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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진리와실천
불기2561-09-28-별역잡아함경 본문
『별역잡아함경』
K0651
T0100
별역잡아함
● 한글대장경 해당부분 열람I
● 한글대장경 해당부분 열람II
○ 통합대장경 사이트
※ 이하 부분은 위 대장경 부분에 대해
참조자료를 붙여 자유롭게 연구하는 내용을 적는 공간입니다.
대장경 열람은 위 부분을 참조해주십시오.
○ [pt op tr] 별역잡아함경_K0651_T0100 핵심요약
♣0651-001♧
『별역잡아함경』
별역잡아함
○ [pt op tr] ▼mus0fl--Jali - Des Ailes.lrc
오늘 『별역잡아함경』이 뽑혀 나와서 살펴 보는데
잡아함경이 따로 있는데
『별역잡아함경』은 무엇인가.
이런 경우에도 기존 『잡아함경』과의 관계도 살피고
또 다른 아함경이나 다른 경전들과의 관계도 살펴야 하는
문제가 생기는데
사진을 추가해야 할 때와 성격이 비슷해 보인다.
그런데 이 근본 경전을 보면
개인적으로 부처님이
대승 경전의 각 내용과 모두 수미일관하게
기본 구도가 바탕이 되어서
각 경전이 시설되고 제시되었다는 생각을 하면서
대하게 된다.
물론 보는 입장따라서
근본 경전과 대승 경전은 너무 입장 차이가 많아서
도저히 한 부처님이 설했다고 보기 힘들다고
여기는 입장도 있다.
그러나 본인은 그와는 반대로 본다.
그리고 그런 부분이 일부 발견되어도
또 계속 읽다 보면 그에 대한 해명이
그 경전 자체에 제시되고 있는 것을 보게 된다.
그래서 어느 경우나
수업이 진행되는 중간에 조퇴하고 나가면 곤란하다.
시험에 출제될 중요한 문제는
보통 그런 학생이 조퇴하고 나간 상황에서
공개되기도 한다.
서로 조금씩 내용이 다른 각 경전의 내용을 이해하는데 있어서
공통적으로 이해가 필요하다고 보는 내용을
그림으로 그려서 반복해 제시하게 된다.
현재 그 내용에 대해서 체계적으로 처음부터 끝까지
설명을 붙이지 못하고
매번 조금씩 관련된 내용만 뽑아서
설명을 이어나가고 있다.
생각해보면 이것도 졸속 연속 처리 방식이다.
이 내용을 잘 이해하면
각 경전에서 제시하는 내용을 이해하기 쉽다고 보는데
그러나 막상 설명하려면
이 내용이 현실에서 이해하기가 쉽지 않다.
그 가운데
자주 올리는 그림 설명이 다음 그림들이다.
[img2]
[그림] 08pfl--image/진리의오류55.jpg
http://buddhism007.tistory.com/228 ☞○ 마음과 색의 의미에 관한 논의
http://thegood007.tistory.com/1172 ☞○ 진리에 관한 수많은 오류와 착각의 문제
03fl--ghpt/r1030.htm ☞○ 진리에 관한 수많은 오류와 착각의 문제
[img2-8] 8pfl--image/8식-8.jpg
이는 현실에서 자신이 대하는 것들의 본 정체에 대해서
왜 각 경전마다 매번 조금씩 달리 설명하고
또 그것들은 하나같이
일반인이 생각하는 내용과는 전혀 다른
엉뚱한 내용들을 매번 제시하는가에 대한 사정을 이해하는데 공통된 내용이라고 본다.
어제 살핀 『약사유리광여래본원공덕경』에서도
이 내용을 조금 살피다가 마쳤는데
핵심만 뽑아 제시하고 자세한 내용은 붙이지 않았다.
그런데 거기에는 그 나름대로 사정이 있다.
마음 같아서는 날을 잡아서 처음부터
다시 자세하게 설명을 붙이고 싶지만,
경전도 매번 정리하면서 살펴야 하고
사정이 복잡하다.
오늘 경전에서는 6 이란 숫자가 붙여진 부분에
다음과 같은 내용이 나온다.
...
치성한 욕망을 능히 버리는 일도
난타 비구가 가장 제일이며,
...
이런 부분이다.
이는 일반적으로 현실에서 대부분 갖고 임하는
그런 수많은 희망을 모두 제거하는 것이
수행의 기본이라고 제시하는 내용이다.
원래 현실에서 어떤 희망을 가질 때
그것이 성취되면 좋다고 보는데
그것은 사실 절도범이나 강간강도범도
자신이 갖는 희망을 놓고는 그렇게 여긴다.
