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번에 100 KM 를 달려가면 그날이나 다음날 바로 죽을 수도 있지만, 쉬엄 쉬엄 가다 쉬고 가다 쉬고 하면 만 kM 도 걸어갈 수 있다는 생각에 되도록 자주자주 쉬면서 작업을 하려고 하고 있다.
연구원들의 사진 앨범을 제작하는 작업을 시작한 지 오래되었는데 아직도 끝을 내고 있지 못하다.
일일히 기능을 다 테스트해보지 않고 대충 작동이 되리라 생각하는데 그러나 어쩌다 한번씩 테스트해보면 매번 오작동이 일어나서 버그를 찾아 방생하느라 힘이 든다. prince 님이 어느날 별 사유도 없이 행방을 감추고 나타나지 않은 뒤로 본인이 설명서를 참조해 작업하는 가운데 힘이 많이 든다.
있을 때 신경써서 잘 했는데도 역시 갑자기 보이지 않으니 상당히 소중함을 느끼게 된다. 성인이라 미아 신고도 가능하지 않고 넓고 넓은 세계에서 어디에 있는지 찾아나설 수도 없고 이런 경우는 유소식이 희소식인데 소식이 아직 없어 안타깝다.
쉬면서 자꾸 단편 사극을 보게 되는데 사극에서 만적이란 노비를 통해 과거 노비생활을 다룬 내용을 보게 된다.
미국의 톰아저씨를 떠올리는 내용인데 오늘날은 갑질이란 용어가 이에 해당할만한 내용이다.
그러고 보면 세상에는 차별이 참 많아서 이런 상황에 처하면 울분이 솟구치게 된다고 할 수 있다.
드라마는 적당히 시나리오작가가 각색해서 당시 있었을만한 부당한 일을 그려 내는데 주인집 아들이 상처를 입게 되었다고 해서 노비를 살해한다거나 노비가 좋아하는 여자 노비를 주인 마음대로 겁탈하거나 팔아치운다거나 노비를 개처럼 줄을 묶고 끌고 다닌다거나 등등 같은 인간으로서 고통과 수모와 수치를 받게 하는 일을 당하고 만적이 봉기를 일으키는데 결국 실패하고 모두 강물에 빠뜨려 죽임을 당했다는 내용이다.
또 광해군은 세자 자리를 놓고 인목대비와 반목하여 영창대군을 죽이는데 나중에 인조반정이 일어난 다음 광해군의 아들도 샤악을 받고 죽음을 당하게 되고 광해군은 제주도에 유배가서 시종의 구박을 받으면서 살다가 죽었다는 내용도 보게 된다.
광해군이 하는 말이 자신이 세자로 지낼 때 임진왜란이 일어나서 전장에서 싸우기도 하고 아버지의 미움을 받아 세자자리를 지키느라 전전긍긍하고 왕이 된 후에는 또 왕 자리를 지키느라 형제를 죽이면서 전전긍긍하고 지냈는데 차라리 유배를 당하고 지내는 지금이 더 낫다. 이런 말을 하는 것을 보았는데 이 역시 시나리오 작가가 적당히 각색해서 넣은 내용이리라 보지만, 아마도 당시 광해군 생각도 이와 비슷했었으리라 생각하게 된다.
알고보면 좋음을 얻기 위해서 그런 자리를 차지하고 좋음을 얻기 위해 그처럼 노력하는 것인데 그러나 결과적으로는 그것을 통해 그렇게 좋음을 얻지 못한 채 삶을 마치게 된다.
그런데 또 당시 노비나 하층민의 입장에서는 이런 왕이 또 얼마나 부럽게 보이겠는가. 며칠만이라도 단 한번만이라도 왕 한번 해보고 죽으면 여한이 없겠다는 이도 상당히 많았으리라 본다.
이런 여러 사건을 보면서 세상에는 이처럼 차별이 많은데 왜 경전에서는 모든 것이 본래 차별이 없이 청정하다고 하고 죄와 복이 모두 공하고 일체 중생이 다 청정하다고 제시하는가.
사실 석가모니 부처님은 당시 차별이 극심한 인도 사회에서 노예도 수행자로 받아들이고 또 여성도 수행자로 받아들이고 해서 상당히 파격적으로 차별을 없앴다고 할 수 있는데 이런 일은 최근 100 여년전까지도 세계적으로 보기 드문 일이기도 하고 세계 여러 종교 가운데 오늘까지도 여성을 이처럼 남성과 평등하게 대우한 종교도 거의 찾아보기 힘들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그런 부처님이 탄생한 인도는 비록 법적 차별제도는 없다고 하지만, 오늘날까지도 사회적으로는극심한 신분 차별이 여전히 행해지는 상태라고 한다.
한국도 공노비제도가 없어진 것은 1800 년대이고 사노비가 없어진 것은 1894 년도로서 극히 최근인 것이어서 그래서 알고보면 세상은 일반적으로 차별이 없는 상태라기 보다는 상당히 극심한 상태라고 여전히 보게 된다.
그런데 위 상황에서 어떤 주체가 고통을 받는 것은 어떤 다른 주체가 마음대로 뜻을 성취하려고 하기에 그렇게 되는 것임을 볼 수 있다.
예를 들어 광해군이 왕이 되면 영창대군은 고통을 받고 그 반대가 되면 또 광해군이 고통을 받는 관계에서 이들이 서로 자신의 좋음을 추구하기에 그런 현상이 나타난다는 사정을 보는 것이다. 왕족 사이에서도 그렇고 왕후나 후궁 사이의 관계도 그렇고 그런 가운데 주인과 노비의 관계도 그렇고 나중에는 인간과 축생의 관계도 또 그 사정이 그렇다는 것을 본다.
현실에서 방에 바퀴벌레가 하나 나타나면 본인도 상당히 놀라게 되는데 인턴연구원이나 다른 연구원은 곧바로 즉결처분을 통해 살해하려고 임하는 것이 일반이다. 그런데 알고보면 바퀴벌레나 사람이나 먹고 싸고 놀고 하고 쉬고 자는 활동을 하면서 자신의 좋음을 추구하며 살아가는 것은 마찬가지다. 그런데 일단 복장이 바퀴벌레 형태면 대부분 인간에게 발견 즉시 살해당하는 것이 일반인 것이다.
극심한 차별이다. 예를 들어 본인이 어떤 낯선 곳을 방문했는데 복장이 특이하다는 사정만으로 어떤 이가 곧바로 총을 발사해서 죽음을 당하거나 큰 부상을 당하면 기분이 좋겠는가.
그런데 현실 사정이 일반적으로 그렇다.
어떤 이가 그렇게 할 수 있더라도 그렇게 행하지 않는 것은 그 주체가 알아서 할 일이지만, 그러나 일반적으로는 그렇지 않고 대부분 곧바로 죽임을 당하기 쉽다. 그리고 이것이 현실의 일반적 상황이다 . 그러니 세상의 차별이 심하지 않은가.
갑자기 극단적으로 바퀴벌레를 놓고 이 문제를 살피면 너무 극단적이지 않은가 생각하기 쉬운데 알고보면 마찬가지라는 의미다.
그리고 바로 그런 자세가 결국 삶에서 각 계층이나 남녀 신분 지위 재산 종교 등등의 여러 차별문제와 바로 관련이 된다는 점을 볼 수 있다. 왜 그런가 하면 이를 통해서 좋음을 얻을 수 있다고 보는 이가 삶에서 바로 그런 방식으로 다른 이나 다른 생명을 대해 나간다는 점이 공통하기 때문이다.
또 사정이 그렇기 때문에 그 역시 다른 생명으로부터 그런 대우를 받는 것도 충분히 예상되는 일이다.
갑질을 한 이는 조금 지나다 보면 다시 을질을 또 아주 심하게 당하는 것을 현실에서 대단히 많이 보는 것이다.
그런데 또 그 반대의 경우는 또 반대의 사례도 많이 찾을 수 있다.
사극을 보고 이런 글을 적다보니 '결초보은'이란 고사도 생각이 나는데 여하튼 갑질을 하면 을질을 당한다는 사례는 현실에서 윤병임병이란 사자성어가 또 잘 나타내준다고 본다. 병을 돌리면 병에 걸리게 된다는 이 내용은 남녀를 불문하고 통용되는 이야기다.
그런데 이상하게 어떤 조직이거나 태움의 문화라거나 신입 괴롭히기 이런 형태로 갑질을 행하는 문화가 상당히 많고 그런 문화가 있을수록 그 조직의 결속도도 오히려 강하다는 그런 보고도 보게 된다.
그러고 보면 수행자 세계는 상당히 느슨하다고 할 수 있다,.
본인보다 후배인 지장보살 관세음보살 문수보살 보현보살 이런 분들이 선배를 무시하는 경향이 그 대표적인 사례이기도 하고 수행자 라이센스를 받고 난 후로도 입출입이 자유롭다. 예를 들어 수행을 하다가 그만둔다고 해서 갑자기 드럼통에 넣고 시멘트를 부어 바다에 버린다는 형태로 수행자 집단을 나가는 것을 막는 경우도 별로 없는 것이다.
참고로 불교계에 유명한 대력보살님들인 지장보살님 관세음보살님 문수보살님 보현보살님 등이 모두 본인 후배라는 것은 낭설이라고 할 수 있는데 본인보다 늦게 성불할 것이 충분히 예상이 되기에 그렇게 보는 것이다.
일단 세상이 왜 이렇게 차별이 많고 심하고 그래서 사건마다 억울함과 울분을 느끼게 하는 일이 많은가. 이런 생각을 잠시 해보면서 그래도 수행자는 그런 상황에 들어가 안인 수행을 잘 해야만 한다고 보게 되는데 한편으로는 울분을 느끼면서 그래도 안인 수행을 원만히 잘 성취해야 한다. 이 부분이 조금 마음에 걸린다.
일단 쉬자.
본인이 오죽하면 스트레스를 받아가면서 힘들게 버그를 찾아 낸 다음 함부로 대하지 않고 정중히 '방생'을 하겠는가.
각 경우마다 억울함을 느끼고 분노를 일으키고 또 원망이나 원한을 깊게 갖고 살아가는 경우가 대단히 많다.
그래서 이것은 간단한 문제가 아니다.
이미 생사현실에서 자신이나 세계라고 보는 것들이 사실은 하나도 그런 것이 아니고 그런 것을 얻을 수 없음을 제시하는데 아무리 이런 내용을 잘 이해해도 현실에서 그런 상황에 놓이면 곧바로 망집에 바탕해 행해나가는 반응을 보이기 쉽다.
그런데 이런 내용을 미리 이해하지 못하는 경우는 더더욱 그런 증상이 심하게 마련이다.
