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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진리와실천
잡아함경-0004-무지경-수행-심해탈-● 심해탈의 효용 본문
≥2
≥1
o:\G\g\08\개인_불교공부\image\Pitaka-K0650V18P0707b13.jpg
K0650V18P0707b13L; 如是我聞一時佛住舍衛國祇樹給
K0650V18P0707b14L; 孤獨園爾時世尊告諸比丘於色不
K0650V18P0707b15L; 知不明不斷不離欲心不解脫者則
K0650V18P0707b16L; 不能越生老病死怖如是受想行識
K0650V18P0707b17L; 不知不明不斷不離欲貪心不解脫
K0650V18P0707b18L; 者則不能越生老病死怖比丘於色
K0650V18P0707b19L; 若知若明若斷若離欲則能越生老
K0650V18P0707b20L; 病死怖諸比丘若知若明若離欲貪
K0650V18P0707b21L; 心解脫者則能越生老病死怖如是
K0650V18P0707b22L; 受想行識若知若明若斷若離欲貪
K0650V18P0707b23L; 心解脫者則能越生老病死怖時諸
K0650V18P0707c01L; 比丘聞佛所說歡喜奉行
0004. 무지경 ②
이와 같이 나는 들었다.
어느 때 부처님께서
사위국 기수급고독원에 계셨다.
그 때 세존께서 모든 비구들에게 말씀하셨다.
"색에 대해서
알지 못하고,
밝지 못하며,
끊지 못하고,
탐욕을 떠나지 못하여
마음이 거기서 해탈하지 못한다면,
그는
태어남·늙음·병듦·죽음에 대한 두려움을
초월할 수 없느니라.
이와 같이
수·상·행·식에 대해서
알지 못하고,
밝지 못하며,
끊지 못하고,
탐욕을 떠나지 못하여
마음이 거기서 해탈하지 못한다면,
그는 태어남·늙음·병듦·죽음에 대한 두려움을
초월할 수 없느니라.
비구들아,
만일 색에 대해서 잘 알고,
밝으며,
잘 끊고,
탐욕을 떠난다면,
그는 태어남·늙음·병듦·죽음에 대한 두려움을
초월할 수 있느니라.
비구들아,
만일 잘 알고,
밝으며,
잘 끊고,
탐욕을 떠나
마음이 해탈한다면,
그는 태어남·늙음·병듦·죽음에 대한 두려움을
초월할 수 있느니라.
이와 같이
수·상·행·식에 대해서
만일 잘 알고,
밝으며,
잘 끊고,
탐욕을 떠나
마음이 거기서 해탈한다면,
그는 태어남·늙음·병듦·죽음에 대한 두려움을
초월할 수 있느니라."
그 때 모든 비구들은
부처님의 말씀을 듣고
기뻐하며 받들어 행하였다.
≤1
[pt] ● 심해탈의 효용
○ 마음의 해탈(심해탈)의 효용
일반 생명이나 세속의 사람이나
부처님 가르침을 따르는 수행자나 모두
삶에서 나쁨과 고통을 없애고
좋음을 구하는 것은 같다고 할 것이나,
그 방안에서는 서로 다르다.
왜 그러한가.
이 의문을 해결하기 위해서는
우선 부처님의 가르침의 내용을 이해하는 것이
가장 기본적으로 필요하다.
부처님의 가르침은 이미 앞에서 살핀 것처럼
삶에서 나타나는 고통을 제거하고
그 고통의 원인을 근본적으로 제거하여
고통을 앞으로 다시 나타나지 않게 하는 것에
1차적인 목적을 두고 있다.
한편 불교에서는 고통이 이번의 삶에서만
나타나는 것이 아니고
윤회의 긴긴 과정을 통해 반복해 나타난다고 본다.
그리고 그런 삶과 윤회의 긴긴 고통은
탐욕, 분노, 어리석음의 번뇌와 집착에 바탕하여
뜻, 말, 행위, 태도 등의 업을 일으킴으로써,
발생한다고 본다. [혹(惑, 번뇌)-업(業)-고(苦)]
따라서 삶과 윤회의 긴긴 고통을 제거하려면
이런 번뇌와 집착을 제거해야 한다고 본다.
그리고 이런 번뇌와 집착을 제거하기 위해,
이런 집착을 일으키는 바탕이 되는
잘못된 견해와 망상분별, 어리석음을
제거해야 된다고 본다.
그래서 이런 내용들이 모두
수행 목표가 되는 것이다.
즉 부처님은
삶과 윤회를 통한 긴긴 고통은
모두 탐욕, 분노, 어리석음의 번뇌에 대한
집착 때문에 발생하고
다시 그런 집착은
자신이 집착을 갖는 자신, 자신의 것 등이
집착을 가질만한 실다운 내용이 아님에도
그것이 집착을 가질만한 실다운 내용이라고
잘못 분별하기 때문에 갖게 된다고 본다.
