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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진리와실천
불기2562-12-22_도행반야경_001 본문
K0006
T0224
도행반야경 제1권
● 한글대장경 해당부분 열람I
● 한글대장경 해당부분 열람II
○ 통합대장경 사이트
※ 이하 부분은 위 대장경 부분에 대해
참조자료를 붙여 자유롭게 연구하는 내용을 적는 공간입니다.
대장경 열람은 위 부분을 참조해주십시오.
○ [pt op tr] 도행반야경_K0006_T0224 핵심요약
♧도행반야경 제1권
경전에는 부처님과 제자, 또는 하늘 사이에
질의와 답변이 이어진다.
그런데 이를 생각없이 그냥 읽다보면 초점을 잃기 쉽다.
그래서 경전에서 어떤 질문이 제기되면
그런 질문을 하는 입장의 문제의식에 공감하고 대할 필요가 있다.
그리고 그에 답을 해보려 노력해볼 필요가 있다.
그리고 자신의 답과 경전의 차이를 살펴보고 그 가운데 무엇이 옳은가를 생각하고
그 내용을 간단히 키워드로 줄여야 한다.
제목이 따로 있으면 제목에 묶어 기억해도 된다.
그러면 경전의 도로명 주소가 확보된다.
도로명 주소의 장점은 어떤 곳을 찾아갈 때, 쉽게 장소를 찾아가게 하고
길안내도 쉽게 할 수 있다.
반야경전이 다양한 버전이 있다.
『대반야바라밀다경』이나
『마하반야바라밀경』이나
『소품반야바라밀경』
『광찬반야바라밀경』을 한번이라도 본 경우는
비슷한 내용을 전에 본 듯한 느낌을 받는다.
경전내용이 중복되면 생략할 수도 있다.
그런데 여기에는 사정이 있다.
만일 완전히 같아 다른 판본이 필요없다면 오래 전에 그처럼 해놓았을 것이다.
그러나 비슷하지만, 그 차이를 무시할 수 없기에 각기 다른 형태로 남아있다고 본다.
그런데 한편 각 부분에 질문이 제시될 때 자신이 답을 잘 할 수 있고
그 답이 부처님의 답과 일치하는가가 문제다.
또 경전 게송도 그처럼 자신이 제시할 수 있는가가 중요하다.
전문수행가를 '지향'하는 입장은 이런 훈련이 필요하다.
경전에 다음 내용이 나온다.
...
이러한 까닭에 단지 글자만을 일컬어 보살이라고 말할 뿐입니다.
그런데 원문 生意是無形。何因是識? 을 볼 때
붙잡을 수 있다고 합니까- 라고 번역해야 할 듯 하다. ]
근본에 이르러도
보살은 반야바라밀에 어떻게 머물러야 합니까?"
『도행반야경』 2. 난문품
이런 질문을 대하면 조금 답하기 어렵다.
그래서 다음과 같은 현실 문제를 놓고 이를 살펴보기로 한다.
뉴스란에서 몇 사건을 발췌해왔다.
비정규직 노동자가 원청 하청 구조로 죽음에 내몰린다.
생존문제에 걸려서 교섭능력이 약한 층에게 임금이나 신분보장은 적게 하면서
기업활동에서 위험성이 높고 상대적으로 전문적인 부분
그럼에도 정규직이 꺼리는 부분을 떼어 비정규직에게 넘긴다.
그래서 사고가 빈번하게 발생하다.
그외 인터넷에서마약을 판매한다는 기사도 있다.
요즘 아이나 어른이나 핸드폰에 중독되어
philo - phone 문화가 기승을 부린다.
적절하면 좋은데 어느 것이나 심하면 부작용이 문제된다.
밥도 죽을 때까지 먹으면 죽게 되기에 사정은 마찬가지다.
반대로 마약도 예를 들어 심한 수술을 받는 경우나
불치병으로 극심한 통증을 겪는 경우는 필요한 약이 되기도 한다.
그런데 그렇지 않은 경우는 부작용이 모두 문제된다.
마약은 부작용이 특히 더 심한데 이를 인터넷으로 판매한다니
인터넷을 폐쇄시켜야 하지 않을까.
기사 제목만 보고 내용을 억측하면 곤란하지만,
대강 이런 문제로 본다.
또 중독 문제의 하나로
음주 운전에 의해 억울하게 희생된 사건기사가 있다.
그리고 미세 먼지기사도 있다.
과거 40 년전 공기도 좋지 않았다고 여기는데 요즘은 더 심하다.
이런 추세면 흡연을 굳이 문제삼는 것이 별 의미가 없다는 취지의 기사가 있다.
참고로 이 페이지는 시사 논의를 목표로 하지 않는다.
단지 이런 현실 내용을 놓고
경전내용이 무슨 의미인가를 파악하려는 것이 목표다.
수보리 존자는 이런 현실문제를 잘 파악하지 못한 것인지.
글자와 모양은 원래부터 있지 않으며 ...
어떤 존재도 이를 지어낸 이가 없고 근본이 없다.
그러니 일반적으로 이런 내용에 공감하기 힘들다.
앞 사건들을 심각하게 여기고 한없이 논의해야 할 상황에서
그런 것이 원래 부터 없다라고 전제한 것도 이상하다.
그리고 다시 그런 바탕에서 어떻게 반야바라밀을 설할 수 있겠는가라고 문제를 제시한다.
그런데 도대체 반야바라밀이 무엇이길레 이렇게 임하는가.
우선 반야바라밀이란 쉽게 말하면 지혜를 뜻한다.
그런데 대단히 넓고 대단히 깊은 지혜를 가리킨다.
그래서 단순히 지혜로만 표현하면
일반적인 지혜로 오해하므로 이처럼 다르게 표현한다.
그래서 세속에서 각 분야 최고 전문가가 갖는 지혜나
또는 수행자가 생사현실에서 닦는 방편지혜는 분별지이고
반야지혜는 그런 분별지혜를 초월한 무분별지라고 구분한다.
그리고 그런 깊은 지혜를 닦아 생사를 벗어나는 것
또는 그렇게 되기 위해 그런 지혜를 닦는 수행을 반야바라밀이라고 표현한다.
그래서 이 반야바라밀이 중요하다.
그런데 반야바라밀로 현실을 대하면
글자나 모양, 수행자, 수행행위도 얻을 수 없다고 보게 된다.
그러니 그런 바탕에서 도대체
어떻게 반야바라밀을 설할 수 있는가라고 문제를 제기한다.
그래서 과연 그런가부터 살펴야 한다.
그리고 그렇다면 이 질문에 어떻게 답할 것인지를 생각해봐야 한다.
그리고 이를 현실사건을 배경으로 놓고 살펴야 한다.
왜냐하면 이는 현실의 생사고통문제를 해결해
벗어나게 하려는데 취지가 있기 때문이다.
즉, 이 논의는 단순히 지적호기심을 충족하기 위한 것이 아니다.
즉, 단순히 형식적으로 전제가 이렇다면 어떤 결론이 참인가를 추상적으로
살피려는 취지가 아니다.
이런 논의를 통해 생사현실에서 고통을 벗어나게 하기 위한 것이다.
그래서 현실에서 수많은 고통을 호소하는 현실 사건들을 놓고
경전내용을 살피는 것은 의미가 있다.
mus0fl--Etienne Daho - Week-End À Rome.lrc
현실 사건 사고를 대표적으로 다음처럼 제시해보자.
현실에서 종이를 불로 태우면 연기와 재가 나타난다.
그런데 종이부분에 대단히 소중한 보물을 넣고
연기와 재 부분에 치명적인 독을 넣어보자.
그렇게 해서 귀중한 보물은 불타고 이로 인해 치명적인 독이 생겨났다고 하자.
그러면 현실 사건 사고가 이런 문장으로 압축된다.
그런데 수보리 존자는 이런 이해를 망집이라고 한다.
즉, 그런 것을 일체 얻을 수 없다.
그런데 망집에 빠져 그런 것이 현실에 있다고 여기며 업을 행하고
그런 바탕에서 무량하게 생사고통을 받는다고 한다.
그런데 망집을 일으킨 경우 수보리존자가 제시한 위 내용을 이해를 못한다.
망집을 일으킨 경우
자신이 대하는 것의 본 정체나 인과도 모른다.
또 그 가운데 무엇이 진정 좋은가도 잘 모른다.
그리고 그런 좋음을 얻는 방안도 잘 모른다.
그런 가운데 삶에 임한다.
그래서 무명 어리석음과 망상분별에 바탕해 집착을 일으켜 업을 행하고
그로 인해 무량한 생사고통을 겪는다고 제시한다.
본 바탕에서는 이런 생사고통을 얻지 못한다.
그러나 망집을 일으키면 그에 바탕해 그런 내용이 그처럼 있다고 잘못 여긴다.
그런 가운데 업을 행하며 한 순간도 그런 망집을 벗어나오지 못한다.
그래서 무량겁에 걸쳐 그런 상태로 생사고통을 받아나간다.
이렇게 제시한다.
그런데 본 바탕에서는 그런 내용을 얻을 수 없다지만,
현실에서는 이상하게도 망집을 일으켜 현실에 그런 내용이 있다고 대부분 여긴다.
현실의 어느 한 단면이던 사정이 그렇다.
그래서 이 두 입장 가운데 어떤 입장이 옳은가부터 살펴야 한다.
그런데 이에 대해서는 중복 서술을 피하고 링크로 연결한다.
■■■
●연기와 재가 불로 인해 나타난다는 망집을 이해하는 5 가지 방안들의 기본골격
http://buddhism007.tistory.com/4629#034
sfed--결정비니경_K0035_T0325.txt
sfd8--불교단상_2562_06.txt ☞ ☞●연기와 재가 불로 인해 나타난다는 망집을 이해하는 5 가지 방안들의 기본골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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링크부분을 살피니 설명이 불충분하고 길다.
그러나 현실에서 판단하는 내용이
전도된 망상분별인 사정을 위 링크를 통해 살필 수 있다.
여기서는 그런 내용을 바탕으로
경전처럼 질문하면 그에 대해 어떤 답이 가능한가를 살피기로 하다.
>>>
수보리 존자는 대략 다음처럼 제시한다.
...
어떤 보살도 찾을 수가 없고
어떤 보살도 있지 않기에 끝내 볼 수가 없습니다.
글자와 모양은 원래부터 있지 않으며
글자의 모양 또한 원래부터 있지 않으니,
...
근본에 이르러도
역시 붙잡을 것은 없는데
...
모든 존재의 모양에는 원래부터 근본이 있지 않고
근본이 없이 펼쳐져 있으며
...
어떤 존재도 이를 지어낸 이가 없고
근본이 없습니다.
본래부터 근본이 있지 않다.
이렇게 제시한다.
이런 경우 형식적으로 보면
대략 4,5 가지 답이 가능하다.
[1] 가장 단순한 방식은 다음이다.
사정이 그와 같다. 사정이 그러니까 더 설할 수 없다. 그만 마치자.
일체 말하지 말자. 그리고 일체 말하지 않는다.
이런 입장을 우선 생각할 수 있다.
그런데 수보리 존자는 사정이 그렇다면서
언설로 일정 내용을 표현해 제시한다.
그래서 위 입장은 아니다.
이제 수보리 존자와는 극단적으로 반대되는 입장을 생각해보자.
이럴 때 다음처럼 수보리 존자와 반대되는 입장이 있을 수 있다.
현실에서 살피는 그 일체내용은 실답게 있다.
그리고 그 근본도 있다.
그리고 일정한 내용을 언어로 표현할 수도 있다고 주장하는 경우가 있을 수 있다.
여기서 수보리 존자입장을 S 라고 표시하고
반대 입장은 T 라고 표시하자.
그런 가운데 다시 각 입장을 좀 더 벌려 세울 수 있다.
우선 수보리 존자처럼 일체의 글자나 모양을 본래 얻을 수 없다는 입장에서는
어떤 경우들이 가능한가.
[2] 일체 글자나 모양을 본래 얻을 수 없다는 입장에서
수보리존자처럼 주장하는 것과 이와 달리 엉뚱한 주장을 하는 것은
서로 어떤 차별이 있다고 볼 것인가부터 검토해보자.
일체 글자나 모양을 얻을 수 없다면
이런 두 경우도 차별을 얻을 수 없다고 해야 한다.
그런 내용은 본래 다 차별없고 또 얻을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니 S 주장이나 T 주장도 마찬가지로 차별이 얻을 수 없다고 해야 한다.
그렇다면 S 주장처럼 말하거나, T주장처럼 말하거나, 아무 관계없다.
다 무방하다.
그리고 결국 어떤 주장도 별 차이가 없기에
무언가를 설하는 가치나 의미가 없다고 여기는 입장을 생각할 수 있다.
[3]
그런데 수보리 존자의 입장을 긍정할 경우에도
다시 다음 입장을 생각할 수 있다.
그래도 S 주장은 T 와 다른 측면이 있다고 내세우는 경우다.
그런 내용이 있다고 주장한다면 또 그런 부분때문에 S 주장은
T와 달리 그 의미와 가치가 있다.
또 그런 사정 때문에 반야바라밀다에 대해서 설해야 한다고 할 수 있다.
한편 T처럼 처음부터 S와는 반대되는 입장을 취하는 경우는 다시 어떤 경우들이 가능한가.
[4] 우선 가장 간단하게 S 입장은 엉터리고
T 자신 입장이 옳다고 제시하는 경우를 생각할 수 있다.
그런데 이런 경우에도 다시 다음경우를 생각할 수 있다.
[5] 우선 S 는 얻을 것이 없다고 주장한다.
그런데 그렇게 주장하면서 그런 주장을 언어로 표현한다.
그런데 그런 언설 자체를 행함은 바로 그런 내용이 그렇게 '얻을 수 있기에' 본래 가능한 것이라고 (잘못) 여길 수 있다.
그렇게 보면 이는 처음 S 의 주장과 어긋난다.
즉, S 는 '그런 언어를 얻을 수 없다'고 주장한다.
=> 그런데 S 가 그런 내용을 언어로 표현했다.
그래서 앞 뒤가 서로 모순된다고 보면 S 는 자체적으로 잘못된 주장을 한 것이 된다.
그래서 T 가 옳다고 본다면 이 경우는 [4]에 포함된다.
그런데 사정이 그러함에도 다시 조금 다르게 입장을 취할 수 있다.
즉, 일체를 얻을 수 없다는 내용은 옳다.
그렇지만, 그런 내용을 제시하는 그 내용만은 그렇지 않다고 달리 입장을 취할 수도 있다.
즉 그런 내용을 제시한 그 부분만은 얻을 수 있다. 그래서 실답다고 입장을 취하는 경우다.
좀 더 자세히 살피면 더 복잡하지만,
일단 이와 같이만 경우를 나누고
어떤 결론이 적절한가를 생각해보자.
mus0fl--Guesch Patti - C'est !omme Ca.lrc
수보리 존자가 제시한 내용과 관련해
가능한 5 가지 경우를 제시했다.
그런데 수보리 존자의 입장을 대변한다면 이렇게 답할 것이다.
우선 수보리 존자가 제시한 내용은 언어나 언설인가 아닌가라고 물을 때 다음처럼 답할 수 있다.
"그렇다. 이렇게 말로써 질문하거나 답하는 것처럼 보이는 이 현실에 그런 내용을 얻을 수 없다.
그 내용을 자신이 제시한다.
따로 입을 다물고 침묵하는 상태를 놓고 말이 없다고도 하지만,
이처럼 질문하고 답하는 현실 자체에 그런 말이 본래 없다고 제시한 것이다.
그런 가운데 언어로 표현하는 것은
그처럼 표현하는 부분만은 무언가 얻을 것이 있어서가 아니다.
그리고 어차피 일체가 다 얻을 것이 없기에
아무렇게나 언어로 표현해도 된다는 뜻은 아니다.
어차피 일체가 다 얻을 것이 없는 가운데
무언가를 언어로 표현하는 것은
그런 언어표현을 통해 그런 사정을 잘 이해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함이다.
그리고 이것이 바로 그런 언어 방편[시설]의 의미다" 라고 제시할 수 있다.
위 입장을 먼저 잘 살펴보자.
언어를 본래 얻을 수 없음은 수보리 존자의 말에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다.
다른 이의 말도 그렇고 더 나아가 만화와 같은 엉터리 대사도 마찬가지다.
어떤 것만 특별히 그런 것이 아니고 일체가 그렇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런 바탕이라면 이렇게 제시하거나 저렇게 제시하거나
그런 측면에서는 모두 차이가 없다.
사정이 그렇다면 이것이나 저것이나 무방하다고 해야 할 것 같다.
그래서 위 상황에서 T 처럼 반대내용을 제시하거나
만화처럼 엉뚱한 내용도 괜찮은가.
그렇지 않다고 해야 한다.
그렇다면 비록 언설에 얻을 바는 없어도
각 언설은 그 내용에 따라 차이가 있다고 보게 된다.
즉, 처음 수보리 존자가 '얻을 수 없다'고 제시한 측면에서는 차별이 없더라도
그러나 현실에서 망집을 일으켜 대하는 현실 측면에서는
수보리존자가 제시한 내용은 그런 망집을 제거해주고
그렇지 않은 다른 주장은 그런 망집을 증폭시키는 차이가 있다.
그래서 본 바탕에서는 차별을 얻을 수 없지만,
생사현실에서는 망집을 제거하고 못하고의 차이가 있다.
그래서 방대한 경전내용은 그런 취지에서 제시되는 것으로 이해해야 한다.
그리고 수행도 그런 취지를 잘 이해한 가운데 실천해가야 한다.
mus0fl--Michel Berger - Ca La Fait Pleurer Pour Un Rien.lrc
앞에서 수보리 존자가 제시한 내용과 관련한 5 가지 입장을 대략 살폈다.
