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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기2564-04-19_유식론_001 본문
『유식론』
K0613
T1588
유식
● 한글대장경 해당부분 열람I
● 한글대장경 해당부분 열람II
○ 통합대장경 사이트
○ 해제[있는경우]
● TTS 음성듣기 안내
※ 이하 부분은 위 대장경 부분에 대해
참조자료를 붙여 자유롭게 연구하는 내용을 적는 공간입니다.
대장경 열람은 위 부분을 참조해주십시오.
○ [pt op tr] 유식론_K0613_T1588 핵심요약
『유식론』
♣0613-001♧
유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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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식론
유식론(唯識論)
천친(天親) 지음
구담반야류지(瞿曇般若流支) 한역
■ 식(識) 뿐이고 경계(境界)는 없다.
6진(塵)이 없는데 있다고 허망하게 보는 것이
사람의 눈에 백태가 있으면
털이나 달 따위가 보이는 것과 같네.
만일에 마음뿐이고 6진이 없으며
바깥 경계를 허망하게 보는 것 떠났다면
장소와 시간의 일정함과 일정하지 아니함과
사람이거나 짓는 일은 무엇이리.
장소와 시간 따위의 모든 사실에
빛깔 따위인 바깥 법이 없는데
사람의 꿈에서와,
그리고 아귀들은
업(業)에 의하여 허망하게 보나니
꿈속에 여자가 있지 않는데도
모믈 움직여 유정을 하며
지옥에서 모두들 그 지옥주(地獄主)에게
갖가지 고통을 받는 것과 같네.
축생(畜生)이 천상에 태어나 있지마는
지옥에는 그렇지 않나니
그 까닭은 천상에 있어서는
축생의 고통을 받지 않기 때문이네.
만일 중생의 업에 의하여
4대(大)가 그와 같이 변한다면
무슨 까닭으로 그 업에 의하여
마음이 그렇게 전변하지 않으랴.
업이 다른 법을 훈습(熏習)하면
과보가 어찌 다른 장소이리오.
선과 악이 마음을 훈습하거니
어찌 마음을 떠나서 말하랴.
빛깔 따위의 온갖 받아들임[入]을 말함은
교화 받을만한 중생을 위하심이요,
그 보다 앞에서 법을 받은 이에겐
화생(化生)이 있다고 말씀하셨네.
저 본래의 마음 지혜에 의하여
식(識)의 허망으로 바깥 경계 취하나니
그러므로 여래께서 말씀하시기를
안팎의 온갖 받아들임 있다고 하셨네.
허망하여 진실함 없다고 관찰하면
그와 같은 이는 아공(我空)에 들며
온갖 다른 법을 관찰한다면
모든 법 ≺나≻ 없음에 들어가리.
저 하나인 것을 볼 수가 없고
많음도 역시 볼 수 없으며
화합인 것도 볼 수가 없나니
그러므로 대상[塵]의 법이 없네.
6진(塵)이 동시에 화합한다면
티끌에 곧 여섯 모양이 있을 것이요,
만일 여섯이 하나의 처소뿐이라면
모든 4대(大)는 하나의 티끌이리.
만일 미진(微塵)과 화합하지 않는다면
저 화합함은 무엇으로 된 것이며
미진을 모양이 없다고 말하나
능히 이름은 곧 모양이 있음이다.
방소가 다른 법이 있나니
그를 하나라고 말하지 못한다.
그림자의 가림이 만일 4대가 아니라면
곧 저 둘은 그것이 아니리라.
하나라면 다님[行]에 차례가 아닐 것이며
취하거나 버림도 같지 아니하리.
차별도 한량없는 장소일 것이요
미세한 것도 볼 수 있어야 하리라.
직접 본다는 것은 꿈과 같으며
봄과 보이는 것이 함께하지 않아서
볼 적에는 분별하지 아니하거늘
어떻게 ‘직접 본다’고 말하랴.
먼저 말한,
저 허망하게 봄이란
저 허망하게 생각함에 의함이다.
허망한 꿈을 꾸고 있는 이는
꿈 깨기 전엔 그를 알지 못하네.
번갈아 함께 증상(增上)하는 원인으로
피차의 마음 인연이 합해진 것이다.
무명(無明)이 마음을 덮었나니
그러므로 꿈과 꿈 깬 결과가 다르네.
죽이는 일이 타심(他心)에 의하며
또한 자심(自心)에 의하기도 하여
가지가지 인연에 의해서
자기 심식(心識)을 잃어버리네.
경에서 일찍이 말씀하시기를
단나가(檀拏迦)ㆍ가릉가(迦陵迦)ㆍ마등(摩登)의 나라는
신선이 성냄으로 인해 텅 비었나니
그러므로 마음 업이 참으로 중하네.
모든 법에서 마음이 근본이요
모든 법에서 마음이 수승하나니
마음 떠나서는 모든 법이 없어
마음뿐이고 몸과 입은 이름뿐이네.
타심(他心)으로 경계를 안다는 것은
실답게 깨달아 아는 것 아니니
식(識)의 경계를 떠난 것 아니기 때문이라
부처님만이 실답게 아시리.
내가 지금 이 유식론을 짓는 것이
내가 생각해 낸 것 아니니
부처님의 미묘하고 깊은 경지의
북과 덕을 중생에게 베풀려 함이네.
【문】그 첫 게송은 어떠한 내용을 밝힌 것인가.
【답】무릇 논(論)을 짓는 것에는 모두 세 가지 내용이 있다.
무엇이 세 가지냐 하면,
첫째는 뜻을 세움[立義]이요,
둘째는 인증(引證)을 함이요,
셋째는 비유(譬喩)이다.
뜻을 세움이란 게송에서 ‘식(識)뿐이고 경계(境界)가 없다’고 말한 것과 같다.
인증을 함이란 게송에서 ‘진(塵)이 없는데 있다고 허망하게 보는 것이라’고 말한 것과 같다.
비유란 게송에서 ‘사람에게 눈에 백태가 있으면 털이나 달 따위가 보이는 것과 같네’라고 말한 것과 같다.
또 다시 이러한 뜻이 있으니,
대승경(大乘經)에서 ‘3계(界)가 마음뿐이라’고 말씀하신 것과 같다.
‘마음뿐이라’고 한 것은 다만 안의 마음만이 있고 빛깔,
냄새 따위의 바깥 경계가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것을 어떻게 아느냐 하면,
『십지경(十地經)』에서 말씀하시기를 ‘3계(界)가 허망하나니
다만 하나의 마음으로 되었기 때문이라’고 하셨기 때문이다.
마음ㆍ뜻ㆍ의식(意識)ㆍ요별(了別) 따위의 그와 같은 네 가지 법은
내용은 하나이고 명칭만 다르나니
그것은 서로 응하는 마음[相應心]에 의하여 말한 것이요,
서로 응하지 않는 마음[相應心]에 의하여 말한 것이요,
서로 응하지 않는 마음[不相應心]에 의하여 말한 것은 아니다.
마음에는 두 가지가 있다.
무엇이 두 가지이냐 하면 첫째는 서로 응하는 마음[相應心]이요,
둘째는 서로 응하지 않는 마음[不相應心]이다.
서로 응하는 마음이란 이른바 온갖 번뇌의 결사(結使)와 느낌[受]ㆍ생각[想]ㆍ지어감[行] 따위의 모든 마음과 서로 응한다 함이니,
그 까닭으로 마음ㆍ뜻ㆍ의식ㆍ요별(了別) 따위가 내용은 하나이고 명칭만 다르다고 말한 것이다.
서로 응하지 않는 마음이란,
이른바 제일의제(第一義諦)로서 항상 머무르고 변치 아니하여 자성(自性)이 청정한 마음이라고 말한 것이 그것이다.
‘3계(界)가 허망하나니 다만 하나의 마음으로 되었기 때문이라’고 말씀하셨으므로 게송에서 말하기를 ‘식(識)뿐이고 경계가 없다’고 말하였다.
위에서 뜻 세움[立義]을 이미 밝혔으니 다음엔 인증(引證)에 대해 밝히리라.
【문】어떤 일로써 증험하여 빛깔 따위의 바깥 경계는 없고 다만 안의 마음만이 있어 능히 허망하게 목전의 경계를 보는 것이라고 아는가.
【답】게송에서 6진(塵)이 없는데 있다고 허망하게 보는 것이라‘고 말함이니 ’6진이 없는데 있다고 허망하게 보는 것이라‘함은 다만 안의 마음만이 있어 허망하게 분별을 내며 빛깔 따위의 바깥의 모든 경계를 능히 본다는 것을 의미함이다.
【문】만일 빛깔 따위의 바깥 경계가 없다면 다만 그러한 말만이 있는가.
또한 그에 관한 비유도 있는가.
【답】게송에서 ‘사람에게 눈에 백태가 있으면 털이나 달 따위가 보이는 것과 같네’라고 말하였다.
그것은 무슨 내용을 밝힘이냐하면,
비유컨대 사람의 눈에 혹 백테나 열기(熱氣)의 병 따위가 있으면
그로 인하여 허망스레 갖가지 모든 사물을 보며,
허공 중에서 털이나 아지랑이를 보며,
두 개의 달과 눈흘림과 건달바성(乾闥婆城)을 보나니
그와 같은 것 들은 실지로 목전에 그러한 것이 있는 것이 아니요,
다만 허망하게 본 것에 불과하다.
그리 그 빛깔ㆍ냄새ㆍ맛ㆍ따위를 수용하는 것과 바깥의 모든 경계도 역시 모두 그와 같나니
끝 없는 세상붙 오면서
안의 마음이 뒤바뀌고 미혹하여 괜히 수용함이 있다고 본 것이요,
실로 빛깔 따위의 바깥의 경계는 전혀 없다.
【문】게송에서 말한,
만일에 마음뿐이고 6진(塵)이 없으며
바깥 경계를 허망하게 보는 것 떠났다면
장소와 시간의 일정함과 일정하지 않음과
사람이거나 짓는 일은 무엇이리.
라고 한,
그 게송은 무슨 내용을 밝힌 것인가.
만일 빛깔 따위의 바깥 모든 경계를 떠났는데도 허망하게 본 것이라 한다면,
무슨 내용으로 말미암아 빛깔이 있는 장소에는
눈으로 곧 빛깔을 보고 그 밖의 빛깔이 없는 장소에서는 곧 빛깔을 보지 못하는가.
또 다시 힐난하기를 ‘만일에 빛깔 따위의 바깥의 모든 경계가 없는데 허망하게 본다면
무슨 까닭으로 저 보는 장소에 관하여
빛깔이 있는 때에는 눈으로 빛깔을 보고 빛깔이 없는 때에는 빛깔을 보지 못하는가’ 하고,
또 다시 힐난하기를 ‘만일에 빛깔 따위 바깥 모든 경계가 없는데 허망하게 본다면
그와 같이 응당 어느 때던지 보아야 할 것이다.
만일 그러하지 않는다면 응당 어느 때에나 모두★★ 다 보지 못해야 할 것이다’ 하였고,
그러므로 게송에서 말하기를 ‘만일에 마음뿐이고 6진(塵)이 없으며 바깥 경계를 허망하게 보는 것 떠났다면
장소와 시간의 일정함과 일정하지 않음이다’고 하였다.
