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그림은 1이라는 이가 4 라는 꽃을 보는 상태를 나타낸다. 그리고 그 상황에서 다른 이 2 가 4^와 같은 꽃모습을 보는 상태를 나타낸다.
이 상황에서 꽃의 정체는 과연 무엇인가. 그리고 그런 모습을 얻는 본 바탕이 되는 실재는 무엇인가를 살핀다.
여기에 대해서는 이론상 다음 여러 입장을 생각할 수 있다.
일반적이고 상식적인 입장은 다음처럼 생각하게 된다.
○ [1] 1 이 보는 그런 모습은 그 자체가 외부 실재라고 잘못 여긴다. 그리고 그 모습은 영희나 철수나 모두 같이 대하는 객관적 실재라고 잘못 여긴다. 그리고 이들은 외부 세계 내용이라고 잘못 여긴다. 그리고 4와 같은 꽃모습은 감관이 대하는 외부대상이라고 잘못 여긴다. 그것은 정신과 구분되는 외부 물질이라고 잘못 여긴다. 이렇게 생각하는 입장이다.
=> 이는 엉터리 전도몽상분별임을 처음에 제시했다. 그리고 이런 입장이 잘못임은 이미 살폈다.
1이나 2가 눈을 떠서 얻는 그 모습은 일단 외부 실재 자체는 아니다. 그런데 어떤 한 주체의 정신은 외부 실재를 거울처럼 그대로 그 안에 투영시켜 내용을 얻는다. 그래서 어떤 주체가 얻는 내용은 곧 실재와 완전히 일치한다.
=> 이 경우, 현실에서 얻는 내용에 그런 실재가 겹쳐 있다고 할 것인가가 문제된다. 겹쳐 있다면 자신이 눈을 뜨고 감을 때 외부 실재가 왜 같이 나타나고 사라지는가 문제된다. 그리고 자신이 얻는 내용 가운데 어떤 부분이 자신의 정신에 맺힌 부분이고 어떤 부분이 외부실재인가에 대해 구분할 수 없는 문제점이 있다.
○ [3] 다시 다음처럼 주장하는 입장이 있을 수 있다.
현실에서 한 주체가 얻는 내용은 실재 지위에 있는 것은 아니다. 다만 주체가 얻는 내용은 실재의 내용을 그대로 비추이는 것이어서 그 주체가 얻는 내용은 외부실재와 그대로 일치한다.
이런 입장을 생각할 수 있다.
=> 이는 현실에서 한 주체가 보게 되는 내용은 실재와 내용이 같다고 여긴다. 그러나 단지 눈을 뜨고 감음에 따라서 그 실재의 모습이 거울처럼 그대로 투영하는 상태가 되는가 아닌가에 따라 모습이 보이고 보이지 않는 차이가 있다는 입장이다. 그래서 처음 입장과는 다르다.
그런데 2 라는 주체가 어떤 모습을 볼 때 큰 산을 본다고 하자. 이 때 그가 보는 산의 모습이 과연 그의 마음 밖에 있는 산과 그 크기가 일치할 것인가가 문제된다. 그런 모습이 외부실재와 일치한다고 하자. 그러면, 왜 볼 때마다 다른 것과 상대적으로 그 크기가 달라지는가가 다시 문제된다.
○ [4] 다시 다음처럼 주장하는 입장이 있을 수 있다.
현실에서 한 주체가 얻는 내용은 외부실재와 그대로 일치한다고 할 수는 없다. 그러나 어느 정도 실재와 유사하거나 비례한다고 주장할 수 있다.
=> 그러나 비례나 유사성 또는 차이를 판단하려 한다고 하자. 그렇다면 최소한 그런 판단을 할 자료로서 문제되는 실재내용을 단 하나라도 얻어야 한다. 그래야 그런 주장을 세울 수 있다. 그런데 어떤 주체도 그런 내용을 얻을 수 없다. 따라서 어느 주장도 근거가 확실하지 않은 문제점이 있다.
또 하나의 대상을 여러 생명의 각 감관이 대할 때마다 각기 달리 내용을 얻는다. 그런데 이들 내용에서부터 그런 유사성이나 공통성 비례관계를 찾을 수 없다. 이들 내용을 모두 합쳐 놓아도 사정이 마찬가지다. 하나씩 살핀다고 해도 각각의 관계는 그 사정이 같다.
○ [5] 다시 다음 입장을 생각할 수 있다.
현실에서 한 주체가 얻는 내용은 실재의 지위에 있는 내용이 아니다. 어떤 주체가 얻는 일체의 내용은 마음안 내용이다. 그것은 외부세계가 아니다. 또한 외부대상도 아니다. 또한 정신 밖에 있는 외부물질도 아니다. 또한 한 주체가 얻는 내용 안에는 그런 내용을 얻게 한 외부대상은 없다. 다만 이들 내용은 분별판단을 행하는 대상은 된다.
=> 한편 이와 비슷하지만, 여기서 조금 더 극단적으로 나아가면 다음 입장도 생각할 수 있다.
○ [6]
[5]의 입장처럼 한 주체가 얻는 내용은 그 일체가 마음안 내용이다. 그리고 이 안에 이를 얻게 한 외부 실재나 외부 대상은 전혀 없다. 한편 그 마음 밖 실재에는 아무것도 전혀 없다. 따라서 현실에서 한 주체가 얻는 내용은 그 마음이 자체적으로 분열을 일으켜서 그런 내용을 얻게 된다. 이렇게 주장하는 입장을 생각할 수 있다.