쉬는 동안 노래를 듣는데 마침 어떤 살인자 도둑을 공개적으로 비난하는 노래를 듣게 되었다. 상당히 심각한 사건을 메세지로 전하는 듯하다.
그런데 본인도 이처럼 현실에서 각 생명의 대량 집단 학살자로 비난을 받은 경우가 많다.
왜냐하면 뻔히 거리에 영희나 철수를 포함해서 수많은 사람들이 여기저기 오가는 모습을 보는데 이 현실에 그런 이나 그런 오고감을 얻을 수 없다고 제시하니, 그러면 그렇게 있다고 보는 그 수많은 사람들은 다 현실에서 어떻게 된 것인가. 그런 주장으로 다 모두 없애 버린 것인가. 이런 오해끝에 본인을 온 생명의 집단 대량 학살 범죄자로 비난하는 경우가 가끔 있다.
그러면 얻을 수 없는 것을 얻을 수 없다고 하고 없는 것을 없다고 하지. 얻을 수 있다고 하고, 있다고 해야 하는가. 답답한 일이다.
그런데 사정이 그런데도 왜 현실에는 갑을간의 갑질 을질이 서로 문제되는가.
그 내력을 찾아보고 알아보다보면 결국 망집에 바탕한 가피 중첩 관계를 또 다시 살펴야 하는데 이것은 과거 조각글에서 많이 살폈으니 생략하고
여하튼 현실에서 그런 내용을 얻을 수 없다고 하면서도 그러나 자신이 도저히 참기 힘들고 억울하고 원통하고 원한이 사뭇칠만한 상황에 처해 있다고 할 때 이를 어떻게 극복해 벗어날 수 있는가. 이것을 놓고 수행자는 고민을 해야 한다고 본다.
이것이 잘 성취되면 이제 앞에 제시한 것처럼 문수보살님이나 보현보살님 지장보살님 관세음보살님 허공장보살님 이런 수많은 대력보살님들이 이제 자신을 함부로 무시하지 않고 다른 의미의 가피를 중첩해 받는 수준에 오르게 되는 것이다.
참고로 이런 대력보살님들이 후배 수행자보다 늦게 성불하게 되는 사정은 그 분들이 갖는 서원 때문에 그런 것인데 여하튼 늦게 성불한다는 점에서는 후배가 되는 것만은 어쩔 수 없다.
그래서 알고보면 빨리 성불하는 것이 또 반드시 좋다고 하기도 곤란한데 이런 사정으로 성불할 가능성이 거의 없다고 보게 되는 자비 이찬띠까형 수행자가 또 주목을 받는 사정도 있다.
여기서 참고로 이찬띠까란 성불할 가능성이 거의 없는 이를 가리키는 표현이다.
그런데 어떻게 하면 가장 늦게 성불할 수 있는가 이런 부분에 초점을 맞추면 위 대력보살님들의 서원을 모두 합쳐 놓고 이것을 물방울 하나라고 한다면, 이렇게 시작해서 자신의 서원은 바다와 같다. 이렇게 놓고 수행에 임하면 또 그 반대가 되는 것이다.
그래서 큰 문제는 없는데 그러나 안인 고지를 원만히 성취하지 못하면 수행자는 수행자지만, 조금 수준이 낮은 수행자로 평가받게 되는 사정만은 충분히 잘 이해해야 한다고 본다.
그래서 알고보면 일반적으로 억울함을 느낄만한 상황에서 억울함을 하소연하는 것 자체가 수준이 낮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
일단 다시 쉬자. 연구방식을 바꾸었다. 자주 쉬면서 아주 조금씩만 연구하고 아주 조금만 글을 적기로..
○ [pt op tr] 음악공양, 나무불, 나무법, 나무승
▼mus0fl--AXELLE RED - Manhattan-Kaboul.lrc
세상을 살다보면
억울하고 분노가 치밀어 오르는 일이 수도 없는데 그런데 이런 상황에서 평안히 참는 수행을 원만히 성취한다는 것은 수행자에게서는 대단히 중요한 일이다.
그런데 어떻게 그런 상황에서 평안히 참는가 이것이 문제다.
금강경에서는 별 이유도 없이 질투심이 일어난 왕에게 붙잡혀 4지를 끊기고 코나 귀 등을 잘리우는 고문을 당하는 상황을 놓고 안인을 성취하는 방안을 제시하는데 그것이 가장 원칙적인 방안이고 이 방안을 원만히 성취하면 또 그로 인해 이후 이전보다 훨씬 수준이 다른 수행을 해나갈 수 있게 되는 것이다.
금강경에서는 아상, 인상, 중생상, 수자상을 갖지 않음으로써 그런 상황에서도 분노를 전혀 일으키지 않고 평안히 참을 수 있었다고 제시하는데 그것은 결국 이전 조각글에서 이미 제시한 방안, 즉 생사의 묶임에서 벗어나는 3 해탈문 가운데 하나인 무상해탈문을 원만하게 닦아 성취하는 방안을 의미한다.
그리고 이는 곧 현실에서 평소 자신이라고 보고 대하는 부분을 놓고 그것이 자신이라는 망집을 일으켜 대하지 않는 것을 기본으로 한다.
그런데 평소 자신이라고 보는 부분이 분명 자신이라고 여기는 한편 그 부분에 대하여 강한 집착을 갖고 대하는 상황이라면 그렇게 자신이라고 보는 부분에서 중요한 감각기관이나 손과 발을 다 잘라내는 그런 상황에서 어떻게 아무런 마음의 동요나 분노를 일으키지 않고 평안히 참을 수 있을 것인가.
그래서 이전 조각글에서 제시한 기본적 이론을 잘 이해하는 것은 비록 그 이론을 그렇게 잘 이해한다고 해서 곧바로 안인을 현실에서 잘 성취할 수 있다고 보기는 힘들지만, 이 내용을 먼저 잘 이해하지 못하면 또 그런 안인을 성취하기는 더욱 힘들다고 보게 된다.
이 내용을 대반야바밀다경 환희품에서는 다음과 같이 제시한다.
...
부처님께서
구수 사리자에게 말씀하셨다.
"보살마하살들은
마땅히 머무름 없음[무주無住]으로써 방편을 삼아
반야바라밀다에 머물러야 하나니,
머무는 곳과
머무는 이를 얻을 수 없기 때문이요,
응당 버림 없음[무사無捨]으로써 방편을 삼아
보시(布施) 바라밀다를 원만케 하나니,
베푸는 이와 베푸는 바 물건을 얻을 수 없기 때문이요,
응당 보호함이 없음[無護]으로써 방편을 삼아
정계(淨戒) 바라밀다를 원만케 하나니,
범함과 범하지 않는 모습을 얻을 수 없기 때문이요.
응당 취함 없음[無取]으로써 방편을 삼아
안인(安忍) 바라밀다를 원만케 하나니,
움직임과 움직이지 않는 모습을 얻을 수 없기 때문이요.
K0001V03P0849b01L; 可得故應以無勤而爲方便圓滿精
응당 힘씀 없음[무근無勤]으로써 방편을 삼아
정진 바라밀다를 원만케 하나니,
몸과 마음의 부지런함과 게으름을 얻을 수 없기 때문이요,
응당 생각 없음[무사無思]으로써 방편을 삼아
정려(靜慮) 바라밀다를 원만케 하나니,
맛의 있음과 맛의 없음을 얻을 수 없기 때문이요,
응당 집착 없음[무착無着]으로써 방편을 삼아
반야바라밀다를 원만케 하나니,
모든 법의 성품과 모습을 얻을 수 없기 때문이니라.
..
위 내용을 보면 원래 각 수행덕목이 당연히 전제로 해야 한다고 보는 내용을 나열하면서 그런 내용을 얻을 수 없기 때문에 수행자는 오히려 그런 사정을 잘 관하고 그런 것을 얻을 수 없음을 방편으로 삼아서 각 수행덕목을 원만히 성취한다는 내용을 제시한다.
이런 내용을 처음 대한다면, 이는 서로 모순되는 궤변적인 내용으로 도무지 이해하기 힘들다고 여길 수 있지만, 이전 조각글들에서 살핀 내용들을 잘 이해한다면 이들 각 문장이 왜 이런 관계로 제시되는가도 잘 이해할 수 있으리라 본다.
그래서 본 바탕에 그런 내용을 얻을 수 없다는 사정을 잘 이해하면 오히려 생사현실에서 생사의 묶임에서 벗어나게 하는 수행도 원만히 성취할 수 있게 되고
또 생사현실에서 수행에 임할 때는 그와 같이 방편을 내어 인위적으로 무소득을 방편으로 수행방안을 실천해가는 수행자세를 취해야
각 수행덕목을 원만히 성취하게 됨을 제시한다.
물론 본 바탕의 측면만 놓고 보면 생사현실 안에서 무소득을 방편으로 수행하거나 유소득을 방편으로 수행하거나, 아니면 아예 그런 수행을 하지 않거나 아니면 수행과는 정반대로 세속에서 악행으로 보는 행위를 심하게 하거나 모두 차별이 없다고 할 것이지만,
그러나 생사현실은 비록 본 바탕의 측면에서 보면 꿈처럼 실답지 않지만, 그러나 정작 꿈은 아니고 꿈과는 다른 것이어서 생사현실에서 겪는 생사고통을 그것이 단지 실답지 않다고 무시하거나 방치할 수 없으므로
생사현실에서 생사고통에 묶이는 상태에서 스스로 벗어나고 또 생사고통을 받는 다른 중생을 제도하기 위해 수행자가 생사현실에서 수행에 임하게 되는데
이런 경우 수행자는 본 바탕의 사정을 잘 관하는 한편 생사현실에서는 그와 같이 인위적으로 방편을 내어 무소득을 방편으로 수행을 해나가야 그 수행을 원만히 성취하게 된다는 사정을 제시하는 것이다.
어차피 본 바탕이 차별이 없고 그런 내용을 얻을 수도 없는데 왜 생사현실에서 수행자가 하필이면 그런 수행을 그렇게 행하고 또 그 수행마저도 무소득을 방편으로 그렇게 수행에 임해야 한다고 하는가는 그런 사정 때문이다.
