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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진리와실천
○현실에서 상을 갖지 않아야 하는 사정의 비유 본문
어떤 SNS 사이트에서
핸폰으로 목성 위성을 찍을 수 있다는 말을 듣고
어제는 카메라를 들고 화성인지 목성인지
여하튼 노란 빛이 나는 별이 하늘에 보여서 그것을 대강 찍어 보았다.
날씨가 더워 옥상에 올라가 보니 남동쪽 하늘에 노란 전구가 하나 떠 있는 것 같다.
그런데 안 움직인다. 기구일까.
처음에 이렇게 생각하다가 너무 안 움직여서 한번 찍어 보았다.
찍어 놓고 보니 이리저리 움직이기도 하고 합쳐지기도 하고 하트 모양 비슷하게도 되고
그래서 우주선이 아닐까 이런 생각도 해보게 된다.
올려진 글에서 노란 빛이 나면 화성일 수도 있다고 했는데...
이것은 달을 찍은 것
위 사진은 화성으로 의심되는 별 사진 가운데 그 중 잘 나온 사진이다.
일단 잘 찍어보기 위해 삼각대를 준비하고
30분 정도 지나 다시 올라가 찍어 보았는데 위와 별로 다르지 않다.
다음이다.
평소 삼각대가 무거워서 잘 사용안하는데
열심히 들고가 다시 찍어보았는데 별 차이는 없다.
조금 더 크게 찍어보았다.
여러장 찍어보았지만 더 좋은 화질은 유감스럽지만 없다.
달은 약 30 분 사이에 시야에서 사라져버려서 찍지 못했다.
그런데
오늘은 이와 관련해
화성과 같은 곳에 우주선을 보내는 나사(못?) 기지를 연상해 떠올려 보다가
책상위에 마침 부러진 나사가 하나 있어서
이것을 또 사진찍어 보았다.
요즘은 기술이 좋아져서 몇 만원만 주면 미니 마이크로 사진을 찍는
기기를 저렴하게 인터넷등으로 구할 수 있다.
그러나 막상 사용해보니 초점 맞추고 사진찍기가 상당히 힘들다.
조금만 흔들려도 초점이 엉망히 되기 때문이다.
그런 사정으로 정작 마이크로 기기를 사고 나서
평소에 별로 사용할 기회가 없어서 처박아 두고 있던 상태인데
오늘 '나사'가 떠올라 한번 또 찍어 보게 된다.
조금 배율을 높이면 앞 사진보다 조금 더 확대해 찍을 수 있는데
그런데 정작 최고로 확대해 찍고 나면
찍고 나서도 정작 무엇을 찍었는지 잘 모르게 되기에
위 사진 정도가 그나마 낫다고 보게 된다.
위 사진은 중간배율로 촬영한 나사다.
처음에 일반 사진기로 찍기 힘든
이 마이크로 기기를 구했었는데
초점을 맞추기가 힘들어 현실적으로 사용하기 힘들고
야외에 나가 움직이는 곤충 이런 사진을 찍는데는
바로 바로 초점을 맞춰
셔터만 누르면 찍을 수 있는 일반 카메라가 낫다.
요즘 기술이 많이 좋아져서
일반 카메라로 따로 망원렌즈를 부착하지 않아도
바로 줌만 확대해 대충이지만 달도 찍고
화성도 찍을 수 있어 정말 좋아졌다.
그런 가운데 초점이 엉망인 사진도 찍어 보고
이리저리 흔들린 사진도 찍어 보고
심지어 셧터를 누르다 흔들려서 그런지 별이 두개인 영상도 찍고 그러다 보면
무엇이 이것들의 진짜 모습인가. 이런 생각을 하게 된다.
별을 볼 때 처음에 안경을 쓰고 볼 때는 그나마 또렷한데
시력이 나빠 안경을 벗고 별을 보면
오히려 안경으로 또렷하게 보던 상황보다 더 환상적으로 몽환적으로 별빛이나 거리 불빛이
다 함께 부옇게 보이기도 하고
그리고 또 어떤 경우는 별 빛도 주변으로 날카롭게 퍼지는 -☆- 이런 형태로도 보이다가,
막상 카메라로 초점을 맞춰 찍어보면 그냥 동그란 모습으로 찍혀 보이기도 한다.
그런데 이런 현상은 알고보면 일반 현실에서도 마찬가지다.
