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pt op tr] 음악공양, 나무불, 나무법, 나무승
▼mus0fl--Aldebert - La Femme De Mon Pote.lrc
♥ 잡담 ♥언어의 혼동
조각글이 계속 밀린 상태다. 지금 글을 쓰고 있는 시점이 한가위 9월 24 일인데 밀려도 너무 많이 밀렸다. 한가위 성묘 때문이 아니고 알고보면 본인의 몸 상태 때문이다.
현재 어떤 이가 눈을 떠 얻는 내용을 □ 라고 표시하는 가운데 어떤 과정으로 이런 모습을 얻게 되는가에 대해 살피는데 이 논의가 점점 복잡해지고 있다.
눈을 떠 모습을 보는 것은 눈에 큰 병이 없는 한 복잡한 설명 없이도 누구나 쉽게 일상적으로 행한다. 그러나 이에 관련한 내용은 평생을 두고 살펴도 쉽지 않다.
더욱이 자신이 눈을 떠 보는 내용 □ 을 어떻게 이해하는가가 곧 자신이 생사의 묶임에서 벗어나올 수 있는가. 아니면 망집번뇌에 묶여 업을 행하고 생사에 묶이는가를 가르게 하는 중요한 역할을 한다.
왜냐하면 한 주체가 현실로 대하는 내용의 거의 90 % 정도를 눈을 통해 얻기에 현실에서 생사에 묶이는 과정도 대부분 이에 바탕하기 때문이다.
이에 대해서 경전에서 일정한 취지로 조금씩 다르게 내용이 제시되는 사정에 대해 경전을 몇 부분 인용해서 앞에서 이미 살폈다. 그런데 경전에서 제시하는 표현에 대해서도 많은 혼동이 있다.
경전과 논서를 공부하고 이해하는 것은 이런 각 표현이 어떤 내용을 가리키는가를 이해하는 것이 그 대부분을 차지하게 된다고 본다. 특히 마음 현상에 있어서는 눈으로 보지 못하고 손으로도 만지지 못하는 것을 놓고 살펴나가는 사정 때문에 이에 대한 혼동이 쉽게 없어지지 않게 된다.
일단 일반적으로 눈을 떠서 보게 되는 내용 □ 이 있다면 그것을 경전에서는 색이라고 표현한다. [좁은 의미의 색]
그런데 또 눈으로 보는 내용 뿐 아니라, 귀, 코, 입, 몸 등을 통해 얻는 색,성,향,미,촉 이들 내용을 모두 합쳐 부를 때도 색이라고 표현한다. [넓은 의미의 색]
그런데 색,성,향,미,촉과 같은 감각현실에 다시 법을 추가해 넣으면 이는 다 함께 경(境)이라고 표현한다. 그래서 이런 내용을 바탕으로 근-경-식 이런 표현을 사용하는데 이것은 그러한 경(境)과 같은 내용은 그러한 근(根)을 의존해서 그런 식(識)을 행해 얻는다.
이런 의미로 이해하면 조금 쉽다.
쉽게 표현하면 다음과 같다. 그러그러한 색(빛깔) □ [색경色境]들은 눈[안근眼根]을 의존해서 시각감각작용[안식眼識]을 통해 보게 된다.
그런데 문제는 누구나 눈을 뜨면 그런 모습을 보게 되는 것은 별 차이가 없는데 자신이 보는 이런 내용이나 과정에 대해 서로 달리 생각하고 대하는 것이 문제다.
그래서 자신이 눈을 떠 보는 내용 □ 을 놓고 경전에서 색[色]이라고 표현할 때 이 색에 대해 일반적으로 망상분별에 바탕해 이해하는 내용에 대해서는 이미 많이 반복했다.
즉, 일반적으로는 이렇게 자신이 눈을 떠 대하는 내용 □ 을 색이라고 부른다면, 그런 내용은 곧 자신 외부에 있는 외부세계의 내용이고 자신의 눈과 같은 감관이 대하는 외부 대상이고 또 마음 밖의 마음과는 구분되는 외부 물질인 한편 이런 내용은 자신 뿐만 아니라 모든 주체가 대하는 외부의 객관적 실재라고 이해하는 것이다.
또 이런 생각을 바탕으로 자신이 눈을 떠 대하는 내용 □ 가운데 일부를 자신의 몸이라고 여기면서 생활한다.
또 그런 바탕에서 색이나 근-경-식 이런 표현을 대하므로 결국 색이란 표현은 곧 '마음 밖에 있고 마음과는 구별되는 물질'을 표현하는 것으로 이해하고 경은 자신의 감관이나 인식기관이 대하는 '외부대상'을 의미한다고 이해하며 대하게 된다.
이는 그 표현이 가리키는 내용은 어떤 이가 눈을 떠 얻게 되는 그런 내용 □ 으로서 서로 차이가 없더라도 그 내용□ 이 갖는 의미에 대해 일반적인 입장에서는 그런 의미로 오해하여 대함을 의미한다. 또 그런 입장에서 경전이나 논서의 각 표현을 대하기에 또 경전이나 논서가 제시하는 내용까지도 함께 오해하게 된다.
그래서 불교 경전에서 가장 기초적인 내용을 제시한다고 평가되는 잡아함경에서 이들 근-경-식에 대해 기본적으로 그 정체나 지위를 어떻게 보고 있는가에 대해서 앞에서 살핀 것이기도 하다.
결국 눈을 떠 보게 되는 내용 □ 을 색이라고 표현하기도 하고 어떤 경우는 경(境)이라고도 표현할 때
이러한 내용 □ 을 일반적인 입장에서는 외부 물질이나 외부 대상으로 이해하고 대하기에 그 내용 □을 가리키는 경전의 표현도 그런 의미로 이해하기 쉽지만, 그런데 정작 그런 언어표현을 시설해서 그런 □ 부분을 가리켜 나타내는 경전에서는 그런 □ 내용의 정체나 그 지위를 그렇게 보고 있지 않다는 의미다.
그래서 이 문제를 해결하려면 결국 일반적으로 일으키는 망상분별을 제거해서 스스로 매 순간 일상생활에서 눈을 떠 대하는 □ 내용의 정체가 무언가를 잘 파악하여 그 사정이 그렇지 않음을 잘 이해해야 하는데 그 과정이 복잡하고 쉽지 않다.
여하튼 그런 과정을 통해서 최종적으로 결국 자신이 눈을 떠 보게 되는 내용 □은 마음안 내용임을 이해해야 하고 또 그런 □ 에는 일반적으로 생각하게 되는 그런 주체나 대상을 얻을 수 없고 그것의 생멸이나 오고감 역시 얻을 수 없음도 잘 이해해야 한다.