이 상황을 비유로 설명하자면 정신병원에서 환자를 치료하기 위해 환자들 속에 들어가는 의사의 상황을 놓고 생각하면 쉽다. 의사 입장에서 환자들이 이야기하는 내용이 하나같이 실답지 않음을 잘 이해하지만, 그러나 환자들의 이야기에 공감하고 그에 맞추어 임하지 않으면 그 환자를 치유하기 힘든 것이다
예를 들어 스스로 황제라고 망상에 걸린 환자를 의사가 상대한다면 환자가 주장하는 내용이 하나같이 실답지 않음을 잘 이해하지만, 그러나 정중하게 환자 입장에서 요구하는 내용을 행해주는데 이를 통해 환자가 결과적으로 잘 응대하게 된다고 해도 의사의 입장에서는 이런 내용과 이를 통한 결과 전반을 실답다고 여기고 이를 통해 얻을 바가 실답게 있다고 여기지 않고 그런 내용을 통해 얻을 바가 없음[무소득]을 방편으로 하여 그러나 그렇게 열심히 대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또 다른 상황을 비유하면 유치원에 들어가 유치원 학생을 가르치고자 하는 선생님의 입장을 놓고 생각해도 또 이해가 쉬울 수 있다.
선생님이 유치원 생들이 집착하는 그런 내용이 실답지 않음을 잘 이해하지만, 그러나 유치원 생을 가르치기 위해서는 유치원생의 입장에 같이 공감하면서 그 상황에 같이 들어가 그런 방안으로 임하지 않으면 유치원생을 가르칠 수 없다고 보는 것이다.
유치원생이 보드게임을 하면서 딱지를 많이 집착하거나 점수를 집착한다면 선생님은 이 유치원생을 상대하는 가운데 딱지도 많이 주고 점수도 많이 주면서 상대하지만, 그렇다고 이런 딱지나 점수를 통해 무언가 얻을 것이 있다고 여기면서 그렇게 임하지 않고 그런 것을 통해 얻을바가 없음을 방편으로 집착하지 않는 가운데 그러나 마치 유치원들 사이에서는 봉이 되어 행하는 내용처럼 딱지나 점수를 베풀고 유치원생이 집착하는 구슬이나 장난감은 뺏지 않고 유치원생이 설령 선생님의 구슬이나 딱지를 빼앗아가도 이에 반응해서 같이 분노를 일으키고 상대의 구슬을 뺏지 않고 평안하게 임하면서 기본적으로 임해야 한다는 의미다.
그런데 이 각 경우에 이렇게 임하지 않고 매 경우마다 반대로 임하면서 황제라고 망상에 걸린 이를 끝내 황제가 아니고 노예임을 인정하라고 한다거나 유치원생이 집착하는 것은 그것이 딱지거나 구슬이거나 장남감이거나 어느 것이나 다 빼앗고 전혀 주지 않고 조금이라도 자신의 딱지나 구슬을 취하면 바로 보복을 가하면서 그러면서 이런 망집환자나 유치원생을 망집과 어리석음과 고통에서 벗어나게 이끌려 한다면 그것은 뜻대로 성취되기 힘들다고 보는 것이다.
그래서 그렇게 각 경우에 의사나 선생님 자신부터 상대와 똑같은 망집이나 어리석음과 집착에 바탕해서 표준적으로 제시되는 수행방안을 전혀 행하지 못하면서 단지 본 바탕에서 그런 내용을 얻을 수 없다는 그 측면만 붙들고 자신이 생사의 묶임에서 벗어나려고 한다거나 또는 다른 중생을 제도하려고 한다면 그것은 성취되기 곤란한 것이다.
그런 경우 각 중생이 제각각 스스로 알아서 곧바로 직접 본 바탕의 사정을 이해하고 수행을 직접 행해 벗어나와야 한다고 할 것인데 이는 현실에서 기대하기 힘든 일이다.
예를 들어 현실에서 대부분 어떤 상태에 관심을 갖고 초점을 맞추는가.
앞에서 바퀴벌레의 예를 들었는데 만일 수행자가 바퀴벌레 형태로 나타나면 그 상대가 그 수행자를 존중하고 수행자가 제시한 내용을 받아들이고 수행으로 전환해 임해 생사고통을 벗어나오겠는가.
그렇지 않다.
그러면 현실에서 병들고 가난하고 감옥에 감금된 상태로 나타나면 그렇게 되는가. 그것도 아니다.
이것도 아니고 저것도 아닌데 그렇다고 전혀 방안이 없는 것은 또 아니다.
그래서 현실에서 극심한 악행을 행하는 강도라고 해도 또는 어리석기는 대단히 어리석은 한편 욕심과 고집은 또 대단히 센 유치원생이라고 하더라도 또는 아예 정신이 돌아서 망상분별에 갇힌 정신병자라고 하더라도 수행자가 어떻게 임해서 대하면 그 상대가 그 상태를 벗어나올 수 있는가에 초점을 맞추고 이들 방안이 하나같이 제시된다는 사정을 여기서 제시하는 것이다.
본 바탕은 그런 내용을 얻을 수 없는데 그러나 현실에서 그런 내용이 있다고 그렇게 망상분별을 일으키고 집착을 일으킨 가운데 대부분 임하고 있는 상태이니
수행자는 그런 사정을 잘 관한 가운데 방편을 내어 얻을 것이 없음을 방편으로 해서 하필이면 그러한 수행을 그렇게 행하며 임할 경우에만 스스로도 그런 생사현실에서 생사고통에 묶인 상태에서 벗어나게 되고 또 다른 중생도 제도할 수 있게 된다는 그 사정을 이와 같이 제시하고 있는 것이다.
왜 그런가.
그러면 물고기를 낚으려고 낚시대를 강에 던지는 이에게 왜 스스로 자신의 입장에서 소중하다고 보는 핸드폰이나 자동차를 매달아 걸지 않고 자신이 취하지 않는 그런 지렁이를 꿰어서 낚시를 하는가. 이것을 그 낚시 하는 이에게 물어보는 것과 사정이 같다.
그렇게 해서는 생사현실에 수행자가 임하는 취지가 성취될 도리가 없다는 의미다.
그래서 생사현실에서 수행자가 수행을 함에 있어서는 본 바탕의 사정은 그러하다는 것을 한편으로 잘 이해하고 관하는 한편 이 생사현실에서 중생들이 망집에 바탕해 대단히 집착하고 반응해나가는 내용과 그 방식을 기본으로 놓고 그런 상태에서 망집을 일으킨 중생들을 제도할 수 있는 방편을 그렇게 취하고 임할 때만 수행자가 생사현실에서 수행에 임하는 수행 취지가 원만하게 성취된다는 사정을 위와 같이 제시하고 있는 것이다.
그 사정을 그렇게 이해하지 못하면 결국 위와 같은 구절을 이치에 맞지 않는 내용으로 이해한 가운데 스스로 생사의 묶임에서 벗어나오지도 못하고 또 다른 중생도 마찬가지로 제도하지도 못하게 되고 그런 상태로 망집을 일으킨 다른 중생과 함께 얽혀 무량겁을 지내게 되고 마는 것이다.
억울한 일을 당했을 때 대부분 어떻게 마음을 갖게 되는가. 이것을 길거리에서 심리 탐지기를 비치하고 앙케이트 조사를 한다면 99.9 %가 통쾌한 복수 보복을 희망한다는 사실을 관찰할 수 있다.
그래서 일반적 입장에서는 고통과 분노에는 그에 상응한 분노와 보복 가해 이런 내용을 연결지을 수 있다.
그런데 현실에 임하는 대부분의 상태가 이와 같은데 왜 수행자는 본 바탕에 그런 내용을 얻을 수 없다고 하면서 억울한 가해를 당하는 그 상황에서 하필이면 그것을 평안히 참는 것을 택하고 또 반대로 다른 생명에게 나쁨을 가하지 않고 좋음을 베푸는 것을 택하는가.
본 바탕에 그런 내용을 얻을 수 없으므로 어차피 이것이나 저것이나 본 바탕에서는 차별이 없으므로 수행자도 생사현실에서 온갖 방편을 사용해서 상대가 다시는 그런 일을 행하지 못하고 앞으로 꿈도 꾸지 못하도록 철저한 응징과 보복을 가해도 무방하지 않겠는가. 이렇게 일반적으로 생각하기 쉽다.
앞 구절을 전제로 한 경우에는 뒷 구절과 같은 내용을 제시하는 것도 별로 이상하지 않다고 보기 쉽다.
그래서 앞에 하필이면 그런 수행방안을 그렇게 취해 하필이면 그런 방편으로 임하게 되는 그 사정을 제시한 것이다.
본 바탕에서는 현실에서 문제삼는 생사고통을 얻을 수 없고 따라서 문제가 되지 않는다.
그런데 처음 생사현실에서 수행이 문제되는 사정은 그런 내용을 얻을 수 없는 본 바탕인 진여 실재에서 그것이 문제되는 것이 아니다.
현실은 본 바탕에 비추어볼 때 실답지 않고 꿈과 같은 성격의 내용이지만, 그런데 그것은 또 정작 꿈은 아니어서 바로 이 현실에서 각 중생이 그처럼 실답지 않은 내용을 붙잡고 생사고통을 극심하게 받아나가는 것이 문제이기에 이를 벗어나는 수행이 문제된 것이다.
또 그런 생사현실에서 겪는 생사고통을 벗어나기 위해 그렇게 실답게 여기며 집착을 갖고 대하는 그 현실이 그러한 사정으로 본 바탕에서 그 내용을 얻지 못하는 것이어서 그것이 실답지 않음을 관하고 이를 통해 집착을 제거하고 그런 망집에 바탕해 받는 생사고통의 상태에서 벗어나기 위해서 이런 본 바탕의 상태를 처음에 잘 관하는 것이 요구되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런 가운데 생사현실에서 받는 그런 생사고통을 벗어나려면 직접 그런 생사고통을 당장 받는 상황에서는 앞과 같이 원칙적으로 무상해탈문을 닦아 상을 일으켜 취하지 않고 원칙적으로 벗어나는 것도 방안이지만,
불필요하게 그런 생사고통을 받지 않도록 그런 결과를 받아나가지 않을 수행을 미리 잘 행할 것도 함께 요구되는 것이다.
그리고 이 두 부분에서 이를 모두 잘 원만히 성취하기 위해서 생사현실의 본 바탕이 공하고 생사현실에 자신이 생각하는 그런 분별내용을 역시 얻을 수 없고 자신이 일으킨 관념분별에는 또 그런 내용이 들어 있지 않고 이름 뿐이다는 등의 그런 사정을 공삼매, 무상상매, 무원무작삼매 등을 통해 기본적으로 다 함께 잘 관하는 것이 요구되는 것이다.
그런데 비닐마술의 비유에서 설명한 것처럼 감각현실의 비닐판에서 △ 를 얻고 이에 대해 관념분별의 비닐판에서 ○ 라는 생각을 일으킨 경우 그 주체는 이 두 비닐 내용을 겹쳐 대하는 가운데 어느 비닐 영역에도 얻을 수 없는 안이 세모인 도너츠 ㋰ 와 같은 내용이 있다고 여기게 된다.
