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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기2562-10-15_인도논리학_367 본문

과거조각글/불기2562(2018)

불기2562-10-15_인도논리학_367

진리와 가치를 고루고루 2018. 10. 15. 13: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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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기2562-10-15_인도논리학_367

sfed--인도논리학.txt ☞=367

http://buddhism007.tistory.com/5195

Charles Aznavour - Quand Tu M'embrasses





참고페이지 









◆vvjo1101

◈Lab value 불기2562/10/15/월/13:32





○ [pt op tr] 음악공양, 나무불, 나무법, 나무승   mus0fl--Charles Aznavour - Quand Tu M'embrasses.lrc







○ [pt op tr] 아름다운 사진 공양, 나무불, 나무법, 나무승 The_Equestrian_Session_(2828508601)



♥Bao'en Temple


○ [pt op tr] 아름다운 풍경사진 공양, 나무불, 나무법, 나무승


Lab value 불기2562/10/18/목/23:59


♥ 잡담 ♥망상분별의 이해를 위한 가정적 논의 

현재 조각글이 밀린 상태에서 
밀린 경전 내용도 정리하는 한편 
마음 현상과 관련해 살피는 중인데 
마음에 망집이 잔류하게 되는 사정을 직전까지 살폈다. 

현재 페이지가 밀려서 핫키에 5 페이지를 등록시켜 놓고 
여기 저기 오가면서 함께 살피는데 
망집의 잔류현상을 살피다가 
일반적으로 일으키는 망집을 대단히 체계적으로 
살필 수 있는 내용이 제시되고 있기에 
여기서부터 작성하는데 
날짜가 상당히 지난 상태에서 조각글을 보충하다보니 
적는 입장도 순서도 혼동되고 
조금 날짜 감각이 혼동된다. 
그래서 별도로 안에 날짜를 함께 적어 보았다. 

일단 조금 쉬기로 한다. 



인도 논리학이란 내용은 경전은 아닌데 
구판 한글대장경에 실려 있다. 
어떻게 보면 불교 외 서적이다. 



● 인도 논리학의 검토 취지 - 망집이 증폭되고 잔류되는 사정 

불교가 진리에 대한 깨달음을 통해
현실에서 갖는 망상분별을 제거하는 것을 중시하기 때문에 
일반적인 입장에서는
망상분별에 바탕해 진리에 대해 어떻게 이해하고 있는가를 
이해하는 것이 대단히 필요하다. 

또 수행자가 일반인을 대상으로 
망집을 제거할 수 있으려면 
반대로 일반적으로 어떤 상태로 망집을 일으키고 
진리 문제를 대하고 있는가를
상대적으로 잘 파악하는 것이 또 요구된다. 


일반적으로 논리학은 모든 학문의 기본 바탕이 되는데 
이 논리학을 살피면
이에 바탕한 모든 학문의 문제점도 함께 살피는 것이 된다. 
그것은 수학이나 물리학 의학 법학도 사정이 
마찬가지가 된다는 의미다. 

그리고 인도에서 논의된 논리학과 관련된 내용을 대강이라도 살피면 
이는 결국 단지 인도에만 국한되는 문제가 아니고 
오늘날 서양의 과학이나 철학의 문제점도 사정이 이와 크게 다르지 않고
일반현실에서 전반적으로 대부분 일으키는 망상분별과 
대단히 밀접함을 볼 수 있다. 
그래서 인도 논리학에서 기본적으로 논의된 내용을 살피면 
이와 관련된 문제의 대강을 다 함께 살필 수 있다. 


여하튼 인도 논리학이란 명칭으로 제시된 내용을 보면 
대부분 일반적으로 그럴 듯하게 여겨진다. 
그리고 이것이 바로 현실에서
일반인들에게 망집이 잔류되는 현상과 관련이 깊다. 
그것은 이런 주장들이 대부분 일반인 입장에서 
대단히 그럴 듯하게 여겨지기 때문이다. 

이 현상은 서양의 논리학도 마찬가지인데 
무엇이 그럴 듯하지만 무엇이 엉터리인가를 잘 찾아내지 못하면 
결국 논리학이라는 지적 최면에 집단으로 걸려 들어서 
망집이 잔류하는 정도가 아니고 증폭이 되게 된다. 

물론 이런 주장을 제시한 이들이 
일부로 다른 이를 속이려고 이런 주장을 제시한 것이라고 할 수는 없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일으키는 망집을 그대로 바탕으로 해서 
망상분별을 일으키고 전개해나가기에 
결국 이와 같은 엉터리 주장을 가장 확실한 진리의 토대로 여기고
이와 같은 주장을 하게 된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그리고 이런 주장은 제시한 입장만 특별히 그런 것이 아니고 
또 일반적으로도 거의 대부분 
이를 대단히 옳다고 보고 현실에 임하게 마련이다. 

그래서 비록 이들 내용이
대부분 망상분별을 증폭시키는 내용이지만, 
반대로 어떤 사정으로 현실에서 일반적으로 
망집이 잔류하게 되는가를 이해하기 위해서  
하나하나 자세하게 어떤 부분이 문제인가를 살피는 것도 필요하다. 

그런데 이를 살피려면 먼저
어떤 주제에 대해서 옳은 내용이 무언가부터 잘 이해하고 
그에 바탕해서 다른 내용들이 무엇을 잘못 보고 있는가를 찾아내는 것이 
조금 더 쉽다. 


망집의 잔류되는 현상에 대해 살핀 다음 부분을 살피면 
이 인도 논리학에서 제시된 각 주장들이 
어떤 부분에서 엉터리인가를 조금 쉽게 파악할 수 있다. 


sfd8--불교단상_2562_10.txt  ☞◆vsey2591

sfed--마하승기율(제21-40권)_K0889_T1425.txt

http://buddhism007.tistory.com/5193#2591



인도논리학 첫 부분부터
어떤 내용이 대상과 일치한다거나 
일치하지 않는다거나 하는 문제를 제시하는데 
처음에 이 부분부터가 문제된다. 

그런데 무엇을 도대체 인도 논리학에서는 
대상이라고 보고 있는가. 
이런 내용에 관해 위 페이지에서 자세히 살폈다. 

그러므로 앞 부분을 잘 이해하면 
반대로 인도 논리학에서 제시하는 주장이 
무엇이 문제인가도 상대적으로 빨리 이해할 수 있다. 



○ 인도 논리학의 주장을 살피는 방식 

인도 논리학이라고 간단하게 제시되었지만, 
만일 이 분야를 자세하게 살피려고 하면 
우선 언어의 장애부터 해결해야 한다. 

앞에 인도의 다양한 학파에 관해서 
소개하는 가운데 


가우따마 Gautama의 니야야 Nyāya, 

카나따 Kaṇāda의 바이세시까 Vaiśeṣika, 

카삘라Kapila의 샹캬 Sānkhya, 

파딴잘리 Patanjali의 요가 Yoga, 

자이미니 Jaimini의 미만사 Mimāmsā, 

바다라야나 Bādarāyana의 베단따 Vedā-nta, 

붇드하 Buddha의 바우드하 Bauddha, 

마하비라 Mahāvira의 자이나 Jaina, 

브리하스빠띠 Brihaspati의 로까야따 Lokāyata 혹은 챠르와까 Cārvāka 이다. 


이렇게 제시되는데 만일 정말 세세하게 살피려면 
우선 이와 관련된 서적을 원서로 이해할 수 있어야 하는데 
현실적으로 어렵다. 

그래서 이들 논의도 
어떤 주장을 정말 어떤 학파 
예를 들어 니야야 학파가 그렇게 주장한 것이 맞는가 아닌가를 
살피는 방식으로 접근하지 않고 

추상적으로 어떤 입장이
만일 이런 문제에 대해서 이러이러하게 주장하면, 
그런 경우 어떤 문제가 있게 되는가를 놓고 
살피는 것이 더 쉽다. 

인도에서 제시되는 여러 주장은 
현실에서 일반인들이 망집을 일으키거나
망집이 잔류하는 사정과 대단히 밀접하다. 
즉 일반적으로 대부분 그렇게 생각하게끔 되기 쉬운 
그런 내용을 주장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인도 사람들만 특별히 그렇게 그 문제를 대하는 것이 아니다. 
오늘날 철학이나 사상 분야에서 주장되는 내용들이 
대부분 인도에서도 비슷한 형태로 주장됨을 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앞과 같은 형식으로 살피면 
굳이 인도의 특정 학파의 문제를 살피는 것에 그치지 않고 
그런 형태로 망집을 일으켜서 
현실에서 진리를 파악하는 일반적인 
망집 현상에 대해서 함께 살필 수 있게 된다.  









○ [pt op tr] 음악공양, 나무불, 나무법, 나무승   mus0fl--Edith Piaf - Une Enfant.lrc

2015_1030_085529_canon.jpg


○ [pt op tr] 예술작품 사진 공양, 나무불, 나무법, 나무승 Theophile Steinlen-retraites



○ [pt op tr] 꽃 공양, 나무불, 나무법, 나무승 Climbing_rose_Clavering_Essex_England



○ [pt op tr] 아름다운 사진 공양, 나무불, 나무법, 나무승 TSh_Maria



♥Seoul National University – Seoul


○ [pt op tr] 아름다운 풍경사진 공양, 나무불, 나무법, 나무승 With the image 'Google Earth & Map data: Google, DigitalGlobe'



● 삶에서 논리문제를 살피는 이유

논리 문제는
옳고 그름의 문제나 
좋고 나쁨의 문제를 살피는 과정에서 
가장 기본적인 논의가 된다.

또 한편 불교입장에서는 
일반적으로 어떤 망집에 바탕해서 삶을 살아가는가.
또 현실에서 망상분별을 제거할 때 
어떤 망집이 잔류되기 쉬운가를 살피는데 많은 도움이 된다. 

그런데 논리문제를 살피면 
일반적으로 졸립게 되기 쉽다. 
이해하기 복잡하고 어렵게 느껴지는데 
막상 이것을 가지고 어떤 효용을 얻기 힘들다고 보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런 논리문제는 별 관심을 갖지 않지만,
그러나 살고 있는 아파트가 10 억원대이었는데 
지금은 100 억원대가 갑자기 되었다고 하면 
눈이 번쩍 뜨이게 된다. 

그런데 바로 이런 문제를 잘 해결하려면 
먼저 논리문제를 잘 살펴야 한다면 
조금 논리문제에 관심을 갖게 되기 쉽다. 

그래서 일단 부동산 문제부터 살펴보자. 

이번에 부동산 가격이 일부 지역에서 급상승했다는 보고를 받아서 
알아보니 40 평 짜리 아파트가 105 억원대가 거래가 되었다고 한다. 
이와 관련한 입장과 관련해 
그래봤자와 그래도의 차이에 대해서 일단 살피기로 한다. 


>>>  2018_1019_2109 ~  http://sbscnbc.sbs.co.kr/read.jsp?pmArticleId=10000915124

전국 아파트 최고가는 강남 현대아이파크…136㎡ 105억원

이 금액을 기준으로 계산해보면 
1㎡ 라고 해보았자 가로 세로 1m 정도로 면적이 별로 안 되는데
7700 만원꼴이다. 
과거 면적 단위인 평으로 하면 1 평당 2 억 5 천만원 정도가 된다. 

이런 거래가 이뤄진 내막을 풍문을 통해 알아보면 
해당 아파트는 30층에 위치한 복층형 펜트하우스인데 

내부에는 수영장 등 부대시설이 갖춰진 복층 구조로 되어 있다고 한다. 

그간 부유층의 지속적인 매수 요청이 있었으나 

집주인이 거부해온 것으로 알려졌다.

어느날 러시아인 사업가 N(60)씨의 집요한 요구에

집주인이 농담처럼 "100억원을 주면 팔겠다"고 했는데

N씨가 "100억원에 5억원 얹어주겠다"고 해서

매매거래가 성사되었다.는 것이다.


그런데 40 평 아파트를 팔거나 거기에서 살아가는 입장은
이를 좋은 일로 볼 수 있지만,
그렇지 못한 본인 입장에서는 이것을 달리 생각하게끔 된다. 

일단 이렇게 생각하게 된다. 
그래봤자, 40 평짜리 아파트 밖에 더 되는가. 
거기에서 할 일이 무엇이 있다고
100 억원을 거기에 넣고 생활을 할 것인가. 

그런데 아파트 소유자 입장에서는 이렇게 생각할 것이다. 
그렇다해도 105 억원이다. 어떤가. 
이렇게 대할 것이다. 

본인도 잠자는 곳이 있는데 
그렇게 생각하면 경사스런 일이라고 할 만하다. 
즉 그런 아파트 40 평짜리가 저 금액이니,
본인이 잠을 자는 방과
평소 본인이 자유롭게 사용할 수 있는 
본인이 다니는 둘레길, 공원, 도서관, 체육관,
이런 시설들을 일일히 복덕방에 매물로 내놓고 팔지는 않지만,
만일 내놓으면 얼마나 되겠는가.
대단히 경사스런 일이라고 할 만하다.
별로 한 일도 없이 떼돈을 번 것 아닌가. 

그런데 이것은 별로 소득이 없는 입장에서 
이렇게 생각해서 평안하게 임하자는 취지이기는 한데 
무언가 논리적으로 조금 이상하다고 보지 않는가. 


사실 여기서 문제는 다음이다. 

요즘 가끔씩 수행자를 상대적으로 초라하게 평가하게 하는 보고를 듣게 된다. 

예를 들어 다음과 같은 중국 뉴스도 그런 예다. 

최근 마윈의 자산이  44 조에 달한다고 한다. 

한편 판 빙빙이란 한 여배우가 탈세혐의로 부과된 1438 억 여원의 벌금을 부과받았는데 
이 역시 풍문에 의하면 그 금액을 1 주일만에 현금으로 완납했다고 한다.
이런 뉴스를 보다 보면 현금능력이 상당히 부족한 수행자 입장에서는
왠지 초라해지기도 한다. 

그런데 어릴 때 무슨 시험 성적이 나오면 

자신의 성적은 국어는 몇 점 수학은 몇 점 이런데 

다른 친구는 국어 95 점 수학 98 점 이런 식일 때 우울함을 느끼게 되듯 

한 생의 끝 시점에 다 도달해 있는 상태에서 

다양한 기준점에서 평가치가 낮으면 우울해지기 쉽다. 


