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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진리와실천
불기2561-09-04_대반열반경-K0652-001 본문
『대반열반경』
K0652
T0007
상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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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조자료를 붙여 자유롭게 연구하는 내용을 적는 공간입니다.
대장경 열람은 위 부분을 참조해주십시오.
『대반열반경』
♣0652-001♧
상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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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열반에 대한 잘못된 오해
『대반열반경』을 살핀다.
그런데 열반의 관념을 잘못 오해하는 경우가 많다.
예를 들어 부처님이나 수행자가 열반에 든다고 하자.
그러면 그렇게 '죽어서' 이후에는 '아무 것도 전혀 없게 된다'.
이렇게 잘못 이해하기도 한다.
부처님은 평소 다음을 가르친다.
현실에 생사나 생멸을 얻을 수 없다.
그런 생멸을 문제삼을 주체 역시도 얻을 수 없다.
그렇게 무아 무자성 공에 대해 가르친다.
그런데 부처님의 열반을 놓고
부처님이 죽었다고 잘못 여기는 경우가 많다.
그래서 이에 대해 살펴야 한다.
현실에서 100 % 확실하다고 보는 내용이 있다.
예를 들어 '사람이나 생명은 태어나면 반드시 죽는다'는 믿음이 있다.
생사현실에서 누구나 시간이 가면 늙는다.
그리고 병도 생긴다.
그리고 죽어 사라진다.
물론 자신은 아직 그런 경험을 하지 못했을 수 있다.
그래서 엄격히 말하면 전 생명 가운데
적어도 자신은 그 결과가 확인된 상태는 아직 아니다.
그래서 위 명제는 참이 완전히 입증되지 않은 상태다.
경전에서 부처님도 그런 문제를 제기한다.
나이가 든 왕이 부처님을 찾아와 죽음에 대해서 상담을 한다.
이 때 부처님도 왕을 상대로 그런 질문을 한다.
그리고 부처님이 본 사정이 그렇지 않음을 왕에게 설명해 준다.
『대반열반경』에서 열반을 다룬다.
따라서 관련되므로 여기에 붙여 넣기로 한다.
...
"제가 부처님의 가르침을 받들기 전에
가전연(迦旃延)과 비라지자(毗羅胝子)를 만났는데,
그들은 '이 몸이 죽은 뒤에
아무것도 없는 것[斷滅]을 열반'이라고 하였습니다.
제가 비록 부처님을 만났으나
지금도 오히려 의심을 떨쳐버리지 못하고 있으니,
어떻게 해야 이 의심을 해결하여
불생멸의 이치를 확실하게 증명하겠습니까.
지금 이 대중 가운데
번뇌가 있는 이들도 모두 다 듣고 싶어 합니다."
부처님께서
대왕에게 말씀하셨다.
"네 몸이 현존하니
이제 또 네게 물어보리라.
대왕의 그 육신은
금강처럼 견고하여
영원히 머물러 무너지지 않는다고 생각하는가,
아니면 변하여 무너진다고 생각하는가."
왕이 말했다.
"저는 지금 이 몸이 끝내 변하여 무너진다고 생각합니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대왕이여,
그대는 이전에 몸이 멸한 적이 없는데
어째서 멸할 줄 아는가."
[...]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그대는 지금 스스로 하얀 머리와
쭈그러진 얼굴을 서럽게 여기고 있으며,
그대의 얼굴도 분명 동자 때보다 훨씬 쭈그러졌다.
그러나 그대가 지금 강물을 보는 정기와
예전의 동자 때 강물을 보는 정기에도 따로 동자와 늙은이가 있겠는가."
왕이 말했다.
"그렇지 않습니다. 세존이시여."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대왕이여,
그대의 얼굴은
비록 쭈그러졌을지라도,
이 보는 정기의 성품은
일찍이 쭈그러진 적이 없었느니라.
쭈그러지는 것은 변할지라도
쭈그러지지 않는 것은 변하지 않느니라.
변하는 것은 변하여 없어질지라도
저 변하지 않는 것은 '본래 생멸이 없는데'
어째서 그대는 그 속에
생사를 받아들이면서,
오히려 저 말가리(末伽梨)들의
'이 몸이 죽은 뒤에 아무것도 없다'는 주장을 끌어들이는가."
왕은 이 말씀을 듣고
이 몸이 죽은 뒤에 이 생을 버리고
다음 생에 태어난다는 이치를 확실하게 알고,
대중들과 함께 이전에
들어 본적이 없는 법을 얻고 뛸 듯이 기뻐하였다.◂
[참고] 『대불정여래밀인수증요의제보살만행수능엄경』 K0426_T0945
참고로 위에 나오는 가전연(迦旃延)은
육사외도에 속하는 파쿠다 캇차야나(pakudha kaccāyana)를 의미한다.
파쿠다 캇차야나(pakudha kaccāyana)는 무인무연설(無因無緣說)과
지, 수, 화, 풍, 고통, 쾌락, 영혼 등의 7요소설을 주장하였다.
생명은 불멸이므로 살해죄가 성립하지 않는다고 하는 윤리적 회의론자로 분류된다.
이는 부처님 십대제자 가운데 한 분과 혼동할 수 있다.
부처님 제자 가운데에 논의제일인 가전연(Kātyāyana 가전연자迦旃延子]이 있다.
또 비라지자(毗羅胝子)는 역시 6 사외도 가운데 하나로
산사야비라지자(刪闍耶毘羅胝子) 산자야 벨랏티풋타(sañjaya belaṭṭhiputta)라고 하며
아무것도 단정해서 말할 수 없다는 불가지론 궤변론(詭辯論), 회의설(懷疑說)을 주장했다.
**
본래 생멸을 얻을 수 없다.
부처님은 이런 내용을 제시한다.
그런데 왕이 말하는 이야기는 현실에서 대부분 인정하는 내용이다.
따라서 이 두 내용 사이에
어떤 이의 판단이 옳은가를 잘 생각해보아야 한다.
현실에서 철수가 이쪽으로 숨을 헐떡이며 달려온다고 하자.
분명 그런 내용을 보게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거기에 '오고 감'을 얻을 수 없다고 제시한다.
이 경우도 마찬가지다.
『금강삼매경』에서도 이 문제를 살폈다.
여하튼 이 문제가 불교 경전의 핵심주제다.
그래서 경전을 살필 때마다
위 내용을 되풀이할 필요가 있다.
그러나 여기서는 생략한다.
관련 부분을 미리 잘 참조해야 한다.
그리고 지금 문제삼는 열반의 의미를 잘 이해해야 한다.