따라서 부처님은
잡아함경 처음에 제시한 것처럼
올바른 진리의 내용을
올바로 관함으로써,
자신이 집착을 갖던 자신과 자신의 것들이
모두 사실은 집착을 가질만한 실다운 내용이 아님을
깨닫고 집착을 버려서,
탐욕과 분노, 어리석음의 번뇌의 묶임에서 벗어나
마음의 해탈을 얻고
모든 고통이 소멸된 니르바나의 상태에
이를 것을 가르치는 것이다.
즉,
자신이 집착하는 자신, 자신의 것을 포함한
일체 현상은 무상하여 변화하는 것임을 관함으로써,
그런 덧없고 무상한 현상들에 탐욕이나 분노를 일으키거나,
집착을 갖지 않아야 함을 가르치고, [무상]
또한 자신이 집착하는 자신, 자신의 것을 포함한
일체 생멸하는 현상은
그것이 아무리 좋은 것이라 하더라도
그것은 무너지고 사라져 고통을 주게 될 뿐만 아니라,[괴고]
그것은 또 다음의 긴긴 고통의 윤회의 결과를
가져오는 징검다리가 되는 일시적인 좋음일 뿐이므로,
자신과 자신의 것 등 일체 생멸하는 현상이
모두 다 고통임을 관하여
그에 대한 집착을 버릴 것을 가르치고, [고]
또한
자신이 집착을 갖는 자신, 자신의 것 등은
비록 자신이 자신과 자신의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그 모두는 자신의 마음 안 현상 내용으로서, 실재가 아니며
그 실재는 얻을 수 없고 공함을 관하여
집착을 버릴 것을 가르치며, [공]
또 자신이 집착을 갖는
자신이나 자신의 것 모두는
진짜라고 할 영원불변한 실체의 내용이 아님을 관하여 [무아,비아,무자성]
자신이 집착을 갖는 자신이나 자신의 것 모두는
마치 꿈과 환영과 같은 것들이어서
진짜가 아니지만, 마치 진짜인 것처럼 나타나는
실답지 않은 것임을 관하여
집착을 갖지 않아야 함을 가르치는 것이다.
이렇게 올바른 깨달음으로
자신이 망상 분별을 바탕으로 집착을 갖던
자신과 자신의 것,
자신의 생명, 신체, 재산, 가족, 지위, 명예...등에
모두 집착을 버리게 되면,
그로 인해 그 동안 묶여 있던
탐욕, 분노, 어리석음의 번뇌의 묶임에서 풀려나고
또 그에 바탕하여 행하던 악을 중지하여, 행하지 않게 되고,
또 그로 인해 받을 삶과 윤회를 통한
긴긴 고통의 결과를 받지 않게 된다.
그리고 그런 상태에서 이후
잘못된 망상 분별에서 풀려나
올바른 깨달음을 얻고 [지혜의 해탈]
자신이 지금껏 집착하던 것보다
훨씬 더 가치있는
복덕과 지혜가 원만히 성취된 선한 상태를
아무런 집착과 번뇌를 갖지 않고
원만히 성취해나갈 수 있게 되는 것이다.
그런데 사람들은
비록 삶에서 나쁨과 고통을 제거하고
좋음을 구한다고 하지만,
이와는 반대의 방향으로 생활하고 있다.
즉, 일반의 사람들은
잘못된 망상 분별에 바탕하여
자신이 자신과 자신의 것, 또는 세계의 내용이라고 잘못 보는
일정한 내용에 대하여
탐욕과 분노 어리석음의 번뇌를 일으켜
집착하여 행위함으로써
살아가면서도 고통을 받고
또 이로 인해
긴긴 윤회의 고통을 받아 나가게 되는 것이다.
결국 진리와 가치에 대해 잘못된 판단을 하고,
이로써 잘못된 목표를 설정하고
이에 집착을 갖고
잘못된 방식으로 추구하므로서
살아가는 동안 고통을 받고
또 이로 인해 세세생생 고통의 윤회에서
벗어나오지 못하게 된다.
그래서 이것을 시정하는 것이
수행의 목표가 되는 것이다.
현실의 삶에서 사람들이
고통을 받게 되는 과정은 다음과 같다.
현실의 삶에서
대부분의 생명은 태어나 생활하면서
스스로 자신이 자신과 자신의 것으로 보는 내용
즉, 자기 자신, 그리고
자신의 생명, 신체, 재산, 가족, 명예, 지위...등에
강한 애착을 갖고
집착을 갖게 된다.
