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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고 나쁨과 유무 논의의 효용 본문
sfxx--좋고-나쁨과-유무-논의의-효용.txt.htx
sfxx--좋고-나쁨과-유무-논의의-효용.txt
http://buddhism007.tistory.com/3479
● 이하 글은 단상_조각글 내용을 주제별로 '편집중'인 상태의 글입니다.
현실에서 왜 자신은 자신이 좋아하는 것을
추구하고 낭만적으로 살아갈 뿐인데
왜 계속 자신을 괴롭히려는 이들이 나타나
자신을 괴롭혀서 도망을 가게 만들거나
고통을 받는 상태에 묶여 지내게 만드는가 하고
세상을 이상하게 여기는 경우도 가끔 있다.
그런 가운데
불타는 집에 쇠막대에 꼽힌 상태로 도는 상태를 놓고
유무 논의의 효용을 살피는 중이다.
유무 논의는 원래는 이런 상태에서도
이론상 효용을 갖는다고 제시하는 내용인데
그러나 이 이론을 잘못 이해하는 가운데
이 이론으로 그런 효용을 현실적으로
얻게 되는 경우는 거의 희박하다고 보는 것도 사실이다.
그래서 이와 관련해 유무논의의 효용을 살피는 것이
필요하다고 본다.
유무 논의를 살피는 데 있어서
최면 걸린 상황을 놓고 비유를 하게 되는데
문제는 최면걸린 상태에서는 관객의 입장을 이해하지 못하고
관객의 입장에서는 또 직접 최면 걸린 상황을
얻지 못하는 점이 문제라고 할 수 있다.
그런 상황에서 두 입장이 만나 최면상황에서 보는 내용을 놓고
관객은 자꾸 없음만 강조하게 되고
최면 걸린이는 또 자꾸 있다고만 강조하게 되는
상태가 된다고 할 수 있다.
그래서 이 문제를 해결하려면
이 두 상황을 다 함께 같이 얻어 놓고
이들을 살피는 가운데
어떤 것이 적절한 판단인가를 잘 헤아린 다음
평소 그런 상태에서 잘 행동할 방안을 찾아내
그런 상황에서는 그렇게 잘 행할 수 있도록
미리 충분히 훈련을 하지 못하면
각 개인이 그런 상황에 막상 놓이게 되면
그처럼 뜻과 같이 잘 이뤄지지 못하는 사정도 있음을
주의해야 한다고 본다.
일단 있고 없음의 논의에 들어가기 전에
참고 자료로 두 자료 화면을 살피기로 한다.
뱀을 좋아하는 이가 드물다고 보는데
현실에서 뱀을 보는 것도 그다지 흔하지 않다.
태국 뱀쇼, 짜릿한 전율이 쫘악!(코브라와 복싱을.
https://www.youtube.com/watch?v=53j-XGwHG_w
그리고 현실에서 있고 없음의 문제를 논의하는 성격이
최면 걸린 상황에서 따지는 있고 없음과 비슷하다고 제시하게 되는데
최면 상황도 비교자료로 놓고 보기로 하자.
>>> https://www.youtube.com/watch?v=iLGsyhu5mPY
혁대를 뱀으로 보이게 하는 최면쇼이다.
결국 위는 현실에서 뱀이라고 보는 내용이고
아래는 혁대를 뱀으로 보고 있는 최면 상황인 것이다.
이미 있고 없음의 문제를 따질 때
가능하다면
최면 걸린 이가 최면 상황도 경험하는 가운데
또 한편 관객 입장도 이해하는 그런 상태가 되면
논의가 상당히 편해질 수 있다고 제시했다.
그 반대도 마찬가지다.
관객의 경우도 최면상황에 놓인 이가 얻는 내용을
함께 얻는 가운데 여기서 문제되는
있고 없음을 살피는 것이 도움이 된다고 보는 것이다.
현재 있고 없음을 따지는 논의가
이런 양 측면의 내용을 같이 얻어 놓고
그 의미나 성격을 살펴야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있고 없음의 논의에서
어떤 한 측면만 붙잡고 극단적인 있음이나
극단적인 없음을 주장하고 고집하기 쉬운 것이다.
그리고
현실에서 자신이 지극히 싫어하고
고통을 주는 어떤 내용을 놓고
여기에 있고 없음의 논의가 무슨 의미를 갖는가는
이런 측면에서 접근해서 해결할 문제가 된다.
그리고 이것이 왜 생사 고통을 벗어나는데
중요한 논의인가를 생각해보아야 한다.
그래서 결국 위 자료화면을 놓고
이 문제를 생각해 볼 필요가 있는 것이다.
위 동영상에 나오는 이들은 하나같이 전문가라고 할 것이지만,
자신이 엉겹결에 저 상황에 저렇게 놓였다고 가정하고
이 상황에서 이것을 어떻게 해석하는 것이 좋은가를
여유를 갖고 생각해보는 것이 필요한 것이다.
그리고 사실 그런 상황에서는 그런 여유가 없다는 것을
미리 파악하고
평소에 늘 꾸준히 연습훈련을 해야 할 필요가 있다고 보는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그것이
효용을 발휘하지 못하는 내용이 되기 때문이다.
일단 쉬고 살피자.
만일 자신이 정말 벼랑에 매달려 있거나
불 타는 집에 있어 죽기 직전인데
그 상황에서 그런 내용을 보고 생각도 하게 되는데
그런 상황에서 그것을 모두 없다고 여기고 나아가려고 하면
그것은 사실은 그런 최면 상황에 들려고 하는 것과 같다.
최면 자료화면에서 보듯,
어떠한 없는 것은 있다고 여기게 하고
어떠한 있는 것은 없다고 여기게 하는 것이
곧 최면술사가 하는 역할인 것이다.
그래서 지금 유무 논의의 성격을 이해하는데 도움을 얻고자
최면자료를 비유로 들었지만,
그러나 현실의 생사 고통의 문제를
그런 식으로 해결하면 된다고 제시하려는 것이 아니다.
그래서 비유와 현실의 문제를 혼동하지 말고
처음 현실에서 뱀을 처음 대하는 상황이라고 놓고
이것이 어떻게 최면의 상황과 비유적으로
성격이 같다고 제시하는 것인가를 살피고
또 그런 상태에서 어떤 효용을 여기서
얻을 수 있는가를 살펴야 한다고 보는 것이다.
>>>
간단히 생각하면 이렇다.
최면에 걸려서 혁대를 뱀으로 보고 놀라는 입장에 대해
관객은 그것은 뱀이 아닌데
왜 저렇게 반응하는가.
이런 생각을 하게 될 것이다.
문제는 최면에 걸린 입장에서는
그러나 그것이 뱀이 아닌 것으로는 도저히 생각되지 않고
또 혁대로도 생각이 되지 않는다는 점이다.
그러니 관찰자는
어느 한 입장만 여기서 취하지 말고
이 두 측면의 내용을 함께 놓고
이 문제를 잘 살펴야 한다고 제시하는 것이다.
현재 유무 논의의 성격은 다음과 같다.
현실에서 어떤 감각현실을 얻고
일정 부분이 a 라고 생각하게 될 때
그런 감각현실은 생생하게 얻지만,
그런 관념분별은 마치 최면에 걸려서 판단하는 내용처럼
그 감각현실에서 부터 얻어지지 않고
또한 그 감각현실은 실재의 지위에 있는 내용도 아니고
실재는 그 내용을 얻을 수 없고 [불가득, 공]
또
그에 해당하는 진짜의 내용은 없다[무아, 무아소, 무자성, 인무아, 법무아, 승의무자성, 무소유.]
라는 사실을 제시하는 것이다.
이것이 이 논의가 향하는 결론내용이다.
그래서 이 사실을 올바로 관하고
현실을 대하면
현실 내용이 실답지 않다는 것을 이해하고
그로부터 집착을 갖지 않게 되고
이 바탕에서 '현실에서' 문제되는 상황을
벗어날 '수행 방안'을 잘 실천해서
그런 생사고통을 벗어날 수 있음을
제시하는 것이다.
그런데 위 내용을 전반적으로
혼동하고 이해를 잘 하지 못하는 가운데
정작 이런 바탕에서 행해야 한다고 제시되는 수행을 하지도 않고,
단순히 위 이론 때문에
현실의 생사 고통이 처음부터 문제가 안 된다거나,
또는 자동으로 해결된다는 내용을 제시한 것으로
오해하는 경우가 많다.
또 하나의 문제는
자신이 불타는 집에 갇혀서
쇠막대에 몸이 꽂혀 고통을 당장 생생하게 느끼는 상태에서
위 이론만으로 그 고통을 쉽게 극복하기는
사실상 힘들다는 점이다.
이 상황에서
실재가 불가득 공이라고 제시하면
마치 그런 생사고통이 얻어지지 않는다고 제시하는 것으로
오해하기 쉽다.
그러나 이는 실재가 그렇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고
그래서 현실의 내용이 실답지 않음을 지적하는 것인데
이런 사실이 곧
현실에서 생생하게 얻는 감각현실이나 관념분별이 없다거나,
또는 그런 내용을 현실에서 얻어서는 안 된다거나,
또는 그런 형태로 생사고통을 얻어도 일체 문제가 되지 않는다고 제시한 것으로
혼동하면 곤란한 것이다.
더 나아가
이처럼 실답지 않다고 하지만,
현실에서 생생하게 고통을 얻는 상황에서
그 고통을 해결하기 위해
위와 같은 기본 사실을 관하고
집착을 제거하고
수행을 행하라는 내용을 놓고
그런 노력은 하지 않고
단지 위와 같은 내용이
현실에서 그런 생사고통을 겪을 때
또 다른 최면을 사용하거나 마취제를 사용해서
마치 이를 없는 것처럼 여기며 넘기자고 제시하는 것으로
혼동하는 경우도 있다.
그래서 예를 들어
최면에 걸려서 손가락이 10 개인데
그런 손가락이 없다고 생각하게 되는 상태에 도달해야
그런 고통을 벗어나게 된다고 제시한 것으로
위 내용을 이해하는 경우도 있는 것이다.
이 과정에서 수행과 최면요법 사이에서
혼동을 일으키는 것은
다음 사정 때문이라고 보게 된다.
우선 현실 내용이 실답지 않다는 것을 설명하기 위해
꿈의 비유를 들거나
어떤 현실에서 최면에 걸려서 행하는 판단을 비유로 들게 된다.
● 그런데 여기서 꿈의 비유를 놓고
제시하는 내용을 잘 이해해야 한다고 본다.
잠자며 꿈을 꾼 내용을 놓고
그것이 '실답지 않다'고 제시하는 것은
그런 꿈을 꾸지 않았다거나
꿈 내용을 얻지 못한다고 제시한 것이 아니다.
그런 꿈은 꿈꾸는 상태에서 그렇게 얻은 것이다.
그런데 그 꿈 내용은
현실에는 없는 내용이고
현실에서 얻지 못하는 내용임을 제시하는 것이다.
즉, 꿈에서 꾼 황금은 '꿈에서는 그 내용을 얻고 있다고 보지만'
그 꿈을 꾼 현실의 침대에는 없고 얻을 수 없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그래서 꿈 내용은 그렇게 꿈안에서는 얻고 있다고 할 것이지만,
그러나 그것은 '실답게' 있는 것이 아니라고 제시한 것이다.
그리고 그것이 실답게 있지 않음을 지적한 것은
그것이 실답게 있다고 여겨서
일으키는 부작용을 제거하기 위한 것이지,
꿈이 실답지 않기에 앞으로 꿈을 꾸어서는 안 된다거나,
꿈을 꾸지 못한다거나,
꿈을 꾸어도 꿈 내용은 꿈 안에서도 전혀 없다고
제시하는 것이 아닌 것이다.
또 꿈을 꿀때마다 악몽을 꾼다고 할 때
그 상태에서 또 다른 마취제나 마약을 투여해서
그 문제를 해결하라고 제시하는 것도 아닌 것이다.
그래서 이 꿈의 비유를 잘 살피는 가운데
현실에서 얻는 내용이 꿈과 그 성격이 마찬가지여서
실답지 않다고 지적하면서
유무 문제를 살피는 취지를 잘 이해해야 한다고 본다.
우선 현실이 꿈과 같고
환영과 같이 실답지 않다고 지적하는 것은
현실에서 얻는 내용은
진짜로 있는 것이 아니고
실재에서는 그런 내용을 얻을 수 없는 것임을 지적한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현실에서 그렇게 생생한 내용을 얻지 않았다거나
얻지 못한다는 것을 제시한 것이 아니다.
현실내용은 어떤 주체가 그런 형태로 태어나 삶을 살아가고
그런 가운데 감각기관을 통해 내용을 얻고 분별하는 상태에서
그런 내용을 그처럼 생생하게 얻는 것이다.
그가 그런 형태로 살다가 죽을 때까지는 적어도 그런 상태가
반복하고 지속된다고 볼 수 있는 것이다.
그런데 그렇게 현실에서 생생하게 얻는 감각현실이나 분별내용은
진짜라고 할 형태로 즉, 영원불변하고 고정된 것은 없고,
또 본 바탕이라고 할 실재의 지위에 있는 내용도 아니어서
어떤 주체와 관계하지 않고도 실재하는 내용도 아니고
그런 실재영역에서는 그런 내용을 얻지 못함을 제시하는 것이다.
즉, 현실에서 생생하게 얻는 감각현실이나 분별은
'현실에서는 그런 내용을 각 주체별로 생생하게 얻는다고 보지만,'
그 본바탕이 된다고 할 실재에는
그에 해당하는 진짜라고 할 뼈대(실체)도 없고
그 실재 영역에서는 그런 내용을 얻을 수 없음을
말하는 것이다.
그래서 현실에서 얻는 그 일체는
그렇게 현실에서 생생하게 얻게 되고 그래서 있다고 하지만,
그러나 그것은 '실답게' 있는 것이 아니라고 제시한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그런 현실 내용을 실답지 않다고 지적하는 것은
그런 내용일 뿐인 것을
실답다고 여기고 집착을 갖고 대하고 반응함으로써
그 삶과 그 이후의 삶에 일으키게 되는
부작용을 제거하기 위한 것이지,
현실이 실답지 않기에
현실에서 감각현실을 얻거나 일체 분별을 행하면 안된다거나
또는 그런 감각현실을 얻을 수 없다거나
감각현실이나 분별이 그 영역에서 그런 내용을 생생하게
얻지 못한다고 제시하는 것이 아닌 것이다.
또 매 생마다 원하지 않는 형태로 태어나 삶을 살아간다고 할 때
그 상태에서 매번 최면을 행하거나 마취제나 마약을 취하거나 해서
그 상태만 의식을 갖지 않고 넘겨서 그 문제를 해결하라고
제시한 것이 아닌 것이다.
그래서 꿈이나 최면으로 현실의 실답지 않음을 비유하고
또 현실에서 문제삼는 내용이
본래 무소유 불가득 공함을 제시하는 유무 논의가
어떤 점을 지적하고
어떤 방향으로 이런 현실의 생사문제를 해결해야 한다고
제시하는가에 대해 혼동을
일으키면 곤란하다고 보는 것이다.
일단 현실이 꿈과 같고 환영과 같다고 비유할 때는
꿈 내용이나
환사가 만든 환영이나
최면술사가 최면을 걸어 생각하게 한 내용들이
모두 실답지 않듯,
현실에서 행하는 분별 판단도
이와 같이 망상분별의 성격을 갖는다고 제시하는 것이다.
그리고 여기서
그것이 실답지 않고 망상분별이라고 지적한 것이지
그런 내용을 얻지 못한다고 제시한 것이 아님을 주의해야 한다.
그리고 현실에서 어떤 망상분별을 할 때
그것을 다시 최면이나 꿈으로 도피해
해결해야 한다고 이해해도 또 곤란한 것이다.
현실에서 사람들이 있다고 보는 내용이
그것이 진짜가 아니고
실재에서는 그런 내용을 얻을 수 없고 공함을 관하여
그런 내용이 실답지 않음을 이해하고
집착을 제거하고 수행에 임하라고 제시하면
대부분 이런 내용은 현실에서 일반적으로 행하게 되는 판단과 다른 내용을
제시하는 것이어서,
마치 현실에서 있다고 대부분 보는 내용을
자꾸 그런 내용은 본래 없는 것이라고 제시하므로
이를 놓고
스스로 자꾸 최면을 걸어 그것이 없다라고 여기고
그것을 인식하지 못하는 상태에 들어가라고
제시하는 것처럼 혼동을 일으킬 수도 있다고 본다.
그런 가운데 최면에 빠져
있다는 인식을 하지 못하게 되면
결국 현실에서 있다는 망상분별을 떠난 상태가 되는 것 아닌가
혼동할 수도 있지만,
위 내용은 올바른 판단을 통해
현실에서 행하는 분별이 실답지 않음을 관하고
그에 바탕한 집착을 제거하고
현실을 수행방안을 통해 대하라는 것을 제시한 것이다.
그리고
꿈이나 환영 최면 상태에서 행하는 분별은
현실에서 분별하는 내용과 함께
기본적으로 망상 분별이고 엉터리라고 지적하는 것이다.
여기서 망상분별을
또 다른 망상분별로 해결하라고
제시한 것이 아닌 것이다.
그래서 이 두 내용은 서로
차이가 있다고 보아야 한다.
현실에서 어떤 이가 무언가를 눈을 뜨고 보고
그것이 자신과 자신의 것이라고 여긴다고 할 때
그런 상황에
그에 해당하는 진짜의 나와 나의 것은 없고 [무소유]
실재에서는 그런 내용을 얻을 수 없다는 [불가득] 내용을 제시하는데
그러나 현실에 실답지 않다고 할
그런 감각현실은 또 얻고 있는 것이고
그에 대해 일정한 분별을 행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니
이 두 내용을 다 같이 놓고 살펴보아야 한다.
여기서 무소유 불가득 공을 제시한 것이
현실에서 그런 내용을 생생하게 얻지 못한다거나
그런 생사고통을 현실에서 얻어도 아무 문제가 되지 않는다
이것을 제시한 것이 아닌 것이다.
그런데 앞의 내용을 제시하면
마치 그런 내용을 제시한 것처럼
자꾸 혼동을 하는 것이다.
현실의 생사고통이 본래 없다고 한 것은
진짜가 없고 그 실재를 얻지 못한다는 것을 제시한 것인데
이 내용을 통해
현실에서 각 주체가 생생하게 얻는 생사고통도
그렇게 현실에서 얻지 못한다거나,
또는 그런 내용을 얻더라도
문제되지 않는다고
제시한 것으로 오해를 한다는 의미다.
이 문제를 이렇게 생각해보자.
현실에 앞에 독사가 있다.
그리고 독사가 자신을 물어서
지금 몸이 부어 오르고 있다.
이런 경우 자신이 최면에 들어
이런 것이 없다고 생각만 하면
그로 인해서 이 상태가 치유된다고 볼 수 있는가.
그래서 그 최면이 풀린 후에도
그는 그런 고통을 이후 느끼지 않게 된다고
할 것인가.
그렇지 않은 것이다.
최면술사가 쇼를 위해서
적당히 안전한 최면을 걸어 별 문제가 없다고 보지만,
앞에 벼랑이 있는데 그것이 없다고 여기게 하여
계속 걸어가게 한다고 한다면
최면에 걸려서 없다고 보고 걸었다고 해서
최면상태에서 벼랑으로 떨어져 사고를 당하는 일이
발생하지 않게 되는 것은 아닌 것이다.
한편 이런 최면은
그 최면의 한 측면만 얻고 있는 것이다.
즉, 최면이나 마취에 빠져
어떤 상황을 없다고 보는 상태는
현실에 대한 인식은 결여되고
최면 상태만 얻고 있는 상태인 것이다.
그래서 이는 수행자가
실상이 공함을 관하는 가운데
현실에서 생사고통을 제거하기 위해서
현실을 대하고 수행하는 내용과는
성격이 차이가 있는 것이다.
>>>
수행자가 현실에서 고통을 겪을 때
그것이 실답지 않다는 것을 인식한다는 것은
그런 감각현실과 그에 대한 느낌과
그에 대한 판단을 다 얻지만,
+
그러나
그 내용이 '실답지 않음'을 관하고
집착을 제거하여 그것을 대하고
그 바탕에서 수행방안을 통해
임한다는 의미다.
즉
그런 감각현실에
자신이 생각하는 내용은 본래 얻을 수 없고
자신이 생각하는 내용에도 그런 감각현실의 내용이 없고
그런 감각현실아나 관념분별은
본 바탕의 실재의 지위에 있는 내용도 아니고
실재는 이런 내용을 얻을 수 없어 공한 것이고
진짜라고 할 실체는 없다라는 사실을 판단하는 가운데
+
그러나 자신이 그런 바탕에서
현실에서는
그런 감각현실을 얻고
그런 관념분별을 대한다고
이 상황을 이해한다는 의미다.
그래서 최면이나 꿈의 상황을 놓고
현실에서 얻는 내용들의 성격을 비유해 설명하지만,
최면이나 꿈에서는
그 내용만 얻는 점에서
일단 차이가 있는 것이고,
또 한편
현실이 꿈과 같고 최면과 같다고 하는 것은
그것이 실답지 않음이 같다고 제시하는 것이고
또 한편으로는 현실은 꿈이 아니고 최면이 아님도
함께 제시하는 것이다.
즉 실답지 않다는 점에서는 꿈과 '비슷하지만'
꿈은 '아니다'라고 제시하는 것이다.
그런데 현실이 꿈과 같다고 제시하면
현실을 완전히 꿈처럼 무시해도 된다고 제시하는 내용으로
이것을 이해하기 쉽다.
그런 가운데
그런 것은 본래 얻을 수 없고 공하다라는 사실만 계속 붙잡고
현실을 모두 부정하고 임하면
이로 인해 모든 생사 고통 문제가
해결되는 것으로 오해하기 쉽다.