그런데 이들 각 입장은 수행에서 어떤 차이가 있는가를 다시 살펴보자.
[1] 설할 것이 본래 없다. 그러니까 그만 일체 언설을 행하지 말자는 입장은
어떻게 보면 아라한의 입장과 비슷하다.
즉 다음처럼 생각한다.
현실에는 생멸이 있다고 보지만, 본래 그런 것은 얻을 수 없다.
본 바탕 실재 진여는 본래 그런 것을 얻을 수 없다.
현실은 망집에 바탕해 일으켜 얻는다.
그리고 하나같이 실답지 않고 생사고통을 가져다 준다.
따라서 망집을 일으키는 재료가 되는 감각현실이나 관념분별 자체를 모두 제거해야 한다.
더 나아가 그런 내용을 일으키는 망식까지 모두 제거해야 한다.
그래서 회신멸지의 상태에 이르러야 함을 목표로 내세울 수 있다.
이는 현실에서 자신의 신체라고 여기는 것들과 지식이나 지혜로 여기는 것을
모두 남김없이 재로 만들고 제거해 무여열반에 드는 것을 목표로 한다.
[2] 일체는 차별없이 얻을 것이 없다. 따라서 S 의 입장이던 T 의 입장이던
그 모든 것이 무방하다는 입장은
실재의 측면에서 보면 현실 일체가 다 차별없이 공함을 제시하는 입장이다.
이런 입장이 잘못은 아니다.
그런데 이를 현실 수행부분에 잘못 적용하면
다음처럼 주장하기 쉽다.
즉, 현실 일체가 본 바탕에서 차별없이 그 내용을 얻을 수 없다.
사정이 그러므로 현실에서 아무런 일도 하지 않거나,
또는 이렇게 하거나 저렇게 하거나 어떤 일을 하더라도 무방하다
또 선도 얻을 수 없고 악을 얻을 수 없기에 원래 망집에서 행하던 행위를 계속 해도 무방하다.
또는 오히려 이전보다 더 심하게 악행을 해도 무방하다.
또 수행을 하더라도 그로 인해 무언가 얻을 바가 있다고 여기고 집착을 갖고
수행을 해도 관계없다.
이렇게 여기고 현실에 임하기 쉽다.
그리고 그런 바탕에서 아무렇게 행하는 것을 수행으로 여기기 쉽다.
즉, 앞 내용이 현실에서 그런 방향성을 주는 것으로 이해한다.
그런 입장을 관철하면 앞과 같은 문제가 제시될 때도
'물이 쇠보다 단단하다'는 말처럼 전혀 엉뚱한 내용이나
또는 T처럼 '모든 것이 실답다'고 설령 주장해도 무방하다고 여기기 쉽다.
이는 일체가 공함을 바탕으로
현실에서 아무렇게 행하거나 말해도 다 무방하다고 여기는 입장이 된다.
그래서 이는 공한 바탕에서 더 심한 생사고통을 겪게 되는 악취공견의 입장이 된다.
[4] 수보리존자가 제시한 내용은 자체적으로 엉터리라고 여기고
반대로 현실에서 일체는 실답게 있다고 여기는 입장은
결국 불교 외 사상가 즉, 외도의 입장이다.
물론 여기에는 망집의 구체적 내용에 따라 다양한 입장이 있다.
그런데 부처님의 가르침을 받아들이지 않는 점이 공통점이다.
[5] 한편 T의 입장처럼 일체가 실답다고 여기는 것은 아니지만,
그러나 부처님이 설한 내용만은 옳고 여기에는 실다운 내용이 있다고 여기는 입장도 있다.
예를 들어 부처님이 다음 내용을 제시하였다.
일체는 무상하다. 고이다. 무아 무자성이다. 열반은 적정하다. 일체가 공하다.
그리고 현실은 연기관계를 통해 나타난다.
수행을 위해서는 이런 수행방안을 취해야 한다고 제시한다.
그래서 부처님이 이런 내용을 제시했다면
이와 반대되는 주장은 실답지 않고 옳지 않다.
그러나 이런 부처님의 주장은 이와 사정이 다르고
그런 내용을 얻을 수 있고 실답다고 여기는 입장이 있을 수 있다.
불교내 설일체유부나 경량부의 입장이 이에 준한다.
부처님이 일체가 무아 무자성 공하다라는 가르침을 받아들이지만,
그러나 부처님의 가르침만은 그렇지 않고 실답다고 이해하는 입장이다.
그래서 세속에서 가진 망상분별과 집착은 부처님의 가르침에 따라 제거하지만,
다만 부처님이 제시한 내용에 대해서만은 사정이 그렇지 않다고 여긴다.
그래서 부처님의 가르침에 대해서는 여전히 세속에서 갖던 망집과 집착을 일으켜 갖게 된다.
또 다른 입장이 있다.
[3] 얻을 것이 본래 없다.
그것은 침묵이나 S 나 T나 엉뚱한 만화 대사나 일체가 그렇다.
현실에서 무언가 말한다해도 그런 현실 자체가 사정이 그렇다.
- 이 부분은 처음 [2] 와 같다.
그런데 다음 부분이 다르다.
일체가 차별없이 공하고
선도 악도 얻을 수도 없음은 마찬가지다.
그런데 그것은 본 바탕인 실재 진여의 측면에서 그렇다는 의미다.
그런데 그런 본 바탕 사정에도 불구하고
현실에서 망집을 일으킨 상태에서는 그런 사정을 이해하지 못한다.
그래서 무언가가 있다고 잘못 여기고 생사고통을 받아간다.
따라서 생사고통을 벗어나려면 이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
물론 본 바탕에서는 그런 생사고통 자체를 얻을 수 없다.
그렇기에 그런 바탕에서는 그런 생사고통을 벗어나라거나 수행을 요구한 적도 없다.
다만 생사현실 안에서
본 바탕에서는 얻을 수 없는데도
일정한 내용을 얻고 이를 재료로 하여 망집을 일으키고 생사고통을 겪는 것이 문제다.
따라서 생사현실 안에서 그에 대한 망집을 제거하려면
본 바탕에서 사정이 그렇지 않음을 이해해야 한다.
따라서 이런 사정을 이해할 수 있는 내용을 방편상 언어로 제시한다.
이 상황은 비유하면 침대에 누어 침대에는 없는 바다나 황금꿈을 꾼 것과 같다.
꿈속에서 황금을 얻었다가 강도에게 뺏기고 꿈을 깼다고 하자.
그런데 침대가 놓여 있는 현실에는 본래부터 그런 내용 자체를 얻을 수 없다.
그래서 황금꿈을 꾸었다고 없던 황금이 새로 생겨난 일도 없다.
그리고 황금을 꿈속에서 뺏겼다고 없던 황금이 있다가 다시 새삼스럽게 없어진 일도 없다.
이런 사정 때문에 아무리 꿈이 생생해도 꿈은 실답지 않다고 제시한다.
또 그런 사정을 이해시키기 위해서
꿈을 꾼 본 바탕이라고 할 현실에 그런 꿈과 같은 내용을 얻을 수 없음을 제시하는 것이다.
즉, 꿈에서 바다나 황금을 생생하게 보았더라도
침대가 놓인 현실에서는 처음부터 그런 것을 얻을 수 없음을 강조하는 것이다.
현실에서 겪는 생사고통도 마찬가지다.
그 성격이 꿈과 같음을 제시하는 것은
현실에서 망집에 바탕해 무언가가 있고 생멸함이 있다고 여기고 임하지만,
본 바탕이 되는 실재에서는 그런 것을 얻을 수 없음을 제시하기 위해서
실재의 공함을 제시하는 것이다.
그런데 생사현실은 꿈처럼 실답지 않지만,
그러나 정작 꿈은 또 아니다.
'무엇과 같다'는 것은 비슷하지만 아니다는 의미다.
생사현실에서 겪는 생사고통이 정말 꿈자체여서 아무 차이가 없다면,
일반 꿈처럼 그대로 방치해도 관계없다.
그런데 꿈처럼 실답지 않은데 꿈과는 다르다.
그래서 꿈과 같다고 표현하고 '현실은 꿈이다'라고는 하지 않는다.
현실은
본 바탕이 되는 영역에서 그런 내용을 얻을 수 없고 실답지 않다.
이런 측면은 꿈과 성격이 비슷하다.
그러나 다음 측면은 꿈과 다르다.
즉, 꿈과는 달리 한 주체가 일정 조건에 놓이면 그 내용을 대단히 반복해 얻는다.
또 그런 내용을 얻는 것은 그 주체뿐 아니라 그런 상태에 놓이는 주체가 대단히 많다.
그리고 그런 상태는 무량겁전이나 무량겁후까지 반복된다.
더 나아가 그 내용도 색성향미촉 법 이런 형태도 대단히 생생하고 명료하다.
이런 점이 꿈과 다른 측면이다.
또 이런 성격 때문에 비록 그 하나하나는 실답지 않지만,
현실에서 그런 내용을 실답다고 여기고 대하게끔 된다.
그런 사정으로 현실 내용은 대단히 실답다는 망집을 잔류시키게 된다.
또 그런 사정으로 그것이 실답지 않지만,
그러나 꿈과 달리 현실에서 겪는 생사고통을 그대로 방치하고 외면하기 곤란하다.
그리고 이것이 바로 수행자가 해결해야 할 문제다.
그런데 이런 문제는 그런 내용을 얻을 수 없는 본 바탕에서의 문제가 아니다.
또 그런 망집을 일으키는 재료가 되는
감각현실이나 관념분별에 그런 문제가 본래 있는 것도 아니다.
그런데도 이런 내용을 현실에 얻고 이를 재료로 망집을 일으키게 되면
이런 망집을 바탕으로 매순간 생사고통을 무량하게 겪어 나가게 된다.
따라서 이런 현실에서 겪는 생사고통을 해결해야 한다.
이것이 현실에서 수행이 요구되는 사정이다.
그리고 이런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망집상태에서 얻을 수 있다고 잘못 여기는 내용은
그 일체를 본 바탕에서는 얻을 수 없고
본 바탕은 차별없이 공함을 이해하는 것이 요구된 것뿐이다.
그래서 같은 내용을 취하지만, 앞과 입장이 달라진다.
즉, 본 바탕이 공하다고 하여 현실을 그대로 방치해도 된다는 입장을 취하지 않는다.
사정이 그렇기 때문에 굳이 겪지 않아도 되는 생사고통을 그렇게 겪으면 곤란하다.
그래서 본 사정을 잘 관하고 이를 바탕으로 해서
수행에 잘 임해 생사고통을 벗어나야 한다고 입장을 취하게 된다.
여하튼 현실에서 각 입장이 다르다.
그리고 현실에서 각 입장마다 각기 완강하게 고집한다.
이런 경우를 놓고
이미 링크로 제시한 망집을 제거하는방안을 바로 적용하기는 힘들다.
그러나 어떤 방안이 효과적이겠는가를 놓고 생각해보아야 한다.
통상 불어노래만 듣다가 스웨덴 노래도 듣게 된다.
그런데 어차피 듣기 능력이 좋지 않기에
잘 알아듣지 못하는 것은 마찬가지다.
첫부분에 talking away 부분을 the king is away 라고도 듣게 된다.
여하튼 감상은 자유다.
앞에서 일반적으로 갖는 망집을 해소시키는 기본 5 방안의 골격을 소개했다.
●연기와 재가 불로 인해 나타난다는 망집을 이해하는 5 가지 방안들의 기본골격
http://buddhism007.tistory.com/4629#034
sfed--결정비니경_K0035_T0325.txt
sfd8--불교단상_2562_06.txt ☞ ☞●연기와 재가 불로 인해 나타난다는 망집을 이해하는 5 가지 방안들의 기본골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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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앞에서 또 수보리 존자가 제시하는 내용을 이해하는 방식으로
5 가지 방안을 제시했다고 해서
이 각 입장에 대한 방안도 위 5 가지 방안을 도식적으로 적용한다는 의미는 아니다.
부처님이 제시하는 가르침을 받아들이지 않는 입장을
불교에서는 외도라고 표현한다.
이 경우 부처님 가르침을 받아들이고 수행을 하는 입장은
부처님의 가르침을 받아들이고 수행하지만,
자세히 보면 그 입장도 조금씩 차이가 있게 된다.
여기에는 사정이 있다.
부처님이 제시하는 가르침을 받아들이고 수행에 임하기 이전에
그가 어떤 상태에 있었는가가 우선 영향을 미친다.
예를 들어 부처님이 여러 가르침을 제시하는데
그 가운데 일부 내용만 취해 듣고 자신의 개인 사정 때문에
이후 가르침을 듣지 않고 일을 보았다는 경우도 있다.
또는 반대로 부처님의 가르침을 처음 대하기 전까지
자신이 일정한 내용을 익힌 경우
부처님의 가르침을 대하면서 자신이 따로 익힌 내용을
덧붙여서 해석을 가하는 경우도 있다.
그 외 부처님의 가르침을 대하기 전에
자신 나름으로 일정한 분별의 체계나 틀이 확고하게 있었다는 경우에
부처님의 가르침 가운데 잘 이해되지 않는 부분을 만나면
무조건 자신이 기존에 갖고 있던 체계에 억지로 넣어 해석하고 이해해 받아들이는 경우도 있다.
이런 경우를 격의불교라고도 표현한다.
예를 들어 이런 경우다.
부처님이 일체가 공하다라고 제시하는 경우
먼저 공이란 무슨 의미인가가 문제된다.
그런데 어떤 이가 무언가가 있다면 있는 것이고
있지 않다면 없는 것이다라고 2 분법상으로만 분별을 행해 왔다고 하자.
그러면 잘 이해되지 않는 공하다는 표현을 이해할 때
이것이 무언가가 있지 않다는 내용이라면
이를 자신이 기존에 이해하던 '무'라는 관념에 억지로 끼어 넣어 이해하게 된다.
[img2-49] [그림] - 이하 아래 부분은 현재 [작성, / 표현교정, 수정, 보완/ 문단 재배치 순서 정리 등 ] 작업중입니다. -
작업 시점 2563_1223_025705
이는 다음 현상과 관련된다.
헬리콥터를 한번도 보지 못한 아이에게
헬리콥터를 설명해주려고 한다고 가정해보자.
그런데 헬리콥터는 헬리콥터다라고 설명하면 알아듣지 못하게 된다.
그래서 이런 경우 상대방 아이가 이미 알고 있는 내용을 살펴본 다음
아이가 잠자리나 나비나 비행기는 알고 있다면
헬리콥터란 잠자리 비슷한 비행기라고 방편을 사용해 제시하게 된다.
그런데 문제는 이 아이가 그렇게 제시된 내용을
그대로 집착해서 헬리콥터란 잠자리 비행기라고 관념을 형성하는 경우
나중에 진짜 헬리콥터를 대하고도 이것이 헬리콥터라고 이해하지 못하는 경우가 발생한다.
왜냐하면 그 아이가 볼 때 헬리콥터는 전혀 잠자리와 비슷하지 않다.
이것이 어떻게 잠자리 비행기인 헬리콥터일 수 있는가.
이렇게 이해하기 쉽다.
이것이 격의 불교가 갖는 현상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외국어 번역과정에서는 이런 현상이 쉽게 발생한다.
언어학상 어떤 한 외국어 단어가 갖는 의미를 그대로 일치한 형태로 갖는
자국어 단어를 발견하기 곤란한 경우가 대단히 많다.
그런 경우 어떤 외국어의 의미가 과연 무언가가 문제될 때
이미 자신이 갖고 있는 관념의 틀로 그것을 이해하고
그것을 고집하면 위와 같은 현상이 쉽게 발생하게 된다.
예를 들어 상(相) 이란 표현을 Lakṣaṇa라고 표현하는데
Lakṣaṇa 란 존재가 문제되는 3 측면을 벌여
실상(實相 dharmatā ; dharma-svabhāva) - 상(相 Lakṣaṇa ) - 상(想 Saṃjña)
으로 나열할 때 제시하였다.
그런데 만일 Lakṣaṇa가 처음에 무엇인가를 못 알아듣는 이에게
Lakṣaṇa 를 다음과 같이 설명하려고 한다고 해보자.
Lakṣaṇa 란 Lakṣaṇa 다.
그리고 Lakṣaṇa 에는 있다는 Lakṣaṇa 와 없다는 Lakṣaṇa 가 있다.
또 Lakṣaṇa 에는 좋은 Lakṣaṇa 와 나쁜 Lakṣaṇa ,
그리고 좋지도 않고 나쁘지도 않은 Lakṣaṇa ,
그리고 좋기도 하고 나쁘기도 한 Lakṣaṇa 가 있다.
그리고 Lakṣaṇa 란 Saṃjña 와 비슷하지만 Saṃjña 아닌 것이다.
그러면 Saṃjña 는 또 무엇인가 물을 때
Saṃjña 는 Lakṣaṇa와 비슷하지만 Lakṣaṇa 아닌 것이다.
이렇게 제시하면
이런 설명을 대한 이가 Lakṣaṇa 가 무엇을 가리키는 것인지
알 수 있겠는가.
그래서 이런 경우는 결국 상대가 이미 이해하는 내용을 바탕으로
이 내용을 모두 설명해야 한다고 보게 된다.
그래서 결국 하나의 표현에 가장 가까운 표현을 찾아서
이것을 번역해서 설명해 주어야 하는 문제가 발생한다.
반야심경을 보면
조견오온개공..이런 표현이 나온 다음
이 공한 상태에 대한 설명과정에서
무라는 표현이 반복제시되는 것을 볼 수 있다.
그래서 이 표현을 놓고 공을 이해하면
공이란 무를 의미하는 것인가보다 이렇게 이해하기 쉬운데
그 사정은 앞과 같은 사정 때문에 나타나는 것이다.
