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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활의 비상탈출구로서 해탈문 본문

연구자료

생활의 비상탈출구로서 해탈문

진리와 가치를 고루고루 2017. 8. 24. 00:2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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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buddhism007.tistory.com/3474

● 이하 글은 단상_조각글 내용을 주제별로 '편집중'인 상태의 글입니다.



현실에서 사람들이 소원을 갖고 성취하기를 원하는데 

수행의 입장에서는 

이것이 모두 지옥과 아귀 축생의 세계로 

그 자신과 다른 생명을 모두 묶어 끌고가는 과정으로 보고 

이 모두를 무원무작삼매 해탈문에 들어 

제거할 것을 수행의 핵심 내용으로 삼게 된다. 



즉 현실에서 각 중생들이 

각각의 희망을 추구하는 과정이 

전반적으로 전도망상에 바탕해서 

이뤄지는 부질없고 쓸데없는 활동이면서 

동시에 그 자신과 다른 생명을 다 함께 

지옥과 아귀 축생세계로 묶어 끌고 들어가 

생사고통을 받게 하는 근본 원인임도 제시한 것이다. 


그런데 일반적 입장에서는 

왜 현실에서 자신이 좋다고 보는 것을 추구하는 이런 활동이 

거꾸로 지옥과 아귀 축생세계로 들어가는 결과가 되는가를  

이해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방금 아주 이상한 영화를 중간에 하나 보고 왔다. 

전쟁이 나서 어떤 촌장이 주민을 데리고 피난을 갔는데 

무슨 일인지 몰라도  촌장이 그 마을에 온 손님과 아들을 

쫒아내고 음식에 독을 섞어 아들을 죽이려 하고 

그러다 아들이 음식을 먹고 죽게 된 것이다. 


이 촌장아저씨가 영화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 내용이 

생각난다. 


자신이 살려고 행하는 일은 죄가 되지 않는다라고 하면서 

다른 이를 죽이라고 지시하는 것이다. 


이후 그 손님이 그렇게 쫒겨나고 아들이 죽은 다음 

다시 피리를 불어 

쥐들이 몰려오고 

그래서 마을 사람들이 다 죽고 

아이들은 그 피리부는 아저씨를 따라 동굴로 들어가서 

동굴에 갇히는 것으로 영화가 끝난다. 


이 영화가 과거 유명한 노래 

피리부는 사나이라는 노래에서 영감을 받았는지 

아니면 유럽의 피리부는 아저씨 라는 동화에서 

줄거리를 빌려 왔는지 모르지만, 

조금 괴기스러운 영화라고 본다. 


그런데 여하튼 아버지에게 아들을 잃는 슬픔을 주고 

또 이에 대해 보복을 하고 고통을 당하는 과정이 

어떤 사정으로 발생하는가를 살피면 

바로 어떤 한 주체가 자신 입장에서 

자신에게 지극히 절실하기도 하고 소중해서 

양보할 수 없다고 보는 어떤 좋음을 추구할 때 

그것을 추구하는 방식에 의해서 

그런 결과가 계속 이어져서 나타난다고 보게 되는 것이다. 


그 각 주체마다 그 상황 상황에서 

자신이 바라는 좋음을 얻기 위해서는 

그 방안 밖에는 없다고 생각하면서 

매번 그런 방안을 취하는데 

그런데 그 방안이 결과적으로 이끌고 가는 상태는 

처음 그 주체들이 원하는 그런 상태가 아니고 

생사고통을 극심하게 겪게 되는 상태라는 것이 

문제인 것이다. 


그런데 왜 처음 좋음을 얻기 위해서 행하는 것이 

그 결과는 이렇게 되는가 하는 문제에서는 

제 각각 자신의 입장만을 고집하면서 

그런 내용이 서로 작용 반작용의 관계로 얽혀서 

그 이후 상태를 그렇게 만들어 나가게 된다는 내용을 

넓고 길고 깊게 관찰하여 파악하지 못하는 가운데 



계속 자신은 자신에게 소중하고 좋은 것을 

얻고자 한다면서 그렇게 행해나가고 

그 결과 지옥과 아귀 축생세계로 

묶여 들어가게 된다고 보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이런 유형으로 행위하는 대표적 경우를 

짧게 줄여 욱-장-팡 형 방식이라고 표현하게 되는데 


매사 분노를 일으키며 욱하고 반응하는 방식과 

장발잔처럼 일단 탐욕을 일으킨 것을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추구해가는 방식 

그리고 루팡처럼 자신의 뜻을 자신 나름대로 

교묘하게 성취시킨다고 잔꾀를 부리는 방식 

이런 것들이 

대표적으로 지옥과 아귀 축생세계로 나아가는 

주된 방안인 것이다. 


이 공통점은 어떤 주체가 자신의 좋음을 얻을 때 

다른 상대가 지극하게 고통을 받고 

나쁨을 받는데 

그 당사자는 각기 자신의 입장만 고집하고 

다른 상대와 입장을 바꾸어 사정을 

헤아리지 못한다는 점이 있다고 본다. 


루팡과 같은 경우는 지혜로운 것 같지만, 

상대가 고통을 받는 결과가 나타나지 않게 하는 

지혜를 기울이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좋음을 얻고 상대는 고통을 받는데 

다만 그런 결과가 나타나는 과정을 

마치 마술사가 마술을 행하듯 

순간순간 그 과정만 상대가 잘 알아채지 못하게 

교묘하게 행하는 데에만 

지혜를 쏟는 유형이라고 할 수 있다. 


그래서 현실에서 지혜롭다고 보는 이런 유형을 

수행의 입장에서는 

그 내용을 넓고 길고 깊게 관찰하지 못하여  

지극히 어리석음을 행하는 형태라고 보는 것이다. 




그런데 현실에서 매 순간 

이런 유형으로 임하지 않는 경우는 

극히 드물다고 보게 된다. 


