니 중생들이 존경하고 귀히 여겨 공양을 올리기 때문이며, 일체지라 하나니 온갖 지혜에서 공덕이 구족하기 때문이며, 무진(無盡)이라 하나니 온갖 중생들을 위하여 가려 주고 보호하기 때문이며 길잡이[導師]라 하나니 중생의 무리로 하여금 그 바른 길을 보게 하기 때문이며,
무등륜(無等倫)이라 하나니 온갖 중생에 대한 법계와 온갖 지혜[衆智]가 모두 구족하기 때문이며, 묘광(妙光)이라 하나니 온갖 중생들이 그 조명(照明)을 받기 때문이며, 10력(力)이라 하나니 원한 바를 이룩하고 법지(法智)를 분별하여 집착이 없어 더럽힐 수 없기 때문이며, 일체현(一切現)이라 하나니 온갖 법으로 하여금 동일하고 자재하여 저 언덕에 이르게 하기 때문이니라. 최승아, 이것이 바로 보살마하살이 부처님의 열 가지 명호와 열 가지 칭찬 받는 공덕을 얻는 것이니 이것은 모두 삼매의 위신력(威神力)과 은혜이니라. 보살마하살이 이 삼매에 머무르면 열 가지의 광명을 얻어 스스로 밝게 비추느니라. 어떤 것을 열 가지라 하는가? 모든 부처님의 광명으로 스스로를 밝게 비추며 온갖 세계를 태우거나[乘] 태우지 않음이 없는 도량 광명으로 스스로 휘감싸며, 모든 중생에게 가르쳐 경계하는[敎誡] 광명으로써 향훈(香熏)을 삼으며 4무소외의 한량없는 광명이며, 법계 처소의 법계의 광명이며, 벗어남[出要]의 광명이며, 온갖 욕심이 없고 애욕을 없애는 광명이며, 온갖 중생을 교화하고 감동시키는 광명이며, 모든 부처님의 의지함도 없고 물들거나 집착이 없는 광명이며, 선사(善思)의 광명으로 평등하고 바르게 깨닫고 저 언덕을 건너가는 광명이며, 온갖 법성이 으레 그러한 진제(眞際)의 광명이며, 연설하여 번뇌의 우환[結患]을 없애는 위없는 광명이니, 만일 보살마하살이 이 삼매에 머무르면 이 열 가지의 광명을 얻어 스스로 환히 비추느니라. 보살은 다시 열 가지 자취가 없는 행을 잘 배워야 하느니라. 어떤 것이 열 가지인가? 뜻으로 생각하는 바를 몸으로 행한 자취가 없으며, 입으로 행한 자취가 없으며, 뜻으로 행한 자취가 없으며, 공(空)에 처소를 세우려고 하며, 행이 없는 데서 행을 이루려 하며 유위의 법[有爲法]을 행하지 않으며, 법을 무너뜨리지 않으며, 지혜 업[智業]을 헐지 않고 무생지(無生智)를 익히며, 배울 것이 없는 법[不學法]을 배워 지변지(智辯智)에 상응하며, 형상이 없는 지혜의 의미(義味)가 청정한 것이니라. 보살마하살이 이 삼매에 머무르면 약간의 차별이 있어서 연(緣)의 집착을 능히 끊고 하나로부터 약간 종류의 정(定)에 들어가며, 혹은 일으키기도 하고 혹은 사유하기도 하되 등분에 등분하나 또한 등분이 되지 않으며, 작은 것을 좇아 큰 것에 이르고 큰것을 좇아 작은 것에 이르며, 좁은 것을 좇아 넓은 데에 이르고 넓은 것을 좇아 좁은 데에 이르며, 구부러진 것을 펴지게 하고 펴진 것을 구부러지게 하며, 몸이 없는 데서 몸이 있게 하고 몸이 있는 데서 몸이 없게 하며, 혹은 일어날 데서 혹은 정(定)에 들기도 하고 혹은 정에 들었다가 혹은 일어나기도 하며, 때[垢]가 있는 데서 때가 없게 하고 때가 없는 데서 때가 있게 하느니라. 이 삼매를 깨달으면 온갖 경계를 파괴할 수 있는 것이 마치 사람이 굽지 않은 병을 파괴하듯 하며, 마치 큰 주문의 술법으로 방호하여 여러 가지의 물질[色]과 여러 가지의 소리를 징험하며, 혹은 주문으로 금하기도 하고 혹은 요술[幻]의 소리로 부리기도 하며, 주술을 하는 이는 귀신을 부리고 요술쟁이는 겉으로 드러난 모양을 부리되 요술의 물질을 보는 이는 안식(眼識)으로 섭취(攝取)하는 바요 요술의 소리를 듣는 이는 이식(耳識)으로 섭취하는 바며, 요술의 냄새를 맡은 이는 비식(鼻識)으로 섭취하는 바요 요술로 짓는 맛은 설식(舌識)으로 섭취하는 바이니라. 요술로 짓는 바의 모든 형질은 신식(身識)으로 섭취하는 바요 큰 요술을 부리면서 위의 것을 돌려 아래로 하고 아래의 것을 돌리어 위로 하며, 짓는 것을 좇아 찾는다 해도 헤아릴 수 없는 것은 의식(意識)으로 섭취하는 바와 같나니, 이와 같아서 보살마하살이 이 삼매에 머무르면 혹은 흩어버리기도 하고 혹은 모으기도 하면서 여러 가지 변화를 나타내느니라. 최승아, 알아야 하느니라. 이제 비유를 인용하니 안목 있는 선비는 이것만으로도 통달하느니라. 비유하면 마치 여러 하늘과 아수라들이 함께 싸울 적에 모든 하늘들이 이기고 아수라들은 지게 되는데 이때에 아수라는 스스로 진 것을 알고 곧 꾀를 내어 변화로 목욕하는 못을 만들고 갖가지 연꽃이 나게 하고는, 아수라의 키가 7천 유순(由旬)이지만 도리어 그의 몸을 숨기되 여러 병사들을 후퇴시키어 그 연꽃의 줄기나 마디나 실 구멍 속에 넣어 감추면 모든 하늘들이 찾아도 보지 못하는 것과 같으니라. 아수라는 요술하는 법을 잘 알기 때문이니라. 보살마하살도 그와 같아서 온갖 지혜의 요술을 성취하여서 1지(地)로부터 1지에 이르기까지 그 지혜가 소모되거나 줄어듦이 없고 그 여러 보살은 서로서로 보살이란 이들을 불러서 이르게 하되 모두가 지혜의 요술법으로써 그들을 섭취하나니, 이와 같이 보살은 전신정(全身定)에 들어가서 산법정(散法定)을 나타내느니라. 비유하면 마치 어떤 사람이 만일 사람의 세계[人界]에 있거나 귀신의 세계[鬼界]에 있거나 간에 종자를 그 땅에 심고 때때로 물을 주어 크게 자라나게 할 때에 그 종자는 땅에 들어갔지만 그 열매는 위에서 생기게 되는데 그 앞의 종자는 나중의 종자가 아니요 나중의 종자도 앞의 종자가 아니되 앞의 종자는 나중의 종자를 여의지 않고 뒤의 종자도 앞의 종자를 여의지 않은 것처럼 보살 대사(大士)도 역시 그와 같아서 홀로 존재하는 형상을 받되 이 삼매에 머무르면 곧 능히 존재를 여의어 존재에 처하지 않느니라. 또한 마치 남녀가 교회(交會)하되 남자의 맑은 것과 여자의 흐린 것에 식(識)이 그 안에 처하게 되니 어머니의 태(胎) 안에서 점차로 열 달 동안을 경과하면서 전생의 행이 청정하고 복과 서원이 뒤를 따라 형체와 뼈마디가 차츰차츰 충족하여지며 6근(根)이 성취되고 종성(種性)이 고르게 바루어지되 식(識)과 6근은 그 근원이 저마다 다르니, 6근은 존재를 받는 모양으로 행(行)의 선악에 따라 와서 형상을 받느니라. 본래 나는[生] 것을 찾아보면 마치 요술과 같고 허깨비와 같은 것처럼 보살 대사도 역시 그와 같아서 뛰어나게 해탈하는 마음으로 부모를 삼고 지혜의 식(識)으로 생(生)을 받으며, 무유정(無有定)으로 들어가서 유정(有定)을 좇아 일어나고, 혹은 유정에 들어가서 자리 없는[無地] 데에서 머무르기도 하며, 곧 구름을 타고 허공에서 천둥 번개를 치면서 때에 따라 비를 내리어 윤택하게 하는 바가 많느니라. 그러나 그 용궁(龍宮)은 허공에 있지도 않고 용이 사는 곳도 아니니라. 허공 가운데서 여러 가지 변화를 나타내어 혹은 드날리기도 하고 혹은 따르기도 하면서 중생의 무리로 하여금 우러러 살펴보게 하되 집은 땅에 의지하고 비는 위에서 내리거늘 변하고 바뀌는 법이 어찌 그리도 기이하겠느냐? 보살 대사도 역시 그와 같아서 이 삼매와 허깨비의 법에 머물러 모양이 없는 정[無相定]에 들어가 모양이 있는[有相] 데서 일어나고 모양이 있는 정에 들어가 모양이 없는 데서 일어나느니라. 그러하느니라. 최승아, 보살이 이 삼매에 머무르면 허공이 땅이 되게 하고 땅이 허공이 되게 하는 것도 또한 어려움이 없나니, 마치 천상의 수정광전(水精光殿)은 온갖 보배로 이루어졌는데 만일 그 대자재범천(大自在梵天)이 이 전각에 오를 때에 눈을 들어서 천 세계ㆍ십천 세계ㆍ백천 세계ㆍ삼천대천세계를 자세히 보면 그 안에 있는 천궁ㆍ용궁ㆍ야차ㆍ건달바ㆍ아수라ㆍ가루라ㆍ긴나라[旃陁羅]ㆍ마후라가ㆍ인비인 등과 3악취(惡趣)에 이르기까지며, 수미산ㆍ철위산(鐵圍山)ㆍ대철위산ㆍ흑산(黑山)ㆍ대흑산과 칠보산이며, 강물ㆍ하천ㆍ바다의 근원ㆍ성곽ㆍ촌락과 산천ㆍ초목ㆍ약초ㆍ꽃의 열매며, 곱고 추하고 맑고 흐린 것과 삼천대천의 있는 온갖 형질과 허공계의 미세한 형상에 이르기까지 범천은 그 궁전에서 모두 멀리 보는 것과 같으니라. 광명과 광명이 서로 비추되 또한 조그마한 가림도 없나니 마치 여기에 있는 인간의 의복과 장신구가 횃대에 걸려 있는 것과 같고 또한 마치 밝은 거울에서 그 얼굴 모습을 보는 것처럼 그 천궁에서도 역시 그와 같아서 앉고 일어나고 가고 오고 마시고 먹고 잠을 자는 것이 모두 다 눈앞에 있되 마치 손바닥의 구슬 보듯 하느니라. 보살마하살도 그와 같아서 온갖 중생의 쇄신정(碎身定)에 머무르면 모든 삼매에서 자재함을 얻나니, 부처님의 자재한 정[自在定]과 중생을 교화하는 자재한 정과 모든 법에 노니는 자재한 정과 행을 성취하는 자재한 정과 뛰어난 해탈을 완전히 갖추는 자재한 정과 모든 정수(正受)에서의 자재한 정과 들고 나고 앉고 일어나는 자재한 정과 모든 지혜를 얻는 자재한 정과 손가락을 튀기는 잠깐 동안으로 한 겁(劫)을 삼는 자재한 정을 얻게 되느니라. 이것이 바로 보살마하살이 이 삼매에 머무르면 평등하고 바르게 깨닫는[等正覺] 열 가지 자재한 정으로 스스로 즐기는 것이니라. 보살마하살에게는 위엄과 두려움이 없음을 나타내는 열 가지 일이 있느니라. 어떤 것이 열 가지인가? 부처님의 위엄이 빛나서 허공계보다 뛰어나고 정진을 무너뜨리지 않으면 모든 파괴할 법에 대하여 도무극 얻는 것을 나타내며, 보살은 행과 큰서원이 두려움이 없어 여래께서 즐거이 노니시는 입의 도무극을 나타내며, 세계가 청정하게 허망한 때[虛垢]를 밝혀 세계를 환히 빛나게 함을 나타내며, 중생에게 드러나 있는 불가사의함을 나타내며, 모든 보살들은 끊어지지 않는 경법(經法)을 나타내며, 부처님 국토에 이르러서 공양올리고 예배하고 섬기는 것을 나타내며, 지혜의 업과 행의 근본은 불가사의한 까닭을 나타내며, 삼매를 분별하여 두려움 없음을 나타내며, 미묘한 정(定)에 들어가 나아갈 바를 알고 보살의 법도로써 중생을 제도하고 해탈함을 나타내며, 청정한 부처님 국토에서 보살의 서원한 법을 끊지 않고 스스로 밝게 비추고 또한 두려움 없음을 나타내는 것이니라. 보살마하살은 세속에 처하여 있으면서 부처님의 형상을 나타내되 다시 두려운 바 없으며 법륜을 굴리되 교화를 받게 하는 까닭을 나타내며, 모든 여래의 선근의 근본과 불승(佛乘)에 서 있으면 모두 성취하게 됨을 나타내고 뜻의 위엄이 만족하면 도무극에 이르느니라. 또 보살마하살은 불기법인(不起法忍)을 사유하되 낱낱이 수없고 한없는 억백천 겁 동안에 수행한 법을 환히 통달하여 모두 다 앞에 나타나 있게 하며, 법이 거룩하게 빛나고 활활 타듯 하는 도의 가르침[道敎]을 나타내느니라. 또 보살마하살은 낮과 밤ㆍ해와 달ㆍ철[時節]과 해[年歲]를 모두 다 계산하여 알면서 보살은 마음을 쓰되 손가락을 튀기는 잠깐 동안에 쓴 등지(等智)로 삼세의 일을 알고 어긋남이 없음을 분명히 알면서 그 두려움 없음을 나타내느니라. 최승아, 이것이 바로 보살마하살이 삼매에 머무르면 곧 모든 도무극을 빛내고 열 가지의 두려움 없음을 얻으며, 대중 가운데 있으면서 정정수(定正受)에 들어가 몸을 부수는 것이 마치 티끌과 같은 선권방편을 능히 나타내나니 제8의 보살이 수행할 바이니라.”
