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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진리와실천
불기2561-08-31_보변지장반야바라밀다심경-K1267-001 본문
『보변지장반야바라밀다심경』
K1267
T0252
보변지장반야
● 한글대장경 해당부분 열람I
● 한글대장경 해당부분 열람II
○ 통합대장경 사이트 안내
○ 해제[있는경우]
● TTS 음성듣기 안내
※ 이하 부분은 위 대장경 부분에 대해
참조자료를 붙여 자유롭게 연구하는 내용을 적는 공간입니다.
대장경 열람은 위 부분을 참조해주십시오.
『보변지장반야바라밀다심경』
♣1267-001♧
보변지장반야
♥아래 부분은 현재 작성 및 정리 중인 미완성 상태의 글입니다♥
보변지장
♥아래 부분은 현재 작성 및 정리 중인 미완성 상태의 글입니다♥
mus0fl--JP Nataf - Viens Me Le Dire.lrc
Lab value 불기2561/08/31/목/11:46
● 삼매와 다라니
...
관세음(觀世音菩薩)보살ㆍ문수사리(文殊師利)보살ㆍ미륵(彌勒)보살 등으로서
그들이 으뜸이었으니,
모두가 삼매와 총지(摠持)를 증득하여
부사의(不思議)한 해탈에 머물렀다.◂
...
『보변지장반야바라밀다심경』 ♣1267-001♧
삼매와 총지(=다라니)는
보살이 갖추어야 할 덕목이다.
학생으로 비유하면
총지(다라니)는 기존 지식의 암기에 해당한다.
삼매는 새로운 내용을 자신이 찾아내고 발견하는 능력에 해당한다.
주입식 암기방식은 구체적으로 새로운 상황에 대처하는데 효용이 적다.
그래서 요즘 지식 암기여부보다 수학능력을 길러야 한다고 강조한다.
그런데 사실은 이 두 능력이 다 필요하다.
기존지식도 잘 기억해야 한다.
그리고 필요시 바로 꺼내 잘 변형적용해 사용해야 한다.
예를 들어 불을 켜야 할 때
라이터나 성냥을 빨리 구해서 불을 켜는 것도 능력이다.
그런데 그런 것이 전혀 없는 상황이라고 하자.
그러면 라이터나 성냥에 준한 것을 찾아야 한다.
아니면 불을 만들어 낼 방안을 찾아내야 한다.
그래서 그 상황에서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
그런데 이것이 결국 수행자에게 있어선
삼매와 총지(다라니)의 수행덕목이다.
무인도에서 아무것도 없는데 불을 만들어내야 한다고 하자.
카메라를 갖고 있으면 렌즈를 뽑아서 돋보기로 불을 일으켜도 된다.
그런데 카메라도 없다.
그러면 각 상황에 맞추어서 찾아내야 한다.
영화 속 맥가이버가 그런 경우라고 할 수 있다.
옆에 아름다운 여인이 있으면 여인을 화를 나게 한다.
그래서 눈에서 분노의 불꽃이 튀기게 한다.
그래서 불을 얻는 방안을 사용할 수도 있다.
그런데 그것도 여인이 있어야 가능하다.
총지나 삼매가
무량행문에서 중생제도를 위한 방편과 관련된다.
그런데 방편은 본래 선악무기의 성격을 갖는다.
그래서 이를 익히더라도 이는
다시 총지와 삼매형태로 보관해야 한다.
선악무기에서 무기는
선도 아니고 악도 아니고 중간의 성격을 갖는 것을 의미한다.
그런데 중의적으로 공격 무기의 의미도 가질 수 있다.
그렇게 이해해도 마찬가지다.
물이나 전기를 예로 든다면 이들은 하나같이 선악무기다.
좋음을 주는 취지로도 사용될 수 있다.
반면 고통을 주는 취지로도 사용될 수 있다.
물없는 사막에서 물이나
어두운 곳에서 전기는 좋음을 줄 수 있다.
그러나 고문실에서 사용되는 물이나 전기라면 사정이 다르다.
그런데 어떤 방편이나 모두 그처럼 선악무기의 성격을
자체적으로 갖는다.
그래서 그것 자체만으로는 그것이 늘 오로지
잘 사용된다고 보증할 수 없다.
그런데 모든 것은
좋고 아름답고 선하고 가치있는 내용을 얻는 방향으로 사용되야 한다.
그래서 어떤 방편을 그런 방향으로만 사용되도록
통제할 수 있어야 한다.
또 수행자가 그렇게 사용할 수 있는 상태가 되었을 때만
그런 방편지혜를 직접 취득해도 무방하다.
그런 경우에만
그 수행자 자신이나 다른 생명이 그 방편으로
생사고통을 증폭해 받지 않게 된다.
수행자가 어떤 고통도 평안하게 참는 안인을 성취해야 한다.
그래서 무생법인을 증득해야 한다.
그리고 어떤 상황에서도 이전 상태로 물러나지 않게 되야 한다.
그처럼 수행자가 불퇴전위에 이르렀는가 아닌가가 중요하다.
수행자가 불퇴전위에 이르러야
그때부터 무량한 방편지혜를 제한없이 취득할 수 있다.
그리고 부처님이나 대력보살님들로부터
그런 방편을 무량하게 제공받을 수 있다.
그 이전까지는 어떤 필요가 있어도
일일히 사용신청을 하고 허가를 받아야 한다.
그런 가운데 그런 방편력을 사용하게 된다.
다라니(총지)나 삼매수행도 그렇게 구별이 된다.
다라니를 외우는 것은 그런 의미다.
그 다라니에 들어 있는 내용 자체를
취득하는 것은 또 다른 문제다.