그리고 어느 정도는 제거된다고 해도 

자기자신 자신의 생명, 신체, 재산, 가족 이런 내용이 

걸릴 때는 대부분 그렇게 반응하지 않을 도리가 

없게 된다고 보는 것이다. 


그리고 바로 이 관계가 MUN 님이 말하는 우주 세트를 

돌리는 동력이기도 하고 

업감연기에서 말하는 내용이기도 한 것이다.  


예를 들어 왠만한 것은 다 집착을 버리고 대한다고 해도 

영화처럼 다른 이가 자신의 손을 자르고 

자신의 아이를 독을 탄 음식으로 살해하였는데 

자신이 분노를 일으키지 않고 

그에 바탕해서 무언가를 행하지 않게 되는 경우가 있겠는가. 



이론상은 가능하다고 할 지 몰라도 

현실에서 이런 상황에서 영화의 주인공이 행하는 반응관계에서 

벗어나서 행할 사례를 기대하기는 

거의 희박하다고 보게 되는 것이다. 


그런데 이처럼 어떤 주체가 

강하게 집착하고 어떤 희망을 추구하는 과정이 

그 자신과 다른 생명을 

지옥과 아귀 축생의 상태로 묶어 끌고 가는 과정이라고 하면 


왜 수행자가 서원을 성취하려 수행하는 과정은 

그렇지 않다고 하는가 .

이것이나 저것이나 다 어떤 희망을 놓고 

추구하는 것은 성격이 같은데 

왜 차이가 나타나는가. 

이런 의문을 갖게 되기 쉽다고 보는 것이다. 


그래서 이것이 유무 논의와 어떤 관계로 

이런 차이가 나타나는가를 자세히 살필 필요가 있다고 본다. 



[...]

한 사람을 제도하면 마치 도미노 게임에서 
하나의 도미노가 전체의 도미노를 차례차례 쓰러뜨리게 되듯 
그렇게 되어서 일체 중생이 제도될 수도 있겠구나 
하는 생각을 해보게 되는 것이다. 


이는 
경전에서 한 은하계를 머리카락으로 이동시킬 수 있다는 
대반야바라밀다경에서 나오는 내용과 
요즘 새로 듣게 되는 
MUN 님의 세트 이론과도 관련되는 내용처럼 생각된다. 


자동차나 큰 선박을 놓고 생각할 때 
이것을 어느 위치로 옮기려고 할 때 
부품 하나하나를 놓고 옮기려고 하면 
대단히 어려운 일처럼 보이는데 
열쇠를 꼽고 엑셀을 밝고 핸들을 돌리고 하면 
그 전체가 그렇게 움직임도 보는 것이다. 


그래서 중요한 것은 그렇게 행해야 할 취지부터  
잘 판단하고 그렇게 할 방안을 찾아내면 
그런 내용들의 성취가 
불가능한 것이 아님도 보게 되는 것이다. 




일단 소원의 성취과정에서 유무 논의가 어떤 
효용을 갖는가를 살펴보자. 




우선 희망의 구조를 살피면 
이 희망은 관념분별 영역에서 일으킨 관념을 바탕으로 
그리고 좋음과 관련되어 나타나는 내용임을 볼 수 있다. 


예를 들어 어떤 이가 무언가를 좋은 것으로 여긴다고 할 때 
만일 그런 좋은 것이 있다면 좋을텐데~ 라는 형태로 
마음을 갖는다고 할 수 있다. 
이것이 희망인 것이다. 


그리고 그 희망을 성취하고자 할 때는 
그 희망에 해당하는 결과를 얻을 수 있는 인과관계를 찾고 
그 원인에 해당하는 것을 마련하고자 노력하게 된다. 


이런 활동을 통해서 
감각현실에 자신이 원래 희망하던 내용과 상응한 상태가 
얻어진다고 여기면 그 경우 
자신의 희망이 뜻과 같이 성취되었다고 여기게 되는 것이다. 




예를 들어 어떤 이가 시원한 냉면을 먹고 싶다고 한다면 
일단 그런 희망을 가질 때는 그 냉면은 
단지 마음의 분별영역에서 관념으로 가진 내용인 것이다. 


그리고 그 상태에서 그 관념을 
구체적으로 세밀하게 그려 내는 것을 
희망이 성취된 상태라고 하지 않고 


냉면집에 가서 냉면을 먹게 되는 현실상황이 되어 
즉, 그런 감각현실을 얻는 상황이 되고 


그 상황에서 그 내용이 
자신이 희망했던 냉면을 먹는 상황임을 인식하고 분별할 때 
이 상황을 놓고 희망이 성취된 상태라고 한다는 의미다. 










그런데 앞에서 유무의 논의의 결론은 
뜻과 같이 희망이 성취된 하나의 정지단면을 놓고서 살필 때도 


그 한 정지단면의 감각현실에서도 
자신이 생각하는 그런 내용은 얻을 수 없음과 함께 
그 감각현실은 실재의 지위에 있는 내용[실상]도 아니고 


또 실재는 그런 내용을 얻을 수 없고 공하고 
그에 해당하는 진짜의 내용도 없음[무소유 불가득 공]을 
제시하는 것이다. 


이 결론이 왜 그런가는 이후 이어지는 논의에서 
자세히 다룰 내용이지만, 
여하튼 경전에서 제시하는 결론과 
본 유무 논의에서 제시하는 결론은 이런 내용이다. 


그런데 이런 결론을 먼저 취한 상태에서 
위 희망의 성취 과정을 살핀다면 
다음의 문제를 보게 된다. 


분명 뜻과 같이 소원이 성취된 상태라고 해도 
거기에는 처음 어떤 이가 희망을 가질 때 
원래 그 자신이 찾은 어떤 내용은 얻을 수 없는 것이다. 


그것은 꼭 뜻처럼 성취된 그 단면에서만 그런 것이 아니고 
나머지가 다 마찬가지다. 


