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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진리와실천
불기2564-08-13_능가아발다라보경-K0159-002 본문
『능가아발다라보경』
K0159
T0670
제2권
● 한글대장경 해당부분 열람I
● 한글대장경 해당부분 열람II
○ 통합대장경 사이트 안내
○ 해제[있는경우]
● TTS 음성듣기 안내
※ 이하 부분은 위 대장경 부분에 대해
참조자료를 붙여 자유롭게 연구하는 내용을 적는 공간입니다.
대장경 열람은 위 부분을 참조해주십시오.
『능가아발다라보경』 ♣0159-002♧
제2권
♥아래 부분은 현재 작성 및 정리 중인 미완성 상태의 글입니다♥
불교기록문화유산 아카이브
楞伽阿跋多羅寶經卷第二
K0159
능가아발다라보경 제2권
송 구나발타라 한역
최윤옥 번역
2. 모든 부처님께서 마음에 대해 말씀하신 품
이때 대혜보살마하살이 부처님께 말씀드렸다.
“세존이시여,
세존께서는 수다라(修多羅)에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여래장(如來藏)은 자성(自性)이 청정하니
32상을 굴려 모든 중생의 몸속으로 들어간다.
이는 값진 보석이때 묻은 옷에 싸여 있는 것과 같다.
여래장이 영원히 변하지 않는 것도 이와 같으나
음(陰)ㆍ계(界)ㆍ입(入)의 더러운 옷에 싸이고,
탐욕ㆍ성냄ㆍ어리석음의 진실하지 않은 망상과 번뇌에 더럽혀진다.
이는 모든 부처님께서 연설하신 것이다.’
왜 세존께서는 외도들이
‘나[我]’를 말하듯이 ‘여래장이 있다’고 말씀하십니까?
세존이시여,
외도들은 또 ‘항상하는 짓는 자[作者]가 있는데,
구나(求那)를 벗어났고 어디에나 있으며 없어지지 않는다’라고 말합니다.
세존이시여,
그들은 ‘나’가 있다고 말합니다.”
부처님께서 대혜에게 말씀하셨다.
“내가 말한 여래장은 외도가 말하는 나[我]와는 다르다.
대혜야,
나는 언젠가 공(空)ㆍ무상(無相)ㆍ무원(無願)ㆍ여실제(如實際)ㆍ
법성(法性)ㆍ법신(法身)ㆍ열반(涅槃)ㆍ자성을 여읨[離自性]ㆍ
생기지 않음[不生]ㆍ없어지지 않음[不滅]ㆍ본래의 적정함[本來寂靜]ㆍ자성열반(自性涅槃) 등의 구(句)를 말하였다.
또 여래장을 말한 뒤에,
여래ㆍ응공ㆍ등정각은 어리석은 사람이
‘내가 없다[無我]’는 구절에 두려운 생각을 내는 것을 끊어 주려고
망상을 벗어난 무소유 경계인 여래장의 문을 말한 것이다.
대혜야,
미래와 현재의 보살마하살은
내가 있다는 견해[我見]를 지어 계착해서는 안 된다.
마치 도예가(陶藝家)가 진흙 한 덩이를 가지고
공력[人工]과 물과 나무와 바퀴와 줄 등의 방편을 이용해 갖가지 그릇을 만드는 것과 같다.
여래도 이와 같아 모든 법이 실체가 없어
모든 망상의 모습을 벗어난 것이지만
갖가지 지혜와 훌륭하고 교묘한 방편을 써서
여래장(如來藏)이라 말하기도 하고 무아(無我)라고 말하기도 하는 것이다.
이러한 인연으로 여래장이라고 말한 것이지 외도가 말하는 나[我]와는 다르다.
이를 여래장을 설하는 것이라 한다.
나[我]에 계착하는 모든 외도를 이끌어 깨우치기 위해서 여래장을 설한 것이다.
진실하지 않은 아견(我見)의 망상을 벗어나고
3해탈문(解脫門)의 경계에 들어가
속히 아뇩다라삼먁삼보리(阿耨多羅三藐三菩提) 얻기를 희망하게 하려고
여래ㆍ응공ㆍ등정각이 이와 같이 말한 것이다.
여래장이 만약 이와 같지 않다면 외도가 말하는 나와 같을 것이다.
그러므로 대혜야,
외도의 견해를 벗어나기 위해 무아인 여래장에 의지해야만 한다.”
이때 세존께서 이 뜻을 거듭 펴시고자 게송으로 말씀하셨다.
인(人)과 상속(相續)과 음(陰)과
연(緣)과 미진(微塵)과
승(勝)과 자재(自在)가 짓는다 하나
마음이 헤아리는 망상일 뿐이다.
이때 대혜보살마하살이 미래의 중생들을 관찰하고,
다시 세존께 청하였다.
“세존이시여,
미래 중생들을 위해 모든 보살마하살처럼 끊임없이 수행하는 수행자의 대방편(大方便)을 말씀해 주십시오.”
부처님께서 대혜에게 말씀하셨다.
“보살마하살은 네 가지 법을 성취해야 수행자의 대방편을 얻을 수 있다.
무엇이 네 가지인가?
자기 마음이 나타낸 것을 잘 분별하는 것,
바깥 경계의 성품과 성품 아닌 것을 관찰하는 것,
생기고 머물고 없어진다는 견해를 벗어나는 것,
자각성지(自覺聖智)를 얻어 즐거워하는 것이다.
이를 보살마하살이 네 가지 법을 성취하여 수행자의 대방편을 얻는 것이라고 한다.
보살마하살이 자기 마음에 나타나는 것을 잘 분별한다는 것은 무엇인가?
이른바 이와 같이 관찰하는 것이다.
‘삼계는 오직 마음의 범위[分齊]일 뿐이고,
나와 나의 것을 벗어나 있으며,
동요하지 않고 오가는 것을 벗어나 있으며,
끝없는 옛날부터 거짓된 습기에 훈습된 것이다.
삼계는 온갖 물질과 행에 묶인 것이고,
신재(身財)를 건립하여 망상이 입(入)을 따라 나타난 것이다.’
이를 보살마하살이 자기 마음에 나타난 것을 잘 분별하는 것이라고 한다.
보살마하살이 바깥 경계의 성품과 성품 아닌 것을 잘 관찰한다는 것은 무엇인가?
불꽃이나 꿈 등의 모든 성품은 끝없는 옛날부터 거짓된 망상과 습기가 원인임을 알고,
모든 성자성(性自性)을 관찰하는 것이다.
보살마하살이 이와 같이 바깥 경계의 성품과 성품 아닌 것을 잘 관찰하면,
이를 보살마하살이 바깥 경계의 성품과 성품 아닌 것을 잘 관찰하는 것이라 한다.
보살마하살이 생기고 머물고 없어진다는 견해를 잘 벗어난다는 것은 무엇인가?
환(幻)과 꿈처럼 모든 성품은 자성(自性)도 타성(他性)도 구성(俱性)도 생기지 않는다.
입(入)에 따른 자기 마음의 범위일 뿐이다.
따라서 바깥의 성품과 성품이 아닌 것을 알고,
식(識)이 생기지 않고 연(緣)도 모이지 않음을 알고,
망상이 연으로 생기는 것인 줄을 알고,
삼계 내외(內外)의 모든 법이 법이라고 할 것이 없다는 사실을 알고,
자성을 벗어나는 것인 줄을 알아 생긴다는 견해[生見]가 모두 없어진다.
환 등과 같은 모든 법의 자성을 알아 무생법인(無生法忍)을 얻으며,
무생법인을 얻고 난 뒤에 생기고 머물고 없어진다는 견해를 벗어난다.
이를 보살마하살이 잘 분별하여 생기고 머물고 없어진다는 견해를 벗어나는 것이라 한다.
보살마하살이 자각성지를 얻어 즐거워한다는 것은 무엇인가?
무생법인을 얻어 제8 보살지(菩薩地)에 머물러
심(心)ㆍ의(意)ㆍ의식(意識)과 다섯 가지 법의 자성[五法自性]과 두 가지 무아의 모습[無我相]을 벗어나게 되고,
뜻대로 나타나는 몸[意生身]을 얻는 것을 말한다.”
“세존이시여,
어떤 인연으로 뜻대로 나타나는 몸이라 합니까?”
부처님께서 대혜에게 말씀하셨다.
“뜻대로 나타난다는 것은 마치 마음으로 간다고 생각하면 신속하고 빠르며 장애가 없는 것과 같다.
따라서 ‘뜻대로 나타난다’고 한다.
이는 마치 마음으로 간다고 생각하면 석벽이 장애되지 않는 것과 같다.
저 다른 나라가 한량없는 유연(由延)만큼 멀리 떨어져 있다고 해도
이전에 보았던 기억을 바탕으로 잊지 않고
자기의 마음을 쏟아 끊어지지 않게 하면 몸에 장애되지 않고 그곳에 나타난다.
대혜야,
이와 같이 뜻대로 나타나는 몸은,
보살마하살의 뜻대로 나타나는 몸의 여환삼매(如幻三昧)와 동시에 함께한다.
그 힘이 자재하고 신통하며 묘한 모습으로 장엄한 성스러운 종류의 몸이 일시에 함께 나타난다.
마치 뜻에 의지하여 생기는 것엔 장애가 없는 것처럼,
본원(本願)의 경계를 잊지 않고 생각하는 데 따라 중생을 성숙시키고,
자각성지(自覺聖智)를 얻어 즐거워하게 한다.
이와 같이 보살마하살은 무생법인을 얻어
제8 보살지에 머물러 심ㆍ의ㆍ의식과 다섯 가지 법의 자성과 두 가지 무아의 모습인 몸을 버리고,
뜻대로 나타나는 몸을 얻고 자각성지를 얻어 즐거워한다.
이를 보살마하살이 네 가지 법을 성취하여 수행자의 큰 방편을 얻는 것이라 하니,
이와 같이 배워야 한다.”
이때 대혜보살마하살이 다시 세존께 청하였다.
“저희를 위해 일체 모든 법의 연(緣)과 인(因)의 모습을 설명해 주십시오.
연과 인의 모습을 깨달음으로써 저를 비롯한 모든 보살은 모든 성품이 있다거나 없다고 하는 망견(妄見)을 벗어나 망상의 견해가 차례로 또는 함께 생기는 일이 없을 것입니다.”
부처님께서 대혜에게 말씀하셨다.
“모든 법에는 두 가지 연(緣)의 모습이 있으니,
밖의 것과 안의 것이다.
외연(外緣)이란,
진흙덩이나 기둥이나 바퀴나 밧줄이나 물이나 나무나 사람의 공력과 같은 모든 방편의 연이 있어 병(甁)이 생기는 것과 같은 것을 말한다.
진흙으로 만든 병처럼 실로 짠 천이나 새끼를 꼬아 만든 자리나 씨앗의 싹이나 낙(酪)이나 소(酥) 등도 방편이 연이 되어 생기는 것이 역시 이와 같다.
이를 외연이라고 하며 전후로 바뀌어 생긴다.
무엇을 내연(內緣)이라고 하는가?
무명(無明)이나 애(愛)나 업 등의 법을 ‘연(緣)’이라 할 수 있고,
그 법으로부터 생긴 음(陰)ㆍ계(界)ㆍ입(入)의 법을 ‘연에서 일어난 것’이라 할 수 있다.
이것들은 차별이 없는데 어리석은 사람들이 망상으로 이를 ‘내연법(內緣法)’이라고 한다.
대혜야,
저 인(因)에는 여섯 가지 종류가 있으니 당유인(當有因)ㆍ상속인(相續因)ㆍ상인(相因)ㆍ작인(作因)ㆍ현시인(顯示因)ㆍ대인(待因)이다.
당유인이란 인을 짓고 나서 안팎의 법이 생기는 것이고,
상속인이란 반연(攀緣)을 짓고 나서 안팎의 법이 음의 종자 등을 생기게 하는 것이다.
또한 상인이란 끊임없는 모습을 지어 모습이 계속하여 생기는 것이고,
작인이란 증상사(增上事)를 짓는 것이니 전륜왕과 같다.
현시인이란 망상사(妄想事)가 생기고 나서 모습을 짓고 지어진 것이 나타나는 것이니,
등불이 물질 등을 비추는 것과 같다.
대인이란 없어질 때 상속하는 것이 끊어져 망상의 성품이 생기지 않는 것이다.
대혜야,
이런 것들은 어리석은 범부가 자기 스스로 분별하는 모습이다.
모든 법은 차례로 생기는 것도 아니고,
함께 생기는 것도 아니다.
무엇 때문인가?
만약 함께 생긴다면 짓는 자와 지어진 것의 분별이 없을 것이니,
인(因)의 모습을 얻을 수 없기 때문이다.
만약 차례로 생긴다면 아상(我相)을 얻을 수 없기 때문이다.
차례로 생기지 않음은 마치 아들이 생기지 않으면 아버지라는 명칭이 없는 것과 같다.
대혜야,
차례로 생겨 방편이 상속한다고들 하나 그렇지 않다.
망상(妄想)일 뿐이니,
반연ㆍ차제연(次第緣)ㆍ증상연(增上緣) 등을 인하여 생기는 것이기 때문이다.
대혜야,
차례로 생긴다고 하지만 생기는 것이 아니니,
망상자성(妄想自性)으로 계착하는 모습이기 때문이다.
차례로 또는 함께 생기는 것도 아니니,
자기 마음이 나타낸 것을 수용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자상(自相)과 공상(共相),
바깥 경계의 성품과 성품 아닌 것도,
대혜야,
차례로 생기지도 않고 함께 생기지도 않는다.
자기 마음이 나타낸 깨닫지 못한 망상 때문에 상(相)이 생기는 것은 제외한다.
이런 까닭에 인연이 짓는 일과 방편의 모습이 차례로 또는 함께 일어난다는 견해를 벗어나야 한다.”
이때 세존께서 이 뜻을 거듭 펴시고자 게송으로 말씀하셨다.
일체 모두 생김이 없고
또한 인연(因緣)이 없어짐도 없는데
저 생기고 없어지는 가운데서
인연이라는 생각을 일으킨다.
