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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진리와실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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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기2558-01-01_변중변론송_001

진리와 가치를 고루고루 2014. 1. 9. 01:17



®

『변중변론송』
K0599
T1601

변중변

● 한글대장경 해당부분 열람I
● 한글대장경 해당부분 열람II
○ 통합대장경 사이트

○ 해제[있는경우]
※ 이하 부분은 위 대장경 부분에 대해
참조자료를 붙여 자유롭게 연구하는 내용을 적는 공간입니다.
대장경 열람은 위 부분을 참조해주십시오.


○ [pt op tr] 변중변론송_K0599_T1601 핵심요약



♣0599-001♧
『변중변론송』

변중변



비영리-동일조건변경허락원문번역문

변중변론송


○ [pt op tr]


변중변론송(辯中邊論頌)★★


미륵보살(彌勒菩薩) 지음

현장(玄奘) 한역

송성수 번역




■ 1. 변상품(辯相品)


■ 다만 모양[相]과 장애[障]와 진실함[眞實]과

모든 다스림을 닦음[修對治]이다

곧 이 닦음의 나누어진 위치[修分位]와

과위를 얻음[得果]과 무상승(無上乘)만이 있다


허망한 분별은 있고

이것에 두 가지는 도무지 없으며

이 안에는 ≺공≻이 있을 뿐이요

그것에도 역시 이것만이 있다


그러므로 온갖 법은

≺공≻이 아니고 ≺공≻ 아님도 아니라고 말하나니

있음[有]과 없음[無]과 및 있음[有] 때문에

이는 곧 중도(中道)에 꼭 들어맞는다


의식[識]이 나서 변하여

뜻[義]ㆍ유정(有情)ㆍ≺나≻[我]와 알음[了]과 비슷하되

이 대경[境]은 실로 있는 것이 아니므로

대경이 없는지라 의식도 없다


허망한 분별의 성품은

이 뜻으로 말미암아 서로 있음[實有]도

전혀 없음[全無]도 아님을 이룩하게 되나니

사라져서 해탈(解脫)한다고 인정되기 때문이다


오직 제나름 분별[遍計所執性]과 새로 의지성[依他起性]과

두루 진실성[圓成實性]만은

대경[境]이기 때문이요 분별(分別)이기 때문이니

두 가지가 ≺공≻하기 때문에 말한다

의식[識]은 얻는 바[所得]가 있는 데에 의지하고

대경은 얻는 바가 없으면서 생기며

대경은 얻는 바가 없는 데에 의지하고

의식은 얻는 바가 없으면서 생긴다


의식의 얻음이 있는 성품[有得性]도

얻는 바가 없음[無所得]을 이루므로 말미암아

그러므로 두 가지의 얻음이 있음[有得]은

얻음이 없는 성품[無得性]과 평등한 줄 알아라




세 가지 세계[三界]의 심, 심소[心心所]는 

이야말로 허망한 분별인 것이니

대경을 아는 것만을 임자 마음이라고 하고

또한 차별하는 것을 딸린 마음이라 한다


첫째를 곧 연식(緣識)이라고 하고

둘째를 받는 이[受者]라고 하나니

이 가운데서 능히 수용(受用)하고

분별하여 추리함[推]은 딸린 마음이다


가려 막음[覆障]과 편히 세움[安立]과

거느려 인도함[將導]과 포섭함[攝]과 원만함[圓滿]이며

세 가지 분별[三分別]과 받아 씀[受用]과

끌어 일으킴[引起]과 연달아 맴[連縛]이며


앞에 나타남[現前]과 괴로움의 결과[苦果] 때문에

이것만이 세간을 괴롭히나니

세[三]과 둘[二]과 일곱[七]의 섞여 더러움[雜染]은

허망한 분별로 말미암아서이다


모든 모양[相諸] 및 다른 문[異門]과

뜻[義]과 차별(差別)과 성립(成立)은

두 가지가 ≺공≻한 성품인 줄 알지니

간략히 말하면 이것뿐이기 때문이다


두 가지가 없고[無二]없음이 있기[有無]때문이요

있음[有]도 아니고 없음[無]도 아니며

다름[異]도 아니고 또한 동일함[一]도 아니니

이것을 말하여 ≺공≻한 모양이라고 한다




■ ≺공≻의 다른 문을 간략히 말하자면 진여(眞如)와 실제(實際)와

모양 없음[無相]과 뛰어난 이치의 성품[勝義性]과

법계(法界) 따위인 줄 알아야 하리라


변함이 없음[無邊]과 뒤바뀜이 없음[無倒]과

모양의 사라짐[相滅]과 거룩한 지혜의 경계[聖智境]와

모든 거룩한 법의 원인[聖法因]으로 말미암아서이니

다른 문의 뜻은 다음과 같으니라


이것은 섞여 더러움[雜染]과 맑고 깨끗하여[淸淨]

때 있음[有垢]과 때 없음[無垢]으로 말미암아서이니

마치 물 경계[水界]와 온전한 허공[空]처럼

깨끗하므로 인정하여 깨끗함[淨]이라고 한다


능히 먹음[能食]과 먹을 바[所食]와

능히 이것을 봄[能見此]과 그대로의 이치[如理]는

구하는 바 두 가지 깨끗함의 ≺공≻[二淨空]이며


언제나 유정들을 이롭게 하기를 위하고

나고 죽음[生死]을 버리지 않기를 위하고

착함[善]의 다함이 없기를 위하여

그 때문에 이를 살피어 ≺공≻으로 삼는다


종성(種性)의 맑고 깨끗함을 위하고

모든 좋은 모습[相好]를 얻기 위하고

모든 부처님 법을 깨끗하게 하기 위해

그 때문에 보살은 ≺공≻임을 살핀다


보특가라[補特伽羅]와 법(法)의

실제 성품[實性]은 다 같이 있음[有]이 아니며

이 없는 성품[無性]이 있는 성품[有性]이므로

두 가지의 ≺공≻[二空]을 세운다


이것이 만약 섞여 더러움이 없다면

온갖 것은 저절로 해탈되어야 하고

이것이 만약 맑고 깨끗함이 없다면

하욤[功用]은 결과가 없어야 하리


더러움[染]도 아니고 더럽지 않음[不染]도 아니며

깨끗함[淨]도 아니고 깨끗하지 않음[不淨]도 아니니

마음의 성품[心性]은 본래 깨끗하지마는

손티[客塵]로 말미암아 더럽게 된다






■ 2. 변장품(變障品)


