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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진리와실천

[불교공부_단상]_256102_03 본문

과거조각글/불기2561(2017)

[불교공부_단상]_256102_03

Pun tarika 2017. 2. 16. 08:50



®

『대반야바라밀다경』

K0001
T0220

제332권

● 한글대장경 해당부분 열람I
● 한글대장경 해당부분 열람II
○ 통합대장경 사이트

○ 해제[있는경우] 
● TTS 음성듣기 안내
※ 이하 부분은 위 대장경 부분에 대해
참조자료를 붙여 자유롭게 연구하는 내용을 적는 공간입니다.
대장경 열람은 위 부분을 참조해주십시오.


○ [pt op tr] 대반야바라밀다경_K0001_T0220 핵심요약




『대반야바라밀다경』 ♣0001-332♧

제332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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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반야바라밀다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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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반야바라밀다경 제332권

 

삼장법사 현장 한역

김월운 번역

 

53. 

선학품 ②

 

“선현아, 

이 보살마하살은 깊은 반야바라밀다를 행하면서 마땅히 공삼마지를 익히고 공삼마지에 머무르고 공삼마지를 수행해야 하되 실제(實際)를 증득하지 않아야 하고, 

무상ㆍ무원 삼마지를 익히고 무상ㆍ무원 삼마지에 머무르고 무상ㆍ무원 삼마지를 수행해야 하되 실제를 증득하지 않아야 하며, 

4념주를 익히고 4념주에 머무르고 4념주를 수행해야 하되 실제를 증득하지 않아야 하고 4정단ㆍ4신족ㆍ5근ㆍ5력ㆍ7등각지ㆍ8성도지를 익히고 4정단 내지 8성도지에 머무르고 4정단 내지 8성도지를 수행해야 하되 실제를 증득하지 않아야 하느니라.

이와 같이 내지 부처님의 10력을 수행해야 하되 실제를 증득하지 않아야 하고, 

4무소외와 4무애해와 대자ㆍ대비ㆍ대희ㆍ대사와 18불불공법을 익히고 4무소외 내지 18불불공법에 나아가고 4무소외 내지 18불불공법을 수행해야 하되 실제를 증득하지 않아야 하느니라.

 

선현아, 

이 보살마하살은 비록 공삼마지를 익히고 공삼마지에 머무르고 공삼마지를 수행한다 하더라도 예류과를 증득하지 않고 일래과ㆍ불환과ㆍ아라한과도 증득하지 않고 또한 독각의 깨달음도 증득하지 않으며, 

비록 무상ㆍ무원 삼마지를 수행한다 하더라도 예류과를 증득하지 안고 일래과ㆍ불환과ㆍ아라한과도 증득하지 않고 또한 독각의 깨달음도 증득하지 않느니라.

또 비록 4념주를 익히고 4념주에 머무르고 4념주를 수행한다 하더라도 예류과를 증득하지 않고 일래과ㆍ불환과ㆍ아라한과도 증득하지 않고 또한 독각의 깨달음도 증득하지 않으며, 

비록 4정단ㆍ4신족ㆍ5근ㆍ5력ㆍ7등각지ㆍ8성도지를 익히고 4정단 내지 8성도지에 머무르고 4정단 내지 8성도지를 수행한다 하더라도 예류과를 증득하지 않고 또한 독각의 깨달음도 증득하지 않느니라.

선현아, 

이 보살마하살은 이러한 인연으로 성문지와 독각지에 떨어지지 않고 빨리 위없는 바르고 평등한 깨달음을 증득하느니라.

 

선현아, 

비유컨대 어떤 장사가 위세가 씩씩하고 용맹하며 얼굴도 잘 생겨서 보는 이면 모두 기뻐하며 가장 청정하고 원만한 권속들을 갖추었고 모든 병법에서도 끝까지 배워서 무기를 잘 가지고 있으면서 엄연하여 동하지도 않으며 예순 네 가지의 재능과 열여덟 가지의 학문이며 온갖 기술에도 능통하지 않음이 없는지라 뭇 사들이 흠앙하고 공경하고 복종하며 사업도 잘 하는 까닭에 노력은 적으면서도 이익이 많았나니, 

이로 말미암아 모든 사람들은 공경하고 공양하고 존중하고 찬탄하게 되므로 그는 그러한 때에 갑절 더 뛰면서 자신을 경하하게 된다.

 

어떤 일이 있어서 늙은이와 약한 자며 모든 권속들을 거느리고 다른 지방으로 떠날 때에 중간에 험난한 들을 지나게 되는데, 

그 곳에는 나쁜 짐승과 도둑과 원수들이 숨어 있는 등의 온갖 두려운 일들이 많았으므로 권속들은 모두가 두려워하지 않음이 없는 데도 그 사람은 자신의 위엄과 용맹이며 온갖 기술들을 믿고 몸과 마음을 태연히 가지면서 부모와 권속들을 위로하되,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반드시 괴로움이 없게 하리다’ 하느니라.

 

그 사람은 이때에 교묘한 재주로써 모든 권속을 데리고 편안한 곳에 당도하게 되거니와 이런 위난을 면한 뒤에는 기뻐하면서 쾌락을 받느니라. 

그러나 그 장사는 들 가운데서 나쁜 짐승이나 도둑들을 해치려는 생각이 없었나니, 

왜냐하면 용맹과 온갖 기술을 갖추고 있는지라 두려울 것이 없음을 자신하고 있었기 때문이니라.

선현아, 

알아야 하느니라. 

모든 보살마하살도 이와 같아서, 

나고 죽는 고통을 받는 모든 유정들을 불쌍히 여기어 위없는 바르고 평등한 깨달음에 나아가면서 두루 유정을 반연하여 4무량(無量)을 일으키고 4무량과 함께 하는 마음에 머물러 보시ㆍ정계ㆍ안인ㆍ정진ㆍ정려ㆍ반야 바라밀다를 부지런히 닦아 익히어 속히 원만하게 되느니라.

 

이 보살마하살은 이 6바라밀다에 아직 원만하기 전에는 일체지지를 닦고 배우기 위하여 번뇌가 다함을 증득하지 않으며, 

비록 공ㆍ무상ㆍ무원 해탈문에 머무르기는 하나 그의 세력에 따라서 움직이지도 않고 그의 장애에 끌리지도 않으며, 

해탈문을 증득하지도 않고 증득하지 않기 때문에 성문지와 독각지에 떨어지지 않으며, 

반드시 위없는 바르고 평등한 깨달음에 나아가느니라.

 

선현아, 

마치 날개 야문 새는 허공에 날아올라서 자유로이 날아다니되 오래도록 떨어지지 않으며, 

비록 허공에 날아다니기는 하나 허공에 기대지도 않고 허공에 구애도 받지 않은 것처럼, 

선현아, 

모든 보살마하살도 그와 같아서 비록 공ㆍ무상ㆍ무원 해탈문을 자주자주 익히고 머무르고 수행하기는 하나 증득하지 않으며, 

증득하지 않기 때문에 성문지와 독각지에 떨어지지 않고 부처님의 10력과 4무소외와 4무애해와 대자ㆍ대비ㆍ대희ㆍ대사와 18불불공법과 일체지지를 수행하되 아직 원만하기 전에는 끝내 공ㆍ무상ㆍ무원 삼마지에 의지하여 번뇌가 다함을 증득하지 않느니라.

 

선현아, 

마치 어떤 활쏘기에 능숙한 장사가 자기의 재주를 나타내기 위하여 허공을 향해 활을 쏘아 놓고, 

그 공중에 화살이 땅에 떨어지지 않게 하기 위하여 다시 뒤의 화살로써 앞의 화살 꼭지를 쏘아 이렇게 계속하여 오랫동안 쏘면 화살과 화살이 서로 이어 받아서 떨어지지 않게 되지마는 만일 떨어지게 하려고 뒤의 화살을 쏘지 않으면 그때에 모든 화살들은 한꺼번에 떨어지는 것처럼, 

선현아, 

모든 보살마하살도 그와 같아서 깊은 반야바라밀다를 행하여 방편선교로 거두어지므로 위없는 바르고 평등한 깨달음의 원인이 되는 행인 선근이 아직 익지 않을 때까지는 끝내 중도에서 실제를 증득하지 않지마는, 

만일 위없는 바르고 평등한 깨달음의 원인 되는 행인 선근이 모두가 익게 되면 그때에야 보살은 비로소 실제를 증득하며 곧 위없는 바르고 평등한 깨달음을 얻느니라.

그러므로 선현아, 

모든 보살마하살이 깊은 반야바라밀다를 행할 때에는, 

모두가 이와 같이 앞에서 말한 것과 같은 모든 법의 참 모습[實相]을 자세히 관찰할지니라.”

 

그때 구수 선현이 부처님께 아뢰었다.

“세존이시여, 

모든 보살마하살은 어려운 일을 능히 하나니, 

비록 모든 법의 진여ㆍ법계ㆍ법성ㆍ불허망성ㆍ불변이성ㆍ평등성ㆍ이생성ㆍ법정ㆍ법주ㆍ실제ㆍ허공계ㆍ부사의계를 배우고, 

비록 모든 법의 내공ㆍ외공ㆍ내외공ㆍ공공ㆍ대공ㆍ승의공ㆍ유위공ㆍ무위공ㆍ필경공ㆍ무제공ㆍ산공ㆍ무변이공ㆍ본성공ㆍ자상공ㆍ공상공ㆍ일체법공ㆍ불가득공ㆍ무성공ㆍ자성공ㆍ무성자성공을 배우고, 

비록 괴로움ㆍ괴로움의 발생ㆍ괴로움의 소멸ㆍ괴로움의 소멸에 이르는 길에 대한 성스러운 진리를 배우고, 

비록 4념주ㆍ4정단ㆍ4신족ㆍ5근ㆍ5력ㆍ7등각지ㆍ8성도지를 배우고, 

비록 공ㆍ무상ㆍ무원 해탈문을 배운다 하더라도, 

중도에서 성문지나 독각지에 떨어져 위없는 바르고 평등한 깨달음에서 물러나지 않으리니, 

세존이시여, 

이 보살마하살은 매우 회유합니다.”

 

부처님께서 선현에게 말씀하셨다.

“모든 보살마하살은 모든 유정들을 맹세코 버리지 않으려는 까닭에 서원을 세우되, 

‘만일 모든 유정이 해탈을 얻지 못하면, 

나는 끝내 일으킨 가행(加行)을 버리지 않으리라’고 하느니라.

선현아, 

모든 보살마하살은 원력의 수승함으로 항상 생각하기를, 

‘만일 모든 유정이 해탈을 얻지 못하면, 

나는 끝내 버리지 않으리라’고 하느니라. 

이와 같은 넓고 큰마음을 일으켰기 때문에 중간에 반드시 물러나 떨어지지 않느니라.

선현아, 

모든 보살마하살은 항상 생각하기를, 

‘나는 온갖 유정을 버리지 않겠으며, 

반드시 해탈하게 하리라. 

그러나 유정들이 바르지 못한 법을 행하면 나는 그를 제도하기 위하여 자주자주 고요한 공ㆍ무상ㆍ무원 해탈문을 끌어내겠으며, 

비록 자주자주 끌어내기는 하나 증득하지는 않으리라’고 하느니라.

선현아, 

이 보살마하살은 선교방편의 힘을 성취했으므로 비록 자주자주 세 가지 해탈문을 일으키기는 하나 중간에는 실제를 증득하지 않고 일체지지를 얻기 전까지 이르게 되며, 

반드시 위없는 바르고 평등한 깨달음을 얻어야 비로소 증득하는 것이니라.

 

또 선현아, 

모든 보살마하살은 매우 깊은 곳에 대해 항상 관찰하기를 좋아할 것이니, 

이를테면 내공ㆍ외공ㆍ내외공ㆍ공공ㆍ대공ㆍ승의공ㆍ유위공ㆍ무위공ㆍ필경공ㆍ무제공ㆍ산공ㆍ무변이공ㆍ본성공ㆍ자상공ㆍ공상공ㆍ일체법공ㆍ불가득공ㆍ무성공ㆍ자성공ㆍ무성자성공을 관찰하기 좋아하고, 

또한 4념주ㆍ4정단ㆍ4신족ㆍ5근ㆍ5력ㆍ7등각지ㆍ8성도지와 공ㆍ무상ㆍ무원 해탈문 등이 모두 제 모양이 공함을 관찰하기 좋아하는 것이니라.

 

선현아, 

이 보살마하살은 이렇게 관찰하고 나서 생각하기를, 

‘모든 유정들은 나쁜 벗의 힘으로 말미암아 오랜 세월 동안에 나라는 생각의 집착ㆍ목숨이라는 생각의 집착ㆍ나는 것이라는 생각의 집착ㆍ기르는 것이라는 생각의 집착ㆍ장부라는 생각의 집착ㆍ보특가라라는 생각의 집착ㆍ뜻대로 남이라는 생각의 집착ㆍ어린이라는 생각의 집착ㆍ짓는 것이라는 생각의 집착ㆍ받는 것이라는 생각의 집착ㆍ아는 것이라는 생각의 집착ㆍ보는 것이라는 생각의 집착을 일으키나니, 

이 생각의 집착으로 말미암아 얻을 바 있음[有所得]을 행하여 나고 죽음에 바퀴 돌 듯하면서 갖가지의 고통을 받고 있구나. 

유정들의 이러한 생각의 집착을 끊기 위하여 위없는 바르고 평등한 깨달음에 나아가서 유정들에게 깊고 묘한 법을 말해 주어 생각의 집착을 끊고 나고 죽는 고통을 여의게 하리라’고 하느니라.

 

선현아, 

이 보살마하살은 그때에 비록 공해탈문을 익히기는 하나 이에 의하여 실제를 증득하지 않으며, 

비록 무상ㆍ무원 해탈문을 익히기는 하나 역시 이에 의하여 실제를 증득하지 않나니, 

실제를 증득하지 않기 때문에 예류과ㆍ일래과ㆍ불환과ㆍ아라한과에 떨어지지 않으며 또한 독각의 깨달음에도 떨어지지 않느니라.

 

선현아, 

이 보살마하살은 이런 생각 때문에 깊은 반야바라밀다를 행하여 선근을 성취하되 실제를 증득하지 않으며, 

비록 실제를 증득하지 못하기는 했으나 4정려에서 물러나지 않고 4무량과 4무색정에서도 물러나지 않으며, 

4념주에서도 물러나지 않고 4정단ㆍ4신족ㆍ5근ㆍ5력ㆍ7등각지ㆍ8성도지에서도 물러나지 않으며, 

8해탈에서도 물러나지 않고 8승처ㆍ9차제정ㆍ10변처에도 물러나지 않으며, 

공해탈문에서도 물러나지 않고 무상ㆍ무원 해탈문에서도 물러나지 않느니라.

 

또 내공에서도 물러나지 않고 외공ㆍ내외공ㆍ공공ㆍ대공ㆍ승의공ㆍ유위공ㆍ무위공ㆍ필경공ㆍ무제공ㆍ산공ㆍ무변이공ㆍ본성공ㆍ자상공ㆍ공상공ㆍ일체법공ㆍ불가득공ㆍ무성공ㆍ자성공ㆍ무성자성공에서 물러나지 않으며, 

진여에서도 물러나지 않고 법계ㆍ법성ㆍ불허망성ㆍ불변이성ㆍ평등성ㆍ이생성ㆍ법정ㆍ법주ㆍ실제ㆍ허공계ㆍ부사의계에서도 물러나지 않으며, 

괴로움에 대한 성스러운 진리에서도 물러나지 않고 괴로움의 발생ㆍ괴로움의 소멸ㆍ괴로움의 소멸에 이르는 길에 대한 성스러운 진리에서도 물러나지 않느니라.

 

또 보시바라밀다에서도 물러나지 않고 정계ㆍ안인ㆍ정진ㆍ정려ㆍ반야 바라밀다에서도 물러나지 않으며, 

5안에서도 물러나지 않고 6신통에서도 물러나지 않으며, 

온갖 다라니문에서도 물러나지 않고 온갖 삼마지문에서도 물러나지 않으며, 

부처님의 10력에서도 물러나지 않고 4무소외와 4무애해와 대자ㆍ대비ㆍ대희ㆍ대사와 18불불공법에서도 물러나지 않으며, 

잊음이 없는 법에서도 물러나지 않고 항상 평정에 머무는 성품에서도 물러나지 않으며, 

일체지에서도 물러나지 않고 도상지와 일체상지에서도 물러나지 않느니라.

 

선현아, 

이 보살마하살은 그때에 온갖 보리분법(菩提分法)을 성취하여 위없는 바르고 평등한 깨달음을 증득하기까지 모든 공덕에서 끝내 쇠하거나 줄어지지 않느니라.

선현아, 

이 보살마하살은 깊은 반야바라밀다를 행하여 방편선교로 거두어지기 때문에 찰나찰나마다 흰법[白法]이 더욱 늘어나고 모든 감관이 영리하여져서 온갖 성문과 독각보다 뛰어나느라.

 

또 선현아, 

만일 보살마하살이 항상 생각하기를 ‘모든 유정들은 오랜 세월 동안에 그 마음이 언제나 네 가지 뒤바뀜[四倒]에 뒤바뀌었나니, 

이를테면 항상하다[常]는 생각이 뒤바뀌어 마음이 뒤바뀌고 소견이 뒤바뀌며, 

즐겁다[樂]는 생각이 뒤바뀌어 마음이 뒤바뀌고 소견이 뒤바뀌며, 

나[我]라는 생각이 뒤바뀌어 마음이 뒤바뀌고 소견이 뒤바뀌며, 

청정하다[淨]는 생각이 뒤바뀌어 마음이 뒤바뀌고 소견이 뒤바뀐 것이니라.

나는 이러한 유정들을 위하여 위없는 바르고 평등한 깨달음에 나아가서 모든 보살마하살의 행을 닦아 위없는 큰 깨달음을 증득할 때에는 유정들에게 뒤바뀜이 없는 법을 말하리니, 

‘나고 죽음은 항상함이 없고 즐거움이 없고 나가 없고 청정함이 없거니와 오직 열반만은 고요하고 미묘하면서 갖가지의 항상함과 즐거움과 나와 청정함의 진실한 공덕을 갖추었느니라’고 하면, 

선현아, 

이 보살마하살은 이런 생각을 성취하고 깊은 반야바라밀다를 행하여 방편선교로 거두어지기 때문에 부처님의 10력과 4무소외와 4무애해와 대자ㆍ대비ㆍ대희ㆍ대사와 18불불공법에 아직 원만하기 전에는 끝내 여래의 훌륭한 선정을 증득하여 들지 않느니라.

 

선현아, 

이 보살마하살은 그러한 때에 비록 공ㆍ무상ㆍ무원 해탈문을 익히어 들고남이 자유롭다 하더라도 실제를 증득하지 않으며, 

위없는 바르고 평등한 깨달음에 이르기까지는 원인 되는 행의 공덕이 잘 원만하지 못했으면 실제와 그 밖의 공덕을 증득하지 않다가 위없는 바르고 평등한 깨달음을 얻으면 비로소 증득하느니라.

 

선현아, 

보살마하살이 항상 생각하기를 ‘모든 유정들은 오랜 세월 동안에 얻을 바 있음을 행하였나니, 

이를테면 나가 있다고 집착하고 혹은 유정ㆍ목숨ㆍ나는 것ㆍ기르는 것ㆍ장부ㆍ보특가라ㆍ뜻대로 남ㆍ어린이ㆍ짓는 것ㆍ받는 것ㆍ아는 것ㆍ보는 것이 있다고 집착하며, 

혹은 물질이 있다고 집착하고 느낌ㆍ생각ㆍ지어감ㆍ의식이 있다고 집착하며, 

혹은 눈의 영역이 있다고 집착하고 귀ㆍ코ㆍ혀ㆍ몸ㆍ뜻의 영역이 있다고 집착하며, 


 

혹은 빛깔의 영역이 있다고 집착하고 소리ㆍ냄새ㆍ맛ㆍ감촉ㆍ법의 영역이 있다고 집착하며, 

혹은 빛깔의 경계가 있다고 집착하고 소리ㆍ냄새ㆍ맛ㆍ감촉ㆍ법의 경계가 있다고 집착하며, 

혹은 안식의 경계가 있다고 집착하고 이식ㆍ비식ㆍ설식ㆍ신식ㆍ의식의 경계가 있다고 집착하며, 

혹은 눈의 접촉이 있다고 집착하고 귀ㆍ코ㆍ혀ㆍ몸ㆍ뜻의 접촉이 있다고 집착하며, 

혹은 눈의 접촉이 연이 되어 생긴 모든 느낌이 있다고 집착하고 귀ㆍ코ㆍ혀ㆍ몸ㆍ뜻의 접촉이 연이 되어 생긴 모든 느낌이 있다고 집착하느니라.

혹은 지계가 있다고 집착하고 수계ㆍ화계ㆍ풍계ㆍ공계ㆍ식계가 있다고 집착하며, 

혹은 무명이 있다고 집착하고 혹은 지어감ㆍ의식ㆍ이름과 물질ㆍ여섯 감관ㆍ접촉ㆍ느낌ㆍ애욕ㆍ취함ㆍ존재ㆍ태어남ㆍ늙음과 죽음이 있다고 집착하며, 

혹은 10선업도가 있다고 집착하며, 

혹은 4정려가 있다고 집착하고 혹은 4무량과 4무색정이 있다고 집착하며, 

혹은 4정사(四正事)가 있다고 집착하나니, 

나는 이와 같은 유정들을 위하여 위없는 바르고 평등한 깨달음에 나아가서 모든 보살마하살의 행을 닦아 위없는 큰 깨달음을 증득할 때에는 유정들에게 이와 같은 얻을 바 있음의 집착을 영원히 끊게 하리라’고 하느니라.

 

선현아, 

이 보살마하살은 이런 생각을 성취하여 깊은 반야바라밀다를 행하고 방편선교로 거두어지기 때문에 부처님의 10력과 4무소외와 4무애해와 대자ㆍ대비ㆍ대희 대사와 18불불공법이 아직 원만하지 못했으면 실제를 증득하지 않느니라.

선현아, 

이 보살마하살은 그때에 비록 무상ㆍ무원 삼마지문을 닦아 익히지 아니함이 없으나 다만 공삼마지문은 닦아서 이미 원만해졌느니라.

 

또 선현아, 

만일 보살마하살이 반야바라밀다를 행할 때에 모든 유정들이 나쁜 벗의 힘으로 오랜 세월동안 한량없는 종류의 모양[相]인 이른바 여자의 모양과 남자의 모양과 빛깔의 모양과 소리의 모양과 냄새의 모양과 맛의 모양과 감촉의 모양과 법의 모양을 집착하는 것을 보게 되나니, 

항상 생각하기를 ‘나는 이와 같은 유정들을 위하여 위없는 바르고 평등한 깨달음에 나아가서 모든 보살마하살의 행을 닦아 위없는 큰 깨달음을 증득할 때에 모든 유정들에게 이러한 모든 모양의 집착을 영원히 없게 하리라’고 하느니라.

 

선현아, 

이 보살마하살은 이런 생각을 성취하여 깊은 반야바라밀다를 행하고 방편선교로 거두어지기 때문에 부처님의 10력과 4무소외와 4무애해와 대자ㆍ대비ㆍ대희ㆍ대사와 18불불공법이 아직 원만하지 못했으면 실제를 증득하지 않느니라.

선현아, 

이 보살마하살은 그때에 비록 공ㆍ무원 삼마지문을 닦아 익히지 않음이 없으나 무상삼마지문은 닦아서 이미 원만해졌느니라.

 

또 선현아, 

만일 보살마하살이 이미 보시ㆍ정계ㆍ안인ㆍ정진ㆍ정려ㆍ반야 바라밀다를 잘 닦아 배우고, 

이미 내공ㆍ외공ㆍ내외공ㆍ공공ㆍ대공ㆍ승의공ㆍ유위공ㆍ무위공ㆍ필경공ㆍ무제공ㆍ산공ㆍ무변이공ㆍ본성공ㆍ자상공ㆍ공상공ㆍ일체법공ㆍ불가득공ㆍ무성공ㆍ자성공ㆍ무성자성공에 잘 머무르고, 

이미 진여ㆍ법계ㆍ법성ㆍ불허망성ㆍ불변이성ㆍ평등성ㆍ이생성ㆍ법정ㆍ법주ㆍ실제ㆍ허공계ㆍ부사의계에 잘 머무르고, 

이미 괴로움ㆍ괴로움의 발생ㆍ괴로움의 소멸ㆍ괴로움의 소멸에 이르는 길에 대한 성스러운 진리에 잘 머무르고, 


 

이미 4념주ㆍ4정단ㆍ4신족ㆍ5근ㆍ5력ㆍ7등각지ㆍ8성도지를 잘 닦아 배우고, 

이미 공ㆍ무상ㆍ무원 해탈문을 잘 닦아 배우고, 

이미 나아가 부처님의 10력과 4무소외와 4무애해와 대자ㆍ대비ㆍ대희ㆍ대사와 18불불공법과 그 밖의 한량없고 그지없는 불법을 잘 닦아 배웠으면, 

선현아, 

이 보살마하살은 이와 같은 공덕과 지혜를 성취했으므로 나고 죽음에 대하여 즐겁다는 생각을 일으키거나 즐거운 것이라고 말하거나 혹은 삼계(三界)에 머물러서 집착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니라.

 

선현아, 

어떤 보살마하살이 이미 보리분법과 온갖 여래ㆍ응공ㆍ정등각이나 모든 보살마하살들의 법을 잘 닦아 배웠거든, 

그에게 시험삼아 물어 보되 ‘만일 보살마하살이 위없는 바르고 평등한 깨달음을 증득하고자 하면 어떻게 보리분법을 닦고 배우면서 공ㆍ무상ㆍ무원과 생김이 없고 소멸이 없고 작용이 없고 함이 없고 성품이 없음의 실제(實際)를 증득하지 않으며, 

증득하지 않기 때문에 예류과ㆍ일래과ㆍ불환과ㆍ아라한과며 독각의 깨달음에 떨어지지 않으면서 매우 깊은 반야바라밀다를 부지런히 닦고 익히며 항상 집착한 바가 없겠습니까?’라고 하라.

 

선현아, 

이 보살마하살이 이런 질문을 받았을 때에 대답하기를 ‘모든 보살마하살이 위없는 바르고 평등한 깨달음을 증득하고자 하면 다만 공ㆍ무상ㆍ무원과 생김이 없고 소멸이 없고 작용이 없고 함이 없고 성품이 없음의 실제와 그 밖의 온갖 보리분법을 생각하기만 해야 하고 닦아 배우지는 말지니라’ 하면, 

선현아, 

이 보살마하살은 아직 여래ㆍ응공ㆍ정등각에게서 위없는 바르고 평등한 깨달음에서 물러나지 않는 수기를 받지 못했는 줄 알 것이니, 

왜냐하면 선현아, 

이 보살마하살은 물러나지 않는 지위에 머무른 보살마하살이 닦고 배우는 법의 모양을 아직 보이고 기별[記別]하고 드러내지 못하기 때문이니라.

 

선현아, 

이 보살마하살이 이런 질문을 받았을 때에 대답하기를 ‘모든 보살마하살이 위없는 바르고 평등한 깨달음을 증득하고자 하면 응당 공ㆍ무상ㆍ무원과 생김이 없고 소멸이 없고 작용이 없고 함이 없고 성품이 없음의 실제와 그 밖의 온갖 보리분법을 바르게 생각해야 하고 또한 방편으로 앞에서 말한 것을 교묘하게 닦고 배우면서도 증득하려 하지 않아야 하느니라’고 하면, 

선현아 이 보살마하살은 이미 여래ㆍ응공ㆍ정등각에게서 위없는 바르고 평등한 깨달음에서 물러나지 않는 수기를 받았는 줄 알지니, 

왜냐하면 선현아, 

이 보살마하살은 물러나지 않는 지위에 머무른 보살마하살이 닦고 배우는 법의 모양을 이미 보이고 기별하고 드러냈기 때문이니라.

 

선현아, 

만일 보살마하살이 물러나지 않는 지위에 머무른 보살마하살이 닦고 배우는 법의 모양을 아직 보이고 기별하고 드러내지 못하면, 

이 보살마하살은 아직 보시ㆍ정계ㆍ안인ㆍ정진ㆍ정려ㆍ반야 바라밀다의 보리분법을 잘 닦아 배우지 못했고, 

아직 박지(薄地)에도 들어가지 못했으며 아직 그 밖의 물러나지 않는 지위에 머무른 보살마하살이 보이고 기별하고 드러내고 머무르는 물러나지 않는 지위와 같은 것이 못되는 줄 알지니라.

선현아, 

만일 보살마하살이 물러나지 않는 지위에 머무른 보살마하살이 닦고 배우는 법의 모양을 보이고 기별하고 드러냈으면, 

이 보살마하살은 이미 보시ㆍ정계ㆍ안인ㆍ정진ㆍ정려ㆍ반야 바라밀다의 보리분법을 잘 닦아 배웠고, 

이미 박지에도 들어갔으며, 

이미 그밖에 물러나지 않는 지위에 머무른 보살마하살이 보이고 기별하고 드러내고 머무르는 물러나지 않는 지위와 같은 줄 알지니라.”

 

그때 구수 선현이 부처님께 아뢰었다.

“세존이시여, 

혹시 아직 물러나지 않음을 얻지 못한 보살마하살도 이와 같이 여실(如實)하게 대답할 수 있습니까?”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선현아, 

어떤 보살마하살은 비록 아직은 물러나지 않음을 얻지 못하기는 했으나 이렇게 여실히 대답할 수 있느니라.

선현아, 

이 보살마하살은 비록 물러나지 않음을 얻지 못했으나, 

보시ㆍ정계ㆍ안인ㆍ정진ㆍ정려ㆍ반야 바라밀다의 보리분법을 잘 닦아 익히어 이미 익어져서 깨닫는 지혜가 영리하여지면 들었거나 듣지 못했거나 간에 여실하게 대답할 수 있음이 마치 물러나지 않는 지위의 보살마하살과 같으니라.”

 

구수 선현이 다시 부처님께 아뢰었다.

“세존이시여, 

보살마하살로 위없는 바르고 평등한 깨달음을 수행한 이는 많이 있으나 물러나지 않는 지위의 보살마하살과 같이 여실하게 대답할 수 있는 이는 적으니, 

이미 잘 닦아 다스린 지위와 아직 잘 닦아 다스리지 못한 지위로서 머무르기 때문입니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선현아, 

그러하느니라, 

그러하느니라. 

너의 말과 같으니라. 

왜냐하면 선현아, 

보살마하살로서 이러한 물러나지 않는 지위의 미묘한 지혜의 수기를 받게 된 이는 적나니, 

만일 이러한 수기를 받게 된 이면 모두가 이렇게 여실히 답할 수 있느니라.

선현아, 

만일 이렇게 대답할 수 있는 이면 이 보살마하살이야말로 선근이 밝고 예리하여 세간의 하늘이나 사람이나 아소락 등이 파괴하지 못할 줄 알아야 하느니라.

 

또 선현아, 

만일 보살마하살이 꿈속에서까지도 성문지와 독각지를 좋아하거나 칭찬하지 않고 삼계의 법에 대해서도 좋아하거나 칭찬하는 마음을 일으키지 않으면서 항상 모든 법은 꿈과 같고 요술과 같고 메아리와 같고 형상과 같고 그림자와 같고 아지랑이와 같고 변화로 된 일과 같고 심향성(尋香城)과 같은 줄 관찰하고 비록 이렇게 관찰한다 하더라도 실제를 증득하지 않으면, 

선현아 이 보살마하살에게는 물러나지 않음의 모양[相]이 있는 줄 알지니라.

 

또 선현아, 

만일 보살마하살이 꿈에 여래ㆍ응공ㆍ정등각께서 한량없는 대중과 한량없는 백의 대중과 한량없는 천의 대중과 한량없는 백천의 대중과 한량없는 구지의 대중과 한량없는 백 구지의 대중과 한량없는 천 구지의 대중과 한량없는 백천 구지의 대중과 한량없는 나유타의 대중과 한량없는 백 나유타의 대중과 한량없는 천 나유타의 대중과 한량없는 백천 나유타의 대중인 필추ㆍ필추니ㆍ오파색ㆍ오파사카ㆍ하늘ㆍ용ㆍ약차ㆍ건달박ㆍ아소락ㆍ게로다ㆍ긴날락ㆍ막호락가ㆍ인비인 등에게 공경히 둘러싸여 설법하시는 것을 보고, 

법문을 들은 뒤에는 이치를 잘 알며 이를 잘 안 뒤에는 법을 따르는 행[隨法行]과 화합하고 공경하는 행[和敬行]과 믿음을 따르는 행[隨信行]을 부지런히 수행하면, 

선현아, 

이 보살마하살에게는 물러나지 않음의 모양이 있는 줄 알지니라.

 

또 선현아, 

만일 보살마하살이 꿈에 여래ㆍ응공ㆍ정등각께서 갖추신 서른 두 가지 거룩한 이의 몸매[三十二大士夫相]와 여든 가지 잘 생긴 모습[八十隨好]으로 원만하게 장엄하시고 원광(圓光)이 한 길이나 되어 둘레를 비추시며 필추들과 함께 공중에 솟아올라 큰 신통을 나타내시고 바른 법을 말씀하여 변화로 불사를 지으시며 다른 지방의 그지없는 불국토에 가서 불사를 베풀게 하시는 것을 보면, 

선현아, 

이 보살마하살에게는 물러나지 않음의 모양이 있는 줄 알지니라.

 

또 선현아, 

만일 보살마하살이 꿈에 미쳐 날뛰는 도적이 마을을 파괴하고 혹은 불이 나서 마을을 태우며 혹은 호랑이나 사자의 사나운 짐승과 독사나 악한 전갈이 와서 몸을 해치려 하고 혹은 원수가 그의 목을 베려 하며 혹은 부모와 형제와 자매와 처자와 친구가 목숨을 마치려 하고 혹은 자기 몸이 춥고 덥고 배고프고 목마르고 그 밖의 고통에 시달리는 등의 이러한 두려워 할 만한 일을 보고도 놀라지 않고 두려워하지 않고 근심하지도 않다가 꿈에서 깨어난 뒤에 생각하기를 ‘삼계(三界)는 거짓이어서 모두가 꿈에서 본 것과 같다. 

나는 위없는 큰 깨달음을 증득할 때에 모든 유정들에게 삼계는 모두 허망하여 다 꿈의 경계와 같다는 것을 널리 말하리라’고 하면, 

선현아, 

이 보살마하살에게는 물러나지 않음의 모양이 있는 줄 알지니라.

 

또 선현아 만일 보살마하살이 꿈속에서 지옥과 방생과 아귀 세계의 유정들이 있음을 보면 생각하기를 ‘나는 모든 보살마하살의 행을 부지런히 닦아서 위없는 바르고 평등한 깨달음에 속히 나아가겠으며, 

위없는 큰 깨달음을 얻었을 때에 나의 불국토에는 지옥과 방생과 아귀 세계의 유정들이 없으며, 

내지 악취(惡趣)의 이름조차도 없게 하리라’ 하고, 

꿈에서 깨어난 뒤에도 이렇게 생각하면, 

선현아, 

이 보살마하살은 장차 부처님이 되었을 때에 그의 불국토에는 틀림없이 악취가 없을 줄 알지니, 

왜냐하면 선현아, 

꿈속이나 생시의 모든 법은 둘이 없고 두 가지의 구분이 없기 때문이니라. 

선현아, 

이 보살마하살에게는 물러나지 않음의 모양이 있는 줄 알지니라.

 

또 선현아, 

만일 보살마하살이 꿈속에서 불에 지옥 등의 유정들이 타는 것을 보거나 혹은 또 성과 읍과 마을들이 타는 것을 보고 곧 서원을 세우기를 ‘만일 제가 이미 물러나지 않은 수기를 받은지라 장차 위없는 바르고 평등한 깨달음을 얻을진댄, 

이 큰 불이 단번에 꺼지면서 맑고 시원한 것으로 변하여지이다’고 할 때에, 

선현아, 

이 보살마하살이 이런 서원을 세운 뒤에 꿈속에서 불이 이내 꺼진 것을 보게 되면 그는 바로 물러나지 않는 보살마하살인 줄 알 것이요, 

이런 서원을 세운 뒤에 만일 불이 꺼지지 않으면 아직 물러나지 않는 지위를 얻지 못했는 줄 알 것이나, 

선현아, 

이 보살마하살에게는 물러나지 않음의 모양이 있는 줄 알지니라.

 

또 선현아, 

만일 보살마하살이 생시에 실제로 큰불이 갑자기 일어나서 모든 성과 읍을 태우거나 마을을 태우는 것을 보고 생각하기를, 

‘나는 꿈속에서나 생시에 일찍이 스스로가 물러나지 않는 지위의 모든 행과 형상과 모양이 있음을 보았거니와 그것은 허망한 것인가, 

진실한 것인가. 

만일 내가 본 것이 진실로 있는 것이라면, 

이 불이 단번에 꺼지면서 맑고 시원한 것으로 변하여지이다’고 하면, 

선현아, 

이 보살마하살이 이러한 서원으로 진실한 말을 할 때에 큰불이 단번에 꺼져버리면 그는 바로 물러나지 않는 보살마하살인 줄 알 것이요. 

이런 서원으로 진실한 말을 할 때에 불이 꺼지지 않으면 아직 물러나지 않는 지위를 못 얻은 줄 알 것이나, 

선현아, 

이 보살마하살에게는 물러나지 않음의 모양이 있는 줄 알지니라.

 

또 선현아, 

만일 보살마하살이 생시에 불이 모든 성읍을 태우고 흑은 마을을 태우는 것을 보고 생각하기를, 

‘나는 꿈에서나 생시에 일찍이 스스로가 물러나지 않는 지위의 모든 행과 형상과 모양이 있음을 보았다. 

만일 내가 본 것이 진실로 잇는 것이어서 반드시 위없는 큰 깨달음을 얻게 된다면, 

이 큰불이 단번에 꺼지면서 맑고 시원한 것으로 변하여지이다’고 하면, 

선현아, 

이 보살마하살이 이런 서원으로 진실한 말을 할 때에 그 큰불이 단번에 꺼지지 않고 한 집만을 태우고는 한 집을 건너뛰어 다시 한 집을 태우거나 혹은 한 마을만을 태우고는 한 마을을 지나서 다시 한 마을을 태우는 등 이렇게 하다가 점차로 꺼지면, 

선현아, 

이 보살마하살은 스스로가 이미 물러나지 않는 지위를 얻었는 줄 알지니라.

 

그러나, 

화재를 당한 이는 그 유정이 지은 바른 법을 무너뜨린 업이 자라난 연유이니, 

그는 이 업으로 말미암아 전생에 악취에 떨어져서 한량없는 겁 동안 고통의 과보를 받다가 지금 사람으로 태어나서 그의 남은 재앙을 받는 것이며, 

아니면 이 업으로 말미암아 장차 악취에 떨어져서 한량없는 겁 동안 고통의 과보를 받을 것을 지금 인취(人趣)에서 먼저 조그마한 재앙을 보이는 것이니라. 

선현아, 

앞의 보살마하살에게는 물러나지 않음의 모양이 있는 줄 알지니라.

또 선현아, 

앞에서 말한 갖가지 인연에 의하여 그가 물러나지 않는 보살마하살임을 알 것이며, 

다시 다른 모든 행과 형상과 모습을 성취하여도 그는 물러나지 않는 보살마하살임을 알아야 되므로, 

너에게 말할 것이니 너는 자세히 들어야 하느니라.”

 

선현이 대답하였다.

“예, 

그러하겠습니다. 

말씀하여 주십시오.”

 

부처님께서 선현에게 말씀하셨다.

“만일 보살마하살이 어떤 남자나 혹은 어떤 여인이 그의 앞에서 사람이 아닌[非人]무리에게 홀리는 것을 보고 생각하기를. 

‘만일 모든 여래ㆍ응공ㆍ정등각께서 내가 이미 청정한 의요(意樂)를 얻은 줄 아시면 나에게 위없는 바르고 평등한 깨달음의 수기를 주시리라. 

만일 내가 오래부터 청정한 뜻 지음[作意]을 일으켜 위없는 바르고 평등한 깨달음을 구하였다면 성문이나 독각의 의요를 멀리 여의었으리니, 

성문이나 독각의 뜻 지음으로서 위없는 바르고 평등한 깨달음을 구하지 않으리라. 

만일 내가 장차 오는 세상에 반드시 위없는 바르고 평등한 깨달음을 증득할진댄 미래의 세상이 다하도록 모든 유정들을 이익되게 하고 안락하게 하리라.

 

만일 시방 세계에 현재 계신 한량없는 여래ㆍ응공ㆍ정등각께서 미묘한 법을 말씀하시어 유정을 이롭게 하고 안락하게 하신다면, 

그 모든 여래ㆍ응공ㆍ정등각께서는 보시지 않음이 없으시고 모르시는 바가 없으시고 이해하지 못하심이 없으시고 증득하지 않으심이 없으시므로 지금 온갖 유정들의 의요의 차별을 아시고 보시고 깨달으시리라.

원하옵건대, 

제가 생각하는 바와 진실한 말씀을 자세히 살피시어 만일 제가 실로 보살의 행을 닦아 반드시 위없는 바르고 평등한 깨달음을 얻어서는 유정들의 나고 죽는 고통을 구제할 수 있다면 이 남자 혹은 이 여인을 사람 아닌 것에게 시달림을 받지 않게 하시며, 

그는 저의 말에 따라 곧 버리고 떠나게 하소서’ 하면, 

선현아, 

이 보살마하살이 이런 말을 할 때에 만일 그 사람 아닌 것이 버리고 떠나지 않으면 그 보살마하살은 아직 여래ㆍ응공ㆍ정등각에게서 위없는 바르고 평등한 깨달음의 수기를 받지 못한 줄 알지니라.

 

선현아, 

이 보살마하살이 이런 말을 할 때에 만일 사람 아닌 것이 이내 떠나게 되면 이 보살마하살은 이미 여래ㆍ응공ㆍ정등각에게서 저 위없는 바르고 평등한 깨달음의 물러나지 않는 수기를 받은 줄 알지니라.

선현아, 

만일 보살마하살이 이와 같은 모든 행과 형상과 모양을 성취하면, 

그가 바로 물러나지 않은 보살마하살인 줄 알지니라.

 

또 선현아, 

어떤 보살마하살이 아직 보시바라밀다를 잘 닦아 배우지 못하고, 

정계ㆍ안인ㆍ정진ㆍ정려ㆍ반야 바라밀도 잘 닦아 배우지 못했으며, 

아직 내공에 잘 머무르지 못하고, 

외공ㆍ내외공ㆍ공공ㆍ대공ㆍ승의공ㆍ유위공ㆍ무위공ㆍ필경공ㆍ무제공ㆍ산공ㆍ무변이공ㆍ본성공ㆍ자상공ㆍ공상공ㆍ일체법공ㆍ불가득공ㆍ무성공ㆍ자성공ㆍ무성자성공에도 잘 머무르지 못했으며, 

아직 진여에 잘 머무르지 못하고, 

법계ㆍ법성ㆍ불허망성ㆍ불변이성ㆍ평등성ㆍ이생성ㆍ법정ㆍ법주ㆍ실제ㆍ허공계ㆍ부사의계에도 잘 머무르지 못했으며, 

아직 괴로움에 대한 성스러운 진리에 잘 머무르지 못하고, 

괴로움의 발생ㆍ괴로움의 소멸ㆍ괴로움의 소멸에 이르는 길에 대한 성스러운 진리에도 잘 머무르지 못했으며, 


 

아직 4념주를 잘 닦아 배우지 못하고, 

4정단ㆍ4신족ㆍ5근ㆍ5력ㆍ7등각지ㆍ8성도지도 잘 닦아 배우지 못했으며, 

아직 4정려를 잘 닦아 배우지 못하고 4무량과 4무색정도 잘 닦아 배우지 못했으며, 

아직 8해탈을 잘 닦아 배우지 못하고, 

8승처ㆍ9차제정ㆍ10변처도 잘 닦아 배우지 못했으며, 

아직 공해탈문을 잘 닦아 배우지 못하고, 

무상ㆍ무원 해탈문도 잘 닦아 배우지 못했으며, 

아직 다라니문을 잘 닦아 배우지 못하고, 

삼마지문도 잘 닦아 배우지 못했으며, 

아직 보살의 정성이생(正性離生)에 들지 못하고, 

아직 온갖 불법을 다 닦아 익히지 못하여 보살의 방편선교를 여의었으면, 

악마의 시달림을 면치 못하고 모든 악마의 일을 깨닫지 못하리니, 

스스로 선근의 후박(厚薄)을 헤아리지 않으면서 모든 보살마하살의 진실한 말만을 본받으면 곧 악마의 시달림을 받는 것이니라.

 

선현아, 

이 보살마하살은 어떤 남자나 어떤 여인이 그 앞에서 사람 아닌 것에게 홀리는 것을 보고 곧 경솔하게 진실한 말을 하되, 

‘만일 내가 과거의 모든 부처님에게서 위없는 바르고 평등한 깨달음의 물러나지 않는 수기를 받았었다면 이 남자와 여인들이 사람 아닌 것에게 시달림을 받지 않게 되고 그는 나의 말에 따라 속히 버리고 떠나리라’ 하면, 

선현아, 

이 보살마하살이 이 말을 할 때에 악마가 혹란(惑亂)시키기 때문에 이내 욱질러서 사람 아닌 것을 떠나가게 하느니라. 

그 까닭이 무엇이냐 하면, 

악마의 위력은 저 사람 아닌 것보다 뛰어나기 때문이니, 

그러므로 사람 아닌 것은 악마의 분부를 받고 떠나가는 것이니라.

선현아, 

이 보살마하살은 이런 일을 보고 기뻐 뛰면서 말하기를 ‘사람 아닌 것이 버리고 가는 것은 이는 나의 위력이다. 

그 까닭이 무엇이냐 하면, 

사람 아닌 것이 내가 일으킨 서원에 따라 곧 이 남자와 여인을 놓아주기 때문이요 다른 까닭은 없다’ 하면, 


 

선현아, 

이 보살마하살은 악마의 짓임을 깨닫지 못하고 그것이 자기의 힘이라 하여 허망하게 기뻐하는 것이며, 

그리고 이를 믿고서 경솔하게 모든 다른 보살들을 희롱하되 ‘나는 이미 과거의 모든 부처님으로부터 위없는 바르고 평등한 깨달음의 물러나지 않는 수기를 받았으므로 일으키는 서원은 모두가 헛되지 않거니와, 

그대들은 아직 모든 부처님의 수기를 아직 못 받았으므로 나를 본받아 진실한 말을 내지 말지니라. 

설령 바라는 것이 있다 해도 반드시 헛된 일이요 결과가 없으리라’ 하느니라.

 

선현아, 

이 보살마하살은 경솔하게 모든 보살들을 헐뜯은 까닭에, 

조그마한 재수를 망령되이 믿고 모든 공덕에 대하여 여러 가지 뛰어난 체함[增上慢]을 낸 까닭에 위없는 바르고 평등한 깨달음을 여의고 일체지지(一切智智)를 증득할 수 없느니라.

선현아, 

이 보살마하살은 선교방편의 힘이 없는 까닭에, 

여러 가지의 뛰어난 체함을 낸 까닭에, 

모든 보살들을 업신여기고 헐뜯은 까닭에, 

비록 부지런히 정진한다 하더라도 성문지나 독각지에 떨어지느니라.

선현아, 

이 보살마하살은 복과 덕이 박하기 때문에 짓는 착한 업과 하게 되는 진실한 말은 모두가 악마의 일을 일으키느니라.

 

선현아, 

이 보살마하살은 모든 선지식(善知識)을 가까이 하고 공양하고 공경하고 존중하고 찬탄할 수 없으며, 

물러나지 않는 보살의 행상(行相)을 청하여 물을 수도 없으며, 

악마들이 짓는 일을 물어 알 수도 없나니, 

이로 말미암아 악마의 속박은 더욱 더 굳어지느니라. 

