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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진리와실천
불기2564-01-16_성실론_016 본문
『성실론』
K0966
T1646
제16권
● 한글대장경 해당부분 열람I
● 한글대장경 해당부분 열람II
○ 통합대장경 사이트
○ 해제[있는경우]
※ 이하 부분은 위 대장경 부분에 대해
참조자료를 붙여 자유롭게 연구하는 내용을 적는 공간입니다.
대장경 열람은 위 부분을 참조해주십시오.
○ [pt op tr] 성실론_K0966_T1646 핵심요약
♣0966-016♧
『성실론』
제16권
성실론
성실론 제16권
하리발마 지음
구마라집 한역
192) 성행품(聖行品)
두 가지 행이 있다.
공(空)의 행과 무아(無我)의 행이다.
다섯 가지 쌓임 중에서 중생이라고 보지 않는 것을 공의 행이라 하고
다섯 가지 쌓임마저 없다고 보는 것을 무아의 행이라 한다.
어떻게 그런 줄을 아느냐 하면 경전 중에서
“물질에 자체의 성품이 없음을 보며 느낌과 생각과 지어감과 의식도 자체의 성품이 없음을 본다”고 하였다.
또 경전 중에서 “성품이 없음으로 인하여 해탈을 얻는다”고 하였다.
그러므로 알아라.
물질의 성품은 진실로 있는 것이 아니요,
느낌과 생각과 지어감과 의식의 성품도 진실로 있는 것이 아니다.
또 경전 중에서 말하기를 “다섯 가지 쌓임은 모두가 공하여 요술과 같다”고 하였다.
요술이 진실하다고 말할 수는 없다.
요술이 만일 진실로 존재한다면 요술이라 하지 못할 것이며,
또한 없는 것이라고도 말하지도 못하리라.
다만 진실이 없고 속여서 헷갈리게 할 뿐이다.
또 이 수행하는 이는 온갖 것은 공이라고 관한다.
그러므로 알아라.
다섯 가지 쌓임은 진실로 존재한 것이 아니다.
마치 하나의 모습을 부수기 때문에 벽(壁) 등의 한 가지 법도 볼 수 없는 것처럼
다섯 가지 쌓임도 그러하여 한 가지라도 진실한 법이 없다.
【문】물질 등의 법 또한 진실이 아니라면 지금은 단 하나뿐인 세속의 진리이어야 한다.
【답】사라짐은 바로 으뜸가는 진리이기 때문에 존재한다.
경전 중에서 “허망은 거짓이요,
속임수이고 진리는 사실대로[如實]라고 말한다”고 함과 같다.
사라짐은 바로 사실대로의 결정이기 때문에 으뜸가는 이치는 존재한다고 말한다.
또 수행하는 이는 진실한 지혜를 내며,
온갖 함이 있는 법은 모두가 공하여 없다.
그러므로 알아라.
사라짐은 바로 으뜸가는 이치로서 존재한다.
【문】그대는 “다섯 가지 쌓임 안에는 중생이 없는 것으로 본다”고 말하였다.
무엇으로 인하여 다섯 가지 쌓임을 가리켜서 중생이라 하는가.
샘이 있는 것인가.
샘이 없는 것인가.
【답】샘이 있기도 하고 샘이 없기도 하다.
【문】경전 중에서 말하기를 “만일 중생으로 보면 모두가 다섯 가지 느낌의 쌓임을 보는 것이다”라고 하였다.
【답】샘 없는 법도 중생이라는 숫자 안에 있는 것이요 중생의 무리가 아닌 나무거나 돌 따위에는 잇지 아니하다.
그러므로 알아라.
역시 샘 없는 모든 쌓임으로 인하여 중생이라고 한다.
또 성인으로서 샘 없는 마음에 있느라면 그 때에는 역시 마음 있는 중생이라고 하게 되기 때문에 샘 없는 마음도 중생이라 하게 된다.
온갖 쌓임들은 느낌으로부터 생기기 때문에 모두를 느낌의 쌓임이라 한다.
【문】어떻게 모두가 느낌으로부터 생기는 줄 아는가.
【답】샘 없는 법은 다 보시와 지계와 선정을 닦는 등의 업의 마음으로부터 생기며,
그것이 없으면 생기지 않는다.
경전 중에서 “무명에 덮이고 애욕의 번뇌에 매였기 때문에 어리석은 이는 이 몸을 받고 슬기로운 이도 역시 마찬가지니라”고 함과 같다.
몸은 곧 느낌의 쌓임이다.
【문】느낌의 쌓임이라 한다면 샘 있는 쌓임과 샘 없는 쌓임에는 어떤 차별이 있는가.
【답】온갖 쌓임은 느낌으로부터 생기기 때문에 모두 느낌의 쌓임이라 하는데 후세의 몸을 받지 않기 때문에 샘이 없다고 한다.
이것을 차별이라 한다.
쌓임은 느낌의 쌓임과 함께 느낌으로부터 생기기 때문에 느낌의 쌓임이라 한다.
그러므로 이 경전은 서로 어긋나지 아니한다.
이 두 가지 행은 다 아무 것도 없음을 반연한다.
만일 물질 등의 법이 공하고 체성이 사라졌다면 모두가 이는 아무 것도 없는 것이 된다.
【문】이 두 가지는 다 다섯 가지 쌓임을 반연한다.
경전 중에서 “물질이 공하여 나 없다고 보며,
느낌과 생각과 지어감과 의식도 공하여 나 없다고 본다”고 하였다.
【답】모든 쌓임은 공하고 나 없는 것을 본다.
왜냐하면 중생의 인연 중에서는 중생이 공한 것으로 보고 또한 물질 등의 법도 사라진다고 본다.
【문】이것이야말로 다 같이 반연하는 것이 된다.
만일 수행하는 이가 모든 쌓임과 공을 생각하면 곧 쌓임과 아무 것도 없음을 반연하는 것이라 한다.
【답】수행하는 이는 중생의 인연 중에서 중생이라고 보지 않기 때문에 곧 공하다는 마음을 내며,
그런 마음에 공을 본다.
또 다섯 가지 쌓임의 사라짐 가운데서는 물질의 체성도 느낌과 생각과 지어감과 알음의 체성도 보지 않는다.
그러므로 이 두 가지는 모두가 아무것도 없는 것이 반연인 줄 알 것이다.
193) 견지품(見智品)
【문】바른 소견[正見]과 바른 지혜(正智)와는 어떠한 차별이 있는가.
【답】이는 곧 하나의 체성이어서 차별이 없다.
바른 소견은 두 가지로서 세간과 출세간이다.
세간이라 함은 죄와 복 등이 있고,
출세간이라 함은 괴로움 등의 모든 진리에 통달하는 것이다.
바른 지혜에도 역시 그렇다.
【문】그대가 말한 소견과 지혜의 모양은 그러한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모든 인(忍)은 소견일 뿐이어서 지혜는 아니기 때문이다.
진지(盡智)와 무생지(無生智)와 다섯 가지 식과 상응하는 슬기[五識相應慧]는 오직 지혜일 뿐 소견은 아니다.
【답】무엇 때문에 모든 인(忍)이 지혜가 아니겠는가.
【문】아직 알지 못하는 것을 알려고 하기 때문에 미지근(未知根)이라 한다.
만일 고법인(苦法忍)이 바로 지혜라고 하면,
괴로움의 법을 확실히 인지(忍知)한 다음의 고법지(苦法智)는 지근(智根)이라 할 것이요 미지근이라고 하지 않아야 한다.
그러므로 인은 지혜가 아니다.
또 경전 중에서 “만일 수행하는 이가 이 모든 법에서 조금이라도 슬기[慧]로써 고나하면 인은 아직 마치지 못하였다고 하고,
마친 다음이면 지혜[智]라 한다”고 하였으니 인은 아직 관이 끝나지 못하였음을 말한다.
또 첫 단게의 샘 없는 지혜가 처음 보이는 것을 인[忍]이라 할지언정 처음 보인 것을 지혜로 삼지 않아야 한다.
또 인의 때는 아직 분명하지 않지만 지혜의 때는 분명하며,
또 인이 생기는 때에는 의심이 아직도 붙따르기 때문에 인은 지혜가 아니다.
【답】인(忍)은 곧 지혜이다.
왜냐하면 하려함[欲樂]과 인(忍)은 모두 같은 뜻이다.
수행하는 이는 먼저 괴로움을 안 연후에 인요(忍樂)하는 것이다.
만일 먼저 알지 못한다면 무엇을 인요하는 것인가.
또 적은 설명 안에서는 관(觀)의 인(忍)만을 말하고 지혜는 말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행의 결과를 받는 이에게는 지혜가 없어야 된다.
만일 그대의 뜻에 “수행하는 이에게 지혜가 있는데도 인이다”고 한다면 지금도 역시 받아야 하리니,
인이 바로 지혜이기 때문이다.
또 경전 중에서 “수행하는 이는 때를 알고 때를 보아 곧 샘이 다함을 얻는다”고 하였다.
또 말씀하기를 “아는 것과 보는 것은 같은 뜻이니라”고 하엿다.
또 부처님은 “괴로움의 지혜와 쌓임과 사라짐과 도의 지혜”를 말씀하셨어도 인이 있다고는 말씀하지 않으셨다.
그러므로 알아라.
지혜가 바로 인이다.
또 부처님은 지혜의 뜻을 풀이하는 가운데서 말씀하셨다.
사실대로 알기 때문에 지혜라 한다고 하셨다.
인도 역시 사실대로 아는 것이기 때문에 다르지 않아야 한다.
만일 그대가 미지근(未知根)을 인이라 한다면 그 일은 옳지 못하다.
우리들은 먼저 인이요,
그 뒤에 지혜라고 하는 것이 아니요,
한 마음 가운데서 곧 인과 지혜를 말하는 것이므로 이 이치는 성립되지 않는다.
그대는 어찌하여 성립되지 못할 것을 성립시키려고만 하는가.
그대가 “인은 아직 마치지 못한 때를 말한다”는 말은 내가 이미 먼저 대답하였다.
먼저 알고 뒤에 인가(忍可)한다.
그러므로 알아라.
인은 곧 끝마친 것인 줄 알아야 된다.
만일 끝마쳤는 줄을 알지 못하면 어떻게 인가할 수 있겠는가.
그대는 “인가한 대는 아직 마치지 못하였다”고 말하지만 그대의 법 중에서도 인으로써 번뇌를 끊는다.
만일 그것이 끝나지 못하였다면 어떻게 번뇌를 끊을 수 있는가.
그대는 “인가할 때에는 의심이 아직 붙따른다”고 하지만 만일 그렇다면 진리를 보는 도[見道分] 중에서는 전부 의심이 따르게 될 것이므로 그 중에서 지혜가 생기더라도 모두 지혜가 아니어야겠다.
또 이것은 인이요,
이것은 지혜라는 것을 분별할 수도 없다.
마치 세속의 관(觀)이 네 가지 진리에 수순하는 것을 인이라 말하기도 하고 지혜라 말하기도 함과 같이 샘 없는 인과 지혜 또한 그와 같아야 된다.
【문】진지와 무생지는 지혜일뿐이요,
소견은 아니다.
【답】어떤 이유가 있어서인가.
【문】경전 중에서 바른 지혜와 바른 소견을 따로따로 말씀하셨기 때문에 지혜는 소견이 아니다.
【답】만일 그렇다면 바른 소견은 바른 지혜라고는 말하지 못하리라.
만일 그대가 “바른 소견은 곧 바른 지혜이다”라고 말한다면 바른 지혜도 역시 바른 소견이어야 한다.
또 다섯 갈래[五分]의 법신(法身)에서는 혜품(慧品) 중에서 따로 해탈지견(解脫知見)을 말하였으므로 그도 지혜가 아니어야겠구나.
그렇다면 진지(盡智)와 무생지(無生智)도 역시 지혜[慧]가 아니리라.
지금은 바른 소견을 다른 현상으로써 바른 지혜라고 말하는 것이니,
온갖 번뇌를 다한 아라한의 마음에서 나기 때문에 바른 지혜라고 한다.
【문】만일 바른 지혜가 곧 바른 소견이라 하면 아라한은 충분히 성취하였다고 하지 못하리라.
【답】체성은 하나이면서 이름만 다를 뿐이니,
마치 법지(法智)와 고지(苦智)에서와 같다.
또 아라한은 여덟 가지 공덕의 복전(福田)을 성취하였다 한다.
그러므로 바른 지혜가 곧 바른 소견이다.
또 6화경(和敬) 안의 여섯째 번의 화경을 동견(同見)이라 하는데 만일 그대의 말과 같을진대 다 알았고[盡] 더 알 것이 없음[無生]의 지혜는 화경이라고는 하지 못하겠다.
