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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진리와실천
불기2561-09-09_백자론-K0631-001 본문
『백자론』
K0631
T1572
백자
● 한글대장경 해당부분 열람I
● 한글대장경 해당부분 열람II
○ 통합대장경 사이트 안내
○ 해제[있는경우]
● TTS 음성듣기 안내
※ 이하 부분은 위 대장경 부분에 대해
참조자료를 붙여 자유롭게 연구하는 내용을 적는 공간입니다.
대장경 열람은 위 부분을 참조해주십시오.
● 자료출처 불교학술원 기금 후원안내페이지
『백자론』 ♣0631-001♧
백자
♥아래는 현재 작성 및 정리 중인 미완성 상태의 글입니다♥
[페이지 내용 업데이트 관련 안내]
❋본문
◎[개별논의]
○ [pt op tr]
○ 2019_1105_123433_can_fix
○ 2019_1105_122549_can_fix
❋❋본문 ♥ ◎[개별논의]
불교기록문화유산 아카이브
百字論一卷
K0631
○ [pt op tr]
『백자론』 ♣0631-001♧
◎◎[개별논의] ♥ ❋본문
○ [pt op tr] mus0fl--Joe Dassin - A Toi.lrc
중론(中論)과 십이문론(十二門論), 백론(百論)
이 세 논서는 중관학파의 핵심이 된다.
그리고 중국에서는 3 론종이란 종파가 성립된다.
이 가운데 백론은 용수의 제자 제바(提婆)가 저술했다.
이들 내용은 간결해 보인다.
그러나 이에는 살펴야 할 논점이 대단히 많다.
● 논쟁을 통한 중생제도의 효과
일반적으로 추론이나 논리학적 주제를 좋아하지 않는다.
사회에서 그다지 환영을 받지 못한다.
논리적 주제는 맛있는 음식이 아니다.
또 아름다운 그림이나 음악이 아니다.
그리고 사사건건 시시비비를 까다롭게 따진다.
그래서 좋아하는 경우가 드물다.
중생제도의 측면도 사정이 비슷하다.
시시비비를 따져 이로 인해 상대가 변화되는 경우가 드물다.
그래서 수행으로 전환해 임하는 경우가 그리 많지 않다.
○ 자비에 바탕한 제도방안과 논리적 설득을 통한 제도
극장에서 어떤 이가 관객을 붙잡고 인질극을 벌인다고 하자.
그래서 수사관들이 이를 포위한 가운데 자수를 권유하려고 한다.
이런 경우 논리학자가 상대해 시시비비를 가려 설득한다고 하자.
효과가 별로 좋지 않다.
한편 변호사가 법률 상담을 통해 이해득실을 이해시켜 중지시키려 한다고 하자.
이 역시 효과가 별로 좋지 않다.
이성적으로 납득시켜 상대가 그런 일을 중단하는 경우가 적다.
이런 상황에서 효과가 그나마 있는 것은 주로
인질범이 사랑하는 애인이나 어머님이 설득하는 경우다.
그런데 그렇게 되는 배경 사정이 있다.
우선 그런 이도 애인이나 어머님은 좋아한다.
고슴도치도 제 아이는 예쁘게 보인다는 속담과 사정이 비슷하다.
그렇게 된 데에도 다시 배경 사정이 있다.
우선 어머님은 어릴 때부터 그 뜻을 대부분 받아주었다.
그리고 사랑을 쏟고 길러주었다.
또 같이 기뻐해주고 슬퍼해준다.
또 약간 문제가 있어도 이를 사랑으로 대하고 긍정적인 측면으로 대한다.
또 약간의 단점은 눈감아 주고 이해해주려 한다.
그리고 정신적 물질적 후원을 계속 하면서 바라보아준다.
그리고 참고 기다려준다.
그런 배경 사정이 있다.
그래서 어떤 이가 고집을 피운다고 하자.
그런 경우 이런 어머님 입장을 취해 설득하는 것이 그나마 효과가 낫다.
즉 자애롭고 현명한 어머니가 자신의 아이를 대하는 마음으로 대할 때 그나마 효과가 있다.
그런데 일반적으로 그렇게 하기 쉽지 않다.
상식적으로 누군가 대신 죽으면 어떤 아이를 살릴 수 있다고 하자.
그런 경우 자신이 대신 죽겠다고 나서는 경우가 거의 없다.
그러나 어머님은 그런 경우에도 나서려 함을 현실에서 볼 수 있다.
현실에서 그런 사례가 전혀 없는 것은 아니다.
그런데 중생을 제도하려면 이런 자세가 효과가 좋다.
즉, 어머님이 아이에게 갖는 자비심을 바탕으로 임하는 것이 효과가 좋다.
그리고 수행자는 그렇게 한 생명 생명을 상대해야 한다. 그래야 효과가 좋고 빠르다.
미륵 보살님이 석가모니 부처님보다 더 수행을 일찍 했다.
그러나 성불은 석가모니 부처님이 먼저 하게 되었다.
그런데 여기에도 배경사정이 있다.
예를 들어 호랑이가 배가 고파한다고 하자.
이런 경우 석가모니 부처님은 그냥 자신의 몸을 먹으라고 제공해 주었다고 한다.
물론 이 부분은 상상으로 지어낸 엉터리 이야기라고 여길 수도 있다.
그러나 석가모니 부처님은 일반인과 사정이 다르다.
무상해탈과 안인을 성취해 생사를 벗어난 입장이다.
또 자비심을 갖고 중생을 위해 베풀고자하는 마음이 지극했다.
그래서 그처럼 일반적으로 하기 힘든 수행을 했다.
그리고 바로 그런 특별한 사정 때문에 더 일찍 성불하였음을 함께 이해해야 한다.
참고 『불설보살투신이아호기탑인연경』 K0512 T0172
보리심을 일으킨 수행자는 중생을 제도하고자 서원을 갖는다.
그런 경우 우선 자신이 왕이 백성을 대하듯 중생을 대해 제도하려는 경우도 있을 수 있다.
또는 주인이 노예를 대하듯 중생을 이끌려는 경우도 있을 수 있다. ,
또는 교도관이 죄인을 대하듯 제도하려는 경우도 있을 수 있다.
또는 선생님이 학생을 대하듯 중생을 제도하려는 경우도 있다.
또는 상관이 부하를 대하듯 중생을 대해 이끌려는 경우도 있을 수 있다. ,
또는 부모가 자식을 대하듯 이끌려는 경우도 있을 수 있다.
그러나 예를 들어
남편이 부인을 대하듯, 상대를 친근하게 대해 제도하려는 경우는 상대적으로 적다.
또는 우정이 깊은 친구를 대하듯, 상대를 대해 제도하려는 경우는 적다.
또는 친 형제자매를 대하듯, 상대를 대해 제도하려는 경우는 적다.
그런데 앞과 반대 입장은 더더욱 드물다.
예를 들어 백성이 임금을 대하듯 상대를 공경하게 대해 제도하려는 경우는 드물다.
또는 종이 주인을 대하듯 상대를 대해 제도하려는 경우는 비교적 드물다.
또는 죄수가 교도관을 대하듯 상대를 대해 제도하려는 경우는 비교적 드물다.
또는 학생이 선생님을 대하는 형태를 반대로 취해 제도하려는 경우는 드물다.
또는 부하가 상관을 대하듯 상대를 대해 제도하려는 형태는 비교적 드물다.
또는 자식이 부모를 공경히 대하듯, 상대를 대해 제도하려는 경우도 드물다.
더 나아가
생명의 은인을 대하듯 상대를 대해 제도하려는 경우도 드물다.
또는 어머니가 자신의 낳은 아이를 대하듯 상대를 대해 제도하려는 경우도 드물다.
수행자가 중생을 대해 제도하려고 서원을 가져도
현실에서 이런 식으로 임해 제도하기는 어렵다.
에디슨이 학교에서 자꾸 질문을 해서 쫒겨 났다.
그러나 어머니만은 에디슨을 이해하고 정신적으로 후원을 계속한다.
그래서 나중의 에디슨이 훌륭하게 되었다고 한다.
이런 이야기도 같은 내용이다.
그런데 이런 경우 일반적으로는 그렇게 임하지 않는다.
일반적으로 이는 그 아이의 특수한 개인 문제로 여긴다.
그리고 그렇게 일일히 개인 사정을 다 보아주면 넓게 이끌어줄 수 없다고 여긴다.
그리고 그런 특수한 경우는 그 혼자 알아서 적응해야 할 문제로 여긴다.
그렇지 못해 겪는 고통은 그 개인이 혼자 알아서 감내해야 한다.
그런 가운데 자체적으로 선근이 성숙되어야 한다.
그리고 그런 상태가 될 때까지 방치하고 기다리게 된다.
그리고 그렇게 상대가 알아서 변화되면 지도하거나 제도하기 쉽다.
그런 결과 제도될 기간은 상대적으로 길어진다.
석가모니 부처님처럼 모든 경우 자비로 대해 이끌면 상대는 편할 수 있다.
그런데 그렇게 해도 그래도 제도가 안되는 경우가 있다.
이런 경우 이후 56 억년 정도 제각각 생사를 받아가며 알아서 선근을 성숙시켜야 한다.
그래야 미륵보살님이 내려오셔 설할 때 이를 통해
비로소 생사를 벗어날 수 있다.
현실 사정이 이와 같다.
어떤 이가 망집을 일으켜 생사고통을 받아간다.
이 때 자비로 대해서 제도해주면 좋을 듯하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수행자가 그렇게 매 경우마다 임하기 힘들다.
우선 그런 중생을 제도하려면
수행자 자신부터 중생이 생사고통을 겪는 생사현실에 들어가 임해야 한다.
그리고 중생과 눈높이를 맞추어 임해야 한다.
중생이 스스로 알아서 망집을 제거하고 생사를 벗어나기를 기대하기 힘들기 때문이다.
그런데 수행자 입장에서는 그런 사정으로 생사현실에 임하는 것부터가 쉽지 않다.
더 나아가 그 생사현실에서 중생을 하나하나 어머니처럼 대해주며 임하기가 힘들다.
생각해보면 현실에서 자신의 어머니 외 자신을 그처럼 대해주는 이가 거의 없다.
마찬가지로 온 생명을 다 그 어머님처럼 임해 사랑을 쏟고 제도하는 것이 쉽지 않다.
그러나 중생제도를 위해 수행하는 이는 원칙적으로 그런 자세를 갖고 임해야 한다.
○ 중생제도의 기본적 어려움
다른 글에서도 중생제도의 어려운 사정을 살폈다.
그런데 이는 어떤 이가 축사에 갇힌 소를 구출해내고자 하는 경우와 비슷하다.
문제는 이 상황에서 소는 소대로 사정을 잘 이해하지 못한다.
그리고 축사에서 사료를 먹고 그대로 지내는 것이 편하고 좋다고 여긴다.
그런 상황에서 모르는 이가 다가와 축사문을 열어준다고 좋아하지 않는다.
오히려 대부분 이를 경계하고 뿔로 받으려하기 쉽다.
수행자 입장에서는 옳은 내용을 간단히 알려주고 해탈문 위치만 가리키면
상대가 대단히 좋아하고 이를 받아들여 실천해갈 것처럼 여기기 쉽다.
그런데 현실이 전혀 그렇지 않다.
그런데 정작 이 과정에서는 앞과 같은 사정들로 어려움이 있다.
그런데 여하튼 그런 방식으로 자신이 소를 구출하려고 임한다고 하자.
그런 경우 소는 소대로 그 내용이 하나도 마음에 와 닿지 않는다.
이해도 안된다. 골치만 아프다.
무엇이 이익이 되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래서 어떻게 해야 되는지도 알 수 없다.
그리고 당장 살기만 불편하다.
이렇게 여기게 된다.
그런 가운데 오히려 자신을 도우려는 상대에게 거꾸로 분노를 일으키게 된다 .
그리고 상황을 거꾸로 생각한다.
그리고 상대를 들이 받으려고 하게 된다.
그런 가운데 축사에서 도살장에 끌려가는 순간까지 나오지 않으려고 임한다.
한편 소를 자유롭게 풀어주려 하면
소를 키우는 목장 주인부터 경계하며 신경을 기울이게 된다.
이 상황에서 목장 주인은 그 소를 기르면서 이익을 얻는 상태다.
그래서 목장 주인은 또 이런 이에게 항의하고 문제를 제기한다.
또 한편 그 소에 애착을 갖던 다른 소도 사정이 비슷하다.
