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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진리와실천
불기2564-01-14_대보적경_103 본문
『대보적경』
K0022
T0310
제103권
● 한글대장경 해당부분 열람I
● 한글대장경 해당부분 열람II
○ 통합대장경 사이트
○ 해제[있는경우]
※ 이하 부분은 위 대장경 부분에 대해
참조자료를 붙여 자유롭게 연구하는 내용을 적는 공간입니다.
대장경 열람은 위 부분을 참조해주십시오.
○ [pt op tr] 대보적경_K0022_T0310 핵심요약
■ 문수사리가 말하였다.
“그러합니다.
천자여,
여래라 함은 곧 허공의 경계입니다.
왜냐 하면 모든 법은 평등하여 마치 허공과 같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허공이 곧 여래요,
여래가 곧 허공이어서 허공과 여래는 둘이 없고 구별도 없습니다.
♣0022-103♧
『대보적경』
○ [pt op tr]
제103권
대보적경 제103권
수 삼장 달마급다 한역
송성수 번역
36.선주의천자회 ②
■2) 개실의품(開實義品)
그때 크게 모인 대중가운데서 우두머리 천자(天子)로서
이른바 선주의(善住意) 천자와 선적(善寂) 천자와 참괴(慚愧) 천자가 있었다.
이들은 96억의 천자들과 함께 있었으며 그들은 모두 보살도를 행하였다.
모두 함께 문수사리에게로 나아가 그 문 밖에 이르러
오른 편으로 일곱 번 돌고 일곱 바퀴를 돈 이후에 하늘의 만다리꽃을 뿌렸다.
그리하여 그 뿌려진 꽃은 허공을 두루 덮으면서
10유순의 높이에서 꽃 그물의 받침대[花網臺]를 이루었는데
그 모양이 마치 보배 탑과 같았다.
그때 문수사리는 이 꽃 받침대를 세존께 공양하였으며
공양하고 나서는
곧 신력으로 이 삼천대천세계의 모든 국토를 허공에서 꽃그물로 두루 덮었고
이 꽃의 광명은 삼천대천세계를 두루 비추어 일체를 밝혔으며
또 하늘의 만다라 꽃을 비 오듯 뿌렸다.
그때 문수사리보살마하살은 조용하면서도 찬찬히 정사(精舍)에서 나와서
다시 신력으로 거처하던 처소에 7보로 된 미묘한 자리가 저절로 나타나게 하였는데
그 자리는 높고 훌륭하였으며 장엄이 두루 갖추어졌다.
문수사리는 용모를 단정히 하고 가사를 매만진 뒤에 이 보배 자리 위로 올라갔다.
그때 선주의 천자는 문수사리가 보배 자리에 올라간 것을 보고
곧 머리 조아려 문수사리의 발 아래에 예배하고 물러나 한 쪽으로 가서 앉았다.
모든 하늘들도 한결같이 문수사리의 발에 머리 조아려 예배하였다.
그때 문수사리는 생각하였다.
‘과연 누가 오늘 나와 세존 앞에서 깊은 법을 천명할 수 있을까?
그 누가 법의 그릇[法器]이어서
이와 같은 불가사의 한 구절[不思議句]과
매우 증득하기 어려운 구절[甚難證句]과
처소가 없는 구절[無處所句]과
집착함이 없는 구절[無所著句]과
헛된 이론이 없는 구절[無戱論句]과
얻을 수 없는 구절[不可得句]과
말로 설명할 수 없는 구절[不可說句]과
매우 깊은 구절[甚深句]과
진실한 구절[眞實句]과
걸림이 없는 구절[無礙句]과
무너뜨릴 수 없는 구절[不可壞句]과
공의 구절[空句]과
모양이 없는 구절[無相句]과
소원이 없는 구절[無願句]과
여여한 구절[如如句]과
실제의 구절[實際句]과
법계의 구절[法界句]과
형상이 없는 구절[無形貌句]과
취하지 않는 구절[不取句]과
버리지 않는 구절[不捨句]과
부처님의 구절[佛句]과
가르침의 구절[法句]과
승가의 구절[僧句]과
지혜가 만족한 구절[智慧滿足句]과
삼계가 평등한 구절[三界平等句]과
모든 법에서 얻을 것이 없는 구절[一切法無所得句]과
온갖 법에서 생김이 없는 구절[一切法無得句]과
사자의 구절[師子句]과
용맹스런 구절[勇猛句]과
글귀가 없는 구절[無句句]을 받을 수 있을까?
그리고 이와 같이 설하고 나면 들을 수 있는 사람은 누구일까?’
또 문수사리는 생각하였다.
‘지금 이 자리에는 선주의 천자만이 있을 뿐이구나.
그는 이미 과거 세상에 많은 부처님께 공양하였고 깊은 법인(法忍)에 들어가서 변재를 두루 갖추고 있으니,
세존 앞에서 나와 함께 진실한 이치를 말할 수 있으리라.’
그때 문수사리는 이런 생각을 하고 나서 곧 선주 천자에게 말하였다.
“천자여,
그대는 이제 이미 매우 깊은 법인을 얻었고
또 걸림이 없는 변재를 두루 갖추고 있으니,
이제 나와 함께 세존께로 나아가서
이처럼 깊고 묘한 이치를 논의하여 봅시다.”
그때 선주의 천자가 문수사리에게 대답하였다.
“대사(大士)여,
저는 이렇게 말하겠습니다.
그가 만일 나에게
말함이 없고,
연설하지도 않고,
묻지도 않으며,
대답도 하지 않고,
불․ 법․ 승도 없고,
3승(乘)이 끊어져 없어지며,
나고 죽음도 없고,
열반도 없으며,
합하지도 않고,
펴지도 않으며,
소리를 내지도 않고,
모든 문자도 없앤다는 말을 하는 이라면
저는 마땅히 함께 논의할 것입니다.”
문수사리가 선주의 천자에게 말하였다.
“천자여,
나는 이렇게 말하리다.
‘그가 나에게서
듣는 것이 없고,
읽는 것도 없고,
외우는 것도 없고,
받는 것도 없어서,
지니지도 않고,
생각하지도 않고,
기억하지도 않으며,
취하지도 않고,
버리지도 않으며,
깨닫지도 않고,
알지도 않으며,
나의 말을 듣지도 않고,
다른 이에게 연설하지도 않는다’고 하리니,
그 까닭은 모든 부처님의 보리에는
본래 문자가 없고 마음도 없으며
마음을 여의고 깨닫는 것도 없으며
비록 이름을 붙여서 말한다 하더라도
그 이름도 역시 공하기 때문입니다.”
선주의가 또 말하였다.
“대사여,
지금은 우선 모든 천자들을 위하여 말씀하여 주소서.
이 모든 천자들은 대사의 설법을 즐거이 듣고자 합니다.”
■ 문수사리가 말하였다.
“천자여,
나는 끝내 즐거이 듣고자 하는 이를 위하여 말하지 않고,
또한 듣고 받아들이는 이를 위하여 말하지 않습니다.
그 까닭은 무릇 듣고 받아들임이 있으면 취착(取着)이 되기 때문입니다.
무엇을 취착하는가 하면
이른바 나[我]에 취착하고 사부(士夫)에 취착하는 것이니
취착하기 때문에 곧 듣고 받아들임이 있습니다.
■ 이와 같이 듣고 받아들이면 그는 세 가지 속박 안에 머물 줄 알아야 합니다.
세 가지 속박이란 무엇인가 하면
첫째는 나라고 보는 속박[見我縛]이요,
둘째는 중생이라고 보는 속박[見衆生縛]이며,
셋째는 법이라고 보는 속박[見法縛]입니다.
■ 천자여,
만일 이러한 세 가지 견박(見縛)이 없이 법을 들으면
그는 세 가지 청정함 가운데에 머문 줄 알아야 합니다.
세 가지 청정함이란 무엇인가 하면
첫째는 자기 몸을 보지 않기 때문에 분별하지도 않고 생각하거나 기억하지도 않으며 깨달아 알지[證知]도 않습니다.
둘째는 말하는 이를 보지 않는지라 분별하지도 않고 생각하거나 기억하지도 않으며 깨달아 알지도 않습니다.
셋째는 말한 바를 보지 않는지라 분별하지도 않고 생각하거나 기억하지도 않으며 깨달아 알지도 않습니다.
천자여, 이것을 세 가지 청정함이라 합니다.
천자여, 만일 어떤 이라도 이렇게 들을 수 있다면
이것은 평등하게 듣는 것이니 평등하지 않은 것이 아닙니다.”
그때 선주의 천자가 문수사리를 찬탄하였다.
“장하고 장하십니다.
명쾌히 말씀하여 주셨습니다.
대사여,
만일 어떤 이라도 이렇게 말할 수 있다면
곧 그것은 물러나지 않음[不退轉]의 말씀인 줄 알아야 합니다.”
문수사리가 말하였다.
“그만두시오.
천자여,
그대는 지금 보살의 물러남[退轉]을 허망한 생각으로 분별해서는 안 됩니다.
왜냐 하면 만일 보살에게 물러남이 있다고 한다면 그는 마침내 등정각[等正覺]을 이룰 수 없으리니,
그 까닭은 이 보리 안에는 물러나는 법이 없기 때문입니다.”
선주의가 다시 말하였다.
“대사여,
만일 그렇다면 어느 곳에서 이런 물러남이 있습니까?”
문수사리가 말하였다.
■ “천자여,
알아야 합니다.
탐욕을 좇기 때문에 물러남이 있고,
성냄을 좇기 때문에 물러남이 있으며,
어리석음을 좇기 때문에 물러남이 있고,
유애(有愛)를 좇기 때문에 물러남이 있으며,
무명(無明)을 좇기 때문에 물러남이 있고,
나아가 십이 유분(有分)의 나고 죽음[生死]을 좇기 때문에 물러남이 있으며,
인(因)을 좇기 때문에 물러남이 있고,
소견[見]을 좇기 때문에 물러남이 있으며,
이름[名]을 좇기 때문에 물러남이 있고,
물질[色]을 좇기 때문에 물러남이 있습니다.