특히 부처님이 수행자가 죽음을 맞이하면 반열반에 들었다고 표현한다.
이는 세속인이 이해하는 죽음과 어떤 차이를 갖는가를 잘 이해해야 한다.
최근에 이를 설명하기 위해 그림을 하나 그렸다.
이를 통해 이해하면 조금 사정을 이해하기 쉽다.
현실에서 자신이 몸이라고 여기는 부분이 있다.
이는 자신의 근본정신이 매 순간 의존하고 매순간 갈아 입는 옷과 같다.
또는 매 순간 타고 다니는 자동차와 같다.
이러한 자신의 몸이 나중에는 낡고 허물어진다.
그래서 부처님도 이런 사정을 제시한다.
수행자는 무작무원해탈 삼매를 통해 해탈을 얻는다.
그래서 일반적으로 자신과 자신의 것으로 여기는 것에 상을 취하지 않는다.
그래서 삶에서 그런 망상을 갖지 않는다.
그리고 그런 망상에 집착하지 않는다.
그리고 이에 바탕해 갖는 쓸데없는 희망을 제거한다.
그리고 평소 자신의 몸이라고 여기는 부분이
죽음을 맞이해서 변해가는 모습을 미리 잘 관한다.
그래서 이에 대해서 집착을 제거한다.
그것을 구상관(九想觀)이라고 한다.
사전을 참조해 내용을 붙이면 다음과 같다.
구상관(九想觀).
5욕(欲)의 낙을 탐내어 아름다운 것이라고 즐기는
어지러운 생각[미상-迷想)을 일으키는 이에게,
사람의 더러운 점을 알게 하여 그 욕정을 없애는 관법.
(1) 창상(脹相). 사람의 시체가 부어서 마치 곡식 담긴 자루처럼 팅팅한 모양을 관함.
(2) 괴상(壞想). 시체에 가죽과 살이 문들어지고 오장이 썩는 모양을 관함.
(3) 혈도상(血塗想). 신체의 온몸이 피고름으로 더러워진 모양을 관함.
(4) 농란상(膿爛想). 시체에서 벌레와 고름이 흘러나오고 살이 흩어져 여러 군데에 낭자한 모양을 관함.
(5) 청어상(靑瘀想). 시체가 바람에 쏘이고 비에 씻겨 피고름이 엉켜 푸르퉁퉁한 모양을 관함.
(6) 담상(噉想). 시체가 새ㆍ짐승ㆍ구더기에 파먹히는 모양을 관함.
(7) 산상(散想). 가죽과 살은 없어지고 뼈만 붙어있으면서 머리와 다리가 뒤섞인 모양을 관함.
(8) 골상(骨想). 백골이 낭자한 모습을 관함.
(9) 소상(燒想). 불에 타서 그슬리어 악취가 나고 재와 흙이 되는 모양을 관함
부처님은 이런 내용을 기본적으로 제시한다.
한편, 본래 생멸 생사를 얻을 수 없다고 제시한다.
이 두 내용은 서로 다르다.
그래서 이런 두 내용을 대하면
이 두 내용이 서로 일치하지 않고 모순된다고 이해하기 쉽다.
그래서 어떤 한 내용이 부처님 가르침이면
다른 내용은 부처님 가르침이 아닌 것처럼 여기기 쉽다.
그런 사정으로 다른 내용은 다른 이가 위작한 경전으로도 이해하기 쉽다.
예를 들어 다음 상황을 생각해보자.
대학 수학교수가 유치원생을 상대로 산수 이야기를 한다고 하자.
그런데 나중에 보니 고등학생을 상대로도 수학을 가르친다.
또 대학생에게도 수학관련 내용을 가르친다.
그런데 매번 다른 내용을 다른 방식으로 가르친다.
이 내용을 모두 모아 놓고 대조해 보니
서로 일치하지 않는 부분이 발견될 수 있다.
그래서 이 가운데 하나는 그 대학교수가 가르친 내용이 아닌 것으로 여길 수 있다.
이런 상황과 사정이 비슷하다.
[img2-8] 8pfl--image/8식-8.jpg
위 그림은 이 사정을 설명하기 위해 최근에 그린 그림이다.
그림만으로는 내용을 이해하기 쉽지 않다.
일단 진짜나 실다운 본 바탕이 무언가에 초점을 맞추기로 하자.
한 주체가 각 감관을 통해서 감각현실을 얻는다.
그리고 이에 바탕해 일정한 분별을 일으킨다.
그런데 이들 감각현실과 관념 일체는 본 바탕인 실재의 지위에 있는 내용이 아니다.
따라서 이들은 꿈과 같이. 실답지 않은 내용이다.
현실에서 얻는 내용은
a + b => c 의 연기(인과)관계로 c 의 내용을 얻는다.
그 c 는 앞 부분에는 없는 내용을 그런 관계로 얻은 것이다.
그리고 그런 조건에서만 얻는 것이다. [무상]
따라서 그것은 영원불변한 진짜가 아니다. [무아, 무자성]
그리고 그것은 사정이 그와 같기에 실재의 지위에 있는 내용도 아니다.
또 실재는 그런 것이 아니다. [ 공]
그래서 기본적으로
앞의 그림에서 1,2,3,4,5, 6 등과 같은 정신영역에서 얻는 내용은 다 실답지 않다.
따라서 이에 대한 집착을 하나같이 다 제거해야 한다.
실답지 않기에 이를 완전히 제거한다고 하자.
이 경우 본 바탕인 실재는 이와 무관하게 원 상태와 다름없이 여여하게 있다.
즉 생멸 자체를 떠나 공한 상태로 그대로다.
그리고 그 주체의 근본정신은 다른 정신을 생성하지 않고 원 상태 그래도 있게 된다.
여기에는 현실에서 문제삼는 생멸이나 생사고통을 얻을 수 없다.
그래서 이를 청정한 니르바나의 상태라고 하게 된다.
이를 회신멸지의 상태라고 칭하게 된다.
그리고 기초적으로는 이런 상태를 일단 기본 목표로 한다. [회신멸지]
현실에서는 여러가지 내용을 얻는다.
그런데 이들은 원래의 정신에는 얻어지지 않는 쓸데없는 내용이다.
이는 마음에 잠시 들어와 머물다 사라지는 '손님'과 같은 내용일 뿐이다.
그래서 망상과 번뇌를 일으키는 '티끌'과 같다.
그래서 번뇌를 일으키고 생사 고통을 받게 하는 재료가 된다. [ 객진번뇌 ]
따라서 이들 현실 내용에 그런 평가를 하게 된다.
