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pt op tr] 음악공양, 나무불, 나무법, 나무승
▼mus0fl--Jean - Jacques Goldman - Filles Faciles.lrc
♥ 잡담 ♥데이터의활용
요즘은 데이터도 많이 쌓이고 또 용량이 대단히 큰 저장 매체도 많다. 그래서 이것을 어떻게 잘 활용할 지 고민이 되는 경우가 많다.
메모리 카드가 몇 개 있는데 잘 활용해보고자 음악파일을 잔뜩 넣어서 각 기지에서 구형 앰프와 구형 핸드폰을 연결해서 음악 공양 시스템을 만들어 운영 중인데 그래도 또 남은 저장 매체가 많다.
요즘은 하드디스크가 8 테라 시대인데 그렇게 자꾸 담아 놓다보니 최근 확인해보니 이제 1 테라 정도만 남아있다. 그래서 요즘은 저장할때도 용량이 조금 크면 마음이 쓰인다. 디스크에 여유공간이 1 테라가 남아 있는 것과 10 기가가 남아 있는 것은 사정이 달라지기 때문에 미리 주의를 하는 것이다.
블로그에 글을 자주 올리는데 이 블로그에 작성한 글을 잘 정리해야 한다고 보는데 새 글 적기도 힘들지만, 한번 작성한 글을 다시 살펴보면서 표현도 수정하고 내용도 보충하고 체계적으로 정리하는 것도 보통 힘든 일이 아니다.
연구가 어떻게 과거에 작성한 글만 또 반복하고 반복할 수 있겠는가. 매번 새로운 주제를 놓고 연구를 해야 하는데 사정이 그렇기에 과거에 작성한 글은 거의 다시 보지 않게 된다. 그 시간에 새로 경전도 살피고 논서도 살펴보고 그래야 한다고 생각하고 그런 작업이 매 경우마다 우선시 되기에 뒤로 밀리는 것이다.
● 눈을 떠 보는 내용 □과 관련된 논의 사항
눈을 떠 보는 내용 □을 놓고 이 내용 □ 이 갖는 의미를 살핀다.
그런데 이 주제가 수행과 관련해서는 생사현실에 임하는 자신의 본 정체가 무언가를 확인하는 한편, 그런 주체는 고려해야 할 문제가 무엇이고 그렇게 고려할 기간이 도대체 어떻게 되는가.
즉 생전 그 주체는 어떻고 사후에는 또 어떻게되는 것인가 이런 문제로 나아가게 된다.
그런데 여기에 해결해야 할 문제가 있다.
우선 일반적으로 현실에서 자신이 스스로 자신으로 여기고 대하는 내용은 그런 자신이 아님을 먼저 잘 확인해야 한다.
두번째는 그러나 왜 현실에서 자신이 자신이라고 여기는 그런 부분을 자신이라고 여기면서 매번 대하게 되는가. 현실에서는 그런 부분을 무시하고 한 순간도 살기 힘든데 이 사정이 도대체 왜 그런가를 또 한편 이해해야 한다.
이는 먼저 현실에서 눈을 떠 보는 내용 □ 이
마음내용이고 그런 결과 그 마음 내용이 수시로 마음에 들고 나고 변화해도 그 마음 자체는 그렇지 않다는 사정을 이해해야 한다.
그래서 처음 현실에서 일정한 사정을 바탕으로 어떤 부분을 자신이라고 여기게 되었다면
그렇게 여기게 하는 그런 사정은 사실은 그 부분에 해당되는 것이 아니고 오히려 그런 내용을 얻는 마음 자체라고 보아야 한다.
그런데 여기서부터 어려운 문제가 발생한다.
우선 그런 마음은 눈으로 보이지도 않고 만져지지도 않는다. 그래서 이런 마음이 '있다'고 하려면 그것이 '없다'는 것과는 도대체 어떤 점에서 구분이 되기에 그것을 '있다'라고 하는가부터 살펴야 한다.
현실에서는 이런 마음을 따로 인정하지 않고도 한 주체가 현실에서 행하는 온갖 감각이나 분별을 모두 설명할 수 있다는 입장도 있다. 그런데 경전의 입장은 적어도 그렇지 않다. 그래서 위 내용을 먼저 확인해야 한다.
그리고 현실에서는 일반적으로 이런 마음은 현실에서 자신이 몸이라고 보는 각 부분이 없으면 그것이 작용하지 못한다고 여기는 한편 자신이 평소 정신과는 다른 외부 물질로 이해한 그런 내용들이 바탕이 되어 만들어지는 것으로 이해한다.
그런데 앞에서 보듯, 일반적인 입장에서 외부 물질로 이해하는 그 내용들이 오히려 마음안에 들어온 마음내용임을 이해하면 마음에 들어온 마음내용이 마음을 만들어 낸다고 보기는 힘들다.
그래서 이런 마음은 처음에 일반적 입장에서 외부 물질이나 육체내 물질로 이해하고 대한 그런 내용과는 어떤 관계에 있는가를 또 살펴야 한다.
일단 일반적 입장에서 물질로 여기고 대하던 내용들은 알고보면 마음안에 들어온 마음내용이어서 이런 내용이 그 내용을 담는 마음을 만들고 유지시킨다고 보기는 곤란하지만,
그러나 마음에서 그런 내용을 얻게 되면 여하튼 마음 외부 실재 영역에 무언가가 있기에 그렇다고 추리하는 입장에서는
이런 마음밖의 실재내용이 마음과 어떤 관계에 있는가를 또 살펴야 한다.
즉, 마음 외부의 내용을 실재 영역이라 한다면 그런 실재와 마음의 관계를 살펴야 한다.
그런데 실재는 어떤 주체가 그 내용을 직접 얻지도 못하고 또 어떤 주체는 마음도 직접 보지도 못하고 만지지도 못하니 이 문제가 대단히 해결하기 곤란하다.
그 다음 문제가 또 있다.
비록 보이지도 않고 만지지도 않는 마음의 존재를 확인하게 되더라도 사정이 이러니, 현실에서 전 후의 마음을 놓고 이 마음이 계속 같은 주체의 마음이라는 것은 어떻게 확인하는가.
보이지도 않고 만져지지도 않는데 전 후의 마음이 같은가 다른가는 어떻게 파악하는가.
현실에서 눈으로 보면서 자신이라고 잘못 여기는 자신의 몸도 알고보면 매 순간 α,β,γ,δ,ε,ζ,η,θ,ι,κ,λ,μ,ν,ξ
이러한 형태로 갓난아이 시절 부터 노인이 될 때까지 매순간 그 내용이 달라지고 이들에서 그 대표를 찾을 수 없다고 보게 되는데 마음은 또 무엇을 통해 그런 내용을 찾을 수 있을 것인가.
그래서 경전에서
수행자는 무량겁에 걸쳐 이어지는 이런 마음을 바탕으로 생사현실에 임해서 수행을 무한히 이어가 성불하게 된다는 그런 내용을 하나 이해하려면
먼저 해결해야 할 문제가 대단히 많다.
위 문제도 문제지만, 또 하나 문제는 생사 전후를 통해서
그 마음이 어떻게 다른 세계의 다른 생명형태까지 이어진다고 할 것인가.
설령 그렇다해도 그것을 어떻게 확인할 것인가.
이런 문제도 나타난다.
그리고 나서 이 마음이 특히 근본마음이 무량겁에 걸쳐 그렇게 이어진다는 사실은 도대체 어떤 주체가 그렇게 무량겁 동안 일일히 그 마음과 함께 따라다니면서 확인할 수 있는가. 그리고 그렇지 못하다면 그러한 주장을 어떻게 또 확인할 수 있는가. 이런 어려운 문제가 나타난다.
그래서 하나하나 쉽지 않다.
일단 이렇게 중간에 앞으로 살필 마음 문제를 올려 놓게 되는데, 그렇다고 마음과 관련된 문제가 이것으로 끝은 아니다.
그러나 당장 모두 이것을 완벽하게 연구해야 한다는 부담을 가질 필요는 없고 무량겁을 두고 하나씩 즐거운 마음으로 살펴나가면 된다고 본다. 그리고 이 문제를 연구할 도구와 실험재료가 늘 자신의 현실에 있기에 또 연구에 별 어려움은 없다고도 할 수 있다.
