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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진리와실천
불기2564-08-20_종경록-K1499-041 본문
『종경록』
K1499
T2016
제41권
● 한글대장경 해당부분 열람I
● 한글대장경 해당부분 열람II
○ 통합대장경 사이트 안내
○ 해제[있는경우]
● TTS 음성듣기 안내
※ 이하 부분은 위 대장경 부분에 대해
참조자료를 붙여 자유롭게 연구하는 내용을 적는 공간입니다.
대장경 열람은 위 부분을 참조해주십시오.
『종경록』
♣1499-041♧
제41권
♥아래 부분은 현재 작성 및 정리 중인 미완성 상태의 글입니다♥
불교기록문화유산 아카이브
宗鏡錄卷第四十一 ...
K1499
종경록 제41권
연수 지음
송성수 번역
【문】 대저 이 종(宗)은 어떻게 나아가 들어야 이내 상응(相應)하게 되는가?
【답】 향해 가면 등지고 가까이 가면 떨어지며 취하면서도 다시 잃고 급하면서도 다시 더디나니,
천(千) 성인이 팔짱끼고 있으면서 견주어 보는 것이 없고 한 문으로 깊이 들어가면서 깨닫고 아는 것을 잊는다.
이것이 바로 마음속에서 스스로 증득하는 법문이요 문답을 기다려서 얻는 것이 아니다.
마치 『법화경(法華經)』의 게송에서 이르되
“나의 뜻이야말로 측량하기 어려워서/
또한 능히 묻는 이도 없나니/
묻는 이 없는데도 스스로 말하며/
행한 바의 도(道)를 칭탄하느니라”
고 함과 같다.
그런 까닭에,
선덕(先德)이 이르되 “여러 조사(祖師)가 함께 전하고
모든 부처가 청정하게 스스로 깨달은 거룩한 지혜인 진여 묘심(眞如妙心)은
세간의 문자로 얻는 바와는 같지 아니하나니,
만일 이 진실한 법성(法性)을 깨침이 있는 이면
이 사람이야말로 3세(世)의 모든 부처와 일체 중생들은 동일한 법계(法界)요
본래부터 평등하여 항상 변하지 않는 줄을 분명히 안다”고 했다.
앞의 조산(曹山) 화상의 게송에서 이르되
“인연을 좇아 얻음을 거듭하면 상응함이 빠르고/
바탕에 나아가 기연(機緣)을 녹이면 도(道)는 도리어 더디다/
문득 일어나며 본래 처소가 없는데/
우리 스승이 잠시 동안 부사의(不思議)함을 말씀했네”
라고 했다.
그러므로 알라.
천 성인 모두가 이 한 생각의 마음이 일어날 때에 마침내 얻을 수 없는 이것이 참된 부사의라고 일컬었나니,
이를 여의고는 반드시 따로 수승함이 없다.
이와 같이 아는 이면 어찌 빠르지 않겠으며,
어찌 녹아 없어짐을 기다려서야 비로소 도(道)를 볼 수 있겠는가.
만일 곧장 그 일을 보지 않고 뜻으로 이해하고 정(情)으로 구하려 하면,
마치 토끼 뿔로 된 활에 거북 털로된 화살을 메워 손이 없는 이가 수미산을 쏘아 부수려는 것과 같고,
마치 모래로 짠 기름을 부어 연기 없는 불을 붙여서 술이 새는 잔 안에다 놓아두고서 철위(鐵圍)의 어둠을 비추려는 것과 같나니,
한갖 미치광이의 마음을 부림이라 그렇게 될 수 있는 이치가 없으리라.
그러므로 『사익경(思益經)』에서 이르되 “물었다.
‘어떤 법으로 도를 닦습니까?’ 대답했다.
‘보고 듣고 깨닫고 아는 법으로써 하지도 않고 얻음으로써 하지도 않고 증득함으로써 하지도 않으며 온갖 법에서 모양도 없고 보임도 없음을 수도(修道)라 한다’ ”고 했다.
『화엄소(華嚴疏)』에서 이르되 “돈교(頓敎)란 온통 법의 모양[法相]을 말하지 않고 참된 성품[眞性]을 밝힐 뿐이다”라고 했다.
8식(識)의 차별된 모양이 없다 함은,
해석에서 이르되
“8식의 심왕(心王)조차도 오히려 차별이 없거든,
하물며 마음으로 변한 데에 어찌 있어야 되겠는가”라고 했다.
마음이 나면 갖가지 법이 나고 마음이 사라지면 갖가지 법이 사라진다.
그러므로 『기신론(起信論)』에서 이르되
“온갖 모든 법은 망념(妄念)에 의지하여 차별이 있을 뿐이니,
만일 마음의 망념만 여의면 온갖 경계의 모양이 없다.
그러므로 온갖 법은 본래부터 언설(言說)의 모양을 여의었고
이름의 모양을 여의었고
마음으로 반연하는 모양을 여의어서 마침내는 평등하여 변하거나 달라짐이 없나니,
오직 이 한 마음일 뿐이기 때문에 진여라고 한다.
온갖 언설로써 이름을 붙이고 진실이 없으며 망념만을 따르는 것이어서 얻을 수 없기 때문이다”라고 했다.
그런 까닭에,
소(疏)에서 이르되
“온갖 있는 바는 바로 망념일 뿐이요,
온갖 법계는 바로 말이 끊어졌을 뿐이다”라고 했다.
그러므로 『기신론』에서 이르되 “진여라고 말하는 것도 역시 모양이 없다.
언설의 극치(極致)는 말로 인하여 말을 보내겠거니와,
이 진여의 본체는 보낼 만한 것이 없나니 온갖 법이 모두 한 가지로 여여(如如)이기 때문이다.
알아야 한다.
온갖 법은 말로는 할 수도 없고 생각할 수도 없기 때문에 진여라고 한다”고 했다.
온갖 법의 성품은 모두가 언설을 여의었기 때문이고 역시 4종법계(四種法界)에 통하여 모두 말로는 설명할 수 없으며,
이름으로는 물건을 얻는 공(功)이 없고 물건으로는 이름에 해당하는 진실이 없나니,
이치가 본래부터 말이 없기 때문이다.
현상[事]과 본체[理]가 서로 통한지라 현상과 본체라는 설명을 지을 수도 없고 현상과 현상이 상즉(相卽)한지라 하나와 여럿이라는 설명을 지을 수도 없다.
마치 능가(楞伽)에서와 같이 비록 다섯 가지의 법을 밝히기는 했으나,
명(名)ㆍ상(相)ㆍ망상(妄想)ㆍ정지(正智)ㆍ여여(如如)의 다섯 가지는 모두가 비고 고요하다.
왜냐하면 진여에 미혹하여 명상을 이루는지라
망상 이것이 생기거니와
명상이 본래 여여함을 깨치면 망상이 문득 지혜와 일치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명ㆍ상과 망상은 없고 여여한 지혜일 뿐이니,
지혜는 여여로 인하여 성립된지라 지혜의 체성 또한 공하고,
여여는 지혜를 빌려서 밝아지는지라 본래부터 항상 고요하다.
때문에 다 같이 공하다.
하물며 8식(識)을 현상에서 보면 모두가 인연으로 생기되 성품은 공하며
나의 법이 있음으로 인하여 둘째의 나 없음을 말하거니와,
나조차도 오히려 얻을 수 없거늘 나 없음이 어찌 존재하겠는가.
그러므로 『중론(中論)』의 게송에서 이르되
“모든 부처는 혹은 나를 말하기도 하고/
혹은 나 없음을 말하기도 하나/
모든 법 참 모습 안에는/
나도 없고 나 아님도 없다”고 했다.
때문에 쌍으로 부정한다.
소(疏)에서 이르되
“교를 꾸짖고[訶敎] 여의기를 권하며[勸離]
모양을 무너뜨리고[毁相] 마음이 없어진다[泯心]고 함에서,
교를 꾸짖는다 함은 마음으로써 마음에 전하고 문자에 있지 않기 때문이다.
여의기를 권한다 함은 법을 여의게 하는 것이니,
법이 비록 한량없다 하더라도
물질[色]과 마음[心]에서 벗어나지 않아서
마음을 여의면 마음의 여[心如]요
물질을 여의면 물질의 여[色如]이기 때문에
모두 여의게 되면 마음의 체성에 계합되어 생각을 여읜다.
모양을 무너뜨린다 함은 경계에 결부된 것으로서,
무릇 있는 바의 모양은 모두가 허망이기 때문이다.
마음이 없어진다 함은 지혜에 결부된 것으로서,
경계의 모양이 공함을 분명히 앎을 임시로 지혜라고 일컫거니와 모양이 이미 있지 않거늘 지혜인들 어찌 진실함이 있겠는가”라고 했다.
마음과 경계의 둘이 다 없으면 모두가 끊어져 없어지며,
마음에 마음이 없는 모양 이것이 바로 편안한 마음[安心]이기 때문에 ‘마음을 내면 곧 허망이요 내지 않으면 곧 부처이다’라고 설명한다.
마음을 낸다고 말한 것은 그 밖의 마음을 낸 것만이 아니라 비록 보리와 열반을 내는 관심(觀心)과 견성(見性)이라 하더라도 역시 ‘마음을 낸다’고 말하는 것이므로 다 같이 망상이 되며,
생각의 모양이 도무지 고요하여야 비로소 ‘내지 않는다’고 말하는 것이므로 고요히 비춤[寂照]이 앞에 나타나거늘 어찌 부처라 하지 않겠는가.
그러므로 달마비(達磨碑)에서 이르되 “마음의 있음이여 오랜 겁 동안 범부에 걸려 있고,
마음의 없음이여 찰나 동안에 정각(正覺)에 오른다”고 했다.
마음의 없음이라고 말함은 마음이 공함을 요달(了達)하는 것이 아니고 요달하는 그것을 내지 않을 따름이다.
그러므로 위시어(韋侍御)가 앙산(仰山) 화상에게 마음을 요달하는 뜻을 묻자 대답하기를 “만일 마음을 요달하려 하면 마음에는 요달할 만한 것이 없나니,
요달함이 없음을 요달하는 이것이 참으로 요달하는 것이다”라고 했다.
『화엄경』의 게송에서 이르되
“온갖 법은 나지도 아니하고/
온갖 법은 사라지지도 않는다/
만일 이렇게 이해하게 되면
모든 부처가 언제나 앞에 나타난다”
고 했다.
이렇게 이해한다고 함은,
마치 나지 않는다[不生]고 이해하면서도
이해하는 모양이 없는 것이니,
공이라고 여기는 것이 아니고 나지 아니함을 이해할 따름이다.
소(疏)에서 이르되
“부처도 없고 부처가 되지 않음도 없으며
생기는 것도 없고 생기지 않음도 없다고 함은
앞의 자취를 거듭 떨쳐버리는 것이니,
미혹한 중생들을 위하여
‘곧 마음 그대로가 부처’라고 말하거니와 이미 중생도 없거늘
어찌 부처가 있겠는가”라고 했다.
그러므로 경의 게송에서 이르되
“평등한 참 법계에는/
부처도 없고 중생도 없나니/
부처에 집착하므로 부처가 없다 하거니와/
이는 부처가 없다고 말하는 것 아니다”라고 했다.
때문에 ‘부처가 되지 아니함도 없다’고 하여,
보내고 또 보내버리는 것이니 만일 조금이라도 얻는 바가 있으면 모두가 망상이다.
