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 | 월 | 화 | 수 | 목 | 금 | 토 |
---|---|---|---|---|---|---|
1 | 2 | |||||
3 | 4 | 5 | 6 | 7 | 8 | 9 |
10 | 11 | 12 | 13 | 14 | 15 | 16 |
17 | 18 | 19 | 20 | 21 | 22 | 23 |
24 | 25 | 26 | 27 | 28 | 29 | 30 |
- Japan
- 정법화경
- 중아함경
- 유가사지론
- 마하승기율
- 대반야바라밀다경
- 아미타불
- 대지도론
- 대방광불화엄경60권본
- 유마경
- 종경록
- 백유경
- 수능엄경
- 반야심경
- 잡아함경
- 마하반야바라밀경
- 방광반야경
- 금강삼매경론
- 증일아함경
- 장아함경
- 대반열반경
- 대방광불화엄경
- 가섭결경
- 대승기신론
- 묘법연화경
- 무량의경
- 원각경
- 마명
- 유마힐소설경
- 근본설일체유부비나야
- Since
- 2551.04.04 00:39
- ™The Realization of The Good & The Right In Wisdom & Nirvāṇa Happiness, 善現智福
- ॐ मणि पद्मे हूँ
불교진리와실천
불기2561-09-08_대반열반경-K0105-002 본문
『대반열반경』
K0105
T0374
제2권
● 한글대장경 해당부분 열람I
● 한글대장경 해당부분 열람II
○ 통합대장경 사이트 안내
○ 해제[있는경우]
● TTS 음성듣기 안내
※ 이하 부분은 위 대장경 부분에 대해
참조자료를 붙여 자유롭게 연구하는 내용을 적는 공간입니다.
대장경 열람은 위 부분을 참조해주십시오.
● 자료출처 불교학술원 기금 후원안내페이지
『대반열반경』 ♣0105-002♧
제2권
♥아래 부분은 현재 작성 및 정리 중인 미완성 상태의 글입니다♥
❋본문
◎[개별논의]
○ [pt op tr]
○ 2020_0906_124646_can_ori_rs
❋❋본문 ♥ ◎[개별논의]
K0105V09P0010b01L; 大般涅槃經卷第二
대반열반경 제2권
북량 천축삼장 담무참 한역
대반열반경 제2권
1. 수명품②
[...]
◎◎[개별논의] ♥ ❋본문
♥아래 부분은 현재 작성 및 정리 중인 미완성 상태의 글입니다♥
❋본문 ◎[개별논의]
● 자신과 유무에 대한 망집과 열반경의 가르침
○ 자신에 대한 망상분별
현실에서 자신이 자신으로 보는 부분이 있다.
그런데 그런 부분을 자신이라고 여기는 것은 잘못된 분별이다.
그런데 그런 부분을 자신으로 여기게 되는 사정이 있다.
일상생활에서 다음과 같은 경험을 통해 그런 부분을 자신으로 잘못 여기게 된다.
우선 자신이라고 보는 부분은 볼 때마다 늘 대하게 된다고 여긴다.
그에 반해 다른 부분은 매번 들고 나고 변한다.
그래서 들고 나는 부분은 손님으로 여기고
늘 있는 것처럼 파악되는 부분을 스스로 자신이라고 여기게끔 된다. => 상
또 그 부분은 자신이 어디론가 가려고 하면 그 뜻대로 움직인다. 나머지 부분은 그렇지 않다.
그래서 그 부분은 자신 뜻대로 되고 즐거움을 주는 부분으로서 자신이라고 여기게 된다. => 락
그리고 그런 부분이 다른 부분을 대하면 촉감을 얻는 경험을 한다.
그래서 그 부분이 다른 부분에 대해 어떤 내용을 얻는 주관이 위치한 부분으로 여긴다.
즉, 그 부분은 주관이 되고 나머지 부분은 그 부분이 대하는 외부대상이라고 잘못 여긴다. => 아
그런 가운데 그런 자신의 몸에 애착을 갖게 된다.
그래서 그 부분은 깨끗하고 소중한 부분이라고 여기게 된다. => 정
대강 위와 같은 계기로 현실에서 일정한 부분을 자신이라고 보게 된다.
그래서 그런 부분을 자신이라고 잘못 여기게 된다.
그런데 이는 잘못되고 뒤집혀진 전도망상이다.
즉, 엉터리고 거꾸로 뒤집힌 판단이다.
그래서 그렇게 현실에서 대부분 그런 내용을 놓고 자신이라고 잘못 이해하면 안 된다.
◧◧◧ para-end-return ◧◧◧
● 자신에 대한 망상분별의 제거
평소 자신이라고 여긴 부분이 있다고 하자.
그런 부분은 늘 자신이 일정하게 대한다고 잘못 여길 수 있다.
그러나 그런 부분은 결코 영원하지 않다.
5 살 때 그처럼 자신이라고 본 모습이 있다고 하자.
한편 50 살이 된 때에도 그처럼 자신이라고 보는 모습이 있다.
이 두 모습은 정신과 육체의 내용면에서 모두 다르다.
한편 그 부분은 자신의 뜻에 의해서 생노병사과정을 겪는 것이 아니다.
또 이들 일체는 마음내용이다. 그래서 이들 부분은 주관이 위치한 부분이 아니다.
그래서 평소 자신이나 자신의 것이라고 여긴 내용에 대해 집착하고 임하면 안 된다.
그런 분별이 잘못임은 다음처럼 살필 수 있다.
○ 늘 일정하게 고정된 부분으로서 자신에 대한 망상분별
평소 자신으로 여긴 부분은 마음 내용이다.
그것은 다른 부분과 마찬가지로 그 마음에 담기는 손님과 같은 객진번뇌에 해당한다.
처음 자신이라고 여긴 일정한 부분이 있다고 하자.
이런 부분이 늘 주인으로 고정되어 머무는 것인가부터 살펴보자.
우선 현실에서 현재 스스로 자신이라고 보는 부분을 자신이라고 여긴다고 하자.
그런데 자신이 지금 37 살 정도라고 하자.
그런데 자신이 아이때에도 그처럼 여긴 부분이 있었다.
이 두 내용을 놓고 비교해보자.
그렇게 하나하나 비교해보면 20 년전 30 년전 당시 자신이라고 본 모습은 하나도 남김없이 사라졌다.
예를 들어 5 살 때 몸이나 17 살 당시 스스로 자신이라고 여긴 몸은 이미 없어져 버렸다.
육체와 마찬가지로 정신적 내용물도 바뀌었다.
이를 다음처럼 비유로 이해해보자.
어떤 이가 레고블럭으로 무언가를 만들기를 한다고 하자.
그리고 처음 한 쪽에 사람 모습을 만들었다고 하자.
그 후 부품을 하나씩 조금씩 떼고 다른 부품을 여기에 옮겨 붙인다고 하자.
시간이 지나면 처음 형태를 구성한 부품은 다 밖으로 사라진다.
그리고 밖에 있던 부품들이 원래의 형태에 붙여지게 된다.
예를 들어 처음 형태가 abcdefghij 였다고 하자.
그 뒤에 하나씩 부품이 떨어지고 새로 숫자 부품이 붙어진다고 가정해보자.
그런 경우 시간이 지나면 다음과 같은 형태로 바뀐다.
abcdefghij
bcdefghij1
cdefghij12
defghij123
efghij1234
fghij12345
ghij123456
hij1234567
ij12345678
j123456789
1234567890
즉 처음 형태를 구성한 부품은 다 사라지고 새 부품으로 모두 교체된다
그런 변화과정에서 구성부품만 달라지는 것은 아니다.
그 형태도 달라진다.
현실 삶에서 이런 과정이 호흡과 식사 흡수 배설 과정에서 이뤄진다.
정신적 내용도 이와 사정이 같다.
그래서 처음 5 살 때 스스로 자신으로 여긴 부분을 자신이라고 여긴다고 하자.
한 주체는 이 과정에서 식사 전에 있던 식품을 자신으로 여기지 않는다.
또 배설후 배설된 소대변을 자신으로 여기지도 않는다.
매번 구성부품과 형태가 조금씩 달라지는 부분을 붙잡고 자신으로 여긴다.
그러나 그 내용은 매 순간 전후가 달라진다.
이것을 시간을 오래 두고 보면 앞과 뒤는 그 형태나 구성부품이 완전히 달라지게 된다.
이들 각 내용들에서는 끝내 계속 유지되는 어떤 것을 찾기 힘들다.
그렇다면 그런 자신은 10 여년 지난 후에는 이미 없어져 사망한 것과 같다.
그런데 그 그 상황에서 과거의 자신에 대해 장례식도 치루지 않았다.
그리고 태연하게 생활하고 있다.
그런데 일반적으로 그것을 아쉬어 하지는 않는다.
그리고 이를 놓고 매 순간 통곡하며 지내지는 않는다.
그러다가 이제 완전히 형태가 달라지면 그 주체는 사망했다고 여긴다.
그리고 이제는 더 이상 그와 관련된 것은 전혀 없게 되었다고 여기게 된다. [단멸관]
그러나 그 사정이 그렇지 않음을 되짚어 보아야 한다.
즉 평소에도 자신으로 여긴 부분은 다른 부분처럼 매순간 들고 나는 것이다.
다만 정도 차이가 있을 뿐이다.
그래서 일정 부분은 늘 일정하게 유지되는 것으로서 그런 부분이 자신이라고 여기는 것은 잘못이다.
○ 자신의 뜻대로 움직이는 부분으로서 자신에 대한 망상분별
한편 자신의 신체 부분은 자신의 뜻처럼 움직일 수 있다고 여긴다.
그리고 자신의 몸이 자신의 뜻과 같이 움직이고 변한다고 여긴다.
그런데 알고보면 이 부분은 자신의 뜻에 그처럼 잘 따르지 않는다.
예를 들어 자신은 병들지 않기를 원한다.
그런데도 병이 든다.
또 자신은 늙지 않기를 원한다 .
그런데도 자신의 몸은 늙는다.
또 자신은 죽지 않고 게속해서 그대로 살아가기를 바란다.
그런데도 자신의 몸은 끝내 허물어지고 죽음을 맞이하게 된다.
그런 가운데 생사를 반복해 가게 된다.
이런 각 과정은 그 자신의 뜻과 같지 않다.
그 생사과정에서 겪는 생노병사 현상이 다 자신의 뜻처럼 되지 않는다.
그런데 평소 이런 부분을 자신의 뜻처럼 움직이는 부분이라고 여긴다.
그리고 집착을 갖는다.
그래서 그렇게 되는 사정을 잘 검토해 봐야 한다.