또 바르게 관하기 때문에 바른 소견이라고 하는지라 진지와 무생지는 바른 관이기 때문에 바른 소견이라 한다.
【문】5식과 상응[識相應]한 슬기[慧]는 오직 지혜[智]일 뿐이요 소견은 아니다.
【답】무엇 때문에 소견이 아니라고 하는가.
【문】다섯 가지 식은 다 분별이 없다.
처음 반연에 있기 때문에 소견을 생각[思惟]하여 관찰한다고 한다.
또 다섯 가지 식은 현재만을 반연한다.
그러므로 소견은 아니다.
【답】그 중에는 거친 생각과 세밀한 생각이 없기 때문에 분별하지 못한다.
만일 “처음 반연에 있기 때문에 소견이 아니다”라고 하나,
그 일은 옳지 못하다.
왜냐하면 그대는 그대의 법에 “안식은 상속하는 인연이 있어서 마치 의식과 같기 때문에 처음 반연에 있다”고 말하지 말아야 하기 때문이다.
만일 그렇다면 의식도 역시 소견이 있지 않아야 한다.
또 그대는 “현재만을 반연하기 때문에 소견은 아니다”라고 말하나 그도 옳지 못하다.
타심지(他心智)도 역시 현재를 반연하는 것이다.
그도 역시 소견이 아니어야 한다.
다섯 가지 식 안에는 진실한 앎[知]이 없는 것이니,
지어감[行]이 없기 때문이다.
또한 항상 붙인 이름에 붙따르기 때문에 소견[見]과 지혜[智]와 슬기[慧] 등의 온갖 것이 다 없거든 황차 소견만이 없겠는가.
【문】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눈 감관을 보는 것이라 한다”고 하였다.
그 일은 어떠한가.
【답】눈이 보는 것이 아니요,
안식이 능히 반연한다.
세속의 말에 따라 설명하기 때문에 눈이 본다고 말할 뿐이다.
【문】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여덟 가지 소견이 있다.
이른바 다섯 가지의 삿된 소견과 세간의 바른 소견과 배우는 이의 소견과 배울 것 없는 이의 소견이다 이 여덟 가지 소견을 제하고는 그 밖의 지혜는 소견이라고 하지 않는다”고 하였다.
그 일은 어떠한가.
【답】만일 소견과 지혜를 분명하게 알아서 서로 꿰뚫어 깨달으면 모두 하나의 이치이다.
만일 “이것은 소견이요,
이것은 소견이 아니다”고 하면 다 자기의 생각대로만 분별하여 하는 말이다.
【문】경전 중에서 “지혜라는 것과 소견이라는 것은 샘이 다함을 얻는다”고 하였다.
무슨 차별이 있는가.
【답】만일 지혜로 처음에 붙인 이름을 부수면 그것을 앎[智]이라 하고,
법위(法位)에 들은 다음이면 소견이라 하며,
관하기 시작한 것을 앎이라 하고,
통달하여 깨달은 것을 소견이라 한다.
이와 같은 법 등의 깊고 얕은 차별이 있다.
194) 삼혜품(三慧品)
세 가지 지혜[慧]라 함은 듣고서 얻는 지혜[聞慧]와 생각하여 얻는 지혜[思慧]와 닦아서 얻는 지혜[修慧]이다.
수다라 등의 12부경 안에서부터 생기는 것을 듣고서 얻는 지혜라 하는데
이것으로써 샘 없는 거룩한 지혜를 내게 되기 때문에 지혜라 한다.
경전 중에서 “라후라 비구는 이제야 해탈하게 되는 지혜를 성취하였다”고 함과 같다.
아무리 위타(韋陀) 등의 세속 경전을 듣는다손 쳐도
샘 없는 지혜를 얻지 못하기 때문에 듣고서 얻는 지혜라고는 하지 못한다.
만일 여러 경전 중의 이치를 생각하면 그것을 생각하여 얻는 지혜라 한다.
마치 수행하는 이는 법을 듣고서 뜻을 생각한다는 설명과 같다.
또 말하였다.
“수행하는 이는 법을 듣고서 뜻을 생각한 다음에 그대로 따라 행해야 한다”고 하였다.
만일 알고 보는 것을 앞에 나타내면 그것을 닦아서 얻는 지혜라 한다.
마치 “수행하는 이는 선정의 마음 가운데서 다섯 쌓임의 나고 사라짐을 본다”고 말함과 같다.
여러 경전 중에서 “너희 비구가 선정을 닦아 익히면 마땅히 사실대로 알고 보는 것이 앞에 나타나게 해야 한다”고 말함과 같다.
또 칠정지경(七正智經) 중에서 “만일 비구가 법을 알면 듣고서 얻는 지혜라 하고,
이치를 알면 생각하여 얻는 지혜라 하고 시기 등을 알면 닦아서 얻는 지혜니라”고 하였다.
또 라후라가 5수음부(受陰部) 등을 읽어 외우는 것을 듣고서 얻는 지혜라 하고
혼자 있으면서 이치를 생각하는 것을 생각하여 얻는 지혜라 하고,
뒤에 도를 얻는 때를 닦아서 얻는 지혜라 함과 같다.
또 경전 중에서 세 가지 지팡이[杖]를 말하였다.
“듣는 지팡이와 여의는 지팡이와 슬기로운 지팡이”가 그것이다.
듣는 지팡이란 듣고서 얻는 지혜요,
여의는 지팡이란 생각하여 얻는 지팡이요,
슬기로운 지팡이란 닦아서 얻는 지혜를 말한다.
또 경전 중에서 법을 듣는 데의 다섯 가지 이익을 말하였으니,
듣지 못하던 것을 듣고 기왕에 들은 것을 더 환히 알고,
의심을 끊고,
바른 소견과 지혜로써 심히 깊은 이치를 통달하는 것이다.
아직 듣지 못하던 것을 듣는 것과 기왕에 들은 것을 더 환하게 안다는 것은 바로 듣고서 얻는 지혜요,
의심을 끊는 것과 바른 소견을 바로 생각하여 얻는 지혜며,
슬기로써 통달하는 것은 바로 닦아서 얻는 지혜이다.
또 법을 듣는 이익 중에서 말하기를 “수행하는 이가 귀로 법을 듣고 뜻으로 생각하면 이것을 생각하여 얻는 지혜라 하며,
소견으로 통달하는 그것을 닦아서 얻는 지혜라 한다”고 하였다.
또 네 가지 수다원의 갈래 안에서 바른 법을 듣는 것을 듣고서 얻는 지혜라 하고,
바르게 생각하는 것을 생각하여 얻는 지혜라 하며,
법에 따라 행하는 것을 닦아서 얻는 지혜라 한다.
또 다섯 가지 해탈의 부문 중에서는 존경하는 이로부터 법을 듣는 그것을 듣고서 얻는 지혜라 하고 말의 뜻을 달통하는 그것을 생각하여 얻는 지혜라 하며,
또 경전 중에서 “부처님의 말씀한 바 법문은 세 때[三時]가 다 같이 좋으시다.
착한 남자들이여,
어른이거나 어린이거나 간에 법문을 들으면 ‘집에 있으면 시끄럽고 출가하면 조용한거라 만일 출가하지 않으면 깨끗이 착한 법을 닦을 수 없다’는 생각을 내어서 바로 모든 친척과 재산 등을 버리고 출가하여 계행을 가지며 모든 감관을 단속하고 위의를 자세히 살피면서 홀로 거처하고 사유(思惟)하며 다섯 가지 번뇌[蓋]를 멀리 여의고 초선(初禪) 등으로부터 내지 샘이 다함을 얻으라”고 하였다.
이 안에서 어른과 아이가 법문을 듣는 그것은 듣고서 얻는 지혜요 집에 있으면 시끄럽고 출가하면 고요하다고 생각하는 그것은 생각하여 얻는 지혜며 다섯 가지 번뇌를 멀리 여의고 샘이 다하기까지의 그것은 닦아서 얻는 지혜이다.
또 경전 중에서 “두 가지 인연 때문에 바른 소견을 내는 것이니,
남으로부터 법을 듣는 것과 스스로가 바르게 생각하는 것이다.
남으로부터 법을 듣는 것을 듣고서 얻는 지혜라 하고 스스로가 바르게 생각하는 것을 생각하여 얻는 지혜라 하며 바른 소견을 내는 것을 닦아서 얻는 지혜라 한다.”
또 게송 중에서 말씀하였다.
착한 사람을 가까이하여
바른 법을 듣고 받으며
홀로 있기를 좋아하면서
그 마음을 조복하여야 한다.
여기서 착한 이를 가까이하여 바른 법을 듣고 받는 다는 것은 바로 듣고서 얻는 지혜요 홀로 거처하기를 좋아하는 것은 바로 생각하여 얻는 지혜며 그의 마음을 조복한다는 것은 바로 닦아서 얻는 지혜이다.
또 부처님은 모든 비구에게 가르치셨다.
“너희가 말을 하게 될 때에는 네 가지 진리를 설명해야 하고,
생각하게 될 때에는 네 가지 진리를 생각해야 한다”고 하셨다.
여기서 네 가지 진리를 설명하라는 것은 듣고서 얻는 지혜요,
네 가지 진리를 생각하라는 것은 생각하여 얻는 지혜며,
네 가지 진리를 얻으면 닦아서 얻는 지혜이다.
이와 같이 여러 경전 가운데서 부처님은 세 가지 지혜를 말씀하셨다.
【문】이 세 가지 지혜는 몇 가지가 욕심 세계의 것이며,
몇 가지가 형상 세계의 것이며,
몇 가지가 무형 세계의 것인가.
【답】욕심 세계와 형상의 세계에는 전부가 다 있다.
마치 수거사(手居士)가 무열천(無熱天)에 가서 나서 거기서 설법함과 같다.
만일 사람이 법을 연설하면 반드시 그 뜻을 생각하게 된다.
그러므로 알아라.
형상 세계에도 생각하여 얻는 지혜가 있다.
무형 세계 안에 닦아서 얻는 지혜만이 있다.
【문】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욕심 세계에는 닦아서 얻는 지혜가 없고,
형상 세계에는 생각하여 얻는 지혜가 없다”고 하였다.
그 일은 어떠한가.
【답】어떠한 이유로 욕심 세계에 닦아서 얻는 지혜가 없겠는가.
【문】욕심 세계에서의 익히는 길로써는 모든 덮개의 장애가 모든 얽음을 끊어서 욕심 세계의 번뇌로 하여금 바로 앞에 나타나지 않게 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답】부처님의 법 가운데는 “욕심 세계에서의 길로써는 모든 덮개의 장애와 모든 얽음을 끊어서 욕심 세계의 번뇌로 하여금 바로 앞에 나타나지 않게 할 수는 없다”는 그런 말은 없다.
또 말하였다.
“욕심 세계의 길로써 번뇌를 능히 깨뜨린다”고 하였다.
왜냐하면 욕심 세계에는 부정관(不淨觀) 등이 있기 때문이다.
경전 중에서 부정관을 잘 닦으면 탐욕을 깨뜨릴 수 있나니,
자비[慈] 등도 그렇다”고 함과 같다.
【문】이 욕심 세계의 부정관 등은 번뇌를 영원히 끊을 수가 없다.
【답】형상 세계의 부정관 등으로도 역시 모든 번뇌를 끝까지는 끊을 수 없다.
【문】거칠고 무겁고 편안하지 못함 따위의 행으로는 번뇌를 끊을 수 있으나 부정관 등으로는 끊지 못한다.
【답】경전에서 거칠음 따위는 번뇌를 끊을 수 있고 부정관 등으로는 끊을 수 없다는 말씀은 없다.
경전 중에서 “부정관 등으로 번뇌를 끊을 수 있다”고 하였다.
또 거칠음 따위에 무슨 세력이 있기에 번뇌를 끊을 수 있으면서 부정관으로는 끊을 수 없는가.
또 욕심 세계에 거칠음 등의 행이 있으면 이 행으로 모든 번뇌를 끊어야 하며 만일 없으면 그 이유를 설명해야 한다.
무엇 때문에 부정관 등은 있고,
거칠음 따위는 없는가.
만일 있는데도 번뇌를 끊지 못한다면 형상 세계에 비록 있다손 쳐도 역시 끊을 수 없어야 한다.
여기에 대하여도 이유를 설명해야 한다.
무엇 때문에 욕심 세계에서는 끊을 수 없으면서 형상 세계에서는 끊을 수 있는가.
【문】욕심 세계에는 비록 거칠음 등의 행이 있더라도 모든 번뇌를 끊을 수 없는 것이니,
여기는 산란한 세계이기 때문이다.