전체 부분[具分]과 한 부분[一分]과

더욱 왕성함[增盛]과

나고 죽음에 있어서 가지거나 버림[取捨]은

두 가지 종성(種性)을 장애한다고 말한다


아홉 가지 번뇌의 모양[煩惱相]이라 함은

사랑함[愛] 따위의 아홉 가지 맺음[口結]이니

첫째와 둘째는 싫어함[厭]과 버림[捨]을 장애하고

나머지의 일곱은 참된 소견[眞見]을 장애한다


말하자면 몸에 대한 소견[身見]과 그의 일[事]과

사라짐[滅]과 도(道)와 보배[寶]와

이끗 공경함[利養恭敬] 따위와 멀리 여읨[遠離]과의

두루 앎[徧智]을 장애하기 때문이니라


행을 더함이 없음[無加行]과 그릇된 곳[非處]과

이치답지 않음[不如理]과 내지 않음[不生]과

바른 생각[正思惟]을 일으키지 아니함과

양식[資糧]이 아직 원만하지 못함이며


종성(種性)과 착한 벗[善友]과를 궐(闕)함과

마음이 극히 고달프고 싫증나는 성품과

바른 행[正行]을 궐함과

비루하고 나쁜 이와 함께 사는 것이며


뒤바뀐 거칠고 무거움[倒麤重]과 셋의 나머지와

반야(般若)가 아직 성숙되지 못함과

본래 성품[本性]의 거칠고 무거움과

게으름[怠惰]과 방일(放逸)과의 성품이며


존재[有]에 집착함과 재물[資材]에 집착함과

마음 성품의 낮고 열등함과

믿지 않음[不信]과 훌륭한 알음[勝解]이며


법을 가벼이 하고 명리[名利]를 중히 여김과

유정에게 가엾이 여김이 없음과

들음이 모자람[匱聞]과 들음이 적음[少聞]과

미묘한 선정[妙定]을 닦고 다스리지 않음이다


착함[善]과 보리(菩提)와 섭수함[攝愛]과

지혜 있음[有慧]과 어지러움[亂]도 장애도 없음과

회향함[廻向]과 두려움[怖]도 아낌[慳]도 아님과

자재함[自在]을 착함 따위라고 이름한다


이와 같은 착함 따위의 열 가지 것은

각각 앞의 세 가지씩 장애를 보유하며

깨달음 장래[覺分]와 건넘[度]과 자리[他]에선

따로[別]의 장애가 있는 줄 알지니라



일에 있어 잘하고 교묘하지 않음과

게으름과 선정에 둘을 줄게 함[定滅二]과

심지 아니함과 파괴하고 열등한 성품[嬴劣性]과

소견[見]과 거칠고 무거움[麤重]과의 허물이다


부귀(富貴)와 착한 갈래[善趣]와

모든 유정들을 버리지 아니함과

허물[失]과 덕(德)에 있어 줄어짐과 불음[減增]과

나아가 들게 함[趣入]과 해탈을 장애함과


보시[施] 따위의 모든 선행과

그지없음[無盡]과 끊임없음[無間]과

할 일을 잘 결정함[所作善決定]과

법을 수용하여 성숙케 함을 장애함이다


두루한 행[徧行]과 가장 훌륭함[最勝]과

훌륭한 종류[勝流]와 포섭함이 없음[無攝]과

서로 잇달아서 차별이 없음[相續無差別]과

섞여 더러움도 맑고 깨끗함도 없음이며


가지가지 법의 차별이 없음[種種法無別]과

늘지도 아니하고 줄지도 아니함[不增不滅]과

아울러 분별함이 없는 따위의

네 가지 자재함의 의지[四自在依]의 이치니라


이 열 가지 법계[十法界]에서는

물들지 아니하는 무명[不染無明]이것이

10지의 공덕을 장애함이 있는지라

그러므로 열 가지 장애[十障]라고 하느니라


■ 이미 모든 번뇌장(煩惱障)과

모든 소지장(所知障)을 설명하였나니

이 두 가지가 다하였기 때문에

온갖 장애[一切障]는 해탈되었다 하리라





■ 3. 변진실품(辯眞實品)


진실함[眞實]은 열 가지가 있을 뿐이니

근본(根本)과 모양[相]과

뒤바뀜이 없음[無顚倒]과 인과(因果)와

굵고 가늘음[麤細]의 진실함이며


지극하게 이루짐[極成]과 깨끗함으로 행하는 바[淨所行]와

받아들임[攝受]과 차별(差別)과

열 가지 교묘함[十善巧]의 진실함이니

다 ≺나≻라는 소견[我見]을 제거하기 위함이다


세 가지의 제 성품[三自性]에 있어서

하나만은 언제나 있음이 아님[非有]이고

하나는 있음[有]이면서 진실함이 아니며

하나는 있음[有]ㆍ없음[無]이면서 진실함이다


법(法)과 보특가라[數取趣]와

취할 바[所取]와 능히 취하는 것[能取]과

있음과 있음이 아닌 성품[有非有性] 중에는

더 늘음[增益]과 줄어짐[損滅]의 소견이 있다


이를 알기 때문에 바꾸지 아니하면

이것을 진실한 모양[眞實相]이라고 하며

성품 없음[無性]과 나고 없어짐[生滅]과

때 끼고 깨끗함[垢淨]이 셋의 무상함이다


취할 바[所取]와 일 모양[事相]과

어울려 합함[和合]이 괴로움의 세 가지[苦三種]며

≺공≻함에도 또한 세 가지가 있나니

없음[無]과 다름[異]과 각자[自]의 성품이다


모양이 없음[無相]과 모양이 다름[異相]과

제만의 모양[自相]이 셋의 ≺나≻ 없음이며

다음과 같이 네 번의 세 가지는

근본의 진실함에 의지함인 것이다


괴로움의 세 모양[苦三相]은 이미 설명하였고

쌓임[集]에도 또한 세 가지가 있나니

습기(習氣)와 등기(等起)와

모양의 매임을 여의지 못함[未離繫]이다★★


제 성품[自性]과 두 가지의 나지 않음[不生]과

때와 고요함[垢寂]의 둘은 셋의 사라짐[滅]이며

두루 앎[遍知]과 영원히 끊음[永斷]과

증득함[證得]은 세 가지 도의 진리[道諦]이다


알아야 하리니 세속의 진리[世俗諦]는

차별하자면 세 가지가 있어서

거짓[假]과 행함[行]과 나타나 앎[顯了]이니

차례대로 세 가지의 근본(根本)에 의한다


■ 으뜸가는 진리[勝義諦]에도 세 가지가 있어서

뜻[義]과 얻음[得]과 바른 행[正行]이니

근본의 하나에 의한 변함이 없음[無變]과

뒤바뀜이 없음[無倒]의 둘은 두루 진실[圓實]이다


■ 세간이 지극하게 이뤄짐[世極成]은 첫째에 의하고

도리가 지극하게 이뤄짐[理極成]은 셋째에 의하여

깨끗함으로 행하는 바[淨所行]에 두 가지 있나니

하나의 두루 진실성[圓成實]에 의하느니라


이름[名]은 제나름 분별성[遍計所執]이고

모양[相]과 분별(分別)은 서로 의지성[依他起]이며

진여(眞如) 및 바른 지혜[正智]는

두루 진실성의 소속이니라


헤맴[流轉]과 편히 세움[安立]과

삿된 행[邪行]은 처음과 둘째에 의하고

실제 모양[實相]과 오직 의식[唯識]과 깨끗함[淨]과

바른 행[正行]은 뒤의 하나에 의한다


쌓임[蘊] 등에 있어서 ≺나≻라는 소견[我見]은

하나[一]와 원인[因]과 받는 것[受者]과

짓는 것[作者]과 자재로이 바꿈[自在轉]과

더 위가는 이치[增上義]와 항상 함[常]이며


섞여 더러우며 맑고 깨끗함의 의지[雜染淸淨依]와

관(觀)과 묶고 푸는 것의 성품[縛解者性]을 집착하며

이 집착할 바[所執]와 분별(分別)과

법의 성품[法性]의 이치가 거기에 있다


하나가 아님[非一]과 묶어 간략히 함[總略]과

나눈 대문[分段]의 이치를 쌓임이라 하며

능히 취함[能取]과 취할 바[所取]와

저 취함[取]의 종자(種子)의 이치를 경계[界]라 한다


능히 받음[能受]과 알 바 대경[所了境]과의

받아 쓰는 문[受用門]의 이치를 처소라 하며

연기(緣起)의 이치는 원인[因]과

결과[果]와 작용[用]에서 더하고 덜함이 없음이다


사랑스럽지 않음[非愛]과 사랑스러움[愛]과 깨끗함[淨]과

함께 남[俱生]과 훌륭한 임금[勝主]과

얻음[得]과 행함[行]에 자재(自在)하지 아니함이

도리에 계합하고 못함[處非處]의 이치이다


뿌리는 취함[取]과 머무름[住]과 이어짐[續]과

씀[用]과 두 가지 깨끗함[二淨]에서 더함[增上]이며

원인[因]ㆍ결과[果]와 이미[已]ㆍ아직[未]의 수용은

바로 세상[世]의 이치인 줄 알라


느낌[受]과 느낌의 양식[受資糧]과

저 원인하는 바의 모든 행[所因諸行]과

두 가지 고요히 사라짐[二寂滅]과 다스림[對治]은

이는 진리[諦]의 이치인 줄 알라


공덕(公德)과 허물[過失]과

분별이 없는 지혜[無分別智]로 말미암아

다른 이에 의하거나 스스로가 벗어남[出離]은

이는 승[乘]의 이치인 줄 알아야 한다


함이 있고 함이 없는[有爲無爲]이치라 함은

거짓[假]이거나 원인[因]이거나

모양[相]이거나 고요함[寂靜]이거나

또는 저 살필 바[所觀]의 이치이니라





■ 4. 변수대치품(辯修對治品)


거칠고 무거움[麤重]과 사랑의 원인[愛因]과

≺나≻라는 일[我事]과 헷갈림 없음[無迷] 때문에

네 가지 거룩한 진리[四聖諦]에 들기 위하여

염주(念住)를 닦는 줄 알아야 한다


장애[障]와 다스림[治]의 온갖 차별을

이미 두루하게 알았다고 하면

멀리 여읨[遠離]과 닦아 쌓음[修集]을 위하여

네 가지 정단[四正斷]을 부지런히 닦는다


감당하는 성품[堪能性]에 의지하여 머무르고

온갖 일을 이룩하기 위하여

다섯 가지 허물[五過失]을 없애버려서

여덟 가지 끊는 행[斷行]을 부지런히 닦는다


게으름[懈怠]과 성인 말씀[聖言]을 잊음과

흐리멍텅[惛沈]하고 들뜸[悼擧]과

행을 짓지 않음[不作行]과 행을 지음[作行]