없어진 뒤에 다시 생기고
상속하여 인연이 일어남 부정하는 것 아니니
오직 어리석은 범부의
어리석은 망상연(妄想緣)을 끊어 주기 위함이다.
있고 없는 연기법(緣起法)을 말하나
이는 모두 생김이 없다.
습기에 미혹되어 일어나는 것이니
이를 따라 3유(有)가 나타난다.
진실은 생하는 인연이 없고
또한 없어짐도 없으니
모든 유위(有爲)를 관찰해 보면
마치 허공에 핀 꽃과 같다.
받아들이는 것과 받아들여지는 것에서
미혹되고 혼란한 견해를 벗어나라.
이미 생긴 것도 아니고 생길 것도 아니며
또한 인연이 없는 것도 아니다.
모든 것이 무소유이니
이들은 모두 말뿐이다.
이때 대혜보살마하살이 다시 부처님께 말씀드렸다.
“세존이시여,
저희를 위해 『언설망상상심경(言說妄想相心經)』이것은 위의 ‘부처님께서 마음에 대해 말씀하신 경’과 같다.을 말씀해 주십시오.
세존이시여,
저를 비롯한 다른 나머지 보살마하살들이 『언설망상상심경』을 잘 알게 된다면 말[言說]과 말의 내용[所說] 두 가지 뜻에 통달하여 속히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을 것이고,
말과 말의 내용 두 가지로써 모든 중생을 깨끗이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부처님께서 대혜에게 말씀하셨다.
“자세히 들어라.
자세히 듣고 잘 생각하여라.
너를 위해 설명해 주겠다.”
대혜가 부처님께 말씀드렸다.
“거룩하신 세존이시여,
가르침을 받겠습니다.”
부처님께서 대혜에게 말씀하셨다.
“언설망상(言說妄想)의 모습에 네 종류가 있으니 상언설(相言說),
몽언설(夢言說),
과거에 계착한 언설망상[過妄想計着言說],
끝없는 옛날부터의 언설망상[無始妄想言說]이다.
상언설이란 자기 망상에 따라 물질의 모습에 계착해서 생기는 것이다.
몽언설이란 과거에 지나온 경계를 기억해서 생각함에 따라 생기는 것이니,
깨고 나면 그 경계는 성품도 없이 생긴 것이었다.
과거에 계착한 언설망상이란 과거에 원한으로 지은 업이 기억을 따라 생기는 것이다.
끝없는 옛날부터의 언설망상이란 끝없는 옛날부터 거짓된 것에 계착한 허물이 종자습기(種子習氣)로부터 생기는 것이다.
이를 네 가지 언설망상의 모습이라고 한다.”
이때 대혜보살마하살이 다시 이 뜻을 지극한 정성으로 청하였다.
“세존이시여,
언설망상이 나타나는 경계를 다시 말씀해 주십시오.
세존이시여,
어느 곳에서,
어떠한 까닭으로,
어떻게,
어떤 인(因)으로 중생의 망상언설이 생깁니까?”
부처님께서 대혜에게 말씀하셨다.
“머리ㆍ가슴ㆍ목구멍ㆍ코ㆍ입술ㆍ혀ㆍ이가 화합해 음성을 내는 것이다.”
대혜가 부처님께 말씀드렸다.
“세존이시여,
말[言說]과 망상(妄想)은 다릅니까,
다르지 않습니까?”
부처님께서 대혜에게 말씀하셨다.
“말과 망상은 다른 것도 아니고,
다르지 않은 것도 아니다.
왜냐하면 말은 망상으로 인해 생기는 모습이기 때문이다.
대혜야,
만약 말과 망상이 다른 것이라면 망상은 이 말의 인(因)이 아니어야 할 것이다.
만약 다르지 않다면 말이 뜻을 드러내지 못해야 하는데 드러내 보여 주고 있다.
따라서 다른 것도 아니고 다르지 않은 것도 아니다.”
대혜가 다시 부처님께 말씀드렸다.
“세존이시여,
말[言說]이 곧 제일의(第一義)입니까,
말의 내용[所說]이 제일의입니까?”
부처님께서 대혜에게 말씀하셨다.
“말은 제일의가 아니며 말의 내용도 제일의가 아니다.
왜냐하면,
제일의란 성인의 즐거움이니,
말이 들어가는 곳이 제일의이지 말이 제일의는 아니다.
제일의란 성지(聖智)가 스스로 깨달아 얻는 것이지 언설망상이 깨닫는 경계가 아니다.
그러므로 언설망상은 제일의를 드러내지 못한다.
말이란 생기고 없어지며 동요하고 전전하며 인연으로 생긴다.
전전하여 인연으로 생기는 것은 제일의를 드러내 보이지 못한다.
대혜야,
자타(自他)의 모습이 성품이 없는 까닭에 말의 모습은 제일의를 드러내 보이지 못한다.
또 대혜야,
자기 마음의 현량(現量)을 따라 들어가므로 온갖 모습과 바깥의 성품이니,
성품이 아니니 하는 언설망상은 제일의를 드러내 보이지 못한다.
그러므로 대혜야,
말과 모든 망상의 모습을 벗어나야 한다.”
이때 세존께서 거듭 이 뜻을 펴시고자 게송으로 말씀하셨다.
모든 성품은 자성(自性)이 없고
또한 말로 나타낼 수도 없다.
깊고 깊으며 공(空)마저 공한 뜻을
어리석은 범부는 알지 못한다.
모든 성자성(性自性)과
언설법(言說法)은 그림자 같으니
자각성지(自覺聖智)의 불자여
실제(實際)를 내가 말하노라.
이때 대혜보살마하살이 다시 부처님께 말씀드렸다.
“세존이시여,
저희를 위해 있음[有]과 없음[無],
같음[一]과 다름[異],
함께함[俱]과 함께하지 않음[不俱],
있지 않음[非有]과 없지 않음[非無],
상(常)과 무상(無常)을 벗어나는 것을 말씀해 주십시오.
모든 외도가 행하지 않는 것과 자각성지가 행하는 것을 말씀해 주십시오.
망상인 자상(自相)과 공상(共相)을 벗어나 제일(第一)의 진실한 뜻에 들어가는 모든 지위의 상속과 점차(漸次),
상상(上上)으로 증진하는 청정한 모습과 여래지상(如來地相)의 개발(開發)함이 없는 본원(本願),
갖가지 색깔로 나타나는 마니 구슬의 경계와 같은 끝없는 상(相)과 행(行),
자기 마음에서 나타난 세계의 부분적 모습인 일체 모든 법을 말씀해 주십시오.
저와 나머지 다른 보살마하살은 이와 같은 여러 망상자성(妄想自性)과 자상ㆍ공상의 견해를 벗어나고 속히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어 모든 중생으로 하여금 모든 안락함을 다 갖추어 충만하게 하겠습니다.”
부처님께서 대혜에게 말씀하셨다.
“옳은 말이다.
옳은 말이다.
네가 나에게 이와 같은 이치를 묻는 것은
일체 모든 하늘과 세상 사람들에게 많은 안락을 주려 하고 많은 이익을 주려 하며,
가엾이 여기기 때문이니라.”
부처님께서 대혜에게 말씀하셨다.
“자세히 들어라.
자세히 듣고 잘 생각하여라.
내가 너를 위해 분별하여 설명하리라.”
대혜가 부처님께 말씀드렸다.
“거룩하신 세존이시여,
가르침을 받겠습니다.”
부처님께서 대혜에게 말씀하셨다.
“심량(心量)이 어리석은 범부는 안팎의 성품을 취하여 같음과 다름,
함께함과 함께하지 않음,
있음ㆍ없음ㆍ있지도 않고 없지도 않음,
상(常)과 무상(無常)에 의지하니,
이는 자성의 훈습된 인[習因]으로 망상에 계착하는 것이다.
마치 사슴 떼가 갈증에 시달리다가 봄에 아지랑이를 보고 물이라고 생각하고는 미친 듯이 달리며 물이 아닌 줄 모르는 것과 같다.
이와 같이 어리석은 범부도 끝없는 옛날부터 거짓된 망상에 훈습된 3독(毒) 때문에 그 마음을 태우고 물질의 경계를 즐거워한다.
그리하여 생기고 머물고 없어짐을 보고 안팎의 성품을 취하여 같음과 다름,
함께함과 함께하지 않음,
있음ㆍ없음ㆍ있지도 않고 없지도 않음,
상(常)과 무상(無常)과 같은 생각에 떨어져 망견(妄見)으로 그것들을 받아들인다.
마치 건달바신(乾闥婆神)이 허공에 환상으로 만들어 놓은 성(城)을 보고 어리석은 사람이 무지하여 진짜 성이라는 생각을 일으키는 것과 같다.
이것은 끝없는 옛날부터 습기로 계착한 생각이 나타난 것이지,
그 성은 있는 것도 아니고 없는 것도 아니다.
이와 같이 외도는 끝없는 옛날부터 거짓된 습기로 계착하여 같음과 다름,
함께함과 함께하지 않음,
있음ㆍ없음ㆍ있지도 않고 없지도 않음,
상(常)과 무상(無常)의 견해에 의지하므로 자심(自心)의 현량(現量)임을 확실히 알지 못한다.
마치 어떤 사람이 남녀ㆍ코끼리ㆍ말ㆍ수레가 오가고 성(城)ㆍ읍(邑)ㆍ정원ㆍ숲ㆍ산ㆍ강ㆍ연못 등 갖가지로 장엄한 곳에 자신이 들어간 꿈을 꾸고는 깬 뒤에 기억해 내는 것과 같다.
대혜야,
네 생각에는 어떠하냐?
이와 같이 전에 꾼 꿈을 기억하여 생각하고 버리지 않으면 영리하다고 하겠느냐?”
대혜가 부처님께 말씀드렸다.
“아닙니다,
세존이시여.”
부처님께서 대혜에게 말씀하셨다.
“그렇다.
범부는 악견(惡見)에 갇혀 있고,
외도는 지혜로우나
꿈처럼 자심의 현량임을 알지 못해
같음과 다름,
함께함과 함께하지 않음,
있음ㆍ없음ㆍ있지도 않고 없지도 않음,
상(常)과 무상(無常)의 견해에 의지한다.
마치 그림에 그려진 사람처럼 높지도 않고 낮지도 않은데
저 어리석은 범부들은
높다거나 낮다는 생각을 한다.
이와 같이 미래의 외도도
악견과 습기가 충만하여
같음과 다름,
함께함과 함께하지 않음,
있음ㆍ없음ㆍ있지도 않고 없지도 않음,
상(常)과 무상(無常)의 견해에 의지하여 스스로 무너지고 남도 무너뜨릴 것이다.
그 밖에 유(有)와 무(無)를 벗어난 무생(無生)을 주장하는 자들 역시
‘없다[無]’고 말하며 인과(因果)의 견해를 비방하고,
선의 근본을 뽑아버리며,
청청한 인을 파괴할 것이다.
뛰어난 법을 구하는 자라면 멀리 버리고 떠나면서 이렇게 말해야 한다.
‘저들은 나다, 남이다,
함께 있는 것이다 하는 견해로
있다거나 없다는 망상을 일으켜 건립과 비방에 떨어졌으니,
그 악견으로 분명 지옥에 떨어질 것이다.’
마치 눈병이 난 사람이 눈에 아른거리는 머리카락[垂髮]을 보고선
여러 사람들에게 ‘너희도 이것을 보라’고 말하는 것과 같다.
그러나 눈병에 아른거리는 머리카락은
필경에 성품이 있는 것도 아니고 성품이 없는 것도 아니니,
보기도 하고 보지 못하기도 하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외도는 망견(妄見)으로 희망하여
같음과 다름,
함께함과 함께하지 않음,
있음ㆍ없음ㆍ있지도 않고 없지도 않음,
상(常)과 무상(無常)의 견해에 의지해
정법(正法)을 비방하며 자기도 무너지고 남도 무너뜨린다.
이는 마치 불을 돌렸을 때 생기는 바퀴 모양[火輪]은
바퀴가 아닌데
어리석은 범부는 바퀴라고 생각하는 것과 같으니,
지혜로운 이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이와 같이 외도는
악견으로 희망하여 같음과 다름,
함께함과 함께하지 않음,
있음ㆍ없음ㆍ있지도 않고 없지도 않음,
상과 무상이라는 생각에 의지해,
모든 성품이 생긴다고 생각한다.
이는 마치 물거품이 보배 구슬인 마니(摩尼)와 비슷하다고,
어리석고 지혜가 없는 사람이
마니 보배라 생각하고선 계착해서 쫓는 것과 같다.
그러나 저 물거품은
마니 보배도 아니고 마니 보배가 아닌 것도 아니니,
취하기도 하고 취하지 못하기도 하기 때문이다.
이처럼 외도들은 망상과 습기에 훈습된 악견으로
무소유(無所有)인데도
‘생겼다’고 말하고,
연(緣)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없어졌다’고 말한다.
또 대혜야,
어떤 외도는 세 가지 양(量)과 5분론(分論)을 각각 건립한 뒤에
성지(聖智)를 스스로 깨달아 두 가지 자성을 벗어나게 되었다고 하지만,
일에 있어서 성품이 있다는 망상을 지어 계착한다.
대혜야,
심ㆍ의ㆍ의식과 몸과 마음이 변화되고,
자기 마음에 나타난 받아들이고 받아들여지는 모든 망상이 끊어져야
여래지(如來地)의 자각성지(自覺聖智)이다.
그러므로 수행자는
그것에 대해서 성품이라거나 성품이 아니라는 생각을 하지 말아야 한다.
만약 다시 수행자가 이와 같은 경계를
성품이라거나 성품이 아니라고 하여 받아들이는 생각을 한다면,
그는 곧 장양(長養)을 취하는 것이며,
아상(我相)과 인상(人相)을 취하는 것이다.
대혜야,
만약 저 성자성(性自性)은 공상(共相)이라고 말한다면,
모두 화불(化佛)의 말이지
법불(法佛)의 말은 아니다.
또 모든 설명은 어리석은 범부가 희망하는 소견으로 생긴 것이다.