성적이 상대적으로 낮게 나올 때
갑자기 노력한다고 쉽게 점수를 다시 올리기 힘들다고 보게 되는데 

삶의 성적도 비슷하다. 


자신이 돈이 부족하다고 느낀다고
갑자기 44 조를 자산으로 가질 수 있겠는가.
쉽게 되지 않는 일이다. 

마 윈같은 경우는 이름 자체가 Ma  win 이라서 돈이 많은가. 
판 빙빙은 판을 빙빙 돌려서 돈을 많이 번 것인가. 

그런 가운데 생계 자체가 해결하기 힘든 수행자 입장에서 

어떤 한 여인이 벌금으로 낸 금액이라도 한 번 벌어보았는가. 

이런 물음을 갑자기 자신에게 던지면 더 초라해지기 쉽다. 


그런데 삶의 지표가 꼭 이런 것만 있겠는가만 

과거에 삶의 지표와 관련된 이런 영어 이니셜들이 있었다. 

HMHPKWLSLB 

건강, 돈,  명예, 권력, 지식, 지혜, 사랑, 감각적쾌락, 여가 자유, 아름다움, 

이런 내용으로 현실에서 일반적으로 추구하는 내용들을 
제시하기도 한다. 

그리고 doctr 님의 행복론각론에서 다루는 행복을 얻는 수단 항목도 
대강 위와 비슷하다. 

행복론 각론에서는 
건강, 시간, 공간, 쾌, 지혜, 지식, 아름다움, 인격,
직업, 지위, 물질적부, 명예, 인간관계, 사랑, 결혼, 가정, 권력, 자유, 
타인에 대한 희망, 
사회에 대한 희망, 
자연에 대한 희망. 
이런 식으로 좀 더 자세하게 분류하고 있는데 

전반부는 한 주체와 관련성이 깊고 
뒤로 갈수록 다른 사물이나 인간 사회 자연과의 관계 등과 관련해
한 주체가 갖는 희망들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현실에서 사람들이 얻고자 하는 항목이
크게 다르지 않고 서로 엇비슷하다고 볼 수 있다. 

그런데 만일 인생 성적표 항목에 이런 것들이 죽 나열 되어 들어 있고
이런 항목으로 자신의 상태를 평가해서
성적표를 매 기마다 받게 된다면,
이 성적표를 볼 때마다 상당히 위축되기 마련이라고 본다.  


그런데

어차피 삶이 마무리 단계에 들어간 상태에서 

이런 비관적인 이야기만 하면 곤란하다. 

과거 나이가 어린 학창시절이라고 해도 

성적이 안 나왔다고 갑자기 도서관에 들어가서 머리 싸매고 

정신일도 하사불성 이런 구호 외치면서 노력한다고 해서 

한 과목 성적도 제대로 올리기 힘든데 

인생 성적표 항목은 쉽겠는가. 

예를 들어 

영어 성적이 나뻐서 영어 회화가 잘 안 되는데

영어회화책을 놓고 보면서 한 달 노력한다고 

영어회화를 갑자기 잘 하겠는가. 
노력을 꾸준히 하면 향상이 된다고는 보지만, 
쉽게 되기 힘든 것이 현실이다. 

나머지 부분도 마찬가지다. 

그런데 수단에서는 대부분 성격이 이렇다. 

하루만에 그런 상태가 되기 힘들다. 
그래서 이 부분만 강조하면 우울해지 쉽다. 


그러나 그 수단들로 끝내 얻어내야 할 내용을 지표로 놓고 보면 

또 달라지기에 우울증세의 탈출구가 보인다고 할 수 있다

잘 보면 이런 것이다.


각 항목을 놓고 보면

그것이 최종 목표가 아니고 

그것들은 하나같이 이것을 가지고 또 무언가로 바꿔야 하고 

또 이것을 통해 어딘가 어떤 상태에 다시 도달해야 할 수단들임을 보게 된다. 


그래서 그렇게 도달해야 할 최종적인 

어떤 상태나 가치를 기준으로 붙잡고 평가하면 

이 내용이 달라진다. 


그리고 이런 과정에서는  

수단이 크다고 최종적으로 얻는 맛이 많거나 좋아지는 것이 아니다.

쉽게 말해서 자기의 즐거운 맛을 얻기 위한 도구가 마냥 크다고 

즐거운 맛을 많이 잘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사정이 그렇기에 위 성적표가 그리 좋지 않다고 해도 

최종 성적표 부분에서는 자세를 잘 취하고 잘 임하면 

그 만회가 쉽게 가능해진다고 희망적으로 볼 수 있다.


더 나아가 수단을 최종항목을 얻는 데 들이는 비용으로 생각하면 
비용을 적게 들이고 최종 내용을 많이 오래 얻는 것이
오히려 더 현명하다.

그래서 인생 성적표에서 점수가 별로 좋지 않는 본인같은 경우는
이런 부분이 오히려 상당히 매력적으로 느껴지게 된다. 

평가 항목과 지표를 달리 바꾸면 

의외로 이런 일이 쉽게 될 수도 있다고 보기 때문이다. 


그래서 

조금 항목을 달리 해서 각 수단을 통해 최종적으로 얻는 마음 상태 
예를 들어 삶에서 얻는 만족, 즐거움, 기쁨, 보람, 가치, 평안함, 안정감, 의욕, 희망 

이렇게 주관적 행복 요소로 평가항목을

조금 달리 바꿔보아도 이것이 많이 달라진다. 

그런데 무량겁의 생사를 이어나가는 수행자 입장에서는

항목을 그렇게 단순하게 좁게 한 생만 놓고 볼 수 없기에 

다양한 수행항목을 놓고 복잡하게 평가하게 되는데 

여하튼 그렇게 보면 이것이 대단히 크게 달라지기에 희망적이 된다. 


그러나 또 단순히 그렇게 항목만 바꿔 본다고 해서 

그 최종지표에서의 성적이 반드시 좋다고 단정할 수는 없다. 

그래서 연구와 실천을 열심히 또 해야 한다. 


그런데 이것이 무슨 논리문제와 관련이 되겠는가. 

그런데 잘 보면 좋고 나쁨과 옳고 그름과 관련한 각 판단에
논리가 적용되고 있다. 
예를 들어 만일 기준을 이렇게 놓고 보면 이렇지만,
기준을 달리 이렇게 놓고 보면 또 이렇다. 
이런 내용들이기 때문이다. 

가치 문제와 관련해서는
다른 문제도 많이 관련해 언급할 수 있다. 

어떤 이가 100 억대 아파트가 없다고 가난하다고 여길 때 
현금으로 10 조원을 주면 자신의 두눈과 심장을 빼어주겠는가라고 
어떤 악마가 제의하면 응할 것인가. 
이런 형태로 가치저울의 문제를 풀어보면 
자신이 이미 보유한 것들의 가치가 대단히 높다는 것도 
판단할 수 있다. 

그래서 시장에거 거래가 되지는 않지만, 
이미 자신이 보유한 가치가 상당히 높다는 것을 
스스로 자각하는 것도 필요하다. 
그리고 위와 같은 형태로 한쪽 저울에 심장을 놓고 
세상에서 문제삼는 자산들의 가치를 평가하고 
그 비율을 살피다 보면 
현실에서 대단히 작은 가치를 갖는 것에 초점을 맞추고 
시간을 보내고 있음도 파악할 수 있게 된다. 

이는
시장의 거래가격을 기준으로 하는가 
아니면 이를 통해 실제 얻는 효용과 가치를 기준으로 하는가 하는 
기준의 문제이기도 하고 
가치와 관련된 착시 현상이기도 하다. 

손과 발이 늘 달려 있는 입장에서는 
손과 발이 시장에서 거래되는 것이 아니기에 
그 가치에 대해 의식을 하지 못하고 평소 지내게 된다. 
그런데 만일 손과 발이 없다고 가정한다거나 
현실에서 손과 발이 부러지거나 하면 
손과 발이 정상적인 상태가 갖는 가치가 얼마나 되는가를 
상대적으로 알 수 있게 된다. 

그런데 그 가치가 본래 없었던 것이 아니다. 
다만 평소에는 그것을 의식하지 못하고 
상대적으로 자신이 갖지 못하거나, 구하기 힘들고 
시장에서 거래가 되어 숫자로 표기되는 그런 부분에 
초점을 맞추고 대하여 
가치판단이 왜곡된 상태로 임하기에 
그런 상태가 된다. 

그래서 현실에서 이런 문제를 판단할 때도 마찬가지다. 
현실에서 자신의 손과 발이 갖는 가치가 궁금할 때 
정말 실험을 해서 한 번 팔과 다리를 떼어 놓고 
그리고 다시 손과 발이 붙을 때 
손과 발의 가치를 비로소 파악한다면 대단히 희생이 크다. 
그러나 그렇게 하지 않고 그대로 
손과 발이 계속 있는 상태가 사실 더 좋은 것이다.
그런데 정작 그런 상태에서는 또 그것을 의식하지 못한다. 
그래서 이런 상태에서 그것을 의식하게 되려면 무엇이 필요한가. 
이런 경우 만일 ~ 이라면 ~ 일 것이다. 
이런 식의 논리적 판단이 대단히 필요함을 알 수 있다. 

그것을 잘 하면 또 매 순간 선택의 내용도 달라지게 된다. 
그래서 자신의 심장이나 두눈이 갖고 있는 가치를 1 로 놓으면 
소숫점 0. 00000000000..... 이런 형태로 표기하려고 해도 
표기하기 힘든 작은 가치를 갖는 것에 
초점을 맞추면서 시간을 쓸모없이 보내지 않게 된다. 
그리고 그런 효용을 얻는데도 논리가 이바지한다고 할 수 있다. 




또 다음 문제를 보자. 

로또 복권이 보통 1 장을 사면 당첨될 확률과 함께 
정확한 계산을 피하고 당첨금에 대한 기대값이 
대략 구매금액의 30 % 정도가 된다고 가정하자. 
그런데 로또 당첨자가 6 주 연속 나오지 않을 때는
누적된 당첨금이 넘어가기에
그 기대값이 로또 복권 구매비용보다 더 높을 수 있다. 
이 때 전재산을 로또복권을 구매하는 데 사용하면 투자를
현명하게 잘 한 것일까. 
이런 문제도 논리와 관련된다. 

답은 그런 투자는 상당히 위험한 투자로 봐야 한다. 
이와 관련해서는 확률의 개념부터 먼저 이해해야 한다. 
주사위를 던져 숫자 3 이 나올 확률이 1/6 이라는 것은 
6 번 던지면 반드시 1 번은 3 이 나온다는 의미가 아니고 
주사위를 무한히 던지고 던지면 던진 전체 횟수에서 
3 이 나온 횟수가 1/6 에 가까워진다는 정도의 의미다. 

그래서 로또복권 1 등 당첨될 확률이 1/ 800 만이라는 것은  
로또를 800 만번 구매하면 1 번은 반드시 당첨된다는 이야기가 아니고 

이런 실험을 무한히 계속하면 1/ 800 만에 가까워진다는 의미로 이해해야 한다. 

그리고 기대값이란 1 등 당첨금이 너무 높아서 평균값을 계산하니
그렇게 계산되어 제시되는 것인데 
이 경우는 통계의 중앙값 또는 최빈수 같은 내용이 더 참고 가치가 있다고 해야 한다. 
그래서 기대값이 구매비의 30 % 라고 하는 것은 
만원을 복권에 투자하면 아무리 못해도 3000 원의 수익을 얻게 된다는 것이 아니고 
대부분 경우 없어진다.
그런데 그 복권 회차에서 1 등이 받는 당첨금이 대단히 많기 받기에
이것을 포함시키면 그런 기대값이 나온다. 이런 의미다. 

그런데 수학적으로 이런 판단을 하는 것도 알고보면 논리 문제다.
그리고 이런 논리적 판단이 삶에서 매 상황에 
선택을 하는 과정에 대단히 중요한 기능을 한다. 



현실에서 대부분 부자가 되기를 원하고 
또 부자가 되려면 가격이 수시로 변하는 종목의 가격변동 차트를 놓고 
무언가를 쌀 때 구입해서 비쌀 때 팔면 돈을 쉽게 번다는 
생각을 일반적으로 하게 된다. 

그리고 현실적으로 그렇게 돈을 버는 경우도 많고 
또 그런 가능성이 전혀 없는 것이 아닌데 
왜 현실에서는 이런 투자를 위험한 도박이라고 보는가. 
이것을 판단하는 것도 논리 문제의 하나다. 

삶에서 이런 문제에 대부분 많이 빠지기에 
이것을 놓고도 잘 판단해야 한다. 

또 마찬가지로 몇년몇월몇시에 태어났으면 
그는 이러이러한 운명을 갖는다. 
별 도리없이 그것을 받아들여야 한다. 
또 어떤 이가 다른 이와 결혼을 할 때도 
이런 문제때문에 고민을 하게 되는 경우도 많다. 
이것도 하나의 논리문제다. 

이런 논리문제를 잘 파악하지 못하면 
잘못된 판단에 의해 선택을 하게 마련이다. 
그래서 과연 정말 그런가를 놓고 잘 판단해야 한다. 

최근 어떤 보고에 의하면 
굿을 하지 않으면 죽게 된다거나 큰 사고를 당한다는 말을 듣고 
몇 억원을 사용했는데 정작 상대는 굿도 할 줄 모르는 이였다고도 한다. 

그런데 만일 자신이 어떠한 이가 다가와
어떤 편지를 7 장을 정성껏 써서 다른 곳에 보내면 행운이 오지만, 
그렇지 않으면 큰 불행을 당한다. 
과거에 그런 말을 따르지 않고 무시하다가
이러이러한 불행한 사고를 당한 이런 사례들이 있었다. 
그리고 지금 당신이 이런 상태로 상태가 안 좋은 것도 
그런 편지를 7 장 정성껏 써서 다른 이에게 나눠주지 않아서 그런 것이다. 
따라서 그렇게 하지 않으면 앞으로도 큰 고통을 당할 것이다. 
이런 말을 누가 한다고 하면 
그런 말을 듣고 어떤 선택을 해야 할 것인가. 


경우를 나누어 보자. 
앞 길이 최근 큰 비로 갑자기 끊기고 낭떨어지가 되어 있다. 
그런데 자신은 그 길을 잘 모른다. 
옆에서 앉은 이는 그 부근을 잘 알아서 
여기서 멈추어야 한다고 제시했는데 
운전하는 이가 그런 일이 없다고 계속 속도를 줄이지 않고 
나아갔다고 하자. 
그러면 문제다. 