바로 다섯 가지의 허물[五失]인 줄 알아라


게으름을 끊어서 없애기 위하여

하고자 함[欲], 

부지런함[勤], 

믿음[信], 

편안함[安]을 닦음이니

곧 의지할 바[所依]와 능히 의지함[能依]과

원인한 바[所因]와 능한 결과[能果]이며


그 밖의 네 허물을 제거하기 위하여

기억[念]ㆍ지혜[智]ㆍ생각[思]ㆍ버림[捨]을 닦음이니

말씀 기억함과 흐리멍덩하고 들뜸을 깨달음과

조복의 행[伏行]과 없애서 평등하게 흐름[滅等流]이다


이미 순해탈(順解脫)을 심었지마는

다시 다섯 가지 더함[五增上]을 닦나니

하고자 함[欲]과 행함[行]과 잊지 않음[不忘]과

산란하지 않음[不敬亂]과 생각하여 가림[思擇]이다


곧 장애 줄이는 것을 힘[力]이라고 하나니

원인과 결과로 차례를 세우며

순결택분(順決擇分)의 두 가지와 두 가지는

5근(根)에 있고 5력(力)에 있다


깨달음 갈래[覺支]를 요약하면 다섯 가지 있나니

의지할 바[所依]아 제 성품[自性]과

벗어남[出離]과 아울러 이익(利益)이며

그리고 세 가지의 물듦 없는 갈래[三無染支]이다


인연(因緣)과 의지할 바와

제 성품으로 말미암아 뜻이 차별되나니

그러므로 가뿐함[輕安]과 선정[定]과 버림[捨]을

말하여 물듦 없는 갈래라고 한다


분별(分別)과 가르쳐 보임[誨示]과

다른 이를 믿게 함에 세 가지가 있음과

장애 다스림[對治障]에도 세 가지가 있으므로

도의 갈래[道支]는 여덟 가지가 된다


소견[見]과 계율[戒]과 멀리 여읨[遠離]을 나타내어

다른 이로 하여금 깊이 믿어 받게 하며

근본과 따름의 미혹[本隨惑] 및

자재의 장애[自在障]를 다스리기 때문이다


■ 뒤바뀜 있음[有倒]에서 뒤바뀜 없음[無倒]에 따름과

뒤바뀜 없음에서 뒤바뀜 있음에 따름과

뒤바뀜 없음에서 뒤바뀜 없음에 따름의

이것이 다스림을 닦는 것의 차별이다


■ 보살로서 닦아 익히는 바는

반연할 바[所緣]와 뜻 지음[作意]과

증득함[證得]의 자못 뛰어남으로 말미암아

그 때문에 2승과는 차별이 있다





■ 5. 변수분위품(辯修分位品)


통틀어서 세 가지 위 없음[三無上]으로 말미암아

무상승(無上乘)이라고 말하나니

바른 행[正行]과 반연할 바[所緣]와

닦아 증득함[修證]의 위 없음이다


바른 행에는 여섯 가지 있나니

가장 훌륭함[最勝]과 뜻 지음[作意]과

법을 따름[隨法]과 두 편을 여읨[離二邊]과

차별(差別)과 차별 없음[無差別]이 그것이니라


가장 훌륭함에는 열두 가지 있나니

넓고 큼[廣大]과 오랜 동안[長時]과

의지할 곳[依處]과 그지없음[無盡]과

끊임없음[無間]과 어려움 없는 성품[無離性]이며


자재(自在)와 섭수(攝受)와 일으킴[發起]과

얻음[得]과 같은 종류[等流]와 마지막[究竟]이니

이로 말미암아 열 가지 건넘[十度]을 말하여

바라밀다(波羅蜜多)라고 이름하게 된다


■ 열 가지의 바라밀다라고 함은

보시[施]와 계율[戒]과 편안히 참음[安忍]과

힘써 나아감[精進]과 선정[定]과 반야(般若)와

방편(方便)과 소원[願]과 힘[力]과 지혜[智]이다


이롭게 함과 해치지 않음과 받음[受]과

공덕을 더함과 들임[入]과 벗어남과

그지없음과 항상 일으킴과 결정함과

수용하여 다른 이를 성숙시킴이다


보살은 세 가지의 지혜[三慧]로써 ★★

한결같이 대승(大乘)을 생각하면서

베풀어 설치하는 법[施設法] 그대로를

뜻 지음의 바른 행이라고 한다


이는 착한 경계[善界]를 더욱 자라게 함과

뜻에 들어감과 일을 이룩함이며

이 돕는 짝[助伴]은 바로

열 가지 법의 행[法行]인 줄 알아야 한다


쓰고 베낌과 공양함과

남에게 베풂과 들음과 펼쳐 읽음과

받아 지님과 바르게 열어 폄과

읊고 욈과 그리고 생각함과 닦음이다


열 가지 법의 행[十法行]을 행하게 되면

복 더미[福聚]를 얻음이 한량없나니

훌륭하기 때문이고 그지없기 때문이며

남을 거둬 주되 쉬지 않기 때문이다


법을 따른 행[隨法行]은 두 가지여서

모든 산란함이 없음[無散亂]과

뒤바뀜이 없음[無顚倒]이 변하여 바뀜[轉變]이니

모든 보살은 알아야 한다


선정에서 나옴[出定]과 대경에서 흐름[於境流]과

맛ㆍ흐림ㆍ들뜸[味ㆍ沈ㆍ掉]과 속여 보임[矯示]과

≺나≻라는 고집[我執]과 마음의 열등[心下劣]이니

지혜로운 이들은 알아야 한다


알고 봄[知見]의 글[文]과 뜻[義]과

뜻 지음[作意] 및 움직이지 않음[不動]과

두 모양[二相]과 더럽거나 깨끗함[染淨]과 손[客]과

두려움도 뽐냄도 없음[無怖高]에 대한 뒤바뀜 없음이다


서로 응함[相應]과 많이 익힘[串習]과

혹은 이것을 뒤집음으로 말미암아

뜻이 있고 있지 않는 줄을 아나니

이것이 글에 있어 뒤바뀜 없음이다


두 가지 성품[二性]에 비슷하게 나타남과

현실 같이는 실제 있음이 아님과

있음과 있음 아닌 것을 여읜 줄 앎이

이것이 뜻에 있어 뒤바뀜 없음이다


뜻 지음에 있어서 뒤바뀜이 없다 함은

저 말의 훈습(熏習)함이

말의 뜻 지음이며 그의 의지[依]라고 알지니

나타나서 두 원인과 비슷하기 때문이다


움직이지 않음에 있어 뒤바뀜이 없다 함은

뜻[義]의 있는 것도 아니고

없는 것도 아니고 눈흘림[幻] 따위인 줄 알지니

있음[有]ㆍ없음[無]에 움직이지 않기 때문이다


자기만의 모양[自相]에 있어 뒤바뀜이 없다 함은

온갖 것은 이름뿐인 줄을 알아서

온갖 분별을 여의는 것이니

으뜸가는 뜻의 자기만의 모양[勝義自相]에 의한다


참된 법계[眞法界]를 여읨으로써

따로 하나의 법도 없는지라

그러므로 이것을 통달한다면

공통의 모양[共相]에서 뒤바뀜이 없다


뒤바뀜의 뜻 지음이 아직 사라지지 못함과

이미 사라졌음을 알게 된다면

법계의 섞여 더러움[雜染]과

맑고 깨끗함[淸淨]에 있어 뒤바뀜이 없음이다


■ 법계의 본래 성품은

맑고 깨끗함이 허공과 같은지라

더럽거나 깨끗함[染淨]이 주인이 아님을 안다면

이것이 손[客]에 대한 뒤바뀜 없음이다


유정(有情)과 법(法)은 없기 때문에

더럽거나 깨끗함의 성품조차 없나니

이 두렵거나 뽐냄 없음[無怖高]을 안다면

이것이 두 가지에 있어 뒤바뀜 없음이다


다른 성품[異性]과 동일한 성품[一性]이고

외도(外道)와 그리고 성문(聲聞)의 치우침은

유정(有情)과 법(法)에 두 가지씩이다


다스릴 바[所治]와 능히 다스림[能治]이고

항상 머무름[常住]과 아주 없음[斷滅]이며

취할 바[所取]과 깨끗함[淨]의 둘에는 세 가지 있다


두 치우침[二邊]의 성품을 분별한다면

다시 일곱 가지가 있는 줄 알지니

있음과[有] 있지 않음[非有]의 치우침이며

능소(能所)의 고요함[寂]ㆍ두려움[怖]ㆍ무서움[畏]이다


취할 바와 능히 취함과 바름[正]과 삿됨[邪]이고

쓸데 있음[有用]과 쓸데없음[無用]이며

일으키지 않음[不起]과 시간[時] 따위이니

이것이 두 치우침을 분별함이다


■ 차별과 차별이 없음이라고 함은

알아야 한다 10지(地)에 있어

열 가지의 바라밀다[十波羅密多]의

더함[增上]과 평등한 것[等]의 닦아 모음이다


반연할 바[所緣]★★라 함은 벌려 세움[安]과 법계[法界]와

세울 바[所立]와 능히 세움[能立]과 지녀 있음[任持]과

새겨 지님[引持]과 안에 지님[內持]과 통달함[通達]과

더함[增]과 분증(分證)과 등운(等運)과 가장 훌륭함[最勝]이다


닦아 증득함[修證]이란 모자람이 없음[無闕]과

헐뜯지 않음[不毁]과 요동 않음[不動]과 원만함[圓滿]과

일으킴[起]과 견고함[堅固]과 고르고 부드러움[調柔]과

머무르지 않음[不住], 

장애 없음[無障], 

쉼이 없음[無息]이다.


