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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진리와실천
유가사지론_K0570_T1579_051_002 본문
『유가사지론』
K0570
T1579
유가사지론 제51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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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t op tr] 유가사지론_K0570_T1579 핵심요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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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가사지론 제51권
■■ 51-2 - 불기2563-01-24 V2
● 다시, 올타남(嗢拕南)으로 말하리라.
소연[所緣] 또는 상응[相應]
호위연성[互為緣性-서로가 연이 됨]과
식등구전(識等俱轉-식 등과 함께 굴름)과
잡염오[雜染污-더러움에 섞여 물듦]과 환멸(還滅)이니라.
T30n1579_p0579c23(00)
復次嗢拕南曰。
所緣若相應 更互為緣性
與識等俱轉 雜染污還滅
T30n1579_p0579c25(00)
만약, 간략하게 말하면,
아뢰야식은 4종상[四種相-4 가지 모양]으로 말미암아 유전(流轉)21)을 건립하고
1 가지 상[相-모습]으로 말미암아 환멸(還滅)을 건립[建立]한다.
○ 어떤 4상[四相]으로 유전[流轉-흘러 굴름]을 건립하는가.
(1) 소연전[所緣轉- 소연에서 유전]을 건립하고
(2) 상응전[相應轉-상응하여 유전]을 건립하고,
(3) 호위연성전[互爲緣性轉-서로가 연의 성품이 되어 유전]을 건립하고,
(4) 식등구전전(識等俱轉轉- 식 등과 함께 굴러 유전]을 건립하기 때문이다.
○ 어떻게 1 가지의 상으로 환멸을 건립하는가.
잡염전[雜染轉- 더러움에 섞여 물든 유전]을 세우고
저 환멸을 건립함으로 말미암아서이다.
T30n1579_p0579c26(00)
若略說阿賴耶識。由四種相建立流轉。
由一種相建立還滅。云何四相建立流轉。
當知建立所緣轉故。建立相應轉故。
建立互為緣性轉故。建立識等俱轉轉故。
云何一相建立還滅。謂由建立雜染轉故。
及由建立彼還滅故。
T30n1579_p0580a02(03)
[주석]------
21)유전
[Kor]유전[Chn]流轉[San]saṃsāra[Tib]khor ba[Eng]the transmigration
[mean][1]계속 상속하여 일어나는 것.[ref][k]윤회[c]輪廻
[mean][2]미혹한 중생심에 따라 일어나는 것. 환멸(還滅)의 반대말.[ref][k]윤회[c]輪廻
[주석끝]------
○ 어떻게 소연전상[所緣轉相-소연에서 굴르는 모습]을 건립(建立)하는가.
간략하게 말하면 아뢰야식은 2 가지 소연경[所緣境-의존緣하는 대경]으로 말미암아 굴른다[전轉].
1째는 안의 집수[執受]의 요별[了別-분별하여 앎] 때문이요,
2째는 바깥의 무분별기상[無分別器相-분별없는 세계모습]의 요별 때문이다.
=75
● 안의 집수[執受]의 요별은
변계소집자성[遍計所執自性-두루 헤아려 집착하는 자성]의 망집습기[妄執習氣-망녕되이 집착하는 습기] 및
모든 색근[色根]과 근[根-감관]의 소의처[所依處- 소의가 되는 처소]를 요별함이다.
이는 유색계[有色界-형상 있는 세계]에서요,
만약 무색계[無色-형상 없는 세계]에 있다면, 습기(習氣) 집수(執受)의 요별만 있다.
T30n1579_p0580a03(04)
云何建立所緣轉相。
謂若略說阿賴耶識。由於二種所緣境轉。
一由了別內執受故。二由了別外無分別器相故。
了別內執受者。
謂能了別遍計所執自性妄執習氣。及諸色根根所依處。此於有色界。
若在無色。唯有習氣執受了別。
T30n1579_p0580a07(02)
● 바깥의 무분별기상[無分別器相-분별없는 세계모습]을 요별함은
안의 집수[執受]에 연[緣-의존,반연]하는 아뢰야식에 의지(依止)하기 때문에
일체시에 간단[間斷]없이 기세간[器世間]의 모습[상相]을 요별함이다.
마치 등불의 불꽃이 생겨나는 때에는
안의 기름과 심지에 붙어 바깥으로 광명을 내는 것과 같나니,
이와 같아서 아뢰야식이 안의 집수[執受]를 연[緣]하여
외기[外器-바깥의 세계]에 연[緣]한 모습[상相]이 나타나 일어나게 되는 이치도
역시 그러한 줄 알아야 한다.
T30n1579_p0580a08(07)
了別外無分別器相者。謂能了別依止。
緣內執受阿賴耶識故。於一切時無有間斷。
器世間相譬如燈焰生時內執膏炷外發光明。
如是阿賴耶識緣內執受緣外器相。
生起道理應知亦爾。
T30n1579_p0580a12(06)
또한,
아뢰야식이 연하는 경계는 반연함이 미세하다.
세간의 총명하고 슬기로운 이조차 알기 어렵기 때문이다.
또 아뢰야식의 경계를 반연함은 그만두는 때가 없다.
변하거나 바꾸어짐이 없이
처음 집수하는 찰나로부터 목숨을 마치기에 이르기까지
한 맛[一味]으로 요별하며 구르기 때문이다.
또 아뢰야식은 소연경[所緣境-반연할 경계]에서
생각생각에 생멸한다.
찰나에 상속하고 유전[流轉-흘러 굴름]하므로
이는 하나도 아니고 항상함도 아님을 알아야 한다.
T30n1579_p0580a13(00)
復次阿賴耶識緣境微細。
世聰慧者亦難了故。
復次阿賴耶識緣境。無廢時無變易。
從初執受剎那乃至命終。
一味了別而轉故復次阿賴耶識於所緣境念念生滅。
當知剎那相續流轉非一非常。
T30n1579_p0580a18(03)
● 다시 아뢰야식은
욕계[欲界] 안에서는 협소한 집수(執受) 경계를 반연하며,
색계[色界] 안에서는 광대한 집수 경계를 반연한다.
무색계[無色界-무형세계]의
공무변처[空無邊處-허공이 끝없는 하늘]와
식무변처[識無邊處-식이 끝없는 하늘]에서는 무량한 집수 경계를 반연하며,
무소유처[無所有處-아무것도 없는 하늘]에서는 미세한 집수 경계를 반연한다.
비상비비상처[非想非非想處-생각도 생각 아님도 아닌 하늘]에서는 극히 미세한 집수 경계를 반연한다고 말해야 한다.
이와 같이,
2 가지의 소연[所緣-반연할 바]를 요별하기 때문에
소연경[所緣境]에서 미세하게 요별하기 때문에
서로 비슷하게 요별하기 때문에, (*일미一味)
찰나에 요별하기 때문에,
협소한 집수의 소연[所緣]을 요별하기 때문에,
광대한 집수의 소연을 요별하기 때문에,
무량한 집수의 소연을 요별하기 때문에,
미세한 집수의 소연을 요별하기 때문에,
지극히 미세한 집수의 소연을 요별하기 때문에,
아뢰야식의 소연전상[所緣轉相-소연에서 굴르는 모습]을 건립함을 알아야 한다.
T30n1579_p0580a19(01)
復次阿賴耶識。
當言於欲界中緣狹小執受境。
於色界中緣廣大執受境。
於無色界空無邊處識無邊處緣無量執受境。
於無所有處緣微細執受境。
於非想非非想處緣極微細執受境。如是了別二種所緣故。
於所緣境微細了別故。相似了別故。剎那了別故。
了別狹小執受所緣故。了別廣大執受所緣故。
了別無量執受所緣故。
了別微細執受所緣故。了別極微細執受所緣故。
T30n1579_p0580a28(03)
=76
○ 어떻게 상응전상[相應轉相-상응하여 구르는 모습]을 건립하는가.
아뢰야식은 5 변행(五遍行) 심상응법과 늘 함께 상응한다.
즉, 작의[作意-뜻지음], 촉[觸-닿임], 수[受-느낌], 상[想-생각], 사[思-의지]다.
이와 같은 5 가지 법은 역시 오직 이숙(異熟)22)에 포함되며,
가장 극히 미세하다.
세간의 총명하고 슬기로운 이조차도 역시 알기 어렵기 때문이다.
또한 언제나 하나의 종류로서 경계에 반연[緣]하며 구른다.
또 아뢰야식에 상응하는 수[受-느낌]는
한결같이 불고불락[不苦不樂-괴롭지도 않고 즐겁지도 않음]하며
무기성[無記性-선도 악도 아닌 성품]에 속한다.
그 밖의 심법[心法]의 행상(行相)도 역시 그러한 줄 알아야 하리라.
이와 같이
변행(遍行)의 심소[心所]에 상응하기 때문에
그리고 이숙의 한 종류에 상응하기 때문에,
그리고 지극히 미세하게 굴러 상응하기 때문에,
그리고 언제나 하나의 종류로서 경계를 반연[緣]하며 구르며 상응하기 때문에,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음에 상응하기 때문에,
한결같이 무기[無記]에 상응하기 때문에
아뢰야식의 상응전상[相應轉相]을 건립함을 알아야 한다.
T30n1579_p0580a29(00)
云何建立相應轉相。謂阿賴耶識。
與五遍行心相應所恒共相應。謂作意觸受想思。
如是五法。亦唯異熟所攝最極微細。
世聰慧者亦難了故。亦常一類緣境而轉。
又阿賴耶識相應受。一向不苦不樂無記性攝。
當知餘心法行相亦爾。如是遍行心所相應故。
異熟一類相應故。極微細轉相應故。
恒常一類緣境而轉相應故。不苦不樂相應故。
一向無記相應故。應知建立阿賴耶識相應轉相。
T30n1579_p0580b08(04)
[주석]------
22) 이숙
[Kor]이숙[Chn]異熟[Pali]vipāka[San]vipāka[Tib]rnam par smin (pa)[Eng]maturing differently
[mean]행위의 결과. 업이 성숙하여 결과를 낳는 것.
업력이 그 원인과는 성질과 기능이 다른 결과로 성숙하는 것.
선업을 즐거움을 낳고 악업은 고통을 낳지만,
결과인 즐거움과 고통 자체는 선도 아니고 악도 아닌 무기(無記)이므로, 원인과는 다른 성질이다.
한편 즐거움이나 고통이라는 무기 자체는 과보를 초래하지 않으므로,
원인인 선악과는 기능이 다르다.
원인인 선이나 악을 이숙인(異熟因),
결과인 즐거움이나 고통을 이숙과(異熟果)라고 한다.
‘원인은 선악이지만, 결과는 무기’(因是善惡 果是無記)라는 것이 곧 이숙인과 이숙과의 관계이다.
[syn]동}과보(果報) * 비파가(毘播伽) * 응보(應報).
---
【범】vipāka 비파가(毘播伽)라 음역. 선악의 업인(業因)으로 얻은 무기성(無記性)의 결과.
구역은 과보(果報). 이에 3석(釋)이 있음.
변이숙(變異熟)은 인(因)이 달라져서 과(果)가 성숙.
이시숙(異時熟)은 과는 인과 때를 달리하여 성숙.
이류숙(異類熟)은 과는 인과 별류(別類)로 성숙.
유식가(唯識家)에서는 세 번째 것을 씀.
또 유식가에서는 이숙(異熟)와 이숙으로 생긴 것을 구별하여
앞의 것을 진이숙(眞異熟),
뒤의 것을 이숙생(異熟生)이라 함.((운허_동국역경원사전))
[주석끝]------
○ 어떻게 호위연성전상[互為緣性轉相-서로가 연의 성품이 되어 구르는 모습]을 세우는가.
아뢰야식은 모든 전식(轉識)23)과 함께 2 가지 연[緣]의 성품을 짓는다.
1째는 그의 종자가 되기 때문이요,
2째는 그의 소의[所依-의지할 바]가 되기 때문이다.
● 종자[種子-씨]가 된다 함은
온갖 선[善-착함], 불선[不善-착하지 않음], 무기[無記]의 전식이 구를 때에
일체가 모두 아뢰야식을 사용하여 종자로 삼기 때문이다.
● 소의[所依-의지할 바]가 된다 함은
아뢰야식이 색근[色根-형상 감관]을 집수(執受)함으로 말미암아
5식신[五識身]은 이에 의하여 구르는 것이며,
집수(執受)가 없는 것이 아니다.
또, 아뢰야식이 있음으로 말미암아 말나[末那-제7 말나식]가 있게 된다.
이 말나[末那]가 의지[依止]가 됨으로 말미암아 의식[意識-제6의식]이 구를 수 있게 된다.
비유컨대, 눈 따위의 5근[五根-다섯 감관]에 의지[依止]하여 5 식신이 구르며,
5근[五根]이 없는 것이 아님과 같다.
의식(意識)도 역시 그러하여 의근[意根-뜻감관]이 없는 것이 아니다.
T30n1579_p0580b09(00)
云何建立互為緣性轉相。謂阿賴耶識。
與諸轉識作二緣性。一為彼種子故。
二為彼所依故。為種子者。
謂所有善不善無記轉識轉時。一切皆用阿賴耶識為種子故。
為所依者。謂由阿賴耶識執受色根。
五種識身依之而轉。非無執受。
又由有阿賴耶識故得有末那。
由此末那為依止故意識得轉。譬如依止眼等五根五識身轉。
非無五根。意識亦爾非無意根。復次諸轉識。
與阿賴耶識作二緣性。一於現法中。
T30n1579_p0580b17(03)
[주석]------
23)전식
[Kor]전식[Chn]轉識[San]pravṛtti-vijñāna[Tib]jug pa'i rnam par shes pa[Eng]the knowledge transformed
[mean][1]유식설의 8식 중에서 아뢰야식인 제8식 앞의 7식을 모두 일컫는 말.
아뢰야식으로부터 전변된 식임을 뜻한다.[syn]동}칠전식(七轉識).
[mean][2]다른 식들을 전변하는 식이라는 뜻에서 아뢰야식을 일컫는 말.
[mean][3]대승기신론에서 설하는 5식의 하나.
아뢰야식, 즉 업식(業識)의 근본무명이 일전하여 주관적 인식 작용인 능견(能見)의 식으로 변하는 것.
[mean][4]전식득지(轉識得智)의 줄임말.
망상과 분별을 일삼는 유루의 식을 깨달음의 지혜로 전환하는 것.
[주석끝]------
또 모든 전식(轉識)과 아뢰야식은 다음 2 가지 연의 성품을 짓는다.
1째는 현법[現法-현재 법] 가운데 그 종자를 장양[長養-자라게 하고 기름]하기 때문이요,
2째는 후법[後法-뒷날의 법] 가운데 그것이 생겨날 수 있도록
그 종자를 섭식[攝殖-거두어 심기]하기 때문이다.
● 현법 가운데 그 종자를 장양함은
아뢰야식에 의지(依止)하여 선, 불선, 무기의 전식이 구를 때에
이와 같고 이와 같이 하나의 의지(依止)에서 같이 나고 같이 없어지며,
아뢰야식을 훈습(熏習)한다.
이 인연으로 말미암아
나중 나중에 전식의 선, 불선, 무기 성품이 구르고,
다시 늘어나 구르며,
다시 왕성하게 구르며,
다시 명료하게 구른다.
● 후법 가운데 그것이 생겨날 수 있도록 그 종자를 섭식(攝殖)함은,
그 훈습된 종류가
장차 오는 세상의 이숙무기(異熟無記)를 잘 끌어 포섭함이다.
아뢰야식은 이와 같이
그 종자가 되기 때문에,
그 소의[所依-의지할 바]가 되기 때문에,
종자를 장양하기 때문에
종자를 섭식하기 때문에
아뢰야식과 모든 전식의
호위연성전상[互為緣性轉相-서로가 연의 성품이 되어 구르는 모습]을 건립함을 알아야 한다.
