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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기2564-04-14_아차말보살경_001 본문

과거조각글/불기2564(2020)

불기2564-04-14_아차말보살경_001

진리와 가치를 고루고루 2020. 4. 14. 02:53



®

『아차말보살경』
K0070
T0403

아차말보살

● 한글대장경 해당부분 열람I
● 한글대장경 해당부분 열람II
○ 통합대장경 사이트

○ 해제[있는경우]
● TTS 음성듣기 안내
※ 이하 부분은 위 대장경 부분에 대해
참조자료를 붙여 자유롭게 연구하는 내용을 적는 공간입니다.
대장경 열람은 위 부분을 참조해주십시오.



○ [pt op tr] 아차말보살경_K0070_T0403 핵심요약





♣0070-001♧
『아차말보살경』




아차말보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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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영리-동일조건변경허락원문번역문

아차말보살경




해제보기

 

아차말보살경(阿差末菩薩經) 제1권

 

서진(西晋) 월지국(月氏國) 삼장 축법호(竺法護) 한역

이진영 번역

 

이와 같이 들었다.

 

어느 때 부처님께서는 여래가 노니시는 보엄정(寶嚴淨)이라는 훌륭한 도량에 계셨다. 

그곳은 바로 정각(正覺)이 건립(建立)하신 도량으로서 큰 덕을 장엄하고 신묘한 업을 많이 쌓아 성불의 기별을 받은 보살들이 머무는 궁전이었다.

 

부처님께서는 그곳에서 한량없는 여래의 변화를 드러내 보이시고, 

가없는 지혜에 들어 수승한 경지에 노니셨으며, 

환희심으로 평등한 이치를 판명하시고, 

성스러운 행을 닦아 그 미래세를 보이셨으니, 

가없는 공덕과 명성으로 그 끝이 없었다.

 

또한 바른 깨달음으로 불도를 성취하시고, 

법륜(法輪)을 굴리시어 무수한 수행자들을 교화하시되 모든 법에 항상 자재롭게 하셨으며, 

중생들의 근기를 알고 그들을 깨우쳐서 피안(彼岸)에 이르게끔 제도하시고, 

때때로 방편을 다하여 온갖 장애를 제거하시는 등 불사(佛事)를 행함에 조금도 주저함이 없으셨다.

 

그리고 큰 비구 대중 6백만 명과 함께 계시면서 마음을 평온하게 하여 번뇌와 은애(恩愛)의 뭇 장애를 소멸해 주시니, 

그들 모두가 여래의 법왕자(法王子)로서 심오한 법을 닦아 바른 법이 자라고
위의와 예절이 빛났으며 대중의 복이 되어 부처님께 돌아왔다.

 

다시 그 수를 헤아릴 수 없는 무수한 보살들과 함께 계시면서
일체 큰 성인의 신통과 걸림 없는 다라니[總持]의 변재(辯才)로써 말할 수 없는 신묘한 지혜를 나타내 보이시니, 

그들 모두가 한 찰나에 시방의 불국토를 다니며
한량없는 여래를 공양하는 동시에 들은 법을 받들어 부지런히 선포하고, 

중생들을 깨우치되 방편의 지혜를 널리 갖추어서 가없는 무개(無蓋) 법문에 들어 그들로 하여금
다 망상을 벗어나 모든 것에 순응하게 하고 일체 지혜의 신통한 경지에 친근하게 하였다.

 

그들의 명호는 천명(天明)보살ㆍ선전(選戰)보살ㆍ조장(照藏)보살ㆍ제만(際慢)보살ㆍ
용보(勇步)보살ㆍ안근(眼根)보살ㆍ이언(離言)보살ㆍ제명(除冥)보살 등으로 한없이 부사의(不思議)한 공덕을 갖춘 이들이었다.

 

그때 세존께서는 보살들의 원하는 바를 성취한다는 무음개(無陰蓋) 법문에 드시어
장엄 미묘한 도량을 더욱 청정케 하시고 정각의 두려움 없는 법력과 성스러운 지혜를 갖추어서 모든 법에 자재로 노니셨다.

 

이어 다라니의 인(印)과 변재의 도문(道門)에 드시어 큰 신통으로써 지혜에 이르시고 널리 분별하여 밝히셨다. 

그리고 물러남이 없는 법륜을 굴려서 모든 승(乘)을 평등하게 이끄시고, 

무너짐 없는 법계(法界)에 통달하여서 중생들의 근성을 깨우치되 신속하고 확실하게 일체의 법을 해결해 주셨다.

 

또 마군을 항복 받아서 그들을 다 법에 수순하게 교화하되 번뇌에 얽매이고 미혹된 62종의 삿된 소견을 제거하셨으며, 

걸림 없는 지혜를 가없이 밝히시고 모든 법을 권조(勸助)하여서 드러내 보이셨다.

 

또 부처님의 평등한 도(道)의 지혜에 드시어 어떤 것을 바라거나 집착하는 대상 없이 모든 법을 진리 그대로 연설하시고, 

유상(有想)과 무상(無想)을 한가지로 삼아 심오한 12연기(緣起)를 밝히셨다. 

또한 한량없는 공덕을 많이 쌓아 몸과 입과 뜻의 행을 장엄하시고 그 몸이 다함 없음을 알아 4성제(聖諦)를 닦으셨다.

 

또 성문(聲聞)ㆍ연각(緣覺)의 몸과 마음을 고요히 하여 일체지(一切智)에 이르도록 가르치시고, 

아유안(阿惟顔:

一生補處)으로 하여금 대승을 배우게 하여 일체법에 들어 홀로 걸으면서 여래의 공덕을 찬탄하게 하셨다. 

때때로 이들을 더욱 동정 어린 가르침으로 가르쳐서 그 법장(法藏)을 드러나게 하시고, 

미세한 어둠조차도 제거하여 밝히셨으며 세존의 교법을 시방에 널리 유포하게 하셨다.

 

이때 동방으로부터 홀연히 큰 황금빛의 광명이 나타났다. 

그 광명은 이 보엄정(寶嚴淨) 도량과 삼천대천(三千大千)세계를 두루 비추어서 온 국토를 다 덮었으므로
일월천(日月天)ㆍ제석천(帝釋天)ㆍ범천(梵天)ㆍ사천왕(四天王)의 모든 위요(威曜)가 또한 나타나지 못하였고, 

그 밖의 신묘한 천인들과 천룡(天龍)ㆍ귀신(鬼神)ㆍ건답화(揵沓★)ㆍ아수륜(阿須倫)ㆍ
가유라(迦留羅)ㆍ진타라(眞陀羅)ㆍ마후륵(摩睺勒)의 광명도 다 숨어버리고, 

명월주(明月珠) 등 갖가지 보배 구슬과 큰 횃불 따위도 그 빛이 다 소멸되었다.