공을 이해하지 못하는 상대에게 공을 이해시키는 과정인데
공을 공하다라고만 설명하면 못 알아듣는 것이다.
공함은 무언가가 전혀 없는 것은 아니지만,
그러나 또 그렇다고 a 란 것이 있다고도 할 수 없는 그런 상태인데
현실에선 무언가가 있다고 망상분별을 일으키고 집착을 가져서
생사고통을 받는 경우가 대부분이므로
일단은 실상의 상태가 그런 것이 아니다라는 것을 제시하기 위해서
무라는 표현을 통해서 그 내용을 이해시키는 방편인 것이다.
그런데 처음에 그렇게 공에 대해 이해를 시작하는 것은 좋지만,
이것을 다시 고집하게 되면 그 부작용이 발생하게 된다.
그래서 그런 이해가 충분히 되고, 오히려 이로 인해
부작용이 나타나는 상태에서는
다시 이 부작용을 제거하기 위해
오히려 진여 실상 등은 상락아정의 상태라고도 다시 표현하게 된다.
그래서 이런 방편 시설의 사정을 먼저 잘 이해해야 한다.
부처님의 가르침을 대하는 각 입장따라
하나의 내용을 달리 이해해 받아들이는 현상을 앞에서
제시했는데
위와 같은 현상은 어느 환경에서나 어느 정도 공통된다.
왜냐하면 어느 상황에서나 일반적인 입장에서는
부처님의 가르침을 잘 이해하지 못하고
망집에 바탕해 임해온 상태가 거의 대부분인 것은
마찬가지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부처님께서 일정한 상태에 상대가 도달하게끔 하기 위해서
다양한 방편을 사용하게 되는 사정이 있다.
그래서 처음에 일정한 방편 시설을 통해서
기초적인 명제를 제시하게 되는데
문제는 그 명제를 대하는 상태에 따라서
그 명제가 갖는 의미를 적절하게 이해하지 못하는 상황이 나타난다.
그래서 처음에는 부처님의 가르침을 통해서
기존에 세속에서 가졌던 망집을 대부분 제거하지만,
그러나 기존에 가졌던 망집을 다시 부처님이 제시한 가르침을 향해서
일으켜 갖고 임하는 경우가 발생하게 된다.
예를 들어 부처님이 일체는 무상하다.
이렇게 제시했기 때문에
이 내용은 절대적이다.
이런 내용은 실답게 있다.
부처님이나 수행방안이나 수행목표도 마찬가지다.
이렇게 이해하고 임하게 된다.
그런데 이런 기초적 과정을 넘어서
조금 높은 수준이 되게 되면
그런 상태에서 계속 부처님이 제시한 가르침의 내용을 대하는 입장과
자신의 입장을 구분하여서 제시하게 된다.
그런데 이 경우에도 또 마찬가지로
다시 그런 입장을 편벽되게 집착해서
이런 각 입장이 절대적으로 구분되는 것처럼 입장을 취하게 되는 경우도 있다.
결국 약간 편집증적으로 또는 편향되게 자신의 입장을
다른 입장과 구분하고 그 내용이 절대적이고 실재한다는 또 다른
입장이 되기 쉽다.
그런데 부처님이 이런 설법을 뗏목과 같은 방편으로 삼아
도달하게 하고자 하는 상태는
그런 것이 아니다는 것을 이해하고
결국 부처님이 제시한 가르침들은 모두 다
부처님의 깨달음을 열어서 중생에게 보이고
이를 통해서 중생들이 망집을 제거하고 깨달아서
부처님의 깨달음에 들어오게 하는 취지에서
그런 내용들이 제시된 것이라는 사정을 종합적으로 이해해야 한다.
이른바 개시오입이라는 표현이 이를 가리키는 것이다.
그리고 그 방안의 골격을 보면
결국 망집을 해소시키는 5 가지 방안은
사실은 부처님의 가르침을 대하지 못하고
엉뚱한 망집에 바탕해서 사견을 갖고 임하는 외도의 상태나
일반적인 상태를 대상으로 하는 공통방안이라고 이해해야 한다.
그 가운데 앞과 같은 사정으로
비록 부처님의 가르침과 부처님이 제시한 명제를 바탕으로
수행에 임하는 것은 같지만,
조금씩 다른 내도 안에서도 조금 불충분한 경우는
결국 위 5 가지 방안에 준해서 그 부분을 잘 이해해 나가야 한다고 보게 된다.
mus0fl--Marie Laforet - Noe.lrc
이미 뉴스 사이트에서 보고되는 수많은 사건 사고의 내용을 보았는데
현실에서 이런 사건 사고 내용을 놓고
이 현실에 이와 같은 주체가 이와 같이 행하는 행위와 결과가 그렇게 있다고
이해하고 대할 때 이런 일반적인 망집 증상을 해소하기 위해서
사용할 수 있는 기본적인 5 가지 방안을 살폈다.
그것은 부처님이 제시하는 기본적인 명제를 받아들이지 못하는
입장을 상대로 하여 골고루 상대의 상태에 맞추어 사용할 수 있는 방안들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그 가운데 가장 망집의 정도가 심한 경우는
그 가운데 5 번째 방안이 실효적이라고 보게 된다.
그것은 상대가 이해하는 그런 내용이 모두 실답게 현실에 있다고 받아들이는 바탕에서도
그 상대가 집착하고 갈구하는 그런 좋음을 가장 많이 오래 얻어낼 수 있으려면
이해가 되던 되지 않던,
부처님을 믿고 3 보에 귀의하고 수행방안을 취해 현실에 임해야 한다는 내용을
제시하는 방안이다.
그래서 이런 경우는
상대가 실답다고 보고 좋다고 보는 여러 내용을 나열해 놓은 다음
이들 가운데에서 무엇이 다른 것보다 더 좋고
또 그 좋은 정도의 비례관계는 어떤가부터 기초적으로 살펴야 한다.
그리고 그런 좋은 것을 얻기 위해서는
좁고 짧고 얕은 관찰에 의해 일반적으로 그것을 성취할 수 있는 방안으로 보는 내용과
부처님이 제시하는 방안을 놓고 어떤 것이 과연 그런 좋음을 많이 빨리 쉽게 오래 성취할 수 있는 방안인가를
그런 입장에서 판단할 수 있게 내용을 제시해주는 것이 필요하다.
이것은 결국 일반 중생이 갈구하는 소원을 일단 성취하기 위해서라도
수행방안을 실천해야 한다고 제시하여
적어도 3 악도의 생사고통을 받는 상태로부터는 벗어나게끔 하고
그 다음에 점차 천천히 수행에 진입시키는 방안이라고 할 수 있다.
그래서 상대의 망집 정도가 대단히 극심한 경우는 이 상태에서
우선 인천의 가르침, 즉 현실에서 일단 부처님의 가르침을 따라 10선을 닦아서
3 악도의 생사고통을 면하고 하늘에 이르는 방안을 먼저 제시하게 된다.
또 그러기 위해서 현실에서 좋다고 보는 각 항목을 나열하고
다른 항목은 또 다른 항목과 어떤 비율 정도의 가치를 갖는가부터
살펴야 한다.
예를 들어 현금과 보석 부동산 동산 이런 여러 항목과 함께
다시 자신의 두 눈, 심장, 간, 그리고 손과 발과 같은 신체, 생명
이런 것을 나열해 놓고
이들 사이에 무엇이 무엇보다 나은가.
그리고 그 비율은 어느 정도인가를 살피게된다.
그리고 여기서 두 눈과 심장 이런 것은 좋다고 보는 여러 항목 가운데
서로의 가치를 비교할 때 기준이 되는 가치 추라고 할 수 있다.
그래서 각 가치를 비교할 때
아무리 한 쪽 저울에 무량하게 어떤 좋은 것을 올려 놓아도
두 눈과 심장이 갖는 가치를 넘어서지 못한다고 보는 항목을
돈 이하의 가치라고 표현하는 한편,
그와는 달리 이와 대등하거나 이를 넘어서는 가치를 돈 초과의 가치라고
구별해 표현할 수 있다.
그리고 자신이 스스로 볼 때 우주에 가득 보석이나 현금을 쌓아 놓고
한쪽에 자신의 두눈이나 심장 생명 이런 것을 올려 놓고
이 둘 가운데 하나를 취해야 한다고 하면
어떤 것을 선택하게 되는가를 또 살펴야 한다.
그래서 스스로 자신의 생명이나 신체가 갖는 가치를 평가할 수 있게 해야 한다.
그런데
자신이 평소 이런 가치를 갖는 생명과 신체를 가지고 어떤 활동을 한다면
이를 통해 어떤 가치를 얻어야 이익을 얻는 것인가를 놓고
이번 생 안에서도 수행과 일반적인 활동 사이에서 선택을 할 수 있어야 한다.
예를 들어 일반적인 이익 = 수익 - 비용의 계산에서
이런 생명이나 신체가 갖는다고 보는 가치는
자신의 죽음으로 언젠가는 0 이 된다고 보아야 하므로,
어떤 사업활동을 할 때 언젠가는 0 이 된다고 보는 자산처럼
감가 상각 비용을 계산하면서 임해야 한다.
예를 들어 어떤 이가 사업활동에 필요해서
자동차를 1 억원을 주고 구해서 사업을 했다.
그리고 5 년이 지나 폐차를 하게 되었다.
그런데 5 년 동안 5000 만원의 수익을 거두었다.
그렇다면 과연 이익을 얻는 활동을 한 것으로 볼 것인가.
이 문제다.
이것은 그런 사업을 하지 않고
그냥 1 억원을 그대로 보관하고
사업활동을 하지 않은 경우를 놓고 함께 비교해야 한다.
그래서 그런 경우는 그대로 1 억원이 그대로 있다고 기준을 잡는데
자동차는 1 억원에 구입해서 5 년후에 0 이 된 것이다.
그리고 그 기간 동안 5 천만원을 수익을 얻은 것이다.
그래서 자동차처럼 언젠가는 0 이 되는 자산을 가지고
무언가 활동을 할 때는 그 자산이 있을 때는 그것을 잘 의식하지 못하지만,
이 자산이 언젠가는 0 이 된다는 것을 념두에 두고
미리 그 비용을 예상기간으로 나누어 감가상각비용을 미리 계산한 가운데
수익 - 비용을 평소 산수 계산하면서 임해야
착오가 발생하지 않는다고 보게 된다.
그래서 이와 마찬가지로 비록 자신의 신체와 생명이
아직 건강하게 유지될 때는
이 신체나 생명이 얼마만한 가치를 갖는가를 상대적으로 평가하지 못할 수 있지만,
결국 죽음을 맞이하면
주관적으로 우주보다 가치가 있다고 보는 자신 뿐만 아니라,
그런 자신이 얻어냈다고 보는 재산 등 자신의 것이 모두 주관적으로
0 이 된다는 사정을 미리 감안해야 한다.
그리고 한 사람이 대략 100 년 동안 생존하고 죽음을 맞이한다고 본다면
자신이 갖는 가치를 대략 469 조원은 초과한다고 가정하고
이 금액을 100 으로 나누어 1 년당 소멸되는 감가 상각 비용액을
먼저 계산해 보아야 한다.
그런 경우 하루당 100 억원이 감가 상각 비용으로 없어지는 상태인데
이런 비용을 들이고 어떤 활동을 해야 그런 비용을 넘는 수익을 거두어
이익을 얻을 수 있겠는가 이 문제부터 살펴야 한다.
그렇지 않고 이 문제를 의식하지 않고 임하면
결국 자신이 무언가 소득을 얻었다고 하더라도
하루의 감가 상각 비용도 제대로 충당하지 못하는 상태가 된다고
산수 계산을 잘 해야 한다.
결국 자신이 대단히 소중하다고 보는 자신의 생명이나 신체가
죽음을 맞이해서 현생에서 집착하던 그 모든 것이 0 이 된다는 것을 가정하면,
매 순간 돈 이하의 가치를 갖는 것을 가지고
돈 초과의 가치를 갖는 것을 얻어내야만 겨우 이익이 발생하게 된다는
사정부터 잘 이해해야 한다.
하루당 최소 100 억원 이상의 감가상각 비용이 없어져 가는 상태에서는
현금으로 하루에 아무리 많이 번다고 해도
이 비용을 넘어선 수익을 얻어내기 힘들다.
그리고 알고보면 위 금액 자체가 단지 숫자로 환산해서 표시하기 위해
적어도 그 금액 이상의 가치가 없어져 간다고 제시한 것이어서
사정이 더 어렵다.
그러나 만일 매 순간, 생명이나 생명의 가치를 초과하는 어떤 가치를
얻어내는 활동을 하고
더 나아가 자신이 보유한 돈 이하의 가치를 갖는 품목을
매번 돈 초과의 가치를 갖는 품목으로 바꾸어 내는 활동을 열심히
한다면 또 사정은 달라진다.
그것은 현생 안의 가치 회계 계산을 할 때도 그렇지만,
특히 부처님이 무량겁에 걸쳐 생사윤회를 한다고 가르치는 바탕에서는
이 문제는 이번 생을 마치고 다음 생을 맞이할 때
차로 비유하면 이번에 타고 다닌 인간형 자동차가 폐차 처분되고 난 후
다음 생에서는 바퀴벌레형 자동차를 간신히 구해 타야 하는가.
아니면 닭 형태 자동차를 구해 탈 수 있는가 .
아니면 하늘 형태 자동차를 구해 탈 수 있게 되는가의
차이를 발생시킨다.
그래서 이런 측면에서도
일정한 비용을 들여서 많은 수익을 거두고 이익을 얻어내려면
결국 가장 가치가 있는 품목이 무언가부터 잘 판단해서
이것을 잘 얻어낼 수행방안을 취해 임해야 한다고 제시하는 것이다.
그것은 결국 현실에서 자신이 집착하는 좋음을 가장 많이 오래 얻어내려면
일반적으로 좋음을 놓고 취하는 자세
즉 자신이 얻은 좋음을 대단히 집착해서 이를 아끼고
다른 이에게 결코 베풀지 않으려 하는 탐욕의 자세를 제거하고
또 자신이 집착하는 좋음을 얻기 위해서는
다른 생명이 대단히 집착하는 생명이나 신체 재산 가족을 함부로 침해하면서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추구하는 자세를 제거해야 하고
또 반대로 자신이 집착하는 좋음을 어떤 다른 생명이 침해하는 경우에는
이와 반대로 이에 대해 상을 일으켜 취하지 않고 분노를 일으켜 반응하지 않고
그것을 평안히 참고 받아들이는 안인의 자세가 기본적으로 요구되고
이를 한 생을 통해 꾸준히 정진해 나가는 것이 요구된다.
이것이 결국 수행방안에서 제시하는 계- 정 - 혜 3 학의 항목 가운데
가장 기본적으로 요구되는 계에 해당하는 기본 수행덕목들의 내용이 된다.
즉, 보시- 정계 - 안인 - 정진 항목이 그것이다.
이것이 구족되지 않으면 결국 외관상으로는
어떤 현금 수입을 많이 얻고 풍요로운 상태를 얻은 것 같은데
결과적으로 이익을 얻어내지도 못하고
막대한 손해를 받는 상태가 곧바로 된다.
그것이 부처님이 망집에 바탕해서 탐욕과 분노 어리석음을 바탕으로
감가상각 비용 하나 제대로 산수로 계산하지 못한 가운데
쓸모도 없고 가치도 없는 것을 붙잡고 업을 행한 가운데
맞이하게 되는 3 악도의 생사고통의 문제가 된다.
■■■
● 현실에서 생명에 대한 감가상각비용 계산과 수행으로의 진입
http://buddhism007.tistory.com/5275#001
sfed--중아함경_K0648_T0026.txt ☞중아함경 제 16 권
sfd8--불교단상_2562_12.txt ☞ ☞● 현실에서 생명에 대한 감가상각비용 계산과 수행으로의 진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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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조금 수준이 높다면
결국 일반적으로 망집을 일으켜
자신이 평소 자신이라고 보는 신체가 소멸되면 그것으로 모든 것이 끝이라고 이해하는
단멸관을 제거하고
망집에 바탕해 무량겁에 걸쳐 생사윤회하는 생사현실을 올바로 관하는 한편,
무량겁에 걸쳐 망집에 바탕해 받게 되는 생사고통에서 벗어나고
무량겁에 걸쳐 무량한 복덕과 수명과 지혜를 구족해서
다른 중생을 생사고통에서 벗어나게 하고
불국토를 장엄하고 성불하는 상태에 이르도록 해야 한다.
또 이를 위해서는
기본적으로 평소 현실에서
예를 들어 뉴스 사이트에서 보고되는 내용들을 놓고
이 현실에 그런 주체나 이를 대하는 자신의 정체에 대하여
자신이 갖는 견해가 왜 망집인가를 잘 이해하고
부처님의 가르침을 잘 이해하기 위해서
앞에서 제시한 5 가지 방안을 놓고
골고루 그 내용을 잘 살피는 것이 기본적으로 요구된다.
그런데 여기에서 부처님의 가르침을 비록 받아들이지만,
조금 불충분하게 이해하는 이른바 불교 내
각기 다른 입장을 또 추가적으로 검토해 보아야 한다.
일단 쉬고 이어 나가기로 한다.
mus0fl--Marie Laforet - Si (Viens).lrc
이제 이 페이지를 일단 마쳐야 한다고 본다.
앞에서 일반적 입장에서 가장 증상이 심하다고 보는 상태를 놓고
어떻게 그 망집을 해결할 것인가를 살폈다.
중생제도에 임하는 수행자 입장에서는 대부분 이 부분을
문제로 보게 된다.
그래서 결국 일단 상대를 막무가내로 떼를 쓰고
억지를 피우는 유치원 생으로 놓고
일단 상대가 정상적인 수행부분으로 진입할 때까지
다양한 방편이 필요함을 이해할 수 있다.