그는 ㋰ 가 현실에 있다는 내용을 다음과 같이 주장하게 된다. 저기 자신이 생생하게 △ 를 얻는다. 그것이 ○ 이 아니고 무엇인가.
△ 를 그처럼 생생하게 얻고 그것을 자신이 ○ 라고 생각하는데 이처럼 분명한 내용을 왜 망상분별이라고 하는가. 이렇게 임하는 것이다.
그래서 그런 망집을 일으킨 주체에게는 결국 그런 망집을 통해서
어느 비닐 영역에서도 실답게 있지 않은 안이 세모인 도너츠 ㋰ 가 마치 실답게 있는 것처럼 되는 것이다.
그래서 이것이 하나의 세계가 되는 것이다. 왜냐하면 이런 망집을 일으킨 이들은 이런 내용을 바탕으로 온갖 것을 행하고 그에 머물기 때문이다.
이미 100m 앞에서 자신 앞으로 뛰어 오는 영희의 상황을 놓고 이 내용을 설명했다.
100m 앞에서 영희가 자신 앞으로 수밀도 같은 가슴에 이슬이 맺도록 뛰어 올 때 처음에는 손가락보다도 작게 보인 영희가 점점 모습도 커지고 형태도 변화해서 그것을 기호로 나타내면 α,β,γ,δ,ε,ζ,η,θ,ι,κ,λ,μ,ν,ξ 이런 형태가 매 순간 된다고 한다면 이런 내용을 놓고 이를 대하는 주체는 그 α,β,γ,δ,ε,ζ,η,θ,ι,κ,λ,μ,ν,ξ 가 모두 다 영희임에 분명하다고 여기면서 대하고 있는 것이다.
이런 망집 증상을 일으킨 입장은 α,β,γ,δ,ε,ζ,η,θ,ι,κ,λ,μ,ν,ξ 라는 감각현실은 감각현실이고 그에 대해 일으킨 관념분별로서 영희는 영희다. 이렇게 이를 대하는 상태가 아니다.
α,β,γ,δ,ε,ζ,η,θ,ι,κ,λ,μ,ν,ξ 에서 α도 영희고 β도 영희고 여하튼 α,β,γ,δ,ε,ζ,η,θ,ι,κ,λ,μ,ν,ξ 이 각 부분이 다 영희라고 여기면서 이것을 대하는 상황이라는 의미다.
그런데 α,β,γ,δ,ε,ζ,η,θ,ι,κ,λ,μ,ν,ξ 에서 그 영희가 어디있는가 그 영희를 찾아내라고 하면
자신이 지금 생생하게 α,β,γ,δ,ε,ζ,η,θ,ι,κ,λ,μ,ν,ξ 란 내용을 얻고 있고 보고 있고 만지고 있고 이것을 자신이 영희라고 명료하게 생각하고 대하는데 여기에 이 이상 분명하고 이처럼 자체적으로 자명하고 명료한 내용이 어디있는가 하면서 거꾸로 반문하게 된다는 의미다.
이런 망집 상태를 기준으로 하면 이런 내용이 그럴듯하다고 여기게 되는데 그러나 감각현실- 관념분별의 관계도 그렇지 않고 본 바탕인 실재 - 감각현실의 관계도 그렇지 않고 본 바탕인 실재 - 관념분별의 관계도 역시 그렇지 않다고 기본적으로 경전에서 부처님이 제시하는 것이다.
그런데 현실에서는 이런 망집을 기본으로 하고 특히 욕계에서는 이런 망집을 기본으로 좋고 나쁨의 분별과 집착을 일으키고 이에 바탕해 쓸모없는 희망을 일으켜 갈구하며 추구하는 상태에 있는 것이다.
쉽게 말해 이런 것이다.
자신이 커피를 마시고 싶어한다면 이 커피는 자신의 관념분별 내용으로서 그런 희망을 일으켜 가진 것이다.
그런데 앞의 망집을 바탕으로 현실에 임하는 '욕계' 중생은 기본적으로 앞의 망집을 전제로 그렇게 임하는 것이어서 그런 희망을 어느 영역에서 구하는가하면 감각현실 영역에서 자신의 희망에 해당하는 내용이 있다고 당연히 전제하고 그렇게 여기면서 그 내용을 감각현실 영역에서 찾고 구하면서 현실에 임하는 상황인 것이다.
예를 들어 현실에서 커피를 마시고 싶다는 이가 자신의 희망이 성취되어서 커피를 잘 마시고 있어서 만족한다는 그 상황은 그 주체 입장에서 자신이 커피라고 보는 내용을 감각현실에서 그처럼 얻어서 마신다고 여기는 상태에서 그렇게 된다는 의미다.
다시 말해 처음 △ 를 그처럼 생생하게 얻고 그것을 자신이 ○ 라고 생각하면서 현실에 안이 세모인 도너츠 ㋰ 가 있다고 여긴 입장에서는 자신이 ○ 를 얻기를 원한다고 할 때 그 내용을 관념분별 영역에서 ○ 를 일으켜 얻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 것이 아니고
자신이 ○ 을 얻기를 희망한다는 그 의미는 결국 감각현실 영역에서 △ 를 얻고 그런 상태에서 그 △ 를 얻고 그에 대해 그것이 ○ 라고 여기며 대하는 상태가 되기를 원한다는 내용을 그렇게 표현해 제시하는 것이다.
조금 복잡하지만, 욕계에서의 사정이 그런 것이다.
위 내용을 잘 이해하려면 위 내용이 아닌 경우에 앞의 주체가 자신의 희망이 성취되었다고 여기는가를 놓고 검토해 보면 쉽다.
1- 그 주체가 감각현실에서 커피에 해당한다고 보는 것을 얻지 않고 단지 희망에 해당하는 관념분별만 세밀하게 반복해 그려내는 것을 그 희망이 성취되었다고 여기는가.
즉 위 상황에서 그 주체가 ○ 만 계속 다양하게 ○● 이런 형태로 반복해 그려 내 얻는 것을 희망이 성취되었다고 여기는가. 욕계에서 희망을 일으켜 갈구하는 입장은 그렇지 않다.
2 - 감각현실 영역에서 그러면 ○ 자체를 얻을 수 있는가. 그것은 처음부터 가능하지 않다. 설령 가능하다해도 앞의 1에서 그런 것을 문제삼은 것이 아님을 이미 보았다.
○ 은 아니나 그러나 ○ 을 일으키게 되는 △라는 감각현실을 얻기를 원한 것이다. 즉 커피를 마시고 싶다고 할 때는 커피란 관념이나 글자를 원한 것이 아니고 눈으로 보는 커피 입으로 마시고 향을 맡고 마시면 배도 조금 부른 그런 커피 즉 감각현실에서 각 내용을 얻게 하는 그런 커피를 원했다는 의미다. 일반적 입장에서는 이는 이상한 일은 아닌데 사정이 그렇다는 의미다.
3 - 그런데 △ 을 얻은 그 상황에서 다시 △ 만 얻고 그것을 통해 그것이 ○ 라는 관념분별을 일으키지 못하는 상황을 또 가정해보자. 이 경우는 앞에 제시한 경우와는 상황이 다르기 때문이다. 그런 경우 그 주체가 자신이 가졌던 희망이 성취되었다고 여기게 되는가 이 문제다.
즉 어떤 이가 켜피를 원해서 다른 이가 커피를 건네주어 받았는데 정작 그 주체가 자신이 마시는 그것이 무엇인지 관념분별을 일으키지 못하고 멍한 상태로 있다거나 또는 의식을 잃은 상태라거나 한다면 그것을 그 주체가 자신의 희망이 성취된 상태라고 보겠는가 이 부분이다. 그렇지 않다.
4 그런데 △ 라는 감각현실 자체는 그가 그에 대해 일으킨 관념분별 ○ 인가. 또 반대로 그에 대해 일으킨 관념분별 ○ 자체는 또 그가 얻은 감각현실 △ 인가. 그렇지 않다는 의미다. 다만 망집을 일으킨 상태에선 이들을 함께 접착시켜 놓은 상태에서 이를 명료하게 구분해 분별을 잘 행하지 못하고 있는 것 뿐이다.
그런데 그런 주체에게 있어서 △ 과는 전혀 무관하게 즉, △를 떠나서 ○ 라는 관념분별을 얻는 것도 또 아닌 것이다.
그래서 앞과 같은 망집을 일으킨 바탕에선 이들이 그렇게 접착된 상태로 그 현실에서 그렇게 임하고 그런 내용을 그렇게 취하고 그에 머물고 그에 바탕해서 계속 행해나가는 상태가 된다는 의미다.
본래 비닐마술을 놓고 대하면 ㋰ 란 내용은 어느 비닐에도 그 내용을 얻을 수 없다는 것을 쉽게 확인하지만, 현실에선 그렇지 못하다.
즉 현실에서 감각현실로 α,β,γ,δ,ε,ζ,η,θ,ι,κ,λ,μ,ν,ξ 를 대하는 이는 그것이 곧 영희라고 여기면서 그것을 대하는 것이고
또 평소 자신이 영희라고 생각을 떠올릴 때는 당연히 현실에서 보고 만지고 대하게 되는 그런 α,β,γ,δ,ε,ζ,η,θ,ι,κ,λ,μ,ν,ξ 를 전제로 하면서 영희라는 관념분별을 행하고 있는 상태인 것이다.
다시 △ 란 감각현실과 ○ 의 관념분별을 놓고 이 관계를 설명하면 망집을 일으킨 주체는
△ 란 감각현실을 대하면서 그것이 ○ 라는 관념분별을 일으킨 후에는 △ 란 감각현실은 ○ 란 내용이 거기에 있다고 여기면서 △ 을 대하는 상태이기에
원래는 그 영역에 △ 뿐인데 그 주체는 그 △ 이 단순한 △ 이 전혀 아니고 ○ 란 내용이 '있는' △ 또는 ○ 인 △ 이렇게 평소 △ 를 대하고 있는 상태라는 의미다.
비슷한 내용을 두번 반복하는 것은 번거롭지만, 그 주체가 다시 ○ 란 관념분별을 다시 되살려 생각할 때도 마찬가지다. 그가 ○ 란 관념분별을 생각한다면 사실은 관념분별 영역안에 그가 일으킨 ○ 뿐인데 그는 그렇게 여기는 것이 아니고 ○ 은 당연히 그 안에 감각현실 영역에서 얻는 △과 같은 내용을 그 구성요소로 갖고 있는 ○ 또는 결국 감각현실영역에서 얻는 △ 인 ○ 이렇게 이들 내용을 접착시켜 놓고 이 ○ 를 평소 의식하고 대하는 상태라는 의미다.
이것이 망집증상의 기본 형태다.
왜 망집이라고 하는가.