그리고 이것이 곧 생사에 묶이는 생멸문과 그런 생사의 묶임에서 벗어나는 해탈문의 차이라고 할 수 있다. 그래서 처음 제시한 것처럼 일반인의 입장처럼 현실을 대하는 가운데 거기에 자신이 문제삼는 그런 것이 그렇게 있고 또 그 생멸이나 그 생사가 있다. 그리고 그 가운데 어떤 것은 대단히 좋은 것이어서 그것을 열심히 추구해야 하고 또 그 가운데 어떤 것은 끔직하게 싫은 것이어서 그것이 나타나면 큰 일이므로 열심히 피해야 한다. 이런 식으로 대하며 자신이 그 가운데 무언가를 바라며 열심히 추구해나가면 그것을 얻을 수 있다고 여기면서 현실에 임하게 되는데 이것이 바로 그 주체가 생사현실에서 망집에 바탕해 번뇌에 묶여 사역을 당하고 곰처럼 평생 임하다가 끝내는 극심한 생사고통을 받는 상태로 묶여 끌려가는 과정이라고 이를 이해해야 하는 것이다.
사정이 위와 같기에
그런 생사고통을 겪는 근본원인이 되는 망상분별을 그 생사현실 안에서 잘 제거해야 하는데 그러나 정작 그런 망집에 묶인 상태에서는 왠만한 노력을 통해서도 그것이 곧바로 제거되지 않기에 결국 부처님께서 단계를 벌려 세워서 하나하나 다양한 가르침을 통해 점차적으로 그런 망집을 제거할 수 있도록 이끌게 된다고 할 수 있다.
그래서 처음에 제시하는 것은 본래 그런 현실 내용 □ 안에 그 존재나 생멸을 문제삼을 어떤 내용을 얻을 수 없지만, 그러나 한편 그런 사정을 이해시키기 위한 방편으로 일단 상대의 그런 망집상태를 이해해 받아들이는 가운데 그런 망집환자가 현실에서 문제삼는 그런 각 내용을 일단 그 상대가 이해하는 언어를 통해 시설해 가리킨 다음 이에 대해서 일단 그런 것들이 모두 마음안에서 얻어진 마음 내용이고 그런 내용을 얻을 수 없는 것이어서 집착을 갖고 대할 실다운 내용이 아님을 제시해가게 되는 것이다.
불교 경전 가운데 가장 기초적인 내용을 제시한다고 평가받는 잡아함경에서 다음과 같이 제시한다.
241. 소연법경(燒燃法經)
K0650V18P0787a15L; 如是我聞一時佛住毘舍離獼猴池
신수장경 : 2-58a
한글장경 : 잡-1-236
남전장경 : s.35.194
...
나는 오늘부터 올바르게 사색[思惟]하여,
눈은 무상(無常)한 것이고
유위(有爲-생주멸변화있음)이며, *,
마음을 인연하여 생긴 법[심연생법心緣生法]이라고 관찰하자.
빛깔[색色]과 안식과 안촉(眼觸)과
안촉을 인연하여 생기는 느낌인, [안촉인연생수眼觸因緣生受]
괴롭거나 즐겁거나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은 안의 감각[내각內覺]도
또한 무상한 것이고
유위(有爲-생주멸변화있음)이며, *
마음을 인연하여 생긴 법이라고 관찰하자.'
귀[이耳]·코[鼻]·혀[舌]·
몸[신身]의 입처(入處)에 대해서도
마땅히 이와 같이 배워야 한다.
'차라리 쇠창으로 내 몸을 꿰뚫을지언정,
신식(身識)으로 감촉과 좋은
감촉을 따라 취함으로써
세 갈래 나쁜 세계에
떨어지지는 않으리라.
...
이처럼 현실에서 반복해 얻어지게 되는 그 관계를 연기관계로 제시하여 살피는 가운데 각 주체가 실답게 있다고 여기며 집착하는 내용들이 하나같이 무상-고-무아무자성- 열반적정 - 공하여 집착을 가질만한 실다운 내용이 아님을 이해시켜서 그에 대한 망상분별과 집착을 제거하는 것이 첫 목표점이라고 할 수 있다.
그래서 집착을 제거하고 그에 바탕해 업을 행하는 것을 중지하고 부처님이 제시하는 계, 정, 혜 수행방안을 닦아 나가면 일단 생사의 묶임에서 풀려나 벗어나게 되는 것이다.
그런데 이 과정에서 망집에 바탕해서 생활하던 입장은 자신이 가졌던 망상분별을 기준으로 잡고 자신이 그렇게 좋다고 보는 것에 대해 왜 집착을 제거하고 포기하고 버리라고 하는가. 그러면 자신은 어떻게 되는가. 이런 식으로 이 내용을 대하기 쉽다.
그것은 비유하면 마치 최면에 걸린 이가 자신을 3 악도로 묶어 끌고 가는 수갑과 족쇄를 자신에게 대단한 좋음을 주는 보물로 여기는 가운데 그런 수갑과 족쇄를 다 풀어 던지면 자신은 이후 어떻게 살라는 것인가. 이런 식으로 이를 거꾸로 걱정하면서 대하는 상태와 같다.
그러나 그렇게 망집을 일으킨 상태에서는 또 대부분 그렇게 임하는 상태이기에 생사 묶임에서 벗어나오기가 쉽지 않다는 현실사정도 함께 고려해야 한다.
우선 이렇게 이 상황을 이해해보자.
부처님 입장에서는 어떤 이가 눈을떠 얻는 내용 □ 안에 문제삼는 어떤 것을 얻을 수 없다. 그런 것을 얻을 수 없기에 또 그 생멸이나 생사도 문제삼을 수 없다.
그런데 현실에서는 일반적으로 대부분 그처럼 얻는 내용 □ 에 금도 있고 집도 있고 그것을 갖고 있는 영희나 철수도 있고 또 자신도 있다. 이런 식으로 대하는 상태다.
이처럼 눈을 떠 얻는 내용 □에 대해 일반적인 입장과 경전 입장이 극과 극으로 다른 사정을 보았다.
이 부분을 조금 보충하면 다음과 같다. 이는 그런 내용 □ 을 얻고 그것이 전체는 색이라거나 일부분은 집이나 금이나 영희 철수라는 등등으로 분별을 일으키지만, 정작 그 내용 □안에서 그런 분별내용은 얻을 수 없다는 그런 의미다. 그런데 설명을 위해서 그런 언어 시설 방편으로 그런 내용을 가리키면서 그 사정을 설명해간다는 뜻이다.
그리고 여기서는 이런 망상분별을 시정하기 위해서 기초적으로 어떻게 접근해서 해결해나가게 되는가를 살피는 중이다.
그래서 먼저 어떤 주체가 눈을 떠 얻는 내용 □ 에 그가 문제삼는 그런 내용을 비록 얻을 수 없지만, 여하튼 이를 '색'이라고 표현해 가리키는 가운데 그 주체가 그런 내용을 얻는 과정을 일반인이 이해할 수 있는 형태로 설명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것이 가정적 논의에 해당한다. 왜냐하면 부처님 입장에서는 처음 그런 것을 얻을 수 없는데 그러나 일반인에게 그 사정을 이해시키기 위해서 그런 언어 시설을 통해 가리키면서 설명해가는 것이기 때문이다.
여기에서 가장 기본적인 것은 □과 같은 내용을 눈을 통해서 보게 된다. 이런 내용을 설명하는 부분이다.