T30n1579_p0580b18(02)
復次諸轉識。
與阿賴耶識作二緣性。一於現法中。
能長養彼種子故。二於後法中。
為彼得生攝殖彼種子故。
於現法中長養彼種子者。
謂如依止阿賴耶識善不善無記轉識轉時。
如是如是於一依止同生同滅。熏習阿賴耶識。
由此因緣後後轉識善不善無記性轉。
更增長轉更熾盛轉更明了而轉。
於後法中為彼得生攝殖彼種子者。謂彼熏習種類。
能引攝當來異熟無記。
阿賴耶識如是為彼種子故。為彼所依故。長養種子故。
攝殖種子故。
應知建立阿賴耶識與諸轉識互為緣性轉相。
T30n1579_p0580b29(15)
=77
○ 어떻게 아뢰야식과 전식 등은
구전전상[俱轉轉相-함께 굴름에서 구르는 모습]을 건립하는가.
아뢰야식은 혹 어느 때에는
오직 1 가지만의 전식[轉識]과 함께 구르기도 한다.
이른바 말나(末那-제7식)다.
왜냐 하면, 이 말나(末那-제7식)로 말미암아
아견[我見-나라는 소견]과 만[慢-난체] 등이 항상 함께 상응하고
행상(行相)을 사량[思量-생각하고 헤아림]하기 때문이다.
유심위[有心位-마음 있는 지위]거나 무심위[無心位-마음 없는 지위]거나 간에
항상 아뢰야식과 한 때에 함께 굴르며,
아뢰야식을 반연[緣]하여 경계[境界]로 여기고
〈나〉라고 집착하며 만[慢]을 일으키며 행상을 사량[思量]한다.
혹은 한 때에 2 가지와 함께 구르기도 하나니,
말나(末那-제7식)와 의식(意識)이다.
혹은 한 때에 3 가지와 함께 구르기도 하나니,
5 가지 식신이 따라 하나가 구르는 때이다.
혹은 한 때에 4 가지와 함께 구르기도 하나니,
5 가지 식신이 따라 둘이 구르는 때이다.
어느 때는 내지 7 가지와 함께 구르기도 하나니,
5 가지 식신이 함께 화합해 구르는 때이다.
또, 의식[意識-뜻 알음]은 염오[染污-더러움에 물듦] 말나[末那-제7식]를
의지[依止]로 삼는다.
그것이 아직 멸하지 않을 때 상[相]을 요별하는 속박[縛]에서 해탈할 수 없다.
말나(末那-제7식)가 멸하고 나면, 상박[相縛-모양의 속박]에서 해탈한다.
다시 의식(意識)은 다른 경계를 반연[緣]하고 스스로의 경계도 반연[緣]한다.
다른 경계를 반연한다 함은,
5 가지 식심의 소연[所緣-반연할 바] 경계를 반연하되
혹은 단번에 하기[頓]도 하고 단번에 하지 않기도 한다.
스스로의 경계를 반연한다 함은, 법경[法境]을 반연함을 말한다.
T30n1579_p0580c01(13)
云何建立阿賴耶識與轉識等俱轉轉相。謂阿賴耶識。
或於一時唯與一種轉識俱轉。所謂末那。何以故。由此末那。
我見慢等恒共相應思量行相。
若有心位若無心位。常與阿賴耶識一時俱轉。
緣阿賴耶識以為境界。執我起慢思量行相。
或於一時與二俱轉。謂末那及意識。
或於一時與三俱轉。謂五識身隨一轉時。
或於一時與四俱轉。謂五識身隨二轉時。
或時乃至與七俱轉。謂五識身和合轉時。
又復意識染污末那以為依止。
彼未滅時相了別縛不得解脫。末那滅已相縛解脫。
又復意識能緣他境及緣自境。緣他境者。
謂緣五識身所緣境界或頓不頓緣自境者。謂緣法境。
T30n1579_p0580c13(08)
다시 아뢰야식은 혹 어느 때는
고수[苦受-괴로운 느낌]ㆍ낙수[樂受-즐거운 느낌]ㆍ
불고불락수[不苦不樂受-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은 느낌]과
때를 같이 하여 구른다.
이 느낌은 전식과 상응하여
그에 의존하여 일어난다.
인간 안에서나 욕계[欲界] 하늘에서나
일 부분의 아귀와 방생[傍生-축생]에서
구생[俱生-태어남과 함께 하는] 불고불락수와
전식[轉識]과 상응하는 고수ㆍ낙수ㆍ불고불락수들이
서로 뒤섞여서 함께 구른다.
=78
나라카[那落迦-지옥] 등의 안에서는
남에게 영탈[映奪-압도]당하여
불고불락수와 순고[純苦-순수한 괴로움]를
섞임 없이 받아 함께 한꺼번에 구른다.
여기서의 수[受-느낌]은 영탈당하고 있기 때문에
료지[了知-분명히 앎]하기 어려움을 알아야 한다.
T30n1579_p0580c14(00)
復次阿賴耶識。
或於一時與苦受樂受不苦不樂受俱時而轉。
此受與轉識相應依彼而起。謂於人中若欲界天。
若於一分鬼傍生中。俱生不苦不樂受與轉識相應。
苦受樂受不苦不樂受相雜俱轉。
若那落迦等中他所映奪。不苦不樂受與純苦。
無雜受俱時而轉。當知此受被映奪故難可了知。
T30n1579_p0580c20(04)
나라카 등 안에서는
한결같이 고수[苦受-괴로운 느낌]가 함께 구른다.
이와 같이 아래 3 정려지[靜慮地-정려 자리]에서는
한결같이 낙수[樂受-즐거운 느낌]가 함께 구른다.
제 4 정려 자리부터 유정천(有頂天)까지는
한결같이 불고불락수[不苦不樂受-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은 느낌]가 함께 구른다.
다시, 아뢰야식은 혹 어느 때는 전식과 상응하여
선[善]ㆍ불선ㆍ무기의 모든 심소[心所]와 함께 한꺼번에 구른다.
이와 같이 비록 아뢰야식은 전식과 함께 구르며,
또한 객[客-손님]인 수[受-느낌]와 객인 선ㆍ불선ㆍ무기의 심소와 함께 한꺼번에 구른다.
그러나 그와 상응한다고는 말하지 않아야 한다.
왜냐하면, 그와 함께 연[緣-반연]을 같이하여 구르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마치 안식[眼識-눈알음]이 비록 안근[眼根-눈감관]과 함께 구르지만,
그러나 상응하지 않은 것처럼, 이 역시 그와 같다.
이 가운데 자그마한 부분이 서로 비슷한 이치에 따라, 비유가 될 수 있는 줄 알아야 한다.
또 마치 모든 심소[心所]는 비록 심소[心所]의 성품은 차별이 없어도,
그러나 서로가 다르기 때문에 한 몸에서 일시[一時-한 때]에 함께 굴러도
서로가 어기지[상위相違] 않는 것처럼,
이같이 아뢰야식과 모든 전식은 한 몸 안에서 일시에 함께 굴러도,
서로가 역시 어기지 않음을 알아야 한다.
T30n1579_p0580c21(01)
如那落迦等中一向苦受俱轉。
如是於下三靜慮地。一向樂受俱轉。
於第四靜慮地乃至有頂。一向不苦不樂受俱轉。
復次阿賴耶識。
或於一時與轉識相應善不善無記諸心所俱時而轉。
如是阿賴耶識。雖與轉識俱時而轉。
亦與客受客善不善無記心所俱時而轉。
然不應說與彼相應。何以故。
由不與彼同緣轉故。如眼識雖與眼根俱轉然不相應。
此亦如是。
應知此中依少分相似道理故得為喻。
又如諸心所雖心所性無有差別。
然相異故於一身中一時俱轉互不相違。如是阿賴耶識與諸轉識。
於一身中一時俱轉。當知更互亦不相違。
T30n1579_p0581a05(05)
또, 마치 하나의 사나운 폭포에서 많은 물결들이 일시에 구르면서
서로가 어기지 않는 것과 같으며,
또 마치 하나의 맑고 깨끗한 거울면에서 많은 영상들이 일시에 구르면서
서로가 어기지 않은 것과 같아서,
이와 같이 하나의 아뢰야식에서 많은 전식들이 일시에 함께 구르면서도
서로가 어기지 않은 것인 줄 알 것이다.
또 마치 하나의 안식[眼識-눈알음]이 일시(一時)나 하나의 일의 경계[사경事境]에서는
오직 한 종류의 다름이 없는 색상[色相-빛깔 모양]만 취하기도 하고,
혹은 어느 때에는 단번에 하나가 아닌 갖가지의 색상(色相)을 취하는 것과 같다.
안식[眼識-눈알음]이 뭇 색[色-빛깔]에서 그런 것처럼,
이식[耳識-귀알음]이 뭇 성[聲-소리]에서나
비식[鼻識-코알음]이 뭇 향[香-냄새]에서나
설식[舌識-혀알음]이 뭇 미[味-맛]에서도 역시 그러하다.
또한,
마치 신식[身識-몸알음]이 혹은 일시(一時)나 하나의 일의 경계에서는
다만 한 종류와 다름이 없는 촉상[觸相-닿임 모습]을 취하기도 하고,
혹은 어느 때에는 단번에 하나 아닌 갖가지 촉상을 취하는 것처럼,
=79
이같이 분별하는 의식(意識)도
하나의 시간에서는 하나의 경계 모양을 취하기도 하고
혹은 하나 아닌 갖가지의 경계 모양을 취하는 것이
도리이고 또한 서로가 어기지 않음을 알아야 한다.
T30n1579_p0581a06(05)
又如於一瀑流有多波浪一時而轉互不相違。
又如於一清淨鏡面有多影像一時而轉互不相違。如是於一阿賴耶識。
有多轉識一時俱轉。當知更互亦不相違。
又如一眼識於一時間於一事境。唯取一類無異色相。
或於一時頓取非一種種色相。
如眼識於眾色。如是耳識於眾聲。鼻識於眾香。
舌識於眾味亦爾。
又如身識或於一時於一事境唯取一類無異觸相。
或於一時頓取非一種種觸相。如是分別意識。
於一時間或取一境相。或取非一種種境相。
當知道理亦不相違。
T30n1579_p0581a17(05)
또 앞에서 말한 말나(末那-제7식)는
언제나 아뢰야식과 함께 구른다.
나아가 아직 끊지 않을 때는
언제나 선천적으로[구생俱生] 저절로 있는
4 종번뇌와 일시(一時)에 상응함을 알아야 한다.
살가야견[薩迦耶見-유신견有身見]과
아만[我慢-젠체함]과
아애[我愛-자기를 사랑함]과
무명[無明]이 그것이다.
이 4 가지 번뇌는
정지[定地-선정의 자리]에 있거나 부정지[不定地-선정이 아닌 자리]에 있거나
항상 행하되 선[善-착함] 따위와 서로가 어기지 않음을 알아야 한다.
이는 유부무기[有覆無記]24)의 성품[性]이다.
이와 같이,
아뢰야식은 전식과 함께 구르기 때문에,
모든 수[受-느낌]과 함께 구르기 때문에,
선[善-착함] 따위와 함께 구르기 때문에
아뢰야식의 구전전상[俱轉轉相-함께 굴름에서의 유전의 모습]을 건립함을 알아야 한다.
T30n1579_p0581a18(13)
又前說末那恒與阿賴耶識俱轉乃至未斷。
當知常與俱生任運四種煩惱一時相應。謂薩迦耶見。我慢。我愛。
及與無明。此四煩惱。若在定地若不定地。
當知恒行不與善等相違。是有覆無記性。
如是阿賴耶識。與轉識俱轉故。與諸受俱轉故。
與善等俱轉故。
應知建立阿賴耶識俱轉轉相。
T30n1579_p0581a24(11)
[주석]------
24) 유부무기 ◀有覆無記▶
↔ 무부무기(無覆無記). 또는 유부심(有覆心).
성질이 선에도 악에도 속하지 아니하고,
또 선ㆍ악의 어떤 결과도 불러올 힘이 없는 것을 무기(無記)라고 함.
그 중에 수행(修行)에 방해가 되는 것과 그렇지 아니한 것이 있다.
전자를 유부무기라 하고,
후자를 무부무기라 함.((운허_동국역경원사전))
[주석끝]------
● 어떻게 아뢰야식의 잡염환멸상[雜染還滅相-섞여 물듦에서의 환멸의 모습]을 건립하는가.
간략하게 말하면 아뢰야식은 바로 일체 잡염[雜染]25)의 근본이다.
왜 그런가.
이 식은 유정[有情-중생, 생명]의 세간을 생기게 하는 근본이고,
모든 근[根-감관]과 근소의처[根所依處-감관의 소의 처소]와
전식[轉識] 등을 내게 하기 때문이다.
또한 이는 기세간[器世間-그릇 누리,세계]를 생기게 하는 근본이니,
기세간을 생기게 하기 때문이다.
또한 이는 유정들을 서로 일으키는 근본이다.
일체 유정들은 서로 견주어 보면
서로가 증상연(增上緣)이 되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한 유정과 나머지 다른 유정이 서로 보게 되는 때에는
고락[苦樂-괴로움과 즐거움] 따위를 내지 않음이 없고,
다시 서로가 수용[受用-받아 씀] 아니함이 없기 때문이다.
이런 도리로 말미암아
유정 세계는 서로가 증상연이 됨을 알아야 한다.
또,
이 아뢰야식은 온갖 법의 종자를 지니기 때문에
현재 세상에서는 바로 고제[苦諦-괴로움의 진리]의 체[體-바탕]이며,
또한 이는 미래의 고제를 낳는 원인이며
또 이는 현재의 집제[集諦-고통의 쌓임에 대한 진리]를 낳는 원인이다.
이와 같이, 유정 세간을 내기 때문에,
기세간을 내기 때문에,
이는 고제[苦諦]의 바탕이기 때문에,
미래의 고제[苦諦]를 내기 때문에,
현재의 집제[集諦]를 내기 때문에
아뢰야식이야말로 이는 온갖 잡염[雜染-섞여 물듦]의 근본임을 알아야 한다.
T30n1579_p0581a25(00)
云何建立阿賴耶識雜染還滅相。
謂略說阿賴耶識是一切雜染根本。所以者何。
由此識是有情世間生起根本。
能生諸根根所依處及轉識等故。亦是器世間生起根本。
由能生起器世間故。亦是有情互起根本。
一切有情相望互為增上緣故。所以者何。
無有有情與餘有情互相見等時。
不生苦樂等更相受用。
由此道理當知有情界互為增上緣。又即此阿賴耶識。能持一切法種子故。
於現在世是苦諦體。亦是未來苦諦生因。
又是現在集諦生因。如是能生有情世間故。
能生器世間故。是苦諦體故。
能生未來苦諦故。能生現在集諦故。
當知阿賴耶識是一切雜染根本。
T30n1579_p0581b09(07)
[주석]------
25)잡염
[Kor]잡염[Chn]雜染[San]saṁkleśa[Tib]kun nas nyon mongs pa[Eng]defiled
[mean]마음의 청정을 방해하는 작용으로서 번뇌에 속하는 모든 것.
모든 유루법(有漏法)의 총칭.
26) 기세간
[Kor]기세간[Chn]器世間[San]bhājana-loka[Tib]snod kyi ’jig rten[Eng]the natural world ; the material world
[mean]
2종 세간, 3종 세간 가운데 하나.
중생이 살고 있는 세상으로서, 산하(山河), 대지(大地), 초목(草木) 등을 포함한 세계 전체를 가리킴.
[syn]동}기계(器界) * 기세계(器世界).[opp]반}유정세간(有情世間) * 중생세계(衆生世界).[abr]약}기(器).
* 2종 세간 = [기(국토)세간,중생세간], 3종 세간[2종세간+지정각세간, 또는 5온세간]
[주석끝]------
다시,
아뢰야식이 포함하여 지니는
순해탈분27)[順解脫分-해탈로 향하게 하는 부분, 원인]과 순결택분[順決擇分-4선근위]28) 등의
선법[善法-착한 법]의 종자는
집제[集諦]의 원인이 아니다.
순해탈분 등의 선근[善根-착한 뿌리]은
유전[流轉-생사에 헤맴]과 서로 어긋나기 때문이다.
그 밖의 세간의 온갖 선근은
이로 인하여 나타나기 때문에 굴러 더욱 더 밝고 왕성하다.