여하튼 대부분 자신이 어떤 희망을 가질 때
그것이 뜻대로 성취되면
그것이 자신에게 가장 좋은 것이라고 여기며 집착하고 대하는데
왜 수행자는 이것을 모두 제거하라고 요구받는가.
또 그렇다면 그런 상태에서 무엇을 하는가.
죽을 때까지 아무 것도 하지 않고
그대로 있는가.
이렇게 처음에 생각하기 쉽다.
그런데 그렇게 해야 하는 이유가 무언가라고 묻는다면
사실 그 대답은 간단하.
그런 희망이 성취되면
그것은 그 자신에게 그 순간에 그 측면에서 좋음을 주는 것이지만,
바로 그로 인해 나머지 좋음과 좋고 좋은 상태를 모두 잃어버리게 되고
반대로 극심한 생사고통을 겪게 되기에 그런 것이다.
반대로 말하면
사정이 그렇지 않은 경우는
위와 같은 요구를 하지 않음을 의미한다.
그래서 현실의 전도몽상 상태에서 일으킨 희망들은
비록 그 당사자는 그것을 좋다고 여기고
그것에 집착을 갖고 추구하는 것이지만,
사정이 그렇지 않음을 이해해야 한다.
그러나 그 사정이 그렇지 않음을 이해하는 것이 사실은 어렵고
그 사정을 그렇게 이해할 때
비로소 4 성제 가운데 고성제 하나를
그렇게 이해한 상태가 된다.
그러나 또 그렇게 해서 수행을 시작하게 되면
이제는 다른 입장에서 무량한 기간
무량한 서원을 일으켜서 추구해야 할 내용도 제시된다.
쉽게 말하면 현실에서 어떤 쓸데없고
생사고통을 계속 이어받게 하는 희망을 갖고 추구할 때
이것을 제거하라고 요구하는 것은
사실은 수행과정에서 그런 것을 제거하는 '희망'을 다시 갖고
추구함을 의미한다.
그래서 모든 희망을 다 제거하라고 하면서
왜 또 그런 희망을 '제거하려는 희망'은 갖고 노력해야 한다고 하는가라고
이해하면 곤란하다.
앞의 그림으로 현실에서 각 주체가 대하는
내용의 본 정체나 성격이 무언가를 살펴서
현실에 임하는 이들이 일으키는 전도몽상의 상태와 그 사정을
이해하는 것도 사정이 같다.
사실 현실에서 각 주체가 대하는 내용을 놓고
그런 엉뚱한 전도몽상을 갖고 임한다고 해도
그것이 그로 인해서 어떤 생사고통을 겪는 일이 없고
그저 좋음만 주는 것이라면
사실 위와 같은 내용을 살펴야 할 이유도 없다.
그런데 현실에서는
본래 청정한 니르바나의 상태에 있어서
그 상태는 어떤 노력을 하지 않아도 본래 그런 상태에 있는 것이어서
본 사정이 그렇지 않은데도
그러나 각 주체가 근본 무명 어리석음을 바탕으로 전도몽상을 일으켜서
심하게 고통을 겪는 상황에 있고
그것은 굳이 응급실이나 전쟁이나 재난을 겪는 상황만 그렇지 않고
일상적인 삶 자체
심지어 어떤 주체가 자신의 희망이 성취되어서
좋다고 여기는 그런 상태까지 포함에서 모두 그런 상태다.
이것이 사실은 4 성제에서
처음 제시하는 명제
즉, 일체가 고통이라는 명제가 갖는 의미다.
그러나 대부분 이것을 쉽게 이해하지 못한다.
지금 날씨가 더워서 아이스크림을 먹고 싶어서
그것을 사서 열심히 먹고 있어서 기분이 좋은데
왜 이것이 고통이라고 하는가.
이런 식으로
자신이 매순간 좋다고 보고 추구해서 그것을 성취하고 누리고 있는 경우
매 경우 왜 이것을 놓고 고통이라고 제시한 것인가하고 의문을 제기한다.
그래서 4 성제 가운데 가장 처음 명제 하나를
이해하기가 쉽지 않다.
그러면 그냥 부처님이 그렇다고 하니까 그런 것인가.
그것도 아니라면 왜 지금 이렇게 좋고 편한데 이것이 문제라고 하고
이것이 생사고통을 무량하게 받아나가는 원인이라고 한 것인가부터
잘 이해할 필요가 있다.
가정해서 사정이 그렇지 않아서
생사현실이 비록 실답지 않다고 해도
그런 생사고통을 전혀 겪지 않는다거나,
또는 그런 사정을 전혀 이해하지 못하고
전도몽상에 바탕해서 계속 살아간다해도
그런 생사고통을 전혀 겪지 않게 된다면
그런 내용을 굳이 이해하고 관하고 어렵게 수행을 해나갈 필요는 없다.