반대로 그 소와 대립관계에 있던 소도 사정이 비슷하다.
예를 들어 소는 소대로 그 소를 좋아하는 암소나 숫소가 따로 있다.
또 그 소와 서로 싸워 관계가 안 좋은 소가 따로 있다.
그래서 문제가 상당히 복잡하다.
다 제각각 다른 사정으로 그 소를 그렇게 도와 풀어주면 안 된다고 여긴다.
그리고 이를 다 문제로 삼게 된다.
어떤 이가 도살당할 소 하나를 축사에서 꺼내 살려주려 해도
이런 성격의 문제에 바로 부딪힌다.
그리고 현실에서 수행자가 중생을 제도하려는 상황이 이와 성격이 같다.
예를 들어 목동들이 소를 따로 다룰 때는 별로 어려움이 없다.
그런데 암소앞에서 어린 송아지를 보살펴주려고 다가가 만지면
암소가 흥분해 자신을 들이 받으려 하기도 한다.
또 숫소가 좋아하는 암소가 있다고 하자.
그런 경우 그 암소를 치료해주고자 수의사가 다가서면
숫소가 달려들어 갑자기 들이받을 수도 있다.
소라서 그런 것이 아니다.
생명이 원래 그런 특성이 있다.
한편 이와 반대로 치열하게 서로 다투는 관계라고 하자.
그래서 원수관계로 지낸다고 하자.
그런 상황에서 어떤 이가 한쪽을 도와주려고 한다고 하자.
그러면 그로 인해 곧바로 그 상대과 싫어하게 된다.
그래서 좋은 뜻으로 한쪽을 도우려다.
자신이 그 상대와 다툼에 휘말리기도 쉽다.
예를 들어 부부가 서로 다툰다고 가정해보자.
이런 경우 잘 모르는 이가 어느 한쪽 편을 들고 옹호한다고 하자.
그런 경우에도 그런 상황에 처하기 쉽다.
과거에 세조가 조카를 죽이고 왕이 되었다.
그래서 조카의 어머니인 형수와 관계가 악화되었다.
나중에 꿈에 형수가 세조에게 침을 뱉었다고도 한다.
여하튼 이후 세조는 몸에 잘 낫지 않는 피부병이 생겼다.
이런 상태에서 문수보살님이 세조만 일방적으로 편을 들고 병을 낫게 해준다고 해보자.
그러면 또 앞과 같은 상태에 처한다.
어머니 입장에서는 자신의 아이를 죽인 숙부에게 한이 맺힌 상태다.
그래서 속이 상하다.
그런데 문수보살님이 어떤 해결사로서 그 한편만 일방적으로 돕는다고 해보자.
그런 경우 문수보살님이 무서워서 어떻게 하지 못할 수는 있다.
그리고 그것을 억누르고 한으로만 계속 갖고 지내기 쉽다.
그렇다고 그 문제가 근본적으로 해결되는 것이 아니다.
어느 순간 그 억누르는 힘이 약해진다.
그러면 그동안 억눌렀던 억울함이 한꺼번에 분출하게 된다.
결국 문제를 뒤로 연기했을 뿐 해결한 것이 아니다.
어느 경우나 다 사정이 같다.
예를 들어 자신의 몸에서 바이러스나 세균과 면역세포가 치열하게 싸운다고 하자.
이런 경우 자신이 해결사를 동원해서 이 문제를 해결하려고 할 수 있다.
그러면 그 당장은 문제가 해결되는 것처럼 외관상 보인다.
그러나 그 예후가 장기적으로는 좋지 않다.
그래서 매번 문제가 발생할 때마다 이처럼 해결사를 동원해서 임하면 곤란하다.
그것은 현재의 문제를 자꾸 장래로 넘기는 일이 될 뿐이다.
그리고 당장 문제가 없게 되면 문제가 해결된 것으로 착각한다.
중생은 기본적으로 생사현실에서 서로 수없이 가해와 피해관계가 이처럼 중첩되어 얽혀 있다.
그래서 사실은 수행자는 생사에 묶여진 중생의 상황의 성격을 잘 이해해야 한다.
그리고 수행자가 이런 경우에 개입할 때는
관련된 당사자를 모두 다 좋은 상태로 만들어 줄 방안을 찾아야 한다.
그리고 그렇게 당사자를 모두 좋은 상태로 함께 이끌어주어야 한다.
그런 방안으로 화해를 시켜야 한다.
그렇게 당사자들을 다 함께 천도를 해야만 원만하게 해결된다.'
이런 방식이 중생제도의 근본 방식이다.
그리고 현실에서 그렇게 할 수 있는 방편지혜를 가져야 한다.
이는 결국 그 수행자의 능력이다.
그렇게 수행자가 능력이 있는 경우 그로 인해 당사자의 질환이 해소가 된다.
그렇지 못하면 개입할수록 당사자들 관계가 악화된다.
○ 논쟁을 통한 제도의 문제
한편 중생을 제도하는 방안에서 차선책으로 상대가 이치상 알아들을 내용을 제시하게 된다.
그리고 이후 스스로 알아서 이치를 깨닫고 망집을 제거하기를 기대하게 된다.
그리고 나서 수행을 실천해나가기를 기대하게 된다.
그리고 이런 바탕에서 각 문제에 대해 이치를 따지고 논리적으로 시시비비를 가리게 된다.
『중관론』이나 『십이문론』 『백자론』 등의 논서는 이런 입장이다.
물론 앞에서 보았듯 이런 방안은 그 효과는 상대적으로 적다.
- 우선 이들 논리적으로 시시비비를 다투는 주제를 대해 일반적으로 즐거워하지 않는다.
감성적으로 가까이 하지 않으려 한다. 일반적으로 대하기를 꺼려한다. 골치아파한다.
또 그 내용이 자신의 감성이나 희망에 들어맞지 않으면 그 정도가 더 심해진다.
그런 문제가 우선 있다.
예를 들어 어떤 결혼식장에 가서
『백자론』에 나온 내용을 화제로 꺼내 이야기한다고 가정해보자.
대부분 무상보다는 영원함을 구한다.
삶은 고통보다는 즐거움이라고 여기고 싶어한다.
또 자신은 허망하지 않고 무언가 실다운 존재이길 바란다.
그리고 자신은 우주에서 무엇보다 깨끗하고 소중한 존재라고 여기고 집착한다.
그런데 불교 경전이나 논서는 기본적으로 그렇지 않음을 제시한다.
그런 것은 망집이다. 그 망집에 바탕해 업을 행한다.
그래서 생사고통을 받게 된다.
그래서 그런 망집을 제거해야 한다. 이런 입장이다.
그런데 그런 주제는 대부분 경우 환영받지 못한다.
결혼식 잔치에서 그런 이야기를 만일 한다고 하자.
그러면 당장 혼주나 하객으로부터 항의를 받게 될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이해도 되지 않는 이야기를 꺼내는 이유가 무엇인가.
그 이익이 무언가.
이런 항의를 받기 쉽다.
심하면 밥도 못 먹고 쫒겨나게 되기 쉽다.
그래도 멈추지 않는다고 하자.
그러면 이제 분노를 일으키게 된다.
그래서 위험성이 있다.
그 사정을 잘 알고 이해해야 한다.
- 한편 일반적으로 이들 논서 내용을 읽고 그 내용을 바로 이해하기가 쉽지 않다.
왜냐하면 척 읽어 이해가 바로 되지 않는다.
현재 살피고자하는 백자론도 사정이 마찬가지다.
그 사정은 간단하다.
전도망상 상태에서 눈을 떠 세상을 대한다고 하자.
그 상황에 눈 앞에 화분이 있다.
그리고 꽃이 피어있음을 본다고 하자.
이 상황에서 대부분 꽃이 그렇게 있다고 여긴다.
그리고 어제 없던 꼿이 오늘 피었다고 여긴다.
그래서 꽃의 생멸도 있다고 여긴다.
이런 식으로 여기고 이런 식으로 말한다.
그리고 이런 내용이 옳다고 여긴다.
그런데 경전 및 중관론사들의 공통적인 입장은 다음과 같다.
그 상황은 그가 이해하듯 그런 내용이 아니다.
한마디로 본 사정이 그렇지 않다.
앞과 같은 내용은 그 주체가 망상분별 상태에 있기에 그렇게 여기게 된 것 뿐이다.
이런 입장이다.
그리고 중관논사는 단순히 그에 그치지 않는다.
이와 반대되는 주장을 어떤 이가 고집한다고 하자.
그러면 상대 주장을 받아들이면 그 각 경우마다
이런 오류상황을 만나게 된다고 상대 주장을 논파한다.
그리고 시시비비를 따지고 문제를 지적한다.
예를 들어 그 상황에 그런 꽃이 있다면 이래서 문제가 있게 된다.
또 만일 없다고 한다면 이래서 그것이 엉터리가 된다.
이런 식으로 제시한다.
그래서 가능한 어느 경우나 다 잘못이 된다고 제시한다.
그런데 상대는 우선 그 내용을 잘 이해하지 못한다.
그리고 심정상으로 공감하지도 못한다.
그런데 그런 주장만 놓고 살피면 또 그 비판을 논파하기도 곤란하다.
그런 가운데 그래도 '꽃이 있다' 그리고 '꽃은 피고진다' 그래서 '생멸은 있다'고 여긴다.
그래서 망집을 고집한다.
그래서 결국 이 경우 중관논사들이 억지주장을 궤변적으로 내세우는 것처럼 잘못 여기게 된다.
그런데 자신이 궤변을 통해 논쟁에 패배하여 억울하고 분하다고만 여긴다.
- 이런 주장을 제시하는 경우 이를 잘 이해하지 못한다.
그리고 대부분 그런 주장에 반발해서 정반대로 나아가기 쉽다.
그리고 이런 내용을 제시하는 상대를 오히려 비방하고 비난하는 결과가 나타난다.
예를 들어 제바보살이 외도를 상대하여 논파를 했다.
그런데 그로 인해 그가 자세를 바꾸고 수행으로 전환해 임하게 된 것은 아니다.
오히려 논쟁의 패배로 분노를 더 일으켰다.
그리고 더 불쾌하게 만들었다.
그래서 그 반대방향으로 자신을 논파한 제바보살을 살해하게끔 되었다.
그래서 논쟁을 통한 중생제도는 기대하는 것처럼 효과가 크지는 않다.
한편 부처님을 괴롭힌 제바달다의 경우도 그 사정이 이와 비슷하다.
제바달다는 부처님을 수없은 생을 이어가면서 괴롭혀온 존재다.
그리고 결국 그런 일로 지옥에 들어간 이다.
그런데 처음 석가모니 부처님에게 그렇게 임하게 된 배경사정이 있다.
이 역시 그 사정이 마찬가지다.
어떤 공개적인 논의가 이뤄지는 장소에서
석가모니가 제바달다와 논쟁해 패배시켰다.
그런데 그로 인해 제바달다가 공개적으로 창피를 당했다.
그래서 제바달다가 그로 인해 좋게 변화한 것이 아니다.
그 일을 계기로 다음과 같이 마음을 가지게 되었다.
두고 보자. ...보복을 해주겠다. 이렇게 원한을 갖게 되었다.
그리고 그것은 한 두 생으로 끝나지 않고 계속 증폭되고 이어졌다.
그래서 석가모니 부처님이 태어나는 곳마다
따라다니면서 그렇게 늘 괴롭히는 역할을 맡아 하게 되었다고 소개된다.
대강 살펴보면 설령 불교를 같이 믿는 경우에서도 그 사정이 좋지 않다.
그래서 용수보살님의 경우도 그런 내용이 전한다.
용수보살님 바로 옆에서 생활한 한 스님은 죽을 때까지
그 내용을 이해하지 못했다고 한다.
그리고 용수보살님이 세상을 떠나게 되어서
시원함을 느꼈다는 내용이 용수보살전에도 제시되고 있다.
예를 들어 감기가 들어 약국에 가서 감기약을 달라고 한다.
이런 경우 약사가 그냥 달콤한 약을 하나 줘서 먹고 나으면 그만이라고 여긴다.
그런데 약사가 환자를 붙들고 잔소리를 한다고 하자.
왜 평소 건강관리를 게을리하는가.
왜 술 담배를 못 끊고 계속 피는가.
이렇게 이야기해서 감정을 거슬린다.
또 다른 한편으로 자신이 주는
약의 약리 효과를 자세히 설명한다.
그리고 부작용을 칠판에 적어가면서 설명을 한다.