예를 들어 지금 스스로 자신으로 여기고 대하는 부분을 잘 검토해보기로 하자.
또 자신이 움직이고자 하면 자신 뜻과 같이 그 부분이 움직인다고 여기게 된다.
그런 사정으로 그것이 자신이라고 여긴다고 하자.
그런데 그런 경우 다음 경우를 놓고 비유적으로 생각해보아야 한다.
예를 들어 어떤 이가 평소 버스를 운전하고 다닌다고 하자.
그런데 앞과 같은 사정으로 일정부분을 자신으로 여긴다고 하자.
그렇다면 버스를 운전하는 이는 매번 버스 전체를 자신이라고 여겨야 할 것이다
그래서 그런 상황에서 버스 운전사가 버스 전체를 자신의 몸이라고 여긴다고 하자.
그런데 버스에 탄 승객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내릴 곳에서 내리고 탈 곳에서 탈 것이다.
물론 운전사도 차를 내리고 난 후는 일반인처럼 몸만을 자신이라고 여기게 될 것이다.
그리고 그 부분만 끌고 집에 들어갈 것이다.
그런데 평소 자신이 자신의 몸으로 여기는 부분도 사실은 사정이 그와 같다.
그래서 자신의 몸안에서 살아가는 세균과 자신의 관계도 앞 사정과 비슷하다.
몸안의 세균이나 기생충은 마치 몸이라는 버스에 탄 승객과 같다.
그리고 몸을 끌고 다니는 자신은 마치 이들이 타고 있는 버스 운전사와 비슷하다.
이 상황에서 자신은 일정 부분을 자신의 몸으로 여긴다.
그러나 세균 등 다른 주체들은 그 부분을 그렇게 보지 않는다.
예를 들어 몸안에 있는 다른 세균이나 바이러스 기생충을 놓고 생각해보자.
이들은 하나같이 자신의 몸을 그들의 집이나 식량 정도로 여기고 대한다.
이와 사정이 같다.
결국 자신의 뜻에 따라 일시적으로 움직인다고 해서 그 부분을 자신으로 여기는 것은 적절하지 않다.
○ 대상에 대한 주관으로서 자신에 대한 망상분별
현실에서 자신이 눈을 떠서 세상의 모습을 본다.
그런데 평소 자신이 눈을 떠 얻는 내용 가운데 자신과 외부를 구분한다.
이런 경우 자신이 본 모습 대부분을 일반적으로 외부 대상으로 잘못 여긴다.
그리고 평소 이를 외부 세계로 여기고 대한다.
그리고 이처럼 자신이 본 내용에는 스스로 자신의 몸으로 보는 부분도 있다.
그래서 이 부분을 자신의 몸으로 여긴다.
그리고 이 부분에 자신의 감관이 위치한다고 잘못 여긴다.
그리고 이 부분을 자신의 주관이 위치한 부분으로서 자신이라고 잘못 여긴다.
그리고 이 부분이 다른 부분 (즉 외부세계)를 대상으로 하여 서로 관계해 내용을 얻게 된다고 잘못 여긴다.
한편 이 경우 자신의 몸으로 여긴 부분에 자신의 마음이 위치한다고 다시 잘못 여긴다.
그런데 이들 모두는 사실 자신의 마음이 얻어 놓은 마음안 내용물이다.
즉, 평소 외부 세계나 자신의 몸으로 여긴 부분 모두가 그러하다.
즉 이들 내용 일체는 마음이 얻어낸 내용이다.
따라서 자신의 몸이라고 여긴 부분도 자신의 마음이 얻어낸 내용의 일부분이다.
한편 마음은 마음이 얻어낸 내용물 일부[신체로 보는 부분]에 위치하는 것이 아니다.
한편 마음안 내용들 가운데 각 부분이 서로 관계해 그 마음 내용을 얻어내는 것도 아니다.
즉 [신체로 본 부분]과 [외부세계로 본 부분]은 다 함께 마음안 내용이다.
이처럼 마음안 내용들이 서로 관계하여 그 마음내용을 얻어낸 것이 아니다.
그래서 [신체로 본 부분]은 감관이 위치하는 부분이 아니다.
그리고 외부 대상을 상대해 어떤 내용을 얻는 주관이 위치한 부분도 아니다.
그것은 모두 마음이 얻어진 결과로서 마음안내용이다.
그래서 얻어진 결과물로서 마음안 내용의 한 부분이 어떤 감각을 행하는 것이 아니다.
그래서 이런 판단은 거꾸로 뒤집힌 잘못된 판단이다.
따라서 이는 잘못된 망상분별이다.
그러나 대부분 이처럼 현실을 잘못 이해한다.
한 주체가 생사현실에서 얻어낸 내용 일체는 마음내용이다.
자신이 생사현실에서 얻어내는 내용들은 하나같이 성격이 위와 같다.
그리고 그 안에는 '그런 내용을 얻게한 외부 대상' 역시 존재하지 않는다.
이를 '유식무경'이라고 표현한다.
○ 자신이 깨끗하다고 여기며 집착을 일으키는 망상분별
현실에서 자신의 몸으로 여기는 부분을 자신으로 여긴다.
그리고 집착을 갖고 애착한다.
그러나 이런 내용은 무상하고 깨끗하지 않다.
따라서 이에 대해 집착을 제거해야 한다.
예를 들어 조금만 피부를 벗기면 피고름이 나온다.
안에는 대소변이 가득하다.
그리고 죽은 후에는 부풀어 터지고 허물어지고 피가 흐른다.
고름이 흘러 나온다.
시체는 푸르딩딩해진다.
새나 벌레가 파먹는다.
뼈와 살이 흩어진다.
나중엔 뼈만 남는다.
그리고 불타고 재만 남는다.
경전에서 이런 내용을 관해 집착을 제거한다.
이를 부정관 및 9 상이라고 한다.
현실에서 그처럼 매순간 애착을 갖고 그런 부분을 대한다.
이는 파리나 지렁이나 바퀴벌레도 역시 사정이 같다.
그러나 객관적으로 그런 부분은 그처럼 애착을 가질만큼 좋은 것은 아니다.
◧◧◧ para-end-return ◧◧◧
● 망집이 초래하는 생사고통의 해결과 수행
생사현실에서는 각 주체가 잘못된 망상분별을 일으켜 생을 출발하고 임하게 되는 배경사정이 있다.
근본정신을 바탕으로 일정한 정신의 기제로 그렇게 망상을 일으키게 된다.
그런 바탕에서 그런 정신기제를 바탕으로 삶을 출발하게 된다. [3능변]
그리고 그런 바탕에서 현실에 임하면 일정한 부분을 자신이라고 잘못 여기고 대하게 된다. [구생기신견]
그리고 이후 살아가면서도 그에 바탕해 일정부분을 그처럼 자신이라고 잘못 여기며 분별하게끔 된다. [분별기신견]
그리고 매 순간 그처럼 그런 부분을 자신으로 잘못 여기면서 끌고 다니게 된다.
그런 가운데 평소 그런 부분들을 그런 것이라고 여기면서 취한다.
그리고 그런 상태로 머물고 그에 바탕해 생각하고 말하고 행위해나간다.
그런 가운데 생사고통을 받는 상태에 처하게 된다.
그런 망상분별을 가진 상태에서는 그런 상황에서 고통을 겪지 않을 수 없다.
평소 자신이라고 여기고 대하는 것은 그 실질이 자신이 걸친 옷과 같은 것이다.
또는 자신이 매일 신고다니는 신발과 성격이 같다.
그리고 그것은 신발에 붙은 먼지나 손님과 같다. [객진번뇌]
그런데 그런 부분을 엉뚱하게 자신이라고 잘못 여기고 집착한다고 하자.
그러면 그런 망상에 바탕해 집착을 갖고 이를 대한다.
어느 상황도 본 사정은 그렇지 않다.
그런데도 망집에 바탕해 매순간 그렇게 임하게 된다.
일반적으로 현실에서 각 주체가 바삐 생활한다.
그리고 여기저기 바삐 오고 간다.
그래서 살아서 죽을 때까지 그런 번뇌에 묶여 번뇌의 사역을 당하게 된다.
그리고 그런 바탕에서 업을 행해 나가게 된다.
그러면 자연스럽게 서로 간에 가해와 피해를 주고 받는 관계에 놓이게 된다.
그리고 업의 장애가 쌓이게 된다.
그리고 그런 업장으로 인해 생사고통을 받게 된다.
그리고 서로 그런 바탕에서 생사의 묶임에서 벗어나지 못하게 된다.
그런 가운데 생사를 겪는다.
그리고 여기서 태어나서 저기에서 장레식을 치루고 사라진다.
이처럼 망상증에 걸린 이들이 생사현실 안에서 이처럼 각 상황에 임한다.
그리고 그처럼 망집에 바탕해 업을 행하면 그로 인해 이처럼 생사고통에 묶이게 된다.
그리고 매생마다 생사를 거쳐가며 각 세계로 묶여 끌려가게 된다.
그리고 매생마다 생이 단절되고 끊기게 된다.
그런 가운데 생사고통을 무한히 받아나가게 된다. [분단생사]
그리고 생사과정에서 매순간 자신과 자신의 것으로 여기고 집착하는 것이 있다.
그런데 그는 생사 과정에서 그가 집착한 것을 하나도 가져가지도 못한다.
그런 가운데 자신을 묶어 사역을 시킨 이가 다시 이어 이를 취하게 된다.
예를 들어 어리석은 축생은 인간에게 잡혀 축사에서 생활한다.
그런 가운데 목동은 살아 있을 때는 젖을 취한다.
그러다가 축생이 그 상태로 죽는다고 하자.
그러면 그 축생은 아무 것도 가져가지 못한다.
그리고 죽은 후 남은 목장 주인이 그 살과 고기로 수익을 얻는다.
그런데 한편 목장 주인도 또 다른 이와의 관계가 다시 이와 크게 다르지 않다.
욕계내 생사현실의 사정이 이와 같다.
이들은 그처럼 다 함께 서로 얽혀 그처럼 생사고통을 무한이 받아나간다.
그런데 일반적으로 이런 사정을 이해하지 못한다.
그리고 자신의 망집을 편벽되게 고집한다.
그리고 죽음도 그런 입장에서 이해한다.
그래서 죽으면 그후 그 자신과 관련된 것은 아무 것도 없다고 잘못 여긴다. [단멸관]
그리고 그런 바탕에서 수행자가 성취하는 열반에 대해서도 잘못 이해한다.
처음에 무언가가 실답게 있다고 망상을 일으키는 것도 문제다.