=> 이는 한 주체의 마음 밖에 일체가 전혀 아무 것도 없다고 주장하는 것이 된다. 그래서 다음 문제가 제기된다. 현실에서 어떤 이는
영희나 철수와 같은 여러 생명을 본다. 그리고 산이나 강 등 여러 물체를 본다. 그런데 앞 주장을 받아들인다고 하자. 그렇다면 우선 영희나 철수 부처님같은 생명도 다 모두 자신의 마음에 머무는 존재다. 그리고 외부에는 아무런 존재가 없다고 해야 한다. 그래서 이들 모든 생명은 모두 단 하나의 정신안에 함께 머문다고 해야 한다. 이 경우 그 가운데 부처님은 성불하셨다. 그런데 왜 영희는 영희이고 자신은 자신이고 돼지는 돼지인가라는 문제가 제기된다.
한편 한 주체는 주관이 관계하여 화합관계를 통한 내용만 얻을 수 있다. 따라서 주관과 관계없이 실재하는 내용을 끝내 얻지 못한다. 그렇지만, 그렇다고 실재가 전혀 아무것도 없다고 할 근거 역시 얻어지지 않는다. 따라서 그렇게 주장할 근거가 무엇인가라는 문제가 제기된다.
어떤 내용을 '얻지 못함'이 곧 '전혀 아무것도 없음'을 의미하지 않는다. 귀머거리는 소리를 얻어 내지 못한다. 그러나 소리는 소리대로 있다고 해야 한다. 마찬가지로 무엇을 자신이 '얻지 못한'다고 해서 그것이 곧 '아무것도 전혀 없음'을 세울 근거는 되지 못한다.
○ [7] 다시 다음처럼 주장하는 입장이 있을 수 있다.
각 생명마다 정신(마음)을 갖는다. 그러나 이들 정신 외에 다른 존재는 전혀 없다. 이렇게 주장하는 입장도 생각할 수 있다.
=>
앞[6]은 하나의 정신에 모든 세계나 각 생명 및 그 생명의 정신이 모두 자리잡고 있다고 보게 된다. 그러나 이는 앞에서 보듯 문제가 있다. 그래서 이를 수정한 입장이다.
그러나 이 주장은 여하튼 세계는 정신으로만 되어 있음을 내세운다. 그리고 그런 정신적 존재 외 어떤 실재는 전혀 없음을 내세운다. 그리고 세계는 이들 정신이 각기 자체 분열을 한 것이라고 하게 된다.
그러나 현실에서 한 주체는 영희 철수를 포함해 다양한 생명을 대하게 된다. 이런 주체의 정체를 놓고 생각해보자. 그러면 앞과 같은 성격의 문제가 역시 발생한다.
즉, 모든 것은 자신의 마음이라고 하자. 그리고 마음 밖에는 아무 것도 없다고 하자. 그리고 각 주체의 정신은 제각각 자체분열해서 세계나 각 생명의 모습을 얻는다고 하자.
그런데 한 주체가 세상을 대할 때 그 안에서 다른 생명의 육체와 활동이 파악된다. 이 경우 자신 마음 밖에 이들 주체는 어떤 형태로 있다고 할 것인가. 이 경우 자신 마음 밖에 이런 각 생명의 정신만 있을 뿐이라고 하자.
그런데 이 경우 어떤 이가 다른 이의 정신을 직접 대해 그런 판단을 한 것이 아니다. 그런 각 생명이 따로 있다는 사실은 각 생명의 육체 및 그 활동을 대해 판단한다. 그런데 자신의 마음 밖에정작 그 육체에 대응한 내용은 없다고 한다.
그리고 그런 육체와 관련된 정신만 떼내 그것만 자신의 마음 밖에 따로 있다고 주장한다. 그런데 그렇게 주장할 근거가 명확하지 않다.
자신 마음 밖에 어떤 다른 주체의 존재를 인정했다. 그런데 그 주체가 오직 정신만으로 존재하는지 아니면 육체에 해당한 무엇이 있는지가 문제될 수 있다. 그런데 이런 판단을 할 근거 자체가 명확하지 않다.
현실에서 얻는 일체가 모두 마음안의 내용이다. 그런데 여하튼 이들 두 입장은 너무 지나치게 극단적으로 나아간 입장이다.
원래 유식학파의 주된 경전이나 논서가 되는 『해심밀경』과 『유가사지론』이나 『성유식론』에서는 앞에 나열한 두 입장을 제시하는 부분은 잘 파악되지 않는다.
그러나 여기서는 개별 논서나 특정 논사의 입장에 대해 제시하려는 취지는 아니다. 단지 추상적으로 실재에 대해 제시할 가능성이 있는 여러 입장을 놓고 살핀다.
만일 이렇게 살피지 않으면 관련되는 각 개별 논서 내용을 하나하나 다 나열해 그 논서 입장이 어떤 입장에 해당하는가부터 먼저 살펴야 한다. 그래서 논의가 복잡하게 된다.
그런데 일단 유식학파의 입장은 '유식무경'이라는 표현으로 대변된다. 이 유식무경을 [6]과 같은 입장으로 이해할 수도 있다. 또는 [7] 입장으로도 이해할 수 있다. 따라서 이런 부분에서 오해가 발생할 수 있다.
○ [8] 한편 다음 입장도 있을 수 있다.