정려 수행도 이런 번뇌의 제거에 초점을 둔다.
현실에서 마음에 들어와 있는 그런 객진번뇌를 하나하나 제거한다.
그런 가운데 욕계에서 벗어나 색계에 들어간다.
그리고 색계에서도 벗어나 무색계에 들어간다.
그런 가운데 자신과 세계의 본 정체에 대해서도 스스로 확인한다.
그래서 7이나 8 과 같은 정신의 정체도 스스로 파악하기 위해 노력한다.
이런 것을 정려 수행의 목표로 이해할 수 있다.
자신이 현실에서 살아갈 때는
매 순간 감각하고 감각현실을 얻는다.
그리고 이에 바탕해 관념분별을 일으키고 생각하게 된다.
따라서 현실에서는 감각현실과 관념분별을 오히려 기준으로 삼기 쉽다.
그것이 모든 것의 기준이고 표준이 된다고 잘못 여기기 쉽다.
그러나 자신이 메뚜기나 코브라나 고양이 등을 놓고 생각해보자.
그러면 그 사정이 그렇지 않음을 이해할 수 있다.
그런데 알고보면 자신도 그런 상태다.
이것이 처음의 수행목표다.
조금 더 자세히 살피면 점차 열반에 대해 제시하는 내용이 달라진다.
그런데 처음 이런 내용을 제시한 배경 사정이 있다.
현실에서는 감각과 분별내용을 기준으로 삼고 정신없이 살아간다.
그리고 이들 내용을 자신의 마음에 가득 담아 놓고 살아간다.
그리고 거기에 초점을 맞춘다.
그리고 집착하고 묶여 있다.
비유하면 TV 화면에 쓸데없는 드라마 내용만 가득한 상태와 같다.
그래서 일단 이것들은 다 지워야 한다고 제시하게 된다.
그런데 그렇게 수행을 하여 성취한다고 하자.
그 상태에서는 열반에 다음 내용을 덧붙인다.
『금강삼매경』 에서는 열반의 올가미라는 표현으로 제시한다.
각 정신이나 정신안에 들어온 내용에는
처음 문제삼는 그런 문제가 본래 얻어지지 않는다.
본래 사정이 그렇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러나 처음 수행을 하는 상태는
그 사정을 제대로 관하지 못한다.
그리고 망상에 붙잡혀서 묶여 생사고통을 받아나간다.
그래서 위와 같이 내용을 제시하게 된다.
예를 들어 이 상황은 비닐 마술의 상황과 성격이 같다.
두 비닐에 각기 동그라미와 세모를 그려 놓는다고 하자.
그리고 이 두 비닐을 합친다고 하자.
그러면 안이 세모인 도너츠 모양이 나타난다.
그런데 이 도너츠는 어느 비닐에도 없는 내용이다.
그렇지만 그 상황에서는 그런 도너츠가 있다고 여기게 된다.
그런데 그것이 바로 생사고통의 문제와 성격이 같다.
따라서 위와 같이 내용을 제시한다.
위 비유에서 본래 비닐 상태를 놓고 보자.
여기에 그가 문제삼는 그런 도너츠 자체가 얻어지지 않는다.
즉, 그 상황에서 그 각 비닐이나 비닐 안에
그가 있다고 여기는 내용은 얻어지지 않는다.
그래서 없다고 표현해 제시하게 된다.
일반적인 입장에서는 현실에서 그러그러한 형태로
늙고 죽는 현상이 있다고 여긴다.
그리고 그렇게 시체가 썩고 없어진다고 여긴다.
그런데 이 상황에 본래 생멸을 얻을 수 없다.
본래 이 각 내용은 그런 생사고통을 얻을 수 없다.
사정이 그러므로 이들 내용은 본래 다 청정한 니르바나다.
그것이 곧 생사 즉 열반이라는 구절이 의미하는 바다.
그런데 일반적으로 중생들의 상황은 이 사정을 이해하지 못한다. [무명]
그리고 이 내용을 거꾸로 이해한다.
그래서 열반을 대해 생멸 생사현실로 여긴다.
본래 청정한 니르바나다.
그러나 망상분별에 바탕해 거기에 생멸과 생사현상이 있다고 여긴다.
그리고 그에 집착한다.
그리고 온갖 번뇌를 일으키고 업을 행한다.
그로 인해 온갖 생사 고통을 받게 된다.
그런 상태로 묶여 삼계 육도를 헤메 돌아다닌다.
그리고 일반적으로 그런 망집 상태에 있다.
따라서 그것을 벗어나야 한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
이런 가르침들을 차례차례 제시한 것이다.
이 상황에서 각 주체가 집착하는 내용이 있다.
자신이나 자신의 것 등이다.
그런데 그 상황에 그가 집착하는 그런 내용은 어디에서도 얻을 수 없다.
비닐 마술의 상황과 같다.
그럼에도 그는 망집에 바탕해 그런 내용이 그 상황에 있다고 잘못 여긴다.
이 망집을 제거해야 한다.
그런데 이 망집을 제거하면 그는 자신이 집착하는 것이
그로 인해 없어진다고 여긴다. 그래서 또 두려워한다.
그런데 이 상황에서 그가 있다고 여긴 것은 본래 없었다.
그래서 망집을 제거한다고 새삼 있던 것이 없어지는 것은 아니다.
그리고 망집을 일으킨 재료 자체는 이와 관계없이 늘고 주는 것도 아니다.
비닐 마술을 놓고 생각해보자.
그 상황에서 어떤 이가 도너츠를 집착했다고 하자.
그렇게 집착한다고 없던 도너츠가 그 상황에 있게 되는 것은 아니다.
단지 그만 그 망집으로 없는 도너츠를 그 상황에 있다고 잘못 여긴 것 뿐이다.
그런데 그가 이런 분별이 망상분별임을 이해한다고 하자.
그리고 망집을 제거한다고 하자.
그러면 그는 그로 인해 그가 집착하던 도너츠가 없어져 버린 것처럼 여기기 쉽다.
그런데 그 상황에서 본래 그런 도너츠는 없었다.
그리고 도너츠를 보이게 한 세모나 동그라미는 그 상황에도 여전히 그대로 있다.
다만 그런 세모나 동그라미를 도너츠로 여긴 망집만 제거되는 것 뿐이다.
그 상황에서 도너츠는 본래 없었다.
망집을 갖는다고 없던 도너츠가 그로 인해 있게 되는 것도 아니다.
한편 도너츠가 있다는 망집을 제거한다고 하자.
그렇다고 원래 있던 도너츠가 그로 인해 없어지는 것도 아니다.
