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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구자료

지혜는 유위인가 무위인가

진리와 가치를 고루고루 2018. 7. 17. 20:40



®


제목 :

○지혜는_유위인가_무위인가

지혜는 유위인가 무위인가. 


불설이구시녀경에서 
이구시녀는 사리자 존자에게 
지혜가 유위인가 무위인가를 묻는다. 
※ 불설이구시녀경_K0041_T0338

우선 유위란 생주이멸하는 현상을 의미하고 
무위란 그런 생멸현상을 떠난 것을 의미한다. 

그런데 여기서 지혜를 생주이멸하는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인가. 
아니면 생멸을 떠난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인가가 먼저 문제된다. 

일반적으로 현실에서 지식을 배운다거나 
지혜를 얻는다고 할 때는 
모르던 내용을 대해서 새로운 내용을 알게 되거나 
얻게 되는 것을 지혜나 지식을 닦고 얻는 과정으로 이해하게 된다. 

예를 들어 이런 것이다. 
비는 어떻게 내리는가. 
이렇게 물으면 유치원생은 답을 못하는데 
과학에 대해서 조금 배운 학생은 물이 증발하면 구름이 되는데 
구름에서 비가 내린다. 이런 형태로 답을 하게 될 것이다. 
수학도 마찬가지다. 3 각형의 내각의 합은 얼마인가. 
또는 4 곱하기 5 는 얼마인가. 
이렇게 물을 때 유치원생을 답을 못하는데 
수학에 대해서 조금 배운 학생은 3 각형 내각의 합은 180 도이고 
4 곱하기 5 는 20 이라고 답하게 될 것이다. 
나머지 분야도 다 마찬가지다. 
물을 전기분해하면 무엇이 나오는가. 
사자와 호랑이는 결혼하여 자식을 낳을 수 있는가. 
엉덩이와 궁둥이는 같은 부위를 나타내는가. 

이런 등등의 내용에 대해서 답을 한다는 것은 
그렇지 못한 경우보다 지식이 있고 
그런 답을 찾아낼 수 있으면 지혜가 있다고 보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이렇게 지식과 지혜를 이해하면 
지식과 지혜란 결국 모르던 상태에서 그런 내용을 알게 되는 상태 
또는 모르는 문제에 대한 답을 그렇게 잘 찾아낼 수 있게 된 상태를 
의미한다고 보게 된다. 

그래서 이렇게 깨달음이나 지혜를 이해하면 
그 깨달음은 알지 못하던 것을 새삼스럽게 알게 되는 상태를 의미하고 
이것은 그런 내용이 없다가 있게 되는 어떤 내용이라고 이해하는 것이 된다. 
그래서 이런 경우의 깨달음은 생멸변화를 하는 유위법에 든다고 보게 될 것이다. 


그런데 불설이구시녕 경에서 이구시녀는 
만일 지혜가 유위라면 

곧 일어나고 생기며 허물어져 없어지는 것은 

허위의 법인 것이며, ...
라고 제시하고 있다. 

그런 경우는 그 깨달음이 허위다. 
이렇게 그 문제를 지적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반대로 말하면 현실에서 알지 못하다가 알게 되었다고 
대부분 여기고 대하는 그 일체의 지식이나 지혜가 
다 허위다. 
이렇게 보는 것이다. 

왜 그런가. 

그 사정을 이해해보자. 

무언가 모르는 것을 알고자 할 때 
자신이 알고자 하는 대상의 정체가 과연 어느 영역에 있는 
무엇인가가 처음 문제된다. 

그래서 이 경우 존재하고 앞과 같은 의문의 대상이 되는 것들을 
대강 그 영역을 나누어 보기로 한다. 

그러면 존재가 문제되는 것들을 다음과 같이 대강 나누어 
나열할 수 있다. 

08pfl--image/존재의_영역_설명.png 
[img2-01]
08pfl--image/존재의_영역_설명.png



현실에서 무언가를 문제삼을 때 이들 영역 가운데 
하나를 붙잡고 논의하게 된다는 의미다. 

