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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진리와실천
불기2562-01-17_금강반야바라밀경파취착불괴가명론_001 본문
『금강반야바라밀경파취착불괴가명론』
K0559
T1515
금강반야바라밀경파취착불괴가명론
● 한글대장경 해당부분 열람I
● 한글대장경 해당부분 열람II
○ 통합대장경 사이트
※ 이하 부분은 위 대장경 부분에 대해
참조자료를 붙여 자유롭게 연구하는 내용을 적는 공간입니다.
대장경 열람은 위 부분을 참조해주십시오.
○ [pt op tr] 금강반야바라밀경파취착불괴가명론_K0559_T1515 핵심요약
♣0559-001♧
『금강반야바라밀경파취착불괴가명론』
금강반야바라밀경파취착불괴가명론
○ [pt op tr] 음악공양, 나무불, 나무법, 나무승 ▼mus0fl--Barbara - Chapeau Bas.lrc
● 법을 취할 수 없다고 한다면,
무엇 때문에 보살은 지혜로써 불국토[불토佛土]의 공덕을 취했으며,
서원(誓願)을 일으켰을까?”
이 말은 무슨 말인가하면
보살이 어떤 것에서도 법을 얻을 수 없고 취할 수 없다고 제시하는 입장이라면,
왜 그런 입장에서 불국토의 공덕을 취하고
불국토를 장엄한다거나 성불한다거나 중생을 제도한다는 등등의 서원을
일으키고 성취한다고 하는가.
이런 의문이다.
그런데 알고보면
『금강경』에서의 핵심사항이 바로 이 부분에 들어 있다.
한편으로는 어떤 것이 얻을 수 없음을 잘 이해하고
그에 대한 집착을 제거하고 생사고통으로부터 벗어나야 한다.
그런데 또 한편으로는 사정이 그렇기에
수행을 정진하면 무량한 서원을 다 뜻과 같이 성취할 수 있다.
이 부분을 또 잘 이해해서
무소득을 방편으로 수행에 정진해나가야 한다.
그런데 앞 문장과 뒤 문장이
왜 그런 관계로 이어지는가는
일반적으로 도무지 잘 이해가 안 된다고
이 부분을 대하는 경우가 상당히 많다.
그리고 오히려 이 두 내용은 서로 모순되고
그래서 앞 내용을 전제로 뒤 내용을 제시하면
자체적으로 말이 되지 않는 궤변적 주장이 된다고 이해하기 쉽다.
○ [pt op tr] ▼mus0fl--Indochine - Drugstar.lrc
이 문제를 이번에는 수학적인 방식으로 접근해볼까 생각하게 된다.
수학에서 무엇이 없다거나 얻을 수 없다는 상태를 나타내기 위해
0 이라는 기호를 사용하고
또 반대로 무량하게 많고 많다는 내용을 나타내기 위해서는
00 [=∞] 이라는 기호를 사용한다.
세간에서 공수래 공수거 즉 빈손으로 왔다가 빈손으로 간다
이런 말을 하는데 그런데 그 사이에서 만나는 현실에는
무량한 일들이 있다.
그래서 이런 내용을 수학기호로 나타내면
0 과 00 사이의 일들이라고 표시할 수 있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이 0 이라는 기호로 나타낸다면,
결국 공수래 공수거의 내용과도 부합하고
또 이 모든 것이 공한 바탕에서 그런 내용이 나타남도
잘 표현한다고 본다.
그런데 0 과 00 사이에 무슨 문제가 있어서
이런 논의를 하는가를 잘 헤아려야 한다.
한마디로 현실에서 대하는 내용들이
자신에게 어떤 고통을 주지 않는다면
그 자신에게 무슨 문제가 되는가.
문제될 리 없다.
문제가 되지 않는데 왜 논의할 필요가 있는가.
논의할 필요가 없다.
사정이 이런데도 논의한다면
너무 심심한데 왜 현실이 그런가 지적 호기심이 일어나고
그런 지적 호기심을 심심풀이로 접근해 풀어보는 의미 외에는 없다.
그런데 사정이 그렇지 않다.
0 과 00 으로 단순히 표현한 내용에는
극히 견디기 힘든 생사고통이 들어 있다.
그래서 이를 살피는 것이 필요하다.
그리고 이런 문제 때문에
그런 생사고통을 극심하게 받는 단면을 하나 문제삼게 되고
또 다른 한편
그런 생사고통을 벗어나서 생사고통이 완전히 제거된 상태를
그 반대면 즉 목표점으로 놓고 살피게 된다.