왜냐하면
그런 내용은 본래 없고 실재는 얻을 수 없다[무소유, 불가득]는 내용을
곧 그런 현실 내용도 얻지 못하고 없다라고 제시한 것으로
혼동을 하고 받아들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무소유 불가득 공이
현실에서 그런 내용을 얻지 못한다고 제시한 것도 아니고
또 그런 자세로는
비록 실답지는 않지만, 현실에서 매 순간 생생하게 받게 되는
생사 고통도 근본적으로 해결하기 힘든 것이다.
즉, 위와 같은 내용은
현실이
집착을 가질만한 실다운 내용이 아니라는 것을
제시하는 것이지,
그런 내용을 얻지 못한다고 제시하는 것이 아니다.
그리고 그처럼 무소유 불가득을 이해하고
현실을 대한다고 해서
현실에서 받는 고통을 극복하는 것도 쉬운 것은 아니다.
현실에서 이런 내용을 관하여 그것이 실답지
않음을 이해하라고 제시하는 것은
그래서 그런 생사고통이 현실에 없다거나
문제되지 않는다고 제시한 것이 아니고
바로 그런 생사고통을 해결하기 위해
위와 같은 사실을 잘 이해한 바탕에서
수행을 잘 행하라고 제시하는 내용인 것이다.
그래서 위 두 입장이 언뜻 보면 비슷해 보이지만,
대단히 큰 차이가 있는데
이것을 서로 혼동하게 되는 경우가 많다고 보는 것이다.
그리고 원래 그런 문제가 없는
실재의 영역에 대해서도 또 혼동을 일으키기도 한다고 본다.
원래 이런 생사고통의 문제가 없고 얻을 수 없는 측면은
수행자가 어떤 수행을 해서 그런 상태가 되는 것이 아니고
본래 사정이 그렇다고 제시하는 것이다.
그래서 이 부분은
현실에서 어떤 수행을 통해 성취해야 하는 목표상태도 아니고
수행자가 어떤 노력으로
그것을 변화시킬 내용도 아닌 것이다.
수행자가 이렇게 이해하던 저렇게 이해하던
이것은 본래 그런 것이고
아무 관계가 없는 것이다.
그래서 수행자가 현실에서 행하는 수행은
이런 내용을 목표로 하는 것이 아닌 것이다.
수행자는 본래 바탕이 이런데
그러나 이상하게 현실에서 얻게 되는 생사고통을
그 바탕이 위와 같다는 사정을 이해하고
현실에서 수행에 임하여
'현실에서' '자신이나 중생이 겪는' '생사고통'을
제거하고 벗어나기 위해서
수행을 하는 것이다.
그래서 수행의 목표점은
'실답지 않지만, 현실에서 겪는' 고통을 해결하는 것이
원래 수행을 행하는 취지이고 목표점인 것이다.
그런데 이 내용을 잘못 이해하고
실재가 본래 청정한 니르바나라는 사실을 놓고
수행자가 마치 어떤 노력을 통해서
이처럼 실재를 그렇게 만들어야 하는 것으로
잘못 여기기 쉽다.
또는
실재에서 생사고통 등을 얻을 수 없기에
현실에서 어떤 내용도 얻지 못한다거나
현실에서 생사고통을 겪는 일도 아예 없다고
제시한 것으로 오해하기도 쉽다.
본래 실재가 그렇다는 것은
현실이 실답지 않지만,
그렇게 생생하게 얻어짐을 부정하는 것이 아니다.
그런데도
실재가 그렇기에
현실의 내용을 다 무시하고
부정하고 방치해도 된다는 식으로 임하게 되면
이는 실재에서의 불가득 공의 측면을 가지고
현실의 내용을 모두 없애는 노력을 하는 것이 된다.
그런 경우 비록 현실에서 겪게 되는 생사 번뇌 문제는
이로 인해 함께 없어지는 것이 되어
문제가 해결되는 것처럼 여기게 되지만,
이는 실답지는 않지만,
그렇게 얻어지는 현실의 내용에서
이룰 수 있는 많은 선하고 좋고 좋은 내용까지
다 함께 없애 버리는 어리석은 행위가 되는 것이고
생사 문제도
극히 일부 문제만 해결하는 상태로 그치기 쉽게 된다.
즉 이는 매가 자신을 쫒아오면
모래에 고개를 박는 꿩처럼
어떤 고통이 밀려오면
그것을 보지 않고 없다고 하여
그것을 회피하는 입장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렇게 하면 매가 자신의 엉덩이를 붙잡고
살을 뜯어 먹는 그런 상황에서도
이론상 자신 혼자 그런 것이 없다고
최면에 들어가면
그것으로부터 받는 고통을 받지 않는다고는 할 수 있다.
그래서 이처럼 무아 무자성 무소유 불가득 공의 내용과
실답지는 않지만, 현실에서 얻는 내용의 관계를
놓고 혼동을 일으키면 곤란하다고 보게 된다.
만일 현실에서 어떤 내용을 얻는데
최면에 들어서 그것을 있다고 인식하지 못하는 상태가 되면
마치 원래 실재의 측면에서 제시하는 내용과
유사하고 상응한 상태가 되는 것으로 혼동할 수도 있다.
왜냐하면 무소유 불가득의 내용은
마치 현실에서 그처럼 어떤 것을 인식하지 못하는 상태를 의미한다고
잘못 이해하기 쉽기 때문이다.
이는 실재가 얻을 수 없다는 측면과
그런 바탕에서 실답지는 않더라도 현실이 그렇게 생생하게 얻어진다는 사정을
서로 혼동하는 것이고
또 최면에 들거나 의식혼절 상태에서 무엇을 분별하지 못하는 상황과
수행을 통해 실재가 그런 상태라는 것을 깨닫고 이해하고
현실에서 집착없이 수행을 행하는 내용을
서로 혼동을 일으키는 잘못이라고 본다.
>>>
지금 제시하는 것은
현실에서 얻는 내용이
'실재의 측면'에서는 그런 내용을 얻을 수 없고
그 '진짜의 내용'은 없다고 제시한 것이고
그런 사정으로
실답지 않지만,
'그런 현실의 내용을' 얻지 못한다고 제시한 것은 아닌 것이다.
그래서 이 부분을 서로 혼동하면
곤란하다고 보는 것이다.
현실에서 그 내용을 아주 생생하게 얻지만,
그러나 앞과 같은 사유로
그것이 실답지 않다고 이해하면
그 부작용을 제거할 수 있다고 제시한 것이지,
실답지 않다고 해서
그런 현실 내용이 전혀 무의미하다거나
그런 현실 내용을 일체 얻을 수 없다거나
더 나아가 그런 현실 내용을
하나라도 얻으면 안 된다고 여기서 제시한 것이 아닌 것이다.
그런데 무소유 불가득 공과 같은 내용을 제시하면
자꾸 그런 혼동을 일으켜서
현실을 대하기 쉬운 것이다.
그래서 현실에서 자신이 감각도 하고
분별도 행하는데
실재가 사정이 그렇기에
현실에서 자신도
이런 내용을 일체 얻지 않아야 하고
분별도 행하지 않아야 한다고 여기거나,
또는 자신이 또 다른 최면을 자신에게 걸어서
그런 분별을 얻더라도
얻지 않은 것과 같은 상태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경우도 있는 것이다.
여기서는 그런 혼동을 일으키면 곤란하고
사정이 그렇지 않다고 제시하는 것이다.
즉 현실에서
그런 감각현실도 얻고
관념분별도 행하는데
다만 그 내용이
앞과 같은 사유로 인해
집착을 가질 실다운 내용이 아님을 관하고
그에 대해 집착을 갖지 않아야 함을 제시한 것이다.
그리고 사정이 그런데
그것을 잘못 이해하면서
자신이 생각하는 내용이
그처럼 실답게 각 영역에 있다고
분별을 행하면 곤란하다고 제시하는 것이다.
즉, 그런 망상 분별은 곤란하지만,
그렇다고 감각하거나 분별하는 것 자체가
문제라고 제시하는 것이 아니다.
그리고 위와 같은 내용은
또 실답지 않지만,
생생하게 얻는 내용이고
그래서 이런 내용을 수행을 통해
또 좋고 좋은 상태로 만들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문제는 그렇게 만드는 과정에 있어서
앞과 같은 집착을 갖고 임하면
그것이 그렇게 되지 못하게 되므로
먼저 이 내용을 잘 관해야 한다고 제시한 것이다.
그래서 본래 사정이 그렇지 않음을
올바로 관하고
중생제도를 위해 수행하는 활동을 할 필요성을 강조한 것이지
현실의 일체 내용을 다 부정해야 한다고
제시한 것이 아닌 것이다.
>>>
그래서 매가 자신을 붙잡고 엉덩이 살을
파먹는 꿩과 같은 상황에서
꿩이 모래에 고개를 파묻고
그 사실을 자신이 관하지 않고 무시함으로써
이것이 해결된다고 보는 것은
수행의 방안을 오해한 입장이라고 해야 한다.
그래서 여기에 대해서는
조금 더 자세한 논의가 필요한 것이다.
예를 들어
금강경에서 가리왕이 수행자를 붙잡아
신체를 절단하는 고문을 행할 때
아상 인상 중생상 수자상을 갖지 않음으로써
안인을 성취했다고 제시되는 내용이
이 상태에서 자신이 다른 최면을 들어서
그런 일이 있다는 것을 인식하지 못하는 상태가 되어서
이것을 극복했다.
이런 내용을 제시하는 것으로 오해하면
곤란한 것이다.
만일 그렇다면 거기에는
무언가 극복해 낸다고 할 고통 자체가
없는 마취 상태와 비슷한 것이다.
평소에 자신이 아무런 고통을 느끼지도 않고
편안한 상태에 있는데
그 상태에서 자신이 무언가를 참는 수행을
잘 성취했다고 말할 수 있는가.
이 상황에는 그처럼 평안히 참는 수행을 할
전제자체가 없는 것이다.
그러니 이것을 서로 혼동하면
곤란하다고 보는 것이다.
있고 없음의 논의가
혼동을 일으키는 측면이 대단히 많기에
이와 관련된 내용을 적었는데
아주 깨끗하게 정리된 것 같지는 않다.
그래서 현실에서 집이 붙타고
자신은 어떻게 하다
쇠막대기에 몸이 꽂힌 상태에서
돌고 있는 상태를
가정이 아니고 현실 상황이라고 놓고
있고 없음의 논의가 여기서
어떤 내용을 제시하는 것인가를
잘 살펴야 한다고 보게 된다.
위와 같은 사례는 상징적으로 극단적인 내용을
제시한 것이지만,
조금 현실적으로 본다면
손이나 다리가 잘라졌다고 놓고 생각해도
마찬가지다.
지금 이 상태에서 실재가 공하다는 것이
이런 현실이 얻어지지 않는다거나
문제가 되지 않는다고 제시한 것으로
오해하면 곤란하다고 제시하는 것이다.
또 이 상태에서 또 다른
망상분별이나 최면에 들어
이런 사실이 없다고 외면하면
그것이 해결된다고 보는 것도 아닌 것이다.
그래서 무소유 불가득 공이라는 사실을 잘 관하고
이에 바탕해 현실에서 행하는 망상분별과 집착을 제거하고
+ 그러나 감각현실과 분별은 행하는 가운데
수행을 잘 실천해 나가야 한다고 제시하는 내용이
이 상황에서 무엇을 의미하는가를
잘 검토해야 한다고 본다.
>>>
극단적인 고통을 받을 때
어떻게 해야 좋은가는 사실 수행방안과 관련되는
문제라고 본다.
그리고 유무 논의는 이런 수행방안을 채택하여
생사고통을 벗어나는데 핵심이 있다고 보게 된다.
그런데 수행방안까지 살피면 너무 글이 길어지는 한편
이전에 왜 그런 상황에서 그런 수행방안이 제시되고
실천되어야 생사고통이 제거되는가는 그간 많이 살폈다고 보고
생략하게 된 것이다.
그리고 극단적인 고통은 사실 그 한 단면만 놓고
문제를 살펴서는 곤란하고
반대로 극단적인 즐거움이나 좋음을 추구하는 방식과
이것이 대단히 밀접하게 관련이 되어 있다고 보게 된다.
현실에서 겪는 극단적인 고통은
마치 밭에 씨를 뿌리고 가을에 열매를 얻는 관계처럼
서로 인과관계로 묶여 있는 것이어서
그 하나만 문제를 삼으면 곤란하다고 본다.
그래서 사실 이것이 그렇게 나타나는 과정을 살피는 것은
곧 이 문제를 해결하는 수행방안을 살피는 것과
같은 의미가 된다고 본다.
여하튼 한편으로 극단적인 고통의 측면을 놓고
유무문제를 살폈으므로
이번에는 그 반대면을 놓고
또 유무문제를 살피기로 한다.
[...]
무엇이 대부분 삶에서
추구하는 좋음인가.
이런 문제는
대부분 어느 내용에 많은 집착을 갖고
또 그로 인해 문제가 발생하는가하는
것과 관련이 된다고 본다.
[...]
어떤 이가 자신이 좋아하는 것을 열심히 했을 뿐인데
왜 자신이 감옥에서 살아가야 하는지
누군가 이유를 묻는다면
좋아하는 것을 그렇게 추구한 것이 문제라고
대부분 쉽게 보는데
그렇다면 좋은 것을 추구하지 말라는 것인가.
이렇게 다시 의문을 제기하기 쉽다.
조금 자세히 제시하면
자신의 당장의 이 측면에서의 좋음을 얻는 일이
자신도 좋고 남도 좋고 온 생명이 차별없고 제한없이 모두 좋고
지금도 좋고 나중도 좋고 오래오래 무한하게 좋고
이 측면도 좋고 저 측면도 좋고 두루두루 모든 측면이 좋은 것이
아닐 때
그렇게 아닌 부분에서 문제가 발생하는 것이지,
좋은 부분이 좋기에 문제라고 답하기는 곤란한 것이다.
그래서 어떤 이가 좋음을 추구하다
고통을 받는 상태에 있다면
위와 같은 부분을 점검해서
그 부분을 개선하는 것이 그 해결방안이라고 일단 제시하게 될 것이다.
그래서 어떤 좋음을 추구할 때 발생하는 문제의 해결방안이란,
그로부터 얻을 수 있는 좋음을 모두 다 얻을 뿐 아니라,
그로 인해 앞과 같이 좋고 좋고 좋음을 충분히 얻어내면서
그러나 그로부터 발생하는 나쁨을 모두 제거하는 방안을
찾아내면 된다고 보게 된다.
구체적으로 그것이 어떤 방안인가는 이후에 논의하게 되겠지만,
여하튼 그 목표점은 위와 같다고 볼 수 있는 것이다.
이미 소원의 성취 방안과 함께
3 계 육도의 세계 여행 방안을 살핀 적이 있는데
이 가운데 지옥 아귀 축생의 세계는
고통과 공포를 지극히 많이 받는
세계로서 이런 상태를 일단 피하는 것이
삶의 목표라고 할 수도 있다.
그런데 여기서
다음 문제를 먼저 살피기로 한다.
자신이 좋아하는 무언가를 대하고 있을 때
그 주체는 그 대상에 집중하게 되기 마련이다.
그런데 나쁜 것을 대할 때는
그 주체는 그 대상에 집중하기 힘들다고 보게 된다.
무언가 불쾌해서 화가 난다고 할 때도
마찬가지다.
화가 나면 일단 자꾸 산란한 상태로
그 분노를 표출시키기 위한 활동을 하는데
그것은 나쁨을 주는 대상을 오래 대하는 것이
그 주체 자신이 좋다고 보지 않기에
그에 집중하지 않으려 하는 경향 때문이라고
사정을 헤아릴 수 있다.
쉽게 예를 들어
tv 를 보는데 보기 싫은 장면이 나온다고 하면
다른 채널로 자꾸 돌리고 싶어하게 되지 않는가.
그런데 자신이 좋아하는 배우나 상품이 나온다면
조금 더 오래 자세히 지켜보고자 하지 않는가.
그래서 좋고 나쁨은 이를 대하는 이의
자세에 조금 차이가 있다고 보게 되는 것이다.
그런데 세계 여행 과정에서
칠각지에서 여행을 떠난다는 내용은
기본적으로 심일경성
즉 마음을 하나의 대상에 집중시키는 상태를
가장 기본적인 전제로 한다고 할 수 있다.
수행자가 정려수행을 하면
곧바로 색계의 하늘의 세계를 여행하는 상태가 되는데
색계나 무색계에서는 분노와 관련된 현상이 없다고 제시되는 사정은
이런 사정 때문이라고 보게 된다.
마음의 집중이 되는 상태는,
기본적으로 어떤 이가
싫은 것을 대해서 분노를 일으키는 상황과는
특성상 거리가 조금 멀다고 보는 것이다.
날씨가 더울 때
공포특집을 놓고 연구하는 것도 좋지만,
대부분 좋아한다고 보는 내용을 하나 놓고
이에 집중하면서
또 소원의 성취나
세계의 구조를 살피는 것도
하나의 좋은 연구방안이 된다고 본다.
[...]
지극히 고통스런 상태를 놓고 유무 논의를 살폈는데
잘못 생각하면 수행과 관련해
고통은 무조건 참아야 한다 이런 방안을
제시하는 것으로 오해하기 쉽다.
이렇게 이해하면 불교의 가르침을 어떤 고행의 수행과정으로
오해하는 내용이 되기 쉽다.
결국 각 경우에 어떻게 하는 것이 올바른 수행인가의 문제는
반야 지혜에 의해 그것을 판단해서 행해야 한다고 보는데
그 기준도 결국 앞에 제시한 내용과
크게 다르지 않다고 본다.
의자에 앉는데 아래에 유리나 못이 있다고 할 때
그렇게 앉으면 불편하지 않은가.
그런데 앞에 내용을 잘못 이해하면
어떤 경우도 그런 것은 본래 없는 것이니
그냥 모두 참고 받아들여야 하는 것으로 이해하면
그 경우에도 그렇게 해야 한다고 볼 것이다.
그러나 사정이 그렇지는 않은 것이다.
다만 표준적으로 말하면
고통은 안인 수행으로 해결한다고 볼 수 있는데
이런 수행의 기본 바탕으로서
지금 살피는 유무 논의가 잘 정리되어야 한다고 보는 것이다.
그런데 고통의 상황을 해결하려면
사실은 이것을 독립적으로 살피지 말고
이 고통이 발생하게 된 원인으로서
좋음을 추구하는 방식도 함께 살펴야 한다고 본다.
과거에 소개한 내용이지만,
한국의 민요에
아리아리랑 쓰리쓰리랑 아라리가 낳네
이런 노래가 전해지는데
이것이 바로 이 상황을 잘 제시하고 있다고
시감상하게 되는 것이다.
아리고 쓰린 고통은
무엇이 만들어 냈는가에 대해
즐겁고 신이 나서
아라리요를 외치던 그 당시
그렇게 행한 일들이
그런 고통을 만들어 낸 것이라고
그 사정을 제시하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이 두 문제가 늘 같이 따라다니는 문제인데
마치 씨는 씨고
열매는 열매여서
별개의 문제인 것처럼 이것을 대하면
이 문제의 해결이 원만하게 되지 않는다고 보는 것이다.
항상 넓고 길고 깊게 관찰해서
문제해결방안을 찾아야
앞에서 살핀 좋고 좋고 좋음을 성취할 수 있는 것이고
좁고 짧고 얕게 관찰해서
문제해결방안을 찾으면
단순히 지금 당장 자신에게 이 측면에서 좋다고
보는 것만 하나 얻고
이것을 징검다리 삼아
자신을 포함하여 아주 많은 생명에게
오랜 기간
두루두루 나쁨을 받는 상태에 묶이게 된다는 것을
주의해야 한다고 본다.
그런데 왜 이 함정에 대부분 걸려드는가는
위 문제가 사실은 간단하게 파악할 수 있는 성격의 문제가
본래 아닐 뿐 아니라,
매 순간 자신이 당장 느끼는 좋음은
그 주체의 초점을 모두 빼앗아가서
일종의 최면상태처럼 되어
진리나 가치 판단의 눈을 가리게 하는 현상을
일으키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자신의 손이 잘라지면 아주 분명하게 고통을 느끼는데
문어의 다리를 난도질 하더라도
자신은 그것이 왜 문제인지 잘 모르겠다는
경우가 대부분인 것도
이와 관련되는 현상이다.
다른 생명이 받고
나중에 받고
지금 보지 못하는 다른 측면에 들어 있는 나쁨이나 좋음은
지금 당장 자신에게는 파악되지 않는다는
것이 이 판단에 심각한 장애요소가 되는 것이기도 하다.
씨를 뿌려야 열매가 맺는데
이 관계 하나를 알아내는 것도
1 년은 관찰을 면밀히 해야
처음 알아내게 된다고 보는 것이 당연하지 않은가.
그런데 대부분 그런 자세를
갖고 이 문제를 살피기 힘들고
또 힘들어 하는 것이다.
내일 일은 어떻게 아는가.
이러면서 지금 당장 하고 싶은대로 한 이들이
대부분 지옥 아귀 축생에 가득한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닌 것이다.
그래서 이 문제를 잘 살펴야 하고
시간이 급하면
그 결론으로 간단히 제시된
수행방안을 그대로 실천하면 된다고 보는 것이다.
다만
유무 논의는 그런 차원이 아니고
관련된 내용에 대해 끝장 논의를 한다는 입장에서
임하는 것이므로 조금 성격이 다른 것이다.
유무 논의와 관련해서는
우선 다음을 주의해야 한다고 본다.
처음 눈을 떠서 일정한 모습[상相]을 볼 때
그 가운데 일부를 놓고 그것이 꽃이라고 생각하거나
자신이라고 생각하거나, 또는 다른 남이라고 생각하게 된다. [상想]
그래서 어떤 이는 그런 상황에서
꽃이나 자신이나 남이 그렇게 있다고
망상분별을 시작하는 것이다.
그 상태에 대해 그것이 꽃이나 자신이라고 생각하는 것도 망상분별인데
그런데 이것이 문제라고 해서
그것이 바위라거나 떡이라고 최면에 들어서 생각하면 된다고 보겠는가.
그것은 더 심한 것이다.
그런데 이것이 망상분별이라고 할 때
그것이 꽃이 아니다 자신이 아니다라고 생각하는 것도
사실은 문제가 있는 것이다.
