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장경_K0529_T0653_001
Julien ClercAnne Clark - Fais-Moi Une Place
Philippe Clay - Les Brigades Du Tigre
Weepers Circus - Suspendez La Tempete (Avec Isabelle Lux)
● [pt op tr] fr sfed--불장경_K0529_T0653.txt ☞불장
어느 때 부처님께서는 왕사성(王舍城)의 기사굴산(耆闍崛山)에 큰 비구의 무리와 함께 머무셨는데,
이들은 모두가 지식을 갖춘 이들이었으며,
또 가없는 대보살마하살의 무리는 한량없고 셀 수 없었다.
이 때 사리불이 삼매로부터 깨어나 부처님 계신 곳으로 찾아와서 오른쪽 어깨를 한쪽으로 드러내고 머리를 숙여 예의를 갖춰 부처님께 아뢰었다.
“희유(希有)하십니다. 세존이시여,
여래께서 설하신 일체의 법은 생이 없고[無生],
멸이 없고[無滅],
상이 없고[無相],
함이 없는 것[無爲]으로 사람으로 하여금 믿고 깨닫게 합니다.”
부처님께서 사리불에게 말씀하셨다.
“그대가 어떠한 이익을 보았기에 찬탄하여 ‘희유합니다.
여래가 설하신 일체의 모든 법은 생이 없고 멸(滅)이 없고 상이 없으며 함이 없는 것으로 사람으로 하여금 믿고 깨닫게 한다’고 하는가?”
■사리불이 부처님께 아뢰었다.
“세존이시여,
저는 선정(禪定)에 있으면서 항상 이러한 생각을 하였습니다.
‘세존께서는 명상(名相)이 없는 법에 있어 곧잘 명상으로써 설하며 언어가 없는 법을 언어로써 설하신다.’
이 일을 사유하여 희유하다는 마음이 생겼습니다.”
부처님께서 사리불에게 말씀하셨다.
“참으로 그렇다.
이 일은 가장 희유하다.
이것을 모든 부처의 아뇩다라삼먁삼보리(阿耨多羅三藐三菩提)라고 말한다.
사리불아,
비유컨대 훌륭한 화공(畵工)이 허공에 여러 가지 색상(色相)을 그려서 나타내는 것과 같다.
어떻게 생각하느냐?
이 화공을 희유하다고 하겠느냐, 아니하겠느냐?”
“희유합니다,
세존이시여.”
■ “사리불아,
여래가 얻는 아뇩다라삼먁삼보리는 모든 법은 무생(無生)ㆍ무멸(無滅)ㆍ무상(無相)ㆍ무위(無爲)라고 설하여,
사람으로 하여금 믿고 깨닫게 함이 배(倍)나 희유하다.
무슨 까닭인가 하면,
명상(名相)이 없는 법은 생각이 없고 얻음이 없는 것으로서 역시 닦을 것도 없다.
불가사의하여 마음의 의지하는 바가 아니며 희론(戱論)함도 없다.
이는 희론이 의지할 곳이 아니고,
깨달을 것도 관(觀)할 것도 없고 거두는 바도 없다.
마음에 있지 않고,
얻고 얻는 것이 아니며,
이것도 없고 저것도 없어 분별함이 없다.
움직임도 없고 성품[性]도 없어 본래가 스스로 공(空)한 것이다.
생각할 수가 없고 나갈[出] 수가 없는 것으로서 일체의 세간이 믿을 수 없는 곳이다.
이와 같이 명상이 없는 법을 명상으로서 설하는 것이 그와 같다.
사리불아,
일체의 모든 법은 생이 없고 멸이 없고 상이 없고 함이 없는 것으로서 사람으로 하여금 믿고 깨닫게 하기가 배나 희유하다고 한다.
사리불아,
비유하면,
사람이 있어 수미산(須彌山)을 씹어 삼켜서 능히 없애고 허공을 날아도 병이 되지 않음과 같다.
어떻게 생각하느냐? 희유하냐, 하지 않으냐?”
“희유합니다, 세존이시여.”
“사리불아,
모든 부처가 설하는 바의 모든 법은 무생(無生)ㆍ무멸(無滅)ㆍ무상(無相)ㆍ무위(無爲)로서 사람으로 하여금 믿고 깨닫게 하기가 배나 희유하다고 한다.
사리불아,
비유하면 화성(火城)의 높이와 너비와 깊이가 각각 1유순(由旬)으로 네 개의 문으로부터 불꽃을 뿜어낸다.
사람이 마른 풀을 지고 그 속을 지나가니 사나운 바람에 불길이 불어 그 몸을 태우려 하지만,
이 사람은 풀을 태우지 않고 몸도 태우지 않고서 안에서 나올 수가 있어 본래와 같아 다름이 없다.
어떻게 생각하느냐?
희유하다 하겠느냐,
아니하겠느냐?”
“희유합니다.
세존이시여.”
“사리불아,
여래께서 설하시는 바 일체의 모든 법은 무생(無生)ㆍ무멸(無滅)ㆍ무상(無相)ㆍ무위(無爲)로서 사람으로 하여금 믿고 깨닫게 하기가 배나 희유하다고 한다.
사리불아,
비유컨대 사람이 돌을 가지고 뗏목을 만들어 바다의 이쪽 기슭에서 저쪽 기슭에 이르고자 하는 것과 같다.
어떻게 생각하느냐?
희유하다 하겠느냐,
아니하겠느냐?”
“희유합니다,
세존이시여.”
“사리불아,
여래께서 설하시는 일체의 모든 법은 무생(無生)ㆍ무멸(無滅)ㆍ무상(無相)ㆍ무위(無爲)로서 사람으로 하여금 믿고 깨닫게 하기가 배나 희유하다.
사리불아,
비유하면 사람이 있어서 4천하(天下)와 그리고 모든 수미산의 강과 풀과 나무를 지고서 모기[蚊]의 다리로 사다리를 삼아 올라가 범천(梵天)에 이르고자 함과 같다.
어떻게 생각하느냐?
희유하다 하겠느냐,
아니하겠느냐?”
“희유합니다,
세존이시여.”
“사리불아,
여래께서 설하시는 일체의 모든 법은 무생(無生)ㆍ무멸(無滅)ㆍ무상(無相)ㆍ무위(無爲)로서 사람으로 하여금 믿고 깨닫게 하기가 배나 희유하다고 한다.
사리불아,
비유컨대 연(蓮) 줄기의 실을 수미산에 걸어 허공에 있게 함과 같다.
어떻게 생각하느냐?
희유하다 하겠느냐,
아니하겠느냐?”
“희유합니다,
세존이시여.”
“사리불아,
여래께서 설하신 일체의 모든 법은 생이 없고 멸이 없고 상이 없고 함이 없는 것으로서 사람으로 하여금 믿고 깨닫게 하기가 배나 희유하다고 한다.
사리불아,
비유하면 겁(劫)이 다하도록 큰불이 타오를 때,
사람이 침을 한 번 뱉어서 능히 이 불을 끄고,
또 한 번 불어서 세계와 모든 천궁(天宮)을 다시 이루는 것과 같다.
어떻게 생각하느냐?
희유하다 하겠느냐,
아니하겠느냐?”
“희유합니다,
세존이시여.”
“사리불아,
여래께서 설하시는 일체의 모든 법은 무생(無生)ㆍ무멸(無滅)ㆍ무상(無相)ㆍ무위(無爲)로서 사람으로 하여금 믿고 알게 하는 것은 배나 희유하다고 한다.
사리불아,
항하(恒河)의 광대(廣大)함을 무량하다 하겠느냐,
아니하겠느냐?.”
“무량합니다,
세존이시여.”
“사리불아,
4천하(天下) 가운데 널리 큰비를 내려 항하에 넘치도록 함과 같은데,
사람이 있어 손으로 이 비를 받아 버릴 곳이 없다면 어떻게 생각하느냐?
희유하다 하겠느냐,
아니하겠느냐?”
“희유합니다,
세존이시여.”
“사리불아,
여래께서 설하시는 일체의 모든 법은 무생(無生)ㆍ무멸(無滅)ㆍ무상(無相)ㆍ무위(無爲)로서 사람으로 하여금 믿고 알게 하기가 배나 희유하다고 한다.
사리불아,
수미산을 넓고 크다 하겠느냐,
아니하겠느냐?”
“높고 큽니다.
4천하 가운데 큰돌을 남김 없이 비오듯 뿌려 모두가 수미산과 같이 하는데,
사람이 있어 손으로 이 돌을 받아 개자(芥子)와 같이 버릴 곳이 없다면 어떻게 생각하느냐?
희유하다 하겠느냐,
아니하겠느냐?”
“희유합니다,
세존이시여.”
“사리불아,
여래의 설하시는 일체의 모든 법은 무생(無生)ㆍ무멸(無滅)ㆍ무상(無相)ㆍ무위(無爲)로서 사람으로 하여금 믿고 알게 하는 것은 배나 희유하다고 한다.
사리불아,
비유컨대 사람이 있어 일체 중생을 왼손에 놓고 오른손에 삼천대천세계의 산과 갖가지 풀과 나무를 들어 올려 능히 일체 중생 모두로 하여금 한가지로 마음이 기쁘고 즐겁게 하고 그 뜻이 다르지 않게 함과 같다.
어떻게 생각하느냐?
희유하다 하겠느냐,
아니하겠느냐?”
“희유합니다,
세존이시여.”
“사리불아,
여래께서 설하시는 일체의 모든 법은 생이 없고 멸이 없고 상이 없고 함이 없어 사람으로 하여금 믿고 알게 하기란 배나 희유하다고 한다.
사리불아,
여래께서 설하시는 모든 법은 성품이 없고 공(空)하여 있는 바가 없어 일체의 세간(世間)이 믿고 알기에 어려운 것이다.
무슨 까닭인가?
■ 사리불아,
이 법은 생각[想]이 없고 모든 생각[想]을 떠났으며,
생각[念]이 없고 모든 생각[想]을 떠났으며,
취(取)도 없고 버리는 것[捨]도 없고 희론(戱論)함도 없고 뜨거운 고뇌도 없다.
차안(此岸)도 아니며 저 피안(彼岸)도 아니며 육지도 아니다.
어리석음이 아니며 현명함도 아니며,
무량한 지혜로써 알 수가 있게 되는 것이지,
사량(思量)으로써 능히 알 수 있는 곳이 아니다.
행(行)도 없고 상(相)도 없으며 뜨거운 고뇌도 없다.
생각[念]이 없고 모든 생각을 지난 것이다.
마음도 없고 모든 마음을 지난 것이다.
앞[向]도 없고 뒤[背]도 없으며 묶임도 없고 풀리는 일도 없다.
망령됨도 없고 망령된 법도 없다.
어리석음도 없고 어리석은 법도 없다.
어리석음의 그물이 없으며 이름도 없고 말도 없다.
설함이 없고 설하지 않음도 없고,
다함이 없고 다하지 않음도 없다.
행(行)이 없고 행의 상(相)도 없으며 길이 없고 길의 결과[道果:보리와 열반]도 없다.
떠남도 없고 떠나는 모든 것도 지났다.
사유(思惟)함도 없고 뒤범벅이 된 것도 없다.
취(取)하지 않고 버리지 않으며 얻음도 얻을 수 없는 것도 없다.
모든 집착을 없애고 탐욕과 성냄과 어리석음을 없앤다.
진실이 아니고 허망함도 아니다.
항상함이 아니고 무상(無常)한 것도 아니다.
밝음이 아니고 밝음이 아닌 것도 아니다.
어둠이 아니고 비춤[照]도 아니다.
마음에 있지 않고 성품이 있는 것이 아니며 성품은 본래가 공(空)이다.
능히 악마를 항복하고 번뇌를 항복하고,
5음(陰)을 항복하고 12입(入)을 항복하고,
18계(界)를 항복하고 5음이 있다고 설하는 자를 항복하고,
12입이 있다고 설하는 자를 항복하고 18계가 있다고 설하는 자를 항복하며,
중생이 있다고 설하는 자와 사람이 있다고 설하는 자와 목숨[壽]이 있다고 설하는 자와 명(命)이 있다고 설하는 자와 유(有)가 있다고 설하는 자와 무(無)가 있다고 설하는 자를 항복하며,
일체의 모든 삿된 행이 있는 자를 항복한다.
사리불아,
나의 이 거룩한 법은 능히 일체의 탐착하고 내지 법이 있다고 설하는 자와 모든 법의 여실(如實)한 상을 바라지 않는 자와 불법(佛法)을 거스르는 자,
모두를 항복한다.
무슨 까닭인가?
사리불아,
만약 중생의 아(我)를 설하는 자와 인(人)을 설하는 자와 끊어짐과 멸함을 설하는 자,
상(常)을 설하는 자와 유(有)를 설하는 자와 무(無)를 설하는 자,
여러 법을 설하는 자와 거짓 이름을 설하는 자와 가[邊]를 설하는 자가 있으면,
그 모두는 부처에게 어기고 배반하며 부처와 함께 다투는 자이다.
사리불아,
내지 법에 있어서 조금의 기약이라도 얻는 자는 모두가 부처와 함께 다툰다.
부처와 다투는 자는 모두가 삿된 길에 들며 나의 제자가 아니다.
만약 나의 제자가 아니면 곧 열반과 함께 다투며 부처와 함께 다투고 법과 함께 다투고 승(僧)과 함께 다툰다.
사리불아,
이와 같은 소견을 가진 사람이 출가하여 계를 받은 것을 나는 허가하지 않는다.
사리불아,
이와 같은 견해를 가진 사람에게는 내가 한 번 마시는 물을 받아도,
스스로 공양(供養)하는 것이라고 허락하지 않는다.
사리불아,
만약 사람이 이와 같은 선하지 못한 탐착한 일을 없애고 나의 법 가운데서 출가하여 도(道)를 구하면 열반을 염하고 열반으로써 염(念)을 삼고 열반을 탐하지 않는다.
필경공(畢竟空)의 법에 있어서 놀라지 않고 두려워하지 않는 이 사람은 더욱 모든 법을 끊기 위한 까닭에 부지런히 정진을 행한다.