산란한 마음으로는 끊을 수가 없다.
경전 중의 말씀에 “마음을 껴잡으면 도가 되고 마음이 산란하면 도가 아니다”라고 함과 같다.
【답】이유를 말하라.
무엇 때문에 욕심 세계를 산란한 세계라 하는가.
여기는 부정관 등이 있다.
만일 산란한 세계라면 어떻게 뼈들의 특이한 모습을 관할 수 있겠는가.
또 형상 세계에서는 마음을 껴잡는데 무슨 별다른 모습이 있기에 욕심 세계에서는 없다는 것인가.
【문】형상 세계의 도로 욕심을 여읠 수가 있기 때문에 이 세간에서 죽으면 형상 세계에 나는 것이 마치 문설주[榍]로 문설주를 뽑아내는 것과 같다.
【답】무엇을 욕심을 여읨이라 하는가.
【문】번뇌를 끊은 것을 욕심 여읨이라 한다.
형상 세계의 도로는 번뇌를 끊을 수가 있되 욕심 세계에서는 그렇지 못하다.
【답】모든 외도는 번뇌[結]를 끊었다가도 도로 일으켜서 다시 욕심 세계에 태어난다.
그러므로 “범부는 번뇌를 끊었다”고 말하지 못한다.
만일 끊었다가도 다시 생기는 것이라면 샘 없는 지혜로 번뇌를 끊었다 할지라도 다시 생겨야 되므로 그런 일은 옳지 못하다.
또 경전 중에서 “세 가지 맺음을 끊은 뒤에야 세 가지 독(毒)을 끊는다”고 하였다.
범부는 세 가지 번뇌를 끊을 수 없기 때문에 욕심을 여읠 수 없다.
또 범부는 항상 나 따위의 마음이 있기 때문에 몸에 대한 고집 등을 끊을 수가 없다.
만일 범부로서 욕심을 여읜다면 온갖 번뇌는 다 있지 않아야 한다.
왜냐하면 온갖 번뇌는 다 뭇 인연으로부터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경전 중에서 “뭇 인연으로부터 나를 이룬다”고 함과 같다.
만일 이 범부가 욕심 세계의 다섯 가지 쌓임에서 몸에 대한 고집을 일으키지 아니하면 다시는 뭇 세계의 쌓임들을 얻지 않는다.
그렇다면 응당 몸에 대한 고집은 없어야 되는 그러한 허물이 있게 된다.
그와 같이 되면 번뇌는 영원히 다 하여야 되고 이 범부는 바로 나한이어야 할 터인데,
실로 번뇌가 도무지 끊어지지는 못하였다.
경전 중에서 “큰 우렛소리를 듣고도 두 사람만은 두려워하지 아니하였으니,
전륜왕과 아라한이다”라고 함과 같다.
이제 이 범부도 두려워하지 않아야 할 것이다.
또 아라한은 삶을 기뻐하거나 죽음을 미워하지도 않는다.
마치 우파사나(優波斯那) 아라한이 독사에게 물려서 죽으려 할 때에도 모든 가관은 달라지지 아니하고 얼굴빛조차 변하지 아니한 것과 같이 이 사람도 그와 같아야 하리라.
또 아라한은 세간의 여덟 가지 법으로도 마음을 덮지 못하는 것인데 이 사람도 그와 같아야 하리니 욕심을 여의었기 때문이다.
실로 범부가 아무리 욕심을 여의었다 말하여도 모두가 이런 모습까지는 없다.
그러므로 번뇌가 끊어지지 않았는 줄 알 것이다.
【문】범부도 번뇌를 끊고 이 세간에서 죽으면 형상 세계에 가서 난다.
만일 번뇌를 끊지 않았으면 어떻게 그곳에 가서 나겠는가.
경전 중에서도 “욕심을 여읜 외도도 있다”고 하였다.
또 말하기를 “아라라가라마(阿羅邏迦羅摩)와 울두람불(鬱頭藍弗)과는 욕심 세계와 형상 세계를 여의고 무형 세계 안에 가서 났다”고 하였으며 또 말하기를 “형상 세계로써 욕심을 여의고 무형 세계로써 형상을 여의며 열반으로써 일어나는 생각을 여읜다”고 하였다.
그러므로 그대가 “범부는 번뇌를 끊었더라도 가로 생기기 때문에 끊었다고는 하지 않는다”고 하나 그 일은 옳지 못하다.
그대는 또 말하기를 “범부로서 끊는 바는 실은 모두가 이는 막은 것에 불과하다.
이름으로만 끊고 여의었다 할뿐 그 내용은 끊지 못한 것을 끊었다고 말하며 실은 욕심을 여의지 못한 것을 욕심을 여의었다고 말한다”고 하고 있다.
게송 중에서 말함과 같다.
나라 내 것이라 생각하다가도
죽음이 닥칠 때는 잘 끊는다.
어린애가 흙으로 희롱을 부리면서
즐거울 때에는 아끼면서 보호하나
만일 마음에 싫증이 나면
이내 부수고서 버리고 떠난다.
이런 것도 역시 욕심을 여의었다고 한다.
그러나 외도의 끊음은 죽어서 끊어짐과는 다르다.
죽어서 끊어지는 것으로 형상 세계나 무형 세계에 가서 나지를 못한다.
어린애는 비록 흙을 버렸다 하여 그에게 공양하여도 큰 과보가 없지만 만일 욕심을 여읜 외도에게 공양하면 큰 과보를 얻는다.
말은 비록 같으나 그 뜻인 즉 다르다.
그러므로 알아라.
범부도 사실상 끊거나 여읨이 있다.
【답】막는 것 중에도 차별이 있다.
만일 깊이 번뇌를 막으면 형상 세계거나 무형의 세계에 가서 난다.
또 만일 몸에 대한 고집을 막는다면 먼저 이미 그 허물되는 점을 말하였다.
만일 욕심 세계의 몸에 대한 고집을 막지 못하면 어떻게 형상 세계거나 무형 세계에 가서 나겠는가.
탐심과 진심만을 막기 때문에 형상 세계에 가서 난다는 것이며,
몸의 고집들을 막는 것쯤으로는 되지 않는다.
그러므로 알아라.
범부는 사실상 번뇌를 끊지 못한다.
또한 욕심 세계의 착한 법으로도 번뇌를 막을 수도 잇다.
그러므로 알아라.
욕심 세계에도 역시 닦아서 얻는 지혜가 있다.
또 경전 중에서 “일곱 가지 의지할 곳[依處]을 제하고도 도(道) 얻는 것을 허락한다”고 하였다.
그러므로 알아라.
욕심 세계의 선정에 의하여도 진실한 지혜를 낸다.
【문】이 사람은 초선의 가까운 자리에 의하여서 아라한의 도를 얻은 것이며,
욕심 세계의 선정으로 얻은 것이 아니다.
【답】그렇지 않다.
“일곱 가지 의지할 곳을 제외한다”는 말은 곧 초선과 그 가까운 자리를 제외할 뿐이다.
또 이 안에서는 가까운 자리를 의지한다 하여 욕심 세계의 선정이 아니라고 하는 이유는 없다.
만일 이 수행하는 이가 가까운 자리에 들어갔다면 무엇 때문에 초선에 들어 갈 수 없겠는가.
그 일도 또한 이유가 되지 않는다.
또 수시마경(須尸摩經) 중에서 “먼저는 법주지(法住智)요,
뒤에는 열반지(涅槃智)이다”라고 하였다.
이 뜻은 반드시 먼저 선정을 얻고서 뒤에 샘을 다한다는 것이 아니어서 반드시 법주지를 우선으로 삼은 연후에 번뇌가 다한다는 것이니,
그러므로 모든 선정을 제외한 줄 알 것이다.
선정을 제외하기 때문에 수시마역을 말하였다.
만일 가까운 자리를 받는다면 그 허물은 곧 모든 선정에서와 동일하리라.
또 경전 중에서는 가까운 자리라는 이름을 말한 일이 있지 않는지라 그것은 그대 스스로의 생각으로 분별하는 것뿐이다.
【문】나는 먼저 번에 문설주[榍]의 비유를 말하였다.
그러므로 다른 자리의 도(道)로써 다른 자리의 번뇌를 끊을 수 있음을 알 것이다.
마치 가는 문설주로 둥근 문설주를 뽑아냄과 같이 형상 세계의 도로써 욕심 세계의 것을 끊을 수 있다.
수행하는 이가 먼저 욕심과 나쁘고 착하지 못한 법을 끊으면 그런 뒤에는 초선에 든다.
그러므로 알아라.
반드시 가까운 자리에 있어서 그것으로 욕심을 끊는 것이다.
또 말하였다.
“형상 세계로 인하여 욕심 세계를 벗어난다”고 하였다.
만일 가까운 자리가 없으면 어떻게 형상 세계로 인할 것인가.
또 경전 중에서 수행하는 이가 만일 깨끗한 기쁨을 얻으면 깨끗하지 못한 기쁨을 버리는 것이다.
마치 난타(難陀)가 천녀(天女)의 사랑으로 인하여 본래 품었던 애욕을 버림과 같다.
또 만일 초선의 적멸한 맛을 얻지 못하면 다섯 가지 욕락(欲樂) 안에서 거칠고 폐해라는 마음을 내지 못한다.
그러므로 알아라.
먼저 초선의 가까운 자리를 얻어야만 욕심 세계를 버리게 된다.
【답】욕심 세계의 깨끗한 선(善)을 얻으면 불선(不善)을 끊을 수 있는 것이 마치 다섯 가지 벗어나는 성품[出五性]을 말함과 같다.
만일 거룩한 제자가 혹 다섯 가지 욕락은 기쁨과 즐거움을 내지 못한다고 생각하면 마음이 탁 트이지 못하여서 마치 힘줄과 깃을 불태움과 같거니와 만일 벗어남의 법을 생각하면 마음이 환히 트인다.
또 말하였다.
“수행하는 이가 좋지 못한 각관(覺觀)이 나면 곧 좋은 각관으로 없앤다”고 하였다.
그러므로 그대가 문설주의 비유를 말하지만 역시 욕심 세계에서 가능한 일이다.
그대가 “형상 세계로 인하여 욕심 세계를 여읜다”고 말하나 이것은 맨 나중의 일이다.
수행하는 이는 욕심세계의 도로써 모든 번뇌를 끊고 차례대로 점차로 끊어서 형상 세계의 선한 법을 얻기에 이른다.
그 때에는 욕심세계를 마지막 끊음[異竟斷]이라고 한다.
형상 세계의 법을 얻으면 그대는 “생각 끊는 선정[滅盡定]을 얻었으며 아라한도 모든 선정을 얻었다”고 하리니 그의 맛[味]만을 말하였을 뿐이다.
그대가 깨끗함[淨]과 미묘함[妙]과 기쁨[喜]과 그리고 적멸한 맛을 얻었다 말한 것은 다 이미 통 털어서 대답하였다.
또 욕심 세계에 선정이 없다면 어떻게 흩어진 마음으로 형상 세계의 착한 법을 깨달을 수 있겠는가.
【문】혜해탈(慧解脫)의 아라한은 선정이 없어도 역시 지혜만은 있다.
【답】그 중에서는 선정만을 막는 것이며 반드시 잠간 동안의 껴잡는 마음이거나 한 생각만이라도 있어야 된다.
경전 중에서 부처님은 말씀하셨다.
“비구가 옷을 취할 때에는 세 가지 독(毒)이 있으나 옷을 입고 나면 사라진다”고 하심과 같다.
경전에서는 “산란한 마음 가운데서 진실한 지혜를 낸다”는 설명은 없고,
모두가 “마음을 껴잡아야만 진실한 지혜를 낸다”고 설명되어 있다.
195) 사무애품(四無礙品)
【문】“법위(法位)에 가까운 세간의 지혜가 있다” 한다.
어느 것이 그것인가.
【답】그것은 난(煖) 등의 법 중에서 붙인 이름을 부수는 지혜이다.
이 지혜는 세속의 것으로써 진리를 보기 때문에 세간의 지혜[世智]라 하고,
성인의 도에 가깝기 때문에 법위에 가깝다고 한다.
【문】견제(見諦)의 도 가운데서 미래의 수행하는 등의 지혜인가.
【답】미래의 수행하는 등의 지혜는 없다.
뒤에 설명하겠다.
왜냐하면 법 모양을 부수는 가운데서는 붙인 이름의 마음은 없다.
그러므로 견제의 도 안에서는 세간의 지혜를 닦지 아니한다.
【문】경전 중에서는 네 가지 걸림 없는 지혜[無礙智]를 말씀하셨다.
