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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진리와실천
[pt]잡아함경-0009-염리경-●왜 무상한 것은 곧 고통인가 본문
잡아함경 제 1 권
#0009. 염리경(厭離經)
● 한글대장경 해당부분 열람I
● 한글대장경 해당부분 열람II
○ 통합대장경 사이트
※ 이하 부분은 위 대장경 부분에 대해
참조자료를 붙여 자유롭게 연구하는 내용을 적는 공간입니다.
대장경 열람은 위 부분을 참조해주십시오.
[0009]
K0650V18P0708b05L; 如是我聞一時佛住舍衛國祇樹給
K0650V18P0708b06L; 孤獨園爾時世尊告諸比丘色無常
K0650V18P0708b07L; 無常卽苦苦卽非我非我者亦非我
K0650V18P0708b08L; 所如是觀者名眞實正觀如是受
K0650V18P0708b09L; 想行識無常無常卽苦苦卽非我
K0650V18P0708b10L; 非我者亦非我所如是觀者名眞
K0650V18P0708b11L; 實觀聖弟子如是觀者厭於色厭受
K0650V18P0708b12L; 想行識厭故不樂不樂故得解脫解
K0650V18P0708b13L; 脫者眞實智生我生已盡梵行已立
K0650V18P0708b14L; 所作已作自知不受後有時諸比丘
K0650V18P0708b15L; 聞佛所說歡喜奉行
#0009. 염리경(厭離經)
이와 같이 나는 들었다.
어느 때 부처님께서 사위국 기수급고독원에 계셨다.
그 때 세존께서 모든 비구들에게 말씀하셨다.
"색은 무상하다.
무상한 것은 곧 괴로움이요,
괴로움은 곧 나[我]가 아니며,
나가 아니면
또한 내 것[我所]도 아니다.
이렇게 관찰하는 것을
진실한 바른 관찰이라 하느니라.
이와 같이 수·상·행·식 또한 무상하다.
무상한 것은 곧 괴로움이요,
괴로움은 곧 나가 아니며,
나가 아니면 또한 내 것도 아니다.
이렇게 관찰하는 것을
진실한 바른 관찰이라 하느니라.
거룩한 제자들아,
이렇게 관찰하면 그는
곧 색을 싫어하고,
수·상·행·식을 싫어하게 되며,
싫어하기 때문에
즐거워하지 않고,
즐거워하지 않기 때문에
해탈하게 된다.
해탈하면
진실한 지혜가 생기나니,
이른바
'나의 생은 이미 다하고
범행은 이미 섰으며,
할 일은 이미 마쳐
후세의 몸을 받지 않는다'고 스스로 아느니라."
그 때 모든 비구들은
부처님의 말씀을 듣고
기뻐하며 받들어 행하였다.
신수장경 : 2-2a
한글장경 : 잡-1-5
남전장경 : s.22.15
[pt] ● 무상과 고의 관계성
[pt] 시작 fr [ori] k0650sf-- ♠○ 무상, 고와 수행목표로서 해탈과 열반의 성격
*pt* 시작 to k0020sf-- ♠○일반의 경우와 불교의 목표의 차이
먼저 부처님에 제시하는 목표상태는
현실에서 사람들이 일반적으로 세우는 목표점과는
다음의 측면에서 기본적으로 크게 다르다.
이는 불교에서 해결하고자 하는 고통의 내용과
현실에서 사람들이 해결하고자 하는 고통의
범위가 서로 다르기 때문이라고 이해할 수 있다.
삶에는 좋음과 나쁨이 뒤섞여 있고
그런 가운데 원치 않는 생, 노, 병, 사의 현상,
또는 사랑하는 이와 헤어지거나,
미운 이를 만나거나,
기타 구하는 것을 뜻대로 얻지 못해
가지가지 고통을 만난다.
그런데 이런 경우 일반적이고 상식적인 입장에서는
그것이 비록 무상하여 무너지는 현상이더라도,
일단 자신이 좋아하는 어떤 좋은 상태를
뜻대로 다 성취해 얻는 것만을
목표상태로 설정하기 쉽다.
세속에서 원하는 많은 것을 성취해 얻고
그리고 건강히 살아가는 것 등을 목표상태로 정하고
추구하는 것 등이 그런 예이다.
건강, 재산, 지위, 명예...등등 현실에서
애착을 갖고 추구하는 것이
짧은 견해에서는 대단히 좋은 내용으로
보인다.
또 사람들은 그것도 주로 현실의 생에 국한해
그 목표를 설정하게 된다.
그러나, 이처럼 사람들이 일반적으로
애착과 집착을 갖고 추구하는 것은
사실은 그 생명이
가치가 대단히 적고 보잘것 없는 것을 위해
한 생을 살아가게 하고
다른 생명도 긴긴 고통을 받게 하고
또 이로 인해
자신도 긴긴 시간 윤회의
고통을 얻게 만드는 것으로써
결과적으로 잠시간 좋음을 주고
긴긴 시간 고통을 받게 되는
일종의 삶의 덫에 빠진 상태가 되는 것이다.
현실에서 설정하는 목표와
부처님이 제시하는 목표가
달라지는 것은 이런 사정 때문이다.
일반적으로 당장 나쁨을 겪고 있고
또 아직 얻지 못한 좋음을 집착해 구할 때는
그것이 비록 영원한 것이 아니더라도
그 나쁨을 잠시라도 벗어나고
뜻하는 바를 단 한순간이라도 성취하여
좋음을 맛보는 것을
삶의 목표라고 생각하기 쉽다.
그런데 이는 정작 그 뜻을 성취한 이후에
만나게 되는 또 다른 문제를
미리 보지 못하고 생각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현실에서 얻는 좋은 상태는
그것만 보면 좋음을 주므로,
좋은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그것은 영원하지 않아 무너지고
소멸되게 된다.
한편 그 좋음이 악한 방식으로 얻은 것일 때는
그로 인해 또 다른 나쁜 결과를 받게 된다.
사정이 이러함에도
당장의 좋음에만 초점을 맞추어,
그 좋음만 얻어내면 되지,
그것이 영원하지 않아 언젠가는 무너져
다시 고통을 받는 것이
무슨 큰 문제인가 생각하기 쉽다.
또 그로 인해 나중에
어떤 고통의 결과를 받던지
당장 자신이 집착하는 것을 얻기를 갈구하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세상의 고통은 바로 이처럼
영원하지 않은 좋음에 집착하여 행위하고,
그렇게 집착한 좋음들이 무너지고
나쁜 결과가 발생함으로써
발생하는 것이다.
하나의 현상은
그 원인과 이후 이어지는 결과가
모두 같이 묶여져 있는 종합세트와 같다.
그래서 이 가운데 어느 하나를 취하면
이 모두를 받게 되며,
이 가운데 자신이 좋아하는 어느 하나만 취하고
다른 것을 빼내기 곤란한 것이다.
한편, 일반인들은 현실모습이 나타나는 인과관계를
단지 한 생에 국한해 살피는 것이 보통이다.
그리고 사람들은
자신의 삶이 이번 한 번의 생만으로
모든 것이 끝난다는 것을 두려워한다.
그러나 부처님은 이와 달리
생명이 무한한 시간 윤회해 감을 설하며,
하나의 현상을 무한한 시간에 걸친 윤회의 과정과 관련시켜
전체적으로 살핀다.
그래서 부처님의 입장은 일반인의 입장과
또 달라진다.
이런 입장에서 부처님은
비록 여러 하늘들의 수명이 사람이 생각하기에는
상상하기 힘든 긴 시간에 걸쳐 있다고 제시하지만,
그러나 그런 좋음을 얻는 것을
목표점으로 제시하지는 않는다.
참고 잡아함경 0863. 타화자재천경(他化自在天經)
예를 들어 불교에서 제시하는
1 겁이라는 시간은
상상하기 힘든 매우 긴 시간에 해당한다.
그러나 이 역시 무한한 시간에 비교하면
역시 찰나의 순간 쪽에 가깝다고 해야 한다.
이는 마치 3 이 1 보다는 큰 수지만,
9 에 비교할 때는 9 보다는 1 쪽에 가까운 것과
마찬가지다.
그래서 아무리 긴 시간을 나열해도
무한한 시간과 비교하면 그것은 늘 찰나 쪽에
가까운 시간이라고 관할 수 있어야 한다.
그리고 부처님의 입장은 이처럼
무한한 기간에 걸친 윤회 과정에서의
고통을 전체적으로 문제삼고
해결하고자 하는 입장인 것이다.
그래서 어떤 좋음을 비록
상당히 긴 기간에 걸쳐 얻는다해도
그것이 영원하지 않고 무너지고
또 그로 인해 다른 고통을 받게 되는 것이라면,
그것은 마치 현실에서 잠시간 좋음을 얻고
그후 그로 인해 긴 고통을 받게 되는 경우와 같아서,
그것을 문제로 삼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이는 비유하면, 마치 물에 빠지면,
그후 잠시 물에 떠오르거나,
또는 바람이 빠지는 튜브에 잠시 몸을 실어
좋음을 느낄 순간도 있다고 하여
그렇게 물에 빠진 상태에서 숨을 내쉬는
상태를 목적으로 할 수 없는 것과 같다.
물론 물에 빠져 있는 가운데,
잠시라도 물 밖으로 몸을 내어 숨을 쉬는 것은
숨을 못 쉬는 것보다는 나은 것이라고 보지만,
그러나 부처님의 입장에서는
이렇게 물에 빠진 전체 상황 자체가 문제이며
물에 빠져 있는 이상 그 어느 것이나
모두 고통의 문제라고 보는 차이가 있는 것이다.
이런 이유로
현실에서 일반적으로 좋다고 생각하는 상태들을
그 안에 문제가 들어 있으며
따라서 불완전한 목표점이 된다.
그러나 이는 부처님만 특이하여 문제삼게 되는
특이한 관점의 문제가 아니다.
모든 생명들이 비록 당장의 좋음에 집착하여
좋음을 얻는 순간 그 내용을 미리 보지 못하고,
또 그 관계를 일일히 이해하지 못하더라도,
그것이 영원하지 못하기에
그것이 무너지고 사라지는 상태에 처하면
그에 집착한 만큼 고통을 겪게 되며,
또 그런 집착에 바탕하여 행위하면,
또 다른 고통의 결과를 얻게 되어
결국 이런 내용들에서
모두 고통을 받게 되는 것이다.
즉 윤회 과정이나 하나의 생 안에는
분명 좋은 내용이 일부 포함되어 있지만,
그것은 영원한 좋음을 주지 못하고,
그것이 다시 징검다리가 되어
또 다른 고통을 받는 것이므로,
결국 이 전체 상황이
모두 해결해야 할 문제가 되는 것이다.
그리하여 색, 수, 상, 행, 식 5온으로 구성된 존재는
그 일체가 고통의 현상과 관련되므로
이를 오음성고로 표현하여 제시하게 된다.
결국 부처님이 해결하려는 고통은
일반 현실에서 생각하는 고통보다
더 근원적인 고통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현실에서 사람들이 집착하는 좋은 상태가
갖는 이런 문제점을 해결하지 못하면,
그것은 고통을 없애는 완전한 방편이
되지 못한다.
그리고 부처님의 이런 입장은
부처님이 세속에서 가장 높은 위치인
왕위에 오를 왕자의 입장에서
삶의 문제점을 이처럼 관하고
출가를 했다는 점을 통해서도 볼 수 있다.
즉, 왕위는 세속의 사람들이
대부분 부러움을 갖고
삶의 목표로 할 상태라고 할 수 있지만,
이런 상태는
결국 고통을 없애는 완전한 해결방안이 못되는 것임을
간접적으로 나타내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래서 윤회과정이나, 한 생에 들어 있는
좋은 상태를 성취하는 것을
목표로 추구하는 일반적인 입장과
이 모두를 고통의 현상으로 보고
이런 고통을 제거하는 것을 목표로 하는
부처님의 입장은 차이가 있게 된다.
현실에서 해결해고자 하는 고통과
부처님이 해결하고자 하는 고통의 범위의 차이는
다음의 비유와 같다.
몸에 종기가 난 경우,
사람들은 이 종기만 제거하여 낫는 것을
목표로 의사를 찾게 된다.
그런데 어떤 의사가 말하길,
몸도 영원하지 않아 결국 무너지고,
그 몸이 무너지면 역시 현재의 종기처럼
큰 고통을 안겨주므로
근본적으로 몸 자체를 제거해야 한다는
처방을 내린다면
누구나 우선 놀라게 된다.
종기의 치료를 원했는데,
그 고통을 없애려고 몸을 없애고 죽으라는 것인가.
이런 오해를 하게 된다.
그러나 부처님은
결국 무상하여 영원하지 않는 현상에 집착하는 경우,
그것이 현재 당장 고통을 주는 종기거나,
당장은 좋음을 주는 자신의 몸이거나
색, 수, 상, 행, 식 일체가 다 고통과 관련되고
그리고 그 고통이 윤회를 통해 무한히 반복되어
감을 말하는 것이다.
그래서 궁극적으로 안온한 열반에 이르러야 하고
그렇지 못하면 모든 것이 임시방편이 되고
불완전한 해결책이 됨을 설하는 것이다.
즉 바다에 빠져 있는 상태라면,
더 이상 빠지지 않을 섬에 도착하는 것을
목표로 나아가야 하며,
바람빠지는 튜브를 목표로 나아가서는
안 된다는 의미다.
부처님은, 현실의 모든 내용은
일정한 나쁨을 지금 받고 있거나
아니면 지금 당장 좋음을 얻거나,
그것이 생멸하는 현상으로서 무상한 것인 이상
그 일체가 결국 고통의 현상에
속한다고 보는 것이다. [일체개고]
부처님의 이런 고통에 대한 입장은
다음의 구절에서도 간단히 볼 수 있다.
"색(수상행식)은 무상하다.
무상한 것은 곧 괴로움이요,...
[참조 잡아함경 0009. 염리경(厭離經) ]
부처님은 한편으로는
현실에서 자신이라고 생각하는 그 모든 내용에
진짜의 자신이란 존재는 본래 없으며, [무아]
또 한편, 자신은 이번 한 번의 생으로
삶을 마치는 것이 아니고 무한한 시간 동안
윤회를 하며 삶을 이어가는 것이라고 설한다. [윤회]
그런 가운데 진리를 올바로 관하고
집착을 버린 가운데 임하면,
앞에서 문제라고 보았던 그 모든 것은
또 하나같이 문제가 되지 않는 것이다.
앞에서 소개한 타화자재천경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나온다.
..
타화자재천의 수명은 1만 6,000년이다.
그런데 어리석고 들은 것이 없는 무식한 범부들은
거기서 목숨을 마치면 지옥·축생·아귀 가운데에 태어난다.
그러나 많이 들어 아는 것이 많은 거룩한 제자들은
거기서 목숨을 마치더라도
지옥·축생·아귀 가운데에는 태어나지 않느니라.
...
[참고] 잡아함경 0863. 타화자재천경(他化自在天經)
즉 위 경전의 내용과 같이 해탈하고
진실한 지혜를 얻어 수행을 하면,
비로써 이들은 문제가 되지 않게 되는 것이다.
그것은 설령 하늘의 경우가 아니고
지옥의 경우라고 하더라도
사정이 다르지 않다.
5무간지옥이 보리라는 가르침은
바로 이런 사정을 함께 말하는 것이다.
[참고] 대반야바라밀다경 제 574 권 만수실리본
일반적인 경우는 이와는 어떻게 다른가.
사람들이 작은 번뇌에 시달리고 있을 때는
그 문제만 해결되면 그것으로 좋고,
문제가 없으리라 생각한다.
그런데 정작 다른 상태가 되면
또 그에 대해 번뇌를 일으켜 갖는다.
예를 들면, 이렇다.
하루하루의 생계를 걱정할 때는
이 생계만 해결되면
걱정이 없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질병 때문에 고통받는 이는
그 질병만 해결되면
아무런 걱정이 없을 것이라 생각한다.
그런데 앞의 나쁜 방향으로 뒤로 좋은 방향으로
무한히 확대해도 그 관계나 성격은 달라지지 않는다.
예를 들어 현실에서는
자신의 힘으로 소대변도 보기 힘든
중환자의 상태도 있다.
번뇌와 고통의 범위를 넓혀 생각하면,
현실적으로 나라 전체가 전쟁에 휩싸이고
기아와 빈곤에 휩싸이어
극심한 고통을 겪는 상태도 있다.
앞의 상황에서는 미처 보지 못한 더 큰 문제가 아닐 수 없다.
또 한편, 이들 문제가 해결되어
큰 재산을 갖고 건강하게 살고
나라도 풍요롭게 사는 경우도 있다.
앞의 입장에서는
이는 걱정이 해결된 안락한 상태라고 보겠지만,
그런데 재산이 많고, 건강하다고
아무런 문제가 없다고 생각하며
근심 걱정없이 살아가는 경우는 거의 없다.
또 나라 전체가 풍부하고
안락하게 산다해도
역시 해결해야 할 문제는 수없이
생겨나는 것이다.
그래서 번뇌란
주체나 시간적으로 공간적으로
그리고 양적으로 질적으로
그 내용과 범위가 달라질 뿐,
고통의 정도가 지옥에 이르거나,
즐거움의 정도가 하늘에 이르러도
그 사정은 달라지지 않는 것이다.
그리고
부처님은 일반 사람들이 미처 볼 수 없는
욕계, 색계, 무색계의 수많은 세계를 나열하고
다시 무한한 기간을 놓고 관찰하는 가운데
생명이 윤회하는 이 모든 세계의 상태가 전체적으로
다 같은 성격의 고통의 문제에 있음을 제시한 것이다.
그리고 이처럼 모든 문제를 관찰하고
이를 근본적으로 해결할 방안을 찾은 것이다.
그래서 이처럼 일체 무상한 것은
모두 괴로움이라는 것을 올바로 보고
이런 올바른 관찰과 깨달음을 통해
그에 대한 탐욕과 집착을 버려야만,
이런 번뇌와 집착으로 부터 생겨나는
독과 고통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음을 설하신 것이다.
그런데 이처럼 3계 6도의 모든 상태
세상의 색, 수, 상, 행, 식 일체를
괴로움이라고 올바로 관하고
집착을 버리고 해탈과 열반을 증득하면
이후 이들은 다 문제가 되지 않게 된다.
결국 일반적인 생각과의
부처님의 가르침의 차이는 다음과 같은 점이다.
일반적인 입장에서는
비유하면, 지금껏 자신이 몸에 난 종기 하나 때문에 고민하고
그것만 해결되면 삶에는 문제가 없다고 보는 것이다.
그러나 불교에서는 사실은 그렇지 않음을 보는 것이다.
일반사람들이 문제라고 보는 종기도 문제지만,
일반사람들이 문제가 없다고 본 몸도,
문제를 미처 보지 못한 것인 것일뿐
그 안에는 역시 수많은 문제가 있는 것이다.
그런데, 이들을 집착하면서 추구하면,
몸은 좋아지지 않고 더 악화된다.
또 몸은 그런 집착으로 당분간 유지해도,
그로 인해 윤회의 고통은 더욱 증가되는 것이다.
그런데 이 모든 번뇌를 그 근원부터 해결하면,
그 때는 비로소 그 모든 번뇌와 고통이
다 없어지는 것이다.
그런 경우는
일반사람들이 처음에 문제라고 본 종기도
역시 문제가 되지 않고,
또 더 큰 문제라고 볼 몸도 문제가 되지 않고
지옥도 문제가 되지 않고
또 하늘도 그 때야 비로소
정말 문제가 없게 되는 것이다.
이렇게 되기 위해서는
먼저, 일반적인 입장에서 처음에
아무 문제가 없으리라고 본 상태들이 왜 문제인가를 살펴야 한다.
즉 종기가 나면 종기가 문제인데
왜 종기가 없는 몸이나 삶까지도 또 심지어
하늘까지도 함께 문제라고 보아야 하는가를 관할 수 있어야 한다.
그리고 나서
종기나 현실의 몸이나,
또 생명의 기간이나 좋음이 극한에 이른 하늘이나,
그 모든 것은 다 무상한 것이어서 문제이고,
고통을 안겨주는 것임을 올바로 관해야 한다.
그러나 이에 대해 그 정체를 올바로 살펴
그 실재가 공하며,
이들이 본래 모두 생멸이 없고
본래 니르바나의 상태라는 사실을 깨닫고
그리고 그 모두에 대해 집착을 버리고 임하여,
해탈을 얻음으로써
그 모든 상황이 다 문제가 본래 없는 것이 된다.
실제로 집착을 버린 가운데,
자신이 그전까지 집착했던 것을 생각하면
그것이 아무런 괴로움을 주지 않게
바뀐 것을 알 수 있다.
그래서 수행자는
집착을 버려 번뇌를 제거한 상태에서
우선 과거에 자신이 집착하던 것들이
성취되지 않는 현실에서도 그대로
평안하고 안온하게 머무를 수 있다.
그리고 그런 상태에서
3계6도에서 윤회하는 수많은 생명의 고통과
자신의 문제를 함께 대비해 생각하면,
자신의 문제는
매우 작은 티끌과 같은 것임을 깨닫게 된다.
그리고 이런 티끌에 집착하며 추구하는 것은
안온한 즐거움을 주는 것이 아니고
또한 크고 오랜 이익이나 즐거움을 가져다주는 것도
아님을 알게 된다.
따라서 그런 상태에서
자신과 자신의 생명, 신체, 재산, 명예, 지위..등에 대한
집착을 버리고
아상, 인상, 중생상, 수자상을 갖지 않은 가운데,
모든 생명들을
자신과 같은 안온한 니르바나의 상태로 이끌고자,
원대한 서원을 일으키고
수행을 시작해 나가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런 상태는 다음과 같은 점이 다르다.
우선 자신의 생명, 신체, 재산, 가족, 명예, 지위 등에
집착을 갖고
그 집착하는 바가 얻어진다고 해서
자신의 괴로움의 문제가
근본적으로 해결된다고
잘못 보지 않는다는 점이 다르다.
또한 자신의 번뇌의 해탈 니르바나 뿐만 아니라,
자신을 포함한 온 생명의 해탈과 니르바나를
위해 노력하지만,
그러나 이 역시
얻을 것이 없음을 방편으로
집착을 갖지 않고 추구해나간다는 점이 또한 다르다.
살아가면서
무상하고 가치없는 것에 집착하여
번뇌를 일으키고 괴로움을 받는 경우는
이런 점을 잘 파악하여
자신과 온 생명이 다함께 해탈하고
안온한 니르바나를 얻을 수 있게 하는데,
노력을 기울이고
수행에 정진해나가야 하리라 본다.
부처님은 가장 기본적으로 이러한 고통이 발생하는 원인을
현상(색, 수, 상, 행, 식)이 영원하지 않아 무상함과 함께
또 그런 무상한 것에 대해 생명들이
탐욕과 분노 어리석음의 번뇌로 집착하고,
그 번뇌에 바탕해 행하기 때문에
고통의 윤회과정이 발생하는 것으로 본다.
따라서 부처님의 입장을 기본적으로 이해하지 못하고,
이처럼 일체 생멸하는 현상을 고통으로 관하지 못하고,
현실에서 얻는 많은 좋음들마저도
왜 모두 고통의 내용으로 보아야 하는가.
그리고 현실에서 자신이 집착해 추구하는 좋음이
왜 목적상태가 될 수 없는가를 이해하지 못하면,
수행의 목표점도 올바로 세울 수 없고
수행목표로서 열반의 성격도 이해하지 못하게 된다.
그리고 그를 얻을 방안도 올바로 찾을 수 없게 된다.
○ 고통과 열반의 관계
- 생멸 즉 고통이 없어진 상태로서의 열반
불교 수행자가 수행의 목표점에 대해
정확히 이해하는 것은
수행자가 처음 수행을 시작함에 있어서
앞으로 자신이 향해 나아갈 방향을 찾는 처음 단계가 된다.
현실의 문제가 무엇이고,
자신이 나아갈 목표 상태가 무엇인가를 정확히 모르면
앞으로 자신이 무엇을 끊고 중지하여 떠나고
다시 무엇을 향해 어떻게 수행하고
정진해야 하는가도 정확히 알 수 없다.
불교의 목표상태는 결국
현실의 고통과 그 고통의 원인을 제거하고
이 고통이 소멸되는 해탈, 열반 등의 상태가 된다.
무상하여 생멸하는 현상 일체를
고통으로 보는 것이므로,
결국 이런 생멸하는 현상을 모두 떠난 상태를
고통이 소멸된 열반으로 보게 된다.