그것이 실답지 않은 것은 마찬가지이지만 감각현실 영역에서 △ 을 얻었다거나 관념분별 영역에서 ○ 을 얻었다고 이를 단순히 망집이라고 하는 것이 아니다.
그 영역에 그런 내용을 얻을 수 없는데 그런데 그 주체가 그 런 영역에 자신이 생각하는 내용이 있다거나 그런 내용을 얻을 수 없는 다른 영역의 내용이 바로 그것이다라고 여기면서 엉뚱한 것을 붙잡고 취하고 머물고 늘어지는 현상이 망집현상이라고 지적하는 것이다
화분에 우주인이 전혀 없는데 그러나 화분만 보면 그것을 우주인이라고 여기면서 어떤 이가 반응하거나 자신이 황제의 실질이 아무 것도 없는데 그러나 거울만 보면 자신이 황제라고 여기면서 임하거나 하면 그 증상이 바로 망상증상인 것이다.
그런데 감각현실에서 얻는 △ 과 그에 대해 일으킨 관념분별 ○ 상호간의 관계가 기본적으로 그런 상태인 것이다.
그리고 앞에서 설명한 내용은 망집환자가 일으킨 나머지 영역의 내용들 대부분에서 공통적으로 발생하는 망집 형태가 된다.
다시 말해 감각현실을 그 주체가 얻으면 그 주체는 그런 감각현실을 얻게 된 본 바탕인 실재 영역도 그와 같다고 또 여기는 것이다 .
또 어떤 음식을 대해 먹으면서 좋음을 느끼면 그 주체는 그 좋음이 그 음식에 있다고 또 여기는 것이다.
결국 감각현실 ~ 느낌 감각현실 ~ 관념분별 본 바탕인 실재 영역과 ~ 감각현실 본 바탕인 실재 영역과 ~ 관념분별
이런 각 내용마다 앞의 망집환자는 매 경우 그 문제를 그렇게 접착시켜 놓고 매 순간 대해나간다는 의미다.
그것이 왜 문제되는가. 비유로 설명하면 어떤 이가 침대에 누어 바다나 황금 꿈을 꾸고 나서 그런 꿈을 침대에서 꾸었다는 이유로 자신이 꾼 바다나 황금이 그 침대에 그렇게 있다고 여기면서 대한다면 어떤 문제가 발생하는가.
그런데 앞처럼 두 내용을 놓고 대하는 것은 이 경우 그 꿈 내용이 다른 영역에서도 그처럼 얻어지고 있다고 여기는 것으로서 곧 그 꿈이 실다운 내용이라고 여기는 망상 증상인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실답지 않은 꿈을 실답다고 여기면 당연히 실답지 않은 꿈 내용을 붙잡고 집착을 일으켜 대하고
그리고 그에 바탕해 또 침대를 대하기 때문에 그로 인해 엉망이 되는 것이다.
비유를 든다면 침대는 침대인데 그 망상환자는 침대를 바다나 황금이라고 여기면서 침대를 자꾸 뒤적거리고 침대를 옮기고 파고 그러는 상황과 비슷한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이 꿈에서 든 비유와 같은 상태가 욕계에서 활동하는 생명의 기본 상태라는 의미다.
너무 환자가 많아서 오히려 이런 환자의 상태가 정상인 것처럼 여겨질 수는 있지만, 사실은 바람직한 것도 아니고 바로 이 부분에서 극심한 고통을 받는 3 악도라는 세계가 실답지도 않는데 대단히 실답고 생생한 형태로 나타나고 존재하게 된다는 의미다.
어떤 주체에게 그렇게 생생하고 실답게 존재하는가하면 앞에서 비닐 마술을 통해 △ 과 ○ 만 있는 비닐을 놓고 거기에 안이 세모인 도너츠가 실답게 있다고 여기는 망상증을 일으킨 망집환자에게는 그것이 대단히 그처럼 실답고 생생한 형태로 있다고 믿고 대하게 되는 세계가 된다는 의미다.
그래서 지옥에서 매를 맞고 고통을 받는 중생에게 문수보살님이 이것은 알고보면 꿈과 같다고 아무리 말하고 깨달음을 통해서 꿈을 깨어나고 그런 생사고통에서 벗어나오라고 열심히 옆에서 말해주어도 그 당사자는 그렇게 되지 못하고 실답지 않은 그 내용을 매 순간 그렇게 생생하고 실답게 받아나간다는 안타까운 사정을 제시하는 것이다.
여하튼 욕계에서는 이런 망집을 기본으로 한 상태에서 다시 자신이 좋다고 여기는 내용이나 싫다고 여기는 내용에 집착을 일으켜 어리석음과 탐욕과 분노를 바탕으로 행해 나가는 가운데 극심한 생사고통을 받아나가는 상태로 업을 매순간 행하고 그로 인해 3 악도에 진입해서 극심한 생사고통을 무량하게 받아나가게 되는 것이다.
생사현실에서 문제가 되는 3 악도의 고통은 그래서 욕계에만 있는 문제인 것이다.
그래서 색계 무색계는 그런 3 악도가 없고 하늘 세계로만 되어 있어 그 자체만 놓고 보면 별 문제가 없다고 할 수도 있는데
그러나 결국 기본적인 무명 어리석음과 존재에 대한 집착을 바탕으로 결과적으로 이런 욕계의 3 악도의 고통을 끝내는 받게끔 되는 관계에 함께 묶여 놓여 있게 되므로 역시 3 계6 도는 전반적으로 다 함께 생사고통을 받는 상태로서 수행자가 함께 벗어나야 할 내용이라고 제시되는 것이다.
그런 가운데 어떤 업의 장애를 통해 개별적으로 각 주체가 그런 생사고통을 받아나가게 되는가는 다음 사정을 살피면 쉽게 이해할 수가 있다고 본다.
현실에서 어떤 주체가
극히 고통스럽고 불쾌하고 수치스럽고 분하고 억울한 일을 당한다고 여기는 상황에 처할 때 그 주체가 그 상황만 딱 떼어내서 그것을 살피면 이에 대해 자신이 상응한 가해를 가하고 보복을 해야만 이것이 결과적으로 공평해지고 정의가 실현된다고 대부분 보게 된다.
그런데 앞에서 가피 중첩관계라고 제시한 내용은 넓고 길고 깊게 이 내용을 관찰하게 되면 그 내용은 그렇게 단순하지 않다는 사정을 제시하는 것이다.
이전 조각글에서 유리왕이 석가족과 전쟁을 해서 석가족을 구덩이에 묻고 코끼리로 밟아 죽이게 하고 소에 쟁기를 달아 쟁기로 머리를 갈아 죽이게 하고 여인들을 벌거벗겨서 불에 태워 죽이고 이런 행위를 했다고 하는 것도 그 사정을 알고보면 마찬가지다.
이 한 장면만 보면 그런 행위를 한 유리왕이 대단히 악하다고 보게 되고
또 한편 이런 피해를 당하는 석가족 입장에서는 다시 후일을 기약하며 통쾌한 보복 응징조치를 기대하기 마련인데
그런데 가해와 피해가 각 주체별로 그리고 각 시기별로 그리고 각 측면과 기준에 따라 무량하게 중첩된 상태에서 이런 하나의 사건이 나타난다는 사정을 관하면 앞의 내용은 부적절하다고 오히려 보게 되는 것이다.
알고보면 과거에 석가족이 물고기로 지내던 유리왕 족을 그렇게 대한 것이고
또 가장 가까운 근인을 찾으면 태자였던 유리왕이 석가족을 방문했을 때 석가족들이 유리왕에게 모욕을 주고 수치심과 불쾌감을 주었던 것이다.
그러니 또 입장을 바꾸어 놓고 보면 그런 상태로 모든 것이 끝난다면 유리왕 입장에서는 또 억울해서 밤잠을 못 잔다고 호소하는 상태가 나타나게 되는 것이다 .
그런데 만일 이 가피 중첩관계를 계속 입장을 옮겨가면서 앞과 같이 그 상황에서 취할 도리밖에 없다고 대부분 보는 그런 반응을 해나간다면
결국 그것이 무량한 생사고통을 묶여 그처럼 반복해 받아나가고 고통을 증폭시켜나가는 그런 상태가 된다는 의미다.
이것이 일반적이 가피 중첩관계의 의미다.
그런데 이렇게 서로 얽혀 있을 때 가해를 막 마친 입장은 이제 그렇게 해서 자신이 보복을 하고 통쾌함을 맛보았으니 이제 여기서 이 관계를 그만 두고 벗어나도 되겠다고 여기게 되는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이 가피중첩관계가 계속 이어져 나가는 것을 끊는 스위치를 누를 권한은 가해자에게 있는 것이 아니고 막 피해를 본 쪽에 주어져 있는 것이다.
왜냐하면 같은 문제지만 한 번 더 나아가보면 그 사정을 쉽게 알 수 있다. 그 상황에서 가해자는 이제 자신은 되었다고 여기고 그만 해도 된다고 여기는데 그렇게 되지 못하는 것은 막 피해를 본 입장에서 그렇게 그것을 대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피해를 본 입장은 다시 자신이 그에 상응한 보복이나 가해를 한 연후에 이제 그 관계를 그만두어도 두겠다. 대부분 이렇게 마음을 갖는다는 의미다. 그러나 당장은 그런 상태를 성취하지 못한 상태로 지내다가 상황이 변하여 그런 뜻을 실현할 수 있는 기회가 되면 그런 피해를 받았던 이가 나중에 그 보복을 성취하게 되면 그 상태는 또 앞과 마찬가지가 되는 것이다.
이 경우는 이제 또 입장이 바뀌어서 그런 보복을 마친 입장에서는 이제 그것으로 되었다고 여기고 그만 두고 그 관계에서 벗어나 떠나려고 하는데
또 그렇게 되지 못하는 것은 그 반대 입장에서 그렇게 임하지 않기 때문인 것이다.
이처럼 단 두 번의 관계를 살폈는데 이것이 무량하게 앞 뒤로 나아가도 가피중첩관계의 사정은 그 사정이 이와 같다고 제시하는 것이다.
그러니 일반적으로 욕계안의 생명들 99 % 가 이런 상태로 임하는 가운데 서로 얽혀서 업의 장애를 무량하게 쌓아 놓고 있는 상태에서 이들을 생사고통에서 벗어나게 하려면
수행자 자신이 이런 상황에 처할 때 어떻게 임해야 이런 무한한 가피 중첩관계에서 스스로 빠져 나오고 다른 중생도 함께 빠져 나오게 할 것인가. 바로 이 부분이 수행의 문제인 것이다.