어느 것이 그것이다.
【답】명자(名字)중에서 걸림 없는 지혜를 법에 걸림이 없다[法無礙]고 하고 음성과 말 중에서 걸림 없는 지혜를 말에 걸림이 없다[辭無礙]고 하는 것이니,
지방이 다르고 풍속이 다른 말소리의 차별이다.
경전 중에서 “수행하는 이는 나라와 지방의 말소리에 집착하지 말아야 한다”고 하였다.
말소리가 서투르면 말하는 뜻은 역시 이해하기 어려울 것이요,
만일 이름이 없으면 뜻을 전혀 밝힐 수 없으리라.
곧 이 말하는 솜씨가 막히지 않고 모자라지 아니하면 자유로이 말하여 걸림이 없다[樂說無礙]는 것이다.
경전 중에서 “네 종류의 설법이 있다.
혹시 말을 하되 이치는 있는데도 말에 한정이 있는 이가 있고,
말에 한정이 없으면서도 이치가 없는 이가 있고,
두 가지가 다 능한 이가 있고,
두 가지가 다 능하지 못한 이가 있다”고 하였다.
이상의 세 종류의 지혜를 말씨의 방편이라 한다.
이름과 말씨의 뜻을 앎에 걸림이 없는 지혜를 뜻에 걸림이 없다[義無礙]고 한다.
설법에 네 가지가 있다.
“뜻에는 방편이 있으면서 말에는 방편이 없으며,
말에는 방편이 있으면서 뜻에는 방편이 없으며,
두 가지에 다 방편이 없다”고 함과 같다.
만일 사람이 네 가지 걸림 없는 지혜를 얻으면 방편을 구족하였다고 한다.
수작하기 어렵고 가까이 하기 어려운 설법 중에서도 으뜸가게 잘하는 설명은 끊이지 않고 또한 이치가 있으며 지혜는 궁함이 없고 말씨가 막힘이 없다.
【문】이 걸림 없는 지혜는 어떻게 얻어지는가.
【답】전생에 지은 업의 인연 때문에 얻어진다.
만일 세세생생에 인연과 지혜와 또는 쌓임[陰] 등의 방편을 잘 닦았으면 그 닦아 익힌 힘 때문에 금생에 와서는 비록 문자를 학습하지 않거나 경전을 읽고 외지 않는다손 쳐도 또 천안통(天眼通) 등과 같다.
【문】어떤 사람이 얻을 수 있는가.
【답】오직 성인만이 얻는다.
또 누구는 말하기를 “아라한만이 얻고 모든 배울 것 있는 이는 얻지 못한다”고 하나 이것은 반드시 그렇지는 아니하다.
배울 것 있는 이도 또한 여덟 가지 해탈을 얻거늘 무엇 때문에 이 지혜만을 얻을 수 없겠는가.
【문】이 네 가지 걸림 없는 것은 어느 세계 안에 있는가.
【답】욕심 세계와 형상 세계 안에는 다 있고 무형 세계 중에는 오직 이치의 걸림 없음 만이 있다.
걸림이 없는 데는 두 종류로서 샘이 있음과 샘이 없음이다.
배울 것 있는 이는 두 종류를 다 감추지만 배울 것 없는 이는 샘 없음 뿐이다.
만일 얻을 적에는 한꺼번에 다 얻는다.
여자도 얻게 됨은 마치 담마진나(曇摩塵那)비구니 등과 같다.
196) 오지품(五智品)
다섯 가지 지혜라 함은 법주지(法住智)와 열반지(涅槃智)와 무쟁지(無諍智)와 원지(願智)와 변제지(邊際智)이다.
모든 법의 생김을 아는 것을 법주지라 한다.
나기[生]는 늙어 죽음에 반연하고 내지 무명은 지어감[行]에 반연하는 것처럼,
부처야 있든 없든 이 성품만은 항상 머무르기 때문에 법주지라 한다.
이 법의 사라짐을 열반지라 한다.
나기가 사라지기 때문에 늙어 죽음이 사라지고 내지 무명이 사라지기 때문에 모든 지어감이 사라짐과 같다.
【문】만일 그렇다면 열반지도 역시 법주지라 하겠다.
왜냐하면 부처가 있거나 부처가 없거나 간에 그 성품은 항상 머무르기 때문이다.
【답】모든 법이 다 사라지면 열반이라 한다.
이 다 사라진 것 안에 무슨 법이 있어서 머무르겠는가.
【문】열반은 실지로 있는 것이 아닌가.
【답】쌓임이 사라져서 남는 것이 없기 때문에 열반이라 한다.
그 중에 어느 것이 있겠는가.
【문】실로 열반은 있다.
어떻게 그런 줄을 아느냐 하면 사라짐의 진리를 열반이라 하기 때문이다.
괴로움 등의 모든 진리는 실지로 있기 때문에 열반도 실지로 있어야 된다.
또 열반 중의 지혜를 사라짐의 지혜라 한다.
만일 법이 없다면 어떻게 지혜를 낼 것인가.
또 경전 중에서 부처님은 여러 비구들을 위하여 말씀하셨다.
“생김이 있으면 함이 있는 법을 만들고 생기지 않으면 함이 없는 법을 만든다”고 하셨다.
또 경전 중에서 “오직 두 가지 법만이 있다.
함이 있는 법과 함이 없는 법이다”고 하였다.
함이 있는 법은 생기고 없어지고 머무르고 달라짐이 있지만 함이 없는 법은 생기고 없어지고 머무르고 달라지는 작용이 없다.
또 경전 중에서 “모든 법은 함이 있거나 함이 없거나 간에 사라져 없어지면 열반이다.
오직 그것만이 으뜸이 되느니라”고 하였다.
또 말하였다.
“물질은 무상하다.
물질을 없앴기 때문에 열반은 항상하다.
의식까지도 그와 같다”고 하였다.
또 경전 중에서 “사라짐은 증득하여야 한다”고 하였다.
만일 법이 없으면 증득할 것이 무엇인가.
또 부처님은 다성경(多性經) 중에서 말씀하셨다.
“슬기로운 이는 함이 있는 성품[有爲性]과 함이 없는 성품을 사실대로 안다”고 하셨다.
함이 없는 성품이 바로 열반이다.
진실한 지혜로 알게 되거늘 어째서 없다 하는가.
또 모든 경전 중에서는 결정코 “열반은 없는 법[無法]이다”고 말씀한 일이 없다.
그러므로 알아라.
그대가 스스로 생각하고 분별하여 열반이 없다고 말할 뿐이다.
【답】만일 모든 쌓임을 떠나서 다시 다른 법을 열반이라고 할 것이 있다면 모든 쌓임이 다 없어진 것을 열반이라고 하지 않아야 한다.
또 만일 열반이 있다면 그 형체를 말해보라.
어떻게 생긴 것인가.
또 열반을 반연하는 선정을 형상 없는 것[無相]이라 한다.
만일 법 모양[法相]이 그대로 있다면 어찌하여 형상이 없다 할 것인가.
경전 중에서 “수행하는 이는 물질의 모양이 끊어짐을 보고,
법의 모양이 끊어짐까지도 본다”고 하였다.
또 경전 중의 여기저기서 “온갖 작용은 무상하다.
온갖 법은 나가 없다.
고요히 사라짐의 열반이다”고 함과 같다.
이 중에서의 나를 모든 법 자체의 성품이라 할 적에 만일 모든 법 자체의 성품을 보지 못하면 그 때에 나 없음을 보았다 하리라” 만일 열반 이것이 법이라면 역시 체성도 없고 볼 수도 없다.
이 법은 사라지지 않기 때문이나,
마치 병(甁)이 있었을 때에 병이 없어짐은 깨뜨림의 법 때문인데 만일 병이 깨졌으면 병이 깨졌다고 설명할 수 있는 것처럼,
나무를 짜르는 것들도 그와 같다.
그와 같아서 만일 모든 작용이 아직 있을 그 때에는 열반이라고 하지 못하며,
모든 작용이 사라졌기 때문에 열반이라는 이름이 있다.
또 괴로움이 사라지면 다시 그와 다른 법이 있다고는 말하지 못한다.
경전 중에서 “비구들아,
만일 이 고통이 사라지고 그 밖의 고통이 생기지 아니하면서 다시는 잇따르는 일이 없으면 그곳이 제일의 고요히 사라짐과 안온이니,
이른바 온갖 것을 버리고 떠나서 온갖 몸과 마음의 탐애는 영원히 다 사라진 것이니라”고 함과 같다.
열반이라는 것은 그 중에서 이 고통이 사라지고 그 밖의 고통이 생기지 아니함을 말한 것인데,
다시 어떤 법이 있어서 열반이라 하겠는가.
또한 다시는 따로 다하는 법이 있지 않다.
다만 이왕에 생긴 애착은 없애고 아직 생기지 아니한 것은 생기지 않게 하는 그 때를 다하였다고 하는 것이요,
다시 어떤 법이 있어서 다하였다고 하는 것인가.
실로 말할 것조차 없다.
또 “있다” 함은 그것이 법의 별명[異名]이어서 다섯 가지 쌓임의 법이 없는 것을 열반이라 한다.
여기에서 있지 아니한 것을 이름만으로 있다하면 그것은 옳지 않은 것이니,
다 사라졌기 때문에 열반이라 하기 때문이다.
마치 옷이 다하여 다시 다른 방법이 없음과 같다.
만일 그렇지 않다면 또한 별도로 옷이 다하는 등의 방법들이 있어야 한다.
그대는 “사라짐의 지혜가 있다”고 말하나 역시 무방한 말이다.
마치 나무를 끊는 일들 가운데서 지혜가 생기는 것이요,
또한 따로 끊는 법이 없는 것과 같다.
또 모든 작용으로 말미암아 그 중에서 지혜가 생기는 것이니,
모든 작용이 없는지라 열반이라 한다.
마치 그 물품이 없는지라 “이 물품은 비었다”고 알게 됨과 같다.
【문】지금 열반이 없다는 말인가.
【답】열반이 없다는 것은 아니다.
다만 실지의 법이 없을 뿐이다.
만일 열반이 없다면 항상 나고 죽는 데 있으면서 영원히 해탈할 기회가 없으리니 마치 병이 깨짐과 나무가 끊어짐이 있는 것은 실지로 별다른 방법이 있지 아니함과 같다.
나머지 진리에 관한 말 등은 다 이미 통틀어 대답하였다.
왜냐하면 고통의 사라짐이 있기 때문에 생기지 않고 일어나지 않고 작용하지 않는 함이 없는 법들이 있다고 말하여도 모두 방해도리 바가 없기 때문이다.
무쟁지(無諍智)라 함은 어느 지혜로써도 다른 것과 다투지 아니하면 다툼이 없음[無諍]이라고 한다.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인자한 마음이 바로 그것이다.
인자한 마음 때문에 중생을 괴롭히지 않기 때문이다”고 하였다.
또 어떤 이는 말하기를 “공의 행이 바로 그것이다.
이 공의 행 때문에 남과 다투지 않기 때문이다”고 하였고 또 어떤 이는 말하기를 “열반을 좋아하는 마음이 바로 그것이라 열반을 좋아하기 때문에 다투는 바가 없기 때문이다”고 하였고,
어떤 이는 말하기를 “제4선에 있다고 하였으나 이것은 반드시 그렇지도 않은 것이니,
이 아라한은 이 지혜로써 마음을 닦아 모두가 다투는 바가 없기 때문이다.”
원지(願智)라 함은 모든 법 안에서 장애됨이 없는 지혜를 원지라 한다.
【문】만일 그렇다면 오직 부처님 세존만이 홀로 이 지혜를 가지셨으리라.
【답】그렇다.
오직 부처님 세존만이 홀로 이 지혜를 구족하셨으며,
그 밖의 사람은 힘이 미치는 바에 따라 장애 없음을 얻을 뿐이다.
변제지(邊際智)라 함은 수행하는 이가 가장 으뜸가는 지혜를 얻음에 따라서 온갖 선정으로써 쪼이고 닦아 더욱 자라게 하거나 또는 수명을 늘리고 줄이는 따위 가운데서 자재한 힘을 얻는지라 그것을 변제지라 한다.
197) 육통지품(六通智品)
여섯 가지 신통의 지혜가 있다.
여섯 가지 신통이라 함은 신통(身通)과 천안(天眼)과 천이(天耳)와 타심지(他心智)와 숙명(宿命)과 누진(漏盡)의 신통이다.
신통(身通)이라 함은 수행하는 이가 몸으로 물이나 불을 내뿜고 공중에 날아올라 나투기도 하고 없어지기도 하며 해와 달을 만지고 범천에 오르는 자유며 기타 여러 가지의 변화를 말한다.