일단 쉬기로 한다. 새로 개발한 핫키가 상당히 편해서 연구과정에 시간도 절약하게 해주고 연구에도 의욕이 생긴다. 조금 쉬고 이어나가기로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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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us0fl--Patrick Bruel - Au Cafe Des Delices.lrc
♥ 잡담 ♥
'눈을 떠 보는 내용 □ '에 대해 논의하는데 이 과정에서 위 구절을 대단히 많이 적게 되기에 드디어 이 부분을 축약키로 지정해 넣었다.
처음에 이를 눈,L 즉 영자로 sns,l 이렇게 타이핑하면 위 글자가 나타나게 하였다. 그러면 일단 타이핑 작업이 편해진다. 그런데 한글키는 눈 한글자인데 영어는 3 글자라 조금씩 글자가 없어지는 현상이 있다. 그래서 다시 축약키를 조정했다. ㄴㄴ,l 로 축약키를 만들어 ss,l 키로 위 내용을 축약하면 위 문제가 없어진다. 모음을 없애서 한글 글자가 서로 붙지않게 하는 것이다. 그런데 나중에도 기억이 잘 되는가는 문제다.
여러 주제를 늘어 놓고 연구를 하려니 마음이 복잡하다. 그런데 경전 등에서 제시되는 결론은 명료하다고 할 수 있다. 그래서 수행자의 문제는 그런 경전 내용이 어떤 근거에서 그렇게 제시된 것인가를 연구해서 잘 이해해면 된다고 본다. 그리고 또 한편 이들 내용은 자신의 현실 문제이기도 하므로 그 내용을 현실에서 그렇게 확인하고 또 이에 바탕해 수행을 실천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
사정이 이렇지만, 일반적으로 그런 내용을 이해하지 못하면 또 그에 바탕해 제시되는 여러 내용도 받아들이지 못하고 또 실천하기도 힘들다. 또 그러면 그런 사정으로 그 주체는 3 악도에 묶여서 실답지 않은 고통을 그러나 대단히 생생하고 실답게 받아나가게 되고 무량겁에 걸쳐서 그 상황에서 벗어나기 힘들다고 경전에서는 제시한다. 그러니 이는 심각한 문제다.
그런데 한편으로는 자신이 현재 대하는 상황은 평소 일반적인 입장에서 이해하고 대하는 방식으로 임해도 별 문제가 없다고 여기기에 이를 그냥 세간에서 유행하던 행운의 편지내용처럼 일종의 구라성 협박이라고 여길 수도 있다.
그러나 만일 사정이 그렇지 않다면 이는 대단히 심각한 문제인 것이고 또 본 연구인 입장에서는 그 사정이 그러해서 사실상 대단히 심각한데 일반적으로 그 사정을 잘 이해하지 못하고 대하는 것 자체를 오히려 문제점으로 보는 것이다.
그리고 TV 나 언론매체를 통해 매일매일 쏟아지는 뉴스를 듣다보면 그 하나하나가 다 당사자들의 극심한 생사고통의 문제임을 보게 된다. 그런데도 그런 당사자나 그 부모 형제 가족이 아니면 또 대부분 대범하게 이를 지나치고 별로 마음에 두지 않게 된다. 그런데 알고 보면 그 당사자 역시도 평소 사실은 그런 입장이었던 것이다. 그래서 현실에서 극심한 고통을 받는 현장의 각 생명의 상황은 알고보면 남의 일이 아니다.
그런데 그 사정을 그렇게 이해하지 못하기에 또 현실에서 대충 좁고 짧고 얕게 사정을 관하고 지혜를 발휘한다면서 매번 엉뚱한 업을 선택해 행하면서 묶여 가는 상태인 것이다. 이는 경전 표현에 의하면 주변이 다 불타고 있는데 정작 그 안에서 철부지 아이들은 상황을 파악하지 못하고 정신없이 뛰놀고 있는 상황이어서 3계화택의 상황이라고 비유적으로 표현하는데 그 심각한 사정이 이와 비슷한 것이다.
그런데 또 그런 사정 때문에 그 상태에서 그런 상대를 강제로 끌고 벗어 나오도록 수행방안을 강제한다면 그 경우는 그 과정에서부터 대단히 문제를 겪는다.
오늘은 사건 보고 중에서 바둑을 두는데 훈수를 두었다고 흉기로 상대를 해쳤다는 보고를 받는다. 그런데 현실적으로 초등학생만 되어도 대부분 다른 이가 자신에게 무엇을 어떻게 하는 것이 좋다거나 사정이 이렇다 저렇다 이런 식으로 내용을 제시하는 것 자체를 대단히 싫어한다.
고집도 셀 뿐만 아니라, 사정이 그렇기에 어떤 내용을 알려주어도 오히려 다른 이가 그렇게 제시했기에 자신은 왠만하면 그렇게 하지 않으려 하는 경향을 갖는다. 바둑에서 누군가 옆에서 훈수를 두고 힌트를 주면 알고보면 그 내용이 맞다고 보기도 하지만, 그 자체를 불쾌하게 여기게 되기에 여하튼 상대가 제시한 그것만은 따라 두지 않고 달리 해결하려고 임하는 경향을 갖게 된다. 그리고 이것이 이런 방안이 갖는 부작용이다. 그리고 이는 어떤 특수한 이만 갖는 특이한 현상이 아니다. 그래서 어려움이 많다.
그래서 어떻게 보면 사정이 이렇기 때문에 각자가 스스로 이런 사정을 어떤 계기로 파악해서 스스로 벗어나올 때까지 그냥 제 3 자는 내버려두고 외면하는 것이 나을 것도 같지만, 또 이렇게 되면 무량겁에 걸쳐 관찰해도 그 상대가 스스로 그 사정을 이해하고 벗어나오는 것을 거의 기대하기 힘들다고 제시된다.
그래서 여하튼 부작용을 갖는 그런 방안도 피하는 한편 사정이 그렇다고 완전히 외면하고 방치하는 giveup 외면의 방안을 다 피하고 이런 문제가 적은 방안을 찾다보면 상당히 이 문제해결이 어려움을 보게 된다.
그것이 결국 경전에서 제시하는 것처럼 중생제도를 위해 생사현실에 임해 수행하는 이가 생사현실에서 무량겁에 걸쳐서 무량행문을 닦아나가게 되는 어려운 사정이다. 그리고 그러한 수행의 최정점에 결국 법신을 증득한 부처님이 있게 되는 것이기도 하다.
그런데 그렇다해도 사정이 어렵다고 보는 것은 부처님이 이미 가르침을 베풀고 경전을 통해서 그 가르침을 그렇게 남겨 두었어도 현실은 사정이 크게 다르지 않다는 것이 이 어려운 사정을 나타낸다고 본다.
말처럼 생각처럼 쉬우면 세상의 중생들이 벌써 다 생사를 벗어나 성불했어야 할 것인데 현재 사바세계의 사정만 놓고 보아도 다음에 부처님이 나타날 시점은 대략 56 억년 정도가 남아 있다고 하니 비록 1 겁 2 겁이 남은 것은 아니라지만, 이 기간만 해도 상상을 초월한 장구한 기간이다. 이는 수행목표점에 도달하는 것이 마냥 쉬운 문제가 아님을 의미한다. 그리고 그 사정은 결국 그렇게 임하게 하는 중생에게 대부분 그 어려운 사정이 그렇게 들어 있다고 보는 것이다.
이 사정을 잘못 생각하면 그런 중생을 그렇게 빨리 제도해 내지 못하는 부처님이나 대력보살님들에게 책임을 떠넘길 수 있는데 현실 사정은 다른 종교를 놓고 보아도 사정이 마찬가지이지만, 경전에서는 이에 대해 장님이 햇빛을 보지 못하는 것은 장님의 사정때문에 그런 것이지 태양때문에 그런 것이 아니라는 내용으로 제시한다.
그런데 여하튼 그 책임이 누구에게 있던 사정이 어려운 것만은 사실이다.
더욱이 어떤 주체가 아무리 노력해도 눈으로 보지도 못하고 만지지도 못하는 마음과 관련해서 논의를 하다보면 한편으로는 표현과 관련해 많은 혼동을 일으키기도 하고 또 이런 내용에 대해 서로 다른 견해를 가지면 서로 시시비비를 문제삼는 가운데 앞과 마찬가지 부작용 현상이 또 다양하게 나타난다.
현재 마음으로 보는 내용을 눈을 떠 보는 내용 □ 이라고 표시하는 것은 조금이라도 표현으로 일으키게 되는 혼동을 방지하자는 취지인데 □ 하나를 더 붙였다고 그런 현상이 완전히 없어진다고 보기는 힘들다.