그런데 그렇지 않다면 또 문제다. 
옆 사람이 세상일이나 길은 직접 가보기 전에 앞에 무엇이 있는 지 알 수 없고
길에 싱크홀이 생겨나 있을 수 으니 
5 분마다 멈추어서 미리 앞 상태를 확인해보고나서 
차를 몰고 나아가야만 한다고 주장하면 
그런 가능성이 전혀 없다고 단정하지도 못하지만,
그러나 반드시 있다고도 할 수 없는 상태에서 
세상 길이 지뢰가 묻혀 있는 지뢰밭도 아닌데 
매 경우마다 이렇게 임하는 것도 문제다. 


그런데 현실에 그런 경우는 별로 없다지만,
엄격하게 진리 문제를 놓고 생각하면
어떤 입장이 낫다고 할 것인가. 
그런데 결국 이 가운데 어떤 방안을 하나 선택해 취하는 것도 
다 논리와 관련된 문제다. 


어떤 투자를 할 때 
과거 차트만 보면 
어떤 때 어떤 종목을 사고 
어떤 때 어떤 종목을 파는 일을 계속 하면
그로 인해 엄청난 수익을 얻었을 것임을 대부분 쉽게 안다.
그런데 문제는 지금 어떤 종목이 그런가가 현실 문제다. 

사실은 과거 내용을 보듯 
미래의 사실을 정확히 지금 파악할 수 있으면 
역시 그렇게 쉽게 될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래서 그처럼 미래를 미리 예측해 보려는 노력을
투자자마다 모두 기울이게 된다. 

그런데 가정해서 그런 미래를  
마치 지금 과거 차트 내용을 보듯
아주 정확하게 알게 되어서 살펴 보니까. 
정말 과거 내용처럼 
어떤 종목을 사야할 시점마다 그 종목은  사지 않고 
엉뚱하게 투자하는 자신의 모습까지
그 미래에서 함께 정확하게 보게 된다면 

과연 그런 앎이 지금 투자선택에 과연 필요할까. 
이 문제를 또 생각해보아야 한다. 

그런데 이것이 운명론이 제기하는 퀴즈 문제의 하나다. 
그런데 이것도 알고보면 논리의 함정의 하나다.

여하튼 현실에서 이런 형태로 제시되는 문제가 많은데 
이 매 경우 해결을 잘 하는것이 요구된다. 
그 과정에 논리의 문제의 검토가 요구된다. 

과연 현실이 그런가. 
아니면 어차피 이경우나 저 경우나 다 자신이 정확히 모르므로
매번 선택 문제가 제기될 때마다
주사위를 던지듯 하면서 점을 쳐서 임하면 되는가. 

그런 경우에는 또 오목이나 바둑을 상대와 한번 두면서 
바둑판에서 어디에 두어야 이로운지 
또 그 때마다 상대는 어디에 두게 될 지를
자신이 일일히 미리 알지 못하므로
매번 주사위나 점을 쳐서 결정하면 
오목이나 바둑을 이길 수 있겠는가 
이런 문제를 놓고 또 생각해야 한다. 
그래서 아무리 그런 내용을 정확하게 모른다 해도 
매번 자신의 희망에 따라 오로지 즉흥적으로 임하거나, 
아니면 매번 점을 쳐서 임한다면 이것은 또 문제가 된다. 

그리고 이런 문제가 종합적으로 논리와 관련된다. 

그래서 이런 사정을 통해서
오목이나 바둑을 두면서 매 선택을 신중하게 잘 해나가면
잘 둘 수도 있다고 보겠지만, 
그러나 점이 과연 아무 효용이 없는가도
또 종합적으로 잘 살펴야 한다. 
즉, 현실에서 자신이 모든 내용을 미리 다 잘 알고 
선택할 수는 없기에  어차피 어느 쪽도 잘 알 수 없다면 
어떻게 선택을 해야 하는가도 현실에서 문제되기 마련인데
이 역시 논리와 관련되는 것이다. 







○ [pt op tr]  mus0fl--Daniel Balavoine - Drôle De Galaxie.lr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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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t op tr] 예술작품 사진 공양, 나무불, 나무법, 나무승 Ernst-Ludwig-Kirchner-the-kis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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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t op tr] 아름다운 풍경사진 공양, 나무불, 나무법, 나무승 With the image 'Google Earth & Map data: Google, DigitalGlobe'



원래 논리문제를 조금 살피려고 했는데 
논리 문제는 복잡하기도 하지만, 논점도 많다. 

어차피 진리와 관련되어 살피지만, 
그러나 무엇이 잘못인가를 살피는데 노력을 소진하기보다는 
무엇이 올바른가를 놓고 살피는 것이 효율적이기에
경전이나 논서를 살피는 것이 더 효과적이라고 본다. 
그래서 경전과 논서를 먼저 살피고 난 다음 
이런 문제는 부수적으로 살피는 것이 낫다고도 보게 된다. 

그러나 또 일반적으로 광범위하게 갖고 있는 망집 현상을 살피는 것도 
전혀 무의미한 것이 아니다. 
그래서 어느 정도를 살펴야 적절한가를 놓고 고민하게 되는데 
쉬는 동안 음악을 들으면서 
인도논리학 부분에서 주제로 삼은 내용이 언급되는 것을 듣게 된다. 

그래서 그 부분까지는 대강이라도 살피는 것이 좋지 않을까 생각하게 된다. 

논리 문제를 살피다 보면 
인도 논리학 첫 부분에 제시된 내용부터가 문제임을 보게 된다. 

이렇게 제시된다. 
...

대상과 일치되는 직접적 경험이라고 함은 

가령 실지 물단지 노릇을 하고 있는 하나의 물단지를 눈 앞에 직접 보면서 

「이것은 물단지이다.」라고 아는 것과 마찬가지로 

대상이 갖고 있는 모양과 성질을 

그 모양 그 성질 그대로 직접 지각함이다. 


이런 지각(知覺)을 가리켜서 

「이 세상 사람들이 누구나 다 잘 알고 있는 사실 〔事實 pramā〕」이라고도 한다. 


사실과 일치되지 않는 직접적 경험이라고 함은 

가령 하얀 조개껍질을 보고 

은(銀)이라고 잘못 아는 따위이다. 


사실과 일치되는 직접적 경험에 네가지가 있다. 


감관적직감지(感官的直感知) pratyakṣa, 

추리지(推理知) anumiti,

비교지(比較知) upamiti,

성언지(聖言知) śabda이다. 


이 네가지 인식을 성립시키는 방법 karaṇa도 역시 네가지가 있다. 


감각 pratyakṣa, 

추리 anumāna, 

비교 upa-māna, 

성언 śabda 이다.


...

나중에 추리지도 그 문제점이 심각한데 
그런데 그 이전에 제시된 내용부터도 이미 문제가 심각함을 볼 수 있다. 
그런데 일반적으로는 대부분 무엇이 문제인가를 잘 파악하지 못한다. 


물론 이들 내용은 이전에 살핀 내용에서도 자세히 살폈다. 
그래도 위와 같이 판단하고 내용을 제시하게끔 되는
망상분별이 현실에 뿌리가 깊다. 

그래서 이것을 살피는 것이 좋지만,
이전에 살핀 내용과 중복되므로, 
논리전반에서 제기되는 문제를 놓고
일단 크게 개관해 보는 것도 필요하다. 

그리고 이와 관련해 
불교 경전이나 논서에서 논리를 어떻게 대하는가를 
참조하는 것도 필요하다. 
이는 이들 내용들이 모두
무엇이 참된 진리인가를 놓고 문제삼기 때문이다. 


이것을 우선 이렇게 접근해보자. 

어떤 이가 아주 특수한 차를
외국에서 하나 가져와서 맛을 본다고 하자. 

앞에서 물단지를 놓고 상황을 설명했는데 
그것이 물단지가 되었던 사과가 되었던 
차가 되었던 문제는 마찬가지다. 

무언가를 대해서 어떤 내용을 안다고 여기고 
그것은 세상 사람들이 누구다 잘 안다. 
이렇게 넘어가는데 사정이 과연 그런가가 첫 문제다. 

이 문제를 쉽게 이해하기 위해서 차를 놓고 생각해보자. 

어떤 이가 차를 맛 보았다. 
그 차가 어떤 맛이란 것을 안 것이다. 

그런데 여기에 무슨 문제가 있는가를 생각해보자. 

그 주제를 놓고 이미 앞 링크에서 자세히 살핀 것이다. 
이 내용을 또 다시 살피려면 중복된 노력이 필요하다. 
그래서 이것은 간단히만 살피고 건너뛰기로 한다. 

우선 그런 감각을 할 당시 
그 주체가 그런 감각을 생생하게 한 것은 사실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자신이 무엇을 대상으로 그런 감각을 했는가가 첫 문제다. 
여기서 자신이 눈으로 보는 차 모습은 일단 그런 내용을 얻게 된 그 대상이 아니다. 
눈을 감고 마셔도 차맛을 볼 수 있기 때문이다. 
또 설령 그 모습이 대상이라고 해도 차맛과 그 모습은 일치하지 않는다. 

한편 그렇게 얻어진 차맛은 
또 자신이 그런 차맛을 얻을 때 상대한 대상이 아니다. 
이것은 무언가를 대해서 얻어낸 결과물이다. 
대상과 결과물을 구분을 먼저 해야 한다. 

그런데 만일 어떤 결과물이 자신이 상대한 대상과 일치해야 한다면 
여기서 자신이 먼저 무엇을 대상으로 그런 맛을 얻었는가부터 확보해야 한다. 
그것이 곤란함을 반복해 살핀 것이다. 

그런데 여하튼 그 차맛을 자신은 얻어낸 것이다. 

이제 그렇게 차를 마실 때나 마시고 난 후에 
그 차맛이 어떠어떠하다고 분별할 수 있다. 
그리고 그런 분별에 바탕해서 그 내용을 언어로 기술할 수 있다. 

이 부분들이 다시 문제가 된다. 

일단 차맛을 보고 그런 분별도 하고 
언어로 표현도 하지만, 
그 차맛은 그런 분별이 아니다. 
그리고 그 분별도 그 자체가 그 차맛은 아니다. 
사정이 이렇기 때문에 여기서 이 두 내용을 구분하지 못하면 
이후 논의가 엉망이 된다. 

논리의 문제가 진리를 확보하기 위한 기본 토대인데 
처음부터 이 각 영역의 내용을 구분하지 못하고 
서로 접착시켜서 대하면 이후 혼동은 막을 도리가 없게 된다. 


두 번째 문제를 보자. 

논리는 언어를 의존해서 전개하게 마련이다. 

앞에서 차맛이 무언가를 놓고 따질 때 
언어가 이 차맛에 해당이 되는가를 놓고 또 살펴야 한다. 
그렇지 못하다. 
그런데 그것을 모든 세상 사람들이 다 안다고 하고 
넘어가기에 이것이 문제가 되는 것이다. 



그런데 경전이나 논서에서도 역시 언어로 표현하고 
또 비록 인도논리학에서 제시하는 그런 방안을 그대로 
사용하는 것은 아니지만, 
역시 논리적인 바탕에서 내용을 제시하는 것은 
사정이 비슷하다고 할 수 있다. 

그래서 이 부분을 또 잘 이해해야 한다. 

불교내에서도 불교인명론이라고 해서 
논리에 관한 내용을 제시하는데 
그러나 논리 자체를 제시하기 위해서
논리에 관한 내용을 제시한다고 오해하면 곤란하다. 

이는 불교 경전에서 병을 낫는 방안이라거나 
기타 다양한 현실 내용을 제시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부처님이 병을 낫게 하는 방안을 
제시하기 위해서
그렇게 가르침을 베풀었다고 이해하는 것과 
사정이 비슷하다. 

앞에서 처음 가정적 논의라고 제시했는데 
불교 내에서 논리에 관한 내용을 살피는 것은 
본래 그런 내용이 옳다고 할 수 없지만, 
일반적으로 그런 망상분별에 바탕해서 판단을 전개하고
업을 행해 나가는 것이 문제이므로 
이 문제를 시정하기 위해서 
그런 입장을 가정적으로 받아들여서 
그런 상태에서 일정한 내용을 이해하게끔 하기 위해 
사용하는 방편으로 이해해야 한다. 

그래서 이 부분을 잘 파악하고 
관련 내용을 살펴야 한다. 

그런데 왜 사정이 그런가는 
앞에 제시한 내용부터가 그렇게 문제되기 때문이다. 
더 자세히 살피면 대단히 심각한 망집 문제가 
대부분 이로 인해서 발생함도 파악할 수 있다. 

그런데 불교는 진리에 관해서
일반적으로 일으키는 이런 망집을 해결하기 위해 
일반적으로 의존하는 이런 방안을
방편상 사용하게 되는 것이다. 



일단 조금 더 쉬고 이어서 살피기로 한다. 
노래에서 자꾸만 어떻게 알았는가라고 문제를 제기하는 듯 한데 
어떤 사람이 차가 대단히 특이한 맛이라는 것을 
도대체 어떻게 알았는가. 
이것이 첫 문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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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남 대흥사



○ [pt op tr] 아름다운 풍경사진 공양, 나무불, 나무법, 나무승 With the image 'Google Earth & Map data: Google, DigitalGlobe'


● 관념분별내 희론의 성격을 갖는 논리와 실다운 논의를 위한 망상 논리

진리에 관련해 논리의 문제를 살피는데 
처음 부딪히는 문제점을 
차나 물단지 사과 이런 것을 놓고 
그것은 차다. 또는 그것은 물단지다 이런 형태로
분별하는 문제를 살피는데 
사실은 이 부분이 중요하다. 


○ 관념분별 영역내에서 전개하는 희론의 성격을 갖는 논리 

만일 언어를 통해 표현하고 전개하는 어떤 논리체계가 
그런 언어나 관념분별 영역에서만 그렇게 전개하고 만일 끝이 나는 문제라면 

사실은 그것은 관념영역에서 일정한 약속과 규칙을 만들고
그 전제에서 게임을 행하는 것과 같은 희론의 성격을 갖기는 하지만, 
현실에서 망집을 바탕으로 망집을 증폭시키고 
그에 바탕해 업을 행해 생사고통을 받는 상태까지는 
나아가지 않을 수도 있다. 