그런데 이상하게 그 주체는 
다른 감각현실에서는 자신의 뜻이 성취되었다고 하지 않고 
특정한 감각현실이 얻어질 때만 
그런 감각현실에 마치 자신이 희망한 그런 내용이 있고 
거기에서 그런 내용이 얻어지기라도 하는 것처럼 여기고 
그런 상태를 자신의 뜻이 성취된 상태라고 여긴다는 점이다. 


그래서 쉽게 예를 들어 
짜장면을 먹고 싶어한 사람은 
중국집에 들어가 짜장면을 먹게 될 때 
자신의 희망이 성취되었다고 여기는 것이고 


모래를 만지거나 
물을 마실 때 
짜장면을 먹고자 한 희망이 성취되었다고는 여기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 내용이 바로 현실에서 어떤 이가 희망을 그려 가진 상태에서 
그 희망을 성취하고 그 희망이 그래서 성취되었다고 
여기는 내용인 것이다. 




그런데 앞에서 유무 논의는 
일단 기본적으로 그렇게 100 % 소원이 성취되었다고 하는 
그 감각현실에서부터 그런 내용을 얻을 수 없고 
그것은 실상이 아니고 그에 해당한 진짜 내용은 없음을 
결론으로 제시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것이 본래 생사 고통을 얻을 수 없는 
본 바탕의 청정한 니르바나와 
관련되는 내용이기도 하다. 


그리고 이런 청정한 니르바나는 
어떤 현실의 특정 상태에서만 그렇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 것이다. 


그런데 본 바탕의 사정은 이렇지만, 
현실에서는 그 기본 사정을 그렇게 파악하지 못하고 


근본 무명에 바탕해서 
전도망상을 일으키는 가운데 


자신이 생각하는 내용이 
감각현실에도 그렇게 얻어져서 있고 
또 그 내용은 자신의 주관을 떠나 실재도 그러한 것이고 
또 거기에는 그런 내용을 나타나게 하는 진짜에 해당하는 
영원불변하고 고정된 실체가 있어서 
그런 내용이 나타나게 되는 것이라고 여기는 한편 


자신이 생각하고 대하는 그 모든 것은 
하나같이 실다운 것이라고 여기고 
특히 이 가운데 자신이 가장 소중하게 여기는 
자신과 자신의 것 자신의 생명, 신체, 재산, 가족, .. 등을 
놓고 집착하고 임하면서 
매 순간 생사고통을 받아나가는 상태에 있는 것이다. 




그러니 수행은 이런 상태에서 
이 사실을 관하고 그런 전도망상을 벗어나서 
본래의 청정한 니르바나에 상응하게 
현실에서도 생사고통을 벗어나 임하는 것이 
요구되는 것이다. 


그래서 이것이 1차적 수행목표인 것이다. 


이 상태가 갖는 효용은 언뜻 보면 
일반 입장에서 갖는 모든 것을 제거하고 버리는 것이 되어서 
오직 부정적인 가치만 갖는 것으로 오해하기 쉽다. 


그런데 사실은 이를 통해서 
그 주체는 그 주체를 
각 세계에서 무한하게 받아나갈 생사고통에서 
벗어나게 하는 대단한 효용을 갖는 측면이다. 


그래서 
이처럼 생사고통을 벗어나서 
청정한 니르바나의 상태에 상응하게 여여하게 
현실에 임하게 되는 가치는 
현실의 그 어떤 것과도 비교를 할 수 없을 정도로 
그 가치가 큰 것이다. 


지금 당면한 순간에서 좋음에 집착하는 경우 
그 좋음이 우주보다 더 가치가 있다고 착각을 할 수는 있지만, 
그것은 아주 잠시간에 그치는 것이고  
나중에 생사고통을 받는 상황에 직면하면 
그러한 것이 하등 의미가 없게 된다는 것을 실감하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기본적으로 유무 논의를 통해 
이런 상태에 이르는 것은 
이미 대단한 효용을 취하는 상태가 된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사실 수행은 그 상태로만 
그치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만일 그 수행자가 자신만 그처럼 
생사고통을 벗어나고 그렇게 머물 때 
어떤 결과가 나타나는가를 놓고 생각하면 
이해가 쉽다. 


원래는 각 중생이 처음 그 수행자처럼 
그렇게 제각각 생사고통을 벗어나면 
현실에서 문제가 없다고 보게 되고 


그렇게 하던 하지 않던 
원래의 본 상태는 또 처음부터 하등 그런 문제를 얻을 수 없고 
따라서 문제가 되지 않는다고 볼 수 있는 것이다. 




그런데 그런 경우 본 바탕은 그렇다고 하지만, 
무량한 중생들이 서로 얽혀 극심한 생사고통을 받아나가는 상태가 
그대로 잔존하게 된다는 문제가 남는 것이다. 


물론 그 경우 
실재의 측면에서 보면 
이 역시 문제가 없다고 보지만, 


그러나 현실의 측면에서 이 상황을 보면 
무한한 중생이 서로 얽혀 
생사고통을 받는데 
이를 그대로 방치하는 상태가 되는 것이다. 




그래서 수행자가 다시 생사 현실에 들어가 
수행을 통해서 복덕자량과 
지혜자량을 구족해서 
중생을 제도하고 
불국토를 건설하고 장엄해서 
성불한다는 상태가 
2 차 목표로 제시되는 사정이 있는 것이다. 




그런데 이 내용은 수행자가 
현실에서 추구하고 성취하는 서원의 내용과 
관련되는 것이다. 


그래서 본 바탕은 원래 
이렇거나 저렇거나 
모두 청정한 니르바나임에 차별이 없는데 


본 바탕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중생이 소원을 추구하면서 생사고통을 겪는 현실과 
수행자가 이런 사정을 관하는 가운데 
본 바탕과 상응하게 여여하게 생사고통을 벗어나 임하는 경우거나 


또는 더 나아가 
수행자가 중생을 제도하는 서원을 성취하는 현실은 
서로 차별이 나타나는 것이 되는 것이다. 


