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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진리와실천
불기2555-02-03_십이문론_001 본문
『십이문론』
K0579
T1568
십이문
● 한글대장경 해당부분 열람I
● 한글대장경 해당부분 열람II
○ 통합대장경 사이트
○ 해제[있는경우]
● TTS 음성듣기 안내
※ 이하 부분은 위 대장경 부분에 대해
참조자료를 붙여 자유롭게 연구하는 내용을 적는 공간입니다.
대장경 열람은 위 부분을 참조해주십시오.
○ [pt op tr] 십이문론_K0579_T1568 핵심요약
♣0579-001♧
『십이문론』
십이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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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이문론
해제보기
십이문론품목(十二門論品目)
제1 관인연문(觀因緣門)
[만법(萬法)에 인(因)이 되는 것은
각기 성품[性]이 있는 듯하나
고찰해 모아보면 실로 본래의 성품이 없다.
환하게 트여서 막힘이 없기 때문에 문(門)이라고 한다.]
제2 관유과무과문(觀有果無果門)
[성품이 없는 법을 거듭 고찰하면
먼저 있다[有]가 생기기도 하고 먼저 없다[無]가 생기기도 한다.
유무(有無)는 생김이 없기 때문에 그것으로써 문을 삼는다.]
제3 관연문(觀緣門)
[위에서는 인(因)을 고찰하고 여기서는 연(緣)을 고찰한다.
4연(緣)1)의 자세하고 간략함이
모두 과(果)가 없기 때문에 그것으로써 문을 삼는다.]
제4 관상문(觀相門)
[위의 세 가지 문은 인(因)과 연(緣)이 생김이 없음을 고찰하고
여기서는 3상(相)2)을 고찰한다.
3상이 이미 없기 때문에 그것으로써 문을 삼는다.]
제5 관유상무상문(觀有相無相門)
[여기서는 3상의 실체를 고찰하니
상(相)이 있으면서 상이 되고 상이 없으면서 상이 된다.
상이 있는 것[有]도 상이 없는 것[無]도 상이 없기 때문에
그것으로써 문을 삼는다.]
제6 관일이문(觀一異門)
[곧 유상(有相)과 무상(無相)을 고찰하면
같은 법[一法]에도 있고 다른 법[異法]에도 있다.
같지도 않고 다르지도 않기 때문에 그것으로써 문을 삼는다.]
제7 관유무문(觀有無門)
[위에서는 3상이 상이 아님을 고찰하고
여기서는 4상(相) 역시 아님을 밝힌다.
생(生)과 주(住)는 유(有)가 되고 변이(變異)는 무(無)가 된다.
같은 곳[同處]에도 있지 않고
다른 곳[異處]에도 없기 때문에 그것으로써 문을 삼는다.]
제8 관성문(觀性門)
[이미 유무(有無)를 알았다.
또 그 성품[性]을 고찰하고,
변역(變易)하여 무상(無常)하고
연(緣)을 따라 있으면 성품이 아니기 때문에
그것으로써 문을 삼는다.]
제9 관인과문(觀因果門)
[성품이 없는 법은 이미 인과(因果)가 없다.
변하고 달라지는 곳에서 고찰해 찾아보면 이치를 터득할 수 없기 때문에 그것으로써 문을 삼는다.]
제10 관작문(觀作門)
[인(因)도 없고 과(果)도 없으면 지음[作]도 없게 된다.
네 곳[四處]3)에 이미 없기 때문에 그것으로써 문을 삼는다.]
제11 관삼시문(觀三時門)
[이미 지음이 없음을 고찰하였다.
반드시 그 인(因)을 다해야 하기 때문에 3시(時)4)를 찾아보아도 지음이 없기에 그것으로써 문을 삼는다.]
제12 관생문(觀生門)
[지음은 만듬[造]이 있게 되고 생김은 일어남[起]이 있게 된다.
시간[時]에는 이미 없으니 무엇이 생기는 것이 되겠는가?
바로 그것으로써 문을 삼는다.]
십이문론(十二門論)
1. 인과 연들을 관찰하는 문[觀因緣門]
용수보살(龍樹菩薩)지음
요진삼장(姚秦三藏) 구마라집(鳩摩羅什)한역
박인성 번역
설명하겠다.
이제 대승[摩訶衍]14)의 요체를 풀이하겠다.
【문】 대승의 요체를 풀이하면 무슨 이익이 있는가?
【답】 대승이란 시방 삼세 부처님들의 깊디깊은 법장(法藏)15)이니
공덕(功德)이 크고
근기가 높은 자들을 위해 설시(說示)하는 것이다.
말세의 중생은 복이 얕고 근기가 낮아서
설사 경문(經文)을 찾아본다 해도 이에 통달할 수 없다.
나는 이들에게 연민을 느껴 (이들을) 깨닫게 하고자 하고,
또 여래의 위 없는 큰 법을 환히 밝히고자 한다.
그러기에 대승의 요체를 풀이하는 것이다.
【문】 대승은 무량하고 무한해서 측량하거나 계산할 수 없다.
부처님의 말씀은 다하는 일이 없거늘
하물며 어찌 그 뜻을 풀어서 펼칠 수 있겠는가?
【답】 이런 이치 때문에 나는 서두에서
“요체를 풀이하겠다”고 말한 것이다.
【문】 왜 대승이라고 하는가?
【답】 대승이란,
2승(乘)16)보다 위에 있기에 대승이라 하는 것이다.
부처님들께서 가장 크게 이것을 타고서 도달하기에 대(大)라고 하는 것이다.
큰 사람인 부처님들께서 이 수레[乘]를 타기[乘] 때문에 대(大)라고 하는 것이다.
■ 또 중생의 큰 고[苦]을 제거해서 큰 이익을 주기 때문에 대(大)라고 하는 것이다.
또 관세음ㆍ득대세(得大勢)17)ㆍ문수사리(文殊師利)18)ㆍ미륵 보살 등
대사(大士)19)들이 타는 것이기 때문에 대(大)라고 하는 것이다.
또 2승(乘)은 모든 법들의 가장자리[邊]와 밑바닥[底]을 없앨 수 있기 때문에 대라고 하는 것이다.
또『반야경』에서 부처님 스스로가 “대승의 뜻은 무량하고 무한하다”고 말씀하셨는데
이 이유 때문에 대라고 하는 것이다.
대는 심오한 이치를 분유하고 있으니 이른바 공성[空]이다.
만약 이 이치에 통달한다면 대승에 통달하고,
6바라밀(婆羅蜜)을 다 갖추어서 장애가 없다.
그래서 이제 공성[空]만을 풀이하는 것이다.
공성을 풀이하고자 한다면
당연히 열두 문[十二門]을 통해서 공성[空義]에 들어가야 한다.
최초는 ‘인과 연들을 관찰하는 문’이다.
이른바 다음 게송과 같다.
여러 연에서 생긴 법
이것에는 자성이 없네.
자성이 없는데
어떻게 이 법이 있겠는가?
연들에서 생긴 법에는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안이고 다른 하나는 바깥이다.
연들에도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안이고 다른 하나는 바깥이다.
바깥의 연들[外因緣]이란 예를 들어 진흙덩어리ㆍ먹줄ㆍ도공 등이 화합해서 물단지가 생기고,
또 실ㆍ베틀의 북[機杼]ㆍ직공[織師] 등이 화합해서 명주[疊]가 생기고,
또 땅을 고르는 일ㆍ터를 다지는 일ㆍ대들보와 서까래ㆍ진흙ㆍ풀ㆍ사람의 노력[人功] 등이 화합해서 집이 생기고,
또 타락의 그릇ㆍ모아서 흔드는 일ㆍ사람의 노력 등이 화합해서 연유가 생기고,
또 씨ㆍ지(地)ㆍ수(水)ㆍ화(火)ㆍ풍(風)ㆍ공간[虛空]ㆍ절기 등이 화합해서 싹이 생기는 경우에 있어서 그 연들을 말한다.
바깥 연의 법은 모두 이와 같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안의 연들[內人緣]이란 무명(無明)ㆍ행(行)ㆍ식(識)ㆍ명색(名色)ㆍ6입(入)ㆍ촉(觸)ㆍ수(受)ㆍ애(愛)ㆍ취(取)ㆍ유(有)ㆍ생 (生)ㆍ노사(老死)가 각각 앞의 것에 의존해서 뒤의 것이 생기는 경우에 있어서 그 연들을 말한다.
■ 이와 같이 안과 바깥의 모든 법은 다 연들에서 생긴다.
연들에서 생기니 자성이 없는 것이 아니겠는가?
만약 법이 자성이 없다면 타성도 없고,
자성과 타성 양자도 없다.
왜 그러한가?
타성에 의존하기에 자성이 없는 것이다.
만약 “타성에 의존해서 (자성이) 있다”고 말한다면
소는 말의 본성에 의존해서 있는 것이고
말은 소의 본성에 의존해서 있는 것이다.
배는 능금의 본성에 의존해서 있는 것이고
능금은 배의 본성에 의존해서 있는 것이다.
여타의 것도 모두 그러할 것이다.
그러나 실제로는 그렇지 않다.
만약 “타성에 의존해서 있지 않고
그저 다른 것에 의존해서 있을 뿐이다”고 말한다면 이것도 옳지 않다.
왜 그러한가?
만약 부들[蒲]에 의존하기에 자리[席]가 있다면
부들과 자리는 일체가 되어 다른 것이라 이름하지 못한다.
만약 부들이 자리에 대해서 다른 것이라고 말한다면
부들에 의존해서 자리가 있다고 말할 수 없다.
또 부들 또한 자성이 존재하지 않는다.
왜 그러한가?
부들 또한 연들에서 생겨난 것이기에 자성이 존재하지 않는다.
자성이 존재하지 않으니
부들의 본성에 의존해서 자리가 존재한다고 말할 수 없다.
그러므로 자리는 부들을 자체로 하지 않아야 한다.
여타의 물단지.
연유 등 바깥의 연들에서 생긴 법들도
모두 이와 같이 얻을 수 없다.
안의 연들에서 생긴 법들도
모두 이와 같이 얻을 수 없다.
『칠십론(七十論)』20)에서 이렇게 말한다.
연법(緣法)21)은 실제로 생기는 일이 없네.
만약 생기는 일이 있다고 말한다면
하나의 심(心)에서 생기는가,
여러 심에서 생기는가?
이 12연기법(十二因緣法)은
실제로 자기에게서 생기는 일이 없다.
만약 생기는 일이 있다면 하나의 심(心)에서 생기는가,
여러 심(心)에서 생기는가?
만약 하나의 심에서 생긴다면,
원인과 결과가 동시에 함께 생기는 것이다.
또 원인과 결과가 동시에 존재한다면 이것은 옳지 않다.
왜 그러한가?
모든 사물은 원인이 전에 있고 결과가 후에 있기 때문이다.
만약 여러 심(心)에서 생기는 일이 있다면,
12연기의 법들은 각각 독립해 있는 것이다.
앞의 분지가 심과 함께해서 소멸했을 때
뒤의 분지가 무엇을 원인[因緣]으로 삼겠는가?
소멸한 법은 존재하지 않는 것인데 어떻게 원인이 될 수 있겠는가?
만약 12연기법이 미리 존재한다면
하나의 심이거나 여러 심에서일 것인데,
두 가지 모두 옳지 않다.
그러므로 연들은 모두 공하다.
연들이 공하기 때문에 연들에서 생긴 법도 공하다.
그러므로 모든 유위법들은 다 공하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유위법들이 공한데 하물며
어찌 나(我)가 공하지 않겠는가?
5온(蘊)ㆍ12처(處)ㆍ18계(界)의 유위법에 의존해서 나(我)가 존재한다고 말한다.
장작[可然]에 의존해서 불[然]이 존재한다고 말하는 것과 같다.
만약 온ㆍ처ㆍ계가 공하다면 나[我]라고 말할 수 있는 법이 존재하지 않는다.
장작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불이 존재한다고 말할 수 없는 것과 같다.
경전에서는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부처님께서 비구들에게 말씀하셨다.
나[我]에 의존해서 나의 것[我所]이 존재한다.
만약 나가 존재하지 않는다면 나의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이와 같이 유위법이 공하기 때문에
무위인 열반법도 공하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왜 그러한가?
이 5온이 소멸했을 때
다시 여타의 5온이 발생하지 않으니 이것을 열반이라고 이름한다.
5온은 본래 자체가 공한 것인데
무엇이 소멸하기에 열반이라 하는가?
또 나 또한 공한데 누가 열반을 얻겠는가?
또 발생하지 않는 법[無生法]을 열반이라고 이름한다.
만약 발생하는 법이 성립한다면
발생하지 않는 법도 성립할 것이다.
발생하는 법이 성립하지 않는 이유를 앞에서 설명한 바 있다.
후에 다시 설명할 것이다.
그러므로 발생하는 법은 성립하지 않는다.
발생하는 법에 의존하기 때문에 발생하지 않는 법이라 이름하는 것이다.
발생하는 법이 성립하지 않는데
발생하지 않는 법이 어떻게 성립하겠는가?
그러므로 유위법ㆍ무위법ㆍ나[我]는 모두 공하다.
2. 결과가 있다는 것과 결과가 없다는 것을 관찰하는 문[觀有果無果門]
또 모든 법은 발생하지 않는다.
왜 그러한가?
미리 존재한다면 발생하지 않네.
미리 존재하지 않는다 해도 발생하지 않네.
존재하면서 존재하지 않는다 해도 발생하지 않네.
무엇에 발생하는 것[生者]이 있겠는가?