본래 없던 도너츠가 없음을 있는 그대로 파악하게 되는 것 뿐이다.
그리고 그 상황에서 그런 망집을 일으킨 재료는 또 이와 관계없이 그대로 있는 것뿐이다.
이 비유를 잘 이해해야 한다.
그래서 생사현실에서 망집과 그 제거문제를 잘 파악해야 한다.
생사현실에서 평소 자신으로 여기고 집착하는 내용이 있다.
그런 내용은 현실에서 본래 없다.
그리고 그 생사나 생멸도 본래 얻을 수 없다.
그런데 그렇게 이해하면 오히려 걱정을 갖기도 한다.
왜냐하면 그로 인해 자신이 평소 집착하던 것이 갑자기 없어진다고 이해하기 때문이다.
그런 망집을 갖는다고 자신이 여기는 그런 내용이 그 상황에 있게 되는 것이 아니다.
다만 그런 망집을 바탕으로 할 때 그런 오해를 하고 대하는 것 뿐이다.
그리고 그런 망집을 제거한다고 하자.
그렇다고 그로 인해 있던 그런 내용이 없어지게 되는 것이 아니다.
본래 없었다. 그런 사정을 있는 그래도 이해하게 되는 것 뿐이다.
그리고 그 상황에서 자신이 그런 망집을 일으키게 된 그 재료는 그와 관계없다.
즉 감각현실이나 관념 분별 자체는 그와 관계없이 그런 형태로 얻는다.
나머지 제 7,8 식의 사정도 사정이 마찬가지다.
그래서 이런 점을 주의해야 한다.
이런 사정을 비닐판의 마술을 비유로 들어 설명하였다.
그리고 이 내용으로 생사과정과 열반의 의미를 살피면 이해에 도움이 된다.
경전에서 생사와 열반을 다양하게 살핀다.
이 내용은 『금강삼매경』을 살필 때도 제시했다.
그런데 중복서술하면 오히려 번잡하다.
이 내용을 링크만 걸어 놓기로 한다.
[일일단상과 경전공부]
불기2561-09-01_금강삼매경_001
http://buddhism007.tistory.com/3530#001
본래 생멸을 얻을 수 없다.
본래 청정한 니르바나다.
이런 사정을 제시한다.
이것이 수행자가 기본적으로 이해해야 할 내용이다.
그러나 이는 기본 상태다.
그리고 이것만이 수행자의 최대 목표는 아니다.
본래 생멸을 얻을 수 없다.
그리고 본래 청정한 니르바나다.
한편 본각의 상태는
어떤 수행자가 어떤 노력을 해서
비로소 그렇게 되는 것이 아니다.
본래 본 바탕이 그렇다.
어떤 수행을 하지 않는다고 하자.
심지어 수행과 정반대로 극단으로 나아간다고 하자.
그런 경우에도 본 상태는 그러하다.
본 상태는 그렇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실에서 일반적으로 전도망상을 일으킨다.
그리고 그런 상태로 생사고통을 받아나간다.
그래서 수행은 이런 망집을 걷어내는 것을 기본 목표로 한다.
그리고 원래 본 상태를 있는 그대로 이해하는 것을 우선 목표로 하게 된다.
본래의 청정한 니르바나의 상태는 차별이 없다.
이렇거나 저렇거나 차별이 없다.
그러나 문제는 그런 사정을 올바로 이해하고 깨닫는가
아니면 그것을 이해하지 못하는가가 문제가 된다.
깨닫지 못하면 전도망상을 일으킨다.
그리고 번뇌 집착을 일으켜 대한다.
그리고 현실에서 이에 바탕해 업을 행한다.
그러면 그런 망집에 바탕해 생사고통을 겪게 된다.
이렇게 되면 곤란하다.
어떤 이가 최면에 걸려 있다고 하자.
그래서 없는 것을 있다고 여긴다고 하자.
최면상태에서 그렇게 여기고 행한다.
그렇다고 해도 관객석과 무대는 그러나거 말거나
아무런 차별이 없다.
최면 걸리지 않은 관객은 이런 사정을 이처럼 관하게 된다.
이와 사정이 같다.
그런데 최면에 걸린 입장은 또 다르다.
없는 것을 있다고 잘못 여긴다.
그런 바탕에서 생사고통을 겪는다.
그래서 생사 현실에서 자신이 대하는 세계나 자신의
본 정체를 올바로 관해야 한다.
그래서 그런 생사고통의 묶임에서 벗어나야 한다.
이는 그런 측면에서 의미가 있다.
그리고 이런 사정을 이해해야 한다.
그래서 그런 상태가 되야 한다.
이런 것이 수행의 가장 기본적인 목표상태다.
그래서 수행을 통해서 이런 상태를 얻는다고 하자.
그러면 이는 수행을 통해서 얻는 결과인 것처럼 여기기 쉽다.
그러나 그 상태는 본래부터 그런 것이다.
그래서 그런 상태는 수행과 원인 결과의 관계가 있는 것이 아니다. [ 이계과]
이 두 설명이 서로 모순되는 내용처럼 여겨질 수 있다.
그러나 앞의 최면의 상황을 놓고 이해하면 이해가 쉬울 수 있다.
최면 걸린 이가 최면에서 벗어난다고 하자.
그래서 원래의 상태를 있는 그대로 파악한다고 하자.
이 때 최면거린 상태를 기준으로 생각한다고 하자.
그러면 자신이 최면 상태에서 노력해 그 상태를 새로 얻은 것처럼 잘못 여기기 쉽다.
그러나 이를 관객의 입장을 기준으로 보자.
그러면 원래부터 그랬던 것이다.
그리고 자신도 그러함을 이해하게 된다.
본각이란 내용도 이에 준해서 사정을 이해하면 된다.
이는 기본 상태다.
그러나 그것만으로 수행이 모두 끝이라고 여겨서는 곤란하다.
부처님은 중생을 상대로
다양한 방편을 시설해서 깨달음을 열어서 보인다.
그리고 중생들이 깨달음에 들어오게 노력한다.
그래서 처음 수행자는 그런 사정을 깨닫게 된다.
그러나 이는 기본 상태다.
수행자 자신도 다른 생사고통을 겪는 중생을 다시 그처럼 제도해야 한다.
그래서 수행자는 공한 실상을 깨닫고 다시 생사현실에 임해야 한다.
그리고 생사현실에서 공한 실상을 자신의 자리로 삼는다.
그리고 무상삼매를 통해서 아상과 인상 등을 제거한다.
그리고 안인을 성취한다.
그리고 무생법인을 성취한다.
그래서 불퇴전의 지위에 오른다.