그리고 희망을 놓고 그것을 성취한다는 과정은 
또 이 두 경우가 성격이 같은 것이다. 


그래서 처음의 문제가 또 여기서 제시되는 것이다. 


희망이던 서원이던 그 내용을 처음 
어떤 주체가 마음에 그려 놓고 희망을 가지는 상황과 


그것을 추구하는 과정 


그리고 현실에서 어떤 내용이 나타날 때 
다른 경우와는 달리 그 경우는 
그런 희망이 성취되었다고 보게 되는 과정이 
이 두 경우에 모두 공통된다는 점이다. 




그래서 짜장면 비유에서 보았듯 
서원을 성취하는 경우도 


어차피 어느 정지단면에서도 어떤 관념분별로 가진 희망의 내용을 
얻을 수는 없으므로 
그냥 모래 하나를 놓고 
그것이 서원이 성취된 상태라고 할 수는 없다는 의미다. 


그런데 그것은 일반적인 상황과 달리 
어떤 특별하고 고정된 진짜의 내용을 얻고 
실재에서 내용을 얻을 수 있는 
실다운 내용을 얻기에 


일반인이 소원을 성취한 상태와 
구별된다고 하는 것이 아닌 것이다. 


이 역시 사정은 마찬가지인 것이다. 




그래서 경전에서는 
무한히 중생을 제도해도 
그로 인해 제도되는 중생을 얻을 수 없다. 


이런 내용을 제시하는 것이다. 
그리고 수행목표를 이루는 다른 내용들도 
다 사정이 마찬가지다. 




그래서 그렇게 얻을 수 없음을 제시하고 
바로 그런 사정 때문에 
그렇게 수행하면 
그런 결과를 성취할 수 있음을 
다시 제시하는 것이다. 


그래서 이것이 유무논의에서 
얻는 제 2 차적 효용이고 
사실 이 부분이 광대무변한 효용을 갖는 부분이라고 
할 수 있다. 


무한한 기간 광대무변한 국토에서 
서원을 뜻과 같이 성취해서 
무량한 중생을 제도하고 
불국토를 장엄하고 
성불한다는 것이 
바로 유무논의를 통해 얻게 되는 
그런 광대무변한 효용이기도 한 것이다. 




그런데 이 내용을 
처음 전도망상 상태에서 
당장 자신의 좋음에 집착하고 
이를 추구하는 과정이 
그 당사자와 다른 생명을 
다 함께 지옥과 아귀 축생의 생사고통을 겪게 하는 
상태로 묶어 끌고 가는 과정과는 
어떤 점에서 차이가 있기에 
그런 차이가 나타나는가를 
자세히 살펴야 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에 대해 유무 논의에서는 
이미 앞에서 본 것처럼 
실재의 측면에서는 그런 차별을 
얻을 수 없다고 제시하는 것이다. 




그래서 그런 차이는 도대체 어느 부분에서 
그렇게 나타나는가가 문제된다. 


이 부분은 결국 
전도망상으로 현실을 대하는가. 


그런 전도망상을 제거하고 
실상을 밝게 비추어 관하는 가운데 
현실을 집착없이 대하고 


그 취지 역시 온 생명을 제한없이 
생사고통을 벗어나게 하려는 데 
그 취지가 있는가에서 
기본적으로 차이가 발생한다고 보게 된다. 


일단 여기까지 기본적으로 살피고 


구체적으로 현실에서 
당장 자신과 자신의 것에 대해 망상분별을 일으키고 
좋음을 추구하는 상태에서 


어떻게 생사고통을 벗어나는 비상 탈출구를 
찾아내고 이로부터 벗어나 
무량한 기간 무량한 복덕과 지혜를 얻어 나가게 
될 수 있는가를 


이어서 살피기로 한다. 






현실에서 이 유무 논의가 
어떻게 생사고통에서 벗어날 수 있는 
비상탈출구를 
제공해주는가를 살피기로 한다. 



[...]

여하튼 원래 선악의 차별을 얻을 수 없고 

죄와 복이 공하다는 것이 부처님들의 입장인데 

현실에서는 이 선악과 관련된 시비가 끊이지 않는 것도 사실이다. 



그런데 현실에서 수행을 한다는 것은 

바로 그렇지 않은 현실과 본 바탕은 차별이 없음을 인정하면서도 

그러나 현실에서 그런 수행을 해서 

그런 본 바탕의 상태와 상응한 상태가 되어야 한다고 

제시하는 이중적인 입장이 된다고 할 수 있다. 


본 바탕이 차별이 없으면 그것만으로 

모든 문제가 해결되는 것이 아닌가 

이렇게 생각하기도 쉽지만, 

본 바탕이 그러므로 현실에서 각 생명이 겪는 

생사고통도 그래서 문제가 전혀 되지 않는다고 

제시하는 것이 아닌 것이다. 


오히려 본 바탕이 그런데도 

망상과 집착을 일으켜서 겪지 않아도 될 생사고통을 겪는 상태를 

문제로 보고 


이 본 바탕의 사정을 잘 관하는 한편 

현실도 이에 상응한 상태가 되도록 수행자세를 여여하게 취해야 함을 

제시하고 

또 이에 바탕해서 일정한 수행을 해야 함을 

제시하는 것이다. 


그래서 그런 노력이 없이도 

본 바탕이 그렇다는 사정만으로 

현실에서 겪게 되는 생사고통이 자동적으로 제시하고 있는 내용이 

아닌 것이다. 


이런 상태에서도 자동으로 해결되는 무엇이 있다면 

본래 어떤 노력을 하던 않던 

원래부터 그런 생멸을 얻을 수 없는 본 바탕의 실재만 

그런 상태라고 제시하는 것이다. 


그것은 원래부터 그랬고 

또 그것은 아무 문제가 아닌데 

다만 본 바탕이 그런데도 

그런 본 바탕의 상태와는 달리 

각 생명이 현실에서 겪는 생사고통이 문제였던 것이고 

그것을 해결하기 위해 위와 같은 사정을 관하는 노력과 함께 

수행이 필요함을 제시하는 것이다. 



