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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속의 번뇌와 열반의 갈림길-5정심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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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속의 번뇌와 열반의 갈림길-5정심

진리와 가치를 고루고루 2011. 11. 11. 15:19



®


[ 요약 ]

● 세속의 번뇌와 열반의 갈림길-5정심
○ 5정심관은 가장 기초적인 수행방안이지만, 열반에 이르게 하는 가장 중요한 수행방안이다.


● 불교의 5정심관은 불교에서 제시하는 가장 기본적인 수행방안이다.

그런데 이 5 정심관의 수행방안을 택해 사는가 그렇지 않은가가
바로 
세속의 번뇌에 묻혀 사는가 그렇지 않은가의 중요한 최초 갈림길이 된다.


○ 세속의 일반적인 모습은 우선 다음과 같다.

우리는 보통 자신이 건강하고 행복한 가운데
자신의 희망이 모두 뜻대로 이뤄지는 삶을 꿈꾸며 산다. 

예를 들면 건강하고 장수를 누리면서 즐거움을 향유하고, 
높은 지혜와 지식 학문을 갖추고 
아름다운 용모와 원만한 인격을 갖추고 
좋은 직업을 갖고 
수많은 재화를 갖고 물질적으로 호화롭고 풍요롭게 살면서 
좋은 인간관계를 형성하고, 얻기 힘든 인기와 명예를 누리고 
그리고 사랑하는 이와 결혼을 하여 가정을 이루어 오래오래 행복하게 살며 
높은 권력을 갖고 자신의 뜻을 펼치며 자유롭게 살고자 하고, 
그리고 자신의 자손들까지 모두 그와 같이 안정되고 행복하게 사는 삶을 꿈꾼다. 

물론 많은 사람가운데 실제로 이런 꿈을 모두 이룬 이는 극히 소수에 불과하다. 
그러나 그와 같은 꿈을 성취한 소수를 포함하여 
그 외 뜻을 이루지 못한 사람까지 
모두 현실에서 가지가지의 고통의 현실을 피하지 못하고 번뇌에 쌓여 살아가고 있다. 

그래서 현실에서 일반적인 자세로 희망을 추구하고 살아가는 결과는 
번뇌에 묶여 살아가는 결과를 결과적으로 낳는다. 

그러나 5정심관에 따라 수행하는 것은 이와는 반대의 방향을 향하며 반대의 결과를 낳는다. 
그래서 비록 5정심관이 불교에서 가장 기초적이고 초보적인 수행방안이지만, 
그 방향을 완전히 서로 다르게 만드는 최초의 갈림길로서 중요한 내용이라고 본다. 


이하에서는 불교의 수행방안과 현실 세속에서의 많은 사람들이 살아가는 방향이 어떻게 다른가.
그리고 불교의 수행방안은 과연 이런 여러 희망들과 관련하여 어떤 자세를 취하라는 것인지,
그 내용과 이유에 대해 간략하게 살펴보고자 한다.


○ 우선 삶을 구성하는 요소는
크게 좋은 것, 나쁜 것, 좋지도 않고 나쁘지도 않은 중간의 것 등으로 나누어 볼 수 있다.
그런데 이 각각에 대해 어떤 자세 태도로서 대하는가에 따라 삶의 내용과 방향이 달라진다.

세속의 방향을 취할 때와 5정심관의 수행방안을 따를 때 
그 결과가 달라진다는 것도 결국 이와 관련된다. 

우선 본능적인 삶의 모습은 다음과 같다. 

모든 생명은 자신의 입장에서 본능적으로 좋은 것을 차지하려 하고 나쁜 것을 없애려 하면서 살아간다. 
그리고 사람의 입장에서 좋은 것으로 나열할 수 있는 것들은 이미 앞에서 본 것과 같은 내용들이다. 
생명,건강, 장수, 지혜, 지식, 아름다움, 부, 명예, 권력...등이다. 
그래서 사람들마다 이런 좋은 것에 대해 집착하고 탐욕을 내어 차지하려 애쓴다. 
또 반대로 이런 좋은 것을 침해하거나, 나쁜 것에 대해서는 분노를 일으키고 화를 내어 
그 불쾌와 분노를 풀어버리려 애쓰는 것이다. 