그런 경우 환자가 그로 인해서 병이 빨리 낫게 되는가를 살펴보면
감기는 감기대로 악화되고 없던 울화증까지 얻게 되기 쉽다.
인질극을 벌이는 현장 사정도 마찬가지다.
어떤 논리학자가 논리적으로 시시비비를 따져 설득하려고 한다고 하자.
그런 경우 인질범이 이치상 그 내용을 인정해도
갖고 있는 권총으로 제일 먼저 해치고 싶어 하는 이는 그 상대인 경우가 많다.
그래서 무엇을 놓고 이치상 시시비비를 따지고
옳고 그름을 문제삼는 논의는 효과가 그다지 좋은 것은 아니다.
- 그래도 여하튼 망집을 제거하려면 어떤 계기가 되었던
이들 내용을 잘 이해해야 한다.
그래서 내용을 제시한다.
그런데 정작 이들 내용을 이해해도 이를 통해 자신의 오류를 시정하기 쉽지 않다.
또 이를 바탕으로 수행으로 자세를 전환해 임하기가 다시 쉽지 않다.
그리고 내용은 이해하고 나서 정작 그런 바탕에서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 잘 모르는 경우가 많다.
중관논서를 예를 들면 결국 결론은 일체는 무아 무자성 공하다는 것이 결론이 된다.
그런데 이 내용은 현실에서 어떤 방향을 제시하는가를 잘 이해하지 못한다.
그리고 이를 이해하면 앞으로 어떻게 삶에 임해야 하는가.
또 수행은 어떤 자세로 무엇을 행해 나가야 하는가를 잘 이해하지 못한다.
그리고 이 부분에서 다시 어려움을 겪게 된다.
- 일체가 차별없이 공하다고 하자 .
그러면 일반적으로 그런 바탕에서 다음 내용을 제시한 것으로 오해하기 쉽다.
사정이 그렇다고 하자.
그렇다면 어떤 것의 정체를 있는 그대로 제대로 파악하던, 못하던 차별이 없다.
그래서 몰라도 무방하다.
또 안다고 해도 그것을 올바로 잘 제시하거나 않거나 다 관계없다.
옳은 내용이거나 엉터리 내용이거나 그 본 바탕이 다 차별이 없기 때문이다.
또 한편 그런 바탕에서 어떤 수행을 하거나 않거나 다 무방하고 차별이 없다.
그리고 오히려 이전처럼 망집에 바탕해서 임한다해도 무방하다.
더 나아가 현실에서 오히려 더 극심하게 악을 행해도 그것도 무방하다.
또 현실에서 수행을 아무것도 행하지 않고 머물러도 무방하다.
그리고 설령 수행을 할 때 그 수행을 망집에 바탕해서 행해도 무방하다.
즉, 수행으로 무언가 실다운 것을 얻을바가 있다고 이해하고 수행해도 무방하다.
왜냐하면 일체가 다 차별없이 무아고 공하기 때문이다.
이렇게 잘못 이해하기 쉽다.
그런데 논서의 결론만 취하고 임하면 오히려 위와 같은 잘못된 입장을 취하기 쉽다.
이것이 결국 악취공견의 입장이기도 하다.
그것은 본 논의와 같은 내용들이 제시된 배경사정이나 맥락부터
잘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현실에서 각 생명이 생사고통을 심하게 겪는다.
그 해결이 문제다 .
그 생사고통은 그 이전에 생사고통을 겪을 업을 행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업은 그 주체가 망집을 일으켜 현실을 대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 망집을 먼저 제거해야 한다.
그리고 그런 바탕에서 장차 생사고통에 묶일 업은 중지해야 한다.
그런데 그것만으로 위 문제가 곧바로 해결되지는 않는다.
이미 그 이전에 행한 업의 장애가 해소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쌓여 있는 업의 장애를 해소할 수행을 해야 한다.
또 한편, 극심한 생사고통을 겪는 상태에서
원칙적으로 그것이 실답지 않음을 관하고 평안히 잘 극복해 견딜 수도 있어야 한다.
이런 수행이 종합적으로 필요하다.
그 수행을 원만히 잘 성취하기 위해
일체가 무아 무자성 공함을 이해하는 것이 요구된 것이다.
한 주체가 현실을 대한다.
그런데 이 현실은 마치 침대에서 꾼 바다나 황금꿈과 사정이 같다.
이 사정을 이해해야 한다.
그래야 현실이 실답지 않음을 이해한다.
그래야 현실에 집착을 갖고 임하지 않게 된다.
그래야 현실에서 생사고통을 겪는 업을 행하지 않게 된다.
또 쌓인 업을 수행을 행해 제거해야 한다.
그래야 생사고통을 겪는 상황에 처하는 것을 예방할 수 있다.
그런데 이렇게 수행하는 것 자체가 쉽지 않다.
또 생사고통을 겪더라도 그것이 실답지 않음을 관할 수 있어야
이를 잘 극복할 수 있다.
그런데 이 모든 과정에서 현실 자체가 실답지 않음을 관하고 대할 수 있어야 한다.
그래야 이 각 수행을 원만하게 잘 성취할 수 있다.
그래서 현실이 침대에서 꾼 바다나 황금 꿈과 그성격이 같음을 먼저 이해해야 한다.
그것은 현실의 본 바탕의 사정을 이해하는 문제다.
즉 현실은 매 순간 생생하게 얻는다.
그리고 그에 대해 명료하게 분별을 행한다.
그런데 이 본 바탕은 그런 내용을 얻을 수 없다.
이 부분이다.
생사현실은 문제다.
그런데 정작 그 본 바탕은 공하다.
그리고 현실과 같은 내용을 본래 얻을 수 없다.
그리고 진짜에 해당하는 실체도 없다[ 무아, 무자성, 공 ]
이것이 현실은 마치 침대에서 꾼 바다꿈과 성격이 같음을 이해하게 하는 부분이다.
즉 이는 현실이 비록 그처럼 생생하지만, 그것은 하나같이
꿈처럼 실답지 않음을 이해할 수 있게 하는 내용이다.
그래서 실재가 공함을 파악하는 것이 의미를 갖는다.
그리고 위 각 과정에 그 내용을 그처럼 적용하게 된다.
그러나 정작 공한 실상은
그런 생사현실을 그처럼 해결하라고 문제삼은 적이 없다.
왜냐하면 그런 내용은 본 바탕에서는 본래 얻지도 못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만일 논서에서 제시한 내용을 그대로 100% 취하면
결국 앞에 처음 제시한 악취공견의 입장이 오히려
원칙상 적절해보인다.
그런데 이는 사정이 그렇지 않다.
이는 본 바탕 실재 그 자체를 살피기 위한 논의가 아니다.
이는 본래 생사현실에서 있는 생사고통을 해결하기 위한 논의다.
생사현실은 앞에서 본 것처럼 본래 꿈처럼 실답지 않다.
그런데 정작 꿈은 아니다.
그 하나하나가 실답지 않은 점에서 꿈과 성격이 비슷할 뿐이다.
즉 현실 내용은 생생하게 얻는다.
그러나 이는 다른 영역이나 본 바탕인 실재 영역에서 얻지 못하는 내용이다.
그런 가운데 그런 조건에서 그처럼 얻는 내용일 뿐이다.
그래서 실답지 않다. 마치 침대에서 꾼 바다꿈과 성격이 같다.
그러나 사정이 그렇다고 이 생사현실을 정말 꿈처럼
무시하고 방치할 도리가 없다.
왜냐하면 생사현실은 꿈과 비슷하지만, 정작 꿈은 아니기 때문이다.
실답지 않지만, 그렇다고 전혀 없다고 할 내용도 아니다.
또 현실은 꿈과 달리
다수의 주체가, 일정한 조건과 상황에서 비슷한 관계로
무량겁에 걸쳐 비슷한 내용을 반복해 받는다.
그래서 이 하나하나가 실답지 않다고 이를 그대로 방치할 도리가 없다.
그리고 바로 위 사정 때문에
대부분 그 현실을 대단히 실답게 진짜처럼 대하게 된다.
그리고 그런 바탕에서 한번 행한 업은 무량겁을 두고 사라지지 않는다.
그리고 그 과보를 받는다.
이런 내용을 한편 경전에서 제시한다.
그래서 생사현실에서 겪는 생사고통은 대단히 문제가 된다.
그래서 이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
또 그러기 위해 우선 위 사정을 잘 이해하는 것이 요구된 것이다.
즉 현실을 꿈과 같다.
그렇지만, 한편 현실은 꿈과 달리 대다수가 무량겁에 걸쳐 반복해 얻는다.
그래서 대단히 실답게 여기게끔 된다.
그렇지만, 그 하나하나는 본 바탕이나 다른 영역에서 얻을 수 없다.
그런 가운데 그처럼 얻는 내용이다.
따라서 그런 사정으로 꿈처럼 실답지 않다고 제시한다.
본 바탕이 무아 무자성 공함에 대한 이해가 수행에서 갖는 효용의 하나다.
이 내용을 이해하고 현실을 대해야 한다.
그래야 현실에 대한 집착을 잘 제거한다.
그리고 그 바탕이 되어야 수행도 어렵게 여기지 않게 된다.
그리고 그런 바탕에서 수행을 원만히 잘 성취하게 된다.
그래야 또 생사고통에서 벗어나게 된다.
그런데 이제 수행자가 이를 통해 생사에서 벗어난 경우에도
다시 위 내용이 같은 형태로 또 문제된다.
수행자가 생사를 벗어난다고 하자.
그런 경우 다른 중생은 여전히 그런 상태로 실답지 않는 생사고통을
실답게 받으며 남아 있다.
그런데 그렇게 방치하면 스스로 이를 벗어나기가 대단히 힘들다.
따라서 이 사정을 이해한 이가 자비심을 일으켜 다른 중생을 제도해야 한다.
그리고 이들 중생을 제도하기 위해 중생이 처한 생사현실에 들어가 임하게 된다.
그런 가운데 그런 중생에 눈높이를 맞춰 수행을 행해 나가게 된다.
이 경우 앞 문제가 다시 또 문제된다.
즉 생사현실은 실답지 않다.
그런데도 그 생사현실에 다시 들어가 임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본 바탕의 사정을 99 % 취하더라도
1%는 생사현실을 다시 대하고 임해야 한다.
그 안에서 생사고통을 겪는 중생을 제도하려면 그렇게 해야 한다.
본 바탕의 측면을 100% 취하면 이는 본래 하등 문제되지 않는다 .
그런 차별을 일체 본래 얻을 수 없다.
또한 본 바탕에서는 그런 문제도 얻을 수 없다.
따라서 그런 문제를 해결하라고 요청한 적도 없다.
그래서 그처럼 100%를 다 취할 경우는 오히려 악취공견의 입장이 적절하다.
그런데 앞에서 보듯 생사현실이 갖는 특성이 있다.
실답지 않지만, 그런 특성 때문에 이 생사현실을 완전히 외면할 수 없다.
그래서 1% 의 측면을 취해서라도 생사현실에 들어가 임해서 중생제도의 노력을 해야 한다.
그런 경우 다시 생사현실에 처할 때는
본 바탕의 사정을 역시 잘 이해하고 생사현실을 대하는 것이 필요하다.
우선 생사현실에서 중생을 제도하기 위해 어렵더라도 계의 수행을 잘 성취해야 한다.
그리고 생사현실 안에서 복덕자량을 우선 구족해야 한다.
그리고 안인을 성취하고 무생법인을 증득해야 한다.
그래서 생사현실 안에서 어떤 어려움을 만나도
원래 상태로 물러나지 않는 상태가 되어야 한다. [불퇴전위]
그런 가운데 지혜자량을 구족하고 무량한 방편 지혜를 닦아야 한다.
중생을 제도하기 위해서는 어차피 다 차별이 없어도
이왕이면 이런 상태를 굳이 잘 성취해야만 한다.
그렇지 않으면 생사현실 안에서 스스로 생사를 벗어나기 힘들고 또
다른 중생을 벗어나게 하기 힘들다.
그리고 이 상태를 잘 성취하려면 기본 바탕의 사정을 잘 이해해야 한다.
이 부분이 중요하다.
그리고 이 부분 때문에 악취공견의 입장과 다른 입장을 취하게 된다.
본 바탕에서는 일체가 다 차별을 얻을 수 없고 공하다.
이 입장을 100% 취하면 이래도 저래도 다 무방하다.