그러므로 『불장경(佛藏經)』에서 이르되 “법에서 조금이라도 얻는 바가 있으면 부처와 다투는 이이니,
부처와 다투는 이는 모두 삿된 도에 들어갔는지라 나의 제자가 아니니라”고 했다.
또 다만 부처가 없다고 함만이 참 부처라 여겨지지 때문에 ‘부처가 되지 아니함이 없다’고 말할 뿐이다.
그러므로 경의 게송에서 이르되 “성품의 공함이 바로 이는 부처라/헤아려 얻을 수는 없는 것이다”라고 했다.
만일 마음을 냄이 있으면 마음을 내는 이것이 망상이기 때문에 ‘생기지 않는다’고 설명한 것이니,
부처도 오히려 있지 않거늘 어찌 생기는 것도 없음이 있겠는가.
생기는 것도 없다는 알음알이를 지으면 도리어 생기는 것이 없다는 것에 얽매임을 당하는 것이므로 ‘생기지 않음도 없다’고 말한다.
또 온갖 법이 생기지 않으면 반야(般若)가 생기기 때문에 ‘생기지 않음도 없다’고 말한다.
그렇다면,
생김과 생기지 않음이 이랬다 저랬다 하면서 서로 어기고
또한 이랬다 저랬다 하면서 서로가 이루어지나니,
말이 없는 것만이 도(道)와 계합될 수 있고
생각을 비우는 이만이 진리와 통할 수 있다.
만일 말이 없으면 그치고 그치면 말할 필요가 없거니
어찌 억지로 말끝을 일으키겠으며,
만일 생각을 비우면 우리의 법이 묘하여 생각하기 어렵거니
어찌 망령되어 지해(知解)를 내겠는가.
또 대저 종경(宗鏡)에 들어가면
법이 원래 말이 없어지고 지혜로 알 바가 아니며
믿음만으로 미치는 바다.
마치 반야를 찬탄하는 게송에서 이르되
“만일 사람이 반야를 보면/
논의(論議)의 마음이 모두 끊어지나니/
마치 해가 돋아날 적에/
이슬이 한꺼번에 없어지는 것과 같다”고 함과 같다.
그러므로 조사(祖師)가 이르되 “논(論)하면 곧 뜻[義]이 되지 않고 뜻은 곧 논하지 아니한다.
만일 뜻을 논하려 하면 끝내 뜻의 의논이 아니다”라고 했다.
옛날 양무제(梁武帝)가 화림원(華林園)의 중운전(重雲殿)에서 사부대중들을 모아 놓고
스스로가 『삼혜반야경(三慧般若經)』을 강할 때에
부대사(傅大士)가 그 모임에 있었으므로 태자가 질문했다.
“대사께서는 어찌 논의(論議)하지 않으십니까?”
대답하길,
“황제(皇帝)보살의 말씀한 바는
긴 것도 아니고 짧은 것도 아니며
넓은 것도 아니고 좁은 것도 아니며
끝이 있는 것도 아니고 끝이 없는 것도 아니어서
여여(如如)하고 바른 이치이거늘,
다시 무슨 말이 있겠습니까”라고 했다.
유중승(劉中丞)이 또 물었다.
“대사께서는 어찌 논의하며 주고받지 않으십니까.
대중들은 듣고 싶어합니다” 대답하였다.
“해와 달은 빛을 멈추고 네 철[四時]은 고르고 알맞습니다.”
또 중천축(中天竺)에 출가한 외도 마명(馬鳴)이란 이가 있었다.
세간의 지혜와 변재로 언론이 뛰어났는데 부르짖었다.
“만일 모든 비구로서 나와 논의할 수 있는 이면 건추(揵搥)를 쳐라.
만일 그러할 수 없다면 드러나게 건추나 울리면서 사람들의 공양을 받기에는 족하지 못하다.”
이때 장로 협(脇)이 그 나라에 도착하여 말했다.
“건추를 울려서 그가 오도록 마련하라.
내 자신이 대해 주겠다.”즉시 건추를 울렸더니,
외도가 물었다.
“오늘 무슨 까닭에 이 나무를 치오?” 대답하였다.
“북방에 장로 사문이 계시는데,
오셔서 건추를 울렸습니다.” 외도가 물었다.
“논의를 하겠다는 것입니까?” 대답하였다.
“그렇습니다.”
이리하여 논의할 장소를 널리 시설하였고 대중들이 구름처럼 모여왔다.
장로 협은 말하였다.
“내 벌써 나이 늙었고 짐짓 먼 데서 왔으며,
또 먼저 여기에 앉아 있었으므로 이치로 보아 먼저 말해야겠다.” 외도가 말하였다.
“역시 그렇게 해야 할 겁니다.
당신이 말을 내기만 하면 나는 모두 부수겠습니다.” 장로 협이 말하였다.
“지금 천하는 태평하고 대왕은 오래 살고 계시며 국토는 풍락(豐樂)하고 모든 재환이 없습니다.”외도는 잠자코 있으면서 말할 바를 모르고 있다가 논법(論法)에 응대할 수가 없자 이내 무릎을 꿇고 항복하여 제자가 되어 수염과 머리칼을 깎고 사미가 되어서는 구족계(具足戒)를 받았다.
또 어떤 학인(學人)이 충(忠) 국사 화상에게 세움[立]의 뜻을 청하자,
스님은 이르되 “세워 마쳤느니라”고 했다.
학인은 어쩔 줄을 모르다가 스님의 할(喝)을 맞고 내쫓겼으니,
드러난 경계가 아니었다.
그러므로 알라.
만일 종경(宗鏡)에 들면 오묘하게 비추어 탁 트임이 마치 거울 앞에서 자기 얼굴 모습을 보는 것과 같나니,
보면 이내 보이거늘 다시 무슨 할 말을 기다리겠는가.
그런 까닭에,
『월상녀경(月上女經)』에서 이르되 “때에 사리불(舍利弗)이 다시 여인에게 물었다.
‘중생의 경계란 다시 얼마만큼 있습니까?’ 그 여인이 대답하였다.
‘마치 저 과거와 미래와 현재의 모든 부처님의 경계와 같습니다.’ 사리불이 말하였다.
‘만일 그렇다면 당신은 무슨 일을 설명하며 이것은 무엇으로 해석됩니까?’ 그 여인은 대답하였다.
‘존자의 질문에 의지하여 나는 도리어 의지하면서 대답합니다.≺ 때에 사리불이 다시 여인에게 물었다.
≻내가 무슨 뜻을 물었습니까.’ 그 여인은 대답하였다.
‘문자를 물었습니다.’ 사리불이 말하였다.
‘저 문자는 소멸되어서 발자국조차 없습니다.’ 그 여인은 대답하였다.
‘존자 사리불이여,
이와 같이 소멸된 모양은 온갖 법 중에서 마치 묻는 이가 있는 것과 같고 마치 대답하는 이가 있는 것과 같아서 둘 다 함께 소멸된 마음을 얻을 수 없습니다’ ”고 했다.
『화수경(華手經)』에서 이르되 “부처님이 발타바라(跋陀婆羅)에게 말씀하셨다.
‘장하고 장하도다.
그대의 말한 바와 같아서 여래가 도량(道場)에서 얻은 바 법이란 이것이 법이요 법이 아니며 또한 법이 아님도 아니니라,
나는 이것에 대해서는 지혜로도 행할 수 없고 눈으로도 볼 수 없으며 수행하는 곳도 없고 슬기로도 통달하지 못할 바며 광명으로도 분명히 알 수 없고 질문하여도 대답이 없느니라.
이 법 안에서는 받음도 없고 잡음도 없으며 더러움도 없고 깨끗함도 없나니,
만일 내가 자신이 얻은 바의 법을 말하거나 행하는 모양으로써 이 법을 행한다면 모두가 어지럽고 답답해질 것이니라’ ”고 했다.
『불장경(佛藏經)』에서 이르되 “부처님이 말씀하셨다.
‘사리불아,
거룩한 법 가운데서 적멸(寂滅)을 얻는다고 헤아리면 모두가 삿된 소견에 떨어지거든,
하물며 언설이겠으며 하물며 말하는 이겠느냐.
이와 같은 공한 법은 무엇으로 말할 수 있느냐 하면,
사리불아,
부처가 무엇 때문에 모든 언어는 다 삿된 것이라고 설명하느냐 하면 온갖 법을 통달할 수 없는 일이기 때문이니라.
그러므로 여래는 모든 언어는 모두가 삿된 것으로 알며,
내지 조그마한 언어가 있다 하여도 그 진실을 얻지 못하느니라.
사리불아,
모든 부처의 아뇩다라삼먁삼보리는 모두가 생각함도 없고 기억함도 없나니,
왜냐하면 여래는 법에서 체성을 얻지도 않았고 또한 기억함도 얻지 않았기 때문이니라’ ”고 했다.
『대법거다라니경(大法炬陀羅尼經)』에서 이르되 “부처님이 비사카(毘舍佉)에게 말씀하셨다.
‘응당 먼저 그들을 위하여 저 6바라밀을 말하여 차례로 닦게 된 연후에야 그들에게 공해탈문(空解脫門)을 설명하라.
만일 중생들을 위하여 이 공의 법을 말하여 혹은 듣게 되거나 혹은 생각함이 있거나 혹은 능히 증득한 이가 있다면 이 또한 언설만이 있지 않아야 하느니라.
왜냐하면 이와 같은 공의 법인 마음의 생각으로써 알 수 없을 뿐이기 때문이니라.
만일 저 공의 법을 마음의 생각만으로써 능히 증득하여 안다고 하면,
일체 중생들은 아직 도를 닦지 못했을 적에도 바로 그는 아라한이어야 되느니라.
비사카야,
저 공의 법이란 역시 모습과 형체로 설명할 수는 없나니,
만일 모양을 짓는다면 원하거나 함이 있을 것이며 만일 원하거나 구함이 있으면 이것은 3세(世)이니라.
왜냐하면 비사카야,
모양이 없는 법 안에서는 온갖 3세는 얻을 수 없기 때문이니라.
무슨 까닭이냐 하면,
과거ㆍ미래ㆍ현재 등의 일은 모두가 고요히 사라졌기 때문이거늘 어떻게 소원을 일으키겠으며,
다시 이 물질[色]을 관(觀)하되 모양이 없음의 생각을 지어야 할 터인데 어떻게 물질을 관하면서 모양이 없음의 생각을 짓겠느냐.
이 물질은 생기고 소멸을 거듭하면서 생각생각마다 머무르지 않는 줄 알아야 하느니라.
비사카야,
이와 같은 물질 모양은 눈으로 볼 수도 없고,
저 심식(心識)의 경계라 뜻만으로 알게 되는 줄 알아야 하나니,
그러므로 눈으로써는 보게 될 수 없느니라.
비사카야,
일체 중생의 모든 마음과 뜻은 말로는 할 수가 없고 부처의 지혜만으로 아나니,
비록 생각하여 알 수 있다 하더라도 볼 수가 없고 생각생각마다 머무르지 아니함은 마치 허깨비와 같거늘 어떻게 취할 수 있으면서 볼 수가 있겠느냐.
이와 같아서,
비사카야,
저 중생의 심식으로써는 마음의 참 모습을 취할 수가 없으며,
이미 취할 수가 없거늘 어떻게 설명할 수 있겠느냐.
왜냐하면 사랑하거나 미워하는 일은 평등에 어긋나기 때문이니라.