1! 감각현실 영역 - 시각, 청각, 후각, 미각, 촉각 
2@ 관념분별 판단영역 - 
3# 실재영역
4$ 영원불변하고 고정된 실체의 존부 
5%!  감각현실로서 언어 
5%@ 관념으로서 언어 
6^  좋고 나쁨의 느낌 
7&  선악 

이 가운데 특히 그 존재의 정체가 문제되는 영역은 
결국 실상(實相 dharmatā ; dharma-svabhāva) - 상(相 Lakṣaṇa ) - 상(想 Saṃjña)으로 
나열하게 되는 내용과 관련된다. 

위와 같은 영역에 차이가 있다는 것은 
예를 들어 다음을 의미한다. 

꽃은 영어로 flower가 맞는가. fleur 라고 적는 것이 맞는가. blume 라고 적는 것이 맞는가. 
이런 문제는 어떤 차원에서 꽃을 다루고 문제삼는 것인가. 

그런데 이것은 다음 문제들과는 또 어떤 차이가 있는가. 
저 장미꽃은 생물인가 무생물인가. 생물이면 식물인가 동물인가 

이 두 문제만 놓고 보면 같은 꽃을 문제삼는 것 같은데 
서로 조금씩 다른 측면에서 접근해 문제삼는 것임을 보게 된다. 

그런데 앞의 분류와 관계하면 그 문제삼는 측면이 점점 달라진다는 것을 볼 수 있다. 

눈을 뜨면 장미꽃이 보입니까. 무슨 색인가요 
장미꽃을 손으로 두드리면 어떤 소리가 나는가요? 
장미꽃의 향기는 어떻습니까. 
장미꽃잎을 씹으면 어떤 맛이 날까요? 
손으로 장미꽃을 만지니 어떤가요? 부드러운가요? 거친가요?

그리고 이제 다음과 같은 질문으로 또 넘어가게 된다. 

장미꽃을 보면 기분이 좋아집니까. 아니면 슬퍼집니까. 
장미꽃은 인류에게 궁극적으로 오래오래 다양한 측면에서 좋음을 가져다 주는 것입니까. 아닙니까. 

그런 질문에 이이서 또 다음과 같은 질문도 
문제될 수 있다. 

장미꽃은 눈을 뜨고 보면 이러이러한 모습인데 
눈을 감으면 보이지 않게 됩니다. 

그런데 그렇다면 장미꽃은 눈을 감을 때 세상에서 사리진 것인가요?
아니면 자신이 눈을 감아 보지 못하거나 보거나 관계없이 
따로 실재하는 장미가 있다고 해야 하는 것입니까. 
그런 것이 있다면 그것은 무엇입니까. 

이렇게 질문을 할 수도 있다. 
이것은 어떤 것에 대해서 자신의 주관과 관계없이 실재하는 것에 대해서 질문을 제기하고 있는 것이다. 

그 다음 장미꽃을 살필 때는 
또 다음과 같은 질문도 이어질 수 있다. 

이것은 진짜의 장미꽃을 찾아나설 때 문제삼는 주제가 된다. 
예를 들어 꿈이 실답지 않다고 하는 것은 
꿈이 비록 꿈을 꿀때는 생생하지만, 
꿈을 깨고 나면 그런 내용은 현실에서 얻지 못한다. 
그래서 꿈이란 그런 조건에서 일시적으로 임시적으로 생생하게 얻지만, 
그런 조건을 떠나면 얻지 못하는 내용이고 
또한 그 내용은 다른 영역에서는 얻지 못하고 
또 그것은 그 내용에서 기대하는 다른 성품을 갖지 못하는 것이어서 
실답지 않은 것이라고 판단하게 된다. 

그런데 현실에서 얻는 감각현실도 사정이 같다. 
우리가 눈으로 보는 색깔은 낮에 보는가 밤에 보는가 
멀리서 보는가 가까이서 보는가. 
안경을 쓰고 보는가 벗고 보는가 망원경이나 현미경으로 보는가 
등등에 따라 매 경우마다 다른 모습으로 보게 되는 내용이다. 
그리고 또 눈을 감으면 그 모습을 보지 못하는 것이다. 