거리에 서서 멀리 100M 쯤 떨어져 있는 영희를 본다고 할 때
영희의 모습이나 크기는 자신의 손가락보다도 작고
작은 콩알보다도 작게 보인다.
그리고 그 영희가 자신을 멀리서 보고
좋아서거나 또는 빚을 받아내려고 수밀도 같은 가슴에 이슬이 맺도록 달려온다고 하면
달려오는 과정에서 매순간 그 크기나 형태가 달라진다는 것을 보게 된다.
그래서 멀리서 상대를 보고
그 상태에서 상대가 콩알만하다고 우습게 보고
까불지 말라고 크게 소리쳤는데
상대가 이말을 듣고 화가 나서 달려와 막상 자신 앞에 서게 되면
킹콩보다 더 크다고 느끼면서 당황하게 되기 쉽다.
그러면 다시 급히 사과를 해야 한다.
전..콩알보다 작은 이에게 말한 건데
왜 킹콩보다 큰 분이 엉뚱하게 오신 건가용? (^^)
현실에서 이런 현상은 일반적으로 원근법 문제로 이해하게 되는 내용이기도 한데
여하튼 100m 멀리 떨어진 곳에서 영희가 다가오는 매 순간 순간마다
그 크기나 모습 형태가 달라지는 그런 내용을
α,β,γ,δ,ε,ζ,η,θ,ι,κ,λ,μ,ν,ξ 라는 글자 형태로 표현해본다면
이처럼 매 순간 그 크기나 형태가 다른
이런 여러 모습들 가운데
과연 어떤 것이 진짜 영희의 모습인가.
또는 진짜는 아니더라도 이 가운데 과연 어떤 것이
영희의 대표적이고 표준적인 모습인가
하는 어려운 문제가
참 거짓을 엄격하게 문제삼는 논리학이나
한 주체의 인식과정을 논의하는
인식론 분야에서 제출되게 된다.
그리고 단순히 앞과 같은 문제가 아니고
앞 내용을 어떤 이가 자동차처럼 빨리 움직이는 상태에서 보아서
물체가 흘러가는 듯처럼 보게 되는 경우라거나
또는 날씨가 어둡거나 자신의 시력이 안 좋거나 눈에 병이 생겨
무언가를 보고 그것은 사람이라고 생각했는데
정작 가까이 다가가서 보고 만져보니
그것은 착각이었고 알고보니 나무였다.
이런 경우까지 포함시켜 논의하게 되면
위 문제는 한층 더 해결하기 복잡한 문제가 된다.
그래서 현실에서 어떤 이가 무언가를 볼 때
과연 그 진짜 정체나 모습은 무엇인가의 문제가
일반 인식론이나 논리학 등에서
대단히 해결하기 힘들면서
참 거짓 판단의 가장 기본적인 문제로 제시되게 되는 것이다.
입장에 따라서는
눈으로 직접 보고 얻는 것은
어떤 판단을 거치지 않고 그 자체로 즉자적으로 옳다고 해야 한다.
이런 입장도 제시되기도 하는데
여하튼 참과 거짓을 엄격하게 문제삼는 논리학이나 인식론에서
앞 내용들 가운데 무엇을 옳은 내용이라고 하고
또 무엇은 그렇지 않은 잘못된 내용이라고 할 것인가.
그리고 그 근거는 무엇인가
이런 문제와 관련해 대단히 복잡한 논의가 전개 된다.
그런데 가장 기본적으로
논리나 인식론에서 이와 같은 문제가 엄격하게 확립되지 않으면
그 이후 현실에서 얻는 내용에 대한
참거짓 판단들이 모두 다 함께 곤란하게 되는 것도 현실이다.
온갖 학문적 내용이 쌓여질 토대도
이런 기본적인 내용이 확립이 되야 비로소 마련이 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처음 한 정지 단면에서 얻는 하나의 모습을 놓고
그것이 과연 무엇을 대상으로 어떤 기기를 의존해서
어떤 감각기관으로 어떻게 얻은 어떤 내용이기에
그 내용이 그 대상과 관련해 옳다고 할 것인가가
알고보면 대단히 중요하고 심각한 문제로 논의가 되는 사정이 있는 것이다.