그런데 사정이 그렇지 않기에
이런 사정을 먼저 자세히 관하고
그 바탕에서 수행의 방향으로 자세를 변화시켜야 할 필요가 있다.
그러나 일반인이 놓인 상태가 너무 전도몽상 증상이 심각한 상태이기에
일단 그 상태에서 이해가 되는 내용부터 하나하나 상황에 맞게
그 내용을 풀어서 제시하는 사정이 있다.
비유하면 어떤 대학교수가
산골이나 어떤 외딴 섬에 들어갔는데
그 곳에 있는 이들이
글자도 모르고
숫자도 모르고 그런 상황이어서
처음부터 그 내용을 제시할 도리가 없어서
일단 기초 내용부터 상대에 맞추어서
하나하나 천천히 제시해나가서
나중에 대학원 강의에서 그 교수가 진행할
강의 내용까지 이해할 수 있도록 이끌어 나가게 된다고 보게 된다.
그런 과정에서 각 경우마다 제시된 내용이
조금씩 차이가 있음을
나중에 이해하게 되는 것과 같다.
그런데 그것은 대학교수 입장에서는
본래부터 이런 취지를 가지고
처음부터 수미일관하게 그렇게
각 내용을 제시하게 된 것이다.
현실에서 생사고통에 묶이는 것은
일반 생명이 활동하는 모습처럼
대부분 그 상황에서 그렇게 된다고 보는데
정작 거기에서 벗어나오기는 쉽지 않다.
그러나 사실 이 과정이 하나같이 모두 단순한 것은 아니다.
자신은 그저 세상에 태어나서 세상을 대하고 나서 생각하기에
이것이 거저 그렇게 된 것처럼 무식하게 생각하고 임하는 것이지만,
그러나 자신이 현재처럼 임하게 된 것 자체도
사실 대단히 복잡한 사정이 있다.
다만 자신이 이것을 이해하지 못하고
외면하고 무시하기에 그렇게 이해하는 것 뿐이다.
Elephant Saved from Marsh after Four Hour Rescue Mission
일반적으로 코끼리를 냉장고에 넣기는 쉽다고 말하고
빼기는 어렵다고 말한다.
코끼리를 냉장고에 넣는 기본 방식은
보통 다음이라고 제시한다.
냉장고 문을 연다.
코끼리를 넣는다.
냉장고 문을 닫는다.
이처럼 간단하다고 한다.
그런데 빼기가 어려운 것은 왜일까.
빼는 것도 같은 방식을 사용하면 안 될까.
냉장고 문을 연다.
코끼리를 빼낸다.
냉장고 문을 닫는다.
똑같이 간단해 보인다.
그런데 누가 코끼리를 냉장고에 넣기는 쉽고
빼기가 어렵다고 말했는가.
생활의 달인 편을 보다 보면
대단히 쉽게 무언가를 행하는 이들을 수없이 보는데
현실의 문제는 이렇게 쉬운 방안을
그 각 주체는 그렇게 하지 못하는 상황에 있다.
이것이 문제다.
나중에 망상에 사로 잡힌 상태에서 풀려나서
그 상황을 다시 음미해보면
스스로도 어처구니 없다고 여기게 되지만,
문제는 그 상황에서는 그것이 하나하나
다 힘들다.
동영상을 보다 보니 비교적 짧게 4 시간의 노력끝에
수렁에서 벗어나오는 코끼리의 모습을 올렸는데
찾아보면 10 시간 걸리는 경우도 있고
그 가운데는 실패하는 경우도 있다.
코끼리가 코끼리를 끌어 당기니
그것이 그래도 가능하다고 보지만,
사람이 밑에 들어가서 엉덩이를 송곳으로 찌른다고 해서
코끼리가 저 수렁을 뛰어 올라가겠는가.
그런데 여기에서 문제는
왜 처음에 저 코끼리가 저 곳에 들어갔는가.
그것부터 잘 확인해야 한다.
그것이 징검다리 이론이다.
어떤 징검다리를 코끼리가 밟고
수렁으로 들어간 것은
사실은 그 당시 코끼리가 그런 사정을 미리 보지 못하고
그렇게 하면 좋은 줄 알고 그렇게 한 것이다.
현실에서 각 주체가
좋다고 보고 매 순간 그에 접착되어
집착을 갖고 임하는 내용도 사정이 그와 같다.
그런데 그 사정을 그렇게 종합적으로 보지 못하니까.
그것을 고통이라고 제시하는 내용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이다.