 

오직 여래(如來)ㆍ지진(至眞)의 끝없는 큰 광명과 아라한과 보살들의 몸으로부터 나타나는 광명만이 찬란하여서 다른 일체의 광명은 다 그 자취를 감추었다. 

이에 이 삼천대천세계의 온 국토가 그윽해져서 일월광명이 비록 광대하여도 이 광명의 거룩한 위신(威神)에는 미칠 수 없었다. 

이것은 온 마을을 다 광명으로 뒤덮었다.

 

수목(樹木)과 장벽(牆壁)ㆍ수미대산(須彌大山)ㆍ설산(雪山)ㆍ흑산(黑山)ㆍ목린산(目隣山)ㆍ대목린산(大目隣山)ㆍ철위산(鐵圍山)도 걸림 없이 비추었으며, 

삼천대천세계를 통과하여 지옥과 천상에까지 이르렀다. 

지옥ㆍ아귀ㆍ축생들도 다 이 광명에 힘입어 뭇 고통을 제거함과 동시에 몸과 마음이 안락하여 서로가 좋은 때를 만난 것을 경하(慶賀)하였다.

 

부처님께서 계시는 왼편 보엄정(寶嚴淨) 도량에는 60억 해(★)에 달하는 7보 연꽃이 홀연히 피어나 좋은 향기가 널리 퍼졌는데, 

향기를 맡은 자 가운데 환희심을 내지 않는 자가 없었다. 

부드러운 연꽃은 마치 수레바퀴처럼 컸으며, 

무수히 빛나는 연잎은 백천 가지 보배로 바르고 둥근 형태를 이루고 있었고, 

연꽃 위는 비단 휘장과 보배 일산으로 장식되어 있었다.

 

그 연꽃에서는 가장 아름답고 좋은 향기가 나서 삼천대천세계에 가득 퍼졌다. 

삼천대천 국토의 천인과 인민들이 지닌 모든 향기는 이 꽃의 향기에 부딪쳐서 다 소멸되었고, 

천상과 세간의 온갖 중생들은 이 꽃의 향기로 말미암아 다함께 법향(法香)을 즐겨할 뿐 애욕을 좋아하지 않았다.

 

그때에 현자 사리불(舍利弗)이 이처럼 청정한 연꽃의 끝없는 광명을 보고는 한량없이 놀랍고 기뻐서 곧 자리에서 일어나 부처님 처소에 나아가 꿇어앉아 합장하고 아뢰었다.

“세존이시여, 

지금 본 것은 어떠한 서응(瑞應)입니까? 

이러한 대광명의 나타남과 헤아릴 수 없는 청정한 연꽃이야말로 과거에 보지도 듣지도 못했던 것입니다.”

 

부처님께서는 사리불에게 대답하셨다.

“이것은 아차말(阿差末)이라는 보살이 동방으로부터 그의 권속 60억 보살들에게 앞뒤로 둘러싸여 이 땅에 오려고 하기 때문에 미리 이러한 서응을 나타내는 것이니라.”

 

부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신 지 오래지 않아 과연 아차말보살이 몸을 나타내어 그의 권속 60억 보살들과 함께 나아왔다. 

곧 그는 보살의 가없는 위신(威神)으로써 큰 신통을 나타내고 보살[開士]의 변화의 힘으로써 온 불국토를 진동시켰으며, 

큰 광명을 비추는 동시에 갖가지 향기로운 꽃을 빗물처럼 뿌리고 다시 백천의 음악을 울리면서 드넓은 보엄정 도량에 이르렀다.

 

그리고는 부처님의 처소에 가까이 나아가되, 

허공에 머무르면서도 마치 땅에 서 있는 것처럼 두 손을 합장하고서
한결같은 음성으로 온 삼천대천세계에 두루 들리게끔 게송을 읊어 부처님의 공덕을 찬탄하였다.

 

성웅(聖雄)께서는 탐욕을 버리셨고

어떤 더러움 없이 가장 깨끗하시며

청정한 눈의 지혜 광명으로

저 어둠을 다 제거하셨고

 

3구(垢)1)와 수고로움을 끊고

갖가지 허물을 없애시고

모든 번뇌를 영원히 끊었기에

지금 이렇게 부처님께 예배합니다.

 

어리석음의 그물을

헐고 찢어버리셨으며

성주(聖主)의 10력(力)을 갖추어

외도들을 다 항복 받으셨고

 

대중들로부터 벗어나

몸ㆍ입ㆍ뜻에 방일함을 버리셨고

마치 사자처럼 홀로 걸어

이르는 곳마다 두려움이 없으시네.

 

더러움을 여윈 광명은

비추지 않는 데가 없고

일체 중생을 널리 생각하시어

고난한 중생들을 제도해 주시고

 

무명(無明)에 덮인 중생들의

모든 어둠을 제거하시니

그 광명의 눈부신 빛은

구름에 떠오른 태양과 같네.

 

불쌍한 사람을 보면

곧 자비심을 일으켜서

생ㆍ노ㆍ병ㆍ사를 제거해 주시고

그들을 막힘 없이 옹호해 주시며

 

길잡이로서 중생을 인도하시되

인자한 마음으로 가여워 하시고

그 행업(行業)의 닦음도

온갖 질병을 치료하는 의사와 같네.

 

존사리(尊舍利)께서는 중생을 제어하여

무명의 어리석음을 사라지게 하시며

사람들의 근심을 듣고 나서는

선사(船師)처럼 제도해 주시고

 

무수히 일어나는 망상과

번뇌를 사라지게 하시며

어떠한 처소에 머무시더라도

연꽃처럼 아무런 집착이 없네.

 

일체의 법을 깨달아

청정함과 고요함 자체이시고

입으로 연설(演說)하신 말씀은

다 인연(因緣) 따라 일어나고

 

근원도 없고 지음도 없이

닦아서 이에 이르셨으니

세상 사람들을 가엽게 여겨

그들에게 가르침을 내리시네.

 

귀명(歸命)함이 허공과 같아

일체를 이와 같이 보시고

세간의 법에 머무르시되

큰산과 같이 움직임이 없으시며

 

중생들은 무지하기에

행을 닦아 그 업(業)을 구하지 않으니

부처님께서는 어떤 곳에 머무르시더라도

생사의 고난에서 이들을 제도하시네.

 

그 선명하신 도안(道眼)

푸른 연꽃 같기도 하고

그 거룩하신 위신(威神)

둥근 달 같기도 하고

 

일체의 세간 사람들

모두 그 공덕을 찬탄하여

번뇌를 버리고 속세를 싫어하니

저희들 또한 부처님께 예배합니다.

 

이에 아차말보살이 60억 보살과 함께 이 게송을 읊어 찬탄한 다음, 

허공으로부터 내려와 부처님께 엎드려 예배하고는 일곱 번을 돈 후 연화대에 물러나 앉았다.

 

그때에 사리불이 부처님의 위신(威神)을 받들어 앞으로 나와 아뢰었다.