그리고 각 생명은 그런 집착을 바탕으로,
우선 자신의 생존과 생계를 해결할 방편을 찾고
또 이것을 계속 유지해나갈 방편을 찾는다.
그리고 이것이 해결되면,
다시 좋음을 준다고 보는 또 다른 것들
예를 들어 더 많은 재산과 명예나, 지위...등에
애착을 가지며 추구해나간다.
그러한 것을 모두 나열한다면,
자기 자신, 신체, 건강, 시간, 장수, 즐거움, 지혜, 지식, 아름다움, 인격,
직업, 지위, 물질적 부, 명예, 인간관계, 사랑, 결혼, 가정, 자손, 권력, 자유
타인, 다른 생명, 사회, 자연...
이런 것에 갖는 희망들이 모두 그런 것이다.
또 세상사람들은 이외에도
그것이 진정 가치가 없는 경우에도
가치가 있다고 잘못 가치에 대해 판단하고
집착을 갖고 추구하는 경우도 많다.
예를 들어 사람들은
어떤 것이 진정 가치가 있어서라기 보다는
그것에 관심과 초점을 맞추고
그것만 바라보고 생각하기 때문에
어떤 것을 가치있다고 잘못 여기고
집착을 갖기도 한다.
또 사람들은
시장에서 가격이 매겨지지 않는 것은
그것이 진정 가치가 있더라도
가치가 없다고 잘못 생각하고
반대로
시장에서 높은 가격으로 거래되는 것이면
그것이 진정 가치가 없더라도
그것이 가치가 있다고 잘못 여기고
이를 집착하기도 한다.
또
어떤 것이 영원하지 않고
잠깐만 유지되고 사라지거나,
단지 특이하거나 희소하여,
누구나 가질 수 없으면,
곧 그것이 가치가 있다고 생각하여
이에 집착하기도 한다.
이런 이유 등으로
예를 들어
대부분 누구나 갖고 있는 눈과 손발과
어떤 희귀한 도자기나 금, 은, 보석을 놓고
사람들이 평소 이 가운데
어떤 것에 더 관심과 집착을 갖는가 하면,
사람들은 대부분 희귀한 도자기나
금, 은, 보석에 더 관심과 집착을 갖는
경향을 보인다.
그리고 이처럼 뒤바뀐(전도된) 가치판단에 의해
성취하기 힘들고 가치가 적은 것에
오히려 더 집착을 갖고
이를 추구하게 되고
또 그런 사정으로
이를 성취하는 경우도 드물게 된다.
그래서 대부분 고통의 상황에
직면하게 된다.
또한 인과관계를 잘못 파악하여
잘못된 수단과 방안을 통해 좋음을 구하므로,
얻고자 하는 최종적인 좋음을
잘 얻어내지 못한다.
예를 들어 병을 치료하기 위해
바위에 머리를 부딪히면 낫는다는 식으로
인과관계에 맞지 않은 잘못된 처방을
따르는 것과 같다.
또한 좋음을 얻기 위해
그것을 얻을 수 있는 일정한 수단을 구하지만,
그 수단을 얻는데 너무 집착한 나머지
좋음을 얻어낼 수단은 얻지만,
정작 그를 통해 최종적인 좋음을
얻지 못하는 경우도 많다.
예를 들어 평안히 살기 위해 집을 구하여,
집을 얻더라도,
정작 그 집에 너무 집착함으로 인해
그를 통해 얻고자 한 좋음과 평안함은 얻지 못하고
오히려 그 집으로 인해 온갖 근심, 걱정 등 번뇌에
싸여 살아가기도 하는 것이다.
이런 관계로 좋음을 준다고 생각되는 온갖
수단을 다 갖고도 오히려 늘
번뇌와 고통 속에서 살아가는 경우가 많다.
이처럼 잘못된 뒤바뀐 망상 분별에 바탕해
애착과 집착을 가져서는
이런 삶의 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할 수는 없다고 할 것이다.
○ 집착이 불러 일으키는 고통의
모습은 다음과 같다.
사람들은 처음 어떤 것이
자신에게 좋음을 주는 것이라고 생각하여
그에 집착을 갖게 된다.
또 사람들은 좋음을 구할 때
집착을 많이 가질 수록
자신이 그 좋음을 잘 얻어낼 수 있다고 생각하게 된다.
그러나 그런 집착은 약간의 좋음을 주고
긴긴 고통을 가져다 주게 된다.
집착이 불러 일으키는 고통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우선 어떤 이가 어떤 좋음에 집착을 가질 때
그 집착하는 것이 성취되지 않으면,
성취되지 않는 긴긴 시간 동안,
갈증과 불만, 불쾌와 고통을 받게 된다.