=80
T30n1579_p0581b10(00)
復次阿賴耶識所攝持順解脫分。
及順決擇分等善法種子。此非集諦因。
由順解脫分等善根與流轉相違故。所餘世間所有善根。
因此生故轉更明盛。
T30n1579_p0581b13(00)
[주석]------
27) 순해탈분
[Kor]순해탈분[Chn]順解脫分[San]mokṣa(nirvāṇa)-bhāgīya[Eng]the causes that lead to liberation
[mean]분(分)은 원인을 뜻함. 해탈로 향하게 하는 원인이 되는 것. 해탈을 향해 나아가게 되는 계위(階位). 열반으로 이끄는 선(善). 구사론에서는 3현(賢), 즉 10주(住), 10행(行), 10회향(回向)를 가리키고, 유식설에서는 자량위(資糧位)를 일컫는다.[abr]약}해탈분.
28) 순결택분
[Kor]순결택분[Chn]順決擇分[San]nirvedha-bhāgīya[Tib]nges par 'byed pa'i cha dang mthun pa[Eng]causes from according with selection
[mean]난(煖), 정(頂), 인(忍), 세제일법(世第一法) 등의 4선근위(善根位)를 가리킴. 4선근위를 수행함에 따라서 견도(見道)를 얻게 되는 것을 말함.
[주석끝]------
이런 인연으로 말미암아
그 섭수하는 바의 자기 종류의 종자는
굴러 공능(功能)이 있고
굴러 세력이 있다.
종자를 더욱 자라게 하여
빨리 성립시킨다.
또 이 종자에 의하기 때문에
저 모든 선법[善法-착한 법]은 굴러 밝고 왕성하게 나타난다.
또 장차 오는 세상에서는
굴러 늘어나고
굴러 더 뛰어나고 사랑할 만하고
즐길 만한 모든 이숙과[異熟果-이숙 과보]를 받는다.
다시 다음에,
이 일체종자 아뢰야식에 의하기 때문에
박가범[薄伽梵-bhagavat,세존]께서는 말씀하시기를,
「안계[眼界-눈의 경계]와 색계[色界-빛깔 경계]와 안식계[眼識界]
내지
의계[意界] 법계[法界-법의 경계]와 의식계[意識界]가 있나니,
아뢰야식 안에 갖가지의 계[界-경계]가 있기 때문이니라.」고 하셨다.
또 경에서
악차취유29)[惡叉聚喻-악차의 무더기 비유]를 말씀하신 것처럼
아뢰야식의 안에는 많은 계[界-경계]가 있기 때문이다.
다시, 이 잡염[雜染-섞여 물듦]의 근본인 아뢰야식은
선법[善法-착한 법]을 닦기 때문에
비로소 전멸[轉滅-바꾸어져서 없어짐]하게 된다.
T30n1579_p0581b14(08)
由此因緣彼所攝受自類種子。轉有功能轉有勢力。
增長種子速得成立。
復由此種子故彼諸善法轉明盛生。
又復能感當來轉增轉勝可愛可樂諸異熟果。復次依此一切種子阿賴耶識故。
薄伽梵說。有眼界色界眼識界。
乃至有意界法界意識界。由於阿賴耶識中有種種界故。
又如經說惡叉聚喻。
由於阿賴耶識中有多界故。
復次此雜染根本阿賴耶識。
修善法故方得轉滅。
T30n1579_p0581b23(06)
[주석]------
29) 악차 ◀惡叉▶
【범】akṣa 전마과(田麻科)에 속하는 나무 이름. 오로날라차(嗚嚕捺羅叉, rudrākṣa)ㆍ
인다라(因陀羅, indrākṣa)라고 씀. 인도 마레이 반도에 나는 교목.
잎은 홑잎, 갓은 톱니모양(鋸齒狀), 길이는 4~5촌, 잎꼭지는 짧고, 일찍 떨어지는 탁엽(托葉)이 있음.
꽃은 흰색, 35~40개의 숫꽃술이 있음. 과일은 자색, 크기는 앵두와 같음.
가운데 있는 씨로 염주를 만드는데, 종관구(縱貫球)ㆍ천목구(天目球)ㆍ금강자(金剛子)라고 부름.
씨가 한 곳에 모이므로
『성유식』ㆍ『유가사지론』 등에서는
한 무더기에 여러 가지 있는 것을 설명할 때에 이것으로 비유.
((운허_동국역경원사전))
[주석끝]------
T30n1579_p0581b24(06)
此修善法若諸異生。
以緣轉識為境作意方便住心。能入最初聖諦現觀。
非未見諦者於諸諦中。未得法眼。
便能通達一切種子阿賴耶識。
此未見諦者修如是行已。或入聲聞正性離生。
或入菩薩正性離生。達一切法真法界已。
亦能通達阿賴耶識。
當於爾時能總觀察自內所有一切雜染。亦能了知自身外為相縛所縛。
內為麁重縛所縛。
復次修觀行者。
以阿賴耶識是一切戲論所攝諸行界故。略彼諸行。
於阿賴耶識中總為一團一積一聚。
為一聚已由緣真如境智。修習多修習故而得轉依。
轉依無間當言已斷阿賴耶識。
由此斷故當言已斷一切雜染。當知轉依由相違故。
能永對治阿賴耶識。又阿賴耶識體是無常。有取受性。
轉依是常。無取受性。
緣真如境聖道方能轉依故。又阿賴耶識。恒為一切麁重所隨。
轉依究竟遠離一切所有麁重。又阿賴耶識。
是煩惱轉因。聖道不轉因。
轉依是煩惱不轉因。聖道轉因。應知但是建立因性。
非生因性。又阿賴耶識。
T30n1579_p0581c15(03)
이 선법을 닦으면서
모든 이생[異生-범부]들은 전식[轉識]을 연하여 경[境-대경]으로 삼고서
작의[作意-뜻지음] 방편으로 마음에 머물러
최초의 성제현관(聲諦現觀)31)에 들게 된다.
아직 제[諦-진리]를 보지 못한 이는
모든 진리 가운데서 아직 법안[法眼-법눈]을 얻지 못한지라
곧 일체 종자의 아뢰야식을 통달하지 못한다.
여기 아직 제[諦-진리]를 보지 못한 이는
이와 같은 행을 닦은 뒤에
혹은 성문의 정성이생(定性離生)에 들기도 하고
혹은 보살의 정성이생에 들기도 하여서
일체법의 진법계[眞法界-참된 법계]를 통달한 뒤
역시 아뢰야식을 통달한다.
그 때에야 통틀어서
자기 안에 있는 일체잡염[一切雜染-온갖 섞여 물든 것]을
전체적으로 관할 수 있다.
그리고 제 몸의 바깥은 상박[相縛-모습의 속박] 때문에 속박되었고
안은 추중박[麤重縛-추중의 속박]때문에 속박되었음을 분명히 알 수 있다.
다시 다음에, 관행[觀行-마음 보기]를 닦는 이는
아뢰야식은
일체 희론[戲論-쓸모 없는 이론]에 포함된 제행[諸行모든 행]의 계[界-경계]라고 여겨서,
그 모든 행을 요약하여
아뢰야식 가운데 전체적으로 한 덩이[團] 또는 한 더미[積] 또는 한 무더기[聚]로 삼으며,
한 무더기로 삼은 뒤에는
진여(眞如)의 경계[境]를 반연하는 지혜로 말미암아
닦아 익히고 많이 닦아 익히기 때문에
전의[轉依]를 얻는다.
전의[轉依]가 끊임 없는 상태[무간無間]가 되면
이미 아뢰야식을 끊었다고 말해야 하며,
이것이 끊어짐으로 말미암아
이미 일체 잡염[雜染-섞여 물든 것]을 끊었다고 말해야 한다.
전의[轉依]는 서로 어김[相違]으로 말미암아
영원히 아뢰야식을 다스리게 되는 줄 알아야 한다.
또 아뢰야식의 체(體)는
바로 무상[無常]하고
취수성[取受性-취하여 받는 성품]이 있거니와
전의[轉依]는
바로 항상[常]하고
취수성[取受性]이 없다.
=81
진여의 경계를 반연하는 성도[聖道-성인의 도]로
비로소 전의[轉依]할 수 있기 때문이다.
또 아뢰야식은 항상 일체 추중(麤重)32)이 따르게 되지만,
전의는 마침내 일체 추중을 멀리 여읜다.
또,
아뢰야식은
이는 번뇌에 구르는 원인[轉因]이고
성인의 도에 구르는 원인이 아니다.
전의[轉依]는
번뇌에 구르는 원인이 아니고
성인의 도에 구르는 원인이다.
다만 이것은 원인의 성품[因性]을 세울 뿐이고
낳는 원인의 성품[生因性]이 아님을 알아야 한다.33)
■■
[주석]------
30)현관
[Kor]현관[Chn]現觀[San]abhisamaya[Tib]mngon par rtogs pa[Eng]insight into
[mean][1]진리를 확실하게 아는 것. 진리와 하나가 됨.
눈 앞에서 진리를 관찰하는 지혜.
유루(有漏)와 무루(無漏)의 지혜로써 눈 앞의 대상을 명료하게 관찰하는 것.
[mean][2]설일체유부에서 설하는 성제현관(聖諦現觀)의 줄임말.[syn]동}정관(正觀).
31)전의
[Kor]전의[Chn]轉依[San]āśraya-parāvṛtti[Tib]gnas gyur pa[Eng]changing the basis
[mean]의지하고 있는 근거를 바꿈. 번뇌를 열반으로 전환함.
아뢰야식 속의 온갖 오염된 종자를 소멸하고 청정한 종자만으로 가득 채우는 것.
아뢰야식에 있는
번뇌장의 종자를 버리고 열반을 얻으며,
소지장의 종자를 버리고 보리를 얻는 것.
전(轉)은 버리거나 새로 얻음으로써 바꾸는 것,
의(依)는 의지하고 있는 근거로서 전의 대상.
버려야 할 대상은 번뇌장과 소지장이며,
새로 얻어야 할 대상은 열반과 보리이다.
32)추중
[Kor]추중[Chn]麤重[San]dauṣṭhulya[Tib]gnas ngan lan[Eng]fallacy
[mean]번뇌에 속박되어 있는 것. 번뇌의 장애, 또는 번뇌를 가리킴.
33)
이로 인해 결과가 그처럼 얻어지는 것처럼 여겨지지만,
그 결과는 본래부터 그렇게 있었던 것으로서
다만 그 상태에서는 상대적으로 원인으로 여기게 되므로 원인이라고 세운다는 의미로 본다.
[주석끝]------
○ 음악공양, 나무불, 나무법, 나무승 mus0fl--Amelie Les Crayons - Voyager Leger.lrc
Lab value 불기2564/04/23/목/19:57
♥ 잡담 ♥아뢰야식 존부 증명 8가지과 새 암기방안
유가사지론 앞 부분에
처음 아뢰야식 존부 증명에 관한 8 가지 내용이 나온다.
나중에 왜 보이지도 않고 만져지지도 않는데
그런 아뢰야식이 있다고 제시하는가라고 누군가 질문할 수도 있다.
이런 경우 전문적 수행자를 지향하는 수행자는
막힘없이 『유가사지론』에서 제시된 내용을
하나하나 나열해가면서 이해하기 쉽게 설명해줄 필요도 있다.
이러이러한 근거가 있다.
이렇게 각 내용을 제시해서
이해할 수 있게 해줄 필요가 있다.
예를 들어 다음과 같다.
...
현실의 이런 내용을 살펴보자.
그런데 아뢰야식이 없고
당신이 인정하는 그런 1-6 식만 있다고 하자.
아니면 그런 정신도 아예 없다고 하자.
그래서 마치 도미노가 쓰러지는 것처럼
물질들이 단순히 작용 반작용의 관계로만 변화한다고하자.
그래서 그런 관계로 자극 반응하는 것이 현실 내용이고
마음 현상이라고 하자.
그러면 말이 되는가.
...
이렇게 제시해주어야 한다.
그래서 전문 수행가를 지향하는 수행자는
각 내용을 잘 살펴야 한다.
그리고 그렇게 살핀 다음에는
그 내용을 또 잘 정리해야 한다.
그리고 기억하기 쉽게 잘 결합시켜 보관할 필요가 있다.
그래서 다시 다음과 같은 첫글자를 떼어 시구를 만들어 보았다.
51-1 섭결택분-아뢰야식존부증명-執초明種業身定命
첫글자를 단순히 한글로 읽어 붙이면 말이 잘 안된다.
그래도 이 문장을 그냥 무조건 반복해 외우는 것도 한 방안이다.
그러나 한자어 첫글자들을 통해
새로 만들어진 한문게송으로 여기며 앞뒤로 말이 되도록
감상하는 것도 방안이다.
그렇게 이들 내용을 서로 묶어 연상이 잘 되도록
하는 것이 암기에 도움된다.
한시감상 예 => 아뢰야식의 존재의 증명
=> 섭결택 하자면,
집초명 [처음 밝음에 집착] 하여
종업 [업의 씨를 뿌리고 ]하고
신- 정명. [몸의 운명이 정해졌다. ] 되었다
[=> 그처럼 안타깝게 생사를 겪게 되었다.
이로써 아뢰야식의 존재가 증명된다. ]
이런 시를 만들어 감상할 때는
제목 부분을 함께 반드시 함께 넣어야 한다.
그래야 나중에 이 부분이 그 이후 내용을 꺼내줄 수 있다.
즉 이 부분이 내용을 꺼내주는 열쇠 역할을 하게 된다.
그래서 집초명종업신정명 이 부분만 열심히 묶어 외우면 곤란하다.
이런 경우 정작 나중에 이 내용을 꺼낼 줄 열쇠가 없다.
그래서 생각이 떠오르지 않게 된다.
그래서 주의해야 한다.
섭결택분-아뢰야식(증명)-집초명종업신정명
이렇게 묶어서 함께 외어야 한다.
그러면서 연상이 잘 되도록 시감상해야 한다.
한편 그 구체적 내용자체도 천천히 잘 살펴야 한다.
그래서 각 내용이 논리적으로 그리고 순서상 연상이 잘 되어야 한다.
한편, 이번 페이지에 살피는 내용도 사정이 같다.
그래서 하나 더 만들었다.
51-2 섭결택분-아뢰야식의 상-所相互俱雜還
물론 이런 경우 하나하나 집중하여
하나를 제대로 마치고 다음을 살피는 것이 낫다.
한꺼번에 다 살피려면 마음만 바쁘게 된다.
그리고 하나도 제대로 되지 않는다.
그런데 유가사지론이 알고보면 대단히 분량이 많다.
100 권이 된다.
이것을 다 살필 수 있을 지 모른다.
그래서 미리 각 내용을 보관할 방을 잘 배치하고
각 내용을 배당해서 보관해야 된다.
유가사지론에서 표현하는 유가사와
현실에서 요가 체조 형태의 요가가 많이 연상된다.
서로 의미는 다르다.
일정한 연역상 사정이 있는 듯 하다.
연구를 오래 하려면 한번에 무리하게 연구하기 보다는
조금씩 자주 쉬면서 건강 관리를 하면서
연구에 임해야 한다.
요가 체조 학교에서 알려주는 메뚜기 자세, 이런 것도 좋다.
그런데 사실은 부처님이 알려주는 정려 수행과
삼매 수행이나 경행이 좋다.
알고보면 정려나 삼매로도 그런 효과를 얻을 수 있다.
그런데 수행이 부족해 그렇지 못한 경우가 많다.
그러면 결국 심하게 근육을 움직여가면서 뛰어 보충해야 한다.
그리고 약도 복용하고 치료도 받아야 한다.
그러나 정려나 삼매 수행은 사실 그 자체로 그런 문제를 해결하게 하는
방안이기도 하다.
그래서 단순하게 각 내용을 대하고 암기 정리하기보다는
이런 정려 삼매를 병행해가며 유가사지론의 각 내용을 대할 필요가 있다.
한편 위와 같은 삼매를 행할 시
각 내용마다 나름대로 특색있는 정려 삼매 수행자세를 함께 취하며
암기해가는 도 방안이다.
요즘 연구작업 때문에 상당히 몸 상태가 많이 안 좋다.
그런 가운데 한편으로는 건강도 잘 관리해야 한다.
그런 한편 연구할 부분이 많이 밀려있다.