그와 같은 작용들을 신통이라 한다.
【문】이런 일은 어떻게 하여서 성취하게 되는가.
【답】수행하는 이가 깊이 선정을 닦았기 때문에 얻게 된다.
경전 중에서 “선정하는 이의 힘은 헤아릴 수조차 없다”고 함과 같다.
어떤 이는 말하기를 “변화부리는 마음은 이는 무기(無記)이다”고 하나 그 일은 옳지 못하다.
만일 이 수행하는 이가 남을 이롭게 하기 위하여 갖가지로 변화를 나툰다면 무엇 때문에 무기라 하겠는가.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욕심 세계의 마음으로는 욕심 세계의 변화를 짓고,
형상 세계의 마음으로는 형상 세계의 변화를 짓는다”고 하나 그도 또한 옳지 않다.
눈 따위도 당연히 이러하여야 하기 때문이다.
치심 세계의 의식으로 욕심 세계의 물질을 볼 수 있다는 것인가.
그와 같이 만일 형상 세계의 마음으로 욕심 세계의 변화를 짓는다 한들 무슨 허물이 있겠는가.
또 어떤 이는 말하기를 “초선의 신통은 범천 세상에 이르고 내지 5선의 신통은 색구경천(色究竟天)까지 이른다”고 하나 그도 역시 옳지 않다.
근기와 힘이 미치는 바에 따르기 때문이다.
만일 영리한 근기라면 초선의 신통으로 4선에 있을 것이오,
우둔한 근기라면 2선의 신통으로써도 초선의 것도 사용하지 못하리라.
마치 대범왕(大梵王)이 선정의 중간에 당도하는데 그 가운데서 신통의 초선의 힘으로는 여러 그 밖의 범천에 당도하는 이가 없는 것과 같다.
곧 초선은 범왕의 머무는 곳을 알 수 없기 때문이다.
또 부처님은 전생을 아시는 신통으로 형상 없는 것조차 기억하신다.
경전 중에서 “혹은 형상 세계와 무형 세계 안에서 먼저 나셨던 곳까지도 부처님은 모조리 아신다”고 함과 같다.
그러므로 일정하지 아니하다.
또 어떤 이는 말하기를 “천안은 지혜의 “성품이다”고 한다.
그 일은 옳지 못하다.
천안은 광명으로 말미암아서 이루어지지만 지혜[慧]는 그와 같지 아니하다.
【문】경전 중에서 “광명의 모습을 닦으면 지견(知見)을 성취한다”고 하였다.
지견이 바로 천안이다.
【답】그렇지 않다.
또 말하기를 “천이(天耳)도 지혜의 성품으로써 귀라 하지 않는다”고 하였다.
그러므로 지혜는 아니다.
또 천안은 현재의 물질을 반연하거니와 의식(意識)은 그렇지 아니하다.
어떤 이가 천안을 풀이하는 가운데서 말하기를 “중생의 업과 보를 아는 데에 안식에는 이러한 힘이 없다.
다만 의식 가운데의 앎[知]이 안식을 이용할 때에 생긴다”고 하였다.
그러므로 알아라.
선정으로부터 생기는 빛깔을 천안이라 한다.
【문】천안의 형상과 처소는 큰가,
작은가.
【답】어린아이의 분량만큼 이다.
【문】장님은 어떠한가.
【답】역시 눈 있는 곳은 마찬가지다.
【문】천안은 하나인가,
둘인가.
【답】두 개다.
【문】향하는 처소만을 보는가.
【답】사방을 두루 다 본다.
【문】변화한 사람에게도 있는가.
【답】없다.
변화를 조작한 이에게는 있다.
천이에 대한 이론도 그와 같다.
수행하는 이가 만일 남의 마음을 알면 타심지라고 한다.
【문】무엇 때문에 다른 이의 심수(心數)를 안다고는 말하지 아니한가.
【답】이런 인연 때문에 따로 심수가 없다.
남의 느낌과 생각 등을 아는 것도 타심지라고 한다.
또 어떤 이는 말하기를 “이 지혜는 같은 성품의 반연이다.
마치 샘 있는 것으로 샘 있는 것을 알고 샘 없는 것으로 샘 없는 것을 아는 것과 같다”고 한다.
그 일은 그렇지 않다.
이 사람은 결정된 인연으로 말하지 않는다.
“이 인연으로써 같은 성품의 반연을 안다”고 한다.
어떤 이는 말하기를 “현재만을 반연한다”고 하나 이도 역시 옳지 못하다.
혹은 미래를 반연하기도 하는데 마치 사람이 감각 없는 선정[無覺定]에 들었다가 그 선정으로부터 일어나면 “이러하고 이러한 일을 깨쳤다”고 아는 것과 같다.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이 지혜는 견제의 도를 알지 못한다”고 하나 그 일도 옳지 못하다.
설사 안다한들 무슨 허물될 것이 있겠는가.
어떤 이는 말하기를 “벽지불(辟支佛)은 견제도 안의 셋째 번의 마음을 알려고 하다가 바로 일곱째 번의 마음을 보고 선정은 셋째 번의 마음을 알려고 하다가 바로 열여섯째 번의 마음을 본다고 한다.
이래도 견제의 도를 본다고 하지 않겠는가.” 또 어떤 이가 말하기를 “이 지혜는 으뜸가는 자리와 으뜸가는 사람과 으뜸가는 근기를 알지 못한다”고 하나 그도 또한 일정하지 않다.
모든 하늘도 부처님의 마음을 알기 때문이다.
부처님이 한때는 대중 스님을 아주 내치면서도 생각을 돌리어 붙잡으려 함을 범왕이 다 알고 있었음과 같다.欲知見諦道
또 어느 때에는 생각하시기를 “임금이 되어서 법대로 세간을 교화해야겠다”는 것을 마왕이 바로 알고 와서는 권고하였다.
또 모든 하늘도 또한 “이 분은 나한이다” 내지 “이 분은 수다원이다”고 안다.
또 모든 비구도 부처님의 마음을 안다.
마치 부처님이 장차 열반하려 할 때에 아나율은 차례로 부처님이 드셨던 모든 선정을 알았음과 같다.
또 어떤 이는 말하기를 “이 지혜는 형상 없는 것을 알지 못한다”고 하나 그도 또한 옳지 못하다.
부처님은 전생을 아는 신통으로 형상 없는 것까지도 아신다.
타심지도 역시 그와 같다.
안다 한들 무슨 허물될 것이 있겠는가.
【문】어떻게 남의 마음을 아는가.
【답】반연하는 중에서 안다.
만일 마음이 물질에 작용하면 물질을 반연하는 마음이라고 하듯 이렇게 안다.
【문】만일 그렇다면 타심지는 온갖 법을 반연하는가.
【답】그렇다.
만일 반연을 알지 못하면 어떻게 마음을 알겠는가.
경전 중에서 “나는 너의 마음이 여사여사한 것을 안다 함과 같다.
바로 이것이 물질들을 반연하는 것이다.
남의 마음을 아는 것은 세 가지이다.
첫째는 모양[相]으로 아는 것이요,
둘째는 과보[果]로 얻는 것이요,
셋째는 닦아서 얻는 것이다.
모양으로 안다 함은 앙가주(鴦伽呪) 등으로써 아는 것과 같다.
과보로 얻는다 함은 귀신들과 같다.
닦아서 얻는다 함은 선정의 힘으로 타심지를 여섯 가지 신통 중에서 말하였다.
닦아서 얻는 것으로서 이것이다.
만일 과거 세상 안의 모든 쌓임을 기억하면 그것을 숙명지라 한다.
【문】어느 쌓임을 기억하게 되는가.
【답】자기의 쌓임과 남의 쌓임과 중생 아닌 것의 쌓임을 기억한다.
오직 우월한 이의 모든 쌓임은 기억하지 못하나 우월한 이의 계행 등의 모든 법만은 기억한다.
어떻게 그런 줄을 아느냐 하면 사리불이 세존께 대답한 말과 같다.
“저는 과거와 미래의 부처님의 마음은 알지 못한다 하더라도 그 법만은 아니옵니다”고 하였다.
또 정거천(淨居天)은 부처님의 마음을 알기 때문에 와서 부처님께 아뢰되 “그러하옵니다,
세존이시여 과거의 모든 부처님의 위의도 그러하였나이다”고 하였다.
【문】전생의 일을 아는 것 중에서는 무엇 때문에 공통되는 모양과 공통되는 성품을 설명하는가.
【답】기억되는 생각이 명료하기 때문에 그와 같이 모양의 이름을 말하되 “아무 사람”이라 함과 같다.
또 일을 알기 때문에 모양이라 하며,
성(姓)이란 종족을 말한다.
“이것은 너의 집이다.
이것은 너의 성품이다”고 말함과 같다.
모양과 성품을 합하여 말하기 때문에 알고 보는 것이 명료하다.
【문】무엇 때문에 명료한 기억이라 하는가.
【답】과거의 법은 다 사라져서 형상이 없는데도 능히 알게 되므로 이것을 기특하다 한다.
어떤 사람은 모양을 헤아려서 알기 때문에 환히 알지 못하는 것이니,
부처님의 제자 역시 그와 같다.
그러므로 성품[性]과 모양[相]을 합하여 말한다.
어떤 이는 숙명지를 이용하기도 하고 혹은 도를 닦아 생각하여 얻은 지혜로써 전생 일을 아는 것이니,
마치 지어감[行]이 식(識)에 반연함과 같다.
이 두 종류 중에서는 생각하여 얻은 지혜가 우월하다.
왜냐하면 이 사람이 비록 8만의 대겁(大劫)을 안다손 치더라도 이 생각하여 얻은 지혜가 없기 때문에 삿된 소견을 내기 때문이니 이로부터서는 나고 죽는다고 하게 되며,
이를 지나면 다시는 도를 닦아 생각하여 얻는 지혜가 없으므로 끝내 이 마음은 없다고 한다.
어떤 이는 말하기를 “이 지혜는 차례로 지난 세상의 일을 기억한다”고 하나,
그 일은 옳지 못하다.
만일 생각 생각에 차례로 기억한다면 한 겁 동안의 일조차도 오히려 다 알기 어렵거든 하물며 한량없는 겁의 것이겠는가.
【문】경전 중에서 무엇 때문에 “나는 91겁에서부터 지금까지 오면서 보시를 덜 하는 데도 과보 없는 일은 보지 못하였다”고 하였는가.
【답】부처님은 여기에서 7불(佛)로써 증명을 삼으셨다.
또는 오래 사는 어느 정거천(淨居天)도 부처님과 똑같이 본다.
또 부처님은 진실한 지혜를 얻으셨기 때문에 공덕이 청정하다.
만일 누구라도 공양을 올리면 두 세상의 복을 얻는다.
그러므로 이와 똑같이 설명한다.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이 지혜는 위의 세계는 위의 세계를 알지 못한다”고 하나 그 일은 옳지 못하다.
위의 신통(身通) 등을 말하는 가운데서 이미 대답하였다.
【문】만일 그것이 성품을 기억하는 것이라면 무엇 때문에 지혜라 하는가.
【답】기억은 모양에 따라서 생기며 과거는 모양이 없어도 기억되는 것이니,
우월한 지혜인 줄 알아야 할 것이요,
이것을 기억이라 한다.
전생 일을 기억하는 데는 세 가지가 있다.
첫째는 숙명지를 이용하는 것이요,
둘째는 과보로 얻는 것이요,
셋째는 나면서부터 스스로 기억하는 것이다.
숙명지는 닦아서 얻는 것이요,
과보로 얻는다 함은 귀신들과 같은 것이요,
나면서부터 스스로 기억한다 함은 사람의 갈래 안에서다.
【문】어떠한 업을 지었기에 나면서부터 바로 기억하는가.
【답】중생을 괴롭히지 아니했던 업으로써 얻은 것이다.
왜냐하면 죽을 때나 낳을 때는 고통에 시달리기 때문에 기억을 잃게 되는 것이니,
그 중에서는 잃어버리지 않게 되기가 어렵기 때문에 착한 업이 필요하다.
또 어떤 이는 말하기를 “이 과거를 기억하는 것은 기껏해야 일곱 세상까지이다”라고 하나,
그 일은 일정하지 않다.
어떤 사람은 세세생생에 괴롭히지 않는 법을 깊이 닦았기 때문에 머나먼 전생 일을 기억한다.
누진지(漏盡智)의 신통을 증득한다 함은 바로 금강삼매(金剛三昧)가 그것이다.
금강삼매는 곧 샘[漏]이 다한 것이다.