이 주제는 금강경에서 많이 다루고 있다고 본다.
그래서 중생제도를 하고 보시를 행하는 수행을 하더라도
상을 갖지 말고
상을 취하지 말고
상에 머물지 말고
그런 수행을 해야 한다는 등의 내용이
반복해서 제시되는 것이다.
그래서 상을 갖거나 취하거나 머문다는 것이
무엇이고
왜 그런 자세를 갖으면 곤란하다고 하는 것인가 하는 문제를
유무 논의와 관련해 잘 이해해야 한다고 본다.
물론 엄밀하게 말하면
무엇 A 가 있다고 하는 것은
진짜라고 할 실체가 있다라는 의미이거나
실재에도 그런 a 가 있고 얻을 수 있다라는 의미이거나
할 수도 있다.
그런데 사실은
금강경에서 말하는 아상 인상 중생상 수자상 등은
어떤 특별히 철학적인 사색을 깊이 하는 이들이
주로 생각하는 그런 문제만 놓고
이 망상분별의 문제를 지적하는 것이 아니다.
그렇다면 그런 현상은
아주 특이하게
철학적 사색을 전문으로 하는 이들만
그런 망상분별을 일으키는 것이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왜냐하면 현실의 일상생활에서
어떤 것이 자신이라거나 남이라고 생각할 때
그 실재나 실체를 놓고 그렇게 판단한다는 경우는
대단히 드문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부처님은 그렇게 실재나 실체를 놓고
문제삼는 특별한 경우만 문제라고 제시한 것이 아니고
일상생활에서 사람들이
늘 행하는 그런 분별이 바로 망상분별이라고
지적한 것이기도 한 것이다.
즉 눈을 떠서 앞에 자신의 손도 보이고
앞에 걸어가는 영희도 보인다고 할 때
그렇게 그 부분들이 자신이나 자신의 몸이라고 여기고
앞에 걸어가는 그 부분이 영희라고 생각하고
대하는 이 내용 역시
바로 망상분별이라고 지적하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이렇게 임하면
수행을 올바로 행하는 것이 아니고
망상분별과 집착에서 벗어나올 수 없고
그래서 생사고통도 벗어나올 수 없다고
제시하는 것이다.
그러니 이 부분을
유무 논의와 관련해서
모두 잘 정리해야 한다고 보는 것이다.
설명을 위해서 다시 자료사진을 이용해보기로 하자.
눈을 떠서 볼 때
여기에 아리따운 한 아가씨가 '있다' 고
대부분 여기는 것이다.
일상생활에서 대부분 행하는 망상분별은
이런 것이다.
이 상황에서 어떤 이가
이 아가씨의 실재도 그렇다.
이 아가씨는 영원불변한 본체로서 진짜가 있다.
이런 식으로 평소 생각한다면
물론 이것도 심한 망상분별의 하나가 되지만,
그러나 현실 일상생활에서
이런 모습을 보고 그런 내용을 생각하는 경우는
대단히 드문 것이다.
그러나 여하튼 위 내용들은
다 망상분별인 것인 점은 다르지 않지만,
부처님이 전도망상 증상을 문제삼고
상을 취하지 말라고 제시할 때는
일상생활에서 대부분 행하는 형태의
그런 망상분별을 문제삼는 것으로 이해해야 하는 것이다.
즉 저런 모습을 보고
저 부분이 아름다운 아가씨 ○○다
이렇게 판단할 때
바로 이 부분이 문제라고 지적한 것이다.
그런데 이것이 문제라고 해서
다시 이 상태에서 그런 감각이나
분별 자체를 없애거나
또는 최면에 들어서
거꾸로 저런 부분에 아가씨가 '없다'
또는 저 부분은 '고양이다'
이렇게 엉뚱하게 분별하면
앞의 증상이 개선된 것으로 보는가하면
더 악화된 것으로 보아야 한다고
앞 조각글에서 그 사정을 제시한 것이다 .
앞 내용이 문제라고 지적하고
그런 것이 없고
얻을 수 없다는 무소유 불가득 공을 제시하면
그렇게 생각하는 것이
적절한 것이 아닌가. 이렇게
생각하게 되기에
그 혼동을 정리하기 위해서
반복해 살핀 것이다.
아가씨가 아름다워서 좋다고 보는 경우도 문제지만,
저 아가씨가 장차 자신을
쇠막대기에 꽂아 불에 돌리려고 준비중인 경우도
또 문제인 것인데
여하튼 공통적으로 여기에
유무 판단을 잘 해서
정리할 부분이 있다고
제시하는 것이다.
[...]
유무 논의의 효용을 살피기 전에
이 유무 논의가 얻어낼 결론 부분에 집중해 보기로 하자
눈을 떠서 보니
앞에 이런 모습이 보인다고 하자.
그래서 저 가운데 일정한 부분을 놓고
저 부분은 아리따운 아가씨다
이렇게 생각하고
또 여기서 보이지는 않지만, 이에 준해
자신의 손과 발 이런 부분이 보이면
이는 자신이라고 평소 생각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 순간에서 눈을 감으면 어떻게 되는가.
일상생활에서 눈을 떠서 모습을 보는 만큼
눈을 감아서 보지 못하는 경우도 빈번하다.
그래서 자신이 눈을 뜨거나 감거나 관계없이
즉 자신의 주관과 관계없이
있다고 할 실재는 과연 무엇인가가
또 어떤 것의 본 정체를 살필 때 논의가 되는 것이다.
쉽게 생각해서
자신이 눈을 떠 저런 모습을 보다가
눈을 감으면 저런 모습을 보지 못하는데
그렇다고 해서 저런 아리따운 아가씨가
없어지게 되었다고 할 것인가.
이런 의문을 갖게 되는 것이다.
그러니 만일 자신이 눈을 감아도
자신이 본 모습을 얻게 한 그 무언가가
있다고 할 것인가.
그리고 그런 실재가 있다면
그것은 어떤 내용인가.
이런 것이 문제가 되는 것이다.
자신의 감관이 관계할 때만 얻는 내용은
사실은 마치 자신이 잠잘 때 그 조건에서
꿈을 꾸어 얻는 내용과 성격이 같다고 보는 것이다.
그 조건에서는 생생하게 그런 꿈을 꾸지만,
그 조건이 사라지면 얻지 못하고
현실에서도 그 내용을 얻지 못하는 것이고
그래서 꿈을 실답지 않다고 보는 것인데
현실에서 얻는 내용도 그 성격이 그와
같다고 일단 보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또 반대로 어떤 주관과 관계없이
그대로 실재한다고 할 내용이 무언가를
본 정체를 확인하는 가운데
문제삼게 된다는 의미다.
이런 문제의식 자체를 갖는 것이
현실의 일상생활에서 그렇게 많은 것은 아니라고
보지만,
여하튼 무언가의 본 정체를 깊게 확인하려고 할 때는
당연히 이런 실재의 존부나 그 내용이
문제가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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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하나 문제가 있다.
꿈이 실답지 않다고 보는 것은
꿈을 꿈꾸는 상황에서 그렇게 생생하게 얻지 못해서
실답지 않다고 하는 것이 아니다.
꿈은 꿈꿀 때는 생생하다고 할 것이지만,
그런 조건 그 상황에서만 그렇게 내용을 얻고
또 그 내용에서 일반적으로 기대하는 다른 성품도
얻지 못하기에
그런 측면에서 그것은 실답지 않다고 하고
진짜가 아니라고 보게 되는 것이다.
예를 들어 저 사진이 진짜 사람인가 누가 물으면
사람 모습처럼 보이기는 하는데
걸어다니지도 못하고
말도 못하고
이렇기 때문에 저것은 진짜 사람은 아니라고
대부분 판단하게 되지 않는가.
그래서 어떤 내용을 생생하게 얻지만,
그것이 진짜인가.
또는 그에 해당한 진짜가 따로 있는가 등은
이런 문제의식에서 제기하게 되는
논의인 것이다.
그러니 앞에서 꿈을 놓고 그것이 실답지 않고
진짜가 아닌 내용이라고 보게 한 특성을
모두 제거하고 그 반대의 내용을
갖춘 내용을 진짜의 내용으로 찾는 것이다.
그래서 어떤 것의 진짜를 찾을 때는
꿈과 같은 특성을 갖지 않고
그 내용이 영원불변하고 고정된 성품을 가진 것을
진짜로 찾는 것이다.
물론 이 논의의 결론은 그런 것은 없고
그런 것이 있다면
현실에서 얻는 일체의 내용을 얻을 수 없다고
결론으로 제시하게 되는 것이다.
그런 진짜가 없으니
현실에서 얻는 내용도 그에 상대한
가짜라고 할 것이 아니지 않는가
이렇게 생각하는 입장도 있을 수 있지만,
지금 진짜를 찾는 문제는
꿈과 달리 그런 성품을 갖는 것이 있는가의 문제를
살피는 것이다.
그런 것이 없다는 결론으로 인해서
현실에서 얻는 내용들이
그런 성품을 갖게 된다고 보게 되는 것은 아니다.
그래서 어떤 것의 정체를 살필 때는
이런 여러 측면의 논의가 함께
유무 논의의 내용으로 다루어지는 사정이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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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내용을 논의하는 취지를 이해하지 못하면
왜 이런 내용을 문제삼는가도 이해하지 못하고
왜 현실이 실답지 않다고 하고
따라서 집착을 갖고 대하지 말라고 제시하는가도
이해하기 힘들게 된다.
그런데 현실 일상생활에서 실재나 실체의 존부의 문제는
그렇게 많이 문제삼는 것은 아닌 것이다.
시장에 가서 고등어를 하나 사는 아주머니가
이 고등어가 실재에도 얻어지는 것인가.
또는 영원불변한 실체를 갖는 진짜 고등어가
그 안에 있는 것인가.
이런 것을 문제삼으면서
고등어를 구매하는 것은 아니라는 의미다.
그 보다는 눈을 떠서 보니
고등어처럼도 보이고 꽁치처럼도 보이는데
고등어가 맞는가.
동해에서 잡았다고 해도
일본에서 잡은 고등어인가.
한국에서 잡은 고등어인가.
이런 것을 주 초점으로 놓고 문제삼는 것이다.
그런데 또 한편
현실 일상생활 가운데
많이 행하는 바로 이런 판단 부분에서
자신이 눈을 떠 어떤 모습을 얻고
그 일정 부분을 고등어라고 판단하는 것부터가
망상분별이라고 또 지적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런 판단이 망상분별이라는 것은
여기서 그런 감각현실을 얻는다거나
또 그런 관념분별을 일으킨 것 자체가 문제라고
지적하는 것이 아니다.
바로 위 부분을 혼동하기에
이전 조각글에서 이 내용을 반복해 제시한 것이기도 하다.
어떤 부분을 놓고
고등어라고 생각할 때
그런 내용이 망상분별이고
그런 내용은 실재가 아니고
그에 해당한 진짜는 없고
그 실재는 얻을 수 없어 공하다고
무소유 불가득인 사정을 제시하고
따라서 그렇게 판단하는 내용은
실답지 않은 내용이라고 지적하게 되면
바로 이 내용을 가지고
그렇게 얻은 감각현실이나 분별도 일체 없다거나,
또는 그런 감각현실이나 분별을 일으키면 안 된다거나
할 수 없다거나 등등으로
혼동을 하는 경우가 종종 있기에
그것을 지적한 것이다.
더 나아가 그런 분별이 망상분별이라고 지적하면
이제 그런 것은 없다라는 새로운 망상분별을 일으키거나,
또는 그런 감각과 분별을 행할 수 없도록
마취제나 약을 투여해 지내야 한다거나
최면에 들어 지내야 한다는 등으로 생각한다면
더더욱 문제라고 지적한 것이다.
경전에서 망상분별을 행하지 말라는 의미에서
분별을 행하지 말라고 제시하는 내용을
그대로 받아들이면
어느 약국에 가서 의식을 마비시키는
마취제나 마약을 구해
투여해야 하는 것이 아닌가라고 잘못 오해해
생각하게 되는 경우도 있는 것이다.
>>>
여하튼 그런 감각현실을 얻고
그런 분별을 일으킨다고 할 때
그 자체는 실답지 않더라도
그것이 현실의 내용인데
여기에서 무엇이 문제라고 하는가하면
그 감각현실을 얻고
그 일정부분에 그런 관념분별이 있다고
분별을 일으키고
집착을 갖고 대하면
그 부분부터가 문제라고 지적하는 것이다.
사실이 그렇지 않고
그렇게 보는 것 자체가 대단히
엉터리 판단을 행한 것이기에
그런 것이기도 하고
또 바로 그런 분별 때문에
사실은 자신이 아닌데
그것을 자신으로 보는 가운데
비유하면 단지 신발을 묶어 절벽으로 끌고 내려가는데
그 신발을 자신으로 보고 집착하는 이가
그 신발에 접착되어 함께 절벽으로 끌려가고
또 그에 바탕해서
신발을 누가 발로 차거나 하면
그와 시비를 일으키고 다투고 하면서
생사고통에 그대로 노출된다는 점이
바로 이 망상분별의 부작용인 것이다.
한마디로 생사고통은
이런 망상분별에 바탕해서
나타나는 현상인 것이다.
그러니 이것을 시정하라고 한 것이고
감각현실이나 분별 자체는
본래 그런 문제가 있지도 않음을 제시하는 한편
그 자체만으로는 문제가 아니라고 보는 것이기도 하다.
더 나아가 앞에서 살핀 실재에 관한 내용도
비슷한 혼동을 일으키기 쉽다고 할 수 있다.
즉, 이 실재 영역은
어떤 이가 어떤 노력을 한다고 해서
그것을 얻을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없는 실체를 새로 만들어 낼 수 있는 것도
아닌 것이다.
그것은 그렇게 이해하던 하지 않던
본래 실재가 그렇다고 제시하는 것이고
그런 사정으로
본래의 실재는
현실에서 문제삼는 일체 생사 고통을 얻을 수 없는 것이고
따라서 청정한 니르바나의 상태라고 제시하는 것이다.
그것은 어떤 이가 특별히 어떤 노력을 해서
비로소 그렇게 된다는 것이 아니고
본래 그렇다고 제시하는 것이다.
그래서 여기는 문제가 아닌 것이다 .
문제는 본 사정이 그런데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망상분별을 일으켜
현실에서 각종 생사고통을 겪어 나가는
현실 상황이 문제인 것이다 .
그리고 바로 이 현실상황의 문제를 해결하는데 있어서
본 바탕은 그렇지 않다는 것을 잘 관하고
한편 현실에서 행하는 자신의 분별에서
일정 부분이 엉터리로 전개되는 부분이 있으므로
그것을 잘 시정해서
자신이나 자신의 것의 정체에 대해 올바로 관하고
또 그것들이 위와 같은 사정으로
집착을 갖고 대할 만한 실다운 것이 아니라는 것을 잘 이해해서
그에 대한 집착을 제거하고
그리고 그렇게 현실에서 얻게 되는
감각현실이나 관념분별의 내용을
앞에서 살핀 것처럼
좋고 좋고 좋은 형태가 나타날 수 있도록
매 상황마다
망상분별과 집착에 바탕해서 행하는 방식을 중지하고
이 내용을 수행의 방식을 통해
대체해서 행할 때
그런 결과가 얻어지게 된다고
제시하는 내용이 되는 것이다.
>>>
그런데 일단
현실에서 자신이나 남으로 보는 내용이
왜 엉터리라고 하는가.
우선 이와 관련하여
이미 연구실에서 어느 순간 행방불명된
한 인턴연구원의 행방불명 사건 수사 내용을
보고한 적이 있다.
이 아이가 이 사진을 찍을 당시
이 아이도 현재 대부분 사람들이 생각하듯
자신의 정체를 비슷한 방식으로 확인했을 것이다.
그래서 저 사진을 찍을 당시
그 인턴연구원이 저런 모습을 자신이라고
생각했다고 하자.
그것은 지금 어떤 이가 자신의 눈으로 자신을 보거나
또는 거울을 통해서 보는 가운데
일정한 내용을 자신이라고 여기는 상황과
마찬가지다.
그래서 저 당시 저런 모습을 어떤 아이가
자신이라고 생각했다면
여하튼 저 아이는 지금 이 순간은 없어져 버린 것이다.
본인이 이 사실을 어느 순간 확인하고
행방불명 수사를 시작한 후
사건이 미궁에 빠진 채 해결되지 않고 있는데
그 사정이 이런 것이다
저 아이의 장례식을 치룬 적도 없는데
저 아이가 어느 순간 사라져서
지금 찾아 볼 수 없는 것이 확실한데
그 이후 어떤 다른 인턴연구원이
자꾸 저 사진은 자신의 사진이라고 주장하고
나서는 것이다.
그래서 두 내용을 놓고
면밀히 검토해 보는데
공통점이 거의 없는 것이다.
일부의 공통점이 있다고 할 수도 있는데
그런 공통점으로 어떤 인턴연구원이
저 아이라고 한다면
세상에서 저 아이가 아닌 이를 찾기가
또 거꾸로 힘들어지는 것이다.
그리고 그런 공통점만으로
행방불명된 아이를 지금 찾는다면
본인이 저 아이라고 해도
사정이 마찬가지가 되는 것이다.
[...]
대충 보면 어떤 아이나 다 비슷하기도 한 것이어서
어떤 한 어머니가
군대간 아들을 해당 부대에 가서
여러 군인들의 손이나 다리나 목소리만 듣고
아들을 찾아내라고 할 때
당혹감을 느끼게 되는 것처럼
사실 비슷하다면 다 비슷하고
다르다면 다 달라서
정신이나 육체 그 어떤 면도 같은 부분을
하나도 찾아보기 힘든 것도 사실이다.
여하튼 지금 그런 가운데
자신이 자신이라고 보는 부분을
자신이라고 생각한다면
대충 살아갈 때는 별 문제가 없다고 누구나 여기겠지만,
유무 논의의 끝장 논의에 들어갈 때는
이것들이 하나같이 다 문제가 되는 것이다.
그리고 평소 자신을 이런 방식으로 파악할 때는
남도 비슷하게 그처럼 망상분별을 바탕으로
구분해 판단하게 되는 것이다.
현실에서 망상분별 편집증 상태의 중생들이
서로 얽혀서 살아가는 상황은 바로 이런 상황인 것이다.
그래서 이에 대해 사실을 올바로 관하고
엉터리 판단을
올바로 수정해야 한다고 기본적으로 제시하는 것이다.
일단, 눈을 떠서 자신의 마음에 얻는 내용은
하나의 단일한 색으로 된 백지는 아니지만,
그 전체가 다 하나의 감각현실의 지위를 갖는 것이다.
그런데 묘하게
그 감각현실 하나를 놓고
각 부분을 이렇게 나누고 저렇게 묶으면서
이 부분은 자신이고
다른 부분은 남이고
또 다른 부분은 바위고 물이고 나무라는 식으로
분별을 행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그 모든 내용이 사실은
어떤 주체의 마음 안에 얻어진 내용을 놓고
그런 분별을 행하고 있는 상황인 것이다.
비유하면 어떤 그릇이
매번 그릇안에 여러 물건을 담게 되는데
그 때 이 그릇이 생각하기를
그 가운데 매번 자주 담기는 어떤 물건을
자기 자신이라고 생각하면서
나중에는 그 물건에 접착되어
이후 모든 것을 그 바탕에서
생각하고 말하고 행위해나가는 가운데
이렇게 뒤집혀 판단을 전개하는 상태가
불러 일으키는 부작용이 대단히 많다는 점을
일단 지적하는 것이다.
그래서 앞의 사진으로 설명한 것처럼
나중에는 그 물건이 얻어지지 않는데도
여전히 그 물건이 자신이라고 집착한다거나 하는 것도 문제고
그와 함께
지금은 지금대로 또 다른 엉뚱한 물건을
자신이라고 생각하고 집착하면서
또 무언가를 하고 있다는 것이 문제인 것이다.
그릇을 조금 더 이해가 쉽도록
거울로 비유해도 사정이 같다.
거울이 매번 어떤 모습을 비추어 보는데
그 때마다 늘 한 곳에 어떤 모습이 보인다고 해서
앞과 같은 자세를 취하고
이미 앞에서 제시한 것처럼
불타는 집에 쇠막대에 꼽혀서
돌려지는 상태처럼
나중에 엉망인 상태로
묶여 끌려 들어가는데
알고 보면 처음 그렇게 임하고
계속 그렇게 행한 결과
이런 결과가 나타나게 된다고 제시하는 것이기도 하다.
여하튼 현실에서 그 모든 사건 사고의 당사자는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모두 이와 같은 형태로 판단하고
생각하고 말하고 행위해 온것이어서
그 모든 사건 사고의 바탕은
또 이런 망상분별이 바탕이 되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단지 현실의 문제만
그런 것이 아니고
이 망상분별을 어느 계기로 해결하지 못하면
이 상태로 무한한 기간
매번 그런 형태로 임하는 가운데
생사 고통을 받아나가게 된다고
제시하는 것이기도 하다.
엄밀히 보면 앞에서 아이의 장례식도 치루고
또 소년의 장례식도 치루고
현재순간에 이르렀어야 옳을 것도 같기도 한데
여하튼 그런 형태로 계속
집착을 갖는 내용을 바꾸어 가면서
그러나 같은 방식 같은 형태로 무한히 임하면서
생사고통을 무량하게 받아나간다는 것이
바로 현실의 문제인 것이다.
좋은 내용만 떼어 놓고 보면
이것이 무슨 문제인가 생각하기 쉬운데
그런데 현실에서 보는 모든 비극적이고
극한적인 고통의 상황은
바로 이런 망상분별을 일으켜서
업을 행하는 가운데
전개된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자신의 상황이 너무 평안해서
이런 문제가 잘 생각이 안 되면
이 더위에 축사에서 살아가는 축생이나
현실에서 보는 각종 고통의 내용을
하나하나 나열해서 살피고
그 앞뒤의 관계까지 넓고 길고 깊게 살피면
이것이 모두 그렇게 관련이 된 일임을
살필 수 있게 되는 것이다.
[..]