16. 신입품(身入品)
이때에 세존께서 최승보살에게 말씀하셨다. “또 보살마하살은 도리어 자기의 몸을 관하고 몸의 지[身持]와 몸의 입[身入]을 모두 다 분별하되 처소가 없는 줄 분명히 아느니라. 이때에 보살이 몸의 입ㆍ지의 법계정의(法界定意)에 들어가면 모든 정(定) 가운데서 가장 자재하게 되나니, 몸의 모든 털구멍의 낱낱 털구멍마다 법계정의삼매에 들어가서 자재함을 얻느니라. 모든 법계에서 요술같은 법[幻法]을 나타내 보이고 전세(前世)와 후세(後世)가 있음을 알고 세상의 법을 분별하고 세계의 억백천의 일을 분명히 알고 수없고 한없는 아승기겁의 모든 부처님 세계의 안에 있는 좋고 나쁜 일을 모두 다 통달하여 알며 등정각의 권속이 성취함을 관하고 청정하거나 청정하지 않은 데서도 역시 모두 평등하여, 선법(善法)을 끊지 않고 대승이 손상되지 않으며 마음과 뜻이 견고하여 다시는 이동하지 않느니라. 저 한 겁ㆍ백 겁ㆍ백천 겁ㆍ억 겁ㆍ백천억 겁의 한량없는 아승기는 헤아릴 수 없어서 산가지로써 계산할 바도 아니요 뜻으로 헤아릴 바도 아니니, 이와 같은 겁수 동안의 모든 부처님 세계에서 정수삼매에 들어가 다시 그 안에서부터 일어나며 이 세간의 정에 들어가서 저 세간의 정을 좇아 일어나며, 그 세계에 노닐면서 곧 거기 중생의 행을 성숙시키고 법계를 잃지 않고 정법을 체달하며 삼세를 왕래하되 걸리는 바가 없느니라. 설법하고 교화할 때에 한계나 걸림이 있으면 혜안(慧眼)에 귀취(歸趣)하는 쇄입법(碎入法)을 알아 모든 법계에서 자재할 수 있게 하고 괴이정(壞耳定)의 도무극을 구족하여 역시 걸림이 없으며, 비입의 정의[鼻入定意]에 들어가되 선권(善權)을 손상하지 않고 설근의 정의[舌根定意]에 들어가서 맛의 집착한 바를 알며, 쇄신정(碎身定)을 성취하여 왕래하는 데에 장애가 없고, 쇄의정(碎意定)에 들어가서 지식(智識)을 수순하나니, 저 보살마하살은 이와 같은 관(觀)을 짓고 이와 같이 알 것이니라. 이 신입정(身入定)에 머무르면 곧 보살로서의 십천억의 총지를 획득하고 세간에서 법륜을 굴리어 세속을 따라 들어가며, 다시 십천억의 협장(篋藏)의 행(行)을 얻나니 청정하여 더러움이 없으며, 다시 십천억의 근문(根門)을 얻나니 온갖 지혜를 초월하고, 다시 십천억의 신통을 얻나니 두루 돌아다니되 막힘이 없느니라. 다시 십천억의 정(定)을 얻나니 온갖 정(定)을 초월하고, 다시 십천억의 신족을 얻나니 끝없는 허공의 지경까지 노닐고 다니며, 다시 십천억의 힘을 얻나니 모든 여러 가지 행(行)이 점차로 더욱더 늘며, 다시 십천억의 구망(救望)을 얻나니 영원히 여러 가지 생각을 끊으며, 다시 십천억의 멈추는 곳[止處]을 얻나니 있는 바가 없음을 나타내고, 다시 십천억의 위신(威神)과 변화를 얻나니 앞에 나타나 있게 하느니라. 이것이 바로 최승아, 보살마하살은 이 십천억의 행을 얻어서 이지러지거나 손해남이 없는 것이니라. 또 보살은 십천억의 지절(支節)의 영락(瓔珞)을 생각하고 수행하되 스스로 휘감아 싸야 하며, 다시 십천억의 갖추어 중생을 제도할 것을 수행하여야 하며, 다시 십천억의 탈 것[乘]을 수행하여 중생들로 하여금 이 탈 것을 타고 저 언덕에 이를 수 있게 해야 하며, 다시 십천억의 염정삼매(炎定三昧)를 수행하여 세계를 환히 빛내어 어두운 데가 없어야 하며, 다시 십천억의 의변(義辯)을 얻어서 응(應)하거나 응하지 않음이 없으며, 다시 십천억의 큰 서원을 얻어서 와서 보는 이가 있어도 마음이 옮아가거나 동요하지 않으며, 다시 십천억의 믿음과 원(願)을 얻어서 삿되고 뒤바뀐 소견이 없으며, 다시 십천억의 바른 길을 얻어 보살이 왕래하되 두루 돌아다닐 곳에서 그 자취를 청정하게 하며, 다시 십천억의 광명을 얻어서 입[面門]으로부터 나오며, 다시 십천억의 가르침[典訓]을 얻어서 보살의 덕을 드러내며, 다시 십천억의 청정한 근본을 얻어서 도량을 청정하게 하느니라. 최승아, 이것이 바로 보살마하살이 한량없는 공덕으로 써 스스로 휘감아 싸고 도수(道樹)를 장엄하되 본제(本際)를 잃지 않는 것이니 이 모두는 보살이 도(道)에 나아가는 도구[具]이니라. 만일 보살이 이 여러 가지 도구를 성취하면 곧 보살의 지위에 올라서 칭찬을 얻고 덕향(德香)을 풍겨서 사람의 존경을 받으며 행한 바 대중 가운데서 곧 이끗을 얻게 되고 현재 세상의 덕업(德業)이 다함이 없느니라. 만일 어떤 보살이 이 법계의 정의자재삼매(定意自在三昧)에 머무르면 호족(豪族)의 집에 태어나서 비천한 데에 처하지 않고 많은 보살들을 권속으로 삼으며 삼매에 머무른 뒤에는 동방으로 10억 아승기 등의 여래ㆍ지진(至眞)ㆍ등정각을 멀리서 뵈옵고 명호와 성씨와 국토의 크고 작음도 모두 다 분명해지며, 남방ㆍ서방ㆍ북방과 네 간방[四維]과 위아래의 십억 아승기의 모든 부처님 세계의 모든 여래께서 다 그 낱낱의 성씨와 명호를 알게 되고 보살행을 세워 도의 문[道門]을 지시하여 그 보살들로 하여금 부처님 국토를 청정하게 하느니라. 여래의 몸은 한량없는 광명을 놓고 여래의 눈은 불가사의함을 나타내며, 여래의 이통(耳通)도 한량없고 여래의 비통(鼻通)도 갑절 더 헤아릴 수 없으며, 여래의 설통(舌通)도 광대하여 끝이 없고 여래의 심통(心通)도 형관(形觀)이 없는 것이 아니며 여래의 신족은 위없는 법으로 제도하는 바가 한이 없느니라. 여래의 도(道)는 상ㆍ중ㆍ하가 없이 완전히 성취된 까닭이요, 여래의 명칭은 멀리까지 유포된 까닭이며, 여래의 법륜은 언제나 굴리거나 굴리지 않거나 간에 현재 세간에서 굴려지는 까닭이요, 여래를 공경하고 따르는 무리들이 현재 묻고 받고 하기 때문에 여래의 정법은 한량없어서 중도에 끊어짐이 없는 까닭이며, 여래의 선근은 현재에도 찬탄하는 까닭이요, 여래의 행은 두루하여 논(論)하여도 감당해 낼 수 없는 까닭이며, 여래의 종자는 삼세에 성취하였으니 항복받지 않음이 없는 까닭이요, 여래는 온갖 법을 내셔서 어리석은 사람들에게 널리 펴 보이시는 까닭이며, 여래는 법의 처소를 환히 나타내나니 지혜가 밝은 까닭이니라. 최승아, 그러하느니라. 보살마하살은 나타내는 경계가 청정하여 처소를 세우게 되고 부처님의 여러 겹 구름으로 법의 감로를 비처럼 내리며, 온갖 부처님의 경계는 언교가 있음을 보여 모든 부처님의 법을 나타내고, 모든 법성은 요술 같은 모양이요 진실하지 않는 줄 분명히 알며, 일어나는 것이 자연(自然)이요 동요하거나 전환하지 않기 때문에 모든 법의 형상으로 이치를 분별하며 여래의 한량없는 공덕은 완전히 갖추어져서 한도 없고 끝도 없나니, 이것이 바로 보살마하살이 이 삼매에 머물러 노니는 방소마다 걸리는 바가 없는 것이니라. 