걸림없는 도의 샘이 다한 지혜를 배울 것 없는 이[無學]의 지혜라 한다.
금강삼매로써 모든 번뇌를 다 없애면 샘이 다한 지혜의 신통을 증득한다고 한다.
【문】그 밖의 신통에 대해서도 어떤 법으로써 증득한다고 설명해야 한다.
【답】먼저 이미 깊이 선정을 닦아서 신족통(神足通=身通)을 증득한다고 말하였다.
또 소용에 따라서 증득함과 또 증득할 바의 일을 다 신통이라 부른다.
어떤 이는 말하기를 “온갖 성인의 도는 다 번뇌를 다하는 방편이다”라고 하였다.
경전 중의 말에 “만일 부처님이 세상에 나오시고 착한 사람이 법을 듣고 출가하여 계율을 받들고 다섯 가지 번뇌[蓋]를 버리어 선정을 닦아서 진리를 본다고 말하는 것과 같이 이러한 등등은 다 번뇌를 끊는 방편이라 한다.
또 어떤 이는 말하기를 “보시하는 등의 착한 법도 역시 번뇌를 다하는 인연이라 한다”고 하였다.
경전 중에서 “수행하는 이의 보시는 번뇌를 다함과 공과 나 없음의 지혜를 돕는 것이니라”고 함과 같다.
이것을 참으로 누진지의 신통을 증득하는 것이라 한다.
이 법을 특별히 금강삼매라 부르는 것이니,
모든 형상을 부수기 때문에 금강이라 한다.
모든 외도들은 다섯 가지 신통만을 가질 뿐이니,
다 이것은 진실한 지혜를 얻지 못하기 때문이다.
【문】나 없음의 지혜로 나에 대한 고집을 끊어야 하거늘 어떻게 이것을 가지고 탐심과 진심 등을 끊는다는 것인가.
【답】나 없음의 지혜는 모든 모양을 없앤다.
모양이 없기 때문에 모든 번뇌가 사라진다.
【문】처음에 나 없음의 지혜로써 모든 모양을 무너뜨린다면 둘째의 지혜들은 다시 무슨 소용이 있는가.
【답】모든 현상이 비록 없어진다 하더라도 도로 생긴다.
그러므로 둘째의 것들이 필요하다.
【문】만일 없어졌다가 도로 생긴다면 모양은 끝이 없겠구나,
그렇다면 아라한의 도도 없겠다.
【답】끝이 있다.
지금 당장에 보더라도 우유가 없다가 도로 생기기도 하며,
어느 때에는 우유가 없어지고 타락이 생기면 그것이 끝이 되는 것과 같이 모양도 또한 그와 같다.
또 쇠를 불에 달구면 검정 모습은 없어지고 도로 다른 모습이 생기면서 아주 빨간 모습이 생기기에 이르면 그 때를 끝이라 함과 같다.
가라라(迦羅邏) 등의 모든 비유도 역시 그와 같다.
따라서 어느 때에는 모든 현상이 사라져 다하여 다시는 모양의 생김이 없으면 그 때에 아라한의 도를 얻었다 한다.
【문】아라한에게는 도무지 모든 모양이 없는 것인가.
【답】만일 선정에 들지 않은 마음 안에 있으면 그때에는 역시 물질 등의 모든 모양이 있기는 하되 다만 허물을 저지르지 아니할 뿐이다.
만일 사람이 눈으로 물질을 보고서 삿된 마음으로 삿되게 분별하면 그때에는 모양이 허물을 낸다.
【문】어느 것이 공과 나 없음의 지혜인가.
【답】만일 수행하는 이가 다섯 가지 쌓임 중에서 붙인 이름인 중생을 보지 아니하면 법이 공하였기 때문에 물질의 체성의 사라짐으로부터 식의 사라짐을 보게 된다.
이것을 공과 나 없음의 지혜라 한다.
【문】가령 모든 법은 항상 존재하여도 애욕 등의 번뇌는 또한 끊어져 다할 수 있으리니 마치 만물은 항상 존재하는데도 정진하는 이는 탐애를 제거할 수 있다는 말과 같다.
그렇다면 무슨 모양을 끊을 필요가 있는가.
【답】경전 중에서 말하였다.
남이 있는 모든 형상은
모두가 없어지는 모양인 줄 알면
모든 법의 안에서
법의 눈[法眼]이 깨끗하게 되며,
만일 사라짐으로써 끊으면
필경단(畢竟斷)이라 이름 하느니라.
어느 수행하는 이가 모든 물질의 욕심을 떠나고 탐심과 진심을 막아 없애면 부처님은 이들을 위하여 이런 게송을 말씀하신다.
또 말하였다.
“모든 행의 성품은 공하여서 허깨비와 같건만 범부는 슬기가 없는지라 실지로 있다고 여긴다.
배울 것 있는 이는 거짓이어서 허깨비와 같은 줄을 환희 알며,
아라한은 또한 허깨비로도 보지 않는다”고 하였다.
그러므로 알아라.
어느 지혜로거나 모든 법의 사라짐을 증득하면 그것을 누진지의 신통을 증득하였다고 한다.
198) 인지품(忍智品)
【문】경전 중에서 말씀하셨다.
“만일 수행하는 이에게 일곱 가지의 방편(方便)과 세 가지의 관(觀)하는 이치가 있으면 이 법 중에서 빨리 샘이 다함을 얻는다”고 하였다.
바로 어떤 지혜인가.
【답】일곱 가지 방편이라 함은 듣고서 얻은 지혜와 생각하여 얻은 지혜를 말한다.
왜냐하면 마음이 아직 안정되지 못한 이는 이와 같은 관을 지으라는 것이니,
“이것은 바로 물질이다.
물질의 쌓임이요 물질의 사라짐이며 그리고 물질의 사라짐의 도요 물질의 맛[味]과 허물[過]과 벗어남[出]이다”라고 한다.
【문】만일 이것이 듣거나 생각하여 얻은 지혜라 하면 무엇 때문에 빨리 샘이 다하게 된다고 하는가.
【답】이것이 비록 듣고서 얻은 지혜이고 생각하여 얻은 지혜라 하더라도 이와 같이 다섯 가지의 쌓임을 분별하면 나라는 마음을 깨뜨릴 수 있다.
그러므로 빨리 샘이 다하게 된다고 한다.
세 가지 관의 지혜라 함은 “함이 있는 법은 무상하고 괴롭고 나가 없다”고 관하는 것이다.
만일 음ㆍ계ㆍ입(陰界入)의 문(門)으로써 함이 있는 법을 관하면 이치의 이익이 없다.
【문】만일 그렇다면 전에 허물되는 것 중에서 이미 무상과 고통을 설명하였고 벗어남[出] 가운데는 이미 나 없음을 설명하였거늘 무엇 때문에 다시 이 세 가지의 관을 말하는가.
【답】세 가지를 배워 익히는 데도 먼저 듣거나 생각하여 얻은 지혜로서 하며 그런 뒤에 닦아서 얻은 지혜이다.
먼저 듣거나 생각하여 얻은 지혜 중에서 일곱 가지를 말하고 뒤에 닦아서 얻은 지혜 중에서 세 가지를 말한다.
왜냐하면 만일 무상함과 괴로움으로 모양을 무너뜨리면 무너뜨림의 무상이라 하겠지만 무상을 행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비록 욕심의 번뇌를 제거하라고 말은 하였으나 어떻게 제거하라는 것을 말하지 아니하였는지라 뒤에 세 가지 관의 이치를 설명한 것이다.
【문】무엇을 여덟 가지 인이라 하는가.
【답】만일 지혜로 붙인 이름을 부수면 그것을 인이라고 하는데,
이 인은 난위(煖位)와 정위(頂位)와 인위(忍位)와 세제일위(世第一位) 중에 있다.
【문】수행하는 이는 불ㆍ법ㆍ승과 계율 등에도 인이 있거늘 무엇 때문에 여덟 가지 만을 말하는가.
【답】수승하기 때문에 말한 것이다.
수승하다 함은 도에 가깝다고 하며,
이 슬기로움[慧]을 지혜[智]로 삼기 때문에 인(忍)이라 한다.
마치 고법지(苦法智)를 고법인(苦法忍)이라 함과 같은 것들이다.
왜냐하면 먼저 도에 수순하는 생각과 지혜를 운용하고 그 다음에 실제의 지혜를 얻게 되기 때문이다.
마치 코끼리를 치는 사람이 먼저 코끼리의 발자취를 본 다음에 짐작으로 이 안에 있음을 알고서 뒤에 실제로 보게 되는 것처럼 수행하는 이도 그렇다.
먼저 추측으로 알고서 열반을 헤아린 연후에 지혜로써 실제로 보는 것이다.
그러므로 경전 중에서 “아는 것과 보는 것은 샘이 다함을 능히 얻느니라”고 하였다.
199) 구지품(九智品)
【문】어떤 논사는 말하기를 “아라한이 진지(盡智)를 증득할 때에 세속의 아홉 가지 지혜를 얻는 것이니,
욕심세계 매임[繫]의 선(善)과 무기(無記)며,
내지 비상비비상처(非想非非想處)의 선과 무기이다”라고 하였다.
그 일은 어떤 것인가.
【답】모든 아라한이 다 모든 선정을 얻지는 못하거늘 어떻게 아홉 가지 지혜를 얻을 수가 있겠는가.
【문】모든 아라한은 다 선정을 얻는다.
다만 모두 다 실제로 선정에 드는 것만이 아닐 뿐이다.
【답】만일 실제로 들을 수 없다면 어떻게 얻는다고 하겠는가.
마치 사람이 “글은 알면서도 글자는 하나도 모른다”고 말함과 같이 이 일도 역시 그렇다.
【문】만일 사람이 욕심을 여의었으면서도 아직 실제로 초선에 들지 못하였다면 이 사람은 죽어서도 저 곳에 가서 나지 못할 것인가.
【답】경전 중에서 “먼저 이 세간에 들어온 뒤에야 그 곳에 가서 나게 된다”고 하였다.
지금 어떻게 이 세간에도 들지 않았으면서 저 곳에 날 수 있겠는가.
【문】욕심을 여의었을 때에는 과거와 미래의 모든 선정은 모두가 본래부터 얻어지는 것이다.
이러한 과보 때문에 가서 날 수 있다.
【답】미래의 업은 지금도 없고 생김도 없는지라 과보를 받지 않아야 한다.
과거의 모든 선정은 일찍이 마음에서 생겼으므로 만일 과보를 받는다 하여도 방해될 것이 없지만 또 미래의 모든 업은 얻지 않아야 도니다.
만일 얻을 수 있다면 온갖 미래의 것도 다 얻게 되어야 한다.
무슨 장애 때문에 얻고 못 얻을 것이 있겠는가.
【답】만일 미래의 법을 얻을 수 없다면 배울 것 있는 이는 여덟 가지 갈래가 성취되지 않아야 되며,
배울 것 없는 이도 열 가지 갈래가 성취되지 않아야 한다.
왜냐하면 만일 제2의 선정 등에 의지하여 바른 법 자리[正法位]에 들면 이 사람은 미래에 바른 생각[正思惟]을 얻는다.
또 만일 수행하는 이에게 진지(盡智)가 앞에 나타나면 그 때에는 미래 세상의 바른 소견을 얻는다.
또 사람이 무형 세계 선정에 의하여 나한의 과위를 얻으면 이 사람은 미래에 바른 생각과 바른 말과 바른 생활을 얻는다.
또 만일 사람이 제3의 선정 등에 의하여 성인의 도를 얻으면 미래의 기쁨을 얻는데 이와 같은 것들의 법은 응당 모두가 없어야 된다.
그러므로 미래의 법이 있는 줄 알겠다.
또 만일 미래의 수행이 없다면 어떻게 장차 모든 과위와 모든 선정 등을 얻겠는가.
수행하는 이가 만일 도(道)에 있으면 비지(比智) 안에서 모두가 초과에 속하는 모든 지혜와 모든 선정을 얻겠거니와 만일 그렇지 않다면 과위 등을 자주자주 얻게 되어야 한다.
왜냐하면 모든 과위는 다 눈앞에 나타날 때에 얻게 되기 때문이니 이 일은 옳지 못하다.
그러므로 알아라.
미래 안의 수행이 있어야 한다.
【답】그대는 “여러 가지 갈래가 없다”고 말하나 이것은 무방하다.
왜냐하면 우리는 계율 등의 모든 갈래는 차례대로 얻는 것이어서 한꺼번에 얻는 것이 아니라고 말하는 까닭에 논란할 것은 없기 때문이다.