중생이나 부처나 본래 본 바탕은 차별을 얻을 수 없다.
그 사정을 몰라도 된다.
심지어 엉터리 주장을 고집해도 무방하다.
수행을 하지 않아도 된다고도 할 수 있다.
그런데 앞과 같은 사정 때문에 입장이 달라진다.
즉 생사현실에서 생사고통을 벗어나는 문제때문에 달라진다.
그래서 설령 본 바탕의 차별없이 공한 측면을 99% 취하더라도
다시 차별된 생사현실을 1% 취해야 한다.
그런 가운데 생사현실의 문제를 잘 해결해야 한다.
그래서 본 바탕의 사정이 그렇다해도
생사현실에서는 이왕이면 그 사정을 올바로 잘 깨달아야 한다.
그리고 어차피 차별을 얻을 수 없다해도
생사현실에서는 이왕이면 그 사정을 잘 이해할 수 있도록 잘 설해주어야 한다.
그리고 잘 이해시켜야 한다.
그리고 어차피 차별을 얻을 수 없다해도
생사현실에서 이왕이면 그에 바탕해 수행을 잘 성취해야 한다.
이렇게 하거나 저렇게 하거나 별 차별이 본래 얻을 수 없다.
그렇다해도 이왕이면 수행을 하는 가운데 상을 취하지 않고 행해야 한다.
그리고 그런 바탕에서 집착을 하지 않고 행해야 한다.
그리고 그 수행을 얻을 바 없음[무소득]을 방편으로 행해야 한다.
그래야 그 수행이 원만히 잘 성취된다.
그리고 이왕이면 그렇게 해야 생사현실에서 생사고통의 묶임에서 벗어나고
다른 중생도 벗어나게 할 수 있다.
이것은 생사현실의 차별상의 문제다.
본 바탕에서는 그러거나 않거나 본래 그러 내용을 일체 얻을 수 없다.
그런데 그런 바탕에서 생사현실이 그렇지 않다.
그래서 그 생사고통 문제의 해결이 요구된 것이다.
그리고 이 생사현실안의 문제를 잘 해결하기 위해
이런 기본 사정을 먼저 잘 이해하는 것이 요구된 것이다.
그리고 이것이 본 논의를 행하게 된 그 배경 사정이다.
그래서 이 논의를 통해 이 사정을 잘 이해해야 한다.
그런 가운데 이 내용을 99% 취한 가운데 그런 측면으로 대한다.
그러면서도 또 한편 중생제도를 위해 생사현실 측면의 차별상을 1% 취한다.
그리고 그 측면에서는 중생을 제도할 수 있는 방향으로 수행을 잘 성취해나가야 한다.
만일 본 바탕의 사정을 잘 이해하더라도
그런 바탕에서 앞처럼 방향을 취하지 않으면 곤란하다.
그러한 경우는 어차피 차별없이 다 공한 가운데
매번 하필이면 생사고통을 심하게 겪는 상태에 처하게 된다.
그것이 중생제도를 위해서 필요하면 어쩔 수 없다.
그런데 그것도 아닌데 그렇게 되면 곤란하다.
그런데 무아 무자성 공을 살핀 취지자체를 착각하기 때문이다.
처음 생사고통의 해결을 위해 이를 살폈었다.
그런데 이런 취지를 파악하지 못하면
무아 공을 이해한 다음 오히려 그런 방향으로 잘못 임하게 되기 쉽다.
그래서 주의를 해야 한다.
그래서 이 논서를 대할 때는
종합적으로 이런 사정을 미리 잘 고려해야 한다.
그리고 논사들이 열심히 시시비비를 가리고 따질 경우
이런 점을 미리 종합적으로 헤아려야 한다.
그래서 우선 자신이 이치를 밝혀 설명해주면
상대가 이를 참고 들어줄 수 있는가부터 먼저 잘 헤아려야 한다.
그리고 들으면 그 내용을 상대가 이해할
기본 바탕이 잘 갖춰져 있는가를 헤아려야 한다.
그리고 말해주면 이를 받아들이고
올바른 방향으로 수행을 잘 정진해나갈 수 있는가도
먼저 잘 헤아려야 한다.
현실의 본 정체나, 유무나 생멸 및 인과문제를 살필 때는
이런 사정부터 먼저 이해해야 한다.
이런 논의를 통해 해결하고자 하는 취지가
바로 위 부분과 관련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들 주제를 아무리 엄격하게 잘 따지고 살펴도
앞 문제가 해결되지 않으면 별 실익이 없다.
생사고통을 해결하기 위해 이 문제를 살핀다.
그러려면 상대가 이들 내용을 이해하고 망집을 제거할 수 있어야 한다.
그리고 그런 바탕에서 수행을 실천해나가야 한다.
그래서 그런 상태가 아니라면 곤란하다.
그런 경우에는 『중관론』이나 『십이문론』 『백자론』을 붙들고
평생 옳고 그르고를 밤낮없이 따진다 해도 소용이 없다.
논의는 논의대로 골치가 아프다.
그 정도에 비례해 이 치유제는 대체적으로 인기가 없는 치료제가 된다.
그래서 세상에서 외면하는 상태가 된다.
그리고 이런 사정을 모르고 논의에 임하면
앞에 나열한 문제들이 하나같이 다 자신의 현실 문제가 되기 쉽다.
그러나 효과가 전혀 없는 것은 또 아니다.
결국 수행을 하는 과정에서 이런 내용을 하나하나
스스로 잘 이해하고 깨닫기는 해야 한다.
그래서 설령 잘 이해되지 않아도
그런 주제를 놓고 혼자서라도 자세히 살펴보아야 한다.
그런 가운데 살펴야 한다.
◧◧◧ para-end-return ◧◧◧
○ [pt op tr] mus0fl--Bibie - TOUT DOUCEMENT.lrc
● 수행과 논서의 이해문제
본 논의를 살펴서 얻는 효용을 미리 살피기로 한다.
『중론』 『십이문론』 『백자론』 등에서
있고 없음의 문제나 인과 문제 등을 살핀다.
이는 이미 그 동안 반복해서 살폈다.
그래서 필요하면 기존에 제시된 유무 관련 논의와
인과 관련 논의를 하나하나 살피면 된다.
그러나 수행을 하고자 하는 입장에서는
이들 주제를 굳이 그렇게 대해야 할 필요는 적다.
일반적인 입장에서 수행자가 성취하고 머물러야 할 장소를 어떤 성이라고 비유해보자.
그리고 수행자가 부처님 말씀이 이해가 되던 않던 신심을 일으켜 이를 받아들인다.
그리고 가르쳐준 내용을 그대로 정진해가며 성취해간다.
그리고 성의 정문으로 그냥 들어간다.
그리고 자신의 무량한 서원을 성취해나가면 된다.
그래서 굳이 이런 논서 내용을 붙들고 시간을 소진할 필요는 없다.
아래 부분을 보면 처음에
온갖 법은 하나의 모습[一切法一相]을 갖는다.
이렇게 어떤 이가 주장한다고 하자.
그리고 그것을 붙들고 제바보살이 논파하는 내용이 나열된다.
이는 어떤 이가 그런 망집을 일으켜 억지 주장을 고집할 경우
이를 그렇게 논파하려는 취지다.
그런데 자신은 그런 망집을 일으키지 않았다고 하자.
그리고 그 내용자체가 무엇인지도 모른다고 하자.
그런데 결국 이런 주장은 망집을 바탕으로 일으킨 엉뚱하고 이치에 맞지 않는 주장의 하나다. 그런 경우 그것을 굳이 붙들고 이해해보려 노력하는 것은 별 의미가 없다.
망집에 바탕해 일으킬 수 있는 엉터리 주장은 무량하다.
그리고 그런 내용이 엉터리임만을 알고 버리는 것이 최종적으로 취할 방안이다.
그리고 정작 자신이 성에 들어가 수행하고 닦아야 할 내용과는 큰 관계는 없다.
따라서 급하게 이 내용을 붙들고 시간을 보내야 할 필요성도 적다.
○ 수행에서 논의의 필요성
수행자의 입장에서는 당장 수행을 실천해 닦는 것이 기본이다.
그런 가운데 서원을 세워 성취해 가야 한다.
수행자의 사정은 그렇다.
그렇다고 이들 논의가 아무 필요가 없는 논의인 것은 아니다.
이들 논서의 내용이 중요한 사정이 있다.
일반적으로 상식적인 입장이 대부분 외도와 같은 바탕이다.
그래서 사실 이들 논서의 이해가 필요하다.
또 이들을 상대해 설득하거나 논파할 경우에도 필요하다.
세상에서 대하는 것들의 본 정체가 무엇인가가 문제된다.
이에 대해 다음과 같은 something special 론과 representative 론이 있다.
현실에서 각 주체가 무언가를 보고 대한다.
그래서 현실에서 무언가가 있다고 여긴다.
이런 경우 그에 해당한 무언가 진짜인 [something special]
영원불변한 실체가 그처럼 있다고 잘못 여긴다.
다만 이런 주장을 하는 이도 주장뿐이다.
그것을 정확히 얻지 못한다.
그래서 이를 직접 제시하는 경우는 없다.
그래서 단지 무언가 특별한 것이 그렇게 있다고만 주장할 따름이다.
그런 입장에서는 현실을 대단히 실답게 여긴다. 그리고 집착을 갖고 대하게끔 된다.
현실에서 무언가를 보다가 눈을 감는다고 하자.
그러면 이후 아무것도 보지 못하게 된다.
그렇다 해도 자신의 주관과 관계없이 그대로 있다고 할 본바탕이 있는가를 문제삼게 된다.
그리고 그런 것이 있다면 그 정체가 무언가가 문제된다.
그런 경우 본 바탕인 실재영역에는 현실과 일치한 내용이 그처럼 있다고 잘못 여긴다.
또 그런 사정 때문에 현실 내용을 그처럼 얻게 된다고 여긴다.
그래서 현실은 그런 본 내용을 대표하는 어떤 내용이라고 이해한다. [representative 이론]
이는 마치 플라톤이 동굴에서 비추인 그림자 비유처럼 현실을 이해하는 방식이다.
한편, 감각현실과 분별내용의 관계도 그런 방식으로 이해한다.
즉, 자신이 생각한 내용은 자신이 감각한 감각현실 안에 그대로 있다고 또 망집을 갖는다.
이처럼 종합적인 망상분별을 일으키고 현실에 임한다.
그런데 이런 입장이 현실의 대부분이다.
그래서 이런 입장은 결국 논서에서 살피는 외도의 입장과 그 내용이 같다.
그래서 이런 망집의 제거가 필요하다.
그래서 이런 논서를 통해 시간을 들여서 잘 살펴서 그 망집을 제거할 필요가 있다.
mus0fl--Les Enfoirés - L'amitié.lrc
원래 이런 내용을 제시한 분들의 취지를 생각해보자.
중생은 망집을 바탕으로 3 계 6도에 갇혀서 쉼없이 생사고통의 현장에 끌려다닌다.
그런 상대를 방치할 수 없다.
그래서 구출해내야 한다.
그러려면 일정한 방편을 통해 상대가 본 사정을 잘 이해하고 깨닫게 해야 한다.
그런 취지에서 이들 논의를 제시하게 된다.
그리고 상대에게 이야기해주면 상대가 알아듣고 이해하리라 기대한다.
그래서 깨달아서 생사의 묶임에서 스스로 벗어나올 수 있다고 기대한다.
그래서 그처럼 시시비비에 임해 설명해 준 것이다.
그런데 일반적으로 사정이 그렇지 못한 경우가 더 많다 .
그런 경우는 오히려 그런 논의로 더 상황이 악화되기 쉽다.
상대는 불같이 분노를 일으킨다.
그리고 심지어 그렇게 도움을 주려는 상대를 해치는 경우가 생긴다.
그래서 이런 어려운 사정을 먼저 잘 파악해야 한다.
그래서 약이 갖는 효용과 함께 그 부작용도 잘 헤아려야 한다.
한편 수행을 행하는 입장에서 이런 내용이 필요하게 되는 사정이 또 있다.
예를 들어 어떤 수행자가 수행을 행하는 성이 있다고 하자.
그런데 어떤 이들이 그 성을 허물려고 극성을 피우며 노력한다고 하자.
그런 경우 이런 상대의 공격을 제지할 방편도 다시 필요하게 된다.
그래서 비유하면 성에 성벽도 높이 쌓아야 한다.
그리고 주변으로 깊은 못을 만들어 해자도 만들어야 한다.