이 반야심경에도 다라니가 들어 있다.
이 역시 마찬가지다.
일단 이런 다라니를 수행자가 외우고 념한다고 하자.
그러면 이 다라니를 제시한 분들이
일단 무엇때문에 그런 다라니를 외었는가
그 취지를 심사를 한다.
그래서 도움을 주게 된다.
요즘 현관에 음성열쇠를 설치하는 경우가 있다.
이런 경우 외어 소리만 내면 문이 열릴 수 있다.
다라니는 그런 장치는 아니다.
그러나 취지가 적절하면 신속하게 성취된다.
그래서 이런 다라니 수행을 할 때는
자신이 그런 다라니를 념송해서 성취하려는 바가
무엇인가를 명확히 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일주일을 철야해 외어도 별 효과를 얻기 힘들다.
그러나 중생제도와 성불 이런 수행자의 서원을
위한 경우라면 사정이 반대다.
부처님의 호념 이런 표현이 나온다.
호념 가피 이런 것을 통해서
수행자의 소원이 대단히 신속하게 성취된다.
이는 그런 사정 때문이다.
Lab value 불기2561/08/31/목/12:45
● 공즉시색의 의미
마땅히 이와 같이 배웁니다.
물질[色]의 자성(自性)은 공(空)이요,
공의 자성은 물질로서,
물질은 공과 다르지 않고,
공은 물질과 다르지 않으니,
물질이 곧 공이요,
공이 곧 물질입니다. ◂
[참고] 관련내용 - 색과 공의 의미와 그 관계
sfed--불설성불모반야바라밀다경_K1427_T0257.txt
https://buddhism007.tistory.com/3495#001
>>>
공 가운데는 물질도 없고,
느낌ㆍ생각ㆍ지어감ㆍ의식도 없으며,
눈ㆍ귀ㆍ코ㆍ혀ㆍ몸ㆍ뜻도 없고,
빛깔ㆍ소리ㆍ냄새ㆍ맛ㆍ촉감ㆍ법도 없으며,
눈의 경계[眼界]도 없고,
나아가 의식의 경계[意識界]도 없으며,
무명도 없고
또한 무명이 다함도 없으며,
나아가 늙고 죽음도 없고
또한 늙고 죽음이 다함도 없으며,
고(苦)ㆍ집(集)ㆍ멸(滅)ㆍ도(道)도 없으며,
지혜도 없고
또한 얻음도 없습니다. ◂
>>>
앞에서 색이 곧 공이요 공이 곧 색이다.
라는 표현이 나온다.
그런데 이 부분만 살핀다고 하자.
그러면 실재의 공함은
곧 현실에서 감관으로 얻는 감각현실의 내용 그 자체를 의미한다고
잘못 여기기 쉽다.
그리고 이 둘을 완전히 동일시하기 쉽다.
그래서 색과 공의 의미와 관계를 자세히 살폈다.
그리고 어떤 사정으로 색불이공 공불이색 색즉시공 공즉시색 ...을
제시하는가 그 배경사정을 살폈다.
간단히 다시 말하면 다음과 같다.
감각현실은 실재의 지위에 있는 내용은 아니다.
그런데 한편 그런 감각현실도 그런 실재의 본 바탕을 떠나서 얻는 것은 아니다.
그래서 그처럼 그 관계를 제시하게 된다.
처음에 색(감각현실)과 실재(공함)의 관계에 대해 살핀다.
이 경우
색 그 자체가 그대로 곧 공한 진여 실재인가라고 문제를 제기한다.
한편 반대로
공한 진여 실재 그 자체가 그대로 색 인가라고 문제를 제기한다.
그러면 이에 대해
각기 그렇지 않다고 답하게 된다.
그러나
그런 색은 그런 진여 실재를 떠나서 얻는 것인가라고 문제를 제기한다.
그런 경우는 다시 그 역시 그렇지 않다고 답하게 된다.
그리고 이처럼 뒤에 나열되는 사정이 이와 관련된다.
즉 색불이[不'離']공 공불이[不'離']색의 관계 때문에
앞처럼 색불이[不異]공 공불이[不異]색 색즉시공 공즉시색의 관계를 제시하게 된다.
그리고 다시
그런 실재의 공함에는
앞에서 나열한 색수상행식이 없다고 다시 밝힌다.
그것은 다시 말하면
앞의 처음 질문과 관련된다.
즉, 색 그 자체가 그대로 곧 공한 진여 실재인가라고 문제를 제기해보자.
또는 반대로 공한 진여 실재 그 자체가 그대로 색 인가라고 문제를 제기해보자.
그런 경우 그렇지는 않다고 답하게 된다.
이런 부분이 이와 관련된다.
그런데 공한 실재는 본래
아무 것도 전혀 없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어떤 주체는 자신의 주관과 화합관계한 내용만 얻을 수 있다.
그런데 지금 문제삼는 것은 그런 주관과의 관계를 떠난 본 바탕의 상태다.
따라서 어떤 주체도 본 바탕의 내용은 끝내 얻지 못한다.
그래서 실재는 있다 없다 이 두 변을 모두 떠난다.
그리고 언어 분별을 떠난다.
세상에서 이분법상의 분별을 보통 행한다.
그것은 주로 a가 있다 없다 ~이다 ~ 아니다 ~와 같다 ~와 다르다
좋다 나쁘다 깨끗하다 더럽다 등이다.
그런데 실재는 이런 이분법적인 분별을 모두 떠난다. [불이不二]
그리고 이 가운데 어느 쪽으로 단정할 도리가 본래 없다.
그래서 본래 공한 실재는
그러한 있고 없음의 분별을 모두 떠난다.