기존에 자신의 마음에 망상이 손님으로 티끌처럼 들어와 있었다.
그리고 이에 바탕해 쓸데없는 희망을 추구했다.
이제 무원무작 삼매를 통해 이런 쓸데없는 소원을 모두 제거한다.
그리고 그 빈 자리에 중생을 제도하고자 하는 무량한 서원을 채운다.
그리고 무량한 서원을 성취해 나가야 한다.
본 상태는 생멸과 생사를 얻을 수 없다.
따라서 본래 청정한 니르바나라 상태다.
망집에서 이를 자신이 생사현실로 여겼다.
그런데 이 내용이 그대로 본래 청정한 니르바나임을 이해해야 한다.
그래서 '생사 즉 열반'을 관해야 한다.
그런 가운데 생사현실에서 열반에 상응하게 여여하게 임한다.
그런 가운데 집착을 제거한다.
그런 가운데 현실에서 무소득[얻을 것이 없음]을 방편으로 수행에 임한다.
그리고 중생을 제도한다.
그리고 불국토를 장엄한다.
그리고 법신을 증득하여 성불한다.
그리고 이런 상태를 성취하기 위해
무량행문을 닦아 나가야 한다.
따라서 수행자가 기본상태만 이해하고 머물면 곤란하다.
무엇을 준비하고 수행해간다.
그러다보면 매번 부족한 것이 드러난다.
그리고 다시 살펴보면 또 부족함이 드러난다.
그런 바탕에서 수행자는 무량하게 집착없이
무소득을 방편으로 수행을 해나가야 한다.
욕심을 부리면 오늘 당장
모든 것을 완벽하게 살펴야 할 것 같다.
그리고 해야 할 것같다.
그래서 마음이 급해진다.
그러나 작은 부분이라도 최선을 다해 하나씩
성취해나가야 한다.
이런 자세가 중요하다.
>>>
현재 경전을 매일 뽑아 살펴나간다.
그런데 한 번에 해당 경전을 다 살피는 것은 아니다.
일부만 살피게 된다.
그런 한편 꾸준히 살펴야 할 내용은 잘 살피지 못한다.
또 잡담을 할 마땅한 공간이 없다.
그래서 약간 불만을 갖게 되기도 한다.
다른 연구원도 무언가 의견을 제시하고 싶어 한다.
그런데 현재 체계에서 무언가를 적기 힘들다.
그래서 이전처럼 별도 공간을 만들어야 할 필요도 있다.
그러면 번잡해진다.
어차피 이 공간은 그런 잡담을 허용하는 부분이다.
여기에 함께 적는 것이 나중에 정리할 때도 낫다.
손자병법에서 졸속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별로 중요하지도 않다.
그런데 온갖 것을 다 꼼꼼히 챙겨서 연구를 하려 한다고 하자.
그러면 오히려 좋지 않다.
옥상기지에서 노래를 들었다.
여기에서도 너무 한꺼번에 다 성취하려고 욕심을 내면
곤란하다는 메세지를 전하는 듯하다.
일단 불충분하다.
그래도 그런 상태로 나아가는 것이 낫다.
Lab value 불기2561/09/04/월/13:34
경전에서 이런 내용이 제시된다.
...
4신족(神足)을 가진 사람도
수명이 1겁(劫)을 채우거나
또는 1겁은 못 되더라도 머물 수 있는데,
여래(如來)에게는
지금 위대한 신력(神力)이 있는데
어찌 수명이 1겁
또는 1겁은 못 되더라도
세상에 머물 수 없겠느냐?”
그 때 세존께서
이미 이와 같이 요청할 수 있는 문을 열어서
아난에게 말씀하셨지만,
아난은 잠자코 있을 뿐
무슨 영문인지 깨달아 알지 못했다. ◂
그러나 일반적으로
경전에서 제시한 내용은 도저히 있을 수 없는 일로 여기게 된다.
그리고 이런 내용은 한마디로 방편상 상상적인 내용을 제시한 것으로 여기기 쉽다.
그래서 이런 내용을 제시한 부처님의 진실성까지 의심하기 쉽다.
그래서 이처럼 의문을 제기하기 쉽다.
4 신족을 가진 이는 수명이 1 겁을 채울 수 있다고 한다.
그런데 왜 현실에 200 살을 사는 이 조차 보기 힘든가.
또 가섭존자는 열반에 들지 않고 계속 두타 수행을 한다.
그래서 나중에 미륵보살님이 56 억년 후 성불할 시점까지
사바세계에 머물다가 미륵부처님을 만나고 사라진다고 한다.
현실에 이런 일이 있다고 하자.
그러면 지금 현실에서도 어딘가에 가섭존자를
찾아 볼 수 있어야 할 것이다.
이런 식으로 의문을 제기하기 쉽다.
경전 전반에 이처럼 일반인의 상식적 입장을 벗어나는 내용이 많다.
근본 경전에서 기본적으로 3 계 6 도에 관해 제시한다.
이들 내용도 사정이 같다.
그리고 대승경전일수록 이런 내용이 더 많다.
또 이런 사정으로 경전 전반에 대해 의심과 불신을 갖기 쉽다.
처음엔 전도망상을 바탕으로 일으킨 망상분별만을 기준으로 잡고 이들 내용을 대한다.
그리고 상식적으로 일반적으로 행하게 되는
좁고 짧고 얕게 관찰하는 협단천 관찰을 행한다.
그래서 우물안 개구리 식의 대강의 제한된 경혐에만 의존한다.
그래서 이런 내용을 하나같이 받아들이지 않고 대하게 된다.
그리고 경전에서 제시하는 다른 내용도 다 함께 그런 상태로 대한다.
그러면 행해야 마땅한 수행도 행하지 않게 된다.
그래서 그런 상태에서는
다시 이론적 설명을 통해서라도 이를 이해해야 한다.
아니면 비유를 통해서라도
일단 부처님이 제시한 내용을 이해해야 한다.
그리고 수행을 행해 나가야 한다.
그러면 앞과 같이 직접 자신이 그 내용을 증득할 수 있다.
그러면 그런 내용이 사실임을 스스로 확인하게 된다.
오늘 당장 그런 내용을 시범을 확인할 수는 없다.
그래도 이치상 그런 상태가 가능함을
이론상으로라도 이해하고 넘어가는 것이 낫다.
물론 내용 이해가 되지 않을 수 있다.
그래도 믿음을 가져야 한다.
그래야 이해가 안 되어도 수행을 시작할 수 있게 된다.
그러면 수행 결과를 증득하게 된다.