또한 세상에 대해서는 어리석음을 기초로 해서 
자신 마음대로 견해를 일으켜 생각하고 
자신의 희망대로 해석하며 살려고 한다. 

간단히 말해 자신의 견해대로 세상을 해석하고  
자신의 견해와 희망대로 살면
자신이 상상하고 희망하는대로 
나중에 좋은 천국같은 곳에서 살게 된다라고 생각하면서 
쉽게 살아가려 하는 것도 그 하나다. 

그리고 또한 세상에서 자신과 자신의 것에 대한 분별을 일으킨 다음 
자신에 대해 강한 집착을 일으켜 갖고 
더 나아가자신의 것에 대해 강한집착을 일으켜 
그로부터 많은 번뇌를 일으켜 살아간다. 

더 나아가 세상의 모든 요소가 자극하는 대로 
자신의 마음을 움직여 
산란한 마음상태로 살거나, 
아니면 반대로 모든 것에 흥미와 관심을 잃고 침체되어, 
목적과 가치감을 잃고 우울함을 느끼며 살아가기 쉽다. 

그래서 이러한 모습대로 세상을 살아가면 
그 결과 세상의 일반적인 모습 번뇌의 삶의 모습이 나타난다. 

● 5 정심관은 바로 이와는 반대의 내용들로 구성되어 있다. 

우선 좋은 것에 대해 탐욕의 마음을 일으킬 때 
그것의 더러운 모습 단점을 보아 
욕심을 내어 집착하는 마음 즉 탐욕을 끊는다. [부정관] 

나쁜 것에 대해 불쾌를 느끼고 분노를 일으키는 경우, 
사랑의 마음 연민의 마음을 일으켜 분노를 끊는다. [자비관] 

어리석음과 잘못된 견해를 갖는 경우에는 
원인과 결과의 관계를 살피어 지혜를 일으킨다. [인연관] 

나와 세상을 구성하는 요소에 대해서는 
그 요소들이 모두 영원하지 않고(무상) 
영원불변한 실체가 없으며(무아,무자성),
그 실재는 얻을 수 없고 공함을 본다. 
그래서 나와 나의 것에 대한 집착에서 벗어난다. [계분별관]

그리고 산란하거나 또는 반대로 침체한 마음 상태에서는 
숨을 세며 숨을 헤아림을 통해 
평정한 선정의 상태로 들어간다.[수식관]

그리고 나태하거나 두려운 마음을 갖는 때에는 
부처님을 생각한다.[념불관- 이는 계분별관 대신에 5정심관에 넣기도 한다.]


● 앞의 일반적인 세속적인 태도와 방향과 5 정심관의 내용은
이렇게 서로 구별된다. 

간단히 말해 어떤 것이 좋을 때 
그 좋은 것에 집착을 일으키고 탐욕을 갖고 그것을 꼭 차지하겠다고 생각하면서 살아가는 것이 
대부분의 사람들의 일반적 모습인데, 
5정심관에서는 그와 반대되는 방향으로 나아감을 의미한다. 

예를 들어 불쾌하고 화가 날때
분노를 일으켜 상대에게 속시원하게 통쾌하게 보복하고 해를 가하려는 것이 
일반적인 모습인데, 
반대로 자비스러운 마음을 일으키는 것도 
세속의 모습과는 반대의 방향으로 나아감을 의미한다. 

나머지도 같다. 
이처럼 세상의 좋고 나쁜 내용 각각에 대해 
대처하고 취해 나가는 내용이 서로 다르다. 

그리고 간단히 말하면
이처럼 각각의 내용에 대해 서로 다른 태도를 취해 나가는 것이 
한 쪽 방향은 서로를 번뇌에 묶여 지내는 결과로 나아가게 만들고 
또 다른 한 쪽은 서로 번뇌로부터 벗어나 
번뇌로부터의 해탈, 열반의 상태로 향해 나아가게 만든다. 