그런데도 여기에서 '없다'라는 단정적인 표현을 사용한다.
이는 사정이 있다.
상대가 공이란 표현 자체를 이해하지 못한다고 하자.
그리고 있고 없음의 분별만 행하는 상태라고 하자.
그런 경우 실재의 공함에 대해 이해를 돕기 위해 이들 내용을 제시하게 된다.
그런 상태에서는 일단 있음에 치우쳐 망상분별을 행하게 된다.
즉, 현실에서 대부분은 감각현실이나 관념내용이 그대로 실재에도 '있다'고 잘못 여긴다.
일반적으로 현실내용은 실답게 실재한다고 치우친 견해를 갖는다.
그래서 망상분별을 일으킨다. 그리고 집착을 갖는다.
그래서 이런 망상분별과 집착을 제거하기 위해
우선 '없다'는 표현을 사용하게 된다.
즉, 있음에 대한 망집 제거를 우선 해결할 목표로 한다.
그래서 이와 같이 표현하는 것이다.
여하튼 실재의 공함은 공즉시색 이런 형태로 표현한다.
그렇다고 공한 실재에 그런 색수상행식이 그대로 있다는 것은 아니다.
현실은 색수상행식과 같은 내용이다.
그리고 본 바탕 실재는 공하다.
그리고 이둘의 관계를 위처럼 제시한다.
우선 그런 색수상행식은
한 주체과 관여하여 얻게 되는 내용이다.
그런데 실재는 그런 관계를 떠난 것이다.
따라서 색수상행식은 실재의 지위에 있는 내용이 아니다.
그리고 공한 실재는 아무런 내용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다.
그런데 실재에서는 현실에서 얻는 그런 내용을 얻어낼 도리가 본래 없다.
그래서 색수상행식과 같은 내용이
실재 영역에 그처럼 있다고 제시할 수 없다.
이런 사정을 여기서 밝힌다.
현실에서는 수없이 많이 분별하고 가지가지 내용을 내세운다.
그런데 현실에서 얻는 일체는 모두
실재와 그런 관계에 놓인다.
현실에서 얻는 내용은 대단히 많다.
그것은 부처님이 설법해 제시하는 내용도 포함된다.
그리고 일반인이 현실에서 얻는 감각현실도 있다.
그리고 일반적으로 일으키는 관념분별도 있다.
또 어떤 소설가가 상상을 통해 서술하는 이야기도 있다.
그리고 시인이 그저 감흥을 읊는 시적 표현도 있다.
또는 현실에서 병원에서 치료를 받는 망상증환자가 행하는 망상도 있다.
그리고 엉터리 이야기도 있다.
그런데 이들이 그 사정이 이와 같다.
그런데 여기서는 부처님의 설법도 마찬가지임에 주의해야 한다.
그 일체는 본 바탕에서 모두 차별없이 얻을 수 없다.
실재와의 관계에서는 일체가 차별없이 그와 같다.
그런 사정을 경전에서 제시한다.
이 사정을 다음과 같이 나누어 살펴보자.
우선,
한 주체가 현실에서 감각을 통해 감각현실을 얻는다.
그리고 관념분별을 일으킨다고하자.
그런데 그런 관념분별은
감각현실 영역에서 본래 얻을 수 없다.
그런데 일반인은 여하튼 일정한 감각현실은 관념분별과 상응한다고 여긴다.
그런데 한편 현실에서는
그런 '상응'관계도 세울 수 없는 분별을 행하는 경우도 많다.
예를 들어 나무가 서 있는 장소에
사람이나 도깨비가 있다고 판단한다고 하자.
또는 2 + 3 과 같은 문제 답이 8 이라고 한다고 하자.
이 처럼 명백하게 그 자체로 잘못된 분별도 현실에서는 많이 행한다.
이런 것이 실재하지 않음은 그 자체로 명확하다.
한편 한 주체가 현실에서 얻는 감각현실은 다양한 사정이 있다.
우선 달리는 차에서 풍경을 보는 경우가 있다.
또는 빠른 속도로 회전하는 물체를 보는 경우도 있다.
이런 특별한 상황에서는
평소와는 달리 감각현실을 얻는다.
그리고 감각기관의 질환이 생기는 경우도 있다.
이 경우에도 평소와 다른 감각현실을 얻게 된다.
그러나 이런 경우에도
어떤 주체가 그런 감각현실을 얻었다는 자체는
다른 경우와 차이가 없다.
그런데 이 가운데
어느 것이 옳은가를 문제삼는다고 하자.
또는 어느 것이 정상이고 표준인가를 문제삼는다고 하자.
또 어느 것이 특별한 상황에서 잘못 얻은 감각현실인가를 문제삼는다고 하자.
이런 판단은 일상생활에서 자주 행하게 된다.
그러나 이런 판단을 할 기준을 본 바탕영역에서 따로 얻을 수는 없다.
그래서 실재에서 어떠한 내용을 대상으로
그런 내용을 얻었다는 것을 주장할 수 없다.
그런 입장에서 어떤 감각현실이 옳다거나 그르다고 단정할 도리가 없다.
그런 판단에 필요한 내용을 본 바탕에서 따로 얻을 도리가 없다.
● 감각현실에 대한 옮고 그름의 판단 문제
논리학 등에서 감각현실을 놓고 이처럼 참거짓을 구분하기도 한다.
그런데 이는 적어도 실재를 기준으로 한 판단은 아니다.
실재 영역을 기준으로 할 때는 그런 판단을 행할 도리가 없다.
이런 입장이 본 경전의 입장이다.
현실에서 어떤 사람을 100 m 떨어진 먼 거리에서 보면 손가락만하게 보인다.