그런데 현실에서 각 주체는
어떤 과정으로던 그 결과물이라고 할 감각현실을 마음에 얻게 되는데
단지 그런 결과를 마음에 얻었다는 사실만 확인할 수 있고
이 상황에서 정작 그 주체가
과연 무엇을 대상으로 그런 내용을 얻었는가의 문제와 관련해서는
그 대상 자체를 직접 얻어낼 수는 없기 때문에
그 대상과 관련해 그런 내용이 옳은가 그른가의 문제는
확정할 수 없는 가운데 공회전 하는 상태로 남게 된다.
그리고 이후 논의들은
그렇게 얻어진 결과물인 감각현실을 단순히 토대로 놓고
이후 쌓여지게 되는 사정인 것이다.
그래서 처음에 다양하게 이런 상태 저런 상태에서
눈으로 그냥 본 내용이거나
또는 이런 안경 저런 안경을 바꿔 써가면서 본 내용이거나
이런 사진기 저런 사진기가 찍어낸 화상을 보게 되는 경우들에서
정작 이 가운데 과연 무엇이 옳은 내용인가
또는 여러 모습 가운데 어떤 모습이
그것의 가장 표준적이고 대표적인 모습인가의 문제는
그것을 판단할 근거를 얻지 못하기에 미궁으로 빠지는 것이다.
그리고 여하튼 이들 내용은 그 과정이 어떠하던
하나같이 마음에서 얻어내게 된 마음안 내용이고
따라서 이들은 실재의 지위에 있는 내용들이 아니라고 하게 된다.
즉, 이들 내용은 자신이나 관찰자와 전혀 관계없이
외부에 객관적으로 독립해 실재하는 내용은 아닌 것이다.
다만 현실의 실용적인 차원에서는
위와 같은 엄격한 참거짓을 문제삼는 경우와는 달리
현실에서 한 주체가 매 상황마다
어떤 형태의 모습을 얻어야
생활과정에서 덜 불편하고 편하게 되는가 이런 측면에서
눈에 병이 생겨 모습을 잘 보지 못하면 치료도 하는 한편
평소 시력이 나쁘면 어떤 안경을 착용해 생활하는 것이 나은가
이런 측면의 문제를 주로 논의하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시와 예술 감상의 차원에서
그냥 사진을 찍고 이렇게 처리도 해보고
별 문제없이 편하고 좋은데
그러나 이 가운데 과연 어떤 것이 진짜이고
어떤 내용이 옳고 그 근거는 무엇인가.
이런 형태로 이들 내용을 놓고 시시비비를 가리는 상황이 되면
대단히 복잡한 논의가 이어지게 되고
이로 인해 골치가 아파지게 되는 문제이기도 한 것이다.
쓰다보니 글이 길어졌는데
여하튼 요즘은 기술이 좋아져서
그냥 버턴만 누르면과거에는 상상하기 힘든 영상들을
바로 바로 얻어낼 수 있는 시대가 되었다는 것은 참 다행이라고 본다.
그런 가운데 조금 공상을 더 하다보면
나중에는 들고 다니는 핸폰으로
언제든지 원하면 현미경 촬영도 하고
때로는 천체 망원경 촬영도 하고
이런 때가 분명 곧 오리라고 보고
또 기대해보게 된다.
* 참고로
핸드폰으로 목성의 위성이나 토성을 촬영한다는 것은
다시 알아보니 다음과 같은 상태에서 핸드폰으로 촬영한다는 것을
의미함을 알게 되었다.
참고사진 - 아래는 사정 설명과 인용목적으로 해당 SNS 에서 공유기능을 통해 퍼온 것임. `
- 핸폰으로 촬영한 달 사진 -
- 핸폰으로 촬영한 토성 등의 사진 -
- 자작한 반사망원경에 핸드폰을 부착해 촬영한다고 함 - ( 초상권과 관련해 임의로 일부 자름 )
여하튼 작은 물체던 큰 물체던 정지한 물체던 이동중인 물체던
이 모든 것이
지금 다루는 상과 관련된 문제이므로
이와 같이 살피고
이후에는 현실에서 스스로 자신이라고 보게 되는
부분에 대해 일으키는 아상의 문제를
좀 더 살펴나가기로 한다.
요즘 날씨가 더워 밤에 옥상에 나가
담배를 피는 가운데 별 사진을 많이 찍는데
오늘은 삼각대를 가지고 조금 더 잘 찍어 보았다.