현실에서 얻는 내용은 실재의 지위에 있는 내용이 아니다. 그리고 실재의 내용은 전혀 없다고 할 것은 아니다. 그러나 어떤 진짜라고 할 영원불변한 실체가 그 안에 있는 것이 아니다. [무아, 무자성, 승의무자성, 인무아, 법무아 ] 그리고 그 내용은 어떤 주체가 직접 얻을 수 없다. 어떤 주체는 화합관계로 마음에 얻게 되는 내용만 얻을 수 있다.
그런데 실재는 그런 관계를 떠난 내용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실재는 진짜라고 할 실체가 없다. [무아, 무자성] 그런 가운데 실재 영역에 아무 내용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실재 영역은 현실에서 어떤 주체가 2분법상으로 행하는 온갖 분별을 떠난다. 따라서 모든 2 분법상의 분별을 떠난다. [불이법] 예를 들어 a~ 이다 ~ 아니다. ~이 있다. ~ 이 없다.
~과 같다 ~과 다르다. 깨끗하다 더럽다. 좋다 나쁘다. 등등의 분별을 모두 떠난다. 실재는 그런 분별과 언설을 떠난다. 그리고 이런 상태를 나타내기 위해 언어상으로 실질의미가 공허한 '공'이란 표현을 사용한다.
이와 같은 입장을 생각할 수 있다. 처음에 [5] 입장은 이 입장과 반드시 서로 모순되는 것은 아니다. 다만 [5]는 마음안 내용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그리고 [8]은 실재의 측면에 초점을 맟춘다. 이런 정도의 차이만 있다.
그런데 만일 [5] 의 입장에서 극단으로 나아간다고 하자. 그러면 [6]이나 [7]과 같은 입장을 취하기 쉽다. 그래서 실재는 전혀 없는 것[무]이라고 극단적으로 나아가기 쉽다. 그러면 [8]의 입장과는 일치하지 않게 된다.
이외에도 이론상 제시할 수 있는 입장이 더 많이 있을 수 있다. 그러나 주된 입장들은 대략적으로 위와 같다.
현실에서 어떤 내용을 얻는다. 그런데 그 본 바탕인 실재가 무언가에 대해 논의를 한다. 이런 논의는 현실내용이 과연 실다운 내용인가를 판단하는데 취지가 있다.
예를 들어 자면서 꿈을 생생하게 꾸었다고 하자. 그런데 그런 꿈을 꾼 현실에서 그런 내용이 그처럼 그대로 얻어지는가를 살핀다. 그리고 현실에서 그런 내용이 없음을 이해한다. 그리고 이런 사정을 통해서 꿈이 실답지 않음을 이해하게 된다.
현실의 정체를 살필 때는 본 바탕이 되는 실재를 살핀다. 그 사정도 이와 같다.
예를 들어 현실에서 어떤 내용을 얻었다고 하자. 그런데 본 바탕이 되는 실재 영역에서도 그런 내용이 그대로 얻어지는가를 살핀다. 그래서 실재 영역은 어떠한가를 살핀다. 이처럼 실재를 살피는 것은 현실 내용이 과연 실다운가 여부를 음미하는데 초점이 있다.
실재는 공하다. 그리고 실재 영역에서는 현실 내용과 일치하는 것을 얻을 수 없다.
그래서 현실 내용은 본 바탕에서는 얻을 수 없는 내용을 얻는 것이다. 그런 사정으로 현실 내용은 실답지 않음을 이해하게 된다. 즉 실재영역이 공함은 현실이 실답지 않음을 이해하는데 초점이 있다.
그러나 여하튼 현실에서 그런 내용을 생생하게 얻는다. 실재가 공함은 이런 사실을 부정하는 것은 아니다.
현실은 대단히 생생하다. 그리고 같은 형태로 자주 반복해 얻는다. 그런데 이들 현실 내용은 본 바탕에서는 얻을 수 없는 내용이다. 따라서 실답지 않다.
사정이 그런데도 대부분 생사현실에 망집을 일으켜 이들이 실답다고 여긴다.
그리고 이에 바탕해 업을 행한다. 그리고 그로 인해 생사현실에 묶여 생사고통을 받게 된다. 이것이 생사현실에서 겪는 생사고통의 문제다.
이 문제를 해결하려면 망집에 바탕한 업을 중단하고 수행을 해야 한다. 그러려면 먼저 실재가 공함을 깨달아야 한다. 그래서 이를 바탕으로 현실 내용이 실답지 않음을 깨닫게 한다. 그래서 현실에 대한 집착을 제거해야 한다. 이를 위해 실재가 공함을 파악할 것이 요구되는 것이다.
현실에서 어떤 내용을 얻을 때 그 본 바탕으로서 실재가 무언가를 문제삼는 것과는 달리 그것은 과연 무엇을 대상으로 해 얻는 것인가가 문제될 수 있다.
현실내용이 마음안 내용이라는 것은 현실내용이 마음에 그렇게 얻어진 내용이어서 그 안에는 그런 내용을 얻게 한 대상이 있는 것은 아님을 함께 제시한다.
그래서 현실에서 얻는 내용이 마음내용이라고 할 때 그런 마음 내용은 도대체 마음 밖의 무엇을 대상으로 해 얻게 된 것인가를 문제삼을 수 있다. 이 주제는 현실내용의 본 바탕인 실재가 무언가를 찾는 문제와 어느 정도 관련된다.
