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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진리와실천
불기2564-12-19_아비담비바사론-K0951-001 본문
『아비담비바사론』
K0951
T1546
제1권
● 한글대장경 해당부분 열람I
● 한글대장경 해당부분 열람II
○ 통합대장경 사이트 안내
○ 해제[있는경우]
● TTS 음성듣기 안내
※ 이하 부분은 위 대장경 부분에 대해
참조자료를 붙여 자유롭게 연구하는 내용을 적는 공간입니다.
대장경 열람은 위 부분을 참조해주십시오.
『아비담비바사론』 ♣0951-001♧
제1권
♥아래 부분은 현재 작성 및 정리 중인 미완성 상태의 글입니다♥
○ 2020_0907_152718_nik_BW17 양산 통도사
○ 2019_1106_152259_nik_exc_s12 화순 계당산 쌍봉사
○ 2018_1022_125513_nik_ct24 공주 계룡면사무소 영규대사비
○ 2018_1022_134037_can_bw0_s12 공주 계룡산 갑사
○ 2018_1023_140023_can_CT33_s12 예산 덕숭산 수덕사
○ 2019_1106_105606_nik_Ar28 화순 영구산 운주사
○ 2020_0905_171354_can_bw5 오대산 적멸보궁
○ 2019_1104_120850_nik_AB7 구례 화엄사
○ 2018_1024_163824_can_CT27 부여 고란사
○ 2020_0911_122448_nik_CT33 제천 의림지 대도사
○ 2020_0910_133705_nik_ct8 속리산 법주사
○ 2020_0905_171945_can_BW28 오대산 적멸보궁
○ 2020_0909_143051_nik_ar47 무주 백련사
○ 2020_0906_112937_can_AB7 천축산 불영사
○ 2018_1022_132318_can_ar23 공주 계룡산 갑사
○ 2020_1114_161728_can_ar38 삼각산 도선사
○ 2019_1104_141957_nik_exc 구례 화엄사 연기암
○ 2020_0930_142553_nik_AB7 화성 용주사
○ 2020_0905_142901_can_ct3 오대산 상원사
○ 2020_1114_132648_nik_ct19 삼각산 도선사
○ 2019_1201_161621_can_BW25 원주 구룡사
불교기록문화유산 아카이브
毘婆沙序
K0951
아비담비바사론(阿毘曇毘婆沙論) 제1권
가전연자(迦旃延子造) 지음
오백나한(五百羅漢) 풀이
부타발마(浮陀跋摩)ㆍ도태(道泰) 등 한역
박진효 번역
무엇이 세제일법(世第一法)1)인가?
무엇 때문에 세제일법이라고 하는가?
이와 같은 장(章)과 그 장에 대한 의미를 이제 자세하게 풀이하겠다.
【문】 누가 이 아비담경(阿毘曇經)을 지었는가?
【답】 불ㆍ세존이시다.
왜냐하면 모든 법(法)의 성상(性相)은 매우 깊고 미묘하기에 오직 일체지(一切智)2)를 갖추신 분이어야만 끝까지 궁구할 수 있기 때문이다.
【문】 누가 질문하고 누가 대답하는가?
【답】 어떤 사람은 “존자 사리불이 질문하고 부처님께서 답하셨다”고 하고,
또 어떤 사람은 “5백 아라한이 질문하고 부처님께서 답하셨다”고 하며,
또 어떤 사람은 “모든 천인이 질문하고 부처님께서 답하셨다”라고 하였다.
또 어떤 사람은 “화인(化人)이 질문하고 부처님께서 답하셨다.
왜냐하면 제법의 성상(性相)은 마땅히 자세하게 설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질문하는 사람이 없으면 세존께서 환화(幻化)3)로 비구를 만들어 머리와 수염을 깎게 하고,
승가리(僧伽梨)4)를 입혀서 형상과 용모를 단정하게 하고는 그로 하여금 질문하게 하고 부처님께서 답하시는 것이니,
모든 경전을 설하게 된 인연의 의미를 묻는 것과 같은 것이다”라고 하였다.
【문】 만약 그렇다면 무엇 때문에 또 가전연자(迦旃延子, Katyāyanapuutra)5) 존자가 지었다고 하는가?
【답】 저 가전연자 존자는 항상 이 경을 수지 독송하기를 좋아하고 다른 사람을 위해 해설하여 널리 유포시켰으므로 명예와 칭찬을 그에게 돌려서 그가 지었다고 말한 것이다.
또 어떤 사람은,
바로 저 가전연자 존자가 이 경을 지었다고 말한다.
【문】 앞에서 말하기를 “제법의 성상(性相)은 매우 깊고 미묘한 것이어서 오직 일체지를 갖춘 분이어야만 끝까지 궁구할 수 있다”고 하였다.
존자 가전연자가 어떻게 이 경을 지을 수 있겠는가?
【답】 저 존자 가전연자도 또한 용맹스럽고 예리하고 깊은 지혜가 있어서 총상(總相)과 별상(別相)을 잘 안다.
또 경의 의미와 전후의 경계[前後際]를 잘 알아서 3장(藏)을 통달하였고,
3명(明)과 6통(通)을 얻고 8해탈(解脫)6)을 갖추어 삼계의 욕망을 떠나서 원력과 지혜[願智]를 얻었다.
그는 과거 5백 부처님이 계신 처소에서 수행하고 서원을 세우길 “원하옵건대,
미래의 세상에 석가모니 부처님의 법이 유고되어 없을 때에 아비담경(阿毘曇經)을 짓게 해주십시오”라고 하였다.
【문】 만약 그렇다면 부처님께서 설하신 아비담은 어떤 것인가?
【답】 세존께서 곳곳의 마을에 계실 때 중생을 교화하기 위하여 갖가지로 설법을 하시면 저 존자 가전연자가 갖가지 설법 가운데서 장문(章門)을 세우고 게송을 지었으며 품명(品名)을 정하고 건도(犍度)7)를 지었다.
가령 갖가지 서로 비슷한 점이 없는 의미를 설하면 잡건도(雜犍度)를 세우고,
번뇌의 모습[使相]을 설하면 사건도(使犍度)를 세우고,
지상(智相)을 설하면 지건도(智犍度)를 세우고,
업상(業相)을 설하면 업건도(業犍度)를 세우고,
4대(大)의 모습을 설하면 사대건도(四大犍度)를 세우고,
근상(根相)을 설하면 근건도(根犍度)를 세우고,
정상(定相)을 설하면 정건도(定犍度)를 세우고,
견상(見相)을 설하면 견건도(見犍度)를 세웠다.
이것은 세존께서 곳곳의 마을에서 중생을 교화하기 위하여 갖가지로 설법하신 것을 달마다라 존자가 부처님께서 멸도에 드신 후에 법구경에서 세존께 갖가지로 설한 말씀 중에서 무상(無常)의 의미를 말씀하신 것은 「무상품(無常品)」으로 장문(章門)을 세운 것이며,
나아가 범지(梵志)의 의미를 설하신 것은 「범지품(梵志品)」으로 장문을 세운 것과 같다.
이 경을 지은 가전연자 존자도 또한 이와 같다.
또 모든 부처님께서 세상에 출현하여 설하신 모든 삼장이 이것이니 이른바 수다라(修多羅)8)와 비니(毘尼)9)와 아비담(阿毘曇)이다.
【문】 수다라와 비니와 아비담에는 어떤 차별이 있는가?
【답】 어떤 사람은 “차별이 없다.
왜냐하면 동일한 부처님의 지혜 바다와 강물로부터 유출된 것이기 때문이며,
대자비심으로 설하셨기 때문이다”라고 하였다.
또 어떤 사람은 “차별이 있다.
어떠한 차별이 있는가?
이름[名]에서 차별이 있다.
이른바 이것은 수다라이고,
이것은 비니이고,
이것은 아비담이라고 하는 것이다.
또 마음[心]을 분별하여 수다라라 하고,
계(戒)를 분별하여 비니라 하고,
혜(慧)를 분별하여 아비담이라고 한다”라고 하였다.
【문】 만약 그렇다면 수다라 가운데서도 또한 계와 혜를 분별하고,
비니 가운데서도 또한 심과 혜를 분별하며,
아비담 가운데서도 또한 심과 계를 분별하는가?
이와 같은 삼장(三藏)에는 어떤 차별이 있는가?
【답】 많이 설한 것을 따라 분야로 나누기 때문에 차별이 있다.
수다라 가운데서는 심법(心法)을 많이 설하였고,
비니 가운데서는 계법(戒法)을 많이 설하였고,
아비담 가운데서는 혜법(慧法)을 많이 설하였다.
또 수다라 가운데서 마음을 분별하여 설한 경우에는 수다라라고 이름하였고,
계를 분별하여 설하면 비니라고 이름하였고,
혜를 분별하여 설하면 아비담이라고 이름하였다.
아비담 가운데서 계를 분별하여 설한 경우에는 비니라고 이름하였고,
마음을 분별하여 설하면 수다라라고 하였고,
혜를 분별하여 설하면 아비담이라고 하였으며,
비니 가운데서 혜를 분별하여 설한 경우에는 아비담이라고 이름하였고,
계를 분별하여 설하면 비니라 하고,
마음을 분별하여 설하면 수다라라고 이름하였다.
이와 같이 삼장은 이런 이름의 차별이 있다.
또 수다라 가운데서는 무엇 때문에 세존께서 이와 같은 말씀을 하셨고,
다음에 다시 이와 같은 말씀을 하셨고,
다음에 다시 이와 같은 말씀을 하셨는가 하는 차례를 구해야만 한다가령 부처님을 믿으라고 한 다음에 마땅히 법을 믿으라고 설한 것과 같은데,
이것이 차제를 구하는 의미이다.
비니 가운데서는 이와 같은 계를 설한 것은 어떤 일을 연유해서 제정했는가 하는 인연을 구해야만 한다.
아비담 가운데서는 상(相)으로 구해야만 하며 차제로 구해서는 안 된다.
또 수다라는 힘을 의지하기 때문에 설하였고,
비니는 대자비를 의지하기 때문에 설하였고,
아비담은 두려움 없음[無畏]을 의지하기 때문에 설한 것이다.
또 갖가지 빠짐없이 설한 것을 수다라라고 하고,
계율을 자세하게 설한 것을 비니라고 하며,
총상(總相)과 별상(別相)을 설한 것을 아비담이라고 한다.
또 아직 선근을 심지 않은 자로 하여금 선근을 심게 하는 것을 수다라라고 하고,
이미 심은 선근을 성숙시키고자 하는 것을 비니라고 하며,
선근이 이미 성숙하여 바른 해탈을 얻게 하는 것을 아비담이라고 한다.
또 처음으로 법(法)에 들어가게 하는 것을 수다라라고 하고,
이미 법 가운데 들어가서 계를 수지하게 하는 것을 비니라고 하며,
이미 계를 수지한 사람이 바르게 이해하게 하는 것을 아비담이라고 한다.
수다라와 비니와 아비담은 이렇게 이름의 차별이 있다.
【문】 저 존자는 어떤 인연 때문에 이 경을 지었는가?
【답】 다른 이를 이롭게 하기 위해서이다.
만약 이 경을 받아 지녀서 독송하고,
이치를 통달하여 예리하게 설법하고 올바르게 억념하면,
한량없는 번뇌와 모든 악행이 현전하지 않으며,
이를 통해서 부지런히 수행하면 법상(法相)에 깨달아 들어갈 수 있다.
비유하면 어떤 사람이 다른 사람을 이롭게 하기 위해서 깜깜한 가운데 큰 등불을 밝혀서 눈 있는 사람들로 하여금 갖가지의 빛[色]을 보게 하는 것과 같은데,
저 존자도 또한 이와 같아서 다른 이를 이롭게 하고자 이 경을 지었다.
부처님께서도 또한 이와 같아서 다른 이를 이롭게 하고자 12부경(部經)10)을 설하셨다.
첫째는 수다라(修多羅)11)이고,
둘째는 기야(祈夜)12)이고,
셋째는 바가라나(婆伽羅那)13)이고,
넷째는 가타(伽他)14)이고,
다섯째는 우다나(優陀那)15)이고,
여섯째는 니다나(尼陀那)16)이고,
일곱째는 아파다나(阿波陀那)17)이고,
여덟째는 이제목다가(伊帝目多伽)18)이고,
아홉째는 자타가(闍陀伽)19)이고,
열째는 비불략(毘佛略)20)이고,
열한째는 아부타달마(阿浮陀達摩)21)이고,
열두째는 우파제사(優婆提舍)22)이다.
무엇 때문에 설하였는가?
만약 어떤 중생이 비록 내인(內因)이 있더라도 외연(外緣)이 없으면 끝내 뛰어난 수행을 하여 나아갈 수 없지만,
외연을 만나면 수행해서 나아갈 수 있기 때문이다.
비유하면 발두마(鉢頭摩:)ㆍ분타리(分陀利)ㆍ구물두(拘物頭)ㆍ우발라(優鉢羅)꽃 등의 연꽃이 연못에 있으면서 햇빛이 비추어지지 않으면 꽃이 피지도 않고 번성하지도 않고 향기도 나지 않지만,
햇빛이 비치면 꽃이 활짝 피어서 향기가 나는 것과 같으며,
암실 가운데 갖가지 물건이 있어도 등불을 비추지 않으면 끝내 볼 수 없지만 등불을 비추면 볼 수 있는 것과 같다.
중생도 또한 그러하여 내인이 있더라도 외연이 없으면 끝내 뛰어난 수행을 하여 나아갈 수 없지만,
외연을 만나면 뛰어난 수행을 닦아서 나아갈 수 있다.
이러한 이유 때문에 부처님께서 게송으로 말씀하셨다.
비유컨대 암실 가운데
갖가지 물건이 있어도
등불을 비추지 않으면
눈이 있어도 볼 수 없는 것처럼
어떤 사람이 지혜가 있어도
다른 이의 법문을 듣지 않으면
이 사람은 끝끝내
선악의 의미를 분별할 수 없다네.
비유하면 눈 있는 사람이
등불이 있어 모든 빛깔을 보는 것처럼
지혜 있는 사람은 다문(多聞)에 의지하여
선악의 의미를 분별하네.
다문하면 법을 알 수 있고
악을 멀리할 수 있으며
무의(無義)를 멀리 떠나서
열반을 얻을 수 있다네.
불경(佛經)에서는 또한 설하기를 “두 가지의 인과 연이 있어서 정견(正見)이 발현하는 것이니,
하나는 다른 사람으로부터 법문을 듣는 것이고,
둘은 안으로 정사유(正思惟)하는 것이다”고 하였다.
또 설하기를 “사람에게 매우 희유한 네 가지 법이 있으니,
첫째는 선지식을 친근히 하는 것이고,
둘째는 다른 사람으로부터 법문을 듣는 것이고,
셋째는 안으로 정사유하는 것이고,
넷째는 법에 걸맞게 수행하는 것이다”라고 하였으며,
다시 설하기를 “만약 나의 제가가 일심으로 법문을 들으면 5개(蓋)의 번뇌를 끊어서 7각분법(覺分法)을 빠짐없이 수행할 수 있다”고 하였다.
불ㆍ세존께서 다른 이로 하여금 요익케 하고자 12부경을 설하신 것처럼 저 존자도 또한 이와 같아서 이 경을 지은 것이다.
또 무명의 어둠을 타파하기 위해서 지었다.
마치 등불이 어둠을 타파하는 작용이 있는 것처럼 아비담도 또한 이와 같아서 무명의 어둠을 타파하고 지혜의 광명을 준다.
또한 무아(無我)의 상(像)을 분명히 하기 위해서 이 경을 지었다.
비유하면 밝은 거울이 모든 색상을 비추어 주는 것처럼 어떤 사람이 아비담의 지혜로 총상과 별상을 잘 분별하면,
무아와 무인(無人)의 상이 자연히 환하게 나타난다.
또 생사의 큰 강을 건네주기 위해 지었다.
비유하면 백천 나유타 중생이 견고한 배를 의지하면 두려움이 없어 차안으로부터 피안으로 건너갈 수 있는 것처럼 백천 나유타 제불보살과 모든 권속들도 또한 이와 같아서 아비담의 배를 의지하면 두려움이 없어서 차안(此岸)으로부터 피안(彼岸)으로 이를 수 있다.
또 모든 수다라경에 등불이 되어주기 위해 지었다.
마치 사람이 횃불을 들고 있으면 모든 어둠 가운데서도 끝내 두려움이 없는 것처럼 수행자도 이와 같아서 아비담의 횃불을 들고 있으면 모든 수다라의 의미에 대해 두려움이 없다.
또 선법(善法)과 불선법(不善法)과 무기법(無記法)을 관찰하기 위해 지었다.
마치 훌륭한 보석 감정사가 금강 등의 보석을 잘 분별하는 것처럼 지혜로운 사람은 아비담의 지혜로 선법과 불선법과 무기법을 분별한다.
또 아비담인(阿毘曇人)23)은 수미산과 같아서 기울거나 요동하지 않음을 나타내기 위해 지었다.
마치 산 중의 왕인 수미산(須彌山)24)이 금륜 위에 안주하니 사방의 거센 바람이 기울게 하거나 요동시킬 수 없는 것처럼,
지혜로운 사람도 이와 같아서 아비담의 지혜로 수미산과 같은 계(戒)를 금륜 위에 안치하니,
4도(倒)의 삿된 바람이 기울게 하거나 요동시킬 수 없다.
또 세 가지 인연 때문에 가전연자 존자가 이 경을 지었다.
첫째는 지혜를 증익시켜주기 위해서이고,
둘째는 각의(覺意)를 열어주기 위해서이고,
셋째는 아상(我相)과 인상(人相)을 끊어주기 위해서이다.
지혜를 증익하려면 내외의 법을 설하는 모든 경론 중에서 아비담보다 나은 것은 없다.
‘각의를 열어준다[開覺意]’고 했는데,
이른바 중생이 항상 무명의 잠에 빠져 깨달음이 없을 때에는 어떤 것이 모든 것에 변행하는 번뇌[一切遍使]이며,
어떤 것이 변행하지 않는 번뇌[不遍使]이며,
어떤 것이 자계를 반연하여 변행하는 번뇌[自界緣遍使]이고 어떤 것이 타계를 반연하여 변행하는 번뇌[他界緣遍使]이며,
어떤 것이 유루연(有漏緣)이고 어떤 것이 무루연(無漏緣)이며,
어떤 것이 유위연(有爲緣)이고 어떤 것이 무위연(無爲緣)이며,
어떤 것이 섭수하는 것이고 어떤 것이 상응(相應)하는 것이며,
어떤 것이 인(因)이고 어떤 것이 연(緣)이며,
누가 성취하고 누가 성취하지 못하는가를 알지 못한다.
중생들로 하여금 이와 같은 등등의 원근법을 알 수 있게 하는 것은 아비담의 힘이다.
‘아상과 인상을 끊는다[斷我人]’고 함은,
이른바 저 존자는 아비담경을 지으면서 일찍이 아(我)와 인(人)을 설한 적이 없고 모든 처소에서 항상 무아(無我)와 무인(無人)을 설하였다.
이와 같은 여러 인연이 있기 때문에 저 존자가 아비담경을 지은 것이다.