비사카야,
만일 사랑하거나 미워하는 생각을 없애버리려 하면 부지런히 정진하면서 온갖 법은 모두 다 공하고 고요하여 취착(取著)할 것 없는 것으로 관해야 하느니라’ ”고 했다.
【문】 어찌 지금 당장에 배우는 길이 없겠으며,
어찌 단번에 방편의 문을 끊는가?
【답】 중(中)근기 하근기에는 배우는 길이 없지도 아니하며,
어린아이로서의 교훈이거늘 어찌 지금 당장에 끊겠는가.
그러므로 『능가경(楞伽經)』에서 이르되 “종통(宗通)은 보살을 위하고,
설통(說通)은 어린아이들을 위한다”고 했다.
관(觀)을 돕는 문은 크게 이익이 있거니와,
만일 한결같이 자기를 등지고 문자를 좇아 배움에 집착하면서 판단한다면 나무로 만들어진 사람에게 말하기를 기다리고 석녀(石女)에게 아이 낳기를 바라는 것이니,
티끌과 모래같이 많은 세월을 부질없이 지나는 것이요 끝내 얻게 되는 이치는 없으리라.
설령 외학(外學)으로 이루게 된다 하여도 모두가 진실이 아니다.
어떤 이가 말한 바,
“베껴 놓은 달은 진짜 달이 아니요/그림으로 된 용은 본래 용이 아니다”고 함과 같나니,
지금 만일 참으로 이룩하기 바라면 뜻만을 깨끗이 하여 안으로 관하면 뚜렷이 고요하게 나타남이,
마치 밝은 거울에서 자기 형상을 보는 것과 같거니와,
만일 보고 듣는 것으로 허망하게 구하면 마치 물 속의 달을 붙잡으려는 것과 같거늘 어찌 얻게 되는 때가 있겠는가.
그런 까닭에,
진각(眞覺)의 노래에서 이르되 “5안(眼)을 맑게 하고 5력(力)을 얻음은/증득해야만이 알고 측량하기 어렵나니/거울 속의 형상 봄은 어렵지 않거니와/물 속 달을 잡으려면 어찌 잡히겠는가”라고 했다.
반산(盤山) 화상이 이르되 “향상(向上)의 한 길은 일천 성인도 전하지 않았거늘,
배우는 이들이 몸을 수고롭게 함은 마치 원숭이가 달을 붙잡으려는 것과 같다”고 했다.
방(龐)거사의 게송에서 이르되 “학문을 행함은 참된 도가 아니어서/정신과 몸을 괴롭힐 뿐이다/천생(千生) 동안 물 속 달을 찾는다 해도/끝내 이것은 헛된 공부이니라”고 했다.
【문】 어떻게 해야 옳은가?
【답】 옳다고 하면 둘째 번의 머리요 그르다 하면 셋째번의 손이니,
마음과 지혜의 길이 끊어지고 한량 있는 정(情)이 소멸했다.
그런 까닭에,
『문수반야경(文殊般若經)』에서 이르되 “이해할 수 없는 것이 곧 반야이니,
반야는 이해할 수 있는 것이 아니고 이해할 수 없는 것도 아니다”라고 했다.
『조론(肇論)』에서 이르되 “오묘한 도[玄道]는 멀리 떨어진 지경에 있기 때문에 얻지 못함으로써 그를 얻고 묘한 지혜[妙智]는 세상 밖에 있기 때문에 아지 못함으로써 그를 알며,
큰 코끼리[大象]는 형상 없는 데에 숨었기 때문에 보지 못함으로써 그를 보고 큰 음성[大音]은 희미한 소리에 감추었기 때문에 듣지 못함으로써 그를 듣는다.
믿음으로 들어가는 때만이 저절로 환히 비추나니,
만일 깊이 살펴 깨달아 원만하게 밝으면 분명히 통달한 끝은 오히려 마음의 생각에도 인유하지 않거늘,
하물며 다른 사람에게 나아가서 자기 법을 구하겠으며 저 눈[眼]을 취하면서 원통(圓通)을 짓겠는가?
보물 세는 것으로는 끝내 가난을 구제하지 못하고 음식을 설명한들 어찌 배부를 수 있겠는가.
자신만이 몸소 이르고 단번에 배움을 끊는 문에 들어가 밝혀 냄이 있어야 비로소 함이 없음의 뜻[無爲之旨]을 통달한다.
만일 이렇게 하고 이렇게 하여 이치에 들어가 생각할 수 있으면 이렇고 이렇게 원만하게 나타나나니,
저절로 두 끝[際]이 명합하고 물건과 나[物我]가 차별이 없어지며 온갖 경계에 계합되어 오묘하고 동일한 마음으로 깨끗하여져서 모두가 공에 의지하면서 서고 하나[一]를 안으면서 생긴다.
그러므로 구름이 어울려 끌면서 하늘을 천천히 맑게 하고 산이 깊숙이 숨으면서 들을 조용히 푸르게 하며 높은 소나무가 바위에 기대면서 스스로 자라고 긴 대가 삿됨을 거스르면서 자라며 새롭나니,
안으로는 마음속이 편안하고 밖으로는 도(道)의 성질이 언제나 한결같다”고 했다.
그러므로 『심요전(心要牋)』에서 이르되 “만일 한 생각도 내지 않으면 앞뒤 끝이 끊어지고 비추는 바탕은 홀로 서서 남과 나가 모두 여여(如如)하며,
곧장 마음 근원에 나아가면 알음도 없고 얻음도 없으며 취하지도 않고 버리지도 않으며 대상도 없고 닦음도 없다.
그러나 미혹과 깨침은 다시 진실과 허망에 의지하여 상대가 되나니,
만일 진실을 구하고 허망을 버리면서 마치 그림자를 버리려고 형상을 괴롭히는 것과 같고 만일 허망이 곧 진실임을 체달하면 마치 그늘진 데 있으면서 그림자를 소멸시킴과 같다.
그러므로 마음이 없이 비춤을 잊으면 온갖 허물이 한꺼번에 덜리고 만일 저절로 고요히 알면 뭇 행이 이에 일어나나니,
오락가락하면서 그 가고 섬에 맡기고 고요히 비춰보면서 그 근원의 흐름을 깨달으면 말함과 잠잠함이 현미함[玄微]을 잃지 않고 움직임과 고요함이 법계(法界)를 여의지 못한다”고 했다.
영수음(靈叟吟)에서 이르되 “내가 보리(菩提)를 배우려하면/다른 석가의 앞에 보내지고/내가 천제(闡提)를 배우려 하면/다른 조달(調達)의 뒤에 떨어지리니/두 집안의 풍습을 겪지 아니하면/중도에 달아남을 면치 못한다/설사 온통 옳지 않다 하여도/무엇을 핑계대어 입을 열건가/입을 열건 입을 열지 않거나 간에/간절히 영수(靈叟)를 범하지 말라/만일 이 속의 뜻을 깨달으면/남쪽 바라보아도 북두칠성 보리라”고 했다.
부(傅)대사의 게송에서 이르되 “사람들의 길은 길을 가기 어렵되/나의 길은 길을 가기가 쉽나니/산에 들어간 지 몇 해 남짓해서/두 다리 길게 펴고 잠을 잔다네.
길을 가기 쉽구나/길은 쉽지만 헤아리지 말라/찰나의 마음도 다르지 아니하면/어디인들 천당이 되지 않으랴”고 했다.
위와 같이 비록 먼저 통달한 이들의 정성된 말을 널리 인용하기는 했으나,
겨우 종경(宗鏡) 안에 들기만 하면 원래 말과 생각의 길이 끊어지고 앎과 지혜가 다 같이 없어지며 이기고 지고 함이 모두 함께 없어지고 네 가지 변재로도 궁구하지 못하며 뭇 성현도 측량하지 못한다.
그러므로 『정명사기(淨名私記)』에서 이르되 “정명(淨名)이 잠자코 있음은 예전으로부터 이 마지막에 이르기까지 진실한 지혜가 만족해서이며,
또한 마치 선재(善財)가 미륵을 만나 누관(樓觀)에 들어가서야 비로소 마지막을 얻는 것과 같나니,
지금의 잠자코 말이 없음은 곧 누관의 체성이다”라고 했다.
『대집경(大集經)』에서 이르되 “광명(光明)과 적정(寂靜)과 무쟁(無諍)의 세 글귀 법이 끝났으나,
석가가 잠자코 서 계셨음은 지금과 다름이 없었다”고 했다.
또 서천(西天)의 운타산(韻陀山) 속에 한 아라한이 있었는데 이름은 부루나(富樓那)였다.
마명(馬鳴)이 단정히 앉아 있는 숲 속을 가 보매,
지기(志氣)가 아득하여 측량할 수 없을 것도 같고 신색(神色)이 어수룩하여 굴복시킬 수 있을 것도 같았으므로,
드디어 그에게 말하였다.
“사문이여,
말을 하라.
감히 밝히는 바가 있으면 반드시 그대를 굴복시켜야겠다.
내가 만일 이기지 못하면 목을 꾾어서 사죄하겠다”고 하였으나,
사문은 잠자코 있는데 모양이 졌다는 기색도 없고 이겼다는 안색도 함이 없었으므로 서너 번 두드렸으나 응대하는 뜻이 없는지라 마명은 물러나서 스스로 생각하기를,
‘내가 지고 그가 이겼구나.
그는 편안히 말이 없었으므로 굴복했다고 할 만한 것이 없거니와 나는 그에게 말을 하였다.
비록 말을 아는 이로써 굴복할 수 있었다 하더라도 내 자신은 말을 말하지 못하였으니 참으로 부끄러운 일이로다’고 하고 드디어 나아가 출가하였다.
【문】 만일 위와 같이 도의 바탕[道體]이 자연(自然)이라고 설명하면 조사와 부처가 어찌 번거롭게 세간에 출현하였는가?
【답】 고교(古敎)에서 이르되 “한 법도 얻지 않았으면 빨리 수기(授記)를 준다”고 했으며,
조사(祖師)가 이르되 “한 법도 얻지 아니함을 마음에 전함[傳心]이라고 이름한다”고 했다.
번뇌의 성품이 공한 줄 알면 곧 부처가 세간에 출현한 것이다.
그러므로 경에서 이르되 “탐냄ㆍ성냄ㆍ어리석음이 나오면 바로 이것이 부처의 출현이니,
다만 중생들로 하여금 범부와 성인이라는 정(情)을 끊고 나타났다 숨었다 하는 모양이 없으며 조용한 데 머무르면서 하는 일이 없게 할 뿐이다.
이 법문을 통달하면 참 부처의 출현이요,
이와 같은 일을 말하면 바로 진실한 자비이다.
【문】 이미 마음의 생각이 없다면 목석(木石)과 무엇이 다르겠으며,
또 보고 듣는 것을 끊고서 어떻게 깨칠 것인가?
【답】 다만 억지로 깨닫고 허망하게 알면서 도를 장애함을 말할 뿐이니,
달라붙은 것을 벗기어 속으로 굴복시키고 스스로의 영지(靈知)를 일으켜 내어야 근진(根塵)이 이미 소멸되고 광명이 단번에 나타날 뿐이다.