그렇게 할 수 있는가 없는가가 결국
그 수행자의 역량과 관련된다.
이론상 무상해탈 공해탈삼매를 익히면
사실 상대가 호랑이인데 상대를 수행에 진입시키기 위해서는
먹이로 자신의 신체를 제공할 도리 밖에는 없다.
이런 경우에도 자신의 신체나 생명을 희생해서
제공하는 형태까지 경전에서 제시된다.
이런 경우 일반적인 입장에서는 이를 모두
상상속의 지어낸 허구적 이야기
그러나 딱히 교훈도 얻기 힘들고
현실에서 도저히 실천하기 힘든 내용 이렇게 보게 된다.
그런데 사실은 그것은 망집에 바탕한 판단이다.
수행자는 망집상태에서 있다고 보는 그런 내용이
사실은 환과 같고 꿈과 같고 마치 최면사가 최면을 걸어
혁대를 뱀이라고 보이게 하는 것과 같은 상황이어서
상대가 그렇게 집착하는 그 내용이 거기에 없다는 것을
잘 이해하기에 그런 내용을 제시하는 것이다.
그러나 아무리 사정이 그렇다해도
생사현실에서 자신의 신체나 생명을 내놓고
그렇게 보시하면서 수행하기는 대단히 힘든 것이 현실이다.
그래서 그런 모드는 현실에서 예를 들어 어머니가
자신의 자식을 위해서 자신의 생명을 희생한다.
이런 경우에서나 아주 희박하게 볼 수 있고
자신과 현실적으로 그런 관계도 아니라고 보는 가운데
무량한 중생을 위해서 그렇게 임한다는 수행자는 대단히 희박한 것이다.
그러나 만일 그렇게 임하면, 그 수행자는 대단히 수행수준이 높고
성불하는데 필요한 수행기간도 대단히 짧아진다고 원칙적으로 제시된다.
그런데 여하튼 그런 상태까지는 아니더라도
여하튼 그처럼 현실의 정체나 자신의 정체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고
막무가내로 억지를 피우고 임하는 유치원생인 경우
유치원 보모나 선생님은 이런 유치원생을 잘 다루는데
자신은 한 시간만 유치원에 있으면서
막무가내로 고집을 피우고 말썽을 피우는 유치원생들을
하나하나 상대하다보니 머리 골치가 다 아프고
없던 화병이 다 생긴다. 이러면 무언가 부족한 상태임은 분명하다.
그래서 결국 수행자가 중생제도에 임하는 상황에서는
이런 상태의 중생을 제도할 수 있는 무량한 방편지혜를 얻어내는 것이
요구되는데 이것이 말 그대로 중생의 상태가 무량하고
중생이 고집하고 집착하는 내용이 무량하기에
무량겁에 걸쳐서 노력해도 잘 성취되지 않는다고 일반적으로 보게 되는 부분이다.
그래서 일반 수행자는 잘 안 되는데
그러나 어떤 수행자는 된다.
이 부분에 주목해야 한다.
그런 분들이 대표적으로 문수보살님 보현보살님 지장보살님 관세음보살님
이와 같은 대력보살마하살 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이 분들의 특징이 뭔가하면
일반 수행자 입장에서는 도저히 해결해주기 힘든
중생들이 갖는 억지형 소원을 접수해서 일단 잘 해결해주고
이를 바탕으로 수행에 잘 진입시킨다는 점이다.
중생의 소원이 무량해서
안락하게 되기를 바라고
질병이 없기를 바라고
그 상태에서 이제 수명이 연장되기를 바라고
재물이 구족하기를 바라고
이러다가
교도소나 지옥에 들어가게 되면
다시 그런 지옥의 고통을 면하기 바라고
이런 식으로 무량하게 소원을 나열하는데
사실은 현실에서 이 가운데 어느 하나도 쉽게 성취하기 힘들다.
그런데 수행자 입장에선 이것이 바로
유치원생들이 엉뚱한 것을 거기에 있다고 여기면서
장난감을 내놓으라고 떼를 쓰는 상황이다.
그런데 실답지는 않지만,
그런 장난감을 요청받는대로 척척 제공해줄 수 있는 것은
또 아니다. 대단히 힘들다. 이런 의미다.
그래서 그런 방편지혜를 구족해서 그 문제를 해결함과 동시에
이를 통해서 깨달음을 얻는 수행에 진입시켜
생사고통을 면하게 해주는 능력이 과연 있는가 없는가.
때로는 수행자 자신도 같은 문제를 놓고 해결하지 못해
같은 생사고통에 묶여 있는가 없는가.
이런 부분에서 수행자의 수준과 단계가 차별이 나타나는 것이다.
그래서 위 문제를 수행자는 잘 살펴서
수행에 임해야 한다.
그런데 일단 그런 상태에서 벗어나
앞에서 내도라는 이상한 표현을 새로 만들어서 표현했지만,
일단 수행에 진입해서
부처님이 제시한 기본 명제를 받아들이고
실천하는 입장 안에서도
앞에서 본 것처럼 여러 문제가 있다고 보게 된다.
그것은 앞과 같은 유치원 생 상태에서
수행에 진입해 내도의 범위에 들어가는 것 자체가 쉽지 않은 것은
사실이지만,
설령 그렇다해도 다시
대단히 수준이 높은 대력보살님의 상태에까지 도달하려면
다시 넘고 넘어야 할 부분
그리고 이론상으로라도 일단 이해해야 할 내용들이
대단히 많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래서 이 부분을 또 잘 붙잡고 살펴야 한다.
그래서 기본적으로 이 경우에도
망집을 제거하는 1,2,3,4,5, 의 방안이 다 적용되는 것은 사실이지만,
조금 더 세밀하게 살펴야 하는 것이다.
mus0fl--Edith Piaf - Exodus.lrc
앞에서 유치원생의 비유를 들어
어떤 이는 이런 경우도 잘 상대해서 이끄는 경우가 있는데
어떤 이는 이런 유치원생을 상대하다가 자신부터 화병에 걸린다고 제시했다.
그런데 그런 경우도 또 다른 상대를 대하면 또 경우가 달라짐을 보게 된다.
예를 들어 자신이 잘 알아서 연구하는 대학원생을 지도하는 대학교수를 놓고 살피면 마찬가지다.
유치원생을 잘 교육하는 이가 또 대학원생을 잘 지도하는 것은 반드시 아니다.
그런데 대학원생을 잘 지도해도 유치원생을 또 지도하는데는 마찬가지로 화병이 난 상태가 된다.
이처럼 각 경우가 어느 정도 상대적인 관계가 있음을 보게 된다.
그런 가운데 가장 모범적인 부처님의 경우를 놓고 보면
일자 무식인 수드라 출신의 수행자부터,
이미 대단히 박식한 상태로 수많은 제자를 거느리고 있던 이들까지
다 망라해서 모두 일정한 수행상태에 도달할 수록 이끄는 한편,
아무리 그렇다해도 자신의 가족이나 친족은 이끌기 힘들다고 대부분
어려움을 호소하는데 또 이 경우도 다 수행에 진입할 수 있게 이끌고
또 아무리 실력이 좋아도 자신을 믿고 따르는 충실한 제자를
단 한 명 얻는 것도 현실적으로 힘들다고 보는데
당시 1250 여명에 달하는 제자를 한 곳에 수용해서
수행을 하게 했다는 사실을 보면서
수행자가 나아갈 방향이 어느 방향인가를 미루어 살필 수 있다.
아무리 유능한 선생님도 가족이나 친족을 상대로 교육하기 힘들다는 것은
사정이 있다. 가족은 늘 가까이 보아왔다. 이 점이 작용한다.
내가 저 아이를 젖을 먹어셔 키웠고 어릴 때 다 돌보아 주었다.
또는 어릴 때 무엇을 어떻게 했는지도 다 옆에서 보고 알았다.
이런 바탕이 작용하기에 사실은 힘들다고 보는 것이다.
여하튼 부처님 당시 부처님이 제자들이 수행한 기원정사나 죽림정사
이런 유적은 지금도 살펴볼 수 있다.
잠깐 링크를 걸어보기로 한다.
기원정사 http://buddhism007.tistory.com/4652
이곳이 이른바 이 기원정사의 면적만큼 금을 깔아서
수달타 장자가 구하고
또 기타태자가 그 사정을 이해하고 나머지를 기증해 건립한 기원정사다.
문명이 발달해서 직접 방문하지 않고도 그 모습을 살필 수 있게 된 것도
놀라운 일인데 여하튼 기원전 2562 여년 이전에
1250 여명에 달하는 수행자가 여기에서 수행을 함께 했다.
이런 사실을 살피는
한편 지금 상당히 풍요롭고 문명이 발달한 지금 상황에서도
그런 일이 쉽게 가능한가. 그런 면도 또 념두에 두어야 한다.
그리고 또 그런 기원정사를 설립해 기증한 수달타 장자가
살았다는 저택도 지금 남아 있다. 지금 보아도 왠만한 규모가 아니다.
그런데 더 놀라운 것은 그런 부자 상인인 수달타 장자는
자신이 입고 먹는 옷과 음식과 거처하는 장소가 있다면
심지어그 집에서 일하는 하인까지도
모두 같은 형태로 입고 먹고 자게 했다는 점이다.
그리고 그 많은 부를 홀로 생계를 해결하기 힘든 고아나 어려운 이를 돕는데 사용해서
세상에서 그를 급고독장자라고 불렀다는 것이다.
오늘날도 돈이 좀 많으면 상대적으로 돈이 없는 이를 상대할 때
갑질행태를 보인다고 해서 문제가 되는데
수준이 달라도 너무 다르다는 측면을 보게 된다.
여하튼 그가 그런 부를 가졌다는 것도 이해하기 힘들지만, 또 그런 부를 갖고도
자신이 거느리는 수많은 이들을 모두 차별없이 평등하게 대우하는 한편
어려운 이를 돕는데 막대한 부를 사용하는 한편,
더 나아가 부처님의 설법을 한번 듣고 크게 깨달은 바가 있어서
부처님과 제자들이 머물 시설을 만들기 위해 땅을 구입하는 과정에서도
가진 황금창고를 다 헐어서 땅을 구해서 기원정사를 세웠다는
이런 내용이 잘 믿기지 않는 내용이다.
그런데 여하튼 그런 흔적을 오늘날도 찾아 볼 수 있다.
그외에도 왕이 기증한 죽림정사도 사정이 비슷하고
그런 사연들이 담겨 있는 각 불교 유적지를 또 한편으로 살피면서
앞에서 처음 제시한 뉴스 사이트에서 보는 사건 사고의 내용도 살피고
이와 함께 각 주체가 매 순간 집착하고 추구하는 것을 놓고
그 정체가 과연 무엇이고 그 가치가 과연 어디에 있는가
이런 문제를 함께 살필 필요가 있다.
불교유적지 http://buddhism007.tistory.com/3710
그런데 여하튼 일반적인 수행자 입장에서는
어느 정도 이 문제가 상대적임을 먼저 이해해야 한다.
앞에서 대학원생은 잘 지도하지만,
정작 유치원생에게는 두손을 드는 대학교수의 문제가
사실은 일반적인 수행자의 상황이라는 의미다.
그래서 수행자 수준이 조금 부족한 경우에도
그 상대의 수준이 대신 어느 정도 높으면
또 상대의 망집을 잘 제거할 수도 있다고 보지만,
이것이 서로 적절하지 않으면 대단히 곤란하고
그 노력이나 시간도 상당히 많이 걸린다고 보게 된다.
그런데 또 반대로
수행자 수준이 상당히 높은 상태가 되면
또 앞과는 반대로 상대가 축생처럼
수준이 대단히 낮더라도 또 망집을 제거할 수도 있다.
이런 사례도 보게 된다.
예를 들어 마명보살이 설법을 하니
며칠 굶은 말들이 앞에 놓여 있는 음식을 먹지 않고 계속 설법을 듣다가
끝내 말들이 다 함께 소리내어 울었다는 내용이 전해지는 것이다.
그래서 마명보살의 명호가 마명이 되었다는 내용이 전해진다.
그런 가운데
유치원생 교육도 문제지만,
말을 알아듣지 못하는 개나 곰 등을 교육해서
방송에 출연시키는 분의 경우를 놓고 보면
일반적으로는 말을 못 알아듣기에
심하게 채찍을 사용하거나 당근의 방법을 동원해서 그렇게 할 것 같은데
전혀 그렇지 않음을 보게 된다.
물론 그렇게 축생을 대해서 뉴스사이트에 보도되는 내용도 있지만,
정작 TV에 훈련된 모습을 보여줄 정도로 축생을 잘 훈련시키는 분의
교육과정은 전혀 그렇지 않음을 또 보게 된다.
그래서 수준이 높은 이가 임하면 또 상대적으로 달라진다는 것을 보게 된다.
이런 내용들이 지금 현실에서 망집을 일으켜
정신없이 진지하게 임하고 있는 이를 상대로
어떻게 방편을 취해야 그 망집상태에서 벗어나
생사고통을 벗어나게 되는가 이 주제와 대단히 밀접하다.
결국 수행자는 이런 수준이 될 때까지 수행을 잘 해야 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되기 위해서는
일단 자신부터
생사고통을 극심하게 받고
온갖 전염병과 질병에 걸려 있거나 해서
다른 이들이 대면하기를 꺼려하고
또는 자신부터 감옥에 갇혀 지내고 이런 상태가 되면
다른 중생을 생사고통에서 벗어나게끔 이끄는 것 자체가 곤란하다.
그래서 앞에 소개한 것처럼
중생을 잘 제도하려면
먼저 기본적으로 고통을 받는 중생을 도울 수 있는
무량한 복덕을 먼저 갖추는 것이 요구된다.
그래서 어떤 경우던
수행자 자신부터 생사고통의 묶임에서 잘 벗어나는 것이 요구되고
또 그 상태에서 복덕 자량을 기본적으로 구족한 상태가 되어야 한다.
그래서 수행자는 기본적으로 그런 복덕자량을 구족할 수 있는
기본 수행덕목부터 먼저 잘 성취해야 한다.
즉 어떤 주체를 생사고통의 묶이게 하는 업의 장애부터
기본적으로 계의 항목에 해당하는
보시, 정계, 안인, 정진의 수행덕목을 잘 성취해야 하는 내용이 된다.
이런 상태가 되어야,
그 주체가 일단 수행자 자신부터 생사고통의 묶임에서 벗어나고
이후 수행을 할 수 있는 상태로 진입할 수 있고
또 이후 다른 중생을 제도하고자 할 때도
생사현실에서 복덕자량을 구족해서 중생을 제도하려면
이 내용이 마찬가지로 요구되는 것이다.
그래서 좋음(+)을 중생에게 아낌없이 베풀고 - 보시
반대로 다른 생명이 집착하는 좋음을 침해하면서 나쁨(-)을 가하지 않고 - 정계
반대로 자신이 어떤 (-)을 받을 때는 이를 평안히 참고 받아들이고 - 안인
이런 기본적인 수행을 정진해야 - 정진
비로소 이후 조금 수준이 높은 수행분야로 다시 진입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이론상
망집을 벗어날 수 있는 방안으로 앞에 제시한 5 가지 방안은
원칙적으로 어느 상태던지 쉽게 현실에 적용할 수 있을 것처럼 여겨지지만,
이상하게 기본 수행덕목 자체가 성취되지 않으면
마치 우이독경의 속담이 제시하는 상황처럼
아무리 그런 내용을 제시해도
그 상대는 도무지 이해하지 못하는 한편
그런 생사고통의 묶임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계속해서 바삐 망집에 바탕해 무언가 자신이 좋다고 보거나
대단히 고통스럽다고 보는 것을 징검다리 삼아서
이 고통에서 저 고통으로 쉼없이 분주하게 정신없이 진지하게 임하는 가운데
정작 그 생사고통의 묶임이나
그렇게 자신을 묶고 있는 망상분별과 집착을 제거하지 못하게 된다.
그래서 어떻하던지 위와 같은 기본 수행에 진입시키는 방편을
찾는 것이 또 망집을 제거하는 기본 전제가 된다고 할 수 있다.
또 어떻게 보면 그런 기본 상태가 충분히 성취되지 않은 상태에서는
이런 이론적인 내용을 통해서 오히려
부작용을 일으키게 되는 경우도 발생하게 되는 것이다.
예를 들어 일체가 다 차별없이 공하다는 이런 내용을 제시하면
그런 내용을 바탕으로 오히려 더 심한 생사고통을 받는
상태를 아무렇게 해도 무방하다는 내용으로 이해하고
임하는 경우도 발생하기 쉬운 것이다.
원래는 불교 내의 여러 입장 가운데
미세한 차이를 살피려고 했는데
이는 사실은 현실적으로 그다지 중요한 문제가 아니다.
아라한의 상태로 생사의 묶임에서 벗어난 수준에 이른 수행자를 다시
무량겁에 걸쳐 생사현실에 임해서 중생제도를 위해 수행해가는 형태로
다시 이끄는 것도 중요한 주제인 것은 사실인데
이는 일단 현실 상황과는 조금 거리가 있다
왜냐하면 기본 수행 덕목 자체가 안 되어서
업의 장애 자체가 해소되지 않은 상황이라면
이는 너무 무리한 내용이라고 보는 측면이 있기 때문이다.
어떻게 보면 이론적으로는 원칙적내용만 제시하면
다 망집을 제거하고 생사의 묶임에서 벗어날 것 같지만,
계속 칼로 자신을 해치려는 상대가 수행장소에 빈번하게 나타나면
잘 안된다고 보는 것과 사정이 같다.