앞에서 지적한 잘못된 망상분별과
엉터리 판단을 하나하나 제거하고
현실을 있는 그대로 올바로 관하고
그런 가운데
현실의 내용을 좋고 좋고 좋은 상태가 되도록
만들기 위해서
수행방안을 택해서 임해야
그런 생사고통의 묶임에서 풀려나고
무량한 시간 동안
중생제도와 불국토장엄과 성불의 상태를
성취하기 위하여
유희자재 신통력으로서
생사현실에 임하게 되는 상태가 된다고
제시하는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매 생사현실에서
그렇게 되지 못하는 사정이 있는 것이고
그것이 바로
아리아리랑 쓰리쓰리랑 아라리가 낳네라는
노래가 전하는 메세지이기도 한 것이다.
[...]
다시 아리따운 아가씨에 집중해 보기로 하자.
현실에서 이런 모습을 눈으로 볼 때
이 가운데 일정한 부분을 그런 아가씨라고 보는 것이
전도된 망상분별
즉 거꾸로 뒤집히고 돈 상태에서 행하는 분별이라고
제시하는 것이다.
그것을 가장 쉽게 이해하는 방식은
다음이라고 본다.
눈으로 보고 얻은 감각현실은
눈을 뜨면 얻어지고
눈을 감으면 사라지는 내용이다
이제 매 순간 하는 내용이라고 하더라도
자신이 무언가를 보면서
눈을 감고 뜨고 실험하면서
무엇이 그 순간에 나타나고 사라진 것인가를
잘 확인해서 마음에서 포착해 두기로 하자.
지금 말하는 감각현실이란 이런 것이기 때문이다.
지금 망상분별이 심화된 상태에서는
감각현실과 분별 이런 표현을 해도
무엇이 무엇인가를 스스로 구분하지 못하고
두 내용을 접착시켜서 자꾸 문제를 대하는 경우가
보통인 것이다.
그래서 간단하지만, 위 실험을 지금 행해서
여기서 말하는 감각현실이 무엇인가를
스스로 확인하는 것이 필요한 것이다.
그리고 이런 감각현실을 얻을 때
어느 부분이 아가씨라고 생각한 경우
그런 생각은 이처럼 눈을 감고 뜨고 함에 관계없이
계속 생각할 수 있는 그런 내용인 것이다.
이것을 분별이라고 표현하는 것이다.
이 때 그는
아가씨와 아가씨 아닌 부분을 나누고
아가씨라고 하는 것은 어떤 성품으로
다른 부분과 구분되는 것이라고 판단하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이런 감각현실과 이 분별내용의 관계를
스스로 살피는 것이다.
이 감각현실 그 자체가 곧 그대로
그런 관념분별인가.
반대로 살피면
그런 관념분별 자체가 곧 그대로
그런 감각현실인가를
스스로 확인해보는 것이다.
눈을 감고 아가씨에 대한 생각을 떠올릴 수 있다고 할 때
그처럼 생각하는 내용 안에
그 직전에 눈을 뜨고 보았던 내용이
단 한 부분이라도 얻어지고 있는가를
살피는 것이다.
있으면 제출은 못하더라도
있다고 자신이 확인하면 되는 것이고
없으면 없다고 하면 되는 것이다.
그래서 그런 분별내용에는
감각현실의 내용이 없음을 일단 확인하는 것이다.
감각현실도 마찬가지다.
눈을 떠 마음에 그런 감각현실을 얻을 때
자신이 생각하는 내용이 하나 더 그 영역에서
얻어지는가를 확인해보는 것이다.
그래서 일단 자신이 얻는 감각현실과
관념분별의 관계를 확인해보는 것이다.
여기서 지적하는 것은
그런 감각현실에는 그런 관념분별이 얻어지지 않는다는
당연한 사실을 지적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것은 최면이나 꿈의 상황과도 사정이 같은 것이다.
뱀이 아닌 혁대와 같은 무엇을 보면서
최면에 걸려 그가 뱀이라고 생각한다면
그가 생각하는 내용은
그 감각현실에 그런 내용을 얻을 수 없는 것인 것이다.
그런데 그런 내용이 있다고 여기고
그에 집착하고 접착되버리면
그 부분부터가 문제라고 지적하는 것이다.
이것이 정신병원에서 치료받는 망상환자의
사정과 동일한 것이다.
화분에 우주인기지가 없는데
망상환자가 자꾸 화분을 대하면서
거기에 우주인기지가 있다고 주장한다거나
기타 다양한 형태로 엉터리 분별을 행하는 것이
문제인 것이다.
더 나아가 그런 상태에서
우주인 기지를 파괴시킨다고
화분을 깨뜨리거나 하게 되는데
그 상태에서도 또 앞과 같은 방식으로
연장되고 증폭된 망상을 전개해나가게 되는 것이다.
망상환자의 증세가 다양하기에
일일히 나열할 수 없는데
여하튼 거기에 그런 내용을 얻을 수 없는데
그 안에 그런 것이 있다고 하면서
그에 바탕해서 무언가를 계속 행하고
그런 결과 그 바탕에서는
고통을 생생하게 받을 수 밖에 없는 상태로
묶여 지낸다는 것이 바로 문제인데
이것이 바로 현실의 생사고통의 문제인 것이다.
그런데 현실에서 정신병원의 환자는 환자지만,
자신은 그렇지 않다고 계속 고집하면서 임하는 것이
무한한 기간에 걸쳐 그 망상분별 증상의 치유를
기대하기 힘들게 만드는 중요한 원인이기도 한 것이다.
그래서 위 실험을 자신이
천천히 잘 반복해서 행하면서
사정을 파악해야 한다고 하는 것이다.
또 하나 감각현실과 분별의 관계를 살피는 방식은
다시 그런 관념분별을
그런 감각현실을 떠나서 자신이 얻은 것인가를
또 스스로 살펴 보는 것이다.
과연 그런가.
자신이 저 사진을 보고 아가씨라고 생각한 것이지
어떤 바위 모습을 대하면서 아가씨라고 생각한 것인가.
그렇지는 않은 것이다.
그래서 현실에서 얻게 되는
감각현실과 관념분별부터
이런 형태로 그 상호관계를 살펴서
잘 파악하여 자신의
전도망상 편집증의 상태가 어떤 상태인지를
파악하는 것이 필요한 것이다.
그리고 위 방식은
앞에서 나열한
실재 ~ 감각현실 ~ 분별의 각 관계에 대해서도
동일한 형태로 살필 수 있는 것이다.
또 어떤 내용을 마음에서 얻는다고 할 때
그렇게 마음에 얻은 내용과
그런 내용을 얻은 마음의 관계도
또 위와 같은 형식으로 살필 수 있는 것이다.
마음으로 어떤 내용을 얻는다고 할 때
그 내용이 마음과 같은 기능을 하는 마음인가.
그런 것은 아닌 것이다.
그러나 그런 내용이 마음을 떠나 있는 것인가하면
그렇지도 않은 것이다.
그래서 이 둘의 관계를 그렇게 있는대로
잘 파악해야 한다고 하는 것이다.
거울에 비추인 모습이 있을 때
그 모습이 거울인가.
그렇다고 그 모습이 거울을 떠나 있는가.
이런 질문과 같은 것이다.
글이 길어지고 과거에도 반복한 내용인데
이런 내용을 올바로 관해야
자신이 묶여 있는 생사고통의 현실에서
벗어날 해탈문의 열쇠를 찾아내는 계기를
여기서 얻게 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렇지 못하면 계속 뒤집혀 돈 상태에서
엉뚱한 것을 붙잡고
계속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해가면서
생사 고통을 받아나갈 도리 밖에는 없다고
보는 것이다.
어느 병아리가 양계장에서 태어나
양계장에서 살다가 죽는다고 할 때
왜 그 병아리가 그렇게 살다가 죽었는가를
설명하라면
결국 위 내용을 그 근본원인으로
제시하게 되는 사정이 있는 것이다.
대부분 자신이 지금 살고 있고
현실에서 경험해 보고 듣는 내용은 잘 파악해도
정작 왜 이런 형태로 태어나 살게 되었는가
그 부분은 우연이라거나
잘 모르겠다고 하면서
자동차는 엑셀을 밟으면 자동차가 나아가고
브레이크를 밟으면 멈춘다는 사실을 잘 파악하고
그에 바탕해
자동차를 가고 서는 부분은 그런 관계로 잘 하면서도
정작 자신이 처음 삶을 이 형태로
시작하게 된 과정은 모르겠다고 임하면
곤란한 것이다.
그것은 이번 생만 그렇게 곤란한 것이 아니고
이후 무한한 시간동안 그렇게 곤란하게 되는 것이다.
>>>
그래서 이 유무 논의를 살피는 것은
바로 이런 생사고통을 벗어나는
해탈문의 열쇠를 찾아서
그 안에 들어가
이 생사고통에서 벗어나는 상태를
기본적으로 얻고
이후 그 상태에서 무량행문을 닦아나가기 위한
기본내용이라고 이해해야 할 것이다.
처음 아가씨 사진을 놓고
그것이 본래 없고 얻을 수 없다는
무소유 불가득의 사정을 제시하게 되면
이제 그 내용을 이해하고 받아들인다는 경우
거꾸로
그 상황에서 그런 아가씨가
거기에 없다라고 주장하는 경우가 있다.
그런데 이것이 또 망상분별에서 또 다른 망상분별을 행하는 것이기도 한 것이다.
앞 부분에 그런 내용을 제시했고
그가 그와 일치되는 주장을 또 한 것 같은데
왜 이것이 망상분별이라고 하는가하면
그가 없다고 하는 것은
그 내용을 잘못 이해하는 가운데 그렇게 주장하기에
그런 것이다.
무엇이 있고 없음을 따지는 문제는
그래서 사정이 복잡하고
혼동을 일으키는 성격이 많은 것이기도 하다.
앞에서 여러 측면의 내용을 제시했는데
만일 '아가씨'란 글자를 써 놓고
거기에 아가씨가 있다고 주장한다거나,
아가씨를 보면서 거기에 '아가씨'란 글자가
있다고 하면 어떤가.
지금 혼동을 일으키는 내용은
사실은 이런 경우와 같은 혼동인 것이다.
앞에서 분명
어떤 이가 눈을 떠서
어떤 부분이 아가씨라고 생각할 때
그에 해당한 '진짜'는 없다고 한 것이다.
그리고 그 실재는 '얻을 수 없고 공하다'고 한 것이다.
여기서 실재가 공하다는 것은
실재에는 앞과 같은 진짜라고 할 내용이 없는 한편
아무것도 전혀 없는 것은 아니지만,
그러나 그 내용을 어떤 주체도 얻지 못한다고 제시한 것이다.
이 내용을 혼동하면 안 되는 것이다.
직전까지 아가씨를 보았는데
어느 순간 눈을 감아서 아무 것도 보이지 않을 때
그렇다고 아무 것도 없게 된 것인가.
아니면 무엇은 있다고 할 것인가
이런 문제가 실재의 영역에 관한 논의라고 앞에서
제시했다.
이 때 만일 앞에서 살핀 진짜라고 할 내용이 있다면
즉, 어떤 조건에 관계없이 늘 영원불변한 진짜가 있다고 하면
이 문제에 대해서도 그 진짜의 내용을
제시하면 간단한 것이다.
그런데 그런 진짜는 없고 [무아, 무자성, 인무아, 법무아,...]
그러나 그런 본바탕이라고 할 실재는
전혀 아무 것도 없는 것은 아니지만,
그 내용을 어떤 주체도 얻지 못한다고 제시한 것이다. [불가득 공 ]
그것은 어떤 주체는 모두 주관과 관계한 내용만을
그의 마음에 얻는 사정 때문에 그런 것이고
실재가 전혀 아무 것도 없기에 그런 것은 아닌 것이다.
그런 사정으로 실재는 얻지 못하고 공하다고 표현하는 것이다.
이제 이 내용을 놓고
실재는 없다고 제시하면 그것이 또 문제가 되는 것이다.
그리고 이 내용들은
현실에서 얻는 감각현실을 그렇게 생생하게 얻지 못한다고 제시한 것이 아니고
또 그에 대해 일정한 분별을 일으키지 못한다고 제시한 것도 아닌 것이다.
이런 상태에서 앞에서
어떠한 이가 현실에서 얻는 그런 내용이
하나같이 이런 사정으로 실답지 않아서
집착을 떠나야 한다고 제시하면
이 내용을 가지고
다시 현실에서 그런 내용을 얻지 못한다거나
그런 내용은 '없다'라고 판단하면
그것이 위와 같은 사정으로
또 다른 엉터리 망상분별을 행하는 상태가
된다고 제시하는 것이다.
감각현실을 놓고 일정부분을 A 라고 판단할 때
이미 앞에서 그런 내용을
감각현실에서 '얻지 못한다'고 제시했다.
그것은 A라는 분별 내용을 일으킬 때
감각현실 영역에서는
그런 내용이 '없다'거나 '있다'라고
판단할 수 없는 것임을 제시한 것이다.
그런데 이것을 놓고
또 그 감각현실에는 그런 A가 '없다'거나
아예 그런 감각현실 자체를 '얻지 못한다'라고
생각하면 또 문제라는 의미다.
왜 그런가하면
지금 있다 없다의 논의에서
잘못된 판단을 하고
그에 접착되면
엉뚱한 생각과 말과 행동을 하면서
위 바탕에서는 고통을 생생하게 받을 도리 밖에 없는
상태를 만들어가기에 그것을 문제로 제시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잘 판단을 해야 한다고 하는 것이다.
무엇이 있다고 판단하는 것이 망상분별이라고 제시한 내용을
가지고
또 다른 망상분별을 일으키면
앞의 망상분별로 인한 문제가 해결되는 것이 아니고
더 엉망이 된다고 보는 것이다.
그래서 실재가 공하다는 내용을 가지고
현실에서 잘못된 판단을 하면
그런 판단을 아예 하지 않은 경우보다
더 심하게 빨리 지옥의 상태에 떨어지게 된다고
악취공견의 문제를 지적하는 사정이 있는 것이기도 하다.
왜 그런가.
실재가 공하다는 내용을 가지고
이렇게 해도 공하고 저렇게 해도 공하니까.
현실에서 아무렇게 행한들 어떠하리
아무 일도 하지 않은들 어떠하리
이전에 망상분별과 집착에 바탕해서 그런 것을 모를 때처럼
똑같이 계속 행한들 어떠하리
심지어 악행을 극단적으로 행한들 어떠하리
이렇게 임하는 경우가 발생하는 것이다.
이것은
어디에서 잘못된 판단을 행한 것인가.
실재가 공하고 그래서
실재가 본래 청정한 니르바나라고 한 내용을
놓고 그런 혼동을 일으킨 것이다.
마치 처음 자신이 어떤 수행을 한 것이
그런 실재의 공함 때문에 행한 것처럼
혼동한 것이기도 한 것이다.
과연 그런가.
실재가 공하고 본래 청정한 니르바나인 것은
수행자가 그런 이해를 하던 하지 않던
어떤 수행을 하던 않던
본래 그런 것이다.
그것이 문제가 아니고
본 바탕의 실재는 그런데
망상분별과 집착으로
현실에서 생사고통을 받는 것이 문제였기에
그런 내용을 관하여
현실에서 받는 생사고통을
수행을 통해서 벗어나라고 제시한 것이다.
그런데 위 내용과 뒷 내용을 혼동해버린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실재가 공하다고 제시한 내용을
실재는 아무 것도 없다고 이해하거나
그래서 현실의 내용도 없다고 이해하거나
여기서 수행을 할 필요도 없다는 등으로
수많은 망상분별을 증폭시켜 전개해나가기도 하는 것이다.
여하튼 유무 논의는
존재와 관련된 다양한 측면에서
이런 복잡한 성격을 갖기에
어려움이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이것을 잘 파악해야
현실에서 생사고통을 벗어나는
수행을 원만히 성취해나갈 수 있기에
이 유무 논의를 잘 정리할 필요가 있는 것이기도 하다.
[...]
이미 현실에서 유무 문제와 관련해
행하기 쉬운 망상분별을 많이 살폈는데
이는 수많은 망상분별의 기본 바탕이 그렇다는 것이고
이를 바탕으로 전개하는 망상분별의 내용을
다 나열하면 끝이 없다고 할 수도 있다.
어떤 윤리학자는 배고플 때
짜장면을 먹고 좋음을 느꼈다고 해서
짜장면에는 좋음이 그 순간에
그렇게 있는 것이라고 주장하기도 하는데
짜장면을 강제로 5 그릇을 먹을 때
왜 짜장면에 없던 고통이 또 들어있는가.
이렇게 생각하게 될 것이다.
사막에서 물을 대하면 물이 금보다 더 소중하다고
생각하기도 하지만,
물 고문을 받는 상황에서 물은
지극한 고통을 주는 것이기도 한 것이다.
그래서 이런 전반적인 문제를
다 나열해서 있고 없음의 문제를 살피기는 어렵다고 보지만,
원효대사님이 의상대사와 함께
중국으로 현장법사님이 있는 곳으로 유학을 떠나기전
해골물을 마시고 그 문제의 핵심을 파악하고
유학을 포기하고 돌아섰다는 일화가 전해지는데
이 물의 정체가 과연 무엇인가는
아직도 자세히 밝혀지지 않고 있는 것이다.
해골 썩은 물인가.
자면서 목마른 가운데 청량함을 준 유산균음료수라도 되는가.
아니면 있다 없다의 문제에서
그렇게 망상분별을 일으켜 임하고 판단하면 곤란한 사정을
이해시켜준 법수인가.
등등 여러가지 논의가 행해질 수 있는데
수행과 관련해서는
같은 물이라도
어떤 이는 고통과 공포로 대하기도 하고
어떤 이는 즐거움과 희망을 일으키는 내용으로 대하기도 하는 가운데
같은 물을 섭취해도
뱀은 이것으로 독을 만들어 내고
벌은 이것으로 꿀을 만들어 낸다는 내용이 나타내는 것처럼
이 유무 논의가 수행의 방향과 관련해
어떤 내용을 제시해주는가를 잘 판단하고
현실에서 실천해 나가야 한다고 보는 것이다.
다시
이번 조각글은 아리따운 아가씨 때문에
집중에 도움을 받는다고 보는데
이 하나의 내용도 앞과 똑같은 문제를
제기해주는 자료이기도 한 것이다.
그러므로 기본적으로 이와 관련해
유무 문제를 잘 정리하고
이 내용을 눈을 떠서 보고 얻고
어떤 생각을 일으키는 가운데
어떤 부분이 문제라고 한 것인가를 잘 파악해서
그것을 제거하고
그 다음 문제를 살펴야 하는 것이다.
매일 눈을 뜨고 감지만,
이런 유무 논의의 과정에서
눈을 뜨고 감는 실험을 반복하는 것은
상당히 중요한 실험을 하는 것이기도 하다.
자신의 주관과 관계없이 실재한다고 할 내용이 무언가를
살필 때
자신이 눈을 감을 때의 상태가 그것인가.
아니면
자신이 눈을 떠서 얻는 내용이 그것인가.
이런 것도 이 실험에서 잘 파악해야 할 문제이기도 한 것이다.
그리고 또 이와 관련해
현실에서 행하는 다양한 망상분별과
엉터리 판단을 잘 파악하고 제거해야 하는 것이기도 하다.
대부분 저런 모습을 보면
저 내용은 자신의 외부에 있는 외부대상이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리고 자신이 보는 자신의 몸과
저런 외부대상이 관계헤서
자신이 저 모습을 본다고 엉뚱하게 이해하는 것이다.
그러니 이런 분별이 엉터리라는 것을
이해하는 데에도
눈을 뜨고 감는 실험이 대단히 의미가 있는 것이다.
그것만으로 부족하면
돗수가 다르고 색이 다른 선글래스를 여러개 구해 놓고
이것을 번갈아 써보면서
왜 안경을 바꿔 쓸 때마다
자신의 외부에 있는 대상이 다 변화하는가.
이것도 의문을 갖고 답을 구해야 하는 것이다.
더 나아가 자신과 상태가 비슷한 다른 이를
옆에 놓고
위 실험을 행하게 하면서
그가 무엇이라고 보고하는가를
옆에서 잘 관찰하면서
그 내용과
자신이 행하고 관찰하는 내용에서
어떤 문제가 있는가를
잘 파악해야 한다고 보게 된다.
그런 가운데 왜 현실에서
자신이라고 보는 몸 부분이
자신이라고 여기고 활동하는 것이
적어도 죽을 때까지는
큰 지장을 초래하지 않는가도
잘 이해해야 한다고 본다.
지금 이 논의는
그렇게 해서 생사고통을 받아나가는 과정
즉 그런 생사고통을 묶여 받게 된
망상분별이 전개되게 된 그 사정을
스스로 잘 파악하는 것이
핵심인 것이다.
그리고 그런 사정을 잘 파악한 상태에서는
생사과정에서 도대체 누가 또는 어떤 것이
이런 내용을 그렇게 파악하고
또 수행을 행하여
생사를 벗어나고
무량한 기간 무량한 수행을 닦아
성불한다고 제시하는 것인가도
함께 잘 파악해야 하는 것이다.
앞에서는 기본적으로
유무 논의과정에서 결론적으로 제시하게 되는 내용을
먼저 제시하고
이 내용에 대해 엉뚱하게 혼동을 일으켜
임하는 경우가 간혹 있다고 보고
이 문제를 제시한 것이다.
그런데 이런 문제를 시정하고
유무 문제를 올바로 살피게 되면
그 바탕에서
경전에서 제시하는 수행을
원만하게 실천하고 성취할 수 있는
바탕이 마련된다고 보는 것이다.
또 그렇게 하면 그로 인해
마치 영화 내일을 향해 쏴라는 영화의 내용처럼
끝없이 자신을 추적해 붙잡아
자신을 생사고통을 받는 세계에 묶고
자신의 쇠막대에 꽂아 불에 돌려 태우고자 하는
강한 동기를 갖게 한
업의 장애
즉 자신이 과거로부터 망상분별에 바탕해
행해 쌓아 놓은 업의 장애를
계 정 혜의 수행을 통해
해소시킬 바탕도 마련되고
또 그런 바탕에서
보정안정정반방원역지로 압축되는 수행
즉 보시-정계-안인-정진-정려-반야-방편-원-력-지 바라밀다의
수행들을 원만히 성취해서
복덕자량을 얻고
지혜자량을 얻어
중생을 제도하고
불국토를 장엄하고
성불하는 서원을 성취할 수 있게 된다고 보는 것이다.