그래서 이런 내용들을 통해 일반적으로 외부세계나 외부대상, 외부물질, 외부의 객관적 실재로 실답다고 여기고 대하는 그런 내용이 마음안의 내용이고 그리고 이런 내용이 무상- 고 -무아무자성 - 열반적정 - 공하다는 사정까지 이해하고
본 바탕이 되는 내용은 전혀 아무 것도 없는 것은 아니지만, 이를 어떤 주체가 끝내 얻을 수 없기에 공하다라고 표현하게 된다. 이런 사정까지를 기본적으로 이해하여 현실 내용에 대해 집착을 제거하고 그에 바탕해 업을 행하는 것을 중단하고 생사현실에서 수행으로 전환해 임하면 일단 생사고통을 받는 상태에서는 벗어난다고 보게 되는 것이다.
일단 여기까지 제시하고 조금 쉬었다가 이어나가기로 한다.
조각글이 밀려 있는데 일단 올려진 경전들을 읽고 정리하고 살피느라 힘들다. 그런 상태에서 또 날짜 경계선이 지나 9월 25 일이 되었다. 마음 같아서는 조각글 내용을 건너뛰면서 조각글을 채우고 싶은데 일단 논의하는 내용을 일단락짓고 나아가기로 한다.
앞에서 보았듯 경전 입장과 일반적인 입장이 극과 극으로 차이가 있기에 하나하나 단계적으로 살펴가며 망집을 제거하는 것이 쉽지는 않다.
경전을 보면 가장 기본적 내용을 제시한다고 평가받는 잡아함경에서 세계를 나누는 범주인 18 계의 각각의 요소가 마음을 인연하여 생긴 법[심연생법心緣生法]이라고 제시함을 볼 수 있다. 그러나 이 경전에서 이에 대해 자세히 설명하는 것은 아니다. 부처님의 설법은 어떻게 보면 대단히 간단한 형태다.
그리고 공에 대한 내용도 잡아함경 등에서 그 단어는 제시되지만, 역시 그에 대한 자세한 내용을 살펴보기는 힘들다.
오히려 이와 같은 기본 경전에서는 일반적인 입장에서 망집에 바탕해 이런 내용을 실답다고 여기고 집착하여 업을 행해 생사고통을 받아나가는 상태에서 벗어나게끔 하기 위해 무상 - 고 - 무아 무자성 이런 내용을 통해 집착을 제거하고 수행으로 전환해 생사의 묶임에서 일단 벗어나오게 하는 부분에 더 중점을 두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이는 일반적으로 망상분별이 대단히 복잡한 형태로 얽혀 있기에 일단 이해하기 쉬우면서도 생사의 묶임에서 풀려나는데 직접적이고 효과적인 부분에 초점을 맞추기에 그렇다고 사정을 이해할 수 있다.
그래서 각 주체가 얻는 현실 일체가 공하다거나, 모두 마음안 내용이라는 등은 그 결론적 내용만 간단히 제시하고 관련된 자세한 내용은 이후 수행을 통해 집착이 많이 제거된 바탕에서 제시하게 됨을 이해할 수 있다.
어떻게 보면 마음 현상과 관련된 자세한 내용과 실재의 공함을 자세하게 살피는 것이 수행에 도움이 되지만 그러나 일반적으로 이해하기 쉽지 않고 또 한편, 현실내용 일체가 마음 내용임을 제시하면 이로 인해 그에 대한 집착을 제거하는 방향으로 나아가지 않고 오히려 이 마음에 대해 집착을 다시 일으키고 대하기도 쉽다. 이런 문제점은 잡아함경뿐만 아니라, 마음에 대해 조금 자세하게 1,2,3,4,5,6,7,8 이런 형태로 제시하는 경전에서도 역시 제시하는 문제점이기도 하다. 여하튼 그런 사정으로 간단하지 않다.
따라서 우선 당장은 각 주체가 대하는 현실 내용이 무상하고 고이며 무아 무자성임을 관하여 그에 대한 집착을 제거하는데 중점을 두게 된다.
우선 이 문제를 다음과 같이 살펴보자.
현실에서 어떤 이가 눈을 떠서 사과모습을 바라보는 가운데 그 사과를 손으로 두드려 소리를 듣고 그 사과에 코를 대서 사과향을 맡고 그 사과에 입을 대서 사과맛을 보고 그 사과를 손으로 만져서 촉감을 얻는 경우를 놓고 보자.
이런 실험을 스스로 잘 해보기로 하자.
그런데 이런 상황에서 이 사과에 대해 일반적으로 이해하는 내용에는 대단히 많은 오류가 들어 있다. 그런데 그것을 이해하는 것 자체가 쉽지 않다.
우선 사과를 손으로 두드려 소리를 듣는 경우 일반적인 입장에서는 그 '사과모습'을 '대상'으로 해서 그런 소리를 듣는다고 이해하기 쉽다. 나머지 경우도 마찬가지다. 예를 들어 촉감도 역시 그런 '사과모습'을 '대상'으로 자신의 손이 관계해서
그런 촉감을 얻는다고 이해하기 쉽다.
그리고 자신이 눈으로 사과모습을 보는 것도 이와 마찬가지로 이해한다.
그런데 이런 식으로 이해하는 것이 일단 문제다.
또 이렇게 자신이 대하는 사과모습을 '대상'으로 이해하는 경우에 그런 내용이 자신의 마음안 내용임을 제시하면 나중에는 다시 이런 오해까지 또 일으키게 된다.
즉 자신의 눈 등이 대하는 '대상'으로 이해했던 그런 내용들이 대상이 아니라고 그 오류를 수정하는 것이 아니고, 오히려 자신의 눈 등이 대하는 대상은 그런 '마음-정신적인 내용'이다. 즉 마음이나 마음 내용을 대상으로 해서 자신이 그런 내용을 얻는다. 이렇게 망집을 증폭시켜 나가게도 된다.
이런 식으로 각 주체가 이미 일으킨 망집을 바탕으로 매 경우 엉뚱하게 망상분별을 증폭시켜 나가기 때문에 이 해결이 각 부분에서 대단히 복잡한 문제를 일으키게 된다.
그래서 일단 이들 내용이 마음 현상임을 이해하는 것은 이전에 제시한 실험 방안을 통해서도 쉽게 이해할 수 있다고 보지만, 일단 마음에서 얻는 이들 내용을 놓고 이들 사이의 관계부터 먼저 잘 이해할 필요가 있다.
그 내용을 다음 경전내용을 놓고 참조해보자.
214. 이법경(二法經)
K0650V18P0781b18L; 如是我聞一時佛住舍衛國祇樹給
신수장경 : 2-54a
한글장경 : 잡-1-219
남전장경 : cf.s.35.93
...
그 때 세존께서,
모든 비구들에게 말씀하셨다.
"2 가지 인연이 있어서
식(識)이 생긴다.
어떤 것이 2 가지인가?
이른바
눈과 빛깔,
귀와 소리,
코와 냄새,
혀와 맛,
몸과 감촉,
뜻과 법이니라.
……
(이 사이의 자세한 내용은
앞에서 말씀하신 것과 같다)
……
경계[境界]가 아니기 때문이니라.
무슨 까닭인가?
눈[안眼]과 빛깔[색色]을 인연하여
안식(眼識)이 생기나니,
그것은
무상하고
유위(有爲-생주멸변화함)이며 *
마음[심心]을 인연하여 생긴 것이다.