만약 결과가 원인 속에 미리 존재한다면 발생하지 않을 것이다.
미리 존재한다 해도 발생하지 않을 것이다.
존재하면서 존재하지 않는다 해도 발생하지 않을 것이다.
왜 그러한가?
만약 결과가 원인 속에 미리 존재해서 발생한다면
이것은 무한역행[無窮]이 된다.
가령 결과가 아직 발생하지 않았는데 미리 발생한다면,
이제 이미 발생한 것이 다시 발생하는 것이 된다.
왜 그러한가?
원인 속에 항상 존재하기 때문이다.
이 존재의 끝에서[有邊] 다시 발생할 것이니
이것은 무한역행이 된다.
만약 “이미 발생한 것은 다시 발생하지 않는다.
아직 발생하지 않은 것이 발생한다”고 말한다면
이것에는 발생의 이치가 없다.
그러므로 미리 존재하면서 발생한다면
이것은 옳지 않다.
또 만약 “원인 속에 미리 결과가 존재하는데
아직 발생하지 않은 것이 발생한다.
이미 발생한 것은 발생하지 않는다”고 말한다면
이것에도 둘 모두가 존재하니,
하나는 발생함[生]이고
다른 하나는 발생하지 않음[不生]이다.
옳은 점이 없다.
또 만약 아직 발생하지 않은 것이 실제로 존재한다면
이미 발생한 것이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왜 그러한가?
이미 발생한 것[生]과
아직 발생하지 않은 것[未生]은 상반되기 때문이다.
이미 발생한 것과 아직 발생하지 않은 것이 상반되기 때문에
이 두 행위의 상[作相]도 상반된다.
또 존재[有]는 비존재[無]와 상반되고
비존재는 존재와 상반된다.
만약 이미 발생한 것도 존재하고 아직 발생하지 않은 것도 존재한다면
이미 발생한 것과 아직 발생하지 않은 것에는
다름[異]이 있지 않을 것이다.
왜 그러한가?
만약 발생함[生]이 존재한다면
이미 발생한 것도 존재하고
아직 발생하지 않은 것도 존재할 것이다.
그렇다면 이미 발생한 것과
아직 발생하지 않은 것은 어떤 차이가 있겠는가?
이미 발생한 것과 아직 발생하지 않은 것에 차이가 없다면
이것은 옳지 않다.
그러므로 발생하지 않는다.
또 이미 미리 성립해 있는데 어떻게 다시 발생하겠는가?
이미 행위한 것[作已]은 다시 행위하지 않듯이
이미 성립한 것은 성립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존재하는 법[有法]은 발생하지 않는다.
또 만약 발생함이 원인 속에 존재한다면
아직 발생하지 않았을 때 결과가 보일 것이다.
그러나 실제로는 보이지 않는다.
가령 진흙 속에서 물단지가,
부들[蒲] 속에서 자리[席]가 보여야 하는데
실제로는 보이지 않는다.
【문】 비록 결과가 (원인 속에) 미리 존재하긴 하지만,
아직 변이하지 않았기 때문에 보이지 않는다.
【답】 만약 물단지가 아직 발생하지 않았을 때
(진흙 속에 물단지가 미리 존재하긴 하지만)
물단지 자체가 아직 변이하지 않았기에 보이지 않는다면,
어떤 상(相)에 의해 (그 물단지를) 인식하는가?
진흙 속에 물단지가 미리 존재한다고 말한다면,
물단지의 상으로서 물단지가 존재하는가,
소의 상이나 말의 상으로서 물단지가 존재하는가?
만약 진흙 속에 물단지의 상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소의 상이나 말의 상도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니) 어찌 이것을 존재하지 않는다고 하지 않겠는가?
그러므로 그대가 원인 속에
미리 결과가 존재해서 발생한다고 말한다면
이것은 옳지 않다.
또 변이[變法]가 곧 결과라면
원인 속에 미리 변이가 존재할 것이다.
왜 그러한가?
그대의 교법에 따르면
원인 속에 미리 결과가 존재하기 때문이다.
만약 물단지 등이 미리 (원인인 진흙 속에) 존재하기에
변이도 미리 존재한다면,
눈에 보일 것이다.
그러나 실제로는 얻을 수 없다.
그러므로 그대가 아직 변이하지 않았기에
보이지 않는다고 말한다면
이것은 옳지 않다.
만약 “아직 변이하지 않은 것은 결과가 아니다”고 말한다면,
결과는 영원히 얻을 수 없다.
왜 그러한가?
이 변이가 전에 존재하지 않는다면
후에도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물단지 등은 영원히 얻을 수 없다.
만약 “이미 변이한 것이 결과이다”고 말한다면
원인 속에 미리 (결과가) 존재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확정되지 않은 것이어서
원인 속에 미리 결과가 존재하는 것이기도 하고
(원인 속에) 미리 결과가 존재하지 않는 것이기도 하다.
【문】 미리 변이가 존재하지만 단지 보이지 않을 따름이다.
“모든 사물은 스스로 존재한다.
존재하지만 얻을 수 없다”란,
가령 사물은 가까운 곳에 있기에 인식되지 않거나,
먼 곳에 있기에 인식되지 않거나,
근(根]이 손상되었기에 인식되지 않거나,
마음[心]이 머물지 않기에 인식되지 않거나,
장애물이 있기에 인식되지 않거나,
동등하기에 인식되지 않거나,
월등하기에 인식되지 않거나,
미세하기에 인식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가까운 곳에 있기에 인식되지 않는다’란,
눈 속의 약물이 그러하다.
‘먼 곳에 있기에 인식되지 않는다’란,
가령 새가 허공을 날아 높이 올라가고 멀리 사라질 때이다.
‘근[감관]이 손상되었기에 인지되지 않는다’란,
가령 눈이 멀었을 때는 색깔을 보지 못하고
귀가 멀었을 때는 소리를 듣지 못하고
코가 막혔을 때는 냄새를 맡지 못하고
입이 헐었을 때는 맛을 알지 못하고
몸이 굳었을 때는 감촉을 알지 못하고
마음이 어지러울 때는 있는 그대로를 알지 못하는 것이다.
‘마음이 머물지 않기에 인식되지 않는다’란,
가령 마음이 색(色) 등에 머물고 있을 때 소리[聲]를 인식하지 않는 것이다.
‘장애물이 있기에 인식되지 않는다’란,
가령 대지가 큰 물을 가로막고 벽이 바깥의 물건들을 가로막는 것이다.
‘동등하기에 인식되지 않는다’란,
가령 검은 바탕 위에 검은 점과 같은 것이다.
‘월등하기에 인식되지 않는다’란,
가령 종이나 북 소리가 날 때 빗질하는 소리가 들리지 않는 것이다.
‘미세하기에 인식되지 않는다’란,
가령 극미 등이 현현하지 않는 것이다.
이와 같이 법들이 존재하더라도
여덟 가지 이유 때문에 인식되지 않는다.
그대가 “원인 속에서 변이를 얻을 수 없기에
물단지 등은 얻을 수 없다”고 말한다면 이것은 옳지 않다.
왜 그러한가?
이것은 존재하지만
여덟 가지 이유 때문에 얻을 수 없는 것이다.
【답】 변이[變法]와 물단지 등의 결과를
여덟 가지 이유 때문에
얻을 수 없다는 데에 동의할 수 없다.
왜 그러한가?
만약 변이와 물단지 등의 결과가 극히 가까이 있기에 얻을 수 없다면 조금 멀리 있다면 얻을 수 있을 것이다.
극히 멀리 있기에 얻을 수 없다면 조금 가까이에 있다면 얻을 수 있을 것이다.
만약 근[감관]이 손상되었기에 얻을 수 없다면 감관이 정상이 되었을 때 얻을 수 있을 것이다.
만약 마음이 머물지 않기에 얻을 수 없다면 마음이 머문다면 얻을 수 있을 것이다.
만약 장애물이 있기에 얻을 수 없다면 변이와 물단지 등은 장애물이 없을 때 얻을 수 있을 것이다.
만약 동등하기에 얻을 수 없다면 차이가 있을 때 얻을 수 있을 것이다.
만약 월등하기에 얻을 수 없다면 월등한 것이 그치면 얻을 수 있을 것이다.
만약 미세하기에 얻을 수 없다면 물단지 등의 결과는 거칠고 크기 때문에 얻을 수 있을 것이다.
만약 물단지가 미세하기에 얻을 수 없다면 이미 발생한 것도 얻을 수 없을 것이다.
왜 그러한가?
이미 발생한 것과 아직 발생하지 않은 것은 미세해서 상(相)이 동일하기 때문이다.
이미 발생한 것과 아직 발생하지 않은 것은 둘 다 실제로 존재하기 때문이다.
【문】 아직 발생하지 않았을 때는 미세하지만 이미 발생했을 때는 거칠고 큰 것으로 전화된다.
그러므로 이미 발생한 것은 얻을 수 있지만 아직 발생하지 않은 것은 얻을 수 없다.
【답】 만약 그렇다면 원인 속에 결과가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왜 그러한가?
원인 속에는 거칠고 큰 것이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또 원인 속에 거칠고 큰 것이 미리 존재하지 않는다.
만약 원인 속에 거칠고 큰 것이 미리 존재한다면 “미세하기에 얻을 수 없다”고 말해서는 안 된다.
이제 결과는 거칠고 큰 것인데 그대는 “미세하기에 얻을 수 없다”고 말한다.
이 거칠고 큰 것을 결과라 하지 않는다.
이제 결과는 영원히 얻을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결과는 실제로는 얻을 수 있다.
그러므로 “미세하기에 얻을 수 없다”고 해서는 안 된다.
“그렇다면 법이 존재한다.
원인 속에 결과가 미리 존재하지만 여덟 가지 이유 때문에 얻을 수 없다.
원인 속에 결과가 미리 존재한다”고 한다면 이것은 옳지 않다.
또 만약 원인 속에 결과가 미리 존재해서 발생한다면 그렇다면 원인과 원인이 서로 파괴하고 결과와 결과가 서로 파괴한다.
왜 그러한가?
마치 명주가 실에 있고 과일이 그릇에 있는 것과 같다.
단지 이 머무는 곳[住處]을 원인이라 하지 않는다.
왜 그러한가?
실과 그릇은 명주와 과일의 원인이 아니기 때문이다.
만약 원인이 파괴된다면 결과도 파괴된다.
그러므로 실 등은 명주 등의 원인이 아니다.
원인이 존재하지 않기에 결과도 존재하지 않는다.
왜 그러한가?
원인에 의존하기에 결과가 성립하는 것이다.
원인이 성립하지 않는데 결과가 어떻게 성립하겠는가?
또 만약 만들지 않으면 결과라 하지 않는다.
실 등의 원인은 명주 등의 결과를 만들 수 없다.
왜 그러한가?
가령 실 등은 명주 등이 머무는 것이기에 명주 등의 결과를 만들 수 없다.
그렇다면 원인이 존재하지 않고 결과가 존재하지 않는다.
만약 원인과 결과가 둘다 존재하지 않는다면 원인 속에 미리 결과가 존재한다는 것이나 결과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구해서는 안 된다.
또 만약 원인 속에 결과가 존재하는데 얻을 수 없다면,
상(相)이 현현할 것이다.
마치 냄새를 맡고서 꽃이 있다는 것을 알고 소리를 듣고서 새가 있다는 것을 알고 웃음 소리를 듣고서 사람이 있다는 것을 알고 연기를 보고서 불이 있다는 것을 알고 고니[鵠]를 보고서 못이 있다는 것을 안다.
이와 같이 만약 원인 속에 결과가 존재한다면 상이 현현할 것이다.
이제 결과 자체를 얻을 수 없으니 상도 얻을 수 없다.
이와 같이 원인 속에 결과가 미리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또 만약 원인 속에 결과가 미리 존재해서 발생한다면 실에 의존해서 명주가 존재하고 부들[蒲]에 의존해서 자리[席]가 존재한다고 말해서는 안 된다.
만약 원인이 만들지 않는다면 다른 것도 만들지 않는다.
마치 명주는 실이 만든 것이 아닌데 어찌 부들이 만든 것이겠는가?
만약 무엇에 의해서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면 결과라고 하지 않는다.
만약 결과가 존재하지 않는다면 원인도 존재하지 않는다.
앞에서 말한 바와 같다.
그러므로 원인 속에 결과가 존재해서 발생한다고 한다면 이것은 옳지 않다.
또 만약 결과가 무엇에 의해서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면 상주하는 것이다.
열반의 상과 같다.
만약 결과가 상주하는 것이라면 모든 유위법들은 다 상주하는 것이 된다.
왜 그러한가?
모든 유위법들은 다 결과이기 때문이다.
만약 모든 법들이 다 상주하는 것이라면 무상한 것이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만약 무상한 것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또한 상주하는 것도 존재하지 않는다.
왜 그러한가?
상주하는 것에 의존해서 무상한 것이 존재하고 무상한 것에 의존해서 상주하는 것이 존재한다.
그러므로 상주하는 것과 무상한 것 두 가지 모두가 존재하지 않는다고 한다면 이것은 옳지 않다.
그러므로 원인 속에 결과가 미리 존재해서 발생한다고 말할 수 없다.
또 만약 원인 속에 결과가 미리 존재해서 발생한다면 결과는 다시 다른 결과에 대해서 원인이 된다.
마치 명주가 입는 일[著]에 대해서 원인이 되는 것과 같고,
마치 자리[席]가 가리는 일[障]에 대해서 원인이 되는 것과 같고,
마치 수레가 싣는 일에 대해서 원인이 되는 것과 같다.