까닭이 무엇이냐 하면, 

이 보살마하살은 보시ㆍ정계ㆍ안인ㆍ정진ㆍ정려ㆍ반야 바라밀다를 오래도록 수행하지 않았으며 내지 방편선교를 멀리한 까닭에 악마에게 시달림을 받는 것이니, 

그러므로 선현아, 

모든 보살마하살은 갖가지의 악마의 일을 잘 깨달아 알아야 하느니라.”

 

그때 구수 선현이 곧 부처님께 아뢰었다.

“세존이시여, 

어떻게 보살마하살이 보시ㆍ정계ㆍ안인ㆍ정진ㆍ정려ㆍ반야 바라밀다를 수행한 것이 오래지 않고, 

내공ㆍ외공ㆍ내외공ㆍ공공ㆍ대공ㆍ승의공ㆍ유위공ㆍ무위공ㆍ필경공ㆍ무제공ㆍ산공ㆍ무변이공ㆍ본성공ㆍ자상공ㆍ공상공ㆍ일체법공ㆍ불가득공ㆍ무성공ㆍ자성공ㆍ무성자성공에 머무른 것이 오래지 않고, 

진여ㆍ법계ㆍ법성ㆍ불허망성ㆍ불변이성ㆍ평등성ㆍ이생성ㆍ 법정ㆍ법주ㆍ실제ㆍ허공계ㆍ부사의계에 머무른 것이 오래지 않고, 

괴로움ㆍ괴로움의 발생ㆍ괴로움의 소멸ㆍ괴로움의 소멸에 이르는 길에 대한 성스러운 진리에 머무른 것이 오래지 않고, 

4념주ㆍ4정단ㆍ4신족ㆍ5근ㆍ5력ㆍ7등각지ㆍ8성도지를 수행한 것이 오래지 않고, 

8해탈ㆍ8승처ㆍ9차제정ㆍ10변처를 수행한 것이 오래지 않고, 

공ㆍ무상ㆍ무원 해탈문을 수행한 것이 오래지 않고, 

다라니문과 삼마지문을 수행한 것이 오래지 않아, 

아직 보살의 정성이생에 들지도 못했고 아직 온갖 불법을 구족하게 수행하지도 못하여 보살의 방편선교를 멀리하였는데 모든 악마의 요란(擾亂)함을 받습니까?”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선현아, 

악마가 변화로 갖가지의 형상이 되어 이 보살마하살의 앞에 와서 방편으로 속이되, 

‘답답하구나, 

선남자야. 

그대 스스로가 모르는가, 

과거의 모든 부처님께서 일찍이 그대에게 큰 깨달음의 수기를 이미 주셨으므로 그대는 위없는 바르고 평등한 깨달음을 기필코 얻을 것이며 다시는 물러나지 않으리라. 

그대의 이름은 아무개고 부모의 이름은 아무개고 형제의 이름은 아무개고 자매의 이름은 아무개고 친우와 권속과 내지 7세(世) 동안의 부모와 종친의 이름은 각각 아무개 아무개며, 

그대는 어느 쪽 어느 나라 어느 성 어느 읍 어느 마을 안에 살고 있었으며, 

그대는 어느 해 어느 달 어느 날 어느 때 어느 별과 재상과 왕일 때에 태어났었느니라’고 하느니라.

선현아, 

이러한 악마는 만일 이 보살의 마음씀이 부드럽고 근성이 무딘 것을 보면 거짓으로 수기하되, 

‘그대는 전생에도 마음씀이 부드럽고 근성이 무디었느니라’ 하고, 

이러한 악마는 만일이 보살의 마음씀이 억세고 근성이 영리한 것을 보면 거짓으로 수기하되 ‘그대는 전생에도 마음씀이 억세고 근성이 영리하였느니라’ 하느니라.

이러한 악마는 만일 이 보살이 아련야(阿練若)에 있거나 혹은 무덤 사이에 있거나 혹은 맨 땅에 있거나 혹은 나무 아래 있거나 혹은 항상 걸식을 하거나 혹은 한 번만 받아서 먹거나 혹은 한 곳에 앉아서 먹거나 혹은 한 바리만을 먹거나 혹은 누더기 옷을 입거나 혹은 세 벌의 옷만을 지니거나 혹은 항상 앉아 있고 눕지 않거나 혹은 묵은 방석을 깔거나 혹은 욕심이 적거나

 

혹은 만족함을 좋아하거나 혹은 멀리 여읨을 좋아하거나 혹은 바른 생각을 갖추거나 혹은 고요한 선정을 좋아하거나 혹은 묘한 지혜를 갖추었거나 혹은 이양을 소중히 여기지 않거나 혹은 명예를 귀중하게 여기지 않거나 혹은 청렴 검소함을 좋아하여 그 발에 흙을 묻히지 않거나 혹은 잠을 줄이거나 혹은 들뜨지 않거나 혹은 말이 적은 것을 좋아하거나 혹은 부드러운 말을 즐기거나 한 것을 보게 되면, 

이 악마는 이 보살의 갖가지의 행을 보고 나서 곧 수기하되 ‘그대는 전생에도 일찍이 이와 같이 아련야에 있었고 또는 무덤 사이에 있었으며, 

내지 말이 적었고 부드러운 말을 하였었느니라. 

그 까닭이 무엇이냐 하면, 

그대는 지금 이와 같은 갖가지의 두타[杜多] 공덕을 성취하여 세간이 함께 보는 것은 전생에서도 틀림없이 이러한 갖가지의 수승한 공덕이 있었던 까닭이니, 

응당 스스로가 경하할 일이요 가벼이 여기지는 말아야 하느니라.

 

선현아, 

이 보살마하살은 이 악마가 그의 전생과 오는 세상의 훌륭한 공덕과 현재의 자신의 친족과 이름의 차별이며 태어난 곳과 태어난 때와 아울러 갖가지 두타의 공덕을 말하는 것을 듣고 기뻐하고서 교만한 마음을 내어 다른 보살들을 업신여기고 헐뜯느니라.

 

선현아, 

그때에 악마는 이 보살의 마음이 암둔한 것을 알고 다시 말하기를 ‘그대에게 이와 같은 공덕의 형상이 있음을 보아 과거의 여래ㆍ응공ㆍ정등각께서는 이미 그대에게 큰 보리의 수기를 주셨었다. 

그대는 위없는 바르고 평등한 깨달음을 반드시 증득할 것이요 다시는 물러나지 않는다’ 하느니라.

 

선현아, 

이때에 악마는 그를 요란시키기 위하여 출가한 이의 형상으로 변화하여 혹은 집에 있는 이의 형상으로 변화하여 혹은 부모의 형상으로 변화하여 혹은 형제의 형상으로 변화하여 혹은 자매의 형상으로 변화하여 혹은 친한 벗의 형상으로 변화하여 혹은 범지(梵志)의 형상으로 변화하여 혹은 스승의 형상으로 변화하여 혹은 하늘ㆍ용ㆍ약차ㆍ인비인 등의 갖가지의 형상으로 변화되어 이 보살마하살에게로 와서 말하되, 

‘과거의 여래ㆍ응공ㆍ정등각께서 오래 전에 이미 그대에게 큰 깨달음의 수기를 주셨었다. 

그대는 위없는 깨달음을 기필코 얻을 것이요 다시는 물러나지 않으리라. 

왜냐하면 모든 물러나지 않는 지위의 보살마하살의 공덕과 형상을 그대는 모두 갖추고 있기 때문이니, 

스스로가 존중히 여길 것이요 망설이지 말지니라.’

 

선현아, 

내가 말한 것과 같은 것을 실제로 얻어야 물러나지 않는 보살마하살의 모든 행이요 형상이요 모양인데, 

이 보살마하살은 뛰어난 체한 것이요, 

실로 모두가 있지 않느니라.

선현아, 

이 보살마하살은 악마에게 붙잡히고 악마에게 홀린 줄 알 것이니, 

왜냐하면 이 보살마하살은 물러나지 않는 보살마하살의 모든 행과 형상과 모양을 실로 모두 가지지 못했으면서 다만 악마가 말한 그의 공덕과 이름과 태어난 곳과 태어난 때가 조금 비슷한 것만을 듣고 교만심을 내어 다른 보살들을 업신여기고 헐뜯기 때문이니라. 

그러므로 선현아, 

만일 보살마하살이 위없는 바르고 평등한 깨달음을 증득하고자 하면, 

의당 이러한 악마의 일을 잘 깨달아 알아야 하느니라.”

 


○ [pt op tr]




◆vvty5756

◈Lab value 불기2561/02/22



Lab value 불기2564/02/16/일/16:01


[오래된조각글재정리]

☎잡담☎ = 순전한 잡담부분

● = 논의부분

사이트가없어진개인촬영사진 = 사진파일명만 기재










문서정보 ori http://buddhism007.tistory.com/2963#5756
sfed--대반야바라밀다경_K0001_T0220.txt ☞제332권
sfd8--불교단상_2561_02.txt ☞◆vvty5756
불기2561-02-22
θθ



♥아래 부분은 현재 작성 및 정리 중인 미완성 상태의 글입니다♥





Aldebert - Indelebile
Mireille Mathieu - Toi L'indien Mon Ami
French Anthology Bounds Of Dandysm - Dans La Ville Endormie





[불교공부_단상]_256102_03
08gfl--불교공부_단상_2561_02.txt

http://buddhism007.tistory.com/2963
http://story007.tistory.com/entry/불교공부단상256102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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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eax1479

◈Lab value 불기2561/02/28/화/05:08

2017_0122_124102_nikon_ct33.jpg





○ [pt op tr]  mus0fl--Patrick Bruel - Elle M'regardait Comme Ca.lrc


 
♥ 잡담 ♥지옥의 공 수행자의 지옥 탈출방안 

요즘 본인이 고물 전자제품을 수리하는 일을 반복한다.
그런데 동시에 거리를 거닐면서 예술품을 만들 재료를 수집하는 
넝마 활동도 병행한다. 

어제는 거리를 거닐면서 이상한 물건들만 모아서 파는 분을 
만나 그간 인터넷에서 주문해 구한 선들도 몇개 구하고 
또 이상한 부품도 구했다. 
그리고 또 길을 가다가 이상한 예술작품도 하나 주어 가지고 왔다. 

왠만하면 재활용 가능한 물건은 주어 오지 않는다. 
그런데 예술작품이 상당히 심오한 상태를 표현하고 있다.
그래서 본인이 옥상기지에 걸어둘 생각으로 가지고 왔다. 

그런데 노래에서 본인이 무간지옥에 들어간다고 경고장을 발부받았다.
그래서 그 일을 생각하면서 길을 걸었다.
그런데 약사유리광 여래님이 이에 대해 메세지를 전한 것이 아닌가 여기게 된다. 
일전에 유리를 수리해주신 분 가게 앞에서 그 작품을 주어왔기 때문이다. 
나중에 사진을 촬영해서 올릴 수 있으면 올리기로 한다. 

무간지옥에 들어간다는 메세지가 어디에 나오는가 하고 의문을 갖게 되면 
노래를 올려 놓고 같이 감상을 해야 한다.
그러나 이런 노래를 듣고 이를 징크스로 받아들이기 쉽다.
그리고 불쾌하게 여기는 경우도 있다.


그래서 우선 지옥의 공 수행자의 지옥 탈출방안에 대해 
충분히 설명하고자 한다.
그리고 이후 기회가 되면 올려 놓기로 한다. 

다만 무간지옥에 수많은 중생이 있다고 해도 
다 노래에서 소개하는 것이 아니다. 

그래도 자신을 지목하여 소개한다는 것은  
얼마나 대단한가라고 감상을 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지금 뽑힌 곡에서는 자꾸 감사 감사 한다는 메세지가 들린다. 
사실 본인이 감사라고 듣는 부분은 
불어 부분을 보면 한자어 '여시'에 준하는 말이다. 
영어로 LIKE THAT 이렇게 번역된다. 

그런데 수행자는 모든 상황을 주어진 그대로 놓고 
감사함을 느끼는 자세가 기본적으로 필요하다. 
그리고 종합적 시감상을 해보면 그렇게 감상하게 된다. 

여하튼 같은 노래를 들으면서 
제각각 엉뚱하게 감상을 하게 되는 사정이 있다.


그런데 이런 현상에 대해 혼동을 일으키고 어지러움을 느낀다면 
다음 넌센스 퀴즈가 도움된다. 
어떤 이가 귀가 잘 안들린다고 한다. 
그런데 어떤 이가 그에게 백제 신라 고구려 
이런 말을 했다고 하자. 

이런 소리를 놓고 
그가 알아들을 가능성이 있는 의미를 
우선 다음과 같이 3 가지를 나열할 수 있다. 

1 - 3 국시대의 백제 신라 고구려
2 - 백지에 신나게 (그림을) 그려.
3 - 배를 째려고 하시는 겁니까. 

3 번의 해석은 보충설명이 필요하다. 
비속어 가운데 
어떤 일에 고집을 피우면서 막무가내로 임하는 경우 
배 째라는 식으로 배짱으로 버틴다고 표현하기도 한다. 
그래서 그 상대가 3 과 같은 표현을 하게도 된다. 

번역하면 그처럼 막무가내로 임하시려고 하십니까. 이러한 의미다. 
그런데 이것이 연음현상으로 비슷하게 들릴 수 있다. 

문제는 이 가운데 주로 어떤 의미로 듣는가는 
그 개인이 그 상황에서 어떤 생각을 하고 임하는가에 따라 달라진다. 
이는 넓게 보면 문맥과 맥락에 의한 해석방법이다. 

'배'는 때로는 먹는 배도 된다. 

때로는 타는 배도 된다.
때로는 사람의 몸의 부분을 가리키기도 한다. 
두 배 세 배 이런 의미도 가리킨다.
그외 다른 의미가 많다.
그런데 구체적인 경우에 이 가운데 어떤 의미인가는
앞과 같은 방식으로 사람들이 판단한다. 






참고로 이 문제를 좀 더 살피기로 하자. 

이렇게 이해하는 경우 prince 님처럼 문제가 복잡해지는 경우가 있다. 

예를 들어 자신이 병에 든 액체를 석유로 보았다. 
그런데 알고보니 물이다. 
그래서 처음에 석유로 본 것은 착각이다. 
그리고 물로 보는 것은 옳은 판단이다. 

그런데 이 둘은 모두 그렇게 직접 보고 그 내용을 그렇게 얻는다. 
그런데 왜 하나는 옳은 판단인가가 문제된다.
이 경우 그 병 액체를 가지고 
다른 상황에서 일일히 판단해보면 그런 판단을 얻는다고 주장한다. 

예를 들어 그 병에 든 것을 마시면 시원하고 탈이 없다. 
또 불이 나면 그것을 부으면 꺼진다. 
그래서 자신이 물로 본 내용은 이런 내용을 얻게 되어 옳다.
이에 반해 석유로 보았다면 그것은 그렇지 않아 잘못이다 
이런 주장을 제시한다. 

상식적으로 이런 입장이 진리판단과정에서 제시된다. 
설득력이 있다. 
prince 님의 입장도 이와 유사하다. 

그런데 그 액체를 물이라 볼 때 
'제상비상'의 내용이 적용되는 사정을 이해해야 한다. 





[img2-49] [그림] - 이하 아래 부분은 현재 [작성, / 표현교정, 수정, 보완/ 문단 재배치 순서 정리 등 ] 작업중입니다. -

작업시작시점 2564_0416_214409


- 그래서 이 문제를 여기서 잘 이해해보자. 
처음에 무언가를 놓고 물인가 석유인가 
이 가운데 어떤 것이 착각이고 어떤 것이 옳은 내용인가가 문제된다고 해보자. 
만일 어떤 이가 그렇게 옳음이 문제되는 내용을 
단순히 무한히 반복해 제시한다고 해서 그것이 옳게 되는 것은 아니다. 
처음에 석유로 본 것이 착각이라고 한다면 
그 석유로 보는 현상을 반복한다고 해서 
그것이 옳다고 볼 근거가 되지 못한다. 

그 진위가 문제되는 성격이 같은 내용을 
반복해서 쌓는다고 그것이 옳은 것이 되지 못한다. 


위조지폐의 진위가 문제될 때 
같은 위조지폐를 무한히 반복해 쌓아 제시한다고 해서 
처음 위조지폐가 올바른 지폐가 된다고 보지 못하는 것과 
사정이 같다. 

눈병의 예를 들어보자. 
눈병이 걸려서 계속 눈앞에 뿌연 물체가 보인다고 해보자. 
오늘도 보이고 내일도 보이고 눈병 걸린 상태에서 
그런 모습을 계속 반복해 보게 된다고 해서
그것이 정말 눈앞에 그런 물체가 있어서 보게 되는
올바른 내용이라고 할 수 있는가. 
이것이 문제인 것이다. 

그런데 이런 논의에서 눈병 걸린 어떤 이가 
눈병 걸린 상태에서 본 다른 모습을 계속 제출해서 
자신이 눈병에 걸려 본 모습이 옳음을 입증하려 한다면
그것이 과연 적절한 주장인가가 문제되는 것이다. 

그런데 현실에서는 이것이 통용되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앞의 방식으로 주장해서 
그렇게 통용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물이 맞다고 주장하는 이가
제시하는 다른 내용들은
다 같은 자격에 놓이는 내용들인 것이다.

처음 그것이 옳은가를 문제삼을 때는 
그렇게 증거로 제시할 만한 내용도 
같은 문제가 제기되는 지위를 갖는 내용들인데 

여기서 그 주장자는 첫 문제는 문제이지만, 
다른 것들은 마치 문제가 아닌 것처럼 
잘못 판단하고 그것을 가지고 
그 내용이 옳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그럴려면 그런 근거도 필요없는 것이다. 

그냥 착각이던 잘못이던
그 내용을 그냥 계속 반복하면 
그 자체로 옳게 된다고 보는 것과
사실은 마찬가지인 것이다. 

이것이 우물에 갇힌 사람이
우물 안에서 얻는 내용을 가지고
계속 우물에서 얻은 한 내용의
옳고 그름을 판단하려 하거나, 

꿈에서 얻은 내용을
꿈에서 얻는 다른 내용들로 
옳고 그름을 판단하려 하거나 

게임기에서 나타나는 내용을 
게임기에서 나타나는 다른 내용으로 
옳다고 주장하는 상황과 같은 것이다. 

게임기에서 물이라고 보는 내용을
게임기안에서 불로 표시된 부분에 부으면 
게임기안에서 그 불이라고 표시된 부분이 사라진다. 

그러니 그 게임기에서 물이라고 제시된
그 상자안의 내용은 물이다. 

이런 주장인 것이다. 

그런데 이 각 주장이 
우물안에서나 꿈 안에서나 게임 안에서는 
상당히 설득력이 있게 통용이 되는 것이다. 

그리고 더 나아가 그렇게 제 각각 같은 형태로 
갇혀 있는 입장들 사이에서는
그것이 함께 설득력이 있는 내용으로 
받아들여지는 것이다. 

그것은 서로 간에
우물안에서 꿈안에서 게임 안에서
다른 것은 그렇지 않다는 것을 통해서 
무언가 차이가 있다는 것을
함께 인정한다고 제시한 것 뿐이다. 





그런데 지금 무엇이 옳은가 참된가를 논의하는 것은 
이런 성격의 논의가 아닌데 
자꾸 이런 차원의 논의인 것으로 오해하고 
접근하는 것이다. 

정확히 보면 그 첫문제나 이를 입증하는데 사용하는 내용이나 
모두 그것이 무엇을 대상으로 어떤 내용을 얻은 것이고 
그것이 서로 어떤 관계에 있기에 그것을 옳다고 하는 것인가. 
또 잘못이나 착각이라고 하는 것은 
무엇을 대상으로 해 어떤 내용을 얻었기에 그것을 
잘못된 내용이라고 하는가를 문제삼는 것이다. 

감각현실도 사정이 같고
어떤 감각현실의 일정 부분에 대해 어떤 관념분별을 하고
그것이 무엇이라고 생각할 때 감각현실과 관념 사이에서도
같은 문제가 제기되는 것이다. 

그런데 어느 것 하나도 이 문제를 해결하지 않은 상태에서 
단지 같은 문제가 제기되는 다른 감각현실이나 관념을 제시하여
처음 내용의 옳고 그름의 문제가 해결된다고 
이해하려는 입장인 것이다. 



그런데 이것이 바로 희론의 논리이고 논의인 것이다. 

희론을 일삼다보면 자신이 전제한 희론의 바탕에서 
그것이 옳다고 자꾸 고집해 머무는 경향이 생기는 것이다. 

관념영역에서 그런 분별을 행하고 나서 
그 내용은 그 체계에서는 맞는 것 같은데 
왜 이것을 희론이라고 하는가 하면 

그 내용은 당장 감각현실이나 
앞에서 문제삼는 실재의 영역에서 
얻어지지 않는 내용들이기 때문이다. 

그러니 그런 논의는 실답지 않은 것이다. 

자신이 어떤 주장을 할 때 
그래야만 할 것 같다고 여겨서
그것이 있다거나 없다고 주장하는 것은 
사실은 반대 모순되는 주장도 마찬가지다. 

자신이 없다고 주장하는 것도 
사실은 자신이 그런 것을 생각한 것은 
마찬가지인 것이다. 

그래서 관념분별 영역에서는 
그렇게 그런 것이 생각되고
그래서 그런 것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게 되는 사정은 
같은 것이다. 

반대로 누군가 a 가 있다라고 주장하면 
그런 주장은 당연히 그로 인해 
그런 a 가 없다라는 내용도 생각할 만 하지 않은가. 
그렇기에 그런 a 가 없다라고도 해야 한다. 
이런 식으로 주장하면 
이것이 희론 안에서 계속 헤매도는 상태인 것이다. 




그래서 어떤 소리나 말을 놓고 
그것의 참된 의미가 무언가를 놓고 따지는 가운데
무엇은 참된 의미고 다른 것은 아니라는 등의 주장을 하면서
여기에 그와 같이 제시되는 다른 문장이나 소리가 갖는
의미와 그 전체 맥락을 놓고 이를 판단하겠다고 하는 입장은 
기본적으로 이와 같은 성격의 문제인 것이다. 

그런 경우에는 그 맥락이라고 제시한 부분 부분에 대해서도
첫 질문과 동일한 형태의 질문을 또 제기해야 한다고 보는 것이다. 

그것은 불어 노래를 놓고 처음부터 끝까지 
한국말로 엉뚱하게 이해하는데 그러나 
전체적으로 맥락이 이어지면 
그래서 그 의미가 그 노래의 의미라고 고집하는 
입장과 하등 다르지 않게 된다. 


그런 가운데 한 단어의 표준적인 의미는 도대체
무언가가 문제되는 것이다. 




이미 사진 처리를 여러 형태로 한 사진을 올리면서 
이 가운데 어떤 사진이 진짜 참된 모습을 나타낸 사진인가. 
이런 퀴즈를 내면서 
이 문제를 언급한 바 있는데 

전도망상 증상을 바탕으로 판단하는 경우 
이 가운데 무언가가 표준적이고 가장 옳다고 할 
내용이 정해져 있다고 굳게 믿고 임하는 경향을 보인다. 

그래서 그 문제를 이전 조각글에서 언급한 바가 있다. 

그렇다면 금강경에서 제상비상이란 구절을  
제시할 수 없는 것이기도 함을 제시한 것이다. 

사전을 동원하던 
맥락해석방식을 동원하던 
이 가운데 무엇이 옳고 
다른 것은 착각이거나 잘못이라고 주장하는 입장에서는 
그렇게 보아야 할 근거를 스스로 제시해야 하는데 
그렇게 볼 근거가 찾아지지 않는다는 것이 
곧 제상비상의 내용이기도 한 것이다. 

여기서 제상비상은 영의정이나 우의정 좌의정과 같은 제 상들은
비상하다거나 비상상태에 있다거나 이런 의미가 아니고 
모든 상은 실상이 아니다. 
이런 의미인 것이다. 

사정이 이렇기에 
현실에서 대하는 것은
그 일체가 진짜가 아니고 가짜라고 보게 된다. 

그리고 부처님이 언어로 설법하시는 내용은 
모두 그런 상태에서
임의로 그런 명칭을 시설해서
그 사정을 설명을 하는 것이라고 보는 것이다. 


그런데 가끔 일체가 그렇게 진짜가 아니고 
가짜라고 하면 

가짜는 상대적으로 진짜가 있어야 하는 것이고 
그래서 가짜가 있다면 어딘가에 진짜가 반드시 있다고 
주장하는 이도 있다. 



또는 어디에도 진짜라고 할 것이 따로 없다면 
이와 상대하여 무엇을 가짜라고 할 수도 없다. 
따라서 현실에서 얻는 모든 모습은
다 함께 진짜라고 주장하는 경우도 있다. 

가끔 진짜 가짜라는 관념이 서로 상대적인 관계를 갖기에
가짜가 있다거나 진짜가 없다거나 하는 내용을 놓고
이를 바탕으로 그런 황당한 주장을 하는 경우도 있기에 
설명을 덧붙이면 다음과 같다. 



여기서 진짜란 그런 의미가 아니다. 

진짜라는 의미는
꿈처럼 일정한 조건에서만 화합해서 얻고
그런 조건이 사라지면 얻지 못하는 내용이 아닌 것을 찾는 가운데 
관념으로 몽타쥬를 그렇게 구성해서 찾는 어떤 내용인 것이다. 

왜냐하면 실답지 않은 꿈이 사람을 실망시키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렇지 않은 것을 찾는 것이다. 

그런 것이 있어서 그런 관념을 만들었다기 보다는 
꿈과 같이 실답지 않는 내용이 사람을 실망시키므로 
그런 성격이 아닌 것을 진짜라고 관념하고
몽타쥬를 그려서 그에 해당한 것을 찾아 나섰다는 의미다.

여기서 꿈의 내용이 이해가 쉽기에 
이렇게 설명하지만, 
현실에서 얻는 감각현실도 이와 사정이 같은 것이다. 

현실에서 한 과학자가 바위를 대한다면 
그는 사실은 아침에 대할 때 저녁에 대할 때 
또는 밝은 빛에 대할 때 
또 각기 돗수나 색이 다른 안경을 쓰고 대할 때
그 각 경우마다 
그 조건 상황마다 다 다른 내용을 얻는 것이다. 

또 눈으로 대할 때나 손으로 만질 때 등도
다 마찬가지인 것이다. 

그러니 그렇게 얻은 내용을 놓고 
이것의 지위가 문제되는 사정이 있는 것이다. 

그런 각 조건에서 그런 내용을 얻은 것은 이해하는데 

문제는 그 내용이 위에서 제시한 꿈 내용과 
그 성격이 다르다고 할 만한 그런 내용인가가 
문제가 된다는 의미다. 

그렇다고 보는가. 

위에 제시한 내용이
자체적으로 그렇지 못하다는 것을 제시하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이것이 문제가 된 것이다. 

그리고 사정이 이렇기에 
이 사정을 이해하고 
그것이 실답지 않으므로 
꿈에 대해서 요구되는 것처럼 
현실도 그렇게 대해야 
문제가 발생하지 않게 된다고 제시하는 사정이 있는 것이다. 

그리고 꿈이나 현실내용은 그렇다하고 
이제 그런 내용을 나타나게 한 진짜가 이와는 달리  
따로 있는가

또 그런 현실 내용을 나타나게 한 실재는
또 어떤가 등이 문제된 것이다. 
 


그런데 현실에서 얻는 그 모든 내용이나
그런 내용을 나타나게 했다고 추리하는 실재 영역에서나 
그 어디에서도 그런 것은 없다라는 판단을 일단 얻었다는 의미다.

그것이 무아, 무자성, 승의무자성의 의미인 것이다.

사정이 이렇다고 해서 
이제 현실에서 얻는 내용이
처음 몽타쥬를 만들어 찾었던 진짜가 되는 것은 아닌 것이다. 


즉 그것들은 현실에서 얻는 내용처럼 
어떤 조건에서 연기(인과)관계로 서로 화합하여
그런 관계에서만 얻게 되는 내용이 아니면서,  

고정되고 불변한 어떤 내용으로서 그 어떤 A가 아닌 것이다. 


진여 실재는 무아 무자성인 한편
그 내용을 얻지 못하여 공하다라고 표현할 때
이 공하다는 표현는 그런 것을 얻어내지 못하였다는 의미다. 

만일 실재영역에서 그런 것을 얻었다면
실재가 무엇인가 문제가 제기될 때 
그런 A 를 제시하면 될 것이지만, 그렇지 못하다는 것을 
공하다는 표현이 함께 의미하는 것이다. 

그래서 실재가 공하다고 할 때
그 공함이 진짜의 무엇이라고 제시하는 것이 아니다.




그런데 실재를 나타내는
여 앞에 '진'이라는 글자가 붙어 있어서 
이 진여 실재의 공함은
참된 진짜라는 혼동을 일으키기 쉬운 측면이 있다고 본다. 






한편 현실에서 얻는 내용들은
일정조건에서 화합해 얻게 되는 내용이어서 
그런 관계를 떠나서 실재한다고 보는 
실재 그 자체는 아니다.  

그래서 실재와 현실에서 얻는 내용은
그 지위가 다르다. 

그러나 알고 보면
현실에서 얻는 감각현실이나 관념분별 그 일체는 
문제삼는 진여 실재를 떠나서
별도로 다른 영역에서 그 내용을 얻는 것도 아닌 것이다. 

그래서 공한 실재와 현실의 내용은
서로 떨어져 있는 것이 아니라고
제시하게 된다. 


또 대반야바라밀다경에서는 
그런 사정으로
이 공한 실재와 현실의 내용의 관계에 대해서
색불이공 공불이색 색즉시공 공즉시색 수상행식 역부여시
이런 형태로 제시하는 것이다.

처음에 떠나지 않음은 '불리(不離)'라고 한자어로 표현하고 
뒤에서 다르지 않음은 '불이(不異)'라고 한자어로 표현하는데 
여하튼 이런 사정으로 그렇게 제시하는 것이다. 

이 내용은 반야심경에도 그래서 그렇게 제시되고 있다. 

그런데 이 내용으로 곧
현실에서 얻는 색이 곧 공한 실재라고 오해하기도 하는 것이다. 

그러나 본래 처음 논의를 시작할 때 
색은 현실에서 얻는 내용을 그렇게 가리킨 것이고 
그리고 그런 내용이 나타난 본 바탕으로서 
자신과 관계없이 실재한다고 할 내용을 진여 실재로 놓고 

그런 상태에서 
실재와 현실의 관계를 살피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현실에서 얻는 내용들은
그 지위 자체가 지금 문제삼는
공한 실재의 지위에 있는 내용은 일단 아닌 것이다. 



이를 쉽게 설명하면 이는 다음과 같다. 


현실에서 눈을 뜨니 색(모습)이 얻어진다. 
그런데 눈을 감으면 그 모습이 얻어지지 않는다. 

그렇다고 자신이 보던 그 내용이 아예 없어진 것인가. 
아니면 자신이 눈을 감던 뜨던 그와 관계없이 
무언가 그대로 있다고 할 어떤 것은 있는 것인가.
아니면 그런 것은 전혀 없는 것인가. 
그런데 또 만일 그런 무언가가 실재 있다면 그것은 무엇인가. 

이런 문제를 제기하고 
그것을 실재(진여)라고 표현하고 찾는 것이다. 

그러니 자신이 현실에서 얻는 모습, 소리, 등과 같은 색(넓은 의미의 색)과 
수상행식 일체의 내용은 
지금 문제삼고 찾는 진여 실재의 지위에 있는 내용은 
일단 아닌 것이다. 



그리고 그런 가운데 실재를 파악하다보면 
진짜라고 할 어떤 실체로서 무엇이 있는 것도 아닌데 (무아, 무자성, 인무아, 법무아, 승의무자성) 
그런데 또 아무것도 전혀 없다고 하는 것도 아닌 가운데 
그런 실재 내용은 어떤 주체가 직접 끝내 얻지 못하고 

그래서 어떤 주체가
관념분별에서 행하는 내용을 놓고 그런 무언가가
있다 없다 ~이다 ~아니다 ~과같다 ~과 다르다 좋다 나쁘다 등등의 
분별을 행할 수도 없는 것이어서 
그것은 공하다라고 표현을 빌려 그렇게 표현하는 것이라고 
제시하는 것이다. 

그런 가운데 그 공한 실재와 현실에서 얻는 내용의 상호관계를 
살피자면 
일단 색불이공 공불이색 색즉시공 공즉시색 ...
등으로 제시하게 된다는 의미인 것이다. 

그 사정은 현실에서 얻는 그 일체의 내용은 
문제삼는 실재의 지위에 놓이는 그런 내용이 아니고 
따라서 그것들이 문제삼는 공한 실재의 지위에 있는 내용은 아니지만,

그런데 그런 현실내용은 또 
문제삼는 그 공한 실재를 떠나서 
별도로 따로 있는 것도 아닌 것이다. [불리] 

따라서 이 둘은 앞에 제시한 것처럼 
제시할 수 있는 관계에 놓인다고 제시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이처럼 제시한다고 해서 
또 자신이 현실에서 얻은 내용이 
바로 공한 실재 그 자체를 의미한다거나, 
공한 실재에서 현실에서 얻는 내용을 그처럼 얻을 수 있다고 
생각하면 곤란한 것이다. 

그래서 반야심경에서 
그런 공한 실재와 현실에서 얻는 그 일체의 내용의 관계에 대해
또 다음처럼 설명하고 있는 것이다. 

공중 무색 무 수상행식....

그런데 여하튼 이런 내용들은 
색즉시공 공즉시색 이 부분과 함께
다양한 혼동을 일으킬 여지가 있다고 보게 된다. 

더욱이 
발생순서로는
실재 => 감각현실 => 관념분별의 순서라고 보지만, 

어떤 것의 실재가 무엇인가를 문제삼을 때는
이와는 반대로 
관념분별을 바탕으로 무언가를 얻고
그것이 A 라고 한다면 
그런 내용을 얻게 한 본 바탕으로서 실재는
그런 A 와 유사하지만, 그것은 아닌 그 무엇이라고 일단 추정하는 가운데
그런 실재를 찾아 나서는 관계에 있으므로
그것을 그런 사정으로 일단 '같을' '여'자를 사용하여
여라고 표현하는 사정이 있는 것이다.

그래서 이렇게 A 의 실재를 여로 놓고 
그 정체를 찾아 나설 때 
각 입장마다 다양한 엉터리 주장을 내세우게 되므로 

불교에서 그런 실재에 해당하는 참된 내용을 
진여라고 표현하고 
진여 실재는 공하다라라고 제시하는 사정이 
있다고 보는 것이다. 


그런데 이렇게 실재를 '진'여라고 표현하므로 
이제 이 표현을 통해 이 공한 실재가  
현실에서 얻는 내용들과는 다르게
참된 진짜의 내용이라고 오해하거나,

또는 실재에는 참된 진짜의 내용으로서
공함이 그렇게 있다라고 
종합적 혼동을 일으킬 여지가 있는 것이다. 


진여나 실상이라고 표현하는 것은 
현실에서 얻는 내용을 임시적이고 거짓된 것이라고 칭하는 가운데 
 
그런 조건과 관계없이 본 바탕으로서 실재하는 것에 대해
그런 명칭을 붙여 표현하는 것이지만, 
그렇다고 그것이 진짜의 내용이라고 제시하는 것이 아닌 것이다. 

만일 실재 진여의 내용을 찾을 때 
그런 진짜의 내용으로서 무언가 a 가 얻어지고 
그런 a 가 있다면 
실재 진여는 무엇인가라고 문제가 제기될 때
그런 실재 진여는 바로 그런 a 라고 제시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사정이 그렇지 않기에 
무아 무자성이라고 제시하고 
진여 실재는 공하다라고 표현하는 것임을 이해해야 한다. 

그래서 실재 진여가 공하다다는 것을 이해할 때 
이것을 놓고 다시 이것이 참된 진짜라고 여기고 
분별을 행하고 집착을 하면 그것은 또 문제인 것이다. 
 





여하튼 처음 일정조건에서 화합하여 얻는 내용은
그런 조건에서만 화합해 얻는 것이고
그것을 떠나면 얻지 못하는 임시적이고 거짓된 것이기에 
그렇지 않은 것을 진짜라고 몽타쥬를 그려 놓고 찾을 때 
그런 것은 어느 영역에서도 없다라는 판단을 하여 
무아, 무자성을 제시하는 것이다. 

즉, 
무아 무자성은 
무언가 조건에 의지하지 않고 
독자적으로 고정적으로 어떤 성품을 갖고 
존재하는 것은 없다는 의미에서
진짜란 없다고 제시한 것이다. 



그런데 이제 어디에도 그런 진짜는 없다고 한다면, 
이에 상대하여 가짜라고 할 것도 없는 것이니, 
이제 그런 사정으로 어떤 것이나 다 진짜라고 해도 되는가. 
이런 문제가 제기될 수 있다. 


그런데 사정이 앞과 같기에
이제 현실에서 화합을 통해 얻게 되는 감각현실이나 관념분별 일체의 내용을  놓고 
이제 그런 진짜가 없다는 사정때문에

화합해 얻은 현실내용들이
모두 그처럼 조건에 의지하지 않고 얻는 내용으로서 
고정적으로 어떤 성품을 영구히 갖는 진짜가 된다고 
주장할 수 있는가.

그렇지 않은 것이다. 


그래서 그런 진짜가 없기에 
이제 현실에서 얻는 내용이 그런 진짜가 된다고 
주장할 수는 없는 것이다. 








그리고 실재의 공함과 
가(거짓, 임시적인 것)라고 표현하는 현실 내용과의 상호관계를 살필 때 
앞에서 본 것처럼 
이들이 서로 떠나 있는 것이 아니고 
따라서 색불이공 공불이색 색즉시공 공즉시색 등의 관계가 파악되므로 
결국 '공' '가' '중'을 세워 공가중  중도실상관등을 제시하는데 
여기에서 제시하는 '실상'이란 표현도 마찬가지의 의미인 것이다. 

현실에서 얻는 모든 상은 
일정 조건에서 화합해 얻는 것인데 
그런 관계를 떠나 독자적으로 있다고 할 실재의 내용을 
실상이라고 표현하고 찾을 때 
그 내용이 앞과 같이 진짜라고 할 내용이 없고(무아 무자성)
그 사정이 앞에서 살핀 것과 같으니
그런 실상은 공하다고 표현한 것이다. 



그리고 현실에서 얻는 일체의 내용과
이런 공한 실상과의 관계를 살피니, 
현실에서 얻는 내용도 
본 바탕이라고 할 실상을 떠나지는 않은 것이라고 관하는 것이고

그런 가운데 이들 실재나 현상 각 측면 가운데
어느 한 측면에만 극단적으로 치우치지 않고
이 모두를 함께 관하는 입장이 중도실상관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그렇다고
이 가운데 어떤 진짜의 내용이 있다거나, 
현실에서 대하는 내용이
곧 앞에서 문제삼은 그런 진짜라고 제시한 내용은 아닌 것이다. 


그런데 이런 용어나 표현으로 인해 
혼동을 일으키는 경우가 발생하기도 하는 것이다. 






그리고 공한 실재가 무아 무자성이어서 진짜라고 할 내용은 
없다라는 측면과 

공한 실재를 청정한 니르바나라고 제시하는 것과 
또 혼동을 하기 쉽다. 

이것은 공한 실재가 진짜여서
그 상태가 니르바나라고 제시한 것은 아니다. 


그런데 왜 공한 실재를 니르바나라고 제시하는가 하는 사정은 
모든 존재의 본 바탕이라고 할 공한 진여 실재는
그것이 진짜라고 할 무엇이 있다거나
그것이 진짜의 내용이라는 의미는 아니지만,

그 실재 진여에서는
현실에서 문제삼는 생사 고통을 얻을 수 없기에 
니르바나라고 제시한 것이다. 

현실에서 생사 고통을 겪고
이것이 문제가 되는데 
본 바탕에서는 그런 내용을 얻을 수 없다고 제시한 것이다. 

그래서 현실은 본래 그 본바탕에서는
생사고통을 얻을 수 없는 니르바나라고 일단 제시한 것이다. 


그리고 다시 현실도
또 이미 앞에서 살핀 것처럼
이런 실재의 바탕을 떠나지 않은 것이므로 
색불이공 공불이색 색즉시공 공즉시색임을 밝히는 가운데 
또 현실에서 겪는 생사 고통 일체는
사실은 본래 니르바나의 상태인 실재를 떠나지 않은 것임을
제시하는 것이다.


더 나아가 현실에서 얻는 그런 감각현실이나 관념분별도
자세히 살피면
각 주체가 문제삼는 그런 고통이나 생사의 내용은 
사실은 그런 분별 집착을 갖고 대하는 이가 생각하는 것처럼 
그 내용들이 실답게 있는 것이 아니므로 
다시 이 일체가 그대로 또 니르바나라고 제시하게 되는 것이다. 

다시 정리하면 
현실에서 생사 고통이 하나같이 문제가 되고 
이 문제의 해결이 초점이 되는데 

현실의 본 바탕에는 그런 생사고통에 해당하는 진짜도 없고, 
그런 내용도 얻을 수 없는 것이다. 그래서 
본 바탕인 실재는 니르바나의 상태인 것이다. 

그리고 현실은
또 이런 니르바나의 상태와 떠나 있는 것이 아닌 것이므로 
그 본 바탕인 니르바나와 다른 것이 아닌 것이다. (색불이공...색즉시공...) 

그리고 현실을 구성하는 그 하나하나의 내용에도 
문제삼는 생사 고통들은 하나같이
그 안에 실답다고 볼 성품들이 없는 상태인 것이어서
그 자체로도 니르바나라고 보게 되는 것이다.


사정이 이런데도 
그러나 망상분별을 일으켜 
자신이 일으킨 망상분별의 내용이 
실재나 감각현실이나 그 분별 내용에 모두 그처럼 
다 함께 있다고 여기고 
그에 집착을 갖고 대하는 경우에는 

그런 상태에서 위 내용들을 대하고 
그 상태에서 계속 생사 고통을 받아 나가게 되므로 
이것은 문제가 된다고 제시하는 것이다. 

이것이 일체가 고통이다라는 명제를 제시하는 측면이고 


그렇게 제시하는 현실이나 
그런 내용의 본 바탕이라고 할 실재는 
또 본래 그런 문제를 얻을 수 없다는 면은 
바로 제법무아, 일체개공, 열반적정 이런 내용이 
제시되는 측면인 것이다. 








또 한편 이제 반대로
가짜가 있으면 이 가짜가 진짜가 있다는
어떤 근거가 되어 주는가의 문제를 살펴보기로 하자.

만일 그렇다면   
누군가 엉터리 내용을 하나라도 주장하면
그 때마다 바로 그 사정 때문에 
어디엔가 그런 가짜에 상대되는 진짜가 있다는 것도  
밝혀지는 것이라고 생각해야 할 것이다. 

그렇다면 누군가 진짜를 확보하려면 
먼저 아무렇게나 가짜를 마구 만들어내면 되고 
그것으로 그에 상대되는 진짜에 해당된 내용은
존재하게 되는 것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논의과정에서
다음과 같은 착각을 일으킨 것이다. 

즉 이는 주장하는 가운데 
어떤 관념을 하나 만들어 가지면 
그로 인해 그런 내용이 시설되고 성립된다고 하는 주장에 
지나지 않는다. 

문제는 이처럼 관념으로 만든
몽타주에 해당하는 
무엇이 정말 각 영역에서 그처럼 찾아지는가가 문제인 것이지 

관념영역에서 어떤 상대적인 관념을 
생각해 낼 수 있고 없고
이런 것을 여기서 문제삼는 것이 아닌 것이다. 

그래서 진짜 가짜의 논의에서 
이런 주장들은 적절하지 않은 주장이고 
또 현실 사정도 그렇지 않다는 것을 우선 
잘 확인해야 한다. 




이러한 논의에서 
말이 혼동을 일으키는 측면은 있지만, 

논의하는 가운데 
자신이 그 표현으로 나타내고자 하고 
찾고자 하는 내용이 무엇인가를 먼저
명확히 하고 임하지 않으면 

배의 논의를 한다면 
처음에는 타고 다니는 배를 이야기하다가 
나중에는 먹는 배를 논의하고 
최종적으로는 먹고 배부르고 두드리는 배를 이야기하고 
끝날 수도 있음을 주의해야 하는 것이다. 


그래서 진짜 가짜의 논의는 
왜 처음 진짜를 찾아 나섰는가 
그 사정을 이해하고 

왜 진짜라는 내용의 몽타쥬를 
그처럼 정하고 찾아나서게 되고 

그리고 왜 그에 해당한 내용은 
어디에도 없다라는 결론을 얻어내게 되는가를 
잘 이해해야 한다고 본다. 



실재를 찾을 때 진여라는 표현을 사용하는 것은 

일반적으로 사람들이 prince 님처럼 
실재에 대해 엉뚱한 해석과 추리 주장을 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실재를 나타내는 여라는 표현에 
진여라고 하여 참된 실재에 대한 내용을 제시한다는 그런 의미로 
받아들여야 하고 

공한 실재가 곧 참된 진짜의 내용이라거나 
그런 내용이 실재에 있다라고 주장하면 
조금 곤란해지는 것이다. 




여하튼 기본적인 내용을 잘 정리하고 
그 다음 공한 지옥의 수행자가 
지옥에 들어간 다음 
어떻게 이것을 벗어날 것인가. 
이런 문제를 논의하고 연구할 필요가 있다고 본다. 

그것은 법화삼매에서 촉발된 문제이기도 하지만, 
또 최근 들은 노래에서 촉발된 문제이기도 하다. 

그 노래에서 본인이 무간지옥에 들어가는 사유로는 

우선 사랑을 하는데 문을 닫고 사랑을 한다. 
담배를 나누어 핀다. 
그리고 파순에게 자꾸 무언가를 준다. 
이런 내용들이 나열됨을 감상할 수 있다. 

그래서 다음과 같이 앞으로 시정하기로 했다. 


사랑을 하는데 문을 닫고 사랑을 한다.
=> 사랑을 하되 문을 열고 사랑을 한다. => 제한을 두지 않고 널리 온 생명을 사랑한다. 

담배를 나누어 핀다.
=> 담배는 혼자 피던지 무언가를 합하던지 곱하던지 빼던지 하면서 핀다. 

파순에게 자꾸 무언가를 준다.
=> 파순에게 무언가를 줄 뿐만 아니라 무언가를 말하기도 하고, 또 다른 이에게도 같이 준다. 

이런 식으로 변형을 해야 한다고 
보게 된 것이다. 

다른 이가 무언가 잘못을 지적하면 
잘 받아들여서 개선을 하는 노력을 쉬지 않아야 한다고 본다. 





이제 넌센스 퀴즈를 또 풀고 
본격적으로 지옥의 공 수행자 문제를 살피기로 하자. 

앞에서 소리를 잘 듣지 못하는 이에게 
누군가 백제 신라 고구려 이런 말을 했을 때 
3 가지 의미로 달리 듣고 
이 가운데 정답은 없는 가운데 
여러가지 의미가 혼동스럽다고 할 때 

가장 나쁜 의미로 
무간지옥에 들어간다는 의미로 들을 경우는 
위 말로 어떤 의미를 들을 때 그런가를 하나 문제로 풀고 

반대로 가장 좋은 의미로 들을 경우는 
위 말로 어떤 의미를 들을 때일 것인가를 
퀴즈로 풀어보기로 하자. 

이미 3 가지 경우를 제시했으므로 
연구해서 
2 가지를 더 보충해보자는 의미다. 

시감상이 자유이므로 
일단 그런 연구를 해보기로 하자는 의미다. 

그래야 이제 본인이 
이를 바탕으로 다음 논의를 할 수 있다고 보는 것이다. 




어떤 이는 
유리가 하나 깨지면 놀라고
그날 자신은 재수없는 일이 반드시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불안해하는 경우도 있다. 

심지어 현실에서 그런 것이 아니고 
그런 꿈만 꾸어도 그런 경우도 있다. 

그래서 본인이 가끔 이런 이야기를 하게 된다. 