만일 빛깔과 눈과 식이
무상하고
유위((有爲)이며 *
마음[심心]을 인연하여 생긴 것이라면,
이 3 가지 법이 화합하는 접촉[촉觸],
접촉 뒤의 느낌[촉이수觸已受],
느낌 뒤의 의도[수이사受已思],
의도 뒤의 생각[사이상思已想],
이러한 모든 법도
다 무상하고 유위(有爲-생주멸변화있음)이며, *
마음을 인연하여 생긴 것이다.
이러한 것들이
이른바
접촉[촉觸]·생각[상想]·의도[사思]이다.
귀·코·혀·몸·뜻에 있어서도
또한 그와 같으니라."
...
위 내용은 잡아함경에서 12 처 18계에 대해 제시하는 부분이라 할 수 있다.
앞에서도 보았듯 여기서 세계를 구성하는 기본 요소가 되는 이들 내용이 하나같이 마음을 인연하여 생긴 것임을 제시하지만, 여기서는 이 내용 보다는 이들에 대해 제시하는 '연기' 관계를 살피는 것이 더 필요하다고 본다.
그리고 여기서는 부처님이 제시하는 연기관계와 일반인이 이해하는 인과가 엇비슷해 보이지만, 어떤 점에서 중요한 차이가 있는가를 잘 파악해야 한다.
이 상황을 먼저 비유로 통해 이해해보자.
이전에 게임기 비유를 한 적이 있다.
게임 화면에 어떤 커서를 놓으면 화면에서 어떤 폭탄이 발사되기도 하고 화면이 바뀐다. 그런데 이런 관계는 그 게임에서는 그런 상태만 되면 늘 그렇게 발생하고 또 어떤 이만 특수하게 그런 것이 아니고 그 게임을 하는 이는 누구나 그렇다.
그런데 이 관계를 설명하는 입장은 그 하나하나가 실답지 않고 또 그것들 사이의 관계도 실답지 않음을 잘 이해한다. 그래서 어떻게 보면 이들은 라면을 놓자 옆에 벽돌이 나타난다. 이런 관계와 비슷한 것이다.
그런데 그 게임을 대하는 이는 그 화면 밖의 사정은 보지 못하고 또 그런 내용들이 그런 형태로 자꾸 반복되니까 그것은 당연하다고 여기는 한편 그 게임 내용을 대단히 실답다고 여기는 상태인 것이다.
그래서 이런 게임에 집착해서 고통을 받는 상태로부터 구해내고자 임하는 입장은 이런 사정을 이해하면서 이 관계를 설명해가게 된다.
위 비유를 잘 이해해야 하는 것은 부처님이 경전에서 설명하는 내용이 바로 이런 취지에서 생사현실 안에서 마음 내용들에서 각 내용들의 관계를 설명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부처님이 제시하는 연기관계에 대해 기본적으로 다음을 잘 이해해야 한다.
우선 일단 무명 어리석음을 바탕으로 임하는 생사현실을 기준으로 놓고 보면 그런 내용과 그 관계가 가장 옳은 내용일 뿐 아니라[세속제] 또 그런 내용은 무한히 다수 주체에게 그런 형태로 적용된다는 사정을 먼저 잘 이해해야 한다.
예를 들어 생사현실에서 살생한다는 등으로 계를 어기면 그로 인해 무량겁에 걸쳐 지옥고를 받게 됨을 제시한다면
무명을 바탕으로 한 생사현실을 기준으로 하면 그런 내용은 그런 관계로 무량겁에 걸쳐서 다수에게 그렇게 적용됨을 제시하는 것이다.
또 이는 달리 말하면 예를 들어 빵을 빨간 토마토와 같이 먹으면 지옥에 간다는 등의 내용은 엉터리인 반면 위와 같은 내용은 비록 각 주체가 그 상황에서 지옥을 직접 대하지 못해도 그런 관계로 무한히 다수에게 그런 내용이 적용됨을 제시하는 것이기도 하다.
그런 의미에서 부처님이 연기관계로 제시하는 내용은 생사현실을 기준으로 놓고 본다면 대단히 옳은 내용임을 한편으로 잘 이해해야 한다.
이미 앞에 소개한 경전에서 다음과 같은 구절을 살필 수 있었다.
...
'차라리 쇠창으로 내 몸을 꿰뚫을지언정,
신식(身識)으로 감촉과 좋은 감촉을 따라 취함으로써
세 갈래 나쁜 세계에 떨어지지는 않으리라.
...
이런 표현은 일반적 입장에서 보면 대단히 심한 표현이다. 창으로 몸을 꿰뚫은 것은 당장 대단히 큰 고통을 준다. 그런데 무명 어리석음과 망집해 바탕해
좋은 감촉을 따라 취해나가는 것보다는 차라리 그것이 낫다고 제시하는 것이다.
왜 그런가. 그것은 간단히 말하면 그런 망집에 바탕해 그렇게 업을 행하면 축생 아귀 지옥이라는 3 악도에 떨어지는 관계가 있기 때문이다. 일반적인 입장에서는 생사현실에서의 이런 관계를 이해하지 못하기에 매 순간 그렇게 자신이 임하면서도 정작 그 문제점을 보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예를 들어 현실에서 대부분 매끼마다 다른 생명을 해쳐 자신의 식사를 해결하고 또 자신의 즐거움을 위해서 사냥이나 낚시를 하기도 하고 하다 못해 파리나 모기가 날라들어 함부로 이들을 파리채로 때려 잡는 경우에도 자신이 그로 인해 얻는 즐거운 맛이나 이익과 좋음만 생각할 뿐 자신이 행하는 업이 다른 생명에게 어떤 의미를 갖고 그런 업을 행해 자신이 종국적으로 어떤 상황에 직면하게 되는가 그 관계를 잘 이해하지 못하고 생사현실에서 매 순간 무덤덤하게 임하는 경우가 많다.
그것은 자신이 그런 행위를 할 때 자신의 입장에서 자신이 좋다고 느끼는 것에만 초점을 맞추는 한편 입장을 바꾸어 그 상황에서 다른 생명이 그로 인해 겪는 고통은 전혀 의식하지 않고 매순간 임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런 사정으로 자신도 거꾸로 생사현실에서 그런 고통을 그런 형태로 받아나가게끔 된다는 사정을 함께 잘 이해해야 한다.
그리고 그렇게 생사현실에서 망집에 바탕해 업을 행하여 그런 상황에 처하게 된다는 그 관계를 잘 이해하면 결국 경전에서 제시하는 것처럼 망집에 바탕해 그런 좋음을 집착해 취하기 보다는 차라리 쇠창으로 내 몸을 꿰뚫는 것이 낫다는 내용도 잘 이해하게 된다.
그런데 한편 이처럼 생사현실 안에서 적용되는 그 관계나 내용은 하나같이 본 바탕이나 본 정체의 측면에서는 그것이 실답지 않고 그런 내용을 본래 얻을 수 없음도 함께 잘 이해해야 한다는 의미다.
그리고 이런 사정을 게임기비유를 놓고 잘 이해해야 한다고 본다. 이 사정을 잘 이해하지 못하면 나중에 이들 관계에 대해 혼동을 일으키기 쉽다.