또 보살이 이 삼매에 머무르면 음(陰)ㆍ지(持)ㆍ입(入)에 노닐되 역시 장애나 폐단이 없고 마음은 요술의 법이 되어 양도 없고 한도 없고 끝도 없는 법을 알아서 모든 보살이 편안히 처하며, 이 정의자재삼매(定意自在三昧)에 머무르면 곧 모든 부처님ㆍ여래ㆍ등정각의 명호와 성씨를 능히 알되 낱낱의 명호는 십억천 아승기 등의 모든 부처님 여래까지 이르고 그 낱낱의 명호는 백천억의 부처님 세계에 이르게 되느니라. 보살의 몸은 모두 그 안에 머물러 편안히 처하되, 한량없는 마음의 생각과 뜻의 생각과 다시 무위의 교묘한 방편으로써 처소에 서게 되느니라. 온갖 법은 또한 망실되지 않나니 도지견(度知見)을 얻기 때문이요, 언제나 지혜 바다[智海]를 친근하나니 현지(現智)를 바라기 때문이다. 머무를 때는 역시 처소가 있으나, 모든 법은 처소가 없음을 나타내 보이느니라. 부처님의 처소를 세우기 위하여 널리 모든 법은 앞뒤가 없음을 보이고 나타내기 때문이며, 근문(根門)은 장애가 없고 지혜의 예리한 법으로 지혜를 잘 이용하되 분별하는 것을 나타내 보이기 때문이며, 위의를 무너뜨리지 않고 모든 경계를 세우기 위하여 오고 감이 없기 때문이요, 지혜의 처소로 청정한 무애지(無碍智)를 나타내 보이기 때문이며, 등정각을 이룬 것을 나타내 보이기 때문이요, 법계를 빛내면서 더하거나 덜함이 없음을 나타내기 때문이니, 이것이 바로 보살마하살이 이 삼매에 머무르되 곧 대승의 자취에 능히 나아가는 것이니라. 보살마하살은 다시 열 가지 나아가는 바다의 문[海門]을 닦아 익히되 만족해 함이 없어야 하느니라. 어떤 것이 열 가지인가? 이른바 부처님의 바다[佛海]는 만족해 함이 없음을 나타내며 사람의 바다[人海]는 움직이거나 움직이지 않거나 교화할 적에 만족해 함이 없으며, 법의 바다[法海]는 더욱더 늘리되 만족해 함이 없으며, 착한 밭의 바다[善田海]는 만족함이 없음을 내되 없는 법에 머무르며, 또한 관행(觀行)과 신족도 없는 공덕의 바다[功德海]에 머물러서 1지(地)로부터 1지에 이르기까지 지혜에 착란이 없기 때문에 마음과 뜻의 바다[心意海]에 머물러서 모두 다 온갖 수행의 여러 가지 마음과 여러 가지 뜻을 깨달아 알고 한량없는 마음은 더함도 있고 덜함도 있음을 알며, 수행하는 바다[修行海]에 머물러서 온갖 서원[衆願]을 완전히 갖추기 때문이며, 큰 서원의 바다[弘誓海]에 머물러서 반드시 마지막의 청정한 벗어남[出要]을 성취해야 하기 때문이니, 이것이 바로 보살마하살이 이 삼매에 머무르면 곧 이 열 가지 나아가는 바다의 문을 얻으나 만족해 함이 없는 것이니 보살 대사(大士)로서 수행할 바이니라. 보살마하살은 다시 열 가지 제일가는 남이 없음[無生]을 사유해야 하느니라. 어떤 것이 열 가지인가? 이른바 중생의 무리를 관찰하는 제일로서 첫 번째 남이 없는 것이요, 하늘의 뛰어난 존귀함[天豪尊]을 관찰하는 것이 제일로서 두 번째 남이 없는 것이며, 맨 위의 범천(梵天)을 관찰하는 것이 제일로서 세 번째 남이 없는 것이요, 세계를 지키는 마음[世護心]은 파괴되지 않는다고 관찰하는 것이 제일로서 네 번째 남이 없는 것이며, 중생에 있으면서 남이 따를 수 없이 뛰어나 짝이 없다고 관찰하는 것이 제일로서 다섯 번째 남이 없는 것이요,
악마들을 항복받아 마음이 안정되고 어지럽지 않다고 관찰하는 것이 제일로서 여섯 번째 남이 없는 것이며, 5취(趣)는 형상이 없다고 관찰하는 것이 제일로서 일곱 번째 남이 없는 것이요, 모든 중생들은 역시 더러움에 물듦이 없다고 관찰하는 것이 제일로서 여덟 번째 남이 없는 것이며, 높고 귀한 모든 부처님 법을 관찰하는 것이 제일로서 아홉 번째 남이 없는 것이요, 자재롭게 벗어나서 밝게 빛난다고 관찰하는 것이 제일로서 열 번째 남이 없는 것이니라. 이것이 바로 보살마하살이 사유해야 할 열 가지 제일가는 남이 없음이니라. 보살은 다시 사유해야 하느니라. 중생계(衆生界)가 나아가 태어나는 바에는 열 가지 일이 있느니라. 어떤 것이 열 가지인가? 이른바 출가(出家)가 견고하여 모든 중생들을 교화하며, 불퇴전에 서서 정진하는 힘을 행하며, 청정하고 집착이 없는 힘으로 더러움에 물듦이 없으며, 온갖 법이 공(空)하기 때문이며, 휴식하는 힘을 성취하여 모든 법이 자재하기 때문이며, 마음으로 굴리거나 굴리지 않는 힘을 성취하여 분별하고 의논하기 때문이며, 저절로 법의 힘을 두루 갖추어서 큰 지혜를 이루기 때문이며, 걸림이 없는 힘[無碍力]을 이루어 마치고 설법하기 때문이며, 두려움이 없는 힘[無畏力]이 성취되면 법을 위하여 처소를 세우기 때문이며, 의단의 힘[意斷力]으로 미지(未知)와 이지(已知)를 성취하며, 지혜가 성취되어도 두 가지의 힘이 없고 생멸이 없기 때문이니 최승아, 이것을 보살마하살이 열 가지의 힘을 사유하는 것이라 하느니라. 가장 큰 힘과 견줄 데 없는 힘과 위도 아니고 아래도 아닌 힘과 한량없는 힘과 기르고 부양하는 힘과 동요하지 않는 힘과 착한 길[善趣]에 나는 힘과 성내지 않는 힘과 지혜가 치성한 힘과 힘쓰고 애쓰면서 행을 쌓는 힘으로 이것이 바로 열 가지 힘이니 마땅히 생각하면서 수행해야 하느니라. 또 보살은 마땅히 열 가지 힘을 잘 사유해야 하느니라. 어떤 것이 열 가지인가? 이른바 공(空)에 잘 들어가는 힘과 잘 청정하게 하는 힘과 잘 미묘하게 하는 힘과 선한 법신[善法身]의 힘과 선한 세간법의 힘과 잘 활활 타는 법의 힘과 선근이 고요하게 되는 힘과 일찍이 없었던 힘과 잘 깨치는 힘과 잘 초월하여 건너는 힘이니, 이것을 보살마하살이 이 열 가지 힘에 머무르면 곧 정의(定意)를 섭지(攝持)할 수 있다고 말하는 것이니라. 보살마하살은 다시 20가지의 힘을 사유하여 정문(定門)에 이르게 되어야 하느니라. 어떤 것이 20가지인가? 이른바 대인(大人)의 힘과 선지식을 친근하는 힘과 평등하고 바르게 깨닫는 마지막의 힘과 본래부터 선근을 닦아 친근(親近)을 얻는 힘과 한량없는 선근으로 향을 쪼이는 힘과 여래의 제도하고 제도하지 않을 수 있는 힘과 마음의 더러운 때[穢垢]를 항복받아 생멸이 없는 힘과 보살의 생각을 더욱더 늘리면서 끊지 않는 힘과 보살을 장엄하여 기쁨을 얻는 힘과 보살의 선(善)을 도와 법을 끊지 않는 힘과 보살의 마음을 제외하고는 연의 집착이 없는 힘[無緣着力]과 보살의 서원이 충만하여 구하는 바가 없는 힘과 보살의 뜻을 이루어 정을 사유하는 힘과 보살의 근성을 얻어 착란이 없는 힘과 법왕(法王)을 세우는 힘과 집착이 없고 한량없는 몸의 힘과 선권방편을 얻은 지혜의 힘과 온갖 법에 대하여 두려움이나 어려움이 없는 힘과 중생의 근본에 서서 새어 없어지지 않는 힘과 모든 중생에서 홀로 걸으며 그들을 번거롭게 하지 않는 힘이니, 이것이 바로 보살마하살로서 이 정(定)에 머무는 것이며, 비로소 있는 바가 없는 힘[無所有力]과 상응하나니 모든 아라한이나 벽지불의 위에 초월하여 이에 보살의 정의 힘[定力]에 들 수 있느니라.”