사람은 이런 경우 그렇게 행하는 것은 오직 자신이나 사람만 그럴 것으로 여기고 대하지만, 세상에서 보는 곤충이나 소나 개나 일체 생명이 다 제각각 그렇게 자신이 좋다고 보는 것을 그렇게 추구하고 나쁘다고 보는 것을 그렇게 피하고자 노력하는 것인데 처음 무엇을 그렇게 좋다고 보고 무엇을 나쁘다고 보고 그렇게 임하게 된 것인가하는 부분은 결국 다 마찬가지로 앞에 제시한 기본적인 근본 무명 망집을 바탕해서 그렇게 임하게 된 상태라는 의미다.
그래서 무량겁에 걸쳐 무량하게 가해와 피해를 무량한 방면에서 무량한 주체와 얽혀서 주고 받는 가피 중첩관계에서 스스로 벗어나고
이 가피중첩관계를 부처님과 보살님의 가피를 중첩에서 받는 관계로 바꾸려면
자신이 극히 억울하고 불쾌하고 고통을 받는 그런 상황에 처할 때 어떻게 달리 임해야 그것이 가능한가를 놓고 깊이 생각을 해야 하는 것이다.
물론 답은 이미 수행방안에 간결하게 제시되어 있는데 본 바탕에서 그런 내용을 하나도 얻을 수 없는데 그러나 망집을 바탕으로 생사현실에 묶여 있는 상태에서는 사정이 위와 같음도 잘 이해해야 하는 것이다.
탐욕을 추구하고 분노를 일으키고 어리석음에 반응하면 업의 장애를 쌓아나가게 되고 그로 인해 생사의 고통을 극심하게 무량겁에 걸쳐서 받아나가게끔 되는가.
그 사정은 위 관계를 하나 놓고 검토하면 곧바로 쉽게 이해할 수 있다.
그런데 그 관계를 그렇게 보지 못하고 자신이 초점을 맞추는 하나의 내용만 불들고 대하면
그 사정을 스스로도 이해 못하고 그 원인이 되는 상태에서도 그 사정을 이해를 못하고 그 결과가 나타나는 그 상태에서도 그 사정을 이해를 못한 가운데 그렇게 3 악도를 무량하게 헤매 돌아다니게 된다는 의미다.
비유하면 음식을 먹으면 얼마 있지 않아 배설을 하게 되고 봄에 씨를 뿌리면 가을에는 열매를 맺게 되는데 어떤 이가 음식을 먹을 때는 나중에 무슨 일이 있는가를 알지 못하고 먹고 또 배설할 때는 자신이 무엇을 먹어서 그런 일을 하는가를 알지 못하고 배설을 하고 씨를 뿌릴 때는 무슨 열매가 나오는 지 미리 헤아리지 못하고 씨를 뿌리고 열매가 열릴 때는 이 열매가 무슨 씨로부터 나온 것인지 알지 못하고 열매를 대하는 것과 사정이 마찬가지다.
그래서 넓고 길고 깊은 광장심 관찰을 바탕으로 수행에 임하는 입장에서는 현실에서 매 순간 매 단면에서 이렇게 좁고 짧고 얕은 협단천 관찰을 바탕으로 임하고 반응해나가는 입장이 대단히 답답하고 안타까운 것이다.
그런데 현실적으로 지금 자신이 자신으로 보고 대하는 부분에서 손과 팔이 잘려 나가고 눈과 귀와 코 등등이 다 짤려나가는 상황인데 그러면 끝인 것이지. 여기에 무슨 이어질 다른 스토리가 또 있다고 여기서 분노나 억울함도 느끼지 않고 평안하게 이를 대할 수 있다는 말인가. 이것이 도대체 무슨 이야기인가.
이 부분을 평소에 하나의 현실 단면을 잘 붙잡고 잘 이해하고 평소 그런 상황에 대처해 수행과 훈련을 꾸준히 잘 닦아야 한다고 제시하는 것이다.
평소 훈련과 수행이 잘 되어 있지 않으면 누구라도 그런 상황이 되면 황망함을 느끼게 되고 얼굴이 노랗게 변하게 되는 것은 어쩔 수 없다.
그리고 또 그렇게 반응하면 결국 앞에 제시한 무량한 가피 중첩관계로 진입해 들어가게 되는 것도 또 어쩔 수 없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총체적으로 수행의 부족을 의미하는 것이다.
평소 수행을 열심히 행하는 것은 생사 현장에 자신이 처한 그 순간에 어떤 티겟을 끊고 어떤 세계로 진입해서 어떤 취지로 앞으로 임할 것인가에 대한 방향을 잘 잡기 위해서인데
평소 아무리 준비를 해도 막상 기차역 앞에서 평소 희망하고 예약해두었던 좋은 티겟을 찢어 버리고 다른 티겟을 구해서 올라타면 또 어쩔 수 없는 것이다.
그래서 학생이 평소 공부를 열심히 행하는 것은 단지 입시만을 위해서 그런 것이 아니라고 하더라도 그러나 평소 공부를 열심히 하고 입시일에 엉망으로 임하면 그것도 엉터리인 것이다.
그런데 평소 공부를 하지 않은데 입시일 당일만 바짝 잘 임하면 시험을 잘 볼 수 있는 것도 또 아닌 것이다.
수행도 이와 마찬가지다.
그래서 평소 자신이 역적모의를 한 일도 없는데 공연히 자신의 가족을 모두 체포해서 하나하나 고문을 하고 손과 발을 자르고 또 가족을 종으로 잡아가고 그런다고 가정을 하면서 자신이 이런 상황에 처해 어떻게 분노를 일으키지 않고 평안히 대할 수 있는 것인가.
이런 상황을 가상적으로 그려 놓고 최소한 수행자라면 그런 상황의 정체에 대해 그 이론적 사정을 먼저 평소 잘 이해하고 또 평소 잘 수행을 닦아서 이런 상태에 표준 대처 방안을 평소 잘 익히고 미리 잘 준비하고 있어야 한다고 보는 것이다.
그 이론적 설명은 이미 비닐 마술 이론과 100 m 앞에서 수밀도 같은 가슴에 이슬이 맺도록 달려오는 영희를 놓고 충분히 설명했다고 보는데 다시 설명하면 다음과 같다.
현실에서 매순간 자신이 자신이라고 보고 대하는 내용이나 또는 영희나 철수라고 보고 대하는 내용은 다음과 같다고 할 수 있다.
α,β,γ,δ,ε,ζ,η,θ,ι,κ,λ,μ,ν,ξ
알고보면 매순간 그 크기나 형태가 다 다르다.
잘 이해가 안 되면 갓난아이 때 자신의 모습과 초등학교 시절의 자신의 모습 등을 죽 나열해 놓고 이 상황을 이해하면 쉽다.
그래서 매 순간이 다른데 이상하게 각 주체는 특정한 α,β,γ,δ,ε,ζ,η,θ,ι,κ,λ,μ,ν,ξ 를 놓고 평소 자기 자신이라고 여기거나 또는 영희라고 여기는 한편
또 이와는 달리 다른 바위나 물이나 산 등은 바위나 물이나 산이고 자신이나 영희나 철수가 아니라고 구분해 대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α,β,γ,δ,ε,ζ,η,θ,ι,κ,λ,μ,ν,ξ
이 가운데 무엇이 이들 여러 내용을 대표하는 것인가를 놓고 찾아보면 이들에서 그런 내용을 찾아내기 곤란함을 보는 것이다.
그런데 그런 사정에도 불구하고 각 주체는 α,β,γ,δ,ε,ζ,η,θ,ι,κ,λ,μ,ν,ξ 를 또 하나의 주체로 여기는데 어려움이 별로 없다고 스스로 파악하는 것이다. 그런데 그것이 무엇때문인가.
과거 조각글에서 앞의 내용이 무엇인지 잘 모르지만, 여하튼 현실에서 그렇게 각기 다른 α,β,γ,δ,ε,ζ,η,θ,ι,κ,λ,μ,ν,ξ 를 한 주체로 보게 하는 무언가가 있어서 그렇게 현실에서 각 주체가 자연스럽게 임하고 있는 것이니 그렇게 만든느 그 무언가를 일단 U 라고 표시하고서 이렇게 각기 다른 α,β,γ,δ,ε,ζ,η,θ,ι,κ,λ,μ,ν,ξ 를 다른 산이나 강과는 또 구분하면서 하나의 주체로 관하게 되는 사정은 바로 그런 U 때문에 그렇다라고 일단 결론을 내린 것이다.
문제는 그 U 가 α,β,γ,δ,ε,ζ,η,θ,ι,κ,λ,μ,ν,ξ 에서는 직접 찾아지지 않는다는 점이다.
그리고 그 U 를 기준으로 잡고 α,β,γ,δ,ε,ζ,η,θ,ι,κ,λ,μ,ν,ξ 를 살피면 현실에서 매 순간 자신이라고 여기고 대하는 그 내용들은 하나같이 그 U 가 그 생에서 그 순간에 걸치고 있는 옷이나 신발과 같은 성격을 갖는 내용일 뿐이라고 제시하는 것이다.
그런데 만일 현실에서 일반인이 보는 것처럼 각 순간에 자신이라고 여기는 내용을 거꾸로 뒤집혀서 정말 자신이라고 여기고 대한다면 다음과 같은 입장이 되는 것이다.
α,β,γ,δ,ε,ζ,η,θ,ι,κ,λ,μ,ν,ξ 로 나열한 내용에서 갓난아이 시절에 스스로 자신이라고 여긴 내용은 α이고 초등학교 시절에 스스로 자신이라고 여긴 내용은 β이고 ... 지금 이 순간에 스스로 자신이라고 여기는 내용은 또 ξ라고 해보자.
그러면 이를 놓고 그 주체는 이렇게 말해야 한다.
초등학교 시절에 자신 α은 지금 이 순간에는 아무리 찾아도 찾아낼 수 없고 볼 수 없어서 비유하면 이미 사망해서 장례를 치루고 화장한 것과 상태가 같아서
그 당시 자신을 구성한 내용은 다 갈기갈기 찢겨져 공중에 흩어진 상태와 같다. 이렇게 보아야 한다.
또 반대로 지금 자신이라고 보는 ξ는 또 갓 태어난 시점이거나 초등학교 시절로 그것을 옮겨 놓을 수도 없고 따라서 그 시기를 기준으로 하면 그런 내용은 전혀 그 존재를 인정하기 곤란한 엉터리 같은 것이다
이처럼 이 내용을 보아야 하는 것이다. 그것이 각 순간에 자신이라고 보고 대하는 내용을 정말 자신이라고 여기고 대하는 입장에서 취할 수 있는 내용이다.