그래서 그것은 좋고
그로 인해 받는 고통은 그와 별개다.
따라서 이 일체를 모두 고통이라고 제시하면 곤란하다라고
의문을 제시하게 된다.
마치 농부가 봄에 씨를 뿌리면
씨는 씨고 가을에 열리는 열매는 열매다.
이렇게 주장하는 것과 마찬가지다.
그런데 부처님은
씨만 놓고 보면 그렇지 않다고 보게 되지만,
그러나 사정이 그렇지 않고
그 씨는 열매와 떼어서 볼 수 있는 것이 아니므로
고통을 문제삼을 때는
그것 일체를 모두 함께 고통이라고 제시하는 것이다.
그러나 저 상황에서 코끼리에게
그런 사정을 말하면 코끼리가 이해하겠는가.
그렇지도 않다.
동영상들을 보다가
생활의 달인편을 또 보게 되는데
이런 모습도 보게 된다.
https://youtu.be/XOo9VNNC6xg
현실에서 어떤 이가 굳이 저렇게 할 필요는 없지만,
삶에 여유가 있어서 취미삼아 삶을 즐기기 위해서
저런 활동을 하는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저런 빌딩을 짓고
외벽에 어떤 시설물을 붙이기 위해서
매일 저렇게 활동하는 경우도 현실에는 있다.
여하튼 보기에는 좋아 보이는데
막상 자신이 직접 해보려면
쉽게 되지 않는다.
코끼리가 수렁에서 잘 나오지 못한 것도
사정이 비슷하다.
왜 그 힘으로 못 나오는가 하는데
자신이 수렁으로 들어간 경우
자신의 발로 자신의 몸무게를 들어 올려서 나와야 하는데
그것이 쉽지 않기 때문이다.
현실도 마찬가지다.
평소 자신이 무언가에 집착해서
지혜를 발휘해서 그것을 성취할 방안을 찾고
열심히 노력하는데
이것이 수렁뻘에서 자신이 무언가 좋음을 얻고자 하면서
그 수렁을 더 깊게 파들어 가는 행위와 비슷하다.
그래서 나중에 자신이 파 들어간 구멍에서 다시 나오려면
그 노력을 기울인 만큼 반대로
그로부터 벗어 나오는 것이 더 힘들게 된다.
알고 보면
전도몽상 상태에서 지혜를 발휘한다고 하는 경우는
사실은 그 만큼 비례해서 어리석다고 평가된다.
손오공이 재주를 피우고
허공을 날아간 만큼
자신이 돌아오는데 더 힘만 들고
나중에 돌무덤에 갇혀 지내야 하는 기간만
그에 비레해서 늘어난다.
현실에서 이 상황에 예외가 되는 경우가 많으면 좋은데
수행뱡향으로 자신의 방향을 전환하여
현실에 매순간 임하는 경우는 이처럼 극히 드물다.
오늘 『별역잡아함경』 정리하며 읽는 가운데
내용상 그다지 이해하기 어려운 부분은
별로 없다고 보게 된다.
물론 어떤 수행자는 어떻게 잘못 수행해서
지옥에 들어갔다는 내용도 제시되는데
과연 고통을 극심히 받는 지옥에 대해 입증하거나
설명하기는 곤란할 것이다.
그런데 그것은 현실에서 자신의 귀로 듣는 소리를
눈으로 보는 색상으로 표현해보라고 하는 것처럼
처음부터 곤란하다.
그러나 그렇게 눈이 그런 소리를 보지 못한다고
그처럼 듣게 되는 소리를 전혀 없다고
하는 것도 역시 곤란하다.
그렇다고 앞에 제시한 동영상과 같은 상태에
하나하나 직접 들어가서 경험을 해보아야
그런 상황을 이해하겠다고 임하면
그것은 더더욱 곤란하다.
물론 그런 상황에서 직접 벗어나오는 방안도
경전에서 제시되는데
그것은 말 그대로 대단히 수행을 오래한 고급 수행자의 경우가 그렇다.
초보 수행자는 원칙적으로
아예 처음부터 그런 곳에 들어가지 않도록
조금 덜 힘든 수행 내용부터 하나하나 정진해야 한다.
그리고 수행상 필요하여
칠각지역에서 욕계 색계 무색계
세계 여행을 떠날 때에도
삼악도가 들어 있지 않고
오로지 하늘세계만 있는
색계 무색계 여행부터 떠날 것을 제시받는다.
영화구경을 할 때에도 정도에 맞지 않게
공포 영화나 잔혹한 폭력물을 먼저 대하면
상당히 심성이 거칠어지고 부작용이 심하게 되기 쉽다.