특히 앞에서 처음 살핀,
일체에 관한 판단 내용으로서,
무상, 고, 공, 비아(무아, 무자성) 등의 내용과 함께
목표상태로서 열반 적정의 내용도
역시 일체법에 대해 성립하는 내용임도
이와 관련하여 주의깊게 이해할 필요가 있다.
이런 입장에서 다음과 같은 게송을 이해할 수 있다.
다음은 설산동자의 게송으로 유명한
무상게라는 게송이다.
제행무상(諸行無常) 이 세상 모든 일은 영원하지 않으니,
시생멸법(是生滅法) 이는 나타나고 멸하는 현상이다.
생멸멸이(生滅滅已) 나타나고 멸함이 없어지고 나면,
적멸위락(寂滅爲樂) 적멸이 즐거움이 된다.
그런데 위 게송과 관련하여
생멸이 멸해 없어진 상태는 어떤 상태를 말하는가.
여기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은 여러 입장을
생각할 수 있다.
본래 현상과 달리 실재 진여에서는
생멸이나 고통을 얻을 수 없다.
따라서, 우선, 현상의 생멸현상과 윤회생사를 일으키는 원인을
근본적으로 제거하여,
진여 실재만 남기는 상태를
그런 열반으로 생각할 수 있다. [회신멸지의 니르바나]
한편, 깨달음의 입장에서 보면,
현실 자체에 생멸이란 본래 없는데,
생멸한다고 보는 것은 망상분별에 의한 것이므로,
이런 망상분별과 번뇌 집착을 제거하고
생사가 곧 열반과 다르지 않음을 관하고
생멸현상에 머무르는 것도
생멸이 멸해 없어진 상태로 볼 수도 있다. [생사 즉 열반의 입장]
그러나 이 두 경우 모두 수행목표로서
니르바나는 현실에 모두 본래 이미 갖추어져 있는 상태로
보는 것은 다르지 않다.
근본불교와 대승불교에서
이런 여러 입장이 제시되고 있으므로
이들 내용을 함께 차례대로 살피기로 한다.
○ 생멸을 멸하는 방안 - 회신멸지의 니르바나
생멸현상 일체를 고통으로 관할 때에는
이런 생멸현상을 모두 멸하는 것을
곧 고통이 소멸된 열반으로 볼 수 있다.
잡아함경 0051. 괴법경(壞法經)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나온다.
...
색은 무너지는 법이다.
그 색이 소멸하면 열반이니,
이것은 무너지지 않는 법이다.
수·상·행·식은 무너지는 법이다.
그것들이 소멸하면 열반이니,
이것은 무너지지 않는 법이니라.
...
또한 잡아함경 0039. 종자경(種子經)에는
집착을 끊음과 해탈과의 관계에 대해
다음과 같은 내용이 나온다.
...
색(色)의 경계에 대해서 탐욕을 떠나면...
수(受)·상(想)도 마찬가지이며,
행(行)의 경계에 대해 탐욕을 떠나면
탐욕을 떠난 뒤에는
행에 대한 집착과 마음에서 생긴 접촉[觸]이 끊어지고,
행에 대한 집착과 마음에서 생긴 얽맴이 끊어진 뒤에는
반연(;마음이 대상에 의존하여 일어나는 것)이 끊어진다.
반연이 끊어지고 나면
그 식(識)은 머무를 곳이 없게 되어
다시는 성장하거나 뻗어나가지 못한다.
성장하지 못하기 때문에 행동하지 않고,
행동하지 않은 뒤에는 머무르며,
머무른 뒤에는 만족할 줄 알고,
만족할 줄 안 뒤에는 해탈하며,
해탈한 뒤에는
모든 세간에 대해서
전혀 취할 것도 없고 집착할 것도 없게 되며,
취할 것도 없고 집착할 것도 없게 된 뒤에는
스스로 열반을 깨달아
'나의 생은 이미 다하고 범행은 이미 섰으며,
할 일은 이미 마쳐 후세의 몸을 받지 않는다'고
스스로 아느니라.
라고 밝히고 있다.
이처럼 현상의 무상함과 생멸현상을
모두 고통의 현상으로 본다고 하면,
그런 생멸과 고통이 없는
니르바나는 과연 어디에 있는가.
이 경우, 우선 모든 현상을 나타내는 본 바탕이라고 할
공한 실재, 진여의 상태는
그 안에 생함과 멸함이나, 고통과 번뇌도 세울 수 없고
이들이 있다고 할 수 없다.
이렇기에 우선 이런 공한 실재 진여를
니르바나의 상태로 보게 된다.
이처럼, 공한 실재, 진여를 니르바나로 볼 때는
어느 현실도 공한 실재의 바탕을 떠나 있는 것이 아니고,
공한 실재는 본래 어느 상태에나 갖추어진 것이라 보지만,
단지 이 공한 실재를 바탕으로
생멸현상이 나타나 이 실재를 덮어 가리는 것만이 문제라고 보고,
생멸하는 현상, 즉, 감각현실과 관념을 모두 소멸시키고
이를 이후 더 이상 발생시키지 않게 하는 것을
니르바나에 도달하는 방안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즉, 공한 실재, 진여를 바탕으로 나타난 현상은
청정하고 공한 진여를 덮어 가리우는 것이며
따라서 이 현상을 모두 제거한 후
그것이 발생하게 될 원인을 제거하여 다시 나타나지 않게 하면,
본래 있던 공한 진여 상태와 니르바나만
드러나 남게 된다고 보는 것이다.
이 무상한 현상을 지워 내는 일을
쉽게 생각하면,
자신이 보고 생각하는 모든 세계의 모습은
자신의 감각기관과 인식기관을 통해서 얻는 내용이니,
이 감각기관과 인식기관에 독을 발라
그 기능을 정지시키면 되지 않겠는가 하고 단순하게 생각할 수도 있다.
또는 살아서 얻는 모든 현상이 고통이라고 보는 것이니,
죽음이 그 해결방안이 아닌가 하는 것도
같은 생각이라고 할 수 있다.
만일 생명이 죽게 되면,
그 생명이 이후 전혀 존재가 없게 된다면,
생멸현상이 없어지는 상태는
이런 죽음으로 인해 자연적으로 이루어진다고 볼 수 있다.
이런 입장에서는 생명이 죽게 되면
그와 관련하여서는 아무런 생멸현상도
남지 않는다고 보기 때문이다.
현실에서 사람들이 해결할 수 없는 고통에 직면할 때
이의 탈출방안으로 죽음을 생각하는 것도
이런 상식적 입장에 바탕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불교에서는 이런 식으로
문제가 자연적으로 해결된다고 보지 않는다.
이미 앞에서 윤회의 내용을 살핀 것처럼
생명이 죽는다해도 그 생명의 근본 정신(아뢰야식)은
소멸하지 않기 때문에 여전히 근본정신은 남아서
그 이전 생에서 가진 번뇌와 그에 바탕해
행한 업(뜻-말-행위,태도)에 의하여
다음 생을 받아 또 다시 살아가게끔 된다고 보는 것이다.
즉, 모든 세계의 모습은
마음 안에 들어온 내용물이라고 밝히는데,
우리가 현생에서 얻는 내용들은
근본 정신(아뢰야식)이 이번 생에서 변화하여 만들어 낸
정신들(제 2능변, 제 3능변[안,이,비,설,신 5식, 제 6 의식,])에 의해
얻는 것으로 본다.
즉 우리가 감각기관을 통해 얻는 내용들은
감각기관을 통한 5식 안의 내용들이고
우리의 관념 판단 등은 제 6식 안의 내용들인 것이다.
그리고 이것이 곧 제 3 능변에 해당한다.
그리고 이런 정신을 변화시켜 만들어낸
근본정신은 5식과 제 6의식이 소멸하고
그 안에 내용물이 얻어지거나 얻어지지 않더라도
소멸하지 않고 계속 이어져 나가는 것으로 본다.
관련내용 참조 해심밀경 3. 심의식상품(心意識相品)
따라서 근본 정신(아뢰야식)에서
기본적으로 세세 생생 반복해온 망상 분별과
탐욕 분노 어리석음의 번뇌와 집착의 쌓임이
제거되지 않으면,
사후에도 그런 상태로 근본정신이 다른 생명에 얹혀져서
새로운 감관과 인식기관 및 정신(전 5식과 제 6 의식 등)을 분화시켜
다음 생에서 또 다른 현상을 얻어 내게 되고
또 다음 생에서 또 다른 고통과 번뇌를 지금의 생과 같이,
반복해 받게 된다고 제시한다.
또 현실에서 악행을 한 이는 자신이
원하지 않아도 감옥에 붙잡혀 끌려가는 것과 마찬가지로
잘못 전도된 망상 분별과 번뇌와 집착에 바탕하여
행위를 하는 경우
그 업력에 의해 근본 정신은
원하던 원하지 않던,
다음 생에 지옥, 아귀, 축생의 악한 세계에서
다음 생을 시작하게 된다.
또 이런 업력은 이번 생에 한해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이전의 무한한 기간 동안 만들어진 것이다.
사정이 이와 같기에,
단지 이번 생에서 자신의 감관과 인식기관을
독을 발라 기능을 정지시키거나
단지 목숨을 마치고 죽는다고
이 윤회의 고통을 자연히 벗어날 수 있는 것이 아닌 것이다.
그래서 경전에서 설한 것처럼
본래의 상태가 니르바나임에도 불구하고
생명들은 실재[원성실상, 진여]를 바탕으로
나타난 감각현실[의타기상]과
이에 대해 갖는 관념[변계소집상]을 집착하여 행함으로써,
이러한 인연으로 오는 세상의 감각현실[의타기상]을 일으키는 현상이
장구한 세월동안 지속되는 것이라고 이해할 수 있다.
그래서
이 근본정신이 다음 생에 또 다른 식(정신)을 변화시켜
나타내지 않게 하기 위해서는
수행을 통하여
기존에 가진 전도된 망상 분별과
번뇌, 집착의 근본을 모두 말끔히 제거하고
더 이상 번뇌와 애착이 발생하지 않는 상태가 되도록
노력해야 하는 것이다.
따라서 현실에서 감각현실과 관념을 얻는 상태에서
가장 먼저 필요로 하는 것은
앞과 같은 망상 분별과 이를 바탕으로 해서 갖는
자신과 자신의 것에 대한 집착의 제거라고 할 것이다.
한편 이런 집착을 벗어나면, 우선 그 자체로
현실이 무상하더라도 고통의 상태에서 벗어나고,
고통의 윤회를 불러일으키는 악행도
중지할 수 있다.
즉 집착을 벗어나면,
당장 고통을 주는 것이거나,
또 있는 좋음이 사라지는 경우에도
고통에서 벗어날 수 있다.
가장 집착을 버리기 힘든
자신, 자신의 생명, 목숨에 대해서도
역시 집착을 버림으로써 그것이 무너지고
사라지는 상태에 대하여 고통과 두려움을 받지 않을 수 있다.
그래서 현실은 여전히 무상한 가운데에서도
망상분별과 집착을 제거하면, 무상한 생멸현상은
고통을 주지 않는 생멸현상으로 남게 된다.
또한 이로써 집착에 바탕한 악행을 중지하고
올바른 수행에 정진할 수 있는 것이다.
잡아함경 처음부터, 불교 전반을 통해서
집착을 버리고 마음의 해탈을 얻는 것이
강조되는 것은 이런 사정 때문이다.
그리고 이런 수행을 통하여
망상 분별과 번뇌 집착을 제거하여
마음의 해탈(심해탈)과 지혜의 해탈(혜해탈)을
완전히 얻게 되면,
근본 정신(아뢰야식)이 맑게 정화된 상태로써
그로써 이후 애착으로 인한 후생의 식(정신)을 발생하지 않게 되고
따라서 현상을 얻는 감각과 인식도 발생하지 않고
진여 실재를 덮을 현상 내용도 나타나지 않게 되어
그 생명은 니르바나의 상태에 머무르게 된다고 볼 수 있다.
이는 몸과 마음이 함께 아주 없어져서 [회신멸지(灰身滅智)]
청정한 근본 정신과 진여 실재만 남고,
이후 세세생생 생멸현상이나 생사윤회가 완전히 남김없이 소멸되는
상태로써 '남김이 없는 니르바나'[무여열반]이라고 표현한다.
한편 잡아함경에서는
윤회 과정에서 수행자가 수행을 통해
이런 열반을 최종적으로 얻게 되는 과정과 단계에 대해
여러 형태의 열반을 다음과 같이 제시하고 있다.
....
그 사람이 이와 같이 알고 이와 같이 보면,
욕유루(욕계에서의 번뇌)에서 마음이 해탈하고,
유유루(색계,무색계의 번뇌)에서 마음이 해탈하며,
무명유루(3계의 어리석음)에서 마음이 해탈하고,
해탈한 줄을 알고 보아
'나의 생은 이미 다하고 범행은 이미 섰으며,
할 일은 이미 마쳐 후세의 몸을 받지 않는다'고
스스로 아느니라.
만일 해탈하지 못하더라도
법을 탐하고 법을 기억하며 법을 좋아하기 때문에 중반열반을 취하게 될 것이다.
만일 또 그와 같이 되지 않으면 생반열반을 취하고,
만일 그와 같이 되지 않으면 혹은 유행반열반을 취하고,
또 만일 그와 같이 되지 않으면 혹은 무행반열반을 취하기도 하며,
또 만일 그와 같이 되지 않으면 상류반열반을 취한다.
또 만일 그와 같이 되지 않으면
그는 곧 법을 탐하고 법을 기억하며 법을 좋아한 공덕 때문에
자성광음천(自性光音天)에 태어나고,
또 만일 그렇게 되지 않으면 무량광음천(無量光音天)에 태어나며,
또 만일 그렇게 되지 않으면 소광천(少光天)에 태어날 것이니라.
...
참조 잡아함경 0868. 해탈경(解脫經)
이는 수행자가 윤회과정과 관련하여
열반을 얻는 과정과 단계를 설한 내용이다.
윤회하는 세계는 크게 욕계와, 색계, 무색계로 나누는데
수행자가 현생에서 수행을 완전히 성취하여, 열반을 얻지 못하는 경우,
욕계에서 죽고 색계에 가서
그 중유(中有)의 상태에서
남은 번뇌를 끊고 반열반하는 경우를 중반열반이라고 하고,
수행정도에 따라,
색계에 태어난 후 오래지 아니하여 곧 남은 번뇌를 끊고, 반열반하는 것을
생반열반이라고 하며,
색계에 난 후 그 하늘에서 오랜 시간을 노력 수행하여
남은 번뇌를 끊고 바야흐로 반열반하는 것을
유행반열반이라고 하고,
색계에 난 후 그 하늘에서 수행하지 않고,
게을러서 장구한 시간을 지내면서 남은 번뇌를 스스로 벗고 반열반하는 것을
무행반열반이라 하며,
색계에서 아래단계의 하늘[下天]에서 윗 단계의 하늘[上天]로 나아가면서
그 사이에 남은 번뇌를 끊고 반열반하는 것을 상류반 열반이라 한다.
그리고 그보다 수행정도가 더 낮은 경우에는
위에 설한 것과 같이 여러 색계의 하늘 가운데,
또 태어나게 됨을 설한 내용이다.
○ 회신멸지(灰身滅智) 니르바나의 문제점
- 일반인의 입장에서의 문제점
불교에서는 기본적으로
생멸하는 현상 일체를 모두 고통으로 보기 때문에,
이 생멸 현상이 모두 멸해 없어진 상태를
니르바나로 보게 된다.
그래서 불교에서 추구하는 니르바나의 상태는
세상에서 생멸하는 현상 안에서
일정한 좋음을 찾고
이에 애착과 집착을 갖고 추구하는 것과는
입장이 다르다.
예를 들어 현실을 살아가는 생명은
대부분 자신의 생명, 신체, 재산, 가족, 지위, 명예...등이
비록 영원하지 않고
결국엔 소멸되어 없어지는 것이더라도
이것을 좋은 것으로 보고 애착을 갖고
이를 얻어 유지하려는 마음을 갖고
이를 집착하며 살아간다.
그러나 불교에서는 이렇게 자신이 애착을 갖는
이들 생멸하는 현상 일체가
고통이나 고통의 원인이 되는 것이라고 보고
애착을 갖는 이들 현상이 모두 멸해 없어진 상태를
니르바나라고 하여 구하는 것이므로,
이들에 대해 애착을 갖는 일반적인 입장에서는
오히려 이런 니르바나에 대해
좋다는 생각보다는 두려움을 더 느낄 수도 있다.
불교에서 생멸하는 현상 가운데
나쁜 내용만 고통으로 보고 해결할 문제로 보지 않고
생멸현상 일체를 모두 다 함께 고통으로 보고
이 모두를 멸해 없애야 한다고 보는 이유에 대해서는
이미 앞에서 살폈다.
생멸 현상에 나쁨이 있다면 그것은 당연히 문제이고
아무리 좋은 것이더라도,
그것이 영원하지 않고 생멸하는 것인 이상
결국 멸해 없어지는 것이므로 끝내 고통을 주게 되는 것이고,
또 집착을 갖고 추구하는 좋음은 인과관계상 또 다른 나쁨을
이후 세세 생생 불러 일으키고 가져다 주는 원인이 된다고 보기 때문이다.
즉 그 좋음은 그것만 보면 좋은 것이라 할 것이지만,
그것은 인과관계상 또 다른 나쁨을 당연히 불러오기 때문에
현상 안의 좋음은 세세생생
길고 긴 고통으로 이끌고 가는 징검다리가 되는 것이고,
따라서 생멸하는 현상 일체는
그것이 좋은 것이나 나쁜 것이나 가리지 않고
모두 다 함께 고통으로 보는 것이다. [일체개고]
그래서 앞에서 살핀 것처럼
생멸현상 일체가 멸한 상태를 니르바나로 보고
이 적멸한 상태가 곧 즐거움이 된다고 말하는 것이다.
그런데 일반인의 입장에서는 다음과
같은 의문을 갖게 된다.
생멸현상이 모두 멸해 없어진 적멸한 상태에
과연 즐거움이 있을 것인가.
생멸이 멸해 없어진 상태는
그 안에 고통이 있을 수 없다고 할 것이지만,
그렇다고 현상 안에서 얻는 좋음도
생멸현상이 없어진 이상 있을 수 없다고 할 것이다.
그러나, 생멸하는 일체를 고통으로 보기에
이 고통에 상대하여
생멸이 없는 적멸을 즐거움이 된다고 보는 것이다.
다만, 이처럼 몸과 마음이 아주 없어진 상태를
무여열반의 상태로 보면,
생멸현상은 아무 것도 없기 때문에
그 안에 고통이 있을 수 없겠지만,
현실 안의 좋음에 애착을 갖는 입장에서는
그렇게 아무 것도 없다는 사실로부터
오히려 두려움을 느끼게 된다.
마치 죽으면 아무 것도 없다고 생각하는 이가
죽음 이후에는
살아서 자신이 애착을 갖던 것들이
아무 것도 없게 된다고 생각하여
죽음에 대해 두려움을 갖는 것과 마찬가지다.
다만 불교에서는
죽음으로 인해 그렇게 당연히 되는 것이 아니고
수행을 통해 번뇌를 완전히 제거해야
회신멸지의 남김이 없는 니르바나[무여열반]의 상태에
비로소 이르게 된다고 보는 것이므로,
이 점만 차이가 있는 것이다.
여하튼 현실의 생멸하는 현상에 애착을 갖고 있던
입장에서는
이런 회신멸지의 니르바나는
비록 그 안에 고통이 없다 하여도
애착하는 좋은 것도 역시 없는 것이기에
그로 인해 두려움을 느끼게 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즉, 개똥밭에서 구른다 해도 이승이 좋다고 하고
비록 삶이 고달퍼도 죽음보다는 삶이 좋다고 여기며
삶에 집착을 갖고 살아가는 것이 보통이고
특히 살면서 좋음을 만끽하며 살아가고 있는 경우는
생멸현상이 모두 사라진 이런 회신멸지의 니르바나는
모든 고통이 제거된 축복이 아니라
오히려 두려움을 주는 상태라고 할 수 있다.
이는 물론 생멸하는 일체 현상은
그것이 좋은 것이더라도
세세생생 고통을 받게 되는 원인이 되기에
고통으로 보아야 한다는
불교의 입장에 동의하지 못하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여하튼 현실에 애착과 집착을 갖는 만큼
이들 생멸 현상이 모두 사라진 니르바나는
바로 그렇게 생멸현상이 모두 사라져 없다는 사실 자체가
오히려 공포와 두려움을 줄 수도 있다.
그리고 자신의 생명, 신체, 재산, 가족, 지위, 명예...등에 대해서는
그것이 세세생생 고통을 불러 일으킨다해도
우선 당장은 좋다고 보고 여전히 애착을 갖고,
그 안에 비록 고통이 소멸되어 없더라도
이런 생멸현상 일체가 모두 소멸되어 없는 니르바나의 상태를
향해 나아가는 것을 주저하게 된다.
이는, 만일 죽으면 아무 것도 없고
그 안에 고통이나 고통을 느낄 주체마저도 없다고 생각하더라도,
그렇다고 고통을 피해 죽음을 곧바로 선택하지 못하고
주저하는 것과 마찬가지다.
또 바위나 모래는 그 안에 정신이 없어,
망치로 부순다해도 고통을 느끼지 못한다 하더라도
그런 고통을 전혀 느끼지 않기 위해
바위나 모래가 되기를 원하지는 않는 것과 마찬가지다.
따라서 공한 실재는 내용을 얻을 수 없어
생멸이나 고통을 그 안에 세울 수 없기에 .
공한 실재를 니르바나라고 하지만,
이 사실만으로 공한 진여, 실재만 남기고
이를 덮고 있는 모든 생멸현상을 소멸시켜 없애는 것을
주저하는 마음을 일반의 입장에서는 갖게 된다고 본다.
- 수행자의 입장에서의 문제점
수행자는 다만, 기본적으로 일반인과 달리
일반인이 보지 못하는 무한한 생사 윤회의 고통을 관하게 되므로,
이 생사윤회의 고통을 멸하는 회신멸지의 니르바나를
일반인처럼 두렵게 여기지 않고
오히려 이를 수행목표로 삼게 된다.
그러나 또 한편,
수행자가 망상분별과 집착을 제거하게 되면,
굳이 회신멸지(灰身滅智)의 니르바나에 들지 않더라도
생멸하는 현상이 곧 청정한 니르바나와 다르지 않음을 관하게 되고
생사를 받고 생멸하는 현상에 머물러도
이런 생사와 고통에 물들지 않고 머물 수도 있다.
그리고 수행자가
만일 자신만의 깨달음과 고통의 소멸을 원하지 않고
다른 모든 생명의 깨달음과 고통의 소멸을 원하고,
더 나아가 복덕과 지혜를 원만히 성취하여
부처님과 같은 법신의 상태를 증득하는 것을
목표로 할 때는
앞과 같이 자신만 생사 윤회를 피해
회신멸지의 니르바나에 들게 되면
이런 중생제도와 성불의 서원을 성취할 수 없음을
문제점으로 보게 된다.
그래서 이런 입장에서는 오히려
무한한 생사 윤회의 고통을 피해
회신멸지의 니르바나에 들지 않고
생사를 받으며 중생제도와 성불을 위한
보살 수행을 행하게 된다.
이는 간단히 말하면 생사 즉 열반임을 깨닫는 것을
그 바탕으로 한다.
더욱이 이런 자비심을 갖고 중생제도를 위해
끝내 성불하지도 않고 열반에 들지 않으며
생사를 피하지 않는 보살도 있다.
..
"보살 일천제는 항상 열반에 들지 않는다.
무슨 까닭인가?
능히 모든 법이
본래부터 열반인 것을 잘 알기 때문에
열반에 들지 않는다.
...
K0160V10P0846c23L; 不入涅槃佛告大慧菩薩摩訶薩一
K0160V10P0846c24L; 闡提常不入涅槃何以故以能善知
K0160V10P0847a02L; 一切諸法本來涅槃是故不入涅槃
...
[참조 입능가경 집일체불법품(集一切佛法品)]
라고 경전에서 밝히는 내용이
이와 관련된다.
여기서 '일천제'란 본래 부처가 될 수 없는 이를 의미한다.