즉 언어나 분별이 감각현실과 관계맺지 않는 경우라면,
그것은 관념영역에서만 그런 규칙으로 
관념분별을 전개하는 희론일 뿐이다. 
그리고 관념영역에서만은 그런 규칙을 받아들이는 한 
그 자체로서는 별 문제가 없다고도 할 수 있다. 

그러나 또 이 경우는 실답지 않은 쓸모없는 논의를 위한
희론의 성격을 갖는 것이 가장 큰 문제가 된다. 
그리고 이런 경우는 극단적으로 
무엇이 없음을 문제삼는 경우에도 
일단 그런 무엇을 관념으로 분별하고 문제를 삼는한,
그런 관념분별 자체는 있으므로 있다고 해야 하는 것이 된다. 
그래서 희론을 붙잡고 임하면 곤란하다. 

관념분별에서 주로 논리 추론을 하는 형태의 문제는 
대표적으로 바바라식이라고 표현하는 형식을 놓고 살필 수 있다. 

예를 들어 이런 형태다. 

S - M

M - P

∴ S -  P


위 간단한 기호는 이런  의미다. 

모든 S는  M이다. 
모든 M은  P이다. 

∴ 따라서 모든 S는  P이다. 

이런 형태로 추론하는 것을 의미한다. 




서양논리학에서는 이 형식 외에도 
다른 형식도 함께 나열해 살피는데 
인도 논리학에서는 다른 형식은 별로 문제삼지 않는다. 

왜 그런가 그 사정을 살피면 
추론을 열심히 해서 얻어내는 결론이
자신이 문제삼는 어떤 내용에 대해서 
일부는 이럴 수 있고 일부는 저럴 수 있다 
이런 형태로 결론이 제시되는 것은 
처음부터 논의할 가치가 별로 없다고 보기에 
그런 것으로 이해한다. 

어떤 S 를 놓고 그것이 과연  P인가 아닌가를 놓고 
문제삼고 논의하는데 
추론을 해서 얻어낸 결론이 
일부의 S 는 P 이고 일부의 S 는 P 가 아니다. 
이런 결론이면 추론의 가치가 떨어진다고 보게 된다. 

이런 결론은 
S 에 대해서 이렇게 해야 하는가 저렇게 해야 하는가에 대해서 
별 도움이 안 된다. 
처음에 S 에 대해서 잘 알지 못한 상태에서 
나아진 것이 아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 뿐이다. 

결국 추론을 하는 것은 이 추론을 통해서 
명확하고 확실한 결론을 얻기 위한 것이라면 
위와 같은 형식을 굳이 문제삼기 곤란하다. 



이는 . 필연성을 보장하는 형식논리체계에서 

'모든 S는  P이다'라는 명제 즉 전칭명제 형태로
결론이 도출하지 않는 경우도 문제되지만, 

이와 성격이 달리 개연성을 갖는 결론을 끌어내는
귀납추리에서도 같이 문제된다. 

예를 들어  'S는 P이다'라는 어떤 내용이 
'모든' S는 P이다라는 결론이 아니고
S는  P일 가능성이 대단히 높다.
그런데 아닐 수도 있다. 이렇다고 해보자.

그런 상태에서 자신이 그 가능성을 믿고 어떤 선택을 했는데 
바로 그 경우만 900 조 분의 1 의 확률로서 
대단한 손해와 피해를 보게 되었다. 
이러면 문제다. 

알고보면 현실에서 악마와 같은 상대를 상대해서 
선택해 결과적으로 무량겁에 걸쳐
대단히 장구한 생사고통을 겪는 선택을 하는 경우는 
대부분 이런 유형이다. 

어떻게 보면 지적 사기와 같다. 
대부분 막대한 피해를 받는 사기 범죄의 피해는 
그 피해자들이 그 이전의 과거 자료만 놓고 보면 
대단히 개연성이 높은 귀납추리를 통해서 
그런 선택을 하게 된 것임을 알 수 있다. 
사기를 행하는 입장에서는 
최대 이익을 얻는 시점까지 
정확하게 한치의 빈틈도 없이 상대의 예상대로 행동해서 
귀납추리를 하면 다음 선택을 이렇게 해야 한다고 
보게끔 만들어 놓고 피해를 입히는 것이다. 

그러니 이런 결론을 얻어내는 추론식을 
진리를 얻는 토대라고 제시할 수 있겠는가. 
평범한 일상생활에서는 이것도 도움이 된다고 보지만, 
그러나 진리를 엄격히 문제삼는 영역에서는 
이것은 악마에 농락당하는 중요한 원인이다. 

추론을 할 때 전칭명제 형태의 결론을 얻는 것이 중요하다고 보는 것은 
이런 취지라고 이해할 수 있다. 

즉 이럴 수도 있고 저럴 수도 있는데 
구체적인 이 경우는 잘 모르겠다. 
이런 결론은 현실 생활에서는 상당히 유용하다고 보기에 
현실에서는 또 이런 귀납추리
즉 확실한 결론이 아니라 개연성이 있는 정도의 내용을 
끌어내는 추리도 상당히 중요하다고 보게 된다. 

그래서 통계 방법도 사용하고 해서 
이런 내용을 얻어 내기 위해서 노력을 하게 되지만,
엄격한 진리를 문제삼는 영역에서는
이런 결론을 얻기 위해 추론을 하는 것은 아니다. 

수행자의 입장도 마찬가지다. 
무량겁에 걸쳐서 수행을 하는 것은 
그런 바탕에서 임하기에 수행을 하는 것이다. 

만일 99999 조년까지는 그럴 듯 했는데 
무량한 기간에서 나머지 기간은 그로 인해 엉망이 되고 
생사고통을 극심하게 받아야 한다고 한다면 
그것은 안 된다고 제시하는 것이다. 

그런데 위 말은 적어도 99999 조년만 놓고 보면 
귀납추리를 통해서 살피면 
이것 이상 확실한 내용은 없다는 내용을 도출하게 되는 내용이기도 한 것이다. 

그런데 그런 것은 일단 취급하기 곤란하다. 

그래서 앞에서도 살폈지만, 
부자 3 대는 간다. 
50 년 불패 신화 
이런 내용은 현실에서는 도움이 된다고 보기도 하겠지만, 
진리를 바탕으로 어떤 방안을 취할 것인가를 문제삼는 
수행에서는 이런 내용을 가지고 임하기 곤란하다. 
로마 천년 영화 이런 것도 사정이 마찬가지다. 



이 각 부분에서 
삶과 관련해서는 각기 심각한 문제가 있다. 

S - M

M - P

∴ S -  P
을 위에 살핀 것처럼 살피면 
만일 그것이 언어나 관념분별 영역에서만 진행된다면 
비록 쓸모없는 희론이고 단순한 지적 유희에 그치더라도 
엄밀하게 확실한 진리값을 얻어낸다고 말할 수 있다. 

이는 첫 부분의 내용을 
수학에서 제시하는 공리처럼 
그런 내용을 참이라고 그렇게 약속하자. 
이런 전제에서는 그렇다는 의미다. 
그런데 그렇지 않은 경우는 사정이 달라진다. 



○ 감각현실 및 본 바탕 실재와 관련시킬 때 망상논리체계 

어떤 논리체계가
그 내용을 관념영역에서의 약속이나 규정에 바탕하지 않고
논리 체계에서 사용하는 명제나 단어 하나라도 
그것을 감각현실이나 실재의 본 바탕의 영역과 관련시키면 
그 경우는 이 논리 추론이 전체적으로 
다 심각한 문제를 갖게 된다. 

첫 부분에 살핀 내용
즉 현실에서 직접 눈이나 귀로 보고 듣는 내용을 놓고
저 부분이 물단지이고 차이고 사과다
이렇게 판단하는 경우에서 
과연 그 판단이 참인가하는 문제가 
바로 이 문제와 관련된다. 

그래서 언어 분별로 진행하는 내용이 
감각현실 영역이나 본 바탕이라고 할 실재 영역에 적용이 되려면 
처음에 살핀 그 문제부터 먼저 해결이 되야 한다. 

그리고 진리에 관해서는
이런 부분부터가 실다운 논의가 이뤄질 주된 부분이 된다. 

그런데 실상이 공하다는 내용이나, 
현실에서 상을 취하면 안 된다는 경전 내용 등은 
현실 사정이 그렇지 않음을 제시하는 것이다. 

그리고 망집현상이라는 것은 본 사정이 그런데 
그것을 그렇게 이해하지 못하고 
자신이 관념영역에서 전개시킨 내용을 가지고 
본 바탕에서나 감각현실 영역에서의 내용들이 
자신이 관념분별 영역에서 일으킨 내용들과 같다고 여기면서 임하고 
그 바탕에서 업을 행해서 
엉망이 되고 그로 인해 
극심한 생사고통을 겪어 나가는 것이 바로 현실문제인 것이다. 

그러니 한 주체가 현실에서
이렇게 임하게 만드는 데 기여하는 위 내용들이 
하나같이 망집을 증폭시키고 또 잔류시키는 원인으로서 
문제가 된다. 


참고로 인도 논리는 
외관은 비슷해보이지만, 
서양에서 형식 논리학에서 제시하는 형태와는 다르다. 

서양의 형식 논리학은 앞에 살핀 것처럼 
그 자체로는 엄격한 진리값을 얻어내는 것처럼 보이지만, 
희론의 성격을 갖기에 지적 유희의 수단이 될 뿐이고 
그 내용을 가지고 현실에 적용할 때는 문제가 발생한다. 

여기서 착시현상을 일으키는 것은 
그런 형식논리체계를 통해 얻는 내용이 
감각현실이나 실재 영역에도 적용된다고 잘못 이해하거나, 
설령 그렇게 그 내용을 현실에 적용해도 
그 내용이 대부분 맞는다고 여기는 현상이다. 

앞에서 이런 문제점을 악마와 내기를 거는 상황에 비유했다. 
그리고 그것이 망집을 잔류시키면서 
계속 생사고통을 받아나가는 업을 행하는 주된 원인이 되는 것이다. 
그 사정은 또 적당히 보면 그럴 듯하게 여겨지기 때문이다. 


그런데 인도 논리학은 
앞과 같이 서양의 형식논리학적 성격을 전혀 갖지 않는다고 할 수는 없지만, 
동품 이품 등과 같은 내용을 논리체계에서 요구함으로서 
이 논리체계는 일반적으로는 처음부터 감각현실과 관련시켜 
제시하는 것으로 보게 된다. 
그래서 첫 문제가 여기에서 함께 다 문제된다. 

즉, 현실에서 직접 눈이나 귀로 보고 듣는 내용을 놓고 
저 부분이 물단지이고 차이고 사과다 
이렇게 판단하는 경우 
그런 명제가 그런 상황과 관련해 
무엇을 근거로 참이라고 할 것인가의 문제가 이와 관련된다. 

그리고 사정이 그렇기 때문에 
추론식이 갖는 엄격한 진리성도 확보되지 않는다. 

어떤 명제가 감각현실과 관련해 무엇을 근거로 참이라고 하게 되는가 하는 
이런 첫 문제를 건너 뛴다고 하더라도 

감각현실 등과 관념영역의 논리체계를 관련시키게 되면 
이와 같은 논리체계는 현실과 관련해 참인 전칭 명제를 확보해
논리추론을 전개하기 힘들다는 사정으로 인해 
어떻게 보면 서양에서 제시하는 귀납추리 

즉 개연성을 갖는 추리 정도의 의미밖에는 갖지 못하거나 

아니면 처음부터 그 결론에 해당한 내용에 대해 미리 참을 확인한 상태에서만 
추론이 가능한 형태가 되어 
실질적으로 그런 추론을 할 의미가 없는 추리를 행하는 형태라고 보아야 한다. 


그런데 처음에 감각현실과 관념분별의 차이를 구분하지 못하면 
이 두 추론이 각기 갖는 성격의 차이도 구분하지 못하기 쉽다. 
그래서 각 경우마다 무엇이 문제인가 자체도 구분하지 못하게 된다. 


일단 또 쉬기로 한다. 




○ [pt op tr]  mus0fl--Carole Fredericks - Jean-Jacques Goldman - Michael Jones - Tu Manques.lr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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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t op tr] 예술작품 사진 공양, 나무불, 나무법, 나무승 Giovanni-Battista-Piranesi-piazza-san-pietro



○ [pt op tr] 꽃 공양, 나무불, 나무법, 나무승 Light_pink_unidentified_garden_flower



○ [pt op tr] 아름다운 사진 공양, 나무불, 나무법, 나무승 Peyto_Lake-Banff_NP-Canada



망집의 잔류현상과 관련해 
논리의 문제를 살피고 있다. 


○ 논리와 망집잔류현상 


각 주체가 논리 추론을 행하는 것은 관념영역에서 행하는 일이지만, 
논리 추론은 한 주체가
각기 다른 성격을 갖는 논리추론체계가 적용될 수 있는 범위나 그 특성을 
명확하게 구분해 인식하던 않던 
대부분 그 내용을 감각현실이나 객관적 실재에 적용시키고자 하는
취지에서 현실에서 진행하는 것이 보통이다. 

그런데 그처럼 일정한 논리를 전개하면 
또 그런 추론 판단에 바탕해
현실에서 업을 행하게 된다. 


예를 들어 운명론을 일정한 논리의 함정에 빠져 받아들이는 입장은 
어떤 경우는 자신이 매번 뜻을 일으켜 행위를 하면서도 
그것이 운명적이라고 하면서 임하기도 한다. 
그래서 하고 싶은 것을 매번 하면서도 
결과만 나타나면 운명으로 인해서 그렇다고 받아들이는 경향을 갖기도 한다. 

앞에서 점성술이나 태어난 날짜를 따져 운명을 점치는 내용을 
받아들이는 이는 정작 어떤 중요한 판단을 할때 
그 내용에 따라서 선택을 한다. 
이것이 바로 위 문제다. 

그래서 이런 논리추론과정에서 어떤 망집을 일으키게 되면
그것으로 문제가 끝이 아니고 
그런 망집에 바탕해서 이후 진지하게 무언가를 행해 나가고 
그로 인해 나타나는 상황에서 생사고통을 겪게 된다는 것이 
이 망집이 갖는 문제점이다. 

그래서 의외로 지나치기 쉬운 가장 기본적인 문제로서 
첫 부분을 잘 파악해야 한다. 