또 그것이 성취되면 잠시 좋음을 얻고
그 좋음은 오래가지 않고 곧 소멸되고,
또 다른 것에 관심을 갖고 집착을 갖게 된다.
그리고 성취를 한 후에도
그에 대해 애착과 집착을 갖는 경우
그것이 없어지고 사라질 것에 대해
강한 두려움을 갖고 불안에 빠지게 된다.
또한 그것이 정말 사라지거나,
또는 욕구를 끝내 뜻대로 성취하지 못하는 경우에는
그 애착한 정도에 비례하여
강한 불쾌와 불만, 슬픔 고통 등을 받고
삶을 살아가게 된다.
이처럼 집착하기에
집착하는 것을 얻기 전까지는 갈증과 불만, 불쾌, 고통에 시달리게 되고
집착하는 것을 얻으면 그것이 사라질 것을 생각하여 두려움과 불안에 시달리고,
또 그것이 사라지면 고통을 받게 된다.
또한 자신이 집착하면
그 집착으로 인해 눈이 가리워져
훨씬 가치있는 것을 보지 못하게 되며,
집착하는 좋음 때문에
온 생명을 위해 다른 생명에게 널리 좋음을 베풀지 못하여
공덕을 쌓지 못하게 되고,
더 나아가 자신이 집착하는 좋음 때문에
다른 생명이 집착하는 좋음을 함부로 침해하고 나쁨을 가하게 되고
또 자신이 좋아하는 좋음이 침해될 때
그것을 좋게 해석해 평안히 참지 못하고
분노를 일으키며 상대에 대한 미움과 원망을 갖고
그 상대에게 다시 나쁨을 가하여 해치고 보복을 가하게 되고
이후 무한한 시간에 걸쳐 서로 나쁨을 주고 받으며
이 나쁨을 키워 나가는 관계가 된다.
이처럼 집착 때문에
탐욕, 분노, 어리석음의 많은 번뇌를 일으키고
이에 바탕하여 행위하고
다른 생명의 좋음을 침해하고 나쁨을 가하는 등 악을 행하고
또 그로 인해 긴긴 고통을 받게 된다.
집착하는 대상이 예를 들어
재산이나, 명예, 지위, 권력과 같이
가치가 적은 것들일 때에도
그것에 대하여 집착을 갖게 되면,
그 상실로부터 강한 고통과 두려움을
갖게 되는 것이 보통이다.
다만, 세속 생활에서
작은 것에 초점을 맞추고
집착을 가졌던 경우는
넓은 세상을 관찰하여
그보다 가치가 많은 것을 살펴
그 집착을 벗어날 수도 있다.
또 실질적으로 가치가 적은 것에
집착을 가졌을 때는
가치가 큰 다른 것과 비교하여
그것이 실질적으로 가치가 적은 것임을
올바로 관하고
그에 대한 집착을 벗어날 수 있다.
예를 들어
수많은 재산이나 지위에 집착을 가질 때는
이런 수많은 재산과 지위를 비롯하여
우주 전부를 준다해도
이것과 자신의 생명을 바꿀 수 없음을 관할 수 있다.
그래서 자신이 평소 집착하는 것들은
자신의 생명을 기준으로 가치를 비교 평가해보면,
이들은 상대적으로
옷에 붙은 작은 먼지나 티끌처럼 가치없는 것임을 관하게 되고
이로써 그것들에 갖는 집착을 버릴 수 있다.
이렇게 집착을 버리게 되면,
그 부분만큼은
그것을 잃거나 얻음에 관계없이
평안한 마음에 머무를 수가 있다.
그런데 그렇게 현실의 많은 것에
집착을 버린다고 해도,
자신의 생명이나, 신체에 대해서는
여전히 강한 집착을 갖고 임하게 된다.
그리고 그런 경우에는
역시 삶의 번뇌와 윤회의 고통으로부터
끝내 벗어날 수 없다.
특히 그것이 자신이라고 여기며
소중하게 여기는 색, 수, 상, 행, 식,
그리고 자신의
생명, 목숨, 신체, 가족 등인 경우에는
왠만해서는 집착을 버리기 힘들며
그것이 상실될 위험에 처하게 되면,
강한 고통과 두려움을 느끼게 된다.
특히 일반적으로
자신의 생명, 신체에 대단히 강한
집착을 갖는데,
늙음, 질병, 사고, 죽음 등은
이런 자신의 신체를 허물어 사라지게 하며,
자신이 살면서 애착을 갖던 것을 함께 모두
허무화시킨다.
또한 이런 늙음, 질병, 사고, 죽음 등은
그것을 아무리 피하려고 노력해도
끝내 피할 수 없기에
생, 노, 병, 사의 고통과 두려움은
살아가면서 겪는
다른 고통과 두려움보다
한층 더 심한 고통과 두려움을 주게 된다.