이 문제를 꿈을 놓고 비유적으로 생각해보자. 침대에 누어 바다나 황금꿈을 꾼다고 하자. 이 때 바다나 황금꿈은 그 본 바탕이 침대가 놓여 있는 현실이라고 볼 것이다. 그런데 이 때 바다나 황금꿈은 과연 침대나 베개를 대상으로 그런 꿈내용을 꾸었다고 할 것인가 아닌가가 문제된다. 그리고 이것이 꿈 내용의 대상 문제다.
꿈 내용을 얻게 한 대상이 꿈 내용 안에 있다고 보지 않는다고 하자. 그렇다면 꿈 내용을 얻게 한 대상을 꿈 밖에서 찾아야 한다. 그런데 꿈 밖의 내용은 꿈을 꾼 본 바탕이 무언가부터 살펴야 한다. 그래서 이 두 문제는 어느 정도 관련된다.
현실에서 눈,귀,코,입,몸 등으로 어떤 감각현실을 얻을 때도 상황이 같다. 그런 내용을 얻게 된 본 바탕이 무언가를 먼저 살핀다. 그 다음 현실 내용은 도대체 무엇을 대상으로 삼아서 그처럼 얻게 되었는가를 살피게 된다. 이 두 문제는 그런 측면에서 어느 정도 관련된다.
이 때 실재가 현실의 내용과 일치한다거나 그와 유사하거나 비례한 형태라고 제시하는 것은 곧 그런 외부대상이 그렇게 있다고 제시하는 입장으로 해석된다.
그에 반해서 [6]과 같은 극단적인 입장은 그런 실재는 전혀 없다는 입장이다. 그래서 이 경우는 그런 외부대상은 전혀 없다고 제시하는 입장으로 이해된다.
또 [7]과 같은 경우는 어떤 한 주체의 정신 외부에 무언가가 있더라도 그것은 오직 각 생명주체에 대응한 정신적인 존재만 있다고 보는 입장이다. 이 경우에는 어떤 내용을 얻게 하는 대상이 외부에 있어도 그것은 다른 정신들이라고 해야 한다.
그러나 이는 처음 살핀 [1] 입장과는 혼동하지 않아야 한다. [1]은 처음 어떤 주체가 현실에서 얻는 내용을 놓고 그 내용이 곧 그런 내용을 얻게 한 외부 대상이라고 잘못 여긴 것이다.
한편 [1]과 같이 현실에서 얻는 그런 내용을 대상이라고 보는 가운데 그 내용이 한 주체가 감각을 통해 얻는 것이기에 대상은 곧 정신적이라고 보는 입장도 있을 수 있다.
그런데 이는 앞에서 나열하지 않은 입장이다. 굳이 따로 번호를 붙인다면 [1-2] 라고 붙일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이 입장은 앞의 [5] [6] [7]의 입장과는 다르다.
우선 일반적인 입장에서 처음 [1]처럼 외부대상으로 여기는 내용은 마음안에 이미 얻어진 내용이다. 따라서 이들 내용은 그런 내용을 얻게 한 대상이 아니다,. 따라서 이를 대상으로 인정하지 않아야 한다. 그런데 이 [1-2] 경우는 그렇게 하지 않고
그 내용을 여전히 일반적인 입장 [1]처럼 계속 대상으로 보는 한편, 그 내용이 마음안 내용이라고 하여 두 내용을 섞어 혼동하게 된 것이다.
한편 [5] [6] [7]의 입장은 다음과 같다. 현실에서 얻는 내용은 마음안 내용이다. 그리고 일단 이 안에는 그런 내용을 얻게 한 대상이 없다. 이렇게 판단한다. 그리고 다시 그 마음 밖에 어떤 외부 실재 대상이 있는가 없는가를 놓고 조금씩 입장 차이가 있는 것 뿐이다.
한편 [5]와 [8]과 같은 입장은 실재가 무언가라는 문제에 대해서 있다거나 없다라는 양 극단을 떠난 입장이다. 따라서 앞과 다르다.
이 경우 실재는 그런 있고 없음을 판단할 수 없는 상태다. 그래서 실재에서 어떤 A 를 정하고 나서 그 A 를 넣고 빼고를 반복할 수 없다. 따라서 어떤 주체가 어떤 내용을 얻고 못 얻고에 실재의 어떤 A 가 어떤 관계가 있는가 없는가 역시도 당연히 살필 수 없다. 따라서 결국 그런 외부대상의 '있고 없음'을 떠난다고 하게 된다.
그래서 각 입장 간에 약간의 차이가 있다.
이처럼 서로 다른 입장을 나열해 살피면 각 입장별로 시시비비의 논의가 엇갈린다. 그리고 주장이 서로 얽혀 혼동을 불러일으키게 된다. 그래서 이들 논의는 상당히 복잡하고 살피기 어렵다.
『광찬경』의 입장은 결국 [5]와 [8]의 입장과 부합한다. [5]와 [8]은 현실에서 얻는 내용에 주된 초점을 맞추고 기술했는가 아니면 실재에 주된 초점을 맞추고 내용을 제시하는가의 차이다. 그러나 만일 [6]이나 [7]과 같이 극단적인 입장을 취하면 다르다. 이들은 실재는 아무 것도 '전혀 없고' 오직 존재하는 것은 식뿐이라는 입장이 된다.