유리란 깨지면 대박이다. 

한자어로 유리란 다양한 의미가 있는데 
그것이 깨진 것이다.

그러니 정말 좋은 것이다. 

왜 꿈에서 대변을 보면 
돈을 번다는 속설이 있다고 보는가. 

대변의 발음이 돈과 비슷하고 
회계장부의 대변 차변에서 대변도 그런 의미와 비슷하고 
여하튼 이것은 자산에 포함되는 내용이 증가된 것이므로
대박이다. 


그리고 불교 전문 용어에서는 
유리란 생멸변화하는 유위법을 가리키고 
한마디로 니르바나가 아닌 상태를 가리키는 용어이기도 한 것이다. 

그런데 그것이 깨졌다는 것은 
니르바나의 상태를 얻었다는 것도 의미하는 것이다. 

그래서 꿈이던 현실이던 
유리가 깨지면 재수가 없는 것이 아니고 
대단히 좋은 일이다. 
이런 식으로 우기는 것이다. 

무간지옥에 연구원들이 들어가게 되었다는 것은 
어떻게 되는 것인가. 

바로 그것이 그런 의미이기도 한 것이다. 


수행자는 왜 현실에서 수행을 하는가. 

바로 생사 고통을 제거하고 
지옥과 같은 세계를 벗어나기 위해서 
수행을 하는 것이다. 


그래서 수행자는 사실은 
전자제품을 그런 취지로
수리를 하는 것이기도 하다. 


현실이 실답지 않다고 해도 
현실에서 전혀 고통이 없다거나 
고통을 받는 상태나 세계로서 지옥과 같은 것이 
전혀 없다거나, 

또는 좋음을 얻어도 그런 고통과 결합되지 않고 
그 결과로 그런 고통을 받지 않는다면 
수행자가 그것을 문제삼을 이유 자체가 없는 것이다. 

실답지 않던 실답던 그런 사정이라면 
왜 그것을 문제삼을 것인가. 

그런데 사정이 그렇지 않기에 
이것을 문제삼고 
그래서 수행을 하게 되는 것이기도 한 것이다. 

그래서 수행자는 
사실은 생사 고통을 벗어나고 
고통을 받는 지옥에서 벗어나고 
그런 상태에 다시는 들어가지 않으려고 
수행을 하는 것이다. 

그래서 실상을 관하고 
계율과 정려와 반야 수행을 해 나가는 것이기도 한 것이다. 



그러니 이것은 수행자가 행해야 할 
전문 핵심 연구 분야인 것이기도 하다. 


전자제품 수리는 수행자의 전문분야가 아닌데 
수행자가 전자제품을 수리한다면 
그것은 또 바로 위와 같은 취지와 관련이 되어서 
그런 취지에서 수리에 임하는 것이라는 의미이기도 하다. 


글이 길지만, 
일단 쉬고 이어 가기로 한다. 





지옥의 공 수행자는 
3 계라는 고통의 생사를 벗어나는 것을 목표로 임하는데 
그것은 삼계가 불이 나서 
자신은 화상을 입고 죽음을 맞이하고 
또 재산은 다 불타 없어지는 사태를 놓고 

어떻게 이것을 벗어날 것인가를 
문제삼는 것과 같다. 

지금 자신이 살고 있는 집이 
내일 불이 나고 자신은 잠자다가 화상을 입고 
병원에 실려가 고통을 받다가 결국 죽게 된다고 예고가 되어 있다고
가정할 때

어떻게 이 문제를 해결할 것인가.

이미 백제 신라 고구려 해석을 할 때
3 가지 방안을 제시했는데
여기에도 일단 기본적으로 그런
3 가지 대처방안이 제시된다고 본다.  

그러니 앞의 넌센스 퀴즈 문제는
잘 음미해 볼 문제라고 본다. 







불교에서는 본래 생사를 얻을 수 없다고 제시하는데 
이 말의 의미를 잘 이해해야 할 필요가 있다. 

이 말은 우리가 장례식장이나 화장터에서 보는 
그런 모습을 일체 얻지 못하고 
그에 대한 관념분별을 전혀 하지 못하게 된다고 제시하는 것이 아니다. 

생생하게 그런 내용도 얻고 
그런 분별도 할 만한 현실에 놓이는데 

다만 그런 현실에 실다운 내용으로서 
그런 것을 얻을 수 없고 
그에 해당한 진짜라고 할 내용은 없다고 제시한 것이다. 

이 말이 현실에서 생생하다고 여기는 
그런 생사 고통에 해당하는 현실 내용을 얻지 못한다고 
제시한 것이 아닌 것이다. 


그래서 아무리
현실에 본래 생사고통을 얻을 수 없다고 해도 
그래도 현실에서 생생하게 얻는 생사고통의 현실이 
문제로 남게 되는 것이다. 



이는 꿈에 비유하면 이렇다. 

꿈은 누가 생각해도 실답지 않음을 쉽게 안다. 
그래서 꿈을 꾸게 되고 꿈을 깨고 
그런 가운데 꿈에서 황금을 얻거나 잃거나 
공중에서 자신이 떨어지거나 해도 
그것은 모두 실답지 않음을 아는 것이다. 

이는 영화나 만화로 비유해도 마찬가지다. 

그런데 문제는 
그렇다고 꿈에서 그렇게 그런 꿈을 꾸고 
꿈안에서 좋아하고 놀라고 할 만한 
그런 내용을 생생하게 얻는 현상이 없다고 
제시하는 것이 아닌 것이다. 

이 두 내용을 혼동하지 않아야 하는 것이다. 



그래서 실다운 내용은 아닌데 
꿈과 관련해서는 무엇이 문제로 남는다고 보는가 하면 

그런 꿈을 꿀 때
실답지는 않지만, 그런 꿈 내용을 생생하게 얻고
또 이 꿈 내용이 꿈꾸는 동안 자신에게 계속 고통을 주고 
또 꿈을 깨고나서도 그 내용 때문에 고통받고 
시달리면 그것이 문제가 되는 것이다. 


이 관계가

현실에서 얻는 내용은
실재가 아니고
실재는 무아, 무자성이고 공하다라고 제시하는 경우에서도 
마찬가지인 것이다. 


본래 생사고통을 얻을 수 없고 
청정한 니르바나라고 하는 것은 
그 측면이 그렇다는 것이지만, 

그러나 그런 바탕에서 
눈을 뜨고 대하는 현실에서는 
실답지는 않다고 하지만,
자신이 고통으로 받아들일 수 밖에 없는 현실을
매 순간 생생하게 얻고 
또 그런 내용으로 고통받는다면 
그것이 앞과 같이 문제가 되는 것인 것이다. 


꿈으로 다시 이 관계를 놓고 
그 문제가 무엇인가를 살펴야 하는 것이다. 


본래 생사 고통을 얻을 수 없고 
모두 청정한 니르바나이고 
지옥과 극락이 본래 다르지 않고 
이들이 차별이 없이 모두 공하다

이 측면이 

현실에서 각 사람이 대하는 
생노병사의 현실을 놓고 
그에 해당하는 내용을
감각현실로 전혀 얻지 못하고 
그로부터 고통을 느끼지 못한다는 것을 
제시하는 것은 아닌 것이다. 

그런 가운데 그런 사실을 이해하고 깨닫고 
잘 임해야 한다고 수행방안을 제시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제 실상이 공하다 
이 가운데 진짜라고 할 그 무엇은 없어서
무아 무자성이고
또 어떤 이가 그런 사정을 이해하고 안다고 해서

자신이 현실에서 칼이나 톱으로 
손을 잘리울 때 
그런 일로 인해 
현실에서 손이 떨어져 나가고 
피가 흘러나오는 감각현실을 얻을 수 없는가. 

그리고 그로부터 
아무런 고통을 받지 않을 수 있는가. 

그렇지 않다. 

그런데 앞 내용과 이 문제를
서로 혼동하는 것이다. 

그래서 이것을 쉽게 여기는 경우가 있다. 



색즉시공 공즉시색
이 내용만 하나 이해하면 
이제 자신이 현실에서 묶여서
손과 발을 잘리워도 
자신은 아무렇지 않게 임할 수 있는 것처럼
혼동하기도 하는 것이다. 


그렇게 되는 것이 수행목표인 것은 맞지만, 
과연 자신이 그런 내용을 이해했다고 해서 
곧바로 그렇게 정말 되었는가는 의문인 것이다. 


그래서 자신이 지옥의 공수행자가 되어  
지옥에 들어가도 

자신이 지옥에서 아무렇지 않게 임할 수 있을 것처럼
착각을 하는 것이기도 하고 

또 그렇게 임하기에 
수행을 적당히 해도 된다고 여기는 경향이 있는 것이다. 

그래서 정말 만사에 배를 째도 좋다고 
배짱으로 임하는 입장도 나타나는 것이다. 


이론상 그렇게 되어야 할 것 같지만, 
손이나 발에 가시 하나만 박히고 염증이 생겨도 
그렇게 되지 못하는 것이 현실인 것이다. 





지옥의 공수행자는 
지옥이 멀게 있다고 생각하지만, 
현실에서 지옥에 준하는 상황을 
여럿 생각할 수 있다. 

간단히 보면 아우슈비츠에 수용되어 
최종적으로 뼈만 앙상하게 남아서 
구출된 상태를 놓고 
어떤 고통을 그 안에서 겪으면 
그렇게 되는가를 
상상해보는 것도 필요하다고 본다. 

더 심한 경우도 있는데 
여하튼 이런 문제가 바로 
수행의 필요성을 제시하는 사정이라고 
이해할 필요가 있는 것이다. 



기본 문제를 설명하는 가운데 
너무 설명이 길어져서 
오히려 복잡해졌는데 

그러나 지옥의 공 수행자가
지옥의 고통에서 벗어나는 데에는
상당히 필요한 내용이기도 하다고 본다. 

좀 복잡한 설명이었다고 보지만, 
잘 살펴야 할 부분이 많다고 본다. 


그런데 문제는 그런 내용을 바탕으로 놓고 
현실을 대할 때 
어떻게 고통의 현실을 해결할 수 있는가가 
실천 차원의 문제로 제기되는 것이다. 

원래 앞에 제시한 복잡한 내용도 
바로 이 문제의 해결을 위해 필요한 것이지 
이론 자체를 위해서 논의가 되는 것은 아니다. 

현실에서 어떤 상태가 문제가 되는가. 

앞에서 지옥에 준한다고 할 만한 내용을 제시했는데 
현실에서 그런 일은 가끔 있는 것이고 
자신의 현실은 또 아니지 않는가. 
이렇게 생각할 수도 있다. 

그런데 과연 그런가가 문제인 것이다. 


본인이 병원에 들러 대기실에 있으면서 
여러가지 사실을 대하고 놀란 적이 있는데 
그것은 그 당시만 그런 것이 아니고 
지금도 그렇다고 보아야 하리라 본다. 

본인이 몇 십만원 나온 병원비를 보고 
조금 많다고 생각하고 있는데 
한 분이 몇천만원의 병원비가 나온 것을 보고 
그 사정을 알아보니 
그 사정이 복잡했던 것이다. 

환자가 10 년째 중환자실에서 있는데 
다행히 병원비는 보험회사에서 처리해준다고 한다. 
그래서 그 병원비들은 보험회사가 걱정할 문제인데 
그러나 문제는 환자가 그렇게 계속 10 년째 
중환자실에서 지내고 있다는 것 자체가 문제인 것이다. 

또 한 경우는 어떤 환자를 어머니가 간호하는데 
그 환자는 하루 종일 의식이 있을 때 
계속해서 자신의 어머니에게 심한 욕을
시끄럽게 한다는 것이다. 

그 사정인 즉 그 환자가 교통사고를 당한 다음 
병원에 실려 갔는데 
그 이후 수술을 한 번에 못하고 
계속 이어서 여러 번 수술을 받아서 
6 개월 정도 지난 상태였다는 것이다. 

당연히 어머니가 그런 과정에서 환자를 간호한 것인데 
문제는 그렇게 해서 회복된 상태가 
목 이하 부분은 마비된 상태로 환자가 지내는 
상태여서 왜 자신을 이렇게 살려 놓았는가. 
죽게 해달라고 하는 차원에서 그렇게 계속 
어머니에게 심한 욕을 하면서 보낸다는 것이다. 

그런데 어머니는 또 어머니대로 
자신이 여러 환자를 보는 가운데 
손과 발을 노력하면 되살릴 수 있다고 보고 
계속 간호를 하고 물리치료를 한다는 내용을 
옆에서 본 것이다. 

그런데 이런 일이 가끔 있는 일이 아니고 
병원에 가면 또 그런 환자가 대단히 많다고 보게 되는 것이다. 

이 환자 저 환자 그리고 그 가족을 대하다 보면 
자연히 그런 고통에도 둔감하게 되는 현상이 있는데 
문제는 그 당사자의 입장에서는 
그렇지 못한 것이다. 

그리고 이런 사례를 하나 하나 나열하자면
끝이 없는 것이다. 

그래서 한마디로 압축하면 
생사고해인 것이다. 


자신이 지금은 몸이 정상이라고 해도 
그것이 영원할 것인가. 

생사가 본래 없고 실재가 공하고 
자신이 그것을 이해했다고 해서 
자신은 늙지 않고 
어떤 사고도 당하지 않고
또 어떤 고통도 받지 않고 
심지어 죽지도 않게 되었다고 보는가. 



그리고 한편 어떤 입장에서는 
그렇게 그렇게 적당히 지내다가 죽으면 
그것으로 이제 일체가 끝이라고 생각하고 
그 문제를 덮으려고도 하는데 

사정이 그렇고 그렇게 그렇게 해서
죽음을 맞이하면 그 이후 아무것도 없게 되고
그래서 문제가 다 해결된다면
왜 수행을 하겠는가. 

사정이 그렇지 않음을
지금 반복해서 
제시하고 있는 것이다. 


그럴 이유가 없고
사정이 그렇지 않음을 
a + b => c 라는 인과관계식을 통해
반복해서 제시하고 있는 것이다. 



이 식이 
한편으로는 C 를 얻어서 그것을 문제삼을 때 
그 본 바탕은 그런 C 가 아니고 
그 본 바탕은 공하고 
그 본 바탕에는 앞과 같은 관계식으로 제시하지 못하는 어떤 고정불변한 실체가
떡 진짜의 내용으로 있는 것이 아니어서 
무아 무자성인 것이고 

그런 가운데 실답지는 않지만 
현실에서 진짜처럼 여겨지고 
그리고 prince 님이 호소하듯 
매번 생생하게 그런 내용이 C 로서 그렇게 그런 관계로 얻어지는데 

그 가운데 무언가 지극히 고통을 느끼게 하고 
괴롭게 하는 것들이 상당히 많다. 

그런데 알고보면 그것이 자신이 좋다고 본 것들과 
함께 결합되어 있다. 
그래서 이것을 취하면 그것도 함께 취해야 하는 관계로 
계속 붙어 다닌다. 

이런 문제를 지금 논의하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앞과 같은 주장이 적절하지 않다는 것도 
함께 이해해야 할 필요가 있는 것이다. 

자신이 눈을 통해 대하는 현실에서는 
그 관계에서는 소리란 얻어지지 않는다고 할 수 있다. 

그래서 자신이 대하는 관계나 상태에서는 
경전에서 부처님이 제시한 그런 하늘이나 지옥도 
없다고 주장할 수도 있는 것이다. 

그런데 사정이 그렇지 않고 
그런 관계에서 그런 내용이 얻어지게 된다는 사실을
또 제시하는 것이다. 


이것은 다른 종교 입장과 크게 다른 것은 아니다. 

성경을 놓고 본다면 
하느님이 있다고 하고 
또 그 하느님 밑에 천사도 있다고 제시하는데 
이것은 불교에서 하늘을 제시한 내용과 사정이 같다. 

그런데 성경에서도 다시 그런 하늘과 대적해서 
싸우는 악마가 있다고 하는데 
이것도 불교에서 하늘과 대립해서 전투를 벌이는 
아수라라는 세계를 또 제시하는 것이다. 

그리고 성경에서 하늘과 지옥만 제시하는 것 같지만, 
이미 현실에서 사람이 보듯 
사람과 축생이 파악되는 것도 사실이다. 

불교에서 이외에 지옥에 준하는 괴로움을 받는 상태로
아귀세계를 제시하는 것이지만,
여하튼 이렇게 보면
큰 차이가 없는 것이다.

그런데 자신이 현실에서 이런 내용을 보지 못한다고
이런 세계는 없다고 주장하면 
일단 그 입장에서는 그럴 듯하다고 할 수 있다. 

이것은 눈만 있고 귀는 없는 어떤 이가 
세계에는 자신이 보는 색깔이나 모습만 있고 
소리는 세계에 없다고 주장할 때 
그 입장에서는 적절하다고 하는 것과 사정이 같다. 

그러나 귀가 생겨 그것으로 세계를 대할 때는 
또 소리가 아주 생생하게 얻어지는 것이다. 

그래서 자신이 죽으면 그것으로 끝이고 
아무 것도 없어서 그런 것을 미리 걱정할 필요가 없다고 
단순하게 생각하는 입장은 
사실 수행자 입장에서는 정말 그렀다면
문제는 훨씬 간단하고 쉽겠다고 보게 되는 것이기도 하다. 

그런데 사정이 그렇지 않기에 
상당히 복잡한 것이기도 한 것이다. 

지옥의 공 수행자가 지옥의 고통을 벗어나는 방안에 대한 논의는 
사실 위 입장에서는 지극히 간단한 것이다. 
그런 논의나 연구나 훈련 자체가 필요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니 얼마나 편한가. 

그런데 그렇지 않다고 보기에 
그것을 연구 논의하고 실천 수행에 옮기고 

또 그런 가운데 
현실에서 보게 되는 다양한 고통의 현실에서도 
같은 내용을 적용해 수행에 임하는 것이기도 한 것이다. 

여하튼 그런 전제에서 
중요하다고 보는 논의를 또 해야 하는 것이다. 



이 대목에서 앞에 제출된 
넌센스 퀴즈를 풀어보야 하리라 본다. 

넌센스 퀴즈와 시감상 문제에
정답은 본래 없는 것이다. 

그러나 일단 문제를 제출했으므로 
한번 엉터리로 답을 제시한다면 
이렇다고 본다. 

백제 신라 고구려 
이것을 가지고 가장 바람직한 시감상을 한다면? 

백제 => 깨끗하고 맑고 청정한 진리 
신라 => 실라는 참고로 범어로 계율을 의미하는 것이다. 
고구려 => 광대무변한 좋고 아름다운 서원을 일으켜서 높이 추구함

대강 이렇게 엉터리라도
그런 말에서 그런 시감상을 하고 대한다면
결국 수행에 임해서 그런 서원을 실천하는 상태를
나타낸다고 볼 수 있다고 본다. 




그런데 또 반대로 어떻게 시감상을 하면 
거꾸로 그 말이 무간지옥의 고통을 받는 내용인가라고 하면 

백제 => 정말 배를 째낸다. 
신라 => 신나에 불을 붙이듯 불로 태운다. 
고구려 => '거꾸로' 매달린 채로 고통을 받는다.
이렇게 시감상을 하면 그런 상태에 준한다고 볼 수 있다.

그래서 사실 거꾸로 잘못 보고 현실을 대하면
또 바로 이렇게 쉽게 그 현실이 곧
지옥의 고통을 받는 상태가 곧바로 된다고 이해할 수도 있다.


손과 발이 달려 있는데
자동차가 없어서 고통스럽다고 하는 경우도 있다.

그런데 손과 발이 없는데도
그래도 자신은 눈이 있어서 행복하다고 여기는 경우도 있다.

이 가운데 누가 표준이고 정상이라고 볼 것인가.
사실은 이 가운데 정답은 없는 것은 매마찬가지다.

전쟁터에서 눈이 없어진 병사는 흐뭇해 하고 있는데
손이 잘려진 병사는 크게 근심하고 자살을 계획하고 있기도 하다고 하는데
이 차이가 무엇때문에 각 개인에게 나타난다고 보는가.
여기에도 약간의 퀴즈가 있다고 본다.

그런데 이것이 사실은 삶의 문제이기도 한 것이다.


전도 망상이 심화된 상태에서는
매 순간

자신에게 수억원의 황금의 가치를 갖는 복권증서를
길에서 주을 수 있는데 줍지 않고  

또 이미 갖고 있는 그런 복권증서는 볼 때마다 찢어 버리고 

그리고 한편으로는 
매번 열심히 행하는 일은 자신이 늘 다니고 
앞으로 다닐 거리에 
시한폭탄과 지뢰를 묻는 일에 열중이면서 
매 순간 임하는 경우가 있다고 보는 것이다. 



사실 어떤 이가 지금 잘 지내고 있는데 
왜 나중에 무간지옥에 들어가게 된다고 경고를 받는가하면 

사실은 매 순간 
생각과 말과 행동 자세를 위와 같이 행하고 있기에 
그런 것이기도 한 것이다. 


그런데 또 그렇게 그가 매순간 그처럼 행하는 이유는 
그가 현실에서 대하는 내용을 놓고 
엉뚱하게 뒤집혀서  
생각판단 분별을 행하고
그에 집착해서
그렇게 행하는 것이기도 한 것이다. 

그 사정은 간단하다. 
그런 분별 상태에서 
좁고 짧고 얕게 관찰하고 판단하고 분별지혜를 사용하면 
그렇게 해야 자신이 가장 많은 좋음을 얻게 되는
최선의 방책이 된다고 헤아리고 집착하기 때문인 것이다.

그리고 그런 범위에서 정말 자신이 생각한 것처럼 
그런 결과를 얻기도 함을 보는 것이다. 

루팡이 무언가를 훔치면
그렇게 지혜를 써서 
박물관의 귀중품을 훔쳐서
일단 자신의 보물 창고안에 
옮겨 놓는 일에 성공함을 보는 것이다. 

그래서 그런 일을 하게 되는 것이고 
그것을 보는 이들도 이를 따라 하게 되는 것이기도 한 것이다. 

그런데 또 공통점은
대충 그렇게 살피고 
그 전후는 깊게 안 보는 것이기도 하다. 

영화를 보아도 자신이 감명깊은 부분만 기억하고 
그 뒤 그 뒤 이런 내용은 살펴보지 않는 것과
비슷한 것이다. 

즉 넓게 길게 깊게 두루두루 살펴보지 않고 
좁고 짧고 얕게 자신이 초점을 맞추는 몇 부분만 보면서 

나머지는 지나치고 

그래서 무간지옥에 들어가는 장면은 
대부분 생략해버리는 것이다. 





그러니 자신이 사는 집을 놓고 
불타고 자신이 화상입고 
전신이 마비되고 고통받고 재산을 잃어버리고 
이런 것을 지옥의 상황이라고 이해한다면 

사전에는 어떻게 그것을 예방하고 

그런 상태가 현실이 된 상황에서는 
또 어떻게 극복하고 

또 그것을 벗어난 상태에서는 
또 이를 어떻게 대해야 좋은가를 놓고 
고민을 해보아야 하는 것이다. 


그 사태를 바로 대하는 순간 말고는 
그것은 없다고 할 수 있는데 
그렇다고 자신이 대하는 현실에 
그런 일이 전혀 없다고 할 수 없는 것이다. 

그러니 그런 일이 아직 현실이 아닐 때 
그 문제를 잘 생각해야 하는 것이다. 

그래서 사실은 앞과 같은 내용과 모두
반대로 하는 것이
현실에서 요구되는 것이다. 












글이 긴데 본 내용에 들어가지 못하고 있다.


현재 누어 뒹굴뒹굴 시스템을 계속 연구 중인데 
구형 노트북을 활용하려고 했는데 
무슨 이유인지 인터넷에서 사용하는데 장애가 있다. 

이 상태에서도
텍스트를 편집하는데 큰 어려움은 없는데 
조금 사양이 떨어지면 인터넷 이용에 시간이 걸려서 
답답함을 느끼는 상황이 되곤 한다. 

현재 페이지에도 사진이 많이 올려져 있는데 
이런 경우 상당히 시간이 걸린다. 

그래서 여하튼 데스크탑과 연결해 시스템을
따로 만들어야 한다고 보게 된다. 

무선 키보드와 무선 마우스가
뒹굴뒹굴 작업 시스템에서 사용되는데 
그런데 수신기를 각 데스크탑 본체에
꼽고 사용하는 가운데 
시스템 사이에서 이동을 하면 또 복잡해진다. 


그렇다고 무선 키보드를 또 하나 구할 때 
같은 방식을 사용하면
곤란하게 된다고 본다. 

각 시스템마다 수신기가 서로 달라야 하는데 
같으면 이로 인해 혼선이 생기리라 보는 것이다. 


그래서 또 어렵지만
블루투스 방식을 사용하는 키보드를 하나 
또 추가해야 되지 않을까 생각 중이다. 






어제 길에서 들고 온 그림이다. 











동그라미는 자연스럽게 무언가 원만하고
공한 상태를 상징한다고 보게 된다. 
왜 인지 모르지만,
공=0=zero = 원
이런 식으로 연상이 된다. 

그런데 엄밀하게 보면 공한 상태가 
네모라거나 원형이라고 보는 것은
엉터리다. 

그래도 언어상으로는 그렇게 연상이 된다. 





수행자가
여래의 방에서 
여래의 옷을 입고 
여래의 자리에 앉아 수행을 한다는 
이런 내용이 경전에 실려 있다. 

수행자가 아직 법신을 얻어 성불한 상태가 아닌데 
그렇게 여래인 척하는 것이
가능하다. 

그래서 이런 내용을 잘 배워둘 필요가 있다. 

경전에서는 이에 다음과 같이 제시한다. 


여래의 방은 일체 중생 가운데 대자비심이요,
여래의 옷은 부드럽고 화평하고 인욕(忍辱)하는 마음이며,
여래의 자리는 일체의 법의 공함[法空]이니,
...

묘법연화경 법사품 제 10 (K0116 T0262)
이런 내용이 경전에 나온다. 

저 그림을 보면
수행자인 듯한 분이 공한 여래의 자리에 있고 

무언가 뾰족한 곳에 앉아 인욕의 마음으로
옷을 입고 앉아 있는 것을 상징하는 것 같다. 

그런데 지옥의 공 수행자를 대자비심의 방에 앉아
대하는 듯하다. 

그래서 그런 감상이 이뤄진다.


그림 감상 시감상 노래 감상
다 같은 성격을 갖는다.  






처음 유리가게 앞의 길가 가로수 앞에
이런 그림이 나와 있고
액자 상태와 전반적인 상황을 보니 
일단 폐기물로 내놓은 것으로 심증이 간다. 

그런데 잘못 가져가면
자칫 현행범으로 체포될 수 있다. 
문의를 하기 위해 가게에 들어갔는데 
사장님은 또 안 계신다. 

그런데 전반적 상황을 보건대 
본인이 걸어가는 길에
그냥 들고가야 할 작품으로 보고 들고왔다. 

위 사진을 통해 체포될 여지가 있다고 보기에 
일단 또 해명용 사진을 같이 첨부한다. 








거리에서 이상한 잡동사니를 
펼쳐 놓고 파는 분이 있다. 
이번 옥상외부 기지 건설과정에 혹시
실험용으로 필요할지도 몰라 밧대리를 구했다.
요즘 밧대리는 크기나 사양이 맞지 않으면 
다른 곳에 사용하기 힘들다. 
그래서 다른 선 등을 구입하는 과정에서 
서비스 품목으로 하나 얻었다. 
 






보성 여래님 기지를 또 하나 만들었다. 

보성 여래님은 동방에 계신 부처님이다. 
그런데 봉타래 수행자에게 봉 노릇을 해주시는 선명칭길상왕 여래님도 
동방에 계신 여래님이다. 
그런데 사바세계를 기준으로 거리 상 차이가 있다. 

보성여래님과
선명칭길상왕 여래님 사이에는 
대략 3 항하사수(갠지스강 모래알수) 정도의 세계가 있다고 경전에 제시된다. 

그리고 보성여래님을 대하면서
봉타래 수행자는
원칙적인 표준 수행이 상당히 중요함을 또 생각하게 된다. 

부처님 명호만 념하면 
소원이 성취되고 
깨달음을 얻게 해주시면서
봉타래 수행자에게 봉노릇을 하시는  
봉 부처님도 계시다.

그러나 
원칙적인 수행은 
또 그렇지 않음도 
이해할 필요가 있다. 








이번 조각글에서 
백제 신라 고구려란 말을 놓고 
다양한 해석이 가능하다. 
앞에서는 배째라 형 수행방안을 살폈다. 
배짱 수행방안이다. 

그런데 거의 이에 준하는
닐니리야 수행방안도 또 함께 제시한다. 


시감상자의 개인적인 감상방식을 설명하기 힘들다. 
불교에서 니리라는 말은 지옥을 의미한다. 

니리(泥犁)는 범어 niraya 를 나타내고 나락가라고도 하고 

결국 이는 지옥을 나타낸다. 


닐은 영어에서 0 이나 무를 가리키는 표현이다. 
이것을 합치면 자연스럽게 지옥의 공 수행자를 연상시키는 표현이 된다. 
그처럼 시감상을 한다. 

그런데 왜 배째라 수행방안과
닐니리야 수행방안이
그런 지옥의 공수행자를 양산시키는 방안이 되는가는
그 사정이 그렇기 때문이다. 


거기에 각기 그런 사정도 있고 
그처럼 그런 방안을 잘못 취하게 하는 사정이 있다.




닐니리야는 앞에서 백제 이런 내용을 놓고 
백지에 신나게 마음껏 자신 좋아하는대로 그려놓고 
그렇게 현실을 바라보고 대하는 입장이다. 

그리고
그런 자신의 희망에 들어맞는 내용은 받아들이고 
그런 내용에 맞지 않으면 
그것을 가지가지 이유를 들어 받아들이지 않고 거부한다. 

그래서 상당히 왜곡된 해석을 취한다. 
그런데 당사자는 자신이 희망하는 내용을 붙들고 
계속 그것을 대하므로 
문제가 전혀 없다고 여긴다.
그리고 닐니리야 하는 자세로 임하게 된다. 

그래서 이 경우 그로 인해 지옥에 입소하기 전까지는 
이런 수행자를 말릴 도리가 잘 안 보인다. 

현실에서 대표적인 사례로 
선조대왕과 같은 경우를 생각할 수 있다. 

장차 옆 나라에서 침략할 조짐이 보인다고 경고가 되었다.
그래서 정보 수집차원에서 사람들을 보냈다.
그런데 이들이 돌아와 서로 반대되는 내용을 보고한다. 

하나는 낙관적인 내용이고 
하나는 비관적인 내용이다. 

이 경우에는 어떻게 해햐 하는가가
하나의 현실 퀴즈다. 

그런데 위 경우 낙관적 내용이 
선조대왕 자신의 희망과 맞다. 

선조대왕 입장에서는 그러면 좋다. 
그래서 현실도 그렇다고 보고 
별 대비를 세우지 않고 임한다. 
그 결과 지옥과 같은 상황을 만난다. 
그리고 허둥대는 모습을 나중에 보이게 된다. 


그런데 현실에서 이렇게 임하는 경우가 상당히 많다. 
그리고 이런 입장에서 행하는 이에게 
무언가 그 희망과 어긋나는 사실을 제시하면 
상당히 기분 나빠하고 싫어한다. 

그리고 상대에게는 
왜 공연히 그런 기분나쁘고 걱정되는 이야기를 하는가. 
그렇게 부정적으로 생각하면 될 일도 안 되고 
여러가지 징크스만 얻게 된다고 임한다. 
그리고 자신 희망에 들어맞는 것만 생각하고
임하면 된다고 자꾸 자기최면을 걸면서
닐니리야를 외치면서 임한다. 

그래서 이런 경우는
그가 정말 원치않는 상황을 만나고 나서야 
그것이 그렇지 않음을 이해하게 된다. 

그런데 이런 자세로 
벼랑에 떨어지기 전까지 
근거없이 낙관적 입장만 취해 
자신이 희망하는 내용만 붙잡고 나아가면 곤란하다. 

그러면 곧바로 지옥의 수행자로 변신해서 
임해야한다. 


지옥에 들어가기를 원하는 이가 거의 없다. 
현실에서는 어떤 축생이나 벌레로 되고 싶어 하는 경우조차 없다. 
그런데 자신은 무슨 이유인지 
그렇게 될 가능성이 전혀 없다고 여긴다. 
또는 그런 지옥이 있더라도
그런 지옥에 떨어져 자신이 그런 고통을 받는 일은
자신과는 전혀 무관하다고 여긴다.
그리고 그런 희망을 사실인 것처럼 믿으려고 한다. 

그래서 정작 왜 자신은 그런가를 스스로 설명해보아야 한다.
알고보면 그 근거가 없다. 

수없이 많은 생명을 포함해
다른 생명들이 제각각 다 고통을 받는다.
그런데 왜 자신은 그렇지 않고 
또 자신만은 하늘에 가장 우선 순위로 가게 된다고 믿는가 

그 근거는 그렇게 자신이 희망하고 
그렇게 믿는다는 것 뿐이다. 
그리고 실질적으로 그렇게 자신만 예외 취급받아야 할 사유가 하등 없다. 

그런 상태에서
그 문제점을 누가 지적하면 
그는 상당히 불쾌하게 대한다. 

그러니 곤란하다. 


이렇게 된 데에는 한편으로는
수행자들에게 봉 노릇을 해주시는 부처님들이나 
대력보살님들의 영향도 약간은 있다. 


조금 심하게 표현하면 
이분들이 봉타래 수행자들의 버릇을 나쁘게 만든 측면이 있다. 
어떤 이가 수행은 전혀 신경을 안 쓰는데 
현실에 어떤 문제만 생기면
그런 봉 노릇을 해주신다는
부처님이나 보살님의 명호를 념하면 다 해결된다.
이렇게 믿고 태평하게 지내려는 경향을 갖는다. 

이것이 닐니리야 수행자세를 만들어 내는
한 원인도 된다. 

백지에 신나게 자신이 원하는 것을 제 마음대로 그려놓고 
그것이 현실 내용이라고 믿고 
그 바탕에서 계속 나아가려고 한다. 
그러다가 정작 뜻과 달리 벼랑에서 굴러 떨어진다.
그래도 그 자세가 잘 시정되지 않는다. 

여기에는 앞의 원리가 또 적용된다.

원래 현실이 자신이 희망하는 내용과 거리가 있다.
그런데 처음에 그렇게 희망하고 믿고 현실에 임한다.
그러면서 처음에 이런 자세를 형성한다. 
이후 그런 자세로 벼랑에서 떨어진 경우에도
여전히 또 그런 방식으로 해석해가게 된다. 
그런 벼랑은 사실은 그것이 아니다.
이런 식으로 임한다. 

 
왜냐하면 처음이나 그 경우나
그런 닐니리야 방안을 취하는 사정에는 
별 차이가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관세음보살님이 구조를 위해서 
줄을 내려 줘도 
그는 이렇게 생각하는 것이다. 

내려준 줄을 붙잡고 '
스스로 노력을 해가며 올라갈 생각을 하지 않고 

아니야, 분명히 관세음보살님이 자신을 
공중으로 부양시켜 구해줄 것이다라고 하면서
계속 관세음보살님만 념하고 
임하는 상태가 되는 것이다. 



조금은 도움을 받더라도
이를 바탕으로 자신이 노력을 해야 하는데 
모든 것을 그저 다 맡기면 된다고 
편하게 임하려고만 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런 자세는 편한 입장인 것 같지만,
알고보면 편한 것이 아니고 
그로 인해 지옥의 닐니리야 수행자로 
임하게 되기 쉬운 것이다. 






처음 배째라 형 배짱 수행은 
공에 대한 잘못된 이해 즉 악취공견으로 인해 
그런 자세가 형성되기 쉽고
그로 인해 지옥의 공수행자를 양산시키는 측면이 있는데

앞에 살핀 닐니리야 수행도 위험성이 상당한 것이다. 
그리고 이런 자세도 지옥의 수행자를 양산시키는 측면이 
많다고 본다. 
실질적으로 지옥에 가지 않게될 행위와 노력은 행하지 않고
그저 닐니리야하면서 희망만 붙들고 있는 경우에 해당하기
때문이다. 



이는 어떤 사정인가 하면 
어떤 시험을 놓고 생각하면 쉽다. 


아주 어려운 시험이 있다고 하자. 

시험에 합격하면 지극히 좋다. 
그리고 떨어지면 지극히 나쁘다. 

그 차이가 하늘과 지옥의 차이라고 하자. 


이런 경우 대부분 긴장하고 강박감을 갖고 
시험의 합격에 대단히 집착을 갖게 되는 것이다. 

이 경우는 이것이 문제가 된다. 
현실의 문제는 또 대부분 이런 형태다. 

집착이 상황을 악화시키는 측면인 것이다. 

그래서 강박감을 갖고 긴장을 하기는 하는데 
정작 그로 인해서
필요한 실질 노력은 하지 못하는 
상황에 빠지게 되는 것이다. 

이유는 그렇게 집착하고 긴장하기 때문인 것이다. 

잘 하려고 하는데 바로 그 마음때문에 
더 잘 하지 못하는 것이다. 

물에 빠져 살려고 전력을 다해서 바둥거리는데 
그로 인해서 물에 가라앉는 경우와 사정이 비슷하다. 



이런 경우는 처음의 넌센스 퀴즈 문제에서
백제 신라 고구려라는 소리를 듣고  
표준적으로 삼국시대의 백제 신라 고구려를 의미하는 것으로
알아듣고 임하는 경우가 
이런 경우에 해당한다고 볼 수 있다. 


현실에서 분별을 행하는 입장은 
바로 그 분별을 바탕으로 그처럼 무언가에 집착하고 
그에 바탕해 경직된 상태로 임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이 문제를 악화시키는 경향을 갖는 것이다. 






그런데 넌센스 퀴즈에서 엉뚱한 답을 한 입장은
또 그런 엉뚱한 입장대로 각기 문제가 있음을 
베째라 수행방안과 
닐니리야 수행방안이 보여주는 것이다. 


선조 대왕도 사실 그런 위험성을 인식은 했는데 
사정이 단순하지는 않았다고 전한다. 

외적도 걱정이지만, 
내부의 적도 걱정인 것이다. 
특히 선조대왕은 자신의 입지가 정통이 아니라는 핸디캡을 지니고 있어서
그런 문제를 상당히 신경썼다고 전해진다. 

그런 가운데
자신의 입맛에 맞는 내용을 받아들이고
그렇게 근거없이 낙관적인 자세로 
닐니리야를 외치고 있다가 
지옥의 상황에 빠져 들어간 사례라고 제시하는 것이다. 


현실의 개인도 마찬가지다. 
일기예보에서 태풍이 온다고 예보하는데 
누구나 그럴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고 
이렇게 일단 보게 된다. 

그런데 대비를 철저히 하면 
처음에 예상한 그런 문제가 잘 안 생긴다. 

그 경우 공연히 고생한 것이 되어 버린다. 

이런 경험을 반복하다 보면 
대비를 안 해도 된다고 여기고 
태평하게 임하기 쉽게 된다. 
그리고 실제로 현실에서 
그렇게 태평하게 임해도
많은 경우 별 일이 없는 것이다. 

그러다가 어느 순간 큰 사고를 당하면 
그 때는 그것이 문제가 되는 것이다. 


또 다음과 같은 경우도 생각할 수 있다. 

현실에서 전쟁이 일어날 것 같다고 대비하면 
사실은 그 대비로 인해 상대도 눈치를 채고 
조금 전쟁을 미루게 마련이다. 

그런데 그렇게 되면
공연히 땀흘리고 훈련을 하고 
힘들인 것이 되버리는 것이다. 

국가로 보면 공연히 쓰지도 않을 
장비를 마련하고 낭비해버린 상황이 되는 것이다. 

그리고 처음의 그런 예측은
결과적으로 안 맞은 내용이 되고 마는 것이다. 

그런데 그렇다고
또 반대로 전쟁이 설마 일어나겠는가 하면서
태평하게 생각하는 가운데
그런 대비를 하지 않으면 

이후 어떻게 되는가하면 
상대도 눈치를 채고
전쟁을 시작하게 되는 것이다. 

이 경우는 또
지옥 상황에 곧바로 진입하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이런 이상한 상황이
현실에 문제가 되는데 


수행자가 수행함에 있어서도 
지옥이 정말 있는가. 
있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를 놓고도 
비슷한 문제가 일어나는 것이다. 

그래서 처음에 낸 넌센스 퀴즈는 
무언가 문제가 조금씩 있는 그런 수행자 자세를 
상징하는 측면이 있다고 제시하고자 한 내용이기도 한 것이다. 




이런들 어떠하리 
저런들 어떠하리
수행을 한들 어떠하고 
안 한들 어떠하리 
안 할 뿐만 아니라 
하던 일을 더 극단적으로 또 하면 어떠하리
그리고 심지어 극악한 악을 행한들 어떠하리 

이렇게 배짱으로 임하게 되는 사정에는 
이 모든 경우가 차별없이 
다 공하다라는 내용이 
작용하고 있는 것이기도 하다. 


그런데 사실 그렇다. 
현실의 차별적인 모습이 어떻든 
그 모든 것이 다 본래 청정한 니르바나이고 
그 모든 상태가 다 차별없이 그 실상은 공하다라는 것은 
맞는 내용이다. 


그리고 이 내용을 이해하는 것이 
수행에 대단히 중요한 것도 사실이다. 

그리고 바로 그런 이해로서 
처음에 취한 
망상분별과 집착에 바탕해서 행할 때 
문제가 해소되는 측면이 분명히 있는 것이다.

그런데 수행자가 이 측면을 취하는 것은
바람직한데
앞과 같은 자세가 되는 것은

또 문제인 것이다.



수행자는 여기서 무엇을 혼동하고 있는가하면  
수행의 원 목표점이 
잃어버린 축구공을 되찾아 얻는 것인양 
잊어 버린 실재의 공함에 대해 이해를 하게 되면 
그로써 모든 문제가 해결된다고 착각하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실상이 공하다는 내용만 이해하고 
그것을 확보하고 
그 상태로 임하면
만사가 다 ok,가 되는 것으로 
오해한 것이다. 

그래서 지옥의 공수행자의 상태로 
들어가게 되는 문제가 발생하는 것이다. 




시험이 있는데 
너무 집착해 경직되어 임하는 것도 문제라고 보기에 

시험이 안 되어도 무방하다. 괜찮다. 
되고 안 되고 실상은 차별이 없이 공한 것이다. 
이렇게 제시해 집착을 
기본적으로 제거하게 한 것이고 

현실에서 대부분 고통을 받는 것은 
공연히 망상분별에 바탕해 집착을 갖고 행위를 하는 것이
원인이 되는 것이므로 

그런 측면에서 실상이 공하고 
현실의 내용이 실답지 않음을 이해하고
이런 행위를 중단하는 것은 대단히 중요한 것이다. 

그런데 그것만이 수행의 목표상태인 것은 아니다. 



그리고 공한 상태가 목표라면
원래 수행할 필요자체가 없는 것이다. 

그렇게 이해하던 안하던 
그런들 어떠하리 저런들 어떠하리가
여기에도 적용되는 것이다. 

즉, 어떤 수행자가 현실을 공하다고 보던 그렇지 않던 
본래 공한 것이지, 

그 수행자의 인정이나 동의를 통해서 
비로서 현실이 공해지는 것이 아닌 것이다. 


그래서 그렇게 하던 안 하던 
원래 공한 실상은 그대로인 것이다. 

그래서 그런 공한 상태가 목표라면 
어떤 수행을 굳이 할 필요도 없는 것이고 
원래 그런 것이다. 

그런데 처음 왜 수행자가 수행을 한 것인가. 
그것을 스스로 확인해야 하는 것이다. 

잃어버린 축구공을 그렇게 되찾고 
그러면 없던 공이 다시 회복되는 것처럼

공한 상태가 어떤 사유로 공하지 않게 되었는데 
자신이 공하다고 깨달으면 
이제 그 상태가 공해지기에 
그런 것인가. 

그것이 아니다. 


현실에서
각 생명이 망상분별을 일으키고
그에 바탕해 번뇌를 일으키고
그에 집착을 갖고 
잘못된 행위를 반복해서
고통을 받아가게 되는데
이것이 문제인 것이다. 

그래서 이 문제를 시정하기 위해 
현실이 실답지 않고 공하다는 사실을 깨닫고 
그렇게 관해서
이를 통해 그런 고통을 받는 원인이 된
망상분별과 집착을 제거하는데 
그런 사실을 깨닫고 이해하는 것이 
중요한 내용이 된 것이다. 

그래서 그런 사실을 강조하게 된 것인데 
그런 가운데 
수행목표에 혼동을 일으키게 된 것이다. 


그리고 공함을 깨닫고
그에 바탕해
하지 않아야 할 것을 끊고 
해야 할 것은 집착없이 잘 해야 함에도 

그저 공하다는 사정만 붙들고 
사정이 그렇기에 
자신이 하고 싶은 것은  
마음대로 행해도 무방하고 
아무것도 안해도 무방하다고 여기면서
앞과 같은 시를 읊으면서 
배째라 수행을 시작하게 된 
것이다. 


그래서 그렇게 임하고 
그로 인해 지옥의 공 수행자 상태가 막상 되면 
손에 가시가 하나 박혀도 
이것이 아니구나라고 여기게 되는 상황에 
직면하는 것이다. 


그래서 위 3 가지 유형이 
다 일부 장점이 있는 한편 
각기 문제가 있다고 지적되는 것이기도 한 것이다. 







닐니리야 수행자는 왜 양산되는가. 

원칙대로 딱 끊고 딱 수행을 하면 
되는데, 

거의 대부분 그렇게 하지 않으려 하고 
못한다는 사정 때문에 

자비심에 바탕한 부처님이나 보살님들이 
그런 나약한 수행자를 구출해내기 위해 
가지가지 방편을 마련하고
이를 바탕으로 중생을 제도해내고자 하는 사정 때문에
이런 문제가 발생하는 것이기도 한 것이다. 


그런데 그것은 한편으로 보면 장점이기도 한 것이다. 

만일 원칙대로 방치하면 
대부분 그대로 수행을 포기하고 
지옥에 골인하게 되는 것이다. 


그런데 방편을 써서 
쉬운 수행방안을 만들어 제시함으로 
중생들이 점차적으로
수행에 진입해 들어가게 되는 사정이 있는 것이다. 


그런데 이처럼
수행자가 봉 부처님이나 보살님을 믿고
수행에만 전념하게 하는 장점이 있는 반면 

이것이 지나치면
근거없이 아무렇게 하고 
단순히 명호만 념하고
'믿습니다' 라고 말만 반복하면
그것으로 만사가 해결된다고 
쉽게 임하는 문제점도 발생하는 것이다. 

그래서 그렇게 희망하고 믿는 내용과 달리 
정작 현실에서 매 순간 지옥의 상황을
대면하게 되는 경우도 있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그 사례를 선조대왕의 근거없는 낙관적 자세를 통해
제시한 것이다. 





그러니 어떻게 해야 하는가

위 방안에서 좋은 점만 골고루 뽑아내고 
나쁜 점만 다 빼내면 
사실은 그것이 좋은 것이다. 

위 문장을 잘 음미하면 
자체적으로 좋고 옳은 말임을 이해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위 방안들이 각기 갖는 문제점은 
먼 곳 먼 장래로 가서 살피지 말고 
바로 지금 이 순간 그 내용을 놓고
실험해보면 곧바로 알 수 있다고 본다. 

먼저 일체가 공하다라고 이해하고
그런 이해로 모든 것이 다 해결된다고 여긴다면 
이제 그 상태에서 면도칼이나 톱을 하나 찾아 들고 
자신의 손을 한 번 잘라보는 것이다. 

그리고 이래도 공하고 저래도 공해서 
어느 것이나 무방하고
배를 째도 된다는 배짱으로 임하면 다 잘 된다고 하는 입장이
이런 상황에서도 잘 통용된다고 보는가를 
스스로 실험해보는 것이다. 