그리고 장미꽃에 대해 눈으로 얻는 내용에서는 
귀나 코 입 몸과 같은 청각, 후각 미각 촉각정보를 얻는 영역에서는 그 내용을 얻을 수 없는 것이다. 
또한 그처럼 눈으로 얻는 내용에서는 
귀나 코나 입이나 몸으로 얻는 내용 역시 그 안에서는 얻지 못하는 것이다. 

그래서 알고보면 하나의 감관으로 얻는 그런 내용은 
실답지 못한 사정이 꿈과 그 성격이 같다고 보게 된다. 

그래서 이런 반성을 통해서 
실답지 않다고 할 꿈과는 성격이 다른 내용이 
그런 장미꽃에 과연 있는것인가가 따로 문제된다. 

그래서 장미꽃은 꿈과 달리 늘 영원하고 불변하면서 고정된 어떤 성품을 갖고 있는가. 
반대로 말하면 현실에서 어떤 주체가 장미꽃에 대한 
위와 같은 여러 내용을 얻고 문제삼는다면 
어딘가에 그처럼 진짜라고 할 장미꽃의 내용이 따로 있어서 
그 주체가 그런 내용을 얻고 문제삼는 것인가가 문제된다는 의미다. 

이는 앞에서 살핀 실재와 관련이 되지만, 
조금은 다른 측면이다. 
실재의 문제를 삼을 때는 어떤 주체와 관련되지 않고 
그대로 실재하는 것이 있는가 
있다면 그 내용이 무언가 이런 측면의 문제였고 

꿈과는 달리 진짜라고 할 영원불변하고 고정된 것이 있는가 여부를 따진 것은 아니다. 

그런데 만일 진짜가 있는가라는 문제에서 그런 것이 있다고 한다면 
실재의 문제를 살필 때 
그런 것을 제시해야 한다고 보게 된다. 
왜냐하면 진짜라고 한다면 어떤 주체와 관련될 때만 그 내용을 얻어서는 안 되고 
그와 관계없이 늘 그런 내용으로 있어야 한다고 보기 때문이다. 

그런데 실재가 공하다라고 제시하게 되는 것은 
결국 앞에서 진짜가 있는가를 문제삼을 때 
그런 것은 없고[ 무아, 무자성, 인무아, 법무아. 승의무자성 ]
따라서 그런 것을 제시할 수 없은 한편 
그러나 문제삼는 그 실재는 아무 것도 전혀 없는 것은 아니지만, 
그러나 어떤 내용을 위와 같은 관계에서만 얻는 주체의 입장에서는 
그 내용을 끝내 얻을 수 없는 것이어서 [ 불가득 필경리 ]
결국 실재는 한 주체가 관념영역에서 행하는 분별 
예를 들어 -이다 -아니다. -이 있다 - 이 없다. -과 같다 -과 다르다. 깨끗하다 더럽다 좋다 나쁘다 
등등의 온갖 2 분법상의 분별과 [불이법]
언어표현을 할 수 없고 언어표현을 모두 떠나는 것이어서 [언어도단]
그런 상태를 나타내기 위해 그 의미가 없는 공이라는 표현을 빌려 
나타내게 된다고 제시한다. 

그래서 실재가 공하다는 것은 무아 무자성과 완전히 같은 의미는 아니지만, 
그 안에 진짜라고 할 실체가 없다[무소유 무자성]는 내용도 함께 포함되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왜냐하면 만일 그렇지 않고 진짜라고 할 실체가 있다면 
실재가 무언가라고 문제가 제시되면 
그 진짜에 해당하는 내용을 제시하면 되기 때문이다. 


여하튼 이와 같은 다양한 측면에서 
어떤 것의 정체가 무언가가 문제되는데 
이런 여러 측면에 대한 내용을 자세히 잘 파악하는 것이 
결국 지혜와 지식에 관련된 주제가 된다. 

문제는 다음이다. 

이 여러 주제 가운데 
관념의 내용을 관념 영역에서 찾고 언어 차원에서 그것을 표현하는 경우는 
그 문제점이 비교적 적다고 할 수 있는데 

그런데 문제되는 내용이 그 범위 밖일때는 
앞의 문제가 조금 성격이 달라진다. 

쉽게 이해하면 다음과 같은 문제다. 

어떤 이가 
아주 특이한 차를 외국에서 가지고 왔다고 한다. 
커피라는 것이다. 