17. 변재품(辯才品)
그때에 최승보살이 앞으로 나아가 부처님께 아뢰었다. “어떻게 보살은 온갖 덕을 두루 갖추어 중생을 끊겠다는 희망과 모든 것을 배부르게 하고 혐오나 원한이 없게 하나이까?” 부처님께서 최승보살에게 말씀하셨다. “자세히 듣고 자세히 들어서 잘 생각하여라. 이제 너에게 이것을 분별하여 주리라. 보살이 처음 발심(發心)해서부터 부처가 되기에 이르기까지 반드시 청정한 도량을 장엄하여 큰 광명을 놓아 그의 경계에 비추면 어두운 곳에서도 그의 광명을 받으며, 그 광명을 본 이면 마음에 두려움을 품지 않고 어려운 바가 없으며, 마음이 드디어 왕성하여 갑절이나 더 기쁘게 하고 공덕을 더욱 늘려 청정한 행을 여의지 않고 스스로 그의 행을 청정하게 하고 위없는 도를 닦으며, 공덕의 업(業)으로 하여금 다할 수 없고 지혜가 끝이 없게 하여야 하느니라. 보살행의 법은 역시 끝이 없는 행이요, 보살승(菩薩乘)도 역시 밑[底]이 없으며, 보살의 경계는 불가사의하여 이는 아라한이나 벽지불로서 헤아릴 수 있는 바가 아니며, 보살이 제도할 바는 다시 가장자리나 폭이 없고 온갖 덕을 성취하여 다시는 낭떠러지가 없으며, 보살이 청정하게 할 바 큰 서원을 버리지 않고 보살의 출요(出要)는 도의 문[道門]을 가리켜 보이느니라. 보살의 모든 법은 단서를 논하고자 하여도 얻을 수 없으며, 보살마하살은 수없는 겁으로부터 바야흐로 보살을 얻었으니 그런 뒤에야 보살의 도를 이루느니라. 어떤 이가 와서 친근하고 보살을 받들되 더욱더 권하고 일으키어 보살의 덕을 이루어 명칭이 멀리까지 들리게 하고 그 이름을 들은 이가 모두 와서 받들어 섬기고 묵으면서 호위하고 공양올려 후세에서 어질게 돕는 복전이 되게 하느니라. 만일 어떤 중생이 보살을 보면 곧 그를 위하여 위없는 지혜를 설법하고 전에 법을 들은 이면 만족해 함이 없게 하며 널리 지혜의 광명을 펴고 법성을 무너뜨리지 않나니, 그렇게 하는 까닭은 법을 들은 중생이 바른 가르침을 받들고 받아 지혜의 업을 갑절 더하고 바른 교훈을 널리 펴서 모두 없어짐이 없게 하기 때문이니라. 보살마하살이 이 삼매 가운데에 머무르면 곧 모든 선한 공덕을 널리 펼 수 있으며 보살은 한량 없고 수없고 헤아릴 수 없이 넓고 큰 뜻과 낱낱이 베푸는 뜻은 그 앞의 인연에 따르고 삼매의 정(定)에 들어가 다시 그 정을 좇아 일어나며, 스스로 법성의 관(觀)을 살피되 이 삼매로 인하여 삼매의 경계를 알고, 수없는 삼매인 정의관(定意觀)삼매ㆍ광보관(廣普觀)삼매ㆍ무욕관(無欲觀)삼매ㆍ상관(相觀)삼매ㆍ소현관(所現觀)삼매ㆍ위의관(威儀觀)삼매ㆍ의관(猗觀)삼매ㆍ염관(念觀)삼매ㆍ대관(待觀)삼매ㆍ희관(喜觀)삼매ㆍ안은관(安隱觀)삼매ㆍ호관(護觀)삼매ㆍ출요관(出要觀)삼매를 분별하나니, 이미 생긴 것은 버리고 아직 생기지 않은 것도 모두 버리되 선열(禪悅)의 정의(定意)에 상응하나니 비록 선정에서 노닌다 하더라도 역시 선정에 물들지 않느니라. 최승아, 알아야 하느니라. 마치 아뇩달대용왕(阿耨達大龍王)의 궁전 모두가 7보(寶)로 이루어지고 아뇩달샘[阿耨達泉]에서는 4개의 큰 강물이 나오는데 그 물이 4문(門)에서 흘러 넘치는데도 생 모종[生苗]을 상하지 않는 맑은 샘물은 사무쳐서 마치 허공 빛깔과 같으며, 이때에 4개의 강물은 4개의 문으로부터 나와 사방으로 나아가 모두 바다로 돌아가는 것과 같으니라. 그 4개의 강물이란 첫째의 이름은 항가(恒伽)이니 코끼리의 입으로부터 나오고, 둘째의 이름은 사두(私頭)이니 사자의 입으로부터 나오며, 셋째의 이름은 사타(私陀)이니 소의 입으로부터 나오고, 넷째의 이름은 바차(婆叉)이니 말의 입으로부터 나오느니라. 이 4개의 큰 강물은 4개의 입으로부터 나와서 사방으로 나아가 4개의 바다로 돌아가느니라. 항가의 큰 강물은 자거(車璖)의 진짜 보배로 코끼리의 몸이 되어서 그 물을 흘러 나오게 하고, 사두의 큰 강물은 진짜 금강(金剛)의 보배로써 사자의 몸이 되어 그 물을 흘러 나오게 하며, 사타의 큰 강물은 마노(馬瑙) 보배로써 소의 몸이 되어 그 물을 흘러 나오게 하고, 바차의 큰 강물은 푸른 유리(琉璃) 보배로써 말의 몸이 되어 그 물을 흘러 나오게 하나니, 이 네 가지 보배는 모두가 천상의 보배요 인간의 보배는 아니니라. 이 4개의 큰 강물은 처음 흘러 나오는 곳은 각각 너비가 1유순(由旬)이요 흐를 때에는 차례로 고요하여 소리나 메아리가 없으며, 낱낱의 큰 강물은 저마다 오른편으로 신령한 샘[神泉]을 일곱 바퀴를 돌고 모두 바다로 들어가는데 일곱 바퀴를 도는 그 중간은 서로 한 유순씩 떨어졌고 그 사이에는 여러 가지 연꽃이 나 있나니 우발연꽃[優鉢蓮花]과 발두모꽃[鉢頭牟花]과 수건제꽃[須犍提花]과 만원건제꽃[滿願犍提花]이며, 여러 가지가 섞인 보배가 모두 그 안에 나 있느니라. 다시 갖가지 미묘한 향기가 풍기나니 그 빛깔은 향기롭고 아름다우며, 여러 가지 보배는 서로서로 광명을 비추며, 그것을 보는 이들은 만족할 줄 모르고 구경하나니 기이한 보배들은 겉도 보이고 속도 보이되 1유순 안을 보배끼리 서로 비추니 마치 마니주(摩尼珠)가 빛나지 않음이 없는 것과 같고 그 일곱 겹으로 된 안에는 기이한 새들이 지저귀고 화답하며 울면서 서로 함께 즐기고 있느니라. 다시 백 가지 신령한 나무와 약초들이 나 있고 향기로운 바람이 멀리 퍼지나니 그것에 사무치되 사문(沙門)의 경계를 따르며, 그 아뇩달 용궁(龍宮)의 전각들은 동ㆍ서ㆍ남ㆍ북이 각각 50유순씩이요 순전히 7보로써 장식하였으며, 다시 여러 가지 기이한 빛의 마니보가 사이사이 섞였고, 다시 마니보주가 허공에 걸려 있으며, 해ㆍ달과 별이 허공에 줄 지어 늘어서 있고, 우두전단(牛頭栴檀)을 땔감으로 사용하여 공양을 지으며, 궁전 안에는 하루 동안 세 때[三時]에 여러 가지 향기로운 꽃인 우발연꽃과 구모두꽃[拘牟頭花]과 분타리꽃과 수건제꽃과 만원건제꽃이 비처럼 내리며 여러 가지 보배로 궁전이 이루어졌고 광명과 광명이 서로 비추면서 밝음이 서로 이어지느니라. 마치 아뇩달의 샘물이 4개의 큰 강물을 나오게 하고 4개의 입으로부터 흘러 나와 네 바다로 나아가는 것처럼 보살마하살도 역시 그와 같아서 네 가지 변재의 걸림이 없는 강물을 얻어 네 가지 도(道)를 분별하여 지혜 바다[智海]로 돌아가느니라. 마치 저 항가의 강물이 자거의 진보(眞寶)로 이루어져서 코끼리의 입으로부터 나와 바다에 흘러드는 것처럼 보살마하살도 역시 그와 같아서 청백한 법의 입을 좇아 한량없는 뜻을 나오게 하되 모두가 이것은 여래께서 비밀히 간직한 상자[篋]로 깊은 이치를 풀어 드날리며 모두가 모든 법으로 하여금 저마다 이름을 듣고 법의 맛[法味]을 펴 나타나게 하며 지혜의 광명을 훨훨 태워 모두 끝없는 지혜 바다에 몸이 들게 하느니라. 비유하면 마치 저 사두의 큰 강물이 진짜 금강의 보배로써 그 바탕을 이루고 사자의 입으로부터 바다에 흘러드는 것처럼 보살 대사(大士)도 역시 그와 같아서 법변(法辯)을 연출하여 부처님의 금강(金剛)을 부리되 모든 중생들을 보호하고 비추어 밝음을 얻게 하며, 지혜의 금강을 가지고 걸림없는 바다[無碍海]에 들어가게 하느니라. 마치 저 사타의 큰 강물이 마노의 보배로써 이루어지고 소의 입으로부터 나와 바다로 흘러드는 것처럼 보살마하살도 역시 그와 같아서 상응한 변재를 연출하여 의심이나 막힘이 있는 이에게 영원히 망설임이 없게 하고 또한 중생으로 하여금 다툼이 없고 근기와 보응에 따라 이치를 분별하게 하며 중생으로 하여금 순수하게 그 행이 성숙하여 모두 연의 집착이 없는 바다[無緣着海]에 돌아가게 하느니라. 마치 바차의 큰 강물이 푸른 유리로 이루어지고 말의 입으로부터 나와 다 바다에 드는 것처럼 보살마하살도 역시 그와 같아서 다함 없는 변재[無盡辯]를 얻어 모든 법을 사유하고 억백천 겁 동안 그 가운데 나타내 보이되 다함이 없으며, 선한 법[善法]으로 경영하고 보호하여 선도(善道)에 이르고 모든 금계를 지키는 사람으로 하여금 다 부처님 바다로 돌아가서 동일한 맛이 되게 하느니라. 마치 저 4개의 큰 강물이 오른편으로 아뇩달샘을 일곱 바퀴 돌고 사방으로 나아가 네 바다로 돌아가는 것처럼 보살 대사도 역시 그와 같아서 몸의 행[身行]이 성취되면 또한 왼편에 있지 않고 입의 행[口行]이 성취되면 또한 왼편에 있지 않으며 뜻의 행[意行]이 성취되어도 왼편에 있지 않나니, 뜻으로 닦는 바 지혜로 우두머리를 삼느니라. 마치 저 4개의 강물이 사방으로 나아가서 바다로 돌아가는 것처럼 보살 대사도 역시 그와 같아서 네 지혜의 변재를 타고 사방으로 나아가나니, 이에 보살은 모든 부처님께서 계시는 방소를 관하여 받들어 섬기고 예경하며 위의를 잃지 않아야 하느니라. 또 모든 부처님 법의 광명이 빛남을 나타내되 총지의 법을 지니고 망실하지 않게 하여야 하며, 또 모든 지도(智度)를 나타내며, 보살의 온갖 행의 근본을 두루 갖추며 또 대자비를 나타내어 중생에 처해 있으면서 실제로 법륜을 굴리느니라. 마치 저 4개의 강물이 아뇩달을 일곱 바퀴 돌 적에 그 중간에는 여러 가지의 우발연꽃과 구모두꽃과 분타리꽃과 수건제꽃과 만원건제꽃이 피어 있고 그 향기로운 꽃에서는 향기가 사방에 자욱한 것처럼 보살마하살도 그와 같아서 처음 뜻을 내어서부터 부처님이 되기에 이르기까지 그 중간에 아직 가르침을 받지 못한 중생들을 교화하고 인도하며 나아가도록 설법하고 권하여 불퇴전에 이르게 하고 그들을 위하여 바른 법을 연설하되 억백천 겁으로부터 또한 고달파하지 않았으며, 한 사람이라도 제도되지 않았으면 끝내 버리지 않았고 부처님 국토를 청정하게 하되 머물러 있는 땅을 장엄하게 다스리며 사자보정의(師子步定意)삼매에 들어가서 도수(道樹)을 향하여 나아가고 뜻이 금강과 같으니 특별한 어려움이 없느니라. 마치 저 아뇩달샘의 일곱 겹 안에 7보로 된 나무가 나서 스스로 장식하였고 온갖 열매와 향기로운 꽃이 한량없는 것처럼 보살마하살도 그와 같아서 부처님 세계의 청정한 국토를 장엄하고 서른일곱 도수(道樹)의 꽃이 피며 각관(覺觀)과 도의 마음[道心]으로 정법(正法)을 사유하느니라. 마치 저 아뇩달 궁전이 세로와 너비가 50유순이나 청정하여 하자가 없으며, 또한 비바람에 날리는 티끌이나 일어나는 먼지가 없는 것처럼 보살마하살도 다시 그와 같아서 도의 마음이 청정하여 하자가 없고 안으로는 갖가지 선의 근본 공덕을 품으며 한량없는 정의 법문(定意法門)을 완전히 갖추느니라. 