그런데 물론 매 순간 그런 형태로 그렇게 자신을 여기고 생활해 온 가운데 현실적으로 α,β,γ,δ,ε,ζ,η,θ,ι,κ,λ,μ,ν,ξ 이런 모습의 변화를 겪어온 것이 사실인데
그런데 한편으로 매 순간 그처럼 그렇게 여기고 그렇게 현실에 임하고 살아왔기에 또 그 형태가 또 α,β,γ,δ,ε,ζ,η,θ,ι,κ,λ,μ,ν,ξ 와 같은 형태로 전개되어 온 것이고
그래서 그것이 문제가 된다고 경전에서 제시하고 있는 것이다.
물론 지금 α,β,γ,δ,ε,ζ,η,θ,ι,κ,λ,μ,ν,ξ 이렇게만 그 내용을 제시하면 크게 문제가 없고 때로는 대단히 만족스럽다고 여길 수도 있지만,
문제는 앞의 U 를 바탕으로 앞과 같은 내용의 관계를 계속 이어나가면 앞에서 제시한 가피 중첩관계와 업의 장애로 인해 그 뒷 내용이 극심한 고통을 무량하게 받아나가는 형태로 되고 그래서 3 악도로 죽 연결이 된다고 제시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런 사정은 그렇게 매순간 망집에 바탕해 α,β,γ,δ,ε,ζ,η,θ,ι,κ,λ,μ,ν,ξ를 매 순간 자신이라고 여기며 이를 붙잡고 임하는 그 본인만 그 사정을 잘 이해하지 못하고
광장심 관찰을 행하고 이 관계를 살피는 입장에서는 그런 사정을 불 보듯 명확하게 예견하게 된다는 의미다.
이는 마치 엉터리 농부는 자신이 봄에 엉터리로 씨를 뿌리고 어떤 결과가 가을에 나타나게 될 지 잘 모르고 또는 치매환자가 아침에 식사를 하고 시간이 지나면 어떻게 될지 모르고 엉터리 학생이 평소 수업시간에 엉터리로 임하고 시험날에 시험을 보면 어떤 성적이 나올지 에견을 못하지만,
농사에 능숙한 전문가 농부라거나 정상적인 생활을 하는 이라거나, 입시에 능통한 입시 전문가나 입시 사정관 등이라면 그 사정을 척 보면 척하고 알 수 있다는 의미다.
경전의 입장은 그런 것이다.
그래서 지금 이 순간에 그 사정을 그렇게 올바로 관하고 올바로 수행을 한 내용이 없으면
그 주체가 과거 무량겁에 걸쳐 쌓아 온 업의 장애가 해소되기는 커녕 다시 업의 장애가 증폭되고 증가되어 축적된 것이고 그래서 이를 통해 그 주체가 장차 3 악도로 진입해 들어가는 것은 거의 분명하다.
굳이 비유로 표현하면 그렇게 되지 않을 확률이란 산 전체의 흙 가운데 손안에 쥔 흙 정도의 비율에 불과하다. 이렇게 객관적인 상황 보고를 하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현실을 놓고 살피면 또 그 사정이 그렇다고 보게 되는 것이다.
그런데 여하튼 α,β,γ,δ,ε,ζ,η,θ,ι,κ,λ,μ,ν,ξ 이런 상태에서
매 순간 자신이 자신이나 세계로 대하는 내용은 알고보면 그것이 아니고
그래서 설령 지금 자신이라고 보는 내용이 α,β,γ,δ,ε,ζ,η,θ,ι,κ,λ,μ,ν,ξ 가운데 그 무엇이라고 해도 그것이 다 사라지고 없어져도 그래도 관계없이 계속 이어나가는 요소는 눈에 보이지도 않고 만져지지도 않지만, 이와 관계없이 계속 이어지고
또 자신이 평소 α,β,γ,δ,ε,ζ,η,θ,ι,κ,λ,μ,ν,ξ 와 같은 옷을 걸치고 매 순간 행한 업의 내용에 따라 다음에 어떤 옷을 입고 생활하게 되는가가 달라지는 것이어서 관계없다는 의미다.
대강 설명하지만, α,β,γ,δ,ε,ζ,η,θ,ι,κ,λ,μ,ν,ξ 와 같은 내용을 자신이나 영희로 보고 대할 때는 그렇게 보게 하는 요소 그러나 정작 매 순간 눈에 보이지도 않고 만져지지도 않는 U 가 오히려 중요한데
α,β,γ,δ,ε,ζ,η,θ,ι,κ,λ,μ,ν,ξ와 U 의 관계가 서로 무관한 것은 아니지만, 그러나 완전히 같은 것도 아닌 것이어서 비유하면 이들은 U 가 잠시 걸치고 있는 옷이나 신발과 같다고 잘 이해하고 이를 통해 그런 옷이나 신발에 집착을 제거해야 한다고 제시하는 것이다.
만일 그렇지 못하고 계속해서 비유하면 U 가 이번 생에 각 순간에 잠시 걸치고 있는 그런 옷이나 신발에 불과한 내용을 집착하여 임하는 가운데 어떤 상황에서 그 옷이 기계에 걸렸다고 그에 집착해 반응하면, 그 옷을 따라 기계 속으로 빨려 들어가거나 신발이 더러운 연못에 빠졌다고 신발을 따라 수렁으로 같이 들어가게 되므로 이를 문제라고 제시하는 것이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그런 상황에서 평안히 참고 그 옷이나 신발은 집착을 갖지 않고 내버리고 임하면 그 이후 α,β,γ,δ,ε,ζ,η,θ,ι,κ,λ,μ,ν,ξ 의 내용은 이로 인해 오히려 훨씬 수준이 높은 상태가 되고 좋아진다. 이런 내용을 지금 제시하는 것이다.
이 내용의 자세한 이해를 위해서는 결국 앞에서 제시한 U 를 놓고 다시 자세히 살펴야 하는데 그 대강의 골격이 위와 같은 것이다.
일단 쉬거나 이 상태로 마치기로 한다. 너무 길게 썼다.
올려진 노래를 듣다 보니 무슨 공사를 해야 한다고 하고 분노가 치밀어 오를만한 상황들에서 평소 분노 반응을 잘 보이지 않는 특성을 갖춘 특정 연구원을 자꾸 언급하는 것을 메세지로 듣게 되는데
그런데 본인이 볼 때 이 분도 그 상황의 정도가 어느 정도 적절해야지 그렇게 안인모드로 임하는 것이지 그렇지 않은 경우에는 역시 안인모드로 임해서 참는데 일정한 한계가 있음을 또 보게 되는 것이다.
그런데 경전 내용은 그런 안인 수행에 어떤 한계가 있어서 일정한 재산이나 다른 것들은 침해해도 무방한데 그러나 자신이 평소 자신이라고 보는 부분이나 신체나 자신이 애착을 갖는 것이 침해받는 상태가 되면 이것만은 끝내 못참고 물러나게 되는 부분이 만일 있으면 결국은 마찬가지가 되는 것이다.
그래서 수행자가 생사를 벗어날 수 있는 상태가 되려면 그런 한계가 없어야 하는데 그것은 집착을 갖게 되는 그 근본과 그 최극단을 붙잡고 평소 수행을 해서 극복해야 하는 것이고
또 알고보면 하나의 상황을 안인으로 임하여 극복해 내는 그 원칙은 최극단이나 또는 손톱 하나를 뽑아 내는 과정이나 다 마찬가지 원칙으로 벗어나는 것임을 또 제시하는 것이다.
그래서 알고보면 앞에 제시한 원칙 하나로 다 해결되는 것인데 그런데 어떤 부분은 되고 어떤 부분은 안 된다면 그 하나가 제대로 잘 안되어서 그런 것임을 또 보게 되는 것이다.
그러니 쉽다면 쉽고 어렵다면 무량겁을 수행을 반복해도 매 순간 어려운 것이 사실이다.
무량한 가지가지 고통 무량한 가지가지 억울한 사정 무량한 가지가지 불쾌 무량한 가지가지 분노를 일으키는 사정 이렇게 대하면 끝이 없지만, 그러나 이것을 단 하나의 원칙적인 모드로 다 돌파하고 벗어날 수 있음을 경전에서 제시하고 있는 것이다.
앞에서 노래를 통해 여러 연구원들을 나열하면서 긍정적인 메세지로 시감상을 하였는데 쉬는 가운데 기지에서 차공양을 올리면서 듣게 되는 노래는 또 약간 비관적인 메세지를 듣게 된다.
노래는 노래일 뿐이고 불어 노래를 놓고 엉터리로 시감상하는 것은 망상분별 속에서 행하는 망상분별의 연속에 불과하고 무슨 깊은 의미가 있겠는가만
현실적으로 살펴보면 각 연구원마다 그렇게 낙관할 만한 내용이 별로 발견이 안 된다는 것도 한편으로는 사실인데
그러나 또 이미 본인이 과거에 제시한 무량겁의 업의 장애에 무엇을 더하거나 빼거나 곱하거나 나누어서 최종적으로 전체의 값을 변환시키는 전환공식을 적용해 이번 생에 그 방향을 달리 해나갈 가능성이 또 전혀 없는 것도 아니다.
예를 들어 현실에서 염소만 놓고 보면 염소지만, 여기에 나트륨을 결합시키면 무엇이 되는가. 소금이 된다.
물만 놓고 보면 물이지만, 여기서 수소를 빼내면 무엇이 되는가, 산소가 된다.
그런 내용을 놓고 보면 참 이상하고 불가사의한 일이 아닌가.
그래서 현실을 놓고 보면 당연히 극히 불쾌함과 고통을 느끼거나 수치스럽고 억울하게 대할만한 그런 내용인데 이에 대해 수행자가 어떤 모드로 임하면 그것이 또 전체적으로 어떻게 바뀌는가. 이런 부분에 초점을 맞추고 수행에 임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본다.
망집에 바탕해 임하면 한번 행한 업으로 인한 과보는 무량겁을 두고 사라지지 않게 된다고 제시하는데
또 한편으로 그런 생사현실안의 내용을 설명하는 인과나 그런 내용 자체가 본 바탕에서는 일체 얻어지지 않는다는 내용도 함께 제시하고 있는 것이고
또 어떤 수행을 어떻게 취하면 무량겁에 걸쳐 쌓아 놓은 업의 장애도 또 해소시키고 오히려 그 이후에는 복덕자량을 쌓아나가게 될 수도 있다고 또 한편 제시하고
그리고 그런 가운데 일체 중생은 본 성품이 다 극히 청정한 가운데 무량겁에 걸쳐서 끝내는 다 성불할 수 있다는 내용도 함께 경전에서 제시하고 있는 것이다.
원래 만일 현실에 어떤 내용이 결정된 상태로 있다면 그런 내용은 자체적으로 이치에 맞지 않는 내용이라고 할 것인데
그러나 본 사정이 그렇지 않고 본래 그런 내용을 얻을 수 없기에 그런 까닭에 현실에서 그렇게 수행에 임하면 그런 무량항 수명과 복덕과 지혜자량을 구족하고 성불할 수 있다고 제시하는 것이다.