앞과 같은 유무 논의에서
구체적으로 왜 그런 결론이 제시되는가의 문제와
또 그런 내용에서
왜 위와 같은 수행방안이
기본적으로 제시되는가 하는 사정은
또 별도로
자세히 살펴나가야 한다고 보지만,
여하튼 그 효용은
기본적으로 현실에서 전도망상 분별을 행하고
집착을 일으켜 업을 행해
생사고통을 받는 상태에 묶인 상황에서
풀려나 생사고통을 벗어나게 하는 것이
가장 핵심적인 효용인 것이다.
그 이후에 수행자가 생사현실에 들어가
무량행문을 닦아 나간다는 것도 결국
이런 생사고통을 받는 다른 중생을
그런 고통에서 벗어나게 하는 것이
또 주된 핵심이 되는 것이기도 하다 .
일단 여기까지 살피고 길게 쉬기로 한다.
요즘 과거 7 불 명호를 열심히 외우는 중인데
과거의 무한히 많은 부처님이 계시지만,
대표적으로 7 부처님을 이렇게 외운다는 의미다.
그 가운데 비바시부처님이 남겼다는
게송을 여기에 소개하고 마치기로 한다.
...
몸은 형상이 없는 데에서 생겨나니
환술[幻]이 온갖 형상을 만들어낸 것과 같네.
환술로 만들어진 사람에게는
마음이 본래 없으니
죄와 복은 모두 공하여 머물 곳이 없네.
身從無相中受生 猶如幻出諸形相
신종무상중수생 유여환출제형상
幻人心識本來無 罪福皆空無所住
환인심식본래무 죄복개공무소주
여기에서도 무언가 유무 논의와 관련된 내용이
제시되고 있다고 보게 되지 않는가.
그래서 이런 내용을 이후
또 하나하나 자세히 살펴야 한다고 본다.
>>>
논의를 위해서 다음 사진과 같은 형태를
자신이라고 가정하자.
>>>
그런 상태에서
현실에서 어디인가를 여행을 하고자 한다면
누가 또는 어떤 것이 어디를 가야
자신이 여행을 한다고 스스로 여기겠는가.
또 어떤 맛있는 음식을 먹고자 한다면
어떤 이가 먹는 것을 희망하는 것인가.
또 어떤 이가 어디에서인가 잠을 잔다거나
또는 어떤 좋은 옷을 입는다거나
또는 좋은 자동차를 타고 다니기를 희망한다면
누가 그런 것을 하는 것을
원하는 것인가.
또 어느날 자신이 원하는 좋은 지위에 올라가서
사장이나 회장이 되고해서
회장 책상에 앉아서 일을 하고자 한다면
어떤 부분이 그렇게 앉아서 일을 하는 것을
희망하는 것인가.
이것을 생각해보자.
여기에 자신이 평소 자신이라고 보는 내용이
눈을 뜰 때 보는 위 사진과 같은 내용이라면
바로 그 부분을 놓고
그런 생각을 하는 것을 알 수 있다.
또 반대 내용도 마찬가지다.
어느날 자신의 손과 발이 다 끊어지고
죽어갈만큼 고통을 받는다고 한다면
어느 부분이 그렇게 되어서 그런 고통을 느끼는가.
또 언젠가 그렇게 죽어서 사라지는 것이 공포스럽다고 느낀다면
어느 부분이 그렇게 되는 것을
공포스럽게 여기는 것인가.
이런 것을 기본적으로 생각해보자.
유무의 논의에서
현실에서 저런 부분을 자신이라고 볼 때
저런 모습을 얻지 못한다거나
저런 모습에 대해서 자신이라거나 또는 남이라고 생각을
못한다고 제시한 것이 아니다.
그런데 여기서 이런 내용을 얻은 상태에서
이를 놓고 어떤 자세를 취하고 현실에서 임하면
대단히 거꾸로 뒤바뀐 전도망상분별이고
잘못된 엉터리 오류 판단이기도 하고
또 그로 인해 온갖 생사고통을 무한하게 겪게 만들어가는
근본 원인이 된다고 하는가를
잘 살펴야 한다고 본다.
그런데 우선 여기에서
'있다'에 치우친 견해가 불러 일으키는 부작용이 있고
또 '없다'에 치우친 견해가 불러 일으키는 부작용이 있다.
그런 가운데 어느 하나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노력하다보면
그 반대면의 다른 부작용을 모두 안고 지내는 경우가 가끔 있다.
그래서 이러한 있다 없다의 양 극단에서의 문제를
다 잘 처리하는 것을
수행자가 목표로 삼지 않으면 곤란한 것이다.
그렇다 보면 있다도 아니고 없다도 아닌
어중간하고 애매한 입장에서
자신부터 오락가락한 상태가 되는 것이 아닌가
하기 쉬운데
그것은 혼동된 상태인 것이고
올바른 판단을 해서
올바른 수행을 하는 상태는 아니라고 보는 것이다.
이미 있다 없다의 문제가
각 측면마다 매우 복잡하게 제시되어서
상당히 혼동을 일으키는 점이 많지만,
그러나 각 측면마다
명확하게 그것을 제시하고 있는 것이지
매번 오락가락하는 입장을 제시하는 것이 아니다.
예를 들어
진짜 a는 '없다'고 분명히 제시한 것이다.
또 a 라는 관념분별은 관념분별 영역에서 그렇게 '있다'고 제시한 것이다.
이 둘만 놓고 보면
a 는 없으면서 있는 것처럼 오락가락하는 내용으로 생각되지만,
진짜는 없고 관념분별은 그렇게 실답지 않은 형태로
관념분별에 있다고 한 것이다.
그런데 이렇게 정리하고 대하지 못하면
a 는 있기도 하면서 없고, 없으면서 있다고
서로 혼동되고 오락가락한 상태로 이해하고
어떤 때 무언가 a 가 있는 상태가 좋다고 보면
그것이 있다고 하고
또 a 가 없는 상태가 좋다고 보면
그것이 없다고 하고
매번 자신에게 유리하게 오락가락하면서
임해도 된다고 잘못 생각하는 경우가 발생하는 것이다.
그렇게 오락가락한 상태로 임해
삶의 생사고통의 문제가 모두 잘 해결되면 좋겠지만,
오히려 그 반대로 각 경우마다
그로 인한 부작용만 모두 붙잡고
지낼 수가 있는 것이다.
즉 무언가가
a 가 있으면 극히 안 좋을 경우는 그것이 있다고 여기고 임하고
a 가 없으면 극히 안 좋을 경우는 또
그것이 없다고 여기고 임하게 되는 형태가 되기 쉬운 것이다.
쉽게 말해
배가 고파 빵이 필요한데
빵이란 글자가 적힌 청구서는 있고
먹어야 할 빵은 없는 상태로 임하는 경우와 같다.
그래서 청구서에 적힌 글자와 숫자는 그것대로
자신을 괴롭게 하고
빵은 빵대로 없어서 배가 고프다.
이런 상태가 되기 쉬운 것이다.
그런데 있고 없음의 문제를 잘 정리하지 못하고
오락가락 혼동을 일으킨 가운데
해야 할 수행을 할 필요가 없다고 여기고 무시하며 지내거나
또는 수행을 하더라도 이상한 형태로
즉, 무엇인가 얻을 것이 있음[유소득]을 방편으로
수행을 하게 되면
바로 위와 같은 상태로 된다고
금강경 등에서 반복해 지적하고 있는 것이다.
그 외에 있다 없다가 각 측면의 각 기준마다
각기 다르게 제시되는 사정은 이미 보았다.
a 라는 글자에 대한 관념이나
그 a 의 관념은 그렇게 관념영역에서는 '있다'.
그러나 그에 상응한다고 여기는 감각현실에서는
정작 그런 내용은 '얻을 수 없다.' [ => 있다 없다를 말할 수 없다. ]
그런데 그 감각현실을 '감각현실'이라고 언어로 표시해 시설한다면
그런 감각현실은 그렇게 생생하게 '얻고'
그래서 '있다'고 할 수 있다.
이런 등등을 제시하는 것이다.
이미 대강 있다 없다의 판단이
이렇게 다양하게 제시되는 것은
그것이 그런 성격이기에 그런 것이지
공연히 오락가락하기 위해서 그런 것은 아니다.
그런데 이런 있고 없음의 판단과 관련해서
무언가 없는 것을 있다고 여기고 집착을 갖고 대하면
그로 인해 심각한 부작용을 일으키게 되고
또 반대로 있는 것을 없다고 여기고 임하면,
또 그로 인해 엉뚱한 부작용을 일으켜 받게 된다.
또 한편
아주 없는 것은 아닌데
그러나 있다거나 없다라고 단정할 수 없는 것을 놓고
또 있다고 하거나 없다고 하면 또
그로 인해 엉뚱한 부작용을 일으켜 받게 된다.
그리고 각 경우마다
이런 있고 없음의 판단을 뒤바꿔 행하는 가운데
겪게 되는 부작용들이
모두 생사고통의 내용을 의미하는 것이 되기에
이 유무논의는 기본적으로
이런 문제를 시정하기 위한 노력인 것이다.
다시 빵을 놓고 생각해보자.
자신이 배가 고파서 빵을 먹고자 하는 것이다.
그런데 앞에서 감각현실은 관념분별은 아니고
감각현실에서 그런 관념분별을 얻을 수 없다고 제시했다.
그래서 아무리 자신의 눈으로 빵이라고 보는 것에도
자신이 생각하는 '빵이란 생각내용'은
얻을 수 없다고 제시한 것이다.
그런데 사정이 그렇다고
빵으로 보게 되는 감각현실이 없다거나
그런 내용이 아주 없다고 본다면
어떤 부작용을 일으키게 될 것인가를
간단히 검토해보자.
그러면 어차피 빵으로 보는 것에도 빵이 없고
모래로 보는 것에도 빵이 없으니
어차피 없는 것은 마찬가지이니
자신이 모래로 보게 되는 것을
빵이라고만 생각하고
그 모래를 먹어도 빵이란 생각내용은 있으니
별 차이가 없다고 하겠는가.
상식적으로 그렇지 않은 것이다.
아무리 빵을 가져다 놓고 먹어도
그 현장에 자신이 생각하는 빵은 없다고 제시하지만,
그렇다고 모래를 먹어도 된다고 제시하는 것은
아닌 것이다.
그래서 있다 없다의 문제에서 오락가락하게 되면
무엇이 현실에 실답게 있는 것이 아니라고 제시할 때
현실을 다 부정하고 무시해도 된다고
잘못 생각하기 쉬운 것이다.
또 그것이 문제라고 지적하면
이제는 반대방향으로 다시
그런 것이 있다는 쪽으로 가서
본래 그런 것을 얻을 수 없는 것을 놓고
거기에 스스로 달라 붙어서 지내서
각종 부작용을 겪는 현상이 나타나는 것이다.
이것이 생사 고통의 문제이므로
이 문제를 잘 해결하기 위해서
있고 없음의 문제를 잘 살펴야 한다고 제시하는 것이다.
[...]
유무의 논의가 각 측면에서 혼동을
불러 일으키는 면이 많고
논의가 복잡한데
일단 그 효용을 먼저 간단히 보자.
무엇인가 나쁘다고 보는 것이 있다고 해보자.
이것이 삶의 고통과 번뇌를 준다고 할 때
이것이 실질적으로는 없다는 측면을 이해하게 되면
이로써 번뇌를 해소시키는 기능을 갖게 한다고 볼 수 있다.
내일 큰 시험이 없는데
어떤 학생이 그것이 있다고 잘못 알고
걱정을 하고 있다고 해보자.
그런데 어떤 친구가 내일 시험은 없다고 확실하게
알려주는 것이다.
이런 경우 번뇌와 고통을 가져다 주는 내용이 없음을
이해하게 되면
그런 번뇌와 고통으로부터 벗어나는 효과를 갖는 것이다.
그런데 무언가 없다는 측면을 이해하는 것은
이처럼 번뇌를 제거하는 기능을 갖는다고 보지만,
또 다른 부작용을 갖는 것이기도 하다.
즉 내일 큰 시험은 없는데
그러나 5 시간 수업은 있다고 해보자.
앞의 학생이 시험은 없고 수업은 있다는 것을
이해한다면 시험에 대한 걱정은 덜고
수업준비를 하면 된다고 보는데
이 학생이 시험이 없다는 내용을 듣고 나서
내일 할 일이 아무 것도 없다고 생각하고
임하는 경우가 발생하는 것이다.
이런 경우는 있다는 측면이 얻어낼 수 있는
많은 아름답고 선하고 가치있는 내용을
그로 인해 얻어내지 못하는 부작용이 발생하게 된다고
보는 것이다.
비유가 조금 엉성하다고 보게 되지만,
여하튼 있고 없음의 문제가 각기
일정한 기능을 갖기도 하고
일정한 부작용을 갖기도 하는데
여기서 부작용을 없애기 위해
있고 없음의 문제를 정확히 잘 파악해서
그 부작용을 없애야 하는데
이를 잘못 판단해서
그 긍정적인 부분까지
다 없애면 곤란한 것이다.
또 반대로 말하면
긍정적인 부분이 있다고 해서
그 부분을 취할 때
취하지 않아야 할 부작용까지
같이 취하면 곤란한 것이다.
원래 그런 것이 그렇게 있기에 그렇다면
어쩔 도리가 없다고 할 수 있지만,
그렇지도 않은데
잘못 판단을 하고 임해
그런 상태에 들어가면 곤란하다고 제시하는 것이다.
여기서 수행자가 문제삼는 것은
생사고통의 문제다.
본래 생사고통을 제거하기 위해
자신이 집착하는 내용을 얻을 수 없고
그런 것이 없다는 것을 제시한 것인데
그러나 이 내용으로 자칫
현실에서 성취할 수 있는
좋고 좋은 측면까지 모두 다 제거하고
없애면 그것은 곤란하다고 제시하는 것이다.
그래서 원래 생사고통이 없고
얻을 수 없는 측면을 잘 파악해서
본래 청정한 니르바나에 상응한 상태로
생사현실에서도 그처럼
생사고통을 벗어난 상태에
여여하게 머물러야 한다고 제시하는 것이고
또 이 가운데
진짜는 없고
실재는 전혀 없는 것은 아니더라도
그 내용을 직접 얻을 수 없고 공한 것이지만, [ 무소유 불가득 공 ]
그러나 현실에서 각 주체가 얻는
감각현실이나 관념은 그것대로 그렇게
'실답지는 않지만' 현실에서 얻는 내용으로서
그 내용도 좋고 좋은 형태가 되도록
노력을 해야 한다고 하는 것이다.
유무 논의를 통해 얻어야 할
결론은 사실 이것이다.
그래서 망상분별을 일으켜 상을 취하거나 머물지 말고
얻을 것이 없음(무소득)을 방편으로 집착을 갖지 말고
그러나 정확하게
중생을 제도하고 보시를 행하는 수행을
열심히 정진해야 한다는 내용을
금강경과 반야바라밀다경전을 비롯해서
여러 경전들에서 제시하고 있는 것이다.
본래 청정한 니르바나이고
실재가 공하고
이렇게 하던 저렇게 하던 다 차별없이 공하기에
아무 행위도 하지 않고
아무 수행도 하지 않아도 된다거나,
또는 망상분별과 집착에 바탕해서 행위해도 된다거나
악을 극심하게 행해도 무방하다고
경전에서 제시하는 경우는 없다.
그런데도
진짜의 나나 나의 것이 없다거나
실재가 차별없이 다 공하다라는 등의 내용을 제시하면
그 내용을 잘못 혼동해 이해하고는
독자적으로 앞과 같이 생각하고
그렇게 행해서
그런 내용을 듣지 못한 경우보다
훨씬 빨리 더 극심한 지옥에 들어가서
생활하게 되는 경우가 많다고
경전에서 제시되고 있는 것이다.
왜 그러겠는가.
지옥이나 극락이나 모두 그 실재가
차별없이 공하다.
이 내용을 잘못 혼동해 이해하기에 그런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일반적으로 지옥과 극락이 차별이
있다고 여기는 경우는
그래도 지옥을 두려워하고 조심을 하는 가운데
악을 행해도 행한다고 할 것인데
지옥과 극락이 모두 차별없이 공하다는 말을 듣고
지옥에 가도 무방하다거나
아무렇게 행해도 무방하다고 여기게 되면
이제 거침없이 행하는 가운데
그런 상태가 된다고 그 사정을 이해할 수 있다.
그런데
지옥과 극락이 차별이 없이 공하다.
이 말을 반대로 표현하면
본바탕이 차별없이 공하지만,
그러나 지옥과 극락이 달리 나타난다.
이렇게 보아야 할 내용이기도 한것이다.
그래서 본 바탕은 공하고
생사고통을 얻을 수 없는 청정한 니르바나인데도
현실에서는
지옥에서 극심한 고통을 받는 경우도 있고
극락에서 지극한 즐거움을 누리는 경우도 있다.
이렇게 이 내용을 이해해야 하는 것이다.
그런데 얻지 못하는 실재가 공한 것은
본래 그런 것이다.
수행자가 그런 사실을 그렇게 이해하거나,
그렇게 이해하지 못하거나,
또는 어떤 수행을 하거나 하지 않거나
본래 그런 것이다.
그리고 수행자가 어떻게 하고 안하고에 따라
이것을 변화시킬 수 있다고 제시하는 것이 아니다.
더 나아가 수행자가 그렇게 이해해야
비로소 본래의 상태가 공하게 된다고
제시하는 내용도 아니다.
그런 사정을 그렇게 이해하고
수행을 하는 것은
모두 본 상태는 그런데도 불구하고
그와는 달리
생사고통을 겪고 겪지 않는 차별이 현실에 있기에
그런 이해와 그에 바탕한 수행이
필요하다고 제시한 것이다.
그래서 그런 본 상태의 사정을 이해하고
현실에서도 그런 본 상태에 상응하게
생사고통을 제거하고
청정한 니르바나에 여여하게 머무르고
현실에서도
좋고 좋은 상태를 성취하기 위해서
수행에 정진해야 하는데
이 부분에서
앞과 같이 엉뚱하게 판단을 잘못 행하는 가운데
각 부분에서 거꾸로 엉뚱한 내용을 붙잡고 임하기에
본래 차별없이 청정한 니르바나인 바탕에서
극심한 생사고통을 받아 나가는 그런 결과가
발생한다고 볼 수 있다.
그래서 유무 논의는
바로 이렇게 뒤바뀌어서
생사고통을 받는 것을 제거하고
반대로
현실에서 복덕자량과 지혜자량을
무량하게 구족하는 상태를
성취하게 하는 효용을 갖는다고 할 수 있다.
[...]
여하튼 현재 유무 논의의 효용을 살피는데
이 유무 논의가 가장 중요한 부분은
역시 자신과 자신의 것의 유무가 중요하다고 보게 된다.
이미 현실에서 자신이나 남이라고 보게 되는
부분에서는
그런 자신이나 남을 얻을 수 없다.
따라서 그런 부분[상[相]을 놓고
거기에 자신이 생각하는 내용[상想]이 있다고
그런 상[相]을 취하거나 머무르면 안 된다는 내용을
제시한 바 있다.
더나아가 그런 내용이 실재라고 여기거나
또 그에 해당한 진짜의 영원불변한 실체가 있다고 생각하는 것도
곤란함을 제시했다.
이런 이해를 돕기 위해
자료 사진을 추가하는데
비교적 미남 미인의 사진임을 알 수 있다.
세상에서 이런 미남 미인만 있고
그리고 자신도 그렇다면
큰 불만이 없을 것 같은데
대부분 세상에서 대부분 미남 미인이라고 인정하는 경우도
그 당사자는 평생동안 자신에 대해
불만을 많이 갖고 자신을 대하기도 하고
때로는 수술도 감행하는 등
끊임없이 개선의 노력을 기울이기도 한다는 사실이
보고 되고 있다.
그 가운데 원래는 괜찮았는데
공연히 자꾸 개선노력을 하다가
대단히 이상한 형태로 변한 경우도 보고가 되어서
문제가 된다고 보게 된다.
여하튼 대부분 호감을 갖는 형태만 놓고
있고 없음의 문제를 살피면
원래 세상이 그런 것이라고 잘못 판단하고
문제를 대하기가 쉽다.
또 여름이라 약간의 공포 혐오성 자료도 필요하다고 보고
그래서 특별히 공포나 혐오감을 줄 만한
자료를 준비했다.
보통 인터넷을 검색하다가
갑자기 예상하지 못한 내용을
모니터 화면에서 보고 기겁을 하는 경우를 보기도 한다.
아무리 장난이라고 하지만,
심장이 약하거나 질병이 있는 경우
잘못하면 사망에 이를 수도 있는 장난이라고 보는데
여기에 이런 자료를 올리면
곤란하다고 보고
이런 주의를 덧붙이면서
관련 자료를 올리기로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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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언가 보는 즉시 심장이 잘못되고
이후 대단한 정신적 충격을 안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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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하튼 클릭을 하던 않던
무언가 이렇게 제시하면
대단히 꺼림직하고 공포감이나 혐오감을
느끼게 된다고 보지 않는가.
보통 자신이 그 정체가 낯설고
잘 모르는 것을 대할수록 그런 상태가 되기 쉽다.
어두운 지하실에 비닐 안에 무언가가 있는데
억지로 그 안에 손을 넣어 만지라고 강요를 받아서
만지는데 무언가 물껑한 것이 만져진다.
이런 경우 놀랄만하지 않은가.
불을 켜고 막상 보면 별것 아닌데도
그런 상황에서는 놀랄 수 있다고 보는 것이다.
사실 위 링크를 클릭하면
그렇게까지 공포스런 자료를 만나는 것은
아닌데 앞에 설명한 상황을 연출해보기 위해서
조금 과장을 한 것이다.
mun 님이 아름다움과 좋음의 정체를 연구하는
과정에서 자주 화두로 든
암파리 화두와 관련된 자료에 불과하다.