하물며 이와 같이 선하지 못한 탐착(貪着)이겠느냐?
말하자면 나에게 집착하고 중생에게 집착하고 사람에게 집착하고 법에 집착함이겠느냐?
이 사람은 모든 탐착을 끊기 위한 까닭에 오직 부지런히 힘써 무상삼매(無相三昧)1)를 닦아 무상삼매에 있어서도 역시 상(相)을 취하지 않는다.
이 사람이 일체의 모든 법의 상에 통달하면 이 모두는 하나의 상으로서 이른 바 무상(無相)인 것이다.
사리불아,
■ 이는 곧 거룩한 법 가운데서 유순한 법인(法忍)2)을 이룬다고 이름한다.
이 유순한 법인을 얻으면 이는 곧 나의 제자라고 이름한다.
능히 공양을 없애어 몸을 받음에 헛되지 않는다.
무슨 까닭인가 하면 사리불아,
나의 이 진실한 상의 법은 들어갈 수 없고 취할 수 없고 버릴 수 없고 탐착할 수 없으며 설할 수 없어 언어의 길이 끊어진 것이다.
기쁨이 없고 기쁨을 탐하는 마음까지도 끊어진 것이다.
뭇 인연과 뭇 인연의 합하고 떠남이 아니다.
길이 없고 길을 끊어 길 없음에 이른다.
모든 언어와 논의(論議)와 음성을 끊는다.
모양도 없고 빛깔도 없고 취함도 없고 착함[着]도 없고 쓰임[用]도 없다.
진실함도 없고 거짓됨도 없고 어둠도 없고 밝음도 없다.
무너짐도 없고 다툼도 없고 합함도 없고 흩어짐도 없다.
움직임도 없고 생각함도 없고 분별함도 없으며 얻을 수도 없다.
때[垢]가 아니고 깨끗함이 아니며 이름이 아니며 상이 아니며 심수(心數: 心所. 마음의 작용)의 법이 아니며 마음이 이해하는 것도 아니다.
나의 이 법 가운데는 남자도 없고 여자도 없으며 하늘도 없고 용(龍)도 없으며 야차도 없고 건달바도 없다.
구반다(鳩槃茶)3)도 없고 비사사(毘舍闍)4)도 없다.
단견(斷見)5)도 없고 상견(常見)6)도 없고 아(我)도 없고 중생도 없고 사람도 없다.
오고 감이 없고 들고남도 없다.
계율도 없고 계율을 범함도 없으며 깨끗함도 없고 더러움도 없으며 삼매도 없고 선정도 없고 선정(禪定)의 뿌리7)도 없다.
선(禪)도 없고 선의 뿌리도 없다.
앎[知]이 없고 견해도 없으며 탐욕도 없고 다툼도 없다.
도(道)도 없고 도의 열매도 없다.
지혜도 없고 지혜의 뿌리도 없다.
밝음[明]도 없고 밝지 않음도 없다.
해탈도 없고 해탈 아님도 없다.
과보도 없고 과보의 얻음도 없다.
힘도 없고 힘 아님도 없다.
두려운 것도 없고 두려움이 없음도 없다.
생각도 없고 생각의 뿌리도 없다.
앉는 것[坐禪]도 없고 행(行:수행)함도 없으며 위의(威儀)도 없다.
이것이라고 하는 주장도 없고 저것이라고 하는 주장도 없고 기억하고 생각하고 분별함도 없다.
보리(菩提)도 없고 보리의 분(菩提分)8)도 없고 지혜도 없고 지혜 아님도 없다.
땅[地]이 없고 물이 없고 불도 없고 바람도 없다.
죄도 없고 복도 없으며 법(法)도 업고 법 아닌 것도 없다.
괴로움도 없고 즐거움도 없다.
일체의 모든 희론의 뿌리를 뽑아 버린다.
보든 것은 영원히 떠나고 차가워 불타지 않는다.
사리불아,
긴요한 것만을 들어서 이를 말하면 나의 변은 일체의 모든 생각[念]과 일체의 모든 견해와 일체의 모든 번뇌와 모든 증상만(增上慢)9)을 남김없이 깨트린다.
일체의 잊지 않는 모든 것을 염[念]하지 않고 일체의 여러 가지 언어를 끊는다.
나의 이 법 가운데에는 항상 함도 없고 무상함도 없다.
괴로움도 없고 즐거움도 없으며 더러움도 없고 깨끗함도 없다.
단견(斷見)도 없고 상견(常見)도 없으며 아상(我相)도 없고 중생상(衆生相)도 없다.
인상(人相)도 없고 수자상(壽者相)도 없으며 명상(命相)도 없고 생도 없고 멸(滅)도 없다.
무슨 까닭인가?
사리불아,
여래는 법에 있어서 모든 소득이 없으며 멸하는 바는 있다.
까닭에 이름하여 열반이라 이름한다.
또 열반을 얻는다고 보지 않는다.
사리불아,
부처도 또한 열반을 염(念)하지 않는다.
열반으로서 소원을 삼지 않고 또 열반에 탐착하지 않는다.
이 까닭에 마땅히 알아야 한다.
이를 제일로 기특하고 희유하다 한다.
이른바 여래의 일체의 법은 생이 없고 멸이 없고 상이 없고 함이 없다고 설하여 사람으로 하여금 믿고 알게 하는 것이 배나 희유하다고 한다.”
■ 2. 염불품(念佛品)
이 때 사리불이 부처님께 아뢰었다.
“세존이시여,
이 법 가운데서 무엇을 악지식(惡知識)이라 하고 무엇을 선지식(善知識)이라 합니까?”
● 악지식
■ 부처님께서 사리불에게 말씀하셨다.
“만약 비구가 있어서 다른 비구를 가르치는데
‘비구여,
그대는 마땅히 부처를 염(念)하고 법을 염하고 승(僧)을 염하고 계를 염하고 보시를 염하고 하늘을 염해야 한다.
비구여,
그대는 마땅히 몸을 관하여야 하고 취(取)는 이 몸의 상으로서 이른바 부정(不淨)한 것이며 마땅히 일체의 모든 유위법(有爲法)은 모두가 무상하다고 관하고,
일체의 법은 공하여 아(我)가 없다고 관해야 한다.
비구여,
그대는 마땅히 반연하는 바의 상을 취하여 마음이 반연하는 것 가운데 묶어 오로지 공의 상을 염하여야 한다.
마땅히 선근(善根)을 원해야 한다.
마땅히 취는 선하지 않은 법의 상이다.
취는 선하지 않은 법의 상일 뿐이라,
끊기 위한 까닭에 관(觀)하고 염(念)하는 것을 닦아라.
말하자면 탐욕을 끊기 위해서는 부정(不淨)한 상을 관하고,
성냄을 끊기 위해서는 자비로운 마음을 관하고,
■ 어리석음을 끊기 위해서는 인연의 법을 관하여라.
항상 깨끗한 계를 염하여 깊이 공의 상을 취하고 부지런히 정진하는 것을 4선(禪)을 얻는다 한다.
마음을 다하여 도를 구하고 선하지 않은 법은 이 모두가 손해를 가져오는 고뇌라고 관하여라.
선한 법을 관하는 것은 곧 가장 안온한 것이다.
일심으로 수도하여 분별해서 밝게 관찰하라.
선하고 선하지 않는 법은 취의 상일 뿐이라고 밝혀라.
오직 열반을 관하면 안온하고 적멸하다.
■ 오직 열반을 사랑하면 필경은 청정하다고 이와 같이 가르치면 이름하여 삿된 가르침이라 한다.
■ 이를테면 이는 바른 가르침이면서도 곧 삿된 가르침인 것이다.
사리불아, 이와 같이 가르치는 자를 악지식(惡知識)이라 한다.
이 사람을 이름하여 나를 비방하고 외도(外道)를 돕는 자라 한다. 또 남을 위하여 삿된 길을 설하는 자라 한다.
사리불아,
이와 같이 나쁜 사람에게서 내가 한 그릇의 마시는 물을 받았어도 그것으로 스스로 공양함을 허락하지 않는다.
나의 가르침을 받은 자는 받은 것을 설하지 않기 때문이다.
사리불아,
나의 법 가운데에는 이와 같이 많은 증상만(增上慢)의 가르침이 있다.
사리불아,
만약 가르침을 받는 자로서 계를 받고,
다섯 해 동안 이와 같이 가르치는 것을 남김 없이 버리지 못하고,
이 가르침 중에 마음을 부지런히 정진하여 스스로 소득 없음[無所得]을 얻는 일이 있어도,
비구가 와서 스스로 묻지 않으면,
나는 이 사람에게 다섯 해가 있었지만 아직도 삿된 견해를 가졌다고 하고 외도의 법에 섞여 악마의 가르침을 순행(順行)하는 자라고 설한다.
● 선지식
사리불아,
만약,
비구가 있어서 이 가르침을 받기를 마치고 공하고 소득이 없는 법을 듣고서 곧 스스로나 먼저 받는 자는 이 모두가 삿된 견해라고 깨달아 알고 공하고 소득이 없는 법에 있어서 의심이 없고 뉘우침이 없고 깊이 통달하여
■ 일체의 아견(我見)과 인견(人見)에 의지하지 않으면 사리불아, 나는 이 사람을 설하여 청정한 범행(梵行)을 얻었다고 이름한다.
사리불아,
만약 비구가 있어 이와 같은 소득이 없는 인가를 성취하면 지금은 아직 남음이 없는 열반[無餘涅槃]10)을 얻지 못하였다 하여도 나는 이 사람에게,
미륵부처님 때 마땅히 첫 모임에 있게 되고 그 때 미륵부처님께서 환희하기를 세 번하고 이 사람이 석가모니부처의 가운데서 소득이 없는 인가를 성취했다고 말하도록 수기할 것이다.
● 악지식
사리불아,
만약 사람이 있어서 이와 같은 가르침을 받기를 마치고서 공하고 소득이 없는 법[無所得]11)을 듣고,
곧 그 때 놀라고 두려워하면 이 사람을 가엾게 여겨야 한다.
구해 주는 자도 없고 의지할 것도 없어서 곧 지옥에 떨어진다.
무슨 까닭인가?
사리불아,
부처의 가르침 중에서 놀라고 의심하고 두려워하는 자,
이 사람은 곧 나쁜 길을 구족한 자라고 한다.
왜냐 하면,
나는 항상 스스로 설하기를 소득이 있음[有所得]12)은 곧 나쁜 길의 분[惡道分]이라고 하기 때문이다.
무슨 까닭인가?
사리불아,
부처가 얻는 법에는 차별이 없다.
이것이라든가 소견이 아니라든가 혹 차별하지 않으면 이는 소득이 있는 것이 아니다.
사리불아,
사람은 5역죄(逆罪)의 무거운 악을 범하기보다는 모름지기 아견(我見)ㆍ인견(人見)ㆍ중생견(衆生見)ㆍ수견(壽見)ㆍ명견(命見)ㆍ5음견(陰見)ㆍ12입견(入見)ㆍ18계견(界見)ㆍ지계에 탐착하고,
지계에 탐착한 견해와 삼매에 탐착함과 삼매에 탐착한 견해와 부처의 생각에 의지하고 법의 생각에 있어서 얻음과 승(僧)에 있어서 끊어야할 일을 성취한 몸에 대한 견해를 성취하지 말아야 한다.
무슨 까닭인가?
불법 가운데에 신견(身見)을 성취함은 승(僧)의 일[事]13)에 있지 않기 때문이다.
사리불아,
부처의 제자 무리는 마음에 분열이 없어야 한다.
사리불아,
부처의 제자 무리는 착하지 않는 자가 없고 계를 깨트리는 자가 없으며 견해를 깨트리는 자가 없으며 위의를 깨트리는 자가 없다.
사리불아,
무엇을 악(惡)이며 착하지 않은 것이라 하는가?
■ 불법 가운데에 승(僧)의 상응한 행에 있지 않는 것을 악이며 착하지 않음이라고 한다.
이를테면, 마음과 마음에 상응한 행의 법의 온갖 인연과 합하고 진실이 없는 일에 다만 분별할 뿐이다.
분별을 까닭으로 해서 얻음이 있는 것을 헤아린다.
이 사람은 모든 언설(言說)까지도 마음과 마음으로 서로 이어진다.
그리고 선(善)과 선이 아닌 법도 거룩한 법 중에서는 악하고 선하지 않다고 이름한다.
무슨 까닭인가?
사리불아,
모든 즐거운 곳 안에는 반드시 괴로움이 있다.
■ 여래의 법은 이 괴로움을 없애는 것이다.
사리불아,
여래의 얻는 것,
이 중에는 욕심도 없고 욕심이 아닌 것도 없다.
즐거움도 없고 괴로움도 없으며 생각[思]도 없고 생각[想]도 없고 닦음도 없다.
내지 또한 공(空)이라는 생각도 없다.
무슨 까닭인가?
사리불아,
만약 공의 생각을 헤아리면 곧 이는 아상(我想)이며 중생상(衆生想)이다.
이는 상상(常想)이고 이는 단상(斷想)인 것이다.
무슨 까닭인가?
사리불아,
온갖 생각에 따르게 되면 곧 온갖 생각을 낳는다.
이는 모두가 삿된 것에로 떨어지는 것이다.
사리불아,
공은 생각이 없음에 이름한 것이며 이를 이름하여 공이라 한다.
공이라는 생각까지도 역시 공한 것이며,
이를 이름하여 공이라고 한다.
사리불아,
공중에는 선도 없고 악도 없다.
내지는 역시 공이라는 생각도 없다.
이런 까닭에 공의 생각이라고 이름한다.
사리불아,
모든 유위의 법은 알고 이해할 수 있다.
공은 알 수 없고 또 이해할 수가 없다.
사량(思量)하는 것이 아니다.
이 까닭에 공이라고 이름한다.
사리불아,
공은 생각으로 얻어지는 것이 아니다.
무슨 까닭인가?
공은 생각이 없는 까닭이며 이 까닭에 공이라고 이름한다.
사리불아,
무슨 까닭에 공의 행을 공하다고 설하는가?
일체의 모든 생각을 생각하지 않고,
또 공이라는 생각까지도 역시 생각하지 않는 이것을 공의 행이라고 이름한다.