이 논(論)의 변중변(辯中邊)은

길고 은밀함[深密]과 굳고 착실함[堅實]의 뜻과

넓고 큼[廣大]과 온갖 것[一空]의 뜻을 말하여

모든 상서롭지 않은 것[不吉祥]을 없앴네


● [pt op tr] f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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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ab value 불기2564/03/11/수/21: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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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잡담☎ = 순전한 잡담부분
● = 논의부분





오직 제나름 분별[遍計所執性]과 새로 의지성[依他起性]과

두루 진실성[圓成實性]만은

대경[境]이기 때문이요 분별(分別)이기 때문이니

두 가지가 ≺공≻하기 때문에 말한다

의식[識]은 얻는 바[所得]가 있는 데에 의지하고

대경은 얻는 바가 없으면서 생기며

대경은 얻는 바가 없는 데에 의지하고

의식은 얻는 바가 없으면서 생긴다



K0599V17P0351a10L;
境無故識無 虛妄分別性 由此義得成

非實有全無 許滅解脫故 唯所執依他

及圓成實性 境故分別故 及二空故說

依識有所得 境無所得生 依境無所得

識無所得生 由識有得性 亦成無所得

故知二有得 無得性平等 三界心心所

是虛妄分別 唯了境名心 亦別名心所



==> 



◆vukv1514

◈Lab value 불기2558/01/01


Lab value 불기2564/03/11/수/21: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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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테이블 
◈Pun tarika 2014/04/29/화/22:40

[pt]

▶2
○ 수행론 
◈Pun tarika 2014/04/29/화/13:45
- 대반야바라밀다경 9. 행상품(行相品)  
에서 분별을 일으키면서 반야바라밀다를 수행하면 
방편선교가 없기 때문에 
반야바라밀다를 행하는 것이 아니라고 제시한다. 



구수 선현이 부처님께 다음과 같이 아뢴다. 
"...
세존이시여, 
만약 보살마하살이 이와 같이 갖가지 분별을 일으키면서 
반야바라밀다를 수행하면 
방편선교(方便善巧)가 없기 때문에 
반야바라밀다를 행하는 것이 아니옵니다.
.."
『대반야바라밀다경』 9. 행상품(行相品) . 


'분별'이란 일반적으로 
어떠한 것에 관념을 일으켜 판단을 행하는 것을 의미한다. 
또 더 나아가 분별을 일으켜 말을 하는 것도 분별애 포함된다. 

한편 분별하지 말라는 것도 
역시 하나의 분별에 바탕하여 판단하고 말하는 것이다. 
그래서 선현이 이렇게 말하는 것도 따라서 분별이다. 

그리고 공함, 무자성은 
분별하고 언어를 말한다고 해도 달라지지 않는다. 
그래서 공하고 무자성이다. 
또 분별하지 않고 말하지 않아도 마찬가지로 
역시 공하고 무자성이다. 


수행을 하는 데에 있어서 
무엇이 옳고 무엇이 올바른가, 
또 어떻게 해야 하는가. 
또는 분별을 하지 않아야 하는가 해야 하는가 
등도 사실은 모두 그런 분별을 바탕으로 판단할 일이다. 

분별을 일체의 정신작용을 중지하는 것으로 생각한다면, 
매우 기이한 상태에 빠지게 된다. 
그리고 이런 분별을 모두 중지한다면, 
도대체 어떻게 사람이 살아갈 수 있는가하는 의문도 갖게 마련이다. 

따라서 분별을 일으키면서 반야바라밀다를 수행하면 
방편선교가 없기 때문에 
반야바라밀다를 행하는 것이 아니라는 표현이 갖는 의미를  
잘못 새기면 곤란하다. 

이 내용을 잘못 새기면, 
자칫, 정신기관에 어떤 독을 발라서 정신작용을 중지시키거나, 
또는 특수한 수행을 통해 정신작용을 모두 중지시키는 노력을 해야만 
여기서 말하는 반야바라밀다를 수행하는 것으로 
오해할 수 있다. 

우선 분별은 예를 들어 어떤 이가 A라고 분별을 갖는다면, 
어떤 감각을 하고 
그리고 그에 대해 관념을 일으켜 그것을 A 라고 한다. 
이 경우 그는 A라는 관념으로 가진 내용이 
자신이 감각한 현실 내용에도 들어 있다고 여기기 쉽다. 

한편, 어떤 관념을 가질 때 
그것이 곧 실재의 내용인가  
더 나아가 영원불변한 실체의 진짜의 내용인가라고 
철학자처럼 의문을 제기하고 이를 문제로 삼는 경우는 
흔하지 않다. 

그러나 이런 문제가 제기될 때 
자신이 분별해서 관념으로 가진 내용이 
곧 실재의 내용이고 
실재에도 그런 내용이 그대로 있다고 생각하기 쉽다. 

더 나아가 자신이 갖는 관념은 
영원불변한 실체로서 진짜의 내용이라고 여기기도 쉽다. 

그리고 그는 
자신이 갖는 관념이 여하튼 진짜의 내용이고 실답다고 보기에 
집착을 가질만한 것이라고 보는 바탕에서 집착을 갖고 임하게 된다. 

또 그런 집착에 바탕하여 행위하기 때문에 
삼세 윤회의 고통의 과보를 받게 된다. 


그러나 자신이 생각한 그 A라는 관념이나 분별[변계소집상]은 
감각현실과 같은 내용을 그 안에 갖는 것이 아니며, 
감각한 현실[의타기상]에는 관념과 같은 내용이 존재하지 않는다. 

또한 그런 관념이나 그런 관념을 갖게한 감각현실은 
모두 실재의 내용[원성실상]이 아니며, 
그런 내용을 얻게 한 실재는 그 내용을 얻을 수 없고 공하다. 

한편, 이들은 그것이 감각이거나 관념이거나 실재이거나, 모두 
영원불변한 실체로서의 자성이 있는 것이 아니다.
따라서 진짜의 내용이 아니다. [승의무자성, 무아, 무자성]

또 그 실재의 내용은 얻을 수 없어 공하다. 
현실에서 감각하여 얻는 감각현실은 실재의 내용이 아니다. [ 생무자성]  

관념은 감각현실과 같은 자상도 갖지 않는다. [ 상무자성]

이런 사정을 관하여 
그런 내용들이 실다운 내용이 아님을 이해한다. 
그리고 집착을 가질만한 것들이 아님을 관한다. 
그리고 이에 대한 집착을 버려야 한다. 

그리고 이를 통해 집착을 버림으로써 
집착이 만들어내는 업을 중지한다.
그리고  그로 인한 고통의 결과를 모두 떠나 해탈을 이룰 수 있다. 



한편 위와 같은 사정은 경전에서 설하는 
무상, 고, 무아, 무자성 등의 관념에서도 역시 같다. 

이런 내용도 역시 
영원불변한 실체를 갖는 진짜의 내용이 아니다. 
그 실재는 공하다. 
감각현실과 일치하는 어떤 내용이 그 안에 들어 있는 것이 아니다. 
이는 처음과 마찬가지다. 

결국 이런 내용에 대해서도 
일반적인 경우와 마찬가지로 
앞과 같은 잘못된 분별과 집착을 버려야 한다. 

따라서 반야바라밀다란, 결국 
실상을 관하는 깊은 지혜를 통해 
앞과 같은 잘못된 분별을 떠나고 
그에 바탕한 집착을 떠나는 것을 의미한다. 

결국 위 구절에서 분별을 버리라는 표현의 의미은 다음으로 이해해야 한ㄷ.ㅏ 
자신이 어떤 분별을 할 때 
그런 내용이 곧 감각현실의 내용이라고 여기지 않아야 한다. 
더 나아가 실재의 내용이라고 여기지 않아야 한다. 
그리고 영원불변한 실체성을 갖는 진짜의 실다운 내용이라고 여기지 않아야 한다. 
그래서 집착하는 태도를 떠나야 함을 의미한다. 

그러나 감각현실(의타기상)이나 분별이나 관념(변계소집상)은 
전혀 의미없는 것은 아니다. 

진여 실재의 원성실상에 바탕하여 
감각현실(의타기상)이 나타난다.
그리고 다시 관념이나 분별과 같은 변계소집상이 나타난다. 

따라서 이 모두를 전혀 없는 것이라고 무시하면 곤란하다. 
그리고 자칫, 옳고 올바른 판단마저도 모두 중지하고 떠나는 것을 
올바른 수행이라고 생각하면 곤란하다. 

이미 본 것처럼 
분별하여 관념을 갖거나 감각을 하더라도 
그것은 본래 무아, 무자성이고 공하다. 

오직 분별을 중지하고 관념을 전혀 갖지 않고 감각을 전혀 하지 않는 상태, 
그 경우에만 비로소 무아, 무자성이 되고 
공한 상태로 되는 것은 아니다. 