또 다시 힐난하기를 ‘만일에 빛깔 따위 바깥 모든 경계가 없는데 허망하게 본다면
무슨 까닭으로 많은 사람이 같은 장소와 같은 시간에 함께 모여
빛깔이 있는 곳에서는 함께 빛깔을 보고
빛깔이 없는 곳에서는 함께 보지 못하는가’ 하고,
또 다시 힐난하기를 ‘만일에 빛깔 따위 바깥 모든 경계가 없는데 허망하게 본다면
무슨 까닭으로 눈에 백태가 있는 사람은 허망하게 해와 달과 털 바퀴와 파리 따위를 보고
눈이 청정한 사람은 곧 허망하게 보지 아니하는가’ 하고,
또 다시 힐난하기를 ‘만일에 평등하게 빛깔ㆍ냄새ㆍ맛 따위의 바깥 모든 경계가 없는데 허망하게 본다면
무슨 까닭으로 눈에 백태가 있는 사람이 보는 해와 달과 털 바퀴와 파리 따위는 모두 다 작용이 없고
눈이 청정한 사람이 보는 바가 있는 것은 모두 다 작용이 있는가’ 하고,
또 다시 힐난하기를 ‘만일 평등하게 빛깔ㆍ냄새ㆍ맛 따위의 바깥 모든 경계가 없는데 허망하게 본다면
무슨 까닭으로 꿈에 보는 음식과 배부름과 굶주림과 칼이나 곤장과 독약인 그러한 따위의 사실은 모두 다 작용이 없고
깰 적에 보는 음식과 배부름과 굶주림과 칼이나 곤장과 독약인 그러한 따위의 사실은 모두 다 작용이 있는가’ 하고,
또 다시 힐난하기를 ‘만일 평등하게 빛깔ㆍ냄새ㆍ맛 따위의 바깥 모든 경계가 없는데 허망하게 본다면
무슨 까닭으로 건달바성(乾闥婆城)은 실로 성(城)이 없어서 성의 작용이 없고
그 밖의 성(城)은 모두 실로 성(城)이 있어 성(城)의 작용이 있는가.
그러한 까닭으로 말미암아 빛깔ㆍ냄새ㆍ맛 따위의 바깥 모든 경계가 모두 실로 있어서
눈병이나 꿈이나 건달바성 따위와 같지아니하다.
그러므로 장소와 시간과 사람의 짓는 업이 모두 실로 있어서 꿈 따위와 같지 아니하다.
그러므로 게송에서
≺장소와 시간의 일정함과 일정하지 않음과 사람이거나 짓는 일은 무엇이리≻라 말하였다’고 한다.
【답】다음과 같은 게송으로 말하리라.
장소와 시간 따위의 모든 사실에
빛깔 따위인 바깥 법이 없는데
사람의 꿈에서와,
그리고 아귀들은
업(業)에 의하여 허망하게 보나니
그 게송은 무슨 내용을 밝힌 것인가.
그대가 말한,
‘무슨 내용으로 말미암아 빛깔이 있는 장소에서는 눈으로 곧 빛깔을 보고,
그 밖의 빛깔이 없는 장소에서는 곧 빛깔을 보지 못하는가’라고 한 그 내용은 옳지 않다.
왜냐하면 저 꿈속에서 빛깔이 없는 장소에서도
곧 빛깔이 있는 것을 보고 빛깔이 있는 장소에서도 빛깔을 보지 못하기 때문이다.
또 그대가 말한 ‘무슨 까닭으로 저 보는 장소에 관하여 빛깔이 있는 때에는
눈으로 빛깔을 보고 빛깔이 없는 때에는 빛깔을 보지 못하는가’라고 한 것은 그대가 무슨 까닭으로 말했던가.
저 꿈속에서 어떤 장소에서는 마을이나 성읍(城邑)이나 남자ㆍ여자 따위를 모두 보기도 하고,
혹 저 장소에서는 마을이나 성읍이나 남자ㆍ여자 따위를 모두 보지 못하기도 하며,
혹 어느 때에는 보기도 하고,
혹 어느 때에는 보지 못하기도 하여 항상 보는 것이 아니다.
또 그대가 말한 ‘만일에 빛깔 따위 바깥의모든 경계가 없는데 허망하게 본다면 그와 같이 응당 어느 때던지 보아야 할 것이다.
만일 ’그러하지 않는다면 응당 어느 때에나 모두 보지 못해야 할 것이다‘라고 한 그 내용은 옳지 않다.
왜냐하면 어느 장소와 어느 때고 빛깔ㆍ냄새 따위 바깥의 모든 경계가 없는고,
또한 동일한 장소와 동일한 시간에 함께 보기도 하고,
또한 동일한 장소와 동일한 시간에 보지 못하기도 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게송에서 ’사람의 꿈에서와 그리고 아귀들은 업(業)에 의하여 허망하게 보나니‘라고 말했다.
그것은 무슨 내용을 밝힌 것이냐 하면,
그대가 먼저번에 말하기를 ‘만일 빛깔 따위 바깥의 모든 경계가 없다면
어찌하여 어떤 때와 어떤 장송서 보기도 하고 보지 못하기도 하느냐’고 한,
그 내용은 성립되지 않아 그는 곧 허망한 말이 된다.
왜냐하면 응당 빛깔 따위 바깥의 모든 경계를 떠나서도
시간이나 장소 따위의 사실이 모두 성립되기 때문이다.
또 그대가 말한 ‘무슨 까닭으로 많은 사람이 같은 장소와 같은 시간에 함께 모여 빛깔이 있는 곳에서는 함께 빛깔을 보고,
빛깔이 없는 곳에서는 함께 보지 못하는가’라고 함과,
또 그대가 말하기를 ‘눈에 백태가 있는 사람은 허망하게 해와 달과 털 바퀴와 파리를 보고
눈이 청정한 사람은 허망하게 보지 아니하는가’라고 한 그 내용은 옳지 않다.
왜냐하면 아귀(餓鬼) 따위들은 빛깔ㆍ냄새 따위의 바깥의 모든 경계를 떠나서도
장소와 시간ㆍ사람 따위의 온갖 것들이 모두 성립된다.
그 내용이 어떠하느냐 하면,
아귀 따위들은 혹 백의 같은 업[同業]과,
혹 천의 같은 업[同業]으로 강물이 모두가 고름이라고 보고,
혹은 모두 피로 보며,
혹은 소변으로 보고,
혹은 대변으로 보며,
혹은 흐르는 쇠로 보고,
혹은 흐르는 물로 보되,
두 언덕 가에는 많은 사람들이 칼이나 곤장을 가지고 지키며 막아 있어서 그 물을 먹지 못하게 하는 것들을 본다.
그는 빛깔ㆍ소리ㆍ냄새 따위의 바깥의 모든 경계를 떠났으나,
그러나 허망하게 보나니 그러므로 게송에서 ‘사람의 꿈에서와 그리고 아귀들은 업에 의하여 허망하게 보나니’라고 말했다.
또,
그대가 말하기를
‘무슨 까닭으로 눈에 백태가 있는 사람이 보는 해와 달과 털 바퀴와 파리 따위는 모두 다 작용이 없고
눈이 청정한 사람이 보는 것은 모두 다 작용이 있는가.
꿈에 보는 음식과 배부름ㆍ굶주림ㆍ칼ㆍ곤장ㆍ옥약등 그러한 따위의 사실은 모두 다 작용이 없고
깰 적에 보는 음식과 배부름ㆍ굶주림ㆍ칼ㆍ곤장ㆍ독약인 그런 것들만이 모두 그 작용이 있는가.
또 무슨 까닭으로 건달바성(乾闥婆城)은 실로 성(城)이 없어서 성(城)의 작용이 없고
그 밖의 성(城)은 모두 실로 성(城)이 있어 성(城)의 작용이 있었는가’라고 한 그 내용은 옳지 않다.
왜 그러한가를 다음 게송으로 말하리라.
꿈속에 여자가 있지 않는데도
몸을 움직여 유정을 하며
지옥에서 모두들 그 지옥주(地獄主)에게
갖가지 고통을 받는 것 같네.
그 게송은 무슨 뜻을 밝힌 것이냐 하면,
사람이 꿈속에 실로 여인(女人)이 없건마는 여인과 성교하는 것을 보고 유정을 하는 것과 같다는 것을 말한 것이다.
중생들도 그와 같아서 끝없는 세상 적부터 오면서 허망하게 빛깔ㆍ냄새ㆍ맛 따위 바깥의 모든 경계를 수용하나니
모두가 그와 같아 실로 없지마는 성립되므로
그와 같은 따위의 갖가지 비유로써 빛깔ㆍ냄새 따위 바깥의 모든 경계를 떠났으나
장소와 시간과 사람과 짓는바 업 따위의 네 가지 사실이 성립된다는 것을 밝힌 것이다.
또 다시,
한 가지 비유가 있으니 빛깔ㆍ냄새 따위의 바깥의 모든 경계를 떠나서
네 가지 사실이 성립되나 모두 허망하여 진실하지 않다.
그러므로 게송에서 말하기를
‘지옥에서 모두들 그 지옥주(地獄主)에게 갖가지 고통을 받는 것 같으네’라고 하였다.
그 게송은 무슨 뜻을 밝힌 것이냐 하며,
저 네 가지 사실이 빛깔ㆍ냄새 따위 바깥의 모든 경계를 떠났으나 모든 것이 모두 성립된다 함이다.
어떻게 모두 성립되느냐 하면,
지옥 안에 지옥주(地獄主)가 없지마는 지옥 중생들은
자기의 죄업(罪業)에 의하여 지옥주를 보되
저 지옥주가 갖가지 고통을 준다고 하며,
그리고 이러한 생각과 소견을 내되 ‘이것은 지옥이며,
이것은 지옥의 장소며,
이것은 지옥의 시간이며,
이것은 지옥의 밤이고,
이것은 지옥의 낮이며,
이것은 지옥의 아침 시간이고,
이것은 지옥의 오후 시간이며,
저것은 지옥주(地獄主)이고 나는 죄를 지은 사람이다’고 하여,
나쁜 업 때문에 개와 까마귀를 보고,
혹은 쇠 갈고리[鐵鉤]를 보며,
혹은 두 양(羊)을 보기도 한다.
그리고 혹은 두 산이 양쪽으로부터 와서 죄인의 몸을 핍박하는 것을 보기도 하며,
혹은 죄인이 칼 나무[劒樹]에 오를 적에는 칼날이 아래로 향하고 죄인이 내려올 적에는
칼날이 위로 향하여 꽉 둘러 있는 것을 본다.
왜냐하면 업이 같기 때문에 함께 같이 모이어 모두가 같이 보고 과보를 같이 받는다.
만일 업이 같지 아니하면 곧 함께 모이지 아니하며,
또한 같이 보지도 아니하고 같이 고통을 받지도 아니할 것이다.
그러기 때문에 그대가 말한 ‘장소와 시간의 일정함과 일정하지 않음과
사람이거나 짓는 일은 무엇이리’라고 함과
‘응당 빛깔 따위 바깥의 모든 경계가 있고,
장소와 시간과 사람과 짓는바 업 따위가 모두 실로 있다’고 함이 또한 허망하다.
그러한 내용으로 말미암아 장소와 시간과 사람과 짓는바 업 따위의 그 네 가지 사실을
한 가지 지옥의 비유만으로도 모두가 허망함이 된다고 그와 같이 알아야 한다.
【문】지옥 안의 지옥주와 까마귀ㆍ개ㆍ염소 따위는 바로 중생인가,
중생이 아닌가.
【답】그는 중생이 아니다.
【문】무슨 까닭으로 그것이 중생이 아니라고 하는가.
【답】상응(相應)하지 않기 때문이다.
여기에는 무슨 내용이 있느냐 하면,
다섯 가지 재용이 있어서 저 지옥주와 까마귀ㆍ개 따위가 중생이 아닌 것이다.
무엇이 다섯이냐 하면,
첫째는 지옥 안에서 죄가 있는 중생들이 가지가지 고통을 받나니 지옥주들이 만약 중생이라면
그들도 역시 가지가지 고통을 받아야 할 것이거늘 그들은 한결같이 그와 같은 가지가지 고통을 받지 않는다.
그러한 내용으로 보아서 그들은 중생이 아니다.
둘째는 그 지옥주들이 만약 중생이라면,
응당 서로 서로 살해할 것이므로 이것은 죄인이며,
이것은 지옥주라고 분별할 수 없을 것이거늘 실로 서로 서로가 살해하지 아니하여 이것은 죄인이며 이것은 옥주라고 분별할 수가 있나니
그러한 내용으로 그들은 중생이 아니다.
셋째는 지옥주들이 만약 중생이라면,
형체와 힘 따위가 모두 같아서 응당 서로 서로 살해할 것이므로 응당 죄인만이 공포를 받지 아니할 것이거늘
실로 죄인만이 공포를 받고 있으니 그러한 내용으로 그들은 중생이 아니다.
넷째는 저 지옥의 땅은 항상 뜨거운 철이기에 지옥주들이 바로 중생이라면,
능히 그 고통을 참지 못할 것이거늘 어찌 저 죄 받는 사람들을 칠 수가 있으랴.