그리고 여기에 더 추가하면
처음 문제삼는 생사고통은 어떤 사정으로 그렇게
그런 생사고통을 받게 되는가를 또 살피고
그리고 그 문제되는 생사고통을 벗어나고
완전히 제거해내려면
어떤 방안을 취해서 현실에 임해야 하는가를 또 살피게 된다.
그래서 이런 논의를 하는 이유나 효용도 그렇고
논의를 한 다음 이를 바탕으로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하는가도
모두 생사고통의 해결에 초점이 있다.
그래서 생사고통을 기준으로 현실을 살피면
먼저 생사고통을 극심하게 받는 3 악도와
또 그런 상태로 묶여 끌려 나아가는 상태가 있고
또 이와는 달리 그런 생사고통을 벗어난 상태와
또 장차 그렇게 되려고 수행에 정진해가는 상태가 있다.
그런 가운데 앞과 같이
논서에서 제시되는 문제를 살피게 된다.
그래서 현실 내용을 살피다 보면
결국 이 모든 것은 본래는 얻을 수 없음 -> 0 인데
그런데 그런 바탕에서 나타나는 무량(00)한 생사 현실안에서
수행자는 어떻게 무량(00)한 수행을 해서 무량(00)한 서원을 성취하고자 하는가
라는 질문이 제기되는 사정이 있다.
이는 결국 0 과 무한(00) 사이에서
무량한 IF 문제가 제기되지만,
결국 그 안에서 해결할 문제란
그 안에서 겪는 생사고통을 어떻게 남김없이 제거하고
벗어날 수 있는가가 첫 문제다.
두번째는 그런 바탕에서
자신만 그렇게 벗어나는데 그치지 않고
다시 어떻게 하면 그런 상태에 있는 다른 중생도
또 그런 생사고통에서 벗어나게 할 수 있는가가
두 번째 문제가 된다.
그래서 처음 살펴야 하는 문제는
현실에서
어떤 이들이 전도망상분별을 일으킨 상태에서
현실에 무엇이 있다거나 없다고 여기고
또 무엇이 생겨난다 멸한다 여기면서
현실에서 분주하게 임하면서 생사고통을 받아나가지만,
그런데 그 현실 내용은
본래는 그런 내용을 얻을 수 없음을 먼저 잘 관하여 이해하고
그런 망상분별과 집착을 원인으로 생사고통을 받아가는 상태에서
벗어나는 것이 첫번째 과제가 된다.
그래서 이와 관련해서
현실에서 대하는 3 부분의 영역에
생사고통을 벗어날 수 있는 탈출구로서
3 해탈문 즉 공해탈문 무상해탈문 무원무작해탈문이 있음을 제시하고
살피게 된다.
그리고 이런 내용은
마음의 정체를 살피는 과정에서도 마찬가지다.
즉, 현실에서 얻는 그 일체의 내용은
일반적인 전도망상분별 상태에서는
그것이 자신 밖에 있는 외부 세계이고
자신의 감관이 대하는 외부 대상이고
그리고 자신의 정신과는 떨어져 있는 외부물질이라고 여긴다.
그리고 그런 현실 내용은 자신만 그렇게 그것을 여기는 것이 아니고
영희나 철수도 다 함께 그렇게 대하고 여기는 외부의 객관적 실재의 내용이라고
여기면서 대한다.
그리고 이런 바탕해서 생활해간다.
그러나 그 사정이 그렇지 않고
어떤 주체가 얻는 그 모든 현실내용은
일단 그 모든 것이 마음에 얻어진 마음안 내용임을 잘 이해해야 한다.
그리고 현실내용이란 마음을 놓고 보면
결국 마음 안에 손님이나 티끌처럼 잠시 들어와 머물고 또 사라지는 내용이다.
그래서 마음이 행하는 기능을 하는 마음 자체는 아니지만,
마음을 떠나 있는 것은 아니다.
그런데 이런 마음안 내용을 어떤 주체가 대하면서
이를 놓고 무엇이 있다거나 없다거나 생겨난다거나 멸한다거나 하면서
망상분별을 일으키고 집착하며
이를 바탕으로 극심한 생사고통을 겪는다.
그러나 마음은 그런 내용이 들고 나는 것과 관계없이
본래 그런 생멸을 떠나 있는 것이며
또 현실에서 얻는 그런 생멸이나 생사고통은
'본래'는 얻을 수 없는 것이다.