“세존이시여, 

아차말보살은 어디에서 왔으며, 

그곳에 계시는 부처님의 명호(名號)와 그 국토는 어떤 것이고, 

그 세계는 여기에서 얼마나 먼 세계입니까?”

 

부처님께서 대답하셨다.

“네가 이 사실을 직접 아차말보살에게 물어 본다면 곧 해답을 얻게 되리라.”

 

그러자 사리불이 아차말보살에게 물었다.

“어진 족성자(族姓子)여, 

그대는 얼마나 먼 곳에서 여기에 왔으며, 

그곳에 계시는 부처님의 명호는 무엇이고 또 그 세계는 어떠한 세계입니까?”

 

아차말보살이 사리불에게 대답하였다.

“장로[耆年]께서는 아직도 그 간다는 생각과 온다는 생각을 갖고 계십니까?”

“족성자여, 

나는 그러한 생각을 이미 끊었습니다.”

 

“사리불이여, 

그러한 생각을 끊었다면 의혹을 품지 않으실 터인데, 

어찌하여 ‘어느 곳으로부터 왔느냐’고 물으시는 것입니까?

 

사리불이여, 

오는 것이 있게 되면 만남이 있게 되지만 가는 것이 있게 되면 이별이 있게 되니, 

만남도 이별도 없어야만 그 가고 오는 것이 없게 되며, 

가거나 오는 것이 없어야만 성스러운 도(道)의 행(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사리불이여, 

다시 말하면 오는 것이 있다는 것은 바로 상(相)을 만드는 것이고, 

만약 가는 것이 있다면 죄(罪)나 복(福)의 상을 다하는 것입니다. 

죄나 복이 바로 상임을 헤아려서 만약 죄나 복이라는 갖가지 상을 다하면 곧 상이 없는 것이니, 

그 상이 없는 것이야말로 성스러운 도에 나아가는 것입니다.

 

다시 사리불이여, 

오는 것이 있다는 것은 원(願)의 상(相)을 말하는 것입니다. 

만약 가는 것이 있어서 이 원을 여의면 저 원(願)의 상도 가는 것의 상을 여의는 것이니, 

이것이 곧 성스러운 도(道)의 상입니다.

 

다시 사리불이여, 

오는 것이 있다는 것은 생기(生起)의 상(相)이 있게 되는 것이고, 

만약 가는 것이 있다면 곧 소멸의 상이 있게 되는 것이니, 

생기와 가는 것의 상을 제거하면 생함도 멸함도 없습니다. 

가는 것이 없는 것이 곧 성스러운 도의 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다시 사리불이여, 

오는 것이 있다는 것은 훈회(訓誨)의 문(門)이 있게 되는 것이고, 

만약 가는 것이 있다면 교수(敎授)의 문이 있게 되므로 훈회도 없고 교수도 없어야만
곧 성스러운 도에 나아간다고 할 수 있습니다.

 

다시 사리불이여, 

오거나 가는 것이 있게 되면 곧 속된 것에 떨어지게 되니, 

오는 것도 없고 가는 것도 없어야만 비로소 도(道)라고 일컬을 수 있습니다.

 

다시 사리불이여, 

오거나 가는 것을 없앰으로써 미래(未來)와 모든 경계를 제거할 수 있으니, 

이것이 성스러운 도에 나아가는 것입니다.

 

다시 사리불이여, 

오는 것이 있다는 것은 현재(現在)의 상이 있게 되는 것이고, 

만약 가는 것이 있게 되면 이 상을 여의는 것이니, 

현재에 이르는 것과 가는 것의 상을 여의면 곧 성스러운 도에 나아간다고 할 수 있습니다.

 

다시 사리불이여, 

오는 것이 있다는 것은 인과[報應]의 상(相)을 맺는 것이고, 

만약 가는 것이 있게 되면 인과의 상을 다하는 것입니다. 

인과가 없어야만 생함도 멸함도 없게 되니, 

상이 없음으로 말미암아 성스러운 도에 나아가는 것입니다.

 

다시 사리불이여, 

오는 것이 있다는 것은 속된 인연에 화합하는 가장 빠른 길이고, 

만약 가는 것이 있게 되면 이른바 음성과 문자에 이르는 가장 빠른 길이 됩니다. 

가령 음성과 문자를 비롯한 모든 가장 빠른 길을 끊으면 곧 성스러운 도에 나아갈 수 있습니다.”

 

그때에 사리불이 또 아차말보살에게 물었다.

“족성자여, 

어진 이께서 훌륭한 변재(辯才)를 지니었기에 이제 다시 질문하려고 하니, 

왜냐 하면 전에 들어보지 못한 가르침을 들으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족성자여, 

마치 관문(關門)을 맡아 지키는 자가 그 관문을 드나들며 오가는 사람들에 대해 어떤 귀중한 화물(貨物)을 들여오는지, 

또는 짐 없이 다니는지를 조사하여서 세금을 지우고자 함에 ‘당신이 왜 때마다 세금을 거두는 것입니까?’라고 따지기 어려운 것과 같습니다.

 

족성자여, 

나도 그러한 무리들과 같은 성문으로서 다른 사람의 말에 의해 해탈을 얻기도 하고 인연 있는 자와 항상 법에 대해 묻곤 합니다. 

모든 정사(正士) 등이 이를 옹호함으로써 대승(大乘)을 북돋아 이 가운데에서 성문ㆍ연각을 내기도 합니다. 

이 때문에 훌륭하신 족성자께선 어디에서 오셨는지, 

그 처소가 여기에서 얼마나 멀고 가까운지, 

그리고 그 국토에 계시는 여래의 명호에 대해 다 분별하여 말씀하셔야 합니다.”

 

아차말보살이 대답하였다.

“사리불이여, 

여래께서 앞에 계시니, 

이것을 물으신다면 곧 해답을 얻어 이 모임의 대중들이 다 의심을 해결하게 될 것입니다.”

 

그때에 사리불이 부처님 앞에 나아가 아뢰었다.

“세존이여, 

아차말보살은 어디에서 왔으며, 

그 처소는 여기에서 얼마나 멀고 가까우며, 

그 국토에 계시는 여래의 명호는 무엇이고 또한 그 국토는 어떠한 종류의 것입니까? 

또 무슨 인연으로 그 명호를 듣기만 해도 무수한 사람들이 다 도(道)의 마음을 내어 큰 공덕의 갑옷을 입게 되는 것입니까?”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사리불아, 

자세히 듣고 잘 생각하여라. 

그 세계의 공덕과 여래의 명호를 듣는 자는 누구라도 의심하지 말고 다 함께 믿어야 하니, 

여래(如來)ㆍ지진(至眞)께서는 아무런 걸림이 없으시고 감추는 것도 없으시며 모든 것을 다 민첩하게 통달하셨느니라.”

이에 사리불을 비롯한 대중들이 함께 부처님께 아뢰었다.

“원컨대, 

분부대로 받들어 간직하겠습니다.”

 

부처님께서 계속 말씀하셨다.