그런데 그 커피의 맛을 아는가?

누가 이렇게 문제를 제시한다고 하자. 

이 때 어떤 이가 그 커피에 대해서 백과사전을 다 동원해서 
그 커피의 맛을 기술하면 
이제 그 내용을 대하고 읽고 외운 이는 
그 커피맛을 알게 된 것인가. 
이 문제다. 

지금 지혜가 유위인가 무위인가를 문제삼는 것은 
수행자들이 문제삼는 지혜가 
단순히 관념분별과 언어의 측면에서 무엇을 문제삼고 따지는 것이 
아니고 
어떤 것이 문제되면 
그것의 실상을 주로 문제삼기 때문에 
이것이 문제가 되는 것이다. 

그래서 그 사정을 이해하기 위해서 
일단 현실에서 각 주체가 내용을 얻는 감각현실만 놓고서 
먼저 살펴보는 것이다. 

감각현실만 되어도 그 사정이 달라지기 때문이다. 

그래서 앞에서 커피 맛이 어떤가를 문제삼는 경우만 해도 
관념영역에서 행하는 온갖 것은 일단 
지금 문제삼는 그 커피맛 그 자체는 아니다. 
이렇게 결론을 내리게 된다. 

그러니 관념분별이나 언어로 행하는 그 온갖 설명은 
결국 그 커피맛이 무언가하는 주제를 놓고 문제삼을 때는 
그 일체가 다 허위다. 이렇게 결론을 내리게 되는 것이다. 
이는 그 일체의 관념분별과 언어진술은 일단 지금 문제삼는 그 커피맛 자체는 아니다는 의미다. 

감각현실을 놓고서만 살필 때도 그 사정이 위와 같다. 

그리고 실상의 문제는 사정이 더 그렇다. 

그래서 앞에서 이구시녀가 
그것이 유위라면 그것은 생멸하는 것이고 
그것은 허위다. 
이렇게 제시하게 되는 것이다. 


---

그런데 왜 언어나 관념분별의 측면에서 다루는 것은 
그 논의가 희론의 성격을 갖는가 이 부분을 살피기로 한다. 

앞에서 꽃을 영어로 flower 라고 적어야 하는가. fleur 또는  blume 로 적어야 하는가. 
하는 것이 문제되면 답은 있다고 해야 할 것이다. 
그런데 오늘날 구글 번역기로 꽃에 해당하는 각국어를 나열하면 
대강 100 여개가 넘게 될 것이다. 
그런데 이 각각의 표현이 다 다른데 
여기에서 꽃을 본래 반드시 flower 라고만 적어야 한다는 법칙은 존재하지 않는다. 
단지 일정한 언어권에서는 다수가 그것을 flower 로 적고 있다. 
이것만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 언어란 것은 오늘날 언어 상황을 보더라도 
늘 변화하고 있다. 
최근에 한국에서는 '넘사벽' '친추' 이런 이상한 줄임말이 유행하는데 
비록 100 년전에는 이런 한국어 표현을 보지 못했다고 하더라도 
이것이 오늘날 언어의 기능을 담당하고 있는 것은 부정할 수 없다. 

그런데 꽃을 영어로 flower 라고 한다는 사정도 알고보면 마찬가지다. 
영어를 사용하는 언어권에서는 다수가 꽃을 flower 로 적고 발음해야 한다고 
일종의 규칙이나 약속이 정해져 현재 그렇게 사용되고 있는 상태라고 보는 것 뿐이다. 

그리고 관념분별 영역의 측면에서 어떤 것의 유무를 문제삼게 되면 
설령 그것이 없다고 보는 것을 논의할 때에도 
관념분별 영역에서 논의하는 이상 
그것은 관념분별의 측면에서는 일단 있다고 보게 된다. 
예를 들어 '토끼 뿔'이나 '거북이 털'과 같은 내용이 그렇다. 
현실적으로 그에 해당하는 내용을 보거나 만질 수 없지만, 
그대로 언어로 표현하고 그 유무를 논의할 때는 
그것은 그런 언어나 관념분별 측면에서는 그렇게 있다고 해야 하는 것이다. 