밤 10 시 30 분 경
북쪽을 시계 12 시로 놓고 남쪽을 6 시로 본다면
대강 7 ~ 8 시 방향에 달이 떠 있고
옆에 정체를 모를 별이 하나 가까이 보인다.
그리고
4 시 방향 남동동(?)쪽 방향에는 또
어제 찍었던 노란 별 ( 화성으로 추정 )이 보인다.
그런데 찍기는 찍었는데 어제 찍은 것과 비교해서
별로 좋아진 것 같지는 않다.
왜 갑자기 별에 관심을 갖게 되었는가는
밴드에서 다른 분들의 글을 보다 보니 그런 측면도 있는데
그런데 더워서 자꾸 옥상 밖에 나가 담배를 피우게 되다 보니
그렇게 되는 것 같다.
오늘 더워서 쉬는 동안
SNS 에서 다음과 같이 더위 때문에 힘들다는
노래를 들었다.
더워서 힘들다고 하는데
표정을 보다 보면 보는 이가 왠지 상큼한 기운을 느끼게 한다.
아름다움이 알고보면 세상의 문제의 원인인 경우가 많다.
마음을 약간 홀리게 해서 판단을 그르치게 하는 것이다.
덥고 찐득해서 힘들다고 하소연하는데
왜 보는 이가 상큼해지는가.
사실 이 동영상에 올려진 인터뷰한 여인이 지금
모 방송국 아나운서가 되어서 활동한다는 후일담을 듣게 된다.
그리고 이런 인터뷰를 하고 나서 위 형태로 편집된 노래가
몇년전 하루에 백만번씩 조회수를 기록했다고도 한다.
날씨가 더워서 별 사진을 찍고
정작 각 별의 이름을 모른 가운데
SNS 에 사진과 글을 올렸는데
회원분 한 분이 찍은 별이 목성이라면서
스카이맵과 같은 별자리앱을 깔아서 확인하면 된다고 알려준다.
그런데 마침 노래를 듣다보니
별이 쏟아지는 밤에 별이름 찾아내는 문제가
해결되었다는 메세지를 들려준다.
그런데 여하튼 별을 보고 별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수행자의 수행과는 정 반대이기도 하다.
석가모니 부처님께서 별을 보고 깨달음을 얻었다고 하는데
다음과 같은 게송을 남긴 것으로 전해진다.
별을 보고 깨닫게 되었지만
깨달은 뒤에는 별이 아니네.
사물을 뒤쫓지 않지만
무정(無情)은 아니네.
因星見悟 悟罷非星
인성견오 오파비성
不逐於物 不是無情
불축어물 불시무정
출전: 백운화상초록_불조직지심체요절_Hb06_637
별이라고 보는 내용을 놓고
별이라는 상을 취하지 않는 문제
이 문제를 이미 앞 조각글에서 자세히 살폈다.
참고 http://buddhism007.tistory.com/5040#1866
이제 조금 쉰 다음에는
현실에서 자신이라고 보는 부분에는 자신이란 내용은
얻어지지 않는다는 사정을 잘 이해하여 관하고
현실에서 아상을 갖지 않고
수행에 임하는 방안을 살피고자 한다.
그런데 이처럼 현실에서 일반적으로
각 부분에 대해 그것이 무엇이라고 생각하면서
그런 부분을 취하여 생활해나가는 것이
일반인데
만일 그런 상을 취하지 않고 현실에 임한다면
어떻게 생활하고 수행할 수 있는가가
당연히 의문이 일어날 수 있다.
그래서 이런 문제를 놓고
이어 살피고자 한다.
관련
■■■
○현실에서 상을 갖지 않아야 하는 사정의 비유
http://buddhism007.tistory.com/5040#001
sfed--불설묘색왕인연경_K0496_T0163.txt ☞○현실에서 상을 갖지 않아야 하는 사정의 비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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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실에서 상을 갖지 않아야 하는 사정의 비유
○현실에서 상을 갖지 않아야 하는 사정의 비유
상을 갖지 않아야 한다는 것은
현실에서 감각현실을 어떤 주체가 얻을 때
일정한 부분에 대해 무엇무엇이라고 관념분별을 일으킨 다음
그런 관념분별을 바탕으로
그 감각현실 부분을 그렇게 취하고
붙잡고 머물면 곤란하다. 이런 내용이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 비록
그런 감각현실이 재료가 되기는 하지만,
그처럼 상을 취하고 머무는 그 작용은
관념분별 영역에서 그런 망집을 일으켜 그렇게 임한다는 것까지
이전에 살폈다.