“사리불아, 

여기에서 동방으로 10항하사[江沙] 세계의 티끌 같은 국토를 지나면 아니미사(阿尼彌沙)라는 세계가 있고 삼만발타(三曼跋陀) 여래(如來)ㆍ지진(至眞)ㆍ등정각(等正覺)이라는 부처님께서 계시어 현재에도 설법하시느니라.아니미사는 진(晋)나라 말로 불현(佛眴)이고 삼만발타(三曼跋陀)는 보현(普賢)이다.

 

그 불현(不眴)세계에서 성문ㆍ연각은 이름조차 들을 수 없고 큰 성인이신 세존과 순수한 보살들만이 이미 예부터 모든 수행을 갖추어 왔느니라. 

보시를 베푸는 것과 그 뜻을 다스려서 성스러운 경지에 이르고, 

계율과 널리 아는 지혜로움으로 적정에 이르되 방일하지 않으며, 

구족한 공덕으로 고요함을 이루고, 

인욕의 마음으로써 다른 사람을 해치지 않으며, 

굳은 정진으로 많은 공덕을 쌓고 항상 스스로를 극복하며, 

고요한 선정으로 해탈문에 들어 바른 깨달음을 이루느니라.

 

또 신통의 지혜로 즐거워하고 그 끝없는 지혜의 광명으로 모든 경전의 이치를 다 분별하여 널리 선포하느니라. 

나아가서는 허공과 같이 평등한 자비심으로 중생들의 성품을 두루 알아 교화하되, 

기쁘게 해야 할 자에겐 감로(甘露)를 내려서 그 도법(道法)의 맛으로 일체의 분노와 원한을 제거하고, 

옹호해야 할 자에겐 성문ㆍ연각의 2승(乘)에서 벗어나게 할 뿐만 아니라 공(空)하고 상(想)도 없고 원(願)도 없는 해탈의 법으로써 뭇 번뇌와 악마와 더러움과 위태로운 환난에서 다 구제해 주느니라.

 

또 중생들의 근본이 12연기(緣起)에 이르는 것임을 분명히 알고 그 질병을 관찰하여 병에 따라 약을 주며, 

언제나 평등하고도 한결같은 마음이어서 마치 땅ㆍ물ㆍ불ㆍ바람처럼 애증이 없느니라.

 

또 일체의 삿된 무리들과 이학(異學)을 굴복시키되, 

마치 용맹스러운 장수가 대군을 통솔하여 강한 적군을 무찌르는 것처럼 그 갖가지 법의 깃발을 굳게 세우느니라. 

또 바른 부처님의 법을 깊이 깨달아서 두려움 없는 10력(力)으로 두 경계를 벗어나니, 

인연에 따르더라도 업(業)이 없고 모든 견해(見解)를 넘어 중도(中道)의 행에 이르느니라.

 

또 나[我]라든가 사람이라든가 수명이라든가 유위(有爲)라든가 무위(無爲)라는 생각을 다 버리고, 

참된 것을 거짓되게 하는 전도된 견해를 바르게 하느니라. 

또 모든 경전의 법문을 여래 법왕의 법인(法印)으로 증명하여서 그 연설하는 변재가 걸림 없이 무수한 백천 억 겁에 널리 퍼지게 하느니라.

 

또 신족(神足)의 변화로써 한량없는 불국토를 처음부터 끝까지 거닐고, 

홀연히 일체의 두려움과 성냄과 교만함과 허황됨을 깨끗이 다 제거하며, 

그 음성은 마치 사자의 부르짖음과 같고 우레 소리와도 같으며, 

중생들의 상ㆍ중ㆍ하의 행을 잘 관찰하고 굳건한 마음으로 친한 벗을 끝까지 열반의 경지에 들어가게 하느니라.

 

또 그 지혜는 법의 구름을 감응케 하여 법의 우레를 일으키고 감로수(甘露水)를 내리게 하며, 

그 성품은 청명하여 명월주(明月珠)와 같이 안팎이 서로 통하느니라. 

또 밝은 광명과 뛰어난 상호를 갖추며, 

계율로써 스스로를 장엄하고 백천 가지 공덕으로써 몸을 장식하며, 

모든 부처님의 법으로써 아라한의 위(位)와 일생보처(一生補處)2)에 이르는 행을 닦아 중생들의 믿음을 돈독하게 하고 교화하여 해탈하게 하니, 

그 뜻한 바에 따라 얻게 하느니라.

 

또 다라니를 깨쳐서 사자좌(師子座)의 장엄청정한 도량을 이루고 밝은 지혜로 4무소외(無所畏)3)에 드느니라. 

또 모든 부처님께서 이루고자 하시는 바른 깨달음의 체(體)를 다 나타내 보이고 취함과 버림ㆍ나아감과 물러남에 있어 그 마음이 용맹하고 자재로와 더 없는 보배 법륜을 굴리느니라.”

 

그때에 모임의 대중들은 모든 보살들의 수행의 공덕을 듣고는 뛸 듯이 기뻐서 환희심을 억누를 수 없었다. 

그래서 그들은 곧 천상의 푸르고 붉고 흰 연꽃을 꺾어 다 함께 부처님께 공양하면서 아차말보살을 비롯한 여러 보살들에게도 뿌리고 음성을 높여서 다음과 같이 그 위덕(威德)을 찬탄하였다.

 

“우리들은 다행스럽게도 복되고 경사스러운 인연이 있어서 이제 이러한 정사(正士)들을 만나 귀명하고 공양하게 되었도다. 

그 어떤 중생이라도 이 보살들의 거룩한 명칭과 한량없는 공덕을 듣게 된다면, 

그는 이로 말미암아 보살의 큰마음을 일으키게 되리라.”

이때 모임에 있던 3만 6천여 명의 사람들이 다 더 없이 바르고 참된 도의 마음을 내었다.

 

부처님께서 다시 사리불에게 말씀하셨다.

“저 아니미사 국토에는 지옥ㆍ아귀ㆍ축생 따위의 갖가지 악함과 괴로움이 없는가 하면 계율을 받드는 자도 계율을 범하는 자도 없으며, 

여인을 보거나 여인의 이름조차 들을 수 없으니, 

왜냐 하면 다 연꽃으로부터 화생(化生)하기 때문이니라. 

또 간탐과 음욕과 성냄과 어리석음을 벗어나 3독(毒)이란 이름조차 없으므로 그 밖의 다른 것은 말할 것도 없느니라.

 

그 국토의 인민들은 상ㆍ중ㆍ하의 좋거나 나쁜 차별이 없이 모두가 평등하며 나[我]와 나 아닌 것이 없고 음식을 먹지도 않으니, 

왜냐 하면 법에 대해 기뻐하는 것을 음식으로 삼고 이치를 푸는 것을 마실 것으로 삼아 항상 스스로가 넉넉하여서 목마름이나 굶주림을 생각하지 않기 때문이며, 

나와 남이 없고 온갖 환란과 걱정이 없기 때문이니라.