그래서 삶의 고통에는
사랑하는 이와 헤어지거나[애별리고]
미운 이와 만나거나[원증회고]
구하는 데 구하는 바를 얻지 못하는 고통[구부득고] 등등
여러가지 고통이 있지만,
그 가운데서 가장 대표적인 것으로
생, 노, 병, 사의 고통을 들게 된다.
그리고 이런 고통과 두려움은
수행을 통해 이러한 번뇌로부터
해탈을 얻지 못하는 경우,
이번 한 생에서 뿐만 아니라
윤회를 통해 매 생마다
반복해 받게 된다.
그리고 불교 수행의 목적은
바로 이런 모든
고통과 두려움을 근본적으로 제거하는 데 있는 것이다.
그리고 이 문제에 대해서 부처님은
그 고통의 원인을
자신의 마음으로 얻는 색, 수, 상, 행, 식을
잘못된 분별로서
자신과 자신의 것 그리고 세상의 내용으로 보고,
이런 망상분별을 바탕으로
애착과 탐욕 등의 번뇌와 집착을 일으키고
그에 바탕하여 행위를 해나감에 있다고 보고,
그 해결방안으로서
이런 원인을 제거해야 함을 제시하는 것이다.
상식적으로 생각하면,
태어남과 늙음과 질병, 죽음의 고통과 같은
여러 문제를 해결하려면,
그런 현상을 아예 없게 하는 것이
원천적인 해결방안이 아닌가 생각하기 쉽다.
그러나
세상을 올바로 보고
일체가 무상, 고, 공, 무아, 무자성을 관하는 입장에서는
그런 방안으로 이런 고통과 두려움을
해결할 수 있다고 보지 않는다.
탐욕을 떠나 집착을 끊고
마음이 거기서 해탈하면,
이 문제가 해결된다고 보는 것은
다음과 같은 이치다.
오늘도 세상 이곳 저곳에서 무수한 생명이
태어나고 또 늙고 병들고 죽어가고 있다.
그런데 그런 가운데
자신이 늙고 병들고 언젠가는
죽을 것을 두려워하는 이도
예를 들어
자신이 애착을 갖지 않고
집착을 갖지 않는 다른 생명이
어디에서 늙고 병들고
죽는다고 하는 사실 앞에서는
아무런 고통이나 두려움을 느끼지 않는다.
이런 차이는 왜 일어나는가.
그것은 단순하다.
그 어떤 생명이 자신이 애착을 갖는
자신의 생명,
또는 자신의 가족 등의 생명인 경우에는
바로 그런 애착과 집착 때문에
그것이 상실되는 것에 대해
강한 고통과 두려움을 느끼게 되는 것이다.
반면 다른 생명이 늙고 병들고 죽는 일에 대해
아무렇지도 않고 평온함을 유지하는 것은
그가 그런 다른 생명에 대해
크게 애착과 집착을 갖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사실, 태어남, 늙음, 병듦, 죽음의
고통과 두려움에 대해
가장 근본적인 방안은
바로 그에 대해 갖는 애착과 집착을
내려 놓는 것이다.
○ 한편, 그런 애착과 집착을 벗어나기 위해서는
그런 애착과 집착을 갖게 한
기본 바탕이 되는
잘못된 망상 분별을 먼저 버려야 한다.
그것은 크게 보아,
자신과 세계에 대해 갖는
온갖 잘못된 분별이 다 포함된다.
이는 우선 이렇게 생각할 수 있다.
즉, 자신이 자신과 자신의 것으로 보는 내용이
잘못된 망상 분별이 아니고,
설령 '실다운' 진짜의 내용으로서,
자신이고 자신의 것이라고 가정한다해도,
그것이 뜻대로 얻어지지 않고
또 얻어도 언젠가는 결국 무너지고 사라지는 것이어서
그로 인해 고통을 받게 될 수 밖에 없다면,
그런 고통을 없애기 위해서는
그렇게 무너지고 사라지는 자신과 자신의 것에 대해
집착을 버리는 것이 현명하다고 할 것이다.
그렇게 자신과 자신의 것에 대해 집착을 버림으로써
그것을 자신의 뜻대로 얻지 못함으로 인해 갖는
갈증과 불쾌에서 벗어날 수 있고,
또 그것이 장차 무너질 것을 두려워 하는 마음에서 벗어나고
또 그것이 무너지고 사라져도 고통을 받지 않을 수 있기 때문이다.
또 그런 집착으로 인해 좋음을 베풀지 못하고
다른 생명에게 나쁨을 가하고 또 나쁨에 나쁨을 되돌려주며
나쁨을 계속 주고 받는 악행을 피하고
그로 인해 받을 고통도 피할 수 있을 것이다.