따로 자성으로 나아가는 법을 건립해,
성지(聖智)의 자각삼매(自覺三昧)를 얻어
즐겁게 머무는 사람을 위해 분별하여 드러내 보이는 것은 아니다.
이는 마치 물에 나무의 그림자가 나타나는 것과 같으니,
그것은 그림자도 아니고 그림자가 아닌 것도 아니며
나무 형태도 아니고 나무 형태가 아닌 것도 아니다.
이와 같이 외도의 견해는 습기에 훈습된 망상으로 계착하여 같음과 다름,
함께함과 함께하지 않음,
있음ㆍ없음ㆍ있지도 않고 없지도 않음,
상(常)과 무상(無常)이라는 생각에 의지하는 것으로서 자심의 현량임을 알지 못한다.
이는 마치 맑은 거울이 연(緣)을 따라
모든 물질의 형상을 나타내지만 망상이 없는 것과 같다.
그것은 형상도 아니며 형상이 아닌 것도 아닌데,
형상과 형상 아닌 것을 보는 망상의 어리석은 범부는 형상이라 생각한다.
이와 같이 외도는 악견(惡見)으로 자기 마음에 형상이 나타난 것을 망상으로 계착하여 같음과 다름,
함께함과 함께하지 않음,
있음ㆍ없음ㆍ있지도 않고 없지도 않음,
상과 무상의 견해에 의지한다.
이는 마치 바람과 물이 화합하여 소리가 나는 것과 같으니,
그것은 성품도 아니고 성품 아닌 것도 아니다.
이와 같이 외도는 악견과 망상으로 같음과 다름,
함께함과 함께하지 않음,
있음ㆍ없음ㆍ있지도 않고 없지도 않음,
상과 무상의 견해에 의지한다.
이는 마치 초목이 없는 대지에 뜨거운 아지랑이가 실개천처럼 흐르고,
일렁이는 파도나 구름이 피어나는 것처럼 보이는 것과 같다.
그것은 성품이 아니며 성품 아닌 것도 아니니,
탐할 것이 없는 것을 탐하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어리석은 범부는
끝없는 옛날부터 거짓된 습기에 훈습된 망상으로 계착하여
생기고 머물고 없어짐,
같음과 다름,
함께함과 함께하지 않음,
있음ㆍ없음ㆍ있지도 않고 없지도 않음,
상과 무상에 의지하여 스스로 머무는 문(門)을 반연하니,
역시 저 뜨거운 아지랑이를 일렁이는 파도로 보는 것과 같다.
이는 마치 어떤 사람이 주술의 기능을 일으켜
무정물[非衆生數]로 비사사(毘舍闍) 귀신을 방편으로 합성하여 움직이고 말하고 행동하게 하면
어리석은 범부는 망상으로 오고 간다고 계착하는 것과 같다.
이와 같이 외도는
악견으로 희망하여 같음과 다름,
함께함과 함께하지 않음,
있음ㆍ없음ㆍ있지도 않고 없지도 않음,
상(常)과 무상(無常)의 견해에 의지하니,
희론(戱論)에 계착된 것이며,
진실한 건립이 아니다.
대혜야,
그러므로 자각성지(自覺聖智)를 얻으려면
생기고 머물고 없어짐,
같음과 다름,
함께함과 함께하지 않음,
있음ㆍ없음ㆍ있지도 않고 없지도 않음,
상과 무상 등의 악견(惡見)과 망상을 벗어나야 한다.”
이때 세존께서 이 뜻을 거듭 펴시고자 게송으로 말씀하셨다.
환(幻)과 꿈,
물에 비친 나무 그림자 같고
눈병에 아른거리는 머리카락,
더운 날 아지랑이 같으니
이와 같이 3유(有)를 관찰하면
구경(究竟)에 해탈을 얻으리라.
마치 목마른 사슴의 생각과 같으니
동요하며 혼란스러운 마음으로
사슴은 물이라고 생각하지만
실은 물이 없는 것과 같다.
이와 같이 식(識)의 종자가
동요하여 나타난 경계에
어리석은 범부는 망상을 일으키니
마치 가리개에 가려진 것과 같다.
끝없는 옛날부터 태어나고 죽으며
성품을 계착하여 성품으로 받아들였으니
쐐기로 쐐기를 빼는 것처럼
탐욕으로 받아들인 것 버리고 벗어나라.
주술로 움직이는 환(幻)과 같고
뜬구름ㆍ꿈ㆍ번개와 같으니
이와 같이 관찰하면 해탈을 얻어
영원히 세 가지 상속 끊어지리라.
그것들은 만들어진 일 없으니
허공의 아지랑이 같다.
이와 같이 모든 법 알면
곧 안 것도 없으리라.
언교(言敎)는 가명(假名)이며
그 역시 상(相)이 없으나
거기에서 망상 일으키니
음(陰)과 행(行)은 눈병에 아른거리는 머리카락 같다.
그림이나 눈병에 아른거리는 머리카락,
환(幻)
꿈이나 건달바성(乾闥婆城)
불을 돌렸을 때 생기는 바퀴[火輪],
더운 날 아지랑이 같아
없는 것인데도 중생에겐 나타난다.
상(常)과 무상(無常)과 같음과 다름
함께함과 함께하지 않음 역시 그러하여
끝없는 옛날부터 허물이 상속한 것이니
어리석은 범부의 어리석은 망상이다.
명경수(明鏡水)처럼 깨끗한 눈과
마니(摩尼)의 묘한 보배 구슬
그 가운데 온갖 색이 나타나지만
실은 어떤 것도 없다.
나타나는 모든 성품
그림이나 더운 날 아지랑이 같고
나타나는 온갖 여러 가지 물질
꿈과 같아 무소유(無所有)이다.
“또 대혜야,
여래의 설법은 다음과 같은 네 구(句)를 벗어난다.
그것은 같음과 다름,
함께함과 함께하지 않음,
있음ㆍ없음ㆍ있지도 않고 없지도 않음,
상(常)과 무상(無常)이다.
유(有)와 무(無)의 건립과 비방을 벗어나
진제(眞諦)ㆍ연기(緣起)ㆍ도(道)ㆍ멸(滅)ㆍ해탈(解脫)을 분별하고 결집하니,
여래의 설법은 이것을 으뜸으로 한다.
성품[性]이 아니고 자재(自在)도 아니며,
무인(無因)도 아니고 미진(微塵)도 아니며,
시(時)도 아니고 자성상속(自性相續)을 설법하는 것도 아니다.
또 대혜야,
번뇌와 이염(爾炎)의 장애를 없애기 위한 까닭이다.
이는 마치 상주(商主)가 있지도 않은 108구(句)를 차례로 건립하여
모든 수레와 모든 땅의 모습을 잘 분별하는 것과 같다.
또 대혜야,
네 가지의 선(禪)이 있으니,
무엇이 네 가지인가?
어리석은 범부가 행하는 선,
이치를 관찰하는 선,
진여(眞如)를 반연하는 선,
여래선(如來禪)이다.
▸ 무엇이 어리석은 범부가 행하는 선인가?
성문과 연각과 외도 수행자가
인무아(人無我)와 성품의 자상(自相)과 공상(共相)을 골쇄관(骨鎖觀)과
무상(無常)과 고(苦)와 부정상(不淨相)으로 계착하여 관찰하는 것으로 으뜸을 삼는 것이다.
이와 같은 모습과 다르지 않게 관찰하고는
전후로 전진(轉進)하는 생각을 끊어 없애지 못하는 것이니,
이를 어리석은 범부가 행하는 선(禪)이라고 한다.
무엇이 이치를 관찰하는 선인가?
인무아와 자상ㆍ공상과
외도들이 말하는 자성(自性)ㆍ타성(他性)ㆍ구성(俱性)이 없음을 알고 나서,
법무아(法無我)와 모든 지위의 모습과 이치를 관찰하여 차례로 증진하는 것이다.
이를 이치를 관찰하는 선이라고 한다.
무엇이 진여(眞如)를 반연하는 선인가?
두 가지 무아가 망상인 줄 알고
여실한 것이 망상인 줄을 알아
망상을 일으키지 않는 것이니,
이를 진여를 반연하는 선이라고 한다.
무엇을 여래선이라고 하는가?
여래지(如來地)에 들어가
자각성지상(自覺聖智相)을 행하여
세 가지 즐거움[三種樂]에 머물고
중생의 부사의한 일을 이루어 마치는 것이니,
이를 여래선이라 한다.”◂
성문과 연각과 외도 수행자가
인무아(人無我)와 성품의 자상(自相)과 공상(共相)을 골쇄관(骨鎖觀)과
무상(無常)과 고(苦)와 부정상(不淨相)으로 계착하여 관찰하는 것으로 으뜸을 삼는 것이다.
이와 같은 모습과 다르지 않게 관찰하고는
전후로 전진(轉進)하는 생각을 끊어 없애지 못하는 것이니,
이를 어리석은 범부가 행하는 선(禪)이라고 한다.
무엇이 이치를 관찰하는 선인가?
인무아와 자상ㆍ공상과
외도들이 말하는 자성(自性)ㆍ타성(他性)ㆍ구성(俱性)이 없음을 알고 나서,
법무아(法無我)와 모든 지위의 모습과 이치를 관찰하여 차례로 증진하는 것이다.
이를 이치를 관찰하는 선이라고 한다.
무엇이 진여(眞如)를 반연하는 선인가?
두 가지 무아가 망상인 줄 알고
여실한 것이 망상인 줄을 알아
망상을 일으키지 않는 것이니,
이를 진여를 반연하는 선이라고 한다.
무엇을 여래선이라고 하는가?
여래지(如來地)에 들어가
자각성지상(自覺聖智相)을 행하여
세 가지 즐거움[三種樂]에 머물고
중생의 부사의한 일을 이루어 마치는 것이니,
이를 여래선이라 한다.”◂
이때 세존께서 이 뜻을 거듭 펴시고자 게송으로 말씀하셨다.
범부가 행하는 선(禪)
모습과 이치를 관찰하는 선
진여를 반연하는 선
여래의 청정한 선.
마치 해와 달의 형상과 같고
깊고 험준한 곳의 붉은 연꽃 같고
허공과 같고 타버린 재와 같다고
수행자들은 관찰한다.
이와 같은 온갖 모습은
외도의 도(道)와 통하는 선이며
또한 성문에 떨어지고
연각의 경계에 떨어지는 것이다.
저 일체를 버리고 벗어나면
이것이 곧 무소유(無所有)이니
여러 국토의 모든 부처님께서
불가사의한 손길로
일시에 그 이마를 만지고
수순(隨順)하여 진여상(眞如相)으로 들어가리라.
이때 대혜보살마하살이 다시 부처님께 말씀드렸다.
“세존이시여,
열반에 든다는 것은 무엇이며,
어떤 법들을 열반이라고 말씀하십니까?”
▸ 부처님께서 대혜에게 말씀하셨다.
“모든 자성과 습기ㆍ장(藏)ㆍ의식(意識)ㆍ견(見)ㆍ습(習)이 변하여 바뀐 것을 열반이라고 한다. ◂
“모든 자성과 습기ㆍ장(藏)ㆍ의식(意識)ㆍ견(見)ㆍ습(習)이 변하여 바뀐 것을 열반이라고 한다. ◂
모든 부처와 나의 열반은
자성이 공(空)한 사물의 경계이다.
또 대혜야,
열반이란 성지(聖智)가 스스로 깨닫는 경계이므로
단(斷)과 상(常)의 망상,
성품과 성품 아닌 것을 벗어난다.
왜 상이 아닌가?
자상(自相)과 공상(共相)의 망상을 끊었으므로 상이 아니다.
왜 단이 아닌가?
과거와 미래와 현재의 모든 성인이 스스로 깨닫게 되므로 단이 아니다.
▸ 대혜야,
열반은 무너지는 것도 아니고[不壞] 죽는 것도 아니다[不死].
만약 열반이 죽음이라면 다시 생(生)을 받아 상속하여야 할 것이며,
만약 무너지는 것이라면 유위상(有爲相)에 떨어져야 할 것이다.
그러므로 열반은 무너짐을 벗어나고 죽음을 벗어난다.
그러므로 수행자가 귀의할 곳이다.◂
열반은 무너지는 것도 아니고[不壞] 죽는 것도 아니다[不死].
만약 열반이 죽음이라면 다시 생(生)을 받아 상속하여야 할 것이며,
만약 무너지는 것이라면 유위상(有爲相)에 떨어져야 할 것이다.
그러므로 열반은 무너짐을 벗어나고 죽음을 벗어난다.
그러므로 수행자가 귀의할 곳이다.◂
또 대혜야,
열반은 버리는 것도 아니고[非捨] 얻는 것도 아니며[非得],
끊어지는 것도 아니고[非斷] 영원한 것도 아니며[非常],
하나의 뜻도 아니고[非一義] 여러 가지 뜻도 아니다[非種種義].
이를 열반이라고 한다.
또 대혜야,
성문과 연각의 열반이란,
자상(自相)과 공상(共相)을 깨닫고 경계를 가까이하지 않으며
전도되지 않은 견해로 망상이 일어나지 않는 것이다.
그들은 이런 것을 열반이라고 깨닫는다.
▸ 또 대혜야,
두 종류의 자성상(自性相)이 있으니,
무엇이 두 가지인가?
말의 자성상[言說自性相]에 계착하는 것과
사물의 자성상[事自性相]에 계착하는 것이다.
말의 자성상에 계착한다는 것은
끝없는 옛날부터 거짓된 습기인 말에 계착하여 생기는 것이고,
사물의 자성상에 계착한다는 것은
자기 마음이 나타낸 영역임을 깨닫지 못하는 데에서 생기는 것이다.◂
두 종류의 자성상(自性相)이 있으니,
무엇이 두 가지인가?
말의 자성상[言說自性相]에 계착하는 것과
사물의 자성상[事自性相]에 계착하는 것이다.
말의 자성상에 계착한다는 것은
끝없는 옛날부터 거짓된 습기인 말에 계착하여 생기는 것이고,
사물의 자성상에 계착한다는 것은
자기 마음이 나타낸 영역임을 깨닫지 못하는 데에서 생기는 것이다.◂
또 대혜야,
여래가 두 가지 신통력으로 건립하기 때문에
보살마하살은 모든 부처님께 이마를 땅에 대고 절하고
귀 기울여 듣고 이치를 여쭈게 되는 것이다.