그런 사정으로 조금 더 쉬었다가
이어나가기로 한다.
mus0fl--Edith Piaf - La Julie Jolie.lrc
쉬면서, 25 일자 조각글도 살피는데
지금 살피고자 하는 주제와 관련된 『불설광박엄정불퇴전륜경』을 보게 된다.
결국 지금 살피고자 하는 주제가 그렇게 쉬운 주제는 아니다.
그래서 사실 자세하게 살피자면 페이지를 옮겨서 함께 살펴야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갖고
일단 여기서는 아주 간단하게만 살피고,
다시 해당 페이지는 좀 자세하게 살피는 방안도 생각해보게 된다.
그렇게 시간대를 오가면서 조각글을 살피는데
쉬면서 노래를 듣다가 약간 놀라운 메세지를 전하는 것을 듣게 된다.
믿지 않고 업을 행하는 가운데 축생이 된다. 이런 메세지가 들리기 때문이다.
그런데 본인이 여러 버전을 듣다보면 연구원들이 아귀나 지옥 축생계에 들어간다는
메세지를 그간 많이 접하지만, 그러나 또 장차 성불한다는 메세지도 듣는다.
이것은 왜 그런가. 그런 과정을 거쳐서 그렇다는 의미로 이해하게 된다.
그리고 본질적인 사정은 무유정법이기에 또 그렇다라고 할 수 있다.
그런 가운데 예를 들어 사바세계에서는 다음 부처님이 성불하여 출현하시는 시점이
56 억년 후라고 제시하는데
그 정도기간만 놓고 보아도 대단히 긴 시간 동안
사바세계에서는 성불하는 분이 나타나지 않고
수많은 중생이 3 계 6 도 안을 이런 형태 저런 형태로 바꿔가며
정신없이 임한다는 것을 나타내는 것이기도 하다.
가까이 지내는 연구원들이 그런 가운데 아귀나 지옥 축생계에 들어간다는
메세지를 전하는 노래는
예를 들어 연구원이 갑자기 감옥에 들어가게 되었다거나
갑자기 사고를 당해 병원 중환자실에 입원하게 되었다
또는 갑자기 파산했다거나
어떤 입학시험에서 낙방했다는 소식을 듣는 것처럼 대단히 안타까운 일인데
생사현실 안에서 기본적인 10 선업 10신의 수행덕목부터 시작해서
보시 - 정계- 안인 - 정진 - 정려 - 반야 등의 계 정 혜 3 학을 성취한 바가 없으면
생사과정에서 생사를 벗어나는 시험, 또는 3 계 6 도에서 3 악도에서 벗어나는 시험에
낙방하는 것은 불을 보는 것처럼 뻔한 일이기도 하다.
학생이 수능시험공부를 전혀 하지 않는데
그러나 그 학생이 명문 사관학교에 시험을 보고 합격하리라고
가까운 이들이 희망하고 기대하더라도
현실에서 그렇게 되지 않는 것과 사정이 마찬가지다.
알고 보면 생사의 묶임에서 벗어나고
3 악도를 벗어나고 붓다 사관학교라고 할 수 있는 극락세계에 입소하고
이런 일들도 그 사정이 마찬가지다.
한 번 인간은 영원히 인간, 한 번 축생은 영원한 축생
이런 경우라면 무유정법이라고 할 수 없다.
또 어떤 서원을 가져서 무언가를 변화시킬 방안도 본래 없다고 보아야 한다.
연기나 인과의 내용을 기계적 결정적 인과율로 잘못 이해하면
업을 행하면 어떤 과보를 받는다는 내용은
결국 현실에서 일어나는 일체가 그런 과정으로 나타나게 되는 것임을
제시하는 내용으로 이해하고
자신이 어떤 인과를 이용해서 어떤 목표를 성취한다는 과정 자체도
인과율에 의해 지배를 받는 것이고
모든 것은 업에 의한 것이어서
이것을 바꿀 도리는 없다는 운명론적인 내용이 된다.
그런데 과연 그런가가 문제다.
어떤 기사를 보았는데 과거 조선시대에는 집안에 우물을 두면
기가 사라진다고 해서 우물을 마당에 두었다.
이런 내용을 볼 수 있다.
그런데 정말 그런가 아닌가를 떠나서 어떤 견해를 가지면
그에 따라 그 견해를 가진 이는 이러이러하게 행하게 된다는 것을 볼 수 있다.
그래서 현실에서 각 현상이 나타나는 관계가
앞과 같이 기계적 인과율에 의해 나타나는가 아닌가에 관계없이 그렇다라고 이해하면
그 주체는 이제 매 순간 자신이 마음대로 뜻을 일으키고 행위를 하면서도
그것은 자신이 구체적으로 파악하지 못하는 인과율 때문에 그렇다라고
스스로 최면을 걸면서 그렇게 매 순간 임하게 된다.
그래서 자신이 매순간 행하는 것은 매 순간 충동적인 반응에 따라 행하면서도
그러나 그것이 모두 운명적이어서 어쩔 도리가 없는 것이다.
이런 형태로 여기면서 임하면서 3 악도에 처하는 상태가 되기 쉬운 것이다.
그런데 사실은 인과관계는 그렇지 않다.
무유정법이라는 『금강경』 구절은 바로 이런 사정을 제시한다.
또 이는 반대로 무유정법이 아니라,
현실에 어떤 결정된 진짜의 내용이 있다면,
또 반대로 현실에서 보는 그런 내용은 일체 나타나지 않는다.
이런 관계를 제시하는 것이다.
또 사정이 그렇기에 지금은 인간이지만, 나중에는
축생이나 아귀 지옥중생이 되기도 하고
또 그런 과정을 거쳐서 나중에는 성불하게도 된다고
경전에서 제시하게 되는 것이다.
참고로 『묘법연화경』 상불경보살품에 보면
현재 보살 수행자로 활동하는 분들이
과거에 그런 과정을 거쳐서 지옥에 들어가 한참 지내던 상태였다.
그런데 그것이 결국 상불경보살이 제시하는 것처럼 일체 중생이
모두 다 성불한다는 이런 내용이다.
이것은 또 부처님이 과거생에 장차 부처님이 되리라고 수기를 받았을 때
그러나 당시 부처님이 이로 인해 어떤 결정된 내용을 얻은 것은 하나도 없다.
이런 의미다.
그래서 본 바탕에서는 그런 내용이 결정된 것이 하나도 없는데
그러나 생사현실에서는 매 생마다 어떤 선택을 하고
어떤 업을 행하는가에 따라 그 과보를 그렇게 무량하게 받아나간다는
그 두 사정을 놓고 서로 혼동하면 안 된다.
그리고 이것이 바로 지금 살피는 불교 내도 안에서의
미세한 해석차이문제와도 바로 관련된다.
그리고 이 문제를 살피는 것은 결국 노래에서 제시하는 것처럼
모든 중생이 다 여러 과정을 거쳐서 성불하는 상태에 이른다고는 보지만,
그러나 되도록 3 악도에 머무는 과정은 간접경험으로 생략하는 한편
성불하고 불국토를 장엄하고 중생을 제도하는 그런 상태를 향해서는
좀 더 일찍 떠나고 빨리 도달하고자 하는 취지인 것이다.
여하튼 시간대를 오가면서 작업을 하다보면
복잡하기는 하지만,
일단 여기서는 내도 안의 각기 조금 다른 입장을 대단히 간단하게 살피고
자세한 부분은 미루기로 한다.
우선
경전에서 이런 표현을 만날 수 있다.
색은 항상한가. 아니면 무상한가?
여기서 색은 좁게는 눈으로 보는 빛깔도 의미하지만,
그런 빛깔을 포함해서 귀로 듣는 소리, 코로 맡는 냄새, 입으로 느끼는 맛, 몸으로 느끼는 촉감
이런 것을 모두 함께 가리키는 표현이기도 하다.
한마디로 현실에서 한 주체가 감각기관을 통해 얻는 감각현실 일체
그래서 한 주체가 평소 외부 세계, 외부대상, 외부물질로 여기고 대하는 그 일체를 의미하고
또 이 내용에는 자신이 평소 자신의 몸이라고 보고 대하는 내용도 포함된다.
그렇게 어떤 주체가 감각기관을 통해 어떤 내용을 얻는다.
그리고 이것이 현실의 한 단면이다.
이제 이 내용을 놓고
처음 살피는 것은 이런 내용이 어떻다고 보는가
이 부분부터 처음 시작하게 되는 것이다.
이런 감각현실은 항상하다고 보는가. 아니면 그렇지 않다고 보는가.
이것이 처음 문제된다.
이것은 어려운 문제가 아니다.
각 감각현실은 눈을 뜨고 보는 내용만 놓고 보아도
자신이 눈을 한번 뜨고 감음에 따라 나타나고 사라짐을 확인할 수 있다.
그리고 이 한 순간만 확인하면 설령 나머지 기간이 모두 그대로 유지된다고 해도
적어도 항상한 것은 아님을 쉽게 파악할 수 있다.
그래서 처음 제시하는 명제는
색은 무상하다.
이런 내용이다.
그리고 현실에서 문제되는 것을 하나하나 주어부분에 넣어도
다 사정이 같음을 확인하게 된다.
문제는 이 부분이다.
부처님이 '제행은 무상하다' 이렇게 처음 명제를 제시할 때
이 명제가 갖는 의미가 무언가를 먼저 잘 음미해야 한다.
mus0fl--Edith Piaf - Traque.lrc
쉴 때마다 비슷한 주제를 전하는 노래를 듣게 되어서
마음이 약간 우울하다.
그리고 최근 불교학과로 간다고 한 인턴연구원이 또 마음이 바뀌었는지
원래 가고자 한 학과도 한번 지망해보겠다고 해서 또 우울하다.
어떻게 보면 축구 경기를 관전하는 것과 사정이 비슷하다.
열심히 응원하면서 좋은 결과를 얻어내기를 바라는데
관전하며 응원하는 입장처럼 늘 결과가 나오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관람하는 이가 직접 경기에 뛰어 들어가 임하면
선수보다 반드시 잘 하는 것도 아니다.
특히 생사문제는 아무리 가까워도 대신 대행해 줄 도리가 없다.
그리고 경향성을 무시할 수 없다.
그래서 한번 어떤 경향을 갖고 임하는 이는 대부분 삶을 마칠 때까지
그런 경향을 갖고 임하는 것이 대부분이라고 보게 된다.
이는 앞에 비유로 든 유치원 상황과도 마찬가지다.
예를 들어 선천적으로 장애를 갖고 있는 어떤 학생을
옆에서 그 장애를 극복할 수 있게끔 노력한다고 하지만,
그 가운데 헬렌켈러처럼 그 장애를 극복하고 벗어나오는 사례는
대단히 희박하고 평생 그런 상태로 삶을 살다가 마치게 된다고 보게 된다.
한번 소나 돼지로 태어났다면 이를 옆에서 붙들고
구구단 한번만 외어보게 해보자 이렇게 임하면
그렇게 임하는 이가 제 풀에 지치거나 화병에 걸리게 되기 쉽다.
대학지망을 앞둔 인턴연구원을 놓고 보아도 그 사정이 마찬가지고
또 스스로 자신을 놓고 보아도 그 사정이 마찬가지임을 보게 된다.
스스로 자신을 놓고 앞으로 파리처럼 되어 한번 공중을 날아보자.
이렇게 한다고 해서 그것이 쉽게 되겠는가.
그래서 이런 문제가 해결이 쉽지 않다는 사정을 보게 된다.
그러나 이번 노래는 바라밀의 수행에 탈출구가 있다는 메세지를
전하는 듯 해서 약간은 긍정적이다.
사실 바라밀을 왜 닦는가 하는 부분에 대해 자세하게 내용이 제시되는 부분을
보면 그 사정을 알 수 있다.
현실에서 안 된다고 보게 되는 내용을 다 성취할 수 있는
수행방안이 사실은 반야바라밀 수행이기 때문이다.
이것은 게임과 사정이 같다.
아무리 해도 돌파하기 힘들다고 보는 게임이 있을때
그것을 그 게임화면만 놓고 대하면
그 방안을 알아낼 도리가 없다.
그런데 그 게임화면이 나타나는 본 바탕이라고 할
게임 파일을 열어서 IF 구문을 놓고
계속 살피면 어느 부분을 살짝 만지면
원하는 내용을 만들어 낼 수 있는가를 또 알아낼 수 있는 것과 사정이 같다.
여기에도 같은 내용이 적용된다.
게임파일을 아무리 본다고 해서 게임 파일 글자 안에서
게임 화면이 보이는가. 그렇지 않다.
처음 제시하는 내용은 이런 내용이다.
게임 화면을 대하면 그것이 대단히 실다운 것처럼 여겨지지만,
그 본 바탕이 되는 파일 안에서는 그런 내용을 일체 얻을 수 없다.
그런데 그런 사정을 꿰뚫어 관하는 반야바라밀을 수행하면
이를 바탕으로 현실 게임 화면을
원하는 형태대로 마음껏 성취할 수 있다.
생사현실안에서 반야바라밀 수행이 갖는 의미가 사실은 이것이다.
그 게임안에서 겪는 고통을 일체 제거하고
중생제도를 위한 온갖 내용을 다 무량하게 성취해낼 수 있다.
이런 내용이다.
지금은 경전 첫 부분을 살피지만,
조금만 살피면 이런 내용이 나온다.
그리고 왜 이런 것이 필요한가도 함께 이해할 필요가 있다.
이미 현실에서 일반적으로 망집에 바탕해서
완강하게 고집하고 임하는 사례를 많이 보았다.
그래서 그 상태에 맞추어 상대를 수행으로 진입하려면
결국 차력사나 마술사가 선보이는 깜작 쇼가
더 효과가 있다고 보는 경우가 많다.
경전에서도 이런 내용이 많이 제시된다.
일반적으로 길게 이야기해서 이치를 이해시키기 힘든 상대더라도
일단 처음 부처님의 구족한 신상을 대하는 한편,
부처님이 보이는 신통력을 또 대하면서
곧바로 부처님의 가르침을 받아들이는 사례가 많이 보이는 것이다.
현재 예약글로 올려진 글도 함께 살피는데
중국이나 한국이나 기타 인도 안에서도 스리랑카를 비롯해
다른 지역에 처음 불교가 들어갈 때
당시 불교를 이해하지 못한 이들을 상대로
불교가 처음 받아들여지는 과정을 살피면
대부분 그 상황이 비슷함을 볼 수 있다.
심지어 부처님의 경우도
도무지 부처님의 출가 취지를 이해하지 못하고
나중에 성불한 이후에도 입장을 바꾸지 않는 부왕을 만나서
불교를 받아들이게 하는 과정을 살펴보면 이와 마찬가지다.
그리고 이후 왕명에 의해 석가족의 왕족이나 귀족 들이
출가 수행하는 계기가 마련된 것이기도 하다.
이는 결국 말로는 도무지 이해를 못하겠는데 그러나
자신이 직접 믿기지 않는 내용을 대하게 되면 받아들인다.
망집에 바탕해 임하는 상대의 상태가
대부분 이런 상태라는 의미다.
이는 반대로 말하면
수행자가 수행을 통해서 자신이 생사고통에서 벗어날 뿐 아니라,
중생을 잘 제도할 수 있는 상태가 되려면
단순하게 이론적으로 부처님의 가르침을 이해하고 실천하는데 그치면 곤란하고
결국 수행을 통해서
때로는 말이 필요없이 바로 상대를 수행으로 진입시킬 수 있는
상호나 신통력 등을 다 모두 그처럼 잘 구족하는 상태에
이르러야 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기도 하다.
그래서 경전에서 제시하는 32 상 80 종호도 구족하여 위의도 구족하는 한편,
또 중생제도를 위해서 필수적인 다라니 삼매 그리고 신통을
수행을 통해 구족해 나가는 것이 요구되는 것이다.
그리고 또 이를 위해서는 좋은 상호 하나 하나를 성취하는데
원칙상 무량겁의 수행이 필요하다는 내용도 함께 참조해야 한다.
요즘도 알고보면 그런 아이템 하나로
모든 이들이 다 부러워하는 상태를 곧바로 성취해서
한 생을 아주 평안하게 보내는 사례를 보게 된다.
그리고 그것이 현실의 스타의 삶이기도 하다.
그런데 그것이 그저 아무렇게 얻어지는 것은 또 아닌 것이다.
아름다운 용모 하나로 삶을 잘 산다거나
목소리 하나로 삶을 잘 산다고 하는 사례도
알고 보면 마찬가지다.
그 전후배경을 보면 최소한 7 생 이상의 노력을 통해서
그런 아이템이 취득된다는 사정을 보게 되는 것이다.
그런데 지금 한 순간만 놓고 보면
모든 것을 우연의 조합이라고 이해하고
그래서 이런 일들은 하나같이 이치에 맞지 않고 부조리한 현상인 것처럼
여기기 쉽다.
그런데 그러면서도 자신은 엑셀을 밟으면 차가 나아가고
브레이크를 밟으면 차는 선다고 하면서
열심히 인과를 존중하면서 현실에 임하는 것이다.
그래서 알고보면
인삼 하나를 수확하는 경우에도 인삼 수확하기전
하루 전과 하루 후만 놓고 그 관계를 살피면 대단히 부적절하다고 보듯,
현실의 삶도 마찬가지라는 것을 이해해야 한다.
그리고 지금 살피는 반야바라밀경에서
반야바라밀다의 수행을 제시하는 것은
그것이 결국 수행자가
생사현실에서 고통을 받는 중생을 상대로
바로 바로 수행에 진입시켜 생사고통을 벗어나게 하려면,
수행자가 기본적으로 반야바라밀다를 잘 닦아 성취하는 것이
필수적으로 요구되기 때문이다.