다만, 무아 무자성이고 공한 상태인데도 불구하고 
잘못된 분별을 일으키고 집착을 일으켜 갖는다면 곤란하다. 
그러면 그 분별과 집착에 얽매여 행하게 된다. 
그로 인해 삼세 윤회의 고통을 받게 된다.
따라서 경전에서 위와 같은 표현으로 경계시킨다. 

결국 집착을 떠나고 마음의 해탈을 얻기 위해서는 
무아 무자성이고 공한 상태에 상응하여 
그와 같이 올바로 생각해야 한다.
그래서 앞과 같은 잘못된 분별을 떠나야 한다. 
나아가 집착을 떠나야 한다. 
이런 내용을 여기에서 강조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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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서정보
[pt] FR Q:/G/G/08/개인_불교공부/K0001_T0220[401-500]_대반야경.txt 







◈Pun tarika 2014/04/28/월/09:47

[pt]

대반야바라밀다경 제 411권 
삼장법사 현장 한역 
 
11. 비유품(譬喩品) 

K0001V03P0927a04L;
爾時具壽善現白佛言世尊言菩薩
者是何句義佛告善現無句義是菩
薩句義何以故善現菩提薩埵二旣
不生句於其中理亦非有故無句義
是菩薩句義善現當知譬如空中鳥
迹句義實無所有菩薩句義亦復如
是實無所有譬如夢境幻事陽焰光
 
▶2
○ 실상론 
◈Pun tarika 2014/04/28/월/09:25
보살이란, 보리 즉 깨달음, 그리고 살타 즉 중생, 생명이란 말이 합쳐진 것으로 
깨달음을 구하는 생명이라고 할 수 있다. 
현실에서 일반적으로 이해하는 의미는 
이와 같다. 

그러나 『대반야바라밀다경』 제 411권 11. 비유품(譬喩品)에서는 
보살이 무슨 뜻인가 묻는 질문에 '뜻없음'이라고 밝히고 있다. 
그 이유는 이런 단어[구]가 '본래 생겨나지 않음'이고 
또 그런 구절 가운데 그러한 '이치가 있는 것이 아님'을 이유로 들고 있다. 

...
"세존이시여, 
보살이라 함은 무슨 뜻[句義]이옵니까?" 
부처님께서 선현에게 말씀하셨다. 
"뜻 없는 것[無句義]이 보살의 뜻[句義]이니라. 
왜냐 하면 선현아, 
보리(菩提)와 살타(薩埵), 
이 두 가지는 
이미 생겨 나지 않는 구절이며, 
구절 가운데 이치도 있는 것이 아닌 까닭에 
뜻 없는 것[無句義]이 
곧 보살의 뜻[句義]이라 하느니라. 
... 
『대반야바라밀다경』 제 411권 11. 비유품(譬喩品)


반야경에서의 가르침은 
어떤 것의 실재의 내용에 대한 의문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 

이런 실재의 측면에서는 
보살이 아니라, 그 어떤 것을 묻는다 해도 다 사정이 같다. 
예를 들어 부처나 또는 바위나 꽃의 의미를 묻는다 해도  
다 이와 같이 답해야 한다. 


이 관계는 다음과 같다. 
우선 현실에서는 일정한 감각을 얻는다.
그리고 관념을 일으켜 갖는다. 
또 언어인 감각과 관념으로 이들 내용을 가리킨다.
그런 가운데 생활한다. 

이러한 것이  생사현실이다. 

그리고 이러 생사현실에서 
현상적인 올바른 의미나 내용을 세속의 진리[세속제]라고 표현한다. 

그러나 이러한 세속의 현실 모습, 현상적 내용들을 일으키는 
본 바탕이 되는 실재의 내용이 무엇인가가 문제된다. 
즉, 우리가 얻는 감각과 관념, 언어 등이 일어나는 본 바탕으로서 실재의 내용[실상]은 무엇인가. 


○ 본 바탕으로서 실재 

예를 들어  어떤 이가 눈을 떠 바위나 나무, 새를 본다. 
그러나 눈을 감으면 그 바위나 나무, 새의 모습이 보이지 않는다. 
이런 경우 자신이 눈을 감아서 
방금 전에 눈으로 보았던 바위나 나무, 새의 모습이 보이지 않는다.
그렇다고 하여 이제 그 바위나 나무, 새가 아주 없어진 것인가. 

그런데 그 순간 또 자신이 눈을 떠 
다시 바위나 나무, 새의 모습이 보이게 된다.
이런 경우 그 순간에 없던 바위나 나무, 새가 새로 생겨난 것인가. 
이런 의문을 갖게 된다. 

이런 과정을 통해 자신이 본 바위나 나무, 새의 모습은 
자신이 그 모습을 보기 전에 
자신의 주관과 관계없는 실재의 내용이 따로 있다고 추리하게 된다.

그리고 자신이 눈을 떠 어떤 모습을 보는 것은 
그런 실재의 내용을 자신의 실재의 주관이 관계하여 화합을 일으킨 가운데 
자신의 정신 안에 바위나 나무, 새와 같은 모습을 얻어 갖는 것이라고 추리하게 된다. 

이런 가운데 자신과의 관계를 떠나, 
본래 그대로 있다고 할 본 바탕이 무엇인가를 찾게 된다. 

예를 들어 바위나 나무, 새의 모습을 보았다고 하자. 
그런 상황에서 그런 바위나 나무, 새의 모습을 얻게 한 
본 바탕의 내용은 무엇인가. 
이런 의문을 갖게 된다. 

실재내용, 또는 승의제로서의 내용이란, 
바로 이런 의문이 현실에서 얻는 내용들에 대한 
실재의 내용을 찾는 의문이 된다. 
그리고 이 의문이 바로 반야경에서 기본적으로 
추구되는 승의제적인 의문인 것이다. 

그리고 반야경전에서는 이런 입장에서 각 내용의 실재 내용을 살핀다. 
그리고 이렇게 그 실재내용을 찾는 경우를 
제일의제, 또는 승의제[뛰어난 진리]라고 표현한다. 

결국 여기서 보살이 무엇인가 라는 질문에 
뜻없음이 보살의 뜻이라고 답하는 것은 그런 측면에서다. 
즉, 보살의 실재내용에 대해서 승의제적 차원에서의 답이다. 



○ 현실내용으로 감각과 관념, 언어, 

한편, 우리가 관념으로 생각하는 내용이나, 
언어의 내용도 사정이 같다. 

앞에서 감각하는 내용들로서 
바위나 나무, 새의 모습을 가지고 논의했다.

한편 관념이나 언어의 내용들은 다음과 같다. 
우리가 눈을 떠 일정한 색깔을 얻고 나서 
이에 대해 생각하기를 
자신이 눈을 떠 얻는 색깔이나 전체 모습 가운데 
일정한 부분은 바위라 관념을 갖고 
또 일정한 부분은 나무라 관념을 갖고
또 일정한 부분은 새라 관념을 갖는다. 

이런 관념은 눈을 떠 모습을 얻거나 눈을 감아 얻지 못하거나, 
자신의 마음 안에 비교적 일정하게 남는다. 

바위나 나무, 새라는 생각을 일으켜 가졌다면, 
눈을 감고도 그런 생각을 계속해서 가질 수 있다. 

이런 생각에 대해서도 
역시 앞과 같이 어떤 실재내용을 놓고 
그런 관념이나 생각을 얻어가진 것인가라고 의문을 가질 수 있다. 
이것이 관념에 대한 그 실재내용에 대한 의문, 또는 승의제적인 의문이다. 



한편 언어적인 내용도 사정이 같다. 
앞에서 나열한 감각내용과 관념 내용을 어떤 주체가 얻었다고 하자.
그런데 이것을 가리키는 수단이 필요하다. 
또 다른 이에게 그 내용을 표현하는 수단이 필요하다. 
그래서 함께 감각하여 그것을 얻을 수 있는 형태로 
즉, 소리나 글자모양과 같은 일정한 감각내용을 그런 수단으로 사용한다. 

그것이 우리가 사용하는 언어인 것이다. 
이는 감각현실과 그에 대한 관념의 성격을 갖고 있다. 

즉 감각현실로 말이나 글자를 표현한 경우 
이에 대해 그에 대해 말소리나 글자 관념을 다시 얻는다. 

즉 bawi namu sae 이런 식으로 소리 내고 
'바위' '나무' '새' 이런 식으로 글자를 그려서 
자신이 앞에서 얻는 바위나 나무 새의 감각내용이나 관념내용을 가리킨다고 하자.

그러면 이때  bawi namu sae 이런 식으로 낸 소리나 글자, 
그리고 이런 소리나 글자에 대한 관념이 모두 언어적 내용인 것이다. 

이처럼 언어로서의 감각내용과 관념내용은 
자신이 얻은 다른 감각내용과 관념내용을 가리키고 표현하는 데 
사용되는 감각내용과 관념내용이다. 

우리가 현실에서 얻는 이런 내용을 모두 현상적 내용이라고 표현한다면, 
이들은 모두 생겨나고 멸하며 변화한다. 