사리불아,
생각이라고 하는 이름은 내지 마음에 생각하는 바가 있으면 곧 이름하여 생각이라 한다.
생각하는 바가 없는 것을 곧 생각이 없다고 이름한다.
모든 생각을 떠났기 때문에 이름하여 생각이 없다고 하는 것이다.
취(取)하는 바의 생각에 따르면 이 모두는 삿된 소견이다.
무슨 까닭인가?
사리불아,
거룩한 법 가운데서 적멸(寂滅)을 얻는 것을 헤아리는 것은 모두가 삿된 소견에 떨어지는 것이다.
하물며 말과 설(說)함이며,
하물며 설하는 자이겠느냐.
이와 같은 공의 법을 무엇으로써 설하겠느냐?
사리불아,
모든 부처님은 무슨 까닭에 온갖 언어를 설하여 삿되다고 이름하는가?
일체의 법에 통달할 수가 없는 것은 이는 곧 모두가 언설(言說)을 덮는 것이다.
이 까닭에 여래는 모든 언어(言語)는 이 모두가 삿되다는 것을 안다.
그러므로 조금이라도 언어가 있으면 그 실(實)을 얻지 못한다.
사리불아,
모든 부처님의 아뇩다라삼먁삼보리는 이 모두가 무념무상(無念無想)이다.
무슨 까닭인가?
여래는 법에 있어서 체성(體性)을 얻지 않고 또 생각을 얻지 않는다.
사리불아,
여래는 무슨 까닭에 염처(念處)14)가 있다고 설하는가?
사리불아,
경(經)에 설하기를 ‘만약 사람이 4념처(念處)15)를 얻으면 이 사람은 능히 모든 법의 체성(體性)을 얻고 능히 스스로의 몸을 얻고 자아[我]를 얻고 사람으로 나는 것을 얻는다.
이에 속한 것은 없다’고 하였다.
법의 다른 상(相)은 공임을 나타내지 않는 까닭에 4념처를 설하는 것이다.
4념처의 성품은 무성(無性)16) 무처(無處)이다.
생각이 없고 설함이 없어 탐착함도 없다.
생각의 성품은 더욱 없다.
하물며 염처(念處)이겠느냐?
이 까닭에 여래는 설하여 염처라고 이름한다.
■ 사리불아,
모든 법에 만약 결정적인 체성(體性)이 머리털을 끊어 그 100분(分)의 일이라도 있다면,
이에 곧 모든 부처님은 세상에 나지 않는다.
또 끝내 모든 법의 성품은 공하다고 설하지도 않는다.
사리불아,
모든 법은 실로 공하여 성품이 없는 그 하나의 상(相)뿐이다.
이른바 상이 없는 상으로서 여래는 남김없이 본다.
여래는 이로써 염처가 있다고 설한다.
사리불아,
염처를 이름하여 무처(無處)ㆍ무비처(無非處:속한 대상이 아닌 것도 없음)ㆍ 생각이 없음[無念]ㆍ생각의 업도 없음[無念業]ㆍ생각이 없음[無想]ㆍ 분별이 없음ㆍ뜻이 없음ㆍ뜻의 업이 없음ㆍ 생각[思]이 없음ㆍ생각[思]의 업이 없음ㆍ법이 없음ㆍ법의 상이 없음이라고 한다.
이 모두는 합하고 흩어짐이 없다.
이 까닭에 현성(賢聖)을 이름하여 분별이 없는 자라고 한다.
이것을 염처라고 이름하는 것은 여래가 이것으로써 염처가 있음을 설하고 소유가 없음에 수순하기 때문이다.
이름하여 염처라고 함은 염불(念佛)에 수순하는 것을 염처라고 이름하기 때문이다.
■ 사리불아,
무엇을 이름하여 염불이라 하는가?
소유 없음을 보는 것을 염불이라고 이름한다.
사리불아,
모든 부처님은 무량(無量)하여 불가사의하고 칭량(稱量)할 수가 없다.
이 뜻 때문에 소유가 없음을 보는 것을 이름하여 염불(念佛)이라고 한다.
실로 분별이 없다고 하는 것은 모든 부처님의 분별이 없음이다.
이 까닭에 말하기를 분별이 없음을 염하는 것,
이가 곧 염불이라고 한다.
■ 또 다음으로 모든 법의 실상(實相)을 보는 것을 이름하여 부처를 본다고 한다.
무엇을 이름하여 모든 법의 실상이라 하는가?
이른바 모든 법은 필경은 공하여 소유가 없다.
이 필경은 공하여 소유가 없는 법으로써 염불하는 것이다.
또 다음으로,
이와 같은 법 가운데는 내지 작은 생각까지도 더욱 불가득이다.
이를 염불이라고 이름한다.
사리불아,
이 염불의 법은 언어의 길이 끊기고 모든 생각을 지나쳐 나온 것이다.
불가득인 생각, 이를 염불이라 한다.
사리불아,
사리불아,
일체의 모든 생각[念]은 모두가 적멸의 상이다.
이 법에 수순하면 이를 곧 이름하여 염불을 닦고 익힌다고 한다.
색(色)으로써 염불하지 말아라.
무슨 까닭인가?
색을 생각하면 상(相)을 취하고 맛을 탐하여 알음알이[識]가 되기 때문이다.
모양도 없고 색도 없고 반연도 없고 성품도 없다.
이를 염불이라고 이름한다.
이 까닭에 마땅히 알아야 한다.
■ 분별함이 없고 취함도 없고 버림도 없는 것,
이것이 참다운 염불인 것이다.”
■ 3. 염법품(念法品)
이 때 사리불이 부처님께 아뢰었다.
“세존이시여,
어떤 것이 사람을 위하여 또 이 법을 설하는 것을 악지식(惡知識)이라 합니까?
세존이시여,
어떤 것이 사람을 위하여 또 이 법을 설함을 선지식(善知識)이라 합니까?”
● 선지식
■ 부처님께서 사리불에게 말씀하셨다.
“만약 비구가 있어 다른 비구에게 가르치면서 ‘ 비구여, 그대는 지금 마땅히 알아야 한다.
불사(佛事)인 공(空)을 염하고 인연하는 것을 염하는 것,
이것은 마땅히 염이라고 할 수 없다.
그대가 염하는 것이 공한 것이라는 생각까지도 또한 비워야[空] 한다.
이는 성품이 없는 공으로서 능히 색(色)에 대한 생각을 끊고 능히 취한다는 생각도 끊는다고 한다.
이 사람은 이 때, 생각[想]17)이 없음도 얻지 아니하였는데,
하물며 염(念)이겠느냐?
이 때 이 사람은 전혀 소유함이 없어 적멸(寂滅)하여 성품이 없다.
온갖 생각을 모으지 않아 일체의 법을 멸한다.
이것을 이름하여 곧 염불을 닦아 익힌다고 한다.
염불이란 선(善)하고 선하지 않은 일체의 크고 작은 생각을 깨트리는 것을 이름한다.
크고 작은 생각도 없고 적연(寂然)하여 생각이 없음을 이름하여 염불이라 한다.
무슨 까닭에 마땅히 크고 작은 생각으로 모든 부처를 기억하고 생각하지 말라 하는가?
크고 작은 생각이 없음을 이름하여 청정한 염불이라 하기 때문이다.
이 생각[念] 중에는 곧 미세한 마음과 마음이 생각하는 업도 없다.
하물며 몸과 입의 업이겠느냐?
또 염불하는 자는 모든 생각을 떠난다.
온갖 생각이 마음에 있지 않으면 분별함이 없고 이름이 없고 장애가 없고 욕망이 없고 얻음이 없어 크고 작은 생각이 일지 않는다.
무슨 까닭인가?
사리불아,
생각하는 바를 따라서 일어나는 일체의 모든 생각은 이 모두가 삿된 견해이다.
사리불아,
소유 없음에 따르면 크고 작은 생각이 없고 생함도 없고 멸함도 없다.
이에 통달한 자를 염불하는 자라고 한다.
이와 같은 생각 중에는 탐욕이 없고 집착함도 없다.
거슬림도 없고 순종함도 없고 이름도 없고 생각[想]도 없다.
사리불아,
생각도 없고 말도 없는 것을 곧 염불이라고 이름한다.
이 가운데는 곧 미세한 작은 생각도 없다.
하물며 거친 몸과 입과 뜻의 업이겠느냐?
몸과 입과 뜻의 업이 없는 곳에는 취함도 없고 버림도 없다.
싸움이 없고 다툼이 없으며 생각도 없고 분별함이 없다.
공적(空寂)18)하여 성품이 없어 모든 크고 작은 생각을 없앤다.
이것을 염불이라고 이름한다.
사리불아,
만약 사람이 이와 같은 생각을 성취한 자로서 4천하(天下)의 땅을 굴리고자 바라면 뜻에 따라서 능히 굴린다.
또 능히 백천억(百千億)의 악마를 항복하게 한다.
하물며 무명(無明)에 가리워 거짓된 인연으로 일어난 결정함이 없는 상(相)이겠느냐?
이 법은 이와 같이 생각도 없고 무익한 의론(議論)도 없다.
생(生)도 없고 멸(滅)도 없어 설할 수가 없고 분별할 수가 없다.
어두움도 없고 밝음도 없다.
마왕(魔王)이나 혹은 마왕의 백성이 능히 헤아릴 수 없는 것이다.
다만 세속의 언설(言說)로써 교화함이 있을 뿐이어서 이러한 말을 한다.
‘그대가 부처님을 염(念)할 때,
조그마한 생각이라도 취하지 말라.
무익한 의론을 하지 말아라.
분별을 하지 말아라.
무슨 까닭인가?
이 법은 모두가 공하여 체성(體性)이 없다.
하나의 상도 염하지 말아야 한다.
이른바 상이 없는 상인 것이다.
이것을 진실한 염불이라고 이름한다.
이른바 생(生)이 없고 멸(滅)이 없고 상(相)이 없고 함[爲]이 없음이다.
무슨 까닭에 여래는 이름하여 색이라 하지 않고,
이름하여 생각[想]이라 하지 않으며,
이름하여 생각[念]이라 하지 않으며,
분별이라 이름하지 않으며,
거슬림이라 하지 않고,
순종함이라 하지 않고,
취(取)라 하지 않고,
버림이라 하지 않고,
선정이 아니며 지혜가 아니며 밝음[明:慧明]도 아니며 무명(無明)도 아니며 여래는 설할 수 없고 불가사의하고 상이 없다 하는가?
■ 그대는 지금 취(取)의 상을 즐기지 말라.
무익한 의론을 즐기지 말라.
부처님은 모든 법에 있어서 집착함이 없고 헤아림[比量]이 없다.
법에 집착함이 있음을 보지 않는다.
이 사람은 부처를 아직 얻지 못하였는데 하물며 생각[念]에 있겠는가?’
사리불아,
이와 같이 가르치는 자를 이름하여 선지식이라 한다.
제일의(第一義) 중에는 결코 이는 선지식이다,
이는 악지식이다고 하는 일이 없다.
또 다음으로 사리불아,
만약 비구가 있어 다른 비구를 가르치는데 ‘비구여,
그대는 마땅히 모든 법을 분별하고 관찰해야 한다.
또 다시는 법의 상을 염하지 말라’고 한다.
이 비구는 이와 같이 닦아서 마음에 묶이고 집착함이 없어 곧 능히 모든 법이 일상(一相)임을 통달하면 이른바 무상(無相)이다.
이 사람은 더욱 법의 생각을 내지 않는다.
하물며 아(我)ㆍ아상(我想)과 인상(人想)이겠느냐?
사리불아,
어떻게 생각하느냐?
법상(法想)을 염하는 자,
이 사람이 능히 일체의 법을 멸하겠느냐,
아니겠느냐?”
“아닙니다.
세존이시여.”
“사리불아,
만약 나무에 뿌리가 없는데 능히 가지와 잎이 있고 꽃과 열매가 맺겠느냐,
맺지 않겠느냐?”
“아닙니다.
세존이시여.”
“이와 같이 사리불아,
만약 사람이 모든 법의 근본을 얻지 못하였는데 이 사람이 능히 모든 법상(法想)을 생하겠느냐,
생하지 않겠느냐?”
“아닙니다.
세존이시여.”
“사리불아,
만약 사람이 법상(法想)을 염함을 얻지 못하면,
이 사람이 능히 일체의 법을 멸하겠느냐,
아니겠느냐?”
“아닙니다.
세존이시여.”
“이 사람은 법에 있어서 법상을 얻지 못함을 얻는다.
멸에 있어서도 또 생이 없음과 멸이 없음을 분별하지 못함을 얻는다.
이 사람은 이 때,
낳지 아니 하고 멸하지 아니하여도 열반을 얻은 자라고 이름하지 않는다.
사리불아,
이와 같이 가르치는 자를 선지식이라고 이름한다.
제일의(第一義) 중에는 선지식(善知識)도 없고 악지식도 없다.
사리불아,
만약 사람이 이와 같은 상(相)을 성취하면 세간에서 희유한 일로서 이치에 어긋나지 않음을 얻는다.
진실한 소견 때문이다.
이것을 바른 견해라고 한다.
또 다음으로 사리불아,
바른 견해라고 하는 것은 바르게 짓는 것과 바른 행(行)과 바른 길과 바른 이해를 이름한다.
이치에 어긋남이 없고 여실하게 본다.
이 까닭에 여래는 설하여 바른 견해라고 이름한다.
사리불아,
만약 중생이 있어서 이치에 어긋남이 없고 여실하게 보는 자는 곧 바른 견해가 있다 한다.
● 악지식
■ 만약 아상(我想)ㆍ인상(人想)ㆍ중생상(衆生想)을 낳는 자는 마땅히 알아야 한다.
이 사람의 이 모두는 삿된 행이다.
● 정견
사리불아,
부처와 제자는 나[我]가 있다고 설하지 않으며,
사람이 있다고 설하지 않으며 중생도 설하지 않고 수명(壽命)도 설하지 않으며,
변한다든가 변하지 않음을 설하지 않으며 이 까닭에 부처와 제자는 이름하여 바른 견해라고 한다.