그러나 실로 저 죄 받는 사람들을 해치고 있나니 그러한 애용이서 그들은 중생이 아니다.
다섯째는 지옥주가 만약 중생이라면,
죄를 받지 않는 사람은 저 지옥 안에 나지 아니할 것이거늘,
그러나 실로 저 지옥에 태어나나니 그러한 애용에서 그들은 중생이 아니다.
그것은 무슨 애용이냐 하면,
저 지옥에서 고통을 받는 중생들은 5역(逆) 따위의 온갖 악업(惡業)을 지어 그곳에 태어나거니와
지옥주들은 악업을 짓지 아니했거늘 어찌하여 그 곳에 태어났겠는가.
그러한 다섯 가지 내용으로 말미암아 상응하지 않음이라고 말한다.
【문】만일 저 옥주들이 중생이 아니고 죄업을 짓지 아니했으며 그곳에 태어나지도 않는다면 어찌하여 하늘에 축생이 있는가.
그것은 무슨 내용이냐 하면,
저 하늘 안에 갖가지의 새와 모든 축생들이 저 곳에 태어나 있기 때문이다.
지옥에는 무슨 까닭으로 그러하지 않으면서 축생ㆍ아귀 등 갖가지 것들이 섞여나서 그들로 하여금 주(主)가 되게 하는가.
【답】다음의 게송으로 말하리라.
축생이 천상에 태어나 있지마는
지옥에는 그러하지 아니하나니
그 까닭은 천상에 있어서는
축생의 고통을 받지 않음이네.
그 게송은 무슨 내용을 밝힌 것이냐 하면,
저 축생들이 천상에 태어난 것은 저 천상의 기세계[器世間]에서 조그마한 업이 있기 때문이니
그러므로 저 기세계에서 즐거운 과보를 받는다.
그러나 저 지옥의 지옥주와 까마귀와 개 따위들은 온갖 고통을 받지 아니하나니 그러한 까닭으로
저 지옥에는 실지의 옥주와 까마귀와 개 따위가 없다.
단 죄업의 중생만은 예외이다.
【문】만일 그렇다면 지옥의 중생들이 죄업에 의하여 바깥 4대(大) 따위 가지가지로 전변(轉變)하며
그 중의 몸이나 힘 따위가 수승한 이를 옥주ㆍ까마귀ㆍ개 따위라고 말한다.
어떤 것은 4대(大)의 전변함이라고 말하느냐 하면,
그곳에서 4대(大)가 가지가지로 전변하되 손이나 다리 따위를 움직이며
입으로는 말을 하여
죄받는 사람으로 하여금 놀래고 두려워하도록 한다.
그리고 두 마리의 염소가 양쪽에서부터 와서 저 지옥의 중생들을 함께 살해하며
모든 산이 오기도 하고 가기도 하여 그 중생들을 살해하는 것이 보이고,
쇠 나무숲이 보이고,
가시 숲 따위가 보이는데 죄인들이 그 곳에 오를 때에는 나무 가시가 아래로 향하고
죄인들이 내려 올 때에는 그 나무 가시가 위로 향한다.
그러한 까닭으로 안의 마음만 있고 바깥 경계가 없다고 말하지 못할 것이 아닌가.
【답】다음의 게송으로 말하리라.
만일 중생의 업에 의하여
4대(大)가 그와 같이 변한다면
무슨 까닭으로 그 업에 의하여
마음이 그렇게 전변하지 않으랴.
그 게송은 무슨 내용을 밝힌 것이냐 하면,
그대가 위에서 말하기를 ‘죄인의 업에 의하여 바깥 4대(大) 따위가 그와 같이 전변한다’고 한다면,
무슨 까닭으로 ‘저 중생들의 죄업력(罪業力)에 의하여
안의 자기 심식(心識)이 그와 같이 전변한다고 말하지 아니하는가.
마음의 허망한 분별에서 바깥 4대(大) 따위가 그와 같이 전변한다’고 말한 것이다.
또 게송으로 말하리라.
업이 다른 법을 훈습(薰習)하면
과보가 어찌 다른 장소이리오.
선과 악이 마음을 훈습하거니
어찌 마음을 떠나서 말하랴.
그 게송은 무슨 내용을 밝힌 것이냐 하면,
그대가 허망하게 분별해서 말하기를 ‘저 중생들의 죄업력에 의하여
바깥 4대(大) 따위가 그와 같이 전변하여 저 죄인들에게 갖가지 두려움이 생기게 한다’고 한다면,
무슨 까닭으로 ‘저 중생들의 죄업력에 의하여 안의 자기 심식(心識)이 그와 같이 전변한 것이다’고 그와 같이 말하지 아니하는가.
그러므로 게송에서 ‘업이 다른 법을 훈습하면 과보인들 어찌 다른 장소이리오’라고 말하였다.
그것은 무슨 뜻이냐 하면,
저 지옥 중에서 고통을 받는 중생들의 온갖 죄업은 본마음[本心]에 의하여 지었고 도로 마음 안에 있어서 마음을 떠나지 아니했다는 의미이다.
그러한 까닭으로 악업이 마음을 훈습하고서 도로 마음 안에서 괴로움의 과보를 받는다.
왜냐하면 선ㆍ악의 업은 심식(心識)을 훈습하고,
저 바깥 4대(大) 따위를 훈습하지 않나니 4대(大) 안에는 훈습하는 사실이 있지 않기 때문이다.
어찌 허망한 분별로 ‘4대(大)가 전변하여 4대(大) 중에서 괴로움의 과보를 받는다’고 말하랴.
그러므로 다음 게송에서 ‘선과 악이 마음을 훈습하거니 어찌 마음을 떠나서 말하랴’라고 말하였다.
【문】그대가 위에서 말함과 같이 무슨 까닭으로 ‘저 중생들의 죄업력에 의하여 안의 자기 심식(心識)이 그와 같이 전변한 것이라 말하지 아니하느냐 함과 마음의 허망한 분별로 바깥 4대(大) 따위가 그와 같이 전변함이라’고 말한 그것은 무슨 내용인지를 아함(阿含)에 근거를 두어 알 수 있기 때문이다.
아함이라 함은 부처님 여래께서 말씀하신 언교(言敎)를 뜻함이다.
그것이 무슨 내용이냐 하면,
만일 다만 심식(心識)의 허망한 분별로 바깥 경계를 본 것이요,
빛깔 따위의 바깥 경계로부터 눈의 인식[眼識] 따위가 나온 것이 아니라면
무슨 까닭으로 여래가 경 중에서 ‘눈ㆍ빛깔 따위의 열두 가지 받아들임[入]을 말씀하셨겠는가.
여래께서 12입(入)을 말씀하셨기 때문에 응당 빛깔ㆍ냄새ㆍ맛 따위의 바깥 경계가 있다는 것을 분명히 알 수가 있다.
【답】다음의 게송으로 말하리라.
빛깔 따위 온갖 받아들임[入]을 말함은
교화 받을 만한 중생을 위하심이요,
그보다 앞에서 법을 받은 이에겐
화생(化生)이 있다고 말씀하셨네.
그 게송에는 무슨 내용이 있는가.
그대가 앞에서 말하기를,
‘아함(阿含)에 근거를 두어 알 수 있기 때문에 빛깔ㆍ냄새ㆍ맛 따위인 12입(入)과 바깥의 모든 경계가 모두 다 있다’고 하는데,
만일 그렇다면 저 경의 뜻을 이끌어 인증한 것은 옳지 못하다.
왜냐하면 다시 딴 수다라(修多羅) 중에서
여래가 ‘저 마음 업이 계속하여 끊어지지 않음’에 의하여 ‘화생(化生)하는 중생이 있다’고 말씀하셨으며,
또 다시 딴 수다라에서 말씀하시기를,
‘≺나≻가 없고 중생이 없고 수자(壽者)도 없고 오직 인연이 화합하여 모든 법의 생김이 있다’고 하셨다.
그러므로 게송에서 말하기를,
‘그보다 앞에서 법을 받은 이에겐 화생(化生)이 있다고 말씀하셨네’라고 하였다.
여래가 그와 같이 빛깔 따위의 받아들임[入]을 말씀하신 것은,
앞의 사람들로 하여금 법을 받도록 하기 위하심이니 저 앞의 사람들은
인연인 모든 법체가 공(空)한 것임을 알지 못하기 때문이요,
실로 빛깔ㆍ냄새ㆍ맛 따위의 바깥의 모든 경계가 있다고 말한 것은 아니다.
그러므로 게송에서,
‘빛깔 따위의 온갖 받아들임[入]을 말함은,
교화 받을 만한 중생을 위하심이요’라고 말하였다.
【문】만일에 실로 빛깔 따위의 받아들임[入]이 없다면,
무슨 까닭으로 여래가 경에서 그와 같은 말씀을 하셨는가.
【답】다음의 게송으로 말하리라.
저 본래의 마음 지혜에 의하여
식(識)의 허망으로 바깥 경계를 취하나니
그러므로 여래께서 말씀하시기를
안팎의 온갖 받아들임 있다고 하셨네.
그 게송은 무슨 내용을 밝힌 것이냐 하면 오직 안에 마음의 허망 분별로 빛깔 따위 바깥의 모든 경계가 있다고 봄이니,
그것은 끝없는 마음ㆍ뜻ㆍ의식 따위인 종자(種子)의 전변함에 의하여
허망스레 저 빛깔ㆍ냄새ㆍ맛 따위의 바깥 경계를 보는 것이다.
그러므로 여래께서 그 허망한 두 가지 법에 의하여 그와 같은 말씀을 하신 것이다.
무엇이 두 가지냐 하면,
첫째는 근본 식(識)의 종자요,
둘째는 허망한 바깥 경계 따위이니,
그 두 가지 법에 의하여 여래께서,
‘눈ㆍ빛깔 따위의 받아들임이 있다’고 말씀하셨으며,
그와 같이 차례로 내지 ‘몸의 닿음[身觸]이 있다’고 하셨다.
허망한 마음이 끝없는 옛적부터 오면서 마음ㆍ뜻ㆍ의식 따위인 종자가 전변(轉變)함에 의하여
허망스레 저 빛깔ㆍ냄새ㆍ맛 따위의 바깥의 모든 경계를 보기 때문에
여래께서 그 허망한 두 가지 법에 의하여 그와 같은 말을 하신 것이다.
무엇이 두 가지이냐 하면,
첫째는 근본 식(識)의 종자요,
둘째는 허망한 바깥 경계 따위이니 그 두 가지 법에 의하여 여래께서 ‘몸의 닿음 따위인 받아들이 있다’고 하셨고,
또 차례로 말씀하셨다.
그러므로 게송에서,
‘저 본래의 마음 지혜에 의하여 식(識)의 허망으로 바깥 경계 취하나니,
그러므로 여래께서 말씀하시기를 안팎의 온갖 받아들임 있다고 하셨네’라고 말하였다.
【문】만일 그와 같은 뜻에 의하여 말한들 무슨 공덕과 이익이 있는가.
【답】다음의 게송으로 말하리라.
허망하여 진실함 없다고 관찰하면
그와 같은 이는 아공(我空)에 들어
온갖 다른 법을 관찰한다면
모든 법 ≺나≻ 없음에 들어가리.
그 게송은 무슨 내용을 밝힌 것인가.
성문(聲聞)들로 하여금 저 여섯 감관(六根)과 여섯 대상[六塵]으로 인하여
여섯 가지 인식[六識]을 내나니 눈의 인식은 빛깔을 보고 더 나아가서는 몸의 인식은 닿음을 안다.
어느 한 법이라도 진실이라고 볼 것이 없으며,
더 나아가서는 어느 한 법이라도 진실이라고 느낄 것이 없음을 알도록 하심이다.
교화 받을 만한 중생들로 하여금 그러한 관찰을 하여 인무아공(人無我空)에 들도록 하심이니 그러므로 게송에서,
‘허망하여 진실함 없다고 관찰하면 그와 같은 이는 아공(我空)에 들며’라고 말하였다.
아래의 반 게송인 온갖 다른 법을 관찰한다면 ‘모든 법 ≺나≻ 없음≺法無我≻에 들어가리’라고 한 그 게송은 무슨 내용을 밝힌 것인가.