마치 아뇩달의 샘이 우두전단과 여러 가지 보배로 담이 둘린 것처럼 보살마하살도 역시 그와 같아서 도의 마음으로 생각하는 바와 십억백천의 지혜와 소견으로 에워싸고 서원한 바가 이지러지지 않고 본래 심통(心通)이 없으며 심통을 이룬 행으로 지혜의 업이 성취되었으니 온갖 선의 근본이 모두 청정하느니라. 마치 아뇩달 궁전 안은 순수하게 진주(眞珠)와 호박(琥珀)으로써 그 땅에 섞었으므로 여러 가지 광명이 나와 빛나지 않음이 없는 것처럼 보살마하살도 그와 같아서 지극히 미묘한 지혜에 들어가서 뜻으로 규도(規度)한 바가 불가사의하고 중생을 돕고 보호하되 근심이 없는 못을 내어 여러 가지 값진 보물과 영락(瓔珞)으로써 스스로 장엄하고 또한 법계의 체성(體性)을 파괴하지 않으며, 모든 여래의 무위(無爲)의 방에 머무르되 뜻이 나아가는 바가 끝내 퇴전(退轉)하지 않느니라. 마치 저 아뇩달용왕이 여러 작은 용[小龍]들과 함께하되 덮어 보호하여 주나니 두려움이 있는 이면 두려운 바가 없게 하느니라. 좌우에 있는 신령한 용은 모두가 위덕이 있어 바다 안의 작은 용왕들이 모두 와서 뵙고 하례하는 것처럼 보살마하살도 역시 그와 같아서 온갖 형상 있는 중생으로서 두려움을 품고 있는 이면 덮고 보호하여 주고 때에 따라 돕고 기르면서 원한이 없게 하며, 지경 안이나 지경 밖이거나 간에 마음이 평등하기 허공과 같으며, 비록 세간에 처한다 하더라도 지혜의 광명을 펴 백성들을 돕고 수호하는 것이 마치 자기 몸과 같이하되 다름이 없느니라 마치 아뇩달샘에서 4개의 강물이 나와 염부지(閻浮地)에 두루하고 굽이쳐 돌아 흘러 바다로 돌아가며, 지나는 처소마다 윤택한 바가 많은 것처럼 보살마하살도 역시 그와 같아서 4지(智)의 바다를 타고 모든 하늘과 사람과 악마며 또는 마천(魔天)ㆍ제석ㆍ범왕의 모든 천인(天人)들과 사람[人]과 사람 아닌[非人] 따위를 싣고는 모두 큰 지혜의 바다에 나아가게 하되 위없는 바르고 참된 도를 일으키고 10력과 두려움 없음과 18불공(不共)의 일이 있게 하며 도수 아래에 이르러서 끝내 퇴전하지 않느니라. 이른바 4지의 강물이란 첫째 원지(願智)의 강물이니 항상 서원으로 중생을 제도하기 때문이요, 또한 안 몸[內身]을 의지하지 않고 집착한 바도 없느니라. 둘째 지도(智度)를 두루 갖춘 끝없는 강물이니 청정한 보살도로 온갖 세계를 섭수하여 오가고 돌아다니되 역시 집착하는 바가 없고 듣는 바가 그지없되 역시 다함이 있지 않으며 삼세의 지혜를 내고 비상(非常)ㆍ고(苦)ㆍ공(空)ㆍ비신(非身)의 뜻을 연출하느니라. 셋째 보살 정의(定意)의 지혜 바다이니 헤아릴 수 없는 정(定)으로써 스스로 장엄하고 시방의 모든 부처님 국토에 가 노닐되 모든 부처님 세존께 예배하고 섬기고 공양올리며 모든 부처님의 근원 없는[無源] 바다를 연출하느니라. 넷째 대자비의 강물이니 중생의 무리로 하여금 자비에 편안히 있으면서 불퇴전에 서게 하고 온갖 고통을 뽑아 주어 뜨거운 고뇌가 없게 하며 다시 수없는 선권방편으로써 그들을 인도하여 앞으로 나아가게 하되 돌아보며 그리는 바가 없게 하고 10력(力)으로 많이 쌓은 진기한 보배로써 반연이나 집착이 있는 이에게 돌아갈 바를 알게 하느니라. 마치 저 아뇩달샘에서 4개의 큰 강물이 나와 모두 다 바다로 돌아가되 끝이 없고 다함이 없고 불가사의한 것처럼 보살마하살도 역시 그와 같아서 뛰어난 큰 서원을 얻어 원지(願智)를 성취하여 보살행을 수행하고 지혜와 관법(觀法) 또한 다할 수 없으며, 위없는 도를 이루어서 의심이나 막힘이 없고 또한 모든 부처님께서 두루 쌓으신 정의[普集定意]를 알며 부처님들이 좋아하는 바로써 즐기느니라. 마치 저 아뇩달샘에서 4개의 큰 강물이 나오되 한 개의 강물에서 5백의 지류로 나뉘어지고 그 낱낱의 5백 지류는 모두 다 바다로 돌아가되 중생을 번거롭게 하지도 않고 상해하는 바도 없는 것처럼 보살마하살도 역시 그와 같아서 크게 서원한 지혜에 의지하여 뜻이 이동하지 않고 두루 구제하는 행을 닦아 자비가 온갖 것에 미치며, 모양[相]이 있는 것과 모양이 없는 것을 나타내어 온갖 법을 깨닫고 걸림이 없는 지혜[無碍智]를 행하되 법의 근본을 끊지 않으며 벗어남[出要]을 가르쳐 주어 걸림이 없는 자리[無碍地]에 머무르게 하느니라. 마치 아뇩달샘의 일곱 겹으로 된 그 중간에 여러 가지 진기한 보물이 나 있고 광명과 광명이 서로 비추어 햇빛과 똑같이 밝으며 비추어진 곳은 백 배(倍), 천 배로 다 그 밝음을 받는지라 눈이 있는 선비는 아뇩달 궁전의 5색(色)이 아름다운 것을 보는 것과 같으며 마치 해가 공중에 있을 적에는 빛을 힘입지 않음이 없는 것과 같으며 각각의 형질에는 스스로 광명이 있어 모습이 쪼그라들게 하지 않고 보배와 보배를 비빌 때에는 약간의 소리가 나되 그 소리는 매우 부드러워 들어도 싫증남이 없는 것처럼 보살마하살도 역시 그와 같아서 이 법계의 자재정의(自在定意)에 머무르면서 낱낱의 털구멍에 수없고 헤아릴 수 없는 억백천의 여래와 부처님 국토의 보살 제자들이 모두 모여 있는 것을 관하면서 법의 맛을 듣고 지니어 잊지 않으며 밤낮 읊고 외우느니라. 마치 저 사람이 깊은 못에 빠졌을 적에 여래의 몸이 두루 모든 세계에 나타나서 구제한 것 같아서 불가사의하고 헤아릴 수 없으며, 다시 가서 모든 부처님 세계를 친근하여 예배하고 섬기고 공양올리면서 현지에서 법의 맛을 들으며 백천 겁 동안 들었던 정의(定意)에 대하여 장점을 보지도 않고 또한 단점도 보지 않으며 큰 것도 보지 않고 다시 작은 것도 보지 않느니라. 보살은 낱낱의 털구멍에서 모든 부처님 여래의 국토와 성곽과 제자들이 좌우에서 모시는 것과 중생들의 많고 적은 것과 여러 가지 형상과 언사(言辭)가 같지 않은 것과 돌아다니고 오가면서 뜻대로 짓는 바를 보되 저마다 뜻하고 원하는 바에 따라 함께 서로 재미있게 즐기며, 또한 좁은 것도 보지 않고 다시 넓은 것도 보지 않나니 그 까닭이 무엇인가? 그 어떤 보살로서 법계의 정의에 들어간 이는 마음이 미세하여 보기도 어렵고 또한 형질이 없으며 그 행적은 지극히 미세하여 비유할 수조차 없고 생기는 것마다 스스로 파괴되고 또한 스스로 알지 못하기 때문이니라. 삼매의 경계는 불가사의한지라 선행(禪行)을 사유하면 노니는 경계도 헤아리거나 말로 할 수 없으며 모든 부처님께서 머무르는 곳도 역시 처소가 없고 드러난 부처님의 위의도 다할 수 없어서 하기도 어렵고 행하기도 어려우며, 끝내 중도에 보살의 행을 버리거나 잃지도 않고 모든 악마의 경계를 초월하나니 견고하지 못한 이는 무위(無爲)에 편안히 있되 청정한 덕을 획득하고 여래의 10력(力)과 대요(大要)를 두루 갖추며 위없고 한이 없는 업(業)을 구하되 바른 법의 깊고 묘한 뜻을 수행하지만 어렵게 여기지 않느니라. 보살마하살도 역시 그와 같아서 그 마음과 뜻에 따라 한 생각 동안에 삼매로부터 일어나 삼세의 일을 알며 곧 선악(善惡)으로 나아간 바를 능히 분별하고 모든 법계에서 자재함을 얻으며, 또한 안[內]을 의지하지도 않고 또 바깥[外]을 의지하지 않으며 그 근본과 지말을 미루어 찾아도 실마리를 보지 못하고 도무지 처소가 없으며 또한 생각[想]을 보지도 않고 그로써 온갖 생각을 제도하며 모든 의변(義辯)을 변론하고 부처님 국토의 지경에 노닐며 예배하고 섬기고 공양올리되 역시 만족해 함이 없느니라. 모든 법계에 들어가 사유하고 분별하되 그 근원을 다하며, 무위(無爲)에 처하지도 않고 가장자리에도 떨어지지 않으며, 온갖 지혜를 닦되 지혜에 집착하지 않고 비록 왕래함이 있어도 돌아다니는 것을 보지 않으며, 지혜는 요술[幻]과 같되 실로 요술조차도 없다고 관하고 중생의 등분(等分)도 역시 그와 같아서 그 근본을 찾으면 제한이 없으며, 모든 세계를 청정하게 하되 청정함이 있음을 보지 않고 중생의 고통은 무엇 때문에 생기고 무엇으로부터 일어나는가를 널리 보이며, 고(苦)ㆍ공(空)ㆍ비신(非身)ㆍ무아(無我)ㆍ인(人)ㆍ수(壽)는 모두 다 아무것도 없고 여러 가지 무상(無常)한 변화를 나타내되 생사에 처하지 않고 열반에 집착하지 않으며, 온갖 겁을 초월하여 모든 죽음의 자리를 건너고 모든 모습[相貌]을 관하되 뜻이 미혹되지 않느니라. 그리고 그 보살은 선권방편으로써 진실로 온갖 지혜를 원만히 하고 마지막까지 청정하여 뜻이 옮아가거나 바뀌지 않으며, 모든 세계와 중생을 관찰하되 가고 돌아옴[往還]이 있는 이와 가고 돌아옴이 없는 이를 다 제도하고, 모든 중생으로 하여금 지혜가 줄어듦이 없게 하며, 온갖 세간과 법계와 위의와 법을 잇고 법을 얻는 데서 차례를 잃지 않느니라. 부처님께서 쌓은 행을 관하되 또 만족해 함이 없고, 모든 부처님의 창고[藏]에 의지하여 큰 진보(珍寶)에 이르게 하며, 모든 삼매와 권현(權現)에서 장애가 없이 그대로 자연히 수호하며, 깊은 법의 구절이 뜻에 막힘이 없고 통한 바의 도교(道敎)는 다할 수 없으며, 변재와 큰 지혜로 자체(字體)를 분별하고 총지를 널리 펴 내어 여러 가지 모든 부처님의 비밀한 창고[秘藏]를 드날리며, 이미 탐욕을 여의면서 또한 중생으로 하여금 탐욕ㆍ성냄ㆍ어리석음이 없게 하느니라. 보살 대사는 수없는 겁 동안 권방편을 행하되 갖가지의 도(道)를 나타내었고, 무리에 따라 교화하여 해탈을 얻게 하였으며, 모든 법이 자연히 제도되고 해탈함도 자연히 보지 않고 제도되지 못한 이를 제도하기 위하여 큰 자비를 세웠으며, 모든 중생들에 대하여 또한 중생이 있다는 생각을 하지도 않고, 들숨ㆍ날숨을 세되 숨을 내쉴 때에나 들이쉴 때에 모든 세계의 성품은 본래 자연이요 법은 스스로 항상 머무른다[常住]는 것을 분명히 알며, 앞 사람이 행하는 것이나 스스로 식(識)을 일으킨 이에게 안정하지 않다[不定]고 여기지만 동요하거나 말과 법에 내닫는 것을 보지 않느니라. 비록 중생을 교화한다 할지라도 교화함이 있다고 보지 않고 3계장(戒場)을 청정하게 하여 여래의 방에 들어가며, 모든 법에 대한 생각을 일으키되 마음에 두려움이 없고 설법하여 청정하게 법륜을 굴리되 무너뜨릴 수 없으며, 도의 마음이 융성하여 끝내 아라한이나 벽지불의 뜻이 없나니 최승아, 이것이 바로 보살마하살이 이 법계의 자재정의삼매(自在定意三昧)를 얻으면 큰 일[大事]이 더욱더 늘어나 보살의 지위에 오르고 마침내 헛되이 수고하지 않는 것이니라.”