그러나 사정이 그런데도
왜 자꾸 그런 망상분별을 일으키고 대하게끔 되는가를 살펴야 한다.
그래서 그렇게 되는 근본사정을 마음의 정체를 함께 잘 살피면서 이해하고
그 상태에서 잘 벗어나오는 것이 요구된다.
[참고; 이전 조각글]
그런데 어떤 주체가 얻는 현실 내용은 모두가 마음안에 머무는 내용이고
그런 내용은 '본래'는 얻을 수 없다고 제시할 때
그것은 다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즉, 현실에서 그런 내용을 일체 얻지 못한다거나
결코 얻어서는 안 된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또 '본래' 그런 내용을 얻을 수 없음은
본래의 상태가 도무지 전혀 아무것도 없다는 의미가 아니다.
그런데 그런 의미로 혼동을 일으키기 쉽다.
현실에서 얻는 내용은
본바탕이라고 할 실재의 지위에 있는 그런 내용이 아니다.
그리고 본래의 상태, 실재, 진여, 실상에서는 그런 내용을 얻을 수 없다.
또한 본래의 상태는 전혀 없는 것은 아니지만,
적어도 현실에서 문제삼는 그런 생사고통은 아닌 그 어떤 것이라는 의미에서
이를 청정한 니르바나의 상태라고 표현하게 된다.
이를 조금 수학적으로 표현한다면
현실에서 0 과 무한(00) 사이에서
어떤 이가 어떤 상황에서 A 라는 내용을 얻는다고 여기지만,
그가 얻는다고 생각하는 그 A 는
어떤 이의 마음안에 얻어져 머무는 내용으로서
마음에 잠시 들어와 머물다가 사라지는 손님이나 티글과 같은 내용[객진번뇌]이고
그것은 본 바탕이라고 할 실재의 지위에 있는 내용이 아니다.
그리고 그런 A는 '본래는' 그런 내용을 얻을 수 없다.
그래서 그런 A는 결국 현실에서 생생하게 얻더라도
집착을 갖고 대할 만큼 실다운 것이 아님을 나타낸다.
그러나 그렇다고 본래의 상태 즉 진여 실재가
전혀 아무 것도 없는 상태라고 제시하는 것이 아니다.
또 현실에서 어떤 주체가 그렇게 얻은 A가 전혀 없다거나
그런 A를 전혀 얻지 못한다거나
또는 결코 얻어서는 안 된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도 아니다.
그런데 현실에서 얻는 내용이 본래 얻을 수 없다고 제시하면
이상하게 이 표현으로 그런 의미를 나타내는 것으로 오해를 하는 경우가 많다.
그리고 처음 제시한 의문은
이런 혼동을 일으켰기에 제기하게 되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그 사정을 살피면 다음과 같다.
즉,
어떤 이가 무엇을 본래 얻을 수 없다고 제시했으면
그런 전제에서는 무엇을 닦고 무엇을 성취할 것도 없다고 보아야 하지 않는가.
그런데 무엇을 얻을 바가 없고
생멸이나 생사나 오고감도 일체 얻을 수 없다고 제시하면서
정작 그런 입장에서 무엇을 열심히 수행하고 여기저기 오가고
그런 수행을 무량하게 정진해서 무량한 서원을 뜻과 같이 원만히 성취한다는
내용을 제시할 수 있는가.
이렇게 오해를 한다.
그래서 일단 앞의 표현 가운데 어느 부분에서
어떤 혼동을 일으켰기에 그런 의문을 제기하게 되었는가를
잘 살펴야 한다.
그 사정을 쉽게 비유하면 다음과 같다.
예를 들어
어떤 이가 침대에 누어 자면서 꿈을 꾸는데
꿈에서 무인도에 황금을 가득 얻고
배에 싣고 돌아오는데 중간에 바다에 빠뜨리는 꿈을 꾸었다고 하자.
그리고 깬 것이다.
그리고 나서 자신의 황금이 다 사라져서 큰 일이라고 여기면서
그 황금이 어디에 있는가 하면서
잠을 잔 침대 이곳 저곳을 뒤진다면
옆에서 이를 보는 이는 다음과 같이 말하게 될 것이다.
꿈에서 얻는 내용은 아무리 생생하게 그 꿈을 꾸었더라도
그런 꿈 내용은 본래 현실에서 얻을 수 없다.
그래서 꿈은 한마디로 실답지 않다.