무슨 까닭인가?
바르게 관(觀)하여 이치에 어긋나지 아니하는 까닭이다.
사리불아,
일체의 범부는 이 일 중에서 능히 드는 자가 없다.
무슨 까닭인가?
일체의 범부는 모두가 바른 견해가 없기 때문이다.
다만 바른 견해에 수순하여 유순(柔順)하다는 인가를 얻은 자가 있어도 여실할 수는 없다.
사리불아,
이 까닭에 바른 견해와 삿된 견해라는 구별을 이름한 것이다.
여실하게 보는 까닭에 이름하여 바른 견해라고 한다.
세간의 즐거움의 원인을 보고서 재물을 증장하는 것,
이는 세간의 바른 견해이지만 이는 모두가 허망하고 거짓된 것으로서 생사(生死)를 면치 못한다.
사리불아,
부처는 세간의 바른 견해를 설하여 이는 게으르고 열등(劣等)한 법이라고 설한다.
현성(賢聖)은 ‘이것은 곧 바른 견해이다.
이것은 곧 삿된 견해이다’라고 하는 이러한 생각을 짓지 않는다.
무슨 까닭인가 하면 일체의 모든 견해는 모두가 허망함을 인연해서 일어나기 때문이다.
● 사견
■ 사리불아,
만약 ‘이것은 곧 바른 견해이다’라고 하는 이러한 생각을 짓고 말하면 이 사람은 곧 삿된 견해인 것이다.
사리불아,
거룩한 법 가운데서는 일체의 모든 견해의 근본을 뽑아 끊고 일체의 모든 언어의 길을 남김없이 끊는다.
허망한 것들 가운데 손에 잡히고 쥐는 것이 없음과 같다.
모든 사문(沙門)의 법도 마땅히 모두가 이와 같아야 한다.”
■ 4. 염승품(念僧品)
● 거룩한 무리
사리불이 부처님께 아뢰었다.
“세존이시여,
무엇을 거룩한 무리라 합니까?”
“사리불아,
만약 사람이 있어 능히 믿고 이해하여 일체 모든 법의 생이 없음과 멸(滅)이 없음과 일어남이 없음과 상(相)이 없음에 통달하고 이와 같은 인가를 성취한다 하여도 아직 나[我]를 얻지 못한다.
하물며 수다원(須陀洹)19)과 아나함(阿那含)을 얻겠느냐,
하물며 아라한을 얻겠느냐?
어찌 또 법을 얻고 어찌 남자와 여자를 얻고,
어찌 도를 얻고,
어찌 이와 같은 일들을 얻겠는가?
이 거룩한 무리라고 이름하는 이것도 역시 얻지 않는다.
또 다음으로 사리불아,
중생으로서 조금이라도 능히 생이 없고 멸이 없고 상이 없는 법을 믿고 이해한 자,
혹은 능히 생이 없고 멸이 없고 상이 없는 법을 믿고 이해한 자는 마음에 전도(顚倒)됨이 없고 서로가 함께 알고 이해한다.
법으로 해서 화합하여 다음의 존재를 받지 않는다.
모든 세간은 다만 허망함에 인연해서 일어남을 안다.
이 사람은 곧 다시는 이 몸에 머물지 않는다.
이 인연으로 해서 설하여 거룩한 무리라고 이름한다.
이 사람은 이 언어에 있어서 다시는 이름과 상을 말하지 않는다.
다만 상도 없고 무익한 의론도 없는 일을 모은다.
이것을 승보(僧寶)공양을 받음에 합당하다고 이름한다.
이에 어긋남이 없는 진실한 뜻을 얻기 까닭이다.
이 사람이 이 방편(方便)으로 승(僧)을 염하여도 이 일도 또한 공인 것이다.
사리불아,
이와 같이 가르치는 자는 선지식이라고 이름한다.
사리불아,
일체의 언어의 길을 끊는 것을 이름하여 거룩한 무리라고 한다.
무슨 까닭인가?
거룩한 법 중에 있으면서 언어에 의지하여 진실한 뜻을 설하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언어도 역시 불가득(不可得)이다.
이 까닭에 마땅히 알아야 한다.
모든 언어를 끊는 것을 이름하여 거룩한 무리라고 한다.
사리불아,
혹 사람이 있어서 ‘만약 이 가운데 언설도 없고 정해진 것도 없다면 무엇을 이름하여 승(僧)이라 할 것인가?’고 말한다면,
사리불아, 나는 이 가운데서 이와 같은 답을 한다.
승(僧)의 무리를 이름하여 여실한 일을 나타내고자 한다.
이 일은 결정적이며 또 불가득이다.
한가지로 모두가 하나의 배움이며 하나의 참음이며 하나의 맛이다.
이 일도 또한 세속의 말이기 때문에 설하는 것이다.
제일의(第一義)는 아니다.
제일의 중에는 실로 이름하여 승법(僧法)은 항상하고 무너지지 않는다고 이름하여 정해진 일이 없다.
만약 성인(聖人)이 설하여 이 법이 있다고 말하면 이것을 곧 잘못이라고 한다.
무슨 까닭인가 하면 만약 사람이 이와 같은 분별을 짓고 이것은 남자다,
이것은 여자다,
이것은 하늘이다,
이것은 용(龍)이다,
이것은 야차(夜叉)이다.
이것은 건달바(乾闥婆)이다,
이는 구반다(鳩槃茶)이다,
이는 법이다,
이는 법이 아니다 라고 이러한 분별을 짓기를 마치고서 여러 가지 일을 얻고 여러 가지 일을 얻는 까닭에 이러한 말을 한다.
이는 앉음이고 이는 눕는 것이며,
이는 가는 것이고 이는 머무는 것이라고
성인은 모든 법의 실상(實相)을 얻는 까닭에 또 이것은 남자다,
이것은 여자다,
이는 하늘이다,
이는 용이며,
이는 법이다,
이는 법이 아니라고 분별하지 않는다.
분별하지 않는 까닭에 여러 가지 법을 얻지 않는 자는 능히 이 설(說)을 지어 이는 앉음이며 이는 눕는 것이며,
이는 가는 것이며,
이는 머무는 것이라고 말하는가, 하지 않는가?”
“않습니다. 세존이시여.”
“사리불아,
만약 사람으로서 이는 남자이다,
이는 여자이다,
이는 하늘이다,
이는 용이다,
내지 이는 법이다,
이는 법이 아니다라고 말하면,
이 사람이 한 짓은 허망하지 않는가?”
“허망합니다. 세존이시여.”
“사리불아,
만약 이 허망함에 들지 않으면 이름하여 거룩한 무리라고 한다.
전도되지 아니한 까닭에 이름하여 거룩한 무리라고 하는 것이다.
사리불아,
선하지 않은 모든 것,
알아야 한다는 모든 것,
얻어야 한다는 모든 것,
이 같은 일체의 모든 선하지 않은 법은 모두가 명상(名相)으로써 근본을 삼는다.
이 현성(賢聖)의 법 중에서는 모든 명상을 끊는다.
또 명상을 염하지 않는다.
명상을 얻지 않는다.
어찌 이것은 거룩하고 이것은 거룩한 무리라고 마땅히 말할 수 있겠는가?
■ 모든 명상을 끊는 것을 이름하여 거룩한 무리라고 하기 때문이다.
만약 법에 계속한 대상으로서의 경계[處]가 있다면 깨트려야 하고 끊어야 한다.
현성의 법 중에는 이름도 없고 상도 없으며 언어도 없다.
모든 언어가 끊겼으며 합하고 흩어짐도 없다.
만약 승(僧)이 없으면 곧 거룩한 무리를 깨트린다고 말하나 이도 또한 얻지 못한다.
이른바 이름과 상의 허망한 생각 때문이다.
여러 가지 삿된 견해에 집착하고 이 삿된 견해에 의지하여 다시 후세에 몸을 받는다.
모든 견해에 탐착하면 곧 다섯 가지 쌓임[五陰]이 생한다.
사리불아,
다섯 가지 쌓임은 이 모두가 허망한 탐착(貪著)이다.
이를 악도(惡道)라고 이름한다.
현성의 무리에게는 이 일이 없다.
다만 허망한 인연 때문에 3계(界)가 일어나는 것을 안다.
이 일을 아는 까닭에 이름하여 거룩한 무리라고 한다.
사리불아,
무릇 소유한 견해는 거룩한 무리 중에서는 불가득이다.
이른바 아견(我見)20)ㆍ중생견(衆生見)ㆍ수명견(壽命見)ㆍ인견(人見)ㆍ 남견(男見)ㆍ여견(女見)ㆍ천견(天見)ㆍ지옥견(地獄見)ㆍ축생견(畜生見)ㆍ아귀견(餓鬼見)ㆍ 5음(陰)과 12입(入)과 18계(界)에 대한 견해와 온갖 소리를 갖추었다고 하는 주장과 북소리에 대한 견해와 땅의 소리에 대한 견해와 물과 불과 바람 소리에 대한 견해와 지계(持戒)의 소리에 대한 견해와 계를 깨트리는 소리에 대한 견해와,
바른 길의 소리에 대한 견해와 삿된 길의 소리에 대한 견해와 때묻은 소리와 깨끗한 소리와 선정(禪定)과 삼매(三昧)와 여덟 가지 거룩한 길의 소리와,
수다원(須陀洹)의 과위(果位)와 사다함(斯陀含)의 과위와 아나함(阿那含)의 과위와 아라한의 과위의 소리에 대한 견해와 해탈의 소리에 대한 견해와 과위를 얻은 소리에 대한 견해와 부처의 소리에 대한 견해와 법의 소리에 대한 견해와 승(僧)의 소리에 대한 견해와 멸(滅)의 소리에 대한 견해이다.
사리불아, 이를 허망한 음성들의 견해라고 이름한다.
현성의 무리는 제일의에 있어서 이러한 견해를 얻지 않는다.
여러 가지 음성이 일상(一相)임을 통달한다.
이른바 상이 없는 상으로서 어김이 없고 다툼이 없으며 전도되지 아니한 법인(法忍)을 성취하는 까닭에 이름하여 거룩한 무리라고 한다.
사리불아,
■ 이 전도되지 아니한 법인(法忍)21)이라고 함은 이는 곧 무상(無相)이다.
상이 없는 까닭에 취(取)함도 없고 버림도 없다.
거슬림도 없고 순종함도 없고 생도 없고 멸도 없다.
이 중에 자연히 없어져 닿음도 없고 무너짐도 없으며 일어남도 없고 얻음도 없다.
이것이다 저것이다를 분별하지 않으므로 마음은 항상 평등하고 떠나 있다.
무슨 까닭인가 하면 이 인(忍) 중에는 이 언덕도 없고 저 언덕도 업고 분별도 없고 분별이 아닌 것도 없으며 상이 없음에 통달하여 이 인을 성취하는 것,
이를 이름하여 거룩한 무리라고 한다.
화합(和合)을 깨트리는 까닭에 이름하여 거룩한 무리라고 한다.
사리불아,
나는 다른 경에서 ‘만약 사람이 법을 보면 이는 나를 보는 것이다’라고 설하였다.
여래는 법이 아니고 또 법 아님도 아니다.
무슨 까닭인가?
어리석은 사람과 여러 외도(外道)를 조달(調達)하기 위하여 모두가 색신(色身)으로써 부처를 보게 한다.
■ 사리불아,
여래를 마땅히 색신으로써 보지 말아야 한다.
또한 음성으로써 보지 않아야 한다.
사리불아,
만약 사람이 색신으로써 부처를 보면 이는 부처를 떠나감이 멀다.
무슨 까닭인가 하면 부처란 색을 보아서 이름하지 않기에 이름하여 부처를 본다고 한다.
사리불아,
만약 사람이 능히 모든 법의 무상(無相)을 보면 이름도 없고 감촉도 없고 기억도 없고 생각도 없고 생도 없고 멸도 없고 무익한 의론도 없어 일체의 법을 생각[念]하지 않으며 열반을 생각하지 않으며 열반으로써 생각[念]을 삼지 않고 열반을 탐하지 않는다.
모든 법을 믿고 이해하면 이 모두는 하나의 상이다.
이른바 상이 없는 상이다.
사리불아,
이것을 참다운 견해라고 이름한다.
부처란 일체의 법에 구함이 없고 무익한 의론이 없고 생이 없음을 말한다.
이 일 중에서 생각하지 않고 분별하지 않는다.
이를 부처를 본다고 이름한다.
만약 사람이 있어 이 법 중에서 기억하고,
생각하고 분별함이 없으며 취함도 없고 버림도 없고,
탐함도 없고,
어김도 없고 생각도 없고,
생각의 업도 없고,
언설을 탐하지 않고,
법의 거짓 이름을 알아 모두가 소유함이 없고 언설의 길을 끊고,
차별함이 없고,
또 무익(無益)한 의론이 없으면 이를 생이 없고 생각이 없는 수행자(修行者)라고 이름한다.
세간에서 이름하여 거룩한 무리라고 한다.
사리불아,
무슨 법을 보는 까닭에 부처를 본다고 이름하는가?
이른바 생각이 없고,
분별이 없고,
희론(戱論)함이 없는 것으로서 일체의 법을 느끼지[受] 않는 것이다.
혹은 공의 문(門),
혹은 적멸의 문,
혹은 떠남의 문으로써도 견해를 생각하지 않고 견해를 얻지 아니하고 이 일도 또한 얻지 않으며 이른바 이름이라고 하는 이 처소 또한 얻지 않는 이른바 열반이다.
무슨 까닭인가?
사리불아,
나는 오히려 열반을 염하지 않으면서 어찌하여 너희들에게는 마땅히 열반을 염하고,
열반을 얻으라고 설하겠는가?
사리불아,
만약 사람이 열반을 얻으면 이 사람은 여래를 따르지 않는 출가자(出家者)로서 6사(師)22)를 따르는 출가자이다.
사리불아,
마땅히 알아야 한다.
이 사람은 곧 법의 도적으로서 나의 법 안에 들려고 한다.
이 사람은 나의 법을 더럽힘을 마땅히 알아야 한다.
이 사람은 큰 도적임을 마땅히 알아야 하니,
마치 큰 성읍(城邑)에 큰 도적이 있는 것과 같다.