문제는 자신이 자신과 자신의 것으로 보는 것이
실다운 것이라고 가정해도
이런 이유로 집착을 버려야 마땅한데,
정작 자신과 자신의 것으로 보는 내용이
사실은 망상 분별에 의한 내용이며,
그렇게 집착을 가져야 할 실다운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자신이 자기 자신과 자신의 것으로 보는 내용들은
하나 같이 한 주체가 현실에서 얻는 내용으로서,
색, 수, 상, 행, 식이며,
이들은 자신이 자신의 마음으로 얻는 마음안 내용이고,
현상의 내용이다.
이들은 하나같이 실답지 않은 것인데도
각 생명은 어리석음에 바탕하여
그런 사실을 올바로 관하여 깨닫지 못하고
자신의 마음 안에 들어온 내용을 놓고
여기에 대해 나다, 나의 것이다라는 등으로
잘못된 망상 분별을 일으켜,
그러한 것을 자신과 자신의 것이라고 생각하며
그에 대한 애착과 집착을 일으켜 갖고
이에 바탕해 행위를 일으켜서
그로 인해서 살아서 고통을 받고
또 그로 인해 고통의 윤회를 하게 되는 것이다. [혹-업-고]
따라서 올바른 관찰로서
그런 잘못된 분별을 없애고
그 대신 올바른 깨달음을 채워 넣어야
이런 잘못된 분별에 바탕한
애착과 집착이 함께 없어지고
그렇게 애착과 집착이 없어짐으로써
그런 것이 무너지고 없어지는 사태에 대해서도
고통과 두려움을 받지 않고
평안한 상태에 머무르고,
마음이 번뇌의 묶임에서 풀려나는 상태
즉 마음의 해탈[심해탈]의 상태에
이르게 되는 것이다.
또 이로 인해 번뇌와 집착에 바탕한
악업을 행하지 않게 되고
집착을 벗어나
올바르고 선한 수행을 닦아 행할 수 있게 되며,
이로 인해 또 고통의 윤회에서
벗어날 수 있는 것이다.
따라서, 자신이 집착을 갖는
자기 자신과 자신의 것으로 보는 내용들이
하나같이 집착을 가질만한 실다운 내용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는 것이,
고통을 일으키게 되는 근본 원인인
집착을 제거하는 데
필요한 일이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자신이 자신과 자신의 것이라고 보는
현실의 일체의 내용[색, 수, 상, 행, 식]은
영원하지 않아
일정한 조건에 의해 인연이 화합하여
나타나고 변화하는 덧없는 것이고 [제행무상]
그것은 변화하여 소멸되는 것이기에
그것에 집착을 가지면,
그것은 잠시 좋음을 주고 나서
그로 인해 긴긴 고통을 안겨주는 것[일체개고]임을
올바로 관하고
또 그런 색, 수, 상, 행, 식은 실재의 내용이 아니며,
그 실재의 내용
즉 그런 현상들이 자신과 주관과 관계하지 않는 상태에서
있을 그대로의 실재의 모습은 끝내 얻을 수 없어서
있다, 없다, 이다, 아니다, -과 같다, -과 다르다, 좋다, 나쁘다,...등의
모든 이분법적인 분별을 행할 수 없어
공한 것임[일체개공]을
올바로 깨달아 관하고,
또 이들에는
집착을 가질만한 실답고 진짜라고 할
영원불변하고 고정된 실체의 내용이 없음[무아, 무자성]을
올바로 관하는 것이
필요하다.
그외, 자신과 자신의 것에 대한 관념적 분별이
잘못된 망상분별인 이유에 대해서는
뒤 부분에서 다시 좀 더 자세히 따로 살피기로 한다.
여하튼 이렇게 올바로 관함으로써
이런 현실의 모습은
마치 꿈과 같고 환영과 같은 것이어서
영원불변한 본체가 아니고,
실체가 없어 진짜가 아닌데,
마치 진짜인 것처럼
나타나는 것이어서
집착을 가질 만한 실다운 것들이 아님을 관해야 한다.
그리고 그런 관찰을 통해
자신이 현상에서 갖는 집착에서
벗어날 수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올바로
모든 현실을 올바로 관하게 되면,
다음의 잡아함경-0004-무지경2 에서
제시하는 것처럼
색, 수, 상, 행, 식에 대하여
잘 알고,
밝으며,
잘 끊고,
탐욕을 떠나
마음이 거기서 해탈하여서,
그는 결국
수행의 목표 상태라고 할 수 있는
태어남·늙음·병듦·죽음에 대한 고통과 두려움을
초월할 수 있게 된다.