그것은 한마디로 언어나 분별을 통해서 일정한 판단을 하고 
추리한 내용을 감각현실이나 실재 영역으로
그 내용을 가지고 오려할 때 
반드시 거쳐야 할 기본문제가 되기 때문이다. 


논리의 문제를 살피는데 망집이 잔류한다는 것은 
언뜻 보면 그럴 듯한데 사실은 아니고 
또 그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고 
그로 인해 패가망신 내지는 3 악도의 생사고통을 겪게 됨을 
살피는 것이다. 

가끔 논의를 하다보면 
그렇게 현실에 대충 임해도 삶에 별 지장이 없는데
왜 이렇게 복잡하게 살피는가 이런 의문을 갖는 경우가 가끔 있다. 

그래서 이 부분을 먼저 확인해야 한다. 
예를 들어 하나도 이치에 맞지 않고 
공상이거나 망상이더라도 
그래서 19 년이 아니라 99 년 99 조년 이런 식으로 
망상 속에 지내고 그로 인해 어떤 고통도 겪지 않는다면 
도대체 무엇때문에 그것을 문제삼겠는가. 
정말 그렇다면 그럴 필요가 없다. 

즐거운 공상 망상 분별을 문제삼는 것은 
사정이 전혀 그렇지 않기 때문이다. 

현실에서 자신이 희희낙락하고 지낼 때는 
위에서 살피는 문제가 왜 문제가 되는지 이해하지 못할 수가 있다. 
역시 마찬가지다. 

그런데 삶에서는 지극히 고통을 겪는 경우가 대단히 많다. 
그리고 인간의 범위를 넘어서 
축사에서 지내는 축생의 상태를 살펴본다던지 하는 가운데 
그런 문제가 다른 축생만 자신과 별도로 따로 겪어야 할 문제가 아니고 
장차 자신이 겪어야 할 현실이라고 자각하게 되면 
이 문제에 좀 더 진지해질 수 있다. 

논리나 망상의 잔류현상을 살피는 것은 
바로 위 사정 때문이다. 
그리고 그런 망집은 이런 생사고통과
단순히 관련이 있는 것이 아니고 
바로 그 핵심 원인이 되기에 이것을 살피는 것이다. 

그리고 또 그 사정이 위험한 것은 
대부분 그럴 듯하게 여기고 바로 이 부분에 
붙잡히기에 또 그런 것이다. 

예를 들어 빛깔이 좋은 독과 사정이 비슷하다. 
사람들이 누구나 혐호하는 색깔 
그리고 불쾌한 냄새가 나는 독은 
오히려 덜 해롭다고 할 수 있다. 
왜냐하면 그것을 취해서 고통받는 경우가 덜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외관상은 아주 맛있는 사탕처럼 보이는데 
먹고나니 아주 장구하게 시시때때로 각종 번뇌와 고통을 
갖게 하는 경우면 대단히 큰 문제라고 보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망상을 제거해도 그래도 남게 되는 망상잔류현상이 
심각한 것은 사정이 이렇기 때문이다. 

인도논리학의 문제점을 명확하게 파악할 수 있는 것은
처음 제시된 부분에 그 핵심이 들어 있다고 보게 된다. 
나머지 부분은 학자들이 걸리는 전문적 망집과 관련되어서 
위험하기는 마찬가지이지만, 
일반적으로 붙잡히는 망집은 첫 부분과 관련이 깊다. 


첫 부분을 다시 한번 옮겨 복사해 놓고 살펴보자. 
...

대상과 일치되는 직접적 경험이라고 함은 

가령 실지 믈단지 노릇을 하고 있는 하나의 물단지를 눈 앞에 직접 보면서 

「이것은 물단지이다.」라고 아는 것과 마찬가지로 

대상이 갖고 있는 모양과 성질을 

그 모양 그 성질 그대로 직접 지각함이다. 


이런 지각(知覺)을 가리켜서 

「이 세상 사람들이 누구나 다 잘 알고 있는 사실(事實 pramā)」이라고도 한다. 


사실과 일치되지 않는 직접적 경험이라고 함은 

가령 하얀 조개껍질을 보고 

은(銀)이라고 잘못 아는 따위이다. 
...

그리고 위와 같은 경험은 대부분 일상생활에서 자주 한다고 볼 수 있다. 

길에서 떨어진 동전이나 지폐인줄 알고 
평소 동네 할아버지 할머니를 만나도 잘 하지 않던 허리를 굽히는 절을 하면서 
열심히 주었는데 동전이나 지폐비슷한 금속이나 딱지다. 
이런 경우 앞과 같은 심정을 토로하게 된다. 

그것은 반대로
현실에서 그것이 자신이 생각한 그런 내용이라고 여기는 경우가 있는 반면 
그렇지 않은 경우가 있다. 그리고 
바로 이런 각 내용이 구분되는 경계에
곧 진리와 진리 아닌 내용이 있는 것 아닌가. 
이런 망집을 일으킨다는 의미다. 

그리고 반대로 이것을 살피면 
동전인 줄 알고 주었더니 동전이다. 
이런 경우 이것처럼 확실하고 세상사람들이 곧바로 
그것이 옳다고 할 수 있는 진리가 어디 있겠는가. 
이렇게 임하면서 업을 행해 나간다는 이 부분이 문제다. 

물론 그것이 자신이 원하는 동전이면 그 주체의 뜻과 같이 
좋음을 얻는 상황이기에 별 문제가 없다고 할 수도 있는데 
그런데 그 주체가 생사현실에서 지극한 고통을 겪고 벗어나려고 해도 
벗어나지 못하고 장구하게 묶이는 상황도 이와 사정이 같다. 

예를 들어 송곳인 줄 알고 있는데 맞아보니 송곳이고 
톱인 줄 알았는데 정말 톱이어서 손과 발이 잘려 나간다. 
불인 줄 알았는데 정말 뜨겁다. 
하나같이 이런 상태로 생사고통을 겪어나가게 된다는 의미다. 
그래서 고통을 극심하게 겪게 되고
또 이 내용이 앞과 같이 현실에서 임하는 자세를 전제로 해서
또 그런 내용과 관련이 되어서 겪게 된다는 것이 
바로 생사현실에서 겪는 생사고통의 문제다. 

그래서 그 고통의 상황을 보면 
이 두 경우가 다 증상이 같아서 
함께 문제된다고 제시하는 것이다. 



일단 문제의 심각성을 파악하면서 조금 더 쉬고 
왜 위에 제시한 사례가 망상분별이라고 하는가 

또 그렇다면 이런 상황에서 어떻게 임해야 한다는 것인가를 
또 살펴야 한다. 

금강경에서 법상도 버려야 하는데 하물며 비법상이랴. 
이런 구절이 갑자기 생각이 나는데 
여하튼 위 문제를 놓고 처음에 잘 살펴야 
이후 논리학자들이 전문적으로 붙잡히는 망집도 
잘 해결할 수 있다. 

일단 조금 쉬기로 한다. 





○ [pt op tr] 음악공양, 나무불, 나무법, 나무승   mus0fl--C.Jerome - La Poupee Qui Fait Non.lr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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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t op tr] 예술작품 사진 공양, 나무불, 나무법, 나무승 Ernst-Ludwig-Kirchner-dodo-with-large-fan



○ [pt op tr] 꽃 공양, 나무불, 나무법, 나무승 Begonia_×_hiemalis



○ [pt op tr] 아름다운 사진 공양, 나무불, 나무법, 나무승 Pekinguniversitykunqu1



♡만호사


○ [pt op tr] 아름다운 풍경사진 공양, 나무불, 나무법, 나무승 ●With Daum 지도


앞에서 물단지를 놓고 
이것은 물단지라고 판단하거나
조개껍질은 동전이라고 잘못 판단하는 경우 등이 갖는 문제점을 제시했는데 
이런 내용을 제시하면 
단순히 황당하게 여기며 어리둥절한다거나 하는 경우도 있지만,
이에 그치지 않고 대단히 의아하게 여기면서 
반대로 의문을 제기하는 경우가 많다. 
만일 그렇다면 어떻게 현실에서 생활하는가. 

조개껍질은 은화로 잘못본 것은 분명히 잘못 본 것이어서 
그것을 은화로 알고 줏어서 가게에 가지고 가면 
상품을 하나도 구입하지 못할 것이다. 
그런데 물단지를 물단지로 알고 그에 물을 담으면 
물이 보관되는 차이가 있지 않은가. 
그런데 왜 이것을 다 함께 망상분별이라고 하는가. 

이런 기본적인 의문부터 시작해서 
영희는 사람이다. 
사람은 죽는다. 
그래서 영희는 죽는다. 
이런 식으로 판단한다면 
현실에 대단히 들어맞는 올바른 추리 판단이라고 보게 되는데 
도대체 왜 이런 판단에 의존해 선택하고 업을 행하면
이것이 왜 악마의 속임수에 빠져 엉뚱한 선택을 하게 하는 내용이 된다고 하는가. 
도무지 이해를 하지 못하겠다. 
이렇게 임하기 쉽다. 


그리고 이것이 본 논의에서 제시하는 
망집의 잔류현상과 바로 관련된다. 
일반적으로 이런 내용을 대해서 
그 판단이 갖는 문제점을 인식하지 못하고 
오히려 의아하게 여기는 한편 
심한 경우는 이런 내용을 제시하는 이에게 
분노까지 일으키는 경우가 그런 문제다. 

앞 부분에 그 대강의 내용을 제시하고
또 각 논리체계가 갖는 치명적인 문제점을 대강 살폈는데 
조금 설명이 부족해서 좀 더 자세한 설명을 덧붙일 필요도 있다고 본다. 
그래서 이 문제를 다음에 이어서 살피자. 

우선 첫 부분이다. 

어떤 이가 눈을 뜨고 
물단지나 사과나 자동차를 본다. 
그런 상태에서 저 부분은 물단지다. 
또는 저 부분은 사과다 
또는 저 부분은 자동차다. 
이렇게 판단한다면 이것은 무슨 문제가 있는가. 

또 한편 각 경우 엉뚱하게 그런 부분을 가리키면서
그 부분은 금화다. 
이런 식으로 판단하는 것은 분명 위와 같은 
판단과 특성이 다른 판단이 아닌가. 

이 문제를 검토해보자. 

우선 위에 든 사례에서 사과나 물단지 자동차나 사정이 다 같으므로 
여기서 단순히 사과를 하나 놓고 판단하는 경우를 놓고 살피자. 

눈을 떠서 사과를 보고 
저 부분은 사과다 이렇게 판단을 하고 
그와 같이 '이것은 사과다' 진술한다. 
이것은 참된 옳은 판단이 아닌가. 
이것을 살펴보자. 

여기서 다음을 우선 구분해야 한다. 

○ 감각현실의 옳고 그름의 문제 
처음 눈을 떠서 볼 때 일정한 감각내용을 얻는다. 
현실에서 사과를 본다고 할 때 
사과만 딱 구분해서 떼어 보는 경우는 드물고 
전체적으로 보게 된다. 
방에서 사과를 본다면 
사과와 사과가 놓인 접시 탁자 벽 의자 책상 
이런 것을 다 함께 전체적으로 감각현실로 얻는 것이다. 

그런 가운데 자신이 사과라고 여기는 그 감각현실 부분에 
초점을 맞춘다면 
과연 그런 감각현실이 옳은 감각현실인가를 먼저 문제삼을 수 있다. 
그래서 이렇게 판단할 수 있다. 
'저 부분 즉 자신이 사과라고 보는 그 부분에 대한 감각현실은 옳은 감각이다'


○ 감각현실에 대한 분별의 옳고 그름의 문제 
그 다음 두번째 
그런 상황을 놓고 
다시 '그 부부은 사과다' 이렇게 분별을 하는 경우가 있다. 
그래서 이런 분별이 또 그 상황과 관련되어서 
옳은 분별인가가 문제된다. 


○ 감각현실에 대한 언어표현의 옳고 그름의 문제 

또 논리추론을 하는 가운데 특히 다른 이와 의견을 교류하는 과정에서는 
이 내용을 언어로 표현해 진술하게 된다. 
그래서 '그것은 사과다' 이렇게 표현하거나 
외국인을 상대로 한다면 'It is an apple' 이런 식으로 표현하게 된다. 
이 경우도 마찬가지로 그런 명제의 참 거짓이 문제된다. 

그래서 위 각 내용을 일단 구분하는 것이 필요하다. 
그런데 잘 살피면 위 내용을 모두 다 언어로 표현했다. 
그래서 논의 과정에서 이 각 내용을 놓고 
일단 혼동을 일으키지 않도록 주의해야 한다. 

그 사정은 한 주체가 얻는 감각현실이나 
관념분별 자체는 그 주체가 생생하게 또는 명료하게 얻는다해도 
그 자체를 다른 이에게 그대로 전달하는 것이 곤란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결국 언어를 통해 이들 각 내용을 가리키면서 
서로 의사를 교류하게 되는 사정 때문이다. 

그런 사정에서 어떤 책에 이와 관련된 내용이 나올 때 
표현만 의존해서 이 가운데
어떤 내용을 초점으로 두고 논의하는가가 명료하지 않을 수 있다. 



○ 감각현실과 관념분별의 구분 

인도논리학과 관련해 이런 내용을 살필 경우도 마찬가지다. 

그래서 이 문제를 정말 어떤 학파의 어떤 이가 
그런 의미로 내용을 제시한 것인가를 놓고 
문제를 살피면 문제를 해결하기가 한층 더 어려워진다. 
그 당사자를 지금 만나는 것도 힘들고 
그 당사자가 사용하는 언어를 이해하는 것도 힘들지만, 
설령 언어표현을 잘 이해해도 
그 언어표현과 그 주장자의 내심의 판단과 
그 판단이 가리키는 부분이 과연 어떤 내용인가가 
다 해결하기 곤란한 성격을 갖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문제를 추상적으로 가정적으로 바꾸어 놓고 
내용을 살피면 위 문제를 일일히 살피지 않아도 
실질 논의로 옮겨 갈 수 있다. 

즉 위에 나열한 각 주장을 어떤 이가 그렇게 한다면 
그 경우는 각기 어떤 문제를 갖게 되는가를 
가정적으로 살피는 방식으로 임하면 
구체적 어떤 주체가 어떤 표현으로 무엇을 정확히 
가리킨 것인가를 일일히 살피지 않더라도 
실질 논의로 옮겨갈 수 있게 된다. 