욕심 세계[欲界]를 좇기 때문에 물러남이 있고,
형상 세계[色界]를 좇기 때문에 물러남이 있고,
무형 세계[無色界]를 좇기 때문에 물러남이 있고,
성문의 행을 좇기 때문에 물러남이 있으며,
벽지불의 행을 좇기 때문에 물러남이 있고,
분별을 좇기 때문에 물러남이 있으며,
집착을 좇기 때문에 물러남이 있고,
모양을 좇기 때문에 물러남이 있으며,
취하는 모양을 좇기 때문에 물러남이 있고,
아주 없다는 소견[斷見]을 좇기 때문에 물러남이 있으며,
항상 있다는 소견[常見]을 좇기 때문에 물러남이 있습니다.
취함을 좇기 때문에 물러남이 있고,
버림을 좇기 때문에 물러남이 있으며,
나라는 생각을 좇기 때문에 물러남이 있고,
중생이라는 생각을 좇기 때문에 물러남이 있으며,
수명이라는 생각을 좇기 때문에 물러남이 있고,
사부(士夫)라는 생각을 좇기 때문에 물러남이 있으며,
생사를 반복하는 주체를 좇기 때문에 물러남이 있고,
생각[思想]을 좇기 때문에 물러남이 있으며,
얽매임[繫縛]을 좇기 때문에 물러남이 있습니다.
뒤바뀜을 좇기 때문에 물러남이 있고,
나라는 소견을 좇기 때문에 물러남이 있으며,
나라는 소견이 근본이 되는 견해를 좇기 때문에 물러남이 있고,
모든 개(蓋)를 좇기 때문에 물러남이 있으며,
모든 음[陰]을 좇기 때문에 물러남이 있고,
모든 입(入)을 좇기 때문에 물러남이 있으며,
부처님이라는 생각을 좇기 때문에 물러남이 있고,
법이라는 생각을 좇기 때문에 물러남이 있으며,
승가라는 생각을 좇기 때문에 물러남이 있습니다.
■ 이렇게 하여 ‘나는 마땅히 부처가 되어야 한다,
나는 마땅히 설법을 하여야 한다,
나는 마땅히 중생을 제도해야 한다,
나는 악마을 깨뜨려야 한다,
나는 지혜를 얻어야 한다’는 등 이런 모든 생각을 좇기 때문에 물러남이 있습니다.
■ 이와 같아서 천자여,
만일 여래의 10력(力)을 분별하지 않고,
4무소외(無所畏)를 분별하지 않고,
18불공법(不共法)을 분별하지 않고,
온갖 근(根)․ 역(力)․ 각(覺)․ 도(道)를 분별하지 않고,
모든 상호(相好)를 분별하지 않고,
장엄한 불국토를 분별하지 않고,
성문을 분별하지 않고,
보살을 분별하지 않으며
온갖 분별을 하는 물러남을 분별하지 않으면 이것을 불퇴전이라 합니다.”
그때 선주의 천자가 다시 문수사리에게 아뢰었다.
“대사여,
만일 그렇다면 마땅히 어디에서 불퇴전을 얻어야 합니까?”
문수사리가 말하였다.
“천자여,
알아야 합니다.
통달한 부처님이
■ 지혜를 좇기 때문에 물러나지 않음[不退轉]을 얻고,
공을 좇기 때문에 물러나지 않으며,
모양이 없음을 좇기 때문에 물러나지 않고,
소원이 없음을 좇기 때문에 물러나지 않으며,
여여(如如)를 좇기 때문에 물러나지 않고,
법 성품[法性]을 좇기 때문에 물러나지 않으며,
실제(實際)를 좇기 때문에 물러나지 않고,
평등을 좇기 때문에 물러나지 않습니다.”
선주의가 말하였다.
“대사여,
만일 그렇게 말씀하신다면
일체의 모든 분별과 분별 없음은 이 둘이 함께 다르지 않겠습니다.
그 까닭은 모두가 생각함을 좇아서 분별이 생기기 때문이니,
그것은 물러남이 있다고 말할 수 있겠습니다.”
또 물었다.
“이와 같은 물러남은 있는[有] 법입니까,
없는[無] 법입니까?”
문수사리가 말하였다.
“이와 같은 물러남은
있는 것도 아니고 없는 것도 아닙니다.”
선주의가 말하였다.
“대사여,
만일 그렇다면 어느 곳으로 물러납니까?”
■ 문수사리가 말하였다.
“있다 없다 하는 것은 바로 허망하게 취(取)하는 것이요,
이는 뒤바뀌게 취하는 것이며,
이는 여(如)하지 않게 취하는 것이니
그것은 곧 취하지도 않고 취하지 않는 것도 아닙니다.
이런 이치 때문에
물러나는 법은
있다고 설명할 수도 없고,
없다고 설명할 수도 없습니다.
왜냐 하면 만일 있다 없다 하는 가운데에 물러남이 있다면 그것은 허물이 되기 때문입니다.
그 까닭은 만일 있는 법에서 물러난다면 곧 항상 있다[常]는 치우침에 떨어지고,
없는 법에서 물러난다면 곧 아주 없다[斷]는 치우침에 떨어지기 때문입니다.
■ 그리고 세존께서는
‘항상 있는 가운데에도 머무르지 않고
아주 없는 가운데에도 머무르지 않는다’고 하셨으니,
아주 없는 것도 아니고 항상 있는 것도 아닌 것이 세존께서 하신 말씀입니다.
천자여,
만일 먼저 진실하지 않다고 생각하고서 그것을 증득하여 알면
곧 이름하여
아주 없는 것도 아니고 항상 있는 것도 아니라고 합니다.
천자여, 이것이 보살의 물러남의 법문[退轉法門]입니다.”
이 법을 설할 때에 만 명의 천자들이 무생법인을 얻었다.
■ 3) 문수신변품(文殊神變品)
그때 선주의 천자가 문수사리에게 아뢰었다.
“대사여,
이제 함께 여래께 나아가 뵙고 머리 조아려 예배하고,
아직 듣지 못했던 것을 여쭈어 받으며 또한 이때에 법답게 묻고 논의해야 하겠습니다.”
문수사리가 말하였다.
“천자여,
그대는 여래를 분별하거나 집착하지 마십시오.”
선주의가 말하였다.
“대사여,
여래께서는 어디에 계시는데 집착하지 말라 하십니까?”
문수사리가 말하였다.
“바로 앞에 계십니다.”
선주의가 말하였다.
“만일 그렇다면 어째서 저에게는 보이지 않습니까?”
문수사리가 말하였다.
“천자여,
그대가 지금 모든 것이 보이지 않는다면 그것을 일러 참으로 여래를 뵈었다고 하는 것입니다.”
선주의가 말하였다.
“만일 바로 앞에 계신다면 어떻게 저에게 여래를 집착하지 말라고 경계하십니까?”
문수사리가 말하였다.
“천자여,
그대는 바로 앞에 무엇이 있다고 여기십니까?”
선주의가 말하였다.
“허공의 경계가 있습니다.”
■ 문수사리가 말하였다.
“그러합니다.
천자여,
여래라 함은 곧 허공의 경계입니다.
왜냐 하면 모든 법은 평등하여 마치 허공과 같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허공이 곧 여래요,
여래가 곧 허공이어서 허공과 여래는 둘이 없고 구별도 없습니다.
천자여,
이런 이치 때문에 만일 사람이 여래를 뵙고자 하면 이런 관(觀)을 지어야 하며,
사실대로 진제(眞際)를 깨달아 알면 이 가운데서는 분별할 만한 그 어떤 물건도 없습니다.”
그때 문수사리가 보살마하살이
다시 신력으로 서른 두 곳의 중각(重閣)과 보당(寶堂)을 변화하여 만들어냈는데
수레[輦軒]도 완전히 갖추었고 사면은 정방(正方)이었고 네 모퉁이에는 기둥이 있었으며
주위에는 난간이 둘러있고 보배로 된 그물이 엇갈려 이어져 있었으니
아주 특출 나고 근사하며 높고 드러나게 훌륭했고
장엄을 갖추었으니 참으로 좋아할 만하였다.
그리고 모든 당각(堂閣) 안에는 한결같이 훌륭한 평상이 있었는데,
여러 가지 보배로 만들어졌고 하늘옷을 그 위에다 덮었으며
그 평상에는 각각 변화로 된 보살들이 앉아있었고
서른두 가지 거룩한 몸매를 다 갖추었다.
그때 문수사리는 이와 같은 장엄한 일을 두루 나타내고 나서
드디어 다시 그 연꽃 안의 변화한 부처님과 보살과 이 보배 수레와 중각과 전당 안에 있는 모든 보살들과 함께
부처님께 나아가서 부처님을 일곱 바퀴 돌고
또한 비구 대중들을 돈 뒤에 허공에서 도량을 도루 비추면서 사면에 머물러 있었다.
그때 문수사리는 선주의 천자보다 뒤에 출발하였는데도
홀연히 앞서 부처님께 도달하니
선주의 천자가 오히려 뒤에 도달한 연후에 아뢰었다.
“대사여, 제가 먼저 출발하였는데도 더 늦게 도달하였나이다.
어진 이께서는 어느 길을 따라 여기까지 오셨습니까?”
■ 문수사리가 말하였다.
“천자여,
설령 항하의 모래만큼 많은 모든 여래께 공양하고 머리 조아려 예배하였다 해도
끝내 나의 가고 오는 거동은 보지 못할 것입니다.”
그때 꽃받침대에 있던 변화한 보살과 보당(寶堂) 안에 있던 보살들이
모두 게송으로 여래를 찬탄하였다.
일찍이 항하의 모래만큼
많고 불가사의한 모든 세존을 공양하셨고
부지런히 수행하며 보리 구하셨으니
천상과 인간을 초월하셨습니다.
광명과 묘한 빛깔 삼계(三界)에 뛰어나시니
모니(牟尼)의 여러 몸매는 실로 기특하오며
대중에게 수명과 사람과 나가 없다는
매우 깊은 법을 연설하시나이다.
세존께서는 보시와 청정한 계율 지니시고
인욕과 정진으로 선정을 갖추고 닦으시며
지혜가 청정하여 삼계(三界)를 초월하시니
저희는 저 언덕[彼岸)의 가장 높으신 이께 예배하나이다.