그대는 모든 얻음[得]은 그 종류를 얻는다”고 하나 수행하는 이가 고지(苦智)를 얻는 때에는 그 밖의 고지의 종류도 다 얻는다고 하는 것이니,
마치 사람의 종류를 얻었기 때문에 사람의 모양까지도 얻었다고 하는 것이요,
또한 생각생각 동안에 점차로 사람의 모양을 얻는다고 말하지 아니함과 같다.
그 일도 역시 그렇다.
【문】수행하는 이의 모든 괴로움 등에 대한 지혜들을 차례로 얻는다면 다 이미 여의어 버리고 다시 한꺼번에 수다원 과위에 소속되는 모든 지혜를 얻겠다.
【답】샘 없는 모든 지혜는 얻게 되면 잃어버리지 않는다.
【문】만일 얻은 것을 잃어버리지 않는다면 얻는 것과 행(行)은 차별이 없으리라.
왜냐하면 결과를 얻은 이가 이는 곧 행하는 이인지라 이러한 허물들이 있게 되기 때문이다.
【답】만일 차별이 없다면 무슨 허물이 있겠는가.
결과를 성취한 이를 또한 행하는 이라고도 말함과 같이 이 일도 역시 그와 같다.
또 이 사람은 다시 더 나은 법을 얻었기 때문에 차별이 있다.
그러므로 허물은 없다.
다섯 가지 계법을 받은 사람이 다시 출가의 율의(律儀)를 받아도 본래 받은 계는 잃지 아니함과 같다.
또 결과를 얻은 이는 도를 보았기 때문에 차별이 없다.
사람이 비록 첫 번의 일을 알았다 할지라도 다시 더 나은 일 때문에 차별이 있는 것처럼 이 일도 또한 그렇다.
그러므로 알아라.
미래의 얻는 것은 없다.
또 수행하는 이는 공과 나 없음의 지혜에 머무르거늘 그때에 어떻게 세간의 법을 얻겠는가.
그러므로 알아라.
진지(盡智)를 얻는 때에는 세간의 지혜를 얻지 않는다.
【문】이 모든 세간의 지혜는 진지와 함께 아라한에게 선정에 들고 나는 마음을 짓게 한다.
【답】아라한의 마음은 계속 잇달아 생기되 생각 생각마다 모두 깨끗하다.
만일 다시 아홉 가지 지혜를 얻으면 눈[眼] 등도 다 다시 얻어야 되며,
만일 그렇지 못하면 아홉 가지 지혜만을 얻지 않아야 한다.
또 말하거니와 미래의 수행은 모두가 인연이 없다.
왜냐하면 이들은 견제도(見諦道) 가운데서는 비슷한 지혜(相似智)만 닦고 사유도(思惟道) 가운데서는 비슷한 지혜와 비슷하지 아니한 지혜를 닦으며,
견제도 가운데서는 위의 자리[上地]를 닦지 아니하고 사유도 중에서는 닦으며,
도(道)의 비지(比智) 중에서는 세간의 선(善)을 닦지 아니하고 그 밖의 지혜 가운데서는 닦으며,
걸림없는 도[無礙道] 가운데서는 타심지(他心智)를 닦지 아니한다.
신해탈(信解脫)이 바뀌어서 견도(見到)가 될 때에는 온갖 무애(無礙)와 해탈의 도 가운데서 세속의 도를 닦지 아니하고 시해탈(時解脫)이 바뀌어서 불괴 해탈[不壞解脫]이 될 때에는 아홉 가지 무애와 여덟 가지 해탈의 도 가운데서 세속의 도를 닦지 아니하며,
아홉째의 해탈의 도 가운데서는 닦고 미세한 마음 가운데서는 온갖 샘 없음을 닦지 아니한다고 하는 이와 같은 것들을 설명하나 모두가 이유가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대가 이제 바른 인[正因]을 말하거나 혹은 믿어 받아야 하거나 혹은 배우고 익힘을 수행으로 삼는다면 난위(煖位) 등의 안에 있을 때에 위의 모든 선근(善根)을 모두 닦아지는 것이니,
모두가 더욱 더해지기 때문이다.
마치 경서를 익히면 다 총명하고 영리하여 짐과 같다.
그러므로 난위 등의 법에 있을 때에는 진지(盡智)에 이르기까지 온갖 모두가 닦아진다.
만일 그렇지 않다면 마땅히 바른 인을 말해야 한다.
200) 십지품(十智品)
열 가지 지혜라 함은 법지(法智)와 비지(比智)와 타심지(他心智)와 명자지(名字智)와 사제지(四諦智)와 진지(盡智)와 무생지(無生智)이다.
현재의 법을 아는 것을 법지라 한다.
경전 중에서 부처님은 아난에게 말씀하셨다.
“너는 이 법에 대하여 그와 같이 보고 알며,
그와 같이 통달하며 과거와 미래 또한 그와 같이 알지니라”고 하심과 같다.
응당 현법지(現法智)라고 말씀하셨어야 할 터이다.
현재라고는 말씀하지 않으셨기 때문에 법지라고만 설명한다.
경전 중에서 “어리석은 이는 현재의 법을 귀히 여기지만 슬기로운 이는 미래를 귀히 여기느니라”고 함과 같다.
또 말하였다.
“현재의 모든 욕심과 미래의 모든 욕심은 모두가 이는 악마의 그물이요 악마의 얽매임이요 악마의 속박이다”라고 하였다.
이와 같은 말들 가운데서도 다 현재라는 말을 썼어야 할 터인데 현재라는 말을 생략했기 때문에 법지라고만 말한다.
그 밖의 나머지 법을 미루어서 아는 것을 비지라 한다.
그 밖이라 함은 과거와 미래의 모든 법이다.
현재의 법에 견주어 뒤에 아는 것이므로 비지라 한다.
왜냐하면 먼저 알고 난 연후에 견주어서 알게 되기 때문이다.
법지는 현지(現智)라 하고 이 법지에 따라 헤아리고 견주어 아는 것을 비지라 한다.
【문】이 지혜는 무루지(無漏智)이다.
무루지를 어떻게 비지라고 하는가.
【답】세간에도 역시 비지가 있다.
왜냐하면 법지와 비지와 타심지와 고지(苦智)와 집지(集智)와 멸지(滅智)와 도지(道智)는 모두가 샘이 있기도 하고 샘이 없기도 하기 때문이다.
이 모든 지혜가 난위 등의 법 중에 있으면 바로 샘이 있는 것이거니와 법의 자리(法位) 중에 들어가서 얻은 바라면 샘이 없다고 한다.
【문】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욕심 세계의 모든 행과 모든 행의 쌓임과 모든 행의 사라짐과 모든 행의 사라지는 도를 아는 것을 법지라 하고,
형상 세계와 무형 세계의 모든 행의 네 가지를 앎을 비지라 한다”고 하였다.
이 일은 어떠한가.
【답】경전 중에서 부처님이 아난에게 말씀하셨다.
“과거와 미래의 세간 안에서도 역시 이와 같이 아느니라”고 하셨다.
경전에서는 “형상 세계와 무형 세계의 모든 행 안의 것을 앎을 비지라 한다”고 한 설명은 없다.
또 경전 중에서 “수행하는 이는 생각하기를 나는 ‘지금 현재의 물질에 침식되고 있고,
과거에도 일찍이 물질에 침식되었으며 미래 안의 물질에도 역시 침해를 당하리라’고 하여야 한다”고 하였다.
또 경전 중에서 나기[生]는 늙어 죽음에 반연하며,
과거와 미래의 세상에서도 역시 그와 같다”고 함과 같다.
마명 보살(馬鳴菩薩)이 말한 게송과 같다.
마치 현재의 불이 뜨겁다 하면
과거ㆍ미래의 불도 뜨거운 것처럼
현재의 5음(陰)이 괴로운 것이라면
과거ㆍ미래의 5음도 괴로우리라.
이와 같은 따위의 괴로움은 여러 큰 논사들도 역시 그렇게 말하였다.
또 과거와 미래의 세상 법을 아는 것을 비지라고 함도 역시 도리가 있다.
왜냐하면 수행하는 이는 과거와 미래와 현재의 고통에 대하여 싫증내어 여의기 때문이다.
“싫증내어 여의면 이 법 중에서 참된 지혜가 나는 것이라고 하며 현재의 행의 괴로움과 같이 과거와 미래의 모든 행 역시 그렇게 괴로우리라”고 한다.
지금 어떤 지혜로써 과거와 미래의 법을 안다는 것인가.
만일 그것이 법지라 하면 형상 세계와 무형 세계의 모든 행에도 또한 과거와 미래가 있는지라 그 가운데서의 알음도 법지라고 해야 된다.
그렇다면 오직 법지만이 있고 비지는 없게 된다.
만일 형상 세계와 무형 세계의 과거와 미래의 행중에는 특별한 지혜가 있다면 욕심 세계의 과거와 미래의 행중에도 다시 특별한 지혜가 있어야 한다.
이러한 이치 때문에 여러 논사들은 말하기를 “얻음과 아직 얻지 못함이 있기 때문에 차례대로 진리를 본다.
욕심 세계의 괴로움을 얻는다 하고 형상 세계의 괴로움을 아직 얻지 못한다”고 하였다.
그러므로 한꺼번에 나란히 알 수는 없는 것이다.
만일 아직 얻지 못한 괴로움을 비지로써 안다 하면 지금 욕심 세계의 가운데서도 아직 얻지 못한 괴로움 또한 비지로써 알아야 하리라.
【문】어떤 지혜로써 번뇌[結]를 끊는 도를 삼는가.
【답】법지와 비지만을 응용함은 방편도(方便道)의 안에 있다.
【문】어느 법지를 쓰는가.
【답】고법지(苦法智)와 멸법지(滅法智)를 쓴다.
왜냐하면 수행하는 이는 무상함과 괴로움을 관할 때에는 공과 나 없음을 본다.
그 때에는 모든 행의 사라짐을 증득하므로 그의 지혜는 모두가 이는 방편인 것이다.
【문】어떠한 괴로움을 관하여 사라지게 하는가.
【답】모든 느낌의 괴로움을 관한다.
이 중에서는 나라는 마음을 낼 수 있는지라 역시 이 안에서 사라짐도 본다.
“안에서 해탈하였기 때문에 모든 애욕이 다 사라져서 스스로 아라한이 된다”고 말하는 것과 같다.
【문】경전 중에서는 온갖 행의 끊어짐을 끊어짐의 성품[斷性]이라고 말하지 아니한가.
【답】이 수행하는 이는 안으로 적멸을 증득하였기 때문에 온갖 것을 싫증내어 여읜다.
또 수행하는 이는 반드시 안으로 적멸을 증득해야 하며,
그 밖의 것은 반드시 정하여 있지 아니한다.
【문】모든 진리 안에서 어떻게 지혜를 내는가.
【답】나기[生]의 괴로움 등을 알면 도니다.
【문】이것은 선정의 마음이 아니거늘 어떻게 지혜를 낼 수 있는가.
【답】그와 같은 관이 있으면 또한 쌓임의 무상함 따위의 허물을 보고서 괴롭고 나 없다는 생각을 냄이 있기 때문이다.
경전 중에서 “만일 법이 무상하다 하면 바로 그것이 나 없음이다”라고 함과 같다.
왜냐하면 눈 따위의 모든 감관은 생김도 있고 없어짐도 있기 때문이다.
만일 그것이 나라 하면 나는 곧 나고 죽고 하는 것이 된다.
그러므로 나가 아닌 줄 알 것이다.
이 눈 따위가 생길 때에는 어디로부터 온 곳이 없건만 작용하는 바가 있기 때문에 나라 하나 경전 중에서는 “짓는 이가 없다”고 설명한다.
그러므로 알아라.
만일 법이 무상하면 그것이 곧 나 없음이다.
이와 같이 수행하는 이는 무상함과 나 없음을 잘 닦기 때문에 몸과 마음은 고요히 사라져서 모든 작용이 생기면 그 괴로움을 다 깨달아서 괴로운 생각을 냄이 마치 가죽이 없는 소가 조금만 다쳐도 아픔을 깨닫는 것과 같다.
수행하는 이도 그와 같아서 나 없음의 생각 때문에 위와 같은 괴로운 생각을 이룬다.
어리석은 이는 나라는 생각 때문에 비록 큰 고통이 있을지라도 그 괴로움을 깨닫지 못한다.
그것을 고지(苦智)라 한다.
모든 행의 생기는 것을 보면 그것을 집지(集智)라 하며,
모든 행의 사라짐을 보며 그것을 멸지(滅智)라 하며 도의 처음부터 끝까지를 생각하면 그것을 도지(道智)라고 한다.
【문】무엇을 진지(盡智)라 하는가.
【답】온갖 모양을 다하기 때문에 진지라 한다.