그리고 여기저기 적이 침투해 함부로 공격하지 못하도록 해야 한다.
그리고 상대의 공격을 격퇴할 방안도 갖추어야 한다.
예를 들어 적이 창을 가지고 함부로 공격하면 방패를 사용한다.
또 성벽을 기어 오르면 기름을 부어 못오르게 할 방안을 갖춘다.
그런 노력이 비유적으로 필요할 수 있다.
그리고 이들 논서는 그런 부분의 하나로 이해하면 쉽다.
그래서 이런 논서는 불교의 가르침에 따르지 않고
고집을 피우는 경우 이를 격퇴시키기 위한 논의의 성격을 갖는다.
그런데 현실적으로 외도 논사들의 고집스런 공격이 있다.
그래서 이런 논서가 제시되는 것이기도 하다.
시시비비 논의는 일종의 전투와 같다.
이는 고급 수행자가 성의 경비를 책임져 행하는 성격이다.
그래서 외도의 공격을 상대해 깨뜨리는 취지다.
이것이 파사현정이 갖는 의미다.
그리고 이를 통해 외도 논사들이 스스로 잘못을 깨닫고 물러나게 하려는 취지다.
그런데 일반 수행자 입장은 그 구체적 사정이 그렇지 않은 경우가 많다.
자신은 그런 외도 입장에 공감하지 않는다.
그리고 불교를 공격하려는 입장도 아니다.
그리고 또 자신이 이들을 상대해 전투를 준비하는 입장도 아니다.
그보다는 자신부터 신심을 갖고 수행을 실천해 성취하는 것이 더 급하다.
그래서 수행 자체를 성취하려는 입장에서는
우선 경전의 내용을 먼저 살피는 것이 낫다.
그리고 경전의 가르침을 하나하나 이해하고 수행실천에 정진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
예를 들어 수행자가 성안에서 들어가 수행을 성취하고자 할 경우는
굳이 이렇게 임할 필요는 적다.
그래서 그런 경우는 수행자는
그냥 성문을 통해 성 안으로 들어가 생활하면 된다.
수행자가 굳이 힘들게 밧줄을 걸고 성벽을 기어오르거나
수렁을 통해 들어가려 할 필요는 없다.
그런 수행자는 별 해당사항이 없다.
그래서 당장 수행을 실천하는 것이 더 급하다.
● 외도의 주장에 대한 가정적 항변 방식의 논파
어떤 특정한 이가 어떤 해괴한 주장을 내세운다고 하자.
그래서 불교의 가르침을 비판하며 고집한다고 하자.
그래서 엉터리 주장을 내세우고 끝내 고집한다고 하자.
그런 경우 어떻게 이를 논파할 것인가.
그리고 부처님의 가르침이 옳음을 이해시킬 것인가가 문제된다.
다양한 방안이 있다.
그가운데 하나가 지금 논서에서 살피는 방식이다.
이는 가정적 항변 또는 가정적 논의라고 부르기로 한다.
이는 다음과 같은 방식이다.
우선 상대의 입장을 일단 가정적으로 받아들인다.
그런 가운데 상대의 입장을 취해 계속 나아가면
상대가 최종적으로 처하게 될 난감할 상황을 미리 찾아 보여준다.
그래서 그런 경우 상대는 어떻게 할 것인가를 미리 알려준다.
이를 통해 그런 상대의 주장을 예방하고 또 논파해 격퇴시킬 수 있다.
따라서 이런 취지로 논의하는 방식이다.
그런데 상대는 왜 처음 그런 망집을 일으키었는가를 함께 살펴야 한다.
그리고 이상한 주장을 내세우고 고집하게 되었는가를 살펴야 한다.
그것은 망집을 일으킨 대부분의 일반인 입장과 유사하다.
그래서 그런 주장을 내세우게 된 그 배경 사정부터 살펴 보아야 한다.
그 사정은 비유하면 다음과 같다.
예를 들어 어떤 이가 게임을 한다고 하자.
그러면 그 게임규칙은 그 게임 영역에서는 대단히 정연하고 체계적일 수 있다.
예를 들어 장기나 오목이나 바둑이나
요즘 아이들이 하는 전자게임도 마찬가지다.
그래서 이 게임만 놓고 보면
그 게임규칙은 그 자체로 상당히 체계적이다.
그리고 그 게임을 계속 진행할 수 있게 해주는 기본 바탕이 된다.
그리고 게임이 진행되는 상황에서 이 게임규칙은 대단히 확고부동하다.
그 안에서는 절대적이기까지 하다.
그리고 현실사정이 이와 비슷하다.
현실에서 사람들이 생활하는 가운데 우선 감각기관을 통해 감각현실을 얻는다.
그리고 관념 분별을 일으킨다.
그리고 그 분별을 전개해가며 생활하게 된다.
이런 상황에서 논리식이나 논리 체계에 의존한다.
그가 대하는 현실은 모두 이런 바탕에서 확립된다.
그리고 이런 내용이 그가 대하는 삶의 기본 토대다.
그리고 이런 상황에서 논리가 갖는 의미도 그 사정이 이와 같다.
그런데 이런 상황에서 세운 관념분별이나 추론 체계가 엉터리라고 제시한다고 하자.
그러면 일반적으로 그것을 도저히 받아들이지 못하기 쉽다.
그 자신의 토대 자체가 다 허물어지기 때문이다.
본래 이들 논리체계는 관념영역에서 세우고 그 안에서 적용된다.
그외 다른 영역 예를 들어 감각현실이나 실재 영역 등에서는 본래 적용이 될 수 없다.
그런데 일반적으로 이런 본 사정을 잘 이해하지 못한다.
그래서 우선 상대의 입장을 일단 가정적으로 받아들인다.
그런 가운데 상대의 입장을 취해 계속 나아가면
상대가 최종적으로 처하게 될 난감할 상황을 미리 찾아 보여준다.
논서에서는 처음 다음과 같이 논의를 행한다.
무엇이 있고 없음을 따진다고 하자.
그런데 이때 우선 자신이 무엇이 있다고 여긴다.
그러면 그런 사정 때문에 그 내용이 다른 영역에도 실재로 있다고 망상을 일으킨다.
그런데 그런 입장이 정말 옳다고 하자.
그렇다면 자신이 그와 반대로 그런 방식으로 그것이 없다고 분별을 하겠다.
어떻하겠는가.
당신의 그런 입장이 타당하다고 하자.
그렇다면 그 반대인 내 입장도 그처럼 타당하다고 해야 한다.
이렇게 문제를 제기한다.
...
▸ 불교의 학자는 말한다.
“그대가 지금 ‘있음’의 주장을 세우는 것은,
반드시 타당한 근거[因]가 있어야 할 것이다.
만약에 타당한 근거도 없이 있음의 주장을 세운다면,
나도 또한 타당한 근거 없이도 없음[無] 주장을 세울 수 있을 것이다.”◂
...
『백자론』
♣0631-001♧
일반적으로 망집을 일으킨 이는 일정한 망집을 갖고 임한다.
그래서 그것을 문제삼게 된다.
그리고 망집을 일으킨 입장에서 행하는 주장은 관념영역안에서만 내세운 내용들이다.
그래서 희론적인 성격을 갖고 내세워진 것들이다.
그리고 그런 사정 때문에 이처럼 비판을 제시하는 것이다.
예를 들어 장기나 바둑규칙은 그 게임 안에서는 정연하고 체계적이다.
예를 들어 왕이 어떻게 가야 한다거나 졸은 어떻게 움직여야 한다는 규정이 있다.
그런 바탕에서 그 게임이 진행된다.
그런데 그 규칙은 그런 전제에서 그런 게임에만 적용된다.
그래서 희론이라고 칭한다.
즉, 그 내용은 실제 현실에 적용할 수 없는 내용이다.
그런데 상대의 주장은 이런 성격을 갖는다.
그런 상태에서 관념분별이나 그 추론 체계나 논리식을 붙들고 계속 억지 주장을 한다.
그래서 이제 용수보살이나 제바보살 같은 분들이 이들 억지 주장을 격퇴시키고자 임하는 것이다.
그 방법은 다음과 같다.
그렇게 억지를 부린다면 일단 그런 내용을 받아들인다.
그래서 그렇다고 하자.
이렇게 임하고 이후 문제를 살핀다.
그래서 그런 주장의 문제를 찾아 제시한다.
이렇게 살펴나간다.
이것이 가정적 항변의 방식이다.
그리고 이것이 이들 논서에서 중요한 의미를 갖는 부분이다.
처음부터 그런 주장을 인정하는 입장이 아니다.
그러나 상대가 그렇게 고집을 피우고 임한다.
그러니 일단 상대의 주장이나 추론 체계 일체를 다 받아들여준다.
그런 전제에서 그 주장이 갖는 문제점을 살피겠다고 임하는 취지다.
소송에서 이런 방식을 사용한다.
이를 가정적 항변이라고 칭한다.
어떤 다툼이 있어서 무엇이 있고 없음을 놓고 증거를 제시하고 다툰다.
그런데 어떤 문제를 놓고 상대가 이기려고 심하게 억지를 부리는 상황이 생긴다.
직접적인 증거가 되는 내용을 가지고 제시해 이를 해결할 수 있다면 가장 좋다.
그런데 문제 성격이 그렇지 않은 경우가 많다.
예를 들어 상대는 돈을 자신에게 빌려 준 적이 없다.
그런데도 자신이 돈을 빌려주었다고 억지 주장을 한다.
그리고 갚으라고 요구를 한다고 하자.
그래서 처음에 기본적으로 자신은 그런 돈을 받은 적도 없다고 주장을 하게 된다.
그런데도 상대는 계속 억지주장을 한다.
그래서 다시 백번 양보하여 이제 '가정적으로' 상대의 주장을 받아들인다고 전제한다.
그렇다해도 그런 경우엔 이러이러한 문제가 있다고 다시 보충적으로 비판한다.
따라서 상대는 자체적으로 엉터리 주장을 함을 밝힌다.
이런 식으로 상대의 주장을 논파하려는 것이다.
그리고 소송에서 이런 경우를 가정적 항변이라고 표현한다.
용수보살이나 제바보살이 외도의 주장을 상대하여 논파하는 것도 사정이 이와 같다.
다만 소송 용어가 오히려 더 어렵다고 느끼기 쉽다.
그래서 조금 이해가 쉽도록 가정적(IF) 논의라고 다시 표현하게 된다.
우선 상대 주장은 고려할 가치가 없을 정도로 엉터리다.
그럼에도 어떠어떠한 엉터리 주장을 상대가 내세우고 고집한다고 하자.
일단 그 주장은 하나같이 엉터리다.
또한 상대가 의존하는 논리체계나 추론체계도 역시 엉터리다.
그런데 상대가 끝내 자신이 입장이 엉터리임을 이해하지 못한다.
그리고 자신의 입장을 고집하며 억지를 부린다.
그리고 관념분별 영역에서 세운 이들 내용이 현실에 그대로 적용된다고 잘못 이해한다.
그리고 그것을 고집하고 현실에 임한다.
그래서 그런 문제가 나타나게 된다.
불교 입장에서는 그런 상대 주장은 사실은 고려할 가치가 그다지 없다.
그런데 중관논사들은 이를 논파하기 위해 다시 다음 방안을 취한다.
상대 주장은 본래 잘못이다.
그러나 상대가 그것을 고집한다.
그러니 방법을 달리하여 그 문제를 이해시키고자 한다.
상대주장은 엉터리다.
그렇지만 그 주장을 일단 받아들인다.
즉, '가정적'인 입장에서 일단 상대의 주장을 하나하나 다 받아들인다.
그리고 그 상대가 취하는 논리나 추론체계도 받아들인다.
그리고 그런 바탕과 전제에서 나아간다.
그런 경우 필연적으로 만나게 되는 치명적인 문제점을 찾아낸다.
그리고 그것을 상대에게 밝혀 보여준다.
즉, 상대주장을 가정적으로 받아들이는 경우
이러이러한 사정으로 그것은 엉터리임을 알 수 있게 한다.
이런 방식으로 상대주장을 논파하려는 취지다.
이것이 가정적 항변 내지는 가정적 (if) 논의가 갖는 성격이다.
이 논의에서 '상대 주장은 엉터리다. 그렇지만 설령 그렇다고 가정해보자'
이렇게 임하는 부분이 바로 '가정적' 논의가 시작되는 출발점이다.
그래서 이를 IF(만일~라면) 라는 표현을 빌려 가정적 (IF)l 논의라고 칭해본다.