그런데 실다운 것이 없음을 이해하게 된다고 하자.
그렇다고 해서 본 바탕의 공한 실재나 생사현실에 아무 것도 전혀 없다고 치우쳐 이해하는 것도 잘못이다.
그래서 이 양 측면의 잘못된 견해를 다 함께 시정해야 한다.
그래서 열반경에서도 다시 열반의 상태를 상 락 아 정이라고 표현해 제시하는 사정이 있다.
◧◧◧ para-end-return ◧◧◧
● 망집이 초래하는 생사고통의 해결과 수행
처음 일으킨 망집은 엉터리다.
그런 망집을 바탕으로 있다고 여긴 내용도 모두 엉터리다.
따라서 그런 망집에 바탕해서 업을 행하면 안 된다.
그런 망집에 바탕해 업을 행한다고 하자.
그러면 그로 인해 그런 바탕에서 생사고통을 겪는 상태에 처하게 된다.
즉, 극심한 고통을 받는 축생 세계나 아귀 지옥의 3 악도의 세계에 묶이게 된다.
그리고 이후 그런 상태에서 벗어나기 힘들게 된다.
그리고 그처럼 당장 생사고통을 극심하게 받는 상태에 처해서 벗어나는 것은 힘들다.
그래서 그 원인이 되는 단계에서 미리 이를 원인을 제거해 예방해야 한다.
이는 마치 낭떨어지에 떨어져 다리가 부러지는 사고를 당하는 경우와 같다.
떨어진 후 치료를 받는 것보다 미리 떨어지지 않도록 예방하는 것이 훨씬 낫다.
생사현실안의 고통도 그처럼 미리 예방하는 것이 훨씬 낫다.
그래서 그런 상태에 처하게 하는 업을 미리 중단해야 한다.
또 업을 중단하려면 그런 업을 행하게 하는 망집을 제거해야 한다.
생사고통의 근본원인은 망상분별과 집착이다.
망상분별 자체만 놓고 보면 큰 문제가 없는 듯 여길 수 있다.
세상을 이렇게 여기던 저렇게 여기던 그 자체로는 큰 문제가 없는 듯 하다.
그러나 위와 같은 사정으로 망상분별을 제거하는 것이 필요하다.
그래서 이를 미리 제거해야 한다.
부처님은 중생들이 일으키는 이런 망집을 시정하기 위해
무상, 고, 무아무자성, 열반적정, 공과 같은 기본 가르침을 제시한다.
이런 가르침을 통해 일반적으로 갖는 우선 집착을 제거할 수 있다.
그래서 집착에 바탕해 행하던 업을 중단할 수 있다.
한편 그것만으로 생사의 묶임에서 바로 벗어나기 힘들다.
이미 오랜 기간 망집에 바탕해 업을 행해 업장을 쌓아 놓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수행을 통해 업의 장애를 해소시켜야 한다.
그래서 이런 상태와 관계를 벗어나야 한다.
근본적으로 생사묶임에서 벗어나려면 망상분별을 제거해야 한다.
그래서 망집의 제거가 수행에 있어서 대단히 중요하다.
그러나 생사현실에서 곧바로 망집을 제거하는 것이 쉽지는 않다.
그래서 그런 망집을 계속 갖고 임하는 경우라고 해도 일단 극심한 생사고통에 처하는 것을 예방해야 한다.
그래서 계의 덕목에 해당하는 수행을 기본적으로 성취해야 한다.
그렇게 해야 생사고통에 처하게 되는 업장을 해소할 수 있게 된다.
그리고 업장이 다 해소되면 복덕자량이 그로 인해 쌓이게 된다.
그리고 인간과 하늘세계를 오가는 상태가 될 수 있다.
한편 평소 자신으로 여기는 부분이 망가져서 당장 고통을 겪게 된다고 하자.
그런 경우에도 망집을 일으켜서 상을 취하고 임하면 곤란하다.
생사현실에서 자신과 자신의 것으로 여기는 것이 그런 부분에 있다고 여기면 곤란하다.
본 사정이 그렇지 않음을 잘 이해하고 상을 취하고 임하지 않아야 한다.
그리고 그에 대해 집착을 갖고 대하지 않아야 한다.
즉 무상해탈문으로 통해 그런 상황을 잘 극복해야 한다.
그래서 그런 상황에서도 평안히 참고 임해야 한다.
그리고 이것이 안인을 성취하는 방안이기도 하다.
『금강경』에서도 이런 사정을 제시한다.
생사현실의 상황을 올바로 관한다고 하자.
그리고 있는 그대로 그것을 잘 관하고 대한다고 하자.
그런 경우 그런 현실에 그런 내용을 얻을 수 없음을 이해하게 된다. .
그런 가운데 수행자는 기본적으로 망집을 제거하고 생사의 묶임에서 벗어나 해탈을 한다.
그리고 니르바나의 상태에 이른다.
따라서 수행자는 무상해탈문을 통해 그런 증상에서 벗어나와야 한다.
수행 과정에서 망상분별을 제거하는 것이 중요하다.
망상분별을 제거해야 수행도 원만히 성취해갈 수 있다.
수행은 일반적으로 망집에 바탕할 때 대단히 행하기 어려운 내용들이다.
예를 들어 일반적으로 좋은 것을 대할 때 탐욕을 일으키고 아끼게 된다.
그런데 수행자는 이를 아끼지 않고 남에게 베풀어야 한다. [보시]
일반적으로 자신의 좋음을 얻기 위해 다른 생명이 집착하는 것을 함부로 침해한다.
그러나 다른 생명이 집착하는 것[생명, 신체, 재산,,등]을 함부로 침해하지 않아야 한다 [ 정계]
한편 자신을 다른 생명이 침해하면 불같이 분노를 일으킨다.
그리고 미움과 원망을 갖고 보복하며 해를 가하게 된다.
그러나 이런 경우에도 상을 일으켜 취하지 않고 평안히 참아야 한다.
그리고 미움과 원망을 일으키지 않고 자비심으로 대해야 한다. [ 안인 ]
한편, 없는 선은 새로 만들고, 있는 선은 키워야 한다.
그리고 없는 악은 새로 만들지 않고 있는 악은 키우지 않아야 한다.
이처럼 수행에 끊임없이 정진해야 한다. [ 정진]
그런데 망집에 바탕할 때 이런 각 수행은 대단히 행하기 힘들게 된다.
그래서 생사현실에서 이처럼 집착을 갖게 되는 것의 본 정체를 잘 파악해야 한다.
그래서 망집을 제거해야 한다.
그런 상태가 되어야 이런 기본적인 수행도 함께 원만히 잘 성취할 수 있게 된다.
그리고 이처럼 계의 덕목에 해당하는 수행이 원만히 성취되어야 복덕자량을 얻게 된다.
그리고 복덕자량이 쌓여야 지혜 자량을 구족해갈 수 있게 된다.
◧◧◧ para-end-return ◧◧◧
●망집제거와 생사현실
수행에 있어서 망집의 제거가 대단히 중요하다.
그런데 망집을 일으킨 경우 이런 상황에 대해 다음처럼 잘못 여기고 걱정한다.
예를 들어 어떤 이가 평소 무언가를 자신이나 자신의 것이라고 잘못 분별하고 있었다.
그런데 이제 그런 잘못된 망상분별을 제거한다고 하자.
그렇게 되면 이제 평소 자신이나 자신의 것이라고 여기고 집착했던 것들이 다 사라진다고 잘못 여기기 쉽다.
그래서 걱정하기도 한다.
그러나 망집을 제거한다고 해서 그로 인해 전혀 아무 것도 없게 되는 것은 아니다.
단지 그런 상황에서 잘못된 망집만 제거되는 것이다.
예를 들어 현실에서 어떤 이가 감각현실을 얻는다.
그리고 그에 대해 일정한 관념분별을 일으킨다.
그리고 이를 재료로 망상분별을 일으킨다.
그런 가운데 감각현실의 한 부분을 자신이라고 잘못 여기고 대한다.
그리고 그는 평소 그 부분을 자신으로 여기고 집착을 갖고 있었다.
그런데 그런 부분을 자신이라고 여기는 것은 잘못된 망상분별이다.
그런데 그런 망상분별을 제거한다고 해서 그런 부분이 곧바로 없어지는 것이 아니다.
망집을 제거하면 그 상황에서 잘못된 망상분별과 집착만 없어진다.
그리고 처음 망집을 일으켰던 재료 자체는 그와 관계가 없다.
즉 그 상황에서 그가 얻던 감각현실은 그대로다.
그리고 그가 일으킨 관념분별도 그대로다.
또 본 바탕인 실재영역도 마찬가지다.
본 바탕에 어떤 생멸이나 늘고 줆을 얻을 수 없다.
다만 그 상황에서 본래 없던 것을 있다고 여긴 망집만 사라지는 것뿐이다.
또한 매 상황 그런 망집을 일으키고 임하였던 실질적인 자신도 그와 관계가 없다.
그래서 그 사정을 잘 이해해야 한다.
이를 비유로 좀 더 자세하게 이해해보자.
어떤 이가 어떤 지갑을 자신의 것이라고 잘못 여겼다고 하자.
그런데 그렇게 잘못 여겼다고 그 지갑이 자신의 것이 되는 것은 아니다.
물론 처음 그 지갑이 그런 잘못된 망상을 일으킨 재료가 되어주었다.
그래서 그 지갑을 자신의 것으로 잘못 여기고 임했던 것 뿐이다.
즉, 그는 그 상황에서 엉뚱하게 그 지갑을 자신의 것으로 여겨 집착을 가졌을 뿐이다.
그런데 어느 순간 그 지갑이 자신의 것이 아님을 이해했다고 하자.
그래서 그런 망상분별을 제거한다고 하자.
그런 경우 그로 인해 마치 자신의 지갑이 갑자기 없어진 것처럼 잘못 여길 수 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그 지갑 자체가 어디로 없어지게 되는 것은 아니다.
다만 그 지갑을 자신으로 잘못 여긴 망상분별만 제거되는 것이다.
그 지갑은 그대로 전처럼 있다.
그런데 그 지갑은 처음부터 자신의 것이 아니었던 것이다.
그래서 망집을 벗어남으로 인해 자신의 지갑이었던 것이, 그로 인해 사라지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그대로 있는 것이다.
다만 원래부터 자신이 것이 아닌 지갑을 자신이 아닌 것으로 올바로 이해하고 대하게 되는 것 뿐이다.
한편, 자신의 본래 지갑도 이와는 관계없다.
예를 들어 자신의 지갑은 집에 그대로 있을 수 있다.