● 그런데 5정심관의 수행방안에 대해 오해를 갖기 쉽다. 

앞의 5정심관을극단적으로 이해하면 
세상에서 모두 좋다고 하는 것을 거꾸로 다 버리고 끊어야 하는 것을 말하는 듯 느껴지기 쉽다. 
또 나쁘다는 것에 대한 대처방안에 대해서도 같다. 

그래서 세속의 사람들이 행하는 방향과 모두 반대로 행하거나 
이런 것을 모두 끊고
과연 어떻게 살아갈 수 있을 것인가 하는 우려를 갖게 되고 
오해를 갖기 쉬운 것이다. 

예를 들어 사랑하는 사람이 있다거나, 매우 좋아하는 재물이 있을 때, 
불교수행은 이런 모든 것에 대해 좋다고 생각하지 말라는 것인가. 
그러면 모든 희망을 다 버리라는 것인가. 
아무 것도 하지 말라는 것인가. 
이렇게 극단적으로 이해하기 쉽다. 

그래서 불교에서 최초로 가르치는 5정심관의 수행방안을 쉽게 무시하거나 거부하기 쉽다. 
자칫 세간에서는 이처럼 수행방안에 대해 오해를 하기 쉽다. 

이미 앞에서 본 것과 같이 석존의 가르침은 
일반 세속에서 사람들이 갖는 욕구와 추구 방향과는 반대되는 내용이다. 

그래서 불교의 수행은
오직 세간을 등져 모든 욕구 및 모든 일체를 외면하여 끊어 버리고, 
마치 죽음과 같은 상태를 향해 나아가는 
허무주의적인 가르침만으로 일관된다고 오해하는 것이다. 

그래서 우선 5정심관에서 말하는 각 방향이 어떤 자세를 취하고 수행하라는 것인가에 대해 
다시 한번 살펴볼 필요가 있다. 

우선 앞과 같은 생각은 오해다. 
우선 이런 오해는 예를 들어 탐욕을 끊어야 함을 곧 
좋다 나쁘다의 판단 자체를 일체 행하지 않거나, 
선악 판단을 아예 행하지 않거나, 
일체 모든 욕구를 갖지 않아야 하는 것으로 
단순하게 이해해 받아들이기 때문에 일어난다. 

그리고 이런 잘못된 이해는
실제로 많은 불교수행자들을 잘못된 방향으로 나아가게 하는 면도 있다.

그런 결과 모든 것을 외면하고 무기력하게 아무것도 안 하거나, 
모든 일체의 욕심을 다 끊는 것을 
올바른 수행방안으로여기기도 한다. 

그리고 사실상 이는 매우 곤란하므로 
아예 처음부터 불교의 가르침을 따라 번뇌를 끊으려는 의지를 갖지 않으려 하기도 한다. 

그런데 이런 오해는 석존이 끊으라는 '탐욕'의 의미에 대해 
기본적인 오해에서 비롯된다고 본다.

따라서 이를 위해 석존이 말하는 탐욕의 의미가 무엇인가에 대해 살펴보기로 한다. 

석존은 욕심이 무엇인가를 묻는 데 대해 다음과 같이 설하신다. 

"욕심이란 이른바 다섯 가지 욕심의 번뇌다. 
어떤 것이 다섯인가. 
눈에 의한 의식[眼識]이 사랑스럽고 마음에 드는 빛깔을 보면 탐욕을 자라게 한다. 
이와 같이 귀,코,혀도 그러하며, 
몸에 의한 의식[身識]도 사랑스럽고 마음에 드는 감촉에 닿으면 탐욕을 자라게 하나니, 
이것을 욕심이라 한다. 
그러나 그것은 (붓다가 말하는) 욕심이 아니다. 
그것을 탐(貪)해 집착할 때 그것을 욕심이라 하느니라.” 
fr: 『雜阿含經』 (大正藏, 2권, p.198하)


한편 대상이 즐거움을 주는 것과 이로 인해 갖는 번뇌의 상태에 대해 다음과 같이 설하신다. 