왜냐하면 배우는 이에게는 모양이 끊어졌다가 도로 생기지만 이것은 마지막까지 끊어지기 때문에 진지라고 한다.
경전 중에서 “만일 허망한 생각을 바로 허망한 생각이라고만 알면,
모든 고통은 바로 다한다”고 함과 같다.
배우는 이의 지혜는 허망한 생각뿐이어서 이는 곧 나이다.
하지만 이 마음이 영영 끊어진 것을 진지라 한다.
경전 중에서 아라한이 부처님 앞에서 스스로 대답하였다.
“세존께서 말씀하신 모든 번뇌[結]는 저에게는 없사오며 저는 이 번뇌에 대하여 다시는 의심을 내지 않사오며,
저는 항상 한 마음으로 생각을 바른 행에다 껴잡아서 탐욕 등의 착하지 못한 짓은 마음에서 새지 않나이다”고 함과 같다.
이 안에서는 모양을 취하기 때문에 모든 번뇌가 나거니와 모든 모양이 끊어지기 때문에 모든 번뇌는 사라지는 것이다.
배우는 이는 모양에 대하여 모양 없음[無相]을 행하기 때문에 나라는 마음이 때로 일어나는 것이 마치 뗏목을 보고 그것이 사람이라 의심함과 같다.
그러므로 아라한이 홀로 의심이 없는 것이니,
마음이 항상 모양 없음 안에서 행해지기 때문에 먼저 생공(生空)으로써 다섯 가지 쌓임 중에서 신아(神我)를 보지 아니하며 뒤에는 법공(法空)으로써 물질의 성품으로부터 의심의 성품까지를 보지 아니한다.
그러므로 알아라.
온갖 모양이 다함을 진지라고 한다.
모든 모양이 생기지 않는 것의 앎을 무생지(無生智)라 한다.
배우는 이는 모양을 끊어서 다한 뒤에도 도로 생기지만 배울 것 없는 이는 모양이 다하면 다시는 생기지 아니한다.
만일 모든 모양이 다 사라져서 다시는 생기지 않게 되면 그때를 무생지라 한다.
【문】배우는 이도 진지와 무생지가 있음을 안다.
마치 “나는 세 가지 번뇌[結]가 다하여서 다시는 생기지 않는다”고 생각하는 것과 같다.
무엇 때문에 열 갈래[十分]의 성취를 말하지 않는가.
【답】배우는 이는 온갖 모양을 끊을 수 없기 때문에 진지와 무생지가 있음을 말하지 않는다.
마치 사람이 여러 군데가 곡 묶여 있으면 한 군데를 푼다 하더라도 자유를 얻었다고 말할 수 없음과 같다.
또는 이런 이치도 있다.
사리불은 급고독(給孤獨)씨의 열 갈래의 성취를 말하였다.
또 아라한은 자재한 힘을 얻었기 때문에 저절로 번뇌가 끊어져서 다시는 생기지 않는 줄을 알지만 배우는 이는 그렇지 못하다.
또 아라한은 배울 것 없는 도를 얻을 때에 스스로 온갖 남[生]이 다함을 아는지라 진지라 한다.
맑은 행[梵行]을 성취하였다 함은 모든 배우던 행을 버렸다는 것이요,
할 일[所作]을 마쳤다 함은 모든 해야 할 일을 모두 다하여 마쳤다는 것이니,
이 몸으로부터 다시는 상속이 없음을 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알아라.
아라한만이 온갖 할 일에서 자재함을 얻어서 진지와 무생지를 성취하여야 하며,
모든 배우는 이로써는 되지 아니한다.
마치 학질[瘧病]이 비록 발작하지 않는 때라하여도 아주 나았다고는 말할 수 없음과 같다.
경전 중에서 “온갖 처소의 기쁨을 여의고 온갖 처소의 근심을 없애고,
온갖 법의 사라짐을 깨달으면 항상 샘 없는 마음을 행하게 된다”고 함과 같다.
타심지(他心智)는 여섯 가지 신통 중에서 설명한 바와 같다.
다섯 가지 쌓임의 화합을 거짓으로 중생이라 하며,
이러한 것들 안의 지혜를 명자지(名字智)라 한다.
샘 없는 지혜를 진실한 지혜라 하고 이것은 샘 없음에 비슷한지라 지혜라는 이름을 붙였기 때문에 명자지라 한다.
【문】또 어떤 이는 말하기를 “모든 중생은 등지(等智)를 성취한다”고 하였다.
그 일은 어떠한가.
【답】만일 부처님의 제자로서 모든 법은 뭇 인연으로부터 생겼음을 알면 그 사람을 얻게 되거니와 그 밖의 중생으로서는 얻지 못하는 것이니,
지혜라는 이름이 붙었기 때문이다.
모든 중생들은 생각[想]만으로써 알 뿐이나,
만일 이 지혜를 얻으면 내범부(內凡夫)라 한다.
201) 사십사지품(四十四智品)
【문】경전 중에서 44종의 지혜를 말씀하셨다.
말하자면 늙어 죽음의 지혜[老死智]와 늙어 죽음의 쌓임의 지혜[老死集智]와 늙어 죽음의 사라짐의 지혜[老死滅智]와 늙어 죽음의 사라짐의 도의 지혜(老死滅道智)와 나기[生]와 존재[有]와 잡음[取]과 욕망[愛]과 느낌[受]과 닿임[觸]과 여섯 감관[六入]과 이름과 물질[名色]과 의식[識]과 지어감[行]에 대한 것도 마찬가지다.
무엇 때문에 이것을 말하는가.
【답】열반은 바로 참된 법보(法寶)이어서 갖가지 문으로써 들어간다.
다섯 가지 쌓임의 문으로 들어가는 수도 있고,
혹은 계ㆍ입(界入)의 인연과 모든 진리[諦]를 관(觀)과 같으며 그 사실을 말한다 함은 공에 통달함을 말한 것이다.
이 모든 사자가 아무리 여러 문으로부터 들어온다 하더라도 모두가 한 곳으로 당도한다.
그와 같아서 비록 음ㆍ계ㆍ입 등의 모든 문의 방편을 관한다손 쳐도 모두가 열반에 드는 것이다.
라후라의 말과 같다.
“혼자 으슥한 곳에서 법을 생각할 때는 이러한 법은 다 열반에 수순하고 지향하고 칭찬하는 것임을 안다”고 하였다.
또 부처님은 법을 칭찬하는 중에서 말씀하셨다.
“이 법은 모든 번뇌의 불을 끌 수 있기 때문에 사라짐[滅]이라 하며,
수행하는 이의 마음을 안온하게 하기 때문에 안은(安隱)이라고 하며,
수행하는 이로 하여금 정변지(正遍知)에 도달하게 하기 때문에 이름[至]이라 부른다”고 하셨다.
이런 이치들은 다 열반을 찬양하는 것이다.
또 맑은 행을 여덟 가지 거룩한 도[聖道]라 한다.
여덟 가지 거룩한 도 중에는 바른 지혜가 으뜸이며 이 바른 지혜의 결과는 이른바 열반이다.
또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가르침은 다 열반을 위한 것이다.
그러므로 알아라.
다섯 가지 쌓임 등의 문은 모두가 열반에 이른다.
【문】어떤 논사는 말하기를 “늙어 죽음의 지혜는 괴로움의 지혜다”고 하였다.
그 일은 어떠한가.
【답】아니다.
왜냐하면 그 가운데서는 괴로움의 행을 말하지 않았기 때문에 괴로움의 지혜는 아니다.
【문】그것은 무슨 지혜가 되는가.
【답】이것은 늙어 죽는 성품의 지혜[老死性智]라 한다.
【문】역시 “늙어 죽음의 쌓임과 늙어 죽음의 사라짐과 늙어 죽음의 사라짐의 도를 안다”고 하였다.
그러므로 이것은 고지인줄 알겠다.
【답】이것은 곧 인연문이요,
진제문(眞諦門)이 아니다.
그러므로 이 중에서는 괴로움의 행을 말하지 않아야 하고 쌓임[集] 등을 말해야 하리니,
서로가 붙따르기 때문이다.
【문】여기서는 무엇 때문에 맛[味]과 허물[過]가 벗어남[出] 등의 모든 지혜를 말하지 아니한가.
【답】이 이치를 다 포함하였다.
다만 경(經)을 집결한 이가 생략하여 설명하지 않았을 뿐이다.
202)칠십칠지품(七十七智品)
【문】전경 중에서 77종의 지혜를 말하였다.
이를테면 나기[生]는 늙어 죽음에 반연하며,
나기를 여의지 않는지라 늙어 죽음이 있다.
과거와 미래의 세상에서도 역시 그와 같다.
이것은 법주지(法住智)로서 “덧없고 함이 있는 것의 지음과 일어남은 뭇 인연으로부터 생긴다”고 관하며 끝나는 모습과 무너지는 모습과 여의는 모습과 사라지는 모습[滅相]도 역시 그렇게 관하며,
무명이 지어감에 반연한다는 것까지도 그와 같이 한다.
여기서는 무엇 때문에 늙어 죽음의 성품과 사라짐의 도 등을 말하지 않는가.
【답】영리한 지혜 지닌 이를 위하여 그와 같이 설명하여 그 문만 열어 놓았음을 알 수 있다.
그 밖의 것도 역시 그와 같다.
또 외도는 흙이 인연 중에서 “세간 만물은 세간의 성품을 의지한다”고 하는 등의 그릇된 말을 하기 때문에 부처님은 이것에 대하여 인연만을 말씀하신 것이다.
【문】이미 “나기는 늙어 죽음에 반연한다”고 하였거늘 무엇 때문에 다시 “여의지 아니한다”고 말하는가.
【답】반드시 결정하기 위하여서이다.
모든 법 안에는 일정하지 아니한 인(因)이 있어서 마치 보시는 복의 인이되는 것 같고,
또한 계행을 지녀도 복을 얻는지라 “계행을 지니면 천상에 가서 나게 된다”고 말하는 것과 같다.
혹은 어떤 이는 생각하기를 “늙어 죽음은 나기를 원인하기도 하고 혹은 나기를 원인하지 않기도 한다”고 한다.
그러므로 반드시 일정한 설명이어야 한다.
【문】무엇 때문에 과거와 미래의 세상에 대하여도 다시 일정한 설명이 필요한 것인가.
【답】현재는 과거의 세상과는 혹은 다른 상황이 있기도 한 것이니,
과거의 중생은 수명이 한량없었고 세력도 모든 하늘과 같은 것 따위이다.
사람들은 수명들이 다른지라 “늙어 죽음의 인연도 역시 달라야 할 것이라”고 말할까 두렵기 때문에 반드시 일정하게 설명하여야 하며,
미래에 대하여도 또한 마찬가지다.
이 여섯 가지로 법주지라고 하고 그 나머지를 열반지라고 하며 늙어 죽음으로 하여금 계속되게 하기 때문에 무상함과 함이 있는 법의 짓고 일어남은 뭇 인연으로부터 생긴다고 말한다.
끝나는 모습과 무너지는 모습은 바로 무상함의 행이요,
여의는 모습은 바로 괴로움의 행이요 사라지는 모습은 바로 공과 나 없음의 행이다.
왜냐하면 이 중에서 물질의 성품이 사라지고 느낌과 생각과 지어감과 의식의 성품이 사라지면 이것을 세 가지의 관(觀)의 이치라고 하기 때문이다.
경전 중에서 “비구에게 일곱 군데의 방편과 세 가지 관의 이치가 있으면 빨리 셈이 다함을 얻느니라”고 함과 같다.
모두 이것을 열반지라고 한다.
이와 같은 따위의 인연지(因緣智)는 백 가지 천 가지로 한량없이 있다.
이른바 눈으로 아는 지혜 등이어서 경전 중의 설명과 같다.
“눈[眼]은 업에 반연하고 업은 욕망에 반연하고 욕망은 무명에 반연하고 무명은 삿된 생각[邪念]에 반연하고 삿된 생각은 눈과 물질에 반연하고 모든 번뇌는 삿된 생각에 반연하고 모든 음식은 욕망에 반연하고 다섯 가지 욕심은 단식(揣食) 등에 반연하고 지옥의 단명(短命)은 살생 등에 반연하고 지금의 고통이거나 먼저의 고통이거나 간에 다 허망한 생각[妄想]에 반연하고 허망한 생각은 몸과 마음의 미워함과 사랑함에 반연하고 미워함과 사랑함은 탐욕에 반연하고 탐욕은 삿된 생각[思惟]에 반연한다” 이와 같은 등의 모든 인연지는 한량없고 그지없는 것이니,
그런 줄 알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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