그리고 이런 입장의 논의를 통해
상대가 스스로 그런 잘못된 망집을 제거하기를 기대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들 논서의 성격이 그와 같다.
예를 들어 상대가 어떠한 주장을 고집한다고 하자.
그러면 그것을 일단 받아들이고 계속 나아가본다.
그렇게 되면 결국 벼랑에서 떨어지게 된다고 하자.
아니면 깊은 못 수렁에 빠지게 된다.
이를 찾아내 상대에게 이를 보여준다.
그래서 그렇게 고집하고 나아가면 이렇게 된다.
그러니 어떡하려고 하는가하고 그것을 거꾸로 물어본다.
그래서 그 사정을 그렇게 이해시킨다.
그래서 처음 주장한 내용을 스스로 알아서 폐기시키도록 이끌려는 취지다.
이 과정에서 용수보살이나 제바보살이 내세우는 내용의 성격을 잘 이해해야 한다.
우선 그런 내용을 용수보살 측에서 내세우는 것이 아니다.
상대는 자신의 주장이 갖는 문제점을 미리 잘 헤아리지 못한다.
그래서 사실 그런 주장을 하고 고집을 갖는 상태다.
그래서 외도가 가지가지 괴상한 주장을 내세운다.
이를 깨뜨리기 위해 위 방식을 취한 것이다.
그래서 일단 그런 상대 입장을 가정적으로 받아들여준 것이다.
그리고 그런 바탕에서 상대가 임하면 필연적으로 처하게 되는 문제점이 있게 된다.
이를 자신이 '상대입장에 가정적으로 들어가' 대신 찾아 제시해 주는 것 뿐이다.
이는 용수보살이나 제바보살이 적극적으로 주장하거나 내세우는 내용이 아니다.
따라서 이들 내용이 갖는 성격을 오해하면 곤란하다.
단지 상대 입장에서 상대 대신 문제를 살펴 제시한 것이다.
그리고 상대가 자신의 주장에 있는 문제를 스스로 미리 잘 파악하라는 취지다.
즉, 상대가 그런 바탕에서 그런 주장을 하면
그 바탕에서는 이런 문제를 만나게 됨을 제시하는 취지다.
그래서 상대 스스로 그 문제점을 파악하게 하려는 취지다.
그래서 그런 잘못된 입장을 잘 폐기해 버리도록 이끄는 취지다.
그것이 결국 IF논의의 성격이다.
또 소송에서 가정적 항변이 갖는 기능이다.
그런데 이들 논의를 완전히 마치려면 살펴야 할 분야가 대단히 많다.
학문 가운데 논리학이 가장 확고하고 정확하다고 일반적으로 이해한다.
언어나 수학 논리학이 학문의 가장 기본 토대다.
그런 가운데 논리학 전반 문제부터 살펴야 한다.
그래서 각 개념의 내포 외연 자체가 기본부터 엉터리인 사실부터 지적하게 된다.
그런 가운데 이런 추론 체계가 총체적으로 엉터리임을 확인시켜야 한다.
그래서 이 논의가 기본적으로 그 성격이 복잡하다.
그리고 상대가 망집에 바탕해 고집해 내세우는 주장은 대단히 다양하다.
그래서 그 주장별로 살펴야 할 구체적 내용이 대단히 많고 복잡하다.
그래서 종합적으로 어려움이 있다.
이들 논의를 살피려면 이런 사정부터 기본적으로 잘 이해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논의를 통해 얻는 효용보다 부작용이 많게 된다.
○ 음악공양, 나무불, 나무법, 나무승 mus0fl--Jean Ferrat - Heureux Celui Qui Meurt D'aimer.lrc
● 논리 추론의 문제점
어떤 상대가
예를 들어
S 는 P 다
이런 주장을 제시한다고 하자.
그런데 용수보살이나 제바보살은 다음처럼 입장을 취한다.
우선 S 는 P 다라는 것도 잘못이다고 제시한다.
그런데 그렇게 주장하면
S 는 P 가 아니다라고 제시하는 것으로 오해하기 쉽다.
그런데 용수보살은
다시 그것도 잘못이다.
이런 식으로 비판한다.
그래서 일반적인 경우 용수보살의 입장 자체가 무언가를 이해하기가 쉽지 않다.
한편 서양 추론식에 익숙한 입장이 있다.
이런 경우 귀류논증식과 관련해서 또 다른 의문을 일으키게 된다.
어떤 이가 어떤 주장을 한다고 하자.
그런데 그 주장의 옳고 그름을 밝힐 증거를 직접 찾아 제시하기 곤란한 경우가 있다.
그런 경우 간접적으로 이를 증명하려고 꾀하게 된다.
예를 들어 어떤 이가 'S 는 P 다' 이런 주장을 하려 한다고 하자.
그런데 이 자체를 직접 밝히기 곤란하다.
그런 경우 이제 위 명제와 모순되는 명제를 먼저 취한다.
즉 이제 'S 는 P가 아니다' 라고 한다.
그리고 그런 전제를 받아들이면 '필연적으로' 어떤 잘못된 결론을 만나게 됨을 밝혀 낸다.
[귀류]
이 부분이 귀류논증이다.
그리고 귀류논증이 1차적 결론은 이 부분이다.
그래서 'S 는 P가 아니다'라는 것은 잘못에 귀착됨을 밝힌 것이다.
그런데 중관학파 입장과 서양 추론의 입장이 이 부분 이후부터 다르다.
서양 추론식에서는 이 귀류논증은 간접적 증명을 위해 주로 사용한다.
즉 'S 는 P가 아니다'라는 주장이 잘못임을 밝힌다고 하자.
그런데 이 귀류논증은 이 자체를 밝히는 것이 본 취지가 아니다.
이를 통해 이와 모순되는 명제가 반대로 참임을 간접적으로 내세우려는 것이 본 취지다.
즉 'S 는 P가 아니다'라는 주장은 잘못이다.
=> 따라서 이와 모순된 명제를 옳다고 봐야 한다.
=> 즉 'S 는 P다' 라는 명제를 옳다고 봐야 한다.
이런 주장을 내세우려는 것이 본 취지다.
그런데 이는 결론을 직접적으로 밝힌 것은 아니다.
그와 모순되는 명제가 옳지 않음을 밝힌 것이다.
그리고 이를 통해 간접적으로 처음 주장이 옳음을 내세우려는 형태다.
그래서 서양에서 귀류논증식은 간접적인 증명방법으로 주로 이용된다.
그런데 용수보살이나 제바보살의 귀류논증은 이런 취지가 전혀 아니다.
그래서 혼동을 일으키지 않아야 한다.
그래서 왜 그런 차이가 나타나는가를 먼저 잘 이해해야 한다.
용수보살이나 제바보살의 입장이
소송에서 가정적 항변이나 IF 논의의 성격을 갖는다고 제시했다.
이 배경과 관련이 된다.
처음 상대가 S 는 P 라는 주장을 내세운다고 하자.
그런데 용수보살이나 제바보살은
처음부터 그런 S 나 P 라는 내용부터 얻을 수 없다는 입장이다.
즉 문제를 따져야 할 현실 영역에 그런 내용 자체를 본래 얻을 수 없다.
그런데 상대가 그런 주장을 고집한다.
그래서 그 문제를 살핀다.
그리고 그 방편으로 일단 상대주장을 받아들인다.
그리고 그 주장의 문제점을 살피는 것 뿐이다.
상대가 S 는 P 다라고 주장한다고 하자.
그래서 그 전제에서는 필연적으로 엉터리인 결론을 만나게 됨을 밝혀 낸다.
그래서 그런 주장을 폐기하게끔 이끄는 것뿐이다.
그리고 이를 통해
그 반대 (모순)되는 주장을 간접적으로 내세우려는 취지가 결코 아니다.
용수보살의 본 입장이 그런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런데 여하튼 이를 위해서는 우선 귀류논증식부터 기본적으로 살펴야 한다.
이런 방식으로 상대 주장을 논파하려 한다고 하자.
이는 결국 상대 주장을 잘못이라고 결론을 이끌어 내는 기본 형태를 이해하는 문제다.
우선 그 논파 원리는 다음과 같다.
S 는 P 다
=> 그러면 필연적으로 잘못이라고 볼 결론이 얻어진다.
=> 그런데 이렇게 얻어진 결론이 오히려 맞을 수도 있다.
( 필연적으로 얻어지는 결론이 엉터리가 볼 것이 아니다. 그것이 맞을 수도 있다. )
=> 그러나 만일 그 결론이 현실에 비추어 볼 때 명백한 잘못이라고 하자.
그렇다면 이제 그런 전제에서 그런 (잘못된) 결론을 얻어낸 추론과정에
먼저 어떤 문제가 있을 수 있다. 즉 그런 잘못된 결론을 끌어낸 추론과정이 엉터리일 수도 있다.
=> 그러나 그 추론과정은 오류가 없고 맞다고 하자.
그러면 이제 그런 결론을 끌어낸 추론체계가 엉터리여서 그럴 수도 있다.
=> 그러나 그 추론과정이나 추론쳬계가 잘못이 없다고 하자.
그러면 이제 그런 (잘못된) 결론을 끌어내게 한 처음의 전제 'S 는 P 다'가 잘못일 수 있다.
이론상 이 추론에는 이런 여러 가능성이 있다.
그리고 이런 여러 가능성을 놓고 검토해야 한다.
그런 상태에서 최종적으로 앞 부분들에는 아무 문제가 없다고 하자.
그렇다면 결국 위와 같은 상태에서 처음 전제한 내용을 잘못이라고 보게 된다.
그래서 처음 전제한 내용이 오류임을 밝히게 된다. [귀류논증의 본의미]
그런데 그런 경우 다시 여기서 다음처럼 나아가기 쉽다.
=> 'S 는 P 다'가 잘못이라고 하자.
그렇다면 이제 그와 모순되는 명제가 참이다.
이런 방향으로 나아가기 쉽다.
그리고 서양추론식에서 귀류논증식이 갖는 의미는 이 부분이다.
즉 일반적으로 귀류논증을 사용하는 취지는 마지막 부분에 있다.
즉 처음 전제한 내용이 잘못이다.
=> 그러면 그와 모순된 내용이 옳다.
이런 내용을 간접적으로 증명하고자 주로 사용하게 된다.
그런데 이는 그런 결론을 직접적으로 살펴 끌어낸 것이 아니다.
간접적으로 우회해 일정한 결론을 증명해내려는 취지다.
그래서 간접적인 증명방식이라고 일반적으로 칭한다.
○ 귀류논증을 간접 증명방식으로 사용하는 배경사정
그런데 일반적으로 현실에서 이런 추론식을 사용하게 되는 사정이 있다.
그 사정을 쉽게 살피면 다음과 같다.
어떤 이가 남자인가 여자인가가 궁금하다고 하자.
겉모양으로는 잘 구별이 안 된다.
그런데 어떤 이가 그가 여자라고 자꾸 주장한다.
만일 이 내용의 참거짓이 문제된다고 하자.
그렇다고 직접적으로 그 내용을 확인하려면
옷을 벗겨서 확인해보면 된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사정상 그것이 곤란하다.
그래서 이런 경우 위와 같은 방식을 사용하게끔 된다.
그래서 우선 일단 처음에 '그가 남자다'라고 전제를 한다.
그렇다면 그는 반드시 화장실을 갈 때 남자화장실을 가야 한다.
이런 필연적인 관계가 있다고 보게 된다.
그런데 그가 남자화장실에 들어가지 않고 여자 화장실로 들어갔다.
그러니 위 결론이 잘못이라고 보게 된다.
다만 이는 비유적으로 이런 추론방식을 행하는 배경 사정을 설명하기 위한 것뿐이다.
그런데 여기서 남자면 언제나 반드시 남자화장실을 간다는 관계가 있어야 한다.
즉, 필연성이 있어야 한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꼭 그런 것은 아니다.
논리에서는 엄격히 그런 관계가 요구된다.
100 번 가운데 99 번은 그렇다고 하자. 그러나 1 번은 아닐 수 있다고 하자.
그렇다면 이런 내용으로서는 귀류논증을 행할 수 없다.
왜냐하면 그 예외가 바로 위 경우라면
이 사실만으로 곧 잘못이라고 할 수 없기 때문이다.
다만 여기서는 귀류논증을 행하는 사정을 비유적으로 설명하는 취지일 뿐이다.
그래서 위 관계가 대강 그렇다고 하자.