18. 권지품(權智品)
“또 최승아, 보살마하살은 다시 제10 권지(權智)의 정혜삼매(定慧三昧)를 사유하고 수행할 것을 생각해야 하느니라. 어떻게 보살은 제10 권지의 정혜 삼매를 수행해야 하는가? 이에 최승아, 보살마하살에겐 삼매가 있나니 이름은 무량정의(無量定意)이니라. 보살이 이 삼매에 머무르면 한량없는 몸의 행[身行]을 관하여 알고 한량없는 입의 행[口行]을 관하여 알며, 한량없는 뜻의 행[意行]을 관하여 알고 한량없는 부처님 세계를 관하여 알고 가서는 장엄하며, 한량없는 중생을 지혜로써 가서 항복받는 것을 관하여 알며, 한량없는 교화받을 중생의 지혜 업이 성취됨을 관하여 알며, 한량없는 큰 광명을 놓을 것을 관하여 알고 아직 제도되지 못한 이를 접(接)하며, 한량없는 대인(大人)의 거룩한 몸매의 광명을 놓되 비추지 않는 바가 없음을 관하여 알며, 한량없는 바른 법륜을 굴리되 모든 하늘과 세간 사람과 악마며 또는 마천(魔天)ㆍ범왕ㆍ제석ㆍ사천왕으로서는 굴릴 수 없고 혼자만이 능히 굴릴 수 있음을 관하여 알며, 한량없는 보살들이 모든 부처님 세계에 노닐되 모든 중생들의 길잡이[導師]가 되어 줌을 관하여 아느니라. 비록 부처님의 힘을 얻었으나 그 힘에 의지하지 않고, 스스로 몸과 뜻을 놓아버렸으나 놓아버린 바가 없는 것과 같으며, 부처님의 지혜를 획득했으나 그 지혜에 의지하지 않고, 부처님의 일으킴으로써 그들을 일으키며, 부처님의 신족을 지니면서 한량없는 경계를 제도하고 부처님의 청정함으로써 온갖 행을 청정하게 하며, 부처님의 행하는 바로써 그 행이 초월하고 부처님의 헤아리는 바로써 모든 헤아릴 바를 뛰어나며, 부처님의 분신의 정[奮迅定]으로써 겁약하지 않고 부처님의 청정함을 얻음으로써 불사(佛事)를 행하느니라. 보살마하살이 이 삼매에 머무르고 나면 두루 일체지를 관하고 일체지를 관함으로써 다시 일체지의 업(業)을 관하며, 이미 지혜 업을 관하고서 곧 능히 닦아 익히고 지혜를 능히 닦음으로써 곧 지혜의 가르침을 받으며, 이미 지혜의 가르침을 받고는 미묘한 지혜[妙智]를 사유하고 이미 미묘한 지혜를 사유하고는 곧 지혜의 연(緣)을 구하며, 이미 지혜의 연을 일으키고는 곧 해탈하는 지혜를 얻고 해탈을 얻음으로써 곧 해탈을 남김 없이 얻으며, 남김 없이 얻음으로써 곧 법과 율에 상응하느니라. 위없는 바른 요목[正要]은 보살행을 자라게 하고 보살의 업을 이루며, 보살의 뜻에 나아가고 보살로서의 고통을 참으며 보살의 악(惡)에서 물러나고 보살의 창고[藏]에 들어가며, 보살의 광명을 붙잡고 보살의 어두움을 없애며, 보살의 지위에 머물러 보살의 몸매[相]를 나타내며, 보살의 귀머거리됨을 던져버리고 보살의 음성을 청정하게 하는 것이니라. 보살은 이것을 듣고도 동요하지 않으며 다시 두려움을 품지도 않고 또한 물러나지도 않으며, 마음으로 싫증을 내지도 않고 이익이 있다고도 생각하지 않으며, 또한 버리거나 여의지도 않고 또한 의심이 있지도 않으며, 또한 중간에 끊지도 않고 또한 보살의 듣고 보는[聞見] 데에도 의지하지 않느니라. 그렇게 되는 까닭은 보살마하살은 모든 중생에 있으면서 무리에 따라 들어가기 때문이니 법칙(法則)을 관찰하여 큰 서원의 마음을 이루고 그 중생들에게 모범이 되어 주며, 대승의 법에 나아가 부처님의 강해(江海)에 들어가고 곧장 나아갈 데에 이르러 흔적을 잃지 않느니라. 보살마하살은 언제나 세 가지 크고 넓은 서원을 사유해야 하나니, 큰 서원의 마음을 지녀서 중생을 인도하고 이 언덕에서 저 언덕까지 이르게 하느니라. 무엇을 세 가지의 크고 넓은 서원이라 하는가? 첫째는 증상(增上)의 큰 서원이요, 둘째는 증중(增中)의 큰 서원이며, 셋째는 증하(增下)의 큰 서원이라 이름하느니라. 또 보살에게는 다시 세 가지의 큰 서원이 있느니라. 무엇을 세 가지라 하는가? 이른바 첫째는 중상(中上)이요, 둘째는 중중(中中)이며, 셋째는 중하(中下)라 이름하나니 이것이 바로 세 가지 큰 서원이니라. 또 보살에게 다시 세 가지 큰 서원이 있느니라. 무엇을 세 가지라 하는가? 이른바 첫째는 하상(下上)이요, 둘째는 하중(下中)이며, 셋째는 하하(下下)라 이름하나니 이것이 바로 세 가지 큰 서원이니라. 최승아, 알아야 하느니라. 보살마하살로서 이 제10 권지(權智)의 정혜삼매를 얻은 이는 이에 이 제일 증상(增上)의 크고 넓은 서원의 마음을 능히 체득하여 중생을 길러 부양하고 부처님 국토를 청정하게 하며, 권도[權]를 지니어 지혜를 행하고 애욕의 속박을 여의며, 잘 배워서 보살의 한 모양[一相]에 깊이 들어가고 모든 모양은 또한 모양이 없음을 이해하며, 보살의 허깨비 법을 환히 잘 알고 중생이 뜻을 세워서 견고한 데에 있게 하며 베푸는 마음[施心]을 뜻에 매어 두되 다 중생을 위하느니라. 미래와 과거와 현재의 모든 여래ㆍ무소착ㆍ등정각께서는 큰 자비를 행하여 두루 온갖 것을 덮어 주시되 그 지혜가 없는 이면 그를 위하여 지혜의 광명을 나타내고 눈이 멀고 없는 이면 그를 위하여 눈이 되어 주시며 구호할 이가 없는 이면 그를 위하여 덮어 주시고 보호하시나니, 모든 부처님의 법을 충족시키면서 바라는 바가 있는 중생으로 하여금 법이라는 생각을 제거하게 하느니라. 그렇게 하는 까닭은 마치 장자(長者)가 금ㆍ은의 진기한 보배와 자거ㆍ마노ㆍ진주ㆍ호박 등 천억의 재물을 쌓아 둔 창고 안에 여의명월보주(如意明月寶珠)가 더 있게 되면 이르거나 놓아 둔 데마다 번쩍거리지 않음이 없고 색상(色像)이 제일인 것과 같나니 그 구슬의 성분 자체가 밝은 것이기 때문이니라. 보살도 그와 같아서 마음의 여의주[心意珠]를 얻어서 지혜의 문을 내고 지혜의 광명으로써 두루 비추는 바 있으며, 통달하여 왕래하되 걸리는 것이 없고 이 정의(定意)에 드는 데도 역시 장애가 없느니라. 마치 저 명주(明珠)의 광명이 비추는 바는 스스로 지능(志能)과 본성(本性)을 나타냄이 스스로 그러한지라 제어하고 부리어 그렇지 않게 할 수 없는 것과 같나니, 왜냐하면 체성(體性)이 자연(自然)인지라 그렇지 않을 수 없기 때문이니라. 그러한 것도 또한 그렇지 않고 그렇지 않은 것도 또한 그렇지 않으며 중생의 그러한 것도 보지 않고 중생의 그렇지 않은 것도 보지 않느니라. 최승아, 알아야 하느니라. 중생은 역시 그러한 데서도 벗어나고 또한 그렇지 않은 데서도 벗어나느니라. 어떻게 중생은 또한 그러한 데서도 벗어나고 또한 그렇지 않은 데서도 벗어난다 하는가? 말한 바 중생이 그러한 데서 벗어난다고 함은 5도(道)의 과한(科限)에는 유전(流轉)이 끊이지 않아서 한 몸[一身], 백 몸 혹은 천만의 몸이 되기도 하고 한 겁(劫), 백 겁 혹은 천만 겁 동안 몸을 버리고 몸을 받되 4대를 성취하여 5음을 기르고 자라게 하는 것이니, 이것이 바로 중생은 그러한 데서 벗어난다고 하느니라. 어떻게 중생은 그렇지 않은 데서 벗어난다 하는가? 이에 중생의 체성은 본래부터 공(空)하나 공에는 또한 식(識)이 없고 다시 식이라는 생각[識想]도 없거니와 그때 저 사방에서 4개의 바람[風]이 일어나나니, 첫째 지기(地氣)의 바람이 불어서 공(空)에 이르게 되고, 둘째 수기(水氣)의 바람이 불어서 공에 이르게 되며, 셋째 화기(火氣)의 바람이 불어서 공에 이르게 되고, 넷째 풍기(風氣)이니 곧 공의 바람[空風]이 바로 그것이니라. 여기에 정신[神]이 합치고 식(識)이 걸리어 홀연히 서로 만나면 다섯 가지 법이 서로 섞이고 모여 이에 형체를 이루는 것이니, 하늘을 만나면 하늘이 되고 사람을 만나면 사람이 되어 그 형체의 물든 바에 따라 그 몸을 이루게 되느니라. 가령 지기는 있어도 수ㆍ화ㆍ풍이 없으면 역시 이루어지지 못하고, 가령 수기가 있어도 지ㆍ화ㆍ풍이 없으면 역시 이루어지지 못하며, 가령 화기가 있어도 지ㆍ수ㆍ풍이 없으면 역시 이루어지지 못하고, 가령 풍기가 있어도 지ㆍ수ㆍ화가 없으면 역시 이루어지지 못하며, 가령 신식(神識)이 공(空)에 의지하여 스스로 다스림이 있어도 지ㆍ수ㆍ화ㆍ풍이 없으면 역시 이루어지지 못하느니라.