그 어떤 이가 뜻을 내어 보리를 구하면
천상과 인간의 묘한 공양 받으며
만일 깊은 공에 의혹이 없으면
장차 세간을 벗어나는 대법왕(大法王)이 되나이다.
과거의 모든 부처님․
등정각과
현재에 계신 온갖 양족존(兩足尊)께서는
본래 모양도 없고 지어냄도 없다고
모든 법의 공을 항상 설하시나이다.
중생의 체성(體性)은 얻을 수 없거늘
어찌 태어남과 죽음이 있겠나이까?
본래 오는 것도 없고 가는 것도 없나니
온갖 모든 법은 허공과 같나이다.
요술로 만들어진 사람이 온갖 일들을 구경시키듯이
비록 보이고 나타내나 진실이 없나니
세존의 설법 또한 그와 같아서
이 모두 헛된 거짓이니 요술 같고 꿈과 같나이다.
항하의 모래만큼 많은 세계에 가득 찬 보물을
모든 사람에게 가져다 보시하여도
인욕을 닦으면서 공을 잘하는 자 있으면
보시하는 이보다 더 뛰어나나이다.
다시 항하의 모래만큼 많은 겁 동안에
모든 부처님․
천인상(天人上)께 공양하면서
향과 꽃과 여러 도구를 받들어 바치고
보리를 구하기 위하여 세간을 떠나
■ 중생과 수명과 사람이 없다 하는
이러한 매우 깊은 법을 얻어들으면
그는 밝고 청정한 법인(法忍)을 얻는 줄 알지니
이것이 시방 부처님께 공양함이옵니다.
수없는 겁 동안에 행하여온
옷과 음식과 코끼리와 말과 뭇 보배의 보시는
해탈의 인(因)이 아닌 줄 알지니
나와 사람과 중생이란 생각이 있기 때문이옵니다.
열반에 이르신 부처님[人中尊]께 귀명하노니
한량없는 중생을 구제하시며
모든 법은 공하고 본래 청정하다는
이와 같은 해탈지로 장엄하셨나이다.
‘부처님 계신 세상 심히 만나기 어렵고
바른 법을 듣고서 믿음 내기 어려우며
사람 몸 얻기 어려운데 이제 얻었으니
거룩한 불법을 너는 따르고 행하라.
이미 이 8난(難)을 물리치게 되었으니
절박함을 영영 끊고 한적한 데 있으면서
모든 바른 법에 믿음과 이해를 얻어
용맹스럽게 정진하여야 한다.
법을 들었다면 마땅히 바르게 생각하며
소리를 듣고 집착하지 않아야 하나니
너희들이 항상 조용한 곳에서 수행하면
반드시 이루게 되리라.
선지식과 법사를 가까이 하고
모든 나쁜 벗은 속히 멀리 하고
중생들을 평등하게 여기면서
부디 나와 사람이라는 마음을 일으키지 말라.
항상 다문(多聞)을 즐기면서 계율을 지니고
집을 버리고 숲 사이에 앉으며
썩은 약으로 병을 치료하며 착한 척 하지 말고
항상 걸식하면서 누더기를 입어라.
일체의 유위(有爲)는 곧 무위(無爲)여서
같은 한 모양으로 아지랑이 같나니
만일 실제(實際)를 알고 진여(眞如)를 보면
위없는 보리 도를 빨리 이루리라.
■ 5음(陰)은 마치 요술과 같다고 보고
안팎의 모든 입(入)은 빈 집 같다고 볼지니
법은 평등하니 그것에 집착하지 말라’고
세존께서는 항상 이러한 법을 말씀하시옵니다.
■ 탐욕과 성냄의 성품은 스스로 공하고
어리석음과 아만(我慢)은 분별에서 생기니
그 법은 이미 소멸하고 없다고
아는 이면 성불하게 되리이다.
이와 같이 모든 변화한 보살이 이 게송을 말할 때에
그 모인 대중 가운데 2만 2천의 중생은 모두가 아뇩다라삼먁삼보리의 마음을 내었고,
5백의 비구는 번뇌가 다하고 뜻이 풀리면서 마음에 해탈을 얻었으며,
3백의 비구니는 티끌을 멀리하고 때를 여의어 법 눈이 깨끗하여졌고,
7천의 우바새․
우바이와 2만 5천의 천자들도 역시 티끌과 때[塵垢]를 여의어 법 눈이 청정하여졌으며,
3백의 보살은 무생법인(無生法忍)을 얻었다.
이때 삼천대천세계의 대지(大地)는 여섯 가지로 진동하였으니 이른바 흔들흔들[動],
두루 흔들흔들[遍動],
같이 두루 두루 흔들흔들[等遍動]하고,
우르르[震],
두루 우르르,
같이 우르르하며,
울쑥불쑥,
같이 울쑥불쑥하고 나아가 와지끈과 와르릉과 들썩들썩하는 것도 역시 그와 같았다.
■ 4) 파마품(破魔品)
그때 존자 사리불이 부처님께 아뢰었다.
“세존이시여,
지금 이 상서로운 현상은 누구의 소위(所爲)이기에 이와 같이 삼천대천세계의 대지가 여섯 가지로 진동하고
또 이 보배 수레와 전당과 연꽃자리 위의 모든 보살들은 큰 광명을 놓아 이 대중의 모임을 비추는 것이며
이처럼 미묘한 깊은 법을 연설하는 것이오며,
또한 이와 같이 수없이 많은 천자들은 모두 여기에 와 모이게 한 것이오며,
또 수없는 모든 보살들도 여기에 와 모이게 하는 것이옵니까?”
그때 부처님께서 사리불에게 말씀하셨다.
“이것은 곧 문수사리의 위신력을 장엄한 일이 나타난 것이요,
또한 보살과 모든 하늘들을 구름처럼 모여들게 한 것이니라.
사리불아,
그 까닭은 이 문수사리와 선주의 천자가 모든 대중을 거느리고 나에게 와서
모든 악마를 파하여 항복시키고 해산시키는[破散諸魔] 삼매 법문을 청하고 물음으로써
불가사의하고 심오한 부처님의 법을 구족하게 성취하려고 하기 때문이니라.”
그때 사리불이 다시 부처님께 아뢰었다.
“세존이시여,
만일 그렇다면 무슨 까닭으로 저는 이 대중들을 보면서도
저 문수사리만은 끝내 보지 못하나이까?”
부처님께서 사리불에게 말씀하셨다.
“너는 우선 기다려야 하느니라.
지금 악마 대중과 악마 궁전에 엄청난 쇠퇴를 불러일으켰고 극히 묘하고 장엄한 신통변화를 이루었느니라.
나에게로 올 터이니,
너는 저절로 보게 되리라.”
이때 문수사리는 곧 모든 악마를 파하여 흩어버리는 삼매에 들어갔다.
그 삼매의 힘으로 인해 그 순간 삼천대천세계에 있는 백억의 악마 궁전은 썩어 내리고 어둠으로 뒤덮이고 무너지려 하였으며,
그러한 변(變)이 나타나자 위엄으로 빛나던 광채도 두번 다시 나타나지 않게 되었다.
그러자 모든 악마들은 더 이상 그곳에 애착을 갖지 않게 되었으며 저마다 늙어빠진 앙상한 몸으로 변하여
지팡이를 짚고 걸어나갔으며 모든 천녀(天女)들도 노파로 변하고 말았다.
모든 악마들이 이런 일들을 보자 몹시 근심하면서 몸의 털이 곤두서듯 당황하고 두려워하면서 생각하기를
‘이 무슨 변괴(變怪)이기에 우리를 안팎으로 이렇게도 불길하게 만드는 것인가.
죽을 때가 다가와 과보가 떠나버리는 것은 아닐까?
그렇지 않으면 세간이 괴겁(壞劫)에 접어들어 재앙이 일어나는 것이란 말인가’ 하였다.
그 모든 악마들이 이렇게 생각할 때 문수사리의 신력으로 백억의 천자들이 곧 악마들 앞에 나타나 말을 하였다.
“그대들은 근심하거나 두려워하지 말라.
이것은 그대들의 재앙도 아니고 겁(劫)이 다 하면서 그런 것도 아니다.
그 까닭은 지금 이 자리에는 불퇴전(不退轉)에 머무른 문수사리라는 보살 대사(大士)가 계시는데
그분은 큰 위신력이 있고 도덕 또한 이 세간을 뛰어나셨다.
그 보살이 지금 막 모든 악마를 항복시켜 해산시키는 삼매 법문에 드셨기 때문이니,
그 대사의 삼매의 위신력으로 그와 같은 일이 생긴 것이요,
다른 원인으로 그런 일이 있는 것은 아니다.”
모든 화현(化現)한 천자들이 이렇게 말을 하자 온갖 마왕과 악마들은
이 화현한 하늘들이 일컫는 문수사리대사의 명호를 듣는 순간
한층 더 두려워하고 떨면서 불안해하였으며 모든 악마의 궁전을 모두 크게 전율하였다.
그때 모든 마왕이 화현한 하늘들에게 대답하였다.
“원컨대 어진 이들이여,
자비로써 저희들을 위액(危厄)에서 구제하여 주소서.”
화현한 천자들은 다시 그 악마들에게 말하였다.
“두려워하지 말라,
두려워하지 말라.
그대들은 지금 석가모니 부처님․
세존께 빨리 나아가야 한다.
그 까닭은 그 부처님․
여래께서는 대자대비하시나니 만일 근심과 두려움과 절박함에 빠진 모든 중생들이 \
오직 나아가서 귀의하기만 하면
모두가 안락함을 얻고 모든 근심과 괴로움이 사라지기 때문이다.”
모든 화현한 천자들은 이렇게 말을 하고는 곧 그 자리에서 홀연히 사라져 버렸다.
그때 모든 마왕과 악마들은 그 화현한 천자들의 가르침을 듣고
한결같이 기뻐하면서 모두가 한마음이 되어
순식간에 그 늙어빠진 몸으로 지팡이를 끌고 석가모니 부처님 앞으로 나아가서 한 목소리로 아뢰었다.
“대덕 세존이시여,
구호하여 주소서,
구호하여 주소서.