그래서 이런 아이디어를 생각해보게 된다.
여하튼 각 내용마다 조금은 특수한 자세를 취하면서
각 내용을 결합시키면 좋다.
아뢰야식의 존부증명에 관한 내용은
51-1 번 방에 넣는다고 하자.
그리고 양 손의 엄지 손가락과 집게 손가락이 서로 닿을락 말락 하는 가운데
유무문제를 놓고 삼매에 든다.
그리고 그런 자세를 신체에서 51 번 위치에 배당한 부분과 관련시킨다.
그리고 집초명종업신정명,,이런 내용에 해당한 사례를 하나하나 떠올려 연구해본다.
이렇게 임하면 좋을 듯하다.
한편 사전 퀴즈 파일이 있다.
현실적으로 연구하면서
이런 퀴즈까지 매번 풀면서 임하기는 쉽지 않다.
그러나 쉬면서 건강도 잘 관리하고
삼매 정려도 행하면 좋다.
그리고 과거에 한번 대한 내용을 잘 보관하고 지닐 수 있는 방안이다.
두번째 시는 새로 자세를 취해 보기로 하자.
양쪽 엄지손가락과 집게를 가지고
한글 자모 ㄷ 자 형태로 만들어 본다.
그리고 양 손가락에서 기를 발산시킨다. [?]
그리고 아뢰야식의 상과 관련해서
유전과 환멸 각 방향으로 6 가지 내용을 기를 모아 발산시켜본다.
그러면 그냥 암기하는 것보다 조금 나을 듯하다.
이처럼 암기와 건강 관리를 병행하는 방안을 제시해본다.
별 다른 의미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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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mg2-49] [그림]
- 이하 아래 부분은 현재 [작성, / 표현교정, 수정, 보완/ 문단 재배치 순서 정리 등 ] 작업중입니다. -
작업시작시점 2564_0424_021614
■■■ 아래에는 비슷한 주제에 대한 내용이 반복 기술되어 있습니다. 현재 중복부분을 정리중입니다. 참고 바랍니다. ■■■
Lab value 불기2563/01/21
mus0fl--Jeanne Moreau - Les Mensonges.lrc
● 아뢰야식 등의 시설 방편이 갖는 성격에 대한 주의점
눈에 보이지도 않고 만져지도 않는 이런 마음을
1,2,3,4,5,6,7,8 식 이런 형태로 시설해 제시하는 과정에서는
다시 이처럼 시설하는 각 내용들이 갖는 지위와 성격을 살펴야 한다.
그리고 그런 언어시설 방편이 갖는 의미를 놓고 다시 주의해야 한다.
그리고 이것이 처음 해심밀경에서 부처님이 주의를 주는 내용과 관련된다.
즉 이런 마음을 경전과 논서 등에서 그처럼 시설해 제시한다.
그런데 그런 경우 현실에서 보게 되는 이러이러한 내용들 때문에
그런 각 내용이 그렇게 그런 형태로 '있다'고 시설하게 된다.
그런데 이처럼 그런 내용을 제시하는 본 취지는
이런 사정을 이해해 망집에 빠져 있는 상대가
생사고통의 묶임에서 벗어나게 될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다.
즉, 현실에서 각 주체가 생사고통을 겪는 그 사정은
처음에 그러한 바탕에서 각 주체가 삶을 출발한다.
그리고 이후 그 상태에 다시 망집을 증폭시켜 일으킨다.
그리고 그런 망집의 바탕에서 업을 행한다.
그렇기에 생사고통을 받는 상태에 묶이게 된다.
그리고 그런 전제에서는
그가 고통으로 여기고 대할 수 밖에 없는 상태에 장구하게 묶이게 된다.
이것이 생사현실안의 생사고통의 문제다.
그런데 이 생사고통을 해결하려면
기본적으로 그렇게 묶이게 된 그 기본 사정을 잘 관해야 한다.
그리고 한편 그런 바탕에서 그런 생사고통을 계속 받게끔 만드는 업을 중지해야 한다.
그리고 그와는 반대로 생사고통의 묶임에서 벗어날 수 있는 수행을 올바로 원만히 잘 행해야 한다.
그래서 이런 생사고통에서 벗어나야 한다.
그래서 그런 상태에 이르도록 하기 위한 취지로 이들 내용을 시설해 제시하는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이런 취지로 이런 각 내용을 제시하면
이상하게도, 오히려 다른 망집을 일으키는 경우가 많다.
즉, 원래 망집에 묶여 지내던 입장에서는
기존의 망집 자세를 가지고 이들 내용을 대하는 가운데
앞과 같은 취지로 제시하는 내용에 대해서도
다시 이들 내용이 대단히 실다운 것으로 망집을 일으켜 대하게 된다.
그래서 결국 앞과 같은 취지로
각 정신의 내용들을 제시한다고 하자.
그러면 이를 대하는 가운데
다시 이런 내용을 곧 실다운 <나>의 정체인 것으로 잘못 이해하게 된다.
그런데 이렇게 되면 이것은 더 큰 문제다.
그래서 처음 주의를 덧붙이는 것이다.
이렇게 되는 사정은 비유를 하면 다음과 같다.
예를 들어 처음 현실에서 어떤 이가 대단히 엉뚱하게
벽돌 하나를 붙잡고 그것을 자신이라고 여긴다.
그런 가운데 이에 바탕해 온갖 업을 행해가면서 장구하게 고통을 받아 나간다.
그래서 이런 사정이 대단히 엉뚱하기도 하고 안타깝다.
때문에 다른 이들이 그 본 사정을 이해시키기 위해 노력하게 된다.
그런데 그런 노력을 통해
그 상대가 이제 벽돌을 자신이라고 여기지 않게 된다.
그리고 더 이상 벽돌을 붙들고 업을 행해나지 않게 된다.
그래서 그 망집현상은 제거하게 된다.
그런데 이 과정을 통해
이제는 벽돌 대신 다시 엉뚱한 배추를 붙들고 새로 그처럼 임한다고 하자.
그러면 처음 망집 치유과정을 통해
망집 증상이 잘 해결되었다고 보기 힘들다.
오히려 망집증상이 더 심해지게 된 것이다.
그래서 마음에 관해 살필 때는
『유가사지론』 섭결택분에서
제시하는 다음 내용을 먼저 잘 이해해야 한다.
다음 부분이다.
..
아타나식阿陀那識]은 매우 깊고 미세하며,
일체종자(一切種子)는 폭류[瀑流-사나운 흐름] 같다.
나는 범부와 어리석은 이에게 펴 말하지 아니했나니
그가 분별하고 집착하여 〈나〉라고 여길까 하여서이다.
『해심밀경』 심의식상품
그리고 참고로 다음과 같은 내용도 먼저 참조할 필요도 있다.
..
마음을 떠나서 그 밖의 것이 없음을 알면
이러함으로 말미암아 곧 마음이 있지 않음을 본다.
지혜로운 사람은 이러한 두 가지가 있지 않음을 보아서
둘이 없는 진실한 법계에 머무를 수 있다.
...
무착보살조. 진 진제역 『섭대승론』 2권(ABC, K0588 v16, p.1069a02)
...
그런데 이는
기본 경전들에서 제시한
부처님의 가르침 여러 내용들과도 그 사정이 비슷하다.
부처님께서
일반 중생들이 갖고 생사고통을 받아나가게끔 만드는
망집을 제거하고
생사의 묶임에서 벗어나게 하기 위해 일정한 가르침을 제시한다.
그렇게 되면 이를 통해 세속에서 갖고 있던 망집을 제거한다.
그런데 어느 순간
다시 부처님의 가르침을 붙잡고
그런 내용은 실다운 내용이라고 여기며 집착하고 대하기 쉽다.
이는 기존에 세속에서 일으켜 갖던 망상 분별 자세와 습성 때문이다.
이는 비유하면 다음과 같은 문제다.
상대가 강을 건너지 못해 고통을 받고 있다.
그러므로 일단 상대가 강을 건너가게 하기 위해 방편으로 뗏목을 만들어 건네게 한다.
그런데 이 때 상대가 강을 건너기 위해
그 전까지 붙잡고 있던 것은 다 내려 놓는다.
그 대신 이제 그 뗏목으로 강을 건너가지는 않고
그 뗏목을 붙들고 마냥 늘어진다고 하자.
또는 그 뗏목으로 강을 건너가고 나서도
그 뗏목을 집착하고 계속 붙들고 그에 머문다고 하자.
또는 기존에 가졌던 망상분별과 집착은 버리지만,
대신 그 뗏목에 대해서 새로 망상분별과 집착을 일으킨다고 하자.
그래서 기존의 다른 것과는 달리
그 뗏목에만은 무언가 실다운 것이 따로 있다고 여기면서
또 집찾을 갖고 대한다고 하자.
그러면 뗏목이 처음 문제를 조금 해결하였다지만,
결국 처음 가졌던 망상 증상을 단지 다른 부분으로 옮겨 온 것 뿐이다.
그리고 오히려 그 증상을 더 심화 증폭시킨 결과가 된다.
.
그래서 다음 내용부터 잘 파악해야 한다.
현실에서 거리에서 눈을 뜨고 거리를 본다고 하자.
영희나 자신이 여기저기 오간다
이렇게 일반적으로 대하는 현실 상황을 놓고
이 사정을 먼저 잘 이해해야 한다.
일반적으로
그 현실 상황에 '영희'나 '자신' 그리고 '오고감'의 동작들이 있다고 여긴다.
그런데 경전에서는 그 상황에
그런 영희나 자기자신, 또 그런 동작 일체를 얻을 수 없다고 제시한다.
즉, 상대가 문제삼는 그런 내용 일체를 거기에서 얻을 수 없다.
그리고 그런 사정을 이해시키기 위해 설명을 행하게 된다.
즉, 상대가 대하는 그 현실을 같이 놓고
우선 상대가 이해할 수 있도록 상대와 눈높이를 맞추어 임하게 된다.
그래야 상대가 이해할 수 있게 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선 상대가 이해할 수 있는 태로
각 부분을 상대처럼 언어로 표현하게 된다.
즉, 일정부분은 영희
일정 부분은 철수
이 부분은 자신 이런 식으로 표현한다.
그리고 이러이러한 내용은 오고가는 동작. 앉는 동작 이런 식으로 표현한다.
그런 가운데
그 현실에 그런 내용을 얻을 수 없고
그에 대해 집착을 갖고 업을 행해나가면 곤란한 사정을 하나하나 설명해가게 된다.
그리고 각 경전이나 논서에서 각 내용을 제시하는 그 기본 취지와 사정이 모두 위와 같다.
그래서 이렇게 내용을 제시하여 처음에 가졌던 망집을 제거했다고 하자.
그런데 정작 이런 취지로 위와 같이 제시한 내용에 대해서는
다시 처음 가졌던 망집과 같은 형태로 망집을 일으키고 임하면 곤란하다.
그리고 그런 사정이 바로 『해심밀경』에서 부처님이 우려하는 범부의 망집 자세다.
그리고 지금 살피는 마음이나 아뢰야식도
그 사정이 이와 마찬가지다.
이들 내용을 살피는 취지는 다음과 같다.
현실에서 갖는 온갖 망상분별과 집착을 제거한다.
그리고 그에 바탕해 행해 나가는 업을 제거한다.
그래서 그런 업으로 받게 되는 생사고통의 묶임에서 벗어나게 한다.
이렇게 하기 위해 이를 살핀다.
그래서 기본적으로
현실내용이 실답지 않음을 제시한다.
그런데 또 한편, 사정이 그러함에도
현실에서 각 주체는 그런 형태로 현실 내용을 얻는다.
그리고 또 그런 망집을 일으키고 임하게 된다.
그래서 어떤 배경 사정으로 그렇게 되는가를 잘 살펴야 한다.
즉 현실에서 본래 사정이 그렇지 않다.
그런데 주체는 그처럼 매순간 망집을 일으키고 임한다.
그렇게 되는 배경사정을 이해해야 한다.
또 그런 가운데 각 주체가
무량겁에 걸쳐 이 세계 저 세계에서 생사를 겪어 나가는 사정을 살펴야 한다.
그리고 이를 살피기 위해
각 주체의 생사과정에 작용하는 아뢰야식이나
각 정신을 시설해 살펴야 한다.
그래서 이런 취지로 이런 1,2,3,4,5,6,78 식을 제시하게 된다.
그런데 이렇게 시하면
원래 망집을 일으켜 임하던 입장은 또 다른 망집을 일으켜 임하게 되기 쉽다.
즉, 이런 내용으로 처음 세속에서 갖던 망상 분별과 집착은 일부 제거할 수도 있다.
그런데 처음에 가졌던 망집과는 달리,
이제 이렇게 제시한 내용들에 대해 다시 이들을 실다운 내용으로 잘못 여기기 쉽다.
그리고 처음에 가졌던 망집을 이런 내용으로 옮겨 가지고 오게 된다.
그래서 이 부분을 다시 주의 해야 한다.
처음 내용을 놓고 이 사정을 이해해보자.
어떤 이가
눈을 뜨고 거리를 보면 일정한 모습을 보게 된다.
즉, 일정한 '감각현실'을 얻게 된다.
그리고 이를 바탕으로
'저기에 영희와 철수가 있고 여기 자신이 있고
영희가 저기에서 여기로 오고 간다'라고 .분별을 일으킨다.
그런 사정으로
이런 감각현실은
그 주체가 그런 망상분별을 일으키게 한 재료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여하튼 그 주체가 눈을 뜨면
그런 감각현실을 얻는다.
그런데 문제는 그것이 아니다.
정작 그 안에는 그가 분별하는 그런 내용을 얻을 수 없는 점이다.
또 더 나아가 그런 감각현실의 본 바탕이라고 할 실재 영역에도 그런 분별 내용은 얻을 수 없다.
그런 가운데 그 주체가 실답게 있다고 여기는 내용들은
하나같이 무아 무자성이어서 진짜라고 할 내용이 없다.
따라서 그런 분별내용은 실답지 않다.
즉 한 주체는
현실에서 감각과정을 통해 현실에서 일정한 재료를 얻고 나서
이런 저런 분별을 행한다.
그러나 그가 문제삼는 내용들은 하나같이
그런 본 바탕에서 분별 영역에서 일으킨 관념영역안의 일일 뿐이다.
즉
본 바탕은 그런 내용을 얻을 수 없다.
또 진짜라고 할 영원불변한 것이 없어 무아 무자성이다.
그 뿐 아니라, 실재 내용은 그 내용을 직접 얻지 못하고 공하다.
그리고 그처럼 공하고 실답지 않은 실재를 바탕으로 하여
먼저 실답지 않은 감각현실을 1,2,3,4,5, 정신에서 얻는다.
그리고 나서 한 주체는 다시 그런 재료를 바탕으로 하여
제 6 식에서 분별을 일으키게 된다.
사정이 그런 것일 뿐이다.
그래서 그가 현실에서 문제삼는 내용은 오로지 그런 관념분별이고 이름 뿐이다.
그리고 다른 영역에서 그 내용을 얻을 수 없는 실답지 않은 내용이다.
그래서 현실 사정이 그와 같은 줄 알고 현실에 임해야 한다.
그리고 생사현실에 수행을 임하는 경우도 사정은 마찬가지다.
사정이 이렇다.
그런데 정작 각 주체는 그처럼 감각으로 얻는 그런 재료를 바탕으로
일정한 분별을 '일으킨다'
그런 후에는 그런 내용들이 하나같이 다른 영역에도 있는
실다운 내용이라고 망상분별을 일으킨다.
그리고 이후 이런 망상분별에 바탕해서
이들 내용에 대단한 집착을 갖는다.
그리고 이에 바탕해 업을 행해나가게 된다.
그리고 그런 업으로 그는 생사고통을 겪는 상태에 처한다.
그리고 그런 바탕에서는 그는 이를 대단히 극심한 고통으로 여기며
생생하게 대할 수 밖에 없게 된다.
생사현실의 사정이 이와 같아서 문제가 된다.
따라서 그런 생사고통을 벗어나려면
그런 상태를 초래하게 되는 기본 원인이 되는 그런 망집상태를 제거해야 한다.
그리고 현실에서 그런 분별을 일으킬 때
그것은 하등 집착을 갖고 대할 내용이 아님을 잘 이해해야 한다.