그래서 보살 일천제란
보살 가운데 자비의 마음으로 중생을 제도하기 위하여
모든 중생을 제도하기 전까지는 성불하지 않겠다는 서원을 세워
성불하지 않는 경우를 의미한다.
여하튼 이런 보살 일천제는 중생을 제도하기 위해
무한히 생사를 피하지 않고,
끝내 성불하지 않고 열반에 들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이유가 보살은
모든 생멸하는 현상이
본래부터 열반인 것을 잘 알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생멸하는 현상이 그대로 생멸이 없고
니르바나라는 것은
처음 생멸하는 현상에 생멸과 고통이 있다고 보고
이를 제거해야 한다고 본 처음의 입장과는
언뜻 모순되는 내용처럼 생각된다.
따라서 어떤 근거로 생멸하는 일체현상에
생멸이 본래 없고 고통도 본래 없는 것이어서
본래 니르바나라고 하는 것인가를
좀 더 자세히 이해할 필요가 있다.
a name=nirvana
○ 보살의 생사 즉 열반
분별과 집착을 제거하고 깨달음을 얻게 되면,
굳이 회신멸지(灰身滅智)의 니르바나에 들지 않더라도
그 이후에는
생멸하는 현상이 곧 청정한 니르바나임을 관하고
생멸하는 현상에 관계없이
이에 물들지 않고 이에 머물 수도 있다.
생멸하는 현상이
그에 대한 망상분별과 집착을 떠나면
그 자체가 곧 청정한 니르바나(열반)이라는 것은
다음과 같은 여러 내용을 근거로 한다.
가장 먼저
현실에서 망상 분별과 번뇌, 집착을 벗어나면
생멸하는 현상을 굳이 멸하지 않고
생사 윤회를 하더라도
그로 인한 고통과 악에 물들어 오염되지 않게 된다.
즉, 애착과 집착을 갖던 것에 집착을 갖지 않으면,
무언가를 추구할 때에도 집착하지 않음으로 인해
그것을 얻기 전까지 그것을 얻지 못하여 일으켜 갖던
갈증과 불만, 불쾌, 고통에 시달리지 않게 된다.
또 무엇을 얻은 후에도 그에 집착하지 않음으로써
그것이 사라질 것을 생각하여 두려움과 불안에 시달리지 않게 된다.
또 그것이 사라진다해도 집착하지 않기에
그로 인해 고통을 받지 않게 된다.
또 집착을 갖지 않기에 이로 인해
다른 생명을 해치는 악행을 중지하고 끊고,
올바른 수행에 정진할 수 있는 것이다.
이처럼 망상분별과 집착을 갖지 않기에
무상한 생멸현상은 그대로 고통을 주지 않는
생멸현상으로 남게 된다.
그래서 망상분별과 집착을 제거하면
현실은 곧 고통이 소멸된
니르바나와 같은 상태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한편 다음과 같은 근거에서도
생멸하는 생사 현실이 곧 니르바나라고 보게 된다.
우선 이미 앞에서 본 것처럼
공한 실재에는 생멸이나 고통을 얻을 수 없어
니르바나라고 함을 보았다.
그런데, 공한 실재와 차별적인 생멸현상에 대하여
대반야바라밀다경에서는 다음과
같이 그 관계를 설명한다.
...
왜냐 하면
사리자여,
이 색은 색의 공함이 아니고,
이 색의 공함은 색이 아니나,
색은 공을 떠나지 않고
공은 색을 떠나지 않으며,
색이 곧 공이요
공이 곧 색입니다.
수, 상, 행, 식도
이와 같습니다.
...
라고 밝히고 있다.
K0001V03P0916b13L; ... 何以故舍利子是色
K0001V03P0916b14L; 非色空是色空非色色不離空空不
K0001V03P0916b15L; 離色色卽是空空卽是色受想行識
K0001V03P0916b16L; 亦復如是乃至是十八佛不共法非
K0001V03P0916b17L; 十八佛不共法空是十八佛不共法
K0001V03P0916b18L; 空非十八佛不共法十八佛不共法
K0001V03P0916b19L; 不離空空不離十八佛不共法十八
K0001V03P0916b20L; 佛不共法卽是空空卽是十八佛不
K0001V03P0916b21L; 共法舍利子如是菩薩摩訶薩修行
K0001V03P0916b22L; 般若波羅蜜多有方便善巧故能證
K0001V03P0916b23L; 無上正等菩提...
참조 대반야바라밀다경 제 2분 행상품
즉, 공한 실재는
현실의 색, 수, 상, 행, 식 오온은 아니지만,
현실은 공한 실재와 떨어져 있는 것이 아니고,(色不'離'空)
또 공한 실재는 그런 현실과 떨어져 있는 것이 아니다.
그렇기에
현실은 곧 공한 실재이고
공한 실재는 곧 현실이라고 관할 수 있는 것이다.
결국 현실은 이런 색즉시공과 같은 관계로써
그 현실을 곧 공한 실재, 니르바나의 상태로
관할 수 있는 것이다.
반야심경에서도 이와 같은 내용을
볼 수 있다.
반야심경에서는
색불이공 공불이색
색즉시공 공즉시색, 수상행식 역부여시...
시고 공중무색 무수상행식...
라고 하여
현실의 내용과 실재의 공함의 관계에 대해,
제시한다.
즉, 색불이공 공불이색 색즉시공 공즉시색...의 구절에서는
대반야바라밀다경과 같이
색,수,상,행,식의 현실 내용이 공한 실재와 다르지 않고(色不'異'空)
곧 공한 실재로 볼 수 있는 관계성을 밝힌다.
또한 이어지는
공중무색무수상행식(空中無色無受想行識)...이하의 구절에서는
공한 실재에는 색,수,상,행,식이 있다 할 수 없음을 밝혀서,
공한 실재는 색,수,상,행,식이 아니고 색,수,상,행,식과 다르며,
서로 구별되는 사정을 밝히고 있는 것이다.
또한 이는 공한 실재의 입장에서 본다면,
현상의 모든 차별적인 내용을 세울 수 없음을 밝히는
내용으로도 볼 수 있다.
..
K0020V05P1035a05L; 色不異空空不異色色卽是空空卽
K0020V05P1035a06L; 是色受想行識亦復如是舍利子是
K0020V05P1035a07L; 諸法空相不生不滅不垢不淨不增
K0020V05P1035a08L; 不減是故空中無色無受想行識無
K0020V05P1035a09L; 眼耳鼻舌身意無色聲香味觸法無
...
참조 반야바라밀다심경 현장역
한편 다음과 같은 근거로,
생멸하는 현상에는 생멸이 본래 없고
고통이 본래 없음을 말하기도 한다.
즉, 생멸이나 고통으로 보는 내용은
이미 본 바와 같이
본래 진짜라고 할 영원불변한 실체의 내용이 아니고[무아, 인무아, 법무아, 승의무자성]
또한 그런 현실내용은 실재의 내용이 아니고 [의타기상의 생무자성]
한편 이런 생멸과 고통에 대한 관념적 분별에는
감각현실과 같은 자상이 없는 것이고 [ 변계소집상의 상무자성]
또 반대로 감각현실에는 그런 관념에 해당하는 내용이 없는 것이므로,
생멸이나 고통이라는 것은 본래 실다운 내용이 아니고,
오직 망상 분별 안에서 있는 내용이어서
이런 망상분별을 떠나면
이런 생멸과 고통은 얻을 수 없기에
현실 자체가 곧 니르바나라고 하는 내용이 제시된다.
예를 들어 대승경전 가운데 하나인 해심밀경에서는
다음과 같이 본래 일체법이
다 열반임을 제시하는 내용이 나온다.
...
일체 법이
생함도 없고 멸함도 없으며 본래 고요하여
자성이 열반이라고 말한다.
무슨 까닭인가?
만일 법의 자상(自相)이 도무지 있는 것이 없으면
곧 생기는 것이 없을 것이요,
생기는 것이 있지 않으면
곧 멸하는 것이 있지 않을 것이요,
생함도 없고 멸함도 없으면
곧 본래 고요할 것이요,
본래 고요하면
곧 자성이 열반이다.
그 가운데는 다시 그로 하여금
열반에 들게 할 것이
아예 조금도 없는 까닭이다.
그러므로 상무자성성의 밀의에 의지해,
일체 법이 생함도 없고 멸함도 없으며
본래 고요하여 자성이 열반이라고 말한다.
...
...
K0154V10P0717c05L; 說言一切諸法無生無滅本來寂靜
K0154V10P0717c06L; 自性涅槃何以故若法自相都無所
K0154V10P0717c07L; 有則無有生若無有生則無有滅若
K0154V10P0717c08L; 無生無滅則本來寂靜若本來寂靜
K0154V10P0717c09L; 則自性涅槃於中都無少分所有更
K0154V10P0717c10L; 可令其般涅槃故是故我依相無自
K0154V10P0717c11L; 性性密意說言一切諸法無生無滅
K0154V10P0717c12L; 本來寂靜自性涅槃...
참조 해심밀경(解深蜜經) 무자성상품(無自性相品)
위에서 살핀 것처럼,
현실이 공한 실재를 떠나지 않은 것이어서
현실이 곧 공한 실재이고(색즉시공..)
또 한편, 생멸이나 고통이
본래 실체가 없고, 실재가 아니고
그 관념은 자상을 갖지 않고
또 그 관념은 감각현실에 없는 것으로서,
실답게 있는 것이 아니므로
생멸하는 현상과 생사가 본래 니르바나라고 하여도,
생멸하는 현상 속에서
뭇 생명이 윤회의 고통을 받게 되는 것은
그가 그러한 사실을 올바로 관하지 못한 가운데
망상 분별을 일으키고
그에 집착을 일으키기 때문인 것이다.
따라서 생사 즉 열반이라는 말은
그것만으로 망상분별과 집착에 바탕하여 살아가는
뭇 생명들의 생사의 현실이 그 상태 그대로
아무런 문제도 없고 고통이 없음을
나타내는 것은 아니다.
즉, 색,수,상,행,식의 현상과 생멸현상의 차별을
공한 실재와 관련시켜 살피지 못하거나,
그런 관념들이 모두 실답지 못함을 깨닫지 못하고
생멸현상에 망상분별을 일으키고 집착을 갖게 되면,
그런 바탕에서 고통이 존재하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현실이 곧 공한 실재와 다르지 않고,
생사가 곧 본래 청정한 니르바나인 상태에서
생멸하는 현상에 관계없이
윤회의 고통을 받지 않고
청정한 니르바나에 머물기 위해서는
바로 이런 사실을 깨닫고
망상 분별과 집착을 버리고
현실을 곧 공한 실재 니르바나로 깨달아 관하여
집착없이 임하는 것이 요구된다.
현실을 곧 공한 실재 니르바나로 관하며,
생멸과 고통이 본래 없음을 관하는 것은
현실을 관할 때
이 현실의 내용을
곧 실재의 공함에 상응한 상태로 관하고,
현실에서 갖는 생멸, 고통 등의 여러 관념이 실답지 않음을 깨달아,
망상 분별을 일으키지 않고
그에 대해 집착을 하지 않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고 그렇게 실재에 상응한 상태로 올바로 현실을 관하면서
현실에서 망상 분별과 번뇌, 집착을 벗어나면
역시 생멸하는 현상을 굳이 멸하지 않고
생사 윤회를 하더라도
그로 인한 고통에서 벗어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결국 생사 즉 열반이라고 말하지만,
뭇 생명의 현실은,
본래의 니르바나의 상태가 망상분별에 덮이어
고통을 받아가는 상태이므로,
현실에서 실제로 각 생명이
생사의 고통에 물들지 않고
니르바나의 상태에 머무르기 위해서는
이러한 깨달음을 통해
망상분별과 번뇌, 집착을 제거하는 수행이
갖추어져야 비로소 가능한 것이다.
이와 같이 보면
열반의 의미는
번뇌와 집착을 소멸한 상태에
그 비중을 높게 두게 됨을 이해할 수 있다.
이처럼 열반을
번뇌와 집착을 소멸한 상태와 관련해 이해하는 내용으로
다음과 같은 내용을 볼 수 있다.
...
색은 본래부터 그 일체가 무상하고, 괴로우며,
변하고 바뀌는 법이다.
이렇게 알고 나면
그 색으로 말미암아 생겼던
모든 번뇌의 해로움과 불꽃,
근심과 번민은 모두 끊어져 없어진다.
그것이 끊어져 없어진 뒤에는
집착할 것이 없게 되고,
집착할 것이 없게 된 뒤에는
안락하게 머무르게 되며,
안락하게 머무른 뒤에는
반열반(般涅槃)을 얻게 된다.
수·상·행·식도 그와 같으니라."
참조 잡아함경 0035. 삼정사경(三正士經)
..
염부차가 사리불에게 물었다.
어떤 것을 열반(涅槃)이라고 합니까?
사리불이 말하였다.
열반이라는 것은
탐욕이 영원히 다하고,
성냄이 영원히 다하며,
어리석음이 영원히 다하고,
일체 모든 유루(有漏 : 번뇌)가 영원히 다한 것이니,
이것을 열반이라고 합니다.
참조 잡아함경 0490. 염부차경(閻浮車經)
이처럼
열반은 수행의 목표상태로서
경전에 많은 가르침이 있는데
이는 모두 앞에서 본 것처럼
각 생명이
망상분별과 번뇌 집착을 제거하여
생멸과 고통에서 벗어난 상태를 의미하는 것이다.
다만, 생멸하는 현상을 놓고
여기에서 생멸과 고통이 본래 없다는 내용은
일반인의 입장에서 이해하기 어려울 수 있다.
이하에서는 이에 관해 좀 더 자세히 설명하기로 한다.
>>>>>[생멸하는 현상에 생멸이 본래 없음에 대한 자세한 설명]
○ 생멸현상에 본래 생멸이 없음
일체 현상이 영원하지 않아 생멸하고
생멸하는 것 일체는 고통이이서
문제라는 것이 무상, 고의 판단인데,
그러나 또 일체가 본래 생멸이 없고
고통이 없는 열반의 상태여서,
그런 문제가 해결된 상태이기도 하다는 것은
쉽게 이해하기 힘든 내용이기도 하다.
그래서 이 문제를 다음과 같이
조금 더 자세하게 살펴나갈 필요가 있다고 본다.
우선 현실의 문제점은 고통이다.
현실이 어떠하든 그 안에 고통이 없다면,
수행자가 수행을 통해 해결해야 할 문제도
본래 없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현실의 삶에는
여러가지 고통이 있는 것이며
따라서 이미 본 것처럼
고통의 정체를 자세히 살핀 것이다.
그것은 우리가 살면서 직접적으로
고통으로 느끼는 고통도 고통이지만,
좋음으로 느끼는 내용도
그것이 영원하지 않고 결국 무너지는 것이어서
그에 집착하면 역시 고통이 됨을 보았다.
또 분별과 집착으로 일으킨 행은 고통의 윤회를
불러 일으키는 것이다.
이런 결과 생멸하는 현상 일체는
모두 고통으로 관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미 앞에서 하나의 현상을
다양한 측면에서 살펴
일체는 무상하고, 고이며,
공하고 무아, 무자성이라는 판단을 한 바 있다.
그런데 이 고통의 문제를 살피기 위해서는
생멸하는 현상의 정체를
좀 더 자세히 살필 필요가 있다.
그래서 우선 존재하는 모든 존재의 영역을
다시 3 가지로 나누어 살피게 된다.
우선 모든 존재는
어떤 존재가 주관과 관계하지 않은 상태에서
본래 있는 그대로의 상태(진여)인 실재내용을 하나 생각할 수 있고
한편 주관이 관계하여 얻는 내용으로서
감각현실로 얻는 내용을 생각할 수 있고
다시 관념으로 만들어 갖는 내용을
생각할 수 있다.
예를 들어 바위를 하나 놓고 생각한다면,
우선 주관이 관계해 얻는 어떤 내용이 아니고
바위가 바위 있는 그대로(진여)의 내용이라고 할
실재 내용으로서의 바위가 있다. [원성실상]
또 한편 눈을 뜨면 보는 모습이나
손으로 만져 얻는 감각하는 현실내용으로서 바위도 있다. [의타기상]
한편 자신이 눈을 뜨지 않더라도
말이나 생각만으로 떠올리는 바위란 존재가 있다.
이것은 관념적 내용으로서의 바위다. [변계소집상]
존재의 진실성이 문제되는 내용을
이렇게 존재의 영역을 3 가지 영역으로 나누고,
그 정체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그런 가운데 일체는 본래 생멸현상과 고통이 있다고 할 수 없으며
따라서 열반의 상태라는 판단이 나오게 되는 것이다.
어떻게 보면 현실에서 고통을 경험하고
이 고통을 해결하려 노력하여
그 목표상태를 열반이라고 표현하여
이를 힘들여 찾는 것인데
이미 일체가 다 그런 열반의 상태에 있다는 판단은
약간 이해하기 힘든 내용일 수 있다.
이것은 다음 사정 때문에 발생한다.
예를 들어 어떤 이가 눈을 떠 감각현실[색]을 얻고
어떠어떠한 부분은 '나', 어떤 부분은 '다른 사람'이거나 '꽃'이라는 등으로 생각할 때
이런 생각은 모두 감각내용이 아니라
마음 속의 생각이고 관념이다.
이런 관념은
눈을 뜨거나 눈을 뜨지 않고 감아도
마음 안에서 떠올릴 수 있는 내용이다.
그래서 예를 들어
눈을 떠야만 그 모습을 얻는 감각내용과는 구별된다.
한편, 이런 관념은 각 생명이
희망을 갖고 이를 집착해 추구하고
이로 인해 고통을 받는 과정에서
모두 관련되고 문제된다.
예를 들어 어떤 이가 희망을 갖고 이에 집착하는 경우는
공통적으로 다음 내용이 그 안에 담기게 된다.
즉 어떤 이는
일정한 관념으로 희망을 만들어 갖고
이런 희망의 내용과 같은 관념을 얻을 감각현실을 노력하여 구하고
감각현실 안에서 그런 감각현실을 얻게 되어
그에 따라 처음의 희망의 내용(관념)과 일치하는 관념을 얻게 되면
이런 경우에 자신의 희망이 성취되었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런 상태를 구하고
이런 상태를 얻지 못하면, 괴로움을 얻게 되는 것이다.
예를 들어 현실에서 어떤 꽃을 찾는 이는
먼저 마음에서 꽃의 관념으로 희망을 만들어 갖는 것이고
감각현실에서는 그런 꽃의 관념을 얻을 수 있는 감각현실을 찾아 구하고,
그런 감각현실을 얻어 그런 꽃의 관념을 얻게 되면
이로써 자신의 원래 희망이 성취된 것으로 생각하는 것이다.
그리고 자신이 그 꽃에 크게 집착하는 경우에는
그 꽃을 얻지 못하면 이로써 그는 괴로움을 받는 것이다.
그래서 이 관념은 현실의 고통의 문제와
모두 기본적으로 관련이 되는 것이다.
그런데 사람들은
어떤 감각현실에서 이런 관념을 갖게 되면
자신이 생각한 관념의 내용이 감각현실에도 그와 같이
존재하는 것으로 잘못 생각하게 된다.
더 나아가 실재내용도 그런 것이고
더 나아가 그런 내용이 영원불변한 실체로서
진짜의 내용이라고도 생각하게 된다.
그러나 그렇지 않은 것이다.
사람들이 어떤 감각현실에서
일정한 관념을 갖고 생각하지만,
그러나 실제는 그런 감각현실에
그런 관념이 없다는 것을 우선 기본적으로 이해할 필요가 있다.
이를 위해 다음 사진과 같이 꽃이 져 있는 모습과 피어 있는 모습이
함께 찍힌 사진을 보기로 하자.
08pfl--image/꽃의핌과생멸.jpg
우리는 분명히 눈을 떠 이와 같은 감각현실을 얻고
그것이 꽃이라는 생각을 일으키고
또 꽃이 피지 않은 상태였다가 핀 상태를 보고
꽃이 핀다는 생각을 갖는 것이기에
그렇게 생각한 내용이 1차적으로
감각현실(현상- 눈을 떠 얻는 감각현실) 안에 없다고 누군가 이야기하면
대단히 이상하게 여기게 된다.
지금 내가 꽃을 보고 있고 꽃이 없다가 새로 생겨난 것을 다 보았는데
왜 꽃이 여기에 없고
더 나아가 그런 꽃이 피고 짐(생멸, 생사)이 본래 없다고 이야기하는가
하면서 의아하게 여기게 되는 것이다.
이는 그렇게 생각하는 이가
그런 생각을 할 때 눈을 떠 꽃의 모습을 같이 보면서
그런 생각을 하는 경우 더 강하게 의문을 갖게 된다.
내가 지금 보고 있는 저 부분이 꽃이 아니고 무엇이란 말인가.
꽃이 진 상태에서 오늘 피었음을 보는데
이것이 핀 것(생겨난 것)이 아니고 무엇이란 말인가.
이렇게 의문을 갖는 것이다.
이런 경우에 어떤 이가 이 모습을 보고
어떤 부분을 꽃이라고 생각하고
또 핀다거나 진다거나 등으로 생각하는 것을
불교 전문 용어로는 변계소집상이라고 표현한다.
오늘날 우리가 사용하는 말로 표현한다면
관념, 분별, 판단 이런 내용들이
모두 이에 해당한다고 할 수 있다.
우리는 눈을 감고서도 그런 생각을 할 수 있다.
그런데 그런 생각이 가리키는 감각현실에 해당하는
그 모습은 눈을 감고서는 떠올릴 수 없다.
예를 들어 이처럼 눈을 감았을 때는 얻지 못하다가
눈을 뜨는 순간 마음 안에서 얻는 내용을
감각내용(시각적 감각현실)이라고 할 수 있다.
그래서 우리가 외부현실로 이해하는 것은
사실은 그것은 감각내용이고 감각현실인 것이다.
이제 실험을 해보자.
눈을 떠 꽃의 모습(사진과 같은 모습)을 보고 있다가
방금 본 그 꽃의 모습을
눈을 감은 상태에서,
마음에서 그대로 떠올려 얻어낼 수 있는가를 실험해보자.
그것이 가능하지 않다.
그래서 눈을 떠야만 보이는 그런 내용을 감각현실이라고 하고
이와 관계없이 즉 눈을 뜨고 있거나 감고 있거나
마음에서 얻는 내용이 있다면
그것을 마음 안의 관념이라고 이해할 수 있다.
지금 실험을 한다면
눈을 감고서도 꽃이란 관념과
있다, 없다라는 관념, 그리고 생겨난다 멸한다 등의 관념을
떠올릴 수 있다.
경전에서 '변계소집상에는 자상이 없다'는 내용[상무자성]은
바로 이 경우를 놓고 이해하면 쉽다.
우리가 마음 안에서 꽃이나 구름, 별,...
있음, 없음, 생겨남, 멸함... 등을 생각한다면,
생각할 수 있다.
그래서 관념은 마음의 관념 내용 차원에서는
그런 내용을 얻을 수 있고 그런 내용이 있다고 하게 된다.
문제는 꽃이란 관념을 아무리 생각해 떠올려 놓고
앞 순간에 본 꽃의 감각현실을 찾아 보아도
그런 감각현실은 그 안에서 찾아낼 수 없는 것이다.
더욱이 있음, 없음의 경우와 같이 그것이 추상 관념일 때는
더더욱 그렇다.
더 나아가 있음과 없음을 묶은 복합관념이라고 할 수 있는
생겨남의 관념은 사정이 더더욱 그렇다.
감각현실은 한 순간에 받아들이는 내용인데
이 하나의 감각현실에는
있고 없음을 같이 얻을 수는 더더욱 없기 때문이다.
꽃이 없다가 피는 내용을
위 사진 처럼 하나의 내용으로
같이 한 화면에 찍어 놓는다고 해도 역시 같은 문제를 보게 된다.
관념(변계소집상)에는 자상(감각현실과 같은 내용)이 없다는 내용은
이런 의미를 갖는다.
여기서 자상(自相)이란 공상(共相)과 상대되는 말이다.
자상은 우리가 감각을 통해 감각현실로 얻는 내용으로서
낱낱 물건 모습 자체를 자상(自相)이라고 하고,
예를 들어 꽃이 푸르고, 과일이 푸르고, 옷 빛깔이 푸르다고 할 때
푸른 색과 같은 내용은 이들 여러 내용에 공통하게 적용되는 내용이므로
공상이라고 하는 것이다.
그런데 관념은
그것이 감각현실 하나에만 관련시키는 구체적 관념이라고 하더라도
관념은 공상(共相)인 것이다.