무엇이 두 가지 신통력으로 건립하는 것인가?
삼매에 들어 일체의 몸을 나타내고 얼굴을 마주해 말하는 신통력,
손으로 관정(灌頂)하는 신통력이다.
대혜야,
보살마하살은 초보살지(初菩薩地)에서 불신력(佛神力)에 머무니,
즉 보살대승조명삼매(菩薩大乘照明三昧)에 들어가는 것이다.
이 삼매에 들어가고 나면
시방세계의 일체 부처가 신통력으로써
그들을 위해 모든 몸을 나타내고 얼굴을 마주해 말씀해 주시니,
금강장(金剛藏)보살마하살과 나머지 이와 같은 모습의 공덕을 성취한 보살마하살이 그들이다.
대혜야,
이들을 초보살지라 한다.
보살마하살이 얻는 보살삼매정수신력(菩薩三昧正受神力)은
백천 겁 동안 쌓은 선근으로 성취된 것이다.
차례로 모든 지위에서 대치(對治)하는 법과 대치해야 할 상(相)을 통달하여 완성하면
법운지(法雲地)에 이르러
대연화미묘궁전(大蓮花微妙宮殿)에 머물고 큰 보배 연꽃 사자좌에 앉으며,
동류의 보살마하살 권속들에게 둘러싸이게 된다.
여러 가지 보배 영락으로 그 몸을 장엄하여
마치 황금으로 만든 첨복(瞻蔔)꽃 같고 해와 달의 광명 같으며,
최승자(最勝子)들이 시방에서 찾아와 대연화 궁전의 윗자리에 앉아 그 정수리에 물을 부어 줄 것이다.
이는 자재한 전륜성왕과 천제석(天帝釋)이 태자에게 관정하는 것과 같으니,
이를 보살수관정신력(菩薩手灌頂神力)이라 한다.
대혜야,
이를 보살마하살의 두 가지 신통력이라 한다.
만약 보살마하살이 두 가지 신통력에 머문다면
모든 부처님 여래를 직접 볼 수 있겠지만,
그렇지 않다면 볼 수 없다.
또 대혜야,
보살마하살이 모든 것을 분별하고,
삼매에 들어 신통력을 갖추고 설법하는 등,
이러한 모든 행을 하는 것은 모두 여래의 두 가지 신통력에 머물기 때문이다.
대혜야,
만약 보살마하살이 부처님의 신통력을 떠나서 분별해 말할 수 있다면,
모든 범부도 역시 말할 수 있어야 한다.
왜냐하면 신통력에 머물지 않기 때문이다.
대혜야,
산ㆍ바위ㆍ나무ㆍ모든 악기ㆍ성곽ㆍ궁전도
여래가 성(城)에 들어가면 그 위신력(威神力)으로 모두 저절로 음악 소리를 내거늘,
하물며 어찌 마음이 있는 자이겠는가?
귀머거리나 장님이나 벙어리 등 한량없는 고통을 받는 이들이 모두 해탈을 얻으리라.
여래에겐 이와 같이 한량없는 신통력이 있어 중생을 편안하고 이롭게 한다.”
대혜보살이 다시 부처님께 말씀드렸다.
“세존이시여,
어떤 인연으로 여래ㆍ응공ㆍ등정각께서는
보살마하살이 삼매정수(三昧正受)에 머물 때나 가장 높은 지위[勝進地]에서 관정할 때
그 신통력을 더해 주십니까?”
부처님께서 대혜에게 말씀하셨다.
“마업(魔業)과 번뇌를 벗어나게 하기 위해서이고,
성문지(聲聞地)의 선(禪)에 떨어지지 않게 하기 위해서이며,
여래의 스스로 깨달은 지위에 들어가게 하기 위해서이고,
얻은 법을 증진시키도록 하기 위해서이다.
이런 까닭에 여래ㆍ응공ㆍ등정각이
모두 신통력으로 모든 보살마하살을 건립하는 것이다.
만일 신통력으로 건립하지 않으면 외도의 악견과 망상에 떨어지고,
성문과 여러 악마가 희망하는 데 떨어져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지 못할 것이다.
이런 이유로 모든 부처님 여래가 신통력으로써 모든 보살마하살을 거두는 것이다.”
이때 세존께서 이 뜻을 거듭 펴시고자 게송으로 말씀하셨다.
신통력 갖춘 인중존(人中尊)
큰 원(願)이 모두 청정하여
삼마제(三摩提)에서 관정하니
초지(初地)에서 10지까지이다.
이때 대혜보살마하살이 다시 부처님께 말씀드렸다.
“세존이시여,
부처님께서는 연기법(緣起法)을 말씀하셨습니다.
이와 같이 인연을 말씀하셨으나 직접 도(道)에 대해서는 말씀하시지 않으셨습니다.
세존이시여,
외도도 인연을 말하니,
승(勝)ㆍ자재(自在)ㆍ때[時]ㆍ미진(微塵)으로 생긴다고 하고 이와 같이 모든 성품이 생긴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세존이시여,
인연이 모든 성품을 생기게 한다는 말은
유간실단(有間悉檀)과 무간실단(無間悉檀)입니다.
[실단은 뜻≺義≻이라고 번역하며 종지≺宗≻ 혹은 이루다≺成≻ 혹은 침묵≺默≻이라고도 한다.]
세존이시여,
외도도 있음이 없음에서 생긴다고 말하였습니다.
세존께서도 없음에서 있음이 생기고,
생기고 나서는 없어진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세존께서 말씀하신 대로 무명(無明)이 행(行)과 내지 늙음과 죽음의 연(緣)이 된다면,
이것은 곧 세존께서 인(因)이 없다고 말씀하신 것이지,
인이 있다고 말씀하신 것은 아닙니다.
세존께서는 이것이 있음으로 저것이 있다는 이런 설(說)을 세우셨지,
차례로 생긴다는 설을 세운 것은 아닙니다.
외도들이 말하는 승(勝)을 관찰해 보면 여래께서 말씀한 것과 다릅니다.
왜냐하면 세존이시여,
외도들이 말하는 인(因)은 인연을 따라 생겨 있게 된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세존께서는 말씀하시기를 ‘인(因)을 보면 사(事)가 있고,
사를 보면 인이 있다’고 하셨습니다.
이와 같다면 인과 연이 어지럽게 섞일 것이며,
이와 같이 전전하여 무궁할 것입니다.”
▸ 부처님께서 대혜에게 말씀하셨다.
“나는 인이 없다고 말한 것도 아니고,
인과 연이 어지럽게 섞였다고 말한 것도 아니다.
‘이것이 있으므로 저것이 있다’고 말한 것은
받아들이는 것과 받아들여지는 것이 성품이 아니라는 말이니,
자심(自心)의 현량(現量)임을 깨달아야 한다. ◂
“나는 인이 없다고 말한 것도 아니고,
인과 연이 어지럽게 섞였다고 말한 것도 아니다.
‘이것이 있으므로 저것이 있다’고 말한 것은
받아들이는 것과 받아들여지는 것이 성품이 아니라는 말이니,
자심(自心)의 현량(現量)임을 깨달아야 한다. ◂
대혜야,
받아들이고 받아들여지는 것에 계착하면
자기 마음의 현량임을 깨닫지 못하고 바깥 경계의 성품이라거나 성품이 아니라고 하게 된다.
그들에게 이와 같은 허물이 있는 것이니,
내가 말한 연기는 아니다.
나는 항상 인과 연이 화합하여 모든 법이 생긴다고 말했지,
인이 없이 생긴다고 말한 것이 아니다.”
대혜가 다시 부처님께 말씀드렸다.
“세존이시여,
말[言說]에 성품이 있으니,
모든 법도 성품이 있는 것이 아닙니까?
세존이시여,
만약 성품이 없다면 말이 생기지 않았을 것입니다.
세존이시여,
말에 성품이 있으므로 모든 법이 성품이 있다고 하겠습니다.”
▸ 부처님께서 대혜에게 말씀하셨다.
“성품이 없어도 말을 만든다.
이를테면 토끼의 뿔이나 거북이의 털 등이니,
세상에서 현재 쓰고 있는 말이다.
대혜야,
성품도 아니고 성품 아닌 것도 아니니,
단지 말일 뿐이다. ◂
“성품이 없어도 말을 만든다.
이를테면 토끼의 뿔이나 거북이의 털 등이니,
세상에서 현재 쓰고 있는 말이다.
대혜야,
성품도 아니고 성품 아닌 것도 아니니,
단지 말일 뿐이다. ◂
그러므로 네가 말한 대로 말에
자성(自性)이 있어 모든 법이 성품이 있다고 한다면,
이러한 너의 이론은 무너지는 것이다.
▸ 대혜야,
모든 국토에 말이 있는 것은 아니다.
말이란 곧 모습을 짓는 것일 뿐이다. ◂
모든 국토에 말이 있는 것은 아니다.
말이란 곧 모습을 짓는 것일 뿐이다. ◂
혹 어떤 불국토에서는 바라보기만 하여도 법(法)이 드러난다.
어떤 국토에서는 모습을 짓기도 하고,
어떤 국토에서는 눈썹을 치켜 올리기도 하고,
어떤 국토에서는 눈동자를 굴리기도 하고,
어떤 국토에서는 웃기도 하고,
어떤 국토에서는 하품을 하기도 하고,
어떤 국토에서는 헛기침을 하기도 하고,
어떤 국토에서는 생각만 하기도 하고,
혹은 어떤 국토에서는 움직이기만 하기도 한다.
대혜야,
바라본다는 것은 향적세계(香積世界)나 보현여래(普賢如來)의 국토에서는 바라보기만 해도
모든 보살로 하여금 무생법인(無生法忍)과 수승한 삼매를 얻게 한다.
따라서 말에 성품이 있으므로 모든 법이 성품이 있는 것은 아니다.
대혜야,
이 세계에 있는 모기나 파리나 벌레나 개미와 같은 중생들은
말없이도 제각기 일을 잘 처리한다.”
이때 세존께서 거듭 이 뜻을 펴시고자 게송으로 말씀하셨다.
허공과 토끼의 뿔
반대자(槃大子)는
없는 것인데도 말은 있으니
이와 같이 성품은 망상일 뿐이다.
인(因)과 연(緣)이 화합하여 생긴 법인데
어리석은 범부는 망상을 일으켜
여실(如實)하게 알지 못하고
3유(有)의 집에서 윤회한다.
이때 대혜보살마하살이 다시 부처님께 말씀드렸다.
“세존이시여,
영원하다는 소리[常聲]는 무엇을 말하는 것입니까?”
부처님께서 대혜에게 말씀하셨다.
“혹란을 말한다.
저 혹란을 모든 성인도 나타내지만 전도되지는 않는다.
▸ 대혜야,
봄날 아지랑이나 불을 돌려 생기는 바퀴 모양이나 눈병에 아른거리는 머리카락이나
건달바성이나 환(幻)이나 꿈이나 거울에 비친 모습 같은 것은 세상의 전도된 생각이니,
밝은 지혜가 아니다.
그러나 나타나지 않는 것도 아니다.
대혜야,
저 혹란이 갖가지로 나타나는 것이 있으나
혹란이 무상(無常)을 일으키는 것은 아니다. ◂
봄날 아지랑이나 불을 돌려 생기는 바퀴 모양이나 눈병에 아른거리는 머리카락이나
건달바성이나 환(幻)이나 꿈이나 거울에 비친 모습 같은 것은 세상의 전도된 생각이니,
밝은 지혜가 아니다.
그러나 나타나지 않는 것도 아니다.
대혜야,
저 혹란이 갖가지로 나타나는 것이 있으나
혹란이 무상(無常)을 일으키는 것은 아니다. ◂
왜냐하면 성품과 성품 아닌 것을 벗어났기 때문이다.
대혜야,
성품과 성품 아닌 것을 벗어났다는 것은 무엇인가?
혹란은 모든 어리석은 범부의 온갖 경계이기 때문이다.
마치 저 항하(恒河)를 아귀(餓鬼)는 보아도 보지 못하는 것과 같다.
따라서 혹란은 성품이 없으나
다른 중생에게는 나타나므로 성품이 없는 것도 아니다.
이렇듯이 혹란은
모든 성인이 전도된 것과 전도되지 않은 것을 벗어나는 것이다.
그러므로 혹란은 영원하다.
이른바 모습 모습이 무너지지 않기 때문이니,
대혜야,
혹란의 온갖 모습과 망상의 모습은 무너지는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혹란은 영원하다.
대혜야,
왜 혹란을 진실(眞實)이라고 하는가?
만약 다시 그 인연을 말한다면
모든 성인은 이 혹란에 대해서 전도된 깨달음을 일으키지도 않고,
전도되지 않은 깨달음을 일으키지도 않기 때문이다.
대혜야,
모든 성인을 제외하고는 이 혹란에 대해서 약간이라도 생각을 일으키니,
성지(聖智)의 사상(事想)이 아니다.
대혜야,
그 ‘있다[有]’는 것은 어리석은 사람이 헛되이 말하는 것이니,
성인의 말이 아니다.
저 혹란은 전도되고 전도되지 않은 망상으로
두 가지의 종성(種性)을 일으키니,
성인의 종성과 어리석은 사람의 종성이다.
성인의 종성에 세 가지의 구별이 있으니,
성문승(聲聞乘)과 연각승(緣覺乘)과 불승(佛乘)을 말한다.
어떻게 어리석은 사람이 망상으로 성문승종성(聲聞乘種性)을 일으키는가?
자상(自相)과 공상(共相)에 계착하여 성문승종성을 일으키는 것이니,
이를 망상이 성문승종성을 일으키는 것이라고 한다.
대혜야,
저 혹란(惑亂)에 즉한 망상이 연각승종성을 일으킨다는 것은,
저 혹란에 즉하여 자상과 공상을 관찰하지 못하고 계착하여 연각승종성을 일으키는 것을 말한다.
어떻게 지혜로운 사람이 저 혹란상(惑亂想)에 즉하여 불승종성(佛乘種性)을 일으키는가?