또 이런 현상 안에서 바위나 나무 새의 의미를 묻는 것이라면, 
이렇게 얻는 현상적인 바위나 나무 새의 감각내용이나 관념내용을
나열해 제시하면 된다. 

그러나 그 질문이 이들을 얻게 한 
실재의 내용이 무엇인가라는 질문인 경우에는 이는 곤란하다. 

실재의 내용은 어떤 주체가 얻을 수 없다. 
모든 주체는 자신의 주관이 관계한 내용만을 그의 마음에 얻기 때문이다. 

그래서 자신의 주관과 관계하지 않고 본래 있는 실재의 내용을 
주관은 얻어낼 수 없다. 

그런 관계로 어떤 것의 실재내용을 찾는 경우에는 
그것은 끝내 어떤 주체가 그 주관안에 그 내용을 직접 얻을 수 없다. 
따라서 무엇이 있다 없다 -이다 - 아니다 -와 같다 -와 다르다.
하나다 여럿이다. 좋다 나쁘다 등등의 이분법적인 분별을 행할 수 없다.
그래서 언어를 떠난 상태가 된다. 
이런 상태를 나타내기 위하여 그 자체로 의미를 갖지 않는 '공'이란 표현을 빌려 나타낸다. 
공하다는 표현은 그 표현이 어떤 얻을 수 있는 성품을 나타내는 것이 아니다. 

실재내용이 이와 같다. 
따라서 보살에 대한 내용도 마찬가지다.

처음 보살이란 언어, 또는 그 언어로 가리킨 
감각내용, 관념내용과 같이 현실에서 얻는 내용들이 있다. 

그리고 이런 내용을 얻게 한 실재내용이 무엇인가를 묻게 된ㄷ.
이 경우 현실의 내용은 생하고 멸하는 현상적 내용이다.
그러나 그 실재내용은 이런 생멸을 세울 수 없다.
따라서 본래 생함이 없다고 표현하게 된다.
그리고 현실 현상 안에서 얻는 어떤 뜻이나 의미가 그에 해당되지 않는다.
따라서 그런 뜻이 없음이라고 표현하게 된다. 


◧◧◧ para-end-return ◧◧◧



문서정보
[pt] FR Q:/G/G/08/개인_불교공부/K0001_T0220[401-500]_대반야경.txt


◈Prajna Citta 2014/04/26/토/04:13

♥ 잡담 ♥불교는 무엇을 파는 곳인가. 
어느 신문기사에서 
한 쇼핑호스트(쇼호스트 showhost => tv 쇼핑 프로 등에서 물건판매 안내를 진행하는 방송 진행인)가 
1분당 1억씩을 팔았다는 내용을 보았다. 
그 쇼호스트가 물건을 한해에 1000 억원 2000억원씩을 팔았다는 것이다. 
물론 물건도 좋아야겠지만, 
그 물건을 안내하고 설명하여 시청자로부터 구매를 하게 이끄는 
진행자의 능력이 각기 다 다르다. 
따라서 누가 쇼호스트인가에 따라 판매량도 달라진다. 
그래서 최고의 실적을 거둔 스타 쇼호스트가 있는 반면 
그렇지 못한 쇼호스트도 있기 마련이다. 
이를 보면서 불교를 이런 경우에 놓고 본다면, 
그리고 불교 공부하는 이가 이것을 남에게 전달하려는 입장을 
이런 쇼호스트라고 본다면, 
과연 어떤 노력을 해야 할 것인가 하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불교가 마치 이를 모르는 이에게 
설명과 안내를 하여 팔아야 할 하나의 상품과 같다고 보자. 
그러면 불교는 어떤 내용이고 어떤 가치와 효용을 갖는 것인가를 
설명하고 안내해야 할까 이런 생각을 해보게 된다. 
생각해보면 
불교를 오래 공부하는 입장에서도 이런 내용이 
명확히 보이지 않는다. 
그러면 불교는 결국 쓸모없는 것인가. 
그렇지는 않다. 
그러나 이런 내용을 설명하기 어렵다. 
그래서 불교를 공부해 남에게 설명하는 입장을 
마치 어떤 상품을 설명하여 판매를 하는 쇼호스트의 입장이라고 하면 
불교는 설명하기 매우 어려운 복잡한 상품으로 여겨진다. 
불교를 공부하고 또 배운 내용을 남에게 설명을 잘 하려면, 
결국 자신부터 이에 대해 명확히 잘 알고 
그 가치와 효용에 대해 설명을 잘 할 수 있어야 한다. 
생각해보니 쉽지 않다. 
더욱이 그냥 판매만 하지 않고 
판매후 애프터 서비스와 
모든 그 뒷 내용을 다 책임지어야 하는 입장이라면, 
이는 좀 더 어렵다. 
그냥 남에게 물건만 많이 팔면 
전부는 아니다. 
여하튼 그런 입장에서 
자신이 공부하는 내용에 대해 
생각을 정리해볼 필요도 있다. 
이것은 과연 무엇이 좋은 것인가.

문서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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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하 ☎잡담☎










◈Prajna Citta 2014/04/26/토/03:59


♥ 잡담 ♥공간활용

이 곳은 임시 공간이다. 
연구는 경전 파일에서 하는데 
경전 파일 안에서는 조금 형식의 구속을 받는다. 

글을 한 번 쓰려면 체계를 갖추고 작업을 해야 한다. 
어떤 때는 체계 갖추는데 시간의 반을 소모하게 된다. 
파일 찾고 형식 맞추고 쓸 곳을 찾아 쓰려고 하다보면 
그렇게 된다. 

여기 임시 공간은 그저 생각난 내용을 적어 놓을 수는 있다.
그러나 결국 체계가 없는 글이 된다. 
그렇게 써 놓고 다시 체계에 맞춰 정리하는 것이 또 일로 남는다. 

이미 LAB님이 그렇게 된 상태다. 
결국 글이 체계적으로 정리가 안 된 상태로 
마냥 정리를 뒤로 미룬다. 
대강 LAB 님의 글은 정리가 되지 않는 상태로 끝날 것같다. 

정리는 글을 쓴 시간만큼 또 시간이 걸린다. 

다시 읽고 수정하고 정리하고 체계에 맞게 분류해야 한다. 
또 또 전체적으로 수정해야 한다. 
글 쓰는 입장에서는 이런 것이 모두 고민이다. 

LAB님이 교육 방송 자재라고 캠코더나 여러 멀티미디어 프로그램을 
제공한다.
그리고 심지어 샘플까지 만들어 보이며 
동영상을 제작해 보라고 권유한다. 

그런데 말은 또 다른 정리가 필요한 부분이다.
말을 하려면 우선 자신이 할 말을 어느 정도
글과 같이 정리를 해 놓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말로 하기 힘들다.

무엇보다도 자신이 배우는 과정에서 정리하는 것과
그것을 남에게 알려주려 노력하는 것은
조금은 성격이 다르다. 

남에게 알려주는 코치가
반드시 그것을 잘 하는 선수가 아니다. 
또 무언가를 가장 잘 하는 선수가
남에게 무언가를 잘 알려주는 코치는 아니다.

이 두 내용이 다 갖추어지는 것이 바람직하다.
그러나 조금은 성격이 다르다. 

VIMALA 님은 교육자다.
그런데 늘 하는 말이 있다.

lab 님은 무언가 잘 아는 것 같은데 
어렵게 말하고 설명을 잘 못한다고 한다. 

반면 자신은 어떤 내용을 한 두번만 듣고
사실 깊게는 잘 모른다고 한다.
그런 상태에서  
그것을 남에게 가르치거나 전달해야 하는 경우, 
상대방으로부터 이해가 잘 되게 잘 가르친다는 평을
자주 받는다고 한다. 


자화자찬인 듯한 VIMALA 님의 말에도 
일리가 있는 듯하다. 

자신이 알기는 아는 것 같은데 
남에게 요령있게 설명하려면 
어려움을 느끼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또 그 반대 경우도 있다. 

남에게 알려주려면 자신도 어느 정도는 
내용을 알고 그에 대해 할 줄 알아야 한다. 
그러나 그것을 설명하는 부분에서는 또
단순히 아는 것과는
좀 다른 노력이나 능력이 또 다시 필요하다.

그래서 이 둘은 좀 차이가 있다. 

물론 이 둘 다 잘 하는 경우도 있다. 
가장 바람직한 경우는 이 경우다. 

남에게 자신이 배워서 알고 있는 내용을 
전해 주고자 할 때 
어디서부터 어떻게 설명을 해야 하는 지 막연해진다. 
그래서 생각해보면 남에게 어떤 내용을 전달하고 설명하는 일은 어렵다. 

테스트삼아서
그런 목적으로 한 번 동영상을 만들어 본다. 
아주 작은 분량인데도 시간이 너무 걸린다. 
지엽적인 것에 설명을 많이 하다보니
시간이 많이 소모된다. 

그러나 그냥 넘어가면
또 부족하다. 
한마디로 어렵다. 