일단 조금 쉬고 살피기로 한다. 오늘도 숙왕화님이 등산 훈련을 떠나자고 통보가 왔는데 상황따라 잘 대응해야 한다.
앞에서 각 감관을 통해 일정한 내용을 얻는 과정과 관련한 연기(인과) 관계의 문제를 살폈는데 인과를 살피는 것은 같다고 보지만, 불교 경전과 일반적 입장은 차이가 많다.
그런데 이는 현실에서 일반적으로 일으키는 망집과 관계된다.
그래서 일단 이 차이를 잘 살필 필요가 있다.
우선 다음 실험을 해보자. 어떤 이가 책상에 사과를 하나 놓고 이 사과는 어떻게 여기에 이렇게 있게 된 것인가라고 . 사과가 나타난 인과를 묻는다고 하자.
또 한편 자신이 눈을 떠 사과 모습을 보게 될 때 이는 어떤 과정으로 보게 되는가 이런 형태로 인과문제를 살필 수도 있다.
그런데 이들 문제를 살필 때 경전에서는 어떤 입장으로 이를 대하는가는 앞에서 기본적으로 살폈다.
인과문제는 과거에 관련내용을 많이 살핀 한편 내용이 복잡하기에 조각글 적는 입장에서도 마음이 복잡하게 된다. 살필 내용이 많은데 이를 하나하나 다시 꺼내 살피자니 무엇을 간추려 제시할 것인가 이런 부분에서 고민이 많아진다. 과거에 인과에 대한 대략적으로 살핀 적이 있는데 이를 기본적으로 참조하는 것도 도움이 되리라 본다. 그런데 이는 대략적인 내용이어서 보충할 부분이 많다.
우선 사과가 하나 책상에 놓여 있을 때 이 사과가 어떻게 나타난 것인가. 이를 문제삼는 경우를 놓고 보자.
여기에서 일반적입장과 불교 입장이 기본적으로 어떤 차이가 있는가하면 일반적 입장은 문제삼는 사과를 놓고 그것이 곧 외부세계의 외부대상이고, 외부 물질이며 객관적 실재라고 이것을 대한다고 할 수 있다.
그런 가운데 사과가 열리게 된 사과씨를 그 직접적인 원인으로 제시함과 함께 그 사과씨가 사과로 되기까지 필요하다고 보는 흙이나 물이나 햇빛 이런 보조적인 원인요소 등을 나열하고 그에 대한 인과를 살폈다고 여긴다.
그런데 경전 입장은 이에 대해 다양한 입장이 제시되는 사정을 이미 살폈다. 그런 가운데 여기서는 처음 어떤 이가 도대체 무엇을 사과라고 보고 그것을 문제삼는가 하는 부분부터 문제가 제기된다.
인과문제를 따지는 입장은 그가 누구던지 일단 무언가를 감각한 가운데 그 가운데 일 부분을 무엇이라고 여기면서 그것을 다시 언어로 가리키면서 이것을 문제삼게 된다.
그래서 이 상황에서 뒷 부분을 다 제거하면 사실은 그런 문제자체를 그 상황에서 제기하지 못한다는 것을 먼저 잘 파악해야 한다.
경전에서 최종적으로 이 부분에 제시하는 것이 결국 '무상해탈문'의 내용이라 할 수 있다.
일반적인 입장에서 자신이 무언가를 감각하고 그 가운데 일 부분을 묶고 나누어서 어느 부분이 사과라거나 영희나 철수 자신이라고 이해할 때 그런 부분에 그가 생각하는 그런 모습이나 성품을 얻을 수 없음을 이해하는 것이 곧 무상해탈문과 관련된다. 이런 사정을 이해하면 이로 인해 생사의 묶임에서 벗어나게 된다는 의미다.
그런데 일반적으로 망집에 바탕한 상태는 그 사정을 그렇게 이해하지 못하고 감각한 현실의 일정 부분은 자신이 그에 대해 일으킨 그런 분별 내용이 거기에 그렇게 있다고 여기고 대하는 상태이다.
또 사정이 그렇기에 경전에서도 이런 사정을 이해시키기 위해서 방편을 시설해서 일단 그런 부분을 일정한 언어로 가리키면서 이 사정을 살펴나가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이것을 가정적 논의라고 하게 됨을 앞에서 살폈다. 즉, 그것은 그런 내용이 거기에 있어서 그렇게 제시하는 것이 아니고 그런 것을 얻을 수 없지만 일단 일반적으로 그렇게 이를 대하기에 일단 그런 언어로 그런 부분을 가리키면서 살펴나간다는 의미다.
그리고 이 상태에서 어떤 이가 어떤 부분을 사과라고 분별하는 가운데 또 그것을 '사과'라는 언어로 가리킨다면 이제 이런 사과를 살필 때 일반적 입장에서는 그런 현실 내용 일체가 그 자신의 마음안 내용임을 일단 이해하지 못하는 상태다.
그런데 이를 연기관계로 살피는 입장은 사정이 그렇지 않음을 이해하는 한편 일단 상대에게 그런 내용을 대하게 되는 본 사정을 이해시키기 위해 마음안에서 얻은 내용을 그 마음 안에서 그 내용들 상호간 갖는 관계를 제시하는 입장인 것이다. 그리고 이것을 앞에서 게임기 비유로 설명한 것이다.
본래 게임기 화면에 커서를 올려 놓으면 어떤 폭탄이 발사되고 하는 등등은 사실은 게임기 화면의 그런 내용이 게임기 화면내 다른 부분에 어떤 작용을 해서 그런 것이라고 할 수 없다. 그러나 게임기 화면만 대하는 상황에서는 일단 그 화면안의 내용들로 그 관계를 설명하게 되고 그런 설명도 역시 앞과 같은 사정을 바탕으로 그렇게 방편적으로 제시하게 된다는 의미다.
그런데 이미 앞에서도 제시했지만, 비록 그것이 실답지 않지만, 근본 무명 어리석음에 바탕해서 화면 각 부분에 그런 내용이 거기에 있다고 여기는 바탕에서는 그런 내용을 그런 상황에서 그런 관계로 무한히 다수가 반복해서 얻게 됨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것이 망집에 바탕해서 업을 행하면 3 악도에서 무한한 고통을 받게 된다는 혹-업-고의 관계가 나타내는 내용이다. 그리고 이런 입장에서는 한번 행한 업은 사라지지 않는다고 또 제시하는 것이다.
그런데 또 이런 지옥에서 수많은 중생들이 그렇게 생생하고 실답게 여기며 고통을 받을 때 그 고통들이 하나같이 꿈처럼 실답지 않음을 잘 깨닫고 수행을 통해서 벗어나오라고 경전에서는 한편으로 제시하는 것이다.
그래서 생사현실에서 각 내용들간의 연기의 관계란 기본적으로 이런 입장에서 제시하는 것이다.