 

또 그 국토는 매우 광대하여 하나의 해와 달이 60억에 달하는 사방의 지역을 비추니, 

여러 보살들이 본래 원하는 바가 그러하기 때문이니라.

 

이에 하나의 해와 달이 있고 또한 온 땅은 평평하여서 언덕이나 높거나 낮거나 기울어진 곳이 없으며, 

모두 검푸른 유리(琉璃)의 뭇 보배로 장식되어 있느니라. 

또 그 땅은 하늘 비단처럼 부드럽고 열여덟 가지 광채로 장엄 되어 있으며, 

줄지어 늘어서 있는 보배나무에는 여름이나 겨울에도 항상 꽃과 과일이 무성하게 맺히고, 

모래ㆍ자갈ㆍ돌 따위의 꺼리는 것들이 없느니라. 

또 흑산(黑山)ㆍ설산(雪山)과 같은 그 국토의 뭇 산들은 다 갖가지 보배로 이루어져 마치 수미산(須彌山)과 같으니라.

 

그리고 그 국토의 인민들은 천상ㆍ천하가 다름없이 다 세간의 업을 벗어나 여래의 법을 업으로 삼기에 세간의 왕이 없느니라. 

오직 여래(如來)ㆍ보현(普賢)ㆍ지진(至眞)을 법왕으로 삼느니라.

 

또 그 국토의 법은 문자(文字)와 언사(言辭)를 쓰지 않으며, 

보살들이 경전을 배우기 위해 부처님의 처소에 나아갈 때에도 싫어하거나 게을리 함이 없으니, 

모두가 기쁜 마음으로 응하여 부처의 마음을 얻고 무생법인(無生法忍)4)에 이르기 때문이니라. 

이러한 연유로 그 국토의 명호(名號)를 불현(不眴)이라고 하는 것이다.

 

부처의 마음을 얻는 것이란, 

색상(色相)을 보고 얻는 것도 아니고 본래의 원력으로 얻는 것도 아니며 그렇게 되기를 희망하여 얻는 것도 아니니라. 

왜냐 하면 그 마음을 얻는 것 자체가 과거와 미래를 생각하는 것도 아니고 현재를 생각하는 것도 아니며 5음(陰)과 6쇠(衰)를 따르는 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5음이란 무엇인가? 

5음이란 바로 6근(根)으로부터 일어나는 생각을 말하는 것이고 6근이란 눈ㆍ귀ㆍ코ㆍ입ㆍ몸ㆍ뜻의 분별을 말하는 것이며, 

6쇠란 물질ㆍ소리ㆍ냄새ㆍ맛ㆍ감촉ㆍ법을 말하는 것이니라.

 

그러므로 부처의 마음을 얻는 것이란, 

보거나 듣거나 생각하는 등의 갖가지 업(業)으로 이루어지는 것도 아니요, 

어떤 인위적인 것이나 생멸(生滅)로 이루어지는 것도 아니요, 

비교함도 없고 삿됨도 없고 지음도 없고 희망하는 것도 없고 옳다거나 옳지 않다는 것으로 이루어지는 것도 아니요, 

하나ㆍ둘ㆍ셋의 수효를 따라 이루어지는 것도 아니요,

 

인식에 의해 이루어지는 것도 아니요, 

안팎의 뭇 망령된 생각과 옳고 그른 일을 깨달아 이루어지는 것도 아니요, 

물질[色]ㆍ느낌[痛]ㆍ생각[想]ㆍ지어감[行]ㆍ의식[識]으로 말미암아 이루어지는 것도 아니요,

 

계율ㆍ선정ㆍ지혜와 해탈지견(解脫知見)과 10력(力)과 4무소외(無所畏)와 그 모든 부처님의 법으로 이루어지는 것도 아니요, 

어떤 뜻을 생각함으로써 알게 되는 것도 아니요, 

보고 듣는 것으로 이루어지는 것도 아니요,

 

나라는 생각과 나라는 생각이 없음으로 이루어지는 것도 아니요, 

5음과 6쇠의 생멸로 이루어지는 것도 아니요, 

머물거나 머물지 않음으로 이루어지는 것도 아니요, 

물질ㆍ느낌ㆍ생각ㆍ지어감ㆍ의식이나 눈ㆍ귀ㆍ코ㆍ입ㆍ몸ㆍ뜻의 물질ㆍ소리ㆍ냄새ㆍ맛ㆍ감촉ㆍ법으로도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니라.

 

또 그 처소를 얻을 수 없으니, 

눈으로 보아서 뭇 형상을 알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사유함으로써 알 수 없는 것을 알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생기하는 것도 멸하는 것도 없어 그 끝도 시작도 없기 때문이니라.

 

또 머무는 것은 인연의 작용에 따르는 것이어서 온갖 번뇌의 더러움을 없애야 하는 것이니라. 

왜냐 하면 애욕이 있기 때문에 애욕을 없애야 하고 애욕을 없애기 위해서는 애욕이 일어나는 인연과 나라는 생각을 끊어야 하며, 

그렇게 해야만 모든 것이 청정해져서 늘지도 줄지도 않게 되기 때문이니라.

 

또 안락하다거나 고통스럽다고 헤아리게 되면 애욕에서 벗어나지 못함을 생각하지 못하게 되고, 

또 그렇게 됨으로써 번뇌가 생기게 된다. 

모든 생각을 떨쳐버려야만 행이 다 갖추어지게 되고, 

그 행이 다 갖추어지게 되면 몸뚱이 마저 없는 것을 깨닫게 되리니, 

물질이 없는 데 무슨 고통이 있고 느낌이 있으랴.

 

그러므로 항상 여실히 법에 머물되, 

도(道)라고 생각함이 없으면 곧 속된 업이 아니게 되니, 

가령 듣는 것이 없는데 어떻게 의식이 일어나겠는가? 

보는 것이 없으면 얻을 것도 없고 얻을 것이 없으면 해탈하게 되느니라.

 

또 마음과 그 마음의 작용까지 얻을 수 없으면 무엇을 가져오거나 일어날 것이 없고, 

오는 것도 가는 것도 보지 않으면 그 근본 자체에 아무 것도 얻을 것이 없어서 모든 법이 다 평등하여 차별 없음을 알게 될 것이다. 

마치 어떤 사람이 허공을 우러러 볼 때에 어디까지가 허공이고 어디까지가 허공이 아닌 것을 분별하여 알 수 없는 것처럼 부처님의 마음도 그러하느니라.

 

보살이 만약 부처님의 마음을 얻는다면 모든 부처님의 법을 알고 온갖 상호를 구족하며 도(道)의 지혜를 다 갖추는 동시에 부처님께서 말씀하시는 이치를 다 깨치게 되니, 

곧 받아 지니고 외워서 그 뜻을 통하여 모든 부처님의 법을 널리 유포할 수 있느니라.