[...]

일단, 현실에서 망상상태에서 

희망을 갖고 추구하는 가운데 

지옥이나 아귀 축생세계로 열심히 진입해 들어가는 

상태에서 생사고통을 벗어나려면 


가장 기본적으로 

다음 화두를 연속으로 놓고 

이에 대해 살피는 것이 필요하다고 보게 된다. 


그것이 생사고통을 받는 기간을 

최단축하는 방안이기도 한 것이다. 



먼저 시태희라는 한 의사선생님을 떠올리기로 한다. 

과거나 지금이나 의사는 

돈도 많이 벌고 존경받는 직업이다. 

왜냐하면 사람이 고통받는 상황에서 

그 구조를 최일선에서 담당하는 직업이기 때문이다. 


시태희라는 의사는 참조로 

시바이쩌 태레사 수녀 희포크라테스 

이것의 첫글자를 따서 만든 이름인데 


문제는 이 시태희 의사가 위 분들의 특성을 

다 갖춘 한편 

세계 최고로 큰 병원을 운영하고 

돈도 정말 많은 의사의 명칭을 

나타낸 것이다. 


한마디로 현실에서 

인기도 좋고 이 분을 만나면 

다 이 분에 초점을 맞추게 되는 

star 와 같은 상태인 것이다. 


그래서 중요한 인물이다 



그런데 이 시태희 의사분이 

단지 육체의 질병을 치유할 뿐만 아니라 

이것을 계기로 


그 병원에 찾아온 사람이 갖는 

현실적 소원도 다 뜻과 같이 성취시켜 주고 


또 이를 통해서 생사고통을 벗어나는 

수행에 진입시키고 

끝내는 보리와 무여열반 해탈을 얻게 해준다고 

해서 그 명성이 높은 분인 것이다. 



이미 세상에서

병 치료 활동과 관련해서  

대부분 안다고 보는 

시바이쩌 박사 태레사 수녀 희포크라태스의 이름 글자가 

다 포함되어 있다는 점에서도 

상당히 수준이 높은 의사인 것이다. 


[...]

그런데 하나 더 시태희 선생님의 특성을 살피면서 추가할 일은 
알고보면 이 시태희선생님이 환자때문에 
하루도 제대로 쉬지 못하고 바쁠 것 같은데 
전혀 그렇지 않다는 점이라고 할 것이다. 


왜냐하면 늘 하는 일이 그것인데 
그것을 잘 할 뿐 아니라 
즐겁게 잘 하기에 그런 것이기도 하고 


또 병을 낫게 하는 문제도 
자동차나 선박을 쉽게 움직이는 문제처럼 
핵심을 파악하고 접근하기에 
쓸데없이 장기나 몸을 붙잡고 힘을 쓰는 일이 
별로 없다는 것이다. 


그런데도 대단히 신통한 치유력을 보여서 
세상에서 이 분을 대단히 존경 존중하는 상황인 것이다. 


여기서 강조하는 것은 
현실에서 이런 능력이 있고 없고의 차이가 
대단히 크다는 것을 제시하기 위한 것이다. 




이것이 원래 수행자의 수행공식 


참! 예쁘지(f(x)g(y)] 삼삼하지 아라바자나 나자바라아 공식과 
깊은 관련이 있는 내용인데 


참! 은 일단 수행자가 
전도망상 증상의 중생의 증상을 치유하려면 
그 전도망상 상태에서도 
집중하고 초점을 맞출만한 요소를 
진리에 바탕해서 갖추고 있지 않으면 
안 됨을 제시한 것이다. 


이것이 바로 시태희 선생님이 갖고 있는 특성인 것이다. 


사람들이 사회에 많은 유익한 활동을 한다고 해도 
어디 모임에 나타날 때 타고온 자동차가 
구형 소형차라거나 
옷 차림이 왠지 노숙자풍이라거나 
이렇게 되면 
그다지 관심을 갖지 않고 
무시하는 경향이 있는 것도 사실이다. 


유마힐소설경에서도 이런 부분에 대해 
주의를 환기시키는 내용을 볼 수 있는데 
그렇게 되면 그 이후가 잘 진전이 안되는 사정이 
있다는 것을 여기서 일단 제시하는 것이다. 


유무 논의에서 수행자가 현실에서 
그 논의를 통해 효용을 얻으려면 
결국은 이 부분을 잘 해결하지 않으면 
구두선으로 수행이 끝나는 경우가 
많다고 보는 것이다. 


결국 혼자 수행해서 혼자 좋다거나 
알고보면 혼자도 별로 만족스럽지 못한 상태가 
되고 만다는 의미다. 




그러나 시태희 박사는 다르다는 점이다. 
병원 입구에서 응급실과 환자 병실로 
환자를 이송할 때 
중간에 철도도 나타나고 
마라톤 코스도 나타나서 
의사랑 환자가 같이 뛰기도 하는 
개그 프로를 본 적이 있는데 
그 병원이 바로 시태희 박사 소유의 병원이기도 한 것이다. 


현실에서도 이와 유사한 큰 병원이 많이 있는데 
시태희 박사의 병원은 이보다 더 큰 것이다. 




그런데 일상생활에서 
지옥과 아귀 축생의 세계로 진입하는 
과정에서 


어떻게 빨리 탈출구를 발견해서 벗어나는가는 
이런 상태와 
또 다른 상태를 비교를 하는 작업이 필요하다고 
보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종전에 여러 주제를 제시한 적이 있는데 
이것을 종합하여 
다음과 같은 스토리를 묶어 제시해보기로 하자. 