그가 계속 자신을 향해 다가온다고 하자.
그런 가운데 매 순간 그 형체가 달라진다.
그리고 가까이 다가 온 상태에서 보면
자신처럼 큰 모습으로 보인다.
그런데 이 매순간의 각기 다른 모습들을 대한다.
그런데 이 가운데 어떤 모습이 실재와의 관계에서 옳은가가 문제된다고 하자.
그런 경우 본 바탕을 기준으로 해서는 이 어느 것도 옳다거나 그르다고 할 수 없다.
본 바탕의 내용을 얻을 수 없기 때문이다.
현실에서 마구 달려가는 차에서 풍경을 보는 경우도 있다.
상대가 움직이거나 흐릿하게 보이는 경우도 있다.
그외 감관의 이상이나 상황에 따라서
매번 다양한 형태로 감각현실을 얻을 수도 있다.
이들 수많은 모습 가운데
어떤 것이 그 표준이고 가장 옳은 감각현실인가가 문제될 수 있다.
이 경우에도 마찬가지다.
실재와의 관계에서는 이것을 판정할 기준 자체를 얻을 수 없다.
그 사정이 위 경전에 밝힌 내용이다.
다만 현실에서 이런 감각현실 가운데
어떤 것이 정상이고 어떤 것은 착각이거나
옳지 않은 내용이라고 현실에서 분별한다.
그러나 이는 관념 분별 영역안의 관념내용을 기준으로 행하는 판단이다.
현실에서는 각 주체가 감각현실을 얻는다.
그리고 관념영역에서 이에 대하여 관념을 일으킨다.
그런 상황에서 관념 분별 영역안의 내용들을 기준으로 다시 판단한다.
그리고 자신이 생활함에 이 가운데 어떤 것을 표준으로 삼아서 생활하는 것이 편한가를 살핀다.
또 어떤 내용을 자신이 더 자주 많이 반복해 대한 것 같은가를 분별한다.
그리고 이런 '분별'을 통해서 그 가운데 어떤 것이 비교적 표준내용이라고 판단하는 것 뿐이다.
예를 들어 현실에서 안경점에서 안경을 맞춘다고 하자.
이 경우 여러 돗수의 안경알을 바꿔 낄 때마다
매번 형체가 조금씩 달리 보인다.
그리고 이와 같은 내용을 기준으로
자신에게 적절한 안경을 맟추어 사용한다.
그러나 이는 처음 문제삼은 옳고 그름의 판단문제와는 성격이 다르다.
따라서 주의해야 한다.
그리고 이 양 문제를 서로 혼동하면 곤란하다.
이 경우 그런 정상이나 적절함에 대한 판단은
분별 영역에서 분별 내용을 기준으로 행한다.
따라서 옳고 그름을 판단한 기준에서 주종의 위치가 서로 뒤바뀌어진 판단이다.
또 옳고 그름을 판단할 대상도 서로 뒤바뀐 내용이다.
분별을 한다면 분별은 본래 감각현실을 바탕으로 얻는다.
즉 실재 => 감각현실 => 관념분별
이런 관계로 각 내용을 얻게 된다.
그런데 앞의 판단은 이들의 순위를 뒤바꾼 것이다.
그래서 뒤의 내용으로 앞의 내용을 판정한 것이 된다.
이렇게 되면 주종이 뒤바뀌게 된다.
* 간단히 말하면
어떤 감각현실을 얻는다고하자.
예를 들어 영희 모습을 본다고 하자.
그러면 자신이 '영희라고 생각하는 어떤 내용'을 대상으로 놓고 문제삼아야 한다.
그런데 그 감각현실에서는 그런 모습이나 성품 자체를 얻을 수는 없다.
이는 사실은 관념 영역안의 내용이다.
영희가 먼 곳에서 빠른 속력으로 달려 온다고 하자.
그 과정에서 매번 영희 모습이 달리 보인다고 하자.
이 경우 이들 여러 모습 가운데 어떤 것이 옳은가를 판단해보기고 하자.
그런 경우 자신의 마음 속 생각 내용이 그 판단의 기준이 되어 줄 수 없다.
그런데 현실에서는 안경을 맞추거나
어떤 감각내용이 정상이라고 판단할 때는
그런 감각현실을 얻는 대상이 되는 내용을 실재에서 얻어 놓고
이것을 기준으로 판단하는 것이 아니다.
단지 현실에서 분별을 행하고 살아가는데 있어서
어떤 것이 더 나은가를 기준으로 판단하는 것 뿐이다.
여하튼 이런 가운데
명백히 잘못된 관념분별을 포함해서
현실에서 일반적으로 얻는 감각현실은
모두 실재에서는 그런 내용을 얻지 못한다.
이 가운데 어떤 것만은
특별히 실재에도 그런 내용이 있다고 여긴다고 하자.
또는 실재는 현실과 상응하는 것이라고 이해한다고 하자.
그러면 그것이 곧 실재의 내용에 대해 일으키는 전도망상분별이다.
그런데 일반적으로 2 + 2 = 4 라는 식으로
정상적이고 옳다고 관념분별하는 경우가 많다.
일반적으로 정상적인 상태에서
질환이 없는 눈을 떠서 보게 된다고 하자.
이 경우 얻는 모습은
그런 내용이 실재에도 그대로 있다고 잘못 여긴다.
그리고 바로 그런 사정으로 그런 내용을 실답다고 잘못 여긴다.
그리고 집착을 일으킨다.
그런 가운데 그에 바탕해 생각하고 말하고 행위해나간다.
그래서 생사고통을 세세생생 받아나가게 된다.