그런데 또 만일 생사현실에서 그렇게 임하지 못한다면, 그래서 여전히 매 순간 망집을 해소시키지 못하고 임해나간다면 그런 전제에서는 한 순간이 그렇듯 그런 형태로 매순간 순간 임하는 가운데 무량겁을 나아가면서 그런 업에 마땅한 그런 과보를 받게 된다고 제시하는 측면인 것이다.
어떻게 보면 침대에 누어서 바다 꿈을 꾸었다면 바다가 침대에 있어야 마땅하고
짜장면을 먹으면서 한번 좋음을 느꼈다면 이후로도 계속해서 짜장면을 대하면 좋음을 얻어야 하는데 본 사정이 그렇지 않음을 제시하는 측면인 것이다.
침대에 누어 바다나 황금꿈을 꿀 때 이것이 그렇게 실답게 결정된 것이라는 의미는 그런 황금꿈을 꾸었다면 그 침대에 그런 내용이 실답게 있는 것이어서 그 침대에서는 그런 꿈 내용을 그렇게 얻을 도리 밖에 없다고 그 관계를 제시하는 의미다.
그런데 무유정법이라고 금강경에서 제시하는 내용은 본 사정이 그렇지 않고 본래 그런 내용을 얻을 수 없음을 제시하고 현실 내용은 바로 그런 바탕에서 그렇게 실답지 않게 나타나 얻게 되는 것임을 나타내는 의미다.
그래서 얻을 것이 없기에 그러그러한 수행을 생사현실에서 행하면 그를 통해서 그런 무량한 수명과 복덕과 지혜를 다 구족할 수 있게 된다. 그 관계가 그렇다고 반복해 반야경전에서 이 사정을 제시하고 있는 것이다. 어차피 본 바탕이 차별이 없고 공한데 그런데 왜 하필이면 그런 좋고 좋은 상태를 성취하는 수행을 행하지 않고 망집을 일으켜 실답지 않은 내용을 집착해서 그렇게 매 순간 임하여서 무량한 생사고통을 받아나가는가. 이것이 바로 생사현실에 임한 수행자의 수행의 문제인 것이다.
그런데 본 사정이 이런데도 그러나 단지 그럴 듯한 망상을 바탕으로 해서 말로만 이치를 따지다보면
자신이 눈으로 어떤 모습을 보았다면 그 내용이 귀로 대할 때도 그렇게 얻어지고 코로 대할 때도 그런 내용으로 얻어지고 그리고 본 바탕인 실재에도 그런 내용이 있고 더 나아가 관념분별을 행할 때도 그 내용이 그대로 얻어져야 하고 나중에 다시 떠올릴 때도 그대로 다시 얻어지고 그래야 할 것 같다고 여기게 되는데 그런데 이들이 하나도 상호간에 그렇지 않은 것이다.
또 사정이 그렇지 않기에 그렇지 않다고 제시하는 것이다.
이미 α,β,γ,δ,ε,ζ,η,θ,ι,κ,λ,μ,ν,ξ 로 매 순간 달라지는 영희나 자신의 내용을 놓고 이 관계를 살폈는데 그러나 그러면서도 계속 이것을 영희나 자신으로 여기고 현실에 대하게 되는 것은 또 나름 사정이 있어서 그런 것이다.
그 역시 진짜의 나라고 할 내용은 아닌데 바로 그 U 가 무량겁에 걸쳐서 수행자가 생사현실을 받아가면서 복덕과 지혜자량을 구족하고 성불해 가는 바탕이기도 한 것이 사실이다.
현실에서 이런 U 가 그 모습을 눈으로 보지도 못하고 손으로 만지지도 못하는데도 그렇게 시설해 제시하는 사정은 또 알고보면 하나같이 실답지 않다고 제시하는 그 α,β,γ,δ,ε,ζ,η,θ,ι,κ,λ,μ,ν,ξ 를 바탕으로 그렇게 시설해 제시하는 것이기도 하다.
그리고 이처럼 그 모습을 눈으로 보지도 못하고 손으로 만지지도 못하는 그런 근본 정신으로서 마음을 하나 붙잡아 놓고
다시 본 바탕인 실재와 이 관계를 살피면 역시 실재 자체가 곧 그 마음이 아니지만, 그러나 실재를 떠나서 그런 마음을 얻는 것도 아니라는 내용을 또 제시하게 되는 것이다.
결국 짜장면을 먹고 좋음을 느낀다고 할 때 그 짜장면과 좋음의 관계가 애매모호한 관계이듯
그리고 솜을 만지고 부드러움을 느낄 때 그 각 내용이 서로 애매모호한 관계이듯 이들이 다 그 관계가 그러한 것이다.
그런데 이런 상태에서 중요한 것은 현실에서 생사현실을 기준으로 잡고 이 생사현실에서 겪는 생사고통이나 생멸을 문제삼을 때 그런 내용은 그 각 영역에서 얻어지지 않고 적어도 그런 것은 '아닌' 그 어떤 것이라는 의미에서 본 바탕인 진여 실재는 현실에서 문제삼는 것들을 기준으로 하면 그런 것 일체가 얻어지지 않는다는 의미에서 청정하고 공허한 것이라고 제시하지만,
그러나 그런 생사고통이나 더러움은 아니지만, 한편 아무것도 전혀 없는 것은 아닌 것이어서 상당히 알차게 꽉 차있고 여기에서 무량한 여래나 수행자가 또 이를 바탕으로 중생제도 활동을 해나가는 것이므로 달리 보면 이런 부분은 또 상락아정의 상태라고도 표현하게 하는 측면인 것이다.
이는 실다운 것이 없다는 측면에서는 그에 대한 망상분별과 집착을 제거하게 하는 측면으로 청정하고 비었다고 제시하는 내용이지만,
그러나 수행자가 그런 바탕에서 집착을 제거하고 수행에 정진하면 그로 인해 올바른 깨달음을 얻고 복덕과 지혜를 무량하게 성취하고 불국토를 장엄하고 중생을 제도하고 성불하게 된다는 측면은 또 속이 알차게 들어 있어서 상락아정의 상태라고 표현할 수 있는 그런 측면이 된다는 의미다.
처음 그런 사정을 이해시키기 위해 시설한 언어표현 자체에 붙잡혀 망상분별을 증폭시키지 않는다면 이런 각 표현으로 부처님이 제시하고자 한 본 취지를 잘 이해하고 수행에 정진해 그 결과를 원만하게 잘 성취할 수 있다고 할 것이다.
자꾸 쫒겨 난다고 노래에서 메세지를 전하는데 본 바탕의 측면에서는 그런 내용이 정해진 것이 아니어서 무유정법이라고 제시하게 된다는 사정을 한편으로 잘 이해하는 한편
그러나 또 망집에 바탕해 계속 임하면 또 현재 상태를 바탕으로 해서는 장차 그런 상태로 진입해 들어가게 된다는 것도 별 도리가 없다는 점을 미리 념두에 두고 수행에 잘 임해야 한다는 의미라고 보게 된다.
쉬는 가운데 각 기지마다 차공양을 올렸는데 대력보살님들은 일념에 무량한 부처님국토를 방문해서 공양을 올린다고 하는데 기지가 그렇게 많지 않은데도 상당히 바쁘다. 원래는 본인이 그냥 차 한잔 마시려다가 행한 일인데 빨리 대력보살님들이 행하는 그런 비법을 취득해야 할 것도 같다.
그런 가운데 여러 노래를 듣는데 일단 글이 길어졌으므로 그 가운데 대표적인 두 곡만 올려 놓고 글을 마치기로 한다.
자비의 정신을 강조하는데 수행자는 생사현실에서 공해탈삼매을 바탕으로 공한 자리에 앉아 무상해탈삼매를 바탕으로 안인을 성취하고 그 안인을 옷으로 하고 무원무작삼매를 바탕으로 쓸데없는 집착을 제거하고 그렇게 빈 마음 안에 무량한 자비의 마음을 채우고 이를 바탕으로 그 자비를 방으로 하여 생사현실에 임해 수행에 임해나가게 된다.
묘법연화경 법사품에서도 이와 같은 내용을 제시하는데 그것은 전체 경전을 관통하는 가르침의 핵심 내용이기도 한 것이다
그것은 존재가 문제되는 실상(實相 dharmatā ; dharma-svabhāva) - 상(相 Lakṣaṇa ) - 상(想 Saṃjña) 각 측면에서 수행자가 생사현실에서 취해야 할 가장 표준적이고 바람직한 자세를 제시한 것이고 본 바탕에서 그런 내용을 얻을 수 없다고 매 경우 매 순간 아무렇게 임해도 된다고 본 바탕의 사정과 현실 사정을 그렇게 제시한 것이 아니라는 의미다.
그래서 이런 바탕에서 자비의 정신을 갖고 자비를 수행자가 머무는 방으로 삼아 현실에 임하는 것이 수행자가 생사현실에 임하는 기본 취지인 것이다.
즉 자신이 관할구역으로 삼는 범위에서는 그 안에서 대하는 생명은 모두 자비의 마음을 바탕으로 생사고통에서 벗어나게 하기 위한 취지로서 무량한 방편을 취해 대하고 임하는 기본 자세가 수행자에게 요구된다는 의미다,.
또 이어 듣는 노래는 아개령입 무여열반 작전에 임하는 본 선현지복 연구소의 주제곡이기도 한 곡이다. 그래서 특별히 본인이 관심을 갖는 곡인데 이번에 쉬는 가운데 다시 듣게 되어서 올리게 된다.
여기서 아랍이 문제라고 하는데 현실적으로 탐욕 분노 어리석음에서 다 독이 발생하고 그 각각에 따라 각 주체가 행하게끔 되는 그 내용이 곧 생사현실에서 결국 생사고통을 극심하게 받는 3 악도로 들어가게끔 만드는 생사현실의 문제현상인데
오늘날 현실에서 그래도 과거의 경험을 바탕으로 많이 자제하는 형태로 되었다고 보게 되는 한편 여전히 일부 영역에서는 그런 측면이 여전히 남아서 부각되어 나타나기에 그런 메세지를 전하는 것이 아닌가 그런 시감상을 또 해보게 된다.
여하튼 시감상은 시감상이고 수행자는 수행에 임함에 있어서 어떤 상황에서든 아개령입 무여열반의 수행자 임무를 망각하지 말고 수행에 정진해 나가야 한다고 본다.
-- 아래에 조각글 작성시 휴식시점에 붙인 노래가사,사진,풍광,예술작품 자료를 편집상 옮겨 붙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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