【문】 아비담의 체(體)는 어떤 것인가?
【답】 무루혜근(無漏慧根) 자체이니,
이 자체가 1계(界)와 1입(入)과 1음(陰)을 포섭한다.
1계는 법계(法界)이고,
1입은 법입(法入)이고,
1음은 행음(行陰)이다.
만약 취(取)와 상응(相應)을 공유하면 삼계(三界)와 2입과 5음을 포섭한다.
삼계는 의계(意界)ㆍ식계(識界)ㆍ법계(法界)이고,
2입은 의입(意入)ㆍ법입(法入)이고,
5음은 색(色)ㆍ수(受)ㆍ상(想)ㆍ행(行)ㆍ식(識)이다.
또 수다라에서 설하기를 “이 제석(帝釋)은 오랜 세월 동안[長夜]에 그 마음이 질박하고 곧아서 아첨하거나 굽히지 않고 모든 의문점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요란을 당하지 않고,
‘내가 깊고 깊은 아비담의 지혜로 너의 질문에 거침없이 대답하리라”고 하였다.
여기에서 ‘깊다[甚深]’고 함은 무슨 의미인가 하면,
앞에서 말한 무루혜근(無漏慧根)이다.
또 경에서 설하기를 “독자(犢子, Vatsagotra)라는 성을 가진 범지가 있었는데 그 성품이 질박하고 곧아서 아첨하거나 굽힘이 없고 모든 문제를 알고 있었기 때문에 남에게 요란을 당하지 않고,
내가 깊고 깊은 아비담의 지혜로 너의 질문에 거침없이 대답해 주리라”고 하였다.
여기에서 ‘깊고 깊다’고 함은 앞에서 말한 무루혜근을 말한다.
또 범마유(梵摩瑜, Brahmāyus) 바라문과 수발(須跋, Subhadra) 범지의 경우도 앞에서 말한 것과 같다.
부처님께서 선니(先尼, Śreṇika)25) 범지에게 말씀하시기를 “나의 법은 깊고도 깊어서 요해하기도 어렵고 알기도 어렵고 보기도 어려운 것이니,
사량분별로 이를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오직 미묘한 결정지(決定智)가 있어야만 알 수 있는 것이어서 너의 미천한 지혜로 도달할 바가 아니다.
왜냐하면 공(空)이 바로 무아(無我)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너는 아(我)가 있다고 헤아리고,
오랜 세월 동안 항상 이견(異見)과 이욕(異欲)과 이심(異心)을 가지고 있었다.
이러한 이유 때문에 너의 미천한 지혜로는 도달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니라”라고 하셨다.
여기에서 무엇이 깊고 깊은 의미인가 하면,
이른바 공삼매(空三昧)26)이다.
또 설하시기를27) “어리석은 이가 안목도 없으면서 상좌(上座)인 지혜로운 비구와 깊은 의미를 의론하고 있구나”라고 하셨다.
여기에서 무엇이 깊고 깊은 의미인가 하면,
이른바 퇴전하는 법[退法]이다.
부처님께서 아난에게 말씀하시기를 “이 12인연법은 깊고 깊어서 요해하기도 어렵고 알기도 어렵고 알 수 없는 것이니,
사량분별로 미칠 바가 아니라서 오직 결정지(決定智)가 있어야만 알 수 있는 것이니,
너의 미천한 지혜로는 미칠 바가 아니니라”고 하셨다.
여기에서 무엇이 깊고 깊은 의미인가 하면,
이른바 인연(因緣)이다.
또 설하시기를 “이것은 깊으니 이른바 연기법이다.
이 법은 욕망을 떠난 적멸의 열반이니라”고 하셨다.
여기에서 무엇이 깊고 깊은 의미인가 하면,
이른바 모든 인연이 적정하게 소멸된 자성[因緣寂靜滅性]이다.
또 설하시기를 “모든 부처님 법은 깊고 깊기 때문에 보기 어렵고,
보기가 어렵기 때문에 깊고도 깊느니라”고 하셨다.
여기에서 무엇이 깊고 깊은 의미인가 하면,
이른바 “모든 법의 체성이 깊고도 깊다”라고 하신 것이 여기에 해당한다.
【문】 아비담의 체(體)는 무엇인가?
【답】 무루혜근이다.
무루혜근의 힘으로 말미암아 태어나는 곳에서 지혜를 얻어 십이부경을 수지 독송하고 예리하게 통달할 수 있기 때문에 또한 아비담이라고 하는 것이다.
또 무루혜근의 힘으로 말미암아 문혜(聞慧)로 총상과 별상을 알 수 있고,
총상과 별상을 건립하고,
또 문혜로 자성의 어리석음[自性愚]과 소연(所緣)인 외부 대상에 대한 어리석음[緣中愚]을 단절시키고 불법(佛法)에 오류를 범하지 않을 수 있다.
또 무루혜근의 힘으로 말미암아 사혜(思慧)로 부정관(不淨觀)과 안반수식관(安般數息觀)과 4념처관(念處觀) 등을 관할 수 있기 때문에 또한 아비담이라고 한다.
또 무루혜근의 힘으로 말미암아 수혜(修慧)로 난(煖)ㆍ정(頂)ㆍ인(忍)ㆍ세제일법(世第一法)을 닦을 수 있기 때문에 또한 아비담이라고 한다.
이와 같은 등등의 혜가 있어서 무루혜근으로써 부정(不淨)을 전환시켜 밝고 청정함[明淨]을 얻을 수 있기 때문에 아비담이라고 하는 것이다.
【문】 만약 무루혜근이 아비담의 체라면 무엇 때문에 다시 이 경을 아비담이라고 하는가?
【답】 아비담을 갖추었기 때문에 또한 아비담이라고 하는 것이니,
가령 경 가운데 여러 곳에서 갖가지로 밑바탕이 되는 것을 인(因)으로 삼아 갖가지의 이름을 건립하는 것과 같다.
누(漏)의 밑바탕이 있기 때문에 누를 설하였으니,
가령 7루(漏)를 설하면서 이것은 번뇌이고,
이것은 불꽃처럼 타오르고,
이것은 고뇌라고 한 것이 여기에 해당된다.
실제로 누(漏)는 세 가지가 있으니,
이른바 욕루(欲漏)와 유루(有漏)와 무명루(無明漏)이다.
또한 구(垢)의 밑바탕이 있기 때문에 구를 설한 것이니,
마치 게송에서 말하는 것과 같다.
여인은 범행(梵行)28)에 티끌이 되나니
여인은 중생을 속박한다네.
고행을 통해 청정한 행을 하는 것이지
물로 청정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오.
여인은 실제 번뇌는 아니다.
실제로 구(垢)에는 세 가지가 있으니,
이른바 탐ㆍ진ㆍ치의 번뇌이다.
또한 즐거움[樂]의 밑바탕이 되기 때문에 낙을 설한 것이니,
마치 게송에서 말하는 것과 같다.
음식을 먹을 때 즐겁고
옷을 입을 때도 즐겁다네.
산의 굴에 살면서 경행하는 것
이것도 또한 즐거움이라오.
음식 등은 실제의 즐거움이 아니다.
실제의 즐거움은 낙수(樂受)이다.
사(使)29)의 밑바탕이 되기 때문에 사를 설한 것이니,
가령 경에서 “이 비구가 색(色)에 얽매여서 색에 계박된다”고 설하신 것과 같다.
색이 실제의 사는 아니다.
실제의 사에는 일곱 가지가 있다.
미(味)의 바탕이 되기 때문에 미를 설한 것이니,
경에서 “비구들이여,
눈은 색을 미로 여겨서 탐착하나니 색은 마군의 갈고리이다”라고 설한 것과 같다.
색이 실제의 미(味)는 아니며,
실제의 미는 애욕[愛]이다.
욕(欲)의 밑바탕이 되기 때문에 욕을 설한 것이니,
경에서 “5욕(欲)은 아름다운 것을 좋아하며 능히 애착하는 마음[愛心]을 증장시켜 거기에 물들고 집착하게 한다”고 설한 것과 같다.
색 등이 실제의 욕은 아니며,
실제의 욕은 애락(愛樂)이다.
수행에서 물러나게 하는 밑바탕이 되기 때문에 물러남[退]을 설한 것이니,
경에서 “때때로 해탈한 아라한도 다섯 가지 인연 때문에 물러나는 경우가 있으니,
첫째는 사업을 경영해서 일하는 것이고,
둘째는 경(經)을 지나치게 읊는 것이고,30) 셋째는 소송을 걸어 다투는 것이고,
넷째는 멀리 다니는 것[遠行]이고,
다섯째는 오랫동안 병에 시달리는 것[長病]이다”라고 설한 것과 같다.
곧,
사업을 경영하는 것 등이 실제의 퇴전은 아닌 것이다.
실제의 물러남은 불선(不善)과 은몰무기법(隱沒無記法)이다.
업을 짓는 바탕이 되기 때문에 업을 설한 것이니,
경에서 “비구가 세 가지 의미의 불선업을 지어 고(苦)의 과보를 낳게 한다.
이른바 탐욕[貪]과 성냄[瞋]과 사견(邪見)이다”라고 설한 것과 같다.
탐욕ㆍ성냄ㆍ사견의 체가 실제의 업은 아니고,
실제의 업에는 세 가지가 있으니 신업ㆍ구업ㆍ의업을 말한다.
과보의 밑바탕이 되기 때문에 보(報)를 설한 것이니,
존자 아니로두(阿泥盧頭,
Aniruddha)31)가 “나는 한 그릇의 음식을 보시한 과보로 일곱 생 동안 삼십삼천(三十三天)에 태어났고,
일곱 생 동안 바라나국(波羅奈國,
Bārāṇasi)에 태어났다”고 말한 것과 같다.
그러나 음식이 실제로 과보를 낳게 하는 것은 아니고,
실제로 과보를 낳게 하는 것은 불선법과 선법과 유루법이다.
이와 같이 경전 곳곳에서 갖가지의 밑바탕이 되는 것을 인으로 삼아 갖가지의 이름을 설한 것처럼,
이 아비담경도 또한 이와 같아서 아비담의 밑바탕이 되기 때문에 아비담을 설하는 것이다.
【문】 어떤 의미가 있기 때문에 아비담이라고 하는가?
【답】 화수밀(和須密, Vasumitra) 존자가 말하기를 “12부경을 결정해서 분별할 수 있기 때문에 아비담이라 한다”고 하였고,
“12인연을 깨달을 수 있기 때문에 아비담이라 한다”고 하였으며,
“4성제에서 차제를 얻어 올바르게 결정할 수 있기 때문에 아비담이라 한다”고 하였다.
또한 “8성도법(聖道法)을 닦아 익혀서 해설할 수 있기 때문에 아비담이라 한다”라고 하였고,
“열반을 증득할 수 있기 때문에 아비담이라 한다”고 하였다.
바단타(婆檀陀, Bhadanta)32) 존자는 말하기를
“번뇌와 출요(出要),
얽매임[繫縛]과 해탈,
생사와 열반 등의 법을
명신(明身)ㆍ미신(味身)ㆍ구신(句身)의 차례로 가려 뽑아서 분별하고 해설할 수 있기 때문에 아비담이라 한다”고 하였다.
구사(瞿沙, Ghoṣa) 존자는 말하기를
“해탈을 구하는 사람에게 모든 것을 베풀어 시행하여 아직 분별하지 못한 것을 모두 분별해 주는 것이니,
이른바 이것이 고(苦)이고 이것이 고의 원인[苦因]이며,
이것이 도(道)이고 이것이 도과(道果)이며,
이것이 방편도(方便道)이고,
이것이 무애도(無礙道)이며,
이것이 해탈도(解脫道)이고,
이것이 승진도(勝進道)이며,
이것이 향과도(向果道)이고 이것이 득과(得果)라고 설해주기 때문에 아비담이라 한다”고 하였다.
바사(波奢, Pārśva) 존자는 말하기를
“이 지혜는 구경의 지혜[究竟智]이고,
제일의 지혜[第一智]이며 오류가 없는 지혜[不謬智]이기 때문에 아비담이라 한다”고 하였다.
아비담인(阿毘曇人)은 말하기를 “갖가지의 모든 법을 잘 선택해서 깨닫고 증득해서 알 수 있기 때문에 아비담이라 한다”라고 하였고,
또 “법의 성품[法性]은 깊고도 깊은데 그 원인을 다할 수 있기 때문에 아비담이라 한다”고 하였다.
또한 “법안(法眼)을 청정하게 할 수 있기 때문에 아비담이라 한다”고 하였고,
또 “그윽하고 은밀하여 깊고 깊은 지혜를 설하여 드러나게 하므로 아비담이라 한다”고 하였고,
또 “만약 어떤 사람이 아비담의 지혜로 총상과 별상을 분별하면 모두가 법에 걸맞게 설법해서 과오를 범하는 사람이 없도록 할 수 있기 때문에 아비담이라 한다”고 하였다.
미사색부(彌沙塞部, Mahīśāsaka)에서는 설하기를
“등불처럼 비출 수 있기 때문에 아비담이라 한다”고 하였는데,
이는 경에서 “모든 빛 중에서 지혜의 빛이 최상이다”라고 한 것과 같다.
담마굴부(曇摩掘部, Dharmagupta)에서는 설하기를
“이 법은 증상(增上)시켜 주기 때문에 아비담이라 한다”고 하였는데,
이는 경에서 “모든 법 가운데 지혜가 최상이다”라고 한 것과 같다.
비유자(譬喩者)33)는 설하기를
“갖가지의 모든 법 가운데서 열반법이 최상이고 이 법이 그 다음이기 때문에 아비담이라 한다”고 하였다.
성론자(聲論者)34)는 다음과 같이 설하였다.
“아비(阿毘)는 ‘제거해서 버린다[除棄]’는 말이고 또 ‘뽑아서 가려낸다[選擇]’는 말이다.
제거해서 버리는 것은 결(結)ㆍ박(縛)ㆍ사(使)ㆍ전(纏)ㆍ번뇌(煩惱)이고,
뽑아서 가려내는 것은 음(陰)ㆍ입(入)ㆍ계(界)ㆍ연기(緣起)ㆍ도품(道品) 등의 모든 법이다.
또 아비는 ‘증진시켜서 향상하게 한다[增上]’는 말이다.
가령 ‘만(慢)을 증상시키는 것을 증상만(增上慢)이라 한다’고 설하고,
‘향상시키는 것[上]을 증상이라 한다’35)고 설하고,
‘향상시켜서 뛰어나게 하는 것[上逸]을 증상일(增上逸)이라 한다’고 설한 것과 같이 이 경은 증진시켜서 향상하게 하기 때문에 아비담이라고 한다.
또 아비는 ‘눈 앞에 드러난다[現前]’는 말이니,
모든 선법과 도품 등의 법을 눈앞에 환하게 나타낼 수 있기 때문에 아비담이라 한다.
또 아비는 ‘공경한다’는 말이니,36) 이 법은 존중하고 공경할 만하기 때문에 아비담이라 한다.”
그리고 이 경을 ‘발지(發智)37)’라고 부른다.
【문】 무엇 때문에 발지라고 하는가?
【답】 모든 구경의 지혜가 모두 이 경에서 출발하여 그 터로 삼기 때문에 발지라고 하였다.
또 이 경을 ‘지혜의 안족처(安足處)’라고 하는데,
모든 구경의 지혜가 이 경을 근본으로 삼기 때문에 안지족처라고 한다.
【문】 이 경에는 어떤 이익이 있는가?
【답】 해탈과 무아를 수순하여 아인(我人)을 헤아리는 망계(妄計)를 끊고 무아(無我)를 환하게 나타내며,
중생의 각의(覺意)를 개발하고 지혜를 출생시켜 어리석음을 제거하고 의심의 그물[疑網]을 끊어 버리며,
결정지(決定智)를 얻어서 불꽃처럼 타오르는 번뇌를 등지고 출요(出要)를 향하게 한다.
지혜가 상속되게 하여 적정함을 즐기고 생사의 윤회를 멈추게 하며,
공법(空法)을 수순하여 열반의 언덕에 이르러 모든 외도의 이견(異見)을 끊고 불법(佛法) 가운데서 모든 즐거워하는 마음이 일어나게 한다.
이 경에는 이와 같은 이익이 있기 때문에 아비담이라고 한 것이다.
1. 잡건도(雜犍度)
1) 세제일법품(世第一法品)
① 무엇이 세제일법인가?
【문】 무엇 때문에 이 경에서는 세제일법을 먼저 설하였는가?
이것은 차례를 따라서 설한 것인가,
차례를 거슬러서 설한 것인가?
▸ 만약 차례를 따라서 설한다면 반드시
부정관(不淨觀)을 먼저 설하고,
다음에 안반(安般)을 설하고,
다음에 염처(念處)를 설하고,
다음에 7처선(處善)과
세 가지의 관의(觀義)와
난(煖)ㆍ정(頂)ㆍ인(忍)의 법을 설한 후에 세제일법을 설해야 한다.
만약 차례를 거슬러서 설한다면
반드시 아라한과를 먼저 설하고,
다음에 아나함과를 설하고,
다음에 사다함과를 설하고,
다음에 수다원과를 설하고,
다음에 견도(見道)를 설한 후에
세제일법을 설해야 한다.◂
부정관(不淨觀)을 먼저 설하고,
다음에 안반(安般)을 설하고,
다음에 염처(念處)를 설하고,
다음에 7처선(處善)과
세 가지의 관의(觀義)와
난(煖)ㆍ정(頂)ㆍ인(忍)의 법을 설한 후에 세제일법을 설해야 한다.
만약 차례를 거슬러서 설한다면
반드시 아라한과를 먼저 설하고,
다음에 아나함과를 설하고,
다음에 사다함과를 설하고,
다음에 수다원과를 설하고,
다음에 견도(見道)를 설한 후에
세제일법을 설해야 한다.◂
【문】 처음으로 법에 들게 하기 위해서 설한 것인가?
선근을 부분적으로 통달케 하기 위해서 설한 것인가?
가장 뛰어난 공덕을 성취하게 하기 위해서 설한 것인가?
처음으로 법에 들게 하기 위해서 설한 것이라면,
부정관과 안반수식관을 설해야만 하고,
선근을 부분적으로 통달하게 하기 위해서 설한 것이라면,
마땅히 먼저 난법(煖法)을 설해야 하는 것이니,
난법이 4선근(善根) 중에서 최초에 있기 때문이다.
이것은 가령 구사(瞿沙) 존자가 논(論)에 있어서 난법을 먼저 설한 것과 같다.
만약 가장 뛰어난 공덕을 성취하게 하기 위해서 설한 것이라면 마땅히 아라한과를 설해야 한다.
이와 같은 등등의 일을 부처님 재세시(在世時)에 대가전연(大迦旃延)38) 존자도 정관(正觀)의 지혜로 한량없는 공덕을 성취하여 걸림없이 정진한 결과 아비담의 바다에 들어갔다.
그 마음은 증감(增減)이 없고 각의(覺意)는 가이없어서 말로는 이기기 어려웠으며 모든 의론(義論)으로 감당할 수 없었다.
제2의 가전연자 존자39)도 또한 이와 같은 지혜로 공덕을 성취하였다.