그래서 자주 눈을 감았다 뜨면서 눈을 뜨는 그 순간에 그 직전까지 얻지 못했던 내용을 얻게 되면 그것을 위 표현으로 나타낸다고 이해하고 그 내용을 먼저 잘 확보해보려 노력해야 한다고 본다.
그래서 그렇게 놓고 살피면 눈을 떠 보는 내용 □ 이란 일반적으로 현실에서 대단히 입체적으로 생생하게 얻고 그래서 대단히 실답다고 여겨지는 한편 그것은 곧 자신이 대하는 외부세계이자, 자신의 감관이 대하는 외부대상이고 그리고 마음 밖에 있는 마음 현상과는 별개의 외부 물질이라고 여기게 되는 한편 이 내용은 자신 뿐 아니라 영희 철수가 다 함께 대하는 외부의 객관적 실재라고 여기게 된다. 또 이런 바탕에서 상대적으로 자신이 자신이라고 여기는 내용을 또 붙잡고 그런 내용이 자신이라고 여기며 현실에 임하게 된다.
그리고 일반적으로 이렇게 이해하는 바탕에서 현실에 임하는 현상을 가장 기본적인 망집 현상이라고 반복해 제시했다. 그리고 이것이 그 주체를 생사고통에 무량하게 묶어두는 기본 바탕이 되기에 이 증상을 빨리 치유하고 벗어나야 한다고 경전에서 제시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런 과정에서 눈을 떠 보는 내용 □ 이 갖는 의미나 그 정체를 잘 확인하는 것이 필요하다.
글을 적으면서 노래를 듣는데 처음에는 잘 알아듣지 못하는 불어 가사를 반복해 듣다보면 나중에는 이상하게 한국어로 알아듣는 현상이 나타난다. 그런데 이것도 알고보면 마음 현상의 하나다. 그래서 이런 현상을 놓고도 잘 생각해보아야 한다.
그런 가운데 노래에서 자꾸 '얄리 얄리' 이런 소리를 듣게 되는데 어떤 고전 가사에서 얄리 얄리 얄라셩 이런 소리를 들은 적이 있기에 이런 의미인가 하고 생각해보는데 그 경우도 사실 그 의미는 잘 모른다.
이런 경우 다라니 해독에서 본인이 사용하는 방법을 동원하게 된다.
예를 들어 '다냐타' 이런 다라니가 있다면 이것이 무엇인가. 냐에서 보통 걸린다. 냐가 무엇인가? 이런 경우 본인은 이렇게 있는 그대로 처리한다. 냐라는 것은 나와 비슷하다. 비슷하지 않은가. 비슷하다. 그런데 나인가. 나는 아니다. 그래서 냐가 무엇인가라고 문제가 제기되면 냐라는 것은 내가 이해하는 나와 비슷한데 그러나 정작 나는 아닌 것이라고 생각하게 된다. 여하튼 그런 것이라고 이해하고 이 말을 대하면 조금 마음이 편해진다는 의미다. 잘 모르는 부분이 비슷하게 아는 것처럼 되기 때문이다.
'얄리'가 무언가도 마찬가지다. 알리 => 알게 되리 ~ 알아야 하리. 이런 말과 비슷한데 그러나 그것은 아닌 그런 것이다. 이렇게 되면 전혀 모르는 소리가 소음형태로 반복되는 상태에서 무언가 의미를 주는 소리로 바뀐다. 그리고 이렇게 이해하면 조금 마음이 편해진다.
그런 가운데 듣다보니 노래에서 자꾸 깊이 '얄리' 깊이 '얄리' 이런 메세지를 전해주는 듯 하다. 그런데 가사를 보고 살피면 '깊이'라고 듣게 되는 부분은 맨 처음엔 그냥 해피 (행복한 ) 얄리라고 또 잘못 들었던 부분이기도 하다. 그것도 엉터리 감상이기는 한데 그런데 이제 '얄리'를 알아야 하리 이런 알리로 듣다보니 이 부분을 맥락상 관련되는 '깊이'라는 소리로 바꿔 듣게 되는 것이라고 이해하게 된다. 그래서 알고보면 망상이 맥락을 통해 또 다른 엉뚱한 망상을 연상과정을 통해 자꾸 불러 일으켜서 이런 형태로 듣게 된다고 본다.
그런데 감상내용 자체는 이처럼 엉터리라고 해도 여하튼 그렇게 알아듣는 엉뚱한 내용으로서 깊이 알아야 하리 이런 메세지는 연구하는 입장에서는 필요하다고 본다.
그런데 그렇게 깊이 아는 내용은 또 알리가 아니고 '얄리'다. 즉 아는 것 비슷하지만 정작 알아야 할 그 자체와는 조금 다른 그런 것이라는 의미를 나타낸다고 본다.
그런데 경전에서 반복해 제시하는 핵심도 마찬가지다. 즉 경전에서 제시하는 여러 가르침을 통해 그렇게 알게 되는 지식은 그냥 피상적으로 분별해 아는 것이어서 정작 알고자 한 그 내용 자체는 아니다. 경전에서 이런 내용을 강조한다.
특히 언설을 떠난 승의제와 관련된 내용을 제시하는 부분에서 그 사정을 나타내는 언어표현들은 대부분 그런 성격을 갖는다. 대지도론을 살피는 가운데 나오는 제일의 실단 이런 표현도 그런 바탕에서 제시되는 내용이기도 하다.
그런데 여하튼 경전에서는 그처럼 본래 언어로 나타낼 수 없고 끝내 얻을 수 없는 어떤 내용에 대해 그 본 사정을 일반적인 입장에서 이해할 수 있도록 일정한 방편 시설을 그렇게 동원해 제시하게 된다.
그러니 그런 취지로 언설로 표현해 제시한 내용을 통해 무언가 알게 되었다고 해도 이는 사실은 엇비슷한 이해에 불과하고 원래 문제삼은 그 상태를 그대로 직접 얻어낸 것은 아니다.
그래서 '얄리'라는 이상한 표현 하나를 놓고도 이런 온갖 생각을 다 해보게 되는데 이것이 지금 논의하고자 하는 마음과 관련된 주제와도 밀접하다.
이미 눈을 떠 보는 내용 □ 하나만 놓고 이 내용과 관련된 마음을 찾는다고 해도 그 내용을 직접 보지도 못하고 만지지도 못하는데 앞으로 계속 이런 상태로 이 내용을 논의해가게 된다. 그러니 그런 글자로 그 사정을 살펴나가면 이를 통해 파악하는 내용이 문제삼는 그 자체와 과연 얼마큼 가까운 내용이 될 것인가. 이런 문제점을 먼저 생각하게 된다.
앞에 논의해나갈 여러 주제를 나열했는데 일단 그 결론적 내용은 이미 경전에서 명료하게 제시하고 있다.
여하튼 무량겁에 걸쳐서 생사현실에서 각 주체가 그렇게 그처럼 생사를 통해 무한히 이어지는 근본 마음을 바탕으로 그처럼 매생 각기 다른 세계에 처해서 생사고통을 겪어 나간다. 그러니 그런 상태를 벗어나려면 미리 망집을 잘 제거하고 수행에 잘 임해 벗어나와야 한다. 이런 내용이다.
또 그렇게 제시하는 사정도 그 대강은 이미 이전 조각글들에서 살폈다.
그런 가운데 처음 이런 논의에 들어갈 때 다음을 먼저 잘 이해해야 한다고 보고 이 부분부터 먼저 살피기로 한다.
먼저 눈을 떠 보는 내용 □ 을 놓고 사정을 이해해보자.
눈을 뜨면 대부분 무언가를 보게 된다. 너무 일상적으로 반복해서 이상한 일이 아니라고 여긴다. 그런데 알고보면 대단히 이상한 일이다.
양쪽 눈 시력이 다른 이도 있고 한 쪽 눈을 가리고 번갈아 보면 또 각 눈으로 보는 내용이 조금씩 다름을 확인하게 된다. 그리고 다른 생명을 놓고 보면 다른 생명이 보는 내용을 제 3 자가 비록 직접 확인하지는 못해도 적어도 자신과 대단히 다른 형태로 볼 것이라는 점은 충분히 예상할 수 있다. 예를 들어 벌이나 파리나 개미나 개나 이런 여러 생명체를 놓고 그 눈의 구조나 상태를 놓고 생각해보면 그런 사정을 충분히 예상할 수 있다.