그러나 실제로는 다른 결과에 대해서 원인이 되지 않는다.
그러므로 원인 속에 결과가 미리 존재한다고 말할 수 없다.
만약 “땅에 냄새가 미리 존재하는데 물로 뿌리지 않는다면 냄새가 피어나지 않듯이 결과도 이와 같아서 만약 여러 연(緣)을 만나지 않는다면 원인이 되지 않는다”고 말한다면 이것은 옳지 않다.
왜 그러한가?
그대가 말한 바와 같이 인식되는 때가 결과이다.
물단지 등의 사물이 결과인 것은 아니다.
왜 그러한가?
인식될 때 짓는 것이다.
물단지 등은 미리 존재하기에 짓는 것이 아니다.
그러니 짓는 것을 결과라 한다.
그러므로 원인 속에 결과가 미리 존재해서 발생한다고 한다면 이것은 옳지 않다.
또 인식함의 원인[了因]은 단지 현현하게 할 수 있을 뿐이지 사물을 생기게 할 수는 없다.
마치 어둠 속의 물단지를 비추기 위해서 등불을 켤 때 여타의 침상 등의 물건들도 비추듯이,
물단지를 만들기 위해 여러 연이 화합할 때 여타의 침상 등의 물건들을 생기게 할 수 없다.
그러므로 원인 속에 미리 결과가 존재해서 발생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또 만약 원인 속에 미리 결과가 존재해서 발생한다면 지금 만드는 일[今作]과 앞으로 만드는 일[當作]의 구별이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그대는 지금 만드는 일과 앞으로 만드는 일의 구별을 인정하고 있다.
그러므로 원인 속에 미리 결과가 존재해서 발생하는 것이 아니다.
만약 원인 속에 미리 결과가 존재하지 않는데 결과가 발생한다면 이것도 옳지 않다.
왜 그러한가?
만약 (원인 속에 결과가 미리) 존재하지 않는데 발생한다면 제2의 머리와 제3의 손이 생길 것이다.
왜 그러한가?
존재하지 않는데 발생하기 때문이다.
【문】 물단지 등의 사물에는 여러 연이 있지만 제2의 머리와 제3의 손에는 연들이 없는데,
어떻게 생길 수 있겠는가?
그러므로 그대의 말은 옳지 않다.
【답】 제2의 머리와 제3의 손,
그리고 물단지 등의 결과는 원인 속에 모두 존재하지 않는다.
마치 진흙덩어리 속에 물단지가 있지 않고 돌 속에도 물단지가 있지 않은 것과 같다.
무엇 때문에 진흙덩어리를 물단지의 원인이라 하고 돌 등을 물단지의 원인이라 하지 않는가?
무엇 때문에 우유를 타락의 원인이라 하고 실을 명주의 원인이라 하면서 부들을 원인이라 하지 않는가?
또 만약 원인 속에 결과가 존재하지 않는데 결과가 발생한다면,
하나하나의 사물이 모든 사물들을 생기게 할 것이다.
마치 손가락 끝이 수레ㆍ말ㆍ마실 것ㆍ먹을 것 등을 만들어 내듯이 그렇듯이 실은 명주만을 내지 않고 수레ㆍ말ㆍ마실 것ㆍ먹을 것 등의 사물을 낼 것이다.
왜 그러한가?
만약 (원인 속에 결과가 미리) 존재하지 않는데도 발생한다면,
왜 실은 명주만을 만들어 내고 수레ㆍ말ㆍ마실 것ㆍ먹을 것 등의 사물은 만들어 내진 않는가?
모두22)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만약 원인 속에 결과가 미리 존재하지 않는데 결과가 발생한다면 모든 원인들은 각각 힘이 있어서 결과를 생기게 하지 않을 것이다.
마치 기름이 필요한 자는 반드시 삼[麻]에서 (기름을) 얻지 모래에서 짜내지 않는 것과 같다.
만약 모두 존재하지 않는다면 왜 삼에서 구하지 모래에서 짜내지 않는가?
만약 “이전에 삼에서 기름이 나오는 것을 보았지 모래에서 (기름이) 나오는 것을 보지 않았기에 그래서 삼에서 구하지 모래에서 짜내지 않는다”고 말한다면 이것은 옳지 않다.
왜 그러한가?
만약 발생의 상이 성립한다면 “다른 때에 삼에서 기름이 나오는 것을 보았지 모래에서 나오는 것을 보지 않았다”고 말해야 할 것이다.
그러므로 삼에서 구하는 것이지 모래에서 얻는 것이 아니다.
모든 법은 발생의 상이 성립하지 않기 때문이다.
다른 때에 삼에서 기름이 나온다고 말할 수 없기 때문에 삼에서 구하는 것이지 모래에서 얻는 것이 아니다.
또 내가 이제 한 사물을 파괴할 때 모두가 모든 원인과 결과를 완전히 파괴하게 된다.원인 속에 결과가 미리 존재하면서 발생하는 것,
결과가 미리 존재하지 않고서 발생하는 것,
결과가 미리 존재하기도 하고 결과가 존재하지 않기도 하면서 발생하는 것 세 가지 발생은 모두 성립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그대가 “다른 때에 삼에서 기름이 나오는 것을 보았다”고 말한다면 동의인(同疑因)에 떨어질 것이다.
또 만약 앞선 원인 속에 결과가 없는데도 결과가 발생한다면 모든 원인의 상들은 성립하지 않는다.
왜 그러한가?
원인들이 존재하지 않는데 법이 무엇을 만들 수 있겠으며 무엇을 성취할 수 있겠는가?
만들지 않고 성취하지 않는데 어떻게 원인이라 하겠는가?
이와 같이 만드는 사람에게는 만드는 대상이 존재할 수 없고 또한 만들게 하는 자에게도 만드는 대상이 존재할 수 없다.
만약 원인 속에 결과가 미리 존재한다면 만드는 일[作]ㆍ만드는 사람[作者]ㆍ만드는 대상[作法]의 구별이 없을 것이다.
왜 그러한가?
만약 결과가 미리 존재한다면 어떻게 다시 만드는 일을 필요로 하겠는가?
그러므로 그대가 “만드는 일ㆍ만드는 사람ㆍ만드는 대상의 모든 원인들을 다 얻을 수 없기에 원인 속에 결과가 미리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한다면 이것도 옳지 않다.
왜 그러한가?
만약 어떤 사람이 만드는 일과 만드는 사람이 구별된다는 것,
원인과 결과가 존재한다는 것을 인정한다면 마땅히 이런 비판을 하겠지만 나는 만드는 일과 만드는 사람,
원인과 결과가 모두 공하다고 말하였다.
만약 그대가 “만드는 일과 만드는 사람,
그리고 원인과 결과를 타파해서 ‘나’와 법을 성립시키니 비판의 대상이 되지 않는다.
그러므로 원인 속에 미리 결과가 존재하지 않는데 결과가 발생한다”고 말한다면 이것은 옳지 않다.
또 만약 어떤 사람이 원인 속에 결과가 미리 존재한다는 것을 인정하다면 이런 비판을 할 것이다.
그러나 나는 원인 속에 결과가 미리 존재한다고 말하지 않기 때문에 이 비판을 받아들이지 않고 또한 원인 속에 결과가 미리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받아들이지 않는다.
만약 “원인 속에 결과가 미리 존재하기도 하고 결과가 존재하지 않기도 하면서 결과가 발생한다”고 말한다면 이것도 옳지 않다.
왜 그러한가?
존재함[有性]과 존재하지 않음[無性]은 상반되기 때문이다.
본성이 상반되는데 어떻게 처소를 같이하겠는가?
마치 밝음과 어둠,
괴로움과 즐거움,
감과 머묾,
계박과 해탈이 처소를 같이할 수 없는 것과 같다.
그러므로 원인 속에 결과가 미리 존재하면서 (동시에) 결과가 미리 존재하지 않으면서 두 가지 모두는 발생하지 않는다.
또 원인 속에 결과가 미리 존재하는 것과 결과가 미리 존재하지 않는 것을 위의 존재함과 존재하지 않음에서 이미 타파한 바 있다.
그러므로 원인 속에 결과가 미리 존재하면서도 발생하지 않고,
결과가 존재하지 않으면서도 발생하지 않고,
존재함과 동시에 존재하지 않으면서도 발생하지 않는다.
이치가 이것에 달하면 모든 처소에서 구해 보아도 얻을 수 없다.
그러므로 끝내 발생하지 않는다.
끝내 발생하지 않으니 모든 유위법들은 다 공하다.
왜 그러한가?
모든 유위법들은 다 원인이고 결과이다.
유위법이 공하기에 무위법도 또한 공하다.
유위법과 무위법이 공한데 하물며 어찌 나[我]가 공하지 않겠는가?
3. 연을 관찰하는 문[觀緣門]
또 모든 법의 연(緣)이 성립하지 않는다.
왜 그러한가?
하나하나의 연이든 화합한 연이든
이것에는 결과가 존재하지 않네.
연 속에 결과가 존재하지 않는데
어떻게 연에서 생기겠는가?
물단지 등의 결과는 하나하나의 연 속에 존재하지 않는다.
화합한 것에도 존재하지 않는다.
두 문(門)에 존재하지 않는데 어떻게 연에서 생긴다고 말하겠는가?
【문】 왜 연들이라 하는가?
【답】 4연(緣)에서 모든 법이 생기네.
다시 제5의 연은 존재하지 않네.
인연ㆍ등무간연ㆍ
소연연ㆍ증상연이네.
4연(緣)이란 인연ㆍ등무간연[次第緣]ㆍ소연연[緣緣]ㆍ증상연이다.
인연이란,
법을 생기게 하는 직접 원인이다.
이미 생기게 했거나 지금 생기게 하거나 앞으로 생기게 하는 직접 원인인 법을 인연이라고 한다.
등무간연이란,
전찰나의 법이 소멸했을 때 잇달아서 다음 찰나의 법이 발생하는데 이것을 등무간연이라고 한다.
소연연이란,
기억된 법에 수반되어서 신업(身業)을 일으키거나 구업(口業)을 일으키거나 심법(心法)과 심소법[心數法]을 일으키게 하는 것을 소연연이라고 한다.
증상연이란,
이 법이 존재하기에 저 법이 발생할 수 있을 때 이 법은 저 법에 대해서 증상연이 된다.
이와 같이 4연은 모두 원인 속에 결과가 존재하지 않는다.
만약 원인 속에 결과가 존재한다면 연들이 없이 결과가 존재할 것이다.
그러나 실제로는 연들이 없이 결과가 존재하지 않는다.
만약 연들 속에 결과가 존재한다면 원인이 없이 결과가 존재할 것이다.
그러나 실제로는 원인이 없이 결과가 존재하지 않는다.
만약 연들과 원인[因]에 결과가 존재한다면 얻을 수 있어야 한다.
이치로 궁구해 보건대 얻을 수 없다.
그러므로 두 곳23)에 모두 (결과가) 존재하지 않는다.
이와 같이 하나하나의 연 속에도 존재하지 않고 화합한 것에도 존재하지 않는데,
어떻게 결과가 연에서 발생한다고 말할 수 있겠는가?
만약 결과가 연 속에 존재하지 않는다면
연에서 출현한다면
이 결과가 어떻게
연 아닌 것에서 나오지 않겠는가?
또 만약 결과가 연 속에 존재하지 않는데 연에서 발생한다면 왜 연 아닌 것에서는 발생하지 않겠는가?
(결과가) 둘 모두24)에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연 속에 존재하지 않는데 결과가 발생한다면,
결과가 발생하지 않기에 연도 발생하지 않을 것이다.
왜 그러한가?
연이 전이고 결과가 후이기 때문이다.
연과 결과가 존재하지 않기에 모든 유위법들이 공하다.
유위법들이 공하기에 무위법들도 공하다.
유위법들과 무위법들이 공한데 어떻게 나(我)가 존재하겠는가?
4. 상을 관찰하는 문[觀相門]
또 모든 법은 공하다.
왜 그러한가?
유위(有爲)와 무위(無爲)
두 법은 모두 상(相)이 존재하지 않네.
상이 존재하지 않기에
두 법은 모두 공하네.
유위법은 상으로써 성립하지 않는다.
【문】 무엇을 유위의 상이라고 하는가?
【답】 모든 사물들에는 각각 유위의 상이 존재한다.
가령 소는 뿔이 있고
등이 불룩 튀어나와 있고
목덜미가 축 늘어져 있고
꼬리 끝에 털이 나 있는데
이것이 소의 상이다.
가령 물단지는
밑바닥이 평평하고 배가 불룩하고 목이 가늘고 입술이 투박한데,
이것이 물단지의 상이다.
가령 수레는 바퀴ㆍ굴대ㆍ끌채[轅]ㆍ멍에[軛]이 있는데 이것이 수레의 상이다.
가령 사람은 머리ㆍ눈ㆍ배ㆍ등골뼈ㆍ어깨ㆍ팔ㆍ손ㆍ발이 있는데 이것이 사람의 상이다.
그렇듯이 발생과 머묾과 소멸이
만약 유위법의 상이라면 유위법인가, 무위법인가?
【문】 만약 유위법이라면 무슨 과실이 있는가?
【답】 만약 발생이 유위라면
다시 3상(相)이 존재할 것이네.
만약 발생이 무위라면
어떻게 유위의 상(相)이라 하겠는가?
만약 발생이 유위법이라면 3상(相)이 존재할 것이고,
이 3상에 다시 3상이 존재할 것이다.
이와 같이 계속해서 뻗어나가면 무한역행이 된다.