【문】 무엇 때문에 이 경을 지으면서 세제일법(世第一法)을 먼저 설하였는가?
【답】 모든 논사들이 세제일법을 설한 것이 여러 가지로 같지 않은 점이 있다.
어떤 논사는 “차례를 따라서 설한 것도 아니고 차례를 거슬러서 설한 것도 아니니,
다만 저 경을 지은 이의 뜻에 따라 지었을 뿐이다.
그의 뜻에 따라 지었기 때문에 법상(法相)에 위배되지 않는다.
이 때문에 세제일법을 먼저 설한 것이다”라고 하였다.
어떤 논사는
“아비담은 마땅히 법상으로 구해야 하고 차례를 따라 구해서는 안 된다.
수다라경은 차례를 따라서 구해야 하고,
비니는 그 설하게 된 인연을 따라 구해야 한다.
만약 아비담경을 차례를 따라 구하면 문장이 복잡하고 어지럽게 된다.
이 때문에 그 차례를 따라 구해서는 안 된다”라고 하였다.
어떤 논사는 말하기를
“세존의 계경 가운데서 만약 어떤 사람이 제행의 성상(性相)을 바르게 관(觀)할 수 없으면서
세제일법을 일으킬 수 있다고 함은 것은 옳은 것이 아니며,
제행의 성상을 바르게 관할 수 있으면서 세제일법을 일으킬 수 있다고 하면 이것은 옳은 것이니,
세존께서 경 가운데서 세제일법을 먼저 설한 것과 같다.
저 아비담경을 지은 사람은 경으로 해서 논은 지었기 때문에 또한 마땅히 세제일법을 먼저 설해야 한다”고 하였다.
【문】 이 경을 지은 사람은 차치하고,
세존께서는 무엇 때문에 세제일법을 먼저 설하였는가?
【답】 세존께서는 중생을 교화하기 위해서 차례로 설하셨다.
모든 교화를 받는 중생들이
이미 하인(下忍)과 중인(中忍)의 법을 얻고
아직 상인(上忍)40)의 법과 세제일법을 얻지 못했을 때,
이를 얻게 하려고 세존께서 제행의 성상(性相)을 바르게 관하고 사유하라고 설하신 것이다.
이 상인(上忍)을 얻은 다음에 세제일법을 얻기 때문에 먼저 설한 것임을 알아야 한다.
어떤 논사는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모든 비방을 중지시키기 위해서이다.
곧 세제일법에 대하여는 많은 비방이 있으니,
이른바 이름에 대해서 비방을 받는 명수비방(名受誹謗)과,
자체에 대해서 비방을 받는 체수비방(體受誹謗)과,
계에 대해서 비방을 받는 계수비방(界受誹謗)과,
현전함에 대해서 비방을 받는 현전수비방(現前受誹謗)과,
물러남에 대해서 비방을 받는 퇴수비방(退受誹謗)이다.
명수비방이란,
어떤 이가 ‘이것은 성지법(性地法)이지 세제일법이 아니다’라고 하는 것이며,
체수비방이란,
어떤 이가 ‘이것은 5근(根)의 자성[體]이다’라고 말하는 것이다.
계수비방이란,
어떤 이가 ‘이것은 욕계계(欲界繫)이다’라고 하거나,
어떤 이가 ‘이것은 색계ㆍ무색계의 계(繫)이다’라고 하거나,
어떤 이가 ‘이것은 삼계의 계이다’라고 하거나,
어떤 이가 ‘이것은 불계(不繫)이다’라고 말하는 것이다.
현전수비방이란,
어떤 이가 ‘이것은 갖가지 마음[多心]이 상속하는 것이지 일심(一心)이 현전하는 것이 아니다’라고 말하는 것이다.
퇴수비방이란,
어떤 이가 ‘세제일법도 물러남이 있다’라고 말하는 것이다.
이와 같은 등등의 모든 비방을 중지시키기 위해서 세제일법을 먼저 설하는 것이다”고 하였다.
어떤 논사는 “모든 생사법은 견고하지 못하여 마치 분소(糞掃)와 더러운 진흙과 같다.
이 중에서 어떤 법이 가장 뛰어나고 견고하여 제호와 같은 것인가?
이른바 세제일법이니 이 때문에 먼저 설하였다”라고 하였다.
또 어떤 논사는 “무아를 수순하기 때문이다.
이 아비담경은 항상 무아를 설하고 있는데 외전(外典)에서 아(我)와 욕법(欲法)과 유법(有法)과 재(財)를 설한 것과는 같지 않다.
오직 이 경만이 무아ㆍ열반ㆍ해탈을 설하고 있다.
세제일법도 또한 무아를 관하는 것이니,
이 경을 수순하기 때문에 먼저 설한 것이다”고 하였다.
어떤 논사는 “이 경이 모든 논(論) 가운데서 가장 뛰어나고,
세제일법이 모든 세속의 선법(善法) 중에서 가장 뛰어난 것이다.
이 경이 뛰어나기 때문에 뛰어난 법[勝法]을 먼저 설해야 한다”고 하였다.
어떤 논사는
“세제일법에 안주하면 그때 진불(眞佛)이 세상에 출현한다고 한다.
부처님은 성법(聖法)을 자재하게 수용할 수 있어서 세간을 벗어난다.
중생이 법에 들어가는 것은 두 가지가 있으니,
첫째는 가명(假名)이고 둘째는 진실(眞實)이다.
가명으로 법에 들어가는 것은 수염과 머리를 깎고 법복을 입고 바르게 믿어 출가(出家)하는 것이며,
진실하게 법에 들어가는 것은 세제일법을 일으켜 차례를 따라 고법인(苦法忍)41)에 들어가는 것이다.
가명으로 법에 들어가는 사문에게는 두 가지 허물이 있다.
첫째는 파계(破戒)이고 둘째는 사계(捨戒)이다.
정법에 들어간 진실한 사문은 이와 같은 허물이 없고 성법(聖法)을 자재하게 수용하여 그 성분(性分)을 따르므로 끝내 퇴심함이 없다”고 하였다.
또 어떤 논사는 말하기를
“세제일법에 안주하면 그때 비로소 근본 없는 생사 이래로 닫혀있던 성도(聖道)의 문을 열 수 있고,
일찍이 버리지 못했던 범부의 성품을 버릴 수 있으며,
일찍이 얻지 못했던 무루의 성도를 얻을 수 있기 때문에 세제일법을 먼저 설한 것이다”고 하였다.
어떤 사람은
“세제일법에 안주하면 그때 이름을 버리고 이름을 얻으며,
수(數)를 버리고 수를 얻고,
계(界)를 버리고 계를 얻으며,
성(性)을 버리고 성을 얻는다.
‘이름을 버리고 이름을 얻는다[捨名得名]’는 것은 범부의 이름을 버리고 성인의 이름을 얻는다는 말인데,
수(數)ㆍ계(界)ㆍ성(性)도 또한 이와 같다”고 하였다.
또 어떤 사람은
“세제일법에 안주하면 그때 심(心)은 얻어도 심인(心因)은 얻지 않으며,
명은 얻어도 명인(明因)은 얻지 않고,
수는 얻어도 수인(受因)은 얻지 않는다”고 하였고,
또 어떤 사람은 “세제일법에 안주하면 그때 구연(舊緣)을 버리고 신연(新緣)을 얻으며,
공(共)을 버리고 불공(不共)을 얻으며,
세간을 버리고 출세간을 얻는다”고 하였다.
또 어떤 사람은
“의심을 끊어주기 위해서 이 법을 설하는 것이니,
중생은 범부의 성품이 시작도 없고 끝도 없다고 생각하는데,
지금 세제일법을 설하여 범부의 성품이 끝이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라고 하였다.
또 어떤 사람은
“세제일법에 안주하면 그때에 범부의 퇴환(退患)과 변이(變異)와 완고함[剛强]은 일어나지 않지만
난ㆍ정ㆍ인의 법에서는 간혹 일어난다”고 하였다.
또 어떤 사람은
“이 법에 안주하면 그때 성법을 얻지 못하고 목숨을 마치는 이가 없지만,
난ㆍ정ㆍ인의 법은 그렇지 않다.
이 법에 안주하면 그때에는 성도를 얻지 못하고 목숨을 마치는 이가 없으니,
올바르게 결정하지 못했던 것을 올바르게 결정하며,
얻지 못했던 과를 얻고 부정취(不定聚)에서 나와 정정취(正定聚)에 들어가며,
성도를 얻지 못했다가 성도를 얻고,
4불괴정(不壞淨)이 없다가 있게 되는 것도 또한 이와 같다”고 하였다.
또 어떤 사람은
“이 선근에 안주하면 그만두거나 막힘[止滯]이 없지만 난ㆍ정ㆍ인의 법에는 지체함이 있다”고 하였고,
또 “이 법에 안주하면 그때에 범부인 등이 수행하는 염처관 등을 구경의 경지까지 만족하지만 나머지 법은 그렇지 않다”고 하였다.
또 어떤 사람은 “이 법에 안주하면 그때에 유루심과 무루심 중에서 끊어지는 것도 있고 이어지는 것도 있는데 끊어지는 것은 유루심이고 이어지는 것은 무루심이다.
나머지 법은 그렇지 않다”고 하였다.
또
“수미산왕이 금륜 위에 안주하면 사방의 거센 바람이 기울게 하거나 요동시킬 수 없는 것처럼,
이 법에 안주하면 4전도(顚倒)의 삿된 바람이 기울게 하거나 요동시킬 수 없다”고 하였다.
또 어떤 사람은 “이 법에 안주하면 그때에 처음[始]과 끝[終]을 나타내 주기 때문이다.
마치 해[明相]가 밤의 끝과 낮의 시작을 나타내 주는 것처럼 이 법도 또한 그와 같아서 세속의 끝과 성도의 초위(初位)를 명상이 처음과 끝을 나타내 주는 것처럼 보여주며,
지금 제도되는 것[度]ㆍ이미 제도된 것[已度]ㆍ드는 것[入]ㆍ벗어난 것[出]과 방편과 구경을 나타내는 것 역시 이와 같다”고 하였다.
또 어떤 사람은
“서로 비슷한 법[相似法] 가운데 서로 다른 모습이 있음을 나타내주기 위해서이다.
세제일법은 고제(苦諦)에 포섭되지만 고를 없애는 길[苦道]을 일으켜 낼 수 있다.
이 법은 고에 포섭되고,
세속에 포섭되고,
생사에 포섭되고,
모든 유(有)에 포섭되고,
신견에 얽매이는 것에 포섭되는 법이지만,
고를 소멸시키는 도법을 일으켜 낸다.
그러나 나머지 법[煖ㆍ頂ㆍ忍]은 그렇지 못하다”고 하였다.
또
“세제일법 자체는 세속연(世俗緣)이지만 출세의 연[出世緣]을 일으켜 낼 수 있기 때문에 먼저 설하였다.
마찬가지로 번뇌의 때[垢]가 있지만 번뇌의 때가 없게 하고,
허물이 있지만 허물이 없어지게 하고,
독이 있지만 독을 없애고,
탁함[濁]이 있지만 탁함을 없애고,
신견취(身見聚)가 있지만 신견취를 없애고,
전도취(顚倒聚)에 속하지만 전도취를 없애고,
애취(愛聚)가 있지만 애취를 없애고,
사취(使聚)가 있지만 사취를 없앨 수 있는 것도 또한 이와 같다”고 하였다.
또 어떤 논사는
“세제일법에는 세력이 있어서 그 세력으로 할 수 있는 것이 있기 때문이니,
비유하면 건장한 장부가 힘을 쓸 수 있는 것과 같아서 이 법에 안주하면 올바르게 결정할 수 있기 때문이다”고 하였다.
또
“세 가지 일 때문에 이 법을 먼저 설하였다.
첫째는 경의 의미를 따르게 하기 때문이고,
둘째는 비방을 중지시키기 때문이고,
셋째는 찰나에 과(果)를 얻을 수 있게 하기 때문이다”고 하였다.
경의 의미를 따른 것과 비방을 중지시키는 것은 앞에서 설한 것과 같다.
‘찰나에 과를 얻는다’는 것은 세제일법을 차례로 고법인(苦法忍)을 일으켜 낼 수 있는데 이것을 공용과(功用果)라고 한다.
이와 같이 모든 인연의 차례를 따르기 때문에 세제일법을 먼저 설하였다.
또 “범부가 얻는 법을 차례로 거슬러서 설하고자 하였기 때문이다”라고 하였는데,
이것은 “세제일법 내지 난법(煖法)을 범부가 얻는 출요법(出要法)이라 한다”고 설하고,
“스무 가지의 신견(身見) 등을 범부의 번뇌법(煩惱法)이라 한다”고 설한 것과 같다.
이 두 가지 법을 누가 알 수 있는가?
오직 무아지(無我智)를 갖춘 이만 알 수 있다.
이 때문에 제2품 가운데서 설하기를 “자못 한 가지 지혜가 있어 일체법(一切法)을 아는가?……(이하 자세한 내용은 생략함)……”라고 한 것이다.
이 무아지는 무엇을 연유하여 일어나는가?
곧,
연기를 깨닫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제3품 가운데서 설하기를 “한 사람에게 이 생(生)에서 열두 가지의 연기는……(이하 자세한 내용은 생략함)……”이라고 한 것이다.
그러므로 연기를 깨달을 수 있는 것은 애(愛)와 경(敬)을 연유하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제4품 가운데서 설하기를 “무엇이 애이고,
무엇이 경인가?……(이하 자세한 내용은 생략함)……”라고 한 것이다.
이 애경(愛敬)은 무엇 때문에 일어나는가?
참괴(慙愧)를 연유해서이다.
이 때문에 제5품 가운데서 설하기를 “무엇이 참이고 무엇이 괴인가……(이하 자세한 내용은 생략함)……”라고 한 것이다.
어떻게 하면 참괴할 수 있는가?
곧,
법상(法相)에 대한 이해를 연유해서 할 수 있다.
이 때문에 제6품 가운데서 설하기를 “색(色) 중에 생(生)ㆍ주(住)ㆍ노(老)ㆍ무상(無常)이 있으니 색(色)이라고 해야 하는가,
비색(非色)이라고 해야 하는가?……(이하 자세한 내용은 생략함)……”라고 한 것이다.
무엇을 연유해서 법상을 알 수 있는가?
무의(無義)를 단절하고 유의(有義)의 수습을 연유해서 알 수 있다.
이 때문에 제7품 가운데 설하기를 “모든 고행을 닦음에 있어서 무의를 갖추어야 함은 알아야 한다.……(이하 자세한 내용은 생략함)……”라고 한 것이다.
무엇을 연유해서 무의를 단절하고 유의를 수습한다 하는가?
곧,
바른 생각[思]과 기억[憶]을 연유해서이다.
이 때문에 제8품 가운데서 설하기를 “무엇이 사(思)이고 무엇이 억(憶)인가?……(이하 자세한 내용은 생략함)……”라고 한 것이다.
이와 같은 여러 가지 인연 때문에 범부가 얻는 법을 차례로 거슬러서 설해주기 위하여 세제일법을 먼저 설한 것이다.
【문】 무엇을 세제일법이라 하는가?
【답】 모든 심법(心法)과 심수법(心數法)에서 차례로 정결정(正決定)을 얻는 것을 세제일법이라 한다.
【문】 이미 정결정을 얻은 것과 미래에 정결정을 얻을 수 있는 것도 또 세제일법인가?
【답】 마찬가지로 세제일법이다.
현재를 설하면 과거와 미래를 함께 설한 것임을 알아야 한다.
【문】 세제일법으로 정결정을 얻는 것은 현재에 얻은 것인가?
과거에 이미 얻은 것인가?
만약 현재에 얻는 것이라면 범부도 또한 성인이고,
만약 과거에 이미 얻은 것이라면 무엇 때문에 이미 정결정을 얻었다고 말하지 않고 지금 얻는다고 말하는가?
【답】 마땅히 과거에 이미 얻었다고 말해야 하지만,
경문(經文)에서 과거에 얻었다고 말하지 않기 때문이다.
지금 얻었다고 말하면 이미 얻었다는 뜻이 저절로 포함된다.
가령 “대왕께서는 어디에서 오십니까?”라고 말하는 것과 같은데,
이것은 ‘이미 왔는데[已來]’ ‘지금 오느냐[今來]’ 하고 말하는 것이다.
‘이미 제수(諸受)를 깨달았다’는 말과,
‘이미 번뇌[漏]를 단절하였다’는 말과,
‘이미 해탈을 얻었다’는 말도 또한 이와 같다.
혹 어떤 사람은 “‘시간차 없이[無間] 정결정을 얻는 것을 세제일법이라 한다’고 설해야 된다’”고 말한다.
【評】 시간차 없이 정결정을 얻는 것과 차례를 따라 정결정을 얻는 것에는 어떤 차별이 있는가?
또 어떤 사람은 “고법인(苦法忍)은 비록 일어나지 않았지만 이 세제일법을 결정하는 것은 차제연(次第緣)42)이기 때문에 ‘지금 정결정을 얻는다’고 한다”라고 말한다.
어떤 사람은 “모든 5근 가운데서 정결정을 얻는 것을 세제일법이라 한다”고 설한다.
【문】 누가 이 말을 하였는가?
【답】 아비담인(阿毘曇人)이 말하였다.
【문】 그는 무엇 때문에 5근이 세제일법이라고 설하는가?
【답】 그는 반드시 5근이 세제일법이라고 말하고자 하는 것은 아니고,
이론(異論)을 단절시키기 위해서이다.
여기에서 이론이란 비바사바제(毘婆奢婆提)43)의 설로서,
신(身) 등의 5근은 한결같이 무루이기 때문에 모든 범부가 다 성취할 수 없다고 하였다.
【문】 그들은 무엇 때문에 그 같은 말을 하는가?
【답】 그들은 불경(佛經)에 의지해서 그와 같은 말을 하는 것이다.
불경에서 설하기를 “5근이 맹렬하고 예리하면 아라한과를 만족하게 통달하지만,
만약 5근이 없으면 범부의 범주에 떨어진다”고 하였다.
그들은 경에서 이와 같이 설하였기 때문에 “신 등의 5근은 모두 무루이다”라고 한다.
그들이 이와 같은 이론(異論)에 집착하는 것을 단절해 주기 위해서 “신근 등 5근은 세제일법이다”라고 설한다.
만약 신근 등 5근이 무루라면 근본 없는 시작 이래로부터 일념의 무루를 일으키고 세제일법을 얻을 수 있음은 일찍이 없을 것이다.
이 때문에 5근이 순무루(純無漏)가 아님을 알아야 한다.
또 만약에 5근이 무루라고 하면 이는 부처님의 정경(正經)에 위배되는 것이다.
가령 경에서는 “만약 내가 신근 등 5근에 대하여,
이것은 집(集)이고 이것은 멸(滅)이며,
이것은 미(味)이고 이것은 환(患)이며,
이것은 사(捨)라고 여실하게 관하지 못하면 아뇩다라삼먁보리를 얻을 수 없다.……(이하 자세한 내용은 생략함)……”라고 설하였다.
그러므로 이와 같은 상(相)으로 무루법을 관해서는 안 된다.