그런데 상을 갖지 않아야 하는 사정을
하나의 감각현실과 다른 감각현실과의 관계를 놓고
비유로 이해해보기로 하자.
예를 들어 현실에서
사과를 붙잡고
사과를 두드리며 소리도 듣고
입으로 맛도 보고
손으로 사과 촉감도 느끼게 된다.
그런데 이 상황에서
자신이 사과를 손으로 두드리면서
어떤 소리를 듣는다면
이 소리가 어떤 과정으로 듣게 된다고 여기는가를
살펴보자.
앞에 제시한 것과 같이
현실에서 이해하는 방식이 엉터리라는 사정은
이미 이전 글들에서 살폈다.
시각정보가 청각정보나 촉각정보 등을 일으키지는 않기 때문이다.
그런데 문제는 현실에서 대부분
자신이 사과를 만지면서 소리를 들을 때
그 소리는 자신이 바라보는 그 사과모습에서 얻는다고 이해하는 것이다.
그러니까
자신이 본 사과의 모습 => 소리를 얻게 한 그 대상
이렇게 이해한다는 의미다.
그런데 이 경우 자신이 눈으로 본 사과 모습은 정작 소리가 아닌 것이다.
이 비유에서 말하고자 하는 내용은 바로 위 부분이다.
눈으로 본 사과모습을 손으로 두드릴 때 이로 인해 소리를 듣는데
정작 눈으로 보는 사과모습에서는 소리를 찾을 수 없다
이 내용이다.
이것을 비유로 사용하여
감각현실과 관념분별의 관계의 의미를 이해해보자는 의미다.
알고보면 처음부터 위와 같이 관계를 이해하는 것은 잘못이기는 한데
그러나 현실에서 매번 눈을 떠서 자신이 사과 모습을 보는 가운데
그 사과에 손을 갖다 대어 두드리면 소리를 듣지 않는가.
그러니 사과 모습에 손을 대어서 소리를 얻는다.
이렇게 관계를 이해하는데 이해한다.
그런데 그렇게 소리를 얻는다고 할 때
정작 그 소리는 눈으로 보는 사과 모습에서 찾아지지 않는다.
비유로 사용하고자 하는 내용은 이 부분이다.
앞에서
사과 모습을 놓고 손으로 두드리자 소리를 얻었는데
정작 그 사과 모습에서 소리를 찾을 수 없다
이 내용은
사과 모습과 같은 부분을 감각현실로 얻고
그 부분에 대해 자신이 그 부분은 사과라고 여기고 분별을 하지만,
정작 그 부분에서는 사과를 얻을 수 없다.
이 내용을 이해시키려고 든 비유의 하나다.
자신이 얻은 감각현실 --> 그 일정 부분을 놓고 일으킨 관념분별
자신이 눈으로 본 감각현실 ---> 자신이 귀로 얻은 감각현실
이 관계가 완전히 대등한 관계로 대칭적으로 놓여 있는 것은 아닌데
이들 각각의 사정이 비유로 사용할만하다고 보게 되는 것이다.
상을 갖지 않아야 한다는 것은
현실에서 감각현실을 어떤 주체가 얻을 때
일정한 부분에 대해 무엇무엇이라고 관념분별을 일으킨 다음
그런 관념분별을 바탕으로
그 감각현실 부분을 그렇게 취하고
붙잡고 머물면 곤란하다. 이런 내용이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 비록
그런 감각현실이 재료가 되기는 하지만,
그처럼 상을 취하고 머무는 그 작용은
관념분별 영역에서 그런 망집을 일으켜 그렇게 임한다는 것까지
이전에 살폈다.
이제 앞 내용을 또 다른 비유로
모니터 비유를 놓고 설명해보기로 한다.
모니터 상황을 생각해보자.
모니터에서
모니터 화소가
좌측에 있는 화소에서 노란불이 켜졌다가 꺼지고
계속 그렇게 오른쪽으로 옮겨간다고 하자.
이때 과연 노란불이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이동한 것일까?
그렇지 않다.