『석마하연론(釋摩訶衍論)』에서 이르되 “온갖 법은 본래 유심(唯心)이라 실로 생각을 함이 없는 것이 바로 제 종(宗)의 바른 도리이니,
이른바 법성(法性)은 끝없는 때로부터 이 한 마음일 뿐이어서 하나의 법도 마음이 아님이 없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허망한 마음이 있으면 모르는 결에 생각을 일으켜 모든 경계를 보기 때문에 무명(無明)이라고 말하거니와,
만일 한 마음의 성품이 고요히 사라져서 일어남이 없으면 바로 이것이 본각(本覺)의 지혜 광명이다”라고 했다.
논(論)에서 말한 바와 같아서,
마음 성품이 일어남이 없으면 바로 이것이 큰 지혜의 광명이라는 뜻이다.
또 허망한 마음으로 소견을 일으켜 한결같이 허망한 경계 안에서 굴릴 뿐이면 진실한 경계를 통달할 수가 없다.
무슨 까닭이냐 하면 참과 거짓이 서로 어긋나서 마땅함에 계합되지 않기 때문이다.
논에서 말한 바와 같아서,
마음의 체성이 만일 소견을 여의면 바로 이것이 법계에 두루하다는 뜻이다.
또 만일 마음에 움직이는 모양이 있으면 바로 이것이 무명으로 훈습된 습기(習氣)이기 때문이며,
심성이 고요하여 시끄러움이 없으면 바르고 곧아서 뒤바뀐 알음알이가 없나니,
바로 이것이 진실한 지혜의 비춤이다.
논에서 말한 바와 같아서 만일 마음에 동요가 있어서 진실한 앎이 아니거나 한 마음에 움직이는 모양이 있어서 다시 앞 경계에 반연할 만한 것이 있다면 능견(能見)의 마음과 소견(所見)의 경계가 둘이 차별되기 때문에 본각(本覺)의 공덕이 원만하지 않다.
그러나 본래의 성덕(性德)은 비록 항하 모래만큼 많은 겁을 지난다 하더라도 한 마음의 분량일 뿐 끝내 두 체성이 없다.
무슨 까닭이냐 하면 이와 같은 모든 덕은 모두가 다 각각 그 체성이 나누어지지 않고 한 법계에서 그 분량이 균등하기 때문이다.
『수능엄경(首楞嚴經)』에서 이르되 “부처님이 아난에게 말씀하셨다.
‘이와 같은 6근(根)은 저 각(覺)의 밝은 데서 밝히려는 명각(明覺)은 있으므로 그 정료(精了)함을 잃어버리고 허망에 달라붙어서 빛을 내느니라.
그러므로 네가 지금 어둠[暗]을 여의고 밝음[明]을 여의면 보는 체성이 없을 것이요,
움직임[動]을 여의고 고요함[靜]을 여의면 듣는 성질이 원래 없을 것이며,
트임[通]이 없고 막힘[塞]이 없으면 맡는 성품이 나지 못할 것이요,
변함[變]이 아니고 조용함[恬]이 아니면 맛보는 것이 생기지 않을 것이고,
떨어짐[離]이 아니고 합함[合]이 아니면 접촉을 깨달음이 없을 것이며,
사라짐[滅]이 없고 생김[生]이 없으면 분명히 아는 것이 어디 있겠느냐.
네가 다만 움직임ㆍ고요함ㆍ합함ㆍ떨어짐ㆍ조요함ㆍ변함ㆍ트임ㆍ막힘ㆍ생김ㆍ사라짐ㆍ밝음ㆍ어둠의 열두 가지의 유위(有爲)의 모양을 따르지 않고 어느 감관이나 마음대로 뽑아내어 달라붙은 것을 벗기어 속으로 굴복시키고 원진(元眞)에 돌아가서 본래의 밝은 빛은 내게 되고 비치는 성품이 환하게 밝아지면 다른 다섯 감관의 달라붙은 것도 하나의 감관을 뽑음에 따라 한꺼번에 해탈하게 될 것이며,
앞의 경계로 일으킨 지견(知見)을 말미암지 아니하여 밝음이 감관을 따르지 않고 감관에 맡겨 밝음이 나게 되면 이로부터 여섯 감관은 서로 작용하리라.
아난아,
네가 어찌 모르겠느냐.
이 모임 안의 아나율타(阿那律陀)는 눈이 없으면서도 보고,
발난타룡(跋難陀龍)은 귀가 없이도 듣고,
긍가여신(殑伽女神)은 코가 아니고도 향기를 맡고,
교범발제(驕梵鉢提)는 혀가 다르면서도 맛을 알고,
순야다신(舜若多神)은 몸이 없이도 닿음[觸]이 있었으니 여래의 광명에 비추어 잠깐 나타나지만 체질이 바람이므로 몸이 본래 없었으며,
멸진정(滅盡定)에 들어 고요하여진 성문으로 마하가섭(摩訶迦葉) 같은 이는 의근(意根)이 오래 전에 소멸하였지만 마음의 생각을 인유하지 않고도 원명하게 환히 알지 않느냐.
아난아,
지금 네가 여러 감관을 뽑아버리고 속으로 환하게 빛을 내기만 하면 이러한 부진근(浮塵根)과 기세간(器世間)의 모든 변화한 것들이 끊는 물에 얼음이 녹듯 생각에 따라 위없는 지각(知覺)을 이루게 되리라.
아난아,
마치 세간 사람들이 보는 것[見]을 눈에 모았다가 갑자기 눈을 감아 어두운 것이 앞에 나타나면 여섯 감관이 캄캄하여 머리와 발이 한결같으려니와,
그 사람이 손으로 몸을 따라 두루 만지면 그가 비록 보지는 못하더라도 머리와 발을 낱낱이 분별하여 아는 것이 밝을 때와 같으리라.
반연을 보는 것은 밝음을 인유하므로 어두우면 보는 것이 없거니와,
밝음이 아니라도 저절로 깨달음이 생긴다면 모든 어두운 모양이 영원히 어둡게 하지 못하리니,
감관과 경계가 없어지기만 하면 어찌 각명(覺明)이 원만하고 묘하게 되지 않겠느냐’ ”고 했다.
【문】 위에서 말한 것과 같은 것은 다 같이 대근기(大根機)에서 본 것으로서 마치 처음 돋는 해는 높은 산을 비추고 빨리 닫는 말은 채찍 그림자를 보는 것과 같거니와,
만일 중근기와 하근기라면 혼자 그렇게 할 수는 없다.
아직 들지 못한 사람은 어떤 방편을 써야 되겠는가?
【답】 역시 자신이 반성하며 신심(信心)을 개발해야 한다.
만일 아직 개발하지 못했을 때는 곧장 정려(靜慮)로써 언제나 연구하면서 영원히 반연을 끊고 몸과 마음을 한결같이 하여 깨치는 것으로 한정을 삼아야 하리니,
혹은 들음으로 인하여 들기도 하고 혹은 경계로부터 밝아지기도 하여 환히 트이면서 뜻이 사라지면 참 마음이 저절로 나타난다.
【문】 경계와 식(識)이 다 함께 자체가 없다면,
경계는 식으로부터 생기거니와 식은 무엇으로부터 일어나는가?
【답】 식은 참 성품[眞性]으로부터 일어난다.
【문】 참 성품은 무엇으로부터 일어나는가?
【답】 참 성품에는 일어나는 것이 없다.
【문】 만일 일어나는 바가 없다면 어떻게 나타나는가?
【답】 일어남 없는 것이 곧 일어남이요 일어남이 곧 일어남 없는 것이며 일어난 것도 아니고 일어나지도 않나니 이것이 불가사의한 일어남이다.
【문】 어떤 것이 불가사의한 일어남인가?
【답】 붉은 먼지가 푸른 바다에서 날고,
흰 물결이 높은 봉우리에서 솟는다.
【문】 이 종(宗)을 닦아 익히면서 듣고 이해하여 믿는 사람은 어떠한 법의 이익을 얻고 무슨 훌륭한 과보를 얻는가?
【답】 이것이 바로 첫째가는 언설이요 견줄 데 없는 도리이다.
배워서 얻지 못하여도 복은 오히려 인간ㆍ천상에서 뛰어나고 듣고서 믿지 아니하여도 오히려 보리의 종자를 맺게 되나니,
시방의 부처님[金口]께서 다 함께 칭양하였고 모든 대승 경전에 자세히 실려 있지 아니함이 없다.
『법화경(法華經)』에서 이르되 “한 생각만이라도 따라 기뻐하면 모두가 위없는 보리의 수기(授記)를 받으며,
한 글귀라도 받아 지니면 모두가 여래에게 공양한 것과 동일하다”고 했다.
고석(古釋)의 『화엄경』 「출현품(出現品)」에서 이르되 “이 품(品)의 글 뜻은 넓고 오묘하여 단박이요 원만한지라,
중생의 근원을 궁구하고 모든 부처의 바다를 다하며,
근본법륜(根本法輪) 안에서 다시 그 마음을 있게 하고 생재금륜(生在金輪) 종성 안에서 다시 적자(嫡子)가 되며 묘한 것 중에서도 묘하고 그윽한 것 안에서도 그윽하나니,
다 같이 범부들 마음에 있으면서 공이 작은데도 빨리 증득되거늘 어찌 스스로 속이면서 받지 않을 수 있겠는가.
이제 듣고 이해하고 기뻐하면서 더욱 스스로가 경하하여야 한다”고 했다.
그러므로 알라.
이 법을 사모한 이는 믿고 좋아하는 마음을 일으켜 겨우 생각을 내는 때면 벌써 여래의 참 아들이 되었고 회향(廻向)하기 시작하는 때에 문득 위없는 보리를 이루게 되며,
배움을 적게 일으켰는데도 윗 성현과 같아지고 공을 작게 베풀었는데도 큰 결과를 얻게 되며,
3아승기(阿僧祗)를 한 생각에 줄여 넣고 만 가지 덕[萬德]을 작은 성과에서 갖추게 되나니,
마치 장자(長者)가 마니주(摩尼珠)를 얻어서 미래 세상이 다하도록 베풀어도 다하지 아니함과 같고 소국(小國)에서 전륜왕의 보배를 얻어서 법계에 모두 쓰는데도 끝남이 없는 것과 같다.
묘덕(妙德)과 약왕(藥王)이 향과 꽃을 바치면서 모시며 서고 석가(釋迦)와 다보(多寶)가 같이 기뻐하면서 증명하며,
이르는 방소마다 발을 들여 놓으면 마치 부처님[善逝]을 만나는 것과 같고 한 게송을 설하는 곳마다 탑을 일으키면서 보배 절을 지을 만하나니,
법의 이익이 어찌 다하겠는가.
공덕이 그지없다.
『화엄론(華嚴論)』에서 이르되 “신해(信解)의 힘을 닦는 이는 언제나 나와 남과 범부와 성인이 한 몸이어서 같고 의지할 대상 머무름이 없으며 나가 없고 내 것도 없으며 마음과 경계가 평등하여 두 모양이 없다 함을 믿기 때문에,
온갖 범부와 성인이 본래 법계일 뿐이요 조작하는 성질이 없으며 진리에 의지하여 머무르되 머무를 바 없는 데에 머무르고 온갖 모든 부처와 중생은 한가지며 한 마음의 지혜는 성품이 참된 법계에 머무르고 모든 분별은 바로 온갖 부처의 근본인 부동지(不動智)이며 범부와 성인은 한결같은 진실이라 이 지혜를 같이한다.
자기 마음 이것이 부처의 종지(種智)요 일체지(一切智)임을 온전히 믿는지라 마음 밖에 따로 부처라고 믿는 마음이 있지 않고 또한 자기 마음 안에서 자기 마음을 보거나 부처의 모양이 있지도 않다”라고 했다.