그래서 이와 관계없이 자신의 지갑은 지갑대로 따로 찾아봐야 할 문제가 된다.
생사현실에서 일으키는 망상도 사정이 이와 같다.
위와 같은 비유로 이 망집과 그 제거를 잘 살펴 이해해야 한다.
현실에서 각 주체는 실재를 본바탕으로 한 가운데 감각현실 - 관념분별을 얻는다.
감각현실은 마음내용이다.
그리고 감각현실은 관념내용도 아니다.
그리고 그런 부분은 자신이라고 여길 특성도 갖지 못한다.
그런데 이들 내용을 재료로 다양한 망집을 일으킨다.
평소 자신은 그 부분이 자신이 생각하는 그런 것들이라고 잘못 여긴다.
그래서 망상분별을 일으켜 그런 각 내용을 잘못 대하고 업을 행하게 된다.
그러나 정작 그 부분에서 본래 그가 분별하는 그런 내용은 얻어지지 않는다.
생사현실에서 이런 잘못된 망상을 제거하면 그런 망상만 없어지는 것 뿐이다.
그리고 그런 재료를 잘못 대하는 자세만 수정되는 것이다.
그리고 그런 망상을 일으킨 재료 자체는 그대로 남는다.
일반적으로 행하는 분별도 사정이 마찬가지다.
망상을 제거한다고 해서 분별을 못하게 되는 것도 아니다.
한편 그렇게 자신이라고 보는 부분이 무너지고 파괴된다고 하자.
그런 경우 옷이나 신발과 같은 그런 모습은 보지 못할 수 있다.
그런데 평소 그런 내용을 얻던 상황을 놓고 보자.
그 상황에서도 그것은 자신이 생각하는 그런 자신이 아니었다.
그리고 그런 망집을 갖는다고 그에 해당한 내용이 거기에 생겨나 있게 되는 것도 아니다.
따라서 처음부터 그런 부분을 그처럼 자신이라고 잘못 여기면 곤란하다.
마찬가지로 나머지 다른 것을 자신의 것이나 외부 세계로 여기면 곤란하다.
그런 가운데 그런 부분이 사라진다고 하자.
그렇다고 해서 있었던 어떤 것이 그로 인해 새삼 없어지는 것도 아니다.
그런데 이처럼 생각하고 임하는 일체가 망상분별이다.
한편, 그런 망집을 일으킨 실재나 재료는 그 전후에 걸쳐 늘고 줆이 없다.
또한 그런 바탕에서 그런 망상을 일으키게 한 근본정신이나 정신 기제도 그 전후로 사라지지 않고 이어진다.
따라서 일정한 계기로 그런 망상을 제거하지 않으면 그 망집 증상은 계속 이어져 나가게 된다.
즉 무량겁에 걸쳐 이런 망집을 바탕으로 생사 윤회를 밟아 나가게 된다.
그래서 우선 그런 전제에서 극심한 생사고통을 받는 상태에 처하지 않도록 예방노력을 해야 한다.
이것이 계의 덕목에 해당하는 수행이다.
또 이와 함께 근본적으로 그런 망집에서 벗어날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한다.
이것은 반야 지혜를 통해 실상의 정체를 올바로 깨닫는 수행이 된다.
◧◧◧ para-end-return ◧◧◧
● 유무의 극단과 열반경 상락아정의 배경
부처님은 어떠한 때는 무상 고 무아 무자성 열반적정 공 부정 이런 내용을 제시한다.
그런데 어떤 때는 상 락 아 정 이런 내용을 제시한다.
『열반경』에서 그렇다.
그래서 그 사정이 무엇인가를 이해해야 한다.
이를 이해하려면 먼저 있고 없음의 문제를 잘 파악하는 것이 필요하다.
우선 생사현실에서 얻는 각 내용은 바탕이라고 할 실재가 아니다.
즉 실재의 지위에 있는 내용이 아니다.
본래 본 바탕의 #실재나 근본 정신은 언설을 통해 표현할 수 없다.
그런데 그런 상태를 이해시키기 위해 그처럼 방편상 언설을 통해 표현한다.
그런데 언어 방편 시설이 갖는 사정부터 잘 이해해야 한다.
그래서 언설에 집착하고 고집하면 안 된다.
그리고 매 경우마다 표현 자체에 붙들리면 안 된다.
그러면 망상을 증폭시키게 된다
언어 표현은 그 본질이 !감각현실이나 @ 관념분별이다.
그리고 그 가운데 @ 관념분별이 그 중심이 된다.
그리고 이런 내용으로 다른 영역의 내용을 가리키게 된다.
그리고 그런 언어 방편으로 다른 영역의 내용을 가리켜 이해시키려고 하게 된다.
그런 취지로 언어 방편이 시설된다.
따라서 외관상으로는 그 표현이 각 경우가 서로 모순되 보이는 경우가 있다.
생사현실의 본 바탕인 실재는 본래 처음부터 언설을 떠난다.
그런데 그 본 사정을 이해시키기 위해 언설을 방편적으로 시설해서 설명해 나가게 된다.
그런데 망집을 일으킨 입장에서는
이 언설을 대할 때마다 그 망집을 바탕으로 다시 망집을 일으키기 쉽다.
그래서 자꾸 표현에 묶인다.
그런가운데 그 언설이 가리키는 의미에 대해 오해를 한다.
그리고 망상을 증폭시킨다.
이는 중생의 망상증이 본래 일으키는 증상 때문이다.
언어시설은 오히려 그런 망상증을 시정하기 위해서 동원하는 것이다.
그래서 각 경우마다 그런 취지로 각 언어 방편이 시설되어 제시된다.
따라서 부처님의 설법이 그처럼 행해지는 취지와 사정을 기본적으로 잘 이해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무슨 표현을 해도 또 다른 망집을 증폭해 일으키기 쉽다.
그리고 매번 그런 형태로 묶이게 된다.
예를 들어 달을 가리키기 위해 손가락을 사용한다고 하자.
그러면 상대는 그 손가락을 통해서 달을 보아야 한다.
그런데 달을 보지는 않고 손가락만 보면 답답하다.
그런데 더 심하게 현미경으로 손가락만 자꾸 들여다보면 한층 더 심하다.
그런데 현실의 일반적인 망상증세가 이와 같다.
그래서 다음 내용을 다시 검토해 보아야 한다.
그렇지 못하면 오해가 발생한다.
그런 경우 하나의 경전이 부처님이 말씀하신 경전이라고 이해한다고 하자.
그러면 나머지는 소설가가 작성한 소설이고 위경이라고 오해하기 쉽다.
경전 표현만 놓고 보면 그처럼 오해하게 쉽다.
그런 사정으로 그 사정을 잘 이해하는 것이 필요하다.
◧◧◧ para-end-return ◧◧◧
● 유무에 대한 망상분별과 비닐마술의 비유
유무[있고 없음]에 대한 잘못된 망상분별 증상을 살피기 위해
먼저 비닐 마술부터 살펴보자.
▼ - 비닐 마술
비닐마술이란 간단하다.
우선 하나의 비닐에 작은 세모를 그린다.
그리고 또 다른 하나에 큰 동그라미를 그린다.
그리고 이렇게 서로 다른 그림이 그려진 비닐 2 장을 서로 포개 놓는다.
그런 가운데 이 비닐을 대한다고 하자.
그러면 안이 세모이면서 동그란 도너츠 모양이 나타나 보이게 된다.
그런데 안이 세모인 도너츠 모습은 본래 각 비닐에 없는 것이다.
그러나 어떤 이가 이 비닐마술의 사정을 잘 안다고 하자.
그러면 이 상황에 안이 세모인 도너츠는 어느 비닐 안에도 '없다'고 말하게 된다.
그런데 이 두 비닐을 겹쳐서 같이 대하는 상황이 되면
분명 안이 세모인 도너츠가 거기에 있는 것처럼 여겨진다.
이는 세모가 그려진 한 쪽 비닐에 다른 쪽 비닐의 동그라미가 있다고 잘못 여기는 현상이다.
반대로 동그라미가 그려진 비닐에 다른 쪽 비닐의 세모가 있다고 잘못 여기는 현상이다.
그래서 안이 세모인 동그라미가 이 비닐에 있다고 잘못 여기게 된다.
이것이 현실에서 일반적으로 행하는 망상증상의 성격이다.
그리고 왠만해선 이 망상증상에서 스스로 벗어나오기 힘들다.
▼ - 생사현실에서의 망집현상
그런데 현실에서도 그처럼 망상증상을 겪는다.
예를 들어 어떤 이는 눈을 떠 일정부분을 대해 꽃이라는 관념분별을 일으킬 수 있다.
그런 가운데 누군가 꽃이 어디 있는가라고 묻는다고 하자.
그러면 그는 손가락으로 일정부분을 가리키게 된다.
이것이 생사현실에서 망상분별에 바탕해 상을 취하는 현상이 된다.
그런데 그가 손으로 가리키는 그 부분은 감각현실이다.
물론 그가 그런 감각현실을 대해 그런 분별을 일으킨 것은 사실이다.
그런 사정으로 그는 그 부분이 그런 분별내용에 해당한 것이라고 잘못 여긴 것이기도 하다.
그러나 그 감각현실 부분에서는 그가 분별한 분별내용을 얻을 수 없다.
그리고 그 감각현실 부분이 그런 관념인 것도 아니다.
한편, 그런 분별내용에도 그런 감각현실은 없다.
그리고 역시 그런 분별내용은 그런 감각현실이 아니다.
그럼에도 그는 그런 감각현실 부분에 그런 관념내용이 있다고 잘못 여긴다.
또 그런 감각현실 부분이 곧 그런 관념내용이라고 잘못 여긴다.
그런 사정 때문에 꽃이 어디 있는가라고 물으면 손가락으로 그런 부분을 가리키게 된다.
이 현상의 잘못을 다음 비유로 이해해야 한다.
예를 들어 어떤 이가 연필이란 생각을 하고 나서 기차란 생각을 연상해 떠올릴 수 있다.
그러나 사정이 그렇다고 연필이 기차는 아니다.
연필에 기차가 들어 있는 것도 아니다.
그래서 기차가 어디 있는가라고 물을 때 연필을 가리키면 안 된다.
이와 마찬가지로 감각현실과 관념분별의 관계를 잘 이해해야 한다.
이는 마치 비닐마술에서 있다고 여기는 그런 도너츠와 성격이 같다.
그래서 그 사정을 깨달아야 한다.
관념분별과 감각현실을 서로 접착시켜 망상분별을 행하지 않아야 한다.