그리고 그런 내용이 실답지 않음을 잘 이해하고 현실에 임해야 한다.
망집을 일으킨 경우는
비유하면 눈병에 걸려서 허공에서 꽃모습을 보는 상황과 같다.
그런 가운데 그런 꽃이 실답다고 여기면서 업을 행해 가는 상태와 같다.
그래서 이런 문제를 해결하려면,
자신이 처한 현실의 정체를 올바로 관해야 한다.
비유처럼 눈병에 걸린 상태여서 허공의 없는 꽃을 보게 된다고 하자.
그 상태에서는 그런 허공의 꽃을 계속 보게 되지만,
그런 꽃이 눈병 때문에 그처럼 보이게 됨을 이해해야 한다.
그리고 그렇게 보이는 그 허공의 꽃이 실답지 않음을 잘 이해해야 한다.
그리고 그에 대한 망집을 제거해야 한다.
그리고 한편 그 현실에서 그런 상을 취하지 않아야 한다.
또 이후 그런 상에 머물러 그런 상을 붙들고 늘어지지 않아야 한다.
또 그런 가운데 수행을 집착없이 원만히 잘 성취해야 한다.
더 나아가, 이들 내용은 일체
자신의 마음이 얻어낸,
자신의 마음 안의 내용임을 이해해야 한다.
일반적으로 그것들을 자신 마음 밖에 있는 외부세계의 내용이라고 잘못 이해하기 쉽다.
그리고 자신 마음이 상대해서 어떤 내용을 얻게 되는 외부의 대상으로 잘못 이해하기 쉽다.
그리고 이들이 자신 마음과는 별개이고 따로 떨어져 있는 외부물질이라고 잘못 이해하기 쉽다.
그런데 그 정체가 그렇지 않음을 잘 이해해야 한다.
=> 즉, 생사현실에 임하게 된다고 하자.
그러면 현실에서 얻고 문제삼는 그 일체의 내용은
알고보면 모두 마음이 얻어낸 내용임을 잘 이해해야 한다.
그래서 그런 사정을 기본적으로 잘 파악하고 이들 현실 내용을 대해야 한다.
그런데 현실에서 얻게 되는 이들 내용은
그런 내용을 그처럼 망상을 일으키는 형태로 얻게 되는 그 배경 사정이 있다.
근본정신은 그런 내용을 세세 생생 얻어내는 바탕이 된다.
그리고 매 생마다, 그런 현실 내용을 얻어내는 각 정신을 분화 생성시키게 된다. [3능변]
그런 배경 사정을 갖고 각 생명은 매생을 임하게 된다.
그런 가운데 정작 그 생에서 그 배경 사정을 스스로 파악하지 못한다.
그런 가운데
다시 그런 정신이 얻어낸 내용 가운데 일부를 곧 자신의 몸이라고 여긴다.
그러나 그 내용은 사실은 그런 마음이 매 순간 얻어낸 내용에 불과하다.
그래서 그것은 마음을 기준으로 보면
마음 안에 일시적으로 들어온 손님이나 티끌과 같은 내용이다.
그리고 마음의 자리를 차지하고 사라져 간다.
그런데 정작 그 주체는 이를 자신으로 여기고 대단한 집착을 갖고 대하게 된다.
그리고 그런 망집에 바탕해 업을 행해나간다.
그런 가운데 그렇게 임하는 그 주체의 전체적 내용이
무량겁에 걸쳐 생사고통에 묶이게 된다.
이것이 그런 상황이 결과적으로 초래하는 생사고통의 문제가 된다.
현실은 실답지 않다.
그런데도 반복해서 매 순간 이런 망집을 일으켜 임하게 된다.
따라서 그 사정을 잘 이해하기 위해서
스스로 그렇게 망집을 자꾸 일으키게 되는 배경사정을 잘 이해해야 한다.
즉, 각 주체가 망상분별을 오히려 대단히 적절하고 옳은 판단인 것처럼 대부분 여기게 된다.
그리고 그런 형태로 한 생을 보내고 또 다시 이어서 생을 보내게 된다.
그리고 그처럼 무량겁에 걸쳐 생사고통을 받아나가게 된다.
따라서 그렇게 임하게끔 되는 배경 사정을 잘 잘 이해해야 한다.
본래 그가 분별하고 집착하는 내용은 하나같이 엉터리이고 망상분별이다.
그러나 현실에서는
그런 내용이 오히려 대단히 실답게 여기게 된다.
그리고 대단히 적절하다고 여기게끔 된다.
즉 어떤 상태로 전도망상이 단단히 매듭지어진 상태로
처음 생을 출발하게 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생사과정을 통해서 이 매듭이 일단 해체 되기 까지는
계속 해서 그런 망상분별을 오히려 더 적절하다고 여기면서 임하게 된다.
한 주체가 생을 출발하는 단계의 과정에서부터
생사를 전전해가는 과정까지 그렇게 되는 그 배경사정을 잘 이해해야 한다.
그래서 이런 사정을 이해할 수 있게 하기 위해서
비록 이런 저런 언어표현으로 일정 부분을 가리켜
이런 사정을 제시하게 된다.
그런데 이 내용도 앞에서 본 뗏목과 같은 성격을 갖는다.
즉, 그런 취지로 시설해 제시하는 언어시설이다.
그러나 이런 취지로 그런 내용을 제시하는 이들 내용이
그 영역에 그렇게 실답게 있는 것은 역시 아니다.
그래서 이들 내용을 통해서
그런 사정을 잘 이해해야 한다.
그러나 이들 내용을 놓고
다시 처음의 일으킨 망집을 갖고 대하면 곤란하다.
여기서 다시 거리 상황의 문제로 돌아가 이 문제를 이해해보자.
거리를 보는 가운데
거리에서 영희나 철수가 오간다고 여긴다.
여기서 그런 내용이 망상분별임을 이해해야 한다.
그래서 그 사정을 이해시키기 위해서
영희라고도 표현해서 일정 부분을 가리키고
철수라고도 표현해서 일정 부분을 가리킨 가운데
일정한 사정을 제시한다.
그것은 그런 현실에
그런 영희나 철수, 그런 오고감 일체를 얻을 수 없다.
또 그런 내용을 보고 생각을 일으키는 자신도 마찬가지다.
이런 사정을 이해시키기 위한 취지로 그렇게 하는 것이다.
그래서 이들 내용으로 그런 상태를 이해하면 된다.
그런데 그 내용을 '영희' '철수'는 이런 표현이나
무아, 무자성, 공 이런 표현들을 통해서 제시한다.
그렇다고 해서 이들 내용은 사정이 다르다고
새로 망집을 일으키면 안된다.
그래서 그런 망집을 제거해야 한다.
그렇다고 그 내용이 이런 망집을 일으키게 한
원 바탕이 되는 각 재료 내용들이
일체 얻어지지 않음을 제시하는 것은 또 아니다.
이것을 서로 혼동하면 안 된다.
다시 거리로 가서 눈을 뜨는 상황을 살피자.
눈을 뜨면 그런 망집을 일으키게 하는 재료가 되는 감각현실이 그처럼 얻어진다.
이 경우에 그것이 실답지 않다고 제시하는 내용이
이 현실을 부정하는 것이 아니다.
그런 재료는 그처럼 생생하게 얻는다.
그러나 그가 그에 대해 일으키는 분별 내용이 거기에 얻어지지 않음을 제시한 것 뿐이다.
한편 그런 감각현실은 본 바탕인 실재 내용도 아니다.
본 바탕인 실재는 전혀 없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그 내용을 직접 얻지 못해 공하다.
그런데 이 영역에서도 그런 분별내용은 얻어지지 않는다.
이 점을 제시한다.
그래서 이 부분을 혼동하면 안 된다.
A 를 바탕으로 해서 b 를 일으켜 얻었다.
이 내용과 다음을 혼동하면 안 된다.
A 에 b 가 있다. 또는 A 는 b 다,
이들 내용을 서로 혼동하면 안 된다.
지금 문제삼는 것은 현실에서 망집을 일으킨 상태다.
그리고 그런 망상분별에 집착을 제거하는 것이다.
A 에 b 가 있다.
A 는 b 다.,
이 부분을 문제삼고 이런 망집을 제거하고자 논의한다.
그렇다고 이 논의가 다음을 부정하는 것이 아니다.
A 를 얻었다.
A 를 바탕으로 해서 b 를 일으켜 얻었다.
b 가 그 영역에 그렇게 있다.
이것은 잘못이 아니다.
따라서 이것을 서로 혼동하면 안 된다.
지금 살피는 마음도 그 사정이 이와 마찬가지다.
열심히 아뢰야식이나 의식 이런 것을 문제삼는다.
그러나 나중에 이들 내용으로 다시 위와 같은 혼동을 일으키면 곤란하다.
A 를 얻었다.
A 를 바탕으로 해서 b 를 일으켜 얻었다.
b 가 그 영역에 그렇게 있다.
그러나 이들 내용으로 다음과 같이 망집을 일으키면 안 된다.
즉,
'A 에 b 가 있다'고 잘못 여기면 안 된다. .
'A 는 b 다'라고 잘못 여기면 안 된다.
그리고 이런 망상분별을 일으키지 않으려면
다음 비유를 놓고 잘 살펴야 한다.
'라이터'란 단어를 떠올려서 => 그 다음에 '담배'를 떠올렸다. 그리고 '영희'를 떠올렸다.
그래서 담배나 영희란 생각을 한다.
여기에 라이터가 그 바탕이 되고 배경이 되었다고는 할 수 있다.
그러나 라이터란 단어에 담배가 있는 것은 아니다.
또 라이터가 그런 사정으로 담배나 영희가 되는 것도 아니다.
그래서 라이터를 붙잡고 라이터는 담배나 영희라고 여기고 임하면 곤란하다.
이 비유를 잘 놓고 이해해야 한다.
침대에 누어서 꾼 바다나 황금꿈의 비유도 사정이 마찬가지다.
열심히 바다나 황금 꿈을 생생하게 꾸었다고 하자.
그런데 그 일체는 사실은 침대를 바탕으로 침대에 누어 그런 내용을 꾼 것이다.
그러나 사정이 그렇다고 꿈에서 꾼 바다나 황금을
침대에 있다고 여기면 곤란하다.
그리고 침대에서 황금을 찾으려 하면 곤란하다.
그런데 현실 사정이 이와 같다.
현실에서 감각현실을 얻고 분별하면서 생활에 임한다.
그런 현실 사정이 바로 위와 성격이 같다.
본 바탕이 되는 실재 => 감각현실
감각현실 => 분별
이들 관계가 모두 위와 같다.
이것을 지금 잘 이해해야 한다.
그리고 이런 취지로 이들 내용을 살피는 것이다.
한 주체는 공한 실상을 바탕으로
생을 출발하는 단계에서
공중 3 회전에 걸친 망집을 일으켜 매듭이 지워진 가운데 생을 출발하게 된다.
그러면 생사과정을 통해서 그 상태를 벗어날 때까지 그 사정을 이해하지 못하게 된다.
그리고 자신이 일으키는 망집에서 쉽게 벗어나지 못한다.
그리고 그 이후도 역시 같은 형태로 계속 생사과정을 밟아나간다.
그래서 더 극심한 생사고통을 받는 3 악도에 묶이게 된다.
따라서 어느 단계에서든지 무언가를 계기로 이 사정을 이해해야 한다.
그래서 이 상태를 수행을 통해 벗어나와야 한다.
그렇지 못하면 그런 상태로 무량겁에 걸쳐 나아가게 된다.
이것이 생사현실의 문제다.
그리고 그렇게 무량겁에 걸쳐 그렇게 생사현실에 묶이게 되는
그 기본 사정을 이해해야 한다.
그래서 그런 과정에 작용하는 각 정신의 사정을 살핀다.
그래서 지금 아뢰야식의 존부문제를 살핀다.
그것은 또 한 생마다 그런 망집을 일으키는 재료를 얻는 정신을 분화생성시킨다.
그래서 그 배경사정을 잘 이해해야 한다.
한편 이 사정을 잘 이해하고 나면
아뢰야식에 대해 갖는 망집도 또 한편 잘 제거하고 임해야 한다.
그것이 처음 경전에서 부처님께서 주의를 준 내용이다.
그런 내용을 제시한다고 해서
이제 그것이 진짜 실다운 자신이라고 다시 망집을 일으키면 안 된다.
그것은 처음 세속에서 엉뚱한 내용을 붙들고 자신이라고 여기며 집착하던 망집 증세를
다시 이 부분으로 옮겨 가져 오는 것이 된다.
그려면 곤란하다.
그런데 사정이 그렇다고
그런 시설을 하게 된 그 무엇까지도 전혀 아무 것도 없다는 의미가 아니다.
그것은 - 정확히 표현하면 그런 언어시설이 가리킨 - 그 무엇이다.
- 그러나 정작 그런 분별 내용은 거기에서 얻을 수 없는 - 그 무엇이다.
- 그리고 영원불변하여 참된 진짜의 내용이라고 할 수 없는 - 그 무엇이다.
- 그리고 실재 본 바탕의 영역에서도 마찬가지로 내용을 얻을 수 없고 공한 - 그 무엇이다.
그래서 그러그러한 재료까지 거기에 없다고 이해하면 곤란하다.
이 점을 서로 혼동하면 안 된다.
망집에 바탕해 일으키는 부작용 (생사고통)을 제거하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그래서 망집을 제거해야 한다.
그런 망집에 바탕해 행해 나가는 업을 제거해야 한다.
또 그런 번뇌망집 - 업을 바탕으로 받는 생사고통을 제거해야 한다.
그렇다고
그와 본래 관계없는 재료나 그외 다른 것을 파괴하거나 할 필요는 없다.
더 나아가 그런 망집을 제거한 바탕에서
열심히 서원을 일으켜 수행을 해가야 한다.
앞과 같은 노력이 이런 부분을 제거해야 하는 것도 아니다.
또 그 서원을 성취하기 위한 수행을 제거하는 것은 더욱이 아니다.
그런데 망집상태를 바탕으로 이 각 부분에 대해
서로 혼동을 일으키면 곤란하다.
○ 음악공양, 나무불, 나무법, 나무승 mus0fl--Catherine Lara - Mourir Pour Mourir..lrc
아뢰야식과 관련한 내용을 정리하기로 하자.
현실에서 거리에 서서 눈을 떠 대하면 다양한 모습을 볼 수 있다.
예를 들어 저기에 자동차와 건물이 이렇게 있고
영희가 저기에서 달려가 자동차를 타고 간다.
철수가 자동차를 타고 여기에서 내린다.
이런 모습을 본다.
이 상황에 그렇게 일반적으로 보고 여기게 되는
그런 감각현실의 재료를 얻는다.
그런 재료가 그렇게 얻어지는 것은 사실이다.
그리고 그런 재료를 대해서 그러그러한 분별을 그렇게 행하는 것도 현실이다.
그러나 본 바탕이 되는 실재 영역은
무아 무자성으로 진짜라고 할 실체는 없다.
한편 본바탕이 되는 실재는 어떤 주체도 직접 얻을 수 없다.
그래서 공하다라고 표현하게 된다.
한편 실재영역에서는 현실에서 얻는 그런 내용을 얻을 수 없다.
또 그런 감각현실 재료는 그런 실재를 본 바탕으로 해서 얻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그런 본 바탕을 떠나서 그런 내용을 얻는 것도 아니다 .
그러나 정작 그런 감각현실들은 실재의 지위에 있는 내용도 아니다.
그리고 역시 인연이 화합해서 얻는 실답지 않은 내용이다.
더 나아가 그에 대해 일정한 분별을 일으키게 된다.
일반적으로 그런 상태에서 그런 분별내용이 그 영역에 그렇게 있다고 여긴다.
그러나 감각현실은 분별내용이 아니다.
그리고 분별 내용도 감각현실이 아니다.
분별 내용도 사정이 마찬가지다.
이 역시 본 바탕을 떠나 그런 내용을 얻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이들 내용은 실재의 지위에 있는 내용도 아니다.