 

부처님께서 다시 사리불에게 말씀하셨다.

“저 보현(普賢)여래께서는 처음부터 두 가지 말씀은 하지 않으시니, 

이른바 집착하여 말씀하시지 않고 단정하여 말씀하시지 않는 것이니라. 

그 말씀은 다 평등할 뿐만 아니라 적합하지 않음도 없으시니, 

또 어떤 것이 없는가 하면, 

다른 사람의 말을 받아들여 생각함도 없고 자기의 생각을 주장하여 아는 체 하지도 않으시느니라. 

그러므로 보살들이 저 부처님을 뵙고는 곧 6도무극을 구족하게 되느니라.”

 

부처님께서 또 말씀하셨다.

“6도무극을 어떻게 구족하겠느냐? 

물질에 대한 생각을 버려서 아무 것도 바라는 것이 없으면 이것이 곧 시도무극(施度無極:

보시바라밀)을 구족하는 것이니라. 

부처님의 몸을 법의 몸으로 생각하지 않음이 없으면 이미 다 갖추어서 계도무극(戒度無極:

지계바라밀)을 구족하게 되니, 

왜냐 하면 스스로의 몸을 생각하지 않기에 32상(相)을 성취하기 때문이니라.

 

모든 법에 대해 음성과 형상을 헤아리거나 없음과 있음 그리고 다함과 머무름 같은 것이 일어나지 않으면 이것을 인도무극(忍度無極:

인욕바라밀)이라고 하느니라.

 

모든 법을 보지도 듣지도 않는 것은 어떤 것인가? 

보살은 선한 것을 본다고 해서 기뻐하거나 악한 것을 본다고 해서 근심하지 않고 마음이 적절하지 않음이 없으니 이것을 진도무극(進度無極:

정진바라밀)이라고 하느니라. 

마음에 아무런 상념(想念)없이 고요하고 담담한 경지에 들어가니 이것을 적도무극(寂度無極:

선정바라밀)이라고 하느니라. 

온갖 물질과 형상의 공함을 깨달아도 그것에 대해 자만하지 않으니 이것을 지도무극(智度無極:

지혜바라밀)이라고 하느니라.”

 

부처님께서 다시 말씀하셨다.

“저 불국토에 있는 보살들은 이 6도무극을 구족함으로써 무생법인을 얻어 시방 불국토를 두루 관찰할 수 있느니라. 

그러므로 뭇 보살들의 수행으로는 저 불현(不眴)국토의 보현여래께서 모든 보살들을 가르치는 것에 이르기는 어렵느니라.”

 

사리불이 아차말보살에게 말하였다.

“훌륭합니다. 

어진이여, 

저 불국토의 보살들의 공훈은 한량이 없는 것입니다.”

이에 아차말보살이 다시 사리불에게 물었다.

“어진이께서는 저 불현불국토의 보현여래를 보려고 하십니까?”

사리불이 대답하였다.

“오직 그 부처님을 뵙고자 하는 것은 이 모임의 대중들로 하여금 다 가호에 힘입어 복되고 경사스러운 일과 공덕이 더 늘어나게 하기 위함입니다.”

 

그러자 아차말보살이 곧 그 자리에서 삼매(三昧)에 들어 신통력을 나타내었는데, 

삼매의 명호(名號)는 변견제불토(遍見諸佛土)였다. 

사리불을 비롯한 여러 모임의 대중들로 하여금 다 불현불국토의 보현여래를 뵙게 하니, 

그들은 다 기쁨에 넘쳐서 전에 없던 일이라고 찬탄하고는 함께 일어나 부처님께 엎드려 예배하였다.

 

이에 그 부처님의 성지(聖旨)에 따라 사리불과 그 대중들의 옷깃 위로 홀연히 하늘의 꽃과 향이 내리고, 

그들이 또 그것을 동방을 향하여 저 부처님께 뿌리니 저 불국토의 부처님과 보살들에게 내리고 부처님 세계에도 가득하였다.

 

그러자 저 불국토의 보살이 그 부처님께 여쭈었다.

“지금의 이 미묘하고 수승한 꽃들은 어느 곳으로부터 날아오는 것입니까?”

보현여래께서 여러 보살들에게 말씀하셨다.

“지금의 이 상서로움은 바로 아차말보살이 저 사바세계[忍界]에 가서 석가모니부처님께 공양하고 법을 여쭘에 따라 시방 보살들이 모두 그 모임에 나아가 대승(大乘)을 강론하기 때문이니라.”

 

그 불국토의 보살들이 다시 부처님께 여쭈었다.

“이 불국토에까지 이러한 변화를 나타내는 것은 어느 부처님의 위신으로 일으키는 은혜로운 변화입니까?”

그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석가모니 부처님께서 시방으로부터 모여든 보살들을 위해 대승을 강론하시기 때문이니라.”

 

보살들이 다시 여쭈었다.

“그러시다면 어떤 것을 강론하시는지 듣고자 합니다.”

“석가모니부처님께서는 그 대회에서 모든 인연의 법품을 분별하여 연설하시느니라.”

 

보살들이 다시 그 부처님께 여쭈었다.

“그 사바세계는 여기에서 얼마나 먼 거리입니까?”

그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여기에서 서방(西方)으로 10항하사[江沙] 수의 모든 불국토에 가득한 그 가는 티끌을 하나 하나의 불국토에 하나씩 뿌려서 그 티끌이 다하고 이어 서방의 모든 불국토에도 뿌려서 다하고 또 이렇게 하여 약간의 불국토를 지나면 사바세계가 있으니, 

거기에 석가모니부처님께서 계시는 처소가 있느니라.”

 

저 불국토의 보살들이 다시 아뢰었다.

“원컨대, 

큰 성인이신 석가모니부처님께서 일으키시는 도의 변화를 보게 해 주십시오.”

 

그때에 보현부처님께서 온 몸에 광명을 내어 시방을 두루 비추시자, 

저 모든 보살과 대중들이 다 이 국토를 보게 되었다. 

보살들은 모두 일어나 멀리 석가모니 부처님께서 계신 곳을 향해 귀명(歸命)하고 한결같은 마음으로 예를 올렸다. 

그리고 보살들은 이 사바세계에 빈틈없이 가득 찬 보살 대중들을 보고는 이상하고도 놀랍고 한편으로 기뻐서 부처님께 다시 여쭈었다.

 

부처님께서 대답하셨다.

“이것은 시방 불국토의 헤아릴 수 없는 보살 대중들이 석가모니 부처님께서 널리 말씀하시는 인연의 법품을 듣기 위해 모여든 것이니라.”

 

한편, 

사리불이 또 아차말보살에게 물었다.

“그대의 이름인 아차말아차말(阿差末)은 진(晋)나라 말로 무진의(無盡意)이다에는 어떤 뜻이 있습니까?”

아차말보살이 대답하였다.

“모든 법을 운용하기에 다함이 없다고 하는 것이니, 

일체의 법 역시 다함이 없기 때문입니다.”