그러므로 이와 같은 법을 믿되 자기 힘이 아직 충분하지 못한 이러한 사람이라도 인간 안에서 온갖 훌륭한 과보를 얻게 되어 의복과 음식이 생각함에 따라 이르게 된다.
또 정보(正報)뿐만이 아니고 의보(依報)도 완전히 갖추며,
유정(有情)ㆍ무정(無情)에 이르기까지 모두 다 돌아와 순종하며,
법계의 근본을 얻었거늘 다시 무슨 일이 있기에 따르지 않겠는가.
가령 『화엄경』에서 이르되 “때에 대광왕(大光王)이 말하였다.
‘선남자여,
나는 보살의 대자당행(大慈幢行)을 청정하게 닦았기에 나는 보살의 대자당행이 만족합니다.
내지 선남자여,
이 묘광성(妙光城)에 살고 있는 중생들은 모두가 보살이요 대승의 뜻을 내었으되 마음에서 보는 바에 따라 같지 아니하나니,
어떤 이는 이 성의 분량이 협소한 것으로 보기도 하고 어떤 이는 이 성의 분량이 광대한 것으로 보기도 하며 어떤 이는 흙과 모래로 그 땅이 된 것으로 보기도 하고 어떤 이는 뭇 보배로 장엄된 것으로 보기도 한다.
어떤 이는 흙을 모아서 담장을 만든 것으로 보기도 하고 어떤 이는 보배로 된 담장이 둘레를 에워싸고 있는 것으로 보기도 하며 어떤 이는 그 땅이 기울거나 돌들이 많고 높거나 낮아서 편편하지 않은 것으로 보기도 하고 어떤 이는 한량없는 대마니보로 사이사이 섞어서 장엄되고 편편하기 마치 손바닥과 같은 것으로 보기도 한다.
어떤 이는 사는 집이 흙과 나무로 이루어진 것으로 보기도 하고 어떤 이는 전당(殿堂)과 누각이며 섬돌ㆍ창문ㆍ난간ㆍ지게문 등 이러한 모두가 묘한 보배 아님이 없는 것으로 보기도 합니다.
선남자여,
어떤 중생은 그 마음이 청정하여 전에 선근(善根)을 심었고 모든 부처님께 공양하며 발심하여 일체지(一切智)의 도에 회향하고 일체지를 마지막 처소로 삼았으며,
그리고 내가 옛날 보살행을 닦으면서 일찍이 거두어 준 이면 이 성(城)이 뭇 보배로 장엄된 것으로 보게 되겠거니와 그 밖의 다른 이들은 모두 더러운 것으로 보게 됩니다.
선남자여,
이 국토 안의 일체 중생으로서 5탁(濁) 세상일 적에 악행 짓기를 좋아했으면,
나는 마음에 가엾이 여기면서 구호하기 위하여 보살로서 큰 자비에 들어감을 으뜸으로 삼아 세간 삼매의 문에 수순하면서 이 삼매에 들어간 때는,
저 모든 중생들에게 있는 두려워하는 마음과 괴로워하는 마음과 원망하는 마음과 다투려는 마음 등의 이런 마음들이 다 저절로 소멸됩니다.
왜냐하면 보살로서 큰 자비에 들어감을 으뜸으로 삼아 세간의 삼매를 수순하는 법이 그러하기 때문입니다.
선남자여,
잠시 동안 기다리면 저절로 나타나 보일 것입니다’ 하고,
이때 대광왕이 즉시 이 선정에 들자 이 성 안팎은 여섯 가지로 진동하였으며,
모든 보배 땅ㆍ보배 담장ㆍ보배 집ㆍ보배 전각ㆍ대관(臺觀)ㆍ누각ㆍ섬돌ㆍ지게문 등의 이런 모두가 다 함께 미묘한 음성을 내면서 모두 왕을 향하여 몸을 굽혀 공경히 예배하였고,
묘광성 안에 살고 있는 사람들은 동시에 기뻐하면서 날뛰지 않는 이 없으면서 모두가 왕이 있는 곳을 향하여 온 몸을 땅에다 던졌으며,
시골이나 도시의 모든 사람들도 다 함께 와서 왕을 뵙고는 기뻐하면서 공경히 예배하였고,
왕의 처소에서 가까이 살던 날짐승ㆍ길짐승들도 서로서로 쳐다보며 자비심을 일으키면서 다 함께 왕 앞을 향하여 공경히 예배하였으며,
온갖 산과 언덕ㆍ풀ㆍ나무들도 몸을 돌려 왕에게 공경히 예배하였고,
못ㆍ샘ㆍ하천ㆍ바다들도 모두 솟아올라 넘치면서 왕 앞으로 흘러들었다”고 했다.
『석마하연론(釋摩訶衍論)』에서 이르되 “자기가 지은 공덕을 세 곳에 회향하나니,
첫째가 진여(眞如)요,
둘째가 한 마음의 법이요,
셋째가 본각의 불성[本覺佛性]이니라.
이것을 세 곳이라 하거니와 무슨 이치로 세 곳에 회향하느냐 하면,
자기가 지은 공덕을 평등하게 하기 위하여 진여에 회향하며,
또는 자기가 지은 공덕을 광대하게 하기 위하여 한 마음에 회향하며,
또는 자기가 지은 공덕을 명료하게 하기 위하여 본각에 회향한다.
이와 같이 알아야 하고 이와 같이 관하여야 하나니 이렇게 회향하면 어떤 이익이 있느냐 하면 여러 가지로 많기 때문이다.
이 뜻은 무엇을 말하느냐 하면,
마치 하나의 작은 티끌을 대지(大地) 가운데다 놓아두면 놓아둔 작은 티끌과 저 대지는 똑 같아서 차별이 없는 것처럼 회향의 법문 역시 이와 같기 때문이다.
또 마치 하나의 물을 쏟아 큰 바다 안에 넣으면 쏟아 넣은 물과 저 큰 바다는 똑 같아서 차별이 없는 것처럼,
회향의 법문 역시 이와 같기 때문이다.
또 마치 하나의 조그마한 것을 부수면 큰 허공과 똑 같아져서 차별이 없는 것처럼,
회향의 법문 역시 그와 같기 때문이다.
이미 공덕을 차츰차츰 펴서 넓게 하는 문을 말하였고,
다음에는 중생에게 베풀어서 널리 이롭게 하는 문을 말한다.
일체 중생계를 널리 이롭게 한다 함은 바로 이것이 중생에게 베풀어서 널리 이롭게 하는 문이니,
광대하고 원만한 공덕을 들어서 중생계를 두루 이익되게 하기 때문이다.
게송으로 말하겠다.
대사(大士)되기 기뻐하는 이께 지심(至心)으로 권하노라.
나는 이미 범부[毛頭]의 세 뿔[三角]을 초월하고
꽃 피우는 네 뿌리[四根]를 뛰어났나니
첫째는 수없는 거친 것[粗滿] 마치고
둘째는 승지(僧祗)가 비로소 무(無)에 들었네.
그대들 모든 불자들이여
왼손 오른손의 두 손에다가
본식(本識)의 밝은 거울 받쳐 들고서
7식(識)의 산란한 얼굴을 들이대어
6진(塵) 경계의 더러운 때를 보고
법집(法執)ㆍ아집(我執)의 허물 씻어야 한다.
그대들 불자여 만일 이렇게 되면
법신(法身)ㆍ응신(應身)ㆍ화신(化身)의 세 가지 몸이
마치 이자(伊字) 펴듯이 원만하게 나타나며
상(常)ㆍ락(樂)ㆍ아(我)ㆍ정(淨)의 네 가지 덕이
아뇩달지(阿耨達池)에 들어가듯 갖추어 생겨나리라.
나는 4왕(王)의 자재(自在)한 곳으로부터 내려와
큰 바다의 용 궁전에 들어가서
분수 따라 모든 경전 바다 엿보매
전체 수는 1백 낙차(洛叉) 권이 있었네.
이와 같은 모든 경의 진실한 법은
한량없고 그지없는 차별된 뜻이지만
『마하연론(摩訶衍論)』의 뜻을 세운 가운데서
거두어 벌려서 두루 갖춰 설명하네.
어떤 선남자와 선여인들로서
만일 손수 이 경책 받쳐 든다면
백 낙차의 경을 받들었다 할 것이며
만일 입으로 경의 본분(本分) 외우면
백 낙차의 경전 외운 이라 하리라.
이 사람이 얻게 된 공덕은
시방 세계의 미진(微塵) 수 같이 많은
모든 부처님과 큰 보살들이
저마다 미진 수의 혀 몸매[舌相]를 내어서
이와 같은 미진 수의 겁 동안에
쉬지 않고 칭찬해도 다하지 못하거늘
하물며 그 뜻의 이치를 관찰하고
글 밑의 설명한 바를 생각함이겠느냐.
그러므로 만일 사람이 이 종경(宗鏡)의 안에서 혹은 견고하게 마음을 일으키거나 혹은 갑자기 뜻을 내거나 혹은 손으로 접촉하게 되거나 혹은 잠깐 동안 눈으로 보거나 하면,
모두가 도에 들어가는 인연을 이루고 다 1승의 종자를 맺게 되어,
이 조사와 부처의 바른 비결과 경과 논의 본종(本宗)으로 열반의 하늘에 널리 펴고 반야의 바다를 깊이 궁구하리라.
또 이 안의 것은 글은 포함되고 뜻은 풍부하며 종(宗)은 넉넉하고 이치는 원만한지라,
찾으면 구절마다 모두 근원에 사무치고 엮으면 하나하나마다 뜻을 두루 포함했거늘,
하물며 믿고 이해하여 깨쳐 들며 바르게 생각하고 수행하며 쓰고 베끼고 받아 지니며 널리 펴고 전하여 유포함이겠는가?
그 공과(功果)를 궁구하고 헤아려도 부처님만이 아실 뿐이요,
산수(算數)로 헤아릴 수 있는 것이 아니거늘,
어찌 찬양만으로 미칠 바이겠는가.
【문】 유심(唯心)의 체성은 전에 이미 간략하게 밝혔거니와 유식(唯識)의 모양은 어떻게 지시하겠는가?
체성과 모양을 쌍으로 밝혀야 바른 종[正宗]이 드러나고 본체[理]와 현상[事]이 함께 통해야 비로소 삿된 고집을 떨어 버릴 것이다.
【답】 바른 종을 나타내기 위해서는 먼저 삿된 고집을 제거할 것이니,
그러므로 현상으로 인하여 본체를 밝히고 허망임을 알아서 진실에 돌아가야 한다.
진실 이것은 허망에 의지한 진실이라 망정으로 인하여 알음[會]을 설명하고,
현상 이것은 본체로부터의 현상이라 고집을 부수고 밝힘[明]을 말하나니,
고집이 없으면서 본체와 현상이 다 같이 비고 망정을 여의면서 진실과 허망이 쌍으로 끊어지며,
눈 병이 없어지면서 허공 꽃이 저절로 사라지고 생각이 쉬면서 허환한 경계가 문득 가라앉는다.
이제 모든 성인에 의하여 중생 경계 안에서는 교(敎)를 안고 종(宗)을 미혹함이 아마 한 둘만이 아니다.
그 가장 중요한 것을 추려 보면 두 가지의 공보다 앞선 것이 없다.