사과씨를 땅에 심으면 싹이 나고 사과나무가 자라난다. 이런 내용을 제시한다면
이는 이런 생사현실의 내용 하나하나는 모두 마음안 내용이고 그런 감각현실에 그처럼 분별내용이 있다고 본다면 그런 내용들 사이에서 그런 관계가 파악된다고 제시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런 전제에서는 다수가 무한히 그런 관계를 대하게 되지만 그러나 그 하나하나가 위와 같은 사정에서 실답지 않다고 제시하는 의미다.
한편, 이런 바탕에서 각 내용들 사이의
인과관계를 판단함에 있어서도 일반적인 입장과 불교 경전 입장은 차이가 많다.
우선 사과 하나를 놓고 이 사과가 어떻게 나타난 것인가를 살필 때 경전에서는 기본적으로 4 연을 제시하게 된다.
이는 단순히 사과씨와 흙과 물과 공기 등등에 의해서 사과가 열려서 사과가 있게 되었다 이런 식으로 불교내 4 연의 분류에서 인연과 증상연에 해당하는 요소 즉, 직접적인 원인과 보조적인 원인들을 단순히 나열해 제시하는 것과는 달리 소연연과 등무간연과 같은 내용을 제시하는데 이는 처음 어떤 이가 무언가를 놓고 사과라고 분별을 하면서 그것을 문제삼는 과정에는 반드시 이들이 포함되기 때문이다.
그것이 이들 내용을 마음안 내용으로 기본적으로 놓고 살피는 입장이다.
이는 또 이들 내용이 외부에 객관적으로 실재하는 내용이어서 이를 대하는 이의 마음은 관계없다고 여기는 입장과 근본적인 차이다.
한편, 일반적인 입장에서 인과판단을 할 때 쉽게 일으키게 되는 오류 가운데 까마귀 날자 배 떨어진다는 말처럼 단순한 선후관계를 연기(인과)관계라고 오해하는 경우가 많다.
그리고 인과 판단 과정에서 각 내용이 서로 원인과 결과의 관계가 있다고 볼 것인가를 판단할 때도 서양 철학자 존 스튜어트 밀이 제시한 방식처럼 일치법, 차이법, 일치차이병용법, 잉여법, 공변법 이런 형태로 판단하기도 쉽다.
그래서 처음에 제시한 연기관계의 형식이 갖는 의미를 잘 이해하는 것이 중요하다. 그리고 위와 같은 방식으로 인과관계를 판단하면 왜 잘못된 판단이 나타나는지도 함께 이해할 필요가 있다.
언뜻 보면 위에 나열한 일치, 차이, 병용, 잉여, 공변법 등이 수많은 사물들이 섞인 상태에서 각 내용들 사이의 인과관계를 판단하는데 기능을 한다고 보기 쉬운데 사실 위와 같이 판단하면 엉뚱한 것을 서로 원인과 결과의 관계가 있다고 판단하기 쉽게 된다.
위 문제를 어떤 이가 사과 하나를 책상에 놓고 눈으로 보고 손으로 두드려 소리를 듣고 코로 향기를 맡고 입으로 맛을 보고 손으로 촉감을 얻는 과정을 놓고 생각해보자.
일반적으로 이 상황에서 대부분 자신이 사과를 만져서 어떤 촉감을 얻는 것은 자신이 눈으로 대하는 그런 사과를 자신이 눈으로 대하는 그런 손이 닿아서 그런 촉감을 얻게 된다고 이해하기 쉽다.
그런데 이것이 왜 엉터리 분별인가를 이해하려면 만일 그렇다면 장님은 그 상황에서 촉감을 얻지 못할 것인가를 놓고 생각해보면 쉽다. 그렇지 않다. 즉 장님이 그런 모습을 보지 못해도 촉감은 얻을 수 있는 것이다.
나머지도 마찬가지다. 그리고 이것이 앞에 제시한 인과를 판단하는 방식과도 관련된다. 앞에 제시한 방식으로 이들 관계를 놓고 판단하면 자신이 눈으로 본 그런 모습이 그런 촉감도 준다고 여기기 쉬운 것이다.
이는 마치 눈으로 보는 번갯불이 천둥 소리를 만들어내는 원인이라고 이해하는 오류와 같다.
쉽게 말해서 이런 입장은 무언가 a 가 있을때 무언가 b가 있음을 보게 되었다. 또는 반대로 무언가 a 가 없을 때 무언가 b가 없음을 보게 되었다.
또는 이 둘을 다 보았다 이런 등등의 내용으로 a 와 b 가 인과관계가 있다고 보려는 입장인 것이다.
어떻게 보면 인과판단에 대해서 가장 기본적으로 일으키기 쉬운 오류, 선후관계를 곧 인과관계라고 이해하는 오류와 그 성격이 비슷한 것이다.
비록 그것이 마음안 내용들이어서 이것들이 서로 직접 작용하고 영향을 주고 받는 내용이 아니더라도 어느 내용과 다른 내용이 관계가 있다고 보려면 어떤 상황에서 어떤 내용 a [유,무,생,멸]이 있을 때 다른 내용 b [유,무,생,멸] 가 있는데 그 상황에서 그 a 가 없으면 그 다른 내용 b 도 없게 된다는 그런 관계를 파악할 때 비로소 a 가 있기 때문에 b 가 있고 따라서 서로 연기(인과)관계가 있다고 보게 되는 것이다.
반대로 말하면 어떤 상황에서 a 를 아무리 넣고 빼고 해보아도 다른 b 에 변화가 없다면 그 a 와 b 는 이것만으로 연기의 관계가 있다고 할 수 없는 것이다. a 가 있거나 없거나 아무런 차이가 없는데 무엇때문에 그 a 를 b 와 관계가 있다고 할 것인가. 그렇지 못한 것이다.
그러나 이에 대해 조금 더 보충하면 이런 경우 그런 상태에서는 이를 통해 a 와 b 가 연기관계가 '있다고 할 수는 없다'는 의미이지, 이를 통해서 a 와 b 가 연기관계가 없다고 단정할 수 있다는 의미는 아니다.
결국 이는 넓고 길고 깊게 관찰이 필요한 문제다.
이제 앞의 사과 실험으로 돌아가보자. 눈을 떠서 볼 때 자신이 사과라고 보는 부분에 자신의 손이 닿으니 촉감을 느꼈다. 이를 앞 방식으로 하면, 일치법에 해당하는 내용이 발생하였다고 볼 수 있다.
그 상황에 수많은 내용이 있었는데 손이 닿는 사건과 촉감을 얻는 사건이 발생한 것이다. 문제는 다음이다. 그 상황에서 그런 모습을 설령 보지 않아도 여전히 촉감은 얻을 수 있는 것이 문제다.
그래서 이것은 사실은 서로 연기의 관계로 관련지을 수 없는 내용을 서로 관련지은 것이 된다.
이 상황을 이해하기 쉽게 앞에서 비유로 제시한 것이 도미노 상황이다.
도미노를 두 줄로 쌓아 놓은 상태에서 긴 막대를 이용해서 그 도미노를 함께 쓰러 뜨렸다. 그리고 그 상황에서 보면 하나의 줄에 있는 도미노가 쓰러지므로 인해서 그 옆 줄의 도미노가 쓰러진다고 여기기 쉽다.
그런데 사실 옆줄의 도미노가 쓰러지는 것은 다른 줄 도미노 때문이 아닌 것이다. 비유로서 나타내고자 한 내용은 이것이다.