그래서 만일 지식이나 지혜의 논의가 이런 측면에서 논의되면 
그것은 그 일체가 희론의 성격을 갖는 큰 실질적 의미가 없는 논의가 된다고 
평가받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경전에서 자주 언설 분별은 희론이다. 이렇게 제시되는 것은 
위와 같은 사정 때문이다. 

그리고 이구시녀경에서는 그런 사정에서 
그런 차원의 지식은 그 일체가 허위다. 
이렇게 결론을 내리고 있는 것이다. 

---

깨달음이 무위 즉 유위법의 3 상 생주멸이 없는 내용이면 
결국 깨달음도 얻을 수 없는 것이라고 하게 된다. 

이구시녀경에서는 다음과 같이 제시하고 있다. 

가령 무위의 그것이라면 

3 가지 모양[3상三相]을 여의게 됩니다. 

그러므로 아무것도 일어나는 것이 없습니다. 

만약 일어나는 것이 없으면 

그 지혜에 모이고 합쳐지는 것이 없으므로 

모두가 없습니다.” 



우선 위 구절에서 3 상이란 유위법이 갖는 생주멸의 3 상을 말한다. 
조금 더 자세히 말하면 생주이멸, 생노병사, 성주괴공 
이렇게 표현할 수 있는 내용인데 
여기서 '이' 란 표현은 
일부분은 생하고 
일부분은 주하고 
일부분은 멸하는 복합현상을 '이'라고 하는 것이다. 

생주멸도 알고보면 복합관념이다. 
없다가 있다. => 생겨난다. 생 
있다가 계속 있다. => 머문다. 주 
있다가 없다. => 사라진다. 멸 
이런 의미다. 

그리고 이런 것을 유위라고 표현하고 
그런 생멸을 얻을 수 없는 내용을 무위라고 표현하는 것이다. 

이미 깨달음이나 지혜가 유위라고 한다면 
그 경우 어떤 문제가 있는가를 보았다. 
허위이고 희론이 된다는 의미다. 

현실에서 온갖 언설로 분별하고 나열하는 것을 
지식이 많고 지혜롭다고 이해하지만, 
사실은 망상분별을 증폭시키는 과정이라고 하게 되는 것이다. 
그 사정은 이미 앞에서 제시했다. 

그런데 그런 희론을 떠나 
어떤 것의 본 정체를 알고자 하게 되면 
이런 희론을 벗어나서 임해야 한다. 

그런데 결론적으로 
어떤 것의 본 정체 본 실상을 파악하고자 임할 때는 
그 내용은 언설 분별을 떠나서 얻을 수 없다는 것을 
파악하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경전에서 깨달음이란 결국 이와 같다고 제시하는 것이다. 

그런데 다행인 것은 
이런 본래 깨닫고자 하는 내용은 
어느 상태로부터도 벗어나 있지 않고 
떨어져 있지 않다고 또 제시하는 것이다. 

그런 사정은 다음에 살피는 
실상(實相 dharmatā ; dharma-svabhāva) - 상(相 Lakṣaṇa ) - 상(想 Saṃjña)의 관계를 
살필 때도 마찬가지이다. 

이런 문제는 또 다른 경전에서는 
본각이란 주제로 문제되기도 한다. 

수행자가 생사현실에 임할 때는 
어떤 내용을 알지 못하다가 
무언가 예를 들어 일체가 무상하고 고이고 무아 무자성이고 열반 적정이고 
공하다라는 내용을 알게 되고 
집착을 제거하는 것 등을 깨닫는다라고 이해하게 되는데 
그러나 알고보면 이들 과정은 

본래의 밝은 깨달음을 
어느 순간 갖게 된 망상분별과 집착이 덮어서 
가리우고 있는 상태를 제거하는 활동이 되는 것이다. 

비유하면 원래 차별없이 사진이 잘 찍히는 좋은 렌즈인데 
그런데 망집을 일으키고 생사현실에 임하는 가운데 
그 주체가 행한 업의 장애로 인해 
그 렌즈에 껌이나 온갖 오물이 묻어서 
아무리 노력해도 쉽게 벗겨지지 않는 가운데 
그 이후 엉뚱한 내용을 자꾸 얻고 쌓아가는 상황과 유사한 것이다. 