이 변괴와 괴로움과 큰 액난을 벗어나게 하여 주소서.
세존이시여,
저희들은 차라리 백천만억 모든 부처님의 명호를 받아지닐지언정
저 문수사리 한 보살의 이름만은 듣고 싶지 않나이다.
왜냐 하면 저희는 곧 이 문수사리 보살의 이름을 들을 때에
몹시 놀라고 두려워지면서 마치 이 몸이 죽어 없어질 것 같았기 때문이옵니다.”
■ 그때 세존께서 모든 악마들에게 말씀하셨다.
“파순(波旬)아,
너는 어째서 갑자기 그런 말을 하느냐.
이 문수대사가 중생을 깨우쳐 인도하고 이익 되게 한 일은
일찍이 억백천의 부처님들도 그렇게 하지 못하셨고,
지금도 역시 그렇게 하지 못하시고,
앞으로도 그렇게 하지 못하실 것이니라.
오직 이 문수사리만이 과거․ 미래․ 현재에 항상 중생들을 위하여
이런 큰 일을 이룩하고 중생이 성숙한 뒤에는 해탈케 하리니,
너희들이 설령 저 백천 부처님의 명호를 듣고서
고뇌가 생기지 않고 놀라거나 두려움이 없다 하더라도
어떻게 ‘우리가 지금 갑자기 문수사리라는 한 이름을 들으니 모두가 크게 놀라고 두려워한다’는 말을 한단 말이냐.”
그때 그 악마들은 아뢰었다.
“세존이시여,
저희는 진실로 부끄러워하나이다.
이 쓸모 없고 늙은 몸에 당황하고 두려움이 더하기에 그런 말을 하였을 뿐이옵니다.
세존이시여, 저희들은 이제 부처님께 귀의하겠사오니,
원하옵건대 가엾이 여기셔서 저희가 본래 몸으로 돌아가게 하여주소서.”
부처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잠시만 기다려라.
문수사리가 오게 되면 저절로 너희들의 부끄러움이 사라지리라.”
이때 문수사리가 삼매에서 깨어났다.
그는 한량없는 백천의 하늘 대중과큰 보살마하살과 용․ 야차․ 건달바․
아수라․ 가루라․ 긴나라․ 마후라가 등에게 앞뒤로 에워싸인 채
다시 한량없는 백천의 미묘한 음악이 울리고
이와 같이 수없이 많은 우발라꽃과 발두마꽃과 구물두꽃과 분다리꽃 등 묘한 꽃들이
비 오듯 쏟아지는 큰 장엄을 갖추고
가없는 큰 신통과 위덕으로 다 함께 부처님께 와서 머리 조아려 예배 공경하고
오른편으로 세 바퀴 돌고 물러나 한쪽으로 가서 머물렀다.
그때 세존께서 문수사리에게 말씀하셨다.
“문수사리야,
너는 그와 같이 모든 악마를 항복시키고 흩어버리는 삼매에 들었더냐?”
문수사리가 아뢰었다.
“세존이시여,
들었나이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문수사리야,
너는 어느 부처님에게서 그 삼매를 들었으며,
얼마 동안 닦아서 원만하게 이루었느냐?”
문수사리가 아뢰었다.
“세존이시여,
저는 본시 아직 보리심을 내지 않았을 때에 부처님으로부터 이러한 삼매를 들었나이다.”
또 물으셨다.
“문수사리야,
그 부처님․ 세존의 명호는 무엇이었기에 이런 삼매를 네게 설하여 주셨느냐?”
문수사리가 아뢰었다.
“세존이시여,
저는 기억하건대 과거의 한량없고 그지없는 불가사의한 아승기겁 전에
만다라화향(曼陀羅花香) 여래․ 응공․ 정변지․ 명행족․ 선서․
세간해․ 무상사․ 조어장부․ 천인사․ 불세존께서 세간에 출현하셨사온데
그 부처님께서 이러한 모든 악마를 항복시키고 해산시키는 삼매를 말씀하여 주셨나이다.
저는 그때 처음 들었나이다.”
부처님께서 물었다.
“이러한 삼매는 어떻게 수행하여 얻는 것이냐?”
■ 문수사리가 아뢰었다.
“세존이시여,
만일 보살마하살이 스무 가지 법을 구족하게 성취하면
이 악마를 항복시키는 삼매[破魔三昧]를 얻게 되나이다.
스무 가지 법이란,
첫째 탐욕을 꾸짖으면서 탐내는 마음을 버리는 것이요,
둘째는 성내는 일을 꾸짖으면서 성내는 마음을 버리는 것이며,
셋째는 어리석음을 꾸짖으면서 어리석은 마음을 버리는 것이요,
넷째는 질투를 꾸짖으면서 질투하는 마음을 버리는 것이며,
다섯째는 교만을 꾸짖으면서 교만한 마음을 버리는 것이옵니다.
여섯째는 세존이시여, 번뇌[蓋]를 꾸짖으면서 번뇌하는 마음을 버리는 것이요,
일곱째는 열뇌(熱惱)를 꾸짖으면서 열뇌하는 마음을 버리는 것이며,
여덟째는 생각[想念]을 꾸짖으면서 생각하는 마음을 버리는 것이요,
아홉째는 소견[見]을 꾸짖으면서 소견을 내는 마음을 버리는 것이며,
열째는 분별(分別)을 꾸짖으면서 분별하는 마음을 버리는 것이옵니다.
열한째는 취사(取事)를 꾸짖으면서 취하는 마음을 버리는 것이요,
열두째는 집착(執着)을 꾸짖으면서 집착하는 마음을 파괴하는 것이며,
열셋째는 모든 모양[相]을 꾸짖으면서 모양에 대한 마음을 버리는 것이요,
열넷째는 존재하는 법[有法]을 꾸짖으면서 존재에 대한 마음을 파괴하는 것이며,
열다섯째는 항상하는 법[常法]을 꾸짖으면서 항상하는 마음을 파괴하는 것이옵니다.
열여섯째는 아주 없는 법[斷法]을 꾸짖으면서 아주 없는 마음을 파괴하는 것이요,
열일곱째는 모든 음[陰]을 꾸짖으면서 음에 대한 마음을 파괴하는 것이며,
열여덟째는 모든 입[入]을 꾸짖으면서 입에 대한 마음을 파괴하는 것이요,
열아홉째는 모든 계[界]를 꾸짖으면서 계에 대한 마음을 파괴하는 것이며,
스무째는 삼계[三界]를 꾸짖으면서 삼계에 대한 마음을 버리는 것이옵니다.
세존이시여,
이것이 보살마하살이 갖춘 스무 가지 법이오며 이로 인하여 마침내는 삼매를 성취하게 되나이다.
■ 세존이시여,
보살마하살에게 다시 네 가지 법이 있어서 구족하게 수행하면 이 삼매를 얻게 되나이다.
네 가지 법이란,
첫째는 심행(心行)을 건립(建立)함에 청정하고도 부드럽게 하는 것이요,
둘째는 심성(心性)이 순박하고 정직하면서도 모든 아첨과 굽음이 없는 것이며,
셋째는 마음에 반연함이 없어 깊은 법인(法忍)에 들어가는 것이요,
넷째는 안팎의 모든 소유물을 모두 능히 보시하는 것이옵니다.
이것이 네 가지 법으로서 마하살이 이 법을 두루 갖추면 이 삼매를 성취하는 것이옵니다.
세존이시여,
보살마하살에게 다시 네 가지 법이 있어서 이 삼매를 얻을 수 있나이다.
네 가지 법이란,
첫째는 끝까지 깊은 믿음을 지니는 것이요,
둘째는 진실한 말을 성취하는 것이요,
셋째는 항상 한적한 데를 좋아하는 것이요,
넷째는 모든 모양[相]을 취하지 않는 것이옵니다.
이것이 네 가지 법으로서 법을 구족하면 이 삼매를 성취하는 것이옵니다.
또 네 가지 법이 있어서 보살이 성취하면 이 삼매를 얻게 되나이다.
네 가지 법이란,
첫째 착한 벗을 가까이하는 것이요,
둘째는 항상 만족함을 아는 것이며,
셋째는 혼자 앉아서 사유(思惟)하는 것이요,
넷째는 시끄러운 데를 좋아하지 않는 것이옵니다.
이것이 네 가지 방법으로서 이 법을 구족하면 이 삼매를 성취하는 것이옵니다.
또 네 가지 법이 있어서 보살이 성취하면 이 삼매를 얻게 되나이다.
네 가지 법이란,
첫째는 계율을 깨지 않는 것이요,
둘째는 계율을 어기지 않는 것이며,
셋째는 계율에 의지하는 것이 없는 것이며,
넷째는 계율에 과보를 바라지 않는 것이옵니다.
이것이 네 가지 법으로서 보살이 이 법을 구족하면 이 삼매를 성취하는 것이옵니다.
또 네 가지 법이 있어서 보살이 성취하면 이 삼매를 얻게 되나니 그 네 가지 법이란,
첫째는 성문의 마음을 버리는 것이요,
둘째는 연각의 마음을 여의는 것이며,
셋째는 보살의 지혜[忍]에 머무르는 것이요,
넷째는 중생을 버리지 않는 것이옵니다.
이것이 네 가지 법으로서 보살이 이 법을 구족하면 이 삼매를 성취하는 것이옵니다.
■ 또 네 가지 법이 있어서 보살이 성취하면 이 삼매를 얻게 되나이다.
네 가지 법이란,
첫째는 공을 닦으면서 나를 버리는 것이요,
둘째는 모양이 없으면서 모양을 여의는 것이며,
셋째는 소원이 없으면서 소원을 제거하는 것이요,
넷째는 소유한 모든 것을 버리는 것이옵니다.
이것이 네 가지 법으로서 보살이 이 법을 두루 갖추면 이 삼매를 얻게 되는 것이옵니다.
■ 세존이시여,
때에 그 만다라화향 여래․ 응공․ 정변각께서
이 모든 악마를 항복시키고 해산시키는 법문을 말씀하여 주시매
저는 그 부처님으로부터 듣고 나서 닦았사오며,
다음에는 다시 일체보전폐일월광(一切寶電蔽日月光)여래․ 응공․ 정변각이 계셨사온데
저는 그 부처님에게서 구족하게 성취하였나이다.