○ 수행목표와 수행방편에 대한 집착의 제거
한편 이처럼 집착을 버리고
심해탈을 얻고
생노병사를 초월하는 것은
일반 세속의 내용에 대해서 뿐만 아니라,
부처님이 제시하는
수행 목표나 수행 방편에 대해서도
모두 동일하게 적용된다.
이 경전이 세속을 떠나
수행을 처음 시작한 이들을
대상으로 한 가르침이므로
그 비중은 물론
기존의 세속에서 가졌던 집착을 버려야 함을
강조한 것이라고 이해할 수 있다.
그러나, 일반 현실 상태나
수행의 목표상태나 모두
집착을 버리고 대해야 한다는 것은
차이가 없다.
처음 세속에서 집착을 가지고
생활하던 이는
앞에서 살핀 것처럼,
자신이 집착하던 것이
실질적으로는 가치가 적은 것임을 관하고
집착을 버리기도 한다.
그러나, 그렇게 집착을 많이 버린다해도
모든 집착의 근본이 되는
자신과 자신의 것에 대한 망상 분별과
이런 망상 분별을 바탕으로 한 집착은
잘 버리지 못하고,
따라서 생사의 번뇌의 묶임에서 벗어나
생사를 초월하지 못하고,
또 고통의 윤회에서 벗어나지도 못한다.
그래서
이를 벗어나기 위하여
부처님의 가르침을 받아들여
수행을 시작하게 되고,
그래서 부처님의 가르침대로
자신과 자신의 것 그리고 세계라고 본
색, 수, 상, 행, 식 일체에 대하여
집착을 버리는 수행을 하게 된다.
그런데 수행을 통해,
세속에서 집착을 가졌던 것들에 대해
모두 집착을 버리고
더 나아가 이 모든 집착의 근본이 되는
자신과 자신의 것에 대해
잘못된 분별과 집착을 버릴 때,
그런 것에 대해 집착을 버리는 대신
반대로 이렇게 집착을 버리게 하는
수행목표나 수행방편
또는 부처님의 가르침에 대해서는
오히려 거꾸로
다시 집착을 일으켜 갖는 경우가 있다.
그런데 이는 잘못이다.
집착은 그것이 세속의 삶에 관한 것이던,
수행목표에 대한 것이던
모두 집착의 독과 고통을 불러 일으키기 때문이다.
그래서
불교에서 제시하는
수행목표나 수행방편에 대해서도
역시 집착을 버리고
이들 수행목표나 수행방편 역시
모두 '얻을 것이 없음을 방편으로 해서'
추구하고 정진해 나가는 것이
또한 요구된다.
- 참고 대반야바라밀다경 제 402권 환희품 등 -
○ 집착을 버림과 적극적 수행과의 관계
한편 집착을 버림을 자칫 오해하면,
그에 대해
아무 것도 행하지 않는 것이라고 오해하기 쉽다.
그러나 집착을 버리고
마음의 해탈을 얻는다는 것은
그것이 무엇이건 그에 대한 희망을 거두고
그것을 행하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물론 집착을 버린 가운데
그것이 가치가 없는 것일 때는
당연히 그것을 끊고 중지하게 될 것이다.
그러나 앞에서 본 것과 같이
수행 목표나 수행방편에 대해서는
그에 대한 집착을 버린 가운데
그 실천을 위해 정진해나가게 된다.
따라서 이들 수행목표나 방편은
집착을 버리지만,
그렇게 집착을 버린 가운데
그 성취를 위해 정진해 나간다는 점에서
차이가 있는 것이다.
결국 마음의 해탈을 얻은 바탕에서
행하지 않아야 할 것과
행해야 할 것이 있다.
행하지 않아야 할 것은
그간 세속에서 집착을 갖고 추구해오고,
고통의 윤회를 불러 일으키는
모든 행위라고 할 것이다.
반대로 행해야 할 것은
가치있고 선한 열반과 깨달음을 얻고
그것을 유지하기 위한 노력이다.
그런데 이 모두를 집착을 갖지 않는 가운데
행위를 중지하거나 또는 행위를 해나가야 하는 것이다.
그래서 모든 것에 대해 집착을 버리고
임해야 함을 제시하지만,
그 가운데에서 수행목표는
집착을 버린 가운데 수행 정진해야 함을 제시하게 되는 것이고,
일반 현실에서 집착을 갖던 것은
집착을 버리고 끊고 중지해야 한다고 제시하는 것은
그것이 각각 고통을 멸한 상태로 향하는 것인가.
아니면 고통을 일으키는 상태로 향하는 길인가의
차이에 있다.
그리고 여기서는 일체에 대해 올바로 관해서
이 모두에 대해 기본적으로 집착을 버려야 함을
제시한 것이다.