그래서 자신이 눈을 떠 일정한 모습을 본다는 현상은 자신에게는 대단히 익숙한 일이어서 별로 이상하지 않다고 여기기 쉽지만 알고보면 대단히 이상한 것이다.
이는 파리가 파리 눈으로 보는 내용을 세상의 절대적인 기준으로 놓고 이해하면 자신이 보는 내용은 역시 라면을 놓고 매번 벽돌의 모습을 얻는 상태와 같다고 할 수 있다. 그러니 왜 정작 자신이 매번 눈만 뜨면 그런 형태로 내용을 얻고 또 그것을 외부세계의 현실이라고 이해하게 되는가가 대단히 이상하다는 의미다.
그리고 이런 입장에서는 예를 들어 자신의 귀로 듣는 소리를 또 세계의 본 정체이자 절대적 기준으로 놓고 이해하면 왜 다른 감관으로는 이와 전혀 엉뚱한 내용을 오히려 매번 얻고 이런 내용을 세계의 현실이라고 이해하는가. 이렇게 문제를 제기할 수도 있다.
그렇게 생각하면 자신이 매번 반복해 얻는 내용이지만, 알고보면 그것이 하나같이 대단히 불가사의하고 미묘하고 이상한 현상임을 이해할 수 있다.
경전에서 이에 대해 제시하는 내용도 알고보면 이것이다. 본래 얻을 수 없는데 각 주체는 왜 현실에서 매번 그런 것을 그렇게 얻고 또 그것이 실답게 있는 내용이라고 여기고 집착하며 매 상황에 임하는가 . 또 그렇게 임하면 왜 그 주체의 생각과는 달리 극심한 생사고통을 받는 상태에 묶이게 되는가.
결국 현실에서 전도된 망상분별을 일으키고 이에 바탕해서 임하는 것은 비유하면 마치 장님이 현실 사정을 모르고 자신이 얻는 소리나 촉감만 의존해서 분별을 일으키고 마구 여기저기 뛰어다니는 것처럼 대단히 위험한 상황에 처하게 되는 것과 그 사정이 같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망집을 바탕으로 전도된 분별을 행하고 그에 바탕해 업을 행하면 생사고통을 겪는 사정도 위와 같다. 알고보면 생사고통을 받는 가장 근본 원인은 무명 어리석음이어서 모든 고통에 대한 책임을 물어야 하는 죄목도 그것이라고 제시된다. 이것도 현실의 이해와는 동떨어진다고 할 수 있다. 현실에서는 모르고 무언가를 행하면 그로 인해 비난도 덜하고 고통을 덜 받게 해야 한다고 여기지만, 사정이 그 반대라고 제시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사정도 자신을 놓고 생각하면 쉽다. 자신이 축생을 상대할 때 축생이 자신보다 어리석다고 여기면서 함부로 대하고 고통을 받게 한다면 그 축생이 어떤 큰 잘못을 해서 그렇게 된 것인가 그 상황만 놓고 보면 또 그렇지도 않다. 또 아이가 몰라서 차도에 뛰어들어 이후 장애를 평생 겪는 경우도 마찬가지다. 그런 경우 그 아이가 이후 장구하게 겪는 장애나 고통의 원인도 그 사정이 마찬가지인 것이다. 그리고 넓게 볼 때 3계 6도에서 각 중생이 생사고통을 겪는 근본 원인이나 그 책임소재도 이와 마찬가지인 것이다.
한편 가장 기본적으로 생사현실 안에서 한 주체가 눈을 뜨게 되면 각 주체가 그러한 내용을 그렇게 얻게 되는 그 깊은 사정에 대해서는 알고보면 대단히 불가사의하고 묘하다. 이런 표현으로 경전에서 제시하게 된다.
그런데 불가사의한 것은 사실인데 그렇게만 답을 들으면 여전히 시원하지 않다.
그래서 또 이에 대해 수행자는 본 사정과 엇비슷하게 나마 그 사정을 이해할 수 있도록 즉 '얄리'의 노력을 이 부분에 기울여야 한다고 본다.
즉, 처음부터 문제삼는 그런 내용을 얻을 수 없는데 그러나 현실에서는 일반적인 입장에서 이해하는 것처럼 각 세계에 처하는 각 중생이 각기 그런 내용을 그렇게 얻고 또 이에 대해 대부분 그러한 망집을 일으키고 현실에 임하게 되는가. 이 부분을 '얄리'의 노력을 통해서 이해하는 노력이 필요하다.
이제 눈을 떠 보는 내용 □을 놓고 보자.
눈을 떠 이런 □ 내용을 매 순간 얻는데 자신이 여기저기 걸어다닌다고 해보자.
그러면 그렇게 눈을 떠 보는 내용 □이 매 순간 바뀌는 것을 경험하게 된다. 예를 들어 방에 있을 때와 상자에 고개를 박고 볼 때와 그리고 길 거리에 나가 볼 때가 다 다르다. 그리고 이것은 매번 실험해도 대강 엇비슷하게 그런 상태로 얻는다.
그래서 이 내용도 잘 실험해야 한다.
이미 앞에서 눈을 떠 보는 내용 □ 이 자신의 마음안 내용임을 살폈다.
그런데 평소 자신이 손을 내밀어 무언가를 만질 때 반복해 촉감을 얻는다면 이들 각 내용이 마음내용이라고 이해하게 되면 이제 이를 다음과 같이 이해하기 쉽다.
즉, 마음 내용의 한 부분이 또 다른 마음내용의 한부분을 대상으로 삼아 상대해서 그런 촉감을 얻는다. 이렇게 이해하기 쉽다. 그래서 이로 인해 여러 혼동도 일으킨다.
처음에는 일반적 입장처럼 눈 을 떠 보는 내용 □이 외부 세계, 외부 물질, 외부대상이고 자신이라고 이해해서 문제였다면
이제 그런 상태에서 자신이 눈을 떠 보는 내용 □ 이 마음 내용임을 이해하게 되면 이제 자신이 대상으로 한 내용이 그런 마음내용이다 그래서 마음내용을 상대해서 그런 마음내용을 얻는다. 이렇게 잘못 이해하기 쉽다.
그리고 또 이제 눈을 떠 보는 내용 □ 안에는 그런 내용을 얻게 한 외부 대상이나 그런 내용을 얻는 주체가 없다고 제시하게 되면 이제는 세상에는 오로지 그런 마음 내용과 마음만 있을 뿐 그 외로는 전혀 아무 것도 없다고 또 이해하기 쉽다.
그래서 이제 이런 실험이 필요하다고 본다.
자신이 어떤 사물을 대할 때 왼쪽 눈과 오른 쪽눈을 번갈아 가리면서 보게 되면 각 경우마다 각기 보는 모습이 조금 다름을 경험한다. 그런데 이는 다른 영희나 철수와의 관계에서도 마찬가지다.
이제 자신이 어떤 물체의 앞면을 보는 가운데 반대쪽에 서 있는 영희에게 그 물체를 어떤 형태로 보게 되는가 물으면 대부분 그 사물 뒷 모습을 본다고 답할 것이다. 그런데 자신은 그 상황에서 그 뒷 부분은 보지 못한다.
이 경우 자신이 보지 못하는 뒷부분을 그 상황에서 과연 '있다'고 해야 하는가도 엄격하게 보면 문제된다.
그런데 여하튼 여기서 우선 확인할 것은 비록 어떤 사물이 자신과 영희가 함께 대하는 하나의 사물이라고 여기더라도 자신이 보는 것과 다른 영희나 철수가 보는 내용은 위 실험을 통해서 서로 다르다고 보게 된다.
이제 이런 상태에서 그 사물을 영희에게 손을 죽 내밀어서 건내는 실험을 해보자. 그러면 그 사물은 이제 자신의 손을 떠나고 영희는 그것을 받는다. 그러면 자신이 앞 순간에 보았던 사물과 영희가 받고 나서 보는 것이 서로 다른 사물이겠는가.
일상생활에서 늘 쉽게 하는 이런 내용을 놓고 생각하면 그렇지는 않다고 해야 할 것이다.
그런데 이 상황을 놓고 자신이 한 순간에 대하는 사물이 오로지 자신 마음안 내용인데 또 한편 그런 마음 밖에는 전혀 아무 것도 없다고 주장한다면 이 상황을 자신의 마음만으로 어떻게 설명해야 하는가가 문제된다.
또 자신은 무엇을 대상으로 그런 내용을 얻게 된 것인가 하는 문제도 이와 관련된다.