부처님․ 세존께서 이 법문을 말씀하실 때에는
그 대중의 모임 가운데 일만의 보살이 모두 이 삼매의 문을 성취하였나이다.”
그때 존자 사리불이 부처님께 아뢰었다.
“희유하나이다.
세존이시여,
지금 이 문수사리야말로 오랜 세월을 지나오면서 이와 같은 악마를 항복 받은 삼매를 얻게 되었사옵니다.
또한 이 삼매의 힘으로 인하여 파순과 모든 악마들이
이처럼 일시에 머리카락이 희고 늙어빠지면서 형상과 뜻이 다 같이 쇠하여버리는 지경에까지 이르게 되었사옵니다.”
부처님께서 사리불에게 말씀하셨다.
“너는 어떻게 생각하느냐,
너는 지금 문수사리가
이 삼천대천세계의 악마들만을 이렇게 늙은이로 만들었다고 생각하느냐?”
사리불아,
비로소 시방 항하의 모래만큼 많은 모든 부처님 세계에 있는 악마들을 모두 다 이와 같이 변하게 하였으니
이는 문수사리가 위력으로 한 일이니라.”
그리고 나서 세존께서 문수사리에게 말씀하셨다.
“문수사리야,
이제 너의 신력을 거두어 들여서 악마들로 하여금 본래의 형상으로 돌아가게 하여라.”
그때 문수사리는 부처님의 분부를 받자마자 모든 악마들에게 말하였다.
“그대들은 정말로 그 몸의 모습에 싫어졌는가.”
모든 악마들이 대답하였다.
“그러하나이다, 대사(大士)시여.”
문수사리가 말하였다.
“만일 그렇다면 너희들은 이제 탐욕에도 싫증을 내어야 하고,
삼계(界)에도 집착하지 말아야 할 것이니라.”
모든 악마들이 대답하였다.
“거룩하신 대사시여,
받들어서 듣고 기꺼이 뉘우치고 있사온데 어찌 감히 어기겠사옵니까?
원컨데 조금이라도 위신력을 내시어 이 부끄럽고 괴로운 모습을 없애주소서.”
문수사리가 마침내 신력을 거두어들이니
온갖 악마들은 그 본래의 하늘 형상으로 회복되었으며
그 장엄함은 이전과 같이 되었다.
그때 문수사리가 모든 악마들에게 말하였다.
“파순아,
네가 가지고 있는 눈[眼]은 그 어느 것이 눈이고,
어느 것이 눈이라고 생각[想]하느냐.
이와 같이 어느 곳이 이 눈에 대한 집착이고,
눈에 대한 모양이며,
눈에 대한 반연이고,
눈에 대한 장애이며,
눈에 대한 사유[思]이고,
눈에 대한 나[我]이며,
눈에 대한 의지(依止)이고,
눈에 대한 기쁨이며,
눈에 대한 쓸모 없는 이론[戱論]이겠느냐.
또 어느 것이 눈에 대한 내 것[我所]이고,
눈에 대한 보호[護]이며,
눈에 대한 염려[念]이고,
눈에 대한 취함[取]이며,
눈에 대한 버림[捨]이고,
눈에 대한 분별이며,
눈에 대한 헤아림이고,
눈에 대한 성취이며,
눈에 대한 생김[生]이고,
눈에 대한 소멸[滅]이며,
눈에 대한 오고 가는 것이겠느냐.
이와 같은 법들은 너희들의 경계이어서 악마의 일[魔業]이요,
장애가 되는 것이니,
눈에 대한 것처럼 몸[身]과 뜻[意]에 이르기까지도 역시 그와 같으니라.
또 빛깔[色]과 촉감[觸]․ 법[法] 등이 너희들의 경계이어서 악마의 일이요,
장애가 되는 것도 역시 그와 같나니,
너희들은 모두가 사실대로 분명히 알아야 하느니라.
■ 또 파순아,
너희가 가지고 있는 눈은 곧 눈이 아니요,
또한 눈이 없는 것이며,
눈이라는 생각도 없는 것이므로
눈에 대한 집착도 없고,
눈에 대한 모양도 없으며,
눈에 대한 반연도 없고,
눈에 대한 장애도 없으며,
눈에 대한 사유[思]도 없고,
눈에 대한 나도 없으며,
눈에 대한 의지도(依止)도 없고,
눈에 대한 좋아함[愛]도 없으며,
눈에 대한 쓸모 없는 이론도 없고,
눈에 대한 내 것도 없으며,
눈에 대한 보호도 없고,
눈에 대한 염려도 없으며,
눈에 대한 취함도 없고,
눈에 대한 버림도 없으며,
눈에 대한 분별도 없으며,
눈에 대한 결정(決定)도 없고,
눈에 대한 생김도 없으며,
눈에 대한 없어짐도 없고,
눈에 대한 가는 것도 없으며,
눈에 대한 오는 것도 없나니
이 같은 법들은 너희들의 경계가 아니니라.
■ 너희들은 이 가운데서 주인이 될 수가 없는지라 법도 없고,
힘도 없으며 자재로움도 얻지 못하고,
또한 취착(取着)도 없나니,
눈에서처럼 몸과 뜻까지도 역시 그와 같으니라.
또 빛깔․ 촉감․ 법 또한 그와 같나니
너희들은 모두가 사실대로 분명히 알아야 하느니라.”
문수사리가 이 법을 설할 때에
대중 가운데 있던 1만의 마왕 파순이 모두 아뇩다라삼먁삼보리의 마음을 내었고
8만 4천의 악마 권속들이 티끌을 멀리하고 때를 여의어 법 눈이 깨끗하여졌다.
■ 5) 보살신행품(菩薩身行品)
그때 존자 마하가섭이 부처님께 아뢰었다.
“세존이시여,
저희들은 문수사리에게 청하오니
저희들로 하여금 저 모든 보살마하살들을 보게 하여 주시기를 원하나이다.
그 까닭은 세존이시여,
이 모든 대사(大士)들은 만나보기가 어렵기 때문이옵니다.”
■ 그때 세존께서 곧 문수사리에게 말씀하셨다.
“너는 알아야 하느니라.
지금 이 대중들이 시방에서 온 모든 보살마하살의 몸을 볼 수 있기를
간절히 바라고 있느니라.
지금이야말로 적절한 때이니 너는 나타내어야 하리라.”
이때 문수사리는 성현의 분부를 받고 이내 저 법륜(法輪) 보살과
월광(月光) 보살과 제마(除魔) 보살과 묘음(妙音) 보살과 이구(離垢) 보살과 적멸(寂滅) 보살과
선택(選擇) 보살과 법왕후(法王吼) 보살 등 이러한 수없이 많은 보살마하살들에게 말하였다.
■ “모든 대사(大士)들이여,
당신들은 이제 각자 궁전에서 각자의 몸을 드러내시고,
당신들 본래 나라의 형상을 분명하게 나타내십시오.”
문수사리가 이렇게 말을 하자
모든 보살들은 삼매에서 일어나 저마다 본래의 몸을 나타내니
모든 대중은 다 함께 그 모습을 보았다.
■ 혹 어떤 보살은 그 몸이 수미산만큼 높고 컸으며,
어떤 보살은 몸의 크기가 8만 4천 유순(由旬)이나 되기도 하였으며
몸의 크기가 10만 유순 혹은 9만 유순․ 5만․ 4만․ 3만․ 2만 유순이 되는 이도 있었다.
몸의 크기가 7만 유순 나아가 5천, 4천, 3천, 2천이 되는 이도 있었고,
혹은 몸의 크기가 1천 유순 나아가 5백․4백․ 3백․ 2백 유순이 되는 이도 있었으며,
혹은 몸의 크기가 1백 유순 나아가 5십․ 4십․ 3십․ 2십 유순이 되는 이도 있었고,
혹은 몸의 크기가 10유순 5․ 4․ 3․ 2․ 1 유순이 되는 이도 있었다.
이와 같이 크고, 작고, 길고, 짧고, 넓고, 좁은 보살들이 있었는데
그 중에는 몸이 마치 이 사바세계 사람들의 몸과 똑같은 보살도 있었다.
그러할 때에 삼천대천세계에는 대중들이 가득 차서 지팡이 끝을 꽂을 만한 빈 땅도 없었으며
그 안에 있는 모든 큰 보살마하살들은 한결같이 그 공덕이 높고 뛰어날뿐더러
지혜가 깊고 원대했으며,
위력을 두루 갖추고 신통을 성취하였는데,
큰 광명을 놓아 시방의 한량없는 백천의 모든 부처님 세계를 두루 비추었다.
그밖의 온갖 큰 위덕이 있는 하늘과 모든 하늘․ 용․ 야차․ 건달바․
아수라․ 가루라․ 긴나라․ 마후라가․
인비인(人非人)들이며 크고 작은 모든 왕들도 모여와 가득히 찼다.
그때 문수사리는 자리에서 일어나 가사를 매만진 뒤에 오른 어깨를 드러내고
오른 무릎을 땅에 대고 합장하고 부처님을 향하여 아뢰었다.
“세존이시여,
저는 이제 여래․ 응공․ 정변각께 마음에 의심하고 미심쩍었던 것을 조금 여쭙고 싶사옵니다.
세존이시여, 하락하여 주시겠나이까?”
부처님께서 문수사리에게 말씀하셨다.
“네가 묻고 싶은 것을 물으면
너를 위하여 의심하고 있는 내용을 명쾌하게 풀어
너의 마음을 기쁘게 할 것이니라.”
문수사리가 말하였다.
“그러하오면 세존이시여,
자세히 설해주소서.
저는 받들어 경청하겠나이다.”
■ 문수사리가 이어서 말하였다.
“세존이시여,
어떤 것을 보살마하살이라 하오며,
보살이라는 뜻은 무엇이옵니까?”
부처님께서 문수사리에게 말씀하셨다.
“너는 ‘어떤 사람을 보살이라 하며,
보살에는 무슨 뜻이 있느냐’고 내게 물었도다.