그런데 이 어느 경우에나, 
자신이 말하고자 하는 내용을 
일단 정리하는 훈련이 먼저 필요하다. 

글을 쓰는 것은 이런 정리의 의미도 갖는다. 

한편, 글은 사실 그것만으로 충분한 경우가 있다. 
글로 써 놓으면 필요시 필요한 이가 알아서 찾아 볼 수도 있다. 

여하튼 LAB 님이 제의한 동영상 제작은 
여러가지 사유로 조금 더 시간이 필요하다. 
가장 큰 이유는 무엇보다도 
어떤 내용을 잘 모르기 때문이다. 
그래서 먼저 자신이 확실히 공부를 마쳐야 한다. 

또 하나 있다. 
무언가 말을 하려면 단순히 아는 것으로는 부족하고 
그 내용을 안 보고 외워서 말을 할 정도로 깊이 알아야 한다. 
공부를 매우 열심히 해야 한다. 

또 공부한 내용을 요령있게 전달하기 위해서는 
또 다른 공부를 더 해야 한다. 

VIMALA 님의 전공인 교육학 같은 공부가 
필요하다. 
그렇다고 교육학까지 다 공부할 수는 없다.
그러나 적어도 노력은 해야 한다. 
그래서 조금 더 노력이 필요하다. 

LAB님의 글을 보니, 산만하고 체계가 안 잡힌 글도 
일단 올려 놓는다. 
그것은 그 자체로도 의미가 있는 듯 하다. 

디스크에만 보관하는 것보다는 
나은 측면도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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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rajna Citta 2014/02/23/일/12:52


♥ 잡담 ♥경전 파일에 대한 인터넷 파일 관리 

각 경전마다 원본 텍스트 파일을 준비하고 여기에서 작업한다. 
그런데 각 경전마다 별도 목록 파일을 만들 것인가가 문제된다. 
경전이 많기 때문에 이렇게 목록파일을 별도로 만들어야 할 듯하다.
그러나 일단은 기본 목록 파일에서 통합관리하기로 하였다. 

기본 목록 파일에서 관리하다가 
너무 분량이 많아질 때 별도 페이지로 분리시키는 방안이 나을 듯 하다. 

한편, 원본 텍스트 파일은 하나의 파일이다.
그런데 각 경전의 부분부분을 인터넷에서 올릴 때는 
너무 분량이 많다.
때문에 분할할 필요가 있다. 

이렇게 인터넷에서 나누어 올릴 때 
이들을 원본파일로 관리할 것인가. 
출력 파일로 관리할 것인가가 문제된다. 

최소한 인터넷에도 하나의 원본파일은 필요하다.
그런 생각에서 원본 파일로 관리해나가고자 한다. 

추후 이들 원본 파일을 기초로 
또 새로운 내용을 출력할 경우가 있다.
그런 경우는 그것을 출력 파일[op]로 표시해 별도 관리하기로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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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ab value 2014/01/28/화/15:09

♥ 잡담 ♥불교공부시 경전파일의 정리와 연구문제 

불교 공부를 시작해보는 입장에서, 
하나의 경전을 놓고 여러 판본의 파일이 필요하다. 

0 우선 원본 파일을 깨끗하게 잘 보관해둬야 한다. 
그 다음은 한문본과 한글본을 놓고 
1 한글본을 일단 읽어가며 이해가 쉽게 단락을 끊어가며 단순 정리한 파일이 필요하다. 
2 그 다음은 이 한글본의 각 단락을 이해하기 쉽게 끊어 제목 표시를 해주는 파일이 필요하다. 
3 그 다음은 표현이 이해가 안 되는 부분들을 교정해주는 파일이 필요하다. 
4 더 나아가 각 부분과 원문 한본본과 대조하면서 번역을 좀 더 자세히 살피는 파일이 필요하다. 
5 그 다음은 이를 바탕으로 자신의 견해나 사전 참조 내용들을 적고 + 자신의 논의를 전개해나가는 파일이 필요하다. 


이것을 하나의 파일로 묶어 관리할 방안이 없는가를 생각하게 된다. 
너무 여러 판본이 있으면 보거나 관리하기가 쉽지 않다. 

물론 하나하나 체계적으로 작업을 하면서 공부를 한다면 
순서대로 백업해가면서 1-2-3-4-5 이런 식으로 완성해나가면 될 것이다. 


그러나 사정이 그렇지 않다. 
단순 정리과정에서도 자신의 생각이 있으면 이것을 기재하고 
또 그런 과정에서도 일부 원문 참조가 필요하면 원본도 살펴야 한다. 

그렇다고 처음부터 이를 다 함께 뒤 섞어 전개해나가면, 어렵다. 
원래 원문만 보려는 경우 어렵다.
또는 간결하게 각 단락별로 제목이 붙여진 것만 보려는 경우도 어렵다. 

만일 5의 파일에 이 모든 것을 다 진행해나갔다면 
거꾸로 이것을 다 분해해주어야 한다. 

어느 방향도 복잡하다. 
일단 5분간 고민을 해보기로 한다. 

나누어서 작업을 하는 것은 좋다.
그런 가운데 중간 중간에 자신의 생각이나 견해 사전 참조 내용들을 적어 놓기 쉬어야 한다.
그리고 문장을 쉽게 바꿀 수 있어야 한다. 
또 그러면서도 쉽게 각 형태로 볼 수 있어야 한다.
이렇게 할 수 있는 방안을 찾아 보기로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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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의 댓글 

◈Lab value 2014/01/29/수/00:26


5분만 생각한다고 했는데 오래 생각했다. 

결국 연구과정에서 그렇게 여러 형태를 작업을 
매번 순서적으로 하는 것이 아니다. 


즉 1-2-3-4-5 를 별도 파일로 만들려면, 
이 순서로 앞의 파일이 다 완료되어야 다음 파일에서 작업할 수가 있다. 

1의 작업이 되지 않았는데 2 파일을 만들고
2의 작업을 진행할 수가 없는 것이다. 


그런데, 연구 과정에서는 위 내용이 섞이게 된다. 


즉 처음부터 5의 작업 즉, 자신의 생각을 적어 놓기를 원할 수도 있고 
그러다가 4의 원문 대조작업을 할 수도 있고 
이렇게 뒤섞인다. 

성격상 이것을 1-2-3-4 가 다 완료된 다음에
그 다음부터 5를 시작할 수가 없다. 

그런데 그렇게 뒤섞으면 
역시 각 형태로 파일을 정리하기가 힘들다. 



● 결국 다음의 방안을 생각하게 된다. 

1 부터 2 -3 -4- 5 를 한 파일에서 그대로 진행한다. 
즉 생각나는대로 그 때 그 때 원하는 작업을 진행한다. 

다만 각 연구나 정리작업의 성격에 따라 
그 부분을 
특수기호로 구분한다. 

현재 

PRAJNA 님이 파일 안에서 

논의 부분을 

$$ [시작부분] /$$ [ 끝부분]을 

기호로 사용한다. 



그런데 다음과 같은 기호를 제안해본다. 

우선 $ 기호가 문장에서도 사용될 수 있고 
또 보기에 그다지 좋지 않다.
따라서 다음 기호를 사용해본다. 


▶1           ◀1              번역 수정, 교정, 

▶2           ◀2              개인적 논의 

▶3           ◀3              주석, 사전 내용 



작업 내용을 다음과 같이 구분된다. 


0 원문텍스트  

1 한글본을 일단 읽어가며 이해가 쉽게 단락을 끊어가며 단순 정리한 파일이 필요하다. 

2 그 다음은 이 한글본의 각 단락을 이해하기 쉽게 끊어 제목 표시를 해주는 파일이 필요하다. 

3 그 다음은 표현이 이해가 안 되는 부분들을 교정해주는 파일이 필요하다.  

4 더 나아가 각 부분과 원문 한본본과 대조하면서 번역을 좀 더 자세히 살피는 파일이 필요하다. 

5 그 다음은 이를 바탕으로 자신의 견해나 사전 참조 내용들을 적고 + 자신의 논의를 전개해나가는 파일이다. 



▶1           ◀1              번역 수정, 교정, 

▶2           ◀2              개인적 논의 

▶3           ◀3              주석, 사전 내용 


기타 위 숫자는 숫자나 영문자 등으로 추가될 수 있다. 



▶0           ◀0             - 한문원문 첨가의 시작부분과 끝부분을 표시하는 기호



이런 식으로 기호를 마련해서 

한 파일에서 작업을 해나간다. 

그리고 나중에 처음과 끝을
▶ ◀ 기호로 모두 찾아내서 편집을 해나가면 

원래 원문이 나타날 것이다. 



또는 ▶1 기호 부분은 남기고 

▶+ 나머지 번호가 붙은 부분은 삭제하는 등으로 

자유롭게 편집할 수 있을 것이다. 


▶ 기호가 문서안에서 다른 의미로 쓰이는 경우가 적다. 

따라서 이런 목적으로 ▶ 기호를 사용할 수 있다.