머묾과 소멸도 그러하다.
만약 발생이 무위법이라면
어떻게 무위법이 유위법에 대해서 상을 만들겠는가?
발생과 머묾과 소멸이 없는데 누가 이 발생을 인지할 수 있겠는가?
또 발생과 머묾과 소멸이 분별되기에 발생이 존재한다.
무위법은 분별되지 않기에 발생이 존재하지 않는다.
머묾과 소멸도 그러하다.
발생과 머묾과 소멸이 공(空)하기에 유위법들이 공하다.
유위법이 공하기에 무위법도 공하다.
유위법에 의존하기에 무위법이 존재한다.
유위법과 무위법이 공하기에 모든 법이 다 공하다.
【문】 그대가 “3상에 다시 3상이 존재한다.
그러므로 무한역행이 되니 발생은 유위법이 아니다”고 말한다면,
이제 이렇게 말할 것이다.
발생한 발생의 발생은
그 근본 발생을 발생하게 하고
발생한 근본 발생은
다시 발생의 발생을 발생하게 하네.
법이 발생할 때는 자체를 포함해서 일곱 법이 함께 발생한다.
첫째는 법(法),
둘째는 발생,
셋째는 머묾,
넷째는 소멸,
다섯째는 발생의 발생[生生],
여섯째는 머묾의 머묾[住住],
일곱째는 소멸의 소멸[滅滅]이다.
이 일곱 법 중 근본 발생[本生]은
그 자체를 제외한 여섯 법을 발생하게 한다.
발생의 발생[生生]은 근본 발생[本生]을 발생하게 하고
근본 발생은 다시 발생의 발생을 발생하게 한다.
그러므로 삼상은 비록 유위법이라 하더라도
무한역행이 되는 것은 아니다.
머묾과 소멸도 이와 같다.
【답】 만약 이 발생의 발생이
다시 근본 발생을 발생하게 한다고 말한다면
발생의 발생은 근본 발생에서 발생하는데
어떻게 근본 발생을 발생하게 할 수 있겠는가?
만약 발생의 발생[生生]이 근본 발생[本生]을 발생하게 한다면
근본 발생은 발생의 발생을 발생하게 하지 않는다.
발생의 발생이 어떻게 근본 발생을 발생하게 할 수 있겠는가?
만약 이 근본 발생이
저 발생의 발생을 발생하게 한다고 말한다면,
근본 발생이 저것에서 발생하는데
어떻게 발생의 발생을 발생할 수 있겠는가?
만약 “근본 발생[本生]이 발생의 발생[生生]을 발생하게 하고
발생의 발생이 발생하고 나서 다시 근본 발생을 발생하게 한다”고 말한다면
이것은 옳지 않다.
왜 그러한가?
발생의 발생[生生法]은 근본 발생을 발생하게 한다.
그래서 발생의 발생이라 하는 것이다.
그러나 근본 발생이 실제로는 자체가 아직 발생하지 않았는데
어떻게 발생의 발생을 발생할 수 있겠는가.
만약 “발생의 발생이 발생하고 있을 때 근본 발생을 발생하게 할 수 있다”고 말한다면
이것도 또한 옳지 않다.
왜 그러한가?
이 발생의 발생이 지금 발생하고 있을 때
혹 근본 발생을 발생하게 할 수 있다고 말한다면
발생의 발생도 아직 발생하지 않았는데
어떻게 근본 발생을 발생하게 할 수 있겠는가?
이 발생의 발생이 지금 발생하고 있을 때 혹 근본 발생을 발생하게 할 수 있다.
그러나 이 발생의 발생이 자체가 아직 발생하지 않았기에 근본 발생을 발생하게 할 수 없다.
만약 “이 발생의 발생이 지금 발생하고 있을 때 자기를 발생하게 할 수 있고 또한 다른 것도 발생하게 할 수 있다.
마치 등불이 타오를 때 자기를 비출 수 있고 또한 다른 것도 비출 수 있다”고 말한다면 이것은 옳지 않다.
왜 그러한가?
등불 자체에 어둠이 없고
(등불이) 놓여 있는 곳에도 어둠이 없네.
어둠을 없애는 것을 비춤이라 하네.
등불은 무엇을 비추는 것일까.
등불 자체에 어둠이 없고 밝음이 머무는 곳에도 어둠이 없다.
만약 등불에 어둠이 없다면 등불이 놓여 있는 곳에도 어둠이 없다.
어떻게 등불이 자기를 비추고 다른 것도 비춘다고 말할 수 있겠는가?
어둠을 없애기에 비춤이라고 한다.
등불은 자기의 어둠을 없애지 않는다.
또한 다른 것의 어둠을 없애지도 않는다.
그러므로 그대가 앞에서 “등불은 자기를 비추고 또한 다른 것도 비춘다.
발생도 이와 같아서 자기를 발생하게 하고 또한 다른 것도 발생하게 한다”고 말한다면 이것은 옳지 않다.
【문】 등불이 지금 타오르고 있을 때 어둠을 없앨 수 있다.
그러므로 등불에는 어둠이 없고 등불이 놓여 있는 곳에도 어둠이 없다.
【답】어떻게 등불이 지금 타오르고 있을 때
어둠을 없앨 수 있는 것일까?
이 등불이 처음 타오르고 있을 때는
어둠에 미칠 수가 없네.
등불이 지금 타오르고 있을 때 어둠에 다다를 수 없다.
만약 어둠에 다다르지 않는다면 어둠을 없앤다고 말해서는 안 된다.
만약 등불이 아직 어둠에 미치지 않았는데
어둠을 없앨 수 있다면
등불이 이 세간에 있을 때
모든 세간의 어둠을 없애리라.
또 만약 등불이 어둠에 다다르지 않아도
힘으로써 능히 어둠을 없앨 수 있다면
이곳에서 지금 타오르고 있는 등불이 모든 세간의 어둠을 없앨 것이다.
두 곳25)에 미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실제로는 이 세간에서 지금 타오르고 있는 등불은
모든 세간의 어둠을 없앨 수 없다.
그러므로 그대가 등불이 어둠에 미치지 않아도
힘으로써 어둠을 없앨 수 있다고 말한다면 이것은 옳지 않다.
만약 등불이 자기를 비추고
다른 것도 비출 수 있다면
어둠도 이와 같아서
자기를 어둡게 하고 다른 것도 어둡게 하리라.
또 만약 등불이 자기를 비출 수 있고 또한 다른 것도 비출 수 있다고 말한다면,
어둠은 등불과 상반되므로 자기도 덮고 다른 것도 덮을 것이다.
만약 “어둠은 등불과 상반되기에 자기를 덮을 수 없고 다른 것도 덮을 수 없다.
그러나 등불은 어둠과 상반되기에 자기를 비추고 다른 것도 비출 수 있다.”고 말한다면 이것은 옳지 않다.
그러므로 그대의 비유는 잘못된 것이다.
발생이 자기를 발생하게 할 수 있고
또한 다른 것도 발생하게 할 수 있다는 것을 이제 다시 설명하겠다.
만약 이 발생이 아직 발생하지 않았다면
어떻게 자기를 발생하게 하겠는가?
만약 이미 발생한 것이 자기를 발생하게 한다면,
이미 발생했는데 발생을 어디에 쓰겠는가?
이 발생이 아직 발생하지 않았을 때에 이미 발생한 것이 발생하든가,
아직 발생하지 않은 것이 발생할 것이다.
만약 아직 발생하지 않은 것이 발생한다고 한다면,
아직 발생하지 않은 것은 아직 존재하지 않는 것인데 어떻게 자기를 발생할 수 있겠는가?
만약 이미 발생한 것이 발생한다고 말한다면,
이미 발생한 것은 곧 발생인데 어떻게 다시 발생을 필요로 하겠는가?
이미 발생한 것에는 다시 발생이 존재하지 않고 이미 만들어진 것[作已]에는 다시 만듦[作]이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발생은 자기를 발생하게 하지 않는다.
발생이 자기를 발생하게 하지 않는데 어떻게 다른 것을 발생하게 하겠는가?
그대가 “자기를 발생하게 하고 또한 다른 것도 발생하게 한다”고 말한다면 이것은 옳지 않다.
머묾과 소멸도 이와 같다.
그러므로 발생과 머묾과 소멸이 유위의 상이라 한다면
이것은 옳지 않다.
발생과 머묾과 소멸이 유위의 상이라는 것이 성립하지 않기에 유위법은 공하다.
유위법이 공하기에 무위법도 공하다.
왜 그러한가?
유위법이 소멸한 것을 무위열반(無爲涅槃)이라고 한다.
그러므로 열반도 공하다.
또 발생이 없고 머묾이 없고 소멸이 없는 것을 무위의 상(相)이라고 한다.
발생과 머묾과 소멸이 존재하지 않으니 법(法)이 존재하지 않는다.
법이 존재하지 않으니 상(相)을 만들지 않을 것이다.
만약 “상이 없는 것이 열반의 상이다”고 말한다면 이것도 옳지 않다.
만약 상이 없는 것이 열반의 상이라면 어떤 상(相)으로 이 상이 없는 것을 인지하는가?
만약 상이 있는 것으로써 상이 없는 것을 인지한다면 어떻게 상이 없는 것이라 하겠는가?
만약 상이 없는 것으로써 상이 없는 것을 인지한다면 상이 없는 것은 무(無)일 것이다.
무는 인지할 수 없다.
만약 “가령 여러 벌의 옷은 다 상이 있는 것이지만 오직 한 벌의 옷만이 상이 없는 것이다”고 말한다면,
바로 상이 없는 것을 상으로 하는 것이기 때문에 사람은 상이 없는 옷을 취한다고 말한다.
이와 같이 상이 없는 옷을 취할 수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이와 같이 발생과 머묾과 소멸은 유위의 상이다.
발생과 머묾과 소멸이 없는 곳이 무위의 상이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그러므로 상이 없는 것이 열반이라 한다면 이것은 옳지 않다.
왜 그러한가?
발생과 머묾과 소멸의 여러 인(因)과 연(緣)들이 모두 공하다.
유위의 상이 존재한다는 것을 얻지 못하는데 어떻게 이것에 의존해서 무위를 얻겠는가?
그대는 어떤 유위의 확정된 상을 얻기에 상이 없는 곳이 무위라는 것을 알겠는가?
그러므로 그대가 여러 상의 옷들 중에서 상이 없는 옷이 상이 없는 열반에 비유된다고 말한다면 이것은 옳지 않다.
또 옷의 비유는 후의 제5장에서 자세히 설명할 것이다.
그러므로 유위법은 모두 공하다.
유위법이 공하기에 무위법도 공하다.
유위법과 무위법이 공하기에 나[我]도 공하다.
셋26)이 공하기 때문에 모든 법이 다 공하다.
5. 상이 있는 것과 상이 없는 것을 관찰하는 문[觀有相無相門]
또 모든 법은 공하다.
왜 그러한가?
상(相)이 있는 것에서 상은 상을 띠지 않네.
상이 없는 것에서도 상은 상을 띠지 않네.
그 상이 있는 것과 상이 없는 것을 떠나서
상이 어떻게 상을 띠겠는가?
상이 있는 사물[事]에서 상은 상을 띠지 않는다.
왜 그러한가?
만약 법에 상이 미리 있다면 다시 상을 어디에 쓰겠는가?
또 만약 상이 있는 사물에서 상이 상을 띨 수 있다면 두 상이 있다는 과실이 있다.
첫째는 전에 있는 상이고,
둘째는 상(相)에 온 상(相)이다.27) 그러므로 상이 있는 사물에서 상이 상을 띠는 일은 없다.
상이 없는 사물에서도 상이 상을 띠는 일은 없다.
어떤 법이 상이 없는 것이기에 상이 있는 것으로써 상을 띠겠는가?
가령 코끼리에는 두 개의 어금니가 있고 한 개의 코가 늘어져 있고 머리에 세 개의 돌기가 있고 귀는 삼태기[箕]와 같고 등뼈는 굽은 활과 같고 배는 크고 축 늘어져 있으며 꼬리끝에 털이 나 있고 네 다리는 투박하고 둥글다.
이것을 코끼리의 상이라고 한다.
이 상들을 떠나서 다시 코끼리가 상으로써 상을 띠는 일은 없다.
가령 말은 쫑긋 솟은 귀를 갖고 있고 갈기가 축 늘어져 있고 네 다리에는 같은 발굽이 있고 꼬리 전체에 털이 나 있다.
이 상들을 떠나서 다시 말이 상으로써 상을 띠는 일은 없다.
이와 같이 상이 있는 것에서 상이 상을 띠는 일은 없다.
상이 있는 것과 상이 없는 것을 떠나서 제3의 법이 상으로써 상을 띠는 일이 없다.
그러므로 상이 상을 띠는 일은 없다.
상이 상을 띠는 일이 없기에 상을 띠게 하는 법[可相法]도 성립하지 않는다.
왜 그러한가?
상이 있기 때문에 이 사물이 상을 띠게 하는 것[可相]이라는 것을 안다.
이 이유 때문에 상과 상을 띠게 하는 것은 모두 공하다.
상과 상을 띠게 하는 것이 공하기 때문에 모든 사물들이 또한 공하다.
왜 그러한가?
상과 상을 띠게 하는 것을 떠나서 다시 사물은 존재하지 않는다.
사물이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사물 아닌 것[非物]도 존재하지 않는다.
사물이 소멸한 것이기에 사물 아닌 것[無物]이라 한다.
만약 사물이 아니라면 무엇이 소멸하겠는가?
그래서 사물 아닌 것이라 한다.