꽃이란 관념은 여러가지 꽃에 대하여 적용되는 관념인데
'그 꽃'이란 관념과 같이 위 사진 하나에만
그리고 단 한순간의 감각현실에만 적용시킬 때에도
관념은 공상이며, 자상이 되지는 못한다.
이미 관념은 감각현실의 부분을 나누거나 묶어서
그에 대응시킨 것임을 이해하면 이 관계를 이해하기 쉽다.
여하튼 관념은 감각현실과 같은 자상이 이 안에 없다.
자신이 눈을 감고 관념을 아무리 떠올려 봐도
그 안에 그 관념이 가리키고자 한 내용으로서
감각현실은 찾아낼 수 없는 것이다.
이것이 우선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위 내용을 반대로 이해하면
감각현실에는 관념의 내용이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감각현실을 얻을 때
그 감각현실에서
자신이 생각한 관념 내용에 상응한 내용을 또 얻어낼 수 있다면
우리는 눈을 감고 꽃이란 생각을 하다가
눈을 떠서 꽃의 모습을 감각내용으로 얻게 될 때는
그 꽃의 모습 안에서
자신이 생각한 꽃의 관념도 다시 또 하나 얻어야 할 것이다.
그러나 그렇지 않은 것이다.
있고 없음의 추상관념이나,
생겨남 멸함, 오고 감의 복합 관념에선 이런 내용은 더더욱 그렇다.
그래서 쉽게 이 내용을 알 수 있다.
그러나 꽃과 같은 구체적 관념에서는
혼동을 갖게 된다.
자신이 분명 꽃을 보고서 꽃이란 생각을 하고 있는 것이므로
저 감각현실이 그 꽃이란 관념에 해당하는 내용이 아니고 무엇인가
하며 반문하기 쉽다.
이 관계를 이해하려면 앞의 경전내용과 같은 내용을
다시 살펴보는 것이 도움이 될 수 있다.
우리는 꽃이란 관념을 가질 때
관념 영역에서 감각현실의 일정부분을 위 사진의 붉은 선처럼
일부분을 묶고 나누어서 그런 관념을 갖는다고 이해한다.
그런데 감각현실에서는 그런 관념을 갖는다고
그 부분이 그처럼 묶이거나 나누어지지 않는다.
한 순간에 어떤 감각현실을 얻을 때
그 감각현실은 관념과 같이 그렇게 일정 부분을 묶고 나누어 얻는 것은 아니다.
그래서 이렇게 일정 부분을 묶고 나누는 것은
관념 영역에서의 문제이지 감각현실에서의 일이 아님을 우선 이해해야 한다.
이것이 한마디로 변계소집(遍計所執)이란 한자단어가 의미하는 내용인 것이다.
두루두루 헤아려 집착을 갖는 작용((遍計所執)인 것이다.
우리가 꽃이란 감각현실을 얻고 나서 꽃이란 관념을 가지면
이 감각현실과 이 관념은 무언가 서로 엇비슷하다고 생각하게 된다.
그런 상황을 비유하여,
변계소집상은 노끈을 놓고 뱀이라고 여기는 경우와 같다고 비유한다.
즉 감각현실과 관념은
마음에서는 이 둘이 매우 유사하고 관련이 있는 것이라고 생각하게 되지만,
정작 뱀이란 내용(관념내용)은
노끈(감각현실)에서는 찾을 수 없는 상황이 되는 것이다.
[당정현상(當情現相) 또는 중간존경(中間存境)]
그래서 감각현실과 관념은 이런 관계에 있음을 기본적으로 이해해야 한다.
한편, 우리는 눈을 떠 위 사진같이 꽃의 모습을 하나 보면서도
꽃이란 관념 외에 다양한 관념을 가질 수 있음을 스스로 실험할 수 있다.
예를 들어 저 여러 꽃을 다 묶어 식물이라고 이해하거나,
또는 물질이라고 이해하거나,
전체 부분을 보고 풍경 또는 존재라고 이해하거나 하는 등이다.
이런 경우에 원래 저 하나의 모습에
이런 여러 내용이 다 들어 있어서,
이런 생각을 가질 때마다 그런 관념내용이 있게 되는 것이 아니다.
만일 어떤 망상증 환자가 저 모습을 보고 엉뚱한 생각을 일으켜
꽃 모습을 보고 포크를 연상해내거나,
또는 시인이 꽃에서 여인이나 소년의 모습을 연상해낸다고 하여
저 사진에 그런 포크나 여인, 소년이
들어 있다고 할 수 없는 것과 사정이 같다.
그런데 대부분의 사람이 저 사진을 보고 꽃이라고 생각하더라도
감각현실과 관념이 갖는 그 기본관계는
그와 같다는 것을 기본적으로 이해해야 한다는 의미다.
앞에서 여러 관념을 나열했는데,
꽃, 식물, 물질, 풍경, 존재, 포크, 여인, 소년...등의 관념을 모두 놓고서
하나하나 생각해볼 때
역시 그 관념 안에는 감각현실로서 자상을 찾을 수 없다.
반대로 말하면 저 사진과 같은 감각현실엔
관념과 같은 내용이 본래 없는 것이다.
이런 이유로 생멸이나 생사나 꽃의 관념 등은
우리가 대하는 감각현실에는 본래 없다고 이야기하게 되는 것이다.
분명 꽃이란 관념을 갖고
저 사진으로 얻는 감각현실의 일정부분을 가리키고
그 내용과 대응시키는 것이지만,
정작 그 감각현실에는 자신이 가진 꽃이란 관념은
들어 있지 않은 것이다.
그렇다고 감각현실을 그와 같은 내용으로 얻지 못한다는 것이 아니며,
또 그런 꽃이나 생멸, 생사와 같은 관념이
마음안에서 나타나지 않는다는 것이 아니며,
그런 관념을 얻지 못한다는 것이 아니다.
다만 감각현실과 관념의 관계는
기본적으로 그와 같다는 것을 이해해야 하는 것이다 .
대보적경에서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나온다.
...
구름 덩어리라 함은
덩어리가 아니언만
구름 덩어리라고 이름한 것이니
어찌하여 구름 덩어리라 하는가.
그것은 본래 각기 다른 부분이 모여 이룩된
형상인 까닭이니라.
어떤 것이 갖가지 다른 형상인가.
그것은 갖가지 형상으로서
모두 광대하다고 미혹되어 상속한 것으로,
그 가운데 작고 큰 모양을 얻을 수 없느니라.
네가 저 구름 덩어리를 보아라.
광대한 모양[廣大相]을 일으켰지만
그것이 모양이 아니니라.
만일 생각이 없으면
다만 궁극적으로 보아,
광대한 모양이라 함은
실로 구름 덩어리가 아닌 것이다.
...
K0022V06P0005b13L; 言雲聚者則爲非聚故名雲聚何名
K0022V06P0005b14L; 雲聚以其各別起相狀故云何種類
K0022V06P0005b15L; 各別相狀以種種相皆是廣大迷惑
K0022V06P0005b16L; 相續而於其中無少大相以爲可得
K0022V06P0005b17L; 汝觀雲聚起廣大相則爲非相若非
K0022V06P0005b18L; 想者但由畢竟廣大之相非實雲聚
[대보적경 삼률의회(三律儀會)]
또 이어서 다음과 같은 내용이 나온다.
...
가섭아,
비유하면 어떤 사람이 다른 사람에게 말하기를
'같이 그늘진 곳에 나아가 앉겠는가.'
슬기로운 이는 말하기를
'그늘이란 형상 없는 것이니 어떻게 가서 앉겠느냐?'
그 사람은 말하기를 '
나는 그늘의 형상을 말한 것이 아니요,
다만 이 그늘진 곳이라고 말하였노라.'
그때에 슬기로운 이가 다시 말하기를
'네가 말한 그늘이란 것이 곧 그늘이 아니니라'고 하느니라.
가섭아,
네가 저 사람을 보아라.
오히려 이렇게 세속을 따라서
능히 깨우쳐 주기를 이와 같이 하도다.
이와 같이 가섭아,
여래는 여실히
모든 법의 진실 이성(眞實理性)을 깨달아 알고
대중 가운데서 사자후(獅子吼)를 하느니라.
가섭아,
여래가
법에 수순하여 머무르기를 즐겨하지만
상(想)에 따르지는 않느니라.
모든 중생이 지닌 아상은
여래에 있어서는
이것이 제일의(第一義)가 되나니,
그 까닭은 여래는
이제 이미 저 생각을 알고
일체 중생의 생각이 곧 생각 아님을 아느니라.
이것이 가장 그윽한 비밀의 말이니라.
혹 어리석은 사람이
이 이치를 등지고
여래와 다투려 하나니,
그러므로 내가 말하기를
'세상이 나와 다툴지언정
내가 세상과 다투는 것은 아니라'고 하느니라.
[참조 대보적경 삼률의회]
우리는 관념과 감각현실의 관계를 살폈는데
관념에는 감각현실의 내용(자상)이 없고
또한 관념의 내용은 감각현실 안에서 찾을 수 없음을 보았다.
그런데 이런 관계는 이런 감각현실과 관념 등을 갖게 한 본 바탕이라고 할
실재내용과 실체에 대해서도 역시 적용된다.
즉 그 관념은 감각현실과 함께 실재의 내용이 아니고
실재는 얻을 수 없어 공하여
이들 내용은 실재에서 얻을 수 없다.
또 그런 관념이나, 감각현실이나 실재는
모두 그에 해당하는 진짜라고 할 영원불변한 본체가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따라서 일반인은 현실에서는 분명
생멸함이 있고
영원함이나 아주 없어짐이나,
같고 다름이 있고
여기저기 오고 감이 있다고 사람들이 여기지만,
그러나 위와 같은 이유로
그런 관념과 달리
감각현실이나 실재에는 모두
그런 생멸이나 내지
오고감이 본래 모두 없다고 말하게 된다.
중론과 같은 논서에서는 현실에서 사람들이
관념으로 분별해 주장하는 여러 내용들이
감각현실에서, 또 실재에서, 또 실체의 내용으로도
그대로 있다는 주장을 깨뜨리기 위하여
여러가지 방식으로 논증을 펼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이런 상대의 주장에 대해서는
그런 주장을 세우면
관념 영역안에서도 형식 논리적으로
자체적으로 모순된 결론을 얻게 됨을 제시하거나,
그런 내용은 감각현실을 얻는 여러 영역에서도 그 내용을 찾아보아도
그런 내용을 얻을 수 없음을 제시하거나,
현상내 내용과 관계없이 자체적으로 그런 내용이 실재한다면
그로 인해 갖게 되는 모순점을 밝히거나,
그것을 영원불변한 실체의 내용이라고 전제하면 얻는 모순을
밝힘으로써 그런 주장을 깨뜨릴 수 있을 것이다.
관념으로 가진 분별내용이 실답지 않음은
이런 여러 설명으로 충분하다고 보지만,
일반인이 상식의 바탕에서 생각하면
이런 결론을 이해하여 받아들이기 힘들 수 있다.
그래서 이해를 쉽게 하기 위해
다음과 같은 비유를 통해 이 사정을 이해해보기로 한다.
예를 들어 어느 환자가 사고를 당하여
식물인간이 되어 눈만 깜박거리고 있을 뿐
가족이 찾아와도 가족을 알아보지도 못하고
의식을 상실한 상태로 있다고 하자.
그래서 환자가족들은 이 환자를 보고
크게 상심하여 슬퍼하고 걱정하며
고통을 겪고 그 고통을 호소한다.
더 나아가 그 바탕에서 환자의 치료를 위해 노력하고
치료비 마련을 위해 분주히 활동한다고 하자.
이런 비유의 상황은 감각현실의 의타기상과
관념적 내용으로서 변계소집상을 구별하기 위함이다.
이런 상황에서 의사는
그 고통을 해결하기 위해
고통이 어디에 있는가를 찾아나서게 된다.
그래서 이미 앞에서 본 것처럼 여러 존재의 측면에서
고통의 정체를 찾아 나서는데
실재(진여, 원성실상)-감각현실(의타기상)-관념(변계소집상)의 측면이
바로 그런 내용들이다.
그런데 이런 여러 내용을 살핀 결과
이들은 하나같이 실다운 내용이 될 수 없다는
3 무자성의 내용을 보게 되는 것이다.
즉, 앞의 비유적 상황에서 고통을 찾아 나선 의사는
다음과 같이 각 영역에서
고통의 정체를 찾아 나선다.
우선 환자 가족인, 당신들은 비록 환자의 상태를 보고
여러가지 슬픔과 걱정을 말하며,
또 생각으로 환자의 고통을 간접적으로 느낀다고 하지만,
그것은 생각일 뿐이고
이들 환자 가족에게는
환자가 직접 느끼는 감각현실은 없다. [변계소집상의 상무자성]
환자 가족들이 말하길
그래도 자신들이 겪는 고통은
환자가 처한 그 현실 때문에 얻는 것이 아닌가
그렇게 말하므로,
의사는 다시 환자를 살핀다.
이제 그 환자의 감각 현실을 살피니,
반대로 그 환자는 의식이 상실되어
환자가족들의 생각하는 내용이 없다.
더 나아가 그 감각현실은 인연화합으로 나타난 것이며
자연적으로 있는 실재의 내용도 아니다. [의타기상의 생무자성]
또 현실의 현상내용이나 실재내용은
모두 진짜라고 할 영원 불변한 본체의 내용이 아니고
그런 진짜의 내용은 없다. [원성실상의 승의무자성]
이런 결과 처음 고통의 문제를 찾아
해결하려 나선 의사는
모든 존재의 영역에서
해결해야 할 고통이 본래 있다고 할 수 없음과 함께
이들 모두가 니르바나의 상태임을 보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의사는 단지 그런 고통은
망상분별에 싸여 있다고 할
환자 가족들의 관념 영역안에서만
존재하는 망상적 내용임을 제시하는 것이다.
그래서 이런 입장에서
일체는 본래 니르바나(열반)의 상태임을
제시하는 것이다.
다만, 일반 상식적인 입장에서는
분명 환자가 처한 상황이 있고,
환자가족은 이로 인해 고통을 호소하는데,
그러나 이 현실 상태가 모두 그 자체로
본래 고통이 없는 니르바나(열반)의 상태라는 사실을
위의 예를 놓고서도 여전히 쉽게 이해할 수 없게 된다.
그것은 사실은 다음 이유때문이다.
일반적인 경우 한 주체가 얻는 내용은
앞의 비유에서 환자가 얻는 감각현실과
환자가족이 그를 바라보고 생각하는 내용이
함께 결합되어 있는 상태다.
그래서 사람들은 일반적으로 자신이
어떤 감각현실을 바탕으로 관념을 가지면,
그 관념에 해당하는 내용이 감각현실에도 그대로 있고
더 나아가 그 관념은
그런 감각현실과 같은 내용이라고 이해한다.
그래서 그 주체는 그렇게 얻은 일정한 관념을
감각현실에 관통시키고 결합해 이해하고
더 나아가 그것을 실재의 내용이며
또 진짜의 내용이라고 여긴다.
즉 그런 진짜의 실체가 있고
또 그런 실재내용도 있어서,
자신이 그런 감각현실도 얻는 것이고
감각현실에도 그런 내용이 정말 있는 것이기에
그런 생각을 하게 되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래서 자신이 가진 생각이
감각현실과 실재도 그러할 뿐 아니라,
그것이 변하지 않는 참된 진짜의 내용으로서
실다운 내용이라고 고집하며
집착을 갖게 된다.
이처럼 일반의 입장에서는
관념(변계소집상)을 가질 때
이를 감각현실(의타기상)과 실재내용(원성실상)의
내용에 모두 관통시켜 결합하여 이해하므로
앞과 같은 내용을 이해하기 힘들게 된다.
그러나 부처님은
우리가 문제삼는 내용들이 있다고 할 때
비록 이들 각각의 내용이 각기 전혀 없는 것이 아니고
또 이들이 서로 관계가 전혀 없는 것은 물론 아니지만,
그러나 이들은 본래 서로 분리되는 내용이고
어떤 한 영역의 내용은 다른 영역에서 찾을 수 없는 내용이어서,
이들이 서로 일치되어 관통시켜 이해할 내용이 아님을 본다.
이는 마치 현실에서 사람이 잠을 자며 꿈을 꿀 때
현실 안에서 잠을 자며 꿈을 꾼 것이고,
꿈을 꾸는 동안 꿈은 마음에서 마치 진짜처럼 얻는 내용인 것이지만,
그러나 꿈의 내용은 현실과는 별개의 내용이며
꿈의 내용을 현실에 관통시켜 이해할 수 없는 것과 같다.
즉, 꿈에서는
어떤 집을 보고 그 안에 물건이 있음을 보았다고 하더라도
꿈을 깬 현실에서는
그런 집도 물건도 찾아 볼 수 없는 것이다.
그래서 꿈은 꿈꾸는 동안 꿈에서는 '있는' 내용이고
또 진짜처럼 여겨지지만,
이런 현실과 관련시켜 볼 때는
그 내용은 현실에서 찾을 수 없고,
따라서 그것은 실답지 않고
허망한 내용으로서 '없는' 내용이라고 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런 관계가
앞에서 본 각 존재의 영역에서도 성립하는 것이다.
그래서 이들 각 내용은 각 영역에서는 나타나 존재하지만,
다른 영역과 관련해서는 하나 같이 실답지 않음을
승의무자성, 생무자성, 상무자성의 내용으로
제시하는 것이다.
즉 실재의 내용을 바탕으로 [원성실상]
각 주체가 현상 안에서 감각현실[의타기상]과
관념[변계소집상]을 얻어 갖지만,
그것은, 그 성격이 서로 각기 다르며,
실다운 것이 아니다.
우선 진여실재나 감각현실 관념에 걸친
이 모든 내용들은
진짜라고 할 영원불변한 본체가 아니며
그런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승의무자성]
어떤 내용이 변화하는 것이라면,
이들 어느 것이나 다른 것의 대표가 될 수 없고,
이들은 모두 마치 꿈이나 환영처럼, 진짜라고 볼 수 없다.
그래서 반대로 영원불변한 내용을 진짜라고 관념하고
그런 진짜의 내용을 찾아 나서는데
승의무자성은 그런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판단이다.
이는 앞에서 살핀 무아, 무자성의 내용과 같다.
한편, 그럼에도 여러 조건이 화합하여
감각하는 현실을 얻는데, [의타기상]
이처럼 감각하여 얻는 감각현실은
여러 조건이 화합하여 얻는 것일 뿐
그것은 실재의 내용이 아니라는 것을 관하게 된다. [생무자성]
그리고 다시 현실에서
마음으로 생각하고 만들어 내는 모든 관념은
또한 그 안에 감각현실과 같은 자체의 모습[자상]이
없음을 관하게 된다. [상무자성]
결국 존재하는 모든 내용을 놓고 판단할 때
그것들은 하나같이
그것을 실다운 내용으로 인정할 만한 성품을
여러 측면에서 갖추지 못한 것임을
보게 되는 것이다.
그것이 곧 승의무자성, 생무자성, 상무자성이라는
3 무성의 내용이다.
일체의 사정이 바로 위와 같기에
생멸이나 해결해야 할 고통이 본래
실답게 존재하지 않음을 관하게 되고,
따라서 이런 입장에서
앞에서 설한 내용이
제시되는 것이다.
해심밀경에는 다음과 같은 구절이 나온다.
...
K0154V10P0717c04L; 勝義生當知我依相無自性性密意
K0154V10P0717c05L; 說言一切諸法無生無滅本來寂靜
K0154V10P0717c06L; 自性涅槃何以故若法自相都無所
K0154V10P0717c07L; 有則無有生若無有生則無有滅若
K0154V10P0717c08L; 無生無滅則本來寂靜若本來寂靜
K0154V10P0717c09L; 則自性涅槃於中都無少分所有更
K0154V10P0717c10L; 可令其般涅槃故是故我依相無自
K0154V10P0717c11L; 性性密意說言一切諸法無生無滅
K0154V10P0717c12L; 本來寂靜自性涅槃...
승의생이여,
마땅히 알라.
나는 상무자성성(相無自性性)의 밀의에 의지해,
일체 법이 생함도 없고 멸함도 없으며
본래 고요하여 자성이 열반이라고 말한다.
무슨 까닭인가?
만일 법의 자상(自相)이 도무지 있는 것이 없으면
곧 생기는 것이 없을 것이요,
생기는 것이 있지 않으면
곧 멸하는 것이 있지 않을 것이요,
생함도 없고 멸함도 없으면
곧 본래 고요할 것이요,
본래 고요하면
곧 자성이 열반이다.
그 가운데는 다시 그로 하여금 열반에 들게 할 것이
아예 조금도 없는 까닭이다.
그러므로 '상무자성성'의 밀의에 의지해,
일체 법이 생함도 없고 멸함도 없으며
본래 고요하여 자성이 열반이라고 말한다.
....
선남자여,
나는 또한 법무아(法無我)의 성품으로 나타난 것인
'승의무자성성'의 밀의에 의지해,
일체 법이 생함도 없고 멸함도 없으며
본래 고요하여 자성이 열반이라고 말한다.
무슨 까닭인가?
법무아의 성품에 의지해 나타난 승의무자성성은
언제나 어느 때나 모든 법의 법성(法性)에 머무는 무위(無爲)이니,
일체 잡염(雜染)과 어울리지 않는 까닭에,
언제나 어느 때나 모든 법의 법성에 머무는 까닭에 무위이다.
무위인 까닭에
생함도 없고 멸함도 없으며
일체 잡염과 어울리지 않는 까닭에 본래 고요하며 자성이 열반이다.
그러므로 나는 법무아의 성품으로 나타난
승의무자성성의 밀의에 의지해,
일체 법이 생함도 없고 멸함도 없으며
본래 고요하여
자성이 열반이라고 하는 것이다.
...
상식적으로 감각현실을 비롯한 현상의 내용이
생겨나고 멸함을 반복하는 것이라고 보는 입장에서는
이 부분은 이해하기 힘든 내용일 수 있다.
이는 다음과 같이 이해하면 쉽다.
생멸이란 것은 그 자체가
관념 영역에서 갖는 관념(변계소집상)이다.
그런데 그런 관념(변계소집상)은
감각현실과 같은 자상을 갖지 않기 때문에
상무자성이라고 한다.
그래서 비록 생멸이란 관념이 마음 안에 나타나 머무르고
그 관념은 감각현실을 가리키는 것이지만,
관념에는 감각현실과 같은 자상이 없고
또 한편,
그 관념이 가리키는 감각현실에도
그런 관념 내용과 같은 것은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결국 관념은
그 내용이 마음 안에 나타나 머무르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것은 감각현실의 내용과 같은 자상을 갖는 것이 아니고 [상무자성]
또한 실재의 내용도 아닌 것이고
진짜라고 할 영원불변한 실체의 내용도 아닌 것이어서 [법무아, 승의무자성]
진실되다거나 실답다고 볼 만한 내용이 아닌
망상인 것이다.
따라서 생멸함은 비록 허망한 망상 분별 속에는
있는 것 같으나,
일체법은 본래 생멸을 떠난 것이고
따라서 그 자체를 곧 니르바나라고 본다는 것이다.
한편 승의무자성의 밀의에 의지해 자성이 열반이라고 본다는 것은
일체법은 본래 모두 진짜라고 할 영원불변한 실체의 내용이
없는 것이므로,
이런 측면에서 생함도 멸함도 본래 있을 수 없다고 본다는 것이다.
결국 사람은 생멸을 분별하고 그 안에서 고통을 보는 것이지만,
그것은 모두 진짜의 내용이 아니므로
이런 측면에서 일체법은 그대로 열반이라는 것이다.
이제 앞에 살핀 내용을 다시 전체적으로 요약하면,
모든 법이 본래부터 열반이란 말의 의미를 이해할 수 있다.
생멸하는 현상이 그 자체가
곧 니르바나라는 것은 다음과 같은 내용을 근거로 한다.
우선, 생멸하는 현상은 공한 실재 진여는 아니지만,
이들 현상은 공한 진여와 떠나 있는 것이 아니고,
공한 진여는 현상과 떠나 있는 것이 아니다.
그렇기 때문에
공한 진여는 생멸하는 현상과 다른 것이 아니고
생멸하는 현상은 공한 진여와 다른 것이 아니다.
따라서 공한 진여는 곧 생멸하는 현상이고
생멸하는 현상은 곧 공한 진여로 보게 된다.