그러면 처음 잘 이해하지 못한 내용들도
자연스럽게 이해할 수 있게 된다.
mus0fl--Indochine - Belfast.lrc
경전에는 일반적인 입장에서 도무지 믿기지 않는 내용이 많이 제시된다.
예를 들어 근본경전에서는 각종 지옥과 아귀나 아수라 하늘과 같은 세계를 제시한다.
생사를 통해 그런 세계에 묶여 태어나고 살고 죽는 것을 반복한다고 제시한다.
91 겁전에 있는 일을 제시하기도 한다.
기타 무량수부처님의 국토에 가면 곧바로 일생보처의 보살의 상태에 이르게 된다고 한다.
여환삼매를 증득하면, 감각현실로 대하는 세계나 자신의 몸도 뜻과 같이
변화시킬 수 있다고 한다.
유마힐 소설경에서 작은 공간에 세계를 넣는다는 내용이 제시된다.
현실에서는 그런 내용을 아무리 노력해도 찾아볼 수 없다.
그래서 이들은 상상으로 만들어낸 허황된 이야기처럼 여기기 쉽다.
그리고 수행 자체를 하려는 마음을 일으키지 않는 경우가 많다.
그래서 경전을 대하며 경전 전반 내용을 불신하는 경우가 많다.
해오와 증오라는 표현이 있다.
해오(解悟)란 비록 직접 그런 상태를 증득한 상태는 아니더라도
그 도리를 이치상 헤아려 이해하여 깨닫는 상태다.
증오(證悟)란 직접 그 내용을 증득하고 체험해 깨닫는 상태다.
어떤 이치를 이해하고 깨달을 때도 마찬가지다.
그냥 그 내용을 듣거나 외어서 안다는 경우가 있다.
또 그것을 자신이 직접 헤아려보고 직접 이치를 궁구해서 아는 경우가 있다.
다시 그런 내용을 자신이 직접 실천해서 증득해 아는 경우가 있다.
이것을 각기 문혜(聞慧), 사혜(思慧), 수혜(修慧)로 표현한다.
결국 단지 듣거나 내용을 외어서 아는 상태만으로 부족하다.
자신이 직접 그 내용을 실천해 성취해서 체득하는 상태가 되어야 한다.
가장 기초적으로 삼계 육도의 내용도 사정이 같다.
선정정려 수행을 통해 얻는 각 상태도 사정이 같다.
초선 이선 삼선 사선 공무변처 식무변처 무소유처 비상비비상처 등과 같은
그 명칭을 잘 외우고 알고 있을 수 있다.
또 그것이 어떤 이치로 그렇게 수행하면 그런 상태가 된다고 이해할 수도 있다.
그렇다해도 자신이 직접 수행을 해서 그런 상태가 되어야 한다.
그렇게 해서 그 사정을 아는 것과 그렇지 못한 것은 차이가 있다.
처음 어떤 소리를 들을 때
그것을 귀먹은 이에게 그 내용을 글자로 제시해준다고 하자.
그러나 귀먹은 이는 그 내용을 직접 듣지 못한다.
그래서 아무리 그 내용을 이해하려고 해도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가 파악하기 힘들 수 있다.
반대로 장님에게 어떤 색깔을 제시해줄때도 마찬가지다.
자신이 혼자서 실험해도 마찬가지다.
자신이 듣는 소리는 자신이 눈에 의존해 내용을 얻는 영역에서는
대단히 엉뚱한 내용이다.
반대로 눈으로 보는 내용은 귀의 영역에서 대단히 엉뚱한 내용이다.
예를 들어 이 음악소리는 어떤 색인가를 생각해보자. .
또는 이 노란 색은 어떤 소리인가를 생각해보자. .
...
거칠거칠한 촉감은 어떤 색인가를 생각해보자.
또 노란 색은 어떤 촉감인가를 생각해보자. .
이렇게 문제를 제기한다고하자.
이 경우 각기 무엇이라고 해야 할 것인가를 판단해보자.
그러면 같은 성격의 문제를 이해할 수 있다.
이들은 각기 얻는 관계가 다르다.
이런 내용을 그 상황에 있지 않은 상태에서 직접 얻기는 곤란하다.
사람들 사이에서도
각기 매 순간 감각내용을 달리 얻는다.
이런 감각내용을 다른 이에게 전하려 한다고 하자.
이런 경우에도 위와 같은 성격의 문제가 있다.
자신이 어느 때 커피맛을 맛본다.
그리고 이 맛을 멀리 떨어진 이에게 전하려 한다고 하자.
이 경우 그 커피를 그대로 보내준다고 하자.
그런다고 자신이 맛본 커피맛을 전한 것은 아니다.
이 문제는 자신에게도 마찬가지다.
어제 이상한 차를 맛보았다.
이 맛을 지금 관념으로 떠올려 볼 수도 있다.
그렇다고 당시 맛본 맛을 다시 꺼내 맛볼 수는 없다.
이제 메뚜기와 코브라 고양이를 놓고 생각해보자.
이 경우 문제가 더 어렵다.
메뚜기가 지금 무언가를 보고 뛰어 날아간다고 하자.
그런데 메뚜기는 그 순간 도대체 무엇을 감각한 것인가.
이런 경우도 문제 성격이 같다.
이런 여러 문제를 검토해보자.
그러면 부처님이 제시한 경전내용을
일반적입장에서 그대로 이해하는 것이 쉽지 않다.
그리고 그 내용을 믿고 받아들이는 일도 역시 쉽지 않다.
그래서 본래 그런 사정이 있다.
그렇다고 장님이나 귀먹은 상태에 있는 이가
자신의 생각만 고집하고 나아가면 곤란하다.
정상적으로 감각하는 이가
앞에 웅덩이나 절벽이 있음을 보았다고 하자.
그래서 앞으로 걸어가면 떨어지고 다치게 된다고 말한다고 하자.
이런 경우 장님은 그 절벽을 자신이 직접 보지 못한다.
그리고 귀먹은 이는 듣지 못한다.
그렇다고 고집하고 나아가면 곤란하다.
직접 보거나 경험하지 못했다 해도 마찬가지다.
그런 경우에도 그 사정을 미루어 헤아려 이해해야 한다.
아니면 신뢰할 만한 이가 제시하는 내용을 믿어야 한다.
그리고 그런 바탕에서 그 순간 요구되는 내용을 직접 행하는 것이
필요하다.
노래를 듣다 보니
노래에서
죽어야 바뀐다고 하는 듯하다. .
그리고 앎의 중요성을 제시하는 듯하다.
그리고 성불하는 이유가 무엇이겠는가라고 묻는 듯하다.