그런데 방송관련되는 이들은 어떤 생각을 하는지 모르는데
온갖 사고가 잔혹하게 일어나는 각종 폭력 장면은 그대로 두고
그 폭력이 일어나는 상황에서 그런 충동을 조금 완화시키고
그나마 줄어들게 하는 역할을 한다고 보는 흡연 장면만 뽑아서
모자이크처리를 일일히 정성들여 하는 우스꽝스런 면도 있다.
왜 그렇게 하겠는가.
그 의식이 그래서 그렇다.
흉기로 잔인하게 살해하는 행위는 무방하지만,
담배를 피우는 것은 해롭다고 생각해서일까.
그런데 그렇게 모자이크처리를 하면
사람들의 의식이 오히려 그 부분에 오히려 초점을 맞추게 되기 쉽다.
술을 마셔서 일으키는 사고는
하루에 수백건을 헤아리고 그래서 갑자기 장애자로서
남은 삶을 살아가야 하는 경우가 한 둘이 아닌데
왜 이는 모자이크 처리하지 않는가.
이렇게 시시비비를 임해서 나중에 보게 되면
온갖 영화는 모든 부분을 다 모자이크 처리해서
봐야 할지 모른다.
경전부분에서 15 란 숫자가 붙은
마지막 부분에 보면
타표라는 수행자가 화광삼매에 들어 열반에 드는 내용이 나온다.
여기에 이런 내용이 붙여져 있다.
...
바른 해탈을 얻음도
역시 그와 같아서
번뇌와 모든 애욕의 진흙에서
이미 벗어났기에
그가 어느 방향과 처소로 가는지를 알 수 없네.
...
이 부분을 놓고 아라한이 들게 되는 열반에 대해 설명하기를
그렇게 현실에서 아라한이 사라지면
그 이후로 아라한과 관련된 내용은 아무것도 없게 된다고
있고 없음의 문제를 따지는 이들이 아라한이 열반에 들면
그 이후로는 아무 것도 전혀 없다는 단멸관을 내세워 주장하기도 한다.
위 문장표현만 놓고 보면
마치 그런 상태를 제시하는 것으로
이해하기 쉽다.
그런데 나중에 보면 이 아함경 안에서
그런 이상한 오해를 일으키고 열반을 이해하는 이를 상대로
사정이 그렇지 않다고 제시한다.
그리고 그것은 처음부터 무아 무자성 공이라는 내용을
제시해서 그렇다고 한 것이지,
단멸관을 부처님이 제시한 것이 아님을
상수제자인 사리자나
부처님이 다시 설명을 덧붙인다.
그런데 있다 없다의 문제에 대해서
처음부터 전도몽상을 일으켜 대하고 있는 입장에서는
그 내용을 그렇게 이해하지 못하고
각 경전의 표현이나 현실 내용을
자신의 전도몽상에 바탕해서 자꾸 해석하고
대하는 현상이 나타난다.
그래서
다시 위에 붙인 그림을 또 붙여서 설명할 필요가 있다.
눈을 뜨고 자신이 보면
각 경우마다 생생하게 얻어지는 그런 내용이
들고 나고 하는 것을 놓고
그는 여기에 그런 무엇이 있고 없고
그런 것이 생겨나고 멸하는 내용이
그렇게 있다고 여기면서 대하는 상태다.
부처님이나 아라한도 그런 내용을 얻는 것 자체는
크게 다르지 않다.
그런데 다만 부처님은 이 상황을 놓고
그런 내용에 우선 전도몽상을 일으킨 이가
생각하는 그런 내용을 얻을 수 없다고 제시하는 것이고
그가 그런 생각으로 그런 내용이 거기에 있다고 대하는 그런 부분은
또한 실상도 아니고
그것은 그 일체가 그 주체의 마음에 얻어진
객진번뇌의 내용이라고 제시하는 것이다.
그것이 다 같이 그 마음에 들어와 머무는
객진번뇌로서 마음안의 티끌과 같은 내용이라는 점은
여기에서 서로 다르지 않다.
그러나 각 주체는 이 부분에서
어떤 부분은 자기 자신이고
다른 부분은 그와는 다른 외부 세계나 외부 대상이라고
또 다시 망상을 일으키는 것이다.
또 그런 내용이 나타나는 것은
이들이 관계하여
그것이 작용해서 그런 모습이 나타난다고 또 이해한다.
그리고 그에 바탕해서
자신과 자신의 것에 대한 집착을 갖고
그에 바탕해서 자신이 좋다고 보는 것에 대해 희망을 일으키고
그것을 성취하기 위해
그 바탕에서 몸부림을 한다.
그런데 처음 부분이 잘못되었으니
그 이후 부분은 더욱 문제다.