 

사리불이 말하였다.

“원컨대, 

다함이 없는 그 법의 뜻을 해설해 주시기 바랍니다.”

 

아차말이 대답하였다.

“사리불이여, 

일체의 법은 본래 발심한 순간부터 역시 다함이 없습니다. 

왜냐 하면 음욕과 성냄과 어리석음의 그 모든 욕심에 얽매이지 않기 때문이고, 

나한(羅漢)과 연각승(緣覺乘)에 혼동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또 발심한 이래로 그 뜻을 굳게 하여 흔들리지 않습니다. 

왜냐 하면 삿된 업에 미혹되거나 일체의 악마들에게도 그 뜻을 빼앗기지 않고 발심한 그대로 끝까지 모든 공덕을 성취하기 때문입니다.

 

또 무상(無常)에 머무르고 홀로 대중의 우두머리가 되어 그들을 거느립니다. 

왜냐 하면 유상(有常)이 곧 생사의 업(業)임을 헤아려서 이 가운데 도를 깨치면 이것을 일컬어 부처라고 하니, 

무상을 나타내기 때문입니다.

 

또 발심한 이래로 그 마음이 평안하고 속박이 없으니, 

모든 부처님께서 성취하신 공덕의 업을 여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또 그러한 업을 닦아도 조금도 결함이 없으니, 

온갖 나쁜 업을 다 소멸하였기 때문입니다. 

또 그 마음은 영원히 평안함을 얻고 동요하지 않아 짝할 것이 없으니, 

희유함을 얻었기 때문입니다.

 

또 그 마음이 금강과 같으니 일체의 법에 대해 다 알기 때문이고, 

또 다함이 없으니 모든 법을 도의 지혜로 감싸기 때문입니다. 

또 발심한 이래로 금강과 같이 강하니 중생들을 평등하게 대하기 때문입니다.

 

또 그 마음이 곧고 질박하여 아첨함이 없기 때문에 이것을 일컬어 곧고 치우침이 없다고 합니다. 

또 발심한 이래로 항상 맑은 생각을 지니니, 

본래 청정하기 때문입니다. 

또 뭇 더러움을 버려서 번뇌를 다 제거하니, 

지혜를 드러내어 그윽함을 밝히기 때문입니다. 

또 발심한 이래로 온갖 더러움을 씻어내니, 

그 믿음이 매우 굳건하여 저버리지 않기 때문입니다.

 

또 발심함이 심원하여 그 끝이 없으니, 

마음이 허공과 같기 때문입니다. 

또 발심함이 드넓으니, 

중생들을 다 받아들여 마땅히 제도하기 때문입니다. 

또 발심함이 다하지 않으니, 

그 지혜로움이 넓고도 넓어 장애가 없기 때문입니다.

 

또 초발심(初發心)한 이래로 선정에 들지 않음이 없으니, 

큰 자비심이 한도 없고 다함도 없기 때문입니다. 

또 발심한 이래로 행이 끊어짐이 없으니, 

공덕의 원(願)이 있기 때문입니다. 

또 발심한 이래로 매우 안락하여 공경할 만하니, 

모든 중생들이 환희심을 일으키기 때문입니다.

 

또 발심한 이래로 매우 존귀하게 되어 중생을 벗어나니, 

모든 외도와 성문과 연각이 받드는 바가 되기 때문입니다. 

또 그 발심한 마음을 능히 알 수 없으니, 

범부가 이를 만한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마치 농부가 성왕(聖王)이 하는 일을 모르는 것과 같습니다.

 

또 갖가지 마음의 종자를 뿌리니, 

각각 그 본래의 종자의 업(業)으로부터 과(果)를 얻고 모든 법이 항상 존재하기 때문입니다. 

또 초발심에서부터 도(道)로써 근본을 삼으니, 

이로 말미암아 큰 안락을 얻기 때문입니다. 

또 발심한 이래로 스스로 장엄하니, 

공훈을 성취하였기 때문입니다.

 

또 발심한 이래로 중생과 큰 차별이 있으니, 

성스러운 지혜를 통달하였기 때문입니다. 

또 발심한 이래로 매우 미묘하니, 

중생들에게 널리 보시하기 때문입니다. 

또 발심한 이래로 원(願)을 세워 이루니, 

계율을 구족하였기 때문입니다.

 

또 발심한 이래로 비할 데가 없으니, 

법을 인가 받지 않음이 없기 때문입니다. 

또 발심한 이래로 억제됨이 없으니, 

용맹정진하여 게으름이 없기 때문입니다. 

또 발심한 이래로 즐거움에 연연함이 없으니, 

가없는 적정에 마음이 이르기 때문입니다. 

또 발심한 이래로 취(趣)5)로 돌아감이 없으니, 

끝없는 깨달음의 지혜에 인하기 때문입니다.

 

또 발심한 이래로 영원히 머무름이 없으니, 

끝없이 자비롭기 때문입니다. 

또 발심한 이래로 근기가 매우 강하니, 

자비심으로 돌보기 때문입니다. 

또 발심한 이래로 기쁘고 즐거운 마음을 지니니, 

모든 중생들을 평등한 마음으로 대하기 때문입니다. 

또 발심한 이래로 고통과 즐거움을 겪더라도 동요함이 없으니, 

일체를 단속하기 때문입니다.

 

또 발심한 이래로 모든 여래께서 돌보아 주시니, 

시방의 모든 부처님의 가르침에 수순하기 때문입니다. 

또 발심한 이래로 5취(趣)와 갖가지 재난에서 벗어나니, 

중생들을 크게 이끌어 교화하기 때문입니다. 

또 발심한 이래로 삼보를 버리지 않고 어긋남이 없으니, 

마땅히 부처님의 계율에 수순하여 거룩한 성중들을 성취시키기 때문입니다.”

 

아차말보살이 다시 사리불에게 말하였다.

“일체지(一切智)의 마음이 어찌 다함이 있겠습니까?”

 

사리불이 대답하였다.

“다함이 없습니다. 

마치 저 다함이 없는 허공처럼, 

일체지의 마음이 다함이 없는 것 역시 그러합니다. 

부처님의 계율 역시 다함이 없습니다. 

왜냐 하면 계율이 바로 일체지의 마음의 근원이 되기에 다함이 없고, 

부처님의 선정과 지혜로 말미암기에 다함이 없고, 

지혜 해탈의 앎이 끝없기에 다함이 없습니다. 

10력(力)ㆍ4무소외(無所畏) 등의 18불공법(不共法)6)에 대해 헤아려 생각해 보면 이것이 곧 근원이니 이 역시 마음의 근원이기에 다함이 없습니다.

 

간략히 말씀드리면, 

일체 법 가운데 으뜸이 되는 부처님의 법이 이 마음으로 말미암아 행하게 되기에 다함이 없고, 

3보의 끊임없음도 이 마음으로 말미암기에 다함이 없습니다. 