‘온갖 다른 법을 관찰한다면’이라 함은,
보살이 ‘오직 안의 식(識)만 있을 뿐이라’고 관찰함을 뜻함이다.
어떻게 관찰하느냐,
이를테면 보살이 관찰하기를,
‘바깥의 여섯 대상[六塵]은 있지 않고 오직 안의 식(識)만 있을 뿐이다.
허망하게 안의 감관과 밖의 대상이 있다고 보나 실제로 빛깔 따위 바깥의 대상과 어느 한 법도 볼 수 있는 것이 없으며,
더 나아가서는 실로 어느 한 닿음이라도 느낄 수 있는 것이 없다’고 함이니,
그와 같이 관찰하면 인연과 모든 법체(法體)의 공한 경지에 들어가게 될 것이다.
【문】만일 일체 법이 필경 없다면 무슨 까닭으로 앞에서 말하기를,
‘식(識) 따위만 있다’고 하였는가.
만일 그렇다면 저 식(識) 따위도 역시 없어야 할 것이거늘 무슨 까닭으로 ‘안의 식(識)만이 있다’고 말했는가.
【답】나는 일체의 모든 법이 모두 필경에 없다고 말하지 아니했나니,
그와 같이 하여야만 모든 법의 ≺나≻ 없음[諸法無我]에 들어간다.
【문】만일 그렇다면 어떻게 하여야 모든 법의 ≺나≻ 없음에 들어가는가.
【답】허망한 법을 막아버리기 위한 때문이다.
허망한 법을 막아 버리기 위함이란,
온갖 외도(外道)와 일체 범부들이 허망하게 분별하여 ‘빛깔 따위인 모든 법의 자체가 실로 있다’고 하나니
그러한 허망하게 분별함을 막아버리기 위하여 ‘빛깔 따위인 일체 모든 법이 필경에 공하여 없다’고 말한 것이요,
말 없는 자리도 모두 다 공하여 없다는 것이 아니다.
말 없는 자리란,
이른바 부처님ㆍ여래께서 행하신 자리이다.
그와 같이 오직 참다운 식[眞識]만 있고 다시 그 외의 식(識)은 없다.
능히 그와 같이 분별하고 관찰하여 식(識)의 공함에 들어가지 못하므로 그와 같이 식(識)에 의하여
‘일체 모든 법이 ≺나≻가 없다’고 말한 것이요,
한결같이 참다운 식[眞識]인 ≺나≻를 훼방하여 ‘불성(佛性)인 진실식[實識]이 없다’고 말한 것이 아니다.
【문】그대가 위에서 말한 것과 같다면,
오직 안의 식(識)만 있고 바깥 경계는 없는 것이다.
만일 그렇다면,
안의 식(識)은 취할만한 것이 되는가,
취하지 못할 것이 되는가.
만일 취할만한 것이라면,
빛깔ㆍ냄새 따위의 바깥의 모든 경계와 같을 것이요,
만일 취하지 못할 것이라면,
곧 없는 법이 되리니 어찌 ‘오직 안의 식(識)만 있고 바깥 경계가 없다’고 말하는가.
【답】여래께서 방편을 가지고 차츰 중생으로 하여금 아공(我空)과 법공(法空)에 들어가도록 하시기 때문에
안의 식(識)이 있다고 말씀하셨으나 실로 안의 식(識)을 취할만한 것은 있지 않다.
만일 그러하지 않는다면 곧 아공(我空)과 법공(法空)을 말하지 아니하실 것이다.
그러한 내용으로 허망한 분별로 이 마음으로 저 마음을 알고 저 마음으로 이 마음을 안 것이다.
【문】또,
다시 힐난이 있나니
부처님ㆍ여래께서 그 내용에 의하기 때문에 빛깔 따위 일체의 모든 받아들임[入]이 있다고 말씀하셨으나
실로 빛깔 따위의 모든 받아들임이 있는 것이 아니며,
또 식(識) 따위로써 경계를 능히 취한다.
그러한 까닭으로 빛깔 따위의 받아들임이 없다고 말하지 못한다는 것을 어떻게 알 수 있는가.
【답】다음의 게송으로 말하리라.
저 하나인 것을 볼 수가 없고
많은 것도 역시 볼 수 없으며
화합도 볼 수가 없나니
그러므로 대상[塵]의 법이 없네.
그 게송은 무슨 내용을 밝힌 것인가.
그대가 위에서 말하기를,
‘빛깔 따위의 모든 받아들임이 모두 실로 있다.
왜냐하면 식(識)이 바깥 경계를 능히 취하기 때문이라’고 한,
그 내용은 옳지 않다.
왜냐하면 세 가지 내용에서 빛깔 따위의 모든 받아들임이 없다.
무엇이 세 가지 내용이냐 하면,
첫째는 하나의 미진(微震)이 실로 있다 함이니
저 외도(外道)ㆍ위세사(衛世師)들이 허망하게 분별하되 ‘머리ㆍ눈ㆍ몸 따위를 떠난 외에 실로 신아(神我)가 있듯이
미진(微塵:작은 분자)도 역시 그러하여 빛깔ㆍ냄새 따위를 떠나서도 실로 있느냐’라고 함과 같음이요,
둘째는 ‘실로 많은 미진(微塵)의 차별을 볼 수 있느냐’라고 함이요,
셋째는 ‘많은 미진이 화합된 것을 볼 수 있느냐’라고 함이다.
그것은 무슨 내용을 밝힌 것인가.
만일 저 하나의 미진이 실로 있다면,
곧 볼 수 없는 것이 저 외도 위세사(衛世師)들이 허망하게 분별하되,
‘머리ㆍ눈ㆍ몸 따위를 떠난 외에 하나의 신아(神我)가 있는 것을 볼 수 없듯이 ★★
미진(微塵)도 역시 그러하여 빛깔ㆍ냄새 따위를 떠나서 볼 수가 없다’함과 같다.
그러므로 어느 하나의 진실인 대상도 볼 수 없나니
그러므로 게송에서,
‘저 하나인 것을 볼 수가 없다’고 하였다.
만약에 많은 미진(微塵)의 차별이 실로 있다면,
응당 낱낱 미진을 뚜렷이 볼 수 있을 것이거늘 볼 수가 없으니
그러한 까닭으로 많은 미진의 차별도 역시 볼 수 없다.
그러므로 게송에서 ‘많은 것도 역시 볼 수 없으며’라고 하였다.
만일 ‘많은 미진의 화합을 볼 수 있다’고 한다면,
그도 역시 옳지 않다.
왜냐하면 하나의 미진이 실로 물체가 없기 때문이다.
어떻게 화합하겠는가.
그러므로 성립되지 않는다.
그러므로 게송에서,
‘화합도 볼 수가 없나니 그러므로 대상[塵]의 법이 없네’라고 말한 것이다.
【문】어떻게 성립되지 않는가.
【답】다음의 게송으로 말하리라.
6진(塵)이 동시에 화합한다면
티끌에 곧 여섯 모양이 있을 것이요,
만일 여섯이 하나의 처소뿐이라면
모든 4대(大)는 하나의 티끌이리.
그 게송은 무슨 내용을 밝힌 것인가.
만일 모든 미진(微塵)이 여섯 방위[六方]로부터 와서 6진(塵)과 화합했다고 하자.
만일 그와 같으면 티끌에 여섯 바위가 있을 것이다.
만일 여섯 바위가 있다면 곧 여섯 모양이 있을 것이며,
또 만일 미진(微塵)에 여섯 처소가 있다면 그 외의 티끌을 용납하지 못할 것이다.
그러므로 게송에서,
‘6진(塵)이 동시에 화합한다면 티끌에 곧 여섯 모양이 있을 것이라’고 말하였다.
‘만일 여섯의 미진(微塵)이 하나의 처소뿐이라’면,
하나의 미진인 처소에 여섯의 미진이 있을 것이다.
만일 그렇다면 6진(塵)이 하나의 처소일 것이다.
만일 하나의 처소라면 여섯의 미진을 볼 수 없으리라.
왜냐하면 이 미진이나 저 미진이 차별이 없기 때문이다.
만일 그와 같다면 일체는 거친 물체와 산이나 강 따위의 사물도 역시 볼 수가 없을 것이다.
그러므로 게송에서 ‘만일 여섯이 하나의 처소라면 모든 4대(大)는 하나의 티끌이리’라고 말하였다.
하나의 티끌이라면,
물체 없는 것이 앞에서 답한 것과 같나니 하나의 화합과 많음의 화합을 볼 수가 없기 때문이다.
계빈국(罽賓國)의 비바사(毘婆沙) 스님이 묻기를,
‘나에게는 그와 같은 허물이 없다.
왜냐하면 나의 미진(微塵)은 여섯의 방위와 모양이 없으니
빛깔ㆍ냄새ㆍ맛ㆍ닿음을 떠나서 거친 물체와 함께 화합하여 4대(大) 따위의 온갖 거친 물체를 이루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다음의 게송으로 말하리라.
만일 미진(微塵)과 화합하지 않는다면
저 화합함은 무엇으로 된 것이냐.
미진을 모양이 없다고 말하나
능히 이름은 곧 모양이 있다.
그 게송은 무슨 내용을 밝힌 것인가.
미진이 화합하여 4대(大) 따위를 이루었는가.
미진을 떠나서 별로 4대(大)를 이루었는가.
그것은 무슨 내용을 밝힌 것이냐.
만일 미진으로 4대(大)를 이루었다면,
‘미진은 모양이 없어서 서로 화합하지 않는다’고 말하지 못할 것이요,
만일 ‘미진을 떠나서 4대(大)를 이루었다’고 한다면 저 4대(大)는 바로 어느 집의 4대(大)인가.
만일 그와 같다면,
‘미진은 여섯의 모양이 없다’고 말하지 못할 것이다.
그러므로 게송에서,
‘만일 미진과 화합하지 않는다면 저 화합함은 무엇으로 된 것이냐’라고 말하였다.
그것은 무슨 내용을 밝힌 것인가.
만일 저 미진이 서로 화합하여 4대(大)를 이루지 아니했다면,
‘티끌에는 여섯의 모양이 없고 거친 물체와 함께 화합하여 4대(大) 따위를 이루었다’고 말하지 못할 것이며,
그대가 말한,
‘거친 물체와 함께 화합하여 4대(大)를 이루었다’는 것은,
다만 말만 있을 뿐이고 전혀 실지의 사실이 없다.
그러므로 미진(微塵)이 하나의 물체를 이루지 아니했다.
만일 저 미진이 하나의 물체를 이루지 아니했다면,
‘저 4대(大) 따위의 물체를 이루었다’고 말하는 것이 모두 다 허망하다.
그러므로 게송에서,
‘미진을 모양이 없다고 말하나 능히 이름은 곧 모양이 있다’고 말하였다.
또,
게송으로 말하리라.
방소가 다른 법이 있나니
그를 하나라고 말하지 못한다.
그림자의 가림이 만일 4대가 아니라면
곧 저 둘은 저것이 아니리라.
그 게송은 무슨 내용을 밝힌 것인가.
그대가 위에서 말하기를,
‘미진(微塵)이 화합했다’고 하는 그 뜻이 옳지 않다.
왜냐하면 게송에서 ‘방소가 다른 법이 있나니 그를 하나라고 말하지 못한다’라고 말하기 때문이다.
‘방소가 다른 법이 있다’함은,
동방에 있는 미진의 방소가 서방에 있는 미진의 방소와 다르며,
서방에 있는 미진의 방소가 동방에 있는 미진의 방소와 다르며,
그와 같이 더 나아가서는 상방(上方)ㆍ하방(下方)에 있는 미진의 방소도 모두 다 그와 같다.
만일 미진 자체가 그와 같이 차별된다면 어찌 ‘하나’라고 말하겠는가.
그러므로 게송에서,
‘방소가 다른 법이 있나니 그를 하나라고 말하지 못한다’라고 말하였다.
‘그림자의 가림이 만일 4대(大)가 아니라면’이라고 함은 무슨 내용을 밝힌 것인가.
만일 낱낱의 미진에 방소가 없다면 무슨 까닭으로 동쪽에 해가 뜨면 서쪽에 그림자가 있고,
해가 서쪽에 있으면 동쪽에 그림자가 있는가.