그렇지 않으면
게임화면은 그 게임기를 만지는 무수한 이들에게
그런 화면을 무량하게 반복해서 그러한 관계로 제시하게 된다는 그 상황을
마치 앞에서 살핀 결정적 인과율의 내용처럼 받아들여
도무지 벗어나기 힘들게 된다.
게임 화면이나 내용은 실답지 않은데
그러나 그 내용이 무량하게 그렇게 반복해 나타난다.
이 두 사정을 잘 살피고
현실과 본 바탕의 실재의 공함의 관계도
이와 마찬가지라고 잘 이해해야 한다.
본 바탕 진여 실재는 공하여 그런 내용을 얻을 수 없는데
그러나 생사현실에서 망집에 바탕해 업을 행하면
그 업이 무량겁에 걸쳐 사라지지 않고
생사고통을 받는 3 악도에 들어가는 상태가 그런 관계로
무량하게 반복해서 나타난다.
그래서 생사현실과 관련된 이 내용을 잘 이해해야 한다.
그래서 그 사정을 꿰뚫어
넓고 길고 깊게 이 현실 사정을 관할 수 있는
깊은 지혜인 반야바라밀다를 통해
이런 생사의 묶임에서 벗어나고
생사현실에서는 생사현실대로
무량한 복덕과 수명과 지혜를 구족해서
중생을 제도하는 수행이
대단히 중요하다는 사정도 이와 함께 이해해야 한다.
반야바라밀다 경전의 내용은
단순히 실상이 공하다는 것만 이해하는 데 그치는 것이 아니다.
이에 바탕해서
지옥부터 하늘까지 갖추어진 것을 하나의 세계라고 할 때
이런 세계가 10 억개가 모인 3 천 대천세계를 놓고
이것을 자신의 중생을 제도하는 자신의 불국토로 삼아서
중생을 제도하는 사업을 잘 하려면
이런 반야바라밀다 수행이 기본인 것이다.
그런데 그 전에
제행이 무상하다라고 처음 제시한 내용이 갖는 의미가
무언가를 놓고 잘 살펴야 한다.
이렇게 살피면 분량이 한도 끝도 없이 늘어나게 된다.
그래서 여기서는
간단히 키워드만 제시하고 마치기로 한다.
우선 '색이 무상하다'거나 '제행이 무상하다'는 내용은 이런 의미다.
현실에서 대부분 눈을 뜨거나 해서 얻는 감각현실을
그런 '색'이라고 일반적으로 표현하고 또 이해한다고 하자.
또 '무상하다'거나 '항상하다'는 표현을 가지고 이해하는 내용도 마찬가지다.
일반적으로 망집에 바탕해 살아가는 입장에서는
그렇게 '항상하다' 또는 '무상하다'라는 표현을 통해
분별하는 내용이 있는 것이다.
그런데 부처님의 본 입장은 어떤가.
사실은 그렇지 않다는 의미다.
그런데 그 사정을 이해시키려면
일반적으로 이해하고 표현하는 그 내용을
일단 받아들이는 한편,
그처럼 방편적으로 시설해 일정한 내용을 언설의 형태로 가리키면서
그에 대한 내용을 제시해야 한다는 사정이 있다.
왜 그런가하면 처음에 그렇게 내용을 제시하지 않으면
그런 일반적인 입장에서는 도무지 못 알아 듣고
이해하지 못하게 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것이 문제다.
눈을 뜨면 보이는 그 현실 내용을 놓고
여기서 본인이 글자로 적듯이
그런 내용을 '감각현실'이나 '현실 내용' '생사현실' 이런 식으로 표현해 제시하게 된다.
그런데 비록 이런 내용의 본 정체가 그런 언설을 떠난 어떤 내용이고
그렇게 언설로 표현하는 어떤 내용을 거기에서 얻을 수 없다는 사정을 제시하고자 할 때
그 사정이 그렇기 때문에 이에 관해서
아무 내용도 적지 않고 빈칸으로 비워두면
이 글을 대하는 입장에서는
본인이 무슨 내용을 제시하고자 하는가를
도무지 알 도리가 없다.
그러니 부처님 입장에서는 비록
각 주체가 눈을 떠서 보고 귀로 듣고 하는
그 일체 감각현실 안에
그런 내용을 얻을 도리가 없다고 보지만,
여하튼 그런 사정을 이해시키기 위해서라도
일단은 상대가 그렇게 표현하고 이해하는 그 내용을
방편으로 취한 다음
그 상대 입장에서 옳다고 보는 내용을 확립해 제시하게 된다.
그것이' 제행은 무상하다' '일체는 고다' 등등의
내용들이 의미하는 바이다.
mus0fl--Mireille Mathieu - Akropolis Adieu.lrc
내용이 상당히 길어지는데 현재 26 일인데 아직 마치지 못하고 있다.
쉬는 동안 남미 칠레의 빙하가 녹아 흐르는 강과 파타고니아를 보고 왔는데 상당히 아름답다.
그런데 한 번 가보고도 싶지만, 스페인판 경전도 마련되지 않은 상태에서
경비를 들여서 공연히 오가면 무엇하는가.
요즘은 구글 풍광여행도 자주 못다니는데 형편이 그렇다.
쉼없이 연구하고 조각글 정리하는데도 시간이 부족하다.
다행이 요즘은 쉴 때마다 소신공양을 할 때마다 계단오르내리기를 65 회씩 하기에
소신공양만 하던 경우보다는 조금은 낫다고도 보는데
그런데 또 어떤 때는 지나치게 많이 해서 그런지 상당히 피곤함도 느낀다.
여하튼 조금씩 습관을 바꾸어야 한다고 보는데
늘 하던 내용 가운데 조금 안 좋다는 부분은 줄이고
여기에 조금씩 일반적으로 좋다고 보는 내용을 접목시켜가면서
점차 선후를 바꾸어 가는 것이 좋지 않은가 한다.
그래서 최근에는 먼저 계단오르내리기를 해보았다.
계단오르내기를 할 때 65 회를 행하는 것은
현재 외우고 있는 다라니 구절이 65 구절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다라니를 외우는데 이왕이면 먼저 다라니를 외우고 계단오르내리기 하고
또 잠깐 더 쉬는 형태를 취해 본 것이다.
여하튼 계단오르내리기를 날씨가 추운 상태에서 하는 것이 힘들다.
그런데 소신공양을 하는 것이 말 그대로 향공양을 하는 가운데
몸이 노화되고 기능이 안 좋아지는 것이므로 되도록 횟수를 줄여야 하는데
이것과 결부시키다 보니, 소신공양 자체도 조금은 자제하게 된다.
그런데 평생 매일 다른 생명이 죽은 사체를 먹고
매 순간 탐욕과 분노 어리석음에 바탕해서 업을 행하다가
가끔 한 번 다라니 외우고
가끔 한 번 불우이웃돕기 성금 낸다고 해서
크게 방향이 달라진다고 보기는 힘들다.
물론 전혀 하지 않은 것보다는 분명 낫다고는 보지만,
저울에 올려 놓고 비교하면 상당히 부족하다.
그런데 자신의 의식상에는 자신이 성금을 낸 금액
또는 몇 번 외운 다라니 횟수 이런 것만 의식에 남고
자신이 매 순간 생활하면서 다른 생명이 집착하는 것을 해치면서
업을 꾸준히 반복해 행해온 사정은 자신의 의식에 전혀 들어 있지 않은 경우가 많다.
어떤 잔치에서 이로 인해 잘 살던 돼지 가족이 모두 몰살하고
생선도 갑자기 삶을 마치고 아우슈비츠 수용소에서 일어날 만한 일들이 수없이 이면에 발생했는데
잔치날 당사자는 전혀 의식이 없이 자신들 즐거운 일만 이야기하고
정신없이 임하는 상황과 비슷하다.
그리고 나서 3 악도에 들어가게 되었다는 집행영장을 받아들게 되면
자신이 왜 그런 3 악도에 들어가야 한다는 것인지를
도무지 이해하지 못하고 당황하게 되는 경우가 현실에 많다.
그리고 그런 상태에서 가족들은 그 사정을 모르고 무조건 장례식을 마치고 난후에는
고인이 모두 하늘이나 극락에 잘 가셨다고 여기고
또 삶을 이어가는 것이다.
이 상황을 부처님이 일찍이 도축장 옆에서 정신없이 목동에 이끌려
오가는 소 떼의 상황과 같다고 제시한 것이다.
1 년간 지켜볼 때 소 떼에서 반절이 도축이 되고
새로 태어난 소도 있는데 이 소들이 자신의 상황이 어떤 상황인지를
도무지 파악하지 못하고 오가고 있다.
그런데 인간들도 그 사정이 마찬가지다.
이렇게 제시하는 내용이다.
요즘 하도 여러 경전을 정신없이 살피고 넘어가기에
출전이 기억이 잘 안나는데 아마 『출요경』이었다고 생각된다.
그런데 사정이 이와 같기에
부처님이 이와 같이 망집에 바탕해서 정신없이 임하는 중생을
생사고통에서 벗어나기 위해
방편으로 3 승을 시설했다는 그 사정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앞에서 색은 무상하다는 내용을 제시하고
이런 가르침을 듣고 하나하나 단계를 밟아 수행에 진입하는 수행을
성문승이라고 표현한다.
그런데 홀로 현상이 나타나는 연기의 관계를 잘 관찰해서
이를 통해 깨달음에 이르는 수행을 연각승이라고 표현한다.
이 두 방안은 특징이 있다.
우선 당장 자신이 생사고통을 벗어나는데 수행목표가 있다는 점이 공통점이다.
그래서 자신이 생사고통을 벗어나면 다시
생사현실에 들어가 그 상태에서 고통받는 중생을
제도하려는 데에 큰 의미를 두지 않는 입장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런데 그렇게 되는데에는 또 일정 사정이 있다.
이것은 현실 일체가 무상하다는 내용 등을 놓고
취하는 해석에서 조금 미세한 차이가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이제 연각승의 입장까지 함께 포함해서
이 상황을 함께 이해해보자.
그리고 조금 상황을 이해하기 쉽게 하기 위해서
앞에서 비유로 든 게임기 상황을 놓고 비유적으로
생사현실의 문제를 살펴보자.
게임기에서 어떤 화면에 작은 풍선이 나타날 때 커서를 그 위치로 놓으면
거기에서 보물상자라는 아이템이 나타난다.
이렇다고 가정해보자.
대단히 이상한 일이다.
그런데 이 게임기를 대하는 무수한 이들이
다 그런 내용을 그 상황에서 그런 관계로 얻게 된다.
그것은 지금만 그런 것이 아니고
그 게임기에서 게임을 할 때마다 그런 내용을 반복해 대하게 된다.
또 그것은 게임화면도 그처럼 생생하고 동시에 배경음악도 그렇다.
이 상황을 잘 이해해야 한다.
여기서 게임의 특정화면의 풍선과 같은 특정부분을 a 라고 표시하고
커서를 그 위치에 놓는 것을 b 라고 표시하고
그렇게 하면 나타나는 어떤 보물상자라는 아이템을 C 라고 표시해보자.
글을 입력하다가 영문 표기 한번 하려면
대단히 많은 오타를 경험한다.
그런데 이 상황도 게임과 마찬가지다.
어떤 키를 누르고 shift 키를 누르면 대문자가 나타나고 그런 식인데 왜 그런가.
그리고 현실 사정도 이와 다 마찬가지다.
왜 종이에 불을 붙이면 종이에서 보이지 않던 연기와 재가 나타나는가.
왜 손을 마주치면 손에는 보이지 않던 손뼉소리가 나는가.
왜 봄에 땅에 씨를 뿌리면 씨에서 볼 수 없던 싹이 봄에 보이고 여름에는 씨에서 볼 수 없던 꽃이 보이고
그리고 가을에는 씨에서는 볼 수 없던 열매가 그렇게 나타나는가.
그리고 현실에서 망집에 바탕해 업을 행하면 왜 이로 인해 무량겁에 걸쳐 3 악도에 묶여 생사고통을 받는가.
이 사정이 다 마찬가지다.
여하튼 입력 편의상 오타가 자꾸 발생하면 이를 방지하기 위해 핫키를 이용하게끔 된다.
그래서 여하튼 게임을 할 때
위와 같은 관계로 보물상자란 아이템을 얻는 경험을 반복한다면
이를 다음과 같은 관계식으로 표현할 수 있다.
a + b => C
이것이 간단한 연기관계의 표현이라고 이해할 수 있다.
이것은 다음을 의미한다.
이상하기는 하지만,
그리고 각 내용은 서로 엉뚱하다고도 볼 수 있지만
여하튼
a 가 있는 그 상황에서 b를 누르면 C 가 나타난다.
그런데 a 가 있는 그 상황에서 b 를 누르지 않으면 또는 다른 d 나 e 부분을 누르면
C 는 나타나지 않는다.
이것을 한번도 아니고 할 때마다 경험한다.
이 내용을 위 식이 나타내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이 관계를 위와 같이 표현하는 것이다.
그리고 게임에서 이 관계를 아주 넓고 길고 깊게 관찰한 끝에 얻는 결론이
바로 부처님이 제시하는 그런 명제인 것이다.
제행은 무상하다.
일체는 고다.
제법은 무아, 무자성이다.
열반은 적정하다.
일체는 공하다.
이 내용이다.
그런데 이 비유에는 여러 문제가 있다.
게임기는 오늘날 그렇게 만들어서 그렇다고 하지만,
게임기가 없는 상태에서는 무엇을 가지고 비유를 들어 설명할 것인가.
이런 경우는 다시 꿈의 비유나, 환사의 환술, 예를 들어 최면술사가 행하는 최면
이런 등의 내용을 통해 비유적으로 설명해야 할 것이다.
또 한편 게임기에서 그렇다는 것이 현실과 무슨 관계인가.
그래서 비유는 어디까지나 현실의 사정을
쉽게 이해하게끔 하기 위한 내용이고
본 현실의 정체를 파악할 때는 이에 준해서 이 내용을
현실에 놓고 직접 적용하면서 직접 살피는 것이 요구된다.
그런데 이 비유는
여하튼 게임기에 갇힌 상황에서
게임기 안의 이런 관계와 상황을 보고
게임기 밖의 사정과 함께
게임기 안 밖에서 그런 내용을 본래 얻을 수 없다는 상태까지
이해하게 되듯
생사현실에서 연각승이나 성문승도 현실에서 살필 수 있는
위와 같은 연기관계를 통해서 그 사정을 파악하게 된다는 그런 의미다.
그리고 이를 통해 생사의 묶임에서 풀려나 벗어난 해탈의 상태에 이르게 되기에
성문승과 연각승은 해탈신을 이룬 성인의 상태가 되는 것이다.
게임 비유로 말하면 게임 상황들로 인해
고통을 받는 상태에서 벗어난 상태가 된다. 이런 의미다.
그런데 부처님이 다시 보살승을 제시하는 것은
그런 깨달음을 바탕으로
다시 그 게임안으로 들어가서
그 이전 상태처럼 그 상황에 묶여 고통받는 다른 중생을
생사고통에서 벗어나게 해야 한다는 것을
다시 강조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런 경우에서는 본래 생멸을 얻을 수 없음과 함께
생사 즉 열반이란 내용까지 같이 이해해야 한다고 제시하는 것이다.
그래서 이 차이를 이해하려면
먼저 게임기 안에서 무수하게 반복해 대하는
a + b => C 의 관계를 하나 놓고
이것이 무슨 의미인가를 다시 음미해야 한다.
부처님이 이 게임기 상황 자체나 그 밖에
그 게임을 열심히 행하는 이들이 대하는
생멸이나 어떤 아이템을 본래 얻을 수 없다고 제시하는 사정은 이렇다.
일반적으로 본래 그 게임기 화면의 한 부분에 초점을 맞추고
일정 부분을 묶고 나누어 일정 부분이 풍선이라고 보는 것 자체가 문제가 있다.
본래 거기에는 그가 생각하는 그런 풍선을 얻을 수 없다.
물론 그가 일정한 부분을 눈을 떠 대한다는 것은 사실이다.
그리고 그가 그런 내용을 대하고 나서는 그 부분이 풍선이라고 생각하는 것도 사실이다.
다만 그 주체들이 그런 부분만 대하면 풍선이란 생각을 일으키는 것 뿐이다.
그래서 거기에는 그가 생각하는 풍선이란 얻을 수 없다고 하는 것이다.
이는 예를 들어 라이터를 어떤 이가 생각하면 매번 담배라는 생각을 떠올리게 되지만,
사정이 그렇다고 라이터라는 생각 속에 담배라는 내용이 있다거나,
그런 사정 때문에 라이터는 담배다라고 할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다.
또 자세히 살피면 그가 풍선이라고 보는 부분은
알고보면 각 부분마다 각기 다른 색이 있는 점에 불과하다.
더 나아가 그 화면 밖에는 역시 그런 풍선을 얻을 수 없고
그런 화면내용도 얻을 수 없다.
현실적으로 살펴보면 파일에 적힌 글자뿐이다.
그래서 어떤 풍선이던 보석상자 아이템이던
무엇이 나타나고 없어진다고 말할 것 자체가
그 화면에는 본래 얻어지지 않는다고 제시하는 것이다.
다만 그러한 화면이 그렇게 나타나고
또 이를 바탕으로 그런 분별을 행하는 것 뿐이라는 의미다.
이 상황에서 망집을 일으키는 이는 자신이 풍선이라고 일으킨 내용이
그 화면에 '있다'고 여기면서 그 화면을 대하는 부분부터가 문제인 것이다.
그리고 한편, 그 화면의 본 바탕에서도 그 사정이 마찬가지라고 제시하는 것이다.
그래서 그런 바탕에서는
무엇이 무엇때문에 생겨나고 멸한다고 말할 수 있는 내용자체를
얻을 수 없다고 제시하게 된다.