무슨 까닭인가.
이와 같이 어리석은 사람은 열반을 얻지 못하는데,
하물며 나와 사람[我人]이겠느냐?
사리불아,
이같이 어리석은 사람은 나의 손으로써 막을 것이다.
나의 제자가 아니며 무리의 수에 들지 못하게 할 것이며 나는 그의 스승이 아니다.
사리불아,
만약 모든 법의 무생(無生)ㆍ무멸(無滅)ㆍ무념(無念)ㆍ무상(無想)함을 알면 이는, 법인(法忍)을 얻은 것이지만 아직 열반은 얻지 못한 것이다.
하물며 나와 사람이겠느냐?
사리불아,
부처도 이같이 설하여 법을 본다고 이름한다.
능히 이 일을 보는 것을 이름하여 부처를 본다고 한다.
사리불아,
무엇을 이름하여 부처라고 하는가.
일체의 법은 같아서[如]23) 다르지 아니하고 무너지지 않는다.
이를 여래(如來)라고 이름한다.
만약 사람이 이 법 중에서 의심하고 뉘우침이 없으면 이를 거룩한 무리라고 이름한다.
사리불아,
과거세(過去世)에 한 어리석은 사람이 있었다.
그는 원숭이를 알지 못하였는데,
어떤 큰 숲에 들어가 원숭이의 무리가 떼를 지어 한 곳에 모여 있는 것을 보았다.
이 사람은 일찍이 도리천(忉利天)이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기 때문에 곧 말하길 이것이 도리천의 여러 하늘이라고 하였다.
곧 숲을 나와 자기의 마을에 돌아와 많은 사람들 가운데서 이렇게 말하였다.
‘당신들은 일찍이 도리천을 보았습니까, 못 보았습니까?’
뭇 사람이 다하여 말하였다.
‘아직껏 보지 못하였소.’
그 때 그가 말하였다.
‘나는 이미 보았소.
당신들은 보기를 원합니까, 원하지 않습니까?’
모두가 보기를 원한다고 말하였다.
곧 대중(大衆)을 이 끌고 그 숲을 찾아가 원숭이의 무리를 가리켜 말하였다.
‘당신들은 보시오. 이는 도리천의 여러 하늘이오.’
여러 사람 모두가 도리천이 아니라 이는 곧 원숭이가 숲 속에서 즐겁게 사는 것이며 당신은 어리석고 전도되었기 때문에 원숭이를 알지 못하며 또 도리천도 알지 못한다고 말하였다.
사리불아,
이 사람은 헛되이 대중을 이끌고 그 숲 속을 찾아 온 것이다.
이같이 사리불아,
미래세(未來世)에 있어서도 마땅히 비구가 있어 속인(俗人)의 집에 이르러 이 말을 해야 한다.
‘당신은 부처님의 제자인 거룩한 무리를 보고 부처님의 법을 듣고 받기를 바라는가, 바라지 않는가?’
그 중에 속인으로서 불법을 믿는 자가 있어서 모두가 보고 부처님 법을 듣고 받아 지니기를 바란다고 말한다.
사리불아,
그 가운데 속인이 있어 언어에 탐착하고 즐겨 절에 들어온다.
여러 비구가 있어 언설을 좋아하고 능히 여러 가지 경에 통달해 있다.
언어에 의지하여 글을 꾸미기를 즐긴다.
이 여러 사문은 수순하여 설하고 이를 참다운 길이라고 말한다.
다만 무리의 수를 채움이 놓아먹이는 소와 같은 사람일 뿐이다.
다만 경을 읽는 것을 즐길 뿐 진리의 경계에는 들지 못한다.
다만 사람의 뜻을 기뻐하고 명리(名利)를 귀하게 여긴다.
세속 일에는 훌륭하나 깨끗한 설법은 못한다.
다만 능히 말하여 세간의 도를 행한다.
위덕(威德)이 없어 열반의 인(因)은 깨어졌다.
거룩한 침묵을 버리고 선정을 즐기지 않으며,
밤낮으로 항상 담론(談論)하고 다투기를 좋아한다.
두터운 잠자리에 눕고 더욱 한 생각도 선정(禪定)에 수순함이 없다.
하물며 능히 사문(沙門)의 과위를 이룰 수가 있겠는가.
이 사람은 자면서도 항상 속된 마음과 상응한다.
초저녁과 새벽에 순인(順忍)을 닦지 않고서 하열한 법을 즐긴다.
이 사람은 또 많은 의복과 음식의 공양을 얻는다.
무슨 까닭인가?
이 사람은 항상 악마에게 포섭되어 천박한 말을 즐긴다.
제일의(第一義)에 있어서는 부지런히 배울 수가 없다.
제일의 깊은 경을 독송하고 지닐 수가 없다.
들으면 곧 놀라고 두려워 맛좋은 국물을 버리고 술찌꺼기를 취한다.
여러 범부가 있어 이익을 얻는 것을 보고는 탐착하는 마음을 내고 이러한 생각을 하고 말한다.
‘우리들도 또 마땅히 이 말을 익혀야 한다.’
사리불아,
이 사람은 위없는 법보(法寶)를 버리고서 삿된 견해에 떨어져 있다.
이는 사문(沙門)의 전타라(旃陀羅)24)이다.
여러 속인이 와서 그곳을 찾아오면 이 같은 악인(惡人)은 그럼에도 설법을 한다.
이익 때문에 부처와 법과 승(僧)을 칭찬한다.
다만 목숨이 살기를 구하여 재물의 종이 되고 의식을 탐하고 귀중히 여겨 자기가 즐기는 것을 칭찬한다.
‘만약 보시를 행하면 천상(天上)에 남을 얻는다.
불법 중에서는 보시를 낮은 법이라고 한다.
칭찬하는 것이 가장 으뜸이다’라고 하면서 이러한 말을 한다.
‘큰 보시의 인연은 천상에 남을 얻는다.’ 말을 모르고 뜻을 이해하지 못한다.
다만 처음으로 들어온 천박한 낮은 법을 알 뿐 나[我]와 사람을 탐착하여 제일의를 버린 것이다.
사리불아,
이와 같은 설법은 혹 그 때,
사람이 있어 믿음이 생겨서 출가한다 하여도 여러 나쁜 사람과 화합하여 제일의의 깊은 뜻을 부지런히 닦을 수가 없게 한다.
소득이 있는 자는 나[我]와 사람과 수명이 있다고 설하고 소유가 없는 법을 기억하고 생각하고 분별하여 아비담(阿毘曇)25)과 수투로(修妬路)26) 중에서 스스로 의론을 하고 혹은 단상(斷常)27)을 설하고 혹은 지음이 있음을 설하고 혹은 지음이 없음을 설한다.
사리불아,
나의 법은 그 때,
외도의 법이 많아 모든 중생으로 하여금 바른 견해의 마음이 무너지지 않게 하지 못한다.
이와 같이 사리불아,
나의 청정한 법은 이 인연으로 해서 점점 멸하여 없어진다.
사리불아,
내가 오래도록 생사(生死)의 세계에 있으면서 온갖 괴로움을 받으면서 이룬 보리(菩提)도 이 여러 악인(惡人)들이 그 때 깨트릴 것이다.
사리불아,
만약 비구가 있어 이 얻음이 있는 견해인 아견(我見)과 인견(人見)을 버리지 못하면 여래가 기쁘게 설한 것을 이해하지 못한다.
더욱 결정적으로 나[我].0와 사람의 법이 있다고 말한다면 이 사람에게서는 내가 곧 하나의 마시는 물도 받기를 허락하지 않는다.
혹은 이 때 이 사람이 공의 법을 들을 수가 있어 마음이 청정하여 놀라지 않고 의심하지 않으면 곧 도리어 뭇 사람을 마땅히 인도하여 실상(實相)의 뜻에 들게 한다.
곧 마땅히 출가하여 구족계(具足戒:比丘戒)를 받아야 한다.
무슨 까닭인가?
사리불아,
만약 사람이 이 같은 견해를 버리지 않으면 이를 외도라고 이름한다.
사리불아,
내가 세속의 인연을 빌어 나[我]가 있다고 설하지만 제일의가 아니다.
만약 사람이 있어서 말한다.
‘나도 또한 세속(世俗)의 인연을 가져 나[我]가 있다고 설한다.’
이 사람이 만약 능히 무생(無生)과 무멸(無滅)과 무상(無相)에 통달하면 나의 설하는 바와 서로 어긋나지 않는 자로서 이가 나의 제자인 것이다.
사리불아,
만약 사람이 있어 말하기를 ‘여래는 무슨 까닭에 세속의 인연에 따라서 무아(無我)의 법이 있어 사람이 있다고 설하시는가?
여래는 마땅히 세간을 위하는 까닭에 부실(不實)한 말을 하지 말아야 한다.
또 여러 경 가운데에서 많은 사람이 있다고 설하였다.
부처의 설한 바는 마땅히 거짓이어서는 아니된다’고 하였다.
사리불아,
마땅히 이 사람에게 ‘부처가 모든 법은 공하여 주인이 없고 성품이 없다고 못하는 것은 다만 이는 허망한 것으로서 제일의가 아니며,
여래는 제일의로써 하지 않으므로 나와 사람이 있다고 설하는 것이다.
성인의 말에는 탐착하는 곳이 없다.
지혜가 없는 사람은 부처와 같을 수 없고 또 지나치는 자도 없다’고 답해야 한다.
사리불아,
여래의 지혜는 불가사의한 것으로써 이 지혜로써 중생의 마음을 안다.
사람이 있어 마땅히 부처와 같다면 부처는 큰 용인 대법왕(大法王)을 위하여 마땅히 어지러운 말을 하지 않는다.
부처는 어느 사람에게는 일체의 세간은 항상 나와 함께 싸운다 하고,
나는 항상 세간과 싸우지 않는다고 설한다.
사리불아,
자아(自我)가 있다고 설하는 자는 매우 가엾고 불쌍히 여겨야 한다.
이 중에는 법도 없고 자아도 없다.
많은 중생이 있어도 여래가 기꺼이 설하는 바를 이해하지 못한다.
법보(法寶)에 거역함이 많아 악의 한계에 떨어진다.
사리불아,
나는 삿된 견해를 알지만,
그러나 삿된 견해라고 하지 않는다.
능히 삿된 견해를 아는 것,
이는 곧 바른 견해이기 때문이다.
사리불아,
삿된 견해는 끝내 바른 견해가 되지 않고 견해는 견해를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사리불아,
모든 부처와 여래의 아뇩다라삼먁삼보리는 일체의 세간이 믿기 어려운 곳이다.
나는 모든 하늘과 일체의 세간에서 보다 가장 믿어야 하며 믿을 수 없는 것은 아니다.
사리불아,
나의 설하는 법은 저 언덕에 이르기 위한 것이기는 하지만 이 가운데 역시 저 언덕에 이르는 것도 없다.
나의 설하는 법은 모든 행(行)을 다하기 위한 것이지만 이 중에 또한 모든 행을 다함도 없다.
나의 설하는 법은 적멸을 위한 까닭이지만 이 중에 또한 적멸이란 없다.
나의 설하는 법은 해탈을 위한 까닭이지만 이 중에 또한 해탈이란 없다.
나의 설하는 법은 모든 지혜를 위한 까닭이지만 이중에 또한 모든 지혜란 없다.
나의 설하는 법은 더러운 것을 깨끗하게 하기 위한 까닭이지만 이 중에 또한 더러움을 깨끗하게 하는 것은 없다.
사리불아,
여래는 하늘을 위하여 설법하나 또한 하늘이 없고,
사람을 위하여 설법하나 또한 사람이 없으며,
중생을 위하여 설법하나 또한 중생은 없다.
사리불아,
여래는 밝음[明]과 해탈을 설하지만 이 중에 밝음과 해탈은 없다.
내가 염불(念佛)을 설하나 부처를 염(念)하지 말라.
내가 공의 행을 설하지만 공의 행을 행하지 말고 또 염하지도 말아라.
사리불아,
이를 여래의 설하는 바인 경과 법의 구절이라고 이름한다.
이 중에 설하는 자는 없다.
여러 악인(惡人)들이 구절을 얻어 남을 위하여 설하고 또한 나를 부처라 하여도 여래와 거룩한 부처의 공덕은 없다.
더욱 스스로 승(僧)에 속한다 함은 사리불아,
비유컨대 원숭이의 무리가 도리천과 비슷한 것과 같다.
이 같은 뭇 악인은 나의 거룩한 무리와 비슷하지 않다.
사리불아,
이 여러 악인은 다만 음성과 말로써 스스로 사문(沙門)이라고 말하는데,
어리석은 사람이 원숭이의 무리를 보고서 도리천(忉利天)이라고 말하는 것과 같이 닮았다.
사리불아,
그 중에 출가한 사람이 있어 어려운 물음을 기뻐하고 즐긴다.
좋은 스승의 명색(名色)을 설함에 적멸하여 언어의 길을 끊고 그에 합당함을 얻어 일어남이 없고 잃음도 없고 무상(無相)에 통달하여 이같이 무생(無生)과 무멸(無滅)ㆍ무상(無相)의 법을 들음을 얻어 놀라지 않고 두려워하지 않는 자는 마땅히 알아야 한다.
이 사람은 이미 일찍이 무량(無量)한 모든 부처를 공양하였고 능히 나의 법을 알아서 거룩한 무리라고 이름한다.”
■ 5. 정계품(淨戒品) ①
● 파계한 비구의 근심과 고뇌
부처님께서 사리불에게 말씀하셨다.
“파계(破戒)한 비구에게는 몇 가지 근심과 고뇌의 화살이 있어 참고 견디기가 어렵다.
비구가 몇 가지 근심과 고뇌의 화살을 성취하면 곧 불법에서 재미를 얻지 못하고 설법(說法)을 미워하는 자는 불법에 친근함을 원하지 않는다.
무엇이 몇 가지인가?
사리불아,
파계한 비구는 승(僧)이 화합하는 것을 보고서 기뻐하는 마음을 내지 않는다.
무슨 까닭인가?
화합의 포살(布薩)28)은 반드시 자기를 내쫓기 때문이다.