■ 법을 환히 깨달아 알기 때문에 보살마하살이라 하느니라.
문수사리야, 저 모든 법을 보살이 깨닫는다는 것은
이른바 언설(言說)이니라.
■ 문수사리야, 보살이 모든 법을 깨닫는다는 것은 무엇인가 하면
눈을 깨닫고,
귀를 깨달으며,
코를 깨닫고,
혀를 깨달으며,
몸을 깨닫고,
뜻을 깨닫는 것이니라.
■ 문수사리야,
보살이 눈을 깨닫고, 귀를 깨닫고, 나아가 뜻을 깨닫는다는 것은
이른바 보살이 저 눈이라는 법의 본래 성품이 공함을 깨닫기 때문에
이와 같이 깨닫고 나서도
끝내 ‘나는 잘 깨달아 알았다’는 생각을 내지 않느니라.
이와 같이 귀를 깨닫고 나아가 뜻을 깨닫되 모두가 본래 성품의 공함을 깨닫는 것이요,
이렇게 깨닫고 나서도 역시 ‘나는 잘 깨달아 알았다’는 생각을 내지 않느니라.
보살이 이와 같이 눈 등을 깨달은 뒤에는 다시 저 빛깔[色]의 본래 성품이 스스로 공함을 깨닫는 것이니,
이와 같이 깨닫고 나서도 역시 ‘나는 잘 깨달아 알았다’고 분별하지 않느니라.
이와 같이 소리[聲]를 깨닫고 나아가 법(法)을 깨닫되 모두가 본래 성품이 공함을 깨닫는 것이요,
역시 ‘나는 잘 깨달아 알았다’고 분별하지 않느니라.
이것이 보살로서 온갖 법을 깨닫는 것이니라.
또 문수사리야,
보살이 어떻게 5음(陰)을 깨닫느냐 하면,
이른바 보살은 음(陰)의 체성[體]은 본래부터 스스로 공하다고 관찰하는 것이니,
이렇게 깨닫기 때문에 모양이 없다고 관찰하고,
이렇게 깨닫기 때문에 소원이 없다고 관찰하며,
이렇게 깨닫기 때문에 욕심이 없다고 관찰하고,
이렇게 깨닫기 때문에 고요하다고 관찰하며,
이렇게 깨닫기 때문에 멀리 여읜다고 관찰하고,
이렇게 깨닫기 때문에 아무 것도 없다고 관찰하며,
이렇게 깨닫기 때문에 실제가 없다고 관찰하고,
이렇게 깨닫기 때문에 움직임이 없다고 관찰하고,
이렇게 깨닫기 때문에 생김이 없다고 관찰하고,
이렇게 깨닫기 때문에 오고감이 없다고 관찰하고,
이렇게 깨닫기 때문에 진실이 없다고 관찰하고,
이렇게 깨닫기 때문에 주인이 없다고 관찰하고,
이렇게 깨닫기 때문에 증득함이 없다고 관찰하고,
이렇게 깨닫기 때문에 앎이 없다고 관찰하고,
이렇게 깨닫기 때문에 소견이 없다고 관찰하고,
이렇게 깨닫기 때문에 사람이 없다고 관찰하고,
이렇게 깨닫기 때문에 생각이 없다고 관찰하고,
이렇게 깨닫기 때문에 말로는 설명할 수 없다고 관찰하고,
이렇게 깨닫기 때문에 다만 이름이 있을 뿐이라고 관찰하고,
이렇게 깨닫기 때문에 나가 없다고 관찰하느니라.
이렇게 깨닫기 때문에 분별로 일어난다고 관찰하고,
이렇게 깨닫기 때문에 인연으로부터 생긴다고 관찰하며,
이렇게 깨닫기 때문에 마치 요술과 허깨비와 꿈과 같다고 관찰하고,
이렇게 깨닫기 때문에 마치 거울의 형상과 같다고 관찰하며,
이렇게 깨닫기 때문에 소리의 메아리와 같다고 관찰하느니라.
이렇게 깨닫기 때문에 마치 파초와 같다고 관찰하고,
이렇게 깨닫기 때문에 오래 머무르지 않는다고 관찰하고,
이렇게 깨닫기 때문에 허망하다고 관찰하며,
이렇게 깨닫기 때문에 사물이 없다고 관찰하고,
이렇게 깨닫기 때문에 이것을 가리켜
보살이 온갖 법을 깨닫는 것이라 하느니라.
■ 또 문수사리야,
보살마하살이 어떻게 탐욕과 성냄과 어리석음을 깨닫느냐 하면,
이른바 저 탐욕은 분별로 인하여 일어난다고 깨닫기 때문이요,
저 성냄도 분별로 인하여 일어난다고 깨닫기 때문이고,
저 어리석음도 분별로 인하여 일어난다고 깨닫기 때문이며,
그리고 또한 그 분별도 공하여
아무 것도 없고,
물건도 없고,
쓸모 없는 이론도 없고,
말로 설명할 수도 없고,
증득할 수도 없다고 깨닫기 때문이니,
이것을 가리켜 보살이 모든 법을 깨달았다고 하는 것이니라.
또 문수사리야,
■ 보살마하살이 어떻게 삼계(三界)를 깨닫느냐 하면,
이른바 저 욕계(欲界)는 나와 사람이 없다고 깨닫기 때문이요,
저 색계(色界)는 조작이 없다고 깨닫기 때문이며,
저 무색계(無色界)는 공하여 아무 것도 없다고 깨닫기 때문이며,
저 삼계를 모두 멀리 여읜다고 깨닫기 때문이니,
이것을 가리켜 보살이 온갖 법을 깨닫는 것이라 하느니라.
또 문수사리야 보살마하살이
■ 어떻게 중생의 행[衆生行]을 깨닫느냐 하면,
이른바 이것이 중생의 탐욕의 행이요,
이것이 성냄의 행이요,
어리석음의 행이요,
이것이 중생의 행이라고 깨닫기 때문이니,
이와 같이 깨달은 뒤에는
이렇게 증득하여 알고,
이렇게 그들을 위하여 말하고,
이렇게 중생을 교화하고,
이렇게 해탈을 얻게 하느니라.
이것을 가리켜 보살로서 온갖 법을 깨닫는 것이라 하느니라.
■ 또 문수사리야,
보살마하살이 어떻게 모든 중생을 깨닫느냐 하면,
이른바 그 이름을 여의고 나면
따로 중생이 없다고 깨닫는 것이니,
그러므로 모든 중생은 곧 하나의 중생이요
그 하나의 중생이 곧 온갖 중생이며,
이와 같은 중생은 곧 중생이 아니니라.
만일 이와 같이 분별함이 없으면
그것을 가리켜 보살마하살이 모든 법을 깨닫는 것이라 하느니라.
■ 또 다시 어떻게 온갖 법을 깨닫느냐 하면,
이와 같이 보살의 도(道)를 깨닫기 때문에
이것이 보살마하살로서 온갖 법을 깨닫는 것이라 하느니라.”
그때 세존께서 이 뜻을 거듭 펴시려고 게송으로 말씀하셨다.
눈과 귀 자체(自體)는
항상 공하고 고요하다고 깨달으면서
나는 능히 깨달았다고 말하지 않나니
이것을 이름하여 보살이라 하느니라.
코와 혀 본래 성품은
아무 것도 없다고 관찰하면서
나는 깨달았다고 분별하지 않나니
이것은 이름하여 보살이라 하느니라.
지혜로 몸을 관찰하고
또한 뜻[意]도 자연(自然)임을 깨달으며
깨달은 뒤에는 남을 위해 말하나니
이것을 이름하여 보살이라 하느니라.
빛깔․ 소리․ 냄새․ 맛․ 촉감․ 뜻이
즐기는 모든 대상[塵]은
본래 성품이 공임을 깨달아 아나니
이것을 이름하여 보살이라고 하느니라.
물질과 느낌과 생각과
모든 지어감과 의식의 마음은
모두 요술과 같다고 깨닫는 것이니
이것을 이름하여 보살이라 하느니라.
5음(陰)의 무더기는 마치 꿈과 같고
그것은 한 모양[一相]도 없다고 깨달으며
내가 안다고도 분별하지 않으니
이것을 이름하여 보살이라 하느니라.
나지도 않고 내지도 않으며
짓는 것도 없고 말도 없으며
이러한 설명도 이름일 뿐이요
그 이름 또한 사물이 아니니라.
탐욕과 성냄,
이것은
분별로 말미암아 일어나는 것이요,
그 분별도 체성이 없어서
끝내 스스로 공임을 깨닫느니라.
어리석음도 분별로 생기는 것이요,
분별은 인연으로 생기는 것이며,
이를 반연하여 모든 소견을 내되
그 모든 소견도 얻을 수 없느니라.
삼계(三界)는 공하여
일체가 진실이 없고
그것은 움직일 수 없다고 관찰하나니
그러므로 이름하여 보살이라 하느니라.
욕계(欲界)는 성취되지 않아서
모두가 분별로 인하여 생기는 것이며
색유(色有)와 무색유(無色有)도
한결같이 견고하지 않느니라.
중생이 행하는 것을
지혜로운 이는 분명히 알며
탐욕과 성냄과
어리석음 등도 분명히 아느니라.
일체 중생이
곧 하나의 중생이라
지혜로운 이는 깨닫는 것도 없고
그 중생임을 생각지도 않느니라.
모든 법의 일어남은
뒤바뀜[顚倒]으로 인하여 생기며
그 뒤바뀜을 깨닫는 이는
뒤바뀜의 참 모습을 아는 것이니라.
지혜가 매우 미묘하여
모든 음성을 취하지도 않으며
깨달은 뒤에도 집착하는 것이 없나니
그러므로 이름하여 보살이라 하느니라.
자기의 육신(肉身)을 능히 버리고
마침내 의지함도 없으니
이와 같이 진실을 깨닫게 되어야
비로소 이름하여 보살이라 하느니라.
계율을 지니는 저 언덕에 이르러도
다시 저 언덕을 생각하지 않으며
계행(戒行)의 법은 여(如)하여
생김도 다함도 없음을 깨닫느니라.