시태희 박사가 처음 병원 개업전에 


라이터 제조 회사에 개미 투자자가 되어 
투자를 했는데 
간신히 투자금 원본을 회복하고 


아무리 돈이 많아도 
생계 해결을 위한 돈은 최소한으로 충분하고 
나머지는 즐거운 맛을 위해 사용하는 것인데 


이 즐거운 맛을 얻는데 
지나치게 과도한 수단과 방편을 추구하는 것을 
어리석다고 보고 
그 사례로 노르웨이 스웨덴 핀란드에서 
노르웨이 국왕과 스웨덴의 국회의장과 
핀란드에서 가장 부자인 사람을 놓고 
이 문제를 생각했다는 것이다. 


이 나라가 형편없는 나라라는 의미가 아니고 
이 나라 국민이 보잘것 없다는 의미가 아닌데 
다만 현재 자신이 사는 곳과는 
너무 거리가 멀어서 


이 나라의 국왕이 누구인가 
국회의장이 누구인가 
부자가 누구인가를 알 지도 못하고 
안다고 하던 모른다고 하던 
자신의 삶에 별 지장이 없다고 본다는 
측면을 제시하기 위해서 
먼 끝 나라를 생각해보게 되었다는 것이다. 


지금 현재도 그런데 
100 년전 
200 년전에 그렇게 활동한 이는 
또 어떤가를 놓고 생각해보는데 


마찬가지 문제를 보았다는 것이다. 




그래서 자신이 이것을 놓고 생각해보았다는 것이다. 


이런 경우는 그런데 
그러나 다른 경우는 
몇 천년전에 활동한 이도 
지금까지 그 이름이 전해지고 
또 그가 한 일들이 영향을 미치고 있지 않은가. 


그런데 외관상 상태는 그보다 훨씬 
이들이 낫다고 보아야 하는데 
왜 그렇지 못한가. 


그래서 자신이 직접 
이 노스핀 국가의 각 인물을 놓고 
무언가 그 상태에서 추가하면 
더 좋다고 보게 되는 내용을 
자신이  시나리오로 써서 추가해보기로 했다는 것이다. 


그렇게 한다고 해도 원래의 상태에서 
별 실질적 차이가 없는데 
그러나 무언가가 추가되면 
그것이 바뀌게 될 수 있을까. 


그래서 1000 년 2000 년이 가고 
심지어 경전에 나타나는 것처럼 
수겁이 지나간다고 해도 
그 내용이 영향을 미치는 상태가 되고 
또 그 영향을 미치는 범위도 
그 동네에 그치지 않고 
한 은하계 전체에 이를 수 있을까 
이런 것을 놓고 
생각을 한 번 해보았다는 점이다. 


어차피 시나리오 구성에는 돈도 안들고 
노력도 크게 안 드는데 
그런 차이를 나타나게 하면서 
실질적으로 외관은 별 차이가 발생하지 않는 
내용이 무언가를 찾았다는 의미다. 




그런데 그 내용을 그 당사자에게 
아무리 요구한다고 해도 
하려고 하는 경우가 없고 
그 내용은 자발적으로 자신이 알아서 해야 
그 의미가 있는 것이기에 


그 시나리오를 다 완성한 다음 
그 가운데 
시태희 박사가 
자신이 자신의 생활에서 직접 
당장 할 수 있는 것을 하나하나 하기로 했다는 점이다. 


이 부분이 이 내용의 핵심이라고 할 수 있다. 


이것이 길고 긴 쓸데없는 노력을 
가장 짧고 빠르게 단축시키는 방안이라고 
여기서 제시하는 내용이다. 


앞과 같은 노스핀 국가의 
최고인물들을 놓고 
그 상태가 되어도 
지금 현재에서도 세계가 알 필요도 없다고 여기고 
100 년이 지나도 곧 잊혀진다고 보는 것이 
상식인데 


그러나 그 상태에서 외관상 
별 변화가 없지만, 
무언가의 실질 내용이 달라지면 
그것이 완전히 달라지게 되는가를 놓고 


그것을 찾아 보니 


당시 아무것도 없다고 할 시태희 박사마저도 
매일 열심히 할 수 있는 것이 
무량하게 찾아졌다는 의미다. 


그래서 거기에 핵심을 두고 
현실에 임하면 
곧바로 


지옥 아귀 축생세계로 고속으로 
진입해 들어가는 열차에서 
곧바로 내려서 


상태가 변화가 된다는 점을 여기서 제시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런 상태에서 
참!의 상태에서 


현실의 소원 성취와 
수행을 동시에 진행하는 가운데 


현실의 어느 부분에 
생사 고통을 벗어나는 탈출구가 있는가를 
살피는 것이 그 다음 문제라고 본다. 




원래 이론상 삼삼하지! 이 부분은 
수행과 관련해 삼자로 시작되는 
중요한 수행항목이 
상당히 많은 가운데 


그 가운데 해야 할 바는 열심히 해야 '하'고 
하지 않고 멈추고 끊고 중지할 부분을 잘 중'지'해야 한다는 의미에서 


하지~ 이 말을 덧붙인 것이다. 


여기가 사실은 수행에 진입한 다음 
처음 생사를 벗어나 임하는 상태가 되는 
부분이기도 한 것이다. 




간단히 말하면 이 내용 가운데 
공 해탈문, 무상 해탈문, 무원무작 해탈문의 
삼삼매 삼해탈문의 내용이 제시되는데 


이 부분이 
지금까지 살핀 유무 논의의 효용과 
바로 직결되는 부분이기도 하다. 


이 문들이 각 영역에서 
해당 주체를 생사를 벗어나 청정한 니르바나로 
건너가게 하는 비상탈출구이기도 한 것이다. 


이름 자체가 해탈문이라고 되어 있는 것도 
그런 의미인 것이다. 


생사고통을 받게 하는 전도망상 번뇌에 묶여서 
사역을 당하고 있는 상태에서 
그 묶임을 풀고 벗어나게 하는[해 탈 ] 
출입구라는 의미를 갖는 것이다. 


그것이 3 종류가 제시되고 있는 것이다. 