이 나쁜 비구는 스스로 잘못이 있음을 알고서 항상 근심과 고뇌를 품고 계를 지닌 자에 대해서는 한탄하고 성내어 기뻐하지 않는다.
사리불아,
이를 파계한 비구의 근심과 고뇌의 첫째 화살이라고 이름한다.
반드시 나쁜 길에 떨어진다.
또 다음으로 사리불아,
파계한 비구는 무리를 미워하고 친근(親近)함을 원하지 않는다.
사나운 소의 날카로운 뿔을 사람이 멀리하고 버리는 것과 같다.
잘못을 저지른 나쁜 비구는 스스로 잘못이 있음을 알고서 항상 조심과 고뇌를 품는다.
사리불아,
이를 파계한 비구의 근심과 고뇌의 두 번째 화살이라고 이름한다.
반드시 나쁜 길에 떨어진다.
또 다음으로 사리불아,
파계한 비구는 비구의 무리를 만나 보고서 스스로의 나쁜 마음과 같지 않음을 알고서 떠나고 참괴심과 부끄러움을 품는 까닭에 무리에 들 수가 없다.
사리불아,
이를 파계한 비구의 근심과 고뇌의 세 번째 화살이라고 이름한다.
반드시 나쁜 길에 떨어진다.
또 다음으로 사리불아,
파계한 비구는 악하고 독한 마음이 왕성하여 교화할 수가 없다.
마치 외도에게 계법(戒法)이 없음과 같다.
하물며 깨끗한 계에 있어서이겠느냐.
그 파계한 인연으로 해서 사람이 친근하지 않는다.
사리불아,
이를 파계한 비구의 근심과 고뇌의 네 번째 화살이라고 이름한다.
반드시 나쁜 길에 떨어진다.
또 다음으로,
사리불아,
파계한 비구는 남의 재물로써 스스로 그 몸을 먹인다.
나는 이 사람을 설하여 무거운 짐을 진 자라고 한다.
무슨 까닭이냐 하면 수행자(修行者)와 얻은 자[得者]29)는 마땅히 공양을 받아야 한다.
파계한 비구는 곧 수행자도 아니며,
이는 얻은 자도 아니다.
이 까닭에 사리불아,
파계한 비구는 마땅히 백천억만(百千億萬)의 겁 동안 몸의 살을 찢고 빼어내서 시주(施主)에게 갚아야 한다.
만약 축생으로 태어나면 몸은 항상 무거운 짐을 진다.
무슨 까닭인가 하면,
한 머리털을 꺾어 천억(千億)으로 나눈다 해도 파계한 비구는 더욱 그 하나의 공양도 갚을 길이 없음과 같다.
하물며 남의 의복과 음식과 침구와 의약을 능히 갚겠는가?
사리불아,
파계한 비구가 거룩한 법복(法服)을 입었다 해도 더욱 마땅히 한 걸음도 절에 들어갈 수가 없다.
하물며 한 그릇의 마시는 물과 내지는 침상(寢床)을 받을 수 있겠느냐.
무슨 까닭인가.
사리불아,
이 같이 나쁜 사람을 하늘과 사람 중에서는 이를 큰 도적이라고 한다.
일체의 세간은 모두가 마땅히 멀리 하고 떠난다.
사리불아,
이 썩고 무너진 사람,
이는 곧 원수의 집인 것이다.
여래는 일체세간의 모두가 남김없이 나의 곳에 이르는 것을 허락하지만 파계한 사람은 여래가 손으로 막는다.
나의 제자가 아니다.
하물며 하루라도 나의 법 가운데 머물게 하겠느냐?
사리불아,
비유컨대 죽은 뱀과 죽은 게와 같이 가장 더러운 냄새가 난다.
청정한 모든 하늘이 교화하고자 할 때에도 마땅히 발견함을 얻지 못한다.
만약 본다 해도 곧 멀리한다.
이와 같이 사리불아,
파계한 비구는 그 세 주검과 같이 더러운 냄새를 풍기고 부정(不淨)하다.
지혜로운 자는 멀리 떠나고 동사(同事)30)와 포살(布薩)과 자자(自恣)31)를 함께 하지 않는다.
사리불아,
파계한 비구는 나의 법 중에서는 곧 불길(不吉)하다고 한다.
계를 지닌 비구가 이 파계한 비구를 보면 즉시 멀리 떠난다.
무슨 까닭인가?
만약 파계한 비구의 손이 닿는 곳의 물건과 받은 물건은 계를 지닌 자에게 있어서는 곧 나쁜 독이 된다.
사리불아,
참으로 세 가지 주검의 더러운 냄새가 땅에 가득하게 하고 내가 그 안에서 능히 네 가지 위의[四威儀]32)를 행한다 해도 이 파계한 비구는 잠시도 함께 머물지 못한다.
무슨 까닭인가?
사리불아,
이는 사문(沙門) 중에서 가장 비루(卑陋)하고 하천(下賤)하다.
사문 중에서 썩어서 메말라버린 흙이며 폐악(弊惡)한 것이다.
사문 중의 쭉정이와 겨[粃糠:하찮고 쓸모없는 것]인 것이다.
사문 중의 때[垢]이다.
사문 중의 혼탁(混濁)함이다.
사문중의 오물(汚物)이다.
사문 중의 왜곡(歪曲)됨이다.
사문 중에 추한[麤=추(醜)] 것이다.
사문 중에서 거룩한 길을 잃은 자이다.
이와 같은 사람들은 나의 법 중에서 출가하고 도를 구해서 무거운 죄를 얻는다.
사리불아,
이와 같은 사람을 나의 법 중에서는 곧 역적이라 한다.
이는 법의 도적이라 한다.
이는 거짓된 사기꾼[詐欺]이라고 한다.
사리불아,
비유컨대 황문(黃門)33)의 사나이가 아니며 여자도 아님과 같다.
파계한 비구도 또한 이와 같다.
집에 있다고도 이름할 수 없고 출가하였다고도 이름할 수 없다.
목숨이 끝난 뒤에는 곧 지옥에 들어간다.
사리불아,
비유컨대 박쥐가 새를 잡고자 할 때는 곧 쥐가 되어 구멍으로 들어가 쥐가 되고,
쥐를 잡고자 할 때는 곧 하늘을 날아 새가 되는 것과 같다.
이미 포살과 자자(自恣)에 들지 않는다.
또한 임금의 사역(使役)에도 들지 않는다.
속인(俗人)이라고 이름하지 않으며 출가자(出家者)라고도 이름하지 않는다.
주검을 태우다 남은 나무를 다시는 쓰지 않음과 같다.
이와 같은 비구에게는 계품(戒品:계율의 품류와 종류)과 선정의 품[定品]과 지혜의 품[慧品]과 해탈품(解脫品)과 해탈지견품(解脫知見品)이 없으며 오직 깨끗한 계를 깨트린 일을 구족할 뿐이다.
크고 미묘한 음성과 계의 소리와 선정의 소리와 지혜의 소리와 해탈의 소리와 해탈지견의 소리를 내지 못한다.
오직 계를 깨트리는 폐악한 소리를 낼 뿐이다.
여러 같은 악인과 함께 나쁜 소리를 내고 오직 의복과 음식과 잠자리를 논하고 나무와 꽃과 열매의 보시를 받으며,
귀한 사람의 심부름꾼이 되고 또 국토(國土)의 길흉(吉凶)과 안위(安危)를 논하고,
뭇 일에 대한 여러 가지 좋지 못한 말을 웃으며 한다.
밤과 낮으로 항상 세속의 일에 물든 것을 바라고 구한다.
이와 같이 비구는 몸의 업도 부정(不淨)하고 입의 업도 부정하고 뜻의 업도 부정하여 마땅히 지옥에 떨어진다.
사리불아,
이 비구는 어두움을 즐기기를 박쥐와 같이 한다.
바른 경(經)을 설하는 것을 듣고서는 근심을 한다.
무슨 까닭인가 하면 여실한 설이기 때문이다.
세간의 사람은 진실한 설은 기뻐하지 않고 다만 뜻에 따르는 것을 즐긴다.
이와 같은 비구는 설법에 있어서 마음이 청정해지지 않는다.
더욱 겹쳐서 죄를 짓고 지옥을 더한다.
사리불아,
이를 다섯 번째의 비구의 근심과 고뇌의 화살이라고 이름한다.
반드시 지옥에 떨어진다.
또 다음으로,
사리불아,
파계한 비구에게는 부끄러움이 없다.
모든 뿌리가 산란하여 부정을 성취한다.
몸과 입과 뜻이 없이 깨끗하지 않은 위의(威儀:行動)는 입은 옷까지도 모두가 법답지 아니함과 같다.
거짓말을 좋아하고 기뻐해서 입을 지키지 못한다.
마음은 항상 분주하게 뛰어다니며 더러운 때에 물든다.
사리불아,
새로운 질그릇에 오줌과 똥과 썩은 냄새를 풍기는 피고름을 가득 담는 것과 같다.
뒤에 더러운 것을 버리고 전단향(栴檀香)을 발라도 또 전단향이 사라지면 이 같은 질그릇에 무슨 기운이 있겠느냐?”
“세존이시여,
이 새 질그릇은 먼저 담은 오줌과 똥의 냄새가 굳게 묻어 오직 그 냄새가 있을 뿐 전단의 향내는 없습니다.”
“사리불아,
사람이 청정한 믿음으로 모든 뿌리를 고르게 하여 출가해서 도(道)를 배우고 악지식(惡知識)을 만나서는 그 가르침에 따르지 않아야 한다.
사리불아, 무엇들을 악지식이라 하는가?
악지식이란 항상 나쁜 희롱을 좋아하고 경박하여 부끄러움이 없다.
말은 산란하여 모든 뿌리를 거두지 못한다.
마음은 전일(專一)하지 못하여 어리석기가 흰 염소와 같다.
이 같은 악지식에게 친근하면 수다원과(須陀洹果)와 사다함과(斯陀含果)와 아나함과(阿那含果)와 아라한과(阿羅漢果)를 잃고 법을 깨트리는 자와 함께 일을 따른다.
이 사람은 부정(不淨)한 몸의 업과 부정한 입의 업과 부정한 뜻의 업과 부정한 지계(持戒)를 성취하여 몸이 죽은 뒤에는 나쁜 세계에 든다.
무엇을 나쁜 세계[惡趣]라고 하는가.
나쁜 세계란 지옥과 축생과 마귀와 아수라의 길을 이름한다.
또 나쁜 길이 있는데 아유륵충(阿由勒蟲)34)과 바가라목거충(婆伽羅目呿蟲)과 부미수차가충(浮彌修遮迦蟲)과 수지목가충(修脂目迦蟲)과 같다.
이 사람은 이 많은 벌레 속에 난다.
사리불아,
이 사람이 악지식에게 따르면 혹 사람 가운데 태어나도 태어나면서 부모를 이별하거나 죽어서 잃으며 친족과 고향은 쇠뇌(衰惱)하고 국토는 파괴된다.
팔난(八難 :부처님을 만나서 교법을 들을 수 없는 경계에 여덟 가지가 있다.
즉 지옥과 출생과 아귀와 장수천(長壽天)과 변두리[邊地]와 눈멀고 귀먹고 벙어리인 자와 세간의 지혜만이 총명한 자와 부처님이 나기 전과 부처님이 가신 뒤의 여덟 가지) 가운데 나서 여덟 가지 즐거운 곳을 버린다.
성냄이 많고 어리석음이 많으며 나쁜 희롱을 좋아하고 경박하여 부끄러움이 없다.
말이 산란하고 마음을 거두지를 못하여 어리석기가 흰 염소와 같고 탐욕과 성냄과 어리석음으로 해서 무너지며 귀먹고 벙어리이며 눈멀고 언청이이며 손과 발은 굽고 곱사가 되어 악지식과 함께 부처가 없는 곳에 태어난다.
만약 부처를 만난다 해도 눈은 보는 것을 기뻐하지 않으며 법을 듣는 것을 기뻐하지 않고 부처와 그를 따르는 무리와 함께 화합하지 않는다.
이 악업(惡業)을 일으키어 악인(惡人)과 삶을 함께하여 하열(下劣)한 법을 즐긴다.
바른 견해 중에 있어서는 삿된 견해의 생각을 내고 삿된 견해 가운데 있어서는 바른 견해의 생각을 내지 않는다.
이를 하열(下劣)한 욕망이며 하열한 법인(法忍)이며 하열한 지혜라고 이름한다.
사리불아,
하열한 지혜의 사람은 세속을 싫어하여 출가하고 적멸의 길과 열반의 세계에 낳는 마음을 끝내 내지 못한다.
사리불아,
악지식을 만나서는 이 같은 여러 가지 쇠뇌(衰惱)한 환난은 얻으나 이러한 모습은 없다.
이 사람은 이 깊은 여러 가지 경을 들으면 놀라고 의심하고 두려워해서 깊은 함정에 떨어짐과 같다.
즉 큰 죄의 깊은 함정 속으로 떨어진다.
무슨 까닭인가.
사리불아,
경 중에서 설함과 같다.
파계한 비구에게는 크고 무거운 죄가 있다.
무슨 인연 때문에 이름하여 파계라 하는가?
받은 바 계를 깨트려 가르침의 말씀과 같이 하기 어렵고 행에 항상 따름이 없고 어기고 거슬림은 많다.
여기서 일반적인 입장은 기초경전에서 제시하는 내용이나 수행덕목 자체를 현실에서 잘 이해하지 못하고 실천하지 않는 경우를 의미한다. 이 입장에서는 처음 기초경전에서 제시하는 무상이나 부정 고, 무아, 공과 같은 기본적 내용 자체를 이해하기 힘들다.
그런데 이제 불교의 기본적 내용을 어느 정도 이해하고 기초 경전에서 제시된 기본적 내용을 잘 이해하는 입장에서는 다시 불장경에 제시된 내용 전반을 또 이해하기 힘들고 어렵게 여기게 되기 쉽다.
그런 부분이 『불장경』 2. 염불품(念佛品) 이하에 다음과 같이 제시되고 있다.
...
■ 부처님께서 사리불에게 말씀하셨다.