그리고 이에 준해서 본 바탕의 실재와 생사현실의 관계도 잘 이해해야 한다.
일반적인 상태에서는 두 비닐판을 포개어 놓은 상태에서 망상을 일으킨다.
그래서 어느 비닐에도 없는 도너츠를 놓고
'있다' '없다'. '생긴다' '멸한다' 이런 망상을 일으킨다.
그래서 이런 망집이 한 번 시작되면 무량한 세월 동안 이런 상태로 지내게 된다.
그리고 각 세계를 묶여 돌고 다니게 된다.
그러면서 각 비닐판에는 있지도 않은 생사고통을 겪고 호소하게 된다.
현실에서 각 주체는 자신과 자신의 것에 대해 망집을 갖고 임하게 된다.
예를 들어 철수에게 영희가 누구인가라고 묻는다고 하자.
그러면 철수가 일정부분을 손가락으로 가리킨다.
마찬가지로 철수는 어디 있는가하면 손가락으로 가리킨다.
이처럼 일정부분을 자신으로 잘못 여긴다.
또는 영희나 꽃이나 바위 등등으로 잘못 여기며 현실에 임한다.
물론 그런 내용을 대해 그가 그런 분별을 일으킨 것은 사실이다.
그런데 그런 각 부분에서 그런 내용은 본래 얻어지지 않는다.
또 본 바탕인 실재에도 역시 사정이 마찬가지다.
그가 일으킨 분별은 분별 영역에서만 일으켜 얻은 내용일 뿐이다.
그리고 그런 내용은 본 바탕인 실재나 감각현실 영역에 본래 있지 않다.
단지 그런 감각현실을 얻고, 그가 그런 분별을 일으켰을 뿐이다.
그런데 그는 그런 상황에서 그가 일으킨 분별에 해당한 내용이 그런 영역에 그처럼 실답게 있다고 여긴다.
그런 가운데 그 각 부분을 그런 분별을 바탕으로 붙잡고 취한다.
현실에서 손가락으로 일정부분을 영희라고 여기며 가리킨 철수는 그처럼 현실에 임한다.
그리고 현실에서 일반적으로 영희나 다른 이도 사정이 마찬가지다.
그리고 그런 바탕에서 좋고 나쁨의 분별을 행하고 집착을 갖는다.
그리고 그에 바탕해 업을 행한다.
그리고 그런 바탕에서 생사고통을 무량하게 겪어 나간다.
그런데 현실의 사정을 있는 그대로 올바로 이해한다고 하자.
그리고 그런 상태로 현실에 임한다고 하자.
그러면 다음 사실을 이해하게 된다.
우선 현실에서 망집에 바탕해서 있다고 잘못 여기게 되는 내용들이 있다.
그러나 망집을 제거한 상태에서는 그런 내용을 얻을 수 없음을 이해하게 된다.
즉 평소 자신으로 여긴 부분은 자신이 아니다.
그리고 그런 자신이나 그 생멸 생사 일체를 다른 영역에서는 얻을 수 없는 것이다.
따라서 그런 사정을 그처럼 이해하게 된다.
그리고 그런 바탕에서 그런 생사에 묶이게 하는 업의 장애를 제거한다고 하자.
그러면 생사의 묶임에서 벗어나 해탈하게 된다.
그래서 아라한이 된다.
그런데 생사의 묶임에서 벗어났다는 아라한을 어떤 이가 옆에서 지켜본다고 하자.
그러면 그런 아라한도 분명 일정한 활동을 하고 이리저리 오고 간다고 여기게 된다.
그런데 그 아라한은 그 상태에서 다음처럼 해탈지견을 읊는다.
즉, 아생이진 범행이립 소작이작 자지 불수후유 이런 내용을 읊는다.
그리고 자신이 그 상태로 생사고통의 묶임에서 완전히 벗어난 상태라고 말한다.
일반인 입장에서 대하면 이는 대단히 이상하다.
그런데 그것이 바로 비닐판의 마술과 관련된다.
망집에 바탕하면 비닐판 마술의 경우처럼 없는 내용을 있다고 잘못 여기게 된다.
그러나 망집을 제거하면 그 상황에서 그런 내용을 얻을 수 없음을 이해하게 된다.
즉, 그런 상태는 망상을 일으키던 상태에서 벗어났다는 것을 의미한다.
◧◧◧ para-end-return ◧◧◧
●유무의 극단을 떠난 수행
▼ 있음에 치우친 입장[실답게 있다고 여기는 집착]의 제거
부처님은 생사고통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생사 현실의 본 정체에 대해 설명을 하신다.
그래서 그 현실의 본 정체에 대해 잘 이해하라고 가르친다.
우선 현실에서 잘못된 망상분별을 일으킨다.
그래서 엉뚱한 것을 붙잡고 그것을 자신과 자신의 것이라고 여기고 집착을 갖는다.
그리고 그런 잘못된 망상분별에 바탕해 매순간 업을 행한다.
그리고 그런 망집에 바탕한 가운데 그런 업으로 인해 극심한 생사고통을 겪어 나간다.
따라서 이런 생사고통을 벗어나려면 근본적으로 망집을 제거해야 한다.
그리고 그런 망집에 바탕해 행하던 업을 중단해야 한다.
그리고 과거에 쌓아 놓은 업의 장애를 수행을 통해 제거해야 한다.
그래야 생사의 묶임에서 온전히 벗어난다.
그리고 이런 것이 수행의 기본 목표 상태다.
그래서 현실에서 각 주체가 있다고 여기는 그런 내용은 본래 얻을 수 없음을 제시한다.
즉 그런 내용은 분별 영역에서만 일으켜 얻는 내용이다.
그리고 다른 영역에는 그런 내용을 본래 얻을 수 없다.
그런 사정을 깨달아서 생사현실의 본 정체를 잘 이해해야 한다.
그래서 기본적으로 그가 있다고 분별하고 집착하는 증상을 시정시키기 위해 노력하게 된다.
그러면 이제 생사현실에서 본래 생사 생멸을 얻을 수 없음을 이해하게 된다.
그러면 생사의 묶임에서 벗어나 해탈을 얻을 수 있게 된다.
▼ 없음에 치우친 입장[아무 것도 전혀 없다고 여기는 집착]의 제거
무언가 실답게 있다고 여기는 망상분별 증상을 제거한다고 하자.
이런 경우에는 오히려 그로 인해 다시 생사현실에 극단적으로 아무것도 전혀 없다고 잘못 여기기 쉽다.
그래서 그런 망집이 다시 발생하게 되면 이제는 오히려 앞과 같은 상태에 대해 상,락,아,정임을 제시하게 된다.
이로써 있고 없음에 대해 일으키는 양 극단의 망집을 제거해야 한다.
있다라는 생각의 극단은 무엇이 실다운 내용으로서 실답게 있다고 잘못 여기는 입장이다.
한편 없다라는 생각의 극단은 실다운 것이 없다고 해서 아무 것도 전혀 없다고 치우쳐 잘못 이해하는 입장이다.
생사현실은 실다운 것은 아니지만, 현실에서 얻는 형태로 그렇게 얻게 되고 그처럼 있는 것이다.
즉 실답지 않지만, 아주 없는 것이 아니다. => 없음[무]의 극단을 떠난다.
그래서 이처럼 유와 무의 양 극단을 모두 떠나서 현실을 있는 그대로 올바로 대하게 된다.
즉, 생사현실에서 무언가를 얻는다. 실답지 않지만, 아주 없는 것이 아니다. => 없음[무]의 극단을 떠난다.
사정이 그렇다고 해서 그런 생사현실이 집착을 가질만한 참되고 진짜는 아니다.
즉 현실이 실다운 내용으로서 있는 것은 아니다. => 있음[유]의 극단을 떠난다.
이렇게 양 극단을 떠난다.
그리고 이 양 측면에서 거꾸로 모두 긍정적인 면을 얻는다.
있음[유]의 극단을 떠나는 측면이 있다.
이 측면에서는 생사현실이 있어도 실답게 있는 것이 아니다.
즉 실재나 다른 영역에서는 얻을 수 없는 내용들이다.
실재나 다른 영역에서 얻을 수 없는 내용을 그처럼 화합해 일시적으로 얻는 것 뿐이다.
마치 침대에 누어 꾸는 바다꿈이나 황금꿈과 성격이 같다.
생사현실이 이와 같다.
이런 측면을 통해 생사현실에서 갖는 온갖 번뇌와 생사고통을 제거한다.
그리고 생사현실에서 망집에 바탕해 행하기 쉬운 업을 중단한다.
반대로 생사현실에서 망집에 바탕해 행하기 힘들어 하는 수행은 오히려 잘 성취한다.
그래서 망집과 업에 바탕해 받게끔 되는 생사고통을 예방한다.
한편 없음[무]의 극단을 떠나는 측면이 있다.
이 측면에서는 생사현실이 비록 실답지 않지만 아주 없는 것이 아님을 이해한다.
생사현실의 단면 하나하나의 성격은 꿈과 같다.
그렇지만 생사현실은 꿈은 아니다.
꿈과 달리 다수 주체가 일정 상황에서 일정 조건에 따라 무량겁에 걸쳐 엇비슷한 내용을 반복해 받아나간다.
마치 만화나 게임화면과 성격이 같다. 실답지 않지만, 그처럼 매번 반복된다.
그래서 실답다고 잘못 여기게끔 되는 사정이 있다.
그래서 이런 생사현실을 그대로 방치할 수는 없다.
그래서 수행자는 이런 생사현실에 들어가 임한다.
생사 즉 열반임을 관하고 생사현실 안의 극한 고통에서도 상을 취하지 않고 극복해 벗어난다.
그런 한편, 생사현실에서 중생과 눈높이를 맞추어 임한다.
그런 가운데 중생을 생사고통에서 벗어나게끔 이끌어 제도한다.
그러기 위해 수행자는 생사현실에서 무량한 선법을 닦아 무량한 복덕 자량을 구족한다.
그리고 그런 가운데 무량한 지혜자량을 구족한다.
그래서 무량겁에 걸쳐 무량한 중생을 제도하고 불국토를 장엄하고 성불한다.
그래서 수행에는 이런 양 측면이 있다.
따라서 『금강경』에서도 이 두 측면 가운데 어느 한 측면도 소홀히 하면 안 됨을 부처님이 제시하고 있다.
◧◧◧ para-end-return ◧◧◧
● 생사현실에서 중생제도를 위한 수행과 생사즉 열반
수행자가 수행을 통해 망집을 제거하고 생사의 묶임에서 벗어나게 되었다고 하자.