문제는 이 파리도 자신의 몸을 놓고
100 % 만족한다고 할 수는 없겠지만,
사람이 자신을 놓고 애착을 갖는 만큼은
갖는다는 점일 것이다.
또 사람이 앞과 같은 사진을 놓고서
남자는 아름다운 여인을 좋아하고
여자는 또 멋진 남자를 좋아한다고 할 때
파리도
수파리는 암파리를 좋아하고
암파리는 수파리를 좋아한다고 보게 된다.
그러나
사람은 파리를 좋아하지 않고
파리도 그다지 사람을 좋아한다고 볼 수 없는 것이다.
그래서 왜 이런 현상이 나타나는가를
mun 님이 오래 연구를 했다는 것이다.
현실에서 남자 입장에서
아름다운 여자를 보고 아름답다고 여기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하지만,
정작 무엇때문에 그런 생각이나 느낌을 갖게 되는가는
사실은 불가사의한 일이라고도 할 수 있다.
이와 관련해서 이전에 소개한 최면자료를
다시 붙여 놓고 살필 필요가 있다고 보게 된다.
자신을 사랑하게 되는 최면
Want Girls to ALWAYS Love You? Hypnotist Marc Savard Shows You How!
https://www.youtube.com/watch?v=AArKwwGYCIA
가장 섹시한 남성으로 보이게 하는 최면
Hypnotist in Las Vegas is the Sexiest Man Alive! Watch and See!
https://www.youtube.com/watch?v=DUDqgZ_iwrM
가장 혐오스럽게 보이게 하는 최면
Hypnosis Video - Most Disgusting Man Alive
https://www.youtube.com/watch?v=fpmshRXuYu0
혁대를 뱀으로 보이게 하는 최면
Snakes on a Stage! Starring Samuel Jackson and Marc Savard
https://www.youtube.com/watch?v=y6ynovdrJM0
이상의 최면 자료를 살피면
같은 사람인데도
어떤 경우는 가까이 가면 총으로 자살을 행하게 될 만큼 혐오감을 느끼게 되기도 하고
또 어떤 경우는 지극히 호감을 느끼는 상대로 대하기도 하고
뱀이라 보는 것이 목에 걸려 있는 상황에서도
자신이 좋아하는 이가 가까이 있다는 이유만으로
그 공포를 잘 극복해내는 모습을 보이기도 한다.
여하튼 이들 자료에 사람들이
뱀이 아닌 혁대를 놓고 뱀으로 보고 반응하는 상태나,
어떤 이에 대해 갖는 호감이나 혐오감이
최면에 의해서 쉽게 형성된다는
사정을 살필 수 있다.
그래서 자신이
현실에서 무언가를
극히 좋아한다거나
혐오한다고 할 때
도대체 왜 그런 정신적 망상질환을
어느 계기로 얻게 된 것인가에 대해서
스스로 잘 검토해 볼 필요가 있다고 본다.
과거에 번데기를 잘 먹다가
어느날 그것이 구더기라고 누가 말한 다음부터
못 먹게 되었다거나,
소고기나 돼지고기 닭고기를 잘 먹다가
그것이 사람의 시체나 마찬가지라고
보고나서부터
잘 먹지 못하게 되었다거나 하는 경우가 있는데
여하튼 좋다 나쁘다를 놓고
이런 문제를 잘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일반적으로 살핀다면
단순히 남자는 여자를 대할 때
남자 자신에게 없고 여자에게만 있는 특성을 주로 포착하면서
초점을 맞추기 쉬운데
본인은 요즘 의자에 앉아서 작업하면
조금만 작업해도 엉덩이가 아파서
비교적 엉덩이가 풍부한 여성의 엉덩이를
부러워하는 마음을 갖게 된다.
본인이 그런 상태라면
엉덩이가 조금 덜 아프지 않을까 하는 생각인데
여하튼 정확히 이유는 잘 모르지만,
남자는 아름답다고 보게 되는 여자를 놓고 아름답다고 하고
여자도 마찬가지이고
또 그런 가운데 각기 자신에 대한 애착을 갖고 있고
또 그와 함께 자신과 종류가 다르다고 보는
생명에 대해서
어떤 경우는
애완견과 같은 경우는 친근감을 갖고 대하기도 하지만,
또 다른 경우는 뱀이나 거미 벌레 등과 같이
약간의 혐오감과 공포감도 갖는 경우가 있다고 보게 된다.
- 남자 -
- 파리-
-여자-
결국 사람은 남녀 누구나 위와 같은 세 사진을 놓고
일단 무엇때문에 무엇을 좋다고 하고
또 무엇때문에 무엇을 혐오하는가
또 그 이전에 무엇을 자신이라고 보고
무엇을 남이라고 보고 그렇게
좋고 나쁨을 느끼는가에 대해서
잘 검토할 필요가 있다고 본다.
그리고 그렇게 혐오감을 주는 다른 생명을 대하면
이를 함부로 해치는 경우도 있는데
예를 들어
사람이 문어를 잡아서 다리를 끊을 때
사람이 자신의 몸을 놓고 애착을 갖는 만큼
그 문어가 그 자신을 놓고 애착을 갖고 있으며
그 문어가 자신의 다리가 끊겨지면
극심한 고통을 느끼게 된다는 사실을 무시하고
또 사람 자신은 문어의 몸에 대해 그런 생각도 하지 않고
그로부터 그런 고통도 받지 않으므로
이를 무시하고 함부로 하는 경향이 있다고 본다.
그래서 사람이 그렇게 행하면
사실 문어입장도 마찬가지라고 보게 된다.
문어도
사람이 자신의 몸에 대해 애착을 갖는다는 것을 이해하지 못하고
또 사람이 손과 발이 끊어질 때 느끼는 고통도
문어는 느끼지 못하게 되는 것은
사정이 마찬가지다.
그런데 여하튼 문어는 이런 사람으로부터
한번 자신이 고통을 받고
그것을 놓고 강하게 기억하기에
그것을 되돌려주려 하는 노력을 이후 하게 된다고 본다.
그러나 언제 문어가 사람을 잡아서
괴롭히는 것을 보았는가.
그러나 만일 사람이 그런 행위를
사자나 코끼리나 들소의 새끼에 대해서 행하면
그 부모가 대단히 예민하게 이에 반응하는 것을
놓고 충분히 살필 수 있다고 본다.
또 그런 상호관계는
사람과 사람의 관계에서는
대단히 많이 보게 되는 것도 사실이다.
거리에서 누군가가 다른 누구를 심하게
폭행한다면
그 장면만 놓고 보면
그렇게 폭행을 행하는 이가 나쁘다고 보게 되지만,
그런데 막상 그 전후관계를 살피면
오히려 폭행을 당하는 이가 더 나쁘다고 보아야 할 경우도
많은 것이다.
알고보면 그 피해자가 과거에
그 상대의 가족을 다 잔인하게 해쳤다던지
수많은 재산상 피해를 주었다던지
등등의 사유가 있어서
그런 장면이 나타난다고 이해하게 되는 것이다.
그런데 좁고 짧고 얕게 이를 관찰하면
이런 관계도 없다고 주장하거나,
비록 사람들 사이에서는 그런 내용이 있지만,
다른 생명과의 관계에서는 그런 관계를
볼 수 없다고 생각하는 경우도 많다.
그러나 바이러스 세균 기생충을 비롯해
온갖 생명이 다 자신에 대한 애착을 갖고
또 다른 생명에 대한 반응형태가 유사한 가운데
이들이 서로 얽혀서 그런
고통을 주고 받는 관계에 놓인다고 보게 되는 것이다.
여하튼 여기서 평소 자신이나 남을 이러한 형태라고 생각하고
또 이들 모습에 집착을 갖고 임하는 것이
어떤 문제가 있고
왜 그것이 생사고통에 자신을 묶고 돌게 하는 기본요소가
된다고 하는가를 자세히 살펴야 한다고 본다.
유무논의의 핵심은 바로 이런 이해를 통해서
자신이 생사고통을 벗어나게 되는 것이
1차적 목표이기도 한 것이다.
그런데 이 논의에서 또 다른 부작용을 갖게 되어도
곤란하므로 미리
유무 논의의 결론을 대강 요약해 제시한 것이기도 하다.
저런 모습에 자신이 생각하는 자신이나 남은
얻을 수 없는데
그러나 이런 내용이 완전히 무관한 것도 아닌 것이다.
그래서 이를 어떤 소원이나 희망을 성취하는
과정과 관련시켜서 살펴보기로 한다.
이미 빵을 놓고 비유를 들었는데
현실에서 빵을 먹기를 희망하는 경우
어떤 경우에 그 희망이 뜻과 같이 성취되었다고 하는가를
놓고 이 문제를 먼저 살펴보자.
빵을 먹고 싶다는 희망은
관념영역에서 만들어 갖는 내용이다.
이런 희망을 가질 때 보통은
그 빵에 상응한다고 보는 감각현실을 얻지 못한 상태인 경우가
대부분이다.
그래서 그런 빵을 먹고 싶다고 '희망'을 갖는 것이다.
이것은 생각으로 만들어 갖는 내용이라는 의미다.
그런데 이런 희망이 실현되고 성취된다고 여기는 순간은
그런 생각을 두번 똑같이 좀 더 세밀하게 생각했다고 해서
그 희망이 성취된 상태라고 하지는 않는 것이다.
이 경우 희망이 성취된다는 것은
감각현실에서 빵에 해당하는 내용을
자신이 취하고 먹는 경우에
빵을 먹었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 상황에서 그런 감각현실을 놓고
이전에 자신이 가진 그런 희망이 뜻과 같이
성취가 되었다고 생각하게 되는 것이다.
이 경우 그 감각현실에 그런 내용을 얻을 수 없다고
기본적으로 제시하지만,
그러나 아무런 감각현실을 놓고
예를 들어 모래나 바위를 놓고
그런 내용이 성취되었다고 여기는 것도 아닌 것이다.
이 관계가
그런 감각현실이 그대로 곧 그런 관념분별인가
그리고
그런 감각현실을 떠나서 그런 관념분별을 얻은 것인가라고
문제를 제기해서
감각현실과 관념분별의 관계를 살피는
것과 관련이 된다고 본다.
빵을 먹는 현실상황이 곧 그런 분별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아무런 현실상황을 놓고 그것이 곧
빵을 먹는 상황이라고 보는 것도 아님을 나타내는 것이다.
그래서 어떤 희망이 뜻과 같이 성취되었다고 할 때는
어떤 감각현실의 한 단면과
관념분별이나 희망의 내용의
관계가 서로 어떤 상태가 될 때를 가리키는가를
먼저 잘 확인할 필요가 있다고 본다.
[...]
일단 현실에서 자신이나 남이라고 보는 부분이
다음 사진의 내용과 같다면
이것이 무슨 문제를 갖는가를 살피기로 하자.
일단 이런 부분이 어떤 지위의 내용인가를 확인해보자.
이전 조각글에서 눈을 뜨고 감는 실험을 반복할 필요가 있다고
제시했는데
이미 과거에 많이 제시한 자료그림이
이 이해에 도움이 된다고 본다.
[img2-02] [그림] 08pfl--image/진리의오류55.jpg
http://buddhism007.tistory.com/228 ☞○ 마음과 색의 의미에 관한 논의
http://thegood007.tistory.com/1172 ☞○ 진리에 관한 수많은 오류와 착각의 문제
03fl--ghpt/r1030.htm ☞○ 진리에 관한 수많은 오류와 착각의 문제
이 그림은 1이 눈을 감았다가 뜰 때
보게 되는 세상의 모습을 위와 같이 그림으로
나타낸 것이다.
자신이 직접 눈을 감고 뜨는 실험을 해서
위 그림이 나타내는 내용을
현실에서 확보한 상태에서
위 그림의 내용을 검토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보게 된다.
그리고 위 그림은
1 이라는 사람이 또 다른 사람 2 를 놓고
2 가 4 라는 꽃을 대하는 상황을
관찰하는 상황을 표현한 것이다.
그래서 1은 자신의 모습도 저와 같이 보고
또 한편 2 나 3 과 같은 다른 사람도 저처럼 보고
그리고 2 에게 눈을 뜨고 감는 실험을
자신처럼 행하게 해서
그가 그 상황에서 무엇을 보고 얻는가를
옆에서 관찰하는 상황을 나타낸 것이다.
그래서 이 내용을 통해
처음에 1 과 같은 부분
즉 앞에서 제시한 사진과 같이 보이는 모습을
자기 자신이라고 이해하는 것이
어떤 문제가 있는가를 살피는데 도움을 주는 그림이라고 할 수 있다.
그간 많이 반복했는데
조금 쉽게 설명하면
1 이 눈을 떠서 1 이나 2, 3을
자신이나 남이라고 보게 되는 것은
위 그림에서
2 가 눈을 떠서 어떤 내용을 5 ^ 처럼 얻는다고
가정할 때
2 의 마음에 머무는
2 ^ 나 1^ 나 3 ^ 와 같은 내용을
2 자신이라거나 1 이나 3 이라고
이해하는 것과 같은 상황인 것이다.
그래서 기본적으로 이런 생각은
엉터리임을 이해해야 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런 내용이 엉터리라고 지적하면
대부분 2 가
2 ^ 나 1^ 나 3 ^ 와 같은 내용을 얻게 되면
그 상황에서는
그 마음 외부에 그런 내용과 상응한 내용으로서
2 나 1 또는 3 과 같은 내용이 있는 것이어서
그런 이해는 크게 잘못된 이해가 아니라고
주장하는 경우가 있다.
이것이 바로 prince 님의
something special 이론과
representative 이론의 골격이기도 한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는
이렇게 이 관계를 이해하는 것을
침대에서 누어 황금꿈을 꾸었다고 해서
침대에 황금이 있다고 주장하는 경우와
사정이 같다고 지적하는 것이다.
이것은 또 짜장면을 배고플 때 먹을 때 좋음을 느꼈다고 해서
좋음이 짜장면에 들어 있다고 생각하고
주장하는 것과 사정이 같다.
이미 자신도 그렇지만, 2 나 3 도
눈을 뜰 때 그런 내용을 얻고
눈을 감으면 그런 내용을 얻지 못하는 것이다.
그래서 자신이 눈을 뜨거나 감는 것과 관계없이
자신 외부에 실재하는 내용이 있는가.
있다면 그것이 무언가를 놓고
실재에 대한 논의를 행한 것이다.
그런데 위 주장은
자신이 눈을 떠서 본 내용이
그대로 외부에 실재한다고 하는 주장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그러나 현실에서 C 를 얻는 것은
a + b => C 의 관계로 C 를 얻게 된다고 이해한다면
그런 C 는 a + b 에서는 얻을 수 없는 사정을 통해
쉽게 확인할 수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만일 그렇게 이해하지 않으면
C => C => C => C => C
이런 관계로 C 를 얻는 관계를 이해해야 할 것이다.
여하튼 이처럼 마음 밖에 실재하는 내용을
찾을 때
위와 같이 주관이 관계해야만 내용을 얻게 되는 주체는
그런 실재를 끝내 얻지 못하고
따라서 실재는 불가득 공하다고 표현하게 된다는 것이
이 문제에서 취하는 결론이기도 하다.
이런 결론이 도출되는 과정은 별도로 살피게 되지만,
여하튼 이 입장에서는
어떤 이가 눈을 떠서 어떤 내용을 얻을 때
그 내용 그대로 일치하는 외부 실재가 있다고 하는
입장을 취하지 않는 것이다.
그리고 어디까지나 현실에서
어떤 이가 자신이라고 보는 내용은
그 주체가 그렇게 마음에 얻는 내용만 가지고
그것을 자신이라고 여기는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2 라는 이가 눈을 떠서 얻는 내용은
모두 다 함께 감각현실이라는 지위를 갖는 내용들인 것이다.
즉 위 그림에서 5 ^ 로 표현된 내용 전부가
다 함께 2 의 마음에 얻어진 감각현실인 것이다.
그래서 이들 안의 내용은 그처럼 같은 감각현실인 것인데
왜 여기서 2 ^ 는 자신이고
1 ^ 나 3^와 같은 부분은 남이라고
분별을 행하게 되었는가.
이 부분을 함께 살펴야 한다고 본다.
본래 2 ^ 와 같은 부분은 2 자신이 아닌데도
그러나 현실에서
2 ^ 와 같은 부분을 2 자신이라고 2 가 여기게 되는데에는
일정한 사정이 있다고 보는 것이다.
그것은 공연히 2 가 그런 감각현실을 얻고
공연히 그런 일정한 부분을 2 자신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또 아닌 것이다.
즉 2 가 현실에서 아무 근거도 없이
감각현실 가운데 하늘이나 바위와 같은 부분을
어느날 2 자신이라고 여기는 것처럼
아주 근거없이 그런 망상분별을 일으키고
그 상태로 삶을 살아가게 된 것이라고
보는 것은 아닌 것이다.
그래서 그런 망상분별을 일으키게 된 데에는
조금 더 복잡한 기본 사정이 있다고 제시하게 되는 것이다.
그것은 2 가 위와 같은 감각현실을 얻고 나서
계속 생활하고 경험을 하는 가운데
2 ^ 와 같은 부분을 자신이라고 보게 되는
일정한 사정이 있기에
그렇게 2 ^ 와 같은 부분을
자신이라고 망상분별을 일으키게 된다고
제시하는 것이다.
[...]
우선 자신의 망상분별이 전개되는
기본 사정을 살펴보자.
유무의 논의가 주는 효용이란
1 차적으로 이 망상을 치유하고
올바른 관을 갖게 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mun 님이 암파리 화두를 통해 다음과 같은 실험을 했다고 하는데
이 내용이 자신의 정체를 확인하는데
도움이 될 수 있다고 본다.
먼저 이와 비슷한 실험을 소설로서 행한 이가 있다고 한다.
카프카의 변신이라는 소설에 이와 비슷한 내용이 나온다.
우선 자신이 위 사진 가운데 하나라고 가정하자.
맨 마지막 사진을 본다면
자신이 눈을 떠서 세상모습을 볼 때
저런 배경과 함께 자신의 모습 일부를 보게 되는 것이다.
처음 이런 문제를 제기했다.
눈을 떠서 그 모습을 보게 되었다는 것은
이 각 부분이 다 사정이 같은데
왜 일정한 부분은 자신이라고 보고
나머지는 다른 외부 세계라고
망상분별을 일으키게 되었는가.
그 사정을 살펴보자는 것이다.
그런데 mun 님이 다음과 같은 상태가
어느 순간 되었다는 것이다.
이미 이 내용을 상-락-아-정이란 내용에
배당해서 살핀 적이 있는데
또 비슷한 내용을 살펴보기로 한다.
어느 순간부터
자신이 눈을 뜨면 늘
자신 옆에 의자가 항상 보인다는 것이다.
태어난 순간부터 지금까지 그랬다고 가정하자.
그런데 의자는 그런데
다른 부분은 또 그렇지 않다고 여기게 된다는 것이다.
그것만이 아니라는 것이다.
자신이 움직이겠다고 생각하고 임하면
그 의자가 자신의 뜻처럼 움직인다는 것이다.
또 그것만이 아니라고 한다.
의자를 어떤 다른 사물에 접촉시키면
이를 통해 어떤 감촉이 느껴진다는 것이다.
그런데 또 다른 사물과 다른 사물을 접촉시키면
그 때는 이와 다르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렇게 늘 의자를 대하고 의자를
움직이면서 생활하다보니
그 의자가 대단히 소중하게 여겨지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 의자에 해당하는 부분이
현실에서는 저 사진에서 사람으로 보게 되는 부분과
같은 내용이라는 의미다.
여기서 카프카의 변신은
이런 내용을 파리나 이상한 곤충의 몸을 놓고
적용시키는 내용이라고 할 수 있다.
이상하지만, 어느순간부터
앞에서 의자에 대해서 일어난 일이
그렇게 계속 곤충의 몸으로 보는 부분에서
일어난다는 것이다.
처음에는 대단히 낯설고 이상해서
계속 불편하게 느끼고
고통을 호소했는데
그러나 시간이 지나가면서
이것이 익숙해져서
몸을 움직이려고 하면 날개가 마구 움직여서
공중도 날아다니고 그렇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런 가운데 자신의 몸도 그렇게 익숙하게
받아들이게 될 뿐만 아니라,
남자 사람이 엉덩이가 풍만하고
가슴이 풍만한 여자를 아름답다고 여기게 되듯
어느 순간 날개에 윤기가 나고
다리가 날씬한 파리가 아름답게 여겨졌다는
넓은 의미의 생명 존중과 박애 정신을
갖게 되었다는 것인데
그 상태에서는 거꾸로 사람 모습을 한 이들이
나타나면 징그럽게 여겨지고 무서워서 자꾸 피하게
되었다는 그런 이야기다.
우선 자신이 익숙한 자신의 몸과 형체가
너무 다르고
또 가까이 가면 그 큰 몸으로 무언가를 휘젖고
날려서 자신을 해치려고 하기에
그렇게 할 도리밖에 없게 되었다는 사정이다.
재미가 없고 공포스럽게 여겨질 수 있는 소재인데
이 내용을 또 다시 거꾸로 적용하면
이제 또 파리가 사람이 되는 변신도
행해진다고 볼 수 있다.
원래 mun 님이 암파리 화두를 들고 수행을 하는 가운데
경전에 소개되는 여환삼매에도 도전을 하였다는 것인데
직접 파리가 한 번 되보지 않으면
왜 그 넓고 넓은 공간에 서로 자유롭게 날아다닐 수 있는
파리들이 어느 순간 한 점과 같은 곳에 서로
포개어져 사랑을 나누고 있는가 이런 의문을
해결하기 곤란하다고 여겨서
그런 시도를 해보았다는 것인데
매번 그런 시도를 할 때마다
파리로 변신은 되는데
파리 상태가 되면
그 이전에 익힌 모든 내용이
치매 상태가 된 것처럼
잘 생각이 안 나서
사람으로 재 변신하는 것이 실패하곤 해서
그 때마다 본인의 도움이 필요해서
본인이 작업하는 모니터에 붙어서
SOS 를 요청하고는 했다는 것인데
본인이라고 그런 상황에 무슨 방안이 있겠는가.