자심(自心)의 현량(現量),
바깥 경계의 성품과 성품이 아닌 것,
망상이 아닌 상(相)을 깨달아 불승종성을 일으키는 것이다.
이를 저 혹란에 즉하여 불승종성을 일으키는 것이라고 한다.
또 온갖 사성(事性)에 대해서 범부는 미혹된 생각으로 어리석은 사람의 종성[愚夫種姓]을 일으킨다.
그것은 현실적으로 있는 것도 아니고 현실적으로 없는 것도 아니니,
이를 ‘종성의 뜻’이라고 한다.
대혜야,
저 혹란은 망상이 아니다.
모든 성인의 심(心)ㆍ의(意)ㆍ의식(意識)과 허물[過]과 습기와 자성법(自性法)과 전변하는 성품[轉變性]을 ‘진여(眞如)’라고 한다.
그러므로 진여는 마음을 벗어난다고 말한다.
내가 이 구절[句]을 말한 것은 생각을 벗어나야 한다는 것을 드러내 보인 것이니,
곧 모든 생각을 벗어나라는 것이다.”
대혜가 부처님께 말씀드렸다.
“세존이시여,
혹란은 있는 것입니까,
없는 것입니까?”
부처님께서 대혜에게 말씀하셨다.
“환(幻)과 같아서 계착할 만한 모습이 없다.
만약 혹란에 계착할 만한 모습이 있다고 한다면
계착하는 성품은 멸할 수 없어야 할 것이며,
연기(緣起)는 외도들이 말하는 인연으로 법이 생긴다는 주장과 같아야 할 것이다.”
대혜가 부처님께 말씀드렸다.
“세존이시여,
만약 혹란이 환과 같다면 다시 다른 미혹에게 인(因)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부처님께서 대혜에게 말씀하셨다.
“환(幻)은 미혹의 인(因)이 아니니,
허물을 일으키지 않기 때문이다.
대혜야,
환은 허물을 일으키지 않으니,
망상이 없기 때문이다.
대혜야,
환이란 다른 밝은 곳[明處]을 따라 생기는 것이지,
자기의 망상과 허물과 습기로 생기는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허물을 일으키지 않는다.
대혜야,
이것은 어리석은 범부가 마음이 미혹하여 계착하는 것이니,
성현은 그렇지 않다.”
이때 세존께서 이 뜻을 거듭 밝히고자 게송으로 말씀하셨다.
성인은 혹란을 보지 않는다 하면
보지 않는 중간 역시 진실이 없을 것이다.
중간이 진실이라면
혹란이 곧 진실이리라.
모든 미혹을 떠나
만약 모습이 생긴다면
이것 역시 혹란이 되리니
깨끗하지 못함이 눈병 난 것 같으리라.
또 대혜야,
환에 비슷한 면이 없는 것도 아니니,
모든 법을 환과 같이 보라.”
대혜가 부처님께 말씀드렸다.
“세존이시여,
온갖 환의 모습에 계착하는 것을 가리켜 모든 법이 환과 같다고 말씀하신 것입니까?
이상(異相)에 계착하는 것을 가리켜 환과 같다고 말씀하신 것입니까?
만약 온갖 환의 모습에 계착하는 것을 가리켜 모든 법의 성품이 환과 같다고 하셨다면,
세존이시여,
환과 같지 않은 성품이 있습니다.
왜냐하면 물질의 온갖 모습은 인(因)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세존이시여,
물질로 인해서 온갖 모습이 환과 같이 나타나는 일은 없습니다.
세존이시여,
그러므로 온갖 환의 모습에 계착하는 것을 비유하여 성품이 환과 같다고 할 수 없습니다.”
부처님께서 대혜에게 말씀하셨다.
“갖가지 환의 모습에 계착하는 것을 비유하여 모든 법이 환과 같다고 한 것이 아니다.
대혜야,
그러나 진실하지 못한 온갖 법은 빨리 없어지니,
마치 번개와 같고 이런 면에서 환과 같다고 한 것이다.
대혜야,
마치 번갯불이 찰나에 나타나고 나타났다가는 곧 사라지는 것과 같다.
어리석은 범부에게 나타나는 것은 그렇지 않다.
이와 같이 모든 성품이 자기망상(自己妄想)이며
자상(自相)과 공상(共相)이어서 관찰하면 본성(本性)이 없는 것이니,
현전(現前)의 색상(色相)으로 계착할 바가 아니다.”
이때 세존께서 이 뜻을 거듭 펴시고자 게송으로 말씀하셨다.
환(幻)에 비유할 수 없는 것도 아니기에
법성(法性)을 환과 같다 하였으니
부실(不實)하여 번개같이 빠르다
그러므로 환과 같다 말하였다.
대혜가 다시 부처님께 말씀드렸다.
“세존께서 말씀하신 것처럼 모든 성품이 생김이 없고 또 환과 같다면,
세존께서 전후에 말씀하신 것이 스스로 서로 어긋나지 않겠습니까?
생김이 없다 하시고 또 모든 성품이 환과 같다고 하셨습니다.”
부처님께서 대혜에게 말씀하셨다.
“내가 ‘생김이 없다’고 하고 ‘성품이 환과 같다’고 한 말에 전후가 서로 어긋나는 허물이 있는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생긴다는 것[生]과 생김이 없다[無生]는 것은
자심의 현량으로 있는 것[有]과 있는 것이 아닌 것[非有]과
바깥 경계의 성품과 성품이 아닌 것을 나타내는 것이니,
이것을 깨달으면 생김이 없다는 것이 나타나기 때문이다.
대혜야,
나에게 전후의 말이 서로 어긋나는 과오가 있는 것이 아니다.
외도의 인(因)으로 생긴다는 주장을 무너뜨리기 위해서 내가 ‘모든 성품은 생김이 없다’고 말한 것이다.
대혜야,
외도의 어리석은 무리들은 있음과 없음이 생긴다고 하며,
자기의 망상이 갖가지로 계착한 반연[緣]이라고 하지 않는다.
대혜야,
아는 있음과 없음이 생기는 것이 아님을 알므로
나는 ‘생김이 없다’고 말한 것이다.
대혜야,
성품을 말한 것은 생사를 받아들이기 때문이며,
무견(無見)과 단견(斷見)을 무너뜨리기 위해서이다.
나의 제자들이 온갖 업(業)에 의해서 태어남을 받기 때문에,
성품이라는 말로써 생사를 받아들이는 것을 말한 것이다.
대혜야,
성자성(性自性)의 모습이 환이라고 말한 것은 성자성의 모습을 벗어나게 하기 위해서이다.
어리석은 범부가 악견(惡見)에 치우쳐 서로 희망하면서,
자심의 현량인 줄을 알지 못하고 인(因)으로 지어진 생연(生緣)을 무너뜨리며 자성상이라 계착하므로,
모든 법의 자성상이 환과 같고 꿈과 같다고 말한 것이다.
이는 어리석은 범부가 악견(惡見)으로 자타(自他)의 모든 법을 여실(如實)한 곳에서 본다고 희망하고 계착하여
올바르지 못한 논[不正論]을 짓는 일이 없도록 하기 위해서이다.
대혜야,
여실한 곳에서 모든 법을 본다는 것은 자심의 현량이다.”
이때 세존께서 이 뜻을 거듭 펴시고자 게송으로 말씀하셨다.
생김이 없다 하면 성품이 아니라 하고
성품이 있다 하면 생사를 받아들이니
환과 같다 관찰하면
모습에 망상을 내지 않으리라.
또 대혜야,
이름[名身]과 구[句身]와 형상[形身]의 모습을 말하겠다.
이름과 구와 형상의 모습을 잘 관찰하면,
보살마하살이 뜻과 구와 형상을 따라 들어가 속히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게 되며,
이와 같이 깨닫고 나서 모든 중생을 깨닫게 하리라.
대혜야,
이름이란 사물에 의지해서 이름을 세우는 것을 말하니,
이를 이름[名身]이라고 한다.
구[句身]란 구에는 자체의 뜻이 있어 구경(究竟)에 확실한 것을 말하니,
이를 구라고 한다.
형상[形身]이란 이름과 구를 드러내 보이는 것을 말하니,
이를 형상이라고 한다.형상은 글자다.
또 형상이란 길고 짧고 높고 낮은 것을 말하며,
또 구란 길에 난 발자국을 말한다.
마치 코끼리ㆍ말ㆍ사람ㆍ짐승 등이 지나간 길에 남은 발자국과 같은 것을 구[句身]라고 한다.
대혜야,
이름[名]과 형상[形]에서 이름은 색(色)이 없는 4음(陰)을 설명하기 때문에 이름이라 하고,
자기 모습을 나타내므로 형상이라고 말한다.
이를 이름[名身]ㆍ구[句身]ㆍ형상[形身]이라 한다.
이름ㆍ구ㆍ형상의 차별된 모습을 설명하였으니,
반드시 배우고 닦아야 한다.”
이때 세존께서 이 뜻을 거듭 펴시고자 게송으로 말씀하셨다.
이름과 구와
형상에 차별 있어
어리석은 범부가 계착하니
코끼리가 깊은 진흙탕에 빠진 것 같다.
또 대혜야,
미래에 어떤 지혜로운 사람이 같음과 다름[一異],
함께함과 함께하지 않음[俱不俱]과 같은 견해를 벗어나고서
자기가 통달한 뜻으로써 지혜가 없는 사람에게 물으면,
그 사람은 곧 ‘이것은 바른 질문이 아니다’라고 대답할 것이다.
물질 등은 영원한가 무상한가,
다른 것인가 다르지 않은 것인가 하고 묻고,
이와 같이 열반이나 모든 행의 상(相)과 소상(所相),
구나(求那)와 소구나(所求那),
짓는 자와 지어진 것,
보는 자과 보이는 것,
티끌과 작은 티끌,
수행과 수행하는 사람이 같은 것인가 다른 것인가 하고 묻는다.
이와 같이 비교하며 전전하는 모습으로 이와 같이 묻고는 ‘부처님은 무기(無記)를 말씀하셔서 논쟁을 그치게 하셨다’라고 말해 준다.
이는 저 어리석은 범부들이 알 수 있는 것이 아니니,
이른바 들어서 얻는 지혜[聞慧]를 갖추지 못하였기 때문이다.
여래ㆍ응공ㆍ등정각은 그들을 두렵게 하는 말에서 그들을 벗어나게 하려고 무기를 말하고,
드러내 말하지 않은 것이다.
또 외도의 견해와 이론을 그치게 하려고 말해 주지 않은 것이다.
대혜야,
외도들은 이렇게 말한다.
‘명(命)이 곧 이 몸이다.’
이와 같은 것들에 대해서 무기를 논한 것이다.
대혜야,
저 모든 외도들이 인(因)에 대해 어리석기에 무기를 논한 것이니,
내가 말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다.
대혜야,
내가 말하는 것은 받아들이는 것과 받아들여지는 것을 벗어나면
망상이 생기지 않는다는 것이다.
왜 그치게 하는가?
대혜야,
만약 받아들이는 것과 받아들여지는 것에 계착하면
자심의 현량임을 모르게 되기 때문에 그것을 그치게 한 것이다.
대혜야,
여래ㆍ응공ㆍ등정각은 네 가지 기론(記論)으로 중생을 위해 설법한다.
대혜야,
그치게 하는 기론은 내가 때때로 근기가 미숙한 사람을 위해 말한 것으로,
성숙한 사람을 위해 말한 것은 아니다.
또 대혜야,
모든 법은 짓는 인연을 벗어났으므로 생기지 않고,
만드는 사람이 없기 때문에 모든 법은 생기지 않는다.
대혜야,
왜 모든 성품은 자성(自性)을 벗어나 있는가?
스스로 깨달아 관찰할 때 자성(自性)과 공성(共性)의 모습을 얻을 수 없기 때문에,
모든 법은 생기지 않는다고 말하는 것이다.
왜 모든 법을 가지고 올 수도 없고,
가지고 갈 수도 없는가?
자상과 공상은 가지고 오려 해도 가져올 것이 없고 가지고 가려 해도 가져갈 것이 없다.
따라서 모든 법은 가지고 오가는 것을 벗어나 있다.
대혜야,
왜 모든 법은 없어지지 않는가?
성자성(性自性)의 모습이 없기 때문에 모든 법을 얻을 수 없고,
이로 인해 모든 법은 없어지지 않는다.
대혜야,
왜 모든 법은 무상한가?
모습[相]은 무상한 성[無常性]에서 일어났으므로 모든 법이 무상하다고 말한다.
대혜야,
왜 모든 법은 영원한가?
모습이 생김이 없는 성[無生性]에서 일어나 무상함이 영원한 까닭에,
모든 법은 영원하다고 한다.”
이때 부처님께서 이 뜻을 거듭 펴시고자 게송으로 말씀하셨다.
기론에 네 가지 있어
일향(一向)과 힐문(詰問)과
분별(分別)과 지론(止論)이니
이로써 모든 외도를 제압한다.
있는 것에서 생기고,
있지 않은 것에서 생긴다는
승거(僧佉)와 비사사(毘舍師)의 주장에
모두 다 무기로 대응하니
그들에게 이와 같이 드러내 보인다.
정각(正覺)이 분별하는 것
자성(自性)은 얻을 수 없어
말을 벗어났다는 것이니
그래서 자성을 벗어나라고 말한다.
이때 대혜보살마하살이 다시 부처님께 말씀드렸다.
“세존이시여,
저희를 위해 모든 수다원(須陀洹)과 수다원취(須陀洹趣)의 차별된 모습과 공통된 모습을 말씀해 주십시오.
만약 보살마하살이 수다원취의 차별된 모습과 융통된 모습을 잘 알고,
사다함(斯陀含)과 아나함(阿那含)과 아라한(阿羅漢)의 방편의 모습을 분별해서 알고 나면,
이와 같은 것들을 중생을 위해 설법할 것입니다.
두 가지 무아(無我)의 모습을 알게 하고,
두 가지 장애를 없게 하며,
모든 지위의 모습을 건너 구경(究竟)에 통달하게 하고,
모든 여래의 부사의한 구경의 경계를 얻게 할 것입니다.