“물질[色]은 한결같이 괴로운 것이 아니며 또 즐겁지 않은 것은 아니다. 
즐거움을 따르고 즐거움을 자라게 하며 즐거움을 떠나지 않는다. 
(그러나) 이런 까닭에 중생들은 물질에 더러워져 집착하고, 
그렇기 때문에 그것에 얽매이고 이로 인해 번뇌가 있느니라. 
(... 느낌 생각 행위 의식[受想行識]도 이와 같다. ) 
이를 일컬어 인과 연이 있어 번뇌의 허물이 있다고 하는 것이다.” 
fr: 『雜阿含經』 (大正藏 2권, p.20중) 

즉 석존이 탐욕이나 번뇌를 문제삼을 때 
어떤 대상에 좋음이 있다는 사실 자체를 부정하거나 
이 자체를 문제삼는 것은 아니다. 
단지 이로 인해 이에 ‘더러워져 집착하고’ 
또 이에 집착해‘얽매이는’ 마음을 문제삼는 것이다. 
따라서 다음 상태와 구별을 잘해야 한다. 

우선 단순히 무엇이 좋고 나쁘다를 판단하거나, 
선한가 악한가를 판단하거나, 
실제로 무엇이 좋아서 기쁨을 갖거나, 
또는 무엇이 좋아 그것을 원하고 바라고 추구하는 것을 
곧바로 애착이나 탐욕이라고 하는 것이 아니다. 

즉 이런 것 일체를 탐욕이나 욕심에 넣어 끊어야 한다고
석존이 가르치는 것은 아니다. 
단지 어떤 상태가 좋음으로 인해 그를 구하여 달라 붙는 마음[貪], 
그리고 그런 상태가 '반드시이뤄지지 않으면 안된다'고 고집하여 '집착'하여 추구하고 얽매이는 마음[貪欲]이 
번뇌의 독(毒)을 일으키게 됨을 우선 경계하여 가르친 것이다. 

또 오정심관에서 부정관을 통해 끊어야 할 내용은 
이와 같이 좋음에 대해 마음이 묶이어 집착하고 악하게 더러워진 탐욕을 가리킨 것이다. 

그리고 부정관과 자비관은 좋고 나쁨의 면에서 비롯되어 
악과 독을 일으키는 요소로서  
탐욕과 분노의 측면을 제시한 것이고, 
이를 각기 중화시켜 올바른 상태로 
즉, 선하고 집착없는 상태로 만드는 방안인 것이다. 

그래서 오정심관에서 처음 탐욕을 끊으라고 하는 말을 자칫 오해하여 
좋다 나쁘다는 판단 자체, 
선악 판단자체, 
그리고 선한 희망을 집착없이 추구하는 마음 상태까지 
다 끊어 없애야 한다고 오해해서는 안 된다. 

따라서 어떤 희망을 갖되 그 희망이, 
자신과 타 생명 모두에게 처음과 끝이 
모두 오래 오래 좋은 상태를 주는 선(善)을 이루고자 하는 욕구 희망이고, 
그 희망을 갖는 이가 집착하는 마음을 갖지 않고 
지혜롭게 이를 잘 실현해나갈 때, 
이를 탐욕이라고 하여 끊으라고 하는 것이 아님을 이해해야 한다.

부처님께서 탐욕을 끊으라는 것은 
이와는 반대의 내용 즉, 
악한 희망이나 가치없는 희망에 집착을 갖고 달라붙는 상태를 끊으라는 것이다. 

그것은 또 한편 일반 세속인의 입장에서 볼 때 
좋아 보여 집착을 갖게 되는 것들이 
아주 오래 오래 좋은 상태를 주지 않고 
그에 대해 갖는 집착이 
집착으로 인해 얻는 것보다 
더 큰 독을 가져다 주기 때문이다. 