▸ 보살은 마땅히 신식은 공의 성품[空性]이로되 법계에 섭취된 줄 관해야 하느니라. ◂
식과 4대의 다섯 가지 법이 있어 상응하면 5음의 몸을 이루지만 민첩하고 빠르게 공계(空界)에 나아가며, 식은 스스로 차고 거칠고 껄끄럽고 굳고 딱딱한 것을 깨닫는 것이므로 곧 공을 여읠 줄 알며, 뜻을 오로지하여 사유하되 마음에 공(空)하다는 생각을 기억하여 고요하고 함[爲]이 없으면 곧 스스로 허공 중에서는 이 세상에 와서 무위(無爲)에 들거나 무여열반계[無餘泥洹界]에서 멸도를 취하지 않는다는 것을 깨닫느니라. 만일 그 신식이 느리고 무디고 영리하지 못하여 어둡고 흐리멍텅하여 공을 여읜다는 것을 믿지 않으면 이를테면 자기 몸은 곧 허공이라고 여기면서 그 형상으로 인하여 대상을 받아들여 생하는 문[生門]에 나아가야 하나니 선(善)을 만나면 곧 선하게 되거니와 악(惡)을 만나면 곧 악하게 되느니라. 선을 만난 중생은 선ㆍ악이 있음을 믿으며 금세(今世)와 후세(後世)와 존귀한 이ㆍ비천한 이ㆍ어른과 어린아이를 알고 세간의 괴로운 것을 싫어하게 되어 선을 익히며 게으르지 않고 오래오래 하면 그제야 도(道)를 얻느니라. 악을 만난 신식은 영원히 선을 여의고 악을 행하기를 마음에 달게 여기며, 생사에 유전하여 지옥의 고통을 겪고 식신은 고뇌를 받되 잠시도 멈춰 쉬는 일이 없나니, 그제야 스스로 깨닫고 본래 행한 일이 금률(禁律)에 맞지 않았다는 것을 기억하며 점차로 스스로 고치고 책망하여 악을 버리고 선으로 나아가며, 처음 발심해서부터 여러 겁수를 지나면서 공을 쌓고 덕을 포개어 온갖 행이 갖추어지면 비로소 도(道)를 이루게 되나니, 이것을 바로 중생이 역시 그렇지 않은 데서 벗어난다고 하느니라. 보살마하살은 언제나 사유하되 한 마음으로 그러한 것과 그렇지 않은 것을 관찰해야 하느니라. 어떻게 보살은 그러한 것과 그렇지 않은 것을 관찰하는가? 그러한 것은 세간의 법이요 그렇지 않은 것은 바로 도이며, 그러한 것은 바로 누(累)요 그렇지 않은 것은 집착이 없는 것이며, 그러한 것은 바로 있는[有] 것이요 그렇지 않은 것은 바로 공(空)이며, 그러한 것은 식이 있는[有識] 것이요 그렇지 않은 것은 이미 여읜 것이며, 그러한 것은 이름[名]이 있고 남[生]이 있고 늙음[老]이 있고 병듦[病]이 있고 죽음이 있는 것이요 그렇지 않은 것은 남이 없고[無生] 일어나고 소멸함이 없는 법이며, 또한 유전하여 5도에 내닫지 않는 것이니라. 보살은 생각해야 하느니라. 그러한 것의 유의 법[有法]을 버리고 그렇지 않은 행을 닦으면 온갖 지혜 광명이 걸리는 바가 없으며, 멸하는 자기의 법을 버리고 저절로 일어나지 않고 또한 멸하는 것도 보지 않으며, 시방의 모든 세계를 청정하게 하되 아직 제도되지 못한 이를 제도하며, 비록 친근한 이가 있다 하더라도 또한 친근한 것을 보지도 않고 사람들을 위하여 수고하면서도 괴로움이 있다고 헤아리지 아니하며, 언제나 무거운 짐을 짊어지는 우두머리가 되고, 법 바다[法海]로 끌어들이되 산란이 없는 정(定)을 구하며, 한량없는 값진 보배를 캐서 이르게 하고, 5분법성(分法性)과 공ㆍ무상ㆍ무원과 선정ㆍ해탈ㆍ상호ㆍ신족으로써 보배를 삼아 마음이 당황하지도 않고 또한 두려워하지도 않느니라. 다시 삼매가 있나니 이름은 무위정(無爲定)이니라. 보살마하살로서 이 삼매에 머무는 이는 환히 빛나는 정수(正受)로써 중생의 자취를 청정하게 하고 싫증을 내지 않으면서 모든 중생들에게 법성의 공(空)을 연설하며 공을 아는 중생이라야 때에 깨칠수 있나니 마음을 돌리어 도(道)에 나아가되 마침내 물러나지 않느니라.” 그때에 세존께서 최승보살에게 말씀하셨다. “내가 오늘 이 법계의 자재정의(自在定意)에 머물러 천안(天眼)으로써 위의 허공 끝의 그렇지 않은 중생들이 처한 세계를 관찰하니, 손가락을 튀기는 잠깐 동안에 억백천의 헤아릴 수 없는 중생들이 처음 막 형상을 받아 생하는 문[生門]으로 나아가려 하느니라. 그때에 시방의 수없는 항하의 모래 수만큼 많은 모든 부처님 세존은 모두 화신(化身)으로서 허공계에 머물러 그들을 위하여 4기(氣)와 신식(神識)에 관한 허무(虛無)한 법을 연설하시되 공(空)에 나아가면서 다시 공을 여의고 여읨을 짓는 식(識) 또한 그러하나니 아공(我空)에서 아유(我有)를 헤아리되 영원히 그로써 공을 여의게 하느니라. 만일 그들이 공에 의지하여 식의 형상을 받고 공관(空觀)을 사유한다면 곧 공계(空界)에서 식의 형질을 버리고 남음이 없는[無餘] 경계에 들어 멸도를 취하는 것이므로 이 세간으로 와서 5음의 형상을 받거나 하여 모든 고뇌를 겪지 않느니라. 여래는 권지(權智)로 형상 없는 식(識)을 제도하시며, 허공계에 덕화(德化)를 나타내시되 혹은 모든 부처님의 청정한 국토를 나타내시기도 하고, 혹은 때로는 서 계시면서 현성의 잠잠함[賢聖黙然]을 나타내시기도 하며, 혹은 때로는 거닐며 다니고 읊고 외고 함에 게으르지 않나니, 식이 비록 보이지는 않는다 하더라도 다만 모든 부처님 세존은 위의와 예절은 처음부터 그만두시지 않느니라. 보살은 마땅히 허공이 덮은 그지없는 세계를 관하되 허공은 ‘나는 지금 저 많은 세계 국토를 덮어 주고 있다’라는 생각도 없고 허공은 역시 스스로 생각하기를 ‘지극히 공로가 있다’라고도 하지 않나니, 왜냐하면 허공이 덮는 본래 성품이 스스로 그러하기 때문이니라. 법은 변하거나 바뀌지 않고 저절로 언제나 머물러 있고, 법은 움직이거나 옮아가지 않고 또 약간의 것도 있지 않으며, 나지도 않고 멸하지도 않고 다시는 변하거나 달라지지 않나니, 그렇게 되는 까닭은 허공의 법계는 성품이 스스로 그러하기 때문이니라. 보살은 다시 허공의 신식[虛空神識]을 사유해야 하나니 그 식에는 세 가지 모양이 있느니라. 어떤 것이 세 가지인가? 첫째 나아가는[趣] 것이요, 둘째 뉘우치는[悔] 것이며, 셋째는 또한 나아가지도 않고 또한 뉘우치지도 않는[亦不趣亦不悔] 것이니라. 어떤 것이 허공의 신식의 첫째의 나아가는 것인가? 이른바 첫째의 나아가는 것이라 함은 생하는 문[生門]을 향해 나아가 음(陰)의 종자를 길러 자라게 하여 종류에 따라 신식에 물들어 곧 그 형상을 받는 것이니 보살은 알아야 한다. 허공의 신식은 또한 그 중간에 머무름[中止]이 없어서 신식이 4기(氣)와 합쳐서 와서는 그 중간에 머무르고 중간에 머물러서 형상을 받되 혹은 반 달[半月]을 경과하기도 하고 혹은 한 달을 다 채우기도 하며 혹은 삼ㆍ사ㆍ오ㆍ육ㆍ칠ㆍ팔ㆍ구ㆍ십ㆍ십일ㆍ십이 월(月)을 경과하되 곧 허공에서 중간에 머물러 있다가 5도(道)로 나아가기도 하느니라. 5도 중에 머물러 있을 때는 곧 앞에 나타나 있게 되고 5도 중에 들어가서 머무른 뒤에는 혹은 일ㆍ이ㆍ삼ㆍ사 월에서부터 십이월까지 이르게 되며, 하늘의 변화[天化]로 중간에 머물러 있을 때는 또한 일(日)ㆍ월(月)ㆍ연세(年歲)의 기한은 없고 지옥ㆍ아귀ㆍ축생도 역시 중간에 머물러 있되 저마다 동일하지 않아서 허공의 식 가운데 머물러 있으면서도 담연(澹然)하여 형상도 없고 볼 수도 없나니, 아유안(阿維顔)에 이른 이나 모든 부처님 세존만이 볼 수 있을 뿐이니라. 이것이 바로 보살마하살이 허공 중에 머물러 있다가 생하는 문으로 향해 나아가는 것이니라. 어떤 것을 허공의 신식의 식에는 둘째의 뉘우침이 있는 것이라 하는가? 이른바 둘째의 뉘우친다 함은 4기(氣)와 합침으로써 식이 그 가운데 처할 때에 그 형상 받은 것을 뉘우치고 마음으로 공(空)하다는 생각을 하며, 박연(泊然)히 하는 일 없이 생각이나 집착을 헤아리지 않느니라. 또 모든 부처님 세존은 화불(化佛)의 성품으로써 가르침에 머무르면 즉시 깨치게 되며, 무여열반계에서 반열반하느니라. 최승아, 알아야 하느니라. 모든 부처님 세존은 삼세 가운데서 중생을 가르치시고 경계하여 저 무위의 언덕에 이를 수 있게 하시는 것이 헤아릴 수 없고 한 중생을 위하여도 세상마다 돌아다니시되 애쓰고 고생하며 수없는 방편으로 교화하시어 제도될 수 있게 하나니, 비록 고뇌에 처하게 된다 하더라도 수고롭게 여기지 않고 또한 다시 고달파하거나 싫어하는 마음이 없느니라. 여래가 세간에 출현할 때는 모든 부처님의 몸으로 변화하느니라. 허공계의 신식(神識) 가운데 머물러 지극히 미묘하고 위없는 도의 가르침을 연설하기 위하여 그 가운데 부모에 머물러 신식이 깨치며, 교화하는 법언(法言)을 받으면 곧 그 곳에서 무여열반계에 들어가 반열반하는 것도 헤아릴 수 없고 시방의 모든 부처님 세존께서 제도할 중생보다 더 많아서 비유할 수조차도 없나니, 이것이 바로 보살마하살로서 이 법계의 정의자재삼매에 머무른 이가 곧 방편을 가지고 지혜를 행하되 한량없는 법을 수행하여 보살의 지위에 오르는 것이니라. 어떤 것이 셋째의 허공의 신식이 또한 나아가는 데도 있지 않고 또한 뉘우침도 있지 않은 것인가? 이른바 또한 나아가는 데도 있지 않고 또한 뉘우침도 있지 않다고 함은 허공계의 법성에 식(識)이 그 가운데에 처하고 그 가운데에 머물러 있는 형질은 마치 그림자와 같고 빛과도 같으며, 지극히 작고 지극히 가늘어서 공한 의식[空意識]이라 생각되나 무위의 경계에도 이르지 못하고 물러나 인간의 존재[有]에도 미치지 못하나니, 이것이 바로 보살마하살이 또한 나아가는 데도 있지 않고 또한 뉘우침도 있지 않다고 하느니라.” 그때에 최승보살이 나아가 부처님께 아뢰었다. “세존이시여, 그와 같사옵니다. 세존께서 말씀한 바는 허공의 신식이 허공 가운데 머물러 있을 때 형질이 빛이나 그림자와 같은데 그것은 아유안(阿維顔) 보살이나 모든 부처님 세존만이 볼 수 있을 뿐이라 하셨나이다. 