여하튼 위 내용이 문제되면 그런 경우 어떻게 판단해야 하는가가 
실질적으로 중요하기에 위와 같은 형태로 
문제를 놓고 각 경우를 살피면 된다. 

그런데 일반적으로 
망집을 일으킨 상태는 
언어표현 => 관념분별 => 가리키는 감각현실을 
모두 접착시켜서 이것이 다 같은 내용이라고 이해하고 
대하는 경우도 많다.
그런 경우는 혼동의 해결이 어려워진다. 
그래서 처음에 무엇이 감각현실이고 
무엇이 그에 대해 일으킨 관념분별인가하는 구분부터 먼저 
잘 행해야 한다. 

눈을 감았을 때 보지 못하다가 
눈을 뜨는 순간 보게 되는 어떤 내용이 있다면 
그것이 감각현실이다. 

그리고 
눈을 떠도 역시 생각할 수 있고
눈을 감아도 여전히 생각할 수 있는 어떤 내용이 
위와 관련해 있다면 그것은 위와는 구분해서 
대하면 된다. 

이렇게 각 내용을 구분하고 
감각현실은 감각현실대로 
또 그에 대해 일으킨 분별 내용은 분별 내용대로 
그 옳고 그름을 판단하면 되는 것이다. 

이것은 어떻게 복잡한 추론을 거치지 않고도 
그런 내용을 곧바로 얻어내는 것처럼 여기지만, 
이 내용을 놓고 그것이 옳다고 한다면
그것은 도대체 무슨 근거로 그것을 옳다고 제시하는가를 
살피는 문제는 조금 더 복잡하다. 

눈을 뜨는 순간 무엇을 볼 때 
그 경로가 알고보면 복잡하다지만, 
그 주체는 눈을 뜨면 그 내용을 곧바로 얻는다. 
또 분별도 마찬가지다. 
그러 내용을 얻는 상태에서 
일정 부분을 이리 묶고 저리 나누어서 
한 부분에 대해 그것은 사과다 이런 분별을 일으킨다면 
그 자세한 과정은 복잡할지 몰라도 
그런 상황에서 그런 분별을 일으키면 
곧바로 그런 분별을 일으키게 되었다고 보게 된다. 

그런데 문제는 그렇게 한 주체가 얻은 
감각현실이나 관념분별을 놓고 
그것이 각기 옳다면 그렇게 옳다고 보는 근거가 
무언가 하는 것을 함께 제시해야 한다. 
그리고 그것을 놓고 과연 그런가를 살펴야 하는 것이다. 

이런 문제에서 그것을 보고 그런 생각을 하는 것은 
당연하지 않은가. 직접 척 보면 딱 알게 되는 것 아닌가. 
이렇게 임하면 더 이상 논의가 진전되지 않고 
또 망집을 해결하기도 어려워진다. 


이 문제를 이미 이전 페이지에서 살폈다. 

그런데 조금 더 자세히 살핀다면, 
그 옳고 그름을 문제삼는 사정이 다음과 같다. 


○ 감각현실에 대한 옳고 그름 판단의 기준 문제 

감각현실을 하나 놓고 보자. 
눈을 떠 본 일정부분이 그렇게 그 순간에 얻어졌다. 
그래서 얻어졌다는 것은 사실인데 
이것이 옳은가 그른가는 무엇을 기준으로 판단할 것인가. 


● 참된 진짜의 영원불변한 내용을 기준으로 하는 경우 

감각현실을 여하튼 현실에서 얻었는데 
그 내용이 꿈과는 달리 
실다운 진짜의 참된 내용이라고 할 수 있는가. 
그런 의미에서 옳고 그름을 문제삼을 수도 있다. 

이는 불교에서 무아 무자성의 논의와 관련되고
해당 내용이 과연 집착을 가질 실다운 내용인가의 판단문제와 관련된다. 

불교에서는 이와 관련해
본 바탕인 실재 영역을 포함해서 현실 일체에
그런 진짜에 해당하는 내용은 없다고 하여
무아 무자성을 제시한다. 

그리고 여기서 문제삼는 감각현실도
결국 그런 상황 그런 조건에서 그 주체가 그런 감관을 통해 얻는 임시적인 내용에 불과한 것이어서 
그 성격이 침대에서 꾸는 꿈과 그 성격이 같고,

결국 그런 내용들은 하나같이
꿈과는 성격이 달라서 참되고 진짜라고 할 수 있는  내용이 아니다. 
즉 이는 영원불변하고 고정된 본체나 실체가 아니다. [무아 무자성]
라고 제시한다. 

그래서 이런 입장에서 옳고 그름을 판단하면 
당연히 그런 내용은 그런 내용에 해당되지 않는다고 해야 한다. 



● 실재대상 

한편 현실에서 얻는 감각내용의 옳고 그름의 문제를 
그것을 얻어내는 과정에서 그 주체가 상대한 대상을 기준으로 판단할 수 있다. 

이 때 그 주체가 얻은 감각내용이 그 주체의 마음 내용임을 이해하면
다시 그런 내용은 그 마음 밖의 어떤 실재대상과 관계헤 
그런 내용을 얻는 것인가를 문제삼게 된다.


이 경우 어떤  주체가 자신의 주관과 관계없이 실재하는 
어떤 실재대상을 추리해 시설한다해도, 
다만 그런 실재는 앞처럼 무아 무자성을 기본으로 하는 한편 
그 실재 영역에 전혀 아무 내용이 없다고 할 수 없지만, 
정작 각 주체는 일정 조건에서 주관이 관계해 얻는 내용만 현실에서 얻을 수 있기에 
여기서 문제삼는 실재 내용 자체를 직접 얻지 못한다.
그런 사정으로 실재에 대해서는
무엇이 있다 없다 -이다 -아니다 -와 같다 -와 다르다 등등의 온갖 2 분법상의 분별을 행할 수 없고 [불2법]
언설을 떠난 상태가 되는데
이런 상태를 나타내기 위해 
어떤 의미를 갖지 않는 공이라는 표현을 시설해
실재는 공하다라고 표현하게 된다. 

또 사정이 그렇기에 실재 가운데에서 무엇을 빼고 넣고 하면서 
그것이 그런 감각현실을 얻는데 관계가 되는가 되지 않는가 자체를
판단할 수 없게 된다. 

이런 사정으로 실재에 대한 부분은
결국 불가득 공이라고 제시하게 되고 
그래서 이 내용과 관련해 
감각현실이 실재와 일치한다거나 일치하지 않는다거나 
같다거나 다르다거나 그 일체를 단정적으로 판단하지 못하는 상태가 된다. 

따라서 한 주체가 현실에서 어떤 감각현실을 얻은 것은 사실이지만, 
이런 측면에서는 그렇게 그런 상황에서 그런 내용이 얻어졌다고만 제시할 뿐 
그 내용에 대해 실재대상을 기준으로 해서 '옳다 그르다' 어느 쪽으로 
단정할 수 없게 된다. 




● 감각현실안에서 대상을 설정하고 이를 기준으로 하는 문제 

두번째 얻어진 내용을 놓고 얻어진 내용을 문제삼을 수도 있다. 
이런 기준은 사실은 조금 엉터리다. 
그런데 그렇게 보는 데는 그 얻어진 내용을  
그 내용을 얻게 한 대상으로 혼동하면 이런 판단도 행하게 된다. 

이 경우 만일 대상을 자신의 다른 감각 내용이나 
또는 다른 주체가 얻는 감각내용을 대상으로 놓고 판단하면
엉뚱하게 판단하게 되는 사정을 이미 보았다. 

예를 들어 손으로 사과를 보고 그 사과를 손으로 만질 때 촉감을 얻는다면, 
이 상황에서 자신이 는으로 본 시각정보로서 사과모습을
촉각정보로서 그런 촉감을 얻게 한 대상으로 여겨서 
이 경우 그런 사과모습에 대해서 그 촉감을 얻은 것이라고 본다면 
이 두 내용은 일치하지 않는다. 

그리고 이것을 반대로 뒤바꾸어도 마찬가지다. 
예를 들어 자신이 본 번개빛이 어떤 천둥소리에 대한 것인가. 
이런 형태가 된다. 

또 다른 이가 옆에서 본 조각상을 
자신은 정면에서 보고 다른 모습을 보았다고 할 때 
이 경우 제 3 자 이 상황을 놓고
그 제 3 가가 본 조각상을 대상으로
자신이 그런 모습을 보았다고 여기면 
이 경우에도 앞과 같은 형태로 문제가 발생한다. 

이것은 그 반대도 마찬가지다. 
자신의 입장에서 다른 영희나 철수는 
자신이 본 그런 시각정보로서 사과 모습을 상대해 
영희나 철수가 무언가를 보게 된다고 이해하면 
역시 이 두 내용은 서로 엄밀히 일치한다고 보기 힘들다. 
물론 영희나 철수도 자신과 상태가 비슷하기에 
그 상황에서 엇비슷하게 보게 된다고 추정하게 되지만, 
여하튼 영희나 철수가 그 마음에서 얻는 시각정보는 
그 상황에서 자신이 보는 시각정보와는 지위가 다르다. 
그런데 정작 영희나 철수는 자신이 보는 시각정보로서 그런 사과모습을 
대상으로 해서 어떤 시각정보를 얻는 것도 아니다. 
다만 그 상황에서 자신은 그렇게 그 상황을 대하고 여기는 것 뿐이다. 

사정이 이렇지만 현실에서 일반적으로 
자신이 본 사과 모습을 '대상'으로 해서 다른 영희나 철수가 무언가를 만지거나
대한다고 이 상황을 이해하는 한편,
바로 옆에 있는 영희나 철수의 상태나
자기 자신이나 상황이 마찬가지라고 이해하면서
자신도 자신이 본 사과모습을 역시 눈이 대상으로 삼아 상대해서
그런 사과모습을 보는 것이라고 
일반적으로 현실에서 이해하는 경우가 많게 된다. 

그래서 이런 경우는 
자신이 본 사과 모습 하나를 놓고 
그것이 자신의 눈이 대한 대상인 동시에 
또 그 내용이 곧 그런 대상을 상대해 자신이 얻어낸 감각내용인 것처럼 
여기면서 
결국 자신이 눈으로 본 내용은
결국 자신의 눈이 상대한 대상과 완전히 일치된 내용을 얻는 것처럼
잘못 여기게 되는 경우라고 할 수 있다.


위 문제들은 
이미 앞 조각들 페이지들에서 많이 반복해 살핀 내용들이다. 

그 외에도
현실에서 눈을 떠서 무언가를 볼 때 
무엇을 대상으로 그런 내용을 얻는가에 대해 
많은 잘못된 판단이 행해진다. 

그런데 결론적으로
현실에서 각 주체가 감각기관을 통해 얻는 각 내용은
그 주체가 얻어낸 결과물로서 마음내용인 것이고
정작 그것을 얻게 한 대상은 그 안에 없다고 제시하는 것이다. 
그래서 이런 입장에서 대상과 얻어진 내용의 관계를 살피는 것은 
부적절하다. 




● 관념분별을 기준으로 하는 경우 

또 하나 문제가 있다. 

얻어진 감각 내용을 바탕으로  
그에 대해 관념분별을 일으킬 수 있는데

이제 이렇게 일으킨 관념분별을 기준으로 놓고 
거꾸로 감각내용의 옳고 그름을 판단할 수도 있다. 

이는 각 내용이 얻어지는 바탕을 놓고 보면
거꾸로 뒤바뀐 경우다. 

그런데 이렇게 판단하게 되는 사정은 무언가를 놓고 문제삼을 때 
그 문제를 관념영역에서부터 문제삼는 사정 때문에
현실에서 많이 발생한다. 

자신이 먼저 얻어낼 관념 내용을 기준으로 잡고 
그에 맞추어 그에 상응하거나 일치한 감각현실인가 아닌가를 
문제삼는 경우다. 

예를 들어 현실에서 미아가 된 영희를 찾고 있다. 
그래서 놀이시설 정문을 지나가는 사람을 하나하나 보면서 
그것이 영희인가를 문제삼는 경우를 생각할 수 있다. 

그런데 그 상황에서 각 감각현실부분은
본래 그런 관념을 대상으로 얻는 감각현실이 아니다.
그래서 어떤 부분이 영희에 해당하는 부분이 아니라고 해서
그 감각현실이 잘못이라고 하기는 곤란하다. 
다만 사정은 그렇지만,
그런 상황에서 자신이 찾는 영희의 분별 내용을 기준으로 잡고 
그런 영희에 상응하거나 일치하는 감각현실이어야
그것이 옳은 감각현실이라고 보려는 입장도 있을 수는 있다는 의미다. 

현실에서 자신이 잃어버린 안경을 찾는다. 
그래서 자신이 잃어버린 안경에 대한 몽타쥬를 마음에 놓고 
각 부분을 찾는다. 
그런에 옆에서 안경 여러개를 들고와서 이 가운데 
네 안경이 있는가를 묻거나 

또는 연못에 도끼를 하나 빠뜨렸는데 
산신령이 나타나 금도기 은도끼 쇠도끼를 들고 나와 
어떤 것이 네 도끼인가를 묻는 상황을 놓고 
이 사정을 이해하면 쉽다. 


● 일정상황에서 표준적으로 얻는 감각현실과 착오의 판단 문제 

또 하나 문제가 있다. 
세번째 문제와 비슷하지만, 
현실에서 실용적인 측면에서
얻어진 감각내용의 옳고 그름을 문제삼는 경우가 있다. 

이는 착시나 착각현상이 이 문제와 많은 혼동을 일으킨다. 

예를 들어 어떤 상황에서 무언가 사람이라고 여겨지는 것을 보았다. 
그런데 가까이 가서 보니 그냥 옷걸이에 걸린 옷이었다고 하자. 
여기서 감각현실과 관념분별 사이에서 본래 무엇이 잘못이라고 해야 하는가. 
사실은 일정한 감각현실 자체는 그렇게 얻어진 것이고,
다시 그 내용을 놓고 엉뚱한 판단을 한 그 부분이 문제라고 해야 한다. 

그런데 안경점이나 안과에 가서 시력검사나 눈 검사를 한다고 하자. 
눈이 나쁜 이가 무언가 뿌옇게 물체를 보거나 사물이 두개로 자꾸 보이거나
흐려서 숫자나 글자를 알아보지 못한다. 