사물과 사물 아닌 것이 공하기에 모든 유위법들이 다 공하다.
유위법들이 공하기에 무위법들도 공하다.
유위법과 무위법이 공하기에 나[我]도 공하다.
6. 같음과 다름을 관찰하는 문[觀一異門]
또 모든 법은 공하다.
왜 그러한가?
상(相)과 상을 띠게 하는 것[可相]의
같음이나 다름은 얻을 수 없네.
같음과 다름이 있지 않은데
어떻게 이 둘이 성립하겠는가?
이 상(相)과 상을 띠게 하는 것[可相]은 같음을 얻을 수도 없고 다름도 얻을 수 없다.
만약 같음과 다름을 얻을 수 없다면 이 둘은 성립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상과 상을 띠게 하는 것은 다 공하다.
상과 상을 띠게 하는 것이 공하기에 모든 법들이 다 공하다.
【문】 상과 상을 띠게 하는 것은 항상 성립하고 있는데 왜 성립하지 않는다 하는가?
그대는 상과 상을 띠게 하는 것의 같음이나 다름을 얻을 수 없다고 말한다.
이제 모든 사물들에 있어서 상이 상을 띠게 하는 것과 같거나,
상이 상을 띠게 하는 것과 다르거나,
일부분은 상(相)이고 다른 부분은 상을 띠게 하는 것이라고 말해야 한다.
예컨대 식(識)의 상(相)은 식과 같기에 작용하는 식(識)을 떠나서 다시 식이 있지 않다.
예컨대 수(受)의 상은 수와 같기에 작용하는 수(受)을 떠나서 다시 수가 있지 않다.
이것들이 ‘상과 상을 띠게 하는 것은 같다’는 것의 예이다.
예컨대 부처님께서는 “애(愛)의 소멸을 열반이라 한다.
애(愛)는 유위의 유루법이고 소멸(滅)은 무위의 무루법이다”고 말씀하셨다.
예컨대 믿음[信]에는 세 가지 상이 있다.
선한 사람과 가까이 하기를 좋아하고 법을 듣고자 하기를 좋아하고 보시를 행하기를 좋아하는 것이다.
이 세 가지 일은 신업(身業)과 구업(口業)이기 때문에 색온(色蘊)에 속한다.
믿음[信]은 심소법에 속하기 때문에 행온(行蘊)에 속한다.
이것이 ‘상과 상을 띠게 하는 것은 다르다’는 것의 예이다.
예컨대 바르게 봄[正見]은 도(道)의 상(相)이다.
도(道)의 일부분이다.
또 발생과 머묾과 소멸은 유위의 상이다.
유위법의 일부분이다.
이와 같이 상을 띠게 하는 것의 일부분을 상이라고 한다.
그러므로 상이 상을 띠게 하는 것과 같거나,
상이 상을 띠게 하는 것과 다르거나,
상을 띠게 하는 것의 일부분을 상으로 하는 것이다.
그대가 같음과 다름이 성립하지 않기에 상과 상을 띠게 하는 것이 성립하지 않는다고 말한다면 이것은 옳지 않다.
【답】 그대가 “상은 상을 띠게 하는 것과 같다.
식(識) 등이 그러하다”고 말한다면,
이것은 옳지 않다.
왜 그러한가?
상이 있기에 인지할 수 있는 것을 ‘상을 띠게 하는 것’[可相]이라고 하고,
작용하는 것을 상(相)이라고 한다.
모든 사물은 자기를 인지할 수 없다.
마치 손가락이 자기를 감촉할 수 없고,
마치 눈이 자기를 볼 수 없듯이.
그러므로 그대가 “식이 곧 상이고 상을 띠게 하는 것이다”고 말한다면 이것은 옳지 않다.
또 만약 상이 상을 띠게 하는 것과 같다면 ‘이것은 상이다’,
‘이것은 상을 띠게 하는 것이다’ 하고 분별하지 못할 것이다.
만약 ‘이것은 상이다’,
‘이것은 상을 띠게 하는 것이다’ 하고 분별할 수 있다면 상이 그대로 상을 띠게 하는 것이라고 말해서는 안 된다.
또 만약 상이 상을 띠게 하는 것이라면 원인과 결과가 동일할 것이다.
왜 그러한가?
상은 원인이고 상을 띠게 하는 것은 결과이니,
이 둘이 동일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실제로는 동일하지 않다.
그러므로 상이 상을 띠게 하는 것과 같다고 한다면 이것은 옳지 않다.
그대가 “상이 상을 띠게 하는 것과 다르다”고 말한다면 이것도 옳지 않다.
그대가 “애(愛)의 소멸이 열반의 상이다”고 말한다면 “애(愛)가 열반의 상이다”고 말해서는 안 된다.
만약 “애가 열반의 상이다”고 말한다면 “상과 상을 띠게 하는 것이 다르다”고 말해야 한다.
만약 “애의 소멸이 열반의 상이다”고 말한다면 상과 상을 띠게 하는 것이 다르다고 말할 수 없다.
또 그대가 믿음[信]에는 세 가지 상(相)28)이 있다고 말하더라도 모두 다르지 않을 것이다.
만약 믿음[信]에 상이 없다면 이 세 가지 일이 없다.
그러므로 상과 상을 띠게 하는 것의 다름을 얻을 수 없다.
또 상과 상을 띠게 하는 것이 다르다면 상에 다시 상이 있을 것이다.
무한역행이 될 것이니 이것도 옳지 않다.
그러므로 상과 상을 띠게 하는 것은 다름을 얻을 수 없다.
【문】 등불이 자기를 비출 수 있고 다른 것도 비출 수 있듯이 그렇듯이 상은 자기의 상을 띨 수 있고 또한 상은 다른 것의 상을 띨 수 있다.
【답】 그대가 말한 등불의 비유는 세 유위의 상을 타파할 때 이미 타파한 바 있다.
또 앞에서 말한 것을 스스로 어기는 셈이 된다.
그대는 앞에서 상과 상을 띠게 하는 것이 다르다고 말했다.
그런데 이제 “상이 자기의 상을 띠고 다른 것의 상도 띤다”고 말한다면 이것은 옳지 않다.
또 그대가 “상을 띠게 하는 것의 일부분이 상이다”고 말한다면 이것은 옳지 않다.
왜 그러한가?
이 의미는 같음이나 다름에 있을 것이다.
같음과 다름의 의미가 앞에서 이미 타파되었기 때문에 일부분이 상이라는 것도 타파된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이와 같이 여러 가지 이유 때문에 상과 상을 띠게 하는 것이 같다는 것도 얻을 수 없고 다르다는 것도 얻을 수 없다.
다시 제3의 법이 상과 상을 띠게 하는 것을 성취하는 일도 없다.
그러므로 상과 상을 띠게 하는 것은 모두 공하다.
이 둘이 공하기에 모든 법들이 다 공하다.
7. 유와 무를 관찰하는 문[觀有無門]
또 모든 법은 공하다.
왜 그러한가?
유와 무는 동시에 얻을 수 없다.
또한 동시가 아닐 때도 얻을 수 없다.
이렇게 말한다.
유와 무는 동시에 존재하지 않네.
무를 떠나서도 유가 존재하지 않고
무를 떠나지 않고서도 유가 존재하지 않네.
유는 항상 존재하지 않네.
유[有性]와 무[無性]는 한 법 속에 동시에[共] 존재하지 않는다.
마치 태어날 때는 죽음이 존재하지 않고 죽을 때는 태어남이 존재하지 않는 같다.
이것에 대해서는『중론』에서 이미 설명한 바 있다.
만약 “무를 떠나서 유가 존재하기에 과실이 없다”고 말한다면 이것은 옳지 않다.
왜 그러한가?
무를 떠나서 어떻게 유가 존재하겠는가?
앞에서 말한 바와 같이 법이 발생할 때 자체를 포함해서 일곱 법이 동시에 함께 발생한다.『아비달마』에서 “유와 무상성은 동시에 발생한다”고 말한다.
무상성은 소멸의 상(相)이기에 무이다.
그러므로 무를 떠나서 유가 발생하지 않는다.
만약 무상성을 떠나지 않고서 유가 발생한다면 유는 항상 무일 것이다.
만약 상주함이 있는 것[有常]이 무라면 최초에 머묾이 존재하지 않는다.
항상 괴멸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실제로는 머묾이 존재한다.
그러므로 “유는 항상 무일 것이다”고 해서는 안 된다.
만약 무상을 떠나서 유가 발생한다고 한다면 이것도 옳지 않다.
왜 그러한가?
무상을 떠나서 실제로 유는 발생하지 않는다.
【문】 유가 발생할 때 이미 무상성이 존재하기에 유가 아직 일어나지 않는 것이다.
소멸할 때 (무상성이) 일어나서 유를 괴멸하게 한다.
이와 같이 발생[生]과 머묾[住]과 소멸[滅]과 쇠이[老]는 모두 시간을 기다려서야 일어날 수 있다.
유가 발생할 때 발생[生]이 작용을 해서 유를 발생하게 한다.
발생과 소멸의 중간에는 머묾[住]이 작용을 행해서 유를 유지한다.
소멸할 때는 무상성이 작용을 행해서 이 유를 소멸하게 한다.
쇠이[老]는 발생을 변하게 해서 머묾에 다다르게 하고 머묾을 변하게 해서 소멸에 다다르게 한다.
무상성은 상주함을 얻는 것을 괴멸하게 해서 네 가지의 것29)을 성취하게 한다.
그러므로 법이 비록 무상성과 함께 발생하긴 하지만 유가 항상 무인 것이 아니다.
【답】 그대가 소멸의 상인 무상성이 유와 함께 발생한다고 말한다면 발생할 때 유는 괴멸할 것이고 소멸할 때 유는 발생할 것이다.
또 발생과 소멸이 둘다 존재하지 않는다.
왜 그러한가?
소멸할 때는 발생이 존재하지 않을 것이고 발생할 때는 소멸이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발생과 소멸은 상반되기 때문이다.
또 그대가 무상성이 머묾과 함께 발생한다고 말한다면30) 유가 괴멸할 때 머묾이 존재하지 않을 것이고,
머물 때 괴멸이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왜 그러한가?
머묾과 괴멸은 상반되기 때문이다.
쇠이할 때는 머묾이 존재하지 않고 머물 때는 쇠이가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그대가 “발생과 머묾과 소멸과 쇠이와 무상성이 본래 함께해서 발생한다”고 말한다면 그렇다면 뒤섞이게 된다.
왜 그러한가?
이 유가 만약 무상성과 함께 발생한다면 무상성은 괴멸의 상이니,
모든 사물들은 발생할 때 괴멸의 상이 없고 머물 때도 괴멸의 상이 없다.
그때 이 무상의 상이 없지 않겠는가?
예컨대 인식하기에 식(識)이니 인식하지 않는다면 식의 상이 없다.
감수하기에 수이니 감수(感受)하지 않는다면 수의 상이 없다.
억념(憶念)하기에 념(念)이니 억념하지 않는다면 념(念)의 상이 없다.
발생[起]이 발생[生]의 상이니 발생하지 않는다면 발생의 상이 아니다.
보존하고 유지하게 하는 것이 머묾[住]의 상이니 보존하고 유지하게 하지 않는다면 머묾의 상이 아니다.
변이[轉變]가 쇠이[老]의 상이니 변이하지 않는다면 쇠이의 상이 아니다.
수명이 소멸하는 것이 죽음의 상이니 수명이 소멸하지 않는다면 죽음의 상이 아니다.
이와 같이 괴멸은 무상성의 상이다.
괴멸을 떠나서는 무상성의 상이 존재하지 않는다.
발생과 머묾의 때에 비록 무상성이 존재하긴 하지만 유를 괴멸시킬 수 없고 후에 유를 괴멸시킬 수 있다면 무엇 때문에 함께 발생하겠는가?
그렇다면 유가 괴멸할 때마다 무상이 존재할 것이다.
그러므로 “비록 무상성이 함께 발생하긴 하지만 후에 유를 괴멸시킨다”고 한다면 이것은 옳지 않다.
이와 같이 유와 무는 함께해서 성립하는 것도 아니고 함께하지 않고서 성립하지 않는 것도 아니다.
그러므로 유와 무는 공하다.
유와 무가 공하기에 모든 유위법들이 공하다.
모든 유위법들이 공하기에 무위법들도 또한 공하다.
유위법과 무위법이 공하기에 중생도 또한 공하다.
8. 자성을 관찰하는 문[觀性門]
또 모든 법은 공하다.
왜 그러한가?
모든 법은 자성이 없기 때문이다.
이렇게 말한다.
변이가 있는 것이 보이니
법에는 자성이 없네.
자성이 없는 법도 존재하지 않네.
법은 모두 공하기 때문이네.
만약 법에 자성이 있다면 변이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모든 법이 다 변이하는 것이 보인다.
그러므로 법에는 자성이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또 만약 법에 확정된 자성[定性]이 있다면 여러 연에서 발생하지 않을 것이다.
만약 자성이 연에서 발생한다면 자성은 만들어진 법[作法]이다.
만들어지지 않은 법[不作法]은 다른 것에 의존하지 않기에 자성이라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모든 법은 공하다.
【문】 만약 모든 법이 공하다면 발생이 없고 소멸이 없을 것이다.
만약 발생이 없고 소멸이 없다면 고제(苦諦)가 없을 것이다.
만약 고제가 없다면 집제가 없을 것이다.
만약 고제와 집제가 없다면 멸제가 없을 것이다.
만약 고(苦)의 소멸이 없다면 고를 소멸시키는 도(道)에 도달하지 못할 것이다.