비바사바제부에서는 “이와 같은 상으로 무루법을 관해야 한다”고 말한다.
“무엇 때문에 경에서 설한 것처럼 관해야 하는가?”라고 한다면,
[저들은] 말하기를 “신 등 5근을 여실하게 관하지 못하면 정각을 얻을 수 없다고 한 것은 신 등 5근을 별상(別相)으로 관해야 함을 말한 것이기 때문이다”고 한다.
무엇을 연유해서 얻을 수 있는가?
선지식의 적집(積集)을 가까이 함으로써 얻을 수 있다.
이것은 ‘집을 관한다[觀集]’고 한다.
“무엇이 ‘멸을 관하는 것[觀滅]’이라고 하는가?
“미지욕지근(未知欲知根)이 멸하면 이지근(已知根)이 생겨남을 관하는 것이다.
이것은 ‘멸을 관하는 것’이라 한다”고 한다.
무엇이 ‘미를 관하는 것[觀味]’이라고 하는가?
이 무루법이 또한 애(愛)의 연이 됨을 관하는 것이다.
이것은 ‘미를 관하는 것’이라 한다.
【문】 무루법도 애(愛)에 얽매이는가?
【답】 그렇지 않다.
그대들이 주장하는 법에서 유루ㆍ무루의 연사(緣使)가 연이 되지만 얽매지는 않는 것처럼 나도 또한 그러하다.
무엇 때문에 ‘환을 관한다[觀患]’고 하는가?
모든 무루법에는 애가 없음을 관하기 때문이다.
이것은 ‘환을 관한다’고 한다.
무엇이 ‘사를 관하는 것[觀捨]’이라고 하는가?
모든 유위법은 열반을 얻었을 때 버리는 것이다.
이것은 ‘사를 관하는 것’이라 한다.
이와 같은 갖가지의 모든 이론(異論)을 끊어주기 위해 ‘‘모든 5근에 대하여 차례로 정결정을 얻는 것을 세제일법이라 한다”고 설하는 것이다.
또 5근을 한결같이 무루법에만 해당된다고 하면 불경(佛經)에 위배되는 것이니,
가령 경에서는 “내가 불안(佛眼)으로 중생의 근기를 관찰해보니 상근기ㆍ중근기ㆍ하근기가 있다”고 설하신 것과 같다.
비바사바제에서는 “불경에서 설한 상근은 아라한이고,
중근은 아나함이고 하근은 사다함과 수다원이다”고 한다.
육다바제(育多婆提)는 이렇게 말하였다.
“만약 그렇다면 세존께서 법륜을 굴리지 않으신 것을 굴리셨다고 하는 것이니,
모든 성인이 이미 세간에 가득해서 부처님도 법륜을 굴리실 필요가 없다.”
비바사바제는 이렇게 말하였다.
“세존께서 모든 중생에게 상ㆍ중ㆍ하의 근기가 있다고 말한 것은 근의 소의처(所依處)를 말한 것이지 근의 체(體)를 말한 것은 아니다.”
육다바제는 이렇게 말하였다.
“그렇다면 이 경에 위배된다.
가령 경에서는 사제륜나(闍提輸那) 바라문이 부처님을 찾아뵙고 말씀드리기를 ‘사문 구담이시여,
몇 가지 근이 있다고 말씀하십니까?’ 하니 부처님께서 답하시기를 ‘스물두 가지 근이 있다’고 하신 것과 같다.”
이것도 또한 근의 소의처를 말한 것이지만 동일하게 이 근을 말한 것이니,
하나는 근의 소의처이고 하나는 근의 체라고 하는 것은 옳지 않다.
이 때문에 신(信) 등 5근은 유루ㆍ무루에 통하는 것이어야 한다.
【문】 그렇다면 비바사바제에서 인용한 불경이 어떻게 유루와 무루에 통하는가?
【답】 신 등의 5근에는 두 가지가 있는데 유루와 무루이다.
저 경에서는 무루만 설하였다.
왜냐하면 성인의 말씀에 차별이 있는 것은 모든 근을 연유해서 설하기 때문이다.
또 신 등의 5근은 유루ㆍ무루에 통하는데 저 경에서 무루만 설한 것은 성인이 대치법(對治法)으로 설한 것이기 때문에 차별이 있는 것이다.
【문】 앞에서 이 5근이 없으면 범부의 범주에 떨어진다고 하였는데,
이것은 어떻게 통하는가?
【답】 앞에서 범부의 범주에 떨어진다고 한 것은 단선근(斷善根)의 범부를 말한다.
혹 어떤 사람은 “독자부(犢子部)44)에서는 5근이 세제일법이라고 말한다.
왜냐하면 5근은 선성(善性)이기 때문이다.
5근이 선성이기 때문에 여타의 심수법도 또한 선성이다.
따라서 이 5근 때문에 성현의 차별이 있다”고 하였다.
이는 경에서 “5근이 맹렬하고 예리하면 만족하게 통달하여 아라한과를 얻는다”고 설한 것과 같다.
자세한 것은 앞에서 설한 것과 같다.
【문】 무엇 때문에 가전연자 존자는 독자부에서 세운 의미를 인용하였는가?
【답】 저 독자부의 설과 이 경의 설에 약간의 상위(相違)가 있기 때문이다.
독자부에서는 “5근이 세제일법의 자성이다.
범부의 성품은 한결같이 오염되어 있다.
그 오염된 성품은 욕계의 고제로 끊어야 하는 열 가지 번뇌인데,
이것은 범부(凡夫)의 성품이다.
열반에는 세 가지의 배움이 있는데,
무학(無學)ㆍ비학(非學)ㆍ비무학(非無學)이다.
아수라는 제6도(道)인데 아(我)와 인(人)이 있다”고 설한다.
이와 같이 5도 또는 6도를 말하는 것 등은 이 경과 서로 위배된다.
따라서 저 독자부의 설이 이 경에서 설하는 것과 모두 같다고 말해서는 안 된다.
이 경을 지은 가전연자 존자는 이와 같은 잘못된 생각을 끊어주기 위해서 다음에 “내가 주장하는 의미는 모든 심법과 심수법에서 차례로 정결정을 얻는 것을 세제일법이라 한다”고 말하였다.
【문】 그대가 말한 것과 같이 5근의 성품이 선(善)이라면,
나머지 심법과 심수법의 성품도 선이 아닌가?
이것을 불선(不善)이고 무기(無記)라고 해야 한다면,
5근의 성품이 선하기 때문에 불선과 무기의 성품도 5근을 친근히 하면 역시 선이라고 하는 것처럼,
지금 5근도 또한 불선ㆍ무기를 친근히 하므로 그 성품을 불선ㆍ무기라고 해야 되지 않는가?
【답】 이것은 그렇지 않다.
왜냐하면 근과 심ㆍ심수법은 소의(所依)와 행(行)과 소연(所緣)과 과(果)와 의(依)와 보(報)가 같아서 함께 한 법[一事]을 이루기 때문에,
그 성품을 ‘선하다[善]’,
‘선을 친근히 하는 것[親近善]이다’라고 하는 것은 망상(妄想)일 뿐이다.
혹 어떤 사람은 “수다라를 지송하는 사람은 5근이 세제일법의 체성이라고 말한다”고 말했다.
달마다라(達摩多羅, Dharmatrāta) 존자는 “세제일법의 체성은 사(思)인데 이름에 차별이 있을 뿐이다”라고 설하였다.
불타제바(佛陀提婆, Buddhadeva) 존자는 “세제일법의 체성은 심(心)인데 이름에 차별이 있을 뿐이다.
왜냐하면 신(信)과 심(心)의 이름이 다르고,
나아가 혜(慧)와 심(心)의 이름이 다르기 때문이다.
만약 어떤 중생이 일시(一時)에 다섯 가지 마음[五種心]으로 정결정을 차례로 얻는다면 옳지 않고,
하나하나 차례로 정결정을 얻는다면 이것은 옳은 것이다”라고 하였다.
【문】 만약 그렇다면 불상응법(不相應法)으로 정결정을 얻을 수 있는가?
【답】 그렇지 않다.
왜냐하면 그대가 말하는 법의 심(心)은 심(心)과 상응하지 않고 소연(所緣)이 된다.
소연이 되기 때문에 차례로 정결정을 얻을 수 있다.
내가 말하는 신(信)도 또한 그러하여 신(信)과 상응하지 않으나 소연이 될 수 있다.
소연이 될 수 있기 때문에 차례로 정결정을 얻을 수 있다.
그리고 혜(慧)도 또한 이와 같다.
【문】 만약 그렇다면 큰 허물이 있다.
왜냐하면 만약 신심(信心)으로만 정결정을 얻고 정진(精進)ㆍ염(念)ㆍ정(定)ㆍ혜(慧)로 정결정을 얻는 것이 아니라면,
해태(懈怠)ㆍ실념(失念)ㆍ난의(亂意)ㆍ악혜(惡慧)로도 또한 차례로 정결정을 얻을 수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나아가 혜도 또한 이와 같아야 할 것이다.
【답】 저들이 이와 같이 생각하는 것을 단절시켜 주기 위해서 이렇게 말하였다.
“내가 말하는 의미는 모든 심ㆍ심수법에서 차례로 정결정을 얻는 것이 세제일법이다.
내가 말하는 의미는 전도됨이 없고 법답게 본성을 따르는 것이다”라고 하였다.
경문(經文)에서도 나와 같은 뜻으로 “모든 심ㆍ심수법에서 차례로 정결정을 얻는 것을 세제일법이라고 한다”고 설하였다.
저 가전연자 존자는 올바른 의미[正義]를 드러내고자 말하기를 “세제일법은 근(根)이면서 근이 아니기도 하다”라고 하였다.
【문】 가령 세제일법이 눈앞에 드러났을 때 미래세 중의 심ㆍ심수법도 또한 닦아서 세제일법이 되는가?
【답】 어떤 사람은 “경본(經本)에 설한 것에 의하면 세제일법이 아니다.
왜냐하면 경본에서 설하기를 ‘모든 심ㆍ심수법에서 차례로 정결정을 얻는 것이 세제일법이다’라고 하였는데,
저 미래세 중의 심ㆍ심수법은 차례로 얻을 수 없기 때문에 세제일법이 아니다”라고 말한다.
또 어떤 사람은 “만약 세제일법이 된다고 한다면 경본에 위배된다.
경본에서는 ‘세제일법은 일심(一心)이라고 말해야 하며 여러 마음[衆多心]이 아니다’라고 설하였다”라고 말한다.
【評】 저 미래세 중의 심ㆍ심수법도 또한 세제일법이라고 말해야 한다.
【문】 저 미래세 중의 것은 차제연(次第緣)으로 얻을 수 없는 것인데 어떻게 세제일법이 되는가?
【답】 저 미래세 중의 심ㆍ심수법은 비록 차제연으로 얻을 수 없지만 차제법(次第法)을 따를 수 있다.
비유하면,
비구가 포살(布薩)을 할 때에 승가 대중에 있지 않아도 승가 대중에게 위임하면 포살이라고 할 수 있어서 승사(僧事)가 성립되는 것과도 같다.
이와 같아서 저 미래세의 심ㆍ심수법도 대중에게 위임하면 승사가 성립되는 것처럼,
현재에 정결정을 얻을 수 있다.
만약 미래세의 심ㆍ심수법이 위임되지 않아 현재에 얻을 수 없다면,
지금 현재의 심ㆍ심수법도 또한 차례로 얻을 수 없다.
만약 차례롤 얻을 수 있다면 이는 미래세의 심ㆍ심수법의 세력 때문임을 알아야 한다.
왜냐하면 저 미래의 것은 성도(聖道)에 장애가 되지 않기 때문이다.
또한 저 미래세의 심ㆍ심수법이 세제일법이 될 수 없다면 지건도(智犍度)를 설하는 경문에 위배된다.
왜냐하면 경에서 “일찍이 증득하지 못했던 도가 현재에 현전하는 것처럼 저 미래세 가운데에도 서로 흡사한 종류의 도를 닦는다”라고 설하였기 때문이다.
만약 저 미래가 세제일법이 될 수 없다면 무엇 때문에 저 경문에서 “서로 흡사한 종류의 도를 닦는다”고 하였겠는가.
이와 같기 때문에 저 미래세의 심ㆍ심수법도 또한 세제일법이 되는 것이다.
【문】 만약 미래의 것도 세제일법이 된다면 경문(經文)에는 무엇 때문에 설하지 않았는가?
【답】 만약 차제연이 될 수 있으면 경문에 설하지만 저 미래는 차제연이 될 수 없기 때문에 설하지 않았다.
또 3세에 유전하는 경우에는 설하지만,
미래는 그렇지 않다.
혹 어떤 사람은 “인(因)으로부터 생겨나서 이 법을 성취하여 몸에 있으면 그 때문에 설하지만,
저 미래는 비록 인으로부터 생겨나서 이 법을 성취할지라도 몸에 있지 않기 때문에 설하지 않는다”고 말하였다.
【문】 만약 그렇다면 무엇 때문에 여러 마음[衆多心]이라고 하지 않는가?
【답】 여기에서는 현재 한 찰나에 성취하는 것만 설하였기 때문에 여러 마음이라고 하지 않았다.
혹 어떤 사람은 “만약 미래세에 닦게 할 수 있으면 설하지만,
미래는 그렇지 않다”고 말하고,
어떤 사람은 “만약 심(心)이 저 미래의 인(因)이고 저 심(心)이 이것의 과(果)라면 설하지만 미래는 그렇지 않다”고 말하였다.
또 어떤 사람은 “인(因)이 될 수 있고 과(果)를 취하여 몸에 있으면서 소연(所緣)이 될 수 있으면 그 때문에 설하지만 미래는 그렇지 않다”고 하였고,
혹 어떤 사람은 “2수(修)의 의미가 있으면 설하지만 저 미래는 득수(得修)의 의미만 있고 행수(行修)의 의미가 없기 때문에 설하지 않았다”고 하였다.
【문】 저 세제일법에서 함께 일어나는 색[俱生色]45)과 심불상응행(色心不相應行)46)은 세제일법인가?
【답】 어떤 사람은 “경본에서 설한 것처럼 그것은 세제일법이 아니다.
왜냐하면 차제연이 될 수 없기 때문이다”고 하였다.
【評】a
評
마땅히 저것도 또한 세제일법이라고 말해야 한다.
【문】 그것은 차제연이 될 수 없는데 어떻게 세제일법이라고 할 수 있는가?
【답】 그것은 비록 차제연이 될 수 없지만 차제연의 의미를 따를 수 있다.
왜냐하면 그것은 세제일법과 함께 생ㆍ주ㆍ멸하고,
과(果)와 의(依)와 보(報)가 동일하기 때문에 세제일법이라고 말한다.
【문】 그것이 만약 세제일법이라면 경본(經本)에서는 무엇 때문에 설하지 않았는가?
【답】 그것은 차제연이 될 수 없기 때문에 설하지 않았다.
혹 어떤 사람은 “만약 인(因)으로부터 생겨나서 이 법을 성취하여 소연이 될 수 있으면 설하지만,
그것은 비록 인으로부터 생겨나서 이 법을 성취하지만 소연이 될 수 없기 때문에 설하지 않았다”고 하였고,
혹 어떤 사람은 “만약 이것이 상응하고 의(依)와 세(勢)와 행(行)과 연(緣)이 있으면 설하지만,
그것은 상응하지 않고 의와 세와 행과 연이 없기 때문에 설하지 않았다”고 말하였다.
【문】 그 세제일법의 득(得)은 세제일법이 되는가?
【답】 득(得)47)은 세제일법이 아니다.
【문】 무엇 때문에 생(生)ㆍ주(住)ㆍ무상(無常)은 세제일법이 되는데 득은 그렇지 못한가?
【답】 생(生) 등은 하나같이 세제일법과 과(果)가 동일하고 함께 행하여 서로 분리되지 않으며,
항상 서로를 따라서 전후가 없다.
득은 그렇지 않으니 과(果)가 동일하지 않고 함께 행하지 않고,
서로 분리되어 서로를 따르지 않아서 전후가 있다.
혹 분리시켜서 얻는 법이 있어도 이것은 나무에서 분리시킨 나무껍질과 같다.
이러한 의미가 있기 때문에 세제일법이 아니다.
【문】 사문과(沙門果)의 득(得)을 사문과라고 하는데,
무슨 까닭에 이 제일법의 득(得)은 세제일법이 아닌가?
【답】 사문과의 득은 성취득(成就得)이기 때문에 사문과라고 한다.
이 때문에 사문과의 득(得)은 사문과이고 차제연이 될 수 있으며 차제연의 의미를 따를 수 있으므로 세제일법이라 한다.
세제일법의 득(得)은 그렇지 않으므로 세제일법이 아니다.
나머지 달분선근(達分善根)48)의 득(得)도 이와 같이 달분선근이 아니다.
왜냐하면 만약에 달분선근의 득이 달분선근이라면 이미 성과(聖果)를 얻고 나서도 성취득이기 때문에 달분선근이 거듭해서 현전해야 한다.
그러나 사실은 그렇지 않다.
이 때문에 달분선근의 득은 달분선근이 아니다.
혹 어떤 사람은 “가령 함께 세제일법을 일어나게 할 경우에 함께 일어나는 것은 세제일법이라 하지만,
후에 일어나는 것은 아니라고 한다.
나머지 달분선근도 이와 같다”라고 하였고,
또 어떤 사람은 “세제일법의 득이 바로 세제일법이니 그 나머지 달분선근의 득(得)도 바로 달분선근이다”라고 하였다.
이에 묻기를 “만약 그렇다면 이미 성과를 얻은 다음에도 거듭해서 달분선근이 현재에 현전해야 한다” 하니,
“어떤 것은 현전하고 어떤 것은 현전하지 않는다.
어떤 것이 현전하는가?
이른바 득(得)이다.
어떤 것이 현전하지 않는가?
모든 상응법(相應法)이다”라고 답하였다.
【評】그처럼 말해서는 안 된다.
앞에서와 같이 말하는 것이 옳다.
【문】 세제일법은 몇 가지 염처(念處)인가?
【답】 현재는 하나로서 괴연(壞緣)의 법념처(法念處)이고,
미래는 네 가지가 있다.
【문】 세제일법은 몇 가지 연(緣)으로 되어 있는가?
【답】 네 가지 연이다.
인연(因緣)은 상응공유인(相應共有因)이고 차제연(次第緣)은 고법인(苦法忍)에 대해서는 차제연이 되는 것이고,
경계연(境界緣)은 인지(忍智)의 소연이며,
위세연(威勢緣)49)은 그 자체를 제외한 나머지 모든 법으로 그것의 연생법(緣生法)이다.
세제일법에는 또한 네 가지 연이 있다.
인연은 상응공유법이고,
차제연은 고인(苦忍)이고,
경계연은 욕계(欲界)의 5음이고,
위세연은 그 자체를 제외한 나머지 모든 법이다.
【문】 또 다른 이치가 설해져야 하니,
무엇을 출세제일법(出世第一法)이라 하는가?
【답】 고법인(苦法忍)이다.
왜냐하면 이것이 성도(聖道)의 종자이기 때문이다.