그것은 
그런 잘못된 판단과 집착을 떠나 
반대로 모두에게 오래 오래 좋고 좋은 상태를 
집착과 번뇌없이 지혜롭게 
추구하여 성취하라는 가르침이기도 하다. 

자칫 탐욕을 끊으라는 부처님말씀을 오해하여 
좋고 나쁨 선악가치판단을 모두 없애고 
모든 선한 희망을 버리라는 것으로 오해하지 않아야 한다. 


실제로 불교의 가르침 안에는 오히려 다 이룰 수 없을 정도로 
많은 원(願), 욕(欲)등에 대한 가르침이 있다. 
예를 들어 근본 수행방안만을 보더라도, 
이미 생긴 악을 끊어 없애고, 
아직 나타나지 않은 악을 생겨나지 않게 하며, 
아직 생겨나지 않은 선을 새로 나타나게 하며,
이미 생겨난 선을 더욱 키우도록 희망하여, 
이의 실천을 위해 근면 정진할 것을 가르치는 내용이 있다. 

이는 곧 바른 '희망', '욕구'를 적극적으로 가져야 함을 가르치는 내용 바로 그것이다. 
cf: [사정근(四正勤,四意斷)]- 『雜阿含經』(大正藏 1권, p.805하-) 『集異門足論』(大正藏 26권, p.391하) 

또한 불교수행방안 가운데 제시되는 4 여의족(如意足, 神足)의 하나에도 욕(欲)의 내용이 들어간다. 
cf: 『大毘婆沙論』권141 (大正藏 26권) 

또한 대승불교안에는 사홍서원(四弘誓願)을 비롯하여 
보살이 실현시키기를 희원하는 수 없이 선한 희망들이 
이루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제시되고 있다. 

또한 대승에서 제시되는 십바라밀의 수행방안가운데에도
원(願)바라밀다가 제시되고 있다. 

그래서 탐욕을 끊는 것을 
일체 희망을 다 포기하고 살라는 의미로 극단적으로 이해하는 것은 잘못이다. 
어디까지나 악한 희망이나 좋음에 집착을버리라는 것이며, 
동시에, 이와는 달리 분별과 집착없이 
얻을 것이 없음을 방편으로 하여
선한 희망을 열심히 추구하라고 강조하는 것이다. 
그것이 모두에게 크고 오랜 좋음을 가져다 주기 때문인 것이다. 

단순히 좋음 즐거움을 느끼는 면도 또한 같다. 
부처님께서 탐욕 또는 애욕을 끊어야 함을 가르치니, 
이를 극단적으로 이해하여 
부처님이모든 좋음 즐거움을 떠나 버리라고 가르치는 것으로 오해하는 경우가 많다. 
이는 옳지 않다. 

부처님은 반대로 선한 희망을 갖고 실현하여 얻는 기쁨이나, 
선정을 닦아 얻게되는 기쁨이나 편안한 마음의 상태를 가지라고 
가르치신다. 

예를 들어 불교수행방안 가운데 7각지의 내용 안에는 
선정과 지혜로 올바른 법을 기억하고 올바른 법을 선택하여, 
선정을 닦아 정진하는 가운데, 
올바른 법을 얻어 희열(喜悅)을 갖고 
몸과 마음이 경쾌하고 안온함에 이르는 기쁨(喜)과 경안(輕安)각지(覺支)가 들어 있다. 

또한 다른 중생을 무량하게 사랑하고 가엾이 여기며, 
타인이 깨달음이나 좋은 과보등을 얻을 때 
이를 따라 기뻐하는 마음을 가져야 한다고 강조한다.
[사무량심[慈悲喜捨]이나 수희(隨喜)의 마음 ] 

따라서 불교에서 끊어야 할 내용으로 제시하는 것은 
악한 희망이나 집착을 갖고 추구하는 탐욕[愛欲, 貪著心]이며,
선을 향한 올바른 희망[發願, 誓願]과 
또 이를 통해 얻는 기쁨[遊戲, 慈悲, 隨喜, 輕安]과 이들을 서로 혼동하여서는 안된다. 