물론 마음이 여기에 관계되는 것을 부정할 수는 없지만, 마음 밖의 내용을 전혀 인정하지 않으면 오로지 마음만으로 이 모든 내용을 설명해내야 한다.
그래서 오로지 마음 밖에 없다고 전제하면 이런 내용은 모두 자신의 마음이 자체 분열해 낸 내용이라거나, 자신의 마음이 자신의 마음 어느 부분을 상대해서 그런 내용을 얻어냈다고 생각해야 한다.
그런데 그렇다면 여기서 자신 이외의 영희나 철수와 사물을 주고 받는 관계는 어떻게 보아야 하는가.
우선 이런 경우에도 자신 마음만 오로지 있고 자신 마음 밖에 그런 사물이나 영희 철수에 해당하는 내용은 전혀 없다고 할 것인가.
그러나 그렇지 않다면 자신은 그런 상황에서 무엇을 대상으로 그런 내용을 얻고 또 상대에게 어떤 사물을 건낸다면 무엇에 대해 자신이 그런 동작을 해서 무엇을 그렇게 전한 것인가.
마음만 존재할 뿐 그 마음 밖에는 전혀 아무 내용이 없다고 전제하고 이 상황은 자신의 마음이 마음 내용 한 부분을 대상으로 삼아 그런 행위나 감각을 한 것이라고 이해하면, 이 상황에서 다른 영희나 철수도 역시 그런 자신의 마음내용을 상대해 그런 내용을 가져간 것인가?
또 영희나 철수도 어떤 내용을 그 마음으로 보고 얻는다면 반대로 자신이 영희나 철수 마음안 내용을 그렇게 상대해서 그런 내용을 보고 만지게 된 것으로 이해해야 할 것인가.
이것이 자신이 눈을 떠 보는 내용 □ 은 자신 마음내용이라고 할 때 그런 전제에서 무언가를 만지고 활동하면서 다른 주체와 관계하는 상황과 관련해 처음 살펴야 할 문제다.
그런데 자신 혼자만 있다고 해도 자신이 여기저기 걸어다니면 다른 모습들을 보게 된다. 그러니 이 내용도 함께 관련해 잘 생각해야 한다.
즉, 자신이 대하는 내용이 마음내용인 한편 이런 마음 밖에는 전혀 아무 것도 없다고 이해하면 이제 이 상황들을 놓고 이 모든 현실 내용을 모두 자신 마음만으로 모두 설명할 수 있어야 하는데 그것이 곤란하다고 보게 된다.
그래서 눈을 떠 보는 내용 □ 이 마음내용임을 인정하더라도 그 전제에서도 다시 마음 밖의 실재 영역에는 그 사정이 도대체 어떻다고 보아야 할 것인가에 대해
각 입장이 조금씩 다르기에 현실에서 이런 내용을 놓고 실험해보면서
각 내용을 검토해 보는 일이 필요하다.
○ [pt op tr]
▼mus0fl--Pierre Bachelet - Une Autre Lumiere.lrc
글이 길어서 일단 나눴다.
두번째 살필 문제는 다음이다.
어떤 이가 눈을 떠 눈을 떠 보는 내용 □은 마음 내용임을 일단 제시하게 된다.
그런데 눈을 뜨고 감는 동작을 반복하면 감을 때는 보지 못하다가 눈을 뜨면 그 순간 보게 된다. 그리고 그런 내용이 곧 □ 으로 표시하는 내용이다.
그래서 이렇게 확보한 내용을 놓고 생각하면 이 내용이 대단히 실답게 느껴지고 외부 세계나 외부의 객관적 실재라고 여겨지는데 눈을 감으면 이 내용을 또 보지 못한다는 것이 이상한 일이다.
왜 이상한가. 왜 외부의 객관적 실재는 자신과 관계없이 그대로 있는 내용이라고 보는데 왜 그런 내용이 자신이 눈을 뜨고 감는 활동에 영향을 받아서 매번 그렇게 눈을 뜨면 보게 되고 눈을 감으면 보지 못하게 되는가.
그리고 자신이 눈을 뜰 때마다 그렇게 눈을 떠 보는 내용 □ 이 곧 외부 실재라면 결국 자신이 눈을 떠야 그런 내용을 보고 눈을 감으면 사라지게 되므로 결국 그런 외부세계 자체를 매순간 자신이 눈을 떠 만들어 내는 것이고 그래서 자신은 그런 외부세계를 매순간 그렇게 만들어내고 없애는 창조자인가. 그렇지는 않다고 보아야 한다. 이들 내용은 자신이나 자신의 마음이 관계는 하지만 그러나 순전히 자신 마음만으로 만들어 내는 내용이라고 보기는 힘들다고 해야 한다.
그리고 또 자신이 보는 내용 □이 그대로 외부 실재라면 그 가운데 자신의 몸은 왜 그 일부만 매순간 그렇게 보는가. 즉, 자신이 보는 내용 □이 외부 실재라면 자신이 몸은 사정이 다 마찬가지인데 그 가운데 왜 일부는 보고 일부는 보지 못하는가. 이 처럼 일정한 경계를 놓고 보거나 못 본다면, 그 각 부분이 갖는 차이는 무슨 의미인가.
이것은 처음 눈을 떠 보는 내용 □ 이 자신이 이해하듯 외부세계나 외부대상, 외부 물질이나 영희와 철수와 함께 같이 대하는 외부의 객관적 실재가 아니고 자신이 마음으로 얻어낸 내용임을 파악하게 하는 실험의 하나이기도 하다.
그런데 이런 실험은 안경이나 손이나 별 다른 실험방안도 없이 무인도에서 혼자 있는 특별한 상황에서 자신이 보는 내용 □ 이 자신 마음내용임을 파악할 수 있게 할 원칙적인 방안이라고는 보지만, 그러나 일반적으로 이 내용을 통해서는
이들이 마음이 얻어낸 마음내용이라는 사정을 이해하기가 쉽지 않다고 보게 되기에 좀 더 쉽게 그 사정을 이해할만한 다른 내용들을 먼저 제시하였다.
그런데 여기서는 그보다는 다음문제를 생각해야 한다.
여하튼 그런 내용을 보다가 눈을 감으면 보지 못한다. 이 때 그러면 앞 순간에 보던 어떤 내용 □ 은 이제 완전히 없어진 것인가. 이 문제를 놓고 살펴야 한다.
그런데 만일 그렇지 않다면 자신이 눈을 뜨고 감는 것과 관계없이 즉 자신의 주관과는 무관하게 그대로 있다고 할 내용이 따로 있다고 할 것인가 또 있다면 그 내용은 무엇이라고 할 것인가가 문제된다.
이것이 본 바탕이 되는 실재는 무언가라는 주제로 논의되는 내용이다. 이것은 이미 많이 반복했다.
그런데 이 내용과 함께 관련해서 여기서 문제삼는 마음의 정체는 무엇이라고 볼 것인가가 문제된다.
우선 눈을 떠 보는 내용 □ 을 놓고 이것이 마음이 있어서 그런 내용을 보게 된다고 이해하면, 이제는 그런 마음의 존재를 따져야 한다.
그런데 정작 눈을 떠 어떤 내용을 본다고 할 때 그렇게 문제삼는 마음은 어떤 주체가 직접 보지 못한다. 또 만지지도 못한다. 사정이 이렇기 때문에 마음을 논의는 하지만, 앞의 실재와 관련해 그 마음이 어떤 영역에 위치하는 존재로 볼 것인가가 처음에 문제된다.
이는 다음 사정 때문이다. 마음은 눈을 감아도 보지 못하고 눈을 떠도 보지 못한다. 그래서 눈을 떠 보는 내용 □ 과 관계없이 마음이 따로 있다면 그리고 그 마음 자체는 일단 눈을 떠 보는 내용 □ 은 아니라고 한다면, 앞에서 문제삼은 실재와 사정이 거의 같다고 보아야 하지 않는가 . 이런 혼동이 생긴다.
그래서 처음의 입장에서 문제삼았던 '실재'와 현실에서 눈을 떠 보는 내용 □ 을 얻는 과정에 관계한다는 '마음'은 서로 어떤 관계인가가 문제되는 것이다.
어떻게 보면 이들은 서로 거의 구별이 안 된다.
그런데 여하튼 눈을 떠 무언가를 보는 과정에서 작용한다는 마음은 그 주체가 현실에서 눈을 떠 얻는 과정에 개입하고 그런 내용을 통해 그 존재를 파악하는 '그 어떤 것'이다. 이는 어떤 주체가 자신의 마음을 눈으로 직접 보지 못하기에 일단은 그렇게 표현해야 한다.