즉 일반적으로 현실에서 자신이 대하는 것이 자신의 외부에 있는 외부세계라고 잘못 생각한다. 또 자신의 감관이 대하는 외부대상이라고 잘못 생각한다. 그래서 자신의 정신밖의 외부물질인 것이라고 잘못 생각한다. 또 이것은 자신뿐만 아니라 영희나 철수도 함께 그 내용을 그렇게 대하고 그렇게 파악하기에 객관적 외부실재라고 잘못 생각한다. 이처럼 생각하는 내용이 모두 잘못이고 이 모두는 각 주체의 마음안 내용임을 살폈다.
우선 위 그림에서 2 가 마음(머리속 5^)에서 4^와 같은 꽃모습을 본다고 하자. 이는 1 이 눈을 떠 4와 같은 꽃모습을 보는 상황과 같다.
그래서 1 은 2 가 자신이 보는 4 라는 꽃을 대해 그런 모습을 보게 된다고 잘못 생각하기 쉽다. 그러나 사정이 그렇지 않다.
그러면 2 는 무엇을 대상으로 삼아 4^ 라는 꽃의 모습을 보는가.
그리고 1 은 무엇을 대상으로 삼아 4 라는 꽃의 모습을 보게 되는가.
이런 의문을 다시 갖게 된다.
이와 관련해 1 이나 2 가 눈을 뜨고 감는 일과는 관계없이 본래부터 그대로 실재하는 것이 과연 있는가 또 그런 실재가 있다면 그것은 무엇인가라는 논의가 이뤄진다.
『광찬경』에서도 결국 이런 실재와 관련된 내용이 제시된다. 『광찬경』 여러 부분에서 실재와 현실의 관계를 제시한다.
어떤 이가 눈을 떠 한 번 꽃의 모습을 보게 되면 그가 눈을 감아 그 모습을 보지 못해도 그와 관계없이 자신 외부에 그런 꽃이 객관적으로 실재한다고 생각하기 쉽다. 자신이 설령 그 꽃을 보지 못해도 영희나 철수가 대하면 꽃을 보게 되고 그래서 자신과 관계없이 누군가 대하면 꽃이라고 보게 되는 그 무언가가 그렇게 실재한다고 여긴다.
그리고 그 실재는 결국 자신이나 영희나 철수가 눈을 떠 대할 때 얻는 모습일 것으로 추리한다.
그래서 앞 글에서 이런 추리가 엉터리임을 살폈다. 즉, 자신이 컵을 만지면서 그 컵을 보게 되면 눈으로 대하는 컵과 손이 대하는 컵이 다 하나의 컵인 것처럼 생각한다.
그런데 설령 그렇다해도 눈으로 얻는 그 모습과 손으로 얻게 되는 그 촉감은 대단히 서로 엉뚱하다. .
그런데 손으로 만질 때 얻는 촉감을 눈으로는 그런 모습으로 얻는 것처럼 실재와 현실의 관계는 오히려 이처럼 서로 엉뚱하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여기서는 문제삼는 실재는 그 내용을 직접 얻지 못한다. 따라서 위 내용을 그대로 적용할 수는 없다.
그러나 여하튼 앞과 같은 추리가 타당하려면 일단 현실에서 얻는 것들에서부터 그런 추리가 타당해야 한다.
침대에서 잠을 자며 바다와 황금꿈을 꾸었다면 침대에서 꿈을 꾸었기에 침대와 바다나 황금꿈이 어떤 관계가 있다고 보기 쉽다.
그러나 그 관계는 서로 대단히 엉뚱하다. 현실에서 하나의 대상에 대해 얻는 각 감각내용도 마찬가지로 서로 대단히 엉뚱하다.
더 나아가 그렇게 감각한 내용과 그에 대해 생각하는 내용의 관계도 사정이 마찬가지다.
그래서 실재에 대한 추리가 타당하려면 그 실재의 내용을 하나라도 얻어 현실과 실재 사이에 어떤 관계가 있음을 직접 밝힐 필요가 있다.
그렇지 않으면 최소한 현실에서 각 주체가 얻는 내용만이라도 그런 관계가 성립함을 제시해주어야 한다.
그런데 안타깝게 그런 내용은 얻을 수 없다.
또 그것은 자신에게서만 그런 것이 아니고 메뚜기나 방울뱀 돌고래 박쥐 이런 생명까지 고려하면 사정이 마찬가지다.
그래서 그런 추리는 망상분별을 일으켜 취하는 경우에 그렇게 고집하게 됨을 이해해야 한다.
여하튼
실재는 과연 무엇인가에 대해 다양한 입장이 있다.
그런데 이 문제는 결국 위와 같은 상황에서 이 각각의 본 정체가 무언가를 파악하는 한편, 현실에서 얻는 내용을 과연 실다운 것으로 볼 것인가와 관련된다.
아래서는 다음 주제를 살핀다.
○ 현실을 외부의 객관적 실재로 여기게 되는 사정
본래 사정이 그렇지 않음에도 현실에서 자신이 어떤 모습을 얻을 때 그것을 외부 세계나, 외부 대상, 그리고 외부 물질 또는 외부의 객관적 실재로 여기게 되는가를 우선 살피자.
이 내용은 곧 현실에서 어떤 내용을 보게 될 때 그것을 자신과 자신이 아닌 외부 부분으로 나누어 보게 되는 과정부터 살펴야 한다.