또 어떤 사람은 “금강유정(金剛喩定)50)이다.
왜냐하면 모든 번뇌[結]를 다하는 구경과를 얻기 때문이다”라고 하였고,
어떤 사람은 “진지(盡智)51)이다.
왜냐하면 최초로 이 진지를 얻어서 그때에 나머지 무루법을 청정하게 닦기 때문이다”라고 하였고,
또 어떤 사람은 “정삼매(正三昧)이다.
왜냐하면 모든 유위법 중에서 가장 뛰어난 정정(正定)을 얻기 때문이다”라고 하였고,
또 어떤 사람은 “열반이다.
왜냐하면 모든 법 중에서 가장 미묘하고 뛰어나기 때문이다”라고 하였다.
어떤 사람은 “아라한의 최후 마음이다.
왜냐하면 범부인의 최후 마음을 세제일법이라 하고,
아라한의 최후 마음을 출세제일법이라고 하기 때문이다”라고 하였다.
【評】그처럼 말해서는 안 된다.
저 아라한의 최후 마음은 출세법이 아니기 때문이니,
앞에서와 같이 말하는 것이 옳다.
【문】 세제일법 중에 고법인과 차제연이 되지 않는 것이 있는가?
【답】 있다.
세간의 제일법에서 색심불상응법이 바로 여기에 해당한다.
【문】 상응법 중에서도 고법인과 차제연이 되지 않는 것이 있는가?
【답】 있다.
미래에 닦는 것이 바로 그것이다.
불타제바(佛陀提婆) 존자는 “만약 신심(信心)으로 정결정을 얻으면 세제일법이라고 하며,
고법인과 차제연이 되면 나머지 정진ㆍ염ㆍ정ㆍ혜의 심도 세제일법이라고 한다.
그런데 고법인과 차제연이 되지 않으면 상사법(相似法)이라 한다”고 말하였다.
사문(沙門)은 설하기를 “수(受)는 수에 차제연이 되고 상(想) 등에는 차제연이 되지 않는다.
나머지 심수법도 또한 이와 같아서 심법(心法)이 일어날 때 연을 만나면 바로 일어난다.
가령 애(愛)가 앞의 대상을 반연하여 즐거운 느낌을 일으킬 때 생각이 떠오르고자[想] 하면 ‘떠오르는 마음작용[想心數]’이 일어나고,
생각을 일으키고자[作] 하면 ‘일으키는 마음작용[思心數]’이 일어난다.
그렇다면 차제연과 서로 비슷한 의미가 없겠는가 하면,
있다.
다만 낱낱이 차제연이 되지 않을 뿐이다.
그대가 말하는 법 중에 무상(無想)의 중생이 생(生)할 때에 심이 멸하고,
사(死)할 때에 심이 일어나서 서로의 거리가 비록 멀지만 차제연이 될 수 있다”고 하였다.
【評】그처럼 말해서는 안 된다.
심(心)은 심에 차제연이 되고 수(受)는 수에 차제연이 되어서 심ㆍ심수법은 하나하나 차례로 일어나 차제연이 되는 것이다.
만약 그처럼 말한다면 경문(經文)에 서로 위배되는 것이니,
경에서는 “어떤 것이 차제법인가?
심ㆍ심수법이다”라고 하였다.
만약 앞에서 말한 것과 같다면 또 허물이 있게 된다.
가령 유각유관삼매(有覺有觀上昧)에 의지해서 무각무관삼매(無覺無觀三昧)에 들어간다고 하자.
그렇다면 유각유관삼매는 무각무관삼매에 차제연이 될 수 없어야 한다.
왜냐하면 서로 비슷하지 않기 때문이니,
무각무관삼매는 차제연을 따라 일어나는 것이 아니다.
무각무관삼매에 의지해서 유각유관삼매에 들어가는 경우도 또한 이와 같다.
만약 또 그렇다면 해탈할 수 없다.
왜냐하면 욕상응심(欲相應心)만이 차제연이 되어 욕상응심을 일으킬 수 있으며,
부정관(不淨觀) 등의 모든 선심(善心)은 일으킬 수 없기 때문이다.
만약 선심이 일어나지 않으면 해탈할 수 없다.
이와 같은 등등의 허물이 있기 때문에 먼저 설한 것처럼 말하는 것이 옳다.
무엇 때문에 세제일법이라고 하는가?
【문】 무엇 때문에 이것을 논하는가?
【답】 앞에서 세제일법의 체성(體性)을 설하였지만 아직 세제일법이라 이름한 까닭을 설하지 않았는데 지금 설해주기 위해서이다.
비유하면 어떤 사람을 세상에서 뛰어나다고 칭하지만 족성(族姓) 때문에 뛰어나다고 하는 것인지,
재력 때문인지,
권속 때문인지를 알지 못하는 것과 같다.
저 세제일법도 또한 이와 같으므로,
지금 세제일(世第一)이라고 이름한 까닭을 설하고자 한다.
‘제일’이라 한 것은 이 심심법(心心法)이 나머지 법에 비해서 가장 뛰어나고[最勝] 존장(尊長)이며 상묘(上妙)하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등등의 의미가 있기 때문에 ‘제일’이라고 한 것이다.
【문】 제일이라 말한 것은 세법(世法)보다 전체적으로 뛰어나기 때문인가?
부분적으로 뛰어나기 때문인가?
만약 전체적으로 뛰어난 것이라면 저 심ㆍ심소법은 견제변등지(見諸邊等智)52)보다 뛰어나지 못하다.
왜냐하면 저 등지(等智)는 견도(見道)의 권속과 서로 분리된 것이 아니어서 혜력(慧力)이 뛰어나기 때문이고 모든 견도의 혜력이 매우 많기 때문이다.
또한 저 법은 정수훈선(淨修勳禪)53)보다 뛰어나지 못하다.
왜냐하면 정수훈선은 범부와 동일한 처소에서 생기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저 법은 또한 진지(盡智)를 얻을 때 닦는 모든 선근보다 뛰어나지 못하다.
왜냐하면 진지를 얻을 때 닦는 선근은 일체 모든 번뇌의 장애[垢障]를 영원히 떠나기 때문이다.
또 저 법은 또한 공공삼매(空空三昧)와 무원무원삼매(無願無願三昧)와 무상무상삼매(無相無相三昧)보다 뛰어나지 못하다.
그것은 왜냐하면 공공삼매 등은 무루법도 싫어하고 천하게 여기는데 하물며 유루법이겠는가.
만약 부분적으로 뛰어난 것이라면 저 난(煖)ㆍ정(頂)ㆍ인(忍)의 법도 또한 제일이라고 말해야 한다.
【답】 혹 어떤 사람은 “마땅히 부분적으로 뛰어나다고 말해야 한다.
왜냐하면 난ㆍ정ㆍ인 등의 법보다 뛰어날 뿐이기 때문이다”라고 하였다.
또 어떤 사람은 “제일이라고 한 것은 저 법이 모든 범부가 증득하는 선(禪)보다 뛰어나 무량의 해탈을 얻기 때문이다.
그러나 입(入)과 일체입(一切入) 내지 제일유(第一有)는 제외된다.
그 중에는 일으키는 생각[思]이 있기 때문이다”라고 하였다.
또 어떤 사람은 “저 법은 전체적으로 뛰어나다.
전체적으로 뛰어나다는 것은 모든 사업(事業) 중에서 뛰어남을 말한 것이 아니라 단지 성도(聖道)의 문을 열어 줄 수 있기 때문이다.
이 법은 저 견도변등지보다 뛰어난데,
견도변등지는 비록 견도의 권속과 분리되지 않아서 혜력(慧力)이 뛰어나지만 성도의 문을 열어주지는 못한다.
등지(等智)처럼 정수훈선(淨修熏禪)ㆍ진지(盡智)와 함께 생하는 선근ㆍ공공삼매(空空三昧) 등이 성도의 문을 열어주지 못하는 것도 또한 그러하다”고 하였다.
또 어떤 사람은 “모든 것보다 뛰어나다.
왜냐하면 성도의 문을 열어줄 수 있기 때문이다.
견도변등지는 비록 성도의 권속이며 내지 혜성(慧性)이 매우 많지만,
만약 세제일법에 비교하면,
성도의 문을 열지 못하며,
닦을 수 없다.
만약 닦을 수 있다면,
모두 저 세제일법의 공용(功用)의 힘 때문이다.
나머지 정수훈선ㆍ진지와 함께 생하는 선근ㆍ공공삼매 등도 또한 이와 같다”고 하였다.
【문】 ‘제일’이라는 말에는 어떤 의미가 있는가?
【답】 가장 뛰어나다는 의미[最勝義]가 제일의(第一義)이고,
묘과를 얻는다는 의미[得妙果義]가 제일의이고,
능입(能入)이 뛰어나 유정(有頂)54)을 부수어버리는 의미가 제일의이고,
최후심(最後心)이라는 의미가 제일의이니,
높은 깃대의 꼭대기 위에 다시 더 높은 것이 없는 것과 같다.
【문】 앞에서 말한 가장 뛰어나다는 것 등에는 어떤 차별이 있는가?
【답】 혹 어떤 사람은 “차별이 없다.
왜냐하면 이것은 모두 상묘(上妙)의 의미를 찬탄하는 말이기 때문이다”라 하였고,
어떤 사람은
“선근(善根)에 대해 말한 것이기 때문에 차별이 있다.
즉 부정(不淨)과 안반(安般)에 대해서는 최(最)라 하고,
문혜(聞慧)에 대해서는 승(勝)이라 하고,
사혜(思慧)에 대해서는 장(長)이라 하고,
난법(煖法)에 대해서는 존(尊)이라 하고,
정법(頂法)에 대해서는 상(上)이라 하고,
인법(忍法)에 대해서는 묘(妙)라 한 것이다”라고 하였다.
또 어떤 사람은 “의지하는 지위[地]가 다르기 때문에 차별이 있다.
가령 미지정(未至定)55)을 의지하면 최(最)라 하고,
초선(初禪)을 의지하면 승(勝)이라 하고,
중간정(中間定)56)을 의지하면 장(長)이라 하고,
2선을 의지하면 존(尊)이라 하고,
3선을 의지하면 상(上)이라 하고,
4선을 의지하면 묘(妙)라 한 것이다”라고 하였다.
또 어떤 사람은
“맨 꼭대기[邊頂]의 의미가 있으면 최(最)라 하고,
향상[上]하는 의미가 있으면 승(勝)이라 하고,
선(善)을 증장시키는 의미가 있으면 장(長)이라 하고,
승진(昇進)하는 의미가 있으면 존(尊)이라 하고,
견고하다는 의미가 있으면 상(上)이라 하고,
만족의 의미가 있으면 묘(妙)라 한 것이다”라고 하였다.
또 어떤 사람은 “고법인에 차제연이 될 수 있기 때문에 최라 하고,
모든 범부의 선근보다 뛰어나기 때문에 승이라 하고,
뛰어난 곳으로 나아가기 때문에 장이라 하고,
세속의 선근보다 뛰어나기 때문에 존이라 하고,
두 가지가 없기 때문에 상이라 하고,
무루법과 상응하기 때문에 묘라 한다”고 하였다.
또 어떤 사람은
“가장 으뜸이기 때문에 승이라 하고,
뛰어나기 때문에 장이라 하고,
우두머리이기 때문에 존이라 하고,
존귀하기 때문에 상이라 하고,
최상이기 때문에 묘라 한다”고 하였다.
또 어떤 사람은
“범부의 최후심이기 때문에 최(最)라 하는데 비유하면 나무의 꼭대기처럼 으뜸이다.
성도의 문을 열 수 있기 때문에 승(勝)이라 하고,
근기가 맹렬하고 예리하기 때문에 장(長)이라 하고,
달분선근(達分善根) 가운데서 뛰어나기 때문에 존(尊)이라 하고,
번뇌를 꺾어 조복시키기 때문에 상(上)이라 하고,
훌륭한 과[好果]를 얻기 때문에 묘(妙)라 한다”고 하였다.
또한 이 심심법(心心法)은 범부의 성품을 버린다.
【문】 범부의 성품을 버리는 것은 세제일법인가, 고법인(苦法忍)인가?
만약 세제일법으로 범부의 성품을 버린다면 어떻게 한 찰나에 범부법으로 범부의 성품을 버리는가?
만약 고법인으로 범부의 성품을 버린다면 일어날 때에 버리는 것인가? 소멸할 때에 버리는 것인가?
만약 일어날 때에 버린다면 어떻게 아직 일어나지 않은 법을 버릴 수 있으며,
만약 소멸할 때에 버린다면 저 범부의 성품은 이미 소멸되었는데 다시 무엇을 버리는가?
【답】 혹 어떤 사람은 “세제일법에 머물 때 버린다”고 한다.
【문】 만약 그렇다면 어떻게 한 찰나에 범부법으로 범부의 성품을 버리는가?
【답】 범부의 성품은 세제일법과 서로 장애거리가 된다.
이 때문에 세제일법에 머물 때에 버린다.
비유하면 조련사가 코끼리를 타고 코끼리를 채찍질하는 것과 같은데,
마부와 뱃사공과 원수를 이기는 사람의 경우도 또한 마찬가지이다.
또 어떤 사람은 “고법인이 일어날 때에 버린다.
범부의 성품이 소멸될 때에 견고소단(見苦所斷)의 10사(使)를 끊는 것은,
비유하면 등불이 켜질 때 어둠이 타파되고,
이미 등불이 켜지면 심지가 타고 기름이 떨어지는 것과 같다”고 하였다.
【문】 만약 그렇다면 어떻게 아직 일어나지 않은 법을 조작할 수 있는가?
또 한 가지 법은 두 가지 일을 조작할 수 없다.
【답】 만약 그렇다 해도 무슨 허물이 있겠는가.
모든 내법(內法)에 두 가지가 있으니,
미래 중에 능히 조작하여 상응하는 것은 고법인이고 상응하지 않는 것은 생상(生相)이다.
미래세를 능히 조작하는 모든 외법(外法)은 등불뿐이다.
혹 어떤 사람은 “세제일법과 고법인이 함께 범부의 성품을 버리는데,
세제일법은 무애도(無礙道)와 같고 고법인은 해탈도(解脫道)와 같다.
세제일법은 범부의 성품이 성취됨과 함께 소멸되며,
고법인은 범부의 성품이 성취되지 않음으로써 함께 일어난다.
세제일법은 고법인을 의지하는데 고법인이 그 세력을 도와서 범부의 성품을 버리는 것이다.
비유하면 나약한 사람이 힘센 자를 의지하여 원가(怨家)를 굴복시킬 수 있는 것과 같은데,
저 세제일법과 고법인 또한 이와 같다.
성법(聖法)을 얻는 것은 고법인이고 삿된 성품을 버리는 것은 세제일법이다”라고 하였다.
【문】 삿된 성품[邪性]에는 세 가지가 있다.
첫째는 취사성(趣邪性)이고,
둘째는 업사성(業邪性)이고,
셋째는 견사성(見邪性)이다.
취사성은 3악취(惡趣)57)이고,
업사성은 5무간업(無間業)58)이며,
견사성은 5견(見)59)이다.
이 세 가지 삿된 성품에서 어떤 것을 버리는가?
만약 취사성과 업사성을 버린다면 이때에는 성취할 수 없으며,
만약 견사성을 버린다면 도비지(道比智)60)가 현재에 현전할 때 버린다.
【답】 세 가지를 함께 버린다.
【문】 어떻게 함께 버리는가?
【답】 불취(不趣)ㆍ부작(不作)ㆍ불행(不行)을 버린다고 한다.
불취는 취사성을 버리는 것이고,
부작은 업사성을 버리는 것이고,
불행은 견사성을 버리는 것이다.
【문】 만약 그렇다면 상인(上忍)에 머물 때에 이미 버렸는데 무엇 때문에 세제일법에 머물 때 버린다고 말하는가?
【답】 그 삿된 성품이 의지하는 곳을 깨뜨리기 때문이다.
모든 번뇌는 범부의 성품이 의지하는 곳이 되어 생사의 허물과 환란을 일으킨다.
이를 비유하면 사자가 굴에 의지해 있으면서 짐승 등에게 해를 미치는 것과 같은데 저 삿된 성품도 이와 같다.
이 때문에 세제일법에 머물러 있을 때 버린다.
혹 어떤 사람은 “고법인이 삿된 성품을 대치하기 때문이다”라고 하였다.
【문】 취사성과 업사성은 수도소단(修道所斷)인데 무엇 때문에 고법인이 그 대치라고 하는가?
【답】 대치(對治)에는 여러 가지가 있는데 사대치(捨對治)와 단대치(斷對治)와 지대치(持對治)와 부작대치(不作對治)와 불취대치(不趣對治)이다.
고법인이 범부의 성품을 버리는 것은 사대치이고,
견고(見苦)의 10사(使)를 끊는 것은 단대치이다.
모든 무루도(無漏道)는 지대치이고,
무간업(無間業)과 여타의 불선업(不善業)을 짓지 않는 것은 부작대치이고,
악도에 미끄러지지 않는 것은 불취대치이다.
이와 같은 것 등을 삿된 성품을 버리는 것이라고 한다.
정성(正性)을 얻는다는 것은 고법인이고,
정결정(正決定)을 얻는다는 것은 견도이다.
【문】 모든 성도(聖道)가 정결정인데,
무엇 때문에 견도만 말하는가?
【답】 혹 어떤 사람은 “모든 번뇌는 중생의 선근을 성숙하지 못하게 하고 애욕을 윤택하게 하고 증장시켜 염착하게 하고 떨어지지 않게 한다.
저 견제도(見諦道)는 중생의 선근을 성숙하게 하고 애수(愛水)를 마르게 하며 모든 염착을 떨어지게 하고 본성을 덮지 않고 파괴되지 않으며 나머지 심(心)을 잡되게 하지 않는다.
이 때문에 견도를 정결정이라 이름한다”라고 하였다.
또 어떤 사람은 “중생의 근기를 성숙시켜 성도에 들어가게 하기 때문에 견도를 정결정이라 이름한다”라고 하였고,
또 어떤 사람은 “번뇌의 뿌리를 뽑아내어 성도에 들어가게 하기 때문에 견도를 정결정이라 이름한다”라고 하였다.
또 어떤 사람은 “5인종(人種)을 버리고 8입성(入性)에 들어가게 하기 때문에 견도를 정결정이라 이름한다”라고 하였고,
또 어떤 사람은 “부지(扶持)하고 장양(長養)함을 정결정이라고 하는 것이니,
비유하면 소와 말이 수초(水草)를 의지해서 성명(性命)을 장양하는 것처럼 모든 성인은 견도를 의지해서 혜명(慧命)을 장양하기 때문에 견도를 정결정이라 이름한다”라고 하였다.
혹 어떤 사람은 “이 법이 결박을 풀어서 다시는 얽매이지 않게 하기 때문에 견도를 정결정이라 이름한다”라고 하였고,
또 어떤 사람은 “올바른 필정(必定)61)의 의미가 있어야 결정의(決定義)가 되니 스스로 결정을 얻었다 해도 올바르지 않으면 사정(邪定)이다.