아라한은 이런 사정을 올바로 깨닫고 망집을 제거한 상태다.
그래서 생사의 묶임에서 벗어난다.
이것이 해탈을 얻은 상태라고 한다.
그래서 해탈신이라고 표현한다.
그렇다해도 생사현실에는 다른 중생들이 여전히 망집에 바탕해 생사고통을 겪으며 남아 있게 된다.
따라서 수행자는 다시 생사현실에 임해 고통을 받는 중생을 제도해나갈 필요가 있다.
수행자는 본 사정이 그렇지 않음에도 중생들이 망집에 의해 생사고통을 겪어 나감을 보게 된다.
따라서 이런 중생을 제도하기 위해 자비심을 일으켜 그런 생사현실에 같이 들어가 임하게 된다.
그래서 생사현실에 다시 들어가 중생과 눈높이를 맞추어 임한다.
그리고 그런 바탕에서 무량한 서원을 일으켜야 한다.
그리고 무량한 기간 수행하고 성취해가야 한다.
그리고 그 바탕에서 중생제도를 위한 무량한 수행을 닦는다.
그리고 무량행문을 닦아 나가는 가운데 법신을 증득하여 성불한다.
그런데 이는 망집을 갖고 생사현실에 임하는 상황과는 사정이 다르다.
◧◧◧ para-end-return ◧◧◧
● 망집을 제거한 상태에서 수행하는 자신의 실질
망집을 제거한다.
그러면 생사의 묶임에서 벗어난다.
이런 것이 수행의 기본 목표 상태다.
이는 다음 그림을 놓고 보면 다음처럼 말할 수 있다.
[img2-8] 8pfl--image/8식-8.jpg
처음 #실재와 !감각현실과 @관념분별의 각 내용을 놓고 이것을 서로 접착시켜 대한다.
그런데 처음 위 그림처럼 감각현실 안에서 어떤 부분을 놓고 그 부분이 자신이라고 잘못 여긴다.
그렇게 임하던 상태는 그러한 문제가 있다.
그런데 그것이 그런 자신이 아님을 이해하게 된다고 하자.
그리고 그 상항에 생사나 생멸을 본래 각 영역에서 얻을 수 없음을 이해하게 된다고 하자.
그래서 생사의 묶임에서 벗어난다.
즉, 해탈을 얻는다.
그렇다고 그로 인해 이전에 얻었던 내용을 못 얻게 되는 것은 아니다.
각 정신 안에 객진번뇌가 다 사라진다.
그래도 가장 근본이 되는 #실재는 본 상태와 차별이 없이 그대로다.
그리고 그런 내용을 얻게 되었던 그 근본정신도 그대로다.
그런 일과 관계없이 그대로다.
그리고 이 가운데 진짜의 내용이라고 할 바는 어디에도 없다.
그리고 여전히 ! 감각을 얻는 정신에서 얻어지는 내용이 있다.
이 내용 안에서 일시적으로 머물다 사라지는 한 부분이 있다.
평소 그런 부분을 스스로 자신이라고 여기고 상을 취하고 대하였다.
이를 자신이라고 여기는 것은 망상분별이다
그래서 제거해야 한다.
그런데 망집을 제거한 상황에서 다음 문제가 남는다.
여전히 평소 자신이라고 잘못 여기고 대한 그런 내용을 자신이라고 할 것인가가 문제된다.
그렇지는 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생사현실안에서 수행은 이에 바탕해 행해야 한다.
그리고 업장을 제거하는 노력도 이에 바탕해 행해야 한다.
생사현실에서는 평소 자신이라고 여긴 그런 내용에 바탕해 임하게 된다.
평소 자신이라고 여긴 그런 부분을 바탕으로 모든 수행과 업을 행해 나가게 된다.
그러나 수행자는 한편 본래 사정이 그렇지 않음을 관하고 집착을 제거한 가운데 그처럼 임해야 한다.
다만 중생제도를 위해서 중생과 눈높이를 맞추어 임해야 하기에 생사현실에 그렇게 임하게 되는 것이다.
그런 상황에서 자신의 본 내용에 해당한다고 보아야 할 것은 무엇인가라는 문제가 제기된다.
◧◧◧ para-end-return ◧◧◧
● 실질적인 자신으로서 근본정신과 생사윤회 문제
매 순간 일정한 내용을 자신으로 잘못 여기고 붙잡게끔 하는 정신기제가 있다.
바로 그런 정신기제와 근본정신을 바탕으로 매순간 생사현실에서 각 주체는 망상을 일으켜 임한다.
그래서 예를 들어 5 살 때는 그런 정신기제를 바탕으로 일정한 내용을 자신으로 잘못 붙잡고 대한다.
또 20 살 때도 그렇고 지금도 바로 그런 정신기제를 바탕으로 일정한 내용을 자신으로 잘못 붙잡고 대한다.
그래서 그런 정신기제가 매 순간 일정한 내용을 그처럼 자신으로 여기면서 붙잡는다.
그런 가운데 그렇게 매 순간 자신으로 여기며 붙잡는 내용을 죽 이어 살펴보면 다르다.
예를 들어 5 살 어린아이가 스스로 자신이라고 대한 내용이 있다고 하자.
그런 아이가 나중에 노인이 된 상황에서 스스로 자신으로 여기고 대한 내용이 있다고 하자.
이 두 내용은 서로 대단히 다르다.
그러나 이 각 상황에 공통적으로 이어지는 내용이 있다.
그렇게 매순간 엉뚱한 내용을 잘못 붙잡아 취하게 하는 그런 정신 기제가 그것이다.
그런 가운데 처음 일정한 부분을 자신이라고 잘못 붙잡게 한 특성을 나열할 수 있다
평소 스스로 자신으로 여긴 부분이 있다.
이런 부분을 자신으로 여기고 집착하는 것은 망집이다.
그런데 그런 부분을 자신으로 여기고 대하게 하는 특성이 있었다.
즉, 그 부분이 그런 특성을 일부 갖기 때문에 그런 부분을 자신으로 여기고 대하게 된 것이다.
예를 들어 다음과 같다
우선 자신이라고 보는 부분은 볼 때마다 늘 대하게 된다고 여긴다.
그에 반해 다른 부분은 매번 들고 나고 변한다. => 상
또 그 부분은 자신 뜻대로 움직일 수 있고 따라서 자신 뜻대로 되는 부분이라고 여기게 된다. => 락
그리고 그런 부분이 주관이 되고 그 부분이 다른 부분에 대해 어떤 내용을 얻는다고 여긴다.
그래서 자신의 부분은 주관이 되고 나머지 부분은 외부대상이라고 잘못 여긴다. => 아
그런 가운데 그런 자신의 몸에 애착을 갖게 된다. => 정
그런데 평소 자신으로 여기고 대한 부분은 그런 부분이 아님을 이해할 수 있다.
그렇다면 이제 그런 특성에 적절한 부분은 어떤 부분일까를 다시 생각해야 한다.
이런 경우 우선 매 순간 일정 내용을 담아 얻어 놓는 그런 정신이나 그 정신의 기제가 있다.
이제 이런 정신과 그 정신의 기제들을 위와 같은 속성을 갖는 자신으로 다시 잘못 여기게 되기 쉽다.
그런 기제로 인해 현실에 그렇게 망상을 일으켜 매순간 임하게 된 것이기는 하다. [3능변]
즉 이런 정신기제와 근본정신을 바탕으로 이런 망상을 일으키게 된 것이다.
그런 가운데 생사현실에서 상을 취해 임하게 된다.
즉 일정 부분을 붙잡고 자신이라고 여기고 집착하게 된다.
그리고 그런 바탕에서 업을 행해 나간다.
그리고 그런 바탕에서 생사 윤회도 진행된다.
그리고 무량겁에 걸쳐 진행되는 생사윤회는 바로 이런 정신기제와 근본정신을 바탕으로 한다.
생사현실에서 한 주체가 대하는 내용일체는 모두 마음안 내용이다.
그런데 이 마음내용 각 부분마다 특성이 다르다.
평소 자신으로 여기는 부분이 있다.
그리고 자신 이외의 외부로 여기는 부분이 있다.
그리고 외부 가운데 자신과 상태가 엇비슷한 영희나 철수로 여기는 부분도 있다.
이처럼 각 부분이 서로 특성이 다름을 파악하게 된다.
예를 들어 평소 자신으로 여기는 부분을 서로 부딪힌다고 해보자.
그리고 평소 자신으로 여기는 부분이 다른 부분에 닿는 경우를 놓고 비교해보자.
또 평소 영희나 철수로 여기는 부분을 자신의 활동과 비교해보자.
그런 가운데 고무공으로 여기는 부분이 유리창에 닿는 경우를 놓고 비교해보자.
이 각 경우가 경험상 서로 다른 특성을 나타낸다.
자신의 손으로 자신의 발을 만진다고 하자.
양 부분에서 촉감을 느끼는 경험을 하게 된다.
그런데 자신의 손으로 벽을 만진다고 하자.
손 부분에서만 촉감을 느낀다.
고무공이 벽에 부딪힌다고 하자.
이 경우는 촉감은 느끼지 못한다. 소리 정도만 듣게 된다.
그리고 영희나 철수도 사정이 자신과 비슷함을 보고 받게 된다.
그래서 이렇게 각 부분의 특성과 사정이 다른 배경 사정을 다시 이해해야 한다.
이는 결국 한 주체가 이렇게 임하게 된 배경사정을 이해하는 문제가 된다.
그런 경우 이렇게 한 주체가 현실을 대하게 만든 배경이 된 정신기제나 근본정신을 살피는 문제가 된다.
그런 가운데 처음 일정 부분을 자신으로 여기게 한 속성을 놓고 판단한다고 하자.
그런 경우 근본정신이나 정신기제가 오히려 그런 속성를 갖는 것이라고 여기기 쉽다.
그래서 이런 근본정신이나 정신 기제를 참된 자신의 본 정체라고 다시 잘못 여기기 쉽다.
그리고 그런 망상분별에 바탕해 다시 이에 집착을 갖고 임하기 쉽다.
그런 경우는 처음 일반적인 망상분별과 집착으로 인한 문제가 더 증폭되게 된다.
따라서 그런 잘못된 분별을 일으키지 않도록 해야 한다.
매 순간 그런 정신기제를 바탕으로 생사현실에 임하게 된다.
사정이 그렇다고 하여 이런 근본정신이나 그 기제가 진짜 자신이라고 여기는 것은 잘못이다.
예를 들어 이런 부분이 '진짜 나'라는 식으로 어떤 관념분별을 일으켰다고 하자.