이럴 때 다시 추론을 이어가보자.
앞에 남자라고 전제했다.
그런데 그런 전제에 들어맞지 않은 결과가 나온다.
그렇게 되는 사정들을 나열해 찾아보자.
이것을 찾아보자고 할 때 앞의 방식이 다 동원된다.
그리고 최종적으로 처음에 전제한 내용이 잘못이라고 하자.
즉 '그는 남자다'라는 전제가 잘못이다.
그러면 이를 통해서 간접적으로 '그를 여자로 보아야 한다'고 추정하게끔 된다.
그래서 그런 결론이 얻어진다고 제시하는 취지다.
그런데 역시 엄격하게 보면 이 비유에는 문제가 많다.
어떤 이가 남자가 아니라고 해서 그렇다고 반드시 그가 여자라고 할 수는 없다.
다만 여기서는 이런 추론식을 현실에서 사용하게 되는 사정만 살피고자 한 것이다.
그것은 결론으로 무언가를 알고 싶어한다.
그런데 그것을 직접 파악하기 힘든 사정때문이다.
그리고 서양추론식은 이런 상황에서
간접적인 방식을 통해 이에 대한 결론을 얻어내고자 주로 이런 방식을 사용한다.
○ 중관학파의 귀류논증의 성격 - 간접증명의 취지가 없음
일반적으로 '있다'라는 주장이 잘못이라고 하자.
그러면 이제는 없다라고 해야 할 것 같다.
그런데 용수보살의 본 취지는 그런 것이 아니다.
그래서 용수보살은 이제 다시 '없다'는 주장을 다시 또 논파하게 된다.
이제 그러면 용수보살이 이를 통해 '있음'을 내세우려는 것으로 또 잘못 오해하기 쉽다.
그런데 용수보살과 제바보살은 그런 입장이 애당초 아니다.
예를 들어 '있음'을 부정한다고 하자.
그러면 대부분 그 비판은 '있음'과는 모순된 '없음'을 내세우기 위한 것으로 잘못 이해하기 쉽다.
그리고 앞에 나열한 각 단계의 추론 자체도 그런 취지로 오해한다.
즉, 용수보살이나 제바보살이 그런 주장을 적극적으로 내세우기 위해
제시한 것으로 잘못 오해한다.
그러나 사정이 그렇지 않다.
처음부터 용수보살이나 제바보살은 그런 입장에서 이 논의를 진행한 것이 아니다.
단지 상대의 주장이 엉터리라는 것을 제시하기 위한 것 뿐이다.
그래서 상대가 그렇게 주장한 내용을 가정적으로 받아들인 것이다.
그런 경우 상대의 입장을 취해 계속 나아가게 되면
결국 그런 문제를 만나게 됨을 찾아 제시한 것 뿐이다.
그러니 상대는 그런 경우에 어떡할 것인가라고 상대에게 문제를 제기한 것뿐이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 용수보살이나 제바보살이 어떤 내용을 내세운 것이 아니다.
그리고 그 추론 과정 자체에서도 무언가를 내세우거나 단정한 것이 아니다.
그런데 이 부분을 잘못 이해하기 쉽다.
그리고 논의 취지를 잘못 이해하기 쉽다.
망집을 바탕으로 견해를 세워 고집하는 것은 모두 문제다.
그래서 가능한 각 경우마다 이렇게 저렇게 해서 다 엉터리임을 밝히는 것 뿐이다.
그런데 일반적인 입장은 그렇지 않다.
다양한 가능한 경우수 가운데 어느 하나가 잘못이면 그 모순된 내용은 옳아야 한다.
이렇게 이해한다.
그래서 일반적인 경우
용수보살 입장을 오히려 자체적으로 말이 안 되는 궤변으로 잘못 이해하기 쉽다.
그리고 이들 논서 내용을 잘 이해하지 못한다.
그러나 그 사정은 앞과 같다.
그리고 일반적이고 상식적인 입장과 그 출발 바탕이 본래부터 차이가 있다.
이런 점을 먼저 이해해야 한다.
○ 귀류 추론 과정의 근거를 확립해 내세우지 않음
한편, 이런 비판과정에는 추론체계가 사용된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중간 내용으로 제시하는 내용도 있다.
예를 들어 S 는 P 라고 주장한다고 하자.
그렇다면 'S 는 K 이다'를 중간으로 내세운다고 하자.
그리고 이를 통해 최종적으로 오류를 밝혀낼 수도 있다.
그런데 이런 경우도 마찬가지다.
이런 경우 그렇게 중간에 내세운 주장도 그 성격이 앞과 같다.
이런 내용을 추론 중간에서나 결론부분에 내세운다.
그러나 이는 용수보살이 이 내용을 내세운 것이 아니다.
그리고 그것이 논의 본 취지도 아니다.
그것이 if 논의가 갖는 성격이다.
그런 내용은 상대가 내세운 주장을 가정적으로 받아들이면 그렇다는 것 뿐이다.
즉 상대가 취하는 추론체계나 일정한 주장을 받아들인다고 하자.
그런 전제라면 그렇게 나아가야 한다.
이런 내용을 용수보살이 가정적으로 상대 입장에 서서
상대를 대신해 미리 찾아내 제시하는 것 뿐이다.
그래서 이는 용수보살이 제시하지만, 용수보살이 내세우는 내용은 아니다.
즉, 상대 입장을 대신해서 찾아 제시해주는 내용일 뿐이다.
즉, 상대입장을 가정적으로 받아들이면
그렇게 됨을 대신 제시하는 취지일 뿐이다.
그래서 서양추론식에서 사용하는 귀류논증식과는
기본적으로 그 취지가 다르다.
그래서 이런 점을 혼동하지 않아야 한다.
그리고 논의의 성격을 잘못 오해하지 않아야 한다.
이들 내용은 이전에도 많이 살폈다.
다만 과거글은 현재 통편집 중인 상태다.
그래서 찾아서 링크를 걸거나 복사해 붙이는 것도 번거롭다.
그래서 그냥 여기서 새로 살피기로 한다.
○ [pt op tr] mus0fl--Gerard Lenorman - Voici Les Clef.lrc
○ 중관학파 귀류논증의 배경사정
상대가 S는 P 이다 아니다.
또는 있다 없다. 이런 주장을 한다고 하자.
그런데 중관학파 논서에서는 이 각 경우를 매번 붙잡고 모두 부정한다.
그래서 서양에서 사용하는 귀류논증식과는 다른 입장이다.
그래서 각 논의 성격을 서로 혼동하면 곤란하다.
이런 기본 문제를 살폈다.
그런데 그렇게 되는 기본 배경사정을 살펴야 한다.
일반적으로는 이런 비판방식은 이해가 잘 안 되게 마련이다.
일반적인 입장에서는 사실은 논서내 다양한 부분이 다 이해하기 어렵다.
그런 사정이 있다.
처음 상대 논사가 S는 P 이다라는 형태로 주장한다고 하자.
이 경우 상대 논사가 내세우는 의미부터 혼동을 갖기 쉽다.
그것은 각 표현이 가리키는 의미와 논의가 제시된 배경 사정을
기본적으로 잘 이해하지 못한 가운데 그 표현을 대하기 때문이다.
그 다음 그런 전제에서
중간적으로 다시 'S는 K 이다' 이런 결론을 도출한다.
그런데 정작 그 전제에서 그런 내용이
어떤 사정으로 필연적으로 도출된다고 하는지를 이해해야 한다.
그런데 이런 추론관계 역시 일반적으로는 이해하기 쉽지 않다.
그리고 한편 그처럼 도출한 'S는 K 이다'라는 부분이 문제다.
귀류논증에서는 이 부분은 일반적으로 명백히 오류로 인정할만한 내용이어야 한다.
그리고 논서에서도 그런 취지로 그것을 제시한 것이다.
그런데 일반적으로는 그것이 잘못임을 이해하기 쉽지 않다.
그것은 논의가 전개되는 배경을 잘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 표현이 가리키는 의미를 잘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것을 기본적으로 이해해야 그것이 명백한 오류임도 쉽게 이해할 수 있다.
한편, 그것이 잘못이라고 하자.
그래서 처음 출발전제인 ' S는 P 이다' 라는 내용이 잘못이 된다고 하자.
그런 경우 이로 인해 그와 모순된 명제를 대신 옳다고 해야 할 듯하다.
일반적으로 이처럼 이해하기 쉽다.
그런데 용수보살은 그렇게 입장을 취하지 않는다.
그래서 왜 그런가를 다시 이해하기가 역시 쉽지 않다.
그리고 이런 비판을 하는 가운데
비판 과정에서 일정한 내용을 내세우는 외관을 취한다.
즉 'S는 P 다'라고 주장한다면 => 'S는 K 이다'라는 엉터리 결론이 도출된다
=> 그래서 잘못이 된다.
이렇게 비판한다고 하자.
그러면 외관상 비판자가 이 각 단계 내용을 그처럼 내세운 것처럼 보인다.
그리고 그 관계도 그처럼 확립해 제시한 것으로 여겨진다.
즉, 위 내용과 이들 관계를 먼저 확립해야 첫 주장을 잘못이라고 논파할 수 있다.
그렇지 않으면 처음 주장도 잘못이라고 하기 힘들다.
그런데 정작 비판하는 이는 그 가운데 어느 하나도 내세우지 않는다.
그리고 그런 내용 역시도 옳다고 인정하지도 않는다.
그래서 다시 이것도 의문이 될 수 있다.
그리고 중관학파가 그렇게 임하는 사정을 일반적으로 이해하기 쉽지 않다 .
그래서 이 논서 전반을 일반적입장에서 이해하기 쉽지 않다.
그래서 처음부터 이 논의가 어떤 바탕에서 제기된 것인가부터 잘 살펴야 한다.
그리고 어떤 사정으로 위와 같은 바탕에서 논의가 전개되는가를
잘 이해해야 한다.
현실에서 'S 는 P 다'의 형태로 어떤 주장이 제시된다고 하자.
이 경우 그 참거짓이 가장 첨예하게 문제되는 부분은 무엇인가부터 살펴보자.
.
S 는 P 다라는 형식이 나타낼 수 있는 내용은 대단히 많다.
책상이나 의자를 놓고 논의할 수도 있다.
그러나 한 주체에게 가장 중요한 문제는자신이나 자신의 것 이다.
그리고 그에 대해서 살피고자 하는 내용이나 측면도 대단히 많다.
그러나 결국 그것이 있는가 없는가가 중요하다.
조금 더 구체적으로 살피면
생멸 현상이 있는가. 항상한가 아닌가. 무엇인가 아닌가. 등이다.
그래서 용수보살의 중론송을 보면
불생불멸 불상부단 불일불이 불래불출(거)라는 내용을 제시한다.
즉, 여러 논의를 통해서 최종적으로 이런 내용을 제시한다.
생이란 '없다가 있는' 현상을 의미한다.
멸이란 '있다가 없는' 현상을 의미한다.
그런데 이것이 결국 기본적으로 무엇이 있고 없음의 문제와 직결된다.
'있음' + '없음'이 결합된 관념분별이 결국 '생한다'는 관념이다.
그런데 만일 '있다가 + 없음'을 부정한다고 하자.
그러면 이런 경우 '없다가 있다'를 긍정할 수도 있다.
더 나아가 '있고 있다'. 그리고 "계속해 죽 있다'를 내세울 수도 있다.
또는 '있다가 없고 그 뒤에 없음이 죽 계속된다' 이런 경우도 내세울 수 있다.
이처럼 다양한 형태를 대신 세울 수 있게 된다.
그런데 용수보살의 입장은 이 각 경우도 모두 그렇지 않다고 비판한다.
그런데 이런 형태로 논의가 진행되는 사정이 있다.
어떤 이가 생멸을 부정한다고 하자.
그렇다면 어떤 것이 '항상 죽 있음'을 내세우려는 것으로 오해하기 쉽다.
한편 '있다'를 부정한다고 하자.
그러면 이를 통해 '없다'를 내세우려는 것으로 잘못 오해하기 쉽다.
그러나 용수보살이나 제바보살은 이런 각 경우마다.
그 일체 경우가 그 사정이 '그렇지 않음'을 살피려는 취지다.
더 나아가 그러한 것을 따지고 문제삼을 S 도 세울 수 없다고 제시한다.
어떤 S도 그렇다.
그리고 그 S 의 생멸을 얻을 수 없다고 제시한다.
그런 바탕에서 그 S 의 원인을 내세울 수도 없다.