문제는 그 상황을 놓고 게임에 열중하는 이에게
사정이 이렇기 때문에 본래
a 나 b 나 C 가 거기에 있다고 하면서 무엇을 제시할 도리는 없다.
그렇지만 사정이 그렇다고 그대로 방치하면 이 사정을 스스로 이해하기 힘들기에
일단 상대가 있다고 보는 그런 a 나 b 나 C 를 받아들이고
그런 언어방편 시설을 통해서 일정한 내용을 가리키면서
그에 대해 일정한 내용을 제시하여
이를 통해 점차 부처님의 깨달음으로 이끌려는 취지인 것이다.
그리고 1 차적으로
그런 내용에 대해 망상분별을 일으키고 집착을 갖고
열심히 커서를 누르는 형태로 업을 행하게 되면 그로 인해
그 바탕에서는 대단히 심각한 고통을 받는 상태가 된다는 점을 경고하고
이 상황에서 벗어나오라고 하는 것이다.
비유만 보면 단순히 게임에서 파산하는 정도이지만,
생사현실은 단순히 그렇지 않다.
그래서 생사현실에서 망집에 바탕해 업을 행해 맞이하는 상태란,
현실에서 자신이 볼 때 대단히 끔직하게 고통스럽다고 보는 내용들
그리고 축사의 축생이 고통받는 상황 등등이 하나같이
그런 상태로 맞이하는 자신의 미래의 모습이기도 한 것이다.
여기서 게임으로 비유하는 화면 상황은
생사현실에서는 어떤 이가 눈을 떠 세계 각곳을 대하면서
그 곳에서 일어난 수많은 비극과 고통의 내용들에 해당하는 것이다.
물론 자신은 이런 경우에 해당하지 않고 예외라고 여기고 싶겠지만, 그렇지 않다.
그리고 그것이 앞에서 말한 소떼에 대한 비유다.
지금도 그렇고 과거도 그렇고
수없이 그런 비극과 고통을 당하고 있는데
이 소떼 무리는 그것이 자신과 관련이 없는 것으로 여기고
그렇게 태연하게 풀을 뜯고 임하고 있다고 비유한 것이다.
그래서 이 부분을 잘 음미해야 한다.
지금 자신은 그런 상태가 아니다.
그런 사정으로 이런 문제를 외면하고
마냥 희희낙락하고 임하면 대단히 문제가 많다.
여하튼 앞의 게임기 상황으로 다시 가보자.
분명 눈을 떠 대하면 일정한 화면을 보게 된다.
그리고 커서를 누르면 또 일정한 다른 화면을 보게 된다.
그리고 그것을 대하는 주체는
풍선 부분에 커서를 갖다 대었더니 보석상자가 나타난다.
한번도 아니고 매번 그런다.
이런 내용을 파악하고
a + b => C 로 제시했다.
그런데 그 상황은 마찬가지이지만,
부처님은
비록 그런 화면 내용을 보게 된 것도 사실이고
그에 대해 각 부분이 풍선이고 보석상자라고 생각을 일으킨 것도 사실인데
정작 그 화면이나 그 화면을 나타나게 한 본 바탕에서
그런 내용을 얻을 수 없다고 제시하는 것이다.
그런데 그 사정을 이해하지 못하고
그런 생각을 일으키고 그 화면을 대하면서
자신이 그런 생각을 하기에
그 내용이 그 화면 그 부분들에 각기 '있다'고 여기고
그 부분은 그런 내용'이다'고 여기면서
그렇게 망집을 일으켜 계속 업을 행하면서
그런 바탕에서 한 순간도 벗어나오지 못하면
그 전제에서는 3 악도에 들어가서 그 상태로 무량겁에 걸쳐서
생사고통을 받아나가게 됨을 제시하는 것이다.
그런데 여기에서 그 게임기 상황에
그런 내용을 얻을 수 없다는 사정을 이해시키려면
비록 그 각 부분에 게임하는 이들이 있다고 여기는
풍선이나 커서나 보석상자가 본래 얻을 수 없다고 하더라도
일단 그 사정을 이해시키기 위해서라도
그 상대의 입장을 받아들이고
그에 바탕해서 그 게임기 안에서 옳다고 보는 내용[법]을 일단 확립시켜 제시하고
반대로 그 게임기 상황에서도 엉터리라고 할 내용[비법]은 제거한 다음
그리고 이를 바탕으로 이제 처음에 제시한 것처럼
그 상황을 포함해 현실 일체에 그런 것과 그 생멸이나 생사를 얻을 수 없음을
먼저 기초적으로 이해시키는 것이다.
그래서 이 사정이 복잡하다.
그저 게임기 화면에 갇혀서
처음 a + b => C 의 관계를 살펴서
그 게임기 안에서
부처님이 제시하는 명제를 얻어내는 과정을 이제 살펴보자.
이는 부처님의 입장도 마찬가지다.
비록 그 상황에 그런 내용을 본래 얻을 수없다고는 보지만,
그러나 이와 같은 관계를 파악하는 입장을 일단 받아들여서
a + b => C 의 관계가
거기에 그렇게 있다고 일단 제시하고
이를 바탕으로 그런 명제를 제시하는 것이다.
먼저 그 게임기 화면의 각 부분이 그가 이해하는 대로
풍선이기도 하고 커서이기도 하고 보석상자이기도 하다고 하자.
그리고 이를 a b C 로 각기 바꿔 표현하면
이들 사이에는 a + b => C 의 관계가 그처럼 파악된다.
이 관계는 적어도 게임기 안에서는
무수히 반복된다. 그렇지 않은가.
그렇다.
그래서 바로 이 관게를 통해서
무상, 고, 무아, 무자성, 공의 내용도 잘 이해하게 된다.
이 의미다.
게임기 안에서 도저히 부정할 수 없는 위와 같은 관계가
바로 그런 사정 때문에 그 내용들이 실답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고
바로 그런 사정 때문에 그 내용들은 하나같이
집착을 갖고 대할 실다운 내용이 아님을 반복해 제시한다.
또 그 사정이 그렇기에
그것을 붙잡고 임하면 끝내 고통을 겪을 도리 밖에는 없다.
그래서 이런 관계를 통해서 이 사정을 잘 파악하고
그 상황에서 벗어나야 한다는 것을 먼저 제시하는 것이다.
그리고 한편 이 관계를 깊게 관하면
부처님이 본래 이런 방편을 통해서
끝내 도달시키고 한 해탈 열반의 상태도 이해하고 이를 수 있는 것이다.
왜 그런가.
위 식에 그 내용이 다 담겨 있기 때문이다.
mus0fl--Jean-Louis Murat - Le Temps Qu'il Ferait.lrc
쉬는 동안, 친한 친구가 세상을 떠났다는 소식을 갑자기 듣게 되었다.
직업이 의사인데도 그러나 의사가 병에 걸려 세상을 떠나게되는 일은 생각해보면
이상한 소식은 아니다.
지금 나이를 놓고 보면 조금 이른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하게 되지만,
그러나 나이가 나이니만큼 또 그렇게 이상한 소식은 아니기도 하다.
청량리에서 갈아타나 종로에서 갈아타나 매 마찬가지라고 보지만,
그러나 아쉬운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한편으로 이 친구가 과거 오래전에 불교에 대해 관심이 많다고 하면서
본인이 갖고 있던 불교를 연구할 수 있는 기본 자료를 요청해서
건네준 적도 있어서 그런 점에서 조금은 마음이 가볍기도 하다.
여하튼 이 글을 마쳐야 하는데 자꾸 길어지고 있다.
a + b => C 와 관련된 내용은 과거에 적은 적이 있기에
그 부분을 찾으면 링크를 걸고 생략하고 넘어가고 싶기도 하다.
그런데 해당 부분을 지금 찾기가 쉽지 않아서 그냥 이 부분에 간단히 이어 살피고 마칠까 한다.
>>>
게임기의 상황을 놓고
매번 반복되는 관계를 a + b => C 의 형태로 먼저 확립했다고 하자.
일반적으로 망집에 바탕해서 이 내용을 대할 때는
a + b => C 의 내용이 게임기 안에서 그런 형태로 대단히 많이 반복하기에
이런 사정 때문에 그렇게 매번 얻게되는 C 나
a + b => C 의 관계가 그런 사정으로 실다운 것이라고 이해하기 쉽다.
그런데 그렇게 대단히 많이 반복하는 a + b => C 라는 연기(인과) 관계식이
매번 반복해 제시하는 내용은
그렇게 얻게 되는 C 가 그런 사정으로 무상하고
또 고이고 또 무아 무자성이고
또 그 관계를 떠난 본 바탕에서는 그런 내용은 얻을 수 없음도 제시하고
그 본바탕은 공하다는 사정인 것이다.
물론 처음에 그 각 부분에서 그런 a 나 b 그리고 C 자체를
얻을 수도 없고 그래서 그 생멸도 그렇게 파악할 수 없다고 보지만,
그런 입장에서도
일반적으로 이해하는 내용
즉, 그 화면에 그런 a, b, C 내용이 있고, 이런 a, b, C 사이에 그런 관계가 있다고 보는 입장을
'가정적으로' 받아들이면
그 바탕에서는 그런 식이 곧
그 각 내용이 그런 사정으로 실답지 않고
공하다는 등의 내용을 반복해 제시해준다는 의미다.
그리고 불교에서 연기 즉 공 이라고 제시하는 내용이 바로 위와 관련된다.
먼저, 그 사정을 다음처럼 살펴보자.
a + b => C 라는 식은 우선 그 C 는 a +b 라는 조건이 충족된 상황에서
'없다'가 그렇게 '나타나게 되는 것' 즉 무상한 것이라고 제시하고 있다.
그래서 바로 이 내용이 그런 C 는 영원하지 않은 것이다라는 것을 제시하는 것이다.
그리고 C가 좋은 내용이라고 할 때
a + b => C 라는 식은
a 만 있는 상태라거나 b 만 있는 상태 또는 d 나 e 등이 있는 상태 등에서는
아무리 그것을 원해도 그 C 를 얻을 수 없기 때문에 이 상태에서는
그런 C 를 집착하고 임하면 그에 대한 갈증을 겪고 임하게 됨을 의미하는 한편
앞과 같이 그런 조건에서 얻어지는 C는 영원하지 않음도 의미하기에
그것이 유지되는 조건이 해소되면 결국 사라지게 된다는 것도 의미해서
또 이런 경우에는 그가 그에 대해 집착하고 대하는 만큼
고통을 되돌려주게 됨을 의미한다.
이 경우는 C 가 좋은 것이어서 집착을 갖게 되는 경우를 전제했지만
만일 그 C 가 그 반대로 대단히 고통을 주는 것이면
또 앞과 반대로 고통과 두려움 공포 불안을 위와 같은 형태로 가져다 줌을
의미하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처음 어떤 C 가 무상하다고 제시한 내용은
곧 이런 C 는 고통을 주게 되는 것임도 함께 의미한다고 할 수 있다.
사정이 그렇기에 경전에서는
C 가 무상하기에 C 는 고통이다 라는 명제가 반복제시된다.
이것을 고고, 괴고, 행고라고 제시하는데
그 C 자체가 고통스런 것이면 고고이고
그 C 자체가 좋다고 보는 것이면 그것이 무상해서 언젠가 사라지게 되므로 고통을 주는 것이고
또 좋지도 않고 나쁘지도 않다고 해도 역시 그 관계가 무상하여
결국 다른 나쁜 상태가 나타남을 의미하는 것이다.
물론 엄밀히 보면 중간에 일부 좋은 측면이 그로 인해 얻어진다고 볼 수 있지만,
여기서 문제삼는 생사현실에서 얻는 고통은
그 사정이 위와 같이 그런 내용을 징검다리 삼아서
결국 고통을 얻게 된다는 측면을 제시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런 부분이 문제이므로
이런 생사고통을 제거하기 위해서
이런 기본 사정을 살피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1차적으로 현실에서 있다고 보고 집착하는 이들 내용이
이처럼 무상하고 고통을 주는 내용이 되므로
이에 대해 집착을 갖고 대하면 곤란함도 함께 제시한다.
이는 반대로 위와 같은 사정을 잘 파악하고
그런 내용에 대해 갖는 집착을 제거하면
위 상황에서도 그 집착으로 인해 겪는 고통을 제거할 수 있고
또 한편 그런 집착에 바탕해 업을 행하지 않게 됨으로써
그런 업에 바탕해 받게 되는 고통도 미리 제거하게 된다.
한편 a + b => C 식 자체는
이 식 자체가 그런 관계에서 그런 C 를 반복해 얻게 된다는 사정 자체가
그 C 는 실답지 않은 꿈과 마찬가지의 성격을 갖는 것으로서,
영원불변하고 고정된 참된 진짜의 내용이 '아님'을 의미한다.
그리고 더 나아가 이런 한 부분이 이와 같음을 파악함으로써
현실 일체가 모두 무아 무자성이라는 사정도 파악하게 된다.
물론 이 부분은 좀 더 자세한 추가 설명이 필요하지만,
여하튼 위와 같은 현실 사정으로 인해 제법무아를 제시하게 되는 것이다.
한편, a + b => C 식 자체는
이 C 가 좋은 내용이던 또는 고통스런 나쁜 내용이던 그런 관계에서 얻어지는 내용인 한편,
위와 같은 관계를 떠난 본 바탕의 영역에서는 이들은 얻어지지 않는 내용임도 의미한다.
따라서 이런 사정으로 그런 관계를 떠난 '본 바탕의 영역'은
그처럼 문제삼는 내용 일체를 얻을 수 없는 청정한 니르바나라고 제시하게 된다.
한편 a + b => C 식 자체는
이러한 C 는 그런 관계로 그런 조건에서 얻는 임시적 내용으로서
본 바탕의 지위에 있는 내용이 '아닌' 한편,
이런 관계를 떠난 본 바탕은
이런 형태로 내용을 얻을 수 밖에는 없는 각 주체의 입장에서는
끝내 그 내용을 얻을 수 없기에
그런 본 바탕이 되는 실재는 공하다고 표현하게 됨을 의미한다.
이처럼 a + b => C 라는 관계가 그 게임안에서 무수하게 반복한다는 사정은
위와 같은 내용을 자체적으로 반복해 제시해주는 것이고
그런 사정으로 위와 같은 C 나 위 관계 자체가 실답다고 하는 것은 아니다.
즉 a + b => C 라는 관계가 그런 형태로 무량하게 반복한다고 해서
앞에 제시한 내용들의 사정이 달라지는 것이 아니다.
그래서 여기서 기본적으로 두 측면을 이해해야 한다.
게임기 비유에서 보듯
비록 게임 안에서 어떤 내용이 어떤 관계를 통해
무수하게 반복한다는 측면이 있는 반면
그 내용을 통해
게임기 밖의 영역 등에서는
그런 내용을 본래 얻을 수 없고
사정이 그렇기 때문에 게임기안의 내용은 실답지 않다.
그리고 또 무상한 내용이기도 하기에 그에 집착을 갖고 대할 것이 아니다.
이런 내용을 함께 제시해주는 것이다.
이제 게임기의 비유를 현실로 그대로 옮겨 오기로 하자.
게임기와 다른 것은 게임기 내용은 비록 그 안의 내용이
아무리 그처럼 반복해도
대부분 그 내용이 실답지 않다는 것을 이미 잘 이해하고 있다.
다만 현실은 이와 성격이 마찬가지인데
현실에서 각 주체는 바로 그런 사정 때문에
현실이 대단히 실답다고 집착을 갖고 대하는 차이가 있다.
또 그에 바탕해서 업을 행하기 때문에
그런 망집을 벗어나지 못하는 전제에서는
무량하게 생사고통을 반복해 받아나가게 된다는 차이가 있다.
즉 게임기 비유에서는 마치 꿈이나 환영이나 최면술사의 최면과 같이
비유로 든 내용 자체가 실답지 않음을 대부분 잘 이해하지만,
그와 성격이 마찬가지인 현실은 이와는 달리,
현실이 그런 형태로 대단히 반복하기에
그런 사정으로 이들 내용이 대단히 실답다고
망집을 갖고 대하는 차이가 있는 것이다.
그래서 위 비유를 놓고 하나하나 비유에서 제시한 내용을
현실에 잘 적용해서
현실 내용도 위와 마찬가지로
실답지 않다는 사정을 이해하고
망집에 바탕해 업을 행해서
그런 망집에 바탕에서 생사고통을 받아 나가는 상태로부터
벗어나야 한다고 제시하는 것이다.
따라서 위 내용은 즉,
한편으로 본 바탕에서 그런 내용을 얻을 수 없다.
그런데 그 바탕에서
망집을 일으켜 업을 행하면 또 그 망집을 바탕한 전제에서는
그 업에 의해 그런 생사고통을 과보로 무량하게 받는 상태가 된다.
이런 두 내용을 함께 제시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런 생사현실에서 그런 상태를 벗어나려면
일단 수행을 통해서
그렇게 묶이게 하는 그 생사현실의 업의 장애와
그런 업을 행하게 한 망집을 제거해야 한다는 것을 또 함께 제시하는 것이다.
즉 그런 생사현실의 상황에서는 그런 관계로 무량하게
망집번뇌 - 업과 - 그로 인해 받게 되는 3 악도에서의 생사고통의 과보가 펼쳐지고
또 한편으로는 수행과 무량한 복덕 지혜의 구족이란 과보가 펼쳐지는데
그러나 그 하나하나가 본 바탕에서는
그런 내용을 얻을 수 없는 가운데
그렇게 된다는 사정을 제시하는 것이다.