그런데 이런 관념분별 역시 그 내용은 실재나 다른 영역에서 얻을 수 없다.
그 사정은 여기에서도 공통된다.
즉 그런 내용은 그런 기제나 근본 정신에서도 역시 얻을 수 없다.
한편 근본정신이나 정신기제 또한 참된 진짜로서의 실체는 아니다.
그리고 그 실재 역시 차별없이 공하다.
이런 점들은 다른 경우와 다르지 않다.
그래서 이들 내용에 대해서도 그것이 참된 진짜 나의 본 정체라고 잘못 여기면 안 된다.
◧◧◧ para-end-return ◧◧◧
mus0fl--Alain Chamfort - Bons Baisers d'Ici.lrc
>>>
Lab value 불기2561/09/08/금/21:35
●반야-해탈-법신-이자삼점의 관계
『대반열반경』에 다음 내용이 나온다.
▸ 해탈법도 열반이 아니고
여래의 몸도 열반이 아니고
마하반야도 열반이 아니며,
세 가지 법이 제각기 달라도 열반이 아니다.
나는 지금
이러한 세 가지 법에 있으면서
중생을 위하여 열반에 든다 하는 것도
세상의 ‘이’자와 같은 것이다.” ◂
...
『대반열반경』 ♣0105-002♧
참고
ꊱ이자삼점
‡이자삼점
사전에서는 이자 삼점 ∴ 을 다음처럼 설명한다.
그러면서 서로 다르지 않다.
앞 뒤 선후의 관계도 아니다.
그러면서 결국 열반이 갖는 3 덕을 구성한다.
이런 취지로 설명한다.
위 경전에서
해탈법, 여래의 몸, 마하반야 세가지를 나열한다.
그러나 정작 이 각각이 곧 열반이 아니다.
이 세가지 법이 제각기 달라도 열반이 아니라고 제시한다.
그런 가운데 열반이 이 3 가지 내용과 무슨 관계인가를 제시하고 있다
이 관계는 수행과 관련해 다음과 같이 이해할 수 있다.
○ 반야
처음 수행을 시작하여 복덕자량을 쌓고 업의 장애를 해소한다.
그런 가운데 지혜 자량을 쌓는다.
그리고 반야 지혜로 실상을 꿰뚫어 관한다.
그런 가운데 현실에서 일으킨 망상을 제거한다.
그러면 생사현실에서 본래 생멸을 얻을 수 없음을 관한다.
그리고 본래 청정한 니르바나임을 관하게 된다. [ 반야 ]
본 바탕인 실재도 마찬가지다.
근본정신도 마찬가지다.
그리고 그에 바탕해 현실에서 얻었던 현실 일체도 사정이 같다.
각 내용의 본 상태가 생멸을 얻을 수 없다.
거기에서 본래 생사고통 역시 얻을 수 없다.
따라서 본래 청정한 니르바나 상태다.
=>
○ 해탈
그래서 이런 사정을 잘 관하고 이해한다.
그래서 망집을 제거한다.
그래서 망집에 의한 생사의 묶임에서 풀려난다.
그래서 생사고통의 묶임에서 벗어나 해탈한다.
그래서 해탈신을 이룬다.
그러나 알고보면 본 상태의 측면에서는 어느 경우나 차별이 없다.
단지 본 상태를 덮고 있던 망상만 거기에서 제거된 것이다.
그래서 이런 상태가 된다.
그러나 그 주체는 이를 새로 얻는 것처럼 여기게 된다. [이계과, 택멸, 해탈]
=>
이후 그처럼 생사고통을 겪는 중생을 제도하고자 하는 서원을 갖는다.
그리고 중생이 생사를 겪는 생사현실에 눈높이를 맞추어 임한다.
그러나 생사현실 자체가 본래 앞과 사정이 같음을 잘 이해한다.
그래서 생사현실 자체가 본래 청정한 니르바나의 상태임을 이해한다. [생사즉 열반]
그리고 그런 바탕에서 생사현실에서 여여하게 임한다.
그런 가운데 중생제도를 위해 생사현실 안에서 수행을 행한다.
즉, 집착없이 무소득을 방편으로 무량행문을 닦아 나간다.
그런 가운데 부처님의 법신을 증득하여 성불하게 된다.
그런 내용을 제시하게 된다. [법신]
이 관계는 다음과 같다.
쉽게 말해 일체의 기본 상태는 모두 차별없이 공하다.
예를 들어 바위나 돼지 또는 영희나 철수,
그리고 수행을 성취한 상태가 다 차별없이 공하다.
그런 본래상태는 어느 경우나 차별을 얻을 수 없다.
즉 중생은 망상을 전개하여 생사고통을 받아나간다.
그런데 본 상태와 그 본 정체를 올바로 관한다고 하자.
그래서 망집을 제거한다고 하자.
그래서 생사고통의 묶임에서 풀려난다.
그런 경우는 이런 상태와 차이가 있다.
이 차이는 생사현실의 측면에서의 차이다.
이 측면에서는 해탈신과 중생이 차이가 있다.
=>
그런데 다시 아라한과 보살 수행을 하는 입장이 다시 차이가 있다.
즉 그런 상태에서 중생제도를 위해 다시 생사현실에 들어가 중생제도를 행하는가의 차이다.
그런 가운데 다시 법신을 증득해 성불하는 상태는 이와 다시 차이가 있다.
즉, 법신을 증득한 상태인가 아닌가에 의해서 차이가 있다.
원래 본 상태는 수행자가 이렇게 하던 저렇게 하던 관계없이 차별을 세울 수 없다.
본래부터 그렇게 청정한 열반의 상태다.
그런 측면에서는 어느 경우나 본래 차별이 있을 수 없다.
그래서 그런 측면의 열반을 우선 말할 수 있다.
그런데 다시 그 바탕에서
생사현실에서 수행자가 그것을 올바로 관하는 경우가 있다.
그리고 생사현실에서 번뇌 망상을 제거하는 경우가 있다.
그리고 망상에 바탕해 겪는 생사고통에서 벗어나는 경우가 있다.
그리고 현실에서도 본래의 청정한 니르바나의 상태에 상응하게
여여하게 임하는 경우가 있다.
그리고 다시 생사현실에 임해서도 그런 바탕에서 생사고통을 벗어난 상태로 임할 수 있다.
그리고 이런 측면에서 그런 상태가 되었는가가 다시 문제된다.
그리고 이런 측면에서 열반을 다시 일컬을 수 있다.
그리고 다시 중생제도와 성불의 서원을 일으킨다고 하자.
그리고 무량행문을 닦아 그 서원을 모두 원만히 성취한다고 하자.
그래서 성불한 상태가 있다.
그래서 그렇지 못한 경우와 차별을 다시 세우게 된다.
그래서 이런 각 측면에서 각기 차별적인 측면의 공덕을 세울 수 있다.
◧◧◧ para-end-return ◧◧◧
◆veli1795
◈Lab value 불기2561/09/08 |
○ 2016_1008_141754_nik_ar48.jpg ○ [pt op tr] 예술작품 사진 공양, 나무불, 나무법, 나무승 Salvador-Dali-dali-s-moustache ○ 2020_0525_171405_can.jpg ○ [pt op tr] 꽃 공양, 나무불, 나무법, 나무승 ○ [pt op tr] 아름다운 사진 공양, 나무불, 나무법, 나무승 PLW-Port-Turismo Michel Sardou - Elle En Aura Besoin Plus Tard ♥ 잡담 ♥운동과 dancing 나 홀로 운동에서 계단 제자리 오르내리기도 있다. 극기형 운동방식에 해당한다. 한편 게송과 함께 요가를 통해 스트레칭 동작을 취해주는 방식도 있다. 또 하나 음악과 함께 dancing 동작을 취하는 것도 하나의 운동 방안이다. 요가자세를 잘 익히면 요가강사가 되어 수입을 올릴 수도 있다. dancing 도 마찬가지다. 어제부터 댄싱을 연습 중이다. 오늘 노래도 dancing 이 뽑혀 나온다. 할아버지가 손녀딸과 춤추는 동영상을 본다. 동작이 간단하다. 그래서 거리에서도 가끔 연습해본다. 연구실에 돌아와 인턴연구원에서 시범을 보여주었다. 그런데 shuffle 댄스를 이미 잘 한다. 요가 때도 그러했다. 뽑힌 노래를 들어 보니 취미삼아 하는 일을 어디에 쓸려고 그러는가 라고 하는 듯 하다. 그러나 수행자는 이 각 과정에 어떻게 하면 무여열반과 3 해탈문과 무량행문을 덧붙일 것인지에 초점을 맞춘다. 그래서 생사고통에서 벗어나고 무량한 복덕과 지혜를 자유자재로 창고에서 꺼내 사용할 방안에 초점을 맞추게 된다. 일단 유튜브에서 요즘 유행하는 shuffle 댄스 기본 동작방법을 배우기로 한다. how to shuffle www.youtube.com/watch?v=pddp8OLi7lo https://www.youtube.com/watch?v=RECaepj8LkU dancing grandpa https://www.youtube.com/watch?v=il4W2fw5Qe0 ○ 음악공양, 나무불, 나무법, 나무승 mus0fl--○ [pt op tr] ▼ Laurent Voulzy - Belle-Île-En-Mer Marie-Galante.lrc 거리에서 춤을 추는 것은 어색한 일이다. 여기에는 예술적인 심성이 필요하다. 버스정류장에서 그냥 서 있는 것이 적절하다. 그런데 공연히 거리에서 걷다가 발을 공중에 내밀고 한참 서 있는다고 하자. 그러면 이상하다. 거리에서 일반적인 형태로 걸어가는 것이 적절하다. 그런데 손을 들고 그냥 서 있다고 하자. 또는 심지어 shuffle 댄스를 춘다고 하자. 그러면 이상하다. 이는 거리공연이나 행위 예술차원에서 하는 일일 수는 있다. 그러나 상황에 어울리지 않으면 타인에게 불쾌감을 주게 된다. 심하면 범죄 행위가 될 수도 있다. 말도 마찬가지다. 그냥 평범한 톤으로 부장님 다녀왔습니다. 이렇게 말하면 이상하지 않다. 그런데 뮤지컬 가수나 오페라 가수들이 노래부르듯 한다고 하자. 그러면 어색하고 이상하다. 그래서 사랑^^^하는 부^^^^장^^님~~~다녀왔^ 습니다. 이런 식으로 회사에서 노래로 인사를 드린다고 하자. 그러면 다음날 사무실 책상이 다른 곳으로 옮겨질 수도 있다. 