만일 미진이 동쪽과 서쪽 방위의 모양이 없다면
무슨 까닭으로 해가 하나의 모양으로 비치고 그 외의 모양에 비치지 않는가.
그러므로 미진이 모든 4대를 이루지 못한다.
그러므로 게송에서,
‘그림자의 가림이 만일 4대가 아니라면 곧 저 둘은 저것이 아니리라’고 말하였다.
어느 것을 둘이라고 하느냐 하면,
첫째는 광명이 비치는 곳이요,
둘째는 그림자가 가리는 곳이다.
그것은 무슨 내용을 밝힌 것인가.
만일 저 미진이 이쪽의 미진을 장애하지 않는다면,
곧 ‘미진이 방소가 있다’고 말하지 못할 것이다.
왜냐하면 미진은 방소와 분리된 자리와 10방(方)의 차별이 없을 것이니
저 동쪽의 미진이 와서 서쪽의 미진을 능히 장애하지 아니하며,
서쪽의 미진도 역시 동쪽의 미진을 능히 장애하지 않기 때문이다.
만일 저쪽 미진과 이쪽 미진이 서로 장애하지 않는다면,
곧 일체의 미진이 한 곳에 모여 있을 것이다.
만일 일체의 미진이 한 곳에 모여 있다면,
그것은 곧 장소가 없을 것이니 그러한 까닭으로 일체의 4대(大)가 모두 미진이다.
모두가 미진이라면,
곧 볼 수 없는 것이 위에서 말한 것과 같을 것이다.
【문】무슨 까닭으로 ‘4대(大)에 그림자의 가림이 있다’고 말하지 아니하고,
‘미진에 그림자의 가림이 있다’고 말하는가.
【답】내가 도리어 그대에게 묻겠으니,
미진을 떠나서 별로 4대(大)가 있기에 다만 ‘4대에 그림자의 가림이 있다’고 말하는가.
【문】힐난하는 이가 풀이하기를,
‘미진을 떠나지 않고 그림자의 가림이 있다’고 하는가.
【답】미진을 떠나지 않고 4대가 있다면,
곧 4대에 그림자의 가림이 있는 것이로다.
무슨 까닭으로 ‘미진에 저절로 그림자의 가림이 있다’고 말하지 않고,
‘4대 따위에 그림자의 가림이 있다’고 하는가.
【문】그 미진에 그림자의 가림이 있는 것인가.
4댕 그림자의 가림이 있는 것인가.
그러한 사실을 그만 두고서 분별할 필요가 없으나,
빛깔 따위 받아들임[入]의 모양은 전혀 없다고 하지 않아야 합니다.
【답】내가 도리어 그대에게 묻겠으니 어떠한 법이 바로 온갖 받아들임[入]의 모양인가.
【문】힐난하는 이가 풀이하기를,
‘눈 따위의 경계와 푸름ㆍ누름ㆍ붉음ㆍ흰 것 따위의 그와 같은 법이
바로 온갖 받아들임의 모양이라 한다’고 합니다.
【답】나의 뜻이 바로 그러한 사실을 생각하여 중생들을 이익되게 하려고 하던 참이다.
어이하여 눈 따위 안의 받아들임[內入]이 푸름ㆍ누름ㆍ 따위의 바깥 여러 경계(境界)를 취하는가.
그것이 하나의 물건인가.
그것이 많은 물건인가.
만일 많은 물건인가.
만일 많은 물건이라면,
위에서 이미 ‘많은 것을 볼 수 없다’고 했으며,
만일 하나의 물건이라면 역시 취할 수 없다.
다음의 게송으로 말하리라.
하나라면 다님에 차례가 아닐 것이며
취하거나 버림도 같지 아니하리.
차별도 한량없는 장소일 것이요
미세한 것도 볼 수 있어야 하리라.
그 게송은 무슨 내용을 밝힌 것인가.
만일 순일하게 푸른 물건이 누른 것 따위와 섞이지 아니했으며,
만일 사람이 눈의 경계를 분별한다면,
땅에 다님에 ‘차례로 다님이 있다’고 말하지 못할 것이니 그러므로 게송에서,
‘하나라면 다님에 차례가 아닐 것이라’고 말하였다.
그 게송은 무슨 내용을 밝힌 것인가.
만일 순일하게 푸른 것이 하나의 물건이라면,
하나의 발을 들 적에 곧 응당 푸른 곳을 두루 밟아야 할 것이거늘 두루 밟지 못하나니 그러므로 하나가 아니다.
‘취하거나 버림도 같지 아니하리’라 한 그 구절은 무슨 내용을 밝힌 것인가.
만일 순일하게 푸른 물건이라면 발걸음을 옮길 적에 무슨 까닭으로 발이 밟는 곳에만 해당하고 발이 미처 밟지 못한 곳과,
그리고 발걸음의 중간에 있는 빈곳은 무슨 까닭으로 한꺼번에 밟지 못하여 이르는 곳이 있고,
이르지 못하는 곳이 있는가.
또,
만일 하나인 물건이라면,
곧 ‘발이 이곳은 밟고 저 곳은 밟지 못했다’고 말하지 못할 것이니,
그러므로 게송에서 ‘취하거나 버림도 같지 아니하리’라고 말하였다.
‘차별도 한량없는 장소일 것이요’라고 한 그 구절은 무슨 내용을 밝힌 것인가.
만일 순일하게 푸른 한 덩어리가 바로 하나의 물건이라면,
무슨 까닭으로 많은 차별이 있어서 코끼리ㆍ말ㆍ수레 따위가 한 곳을 함께 하지 아니하는가.
만일 하나라면,
흰 코끼리의 머무는 곳에도 응당 말이 머물러 있어야 하리라.
만일 그렇다면 응당 코끼리와 말 따위의 머무는 곳이 차별되지 않으리라.
또,
만일 하나라면,
무슨 까닭으로 코끼리가 이르는 곳에 말 따위가 이르지 못하는가.
또,
만일 하나라면,
코끼리와 말의 중간에 무슨 까닭으로 공간이 있는가.
그러므로 게송에서,
‘차별도 한량없는 장소일 것이다’고 말하였다.
‘미세한 것도 볼 수 있으리라’고 한 그 구절은 무슨 내용을 밝힌 것인가.
만일 저 푸름 따위가 하나의 물건이라면,
저 물 따위의 온갖 푸른 물 체중에 푸른 색깔 따위의 거칠고 미세한 벌레가 있는데,
무슨 까닭으로 다만 거친 벌레만 보이고 미세한 벌레는 보이지 아니하는가.
그러므로 게송에서,
‘미세한 것도 볼 수 있어야 하리라’고 말하였다.
【문】무슨 까닭으로 저 푸름ㆍ누름 따위를 의식으로 사유(思惟)하는가.
【답】그대가 위에서 말하기를 ‘온갖 받아들임[入] 따위의 모양과 푸름 따위의 경계를 허망하게 분별하여 실지로 있다’고 여긴다.
그러므로 내가 미진(微塵)의 차별을 관찰하나 저 미진은 하나의 물건을 이루지 않는다.
하나의 물건을 이루지 않기 때문에 빛깔 따위의 경계를 눈 따위가 취하지 아니하나니
그러므로 나를 이룬다고 한 그것이니 오직 안의 식(識)만 있고 바깥 경계는 있지 않는다.
【문】믿을만한 것에 의하여 ‘있다’고 말한다.
믿을 만한 것에는 네 가지가 있나니 첫째는 직접 봄이요,
둘째는 견주어 앎이요,
셋째는 비유요,
넷째는 아함(阿含)이다.
그 여러 가지 믿을 만한 것 중에서 직접 보아서 믿는 것이 가장 수승하다.
만일에 빛깔 따위의 바깥 경계가 없다면,
어찌하여 세상 사람들이,
‘내가 이 푸른 따위의 물건을 직접 보았다’고 말하는가.
【답】다음의 게송으로 말하리라.
직접 본다는 것 꿈과 같으며
봄과 보일 것이 함께하지 않아서
볼 적에는 분별하지 아니하거늘
어떻게 ‘직접 본다’고 말하랴.
그 게송은 무슨 내용을 밝힌 것이냐 하면,
내가 이미 먼저 말하기를,
‘꿈에서 보는 것 허망하다’고 하였느니 모든 범부들이 번뇌의 꿈속에서 보는 바 사실이 있는 것도 모두 그와 같다.
그러므로 게송에서,
‘직접 본다는 것 꿈과 같으며’라고 말하였다.
‘보는 것[見]과 보이는 것[所見]이 함께하지 않아서’라고 한 그 구절은 무슨 내용을 밝힌 것이냐 하면,
빛깔을 직접 볼 적에 빛깔임을 알지 못함을 뜻함이다.
그것은 무슨 내용을 밝힌 것이냐 하면,
마치 저 푸른 빛깔 따위를 직접 볼적에 이러한 생각을 하되,
‘내가 비록 푸른 색깔ㆍ누른 색깔 따위를 직접 보나 그 때에 푸른 색깔 따위를 보았다’고 하지 않는다는 내용이다.
왜냐하면,
그 다음의 때에 의식(意識)이 분별을 한 후에야 비로소 알게 된다.
의식이 분별할 때에는 눈의 인식 따위가 없나니 눈의 인식[眼識] 따위는 벌써 이미 사라졌기 때문이다.
어떻게 내가 저 푸른 색깔ㆍ누른 색깔 따위를 직접 본다고 말하겠는가.
부처님 법에서는 그러한 이치가 있지 않다.
왜냐하면 온갖 법이 찰나 찰나에 머무르지 않기 때문이다.
빛깔을 볼 적에는 저 의식과 그 경계가 없으며,
의식이 일어날 적에는 저 눈의 인식[眼識]과 그 경계가 없나니
그러므로 ‘네 가지 믿을 만한 것 중에서 직접 보아서 믿을 만한 것이 가장 수승하다’고 말하지 못할 것이다.
그러므로 게송에서 ‘보는 것과 보이는 것이 함께 하지 않아서 볼 적에는 분별하지 아니하거늘 어떻게 직접 본다고 말하랴’라고 말하였다.
【문】그 내용은 옳지 않다.
왜냐하면 무릇 바깥 경계를 보는 것에는 먼저 눈의 인식이 보고,
그 후에야 의식이 기억하여 분별하고 안다.
그러므로 반드시 빛깔ㆍ냄새ㆍ맛 따위의 바깥의 모든 경계가 있나니 그러한 까닭으로 ‘저 바깥 경계가 없다’고 말하지 못할 것이다.
왜냐하면 푸른 것 따위의 바깥의 모든 경계를 보는 것을 푸른 것 따위의 경계를 직접 본다고 말하기 때문이다.
【답】그 내용은 옳지 않다.
왜냐하면 그대가 위에서 ‘먼저 눈의 인식이 보고 그 후에야 인식이 기억하여 분별하고,
안다’고 말한 그 내용은 성립되지 않는다.
왜냐하면,
내가 이미 먼저 말하기를,
‘안의 자기 심식(心識)이 허망하게 분별함으로 바깥 경계가 있는 것이요,
빛깔 따위의 바깥 경계가 없다’고 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위에서 말하기를,
‘눈의 인식이 허망하게 분별함은 꿈속에서 온갖 보는 바를 말한 것과 같다’고 했거니와,
전에 허망하게 분별한 것에 의하여 뒤의 의식이 생각하고 기억한다.
그것은 무슨 내용이냐 하면,
전의 허망하게 빛깔 따위 경계를 분별함에 의하여 허망한 눈의 인식이 마음을 일으켜 상응(相應)하며,
허망한 의식(意識)은 허망하게 분별하여 이러한 생각을 하되,
‘내가 푸른 것 따위의 경계를 분별하여 안다’고 한다.
그러므로 ‘눈이 경계를 보고 의식이 분별을 한다’고 말하지 못할 것이니,
그러한 까닭으로 ‘눈의 인식이 빛깔을 보고 그 후에야 기억하여 생각한다’고 한 그 내용이 성립되지 않는다.
【문】꿈속에서 빛깔을 보고 허망하게 기억하고 생각하는 것처럼,
꿈을 깬 후에도 역시 그러하여 허망하게 분별한다면,
무슨 까닭으로 세상 사람들이 꿈을 보고서는 모두 허망하다고 알며,
꿈 깬 후에 보는 것은 모두 허망하다고 여기지 않는가.