안경사나 안과의사는 이 상황에서
일반적으로 시력표에 적힌 4는 4 라고 알아보고 
2 는 2 라고 알아보아야 하는데 그렇지 못하므로 
그가 얻는 감각현실이 무언가 잘못이라고 판단하게 된다. 
그 원인은 시력이 나쁘다거나 눈에 생긴 질환 때문이라고 보고 
안경을 맞추거나 눈 질환치료를 하게 된다. 


이런 상황에서 사물을 잘 알아보지 못하는 이는
무언가 뿌옇게 보기는 하지만
정작 그것이 무엇인지 모른다면 어떤 명료한 분별을 하기 힘들다고 보지만, 
만일 대강이라고 분별하는 가운데
시력표에 적힌 2 를 4 라고 분별한다면 
이는 그 관념분별 부분도 앞과 같은 측면에서 문제라고 보지만,
이 경우 그 상황에서 얻는 감각현실을 놓고 
옳고 그름을 문제삼을 수 있다.   


안경사나 안과의사는 2를 볼 때는
일반적으로 그 2를 구별할 정도로 명료하게 감각내용을 얻어야 하는데 
그 상황에서 그런 분별을 하지 못하면
결국 분별부분보다는 표준적인 감각현실을 얻지 못하는 시력이 문제라고 보고
안경돗수를 맞추어 주게 된다. 

즉 이 경우 안경사 입장에서는 다른 이가 정확히 어떤 상태로 보는지는 
직접 확인하지 못하더라도 
일정한 상황에서는 대부분 시력이 정상인 이들이 얻는
표준적인 감각현실을 얻어야 한다고 보는 한편 
어떤 이가 그런 감각현실을 얻지 못한다면 
그런 감각현실은 잘못이라고 보는 입장이라고 할 수 있다. 


이와 비슷한 예로 드는 경우가 
색깔을 원판에 칠하고 돌리면 색이 섞여 검은색으로 보인다거나 
또는 빨리 달리는 기차에서 나무를 보면 나무가 지나가는 것처럼 
보인다거나 하는 경우를 들게 된다. 

이는 색을 보면 각 부분의 색을 정확히 봐야 하고 
나무는 나무에 해당하는 표준적인 감각현실을 얻어야 하는데 
위 상황에서는 눈에 병이 있다거나 보는 상황에 개입된 어떤 요인으로던지 
그런 감각현실을 얻지 못한 것이기에 
그 감각현실이 잘못되었다고 보려는 입장이다. 

그러나 이 사례들은 엄밀히 보면 조금 구분할 필요가 있다.
위 사례는 대부분 그 상황에 놓이면 비슷하게 보게 된다. 
대부분 빨리 달리는 기차에서 풍경을 보면 나무가 지나가는 것처럼 
보기 때문이다. 

그런데 안경사가 다루는 문제는 
어떤 특정인이 일정 상황에서 다른 이들과 달리 
무언가를 잘 보지 못한다거나 하는 경우다. 

물론 이 경우도 또 다음과 같이 말할 수 있다. 
시력이 나쁜 이들이나 눈에 병이 난 이들은 또 '대부분' 그렇게 
본다고 할 수도 있다. 

그래서 이 각 사례의 구분은 약간 상대적이기는 하다. 
만일 인간이 아닌 다른 생명체까지 고려하면 문제가 조금 
더 많아진다. 

그런데 일단 위 사례는
한 주체가 각 상황에서 얻는 내용 가운데 '어떤 상황'에서 얻는 내용을 표준적인 내용으로 볼 것인가 판단 문제와
일정 상황에서 다수 주체간의 각기 다른 내용을 얻는 가운데 어떤 주체들이 얻는 내용을
표준적인 내용으로 볼 것인가의 판단 문제로 구분할 수 있다. 

그런데 이 경우 감각 부분에서
표준적인 감각내용이 무언가를 객관적으로 명료하게 판정하기는 곤란하다. 
다른 이의 감각내용도 그렇고 
자신의 감각내용도 그렇고
그것을 보관하고 꺼내기가 쉽지 않다. 
또 다른 이에게 이것을 전달하고 
이것을 놓고 서로 비교를 하기도 곤란하다. 

더욱이 병이나, 빠른 기차에 올라탄 특수한 경우가 아니고,
일반적으로 영희라고 보는 부분을 하나 놓고 생각할 때에도  
영희가 100 m 앞에서 자신을 향해 천천히 걸어 오는 일반적인 상황을 놓고 생각하면 
매 순간 그 크기나 형태가 달라짐을 보게 된다. 
처음에는 콩알만한 크기였는데 자신 앞에 서면 킹콩처럼 크게 보인다고 가정하자. 
그래서 이를 죽 나열하면 
α,β,γ,δ,ε,ζ,η,θ,ι,κ,λ,μ,ν,ξ 이런 식으로 
매순간 그 크기나 형태가 다 다르다. 
그리고 그것이 영희가 분명하다고 현실에서 인정해도 
과연 이 각 내용 가운데 무엇이 표준인가는 또 어려운 문제다. 

그런데 여하튼 앞처럼 안경사의 입장이나 안과의사 입장에서 판단하는 것처럼 
물체 자체가 두개로 보이거나 뿌옇게 보이거나 하는 경우와 달리 
어떤 이가 각 상황에서 얻어야 마땅하다고 볼 표준적인 감각을 설정한 가운데
어떤 이가 일반적인 경우와 달리 분별을 하지 못함을 보고하면 
거기에는 다른 이와는 다른 상태로 감각을 잘 하지 못해서 그렇다라고 
추정하게끔 된다. 
그 주체가 생각해도 자신의 다른 경우와 비교하면 그 차이를 확인할 수도 있다. 
평소에는 일정 상황에서 잘 보였는데 어제부터 자꾸 사물이 두개로 보이거나 
뿌옇게 보인다. 알고보니 눈에 백내장이 생겨서 그렇다거나 
또는 노안이 와서 그렇다. 이런 경우를 생각할 수 있다. 
그래서 명확이 각 주체가 얻는 감각현실을 서로 꺼내 비교해 
표준을 판정하기는 곤라해도 현실에서 그런 기준을 추정할 수 있다. 

그런데 이 문제는 
사과를 하나 집어서 다른 이들에게 건네면 
그 상대도 그것을 사과로 보고 받는다. 
영희만 그런 것이아 아니고 철수를 비롯해 그곳에 모인 이들이 
대부분 그렇다. 이런 문제와 함께 관련된다. 

그래서 그 상황에서 한 주체가 대하는 사과는 
객관적 실재의 내용이 아닌가 하는 망상을 잔류시키는 현상과도 관련된다. 

이미 앞 페이지에서 살폈듯, 
이 경우 한 주체가 사과를 건내는 경우 
그 주체가 눈으로 보는 사과 모습은 손으로 붙잡고 건내는 동작의 대상이 아님을 
먼저 이해해야 한다. 
단지 그렇게 보일 뿐이다. 

그 사과를 받는 상대도 마찬가지다. 
이 경우 건내는 이가 눈으로 보고 그 마음에서 얻는 사과모습을 상대가 받는 것도 아니고, 
그 상대도 역시 그 상대의 눈으로 보는 사과 모습을 받는 것이 아니다. 

이 상황에서 각 주체가 엇비슷하게 사과를 서로 건내고 받는다고 여기게 되는 것은 
각 주체의 마음안 내용 즉 시각정보나 다른 감각정보를 서로 주고받아서 그런 것이라고 볼 수 없고 
그런 상황에서 직접 얻기 곤란한 실재에서 
각 주체가 갖는 감관상태가 엇비슷하기에 
그런 상태가 된다고 이해할 수 있다. 

그리고 사과를 건내는 상황처럼
사과를 과연 사과라고 보는가하는 문제도
이에 준해서 생각해야 한다. 

실재를 얻지 못하므로 불가득공이라고 표현하면 
위 문제를 이해하기 힘들게 되므로 
각 주체가 본 바탕인 실재를 바탕으로 감각현실을 얻고 관념분별을 일으키는 
실재 => 감각현실  ..... => 관념분별 이런 관계를 
라면-바위-사과-벽돌-사람
로 비유해 표현하면, 

위 문제는 대부분 라면을 대해서 
일정한 눈을 가지고 대부분 바위의 모습을 얻는데 
왜 특정 주체는 그 상황에서 바위의 모습을 얻지 못하고 
또 다른 엉뚱한 내용을 얻거나 
흐릿한 내용을 얻는가 이런 문제와 관련된다. 

물론 위 비유에서 왜 실재에 하필 라면을 놓고 
그런 라면을 대해 바위와 같은 감각현실을 얻는 관계로 설명하는가. 
바위를 놓고 바위를 얻는다고 비유할 수도 있지 않는가를 
처음에 문제삼을 수도 있다. 

그런데 이는 어디까지나 내용을 직접 얻어내지 못하는 
공한 실재를 바탕으로 감각현실을 얻는 상황을
비유하기 위한 것이기는 하지만,
현실에서 이런 상황을 놓고 이해하면 이해가 쉽다. 

예를 들어 자신이 눈으로 사과를 보면서
또 그 사과를 손으로 붙잡아 두르고 냄새맡고 입으로 맛을 보고
손으로 만지는 상황을 놓고 생각하면 쉽다.

이 상황에서 자신이 눈으로 본 사과는 그런 모습이지만, 
그것을 손으로 대할 때는 이 모습과 엉뚱한 촉감을 얻고 
또 코로 대할 때는 이 모습이나 그 촉감과 엉뚱한 향기를 맡고 
이런 식이다. 
그래서 이런 상황을 놓고 이해하면 조금 쉬울 수 있다. 


그리고 이 상황을
현실에서 다수가 같은 게임기를 놓고 
게임 화면을 대하는 상황에 비유해 설명한 적도 있다. 
게임 화면은 사실은 현실 내용을 놓고 보면 엉터리다. 

그런데 여하튼 그런 게임기를 들고 게임 화면을 대하는 각 주체는 
일단 엇 비슷한 같은 감관,  또는 같은 게임기를 놓고 그처럼 상황에 임하면
서로 엇비슷한 내용을 얻게 된다고 보는 것이다.

그래서 이것을 다시 표준으로 놓는다면 
결국 사과를 놓고 주고 받을 때 
다수가 함께 그것을 사과라고 여기고 주고 받고 
또 마찬가지로 대부분 그것을 대해 사과라고 보게 되는 사정을 이해할 수 있다. 

그래서 이런 내용을 기준으로
다시 그런 상황에 대한 일반적이고 표준적 내용을 세운다고 할 수 있는데 
다시 그런 바탕에서 어떤 특정한 주체의 특수사정으로
또는 특정한 상태에서 그 주체가 갖고 있는 게임기 부품이 고장이 난다거나 등등의  상태에 놓여서 
이런 표준내용과는 또 엉뚱하게 다른 내용을 얻는 것이 문제되는 것이다.
그리고 현실에서 주로 실용적 측면에서
문제삼는 옳고 그름 판단 문제는 이런 측면의 성격을 갖는다는 의미다. 

이는 경전에서 눈 하나만 있는 사람들이 살거나 
장님만 있는 곳에 두 눈이 있는 사람이 가서 상황을 설명하면 
오히려 두 눈이 있는 사람이 비정상이 된다고 제시하는 내용이나, 
또는 장님들이 코끼리를 만지면서 제각기 달리 코끼리에 대해
설명하게 된다는 비유도 또 이와 관련된다. 



그런데 현실에서는 이런 표준적인 감각도 문제삼지만,
그러나 어떤 존재의 엄격한 진리성을 판단하는 문제는 

설령 각 주체가 대부분 얻는 표준적인 감각을
모두 다 함께 무량겁에 걸쳐 반복해 얻는다는 경우에도 

그 감각현실은 본 바탕의 내용의 지위에 있는 내용이 아니고
또한 본 바탕의 실재와  일치한다고 보기 곤란하다는 내용을 문제삼는 것이다. 

그런데 여하튼 현실에서 문제삼는 표준적 내용은 
그 상황에 그런 표준적 내용이 객관적 실재라거나,
또는 적어도 이에 상응하는 어떤 내용이 실재하므로
그 내용은 실답다고 여기고 집착을 일으키는 점에서 
망상의 잔류현상과 밀접하다. 

그리고 망상의 잔류현상을 이해하려면 
우선 표준적 내용마저도 실답지 않다는 사정을 한편으로 이해하고 
다시 사정이 그런데도, 왜 현실에서 다수가 반복해서 일정상황에서 
비슷한 내용을 얻게 되는가 그 사정을 살펴야 할 필요가 있다. 
그런데 그런 사정을 살피는 문제나
현실에서 어떤 내용을 표준적 내용이라고 할 것인가 등은
앞과 같은 측면에서 옳고 그름을 살피는 문제와는 구별해야 한다. 






● 착오 문제와 관련한 감각현실의 옳고 그름 

앞에서 살핀 표준적 감각과 착오와 관련해서는
이와 관련시켜 살펴야 할 문제가 또 있다. 

착각현상과 관련해 다음과 같은 사례를 든다. 
무언가 번쩍이는 것이 보였는데 은화인줄 알았다. 그런데 가서 보니 조개였다. 
이런 경우를 놓고 보자. 
여기서 처음 눈으로 번쩍이는 것을 보는 단계에서 
그 내용이 그 주체의 특수한 눈병 때문에 그 주체만 일으키는 현상인가. 
아니면 대부분 그 상황에서 그렇게 보는가 
이런 문제를 떠나서 
여하튼 그런 과정을 거쳐서 은화로 여긴 어떤 내용이 
나중에 종합적으로 판단해보니 은화가 아니고 조개였다는 경우를 놓고
여기서는 살피는 것이다. 

은화인줄 알았는 조개였다의 경우나 
검은 색인줄 알았는데 알고보니 빨강 노랑 파랑이 그려진 원판이었다. 
나무가 뒤고 움직여 가는 줄 알았는데 알고보니 나무는 그대로 서 있었다. 
멀리서 보니 영희는 콩알만한 크기인 줄 알았는데 알고보니 자신보다 키는 두배는 크다.
이런 형태로 잘못된 판단을 일으키는 경우다. 
일반적으로 이런 착시 착오현상을 설명하는 샘플이 많다. 

>-<
<->
가운데 - 는 같은 폰트로 표시한 글자인데 어떤 것이 길어보이는가. 
이런 문제도 이와 유사하다. 