마치 여러 색의 마니 보배가 모든 중생에게 이익을 줄 수 있는 것과 같아서,
모든 법의 경계와 다함이 없는 신재(身財)로 모두를 거두어 기를 것입니다.”
부처님께서 대혜에게 말씀하셨다.
“자세히 들어라.
자세히 듣고 잘 생각하여라.
지금 너를 위해서 말하겠다.”
대혜가 부처님께 말씀드렸다.
“거룩하신 세존이시여,
듣고 믿겠습니다.”
부처님께서 대혜에게 말씀하셨다.
“수다원과 수다원의 과보[果]에 세 가지 차별이 있다.
무엇이 세 가지인가?
하(下)와 중(中)과 상(上)이다.
하란 최대 일곱 번의 생(生)을 받는 것이고,
중이란 세 번에서 다섯 번까지 생을 받고 나서 열반에 드는 것이고,
상이란 그 생에서 바로 열반에 드는 것이다.
이 세 종류에 세 가지 번뇌가 있으니,
하와 중과 상이다.
무엇이 세 가지 번뇌인가?
신견(身見)과 의심[疑]과 계취(戒取)이다.
이것이 세 가지 번뇌의 차별이다.
점점 위로 올라가면 아라한과를 얻는다.
대혜야,
신견(身見)에는 두 가지가 있다.
구생(俱生)과 망상(妄想)이니,
곧 연기망상(緣起妄想)과 자성망상(自性妄想)이다.
이는 연기자성(緣起自性)에 의지하여
갖가지 망상자성(妄想自性)의 계착이 생기는 것과 같으니,
그들은 있는 것도 아니고 없는 것도 아니며,
그렇다고 있으면서 없는 것도 아니니,
진실이 없는 망상의 모습이기 때문이다.
어리석은 사람은 망상으로 온갖 망상을 자성의 모습으로 계착하니,
마치 더운 날 아지랑이를 본 사슴이
목마름에 그것을 물이라고 생각하는 것과 같다.
이것이 수다원의 망상신견(妄想身見)이다.
이 사람은 인무아(人無我)를 알아 성품이 없음을 받아들이고,
오랜 옛날부터 무지(無知)로 계착하던 것을 끊어 없앤다.
대혜야,
구생(俱生)이란 수다원의 신견(身見)이니,
자기나 남의 몸 등의 4음(陰)은 색의 모습[色相]이 없기 때문이며,
색(色)은 조색(造色)과 소조색(所造色)에서 생기기 때문이며,
전전(展轉)히 서로 인(因)하는 모습[相]이기 때문이며,
대종(大種)과 색이 모이지 않기 때문이다.
수다원은 있다는 견해와 없다는 견해를 관찰해 신견이 끊어지며,
이와 같이 신견이 끊어져 탐욕이 생기지 않는다.
이를 신견의 모습이라고 한다.
대혜야,
의심의 모습[疑相]이란 법(法)을 얻어 모습을 잘 보고,
앞의 두 가지 신견의 망상을 끊으므로 법을 의심하는 마음이 생기지 않는 것이며,
다른 곳에 대하여 큰 스승이라는 생각을 일으켜서 깨끗한지 깨끗하지 않은지 분별하지 않는 것을 말한다.
이를 수다원이 의심하는 모습을 끊는 것이라 한다.
대혜야,
계취(戒取)란 무엇이고,
수다원이 계를 취하지 않는다는 것은 무엇인가?
태어나 몸을 받는 곳이 고통스러운 모습임을 잘 보기 때문에 취하지 않는 것을 말한다.
대혜야,
취한다는 것은 모든 어리석은 범부가 확고하게 고행을 받아들이고 익히는 것을
많은 즐거움을 얻을 수 있는 도구로 여기기 때문에
생(生)을 받기를 원하는 것이니,
저 수다원은 이런 것을 취하지 않는다.
돌이켜 스스로 깨닫는 뛰어난 경계[自覺勝]를 향하고
망상을 벗어난 무루법상(無漏法相)에서 방편을 행하여
계(戒)를 받아들이는 경우는 제외한다.
이를 수다원이 계를 취하는 모습을 끊는 것이라 한다.
수다원은 세 가지 번뇌를 끊어 탐욕과 어리석음이 생기지 않는다.
만약 수다원이 ‘어떤 번뇌도 나는 갖지 않는다’고 말한다면 두 가지 허물이 있게 되니,
신견(身見)에 떨어지는 것과 모든 번뇌가 끊어지지 않는 것이다.”
대혜가 부처님께 말씀드렸다.
“세존이시여,
세존께서 말씀하신 여러 많은 탐욕 중에 저들은 어떤 탐욕이 끊어졌습니까?”
부처님께서 대혜에게 말씀하셨다.
“여인을 좋아하여 얽히고 탐착하는 것이다.
갖가지 방편으로 몸과 입으로 짓는 악업은 현재에는 즐거움을 받으나 미래의 고통을 심는 것이다.
저들은 그러한 탐욕을 내지 않는다.
왜냐하면 삼매정수(三昧正受)의 즐거움을 얻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런 탐욕이 끊어진다.
그러나 열반으로 나아가려는 탐욕이 끊어진 것은 아니다.
대혜야,
무엇이 사다함의 모습인가?
문득 물질의 모습을 비추어 망상이 생기나 상견(相見)의 모습이 생기지 않으며,
선(禪)으로 나아가는 모습을 잘 보므로 곧 이 세상으로 돌아와 고통을 다 없애고 열반을 얻는 것을 말한다.
그러므로 사다함이라고 한다.
대혜야,
무엇을 아나함이라고 하는가?
과거와 미래와 현재에 물질의 모습에서 성품이라든가 성품이 아니라든가 하는 견해가 생기니,
이러한 잘못을 보고 망상이 생기지 않게 하며,
번뇌를 끊는 것을 말한다.
그러므로 아나함이라고 한다.
대혜야,
아라한이란 모든 선과 삼매(三昧)와 해탈(解脫)의 힘으로
번뇌의 고통이 망상이어서 성품이 아니라는 사실을 여실히 아는 것이다.
그러므로 아라한이라고 한다.”
대혜가 부처님께 말씀드렸다.
“세존께서는 세 종류의 아라한을 말씀하셨는데,
여기에서는 어떤 아라한을 말씀하신 겁니까?
세존이시여,
적정한 1승도(乘道)를 얻은 아라한입니까,
보살마하살이 방편으로 나타내 보인 아라한입니까,
부처님께서 응화(應化)하시어 화현(化現)하신 것입니까?”
부처님께서 대혜에게 말씀하셨다.
“적정한 1승도를 얻은 성문이지 다른 것을 말한 것이 아니다.
나머지는 보살행(菩薩行)을 하거나 부처가 응화하여 화현한 것이니,
교묘한 방편과 본원(本願)으로 인하여 대중 가운데 생을 받는 것을 나타내 보인 것이며,
부처의 권속을 장엄하기 위한 것이기 때문이다.
대혜야,
망상처(妄想處)에서 갖가지 설법을 하기에 이른바 과위(果位)를 얻는다고 하는 것이니,
선(禪)을 얻는 자는 선에 들어가 모두 벗어나기 때문이다.
자심의 현량을 얻어 과(果)를 얻는 모습임을 나타내 보이는 것을 과를 얻는 것이라고 한다.
또 대혜야,
선(禪:4禪)과 무량(無量:4無量定)과 무색계(無色界:4無色定)를 뛰어넘고자 한다면
자심의 현량을 벗어나야 한다.
대혜야,
느끼고 생각하는 정수(正受)로
자심의 현량을 초월하려고 하면 그렇게 되지 않는다.
왜냐하면 마음에 헤아리는 것이 있기 때문이다.”
이때 세존께서 이 뜻을 거듭 펴시고자 게송으로 말씀하셨다.
모든 선(禪)과 4무량(無量)
무색(無色)과 삼마제(三摩提)
모든 느낌과 생각이 없어진 선정
마음의 헤아림이 거기에는 없다.
수다반나과(須陀槃那果)
왕래(往來)와 불환(不還)
또 아라한(阿羅漢)
이들의 마음이 곧 혹란이다.
선자(禪者)는 선정(禪定)과 선정의 반연[緣]
이것을 진제(眞諦)로 알고 단정하지만
이것이 곧 망상으로 헤아림이니
이를 깨달으면 해탈하리라.
또 대혜야,
두 종류의 깨달음이 있으니
관찰하여 얻는 깨달음[觀察覺]과 망상의 모습으로 받아들여서 계착하는 자리에 건립하는
깨달음[妄想相攝受計着建立覺]이다.
대혜야,
관찰하여 얻는 깨달음이란,
성품의 자성상(自性相)을 깨달아 이 4구(句)를 벗어나고는 얻을 수 없다고 선택하는 것이다.
이를 관찰하여 얻는 깨달음이라고 한다.
대혜야,
저 4구란 같음과 다름,
함께함과 함께하지 않음,
있음ㆍ없음ㆍ있지도 않고 없지도 않음,
상(常)과 무상(無常)을 벗어나는 것이니,
이를 4구라고 한다.
대혜야,
이 4구를 벗어나면 이를 일체법(一切法)이라고 한다.
대혜야,
이 4구로 모든 법을 관찰하는 것을 반드시 배우고 익혀야 한다.
대혜야,
무엇이 망상의 모습으로 받아들이고 계착하여 세우는 깨달음인가?
망상의 모습으로 받아들여,
단단하다거나 축축하다거나 따뜻하다거나 움직인다고 계착하는 것이다.
진실하지 못한 망상의 모습인 4대종(大種)에 종(宗)과 인상(因想)과 비유를 세워 계착하고는
진실하지 못한 것을 세우고 또 세우는 것이다.
이를 망상의 모습으로 받아들이고 계착하여 세우는 깨달음이라고 한다.
이를 두 가지 깨달음의 모습이라고 한다.
만약 보살마하살이 이 두 가지 깨달음의 모습을 성취하면
인무아(人無我)와 법무아(法無我)의 모습을 끝까지 잘 알고
구경의 방편을 잘 알게 되며,
무소유를 깨닫고,
수행하는 행상(行相)과 지위(地位)를 관찰하여 초지(初地)를 얻으며,
백 가지 삼매에 들어가 차별된 삼매를 얻게 된다.
백 명의 부처와 백 명의 보살을 보고,
과거와 미래 백 겁 동안의 일을 잘 알게 되며,
빛이 백 개의 국토를 비추고,
상상지(上上地)의 모습을 알며,
큰 원이 수승해지고,
신통력이 자재해지며,
법운지(法雲地)에서 관정을 받아 여래의 자각지(自覺地)를 얻게 되며,
마음을 열 가지 다함이 없는 법[十無盡句]에 잘 집중하여 중생을 성숙시키고 갖가지 변화를 일으키며 광명으로 장엄하게 된다.
이는 자각성락삼매정수(自覺聖樂三昧正受)를 얻기 때문이다.
또 대혜야,
보살마하살은 4대(大)와 조색(造色)을 잘 알아야 한다.
보살이 4대와 조색을 잘 안다는 것은 무엇인가?
대혜야,
보살마하살은 저 진제(眞諦)란 4대가 생기지 않는 것이라고 배운다.
저 4대가 생기지 않는 것임을 이렇게 관찰하고,
관찰한 후에는 이름[名]ㆍ모습[相]ㆍ망상(妄想)의 범위와
자심현량(自心現量)의 범위와
바깥 경계의 성품과 성품 아닌 것을 깨닫는다.
이를 자기 마음이 나타낸 망상의 범위라고 하니,
삼계를 말한다.
저 4대와 조색을 관찰하여 4구를 벗어나 모두 청정히 하고,
아(我)와 아소(我所)를 벗어나 여실한 모습인 자상의 범위에 머무르면,
생김이 없는 자상[無生自相]을 이루게 된다.
대혜야,
저 4대종(大種)이 어떻게 조색(造色)을 생기게 하는가?
축축하다는 망상대종[津潤妄想大種]이 안팎의 수계(水界)를 생겨나게 하고,
감당할 수 있다는 망상대종[堪能妄想大種]이 안팎의 화계(火界)를 생겨나게 하고,
펄럭이며 움직인다는 망상대종[飄動妄想大種]이 안팎의 풍계(風界)를 생겨나게 하고,
물질을 끊고 자른다는 망상대종[斷截妄想大種]이 안팎의 지계(地界)를 생겨나게 한다.
색(色)과 허공이 함께하여 삿된 진리에 계착하면 5음(陰)의 모임이라는 사대조색이 생긴다.
대혜야,
식(識)이란 온갖 자취의 경계를 좋아함으로 인하여 생기는 것이므로 다른 곳으로 나아가 계속하여 끊이지 않는다.
대혜야,
지(地) 등의 4대와 조색 등에 4대연(大緣)이 있으나,
그것은 4대연이 아니다.
왜냐하면 성품ㆍ형상(形相)ㆍ처소(處所)ㆍ짓는 방편[作方便]은 성품이 없으며
대종은 생겨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대혜야,
성품ㆍ형상ㆍ처소ㆍ짓는 방편이 화합해서 생기므로 형상이 없는 것도 아니다.
그러므로 4대와 조색이라는 상(相)은
외도의 망상이지 내가 말하는 것은 아니다.
또 대혜야,
모든 음(陰)의 자성상(自性相)을 말하겠다.
무엇을 모든 음의 자성상이라고 하는가?
5음을 말하니,
무엇이 다섯인가?
색(色)ㆍ수(受)ㆍ상(想)ㆍ행(行)ㆍ식(識)이다.
4음은 물질이 아니니,
수(受)ㆍ상(想)ㆍ행(行)ㆍ식(識)을 말한다.
대혜야,
색이란 4대(大)와 조색(造色)으로서 각기 그 모습이 다르다.
대혜야,
물질이 없는데
넷이라는 숫자가 있는 것은 아니니,
마치 허공과 같다.
이는 마치 허공이 숫자의 모습을 초월하는 것이어서
숫자를 벗어났지만 망상으로 하나의 허공이라고 말하는 것과 같다.