색불이공 공불이색 색즉시공 공즉시색의
표현이 바로 이런 내용을 가리킨다.
이런 입장에서는
생멸하는 현상을 곧 공한 진여로 보게 되며
따라서 생멸하는 현상을
곧 니르바나로 관하게 된다.
그리고 현상은 또 다음을 이유로
그 자체로 생멸이 없는 니르바나로 본다.
그것은 모두 진짜라고 볼 영원불변한 실체가 아니고
또 실재의 내용은 끝내 얻지 못하여 공한 것이고
그것은 실재의 내용이 아니며
또 관념은 감각현실(자상)이 없고
감각현실에는 그런 관념과 같은 내용을 얻을 수 없는 것이다.
그래서 생멸이나 생사, 고통 등은
모두 실답지 않는 내용으로서,
진짜라고 할 실체도 아니며,
실재나, 감각현실에서도 모두 내용을 얻을 수 없는 것이어서
실다운 것이 아니다.
여하튼, 생멸하는 현상은
본래 생멸과 고통이 없는 것이어서,
이를 니르바나라 할 수 있는데,
그렇다면 현실 그 자체로
아무런 문제도 본래 없는 것이어서
아무런 수행도 필요없다고 할 것인가.
그렇지는 않다.
생멸하는 현상이 본래 니르바나인데도
이것이 문제가 되고
수행이 필요한 이유는
결국 본래 생멸이 있다고 할 수 없는 실재와 현실을 놓고
이를 생멸한다고 보는 분별과 관념 영역(변계소집상)
때문이다.
그리고 그런 망상 분별을 바탕으로
집착을 갖고 현실에 임하기 때문에,
현실에서 업(뜻, 말, 글, 행위, 태도)를 일으키고
그 업으로 인해 현실에서 세세생생
고통의 윤회과정을 밟아 나가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생멸하는 현상은 본래 니르바나임에도,
현실 자체는 고통의 문제상황에 놓여 있고,
이 해결이 필요한 것이다.
현실이 이러한 상태에 있으므로
이 해결을 위해서는
이와 반대로 현실을 올바로 깨달아
망상 분별을 제거하여
현실이 곧 생멸이 없는 니르바나임을 관하고,
현실의 내용에서 집착을 일으키지 않게 되면,
이로 인해 본래의 니르바나의 상태를
찾고 회복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이런 관계로 수행을 통해 니르바나를 얻는다고 하지만,
그러나, 이 니르바나 자체는 수행을 통해
비로소 새로 얻게 되는 결과로 보지 않고
본래부터 이미 갖추어진 내용으로 보는 것이다.
[이계과(離繫果), 택멸무위(擇滅無爲)]
>>>>
이제 이처럼 일반적으로 생멸한다고 보는 현상에
본래부터 생멸이 없다는 내용은
처음 설산동자의 게송과도 관련시켜
음미해 볼 수 있다.
설산동자의 게송은 다음과 같다.
제행무상(諸行無常) 이 세상 모든 일은 영원하지 않으니,
시생멸법(是生滅法) 이는 나타나고 멸하는 현상이다.
생멸멸이(生滅滅已) 나타나고 멸함이 없어지고 나면,
적멸위락(寂滅爲樂) 적멸이 즐거움이 된다.
이에 대해 부처님은 처음 일반인이 보듯,
일체 현상이 생멸하며 고통이 있다고 보며,
중생들이 고통을 겪게 되는 현상을 문제라고 제시하는 한편,
부처님은 다시
이런 생멸하는 일체 현상을 놓고
그것이 일체 법이 생함도 없고 멸함도 없으며
본래 고요하여 자성이 열반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이렇게 되면 혼동이 일어날 수 있다.
처음 생멸하는 현상이 무상하여 모두 고통과 관련되기에
이 고통의 해결을 위해 생멸 현상의 정체를 찾아 나섰는데,
결국 일체는 본래 생멸이 없는 것임을 다시 관하게 된 것이다.
그리고 곧 일체는 열반 적정이라고 제시하는 것이다.
그러면 일체 현상에는 문제도 들어 있지만,
그 문제가 본래 해결된 상태이기도 하다는 것을
함께 제시하는 것이어서
이해하기 힘든 내용이 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결국 해결해야 할 문제가 있다는 것인가.
본래 없다는 것인가.
부처님은 결국 이 둘을 함께
말씀하시고 있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본래 생멸과 고통이 없지만,
상식적인 일반인의 입장에서는
망상분별에 싸여 생멸과 고통이 있다고 보는 것이며
이런 망상분별과 집착을 떠나
한편으로 생멸하는 현상을 멸해 없애거나,
또는 생멸현상을 깨달음을 통해 관하면,
이 자체가 본래 생멸과 고통이 없는 것임을 깨닫게 되고
그런 깨달음을 통해 고통을 멸하고
열반을 얻게 됨을 말씀하시는 것이다.
따라서 수행을 시작하는 입장에서는
부처님의 설법을 통해
하나의 현상을 다양한 측면에서 관하고
그 관계를 잘 이해해야 마땅하다.
이 내용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본래 현상이 일어나는 바탕이라고 할 실재는
그 내용을 얻을 수 없고
따라서 -이 있다, 없다, -이다, -아니다, 같다, 다르다,
좋다, 나쁘다, 깨끗하다, 더럽다, 생한다, 멸한다 ... 등의
온갖 분별을 할 수 없으며, 공하다. [원성실상]
그런데 이런 실재를 바탕으로
각 생명은 감각현실을 인연 화합으로 얻고 [의타기상]
그 안에서 관념을 일으켜
온갖 분별을 행하게 된다. [변계소집상]
그리고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이런 내용을 얻고
이 모두를 다 관통시켜 결합해 이해한다.
즉, 일반적으로 자신이 감각한 현실을 놓고
스스로 그에 여러 관념을 만들어 갖고
이 둘을 함께 결부시켜 이해하는 것이다.
감각현실에서 관념을 일으켜 가진 후
그 관념을 감각현실에 관통시켜 이해하는 예는
마치 먹물을 마구 흩뿌려 놓은 그림에서
어떤 이가 사람의 형체를 보거나 어떤 동물의 형체를 보고
생각하면,
그 먹물 그림에 마치 사람이나 동물이
있는 것처럼 생각되는 것과 같은 현상이다.
그래서 이 안에서 생멸현상을 보고
망상분별을 일으키고 집착을 갖고
행하는 가운데
또 고통을 얻게 되는 것이다.
그런 결과 처음에 먼저
일체 변화하는 현상이
이런 관계로 모두 고통과 관련됨을 살피고
이 해결을 찾아 나서게 된다.
그런데 이 고통의 정체를 살피는 과정에서
이들 내용이 각 영역에서 서로 일정한 관련성은 있지만,
그러나 본래 떨어진 별개의 내용임을 이해할 필요가 있다.
이 이해를 위해서는 앞에서 비유로 든 의식 상실의 환자와
환자의 가족의 관계를 다시 생각해 볼 필요도 있다.
물론 일반적인 경우는 앞의 비유에서
의식이 없는 환자의 입장(감각현실)과
이를 걱정하는 환자 가족의 입장(관념)을
함께 다 갖고 있는 상태가 된다.
그래서 관념의 영역에서는 분명
영원하지 않아 나타나고 멸한다는 현상[생멸]과
고통이 이 모든 영역에 존재하는 것처럼 생각된다.
그런데 앞과 같이 다양한 측면에서 살핀 결과,
이 각각은
진짜라고 할 영원불변한 본체가 없고[승의무자성]
실재의 내용도 아니며[생무자성]
또 현실에서 생각하는 모든 관념에는
감각현실과 같은 자상이 없어서[상무자성]
각 내용이 모두 실답다고 할 만한 성품이
결여된 내용들임을 관하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본래는 생멸과 고통이 모두
실답게 있는 것이라고 할 수 없는 것이다.
따라서 본래 니르바나의 상태인 것이다.
그럼에도 현실에서 문제가 있는 것은
결국 이런 본래의 상태에 상응하지 않게
각 주체의 정신 안에 감각현실이 나타나고,
또 이를 바탕하여 관념영역에서
잘못된 망상과 분별을 일으켜 갖고
이를 고집해 이 모두에 관통시켜 이해하는
자세가 문제라고 할 것이다.
더욱이 이런 망상 분별을 바탕으로
번뇌와 집착을 일으켜 갖고
다시 이에 바탕하여 행위해나감으로써
이후 온갖 현실의 고통과 윤회의 고통이
다시 이어져 나가게 된다.
결국 해심밀경에서는
현실의 고통과 고통의 윤회과정이 나타나는 과정을
다음과 같이 설한다.
...
이처럼 의타기의 자성과 원성실의 자성 위에서
변계소집의 자성을 집착하니,
이러한 인연으로 오는 세상의 의타기의 자성을 일으킨다.
이 인연을 말미암아
번뇌잡염(煩惱雜染)에 물들며,
혹은 업잡염(業雜染)에 물들며,
혹은 생잡염(生雜染)에 물들어
나고 죽는 가운데서 오래도록 헤매고
오래도록 굴러다니며 쉴 사이가 없고,
혹은 지옥[나락가那落迦]나 축생[傍生]이나 아귀(餓鬼)나
하늘이나 아수라[阿素洛]나
혹은 사람 가운데 태어나
온갖 괴로움을 받는다.
K0154V10P0718a13L; .... 如是於依他
K0154V10P0718a14L; 起自性及圓成實自性上執著遍計
K0154V10P0718a15L; 所執自性由是因緣生當來世依他
K0154V10P0718a16L; 起自性由此因緣或爲煩惱雜染所
K0154V10P0718a17L; 染或爲業雜染所染或爲生雜染所
K0154V10P0718a18L; 染於生死中長時馳騁長時流轉無
K0154V10P0718a19L; 有休息或在那落迦或在傍生或在
K0154V10P0718a20L; 餓鬼或在天上或在阿素洛或在人
K0154V10P0718a21L; 中受諸苦惱
참조 해심밀경 5. 무자성상품(無自性相品)
이는 근본불교에서
고통의 윤회가 나타나는 관계를
혹-업-고[惑-業-苦; 번뇌,집착-행위(업)-고통]의 관계로
제시하는 것과 같다.
한편, 금강경에서는
일반적으로 사람들이 가장 집착을 갖는
나, 사람, 생명, 목숨에 대한
이런 관념적 집착을 갖는 이는
보살이 아니라는 내용이 다음과 같이 나온다.
...
수보리야, 만일 어떤 보살이
아상(我相)ㆍ인상(人相)ㆍ중생상(衆生相)ㆍ수자상(壽者相)이 있으면
보살이 아니기 때문이니라.
...
K0013V05P0979b04L; .... 須菩提若菩薩
K0013V05P0979b05L; 有我相人相衆生相壽者相卽非菩薩
참조 금강반야바라밀경
이런 내용도 위와 같은 의미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이는 생명이 가장 집착하는 내용으로서
모든 집착의 근원이 되는 내용을
나, 사람[윤회의 주체], 생명, 목숨으로 나열하는 가운데
이들에 대해 망상분별을 일으켜
이들이 실답게 감각현실이나, 실재에서 얻을 수 있다고 여기고
또 실체가 있는 진짜의 내용이라는 생각을 갖고
집착을 일으키면 안 된다는 의미로 이해할 수 있다.
○ 다양한 열반에서의 선택 문제
결국 현실의 문제상황의 원인은 이렇다.
본래 실재는 생멸현상이나 고통이 있다고 할 수 없는
청정한 니르바나의 상태이어서
본래 문제가 없다 할 수 있다.
그러나 이 실재를 덮어 나타나는 현상안에서
망상 분별을 행하고 집착을 가짐으로써
그 안에서 생멸과 고통의 문제가 존재하는 것이다.
즉, 본래 문제가 없음에도
현실은 이런 연유로 그 바탕에서
수많은 심각한 고통과 악의 문제가 있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본래의 니르바나의 상태를 덮고 있는
이 생멸 현상만 걷어내면
원래의 니르바나의 상태가
드러나게 되는 것이라고 이해할 수 있다.
이는 비유하면 마치 현실은 아무 문제가 없이 평온한데
자면서 꿈을 꾸며 악몽에 시달린다면,
그 꿈을 깨어나면,
본래 꿈에서 겪은 악몽이 없는 현실을 맞이하는 것과 같다.
그런데 꿈속의 악몽이 사라지고 맞이하는 현실은
꿈에 의해 새로 만들어진 것이 아니며
현실은 본래 악몽과 같은 내용이 있지 않고
본래부터 평온한 상태에 있었던 것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현실의 생멸현상을 멸하고
열반을 증득한다고 할 때
그 증득하는 내용은
생멸현상에 생멸을 떠나 본래 있었던 것이다.
그것이 곧 설산동자의 게송에서
생멸멸이(生滅滅已) 나타나고 멸함이 없어지고 나면,
적멸위락(寂滅爲樂) 적멸이 즐거움이 된다.
는 게송내용이 의미하는 바라고 이해할 수 있다.
물론 엄밀하게 보아 본래 실재의 상태 등은
모든 이분법상의 분별을 떠나고
언어로서 표현할 수 없는 상태이므로
청정하다거나 즐겁다라는 표현을 할 수는 없다.
그러나 처음 생멸하는 현상 모두를
문제현상으로서 고통의 현상,
그리고 더럽고 깨끗하지 않은 오염된 내용으로 보는 것이므로,
그것을 떠난 실재의 상태는 이런 내용과 상대하여
청정하며 또 안온하며 즐겁다라고 표현하는 것이다.
결국 본래 바탕이 청정한 진여 니르바나임에도
그 실재의 니르바나의 상태를 뒤 덮고 있는
생멸 현상이 문제인데,
이 문제현상을 구체적으로 어떤 방안들을 통해
해결할 것인가가, 지금까지 논의한 수행방안과
경전에서 앞으로 살펴 나갈 내용과 모두 관련된다.
이 상황을 비유한다면, 다음과 같다.
본래 본 바탕은 깨끗한데,
여기에 어떤 천을 덮어서
그 안에 온갖 잘못된 내용을 쓰고
그로 인해 번뇌를 일으키고 행위하여
이후에도 또 다음 천을 마련해
계속 잘못된 내용을 써가며
고통을 받는다면 이는 본바탕과 관계없이
문제라고 할 수 있다.
그래서 이 문제를 해결하는 방안으로
다음과 같은 세가지 방향의 노력을 생각할 수 있다.
우선 가능한 그 천을 걷어내
깨끗한 바탕만 남기고
그 위에 다시 그런 천을 앞으로 더 이상 만들어 내지 않는
근본적인 방안을 생각할 수 있다. [회신멸지의 니르바나]
또 하나의 방안은
천 위에 쓰여진 잘못된 내용 위에 선을 그어
잘못된 내용이라고 표기해 지우고,
원래 깨끗한 본 바탕에 상응하는
깨끗하고 올바른 내용만을
그 안에 적어 넣고,
그 안의 내용이 무엇이던 집착을 버려
그 천과 그 안의 내용이 주는 고통에서
벗어나는 방안을 생각할 수 있다.
한편, 개인적인 수행의 목표만을 생각하면
이것으로 충분하다고 할 수 있지만,
그러나 자신의 해탈 열반만 목적으로 하지 않고
다른 생명들의 해탈과 열반을 목적으로 하고
복덕과 지혜를 원만히 성취하여
법신을 증득하고 성불하고자 할 때는
다시 또 다른 수행방안이 필요하다.
불교에서 해탈을 이루고
열반을 증득한 상태로는
아라한과 연각, 부처를 제시한다.
그런데 이들이 모두
해탈과 열반을 증득한 점에서는 차이가 없으나,
자신의 해탈, 열반에만 목적을 두는 아라한과 연각의 경우와
모든 생명을 고통의 윤회에서 제도하여
열반을 얻게 하기 위해 수행하는 보살과 부처의 경우는
그 복덕과 지혜에서 다시 차별이 있으며,
따라서 보살과 부처의 상태를 보다 수승한 상태라 하고,
더 나아가 가장 수승한 상태로
복덕과 지혜를 원만히 성취 완성한
부처의 법신의 상태를 제시하게 된다.
따라서 수행목표는
이런 여러가지 차별적인 상태를 다시 나누어
수행의 방향을 찾아 나가야 한다고 본다.
이는 자신이 병이 걸려 있을 때는
당장 자신의 병만 낫는 것을 목표로 하기 쉽지만,
그러나 좀 더 뛰어난 상태로는
자신의 병도 치료할 뿐 아니라,
다른 이들의 병도 치료하는 의사가 되는 것을 목표로 할 수 있고
더 나아가 모든 의사들을 통솔하여
환자를 치료하는 병원장이나
또는 의사를 가르치고 교육하는 의과대학의 교수나
의대 총장이 되는 것을 목표로 할 수 있는 것과
사정이 같다.
또 이들 모든 의사는 다 다른 사람이지만,
그러나 각 개인이 일정한 성품을 지닐 때
의사의 자격을 얻으면 의사라고 부르게 되듯,
의사가 되는 각 사람과는 별도로
의사가 되기 위해 갖추어야 할 성품은
별개로 또 있다고 보게 된다.
그래서 각 개인이 그런 상태를 증득하면
개개인의 사람은 서로 다 다르지만
또 같은 의사가 된다고 말할 수 있다.
이처럼 각 개인이 처음 고통을 없애기 위하여
수행을 하고 수행 목표를 증득해 나간다고 하지만,
그로 인해 얻는 목표 상태는 또 조금씩 차이가
난다고 할 것이다.
가장 처음 수행을 시작하는 상태에서는
이미 앞에서 본 것과 같이
본래 청정한 진여 니르바나의 상태임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현실 속에서
자신의 마음 안에 얻는 색, 수, 상, 행, 식의 내용 가운데
일부를 자신이고 나머지를 대상이나 외부 세계라 잘못 생각하여
이에 집착하고 이런 집착에 바탕해 행위해나가며
그로 인해 고통의 윤회를 하는 상태에 놓여 있다.
이런 경우 이미 앞에서 살핀 것처럼
니르바나를 얻는 방안에는
기본적으로 두 가지 방안이 있게 되는 셈이다.
즉 앞에서 본 것처럼
윤회 과정에서
생멸하는 현상을 보고
이를 분별하고 집착하는 식을 근본적으로 모두 멸해 나타나지 않게 함으로써
공한 실재, 진여만 남겨
회신멸지의 상태로 니르바나를 얻을 수 있다.
그러나,
굳이 생멸하는 현상을 없애지 않더라도,
이 현상이 본래 생멸이 없고 니르바나임을 관하여
분별과 집착을 버리면
그 상태 그대로에서 번뇌와 고통에 물들지 않고
머무를 수 있다.
그런데 이 두 방안 가운데
과연 어떤 방안이 더 나은 것인가
의문이 생기게 된다.
생각하건대,
자신의 고통의 소멸 만을 목적으로 할 때는
회신멸지의 니르바나를
더 완전한 니르바나로 볼 수 있지만,
그러나 자신이 회신멸지의 상태가 되면,
다른 생명을 구제하는 행위를 할 수 없게 된다.
그래서 중생을 구제하는 것에 목적을 둘 때는
뒤의 방안이 좀 더 낫다고 볼 수 있다.
자비심을 갖고
중생을 제도하는 것에 목표를 두는 보살 일천제가
열반에 들지 않는다는 것도
바로 이런 의미라고 본다.
또한
생멸하는 현상을 그대로 두고서도
그것이 본래 니르바나임을 관하여
그에 집착을 두지 않고
그로부터 번뇌와 고통을 받지 않는 것이므로
이것이 좀 더 낫지 않은가 하는 생각을 갖게 된다.
여하튼 이 두 경우가
모두, 니르바나는 현실에 본래 갖추어진 것으로 보는 것은 같지만,
현실에서 이런 니르바나의 상태에 이르는 것은
번뇌와 집착을 없애는 수행을 통하여 가능하다고 보는 점은
공통하다.
결국 본래 니르바나는 갖추어져 있는 것이지만,
수행자의 입장에서는 니르바나는 수행을 통해
그 상태에 도달할 수 있는 것이다.
망상분별과 번뇌와 집착을 없애야
근본 정신(아뢰야식)은 다음 생의 식을
만들어 내지 않을 수 있는 것이며,
생멸하는 현상을 그대로 니르바나로 보는 경우에도
망상분별과 번뇌와 집착을 없애야
생멸하는 현상에서
번뇌와 집착으로 인한 고통에서 벗어날 수 있기에
이는 두 경우에 모두 공통된 내용인 것이다.
따라서, 수행을 통해
망상 분별과 탐욕, 분노, 어리석음의 번뇌와
집착을 제거하면,
이로서 이 두가지 니르바나 가운데
하나를 선택할 수 있다고 보게 된다.
따라서 그런 상태가 되면
이 가운데 어느 방향으로 나아갈 것인가를
잘 생각해야 할 필요가 있다고 본다.
○ 생사 즉 열반에서의 문제점
- 망상분별과 집착의 상태로 다시 물러남[퇴전]의 잘못
생사에 머물면서
생사가 곧 열반임을 관하고
수행을 하는 입장에서는
매번 현실에서 얻게 되는 감각현실과 관념에서
번번히 망상분별과 집착을 일으켜 갖게 되기 쉬우므로,
앞과 같은 깨달음과 수행을 통해
망상분별과 집착을 반복하여 제거하면서
망상분별과 집착을 떠난 상태에
늘 임하여 머무르려 노력하는 자세가 요구된다.
처음 보살 수행을 하는 입장에서는
이처럼 수행하다가도,
그간의 오래된 습관[훈습된 습기(習氣)]로 인해
다시 망상분별과 번뇌 집착의 상태로
물러나는 경우가 자주 있게 된다.
그래서 수행을 꾸준히 정진하여
더 이상 망상분별과 번뇌 집착의 상태로
물러나지 않게 되는 상태에 이르러 머물러야 할
필요가 있다. [불퇴전위]
- 현실 그대로가 아무 문제가 없다고 착각하는 잘못
한편, 일체 현상이 모두 본래 니르바나이며,
생사 즉 열반이라고 할 때
이 내용을 자칫 잘못 이해하면,
생사현실은 곧 니르바나인 것이므로,
이 내용을 통해
아무런 수행 노력이 필요없고,
원래 현실에서 살던 것처럼 별다른 수행 노력없이,
그냥 살아가는 것이 모두 그대로 니르바나여서,
원래 현실에서 살던 내용 그대로 아무렇게 살아가도
다 무방하고 좋다고, 잘못 생각하는 경우도 있다.
생사 즉 열반이라는 말은
본래 일체 생멸현상이 '본래' 니르바나이어서 아무런
문제가 없음을 말하는 것이지만,
그러나 한편, 이 내용은
현실에서는 그런 사실을 깨닫지 못하고,
각 생명이 '망상분별과 집착을 갖고 살아가기에'
고통을 받고 고통의 윤회를 받게 된다는 사실도
함께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이런 사실을 올바로 깨닫지 못하고,
현실에서 갖는 망상분별과 집착을 문제로 보고
이를 제거하려 노력하지 않고,
집착없이 올바른 수행을 해나가지 않으면,
본래 생사 즉 열반이어서 문제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그와 관계없이 그 망상분별과 집착을 바탕으로,
현실에서 생사의 고통을 받아나가게 됨을 말하는 것이다.
그래서 이는
생사현실이 곧 니르바나이기에
이런 상태의 생사현실이 그대로 아무런 문제가 없고
또 아무런 수행이 필요없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즉 생사 즉 열반임에도 이를 깨닫지 못하고
망상분별과 집착을 갖고 살아가는 생사현실은 문제이므로,
생사 즉 열반임을 올바로 깨닫고
수행에 정진해나감으로써 이 문제를
해결해나가야 함을 제시하는 것이다.
따라서 생사 즉 열반이라는 말이,
현실에서 각 생명이 망상분별과 집착 속에 살아가도
그 상태 그대로 아무런 문제가 없음을
말하는 것은 아님을 주의해야 한다.
현실에서 대부분의 생명은,
상식적이고, 이성적이고, 감성적인 분별(망상분별)을 행하고
이에 바탕하여 탐욕, 분노, 어리석음을 갖고,
1- 자신의 좋음을 집착하여 추구하면서
다른 생명에게 좋음을 베풀 생각을 갖지 못하게 되고,
2- 또 그렇게 자신의 좋음을 집착하여 추구하는 가운데
다른 생명이 집착하는 좋음(생명, 신체, 재산, 가족...)을
함부로 침해하게 되고, 또 이것이 무방하다고 생각하게 된다.