더욱이 일정한 감각현실을 배경으로 놓고
각 부분을 묶고 나누어 일정한 분별을 행하게 되면
자신이 일으킨 그런 분별 내용에 감각현실과 같은 내용이
그 관념 안에 구성요소로서 들어 있는 것처럼 잘못 여기기 쉽다.
그러나 관념분별안에는 그런 내용이 없다.
현실에서 문제삼는 이들 각 영역의 내용과
그 상호관계에 대해 잘 정리해 이해해야 한다.
그리고 지금 살피는 마음은
현실에서 눈을 떠 볼 수 없고 만질 수도 없다.
그러나 이렇게 현실에서 얻는 내용에 준해 그에 밀착되어 논의되는 내용이다.
그런 내용을 얻기에 그런 내용을 얻는 그 마음을 문제삼고 살피게 된다.
앞에서 현실에서 얻는 내용에 대해서 제시했다.
이들 내용은 모두 이런 현실내용을 얻어내는 '마음'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그래서 이를 다시 종합적으로 잘 정리해보자.
현실에서 거리에 서서 눈을 뜨고 대하면 일정한 모습을 보게 된다.
일반적으로 무엇 무엇이 거기에 그렇게 있다고 분별을 일으킨다.
그리고 이것을 보는 자신도 그렇게 있다고 분별을 일으키게 된다.
그런데 그 상황은 그런 상황이 아니다.
그러나 이는 그 상황에서
그런 망집을 일으키는 재료인 감각현실을 얻지 못한다는 것이 아니다.
또 그런 재료를 바탕으로 일정한 관념분별을 그렇게 일으키지 못하는 것도 아니다.
그런 감각현실을 그처럼 얻는다.
그리고 그런 관념분별을 그처럼 일으킨다.
그러나 그런 관념분별에 해당한 내용이 다른 영역에 그처럼 있는 것은 아니다.
따라서 실답지 않다.
=> 그래서 그런 망집에 바탕해 집착을 일으키면 안 된다.
그리고 다시 그에 바탕해 업을 행하면 안 된다.
그렇게 행하면 그런 전제에서는
지금 현실에서 앞과 같은 재료를 대하면서 임하는 형태처럼
극심한 생사고통을 무량하게 겪어나가게 된다.
이런 내용이다.
현재는 축생, 아귀, 지옥 이런 3 악도의 내용을
그저 단어나 글자로 그리고 막연한 관념으로 제시받고
지나칠 수도 있다.
그러나 그 구체적 상황은 고통이 심하다.
예를 들어 축생을 놓고 살펴보자.
한 겨울에 난방시설도 없는 곳에서
추위에 떨며 오가야 한다.
그처럼 고통을 받는 상태가
지금 자신이 대하는 현실 상황처럼 주어진다.
그리고 그런 상태로 묶이게 된다.
그리고 이것이 문제다.
따라서 지금 상황에서 그 사정을 미리 잘 관해야 한다.
그리고 그에 바탕해 그런 상태를 미리 예방할 수 있는 수행으로 전환해 임해야 한다.
그래서 지금 살피는 정신의 문제를 놓고도 이런 내용을 다시 제시할 수 있다.
현실에서 그러그러한 망집을 일으키게 하는
그런 재료 자체는 상태에 따라 예를 들어 눈 자체를 감아 버리면
전혀 얻지 않을 수도 있다.
또 상태에 따라 예를 들어 눈을 뜨면 얻을 수도 있다.
그러나 그런 재료 자체를 얻고 얻지 않는 것을 여기서 문제삼는 것이 아니다.
그처럼 망집을 일으키게 하는 그런 재료를 그렇게 얻는다.
그리고 그에 대해 일정한 분별을 행한다.
이것은 문제가 아니다.
그런데 이 상황에서그가 대하는 그런 재료는
그가 행하는 분별과 같은 내용이 일단 아니다.
예를 들어 현실에서 일정한 감각현실을 얻는 가운데
일정한 부분들을 자신이라고 잘못 여기고 대한다.
그러나 그 부분은 그런 내용이 아니다.
그리고 이제 이렇게 얻는 재료를 바탕으로
이런 현실 내용을 얻는 마음을 다시 살피게 된다.
그런 경우 현실에서 일정한 벽돌과 같은 부분을 붙잡고
자신이라고 여기고 대하는 상황을 놓고 생각하면
그렇게 자신이라고 여기고 대할 내용은 그런 벽돌이 아니다.
차라리 지금 살피는 각 정신을
자신이라고 여기는 것이 더 적절하다고 보아야 한다.
그러나 이것도 사정이 같다.
우선 이 상황에서
마음은 만질 수도 없고 볼 수도 없다.
그러나 그런 재료 형태 자체로 그렇게 그런 마음이
그렇게 있다고는 할 수 있다.
눈을 뜨면 보게 되는 거리 풍경에
그가 생각하는 그런 내용들은 본래 얻을 수 없다.
그러나 그래도 눈을 뜨면 그런 내용을 얻는다.
마찬가지로 지금 제시하는 여러 마음 내용도 그 사정이 이와 같다.
그리고 그런 상태로 무량겁을 나아가게 된다.
그러나 정작 눈을 떠서 보는 거리 내용을 놓고
이에 대해 한 주체가 분별하는 내용이
실답게 그런 상태에 그렇게 있는 것이 아니다.
마찬가지로 이들 마음도 그 사정이 이와 같다.
그래서 이 부분을 주의해야 한다.
그런 사정을 이해하게 하고자
그런 각 마음을 분별해 시설해서 언설을 통해 제시한다.
그러나 이는 현실에서 이해하는 다른 내용과 그 성격이 다르지 않다.
따라서 이런 마음은 참된 진짜의 내용이 아니다.
실재 영역에서 그런 내용을 얻을 수 있는 것도 아니다.
그래서 실다운 내용도 아니다.
그런데 그 내용을 잘못 이해하면
열심히 이들 마음에 대해 살피고 나서
원래 망상을 일으키고 생사고통을 받아나가던 처음 상태
그리고 경전에서 주의한 상태로 들어가게 된다.
다음 부분이다.
...
아타나식阿陀那識]은 매우 깊고 미세하며,
일체종자(一切種子)는 폭류[瀑流-사나운 흐름] 같다.
나는 범부와 어리석은 이에게 펴 말하지 아니했나니
그가 분별하고 집착하여 〈나〉라고 여길까 하여서이다.
『해심밀경』 심의식상품
그래서 현실이나 마음에 대해 제시하는 여러 내용을 통해
현실에서 망집을 일으키고 임하게 되는
일정한 재료를 그렇게 얻게 된 그 기본 배경 사정도 이해해야 한다.
그리고 이를 바탕으로
현실에서 일으키던 망집을 제거해야 한다.
그리고 생사고통을 벗어나는 것이 대단히 중요하다.
그러나 사정이 그렇다고
그런 재료에 다른 내용은 없지만,
지금 제시하는 그런 내용만은 이와 달리 실답게 있는 어떤 내용이라고 여기면 곤란하다.
그리고 이에 대해 집착을 일으키고 임하면 또 곤란하다.
그래서 그것은 영원불변한 자신이 아니다.
그리고 세계의 참된 진짜 내용도 아니다.
또는 다른 영역에서도 얻어지는 실다운 내용도 아니다.
그러나 그런 형태로 그런 재료로서
그렇게 얻어지는 것이다.
이를 꿈의 비유를 통해 잘 이해해야 한다.
꿈의 비유에서
꿈이 실답지 않다고 제시한다.
이는 꿈의 내용이 현실에서 얻어지지 않음을 제시한다.
그리고 꿈은 진짜가 아님을 제시하는 것이다.
그렇다고 꿈이 전혀 얻어지지 않는 것은 아니다.
또는 꿈을 그렇게 얻은 현실의 침대가 전혀 없다는 것도 아니다.
그런 재료는 그렇게 주어진다.
그러나 그것은 그가 생각하거나 꿈꾸는 그런 내용이 아님을 제시한다.
현실도 마찬가지다.
현실이 실답지 않다고 제시한다.
그러나 현실에서 그런 재료가 되는 감각현실이나 관념분별을 얻는다.
그런 내용 자체를 얻지 못한다는 것이 아니다.
재료는 그렇게 주어진다.
그러나 그런 재료는 그가 그에 대해 생각하고 여기는 그런 내용이 아니다.
특히 그가 집착하는 형태의 그런 내용이 아니다.
즉 영원분별하고 참된 진짜의 내용이 아니다.
그리고 실재 영역이나 다른 영역에도 그처럼 있는 그런 실다운 내용은 아니다.
그런 형태의 자신이나 세계는 아니다.
이 점을 제시한다.
왜냐하면 이런 분별에 바탕해 집착을 일으키게 된다.
그리고 그런 집착에 바탕해 매 순간 행할 수 밖에 없다고 여기면서 업을 행하게 된다.
그러면 그 전제에서 생사고통을 이후 장구하게 받아나가게 된다.
그리고 그런 상황에 처하면 쉽게 그런 망집 상태에서 벗어나올 수 없게 된다.
그래서 무량겁에 걸친 생사고통을 받아나가게 된다.
사실이 그 사정이 그렇지 않다.
그런데도 그 주체는 그런 망집을 바탕으로 그것을 대한다.
그런 전제에서 그 주체는 대단히 그 생사고통 하나하나를
생생하고 실답게 여기면서 받아나가게 된다.
그것이 지금 현실 한 단면에서 나타나는 내용이기도 하다.
그런데 그런 망집에서 그 주체가 벗어나지 못하면
매 순간 그런 상태로 무량겁을 나아가게 된다.
그래서 장구하게 그 상태로 생사현실에 묶여 생사고통을 받아나가게 된다.
불교 경전과 논서는 이런 생사고통을 해결하기 위한 것이다.
그래서 각 주체가 이런 생사현실의 묶임에서 벗어나게 하고자 하는 것이다.
이를 주의해야 한다.
『유가사지론』 51 권 섭결택분 처음 부분에서
어떤 사정으로 눈에 보이지도 않고 만져지지도 않는
아뢰야식을 시설해 있다고 제시하는가 하는 사정을 보았다.
그리고 그런 내용을 제시하여
각 주체가 생사과정에서 망집을 바탕으로 생사고통을 겪어나가게
되는 배경사정을 이해하는 한편,
또 생사현실에 임해서
각 주체가 어떤 사정으로 자신이 대하는 현실 내용에 대해
자신이 일으키는 망집처럼 그런 내용이 현실에 실답게 있다고
망집을 일으킨 가운데 업을 행하면서 임하게 되는가 하는 사정을
이후 자세하게 살피게 된다.
그런데 이렇게 경전이나 논서에서
언어 방편 시설을 통해 제시하는 각 내용을 살필 때는
이렇게 제시하는 언어 방편 시설 자체에 대해서도
함께 주의를 기울여야 함을 앞에서 처음 살폈다.
그것은
이처럼 경전과 논서에서 제시하는 모든 내용은
결국 현실에서 일으키는 망집과
그에 바탕해 각 상황에서 어쩔 수 없다고 여기면서 행하게 되는 업,
그리고 그로 인해 그런 망집을 바탕으로 겪어 나가는 생사고통을
제거하기 위해
상대 중생이 이해할 수 있는 형태로 그런 내용을
시설해 그렇게 제시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런 내용과 관련해 주의할 점이란,
이런 내용은 이런 내용을 통해
그런 망집과 그에 바탕한 업- 그리고 생사고통을 제거하는 것이 목적이라는 점이다.
그런데 우선 사정이 그렇기에
이런 내용을 통해
그처럼 망집을 제거한다고 할 때
현실에서 그런 망집을 일으키는 재료가 되는
본 바탕 실재나 현실 재료[감각현실, 관념분별] 자체를
모두 전혀 아무것도 없는 것이라고 잘못 이해하거나,
더 나아가 이를 모두 제거하는 데에 목적이 있는 것이 아님을 주의해야 한다.
물론 이들 망집을 일으키는 재료가 되는 현실재료[감각현실, 관념분별]은
굳이 이것을 얻지 않아도 무방하기는 하다.
예를 들어 꿈은 꾸지 않아도 무방하지만, 또 꿈을 꾸어도 무방한 것이다.
다만 여기서 꿈이 실답지 않기에 집착을 갖고 임하지 말라고 제시하는 것은
그런 꿈을 꾸는 동안 또는 꾸고 나서
그런 꿈이 실다운 내용이라고 망집을 일으켜 임하지 않아야 한다고 한 것이다.
현실도 마찬가지다.
현실에서 어떤 이가 눈을 떠서 무엇을 보아도 되고 굳이 보지 않아도 무방하다.
또 그런 상태에서 어떤 분별을 일으켜도 되지만 일으키지 않아도 무방하다.
그런데 이들 내용이 실답지 않기에 집착을 갖지 말라고 제시하는 내용은
이런 재료 자체를 문제삼은 것이 아니고
이런 재료를 얻고 나서
그 주체가 망집을 일으켜 이들 내용이 다른 영역에도 얻어지고
그처럼 있는 내용이라고 여기면서
그런 내용을 실답다고 여기는 한편
이에 바탕해 하지 않아야 할 업, 하지 않아도 되는 업을 분주히 진지하게 행하는 한편,
생사고통의 묶임에서 벗어나기 위해
또는 무량한 복덕과 지혜자량을 얻기 위해 해야 마땅한
수행은 또 외면하고 행하지 않는 가운데
그런 망집에 바탕해 장구하게 생사고통을 겪어 나가는 현상을 문제삼는 것이다.
그리고 이런 사정을 이해시키기 위해
일정한 내용을 언어 방편을 통해 시설해 내용을 제시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런 내용을 대할 때도
앞과 그 사정이 이와 비슷하다.
이런 언어 시설 방편을 통해
경전이나 논서에서 제시하는 내용과 관련해 주의할 점이라는 것은
이런 시설 방편을 놓고
일반적으로 세속에서 일으키는 망집을 포함해 다른 것들은 실답지 않지만,
그러나 부처님이 제시하는 이런 시설 방편은
이와 달리 영원불변하고 참된 진짜의 내용으로서
그에 해당하는 내용이 그렇게 각 영역에 있는 실다운 내용이라고 망집을 일으켜 가지면
역시 곤란하다고 제시하는 것이다.
그래서 이처럼 부처님이 제시한 시설 방편으로서 각 내용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로 망집을 갖고 집착하면 안 된다.
그런데 그렇게 이런 내용들이 참되고 실다운 내용이라고 집착을 갖지 않아야 하고
따라서 그에 대한 망집을 제거하는 경우에도
그런 내용에 대해 갖던 그런 망집만 제거해야 하는 것이고,
그런 언어시설 방편을 통해 가리킨 그런 재료나 내용까지 전혀 없다고 이해하거나,
또는 그런 내용까지 제거하려고 노력하라는 의미는 아니다.
더 나아가 자신은 그런 뗏목과 같은 기능을 하는 방편 시설로
그런 본 사정을 잘 이해하고 수행에 정진하여
생사 고통을 벗어나게 되었다고 해도,
그 수행자가 다시 생사현실에 임해
생사고통을 겪는 다른 중생을 제도하여
생사고통으로부터 벗어나게 하고자 할 때는
처음 부처님의 입장과 똑같이
역시 그 수행자도 그런 뗏목을 그처럼 시설해 제시하고
이를 통해 중생을 제도해나갈 필요가 다시 있게 된다.
그런데 이 어느 상황에서도
그런 시설 방편이 실답다고 여기면서 임하는 것은 곤란하다.
그래서 그처럼 부처님이 제시한 시설 방편에 대해 망집을 제거하고
임하는 것은 어느 경우에나 요구되고 필요한 것이다.
그런데 반복하지만,
그런 시설방편에 대해 갖는 망집을 제거할 필요가 있다고 해서,
그런 시설 방편을 통해 가리켰던 그런 재료가 전혀 없다고 이해하거나,
그런 재료 자체까지 제거하라는 의미가 아님을 주의해야 한다.
그런데 이렇게 내용을 제시하면
매번 극단적으로 양 쪽 방향에서 망집을 갖고 임하기 쉽다.
그런데 그렇게 매번 극단에 치우쳐 임하게 되는 것은
물론 그 주체가 본래 일으켜 가졌던 망집 증상때문에 그런 것이기도 하다.