인자한 마음이 중생에 두루 하되
중생이라는 상(相)은 얻지 못하며
그 중생을 깨달았을 즈음에
말을 빌어 밝힐 뿐이니라.
용맹스럽게 크게 정진하면서
깊은 마음으로 유위(有爲)를 싫어하며
삼계(三界)가 텅 비었음을 보고
위없는 정득각(正等覺)을 증득하느니라.
항상 미묘한 선정에 들어가서
집착함도 없고 의지한 것도 없으며
머무름도 없고 반연함도 없으니
지혜로운 이는 반드시 이렇게 하느니라.
날카로운 지혜의 칼로
모든 소견의 속박을 끊어 없애지만
법계의 성품[法界性]은 벨 수도 없고
다치게 할 수도 없는 줄 관찰하느니라.
■ 만일 사람이 진실로
모든 법이 여실(如實)함을 깨달아 알아
때 맞추어 중생을 이롭게 하면
그제야 이름하여 보살이라 하느니라.
Lab value 불기2564/01/15/수/23:01
『대보적경』에서 문수사리보살님이 다음과 같이 파격적인 내용을 밝힌다.
여래라 함은 곧 허공의 경계입니다.
왜냐 하면 모든 법은 평등하여 마치 허공과 같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허공이 곧 여래요,
여래가 곧 허공이어서 허공과 여래는 둘이 없고 구별도 없습니다.
천자여,
이런 이치 때문에 만일 사람이 여래를 뵙고자 하면 이런 관(觀)을 지어야 하며,
사실대로 진제(眞際)를 깨달아 알면 이 가운데서는 분별할 만한 그 어떤 물건도 없습니다.”
그런데 이 구절을 보고 대부분 의아하게 여기게 된다.
일반 현실에서 부처님은 깨닫고 사리분별을 잘 하시고 설법을 잘 해주시는 분을 칭한다.
허공은 그런 특성이 없다.
그리고 현실에서 허공을 부처님이라고 이해하는 경우는 거의 없다.
이는 물론 현실에서 부처님이라고 대하는 그런 내용의 본 바탕은 공함을 나타낸다.
즉 허공이나 그런 부처님이나 그 본 바탕은 모두 차별없이 공하다.
그런데 이 내용을 조금 더 확장 적용하면,
일반인이나 심지어 소 돼지와 같은 축생도 여래라고 해야 한다.
앞 구절에 밝힌 사정을 그대로 적용하면 그처럼 내용을 제시하게 된다.
그러나 사정이 그렇다고 사찰 법당의 부처님 모시는 자리에
바위나 소를 놓고 부처님이라고 모시는 경우는 없다.
그리고 그런 바위나 소를 부처님으로 여기면서 절을 올릴 불교신자도 거의 없다.
이것은 현실 일반적 입장도 마찬가지다.
현실에서 역사적으로 부처님이라고 일컬어진 존재는
바위나 허공의 특성을 가져서 부처님이라고 한 것은 아니다.
또 그 본 바탕이 공하다는 측면만 가지고 부처님이라고 칭하는 것도 아니다.
경전에 제시된 것과 같은 일반인이 알지 못하는 여러 내용을 알려주시고
또 일반인이 갖지 못하는 여러 능력을 갖고 계시기에
그런 분을 부처님이라고 일컫고 존중을 하게 된 것이다.
그래서 들판에 어디서나 볼 수 있는 돌조각이나 바위를 놓고
그 본 바탕이 공하다고 하여 존중하는 것은 아니다.
또 부처님도 마찬가지다. 그 본 바탕이 공하다고 하여
부처님을 여래라고 칭하고 존중하는 것은 아니다.
일체가 다 차별없이 공하지만, 현실 안에서
부처님은 다른 바위나 소와 달리 부처님만 갖는 특성때문에
부처님이라고 칭하며 존중하는 것이다.
사정이 그럼에도 위와 같이 내용을 제시하는 취지가 무엇인가를 곰곰히 생각해보아야 한다.
이 사정을 쉽게 이해하려면
우선 비유로 꿈의 상황을 놓고 생각해봐야 한다.
침대에 누어서 어떤 이가 바다에서 황금을 가득 얻는 꿈을 꾸었다.
그러다가 떼강도를 만나서 묶여서 고통을 당하고 황금을 다 뺐겼다.
그런 상태는 지극히 고통스런 상태다.
그런데 어떤 분이 나타나서 그 고통을 해결하는 방안을 알려주었다.
그래서 그렇게 하니까 꿈을 깼다고 하자.
이제 그렇게 꿈에서 얻었다는 황금은
침대에서 어떤 부분인가.
그리고 고통을 당한 상황은 침대에서 어떤 상태가 그런 것인가를 헤아려 보자.
그리고 꿈에서 그 고통을 벗어나는 방안을 알려준 분은
또 침대에서 어떤 부분인가를 헤아려 보자.
지금 문수사리보살님은 조금은 이치에 맞지 않는 듯한 말씀을 하시는 것처럼 여겨진다.
그러나 사실은 제일의제에 바탕해서 볼 때는 사정이 그러함을 제시하는 입장이다.
그래서 현실에서 일으킨 망집분별을 기준으로 이 내용을 대하면
도무지 이치에 맞지 않는 것처럼 여겨진다.
간단히 이 문제를 다음과 같이 살펴보자.
현실에는 극심한 생사고통을 겪는 상태가 있다.
뜻처럼 되지 않고 원치않는 생노병사과정을 겪을 때가 그렇다.
그리고 이 생사고통의 해결이 문제다.
그리고 이 생사현실안에서 그런 생사고통을 벗어날 방안을 가르쳐주는 부처님이 계시다.
그리고 그에 따라 수행을 하고 이런 생사고통을 벗어나는 상태가 또 있다.
그런데 이 현실의 본 바탕이 어떤 상태인가를 놓고 관하면
본 바탕에서는 그런 생사고통 자체를 얻을 수 없다.
심지어 그것을 벗어날 방안도 얻을 수 없다.
본 바탕에서는 그런 생사고통자체를 얻을 수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얻을 수 없는 생사고통을 벗어나는 수행방안도 역시 얻을 수 없다.
마찬가지다.
문수사리보살님이 제시하고자 하는 부분은 이 부분이다.
그런데 이 내용을 이해한 상태에서 다음을 주의해야 한다.
본 바탕의 사정이 그렇다.
그리고 설령 이해가 잘 안된어도 본 사정이 일단 그렇다고 하자.
그런데 그 상태에서
문수사리보살님이 다음을 주장한 것인가를 다시 검토해야 한다.
본 바탕에서는 현실에서 문제삼는 생사고통을 얻을 수 없다.
그리고 그런 생사고통을 벗어난다는 방안도 역시 얻을 수 없다.
그리고 그 본 바탕에서는 그런 생사고통을 벗어나야 한다고 요구한 일도 없다.
왜냐하면 그런 생사고통을 얻을 수 없기 때문이다.
사정이 그렇기 때문에 생사현실에서 생사고통을 겪더라도
그대로 방치해도 무방하다고 볼 수도 있다 .
그래서 문수사리보살님이 그런 주장을 하는 입장인가를
경전을 놓고 잘 검토해봐야 한다.
비록 앞 부분을 주장하지만, 그러나 뒷 부분을 주장하는 입장은 아니다.
그래서 왜 그러한가를 다시 잘 살펴야 한다.
사정은 이렇다.
본 바탕은 앞에서 보듯 생사고통을 얻을 수 없다.
그런데 이상하게 생사현실안에서도 그것이 실답지 않은데도
대단히 많은 대다수가 극심한 생사고통을 아주 장구하게 일정한 조건에서
대단히 반복해서 받아나간다.
그리고 문제는 이 부분이다.
이 부분을 다시 살펴보자.
생사현실에서 생사고통을 겪는다.
그리고 그것을 해결하고자 한다.
이 경우에 본 바탕에서는 그런 것 자체를 얻을 수 없다.
사정이 그러니까 생사현실에서 고통을 겪더라도 무방하다고 주장하는 것은 아니다.
그리고 사정이 그러니까 그렇게 방치해도 무방하다고 주장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그 반대로 주장하는 것이다.
다시 반복해보자.
본 바탕은 앞에서 보듯 생사고통을 얻을 수 없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생사현실안에서 망집을 일으킨 이들이
본래 얻을 수 없는 생사고통을 극심하게 받아나간다.
그리고 이것이 문제다. 그래서 이것을 '그대로 방치할 수 없다'.
즉 실답지 않지만, 대다수가 망집을 일으킨 후
그런 실답지 않은 내용을 대단히 실답게 여기면서 생사고통을 극심하게 받아나간다.
따라서 이것을 해결해야 한다.
그런데 이것을 해결하려면,
본 바탕에서는 그런 내용을 얻을 수 없다는 본 사정을
뚜렷하게 잘 파악하는 것이 필요하다.
그리고 그런 바탕에서 수행을 잘 성취해야 한다.
이런 취지다.
따라서 본 바탕의 사정이 그러함을 문수보살님이 이처럼 강조해 제시하는 것이다.
어떻게 보면 앞 입장과 뒷 입장은 서로 같은 내용을 제시하는 것처럼 여겨진다.
그러나 입장이 다르다. 그리고 강조하는 초점도 다르다.
따라서 이를 잘 살펴보아야 한다.
본 바탕에서는 그런 생사를 얻을 수 없다. - 그런데 이상하게 현실에서 생사고통을 겪는다.
=> 설령 생사현실에서 생사고통을 겪어도 그 본 바탕은 그렇지 않다.
=> [ 앞입장 ]
그러니까. 그대로 방치해도 무방하다.
[ 문수보살님 입장]
=> 그렇지 않다, 사정이 그렇다고 방치하면 곤란하다.
본 바탕은 사정이 그렇지 않은데도 망집을 일으킨 중생들이 그런 실답지 않은 생사고통을 실답게 여기고 겪으니 문제다.
따라서 각 주체가 그 본 사정을 잘 관해야 한다.
그리고 그런 바탕에서 생사현실에서 겪는 생사고통을 벗어날 수행을 잘 해야 한다.
그렇게 해서 그런 상태에서 벗어나야 한다.
이런 차이다.