○ 마음의 해탈과 염세주의나 허무주의와의 관계
한편, 본 경전에서 제시하는 것처럼
현상의 일체, 즉 색, 수, 상, 행, 식에 대하여
무상, 고, 공, 비아를 올바로 관하여
싫어하고 떠날 마음을 일으키고
기뻐하고 탐하는 마음이 없어지면,
이것을 마음이 번뇌의 묶임에서 풀려 벗어남(심해탈)이라고 하게 된다.
그런데 이렇게 현실의 현상적 내용 일체에 대해
애착과 집착을 버려
마음의 해탈을 얻어야 함을 제시하는 내용을,
자칫 염세주의적 삶의 자세와
혼동하기 쉽다.
즉, 마음의 해탈을 얻기 위하여
지금껏 자신과 자신의 것이라고 잘못 보고
애착을 가졌던 현상 일체(색, 수, 상, 행, 식)에 대해
싫어하고 떠날 마음을 일으켜
집착을 버려야 함을 제시하는 내용을,
마치
세상의 모든 내용을 부정하고
싫어하고 혐오하면서
삶을 비관적으로 생각하고
모든 것을 체념 포기하며
아무 것에도 의미를 두지 않고
아무 것도 추구하지 않고 살아가는
허무주의나 염세주의로
혼동하는 것이다.
그런데 부처님께서
집착을 버려야 함을 제시하는 것은
그처럼 모든 것을 혐오하고,
모든 것을 체념 포기하면서
아무 것도 추구하지 않고
살아가라는 가르침이 아니다.
현실의 일체 즉 색, 수, 상, 행, 식에 대해 집착을
버리라는 것은
집착을 통한 번뇌의 묶임과
그 번뇌에 바탕한 행으로부터 받게 되는
고통스런 윤회의 고통에서 벗어나
모든 고통이 사라진
니르바나의 청정한 즐거움을
얻게 하는데 목적이 있는 것이며,
또 그렇게
망상 분별을 없애고
집착과 번뇌를 없앤 상태에서
올바른 깨달음을 바탕으로
자신과 자신의 것, 세계에 대해 올바로 관하고
맑고 깨끗한 서원을 올바로 일으켜 갖고
그 성취를 위해 무한히 정진해 나아갈 것을
강조하시기 위함이다.
그래서 집착을 버린 가운데
행하여야 할 일은
모든 것을 싫어하고 혐오하며
모든 것을 체념 포기하며
아무 것도 추구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번뇌와 집착을 버린 가운데
얻을 것이 없음을 방편으로 하여
맑고 깨끗한 마음으로
원대하고 무한한 서원을 일으키고
이를 유희 신통력을 가지고
정진해 실천해나가야 한다.
그래서 집착을 버린 가운데
행해야 할 일은 오히려 그 전보다
더 광대해지고
무한히 넓어지는 것이라고 할 것이다.
집착을 버린 가운데
행하여 할 내용으로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있다.
우선
모든 상태는 본래
청정한 진여 실재의 니르바나의 상태다.
그런데 이 청정한 진여 니르바나의 상태는
현실의 잘못된 망상, 분별
그리고 이에 바탕한 번뇌 집착,
그리고 그로 인해 행위와
그 결과로 발생하는 악과 고통이
덮어 가리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이런 현실에서
깨달음을 통해
원래의 청정 진여 니르바나를 덮어 가리우고 있는
이런 망상분별과
번뇌 집착, 악과 고통을
지우고 없애서,
원래의 청정 진여 니르바나를
드러내게 하는 것이
1차적 수행목표가 된다.
그 다음
이런 청정 진여의 니르바나에 상응하여
현실에서도 그와 상응한 니르바나의 상태를
만들고 채워 나가는 것이
제 2차적 수행 목표가 된다.
즉, 망상, 분별, 번뇌, 집착을 버린 상태에서
올바른 깨달음을 바탕으로
아름답고 깨끗하고 맑고 선하며
좋고 좋은 서원을 일으키고
정진하여 서원을 성취하고
이를 유지해나가는 것이
제 2차적인 수행목표가 된다.
그리고 이러한 수행목표를
실천해나감에 있어서도
역시 집착을 갖지 않은 가운데
'얻을 것이 없음'을 방편으로
정진해 나가야 함이 요구되는 것이다.
그래서
만일 색, 수, 상, 행, 식에 대해서
잘 알고,
밝으며,
잘 끊고,
탐욕을 떠나
마음이 거기서 해탈한다면,
그는 결국
태어남·늙음·병듦·죽음에 대한 고통과 두려움을
초월한 상태에서
앞과 같은 수행 목표들을 향해
노력해나가게 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pt] 끝
○ 잡아함-수행-심해탈
◈Prajna Citta 2014/02/23/일/13:45
● 심해탈의 효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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