나중에 먼 곳의 지옥에 가서 실험을 하면 늦다고 보는데 
그것이 사실 가능하면 
지금 그런 문제도 쉽게 해결이 되어야 마땅한 것이다. 
과연 그런가. 



닐니리야 수행자는 

동전을 하나 책상에 놓고 
자신이 그렇게 되는 것을 강하게 희망하고
또 그런 희망을 강력하게 믿는다고 해서 
그것만으로 동전이 공중에 뜨는가를 
철야 수행을 통해서 실험해볼 필요가 있다. 


대부분 생명이 고통을 받는 상태에 놓여 있고
또 지옥에 들어가는데 
자신은 온갖 일을 다 자신 마음대로 하는데 
기적처럼  그런 고통을 받는 상태에서 예외가 된다고 하니 
그런 기적같은 일이 일어날 수 있다면, 

앞과 같은 희망 정도는
당연히 성취되어야 할 것 아닌가. 

그래서 철야기도던
강력한 희망과 신념과 믿음이던
그처럼 대부분 가기 힘들다고 보게 되는
하늘에 곧바로 가게 해주거나 
또는 긴 세월 수행을 정진해도 얻기 힘들다고 보는
니르바나나 해탈과 깨달음을 곧바로 얻게 해준다고 한다면 

그전에 적어도 동전 하나 정도는
공중에 부양시킬 수 있어야 하지 않겠는가. 


물론 각 입장에서는 그것은 그렇지 않더라도, 
그러나 이 경우는 그렇다.
이렇게 입장을 취하는 경우가 많고 
그래서 결국 자신이 알아서 할 일이기는 하지만, 

쉽게 그 문제점을 이해하려면 
위와 같은 실험을 당장 해보면
된다고 보는 것이다. 


또 한편 현실에서
상식적으로 대부분 행하는 망상분별에 바탕해 
그에 집착하고 달라 붙어 경직된 상태로 임하는 것은 
또 당연히 문제가 있는데 

그 경우는 현실의 교도소 아니면 병원 응급실을 방문해서 
왜 거기에 굳이 들어가 있는가
그 사정을 하나하나 살피면
바로 그 사정의 이해가 될 수 있다고 보게 된다.

그 경우의 대부분은  
다 제각각 자신의 본능과 감성과 이성에 바탕해 
자신이 좋아하는 것을
지혜를 다 기울여가며 잘 추구한 것인데 
결과적으로 그렇게 된 것 뿐인 것이다. 

그러니 이렇게 간단히 실험을 마치고 
다음 문제를 살펴야 한다고 본다. 


일단 글이 길어졌으므로
여기서 마치고
지옥의 공 수행자가 지옥의 고통을 벗어나는
방안은 다음에 이어 쓰기로 한다.








문서정보 ori http://buddhism007.tistory.com/2963#1479
08gfl--불교공부_단상_2561_02.txt ☞◆veax1479
θ

 





◆vzwq7515

◈Lab value 불기2561/02/27/월/12:41





○ [pt op tr]  mus0fl--Ricochet - Duo De Amor.lrc 


○ [pt op tr]Narrenschiff



♥ 잡담 ♥일체중생실유불성론과 천제성불론의 공포

요즘 본인의 전공이 
고물 전자제품 수리 분야인 것 같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숙왕화님도 본인의 이런 상태를 보고 
처음부터 이쪽 분야로 진출했었으면
생계비를 잘 해결했을 지도 모른다

또는 다음 생은 이쪽 분야로
꼭 진출하라는 등의 격려를 한다. 


그와 비슷한 이야기는
일광님으로부터도 오래전에
들었던 바가 있기는 하다. 







그간 단자만 만지면 지글거려서
방치해두었던 
미니오디오를 꺼내 수리 중이다. 

이것은 오디오단자가 없는데 
각 기지의 특수 사정상
이 오디오도 고쳐서 사용할 필요성이 
종합적으로 있게 되었다. 














본인이 수리를 하지만,
케이스를 열고 청소하고
그리고 케이스를 닫는 것이 전부다. 
여기서 고쳐지지 않으면
본인이 더 손을 볼 여지가 없다. 

그리고 케이스 여는 것이 
사실 본인의 수리 작업의 80 % 다. 
이 부분이 어렵다. 
그런데 역시나 케이스를 열어 떼내는 순간 문제가 생긴다. 
어디에서 떨어졌는지 알 수 없는데
이상한 부품이 하나 떨어져서 살펴본다.
그런데 어느 부분에서 떨어졌는지 잘 알 수 없다. 
처음부터 심상치 않다. 







청소하는 중간에 원래는 붙어 있었는데
이리저리 만지다가 선이 떨어져버렸다.
 이런 경우가 많다. 

원래는 정상이었는데
본인이 수리 중에 오히려 더 문제가 발생하는 경우다. 


최근에 전기인두기를 사려고 했다. 
설마 인두기까지 필요하겠는가 하고 사지 않았는데 
납땜을 할 필요성이 생겼다. 

그래서 창고를 뒤져
오래전에 IS 님이 놓고 간 
전기 인두기를 찾아서 사용하게 되었다. 
이것은 세월이 오래된 100 V 용이어서 
100 v 변환기까지 동원해야 한다.
그나마 이 전기인두기가 있어서
수리 중 떨어진 선을 붙여 놓을 수가 있었다.











매번 움직일 때마다 찌그럭 거리는 소리가 나는 원인은 
움직이는 단자부분이 많이 벗겨져서 그런 것임을 보게 된다. 
가운데 4 개 막대 부분 가운데 위 부분이 하얀 것은 벗겨진 것이다. 
그렇다고 칠을 해줄 방안도 잘 안 보인다.
그래도 그 상태에서 청소를 하니 소리가 거의 없어지고 맑은 소리가 난다. 

이 미니 오디오는 외부기기 입력단자가 없다.
그러나 수리를 마치니 다행이 원래 갖고 있는 전 기능이 다 잘 된다.
cd  녹음테이프 fm 라디오 다 잘 된다.  

문제는 처음 빠져나온 그 부품을
어디에 끼어 넣어야할 지 모른다.
그런데 여하튼 전 기능이 다 잘 되어서 
안에 테이프로 그냥 붙여서
타임캡술 처리해 놓고 마무리를 지었다. 









요즘 손 대는 것마다 상당히 수리 성공률이 높다.
그래서 또 하나 고물 미니 오디오를 손 보려고 시도했다.
문제는 여기서 발생했다. 











이 미니 오디오기기에서 
테이프 부분이 돌아가지 않은 원인을 알아냈는데 
안의 고무 벨트가 끊어져 있는 것을 보게 되었다. 






이 경우는 어떻게 수리해야 하는가. 
요즘은 테이프를 거의 사용하지 않기에 
이런 부품을 구하는 것이 쉽지 않다. 
떨어진 고무를 본드로 붙일 수도 없다. 
넓은 고무판을 하나 사서
섬세하게 예술적으로 잘라서 사용해 볼까 이런 생각도 해본다.
그런데 마땅한 수리 방안이 보이지 않는다. 





이것은 CD 도 인식못하고 테이프도 안 되고 
오직 Fm 라디오만 하나 작동을 한다. 
그래서 일단조립도 하지 않고
이 상태로 방치해두기로 했다. 






옥상 외부 기지에 꽃과 등, 그리고 기악공양시설을 
만들기 위해 어떻게 전원을 확보할 것인가. 

그리고 눈비가 내리는 상태에
장기적으로 노출될 때
누전과 합선 이런 문제를 어떻게 해결할 것인가를 놓고 연구중이다. 

처음 살피는 것은 태양전지를 이용한 방안이다. 
태양전지판은 부품으로 
인터넷 기지에서 공급받을 수 있다. 

그래서 태양광 전지를 이용하여 충전을 하고 
낮과 밤에 사용하는 방안이 하나 있다. 

사용할 전지판이나 
전류가 미약한 범위다.
그래서 큰 문제가 없으리라 보는데 
그 경우 선을 어떻게 이어서 사용할 것인가를 살펴본다. 

태양전지판이나 led 등간의 
직렬과 병렬의 관계를 잘 이해를 못해서 
인턴연구원에게 물어 보았다. 

두 전지판이나 두 LED 간의
+ 단자를 서로 이어 가면 병렬인가. 
아니면 + 단자 - 단자를  서로 뒤바꿔 이어가면 병렬인가., 
이런 식으로 물으니 당황해한다.

그래서 자칫하면 합선을 일으킬 뻔 했다. 
그런 가운데 건전지를 놓고 생각을 해보니 조금 이해가 된다. 
다만, 그런 문제는 초등학교 과학교과서를 찾아보는 것이 좋다. 


















옥상기지의 전기시설 방안의 두번째 방안은 
각 선과 연결부분을 잠수함에서 사용하는 방식으로 
엄밀하게 각 부분부분을 방수처리를 잘 한 다음 
그 다음 누전차단기를 하나 붙여서 
사용하는 방식을 생각할 수 있다. 

그래서 누전차단기를 유심히 살펴보고 있다. 

인터넷 기지에서 아주 저렴하게 
성능이 좋은 것을 제공하고 있다. 
0,05 초 이내에 전선을 끊어준다. 
유사시에도 0.05 초만 견디면 된다. 

누전차단기는 합선으로 인한 과전류에도 끊어주고 
누전시에도 끊어준다. 
그래서 이것도 좋은 방안이 된다. 








가능한 외부에 노출되는 전선은
조금 전력이 약한 형태로 바꿔서
사용하는 것이 낫다.
그래서 기존의 충전기들에 적힌 사항을 참조 중이다. 

무선 충전기도 알아보았는데 
기기가 서로 상당히 근접해 있어야 된다. 


약사여래님께서
10 항하사 세계만큼 떨어진 상태에서 
사바세계에 있는 병자를 치료해주는 그런 상태는 아직 아니다. 

그리고 설령 좀 먼 거리에서
전기를 무선으로 보내 줄 수 있어도 
옥상기지부분 어딘가에서 누전이나 합선이 되고 있으면
전력을 공급하지 말고 끊어주어야 한다. 

보내주는 곳에 비가 내려 합선이 되었다거나
기타 누전이 되고 있다.
그런데 무선으로 계속 전기를 공급해주면 곤란하다. 
전기에 대해 잘 모르는
비전문가의 입장에서도 
그런 경우는 문제가 있다고 보기에 
이 방안은 일찍 포기했다. 












고무 부품을 인터넷 기지에서 찾아 보니 
아주 희소하게 몇 곳에서 팔기는 파는데
비싸도 너무 비싸다. 

고무 벨트를 산다고 해도
어디에 끼어 넣어햐 하는지도 잘 모르고
부품이 있다고 해도
반드시 잘 고친다는 보장도 없는데 

고무 벨트 값이
거의 기기를 새로 하나 사는 값과 
비슷함을 알고
이것도 포기했다.

 


대신 비슷한 재료가 어디서 발견되면 
다시 시도를 해야 하지 않을까 하고 
유심히 여기저기를 둘러보다가 

비슷한 것을 찾아내기는 했는데 
비슷하지만
그것은 아님을 알게 된다. 





이번에
선명칭길상왕 여래님 기지에 설치한 앰프가
아무래도 여러가지 문제가 있는 것으로 판단된다. 


일단 스테레오 음 분리가 안 되는 한편 
오래 켜 놓으면
나중엔 소리가 자동으로 작아지고 
다시 크게 되지 않는 현상을 일으키는 것을 보았다. 



안에 청소할 때
기판 가운데
두툼한 원기둥 부품 부분이 
조금 이상한 상태임을 보았는데 

대충 생각하건대 
이 부분이 그런 현상을 일으키는 것으로 생각한다. 



이런 경우 본인이 손을 더 대는 것은 
곤란하다고 본다. 

지구에서 더 이상 오디오 세트를 
구할 수 없는 경우 
그리고 오직 부품만 여기저기 구할 수 있는 경우 

한 번 비슷한 부품을 구해
수리를 해볼 수 있겠지만, 

현재는 그런 경우가 아니고
이런 경우는
본인의 수리 범위를 넘는 것이라고 보고 

약사여래님 기지에 설치했던 
미니 오디오를 가지고와서 
새로 스피커에 연결하기로 했다. 




스피커를 가지고
실험해 본 결과 


한 스피커 선에
두개의 스피커를 연결해도 되고 

또는 한 스피커에 
두 개의 앰프를 연결해도 된다는 것을 
알아냈다. 

뒤의 경우에는
물론 작동시에는 한 앰프만 사용해야 한다고 본다.  

두 앰프를 동시에 같이 사용하면
당연히 스피커에서 이상한 소리가 난다. 


작은 오디오 스피커 선에  
각기 두개의 스피커를 연결하게 된 것은 

원래의 앰프가 작동이 잘 안 된다고 해서 
기존 스피커를 또 다시 옥상에 올려 놓기가 귀찮고
그냥 그 상태에서 활용을 하는 것이
더 낫지 않을까 생각하기 때문이다. 






여기서 지노이드가  
음악공양과 경전 공양을 다 함께 
맡아서 행하게 위치를 바꾸었다. 





오래 전에

Is 님이 전기 인두기도 연구실에 기증하였지만, 
지금 보는 렌지도 기증한 바 있다. 

저 모델이 전자렌지 처음 모델인데 
다른 분들은 몰라도 
이 곳 연구실에서는 아직도 잘 작동되고 있다. 

조금만 더 시간을 보내면
역시 골동품이 될 수 있다고 보기는 하는데 
그러나 상당히 좀 더 기다려야 한다. 




원래 쓰고자 한 내용은 
천제성불론과 공포감에 관한 내용이었다. 

여기서 천제란
하늘의 왕 이런 이야기가 아니다. 

불교에서 도저히 성불하기 곤란하다고 
보는 경우를 천제라고 표현한다. 

예를 들어 어떤 이가 자신의 부모를 살해했다던지 
그런 경우 성불하기 힘들다는 의미에서 천제라고 표현한다. 

그런데 법화삼매에 대해서 생각하다 보면 
세상에 성불할 가능성이 없는 이는 없다고 하고 
불교를 믿지 않는 외도라거나
외계인이라거나, 심지어 악마도 다 포함된다. 

그런 의미에서 
원래 아무리 해도 성불할 수 없다고 보는 천제(일천제, 이찬띠까)는 
법화삼매의 입장에서는 인정할 수 없다. 
그것이 곧 법화경에서 제시하고자 하는 
핵심 주제다. 

그리고 어떤 생명이던
그리고 어떤 경로를 통해서든
결국 끝내는 성불하게 되고 
부처님은 그것을 돕기 위해서 
다양한 경로와 방편을 제시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런 다양한 방편은 
결국 이 모든 생명이 성불하게 하는데 본 취지가 있다. 

그것이 곧 일 불대승의 입장이다.  
그것이 부처님의 가르침의 본 취지라는 내용이다.

외관상 부처님의 가르침이 
여려 형태로 나뉜 것 같기도 하고 
또 부처님의 입장과는 다른 주장을 펼치는 
외도의 입장도 있고 기타 등등 사정이 복잡하다. 

그런데 알고보면 그렇지 않고 
부처님은 이 모든 생명이 
끝내 부처님이 되게 하기 위한 방편을
다양하게 제공함을 제시하는 것이다. 


이렇게 보면 
도저히 성불할 수 없다고 보는 
천제란 없다는 천제성불론이 
매우 긍정적인 메세지를 전해 준다. 

그런데 알고 보면 
이것이 또 대단히 공포스런 내용을
그 안에 담고 있다. 


모두가 다 언젠가는 성불할 수 있고
모든 생명은 그런 의미에서  
미래의 부처님이기도 하다.
그런데 이런 내용이 왜 공포스러운가는 
법화경 상불경보살품에 그 사정이 자세히 적혀 있다. 


그래서 수행자는 이 대목에서 
상당히 공포감을 느끼게 된다. 


당시 상불경보살이란 수행자는 
별다른 수행은 하지 않고 
앞과 같은 입장에서
다른 수행자를 만나면 
모든 수행자가 끝내 성불할 수 있는 것이므로 
자신은 이들을 가볍게 대하지 않는다는 자세로
공경하면서 대하는 수행만 했다는 것이다. 

어떤 이가 다른 이를 대할 때
그렇게 다른 이가 모두 미래에 성불할 존재라고 인정하면서
그렇게 대한 것이 무슨 나쁜 점이 있겠는가. 

문제는 그것이 아니다. 



바로 이로 인해 
수많은 사람이 무간지옥에 들어가서
대단히 오랜 세월 극심한 고통을 당했다는
사정이 있는 것이다. 


그것이 남의 일이 아니고 
바로 현실의 문제이기도 한 것이다. 

그리고 그런 내용이
바로 누구나 언젠가는 끝내 성불한다는 내용에 
담겨져 있는 내용이기도 한 것이다. 


그러니 수행자는 자신을 포함해
그 누구라도 언젠가는 성불한다는 내용을 통해
긍정적인 입장을 취하는 동시에

한편 이 내용이
자신이 무간지옥에 들어가
고통을 받을 것도 대비는 해야 된다는
내용도 의미함을
잘 살펴야 한다고 보는 것이다.



사람들이 대학교 시험을 본다거나 
하다못해 운전 면허시험을 보게 되면 
대부분 합격을 할 것이라고 
생각하고 임하지만, 

간혹 그렇지 못한 경우가 있다., 

그런데 하늘에 간다거나 
지옥에 간다거나 
이런 경우를 놓고 보면 
하늘 합격률이 대단히 낮다는 것은  
어느 경전에서나 공통적으로 
지적되는 내용이기도 하다. 


그래서 모든 생명이 
다 미래에 성불할 수 있는 존재다라고 
하는 명제에 취해서 
그냥 임하게 되면 

실제는 아주 장구한 세월 동안 
무간지옥에서 지내는 것이 
그 현실이 되는 경우가 많은 것도 사실이다. 


상불경보살품에서 
제시되는 사례는 
바로 그것을 제시하고 있는 내용이기도 한 것이다. 

그러니 공포스럽지 않은가. 

그래서 수행자는 
그것을 대비하는 수행을 
잘 또 훈련을 해야 한다고 보는 것이다. 



그런데 또 노래를 듣다가 
충격적인 노래를 듣게 되어서 
상당히 우울함을 오래 받으면서 
수리에 임했는데 

수리도 어떤 것은 되는데 
어떤 것은 도저히 되지 않는 상태임을 보니 
그런 우울함이 한편으로는 
증폭되는 것이다. 


본인이 처음부터 
전문 전자제품 수리기사도 아닌데 
고장난 전자제품은 만나는대로
다 수리할 수 있겠는가. 


또 설령 수리하더라도 
길가의 모래나 바위로 
새로 전자제품을 만들어 낼 수 있겠는가. 

결국 안 되는 부분이 있게 마련인데 
왜 그렇게 우울한가 할 수 있는데 


노래에서 연구원들을 나열하면서 
이들이 다 무간지옥에 곧 들어간다는 
메세지를 반복해 들려주기에 
약간 충격을 받은 것이다. 

본인의 시감상이 원래 제멋대로
자유롭게 진행되는 것임을
대부분 이해한다고 보지만,

아무리 여러번 반복해 들어도
분명 무간지옥이라고 정확히 말하고
그런 무간지옥에 들아가게 되는 것은
딱 보면 안다고
노래에서 제시하므로
상당히 신경이 쓰이는 것이다.

그래서 일단 가장 시급하게
연구원들이 훈련해야 할 내용은
어떻게 무간지옥에서 잘 견디고
또 무간지옥에서 빨리
벗어나올 수 있는가
이 방안부터 먼저
훈련을 해야 한다고 보게 되는 것이다.


먼 곳의 잘 모르는 이가
무간지옥에 들어간다고 해도 걱정이고
지옥이 아니라
다음에 축생이 된다고 해도 걱정인데

연구원들을 하나하나 나열하면서
무간지옥에 간다고 예고를 반복하니
어떻게 마음이 편해질 수가 있겠는가.

그래서 일단 그 방안부터
연구할 필요가 심각함을
생각하게 되는 것이다. 


연구원들이 그러쟎아도 
일부곡에 대해 가끔 

아후쿵텡풍텡테 현상을 일으키고 
※ [특수전문용어 참고] - 아후쿵텡풍텡테


심지어 어떤 분은 
전체 페이지를 통편집 처리하고 
사라지는 분도 있는데 

연구원들 대부분이 
무간지옥에 가게 된다고 제시하는 이 곡을 올리면 
상당히 비난을 심하게 받으리라고 본다. 


MUN 님은 자신이 무간지옥에 
피를 토하면서 들어가게 된다 
이런 내용을 듣게 되면 
충격을 받을 지도 모른다. 

다행히 혼자만 그렇게 되는 것이 아니고 
별 예외가 없이 대부분 그렇게 된다고 나열하니 
조금 위로가 되는 측면도 있다고 본다. 

본인이 올려 놓고 싶지만 
12000 곡 목록 안에 있는 곡을 듣고 듣다가  
개별적으로 듣는 것이 훨씬 낫다고 보게 돈다. 



생각해보면
일광님께서 임종 전에
지옥에 가서 해야 할 일부터 나열하면서
정리하는 것이 좋다는 말씀을 하신 바 있는데
이것이 수행자의 기본 자세라고 보기도 한다.

행여나 설마 혹시라도
자신은 무간지옥에만은 가지 않겠지 
이런 생각은 수행자가 하면 좋지 않은 것이다. 

그러나 여하튼 이번 곡은 대단히 특이한 곡으로서 
연구원들이 빠짐없이 나열되고 
이 분들이 제각각 무간지옥에 들어가는 사정을
자세히 곡안에 담고 있는 
곡으로서 소장가치가 상당히 높은 곡이라고 본다. 



문서정보 ori http://buddhism007.tistory.com/2963#7515
08gfl--불교공부_단상_2561_02.txt ☞◆vzwq7515
θ

 



◆vynt1329

◈Lab value 불기2561/02/25/토/12:00





○ [pt op tr]  mus0fl--Les Compagnos De La Chanson - Souls Le Ciel.lrc




♥ 잡담 ♥법화삼매와 꽃등의 제작 

경전을 읽다가 법화삼매란 내용을 보고 
꽃 등을 제작하는 데 있어서 
법화삼매를  주제로 꽃 등을 제작하고 싶은 생각이 든다. 


그러나 법화삼매란 무엇인가. 

간단히 생각하면 법화를 주제로 해서 
삼매를 들어 깊이 그 실상을 꿰뚫어 관하고 
법화와 관련된 모든 내용을 샅샅이 살펴보는 활동이라고 
생각하게 된다. 

그래서 명칭을 법화삼매라고 붙였겠지만, 
이 명칭만 가지고 구체적인 내용들이 무엇인가를 
알아내기는 쉽지 않다. 
알아내려면 수행자가 다시 법화삼매삼매에 들어 
법화삼매란 무엇일까를 주제로 또 삼매에 들어야 하지 않을까 
생각하게 된다. 


꽃 등을 법화삼매를 주제로 제작하는데 
꽃 등은 꽃인가 등인가 
조금 혼동이 오게 된다. 

사실은 꽃도 되고 등도 되는 것인데 
둘 가운데 어떤 역할을 주로 하는 것인가가 
개인적으로 문제된다. 

등은 늘 켜야 하고 
꽃은 피고 지고 해야 피는 것을 더 아름답게 여기듯
점멸 장치가 필요하다고 보기 때문이다.

꽃이라고 해서 꼭 피고 지고 해야 한다는 법은 없겠지만,
그래야 왠지 꽃이 더 그 아름다운 가치를 그 순간에 
인정받을 것 같은 느낌이 든다. 

천년에 한 번 핀다는 우담발화는 
천년에 한 번 피기에 더 아름답고 가치있게 여겨지게 되지 않을까. 
그런 생각이다. 

그냥 본다면 더 아름다운 꽃이 많겠지만, 
여기저기 흔하고 언제나 볼 수 있다면 
이를 대하는 이가 이를 또 하찮게 여기게 되기 마련이 아닌가. 

그래서 하찮게 평가받는 것이 사실은 대단히 많다. 

사실은 아름답고 대단히 소중하고 가치있는데 
그처럼 일상에서 하찮게 평가받는 것이 대단히 많이 있다는 사실은 

현실에서 그 반대로 그것들 하나하나의 가치를 음미하고 
평가하면서 임해야 더 바람직하다고 보는 것이기도 하다. 

그래서 본인도 본인이 떠나고 난 다음에 
시원하고 상쾌하고 속이 후련하다고 여기지 말고
평소에 같이 있을 때 그렇게
시원하면서 통쾌하고 속이 후련하게 대해야 함을
강조하게 되는 것이다. 

주변 사람들이 꼭 본인이 떠날 때즘 
그런 말을 하기에 주의를 미리 주는 것이다. 


그러나 이런 것 외에도 
현실에서 늘 같이 있다고 보는 
손이나 발 눈 코 귀 이런 것들을 나열할 때 
평소에 늘 자신이 갖고 있다고 여기는 이런 것들의 가치나 
소중함을 누가 그렇게 늘 감사하게 여기고 
소중하고 아름답다고 여기면서 살아가는가. 

그러다가 그것이 없어지기라도 하면 
그 때가서야 그것이 정말 소중하였다, 이런 식으로 
생각하는 것이다. 

그러니 이 경우에도 평소에 그것을 그렇게 갖고 있을 때 
그것이 정말 소중하고 가치있는 것을 느끼고 음미하면서 
감사를 하면서 지내야 마땅한 것이 아닌가 
생각하는 것이다. 




법화삼매를 주제로 꽃을 제작한다고 해서 
어떤 특별한 방안이 떠오르는 것은 아니다. 
꽃이니까 꽃처럼 만들어야 하고 

기존에 있는 꽃부품을 가지고 
등과 결합시켜서 만드는 작업을 하는 과정에 
법화의 의미에 대해서 
생각해 보면서 만드는 것 뿐이다. 


법화에 대해 앞과 같은 형식의 의문을
다시 던져보게 된다. 

법화는 법인가. 꽃인가. 



법은 불교에서 그것이 무엇인가를 알게 해주는 
그런 특성과 모습 성품을 갖고 있는 현상 일체 

또는 부처님의 가르침

또는 분별 의식에 의해 얻는 내용

이런 다양한 의미를 갖고 있는 용어다. 

오늘날은 법이라면 민법 형법 이런 법을 먼저 떠오르지만, 
불교에서는 위와 같은 의미로 더 많이 사용되는 
것이기도 하다. 










사진을 다양하게 처리해서 올리는데 
늘 이 가운데 어떤 것이 진짜의 모습일까 
이런 퀴즈는 늘 제출되는 것이라고 보게 된다. 

그런데 이런 퀴즈에서 
이렇게 얻는 많은 내용들 가운데 
그런 진짜에 해당하고 옳은 내용이 있는 것이고
그리고 
이것은 그런 것이고 
저것은 그런 것이 아니라고 본다면 

다시 그렇게 판단하게 되는 그 기준과
또 그런 기준이 그처럼 진짜와 가짜를 판단하는 내용이
될 수 있다고 보는 그 근거를
먼저 자신이 제출해야 한다. 

그런데 만일 그런 것이 있다면 
금강경에서 제상비상이라는 구절은 제시될 수 없는 것이기도 하다. 

금강경에서 모든 상은 실상이 아니라는
제상비상이란 구절이 제시되는 것은 

결국 그런 진짜라고 할 어떤 것을 얻을 수 없고 
그런 진짜의 모습은 없다는 사실을
그렇게 제시하는 것이다. 

그러니 현실에서
어떤 것은 착각에 의해 잘못 얻는 모습이고 
대신 어떤 모습은 진짜 곧바로 얻어낸 참된 모습이라는 식의 
분별은 기본적으로 잘못된 엉터리 생각이다. 


사람이 먼 곳에서 자신의 코 앞까지 다가오는 과정을 
지켜본다면 
처음에는 점처럼 보이다가 중간에는 손가락 크기만큼 보이다가. 
눈 앞에 오면 상당히 거구임을 보게 되는데 

이 여러 모습 가운데 어떤 것이 잘못 본 모습이고 
어떤 것이 진짜 모습이라고 여기게 되는가. 

이 퀴즈도 마찬가지 문제다. 

빠른 차를 타고 갈 때는 사람이 가만히 있어도 
뒤로 흘러가는 것 같다고 여기게 되고 

원판에 색을 칠하고 돌리면 칠한 색과는 다른 색을 
보게도 되는데 
이런 가지가지 경우에 어떤 것이 진짜 모습이고 
어떤 것은 잘못 본 모습인가. 

현실에서는 어떤 모습은 진짜 옳게 본 내용이고 
어떤 것은 착각에 의해 잘못 얻는 내용이라고 구분을 하게 된다. 

그것이 사실은 망상분별에 바탕한 내용이기는 한데 
여하튼 현실에서는 그 바탕에서 모든 분별을 행해 나가는 것이기도 하다. 

그리고 그 상태에서 자신이 그렇게 척 보아서 
얻은 내용을 놓고 
이것이 옳은 내용임을 곧바로 그렇게 안다고 또 주장하게 된다.

어떤 것은 척 보아서 그렇게 옳다고 알게 된 것이고
어떤 것은 척 보아서 얻지만 또 착각으로 잘못 얻는 내용이라는 것인데

문제는 여기에 그렇게 판단하는 그 근거가
엉터리라는 점이 문제다.  

만일 그런 것이 있다면 
금강경에서 제상비상이라는 구절은 
제시하지 못하게 되었을 것이다. 

또 만일 그런 것이 있다면 
앞에서 말한 만법은 성립할 수 없다고 보아야 마땅할 것이다. 

그러나 그렇지 않으므로 
또 현실에서 그런 내용을 그렇게 얻게 되는 사정이 
또 있는 것이다. 

이것이 모두 연기의 내용과 관련되는 것인데 
현실에서 prince 님이 갖는 망상분별은 
주로 이런 형태다. 

자신이 매번 무언가를 대하면 
매번 그것에 대해 C 라고 여기게 된다. 

그리고 또 그것은 a +b => C 라는 관계로 
나타나는 것 같고 

또 자신이 C 를 얻고자할 때도 
그런 과정으로 얻는 것 같다. 
이런 식으로 생각하고 

바로 그런 사정 때문에 
위와 같은 내용이나 그 관계가 
모두 실다운 것이라고 생각한다고 하면서 

주장하게 되는 것이다. 


그런데 바로 이것이 전도망상의 증세이고 
그 내용인 것이다. 

왜 생노병사와 고통이 전개되는가 하는 그 근본을 
찾으면 
바로 이런 전도망상 증세 때문이고 
또 그런 전도망상증세를 일으킨 근본원인으로 
근본적인 무명 어리석음을 그 원인으로 제시하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그 근본 무명을 바탕으로 하면 
그런 생노병사 생멸 고통의 현상이 전개되고 
그런 내용이 있다고 여기면서 
계속 해매 도는 상태가 되는 것이다. 


그런데 그 근본 무명을 제거하게 되면 
사실은 그 내용들은 다 어떻다는 것인가 하면 

그런 생멸을 본래 얻을 수 없고 
그런 생사 고통도 본래 얻을 수 없고 
모든 것이 본래 청정한 니르바나의 상태인 것이고 

또 그러한 사실을 그렇게 깨닫고 이해하게 된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이 두 내용이 그래서 함께 제시되는 것이다. 

일체는 무상하고 고통이라는 내용과 함께 

일체는 무아 무자성이고 공하고 그 자체로 일체가 열반적정이다.
이런 내용이 함께 제시되는 것이다. 


그래서 무상하고 고통인 측면에 머물려 있으면 
그 주체는 그렇게 고통을 느끼고 비명을 지르면서 
현실에 임하게 되는 것이고 

그 상황에서도 본래 청정한 니르바나의 측면을 붙잡고 
그에 상응하게 임하면 
그런 상황에서도 그는 청정한 니르바나의 상태에
여여하게 머물 수 있다는 것을 
제시하는 내용이기도 하다. 

여기에 망상분별의 제거가 기본적으로 요구되지만, 
그러나 그런 깨달음을 바탕으로 할 때는 

처음에 문제삼는 그 모든 감각현실이나 분별도 
모두 그 자체로 청정한 니르바나라는 사실도 
함께 이해하고 대하게 되는 것이다. 

그것이 곧 생사현실 즉 열반  
이라는 구절의 의미이기도 하다. 



좋은 꿈이던 나쁜 악몽이던 꿈을 꾼 이가 
꿈을 깨고나서도 꿈에 집착하고
꿈을 기준으로 모든 것을 대하면

좋은 꿈을 꾸다가 깨면 상당히 섭섭해 하기 마련이다.


꿈에서 자신이 정말 좋아하는 어떤 이를 만나서
사랑을 하고 무언가를 성취하고 그러려고 했는데
그 때 누군가 자신을 흔들어 깨버렸다.

깨고나니 왜 이렇게 허무하고 허탈한가.
하루 종일 그로 인해 우울하게 될 지도 모른다.


이런 상황에서
꿈을 기준으로 하면 그렇게 되는 것이
자연스럽다고 할 수 있다.

꿈에서 좋은 내용을 얻었는데
그것이 한 순간에 다 사라진 것이다.


그러나 꿈을 꾸고 있는 상황에서도 
사실 그 꿈이 진실된 내용이고 실다운 내용인가를 
문제삼고 

그것이 그렇지 않다는 측면을 붙잡고 
그것을 대하면 또 어떻게 되는가. 


꿈에서 황금을 얻으면 
정말 없던 황금이 어디에 생겨나고 있게 되는 것인가. 

그러다가 그 황금을 꿈에서 잃어 버렸다면
그렇게 있던 황금이 어디로 사라지고 없게 된 것인가.

그렇지 않은 것이다.
있고 없음을 따지는 문제가 그런 성격을 갖는 것이다.
그러나 그런 내용을 꿈의 영역에서
그렇게 얻기도 하고 얻지 못하기도 하는 것은
또 꿈 속에서 그렇게 생생하게 얻는 것이다. 
이런 의미다. 

그리고 이런 사실을 깨달으면 
꿈의 내용에 묶이거나 그로 인해 
고통을 받거나 하지 않게 되는 것이다. 

그렇다고 그런 깨달음을 통해서 
이후 일체 꿈을 꾸지 못하게 된다거나 
꿈을 꾸지 않아야 한다거나 하는 것도 아니다. 

다만 앞의 상태와 달라진 것이다. 

꿈에서 괴물을 보았다고 놀라고 
일어나보니 식은 땀이 흥건하게 젖어 있고 
그래서 깨고 나서도 하루 종일 
놀란 상태로 지내고 
그 괴물에 대해서 어떻게 할까를 고민하면서 
지낸다고 하는 경우가 있을 수 있다면 

꿈은 실답지 않음을 이해하는 이는 
적어도 그렇지 않다는 차이가 있게 되는것이다. 

그런데 그러거나 아니거나 
꿈은 어느 경우나 실답지 않은 것도 사실이다. 

다만 그처럼 이해하지 못하면 
매번 실답지 않은 꿈을 꾸면서 
그런 식으로 반응하게 된다고 제시하는 것이다. 

이 꿈은 비유다. 
그리고 꿈은 꿈이지
우리가 대하는 현실은 아니다. 

그래서 현실이 꿈과 같다고 제시하는 것은 
현실이 꿈이라는 의미는 아니다. 
다만 꿈과 비슷한 성격을 갖고 있는데 
그 성격이 위와 같다고 제시하는 것이다. 

그런데 현실은 현실을 살아가면서 대하면 
얼마나 굳건하고 오래 지속되는 내용이라고 여기게 되는가. 

그런데 그 내용들이 하나같이 
사실은 앞에서 꿈에 대해 말한 내용과 
그 성격이 같고 실답지 않음을 제시하는 것이다. 

그래서 그것을 그렇게 깨닫고 
현실에서 임할 수 있을 때 
수행자가 가장 기본적인 상태에
도달했다고 보게 되는 것이다. 


그 다음 퀴즈가 다음 문제가 되는 것이다.

즉 현실은 매번 대할 때마다 
하나같이 생생하고
그래서 진짜처럼 여겨지지만, 

그러나 이 현실이 꿈과 같고 
그래서 실답지 않은 것임을 깨닫고 
이에 대해 집착을 제거하고 
임한 가운데 

그 상태에서 무엇을 어떻게 할 것인가가 
수행자의 남은 문제가 되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법화삼매의 주제와 
맞 닿는 문제라고 보는 것이다. 
 












꽃은 많은 잎 가운데 어느 순간 
처음에는 잎 처럼 보이던 어느 부분이 나타나더니 
점차 시간이 감에 따라 
무언가 특이하고 아름다운 모습이 되어 
나타나게 되는데 
알고보면 이것이 그 식물이
무언가 열매를 맺고 또 그로 인해
그것을 세세생생 유지시키려는 취지에서
그런 아름다운 꽃을 만들어 내는 것임을 생각하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그렇게 꽃이 피어나면 
사람도 그것을 아름답고 좋다고 여기고
또 특별한 관심을 갖게 되는 것이다. 

그런 가운데 
그런 좋음을 놓고
자신이 이에 집착하고 이것을 대하면
이 좋음은 자신에게 많은 고통을 가져다 주게 되지만,
그런데 그런 좋음을 
부처님이나 그런 좋은 것들을 좋게 사용할 다른 이에게 베풀면 
더 좋아진다고 보는 것이다. 

그래서 무엇인가 좋다고 보는 것도 
사실은 a + b => C 의 관계처럼 
화합을 통해서 얻는 내용인데 

그 화합의 관계를 조금 달리하면 
그것이 자신도 좋고 남도 좋고 모든 생명이 
함께 오래 오래 이리 저리 두루두루 다 좋은 상태가 
되는 방안이 있는 것이다. 

그러니 그것이 곧 앞과 같이 
기본적으로 청정한 니르바나에 머물고 나서 

현실에서 취해 나갈 방편의 수행이 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현실에서 대하는 감각현실이나 분별이나 
좋음과 나쁨 선과 악이 
이와 같은 관계에서 얻게 된다고 제시하는 것은 

본래는 어떻다는 이야기인가 하면 
본래는 그러한 내용을 얻을 수 없음도 함께 제시하는 것이다. 

a + b => C 의 관계가 바로 그 두 내용을 
함께 제시하고 있는 것이다. 


문제삼는 그 C 란 
본래 그런 내용이 진짜 참된 어떤 것으로서 있는 것이 아니고 
그런 조건에서 그렇게 화합해서 그런 조건에서만 임시적으로
잠깐 나타나고 사라지는 
그런 내용임을 위 식이 함께 제시하는 것이다. 
그래서 위식처럼 제시하는 C 라는 내용은
바로 그런 사정으로 그것이
잠자며 꿈을 꿀 때는
그런 상황에서 꿈의 내용을 생생하게 얻는다는 내용을
설명한 것과 같다는 의미다. 

그러니 prince 님이 
매번 그렇게 같은 내용을 보고 같은 생각을 하게 되고 
같은 관계를 보게 된다는 내용이 
바로 위 내용을 여러번 말하는 것이라는 것을 
스스로 이해해야 하는 것이다. 

C 가 실답지 않다. 이 말을 
수백번 수만번 하면서 
그렇게 그 C 가 실답지 않다는 말을 수백번 반복한다고 해서 
그로 인해 C 가 실다운 내용이 되는 것이 아닌 것이다. 


그런데 prince 님은
C 가
a + b => C 의 관계로 
매번 실답지 않게 얻어지므로 
그렇기 때문에 
C 가 실답고 
심지어 
a + b 안에도 
C 가 그렇게 있는 것이 분명하다고 주장하고 
나서게 되는 것이다. 

이것이 결국 전도망상 분별 편집증세라고 
경전에서 표현되는 내용인 것이고 

바로 이 상태에서
그런 분별에 집착을 갖고 번뇌에 바탕해서 
업을 행하면
그것이 바로 고통의 생사를 전개시키는 근본원인이
되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 증상을 
시정하는 것이 바로 
삶에서 가장 중요한 핵심 과제이기도 한 것이다. 

수행의 핵심주제도 바로 이 부분에 있다고 해도 
지나치지 않다. 

그래야 이후 그런 바탕에서 
무량한 복덕과 지혜를 얻는 
수행이 시작될 수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앞과 같은 상태에서는 
그 망상분별과 집착이 
그런 수행을 하나도 제대로 하지 못하게 
그 자신을 묶어 접착시켜 놓고 있는 것이기도 하다. 

오늘 어떤 이가 어떤 장소에 가고 
무언가를 한다면 
도대체 왜 하필이면 그는 
많고 많은 장소 가운데 그곳에 나타나서 
또 할 수 있는 많고 많은 
생각과 말과 행위 태도 자세 가운데 
하필이면 그런 생각과 말과 행위 태도 자세를 취하게 되었는가. 

이 퀴즈를 풀다보면 
그는 자신이 원해서 그런 것을 한 것처럼 여기지만, 
사실은 그렇게 그를 접착시켜서 
그렇게 묶어 그런 것을 하게끔 한 내용이 
찾아진다는 의미다. 

나중에 그가 어떤 수용소에서 
끔직한 고문을 받는 경우에 
왜 그가 그런 고문을 받고 고통을 얻고 
비명을 지르는가 물으면 

그 전도망상 상태에서 아직 벗어나지 못해서 
그에 바탕해 그 순간 그 상황에서 그런 것을 대하고 
그로부터 고통을 얻는 것도
한 원인이지만, 


또 그 이전에는
그런 망상 집착 상태에서 
그런 수용소에 묶여갈 만한
생각과 말과 행위를 반복해서 누적시켰다는 것도
원인으로 제시하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또 그렇게 된 기본적인 사정은 
또 바로 앞과 같이 
처음 무명 어리석음에 바탕해
전도망상을 전개해나갔다는 데에서 
그 근본 원인을 찾고
그것을 제시하게 되고 

그러니 이것을 수행을 통해
시정해야 한다고 제시하는 것이다. 





















법화삼매란 무엇일까를 생각하면 
결국 미륵보살님과 같은 입장에서 
무엇을 주제로 연구를 하게 되는것인가를 놓고
생각하면
그 답이 쉽게 얻어진다고 본다.

현실을 보면 수많은 중생이 수많은 차별된 모습과 상황에서 
고통을 받아 나가는 모습을 보게 되는 것이다. 

그런데 그 본 바탕은 또 하나같이 다 그렇지 않고
청정한 니르바나의 상태인데도 
그러나 또 하나같이 그렇게 무명 전도 망상에 바탕해서 
그런 생사를 받아나가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이것을 해결하려면 
사실은 그 당사자들이 그 사실을 바로 깨닫고 
딱 번뇌집착을 끊고 딱 벗어나오면 간단하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그 접착력이 상당히 강한 강력 본드를 
붙인 것과 같아서 왠만해서 그렇게 
딱 딱 되지 못하는 것이다. 

그러니 어떻게 해야 그렇게 딱 딱
생사 고통과 그 번뇌에서 벗어나오게 할 것인가를
주제로 놓고 연구가 시작되는 것이다.

모든 생명이 다 그렇게 될 수 있고 
끝내 성불할 수 있고 가장 좋고 좋은 상태에 이를 수 있는데 
문제는 현실에서 그렇게 딱 딱 되지 않기에 
그렇게 될 수 있는 방안을 찾아서 

자신도 그렇게 되는 한편 
모든 생명도 제한없이 다 그렇게 쉽게 될 수 있는 
방안을 주제로 놓고

법화라는 꽃을 하나 피워 보게 되는 것이라고
생각하게 되는 것이다.

그것이 다른 것과 다 같은 법인데
그런데 무언가 조금 특별하게 꽃처럼 피어나서
무언가 다른 것과 달리
좋고 아름답고 소중한 기능을 하게 하는 것이 아닌가.

그러니 그것은
다 같이 차별이 없고 평등하다고 할 만한 그 모든 법 가운데에서도
그러나 무언가 조금 특별한 꽃과 같은 법이 되는 것이
아닌가

이런 생각을 하는 것이다.


그래서 결국 그런 방편을 찾아서 
나열하고 
그 하나하나 방편지혜를 
무량하게 닦아서 

무량한 복덕과 지혜를 구족하고 
중생을 그렇게 제도하고 
불국토를 장엄하고 
성불하고 
또 다른 이도 그렇게 해서 성불하게 하는 것이 
수행자가 
청정한 니르바나를 기본적으로 확보한 상태에서 
이후 임해야 할 사업이기도 한 것이다.


꿈이 꿈인줄 알고 허망하고 실답지 않은 것을
깨달았다고 해서
이후 꿈을 못꾸는 것이 아니고
꿈을 꿀 수 있되, 
그런 바탕에서 오히려 꿈을 더 좋고 좋게 
꿀 수 있게 된다고 제시하듯 

앞과 같이 현실이 실답지 않음을 이해한 바탕에서 
현실에서 감각현실을 얻지 못하거나 
분별을 행하지 못한다거나 
그렇게 하면 안 된다는 것이 아니고 

그런 것을 놓고 
그것이 그런 사정으로 실답지 않음을 이해하고 
집착과 망상분별을 제거한 바탕에서 
앞과 같은 수행에 임해 

그런 좋고 좋은 상태를 만들어나가는 것을 
제시하는 것이다. 

그래서 그 사업이 무량하게 
이후 진행되는 사정을 
부처님이 여러 사례를 들어 
제시하는 것이고 

그것이 곧 법화의 주제이기도 한 것이라고 
보는 것이다. 

법화경에서 에피소드처럼 수많은 내용이 제시되는데 
이것이 무슨 엉뚱한 이야기들을 그렇게 묶어 제시하는가
생각할 수도 있지만,
바로 그런 샘플 사례들을 대표적으로
뽑아 제시한 것이다.

현실에서 mun 님도 성불할 수 있고
doctr  님도 성불할 수 있고 
그외 ... 누구누구...등도 성불할 수 있고 
이렇게 하나하나 다 나열할 수도 있지만,

한마디로 doctr  님도 성불할 수 있다고 제시하면 
끝인 것이다. 

왜냐하면 매번 올려 놓은 글을
한 순간에 통편집해 삭제 처리하는 doctr 님마저 성불하면 
이 세상에 성불하지 못할 이가 없겠구나 라고
다 쉽게 알게 된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현실에서 다른 수행은 잘 안 하는 가운데  
단지 관세음보살님 명호만 딱 하나 붙들고 
계속 그 명호만 념하고 외운다면
어떻게 그렇게 해서
그가 깨달음을 얻고 성불할 수 있겠는가 이렇게
일반적으로 여기게 되는데

그러나 그렇게 해도
소원은 소원대로 성취하고
또 그로 인해서 깨달음을 얻는다.
  
이런 내용을 하나 제시함으로써 
이후 나머지는 다 마찬가지이겠구나
이것을 알게 된다는 의미다. 

그래서 선명칭길상왕 여래님의 명호를 외어도 그렇게 될 
수 있고
보월지엄광음자재왕 여래님의 명호도 그렇고
.. 
아미타불을 념해도 그렇게 되고 
약사여래님을 그렇게 념해도 그렇게 되고
그 외 무량한 다른 부처님이나 보살님을
그렇게 믿고 의존해서
수행에 임해도 성불할 수 있게 된다는 것은  
일일히 다 나열하지 않아도 되는 것이다. 

그렇다고
평범한 황제에 불과한 mun 님을 그렇게 믿고 의존하면 
성불하겠는가. 
이렇게 의문을 갖게 되는데 
사실은 그것도 가능한 것이기도 하다. 

mun 님이 장차 그런 과정을 통해서 
수억 아승기겁 후에는 성불하는데 
그 때는 그것을 연으로 해서 
또 성불이 되는 것이다. 

그래서 경전에 보면 
악인의 대표로 제바달다를 들어 
그런 제바달다마저도 그렇게 된다고 제시하는데 

또 자세한 내용을 보면 
제바달다는 큰 삼계육도의 순환과정에서 
가장 심한 상태에서부터 하나씩 좀 덜한 단계로 나아가서 
그렇게 된다고 제시하는 내용이기도 한 것이다. 

어떤 이에게 당신은 이렇게 복권을 매주 사는 수행을 
하다보면 
10 억년후에 당첨이 된다고 제시하면 
그는 어떻게 받아들이는가. 

당첨이 안된다는 이야기로 받아들이게 되기 쉽다. 