인공(人空)에 미혹하였기 때문에 아견(我見)의 어리석음을 일으켜 허망한 생사를 받고,
법공(法空)에 미혹하였기 때문에 현량(現量)의 경계를 어기어 청정한 보리를 장애한다.
그런 까닭에,
아공(我空)ㆍ법공이 다 같이 공함은 식(識)으로부터 변할 뿐이니,
이제 제1의 마음 법을 세우자면 능변(能變)의 식에는 세 가지가 있다.
첫 번째는 제8의 이숙식(異熟識)의 변함이요,
두 번째는 제7의 사량식(思量識)의 변함이요,
세 번째는 제6의 요별경식(了別境識)의 변함이다.
이미 식만이 변하면 아공ㆍ법공이 모두 공허해지나니,
이 두 공으로 인하여 오묘한 뜻에 계합된다.
아공이기 때문에 번뇌장(煩惱障)이 끊어지고 법공이기 때문에 소지장(所知障)이 소멸되며,
번뇌장이 끊어지기 때문에 참된 해탈을 증득하고 소지장이 끊어지기 때문에 큰 보리를 얻게 된다.
그런 뒤에라야 행(行)은 원인의 문에서 원만해지고 마음은 결과의 바다에서 명합되나니,
그러면 경계와 식이 다 함께 고요해져서 하나의 진공(眞空)일 뿐이다.
【문】위로부터 종승(宗乘)에서는 배움을 끊고 단도직입(單刀直入)하게 하며 교 밖에서 따로 전할[敎外別傳] 뿐이거늘,
어찌 지혜와 들음이 많은 것을 빌려서 성품과 모양[性相]을 널리 논하는가?
말이 번거로우면 진리가 숨게 되고 물이 흔들리면 구슬이 안 보인다.
【답】 종(宗)을 들어내고 고집을 부숨에는 임시로 배움의 길과 토론(討論)』을 떨어버리거니와,
뜻을 요달하고 원융하게 통함에는 문자를 여의고서 해탈한 것 아니다.
『법화경(法華經)』에서 이르되 “만일 근기가 영리하여 지혜가 명료하고 많이 들어서 기억력이 강한 이면,
비로소 그에게 말해야 한다”고 했다.
대략,
오묘한 뜻을 참구하는 선비는 모름지기 두 눈[眼]을 갖추어야 하리니,
첫째는 자기 눈으로 종(宗)을 밝히고,
둘째는 지혜 눈으로 미혹을 판단한다.
그런 까닭에,
선종(禪宗)에서 이르되 “단순히 자기만을 밝히고 눈앞을 분명하게 모르면 이런 사람은 한 눈만을 갖추었는지라 본체[理]가 외롭고 현상[事]이 적나니,
끝내 원만하게 통달하지 못한다.
한 쪽만의 날개요 외수레바퀴거늘,
어찌 능히 날고 운반할 수 있겠느냐.
만일 단도직입만을 필요로 하면서 널리 참구함이 소용없다고 고집한 이면,
선재(善財)가 처음 묘덕(妙德)을 만나서 발명(發明)된 뒤에는 법계를 두루 참구함은 적합하지 못하다”고 했다.
그러므로 알라.
처음과 나중 마음이 평등하고 도리와 수행이 때를 같이한 줄 알아야 하리니,
그런 까닭에 선재가 미륵에게 가서 부처 과위가 원만해진 뒤에 도리어 처음의 벗 문수(文殊)를 다시 만날 것을 지시한 것이다.
마치 선덕(先德)이 이르되 “문수의 묘한 지혜는 완연히 이는 처음 마음이요,
보현(普賢)의 오묘한 문은 일찍이 따로의 체성이 없다”고 했다.
이는 곧 본체와 현상이 하나의 뜻에 그윽이 같아지고 근본과 끝[本末]이 찰나에서 초월한 것이 아니거늘,
어찌 하나만을 지켜 여럿을 의심하면서 단번에 법계를 헷갈리며 이것을 버리고 저것을 취하면서 허공을 멋대로 하는가.
또 만일 지혜가 그르다 한다면 큰 지혜 지닌 문수를 법왕(法王)의 아들이라 일컫지 않아야 하고,
만일 많이 듣는 것이 허물이라 한다면 들은 것이 없는 비구는 지옥 사람이 되기에는 합당하지 못하리라.
마땅히 지혜는 그 들음이 많은 것과 합치되어야 마침내 글에 집착하면서 잘못 지시하지 않을 것이요 많이 들은 것으로 그 지혜를 넓혀야 고루(孤陋)하면서 무식함을 면할 것이다.
그런 까닭에,
이르되
“지혜는 있되 행(行)이 없으면 나라의 스승이요,
행은 있되 지혜가 없으면 나라의 재물[用]이며,
지혜도 있고 행도 있으면 나라의 보배요,
지혜도 없고 행도 없으면 나라의 도둑이니라”고 했다.
그러므로 지혜는 배워야 하고 행은 닦아야 한다.
지혜가 모자라면 도(道)의 원수요
행이 없으면 나라의 도둑이니,
명상(名相)으로 단속한 문은 지혜 열쇄가 아니면 열기 어렵고
정상(情想)으로 이끄는 갈고리는 지혜의 칼이 아니면 끊지 못할 줄 알지니,
모름지기 몸을 꾸짖고 자기를 살피면서 다잡아 닦아 나아가야 한다.
그러므로 원만하게 통달한 사람이면 어찌 말이 끊어진다는 소견에 떨어지겠는가.
ᖰ 보리심을 낸 이는 아주 없다[斷滅]는 마음을 내지 않는다.ᖱ
만일 곧장 자기 마음을 환히 알면
바로 이것이 단도직입이라 가장 분명하고 요긴한 것이 되리니,
하나가 풀리면 천(千)이 따르면서 법을 거두어 남는 것이 없기 때문이다.
또한 이것은 교 밖에 따로 전하는 것이라 이것을 여의고는 따로 기특한 것이 없다.
또 이 종경(宗鏡)의 큰 뜻은 미묘히 깨쳐서 진리 보는 것을 기약으로 삼으며
의통(依通)을 취하거나 가지런한 글로써 알음알이를 짓지 않는다.
벌써 이미 진실하다면 행은 같은 데에 계합되어야 하며,
마음에 있으면서 알 뿐이라
언설을 기다리지 않거니와
아직 모른 이를 위해서는 역시 말을 끊지 않나니
마지막의 상응에는 끝내 몸소 살펴야 한다.
이것이 바로 시방의 모든 부처가 한가지로 증득하고 한가지로 말씀한 것이며,
예나 이제나 바꿔지지 않는 한 동아리의 법문이다.
마치 경에서 이르되
“나는 하나의 부처 국토가 있고 그 중에서
여래는 이 법을 말씀하지 않은 것으로 보지 않나니,
그러므로 부처와 부처의 도는 동일하고 마음과 마음의 도리는 합치한다”고 함과 같다.
그러므로 알라.
종경을 여의고 그 밖에 말할 만한 법이 없으며,
무릇 있는 언교(言敎)는 다 같이 평등한 성품에서 벗어나지 않기 때문이니,
마침내 둘이 없다.
그런 까닭에,
경에서 이르기를
“마치 큰 사자가 향상(香象)을 죽일 때는 그 힘을 모두 다하고
토끼를 죽일 때 역시 그러하여 가벼이 여기는 생각을 내지 않는 것처럼,
모든 부처ㆍ여래 역시 그와 같아서
모든 보살과 일천제(一闡提)를 위하여
법을 연설할 적에도 쓰는 공에 두 가지가 없다”고 했다.
우러러 성인의 뜻을 생각하면 거울 삼아 경계함이 환하거늘,
어찌 평등한 지교(至敎)의 가운데서 차별된 알음알이를 일으킬 수 있겠으며,
하나의 참된 중생계 안에서 낫다 못하다는 소견을 내겠는가.
만일 이 종경 안에 들어가면 저절로 이런 허물을 면하게 된다.
여기서 기록된 것은 하나하나가 모두 옛 부처의 거룩한 가르침이며,
한량없는 억 겁 동안 수없는 몸과 목숨을 버리면서
널리 일체 중생들을 위하여 얻기 어려운 아뇩다라삼먁삼보리의 법을 구하여 여러 대보살들에게 부촉하였고,
말세에 위없는 보리를 구한 사람들을 위하여 천 갈래 길로 말하였으나 다 같이 하나의 마음을 나타냈거늘,
어떻게 은혜를 저버리면서 믿어 받지 않겠는가.
마치 『지도론(智度論)』에서 이르되 “모든 마하연경(摩訶衍經)은 모두가 법이라고 한다.
이 안에서 법을 구하는 이는 쓰고 베끼고 읽고 외며 바르게 기억하되,
이렇게 하면서 중생들의 마음 병을 평등하게 치료하기 위하여 모든 법의 약을 모으며 몸과 목숨을 아끼지 않았다.
마치 석가문불(釋迦文佛)이 본래 이름이 낙법(樂法)이라고 했던 보살일 적의 일이었다.
그 때의 세상에는 부처님이 없었는지라 좋은 말을 듣지 못했고 사방으로 법을 구하면서 부지런히 애썼으나 마침내 얻을 수가 없었다.
그 때에 악마가 변하여 바라문이 되어서는 그에게 말하였다.
‘나에게 부처님이 말씀하신 하나의 게송이 있는데,
그대가 살갗으로 종이를 삼고 뼈로 붓을 삼고 피로 먹을 삼아서 이 게송을 쓰고 베낀다면 그대에게 주겠습니다.’
낙법은 즉시 생각하기를,
‘나는 세세생생에 수없는 몸을 없앴으면서도 이런 이익은 얻지 못했었다’고 하고,
이내 스스로가 살갗을 벗겨 햇볕에 쬐어 말려서 그 게송을 쓰려고 하자,
악마는 이내 몸을 없애버렸다.
이때 부처님은 그의 바라는 마음을 아시고 이내 아래쪽으로부터 솟아나와 그를 위하여 깊은 법을 해설하자,
그 자리서 무생법인(無生法忍)을 얻었다”고 함과 같다.
또 마치 살타파륜(薩陀波崙)이 고행(苦行)으로 법을 구한 것과 같고,
마치 석가문(釋迦門)보살이 법을 구하기 위하여 5백 개의 못을 몸에 박은 것과 같으며,
또 마치 금견왕(金堅王)이 몸을 5백 군데나 베어서 등불심지를 만들어 넣고 바위에서 몸을 던져 불로 들어간 것과 같나니,
이와 같은 갖가지의 행하기 어려운 고행들은 중생들을 위하여 법을 구한 것이다.
그러므로 알라.
선지식(善知識)을 만나기 어려움은 마치 범천(梵天)에서 한 개의 겨자씨를 던져서
아래 세계의 바늘 끝 위에다 놓은 것 같은 것은 오히려 쉽거니와,
밝은 스승과 도 닦는 벗을 만나 바른 법을 듣게 되는 것은 심히 어렵다.
마치 서천(西天)의 96종 외도가 모두 벗어나기를 구했지만 삿된 스승을 만남으로 인하여 도리어 생사에 침몰된 것과 같다.
그러므로 『열반경(涅槃經)』에서 이르되 “네 가지 인연을 갖추어야 열반의 도를 증득할 수 있나니,
첫째는 착한 벗을 사귀는 것이요,
둘째는 바른 법을 듣는 것이요,
셋째는 이치대로 생각하는 것이요,
넷째는 말씀대로 수행하는 것이다”라고 했다.