그리고 그 S 가 무엇을 원인으로 생겨난다고 내세우는 입장도 아니다.
용수보살이나 제바보살은 그런 입장에서
그 모두를 다 붙잡고 비판하려는 취지다.
즉 그 모든 경우수마다 그 사정이 모두 그렇지 않다고 제시하는 입장이다.
그런데 일반인의 입장에서는 이러한 입장이 도무지 납득이 잘 안 되게 된다.
그래서 해괴한 주장이라고만 여기게 된다.
그런데 바로 이 부분이 일반적으로 일으킨 전도망상의 문제점이다.
그래서 그 사정을 기본적으로 잘 이해할 필요가 있다.
이미 이와 관련해서 있고 없음을 따지는 문제를 많이 살폈다.
그래서 기존 내용과 중복된 부분이 많다.
그러나 이 논서 내용을 이해하기 위해 다시 간략히 살피기로 한다.
이를 다음 그림을 놓고 살피면 좋다 .
[img2-8] 8pfl--image/8식-8.jpg
어떤 이가 위 상황에서
'S 는 있다'고 주장한다고 하자.
또는 'S 는 없다'고 주장한다고 하자.
또는 'S 는 P 다'라고 주장할 수도 있다.
또는 'S 는 P 가 아니다'라고 주장할 수도 있다.
그런데 그는 어떤 바탕에서 이런 주장을 하는가를 먼저 살펴야 한다.
그러려면 우선 위 그림의 상황을 먼저 잘 살펴야 한다.
이에 관련된 유무 관련 문제를 그간 반복해 살폈다.
따라서 여기서는 간단하게 핵심만 살핀다.
지금 무언가가 있고 없고를 따지는 문제는 다음이다.
분별은 그림 6 의 영역에서 행한 분별 판단 내용이다.
이 경우 그 내용이 # 실재나 ! 감각현실 영역에서 그런 내용이 그처럼 있다
또는 없다를 제시하고자 한다.
그리고 바로 이 경우가 논서에서 다루는 논의 주제다.
이는 다음 문제다.
일상생활에서
어떤 주체가 현실에서 1,2,3,4,5 와 같은 감각현실을 얻는다.
즉 눈,귀,코,입,몸을 통해 얻는 색,성,향,미,촉 등이다.
그런 가운데 그 각 부분이 무엇이라고 분별한다.
영희는 저 부분에 서 있다.
철수는 저기 있다.
나는 여기 있다.
저기 있는 것은 바위다. 이런 식으로 분별을 행한다.
그런 가운데 영희에게 바위는 어디 있는가라고 물으면
손가락으로 1과 같은 일정부분을 가리키게 된다.
이 부분이 문제다.
그래서 우선 기본적으로 사정이 그렇지 않음을 살피게 된다.
그런데 바위를 1 부분에서 가리킨 이는
자신이나 영희 철수도 그처럼 1 부분에 있다고 손가락으로 가리킨다.
더 나아가 본 바탕인 실재# 영역에도 그런 내용이 그처럼 있다고 여긴다.
그래서 정말 그런가 아닌가를 문제삼는다.
또 그가 문제삼는 영희 철수는 참된 진짜의 실체가 있는가 없는가가 문제된다.
이 내용이 생사고통의 문제와 관련이 깊다.
그래서 이를 살피는 것이다.
물론 다른 측면에서 있고 없음을 따지는 논의가 다양하게 있을 수 있다.
그런데 이들은 모두 본 논서의 논의 초점에서 벗어난다.
예를 들어 방을 샅샅이 찾으니 책상 위에 안경이 있다.
또는 없다. 이런 식으로 있고 없음을 일반적으로 문제삼기도 한다.
이는 눈을 뜨고 빛이 비추고 있다.
그래서 무언가가 있다면 보인다. 다른 것은 보이고 있다.
그런데 찾는 안경은 지금 보이지 않는다. 그래서 없다.
또는 보인다. 그래서 있다. 이런 식의 논의다.
이런 유무 논의는 일상생활에서는 문제삼을 만하다.
그러나 논서에서는 문제삼는 초점이 아니다.
논서에서 초점으로 삼는 주제는 오히려 다음 내용들이다.
이 상황에서 그처럼 안경이라고 할 내용이 보인다고 하자.
그런데 이 상황에 중관학파는 일단 그가 생각하는 안경[관념]은
그가 보는 그 내용[감각현실]에서 본래 얻을 수 없음을 제시한다. [ 무상 해탈 ]
한편 본 바탕인 실재에서도 그가 생각하는 '안경'[관념]은 얻을 수 없음을 제시한다.
또한 실재에는 그가 얻은 감각현실과 같은 내용도 역시 얻을 수 없음을 제시한다.
[공해탈- 불가득 공]
또한 그가 찾는 안경을 얻게 하는 참된 진짜 실체는 어느 영역 어디에도 없음을 제시한다. [무아, 무자성]
이런 주제가 지금 살피는 논의 초점이고 주제다.
그런데 일반적으로 이런 주제와 관련해 제각각 잘못된 망집을 일으킨다.
그리고 엉터리 주장을 행한다.
즉 자신이 생각하는 내용이 그 각 영역에 그처럼 있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그런 가운데 현실을 실답다고 잘못 여긴다.
그리고 그런 집착에 바탕해 업을 행한다.
그래서 생사고통을 받는 상태에 처한다.
그런데 이런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위 측면에서의 유무 논의가 중요하다.
따라서 위 측면의 유무 논의가 필요하다.
다른 측면은 그렇지 않다.
그래서 논의의 초점을 혼동하지 않아야 한다.
그리고 논의 초점을 먼저 잘 파악해야 한다.
이 논의초점을 파악하지 못한다고 하자.
그러면 각 논서에 제시된 표현이 가리키는 내용 자체를 이해하기 곤란하다.
그러면 혼동을 발생시킨다.
그런데 사실상 상대 주장자는 어느 정도 그런 전도몽상을 일으킨 상태다.
그리고 그런 바탕에서 분별을 행하고 주장을 내세워 고집하는 상태다.
즉, 그는 위와 같은 상태에서 각 영역의 내용을 겹쳐 놓고 이를 대한다.
그리고 그런 기본 사정 자체를 파악하지 못한다.
그런 상태에서 이들 유무 등의 논의를 행하는 상태다.
즉, 그 주장자가 그런 망집을 바탕으로 논의에 임한다.
즉, 그가 S 나 P M 이런 관념을 세우고 논의한다고 하자.
그리고 그 추론이나 논의에 일정한 추론 체계도 사용한다.
이 상황에서 그는 그런 내용이 모두 # 실재나 ! 감각현실에서도
당연히 적용되는 것으로 기본적으로 망상을 일으킨 상태다.
그리고 그런 상태에서 논의를 행한다.
그런데 이를 대하는 이들도 그 사정이 비슷하다.
그처럼 잘못된 망집을 바탕으로 이 논의를 시작한다.
그리고 그 망집을 바탕으로 매 내용마다 혼동을 일으키고 대하기 쉽다.
이것이 처음 해결할 기본 문제다.
그리고 용수보살과 제바보살을 포함해
이 문제점을 시정하기 위해서
다양한 설명을 진행하는 것이다.
그리고 다른 경전이나 논서도 그 사정은 마찬가지다.
그래서 S 는 있다거나 S 는 P 다 아니다 이런 논의할 때는
이들 논의가 행해지는 배경 사정부터 잘 파악해야 한다.
그간 이들 내용을 많이 살폈다.
그래서 중복을 피하고 생략하기로 한다.
이후에는 추가 보충이 필요한 부분만 따로 살펴나가기로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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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ngi1022
◈Lab value 불기2561/09/09 |
○ 2020_0930_134431_can_AB2.jpg ○ [pt op tr] 예술작품 사진 공양, 나무불, 나무법, 나무승 Fyodor-Solntsev-polish-coat-of-peter-the-great.jpg!HD ○ 2020_0606_141011_can.jpg ○ [pt op tr] 꽃 공양, 나무불, 나무법, 나무승 ○ [pt op tr] 아름다운 사진 공양, 나무불, 나무법, 나무승 Swaziland_-_Portable_market_hut_in_Mbabane ♥Cetinje, Montenegro ○ [pt op tr] 아름다운 풍경사진 공양, 나무불, 나무법, 나무승 With the image 'Google Earth & Map data: Google, DigitalGlobe' Čeština: Pohled na Cetinje, historickou metropoli Černé Hory Date 25 February 2008, 15:01 Source IMG_4065.JPG Author cheran Permission & Licensing : Wikipedia https://buddhism007.tistory.com/5683 Serge Reggiani - Les Bienfaits De La Lune ○ [pt op tr] mus0fl--Cyril Mokaiesh - Des Mots.lrc Brandt_Józef_Pospolite_ruszenie_u_brodu https://en.wikipedia.org/wiki/File:Brandt_Józef_Pospolite_ruszenie_u_brodu.jpg Pospolite ruszenie u brodu, Józef Brandt ♥단상♥문자의 옥과 if 논의 『백자론』 을 살핀다. 그런데 올려진 노래나 사진도 논서의 내용과 관련되어 보인다. 올려진 노래제목 Des Mots 은 말 (word )을 의미한다. 가슴 아프게 하는 말은 가슴에 대못을 박는다라고도 표현한다. 언어가 각 개인에게 오래 상처를 주기 쉽다. 그리고 불쾌와 고통을 주는 원인이 된다. 예를 들어 50 년이 지나도 과거 말로써 상처를 받은 일이 떠오르기 쉽다. 또 그 상황으로 돌아가 분노를 일으키기 쉽다. 그리고 말은 전도몽상 증상을 악화시킨다. 그리고 증폭시킨다. 이런 사정 때문에 논서를 저술한 제바보살이 장수하지 못한 것으로 전해진다. 제바보살은 이런 형태로 파사현정의 활동을 하였다. 그래서 상대의 주장을 논파하였다. 그래서 외도로부터 지극히 미움을 받았다고 한다. 그러나 이런 현상은 외도 입장에서 보는 내용이다. 논서를 쓴 제바보살 입장에서는 본래 생사를 얻을 수 없다. 따라서 이는 처음부터 문제가 되지 않는다. 다만 여하튼 그 외도가 이런 방안을 통해 제도가 잘 되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여하튼 전도몽상 증상을 해소하기 위해서도 역시 이 말에 의존해야만 한다. 그래서 말은 양면성을 갖는다. 논서를 읽다 보면 갑론 을박의 주장에 혼동을 느끼게 된다. 그래서 각 주장을 잘 구분해 살펴야 한다. 일반 입장에서는 오히려 불교 입장을 현실에 맞지 않는 억지 궤변처럼 여기기 쉽다. 그리고 외도라고 표시된 쪽의 주장에 공감하기 쉽다. 이는 바로 전도몽상 증상에 기인한다. 그러나 이렇게 제시하면 오히려 분노를 일으키고 시시비비를 제기하기 쉽다. 이전에도 그에 관련된 문제점을 제시했다. 그런데 대부분 이로 인해 지옥과 같은 고통을 받게 된다. 그 대표적 사례가 '제바달다'라는 인물이다. 여기서 제바보살의 입장은 가정적 항변 또는 if 논의 성격을 갖는다. 이 점을 먼저 잘 이해해야 한다. 중관학파 논서는 대부분 이런 성격을 갖고 있다. 그래서 이런 사정부터 먼저 잘 이해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논서를 보아도 제바보살의 주장을 단지 궤변으로 이해하기 쉽다. 따라서 이 사정을 이해해야 한다. 그래야 의미를 파악할 수 있다. 그리고 각 부분이 무엇을 놓고 논의하는지도 파악할 수 있다. 한편 어떤 사정으로 외도 주장이 엉터리인가도 이해할 수 있다. 세계나 자신의 정체에 대해 언어로 제시하려 한다고 하자. 그런 경우에는 불교 입장처럼 제시해야 그나마 본 정체에 가깝게 표현한 것이 된다. 한편 이 논서에는 논리에 관련된 내용이 많다. 이런 사정을 기존에 많이 반복했다. 다만 이런 논의를 통해 전도몽상을 시정하는 것이 쉽지 않다. 어려움이 많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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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반(涅槃)을 번역한 말. 나고 죽는 큰 환난을 없애어 번뇌의 바다를 건넜다는 뜻.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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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상(明相)
명호(名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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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간지옥(無間地獄)
무기(無記)
ॐ मणि पद्मे 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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