다만 이렇게 처음과 끝부분을 표시할 때 

이 부분만 찾아 자동으로 삭제하거나 

교정하는 방안이 필요하다. 


현재 LITTLE 님이 

다음의 방안을 우선 제시했다. 

조금 번잡하다. 


1 문서 처음 부분에 커서를 놓고 첫부분 ▶ 시작 부분을 찾는다. 

1 그 부분에서 문서 첫부분까지를 잘라내어 문서 맨끝에 붙여 놓는다. 

1 다시 문서 처음으로 가서 끝나는 부분의 기호 ◀ 부분을 찾는다. 

1 여기서 첫 부분까지 블록 설정한다. 

1 그러면 이 부분이 바로 ▶ [시작부분] ◀[끝부분] 사이의 내용이다. 

1 문서 안에 이런 부분이 많으면 이 작업을 계속 순환해나가면 된다. 

 


이렇게 제시했다. 



그러나 조금 원시적인 방안으로 보인다. 

정 다른 방법이 없으면 이렇게 

편집작업을 하면 되기는 된다. 


상당히 번잡해 보인다. 

정규식이나 조금 더 깔끔한 방법이 있었으면 한다. 


여하튼 연구 과정의 특성상 

여러가지 작업이 산발적으로 또는 동시적으로 

또는 이리저리 순서가 뒤섞여 진행되는 것이 일반적이다. 


결국 하나의 파일 안에서 이 모든 작업을 동시에 다 진행하기로 한다. 

다만 각각의 필요에 따라서 

이 하나의 파일에서 여러 형태를 출력해 낼 편집방안이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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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의 댓글 

◈Mun Tokyun 2014/01/29/수/19:15


● 부분 블럭 선택하기 

lab님의 이야기를 듣고 프로그램 제작자님에게 직접 문의를 했더니 
다음과 같은 답변이 왔습니다. 
역시 전문가와 비전문가의 차이를 바로 느낄 수 있습니다. 

[답변내용]
편집'->'선택'->'선택시작/종료' 명령을 사용하시면 될 것 같은데요,

이렇게 간단합니다.
=> 결국 위 방법으로 하나의 파일 안에 모든 작업 내용을 
넣어도 그렇게 찾아서 자동으로 편집해나갈 방안이 
쉽게 열렸다는 의미가 됩니다. 

즉 다음과 같이 쉽게 블록 선택하고 이후 편집을 자동으로 
해나갈 수 있게 되었습니다. 

◀1


이 방안도 그럴 듯 합니다.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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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의 댓글 

◈Prince evilstupidmiserable Little 2014/02/23/일/12:54


♥ 잡담 ♥경전 텍스트 파일의 정리 문제 

경전 텍스트 파일에서 
자신의 견해 등을 적고 파일을 정리하는 데 필요한 
스크립트를 만들어 제공합니다. 

이는 기존 문서작업용 스크립트 
에서 
USERset\MYoptiontextedit.txt
안에 넣어서 사용하면 됩니다. 

/ 참고 http://story007.tistory.com/89

간단히 요약하면 
L,[숫자]는 각 기호를 만들어 내고 
LL,[숫자]는 그 부분 다음에 있는 해당 기호를 찾아내 블록 선택해서 편집에 이용하게 하며 
LLL,[숫자]는 그 부분 이전에 있는 해당 기호를 찾아내 블록 선택해서 편집에 이용하게 합니다. 

아래는 스크립트 내역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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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un tarika 2014/01/16/목/19:07

♥ 잡담 ♥글 정리의 복잡성 

글을 정리하려고 보니, 
체계가 너무 복잡하다. 

일단, 대장경 파일에 자신이 작업을 한 것이 있다. 
대장경 내용을 요약 정리한 것도 있다. 
공부과정에서 사전 파일을 단순히 복사 정리해둔 것도 있다. 
자신의 생각이나 주장을 정리해 놓은 것도 있다. 

한편, 파일형식도 다 제 각각이다. 
파일이 보관된 폴더도 다 제 각각이다. 
지금 하나하나 꺼내 정리해보려니 엄두가 나지 않는다. 

앞으로 체계적으로 정리해나가기로 한다. 
그리고 일단 과거 파일은 시간날 때 천천히 정리하기로 하고
덮어 두기로 한다. 

앞으로 어떻게 해나갈 것인가가 문제다. 

대장경-요약-정리-관련사전 검색내용 등 
대장경 파일과 관련된 것은 대장경 파일 폴더에서 관리해나기로 한다. 

대장경 파일과 직접 관련성이 없는 

별도의 자신의 견해, 주장 등은 폴더를 분리시킨다. 
일단 오늘은 이 정도로만 생각하기로 한다. 

과거 파일을 보니, 오히려 번뇌가 양산된다. 


참고로 prajna 님은 
prajna 님이 대승불교를 잘 알기에 그런 바탕에서 근본불교를 연구한다. 

본인은 대승불교를 잘 모르기에 연구한다. 
그리고 대부분 정리해 놓은 과거 파일이 근본 불교관련 기초 내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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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의 댓글 

◈Prajna Citta 2014/01/16/목/20:15

♥ 잡담 ♥경전내용의 압축 암기 

경전 내용이 많다. 

따라서 이것을 정리해 올리기 힘들다. 
또는 경전 파일을 올려 놓고 
작업하는 것은 어려움이 많다. 

경전의 내용이 많기에 
이것을 외우고 
또 필요할 때 꺼내 쓰는 것에 
어려움을 많이 느낀다. 
그렇기 때문에 다라니가 강조된다. 

아라바자나. 
이 6 글자에 온갖 경전의 내용을 
다 넣을 수 있다. 
이론상 가능하다고 하니, 
이 방법을 이용해야 할 듯하다. 


글 위에 제목을 붙이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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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rajna Citta 2014/01/09/목/13:41

♥ 잡담 ♥새 페이지의 개설과 이용문제 
새로운 페이지를 만들어 준데 대해 감사드린다.


불교 논의를 근본불교부분과 대승불교부분을 나누어 
대승불교부분을 puntarika 님이 맡고 
근본불교부분을 맡고 있다.

그런데 가치 회계의 연구에 필요하다면서  
lab님이 유가사지론을 연구 중이다. 
 
한편 tok 님은 오래전부터
중론송과 논리학의 연구를 해오고 있다. 

그런데 대부분
이들 연구나 공부 과정을 
일일히 웹 페이지에 정리해 올리는데 
여러 장애가 있다. 


우선 분량이 문제다. 
불교 경전과 논서를 생각해보면 
자신이 연구하고 섭취할 수 있는 분량은 
한 컵의 물과 같다. 

그런데 공부할 경전과 논서의 분량은 
마치 바다와 같다. 


반야경전은 
짧게 보면 반야심경의 내용이다. 
조금 길게 보면 금강경의 내용이다. 
조금 더 길게 보면 마하반야바라밀경이다. 
조금 더 길게 보면, 대반야바라밀다경이다. 

그런데 
짧은 경전을 보면 
여기에 무언가 보충 설명을 덧붙여야 할 것 같다. 

긴 경전을 보면 
이것을 어떻게든 압축하고 정리해 
요점만 제시하고픈 생각이 든다. 


논서를 놓고 보아도 사정이 비슷하다. 

경전 파일을 오늘날은
대부분 쉽게 구할 수 있다. 


그리고 이것을 제공하는 원래 사이트가 있다.
그런데 
본 페이지에 다시 올려야 할 
필요성이 있는가는 의문이다. 

본 페이지에 올린다면 
무언가 공부를 하고 연구를 한 내용을 올려야 할 듯하다.


그러나 읽고 내용을 이해하는 것이 급급하다. 
그래서 다시 여기에 무엇을 덧붙이거나 빼고 
정리해서 올릴 엄두를 내지 못한다. 

우선 경전이나 논서의 내용을 놓고 
한 페이지 한 페이지 읽고 이해하고 
연구하는 자체에 어려움이 많다. 

개별적으로 디스크에서 작업을 하지만, 
이는 경전 파일을 체계로 삼아 
여기에 덧붙인다. 

때문에 따로 이렇게 부분 부분 글을 올려야 하는지는 의문이다. 
또 일부 자료는 저작권법과 관련이 되는 문제도 있다. 

개인적인 이용은 문제없지만, 
그러나 웹사이트에 올리는 것은 
문제되는지도 모른다.
때문에 
글을 올리는 것을 주저하게 되는 경우도 많다. 


여하튼 연구과정에서
아직 정리되지 않고 
어떤 체계에 넣기 힘든 글들을 
올릴 공간이 마련되었다.

이에 감사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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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ab value 2014/01/09/목/01:35

♥ 잡담 ♥ 페이지 개설 축하 

불교공부_단상 페이지 개설 축하! 
개설 축하의 의미로 

Om Mani Padme Hum 미니버전을 제작해 올린다. 



Om Mani Padme Hum01.zi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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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8gfl--불교공부_단상_2014_0101.txt

θ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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