예를 들어 현실에서
눈을 뜨면 평소 자신이나 세계라고 여기고 대하는 그런 내용을 보게 된다.
이런 현실에서
우선 평소 자신이나 세계라고 여기고 대한 그 부분 그 재료 자체는
그렇게 눈을 떠서 얻어도 되고
또 눈을 뜨지 않아서 얻지 않아도 무방하다.
그리고 그렇게 눈을 떠서 그런 내용을 보게 되고
또 그런 바탕에서 각 부분이 자신이나 영희나 철수 바위 자동차 집 이라고 분별을 일으키게 되었다고 해서
그 자체를 문제삼는 것이 아니다.
문제는 이런 재료를 바탕으로 이후
그 주체가 일으키는 망집과
그에 바탕해 행하는 업
그리고 이로 인해 그 주체가 이후 장구하게 겪어나가게 되는 생사고통이 문제다.
따라서 이런 상황에서
그런 감각현실에 그 주체가 있다고 여기는 그런 내용이 실답게 있지 않고
또 본 바탕이 되는 실재 영역도 무아 무자성 공한 상태여서
그런 내용을 얻을 수 없다.
그래서 자신이 일으킨 그런 분별은
마치 침대에 누어 꾼 바다나 황금 꿈의 내용처럼
실답지 않고, 집착을 갖고 임할 내용이 아니다.
그래서 그런 망집에 바탕해 행하는 업을 제거하고
반대로 자신을 계속 생사고통의 상황에 묶이게 만드는
업의 장애를 제거하기 위해
반대 방향으로 계, 정, 혜의 수행에 정진해
이런 생사묶임에서 기본적으로 벗어나야 한다.
그리고 또 한편,
이후 생사현실에서 무량한 복덕과 수명과 지혜를 구족하고
불국토를 장엄하고 성불하는 가운데
그런 생사고통을 겪는 중생을 무량하게 제도해나가야 한다.
이런 내용을 제시하는 것이다.
그래서 수행자가 현실에서
이처럼 부처님이 제시하는 각종 방편 시설을 대할 때는
그 사정을 잘 관하고 이해해서 방편을 취해
현실을 대할 때는 약간은 2 중적인 자세로 원만하게 현실에 임해야 한다.
이는 비유하면 더러운 연못에 몸을 담그되
그 자신은 더러움에 물들지 않는 연꽃의 상황으로 비유할 수 있다.
망집을 일으킨 상태의 중생을 제도하기 위해서는
우선 그런 중생에 눈높이를 맞추어
일반 중생이 이해할 수 있는 형태로
일정한 내용을 언어 방편 시설로 제시하고
이를 통해 망집에서 벗어나 수행에 진입시키고
생사고통을 무량하게 받아나가는 상태로부터 벗어나게 한다.
그런데 이렇게 사용하는 방편 시설이 갖는 의미에 대해서
이들 내용은 어디까지나 시설 방편인 것이어서
다시 상대나 수행자 자신이 그런 내용을 실다운 내용이라고
오해하거나 오해하게 하여 이에 다시 집착을 일으켜 임하거나
임하게 하면 안 된다는 의미다.
이로 인한 부작용이 심각하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부처님이 제시하는 이런 시설 방편을 통해서
현실에서 갖던 망집을 잘 제거해야 하지만,
더 나아가 이런 취지로 부처님이 제시하는 시설 방편 자체에 대해서도
그것이 영원불변한 참된 진짜의 내용이라거나
실재 영역이나 감각현실 영역에 실답게 있는 내용이라고
집착을 갖고 대하면 안 된다.
따라서 이런 시설 방편에 대해서도
그런 망집을 마찬가지로 잘 제거하고 대해야 한다.
그런데 그런 망집은 제거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처음 그런 방편 시설로 가리켰던
그 재료나 그 사정이 전혀 없다고 잘못 이해하거나,
그런 시설 방편 자체까지 제거해야 이해하면 곤란하다.
이런 각 경우 어떤 내용에 가졌던 망집을 제거하는 문제를
그런 망집을 일으키는 재료가 된 내용 자체를 제거해야 하는 것으로
서로 혼동해서는 안 된다.
그리고 그렇게 망집이 제거된 상태에서는
또 그런 시설 방편을 역시 그런 취지로 잘 지니고
유용하게 중생제도를 위해서 잘 사용해나가야 한다.
즉, 여기서 주의할 점은
그런 취지로 부처님이 제시하는 그런 시설 방편에 대해서
망집을 갖고 대하는 그 '망집 부분'만 문제인 것이다.
다시 거리 상황으로 가서 이 문제를 보자.
현실에서 각 주체가 눈을 떠서 거리를 볼 때
일정부분은 자신이라고 여기고
또 다른 부분은 영희나 철수, 자동차, 집이라고 여기면서
그 상황에 임한다.
그 내용이 실답다고 여기면서 대하는 각 주체는
각 순간에서 그 주체가 어쩔 수 없이 행할 도리 밖에는 없다고 보면서
생사고통에 묶이게 하는 업을 진지하고 분주하게 바삐 행한다.
그래서 현실적으로 이런 상태에서 벗어나
단 한번이라도 수행에 진입해 수행에 임하는 것 자체가
현실적으로 대단히 곤란하다.
현실이 그렇다.
어떻게 보면 마음만 내면
계의 항목에 해당하는 보시나 정계, 안인 정진의 수행도 평소 행하고
또는 산사에 들러서 정려 수행도 행하고
또는 반야 지혜를 닦는 수행도 행할 수 있을 것 같지만,
현실에서 대부분은
시장에 가서 생필품을 구하고
또 사업을 위해 주택 융자를 받고 이런 활동은 대단히 진지하고 분주하게 임하지만,
정작 자신을 무량겁에 걸친 생사의 묶임에서 벗어나게 하는 이런 수행에는
전혀 관심을 기울이지 못하다가 삶을 마치는 것이 거의 대부분이다.
그것은 처음 이 현실단면을 놓고
각 주체가 일으키는 망집에서
일단 벗어나지 못하기 때문에 사정이 그런 것이다.
그래서 가장 기본적으로 제시하는 내용은
그렇게 자신이나 영희 철수, 자동차, 집 등이 있다고 여기며 대하는
그 현실 단면 어느 부분에도
그런 내용을 얻을 수 없다.
그리고 그런 현실 재료를 그렇게 얻게 한
본 바탕이 되는 실재 영역도 그 사정이 그와 마찬가지다.
이런 사정을 먼저 잘 관하고 이해해야 한다.
그래서 반복해서
현실에서 어떤 이가
자신이나 세계라고 여기면서 대하는 그런 내용은
무상, 고, 무아, 무자성, 열반적정, 공한 것이고
따라서 집착을 갖고 대할 내용이 아니고 실답지 않다.
이런 내용을 기본적으로 반복해 제시하는 것이다.
그런데 사정이 그렇다고
그런 망집을 일으키게 한
그 재료 자체가 그렇게 얻어지지 않는다거나, 전혀 없다거나,
또 굳이 그런 재료를 다 제거해야 한다고 제시하는 것이 아니다.
그런데 현실에서는
한편으로는
평소 그런 내용이 대단히 실답다고 여기면서 극단적으로 임하다가.
다시 위와 같은 내용을 제시해서
그런 내용들이 실답지 않다고 제시하면
다시 또 다른 극단으로 들어가서
또 다른 부작용을 일으키는 형태로 임하게 되기 쉽다.
예를 들어 일체가 공하다는 내용을 제시받게 되면
이제는 그런 망집을 일으키게 한 재료[감각현실, 관념분별]까지 일체 다 없다거나,
또는 이들이 문제이므로 이들 일체를 다 제거해야 한다고 임하는 경우가 있다.
이런 망집을 새로 일으킨 경우는 또 다른 부작용을 일으키게 되어서 문제가 된다.
그런데 왜 그렇게 자꾸 각 주체가
부작용이 심한 극단에 치우쳐 임하게 되는가하면
그 주체가 평소 그런 망집 증상에 바탕해 장구하게 임해왔기에 그런 것이기도 하다.
즉, 그 주체가 평소 자신이 자신이나 영희 철수 집 자동차 등등으로
어떤 분별을 행하고 임하던 상태에서는
그 주체 자신이 그런 재료와 그런 분별을 서로 접착시켜 놓고
계속 그런 재료나 그런 분별을 대하고
그에 바탕해 업을 행해 왔던 것이다.
그래서 부처님이 제시하는 내용을 대하는 가운데에서도
또 부처님이 제시한 내용을 놓고 마찬가지
증상을 일으켜 대하게 되고
그런 가운데 자꾸 이런 문제 현상을 일으키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이런 극단적인 상태에 치우쳐 임하게 되면
그로 인해 각 측면에서 모두 심각한 부작용이 발생하게 된다.
그래서 미리 이런 점을 처음에 주의해야 한다.
『금강경』이나 『대반야바라밀다경』에서
이 사정을 이렇게 제시한다.
생사현실에서 생사고통을 받는 중생도 얻을 수 없고
이를 제도하는 이도 얻을 수 없다.
그리고 제도하는 행위도 얻을 수 없다.
그리고 그런 중생을 제도하기 위해서
좋음을 베푸는 보시 행위를 하는 경우에도
보시를 받는 상대나
보시를 하는 이나
보시하는 물건이나
보시하는 행위를 얻을 수 없다.
사정이 이러한 가운데
수행자는 이런 상태를 잘 관하고
상에 머물지 않고
얻을 것이 없음[무소득]을 방편으로
집착을 제거하고 여여하게 임해
무량하게 중생을 제도하고 무량하게 보시를 행해야 한다.
이렇게 제시한다.
앞 부분과 뒷 부분이 서로 모순된다고 여길 수 있지만,
그렇게 이 내용을 대하면서 의문을 일으키는 그 현상 자체가
기존의 망집 증상에 연유하는 것이다.
그래서 이런 내용을 대할 때는
위에 제시한 주의사항을 념두에 떠올릴 필요가 있다.
현실에서 그런 내용을 얻을 수 없다.
그래서 그에 대한 상과 망상분별과 집착을 제거해야 한다.
=>
그렇다면 현실에 어떤 이가 있고 어떤 상대가 있고 무엇이 있기에
현실에서 그런 수행을 그렇게 행하여
보시도 행하고 중생을 제도해야 한다고 하는가.
망집에 바탕해 이들 내용을 이해해온 입장에서는
위 내용에 대해 이렇게 의문을 먼저 일으키기 쉽다.
=> 그런데 이런 의문을 일으키는 현상 자체가
기존의 망집에 바탕해 앞에 제시한 내용을 대하여 극단으로 치우친
또 다른 망집을 일으킨 현상이다.
얻을 수 없다. 그래서 실답지 않다. 이 말은
그런 재료나 그 본 바탕이 되는 실재에
그가 생각하고 분별하는 그런 내용을 얻을 수 없다고 제시한 것이다.
그러나 이런 내용은
그에 대해 그런 망집을 일으키게 한 그런 재료자체나
공한 실재 자체가 전혀 없다고 제시한 것이 아니다.
그런데 이들에 대해 망집을 일으킨 입장에서는 이 내용을
그런 내용으로 잘못 오해하는 현상이다.
현실 사정은 부처님이 제시한 것처럼,
본 바탕이 되는 공한 실재는 무아 무자성으로서
참된 진짜라고 할 영원불변한 실체는 없지만,
그러나 아무 것도 전혀 없는 것이 아니고
무아 무자성으로서 실답지 않는 형태로
그리고 또 한편 각 내용을 현실에서 인연을 통해 화합해 얻는 주체의 입장에서는
그 어떤 주체도 그 내용을 끝내 직접 얻어낼 수 없는 상태로
즉, 공한 상태로 그렇게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런 본 바탕이 되는 실재를 바탕으로
각 주체는 연기(인과)관계를 통해
다시 실답지 않은 그런 재료[감각현실, 관념분별]을 일으켜 얻고,
그런 가운데 이를 대하는 중생들은 그런 재료를 놓고
앞과 같은 망집을 다시 일으켜 대하게 된다.
그래서 그런 망집은 생사고통을 받게 하는 근본원인이 되기에
문제라고 지적하고 제거해야 한다고 제시하지만,
그러나 그런 주체가 망집을 일으키게 만드는 그런 재료 자체는
또 그런 형태로 얻는 것이고
그 자체를 문제라고 제시하는 것은 아니다.
위에서 제시한 내용은
현실 사정이 그와 같으므로
그런 사정을 잘 파악하고 임하라고 제시한 것이다.
즉 그런 재료들은 그런 바탕에서 그렇게 얻어지는 것일 뿐
그가 망집을 일으켜 대하는 것처럼 있는 것이 아니다.
따라서 그가 분별을 일으키고 집착하는 그런 내용은
그런 망집을 일으키게 한 현실 재료나,
본 바탕이 되는 실재 영역 어디에서도 얻을 수 없다.
이것을 처음 제시한 것이다.
여기서 주의할 점은
앞에 제시한 경전내용에서 첫 부분은
위 내용을 제시한 것이고
그런 재료 자체가 현실에서 얻어지지 않는다고 제시한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더 나아가 사정이 그렇기 때문에
생사현실에서 그런 재료를 얻고 이후 망집을 일으켜
생사고통을 무량한 겁에 걸쳐 받아나가는 중생을
제도하고 보시하는 수행을 할 필요가 없다거나
제도하지 않아도 무방하고 보시하지 않아도 무방하다고 제시한 것은
더더욱 아니라는 점이다.
그런데 이상하게 기존에 망집을 일으켜 이들 각 내용을
접착시켜 이해하고 대하던 입장에서는
첫 부분의 내용을 대하면, =>
사정이 그러니
이제 아예 수행을 할 필요가 없다거나,
또는 반대로 이전의 망집상태처럼 아무렇게 마음대로 행해도 된다거나,
심지어 심하게 악행을 해도 된다거나,
아니면 이렇거나 저렇거나 그대로 방치해도 무방하다는 이런 형태로
또 다른 극단에 치우쳐 임하게 된다.
또 그렇지 않고 이와는 반대로
망집을 일으키던 이가 이제 부처님의 가르침을 따라 수행을 하게 되는 경우에는
다시 또 다른 형태로 극단에 치우쳐
또 반대 방향의 극단으로 나아가
세속에서 자신이 가졌던 견해와 망집을 포함해
다른 내용들은 다 실답지 않지만,
그러나 부처님이 가르쳐준 가르침이나
수행목표나 수행덕목은 실다운 것이다.
이렇게 다시 이들 내용에 망집을 일으키고
무언가를 이를 통해 얻을 것이 있다고 여기면서
대단히 집착하는 가운데 이런 수행에 임하여
수행을 통해 얻는 공덕이 1 개라면
이런 잘못된 자세로 인해 얻는 생사고통이 다시 무량하게
쌓이게 되는 부작용을 받게 된다.
그래서 이러한 사정 때문에
위 내용을 잘 이해해서
각 측면에서 부처님이 행하라고 가르친 각 내용을
하나도 빠짐없이 잘 행해야 한다고
『금강경』에서 다시 주의 당부를 하는 사정이 있다.
즉,
어떤 내용을 놓고 그것이 실답다고 여기는 가운데
일으키게 되는 망상분별과 집착은 그것대로 잘 제거하고
+
그런 바탕에서 행하라고 한 수행방안은
또 그에 대한 망상분별과 집착을 제거한 바탕에서
무량하게 잘 정진해 나간다.
이 두 내용이다.
그리고 이런 사정은
지금 살피는 아뢰야식을 포함해 1,2,3,4,5,6,7,8의 정신이나
『유가사지론』에서 제시하는 각 내용도
그 사정이 마찬가지다.
그래서 처음 이 부분에 주의를 잘 해야 한다.
이미 첫 부분에 『해심밀경』에서 제시된 구절도
그 취지가 이와 같다.
..
아타나식阿陀那識]은 매우 깊고 미세하며,
일체종자(一切種子)는 폭류[瀑流-사나운 흐름] 같다.
나는 범부와 어리석은 이에게 펴 말하지 아니했나니
그가 분별하고 집착하여 〈나〉라고 여길까 하여서이다.
...
『해심밀경』 심의식상품
이를 다시 현실 상황을 놓고 이해해보자.