즉 한 쪽의 도미노를 쓰러지지 않게 붙잡아도 다른 쪽은 쓰러짐을 보기 때문이다. 그리고 사실 한쪽 줄의 도미노를 쓰러지게 한 것은 다른 줄의 도미노가 아니고 처음 막대로 양쪽의 도미노를 쓰러 뜨린 일과 각 줄의 도미노가 쓰러진 것이 서로 관계가 있다고 이해해야 한다.
그래서 일반적으로는 번개가 쳐서 천둥이 울린다고 이해하지만, 사실은 번개를 보지 못해도 천둥소리는 들을 수 있다고 이해해야 한다. 그래서 이들은 서로 연기 관계라고 보기 힘들다.
사정이 그렇기에 비록 그런 내용을 각 감각현실에서 얻을 수 없고 마음안 내용 각 부분이 서로 영향을 주고 받는 것은 아니지만, 여하튼 이들 안에서 연기 관계를 살필 때는 경전에서 제시하는 것처럼 각 내용을 제시해야 한다.
이는 촉각정보를 얻는 것은 시각정보가 원인이라고 볼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다. 그리고 나머지도 마찬가지다.
따라서 자신이 보게 되는 손이 사과를 닿아서 촉감을 얻는다고 일반인은 이해하지만, 경전에서는 그렇게 제시하지 않는 것이다.
그래서 그러한 촉감은 눈으로 보지 못하지만, 그러나 대할 수 있는 그런 몸에 의존해서 신식을 통해 얻는다. 이렇게 제시하게 된다.
불교 경전에서 실상과 연기와 수행의 문제는 대단히 중요한데 앞과 같이 살피는 내용이 곧 생사현실 안에서 수행자가 생사의 묶임에서 벗어나기 위해 행하는 수행방안과 수행목표의 관계를 제시하는 바탕이 된다.
비유를 들어 다시 설명하면 게임기 안에서 어떤 고통을 받는 캐릭터로 활동하는 상황에서 그 상황에서 벗어나려면 그 안에서 적용되는 일정한 연기관계를 따라서 일정한 행위는 중지하고 반대로 수행에 해당하는 내용을 잘 실천해야만 그 상황에서 벗어나게 된다고 그 사정을 이해하면 쉽다.
실상론에서 이들 내용이 하나같이 실답지 않다고 제시하지만, 그러나 생사현실에서 그렇게 임하지 않으면 그 생사현실안에서는 반복해서 생사고통을 받는 상태에 처하게 됨을 의미한다.
그래서 이런 사정을 연기의 관계로 잘 이해해야 한다.
이미 앞에서도 제시했지만, 문제삼는 것의 본 정체를 밝히는 입장에서는 이들 내용이 하나같이 그리고 종합적으로 실답지 않아서 집착을 갖고 대할 내용이 아님을 제시한다. 이는 생사현실에서 그런 망집에 바탕해 업을 행하면 안 됨을 제시하는 것이기도 하다.
그리고 인과와 관련해서 살펴야 할 핵심은 그런 내용들이 그런 생사현실에 있다고 여기는 것은 결국 그런 주체가 그 현실에서 일정한 내용을 그렇게 감각하고 그런 분별을 일으키는 상태에 있기에 그런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그 주체가 근본적으로 생을 출발하는 단계에서 근본 무명 어리석음을 바탕으로 업을 행하여 그런 상태에 놓였기에 그런 감각현실을 그렇게 얻게 되고 그런 내용과 그 생멸이나 생사가 있다고 대하는 상태인 것이다.
그래서 이 문제를 해결하려면 처음부터 얻지 못하는 것을 그렇게 있다고 여기면서 대하는 그런 망집을 제거하는 것이 근본 방안이고
또 한편 그런 생사현실에 놓여진 상태에서는 장차 그런 생사고통에 묶이게 하는 업을 중지하고 그 생사현실에서 업의 장애를 제거할 수행방안을 실천해 생사의 묶임에서 벗어나는 것이 방안이다.
이처럼 생사현실안에서 행해야 할 수행은 결국 연기관계를 바탕으로 제시되는데
그러나 이를 통해 최종적으로 도달해야 할 목표상태는 그런 내용을 본래 얻을 수 없음을 잘 이해하여 생사고통에 묶이는 상태를 초래하는 업을 중지하는 한편 그리고 그런 업을 그렇게 행하게 만든 그런 망집을 제거하는 상태에 이르러야 한다고 제시하는 것이다.
눈을 떠서 보는 내용 □ 을 놓고 그것을 어떻게 보게 되는가를 살피는 것도 사실은 이런 취지다.
그래서 이와 관련해 연기관계를 자세히 살피는 것이 필요하지만, 그러나 너무 자세히 살피면 또 너무 복잡하게 되기에 그 가운데 비교적 중요한 내용만 대강 살피고 그외 문제는 추후에 또 기회가 되면 자세히 살펴나가기로 한다.
처음 일반인이 눈을 떠서 보는 내용 □ 에 대해 경전에서 첫 단계로 제시하는 내용을 살피는 중인데 이렇게 한번에 다 관련된 내용을 살펴나가려 하면 이를 살피기가 대단히 어렵다. 지금 조각글이 많이 밀려서 계속 관련내용을 이어 살펴가야 하는데 다른 관련 문제는 이후에 문제될 때 살피기로 한다.
인과문제와 관련해서는 또 일반적 입장에서 연기를 어떤 필연적이고 결정론적이고 숙명론적인 내용을 제시하는 것으로 잘못 오해하기도 쉽기에 이런 문제도 살펴야 한다고 보는데
잠깐 보충하면 본래 불교에서는 결정된 법을 얻을 수 없다[무유정법]라고 제시하게 된다. 그런데 무명을 바탕으로 그런 내용이 있다고 보는 전제에서는 그런 관계로 무한히 그런 내용을 대하게 된다는 것을 한편으로 제시하는 것이다.
이를 게임기비유로 이해하면 이해가 쉽다. 본래 게임안의 내용은 실답지 않고 그런 내용을 얻을 수 없다. 그런데 게임기 화면에서 그런 캐릭터와 아이템이 있고 그것이 화면 어떤 부분을 누르면 어떻게 된다고 대하면 그 관계는 그런 바탕에서 그렇다는 의미인 것이다.
연기관계를 어떤 기계적 인과론이나 필연적인 관계로 이해하면 사실은 수행을 해서 생사를 벗어난다는 등을 말할 필요도 없고 말할 수도 없다고 보아야 한다. 그런 일은 그런 관계로 반드시 생길 일이 생긴 것이어서 그런 바탕에서는 피할 방안도 없고 심지어 그런 내용을 알거나 모르는 것도 역시 인과에 의해 정해진 것이고 어떤 결과를 원해도 그에 필요한 원인요소를 마련하거나 마련하지 못하는 것도 역시 다른 원인에 의해 이미 정해진 것이어서 그런 내용을 알더라도 단지 세상은 그런 줄 알고 임할 뿐 별 도리가 없다는 이런 식으로 제시해야 할 것이다. 결국 그런 기계적 인과론이나 필연적인 인과론이 제시하는 내용이 그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는 일종의 숙명론이 된다.