그런데 여기서는 그렇게 제시하는 것이 아니다. 

당첨이 된다고 제시한 것이다. 

그런데 자세히 살피면 그 정도 시간이 걸려서 
그렇게 당첨이 된다고 제시하는 것이다. 

그래서 10 억년이란 시간에 초점을 맞추면 
까마득해서 질리게 될 수도 있는데 
사실은 그렇지도 않은 것이다. 

첫번째로는 무량한 시간을 놓고 대하면 
이것은 정말 찰나쪽에 가까운 시간이지 
50 억년 쪽에 가까운 시간이 아닌 것이다. 
하물며 무량한 시간을 놓고 생각하면
정말 잠깐 사이에 곧 당첨이 된다는 희소식인 것이다.  

그리로 보리심을 일으켜 
수행자 라이센스를 얻고 
일체에 유희자재 신통을 바탕으로 수행에 임하는 
수행자 입장에서는 
그렇게 임하여 성불하는 기간이 그렇게 장구하여 
그로 인해 얻는 공덕도 무량함을 
자연스럽게 이해하고 
또 기쁨을 얻게 하는 내용이기도 한 것이다. 

당신이 지금 보리심을 일으켜
수행자 라이센스를 얻었는데 
얻자 마자 바로 성불해서 끝 이러면 
좋다고 보겠는가. 

처음에 그렇게 생각하지만, 
그런 경우는 
게임기를 하나 샀는데 
실행하자 마자 당신은 이미 퍼펙트 완전한 승리자, 
게임을 종료합니다. 
이러면 좋은가. 

또 어떤 영화를 보러 표를 예매해 
영화관에 들어갔는데 
영화 시작하는 장면에 
주인공은 정말 험난한 고통을 다 제거하고 
원만하게 모든 것을 다 성취하고
이후 평안하고 행복하게 잘 살았답니다. 
이 분입니다라고
주인공 얼굴 보여주고  
이어서 끝 - 이런 글자 보여주면서 
출연자 이름 감독 이런 자막이 나오고 
끝나면 좋겠는가. 

처음에는 그렇게 되야 좋다고 보는 경우도 있지만, 
막상 그렇게 되면 또 상당히 불쾌하게 여기는 것도 
사실이다. 




여하튼 그런 가운데 
mun 님을 비롯하여 
doctr 님까지도 다 끝내 성불한다고 제시되면 
이후 성불하지 않을 이는 거의 없다고 보게 되는 것이고 

prince 님만 한 분 조금 더 살펴보면 
되겠구나 라고 보게 되는 것이다. 


노래를 뽑아 올려 놓고 듣다보면
왜 하필 이런 노래가 뽑힌 것이고 
또 왜 이 노래에서 이상한 메세지를 자신이 
듣게 되는가 생각하게 되는데 
이것도 하나의 인과 문제이기도 하다. 

랜덤추출이란 것도 사실은 인과에 바탕해서 
그렇게 뽑아내는 것이 결국 아닌가. 
다만 그것을 자신이 미리 알 수 있을 정도는 아니라는 점에서 
랜덤인 것이기도 하다. 

숙왕화님이 이번에 보직에서 해임된 사정도 알고 보면 
이 랜덤변수를 잘 처리하지 못해서 그렇게 되었다는 것을 
듣게 되는데 
여하튼 실속이 없는 연구에 너무 붙들여 있다가
이번에 거기에서 풀려난 것은 오히려
다행인 것으로 생각해야 마땅하다고 보게 된다. 

그간 그 업무가 상당히 재미있었다고 하고 
그래서 시간가는 줄 모르고 토요일 일요일에도 
나가서 연구를 했다고는 하지만 
본인이 평가할 때 한마디로 실속이 그다지 없는 
연구라고 보는 것이다. 

뽑혀 올려진 노래에서는 
술 먹으면서 시를 마구 써가다보면 
나중에 일단 보시 수행을 시작하는 것이 
모든 수행의 첫 단계가 됨을 메세지로 제시하는 데 

왜 좋은 것을 다른 이에게 베푸는 것이 
수행의 첫 단계가 되는가 하는 데에도 사정이 있는 것이다. 

무언가 좋음으로 보는 것이 
자신과 결합하면 그것이 고통의 결과를 낳는 관계가 되는데 
그러나 다른 조건과 결합하면 그것이 
자신에게나 그 다른 이에게나 온 생명에게 그렇지 않다. 
이런 것을 우선 인과식을 통해서 
이해하는 것도 중요하다고 본다. 

그런데 왜 이 수행이 계, 정, 혜의 수행에서 
그리고 계의 항목에서 
첫번째 항목이 되는가 하면 

이것이 앞과 같은 바탕에서 
이뤄져야 

자신을 묶고 있는 업의 장애에서 
풀려나게 되는 계기를 마련해주게 되기 때문이다. 

이론상 정려나 반야 수행을 못할 상황이 따로 
있다고 보기는 힘들지만, 
그러나 현실적으로 먼저 
그렇게 묶임에서 풀려나야 

정려와 반야 수행을 임할 바탕이 마련이 된다고 보는 것이다. 

쉼없이 번뇌에 묶여 번뇌의 채찍을 맞아가면
번뇌의 사역을 당하는 가운데 
어떻게 시간을 내서 정려 수행을 하고 
반야수행을 할 수 있겠는가. 

그것이 되는가. 
그렇게 번뇌 묶여서 사역을 당하는 상황에서는 
잠시 여가가 생긴다해도 
그 시간에 역시 또 다른 번뇌망상을 
마음에 채워 놓고 휴식을 취하게 되기 마련인 것이다. 

계율에 해당하는 항목 가운데 
자신의 손과 발이 잘리어져도 
평안히 참고 자비의 마음으로 대한다는 내용도 제시되고
그것을 어느 경우에만 따로 행하여야 한다고 보는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계율에 해당하는 수행 가운데 가장 쉽게 첫번째로 
임할 수 있는 것이 좋음을 아끼지 않고 베푸는 수행이 
가장 기본적이라고 보는 것이기도 하다. 

대부분 이런 수행항목이 제시되면 
또 대부분 거부감을 갖게 되기 마련이다. 

자신이 바보인가, 왜 좋은 것을 남에게 주는가. 
그러면 자신부터 당장 불편해지고 손해가 되는데 
누구 좋으라고 그런 짓을 하는가. 

이렇게 생각하는 것이다. 

그런데 누가 자신에게 다가와 침을 뱉고 발로 차면 
가만히 참는 수행은 오히려 잘 하게 되는 경우가 많다.

그런데 알고 보면 그 경우는 또
하고 싶어서 그런 수행을 한다기 보다는
그렇게 할 도리 밖에는 별 방안이 없어서
그냥 그렇게 하는 경우가 많은 것이다.

묶여서 고문을 당하는데
그런 고통을 그렇게 받는 것 외에
달리 무엇을 어떻게 하는가. 

그 상황에서는 자신이 분노를 표시해보았자 
한 대 맞을 것 두 대 더 세게 맞는다는 것을 
바로 알기에 별 도리없이 
그냥 받고 마는 것이다. 

그리고 히틀러와 같은 분이 선생님이 되어 
자신에게 나타나면 
그가 하라는 대로 꼼작없이 묶여 하게 되는데 반해 

그렇지 않은 상황에서 
자신이 좋다고 보는 무엇을 
아끼지 않고 베푸는 수행은 
대단히 힘든 수행이라고 보는 것 뿐이다. 

그러나 사실은 위와 같이 
어쩔 도리가 없어서 
무언가 고통을 받아 들이거나
무언가를 행하는 것은 
수행이 아닌 것이기도 하다.  

그것은 어쩔 수 없이 묶여서 
그렇게 한 것 뿐이기 때문이다. 

또 장삿꾼이 계산에 의해서 
무언가를 나중에 얻고 남기려고 
무언가를 다른 이에게 베푸는 것도 
수행이 아닌 것은 마찬가지다. 

그것은 장삿꾼이 장사하는 행위인 것이다. 

물건을 팔기 위해서 
샘플을 먼저 공짜로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면 
그 물건을 사람들이 나중에 많이 산다고 보고 
나눠주는 것이 수행이 아닌 것과 마찬가지다. 

그런데 그렇다면 
왜 공연히 자신이 좋음을 아끼지 않고 
다른 이에게 베풀어야 하는가. 
그 이유가 무언가 

그것이 현실에서 문제가 되는 것이다. 

그래서 그 사정을 그렇게 이해하는 것이 
먼저 요구되는 것이다. 

그런 상태가 되야 
또 보리심을 일으키고 
또 수행자 라이센스를 얻게 되는 것이고 
그런 상태가 되어야 
이제 얻을 것이 아무 것도 없음(무소득)을 방편으로 
온갖 수행을 그렇게 해야 한다는 사정도 이해하고 
또 그에 정진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현실에서는 가장 기초적인 이런 수행은 
오히려 대단히 하기 힘들다고 보고 

그러나 당장 
그런 손해는 없다고 보고
돈도 별로 안들어간다고 보는
정려 수행이나 반야 지혜를 닦는 수행은
또 쉽게 할 수 있다고 보고
지식을 쌓는 수행은 많이 할 수 있다고
여기는 경우도 많다. 

그런데 사정이 그렇지 않은 것이다. 

기본적으로 무량한 겁에 걸쳐 자신이 
쌓아 놓은 업의 장애가
기본적으로 계를 닦는 위와 같은
보시 정계 안인의 수행항목을 통해 해소되지 않으면 

사실은 이후 지혜자량을 닦는 
수행에 임할 바탕이 마련되지 못하는 것이기도 하다. 

이론상은 가능하다고 보지만, 
현실적으로는 그것이 그렇게
잘 안 되는 사정이 있는 것이다. 

쉽게 이해하자면 
곰이 되어 곰의 모습으로 활동하는 상태에서는 
아무리 산수책을 또 보고 보아도 
숫자의 의미를 이해할 수 없는 것과 
그 사정이 마찬가지다. 

그래서 일단 곰의 상태에서는 
마늘과 쑥을 먹고 석달을 견디는 
안인 수행 코스를 마쳐야 
이제 인간의 상태가 되고 

그 상태에서 글자도 배우고 그런 가운데 
다시 자신이 대하던 그 모든 내용을 
음미해 나가야 

이런 세속지를 통해서 
세속제를 얻고 그런 바탕에서 이를 통해 
실상을 관하는 승의제를 얻게 되는 단계에 돌입할 수 있다고 
보는 것이기도 하다. 

그렇지 않은 상태에서는 어떻다고 보아야 하는가 하면 

어떤 생명체로 태어나서 
처음 눈을 떠 대하는 그 상태를 출발 바탕으로 삼고 
이후 눈을 감아 목숨을 마치는 그 상태를 마지막으로 하여 
그 안에 갇혀서 삶을 살고 마치는 상태에 
묶여 있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그 바탕에서 모든 것을 대하고 
임하고 그것이 곧 진리라고 이해하고 
임하는 것이기도 하다. 

이것이 현실의 전도망상 편집증상을 겪고 
임하는 생명의 공통점이기도 한 것이다. 

이 상황을 벗어나려면 
어느 순간 무언가를 계기로 
그 묶임이 시작된 것을 풀어낼 
뜻과 말과 행위를 시작해야 되는 것이기도 한 것이다. 

그래야 비로소 
그 안에서 돌고 도는 상태에서 풀려나 
왜 칠각지역에서 세계 여행을 떠나는 수행이 
필요한가를 파악하게 되고 

정려 수행과 반야 수행에 임할 계기가 마련된다는 
것이기도 하다. 

누구에겐가 이런 내용을 제시하면 
대부분 
지금 바쁜데 왜 자꾸 쓸데 없고 
실속없는 이야기만 하는가. 
저리 가세용 

대부분 이런 반응을 취하기 마련이다. 

소에게 경을 읽어 준다고 할 때도 
상황이 마찬가지다. 

그래서 미륵보살님이 
법화삼매를 놓고 연구를 그렇게 오래 
행하는 것이기도 하다. 

사정이 그렇게 되어 있기 때문인 것이다. 

물론 석가모니 부처님처럼 
그런 것 저런 것 따지지 않고 
호랑이가 배가 고픈다고 하면 
자신의 몸을 식량으로 제공하기도 하고 
그렇게 임하는 방안도 있지만, 

일반적으로는 
상대가 조금 성숙한 상태가 되어야 한다고 
보게 되는 사정도 있는 것이기도 한 것이다. 

투우장에서
투우사를 향해 달려가는 소를 놓고 
어떻게 그 소가 장차 고통을 당하고
또 당하는 것을 무한히 반복해 나가는 것을
막을 수 있을 것인가. 

이 퀴즈와 관련해서 
법화삼매란 삼매가 진행되는 것이기도 한 것이다. 



올려진 노래도 좋지만 
잠깐 쉬는 틈에 옥상기지에서 들은 노래도 
좋다고 본다. 

두 노래를 이어 들었는데 
다 법화삼매와 관련해 의미가 있다고 보게 된다. 
사실 어떤 주제를 놓고 대한다면
어떤 노래가 그렇지 않겠는가. 
또 세상의 어떤 것이 또 그렇지 않겠는가. 
이렇게 볼 수 있지만, 
그래도 함께 감상해보는 것도 좋다고 본다. 


노래가 많으면 글이 길어지고
글이 길면 노래를 많이 올릴 필요가 있다고도 보게 된다. 

음악이 왜 현실에서 사랑받는가. 
음악을 빼 보면 그 사정을 이해하기 쉽다고 본다. 

단조롭게 되는 것이다. 

옥상기지에서 또 쉬는 가운데 
또 노래를 듣고 중요한 메세지가 전해진다고 보고 
또 올려 놓게 되는데 

현재 옥상기지에서 또 다른 
아주 오래된 고물 오디오의 뒤에 붙은 단자 내용을 바라보면서
어떻게 이것을 재활용할 수 있을까 
생각해보는 중이다. 











요즘 이런 단자를 구할 수 있는가. 
lp 레코드를 사용할 수 있는 기기인데 
지금 상황에서 
수리를 하려면 상당히 힘든 것도 사실이다. 

사실 옥상 기지에는 조금 더 상태가 심한 
기기도 몇 개 있다. 
진공관을 사용하는 기기도 하나 보관 중인 것이다. 

조금만 더 보관하면
잘 하면 골동품이 될 단계에 가까워지고 있는데 
문제는 일단 그 상태에서
동작은 해야 되는 것이 아니겠는가. 

현재 옥상기지에 작은 카메라를 놓고 
거기서 보는 책 내용 가운데 필요한 부분은 
사진을 촬영해 활용하는데 
매번 카메라를 여기저기 가지고 다니기 귀찮아서 
메모리만 빼고 넣고 가지고 다니다가 
pc 에 옮겨 놓고 메모리를 지운 것 까지는 생각이 나는데 
그 이후 메모리카드가 보이지 않는다. 

그래서 조금 작업이 불편해졌는데 
메모리 카드를 옮겨서 다른 카메라에 넣으면 
그 때부터 무언가 작업을 그 상황에서 시작하는 것은 
현실에서 
각 생명이 각 세계에 세계여행을 다니는 
과정을 연상시키기도 한다. 
무언가 비슷한 점이 보이기도 하는 것이다. 







○ [pt op tr]  mus0fl--Charlotte Gainsbourg - Serge Gainsbourg - Lemon Incest.lrc




노래를 듣다가 자신이 아는 이가 등장하는 것 같다고 해서 
이상하게 생각할 일은 아니다. 

자신이 이미 알고 있기에 그렇게 들리는 것 뿐이다. 

자신이 이가 아프면
거리에 있는 치과병원 간판이 그 때부터
잘 보이기 시작하는 것과 사정이 같은 것이다. 

그것이 특별한 일은 아닌데 
이것이 모두 전도망상을 바탕으로 그렇게 
진행된다는 사정을 이해하는 것이 
수행자에게는 중요한 점인 것이다. 

먹물을 마구 뿌려 놓을 때
왜 그 때마다 자신이 아는 모습이
보이게 되는가는 그런 사정이 주된 원인인 것이다.

그것이 망상 분별이 진행되는 과정을
이해하는 한 방안이기도 한 것이다.

 




 



문서정보 ori http://buddhism007.tistory.com/2963#1329
08gfl--불교공부_단상_2561_02.txt ☞◆vynt1329
θ

 


- Black M - Sur ma route - 


[00:00]Lyrics


이곡에서는 얻어보았자 알고 보니 무위법이다. 
이런 상당히 어려운 내용을 말하고 
수많은 역할을 맡아 행한 배우가 
나중에 우주 공간을 펼쳐 놓고 
어디로 여행을 떠날까 
생각하는 모습을 대하는 것은 
수행자가 대하는 상황과 비슷하다고 본다. 

무위법이란 생멸을 떠난 것을 의미하고 
또 수행의 목표점인 니르바나도 
본래 무위법에 설정하는 것이기도 한데 
그러나 알고보면 현실에서 생멸 변화한다고 보는 
그 일체가 그 본바탕이 또 그런 상태이고 
그런 무위법을 떠나 있는 것이 아니라고 
제시되는 것이기도 하다. 

색즉시공 공즉시색 
불생불멸 불구부정 부증불감 
이런 구절이 다 그와 관련되고 

세속에서 말하는 공수래 공수거 이런 것도 
다 같은 사정을 제시하는 내용이라고 본다. 




- A Caus' des Garçons - A Caus' Des Garçons - 


처음에 뽑힌 곡을 포함하여 
옥상기지에서 들은 
이들 곡들은

전체적으로 
왜 숙왕화님이
하필이면 그렇게 보직이 이 상황에서 해임되고 
또 그런 상태에서 또 왜 무주보시를 그렇게 계속해야 하는가

그 사정을 
공통적으로 
잘 전하고 있다고 본다. 

시감상을 잘 해야 한다고 본다. 
두번째 붙인 곡에서는 
아더왕이 나무의 왕이라는 시감상을 하는 이도 있는데 
원래 시감상에는 제한이 본래 없는 것이기도 하다. 

나무불 나무법 나무승..

이런 정신이 필요한데 
이 한 마디가 계기가 되어서 
점차 묶임에서 풀려나게 되는 것이기도 한 것이다. 

그래서 나무의 정신은 어디에서나 중요한 것이다. 

처음 곡에서 
빨리 보시해야 된다고 반복해 제시하는데 
그 만큼 수행자 라이센스를 취득하고 
수행을 시작하는 것이 사실은 급한 것이기도 하다. 

알고보면 수많은 생명에서 
인간의 상태로 잠시 가석방 상태로 임하는 가운데 
자발적으로 수행에 진입할 수 있는 기회가 제공되는 것이기도 한데 

알고보면 그 시간이 각각에게 
그렇게 장구하게 많이 남은 것이 아니기도 한 것이다. 



현재 누어서 뒹굴뒹글 작업 시스템을 위해
모니터를 3 개를 연결해 놓고 
계속 테스트해보는 중인데 

여하튼 매번 바탕화면을 클릭해
해상도 조정하고 사용하는 것이 상당히
불편하다고 보게 된다.

또 다른 방안으로 매번 모니터 뒤 단자를 빼었다 
끼었다하는 방안도 있다고 할 수 있는데 
그것도 또 불편하다고 본다. 

그런 가운데 이런 작업을 하다보니 
작업 창만 내리면 
이 작업 창이 사라져서 
어디에도 나타나 보이지 않고 
찾을 수 없는 이상현상도 나타남을 보게 된다. 

그런데 또 실행작업창을 열어보면 
그 창들이 있다. 
다만 모니터상에 어떻게 나타나도록 해야할지 
모르게 된 상태로 해당 창들이  
보이지 않는 것이다. 

그래서 한 번 작업하는 가운데 
같은 창만 수십개 열어 놓았음을 또 확인하게 된다. 

이래저래 상황이 복잡함을 느낀다. 

어제 만든 법화삼매 꽃등을 
등이자 꽃으로서 
법이자 꽃으로서 
처음 무우덕 보살님 앞에 올려 심사를 받고 
미륵보살님 앞에 올려 놓고 있는데 

끄지 않고 계속 켜두면서 감상을 하니 
솔직히 첫 작품이라 그렇게까지 
잘 만든 것은 아닌데, 
개인적으로는 좋아 보인다. 

수행자가 경전공부를 할 때만 
숨을 쉬는가. 
또 깨어 있을 때만 
생각을 하는가. 

사실은 그렇지 않은 것이다. 
살아 있는 순간 그런 활동은 쉴 수 없는 것이다. 

너무 공부를 많이 하면 
혹시 폭발하게 되는 것이 아닌가 하고 
무언가를 외울 때
도저히 이제 머리에 들어가지 않는다고 하면서 
염증을 느끼게 되는 경우도 있는데 

알고보면 그런 경우는 없는 것이다. 

무량 겁전에 자신이 누구와 어떻게 지냈고 
그런 사소한 일까지 다 꺼내올 수 있을 정도가 설령 된다고 해도 
그런 일로 머리가 폭발하게 되는 일은
없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그런 바탕에서
각 생명간의 관계와 사정을 파악하다보면

세상의 생명이 
모두 다 부모형제자매 그런 관계로 
얽혀 있다고 경전에 제시되는 사정이 있다고 할 수 있다. 

양성생식을 하는 단계에서 
한 생명의 직계 부모를 계산해도 
2 의 제곱을 계속하고 또 무한하게 해나가다 보면 
얼마만큼의 직계 부모나 직계 조상이 숫자로 나타나는가의 
고전적 퀴즈문제도 있는데 

2 의 제곱 계산 문제를 가볍게 생각하면
힘이 드는 것이다. 

다만 자신의 자신의 30 대 조상을 별로 신경을 기울이지 않고 
자신도 자신의 직계 30 대 후손을 별로 신경을 기울이지 않기에 
아무 문제가 없다고 보지만, 
사실은 그런 사정 때문에 
자신이 바다에서 만나는 문어나 해파리라도
가볍게 대하고 상대하면 곤란한 사정이 또 있는 것이다. 

그런 가운데 오백진점겁 이런 수의 단위로 나아가면 
아미타부처님과 자신과의 관계도 아주 가까웠음을 
파악할 수 있을 가능성도 열린다고 본다. 



가섭부처님이 수행자로 수행에 임할 당시 
전생에 제바달다와 석가모니 부처님이 함께
가섭 부처님의 옷에서 이로 함께 생활하였다는 이야기도
그래서 그냥 이야기로 생각하고 대하면 곤란한 것이기도 하다. 

최근에는 어떤 이가 왜 자신의 애인이 자신과 
가까이 지내다 어느날 집을 방문한 상인과 눈이 맞아
집을 나가 돌아오지 않는가 하는 퀴즈에도 
수행자와 이에 얽힌 이야기가 그 배경으로 제시되는데 
그런 사정이 그렇게 전개되는 사정을 잘 이해할 필요도 있다고 본다. 

그냥 재미있는 이야기인가. 
어떤 경우는 그렇지만, 
어떤 경우는 그렇지 않은 것이고 
그렇지 않은 경우가
현실에서 수행자나 일반인이나 다 문제인 것이다. 











◆vrmd1889

◈Lab value 불기2561/02/24/금/19:44





○ [pt op tr]  mus0fl--Serge Gainsbourg - Vieille Canaille.lrc




○ [pt op tr]Tungchichang



♥ 잡담 ♥숙왕화님의 보직해임

숙왕화님이 5 시라는 아주 이른 시간에 연구실에 나타났다. 
이렇게 일찍 나타나는 일은 아주 드문 일이어서 
궁금해서 물어보니 
드디어 보직이 해임되어서 일찍 왔다는 것이다. 

오래 전에 연구 성과가 담긴 하드 디스크를 
떼강도단에게 탈취당한 일과 
최근에 업무문제가 겹쳐서 
그렇게 되었다는 소식이다. 

그간 토요일 일요일도 없이
계속 연구를 하던 숙왕화님이 
드디어 풀려난 것 같아서
다행이라고 생각하는데 
숙왕화님은 조금 기운이 없어 보인다. 



오늘은 아침부터 
옥상 외부기지의 꽃등을 어떻게 설비할 것인가에 대해 
연구를 했다. 

외부기지에 일반전기로 등을 다는 것을 주저하게 되는 것은 
비가 내리거나 할 때 전기 누전이나 합선 감전 사고 등이 
우려가 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것을 어떻게 해결하는 것이 좋은가 
연구를 하게 되는 것이다. 

처음엔 태양광을 이용하여 등을 밝히는 시스템을 도입했는데 
좀 더 개선을 할 수 없는가하는 생각을 하는 것이다. 




그래서 옥상기지에서 밤에 불을 밝히는 
태양광을 이용한 LED 등 시설을 떼서 
연구 차원에서 살피는 중이다. 





태양전지판이 전기를 만들면 이것을 밧대리에 저장한 다음 
밤이 되면 전등이 자동으로 켜지고 
한 8 시간 정도 사용하고 꺼지는 것이다. 




전선이 없이 어떻게 사용할 수 있는 방법이 없는가. 

최근에 전선이 없이 충전도 하는 시스템이 소개되는데 
어떻게 전선이 없이 전기가 보내지는가. 

이것은 알고보면 자기공명 현상을 이용해서 
그렇게 한다는 것이다. 

이런 공명현상은 
사실은 항하사 세계만큼 멀리 있는 약사여래님이 
상당히 먼 지구상의 환자를 치료하는데 사용되는 
원리가 아닐까 생각해본다. 

여하튼 
선이 없이 충전이 되거나 
어댑터로 직류로 변환된 전원을 공급받고 


외부에서 비가 오던 눈이 오던 
그런 가운데 조금 합선이 어느 부분에 일어나던 누전이 되던 
그 범위에서 그 문제가 단절되고 다른 문제를 일으키지 않고 

그러나 전력은 그런 형태로
안정적으로 꾸준히 공급받을 수 있으면 
좋지 않을까 생각해보는 것이다. 

그런데 어느 부분에서
누전이나 합선이 되면 
앞과 같이 공명현상에 의해 
그런 효과도 다시 돌려 받게 되는 것일까.

잘 모르겠다.

 



선명칭길상왕 여래님 기지에 설치한 앰프가 
조금 이상해서 수리중이다. 

처음에는 
앰프가 소리가 작게 나서
스피커 선이 잘못되어서 그런가 하고
스피커 선을 교체해보기도 하고
스피커가 문제인가 하고
다시 다른 스피커를 붙여보기도 하였는데
별 차이가 없다.

그런 가운데  
앰프를 한쪽으로 기울이면 소리가 또 크게 난다. 
그런데 원 상태로 놓으면 또 소리가 작아지는 것이다. 

무엇때문에 단지 위치만 변경하면 
그런 변화가 일어나는지 알 수 없어서 
결국 또 드라이버를 열어 보게 된 것이다. 

안에 무슨 날라다니는 식물 씨로 보이는 것도 있고 
상당히 먼지 등이 많이 보이는데 
단자와 단자사이에 그런 것이 걸려서 
그런 문제를 일으킨 것인지도 모른다. 

그래서 붓을 동원해서 조금 청소해주는 중이다. 




















청소를 해주니 또 소리가 
아주 크게 잘 난다. 




수리 중 해드폰 변환 단자로 보이는 부품이
떨어져 버렸다. 










LED 전구로 선명칭 길상왕 여래님 기지의 꽃등을 제작 중이다.
잘 안 보이겠지만, 
백은과 염부단금 이런 것을 안에 넣었는데 
상당히 귀한 부품으로서
밖에서는 잘 보이지 않게 특수처리했다. 







안에 들어 있는 백은이다. 








































기존에 초기 제작된 꽃등은 무우덕 여래님의 기지로 옮겨 왔다. 
요즘 그릇이 깨질 때마다 예술품을 만들어
무우덕 여래님에게 공양을 하는데 

깨지거나 말거나 평안하고 
그릇이 깨지면 오히려 더 가치가 높은 예술품이 
된다는 그런 취지를 담고 
이런 작품을 만드는 것이다. 







본인이 무한카드를 제작하여 
주변 연구원들에게 무상으로 그간 공급해주었는데 
세상의 재화를 모두 다 사고도 남는 무한카드인 것이다.

그런데 생존에 필수적인 의식주 부분은
이 무한카드로 결제가 되지 않는 제약이 있다고 할 수 있다.

숙왕화님이 보직이 해임되어서 
기운이 없어 보이는데 

앞의 깨진 그릇을 잘 감상하면서 
기운을 차리고 
또 본인이 제공해주는 무한카드와 무한화폐를 잘 사용해서 
오히려 전화위복의 계기를 삼았으면 하는 희망을 가져본다. 


자기공명 장치로 무선 충전하는 제품을 
구하려면
그런 장치가 장착된 핸드폰 등이 중고가 되어 돌아다닐 시점까지 
대략 한 3 년 정도는 기다려야 한다고 보는데 

그냥 양쪽에 공명이 이뤄질 형태를 만들고 
한 번 시스템을 만들면 되지 않을까. 
이런 생각도 해보게 된다. 
그러나 설계도만 보고 그런 것이 만들어진다고는 보지 않고 
조금 더 좋은 방안이 없는지 생각해보기로 한다. 

전지판과 밧대리를 많이 연결하면 
자체적으로 계속 led 등을 켤 수도 있지 않겠는가. 

일단 주변에 태양광 발전하는 분의 전지판 남는 것 혹시 
없는지 문의를 해볼 일이라고 본다. 



문서정보 ori http://buddhism007.tistory.com/2963#1889
08gfl--불교공부_단상_2561_02.txt ☞◆vrmd1889
θ

 










◆vunc6351

◈Lab value 불기2561/02/23/목/13:49





○ [pt op tr]  mus0fl--Jean-Louis Murat - Pars.lrc


○ [pt op tr]Rinaldo_Cuneo,_Belle_View,_France



♥ 잡담 ♥꽃향기악등게송공양과 뒹굴뒹굴작업시스템의 개선



한국은 정말 배송이 빠른 것 같다. 
도라에몽 기지에 주문하고 다음날 택배물건이
다 도착해버렸다.  

꽃과 등 공양을 위한 작품 구상이 
아직 안 된 상태이기에 
이들 부품은 당분간 보관만 해두어야 하리라 본다. 














뒹굴뒹굴 작업을 위한 시스템 제작을 위해 
주문한 각종 연결선과 
변환젠더 그리고 블루투스 동글 
이런 것들이 또 마구 도착해버렸다. 










일단 선명칭길상왕여래님 기지를 
새로 옮겼다. 

원래는 서방의 보염여래님과 같이 계셨는데 
동방의 선명칭길상왕여래님과 너무 근접해 계시므로 
공간의 왜곡이 너무 심하다는 생각이 들었기에 

해가 가장 먼저 뜨는 방향으로 새로 옮기고 
일단 약왕보살님과 약상보살님과 처음에 함께 모셨는데 
이후 조금 변경이 있었다. 

보염여래님 옆에 지장보살님과 관세음보살님을 모시고 
문수보살님을 선명칭길상왕 여래님 옆에 모시고 
다시 약사여래님 옆에 약왕보살님을 모시기로 하였다.  


꽃 공양 향공양 등공양 시설과 함께
기악공양시설을 설비하고 
그리고 게송공양을 위해서 지노이드를 이곳에 
배치했다. 


처음에 led 등을 늘어 놓았는데 
연구실 분위기가 전반적으로 산만해진다는 
다른 연구원의 지적에 의해 
앞에 모아 놓았다. 

예술가의 작품이라고 해서 
모든 사람이 다 좋아하는 것이 아니듯 

다 미적 감각과 취향이 다르기 때문에 
마땅히 다른 이의 취향을 존중해야 한다고 본다. 






차를 마시는 공간에서 기존에 fm 음악만 듣던 미니 오디오세트도
뒤에 rca 선을 꼽을 수 있기에 
앞으로 약사여래님 기지에서 기악공양을 올릴 수 있도록 
수리 중이다. 







다행히 수리를 마치니까 소리가 잘 난다. 
CD 까지 잘 동작하면 좋을 것 같은데 
CD 만 빼고 카세트 테이프와 fm 이 정상작동하고
지노이드를 가지고 테스트 중인데 이 역시 소리가 잘 난다. 

약사여래님기지의 신해 드로이드를 연결을 마쳤다. 










이번에 선명칭길상왕 여래님 기지가 신설되는 가운데 
옥상 내무기지가 많이 변경이 되었는데 
상당히 어수선한데 
옥상기지의 특성상 
정리해도 어수선한 것은 큰 차이는 없다. 



보염여래님 옆에 
지장보살님과 관세음보살님을 모시기로 했다. 




사실 led 등을 오래 보면 눈이 아프기도 하다. 
그런데 밤에 불이 다양하게 깜박이는 모습을 보면 
상당히 환상적이다. 
사진과는 다르다. 
더구나 안경을 벗고 불빛을 보면 더 환상적이 된다. 

사진으로 본인이 안경을 벗고 볼 때 불빛과 비슷한 모습이 
나타나도록 찍어 보았는데 
밤에는 옥상기지의 어수선한 모습도 잘 안 보이고 
상당히 멋있다. 












뒹굴뒹굴작업 시스템을 구성하기 위해 
도착한 연결선을 가지고 연결을 해보았는데 
본인이 사용하는 컴퓨터 그래픽카드가 
조금 사양이 떨어지다 보니 
모니터를 2 개만 지원한다고 한다.

사양이 조금만 좋았으면 3 개를 연결해서 
그냥 사용하면 될 것 같은데 
현재는 매번 

바탕화면에서 클릭하고
화면해상도부분에서
사용하는 모니터를 선택하고 조정해주고 나서 
뒹굴뒹굴 작업 시스템으로 
들어갈 수가 있다. 


그래서 연구를 해보니 
주문한 변환젠더 가운데 
하나가 hdmi 선을 하나 받아들인 다음 
hdmi 과 dvi 선 두개 선으로 분기해주는 젠더가 있다. 

그래서 이것을 사용하면 동시에 3 개를 사용할 수는 있다. 

문제는 분기해주는 젠더는 
그 두 모니터 가운데
가장 적은 해상도를 나타내는 모니터 해상도로 맞추어주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러다보니 다른 모니터에서 보게 되는 해상도가
영 보기가 힘든 상태가 되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래서 분기하는 젠더를 사용할 때는
그 모니터 해상도가 모두 같은 상태가 가장
바람직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래서 아무래도 모니터를 또 하나
구해서 사용해야 앞으로 뒹굴뒹굴작업 시스템을
효과적으로 사용할 수 있을 것 같다.

그냥 켜고 끄면 바로 뒹굴뒹굴 작업에 임할 수 있어야지
매번 해상도 조정을 재설정해주고
그러면서 어떻게 사용할 수 있겠는가.
이런 생각을 하게 되는 것이다.


다행히 본인은 지금까지 최저가 모니터로만
구해 사용해왔기에
인터넷 도라에몽 기지에 알아보니
역시 최저가다.

이번에 구한 선들도 다 최저가 옵션들이 대부분인데 
성능을 테스트해보니 별 이상이 없다. 

그래도 또 모니터를 하나 더 구하자니 
부담이 되기는 하는데 
현 상황에서는 어쩔 도리가 없는 것 같다. 


현재 뒹굴뒹굴 작업 시스템을 만드는 작업을 하지만,
사실은 이상적인 엉덩이를 만들어 내는 것이
더 시급하다고 본다. 

왜 이런 시스템이 필요하게 되었는가하면 
앉아 있으면 엉덩이가 아파서 
이렇게 된 것이다. 

그래서 검색 사이트에서 
목표로 할 만한 이상적인 엉덩이를 검색해보았는데 
다음 사진 정도가 상당히 이상적인 상태라고 본다. 










옷에 무엇이라고 써 놓은 것인가. 

오렌지? 
rance  를 찾아보니 역한 냄새라고 나오는데 
상황이 맞을 수도 있지만, 
그렇다고 그런 글자를 썼겠는가. 

혹시 현재 불어 노래가 나오는 그 나라? 

여하튼 저 정도 쿠션이 기본으로 장착이 되어야 
이상적이라고 보게 된다. 


요즘 전자제품을 수리하다보니,
전자제품들이 요즘은 사용하려 할 때마다
한 번 씩 드라이버를 사용해서 수리를 한 다음
사용해야 하는 것이 당연한 것처럼 여겨진다.

멀쩡해보이는 전자제품들이 자꾸 조금씩
이상한 모습을 보여서
꼭 분해 조립을 한 번 씩 하게 만드는 것이다.






시간 타이머 장치이다. 
원래 선명칭길상왕여래님 기지는 낮에 환하기 때문에 
꽃 공양시설을 타이머를 붙여서 저녁에만 가동하려고 했던 것인데 
오늘 보니 전혀 작동을 하지 않고 있다. '

그래서 분해를 했다. 
분해를 하면서 이것으로 시간별로 10 W 를 작동시키지 않는 것이나, 
그 타이머를 작동시키기 위하여 시간 회로가 돌아가게 하나 
엇비슷한 것이 아닌가 생각하게 한다.

타이머는 있어서 사용하지만, 새로 하나 부착하려면
비용도 상당히 든다.

무엇때문에 작동이 안 하는지 모르지만, 구조를 살피고
다시 조립하니 정상적으로 작동한다. 





본인은 전문가가 아니라서 분해해보고 
대강 살펴보고 청소해주고 작동되면 되는 것이고 
안 되면 안 되는구나 하고 포기하는 도리 밖에는 없다. 

그런데 이제는 드라이버도 고장이 났다. 
사용 중에 작은 알이 빠져서 드라이버 막대가 자꾸 뺘진다. 
수색을 해서 간신히 작은 구슬을 찾아 끼어 놓았다. 



어제 전자제품 수리에서는 choice 님의 드라이버가 큰 역할을 했다. 

나사가 아주 깊이 박혀 있어서 왠만한 길이의 드라이버로는 돌려지지 않았는데 
choice 님의 드라이버로 연 것이다. 
크기는 전체적으로 비슷해 보이는데 약간의 길이 차이가 보인다. 
굉장히 긴 드라이버로 보이는데 저것도 부족해서 약간 뽑아 늘여서 
돌려서 열었던 것이다. 

열고 나서 한 일은 청소해주는 일만 하고 
그 다음 cd 기가 안 되어서 더 분해하려다 
테스터기를 사용해보아도 고치기가 쉽지 않다고 보고
나머지는 청소 후에 모두 소리가 잘 나서 그 상태에서 포기해버렸다. 






오늘은 약사여래님 기지에 설치한 조명기가 또 고장이 나서 
수리를 했다 
불이 버튼을 누를 때마다 8 가지 모드로 변화하면서 깜박이게 되어 있는데 
약샤여래님 기지의 조명기는 계속 깜박거리기만 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 조종기는 어디에 분해할 나사 자체가 보이지 않는다. 









선명칭 길상왕 여래님 기지의 불빕치 너무 눈부셔서 살짝 가리니까 
햇님의 모습이 연상된다. 

수행자가 온갖 공양을 부처님과 중생에게 해야 한다고 하지만, 
대표적인 것이 꽃, 향, 기악, 등, 게송 공양 이런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것이 수행자의 신구의 삼업을 깨끗이 하는 수행과 과보와도 관련이 
된다고 보게 된다. 

원래 향 공양에서는 계향, 정향, 혜향, 해탈향, 해탈지견향 
이런 식으로 표현하기도 하는데 

담배야 사람들 특히 흡연가들이 많이 좋아하는 향임이 분명하지만, 
계율을 지키고 
정려수행을 하고 
반야 지혜를 닦는 수행이 어떻게 향이 되는가. 

그것은 결국 수행자의 수행이 곧 
수행자를 향기롭게 만들고
그 향을 공양하는 일이 된다는 그런 의미가 아닐까 생각한다. 

경전에 보시와 공양이 갖는 공덕이 많다고 제시하는 가운데
그러나 게송을 하나 지니고 그것을 위타인설하는 공덕은 
이보다 훨씬 많다고 
가치저울로 가치를 비교 측정한 결과를 제시하는 부분이 많이 나오는데 

그래서 수행자는 기본적인 꽃, 향, 기악, 등 공양을 행하는 가운데 
핵심 게송을 지니고 외우고 위타인설하는 그런 수행도 
힘써야 한다고 본다. 









약사여래님 기지에서 말썽을 일으킨 조종기인데 결국 칼로 수술을 해서 
다시 조립하니 정상 작동이 된다. 

분해 후 부품이 별 이상이 없어 보여서
재조립하고
테이프로 감아 놓았는데
그 상태에서 정상 작동하지 않으면 
본인도 방법이 별로 없다. 

그런데 다행히 각 모드 변환이 정상적으로 되어서 
다행이라고 본다. 

그 전에 안 되었던 이유를 생각해보면
아마 부품을 조립후 기계적으로 플라스틱을 붙이는 것 같은데 
이 조종기는 약 1 Mm 정도가 어긋난 상태로 붙여져 있는 상태임을
볼 수 있었는데 그것이 문제였던 것으로 추정하게 된다. 

버튼을 누르면 기판의 일정 부분의 접점에
버튼이 닿아서 각 모드를 선택해주는데 
그 위치가 조금 틀어져서 그런 문제가 있었던 것으로 
추정하게 된다. 




여하튼 잘 되면 문제가 없는데
잘 안 되면 사실 조금 머리가 아파오게 된다.

계속 깜박거리는 상태로 작동하니,
눈이 조금 피곤해지는 것이다.


엉덩이를 강화시키는 방안을 생각하면서
오늘 거리를 거닐었는데 
엉덩이를 강화시키는 운동은 수영이 제일 좋지 않은가 생각한다. 

그런데 수영은 또 조금 심심한 극기훈련에 속한다고 보게 된다. 
수영장에서 왔다 갔다 하는 일은 보통 의지로는
꾸준히 게속하기가 힘든 단조로운 성격이 있는 것이다.


경전과 논서를 여러 종류를 함께 살피려고 계획 중인데 
첫 부분이 대부분 인과 문제와 깊이 관련되어서 
서술이 시작되는 것을 볼 수 있다. 

그래서 이것을 살피기는 살펴야 하는데 
쉽지가 않다고 보게 된다. 

그런데 왜 이것이 문제되는가를 생각하면 
그것은 단순하다고 본다. 

현실에서 모든 생명이 다 본래 차별이 없고 
또 차별이 있더라도 모두 장차 성불할 존재라고 하지만, 
현실을 대하다 보면 

수많은 차별을 보게 된다. 

마치 전자제품이 수없이 많은데 
어떤 것은 잘 작동하는데 
어떤 것은 볼륨을 돌릴 때마다 찌지직 거리면서 
불쾌한 소리를 계속 내는 경우가 있고 
어떤 것은 각종 모드로 불빛을 잘 비춰주는데 
어떤 것은 안 되는 경우도 있고 
이런 차별이 있는 것과 상황이 비슷하다. 



그런 가운데 각 개개인의 입장에서 이 문제를 생각하면 
문제는 더 단순하다. 


자신이 가장 좋아하는 어떤 좋고 좋은 상태가 되기를 바랄 때
어떻게하면 그렇게 될 수 있는가 
이 문제와 직접 관련이 되는 문제가 이것이기 때문이다. 


세상에서는 대박 먹튀 심리가 분명히 있다고 본다. 

물론 이는 대충 좁고 짧고 얕게 현실을 관찰하기에 
그런 것이 좋다고 보게 되지만, 
그러나 그 희망 자체가 나쁘다고 할 수는 없다. 

그 입장에서는 자신에게 가장 좋은 상태가 
그것이라고 보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이런 것이다. 

자신이 다른 생명을 죽이고 매일 음식을 섭취하고 
세상의 재물도 온갖 수단을 다해 다 차지했는데 
원래 mun 님이 제시하는 1-2-3-4 상호 작용 반작용의 인과관계론에 의하면 
각 생명이 그와 같이 반응해나가므로 
결국 그런 행위는 그 이후 그에 대한 과보로서 
또 각 생명에게 행한 그 반대면을 다시 자신이 받아 나간다는 
관계를 제시하게 된다. 

그러나 각 입장에서는 어떻게 생각하게 되는가하면 

자신이 좋아하는 그런 것들을 비록 
다른 생명의 좋음을 침해하고 얻지만,
자신은 그렇게 늘 이를 통해 좋음을 얻기는 얻지만, 
그 반대 입장은 결코 자신이 되지 않기를 바라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대박먹튀심리인 것이다. 

주식거래를 예를 들면 한 번 자신은 엄청난 수익을 거두는데 
반대로 자신이 투자한 것은 결코 손실을 보지 않는 가운데 
모든 것을 마친다. 
이런 희망을 갖고 임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라는 것과 
같다. 


자신을 기준으로 놓고 자신에게 좋은 내용만 
나열해서 그것을 얻기를 원하는 것이 
그 입장에서는 너무나 당연한 것이 아닌가. 

mun 님의 1-2-3-4 이론은 각 생명이 그렇게 원하지만, 
바로 그런 사정때문에 그렇게 안 된다는 인과관계를 
설명하는 내용이지만, 
그러나 인과관계를 살피는 주 목적은 
어떻게 하면 그렇게 될 수 있을까를 놓고 
현실에서 모두 궁리 연구를 행하는 것이기도 하다. 

어떻게 보면 루팡의 대박 먹튀 심리를 대부분 갖고 
임하는 것이기도 하다. 

그것은 수행자라고 해서 다른 것이 아니다 

수행자도 역시 고통과 나쁨을 없애고 피하기 위해서 
수행에 임하는 것이고 
그렇게 할 수 있는 방안을 찾아 
수행에 임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어떻게 하면 그렇게 되고 
어떻게 하면 그렇게 되지 않는가 
그것이 바로 인과관계의 문제와 직결되는 것이다. 

그러니 이 인과관계 문제가 복잡하더라도 
자신이 그런 희망을 갖는한 
연구하지 않을 도리가 있겠는가. 

어떤 희망을 갖는데 우연히 성취되기를 기대하고 
또 그러다가 우연히 사라지기를 사람이 
바라는 것이 아닌 것이다. 


그래서 복잡하더라도 이 문제를 살피기는 살펴야 하는데 
이미 과거글에서 그 내용을 많이 살핀 것도 사실이다. 

그 결론 가운데 중요한 점은  
현실에서 이해하는 인과관계는 
일단 엉터리라는 것을 기본적으로 이해해야 한다는
점이라고 본다. 

그것은 또 소원을 갖고 있을 때 
그것을 성취하는 방안과 관련해서도 
일반적으로 표준적으로 갖고 있는 인과지식은 
엉터리임을 의미하는 것이기도 하다. 

수학시험이 있다고 하자 .
수학시험에 100 점을 맞아서 어떤 상품을 받기를 
대부분 원한다고 하자. 


일반적으로는 이렇게 생각한다. 

그 시험이 나오는 범위에서 출제가능한 문제를 
모두 다 한 번 씩 풀고 연습을 꾸준히 하면 
그렇게 좋은 결과를 얻을 수 있다. 

이렇게 생각하는 것이다. 

그래서 학원도 다니고 문제집도 구해서 풀고 
이런 활동에 분주하게 된다. 


1 월달에 그 자세한 내용을 살폈는데 
인과를 단순히 살피면 위 내용이 맞을 것 같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음을 1 월달에 소원을 성취하는 방안을 살피면서 
살핀 것이기도 하다. 

그런데 왜 그렇게 되는가도 
또 인과문제이기도 하다. 

왜 열심히 수학문제를 다 외우듯 풀고 또 풀었는데 
정작 시험 보는 순간에는 
감기가 갑자기 걸려 머리가 멍하고 
집에서 큰 사고가 나서 도저히 시험문제를 풀 수 있는 
상황이 못 되고 그래서 시험을 망치게 되는가. 

본인이 대부분 시험에서 좋은 성적을 거두지 못하는 
과정은 위와 같다고 할 수 있는데 

그러나 또 이에 반해서 
평소에 공부도 전혀 하지 않은 이는 
나중에 보니 시험에 합격해 있고 
말만 하면 원하는 것을 척척 눈 앞에 누가 갖다주는가. 


물론 이런 것을 사회의 부조리 현상으로 이해하고 
그래서 나중에 그 뒤에 그렇게 이상하게 된 내용이
또 다른 문제를 일으키게 됨을 보게 되는데

여하튼 이런 문제까지 다 포함해서 
이 전체를 인과 문제로 놓고 살피는 것이 필요한 것이기도 하다. 