그런데 그렇게 현실에 임한 상태에서는
이 내용을 검토해볼 여유도 갖지 못하고
쉼없이 바삐 그런 번뇌에 묶여 스스로 사역을 당하고
또 다른 이도 사역을 시키면서
고통을 주고 받는 관계로 들어가 버린다.
심지어 잠깐 쉴 여유가 있어도
그 문제를 그렇게 놓고 집착하면서 대하게 되고,
결코 부처님이 제시하는 내용을 놓고
그 문제를 살펴서 생사고통을 벗어나오기 위해 문제를 생각해본다거나
그런 입장에서 어떻게 수행을 즐겁게 잘 할 수 있는가를 놓고
임하지 않는다.
쉴 여유가 있을 때는 그 때대로
그리고 나머지는 다시 자신이 망상을 일으켜
접착된 그 문제를 놓고
쉼없이 번뇌에 묶여 사역을 당하고
이 세계 저 세계 생사고통을 받는 현장으로 묶여
헤메 끌려 다닌다.
그리고 그 자신은
자신을 그렇게 묶어 이리저리 끌고 다니는
자신의 마음안의 객진 번뇌인
전도망상 분별과 그에 바탕한 탐욕 분노 어리석음이
자기 자신의 본질이라고 여기면서 임한다.
그래서 가끔 자신의 본 상태가
부처님과 차별이 없는 본각이라고 제시하거나
생사고통에서 벗어나려면
자신에게 이미 갖추어진 보리심을 일으켜서
서원을 장착하고 현실에 임하라고 제시하면
이를 엉뚱하게 여기게 된다.
즉, 자신의 문제 하나도
쉽지 않고 복잡해서
해결 방법도 잘 보이지 않은데
온 일체 중생을 다 차별없고 제한없이
좋고 좋게 만드는 희망을 일으키라고 하고 의문을 갖기도 한다.
그리고 있어도 보이지도 않고
설령 그렇게 있다고 해도
없는 것이나 차이가 없는
본각이나 보리심을 제시하는가 하고 의문을 갖는다.
그리고 현실이 이렇게 심각하고 끔직한데
왜 본 상태가 생사고통을 일체 얻을 수 없고
모두 청정한 니르바나라고 하는가라고 의문을 제시하게 된다.
그래서 사실은 그렇게 복잡하게 나가지 말고
자신이 현실에서 대하는
하나의 정지단면을 놓고
그 정체가 무엇인가부터 천천히 잘 이해하는 것이 필요하다.
그래서 위와 같은 그림을 그려 놓고 현실 단면의 정체를
잘 이해해야 한다.
일반인은 현실에서
무엇이 저기에 있다가 여기에 오고 가고
또 그런 것이 자신이 대하는 현실에 있다고 여기고
그런 가운데
이 부분은 자신이고 저 부분은 영희고
저것은 꽃이고 저것은 또 의자와 책상이고
심지어 그 가운데 어떤 이가 여기서 태어나 저기서 저렇게 죽어가고
그래서 생사고통도 생생하게 얻는다고 여긴다.
그런데 왜 여기에 그런 것을 일체 얻을 수 없다고 하는가.
여기에서 그렇게 생각하는 이나
그런 현실에 본래 그런 것을 얻을 수 없다고 제시하는 이나
눈을 뜨고 보면
무언가 생생하다고 할 내용을 얻는 점은 크게 다르지 않다.
그것이 다른 이가 얻는 내용과 같은가 다른가가 문제되면
물론 있다 없다의 문제를 살필 때와 똑같이
그런 것을 문제삼을 수 없다.
더 나아가 메뚜기가 대하는 현실 내용과
지렁이가 대하는 현실 내용과
인간이 대하는 현실 내용과
그 가운데에서도 또 영희가 대하는 내용과 자신이 대하는 내용이
서로 정말 같은가 다른가가 문제되면
또 그 역시 문제가 되지만,
일단 기본 사정은 그와 같다.
그런데 그런 상태에서
그렇게 각 주체가 얻는 생생한 내용의
본 정체가 무언가를 놓고
거꾸로 뒤집혀진 상태에서
자신과 자신의 것을 분별하면서
그런 분별로 자신이 대하는 현실 각 부분을 대하고
그에 접착되면서
업을 행하고
그로 인해 생사고통을 받는 세계에 묶여
끌려다니게 된다.
그리고 이것이 문제다.
[img2-8] 8pfl--image/8식-8.jpg
위 그림을 놓고 보면
8 이라고 표시한 부분은 본래
1과 같은 감각현실을 얻는 부분에서
자신이 제 6 식의 분별과정을 통해
자신이라고 보고 대하는 그런 내용과
아무 관련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본질적인 관련이 없다.