그래서 이를 '라면 그릇에서 나와 내것을 가르기'라는 문제로 살폈다. 여기서 라면은 어떤 생각을 할 때 자주 '만일 ~ 라면'이라는 구문을 사용하기에 붙인 내용이기도 하다.
○ 가정적 항변
if 만일- 라면의 구문은 현실에 없는 내용을 가정적으로 시설한 다음 사정이 만일 그렇다면 하고 가정하고 논의를 하는 방식이다. 즉 현실은 그렇지는 않지만, 그러나 그런 가정과 시설을 한다면, 그런 전제에서는 어떻다고 보아야 하는가를 살피는 것이다. 그래서 사실은 ~ 라면 논의는 그 일체가 희론이다. 그리고 알고보면 그런 가정적 전제부터가 현실에서 얻어지지 않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그런데 이런 논의를 하게 되는 사정은 『회쟁론』에서 살핀 사정과 같다.
망상분별 상태에서는 자신이 생각하는 내용이 감각현실이나 실재 그 각 영역에 그렇게 그대로 있다고 여기면서 자꾸 대한다. 그러므로 일단 그런 입장을 받아들여서 그런 바탕에서 같이 논의해서 그런 경우의 문제가 무엇인가를 살핀다는 취지다. 그래서 그런 처음 전제가 왜 잘못인가를 이해하게 하려는 취지다.
○ 논의의 취지 - 생사고통의 예방과 해결
자신이 외부나 자신이라고 보고 문제삼는 내용들은 우선 자신이 눈을 떠서 다 함께 얻었다.
그리고 이처럼 자신이 눈을 떠 함께 얻은 그 내용 가운데 어떤 한 부분은 자신의 몸이고 다른 부분은 자신 밖에 있는 외부 세계의 내용이라고 여긴다.
이는 하나의 그릇에 들어 있는 것은 마찬가지인데 이 안에서 각 부분을 구분하는 것이 된다.
그래서 그렇게 구분해 대하는 사정이 무언가를 이해해야 한다. 그리고 각 주체가 그렇게 여기게 만드는 사정이 곧 현실에서 전도망상 분별을 일으키는 사정이 된다. 그리고 그 주체가 3 악도에 묶여 들어가고 생사고통을 받게 되는 사정이기도 하다.
물론 업을 행하는 원인단계에서는 그것은 그 주체가 좋아하는 내용이 대부분이다. 그런데 그것이 나중에 생사고통을 극심하게 받는 원인이 된다. 그래서 열매의 씨를 밭에 뿌리는 과정과 같다.
좁고 짧고 얕게 관찰할 경우 이들이 서로 함께 묶여져 있음을 잘 관하지 못하기에 그것을 취하고 머물게 된다.
그래서 현실에서 자신에게 당장 좋다고 여겨져서 집착을 갖고 추구하는 것을 중지하고 수행으로 전환해 임해야 한다. 그런데 대부분 이를 대단히 행하기 힘들다고 여기게 된다. 또는 자신과는 도무지 무관한 내용으로 덤덤하게 대하게 된다.
그런데 나중에 자신이 극심한 고통을 받는 것은
바로 이런 업을 행하였기 때문이다. 만일 이 두 내용이 서로 무관하다면 수행에서 이를 고려할 필요가 없다. 그리고 수행은 단지 원인없이 그 때 그 때 발생하는 고통을 그 순간에서만, 그것이 실답지 않음을 잘 관하고 벗어나오면 될 것이다.
그러나 이 둘은 서로 무관한 것이 아니다. 그리고 이 둘은 함께 묶여 있다.
고통을 벗어나는 원리는 이 둘에 원칙적으로 차별없이 같이 적용될 수 있다.
그러나 생사고통을 직접 받는 상태에서는 원칙적인 방안으로 이를 벗어나기가 쉽지 않다. 그보다는 원인단계에서 제거하는 것이 훨씬 더 쉽다.
이는 축사의 상황을 생각하면 이해가 쉽다. 오늘날 닭이나 오리 돼지나 소를 기르는 곳에서는 고기질을 부드럽게 한다는 이유로 돼지나 소를 거세하기도 한다. 또 서로 상처를 내지 않게 하기 위해 뿔이나 이빨이나 부리를 잘라내기도 한다.
어떤 곳에서는 사람이 좋아하는 부위를 키운다는 취지로 먹이를 주는 관에 부리를 철사로 묶어 놓고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그 상태로 키우기도 한다.
오리는 자유롭게 여기저기 날라 다니는 것을 좋아할 것이다. 그러나 이렇게 묶어 키워야 오리가 스트레스를 많이 받게 되고 그래야 사람들이 좋아하는 부위가 비대해지게 된다고 그렇게 사육한다고 한다.
문제는 미리 이런 곳에 갇히는 것을 예방하지 못하고 그런 상태가 되고 나서 그 상태가 실답지 않고 공함을 관해서 이를 견디고 고통을 벗어나려면, 대단히 힘들다.
그런데 그것이 쉽다면 같은 이유로 지금 상황에서도 수행을 행하기 어렵다고 볼 사정도 없다.
그런데 사정이 같다고 해도 역시 앞의 경우보다는 원인단계에서 미리 제거하는 것이 훨씬 더 쉽고 효과도 좋다.
생사고통의 원인이 되는 씨를 뿌리는 단계에서 이를 중지하지 못하고 벗어나지 못하는 경우 생사고통을 결과로 받는 단계에서는 같은 사정으로 더더욱 벗어나기 힘들다.