그렇기 때문에 필정이라야 정결정(正決定)이라고 한다”라고 하였고,
또 어떤 사람은 “법답게 상응하는 의미가 있어야 결정의가 되니 견도가 법답게 상응하기 때문에 정결정이라 이름한다”라고 하였다.
【문】 모든 정(正)은 정성(正性)인가?
【답】 모든 정성이 바로 저 정이다.
【문】 정이면서 정성이 아닌 것도 있는가?
【답】 있다.
세제일법이 바로 그것이다.
【문】 무엇 때문에 세제일법은 정이면서도 정성이 아닌가?
【답】 혹 어떤 사람은 “중생은 무시이래로 번뇌를 일으키고 악을 행하며 사견에 전도되어 이 마음을 혼란스럽게 하다가 세제일법에 머무르면 번뇌를 제어해서 조복시킬 수 있다.
이 때문에 정체(正體)라고 한다.
이 유루는 번뇌에 얽매이는 것이므로 정성(正性)이라고 하지 않는다”라고 하였다.
또 어떤 사람은 “평등한 의미가 있어야 정(正)의 의미이니,
비유하면 저울에 매달려 있는 물건이 한쪽으로 치우치면 내려가는 것과 같다.
이와 같이 세제일법도 범부의 성품과 견도의 중간에 평등하게 머물다가 고법인이 일어나면 성도(聖道)에 치우침이 많다.
그러므로 평등의 의미가 정의 의미이다”라고 하였다.
또 어떤 사람은 “평등의 의미가 정의 의미이다.
불ㆍ벽지불ㆍ아라한 등은 상상법(上上法)에 평등하게 머문다.
이 때문에 평등의 의미가 정의 의미이다”라 하였고,
또 어떤 사람은 “평등하게 현전하여 행하는 의미가 있어야 정의 의미이다.
모든 수행인이 모두 함께 한 찰나에 머무르기 때문이다”라고 하였다.
또 어떤 사람은 “저 세제일법은 고법인과 네 가지 일에서 동등한데,
이른바 지(地)ㆍ근(根)ㆍ행(行)ㆍ연지(緣地)이다.
고법인이 어떤 지와 어떤 근을 의지하여 상응하고,
어떤 행을 행하고 어떤 법을 연하여도,
저 세제일법도 또한 마찬가지여서 고법인과 4사가 같기 때문에 정체(正體)라고 한다.
이 유루는 번뇌에 얽매이는 것이기 때문에 정성(正性)이라고는 하지 않는다”라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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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바사서(毘婆沙序)
석도연(釋道挻) 지음
비바사는 3장(藏)의 지귀(指歸)이고,
9부(部)의 사남(司南)이니,
사남으로 기준을 잡으면 온갖 미혹이 혁파되어 바로잡히고 지귀를 선양하면 사륜(邪輪)이 수레를 멈추게 된다.
석가께서 천휘(遷暉)하신 지 6백여 년이 지난 때에 북천축(北天竺)에 5백 아라한[應眞]이 오랫동안 꺼지고 신령스러운 횃불이 빛을 잃어 중생[含生]이 무명에 가리워져 진성(眞性)을 상실하였으므로 다시 은혜를 입혀야 할 때가 되었다고 여겼다.
비록 전대에 뛰어난 가전연자(迦旃延子)가 『아비담팔건도론(阿毘曇八健度論)』을 지어 퇴락하는 시운을 일으켜 세웠지만,
후진(後進)인 현인들이 그 종지의 극치[宗極]를 추구함에 이르러서는 유묵(儒墨)의 시비(是非)가 분연하게 다투어 일어났다.
이러한 연유로 심신을 명징하게 하고 현묘하게 관(觀)함을 통해 법상(法相)을 조사하고 간별(簡別)하여 『아비담비바사론(阿毘曇毘婆沙論)』을 지어 구구한 학설을 억지시켰다.
어떤 경우에는 학설의 상이점을 논별하고,
혹은 여러 가지 학설을 저울질하고 평하여 나타내니,
이치(理致)가 깊고 넓으며 문제(文蹄)가 아름답고 광박(廣博)하여 서역(西域)의 승달지사(勝達之士)가 이를 토대로 삼아 마음을 거울로 비추어 보지 않음이 없고,
이것으로써 조잡하여 식(識)을 밝히지 않음이 없었으며,
유유한 물결이 잠쇄(潛灑)하여 멀리 이국(異國)에까지 두루 미치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이치는 공허하게 운행되는 것이 아니고 사람으로 인하여 홍포되는 것이다.
대저거하서왕(大沮渠河西王)은 타고난 심성이 요원광대하고 정성을 표출함에 온화함이담겨 있고,
형적(形跡)은 분주한 왕무(王務)에 얽매였으나 정신은 현묘한 경지에 노닐며 구학(丘壑)과 임야(林野)에 낭관(廊館)을 지었다.
이로써 연수(淵叟)로 하여금 낚싯대를 버리게 하고 암일(巖逸)이 조정으로 찾아오게 하여 식심(息心)과 현객(玄客)이 승당입식(升堂入室)케 하였으니,
이는 성예(誠詣)가 발현하자 이치가 감응한 것이고 의도적으로 기약한 바는 아니었다.
그 중 도태(道泰)스님은 타고난 재주가 영민하고 온화한 기운이 맑고 시원스러워 많은 분야에 관심을 갖고 진기한 풍취(風趣)가있어서 멀리 이언(異言)까지 참구하였다.
그는 한(漢)나라에 이미 방등(方等)을 구비하고 있어서 불교의 유현한 종지(宗旨)가 대략은 천양되었고,
아직 연마하지 못한 것은 3장(藏) 9부(部)뿐이라고 생각하였다.
이런 연유로 석장을 짚고 험난함을 무릅쓰면서 총서(葱西)에 이르러서 범문(梵文)을 종합적으로 열람하여 고원한 의미와 종지를 계승하고 아울러 호본(胡本) 10만여 게송을 가지고 양경(涼境)에 도착하였다.
왕이 즉시 이를 번역하여 선양하도록 하였지만,
그는 환중(環中)에 갇혀서 혹 미진한 바가 있을까 염려되어 역장(譯長)의 자리를 양보하고 마음을 비워서 밝고 뛰어난 사람에게 부촉하기를 바랐다.
때마침 천축 사문인 부타발마(浮陀跋摩)가 두루 유행하면서 교화를 펴다가 양경(涼境)에 이르렀는데,
그는 불교의 근본 종지를 깨닫고 보다 깊고 넓게 연구하여 신회(神懷)가 심오하고 그윽하였으며,
그 의미를 연구하여 찬앙(鑽仰)하는 것은 더더욱 가늠하기 어려웠다.
마침내 을축세(乙丑歲,
425년) 4월 중순에 왕이 양성(涼城)의 내원(內苑)에 있는 궁사(宮寺)에 청하여 한가로이 머물면서 의미를 논구하고 전역(傳譯)하게 하였다.
사문 지숭(智崇)과 도랑(道朗) 등 3백여 명이 문장을 상고하고 의미를 평하였는데,
근본 종지에 역점을 두는 데 힘썼고 번거로운 것을 삭제하여 실제의 의미와 상즉하게 하니,
번역된 문장이 질박하면서도 비속하지는 않았다.
또 왕이 수레를 되돌려 이곳에 자주 왕림하여 유취(幽趣)를 도야하고 번역된 문장이 근본 이치에 걸맞게 하니,
한마디 한마디의 말에 그 이치가 빠짐없이 담기게 되었다.
정묘(丁卯, 427)년 7월에 도합 1백 권으로 끝마쳤는데,
양성(涼城)이 전쟁에서 크게 패하여 먼 지역까지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리고 역출했던 경본(經本)이 거의 모두 보잘것없이 되어 버렸다.
지금 양왕(涼王)이 중도(中道)의 가르침에 믿음을 일으켜 그윽한 종취를 탐구하고 연마하여 항상 신이(神異)한 전적이 이르러오면 그 가르침을 듣고자 간절히 바라면서 숭앙하였고,
그 해(427년) 초에 이미 역출된 경본 60권을 서사(書寫)하여 송대(宋臺)에 보내어 아직 이것을 듣지 못한 사람들에게 선포하였다.
바라건대 일신(日新)하는 아름다움이 지금 당대에도 창연하게 피어나고 후세에 이르기까지 복과 경사가 일어나 길이 전해졌으면 한다.
사문 도연(道挻)은 소소한 인연으로 말석에 참예하여 가르침을 들었는데,
이 가르침을 만난 기쁨을 저으기 홀로 침묵하고 있을 수만은 없어서 이때의 불사(佛事)의 인연을 대략 예시하여 후대의 현철(賢哲)에게 남긴다.
여래 멸도 후에,
법승(法勝) 비구가 『아비담심(阿毘曇心)』 4권을 만들고,
가전연자(迦旃延子) 『아미담(阿毘曇)』을 지어서,
모두 8편 44품을 갖추게 되었다.
그 후 500응진(應眞)이 『비바사(毘婆沙)』를 짓고,
거듭 8편을 해석하고,
또한 번역하여 100권의 책으로 만들었다.
그런데 후위의 태무(太武, 408~452)가 북량의 저거(沮渠, 397~439)를 격파한 이후에 쇠락하였다가
다시 수습하여 60권을 얻었다.
후대의 사람들이 그것을 분류하여 110권으로 만들었으니,
오직 번역본 3편만이 존재하고 5편은 유실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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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범어로는 laukikāgra-dharma.
세간최승법정(世間最勝法頂)ㆍ세간제일가행(世間第一加行)이라고도 한다.
2)
범어로는 sarvajña.
‘일체를 아는 자’라는 뜻으로 부처님을 달리 부르는 말이다.
3)
범어로는 māyā-upamatā.
‘불가사의 한 힘이나 환술로써 드러난 허깨비와도 같은 존재’를 가리킨다.
4)
범어로는 Saṃghāti.
비구가 걸치는 세 가지 옷 가운데 겉옷을 말한다.
5)
범어 Kātyāyanīputra의 음역어.
가전연니자(迦氈延尼子)라고도 한다.
6)
범어로는 aṣṭā-vimokṣa.
초선ㆍ2선ㆍ4선ㆍ공무변처정ㆍ식무변처정ㆍ무소유처정ㆍ비상비비상처정ㆍ멸진정의 8단계로 이루어진 정을 말한다.
7)
범어 khaṇḍa의 음역.
동일한 종류의 법을 모아서 한 몫으로 묶어놓은 것으로,
경론 중의 부문을 가리키는 명칭이다.
갈마(羯磨)의 작법을 기반으로 한 세부적인 수행생활을 규정하고 있다.
편장(篇章)에 해당한다.
8)
범어 sūtra의 음역어.
경(經)을 말한다.
9)
범어 vinaya의 음역어.
율(律)을 말한다.
10)
범어로는 dvādaśāńga-dharmapravacana.
부처님의 가르침을 내용과 형식에 따라 12부류로 나눈 것으로,
12분교(分敎) 혹은 12분성교(分聖敎)라고도 한다.
내용은 전승에 따라 차이가 있다.
11)
범어로는 sūtra.
산문체의 경전으로,
계경(契經)이라고도 한다.
12)
범어로는 geya.
산문에 이어 운문으로 내용을 요약하여 읊은 것으로,
응송(應頌)ㆍ중송(重頌)이라고도 한다.
13)
범어로는 vyākaraṇa.
보살이나 성문 등에게 성불의 시기를 예언한 것이다.
14)
범어로는 gāthā.
4언 또는 5언ㆍ7언의 운문으로,
풍송(諷頌)이라고도 한다.
15)
범어로는 udāna.
제자가 질문하지 않았는데 스스로 설하신 것으로,
무문자설(無問自說)이라고도 한다.
16)
범어로는 nidāna.
과거세에 부처님을 만나 법을 들은 인연 등을 설한 것이다.
17)
범어로는 avādana.
비유의 설명을 말한다.
18)
범어로는 ityuktaka.
부처님이나 제자들의 과거세의 인연을 말한 것으로,
본사(本事)라고도 한다.
19)
범어로는 jātaka.
부처님이나 제자들의 과거세의 인연을 말한 것으로,
본생(本生)이라고도 한다.
20)
범어로는 vaipulya.
올바르고 광대한 진리를 설한 것으로,
광경(廣經)이라고도 한다.
21)
범어로는 adbhuuta-dharma.
부처님의 신통력이 부사의함과 경전이 흥기한 인연이 부사의함 등을 설한 것으로,
희유법(希有法)ㆍ미증유법(未曾有法)이라고도 한다.
22)
범어로는 upadeśa.
교법의 의리를 의론하고 문답한 것으로,
논의경(論議經)이라고도 한다.
23)
곧,
아비달마의 대논사(大論師)를 가리킨다.
24)
범어로는 Sumerupravarta.
불교의 우주관에 의하면 세계의 중심에 서 있는 산으로 주변을 구산팔해(九山八海)가 둘러싸고 있으며,
그 높이가 8만 요자나(yojana)라고 한다.
25)
그는 원래 견계행자(犬戒行者)였으나 뒤에 불제자가 되었다고 한다.
의역하여 승군(勝軍)이라고 하기도 한다.
26)
범어로는 śūnyatā-samādhi.
일체법이 비어 있음을 관함으로써 마음이 번뇌를 여의고 전일해진 상태를 말한다.
27)
곧,
오타이(鄔陀夷,
Udayī)를 상대로 말씀하신 것을 가리킨다.
28)
범어로는 brahma-carya.
계를 지니어 음행 등을 멀리하는 것을 말한다.
29)
사(使,
anuśaya)란 번뇌의 다른 이름으로,
특히 ‘내면에 깃든 악한 성향’을 가리킨다.
30)
『대비바사론』에서는 ‘희론(戱論)을 즐기는 것’으로 되어 있다.
31)
석존의 사촌동생으로,
천안제일(天眼第一)이었다고 한다.
의역하여 무멸(無滅)이라고도 한다.
32)
바단타(婆檀陀)는 본 논에서 자주 인용되는 이름으로,
각천(覺天; 佛陀提婆)을 가리킨다고 여겨진다.
33)
이 논에서의 비유자(譬喩者)란 통상 경량부(經量部)의 일파를 가리킨다.
34)
성론(聲論,
śabda-śāstra)이란 문법을 의미한다.
35)
대비바사론에 의하면,
이는 불타데바(佛陀提婆 Buddhadeva)의 말이다.
36)
대론에서는 노수(老受)의 말이다.
37)
범어로는 Jñāna-prasthāna.
‘지혜의 출발’을 의미한다.
38)
범어로는 Mahākātyāyana.
본 논의 저자와는 동명이인으로,
부처님 재세시의 제자를 가리킨다.
39)
곧 앞의 부처님 재세시의 가전연자가 아닌,
지금 이 논을 지은 후대의 가전연자를 말한다.
40)
4선근(善根)의 인위(忍位)를 하인위(下忍位)ㆍ중인위(中忍位)ㆍ상인위(上忍位)로 분류하는데,
세제일법은 상인위의 직후에 일어나는 지위이다.
41)
범어로는 duḥkhe`nvaya-jñāna-kṣāntiḥ.
고제를 관찰해 얻는 지혜인 고법지의 직전에 얻는 마음을 말한다.
고류지인(苦類智忍)이라고도 한다.
42)
범어로는 samanantarana-pratyaya.
앞의 찰라심이 뒤의 찰라심의 원인이 된다고 간주되는 연으로,
4연(緣,
catvāraḥ pratyayaḥ) 가운데 하나이다.
등무간연(等無間緣)이라고도 한다.
43)
범어로는 Vibhāṣāvadin.
분별설부(分別說部)라고도 한다.
44)
범어로는 Vātsīputra.
20부파 가운데 하나로 상좌부에서 분파되었다고 한다.
45)
이른바 정구계(定俱戒)의 무표(無表)를 가리킨다.
46)
생ㆍ주ㆍ이ㆍ멸 등을 가리킨다.
47)
범어로는 Prāti.
2종의 득이 있다.
첫째는,
이전에 잃었거나 아직 얻지 못한 것을 지금 획득하는 것으로,
이것을 획(獲,
pratilambha)이라고 한다.
둘째는 이미 얻고나서는 잃어버리지 않는 것으로,
이것을 성취(成就,
samanvāgama)라고 한다.
48)
달분(達分,
nirvedha-bhāgīya)이란 ‘번뇌가 없는 세계의 통달로 향하게 된 계위에 이른 것’으로,
이른바 난(煖)ㆍ정(頂)ㆍ인(忍)ㆍ세제일법(世第一法)의 4선근위(善根位)를 가리킨다.
순결택분(順決擇分)이라고도 한다.
49)
4연(緣,
catvāraḥ pratyayaḥ)으로,
인연ㆍ차제연ㆍ경계연ㆍ위세연을 신역에서는 각각 인연(因緣)ㆍ등무간연(等無間緣)ㆍ소연연(所緣緣)ㆍ증상연(增上緣)이라고 한다.
50)
범어로는 vajra-upama-samādhi.
‘마치 금강처럼 견고하게 모든 미세한 번뇌를 분쇄하는 선정’이란 뜻이다.
51)
범어로는 kṣaya-jñāna.
4제의 완성을 아는 지혜를 말한다.
52)
견도(見道)에 들어가 무루지(無漏智)로 4제의 이치를 관하여 고ㆍ집ㆍ멸의 세 가지 지(智)가 생길 때 동시에 유루(有漏)의 세속지를 얻는 것을 일컫는다.
신역에서는 현관변세속지(現觀邊世俗智)라고 한다.
53)
신역에서는 잡수정려(雜修靜慮)라고 한다.
아라한 혹은 불환(不還)의 성자(聖者)가 제 4선(禪)에 들어가 먼저 여러 생각[多念]의 무루심(無漏心)을 일으키고 이것에 의하여 여러 생각의 유루심(有漏心)을 일으키며 차례로 시간을 단축하면서 한 생각[一念]의 유루에 의하여 다음에는 한 생각의 무루를 끌어 일으키는 것을 말하는데,
이와 같이 해서 그 힘으로 아래의 3정려를 섞어서 닦는다.
54)
범어로는 bhavāgra.
비상비비상처(非想非非想處)를 말한다.
3유(욕유ㆍ색유ㆍ무색유) 가운데 가장 위라는 의미이다.
55)
정려(靜慮)에는 4근분(近分:準備定)과 4근본(根本)이 있다.
이 중에서 초선(初禪)의 근분을 특히 미지정(未至定)이라 한다.
56)
초선으로부터 심작용이 미세해져감에 따라 거친 생각[尋]을 여의었으나 아직은 미세한 생각[司]이 남아있는 상태이다.
57)
지옥(地獄)ㆍ아귀(餓鬼)ㆍ방생(傍生)의 셋을 말한다.
58)
반드시 무간지옥(無間地獄)에 떨어지게 될 다섯 가지 무거운 죄업을 말한다.
다섯 가지란 부(父)ㆍ모(母)ㆍ아라한(阿羅漢)을 살해하고 부처님 몸에서 피를 내며 화합승(和合僧)을 파괴하는 것이다.
59)
신견(身見)ㆍ변견(邊見)ㆍ사견(邪見)ㆍ견취견(見取見)ㆍ계금취견(戒禁取見)의 다섯을 말한다.
60)
신역에서는 도류지(道類智)라고 한다.