“만약 비구가 있어서 다른 비구를 가르치는데
‘비구여,
그대는 마땅히 부처를 염(念)하고 법을 염하고 승(僧)을 염하고 계를 염하고 보시를 염하고 하늘을 염해야 한다.
비구여,
그대는 마땅히 몸을 관하여야 하고 취(取)는 이 몸의 상으로서 이른바 부정(不淨)한 것이며
마땅히 일체의 모든 유위법(有爲法)은 모두가 무상하다고 관하고,
일체의 법은 공하여 아(我)가 없다고 관해야 한다.
비구여,
그대는 마땅히 반연하는 바의 상을 취하여
마음이 반연하는 것 가운데 묶어 오로지 공의 상을 염하여야 한다.
마땅히 선근(善根)을 원해야 한다.
마땅히 취는 선하지 않은 법의 상이다.
취는 선하지 않은 법의 상일 뿐이라,
끊기 위한 까닭에 관(觀)하고 염(念)하는 것을 닦아라.
말하자면 탐욕을 끊기 위해서는 부정(不淨)한 상을 관하고,
성냄을 끊기 위해서는 자비로운 마음을 관하고,
■ 어리석음을 끊기 위해서는 인연의 법을 관하여라.
항상 깨끗한 계를 염하여 깊이 공의 상을 취하고 부지런히 정진하는 것을 4선(禪)을 얻는다 한다.
마음을 다하여 도를 구하고 선하지 않은 법은 이 모두가 손해를 가져오는 고뇌라고 관하여라.
선한 법을 관하는 것은 곧 가장 안온한 것이다.
일심으로 수도하여 분별해서 밝게 관찰하라.
선하고 선하지 않는 법은 취의 상일 뿐이라고 밝혀라.
오직 열반을 관하면 안온하고 적멸하다.
■ 오직 열반을 사랑하면 필경은 청정하다고 이와 같이 가르치면
이름하여 삿된 가르침이라 한다.
■ 이를테면 이는 바른 가르침이면서도 곧 삿된 가르침인 것이다.
사리불아, 이와 같이 가르치는 자를 악지식(惡知識)이라 한다.
이 사람을 이름하여 나를 비방하고 외도(外道)를 돕는 자라 한다.
또 남을 위하여 삿된 길을 설하는 자라 한다.
...
여기서 바른 가르침이면서도 곧 삿된 가르침이라는 구절이 나온다. 바른 가르침이라는 것은 외관상 부처님이 기초 경전에서 제시한 것과 같은 내용으로서 그래서 올바른 가르침인 것처럼 보인다. 그런데 그 실질이나 핵심이 잘못되어서 삿된 가르침이다는 의미다.
그런데 또 이후 불장경 후반부를 보면 사정이 그런 가운데 계율을 잘 지켜야만 한다는 내용이 대단히 많이 강조되는 것을 보게 된다.
그래서 또 앞의 입장을 이해하는 경우에는 다시 또 이 부분을 이해하기 힘들게 되기 쉽다.
그래서 이 부분에 대해서 약간의 설명이 필요하다.
이것을 만일 순서대로 문제를 제시하면 다음처럼 될 것이다.
일반적입장에서는 지금 대단히 편안하고 안정적으로 '내가' 잘 살고 있는데 왜 일체는 무상하고 고통이고 무아이고 공하고 열반을 얻어야 한다고 하고 또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현실에 대해 모든 집착을 제거하고 힘든 수행을 해야 한다고 하는가. 이런 기본적인 의문을 갖게 된다.
그래서 그에 대해 답을 해야 한다.
그런데 이제 이런 단계를 지나서 그런 수행이 어느 정도 잘 된다고 할 입장에서는 또 이런 불장경에 제시된 내용을 놓고 다음 처럼 의문을 갖게 된다. 그처럼 기본적인 수행을 잘 성취해가는데 왜 앞 부분에 제시한 것처럼 그런 내용을 제시하고 수행해가려는데 이것을 오히려 부처님을 비방하고 다른 외도를 오히려 돕는 것이라고 하는가 하는 의문을 갖게 된다. 또 후반부를 보면 그런 입장에서 수행하는 것은 오히려 처음부터 계율을 지키지 않고 함부로 행하는 경우보다 더 극심한 잘못을 행하는 것이라고까지 제시된다.
그래서 다시 의문을 갖게 된다. 따라서 이 부분에 대해 답을 해야 한다.
그것은 물론 본 경전 첫 부분에 제시된 것처럼 현실에서 문제삼는 내용이나 또 기본 경전에서 제시된 내용들이 하나같이 본래 있는 바가 없고[무소유] 얻을 바가 없는[불가득] 내용들인데 다만 생사고통을 벗어나고 망상분별을 제거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하여 시설한 방편이고 그래서 강을 건너게 하는 뗏목과 같은 기능을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비록 기본적인 번뇌 망상을 제거하는데 도움은 되지만, 다시 이 뗏목에 집착을 갖게 되면 마치 어떤 병을 고치기 위해 사용하는 약에 너무 의존해서 이제 그 약으로 인한 부작용이 새로운 병을 만드는 상태에 이르고 이 경우는 오히려 처음 병보다 더 상태가 악화되는 부작용이 발생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런 입장에서는 다시 일체가 모두 무소유 불가득하다는 사정을 잘 관하고 일체에 대해 상을 일으키지 않고 망상분별을 행하지 않는 자세가 기본적으로 필요하다.
그런데 이제 이런 입장을 다시 이해하게 되면 또 다음 의문이 발생한다.
즉 그처럼 일체가 모두 무소유 불가득이라면 왜 하필이면 그런 가운데 일정한 수행을 해야 하고 또 계율과 정려 반야 수행을 해야 한다고 할 것인가. 사정이 그렇다면 아무렇게 행해도 되고 또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무방하지 않은가. 앞에서 그런 것 조차도 다 함께 차별없이 무소유 불가득하다고 밝힌 것은 바로 이렇게 아무렇게 하거나 또는 반대로 아무 것도 행하지 않아도 다 무방하다는 것을 제시하는 근거가 아닌가. 그런데 왜 그런 입장에서 그것을 바탕으로 하필이면 행하기 힘든 수행을 잘 성취해야 한다고 하고 지키기 힘든 계율을 잘 지켜야만 한다고 제시하는가.
그런 의문이 발생하게 된다.
그래서 이런 입장에서는 다시 일체가 모두 무소유 불가득하다는 사정을 잘 관하는 가운데 다시 생사현실에 임해 무소득을 방편으로 취해 기본적으로 제시한 수행덕목들을 하나하나 잘 성취해 실천해야 하는 그 사정을 다시 잘 파악하고 그런 바탕에서 이 두 측면의 내용을 모두 잘 지켜서 생사현실에 임해야 할 필요가 있다.
이들 내용은 알고보면 불교계에서 널리 읽히는 『금강반야바라밀경』에 제시되는 핵심 내용이기도 하고 대승 경전 전반을 관통하는 공통 내용이기도 하다. 그리고 대단히 많이 반복된다. 그런데 또 이 사정을 전후로 잘 파악해서 각 단계마다 각 경전마다 각기 조금씩 다른 입장에서 일정한 내용을 제시하는 그 근본취지를 잘 이해하는 것이 쉽지 않다.
그런데 이미 이들 내용을 최근에 『마하반야바라밀경』과 『관소연론석』을 살피는 과정에서 대강 살폈기에 여기에서는 이들 내용은 중복해 살피는 것을 생략하기로 한다.
그런데 조금 더 추가하면 『불장경』에 제시된 내용이 대승의 기본적이고 표준적인 내용이라면 다시 여기에서 조금 더 나아가는 입장도 있다. 그래서 이 부분까지 추가해 잘 이해할 필요도 있다.
그래서 조금 쉰 다음 『불장경』과 관련하여 끝 부분을 놓고 조금만 살피고 마치기로 한다.
우선 이 부분에 대해 간단히 개관하면 다음과 같다.
부처님의 기본 본 입장은 현실에서 차별적으로 대하고 문제삼는 그 일체가 모두 차별없이 공하고 그 내용을 본래 얻을 수 없는 가운데 단지 망상분별을 통해서 마치 꿈처럼 얻는 내용임을 파악해서 근본적으로 생사고통을 벗어나와야 한다는 데 취지가 있다.
이는 비유하면 꿈에서 보는 바다나 황금은 하나같이 그 꿈을 꾸는 침대에서는 얻을 수도 없고 문제되지도 않는 내용들이다. 그런데 사정은 그렇지만, 꿈의 내용을 기준으로 하면 바다에 빠진다거나 황금을 얻는 것은 대단히 큰 차이가 있다.
이 꿈의 비유를 놓고 이것이 본 바탕인 공한 실재와 고락이 오가고 희비가 매순간 엇갈려 심각하게 고뇌하고 번민을 하게 하는 생사현실의 기본 상황과 같음을 잘 이해해야 한다.
그래서 가장 기본되는 내용은 현실에서 문제삼는 그 일체가 본래 무소유[참된 진짜의 내용이 없음]이고 불가득[그런 내용은 본 바탕에서는 얻을 수 없음]을 잘 파악하고 그런 바탕에서 수행을 잘 성취하는 것이다.
그런데 수행덕목을 제시하고 이것을 잘 성취해야 한다는 내용은 기초경전에서도 공통적으로 제시하는 내용이다.
그런데 대승경전에서 다시 강조하는 것은 이런 수행을 하지 말라는 의미가 아니고 그런 수행을 잘 하되, 그 수행을 기본적으로 위와 같은 사정을 잘 파악한 가운데 무소득을 방편으로 상을 취하지 않고 집착을 제거한 가운데 그 수행을 잘 행해야 한다는 점이다. 그리고 그런 바탕에서 수행을 해야 그 수행 자체도 원만하게 성취됨을 강조하는 것이다.
그래서 부처님이 기본적으로 제시하는 바는 예를 들어 과거 7 불의 게송에서 보듯, 일체중생성청정....죄복개공무소주 이런 내용이라고 할 수 있다.
이는 현실에서는 극악한 이는 대단히 나쁘고 어떤 이는 대단히 선하다 이런 식으로 차별상을 취해서 대하면서 수행을 하기 쉬운데 이런 입장을 떠난 가운데 그러나 그런 수행을 잘 행해야 한다는 취지로 이해할 수 있다.
그런데 이렇게 내용이 추가되면 앞에서 제시한 것과 같은 의문이 다시 발생한다. 즉, 사정이 그렇다면 왜 힘든 수행을 하필이면 해야 하는가. 이런 의문이다.
그래서 이와 관련해 다음과 같은 여러 입장을 다시 나열해 볼 수 있다.
가장 극단적인 경우는 비록 생사현실 안에서는 미추, 선악, 청정함과 더러움 이런 수많은 차별이 있지만, 그러나 본 바탕에서는 그런 것을 하등 얻을 수 없으므로
1, 그런 차별이 생사현실에 있더라도 일체 무시하고 이렇다거나 저렇다거나 말할 필요도 없고 그냥 생사현실을 그런 형태로 방치하고 내버려두어도 된다 이렇게 극단적으로 이해하는 입장도 있을 수 있다. 왜냐하면 그런 내용의 본 사정이 위와 같기 때문이다.
그래서 경전에서는 그런 본 사정을 잘 깨달아 이해하고 생사고통을 벗어나와야 한다고 제시하지만, 그러나 따지고 보면 그런 사정을 잘 이해하지 못하고 수행을 잘 성취하지 못하는 그런 상태조차도 부처님의 상태와 본 바탕을 놓고 보면 무슨 차별을 얻을 수 있는가. 사정이 그러니 일체 이런 사정을 이해할 필요도 없고 더 나아가 수행할 필요도 본래 없는 것이다. 이렇게 생각하고 임하는 입장이라고 할 수 있다.
2, 앞의 입장이 가장 극단적인 입장이라면 다음처럼 조금 덜 극단적인 입장도 생각할 수 있다. 일체가 본 바탕은 차별없이 얻을 수 없고 공하다. 그런데 문제가 되는 것은 그런 차별이 없는 본바탕이 문제가 아니다. 본 바탕은 문제를 제기한 적이 없다. 그런데 본 바탕은 그런데도 그런 바탕에서 생사현실에서 생사고통을 겪는 것은 그 당사자가 그런 사정을 관하지 못하고 망상분별을 일으켜 임하기에 그런 것이다. 그래서 이 부분이 문제가 되기에 사정이 그렇다고 그냥 방치하면 안 되고 다만 이런 본 바탕의 사정을 각 당사자가 스스로 잘 깨달아서 임하면 된다는 입장을 생각할 수 있다.
이는 침대에서 누어 잔 바다꿈과 사정이 비슷하다. 꿈에서 바다에 빠지고 고통을 겪고 식은 땀을 흘린다고 해도 침대가 있는 현실상황을 기준으로 놓고 보면 문제가 있는 것은 아니다. 그런데 사정이 그렇지만, 그런 꿈을 꾸는 입장에서 그 꿈을 기준으로 놓고 보면 그런 사정도 잘 파악하지 못할 뿐더러 그 꿈 내용이 그런 고통을 꿈안에서 주기에 문제가 된다. 그래서 그 본 사정을 잘 관하는 것이 요구된다.