한편 이 마음이 사정이 그렇다고 하여 앞에서 문제로 제기한 '실재'와 같은 지위에 있는 것인가가 문제되면 이는 조금 다른 측면을 놓고 살펴야 한다.
우선 어떤 주체가 얻는 내용은 모두 그 주체의 마음으로 얻는다고 전제하면 그 마음은 결국 '그 주체의' 마음이다.
즉 하나의 상황에서 자신이 일정한 모습을 보면 그것은 바로 자신의 마음이 그러한 내용을 보는 것으로 이해해야 한다. 이는 이 상황에서 다른 주체는 그런 내용을 보지 않음을 의미한다. 그래서 각 주체의 마음을 구별한다.
즉 지금 이 상황에 있는 자신은 이런 모습을 보는데 산에 올라가 있는 어떤 이는 이와는 다른 모습을 볼 것이고 외국의 도시에 있는 어떤 이도 또 그럴 것이다. 자신이 여기 저기 걸어다니면 매 상황 다른 모습을 보는 것처럼 그 사정이 그렇다고 이해한다.
그러니 마음이 이런 한 내용을 얻을 때 그 상황에서 전혀 다른 내용을 얻는 마음을 자신의 마음이라고 하겠는가. 곤란하다.
또 자신이 직접 그 마음 내용을 얻지 못한다고 해서 자신만 그런 마음을 갖고 다른 주체는 어떤 내용을 얻는 그런 마음이 전혀 없다고 하겠는가. 그것도 곤란하다.
그래서 각 주체마다 제각각 다른 마음이 있다고 하게 된다.
그런 사정으로 처음 문제삼았던 '실재'는 이와는 조금 성격이 다른 지위의 내용을 놓고 문제삼은 것으로 보아야 한다.
왜냐하면 처음 실재를 문제삼은 내용을 살피면 위와 같이 각 주체가 얻는 내용과 관련시켜 이해하는 마음과는 일단 다름을 쉽게 이해하게 된다.
그래서 이들 내용을 결과적으로 일단 다음과 같이 구분해 볼 수 있다.
우선 현실에서 한 주체가 눈을 떠 보는 내용 □은 정작 이런 내용을 얻게 하는 '마음'과는 일단 구분하게 된다. 즉, 마음은 그 마음 자체를 직접 보고 얻고 못하기에 마음으로 얻는 내용 □ 과는 일단 구분한다는 의미다.
또 한편 한 주체가 눈을 떠 보는 내용 □은 그런 주관의 사정과 관계없이도 그대로 있다고 할 '실재'와도 구분하게 된다.
그리고 결국 이런 마음은 본 바탕인 '실재'와도 다르고 각 주체가 눈을 떠 보는 내용 □과도 구분하면서 이 중간 영역에 있는 어떤 것으로 일단 그 지위를 놓게 된다.
즉, '실재'를 본 바탕으로 하여 한 주체가 눈을 떠 보는 내용 □을 얻는다면 그 중간에 그 주체의 마음이 있고 그 마음이 그렇게 작용해 그런 내용 □ 을 얻게 한다고 일단 보게 되는 것이다.
다만 마음이 그 마음자체를 직접 얻지 못하는 한편, 자신이 얻는 마음안 내용 그 자체를 마음으로는 보지 않는다면, 그런 점에서는 본 바탕의 내용으로 찾는 '실재'와 그 사정이 엇비슷하게 여겨지지만,
그러나 마음은 현실에서 각 현실 상황에서 열심히 작용해 각 내용을 얻어내는 것이어서 그 마음과 관계하지 않고도 그대로 있다고 할 본 바탕인 실재 자체와는 구별해야 한다는 의미다.
그리고 그렇게 이들을 일단 구분해야 앞으로 이런 내용을 놓고 이들 각 관계를 또 살펴나갈 수 있다고 본다.
즉 이렇게 놓고 이후 실재 그 자체가 곧 마음인가. 또는 마음 자체가 곧 마음에서 얻는 내용 □ 인가. 또 반대로 마음 자체가 곧 실재인가. 또는 마음에서 얻는 내용 □ 자체가 곧 마음인가. 이런 것을 살피는 한편
또 실재가 그렇다고 마음을 떠나 있는가. 또는 마음 내용이 그렇다고 마음을 떠나 있는가. 이런 것을 살펴서 이들 관계를 심도있게 살펴나가게 된다고 본다.
그런데 처음부터 일단 이 각 표현이 가리키는 의미나 내용에서부터 서로 혼동하면 논의과정에서 이 혼동을 수정하기가 힘들어진다고 본다.
특히 문제되는 각 내용을 놓고 이들이 서로 떠나 있는 것이 아니므로 이런 사정에서 a 는 즉 b 다 이렇게 제시할 때 이 혼동이 더 심해지게 된다.
예를 들어 반야심경에서 색불이공 공불이색 색즉시공 공즉시색 이렇게 한편으로 제시하고 또 한편 공중 무색 무수상행식... 이런 형태로 제시하면 자신이 문제삼는 감각현실[색]과 실재[공]의 관계를 이해하는 과정에서 심한 혼동을 일으킬 수도 있게 된다.
반야 경전에서 본래 이들 내용을 제시할 때 이를 다음과 같이 제시한다.
문제삼는 어떤 주체가 얻는 감각현실 즉 색의 공함은 색은 아니지만, 그러나 그러한 색의 공함은 색을 떠나 있는 것은 또 아니다. 그래서 색은 공과 다르지 않고 색은 곧 공이다. 이런 형태로 내용을 제시하게 되는데 이것이 문제되는 각 내용들의 관계를 있는 그대로 살피는 과정에서 필요하다.
일단 내용이 길어졌으므로 쉬기로 한다.
○ [pt op tr] 음악공양, 나무불, 나무법, 나무승
▼mus0fl--Pauline Paris - Un Pour Deux.lrc
마음과 관련된 내용을 살핌에 있어서
현실에서 한 주체가 눈을 떠 보는 내용 □ 을 놓고 살피는 데 있어서 먼저 주의할 점을 살피는 중이다.
그런데 쉽게 이 사정을 이해할 수 있도록 실재와 - 각 감각현실 - 관념분별의 관계를 라면 - 벽돌 - 사람 이런 형태로 놓고 설명하는데 이는 실재는 전혀 아무 것도 '없다'고 할 것은 아니지만, 그러나 끝내 어떤 주체가 그 내용을 직접 얻지 못하므로 공하다고 표현하게 되는 것이어서 엄밀히 보면 적절한 비유는 아니다.
그러나 그렇게만 제시하면 공을 곧 '아주 없음[무]'로 이해하기 쉬우므로 여기서 라면이라는 비유를 들어 그 관계를 설명하고자 하는 것이다.
원래는 어떤가하면 현실에서는 감각현실을 전체로 얻고 나서 분별 영역에서 이렇게 저렇게 각 부분을 묶고 나누면서 그 때마다 저 부분은 사람 영희 저 부분은 철수 또 저 부분은 바위 이 부분은 자신의 몸 이런 식으로 분별을 행한다.
그리고 나서 그런 분별 내용이 실재나 감각현실의 각 영역에 그처럼 있다고 여기면서 망집을 일으키고 그런 바탕에서 그 분별 내용을 언어로 표현해가며 논의하게 된다.
그래서 이처럼 각 영역의 내용을 그런 표현을 통해 평소 함께 접착시켜 이해한 바탕에서 논의를 살펴나가기에 나중에는 이로 인한 혼동을 해결하기 곤란하게 된다.
또 일반적인 입장이 그렇기에 경전에서도 원칙적으로 본래 그런 내용을 얻을 수 없다고 보지만, 그러나 일정한 부분을 그렇게 언어를 통해 방편 시설을 하여 일정한 부분을 가리키면서 논의를 하게 된다.
그런 사정으로 실재 영역에 대해 논의하거나 마음에 대해 논의할 때도 그렇게 각 부분을 언어로 표현해가며 논의하게 되지만, 그러나 그 언어표현이 가리키는 구체적 내용이나 의미를 놓고 혼동을 일으키면 곤란하다.
그것이 대지도론에서 처음에 제시하는 4종실단에 대한 내용이기도 하다.
예를 들어 '있다'는 표현은 다 비슷한데 그 표현이 가리키는 구체적 내용이 각 경우마다 조금씩 다른 것이다.