만약 모든 법이 공해서 자성이 없다면 4성제(聖諦)가 없을 것이다.
4성제가 없기 때문에 4사문과(沙門果)31)도 없다.
4사문과가 없기 때문에 현성(賢聖)이 없다.
이것이 없기 때문에 불(佛)ㆍ법(法)ㆍ승(僧)도 없고 세간의 법들도 모두 없다.
이것은 옳지 않다.
그러므로 모든 법은 절대로 공하지 않다.
【답】 2제(諦)가 있다.
하나는 세제(世諦)이고 하나는 제일의제(第一義諦)이다.
세제에 의존하기에 제일의제를 말할 수 있다.
만약 세제에 의존하지 않는다면 제일의제를 말할 수 없다.
만약 제일의제를 얻지 못한다면 열반을 얻지 못한다.
만약 어떤 사람이 2제(諦)를 알지 못한다면 자기의 이익과 타인의 이익과 자타의 이익을 알지 못한다.
이와 같이 만약 세제를 안다면 제일의제를 알고,
제일의제를 안다면 세제를 안다.
그대가 이제 세제를 말하는 것을 듣고서 “이것은 제일의제이다”고 말한다.
그러므로 과실에 떨어진다.
모든 부처님들의 연기[因緣]의 법을 깊고 깊은 제일의(第一義)라고 한다.
이 연기의 법은 자성이 없기 때문에 “나[我]는 공하다”고 말한다.
만약 법이 여러 연에서 발생하지 않는다면 각각 확정된 자성이 있을 것이다.
5온(蘊)에는 발생과 소멸의 5온이 있지 않아야 한다.
5온이 발생하지 않고 소멸하지 않는다면 무상성이 없다.
만약 무상성이 없다면 고성제가 없다.
만약 고성제가 없다면 여러 연에서 발생하는 법인 집성제가 없다.
만약 법에 확정된 자성이 있다면 고(苦)가 소멸하는 성제(聖諦)가 없다.
왜 그러한가?
자성은 변이가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만약 고(苦)가 소멸하는 성제가 없다면 고를 소멸시키는 도(道)에 도달하지 못한다.
그러므로 어떤 사람이 공성[空]을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4성제가 없다.
만약 4성제가 없다면 4성제를 얻는 일도 없다.
만약 4성제를 얻는 일이 없다면 고(苦)를 아는 일,
집(集)을 끊는 일,
멸(滅)을 증득하는 일,
도(道)를 수습(修習)하는 일이 없다.
이것들이 없기 때문에 4사문과(沙門果)가 없다.
4사문과가 없기 때문에 향(向)32)을 얻는 일이 없다.
만약 향(向)을 얻는 일이 없다면 불(佛)이 없다.
연기의 법을 파괴하기 때문에 법(法)이 없다.
법33)이 없기 때문에 승(僧)이 없다.
만약 불과 법과 승이 없다면 3보(寶)가 없는 것이다.
만약 3보가 없다면 세속의 법을 파괴한다.
이것은 옳지 않다.
그러므로 모든 법은 공하다.
또 만약 모든 법에 확정된 자성[定性]이 있다면 발생이 없고 소멸이 없으며 죄가 없고 복이 없으며 죄와 복의 과보가 없어서,
세간은 항상 동일한 모습일 것이다.
그러므로 모든 법은 자성이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만약 “법들은 자성이 없지만 타성에 의해 존재한다”고 말한다면 이것도 옳지 않다.
왜 그러한가?
만약 자성이 없다면 어떻게 타성에 의해 존재하겠는가?
자성에 의존하기에 타성이 있기 때문이다.
또 타성은 그대로 자성이기도 하다.
왜 그러한가?
타성은 타자의 자성이기 때문이다.
만약 자성이 성립하지 않는다면 자성도 성립하지 않는다.
자성과 타성을 떠나서 어디에 다시 법이 존재하겠는가?
만약 유가 성립하지 않는다면 무도 성립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이제 궁구해 보아도 자성이 없고 타성이 없다.
유가 없고 무가 없기 때문이다.
모든 유위법은 공하다.
유위법이 공하기에 무위법도 공하다.
유위법과 무위법이 공한데 하물며 어찌 나(我)가 공하지 않겠는가?
9. 원인과 결과를 관찰하는 문[觀因果門]
또 모든 법은 공하다.
왜 그러한가?
모든 법에는 자성이 없다.
또한 다른 곳에서 오는 것도 아니다.
이렇게 말한다.
결과는 뭇 연 속에서
결코 얻을 수 없네.
또한 다른 곳에서 오는 것도 아니네.
어떻게 결과가 존재하겠는가?
연들 하나하나에도 화합한 것에도 모두 결과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은 앞에서 말한 바 있다.
또 이 결과가 다른 곳에서 오는 것도 아니다.
만약 다른 곳에서 온다면 인과 연들에서 발생하는 것이 아니다.
또한 여러 연이 화합하는 작용[功]도 없을 것이다.
만약 결과가 연들 속에 존재하지 않고 다른 곳에서 오는 것도 아니라면 이것은 공한 것이다.
결과가 공하기에 모든 유위법이 공하다.
유위법이 공하기에 무위법도 공하다.
유위법과 무위법이 공한데 하물며 어찌 ‘나’(我)가 공하지 않겠는가?
10. 짓는 자를 관찰하는 문[觀作者門]
또 모든 법은 공하다.
왜 그러한가?
자기가 짓는 것[自作],
타자가 짓는 것[他作],
양자가 짓는 것[共作],
원인 없이 짓는 것[無因作]은 얻을 수 없기 때문이다.
이렇게 말한다.
자기가 짓는 것,
타자가 짓는 것,
양자가 짓는 것,
원인 없이 짓는 것,
이와 같은 것들은 얻을 수 없네.
그러니 고(苦)가 존재하지 않네.
만약 자기가 짓는 것이라고 한다면,
옳지 않다.
왜 그러한가?
만약 자기가 짓는 것이라면 자기가 자기 자체를 짓는 것이다.
이것을 갖고서 이것을 만들 수는 없다.
예컨대 식(識)은 자기를 인식할 수 없고 손가락은 자기를 감촉할 수 없다.
그러므로 자기가 짓는다고 말할 수 없다.
타자가 짓는다는 것도 옳지 않다.
타자가 어떻게 고(苦)를 짓겠는가?
【문】 연들이 타자이다.
연들이 고(苦)를 짓기에 타자가 짓는다고 하는 것이다.
어떻게 타자가 짓는 것이 아니라고 말하겠는가?
【답】 만약 연들을 타자라 한다면,
고(苦)는 연들이 지은 것이다.
이 고가 연들에서 생겼다면 연들의 성질을 갖는 것[衆緣性]이다.
연들의 성질을 갖는 것인데 어떻게 (연들을) 타자라 하겠는가?
가령 진흙의 물단지에서 진흙을 타자라고 하지 않는다.
또 가령 금팔찌[金釧]에서 금을 타자라고 하지 않는다.
고(苦)도 이와 같아서,
여러 연에서 생기기에 연들을 타자라고 하지 않는다.
또 이 연들은 자성으로서 존재하지 않기에 스스로 있음[自在]를 얻지 못한다.
그러므로 연들에서 결과가 생긴다고 말할 수 없다.『중론』에서는 이렇게 말한다.
결과는 여러 연에서 발생하네.
이 연들은 스스로 있지 않네.
연들이 스스로 있지 않은데
어떻게 연들에서 결과가 생기겠는가?
이와 같이 고는 타자가 지을 수 없다.
자기와 타자가 짓는다는 것도 옳지 않다.
두 과실이 있기 때문이다.
만약 자기와 타자가 고(苦)를 짓는다고 말한다면 자기가 짓는다는 과실과 타자가 짓는다는 과실이 있다.
그러므로 양자가 고를 짓는다는 것도 옳지 않다.
만약 고가 원인 없이 생긴다면,
또한 옳지 않다.
무수한 과실이 있기 때문이다.
경전에서는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나형가섭[裸形迦葉]34)이 부처님께 물었다.
‘고는 자기가 지은 것입니까?’
부처님께서는 아무 말씀도 하지 않고 대답하지 않으셨다.
‘고가 만약 자기가 지은 것이 아니라면 타자가 지은 것입니까?’
부처님께서 또한 대답하지 않으셨다.
‘세존이시여,
만약 그렇다면 고는 양자가 지은 것입니까?’
부처님께서 또한 대답하지 않으셨다.
‘세존이시여,
만약 그렇다면 고는 원인이 없이 연이 없이 지은 것입니까?’
부처님께서 또한 대답하지 않으셨다.” 이와 같이 네 가지 물음에 부처님께 서 다 대답하지 않으셨으니 고가 공하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문】 부처님께서 이 경전에서 말씀하실 때 “고(苦)는 무상하다”고 말씀하시지 않으셨다.
제도되어야 할 중생에 맞추어서 이렇게 말씀하셨을 따름이다.
이 나형가섭은 “사람[人]이 고의 원인이다”고 말한다.
‘나[我]’가 존재한다고 하는 자는 “잘 생기고 못 생긴 것은 모두 ‘나[神]’가 지은 것이다.
‘나’는 항상 청정해서 고[苦惱]가 없다.
인식하는 것과 이해하는 것은 모두 다 ‘나’이다.
‘나’는 잘 생김ㆍ못 생김ㆍ고(苦)ㆍ낙(樂)을 짓고 다시 여러 가지의 몸을 받는다”고 말한다.
이 그릇된 견해를 갖고서 부처님께 “고는 자기가 짓는 것인가?” 하고 묻는다.
그래서 부처님께서 대답하지 않으셨다.
고는 실제로는 ‘나’가 지은 것이 아니다.
만약 ‘나’가 고의 원인이고 ‘나’가 원인이 되어서 고가 발생한다면 ‘나’는 무상할 것이다.
왜 그러한가?
만약 어떤 법이 원인이고 그 원인에서 발생한 법은 모두 또한 무상하기 때문이다.
만약 ‘나’가 무상하다면 죄와 복의 과보는 모두 다 단멸할 것이고 범행을 닦는 복의 과보도 공할 것이다.
만약 ‘나’가 고의 원인이라면 해탈이 존재하지 않는다.
왜 그러한가?
‘나’가 만약 고를 짓는다면 고를 떠나서 ‘나’가 존재하지 않는다.
고를 짓는 자에게 몸이 없기 때문이다.
만약 몸이 없이 고를 짓는다면 해탈을 얻는 자도 고일 것이다.
그렇다면 해탈이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나 실제로는 해탈이 존재한다.
그러므로 고를 자기가 짓는다는 것은 옳지 않다.
타자가 고를 짓는다는 것도 옳지 않다.
고(苦) 바깥에 어떻게 사람이 있어서 고를 지어서 다른 이에게 주겠는가?
또 만약 타자가 고를 짓는다면 자재천이 짓는 것이 되고 이와 같은 그릇된 견해를 갖고서 묻기 때문에 부처님께서 또한 대답하지 않으신 것이다.
그러나 실제로는 자재천이 짓는 것이 아니다.
왜 그러한가?
본성이 상반되기 때문이다.
가령 소의 새끼도 소인 것과 같이 만약 만물이 자재천에서 생긴다면 모두 자재천과 유사할 것이다.
이것들은 그것의 자식이기 때문이다.
또 만약 자재천이 중생을 만든다면 고를 자식에게 주지 않을 것이다.
그러므로 자재천이 고를 짓는다고 말해서는 안 된다.
【문】 중생이 자재천에서 생기고 괴로움[苦]과 즐거움[樂] 또한 자재천에서 생기는 것이지만 즐거움의 원인을 인식하지 못하기 때문에 그 괴로움을 주는 것이다.
【답】 만약 중생이 자재천의 자식이라면 오직 즐거움으로써 괴로움을 차단할 뿐이지 괴로움을 주지 않을 것이다.
또한 자재천만을 공양한다면 괴로움이 없어지고 즐거움을 얻을 것이다.
그러나 실제로는 그렇지 않다.
단지 스스로 괴로움과 즐거움의 인연(因緣)을 행해서 스스로 과보(果報)를 받을 뿐이지 자재천이 짓는 것이 아니다.
또 그가 만약 자재천이라면 필요한 것이 있지 않을 것이다.
필요한 것이 있어서 스스로 짓는다면 자재천이라고 하지 않는다.
만약 필요한 것이 없다면 어떻게 변화(變化)을 행해서 만물을 짓는 것이 어린애가 노는 것과 같겠는가?
또 만약 자재천이 중생을 만든다면 누가 또 이 자재천을 만드는 것인가?
만약 자재천이 스스로 만든다면 옳지 않다.
사물이 스스로 만들 수 없는 것과 같이.
만약 다시 만드는 자가 존재한다면 자재천이라고 하지 못할 것이다.
또 만약 자재천이 만드는 자라면 만들 때 장애가 없어서 생각만 해도 만들 수 있을 것이다.『자재경(自在經)』에서 “자재천은 만물을 만들기를 바라고 모든 고행(苦行)을 행해서 배로 기는 벌레들을 생기게 한다.
또 고행을 행해서 ‘나’는 새들을 생기게 한다.
또 고행을 행해서 사람과 천신을 생기게 한다”고 말하고 있다.
만약 고행을 행해서 처음에 독충을 생겨나고 하고 다음에 ‘나’는 새를 생겨나게 하고 마지막에 사람과 천신을 생겨나게 한다면,
중생은 업(業)의 인연에 의해 생겨나는 것이지 고행에 의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또 자재천이 만물을 창조한다면 어느 곳에 거주하면서 만물을 창조하는 것인가?