그러나 연기관계를 제시하는 본 사정이 그렇지 않다. 그리고 그 사정은 이미 앞에서 제시했다고 본다.
여기서는 첫 단계에서는 연기관계로 살피는 이들 내용이 현실적으로 어떤 의미를 갖는가를 살피는 것이 더 중요하다.
우선 이는 한 주체가 자신이 눈을 떠 보는 내용 □ 을 놓고 그러한 내용이 거기에 있고 그것이 생멸한다고 보는 가운데 그 생멸이 어떤 관계로 그렇게 되는가를 문제삼는다.
그래서 그 자세한 내용을 살피는 것도 중요하지만, 여기서는 이를 통해서 다음 내용들을 이해해서 현실에서 각 주체가 대하는 현실내용에 대해 집착을 제거하고 또 그에 바탕해 행하는 업을 중지하고 반대로 그런 생사의 묶임에서 벗어나올 수행을 행하는 것이 기본적으로 중요하다.
이는 결국 다음이다.
현실에서 문제삼고 집착하는 것이 생멸함을 보는가. 그러니까 그것은 무상한 것이다. 그런데 그런 무상한 것을 집착을 할 필요가 있는가.
=> 한편 어떤 좋은 것이 있는데 그것이 무상해서 사라지면 고통이 아닌가. 그러니까 무상한 것은 결국 고통을 주게 된다.
=> 그리고 그런 것은 결국 나와 나의 것이 아니다.
이런 내용을 잘 이해해서 일단 현실에서 집착을 갖고 대하는 것에서 집착을 제거하는 것이 우선 필요한 것이다.
그리고 연기(인과)의 관계를 통해서 위와 같은 내용을 잘 이해하는 것도 필요하다.
어떤 이가 a + b + c + d => E 의 형태로 연기의 관계를 파악하게 된다면 이 관계는 한편으로 그렇게 얻는 E 가
곧 영원하지 않아서 무상하고 또 사정이 그렇기 때문에 고이고 또 사정이 그렇기 때문에 진짜라고 할 참된 것이 아니고 무아, 무자성이고 또 사정이 그렇기 때문에 그런 관계를 떠나 실재한다고 볼 그런 내용이 아닌 한편 실재는 그런 문제되는 내용을 얻을 수 없는 것이고 또 실재는 전혀 없다고 할 것은 아니지만, 그러나 그런 관계로만 내용을 얻게 되는 어떤 주체가 끝내 얻을 수 없는 것으로서 공한 것이라는 내용을 함께 제시하는 것이다.
그래서 처음 단계에서는 이런 사정을 먼저 잘 관해서 현실에서 집착을 제거하고 그에 바탕해 행하던 업을 중지하고 반대로 그런 망집을 제거한 바탕에서 생사의 묶임에서 벗어나올 수 있는 수행을 어렵게 여기지 말고 그것을 잘 실천해서 일단 생사의 묶임에서 풀려나 벗어나는 것이 중요하다.
노래를 듣다보니 불어 노래에서 손오공은 옛이야기다. 이런 이상한 메세지를 듣게 되는데 과연 불어 노래에 이런 의미를 전하는 구절이 있을 것인가.
이것이 먹물을 뿌려 놓은 그림을 대하면서 그 그림은 거미나 사람을 그린 그림이라고 대하는 망상분별과도 관련된다.
그런데 생사현실에서 그렇게 그런 내용이 있다고 여기는 부분부터가 바로 이런 생멸 문제를 문제삼는 상태이기도 한 것이다.
그런 상황에서는 오히려 손오공이 옛이야기라는 메세지가 방편적으로 그런 망상분별 상태를 벗어나고 생사의 묶임에서 벗어나는 수행에 도움이 된다는 측면을 또 볼 수 있다.
본래 그런 내용을 얻을 수 없는데 어떤 주체가 근본 무명 어리석음을 바탕으로 업을 행하면 이후 생사현실에 처하게 되어 그러그러한 내용이 각 현실에 실답게 있다고 여기면서 생생하게 그 내용을 대하게 된다. 물론 이를 좋다고 여길 때는 별 문제가 아니라고 보지만, 이것이 결국 그 주체를 극심한 고통을 받는 상태로 묶어 끌고 가므로 이것이 문제이다.
그러니 그 상황에서는 한편으로 그런 생사현실에서 그런 생사고통을 받게 만드는 업의 장애를 수행을 통해 잘 제거하는 한편,
근본적으로 그런 내용을 얻을 수 없는데 그런 것이 있다고 여기며 대하게 만든 그런 망집과 근본 무명 어리석음을 그 생사현실 안에서 수행을 통해 잘 관하고 그런 망집을 근본적으로 잘 제거해야 된다.
글이 밀려 있어서 쫒기는 마음으로 조각글을 작성하는데
알고보면 손오공은 이런 과정을 통해서 공의 이치를 깨닫고 성불하기에 이름도 손오공이라고 칭하게 된 것이라고 한다. 그러나 손오공 이야기 첫 부분에 나타나는 손오공은 사실은 망집에 바탕해서 업을 열심히 행하여 심하게 생사고통을 받아 나가는 상태이기에 그 부분은 문제인 것이다.
-- 아래에 조각글 작성시 휴식시점에 붙인 노래가사,사진,풍광,예술작품 자료를 편집상 옮겨 붙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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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등산길에도 특이한 곳에 다라니를 하나 붙여 놓았다. 바라자라반다니. 5 안 즉 육안 천안 혜안 법안 불안 을 증장시킨다는 의미를 붙여서 외우는 다라니인데 이것으로 첫글자를 떼 시를 지어 보자고 제의하니 숙왕화님이 이렇게 받는다. 바라밀을 찾아 떠난다. 그래서 내가 다음을 이었다. 라일락 향기를 찾듯이 그러자 숙왕화님이 또 엉뚱하게 받는다. 그러다가 반 부분에서는 또 엉뚱하게 반야심경을 읽는다. 이렇게 받는다. 그래서 나도 다라니를 외운다. 이렇게 받았는데 나중에 방문할 때는 조금 다듬어야 할 필요가 있다고 보게 된다.
바라자라반다니 이런 다라니를 붙인 곳 주변에 외나무 다리가 하나 있어서 점검 중이다.
공원 계단을 수리하기 위한 시설들이 보인다. 그냥 이용만 하는 입장에서는 쉽게 생각하기 쉬운데 등산로를 확보해 이용하는 입장에서는 이런 일들이 남의 일이 아니라고 보게 된다. 대강 나무를 만져보면 그 무게 자체가 대단히 무거워서 들어서 움직이는 것 자체가 쉽지 않다.
본인의 등산 훈련을 맡아 행하고 있는 숙왕화님에게 사진을 찍을 때 미소를 지으라고 요청하면 공룡 티라노사우루스가 먹이를 향해 이를 벌리는 듯 어색하게 포즈를 취한다고 지적했더니 위와 같은 포즈를 취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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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립공원 밖에서 담배를 피움으로써 국립공원 안에서 담배를 피울 때 내야할 과태료를 내지 않게 됨으로써 50 만원을 쉽게 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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