이것을 비유해서 어떤 이가
오늘 옷을 하나 입고 밖에 나간다면
자신과 그렇게 입은 옷과의 관련성 정도만 갖는다.
그런데 이 사람이 시장에 나가서 망상을 일으켜서
그 옷 자체가 자신이라고 여기면서 현실을 계속 대하는 가운데
누군가 그 옷을 수렁으로 끌고 가 처박으면
그대로 그 몸까지 다 그 수렁에 박혀서
허우적 거리게 된다.
그래서 한 단면의 사정을 올바로 관해서
그렇게 임하지 말고
그처럼 전도망상이 일반적이고 그것이
오히려 표준이라고 보고 다들 임하는 그 시장에서도
각 경우마다 오히려 복덕과 지혜자량을 얻는 상태가 되려면
그렇게 임하지 말고
그런 반응을 중지하고
그와 반대되는 수행방안을 집착없이 행하는 것이 필요하다.
앞에서 수렁에 박혀 고통을 받는 상태에서도
이 원칙은 통용이 되지만,
그보다 그런 상태로 들어가지 않도록
미리 예방을 하는 노력도 중요하다.
이치상은 다 같지만,
현실적으로는 앞의 경우가 훨씬 더 힘들다.
그런데 왜 이 사정을 잘 이해하지 못하게 되는가하면
이미 제시한 것처럼
각 주체가 이미 자신이 일으킨 전도몽상 상태가 심화된 상태에서
좀처럼 여유를 갖지 못하고
접착된 내용을 접착된 상태로 쉼없이
추구해가는 상태에 놓여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본래 그렇게 심하게 고통을 받는
축생 이하의 아귀 지옥의 상황에서는
좀처럼 그 상태에서 벗어나오게 하기가 힘들다.
그나마 가능성이 높은 것은
인간 이상 그리고 하늘과 같은 상태에서
그 내용을 살펴도 살필 가능성이 높다.
하늘이라고 해도 너무 상태가 좋다고 보는 경우는
또 사정이 그렇기에 그런 수행이 쉽지 않다.
현실도 이와 비슷하다.
앞의 동영상 내용처럼
쉼없이 이리 구르고 저리 구르는 상황에서는
어떤 정려수행 자체를 행한다는 것이
이론상으로만 가능하고
현실적으로 곤란하다.
또 현실에서 어떤 이가 놓인 상태가
너무 좋아서 재벌 3 세 정도가 되어서
흥청망청 노는데 정신이 없고
그렇게 놀아도 별 탈이 없다고 보게 되는 상황에서는
어떤 사찰을 찾아가
정려 수행을 해보겠다고 나서는 경우도 드물다.
그러니 그 경우는 그 경우대로
그것을 징검다리 삼아서
어떤 깊은 수렁에 직접 빠지기 전에는
그런 문제 자체를 고려하지 않고 현실에 임하게 된다.
그런데 현실에서 그렇게 해서
생사 병목현장에서 벗어나 임하는 사례가 있는가.
경전에서
생사나 생멸현상을 얻을 수 없고
있고 없음을 문제삼을 수 없다고 하는데
일반인은 그 각 경우마다
그런 A 가 거기에 있고
그런 것이 오고가고 생멸하는 현상이 있다고 여긴다.
그런데 위 그림에서 그 사정을 제시하고 있다.
조금 쉽게 비유를 들어 설명하면
두 비닐판을 놓고
하나의 비닐에는 작은 세모를 그려 놓고
다른 비닐에는 큰 동그라미를 그려 놓고
이것을 겹쳐 놓고 대하면
각 비닐에는 얻을 수 없는
안이 세모인 도너츠 모양이 나타나는 것과 사정이 같다.
여기서 이 도너츠는 어디에도 없다고 파악하는 것이
경전에서 제시하는 내용과 같다.
그런데 망상을 일으킨 상태에서는
그런 도너츠가 그 각 비닐에 그렇게 있다고 여기면서
그 도너츠를 쫒아서 계속 무언가를 생각하고 말하고 행해 나가고
그런 바탕에서 그 도너츠 때문에
고통을 겪는 상태에 들어가게 된다.
어떻게 보면 간단하게 나올 수도 있는데
문제는 그 상태에서는 도무지 나올 방안을
찾아내지 못하게 묶이고
아예 그런 내용을 살필 여유자체가
그의 마음에서 주어지지 않게 되는 상태가 된다.
여기서 도너츠를 얻을 수 없다는 비유는
그런 도너츠가 그렇다는 것이고
각 비닐에는 역시 실답지는 않지만,
일정한 내용이 전혀 없다고 제시한 것이 아니다.