만일 착한 벗을 만나지 못하면 바른 법을 들을 수가 없다.
왜냐하면 바른 법을 들음으로 인하여 생각하고 믿어들며 바르게 기억하면서 수행할 수 있기 때문이니,
이와 같은 법의 이익이 있으므로 마땅히 은근 정중하게 만나기 어렵다는 생각을 내면서 아만심을 꺾어야 한다.
내지 경전에서 듣게 되거나 혹은 사람이 들어 보인 것으로 인하거나 간에 만일 깨쳐 드는 곳이 있으면 모두가 나의 스승이거늘,
하물며 이 『종경록』에서 요긴한 글만을 기록했음이겠는가.
팔짱끼고 단정히 앉아 문을 나서지 않았으면서도 천하를 알고,
쉽게 이룩됨이 나타나서 발을 움직이지 않았으면서도 용궁(龍宮)에 이르렀다 하겠다.
그러므로 『화엄경』에서 이르되 “선남자야,
선지식은 마치 인자한 어머니와 같나니,
부처의 종성을 낳기 때문이요,
마치 인자한 아버지와 같나니 광대하게 이롭게 하기 때문이며,
마치 유모(乳母)와 같나니 수호하면서 나쁜 일을 못하게 하기 때문이요,
마치 가르치는 스승과 같나니 그 보살이 배울 바를 보여 주기 때문이며,
마치 착한 길잡이와 같나니 바라밀의 길을 잘 지시하기 때문이요,
마치 어진 의사와 같나니 번뇌의 모든 병을 능히 다스리기 때문이며,
마치 설산(雪山)과 같나니 온갖 지혜의 약을 더욱 자라게 하기 때문이요,
마치 용맹스런 장수와 같나니 온갖 두려움을 없애주기 때문이며,
마치 건너 주는 나그네와 같나니 생사의 폭류(瀑流)를 벗어나게 하기 때문이요,
마치 뱃사공과 같나니 지혜의 보배 섬에 이르게 하기 때문이니라.
선남자야,
언제나 이와 같이 모든 선지식을 바르게 기억하고 생각해야 하느니라.
선남자야,
그대는 모든 선지식을 받들어 섬기되 대지(大地)와 같다는 마음을 내어야 하나니 무거운 책임을 짊어지고서도 고달파함이 없기 때문이요,
금강과 같다는 마음을 내어야 하나니 바라는 서원이 견고하여 무너뜨릴 수 없기 때문이며,
철위산(鐵圍山)과 같다는 마음을 내어야 하나니 온갖 모든 고통으로는 움직이지 못하기 때문이요,
시종과 같다는 마음을 내어야 하나니 모든 명령은 다 따르기 때문이며,
제자와 같다는 마음을 내어야 하나니 온갖 교훈을 어기거나 거스름이 없기 때문이요,
심부름하는 아이와 같다는 마음을 내어야 하나니 온갖 모든 할 일을 싫어하지 않기 때문이며,
양모(養母)와 같다는 마음을 내어야 하나니 여러 가지 수고하며 애쓰면서도 괴롭다고 말하지 않기 때문이요,
품 파는 사람과 같다는 마음을 내어야 하나니 분부 받은 대로 어기거나 거스름이 없기 때문이며,
인분(人糞)을 푸는 사람과 같다는 마음을 내어야 하나니 교만을 여의었기 때문이요,
잘 익은 곡식과 같다는 마음을 내어야 하나니 머리를 잘 숙이기 때문이니라.
어진 말과 같다는 마음을 내어야 하나니 나쁜 성질을 떠났기 때문이요,
큰 수레와 같다는 마음을 내어야 하나니 무거운 것을 능히 운반하기 때문이며,
잘 길들여진 코끼리와 같다는 마음을 내어야 하나니 항상 복종하기 때문이요,
수미산(須彌山)과 같다는 마음을 내어야 하나니 기울거나 동요되지 않기 때문이며,
좋은 개와 같다는 마음을 내어야 하나니 주인을 해치지 않기 때문이요,
전타라(栴陀羅)와 같다는 마음을 내어야 하나니 교만을 여의었기 때문이며,
암소와 같다는 마음을 내어야 하나니 위험하거나 성을 냄이 없기 때문이요,
배 타는 사람과 같다는 마음을 내어야 하나니 왔다 갔다 하는 데에 게으름을 피우지 않기 때문이며,
교량(橋樑)과 같다는 마음을 내어야 하나니 건너게 하는 데에 고달픔을 잊었기 때문이요,
효자와 같다는 마음을 내어야 하나니 얼굴빛을 잘 받들면서 순종하기 때문이며,
왕자와 같다는 마음을 내어야 하나니 교명(敎命)을 그대로 따라 행하기 때문이니라”고 했다.
그러므로 사람으로 인하여 법을 듣고 법으로 인하여 도를 깨치며 도로 인하여 행을 닦고 행으로 인하여 부처가 되거늘,
어찌 교만을 부리면서 뜻을 따르지 않겠는가.
그러므로 세존이 말씀하되 “내가 지금 부처를 이루게 된 것은 맨 처음에 모두가 착한 벗을 만난 인연 때문이니라”고 했다.
또 외도 수발타(須跋陀) 같은 이가 최후에 만일 석가모니를 만나지 못했더라면 무엇으로 연유하여 삿된 것을 버리고 바른 데로 돌아왔겠는가?
그러므로 『대열반경(大涅槃經)』에서 이르되
“부처님이 말씀하셨다.
‘수발타야,
ᖰ 너는 만일 고행 받는 것으로 도를 얻을 수 있다면 온갖 짐승들도 모두 도를 얻어야 되느니라.
그러므로 먼저 그 마음을 조복해야 되며 몸을 조복하는 것이 아니니라. ᖱ
이런 인연으로 나의 경전 가운데서는
≺이 숲을 벌채할 것이요 나무를 베지 말라≻고 말하느니라.
왜냐하면 숲으로부터 두려움이 생기는 것이요
나무로부터 생긴 것이 아니기 때문이니라.
몸을 조복하고자 하면 먼저 마음을 조복해야 되나니,
마음은 숲에 비유되고 몸은 나무에 비유되느니라.’
수발타가 말하였다.
‘세존이시여,
저는 이미 먼저 마음을 조복하였나이다.’
부처님이 말씀하셨다.
‘선남자야,
너 이제 어떻게 먼저 마음을 조복할 수 있었느냐.’
수발타가 말하였다.
‘세존이시여,
저는 먼저 생각하기를 ≺욕심[欲] 이것은 항상함이 없고 즐거움이 없고 청정함이 없다≺고 하면서 형상[色]을 관하되 ≺바로 이것이 항상하고 즐겁고 청정하다≻고 이렇게 관하였더니,
욕계(欲界)의 번뇌가 끊어지고 색계(色界) 처소를 얻게 되었나이다.
그러므로 먼저 마음을 조복한 것이라 하나이다.
다음에는 ≺형상 이것은 항상함이 없어서 마치 종기와 같고 독과 같고 화살과 같다≺고 하고,
≺형상 없음[無色]은 항상하고 청정하고 고요하다≻고 이렇게 관하였더니,
색계의 번뇌가 끊어지고 무색계(無色界) 처소를 얻게 되었나이다.
그러므로 먼저 마음을 조복한 것이라 하나이다.
그 다음에는 생각[想]을 관하되 ≺바로 이것은 항상함이 없어서 종기요 상처요 독이요 화살이다≻고 이렇게 관하였더니,
비상비비상처(非想非非想處)를 얻게 되었나이다.
이 비상비비상이 바로 일체지(一切智)로서 고요하고 청정하여 떨어짐도 없고 항상 변하지 않나이다.
그러므로 저는 그 마음을 조복할 수 있었나이다.’
부처님이 말씀하셨다.
‘선남자야,
너는 어떻게 마음을 조복할 수 있었다고 하느냐.
네가 이제 얻게 된 비상비비상정(非想非非想定)은 오히려 생각이라 하거니와 열반에는 생각이 없느니라.
너는 어떻게 열반을 얻게 될 수 있다고 하겠느냐.
선남자야,
너는 이미 먼저는 거친 생각[麤想]은 꾸짖을 수 있었으나 이제는 어떻게 세밀한 생각[細想]에 애착하느냐.
이와 같은 비상비비상처를 꾸짖을 줄 모르기 때문에 생각이라고 하며,
마치 종기와 같고 상처와 같고 독과 같고 화살과 같으니라.
선남자야,
너의 스승 울두람불(鬱頭藍弗)은 근기가 영리하고 총명하지만 오히려 이와 같은 비상비비상처를 끊지 못하고 나쁜 몸을 받았거늘,
하물며 그 밖의 사람들이겠느냐.’
‘세존이시여,
어떻게 온갖 모든 존재[有]를 끊을 수 있나이까.’
부처님이 말씀하셨다.
‘선남자야,
만일 진실한 생각[實想]을 관하면 이 사람은 온갖 모든 존재를 끊을 수 있느니라.’
수발타가 말하였다.
‘세존이시여,
무엇을 진실한 생각이라 하나이까?’
‘선남자야,
생각이 없는 생각을 진실한 생각이라 하느니라.’
‘세존이시여,
무엇을 생각이 없는 생각이라 하나이까?’
‘선남자야,
온갖 법은 없어서 자기 모양과 남의 모양과 자기와 남의 모양[自他相]도 없고 원인의 모양도 없다.
짓는 모양도 없고 받는 모양도 없으며 짓는 이의 모양도 없고 받는 이의 모양도 없으며 법과 법이 아닌 모양도 없고 남녀의 모양도 없고 사부(士夫)의 모양도 없으며 작은 티끌의 모양도 없고 시절(時節)의 모양도 없으며 자기를 위한 모양도 없고 남을 위한 모양도 없으며 자기와 남을 위하는 모양도 없느니라.
있는 모양도 없고 없는 모양도 없으며 나는 모양도 없고 나는 이[生者]의 모양도 없으며 원인의 모양도 없고 인인(因因)의 모양도 없다.
결과의 모양도 없고 과과(果果)의 모양도 없으며 밤과 낮의 모양도 없고 밝거나 어둠의 모양도 없으며 보는 모양도 없고 보는 이의 모양도 없으며 듣는 모양도 없고 듣는 이의 모양도 없다.
깨닫거나 아는 모양도 없고 깨닫거나 아는 이의 모양도 없으며 보리의 모양도 없고 보리를 증득하는 이의 모양도 없느니라.
업(業)의 모양도 없고 업 주인의 모양도 없으며 번뇌의 모양도 없고 번뇌 주인의 모양도 없느니라.
선남자야,
이와 같은 모양들이 사라지게 되는 곳에 따라 진실한 생각이라 하느니라.
선남자야,
온갖 모든 법은 모두가 거짓이어서 그 소멸되는 곳에 따라 이것을 진실한 생각이라 하나니,
이것을 법계라고 하고 필경지(畢竟智)라고 하며 제1의제(義諦)라고 하고 제일의공(第一義空)이라고 하느니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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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음악공양, 나무불, 나무법, 나무승 mus0fl--Lio - Les Voyages Immobiles.lrc
종경록에서 고통으로 도를 깨치는 축생의 수행방안에 대한 내용이 나온다.
그리고 나무를 베고 숲은 남겨 놓는 수행 방안에 대해서도 나온다.
그래서 이 부분에 대해 깊게 헤아릴 필요가 있다.
원래 정려 수행을 강조하는 선정에서는 불립문자 직지인심 견성성불을 세우게 된다.