왜냐하면 그렇게 현실이 이상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여하튼 위 두 모델 가운데 
좋지 않은 부분은 분명히 좋지 않은데 
좋은 부분은 좋으므로 잘 취해서 사용해야 한다는 점이라고 본다. 

그래서 현실을 단순하게 접근하기가 대단히 힘든 것이다. 

그런데 위 내용은 일단 
현실에서 이해하는 인과관계는 
대단히 대충의 엉성한 지식이고 
심하게 말하면 그 근본이 모두 엉터리임을 이해해야 함을 
강조하게 되는 것이다. 

그 사정을 자세히 이미 밝혔지만, 
결국 각 논서에서 제시하는 첫 문제도 
바로 이들과 직접 관련되는 문제들이다. 

그것은 또 수행의 방안과도 밀접한 것이다. 


본인이 선명칭길상왕 여래님의 기지에서 
전기를 조금 절약하려고 타이머를 장착할 때마다 
약간씩 문제가 생기는 것을 경험하게 된다. 

솔직히 늘 사용할 필요가 없어 보이는데 
전기를 사용하자면 아까운 마음이 드는 것이 
표준적인 생각 아닌가. 

그것이 10 와트의 전력이던 60 와트의 전력이던 
그런 마음이 들게 되는 것이다. 

그것은 부처님에게 공양을 하는 일이나
다른 생명에게 무언가 좋음을 베풀고 보시하는 행위에 대해서도 
일반적으로 대부분 그렇게 생각하고 대하는 것이기도 하다. 

햇빛이 밝은데 보이지도 않은 led 등을 또 켜두고 있어야 하는가. 
이런 생각이 드는 것이다. 

그런데 경전에서 어떤 수행자가 
기악을 몇만년 쉬지 않고 공양을 했다는 등
그래서 현일체색신삼매 등을 얻었다는 등의 내용이 제시될 때 
사는 것 자체가 100 년을 넘지 못하는데 어떻게 
그럴 수가 있는가. 
이런 생각도 한편 드는데 

일단 그 정신이 중요한 것이 아닌가 생각하게 된다. 

그래서 결국 타이머는 고쳤는데 
부착하지 않기로 했다. 

끊이지 않고 등을 켜놓고 
그에 따르는 비용은 수행자가 감당하겠다는 
각오가 더 필요한 일이라고 본다. 

그런데 알고보면 
사실은 껌값을 아끼려 하는 노력하는 가운데 
대신 다른 곳에서 펑펑 낭비하는 경우가 많은 것도 사실이다. 

그런 것이 다 문제가 되는 것이라고 본다. 


자신은 10w 전기를 아끼면서 
또 안타까울 때는 선명칭길상왕여래님에게 
무엇을 성취시켜주기를 바란다고 소원을 접수시키는가하면

생명을 구해달라고 하거나
불치병을 낫게 히달라고 하거나
온갖 번뇌를 다 제거해달라고 하거나
당장 수용소에 묶여서 고문을 받고 처형당하게 되었는데 
이것을 해결해달라는 등의 
소원을 떡 접수시키는 경우가 대부분인 것이다. 

평소에 10 W 를 아끼려는 정신으로 
좀 더 인과문제를 잘 살피고 
자신과 다른 생명을 고통을 받게 하는 
기차 노선에서 내려올 노력을 했어야 마땅한데 

그렇게 하지 않고 
엉뚱한 지혜만 발휘하다가 
나중에 그런 상태가 되면 
다급하게 sos 를 선명칭길상왕여래님에게 접수시키고는 하는 것이다.


그래서 그건 것이 다 문제가 되는데
현실적으로 일단 전기료가 문제가 되는 것도 사실이기 때문에
되도록 절약하면서 공양을 하려는 생각도 한편 드는 것도 사실인 것이다.


오늘 마트에서 살 것을 미리 외우고 길을 나섰는데

담배, 배추, 라면, 만두, 사탕 이런 것들이었기에 
그것을 이어서 말을 만들다보니 

담배배추라면, 만두사탕 이런 이상한 구절이 나오게 된다. 

가끔 마트에 들러서 물건을 사다보면 
원래 필요한 물건을 빠뜨리고
엉뚱한 것만 들고 오는 경우가 많기에 
이런 방안을 사용한 것인데 

위 구절이 우연히 현실상황과 많이 와 닿는다고 본다. \


현실에서 제갈량이 현명하고 지혜롭다고 
평가하는데 
맹획을 놓고 칠종칠금하는 사자성어를 남길 정도로 
그 실력이 월등했던 것으로 전해진다. 

그런 결과 만족의 머리가 그처럼 많이 
전장터에 잘려지게 된 것이기도 하다. 

제갈량이 만두로 제사를 지내 무사히 귀환했다고 하는데 
이것이 현실에서 뛰어난 지혜가 갖는 
문제점이기도 한 것이다. 
그것이 그렇게 해서 해결된다고 단순하게 보는 것이 
바로 대박 먹튀 심리인 것이다. 

마치 남의 목을 창으로 쉽게 베버리는 관운장이 
정작 자신의 목이 잘리우고 나서는 
그 목을 찾아 헤매도는 상황과 비슷한 것이다. 

그래서 만두는 상당히 많은 의미를 
그 안에 담고 있는 것이다. 

중국에서는 남쪽에 사는 이민족을 만족이라고 불러서 
만두라고 칭한 것인데 
동족에 있는 이민족과 관련해서도 
또 고사가 있다. 
이이제이 이런 말이 있는데 
바로 그것이 그 내용이기도 하다. 
그러면 해결된다는 것이다. 

이것을 거꾸로 그 이에 해당하는 이민족이
중국을 상대로 사용하면 통한다고 보는가. 

반드시 안 통한다고 보기도 힘들지만, 
무엇이던지 얕은 지혜로 임하면 
담배 배추의 결과가 되는 것이다. 

지금 대박을 터뜨리고 먹튀하면 끝 이런 자세로 임하면 
그것은 다음에 배를 부담하게 하는 원인이고 
그래서 배로 추한 상태가 되고 
만두의 결과를 초래한다. 
죽고 난후 화탕지옥에 가는 것도 당연한 귀결이다. 

이런 엄청난 시감상을 하게 되는 것이다. 

당신이 그 잘리어진 만두의 주인공이라면 
시장에서 파는 만두를 받고 
그것을 자신의 목 위에 붙이고 
만족할 수 있겠는가. 

관운장이 그렇게 해서 만족한다면 
만족도 만족하겠지만, 
그것이 서로 그렇게 잘 안 되는 일인 것이다. 


여하튼 그래서 인과관계에 대한 문제는 
기본부터 자세히 살피고 

또 각 구체적인 문제는 무량행문과 관련해서 
또 자세히 살펴야 할 문제이기도 한 것이다. 

세상의 수많은 지식이 이런 인과문제와 관련되지 않는 것이 
어디 있겠는가만은 
적어도 그 기본이 왜 엉터리인가는 확보하고 
그것을 대해도 대해야 한다고 보는 것이다. 

일단 쉬고 이 복잡한 문제를 천천히 살펴나가기로 한다 


그러나 논의는 복잡해서 많은 논의가 필요하다고 보지만, 
결론은 간단하다. 

전도 망상에 바탕해 뒤집혀진 상태에서 
관찰하고 이해하는 인과관계의 내용은 
전도망상의 내용인 것이다. 

그래서 사실은 그렇게 이해하는 내용을 
조금 반대로 뒤집어 이해해야 그래도 
적절한 내용이 되는 경우가 많다. 

그리고 현실에서 
무언가를 A 라 놓고 
그 A 가 없다가 있다 
있었는데 계속 있다. 
있다가 약간의 부분은 조금 없어지고 또 다른 부분은 없다가 있게 되면서 
변화하는 모습을 보인다. 
그리고 있었다가 없다. 

이런 내용을 대하게 되고 
이것을 생주이멸이라고 표현하고 
왜 이렇게 되는가를 
우선 헤아리게 되는 것이다. 

물론 이런 논의는 
그 A 가 자신이 가장 좋아하는 어떤 것이라거나, 
또는 자신이 가장 싫어하는 어떤 것일 때 
그 논의의 의미가 대단히 크다. 

그것을 알아야 원하는 좋음을 얻게 되고 
원치 않은 나쁨을 얻지 않게 되지 않을 것이 아닌가. 

그리고 그 관계를 먼저 관찰하게 되는 것이다. 

그런데 이런 관찰에 임하는 그 주체가 
기본적으로 전도 망상에 바탕해 뒤집혀진 상태에서 
이 내용을 관찰하고 이해하기에
그렇게 파악한 인과관계의 내용은 
당연히 전도망상에 바탕한 전도망상의 한 내용인 것이다. 

그것이 곧 견해의 번뇌에 해당하는 온갖 번뇌와 
관련되는데 특히 인과문제와 관련해서는 
사견이나 계금취견을 형성하는 주된 원인이 된다. 

번개가 천둥소리를 만들어 냈다고 이해한다거나, 
또는 천둥소리가 번개를 만들어 냈다고 이해한다거나, 

또는 제사에 닭머리를 올리고 제사를 잘 지내야 복을 받게 된다거나, 
홍동백서의 규칙을 엄수해서 잘 음식물을 배치해야 조상이 평안해지고 
그래서 자신이 복을 받고 살게 된다거나, 
부처님 상을 하나 놓고 그 앞에 LED 등을 꺼지지 않고 계속 켜 놓아야 
그 부처님의 국토에 평안하게 태어나 평안히 살수 있게 된다거나 하는 등의 생각이
바로 그런 견해에 해당한다고 이해할 수 있다. 


그래서 그것이 전도망상에 바탕한 잘못된 견해임을 이해하는 것이 중요하고
또 현실에서 임할 때는  
사실은 그렇게 이해하고 대하기 쉬운 그 내용을 
그 관계를 올바로 이해한 바탕에서 
오히려 조금 관계를 반대로 뒤집어 이를 대해야
그래도 비교적 적절한 내용이 되는 경우가 많다. 
 

수행방안으로 제시되는 내용은 대부분 이런 형태다 

좋음은 아껴야 하고 좋은 무엇을 
남에게 주면 당연히 손해다

=> 남에게 무언을 준다고 해도 주는 것이나 받는 이 주는 이가 본래 없고 
그 물건은 어디로 사라지는 것도 아니고 오히려 그로 인해 무량한 복덕을 얻게 된다. 
앞과 같이 임하면 아귀세계로 진입하게 된다. 

좋음을 얻기 위해서는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아야 하고 
또 필요하면 다른 생명의 생명이나 신체 재산을 침해해도 무방하다. 

그러나 반대로 
자신의 좋음을 누가 침해하면
분노를 일으키는 것은 당연하고 
또 과거의 피해를 보상받고
앞으로 해당 당사자가 다시 그런 일을 하지 못하게 하고
또 일반적으로 다른 이들도 이를 본받아 행하지 못하도록 
철저히 응징 보복을 해야 한다. 


=> 그러면 당연히 그로 인해 고통을 돌려 받게 되고 
이후 다 함께 지옥세계로 진입하게 된다. 

이런 인과관계를 잘 파악하지 못하고 
자신의 본능이나 그 때 그 때 감정이나
또는 자신의 얄팍한 좁고 짧고 얕은 지혜에 바탕해 
임하면 
그것이 결국 약간의 좋음을 징검다리 삼아 
넓고 길고 깊은 고통을 받는 결과로 나아가게 된다. 

인과나 어떤 것의 정체를 올바로 파악하지 못하고 
그렇게 임하면 그것이 곧 축생의 상태이기도 하고 
또 장차 축생의 세계로 진입하는 원인이 되는 것이기도 한 것이다.

투우장에 있는 소는
투우사가 자신을 자극하면
달려가서 받아 버리는 것이 당장 속이 후련하다고 생각하기에
그렇게 투우사를 향해 돌진해 나아가는 것이다.

개미가 단 설탕이 땅에 떨어져 있으면
개미집에서 행렬을 지어 개미들로 길을 만들어서
그것을 개미집으로 가져 가는 것을 보게 되는데
개미가 아무 생각이 그런 일을 우연히 하게 되는 것이 아니다.

각 개미가 흩어져 그런 먹이를 찾다가
한 개미가 그것을 발견하면 이후 동료 개미들이 그것을 함께
그처럼 모여서 나르는 일을 쉼없이 행하는 것이다.

그 작은 개미도 그런 인과를 생각하고
그렇게 행하듯
덩치가 큰 소도 그렇게 행하고
다른 축생도 다 마찬가지다.

그래서 그렇게 얻고자 한 것을 당장 얻기도 하는데
이것이 축생의 상태인 것이다.

그래서 대충 좁고 짧고 얕게 보면
그것이 그런 좋음을 얻는 방안이라고 여겨지는 것이기도 하다.

그런데 투우장에서 그 소가 그렇게 행해서
투우장에서 무사하게 된다고 보는 것은
축생의 생각인 것이고
투우장에서 그 모습을 지켜보는 관중은
대부분 그렇게 보지 않는 것이다.

투우장에 끌려 온 소를 놓고 
아무리 투우사가 자극을 하고 
칼로 찔러대도 꼬리만 흔들어 대고 
그렇게 하기를 기대하는 것은 지나친 일이라고 보지만, 
만일 투우장에 도착하는 소마다 
다 그런다면 
아마 스페인에서 더 이상 투우시합은 
구경하기 힘들게 될 것이고 
계속 그런 일을 하려는 스페인 투우사들은 세상으로부터 
온갖 비난을 다 받게 될 지도 모른다. 

마치
사람이 다가가면 꼬리를 흔들고 사람에게 충성스럽고
사랑스럽기만 한 애완견을 
왜 날짜를 정해서 매번 잡아먹는가. 
이런 비난을 세계에서 하는 것과 약간 비슷해지는 
것이기도 하다. 

사정은 그렇지만, 
그러나 소는 조금 단순하게 생각하는 것이다. 

도저히 참을 수 없다. 
받아야 시원하겠다. 
전속력을 내어 달려서 뿔로 받으면 
저 정도는 해치울 수 있다. 
이렇게 여기고 돌진하는 것이기도 하다. 

과연 그런가. 

제갈량의 칠종칠금의 모습은 
투우장에서도 쉽게 볼 수 있는 것인데 

현실에서는 이세돌 9단이 
초등학생과 바둑을 두는 것과 같은 모습이 
곳곳에서 쉽게 관찰이 된다. 

한마디로 그 정도로 심한 차이가 
보이기도 하는데 
바로 이런 상태가 한마디로 축생의 상태라고 
표현되는 것이다. 

그것은 한 마디로 
자신이 대하는 것의 정체나 
그런 모습을 보게 되고 그런 내용을 대하는 
그 인과관계 전반에 대해서 
무지한 만큼 
그런 평가를 받게 되는 것이다. 

그런데 사실은 어떻다는 것인가. 

앞에 예를 든 작은 개미나 
소나 제갈량이나 
그 모두가 사실은 모두 본래 차별을 얻을 수 없고 
또 장차 모두 성불할 그런 존귀한 존재라는 것은 
다 같다는 것이다. 

어떻게 그럴 수가 있는가. 

그래서 그 사정을 잘 이해해야 할 필요가 있는 것이다. 

왜 미래의 부처님이 
현재는 그런 모습으로 그렇게 고통을 받는가. 

그것이 현실의 문제이기도 한 것이다. 




더 근본적으로 살피면 
앞에서 a 라는 어떤 것을 놓고 
그 생주이멸의 과정이 어떻게 그렇게 되는가를 
문제삼는데 

사실은 그것부터가 잘못이라는 점을 
잘 이해해야 한다는 점이다. 

무언가를 놓고 a 라고 생각하는 것도 잘못이고 

그 a 가 없다가 있게 되었다. 
있다가 없게 되었다.
그래서 생멸이 있다라고 라고 생각하는 것도 잘못이고 

그렇게 그런 a 나 그 a 의 생멸을 본래 얻을 수 없는데도 
왜 그런 a 가 없다가 나타나고 
또 있다가 없어지는가 하고 의문을 가지면서 
그 생멸의 인과관계를 문제삼는 것도 
엉터리인 것이다. 

그래서 현실에서 
자신이 생각하기에는 분명 
없던 꽃이 새로 피었고 
그리고 어느날 지고 

저 사람이 공을 던지니까 
공이 저기에서 이리로 오고 

그리고 유리창은 깨지고 
그리고 그 사람은 저 쪽으로 달려 도망가는 모습을 
보고 
그래서 오고감이 있고 
변화가 있고 
그것이 그런 과정으로 그렇게 되었다고 여기는 데 

그러나 이 현실에 
그렇게 문제삼는 그 각각과 
그 생멸 역시 본래 얻을 수 없다는 사실부터 
잘 이해해야 하는 것이다. 

이 내용은
앞과 같은 현실을 놓고
생각해보면 정말 엉뚱하고 이상하지 않은가. 

분명 그렇게 문제삼는 그 무엇이 그 현장에 있고 
그런 각 변화가 있다고 여겨지는데 
왜 그런 것을 하나도 얻을 수 없다고 제시하는가. 

그리고 그런 것을 얻을 수 없기에 
그런 것을 놓고 그 생멸과 
그 생멸에 관한 인과관계도 역시 그런 사정에 
놓인다고 제시하는 것은 
더욱 이상하지 않은가. 

그래서 이것을 잘 기본적으로 이해해야 
그 다음 문제가 잘 이해가 된다고 볼 수 있다. 

그리고 그것이 이해가 잘 되면 
그 바탕에서
생사 고통을 멸하고 무량한 복덕과 지혜를 
성취해나가는 수행을 또 그 바탕에서 행해 

또 반대로 일반적으로는 도저히 성취할 수 없다고 보는 
것들을 쉽게 잘 성취할 수 있게 될 수 있기도 하고 
그래서 현실에서 유희자재 신통을 갖추고 
중생을 제도하고 
불국토를 장엄하고 
성불할 수 있다고 제시되는 것이기도 한 것이다. 

앞에서 a 를 얻을 수 없고 
무언가의 생멸도 얻을 수 없고 
그래서 어떤 a 라는 상태를 목표로 하고 
그것을 성취하는 일도 본래 얻을 수 없다고 제시한 내용과 
뒷 부분의 내용이 서로 모순된다고 이해하기 쉬운데 

그것이 또 그렇지 않고 
앞의 내용 때문에 
뒤의 내용이 그렇게 제시된다는 사정도 
함께 잘 이해해야 하는 것이다. 

그러나 결론만 일단 제시하고 보면 
도무지 처음부터 결론부분까지 
모두 자체적으로 말이 잘 안 되고 
이상한 엉터리 내용으로 여겨지게 되기 마련이라고 본다. 


그래서 일단 깊은 반야 지혜의 수행이 
필요한 것이기도 하다. 

그것은 현실에서 매일 대하는 변화를 하나 놓고 
그것을 a + b => C 라고 표현해 놓고 
그 상태에서 C 의 정체와 
C 가 그렇게 나타난 인과관계를 잘 헤아리는 

수행이 먼저 필요한 것이다. 

전문용어로 이를 인연관이라고 하는데 
이것이 곧 
축생의 세계에서 벗어나게 하고
또 이를 바탕으로
아귀세계나 지옥세계 등
각 세계의 고통을 벗어나고 제거하게 하는
기본 수행방안이기도 한 것이다. 

그래서 담배를 좋아한다면 
담배를 태우면서 
왜 없던 연기가 이렇게 나타나는가. 
연기를 하나 놓고 
연기를 잘 헤아려 살피는 수행이 필요한 것이다. 

연기관= 인연관의 수행이 
이렇게 시작될 수 있는데 

담배향을 좋아하지 않으면 
세탁물을 놓고 세탁하는 과정을 이해하거나 
음식재료를 놓고 음식을 만드는 과정을 하나 놓고 
왜 어떠한 한 달걀이 어미 닭에 품어져서 
열을 오래 섭취하면 
그 안에서 병아리가 나타나는데 반해 

프라이판에 올려 놓고 열을 가하면 
계란 프라이가 되는가 
이런 문제를 놓고 
계율과 인과 문제를 살피는 것도 
의미가 깊다고 본다. 

수행자는 유정란이 아니고
무정란인 계란의 경우는 무정물이기에
섭취해도 되고
또 따로 다라니를 염해야 할 일은 아니라고 보지만, 

그러나 역시 계를 어지럽히는 '계란'은 곤란한 것이다. 

그리고 그것이 다 연기 인과의 문제와 관련되는 것이다. 



사람은 자신을 기준으로 모든 것을 판단하려고 하기에 
자신이 섭취하는 것만 음식물이라고 보기 쉬운데 
과학적으로 그렇지 않은 것이다. 

우리가 식사를 하고 
무언가는 섭취해 그것으로 신체를 기르고
무언가는 배설하고 이런 과정을 
생명활동의 중요한 내용이라고 이해하는데 

이것부터 사실은 잘 이해할 필요가 있는 것이다. 

현실에서 사람이 취하는 음식을 기준으로 하면 
그렇지 않은 것들도 그런 음식 기능을 
동일하게 한다는 것을 과학적으로 잘 이해해야 하는 것이다. 

이미 계란이 그 한 사례를 보여주는데 
식물을 빛을 가지고 그 사례를 하나 보여주기도 하는 것이다. 

그러나 도서관에서 공부하는 학생은 
또 다른 사례를 보여주기도 한다. 

그래서 알고보면 그런 인과로 살펴야 할 문제가 
상당히 다양한 형태가 있는 것이다. 

그래서 어떤 존재는 사람이 향으로 여기는 것만 
음식으로 섭취하면서 살기도 하고 

심지어 정신 활동의 내용을 음식으로 여기고 
섭취하기도 하는데 

오늘날 과학에서 이해한다면 

앞에서 달걀은 
어미 닭이 보내는 열파장을 음식물로 삼아 이를 섭취하여
이후 그 달걀은 병아리로 변화해나게 된다고 보게 되듯, 

사람이 정신활동을 하는 경우에도 
그런 파장이 발생하는 것이라고 볼 수 있는데 
이것도 상당히 맛있는 음식물이 되는 경우가 있는 것이다. 

그런데 알고 보면 
이상한 일이 아니다. 

사람이 물체를 보는데 사용하는 빛을 
과학 교과서에서 식물은 이것을 섭취해서 
몸을 키우고 열매를 만들어 낸다고 제시하는 것과 
별반 다른 일이 아닌 것이다. 



여하튼 그래서 대충 파악하는 것은 
오히려 모르는 것보다 더 위험한 경우가 많은 것이다. 
대충 좁고 짧고 얕은 관찰에 바탕한
어설픈 지식은 식자우환 현상에 관련되고 
그 자신이나 다른 생명의 고통을 더 깊게 만드는 원인이 되는 것이다. 

여하튼 a + b => C 이런 내용을 하나 놓고 
여기서 C 의 정체나 
C 가 나타난 과정을 잘 이해하여서 

본래 그런 C 를 얻을 수 없고 
생멸이나 오고감 변화 등을 모두 얻을 수 없는데 
바로 그런 사정으로 

현실에서 그런 C 를 또 얻는다고 제시하는 사정을 
깊게 잘 이해할 필요가 있다고 보는 것이다. 

그래서 수행방안이 수행자에게
그렇게 종합적으로 제시되는 사정이 있는 것이다. 

그런데 또 그런 수행을 잘 행하려면 
기본적으로 위 내용을 또 잘 이해해야만 
수행을 잘 실천할 수 있게 되는 것이기도 하다. 

복잡하지만, 그래서 이런 내용이 
가장 기본적으로 수행자가 이해해야 할 내용으로 
처음에 제시되는 것이기도 한 것이다. 

그러나 사정이 사정인 만큼
또 간단한 문제는 아니기도 하다. 
그래서 어려움이 많은 것이다. 

그래서 투우장의 소는 아무리
어떤 이가 말린다 해도 
그 상황에 놓이면 그 소는 
열심히 투우사를 향해 돌진하는 일은 
반복하게 되는 사정이 또 있는 것이다. 



엉덩이를 아프지 않게 하는 문제와 관련해
사진에 올려진 내용처럼 열심히 운동을 해야 한다고 보기도 하지만,
한편으로 
왜 부처님이나 보살님들은 한 자세로 장구하게 계시는데도
별 문제가 없는가.
이런 문제도 생각해보게 된다.

물론 금속이나 나무 등으로 만들어서 그런 것이라고 여기게 되지만,
사실은 또 그런 측면이 있는 것이다.

평생 눕지 않고 수행하는 아촉불 국토와 같은 경우를 놓고 보면
원래 수행의 표준은 바로 그런 것임을 또 생각하는 것이다.

그 경우는 피가 돌지 않아서
비행기에 오래 앉아 있다가 갑자기 돌연사를 당한
어느 스킨 스쿠버 운동선수도 떠올리면서
문제가 있다고 보게 되는데
어떻게 그것이 가능한가.

그리고 심지어 몇 겁을 두고 그렇게 수행을 해도
무방하게 된다고 제시되는가.

여기에도 과학의 원리가 적용된다고 본다. 

원래 돼지 고기를 하나 쓸어 놓고 
한 30 도 되는 온도에 
잠시 그대로 두면 곧 부패하게 된다. 
그런데 어떤 경우는 그렇지 않은 것이다. 
바로 사람이나 일반 동물의 상태가 그런 것이다. 

그런데 이런 순환이 자체적으로 잘 되지 않으면 
몸을 운동을 통해서 움직이거나 
또는 다른 사람에 의해 움직이게 하는 마사지를 받거나 
기타 뜨거운 물을 이용하거나 
진동기나 마찰하는 기계를 이용하여 
그런 순환을 일으키게 하기도 한다. 
그래야 그 신체 부분이 정상기능을 하게 되고 
그렇지 않으면 앞에 제시한 
썰어 놓은 돼지 살고기처럼 
곧 문제가 생겨나는 것으로 보는 것이다.


그래서 나이가 들고 운동을 하지 않으면 
점차 신체 각 부분이 노화하고 
그 기능을 잃게 되는 현상이 나타나는 것은 
전자제품이나 기계나 사람 몸이나 유사점이 있다고 할 수 있다. 

전자제품이나 기계가 튼튼해서 그렇지 않을 것 같지만, 
대부분 사람보다 일찍 수명을 마치는 것이 대부분이다. 
사용하지 않는다고 오래 보전되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쉼없이 사용한다고 오래 보전되는 것도 아니고 
여하튼 결국 시간 앞에 허물어지는 것은 
사정이 비슷하다고 보는데 

그런데 한편 경전에서는 또 다른 내용도 제시하는 것이다. 

가섭존자가 56 억년 후에 미륵보살님이 성불하실 때까지
선정에 임해 있다가 미륵보살님을 만나고
사라지신다고 하는데 
그것이 어뛓게 가능한가. 

또 어떤 경전에서는 
최근에 보현보살님이 관세음보살님의 털구멍 속으로 들어가 
17 년간 계속 나아갔는데도 
그 끝에 도달하지 못했다는 이상한 내용을 대했는데 
이상한 일이 한 두가지가 아닌 것이다. 

이런 문제도 모두 과학과 인과문제를 잘 이해해야
되는 문제로 보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사실은 수행을 잘 임하면 
그런 것이 모두 자체적으로 다 잘 이뤄지고 
굳이 뜨거운 물이나 차가운 물에 몸을 번갈아 담아야 
피가 순환되게 되는 것은 아니라는 것도 
이번 기회에 이해하고 

원래는 엉덩이가 아프다고 
뒹굴뒹굴시스템을 개발해 사용할 필요는 없는 것이기도 
하다는 점도 이번 기회에 생각해 볼 일이라고 본다.


그래서 아직 모니터를 새로 주문하는 문제는 
보류 중이다.  
 










취문서정보 ori http://buddhism007.tistory.com/2963#6351
08gfl--불교공부_단상_2561_02.txt ☞◆vunc6351
θ

 




◆vwue1681

◈Lab value 불기2561/02/21/화/21: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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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t op tr]  mus0fl--Alex Beaupain - Comme La Pluie.lrc

○ [pt op tr]Willem_Jacobsz._Delff_002




♥ 잡담 ♥종교와 증오

어제는 시간이 남아서 다큐멘터리를 하나 보았다. 
그래서 아우슈비츠를 방문하게 되었는데 
기념관에 걸려 있는 사진이나 
희생자가 끼고 있었던 반지 등을 보면서 
여러가지 생각을 해보게 된다. 


원래 종교는 사랑과 자비 이런 정신을 강조하는데 
유대인들이 그렇게 희생된 데에는 
종교가 서로 다르다는 점도 작용했으리라 본다. 

종교가 서로 다르면 사랑의 감정을 갖고 
서로 대한다기 보다는 증오나 혐오의 감정을 갖고 
서로를 대하기 쉬운 것이다. 

당시 얼마나 독일인들이
유대인에 대해 혐오와 증오의 감정을 가졌으면
그렇게 단지 유대인이라는 이유만으로 
학대를 하고 살해를 했을 것인가. 

이런 점을 생각해보게 되는 것이다. 


오늘 꽃 등을 공양하는 부속품들이 
하나둘 도착해서 일단 
석가모니 부처님과 약사여래님 기지에서 
선을 보이고 있는 중이다. 










유럽의 역사를 보면 
종교문제로 서로를 증오하면서 전쟁을 벌이고 
학살하고 추방한 사건이 상당히 많았던 것을 알 수 있다. 

같은 기독교 바탕인데도 캐톨릭인가 아니면 개신교인가. 
아니면 국교도인가 이런 것을 놓고 
서로 대립하여 전쟁에 들어가는 사례가 많았던 것이다. 

그것은 또 성상파괴령을 계기로 나누어진 그리스정교나
또는 같은 신을 믿지만 메시아를 누구로 보는가에 따라서 나뉘어진 
것으로 보이는 유대교나 크리스트교나 이슬람교 사이에서도 
비슷한 형태의 갈등과 대립을 보게 된다. 

2 차 대전 당시는 독일이 유대인을 학살한 가해자로 등장하지만, 
사실 독일인 거의 대부분이 이런 종교전쟁의 과정에서 
희생당한 아픈 상처도 역사 속에는 담겨 있다. 

사랑을 강조하는 종교가
이렇게 서로를 증오하고
살해하게 만드는 강한 힘을 그 안에 지니고 있다는 것은
약간은 놀라운 일이다. 

원래 각 종교의 경전 내용을 살펴보면 전혀 그렇게 하지 않아야 할 것 같은데 
그러나 이런 살해에 가담하는 입장에선  
또 그런 행위를 정당화하고 합리화하는 구절도 
그 안에서 찾아낼 수 있는 것으로 본다. 

그렇지 않다면
몇몇 사람이 그렇게 행하려고 하더라도 
그것을 말리는 힘이 더 강해서
그런 행위를 하지 않게 되었을 것인데
그렇지 않았던 것으로 보는 것이다.



옥상기지에서 쉬는 동안 
오래된 책을 하나 꺼내 살펴보는데 
거기에 사랑에 대하여라는 주제로 
하르트만이라는 이가 쓴 글을 조금 살펴보게 된다. 







생몰연대를 보면 2 차대전을 마치고 나서 
사망한 철학자로 나온다. 

살육이 진행되는 무대 한편에서 
사랑에 대한 연구를 한 것으로 보게 되는데 
현실 사정이 그렇다. 

멀리 유럽의 상황을 보아서 그렇지 
본인이 연구하는 이곳도 
그런 상황이 거의 다르지 않게 진행되었었다는 사정을 
또 헤아려보게 된다. 

그런데 원래 그렇게 다른 이를 학대하고 살해하는 이도 
역시 세상을 좋게 만들기 위해 
그렇게 행한다고 스스로 생각한다는 점이
문제라고 본다. 

정말 세상을 좋게 만들려면 
그렇게 임하지 않았으면 하는데 
그렇게 하지 않는 것이다. 













왜 독일인들이 그 당시 유대인을 그렇게 
혐오하고 증오했었는가. 

유대인의 역사를 보면 
단지 독일인만 특별히 유대인을 그렇게 
학살한 것은 아닌 것으로 나온다. 

1 차 대전전에는 러시아에서도 그런 일이 있었고 
또 역사상 각 유럽 지역에서 그런 박해를 
받은 것으로 나온다. 

그런데 또 유대인은 나라는 잃고
각지를 방랑하던 상태이지만,
그러나 민족적으로 대단히 역량이 뛰어나서 
각 지역에서 두각을 나타내었던 것으로 
보인다. 

2 차 대전 직전의 독일에서 
유대인이 차지한 지위는 
오늘날 미국에서 유대인이 각 분야에서 두각을 
나타내고 활동하는 상황과 거의 유사했었던 것으로 
나온다. 

독일인구의 2 %에 불과한 유대인들이 
대학교 교수나 법조계나 의료계 금융계 연예계
기타 등등으로  
사회에서 활동하는 이들이 대부분 좋다고 보고
추구하고 얻고자 하는 지위의 
40 % 이상을 차지했었던 것으로 보고가 된다. 

오늘날 유대인이 미국에서 차지하는 지위와 영향력의
상태가 거의 이와 같다고 보고되는데 
당시 독일도 상황이 이와 엇비슷했다는 것이다. 


유대인들이 어느 지역에서 살아가던 
민족적으로 고유성을 잃지 않고
다른 민족과 조화롭게 융합도 되지 않고 
종교도 다른 가운데 
또 사회에서는 그렇게 좋은 것을 차지하는 상태에 있으므로 
그것이 그런 증오와 미움을 받게 한 원인은 아니었을까. 
이런 생각도 하게 된다. 

다큐멘터리에서는 
유대인 가게가 파괴당하고 
유대인이 피해를 보는 상황에서 
처음에는 그처럼 피해나 학살을 당하는 상황을 보고
안타까움을 느끼게 되는데 

그러나 그 유대인이 그런 피해를 당하는 가운데
떨어뜨리는 물건들을 보니 
자신들이 평소에 보지 못한 좋은 물건들인 것을 보고 
적개심을 느끼는 내용을 제시하는데 

그런 사정이
아마 독일인들의 전부는 아니더라도 
독일인 대다수가 유대인에 대해
적개감을 갖게 한 원인이 아니었을까
이런 생각을 해보는 것이다. 


불교에서는 
현실은 꿈과 같고 환영과 같아서
마치 진짜인 것처럼 나타나지만, 
그러나 실답지 않음을 제시한다. 

그래서 이 사실을 깨닫고 
현실의 모든 것이 본래 청정한 니르바나임을 관하고 
그에 상응해서 청정한 니르바나의 상태에 머무는 가운데
망상분별과 집착을 제거한 가운데 
현실을 대할 것을 기본적으로 제시한다. 

대반야바라밀다경 비유품에서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나온다. 

선현아, 

비유컨대 허공에 

새 발자국이라는 구절의 의미가 

실제로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보살이라는 구절의 의미도 

또한 이와 같아서 

실제로는 존재하는 것이 아니며, 


또 비유하면 

꿈의 경계·요술쟁이의 일·아지랑이·

광명의 그림자·물 속의 달·

메아리 소리·허공의 꽃·변화 등의 구절의 의미가 

실제로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보살이라는 구절의 의미도 

또한 그러하여서 

실제로 있지 않은 것임을 알아야 할지니라. 


from 대반야바라밀다경 k0001_T0220  비유품 제 11 


허공에 새가 날아간다고 할 때 
허공에 새의 발자국이 생길 수 있겠는가. 
또 새의 발자국이 있어서 그것이 없어지는 일이 또 있겠는가. 

그렇지 않은 것을 대부분 아는 것이다. 

그래서 이런 내용을 놓고 비유를 통해 
현실에서 문제삼는 그 모든 것들이 
다 그와 같고 
더욱이 수행자가 수행을 하는 가운데 
행하는 각종 수행이나 그런 수행을 통해서 성취하고 얻는 목표 상태도 
다 사정이 그렇다고 여기에서 제시하는 것이다. 
그런 가운데 중생을 제도하고 불국토를 장엄하고 
성불을 위해 수행하는 수행자도 또한 그렇다고 
제시하는 대목이다. 



그런데 위와 같은 내용을 놓고서

다시 앞과 같은 아우슈비츠 수용소와 같은 곳에서
어떤 다른 이를 상대로 극단적인 가해를 하거나
또는 그런 이로부터 그런 극단적인 피해를 받는 상황 어느 한 입장에
자신이 놓여 있다고 가정하면 

위 구절을 놓고 그 상황을 조화롭게 해석하고 
받아들일 수 있겠는가. 

그것이 현실 문제이기도 하고
또 수행자가 현실에서 수행을 하는 가운데
해결해야 할 문제이기도 하다. 

위 구절을 놓고 그런 상황이 되면 
각 입장에서 어떻게 해야 한다는 것인가. 
이것이 문제인 것이다. 


원래 현실에서 가장 극단적인 문제를 놓고 
문제해결을 위해 노력하는 것은 
사실은 그보다 덜한 가지가지 각종 문제를 
다 이 문제 하나에 준해서 함께 해결하기 위해 
시도하는 방안이기도 하다. 

그런 극단적인 상황을 그렇게 해결한다면 
그에 미치지 못하는 문제는 더 말할 나위가 있겠는가. 
이렇게 생각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런데 보통 돈 십만원이 걸린 문제는 
자신이 어떻게 양보하고 말겠는데 

그러나 자신을 묶어서 발가 벗겨 개스실에 
넣으려고 하면 그것은 참지 못하겠다. 
이렇게 생각하는 것이 보통이다. 

이런 경우는
앞과 같은 경우라면
자신이 집착도 버리고 수행에 임할 수 있겠는데 
뒤의 경우가 되면 곤란하다고 하는 것이니, 
이 부분부터 또 다시 문제를 살펴야 하는 것이 된다. 

그런데 만일 자신이 생각할 수 있는 가장 극단적인 
상황을 놓고 그 문제를 해결하면 
그 원리는 다른 것들에서도 당연히
그 문제들을 해결할 수 있는
방안이 된다고 볼 수 있는 것이다. 


그래서 이런 문제를 가끔씩 또 살펴보아야 한다. 


고난탐정의 입장에서 
현실에서 만나는 많은 문제가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다 공통적인 성격을 갖는다. 


원래 위와 같은 상황에서 
제 3 자는 이렇게 방안을 제시할 것이다. 

독일인들에게는 조금 유대인들이 마음에 들지 않아도 
좀 평안히 참고 관용의 자세로 대해주었으면 좋았을 것 같다. 

그렇게 말하면 그 당시 유대인을 학살해야 한다고 
주장한 이들은 
유대인을 학살해야 마땅하다고 보는 가지가지 이유를 
제시하게 되었을 것이다. 

이것을 가지고 다시 유대인에게 가서 
다른 이들이 이런 저런 점을 좋지 않다고 하니 
유대인들이 좀 마음에 들지 않더라도 
그것을 수용해서 현실에 임해주면 좋을 것 같다 

그런 가운데 어느 하나라도 
그런 내용을 잘 성취하면 
이 문제는 발생하지 않을 것이다. 


그런데 현실에서는 이 두 입장 다 
그렇게 결코 하지 않으려 하는 것이 대부분이다. 

그래서 결국 현실에서 비극적이고 고통스런 상황으로 
보게 되는 내용이 나타난다. 


결국 이 각 입장 가운데 그 어느 하나라도 
수행자에게 요구하는 수행방안을 실현한다면 
문제가 발생하지 않게 된다. 

그런데 그 어느 누구도 그런 내용을 실현하지 않을 때는 
그것이 문제로 나타난다. 


최근에는 재벌집안들에서
형제들 가운데 서로 싸우는 모습을 자주 보고 받는다. 
또 최근에는 친척간에 또는 형제간에 서로 죽이고 죽임을 당했다는 
보고도 받는다. 

그러니 사실 증오의 문제는 굳이 민족간의 문제나 
종교가 다른 집단 간에서만 발생하는 것이 아니고 
아주 가까운 부모형제부부간에서도 
쉽게 발생한다. 

그것은 좋지 않다. 
그래서 수행이 필요하다. 

아우슈비츠의 상황을 보면서 
혼자 엉뚱한 시감상을 하게 된다. 
왜 아우슈비츠에서 그런 일이 일어나게 되었던 것일까 .

당시 유대인들은 
독일에서 상당히 뛰어난 역량을 발휘한 집단이었다.
그런데 역량면에서 부족한 독일인들이 대다수인 상황에서 
이들이 진 빚을 그렇게 소송을 거는 상태가 아니었을까. 
그런 가운데 약간 억울한 심정을 담아 
아우~ 이런 감탄사를 내면서 
빚 소송을 그런 형태로 진행한 것인가. 

아무 이유도 없어 보이는데
단지 유대인이라는 이유만으로
그렇게 체포하고 기차에 실어서
수용시키고 학대하고 살해해버렸다.
그래서 그 과정과 사정을 굳이 이해해보자면
그런 무슨 복잡한 사연이 그 안에 들어 있었으리라 추정해보게 된다. 

그렇지 않다면 그렇게 하겠는가.

독일인들도 노래도 좋아하고
또 애완견도 좋아하고
또 꽃도 좋아하고
서로 사랑도 나누고 그런 것이
다른 인간과 특별히 다르지 않다. 

그런데 그런 사람들이 어느 상황에서
대부분 그런 모습을 보인 데에는
무언가 그렇게 된 원인이 있다.

오늘날 미국에서는 한 대통령이
이웃 국가에서 자꾸 자신의 나라에 들어와
불법으로 취업활동을 하고
기타 등등의 문제 때문에
날카로운 입장으로 다른 국가나 민족을 상대하는
모습을 보게 되는데
이미 힘이 있는 나라이고 또 그런 나라에서 
상당히 부자로 지내는 이가 대통령이 되었는데 
그런 입장으로 
다른 국가나 다른 종교를 가진 외국인들을 대하는 모습을 보고 

힘 좋은 맹수가 굶주림을 느낄 때
일으키는 반응이
자꾸 연상이 되는 것이다.  


그런데 사실 원래 독일인들이 
히틀러를 따라 다닐 때 
처음엔 유럽전역을 정복하는 가운데
상당히 좋아 보인 점도 있는데 
나중에는 상당히 고통을 되돌려 받았다는 
사실도 다각도로 넓고 길고 깊게
종합적으로 관찰할 필요가 있다고 보는 것이다. 

고통받고 죽어가는 과정이 조금 다를 뿐 
실질적으로는 유대인이 당한 고통과 
유대인이게 가해를 한 독일인들이 당한 고통이 
별로 차이가 나지 않는 것이다. 

그 이전에 종교전쟁이 벌어지던 당시 
30 년 전쟁 당시의 독일은 
전 영역이 그런 비참한 상황이었던 것으로 
역사는 전하고 있는데 
당시는 개신교인가 캐톨릭인가가
그런 학살을 행하는 주된 원인이었던 것이다. 

가해자의 입장인 독일인들이
과거에 비극을 당했던 사정은 그와 같고 

또 한편 
피해자였던 유대인은 
이제 팔레스타인들을 상대하면서 
또 가해자의 입장이 되어
비슷한 모습을 연출하고 있다고도 보고받는다. 



다른 이가 자신을 때리고 물건을 빼앗고
해치는 것이 억울하다는 말을 하는 이가 
자신은 한편으로 또 다른 생명
예를 들어 소나 닭을 때리고 죽이면서 
열심히 살아가려 하는 것과 
사정이 사실은 서로 비슷한 것이다. 


어디에선가 문제가 분명 있는데 
그 문제들에 무언가 공통점이 있다고 볼 수 있다. 


소나 닭을 때리고 죽여 섭취하는 이가 
자신의 행위가 문제가 되지 않는다고 생각하듯 

사실은 독일인을 학살하던 당시 다른 나라 사람들도 
그렇게 생각했던 것이고 

또 유대인을 학살하던 독일인들도 
그 당시 그렇게 생각했던 것이 아닌가. 

그런 점에서 모두 공통점이 보이는 것이다. 

그 각각은 
무엇은 문제가 안 되고 
무엇은 문제가 된다고 주장하고 싶어 하는 것이지만, 
사실은 다 같은 성격의 문제인 것이다. 


그래서 경전에서 제시된 내용을 놓고 
현실의 각 입장에서 
어떻게 자세를 취해야 
그런 비극적인 결과를 맞이하지 않게 될 것인지를 
깊게 연구를 하고 
또 실천에 옮겨야 한다고 보게 된다. 

다큐멘터리를 보고 약간 우울했는데 
오늘 꽃과 등 공양 부품들이 도착해서 
조금 위안이 된다. 

그런데 어느날 불교를 믿는 이들은 
칠각지역에 모두 집합하시오. 
불응하면 적발시 바로 사살하겠음 
이런 발표가 나오면 
어떡하는가. 

바로 이 문제다. 


너무 많은 led 등을 구한 것이
아닌가 할 수 있는데

원래 구상은
꽃에 들어간 암술 수술 이 부분을
꾸미는데
사용하려고 한 것이다.







일단 모두 펼쳐 놓고 보는데 
상당히 환상적이다. 



수 백개의 전구가 여러 가지 색을 내는데 
이 많은 불을 켜는데 

과거에 전구 하나 켜는 전기 밖에 소모되지 않는다고 하니 
상당히 경제적인 장식방법이라고 보게 된다. 











일단 작품구상이 될 때까지 
당분간 이 상태로 놓고 감상을 잘 해야 할 것으로 본다. 





문서정보 ori http://buddhism007.tistory.com/2963#1681
08gfl--불교공부_단상_2561_02.txt ☞◆vwue1681
θ

 










◆vsfo9105

◈Lab value 불기2561/02/20/월/21: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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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t op tr]  mus0fl--Edith Piaf - Mon Coeur Est Au Coin D'une Rue.lrc

○ [pt op tr]Adriaen_van_der_Werff_-_Adam_en_Eva



○ Adriaen_van_der_Werff-_Self_portrait



♥ 잡담 ♥뒹굴뒹굴 시스템의 주문 
 
하루 종일 각 단자의 암수 결합 문제를 놓고 
연구를 했는데 
간단한 문제 같은데

구체적으로 살피다 보니
상당히 복잡해서 
시간이 많이 걸렸다. 



컴퓨터에는 그래픽 카드에 연결단자가 있는데 
이와 연결해 사용하는 모니터에도
또 각기 단자가 있다. 

그런데 서로 형태가 조금씩 다르기도 하고 
각 단자마다 조금씩 특성도 달라서 
어떻게 연결해야 뒹굴뒹굴 작업 시스템을 
잘 만들 수 있을 것인가가 
문제가 되는 것이다. 

예를 들어 
컴퓨터 하나에는 다음과 같은 단자가 있고 

○ dual link -dvi 

○ mini-hd  


또 다른 컴퓨터에는 다음과 같은 단자가 있다. 

○ dual link -dvi

○ hdmi 

○ mini-dp  



mini-hd  단자나 
mini-dp  단자 등은 평소에
잘 사용하지 않는데
그러나 이미 다른 단자가 다 연결되어 있는 경우에는
이것도 활용하는 것이 좋다고 보게 된다.  


그리고 모니터에는 
또 hdmi 단자와 d-sub 단자만 있는 경우도 있고 

dvi 단자와 d-sub  단자만 있는 경우도 있다. 


이처럼 각각의 사정이 다른 가운데
이 각각을 
어떤 선으로 연결해주는 것이 
적절한가를 놓고 한참 연구를 해야 했다. 



우선 어느 경우나 공통적으로 중간에 
hdmi 10 m 선을 놓고 

각 컴퓨터에 도킹이 가능한 기본선을 한 1 m 빼 놓고 
그 때 그 때 그래픽 카드와 모니터 단자를 연결시켜주는 
방안을 취하기로 했다. 

원래 컴퓨터 뒤 부분에서 선을 끼우거나 빼야 하는데

뒹굴뒹굴 작업 시스템은
보조적으로 가끔 임시적으로만 사용하므로

선을 사용시만 꺼내 이어서 사용하는 방식으로 
하기로 했다. 

왜냐하면 뒹굴뒹굴 작업은 
모니터 위치를 고정시키는 것이 
오히려 안 좋다고 보게 되기 때문이다. 