이것이 문제된다.
따라서 기본적으로 사정이 그렇지 않음을 이해해야 한다.
그래서 이 내용을 제시하는 것이다.
예를 들어 현실에서
저기에 장미꽃이 있어서 장미꽃이 거기에 있다고
생각한다고 하자.
이 경우 과학자나 철학자들을 포함하여
일반적으로 그런 내용이 올바른 분별이라고 잘못 여긴다.
그 뿐 아니라,
그에 해당하는 내용을 감각 현실에서도 그처럼 얻는다고 잘못 여긴다.
그리고 그렇게 그런 내용을 얻는 것은
실재에도 그런 내용이 그처럼 있기에
그런 내용을 자신이 현실에서 얻는다고 잘못 여긴다.
그래서 또 그런 분별을 행한다고 잘못 여긴다.
그런데 여기서는 그 사정이 그렇지 않음을 제시한다.
* 그것은 우선 그런 감각현실은 실재의 내용도 아니고,
다시 그런 감각현실에 대해 행하는 분별 내용은
또 그런 감각현실 그 자체와 일치하는 내용이 아니다.
분별 내용에는 그런 감각현실과 같은 내용이 없다.
눈을 감고 영희를 생각할 때 떠오릴 수 있는 것이 관념분별 내용이다.
이 내용에는 직전에 눈을 뜨고 본 감각내용을 하나도 찾을 수 없다.
경전에서는 이 문제까지는 언급하지 않는다.
그러나 그런 분별내용을 감각현실 영역에서 얻을 수 있다고 주장하면 잘못이다.
더 나아가 실재의 영역에서 그런 내용이 그처럼 있다고 하면 역시 잘못이다.
그것은 잘못된 분별이다.
그 뿐 아니라, 바로 그처럼
자신이 현실에서 얻는 그런 내용이
그런 사정으로 집착을 가질 만한 실다운 내용이라고 여기게 된다.
그런 가운데 그에 바탕해
탐욕과 분노 어리석음의 번뇌를 일으키;고 집착하게 된다.
그리고 그에 바탕해 행위해나가게 된다.
그래서 생사고통의 세계에 세세생생 묶이게 된다.
그래서 문제된다.
따라서 이런 전도망상 증상을 제거하는 것이 필요하다.
이런 전도망상증상을 해결하지 못하면 곤란하다.
그러면 현실에서 그 주체는 생사의 묶임에서 그런 사정으로
벗어나오기 힘들게 된다.
그래서 바로 이 부분을 시정해야 한다.
그리고 이 시정과정에
이 내용이 기본적으로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현실에서 일반적으로 일정한 분별을 정상적이라고 여긴다.
그런데 이들 분별이 하나같이 엉터리임을 이해해야 한다.
그리고 실답지 않음을 이해해야 한다.
이런 오류가 전반적으로 시정이 되어야 한다.
이런 오류가 시정이 잘 안 되면
그 오류는 여기에 그치지 않게 된다.
그리고 온갖 엉터리 관념분별에서도 역시 비슷한 증상을 일으키게 된다.
현실에서 전혀 없는 엉터리 상상으로 만들어낸
어떤 도깨비 소설이 있다고 하자.
그런데 사람들이 그것을 실다운 내용이라고 여긴다고 하자.
그리고 어떤 어린이가 공포에 싸여 생활한다고 하자.
그러면 바로 그런 상태가 문제된다.
현실에서도 이처럼
각 주체가 현실에서 일으키는 관념분별은 엉터리다.
그런데도 그것을 깨닫지 못한다.
그런 가운데 마치 최면에 걸린 이처럼
그런 내용을 바탕으로 생각하고 말하고 행위하게 된다.
그러면 생사고통을 무한하게 이어 받아나가게 된다.
예를 들어 비유하면
어떤 이가 금발이면 아름답다거나 어리석다는 편견을 갖는다고 하자.
그러면 이후에는 그에 바탕해 어떤 자세를 취하는 경향을 갖는다.
이와 사정이 같다.
그래서 그런 잘못된 망상분별을 제거해야 한다.
그래야 생사고통의 묶임에서 벗어날 수 있다.
그러려면
일단 '행심' 반야바라밀다 '조견'오온개공에 해당하는
관찰과 수행을 깊이 잘 행해야 한다.
그래서 본래의 상태가 그렇지 않음을
잘 이해하고 깨달아야 한다.
물론 그 주체가 그 사정을 올바로 이해하거나 이해하지 않거나
본래의 상태는 차별이 없다.
어느 경우나 본래 그런 것을 얻을 수 없다.
그러나 그것을 그처럼 있는 그대로
올바로 이해하고 깨닫지 못한다고 하자.
그래도 본래의 상태는 차별이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주체는
그런 전도몽상에 바탕해 온갖 견해를 분별해 내고 일으키게 된다.
그런 가운데 업을 행한다.
그리고 생사고통에 묶이게 된다.
어떤 최면술사가 최면을 걸었다고 하자.
그러면 최면 걸린이는 그 이후
그 최면내용이 있다고 여긴다.
그리고 그에 바탕해 생각하고 말하고 행위해간다.
그리고 어떤 고통을 받는다고 하자.
이런 경우와 현실이 성격이 같다.
현실에서 어떤이가 그처럼 잘못 여긴다고 하자.
그렇다 해도 본 바탕은 관계없다.
여전히 그런 내용을 얻을 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주체는 그런 망집으로 이를 대한다.
그리고 망집에 바탕해 업을 행한다.
그런 가운데 생사고통을 극심하게 받아나가는 상태에 처한다.
물론 그 상황에서도 역시 그런 내용은 차별없이 얻을 수 없다.