그래서 수행이란 이런 사정을 잘 관하고 
업의 장애로 렌즈에 묻어 잘 벗겨지지 않는 오물이나 껌을 
수행을 통해서 벗겨내는 활동을 의미하는 것이다. 

전도된 입장에서 지식이라고 보는 것은 
전도된 상태에서 전도된 망집을 증폭시키는 내용인 것이고 
더욱더 생사고통에 묶이게 하는 내용이다. 

왜 그런가하면 
그 첫 출발점이 모두 엉터리이기 때문이다. 

이미 그 내용을 반복해 제시한 바 있다. 

예를 들어 다음과 같은 것이다. 
[망1]-

---

현실에서 눈을 뜨면 일정한 모습을 얻게 된다.
그런데 이것은 자신이 눈을 뜸으로써 얻는 감각현실로써
자신의 마음에 얻어 자신의 마음 안에 머무는 마음 내용이고
따라서 그런 내용에는 그런 내용을 얻게 한 대상은 없고
또 이는 마음을 떠나 마음 밖에 있는 내용이 아니다.

그리고 이는 그런 감각기관을 통해 그런 조건에서만 얻는 내용이고
따라서 그 내용은 본 바탕인 실재의 지위에 있는 내용이 아니고,
또 본 바탕인 실재 영역에서도 그런 내용을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리고 이런 내용은 다른 감관 귀나 코 등으로 얻는 내용이나
분별을 통해 일으키는 분별 내용도 그 안에서 얻을 수 없는 것이다.
그래서 이는 마치 침대에 누어 꾼 바다나 황금의 꿈 내용처럼
비록 대단히 생생하게 매순간 얻는 내용이지만,
실답지 않은 내용이다.


그런데 이에 대해 일반적으로
자신이 현실에서 얻는 이런 감각현실은
외부 세계의 내용이고
자신의 감관이 대하는 외부대상이기도 하고
정신 밖에 있는  정신과는 별개인 외부물질이고
이것은 자신 뿐만 아니라, 영희나 철수를 포함해
모든 이가 함께 대하게 되는 내용이어서
외부의 객관적 실재라고 이해한다.

그리고 또 이런 감각현실에 대해 자신이 각 부분을
묶고 나누어 각 부분이 무엇무엇이라고 분별을 할 때
그런 분별내용을 놓고도
또 앞과 마찬가지 형태로 망상분별을 일으킨다.

즉 자신이 그렇게 일으킨 그런 분별내용은
그 감각현실에 그렇게 들어 있고
그래서 그 감각현실은 곧 그런 분별내용인 것이고
또 자신이 생각하는 분별내용은 그런 감각현실을 그 구성요소로 갖고 있는 것이라고 여기면서
그런 사정으로 그 관념분별은 감각현실과 관련해 얻는 실다운 내용으로 여기는 한편,
본 바탕인 실재와 관련해서도
앞과 마찬가지 사정으로 실다운 내용이라고 여기게 된다.

그리고 한 단면의 내용을 놓고서 그런 망상분별을 일으킬 뿐 아니라.
변화나 생멸을 놓고도 마찬가지로 그렇게 이해한다.

---


이처럼 일반적으로 전도된 상태에서 
이후 모든 것을 대하게 되므로 
그런 바탕에서 쌓은 지식은 모두 엉터리인 것이고 
알고보면 생사고통의 묶임에 그 자신을 더 단단하게 묶는 역할을 
하는 것이다. 

그래서 기본적인 수행은 알고보면 
이처럼 생사고통을 무량겁에 걸쳐서 받아나가게 하는 
근본 바탕을 제거하는 것이 목표점인 것이다. 
불교에서는 이것을 회신멸지라고 표현한다. 

그런데 현실에서는 이것을 가장 소중하고 
자신이 가장 집착하고 대하게 되는 것이기도 하다. 
그 사정은 전도된 상태이기 때문에 그 방향이 
이처럼 극과 극으로 차이가 나는 것이다. 

망집상태에서 어떤 부분을 깊게 파고 들어가면 들어갈수록 
그 생사고통의 묶임에서 더 힘들다고 보는 것이다. 

여하튼 이렇게 간단히 살피고 
이 부분을 마치기로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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