그래서 수행자는 이 두 측면을 잘 이해하고 관해서
본래 그런 내용을 얻을 수없다는 측면에서는
생사고통을 받게 하는 망상분별과 집착을 제거하는 한편,
또 다른 한편으로는
그런 상태에서 생사고통을 받는 중생을 제도하기 위해
그런 망집을 제거한 바탕에서 중생을 제도할 수 있는
복덕자량과 지혜자량을 구조할 수 있는 수행을
무소득(얻을 바 없음)을 방편으로 정진해야 함을 제시하는 것이다.
mus0fl--Emmanuelle Seigner - Dingue.lrc
내용이 길어져 부담된다.
불교 내에서 위와 같은 기본 명제가 제시되는 사정을 이해할 수 있다.
그래서 이런 명제를 바탕으로 수행에 임하는 불교내 입장으로
[1] [2] [3] [5] 의 형태가 있게 된다.
그리고 이는 부처님이 제도하고자 하는 중생의 상태 때문이다.
중생이 현실에서 얻지 못하는 내용을 놓고
그런 것이 있고 그 생멸과 생사가 있다고 여긴다.
그러므로 본 사정이 그렇지 않음을 이해시키고자
일단 중생과 눈높이를 맞추어 내용을 제시한다.
그래서 그 일체는 무상하고 고통이며 무아 무자성이고
본 바탕은 그 일체가 열반 적정인 상태이고 공하다고 제시한다.
그래서 이런 내용을 통해 현실에서 망집을 제거하고
그에 바탕한 업도 제거한다.
또 한편 수행을 통해서 업의 장애를 제거한다.
그래서 생사의 묶임에서 벗어나 해탈과 니르바나의 상태에 이르게 한다.
그런데 처음 이런 내용에 바탕해 수행하면
세속에서 일으킨 망집과 업을 제거하지만,
그러나 부처님이 제시한 수행목표와 수행방안을 향해 망집을 옮겨 오는 것이 문제된다.
그것이 앞에서 [1]이나 [5] 의 유형으로 제시한 입장이다.
예를 들어 [5]의 경우는
수보리 존자가 그런 내용을 본래 얻을 수 없다고 제시하면,
그런 내용을 얻을 수 없다고 본다.
그러나 '수보리 존자가 제시한 그 명제'만은 실답게 존재한다고 이해하는 경우다.
그리고 그런 바탕에서는 [1]의 경우처럼
진여 실재와 생사현실에서 얻는 감각현실과 관념분별을 구분해서
진여 실재는 그런 생사를 얻을 수 없는 청정한 니르바나의 상태라고 이해한다.
그리고 생사현실에서 얻는 감각현실과 관념분별은
본래 실답지 않고 망집을 일으키므 문제로 본다.
그래서 회신멸지의 상태에 드는 것을 수행목표로 하여 임하게 된다.
회신멸지는 이런 내용 자체를 얻지 않는 상태를 의미하기 때문이다.
원칙적으로 예를 들어 꿈이 실답지 않다면
공연히 꿈 속에서 황금을 얻고 잃음을 아예 문제삼지 않을 수 있다.
그리고 꿈 자체를 꾸지 않아도 무방하다.
그런데 원칙적으로 다음 두 측면에서 문제가 된다.
우선 그렇게 임하면 그 자신은 생사고통을 벗어나는 것은 맞다.
그러나 대신 생사현실에 남아 생사고통을 받는 중생은 방치하게 된다.
그래서 자신만 니르바나에 이르는 상태가 된다.
그래서 이를 소승이라고 표현하게 된다.
또 하나 원칙적으로 볼 때 다음이 문제된다.
현실에서 망집을 일으키는 기본 재료는 감각현실과 관념분별이다.
그러나 문제는 이런 재료가 아니다.
이를 재료로 관념영역에서 망집을 일으키고 또 그에 바탕해 업을 행하는 부분이 문제다.
각현실과 관념분별은 실재와 함께 무아 무자성으로서 실답지 않다.
그러나 그 재료 자체만 놓고 보면 역시
이들도 진여 실재 바탕을 떠나 얻는 것이 아니다.
또한 이 재료 자체만 놓고 보면 생사현실에서 문제되는 생사고통은 얻을 수 없다.
그래서 이런 입장에서는 생사현실 즉 열반 이라고 제시한다.
수보리 존자는 본 바탕에서만 사정이 그렇다고 제시하는 것이 아니다.
수보리 존자가 행한 그 언설 자체가 그렇다고 제시하는 것이다.
현실에서 오고감이나 생멸을 얻을 수 없다고 한다.
그런데 이 말은 본 바탕인 진여의 영역에서만 그렇다고 제시하는 것이 아니다.
현실에서 거리에서 눈을 떠 영희가 오고 가는 모습도 보는 상황 그 자체에
그런 내용을 얻을 수 없음을 제시하는 것이다.
그래서 이런 측면에서 이들 재료 자체는 모두 청정한 니르바나라고 제시한다.
여기서 망상분별을 일으킨 관념분별 부분은 다음이다.
일정한 감각현실을 얻고 관념분별을 일으킨다.
이 때 관념영역에서 다시 다음처럼 망상분별을 일으킨다.
즉, 그런 사정 때문에 감각현실 영역에 그런 관념분별에 해당한 내용이 그런 형태로 '있다'.
더 나아가 실재 영역에도 그렇게 '있다'.
그래서 실답다. 이렇게 여기고 대하는 그 부분이 문제다.
이 때 관념분별이나 감각현실은 이런 망집을 일으키는 재료다.
그러나 그 자체에는 그런 문제는 본래 없다.
즉 관념분별로 망집을 일으킨 상태에서는
자신이 생각하는 영희는 현실에서 눈을 떠 얻는 그런 내용을
구성부분으로 갖춘 것으로 여긴다.
그런데 알고보면 그 관념분별 자체엔 그런 감각현실이 없다.
따라서 그 관념분별 자체만 놓고 보면 또 그런 문제가 없다.
다만 그런 상태지만, 망집을 일으킨 상황에서는
그렇지 않다고 여긴다.
그런 가운데 망집에 바탕해
감각현실 부분을 취해 붙잡고 늘어지고 업을 행한다.
그래서 그 부분을 엉망으로 만든다.
그로 인해 극심한 생사고통으로 받아들일 수 밖에 없는 상태에 묶이게 된다.
그리고 이 부분이 문제다.
그래서 이 망집이 문제된다.
반대로 실상을 잘 꿰뚫어 현실을 넓고 길고 깊고 관하여
망집을 제거한 상태에서는
이들 재료 자체는 이란 사정으로 본래 그런 생사고통을 얻을 수 없는
청정한 니르바나의 상태임을 깨닫게 된다.
그리고 이런 상태에서
망집을 일으켜 생사고통을 받는 중생을 제도하려면
눈높이를 그런 중생에 맞추어
적극적으로 중생이 있는 생사현실에 들어가야 한다.
그래서 그런 중생을 제도할 복덕자량과 지혜자량을 구족해 내는 것이 요구된다.
사정이 이렇기 때문에
진여 실재만 생사의 묶임에서 벗어난 청정한 니르바라라고 이해하면 곤란하다.
회신멸지의 상태에서 생사현실 자체를 얻지 않는 상태가 되어도 무방하다.
그러나 생사현실도 앞과 같은 입장에서는 그 재료 자체는
곧 청정한 니르바나를 떠나지 않은 상태다.
또 한편 그 생사현실에서 생사에 묶인 중생을 제도하려면
적극적으로 이들 차별된 생사현실 일체가 모두 청정한 니르바나임을 잘 관하고
여여하게 생사현실에 임하는 자세가 요구된다.
결국 생사현실에 임할 때는
수행자가 그런 사정을 잘 이해하고 관하는 한편,
또 한편 중생에 눈높이를 맞추어
중생을 제도할 방편이 필요하다.
따라서 결국 생사현실에서 복덕자량과 지혜자량을 구족해야 한다.
그래서 생사에 묶이게 하는 업의 장애를 제거하기 위한
기본 수행덕목이 요구된다.
그리고 그것이 계의 항목이다.
즉 보시- 정계 - 안인 - 정진과 같은 항목이다.
이는 좋음(+)을 베풀고
중생이 집착하는 좋음을 해치지 않고 나쁨(-)은 가하지 않고
자신이 나쁨(-)을 받을 때는 상을 일으키지 않고 평안히 참고
이런 자세로 꾸준히 수행해 나가는 것을 의미한다.
그런데 본래 그런 것이 거기에 실답게 있어서 그런 수행이 필요한 것은 아니다.
또 그런 수행을 통해 실제로 얻는 복덕 자량이 실답게 있어서 그런 것이 아니다.
반야바라밀다로 관하면 그런 것을 일체 얻을 수 없다고 보게 된다.
그러나 생사현실에서 생사고통을 받는 중생을 제도하려면
수행자 자신부터 그런 생사현실에 묶이는 업의 장애를 제거해야 한다.
그리고 생사현실에서 중생을 잘 제도하려면
복덕자량을 구족하는 것이 방편으로 요구된다.
그리고 그런 바탕이 되어야 중생을 제도할 지혜 자량도 원만히 구족할 수가 있다.
그래서 처음 [1]의 입장과는 차이가 있다.
그런 사정으로 수행자가 회신멸지의 상태에 들어가
일체 아무 말도 하지 않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그리고 수없이 생사를 받고 수없이 설해도
이 자체에 그런 내용을 얻을 수 없음을 잘 이해해야 한다.
그런 가운데 그에 대해 상을 취하거나 집착을 갖지 않고
그런 취지로 이와 같은 수행을 해 나가야 한다.
끝으로 [2]의 유형으로 제시한 입장
즉, 악취공견의 입장과의 차이를 또 살펴야 한다.
이는 다음과 같은 주장을 하는 경우다.
일체가 공하므로 선도 얻을 수 없고 악도 얻을 수 없다.
그래서 아무 것도 행하지 않아도 무방하다.
이렇게 하거나 저렇게 해도 무방하다.
망집상태에서 행하던 방식대로 계속 임해도 된다.
더 나아가 오히려 더 극심하게 악을 행해도 된다.
수행을 해도 무언가 얻을 것이 있다[유소득]고 집착하는 가운데 수행을 해도 된다.
이렇게 입장을 취하는 형태다.
일체가 차별없이 그 본 바탕이 공하다.
또 현실도 앞과 같은 사정으로 알고보면 그런 내용을 거기에서 얻을 수 없다
이 측면은 옳다.
그리고 그 측면을 취하면 위와 같은 입장을 취하기 쉽다.
그런데 문제는 그것이 아니다.
사정이 그런데도
수행자 자신 뿐만 아니라
일반 중생은 그런 재료를 바탕으로
망집을 일으켜 업을 행하고
그런 바탕에서 생사고통을 받아나간다.
이것이 문제다.
그래서 이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필요하다.
그리고 그런 사정으로 위와 같은 내용을 기본적으로 관하고
현실 일체에 대해서 집착을 제거하고 임하는 것이 필요하다.
그래서 위와 같은 입장에서는
사정이 그런데 왜 하필이면 행하기 힘든 수행을 그렇게 행하는가라고
반문하게 된다.
그러나
[3] 의 입장에서는 이를 반대로 반문하게 된다.
[img2-49] [그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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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업 시점 2563_1223_010821
그 입장이 기본적으로 옳아서
현실 일체가 다 차별이 없이 공하다.
그런데 왜 하필이면 어차피 차별이 없는 상태에서
중생이 생사현실에서 고통을 받게 하고
그 자신도 어차피 차별이 없는 공한 바탕에서
중생을 제도하는데 큰 도움이 되는 것도 아닌 상태에서
왜 하필이면 굳이 지옥과 같은 상태에 들어가
그 상태에서 그것이 차별없이 공하기에 무방하다고
고집하는가.
그리고 어차피 차별이 없는데
이왕이면 생사현실에서 무량한 복덕과 지혜자량을 구족하고
불국토를 장엄하고 중생을 제도하고 성불하는
방안을 취하지 않으려 하는가.
이렇게 반문하게 된다.
그래서 특히 일체가 공하다는 경전 내용을 대할 때는
위와 같은 입장을 주의해야 한다.
수행자는 본 사정이 그렇다는 것을 자신은 이해하더라도
생사현실에서 고통받는 중생의 입장에서는
그렇게 그 상황을 대하지 않는다는 것을 문제로 보아야 한다.
그런 가운데 중생의 눈 높이에 맞춰야 한다.
그리고 그에 바탕해 중생을 제도하기 위해서
중생의 입장에서는 행하기 힘들다고 보는 수행을 행하여야 한다.
그래서 복덕 자량과 지혜자량을 얻고
불국토를 장엄해서 중생을 제도하고자 생사현실에 임한다.
즉, 생사현실에서 감각현실과 관념분별을
마찬가지로 얻고 일으키지만,
그러나 또 한편 위와 같은 사정을 잘 관하고 이해해야 한다.
그래서 본래 얻을 바도 없고
그런 것이 실답지 않아 집착할 바가 없음을 잘 이해해 현실에 임해야 한다.
생사현실에 들어가면
망집에 바탕한 중생의 상태처럼
그 수행자도 여전히 실답지 않은 허공의 꽃을 보게 된다.
그러나 앞과 같은 바탕에서
그것이 실답지 않은 허공의 꽃임을 이해하는 가운데
그것을 대해야 한다.
그리고 그 바탕에서 다시
중생을 제도하기 위한 수행에 임해야 한다.
그런데 일체가 공하다고 하여서
위와 같이 임하지 않으면 곤란하다.
원칙적으로 그 내용이 잘못은 아니다.
그러나 지옥과 극락이 둘이 아니고 차별이 없다고 하면서도
매번 지옥과 같은 상황에 처하게 된다.
그리고 알고보면 그렇게 되는 것은
그 수행자부터가 기존에 갖던 망집을 바탕으로 행하던 내용들은
이것이나 저것이나 어차피 차별이 없다고 여기며 쉽게 행하고
수행방안으로 제시하는 내용은 도무지 행하기 어렵다고 여기며
행하려 하지 않는다.
그 때문에 이것이나 저것이나 차별이 없다고 하면서
어차피 차별없이 공한 바탕에서
매번 대면하는 상황은 지옥 상황에 처하게 된다.
그것이 중생제도를 위해 부득이하다면 그 취지가 인정이 된다.
또 불퇴전위에 이른 수행자라면
이런 방편을 통해서도 중생을 제도하려고 임하게 된다.
그런데 그것이 아닌 가운데
잘못된 이해를 바탕으로 위와 같이 임하게 되면 그것은 곤란하다.
그리고 그런 경우는 이론적으로 원칙적으로
지옥도 차별없이 공하여 무방하다고 여기던 것과는 달리
자신의 손 하나만 톱으로 잘려져도
그런 원칙에 바탕해 평안히 임하지 못하게 된다.
현실적으로 당장 실험을 해보아도
어느 수행자라도 그것이 쉽게 잘 안되는 것이 현실이다.
또 그런 상태이기에 어차피 차별없이 공하다는 입장을 취하면서도
매번 생사현실에서 힘든 수행을 외면하고
자신이 평소 망집에 바탕해서 임하던 형태대로 임하게 된다.
그래서 그런 상태에서 잘못 이해하고 업을 행해 생사고통을 받는 상태에 처하면
그 원칙대로 임하지 못하게 된다.
그래서 원칙상으로는 생사 즉 열반이라고 제시하지만,
현실적으로 이런 경우는 생사즉 열반의 상태가 되는 것이 아니고
열반 즉 생사의 상황에 놓이게 된다.
즉 본 바탕은 원칙적으로 그런 생사고통을 얻을 수 없는 니르바나인데
그러나 그렇게 잘못 이해하고 함부로 업을 행하거나
무언가 얻을 것이 있다고 집착한 가운데 수행을 행하게 되면
원칙적으로 니르바나와 차별없는 상태를 생사고통을 받는 상황으로 대하게 된다.
또 일반 중생도 이로 인해
그 생사고통이 더욱 증폭되는 상태에 처하게 된다.
그래서 이런 입장은 주의해야 한다.
위 내용을 간단히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1] 의 입장에 대해서는
생사현실도 곧 청정한 니르바나다.
이런 내용을 제시하게 되고
[2] 의 입장에 대해서는
어차피 차별없이 공한데
왜 차별없이 공한 바탕에서 하필이면
무량한 복덕과 지혜를 구족하여 중생을 제도할 수 있는 수행을 하지 않을 것인가.
이렇게 제시할 수 있다.
[4]는 망집을 없애기 위해 제시한 시설 방편을 놓고
왜 다시 이에 망집을 일으키는가라고 반문할 수 있다.
[5] 는 한편 처음부터 부처님이 제시한 가르침을 이해하지 못하거나
받아들이지 못하는 외도의 입장으로서
기존에 제시한 망집을 제거하는 방편을
상대의 상태에 맞추어 골고루 잘 적용해야 한다고 할 수 있다.
부족하지만, 이렇게 마치기로 한다.
>>>
올려진 노래에서
강도가 들어와 맞고 줄 것인가
아니면 그냥 줄 것인가.
이런 말을 한다는 이야기가 연상이 된다.
어차피 차별없이 공한 바탕인데
그런 바탕에서
끔직한 생사고통을 겪고
부처님의 가르침을 믿고 수행해 나갈 것인가.
아니면 그런 것을 생략하고
일찍 그리고 신속하게 부처님의 가르침을 받아들이고
수행해나갈 것인가.
이런 메세지를 전한다고 시감상하게 된다.
이런 내용은 본래 그런 노래에서 얻을 수 없다
그러나 그런 내용을 전한다고 시감상하는 것이
수행에 도움이 된다.
◈Lab value 불기2562/12/22 |
하루에 과거에 올린 20 개 페이지를 살펴보기로 계획을 했는데 현실적으로 대단히 어렵다. 일단 시간대를 오가면서 조각글을 작성하기에 |
문서정보 ori
http://buddhism007.tistory.com/5300#455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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