그래서 일체 좋고 나쁨 모두를 다 버리고 
일체 세간에 대해 희망과 관심을 갖지 않는 것이 
곧 올바른 수행의 길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석존의 가르침의 본 뜻을 오해하는 것이다. 

예를 들어 이런 오해는 
제자의 악행을 석존이 꾸짖어 계율을 제정할 때, 
부처님의 이런 마음을 
성냄의 마음 상태라고 생각하는 것과 같이 잘못된 것이라고 할 것이다. 

불교 수행에 관해서는 일반인들간에 또 다른 오해도있다.  
예를 들어
세속의 더러움(不淨) 
고통스러움(苦) 
현상의 영원하지 않음(無常) 
영원불변한 실체로서의 내가 없음[無我]를 관하는 수행이 강조된다.
[ 사념처(四念處)의 수행] 

그리고 
일체가 그 실재내용을 얻을 수 없고 공하다라는
일체개공(一切皆空)의 깨달음을 구하는 반야바라밀의 수행도 강조된다. 

또는 멸진정(滅盡定)에 도달하고자 수행하는 선정 및 삼매수행 등도 강조된다. 

그런데 간혹 세간에서는 이런 수행을 
단지 일체 판단을 하지 않고 
멍한 마음으로 아무 생각이 없이 바위와 같은 몽매함에 이르러 이에 마냥 빠져 있는 상태로 생각하거나, 
가라앉은 마음[惛沈]으로 졸음이나 깊은 수면의 상태와 같이 되어야 
곧 무아 공(空)에 대한 깨달음을 증득한 상태인 것처럼 
수행의 방편을 자칫 오해하기도 한다. 
이는 결국 수행의 방안과 의미에 대한 오해에서 역시 비롯되는 것으로 본다. 

결론적으로 불교에서 끊어야 하고, 하지 않아야 한다고 강조하는 것은, 
모든 악행과 탐욕, 분노, 어리석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반대로 선의 경우에는 이를 적극적으로 행하고자 하고, 
한편으로 마음을 적극적으로 지혜롭게 밝히고 맑게 하려 노력하는 것이 
불교의 본 가르침의 내용인 것이다. 
[諸惡莫作 衆善奉行 自淨其義 是諸佛敎- 七佛通戒] 

결론적으로 
부처님께서는 올바른 선악가치판단을 바탕으로 
계율을 지키고 선정을 닦고 지혜를 연마하고 닦아[戒,定,慧 삼학] 
번뇌를 끊고 깨달음을 얻으며 
또한 이를 기초로  
다시 널리 생명을 향해 자비희사의 마음을 갖고 [사무량심] 
다른 중생 모두를 이와 같이 안온한 해탈 열반에 이르게 하고자 하는 
무한히 크고 많은 착한 희망[誓願]을 일으키고,
이를 이루는 길을 최대한 적극적으로 성취시킬 것을 가르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이처럼 불교 수행이 향하는 목적과 취하는 방안이 
세속에서 향하는 목적과 실현방안과 
그 방향과 내용을최초에 갈라지게 만드는 것이 
바로 불교에서 가장 기초적으로 제시하는 5정심관에서부터 출발한다고 본다. 

그래서
이 5 정심관은 또 달리 말하면 
번뇌에 묶이는 삶과
번뇌로부터 벗어나 해탈과 열반을 향하는 삶을 
갈라지게 만드는 가장 중요하고 근본적인 최초의 수행방안이라고 할 것이다. 

그리고 이 가장 기본적인 수행방안으로서 5정심관을 닦아 나감으로써 
점차 세속의 번뇌에서 벗어나게 되고 [ 해탈 ] 
점차 지혜를 얻어 
궁극적으로 번뇌에서 완전히 벗어나고  
완전한 깨달음과 열반의 상태를 증득하여 
성불에 이르게 되는 것이라고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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