그런 내용이 위 불어 노래 가사에 들어 있을리는 없다.
그러나 그렇게 들린다.
그런데 이들 내용이 지금 살피는 내용과도 일부 관련된다.
그러나 죽은 다음에 이를 이해하면 늦다.
죽은 후 말로만 듣던 지옥이 드디어 내것이 되었다고
말하게 된다고 하자.
그리고 생사고통에 처한 다음 경전 내용이 옳음을 알게 된다고 하자. .
그러면 늦다.
경전 내용을 지금 당장 직접 경험할 수 없을 수 있다.
그래도 일단 이치상으로라도 이해하려고 노력해야 한다.
그런데 직접 시범을 보여 달라고 요구하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그에 응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e=mc2 이런 이론을 아윈쉬타인이 제시했다고 하자.
이런 경우 직접 그 시범을 보여줄 것을 요구를 하는 경우도 마찬가지다.
오늘날 작은 메모리 카드에
해인사에 보관된 경전을 다 넣고도 저장 공간이
남는다.
이를 핸드폰에 넣어 가지고 다닐 수도 있다.
개미나 이는 메모리카드보다도 작다.
그런데도 일정한 활동을 한다.
그런데 메모리카드는 그런 것을 못한다.
개미나 이는 작은 몸으로
매 순간 이리가는 것이 좋은가 저리 가는 것이 좋은가를
판단한다.
그리고 무언가를 먹고 싸고 놀고 하고 쉬고 잔다.
그런 활동을 한다.
이렇게 생각하면서
현재의 8 테라 하드디스크를
개미나 이의 머리부분 크기 만큼 만들수도 있겠다고
주장한다고 하자.
이런 경우에도 또 마찬가지 문제를 제기받게 된다.
직접 시범을 보이기 힘들다.
그러나 이치상 그런 상태를 이론상 헤아려 볼수는 있다.
경전에서는 4 신족만으로도
수명을 1 겁까지 머물 수 있다는 한다.
이런 내용도 그처럼 쉽게 헤아려 이해할 수 있어야 한다.
일반적으로 전도몽상을 바탕으로 무엇이 있고 없고를 헤아린다.
그리고 이 모습과 성품은 이렇다 저렇다라고 분별을 행한다.
그런 바탕에서 이런 내용이 제시된다.
그래서 부처님 입장에선 그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다.
중생을 생사고통에서 벗어나게 하는데
그것이 필요한가 아닌가에 따라 의미가 있는 것 뿐이다.
그래서 부처님이 그런 내용을
직접 시범을 보여주시지 않아도 실망할 필요가 없다.
결국 상상으로 말로만 그런 내용을 제시한 것으로 이해하면 곤란하다.
그런 상태로 혹시라도 아미타부처님의 불국토를
방문하려고 임하면
그런 수행자의 자세때문에
그 수행자는 그곳에 도착해도
비자 심사 자체가 거부된다.
그 불국토에 들어가지 못한다.
그 외곽에서 머물러야 하는 상태가 된다.
그런 사정이 경전에서 제시된다.
부처님은 수행자를 높은 상태로 끌어 올려주려고 한다.
그리고 그런 취지로 그런 불국토를 오랜 기간에 걸쳐 성취시켰다.
그런데 수행자의 기본자세가 그런 상태라고 하자.
그러면 그런 불국토를 만들어 제공하는 부처님의 본 취지와
처음부터 들어맞지 않는다.
따라서 그 사정을 잘 이해해야 한다.
마음을 잘 갖고 임한다고 하자.
그러면 호주머니에서 상대가 바로 라이터를 건네줄 수 있다.
그러면 라이터를 받아 곧바로 사용할 수도 있다.
그런데 상대가 무언가 의심을 한다.
그리고 엉뚱한 망집에 바탕해 다른 취지를 갖고 대한다.
그런 경우에는 라이터 하나도 제공하기 곤란하다.
만일 무인도에서 혼자 지낸다고 해보자.
그런 상태로 직접 불을 혼자 만들어 내려고 한다고 하자.
그런 경우는 한 300 만년 고생해도 불을 만들어 내기 힘들다.
그리고 그런 원시 상태로 상황을 견뎌야 한다.
4 신족만 사용해도 1 겁을 머물 수 있다고 한다.
현실에서 망상상태로 각기 자신의 몸이라고 보는 상태가 있다.
일반적으로 이를 있다고 여긴다. 그리고 집착한다.
그런데 그 상태로 1 겁을 머물러야 할 필요가 있다고 하자.
그렇다면 그렇게도 할 수 있음을 제시한 것이다.
이론상으로만 검토해보자.
그 몸은 자신이 현재 타고 다니는 자동차와 성격이 같다.
자신의 눈을 떠 세상을 본다고 하자.
그러면 일 부분은 자신의 몸이라고 여기고 그렇게 대한다.
그리고 자신이 타고 다니는 자동차도 그렇게 자동차라고 여기고 대한다.
이제 어떤 자동차를 놓고 생각해보자.
어떤 자동차를 구해 타고 다닌다고 하자.
그런데 그 자동차가 너무 마음에 든다고 하자.
그래서 이 차를 1 겁 정도를 계속 타고 다니고 싶어 한다고 하자.
이런 경우에도 4 신족을 사용하면 된다고 이해해야 한다.
그런데 이 방안은 누구나 쉽게 알 수 있다.
오늘 차를 타고 다니면
어느 부분인가가 고장 나고 부딪히면 망가질 수 있다.
그런데 그 자동차 공장 회장이라고 해보자.
저녁에 공장에 입고해서 고장난 부분을 모두 뜯어낸다.
그리고 새로운 순정 부품으로 그 부분을 계속 고친다.
그리고 다음날 자신의 주차장까지 갔다 놓는다고 하자.
이는 자동차 회장 입장에서는 불가능한 일도 아니다.
엄격히 보면 이 차는 처음 차와 차이가 있다.
그러나 같은 차다.
현실에서 사람들이 식사하고 배설하고 하는 과정도 성격이 이와 같다.
자신의 몸을 구성하는 것을 레고블럭처럼 이해해보자.
그런데 다른 레고블럭을 주어온다.
그리고 그 레고블럭을 조각으로 분해한다.
그리고 어떤 부품은 부서진 부품과 교체한다.
또 어떤 부품은 활동을 하는 과정에서 필요한 에너지로 사용한다.
그런 가운데 기존 형체를 조금씩 바꿔간다.
각 부품을 그렇게 사용한다.
과거에 한 때 본인과 함께
연구원에서 지내던 인턴연구원이 있다.
그런데 어느순간 행방불명이 되었다.