이미 유무 논의에서 
실재 영역에서 - 무소유 불가득 공한 사정을 살폈는데 => 이것이 곧 공해탈문의 의미이고 


감각현실 영역에서 - 자신이 일정한 부분을 나누고 묶은 가운데 
그것을 자신이나 어떤 a 라고 보면서 대하는 상황에 있는데 
그것은 하나같이 실상도 아니고 
또 여기에 자신이 생각하는 그런 분별 내용은 얻을 수 없음을 깨닫는 가운데 
그런 상에 머물지 않고 상을 취하지 않는다는 내용을 살폈는데 


=> 이것이 곧 무상 해탈문의 의미이기도 하고 




분별 영역에서는 - 다양한 분별을 하는 가운데 
그 가운데 무언가 좋다고 보는 것을 놓고 
만일 그런 것이 있다면 좋겠는데 하면서 
쓸데없는 희망을 일으켜 추구하는 활동을 하게 되는데 
이런 분별에는 그 자체에 그에 해당한 감각현실과 같은 자상도 없고 
또 다른 영역에서 그에 해당한 내용도 얻을 수 없음을 
이해하고 


결국 약간의 자신의 당장의 좋음을 얻으려고 그런 행위를 하면 
그런 생각과 말과 행동이 업의 장애를 만들어서 
그로 인해 자신과 다른 생명이 함께 생사고통을 받아나가게 된다는 
사정을 깨닫고 
이런 것을 제거해야 한다는 내용이 => 곧 무원무작 해탈문의 의미이기도 한 것이다. 




이것이 골고루 각 영역에 배당되어있는데 
총체적으로 중생이 일반적으로 
집착을 갖는 내용이 
'실답지 않고 따라서 집착을 가질 것이 못된다'는 측면을 잘 파악해서 
망상분별과 집착을 제거하는데 핵심이 있는 것이다. 




그런데 이것은 
수행자가 수행을 함에 있어서 
어떤 요소가 필요한가 하는 측면에서는 
다음과 관련된다고 보게 된다. 


법화경 법사품 제 10 에 보면 
수행자는 
여래의 방에 들어가 
여래의 옷을 입고 
여래의 자리에 앉아서 
중생을 제도하는 수행을 해야 한다고 제시되고 있다. 


그런데 무엇이 
여래의 방이고 
여래의 옷이고 
여래의 자리인가는 
바로 위 유무 논의에서 제시한 내용과 
바로바로 직결되는 내용들인 것이다. 


결국 위에서 살핀 삼해탈문의 내용이 
또 위부분과 바로 바로 연관이 되는 것이다. 


내용을 살피면 


여래의 방이란, 수행자가 갖는 대자비를 의미하는데 
이것은 앞에서 무원무작삼매 수행을 통해 
망상집착에 바탕하고 쓸데없이 생사고통을 겪게 하는 
그런 희망을 제거한 자리에 


대자비를 바탕으로 중생을 생사고통에서 제도하고자 하는 
서원을 채워 넣어 
수행자가 중생과 같이 생사현실에 임한다는 
내용이 들어가는 것이다. 


유마힐소설경에서 
수행자가 병이 걸리는 것은 
중생이 생사에 들어 병에 걸리기에 
그처럼 수행자도 중생제도를 위한 자비심으로 
생사에 들어가 병에 걸리는 것이라고 
사정을 밝히는 것과 그 사정이 같은 것이다. 


간단히 위 관계를 말하면 
쓸데없는 생사고통을 받게 하는 희망을 제거하는 무원무작삼매 = 자비를 바탕으로 한 사홍서원의 성취 


이렇게 된다는 의미다. 


 
그리고 수행자가 입는 여래의 옷이란 
안인, 즉 인욕을 의미한다. 


인욕이란 금강경에서 보듯 
현실에서 겪게 되는 고통을 평안하게 받아들이고 
참는 수행인데 
고통이 처음부터 없고 평안해서 평안한 경우나 
고통이 있는데 의식을 잃거나 
혼자 다른 최면에 들어 고통을 느끼지 않는 상태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고통을 느끼고 그 사정을 이해하지만, 
수행자가 무엇을 수행을 해서 
그렇게 평안하게 참는 수행을 원만히 성취할 수 있다고 하는가는 
위에서 제시한 무상삼매와 직결된다고 보는 것이다 


그것은 금강경에서 바로 그런 상황에서 
수행자가 아상, 인상, 중생상, 수자상을 갖지 않기에 
그처럼 억울하게 심한 고통을 당하는 상태에서도 
전혀 분노를 일으키지도 않고 평안히 임할 수 있었다고 
제시하는 내용인 것이다. 


그것이 곧 무상삼매의 내용과 관련되고 
이 내용이 현실에서 문제되는 고통인데 
이것을 놓고 
그것은 한편으로 실상도 아니고 
그 감각현실 부분에는 
자신이 생각하는 나라거나 인간이라거나 생명이라거나 목숨 이라는 등 
모든 집착의 근원이 된다고 보고 
어떤 주체가 집착을 가장 심하게 갖게 되는 내용들이 
본래 그 감각현실에서 얻을 수 없는 것임을 잘 관해서 
그런 상태가 된다는 것을 제시하는 것이다. 


이런 경우에 마취제를 복용하거나 최면요법을 
보조로 취해도 도움은 받을 수 있다고 보지만, 
원칙적인 수행은 위와 같은 내용을 통해 
안인을 원만히 성취해야 한다고 제시하는 것이다. 




그 다음 여래의 자리란 
실상의 공함을 의미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는데 


이것이 또 해탈문에서 공 해탈문과 직결되는 내용이라고 할 수 있다. 