대혜야,
이와 같이 음(陰)도 숫자의 모습을 초월하여 숫자를 벗어나고,
성품과 성품 아닌 것을 벗어나며,
4구를 벗어난다.
숫자의 모습이란 어리석은 범부가 언어로 말하는 것이지,
성현의 경지는 아니다.
대혜야,
성인은 환(幻)과 같은 갖가지 색상(色像)에 대해
다르다든가 다르지 않다든가 하는 시설(施設)을 벗어났다.
또 꿈이나 그림자처럼 사람의 몸은 다르고 다르지 않음을 벗어나 있기 때문이다.
대혜야,
성스러운 지혜로 같은 음(陰)에 나아가 망상이 나타나면
이를 모든 음의 자성상(自性相)이라고 한다.
너희는 이것을 없애버려야 하며,
없앤 후 적정한 법을 말해 주어
여러 불국토에 있는 모든 외도의 견해를 끊어 주어야 한다.
대혜야,
적정을 말할 때 법무아(法無我)의 견해가 청정해져
부동지(不動地)에 들어가게 되며,
부동지에 들어간 후 무량삼매(無量三昧)에서 자재함[自在]과
뜻대로 나타나는 몸[意生身]을 얻고,
여환삼매(如幻三昧)를 얻어 구경의 힘[力]과 밝음[明]과
자재함[自在]을 통달하게 되며
모든 중생을 구제하고 거두어 이롭게 한다.
마치 대지가 중생을 받아들여 키우는 것과 같으니,
보살마하살이 널리 중생을 구제하는 것도 이와 같다.
또 대혜야,
모든 외도에는 네 가지 열반이 있다.
무엇이 네 가지인가?
성자성(性自性)이 성품이 아니라는 열반과,
온갖 상(相)과 성품이 성품이 아니라는 열반과,
자상(自相)과 자성(自性)이 성품이 아닌 줄 깨닫는 열반과,
모든 음(陰)의 자상과 공상이 상속하여 흘러드는 것을 끊는 열반이다.
이를 모든 외도의 네 가지 열반이라 하니,
내가 말한 법이 아니다.
▸ 내가 말한 것은 망상식(妄想識)이 멸하는 것을 열반이라 한다는 것이다.”◂
▸ 대혜가 부처님께 말씀드렸다.
“세존께서는 8식(識)을 세우지 않으셨습니까?”◂
“세존께서는 8식(識)을 세우지 않으셨습니까?”◂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세웠다.”
▸ 대혜가 부처님께 말씀드렸다.
“만약 세우셨다면,
왜 의식(意識)을 벗어나라 하시고,
7식(識)을 벗어나라고 하지 않으셨습니까?”◂
“만약 세우셨다면,
왜 의식(意識)을 벗어나라 하시고,
7식(識)을 벗어나라고 하지 않으셨습니까?”◂
▸ 부처님께서 대혜에게 말씀하셨다.
“저것의 인(因)이 되고,
저것의 반연(攀緣)이 되기 때문에 7식이 생기지 않는다.
의식이란 경계의 분단(分段)에 계착해서 생기고,
습기가 장식(藏識)을 자라나게 하고
의(意)와 함께 나[我]와 나의 것[我所]을 계착해서 생각하는 인연으로 생기며,
무너지지 않는 몸의 모습[不壞身相]인 장식이 인이 되어
자기 마음이 나타낸 경계를 반연해 계착하는 마음이 모여 생기며,
전전하며 서로 인(因)이 되는 것이다.
이는 마치 바다의 파도와 같다.
자기 마음이 나타낸 경계에 바람이 부는 것이니,
생기거나 없어지는 것도 이와 같다.
그러므로 의식(意識)이 없어지면 7식(識)도 없어진다.”◂
“저것의 인(因)이 되고,
저것의 반연(攀緣)이 되기 때문에 7식이 생기지 않는다.
의식이란 경계의 분단(分段)에 계착해서 생기고,
습기가 장식(藏識)을 자라나게 하고
의(意)와 함께 나[我]와 나의 것[我所]을 계착해서 생각하는 인연으로 생기며,
무너지지 않는 몸의 모습[不壞身相]인 장식이 인이 되어
자기 마음이 나타낸 경계를 반연해 계착하는 마음이 모여 생기며,
전전하며 서로 인(因)이 되는 것이다.
이는 마치 바다의 파도와 같다.
자기 마음이 나타낸 경계에 바람이 부는 것이니,
생기거나 없어지는 것도 이와 같다.
그러므로 의식(意識)이 없어지면 7식(識)도 없어진다.”◂
이때 세존께서 이 뜻을 거듭 펴시고자 게송으로 말씀하셨다.
나는 열반의 성품이
만들어지거나 함께하는 모습이라 하지 않는다.
망상과 이염식(爾炎識)
이것이 없어지는 게 내가 말하는 열반이다.
그것이 인(因)이 되고 그것이 반연하여
의취(意趣) 등이 몸을 이룰 때
인이 되어 주는 것,
이 마음이니
식이 의지하는 곳이다.
물의 흐름 사라지면
파도가 일지 않듯이
이와 같이 의식이 없어지면
온갖 식도 생기지 않는다.
또 대혜야,
이제 망상자성(妄想自性)이 분별하는 통상(通相)을 설명하겠다.
만약 망상자성이 분별하는 통상을 잘 분별하면,
너를 비롯한 나머지 보살마하살은 망상을 떠나 자각성지[自覺聖]에 이르러,
외도가 모두 향하는 선견각(善見覺)인 받아들이고 받아들여지는 망상이 끊어질 것이다.
연하여 일어난 온갖 모습은 망상자성이 행한 것이므로,
다시는 망상을 일으키지 않을 것이다.
대혜야,
무엇이 망상자성이 분별하는 모든 모습인가?
언설망상(言說妄想)ㆍ
말한 사실의 망상[所說事妄想]ㆍ
상망상(相妄想)ㆍ
이익망상(利妄想)ㆍ
자성망상(自性妄想)ㆍ
인망상(因妄想)ㆍ
견망상(見妄想)ㆍ
이룬다는 망상[成妄想]ㆍ
생긴다는 망상[生妄想]ㆍ
생기지 않는다는 망상[不生妄想]ㆍ
상속한다는 망상(相續妄想)ㆍ
묶이고 묶이지 않는다는 망상[縛不縛妄想]이니,
이를 망상자성이 분별하는 통상(通相)이라고 한다.
대혜야,
무엇이 언설망상인가?
온갖 미묘한 음성으로 노래를 부르거나 읊는 소리의 아름다움을 좋아하여 계착하는 것이니,
이를 언설망상이라고 한다.
대혜야,
무엇이 말한 사실의 망상인가?
말한 사실에 자성이 있어 성지(聖智)가 안다는 것이니,
이것에 의하여 언설망상이 생긴다.
이를 말한 사실의 망상이라고 한다.
대혜야,
무엇이 상망상인가?
저 말한 사실이 있다는 데에 의지해 마치 사슴이 갈증이 나서 갖가지로 계착하는 것처럼 계착하는 것이다.
이는 단단하다거나 축축하다거나 따뜻하다거나 움직인다거나 하는 모습에,
모두 성품이 있다고 여기는 망상이다.
이를 상망상이라고 한다.
대혜야,
무엇이 이익망상인가?
온갖 금과 은과 진기한 보배를 좋아하는 것이니,
이를 이익망상이라고 한다.
대혜야,
무엇이 자성망상인가?
자성(自性)이 이와 같은 것을 지니고 있어 다르지 않다고 하는 악견의 망상이다.
이를 자성망상이라 한다.
대혜야,
무엇이 인망상인가?
인(因)이나 연(緣)이라고 하여,
있고 없는 데 따라 인을 분별하여 모습이 생긴다고 하는 것이니,
이를 인망상이라고 한다.
대혜야,
무엇이 견망상인가?
있음과 없음,
같음과 다름,
함께함과 함께하지 않음과 같은 악견이니,
외도가 망상으로 계착하는 망상이다.
이를 견망상이라 한다.
대혜야,
무엇이 이룬다는 망상인가?
나[我]와 나의 것[我所]이라는 생각으로 결정론(決定論)을 이루는 것이니,
이를 이룬다는 망상이라고 한다.
대혜야,
무엇이 생긴다는 망상인가?
있고 없음의 성품에 반연(攀緣)하여 계착을 일으키는 것이니,
이를 생긴다는 망상이라고 한다.
대혜야,
무엇이 생기지 않는다는 망상인가?
모든 성품은 본래 생김이 없으므로 종자(種子) 없는 인연에서 인(因) 없는 몸이 생겼다고 하는 것이다.
이를 생기지 않는다는 망상이라고 한다.
대혜야,
무엇이 상속한다는 망상인가?
저들이 모두 상속하는 것이 마치 금실[金縷]과 같다고 하는 것이니,
이를 상속한다는 망상이라고 한다.
대혜야,
무엇이 묶이고 묶이지 않는다는 망상인가?
인연에 묶이는 것이 마치 사람이 방편으로 묶었다가 풀었다가 하는 것과 같다고 계착하는 것이다.
이를 묶이고 묶이지 않는다는 망상이라고 한다.
이처럼 망상자성(妄想自性)이 분별하는 모든 모습에 대해서,
모든 어리석은 범부는 있다거나 없다고 계착한다.
대혜야,
연(緣)에 의지해서 일어난다고 계착하니,
계착한다는 것은 온갖 망상으로 자성(自性)에 계착하는 것이다.
이는 환(幻)으로 갖가지 몸을 나타내 보이면
범부는 망상으로 갖가지 다른 환이라고 보는 것과 같다.
대혜야,
환과 온갖 모습은 다른 것도 아니고,
다르지 않은 것도 아니다.
만약 다르다면 환이 온갖 모습의 인(因)이 아니어야 하고,
만약 다르지 않다면 환과 온갖 모습은 차별이 없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차별이 있음을 볼 수 있다.
따라서 다른 것도 아니고,
다르지 않은 것도 아니다.
그러므로 대혜야,
너를 비롯한 나머지 다른 보살마하살은
환으로 연기(緣起)하는 망상자성을
다르다거나 다르지 않다거나 있다거나 없다고 계착하지 말라.”
이때 세존께서 이 뜻을 거듭 펴시고자 게송으로 말씀하셨다.
마음은 경계에 묶이고
깨달음은 지혜를 따라 움직이니
무소유(無所有)와 훌륭한 곳[勝]에서
평등한 지혜가 생긴다.
망상자성(妄想自性)이 있다고 하지만
연으로 일어나니,
없는 것이며
혹 망상을 받아들인다 해도
연으로 일어나니 망상이 아니다.
온갖 연[支分]으로 법이 생기지만
환과 같으니,
이루어지지 않고
그 모습 갖가지로 있으나
망상이어서 이루어지지 않는다.
그 모습은 곧 허물이니
모두 마음이 속박되어 생긴 것
망상으로 알지 못하여
연기(緣起) 위에서 분별한다.
이 모든 망상의 성품은
이것이 바로 연기(緣起)이니
망상으로 온갖 모습 있어
연기 위에서 분별한다.
세제(世諦)와 제일의(第一義)
제삼(第三)은 인(因)이 없이 생기는 것
망상으로 세제(世諦)를 말하니
끊으면 성인의 경계이다.
마치 수행하는 것과 같으니
하나에서 온갖 모습이 나타나지만
저 법에는 온갖 모습이 없는 것처럼
망상의 모습도 이와 같다.
마치 갖가지 눈병처럼
망상으로 여러 색(色)이 나타나고
눈병에는 색도 없고 색 아닌 것도 없는 것처럼
연기의 깨닫지 못함 역시 그렇다.
마치 정련한 진금(眞金)처럼
모든 더러움 멀리 없애니
허공에 가리는 구름 없듯이
망상의 맑아짐도 역시 그렇다.
망상에 성품이 없고
그의 연(緣)으로 일어나는 것도 없으니
건립(建立)과 비방(誹謗)이
모두 망상이기에 허물어진다.
망상은 성품이 없지만
연기한 성품은 있다고 하면
성품이 없으면서 성품이 있는 것이니
성품 있음과 성품 없음이 생기게 된다.
망상이란 인(因)에 의지하여
저 연기를 얻으니
모습과 이름이 항상 서로 따르며
모든 망상을 일으킨다.
끝내 성취 못하리니
곧 모든 망상을 건너라.
그런 후에 청정함을 알 것이니
이를 제일의(第一義)라 한다.
망상에 열두 가지 있고
연기법에 여섯 가지 있으나
스스로 깨달아 이염(爾炎)을 알면
그것에는 차별이 없다.
다섯 가지 법이 진실하고
자성(自性)에 세 가지 있으니
수행하여 이것을 분별하면
여여(如如)를 벗어나지 않으리라.
여러 가지 모습과 연기(緣起)
그들의 이름이 망상을 일으키니
저 모든 망상의 모습이
저 인연으로 생긴다.
깨달은 지혜로 잘 관찰하라.
연(緣)도 없고 망상도 없으니
이루고 나면 성품이 없는 것
어찌 망상으로 깨달으랴.
저 망상자성이
두 가지 자성을 건립하여
망상이 갖가지로 나타난 것을
청정한 성인의 경계라 한다.
망상은 그림을 그리는 것 같아
연기한 것을 망상으로 계착하니
망상과 다른 것이라 하면
곧 외도의 주장에 의지하는 것이다.
망상으로 생각을 말하니
견(見)으로 인하여 화합하여 생긴다.
두 가지 망상을 떠나면
그런다면 곧 성취하리라.
대혜보살마하살이 다시 부처님께 말씀드렸다.
“세존이시여,
저희를 위해 자각성지(自覺聖智)의 모습과 1승(乘)을 말씀해 주십시오.
자각성지의 모습과 1승을 말씀해 주시면,
저를 비롯한 나머지 보살들은 자각성지의 모습과 1승을 잘 알아,
다른 가르침을 말미암지 않고 불법(佛法)에 통달할 것입니다.”
부처님께서 대혜에게 말씀하셨다.
“자세히 들어라.
자세히 듣고 잘 생각하여라.
너희를 위해 말하겠다.”
대혜가 부처님께 말씀드렸다.