그러나 현실에서 문제삼는 것은 바로 그 도너츠다.
이 관계는
관념분별과 감각현실 사이에서도 그렇고
또 마찬가지로
실재와의 관계에서도 그와 같다.
실재가 공하다는 것은
진짜라고 할 내용이 없는 무아 무자성의 상태이고
그런 가운데 그 내용을 얻을 수 없기에 그렇게 표현하는 것이지
그 실재가 전혀 아무것도 없는 상태라고 제시하는 것은 아니다.
현실에 어떤 이가 생각하는 그런 내용을 얻을 수 없다고 하는 것도
마찬가지다.
그런 것을 얻을 수 없기에 그렇다고 하는 것이지
그렇다고 자신이 매 순간 생생하게 얻는 그런 내용을
전혀 얻지 못한다고 제시하는 것이 아니다.
그런데 어느 경우나 무엇이 문제인가.
자신이 생각하는 그런 내용이
그와 같이 거기에 실답게 있다고 집착을 갖고 임하는 것이
바로 문제다.
그런 실재와 그런 현실은
사실은 실답지는 않지만,
전혀 없는 것은 아닌데
다만 현실에서 문제삼는 그런 것이 아닌 그런 것이어서
그것이 본래 그런 측면에서 청정하다고 표현하고
니르바나라고 표현해 제시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현실에서 문제삼는 그런 생사고통을
얻을 수 없고
그것이 아닌 그런 생생한 그런 것이고
그런 실답지 않은 그 무엇이기 때문이다.
꿈의 비유를 통해서도 이 내용을
쉽게 이해할 수 있다.
꿈을 어디에서 꾸는가.
현실에서 잘 때 꾸는 것이다.
그래서 현실을 대하면서 그런 꿈을 꾸는 것인데
이 관계가 감각현실과 관념분별의 관계와 사정이 같다.
자신이 꿈을 꾸면 그 내용이 그처럼 전혀 없는 것이 아니고 생생한데
그러나 그런 내용이 실답지 않다고 제시하는 것은 그런 사정때문이다.
그런 내용은 감각현실에서 얻지 못함을 제시하는 것이고
그렇다고 감각현실이 전혀 없다고 하는 것이 아니다.
실재도 마찬가지고
자신의 근본정신도 사정이 마찬가지다.
그런 영역에서 자신이 문제삼는 그런 내용을 얻지 못한다고 하는 것이지
아예 아무 것도 거기에는 없다고 제시하는 것이 아니다.
그 역시 무아 무자성으로 실답지는 않지만,
그런 내용을 그렇게 얻는 것인데
다만 자신이 문제삼는 그런 생사고통을 거기에서 얻을 수 없다고
제시한 것이다.
그렇게 보던 보지 않던
그 영역에서는 사정이 그런데
그러나 위와 같이 비닐을 두개 접착시켜 놓고 대하는 상황에서는
또 다른 실답지 않은 내용을 전도몽상을 바탕으로 일으킨 다음에
거꾸로 그것이 세상의 표준이고
그런 내용이 오히려 그렇기에 각 영역에 그렇게 있다고 집착을 갖는 가운데
그에 바탕해서 각 영역에 임하게 된다.
그리고 그런 전제에서는
그가 고통으로 생생하게 받아들일 수 없는 수렁으로
그를 묶어 끌고 가게 된다.
그런데 설령 그렇다하더라도
처음부터 그 사정을 잘 관하고 이해한다면
지옥도 극락과 다르지 않다고 하고
생사 현실이 곧 청정한 니르바나라고 제시하게 된다.
그래서 사정은 본래 그렇지만,
이것을 뒤집허서 전도몽상으로 대하는 입장에서는
이를 거꾸로 극락도 지옥과 같다고 대하고
또 청정한 니르바나가 곧 생사고통을 받는 현실이라고
뒤집혀 대하게 된다.
그래서 본 바탕이나 본래의 상태에서는
그런 생사고통을 얻을 수 없는데도
스스로 엉뚱한 부분을 자신이나 자신의것이라고 여기는 가운데
그것을 붙잡고 무량하게 생사고통의 현장에서
각종 생사고통을 체험하는 상태에 놓이게 된다.
그리고 그런 상태에서
스스로 좀처럼 벗어나오지 못한다.
여하튼 사정이 그래서 어렵다.
◈Lab value 불기2561/09/28/목/14:41 |
또 다른 곳에 옮겨 붙이고는 하는데 생활의 교훈 => 놀이 기구 시설이 재미있어 보이지만,
♥ 잡담 ♥졸속처리의 장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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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서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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