이 거주하는 곳은 자재가 만든 것인가,
다른 것이 만든 것인가?
만약 자재천이 만들었다면 어느 곳에 거주하면서 만드는 것인가?
만약 다른 곳에 거주하면서 만든다면 다른 곳은 또 누가 지은 것인가?
그렇다면 무한역행이 된다.
만약 다른 것이 만들었기에 이 자재천이 존재한다고 한다면 이것은 옳지 않다.
그러므로 세간의 모든 사물은 자재천이 만든 것이 아니다.
또 만약 자재천이 만든 것이라면 왜 고행해서 다른 이에게 공양하고 기쁘게 해서 원하는 바를 구하려고 하는 것인가?
만약 고행해서 다른 이에게 구한다면 자재가 아니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또 만약 자재천이 만물을 창조한다면 최초에 만들어진 것은 결코 변함이 없어야 할 것이다.
말[馬]은 항상 말이고 사람은 항상 사람이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이제 업(業)에 따라서 변화가 있는 것이니,
자재천이 만든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또 만약 자재천이 만든 것이라면 죄와 복이 없을 것이다.
선과 악,
잘 생김[美]과 못 생김[醜] 모두 자재천에 의해 만들어지기 때문이다.
그러나 죄와 복이 실제로 존재한다.
그러므로 자재천이 만든 것이 아니다.
또 만약 중생이 자재천에서 생겨난다면 모두 경애(敬愛)하는 것이 자식이 아버지를 경애하는 것과 같을 것이다.
그러나 실제로는 그렇지 않다.
미움이 있고 사랑이 있다.
그러므로 자재천이 만든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또 만약 자재천이 만든 것이라면 왜 모두 즐거운 사람으로 만들고 모두 괴로워 하는 사람으로 만들지 않았는가?
그러나 괴로워 하는 사람과 즐거워 하는 사람이 존재한다.
미움과 사랑에서 생겨나기 때문에 자재로운 것이 아니고 자재로운 것이 아니기 때문에 자재천이 만든 것이 아니다.
또 만약 자재천이 만든 것이라면 중생이 만드는 것이 없을 것이다.
그러나 중생은 방편으로 각각 만드는 것이 있다.
그러므로 자재천이 만든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또 만약 자재천이 만든 것이라면 선과 악,
괴로움[苦]과 즐거움[樂]의 일들을 짓지 않아도 스스로 올 것이다.
그와 같다면 세간의 법을 파괴하고 계(戒)를 지키는 일과 범행(梵行)을 행하는 일이 모두 이익이 없을 것이다.
그러나 실제로는 그렇지 않다.
그러므로 자재천이 만든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또 만약 (자재천이) 복업(福業)의 인연이기에 중생 중에서 위대하다면 다른 중생의 복업을 행하는 자도 또한 위대할 것이니,
왜 자재천을 귀중하게 여기겠는가?
만약 인연이 없기에 자재롭다면 모든 중생도 자재로울 것이다.
그러나 실제로는 그렇지 않다.
자재천이 만든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만약 자재로움을 다른 것에 의해서 얻는다면 다른 것도 다른 것에 의해서 존재할 것이다.
그렇다면 무한역행이 된다.
무한역행이 된다면 원인이 없는 것이다.
이와 같은 여러 이유들 때문에 만물은 자재천에서 생겨나지 않는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또한 자재천이 존재하는 일도 없다.
이와 같은 그릇된 견해를 갖고서 ‘타자가 지은 것[他作]’에 대해서 묻기 때문에 부처님께서 대답하지 않으신 것이다.
양자가 짓는다는 것도 또한 옳지 않다.
두 과실이 있기 때문이다.
인과 연들이 화합해서 생기기 때문에 원인이 없이 생기는 것이 아니다.
부처님께서 또한 대답하지 않으셨다.
그러므로 이 경전은 네 가지의 그릇된 견해를 타파하는 것일 뿐이지 ‘고는 공하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다.
【답】 부처님께서 이와 같이 인과 연들에서 고가 생긴다고 말해서 네 가지의 그릇된 견해를 타파하긴 하지만 이것은 공성을 설시(說示)하는 것이다.
고는 인과 연들에서 생긴다고 설시하는 것은 공성의 이치를 설시하는 것이다.
왜 그러한가?
만약 인과 연들에서 생긴다면 자성이 없고 자성이 없다면 공하다.
고가 공하듯이 유위와 무위와 중생 모든 것이 다 공하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11. 삼시35)를 관찰하는 문[觀三時門]
또 모든 법은 공하다.
왜 그러한가?
원인과 원인을 갖는 법[有因法]이 전시(前時)에,
후시(後時)에,
동시[一時]에 발생하는 것을 얻을 수 없기 때문이다.
이렇게 말한다.
만약 법이 전시에,
후시에,
동시에
모두 성립하지 않는다면
이 법이 원인에서 발생하는 것이
어떻게 성립할 수 있겠는가?
전에 원인이 있고 후에 원인을 갖는 것이 있다면 이것은 옳지 않다.
왜 그러한가?
만약 전에 원인이 있고 후에 원인에서 발생한다면,
전의 원인일 때 원인을 갖는 것[有因]이 없는데 무엇을 위해 원인이 되겠는가?
만약 전에 원인을 갖는 것이 있고 후에 원인이 있다면 원인이 있지 않을 때 원인을 갖는 것이 이미 성립하는데 원인을 어디에 쓰겠는가?
만약 원인과 원인을 갖는 것이 동시라면 이것은 원인이 없는 것이 된다.
소의 뿔이 동시에 생길 때 왼쪽 것과 오른쪽 것이 서로 의존하지 않는 것과 같다.
그렇다면 원인은 결과의 원인이 아니고 결과는 원인의 결과가 아닐 것이다.
동시에 발생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3시(時)에서 원인과 결과를 얻을 수 없다.
【문】 그대는 원인과 결과의 법을 부정하고 또한 3시에 성립하지 않는다고 한다.
만약 전에 부정함[破]이 있고 후에 부정되어야 할 것[可破]이 있다면,
아직 부정되어야 할 것이 있지 않은데 이 부정함은 무엇을 부정하겠는가?
만약 전에 부정되어야 할 것이 있고 후에 부정함이 있다면,
부정되어야 할 것이 이미 성립했는데 어디에 부정함을 쓰겠는가?
만약 부정함과 부정되어야 할 것이 동시라면 이것도 원인이 없는 것이 된다.
소의 뿔이 동시에 생겨서 왼쪽 것과 오른 쪽 것이 서로 의존하지 않는 것과 같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부정함은 부정되어야 할 것에 의존하지 않고 부정되어야 할 것은 부정하는 것에 의존하지 않는다.
【답】 그대의 부정함[破]과 부정되어야 할 것[可破]도 또한 이 과실이 있다.
만약 모든 법이 공하다면 부정함이 없고 부정되어야 할 것이 없다.
나는 이제 공하다고 말하니 내가 말한 것이 성립한다.
만약 내가 부정함과 부정되어야 할 것이 실제로 존재한다[定有]고 말한다면 이 비판[難]을 받아야 할 것이다.
나는 부정함과 부정되어야 할 것이 실제로 존재한다고 말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이 비판을 받지 않는다.
【문】 전에 원인이 존재하는 것이 눈에 보인다.
마치 도공이 물단지를 만드는 것과 같이.
또 후에 원인이 존재한다.
제자가 원인이 되어서 스승이 있는 것이니 제자를 가르치고 난 후에 제자라는 것을 아는 것과 같이.
또 동시에 원인이 존재한다.
등불과 빛[明]과 같이.
만약 전시(前時)의 원인,
후시(後時)의 원인,
동시의 원인은 얻을 수 없다고 말한다면 이것은 옳지 않다.
【답】 도공이 물단지를 만드는 것과 같은 이 비유는 적절하지 않다.
왜 그러한가?
만약 아직 물단지가 있지 않다면 도공은 무엇을 위해 원인이 되겠는가?
도공과 같은 모든 전시(前時)의 원인은 모두 얻을 수 없다.
후시(後時)의 원인도 이와 마찬가지로 얻을 수 없다.
만약 아직 제자가 있지 않다면 누가 스승이 되겠는가?
그러므로 후시의 원인도 얻을 수 없다.
만약 동시의 원인이 등불과 빛과 같은 것이라면 이것 또한 의인(疑因)36)과 동일하다.
등불과 빛이 동시에 생긴다면 어떻게 서로 원인이 되겠는가?
그와 같이 인과 연들이 공하기 때문에 모든 유위법ㆍ무위법ㆍ중생이 다 공하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12. 발생을 관찰하는 문[觀生門]
또 모든 법은 공하다.
왜 그러한가?
이미 발생한 것[生]과 아직 발생하지 않은 것[不生]과 지금 발생하고 있는 것을 얻을 수 없기 때문이다.
이제 이미 발생한 것은 발생하지 않고,
아직 발생하지 않은 것도 발생하지 않고,
지금 발생하고 있는 것도 발생하지 않는다.
이렇게 말한다.
이미 발생한 결과는 발생하지 않네.
아직 발생하지 않은 것도 발생하지 않네.
이 이미 발생한 것과 아직 발생하지 않은 것 없이
지금 발생하고 있는 것도 발생하지 않네.
발생이란 결과가 생기하는 것,
산출되는 것을 의미한다.
아직 발생하지 않은 것이란 아직 생기하지 않은 것,
아직 산출되지 않은 것,
아직 존재하지 않는 것을 의미한다.
지금 발생하고 있는 것이란 생기하기 시작했는데 아직 성립하지 않은 것을 의미한다.
이 중에서 “이미 발생한 것은 발생하지 않는다”란,
이 발생이 이미 발생했다면 발생하지 않는다.
왜 그러한가?
무한역행의 과실이 있기 때문이고,
이미 지었는데 다시 짓기 때문이다.
만약 발생이 발생하고 나서 제2의 발생을 발생하게 한다면,
제2의 발생은 발생하고 나서 제3의 발생을 발생시킬 것이고 제3의 발생은 발생하고 나서 제4의 발생을 발생시킬 것이다.
최초에 발생하고 나서 제2의 발생이 있는 것과 같이 그와 같이 발생은 무한역행이 된다.
이것은 옳지 않다.
그러므로 이미 발생한 것[生]은 발생하지 않는다.
또 “발생은 이미 발생하고 나서 사용할 발생의 발생을 발생하게 하고
이 발생은 발생하지 않으면서 발생한다”고 말한다면
이것은 옳지 않다.
왜 그러한가?
최초의 발생이 발생하지 않으면서 발생한다면 그렇다면 두 종류의 발생이 있는 것이다.
발생하고 나서 발생하고 아직 발생하지 않고서 발생하기 때문에.
그대가 앞에서는 확정된 것37)을 말했지만 지금은 확정되지 않는 것38)을 말하고 있다.
이미 지은 것은 짓지 않고,
이미 탄 것은 타지 않고,
이미 증명한 것은 증명하지 않는 것과 같이 그와 같이 이미 발생한 것은 다시 발생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이미 발생한 법[生法]은 발생하지 않는다.
아직 발생하지 않은 법[不生法]도 발생하지 않는다.
왜 그러한가?
발생과 합하지 않기 때문이다.
또 모든 발생하지 않은 것에 발생이 있다는 과실이 있기 때문이다.
만약 아직 발생하지 않은 법이 발생한다면 발생을 떠나서 발생이 있는 것이니 그렇다면 발생하지 않는다.
만약 발생을 떠나서 발생이 있다면 지음[作]을 떠나서 지음이 있고 감[去]을 떠나서 감이 있고 먹음[食]을 떠나서 먹음이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세속의 법을 파괴하는 것이니,
이것은 옳지 않다.
그러므로 아직 발생하지 않은 법은 발생하지 않는다.
또 만약 발생하지 않는 법이 발생한다면 모든 발생하지 않는 법이 다 발생할 것이다.
모든 범부에게 아직 무상정등각(無上正等覺)이 생기지 않았는데 모두에게 생길 것이고,
괴멸하지 않는 법[不壞法]인 아라한에게 번뇌가 일어나지 않는데도 일어날 것이고,
토끼와 말 등에서 뿔이 생기지 않는데도 생길 것이니,
이것은 옳지 않다.
그러므로 “아직 발생하지 않은 것이 발생한다”고 말해서는 안 된다.
【문】 “아직 발생하지 않은 것이 발생한다”란,
가령 인연의 화합ㆍ시간ㆍ공간ㆍ행위자ㆍ방편이 다 갖추어져 있다면 그렇다면 아직 발생하지 않은 것이 발생한다.
모든 아직 발생하지 않은 것이 발생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므로 모든 아직 발생하지 않은 것을 비판해서는 안 된다.
【답】 만약 법이 발생할 때 시간ㆍ공간ㆍ행위자ㆍ방편ㆍ여러 연의 화합에서 발생한다면,
이 중에서 이미 실제로 존재하는 것은 발생하지 않는다.
이미 존재하지 않는 것도 발생하지 않는다.
또 존재하면서 존재하지 않는 것도 발생하지 않는다.
이 세 종류에서 발생을 구할 때 얻을 수 없다는 것은 앞에서 설명한 바 있다.
그러므로 아직 발생하지 않은 법은 발생하지 않는다.
지금 발생하고 있는 것도 발생하지 않는다.
왜 그러한가?
이미 발생한 것이 발생하는 과실과 아직 발생하지 않은 발생하는 과실이 있기 때문이다.
지금 발생하고 있는 법의 이미 발생한 부분이 발생하지 않는다는 것은 앞에서 말한 바와 같다.