그래서 이런 비유처럼
현실에서 운동이나 변화과정으로 이해하는 감각현실에서
그런 감각현실을 얻는 관찰자를 함께 놓고 생각하면
그런 이동이란 본래 얻을 수 없다고 보아야 한다는 내용까지
잘 이해해야 한다.
현실에서 공이 굴러서 이동한다고 하는 상황에서
이를 관찰하는 관찰자를 빼고 생각하면
마치 공이 여기에서 저기로 이동했다고 여기기 쉬운데
관찰자를 함께 놓고 생각하면
이 내용은 관찰자의 마음에서 그런 내용을 감각현실로 얻는 것이므로
사실은 앞에 비유로 든 모니터 상황과 같다고 해야 한다.
상식적으로는 이것을 이상하게 여길 수 있다.
그런데 어떤 이가 눈을 떠서 관찰하는 내용은
사실은 그의 마음에 맺히는 내용이어서
앞의 모니터 비유상황과 사정이 같다.
그런데 이 내용은 감각현실과 관련된다.
그런데 이런 감각현실을 얻고 그에 대해 관념분별을 일으킬 때
감각현실과 관념분별의 관계를 이해하려면
또 하나의 모니터를 놓고 이 관계를 이해해보기로 한다.
여기에 또 하나의 모니터가 또 있다.
이 모니터는 앞과 같이 자신이 눈으로 본 감각현실 내용을 가지고
각 부분이 무엇이다라고 생각하는 모니터다.
그래서 처음에 노란 화소 하나를 공이라고 보았다면
그렇게 생각하는 제2 모니터를 말하는 것이다.
그런데 그 처음의 모니터 화소에는
제 2 모니터에서 생각한 내용은 얻을 수 없다는 점이다.
물론 제 2 모니터에서 생각해 내는 내용은
제 1 모니터의 화소 변화 때문에 일으킨 내용이기는 한데
정작 제 1 모니터에는 없는 내용이라는 의미다.
주의할 점은 이 경우에
제 1 모니터 상황(감각현실)과
제 2 모니터 내용(분별내용)이 서로 관계가 전혀 없는 것이 아니고, 관계가 있기는 하지만,
그리고 제 1 모니터에 내용이 전혀 없는 것이 아니고 일정한 내용이 있기는 하지만,
그러나 다만 제 2 모니터에서의 내용은
정작 제 1 모니터 안에서는 얻을 수 없다는 의미다.
좀 복잡하게 이해할 수 있는데
그런데 그것이 현실이다.
그리고 모든 일반인이나 과학자가
이와 같은 상황에서
감각으로 관찰한 내용과
그에 바탕해 생각을 일으킨 내용을 가지고
현실에서 보고를 하는 상태에 있기에
모든 과학이론이나 일반적 보고가 모두 이와 같은 사정에 놓이는 것이다.
그런데 이렇게 이야기하여
한 주체가 현실에서 얻는 그 일체가 모니터로 비유한 마음안에 맺히는 내용이라고 제시하게 되면
이제 다음과 같은 새로운 주장을 하게 되기 쉽다.
즉, 제 1 모니터에서 어떤 내용(감각현실)을 보았다면
그 모니터 밖에서도 그와 같은 내용이 그대로 있다고 여기거나 주장하기 쉽다.
그런데 그런 주장을 하려면
그런 증거를 얻어온 다음에 그런 주장을 해야한다.
그런데 안타깝지만, 모니터로만 내용을 얻는 각 주체는 끝내 그 내용을 직접 못 얻는 것이다.
그리고 얻어진 내용의 관계는 앞에서 설명한
제 1 모니터와 제 2 모니터의 관계와 모두 마찬가지인 것이다.
그래서 다시 처음에 든 사과의 비유를 놓고
생각하면 이 경우도 사정이 마찬가지임을 보게 된다.
예를 들어
사과를 손에 쥐고 만지면
눈으로는 그런 사과모습을 보는데
손은 촉감을 느끼게 된다.
먹으면 맛을 느끼게 된다.
이런 상황에서
앞의 이론,
즉 어떤 하나의 모니터에서 어떤 내용을 얻게 되면
다른 모니터나 모니터 밖에도 그런 내용이 있는 것이다
또는 적어도 그에 비례하거나 유사한 것이 있다라고 주장하는 입장을
여기에도 적용한다면
처음에 사과모습과 촉감 사이에서부터
어떤 비례나 유사성이 찾아져야 한다.