3- 또 반대로 자신이 집착하는 좋음이 침해되고 나쁨을 받게 되면,
분노(슬픔, 원한, 억울함..) 미움과 원망을 일으키고,
상대에 대한 보복 가해를 행하고자 하게 된다.
그런 이런 상태는 모두 문제의 상태이고,
각 생명이 행하는 이런 행위 반응은
본래 생사가 니르바나의 상태임에도 불구하고,
현실을 고통과 악의 상태로 만들어
나가는 원인인 것이다.
따라서 생사 즉 열반의 가르침은 오히려 그런 깨달음으로
이런 행위를 일으키는 망상분별을 제거하고,
그런 바탕에서 이런 집착을 갖는 것들의 의미나 가치를 모두 부정하고
그런 바탕에서 이런 행위를 모두 중지하고
끊어야 하는 것을 강조하는 것이다.
따라서 생사 즉 열반의 가르침이 앞과 같은 현실을
그대로 긍정하는 내용이라고 이해하면
곤란한 것이다.
- 현실의 문제 상태에서 좋은 부분만 보고, 낙관적으로 안주하는 잘못
한편 현실에서 행하는
상식적이고, 이성적이고, 감성적인 분별(망상분별)과 집착을 바탕으로 하면서,
그러면서도 좋음과 나쁨이 뒤섞인 현실에서
주로 좋음만을 찾아 긍정적으로 임하려는
낙관주의적인 자세가 있다.
이 역시 문제가 된다고 본다.
좋음과 나쁨이 뒤섞인 현실을 놓고
단순한 낙관주의 입장에서 본다면,
모든 현실을 그대로 놓고
나쁨의 측면을 무시하고 이를 긍정적으로 바라볼 수도 있다.
즉 좋으면 좋아서 좋고
나쁜 것은 영원하지 않고 무상하여 언젠가 사라지기에 좋고
좋지도 않고 나쁘지도 않은 것은 변화하는 것이므로 좋은 것이라고 볼 수도 있다.
또는 현실에서
숨겨져 있는 좋은 면을 찾아내 그 부분에 초점을 맞추거나,
그것을 좋게 생각할 입장에서 바라보고 좋다고 생각하거나,
비록 그것이 나쁜 것이더라도
그것을 더 큰 나쁨, 또 다른 나쁨, 또는 그것이 없었으면 대신 있었을 나쁨 등과
비교하여 좋다고 여기거나,
이미 이루어진 좋음에만 초점을 맞추어 바라보거나,
나쁜 측면을 무시하고 외면할 수도 있다.
또 앞으로 좋음을 가져다 줄 측면을 보고
미리 그 성취를 그리거나
그 성취 가능성에 초점을 맞추거나,
성취의 원인을 보거나,
아직 이루어지 않은 상태를 성취된 부분으로 보는 등
현실에서 긍정적인 자세로 임하여
낙관주의적인 입장을 견지해나갈 수 있다.
이들은 모두 나쁨과 좋음이 뒤섞인 현실의 내용에서
좋은 측면을 찾아내 긍정적으로 바라보는 방안이 된다.
주어진 현실에서
올바른 수행목적과 관련하여 이상적인 기준에서
좋음을 찾고 긍정적인 자세로 임하는 것 자체는
현실 속에서 주어진 내용을 긍정하며 살아가게 하는 기능이 있고,
바람직한 측면도 있다.
예를 들어 이런 경우는 비록 현재는 많은 번뇌와 집착을 갖고 있지만,
모든 생명은 장차 부처가 될 가능성을 갖고 있다고 관하는 경우와 같다.
그러나 단순한 낙관주의는
현실의 망상분별과 집착을 바탕으로 하여 좋음을 찾고
낙관주의에 머무르는 것이어서,
현실의 잠재된 문제점을 그대로 방치하고
문제를 증가시키는 것이 되어 문제가 된다.
예를 들어 현재 가난한 이가 물질에 집착한 가운데
언젠가는 자신도 큰 부를 이루어 잘 살 수 있으리라고 낙관하거나,
또는 지금 원한을 갚지 못하지만,
언젠가는 복수를 할 수 있으리라고 낙관하면서 살아가는 것은
그런 탐욕이나 분노의 집착에 바탕한
잘못된 낙관주의의 형태가 되는 것이다.
현실에서 취하는 단순한 낙관주의란, 이처럼 기본적으로
망상분별과 집착에 바탕한 것이어서
문제가 있는 것이다.
단순한 현실적 낙관주의는
비유하면 어떤 물건을 훔쳐 가진 자가
자신이 당장 그 물건을 가져서 좋고
다른 이가 피해를 보아 나쁘고
그로 인해 장차 교도소에 갈 수도 있다는 점은 문제점이지만,
이를 외면하고 그런 일이 없으리라고 기대하고 낙관하며 보내고
붙잡혀 교도소에 갇히게 되면,
자신이 영원히 갇혀 있지 않고 언젠가는 풀려나
다시 도둑질을 하게 될 수 있다고 생각하며
낙관적으로 모든 것을 해석하며 현실에 안주하려는 경우와 같다.
또한 이는 불교에서 현실에서 나쁨을 부각시켜
집착을 제거하려는 입장과는 오히려 반대된다.
불교에서는 좋음과 나쁨이 섞인 현실에서
오히려 이를 모두 고통으로 보는 입장이다. [일체개고]
즉, 나쁨은 나뻐서 나쁘고,[고고]
좋은 것도 그것이 무상하여 사라지기에 나쁘다고 관하고 [괴고]
좋지도 않고 나쁘지도 않은 것은 변화하는 것이므로 나쁘다[행고]고
보는 것이다.
이는 불교가 특별한 비관주의적인 입장에 있기 때문은 아니다.
현실에는 나쁨 외에도 좋음이 섞여 있고,
그래서 앞의 낙관주의 입장처럼,
현실을 정반대 방향으로 관하여
각 현실에서 좋음을 찾아 낼 수 있다해도,
그러나 그러한 좋음은 나쁨을 그 안에 갖고 있으며,
장차 나쁨을 불러 일으키는 불완전한 좋음으로써,
목적 상태로 볼 수 없기 때문이다.
현실에서 오로지 좋은 면을 찾아 응시한다고 하여
그 안에 들어 있는 나쁨이
근본적으로 제거되는 것은 아니다.
즉, 현실을 올바로 관찰하여
괴로움이란 문제현상을 직시하여
깨달음을 얻고 망상분별을 떠나고, 집착을 버리고
이상적인 상태를 추구해야 함에도,
현실의 문제를 올바로 보지 못하고
현실에서 일부 좋은 점을 찾아내고
이에 집착하여 안주하는 것은 문제인 것이다.
따라서 이런 문제점을 직시하기 위해,
불교에서는 현실 일체가 고통이라는 입장을 제시하고
근본적인 문제해결을 취하고자 하는 것이다.
불교의 생사즉 열반관에 의할 때에도
현실 긍정적인 측면을 가질 수 있다.
그러나 단순한 낙관주의와는 차이는
현실에서 나쁨에 대해 어떤 입장을 취하는가에서 볼 수 있다.
생사 즉 열반의 입장에서는
이 나쁨이 본래 생멸현상 안에
실답게 있지 않음을 관하여
망상분별과 집착을 근본적으로 제거하여
본래 생사현실이 곧 니르바나임을 관하는 것이다.
이에 반해
단순한 낙관주의의 입장은
좋음과 나쁨에 대해 망상분별과 집착을 바탕으로
나쁨을 외면하고 좋음을 집착하여 찾고 구하는 입장에서
이루어지는 것이어서,
앞에서 본 것과 같이 망상분별과 집착이 갖는
부정적인 면을 지니고 있다.
그리고 이 경우에는 그런 망상분별과 집착으로 인해
집착하는 바를 이루기 전까지 갈증과 불쾌를 느끼고
집착하는 바가 무너질 까 두려움과 불안에 시달리며
또 집착하는 바가 무너져 사라지면 고통과 불쾌를
받게 되는 구조를 그 안에 함께 갖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이는
현실에 존재하는 나쁨을 없애지도 못하고
당장의 좋음에 집착하여
더 큰 나쁨을 불러 일으키고
윤회의 고통을 더 증가시킨다는 점에서 차이가 있다.
부처님의 가르침은 바로 이런 문제점을
올바로 보라는 것이다.
따라서 이런 입장에서 생사 즉 열반의 내용을
단순한 낙관주의로 현실의 좋음을 찾고
단순히 긍정하여 임하는 자세와는 구별하여야 한다고 본다.
- 개인적으로 망상분별 집착을 떠나지만, 다른 생명의 고통의 현실을 외면하는 잘못
한편, 자신이 생사현실이 곧 니르바나임을 관하게 되어,
망상분별과 집착을 제거하여
그로 인해 그 자신의 입장에서는
이제 어떤 현실도 문제가 없게 되었더라도,
그것만으로는 현실 그대로
아무런 문제가 없는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다른 생명들은 여전히 그렇게 깨닫지 못하고
망상분별과 집착을 갖고 살아가기에
그 망상분별과 집착의 바탕에서
여전히 다른 생명들이 고통을 받는 그 현실은
문제가 있는 것이다.
그리고 현실이 그처럼 다른 생명들 입장에서는
여전히 문제가 있기에
수행자는 자신의 입장에서는 비록 문제가 없다하여도
다른 생명들의 입장에서 다른 생명들이
이런 망상분별과 집착으로 인해 받게 되는 고통을
제거해줄 수 있도록
수행을 계속해나가야 하는 것이다.
- 집착이 없으면 아무렇게 행해도 된다고 생각하는 잘못(악취공견)
모든 생멸현실은 본래 생멸이 없는 것이고 니르바나이며,
모두 차별없이 공하다.
그래서 이런 사실을 관하고
망상분별과 집착을 버려야 함을 강조하게 된다.
그런데 이처럼 모든 것이 차별없이 공함을 관하고,
망상분별과 집착을 버리면
이제 해야 마땅한 일을 아무것도 하지 않거나,
또는 반대로 아무 것이나 아무렇게 행해도
무방하다는 생각을 하기 쉽다.
선취공견은
이래도 저래도 모두 차별없이 공한데,
왜 굳이 가장 좋고 좋은 상태를 향해 나아가지 않을 것인가라고
생각하여 수행에 정진해나가는 입장이라면,
악취공견은
이래도 저래도 모두 차별없이 공하므로,
아무렇게 행해도 무방하다는 입장이라고 할 수 있다.
그래서 모든 것이 공하여 본래 생멸이나, 생사도 없고
선악의 차별도 본래 없고, 지옥과 극락이 둘이 아니며,
일체가 다 니르바나임을 깨닫고
망상분별과 집착을 버렸다고 하면서도
실제로 행하는 일은 기존에 행하던 습관[훈습된 습기]에 따라
평소에 집착하던 내용을 그대로 고집하며 나아가며,
거침없이 악행을 저지르기도 한다.
이런 입장을 악취 공견이라고 표현한다.
이런 악취공견을 취하고 고집하며
탐욕을 갖던 것을 그대로 탐욕을 갖고 행하고,
분노를 갖던 것에 그대로 분노를 일으켜 행하는 식으로 나아가면
그 결과로 만나는 현실은
역시 고통스럽고 악한 현실이 나타나게 된다.
물론 이론적으로는 이런 현실도
니르바나의 바탕에 본래 있는 것은 같다.
본래 공하고 니르바나라는 것은
이런 경우에도 그렇다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론상으로는
이런 경우 그가 실제로 망상분별과 집착을 버렸다면,
그 결과 지옥과 같은 현실을 만나게 되어도 그 혼자만은
그 상태에서 여전히 니르바나의 상태에 머물 수 있다고 할 것이다.
그렇지만, 다른 생명에게는 그로 인해
고통과 악을 증가시키는 결과를 초래하게 되는 점이 문제다.
또한 악취공견을 취한 이는 사실은
수행과 깨달음의 부족으로
공과 현실의 관계에 대해 올바로 깨닫지 못하고,
공에 대하여 오직 있지 않음(차별 없음 등)이라는 한쪽에 치우친 견해를 갖고
없지 않음(같지 않음 등)의 면을 보지 못한 것이며,
또한 기존의 습관[훈습된 습기]을 완전히 떠나지 못하고
악행을 행하게 된 것이므로,
자신이 마음대로 행함으로 인해
지옥과 같은 상황에 처하게 되면,
자신이 마음대로 행하던 때와는 달리, 그 상황에서는
망상분별과 집착을 버리지 못하고
그대로 그 고통을 모두 받게 되는 것이다.
한편, 실재의 바탕에서
비록 선과 악이 본래 다름이 없고
차별이 없다 하지만,
그러나 또 한편 실재의 바탕에서
이들이 완전히 동일하고 같은 것이라고
볼 수 없음을 생각해야 한다.
유가사지론에서는
이러한 악취공견을 갖느니,
차라리 내가 실답게 있다는 망상분별 즉 아견을 갖고
사는 것이 차라리 낫다고도 말한다.
즉, 다음과 같이 제시하고 있다.
...
세존은 비말한 뜻[密意]에 의하여 말씀하시되,
'차라리 한 종류의 나라는 소견[我見]을 일으키는 이와
같게 될지언정,
한 종류의 나쁘게 공을 취하는 이[惡取空者]와
같게 되지 말라'고 하셨다.
무슨 까닭이냐 하면,
나라는 소견을 일으키는 이는
다만 알 바의 경계에 대해서만 헷갈린 것이요,
온갖 알 바의 경계는 비방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런 인연으로 말미암아
모든 나쁜 길에는 떨어지지 아니하며,
다른 법을 구하여 괴로움에서 해탈하려 하는데도
헛되이 속지 않고
머물러 있지도 아니하며,
법에 대해서나 진리에 대해서
역시 잘 이룩하고,
모든 배울 곳에서도 느즈러지지 아니한다.
그러나
나쁘게 공을 취하는 이는
알 바 경계에 대해서도 헷갈리고,
온갖 알 바의 경계 역시 비방하나니,
이런 원인으로 말미암아
모든 나쁜 길에 떨어지며,
다른 법을 구하거나 괴로움에서 해탈하려 하는 데서도
헛되이 속고
역시 머물러 있으며,
법에 있어서나 진리에 있어서도
잘 이룩하지 못하고,
모든 배울 곳에서도 지극히 느즈러짐을 낸다.
이와 같이 실제 있는 일을
덜하고 줄이는 이는
부처님의 말씀하신 법과 비나야에 대하여 심히 무너지게 한다.
무엇을 나쁘게 공을 취하는 이라고 하느냐 하면,
어떤 사문이거나 바라문이
그것으로 말미암아 공 또한 믿어 받지 아니하고,
여기에서 공도 믿어 받지 않는 것이니,
이와 같은 것을 나쁘게 공을 취하는 이라고 한다.
왜 그러냐 하면,
그것으로 말미암아서
공은 저 실로 이는 없는 것이요,
여기서의 공은
이는 실로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런 도리로 말미암아 공이라고 말하나니,
만약 온갖 것이 도무지 아무 것도 없다고 말하면
어디서 누가 무엇 때문에 공이라고 하였겠는가.
역시 이로 말미암아
여기서 곧 말하여 공이라 함은
마땅하지 아니하다.
그러므로 나쁘게 공을 취하는 이라고 한다.
...
K0570V15P0771a06L; 彼見者世尊依彼密意說言寧如一
K0570V15P0771a07L; 類起我見者不如一類惡取空者何
K0570V15P0771a08L; 以故起我見者唯於所知境界迷惑
K0570V15P0771a09L; 不謗一切所知境界不由此因墮諸
K0570V15P0771a10L; 惡趣於他求法求苦解脫不爲虛誑
K0570V15P0771a11L; 不作稽留於法於諦亦能建立於諸
K0570V15P0771a12L; 學處不生慢緩惡取空者亦於所知
K0570V15P0771a13L; 境界迷惑亦謗一切所知境界由此
K0570V15P0771a14L; 因故墮諸惡趣於他求法求苦解脫
K0570V15P0771a15L; 能爲虛誑亦作稽留於法於諦不能
K0570V15P0771a16L; 建立於諸學處極生慢緩如是損減
K0570V15P0771a17L; 實有事者於佛所說法毘奈耶甚爲
K0570V15P0771a18L; 失壞
K0570V15P0771a19L; 云何名爲惡取空者謂有沙門或婆
K0570V15P0771a20L; 羅門由彼故空亦不信受於此而空
K0570V15P0771a21L; 亦不信受如是名爲惡取空者何以
K0570V15P0771a22L; 故由彼故空彼實是無於此而空此
K0570V15P0771a23L; 實是有由此道理可說爲空若說一
K0570V15P0771b01L; 切都無所有何處何者何故名空亦
K0570V15P0771b02L; 不應言由此於此卽說爲空是故名
K0570V15P0771b03L; 爲惡取空者云何復名善取空者謂
...
참조 유가사지론 보살지(菩薩地) 지유가처(持瑜伽處) 진실의품(眞實義品)
- 없음에 지나치게 치우쳐 모든 것을 부정하는 잘못
한편 수행자가
생사 즉 열반 즉, 일체 현상이 모두 본래 니르바나임을 깨달아,
망상 분별과 집착을 제거하려고 노력할 때
이를 바탕으로 집착을 제거함에 그치지 않고,
자칫 일체가 없다는 견해에 치우쳐
모든 것을 없다고 부정하여,
고요함에만 머무르려 하고
지혜를 키우고 중생을 제도하는
많은 수행을 외면하는 잘못을 일으키기 쉽다.
그것은 생멸하는 현상이
영원불변한 실체가 없고 [무아, 무자성]
그 실재가 공하며,
실답지 않은 내용임을 보고
또 이에 대해 관념을 세우고 분별하는 것이
모두 망상 분별임을 관하여
집착을 버리고
니르바나에 도달하기 때문이다.
이는 현실 안의 감각현실(의타기상)과
관념의 세계(변계소집상) 등이
모두 무아, 무자성이며(승의무자성)
실재가 아니며(생무자성)
관념에는 감각현실(자상)이 없음(상무자성)을 관하여
이들이 실다움이 '없음'을 관하여
집착을 제거하는 것을 말한다.
그러나 이처럼,
없음(승의무자성, 생무자성, 상무자성)의 측면을 통해
그것들이 실답지 않음을 관하여
그에 갖는 집착을 제거하는데 그치지 않고
오로지 '없다'는 견해에만 지나치게 치우치게 되면,
오히려 현실에서 없음의 측면만을 강조하고
반대로 실재를 바탕으로
감각현실과 관념이 나타나 존재한다는
'있음'의 측면을 외면하기 쉽다.
그리고 온 생명을 구제하고자 하고
지혜를 키워 지혜의 장애[소지장]을 제거하는
많은 수행을 외면하고
자신의 고요함에만 빠지기 쉽다.
자신만 회신멸지의 열반에 드는 것을 목적으로 하지 않고,
온 생명을 제도하고자 하는 입장에서는
이는 문제가 아닐 수 없다.
승의무자성, 생무자성, 상무자성의 3가지 없음[3무성]에 의해
오로지 없다는 견해에만 치우치고
원성실상과 의타기상 변계소집상을 오로지 부정해버리는
경우의 폐해에 대해
해심밀경에서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나온다.
...
그들은 자비가 박약하기 때문에
모든 중생을 이롭게 하는 일을 저버리며,
한결같이 뭇 괴로움을 두려워하기 때문에
지어야 할 모든 행을 일으키는 것을 저버린다.
나(부처님)는
중생들을 이롭게 하는 일을 한결같이 저버리는 자와
지어야 할 모든 행을 일으키는 것을 한결같이 저버리는 자도
도량에 앉아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을 수 있다고 끝내 말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그를 한결같이 고요함에만 빠지는 성문이라 한다.
'''
만일 모든 생명[유정]들이,
널리 말하건대
내지 아직 상품(上品)의 복덕과 지혜 두 가지 자량을 쌓지 못했고
성품이 강직하지 못하다면,
성품이 강직하지 못해
비록 폐하고 세울 것을 생각하고 선택할 힘과 능력이 있긴 하지만
아직도 자기의 견취(見取)에 머물러 있다면,
그들은 이와 같은 법을 듣더라도
나의 매우 깊은 밀의의 말을
여실히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이러한 법에 믿는 마음을 낸다고 해도
그 뜻을 말을 따라 집착해
‘일체 법은 단정코 모두 자성이 없으며,
단정코 생하지도 멸하지도 않으며,
단정코 본래 고요하며,
단정코 자성이 열반이다’라고 할 것이다.
이런 까닭에 모든 법에 대하여
없다는 견해와
모습이 없다는 견해를 얻을 것이다.
없다는 견해와 모습이 없다는 견해를 얻었음으로써
일체 모습은 모두 무상(無相)이라고 부정해 버리며,
모든 법의 변계소집상과 의타기상과 원성실상을
비방하고 부정할 것이다.
무슨 까닭인가?
의타기상과 원성실상이 있는 까닭에
변계소집상도 시설할 수 있는 것이니,
만일 의타기상과 원성실상을 없는 모습이라고 본다면
그는 또한 변계소집상도
비방하고 부인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런 사람은 세 가지 모습을 비방하고 부인한다’고 말하니,
비록 나의 법에 대하여 법이란 생각을 일으키긴 하지만
뜻이 아닌 것 가운데서
뜻이란 생각을 일으키는 것이다.
나의 법에 대하여 법이란 생각을 일으키고
뜻 아닌 가운데 뜻이란 생각을 일으키는 까닭에,
옳은 법 가운데서 옳은 법이라 지니고
잘못된 뜻 가운데서 옳은 뜻이라고 지닌다.
그는 법에 대하여 믿음을 일으킨 까닭에
복덕이 증장하긴 하지만
뜻이 아닌 것에 대하여 집착을 일으킨 까닭에
지혜를 잃으며,
지혜를 잃는 까닭에
광대하고 무량한 좋은 법에서 물러난다.
다시 어떤 유정이
법을 법이라 하고
뜻 아닌 것을 뜻이라고 하는 말을 남에게서 듣고
그 소견에 따른다면,
그는 곧 법에서 법이란 생각을 일으키고
뜻 아닌 것에서 뜻이란 생각을 일으켜,
법을 집착하여 법이라 하고
뜻 아닌 것을 집착하여 뜻이라고 할 것이다.
이런 까닭에 마땅히 알라,
그들은 함께 선법(善法)에서 물러나리라.
'''
참조 해심밀경 5. 무자성상품(無自性相品)
결국 부처님은
승의무자성, 생무자성, 상무자성을 말할 때
이를 통해
원성실상과 의타기상, 변계소집상을 모두
무시하라고 가르치는 것이 아니다.
3 무성을 통하여 집착을 버린 가운데
없음과 있음 양 극단에 치우치지 않아야 함을
강조하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따라서 본래 청정한 니르바나를 바탕으로
나타나는 무상한 현실 속에서
이에 대해 3 무성을 관하여
집착을 버리게 되면,
무상한 현실의 고통에서 벗어날 수 있게 되고
그렇게 집착을 버린 가운데
현실 안에서 올바른 관찰과 함께
수행에 정진하여 지혜를 키움으로써
생명을 구제하는
광대무변한 서원을 실천해나갈 바탕이
마련되는 것이다.
결국 해탈과 니르바나를 얻는 것이 기본적으로
중요하므로,
망상분별과 집착을 제거하여
해탈과 니르바나를 얻어야 한다고 보지만,
생멸하는 현상, 생사가 모두 그대로
니르바나임을 깨달은 상태에서는
이 니르바나를 바탕으로
중생을 제도하기 위하여
복덕과 지혜를 함께 갖추고
법신을 이루고 성불하는 데
목표를 두어
수행을 정진하여 나아가야 한다고 할 것이다.
해심밀경에서는 이런 각 수행으로 얻는
차별을 다음과 같이 설한다.
...
해탈신에 의지하는 까닭에
일체 성문이나 독각과 모든 여래는
평등하고도 평등하다고 말하며,
법신을 말미암는 까닭에 차별이 있다고 말하며,
여래의 법신에 차별이 있는 까닭에
무량한 공덕과 가장 수승한 차별이
산수(算數)와 비유로도 미치지 못한다.”
...
...