그런데 그런 망집의 바탕에서는 이를 실답게 여기고 대하는 점이 문제다.
그리고 생사고통을 겪는다.
그리고 이런 생사고통을 장구하게 벗어나지 못하게 된다.
그리고 이것이 생사현실의 문제다.
그래서 이 부분을 기본적으로
잘 이해해야 한다.
그리고 자신이 평소 행하는 전도망상분별을 제거해야 한다.
그리고 생사고통의 묶임에서 벗어나와야 한다.
그것이 곧 해탈의 의미다.
일반적으로 현실에서 행하는 온갖 분별도 사정이 그와 같다.
그런데 부처님이 그런 분별의 잘못을 시정하기 위해서
일정한 내용을 제시한다.
그리고 수행덕목이나 목표도 제시한다.
이는 세속에서 가장 옳다고 보게 되는 진리의 내용이다. [세속제]
그런데 경전에서는 이들 내용도 그 사정이 마찬가지임을 제시한다.
그래서 의미가 깊다
부처님은 일단
현실에서 눈을 떠 자신이라고 보는 부분이
사실은 자신의 마음에 맺힌 내용임을 제시한다.
그리고 이는 자신의 마음안의 내용물의 한 부분일 뿐이다.
그래서 그런 내용을 실다운 자신이라고 볼 수 없다.
따라서 이런 부분을 자신이라고 아상을 취하여 임하면 곤란하다.
따라서 현실에서 아상을 제거해야 한다.
한편 세계를 구성하는 요소로서 18 계의 내용을 제시한다.
이는
색성향미촉법
안이비설신의
안식,이식,비식,설식, 신식, 촉식 등이다.
또 현상의 변화과정에 대해
12 연기 같은 연기관계를 제시한다.
본래 생멸과 생사를 얻을 수 없다.
그런데도 한 주체는 태어나 그렇게 생멸과 생사가 있다고 여긴다.
그리고 그렇게 살아간다.
이렇게 되는 과정을 설명하는 내용이 12 연기다.
다시 이런 생사고통을 벗어나는 수행의 기본내용으로서
4 성제를 기본적으로 제시한다.
즉 생사현실에서 겪는 생사고통의 정체 [고제]
그리고 그런 생사고통을 받게 되는 원인 [집제]
그리고 그런 생사고통을 제거한 상태 [멸제]
그리고 그처럼 생사고통을 제거하는 수행방안 [도제]
들이다.
부처님이 이처럼 세속에서 가장 옳다고 볼 내용을 제시한다.
그런데 이런 여러 부처님의 가르침마저도
실재와의 관계에서는 차별없이 얻을 수 없는 내용이다.
그래서 앞에서 살핀 내용들과
사정이 마찬가지다.
이런 내용을 다시 제시한다.
현실에서 아주 엉터리 분별이라고 할 내용으로
예를 들어 도깨비 이야기가 있다고 하자.
또는 날개가 달려 빛의 속도로 날라가는 거북이를 말한다고 하자.
또는 전도몽상에 바탕한 일반인들이
일반적으로 옳다고 생각하며 행하는 다양한 분별 판단이 있다.
예를 들어
저기 서있는 사람이 영희다.
저기 영희가 이리로 걸어온다. 또 저기로 간다.
저기 있는 어떤 이는 옷이 더럽고 성격이 악하다.
여기서 불을 많이 태우면 전 우주에서 재료가 줄어든다.
손뼉을 치면 소리가 난다.
번개가 치면 천둥이 울린다.
이런 등등의 다양한 일반적인 분별이 있다.
뿐만 아니라,
이런 분별이 엉터리라고 밝히는
부처님의 세속제적인 진리나 설법도 있다.
그런데 실재의 바탕에서는 그런 내용 일체를 얻을 수 없다.
그리고 실다운 내용으로 볼 수 없다.
이 일체는 희론의 성격을 갖는다.
이 사정은 어느 경우나 마찬가지다.
이런 내용을 경전에서 제시한다.
그런데 다만 부처님의 설법은
그런 사정을 이해시키고 깨닫게 하는 방편으로서
그 가치가 특별하다.
그래서 그 의미가 있다.
그래서 이런 가르침을 통해
이런 사정을 이해해야 한다.
그렇지 못하면 다음처럼 문제가 발생하게 된다.
우선 앞에서 살핀 엉터리 분별은 실재하지 않는다고 이해한다.
그래서 그것들은 실답지 않다고 생각하게 된다.
그러나 반대로 부처님이 설하신 내용만은 실답다고 잘못 여기게 된다.
그리고 그에 해당하는 내용이 실재에도 그처럼 실답게 있다고 잘못 여긴다.
그래서 그 내용들은 절대적이라고 잘못 여기게 된다.
즉, 그것들은 실다운 내용이라고 잘못 여기게 된다.
그리고 다시 이에 대해 집착을 잘못 갖게 된다.
그러면 이로 인해 다시 문제가 발생하게 된다.
이는 다음 상황과 같다.
어떤 병을 고치기 위해서 약을 사용하게 된다.
그래서 그로 인해 처음의 병은 낫게 된다.
그런데 다시 그 약으로 인해
원래의 병과 같은 심함 부작용을 일으킬 수 있다.
앞의 경우는 이런 상태와 사정이 같다.
처음 일반적인 중생들은
실답지 않은 내용을 놓고 집착을 일으킨다.
그래서 생사고통에 묶여 고통을 받는다.
이런 현상이 문제다.
그래서 부처님이 중생을 생사고통에서 벗어나게 하기 위해
방편으로 세속제적인 내용을 제시한다.