그러므로 꿈을 깬 후에 빛깔 따위를 보는 바가 꿈속에서 허망하게 보는 것과 같지 아니하리라.
【답】다음의 게송으로 말하리라.
먼저 말한 저 허망하게 봄이란
저 허망하게 생각함에 의함이
허망한 꿈을 꾸고 있는 이는
꿈 깨기 전엔 그를 알지 못하네.
그 게송은 무슨 내용을 밝힌 것인가.
그대가 위에서 말하기를 ‘꿈에 빛깔을 보는 것은 모두 허망하거니와
꿈을 깬 후에 보는 것은 모두 그와 같지 않다’고 하여 그 견주어 결정한 내용이 서로 응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꿈속에서 보는 이가 꿈을 깨기 전에는 모두 진실하다고 여기다가
꿈을 깰 적에야 비로소 그것이 허망이라고 알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게송에서,
‘허망한 꿈을 꾸고 있는 이는 꿈 깨기 전엔 그를 알지 못하네’라고 말하였다.
그와 같이 세상에 모든 범부들이 끝없이 오면서 허망하고
뒤바뀐 분별이 모여 훈습한 무명(無明)의 꿈을 꾸게 되어 꿈속에서 진실하지 못하고 허망하게 분별하여 바깥 경계를 보고 진실이라고 여기나니 꿈에서나 꿈을 깨서나 저 경계를 보는 것은 모두가 허망이다.
그것이 무슨 내용으로 된 것이냐 하면,
출세간(出世間)의 다스림인 진실한 지혜를 얻음으로 해서 분별함이 있지 아니하고
온갖 세간(世間)의 빛깔 따위 바깥 법은 모두가 다 허망이라고 실답게 깨달아 알고,
저 출세간의 청정한 진실한 지혜에 의하여 곧 세간과 출세간의 수승한 지혜가 앞에 나타남을 체득하며,
온갖 경계는 모두가 다 허망하다고 실답게 알아봄이니 그와 같은 내용은 꿈과 더불어 다르지 아니하다.
【문】만일에 다만 자기 마음이 그와 같이 전변(轉變)하여 허망한 분별로 바깥 경계를 본 것이요,
그는 진실함이 없다면 무슨 까닭으로 선지식(善知識)을 만나서는 착한 법 연설함을 듣고
악지식(惡知識)을 만나서는 나쁜 법 연설함을 듣는가.
만일 일체의 바깥 경계가 없다면 그가 어떻게 연설하며,
만일 연설하지 않는다면 어떻게 들으며,
만일 듣지 않는다면 그가 어떻게 성립되는가.
【답】다음의 게송으로 말하리라.
번갈아 함께 증상(增上)하는 원인으로
피차의 마음 인연이 합해진 것이다.
무명(無明)이 마음을 덮었나니
그러므로 꿈 깬 결과가 다르네.
그 게송은 무슨 내용을 밝힌 것이냐 하면,
일체 중생이 허망한 분별과 사유(思惟)와 기억에서 그들이 내가 듣는다는 말하나니
저 앞 사람의 말하는 의식(意識)에 의하여 이 듣는 사람의 듣는 의식에서 그와 같은 마음을 일으켜 그들이 ‘내가 들었다’고 말하나,
실로 저 앞의 경제가 있지 않다.
그러면 게송에서,
‘번갈아 함께 증상(增上)하는 원인으로 피차의 마음 인연이 합해진 것이다’라고 말하였다.
【문】만일 꿈속의 허망한 심식(心識)이고 실지인 경계가 없는 것과 같아서 꿈 깰 적에도 역시 그러하다면
무슨 까닭으로 꿈속에서와 꿈 깬 후에 선과 악을 행하는 법과 사랑하거나 사랑하지 않음의 과보가 같지 아니하는가.
【답】게송에서,
‘무명(無明)이 마음을 덮었나니 그러므로 꿈 깬 결과가 다르네’라고 말하였다.
그것은 무슨 내용을 밝힌 것인가.
내가 이미 먼저 말하기를,
‘오직 안의 마음만 있고 바깥 경계가 없다’고 말했나니 꿈속에서와 꿈 깬 후의 마음 차별이 같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바깥 경계 따위의 의하여 선업(善業)과 불선업(不善業)을 이룬 것이 아니다.
【문】만일 저 3계(界)가 오직 안의 마음뿐이고,
몸의 업의 바깥 경계가 없다면 무슨 까닭으로 죽이거나 사냥하는 이들이 돼지와 염소와 그리고 소와 말 따위를 살해하는가.
만일 그가 바로 죽이거나 사냥하는 이들이 돼지와 염소와 소와 말 따위를 살해하는 것이 아니라면
무슨 까닭으로 죽이거나 사냥하는 이들이 살생하는 죄를 얻게 되는가.
그러므로 응당 바깥의 빛깔ㆍ냄새 따위와 몸과 입인 경계가 있을 것이다.
【답】다음의 게송으로 말하리라.
죽이는 일이 타심(他心)에 의하며
또한 자심(自心)에 의하기도 하여
가지가지의 인연에 의해서
자기 심식(心識)을 잃어버리네.
그 게송은 무슨 내용을 밝힌 것이냐 하면,
사람이 비사사(毘舍闍) 귀신 따위에 의하여 마음을 잃어버리기도 하며,
혹은 자기 마음에 의하여 마음을 잃기도 하며,
혹은 사랑스러운 일과 사랑스럽지 않은 일을 기억하여 생각하므로 마음을 잃어버리기도 하며,
혹은 꿈에 귀신이 붙는 것을 보고 마음을 잃어버리기도 하며,
혹은 성인이 신통으로 이리 저리 변화시켜 앞 사람의 마음을 잃어버리게 하기도 한다.
경에서 말씀하시기를 ‘대가전연(大迦旃延) 비구가 사라나왕(娑羅那王)으로 하여금 나쁜 꿈을 꾸게 하였다’고 하며,
또,
비니(毘尼)에서 말씀하시기를,
‘어떤 비구가 밤에 오이 껍질을 밟고서 개구리를 죽였다고 여겼더니
죽어서는 나쁜 갈래(惡道)에 떨어졌다’고 하였다.
그러므로 게송에서,
‘가지가지의 인연에 의해서 자기 심식(心識)을 잃어버리네’라고 하였다.
‘죽이는 일이 타심(他心)에 의하며,
또한 자심(自心)에 의하기도 하여’라고 함을 어떻게 알아야 하느냐 하면,
신선이 성내는 마음으로 비마질다라(毘摩質多羅)ㆍ아수라왕(阿修羅王)을 꾸짖다가 다른 중생을 살해한 일에 의하여 알 수 있다.
그것은 타심(他心)에 의한 것으로서 다른 중생이 마음에서 목숨 뿌리[命根]가 없어졌다고 허망하게 분별함에서이다.
저 몸의 목숨이 계속하거나 끊어짐에 관해서 응당 그와 같이 알아야 한다.
또,
다음의 게송으로 말하리라.
경에서 일찍이 말씀하시기를
단나가(檀拏迦)ㆍ가릉가(迦陵迦)ㆍ마등국(摩燈國)은
신선이 성냄으로 인해 텅 비었나니
그러므로 마음 업이 참으로 중하네.
그 게송은 무슨 내용을 밝힌 것인가.
만일 죽이는 일이 타심(他心)에 의하지 아니하고 자심(自心)에 의하지 아니하여 만일 그와 같다면
무슨 까닭으로 여래께서 마음 업이 참으로 중함을 성립시키려고 하시는가.
그러므로 경에서,
‘우파아리[優波離]ㆍ장자(長者)에게 물으시되,
≺장자여,
어떤 인연으로 단나가국(檀拏迦國)ㆍ가릉가국(迦陵迦國)ㆍ마등가국(摩燈迦國)이 그 나라의 벌판이 텅 비고 쓸쓸하게 되어
중생이나 초목 따위가 없게 된 것은 그대는 일찍이 들은 적이 있는가≻ 하시니 우파아리 장자는 부처님께 아뢰었다.
≺고오타마(瞿曇)시여,
제가 옛적에 들은 바가 있사오니 신선의 성낸 마음에 의하여 그와 같이 한량없는 중생을 살해했다고 하나이다≻’라고 하였으니,
그러므로 오직 의업(意業)만 있는 것임을 알 수 있다.
만일 그렇지 않다면 여래께서 무슨 까닭으로 경에서 그와 같은 말씀을 하셨겠는가.
그러므로 게송에서,
‘경에서 일찍이 말씀하시기를,
단나가(檀拏迦)ㆍ가릉가(迦陵迦)ㆍ마등(摩燈)의 나라는 신선이 성냄으로 인해 텅 비었나니’라고 말하였다.
【문】신선의 성낸 마음에 의하여 신선ㆍ귀신을 믿고 그와 같은 세 나라의 중생들을 살해했으니
신선의 성낸 마음에 의하여 죽은 것은 아니다.
【답】여래가 그대 외도(外道)의 경에서 구학니건자(久學尼乾子)에게 물으시되,
‘3업(業) 중에서 무슨 업이 가장 중한가’고 하시니,
구학니건자는 여래에게 답하되,
‘몸의 업이 가장 중합니다’라고 하였다.
부처님은 니건자에게 말씀하셨다.
‘저 성 안에 있는 중생이 많은가,
적은가.’
구학 외도는 말하였다.
‘한량없고 그지없어서 이루 다 셀 수가 없습니다.’
부처님이 말씀하셨다.
‘니건자여,
만일 어떤 악한 사람이 그러한 여러 중생을 살해하려고 한다면,
며칠 만에 죽일 수가 있는가.’
니건자는 말하였다.
‘1년이나 2년에도 죽일 수 없습니다.’
부처님이 구학니건자에게 말씀하셨다.
‘마등가 나라들의 세 나라 중생에 대하여 그들은 어떻게 죽였는지 그대는 일찍이 들은 적이 있는가.
몸의 업으로 죽였는가.
뜻의 업으로 죽였는가.’
니건자는 말하였다.
‘고오타마[瞿曇]시여,
제가 일찍이 듣자오니 신선이 성낸 마음에서 뜻의 업으로 그러한 수효의 중생들을 죽였다고 하나이다.’
부처님이 말씀하였다.
‘니건자여,
만일 그렇다면 어찌하여 몸의 업이 가장 중하다고 말하는가.’
니건자는 말하였다.
‘그와 같고 그와 같습니다.
저는 자세히 살펴보지 못하고서 잘못 듣고 말하였나이다.’고 하였으니 그러한 까닭으로 ≺나≻라는 내용이 성립됨을 증명한다.
3계(界)가 마음뿐이고 몸의 업과 입의 업이 없다고 한 그것은 무슨 내용이냐 하면,
마치 세상 사람이 말하기를 ‘도적이 산림(山林)이나 마을ㆍ성읍(城邑)을 불태웠다’고 하고,
불이 불태웠다고 말하지 않음과 같다.
그 내용도 역시 그러하여 오직 마음에 의하기 때문에 선과 악의 업이 이루어지나니
그러한 까닭으로 경의 게송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모든 법에서 마음이 근본이요
모든 법에서 마음이 수승하나니
마음 떠나서는 모든 법 없어서
마음뿐이고 몸과 입은 이름뿐이네.
‘마음뿐이고 몸과 입은 이름뿐이네’라 함은,
다만 심식(心識)만 있고 몸과 입의 업은 다만 명자(名字)만 있을 뿐이니 그 실체는 뜻의 업이요,
몸과 입은 명칭을 말할 뿐이다.
【문】만일에 마음만 있고 바깥 경계가 없다고 한다면 그 뜻은 옳지 못하다.
왜냐하면 타심지(他心智)란,
타심(他心)과 타 중생의 마음을 관찰하기 때문이다.
그것은 바로 바깥 경계이거늘,
어찌 ‘바깥 경계가 없다’고 말하겠는가.
또,
어떤 이가 힐난하기를,
‘타심지란,
마음을 실로 아는 것이 되는가.
실로 아는 것이 아닌가’하고.
만일 알지 못한다면 어떻게 ‘타심(他心)을 안다’고 말할 것인가.
만일 실로 안다면 어찌 ‘바깥 경계가 없다’고 말하겠는가.