현실에서 눈을 떠서 볼 때
그 상황에서 자신이나 영희 철수 자동차 집이라고 여기면서 망집을 일으켜 임한다.
=>
그러 현실단면이나 본 바탕에 그런 내용은 얻을 수 없다.
그런 주체나 그런 오고감 생사 생멸 일체를 얻을 수 없다.
그래서 그런 상황을 놓고 그렇게 여기는 내용은
하나같이 실답지 않다. => 따라서 그에 집착을 가지면 안되고
더 나아가 그런 망집에 바탕해 업을 행하면 안된다.
그렇게 임하면 결국 이번 생안에서도 고통을 받지만,
그것으로 그 문제가 끝나지 않고 장차 극심한 생사고통을 받는 3 악도에 들어가 장구하게 묶이게 된다.
=> 그래서 그런 망집을 제거해야 한다.
그런데 사정이 그렇기에
그런 재료를 놓고 그렇게 일으킨 망집만 제거하면 되는 것이고
그처럼 망집을 제거한 바탕에서 수행을 잘 행해야 하는 것이다.
사정이 그러하기에 망집을 제거해야 한다고 해서
그런 망집을 일으킨 재료 자체를 제거한다거나,
그런 망집을 제거한 바탕에서 마땅히 행해야 하는 수행이나
그런 바탕에서 그런 수행을 통해
수행자가 얻어나가야 할 무량한 복덕과 지혜와
이를 통해 무량하게 성취해나갈 서원까지
제거하라고 하는 것이 아니다.
그래서 이 부분을 주의해야 한다.
위와 같이 일으킨 분별이 실답지 않다고 제시한 내용은
그런 망집을 가진 그 부분을 문제삼은 것이고
그런 망집을 일으킨 재료가 된,
그런 감각현실이나, 분별 내용 자체가 그렇게 얻어지지 않는다거나,
또는 그런 재료 자체를 제거하라고 한 것이 아니다.
물론 원칙적으로 보면
이런 망집을 일으키게 한 재료가 되는 감각현실이나 분별은
어떤 수행자가 회신멸지의 상태에 들어가서
굳이 얻지 않아도 무방하다고는 할 수 있다.
마치 꿈이 실답지 않고 꿈만 꾸면
자꾸 꿈때문에 번뇌 망상을 일으키고 고통을 받기에
아예 꿈을 꾸지 않고 잠도 자지 않으려 하는 것과
사정이 비슷하다.
그러나 수행자가 반대로
그런 망집 증상으로 생사고통을 받는 중생을 제도하려면
오히려 이런 중생의 상태와 눈높이를 맞추어서
중생이 생사고통을 받는 생사현실 속으로 들어가서
그런 중생을 제도할 수 있는 수행에 정진해야 할 필요성도 있다.
그런 경우에는 특히 이 점을 주의해야 한다.
망집은 제거하지만,
그런 망집을 일으키는 재료가 되지만
그 자체가 망집은 아닌, 감각현실이나 분별,
그리고 중생을 제도하기 위해 필요한 그런 시설 방편들까지
제거할 필요는 없다.
그래야 연못에 들어가 피는 연꽃처럼
망집의 더러움은 더러움대로 제거하여 청정하고 여여하게 임하는 한편,
또 중생을 상대해 중생을 제도해나갈 수 있게 된다.
그래서 약간 2 중적인 측면을 갖는다고 이해하고 혼동을 일으킬 여지도 있지만,
본래 그 현실 사정이 그런 것이다.
다만 이 부분에 오해를 자꾸 일으키게 되는 것은
그 주체가 본래 가졌던 망집을 바탕으로
그처럼 현실에서 얻는 내용[재료]나
그에 대한 가르침이나 언어 방편 시설을
자꾸 대하고 이해하기에 그런 문제가 발생하는 것이다.
아뢰야식이나 제 7 말나식, 제 6의식, 안식, 이식. 비식, 설식, 촉식
이런 정신을 시설해 제시할 때도 이 사정이 마찬가지다.
이런 내용을 제시하지만,
이것이 현실에서 일반적으로 일으키는 다른 망집내용과 달리
이것만은 실답고 참된 진짜의 내용이라고 제시하는 것은 아니다.
그래서 이런 내용을 대할 때는
이 내용에 대해 다시 그처럼 잘못 이해하고 망집을 일으키지 않도록 미리 주의해야 한다.
그런데 사정이 그렇다고
이런 시설로 가리키게 되는 그런 재료 자체가
현실에 아예 없다고 잘못 이해하면 또 곤란하다.
여기서 제시하는 아뢰야식이나 1234567과 같은 각종 마음은
하나같이 눈에 보이지도 않고 만져지지도 않기에
많은 혼동을 일으킬 수 있는데
사정이 그럴수록
이 두 점을 주의해야 한다.
그것은
거리 상황을 놓고
저기 걸어오는 영희를 얻을 수 없고
영희의 오고감이나 생멸 생사를 얻을 수 없다.
이렇게 제시하는 내용과
그 사정이 마찬가지라고 잘 이해해야 한다.
거리 상황을 놓고
저기 걸어오는 영희가 있고
영희의 오고감이나 생멸 생사를 얻을 수 있다고
일반적으로 망집을 일으키고 임한다.
그런데 기본적으로 그런 망집을 제거해야 한다.
그래서 그런 현실상황이나 그 본 바탕이 되는 실재영역에
그가 있다고 여기는 그런 분별내용은 얻을 수 없다.
이것을 먼저 잘 이해해야 한다.
그런데 사정이 그렇다고
망집에 바탕해 임하는 각 주체가
영희라고 보고 오고간다거나 생멸한다고 보고 여기게 되는
그런 재료 자체가 그 현실에
그렇게 얻어지지 않는다고 한 것은 또 아니다.
다만 그 재료를 대하면서
그 재료에 그런 내용이 '있다'거나
그 재료는 그런 내용'이다'라고 여기면서
그래서 그런 내용은 실답다. 그런 망집이 문제인 것이다.
이런 망집때문에 그 주체는 이후 그에 바탕해
또 다른 망집을 증폭시켜 나가고
또 그에 바탕해 대단히 진지하게 임하면서
업을 행해 나가며
그로 인해 극심한 생사고통을 받게 되는 상태에 묶일 도리 밖에 없다.
이것이 문제다.
그리고 이 문제를 해결하려면
이렇게 임하게 만드는 망집 증상부터 해결해야 한다.
그런데 이 경우 그런 망집은 문제지만,
그런 망집을 갖고 대하던 그 재료가
거기에 전혀 얻어지지 않고 없는 것은 또 아닌 것이다.
그리고 아뢰야식 제 7 식. 등등을 포함한
각 내용도 이와 사정이 같다.
그런 언어시설로 가리키게 되는 그런 내용은
비록 눈에 보이지도 않고 만져지지도 않지만
여하튼 앞의 상황에서 그런 망집을 일으키게 한 그런 재료 자체가
그런 형태로 있는 것처럼
이들 내용도 그렇게 언어시설을 통해서 제시할 형태로
비록 앞 내용처럼 눈에 보이고 만져지지는 않지만,
그러그러하게 재료형태로 있고
그런 상태와 그런 관계로
각 주체가 무량하게 생사를 받아나간다.
이런 의미다.
다만 여기서 주의할 점은
그런데 그런 재료를 놓고
언어 방편 시설을 통해 제시한 각 내용들이
그런 재료에 실답게 있다고 여기고
또 한편 바로 이들 내용이 참된 자신이고 세계의 본 정체다
이런 식으로 대하며
그에 집착을 갖고 대한다면
그 부분부터는 문제가 된다는 의미다.
즉 평소 자신이 자신이라고 여기고 대하던 그 부분은
그런 자신이 아니지만,
이제 지금 해심밀경이나 유가사지론 등에서 제시하는
그런 아뢰야식은 무량한 겁에 걸쳐
실답게 있는 자신의 본 정체다.
이렇게 이해하고 이를 대하고 집착을 가지면
문제가 된다.
그런데 그런 자세는 문제인데
이런 시설 방편으로 가리킨,
그런 재료가 또 전혀 없다고
다시 치우쳐 이해하는 것도 또 문제인 것이다.
그래서 이 두 측면을 놓고
거리 상황에서 영희가 오고가는 현실 상황을 놓고
경전에서 이런 현실 상황에 그런 주체나 그런 행위를
얻을 수 없다고 제시한 내용이
갖는 의미부터 먼저 잘 이해하고 검토해야 한다.
>>>
mus0fl--Edith Piaf - Nonje Ne Regrette Rien.lrc
앞에서 경전과 논서에서 제시하는 여러 내용을 놓고
망집을 바탕으로 일반적으로 일으키기 쉬운 점을
기본적으로 살폈다.
이는 경전의 핵심이라고 제시하는 내용[법인]
일체는 무상하다.
일체는 고다.
일체는 무아, 무자성이다.
일체는 생사를 떠난 열반적정이다.
일체는 공하다.
이런 내용을 포함해서
부처님이 제시한
수많은 수행목표나 수행덕목이 사정이 마찬가지다.
그런데 이들 일체 내용이
뗏목과 같은 방편시설이고
본질적으로 희론에 해당한다.
부처님은 본래 한마디도 설하신 바가 없다.
이렇게 제시한다고 해서
그렇다고 이들 내용이 전혀 의미가 없다거나,
이들 내용에 바탕해 현실에서 수행할 필요가 전혀 없다.
이렇게 잘못 이해하면 극단에 치우치면 또 곤란하다.
그래서 생사현실에 임해서 수행을 할 때는
위와 같은 사정을 기본적으로 잘 관하고 이해한 가운데
평소 각 현실 내용에 대해 일으키던 망집은 망집대로 제거하고
또 부처님이 제시한 내용도 이에 준해 망집을 잘 제거한 가운데
현실에서 대하는 각 내용이나 수행 목표나 수행덕목에 대해
상을 취하여 갖지 말고
무소득을 방편으로 임해서
원만하게 각 수행을 잘 정진해 성취해야 한다.
이런 의미다.
그런데 자꾸 어떤 측면에서는 얻을 수 없고
어떤 측면에서는 그런 내용이 재료 형태로 얻어지기에 있고,
또 어떤 측면에서는 망집 상태에 임하는 이들이
그런 내용을 그렇게 이해하게 대하고,
이런 식으로 제시하게 되니
이들 내용을 놓고 잘못 이해하면
무엇이 있고 없음에 대해서
그 때 그 때 자신 마음대로 오락가락하면서
어떤 때는 있고
어떤 경우는 없고
이렇게 제시하는 것으로 오해하기도 쉽다.
그래서 각 내용을 잘 정리하지 않으면
각 측면에서 그 부작용이 심하게 된다.
우선, 위에서 무소득을 방편으로 수행을 잘 정진해 원만히
성취해야 한다고 제시했는데
만일 수행을 하기는 하는데
그렇게 임하지 않고
어떤 수행목표나 수행덕목이
그를 통해 무언가 얻을 바가 실답게 있다고 여기고
수행을 하면 도대체 어떤 부작용을 받게 되기에
그런 주의를 처음부터 제시하는가.
그것은 처음, 생사현실에서 망집을 일으켜 임하여 생사고통을 받는 상태와 준하는
극심한 생사고통을 그로 인해 받아나아게 되기에
이를 문제라고 제시하고 주의해야 한다고 하는 것이다.
『유가사지론』에서는
이런 양극단에 처한 문제를 다음과 같이 제시한다.
우선 처음
기본적으로 부처님이 제시하는 내용을
이해하지 못하고
현실에서 일반적으로 망집상태에 있는 이들이
행하는 형태처럼 망집을 일으키고 업을 행하면
그 자신은 그 과정을 이해하지 못하더라도
축생, 아귀, 지옥의 3 악도에 묶여 대단히 장구하게
생사고통을 겪게 된다.
그리고 이것이 생사현실의 기본적 문제상황이다.
그런데 이후 부처님 가르침을 받아들이고
수행을 하지만,
그런 가운데 일체가 공하다는 사정을 관하고
망집을 제거한다면서,
극단적으로 현실에서 그런 망집을 일으키게 하는
재료 자체도 그런 형태로 얻지 못한다거나,
또는 일체가 실답지 않고 공하기에
사정이 그렇기에
현실에서 아무것도 행하지 않고 그냥 내버려 두고 방치해도 된다고 여기거나,
또는 자신이 하고 싶은대로 아무렇게 행해도 무방하고,
심지어 극단적으로 악행을 해도 된다고 여기거나,
제멋대로 행하는 경우는 또 문제다.
이를 일반적으로 악취공견을 일으킨 상태라고 표현한다.
또 이와 반대로
부처님께서 무언가 이런 수행목표를 성취하기 위해
수행을 하라고 제시했다고 해서
그런 목표나 수행방안에는 실답고 참된 내용이
실답게 있다고 다시 이에 집착하여 임한다면,
이 역시 이런 망집으로 인해
부작용을 심하게 일으켜 받게 된다.
이는 알고보면 처음 세속에서 일반적으로 갖던 망집을
단지 부처님의 가르침 내용들로 옮겨 가지고 온 것 뿐이다.
그래서 이런 각 극단에 치우친 입장들이 다 문제다.
그리고 이렇게 되면
망집에 바탕한 생사고통의 묶임에서 한편으로 벗어나지 못하고
또 그런 바탕에서
다시 생사현실에서 무량한 복덕과 수명과 지혜를 구족하여
불국토를 장엄하고 중생을 제도하는 상태에 이르지 못하고
이런 잘못된 망집으로 인해
각 측면에서 다양한 부작용을 반대로 받아나가게 된다.
또 앞과 같은 극단은 아니더라도
매번 무엇때문에 이런 저런 내용을 제시하는가 하는
그 본 취지 자체를 이해하지 못하고
매 경우 언설 표현에 집착해서 그것을 붙들고
어떤 때는 있다고 하고
또 어떤 때는 없다고도 하고
또 어떤 때는 있는 것도 아니고 없는 것도 아니고
이러니 자신은 뭐가 뭔지 모르겠다.
그냥 아무렇게나 있기도 하고 없기도 하다고
하는가 보다.
그런 가운데 표현 하나하나마다 매번 오락가락하면서
헤매 돌아다니는 상태에 처하기도 쉽다.
그래서 가장 먼저 이런 점들을 주의해야 한다.
『유가사지론』에서는
이런 문제에 대해 다음과 같이 제시한다.
...
「차라리 한 종류의<나>라는 소견[아견我見]을
일으키는 이와 같게 될지언정,
한 종류의 나쁘게 <공>을 취하는 이[○○○○惡取空者]와
같게 되지 말라」고 하셨다.
무슨 까닭이냐 하면,
<나>라는 소견을 일으키는 이는
다면 알 바의 경계에 대해서만 헷갈린 것이요,
온갖 알 바의 경계는 비방하지 않기 때문이다.
..
『유가사지론』 제36권 12. 보살지(菩薩地)② 첫째 지유가처(持瑜伽處) 진실의품(眞實義品)
기본적으로 이런 내용들이 어떤 취지로 그렇게 제시되는가
그 기본 취지를 먼저 잘 이해해야 한다.
그리고 이후 그런 바탕에서
현실에서 각 중생들이 어떤 배경 사정 때문에
무량겁에 걸쳐서 그런 형태로 생사를 받아가면서
생사고통에 묶이는가.
또 그런 가운데 왜 현실에서
그런 망집을 일으키고
그에 바탕해서 쉼없이 업을 행하게 되고
또 그로 인해 극심한 생사고통을 받는 3 악도의 상태에 들어가 묶이게 되는가
또 반대로 왜 무량한 겁에 걸쳐
무량한 복덕과 수명과 지헤를 구족하고
불국토를 장엄하고 성불하는 그런 상태로 나아가지 못하는가.
이런 사정을 구체적으로 잘 살펴나가야 한다.
◈Mun Tokyun 불기2563/01/24 |
|
문서정보 ori
http://buddhism007.tistory.com/5621#1806
sfed--유가사지론_K0570_T1579.txt ☞유가사지론 제51권 sfd8--불교경율논코너sp_2563_01.txt ☞◆vjix1806 불기2563-01-24 θθ |
ॐ मणि पद्मे हूँ
○ [pt op t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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