그런데 그렇지 않다.
나머지도 다 마찬가지다.
그런데 이러한 현실 내용들의 관계는
제 1 모니터(감각현실)에서 어떤 내용을 얻으면
그런 내용이 그대로 모니터 밖에 있다고 하는 주장을 지지해주지 않는다.
그러나 또 한편 모니터 밖에 어떤 내용이 전혀 없다고 할 수는 없는데
정작 그것을 모니터로만 내용을 얻는 각 주체는 끝내 얻지 못하는 것이다.
어떻게 보면 어떤 한 모니터에서 어떤 내용을 얻게 되면
그냥 그 내용을 다른 영역
예를 들어 모니터 밖에 그 내용들이 그대로 있다고 밀어 놓고 싶은데,
현실은 그렇지 않은 것이다.
예를 들어 사과를 만질 때
촉감을 얻게 되거나.
또는 사과를 보면서 자신의 누나의 모습을 떠올리게 된다거나 한다면
그 모두를 다 눈으로 보는 모니터안에 있다고 밀어 넣어 버리고
또 한편
다시 그 모니터 밖에도 그 내용이 그대로 있다고 밀어 놓으면 좋겠는데
그것이 안 되는 것이다.
그리고 정작 그렇게 현실에서 얻는 내용이나 생각하는 내용을 다 밀어 넣으면
현실에서 문제된다고 제시한 앞 내용이 그대로 다 문제가 되게 되는 것이다.
여하튼 이런 여러 비유를 통해서 확인할 것은
감각현실을 얻고 나서
관념분별 영역에서 각 부분을 묶고 나누는 가운데 어떤 부분이 사과다 귤이다 이런 식으로
분별을 행할 때
그런 감각현실도 얻고
그에 바탕해 그런 분별 내용을 일으켜 얻는 것은 현실인데
그러나 정작 자신이 분별한 그런 내용이
그런 부분에 있는 것은 아니다.
이것은 마치 사과모습을 보고 소리를 얻더라도
자신이 눈으로 보는 사과 모습에 소리가 얻어지는 것은 아닌 것과
그 관계가 마찬가지라고 잘 이해해야 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제 사과의 상황이 이해가 되었으면
이후 사과가 놓인 그 부분에 자신을 놓고
또 자신도 사정이 그렇다는 것을 또 살펴나가야 한다.
여기서 주의할 것은
자신이 어떤 부분을 묶어서 그 부분이 사과라고 여기고
그 부분을 대하게 되지만,
정작 그 부분에서 그런 사과를 얻지 못한다는 것을 잘 이해하고
그 부분을 그렇게 대하면 곤란하다는 것이
사과에 대한 상을 갖거나 취하거나 그런 상태로 머물지 말라는 내용이 된다.
그런데 이 내용은
그런 감각현실을 얻지 못했다고 제시한 것도 아니고
그런 감각현실을 바탕으로 그러그러한 관념분별을 일으키지 못한다는 것도 아니다.
다만 그런 관념분별을 일으키는 영역에서
그런 관념분별을 일으킨 다음
1 - 그 감각현실 영역에 그런 내용이 있다고 여기면서
2 - 그런 분별을 바탕으로
3 - 그 감각현실 부분을 취하고 그에 접착되어 머물면
이 1-2-3 부분들이 하나같이 곤란하다는 의미다.
그런데 여기서 그 감각현실이 재료가 되어서
그런 상태에 이르게 되지만,
정작 그런 감각현실을 재료로
그런 망집현상을 일으키고 그에 바탕해 행해 나가는 영역은
관념분별 영역에서의 일이라고 지적하는 것이다.
즉 감각현실 부분에서는 그런 망집을 일으키는 재료는 제공하지만,
그 감각현실 영역에서는 그런 망집을 일으키는 것이 아니다.
그리고 위에서 관념분별 영역에서 1,2,3 의 자세는 문제이지만,
그렇다고 그 상황에서
그러그러한 감각현실을 전혀 얻지 못한다거나 얻으면 안 된다거나
또 그에 바탕해 그런 관념분별을 전혀 일으키지 못한다거나 일으키면 안된다고
하는 것이 아니다.
그런 관념분별을 일으키지만,
1,2,3 의 내용은 아니므로
이 둘을 접착시켜 대하지 말라는 의미다.
○ [pt op tr] 문서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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