【답】다음의 게송으로 말하리라.
타심(他心)으로 경계를 안다는 것은
실답게 깨달아 아는 것 아니니
식(識)의 경계를 떠난 것 아니라
부처님만이 실답게 아시기 때문이다.
그 게송은 무슨 내용을 밝힌 것이냐 하면,
타심지(他心智)란,
실답게 아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왜냐하면 자기 속마음이 허망하게 분별하여 타심(他心)이라고 여기기 때문에 능히 알지를 못한다.
왜냐하면,
자기의 마음ㆍ뜻ㆍ의식(意識)이 섞였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게송에서 ‘타심(他心)으로 경계를 안다는 것은 실답게 깨달아 아는 것 아니니
식(識)의 경계를 떠난 것 아니라’고 말하였다.
【문】일체 성인이 모두 타(他) 중생의 마음을 능히 알지 못하는가.
아는 것이 있는가.
【답】게송에서,
‘부처님만이 실답게 알기 때문이네’라고 말하였다.
그것은 무슨 내용을 밝힌 것이냐 하면,
저 부처님 경지의 여실(如實)한 과체(果體)와 말을 초월하여 수승하고 미묘한 경계는
부처님만이 능히 알고 그 외의 사람들은 알지 못하나니
세간에서 타심지(他心智)를 얻은 그는 저 두 법에 대하여 실답게 알지 못하기 때문이며,
그는 능히 취하는[能取] 경계와 취할 바[所取] 경계를 허망하게 분별하기 때문이다.
저 세간 사람들이 허망하게 분별하는 그것은 바로 식(識) 뿐이니 그는 한량없고 그지없어서
매우 깊은 경계이고 심식(心識)으로 측량할 만한 것이 아니다.
다음의 게송으로 말하리라.
내가 지금 이 유식론을 짓는 것이
내가 생각해 낸 것 아니니
부처님의 미묘하고 깊은 경지의
복덕을 중생에게 베풀려 함이네.
그 게송은 무슨 내용을 밝힌 것인가.
그것은 바로 부처님의 매우 깊은 경계이고 우리네들의 생각으로 알 바가 아니다.
왜냐하면 저것은 마음ㆍ뜻ㆍ의식으로 생각할 만한 경계가 아니기 때문이다.
만일 그렇다면,
그것은 바로 누구의 경계인가.
게송에서 말하기를,
‘부처님의 미묘하고 깊은 경지’라고 하였다.
그것은 무슨 내용을 밝힌 것이냐 하면,
부처님ㆍ여래께서는 일체종지(一切種智)로써 온갖 알아야 할 경계에 대해서 모두 실답게 알기 때문이다.
○ [pt op tr]
Lab value 불기2564/04/19/일/01:58
○ 음악공양, 나무불, 나무법, 나무승 mus0fl--.Dalida - Paroles Paroles.lrc
● 아무래도 실답다고 여기게 되는 6하원칙 현실과 유식무경
현실에서 어떤 사건 사고가 발생한다.
그러면 기자가 이 사건 사고를 기사로 보고한다.
이 때 되도록 빠짐없이 갖춰 기술해야 할 요소로 6 하원칙을 제시한다.
누가(무엇이) 무엇때문에, 언제, 어디서, 무엇(누구)를 무엇(누구)에게, 어떻게 했다.
이런 형태다.
그것이 연속적인 사건일 때는 이런 내용을 시간순으로 또는 인과 형태로 계속 서술하면 된다.
『유식론』에서는 한편으로 유식무경을 제시한다.
그런데도 대부분 이런 현실이 실답다고 잘못 여긴다.
그런데 그렇게 실답게 여기게 되는 그 사정이 앞의 6하원칙의 사정과 같다.
그래서 이것을 이해하려면
사과를 하나 손에 들고 옆에 있는 영희에게 건네면서
왜 이 현실을 유식무경이라고 하는지를 이해해야 한다.
자신이 사과를 손에 들었다고 할 때 이것은 유식무경이라고 한다.
이 때 처음 자신이 손을 사과에 갖다 댈 때 손에서 촉감을 느끼게 된다.
그런데 왜 자신의 눈으로 보는 사과가 손이 닿은 대상이 아니라고 하는가를 먼저 이해해야 한다.
이 상황이 오직 자신마음이고 이 안에 대상이 없어서 유식무경이라고 한다.
그렇다면 그 다음 그 사과를 영희에게 건넬 때 과연 영희는 무엇을 받았는가를 해명해야 한다.
만일 이 상황이 유식무경이라면
사과를 받은 영희는 과연 내 마음의 어떤 부분을 어떻게 받았는가.
또 어떤 사정으로 영희는 내가 받은 사과를 먹게 되는가.
이 사정을 설명할 수 있어야 한다.
처음에 유식무경을 이해하는 것도 어렵다 .
그런데 앞과 같이 자신이 사과를 영희에게 건네는 상황이
왜 그렇게 일어나는가를 설명하기는 더욱 어렵다.
그래서 생사에서 벗어나는 일이 쉽지 않다.
또 하나 추가해보자.
자신이 이 상황에서 영희와 자신을 본다.
그런데 그 영희가 그 상황에 있다고 여기는 그 상황도 역시 유식무경이다.
그렇게 있다고 여긴 영희가 자신의 마음이다.
그러니 그 상황에 무엇때문에 영희가 있다고 하는가도 함께 해명해야 한다.
이런 내용을 지금껏 수없이 반복했다.
정리해서 링크로 거는 작업을 통해 링크로 연결하고 생략하고자 한다.
-> [아래에 붙임]
그런데 이것을 해명하는 경우 또 다른 문제가 이어지게 된다.
그래서 다음과 같은 큰 줄기만 대강 제시하고 마치기로 한다.
먼저 무슨 근거로 유식무경이라고 하는가를 잘 이해해야 한다.
현실에서 자신이 대하는 것 일체가 자신의 마음내용이다.
그리고 그 안에 그것을 얻게 한 외부 대상이 없다.
그 사정을 먼저 정확하게 이해해야 한다.
그리고 앞의 문제를 이 바탕에서 설명할 수 있어야 한다.
즉 사과를 집어서 영희에게 건넨다. 그 때 영희가 그 사과를 받아서 먹는다.
그것은 자신의 마음안 내용이다.
그런데 왜 그 사과에 손을 대면 왜 그 순간 촉감을 얻는가.
그리고 왜 영희가 자신의 마음에 있다고 여기게 되는가.
그리고 자신이 사과를 건네면 그 영희가 그 사과를 받는 일이 있는가.
그리고 누구나 사과를 대해 취해 먹으면 맛을 느끼게 되고 배가 부른다.
이런 현실을 위 바탕에서 설명해야 한다.
한마디로 기자가 6하원칙에 의해 기술하는 내용이 왜 그처럼 일어나는가.
그리고 수없이 많은 주체가 그 사실을 그렇다고 받아들이게 되는가.
이런 현실 사정을 잘 해명해야 한다.
그렇다고 앞의 사실이 바뀌는 것은 아니다.
그런데 이것을 잘 이해하고 해명해도 문제가 남게 된다.
일반인이 앞과 같은 상황에서 사과를 있다고 잘못 여긴다.
그리고 사과를 건네는 자신이나 철수가 있다고 잘못 여긴다.
그리고 그 사과를 받는 영희가 있다고 잘못 여긴다.
그리고 사과가 여기에 있다가 저기로 옮겨가는 현상도 있다고 잘못 여긴다.
여기 유식론에서는 유식무경임을 제시한다.
그래서 그 일체가 모두 자신의 마음 현상임을 제시한 것이다.
즉 일반인이 이해하는 그런 것이 아니다.
그런데 그렇다고 잘못 여긴다.
여기에 이미 살핀 다른 경전의 내용도 함께 추가해서 이 문제를 살펴야 한다.
이미 반야경전에 등장하는 수보리존자.
그리고 『중론송』 등에 등장하는 용수보살님,
그리고 『유마힐소설경』에 등장하는 유마힐거사님,
또 각 경전에 수도 없이 등장하는 문수보살님 등이 이런 사정을 제시한 바 있다.
이 분들도 그런 현실에 그런 내용을 본래 차별없이 얻을 수 없음을 제시한다.
그런데 문제는 일반인이 이 상황에 그런 주체와 그런 대상과
그런 행위 내용이 그렇게 있다고 잘못 여긴다.
이것이 문제다.
그래서 그렇게 경전에서 제시한 내용이
이 상황에 무엇을 어떻게 하라고 하는가를 잘 파악해야 한다.
일체가 다 마음이고, 외부대상이 없다.
그 각 주체가 그 상황에 있다고 여기는 내용들은 본래 하나도 얻을 수 없다.
그래서 사정이 본래 그러함을 잘 이해했다면 이후 어떻게 해야 하는가가 이어져야 한다.
이 부분을 주의해야 한다.
본 바탕에서 그런 것을 일체 얻을 수 없다.
현실 내용도 마음 내용일 뿐이다.
그래서 그런 내용을 100% 다 취하면 다음처럼 임해야 할 것처럼 잘못 여기기 쉽다.
즉 그런 바탕에서는 그런 본 사정을 잘 파악하거나 파악하지 못하거나 다 차별을 얻을 수 없다.
그리고 그런 사정을 그렇게 제시하거나 하지 않거나 모두 차별을 얻을 수 없다.
그리고 그런 바탕에서 이렇게 하거나 저렇게 하거나 모두 무방하다.
또 아무 것을 안 해도 무방하다. 그러니 현실 그대로 방치해두자.
앞 바탕을 100% 받아들이고 임하면 위처럼 생각하고 임하는 것이 옳다고 해야 할 듯하다.
그래서 과연 이런 내용을 제시하는 경전과 논서가
이런 내용을 제시하는가가 문제다.
전혀 그렇지 않다.
오히려 그런 바탕에서 수행을 더 열심히 잘 해야 함을 제시한다.
그것도 그냥 하면 안 된다.
우선 앞과 같이 그 모든 내용을 본래 얻을 수 없음을 잘 이해해야 한다.
그리고 그 일체가 유식무경인 사정을 잘 이해해야 한다.
모르는 것과 아는 것이 차별이 없다. 그래도 알아야 한다.
그런 사정 때문에 그 내용도 잘 설해 이해시켜야 한다.
설하거나 설하지 않거나 본 바탕에서는 차별이 없다.
그렇지만 그 내용을 잘 설해서 이해시켜야 한다.
그리고 다시 그런 바탕에서 집착을 잘 제거해야 한다.
집착을 제거하거나 않거나 본 바탕에서는 차별이 없다.
그래도 위와 같은 사정을 잘 이해하고 집착을 잘 제거해야 한다.
그리고 수행을 하는 것과 하지 않는 것은 본 바탕에서 차별이 없다.
그래도 위와 같은 사정을 잘 이해하고 그런 수행들을 원만히 잘 성취해야 한다.
또 수행을 행한다해도 그것만으로 부족하다.
그 수행마저도 상을 취하지 않고 무소득을 방편으로 하여 그 수행들을 잘 성취해야 한다.
그래야 그 수행이 원만히 성취될 수 있고 생사고통을 벗어날 수 있다.
그리고 그외 무량한 복덕과 수명과 지혜를 구족하고 중생을 잘 제도해나갈 수 있다.
그런데 앞의 입장에서 왜 이런 내용을 제시하게 되는가를 다시 잘 이해해야 한다.
본래 본 바탕이 공하고 차별을 얻을 수 없다.
현실에서 한 주체가 얻는 내용은 그 일체가 다 그 주체 마음안 내용이다.
그리고 설령 그 내용을 그처럼 말하지 않거나, 그것을 모르거나, 알거나 다 마찬가지다.
그런데 사정이 그런데도 수행자는 '하필이면' 그런 사정을 잘 파악해야 한다.
그리고 어차피 다 차별없어서 수행을 하거나 않거나, 다 무방할 것 같다.
그렇지만, '하필이면' 그런 바탕에서 그런 사정을 잘 파악하고 수행을 잘 성취해야 한다.
그래서 왜 사정이 그러한가를 다시 잘 파악해야 한다.
그 사정이 이미 앞에서 살핀 내용이다.
본 바탕은 현실과 같은 내용을 얻을 수 없고 차별없이 공하다.