그런데 여하튼 이렇게 임시로 선을 연결할 때 
그 때마다 뒷부분을 만지는 것이
번거롭다고 보기에

미리 도킹을 할 수 있는 선을 앞으로 빼놓고
필요시마다 그 앞부분에서
선을 떼었다 붙였다 하면서
사용하려고 한다. 



이 경우 
주 컴퓨터에는
모니터가 3 개가 연결되어
평소에는 2 개를 사용하다가
 뒹굴뒹굴 작업시에는
또 따로 1 개를 붙여서
사용하게 된다. 

그러다 보니 
조합하는 경우마다 
젠더도 여러개 필요하다. 

또 되도록 인터넷 도라에몽 기지 몇 군데에서
한꺼번에 같이 주문을 할 수 있게 하려면 
각 부품을 어떻게 조합해야 좋은가에 대해
연구를 해야 했다. 

이제 겨우 주문을 마쳤다. 
그래서 해당 부품이 오면
뒹굴뒹굴 작업 시스템이 
본격적으로 가동될 수 있게 된다. 


이번에 뒹굴뒹굴 작업 시스템을 만드는 과정에서
연결선 사정이 복잡하다. 

본인이 무역업을 하는 사업가는 아니다. 
그런데 같은 종류의 선인데도 
각 도라에몽 기지마다 조금씩 가격이 다르다. 
성능도 조금씩 차이가 난다. 
그런 가운데 조금이라도 기능은 좋으면서
가격이 싼 곳을 찾아 다니게 된다. 

그러나 또 다른 것과 함께 모아서 사야 
택배 비용이 줄게 된다.
그런데 각 기지마다 취급하는 품목이 또 다르다.
그래서 여러가지를 함께 고려해야 한다. 

이번에 앰프에 사용하는 단자도 추가로 함께 구입하고
블루투스 동글도 필요하다고 보고 주문을 했다. 
여하튼 자잘자잘한 젠더나 동글 
연결선 이런 것을 어떻게 조합을 해야
가장 좋은가를 놓고 상당히 복잡하다. 


여하튼 간신히 구매를 마치고 나니 
조금 마음이 가볍다. 

올려진 노래를
듣다보니
뒹굴뒹굴작업시스템이  
불러 일으킬 결과에 대한
메세지를전하는것같다. 

뒹굴뒹굴 작업 시스템을 가동하면 
그로 인해
살이 찌고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는 수행에
쉼없이 정진하게 된다. 

이런 내용을 전하는 것이 아닌가 한다. 

자칫 뒹굴뒹굴 시스템에 대해서 
게으른 연구 자세를 취하는 것으로 오해하기 쉬운데 
쉴 때에도 연구를 하고자 하는 취지에서 
새로 만드는 시스템이 
뒹굴뒹굴 시스템의 본 취지인 것이다. 

처음에 서서 작업하다 
다리가 아프면 앉아서 작업하고 
또 조금 있다 다시 서서 작업하고 
그러다가 피곤해지면 
누어서 뒹굴뒹굴 시스템을 이용하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잠이 들면 
꿈 속에서도 연구를 계속 해나가는 것이다. 

그러니 거의 24 시간 꽉 채워서 
연구를 하고자 하는 취지로 
이번에 뒹굴뒹굴 작업 시스템을 
만들게 되는 것이다. 


문서정보 ori http://buddhism007.tistory.com/2963#9105
08gfl--불교공부_단상_2561_02.txt ☞◆vsfo9105
θ

 








◆vwbm7531




 ◈Lab value 불기2561/02/19/일/11:14
2016_0411_142712_canon.jpg





○ [pt op tr]  mus0fl--Francis Cabrel - Petite Marie.lrc

○ [pt op tr]WKossakBateria



♥ 잡담 ♥여래와 니나의 구출작전 

꿈을 꾸었다. 
한 병원장님이 본인이 지적한 내용이 
이해가 안 된다. 이치에 맞지 않는 것 같다. 
의사가 과학과 수학과 각종 의학지식을 익혀서 
환자를 수술하고 약도 주어 병을 낫게 하는데 
왜 이런 의사와 과학자나 수학자까지 모두 
망상분별 편집증 환자로 취급하는가. 

이런 문제제기였다.

꿈에 설명을 하고 그 화장실을 들어가려는데 
화장실은 이상하게 넓고
조선시대 퍼세식 분위기의 화장실이다. 

그런데 이 화장실에 
꿈에 생각하기를 중국사람들이 들어 있는 것 같은데
노크를 하고 기다리다 들어가서
여기 저기 떨어져 있는 
의학 백과사전을 주어서 들고 나왔다. 

전에 보던 의학백과사전인데 
부분 부분 여기저기에 나뉘어 떨어져 있고 
화장실에 두어서 그런지 
표지에 낙서가 되어 있다. 

그 표지에 
잘 보관하고 지니고 
새로 시작하고 출발하시오 
이런 시감상을 하는 육두문자로 된 낙서가 적혀 있다. 
꿈에서도 X 자가 그려져 있다. 

그래서 수행자는 현실이던 꿈 내용이던
시감상을 잘 해야 한다고 본다. 

꿈에서도 그렇고 현실에서도 그렇고 
화장실이란 그렇게 반가운 곳은 아니다. 

특히 조선시대 퍼세식 분위기의 화장실은 
공포스럽기도 하다. 

꿈에서 대변을 보면 대박을 터뜨린다는 속설이 있는데 
화장실만 보고 대변은 보지 못했다. 


그런데 시감상을 잘 할 필요가 있다고 본다. 

현실에서 사람들은 어쩔 수 없이 
화장터로 상징되는 죽음을 맞이하게 되는데 

그러나 수행자는 이 과정을 
화장세계로 진입해 들어가는 여행으로 
생각하게 된다. 

그래서 수행자는 현실에서 화장터로 여기는 
그곳을 여인이 화장대에 앉아서 화장을 고치고 
외출을 가는 그런 느낌으로 대해서 
화장세계에 진입해 들어가야 된다고 보는 것이다. 

화장세계란 화장을 전문으로 하는 세계가 아니고
경전에서는 연화장세계의 줄임말로 
석가모니 부처님의 진신인 법신 비로자나불의 정토를 
의미한다고 한다. 

그래서 꿈을 꾸고 나서 시감상을 잘 해야 하고
이런 가운데 
이전에 쓴 부분에 이어 새로운 내용을 잘 이어서 
써나가는 작업을 시작해야 한다,. 




참고로 현실에서 활동하는 
과학자나 논리학자 수학자 의사 이런 분들이 
대단히 존중을 받는데 
왜 본인이 한꺼번에 모두 망상분별 편집증 환자라고 
하는가. 
이는 집단 명예 훼손 행위에 해당하는 일이 아닌가
생각할 수도 있는데   
이는 경전에서 나온 내용을 그냥 옮겨 적는 의미도 있지만, 
현실 사정이 또 그렇다. 


원래 현실의 표준에서는
이런 상태가 되기 힘들다고 보게 된다. 

한국은 특이하지만, 전 세계적으로 표준은 
중학, 고등학교 수준에서 적당히 망상 분별에 바탕해 
소꼽장난을 적당히 하다 그만두는 것이
현실 망상증의 증상인 것이다. 

그래서 망상증 상태에서는 이 정도가 그래도 표준으로 보게
되는 것이다. 

그런데 그 정도가 심해서 같은 망상을 바탕으로 
편집증 상태에 이르면 한 부분을 붙잡고 
계속 파들어가게 되어 있는 것이다. 

그래서 그런 특이한 직업을 갖고
평생을 살아가게 되게 된다고 
진단을 받게 되는 것이다. 

망상증을 바탕으로 하면 이는 대단히 좋은 상태라고 할 만한데 
그러나 망상증을 바탕으로 했기에
그것이 더 심각한 문제가 되는 것이다 

어떤 이가 굴을 파는데 방향을 잘못 잡았다고 하자. 

적당히 한 두 번 삽으로 파고 멈추고 
다른 일을 하면서 시간을 보내는 이가 있는 반면 

방향을 잘못 잡았는데 계속 평생 그 방향으로 
파들어가면 어떻게 되는가 
이런 문제와 같다. 

현실에서 아이들이 소꿉장난을 하는데 
대부분 적당하게 여러 역할을 해보다가  
멈추게 마련이다. 

그런데 한 아이가 이상하게 하나의 역할을 맡고 난 후
그것이 좋다며 평생 그 소꿉놀이만  
계속 하며 임한다고 해보자. 
그리고 거기에 그치지 않고
심지어 자신의 자손들까지 그렇게 하게 만들려고 
한다면 또 얼마나 이상한 일인가. 

그런 경우처럼 현실에서도
이상하게 집착하며 임하는 경우로 평가하게 되는 사정이 
있는 것이다. 

이전에도 제시했지만, 
현실이 꿈과 같다고 할 때 
꿈 안에서 행할 의미있는 일이 대단히 많이 있다고 할 수 있다. 


앞에 제시한 여러 분야가
의미가 없다고 지적하는 것이 아니고 
모든 방편은 선악 무기의 성격을 갖는데 
어느 방편이나 정도에 지나치게 집착해 나아가면 
그 부분에서는 문제가 생기게 된다는 점을 지적하는 것이다. 


소꿉놀이가 실답지 않지만, 
아이들이 시간을 보내고 서로 사귀고 
친하게 지내는 데 대단히 유용한 것이다. 

그런데 어떤 아이가 망상 편집증에 걸려 
계속 한 역할만 맡아 하려고 하고 
그에 접착되어 계속 고집하면 
그 부분부터는 문제가 되는 것이다. 

그런데 그것이 바로 현실의 내용인 것이다. 


현실이 꿈과 같다고 할 때 
이런 현실의 내용을 나타나게 한 그 본 바탕을
무엇이라고 표현하게 되는가 하면 
우선 본 바탕이 되는 실재나 실상
이런 식으로 표현하게 된다. 

그리고 이를 다시 여나 진여라는 표현으로
나타내게 된다고 제시한 바 있다. 

이는 발생 순서를 기준으로 보면
실재 진여 - 감각현실 - 관념분별의 순서로 되고 

이런 내용을 놓고 문제삼는 관념분별을
가장 뒤에 나타난 내용으로 보지만, 

그러나 그런 문제를 제기하고
그 본바탕의 내용을 찾아 나설 때는 

현실에서 자신이 행한 관념분별의 내용을 붙잡고 
그것을 나타나게 한 실재를
그런 관념분별과 '같은' 그 무엇으로 몽타쥬를 만들어 놓고
이런 내용을 찾아나서게 되기에 
실재의 내용을 '같을 여'라는 표현을 사용하여
표현하게 되는 것으로 본다고 제시한 바 있다. 



과거 만화영화에 이상한 나라의 폴이라는
영화가 있었는데 
이 폴은 현실 세계에서 
대마왕에 의해 잡혀 있는 니나를 구출하기 위해 
요요를 지니고 4 차원의 세계로 들어가 활동하게 된다. 

부처님의 상태도 이와 비슷하다고 보게 되는 것이다. 

망상 편집증에 걸려서 활동하고 
고통받는 중생을 구하기 위해서 
여라고 표시되는 실재의 본 바탕에서 

망상이 한참 전개되는 현실로 들어와 
가르침을 베푸시는 입장이기에 

여래라고 표현한다고 제시되는 것이다. 





● 신해드로이드의 외출 

처음에 장애를 안고 태어난 신해 드로이드가 
의외로 화면도 크고 사용하기 편함을 알고 
외출용 슈트를 제작 중이다. 







지안드로이드를 비롯하여 
지노이드 
그리고 안드로이드 
손오공 드로이드까지 활동 중인데 

여러 드로이드를 살피다보니 

글자 형태가 어떤 경우는 읽기 편하고
어떤 경우는 그렇지 않다는 것을 보게 된다.

그래서 마음에 드는 글자 형태를 구해 사용하고자 하는데
약간의 제약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바꾸려면 시스템의 루팅권한을 얻어야 하거나
기타 등등으로 복잡함을 안 것이다.

그런데 다행히 원하는 형태로 쉽게
폰트를 변경해 사용하는 방안을 알아냈다. 

화면이 큰데 이전까지는 읽는데
조금 마음에 안 들었는데 
글자 형태를 바꾸니 읽기가 훨씬 낫다. 























모니터 연장선 문제로 모니터 치수를 재는데 
이상하게 어떤 줄자로 잰 치수는 
cm 치수와 인치가 서로 차이가 나는 것을 알게 되었다. 


알고보니 그 줄자는 cm 와 같이 적혀 있는 수치가 
인치 숫자가 아니고 
한국의 과거 길이칫수인 '자'로 환산된 치수임을 알게 되었다. 


그래서 착오가 발생한 것이다. 

한 모니터의 수치를 재다가 
대략 20 인치인 것으로 알고 작업에 임했는데
여러가지를 고려하다 보니
아무리 생각해도 그것이 아닌 것 같아서
다시 두개의 줄자를 놓고 비교해보다 알게 된 것이다. 


위 사진의 아래 부분에 보이는 줄자가
인치를 나타내는 줄자인데 
이 줄자는 한 번 뽑아 사용하면
앞 부분이 끊어져서 안으로 들어가는 경우가 있다. 

그래서 또 나사구멍을 뚫어서 더 이상 안 들어가게 했는데 
앞 부분이 끊어져서 4cm 부분부터 시작한다. 

상당히 똑똑한 줄 자인 것이다. 


현실에서 하지 않아야 할 123 을 제거하고 
그 이후부터 임하는 줄자라고 시감상을 하게 되는 것이다. 




현실의 망상증 환자가 하는 123 이라는 것은 
1- 탐욕을 일으켜 좋은 것이라고 생각되면
이를 집착해 추구해 나가고
또 그렇게 해서 그런 좋음을 얻으면 이후 
그 좋음에 해당하는 것이 무엇이던지 그것을 아끼고
다른 생명에게 베풀려고 하지 않는 자세나 반응을 의미한다. 

2- 그런 가운데 망상상태에서 집착한 좋음을 추구하기 위해 
또 다른 생명이 대단히 집착하는 좋음을 함부로 침해하고 해치면서 
그것은 또 아무 일도 아니라고 무시하는 경향을 갖는다. 
이것이 큰 문제인데 대부분 자신이 추구하는 좋음에 집착하면서 
이것을 무시하고
다른 생명이 고통을 받게 되는 나쁨을 함부로 가하는 활동을
쉬지 않고 평생 계속 해나가는 것이다. 

경전에서 살도음망이라고 지적하는 내용이
바로 이런 성격의 내용이다. 

현실에서 대부분 쉼이 없이 다른 생명을 살해해 섭취하는 활동을 하는데
정작 당사자는
내가 살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고
그리고 맛이 있어서 그런 것인데
그것이 왜 문제인가라고 의아해 하는 것이다. 

그것이 의아하지 않고 당연하다고 여기는 사정은 오직 
그것이 바로 자신에게 좋음을 주기 때문인데
그러나 우선 그 상대가
그것을 그렇게 좋다고 인정해주지 않는 것이 바로 문제인 것이다. 

자신의 입장을 기준으로 놓고 보면
그런 상대가 오히려 이상하다고 할 수 있는데 
그러나 자신이 그 상대입장이 되면 자신도 마찬가지인 것이다. 

그리고 세상은 공평하기에
결국 자신이 다른 생명에게 준 것 만큼
다시 자신이 돌려 받게 되는 작용 반작용의 관계가
삶의 과정안에서도 성립되는 것이다. 


3- 그런 가운데 입장이 반대가 되어 
자신이 집착하는 좋음을 조금이라도 침해를 받게 되면 

평소에 성인군자인 척 하고 지내다가
분연히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서 
분노를 일으키고
이후 상대에게 미움과 원망을 갖고 
그것을 잊지 않고
용서하지도 않고 사랑을 다시 하려하지도 않고 
그런 나쁨을 준 상대를 기회가 되는대로
해치고 보복을 하려 하고 
그리고 그것을 실행해나가는 것이다. 


현실에서 행하는 이 1-2-3 의 반응이 바로
그 당사자가 평생 만들고 쌓아가는 업의 장애이다. 






한 죄수가 교도소에서 탈옥하여서 
거리를 다니면 
방송은 이것을 보도하고 
온 국민이 이것을 걱정하고 
온 경찰이 이 범인을 체포하기 위해 
수사를 하면서 임하게 마련이다. 

그런데 왜 그가 거리를 나와 다니면 
그렇게 되고 
다른 이가 다니면
그렇게 되지 않는가. 

그 원인은 그 죄수가 행한 과거의 
내용에서 찾을 수 있다고 보게 된다. 

알고보면 그렇게 되는 사정은 그것이다. 




원래는 어떤가 하면 
선이나 악이나 모두 공하여 
얻을 수 없다고 제시되는 것이지만, 

그런데 현실에서
어떤 이가 그렇게 되지 못하고 
감옥에 있을 때도 고통받았겠지만 
설령 그런 감옥에서 탈옥을 하여 
거리를 다닐 때도 
위와 같은 사정 때문에
한시도 마음이 편하게 될 도리가 없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알고 보면 탈옥을 했다고 하지만, 
그가 다니는 어느 곳이나 
움직이는 교도소 안에서 
그는 생활한다고 그 실질 사정을 이해하게 된다. 


어떤 사람은 밖에 낙엽이 하나 떨어지거나
길에서 깡통이 굴러가도 
아무 불편함을 느끼지 못한다. 

그런데 이상하게 그렇게 추적을 받고 
도망을 다니는 입장에서는 

그런 낙엽이 하나 떨어져도 
불안해하고 
깡통이 굴러도 또 깜작 놀라는 것이다. 

왜 그럴까 하면 
그것을 총체적으로 설명해서 
업의 장애 때문에 그렇다라고 설명하게 되는 것이다. 


시나리오를 보충하면 
그 사정을 이해할 수 있다. 

그는 이렇게 생각하는 것이다. 

가만히 있던 나무잎이 떨어지는 것은 
주변에 경찰이 무언가 자신을 체포하기 위한 
작전을 비밀스럽게 실행하기에 그런 것이다. 

깡통도 그런 것이다. 

이런 식으로 자꾸 생각하는 것이다. 


그래서 보안에 가장 예민하고 
신경을 기울이는 입장은 
사실은 다른 이의 물건을 훔쳐 보관하는 이라고 
제시되기도 하는 것이다. 

그러니 그런 상태에서 원래 물건에서 얻고자 한
효용을 평안하게 얻을 도리가 있겠는가. 

그래서 이런 1-2-3의 반응을 
평생 해나가는 입장은 
그 사람이 임하는 어느 곳이나 
다 그런 교도소의 상황과
그 실질이 같다는 사정을 잘 이해해야 한다고 본다. 
그런데 그것은 원래 그 수단을 추구한 
본 취지가 아닌 것이다. 

그러니 이것을 제거하는 것이 
바로 수행의 첫 출발점이 된다고 이해해야 한다. 


줄자 하나가 앞이 끊어져서 
4 cm 부터 잴 수 있다는 것이 이런 시감상을 
곁가지로 행하게 하는 사정이 되는 것은 

현실의 인과의 문제가 이 만큼 
중중무진의 관계에 있다는 사실을 
생각하게 한다고 본다. 


어떤 이가 요리사가 된 것은 
치악산에 들어가서 오리가 오리 오리 요리 
이렇게 말을 해서 그 때부터 
요리사로 활동하게 되었다라고 
코미디 프로에서 어떤 이가 제시하기도 하는데 

현실의 내용이 나타나는 배경에는
알고보면 이런 사정이 대단히 많은 것이다. 
















앞에서 현실의 과학자나 논리학자 수학자가 겪는
기본적 망상분별 편집증세에 대해서 이야기했는데 
잘못 오해하면 
공연히 본인이 사회에서 존중받는 이런 분들을 
폄하하기 위해 이런 내용을 적는 것으로 오해하기 쉽다. 

그런데 현실적으로 일단 어떤 이가 한 분야에
대해 그런 편집증을 갖고 있지 않으면
그 분야에서 그런 직위에 오르는 것 자체가 곤란하다는 사정이
하나 현실적으로 있고 

또 그 출발  바탕 자체가
잘못된 오류에 바탕해서 출발한 상태이기에 
망상분별증상이라고 평가하는 것은 
다른 일반 현실의 입장과 크게 다르지 않다. 


어떻게 보면 본인까지 포함해서 사정이 다 마찬가지이기에 
현실 사정이 그렇다는 것을 이해하고 
그렇게 망상분별증상을 벗어나자는 취지이지 

어떤 특정한 입장을 비난하기 위해서 
이런 내용을 제시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경전에서도 사정이 같다. 

그런데 세계적으로 볼 때 한국이
특히 그 증상이 심하다는 것이 
일반적으로 지적받고 있는 문제점이다. 

최근 한 외국 외교관이 
한국의 이상한 실태에 대해 보고를 했는데 
그 지적이 맞는 말이다. 

한 때는 한국에서는 학생들 대부분이 
밤 11 시까지 야간에 학교에서 공부를 하는 모습이 
해외에서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 사정 보고하듯 
해외토픽란에서 보고되기도 한 것이다. 

그것은 알고 보면 이런 것이다. 
앨리스가 방문한 이상한 나라에서는 
트럼프가 마이크를 잡고 말을 하고 걸어다니기도 한다. 

이런 식의 이상한 내용을
보고하는 것과 사정이 같은 것이다. 


여하튼 그런 결과 
현실적으로 그 나라의
최고 명문대학을 유학가 졸업해 돌아온 이가
현실에서 아직도 자리를 제대로 못 잡고 있기도 하고 

그 외교관도 지적하기를
그렇게 좋은 대학을 졸업한 이가 
겨우 대사관에서 서류접수하는 일을 하는 상황에 있다고
지적하는 것이다. 

그러니 어떻하는가. 

누구나 이 상황에서는
적어도 그 보다 더 해야 된다고 생각하게 되는 것이다. 


그런데 좋은 자리는 낙하산을 타고 내려왔든
어떻게 앉아 있게 되었던
쉽게 비워지지 않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 당사자가
또 자신처럼 그에 상당히 집착을 갖고 임하고
그래서 결코 그런 자리들에서
물러나기를 원하지 않기 때문이다. 



한 유명한 미대에 다니던 청년을 아는데
처음에 그 대학의 교수가 되려고 했었는데
대충 상황을 보니 한 30 년은 기다려야
자리가 나올 것 같다고 이야기를 하다가
그 후 전공을 바꾸어서 의사가 되어 활동하는
경우를 본 적이 있다.


또 하나의 사례는
유명한 의대를 다니고
의사가 된 이가 나중에 데이트를 하는데
자신이 다니던 의과대학 주변에 있는
종로를 거닐면서
마치 처음 시골 사람이 서울에 올라 와
각 건물을 신기해하며 걸어다니는 것처럼
그렇게 일일히 바라보고 다녀서
상대방이 상당히 의아하게 생각했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


그런데 그 사정이 왜 그런가 하면
한 분야에서 무언가를 제대로 공부하고
어떤 내용을 매스터하려면 
그 분야에 계속 집중하면서 
전념하고 임하지 않으면 
그런 목표가 잘 성취되지 않기 때문에 그런 것이다. 


그래서 대부분 대학교 주변에 
여러가지 좋은 시설도 있고 
경치좋은 공원이나 산도 있는데 
정작 그곳을 다니는 학생들 대부분이 
마치 점에서 점으로만 이동하는 것처럼 
집 - 강의실 - 도서관 이런 식으로 활동하는 경우가 많고 
그런 경우는 다행히 좋은 직업을 이후 갖게 된다고 
보고되는 것이다. 

그러나 이와 반대로 임하면
그 이후는 또 장담을 못한다. 


그래서 옛날 말에
쥐도 자신이 다니는 곳만 다닌다. 

이런 이야기가 전해지는데 
길 하나 다니는 것도 
그렇게 집중하고 다니지 않으면 
곤란한 것이다. 


어제 숙왕화님이 
전철과 버스를 타고 오다가 
엄청 고생을 했다는데 

이유인즉 전철 타고 다른 생각하다가 내릴 역을 지나치고
그래서 돌고 
버스에서는 졸다가 엉뚱한 데서 내리고 
다시 타고
이런 식으로 대단히 헤맸다고 하는데 
현실이 그런 사정인 것이다. 


그래서 현실은 한 분야에 임하는 이에게 
이런 형태의 편집증을 일정한 정도로 가질 것을 
요구하는 상태인 것이다. 


현실적으로 한국의 고등학교를 다니고 
대학 진학을 목표로 하면 
그 하루 시간 대부분이
그렇게 입시와 관련된 활동을 하게끔 하는 것이고 
그 이후의 삶도 대부분
그런 형태로 전개되게 마련이다. 

그런 가운데 어느 순간 여기서 떨어져 나오면
곧바로 
현실에서 미아 취급을 받게 되는 것도 사실이다. 


그리고 이후 각 분야에 나아갈 수록 
그런 편집증을 갖고 임하는 분야가 
점점 더 좁아지게 되고 
또 깊어지게 되는 사정이 있다. 

현실에서 어느 분야의 박사는 
사실은 대단히 좁은 분야에 아주 깊이 들어갔다는 
상태를 의미하는 것이기도 하다. 


그렇다고 박사라고
놀지도 않고 
여행도 안 다니고 
TV 도 안 보고 
그런다는 것은 아니지만, 

여하튼 세계적인 표준을 중학교 정도로 놓고 볼 때 
대단히 깊게 편집증상을 갖고 현실에 임해야만
비로소 그런 상태에 진입한다는
기본 사정이 있음을 제시하는 것이다.


어떤 집단이 있는데 
그 가운데 1 % 만 갖는 어떤 특성이나 상태는 
비정상적인 것이다. 

그런데 또 현실에서
대부분 좋다고 보고 집착을 갖는 좋음은 
또 바로 이처럼 대부분 1 %만 갖고 있기에 
그런 사정으로 인해 
이 편집증이 더 증폭되어 나가는 경향을 갖는 것이다 


그래서 그 당사자들은 이해를 하지 못하지만, 
다른 나라에서 온 이들은 
이런 증상이 심한 
한국의 상황을 보고 

마치 이상한 나라 앨리스
동화속에서나 볼 수 있는 이상한 모습이 
현실에 나타남을 이상하게 대하게 되는 것이다. 

그런데 또 이상한 나라에서는 그것이 
표준인 것을 어떻하겠는가. 





현재 망상 상태에서
그래도 표준적이고 정상 범위에 있는 경우를
세계적으로 볼 때 중학 정도 상태로 보게 된다고 제시하는데 

한국을 기준으로 본다면
고등학교나 대학교에 다녀야 표준인 것처럼
여겨지는 것도 사실이다. 


글을 적는 가운데 이상한 노래를 들었다. 


그 전에 이런 이야기를 먼저 소개한다. 


스님도 목욕을 해야 하기에 목욕탕에 들르는데 
가끔 목욕탕에서 오해를 받게도 된다는 것이다. 

원래 스님이란 표현은 자체적으로 
'님'이라는 존경어 표현이 들어가 있다. 

한국어는 다른 외국어처럼 수나 성으로 변화를 일으키는 문제는 적지만, 
외국인 입장에서는 존대어 표현이 조금 어렵다고 할 수 있다. 
왜 같은 의미인데 상대에 따라서 표현을 달리해야 하는가. 

그냥 나는 이것을 좋아한다. 이렇게 통일해 말하면 되는데
상대에 따라서
저는 이것을 어쩌구 이런 식으로 변화를 일으켜야 하니
외국인은 말 배우기가 어려운 것이다.

그래서 상대가 성이 무슨 씨인가요 이렇게 물으면 
답하는 이는 저는 X 가입니다.
이렇게 답해야 하는 것으로 일반적으로 제시된다.
낮추는 표현을 사용해서 상대를 배려하는 것이다. 


여하튼 스님이 자신을 소개할 때 
저는 스님입니다.
이렇게 말하면 이상하다는 지적을 
현실에서 가끔 받게 되는 것이다. 

어떤 수사관이 자신을 소개할 때 저는 수사관님입니다.
이렇게 이야기하면 이상하지 않은가. 
저는 박사님입니다. 저는 교수님입니다. 
이런 표현들도 함께 놓고 보면
그런 표현이 이상하게 여겨지는 사정을 이해하기 쉽다고 본다. 


그런데 목욕탕에 들어가서 목욕을 하다 보면 
자신의 손이 닿지 않는 부분이 있어서 
주변 사람과 상부상조의 정신으로
서로 등을 밀어주기를 요청하는 경우가 있는 것이다. 

그래서 그 스님도
옆 사람에게 등을 밀어달라고 요청을 했는데 
옆 사람 입장에선
또 그것이 그렇게 반길 일은 아닌 것이다 .

그런 가운데 상대를 보니
머리도 밀고 있고 
별로 마음에 들지 않아서 
당신은 뭐하는 사람이요 
이렇게 물었다는 것이다. 

그랬더니 그 스님이
자신을 낮추어 저는 중입니다. 
이렇게 표현했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 뒤에
목욕탕에서 엄청 맞았다고 하는데

그 사정인 즉
좁은 장소에서 일단 힘이 부족하면
아무리 스님이라도 어쩔 도리가 없기도 한 것이
주요한 원인이기는 하지만,

그 주요 사정인즉
스님이 그런 부탁을 한 상대가
고등학교에 갓 진학한 일진이었기 때문에
규율을 잡기 위해
그렇게 가혹한 안인 수행을
스님에게 요구했다는 소문이다. 

그 분이 그렇게 기합을 다 준 다음 
이런 훈계 말씀을 스님에게 남기셨다는 것이다. 


어디서 감히 중학교에 다니는 중 2 학년 짜리가
선배님에게 다가와 감히 등을 내밀며서
밀어달라고 해                                                     
난 고등학교에 재학중이야 

그런 일이 있었다고 전해지는데 
스님들은 이런 사건을 통해
목욕탕에서 자신을 소개할 때 
상대가 그런 오해를 하지 않도록 
평소 주의를 해야 한다고 본다. 





요즘 노래를 네트워크를 통해 듣는데 
하루 종일 같은 곡을 계속 반복해서 파일을 보내는 가운데 
늘 그런 것은 아닌데
어떤 때는 노래가 끊기기도 하는 현상을 발견하게 된다. 

그래서 prince 님이 이런 특이현상을 치유하기 위해 
네트워크 상에서는
일단 파일을 자신의 디스크에 옮겨 받은 다음 
재생하게끔 수리를 했다고 한다. 
왜냐하면 그렇게 하지 않으면 
공연히 한 컴퓨터가
같은 파일을 또 보내고 또 보내는 상태가 되어
바쁘게 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이런 상황이 많지는 않기에 
prince 님이 업데이트 버전을 올릴지는 알 수 없는데 
여하튼 그런 상태에서 노래를 듣다가 
이런 이상한 노래를 듣고 어렵게 찾아 올리게 된다. 




불어 노래에서 숙왕화님이 빠지는 경우가 거의 없는데 
여기에서도 또 등장하고 

여하튼 정상과 비정상의 구분 경계에 대해 
강조하는 것으로 본다. 

무엇이 맞는가.
무엇이 적절하고 옳고 타당한가 

이런 문제에서 
표준과 비정상의 문제가 언급되고 있는 것이다. 



한국에서는 1 % 에 들면 비정상 
30 % 이후 범위에 들면
그 때부터 정상이고
망상 치유도 비교적 쉬운
적절한 범위에 든다고 보아야 하지 않을까 생각하게 된다. 

다만 근거는 없다.

경전에서는 거의 대부분이 비정상 망상분별 상태라고 
진단하기에 조금 사정이 더 어렵다.  





○ [pt op tr]  mus0fl--Veronique Sanson - La Groupie Du Pianiste.lrc




여하튼 대부분 생명이
살아감에 있어서
별다른 교육을 받지 않아도 
삶에서 중요한 일을 다 잘 하고 
삶을 마친다. 


그리고 교육을 많이 받던 안 받던 
결국 먹고 싸고 놀고 하고 쉬고 자는 활동에 
대부분을 목숨 걸고 임하는 사정은 같다


이런 점에서 
중2 와
고등학교 재학중이거나
대학교 또는 그 이상의 과정에서 연구 중인 입장가운데 
어느 입장이 표준에 더 가까운가를 생각하면 
중2 정도가 가장 표준적이라고 보게 된다. 


인간의 삶이 100 년이라고 하지만,
이는 약간 구라성 과대포장이고 

사람이 의미있게 잘 활동할 수 있는 기간은
한 50 년 정도로 본다면 

그 가운데 한 6 년 정도 학문 수행에 전념했으면 
충분하다고 볼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한국에선 이것이 통용되지 않는 것이다. 

이미 한국의 초등학교나 중학교에서는 
과거 수많은 천재가 평생을 걸쳐 이룩한
학문 성과의 내용을 대부분 잘 이해하고 있는 상태이고 

그래서 
만유인력의 법칙 
뉴톤의 법칙 방정식 피타고라스 정리 등등
이런 것을 다 해결하고 풀어도 
여전히 부족하다는 평가를 주변에서 받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공부면 공부 
또는 피아노나 노래나 운동이면 그것대로 
단순히 적당히 알고 즐길 수 있는 상태로는 부족하고 

무엇을 하던 그 분야에서 전념해서 
평생 정진해야 겨우 사회에서 인정받게 된다는 것이
현실이다. 

그래서 
피아노를 상당히 잘 쳐도 
세계 대회에서 입상할 정도가 아니면 
어디에서 명함을 내밀지 못하는 것이다. 

그리고 자신이 피아노를 한번 치고자 했다면
평생 피아노만 쳐도 부족하다고 여기면서
마음이 쫒겨 지내는 상태가 쉽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수학을 공부한다거나, 기타 등등 
어떤 분야에 임하면 
그 내용을 거의 평생 꾸준히 하지 않으면 
생계 자체가 잘 해결되지 않는
어려운 상태에 내몰리게 되는 것이다. 


그렇다고 앞에서 제시한
먹고 싸고 놀고 하고 쉬고 자는 활동을 
잘하지 못하는 것은 아니지만, 
여하튼 삶의 질이 떨어진 상태로 살아가게 된다고 평가를 받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한 번 어떤 이가 배트를 휘두르며
야구를 시작했다면 이후 전념해서 쉼없이 배트를 휘두르며 시간을 
보내야 하고 
이런 식으로 각 분야에서 적당히 한다는 것은
인정받지 못하는 상태에 내몰리게 되어 있는 것이다. 





그런데 한편 이런 현상이 당사자에게는 
편집증을 일으키고
고통을 가져다 주는 측면은 있지만, 

그러나 또 다른 입장에서는 오히려 
이런 상태에서 더 많은 도움을 받게 되고 
고마움을 느끼게 하는 측면도 분명 있다고 본다. 



본인도 어제 모니터 여분 선을 가지고
이 모니터 저 모니터에 연결해 테스트해보면서 
여기서는 구현이 되던 해상도가 
왜 다른 모니터에서는 구현이 안 되는가 

이런 문제를 대하고 의문을 가졌었는데 
만일 이 문제를 본인이 직접 해결하려면 어떻게 하겠는가. 


이후 인터넷 검색을 통해
쉽게 사정을 이해하고 
문제 해결방안을 알아냈지만, 

심지어 그런 내용도 일일히 직접 실험해서 알아내야 하고 
또 필요한 선도 직접 제작해서 연결해야 한다면 
얼마나 힘든가. 

전선의 구리도 직접 광산에서 구해서 선으로 만들고
그 위에 일일히 비닐 피복을 입히고 

단자도 직접 철판을 두드려서 만들고 
이런다면 정말 힘든 일이 아닌가. 



또 다른 경우를 예를 든다면, 
갑자기 복막염이나 맹장이 아픈데 
이런 상황에서 자신이 직접 칼로 배를 째서
수술해야 한다면 얼마나 힘이 드는가. 

그래서 각 부분에
그 부분에 정통한 전문가가 있고 

그 전문가가 쉬지 않고 그 분야에 대해 
훈련하고 임한다는 현실은 
그 만큼 대부분 사람에게
큰 이익과 좋음을 주는 것이기도 하다. 


다만 여기서 지적하는 것은 
무엇이던지 너무 지나치면 곤란하다는 점이다.

그리고 어느 부분에서든
그 부분에 임하면서

그 내용들이 실재는 어떤 바탕에서 출발한 것이고 
어떤 한계를 갖는 것인가를 
명확히 인식하고 

그 부분에서 
진여 실재의 청정한 니르바나와 
번뇌와 고통의 묶임에서 풀려나 해탈되는
진여 해탈문의 기능을 함께 갖도록 한 상태에서
늘 임해야 한다고 보는 것이다.


이 탈출구가 없으면
아무리 세상에 최고의 지위에서 금메달을 따 얻어도
삶의 문제가 근본적으로 해결되지 못하는 것이다.


그리고 삶의 병목지점에서 만나는
생노병사 구부득고의 고통에
모두 똑같이 노출되고
고통을 받을 수 밖에 없게 되는 것이다.



그것은 자신이 집착하는 자신의
신체가 허물어지는데
이 상태에서 평안할 이가 없는 사정이
이 모두에게 공통되기 때문이다. 


자신이 평소 집착하고 아끼던 것을 모두 놓고
이제 고통을 극심하게 받으면서
화장터를 향해 들어가기 직전인데 
어떻게 마음이 편할 수 있는가. 



남의 일일 때는 그저 모든 생명이 
다 한 번은 받는
그런 자연적인 일로 여기고 
무시하거나 외면하고 태평하게 임하는 것이 보통이지만, 
그러나 자신이 그 순서에 놓여
그런 내용을 받게 되는 상황에서는
그렇지 못한 것이다. 


그리고 처음 전도된 상태에서 임한 경우 
그런 상태에서 반응하게 되는 그 대부분 내용이 
모두 오히려 그 이후 사태를 악화시키는 방향으로 
그를 묶어 끌고 가게 마련인 것이다. 


그리고 이런 총체적인 업의 장애로 인해 
그 이후 상태도
역시 사정이 그렇게 좋지 못하게 되는 것이다. 


죽으면 그만이라고 보는 입장도 있지만, 
사정이 그렇지 못하고 
이제 자신이 그간 쌓아 놓은 업의 장애로 인한 
그 내용들을 거울 반대면에서 
작용 반작용의 관계로 모두 받아나가야 하는 것이기도 한 것이다 



바로 이 부분이
자신이 평소 살면서 무시하고 관심을 갖지 않았을 수는 있지만, 
다른 생명이 고통을 받는 그런 현장에서의
내용 그 자체이기도 한 것이다.

그래서 이 문제가 결코 단순한 것이 아닌 것이다.



현실에서 어떤 고통을 받는 이가
있으면 그런 입장에서 그 전후 사정을 물어보게 될 것이다.

예를 들어
오토바이를 타고 달리다 사고가 나서
응급실에서 수술을 받으면서 고통받는 환자가 있다면 
그에게 왜 아픈가하고 물어보면 

우선 다리가 부러져서 아프다. 
이렇게 대답할 것이다 .
맞는 말이다. 


그런데 조금 더 넓고 길고 깊게 
그 사정을 물어본다면 
어디까지 나아가야 할 것인가. 

현실에서는 처음 오토바이를 타고 달리던 
그 순간까지도 나아가야 할 것이다.  

그리고 그날 왜 그 거리를 그렇게 달리게 되었던가. 
그리고 왜 또 그 상황에 다른 사물이나 사람은 
또 거기에 있었던 것인가 
등을 모두 문제삼게 될 것이다. 


그런데 수행자가 업의 장애를 말할 때는 
그렇게 이번 생에서 생긴 사건이나 일만 가지고 
그것을 문제삼는 것은 아니다. 



원래 수행자의 입장에서는 
시작도 없고 끝도 없는 
무한한 시간대에서 

이들 생명이 이런 상태에 묶여서 
헤메 돌아다니면서 고통을 받는 것을 문제로 놓고 
수행에 임하는 것이므로 

그렇게 단순하게 좁고 짧고 얕게 
그 업의 장애현상을 살피고 헤아리는 것이 아닌 것이다. 





의사가 남의 병을 고친다지만, 
자신은 병에 하나도 안 걸리고
병에 걸려도 자신의 병을 잘 고치고
그리고 불노장생하고 불사하던가. 

그렇지 않다. 

다른 분야도 마찬가지다. 

심지어 수행자도 사정이 비슷하다고 보야야 한다. 


다만 그래도 문제를 조금 더 살피면서
노력하는 것이 조금 다른 것 뿐이다. 


 

본인이 자꾸 과학자를 비롯해서 일반 현실의 생명이 

모두 망상분별 편집증을 겪고 있고
그로 인해 고통을 무량하게 받아나가는 사정을
지적하는 것을 놓고 


본인이 어떤 입장을 특별히 폄하하기 위해 

그런 표현을 하는 것으로 오해하는 경우가 가끔 있는데 

이는 부처님의 가르침과 경전의 내용이 그런 것이다. 


예를 들어 세간에 널리 알려진 색즉시공의 내용이 

들어 있는 반야심경에서도 

원리 '전도몽상' 구경열반 이란 내용이 제시되는데 


바로 이 부분이 현실의 일반적인
전도 망상 편집증의 상태와 

깊게 관련이 되는 내용인 것이다. 



또 현재 본인이 살피고 있는 대반야바라밀다경 

입이생품 제 7 에서도 

같은 내용이 제시되고 있다. 


○ [pt op tr]


그러나 이런 내용은 단지 특별히 

어떤 특별한 경전의 특별한 부분에서만 제시되는 내용이 아니고 


전체 경전이 다 함께 제시하는 

기본적이고 일반적인 내용인 것이다. 






다만 부처님의 가르침을 잘 이해하지 못하는 입장에서는 

그런 내용이 경전에 그렇게 있다고 해서
그 사정을 또 쉽게 이해하고 받아들이게 되는 것도 아니다. 



그것은 

현실에서 대부분 거꾸로 뒤집혀 

모든 사실과 가치 판단에 임하고 있는 상태이기에

그런 상태에서는 

기본적으로 이런 사정 자체를 이해하는데 

어려움이 많이 따르기 때문이다. 



그러나 여하튼 현실에서 

옳고 그름이나 좋고 나쁨이 모두 문제될 때 

일반적으로 현실에서 표준적으로 행하는 그런 판단은 

대부분 잘못이고 


또 바로 그런 사정으로 

오히려 정말 옳다고 할 내용과 좋은 내용은 

현실에서 일반적으로 이해하기 어렵고 

받아들이기도 힘들고
또 알아도 행하기 힘든 

그런 반대 면 안에 들어 있는 경우가
많다는 것을 

또 잘 이해해야 한다고 본다. 




그래서 현실에서 표준으로 제시되는 내용이 

정말 표준이고 옳은 줄 알고
이에 바탕해서 

생활을 해나가다 보면 

나중에 

사정을 알고 보면 

다 속았다 이런 탄식을 하게 마련인 것이다. 



속았다 이 부분에서 특정한 다라니 구절이 

연상되는데 유명한 다라니 가운데 

'다소가타야' 이런 구절이 있기도 한 것이다. 




그리고 첫 바탕에서 그렇게 속은 경우엔  

그 속은 상태에서 열심히 굴을 파고 또 팠다면 

그렇게 깊고 많이 오래 판만큼 
이후 더 깊게 많이 오래 후회를 하게 되는 상태가 

되게 마련이라는 사정도 함께 이해해야 한다. 


예를 들어 하늘을 가고자 희망하는 이가 

땅 밑을 향해 깊게 굴을 팠다면 

나중에 하늘을 올라갈 때 

그 만큼 더 힘이 들게 되는 이치와 

사정이 같은 것이다. 



그러므로 전도 몽상 상태에서는 

어느 분야에서 1 %를 점하고 두각을 나타내는 상태보다는 

조금이라도 덜 상태가 심한 일반적이고 표준적인 상태가 

그나마 다행스럽다고 보게 되는 측면이 

대단히 많은 것이다. 



그런데 이런 사정을 쉽게 이해하려면 

단지 경전의 내용만 찾아서 대하려고 하기보다는 

현실에서 스스로 

간단한 실험을 해서 


자신이 어떤 바탕에서 이런 전도 망상 증세를 

일으키고 있는가를 빨리 이해하고 

스스로 자각을 해야 한다고 보게 된다. 



현실에서 계속 눈을 뜨고 바라보는 모습을 놓고 

전도 몽상을 일으키고 임하는 경우는 


사실은 현실에서 어떤 아이가 하루 종일 

게임기만 붙잡고 게임을 하면서 

임하는 경우와 사정이 같다. 

그 경우는 게임 프로그래머가 만들어 낸 스토리를 바탕으로
그 아이가 엉뚱하게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하면서 

임하게 되는 것처럼 


현실도 그와 사정이 같은 것이다. 



그러므로 이런 증상을 해소하려면 

평소에 운전하는 이가
한 순간이라도 시선을 떼어 다른 곳으로
시선을 돌리거나 하면서
집중을 하지 않으면 

곤란하게 되는 것처럼

대부분 현실에서 임하는 이가 그런 사정에 놓여 있다고 해도
그래도 


잠시 잠시 시간을 내서 

스스로 간단한 실험을 하면서 

현실의 본 정체에 대해 잘 파악해보려고 

노력할 필요가 있는 것이다. 



이미 그간 많이 반복했지만, 

그 실험내용이 너무 간단하기에 

혼자서도 어느 경우나 쉽게 실험을 하고 

스스로 전도 몽상 증세를 치유할 계기를 

마련할 수 있다고 보게 되기에 

그 내용을 또 소개한다면 다음과 같다. 




우선 현실에서 자신이 혼자
눈을 감고 뜨고하는 운동을 반복해 보는 것이다. 


그런 가운데 다음 문제를 생각해 보는 것이다. 


눈을 감으면 보던 세상 모습이 없어진다. 

그렇다고 세상이 없어지는 것인가 하고 

우선 스스로 물어봐야 한다. 


그런데 보이지 않는데도 

그 직전에 본 모습 그대로 세상이 있다고 

할 것인가 

그렇게 또 물어보아야 한다. 



그래서 자신이 눈을 감던 뜨던 

어떤 세상의 실재 내용이 따로 있는가. 

그리고 그런 실재 내용은 

자신이 본 내용과 일치하는가. 

그런 것들이 일단 문제가 되므로 

그 내용을 실상이나 실재 진여라고 놓고 

그 정체를 파악해보려는 

노력을 시작해 보는 것이다. 




그리고 그런 가운데 

또 자신만 그런 실험을 하지 말고 

자신이 믿을 만한 다른 이를 놓고 

그 실험을 하게 해서 

그 과정을 옆에서 다시 관찰해보는 것이 또 필요한 것이다. 


옆에 있는 동료가
눈을 감고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고 할 때 

정말 그런가. 


눈을 떠서 무언가가 보인다고 할 때 
그래서 자신도 무엇이 새로 생겨난다고 
여기게 되는가. 

그런데 그렇다고
자신은 그 동료와 입장이나 사정이 크게 다른가. 


그래서 동료가 옆에서 눈을 뜰 때 나타난다고
말하는 그 내용은 

자신에게는 어떤 것을 놓고 그렇게 말한 것인가. 


이런 것을 하나씩 검토해보는 것이다. 





그런 가운데 여전히 자신이 눈을 떠서 대하는 

자신의 모습이 자신이라고 여겨지고 

또 자신이 대하는 꽃이나 바위가 

자신의 외부에 놓여져 있는
꽃이나 바위로 여겨진다면 


그 상태에서 자신의 눈을 막대기로 살짝 눌러 보는 실험도 해보고 

또 색이 짙고 돗수가 심한 안경을 구해 번갈아 바꿔 써보기도 하면서 


처음에 본 세상이 왜 자신의 이런 행동에 의해 

일 순간에 다 그 내용이 바뀌는가 

이런 것을 또 검토해 보아야 하는 것이다. 






지금 노래 동영상을 올려 놓았는데 

노래 동영상의 사정을 보고 

현실의 사정도 이에 준해 생각할 수 있어야 한다고 본다. 



동영상에서 어떤 한 부분이 사람이라고 여기고 

그 사람이 무언가를 하거나 

무언가를 집는 모습을 보게 된다고 하자. 