우선 온갖 있고 없음을 문제삼는 내용은 일단 그것을 문제삼을 때 이를 나타내는 언어 표현도 있고 그러한 관념분별도 또 일단 그렇게 있기에
그런 언어자체의 측면이나 관념분별의 측면에서는 그것은 그렇게 '있다'고 해야 한다.
그런데 그런 측면으로 무엇이 있다고 한다면, 처음부터 무엇의 있고 없음을 따질 필요도 없는 것이다. 무엇이던 언어나 관념상에서 문제만 제기하면, 그것은 무조건 그런 언어나 관념의 측면에서는 그렇게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자신이 무언가를 놓고 이러이러한 것은 마땅히 있는 것으로 추리된다거나, 있어야 마땅하다고 생각하고 분별하게 되기에 그래서 그런 것이 있다고 주장하고 나서면, 그런 주장 내용은 모두 그런 관념이나 언어 측면에서는 있다고 해야 한다.
예를 들어 토끼의 황금뿔 이런 내용을 놓고 과연 그것이 있는가 없는가를 문제삼아도 앞과 같은 측면에서는 있다고 해야 한다. 그러니 무엇이던 생각만 하면 그것을 그렇게 있다고 해야 하는 것이어서 이런 측면의 논의는 처음부터 할 필요도 없다고 해야 한다. 이것이 쓸데없는 희론이 갖는 성격이다.
또 사정이 그러므로 무언가가 있고 없음을 문제삼을 때는 적어도 이런 의미에서 그런 측면의 있고 없음을 문제삼는 것은 아님도 기본적으로 이해해야 한다.
즉, 어떤 것의 존재여부나 그 정체를 살필 때 그 논의가 희론의 성격을 갖지 않으려면 일단 이런 측면의 논의는 논의에서 제외해야 한다.
그래서 실재 영역 - 감각현실 - 관념분별 각 영역에 라면 - 벽돌 - 사람 이런 내용이 있다고 할 때 사람이 있는가 없는가가 문제된다면 그 문제는 그런 관념이 관념영역에서 관념으로 있는가 없는가를 문제삼는 것은 아니다.
이런 문제는 관념분별 내용으로서 사람이란
실재 영역의 라면에도 있는가. 이런 것이 문제된다.
그리고 실재 영역에 그런 관념분별 내용이 그대로 그렇게 있는가를 살피는 것은 실재의 공함과 주로 관련되는 논의가 된다.
또 이외에도 그런 관념분별에 해당하는 참된 진짜의 내용으로서 영원하고 불변하고 고정된 무언가가 이들 영역에 있어서 그런 내용을 얻는가 이런 문제를 놓고 그 정체에 대해 살피게 된다. 그리고 이 부분은 무아 무자성과 관련된 논의가 된다.
그리고 현실에서 한 주체가 얻는 감각현실과 관념분별 내용 사이에서도 각 내용이 다른 영역에서 얻어지고 있는가가 또 혼동을 일반적으로 일으키게 되므로 이 역시 잘 살피는 것이 문제된다.
즉 벽돌이란 감각현실에 사람이란 내용이 있는가. 또 반대로 사람이란 관념내용에 벽돌이란 감각현실이 있는가. 이런 문제를 살피게 된다.
또 한편 그런 감각현실은 감각현실대로 실재 영역에서 그런 내용이 있다고 할 것인가 문제된다.
그리고 이렇게 각 영역에서 얻는 내용의 관계를 살펴서 문제삼는 내용의 정체를 살피게 된다는 사정을 이미 반야경전의 구절을 인용을 해서 제시한 바 있다.
참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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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전에서 시설 가명을 통해 각 영역간의 관계를 살피는 문제
http://buddhism007.tistory.com/5142#090
sfed--밀린다경수정본_MilLinDaGyeongSuJeongBon_x.txt
sfd8--불교단상_2562_09.txt ☞◆vsjr1753 ☞○경전에서 시설 가명을 통해 각 영역간의 관계를 살피는 문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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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전에서 시설 가명을 통해 각 영역간의 관계를 살피는 문제
그런데 여하튼 이런 논의에서 초점을 맞추는 부분에 대해 혼동을 일으키면 안 된다.
그런데 한편 일반적인 입장에서 있다 없다라는 표현을 사용할 때는 앞에서 라면 - 벽돌 - 사람의 관계를 놓고 라면이나 벽돌이 있는 영역에서 사람이 있다고 할 것인가를 문제삼는 것은 앞에서 살핀 이런 문제와는 그 성격이 다르다.
일반적 입장에서 있고 없음을 문제삼는 논의는 다음의 의미다.
예를 들어 어떤 이가 현실에서 방안에 사과가 '없다'고 말하는 의미는 일반적인 입장에서는 자신이 눈을 뜨고 있고 빛도 밝아서 여러 사물 모습을 보는 가운데 만일 사과가 있다면 사과에 해당한다고 자신이 스스로 여기는 그런 감각현실도 함께 할 것인데 그런 모습을 보지 못하고 있다. 이런 의미를 나타내는 것이다.
그리고 일반적인 입장에서 '있다'라는 표현으로 나나태는 내용은 결국 그런 감각현실 □ 에서 자신이 사과라는 '분별'에 접착시켜 평소 대하는 그런 '감각내용'을 지금 얻고 있다. 이런 의미를 나타내는 것이다.
그래서 이는 앞에서 라면 - 벽돌 - 사람의 관계를 놓고 사람이 벽돌 영역에 있는가 없는가 등을 문제삼고 그런 측면을 살피는 것이 아니다.
앞과 같은 일반적인 상황에서 그 주체는 무언가 감각하고 그 일정 부분을 묶어서 그것이 사과라고 분별을 일으켜 대하는 것인데 이 상황에서 정작 그렇게 묶은 그 감각현실 그 부분에 그 주체가 생각하는 그런 분별 내용이 그 영역에 그대로 있는가 없는가를 지금 문제삼는 것이다.
그런데 일반적 입장은 그 상황을 놓고 그 상황에서 그런 감각현실을 얻으면 그것으로 곧 자신이 생각하는 사과는 그 영역에 있다고 표현하는 것이다.
있고 없다는 논의와 관련해서 일반적 입장과 기본적으로 이런 차이가 있기에 이로 인해 심한 혼동을 불러 일으키게 된다.
그래서 어떤 것의 정체를 살피는 논의에서는 그런 측면에서 논의를 행하는 것이 아니라는 사정을 한편으로 잘 파악해야 한다.
이는 결국 자신이 무언가 감각을 하고 그에 따라 어떤 관념내용을 일으키면 그것이 있다고 주장하는 것이어서 결국 그 실질은 처음에 살핀 것처럼 어떤 관념분별을 관념영역안에서 그렇게 있으면 있다고 하는 것과 별반 차이가 없다.
무엇이 있고 없거나 같고 다르고를 살피는 문제와 관련해
각 논의를 이렇게 관념분별내용이 관념영역에서 그렇게 있는가 없는가를 문제삼는 것으로 이해하고 대한다면 처음부터 할 필요가 없는 쓸데없는 논의로서 망상분별에 바탕한 희론이 된다는 사정을 잘 파악해야 한다.
그런데 마음에 대한 논의를 할때도 상황이 마찬가지다.
이미 제시했듯 마음은 어떤 주체가 직접 보지도 못하고 만지지도 못한다. 그런데 마음이란 표현을 하고 무언가를 논의하는 것이다.
그런 상태에서 무엇을 가지고 그렇게 논의해가는가. 이것을 먼저 확인해야 한다.
그런데 여기서 마음이 있고 없음을 만일 일반적 입장처럼 그런 생각을 하는데 그에 대응한 어떤 감각현실을 얻는가 아닌가를 놓고 따지는 문제로 살피면 아무리 노력해도 마음에 해당한 내용은 보이지도 않고 만져지지도 않는데 무엇때문에 그것을 있다고 할 것인가.
또 한편 그런 관념분별에 해당한 내용이 마땅히 있어야만 한다고 추리된다거나 그런 생각이 들기에 마음이 있다고 주장하는 것이라면 또 논의하는 내용 가운데 사정이 그렇지 않아서 없다고 할 것은 도대체 무엇이 있는가. 이렇게 문제 성격이 희론 형태로 바뀌는 것이다.
그래서 처음에 마음의 존재성을 문제삼을 때는 적어도 이런 측면은 아님을 먼저 이해해야 한다.
그런데 경전에서 마음이란 표현을 하고 가리킨다면 도대체 무엇을 가지고 그런 마음이 있다고 하고 무슨 내용을 가리키는가.