그러므로 꿈을 아무리 생생하게 꾸었다 해도
그 꿈내용을 현실에서 찾거나
그 꿈내용을 바탕으로 현실에서 무엇을 행하려고 임하면 곤란하다.
이렇게 말해서 진정을 시키고자 할 것이다.
그런데 위와 같이 제시한 내용이
다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즉, 꿈은 그처럼 본래 현실에서 얻을 수 없는 것이다.
그래서 생생하게 꾼 꿈이 꿈으로서 전혀 없었다.
그런 의미로 실답지 않다고 한 것이 아니다.
또 그런 꿈 내용은 현실에서 얻을 수 없다고 제시하는 것은
현실에 전혀 아무 것도 없다고 하는 것이 아니다.
또한 사정이 그렇기에
앞으로 결코 자면서 꿈을 꾸면 결코 안 된다고 제시한 것도 아니다.
다만 앞의 경우처럼
어떤 이가 꿈을 생생하게 꾸면서
꿈을 실답게 여기고
꿈을 꾸는 동안 고통을 받고
또 깨어 나서도 그 꿈 내용 때문에 고통을 받고
또 그 바탕에서 생각과 말과 행위를 엉터리로 해나가면서
고통을 반복해서 무량하게 받아나가면 곤란하다.
이런 내용을 제시하는 것이다.
물론 현실에서 비유처럼
꿈을 가지고 그런 고통을 받는 경우가 많은 것은 아니다.
그러나 또 살펴보면 전혀 없는 것도 아니다.
어떤 이가 현실에서 무언가를 열심히 하는데
그 사정을 알고보니 그가 어느날 꿈을 꾸고
그 꿈내용이 계기가 되어서
그렇게 현실에서 임하게 되었다는 사례가
전혀 없는 것도 아니다.
어떤 이는 꿈에서 얻은 영감으로
대단한 발명을 했다는 경우도 있다.
그런데 이렇게 0 과 00 사이에서
있을 수 있는 무량한 경우가 다 문제일 수 있지만,
그 가운데 무엇이 가장 핵심적인 문제인가하면,
그 0 과 00 사이에서
한 주체가 전도몽상분별을 바탕으로
무량하게 생사고통을 받아나간다는 것이 문제다.
그래서 일단
현실에서 얻는 그런 생사고통이
'본래'는 그런 것이 아니고
'본래'는 그런 것을 얻을 수 없다는 사실을 잘 이해하고
그래서 현실에서 얻는 그런 생사고통은
비록 그 매 순간 순간
대단히 생생하고 진짜처럼 여기게 되어도
그것은 그처럼 집착을 갖고 대할만한 실다운 것이 아님을
잘 관하고 이해해야 한다.
그래서 그 사정이 꿈과 마찬가지임을
앞 비유로써 잘 이해해야 한다.
그런데 정작 현실에서 내용을 대하는 각 순간에는
그것이 대단히 생생하고
그래서 진짜처럼 실답게 여겨져서
그런 생사고통을 매 상황마다
극심하게 받아나가게 되는 것이 생사현실 문제다.
그래서 결국 이런 생사고통을 벗어나기 위해
수행의 측면에서 이 문제를 살피면
수행에서 가장 어렵고 고비가 되는 내용도
바로 이 부분이다.
즉, 이론상은 본래 본 바탕이 되는 실재는
사정이 그렇지 않음을 잘 이해해도
그러나 현실에서 당장 자신의 손과 발이 잘려나가고
고통을 받는 상태에서
그에 대해 상을 일으켜 취하지 않고
평안히 임하는 상태가 되기 쉽지 않다.
결국 앞과 같이 현실의 정체를 잘 이해해서
수행을 잘 성취한다는 것은
앞과 같이 고통을 당장 받는 그런 상태에서
이런 사정을 잘 관하는 가운데
이에 대해 집착을 제거하고
그런 상태에서 견고한 수행력을 갖추어
그런 생사고통을 벗어나오는 것이 수행의 핵심이다.
그렇지 못하고
이론으로는 잘 이해하더라도,
그러나 이론과 현실은 별개여서
현실에서 그런 상황을 만나면
결국 그 상황에 집착해서
그에 바탕해서 일반적으로 행하게 마련인
온갖 반응을 다 행하게 되면
이론은 이론일 뿐
결국 업의 장애에 묶여서
생사고통을 무량하게 받아나가는 상태가 된다.