그런데 이렇게 생각할 때 

정말 그 화면이나 모니터 화면의 그 화소가 

다른 화소를 붙잡아서
무언가를 집고 있는 것인가. 

그렇게 일단 의문을 제기해보자. 


여기서 그렇지 않다는 것을 일단 

지적하는 것이다. 


그렇게 생각은 되지만 

사정은 그렇지 않다. 


심지어 동영상에서 피아노 소리를 듣고 
가수를 보고 노래를 들어도 
컴퓨터 어디를 뒤져도 그런 것은 얻을 수 없는 것이다. 

그것이 평소 자신이 대하는 현실과 세상의 

본 정체인 것이다. 





그런데 왜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는 

그 나라에서
트럼프가 걸어다니기도 하고 

돼지가 날라다니기도 하는 현상을 

자꾸 반복해서 경험하게 되는가. 


이것이 바로 현실의 전도 망상 증상을 

이해하는 첫 계기가 되는 것이다. 




그런데 현실에서 대하는 모든 내용이 

자신의 마음 안의 내용임을 그렇게 이해해도 

prince 님의 경우처럼 
다시 다음과 같은 망상증을 

또 일으키게 마련이다. 




즉, 자신이 동영상에서나 영화화면에서나 

컴퓨터 모니터에서
어떤 모습을 보는 것은 


그 화면 밖에 그 내용과 일치하거나
또는 그에 비례하고 유사하거나 상응되는 
그런 어떤 내용이 있어서 그런 것이라고 여기게 되듯 


이와 마찬가지로 

자신이 현실에서 어떤 내용을 얻으면 

그 내용과 일치하거나 비례하는 실재 내용이
또 그렇게 있다고 여기는 증상을 일으키게 되는 것이다. 






그러니 또 실험을 해야 하는 것이다. 


그런 가운데 

자신이 그릇을 하나 놓고 

손으로 만질 때 촉감이 얻어지면 

그 촉감과 자신이 본 그릇의 모습이 

과연 어떤 부분이 일치하고 비례하는가. 

이런 문제를
한 번 검토해 보아야 한다. 



이 가운데 어느 것이 진짜거나
그와 일치하는 내용이 실재에 그렇게 있다고 전제하면

나머지는 왜 그에 비례하거나 일치하지도 않는데 

그런 내용으로 얻어졌는가. 


그 사정을 이미 얻는 현실 내용 안에서부터 

해명을 해야 하는 것이다. 


그래서 실재와 현실의 내용이 만일 그런 관계가 아니라면
현실에서 그런 내용을 얻을 수 없는 것이라고 생각한다면 

현실 내용 안에서부터
그런 문제현상에 대해
해명을 시작해야 된다는 의미다. 


시각내용과 

청각내용 

후각내용 

미각내용

촉각내용 

이들 하나하나를 놓고 서로 

그렇게 따져 보아야 한다. 



그런데 사실은 이 문제의 성격은 

왜 침대에 누어서 바다 꿈을 꿀 수 있는가. 

그 질문이나 마찬가지다. 



침대에 바다가 얻어지지 않아도 

그러나 꿈에서는 그렇게 바다 꿈을 꾸는 것이고 


시각 내용을 기준으로 하면 

세상에는 소리나 냄새나 맛이나 촉감은 얻을 수 없는 것인데 

그러나 각 정신에서는 

그런 내용을 얻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이들은 서로 비례하거나 일치하다고 볼 내용을 

찾기 힘든 것이다. 


그것은 감각현실과 관념분별 사이에서도 

그 사정이 마찬가지다. 


그런데 눈을 감거나 뜨거나 관계없이 

원래 실재한다고 할 실재내용은 

왜 이런 망상을 바탕으로 얻어낸 내용이
그대로 있어야 한다고 주장하게 되는가. 


이것을 스스로 검토해야 하는 것이다. 


설령 그것을 다 한 곳에 포개어 놓고 문제를 제기해도 
문제는 여전히 남는다. 
그런 상황인데 왜 매번 그렇게
이상한 내용을 얻는가. 이런 
문제는 여전히 제기되는 것이다. 



그런데 현실에서 
그렇게 생각하게 되는
그 이유는 간단하다. 



망상을 바탕으로 할 때는 

그런 생각이 자꾸 반복해서 일으켜지고 

얻어지기 때문에 그런 것이다. 

사정은 그것 뿐이다. 


그래서 사실은 어떤 이가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가 되어서 

이상한 나라를 가도 

쉽게 적응이 되는 것이다. 


그것은 게임기를 새로 구해 

게임을 하는 아이도 사정이 같다. 



그 게임에 임하고 나서부터는 

버튼을 누르면 불이 나가고 

게임 속 상대가 그 불을 다섯번 맞으면 

이유는 모르지만 그 상대는 바로 쓰러지고 

없어지게 되어 있는 것이다. 


게임의 내용이 원래 그런 규칙에 의해 
전개되게 되어 있는데 

무엇이 이상한가. 


사실 이 부분은 이상한 것은 아니다. 


그런데 심각하게 이상한 부분은
자신이 게임 속에서 전개되는 그런 내용을 

다른 영역에서 주장할 때부터 이상하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그런 내용이 게임기 안에서나 

자신의 감각현실이나 관념분별이나 

꿈에서 그렇게 생생하게 얻어진다는 것이 문제가 아니고 


그 내용을 놓고 그것을 다른 영역에서도 

그처럼 얻어지고 

그래서 실답게 있는 내용이라고 여기고 

그리고 이에 바탕헤서 

집착을 갖고 임하는 그 부분부터 문제인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게임기 내용이 무엇이던 그것이 무슨 문제인가. 

그것은 하등 문제가 아니고 

궁극적으로는 그것들마저도 

청정한 니르바나라고 제시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그렇지 못한 상태에서 그것을 대하고 

집착을 일으켜 임하기에 

그것 일체가 또
모두 고통이라고 제시하게 되는 것이다. 



사정이 이와 같으니 

같은 내용을 놓고
한편으로 그 일체는 고통이라고 제시하는 한편 

그러나 또 다른 한편
그 일체는 모두 청정한 니르바나라고 제시하는 것이다. 



그런데 단순히 그렇다는 것을 안다고
그 문제가 다 잘 해결되는 것이 아니다.  

그리고 

현실적으로 자신이나 어떤 주체가 

앞의 측면에 놓여 있으면
그 사정으로 인해 무한한 시간대에서 

도무지 편할 수가 없는 것이다. 



그러니 이것이 문제가 되고 

'행심' 반야바라밀다 '조견' 오온 개공 '도' 일체고액의
노력들이 필요하게 되는 것이다. 


즉 깊이 실상을 관하는 지혜를 닦는 수행을 행하고 

세상의 일체가 모두 그 실상이 공하다는 사정을 

밝게 비추어 보아야 하고 

일체의 고통과 재난을 그로써 쉭 벗어나야 하는 것이다. 


원래 사정이 그런데도
그런 노력을 통해 그 사정을 이해하고
그렇게 현실에서 각 내용을 대하고 임하지 못하면 

결국 앞에 제시한 첫 명제

즉 일체는 모두 고통이다라는 내용만 
자신이 현실에서 경험하게 되는 가운데 

자신이 늘 생생한 고통의 현장에서의 주인공이 되어
현실에 임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면 업의 장애를 해소할 수행을 닦을 계기도 

마련하지 못하고 


원하던 원하지 않던 

공포와 고통을 생생하게 받는 체험학습을 

매번 묶여 강제로 떠날 수 밖에는 없는 것이다. 


예를 들어 

아무리 실상이 공하다라고 몇 만번
반복해 소리내어 외운다고 해서 

자신이 눈을 떠 보는 모습이 그로 인해 

달리 보이게라도 되는가. 

생생하게 바위로 보던 모습은 여전히 바위로 보게 되는데 

그것이 자신이 원하지 않는 고통을 주는 내용이 되면 

어떻게 되는가. 


그런 현실에서 
자신의 손과 발이 잘리워지고 떨어지고 

불타고 그런 모습이 생생하게 얻어지면 어떡하는가. 


그것이 단순한 영화가 아니고 

사실은 축사에서 생활하는 축생의 현실 상황이기도 한데 

그 축생에게 생생한가 아닌가 물어보면 

무엇이라고 답할 것 같은가. 


그것이 그 축생에게만 해당되는 일이고 

자신은 예외가 될 어떤 이유가 있다고 보는가. 

이런 문제다. 




그래서 업의 장애를 제거하고 

또 만들어 내지 말고 

수행을 통해서 복덕과 지혜를 구족하는 상태로 

나아가기 위해 노력하는 것이 

중요한 의미를 갖는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또 꿈에서 황금을 얻는다고 하고 

그것이 아무리 생생하다고 해도 

그로 인해 어떤 황금이 없다가 생겨나는 것도 아니고 

또 있던 황금이 그로 인해 어디선가 없어지는 것도 

아닌 것처럼 

현실과 실재의 관계도
기본적으로 그 사정이 그와 같다는 것을 

이해해야 하는 것이다.





그래서 망상분별과 집착을 제거한다는 것은 

이런 측면에서 대단히 중요한 것이다. 





그런데 편집증세를 일으켜서 

한 분야에서 깊이 나아간 입장은 

도무지 그렇게 잘 되지 않는 경향이 심한 것이다. 



세상에서 소꿉놀이를 하는데 

한 아이가 딱지를 엄청나게 갖고 있는데도
또 갖기를 원하고  

그리고 또 딱지를 그렇게 구하고 

그리고 늘 딱지 놀이만 하려고 임하는 경우가 있다면
이와 사정이 비슷하다. 




다른 놀이를 다른 방식으로 해도 되는데 

왜 그러는가. 


그것은 그 만큼
그가 평소 환각과 망상분별 증상이 심하고 

집착이 심하여
그에 접착되어서 떨어지지 못하고 있는 상태이기에

그런 것이다. 


그러니 그것이 문제가 되는 것이다. 




원래 딱지를 통해서 얻을 수 있는 좋음이 

일부 있다고 할 수도 있는데 


위 상황에선 사실 그것마저도 

실질적으로 잘 얻지 못하고 있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이미 앞에서 업의 장애현상을 살필 때
그 문제를 본 것이다. 


원래 교도소에서 도망 나와 거리를 거닐면 

그로 인해 자유를 느끼고 평안함을 느껴야 할 것 같은데 


그런데 업의 장애가 해소되지 않은 상태에서는 

아무리 교도소를 뛰쳐 나와도 

그것이 잘 되지 않는 것이다. 


그리고 딱지의 사례나 그외 

현실에서 모든 것의 사정이 사실은 그런 것이다. 


밖에서 볼 때는 상당히 좋아 보이는데 

그러나 그 실질이 그렇지 못한 상태가 되는 것이다. 

그러니 그 만큼 더 안타까운 것이다. 


그리고 이 문제가 각 분야에서 심각한 것이다. 

그런 가운데 그 당사자들은 

힘들게 번뇌에 묶여
번뇌로부터 사역을 당하고 또 남을 묶어 사역을 시키는 가운데
남 좋은 일만 열심히 하다가 


결국 어느 순간에는
고통을 받는 다른 세계에 

묶여 끌려 가게 되는 것이다. 




그런 다른 세계를 소개하는 경전내용에 대해서 
일반적인 입장에서는 
평소 그런 세계는 있을 수 없다고 
무시하기도 한다. 


그것은 마치 현실에서 어떤 이가 
자신의 눈으로 보면
소리는 보이지 않는다고 

소리가 없다고 주장하는 경우와 사정이 비슷하다고
이해할 수 있다.

그러나 아무리 눈을 뜨고 소리를 찾아 보아도
찾아지지는 않지만, 

그 상황에서 귀를 열고 대하면
소리가 생생하게 얻어지듯 

경전에서 제시하는 

고통을 받는 세계는 


축생의 세계 뿐만 아니라 

아귀나 지옥의 세계가
그렇게 모두 생생하게 고통을 받아가면서 

또 그와 반대면의 다른 세계를 

그렇게 유지해 나가고 있는 것이다. 


그러니 그렇게 역할을 바꾸어 

각 세계를 돌고 돌아다니는 기본 사정을 잘 이해하고 

이 묶임에서 근본적으로
풀려나야 한다고 제시하는 것이다. 


이 내용이 쉽게 이해가 안 되면 


이제는 그 내용을
어렵게 

각 논서와 경전을 대하여 

살피고 헤아리면서 

이해를 해야 한다고 보는 것이다. 

여하튼 
자신이 선배고 어른이라고 주장하는
전도 몽상 상태에 있는 입장에서는
위에 붙인 노래를 잘 들어야 한다고 본다.


누가 정상이고 옳다고 보는가.
목욕탕에서
자신이 중2이라고 주장하는 이인가.
아니면 자신이 고등학교 재학중이라고 주장하는 이인가. 

여하튼 이런 여러가지 어려운 문제를 메세지로 전하는 
노래를 들으면서 
세상에서 정말 옳고 좋고 좋은 것이 무언가를 
잘 헤아려서 방향을 잡고 나아가야 한다고 보는 것이다. 






옥상기지에 올라가서 또 중요한 노래를 들었다. 
요즘 각 기지마다 기악공양이 행해지기에 
특별한 일은 아니라고 할 수 있는데 

위 노래에서 미륵보살님이
중생을 제도하기 위해 어떻게 시나리오를 구성하고 
이것을 성취시키는가 이런 메세지를 전하는 것을 듣게 되는데 

그 사정을 조금 설명하는 메세지를 이 곡이 
전한다고 보게 되는 것이다. 





- France Gall - Les sucettes -




본인에게 그 사정을 설명하려면 
다음처럼 쉽게 설명하겠다. 

본인이 마술쇼를 한다면 
자신이 만들고 싶은 장면을 먼저 잡아 놓고 
이렇게 먼저 묻게 될 것이다. 


왜 굳이 이렇게 하고자 하는가. 
그리고 그것이 성취되면 무엇을 그 상태에서 어떻게 하려고 하는가. 

이것을 먼저 스스로에게 묻고 
그 답이 온 생명을 제한없이 좋고 좋게 이끌기 위해서다. 
한마디로 금강경에서 제시되는 내용처럼
아개령입무여열반을 위해서 그렇다. 
이런 경우라면 

그 내용을 다시 붙잡아 놓고
나머지를 모두 그에 맞추어 꿰맞추는 것이
그 방안의 하나라고 본다. 



결국 시나리오 작가가 행하는 작업과 비슷한 것이다. 

어떤 환자를 영화 안에서 없애려면 
자꾸 시나리오에서 기침을 한다거나 
피로하다고 말하는 대사를 넣어 말하게 하고 
어느 순간 화장터 장면을 보여주게 되는 것과 비슷하다.



그 반대도 마찬가지다. 

본인도 연구실에서 한가할 때 
각종 드로이드를 제작하는데 
제작 방법은 마찬가지다. 

본인이 원하는 각도가 있다면 
무조건 그렇게 세워 놓고 
그렇게 서 있게 할 재료를 구하는 것이다. 


그래서 바퀴가 꼭 앞뒤로 오가야 한다거나 
바퀴가 서로 방향이 달라서 굴러갈 수 없으면 
곤란하다는 등은 여기에 적용이 되지 않게 된다. 

단지 각 방향에서 원하는 각도로 
신해 드로이드를 세워 줄 수 있으면 
무조건 끼워 넣게 되는 것이다. 

이는 레고블록으로 놀면서
무언가를 만들어 가는 아이와 심정이 같은 것이다. 


그런데 현실도 사실은 이와 사정이 같다. 

무여열반의 상태에 이르게 하기 위하여 
수행자는 그것을 목표로 
무량한 방편 지혜를 닦는 수행에 진입하는 것이고 
그렇기에 무량행문을 닦아 나가게 되는 것이다. 

그 사정이 그러므로 
복덕과 지헤자량이 필요하다고 보지만, 

금강경에서 제시되듯
수행자는 그런 수행으로 
무량한 복덕을 받지만, 
또 그에 집착을 갖지도 않고 
또 그런 복덕을 받지 않는 것이기도 한 것이다. 


그 취지가 그렇게 다르기 때문이다. 

그런데 
수행자가 스스로 그렇게 되지 않으면 
앞의 경전에서 소개한 내용처럼 
밥을 지으려다가 
스스로 쉬어 버린 쉰 밥이 되어 버리는 결과가 되는 것이다. 

그래서 내용과 외관은 같은데 
그렇게 그 마음 상태가 차이가 나면 
그로 인한 결과와 그 내용과 그 의미 차이가
실질적으로 극심해지는 문제가 발생하게 되는 것이다. 

옥상기지에 올라가 쉴 때마다
이상한 노래를 듣고 오는데
오늘 적은 글과 연결이 된다고 보고
또 찾아 올리게 된다.

목욕탕 사건 이후 
그 고등학생이 
이후 전개되는 과정에서 
큰 교훈을 얻었다는데 
나갈 때 중 2라고 주장한 분이 
중2 학생이 아닌 것을 알고 
전하는 메세지가 아닌가 
이런 생각을 엉뚱하게 해보게 되는 것이다. 

시감상 차원에서는
그 외의 내용은 별 생각이 나지 않는다. 



그런데 스님이 되는 것이 
상당히 중요하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세속의 모든 것에 
집착을 버리고 수행을 하기 위해 
스님이 되어 수행에 임하는 것이 쉽지 않다. 

최근 보고에 의하면 수행자가 되는데 
나이 제한을 두어서 스님이 되고자 해도 
스님이 되기 힘들다. 

원래 스님이 되는데 무슨 제한이 그렇게 많았겠는가 
그러나 경전 등을 보면 또 그런 여러 사정도 제시된다. 
그러나 현실에서 출가를 하고
수행자 라이센스를 얻는데
사실 그렇게 복잡한 것은 아니다.

유마경과 같은 경전에서는 그 사정을
또 달리 제시하고 있다.  

그러나 그렇게 출가와 수행 라이센스를 쉽게 얻는다해도 
현실의 외관에서는 스님으로 인정받지 못하는 것도 사실이다. 
스님의 차림으로 스님의 모습으로 
무언가를 제시하면 
신도들이 잘 받아들인다. 

그러나 그렇지 않으면 
또 잘 받아들이지 않는다. 

현실의 대부분이 그렇게
외관을 보고 판단을 행하도록
길들여져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리고 그로 인한 부작용도 많이 발생한다. 
그래서 종단에서는 또 일정한 규제를 하는 사정이 있다. 

그러나 실질적인 의미의 수행을 놓고 생각하면
수행을 시작하는데 무슨 제한이 있고 
자격이 따로 필요할 것인가. 

그런 의미에서 유마경에서 제시하는 출가의 
실질적 의미를 수행자는 또 음미해 보아야 한다. 


'라후라여, 

출가의 공덕이나 이익에 대해 

말해서는 안 됩니다. 

왜냐 하면 

아무런 이익도 공덕도 

없는 것이 출가이기 때문입니다. 

유위법(有爲法)이라면 

이익이나 공덕이 있다 할 수 있겠지만, 

출가는 무위법(無爲法)을 구하는 것으로서 

무위법에는 이익이나 공덕이 없습니다. 

라후라여, 

출가에는 

깨달음[彼]도 미혹[此]도 없고 

그 중간도 없습니다. 


62견(見)32)을 멀리 떠나 

열반(涅槃)에 처하는 것이니 

지혜로운 이가 누리는 것이며, 

성인이 닦는 길인 것입니다. 


온갖 마군을 항복시켜 

5도(道)를 넘어서 

5안(眼)을 맑게 하고, 

5력(力)을 얻었고, 

5근(根)을 바르게 세워 

그 어떤 것으로부터 괴롭힘을 당하지 않고, 

온갖 잡다한 악을 떠나고 

모든 외도들을 꺾었으며, 

가명(假名)에 

집착하지 않으며, 

애욕의 진흙탕을 벗어나 

온갖 속박을 벗어났으며, 


내 것이라는 집착이 없고, 

집착하는 마음[所受]도 없고, 

마음의 혼란이 없고, 

안으로 늘 기쁨을 간직하고 

중생들의 마음을 지켜 주며, 

선정(禪定)을 따르며 


온갖 잘못을 다 떠나 버립니다. 

만약 이렇게 한다면 

이것이 참다운 출가인 것입니다. 


이 때 유마힐은 

장자의 아들에게 말했습니다. 

'그대들은 

정법(正法)을 받아들여 함께 출가해야 할 것입니다. 

왜냐 하면, 

부처님께서 

이 세상에 계시는 기회를 만나기란 

매우 어렵기 때문입니다.' 


장자의 아들들은 
말하였습니다. 

'거사(居士)님, 

저희들이 듣기에는 

부모님의 허락이 없으면 

출가할 수 없다고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고 합니다만…….' 


그러자 유마힐이 말하였습니다. 

'그렇지요. 

그러나 그대들이 

지금 곧 아뇩다라삼먁삼보리심을 일으킨다면, 

그것이 곧 출가이며, 구족(具足)입니다. 


fr 유마힐소설경 K0119_T04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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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rrg1651

◈Lab value 불기2561/02/18/토/23:24



○ [pt op tr]  mus0fl--Arthur H Et Le Bachibauzouk Band - Marouchka.lrc



♥ 잡담 ♥꽃향기악등의 공양준비


앞으로 28 년을 더 살 수 있을 것인가.
약간은 부정적이고 약간은 기대를 갖게 되는 햇수다. 

1 년에 연구를 열심히 하고 
책 걸이 삼아서 꽃 등을 하나씩 제작해보기로 했다. 
연구를 한다고 어떻게 책만 보고 연구할 수 있는가. 
그런 의미에서 28 년간 꽃 등을 제작할 재료를 
이번에 주문을 인터넷 도라에몽기지에 했다. 
부품이 꽤 여러가지가 들어간다. 
하나씩 부품을 주문하면 대부분 택배비가 부품값보다 비싸게 나온다. 
그래서 28 년을 앞으로 산다는 보장이 없지만, 
숫자 28 에 꼽혀서 대강 그 정도씩 주문을 했다. 

일체 중생이 다 성불한다는 가르침을 베푸는 
묘법연화경이 28 품으로 되어 있다.
그래서 28 개 정도의 꽃등을 만들어 보려고 주문했다. 
이번에는 한꺼번에 그렇게 각 부품을 주문하니 
비용부담이 꽤 든다. 

필요한 부품을 다 주문한 것은 아니고 
핵심 부품을 그렇게 주문하고 
1 년간 천천히 꽃잎도 구상하고 전체 꽃 모양도 
구상하면서 작품을 만들어갈 예정이다. 

led 로 꽃을 만드는 방안에 대해서는 
인터넷에서도 많이 나온다. 
그 가운데 검색을 통해 하나를 여기 붙여 놓기로 한다. . 

http://blog.naver.com/x2rose/220832980636

이런 형태로 똑같이 만들 생각은 없고 
자연과 친화력이 있는 형태로 만들고자 한다. 

그런데 오늘 옥상기지에서 안드로이드를 통해 
법화경을 살펴보다가 
중요한 제작 단서를 얻었다. 


○ [pt op tr] 꽃을 만드는 재료 


경전에 나오는 형태로 꽃을 제작하려면 
일단 염부단금과 백은 금강 견숙가보가 필요하다고 보는데 
그것이 무럿을 가리키는지 알기 힘든 것이 많다. 

견숙가보란 생소한 명칭인데 
이런 때 사전이 도움이 된다. 

견숙가보란 홍색을 띈 유리 보물이라고 한다. 
범어로 kiṃśuka 라고 한다는 것이다. 
한국 이름비슷하다. 김숙아? 

염부단금이란 일종의 강가에서 나는 사금이라고 한다. 

백은 금강은 비교적 구하기 쉬운데 
견숙가보 염부단금 이런 것은 어디에 가서 어떻게 생긴 것을 
구해야 하는지 명료하지 않다. 


요즘 고물 전자제품을 수리하고 
꽃을 만들고 등을 만들고 
기악공양을 하는 시스템을 만들고 
경전 열람을 각 기지에서 할 수 있게 만들고 
그런 가운데 소향 공양까지 하느라고 
상당히 피곤하다. 


인터넷 도라에몽 기지에서 검색하면 재료를 팔기에 
주문을 하면 되는데 
그러나 비용을 절약하고 여러가지 내용을 검토해보려면 
상당히 피곤함을 느끼게 된다. 

숙왕화님은 벌써 청소기를 5 개째 구입하는 것 같다. 
그런데 숙왕화님은 청소기가 1 번 통에 먼지가 가득하게 차면 
쓰고 버리는 물건으로 생각하는 것 같다. 

왜 자꾸 청소기를 구입하는가하니 
조금씩 형태가 바뀌는 것은 볼 수 있다. 

처음에는 통이 있었는데 
그 다음에는 앞에 먼지를 모으는 통이 달려 있다가 
그 다음에는 통이 없어지고 
이번에는 선이 없어져서 구입을 한 것 같다. 

연구실에 청소기가 홍수를 이룰 것 같은데 
계단 및 옥상기지 청소용으로 폐기대상으로 분류된 청소기를 
청소를 했는데 멀쩡하다. 
그런데 왜 버리는지를 이유를 알 것 같다. 
안에 먼지가 들어 있는데 그것을 청소하는 것이 
상당히 어렵게 되어 있어서 
아마 더 이상 먼지가 빨려들어가지 않자 
고장 난 것으로 생각하게 된 것으로 본다. 

본인이 전자제품 수리하는 김에 
부품을 뜯어서 청소기를 청소를 하고 
앞으로 옥상기지에서 사용할 생각인데 
사실 본인도 청소를 그렇게 좋아하지 않기에 
언제 사용할 지는 알 수 없다. 

청소기는 진공 유사 상태를 만들어 내는데 
도움이 되는 도구이기는 한데 
과연 앞으로 쓸모가 있을 지 알 수 없다. 
모터만 떼어서 무슨 기구를 제작해볼까 하는데 

어느 어시장에 들렀을 때 
선풍기로 각 가게마다 파리 등을 쫒아내는 도구를 
만들어서 사용하는 것을 본 적이 있다. 

필요는 개선의 아버지 발명의 어머니이기에 
누군가 처음 그런 것을 만들어서 사용하니 
그 어시장에서는 가게마다 다 그렇게 선풍기를 개조하여서 
파리를 몰아내는 도구로 사용하는 것을 보았다. 


본인도 꽃 등을 만들려고 생각하면서 
부품을 찾다보니 

지금까지 아무 쓸모가 없다고 여겼던 
것들이 쓸모가 있어 보이게 된다. 


그런데 그렇게 무언가 고물을 붙들고 
수리를 하거나 개조를 하려고 임하다보면 
인간 자체가 고물처럼 취급을 받기도 하고 

또 뜻대로 잘 안 만들어지면 
약간의 스트레스도 받게 된다. 


처음 누어서 뒹굴뒹굴 작업 시스템을 만들려고 했는데 
누어서 작업하면 연구 효율이 떨어지기에 
어디까지나 누어서 뒹굴뒹굴 작업 시스템은 
보조적으로만 사용하려고 한다. 

그런 가운데 모니터 연장선을 알아보았는데 
연장선을 어느 종류를 사용하는가에 따라서 
모니터에 나타나는 화소가 달라진다는 점을 
알아냈다. 

선을 주문하고 나서 
테스트 차원에서 한 번 선을 여분의 선으로 
교체해보는 가운데 그런 사실을 알고 
일단 취소를 했다. 

선을 바꾸어 화소가 줄어드는 경우 
보기가 안 좋게 되어서 
일단 그런 문제부터 해결하고 주문을 해야 겠다고 생각한 것이다. 

이런 사정 저런 사정을 알아보려다 보면 
인터넷을 통해서도 부지런히 그 분야에 대해 
알아보아야 그런 문제가 없는데 

그냥 즉흥적으로 주문을 하면 
낭패를 보게 되기 쉽다. 

그렇다고 너무 자세히 알아보려다 보면 
자잘한 것에 함몰되고 
본 업무인 연구 자체를 하지 못하게 되는 문제가 생긴다. 

숙왕화님은 그래서 대부분 즉흥적으로 구매하고 
문제가 발견되고 폐기하고 
또 주문하는 경향이 있고 

본인은 어떤 한 항목이 있으면 너무 자세하게 
살펴서 시간과 에너지를 많이 소비하는 경향이 있다. 

연구실 비품 구입에 숙왕화님이 본인에게 
의뢰하지 않는 사정도 바로 이것이다. 

그런데 알아 보면 문제가 있거나 
더 좋은 것이 발견되거나 하기에 
이런 노력을 또 중간에 그만두기가 힘들다. 

모니터 연결선은 hdmi 가 d-sub 선의 4 배 이상의 
해상도를 구현해준다는 것이다. 
또 hdmi 선도 버전이 2.0 과 1.7 은 차이가 있는데
이런 것을 검색해보기전까지는 본인도 몰랐던 것이다.

또 dvi 선도 있는데 이것은 이 중간이라고 한다. 

여하튼 기존 모니터에서 테스트 차원에서 
선을 바꾸어 보니 최대 해상도가 갑자기 줄어들어서 
화면이 이상해지니, 어떻게 하는가. 

조금 늦게 알았으면 결국 또 새로 선을 주문했을 일이 아닌가. 

그런데 여하튼 그런 일로 인해서 
상당히 번잡해지는 것만은 사실이다. 

각 모니터마다 단자가 또 조금씩 다르므로 
단자가 안 맞으면 변환해주는 젠더 컨버터 등을 
또 암수를 잘 배합해서 구해야 하는데 

이것도 따로 따로 구입하면 역시 
택배비가 더 비싸게 되는 경우도 있게 되므로 
되도록 한 번에 한 곳에서 다 주문을 해보려고 하다보니 
상당히 복잡하게 된다. 

그것은 본인이 찾는 것을 한 도라에몽 기지에서 
다 공급해주는 것은 또 아니기 때문이다. 


이런 사정으로 얼마나 피곤하게 되는가. 


그러나 매번 샀다가 또 버리고 샀다가 
버리는 일은 또 얼마나 피곤한가. 

피차 마찬가지라고 본다. 




고물 전자제품을 하나씩 고쳐보는데
뜻과 같지 않게 끝내 못 고치는 경우도 있다.

이런 경우는 본인이 생각할 때 
참 불가사의한 일이라고 보게 된다. 

왜 이것은 안 될까 그런데 왜 또 저것은 될 까 
이것이 궁금한 것이다. 

최근에 32 기가 마이크로 SD 카드가 살짝 구부러진 다음 
그 뒤에 인식이 안 되는데 
역시 같은 의문을 품게 된다. 

그리고 이를 수행과 관련시켜 생각해보게 된다. 


왜 기본 재료가 차별이 없고 
다 그 실질이 청정한 니르바나의 상태라고 하는데 

그러나 현실에서는 
지극하게 고통을 받는 입장이 있는가 하면 
또 그 반대인 경우가 있는가. 

그리고 그 수많은 생명은 또 왜 그렇게 
다 제각각 모습인가. 

수행자는 이 차별 가운데 
부처님이나 대력보살님처럼 
복덕과 지혜를 다 구비히고 
유희 신통력을 갖추고
중생의 소원을 성취시켜 주는 자재한 능력을 갖고 
임할 수 있기를 바라는 것이지만, 

그런데 왜 그런 분은 그런 일이 되고 
자신은 안 되는가. 

이런 것도 같은 문제 성격을 갖는다. 



원래 재료로 따지자면 
방금 전 살아 있던 돼지나
방금 죽은 돼지나 큰 차이가 없다.
왜 하나는 살아서 움직이고 
하나는 그렇지 못한가. 

꺽여진 SD 메모리카드를 
본인이 되살려내려고 하기 보다는 
하나 새로 구입하는 것이 더 쉽고 
새로 공장에서 만들어 내는 것이 더 쉽다. 

여하튼 이런 문제를 놓고 
수행자가 고민을 하는 것은 
무엇이 그런 차이를 만들어내는가하는 점이다. 



각 논서를 함께 관련되는 부분을 살펴가면서 
연구해 나가려고 한다. 

첫부분은 늘 인과의 문제나 
우리가 늘 일상생활에서 행하는 활동으로서 
무언가를 보는 활동과 관련되어 
논의가 시작된다. 


이미 이에 대해 자세히 살피고
왜 현실에서 과학 교과서에 실려 있는 설명이
엉터리이고 망상 분별이라고 하는지
많이 설명했다.

이것을 또 한번은 살펴야 한다.  

그런데 그 논의의 취지는 간단하다. 

현실에서 자신이 무엇이라고 생각하고 
무엇이 원인이고 무엇이 그 결과라고 이해하는 것이 
사실은 망상 분별이다. 

이 모든 분별이 실답지 않다는 사정을 깨달아서
집착을 제거해야 한다. 
번노의 묶임에서 해탈을 이루고 
원래 청정한 니르바나의 상태를 확인하고
현실에서도 이에 상응하게 여여하게 머물러야 한다.

그리고그 바탕에서 복덕과 지혜를 구족해야 한다. 

그래서 전도몽상에 바탕해 고통을 무한히 받아가는
다른 중생을 제도한다.
그리고 불국토를 장엄하고
성불해야 한다.
이런 내용이 그 논의의 취지다.


그러니 그런 수행을 하는 것이
가장 우선적으로 요구된다. 

그러나 현실에서 전도된 망상을 제거하려면
또 왜 자신이 현실에서 이해하고 대하는 내용이
그렇게 엉터리인가를 스스로
이해해야 할 필요가 있다.

그런데 이 부분이 상당히 살피기 복잡한 것이고
수많은 견해가 서로 얽혀서
어떤 것이 왜 옳은가를 놓고
서로 시시비비를 전개한다.
따라서 이것을 대하는 입장도 또 마음이 복잡해진다. 

 
지금 모니터의 글자를 보는 이가 있다면 
이 글자가 자신의 마음 안에 있는 내용인가 
아니면 자신의 밖에 있는 것인가. 
이것부터 사실은 살펴야 한다. 

prince 님은 그래도 이런 세계 일체의 내용이 
자신의 마음 안의 내용이라는 것만은 이해한다. 
그래서 망상증이 그나마 증상이 가볍다.
그러나 현실에서 이렇게 이해하는 경우 자체가 거의 드물다. 
그것이 무슨 말인가 하고 의아하게 여긴다. 


자신이 손으로 컵을 들면 
자신 밖의 컵을 그렇게 자신이 대상으로 삼아서 그 컵을 
들어 올린 것이지 

어째서 이것이 자신의 마음 안의 내용들이라고 하는가를 
도무지 이해를 잘 하지 못한다. 
여기서부터 사실은 크게 입장이 나뉜다. 

세속에서 일반적인 입장은 
그래서 일단 이렇게 한 번 뒤바뀐 상태에서 
모든 것을 따지고 문제삼는 상태에 있다. 


그런데 그 문제가 단순하지 않다. 

1 번 뒤바뀌는데 그치지 않고 
이에 바탕해 온갖 것을 다 뒤바꿔서 
대하고 
추구해나고 
그 방안 마저도 뒤바꿔서 방법을 찾고 
추구해나가는 것이 현실인 것이다. 



제 3 자는 모든 사건 사고에서 
그나마 쉽게 그 방안을 찾아 내는데 
당사자는 대부분 찾아 내지 못한다고 보게 된다. 

그런데 그렇게 남의 문제의 해결방안을 
잘 찾아내는 입장도 사실은 자신의 문제가 될 때는 
잘 못 찾아내는 것도 현실이다. 

이 뒤바뀜이 얼마나 많은 문제를 일으키고 
그 각 당사자를 긴 고통에 가두어 놓는가는 
직접 경험을 통해서 하나씩 생생하게 
파악할 수 있겠지만, 

사실 그것은 바람직하고 
그 때는 또 너무 늦은 것이라고 보게도 된다. 


그러니 어떡해야 하는가. 

시간이 날 때 열심히 이 문제를 살피고 
연구하면서 
빨리 뒤바뀐 망상 증세를 
스스로 치유를 해야 

이런 안타까운 상태에서 벗어날 수 있다고 
보게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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θ

 







◆vdkq7629

◈Lab value 불기2561/02/16/목/14:14

IMG_0471_ab3.jpg





○ [pt op tr]  mus0fl--Ridan - Le Reve Ou La Vie.lrc 


○ [pt op tr]Amedeo_Modigliani_037






♥ 잡담 ♥섰다앉았다시스템

누어서 뒹굴뒹굴 작업 시스템을 
개발 중에 문제점을 발견했다. 

누어서 뒹굴뒹굴 작업은 작업효율이 그다지 높지 않고
작업보다는 잠을 이어 자게 되는 경우가 많으므로 
보조적으로만 사용하는 것이 좋다는 점이다. 

그래서연구는 어디까지나 
앉거나 서서 하는 것이 좋다고 보게 된다. 
종전에 서서 타이핑 작업하는 시스템을 개발했는데 
이번엔 섰다 앉았다 시스템을 추가 개발했다. 

종전은 조금 큰 상자를 가지고 만들었기에 
섰다가 앉아서 작업하려면 
상자를 치우고 설치하는 것등이 상당히 번거롭다. 

이번엔 서서 작업하다가
앉아서 타이핑 하려면 단순히 눕히기만 하면 
곧바로 앉아서 타이핑 작업할 수 있도록 
작은 상자로 만들었다는 차이가 있다. 





이것은 위에서 서서 타이핑할 경우다. 
위에서 본 모습이다. 



이것은 앉아서 작업하기 위해 
앞의 키보드를 눕힌 형태다. 








상당히 혁신적인 시스템이라고 할 수 있다. 

키보드를 3 개 연결해 사용해도 문제는 없으므로 
이 상태에서 누어서 뒹굴 뒹굴 무선 시스템까지 함께 
사용할 수 있다 

현재 누어서 뒹굴 뒹굴 작업용으로 
모니터를 연장 연결하는 문제는 
작업 효율이 떨어지므로 일단 보류 중이다. 





doctr 님이 다시 나타나 페이지를 통편집했다. 

자꾸 고물 전자제품 수리하는 내용을 올려서 
보다 보면
구토 증이 일어난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런 측면에서 물의를 일으킨 점이 있다고 보고 
앞으로는 연구와 직접 관련된 부분에 집중해 나가기로 한다. 


작업하는 가운데 미륵보살님처럼 오래 자세를 취하다보면 
발이 저린 경험을 하게 된다. 

부처님이 되기를 싫어하는 이 가운데 
부처님이 되면 불상에서 보는 것처럼 
한 자세로 있어야 한다고 여기고 
그래서 되지 않으려고 하는 경우도 가끔 있다. 

본인도 처음에 불교 공부를 할 때는 
부처님이 되면 그렇게 되는 것인 줄 알고 
부처님이 되는 것을 목표로 삼지 않고 
연구에 임한 경험이 있다. 

왜냐하면 한 자세로 오래 있으면 
어느 순간부터는 상당히 고통을 느끼게 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것이 바로 
금강경에서 제시하는 내용과 같이 
여래를 상이나 목소리로 보려는 잘못이라고 보게 된다. 



불교에서는 4 성제라는 중요한 진리를 제시하는데 
일체가 고통이다. [ 고제 ]
고통은 번뇌와 집착에 바탕한 업에 의해 발생한다. [집제]
고통이 멸한 상태 즉 니르바나의 상태가 목표상태다. [멸제]
고통이 멸하도록 행해야 할 수행이 있다. [도제]

대강 이런 내용을 제시한다.

그리고 온갖 법을 유루법과 무루법으로 나누고 
유루법이란 번뇌를 따라 증가시키는 법이라고 
제시되는데 

유루법이란 결국 구사론에서는
도제(道諦)를 제외한 

그 밖의 유위법(有爲法)이다. 
이렇게 제시한다. 

멸제는 생멸변화를 떠난 무위법이므로 
결국 멸제와 도제는 무루법이 된다. 

그런데 사실은 고제 집제 멸제 도제에 따로 
해당하는 어떤 사물이나 현상이 있는 것이라고 하기는 
곤란하다. 

고물 전자제품을 놓고 대할 때 
이것이 고제에 해당한 물건인가. 
아니면 집제 멸제 도제에 해당한 물건인가. 
이렇게 문제를 제기한다면 
이는 그것을 대하는 이의 마음과 자세에 따라 
달라진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처음부터 고제에 해당한 일체가 따로 있고 
멸제에 해당한 일체가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는 의미다. 


불교에서 제시하는 내용을 이해하기 전에는 
일체가 고통이다라는 고성제[고제]의 내용을 
이해하기가 쉽지 않다고 본다. 

왜냐하면 현실에서는 
무언가 나쁜 것이 있는 반면
그런 나쁨이나 고통을 받고도 추구할
좋은 것이 현실에 있다고 일반적으로 보기 때문이다. 

그래서 현실에서는 고진 감래라는 사자 성어가 
더 설득력을 갖는다고 보게 된다. 

학교를 다닐 때 비록 가난하게 살았지만,
열심히 힘들게 공부해서 
나중에 좋은 직장을 얻어
수입을 많이 얻고 
편하게 산다. 

그러니 고진감래이고 
이것을 교훈삼아 고통을 극복해야 한다. 
이렇게 제시하는 것이다. 

그런데 또 더 살다보면 
그렇게 좋은 상태에 있었는데 
어느날 또 무슨 사건 사고의 당사자가 되어 
자꾸 법정에 묶여가고 그런 모습도 다시 보게 되면 
이제 또 여기에 맞게 감진고래라는 표현도 하게 되고 

또는 좋은 일 나쁜 일이 서로 이처럼 뒤바뀌어 
번갈아 나타나므로
말 하나를 얻고 어떤 때는 부상을 당해서 고통을 받지만, 
또 어떤 때는 그로 인해 전쟁터에 끌려가지 않아 목숨을 유지해서 
좋다고 하고 말을 잃어버려서 안 좋은데 
나중에는 밖에서 암말과 자식까지 데리고 나타나 좋음을 
주기도 하고 이렇게 좋고 나쁨이 계속 바뀌는 것을 보고 

새옹지마라는 고사성어를 
제시하기도 한다. 


그런데 여하튼 현실에서는 
나쁨이 있지만, 그래도 
이런 나쁨을 겪더라도 이를 통해서 추구하고 
얻을 만한 좋음이 있는 것이라고 
보통은 보게 된다. 

그런 입장에서 개똥밭에서 구르더라도 
이승이 낫다. 이런 속담도 전해진다고 본다. 


그런데 불교에서는 
현상 일체가 모두 다 고통이라고 선언하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가장 기본적인 고성제의 내용인 것이다. 

그리고 이 내용이 현실에서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위와 같은 내용과 
판이하게 다르므로 

이 고제의 내용을 깨닫고 이해하는 것이 
수행자로서 대단히 중요한 핵심이 된다고 할 수 있다. 


그래서 불교에서 수행을 통해 얻고자 하는 목표는 
일반인이 생각하는 것과 같이 
어떤 화려하고 좋은 상태를 얻어 내서 
거기에 머무는 것이 아니고 

현실에 온갖 생멸 변화하는 현상을 제거하고
그런 생멸이 더 이상 나타나지 않는  
무위법에 그 수행목표를 두게 되는 것이다.


비록 수행자가 이후  
다시 생사 즉 열반을 관하여 
생사에 임하며
중생제도와 불국토장엄 성불을 목표로 
무량행문을 닦아 나가는 경우에도 

기본적으로 생사가 생멸을 본래 얻을 수 없고 
따라서 생사 현실이 곧 니르바나임을 관한 가운데 
그렇게 임하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앞에서 제시한 고제의 내용으로서
생멸하는 일체 현상이 모두 고통이다라는
기본 입장은 여기서 다르지 않은 것이다.

생사 즉 열반을 관하여 
생사를 받아들이고 이 모두를 니르바나라고 관하는 
입장에서는 
무언가 앞과는 달리
일체가 고통이라는 고성제의 내용을
부정하고 있는 것 같지만, 

사실은 같은 입장인 것이다. 

생사 즉 열반의 입장에서 대하는 생사현실은 
본래 생멸을 얻을 수 없는 청정한 니르바나에 
상응하게 현실에 여여하게 임하는 입장이기에 
그런 차이가 있는 것 뿐이다. 

그래서 처음 전도몽상과 집착에 바탕해서 
그렇게 망상속에서 생멸을 대하는 입장과는 
다른 것이다. 


왜 이런 이야기를 하는가 .

자꾸 본인이 고물 전자제품을 수리하고 
사진을 올려 놓으니 
본인의 연구 자체가 고물이나 쓰레기처럼 여겨지고 
또 심지어 그런 것까지 다시 고쳐서 사용하려고 하는가 
왠지 쓰레기 냄새가 나고 
째째하고 조잡함을 느끼면서
구토 증세까지 일으키는 듯하다는
입장이 있기 때문이다. 

조금 더 심한 표현도 들었는데 
쓰레기다
이 말 정도가 그래도 적절한 것 같ㄷ. 

그런데 바로 이런 부분에서 
깊이 생각할 바가 있다고 보는 것이다. 


현실에서 무언가를 사용하다보면
이제는 더 어떻게 손 댈 수도 없고
다시 사용할 수도 없는 형태의 부산물로
쓰레기를 만나게 되는 경우가 많다.

포도나 귤을 먹었는데 씨나 껍질이 남았다거나 
상품을 받아 사용하는데
그 상품을 포장한 포장지와 상자만 남았다거나 
기타 등등의 경우가 다 그런 경우다. 



현실에서 사람도 비슷한 취급을 받는 경우가 많다. 

어떤 사람이 어느 부분에서 일을 하고 
수입도 얻고자 하는데 
다른 사람들 입장에서 볼 때 
어떤 이는 어디에도 쓸모가 없고 
그저 밥만 먹고 시간만 떼우다가 적당히 
없어져도 그만일 것 같다고 평가받는 경우가 
가끔 있다고 보게 된다. 

그래서 폐기물이나 독극물처럼 취급다는 경우도 있고 
심한 경우는 한 번 악마는 영원한 악마여서 
도저히 이것을 변화시켜 좋은 상태로 만들 도리가 없다고 
보는 경우도 있다. 

그런데 수행자가 무량행문을 닦는 과정에서는 
바로 이 부분부터 들어가는 것이기도 하다. 




현실에서 좋다고 보고 대하는 것을 놓고
수행자 입장에서 그것이 문제라고 보는 것은 

그것이 아무리 좋더라도 그것은 무상한 것이어서 
언젠가는 그것이 소멸되고 사라짐으로써
역시 고통을 가져다 주게 되고 

또 그런 성격의 좋음을 추구하기 위해 
다른 좋음을 침해하게 되는 측면

그리고 그렇게 얻은 좋음이 또 인과관계상 
다른 나쁨을 증폭시켜 만들어 내는 측면 들을
모두 함께 결합시켜 보기 때문이다. 

그러나 정말 그 좋음의 측면만 따로 떼어서 대한다면
그것만으로는 왜 나쁘다고 할 것인가. 

그러나 사정이 그렇지 않고
위와 같이 서로 결합되어 있는 것이므로 
그 자체가 고통이라고 보는 고고와 함께 
앞의 내용들은 결국 변화하고 무너져 감으로써
고통을 가져다주는 행고와 괴고로 넣어  
생멸 변화하는 일체를 모두 고통이라고 제시하게 되는 것이다. 


그런데 생사 즉 열반을 관하는 입장에서는
다시 이 모두가 본래 청정한 니르바나임을 관하는 한편
그에 상응한 상태로 현실에 임하는 것이며

그런 가운데에 다시 무량행문을 닦아 나갈 때는 
바로 쓰레기를 변화시켜서 가장 귀한 보물로 
변화시키는 일을 하고자 그런 수행에 임하는 것이기도 하다. 


어떻게 그렇게 될 수 있는가. 
그것이 곧 무량행문을 닦아 나가는 수행자가 
매 순간 풀어나가야 할 퀴즈 문제이기도 한 것이다. 

그러니 현실에서 
대부분 쓰레기라고 보고 대하는 것을 놓고 
역시 같은 퀴즈를 놓고 
풀어가는 것은 수행자의 본연의 임무이기도 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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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8gfl--불교공부_단상_2561_02.txt ☞◆vdkq7629
θθ

 





ॐ मणि पद्मे 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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