그래서 현실의 올바른 정체를 잘 관해서
그런 망상분별과 집착을 제거해야 한다.
그래서 일체의 생사고통에서 벗어나게 한 것이다.
그래서 수행자는 그로 인해 기존의 망집은 제거한다.
그런데 이로 인해 오히려
부처님이 제시한 방편시설에 다시 집착을 일으키기 쉽다.
그러면 약으로 인해 오히려 부작용을 더 심하게 일으킨 상태처럼 된다.
이전에 그런 망집으로 문제가되었다.
그런데 이제는 부처님 가르침을 대상으로 그런 망집을 일으켜 갖게 된 것이다.
즉 그런 경우는
이제는 부처님의 가르침을 대상으로 해서
수행자가 다시 엉뚱한 망상분별과 집착을 일으키는 것이다.
그래서 부처님의 가르침을 통해서
다시 앞과 같은 증상을 일으키게 되는 문제가 발생한다.
[img2-49] [그림] - 이하 아래 부분은 현재 [작성, / 표현교정, 수정, 보완/ 문단 재배치 순서 정리 등 ] 작업중입니다. -
작업시작시점 2564_0506_211510
이후 수행자는
중생을 제도하기 위한 취지로
생사현실에서 무량행문을 닦아 나간다.
그리고 복덕과 지혜자량을 얻는 수행을 하게 된다.
그런데 이 증상이 기본적으로 해결되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그런 수행은 오히려
그 수행자를 더욱 더 심한 생사고통을 초래하게 된다.
수행자는 따라서 수행시
그런 수행 자체는 실재에 얻을 수 없는 것임을 이해해야 한다.
그것은 다른 일체와 사정이 마찬가지로 공함을 먼저 잘 이해해야 한다.
사정이 그런데도 부처님은 처음 왜 그처럼 설법을 하였는가가 문제될 수 있다.
그 사정은 앞에서도 설명했다.
그 사정은 비유하면 다음과 같다.
도서관에서 학생들이 시끄럽게 떠든다고 하자.
그래서 어떤 이가 도서관에서는
조용히 하고' 말을 하지 말자'는 말을 한다고 하자.
이 경우 말을 하지 말자는 말을 놓고 생각하면
그것도 사실은 말이다.
그런데 말을 하지 말아야 한다고 하면서
왜 스스로 말을 했는가.
그것은 원래의 상태의 문제를 시정하는데 있어서는
그런 방편이 불가피한 사정이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여기서 '말을 하지 말자'는 말도 말은 말이다.
그러나 그런 취지로 말한 것임을 이해해야 한다.
그런데 자칫 조용히 하자는 말만은
다른 말과 성격이 다른 것으로 오해하면 곤란하다. .
그러면 이후 계속 조용히 하자면서 떠드는 문제가 발생할 수도 있다.
그래서 이런 비유상황을 놓고 잘 이해할 필요가 있다.
사정이 본 경전에서 밝히는 바와 같다고 하자.
그러면 부처님은 왜 처음에
그런 18 계나 12 인연 4제법을
그렇게 제시한 것인가를 문제삼는다고 하자.
또 사정이 그렇다고 하자.
그런데 수행자는 왜 계속 그런 부처님의 가르침을 따라야 하는가를 문제삼는다고 하자.
또 이후 생사현실에 들어가
수행을 무량하게 해나가야 한다고 하는가를 문제삼는다고 하자.
그런 경우 그 사정이 위와 같다고 잘 이해해야 한다.
즉 그런 방편을 통해서만
현실에서 전도망상에 바탕해 생사고통을 받아 나가는
중생을 제도해 낼 수 있다.
그래서 부처님은 자비의 마음으로
그렇게 행한 것이다.
또 수행자도 사정이 이와 마찬가지다.
그래서 그렇게 사정을 잘 기본적으로 이해한 가운데
수행을 해나가야 한다.
다시 설명하면,
본래 사정이 그 일체가 생멸을 얻을 수 없다.
있고 없음도 얻을 수 없다.
모든 것이 차별이 없이 공하다.
일체가 언설을 떠난 것이다.
그런데 사정이 그렇다고
부처님마저도 그렇게 임한다고 하자.
그래도 본 상태는 이경우나 저경우나
차별없이 공하다.
그 측면은 어느 경우나 다 마찬가지다.
그러나 그런 본 상태에서
전도망상을 일으켜
생사고통을 받아나가는 중생의 입장은 이와 다르다.
그 상황에서는 이런 사정을 스스로 깨닫지 못한다.
그래서 그런 생사고통에서 스스로 벗어나오기 힘들다.
그래서 부처님이 자비의 마음을 일으켜서
이런 중생을 제도하고자 한 것이다.
그래서 그런 내용을 세속의 진리로서 시설을 하여 제시한 것이다.
물론 그런 사정 때문에 이들은 본래 희론의 성격을 갖는다.
즉 본래 언설로 표현할 수 없는 내용들에 대해
언설을 통해 설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런 방편을 시설하고 마련해야
이를 의존해 중생들이 이 사정을 이해하고 깨닫게 된다.
그리고 그런 상황을 벗어나겓 ㅚㄴ다.
그래서 그와 같이 설법을 행하게 된 것이다.
그 사정이 그와 같다.
그리고 그런 사정은
수행을 하는 수행자도 마찬가지인 것이다.
수행자도 이런 부처님의 취지에 따라 수행한다.
그래서 수행자는
부처님의 그런 가르침들이
그렇게 행해진 사정을 기본적으로 잘 이해해야 한다.
즉, 중생을 제도하기 위한 방편으로
자비의 마음을 일으켜 그처럼 행한 것이다.