여하튼 공상소설 비슷하게
변신과 관련된 내용을 간략하게 제시했는데
지금 자신이 눈을 떠서 보는 모습이
아주 익숙하게 여겨지고
좋은 것으로 여겨질 수는 있을 지 모르지만,
그 사정은 혐오스런 파리가 자신의 몸을 놓고
그것을 자신이라고 여기고
또 그에 대해 애착을 갖게 된 과정과
별 차이가 없다는 점을 여기서 확인할 필요가 있다고 본다.
자신이 자신의 몸으로 보는 부분을
자신의 몸이라고 망상분별을 일으켜
대하게 된 사정도 앞의 사정과 크게 다르지 않고
온갖 피 고름 땀 소변 대변 각종 바이러스 세균
기생충 등등으로 가득하고
흉칙하다고 할 각 기관으로 구성된 것도
파리의 상태와 그다지 다르지 않다고 할 것인데
그러나 자신은 깨끗하고 좋은 상태고
다른 생명은 그렇지 않다고 여기면서
대하게 되는 과정도
자신이나 파리나 다 사정이 비슷하다고 보아야 하는 것이다.
오죽하면 사람이 파리나 바퀴벌레를 손으로
접촉하면 그런 곤충도 더러운 생명체가
자신을 만졌다고 여겨서
열심히 이를 닦아낸다는 보고도 있다.
그래서 입장과 상태는 다르다고 할 것이지만,
결국 이들이 다
공통된 형태의 망상분별을 겪는
일란성 쌍동이 상태라고 보게 되는 것이다.
그것은 또 광대하게 외계인을 포함해서
모두 다 장차 성불할 존재로 존중을 해야 하는
사정도 된다고 보지만,
여하튼 그렇지 못하고
아직 망상분별을 바탕으로
자신의 정체를 생각하는 상태는
일단 그 망상 증상이 일란성 쌍동이처럼
상태가 비슷하다고 보게 되는 것이다.
이미 위와 같이
왜 현실에서 자신이 자신이라고 보는 부분을
자신이라고 보게 되는가에 대해서
상락아정의 관계를 들어서
설명하였는데
이는 그 근거가 옳다고 그렇게 제시한 것이 아니다.
그처럼 그런 부분을 자신이라고 볼만한 사정이
일부는 있는데
그것이 하나같이 오류에 바탕한 판단이라고
제시하기 위해서
먼저 위 내용을 제시한 것이다.
그래서 이런 것을 자신이라고 여기고
집착하게 되면
평소 자신의 신발에 붙은 껌이나
의자가 늘 그렇게 파악된다고 해서
그 껌이나 의자를 자신이라고 여기고
누군가 그 껌이나 의자를 발로 차거나
시비를 일으키면 그 상대에게 분노를 일으켜서
싸우고 병원 중환자실 아니면 감옥에 가기도 하고
또 어떤 때는 그 껌이나 의자를 아름답게 꾸며 보려고
치장도 하기도 하고
그러다가 그 껌이나 의자가 벼량에 떨어지거나
불 타는 곳으로 들어가면
자신도 이와 함께 따라 들어가려고 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런 사정이 일부 있음은 인정하지만,
그러나 자세히 살피면
그 껌도 그렇고
그 의자도 그렇고
매 순간 조금씩 변화하면서 다른 것으로 교체되는 것들이어서
늘 그 형태로 있는 것도 아닌 것이고
또 자신의 뜻과 같이 움직인다고 하지만,
그러나 버스 운전사가 몰고 다니는 버스와 그 버스 안의 승객의 관계처럼
일정한 상황에서는 자신의 뜻처럼 함께 움직이다가
그러나 중요한 순간에
마치 고장나서 폐기되는 버스나
또는 목적지에 다 왔다며 바삐 내려 버리는 승객처럼
자신의 뜻대로 움직인다고 본 그 몸들이
하나같이
자신의 뜻과 달리 늙고 병들고 죽어서 사라지는 내용으로서
자신에게 고통을 주는 것들인 것이고
또 자신의 몸이라고 본 부분이
어떤 다른 대상과 관계해서
어떤 내용을 얻게 하는 일도 없고
사실은 오히려 마음 안에
쉼없이 들락날락 거리는 손님이고 티끌[객진]이었다는 것이고
그래서 아무리 파리의 상태에서
파리의 몸을 놓고
엉덩이가 풍만해서 아름답다거나
날개가 윤기가 나서 멋있어 보인다고 생각하는 것은 자유지만,
파리만 그것을 인정할 뿐
다른 생명은 별로 그렇게 인정하지 않는 것으로서
오물을 버리기 위해 임시로
담아 놓은 가죽 주머니와 같아서
겉은 그럴 듯해도
속이 상당히 구토증을 유발시키는 형태라는 것이
객관적인 판단내용이라고 본다는 것이다.
그래서 위와 같은 기준으로
자신을 찾고자 한다면
마음에 들어온 손님과 티끌과 같은 그런 내용을
자신이라고 보기 보다는
그런 내용을 매 순간 얻어내는 마음을 차라리
자신의 본 정체로 보는 것이 그나마
낫다고 일단 보게 되는 것이다.
그런데 그렇다고 해서
현실에서 자신의 몸이라고 보는 부분이
아무 관련이 없는 것인가 하면
그렇지도 않은 것이다.
앞 내용만 강조하면
정말 망상에 의해서 아무 관련없는
파리의 몸을
자신이라고 여기고 임하는 것처럼
생각할 수도 있는데
그러나 앞에서 본 것과 같은 내용이
일부라도 얻어지게 된 사정이 있다는 것이다.
그것은 어떻게 비유하면
자신이 매일 바꿔 입는 옷이나
신고 다니는 신발과
자신의 몸의 관계와 비슷하다고 비유할 수 있다고 본다.
옷이나 신발이
몸과 늘 같이 부착되어 다니기에
위와 같은 속성을 같이 갖는다고 할 수는 있더라도
그렇다고 해서 옷이나 신발을
자신이라고 보지는 않지 않은가.
즉,
옷이나 신발이 자신의 몸과 관련은 되지만,
그러나 몸처럼 본질적이라고 보지는 않는 것이다.
그런데 자신의 마음에 얻어져 파악되는
이런 자신의 몸도
위 비유의 옷이나 신발과 같은 상태라고
보게 되는 것이다.
거기에는
처음 자신의 눈으로 본 전체 모습 가운데
일부가 앞과 같은 특성 때문에
이를 놓고
분별 영역에서 자신이라고 분별을 행하게 된 사정처럼
원래 이번 생에서
삶을 시작하는 단계에서
처음 근본정신과 이 근본정신이 분화파생시킨 제 7 식이
이와 유사한 관계를 통해서
일정한 부분을 '자신'이라고 망상을 일으킨 다음
이 위에 위와 같은 여러 기관과
감각을 담당하는 정신과
분별을 담당하는 정신들을 분화 파생시킨
사정이 그 기초 사정이라고 제시하는 내용이기도 하다.
결국 그런 상태이기에
현실에서 감각하고 이를 놓고 분별을 행하는 것도
이에 준해서 그렇게 행해지고 있는 사정이 있는 것이다.
그런데 자세히 이를 놓고 살피면
이것이 파리에서 사람으로 변신하고
사람이 파리로 변신하면서
매순간 그렇게 자신의 정신이 얹혀져서 기능하는
그런 부분을 그렇게 파악하여
자신이라고 여기게 되는 망상분별이 전개된
사정이 있다고 제시하는 내용이다.
글이 상당히 길어지는데
이런 사정을 자세히 이해하고
자신이 현실에서
눈을 떠서 자신이라고 보는 부분은
자신의 마음에 들어온 감각현실이고
여기에 대해 무엇이라고 분별하는 것은
마치 시인이 자신 생각대로 시를 쓰는 것처럼
자유이기는 한데
그런 내용이
그 감각현실에서는 얻어지지 않는 내용이라는 것이고
또 그런 분별 내용에는 역시 그런 감각현실이 들어 있지 않다는 점이고
그래도 이런 상황에서 무엇을 자신이라고 생각해야 한다고 하는가하면
어떤 철학자처럼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고 말하면서
그런 분별과 생각을 행하는 정신을 놓고 자신이라고 볼 수도 있겠지만,
그러나 잠자거나 의식을 잃어서 그런 생각을 못하면
이제 그런 자신은 없게 된다고 할 것인가.
그렇지도 않은 것이다.
그래서 자신이 자신의 몸이라고 보는 부분이 불타 사라져 없어지거나
자신이 분별을 행하는 정신이 기능을 정지한다고 해도
여전히 소멸되지 않고
분주히 이전의 삶의 기간 동안 행한 업을 바탕으로
새로운 세계에서 새로운 생명형태로
옷을 갈아입고 삶을 살아갈 상태를 갖추는
그런 내용을 일단
자신이라고 보아야 한다고 제시하는 것이다.
물론 이 역시 앞에서 유무 논의를 살필 때
살핀 것처럼
진짜는 아니지만,
그러나 무한한 생사를 통해
어떤 수행자가 수행을 게속해가면서
생사를 벗어나고
중생을 제도하고 불국토를 장엄하고
성불한다고 할 때의 주체는
이 부분에 초점을 맞추어야 한다고 제시하는 것이다.
이미 한 인턴연구원이 성장 중에
어느 순간 사라져 없어졌다고 제시한 바 있는데
지금도 현재 진행형이다.
지금은 지금대로 자신이라고 보는
어떤 내용을 잘 포착하면서
지낸다고 보지만
의학적으로나 물리적으로나 정신적인 구성요소를 다
나열해 살펴보아도
여기에 10 년 전후로 공통점을 찾아내기가
대단히 곤란한 것이다 .
그런 공통점을 가지고 그 10 년 전후의
다른 모습들을 하나의 주체로 연결짓는다고 한다면
차라리 자신이 매일 먹는 김치의 재료가 있는
배추밭에서 자신의 생체와 공통점을 찾거나
아니면 매일 자신이 배설해낸 어떤 배설물들이
모여있는 곳에서 공통점을 찾거나
그도 저도 아니면
사람이 가득한 어떤 남대문 시장 같은 곳에
오가는 그 모든 사람을
다 자신이라고 여기는 것과
사정이 비슷하다고 보아야 하는 것이다.
그런 사정으로
10 년전 인턴연구원이나
5 년전 인턴연구원이나
현재 순간의 인턴연구원이
서로 완연히 다른 내용이라고 보지만,
그래도 이런 긴 기간 동안
수없이 다른 형태로 변화해온 이들 여러 모습을
다 함께 이어서
이 모두가 하나의 주체가
계속 연구하고 수행을 해온 과정이라고 본다면
그렇게 각기 다른 모습과 내용을
하나의 주체로 이어서 보게 하는 요소는
바로 앞과 근본 정신에서 찾아야 한다고
제시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 근본정신은 이런 전체의 과정을 통해
앞에서 살핀 상-락-아-정에 해당하는 내용을
그에 가장 유사하게 파악할 수 있기에
이런 근본정신을 그런 무한한 기간 수행을 해나가는
주체로 보게 된다는 내용이다.
그러나 이런 근본정신 또한
그것이 영원불변하고 고정된 실체가 아닌 것이어서
진짜의 나라고 할 것은 아니고
그런 진짜의 나는 없는 것이고,
그 실재는 역시 얻을 수 없고 공한 것인 한편
생사 현실에서 문제삼는 것이 이런 실재 영역에서는
본래 그처럼 없고 얻을 수 없다는 것으로서
본래 청정한 니르바나의 상태라고 제시하는 것이다.
그런 가운데
그 주체가
'본래는 그런 것을 얻을 수 없음'을
스스로 밝게 비추어 관함으로써
생사 현실에서도
그런 본래의 청정한 니르바나의 상태와 상응하게
여여하게 니르바나의 상태를 얻고
그래서 생사고통에서 벗어나게 해주는 측면이기도 한 것이다.
그러나 앞과 같은 사정에도 불구하고
그런 바탕에서
비록 실답지는 않지만,
매 생마다 그렇게
각기 특이한 감각기관과 분별을 행하는 의식을
생성시켜서
그처럼 실답지 않다고 할 내용을 얻어 나가는 측면은
바로 이런 영역에서
앞과 같은 깨달음도 얻고
그런 바탕에서 그처럼 전도몽상에 바탕해
생사고통을 겪는 다른 중생을 제도하고
불국토를 장엄하고
성불하는 측면이 된다고 제시하는 것이다.
즉, 이 과정에서
실답다고 할 진짜의 내용이 없다는 측면은
생사고통과 그것을 발생시키는 번뇌를 제거하고
현실에서도 본래 청정한 니르바나와 상응하게
여여한 상태로 임할 수 있게 하는 기능을 갖는 것이고
또 한편 진짜가 아니고 실답지는 않지만,
현실에서 그런 내용을 그렇게 얻는다는 것은
또 이런 영역에서 좋고 좋은 상태를
수행을 통해서 만들어 내
복덕과 지혜를 구족한 상태를 성취하게 하는 기능을
갖는 측면인 것이다.
그리고 또 자세히 살피면
현실에서 생사고통을 겪게 하는 주된 요소라고 보는
감각현실이나 관념분별은
그 자체로만 놓고 보면 또 그런 내용을
실답게 얻을 수 없는 것이기도 하고
또 한편 이런 내용 역시
앞에서 본 본 바탕이라고 할 실재를 떠나서
그런 내용을 얻는 것도 아닌 것이어서
생사현실 즉 청정한 니르바나라고
보게 되는 것이기도 하다.
물론 그렇게 보면 생사 즉 열반이라고 보게 되지만,
그러나 그 내용 하나하나를 그렇게 대하지 못하고
처음처럼 망상환자가 망상분별을 일으키고
그것이 사실이라고 믿고 대하거나
또는 현실에서 시인이
시를 자신의 희망대로 마음껏 쓰고
그것이 사실이라고 여기고 대하는 것처럼
망상분별을 일으키고 나서
그것이 현실내용이라고 여기고 대하게 되면
앞의 관계가 뒤바꿔져서
청정한 니르바나 즉 생사고통
의 상태가 된다고 보아야 하는 것이다.
그러나 만일 사정이 그렇지 않으면
이런 관념분별은 사실은 그 자체로는
실다운 생사고통도 없는 것일 뿐 아니라,
바로 이런 관념분별을 통해서
감각현실에 대해 각기 분별도 행하고
이를 통해 본 바탕인 실재의 사정도 그렇게 관할 수 있게
도움을 주는 내용으로서
실상을 꿰뚫어서 현실을 올바로 파악하게 하는 수단과 방편으로
기능하게 된다고 보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감각현실과 관념분별등이
앞에서 살핀 것처럼
진짜라고 할 내용도 아니고
실재 그 자체의 지위에 있는 내용도 아니라고 해서
무조건 이를 부정하고 제거하는 것을
수행이라고 보게 되는 것은 아니다.
그리고 이런 사정으로
오히려 이 두 측면을 하나도 잃지 말고
수행자가 다 잘 성취해야 한다고 제시하는 것이기도 하다.
금강경에서
보시하는 이나 받는 이나 보시하는 물건이나
보시하는 행위도 얻을 수 없지만,
+
사정이 그렇기에 상에 머물지 않는 가운데
보시받을 이를 찾아서
보시할 것을 정확하게 잘 보시를
무량하게 해야 한다고 제시하고
+
이렇게 행하면 이로 인해
무량한 복덕을 받게 된다.
+
그러나 수행자는 그런 복덕에 집착하지 않고
복덕을 받지 않는다.
그리고 제도할 중생이나
재도하는 이를 얻을 수 없지만,
+
그러나 수행자는 역시 이런 사정을 잘 관하고
아상 인상 수자상 중생상을 갖거나
또는 이를 취하거나
이에 머물지 않고
집착을 갖지 않는 가운데
+
온갖 종류의 중생을 다 제도한다.
이런 내용을 중첩적으로 제시하면서
이 양측면의 내용을 수행자는
하나도 빠뜨리 않고
다 원만히 성취해야 된다고 제시하는 것이다.
그것은 위 측면에서
어느 한 부분이 빠지면
그것이 곧 그 수행자의 수행을
원만하게 성취하게 하는데 장애가 되는 것이다.
더 나아가 그렇게 되면
잘못된 분별과 집착에 바탕해서
공연히 업의 장애와 번뇌의 장애와 지혜의 장애를 만들어내게 되고
차별없이 공한 가운데
중생제도나 성불과는 별 도움도 되지 않고
복덕과 지혜를 얻는데도 별 도움이 되지 않는데도
그런 사유로 생사 고통을 심하게 받는 지옥에 들어가
지옥의 공 수행자로 임하게 만드는 중요한
사유가 된다고 제시하는 것이다.
그래서
결국 유무 논의가 현실에서
갖는 효용은
바로 앞에 나열한 내용들과 같은 부작용은 다 제거하고
생사고통을 벗어나 청정한 니르바나를 확보하고
또 무량한 복덕과 지혜를 구족하게 만들게 하는 부분이
이 유무논의의 핵심적 효용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
실체와 실재
그리고 감각현실과 관념분별의
유무 논의와 그 효용을 살폈는데
이제 수행에서 핵심적인 내용이라고 할
좋음이나 가치, 선 등과 관련한 유무 논의의 효용을
살펴야 한다고 본다.
이미 살핀 것처럼 이 유무 논의의 핵심은
현실에서 문제삼는 그 일체가 실재가 공하고
그에 해당하는 진짜가 없다고 제시하고자 하는 것이다.
그래서 좋음이나 선이나 아름다움이나 가치 이런 내용도
이와 사정이 같다.
이런 내용도 그 실재가 공하고
진짜라고 할 내용이 없는 것이 기본 내용인 것이다.
그런데 이미 반복했듯
본래 그런 내용을 얻을 수 없고
생사고통도 얻을 수 없어서 본래 청정한 니르바나는
본래 본 바탕이 그렇다는 내용인 것이다.
즉, 수행자가 수행을 하건 않건
이 부분에서는 어떤 차별적인 상태를 얻을 수 없는 것이다.
그런데 수행자가 이런 사실을 관하는 것은
본 상태는 생사고통을 얻을 수 없는 청정한 니르바나인데도 불구하고
그러나 현실에서는 생사고통을 극심하게 겪는 것이
문제가 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수행자가
본 바탕이 청정한 니르바나라는 것을 관하고
현실을 이에 상응하게 만들려고 노력하는 것이고
더 나아가 현실에서 복덕과 지혜와 수명을 무량하게
구족하려는 취지이기도 한 것이다.
이는 본 바탕이라고 할 실재 영역 등에서는
그런 생사고통을 얻을 수 없는 청정한 니르바나이니
현실에서 문제되는 그런 생사고통은
그대로 두어도 관계없다.
이런 내용을 제시하는 것이 아니다.
이런 가운데
실재에는 그 내용을 얻을 수 없는데도
현실에서 각 주체는 감관을 통해 감각현실을 얻고
또 이를 바탕으로 관념분별을 일으키는데
이들이 모두 꿈과 같고 환영과 같이
실답지 않는 내용임을 제시하는 것인데
이 가운데 더 실답지 않다고 할 것이
무엇을 놓고 좋다거나 나쁘다고 느끼는 내용이라고
할 수 있다.
예를 들어
어떤 것을 놓고 그것이 물인가 바위인가가 문제되면
그래도 적어도 감각기관과 분별기관이 엇비슷한
사람들 사이에서는 이에 대해 그다지
다른 입장을 찾는 것이 드물게 된다.
이것이 사실에 관한 진리판단이 갖는 성격이라고 할 수 있다.
다만 이것은 어디까지나, 같은 상태라고 할
사람들 사이에서의 상황인 것이지,
다른 생명체까지 고려하면
그것은 또 그렇지 않다고 보게 되는 것이다.
그런데 이제 그것을
사람들 사이에서는 대부분 물이라고 공통적으로 인정해도
이제 그 물이 좋은가 나쁜가의 문제에서는
각 입장따라 제각각 다른 입장을 취하게 되는 것이다.
이미 앞 조각글에서 그 사정을 살폈는데
사막에서 물을 오래 먹지 못한 입장에서는
물은 황금보다 더 소중한 가치를 갖는다고 보게 되고
보통의 경우는 그저 물은 물이라고 보게 되는데
물고문을 당하는 상황에서의 물은 또
지극히 고통을 주는 것이라고 보게 되는 것이다.
또 뱀이 물을 먹으면 독을 만들고
벌이 물을 먹으면 꿀을 만든다는 이야기처럼
같은 재료라고 해도
그것을 또 어떻게 어떤 취지로 사용하는가에 따라서
그 가치평가가 다 다르게 된다고 보는 것이다.
그래서 이 좋고 나쁨이 과연 있는 것인가
없는 것인가의 논의가 필요하다고 보게 된다.
그런데 여하튼 이런 사정으로
좋고 나쁨의 문제는
그 존재성이 가장 실답지 않다고 보게 되는데
그러나 현실에서 수행을 하는 데 있어서는
이것이 또 가장 핵심적인 주제가 되게 되는 것이다.
단지 무엇이 있고 없고를 따지거나
어떤 것이 이것인가 아닌가를 따지는 문제는
최종적으로 그것이 좋고 좋은 상태를
현실에서 성취해내는데 이바지 하는 내용이 되지 않는다면,
한 마디로 공연히 쓸데없는 논의를 한다는
평가를 받게 마련이다.
[...]
다른 이가 좋고 나쁨과 관련해
심각한 고통을 호소하는 상황에서
이를 보고 옆에서 웃으면 곤란한 것이다.
경전에는 과거 부처님이 전생에
어린이였을 때
동네 어른들이 물고기를 잡는 것을 보고
옆에서 웃었던 일이 있었다는 것이다.
그런 일로 인하여
부처님 당시 부처님 종족이
이웃 국가의 침입을 받아
모두 멸족당하고
당시 부처님은 부처님대로
자신의 종족이 전멸당하는 상황에서
머리가 찢어질 듯 아픔을 겪었다는 것인데
그 인과관계를
위 사건과 관련시키고 있음을 볼 수 있다.