마치 일체 중생이 4대(大)인 것과 같습니다. 

이른바 4대란, 

땅ㆍ물ㆍ불ㆍ바람으로 역시 다함이 없습니다.

 

이 일체지의 마음으로 깨우치기에 중생들의 마음의 행이 부사의하고 본래의 서원이 끊이지 않기에 다함이 없습니다. 

왜냐 하면 도를 받들어 닦기를 원하기에 다함이 없고, 

생함이 없어 오묘하지 않음도 없고 모든 법의 근원이 무궁하기에 다함이 없습니다.”

 

1 탐(貪)ㆍ진(瞋)ㆍ치(癡)의 미혹됨을 뜻하는 것으로 3독(毒)이라고도 한다.

2 단지 한 생애만을 남겨둔 것으로 다음 생에는 부처가 될 수 있는 지위를 이른다.

3 부처와 보살이 설법할 때에 두려움이 없는 네 가지의 것을 뜻하는데, 

부처님의 4무소외로는 정등각(正等覺)무소외ㆍ누영진(漏永盡)무소외ㆍ설장법(說障法)무소외ㆍ설출도(說出道)무소외가 있고, 

보살의 4무소외로는 능지(能持)무소외ㆍ지근(知根)무소외ㆍ결의(決疑)무소외ㆍ답보(答報)무소외가 있다.

4 3법인(法忍)의 하나로서 일체의 것이 불생불멸(不生不滅)임을 확증하는 것이다.

5 전생의 업의 과보를 받아 지옥ㆍ아귀ㆍ축생ㆍ인간ㆍ하늘ㆍ아수라에 태어나는 것으로 6도(道)라고도 한다. 

아수라를 생략하여 5도(道)라고도 한다.

6 부처님에게만 있는 희유한 열여덟 가지의 특징으로 10력(力)ㆍ4무소외(無所畏)ㆍ3념주(念住)ㆍ대비(大悲)가 그것이다.


○ [pt op tr]




◆vers1417

◈Lab value 불기2564/04/14



Jacques Brel - L'aventure


○ 2019_1004_134259_canon_Ab27.jpg


○ [pt op tr] 예술작품 사진 공양, 나무불, 나무법, 나무승 Salvador-Dali-figure-inspired-by-the-adam-of-the-ceiling-of-the-sistine-chapel.jpg!HD



○ [pt op tr] 꽃 공양, 나무불, 나무법, 나무승 flower-1559973



○ [pt op tr] 아름다운 사진 공양, 나무불, 나무법, 나무승 Steinlen-Motocycles_Comiot



♥Sin Sze Si Ya Temple ,Malaysia


○ [pt op tr] 아름다운 풍경사진 공양, 나무불, 나무법, 나무승 With the image 'Google Earth & Map data: Google, DigitalGlobe'






♥ 잡담 ♥꽃이 다 떨어진 벚꽃길 사회적 거리 유지하며 걷기 

prince 님과 요즘 2 주 간격으로 계속 운동 삼아 
산보를 다니고 있다. 
그런데 간격이 너무 길어서인지 
한번 산보 운동을 나서면 처음에는 상당히 힘들다. 
그런데 다 걷고 돌아올 때즘에는 몸이 좋아진 듯한 느낌을 받는다. 
오늘은 대략 24892 보를 걷고 왔다. 
평상시보다 좀 많이 걸은 셈이다. 


prince 님이 자칭 폴 데이빗으로 칭하면서 활동한지 오래되었다. 
그런 prince 님이 요즘 태만하다. 
세계가 요즘 바이러스로 난리다. 
그런데도 자신에게는 아무 문제가 없기에 
세상을 구하는 활동을 할 필요성을 못 느낀다고 말한다. 

이 대목에서 불교 수행계에서 아라한을 연상시킨다. 
아라한들이 자신이 생사의 묶임에서 벗어났다고 
생사현실에 들어가 중생에 눈높이를 맞추어 중생을 제도하려는 일을 외면하는 경향이 있다.

그래서 동가홍상의 수행원리를 말해주었다. 
그리고 산보를 하는 김에
길거리에 보이는 단어를 가지고 gospel 형태로 짧은 글 짓기 훈련을 하는 예를 보여주었다. 

마침 paris 라는 단어가 들어간 가게 간판이 보였다. 
그래서 이 단어로 짧은 글 짓기를 하면서 걸어보기로 했다. 
시적으로도 아름답고, 그리고 의미와 가치가 있는 글을 만들어보면서
걷는 활동이다. 
그렇게 안 해도 걷는데는 지장이 없다. 
그러나 그렇게 하면서 걷는다고 해서 걸을 수 없는 것이 아니다. 
그래서 prince 님과 걸으면서 
한참 있다가 그나마 나은 구절을 하나 만들어 냈다. 
 
원수를 사랑하게 되면 파리를 공짜로 관광하는 것과 같다. 

요즘 코로나 때문에 외국여행도 쉽지 않다. 
산보를 할때 조차도 마스크를 착용해야 한다.
그리고 행인들과 사회적 거리를 서로 유지하면서 걸어야 한다. 

아름다운 아가씨가 또 지나쳐서 
아름다운 아가씨로 짧은 글 짓기를 또 시작했다. 

아름다운 아가씨가 50 보를 걷자고 하면 

(아무리 수행자로서 부정관을 수행중이더라도) 
100 보를 함께 걷는다. 
아름다운 아가씨가 왼뺨을 때리면 
오른 뺨을 돌려 댄다. 

어디서 많이 본 구절일 수 있다. 
모방의 아들은? 
성이 모씨라고 생각해서 
모자라고 쉽게 답하면 안 된다. 
창작이다. 
모방이 창작의 어머니이기 때문이다. 

곧 선거가 끝나면 선거에 당선되어서 브라보를 외칠 이들이 있게 된다. 
이 때 그런 브라보의 아들들은? 
이 경우도 앞과 비슷하게 생각해야 한다. 
겸손 승복 화합 세 쌍동이가 출산되기를 기대해본다.







문서정보 ori http://buddhism007.tistory.com/16322#1417
sfed--아차말보살경_K0070_T0403.txt ☞아차말보살
sfd8--불교단상_2564_04.txt ☞◆vers1417
불기2564-04-14
θ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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견혹의 세 가지.
(1) 구생견혹(俱生見惑). 나면서부터 본래 갖추어 있는 번뇌.
(2) 추리견혹(推理見惑). 어떤 일을 만날 적마다 추리하여 일어나는 번뇌.
(3) 발득견혹(發得見惑). 지혜가 생기므로서 점점 얻게 되는 번뇌.


답 후보
삼종견혹(三種見惑)
삼지(三智)

삼천세계(三千世界)
삼품참회(三品懺悔)
상(想)
상나화수(商那和修)
상무성(相無性)


ॐ मणि पद्मे हूँ
○ [pt op tr]




ॐ मणि पद्मे 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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