예를 들어 평소 하늘을 잘 날라다니지 못하던 닭이 꽁무니에 불이 붙는 순간부터는 갑자기 매처럼 하늘을 잘 날라 고통을 벗어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씨와 열매의 관계를 놓고 3악도에서 생사고통을 받아 나가는 문제를 생각하면 원칙상 이 모든 상황에 같은 원칙이 적용된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열매가 열려 나타나는 단계에서 벗어나오기는 대단히 어렵고 씨를 뿌리는 단계에서 예방하는 것이 대단히 쉽고 효과가 좋다.
일체가 다 공하고 본래 생멸을 떠난 상태로서 청정한 니르바나다. 그런데 전도몽상 분별을 일으켜 집착한 상태에서는 수행에 대해서 이 내용을 먼저 적용하고 임하기 쉽다. 또 나아가 장차 받게 될 생사고통은 별로 대단한 일이 아닌 것처럼 가볍게 대하면서 임하기 쉽다.
장차 겪을 생사고통은 지금 직접 겪는 것이 아니다. 그래서 단지 상상만 할 뿐 직접 느낄 수 없다. 그래서 그것은 당장 자신의 일이 아니라고 여기게 된다. 그래서 그런 경향을 보이게 된다.
그래서 평소 자신이 당장 자신에게 좋다고 보는 것에 주로 초점을 맞추고 행해가게 된다. 그리고 이것이나 저것이나 다 공하기에 무방하다고 임하기 쉽다.
그런데 원칙적 내용만으로 잘 해결되지 않는다.
대부분 다른 외국에서 수백명의 사상자가 생긴 사건 사고에는 대담하고 대범하게 무덤덤하게 대할 수 있다.
그러나 자신의 지갑이 없어지거나, 손톱이 꺽여 부러지면 당황하고 얼굴색이 노랗게 변하며 대하게 된다.
각 개인이 생사현실에서 이런 자세로 임한다.
따라서 어차피 다 차별없이 공한 가운데 유독 극심한 고통을 받는 상황에 반복해 처하게 된다.
일체가 다 차별없이 공하다는 원칙적 내용을 이처럼 잘못 취하는 경우를 악취공견이라고 표현한다.
그래서 이 경우는 어차피 다 차별없이 공한데도 하필이면 지옥에 들어가 쓸데없이 공한 지옥의 고통을 받아가는 상태가 된다.
따라서 이런 내용을 살필 때는 일체가 공하고 청정한 니르바나라는 원칙적 내용을 바탕으로 어떤 자세로 임해야 하는가를 잘 이해해야 한다. 그래야 어차피 차별없이 공한 가운데 지옥에 처해 고통을 겪지 않게 된다. 그리고 반대로 무량한 생사현실에서 무량한 수명과 복덕과 지혜를 구족하고 무량한 중생을 생사고통에서 벗어날 수 있다.
이제 원래 논의하기로 한 라면의 문제를 다시 살피기로 한다.
● 자신의 정체를 잘못 이해하는 사정
이미 어떤 이가 눈을 떠서 세상을 보게 되면 그것은 모두 그렇게 눈을 떠서 얻는 내용으로서 그 일체가 모두 자신의 마음에 머무르게 되는 내용임을 보았다.
그런데 사정이 그런데도 왜 다 같은 자신의 마음안 내용인데 여기서 일정 부분은 자신의 몸이고 일정 부분은 그런 자신의 몸이 아닌 외부 세계라고 이해하게 되는가. 그 사정이 무언가를 또 살펴야 한다.
1이 눈을 떠서 모습을 볼 때 전체적으로 그것이 5 안의 내용이라면 1 은 이 가운데 그림에서 1 과 같은 부분을 자신이라고 여기고 나머지는 자신 밖의 외부 세계로 이해한다.
2 도 마찬가지다.
2 가 눈을떠서 그의 마음에 5^ 같은 내용을 얻는다면 그것은 모두 그의 마음에 머무는 내용인데도 그 가운데에서 2^와 같은 부분은 자신의 몸이고 나머지가 외부 세계라고 이해한다. 그것이 현실에 임하는 각 주체의 전도몽상 분별 가운데 하나다.
그런데 그것이 옳고 그르고를 떠나 각 주체는 왜 그렇게 생각하게 되는가를 살펴보자.
그런데 그렇게 생각하게 만드는 그 사정은 각 주체가 그런 전도망상분별을 처음 일으키고 그것을 계속 고집하며 붙잡고 나아가게 되는 사정이기도 하고 또 그 주체를 끝내 3 악도의 생사고통을 극심하게 받게 만드는 사정이기도 하고 또 그런 상태에서 도무지 벗어나지 못하도록 만드는 사정이기도 하다. 그래서 그 사정을 잘 이해해야 우선 그런 상태로부터 벗어나게 할 방안을 또 거꾸로 찾아낼 수 있게 된다. 그래서 이 부분을 먼저 잘 검토해보기로 한다.
사정이 앞과 같은데 그러나 1은 1 과 같은 부분을 왜 자신이라고 보게 되는가. 이것이 처음에 살필 문제다.
그런데 이것은 자신이 평소 생활하는 과정을 잘 스스로 되돌아보는 것이 필요하다. 왜 그런가?
그 사정은 반대로 말하면 이 모두가 다 자신의 눈으로 보게 되는 내용임에도 불구하고 1 과 같은 부분은 나머지 부분과는 조금 다르게 볼 사정이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 사정을 살피고 다시 그것은 또 왜 그렇게 되어 있는가를 살펴야 한다.