3. 그런데 2의 입장은 1의 입장보다는 덜 심하지만, 그래도 표준적인 입장에서는 극단적인 입장이라고 할 수 있다. 그 사정은 비록 현실이 꿈처럼 실답지 않다고 하지만, 그러나 현실은 꿈은 아니고, 대다수가 비슷한 조건에서 비슷한 내용을 대단히 장구하게 반복해 경험하게 되는 내용이고, 또 각 주체가 매순간 생생하고 명료하게 대하는 내용이기에 단지 그것이 실답지 않음만 관한다고 해서 극도의 생사고통을 장구하게 받는 상황에서 곧바로 쉭하고 벗어나올 수 있는 그런 성격이 아니다. 그래서 비록 그 본 바탕에서는 얻을 수 없는 내용을 생사현실에서 얻는 것이어서 꿈처럼 실답지는 않지만, 그러나 또 꿈 자체는 아니고 일정한 조건에서 반복해 겪게 되는 것이므로 이런 사정만 관하면 그것으로 충분하고 그로 인해 생사현실에서 겪는 생사고통의 문제가 해결된다고 보기 힘들다. 따라서 앞과 같이 그 본 사정을 잘 관하는 한편 그 바탕에서 생사에 묶이게 하는 업의 장애를 제거하고 생사현실 안에서 생사에 묶이지 않게 할 수행방안을 적극적으로 잘 성취하는 것이 요구된다. 그래서 경전에서는 표준적인 생사고통 해결방안으로 위와 같은 본 사정을 잘 관해서 생사현실이 실답지 않음을 이해하고 집착을 제거함과 동시에 또 생사현실에 처해 생사에 묶이지 않게 할 수행방안을 그런 바탕에서 집착을 제거하고 원만하게 잘 성취해야 한다고 제시하게 된다. 이는 본 바탕을 기준으로 하면 수행을 하던 않던 이 경우나 저 경우가 다 차별없이 얻을 바가 없이 공한 것이기는 하나. 그런 바탕에서 하필이면 생사고통을 극심하게 겪을 필요가 없는 한편 이왕이면 생사현실안에서도 복덕과 지혜를 구족해야 또 그런 바탕에서 다른 중생도 역시 생사고통에서 잘 벗어나게 할 수 있기에 그런 스스로 생사고통을 벗어날 뿐 아니라 복덕과 지혜를 구족할 수 있는 수행을 잘 성취해야 한다는 입장이다.
4 그런데 조금 더 나아가면 중생제도를 위해서는 반드시 표준적인 방안만 고집하게 되면 중생제도를 행할 수 없고 포기하게 되는 경우도 있게 되므로 결국 처음 1이나 2 와 같은 입장에서 일체에 모두 상을 취하지 않고 일체 현실에 생멸을 본래 얻을 수 없음을 잘 관하여 무생법인을 증득한 가운데 극심한 고통을 장구하게 받는 지옥과 같은 상황에서조차도 안인을 잘 성취해서 평안하게 임할 수 있는 상태가 되어 이후 중생을 제도하기 위해서는 자신이 설령 그런 노력으로 인해 지옥에 들어가게 되더라도 중생제도를 포기하지 않고 서원을 성취하겠다는 자세로 수행에 임하는 것까지 요구되게 된다. 이는 비록 기본적으론느 3 과 같은 표준적인 선교방편에 입각해서 생사현실에 임해 중생제도를 행하는 것을 기본으로 하지만, 그러나 그렇다고 중생을 제도함에 있어서 어떤 방편에 한계가 있어서 자신이 극심한 생사고통을 그로 인해 받게 되더라도 그런 생사고통을 근본적으로 1이나 2와 같은 입장에서 제거한 가운데 중생제도를 결코 포기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차이가 있다. 그래서 이는 결국 불퇴전위에 이르고 높은 수행단계에서 강조하게 되는 중생제도의 방편에 제한을 두지 않고 무량한 방편을 취하는 입장이 된다.
그래서 일체가 본 바탕이 차별이 없이 공하다는 것을 받아들인다고 할 때는 이처럼 여러 유형이 가능하게 된다.
처믐 본 1 과 2 의 입장은 비록 본 바탕의 측면을 기준으로 잡고 살피면 그것이 큰 문제가 없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러나 생사현실의 내용을 기준으로 놓고 살피면 비록 본 바탕에서는 얻을 수 없는 내용이라지만, 생사현실에서 그가 그런 바탕에서 취하는 입장 때문에 생사현실에서 아무렇게 행해도 무방하다고 잘못 여기고 마땅히 행할 수행을 행하지 않거나, 생사고통을 극심하게 받아나갈 업을 함부로 행하여서 그로 인해 그 당사자도 스스로 극심한 고통을 받는 상태에 처하게 되고 그런 상태에 막상 처하면 앞의 1과 2 의 원칙적인 내용만으로는 스스로 잘 벗어나오지 못하게 된다. 또 이로 인해 다른 중생도 역시 생사에서 잘 벗어나오지 못하고 그로 인해 생사현실 안의 생사고통이 더욱 증폭되는 결과를 초래하게 된다.
그렇게 되는 것은 일반적으로 본 바탕에서 그런 내용을 얻을 수 없기에 어차피 차별없이 다 마찬가지라고는 하지만, 그 당사자는 그런 가운데에서도 원래 본능적으로 반응하는 자세를 중단하는 것을 힘들어하는 한편 수행 자체를 행하는 것을 힘들어 하기에 결과적으로 어차피 차별이 없는 가운데에서도 하필이면 극심한 생사고통을 받게 되는 상태에 반복해서 장구하게 처하게 되는 것이다.
그런데 원인단계에서 생사고통을 받을 업을 중단하는 것도 힘들다지만, 그래도 결과로서 생사고통을 직접 받는단계에서 앞과 같은 원칙적 내용에만 의존해서 그 고통을 벗어나는 것만은 훨씬 쉬운 것이 현실이다. 그리고 원인단계에서 그런 수행을 할 때 원칙적인 내용을 그 상황에 잘 적용해서 그 수행이 비록 힘들어도 그 역시 본래 차별이 없음을 잘 관해서 그 수행을 원만히 평안하게 잘 성취하지 못한 경우는 그로 인해 생사고통을 당장 극심하게 받는 상황에 처하면 더더욱 그 원칙만으로 그 상황을 벗어나오는 것을 기대하기 힘든 것이다.
그래서 수행단계가 높아지면 결국 1과 2 의 입장을 바탕으로 그런 극심한 고통을 직접 받는 상황에서도 평안하게 임하는 안인을 성취하고 불퇴전위에 이르러 중생제도 과정에 제한을 두지 않고 무량한 방편을 사용할 수 있는 상태가 되어야 하는 것은 사실이지만, 현실적으로 기본적인 수행을 잘 성취한 이후 단계적으로 그런 상태로 나아가는 것이 바람직하다.
○ [pt op tr] 꽃 공양, 나무불, 나무법, 나무승 Rose_with_departing_bee._(11383801436)
https://commons.wikimedia.org/wiki/File:Rose_with_departing_bee._(11383801436).jpg Rose with departing bee. Author Bob Adams from George, South Africa ● [pt op tr] fr
♥India Delhi
○ 아름다운 풍경사진 공양, 나무불, 나무법, 나무승 With the image 'Google Earth & Map data: Google, DigitalGlobe'
최근에 대장경을 대강 1회독하고 연구를 하자는 취지하여 대장경을 살폈다. 11월 말일이 되어 경우 그 작업을 마치고 나서 생각해보니 현재 일일단상 코너가 상당히 밀려 있는 한편 이런 형태로 살피면 상당히 어려움이 많다고 보게 된다.
우선, 일반적 입장에서 불교의 가장 기초적인 부분이 이해가 잘 안 되는 상태를 기준으로 일일단상코너에 내용을 적는데 일일단상코너에 뽑혀 나오는 경전이 랜덤으로 추출되기에 사정이 어려운 점이 우선 보인다.
그 다음 개별적으로 깊은 경전 연구를 하는 과정이나 또는 중간단계를 놓고 보더라도 현재와 같은 방식으로 살피는 데에는 무리가 있다고 본다.
그래서 우선 일일단상에서 살필 경전의 범위를 대폭 축소하거나 폐지할 것을 고려하게 된다. 대장경을 처음 대강 1번 훑어보는 과정에서 하루에 10 권씩 또는 30 권씩 살피며 넘어가는 형태와는 달리 이제는 조금 자세하게 살펴가려고 생각중인데 현실적으로 하루에 1 개 경전을 살피면 하루가 거의 다 가게 된다.
지금 경전코너에서 처음에 불장경을 뽑아 살피는 과정에서도 그것을 실감하게 된다. 처음 경전을 살필 때 의미가 구분되는 데에 따라 문단이나 줄을 나누고 반복되는 부분도 파악하고 핵심되는 부분을 파악하는 한편 각 부분의 핵심단어(키워드)를 또 뽑고 그리고 경전 목차와 함께 경전 내용을 요약해 정리하고 또 필요한 부분은 암기도 하고 그리고 논의가 필요한 부분은 논의를 해야 한다.
그런데 처음에 내용을 정리하고 핵심부분을 표시하는데에만 대강 이틀이 소요된다. 물론 중간 중간 다른 활동을 해서 그런 점도 있지만, 현실적으로 1 개 이상의 경전을 매일 살피는 것이 힘들다.
그리고 또 이와 함께 경전코너의 조각글은 일반적인 상태에서 추구하는 다양한 항목이 수행형태로 진입될 수 있는 중간 계단 역할을 할 수 있게 하기 위하여 니르바나 행복론과 관련된 주제를 살피기로 계획되어 있는데 이것도 실행하기가 대단히 힘들다. 마음은 이것도 하고 저것도 하면서 다 하고 싶기도 하고 해야 한다고 보지만, 이런 상황에서 선택과 집중의 필요가 있다.
한편 다시 일일단상코너에 조각글을 올리기 위하여 기본 자료를 준비하던 중 museum of happiness 즉 행복박물관이란 곳을 우연히 만나게 되었다.
그런데
위 지도는 네이버에서 얻어낸 형태인데 그런데 위 지점을 구글지도로 방문해보면 행복박물관은 보이지 않는다. https://goo.gl/maps/5BFy7DTsj7Wwx79r8
그래서 오랫동안 방치해 두고 있던 니르바나 행복론을 또 그렇게 방치해두면 곤란함을 새삼 느끼게 된다. 매번 사진이나 음악자료를 랜덤추출하는 과정에서 doctr 님의 행복론 요약목차 파일이 뽑혀 나오는데 이번에는 가장 처음 목차페이지도 뽑혀서 왠지 니르바나 행복론에 좀 더 신경을 써야 할 필요를 느끼게도 된다.
그것은 결국 그런 내용이 일반적 입장과 경전의 입장을 이어주는 가교나 중간계단 역할을 할 수 있다고 보기 때문이다.
이번에 작업을 준비한 내용도 크게 그간 다녀온 몇몇 사찰에서 촬영한 풍경 사진과 함께 아름다운 모델들을 촬영한 사진을 처리한 내용을 일단 업로드하는 작업을 하는 한편,
현재 티스토리에서 작업한 내용이 완료되면 구글이나 네이버 등 다른 사이트에도 올릴 수 있는 형태가 되도록 각 사이트마다 구현되지 않는 기능을 처리하게 하는 것을 검토했다.
우선 사진은 구글사이트에 올린 경우만 이들 3 사이트에 모두 나타난다. 티스토리에 사진을 올리면 구글이나 네이버에서 보이지 않게 되어 이후 수정 편집이 대단히 번잡해진다. 네이버도 마찬가지다. 네이버에 올리면 티스토리나 구글에서 수정편집하기가 대단히 번잡해진다.
네이버에서는 iframe 을 사용하지 않고 htm 편집이 쉽지 않다. 그래서 펼침글 기능도 달리 편집해야 하고 위에 붙인 구글풍광사진도 또 제거해야 한다.
구글 사이트에서는 또 카데고리 분류가 편하지 않고 역시 펼침글 기능을 달리 편집해야 한다. 이런 문제가 작업과정에서 번잡함을 주게 된다.
또 한편, 글을 쓰거나 쉴 때마다 아름다운 사진이나 꽃공양 사진이나 음악을 올리고 그 가사를 찾아 올리는데 현재 이들 자료는 나중에 글을 정리할 때 번잡하게 되고 페이지 용량을 과도하게 만드는 문제로 따로 페이지를 만들어 정리하고 있다. 이것도 상당히 전에 비해 더 번잡해졌다. 그 사정은 자료는 이 페이지에 올리는데 해당 주된 자료나 가사자료 등은 또 별도 페이지에 따로 올리는 형태가 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현재 글작업하는 과정이 상당히 번잡하다.
그래서 이것을 일괄처리할 수 있도록 방안을 연구중이다.
그리고 현재 이런 가운데 새로 웨일브라우저를 사용중인데 이전에 사용한 브라우저와 환경이 많이 달라서 조금 어려움이 있다.
그런데 연구에 편한 점도 많다.
우선 창을 2 개로 나누어서 작업을 할 수 있는 점이 대단히 편하다. 참조되는 다른 페이지를 바로 옆에 놓고 함께 참조하면서 내용을 살필 수 있다.
그리고 또 웨일브라우저에서는 tts 기능이 있어서 때로는 경전을 음성으로 들으면서 살필 수도 있다. 일반인은 눈으로 볼 수 있기에 별로 필요없지 않은가 할 수도 있지만, 그러나 일반적인 경우도 작업할 때 눈이 피곤하거나 혼자 너무 심심함을 느끼면 사용해보면 좋다. 블록을 일정부분 설정하고 마우스 우클릭하면 메뉴가 나타난다. 사람 음성과 아주 비슷하게 영어나 한글 일어를 모두 읽어주기에 상당히 흥미로운 기능이다. 기술이 많이 발달해서 대략 1 시간 정도만 문장을 어떤 사람이 읽으면 이를 통해 이런 기능을 만들어 낼 수 있다고 한다. 즉 글자는 많지만 기본 낱글자 26 자 24 자 이런 정도만 알면 글자를 적을 수 있듯, 음성도 1 시간 분량의 문장만 녹음하면 이를 통해 각 소리에 대한 폰트를 만들어서 글자에 대응시켜 읽어나가게 할 수 있게 되었다는 소식이다. 그래서 나중에는 자신이 듣고 싶은 사람의 음성을 이런 식으로 만들어서 문장을 읽을 수도 있다고 한다.
생각해보면 현실에서 색이나 소리는 많이 이런 형태로 이용가능하게 되었다 조금 있으면 후각이나 미각 촉각도 점차 이런 형태로 될지도 모른다.
그런데 여하튼 일일단상코너나 경전코너의 연구가 지루하지 않고 흥미롭게 되려면 보조 자료가 많이 필요하다고 보고 기본적으로 사진자료를 사이트에 업로드하는 한편 페이지가 잘 작업이 마쳐지면 대표적인 사이트 3 곳에 쉽게 올릴 수 있는 방안까지 검토를 마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