그리고 현실에서 한 주체가 얻는 내용은 유식무경이다.
즉 그 주체의 마음내용이다. 그리고 그 안에 그런 내용을 얻게 한 외부대상이 없다.
사정이 이렇다.
그래서 한마디로 실답지 않다.
마치 침대에 누어서 바다나 황금꿈을 꾸는 상황과 같다.
심지어 밤에 보는 달도 이 사정이 같다.
돗수가 다른 색안경을 준비해 이것을 썼다 벗었다하면서 달을 본다고 해보자.
그 때마다 그 모습이나 색이 바뀐다.
그리고 이것이 자신의 마음 밖에 있는 외부대상이라고 가정해보자.
그렇다면 자신은 색안경을 하나 쓰고 벗음으로써 그 달을 바꾼 것이라고 해야 한다.
그런데 그렇지는 않다.
그리고 달 하나가 그렇듯 세상 일체가 다 그렇다.
거리에 서서 보는 가로수나 빠른 속도로 달리는 자동차도 그렇다.
자신이 보는 자신이나 영희 철수가 다 마찬가지다.
그래서 이런 현실에서 그런 각 부분을 그런 생각을 바탕으로 붙잡고 상을 취하면 안 된다.
그리고 그런 바탕에서 업을 행해 나가면 안 된다.
그렇게 되면 잘못된 망집을 바탕으로 업을 행한 것이 된다.
그래서 생사고통에 묶이게 된다. 이것이 혹-업-고의 관계다.
이것이 하나같이 실답지 않다. 그런데 그렇게 된다는 것이 문제다.
그래서 처음에 유식무경인 사정을 잘 이해해야 한다.
그런데 문제는 다음이다.
아무리 본 바탕이 공하고 현실일체가 유식무경임을 이해해도
그 현실이 실답게 여겨진다.
그 사정을 앞에서 제시한 것이다.
물론 그 현실 하나하나 내용은 꿈과 같이 살답지 않다.
그렇지만 실답지 않다는 점이 꿈과 '비슷하고 같을' 뿐, 정작 꿈은 아니다.
즉 꿈과는 달리 현실은 대단히 실답게 여기게 되는 사정이 있다.
즉 기자가 6 하 원칙으로 제시한 내용처럼
그 내용이 수없이 많은 주체에게 같은 조건 같은 형태로 반복된다.
그래서 일반인 대부분이 현실을 꿈과는 달리 대하게 된다.
그래서 사정이 앞과 같은데 왜 이렇게 되는가를 다시 이해해야 한다.
이것을 앞 부분에 살피고자 한 것이다.
즉, 아무리 현실 내용 하나하나가 실답지 않은 본 사정을 그렇게 이해해도
그런 현실 사정이 크게 달라지지는 않는다.
이는 마치 게임기 사정과 같다.
게임기 안에서 나타나는 내용이 하나같이 실답지 않다.
그러나 아무리 그렇다해도 그 게임 안에서는 각 내용이 그런 형태와 관계로 반복해 나타난다.
예를 들어 어떤 버턴을 누르면 게임화면에서 황금 아이템이 얻어진다.
또는 폭발이 일어난다. 그것은 하나같이 실답지 않다.
그러나 아무리 그렇다해도 그런 관계로 무한히 반복해서 그런 내용이 반복해 나타난다.
그래서 경전에서도 이 사정을 그처럼 제시한다.
한번 행한 업은 무량겁을 두고 사라지지 않고 그 과보를 받게 된다.
이런 내용이다.
앞에서 열심히 그런 내용을 본래 얻을 수 없고 공하다고 제시했다.
그리고 그것은 유식무경이라고 제시했다.
즉, 마음내용이라고 제시했다.
그렇다고 이런 내용이 무량겁에 걸쳐 반복해 겪는 생사고통을 부정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그 반대다.
본 바탕이 공하고 유식무경이다.
그런데 아무리 사정이 그렇다해도,
생사현실에서는 그런 실답지 않은 생사고통을
무량겁을 두고 그런 형태 그런 관계로 반복해 겪는다.
그 하나하나는 본래 꿈처럼 실답지 않다.
그러나 그런 내용이 무량겁에 걸쳐 반복된다.
그리고 수많은 이들이 매순간 그것을 실답게 진짜처럼 여기고 대하게 된다.
그리고 이 부분이 바로 문제다.
사정이 이와 같다.
그리고 이런 현실에서 겪게 되는 고통을
일체개공 유식무경 이런 내용만을 이해한다고 이 생사고통을 곧바로 쉭하고 벗어날 수 없다.
본래는 원칙적으로 위 내용만으로 곧바로 일체고액을 벗어나야 한다.
그것이 관자재보살님이 제시하는 도일체고액, 능제일체고의 방안이기도 하다.
그런데 일반의 현실 사정이 그렇지 못하다.
그 사정이 여기에 제시되고 있다.
아무리 본 바탕이 차별없이 공하고, 유식무경이라고 해도
매 순간 대하는 현실은 대단히 실답고 진짜처럼 여겨진다.
바로 이 부분이다.
그래서 위 내용을 바탕으로 그것을 100% 다 취해
현실에 제멋대로 임하면 대단히 위험해진다.
이른바 악취공견에 바탕해 수행하는 형태가 된다.
이 생사현실 그 어느것이나 그 일체가
어차피 차별없이 공하고 유식무경이다.
그런데 사정이 그렇다고 그렇게 임한다고 하자.
그렇게 되면 매 순간 하필이면 끔직한 생사고통을 무량하게 겪는 상황에 묶이게 된다.
일체가 차별없이 공하다.
알고보면 그것은 하나같이 실답지 않다.
그럼에도 무량겁에 걸쳐 그런 관계 그런 형태로 반복된다.
그런 가운데 실답지 않은 그 내용을 대단히 실답게 여기고 대하게끔 된다.
그래서 각 주체는 지금 현실처럼
매 순간 그 현실을 대단히 실답게 여기고 마치 진짜인것처럼 여기게끔 된다.
그리고 그 주체는 하필이면 매 순간 극심한 고통을 실답게 받는 상황에 묶인다.
이것이 바로 생사현실 문제다.
그래서 이것을 앞 내용만 이해하고 나서 그대로 방치하면 안 된다.
알고보면 바로 이 생사고통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위 내용들의 이해가 필요했다.
그런데 그 내용만 이해한다고 이 문제가 쉭하고 해결되지 않는다.
그래서 유식무경과 일체개공과 같은 내용을 잘 이해한 바탕에서
현실에서 행하기 어렵다고 여기는 수행을 하나하나 잘 성취해가야 한다.
따라서 앞에 제시한 내용이 제멋대로 아무렇게 해도 무방하다는
결론을 제시하고자 하는 것이 아님을 주의해야 한다.
그리고 앞에 제시한 내용의 이해나 수행 전반이 전체적으로 모두 잘 이뤄저야 한다.
일체가 다 차별없이 공함을 제시하는
문수보살님이나 유마힐 거사님도 그 입장이 마찬가지다.
일체가 다 유식무경임을 제시하는 입장도 그 입장이 마찬가지다.
사정이 그렇기 때문에 아무렇게 해도 무방하다고 이 내용을 제시하는 것이 아니다.
앞 내용을 바탕으로 하면 그렇게 해도 될 것처럼 잘못 여기기 쉽다.
일체가 다 자신의 마음내용이다. 본 바탕은 다 차별없이 공하다.
지금까지 영희나 철수나 사과라고 여긴 것도 알고보니 다 자신 마음안 내용이다.
그렇기에 현실에서 아무 것이나 취해 아무 것이나 다 때려 부셔도 될 것도 같다.
그런데 그것이 아니다.
오히려 일반적으로 행하기 어렵다고 여기는 수행을
이런 내용을 잘 이해한 바탕에서 원만히 잘 성취해야 한다.
또 그러기 위해서 이런 본 바탕의 사정을 잘 이해해야 한다.
그래야 실답지 않은 생사고통을 무량겁에 걸쳐 극심하게 받아나가지 않게 된다.
그 사정을 앞에서 기자가 제시하는 6 하원칙이 제시하고 있다.
본래 그런 것을 얻을 수 없고 실답지 않다.
그런데 그것이 하나같이 실답게 진짜처럼 잘못 여기고 대하는 것이 문제다.
그리고 그런 상태로 무량겁을 걸쳐서 수많은 주체가 반복해서 대하게 된다.
따라서 앞과 같은 본 바탕의 사정을 잘 이해하고 이를 수행으로 잘 해결해야 한다.
이 부분을 잘못 생각하면
본 바탕이 공하고 유식무경임에도 대단히 위험해진다.
자신이 그런 사정을 100% 잘 이해해 받아들이고
이런 생사고통을 잘 극복해도 사정은 마찬가지다.
다른 일반 생명 대부분은 전혀 그렇게 임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이것이 생사고통을 무량하게 받아나가는 중생이 처한 현실이다.
어차피 일체가 유식무경이고 일체개공이고 어차피 차별이 없다.
그래서 이것만 강조하면 사정이 그렇기에
생사고통을 겪는 현실을 그대로 방치해도 무방할 것도 같다.
그런데 현실 사정이 앞과 같이 6 하원칙에 따라 기술되는 형태로
무량하게 반복하기에 사정이 그렇지 않다.
즉, 이것을 방치해두면 곤란하다.
그것이 그렇게 무량하게 반복해도,
그 하나하나가 그런 사정으로 실답지 않다는 사정을 이해해야 한다.
그렇기 때문에 그런 사정을 이해할 수 있도록 잘 내용을 제시해주어야 한다.
그래서 일체개공이나 유식무경인 사정을 각 주체가 잘 이해해야 한다.
그리고 그것만으로 모든 것이 다 해결되지 않는다.
따라서 그런 바탕에서 생사고통을 '예방'할 수 있는 수행을 잘 성취해나가야 한다.
그 수행도 원만히 성취되려면 역시 그런 사정을 잘 이해해야 한다.
그래서 상을 취하지 않고 무소득을 방편으로 그런 수행을 행해 나가야 한다.
그리고 수행에서 만나는 온갖 어려움도 그런 바탕에서 잘 극복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 본 바탕의 일체개공이나 유식무경을 99% 취한 가운데
1% 정도를 망집에 바탕해 엉터리로 이해하는 현실에 눈높이를 맞추고 임해야 한다.
그래야 수행자자신도 생사현실에서 어려움을 대할 때 물러나지 않게 된다.
그리고 안인을 성취하고 무생법인을 증득할 수 있게 된다.
물론 처음부터 본 바탕의 이런 내용을 100% 취해서 수행자 자신만은 생사에서 벗어날 수도 있다.
그렇지만, 100%를 그렇게 다 취하면 다른 중생을 제도해나가기 곤란하게 된다.
그래서 아무리 사정이 그래도 수행자는
중생들이 생사고통을 겪는 생사현실에 들어가 눈높이를 맞추고 임해야 한다.
그래서 아무리 실답지 않아도 생사현실의 1 %를 취해야 한다.
그렇지만 또 사정이 그렇다고 망집을 일으킨 중생과 완전히 같아지면 곤란하다.
그렇게 되면 수행자 자신이 오히려 생사고통을 받는 상태에 처해 제도를 받아야 할 상태가 된다.
그래서 위와 같이 본 사정을 잘 이해하고 수행을 잘 성취해가며 생사현실에 임해야 한다.
그렇게 되면 이후 그런 이해를 바탕으로 온갖 생사현실 일체를 모두 다 극락과 같은 상태로
평안히 대할 수 있다.
본래 지옥과 극락이 둘이 아니고 차별이 없다.
그래서 수행자가 이런 사정을 잘 이해하고 그 본 바탕의 사정을 99% 취하고
생사현실에서 수행을 원만히 성취해야 한다.
그렇게 임하면 지옥도 극락처럼 임하게 될 수 있다.
그런데 그 반대로 임하고 수행마저도 행하지 않고 제멋대로 임하면 그 반대가 된다.
그 경우는 극락상태마저도 지옥으로 여기고 그 상태에서 고통을 겪어 나가게 된다.
그래서 대단히 위험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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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음현상에 대한 논의 - 전체 내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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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과 색의 의미에 관한 논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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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현량상위과(現量相違過)
현신(現身)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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