다음 방안으로 이를 논의한다.
○ 처음에 현실에서 대하는 내용이 외부세계이고 외부 대상이고 외부 물질이고 객관적 실재라는 입장이 잘못임을 살폈다.
=> 그래서 이들 내용이 마음안 내용임을 제시했다.
=> 그러면 이들 내용과 관련된 실재는 무언가가 다시 문제된다. 이것은 이들 내용이 실다운가와 관련되어 논의된다.
○ => 사정이 이런데 그러나 이들 내용을 대할 때 그것이 자꾸 자신과 외부라고 구분하게 되는 사정이 있다. 그래서 그 사정이 무언가를 다시 살핀다. 그런데 그 사정이 바로 그런 전도망상을 일으키게 하는 사정이다. 그래서 그런 사정에서 그처럼 망집을 일으키는 것이 왜 잘못인가를 살펴야 한다.
○ => 그런데 여기에서 다시 더 나아가야 한다. 앞과 같은 사정에서 현실 내용을 놓고 자신과 외부를 나누어 분별을 행하고 대하는 것이 잘못이다. 그런데 현실에서 각 주체가 그렇게 현실을 대하며 임하게 된 근본 배경이 또 있다.
즉 현실에서 자신이라고 보는 그 부분은 자신과 전혀 무관한 것은 아니다. 그래서 왜 그렇게 되었는가 배경을 살펴야 한다. 그런데 바로 이 부분이 처음 근본 무명을 바탕으로 전도망상분별을 일으키고 생사유전의 삶을 시작하게된 배경이기도 하다. 그래서 또 왜 이것이 잘못인가를 살펴야 한다. 이는 뒤집힌 상태로 계속 한 3 번 정도 돌아
현실에서 전도망상이 매듭지어진 상태로 임하게 된 사정이다.
그런데 이 대부분 내용이 과거에 반복했다. 그래서 조금 힘이 빠진다. 그래서 또 같은 내용을 반복해야 하는가. 아니면 과거 글을 다시 잘 살피면서 링크를 거는 것이 나은가를 고민하게 된다.
이는 산카샤(Sankassa) · 산카시아(Sankasia) · 산키사(Sankissa) 또는 산카시(Sankasy)라고도 한다. 인도의 델리 동남쪽 파그나에서 11 km 떨어진 촌락이다. "아소카왕의 코끼리 도시"라 하기도 했다고 한다. . 구글 맵으로 찾을 때 지명만 넣어서는 찾기 쉽지 않다.
노래를 듣고 쉬는데 mun 님의 사례를 들면서 생사고통을 막고 니르바나를 얻으려면 미리 그것을 수행으로 바꿔야 한다는 메세지를 전한다.
~라면에서 자신의 것을 가르는 사정을 살피려다가 앞 부분만 반복하는데 그쳤다. 앞 내용은 이미 과거에 많이 반복했다. 여기서는 조금 더 새로운 내용을 생각해보며 잠시 쉬기로 한다
다음 페이지에서는 현실에서 자신의 정체를 잘못 파악하는 사정을 살펴나가기로 한다.
즉, 현실에서 얻는 내용이 마음안 내용인데 왜 이 내용을 놓고 다시 현실에서 자신과 외부로 나누어 여기게 되는가 하는 사정을 살펴나가기로 한다.
쉽게 생각하면 현실에서 자신이 어디론가 움직여야겠다고 생각하고 움직이면 평소 자신이 자신이라고 본 부분만 그렇게 변화하는 모습을 반복해서 보게 된다는 등등의 내용이 바로 이와 관련된다. 이전에 이런 사정들을 상- 락 - 아 - 정의 내용과 관련시켜서 나열해 살핀다. 그리고 그렇게 보게 되는 사정이 또 잘못된 분별이라는 것도 함께 살핀다. 이런 내용을 살피는 한편, 그럼에도 왜 그 내용이 자신과 관련되는가. 또 현실에서 그렇게 보게 될만한 근본 사정은 무엇인가를 이어서 살핀다.
이것은 처음 근본 무명에 의해서 그런 전도몽상을 처음에 일으킨 기본적인 사정을 살피는 문제가 된다.
그런데 이전 페이지에서 오타를 교정할 부분도 상당히 많이 발견된다. 또한 한 페이지에 내용이 너무 많으면 읽는데 지나치게 부담이 된다.
○ [pt op tr] 예술작품 사진 공양, 나무불, 나무법, 나무승 Karl_Bryullov_(Bryullo)_-_Всадница_-_Google_Art_Project
2017_0322_124200_nikon_ct19_1.jpg https://commons.wikimedia.org/wiki/File:Karl_Bryullov_(Bryullo)_-_Всадница_-_Google_Art_Project.jpg Karl Bryullov (1799–1852) ● [pt op tr] fr
○ [pt op tr] 꽃 공양, 나무불, 나무법, 나무승 Roses_jaunes_et_rouges
https://commons.wikimedia.org/wiki/File:Roses_jaunes_et_rouges.jpg Français : parc de Bercy Author Dinkum ● [pt op tr] f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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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ankasia , Sankissa 및 Sankasya
○ 아름다운 풍경사진 공양, 나무불, 나무법, 나무승 With the image 'Google Earth & Map data: Google, DigitalGlob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