물론 가까운 원인은
석가족이 과거에
신분이 낮은 여인을 공주로 둔갑시켜서
이웃국가에 보내고 그 여인으로부터
이웃 국가의 왕이 태어난 일이 원인이었던 것으로
제시된다.
그리고 그 왕자가 어릴 때
어머니의 고향이라고 방문을 했는데
석가족 사람들이 이사실을 놓고
왕자를 차별하고
모욕을 주었던 일이
나중에 그 왕자가 석가족을 침입해 멸족시키게 된
원인이라고 보게 되는 것이
현실에서의 일반적인 판단이라고 보게 된다.
그러나 여하튼 부처님은 그런 가까운 원인을
제시하기 보다는 앞과 같은 일들이
이와 같은 일과 관련되었다고
제시하는 것이다.
자동차 사고가 나면
가장 가까운 원인은
물론 그 자동차를 운전하는 이가
당시 운전을 잘 하지 못한 것에서 원인을 찾지만,
그러나 멀리 원인을 살피면
처음 자동차를 사는 날
있었던 어떤 사건도 그 원인이라고 보게 되는 것과
사정이 같다.
여하튼 자신이 심한 고통을 겪고 불행을 겪을 때
옆에서 좋아하거나 웃으면
자신의 심정이 어떻게 되는가를 놓고 생각하면
그 인과의 관계를 충분히 살필 수 있다고도 본다.
[...]
여하튼 석가족이 부처님 당시 멸족한 것은
과거 물고기였던 한 생명이
나중에 왕으로 모습을 변신해
그것을 그처럼 복수를 해서 그렇다는 것이
석가모니부처님의 설명이기도 한 것이다.
이런 일을 놓고 눈에는 눈
이에는 이와 같은 탈리오의 법칙을 떠올리게 되는데
대부분 이것이 과거의 악이나 고통을
해결하는 방안이 된다고 여기고
그렇게 행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와 관련해
벤허라는 아주 유명한 한 영화가 생각이 난다.
이는 소설의 내용이라고 보지만,
여하튼 처음 유대에 주둔한 로마인 멧살라가
유대인 귀족이자 부호이며 친구인 벤허에게 협조를 요청하는데
벤허는 이를 거부하고, 둘은 적이 되게 된다.
이후 벤허는 사건에 연루되어 노예가 되고
어머니와 누이는 병에 걸리게 된다.
나중에 전차시합에서 승부를 겨루어
벤허가 멧살라를 죽게 하는데
이 당시 멧살라가 죽어가면서 벤허에게
이것으로 끝이 아니다.
이런 말을 남기고 죽어가는 모습이 인상에 남는다.
죽은 자는 말이 없고
죽으면 끝이다.
이렇게 현실에서는 대부분 보는데
마치 죽어서도 무언가 또 새로 시작해야 할
시합이 있고 보복할 일이 남아 있는 것처럼
멧살라가 말을 하는 데
지금까지 유무의 논의에서 제시하는 바는
진짜의 나가 없고
그 실재는 얻을 수 없는데도
이처럼 각 생명이 한 생을 통해 삶이 끝나는 것이 아니고
무한한 기간 자신이 행한 업을 바탕으로
3 계에서 생사고통을 반복해 겪게 된다는
내용을 살피고 있는 것이다.
앞 부분은 본 바탕에는 그런 문제가 없음을 제시하는데
그러나 그런 바탕에서
실답지는 않은데도
그러나 각 순간 생생하게 얻어지는 현실의 생사고통은
각 생명이 행한 업을 바탕으로
그렇게 무한히 전개되어 나간다는 사정을
제시하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어느 한 단면이나 한 기간만을 놓고
보면
거기에서 앞에 영화처럼
한 때는 멧살라가 가해를 하고 끝난 것으로 보이는데
나중에는 벤허가 다시 나타나 멧살라에게 보복을 하는 장면이 나타나고
그리고 영화는 끝나지만,
멧살라는 이것으로 끝이 아니라는 여운을 또 남기는 것을
보게 되는 것이다.
대부분은 영화가 끝나면 그렇게 그 부분으로
끝이 나고 더 이상 여기에 이어질
다른 내용은 기대하기 힘들다고 보는 것이지만,
지금 논의하는 유무 논의는
사정이 그렇지 않음을 제시하고 있는 것이다.
그것이 곧 유무 논의의 내용이기도 한 것이다.
무엇이 그렇게 계속 또 이어지고 이어지는가는
반대로 말하면
무엇이 무한한 기간 동안
무량한 수행을 한다고 하는가하는 내용과도
같이 관련되는 내용이다.
그런데 그것이 바로
수행과 수행아닌 전도몽상의 생사고통을
구분짓는 경계점이기도 한 것이다.
이 두 내용은 현실에서는 차별이 있는데
앞에서 살핀 유무 논의 부분에서
실재의 측면에서는 이런 차별을 얻을 수 없고
그에 해당하는 진짜의 내용은 없다고 제시한 것이다.
그래서 본 바탕인 실재의 영역에서는
그런 차별을 얻을 수 없는데
그러나 실답지 않은 현실에서
각 경우마다 어떤 자세를 취하고 반응하는가에 따라서
그런 차별이 나타난다고 제시하는 내용이다.
그리고 수행이란 바로 이 부분에서
그런 생사고통을 제거하고
그 대신 무량한 복덕과 지혜를 구족하는 상태가
되기 위하여
본 바탕이 그렇다는 사실을 올바로 관하고
이를 통해서 현실에서는
본래 청정한 니르바나의 상태에 상응하게
여여하게 임하는 한편
또 실답지 않다고 하지만,
매 순간 생생하게 그 내용을 얻는 현실 영역에서는
그 내용이 좋고 좋은 상태가 될 수 있도록
수행의 방안을 취해서
임한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래서 실재에서는 그런 차별을 얻을 수 없는데
현실에서 그런 차별이 나타나는 경계선이
바로 처음 수행자가
보리심을 일으키고 서원을 장착하고
현실에 임하는가 아닌가를 놓고
그 경계가 나누어진다고 제시하게 되는 것이다.
진짜를 얻을 수 없고
실재가 공하다는 무소유 불가득의 사실로서
현실에서 생사 고통이 있어도
아무 문제가 되지 않는 것이라고 잘못 이해하면
자신이 어떻게 하거나 하지 않거나 관계없이
본래부터 공하고 청정한
본바탕의 청정한 니르바나라는 사실만 취하고
현실의 모든 것의 실재가
그처럼 차별없이 공하다는 사정을 통해
현실에서는 수행을 하면 어떠하고
하지 않으면 어떠한가
아무 것도 하지 않으면 어떠하고
이전처럼 전도몽상과 집착에 바탕해서 그대로 행하면 어떻고
또 자신의 좋음을 얻기 위해 심하게 악을 행한들 어떠한가.
이렇게 생각하면서
수행에 나아가지 못하게 되기 쉬운 것이다.
그러나 진짜가 없고 실재가 공하다는 내용은
그렇기에 현실에서 중생들이 겪는 생사고통이
그대로 방치해도 되고
아무 문제가 되지 않는다고
제시하는 내용이 아니고
그런 문제를 잘 해결하기 위해서는
본 바탕은 그렇지 않다는 사정부터 잘 관하고
이에 바탕해서 현실에서
망상분별과 집착을 제거하고
또 실답지는 않지만,
그것이 실답지 않다는 사정을 잘 관하는 가운데
현실의 매순간 수행을 열심히 행해서
생사고통에 묶여 돌게 하는 자신이 과거로부터 쌓아 놓은
업의 장애를 해소시키고
복덕자량과 지혜자량을 얻어나가야 함을
제시하기 위한 내용인 것이다.
또 위와 같은 본 바탕의 사정을
잘 관해야
그런 수행도 원만히 잘 성취할 수 있기에
그런 내용이 강조되는 사정이 있는 것이다.
그래서 유무 논의에서 일으키기 쉬운
혼동을 먼저 잘 정리하지 않으면
본 바탕에 그런 것이 없고 얻을 수 없다고 하면서
수행자가 수행을 통해서
성취하는 상태가
왜 중생의 생사고통과 현실에서는
극심한 차이가 발생하게 되는가를
이해하기 힘들게 된다고 본다.
문서정보 ori http://buddhism007.tistory.com/3453#9155
08gfl--불교공부_단상_2561_07.txt ☞◆vlga9155
● [pt op tr] fr
>>>
[...]
좋고 나쁨과 유무 논의의 효용을 살피는데
수행과 관련해서 가장 중요한 핵심은 이것이라고 본다.
나사가 끊어지듯 자신의 손과 발이
톱으로 잘라지거나
끊어지고 있다.
또는 집이 불이 타고 있다.
이런 경우를 놓고
이번 생에 무여 열반을 증득하지 못하고 삶을 마치면
무한한 기간 앞으로 받아 나갈
생사 고통의 한 샘플이라고 보고
이 문제를 해결해야 하는 것이다.
이 상황에 고통이 과연 있는가 없는가가 문제되면
무엇이라고 답하게 되는가.
그런 것은 없고
그런 실재는 얻을 수 없다.
무소유 불가득 공의 내용을 제시하게 된다.
그리고 자신이 그렇게 보고 얻는 감각현실에는
자신이 생각하는 그런 내용을 역시 얻을 수 없다.
그런 가운데 그런 감각현실을 생생하게 얻고
또 그에 대해 그런 생각을 일으켜 분별하는
상황인 것이다.
이것을 제시하는 것이다.
그래서 이 내용은 원칙적으로
이런 순간의 고통도 해결해주는 기본 원칙이기도 하다.
금강경에서 가리왕에게 체포가 되어
사지를 절단당하는 고문을 당하는 순간에
수행자가 어떻게 평안히 이를 참고
안인을 성취했다고 하는가
그 방안으로 제시되는 내용은
이런 현실에서
그런 감각현실을 얻지만,
그에 대해 아상 인상 중생상 수자상을 갖지 않고
이 현실을 대해서
그런 안인을 성취했다고 제시하는 것이다.
그것이 곧 현실에서
자신이 자신이라고 보는 부분에
자신[아]는 얻을 수 없음을 관하고 이해하면서
이를 대할 때
그런 안인이 성취가능하다는 내용이기도 하다.
그 순간에 그것이 실재도 아니고
진짜라고 할 실체도 아니다라는 생각까지도 하면서
공 해탈문까지 들어갔다 나오면 더 좋겠지만,
일단 기본적으로 현실 상황에서
그런 상을 취하고 상에 머물지 않는 자세를 통해서
무상 해탈문에 들어가 임해도
충분히 안인을 성취할 수 있다고 제시하는 내용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런데 정말 이런 방식으로만
모든 고통의 현장을 상대해서 나아간다면
사실은 계속 지옥 상황에서
그런 고통을 무한히 받는
경우와 큰 차이가 없다고 보게 된다.
또 하나 앞에서 부처님은
그런 방식으로 그 극심한 고통을
평안하게 임했다고 제시하는 것이지만,
일반인이나 이번 생에 수행을 막 시작한 초보 수행자가
앞과 같은 내용만 가지고
즉,
일체가 진짜가 아니고
일체가 그 실재가 얻을 수 없고 공하고
그런 가운데
현실에서 얻는 감각현실의 모습[상相]은
실재의 모습[ 실상實相 ]도 아니고
또 그런 감각현실의 모습[상相]에는
자신이 분별하여 일으키는 생각내용[상想]에 해당하는 내용도
얻을 수 없다고 관하여
이것만으로
이런 극심한 고통을 평안히 참아 안인을 성취하고
이런 현실의 생사고통 문제를 정말 그처럼
쉽게 극복해 낼 수 있는 경우는 대단히 드물다고 보아야 한다.
그래서 사실은 mun 님이 말하는 우주 세트는
99 % 그런 형태로 접착되어 반응할 도리밖에는
없는 것이라고 보게 되는 것이다.
위와 같은 실험을 한다면
100 명중 1명도 평안히 이를 참는 수행을
성취할 수 없는 것이라고 보는 것이
현실적인 것이다.
손이 잘라지고 다리가 잘라지고
이래서 과다출혈로 곧 죽을 상태가 되었는데
이를 평안히 참을 수 있다고 할 수 있는 경우가
과연 현실에 있겠는가.
앞에서는 이 현장에 생사고통이나 생사를
본래 얻을 수 없다는 내용을 제시하는 것이지만,
그 이론을 가지고 이 상황을 극복해내는 경우는
대단히 드물다고 보는 것이다.
그래서 이것이 수행자가 끝내는 극복하고
넘어야 할 안인수행의 목표점이기도 하고
이를 넘아야 비로서
안인을 성취하여 무생법인을 증득하고
불퇴전위에 올라
무량한 방편을 모두 무량하게 취득할 수 있는
수준 높은 수행자의 단계가 된다고 제시하는 것이기는 하지만,
일반적으로 초보 수행자 입장에서는
이런 상태를 기대하기 힘들다고 보는 것이
현실적이다.
그래서 표준적으로는 단계적으로
이런 수행을 밟아나아가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보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일단 그런 심한 고통을 겪게 되는 상황에
자신이 묶여 들어가게 되는 원인부터
하나하나 제거하는 수행부터
열심히 해야 한다고 보는 것이다.
자신이 자꾸
지옥이나 아귀 축생의 세계로 묶여
끌려 들어갈 만한
생각과 말과 행위를 계속 하는 상태에서는
그것을 중단하고
그 반대방향으로 수행해 나가는 것도
앞에서 팔이 잘려지는 데 고통을 겪지 않는 것과 비슷하게
대단히 힘들다고 여기는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알고보면 팔이 잘려지거나
축생 아귀 지옥세계에 끌려가는 것보다
당장
보시나 정계 안인에 해당하는 계를 열심히 닦아나가는 것이
그보다는 훨신 낫다고 보는 것이다.
쉽게 말해서
강도가 나타나서
맞고 줄래
그냥 줄래
이럴 때 그냥 주는 것이 훨씬 낫고
조금 더 센스가 있으면
장발쟌을 상대한 신부님처럼
그것만 가져가지 말고
이런 은쟁반도 기념으로 같이 가져가라고
권하는 자세가 필요한 것이라고 보는 것이다.
이 부분에서 맞는다라는 것은
결국 앞의 상황을 의미하는 것인데
위에서 강도가 제시하는 내용이
지옥과 아귀 축생세계에
중생들이 묶여 끌려가는 인과관계를
아주 쉽게 잘 설명하고 있는 내용이라고 보게 되는 것이다.
저 말은 자진해서 안 주면 (= 널리 좋음을 베풀고 보시하지 않으면 )
강도가 때리고 + 그리고 그 좋음도 취해간다.
이런 관계를 제시하고 있는 것이다.
물론 강도가 여기서 정의를 실현하는 좋은 입장이라고
보기는 힘들지만,
현실 관계가 그렇다는 것을 이해해야 한다.
정글에서 사자가 나타나서
사람을 물으면 사자가 올바른 일을 한다고
보겠는가.
또 길을 가다가 광견병 걸린 개가
나타나 자신을 쫒아와 물게 되면
그 개가 정당한 입장이라고 보겠는가.
그러나 현실이 그런 관계라고 이해를 하고
자신이 그렇게 물리지 않도록
주의해야 하고
물리면 그 사자나 개보다는
그렇게 물린 그 당사자가 문제가 더 많이
있다고 보게 되는 것이기도 한 것이다.
물리고 나서 누가 더 정상인가
이런 것을 따져 보았자
별 필요가 없는 일이다.
그리고 보통 저렇게 물리면
열심히 개나 사자나 상대를 붙잡아서
자신이 보복을 하게 되는데
그 때 그 상대가 생각하는 내용이
바로 앞 경우에 자신이 생각한 내용과
사정이 전혀 다르지 않다고 제시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제 무한 궤도로
무한히 속도를 증폭해서 달려나가는
지옥 아귀 축생 행 열차에 올라타게 되었다고
다른 제 3 자 들은 이 관계를
객관적으로 보는 것이다.
왜냐하면 앞 관계를 서로 계속 주고 받는 관계가
이어지기 때문이다.
중간에 휴식시간이 100 년 200 년이 있거나 말거나
그 관계가 무한히 이어지게 마련이라고
보는 것이다.
지장보살님이 물방울 하나로
바다와 같은 무량한 고통을 받는
지옥이 왜 생겨나는가하는 설명도
사정이 위와 같은 것이다.
그리고 그런 고통을 주고 받는 상황에서는
사실 왜 그런 상황에
자신이 처하게 되었는가를 놓고
그 최초의 사정을 살피는 것은
그다지 도움이 되지 않는다.
또 그런 상황에서는 그런 것을
알아내려고 해도
알아내기가 힘든 것이 사실이다.
왜냐하면 이제 그런 상태에서는
자신의 지옥 아귀 축생세계에서
따로 할 일이 많이 있기 때문이기도 하고
그런 문제를 넓고 길고 깊게 생각할 여유자체가
그 상황에서는 주어지지 않게 된다는 의미다.
그래서 소 귀에 경 읽기 상황이 되는 것인데
그 상황이 되고 나서
그런 내용을 생각하려해도 생각이 되지도 않을 뿐 아니라,
경을 옆에서 들려주어도 무슨 의미인지
내용을 이해하지 못하는 상태가 된다고 보는 것이다.
그래서 조금이라도 여유가 있을 때
미리 그런 고통을 받을 상태로 묶여 끌려가지 않기 위해서는
계 정 혜라는 3 가지 수행 분야에서
계에 해당하는 수행
즉 보정안정[보시-정계-안인-정진]이라는 기본적 수행부터
먼저 열심히 행하는 것이
그 방안이라고 제시하는 것이다.
이것이 성취가 되어야
3계에서 생사고통을 받게 하기 위해 자신을 체포해가려는
수사관의 활동 즉 업의 장애가 해소되게 되는 것이고
또 장차 지혜 자량을 얻을 수 있는 바탕이 되는
복덕자량도 쌓을 수 있게 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여기에 이런 수행으로 성취하는
복과 지혜가 있는가 없는가는
역시 처음 제시한 내용과 다르지 않다.
그런데 본 바탕에서는 그런 것이 없고
얻을 수 없는데
왜 그런 생사고통을 겪게 되는가
이 문제에서
그런 것이 없고 얻을 수 없는데
그런 것이 실답게 있다고 여기면서
그에 집착을 갖고
앞과 같은 수행을 행해 나가지 못하게
접착되버리게 되고
그와 함께 그렇게 올바로 관하여
수행의 방향으로 매순간 행하게 되지 못하여
그런 생사고통을 반복해서 겪게 되는
것이라고 지적하는 것이다.
그러니 사정이 본래
그렇지 않다는 것부터 잘 관해야
기본적으로 현실에서 해탈문을 열고 들어가
기본적인 해탈을 성취할 수도 있을 뿐 아니라,
다시 그런 바탕이 되어야
위와 같은 수행도
현실에서 원만히 잘 성취해 나갈 수 있게 된다고
제시하는 내용이기도 한 것이다.
간단히 말해서
주변에 재물이 필요한 이가 나타났는데
대부분 은쟁반을 왜 흔쾌히 못 주는가 하면
그 은쟁반이 자신의 것이라고 여기고
그 은쟁반에 좋음이 있다고 여기고
그것을 통해 좋음을 얻을 수 있다고 여기고
또 그것을 통해 그런 좋음을 얻는 자신이 있다고 여기면서
그런 반응을 매순간 취하고
그 반대로 사정이 그렇지 않다는 것을 관하는 가운데
수행의 방안으로 행하지 못하기에
결국 맞고 뺏기고
또 다시 이에 서로 보복해 나가는 상황에 반복해서
처하게 되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그러나 어느 순간에
이런 사정이 본래 그렇지 않다는 것을 이해하고
수행방안을 취하면
맞지도 않게 되고
뺏기지도 않게 되고
수행자는 수행자대로
매번 필요한 것을 잘 마련해서
열심히 즐겁게 베풀면서
그리고 그로 인해 생사고통의 묶임에서도 풀려나고
그리고 무한한 생사과정에서
각 단계마다 강제로 포맷당해서
지옥 아귀 축생계에 들어가지도 않게 되고
무량한 복덕을 성취하여
지혜 자량을 쌓을 바탕도 마련하게 된다고 제시하는 것이다.
이론상 처음부터
지옥 아귀 축생의 상태에 들어가 안인 수행부터 붙잡고
노력하면 잘 성취할 수 있을 것 같지만,
그렇지 않은 것이다.
현실을 놓고 비유하면
오늘 초등학교에 입학하는 이가
고등학교 수학문제부터 먼저 풀고
또 공수부대원이 훈련하는 낙하 훈련부터
먼저 하고
학교에서 천천히 덧셈도 배우고
달리기도 해도
관계없다고 볼 수도 있지만,
이 순서가 바뀌면
대부분 그런 코스에 들어가고 난 후는
상태가 회복이 잘 안 되게 된다고 보는 것이다.
그 학생이 과정을 잘못 밟아서
일단 중환자실에 입원하게 되면
아무리 옆에서 경을 테이프로 반복해 들려주고
mun 님이 옆에 붙어
립싱크 수행을 한다고 해도
그 상태가 잘 회복이 안 된다고 보는 것이
현실이다.
그래서 보정안정을 지겹게 잘 성취하고 나서
무생법인을 성취하고 불퇴전위에 이르고
그 이후 단계에서
무량행문을 닦아도 닦아야 되는 것이고
그렇지 못하면
무언가 현실에서 좋음이나 좋음을 얻는 방편을 하나 성취하면
그 하나로 인해
자신이 무량한 고통을 돌려받게 되는 상태로
들어가게 된다고 보는 것이다.
이것이 본래는 그런 생사고통이 없고
그런 내용을 얻을 수 없는 바탕에서
그렇게 생생하게 매순간
각 세계에서 일어나는 내용이라고 제시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런 사정을 제시하는 위 내용에서
또 한편 그런 생사고통을 벗어나는
열쇠가 그처럼 들어 있으니
그것을 매 순간 잘 사용해야 한다고 제시한 것이기도 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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