그래서 현재는 찾아볼 수 없는 실종상태다.
그래서 본인은 실종한 인턴연구원을 가끔 찾아나선다.
그런데 현재 인턴연구원들은 본인과 입장이 다르다.
그래서 과거에 실종된 인턴연구원의 수색에 관심을 기울이지 않는다.
이들 인턴연구원은 그럴 필요성을 잘 못느낀다.
그래서 그렇다고 이해할 수 있다.
DSCN8069-cut.jpg
그런데 과거 어떤 상태를 계속 그 형태로 유지하기를 원한다고 하자.
그러면 앞에 소개한 자동차 공장 회장처럼 임할 수도 있다.
물론 현실적으로 어려움이 많다.
그러나 이런 사정을 이치상으로는 이해할 수 있다.
나머지 문제도 마찬가지다.
경전에서는 다음 내용도 제시된다.
하나의 털끝과 같은 미세한 공간에
하나의 은하에 해당하는 셰계가 들어간다.
그리고 과거겁으로 들어가서 미래겁으로 나온다고도 한다.
또 각 세계에서 시간의 차이도 관찰해
이 세계의 1 겁은 다른 세계의 하루에 해당한다고 한다.
경전에서 하나같이 믿기 힘든 이런 이야기들을 제시한다.
그런데 이들 내용도 앞과 같은 방식으로
이치상으로는 잘 헤아려 이해해야 한다.
이해가 안 되어도 일단 믿음을 가져야 한다.
그래서 그 내용을 받아들여야 한다.
그런 상태가 되어야 수행을 원만히 실천할 수 있다.
처음부터 이해도 안 되고 믿지도 못한다고 하자.
그러면 수행 자체가 실천 시작이 안 된다.
또 그러면 수행을 통해 수행결과를 증득하기 곤란하다.
그러면 그 상태를 직접 확인한다는 것도 곤란하게 된다.
그런 경우 지금 몸이라고 보는 것은 그 성격이 옷과 같다.
그런데 그런 것을 자신이라고 잘못 여긴다.
그리고 집착을 갖고 대하게 된다.
그러다 죽음을 맞이하면 집착하던 옷[몸]을 강제로 벗기운다.
그리고 강제로 각 세계에 묶이게 된다.
그리고 말로만 듣던 각 세계의 생사고통을 직접 겪기 쉽다.
그런데 그래야만 이제 그 내용을 이해하게 되기 쉽다.
그러나 그렇게 되면 곤란하다.
장님이나 귀먹은 이가 직접 눈을 뜨고 소리를 들을 수 없다.
그런데 어떤 이가 앞에 절벽이 있다고 말한다.
그런데 이들이 직접 그 내용을 확인한 다음에야
앞의 벼랑으로 나아가지 않겠다고 고집한다고 하자.
그래서 떨어졌다고 하자.
그래서 자신의 다리가 부러지고 엉망이 되었다.
그런 경우에는 설령 그런 사실을 알아도 효용이 있을 수 없다.
예를 들어 그런 상태에서 비로소 눈도 보이게 되었다고 하자.
그래도 그 상태에서는 별 효용이 없다.
그런 상황이라면 차라리 보지 못하고 의식 자체가 없는 상태가 낫다,
그런데 현실 상황은 대부분 이와 같다.
죽으면 앞의 그림에서 보는 것과 같은 상태가
기본적으로 해소된다.
그리고 그런 장애가 기본적으로 제거된다.
그래서 문제다.
미리 정려 수행등을 통해서 그 사정을 잘 관해야 한다.
그리고 선행학습을 잘 해야 한다.
그래서 자신을 생사고통에서 풀려나게 하는 수행을 해야 한다.
그렇지 않다고 하자.
그것은 고문실에서 의식을 잃을 때
찬물을 끼얹고 의식을 차리게 한다음
계속 고문을 가하는 상태와 성격이 같다.
여유있을 때 사정을 잘 헤아려야 한다.
그리고 생사고통을 벗어나야 한다.
그리고 해탈과 니르바나를 얻어야 한다.
그래서 생사고통의 묶임에서 벗어나야 한다.
그리고 그렇게 묶이게 하는 업의 장애를 해소해야 한다.
그리고 그런 업을 행하게 하는 번뇌망상을 제거해야 한다.
그리고 그렇게 될 수 있는 수행에 정진해야 한다.
◧◧◧ para-end-return ◧◧◧
◈Lab value 불기2561/09/04 |
2016_0621_185110_nikon.jpg
○ [pt op tr]Ernest_Meissonier
62-나마달라-v-up-자세이다. 062▲伽麼怛羅伽麼怛羅為 一 ● 那麼怛羅, ○知其解了,知,知,知,菩 가마달라씩 가마달라가 한 ● 나마달라(那麽怛羅)요, 지지지지(해,취,언,작) 知其解了不可說, 知其趣向不可說, 知其言語不可說, 知其作業不可說。 지기해료불가설, 지기취향불가설, 지기언어불가설, 지기작업불가설。 이해함을 아는 일 말할 수 없고 나아갈 데 아는 일 말할 수 없고 그 말을 아는 일도 말할 수 없고 짓는 업 아는 일도 말할 수 없네 출처: http://essay007.tistory.com/800 [선현지복 잡기]
그래서 당황하는 경우가 있다. 책에서는 처음에 무릎을 가슴에 모아서 붙여 준 다음 처음에는 잘 안 된다. 그래서 당장 오늘 내일 도착하지는 않는다.
요즘 어깨도 통증이 있다.
♥단상♥ |
문서정보 ori
https://buddhism0077.blogspot.com/2020/09/2561-09-04-k0652-001.html#2936 sfed--대반열반경_K0652_T0007.txt ☞상권 sfd8--불교단상_2561_09.txt ☞◆vlco2936 불기2561-09-04 θθ |
■ 선물 퀴즈
방문자선물 안내페이지
다음에 해당하는 단어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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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업(同業). 중생의 제각기 다른 업인(業因). 따라서 제각기 다른 과보를 받는다.
답 후보
● 별업(別業)
보리심(菩提心)
보살마하살(菩薩摩訶薩)
보시바라밀(報施婆羅蜜)
보지관(寶池觀)
보현삼매(普賢三昧)
보현행원품(普賢行願品)
ॐ मणि पद्मे हूँ
○ [pt op tr]
[오래된 조각글재정리 안내]
☎잡담☎ = 순전한 잡담부분
● = 논의부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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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의 (○정리중) (●마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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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t op tr]
● 대반열반경_K0652_T0007 [문서정보]- 일일단상키워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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