그리고 혼자 외롭게 근무할 수도 있다. ○ 음악공양, 나무불, 나무법, 나무승 mus0fl--Raphaël - Schengen.lrc ● 연구원의 실종과 평범한 일에 대한 감사 현재 prince 님이 종적을 감추고 행방불명 상태다. 핸드폰 최종 발신지점만 확인되는 상태다. 그리고 자취가 묘연하다. 그런 상태에서 찾아내기 곤란하다. 그래서 손을 놓고 망연한 상태로 있게 된다. 경전에서는 본래 현실에서 생멸과 생사를 얻을 수 없다고 제시한다. 그렇다해도 현실적으로 걱정이 된다. prince 님은 폴 데이빗이나 오메가컴의 상태를 지향한다. prince 님의 발신지점을 통해서 헤아릴 때 알파고를 찾아 간 듯하다. 그래서 구조행위를 하러 떠난 것으로 추정된다. prince 님을 위해 prince 님 주제곡을 올려 놓고 듣게 된다. 무사 귀환하게 되기를 기대해본다. 연구원들의 사정들이 하나같이 열악하다. 무소식이 희소식이라고 여기며 관심을 끊고 지내는 경우가 많다. 또는 있거나 없거나 아예 관심을 갖지 않는다. 그리고 집착을 갖지 않고 대한다. 그런 경우에는 어느 경우나 마음을 평안하게 유지할 수 있다. 그런데 그렇지 않으면 또 그렇게 임하기 쉽지 않다. 생각해보면 어느 순간 사라져 연락이 끊긴 연구원들이 하나둘이 아니다. 매번 핸드폰 전화번호를 바꿔서 접촉이 안 되는 연구원도 있다. 또 전화를 걸어도 일부러 받지 않는 경우도 있다. 상대가 그렇게 임하는 사정을 헤아려 본다. 제각각 사정이 다 다르다. 결국 세상은 제 마음처럼 되지 않는다. 같이 지내더라도 지낸 기간이 오래되가면 매너리즘에 빠지기 쉽다. 그래서 매일매일 대하는 것이 지겹게 느껴질 수도 있다. 그런 경우 가끔씩 뮤지컬 모드를 도입해 행위 예술차원에서 대할 수 있다. 그런 경우 조금 도움이 될 듯 하다. 과거에 셀브르 우산과 같은 뮤지컬 영화를 놓고 생각해보자. 그런 모습이 현실에서 나타나면 대단히 어색하다. 예를 들어 버스가 막 떠나가는데 하이톤으로 소프라노 조로 운전사^^^아저씨^^^ 절 태우고^^^ 가세요..... 이런 식으로 노래를 부른다고 하자. 주변 사람이 보면 괴이하게 여길 일이다. 셀브르 우산은 어떤 연인이 어떤 사정으로 헤어졌다. 그런데 나중에 각기 가정을 이룬다. 그런 상태에서 어떤 주유소에서 잠깐 만나고 스쳐 지나가는 장면이 나온다. 어떻게 보면 애틋해보인다. 그러나 객관적 입장에서는 그것이 훨씬 더 나은 상태다. 아무리 좋다고 해도 일주일 이상 똑같은 사람을 똑같은 형태로 대한다고 하자. 그러면 질리지 않을 수 없다. 질리지 않는 것이 이상하다. 그런데 대부분 질리지 않고 살아간다. 이는 삶에서 계속 변화를 주입시켜가기 때문이다. 그래서 관심의 초점을 점차 다른 부분으로 옮겨가기에 그렇다. 그렇지 않다고 하자. 그러면 2 인 3 각 경기를 하는 상태가 되기 쉽다. 그러면 어느 일도 행하기 힘들다. 그래서 서로 상대를 탓하며 대하기 쉽다. 무선 마우스가 여러개가 얼마 쓰지 않아 다 고장이 났다. 건전지를 주문해서 충전을 했다. 그리고 다시 끼어 보니 하나같이 다 잘 된다. 처음엔 마우스가 고장 난 것으로 알았다. 결국 건전지에 전기가 남은 정도에 따라 차이가 있었다. 그런데 연구실 건전지로 할 때는 다 안 되었다. 이는 상당히 높은 전기를 요구하기 때문이다. usb 단자를 끼우고 실험한 것과 빼고 실험하는 것이 다르다. ♥단상♥ ●동가홍상의 생활방안 일상 생활에 예술을 접목하는 것은 좋다. 이왕 하는 일을 건강하게 행하면 더욱 좋다. 그런 상태에서 돈까지 벌면 더 좋다. 그런 상태에서 그 행위까지 아름답고 예술적이면 더 좋다. 앉아서 타이핑 작업할 때도 운동을 할 수 있다. 플랭크 (톤!) 운동 비슷하게 등척운동 방식을 도입하면 된다. 그런데 수행자 입장에서는 다시 다음을 추가하게 된다. 이런 일상생활에 다시 3해탈문을 장착해 생사즉, 열반의 입장에서 여여하게 임하면 더욱 좋다. 그리고 복덕과 지혜를 무량하게 얻으면 더 좋다. 그리고 보리심에 바탕해 중생제도까지 행하면 더 좋다. 그런데 어차피 행하는 일에 그처럼 가치있는 것을 모두 다 덧붙여 행하기가 쉽지 않다. 그래도 이왕이면 좋은 내용을 함께 덧붙여 하며 낫다. 다만 평소 행하는 일상생활에 갑자기 이 모든 것을 다 붙여 행하는 것이 쉽지 않다. 따라서 이 가운데 가장 좋고 우선순위가 높은 것을 우선적으로 일단 붙인다. 즉 보리심에 바탕한 중생제도만 덧붙인다. 그리고 그 나머지는 여유가 생기면 다시 하나씩 덧붙여가는 것이 낫다. 그런 가운데 아름답고 예술적인 상태까지 되면 좋다고 할 것이다. 『열반경』을 살핀다. 『열반경』은 버전이 많다. 이전에도 열반경을 살폈다. 오늘도 또 살펴본다. 부처님이 열반에 들면 애석하게 여기게 된다. 그리고 부처님이 남긴 가르침도 조금 더 관심을 갖는다. 그렇지 않으면 그 반대가 되기 쉽다. 가섭존자가 부처님이 남긴 가르침을 경전으로 결집한 계기도 그와 같다. 부처님이 돌아가시자 한 제자가 다음처럼 말한다. 쉼없이 잔소리만 하던 그 분이 이제 없게 되니 정말 시원하다. 이런 식으로 말한다. 가섭존자가 이를 듣고 충격을 받았다. 그래서 결집을 서두르게 되었다. 본인이 없어질 때 비로소 시원함을 느낄 수 있다. 그런데 본인이 있을 때 미리 시원함을 느껴야 한다고 생각한다. 손과 발이 정상적으로 달려있다. 숨도 제 힘으로 쉴 수 있다. 그리고 소대변도 알아서 볼 수 있다. 이런 상황에서 이것을 놓고 뛸듯이 기뻐하고 환희하며 지내야 한다. 그런 가운데 매 순간을 감사하며 보내야 한다. 대부분 그렇게 잘 지낼 때는 엉뚱한 부분에만 관심을 기울인다. 그리고 평생 쓰지도 못할 현금이나 재산에 신경을 기울인다. 그리고 그런 수익을 얻을 투자에만 신경을 기울이는다. 그런다가 나중에 어느 순간 그런 기본 기능이 잘 안된다. 그런 경우에는 다시 손과 발을 정상적으로 움직이면 원이 없겠다고 여긴다. 그런데 이런 식으로 대하는 것이 바로 삶의 문제다. 따라서 이를 뒤바꿔야 한다. 물론 쉽지 않다. 그런 입장에서 평소 환희의 마음을 갖고 제자리 뛰기를 해보는 것도 좋다. 신체 일부분이 마비된다. 또 견디기 힘든 통증이 밀려온다. 머지 않아 한 10 년 이내에는 죽겠구나하고 암담하게 생각된다. 이럴 경우에는 오히려 이를 아무 일도 아닌 것으로 담담하게 대해야 한다. 그리고 자신이 성취해나갈 서원의 내용과 시나리오만 구상하며 보내면 된다. 설령 다음 생이 없더라도 마찬가지다. 먼 강 건너 불처럼 대할 일이 아니다. 바로 현재 진행되는 자신의 일이다. 따라서 평소 행하는 일상 생활을 할 때 그 안에 가장 가치있고 아름답고 좋은 것을 다 함께 담는 노력을 꾸준히 해야 한다. ◧◧◧ para-end-return ◧◧◧ |
문서정보 ori https://buddhism0077.blogspot.com/2021/01/2561-09-08-k0105-002.html#6634 sfed--대반열반경_K0105_T0374.txt ☞제2권 sfd8--불교단상_2561_09.txt ☞◆veli1795 불기2561-09-08 θθ |
■ 선물 퀴즈
방문자선물 안내페이지
다음에 해당하는 단어를 본 페이지 에 댓글로 적어주시면 됩니다.
세는 천류(遷流), 간은 간격(間隔). 생멸 변화하는 미혹한 세계를 벗어나 해탈 경계에 들어가는 것. 또 달라져서 세속 일을 세간, 불법 일을 출세간이라고도 함.
답 후보
● 출세간(出世間)
친연(親緣)
칠십오법(七十五法)
칠처구회(七處九會)
타생(他生)
타심통(他心通)
탁악세(濁惡世)
ॐ मणि पद्मे हूँ
○ [pt op tr]
○ 2018_1024_174206_can_Ar28
[오래된 조각글재정리 안내]
☎잡담☎ = 순전한 잡담부분
● = 논의부분
재검토시작 Lab value 2564/05/06/수/22:18
♥아래 부분은 현재 작성 중인 미완성 상태의 글입니다♥
문단, 표현 재정리 작업중
경전정리 (▽정리중) (▼마침)
논의 (○정리중) (●마침)
조각글 (☆정리중) (★마침)
키워드 연결 페이지
https://buddhism007.tistory.com/5857
○ [pt op tr]
● 대반열반경_K0105_T0374 [문서정보]- 일일단상키워드
'과거조각글 > 불기2561(2017)' 카테고리의 다른 글
불기2561-09-10_불설아미타경-K0192-001 (0) | 2017.09.10 |
---|---|
불기2561-09-09_백자론-K0631-001 (0) | 2017.09.09 |
불기2561-09-07_잡아함경-K0650-039 (0) | 2017.09.07 |
불기2561-09-06_불설관미륵보살상생도솔천경-K0194-001 (2) | 2017.09.06 |
불기2561-09-05_삼무성론-K0622-002 (0) | 2017.09.0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