61)
불퇴전(不退轉,
avaivartika)과 같은 뜻이다.
○ [pt op tr]
○ 음악공양, 나무불, 나무법, 나무승 mus0fl--Arthur H - Les Papous, C'est Nous!.lrc
● 아비담 논서가 일반대중에게 인기가 없는 사정
세속에서 생활하는 이들이 관심을 갖는 내용이 있다.
예를 들어 건강, 질병치유, 장수, 물질적 풍요, 지위. 유흥,
...등등에 관심을 집중시킨다.
그런데 경전은 사정이 그렇지 않다.
사람이 살아가면서 어떤 활동을 할 때는 그로 인해 큰 이익을 얻어야 한다.
그리고 이익을 크게 하려면 활동으로 인한 수익은 크게 하고 들이는 비용을 작게 해야 한다.
이익 = 수익 - 비용
그런 사정 때문에 수행자는 세속에서 일반적으로 관심을 갖는 것에 관심을 갖지 않게 된다.
세속에서 행하는 활동은 하나 같이 얻는 것은 보잘것 없다.
이에 반해 들어가는 비용은 막대하다.
예를 들어 어떤 사람이 사업을 한다고 하자.
그런데 5 조원의 비용을 들여서 이를 통해 겨우 100 억원의 수익을 얻는다고 하자.
그렇다면 대단히 어리석다.
그런데 현실에서 생활하는 이들의 상황이 이와 같다.
만일 1 년당 5 조원의 비용을 들인다면 이를 통해 최소한 5조 원 이상의 수익을 거둬야 한다.
그래야 겨우 현상 유지가 된다. 그 이하로 수익을 얻는 활동은 그 일체가 손해다.
그런데 현실 상황이 또 이와 같다.
그래서 1 년당 5 조원을 초과하는 수익을 얻고자 한다면
결국 경전에서 제시하는 내용에 초점을 맞추고 살펴야 한다.
그런데 망집 상태에서는 이런 내용 자체가 보이지 않게 된다.
즉, 눈에 보이지 않는 비용이 우선 보이지 않는다.
또 당장 눈에 보이지 않는 수익이나 수입도 역시 보이지 않게 된다.
예를 들어 매 순간 137 억원이나 5 조원을 초과하는 수익을 얻는 내용이 보이지 않게 된다.
즉, 경전 표현을 빌릴 때 무량한 복덕을 얻는 방안 자체가 눈에 보이지 않게 된다.
한편 다시 그런 수익을 비용을 가장 적게 해 얻는 방안도 역시 보이지 않게 된다.
이익 = 수익 - 비용의 계산식에서 이익을 키우려면
당연히 비용을 가장 적게 해야 한다.
그래서 어느 정도 비용을 적게 해야 하는가를 기업 경영가에 문제로 제출해보자.
그러면 겨우 원료비나 임금 이자비용 등을 적게 들이면 된다. 이 정도로 답하기 쉽다.
그래도 0 이하로는 잡기 힘들다.
그러나 수행자는 이 비용을 다시 마이너스(-) 형태로 무량하게 만드는 방안을 채택하게 된다,.
그래서 비용 부분에서부터 무량한 마이너스 비용을 통해
다시 무량한 수익을 얻는 활동을 하게 된다.
그리고 이것이 수행이다.
이들이 당장 눈에 보이지 않을 수 있다.
우선 감가상각비용만 놓고 살펴도 그 특성이 그렇다.
건물이나 기계나 장비 또는 자동차가 폐기 될 때까지는 그 소모비용이 당장 눈에 보이지 않는다.
자동차 하나만 놓고 보아도 페차자아에 들어가기 직전까지도 자동차가 굴러간다.
그래서 외관상으로는 그 소모 비용이 눈에 보이지 않는다.
그래서 평소 의식하지 못하고 외면하기 쉽다.
그리고 폐차장에 자동차가 들어가 0 의 상태가 된 후에야 회계장부를 통해 겨우 의식하기 쉽다.
그런데 사람의 생명과 신체도 사정이 같다.
사람이 어떤 활동을 하는 가운데 사람의 신체와 생명이 소모되게 된다.
한편 현실적으로 각 개인의 생명은 유한하다.
아무리 길게 잡아도 100 년을 채 넘지 못한다.
그래서 개인이 어떤 활동을 하던지 그에 따른 생명 신체 감가상각비용이 발생한다.
이는 법인 회계와 사정이 다르다.
법인은 일종의 로보트와 같다.
그러나 개인이 활동하는 경우는 사정이 이와 다르다.
그래서 한 개인이 활동할 때는 이런 생명과 신체의 감가상각비용부터 잘 계산해야 한다.
또 이를 위해서는 한 사람의 생명과 신체가 갖는 가치액부터 잘 계산해야 한다.
이를 위해 다음 식을 먼저 검토해야 한다.
자신의 생명, 신체의 가치 > 우주의 가치 > 전 세계 국가자산의 가치 > 1 국가의 1년 예산액 > 한국 2020 년 1년 예산액 (약 500 조)
그런 가운데 이런 생명과 신체가 100 년을 지나지 않아 폐기처분되어 0 이 된다.
따라서 한 개인이 어떤 활동을 할 경우 이런 생명신체 감가상각비용을 먼저 고려해야 한다.
이런 바탕에서 생명 신체의 감가상각비용을 계산해보자.
그런 경우 '최소' 500 조원 이상을 기간별로 나눠 비용 부분에 반영해줘야 한다.
그런데 이를 계산하면 막대하다.
1년당 개인의 생명 신체 감가상각비용 '>' 최소' 5 조원
1일당 개인의 생명 신체 감가상각비용 '>' 최소' 137 억원
이처럼 막대한 생명 신체 감가상각비용이 소모된다.
이것도 최소한으로 잡아 부등호 기호를 사용해 표현해 그렇다.
그런데 그렇게라도 숫자로 환원시키지 않으면 대부분 이 비용액 자체를 의식하지 못한다.
그래서 각 개인은 이익 = 수익 - 비용과 관련된 기본 가치 회계원리를 이해해야 한다.
그런 가운데 사업이나 기타 활동에 임해야 한다.
그리고 평소 이런 감가상각비용을 넘는 수익을 얻으려고 노력해야 한다.
수행분야에 초점을 맞추어야 하는 사정은 바로 이런 사정이다.
현금 수익을 얻는 활동으로는 아무리 노력해도 위 부등호 기호로 표시된 현금 수익을 얻기 힘들다.
그러나 수행은 가능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수행자는 어떤 방편을 통해 최소한의 의식주를 해결한 이후에는
이런 수행부분에 초점을 맞추게 된다.
그리고 그런 활동을 통해서 무량한 복덕을 얻고자 하는 것이다.
그리고 수행자는 이런 비용부터 마이너스 형태로 무한대로 만든다.
이런 것이 수행의 의미다.
이런 기본 가치 회계 원리를 이해한다고 하자.
그렇다면 당장 눈에 보이는 것만 붙잡고 임하면 곤란하다.
그런데 이런 가치 회계 기본 원리부터 모른다고 하자.
그런 경우에는 시장에서 숫자로 표시해주는 가격표만 붙들고 임하게 바뀐다.
또 그렇게 되면 경전이나 논서에서 초점을 맞추는 주제는 관심을 갖지 않게 된다.
경전과 논서는 아무리 살펴도 시장에서 가격표를 붙여주지 않는 내용들로만 되어 있다고 여기게 된다.
물론 가격표를 붙이지 못해도 세속에서도 건강이나 장수 등은 가치를 인정한다.
그런데 경전에서 제시하는 내용은 이런 수준이 아니다.
한 생을 무병장수로 지낸다. 이런 것은 경전에서는 수준 이하의 가치다.
무량겁을 걸쳐서 하늘에서 지낸다. 이런 것조차도 수준 이하로 놓게 된다.
경전에서 추구하는 가치 상태가 이와 같다.
그런데 이런 내용은 세속의 관점에서 보면 너무 비현실적이라고 여기게 된다.
그래서 경전 내용에 관심을 갖지 않게 된다.
그러면 현실에서 망집에 바탕해 탐욕 분노 어리석음의 번뇌에 묶여 사역을 당하게 된다.
전반적으로 경전과 논서 내용이 인기가 없는 사정이 이와 같다.
그런 가운데 내용이 이해하기 쉽고 재미라도 있으면 좀 덜할 수 있다.
그런데 논서는 조금 사정이 더 심하다.
지엽말단적인 부분을 상당히 자세하게 서술한다.
서술하는 입장에서는 체계를 세워 제시하는 것이 좋다고 본다.
그런데 읽는 입장에서는 일정한 체계에 따라 제시되면 딱딱하게 여기게 된다.
그래서 거부감을 갖는다.
일반적으로 시나 소설 이런 형태를 좋아한다. '
그리고 논문 형태는 싫어한다.
그래서 논서 분야가 대중들에게 인기가 없다.
논서를 놓고 처음부터 읽어보면 그 사정을 바로 알 수 있다.
숲에서 벌들이 꽃 사이를 분주히 날아다닌다고 하자.
이 때 벌 치는 이는 숲 전체의 상태를 관하고 올해는 붤꿀통이 몇개나 가득차게 될 지를 념두에 둔다.
그런데 욕계에서 마 파순이 욕계 내 중생을 바라보는 관점과 이와 같다.
그런데 수행자는 이 비유에서는 우주나 아니면 최소한 지구 전체를 관하고 임하는 것과 비슷하다.
그래서 벌의 입장에서는 도무지 이해하기 힘든 상태가 된다.
과거에 서산대사가 시를 써서 큰 사회 문제가 되었다고 전한다.
서산대사가 세속상황을 개미집에서 살아가는 개미에 비유해 시를 썼다.
그런데 이 시가 결국 왕궁에 사는 임금을 모욕한 것으로 고소가 되었다고 한다.
그런데 현실 상황이 사실은 이와 같다.
500 년 왕궁에서 지내는 것이 알고보면 손오공이 500 년간 돌무덤에 갇혀 지내는 것과 마찬가지다.
부처님 제자 가운데 아나율존자는 눈이 먼 상태였다고 한다.
그래서 옷을 꿰며려고 바늘에 실을 넣어줄 이를 찾았다고 한다.
이 때 일반적으로 관심을 갖지 않게 되기 쉽다.
그런데 부처님이 가장 먼저 다가가 바늘에 실을 꿰어주었다고 전한다.
그리고 복덕을 얻는 데 있어서는 부처님이 최고라고 제시했다.
그런데 그런 부처님이 또 평소 길에 떨어진 황금은 외면한다.
그리고 남이 주지 않는 것을 얻으려고 해서는 안 된다고 제시한다.
그런데 이런 간단한 내용이 바로 가치 회계 원리와 관련된다.
수익 - 비용 = 이익의 계산식을 놓고 보면
하나는 무량한 복덕을 얻는 길이다.
그런데 또 다른 하나는 막대한 비용을 들여 보잘것 없는 수익만 얻고 막대한 손해를 받는 길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외관만 놓고 보면 각 경우가 모두 그 정반대인 것처럼 보이게 된다.
그래서 이런 시각 차이를 일으킨다.
참고로 이익 = 수익 - 비용 이런 표현은 경제학이나 회계학 분야마다 조금 표현이 다르다.
그러나 그 표현히 나타내고자 하는 바는 마찬가지다.
이익 = 수익 - 비용
이윤 = 수입 - 비용
이익이나 이윤을 극대화하려면 우선 비용을 최소화해야 한다.
비용을 마이너스 형태로 무량하게 만들어야 한다.
동시에 수익( 수입)은 무량하게 또 만들어야 한다.
이런 활동을 찾게 되면 결국 경전과 논서 내용에 초점을 맞추어야 한다.
● 가치의 뿌리와 발생의 뿌리의 차이
논서는 지엽말단적인 주제를 세세하게 살핀다.
그런데 그렇게 살피는 기본 배경 사정부터 잘 이해해야 한다.
사과나무를 놓고 생각해보자.
사과나무는 처음 씨에서 출발했다.
그리고 뿌리에서 싹이 발생한다.
줄기가 나타나고 다시 곁가지가 나타나고 잎이 열린다. 이런 식이다.
그런 가운데 꽃이 피고 열매가 맺혀진다.
이런 가운데 사과나무가 왜 가치있는가를 살핀다고 하자.
그러면 대부분 사과나무의 사과 열매 때문에 그렇다고 답하게 된다.
이는 독초와는 성격이 다르다.
이 경우 열매의 발생과정과 가치의 발생과정은 거꾸로 생각하게 된다.
열매의 발생과정은 뿌리 -> 싹 -> 줄기 ,,, 이런 순서라고 하자.
그런데 가치의 발생과정은 이 반대다.
열매가 가치가 있다.
그렇기 때문에 그 열매를 맺게 하는 꽃이 가치가 있다.
이런 식으로 내려가게 된다.
결국 사과나무 뿌리가 가치가 있는 것은 이를 통해 얻는 사과 열매 때문이다.
반대로 독초의 뿌리가 안 좋다고 보는 것은 이를 통해 나타나는 독 때문이다.
논서가 지엽적인 주제를 세세하게 살핀다.
이런 논의는 그것만 놓고 보면 그렇다.
그런 내용을 세세하게 문제삼고 살피는 사정을 도무지 이해하기 힘들 수 있다.
그런데 이런 지엽말단적인 논의가 가치를 갖는 사정도 이와 같다.
예를 들어 핵심적인 가치를 갖는 주제가 있다.
이것이 대단히 가치가 있다.
그런데 이런 내용을 이해하려면 기본적으로 또 다른 어떤 내용을 살펴야 한다.
그리고 그 내용을 이해하려면 다시 또 다른 어떤 내용도 이해해야 한다.
이런 식으로 가치의 체계가 구성된다.
그런 가운데 논서에서 지엽말단적으로 세세하게 살피는 주제가 문제된다.
아비담 논서에서 처음 세제일법에 대해 살핀다.
그런데 이런 세제일법을 그처럼 살피는 사정도 마찬가지다.
○ 고려할 생존 기간과 생사과정의 차이
가치 회계 원리를 적용해보자.
생사현실에서 개인이 어떤 활동을 하던
비용을 초과할 수익을 거둬야 한다.
그리고 수익은 되도록 무량한 최고 수익을 얻어야 한다.
동시에 비용은 최소화해야 한다.
결국 마이너스 형태로 무한대가 되어야 한다.
그래서 극대 수익을 극소 비용으로 얻어내야 한다.
힌퍈 개인이 어떤 활동을 하던 생명과 신체의 막대한 감가상각비용이 발생한다.
그런데 수행자의 입장은 우선 세속인의 사정과 다르다.
우선 생사문제에서 개개인 입장따라 단멸관을 취하기도 한다.
이는 한 개인의 삶은 죽음으로서 모두 끝난다는 입장이다.
즉 사후 그 개인과 이어지는 것은 일체 없다는 입장이다.
그런 경우 위 생명과 신체 감가상각비용 계산은 100 년이 지나면 0 으로 놓고 계산에 임해야 한다.
그런데 생사 문제를 자세히 살피면 사정이 본래 그렇지 않음을 이해하게 된다.
즉, 단멸관이 옳지 않다.
그래서 이를 제거하면 일단 생존 기간 자체는 무량한 상태로 놓고 살펴야 한다.
다만 이 경우 일반적인 경우는 오히려 앞 경우보다 더 사정이 나쁘게 된다.
우선 생사현실에서 분단 생사과정을 겪게된다.
즉 한번 생사를 겪을 때마다 한 생의 내용이 포맷 삭제 처리된다.
그런 가운데 다음 생은 다시 3 악도에서 새로 출발해야 하는 상태가 된다.
이런 경우는 감가상각비용을 위처럼 놓고 계산하면 큰 오류가 발생한다.
이 경우는 100 년이 지나면 단순히 0 의 상태가 되는 것이 아니다.
그가 행한 업에 따라 때로는 무량한 마이너스 상태가 된다.
따라서 이런 상태가 되면 큰 문제다.
수행을 시작하려면 기초적으로 이 사정을 이해해야 한다.
즉 한 개인이 사망하여 화장터에 들어간다고 하자.
그런데도 그 개인이 이후 다시 생명을 이어가게 되는 배경 사정을 먼저 이해해야 한다.
그것은 현실에서 평소 자신의 정체를 잘 파악하는 문제와 관련된다.
그래서 평소 스스로 자신이라고 여기고 대하는 내용의 정체부터 잘 파악해야 한다.
그래야 비로소 앞과 같이 단멸관을 잘못 취하지 않게 된다.
그런 바탕에서는 생사현실에서 고려할 기간을 짧게 잡지 않게 된다.
그리고 무량겁에 걸친 생사문제를 고려하게 된다.
그런 가운데 일반적인 경우는
분단 생사과정을 통해 생사고통을 받아나가게 된다.
이런 상태를 무량겁에 걸쳐 반복해나가게 된다.
그러나 수행자는 이와는 사정이 다르다.
우선 변역생사과정을 통해 무량한 기간 수행을 이어가게 된다.
그리고 이후 3 악도의 생사고통을 벗어나게 된다.
이런 내용이 수행이 현실에서 갖는 기능이다.
망집에 바탕해 상을 취하고 신견을 갖는다고 하자.
그러면 그 주체는 생사현실에 묶이게 된다.
그리고 그런 망집에 바탕해 업을 행한다고 하자.
그러면 그로 인해 3 악도의 생사고통을 받게 한다.
그런데 수행을 통해 망집을 제거하고 업의 장애를 제거한다고 하자.
그러면 3 악도에서 장구하게 겪는 생사고통이 제거된다.
그런데 이런 성인의 상태가 되면 무엇이 달라지는가.
그리고 최소한 하늘과 인간 세계를 오가게 된다.
이를 3 악도에서 고통을 받게 되는 상태와 비교하면 그 격차가 더욱 크다.
그리고 망집에 바탕한 신견을 완전히 제거하면 생사의 묶임에서 벗어난다.
그리고 다시 중생 제도를 위해 생사현실에 임한다고 하자. 세상에서 누구나 살필 때 고통도 있고 즐거움도 있다.
그리고 고통도 아니고 즐거움도 아닌 것도 있다.
예를 들어 수행을 통해 처음 수다원의 지위에 이르렀다고 하자. 그리고 고통도 아니고 즐거움도 아닌 것도 있다.
그런데 이런 성인의 상태가 되면 무엇이 달라지는가.
그리고 최소한 하늘과 인간 세계를 오가게 된다.
이를 3 악도에서 고통을 받게 되는 상태와 비교하면 그 격차가 더욱 크다.
그리고 망집에 바탕한 신견을 완전히 제거하면 생사의 묶임에서 벗어난다.
그렇게 되면 분단생사과정이 이후 변역생사형태로 바뀌게 된다.
그리고 생사과정을 거쳐 수행을 이어 나가게 된다.
그리고 그 공덕이 쌓이게 된다.
그래서 무량한 복덕과 지혜를 얻는다고 하자.
그리고 그런 수행도 유희 자재 신통하게 행한다고 하자. 그러면 그로 인한 수익이 더욱 막대하다.
그래서 수행이 갖는 이런 가치만 계산해도
수익 - 비용의 구조자체가 앞과 달라진다.