이론상은 현실의 본 정체에 대해 그 실상을 꿰뚫어 깊게 관하는
반야바라밀다 수행을 깊게 행하여 [ '행심' 반야바라밀다. ]
현실의 그 일체가 모두 공하다는 사정을 밝게 잘 관하고 [ '조견' 오온개공 ]
그래서 평소 현실에서 집착을 갖고 대하던 그 모든 것
특히 모든 집착의 근원이 된다고 보는
자신과 자신의 신체 수명 목숨...등등에 대한 집착을 모두 남김없이 제거하고
그래서 생사고통을 쉭 벗어나오는 상태 [도일체고액 ]가 되어야 한다.
그런데 이론상은 그렇지만,
아무리 색불이공 공불이색 색즉시공 공즉시색 수상행식 역부여시
등등을 잘 이해해도
그러나 현실에서
자신의 손톱하나라도 생으로 뽑아내야 한다거나,
눈이라도 뽑아 내게 된다거나,
묶여서 손이나 발을 톱으로 잘라내야 한다거나 그런 상황이 되면
얼굴색이 노랗게 변하여 황망한 상태가 되고
결국 원래 생사고통에 묶여 그것을 극심하게 받아나가는 상태로
물러나게 된다.
그래서 이 논의가 의미를 가지려면
단순히 이론의 논의로서 그쳐서는 안되고
현실에서 이처럼 고통을 받는 매 상황마다
이 이론을 바탕으로 그런 생사고통을 잘 벗어나올 수 있도록
그 부분에 초점을 두고 평소 수행에 정진해야 한다.
그런데 현실적으로 이것이 쉽지 않다.
따라서 생사고통을 직접 겪는 상황에서
위와 같은 원칙을 통해 생사고통을 벗어나는 것이 원칙적 내용이지만,
현실적으로는 조금 지나친 요구가 된다.
그래서 먼저
그런 생사고통을 극심하게 받아나가는 상태를
불러 일으키는 원인을 원인단계에서 먼저 중지하여 끊어내는 것이 필요하다.
그래서 자신을 그런 극심한 생사고통을 받게 하는
업의 장애를 제거하는 수행을 열심히 행하는 것이 필요하다.
즉 원칙적으로 그런 생사고통을 직접 받는 그 상태 그 단면에서
고통을 벗어나는 것도 필요하지만,
그 이전에 미리 그런 생사고통을 불필요하게 받아나가지 않도록
미리 그 원인을 제거하고 예방하는 수행이 또 함께 요구되는 것이다.
그리고 이 두 부분에서
공통적으로 요구되는 것은
그 각 경우마다 정작
각 주체가 그런 수행을 잘 원만하게 행하지 못하게 만드는 사정
즉, 각 주체가 일으켜 갖고 있는 전도몽상분별과 집착을 제거하는 것이 필요하다.
그리고 이를 위해서
현실에서 자신이 무언가를 놓고 그것이 A 라고 보고 대하지만,
그러나 '본래' 그런 내용은 얻을 수 없음을 잘 이해하고 관하는 것이 요구된다.
그리고 그런 바탕이 되어야
앞과 같은 전도몽상 분별 집착을 가진 경우
현실에서 도무지 행하기 힘들다고 대하게 되는
수행도 원만히 잘 성취할 수 있다.
그리고 또 한편, 직접 그런 생사고통을 받는 현장에서도
또 같은 원칙으로 그 고통에서 벗어나오고
평안하게 임할 수 있게 된다.
그리고 이것이 수행자가
가장 기본적으로 해결해야 할 수행목표가 된다.
그리고 그런 바탕이 되어야
이후 다시 그처럼 생사고통을 받는 다른 중생을 제도할 수 있는
무량한 수행을 해나갈 수 있게 된다.
현실에서 무소득을 '방편으로' 집착을 갖지 않고
수행에 임해야 한다는 것은
본래 그처럼 방편을 취하여 수행을 하던 그렇지 않던
또는 심지어 수행을 하지 않던
그로 인해서 본래의 상태에 어떤 차별을 얻을 수 있어서
그런 것은 아니다.
즉 이렇게 하던 저렇게 하던
무소득을 방편으로 집착을 갖지 않고
상을 취하거나 머물지 않고 수행에 임하던
그러지 않고 무언가 얻을 것이 있다고 집착을 갖고
수행에 임하던
수행을 아예 하지 않던
아니면 아무 것도 하지 않던
또는 망상분별에 바탕해서 집착을 갖고
일반적으로 반응하는 방식으로 임하던
아예 극단적으로 극심하게 악을 해나가던
이로 인해서 원래의 본 바탕인 실재에서
어떤 차별을 얻을 수 있다고 제시하는 것이 아니다.