K0154V10P0738c14L; 男子名解脫身由解脫身故說一切
K0154V10P0738c15L; 聲聞獨覺與諸如來平等平等由法
K0154V10P0738c16L; 身故說有差別如來法身有差別故
K0154V10P0738c17L; 無量功德最勝差別筭數譬喩所不
K0154V10P0738c18L; 能及曼殊室利菩薩復白佛言
참조 해심밀경 8. 여래성소작사품
○ 생사 즉 열반에서의 망상분별의 제거와 수행방안
생사 즉 열반의 입장이란,
일체 생멸현상은 그 안에 아무리 좋음이 있다고 해도
그것이 결국 멸해 없어지기에
모두 고통으로 보고, [일체개고]
반대로 공한 실재에는 그런 생멸이나 고통이 있다 할 수 없기에
청정한 니르바나로 보는 전제에서 출발한다.
그런데, 다시
현실은 그런 공한 실재를 떠나지 않은 것이어서
현실이 곧 공한 실재라고 할 수 있다. (색즉시공..)
또 한편, 생멸이나 고통이란 관념은
본래 실체가 없고,
실재가 아니고
그 관념은 자상을 갖지 않고
또 그 관념은 감각현실에 없는 것으로서,
실답게 있는 것이 아니고
망상분별인 것이다.
따라서 생멸하는 현상에는
본래 생멸과 생사, 고통이 실답게 없는 것이어서,
본래 니르바나라고 보는 것이다.
그런데도 현실이 문제인 것은
바로 각 생명이 일으켜 갖는
망상분별과 집착 때문인 것이다.
따라서 이런 망상분별과 집착을 갖고 살아가는
현실은 본래의 니르바나를 덮어 가리우기 때문에
위 내용만으로 곧 현실 그대로를
문제가 없는 상황으로 볼 수는 없는 것이다.
그런데 생사 즉 열반을 강조하다보면,
자칫 망상분별과 집착을 갖고 살아가는 현실이
그 상태 그대로 아무 문제가 없는 것이라고
잘못 생각하기 쉽다.
또 생사가 모두 본래 니르바나이기 때문에
심지어 어떻게 행하던 아무 문제가 없다고
생각하기도 쉽다.
그러나 그렇지 않은 것이다.
그래서 위에서
생사 즉 열반의 입장을 취할 때,
가질 수 있는 문제점들을 나열해 살핀 것이다.
그것은
- 망상분별과 집착의 상태로 다시 물러남[퇴전]의 잘못
- 현실 그대로가 아무 문제가 없다고 착각하는 잘못
- 현실의 문제 상태에서 좋은 부분만 보고, 낙관적으로 안주하는 잘못
- 개인적으로 망상분별 집착을 떠나지만, 다른 생명의 고통의 현실을 외면하는 잘못
- 집착이 없으면 아무렇게 행해도 된다고 생각하는 잘못(악취공견)
- 없음에 지나치게 치우쳐 모든 것을 부정하는 잘못
등으로 요약할 수 있다.
이런 상태에서 수행자가
생사 즉 열반의 입장에서 망상분별과 집착을 제거하지만,
그렇다고 완전히 회신멸지의 니르바나에 드는 것도 아니어서,
생사를 피하지 않고
각 생에서의 감각현실과 관념을 일으켜 가질 때
위와 같은 입장을 취하지 않고
어떤 입장에서 무엇을 목표로 임해야 하는가 하는 것이
문제가 되는 것이다.
우선 생사 즉 열반의 입장은
본래 현실에서 행하는
생사나 고통 등 여러 관념적 분별이 모두 망상분별이며,
이에 대해 집착을 갖는 것이 고통을 불러 일으킨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처럼 대부분의 관념적 분별 판단이
망상분별의 성격을 갖기 때문에
현실에서 행하는 판단 가운데
망상분별이 아닌 판단으로는
'이런 분별판단이 망상분별이라고 하는 판단' 정도만을 생각할 수 있다.
그러나 분별이 망상분별이라고 하여
생사현실 속에서 감각현실과 분별 자체가 나타나는 것을
부정하는 것은 아니다.
단지 관념의 내용(변계소집상)을 감각현실과
실재에 관통시키고 그것이 진짜의 내용으로서
영원불변한 실체의 내용이라고 잘못 분별하여
집착을 일으키고 행하면
이것을 문제라고 하는 것이다.
따라서 수행자가 생사현실을 피하지 않고
행하는 분별은 비록 망상분별이라고 해도
수행자가 그것이 망상분별임을 깨달은 상태에서 그 분별을 행하고,
또 망상분별과 집착에 바탕해 아무렇게 분별을 행하는 것이 아니고,
중생 제도의 목적하에 공한 실재에 상응하여 집착을 떠나 분별함은
망상분별의 독을 일으키지 않는다고 할 수 있다.
분별이 망상분별이고 희론임을 깨달음이
망상분별로 인한 독을 제거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수행자는
모든 것이 꿈과 같고 환영과 같은 것이어서
진짜가 아니지만 마치 진짜인 것처럼 나타나는 것이며,
분별판단이 망상분별임을 깨달은 바탕에서,
비록 일체의 분별판단이
실답지 않은 관념(변계소집상)에 바탕한
희론(戱論- 이치에 맞지 않는 실없는 말장난과 같은 논의)이라고 할 것이지만,
현실에서 각 생명이 갖는
망상분별과 집착을 제거하고
온 생명을 제도하기 위한 방편으로
공한 실재에 상응하여 집착을 떠나
얻을 것이 없음을 방편으로 하여
분별하고 실천하는 것이 요구되는 것이다.
이런 사정에 대해
대반야바라밀다경 도토품에서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나온다.
...
선현아,
네가 말하기를 만일 온갖 법이 모두가 제 성품이 공할진대
보살마하살이 어떻게 무엇을 배울 수 있겠느냐.
만일 배울 곳이 있다면
세존은 희론(戱論)이 없는 곳에서 희론을 말하되
모든 법에서 이것이다, 저것이다, 이 까닭이다, 이 때문이다,
내지 여래의 법이다 하는 것이 아닌가 하였거니와,
만일 모든 생명(유정)들이
온갖 법의 제 성품이 모두 공한 것을 '알면'
모든 보살마하살은 온갖 법을 배워서 일체지지를 증득하여
모든 생명들을 위해 건립하고 연설하지 않으리라.
그러나 모든 생명이
모든 법의 제 성품이 모두 공한 것을 '알지 못하는 까닭에'
모든 보살마하살은 결정코 온갖 법을 배워서
일체지지를 증득하여
모든 생명들을 위해 건립하고 연설하여야 하느니라.
...
K0001V04P0210c03L; 菩薩摩訶薩能證無上正等菩提善
K0001V04P0210c04L; 現如汝所言若一切法皆自性空云
K0001V04P0210c05L; 何菩薩摩訶薩於何處學若有所學
K0001V04P0210c06L; 將無世尊於無戲論而作戲論謂有
K0001V04P0210c07L; 諸法是此是彼由是爲是廣說乃至
K0001V04P0210c08L; 是如來法者善現若諸有情知一切
K0001V04P0210c09L; 法皆自性空則諸菩薩摩訶薩不應
K0001V04P0210c10L; 學一切法證得一切智智爲諸有情
K0001V04P0210c11L; 建立宣說以諸有情不知諸法皆自
K0001V04P0210c12L; 性空故諸菩薩摩訶薩定應學一切
K0001V04P0210c13L; 法證得一切智智爲諸有情建立宣
K0001V04P0210c14L; 說善現當知諸菩薩摩訶薩於菩薩
...
[참조 대반야바라밀다경 도토품]
그리고 보살은 이런 중생제도의 목적을 위해
생사를 피하지 않고
올바른 수행을 즐겁게 잘(유희, 신통) 실천해 나가는 것이다.
그리고 이런 목적을 위한 보살의 수행은
현실에서 일반 생명이
망상분별과 집착에 바탕하여 고통을 발생시키고 증가시켜나가는 방식의
분별과 행위를 중지하고
그와는 반대로 행해 나가는 것을 의미한다.
즉, 수행자는 현실에서 일반적으로 생각하고 행하는 방식과는 반대로,
집착없이 얻을 것이 없음을 방편으로
제한없이 온 생명을 위하여
1`- 다른 생명에게 다른 생명이 집착하는 좋음을 베풀기 위한 분별과 실천
2`- 다른 생명이 집착하는 좋음을 침해하지 않고 나쁨을 주지 않기 위한 분별과 실천
3`- 다른 생명이 자신의 좋음을 침해하고 나쁨을 줄 때 좋게 해석하여 평안이 참고
미움과 원망을 버리고 용서하고 사랑을 하기 위한 분별과 실천을
해나가는 등으로
보시-정계-안인-정진-정려-반야-방편-원-력-지의 수행을 해나가는 것이
요구되는 것이다.
아래에서 수행자가 생사 즉 열반의 입장을
바탕으로 생사현실을 피하지 않고
수행을 해나가는 내용을 좀 더 자세히 살피기로 하자.
○ 종교 일반의 현실부정 공상주의적 이상성과 불교
현실에 존재하는 종교는 대부분
현실에서 추구하는 세속적 가치를 부정하고
대신 천국이나 하늘, 지옥과 같은 세계를 제시하며
하늘에 태어나 살아가는 것을 목표로 제시한다.
예를 들어
지옥은 고통과 두려움이 극심한 상태로 장구하게 지내는 상태이고
반대로 하늘은 즐거움과 희망이 가득한 상태로 장구하게 지내는 상태이다.
그리고 각 종교는 각 종교에서 제시하는 절대자를 믿고 따르며
선을 실천하여 사후에 하늘에 태어나 살아가는 것을
주된 목표로 제시한다.
그러나 이런 내용은 현실의 사람들이
직접 보거나 경험하지 못하고
쉽게 인정해 받아들일 수 없는 내용이다.
이처럼 종교가 제시하는 하늘이나 지옥 등의 세계는
살아 있는 동안, 현실에서 경험하고 확인할 수 없는 사정이 있기 때문에,
현실 내용만을 사실로 받아들이며
각 종교에서 제시하는 그런 내용을 사실로 받아들이지 않는 입장에서는
이런 내용들은 모두
비현실적이며, 공상적이고 허구의 종교적 내용으로 볼 여지가 있다.
부처님의 가르침은 어떤가.
부처님도 현실을 무상하고 괴로움이라고 부정하는 한편,
공상적 내용을 제시하며
이를 추구할 것을 제시하는 것인가?
불교도 물론 다른 종교와 유사하게
지옥, 아귀, 축생, 인간, 아수라, 하늘과 같은
여러 초경험적인 세계를
3계6도의 내용으로 제시함과 함께
또 다른 종교와는 다르게,
각 생명이 무한한 시간 동안
이런 세계를 윤회하며 고통을 받게 된다는 윤회설을 제시한다.
따라서 자칫 불교는 현실을 부정하면서
사람들이 경험할 수 없는 여러 내용을 제시하고
한편으로는 이처럼 윤회하는 3계6도의 여러 상태 가운데
가장 좋은 상태인 하늘의 상태에
태어나는 것을 목표로 수행하는 것이라고 오해할 수 있다.
따라서 현실만을 중시하는 입장에서 본다면,
불교 또한 현실을 부정하면서 공상적 허구 내용을
제시하는 종교라고 오해받을 여지가 있다.
그러나 불교는 사람들이 쉽게 믿고 받아들일 수 없는
지옥, 아귀, 축생, 인간, 아수라, 하늘의 세계를 제시하지만,
그렇다고 이런 상태를 목표로 추구하라고 가르치지 않는다.
예를 들어 색계의 하늘 범천의 수명은
1겁을 넘는 것으로
제시되고 있다.
그러나 불교에서는 이런 하늘 등에 태어나면
그처럼 장구한 시간동안
안락하고 즐거운 생활을 할 수 있음을 제시하지만,
그러나 한편, 이런 하늘에서의 안락함도
그것이 무상하여 끝이 있다고 설하며,
불교가 제시하는 궁극적 목표상태는
이와는 다르다고 제시하는 것이다.
그러나 일반인의 입장에서는
타화자재천이나 범천과 같은 하늘이 존재함도 인정하기 힘들고
이런 여러 세계를 생명이 윤회하며 무한히 살아간다는 것도
역시 받아들이기 힘든 데,
불교에서는 공상적이라고 할 이런 내용들을
사실이라고 제시하는 한편,
다시 이를 목표상태로 제시하는 것이 아니라,
이를 초월한 더 높은 상태를 목표상태로 제시한다는 점에서
불교는 한층 더 공상적인 종교라고 볼 여지도 있다.
산수로 헤아리기 힘든 1겁에 가까운 수명과 복을
받는 하늘을 제시하면서도
이 역시 모두 무상한 것이어서
전체적으로 생명이 괴로움을 받고 윤회하는 과정의
일부로 관하며
이런 상태를 모두 벗어나야 한다는 부처님의 가르침은
일반인의 입장에서는
상상을 초월하는 내용이 아닐 수 없다.
그러나 불교는 오히려 이렇게 세계를 관하는 것을
올바른 관찰이라고 한다.
비유하면 사람이 누리는 수명과 복이
일반 세균이나 곤충의 삶에 비한다면,
비교하기 힘들 정도로 복이 많고 수명이 긴 것이지만,
그렇다고 하여 사람이 번뇌와 고통에서
끝내 자유롭지 못한 것과 사정이 같은 것이다.
이처럼 현실도 무상하다고 부정하고,
복과 수명이 수승한 하늘을 목표로 하는 것도 아닌 가운데
부처님이 제시하는 목표는
고통의 윤회를 끊고
해탈과 니르바나에 이르는 것이다.
그런데 이 니르바나의 상태는
현실을 부정하는 한편,
현실을 긍정하는 이중적인 측면을 갖는다.
같은 현실을 놓고
한편으로는 괴로운 윤회과정이라고 제시하고,
또 한편으로는 이 현실이
본래 그런 괴로움이 소멸된 니르바나의 상태라고 제시하는 것은
분명 서로 이중적이고
모순되는 내용으로 볼 수 있다.
물론 현실에 본래 니르바나가 갖추어져 있다지만,
현실에서 괴로움을 떠나 니르바나에 머무르려면,
현실이 본래,
그 실재가 공하며, 무아, 무자성이어서 생멸이 본래 없고,
니르바나의 상태임을 관할 수 있는 깨달음과
이런 깨달음을 통해 현실에서 망상분별과
번뇌에 대한 집착을 버린다는 것이 요구된다.
그래서 같은 현실을 놓고
괴로움을 받는 상태를 벗어나,
본래의 니르바나의 상태를 확인하고 안온함을 누리게 되는 계기는
현실의 정체에 대해 올바로 관하는 지적 깨달음(혜해탈, 소지장의 제거)과
번뇌와 집착을 버리는 수행(심해탈, 번뇌장의 제거)에 있다고
이해할 수 있다.
이렇게 불교의 궁극적인 목적인 해탈과
니르바나가 제시되기 때문에
진리에 바탕한 가운데
불교는 깨끗하지 못한 현실을 부정하면서도
또 가장 현실을 깨끗한 형태로 긍정하는 측면을 갖게 되고
더 나아가 현실 속에서 윤리적인 측면으로
가장 원대하고 올바르며 이상적인 목표를 추구하며 향해 나아가는
이상적이면서 현실적인 측면을 함께 갖게 된다.
이런 측면을 우선
부처님의 모습을 통해서 모두 찾아 볼 수 있다.
○ 현실부정적인 측면 - 깨끗하지 못한 현실의 부정
우선 부처님은 현실 속에서 향락을 누리고
장차 왕이 될 수 있는 왕자의 신분에서
왕궁의 생활을 버리고 출가를 한다.
이는 현실에서 사람들이 집착을 갖고 추구하는 세속적 가치를
부정하고 떠나며 버리는 것으로서
곧 현실을 부정하는 측면으로 이해할 수 있다.
그리고, 현실의 일체가 무상하며 괴로움이라고 관하고
이에 대한 탐욕을 버리고 집착을 버려야 한다는 가르침은
바로 이런 측면과 직접 관련되는 것이다.
○ 현실긍정적인 측면 - 깨끗한 형태로 현실의 긍정
그런데 부처님이 깨달음을 구하는 과정
그리고 깨달음을 얻은 이후
현실에서 살아가는 모습은
낡은 옷을 입고 구걸을 하면서 살아가시는 모습이다.
이처럼 일반적으로
사람들이 생활하기 힘들다고 여기고
곤란함을 느낄 그런 현실상황에서도
부처님은 가장 지극한 안온함과 행복을
자신이 얻는다고 강조한다.
증일아함경 41. 막외품(莫畏品)에는
석존이 빈비사라왕과 자신을 비교하며
왕으로 향락을 누리며 지내는 빈비사라왕보다
자신이 더 즐거움을 누린다고 설하는 부분이 나온다.
상식적으로 볼 때
향락과 권세를 누리며 살아가는 현실의 왕이
낡은 옷을 입고 구걸하며 살아가는 석존보다
더 즐거움을 누리며 살아간다고 보는 것이 일반적이다.
그러나 생각해보면,
빈비사라왕이 왕으로서 누리는 즐거움은
향락과 즐거움을 누릴 수 있는 조건이 충족된 상태에서만
한시적으로 느끼는 즐거움에 불과하다.
현실에서 왕이 왕으로서 누리는 즐거움이란 그런
제한된 조건이 충족된 잠시간만 가능한 것이다.
반면 석존이 느끼는 즐거움이란,
가장 힘들고 고통스러운 상황에서부터
얻고 누리는 즐거움이 된다.
따라서 이는 다른 모든 경우에도 항시
즐거움을 얻을 수 있음도 함께 의미한다.
이런 측면에서 본다면
석존이 누리는 즐거움은
극도로 궁핍하고 악조건인 현실도
가장 안온한 즐거움과 행복으로 받아들이는
극단적인 현실긍정적인 측면을 갖는다고 할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즐거움을 얻을 수 있는 것은
앞에서 본 것과 같이
생멸하는 현상이 본래 생멸을 떠난 것이며
본래 니르바나라는 깨달음과 함께
현실 일체에 대하여 집착을 갖지 않고
번뇌를 끊어 해탈을 얻는 측면과 관련한다.
그래서
깨달음을 통해 집착과 번뇌를 끊으면,
가장 극단적으로 고통스런 현실에서도
그 고통과 두려움을 벗어날 수 있게 된다.
그리고 이런 측면이 바로
가장 극단적으로 고통스런 현실에 처해서도
수행자가 그 모두를 긍정하여
평안하게 받아들이게 하는 요소다.
그리고 이런 측면이 곧
불교가 극단적인 현실 긍정적 측면을 띄게 하는
요소라고 할 수 있다.
경전에서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나온다.
탐욕을 떠나면
괴로움을 끊을 수 있느니라.
...
[참고 잡아함경 0003, 무지경]
탐욕을 떠나
마음이 해탈한다면,
그는 태어남·늙음·병듦·죽음에 대한 두려움을
초월할 수 있느니라.
...
[참고 잡아함경 0004, 무지경2]
이런 경전의 내용은 결국
앞에서 제시한 상태를 나타내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즉 현상의 일체(색, 수, 상, 행, 식)에 대해
탐욕을 떠나
번뇌와 집착에서 벗어나면,
그는 현실에서 이들이 침해될 때 겪는 괴로움과
이들이 위협받는 상황에서 받는 두려움을
모두 끊고 초월할 수 있게 됨을 제시하고 있는 것이다.
실제로 탐욕과 집착을 떠나면
가장 극단적으로 고통을 주는 현실 상황에서도
평안히 머무를 수 있게 된다.
또한 이런 깨달음은
설령 지옥에 처하더라도
그것은 지옥이 아니며
니르바나의 상태임도 의미한다.
그래서, 대반야바라밀다경 제 574 권 만수실리본에서
설하는 것처럼,
...
무간지옥에 나아가는 이도
긴 밤에 생사에 헤매는 것이 아니요
..
5무간지옥이 곧 보리요
...
라는 등의 내용이 제시되는 것이다.
이는 번뇌즉 보리라는 대승의 가르침과도
관련된다.
즉 깨달음을 얻은 상태에서는
이들이 모두 차별이 없이 공하고
생멸이 없는 것이며,
본래 니르바나의 상태임을 관할 수 있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한편, 이처럼 올바른 관찰과 깨달음을 통해
생멸하는 현상 자체가
본래 생멸이 없는 니르바나임을 깨닫고
집착을 버리고 해탈을 얻는다면,
굳이 무상하고 생멸을 반복하는 현실을 지우고 떠나야 할
필요도 없어지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래서 경전에서 반복해 제시되는 것처럼
마음이 해탈한 사람은
만일 스스로 증득하고자 하면
자신이 처한 현실 상황에서
곧 스스로 해탈지견을 증득할 수 있으니,
그것은 곧
'나의 생은 이미 다하고
범행은 이미 섰으며,
할 일은 이미 마쳐
후세의 몸을 받지 않는다'고
스스로 아는 것이 된다.
그리고 이렇게 깨닫고 집착을 버리면
가장 극심하고 극악한 현실 상황에서도
그것을 최상으로 안락한 니르바나의 상태로서
긍정해 받아들이게 되고
평안하고 안온하게 머무르게 됨으로써,
이미 앞에서 본 것과 같은
극단적인 현실 긍정적인
모습을 보이게 되는 것이라고
이해할 수 있다.
또한 이런 현실 긍정은
단순히 좋음과 나쁨이 뒤섞인 현실에서
좋은 측면만을 찾아 응시함으로써
좋음을 얻어내는 낙관주의적인 자세와는
차이가 있다.
또한 세속에서 추구하는
가치나 집착을 부정하여
단순히 현실부정적인 면을 갖는 것과는
다르다.
이처럼
불교의 현실 긍정적 측면은 어디까지나
현실을 올바로 관찰하고
괴로움이란 문제현상을 직시하여
집착을 버리고 깨달음을 얻고
이상적인 현실을 추구하여 수행하는 가운데
갖는 입장인 것이다.
○ 윤리적 이상추구 실천행의 측면
불교가 갖는 현실 부정적인 측면은
사람들이 일반적으로 집착을 많이 갖는 부분들
즉, 탐욕과 분노, 어리석음에 대한 측면이다.
즉, 일체가 무상하며 괴로움이라고 하여
이에 대한 탐욕과 집착을 버림을 강조하는 것은
이러한 현실의 측면에 대해
집착을 버리고 떠날 것을 강조하는
현실 부정적인 측면으로 나타난다.
그리고
부처님의 가르침에 따라
올바로 현실을 관하고 집착을 버리면,
마음의 해탈과 니르바나의 상태에 이르러,
현실의 생멸현상이
본래 생멸이 없는 니르바나의 상태임을 관하고
반대로 현실의 어떤 극악한 조건에서도
평온한 니르바나의 상태에 머무르게 된다.
이는 망상분별과 집착을 버리는 수행이 갖는
현실부정적 측면이
반대로 갖게 만드는
극단적인 현실 긍정적 측면이라고
이해할 수 있다.
처자와 가족을 버리고 출가하여 수행을 하는 상태에서도
안온하고 평안함을 얻는 것은
바로 그런 긍정적 측면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그리고 이 모두가
가장 이상적인 목표 상태로서
자신과 중생 모두의 해탈과 니르바나를 향해 수행하는 과정을 통해
실천된다는 점에서
윤리적이고 이상을 추구하는 실천행으로서
성격을 갖는 것이다.
○ 불교의 생사즉 열반의 현실긍정적 측면과 단순한 현실긍정과의 차이
부처님의 가르침을 따라
현실에 대해 올바로 관하고
집착을 버리고
해탈과 니르바나를 얻기 위해
수행을 하는 것은
한편으로는 세속의 탐욕을 포기하는 부정적 측면을 갖고
그런 세속의 욕구가 실현되지 않는 상황을 그대로
평안하고 안온하게 받아들이는 긍정적 측면을 갖지만,
그와 동시에 이런 수행은
가장 이상적인 상태를 향하고 실천하는
이상추구 실천행의 측면도 함께 갖는 것이다.
정견, 정사유, 정어, 정업, 정명, 정정진, 정념, 정정과 같은
37도품(보리분법)의 수행이나,
보시, 정계, 안인, 정진, 선정, 반야와 같은
6 바라밀다의 수행도 역시
현실 속에서 수행되는 이상추구 실천행이다.
더 나아가 보살이
다른 생명을 제도하고자 하고,
함께 번뇌를 끊고자 하고,
함께 법문을 배우고자 하고
함께 불도를 이루기 위하여,
생사 윤회를 피하지 않으며
수행을 계속하는 것도
이와 같다.