경전을 읽어보면 문수사리보살님이 앞 입장이 아니고 뒷 입장임은 쉽게 파악할 수 있다.
그리고 일단 그런 입장에서 본 바탕의 사정을 강조하는 것이다.
그런데 그렇게 본 바탕의 사정을 강조해서
생사현실 안에서 망집분별을 바탕으로 분별하는 여러 내용을 다 떠나야 함을 강조하는 것이다.
그런데 그렇게 하다보면 자칫 처음 입장을 주장하는 것처럼 오해를 일으키기 쉽다.
생사현실에서 겪는 생사고통을 벗어나려면
기본적으로 현실에서 행하는 분별을 떠나야 한다.
그리고 본 바탕은 사정이 그렇지 않음을 가장 기본적으로 잘 이해해야 한다.
그래서 그 부분을 강조하게 된다.
그리고 생사현실 안에서 방편상 제시하는 부처님의 가르침도
그 본 사정은 그렇지 않음을 반복해 제시하게 된다.
그런데 그처럼 본 바탕의 측면을 강조해 제시하다보니, 오해를 일으키기 쉽다.
즉, 이전에 부처님께서 설하신 내용이 모두 다 잘못이라고 제시한 것처럼 잘못 오해하기 쉽다.
그리고 사정이 그러하므로 이제 수행을 하지 않아도 무방하다고 제시한 것으로 잘못 오해하기 쉽다.
또는 본 사정이 생사고통을 겪는 중생을 그 상태 그대로 방치해도 무방하다고 하는 것처럼 잘못 오해하기 쉽다.
○ 그런데 순수하게 이론적으로만 살피면
처음의 입장도 그다지 잘못이 아닌 것처럼 보인다.
본 바탕을 강조하고 본 바탕의 측면에서만 보면 첫 입장도 타당하다고 여겨진다.
그런데 왜 첫 입장을 취하지 않고 두번째 입장을 부처님과 문수사리보살님이 제시하는가를 헤아려야 한다.
만일 그것이 실답지 않아서 정말 꿈과 같다면
처음 주장도 그렇게 잘못된 주장은 아니다.
사실 수행자의 수준이 아주 높다면 첫 주장 내용 그대로
생사현실을 대하면서 그 내용을 관철할 수 있어야 하는 것이기도 하다.
그런데 현실 사정이 그렇지 못하다.
그것은 생사현실의 사정 때문이다.
현실은 본 바탕에서 얻을 수 없다. 그래서 실답지 않다.
비유하면 마치 침대에 누어 그 침대에서는 본래 얻을 수 없는 엉뚱한 바다나 황금의 꿈을 꾸는 상황과 같다.
즉 본 바탕에서 얻을 수 없는 내용을 화합을 통해 생사현실에서 얻는다.
따라서 꿈과 성격이 같다.
그런데 현실은 정작 꿈이 아니고 꿈과 다르다.
즉, 현실은 꿈과 달리 대단히 생생하고 명료하게 얻는다.
그 뿐 아니라, 망집을 일으킨 대다수가 일정한 조건과 상황에서 무량겁에 걸쳐 대단히 장구하게
반복해 그 내용을 받아간다.
그리고 현실 내용을 꿈과 달리 대단히 실답게 여기면서
매 순간 아주 생생하게 극심한 생사고통을 겪는다.
또한 위와 같은 사정때문에 각 주체는
본 바탕에서 그런 내용을 얻을 수 없음을 잘 헤아려 관하지 못한다.
그래서 현실이 꿈처럼 실답지 않음을 잘 헤아리지도 못한다.
그래서 생사고통을 겪는 상황에서 본 바탕이 그렇지 않음을 아무리 강조해도 그것만으로
대부분 그 상황을 극복하지 못한다.
예를 들어서 마취받지 않고 수술을 당하는 상태처럼 된다.
만일 생사고통을 겪는 상황에서 앞 내용처럼 본 바탕의 측면을 잘 이해하고
그 본 바탕의 측면을 붙잡고 이를 쉽게 극복할 수 있다면 정말 이상적이다.
그런데 대부분 그렇지 못하다.
일반 현실의 본 바탕은 본래 그런 생사고통을 떠난 니르바나 상태다.
본 사정은 그렇지만, 생사현실에 처한 대부분은
그런 니르바나의 상태를 생사고통의 현실로 받아들이고 있다.
그리고 그것이 생사현실의 문제다.
이런 상황에서 마치 꿈처럼 누구나 쉽게 이 상황을 벗어날 수 있다면
이를 그대로 방치해도 별 문제가 아니다.
꿈의 경우는 그렇다고도 할 수 있다.
악몽을 꾸어도 그리고 극히 적은 소수만 아주 잠깐 일시적으로 겪는다.
그리고 꿈은 대부분 꿈을 깨고 그것이 실답지 않음을 쉽게 이해한다.
그래서 꿈에서 겪는 고통은 쉽게 극복가능하다.
그런데 현실은 실답지 않은 점이 꿈과 같지만, 정작 꿈은 아니다.
현실은 그 성격이 꿈처럼 실답지 않다.
그런데 생사현실은 대다수가 대단히 장구하게 그리고 반복해서 극심하게
함께 같이 꾸는 꿈과 같다.
사정이 그렇기에 각 주체마다 이를 대단히 실답게 여기게 된다.
그리고 사정이 그렇기에 그것이 실답지 않다고 그대로 방치할 도리가 없다
그리고 그처럼 실답게 여기는 그 정도에 비례헤서 이를 극복할 수행이 필요하다.
또 바로 그런 사정으로 현실이 실답지 않다는 사정을 철저하게 잘 파악해야만 한다.
꿈처럼 자연스럽게 실답지 않음을 이해할 수 있지 않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처럼 현실의 본 사정을 철저히 깨달아야 그런 생사고통을 겪는 상태에서 벗어날 수 있다.
그리고 그 사정을 그렇게 잘 안다고 해서 그것만으로 해결되는 것도 아니다.
생사고통을 당장 겪는 상태가 되면 그런 내용만으로 그것을 잘 극복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만일 이론의 이해만으로 이런 상태에 누구나 곧바로 도달할 수 있다면 첫 입장도 타당하다.
즉, 본 바탕에서 그런 생사고통을 얻을 수 없다.
그리고 생사현실은 실답지 않다.
사정이 그러므로 누구나 생사현실에서 고통을 쉽게 벗어날 수 있다면 대단히 이상적이다.
그리고 정말 현실이 그렇다면 각 주체의 생사고통을 그대로 방치해도 무방하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현실 사정이 그렇지 않다.
그래서 결국 그것이 실답지 않지만, 이를 방치할 도리가 없다.
그리고 앞과 같이 생사현실에서 이를 극복할 수행을 해서 생사고통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
망집을 일으킨 상태에서 생사고통의 묶임에서 벗어나려면
가장 기본적인 수행부터 잘 성취해야 한다.
즉, 가장 기본적으로는 생사현실 안에서 생사고통을 겪는 원인단계에서부터 예방노력을 해야 한다.
즉, 생사고통을 겪게끔 만드는 업을 행하는 것을 우선 중단해야 한다.
그리고 이미 쌓은 업의 장애를 해소시킬 수행을 함께 병행해야 한다.
이런 수행은 현실에서 일으키는 집착을 제거해야 한다.
그래서 가장 기본적으로 현실내용이 무상함을 통해서 집착을 제거하는 것이 기본이다.
그런 가운데 점차 현실의 본 바탕의 사정을 철저하게 잘 파악해야 한다.
그런 노력이 병행되어야 위와 같은 수행도 함께 원만하게 잘 성취할 수 있다.
한편 그런 수행을 통해 일단 생사고통에서 벗어나게 된다.
그렇게 되면 이후 수행자는 다른 중생을 제도하기 위해
다시 생사현실에 임해 일반 중생과 눈높이를 맞추어 임해야 한다.
앞에서 살핀 사정 때문에 중생들 스스로 생사현실에서 벗어나오기가 대단히 힘들기 때문이다.
따라서 수행자는 이런 중생에 대한 자비심을 바탕으로
생사현실에 들어가 중생제도를 위한 수행을 행하게 된다.
그리고 생사현실에서 수행을 통해
중생을 제도하는 데 필요한 복덕자량과 지혜자량을 원만히 구족해야 한다.
그런 상태가 되어야 다른 중생을 제도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수행자는 그런 수행을 행하는 가운데
원칙적 내용만으로 극심한 생사고통을 극복할 수 있는 상태에 이르러야 한다.
즉, 본 바탕에는 그런 내용을 본래 얻을 수 없다는 원칙적 내용만으로
극심한 생사고통을 겪는 상황에서 평안히 임하고 벗어나올 수 있어야 한다.
그래서 안인을 성취하고 무생법인을 증득해야 한다.
그런 단계에 이르러야 생사현실에서 어떤 극심한 생사고통을 겪어도
물러나지 않고 임할 수 있게 된다.
그렇게 되어야 비로소 수행자가 높은 수준에 이르게 된다.
이것이 불퇴전위이다.
즉 그런 상태가 되어야 수행자가 어떤 극심한 생사고통을 만나도 물러나지 않고
평안하게 임하고 중생제도를 위해 계속 노력할 수 있게 된다.
이런 내용이 불퇴전위와 관련된다.
또 그럴려면 본 바탕의 측면을 철저히 파악하고
그 상태와 거의 같은 상황으로 현실에 임해야 한다.
즉 현실에서 임하듯 망집분별을 기준으로 생사현실에 임하면 곤란하다.
그래서 망집분별을 완전히 떠나야 한다.
그리고 본 바탕의 얻을 수 없는 측면을 놓고 생사현실을 대해야 한다.
그래서 본 바탕을 99% 기준으로 잡고 생사현실을 대해야 한다.
그렇게 임해야 그런 극심한 생사고통을 극복할 수 있고
불퇴전위에 이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런 상태에 이르는 것이 이론처럼 쉽지 않다.
대단히 어렵다.
그러나 여하튼 수행자가 생사현실에 임해
중생을 제도하려면 이런 높은 단계에 이르러야 한다.
그리고 부처님과 문수보살님이 그런 취지로 가르침을 베푸시는 것이다.
◈Lab value 불기2564/01/1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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