그래서
부처님의 가르침을 따라
방편지혜를 닦아 나가야 한다.
그리고 복덕과 지혜를 성취한다.
그리고 성불을 하고자 수행을 정진한다.
그럴 경우에도
본래 그런 내용은 실재의 영역에서
얻을 바가 없음을 잘 이해해야 한다.
그리고 그런 수행을 얻을 것이 없음[무소득]을 방편으로 하여
집착없이 수행에 임해야 한다.
끝으로 내용을 요약하자.
현재 본 경전에서는
최고 상태의 수행자들을 대상으로 가르친다.
예를 들어 지혜가 제일인 사리자 존자와 같은 분을 대상이다.
이들은 처음 부처님이 제시한 내용을
이미 원만하게 최고로 잘 성취한 분들이다.
그런데 관자재보살님이
이들에게 다음내용을 제시한다.
일체의 것은 실재에서 얻을 수 없다.
부처님이 제시한 내용도 그 사정이 같다.
따라서 집착을 갖지 않아야 한다.
부처님이 처음 기본적으로
즉 5 온 18 계 12 인연 사제법과 같은 여러 내용을 제시했다.
그런데 이런 내용 역시도
실재에서는 그런 내용을 얻을 수 없다.
그리고 실다운 것이 아니다.
따라서 집착을 갖고 대하지 않아야 한다.
수행자가 중생제도를 위해 이후
생사를 받아나가면서 무량한 수행을 해간다.
그런 경우에도 그 사정을 그처럼 올바로 이해한 가운데
수행을 해야 한다.
이런 내용들이 본 경전의 핵심이다.
◧◧◧ para-end-return ◧◧◧
◈Lab value 불기2561/08/31/목/09:18 |
▼ mus0fl--Edith Piaf - Les Deux Copains.lrc ○ [pt op tr]1888,_Cézanne,_Three_Pears
보트자세에는 또 다른 형태의 포즈가 있다. 58 극량은 역시 아승기품에 나오는 58 번째 수의 단위를 의미한다.
058▲不動不動為 一 ● 極量, ○出離生死,超,甚,了,一 부동씩 부동이 한 ● 극량(極量)이요, 출초심료 出離生死不可說, 超昇正位不可說, 甚深三昧不可說, 了達一切不可說, 출리생사불가설, 초승정위불가설, 심심삼매불가설, 료달일체불가설, 죽살이 뛰어남도 말할 수 없고 정위(正位)에 올라감도 말할 수 없고 매우 깊은 삼매도 말할 수 없고 온갖 것 통달함도 말할 수 없네. * 참고로 게송 전체를 짧게 줄여 외우기 위해 그러면 매번 혼동을 일으키기 쉽다. 예를 들어 나사를 왼쪽으로 돌려야 잠겨지는가 오른쪽인가
한편 끝글자 하나가 더 붙은 것은 즉 다음에 다시 59 번째가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게송 한 부분만으로 족하면 두번째 형식을 택하면 된다. 그래서 꺼내지지 않는다. 또는 신체에 마련해둔 암기방의 위치도 같은 기능을 한다. 또는 요가자세를 취하면서 외었다면 그 요가자세가 이런 내용을 꺼내주게 된다. 그래서 본문만 열심히 외었다고 하자. 58 이란 숫자와 출리생사 초심료일 그러면 오팔이 출리생사와 무슨 관련이 있는가라고 따지지 않아야 한다. 그런데 역사에서 유명한 인물의 저자나 책명을 외울 경우도 있다.
그 다음 게송을 외운다. 지금 요가자세도 바라만 보면 쉬운 듯 여겨진다. 수행자의 입장에서는 마음을 변화시킨다.
그 연구원도 역시 대단히 좋았다고 말했다. 그런데 즐겁게 느끼면 짧다고 느끼게 된다. 거꾸로 매달려 지내면 3 분도 3 년처럼 느껴진다. 그런데 즐겁게 지내다보면 3 년도 3 분이 지난 것처럼 느끼게 된다.
58 극량 수정된 보트자세를 취할 때
>>>
♥ 잡담 ♥글 수정 문제
♥단상♥ |
문서정보 ori
https://buddhism0077.blogspot.com/2020/07/2561-08-31-k1267-001.html#8406 sfed--보변지장반야바라밀다심경_K1267_T0252.txt ☞보변지장반야 sfd8--불교단상_2561_08.txt ☞◆vhdy8406 불기2561-08-31 θθ |
■ 퀴즈
다음에 해당하는 단어?
[img2-49] [그림] - 이하 아래 부분은 현재 [작성, / 표현교정, 수정, 보완/ 문단 재배치 순서 정리 등 ] 작업중입니다. -
작업시작시점 2564_0504_162358
10종 견(見)의 하나. 현상[事]과 본체[理]를 알지 못하고 여러 가지 그릇된 소견에 집착하는 것.
답 후보
● 무명견(無明見)
무상(無相)
무상도(無上道)
무상열반(無上涅槃)
무상해탈문(無相解脫門)
무생무멸(無生無滅)
무시공(無始空)
ॐ मणि पद्मे हूँ
○ [pt op tr]
[오래된 조각글재정리 안내]
☎잡담☎ = 순전한 잡담부분
● = 논의부분
재검토시작 Lab value 불기2564/05/04/월/16:13
♥아래 부분은 현재 작성 중인 미완성 상태의 글입니다♥
문단, 표현 재정리 작업중
경전정리 (▽정리중) (▼마침)
논의 (○정리중) (●마침)
조각글 (☆정리중) (★마침)
○ [pt op tr]
● 보변지장반야바라밀다심경_K1267_T0252 [문서정보]- 일일단상키워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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