그런데 이미 이렇게 각 측면을 놓고 내용을 제시하다보니 상당히 복잡하다는 느낌을 받게 된다.
그렇다고 대충 임하면 대충 그 부분부터 온갖 혼동을 일으키게 되고 온갖 시시비비에서 헤어나오지 못하게 되기 쉽다.
극단적으로 심하게 말하면 어떠한 이가 경전안에 글자로 마음이라고 써 있는데 왜 여기에 마음이 없다고 하는가. 그러나 한문 경전이나 범어 경전에는 '마음'이란 '한글 글자'가 없는데 부처님이 마음이 있다고 제시했다는 것은 도대체 무슨 근거로 그러는가. 이런 식으로 문제삼는 경우까지 하나하나 살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일단 방편 시설을 통해 언어로 무언가를 가리키는 입장에서는 마음 뿐 아니라 문제삼는 그 일체가 다 사정이 마찬가지로 그런 내용은 그 분별 영역을 떠난 다른 영역에서는 본래 얻을 수 없다는 것을 전제로 하고 그런 바탕에서 그 사정을 이해하지 못하는 상대를 이해시키고자 방편으로 그런 시설을 해서 가정적 논의에 들어간다는 사정을 먼저 이해해야 한다.
그래서 처음 마음이란 표현을 놓고 여러 혼동을 일으킬 때 일단 자신이 마음이란 표현으로 이해하는 글자나 언어자체가 그런 내용은 아니고 더 나아가 그런 표현을 자신이 관념 영역에서 생각하고 추리하는 그런 내용을 가리키는 것도 역시 아님을 기본적으로 이해해야 한다.
그래서 눈으로 보지도 못하고 만지지도 못하는 마음을 놓고 논의할 때 처음에 이 부분부터 정리하지 않으면 논의를 하면 할수록 혼동이 심해지게 된다.
이는 현실에서 눈에 보이는 사람을 놓고 그 정체를 살필 때도 마찬가지다.
경전에서 어떤 상황에서 문제삼는 사람이 과연 있는가 없는가를 살필 때 지금 이 표현을 통해 그 상황에서 어떤 부분의 무엇을 살피는가를 맥락을 통해서 잘 찾아내지 못하면 엉뚱한 혼동을 일으키게 마련이다.
그 상황에서 무언가를 대해 어떤 주체가 사람이라는 생각과 분별 내용을 못 일으켜서 그래서 '사람'이 없다는 것인가. 또 그 상황에서 자신이 눈을 떠 본 내용 가운데 그가 평소 사람이라고 여기고 대하던 그런 감각현실을 못 얻어서 없다고는 것인가. 이런 식으로 오해하기 쉽다는 의미다. 그래서 이런 혼동을 먼저 정리해야 한다.
그리고 이제 그런 문제가 아님을 잘 이해하는 바탕에서 논의 내용을 살펴야 한다.
그래서 경전에서 '마음'이 있다고 하는 것은 비록 그것이 임시적 방편 시설이라고 해도 도대체 어떤 것을 어떤 측면에서 가리키고자 그런 표현을 한 것인가를 놓고 잘 살펴야 한다.
비유를 들어보기로 하자. 한강에 물이 흐른다.
그런데 잘 살피면 한강을 흐르는 물은 어제 물과 오늘 물이 다르다.
그런데 여하튼 그런 물을 매순간 대하기에 어떤 주체가 이를 가지고 한강이라고 하는 것이다. 우선 물이 전혀 없는데 강이라고 할 수는 없는 것이다.
그런데 또 물이 없어도 비가 오면 그곳에 물이 그처럼 흐를 수 있다고 보면 또 메마른 땅도 그 부분이 한강이라고 표현할 수는 있다.
여하튼 이런 비유를 놓고 여기서 문제삼는 한강은 그 상황에서 과연 무엇을 가리키는가를 또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여하튼 한강은 그 물을 떠나서 직접 얻지는 못하는 듯 한데 그러나 또 물이 있고 없고 간에 한강이라고 가리킨 그 부분은 일단 다른 부분과는 성격이 다르다고 할 수 있다. 즉, 한강은 한강 아닌 것과는 다른 것이다. 만일 그런 의미도 전혀 없다면 그것을 한강이라고 부를 이유 자체가 없는 것이다.
그런데 처음 실재 영역 - 감각현실 - 관념분별의 관계를 설명하고자 이를 라면 - 벽돌 - 사람으로 놓아서 실재 영역을 라면이라고 표시하기로 한 것은 다음 생각 때문이었다.
원래 실재는 현실에서 행하는 분별처럼 이 부분 저부분 이렇게 묶고 나누고 전후 좌우를 구분해 시설할 수 있는 어떤 영역이 아니다. 그 내용을 얻을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렇다고 아무 내용도 전혀 없다고 할 수도 없는 것이다.
그런데 그런 실재를 그저 공이라고 표현하면 이해하기가 쉽지 않다고 보고 그런 실재를 만일 라면이라고 놓고 본다면 하는 생각에서 '라면이라면' 이 표현을 사용하게 되는데 이 표현을 잘 보면 앞 뒤로 같은 표현이 나열되지만, 그 의미가 조금 다른 것이다.
그런데 앞 뒤 구절에서 어떤 표현이 같다고
그 표현이 매번 같은 의미를 나타내는 것이 아니다는 사정도 이와 함께 잘 이해해야 한다고 본다.
예를 들어 사람은 사람이 아니다. 나는 내가 아니다. 생사현실에는 생사가 본래 없다. 영희가 오고가는 그 현실에 오고감은 없다. 이런 등등의 표현에서 앞 뒤로 같은 표현이 이어지지만, 이는 각기 같은 영역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다.
그런데 여하튼 이해하기 어려운 공한 실재와 감각현실 등의 관계를 이해할 때 실재를 일단 '라면'이라고 가정하면 이를 바탕으로 각 내용을 얻어내는 그 관계가 위와 같음을 살피자는 의미다.
일반적으로 달을 손으로 가리키면 손을 바라 보지 말고 달을 보아야 한다고 하는데 이 비유에서 달이 나타내는 내용도 사실은 실재를 나타내는 어떤 비유적 표현이다.
그런데 이 비유에서 달은 누구나 보지만,
그러나 이 비유로 나타내고 한 실재는 그렇게 어떤 주체가 직접 보지 못하고 그 내용을 얻지 못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런 실재는 여하튼 전혀 없다고 할 그런 무엇과는 또 사정이 다르기에 여하튼 공하다라고도 일반적으로 표현하게 되는데 라면 - 벽돌 - 사람의 비유에서도 라면이란 표현으로 실재를 나타내는 사정도 이와 비슷하다.
한편 마음도 그 사정이 실재나 앞의 비유에서 라면과 비슷한데 마음도 여하튼 전혀 아무것도 없는 것과는 사정이 다르기에 비록 그것을 보지도 못하고 만지지도 못하지만, 일단 '마음'이라고도 표현하게 되는 것이다.
그런데 이 경우 어떤 이가 자신이 그런 마음이란 표현으로 관념분별을 통해 이해하는 그런 내용이 곧 그 표현이 나타내는 내용이라고 여기고 그 영역에 그런 내용을 바로 밀어 넣으면 곤란하다.
이는 비유하면 마음이란 글자가 마음이란 표현으로 나타내는 그 부분에 그렇게 떡 쓰여 있다 이렇게 이해하는 것처럼 문제가 된다.
일단 쉬기로 하다. 조각글이 계속 밀려서 힘든데 일단 연구 주제는 혼동을 일으키지 않는 전제에서 살펴나가야 한다고 보기에 길게 적게 되었다.
○ [pt op tr] 음악공양, 나무불, 나무법, 나무승
▼mus0fl--Yves Duteil - Le Royaume Des Elephant.lrc
마음 현상에 대해 살피기 위해
살펴나갈 주제를 나열하고 기본적으로 문제되는 몇몇 내용을 살폈는데
앞으로 마음을 살피는데 있어서 현실에서 자신의 마음을 실험 재료와 내용을 연구할 도구로 놓고 앞으로 잘 살펴나가며 연구하는 가운데 과거 7 부처님이 남긴 게송을 참고해 가는 것이 도움이 된다고 본다.
기회 있을 때마다 게송을 외어보려고 하는데 내용이 비슷비슷해 보이면서 혼동이 일어나 시간이 오래 되면 또 희미해지기 쉽다. 그래서 오래 기억하려면 여러가지 방편을 동원해야 한다고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