예를 들어 50 년 후에 사망해 이후 축생의 상태로 지내야 할 경우가 있다고 하자.
그런데 어떤 수행자가 수다원의 지위에 이르러 10 년 후에는 하늘에 태어나 살아가는 경우라고 하자.
그리고 이 각 경우 1년당 소모되는 비용액을 계산해 비교해보자.
그런데 뒤의 경우는 감가상각비용 계산 자체를 거꾸로 달리 해야 한다.
이런 경우는 하루당 생명 신체 감가상각 비용이 마이너스 형태가 된다고 보아야 한다.
일정 기간후에 그 가치가 0 이 되거나 마이너스 상태가 되지 않고 그 반대가 되기 때문이다.
그런데 한 주체가 이 가운데 어떤 형태로 나아가는가는 개인의 선택 문제다.
수행은 이 가운데 수익 - 비용의 구조를 가장 바람직한 형태로 만드는 방안이기도 하다.
○ 변역생사과정과 수행자의 자산형태
일반적으로 각 개인은 망집에 바탕해 가치를 추구한다.
그런데 각 개인이 한 생에서 얻는 가치는 대부분 다음 생으로 보전 이전시키지 못하는 형태다.
망집에 바탕해 그런 성격을 갖는 내용에 초점을 맞추고 활동하기 때문이다.
수행을 통해 얻는 가치는 매 경우마다 다음 생으로 무한히 보전 이전될 수 있는 형태가 대부분이다.
예를 들어 수행자의 자산 항목에 들어가는 대표적 10 가지가 그와 같다.
신장(信藏)ㆍ계장(戒藏)ㆍ참장(慚藏)ㆍ괴장(愧藏)ㆍ문장(聞藏)ㆍ시장(施藏)ㆍ혜장(慧藏)ㆍ염장(念藏)ㆍ지장(持藏)ㆍ변장(辯藏).
그래서 수행자는 평소 가치의 정점으로 불법승 3 보를 의존해
이와 같은 자산을 얻고자 노력한다.
그리고 그렇게 수행을 통해 얻는 수익을 이런 형태로 축적 보관하게 된다.
이런 사정으로 망집에 바탕해 세속적인 주제에 초점을 맞추면 곤란하다.
그런 망집의 정도나 기간에 비례해 손해가 된다.
따라서 수행은 망집에 바탕해 일으킨 일체 소원을 남김없이 다 제거하는 것을 목표로 한다.
이것이 무원무작 삼매의 내용이다.
그런 소원을 붙잡고 추구하면 추구하는 시간당 막대한 손실을 보게끔 되기 때문이다.
현실에서 망집을 일으킨 경우 이 내용이 보이지 않는다.
그래서 그런 활동으로 몇 만원만 현금 수입이 생겨도 이에 초점을 맞추고 집중하게 된다.
그리고 그런 활동에 생명과 신체를 소진시킨다.
그리고 그런 업으로 인해 3 악도에 들어가 묶이게 된다.
이런 사정을 기본적으로 이해해야 한다.
그런데 이런 사정을 이해하지 못한다고 하자.
그리고 가치 회계 계산을 잘 하지 못한다고 하자.
그러면 매 경우 엉뚱한 선택을 하게 된다.
예를 들어 1년에 5 조원의 비용을 들여 10 억원 현금 수익을 얻고 좋아한다.
또는 손과 발을 끊고서 대신 1 억원 벌었다고 좋아한다.
이런 경우가 현실 상황이다.
다만 그 비용이나 손실액이 당장 눈에 보이지 않기에 이렇게 임하는 것이다.
그래서 이 문제를 잘 검토해야 한다.
현실에서 각 개인이 가치 있다고 여기며 축적하는 자산형태가 있다.
금은보석, 동산(원료, 기계) 부동산(건물 토지) 신용자산(예금 등등) 등등이 그런 것이다.
그런데 가치회계 원리 이해를 위해 다음상황을 살펴보자.
한 개인이 이런 자산을 얻기 위한 활동을 했다고 하자.
그런 가운데 대략 3 조원의 자산가가 되었다고 하자.
그런데 이런 활동을 통해 어느 순간 건강이 문제가 발생했다고 하자.
예를 들어 어느 순간 두 눈이 멀게 되었다고 가정하자.
이런 경우에 그가 축적한 자산 전체는 도대체 어떤 가치를 갖는가를 생각해보자.
현실에서 단순히 두 눈만 먼 상태가 되어도 이 문제가 심각해진다.
눈을 통해 좋다고 본 내용은 이 상황에서 일체 얻을 수 없게 된다.
그래서 의미를 갖지 못하게 된다.
더 나아가 생사과정에서 이 문제는 좀더 심각하다.
그런데 수행으로 축적시키는 형태의 자산은 그렇지 않다.
따라서 생사현실에서 시공간 여행 과정에서는 이를 잘 이해해야 한다.
어떤 형태의 자산이 무량겁에 걸쳐 계속 보전할 수 있는가를 고려해야 한다.
그래야 무량겁에 걸쳐서 복덕을 얻고 유지할 수 있다.
○ 다른 중생의 가치와 선한 수행
한편 각 개인은 자신의 생명과 신체의 가치는 대단히 높게 평가한다.
그래서 다음과 같이 평가한다.
자신의 생명, 신체의 가치 > 우주의 가치 > 전 세계 국가자산의 가치 > 1 국가의 1년 예산액 > 한국 2020 년 1년 예산액 (약 500 조)
그런데 다음 문제에서는 이와 달리 임한다.
예를 들어 다른 생명 신체의 가치는 얼마인가가 문제로 제시된다고 하자.
예를 들어 소 돼지 양 오리의 생명과 신체의 가치는 얼마인가.
이렇게 문제가 제시된다고 하자.
그러면 현실에서 많아야 몇백만원도 안된다고 대부분 여긴다.
그런데 그렇게 임하면 그 평가액으로 자신의 생명과 신체도 평가된다.
이것이 물리적 작용 반작용의 법칙과 사정이 비슷하다.
자신이 다른 생명의 신체나 생명의 가치를 낮게 평가한다고 하자.
그런 바탕에서 업을 행한다고 하자.
그러면 다른 생명들도 자신을 그렇게 대하게 된다.
그래서 결과적으로 그렇게 된다.
따라서 이런 점을 미리 주의해야 한다.
○ 고통을 제거하는 수행[4제법]의 가치
한편 다음 가치 회계 문제를 살펴보자.
자신이 생존을 장구하게 되었다고 가정하자.
그래서 생명과 신체는 장구하게 유지된다.
그런데 이상하게 자신이 붙잡혀서 철봉에 거꾸로 매달려서 매순간 물고문을 당하는 상태로 있게 되었다고 하자
이런 경우 하루만 있어도 곧 차라리 죽고 생존하지 않는 것이 이보다 더 낫다고 판단하게 된다.
그런 경우 이런 고통이 제거된 상태가 갖는 가치를 다시 부등호로 비교 판단할 수 있다.
그런 고통을 당하는 상태 (-) < 죽고 생존하지 않는 상태 (-)
이 식을 반대로 변환시켜보자.
하루동안 '고통을 당하지 않고 평안하게 지내는 상태의 가치 > 생명의 가치
그런데 처음
생명과 신체의 가치를 비교판단했다.
자신의 생명, 신체의 가치 > 우주의 가치 > 전 세계 국가자산의 가치 > 1 국가의 1년 예산액 > 한국 2020 년 1년 예산액 (약 500 조)
그래서 이 식을 이어 붙일 수 있다.
하루동안 그런 고통을 당하지 않고 평안하게 생존하는 상태의 가치 > ... > 최소 500 조
그러면 이제 이런 식을 바탕으로
무량겁에 걸쳐 고통에서 벗어난 상태가 갖는 가치를 살필 수 있다.
그런데 수행이 곧 무량겁에 걸쳐 받을 고통을 제거하게 한다.
따라서 수행이 생사현실에서 대단히 중요하다.
3 악도에서 받게 되는 고통문제를 현실적으로 살펴보자.
현실에서 이런 현상은 대단히 바람직하지 않다.
그런데 현실에서 발생한다.
예를 들어 어떤 축산가에서는
대롱에 부리를 철사로 묶어 각 오리를 고정시켜 놓고 사육한다.
그리고 대롱으로 먹이를 강제로 주입해 키운다.
그래서 오리가 대략 1 개월 동안만이라도 그렇게 지내다 도살당한다고 하자.
그러면 아무리 말 못하는 동물이라고 해도 대단한 스트레스와 고통을 겪게 된다.
그런데 오리를 키우는 입장에서 이렇게 가혹하게 임하는 사정이 있다.
그렇게 오리가 스트레스를 받고 지내야 간이 커진다는 것이다.
또 그래야 시장에서 수익을 많이 거두게 된다는 것이다.
마치 벌치는 이가 숲에서 꽃을 향해 날아다니는 각 벌들을 대하는 입장과도 비슷하다.
즉 욕계내에서 파순이 욕계전체를 관하는 입장도 사정이 이와 같다.
그런데 이것이 생사현실 전체의 상황이기도 하다.
그래서 최소한 생사과정에서 3 악도에 묶이게 되면 대단히 곤란하다.
반대로 이런 상태를 벗어나게 하는 수행의 가치도 잘 이해해야 한다.
○ 지엽말단적인 논서 내용의 가치
가치와 관련해 이런 기본 판단이 되어야 비로소
경전과 논서의 가치를 비로소 인식할 수 있다.
또 그래야 이제 논서에서 다루는 지엽말단적인 내용에 초점을 맞추고 살펴가게 된다.
그렇지 않으면 당장 1000 원짜리 회계 문제가 발생해도
상대와 시비를 따지러 나서게끔 된다.
예를 들어 가게에서 어떤 물건을 샀는데 잘못해 1000원을 더 지불했다고 하자.
현실에서 이런 상황을 만나면 대부분 이를 따지러 가게를 향해 나가게 된다.
그리고 대신 경전과 논서는 집어 던진다.
위 경우가 바로 막대한 생명신체 비용을 들여
겨우 1000 원 현금 수익을 얻는 상태가 된다.
그리고 대신 얻을 수 있는 막대한 수익을 그만큼 얻지 못하게 된다.
현실에서 이런 현상은 그런 망집을 일으킨 상황에서 발생한다.
그런데 현실상황에 이런 경우가 거의 대부분이다.
그런데 현실에서 그런 매 경우마다 그렇게 임하지 않아야 한다.
그와는 반대로 임해야 한다.
즉, 그런 것은 무시하고 외면해야 한다.
대신 경전과 논서를 살피고 그 내용을 배위 익혀 현실에 실천해가야 한다.
그것이 한마디로 수행이다.
그렇게 해야 막대한 수익을 가장 최소 비용을 통해 얻게 된다.
또 이런 수행으로 얻는 이익은 숫자로는 도저히 표기할 수 없는 상태가 된다.
이는 결국 경전에서 무량공덕 무량복덕 무량수명 무량 광명 지혜 이렇게 표현하는 내용이다.
이런 배경 사정을 이해해야 이제 논서가 다루는 주제에 초점을 맞추게 된다.
예를 들어 논서에서 세제일법 등을 다룬다고 하자.
또 하나하나 지엽말단적인 항목마다 자세하게 논의한다.
그런데 그런 가지나 잎 하나하나가 가치가 막대한 사정은 위와 같다.
우선 해탈과 니르바나를 이루고 생사현실에 임해 중생제도를 하는 수행이 가치가 막대하다.
그런데 그 이전에 수행자 개인부터 생사고통을 벗어나 성인의 지위에 이르러야 한다.
그래서 이런 상태가 갖는 가치가 막대하다.
이는 곧 4 제법 내용과 관련된다.
또 사정이 그렇기에 세속에서 처음 이 상태로 진입해 들어가는 수행이 중요하다.
그리고 세제일법은 세속상태에서 성인의 지위로 넘어가는 경계선 부분에 위치한다.
그래서 세속에서 가장 가치가 높은 상태가 된다.
가치의 뿌리 체계가 이와 같다.
그래서 처음 이런 내용을 제시해 살피게 된다.
한편 현실에서 일반적으로 중요하다고 여기고 문제삼는 내용이 따로 있다.
그런데 이런 내용의 가치와 수행의 가치를 비교한다고 하자.
그런 경우는 반딧불 빛을 태양의 빛과 비교하는 것과 비슷하다.
◧◧◧ para-end-return ◧◧◧
참고 용어풀이
ꊱ세제일법
‡세제일법
ꊱ사선근
‡사선근
◆vhka1983
◈Lab value 불기2564/12/19 |
○ 2020_0606_181435_can.jpg ○ [pt op tr] 예술작품 사진 공양, 나무불, 나무법, 나무승 Claude-Monet-the-seacoast-of-pourville-low-tide ○ 2020_0525_172609_can.jpg ○ [pt op tr] 꽃 공양, 나무불, 나무법, 나무승 ○ [pt op tr] 아름다운 사진 공양, 나무불, 나무법, 나무승 Baeyer-Volhard_LMU_1877 ♥Barry Reno ○ [pt op tr] 아름다운 풍경사진 공양, 나무불, 나무법, 나무승 With the image 'Google Earth & Map data: Google, DigitalGlobe' ○ 음악공양, 나무불, 나무법, 나무승 mus0fl--Michel Fugain - Les Gens Irremplaçables.lrc Michel Fugain - Les Gens Irremplaçables ♥단상♥없어젼 버린 가치 회계학 책 찾기 오늘 가치 회계에 관한 기초적 내용을 살폈다. 이들 내용 역시 오래 전에 많이 반복한 내용이다. 그런데 조금 회계학 내용을 인용하는 것이 필요해 회계학 책을 찾아보게 된다. 그런데 회계학 책이 어느 순간 부터 사라졌다. 그리고 찾아도 보이지 않는다. 분명 연구실 어딘가에 있을 것 같은데 보이지 않는다. 현실에 무언가 분명히 있다고 보지만, 아무리 찾아도 보이지 않는 내용이 있다. 이런 문제가 현실에 많다. 수행분야에서는 보리심이 그런 성격을 갖는다. 그리고 수행자가 처음 보리심을 일으키고 4홍 서원을 갖고 수행에 임하는 가치가 대단히 크다. 여러 수행항목을 넣고 상대적으로 비교할 경우에도 그렇다. 경전에서도 이 사정을 다양한 형태로 나타낸다. 10 억 세계에 보물이 가득하다. 그런데 이 보물을 다시 보시하면 그 가치가 더 막대하다. 그런데 보리심을 일으키는 가치는 이보다 더 막대하게 크다. 이런 형태로 그 가치를 비교해 제시하게 된다. 그 정도로 가치가 크다. 그런데 이 보리심은 본래 각 개인마다 다 이미 갖추고 있는 상태다. 그럼에도 정작 현실에서 이 보리심을 일으켜 임하는 경우가 대단히 희박하다. 그 사정도 경전에서 제시한다. 그렇게 되는 사정이 있다. 망집이 그 주체의 마음을 덮어 가리기 때문이다. 그래서 스스로 보리심이 어디 있는가 자체를 파악하지 못하게 된다. 또 보리심을 일으키려 할 경우에도 그 보리심이 어디에 있는가부터 파악하지 못하게 된다. 그래서 상대적으로 생사현실에서 이 보리심을 일으킨 상태가 희박하다. 그래서 보리심을 일으킨 상태가 갖는 가치가 막대하다. 보리심은 표현만 놓고 보면 깨달음의 마음이다. 생사현실에서는 그런 보리심을 갖고 임해야 생사현실에서 무량겁에 걸쳐 받는 고통을 제거할 수 있다. 또 그런 보리심을 갖고 임하면 다른 중생이 공연히 생사고통을 받아나간다는 사정도 관하게 된다. 그래서 보리심을 일으키면 당연히 자비심을 바탕으로 중생을 생사고통에서 벗어나게 하고자 하는 마음을 일으키게 된다. 보리심은 그래서 곧 사홍서원을 일으켜 수행자가 임하는 상태와 동일시된다. 그런 사정으로 기본 가치 회계 내용을 살핀다. 그런데 옆에서 이상한 노래를 마침 듣게 된다. 본래 페이지를 작성할 때 기본적으로 랜덤 추출되는 곡을 페이지에 붙이게 된다. 그런데 글을 작성하다가 이상한 노래를 듣게 된다. 노래에서 공연히 쓸모없이 공돈을 아끼려다가 우주적인 가치를 갖는 내용을 그로 인해 잃어버린다는 내용을 듣게 된다. 그래서 이 곡을 다시 붙여 놓게 된다. ○ 음악공양, 나무불, 나무법, 나무승 mus0fl--Guesch Patti - Quand On N'a Que L'amour.lrc Guesch Patti - Quand On N'a Que L'amour 생각해보면 이것이 바로 생사현실의 문제점이다. 대부분 망집에 바탕해 생사현실에 임한다. 그런 가운데 망집에 바탕해 엉뚱한 것을 좋다고 잘못 여긴다. 또 그런 가운데 좋음을 대단히 아낀다. 그리고 다른 이에게 전혀 베풀지 않는다. 그리고 그와 반대되는 성격의 업에 초점을 맞추고 분주히 활동한다. 조금 더 좋음을 얻기 위해 다른 생명이 집착하는 것들을 함부로 침해한다. 예를 들어 좀더 맛있는 식사를 위해 다른 생명의 사체를 분주히 찾아 헤매기도 한다. 그런데 반대로 자신의 좋음을 다른 생명이 조금이라도 침해하면 이와 반대로 불같이 분노를 일으킨다. 그리고 상대에 대해 미움과 원망을 일으키고 장구하게 간직한다. 그리고 기회가 되면 그 상대에게 보복하고 해를 가하려고 임한다. 이런 형태로 각 생명이 임하는 것이 욕계의 현실이다. 그래서 욕계내 각 생명은 서로간에 가해와 피해를 중첩시켜 나가게 된다. 그래서 욕계에서 장구하게 3 악도에 갇혀 생사고통을 받아나가게 된다. 축사에 갇혀 사육되는 동물의 사례는 극히 그 일부분의 사례다. 사정을 살펴보면 그보다 훨씬 심하고 장구한 고통을 겪는 경우가 많다. 그리고 무량겁에 걸쳐 이 상태에 갇혀 지내게 된다. 그래서 이것을 수행을 통해 잘 해결해내는 것이 과제다. |
문서정보 ori
https://buddhism0077.blogspot.com/2020/12/2564-12-19-k0951-001.html#1983 sfed--아비담비바사론_K0951_T1546.txt ☞제1권 sfd8--불교단상_2564_12.txt ☞◆vhka1983 불기2564-12-19 θ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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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는 항복좌(降伏坐). 먼저 오른 발로 왼 다리를 누르고, 다음에 왼 발로 오른 다리를 누르고 앉는 자세.
답 후보
● 항마좌(降魔坐)
해탈장(解脫障)
행선(行善)
행주좌와(行住坐臥)
허공계(虛空界)
현겁(賢劫)
현밀이교(顯密二敎)
ॐ मणि पद्मे हूँ
○ [pt op tr]
○ [pt op tr]
● 아비담비바사론_K0951_T1546 [문서정보]- 일일단상키워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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