그런데도 오히려 대단히 경전과 관련된 내용을 대단히 많이 나열하게 된다.
문자를 떠나서 곧바로 깨칠 수 있다면 대단히 좋다.
또 깨쳐야 할 내용 자체도 성격이 그렇다.
그런데 그렇게 되지 않는다.
사정이 그러한데 또 사정이 그렇다고, 그런 방식만 사용하면
자칫 축생의 수행방안을 따르게 되기 쉽다.
원래 부처님은 절을 3 천번을 해야만 도를 알려준다고 제시한 적은 없다.
그런데 그렇게 정성을 들여서 절을 하면 나쁜 것은 아니다.
그런데 이것이 심하면 결국 축생의 수행방안과 가깝게 된다.
그리고 아주 특수한 상황에서 통하는 방식만 붙잡고 나아가기 쉽다.
그래서 나무는 열심히 베어 나가는데 숲은 끝내 남게 되는 경우가 있다.
원래 취지가 그것이 아니다.
그런데도 그렇게 되기 쉽다.
그래서 역설적으로 아함경을 비롯해서 기본적인 경전 내용들이
그렇게 제시된 것이기도 하다.
그리고 처음 기본적으로 계를 성취하는 것이 강조되는 것이기도 하다.
그런데 갑자기 비약해서 나아가면
잘못은 아니지만, 현실적으로 잘 통용되지 않게 되기 쉽다.
그래서 이런 저런 사정을 살피다보면 대단히 어렵다.
각 경우마다 구체적으로 상응해야 적절해진다.
이것이 유가의 의미이기도 하다.
랜덤으로 뽑여 나오는 사진이나 노래도 어떻게 보면 그런 취지를 갖기도 한다.
여하튼 이 상황에서 만나는 사진이나 노래이기 때문이다.
이것을 보고 바로 도를 깨칠 수도 있다.
본래 색상 문자 일체가 다 그런 기능을 갖는다.
그런데 현실적으로는 어렵다.
◈Lab value 불기2564/08/20 |
우선 단순히 상식이 많아질 수 있다. 그리고 지적 호기심이나 궁금증도 해소될 수 있다. 대부분 지식은 1차적으로 이런 기능을 갖는다. 그런데 역사지식은 또 다른 기능도 갖는다. 역사 현실 대부분은 반면 교사의 기능을 갖는다. 수행자 입장에서는 참과 괴의 자산이 된다. 이것이 자산의 기능을 하는 사정이 있다. 그런 내용이 명료하게 자신의 의식안에 담겨지면 같은 실수나 시행작오를 되풀이 하지 않게 된다. 되풀이 하지 않으면 되풀이 하지 그 만큼이 곧 그로 인해 얻는 수익이다. 무량겁을 두고 수행해 가는 입장에서는 그래서 이 참괴 항목은 대단한 자산가치를 갖는다. 만일 반대로 그런 내용을 지니지 못하면 같은 성격의 실수를 무량하게 반복해 나가게끔 된다. 현실에서 열쇠를 한달마다 한번씩 잃어버리는 이가 있다. 핸드폰을 몇 개월 간격으로 분실하고 깨뜨리면서 매번 새로 구입하는 경우도 있다. 또 안경을 벗고 이후 매번 안경을 찾아 나서는 사례가 있다. 하루 1번 실수했으면 그 다음에는 하지 않아야 할 듯하다. 그런데 대부분 그렇지 않다. 이는 남의 이야기가 아니다. 본인 이야기이기도 하다. 본인은 담배를 필 때마다 이 담배만 피고 이제 안 핀다. 최후의 담배다. 이런 생각을 하고 수십년간 피어 왔다. 그리고 담배를 피고 난 후에는 그런 강한 의식을 갖는다. 그런데 일정 시간이 지나고 연구를 한참 했다거나, 하면 또 달라진다. 일종의 단기 기억상실 치매증상이기도 하다. 그래서 조금씩 반복하는 내용을 합치면 평생 만갑 이만갑 이런 형태로 쌓이게 된다. 자신이 행한 실수라면 참의 항목에 넣고 다른 이들이 행한 실수는 간접 경험을 통해서라도 괴의 항목에 넣어서 잘 보관하고 살펴야 한다. 그런데 역사지식은 이런 기능을 갖는다. 타산지석이다. 현재 진행형인 내용도 사정이 같다. 매일 보고되는 신문 기사 가운데 사건 사고 내용도 이런 성격을 갖는다. 그런데 같은 성격의 사건 사고가 반복되는 것도 볼 수 있다. 반성을 하지 않으려 한다. 그리고 그런 경우 반성하라고 요구해도 반성하지 않는다. 사정이 그런데도 매번 그것을 요구한다. 그래서 바꿔지지 않는다. 그리고 서로 반복한다. 무언가가 필요하다. 그런데 그 경우 다음을 생각해야 한다. 잠을 자라고 요구한다고 해서 자는 경우가 없다. 자신도 마찬가지다. 담배나 술 밥 운동 이런 것들 하나만 놓고 보아도 사정이 같다. 그것에 관해 무엇을 요구한다고 그렇게 하는 경우가 드물다. 자기 자신도 마찬가지다. 자신이 자신 스스로에게 요구해도 행하지 못한다. 그런데 또 요구하지 않았지만 그것을 잘 행하는 경우도 있다. 그래서 이것을 잘 살펴야 한다. 잠을 자라 자라 이런 식으로 요구하지 않아도 어떤 경우에는 잘 잔다. 이제 그것을 잘 살펴야 한다. 역사기록에서 찾아야 할 또 다른 내용에 이런 내용들도 있다. 그래서 그것을 현실에서 잘 적용해 나가면 된다. 그것이 또 현재 현실에서 각곳에서 진행되고 있다. 끔직하게 대량 학살된 사건으로 유명한 사건이 있었다. 그런데 그 뒤로도 계속 이어서 세계 각 곳에서 비슷한 사건들이 빈번하게 재발되었다. 이곳도 사정이 다르지 않다. 같은 유형의 질환이 돌아다닌다. 현재 세계에서 가장 안타까운 현장을 세계에서 몇 곳 추릴 수 있다. 그 모습이 또 세계 각 곳을 시간과 공간적으로 옮겨 다니게 된다. 앞과 같이 기억 상실 치매 증상을 갖고 있는 한편 망집에 바탕해 중독 현상을 끊어 내지 못하는 경우 다시 만날 도리 밖에 없다. 그 속성이 그렇기 때문이다. 그런데 완치가 힘들다. 이것이 수행자가 수행을 하게 되는 기본 배경이다.
종경록에서 구체적 경우에 상응해 행하게 되는 수행방안을 살폈다. 현재 연구해야 할 내용에 대한 노래를 연이어 들었다. 다른 하나는 그렇지 않다. 일단 붙여 놓고 감상을 하게 된다. 특별히 두부분을 어럽게 여기기 쉽다. 거리에서 멀리서 영희가 손을 흔들면서 자신에게 다가온다고 하자. 그런데 이런 상황에 영희나 자신도 얻을 수 없다. 그리고 오고감도 얻을 수 없다. 공을 굴려서 컵이 깨졌다. 이런 상황도 마찬가진다. 공도 얻을 수 없다. 컵도 얻을 수 없다. 공이 굴름도 얻을 수 없고 컵이 깨짐도 얻을 수 없다. 손바닥을 부딪혀서 손뼉소리가 났다. 이런 상황도 역시 마찬가지다. 그래서 이 내용을 우선 일반적으로 이해하기 힘들어 한다. 그리고 두번째 이들 내용이 모두 마음안 내용임을 이해하기 힘들어 한다. 이것은 다음 상황과 관련된다. 사과를 손에 들고 눈으로 본다. 사과를 두르리며 소리를 듣는다. 사과를 냄새맡는다. 사과 맛을 본다. 사과를 만지며 촉감을 얻는다. 이런다고 하자. 이 경우 자신의 손이 사과에 닿는다고 여긴다. 그래서 자신의 손이 닿은 대상은 자신이 눈으로 보는 그 사과라고 여긴다. 눈으로 보거나 소리를 듣는 경우도 이에 준해 다 마찬가지로 여기게 된다. 그리고 이들 내용은 모두 자신이 눈으로 보는 그 사과 모습을 대상으로 다 제각각 얻는 내용으로 잘못 여긴다. 이들 내용은 모두 자신 마음 내용이다. 그리고 이 안에는 그런 내용을 얻게 한 대상이 없다. [유식무경] 이런 내용을 우선 이해하기 힘들다. 또 그런 사정으로 이것이 실답지 않다. 그리고 또 그런 사정으로 앞처럼 오고감도 얻을 수 없다는 등으로 제시하게 된다. 그런데 다시 이것을 이해해도 또 다음을 이해하기 힘들어 한다. 그런데 일반적으로 그것을 받아들여도 다시 다음 의문을 이어가게 된다. 이들이 모두 마음안 내용이고 이 안에는 그것을 얻게 한 대상이 없다고 하자. 그리고 그런 사정으로 실답지 않다고 하자. 그런데 사실 사정이 그렇다. 그런데 일반적인 입장에서는 다음처럼 의문을 제기한다. 사정이 그렇다면 왜 자신뿐 아니라 철수 영희를 비롯해 수많은 사람이 다 함께 일정한 시간과 공간에서 일정한 상황과 조건에서 엇비슷한 내용을 무량하게 반복해 겪는가. 이렇게 의문을 제기하게 된다. 그리고 사정이 그렇다면 그런 사정으로 이것이 실답게 있다고 해야 하는 것 아닌가. 이렇게 의문을 갖게 된다. 그래서 그렇게 여기고 현실에 임하게끔 되는 그 배경사정을 다시 잘 살펴야 한다. 그런데 이 작업이 쉽지 않다. 그래서 이것을 잘 연구해나가야 한다. 그래서 지금 이런 방안을 생각 중이다. 위 내용 가운데 중요한 부분들을 직접 얻지 못한다. 또 마음은 직접 보거나 만지지도 못한다. 그런 가운데 내용을 살펴 나가야 한다. 그래서 이해를 돕기 위해 모두 그 내용을 보고 만질 수 있는 내용으로 바꿔서 비유적으로 접근해볼까 생각 중이다. 예를 들어 벽돌과 라면 이런 것으로 바꿔서 위 내용을 살펴볼까 기획 중이다. 이것이 잘 되면 다음 연구에 임할 수 있으리라 기대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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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서정보 ori
https://buddhism0077.blogspot.com/2020/08/2564-08-20-k1499-041.html#1622 sfed--종경록_K1499_T2016.txt ☞제41권 sfd8--불교단상_2564_08.txt ☞◆vxdv1622 불기2564-08-20 θθ |
■ 선물 퀴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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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기2564-08-20_종경록_041
중도(中道)의 바름을 여읜 양극단. 이를 주관적으로 보면 2견(見). (1) 유변(有邊)ㆍ무변(無邊). (2) 증익변(增益邊)ㆍ손감변(損減邊). (3) 단변(斷邊)ㆍ상변(常邊).
답 후보
● 이변(二邊)
이생희락지(離生喜樂地)
이숙식(異熟識)
이십수번뇌(二十隨煩惱)
이양(利養)
이입(二入)
이종라한(二種羅漢)
ॐ मणि पद्मे हूँ
○ [pt op tr]
○ [pt op tr]
● 종경록_K1499_T2016 [문서정보]- 일일단상키워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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