그런데 여하튼 앞의 사례 가운데
조개를 놓고 은화로 잘못 '여기게' 되는 것이 어떤 경로로 그럴 수 있는가를 놓고 살펴보자. 


○ 어떤 경우는 대다수가 얻는다고 보게 되는 그런 표준적인 감각과 아주 다르게 
눈병이나 기타 보는 각도나 그날 날씨 또는 보는 이가 타고있는 기차의 속도 등등의 요인으로
엉뚱한 감각현실을 얻었다.

=> 그런데 그 내용을 바탕으로 하면 대부분 은화로 보게 된다. 그래서 은화로 보는 것이 적절하다.
=> 그런데 나중에 보니 사실과 다르다. 
이런 경우도 있다. 

그런데 또 다른 경우도 있다. 
○ 위와 같은 사정으로 엉뚱한 감각현실을 얻었다.
=> 그렇다고 해도 그것은 일반적으로 조각품으로 본다. 
=> 그런데 그 특정인만 엉뚱한 생각을 하며 엉뚱한 생각을 하다가 그것을 대해
결국 그 분별과정이 잘못되어 은화로 잘못 보았다. 


그런데 또 다음 경우도 있다. 

○ 
대다수가 얻는다고 여기는 표준적인 감각에서 비추어서도
어떤 주체가 적절한 감각현실을 얻었다.
=> 그런데 그 특정인만 앞과 같은 사정으로 분별과정이 잘못되어서 은화로 여겼다. 

○ 
그런데 감각현실의 문제와 관련하면
오히려 분별은 표준적 분별과 결과가 같아도 감각부분이 문제을고 보는 다음을 더 추가해야 한다. 
다음 경우다. 

표준적인 감각과 어긋난 엉뚱한 감각을 했다. 예를 들어 물체가 둘로 보이기도 하고 뿌옇게 보였다.
=> 그런데 역시 앞처럼 그 주체는 엉뚱하게 그것을 조개라고 여겼다. => 그런데 조개가 맞았다. 

이 경우는 결과적으로 분별 내용은
현실에서 별 이상이 없다고 보게 되는데 
알고보면 감각 부분은 앞의 기준을 놓고 보면 이상하다고 보아야 한다. 


위와 같은 여러 사례 가운데 
감각과정 보다는 분별과정이 잘못되어서 엉뚱하게 여긴다는 것은 
다음에 살필 분별내용의 옳고 그름과 관련시켜 살펴야 할 문제이지만, 
일단 무슨 이야기인가 하면 
자라를 보고 놀란 이는 솥투껑을 보고 자라로 여긴다. 
이런 속담과 관련된다. 

이런 속담의 경우
어떤 이가 무언가를 자라로 여겼지만 알고보니 자라가 아닌 경우다. 
따라서 그 주체가 착각이나 착오를 일으켰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그런 잘못된 판단이 어떤 경로로 일어날 수 있는가를 놓고 볼 때 
감각과정에 문제가 있다기 보다는
그가 그런 감각을 얻기 전에
이미 자라에 대해 놀란 특수한 상태여서 
무엇이던 자라만 비슷한 것만 보면
자라를 떠올리게 되고 분별을 잘못 행했다는 경우다.
이것은 결과적으로 사실과 들어맞지 않은 분별을 한 것인데 
감각현실을 얻는 과정 자체는
표준적인 감각을 정해서 판단한다해도
그 감각과정 자체에는 큰 문제가 없는 경우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결과적으로 잘못된 분별을 하는 과정에는 
그런 경우도 있지만, 
처음 감각과정부터 표준적이지 않아서 
그런 분별을 하는 경우도 또 있다고 보게 된다. 
그래서 이런 경우를 서로 구분할 필요가 있다고 일단 보는 것이다. 

여하튼 일반적으로 착각을 해서 잘못 보았다고 하는 경우에 
이런 여러 경우가 있을 수 있다. 
그래서 이것들이 어떤 기준에서 잘못인가가 또 문제될 수 있다. 

그런데 관념분별에서 살펴야 할 문제이기는 하지만, 
어떤 하나의 감각현실을 놓고 사실상 일으켜 얻을 수 있는 
관념은 대단히 다양하다. 

그래서 낙엽을 놓고 시집간 누이의 모습을 떠올리는 시인까지 포함하고 
다시 숨은 그림 찾기 상황처럼 하나의 감각현실에서 
왜 하필이면 그렇게 그 부분을 대해서 못 찾아내는가. 
또는 자동차에서 왜 창문만 보고 네모라고 하고 
자동차 전체를 보고 달려간다는 생각은 하지 못하는가. 
반대로 바퀴를 보고 동그랗다고 보지 못하는가. 
등등으로 어떤 한 감각현실에서 대부분 일으킨다고 보는 일정한 내용을
왜 어떤 이는 그 상황에서 생각하지 못하는가를 놓고 판단하면 
분별 영역에서도 어떤 표준적인 분별을 정하고
또 반대로 어떤 분별은 엉뚱한 엉터리 분별이라고 구분하는 것이
상당히 애매한 문제가 되는 사정을 볼 수 있다. 

그런데 여하튼 현실에서는 이런 여러 내용이 진리 판단문제와 관련된다. 





● 감각현실의 옮고 그름의 판단과 망집의 문제 


이와 같이 일단 여러 기준을 놓고
감각현실 자체가 옳은가 그른가를 문제삼을 수 있다. 

그런데 엄격한 진리 판단의 측면에서는 주로 
첫번째 측면과 두번째 측면이 주된 논의대상이 되어야 한다고 본다. 
즉 무아 무자성 공과 관련해 감각현실의 판단이 주된 논의대상이 된다. 


그런데 현실에서는 
실용적인 측면에서 
관념분별과 관련해 앞에 나열한 여러 측면이 문제될 수 있다. 

그리고 이 부분이 망집의 잔류현상과 관계가 깊다. 

이는 우선 앞에 제시한 착오의 발생과 관련해서 
그 반대면을 놓고 보면 이해가 쉽다. 

어떤 상황에서 자신이 무언가를 보고 그것을 은화로 여기고
가게에 갔는데 은화가 아니다. 
그런 경우는 어느 부분에서인가 잘못된 판단을 했다고 여기게 된다. 

그런데 반대로 은화로 보았는데
나중에 자신이 다른 상황에서 반복해 보아도 은화로 여겨지고
또 가게에서도 상대방도 은화로 본다.
그리고 은화로 취급해서 상품도 건넨다. 
그러면 앞의 경우는 다르다. 


그래서 이 두 경우를 달리 취급해야 한다고 일단 보게 된다. 

그래서 처음 은화가 아닌 것을 은화로 여긴 경우에는 
처음 무언가를 보는 감각과정에서부터 무엇인가 잘못되었다거나, 
그것이 아니면 그에 대해 분별을 하는 과정에서
잘못이 발생했다거나 하는 가능성을 
함께 다 놓고 또 살펴보아야 한다. 

그런데 이론상 여기에 많은 문제가 들어 있다. 

그런데 이들이 현실에서
어떤 경우는 적절하고 올은 표준적 판단이라거나
또는 그렇지 않은 착각이나 잘못된 판단이라거나 하는 경우
그 모두가 다 함께 망집 현상에 포함된다는 것은 
다음을 의미한다. 

예를 들어 
설령 현실에서 한번 은화로 보고 
그 다음에도 다시 반복해서 자신이 은화로 보고 
또 영희나 철수를 비롯해 다른 이들도 은화로 보는 한편 
그 은화가 이후 현실에서 갖는 여러 기능을 다 발휘한다고 할 때도 
이것을 망집이라고 제시하는 것은 이 경우마저도 
여전히 엄격한 진리 판단 측면에서는 문제가 있다고 제시하는 것이다. 

왜 그런가하면, 
처음 진리성 판단을 함에 있어서 
처음에 제시한 기준 즉 무아 무자성이나 공한 실재와 관련한 판단에서 
현실에서 얻은 a 란 감각이나 관념내용이 실답지 않은 내용으로 문제라고 본다면, 

그 뒤에 이어지는 하나하나의 감각 및 분별 내용도 
모두 이와 같은 성격을 갖고 그 진리성이 문제가 있는 내용이 된다. 

그래서 하나의 내용의 진리성을 판단할 때
똑같은 성격으로 그 진리성이 같이 문제되는 내용을 쌓아서 
처음 문제되는 내용을 옳다고 제시할 도리는 없다는 의미다. 

즉, 
a 가 문제일 때 
b 도 같은 문제고 c 도 문제고 d 도 문제인데 
a  에 대해서 그 뒤에 b ,c, d 가 겹쳐진다고 해도 
a 의 진리성에는 별 영향이 없다는 의미다. 

또 만일 뒷 내용이 이어져서 처음 내용이 옳다고 한다면 
예를 들어 명백히 처음 내용이 잘못인데도 
그 뒤 내용은 역시 같은 형태로 이어지는 경우도 
함께 놓고 살필 필요도 있다.

즉 위조지폐가 한장일때는 위조지폐인데 
그 위조범이 수 억장을 찍어내면 
그런데 앞의 입장은 이런 경우도 그 돈을 그런 사정으로 
진짜돈이라고 해야 하는 것이 된다.  
그래서 
이런 방식으로 진리판단을 하면 곤란함을 제시하는 것이다. 

이런 경우에도 위조 지폐를 유통시키는 이들 사이에서는 
그것이 일정한 기능을 갖는다고 할 수 있다. 
아이들이 갖고 노는 딱지도 그 사정이 같다. 
딱지는 실다운 것이 아니라고 해도 
아이들 사이에서는 딱지를 구슬로도 바꾸고 
노트나 필기도구와도 바꿀 수 있다.
사정이 그렇다고 그것을 실답다고 여기면 곤란하다. 

사실 현실에선 이런 입장이 더 실용적이라고 보지만, 
진리판단에서는 그렇게 임하기 곤란하다. 

특히 수많은 생명을 놓고 이 문제를 다수결로 판단한다면 
어떤 경우는 곤충이 보는 내용을
오히려 표준이라고 해야 하는 문제도 발생한다. 

따라서 진리성 판단 문제에서 실용적으로
대충 표준적인 감각과 표준적인 분별을 세우는 것은 
상당히 곤란하다. 






♥ 잡담 ♥

위에 일단 감각내용과 관련된 여러 관련내용을 일단 적었는데 
조금 복잡하다. 

그런데 이것이 처음 감각현실에 초점을 맞추고 
그것을 어떤 근거로 옳다고 하는 것인가를 살필 경우의 문제다. 

관념분별이나 언어 표현과 관련한 문제도 
또 마찬가지로 살필 수 있다. 

그런데 이들 나머지는 조금 더 쉬었다가 보기로 한다.  

여하튼 위 문제가 상당히 복잡하고 번거로와 보이는데 
현실에서 이런 문제가 많이 제기된다. 

조금 논의에 흥미를 가지려면 
그냥 돌인줄 알고 해변에서 줏어왔는데 
그것이 희귀한 보석이다. 
그런데 그 사실을 알고 자기 가방에 놓고 온 줄 알았는데 
알고보니 가방을 바꿔 들고 왔다. 

이런 등등의 사례를 놓고 
현실에서 많은 부를 얻으려면 
어떤 자세로 임해야 마땅한가 이런 입장에서 살펴보아도
흥미를 갖는데 도움이 되리라 본다. 

그런데 사실 경전에서 다루는 진리 판단 문제에서는 
그런 내용에 집착을 갖고 대하면
전반적으로 종합적으로 생사고통을 받는 상태로 묶여 들어간다는
위험성을 제시하는데 초점이 있다. 

그래서 이것을 망집현상과 관련해 살피게 되는 것이다. 



현재 더 살펴야 하는데 
연구야 계속 하겠지만, 
당분간은 이 내용을 살피기가 곤란하다. 

일단 오래 쉬기로 한다. 

그런데 특히 분별과 관련해서는 
한 현실 단면을 놓고 
사과가 분명 눈앞에 놓여 있고 
그것을 보고 만지는 상황에서 

'그것은 사과다. 그것은 이런 모습이고 그것은 이런 성품을 갖는다'

이런 식으로 분별하는 그 일체가 
망상분별이라는 그 부분을 잘 이해해야 한다. 

여기서 주의할 점은 
그런 감각현실을 대하고 
이렇게 묶고 저렇게 나누면서 그 주체가 
그런 분별을 일으키는 것으로서 

그 주체나 또는 여러 주체가 다 함께 
그런 분별을 일으키는 것은 비록 인정하더라도 

그 분별 내용 자체가 그 감각현실에 있는 내용이 아니다. 
이 부분을 제시하는 것이다. 

그래서 이 경우도 
역시 본 바탕인 실재를 기준으로 하거나 
또는 감각현실을 기준으로 하거나 
어떤 분별을 옳다거나 그르다고 하기 곤란함을 제시하는 것이다. 

특히 여기서 '그르다'고 하는 것도 곤란하다. 
이 부분을 주의해야 한다. 

왜냐하면 그 영역에서 그런 분별 내용을 '얻지 못한다'고 제시한 것이기 때문이다. 

여하튼 앞으로 살필 주제를 대강 이렇게만 제시하고 
오래 쉬기로 한다. 
이렇게 오래 쉬게 되는 것은 일단 
mun 님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이는 연구를 쉬겠다는 뜻이 아니고
연구를 이동을 하면서 계속 하자는 취지다. 

정말 빠른 차를 타고 풍경을 보면 
어떤 문제가 있는가 
이런 것을 일일히 현장에 가서 살펴보자는 취지라고 할 수 있다. 
주마가편, 주마간산, 주마가필 이런 말이 
이 대목에서 떠오르는데 
써 놓은 부분을 다시 검토하면 보충할 부분도 많이 보이지만, 
시간이 늦어져서 일단 여기까지만 살피고 
보충은 뒤로 미루기로 한다. 

현재 작업 페이지를 여는 핫키를 20 개로 증설했는데도 
자꾸 조각들이 밀려서 이 핫키가 다 찼다. 
그래서 이 조각글 저 조각글 옮겨 다니면서 살피는데
한편 심적 부담이 많다. 
그런데 어쩔 도리가 없다. 





ori 문서정보 http://buddhism007.tistory.com/5195#1101

sfd8--불교단상_2562_10.txt ☞◆vvjo1101

sfed--인도논리학_InDoNonLiHag_x.txt ☞=367

불기2562-10-15
θ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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