만일 4기(氣)와 신식이 공 가운데 머물러 오고 감이 있게 한다면 그 열반계와 제일의(第一義)는 역시 신식도 있어야 하고 또한 그 가운데 머물러 있겠습니다. 가령 신식도 있고 그 가운데 머물러 있는 것도 있다면 그 열반계와 허공의 신식과 공 가운데 머물러 있는 것에는 어떠한 차별이 있나이까? 가령 차별이 없다면 열반도 없고 열반이 없다면 곧 도과와 삼승의 법도 없으리니, 생사의 법계와 열반계는 곧 차이가 없으므로 열반이 바로 이것은 생사요 생사가 바로 열반이옵니다. 세존이시여, 제가 부처님으로부터 들은 허공의 신식과 허공 가운데 머물러 있다고 하신 데는 갑절 의혹이 더합니다.” 그때에 세존께서 최승보살에게 말씀하셨다. “저 열반의 경계와 첫째가는 이치에는 역시 신식도 있고 또한 그 가운데 머물러 있는 것이 있느니라. 열반과 신식과 그 가운데 머물러 있는 것은 허공의 신식과 그 가운데 머물러 있는 것과는 법의 성품이 저마다 다르나니, 열반의 신식은 박연(泊然)히 움직이지 않고 또한 옮아가거나 바뀌지도 않으며 또한 생하는 문[生門]도 없고 향하여 나아간 데서도 다시는 나고 늙고 병들고 죽는 것이거나 근심 걱정하고 괴로워하는 것도 없으며, 식(識)이 영원히 소멸한다고 말하여도 또한 영원히 소멸하지도 않고 식이 다시 생긴다고 말하여도 역시 다시는 생기지 않거니와 그 가운데 머물러 있다[中止]는 것에서는 영원히 고요한 것을 그 가운데 머물러 있는 것으로 삼느니라.” 부처님께서 최승보살에게 말씀하셨다. “여래가 세간에 출현하되 과거ㆍ미래ㆍ현재의 항하의 모래 수만큼 많은 모든 여래ㆍ등정각께서는 열반을 취하지도 않고 또한 영원히 멸하지도 않나니, 만일 부처님 세존이 열반에 드신다 한다면 곧 바르게 깨달으신 이도 아니요 큰 서원을 갖춘 이도 아니니라.” 부처님께서 최승에게 말씀하셨다. “삼세의 모든 부처님 세존은 명호가 있게 된 이후로부터 나는 아직도 열반에 드신 이가 있는 것을 보지 못하였으며, 아무리 장차 오는 세상에 모든 부처님이 법계에 출현하신다 해도 돌아다니며 머물러 있으면서 남음이 있게 열반하겠거니와 남음이 없는[無餘] 열반의 경계에는 들지 않을 것이니라. 최승아, 알아야 하느니라. 여래의 신식(神識)과 열반의 신식은 곧 차이가 없으나 다만 열반의 신식만은 형상이 없고 그림자도 없고 또한 광명의 모양도 없으며 움직이지 않아 옮아갈 수도 없느니라. 그러나 여래의 신식은 움직이는 것도 있고 옮아가는 것도 있나니 그 신식과 이 신식은 하나이되 다르지 않고 오직 움직임이 있는 것과 움직임이 없는 것에서만이 차이가 있을 뿐이니라. 보살은 마땅히 공(空)을 관하면 공에는 식(識)도 있고 머무르는[止] 것도 있으며 유(有)에도 식이 있고 머무르는 것이 있다고 해야 하느니라. 만일 다시 유의 법[有法]이 열반 밖에 있다 한다면 식도 있고 머무르는 것도 있나니 최승아, 이것이 바로 허공의 신식이요 허공 가운데 머무른 것이라 하겠거니와 열반의 신식과 열반 가운데 머무른 것은 바로 이것을 각각 차별이 있다고 하느니라.”
○ [pt op tr] 꽃 공양, 나무불, 나무법, 나무승 Astilbe_'Opal'_01
Русский: Астильба 'Opal'. Из коллекции Главного ботанического сада РАН, Москва (участок декоративных многолетников). Permission & Licensing : Wikipedia ● [pt op tr] fr
○ [pt op tr] 아름다운 사진 공양, 나무불, 나무법, 나무승 Tolminskimuzej1
요즘 숙왕화님과 다음 생사여행을 열심히 기획 중이다. 물론 숙왕화님이 큰 병에 걸려서기도 하다. 그런데 수행자에게서는 생사는 늘 관심대상이다. 굳이 수행자라고 아니더라도 생사는 주변에서 늘 대하는 일반 현상이다. 그리고 생사에서 자유로운 사람이 드물다.
남의 일인줄만 알고 지내는 이는 철 없는 사람에 해당한다. 그러나 수행자는 또 입장이 다르다.
본래 생사를 얻을 수 없다는 것을 알면서 생사에 들어가 임하는 이중적입장을 취해야 한다.
어느 쪽이나 쉽지 않다. 생사현실 안에서 극심한 생사고통을 겪는 순간이 가장 문제다.
그리고 두번째는 지금 생과 다음 생을 어떤 형태로 이어 갈 것인지 서원의 시나리오를 잘 구성하고 실천하는 문제가 어렵다. 뜻대로 되는 일이 그렇게 많은 것은 아니다.
어떤 학생이 세계 최고 일류대학을 진학하고 싶다고 희망한다고 하자. 그런 희망을 갖는다고 반드시 뜻대로 되는 것은 아니다. 그런데 그런 희망이 있어야 공부의 방향도 정해진다.
그래서 생사여행의 테마를 찾아야 한다.
본인은 숙왕화님과는 사연이 많다. 그래서 다음 생에 어떤 형태로 생사 여행을 할 것인가를 놓고 요즘 열심히 기획 중이다. 일단 남매 형태의 만남은 지양되었다. 그런데 다음 생에 만날 때도 싱겁게 아주 평안하게 만날 것인가. 드라마에 나오는 주인공처럼 아주 극적으로 때로는 긴장감 높고 갈등 구조로 만날 것인가. 이런 섬세한 기획까지도 요구된다.
숙왕화님이 아주 싱겁고 평안한 것이 좋다고 한다. 본인도 그렇다. 드라마의 갈등 구조는 볼 때는 무방하다. 남의 일이어서 그렇다. 톰 크루즈가 빌딩을 날아다니는 상황과 같다. 볼 때는 흥미진진하고 신이 날 수도 있다. 그러나 자신의 일이 되는 경우는 직접 그렇게까지 할 필요가 있을까. 이런 생각을 하게 된다.
○ 테마가 있는 생사여행을 위해 다음 생에 필요한 개인기를 미리 익히자.
테마가 있는 생사여행을 위해서 이번 생의 남은 기간 몇가지를 배워보기로 했다.
다음 생에 아이돌 스타는 아니어도 악기를 몇개 다루면서 좋은 노래 몇 곡은 소화할 수 있는 상태로 활동하고 싶다.
그래서 일단 피아노를 한번 배우기로 했다.
물론 계기가 있다. 숙왕화님이 연구실에 있는 피아노를 자리만 차지한다고 내다 버리려 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갑자기 생각을 하게 되었다. 버리는 김에 본인이 1 곡만 배우고 버리자.
그리고 아무리 불교 공부를 해도 그런 특기 하나는 있어야 할 듯 해서다.
외국어도 필요할 듯 하다.
그래서 영어로 할 수 있는 중요한 한 문장을 외우기로 했다. What is the most important?
그리고 피아노로 곡을 하나 치면서 노래 부르는 것이다.
피아노 배우는 방안을 보니 다양하다. 학원 강의도 있고, 핸드폰 앱도 있고 유튜브 동영상 강의도 있다.
무엇이던 시간과 비용이 들어간다. 시간과 비용대비 효과가 좋은 것은 역시 대면 학원강의인 듯하다.
그러나 코로나로 인해 비대면 방안이 추천된다.
잘 모르면서 먼저 훅 진입하기 전에 이 분야에 먼저 경험한 분들의 후기를 잘 살펴서 읽어보았다.
후기를 자세히 읽다보니, 유튜브 동영상 강의가 가장 적절해 보인다. 그리고 매일 30 분씩 꾸준히 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전한다.
치고 싶은 1곡만 딱 외어서 잘 치는 것이 처음 목표였다.
어릴 때 본인이 기타를 딱 1 곡만 잘 쳤었다. 그런 방안으로 임하려고 했다.
그런데 동영상에서 선생님이 그런 방법은 별로 안 좋다고 말린다.
치고 싶은 곡이 그 때 그 때 바뀐다. 그럴 때 악보만 구하면 피아노를 잘 칠 수 있는 기본기를 익히는 것이 더 낫다. 이렇게 제시한다.
25 이때 대범천왕이 자리에서 일어나 의복을 단정히 하고 합장공경하며 관세음보살께 사루어 말하되, "잘하나이다. 대사(大士)이시여, 제가 옛적부처 무량한 부처님 회상에서 가지가지 법과 가지가지 다라니를 들었으나 일찍이 이와 같은 광대무애대비심다라니신묘장구(廣大無㝵大悲陁羅尼神妙章句)는 설함을 듣지 못하였습니다. 오직 원하옵건대 대사께서는 나를 위하여 널리 이 다라니의 모양을 설해주소서. 나와 모든 대중은 즐겨 듣기를 원하나이다." 관세음보살께서 대범천왕에게 말씀하시되 "너는 방편으로 일체 중생을 이익케 하기 위하여 이와같이 묻는구나. 너는 잘 들어라. 내가 너희들 대중을 위하여 간략하게 말하리라." 관세음보살께서 말씀하시되, "크게 자비로운 마음[大慈悲心]이 다라니의 모양이며, 평등한 마음[平等心]이 이것이며, 생기고 멸함이 없는 마음[無爲心]이 이것이며, 번뇌에 물듦이 없는 마음[無染着心]이 이것이며, 공을 관하는 마음[空觀心]이 이것이며, 공경하는 마음[恭敬心]이 이것이며, 낮추는 마음[卑下心]이 이것이며, 잡되고 어지러움이 없는 마음[無雜亂心]이 이것이며, 번뇌로 괴롭힘과 해침이 없는 마음[無惱害心]이 이것이며, 잘못된 견해에 대한 집착이 없는 마음[無見取心]이 이것이며, 위없이 가장 훌륭한 깨달음의 마음[無上菩提心] 이 이것이다. 이와같은 마음이 곧 다라니의 모양임을 알아야 하리라. 너희들은 마땅히 이것을 의지하여 수행하여야 하리라." 대범천왕이 말씀하되, "저와 대중은 지금에 비로소 이 다라니의 모양을 알았으니 지금부터 받아 지니되, 감히 잊어버리지 아니하겠습니다." ● 마라마라 摩囉摩囉<二十五> ma la ma la
『불설천수천안관세음보살광대원만무애대비심다라니경』
♣0294-001♧
103 로 가남 샤사다 라 路<引>迦喃<引>設娑哆<二合引>囉<一百三>
『성관자재보살일백팔명경』
♣1122-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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