또한 석존 자신도 깨달음을 얻은 이후
그 깨달음을 중생들에게 열어 보이고
중생들이 깨달아
그 깨달음에 들어오게 하기 위하여
많은 설법과 함께
적극적인 노력을 하신 것도
사정이 같다.
이들은 모두 역시 무상한 현실 속에서
적극적으로
이상적 상태를 추구하는
이상추구 실천행의 성격을 갖는 것이다.
따라서
생멸하는 현상을 무상하고
괴로운 것이라고 관하여
이에 대한 집착을 버리고 떠나는 것은
현실을 부정하는 측면을 갖지만,
이는 어리석음으로
번뇌와 집착을 일으켜
괴로운 생사 윤회의 고통을 받게 하는
현실 측면들에 대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이와는 반대로
세계를 올바로 관하고 집착을 버리는 수행을 비롯하여
위에 나열한 여러 수행방안들은
주어진 현실이
기존에 집착하던 세속적 욕구가 실현되지 않고
낡은 옷과 구걸로서 삶을 유지하는
극악한 상황이더라도,
이를 모두 본래 니르바나의 상태로 긍정하여 받아들이는 한편,
동시에
그 현실에서 가장 이상적인 상태를 실현하기 위해
이상적인 목표를 향해
추구해나가는 적극적인 실천행의 성격을 갖는다.
이는 비유하면
길가에 떨어진 동전이나 낙엽을 바라보지 않고
이에 집착하지 않고 지나치며
동전과 낙엽이 없어도 이를 신경쓰지 않는 가운데,
황금을 바라보고
황금을 얻고 황금을 다른 이에게 나누어 주기 위해
황금을 향해 달려나가는 것과 상황이 같다.
즉,
현실의 탐욕, 분노, 어리석음의 번뇌(동전과 낙엽)을 버리고
집착을 버리고 지나치며 [현실부정적인 측면]
해탈과 니르바나(비유의 황금)를 얻고
이를 다른 생명도 얻게 하기 위해
어떤 극단적인 현실에서도 평안히 머물러 정진 노력하는 것은
현실에서 평안히 머무르는 수행임과 함께 [현실긍정적인 측면]
적극적인 이상 추구 실천행이 되는 것이다. [이상 추구실천행의 측면]
결국 하나의 수행이 이런 성격을
모두 현실에서 동시에 갖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물론 이런 수행도 역시 무상한 현실속에서
행하는 일이므로 역시 괴로운 것 아닌가.
그래서 현실이 무상하고 괴로움이라고 관하여
탐욕과 집착을 버리듯
이런 수행도 그처럼 버려야 하는 것 아닌가 하는
의문을 제기할 수 있다.
물론 이런 수행목표와 수행방안에 대해서도
역시 집착을 갖지 않고
추구하고 임해야 하는 것은 당연하다.
그러나,
이들 수행은
집착을 버린 가운데,
현실적으로 '평안히 머무름'과 함께
'정진하여 추구해 나가는' 내용이며,
수행을 하기 전 가졌던
세속에서의 이기적이고 악한 집착은
집착을 버린 가운데
현실적으로도 '끊고 버리는' 내용들이라는
점에서 서로 구별된다.
한편, 수행이나 현실의 생활이나,
모두 현실 안의 내용이라는 점에서는 같다.
그러나 이미 앞에서 본 것처럼,
현실의 생멸하는 현상이
본래 생멸이 없는 니르바나임을 깨닫기 위하여 행하는 수행과
중생을 제도하기 위하여 행하는 실천행들은
모두 기존의 현실의 삶과는 다른 의미를 갖는다.
다 같은 현실에서 이뤄지는 내용이더라도
이들의 의미를 서로 다르게 만드는 것은
생멸하는 무상한 현실이 괴로움이고,
무아, 무자성이고, 공하며
본래 생멸이 없는 니르바나임을 관하는 올바른 깨달음과
그 깨달음에 바탕하여 집착을 버려 얻는 해탈에
있다고 할 것이다.
이런 깨달음과 해탈은
기존에 일반이 집착을 갖고 대하던,
자신의 생명, 신체, 재산, 가족, 명예, 지위..등에 대해,
번뇌와 집착을 벗어나게 하여
아상, 인상, 중생상, 수자상
즉 나에 대한 생각, 사람에 대한 생각, 생명에 대한 생각, 목숨에 대한 생각을 갖지 않고,
수많은 생명을 자신과 함께
가장 안온하고 평안한 해탈, 니르바나, 보리의 상태에
이르게 하고자 하는
광대무변한 서원을 일으키고,
그 실천에 나서게 만드는 계기도 된다.
여하튼 이런 모든 노력은
공상과 망상을 바탕으로 추구하는 것이 아니고,
가장 올바른 진리 판단으로 세상의 정체를 올바로 관한 가운데
자신을 포함한 온 생명의 구극적인
니르바나와 보리의 이상적이고 원만한 성취를 향하고 있는 것이다.
결국 현실에서
이런 이상을 향하여 수행 실천하는 행위는
한편으로는
현실의 탐욕, 분노, 어리석음과 같은 현실에 대해서는
번뇌를 제거하고 집착을 제거하는
현실 부정적 측면으로 작용하고
또 한편, 그런 번뇌와 집착을 제거하고
현실이 어떻든 그것이 지옥이던 극락이던 모두 차별없이
생멸이 본래 없는 니르바나의 상태임을 관하여
평안히 현실에 머무르는 극단적인 현실 긍정적 측면을 갖고
현실을 긍정한 가운데 현실 속에서
가장 올바르고 옳은 이상적인 상태의 실현을 위해
광대 무변한 서원을 세우고
일반 생명이 집착하고 행하는 방식을 중지하고
그와는 반대의 방향으로
보시-정계-안인-정진-정려-반야-방편-원-력-지 등의
수행방안을 실천해나감으로써,
현실을 바탕으로 가장 이상적인 상태를
이상적인 방안으로 추구하고 실천하는 성격을
함께 갖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와 같이 일체(색, 수, 상, 행, 식)은 무상하며
괴로움이라는 측면과
이를 통해 탐욕과 집착을 버려
해탈을 얻는 수행이 갖는 관계를 살폈다.
이하에서는 보살의 수행목표에 대해
좀 더 자세히 보기로 한다.
○ 보살의 수행 목표
수행자가
만일 이렇게 무상하고 고통스런 현실에서
집착을 버려 고통을 받지 않게 되고,
더 나아가 원래의 니르바나의 상태를
확인해 찾아낸다면,
더 이상 생멸현상을 걷어낼 필요조차 없음을
깨닫게 될 것이다.
왜냐하면 이미 있는 생멸현상을 놓고
자신은 그로부터 고통을 받지 않고
또한 이 생멸현상이 본래 생멸이 아니고
본래 니르바나의 상태임을
그대로 보기 때문이다.
한편, 이렇게 집착을 버리기 위해서는
자신의 관념안에 써 넣은 잘못된 분별을
지우는 노력이 필요하다.
즉, 자신의 잘못된 망상 분별을 통해
자신이나 세계에 대한 관념을 갖고
더 나아가 이런 내용이 실재하는 내용이라고 생각하고
또 이들이 영원불변한 진짜의 내용이라거나
그런 내용이 있다는 등의 잘못된 견해를
떠나고 지우는 노력이 필요하다.
반대로 그 안에 올바른 내용을 써 넣는 것이
필요하다.
즉, 자신이나 세계로 본 색, 수, 상, 행, 식 일체는
자신의 마음안 내용물이고
이들은 모두 무상하고 고통의 현상이며,
또 자신과 세계의 실재는 공하며,
영원불변한 본체가 없다는 등의 올바른 견해를
가질 필요가 있다.
이는 모든 존재
즉 원성실상과 의타기상과 변계소집상에 대해
승의무자성과 생무자성, 상무자성을 관하는 활동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이런 올바른 관찰을 통해
집착을 버릴 수 있게 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런 올바른 관찰은
우선 무상한 현실 현상에 집착하여 고통을 받는 상황에서
그것들이 집착할 만한 실다운 것이 아님을 관하여
집착을 버리게 하고 고통을 제거하는 방안이 된다.
동시에 이런 올바른 관찰은
일체가 본래 생멸을 떠나고 고통이 있지 않아
현실 상태가 곧 니르바나의 상태에 있음을
관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물론 이렇게 관찰하거나, 관찰하지 않거나,
본래 니르바나인 상태가 니르바나인 것은
같으며 달라지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본래 니르바나의 상태에 있지만,
그것을 자신이 관찰할 수 없는 경우는
그 니르바나에 상응한 상태를 현상 안에서 얻을 수 없다.
마치 술에 취해 지갑이 옷 속에 있지만,
지갑이 옷 속에 있음을 알지 못하는 이는
지갑이 있어도 그 지갑의 돈을 꺼내 사용할 수 없는 것과 같다.
그러나 현상 속에서 이렇게 올바로 관할 수 있게 되면,
본래 니르바나의 상태에 상응한 지혜를 갖추고
현상 세계에서도 본래의 니르바나의 상태에 상응한 상태에
머무를 수 있게 된다고 할 수 있다.
그것이 곧 해탈지견의 내용에 해당한다고 본다.
즉 해탈을 이룬 이는 현실 상태에서 그 올바른 관찰을 통해
곧바로 본래의 상태가 생멸현상이 없고
니르바나의 상태임을 깨달아서
곧 다음과 같은 내용을 스스로 증득할 수 있으니,
이른바
'나의 생은 이미 다하고
범행은 이미 섰으며,
할 일은 이미 마쳐
후세의 몸을 받지 않는다'고
스스로 아는 상태가 되는 것이다.
그러나 그렇게 관할 수 없는 경우는,
본래의 상태는 니르바나임에도 불구하고
그가 현상 속에서 만들어 가진 망상 분별에 따라
자신과 세계가 자신이 잘못 생각한 내용처럼 그러하고
이들의 생멸현상도 그러하다고 집착을 하고
그 집착으로 인해 행위한 가운데
고통의 윤회를 겪는다는 차이가 있는 것이다.
이는 앞의 술취한 사람의 비유에 의하면
본래 자신의 옷 속에 지갑이 들어 있는데도
그것을 사용하지 못하고
반대로 그가 술에 취해 허공에서 헛것을 본다면,
그 헛것을 마치 진짜인 것처럼 착각하고 행동하게 만든다.
그래서 온갖 망상 속에서 고난을 겪으며
머나먼 길을 걸어 나아가는 것과 사정이 같다.
이 술취한 사람이 먼 훗날 술을 깨어서 생각한다면,
술에 취해 겪은 고난은 공연한 것이었고
옷에서 찾은 지갑은 원래 있었던 것임을
알게 되는 것과 사정이 같다.
한편 모든 생명이 감각현실과 관념의 세계에서
이리저리 고통을 받고 헤매는 상황에 있기 때문에
이 생명들을 열반에 이르기 위해서는
이 감각현실과 관념의 세계를 부정하지 않고
이 안에서 니르바나에 상응한 상태를 만들어
나가는 적극적인 노력도 필요하다.
보살이 다른 생명들을 구제하기 위하여
생사를 싫어하지 않고 열반에 끝내 들지 않는 가운데,
다른 생명들을 구제하는 행을 해나가는 것도
바로 이런 연유라고 할 것이다.
현상의 무상함과 생멸현상 그리고 윤회가
모두 고통이더라도,
이 상황에서도 본래 니르바나의 상태인 것이며,
그것을 관하고
또한 현상 안에서 앞과 같이 올바로 관찰하고
집착을 버리고 선을 행하는 것은
비록, 감각현실과 관념이 청정한 진여 니르바나를
덮고 있는 것처럼 보여도
그것은 본래 니르바나의 상태에 머물러 있는 것과
하등 다르지 않은 것이다.
마치 술에 취하거나
눈병이 나서 허공에서 헛것이 보인다 하더라도,
스스로 자신이 술에 취하고 눈병에 걸린 것을 자각한 상태에 있어,
허공에 보이는 것들이 실재하는 것이 아님을
관할 수 있다면,
그런 분별은 실재에 상응한 분별이며,
또 그로 인해 그 헛것에 끌려 행하지 않고
본래 있는 니르바나도 그로 인해 덮어 가리지
않게 되는 것과 마찬가지다.
한편, 무상한 현상과 고통의 현상은
그것을 그대로 인식한다고 하여
무상과 고통이 달라지는 것은 아니다.
무상과 고통의 현실 안에서
그 고통을 벗어나는 방안은
무상한 현실에 대한 집착을 버리는 것이다.
그리고 현상안에서는 추구하는 올바른 수행목표도
역시 집착을 떠남으로써
그 집착으로 갖는 독을 제거한다는 점에서는
차이가 없다.
관념적 분별이 망상분별이라는 것을 깨닫는 것은
이런 보살의 수행에
무슨 효용이 있는가부터 살펴야 한다.
관념적 분별은 집착의 발생 원인이 되고
고통의 원인이 된다.
더 나아가 불교에서는
이 관념적 분별로 인한 행위(뜻, 말, 글, 행위,태도)가
감각현실을 변화시키고
다음 생의 고통의 현실도 만들어내게 됨을 제시한다.
그래서 관념적 분별이 망상 분별인 것을 깨닫고
집착을 버리고 임하는 것이 갖는 효용은
위와 같은 내용을 제거하는 효과를 갖는 것이다.
그래서 중요한 것이다.
보살이 수행을 하고 서원을 실천하는 과정에서
보살은 일반 생명과 같은 상황에 노출된다.
실재를 바탕으로 현상적 내용으로서
감각현실을 얻고 관념도 얻게 된다 .
일반 생명이 병에 들고 죽음을 맞이한다면
그와 같은 현상에 보살도 노출되는 것이다.
문제는 보살이 이와 같은 현상에 같이 노출되면서
일반 생명이 그로 인해 번뇌와 고통을 얻고
고통의 생사윤회를 받게 되는 것과 달리,
보살은 그로 인해 번뇌와 고통을 받지 않는다는 점에
차이가 있다.
무엇이 이런 차이를 발생시키는가.
앞과 같이 이런 내용들이 망상분별임을 깨닫고
집착을 갖지 않음으로써 여기에 물들지 않는 것이다.
또한 고통의 과보를 불러 일으키는 행위 반응방식을
따르지 않고 그것을 중지하고,
집착을 갖지 않고 그 반대의 수행방안을 행하기에,
일반 생명들이 자신은 원치않는데 불구하고
어쩔 수 없이 고통의 윤회를 하게 되는 것과는 달리,
보살은 비록 생사를 받더라도 일반 생명의 생사와는 달리
보살의 자비의 원에 의한 윤회,
즉, 변역생사(變易生死)를 행한다는 점이 차이가 된다.
이런 차이는 결국
현실에서 행하는 분별이 망상분별인가 아닌가를
깨닫는 데에서 출발한다고 본다.
현실이 실답지 않기에 꿈이나 환영과 같다고 말하게 된다.
그래서 보살이 생사를 받고 수행을 하는 상태를
영화에 비유할 수 있다.
어떤 영화를 예로 들어 본다면,
현실에서 영화처럼
어떤 범인이 보석을 훔치고 다른 이를 죽이고 했다면,
이들 모두가 그 분별과 집착으로 인해
크게 고통을 받고, 이후 이후의 내용들도 이에 바탕하여
그 당사자들이 원하던 원치 않던 그에 따른 과보의
현실 내용이 전개되어 나감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이 영화에서
반대로 현실을 영화와 같다고 보는 전제에서
영화 속에서 죽임을 당하고 재물을 뺏긴 것으로 보이는 배우들을
하나하나 찾아가 그 영화속 사건에 대해 물어보면
이들은 그로 인해 죽거나 다친 것도 아니고
재물도 뺏겨 손해를 입은 바도 없음을 말한다.
오히려 영화에 출연해서 수익을 거두고 보람이 있었다거나,
다음 영화에 어떤 조건에 어떤 배역으로 나올 것인가를
각자 계획 중일뿐 별 영향을 받지는 않는다고
보는 것이다.
현실이 꿈과 같고 환영과 같고 영화와 같다고 말할 때
이 내용에서
영화는 현실과 같음 -> 현실의 실다움 -> 집착을 취해 나아가면
앞의 내용이 되고
현실은 영화와 같음 -> 영화의 실답지 않음 -> 집착이 없음을 취해 나아가면
뒤의 내용에 가깝게 된다.
참고로 현실의 영화배우는
이 두 측면을 다 갖고 사는 것이라고 보기에
가깝다고 표현한 것이다.
그리고
색즉시공 공즉시색의 표현이 이와 관련이 되는 내용이라고 본다.
즉 이 내용에서 색의 현상적 차별과 집착을 취해 나가는 것과
공함의 무분별을 이와 관련시켜 망상 분별과 집착을 떠난
자세로 임하는 것의 차이인 것이다.
한편 이와 같이 집착을 버린 바탕에서는
현실은 본래 실재를 바탕으로
나타난 것임도 깨닫게 되고,
굳이 현실을 앞과 같은 방식으로 부정해 없애야 할
필요조차 느끼지 못하게 된다.
그보다는 집착을 떠난 상태에서
그동안 자신이 집착한 것들이 가치가 적은 것임을 깨닫고,
과거의 자신처럼 무상한 현실 속에서
집착을 일으켜 고통받는 다른 생명들을
구제하고 제도해나가야 할 필요성을 깨닫고
이를 위해 광대 무변한 서원을 일으키고
추구해 나갈 필요성을 깨닫게 된다.
그것은 현실에서 일반 생명이 행하는
망상분별과 집착에 바탕하여 고통을 발생시키고 증가시키는 방식의
분별과 행위를 중지하고
그와는 반대로 행해 나가며 수행해 나가는 것을 의미한다.
그것이 곧 망상분별과 집착을 버리고,
온생명을 제도하기 위하여
'얻을 것이 없음'을 방편으로
보시-정계-안인-정진-정려-반야-방편-원-력-지의
바라밀행을 실천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로 인해
수행자가 생사하는 현실에서 생사윤회하며
수행을 해나가더라도,
현실의 번뇌에 물들지 않고 살아가는
상태가 된다.
이는 마치 연꽃이
더러운 연못에서 더러움에 물들지 않고
아름다운 꽃을 피우는 상황에 비유된다.
그래서 그런 수행자의 노력은
온 생명을 제도하기 전까지는 성불하지 않겠다고 서원하여
끝없이 중생구제행을 실천해나가는 형태가 될 수도 있다.
그래서,
무한한 기간에 걸쳐
중셍들의 제도와 성불을 위해 서원을 일으켜
중생을 구제하는
문수보살이나 보현보살, 관세음보살, 지장보살처럼
수행해 나가고,
예를 들어 법장비구가 왕위를 버리고 48 대원을 일으켜
수행에 정진하여 끝내 극락정토를 만들고
무량한 중생을 깨달음과 니르바나의 상태에 이끌어
제도시키는 무량수불(아미타불)처럼 되거나,
또는 약사유리광여래나,
문수사리보살이 수행을 통하여 이루는 보견여래나,
보광상다공덕해왕((普光常多功德海王)여래처럼
질병의 고통은 없고, 그 수명은 무량하고
성취하는 불국토의 장엄은 한없이 뛰어나며
그 세계에 태어나는 중생은
보살이 성취할 수행결과를 기본적으로 성취한 상태에서
성불의 결과를 보다 쉽게 성취하게 할 수 있다.
그리고 이 모든 여래가 공통적으로 증득하는
법신의 상태를 증득하는 것도
수행의 목표로 생각할 수 있다.
이런 여러 수행목표를 생각하면
다음과 같이 그 관계를 이해할 수 있다.
고통의 문제를 해결함에 있어서는
가장 기본적으로
고통을 없애기 위해
망상 분별과 집착을 버리면,
생사현실에서 번뇌로 인한 고통을 벗어나게 되며,
그런 가운데,
이후 다음 생의 윤회 생사를 멸해
나타나지 않게 하고,
공한 실재, 진여와 근본정신만 남겨
회신멸지의 상태로 니르바나를 얻거나,
또는 굳이 생멸하는 현상을 없애지 않더라도,
이 현상이 본래 생멸이 없고 니르바나임을 관하여
분별과 집착을 버린 상태에서
생사에 그대로 머물러서도 번뇌와 고통에 물들지 않고
중생제도와 성불을 목표로 수행을 계속 행할 수 있다.
이런 내용이 석가모니 부처님이
사바세계의 중생들에게
가장 기본적으로 가르치는 내용이기도 하다.
한편, 보살이 수행을 통하여 법신을 증득하고자 할 때
그가 세우는 서원의 내용에 따라,
중생들이 고통을 겪게 되는 원인을 근본적으로 제거하여
중생의 고통을 해결해주고 중생을 깨달음과 성불의
상태로 이끄는 다양한 방안을 생각할 수 있다.
이는 각 부처님의 서원에 따라 다 내용이 다르지만,
예를 들어 아미타불이나 약사유리광여래,
보견여래, 보광상다공덕해왕여래.... 등
무수한 여래의 상태와 같은 것이다.
그래서 이런 방안이 다 좋고
종국적으로 고통을 제거하는 효과가 같은데
뒤의 방안은
수행을 통하여 성취하는 데 시간이 많이 걸리니
일단 기본적으로
어느 상황에서나 가장 먼저 적용하여 실천하면
효과를 얻는 방안으로서
석가모니 부처님이 가르친 가장 기본적인 방안을
실천하는 것이 필요하며
그런 가운데,
예를 들어 중생제도와 깨달음을 구하는 마음을 일으키는 가운데
자신이 성취할 서원을 세워
예를 들어 아미타불과 같은 여래의 상태를 이루는 것을
목표로 수행 정진해 나가고,
그 중간에 아직 그와 같은 여래가
직접 되지 못한 상태에서는
아미타부처님 등과 같이 중생의 수행을 도와주는
많은 부처님에게 도움을 요청하는 것이
좋다고 볼 수 있는 것이다.
물론 이런 행위도 어떻게 보면
과거의 좋음과 나쁨이 뒤섞인 무상한 현실 가운데
어떤 좋음을 추구해 나가는 행위와
결국 같은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할 수 있다.
그러나 이는 그 가치가 훨씬 큰 동시에
이 역시 집착을 벗어나서
행해 나가게 된다는 점에서 차이가 있다.
즉 집착을 갖고 무언가 좋음을 추구할 때는
그것이 삶의 고통과 윤회의 고통과 관련되지만,
망상분별과 집착을 버리고
모든 생명의 최상의 상태의 실현을 위해서
'얻을 것이 없음'을 방편으로
추구하는 자세는 앞에서 본
망상분별과 집착이 일으키는 문제와는
기본적으로 관련되지 않는 상태가 되는 것이다.
보살이 중생을 제도하기 위해서
생사를 피하지 않는다는 것은 바로 이와
관련되는 내용이라고 본다.
이상 수행의 목표와 무상, 고의 관계를 먼저 살폈다.
다시 이를 정리하면
일체 현상은 무상하고 고이며
일체의 생멸현상이 모두 문제상황임을 기본적으로 살피고
이에 반해
수행 목표 상태인 해탈과 니르바나의 상태는
이런 생멸 현상과 고통을 떠난 것임을 보았다.
그런데 한편
생멸하는 현상은 본래 생멸과 고통을 떠난 것이며
따라서 본래 니르바나(열반)의 상태임을
함께 살폈다.
이는 일체 현상을 놓고
서로 모순된 내용을 제시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이는 하나의 현상을 놓고
세속의 분별을 바탕으로 이를 고통으로 대할 때의 문제의 내용과
이런 망상분별을 떠나 깨달음으로 대할 때의 내용을
이처럼 각기 다른 측면에서 제시한 것이다.
그리고 현실의 일체가 무상하며
괴로움이라는 독의 측면은
탐욕과 집착을 버리는 수행이
제거하여 주는 것이다.
즉, 무상하고 괴로운 현실의 독을 제거해주는 약은
무상하여 괴로운 현실을
무상하여 괴롭다고 올바로 관하고,
이런 올바른 관찰을 통해
그 무상한 현실에 대하여 집착을 제거하고
해탈을 얻는 것이
그 집착의 독을 해독해주는 약이 된다는 의미다.
따라서, 역설적으로
올바른 관찰과 깨달음을 통해
망상분별과 집착을 버림으로써,
망상분별과 집착을 바탕으로 얻게 되는
생사 고통을 멸해 없애는 것이 중요한 의미를
갖는 것이다.
그리고 불교의 수행이 현실과의 관계에서 갖는 성격으로
현실부정적 측면
그리고 현실긍정적 측면
그리고 이상추구실현적 측면 등으로 나누어 살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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