“예,
가르침을 받겠습니다.”
부처님께서 대혜에게 말씀하셨다.
“과거의 성인들께서 알고 있는 것을 서로서로 전수해 주었으니
‘망상에는 성품이 없다’는 것이다.
이를 보살마하살이 홀로 고요한 곳에 있으면서 스스로 깨달아 관찰하고,
다른 가르침을 연유하지 않고 망상의 견해를 벗어나면,
위로 승진(昇進)하여 여래지(如來地)로 들어갈 것이다.
이를 자각성지의 모습이라고 한다.
대혜야,
무엇이 1승의 모습인가?
1승도(乘道)의 깨달음을 얻는 것을 나는 1승이라고 말한다.
어떻게 1승도의 깨달음을 얻는가?
받아들이는 것과 받아들여지는 것이 망상인 줄을 알아 여실한 곳에서 망상을 내지 않는 것이니,
이를 1승의 깨달음[一乘覺]이라고 한다.
대혜야,
1승의 깨달음이란 다른 외도ㆍ성문ㆍ연각ㆍ범천왕(梵天王) 등이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오직 여래만이 얻을 수 있다.
이런 까닭에 1승이라고 한다.”
대혜가 부처님께 말씀드렸다.
“세존이시여,
왜 3승만 말씀하시고 1승은 말씀하지 않으셨습니까?”
부처님께서 대혜에게 말씀하셨다.
“스스로 반열반법(般涅槃法)에 들려고 하지 않았기 때문에 모든 성문과 연각에게는 1승을 말하지 않았다.
모든 성문과 연각은 여래가 조복시켜 적정한 방편을 주어 해탈을 얻은 것이지
자기의 힘으로 한 것이 아니다.
따라서 1승을 말하지 않은 것이다.
또 대혜야,
번뇌의 장애와 업의 습기가 끊어지지 않았기 때문에 모든 성문과 연각에겐 1승을 말하지 않았으며,
법무아(法無我)를 깨닫지 못하고 범부의 생사[分段死]를 벗어나지 못했기 때문에 3승을 설한 것이다.
대혜야,
저들 모두는 일어난 번뇌와 허물과 습기를 끊고 나아가서 법무아를 깨달을 것이다.
그들 모두는 일어난 번뇌와 허물과 습기를 끊고는 삼매의 즐거움에 맛들이고 집착해
성품이 아닌 무루계(無漏界)를 깨달을 것이다.
깨달은 뒤에는 다시 출세간(出世間)의 가장 높은 무루계에 들어가 온갖 요인[衆具]을 만족할 것이며,
여래의 부사의하고 자재한 법신(法身)을 얻을 것이다.”
이때 세존께서 거듭 이 뜻을 펴시고자 게송으로 말씀하셨다.
제천승(諸天乘)과 범승(梵乘)
성문승(聲聞乘)과 연각승(緣覺乘)
제불여래승(諸佛如來乘)
나는 이 모든 승(乘)을 설했다.
나아가 마음이 움직이면
모든 승이 구경(究竟)이 아니니
그 마음이 다 없어지면
탈것도 없고 탈 사람도 없으리라.
내세울 수레가 없는 것을
나는 1승이라 하니
중생을 인도하려고
여러 승(乘)을 분별해 설한 것이다.
세 가지 해탈과
또 법무아(法無我)
번뇌와 지혜(智慧) 등을
해탈하면 멀리 벗어나리라.
마치 바다에 떠다니는 나무가
항상 파도 따라 뒹굴듯이
성문의 어리석음도 이와 같아서
모습이라는 바람[相風]에 끝없이 흔들린다.
저들은 일어난 번뇌를 없애고
습번뇌(習煩惱)와 어리석음 제거하고는
삼매의 즐거움에 맛들이고 집착해
무루계(無漏界)에 안주(安住)하리라.
구경(究竟)에 나아갈 곳도 없고
또한 물러나 돌아올 곳도 없으니
모든 삼매의 몸을 얻어
겁(劫)이 지나도록 깨어나지 않으리라.
마치 정신없이 취한 사람이
술기운이 가신 후 깨어나듯
저 법을 깨닫는 것 역시 그러하니
부처의 위없는 몸[無上身] 얻으리라.
○ [pt op t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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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두려움을 주는 무아.
생사현실에 살아 활동하는 자신이 있다고 여기면
집착을 일으켜 업을 행하고 생사고통에 묶인다.
그런데 이제 그런 자신이 없다고 제시하면,
지금껏 집착하던 것이 갑자기 소멸되어 없어진다고 여기고 두려워한다.
경전에서 그런 사정을 제시한다.
내가 없다고 하여 생사현실에서 늘거나 줄어드는 것이 없다.
단지 그 상황에서 없어지는 것은 잘못된 망상분별 뿐이다.
이것을 종전에 지갑과 벽돌의 비유로 설명했다.
어떤 이가 다른 이의 지갑이나 길거리의 벽돌을 자신과 자신의 것이라고 착각했다고 하자.
그 상황에서 올바른 판단을 통해 이제 그것이 자신이나 자신의 것이 아님을 이해했다고 하자.
그렇다고 해서 그 상황에 그 지갑이나 벽돌이 없어지는 것이 아니다.
단지 그 전까지 그것을 자신과 자신의 것이라고 여긴 망상분별만 제거된다.
다만 현실에서는 이 망상분별이 너무 견고해서 그것이 쉽게 없어지지 않는다.
자신이 눈을 뜨고 대하면 자신의 몸이 늘 파악된다.
자신이 움직이려고 하면 자신의 몸이 움직인다.
자신이 손을 뻗어 사과를 만지면 촉감이 느껴진다.
이런 현실 경험 때문에 평소 자신으로 여기고 대하는 부분이
자신이 아니라는 경전 내용을 쉽게 이해하지 못한다.
그래서 이 경우
그것이 자신이 아니라면 이런 현실 모습들이 왜 이처럼 나타나는가를
추가적으로 잘 이해해야 한다.
앞의 비유를 놓고 설명하면 이와 같다.
그 지갑이나 벽돌이 자신이 아니라고 하자.
왜 눈만 뜨면 그 지갑과 벽돌이 파악되는가.
또 자신이 움직이려고 하면 왜 그 지갑과 벽돌부분만 따라 같이 움직이는가.
또 왜 그 지갑과 벽돌 부분에 다른 물건이 닿으면 촉감 등을 느끼는가.
또 자신은 그에 바탕해 평소 생각도 하고 활동도 한다,.
그래서 이들 내용은 평소 자신으로 여기고 대한 그런 부분이 자신임이 분명하다는 심증을 갖게 한다.
그래서 이런 부분이 자신이 아니고 무아라면 이런 여러 내용에 대해 답을 해야 한다.
물론 부처님은 그것을 경전 여러곳에서 무아 무자성 공을 밝힌다.
그런데 현실에서 이 내용의 이해가 쉽지 않다.
앞에 말한 사정 때문에 거의 대부분 망집에 바탕해 생활해 나가게 된다.
그리고 3계의 생사고통은 바로 이에 바탕한다.
그래서 이 망집을 벗어나기가 결코 쉽지 않다.
이것을 잘 제거하면 성인의 지위에 이른다.
그런데 이 망집 제거과정에서 이제 거꾸로
아무 것도 전혀 없다는 극단적인 입장에 치우치기 쉽다.
경전에서 여래장을 제시하는 사정은
바로 이 문제를 시정하기 위해서임을 밝히고 있다.
이는 유무의 극단에 치우쳐 임하는 경우
심한 부작용이 발생하기 때문이다.
지갑과 벽돌이 자신이라는 망상을 제거하는 것도 중요하다.
그런데 망상을 제거한다고 해서
이제 생사현실에 아무 것도 전혀 없다고 이해하면 그것도 곤란하다.
공한 본 바탕 실재와 감각현실 관념분별의 관계를
잘 파악해서 이런 문제를 잘 제거해야 한다.
....
‘내가 없다[無我]’는 구절에 두려운 생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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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음악공양, 나무불, 나무법, 나무승 mus0fl--TELEPHONE - Au Coeur de La Nuit.lr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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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9_1004_144141_can_bw26.jpg ○ [pt op tr] 예술작품 사진 공양, 나무불, 나무법, 나무승 Salvador-Dali-madonna-1 ○ 2016_1008_150348_can.jpg ○ [pt op tr] 꽃 공양, 나무불, 나무법, 나무승 ○ [pt op tr] 아름다운 사진 공양, 나무불, 나무법, 나무승 Galway_City_Museum_Entrance With the image 'Google Earth & Map data: Google, DigitalGlobe' ▶▶▶ [참조링크11]www.google.nl ○ 음악공양, 나무불, 나무법, 나무승 mus0fl--Julien Clerc - Ivanovitch.lrc Julien Clerc - Ivanovitch ♥단상♥ 중생제도를 외치면서 게임에 몰두하는 인턴연구원 인턴연구원이 공부에 열중하는 모습을 거의 보지 못한다. 그래도 중생제도와 성불을 외치면서 게임을 한다. 중생제도와 성불을 외치면서 잠을 청하는 본인과 상태가 비슷하다. 신문을 보다 명상에 대한 내용이 나와서 링크를 걸어 보았다. 명상으로 치유하는 번아웃 >>> 2020_0813_2024 ~ https://psychiatricnews.net/news/articleView.html?idxno=18915 한 사이트에서 글을 적을 때마다 매번 퀴즈를 풀라고 해서 짜증이 유발되곤 한다. 그런데 오래 사용하다보니 치유방안을 알게 되었다. 해당 퀴즈를 만들어 제공한 사이트를 먼저 방문하고 나서 페이지를 작성할 때는 이런 증상이 나타나지 않는다. 이상한 일이다. 한편 사진을 많이 올리고 글을 적으려면 글이 적히지 않는다. 이런 경우 htm 코드 창에서 작업하면 작업이 쉽게 된다. 아마 메모리 용량 때문에 이런 현상이 나타난다고 본다. 평소 일이 잘 안 될 때도 사정이 마찬가지다. 표면 아래에서 작동하는 무언가에 무언가 문제가 있어서 그런 현상이 발생할 수 있다. 현재 표면에서 활동하는 의식에 너무 쓸데없는 내용이 가득차서 부담을 주기에 그럴 수 있다. 명상은 이런 것을 게임의 비밀 치트키처럼 해결해준다. 그리고 문제 현상을 비우는 효과를 준다. 그래서 최근에는 의식적으로 작업시 몇십초 단위로 눈을 감고 자꾸 쉬어주는 것을 병행하기로 했다. 아주 조금씩 쉬어주면서 자신이 지금 무엇을 하는가를 한번 되새겨본다. 그러면서 작업을 한다. 눈의 피로도 덜고, 마음이 피로도 덜 수 있다. 컴퓨터로 작업하다보면 컴퓨터가 일을 도와주는 것 같다. 그러나 컴퓨터가 버튼을 누르라고 하고, 커서를 움직이라고 하면서 쉼없이 일을 시킨다. 그것을 바라보느라 눈도 피곤하다. 그래서 본인이 눈을 감고 뜨고 하면서 자꾸 브레이크를 걸어주게 된다. 그러면서 쉬고 또 작업하면 조금 낫다. ○ 음악공양, 나무불, 나무법, 나무승 mus0fl--Marie Carmen - Deshabillez-Moi.lrc Marie Carmen - Deshabillez-Moi ♥ 잡담 ♥삶이 저물어 가는 시기 삶이 저물어간다. 요즘은 건강이 안 좋아졌음을 피부로 느끼게 된다. 그런데 하는 일이란 대장경을 보고 생각한 내용을 몇 자 적는 일 뿐이다. 최근에 핸드폰 기본료를 몇천원대 상품으로 옮겼다. 숙왕화님이 김밥과 샌드위치를 들고 와서 이것을 받아들고 이 사실을 숙왕화님에게 말했다. 본인이 초등생 같다고 한다. 숙왕화님이 가끔 과자나 맛있는 것을 가지고 오면 초등생처럼 반긴다는 것이다. 그리고 관심 두는 주제가 너무 유치하다고 한다. 생각해보니, 본인 상태가 언제부터인가 그렇게 되어 버렸다. sns에서 오래된 친구들과 대화를 나누면 과거 학창시절 부모님과 대화를 하는 느낌을 종종 받는다. 여러모로 불편해서 요즘은 sns 도 거의 들어가지 않는다. 그러다보니 외로움을 가끔 느끼게 된다. 연구작업은 지지부진하다. 과거 글을 보면 대부분 만연체다. 시간이 지나 읽어보면 글 쓴 본인도 이해하기 힘들다. 그래서 이것들을 다시 고쳐야 한다. 몇년째 작업 중인데 힘들다. 연구작업을 하다보면 인용이 필요할 때가 많다. 대장경자료만 살피면 그래도 그렇게 큰 문제가 없다. 그런데 다른 자료를 이용하려면 인용 절차가 복잡하다. 요즘은 자료가 전자파일로 되어 있는 경우가 많다. 이 경우 인용 참고에 사용하는 자료와 글 사이를 상호 연계시킬 필요가 많다. 즉 참고자료에도 일정 부분이 인용에 사용된 내용을 기록한다. 그리고 글에서도 해당 부분을 쉽게 인용할 수 있게 한다. 이런 목표로 방안을 찾고 있다. 그런데 prince 님이 마련한 방안을 다시 더듬어 살펴보니 복잡하다. 이것을 조금더 단순하게 할 필요가 있다. 요즘은 인용에 사용할 부분을 스캔하거나 스크린 샷 형태로 캡처하거나, 또는 카메라로 촬영해서 서지정보를 확보해두기도 한다. 스캐너도 과거와 달리 1 초에 1장씩 스캔할 정도로 성능이 좋아졌다. 그런데 자료가 많아질수록 숙제가 많아진다. 하나씩 읽고 공부할 분량이 많아지기 때문이다. 건강도 좋지 않은데 부담만 자꾸 늘어난다. ○ 음악공양, 나무불, 나무법, 나무승 mus0fl--Hervé Vilard "J'm'en balance.lrc Hervé Vilard "J'm'en balance ★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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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기2564-08-13_능가아발다라보경_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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