결국 현실에서 그런 감각현실도 얻고 
그런 분별도 행하지만, 
본 바탕이 되는 실재에는 
진짜라고 할 내용이 없고 [무아, 무자성, 무소유]
그리고 전혀 내용이 없다고 할 것은 아니지만, 
어떤 내용을 어떤 주체가 끝내 얻을 수 없는 것이고 
현실에서 문제삼는 것도 역시 실재에서는 얻을 수 없음을 
관해서 


바로 이런 공한 상태를 수행자가 
자리로 삼아서 수행에 임해야 한다는 것을 
제시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것이 바로 유무 논의에서 
있고 없음을 살핀 내용과 바로 직결되고 


또 생사를 벗어나는 해탈문과도 직결되고 


그 문에 들어가 청정한 니르바나를 확인하고 
다시 현실에서도 이에 상응한 상태로 여여하게 임하는 가운데 


중생제도와 불국토 장엄 성불을 위해서 
다시 현실에서 수행을 하는 상태에서도 


바로 이 내용들과 관련된 내용을 갖추고 
현실에 임해서 수행을 해야 한다고 제시하는 내용이 된다고 보는 것이다. 


이 각 영역에 유무의 논의가 그런 내용을 제시하는 것이고 
또 그 내용이 해탈문의 내용도 되고 
수행자가 현실에서 수행할 때 갖추어야 할 
여래의 방의 의미를 갖는 자비와 
여래의 옷의 의미를 갖는 안인 인욕의 성취와 
여래의 자리의 의미를 갖는 실상이 공의 내용도 
된다고 제시하는 것이다. 


[...]

참! 예쁘지( f(x)g(y) ) 삼삼하지 아라바나자 나 자바라아 
이런 수행공식을 제시했는데 




f(x)g(y) 는 현실에서 중생이 가장 집착을 갖고 
추구하는 내용을 
수행자가 붙잡고 그것을 해결해주는 것f(x)을 방편으로 해서 
이 상대를 수행에 진입시키는 방안g(y)을 나타낸 것이다. 


이는 상대는 무여열반이나 해탈에 관심이 없고 
자신의 소원에만 초점을 맞추기에 


수행자는 이것도 해결해주는 한편 
이를 방편으로 끝내 생사고통을 상대가 벗어나게 하고 
무량한 복덕과 지혜를 구족하는 상태가 될 수 있도록 
이끌게 하기 위해 이런 방안을 접속시키게 된다는 의미다. 




세상에서 중생이 갖는 희망이 무량하듯 
그래서 이 f(x)는 일일히 나열할 수 없을 정도로 무량하고 
또 그에 상대해 그 내용에 
앞에서 소개한 공 무상 무원무작 해탈문을 접착시켜 
이어 주는 g(y) 의 내용도 함께 무량하다고 할 수 있다. 


결국 이것이 원래는 
한 생명의 소원 성취는 
그 당장 그 생명에게는 좋음을 주지만, 


나 좋고 남 좋고 온 생명이 제한없이 좋고 
지금 좋고 나중 좋고 길게 길게 무한히 좋고 
이 측면도 좋고 저 측면도 좋고 두루두루 온 측면이 좋은 
상태가 아닌 결과를 낳게 한다고 할 때 


앞의 상태를 성취시키면서 
뒤의 부분에서 문제가 발생하는 부분을 제거해서 


결국 뒤의 좋고 좋은 상태가 되게 만드는 방안이라고 
이해할 수 있다. 


그런데 이 방편은 중생의 희망이 무량한 만큼 
무량한데 
그 기본 성격이 방편의 선악무기성 때문에 
반드시 좋은 상태로만 사용된다고 볼 수 없게 된다. 




그래서 결국 이 내용은 
수행자가 다라니와 삼매로 대하고 익히고 
그것이 완성되어도 
다시 다라니와 삼매로 보존해야 할 성격을 
갖는 부분이 된다. 


그것은 방편이란 
전등이나 물과 그 성격이 같은 것이기 때문이다. 


물이 사막에서 목이 마를 때 마시는 경우처럼 
좋은 경우는 좋다고 보지만, 


물고문을 당하는 상황처럼 고통을 주는 상황에선느 
지극히 고통을 주는 내용이 되는 것이 
모든 방편과 수단이 갖는 성격인 것이다. 


그리고 그 내용은 무량하고 방대한 것이기도 하여서 
일일히 나열할 도리도 없는 것이고 
그러나 각 상황에서 
각 생명이 절실히 요구하는 것은 
또 그 자체에 맹모적으로 집착을 하는 가운데 
갈증을 일으키고 갈구하는 경우가 대부분인 것이다. 


이런 사정이 결국 이를 방치하면 
그 생명이 이런 수단으로 
지옥 아귀 축생 세계에 묶여 들어가게 되는 
기본 사정이 되는데 


수행자가 이것을 방편으로 취해 
그런 소원의 발원과 성취노력의 과정과 
성취 결과 각 부분에 


공해탈문 무상해탈문 무원무작 해탈문을 
부착시켜서 


이 각 부분에 진입하게 되면 
이를 통해 그 상대가 이후 
수행에 진입할 수 있게 하는 방안을 
여기서 f(x)g(y) 의 복합함수식으로 표현한 것이다. 


처음 참! 부분에 상대가 초점을 맞추고 
이후 이 과정을 거쳐 
마음과 지혜의 해탈을 얻는 과정에 
진입하는 것을 
참 예쁘지라는 표현에 담아 제시한 것이기도 하다. 




이후 제시되는 아라바자나는 
일체에 언설 명자를 얻을 수 없고 
그 모습과 성품도 얻을 수 없다는 내용을 의미하는 
'나' 라는 내용에서 


최종적으로 
본래 생멸을 얻을 수 없다는 내용을 의미하는 
'아'까지가 그런 관계로 제시되고 


이것이 모든 부처님의 가르침을 
압축해 제시한다는 그런 의미이다. 


즉, 문수보살님의 아라바자나 다라니의 내용과 
그것이 나자바라아의 관계로 제시되었다는 
사정을 그렇게 제시해 여기에 붙인 것이다. 




그래서 수행자가 
스스로 생사 고통을 벗어나고 
또 중생을 제도하는 수행과정은 
이런 관계로 압축해 제시할 수 있다고 보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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