그런 측면에서는 이렇든 저렇든
본래 그런 것을 얻을 수 없고
그래서 그런 생멸이나 생사고통을
본래 얻을 수 없다고 제시하는 것이다.
그런데 현실에서는 본래 그런 사정인데
그것을 그렇게 관하지 못하고
근본 무명(어리석음)을 바탕으로
망상분별을 일으키고 대하므로
본래 얻을 수 없는 그런 생사 생멸을
그처럼 실답게 있다고 여기면서
생사고통을 겪어 나가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이런 생사고통을 겪는가 겪지 않는가의 차이는
본 바탕에서 있는 것이 아니고
그런 망상분별이 전개 되는 그 바탕 그 측면에서
그런 것이 있게 된다.
그런데 그것이 바로 현실에서
각 주체가 심각하게 겪고 대하는 그 현실이다.
그래서 바로 이 측면에서
그 문제를 해결하고
그런 생사고통을 받는 상태에서 벗어나고
또 그에 그치지 않고
그런 생사고통을 겪는 다른 중생을 제도하고자 임할 때는
그 측면에서 앞과 같은 다양한 부작용과
생사고통의 문제현상을 받지 않으려면
위와 같은 자세로 수행에 임해야 한다는 그런 의미다.
그래서 위에 제시한 두 부분의 내용을
다 함께 취해서 각 측면에서 잘 적용해서
종합적으로 잘 사용하지 못하면
그 부분에서 문제가 발생하게 된다.
즉 앞부분만 취하면
그 수행자 자신은 생사고통에서 벗어난다고 보지만,
그러나 그 외 다른 중생은 여전히
무량하게 생사고통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수행자는 수행자대로 무량한 선법을 잃어 버리게 된다는 문제가 있게 된다.
그러나 또 수행자가 다른 중생을 생사고통에서 벗어나게 한다고 하여
그 생사현실에 들어가서 수행에 임하더라도
그 자신부터 이를 통해 무언가를 얻을 것이 있다고 여기면서
그러한 수행에 임하면
이 경우는 또 그 수행자 자신부터
처음 상태처럼 망상분별과 집착으로 인해
생사고통을 받던 처음의 문제 상황에 다시 놓이게 된다.
그래서 이 두 부분을 함께 종합해서
다 함께 잘 사용하는 것이
수행자에게 요구된다.
그리고 금강경에서 강조하는 내용도
바로 이 부분에 핵심이 있다.
여하튼, 수행자는
무량한 수행에 임하는 가운데
참괴를 통해 시행착오를 반복하지 않게 되는 것이
수행자의 중요한 수행자산이다.
이 참괴를 수행자의 보물 창고에 잘 보관해두어서 한다고 보고
또 그런 가운데 보현보살님처럼 보현삼매에 잘 들고
다라니와 삼매를 잘 갖추고
무량행문을 잘 닦어야 한다.
현실적으로 번뇌가 또 번뇌를 만들어 내고
선은 선을 만들고
악은 악을 또 만들어 내서
계속 같은 내용을 반복하고 또 반복하면서
동류인 변행인 등류과 사이를 바삐 체바퀴 돌듯 돌아가면서
현실에 임하는 것이 현실 사정이다.
>>>
◈Lab value 불기2562/01/17/수/11:54 |
♥ 잡담 ♥미래 부처님의 진신을 보기 논서는 문단정리보다는 내용 정리에 치중하고 한 대목 정도만 떼어서 올리기로 하였다. 한번 살핀 내용을 반복하는 경우가 많다.
풍경사진 스크립트가 마련된 후 틈이 나면 세계각곳과 사찰 들을 방문해 보는데
♥ 잡담 ♥ DOCTR 님이 본인이 대단히 편하게 이곳 저곳을 공짜로 방문하게 된다고 보는데 남는 시간에 원래 디스크에서 작업할 일을 논서 과거 관련 부분 http://buddhism007.tistory.com/3756 출처: http://buddhism007.tistory.com/entry/불기25611201금강반야바라밀경파취착불괴가명론#gsc.tab=0 [불교진리와실천] |
문서정보
ori
http://buddhism007.tistory.com/3892#7179 θθ |
-- 아래에 조각글 작성시 휴식시점에 붙인 노래가사,사진,풍광,예술작품 자료를 편집상 옮겨 붙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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