아직 발생하지 않은 부분이 발생하지 않는다는 것도 앞에서 말한 바와 같다.
또 만약 발생을 떠나서 지금 발생하고 있는 것이 있다면 지금 발생하고 있는 것이 발생할 것이다.
그러나 실제로는 발생을 떠나서 지금 발생하고 있는 것이 없다.
그러므로 지금 발생하고 있는 것도 발생하지 않는다.
또 만약 “어떤 사람이 지금 발생하고 있는 것이 발생한다”고 말한다면 두 발생이 있는 것이다.
하나는 지금 발생하고 있는 것이 발생한다 할 때의 발생이고 다른 하나는 지금 발생하고 있는 것의 발생이다.
두 법이 있는 일이 없는데 어떻게 두 발생이 있겠는가?
그러므로 지금 발생하고 있는 것도 발생하지 않는다.
또 아직 발생이 있지 않은데 발생이 어느 곳에서 행하겠는가?
발생이 만약 행할 곳이 없다면 지금 발생하고 있는 것의 발생이 없다.
그러므로 지금 발생하고 있는 것도 발생하지 않는다.
이와 같이 이미 발생한 것과 아직 발생하지 않은 것과 지금 발생하고 있는 것이 모두 성립하지 않는다.
발생[生法]이 성립하지 않기 때문에 발생하지 않는다.
머묾과 소멸도 이와 같다.
발생과 머묾과 소멸이 성립하지 않기 때문에 유위법도 성립하지 않는다.
유위법이 성립하지 않기 때문에 무위법도 성립하지 않는다.
유위법과 무위법이 성립하지 않기 때문에 중생도 성립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모든 법은 무생(無生)이다.
영원히 공적(空寂)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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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이문론서(十二門論序)
『십이문론(十二門論)』은 실상(實相)의 절중(折中)5)이고 도량(道場)의 중요한 궤범[要軌]이다.
십이문(十二門)이란 뭇 갈래[衆枝]를 총괄한 큰 숫자[大數]이며,
문(門)이란 열리고 통하여 막힘이 없음을 이르며,
논한다는 것은 그 근원[源]을 궁구하여 그 이치[理]를 다하고자 하는 것이다.
만약 한 이치[一理]가 다하지 않으면 온갖 다른 것들[衆異]이 어지럽게 일어나 이치를 모르는 어그러짐이 있게 되며,
한 근원[一源]이 다하지 않으면 온갖 길[衆塗]이 번성하게 되어 다른 곳에 이르는 자취가 있게 된다.
다른 곳에 이르는 길들이 평탄해지지 않고 이치에 어긋나는 것들이 없어지지 않는 것은 보살의 근심이다.
이 때문에 용수보살이 출리(出離)를 원하는 이가 말미암을 길을 열고자 『십이문(十二門)』을 지어 바로잡았다.
십이(十二)로써 바로 잡으면 유무(有無)가 아울러 펼쳐지고 일이 다하지 않음이 없게 된다.
일이 유무에서 다하면 공(功)을 조화(造化)에서 잊게 되며6),
이치가 허위(虛位)7)에서 다하면 아(我)를 2제(際)에서 잊게 된다.
그런즉 아(我)를 잊으면 통발[筌]8)을 버리게 되고 통발을 잊으면 언교(言敎)의 이유조차 버리게 된다[遺寄].
통발과 아(我)를 겸하여 잊어야 비로소 진실[實]에 가깝게 될 것이다.
진실에 가깝게 되면 허(虛)와 실(實) 두 가지가 아득해져 득실(得失)에 사이가 없게 된다.
아득하여 사이가 없으면 조차(造次)를 양현(兩玄)에서 잊고 전패(顚沛)를 일치(一致)에서 없애서9) 돌아가는 수레[歸駕]를 도량(道場)에서 가지런히 몰고 이치로 향하는 마음[趣心]을 불지(佛地)에서 마칠 수 있을 것이다.
넓고도 넓도다! 참으로 허인(虛刃)10)을 틈이 없는 곳에서 놀리고 희성(希聲)11)을 우주 안에서 연주하여 중도의 이치를 놓친 사람[溺喪]을 중도의 이치[玄津]에서 건지고 유무(有無)에 빠져 있는 사람을 유무의 밖[域外]에서 끄집어내는 자라고 이를 만하다.
만났도다! 후세의 학자들은 험한 길[夷路]이 평탄해지고 그윽한 길[幽塗]이 열려 참으로 화란(和鸞)12)을 북녘 바다[北冥]에 떨치고 흰 소[白牛]를 남쪽으로 몰아가며,
큰 깨달음[大覺]을 꿈속 경계[夢境]에서 깨치고 현전(現前)의 사물[百化]에 나아가 편안히 돌아갈 수 있을 것이다.
이와 같은 이는 태양[曜靈]이 바야흐로 한창인지 대지[玄陸]가 아직 밝지 않은지 어찌13) 다시 알겠는가?
나[睿]는 비루하고 이치에 어긋난 얕은 식견으로 감히 허관(虛關)에 정성을 쏟고 종극(宗極)을 희망하여 날마다 마땅함이 있기를 바라고 해마다 잘 자라기를 바라는데 더구나 재질이 아름다운 자이겠는가?
지극한 공경과 우러름을 이기지 못하고 감히 우둔한 말과 짧은 생각으로 서문을 써서 편다.
아울러 품목(品目)의 뜻도 앞에다 쓴다.
어찌 보탬이 되기를 바라겠는가?
이 마음으로 빨리 나아가는 길을 열기를 바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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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4연(緣):
인연(因緣),
등무간연(等無間緣),
소연연(所緣緣),
증상연(增上緣)을 말한다.
2 3상(相):
생(生),
주(住),
멸(滅)을 말한다.
3 네 곳[四處]:
자작(自作),
타작(他作),
공작(工作),
무인작(無因作)을 말한다.
4 3시(時):
과거,
현재,
미래를 말한다.
5 절중(折中):
서로 다른 사물을 조절하여 알맞게 하는 것을 말한다.
6 일이 유무에서~잊게 되며:
조화(造化)의 공(功)을 인식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조화(造化)는 조물주(造物主)를 말한다.
7 허위(虛位):
실상진여(實相眞如)의 법위(法位)를 말한다.
8 통발[筌]:
언교(言敎)를 통발에 비유한 것이다.
9 조차(造次)~없애서:
조차(造次)와 전패(顚沛)는 유가의 말이다.
양현(兩玄)과 일치(一致)는 도가의 말로 천지현묘(天地玄妙)한 이치(理致)를 말한다.
여기서는 유가와 도가의 말을 빌려 범부(凡夫)와 3승(乘)이 1승(乘)으로 돌아온다는 뜻을 표시했다.
10 허인(虛刃):
공(空)을 비유한 말이다.
11 희성(希聲):
보통 사람이 귀로 듣지 못하는 소리 없는 위대한 연주라는 뜻이다.
『노자(老子)』 41장에 “큰소리는 소리가 들리지 않으며,
큰 형상은 모양이 없는 것처럼 보인다.[大音希聲,
大象無形]”라는 말이 있다.
12 화란(和鸞):
화(和)와 난(鸞)은 모두 제후의 수레에 다는 방울로 식(軾)에 있는 것을 화라고 하고 재갈에 있는 것을 난이라 한다.
13 어찌:
원문의 혜(慧)는 소(疏)에서는 언(焉)자로 보았다.
14 범어 mahāyāna의 음역이고 대승(大乘)이라 한역한다.
15 법(法)을 함장(含藏)하고 있는 것을 말한다.
법은 부처님의 교법(敎法)을 의미하고 법장(法藏)은 이 교법을 담고 있는 경전을 의미한다.
16 성문승(聲聞乘)ㆍ연각승(緣覺乘).
17 대세지(大勢至)라고도 한다.
18 문수(文殊)라고도 한다.
19 범어 mahāsattva의 의역으로 마하살(摩訶薩)이라 음역하기도 한다.
대보살(大菩薩)을 의미한다.
20 용수의『공칠십론(空七十論)』을 말한다.
21 12연기법(緣起法)을 말한다.
22 앞에서 말한 수레ㆍ말ㆍ마실 것ㆍ먹을 것 등의 사물을 가리킨다.
23 하나하나의 연과 연들이 화합된 것을 말한다.
24 연과 연 아닌 것을 말한다.
25 이 세간의 어둠과 모든 세간의 어둠을 말한다.
26 유위법ㆍ무위법ㆍ나(我)를 가리킨다.
27 고려대장경 원문에는 이어서 ‘시상(是相)’이 나오는데 송(宋)ㆍ원(元)ㆍ명(明) 3본(本)에 의거해서 빼냈다.
28 고려대장경 원문에는 ‘신(信)’으로 되어 있다.
원본과 명본에 의거해서 ‘상(相)’으로 바꾸어 번역하였다.
29 발생과 머묾과 소멸과 쇠이를 말한다.
30 원문의 ‘법(法)’은 ‘설(說)’의 오기일 것이다.
31 예류과(豫流果)ㆍ일래과(一來果)ㆍ불환과(不還果)ㆍ아라한과(阿羅漢果).
32 예류향(豫流向)ㆍ일래향(一來向)ㆍ불환향(不還向)ㆍ아라한향(阿羅漢向)을 말한다.
33 원문의 ‘과(果)’를 송ㆍ원ㆍ명 3본에 의거해서 ‘법(法)’으로 바꾸었다.
34 나형외도(裸形外道)인 니건자(尼乾子)의 제자일 때의 가섭(迦葉)을 일컫는 말이다.
35 전시(前時)ㆍ후시(後時)ㆍ동시.
36 원인인지 아닌지 의심되는 원인.
37 이미 발생한 것을 가리킨다.
38 이미 발생한 것인지 아직 발생하지 않은 것인지 확정되지 않은 것을 말한다.
○ [pt op tr]
[오래된 조각글재정리 안내]
☎잡담☎ = 순전한 잡담부분
● = 논의부분
재검토시작 Lab value 불기2564/03/25/수/14:35
♥아래 부분은 현재 작성 중인 미완성 상태의 글입니다♥
문단, 표현 재정리 작업중
경전정리 (▽정리중) (▼마침)
논의 (○정리중) (●마침)
조각글 (☆정리중) (★마침)
Lab value 불기2564/03/25/수/14:35
● 12 가지 문에 대한 정리
제1 관인연문(觀因緣門)
제2 관유과무과문(觀有果無果門)
제3 관연문(觀緣門)
제4 관상문(觀相門)
제5 관유상무상문(觀有相無相門)
제6 관일이문(觀一異門)
제7 관유무문(觀有無門)
제8 관성문(觀性門)
제9 관인과문(觀因果門)
제10 관작문(觀作門)
제11 관삼시문(觀三時門)
제12 관생문(觀生門)
12문 =>
인연(因緣)
과(果)
연(緣)
상(相)
유상무상(有相無相)
일이(一異)
유무(有無)
성(性)
인과(因果)
작(作)
삼시(三時)
생(生)
법수_암기방안
Lab value 불기2564/03/25/
12 문론에서
인연(因緣) 과(果) 연(緣) 상(相) 유상무상(有相無相)
일이(一異) 유무(有無) 성(性) 인과(因果) 작(作)
삼시(三時) 생(生) 등에
대해서 살핀다.
그런데 이들은 현실에서 그런 내용이 그렇게 있다고 대부분 여기는 내용이다.
그런데 『십이문론』에서는 그런 내용을 얻을 수 없다고 제시한다.
그래서 이 내용을 상당히 이해하기 힘들게 여기기 쉽다 .
이들 논의는 이후 대부분 가정적 항변 방식으로 논의가 진행된다.
그런 것이 있다거나 없다고 여기는 상대의 주장은 잘못이다.
그런데 그런 상대의 주장을 일단 그렇다고 받아들인다.
그렇다면 해결하기 힘든 잘못된 내용을 만나게 된다.
따라서 처음 주장을 폐기해야 한다고 제시하는 논의다.
그런데 여하튼 그런 추론과정부터 이해하기 쉽지 않다.
그리고 그 추론에 의한 결론도 역시 이해하기 쉽지 않다.
그리고 그 결론이 갖는 의미또한 이해하기 쉽지 않다.
이들 논의는 『회쟁론』에서 제시한 논의 기본 배경부터 먼저 이해하는 것이 필요하다.
여기서는 간단히 이런 결론이 갖는 의미만 살피고
나머지는 『회쟁론』으로 넘기기로 한다.
간단히 말해서 어떤 이가 눈을 떠서 보는 내용을 ○ 라고 표시해보자.
이런 상황에서 눈을 감으면 ○ 모습을 보지 못한다.
그런데 눈을 뜨거나 감거나 관계없이 그대로 있다고 할 어떤 상태를 # 라고 표시해보자 .
그리고 어떤 이가 눈을 떠서 본 모습 가운데 일 부분을 영희나 자신 또는 바위나 나무라고 여긴다고 해보자.
이런 생각은 눈을 감어도 어느 정도 계속해서 떠올릴 수 있다.
이런 내용을 ■ 라고 표시해보자.
그리고 이 상황에서 자신이 무언가를 영희나 바위로 여기고 대한다고 하자.
그런데 그렇게 대하는 내용은 아침에 대할 때와 저녁에 대할 때가 다르다.
그리고 각 감관으로 대할 때마다 내용이 달라진다.
눈으로 볼 때는 색안경 하나를 쓰고 벗고 할 때마다 달라진다.
그래서 이 현실에 그런 내용을 얻게 하는 참된 진짜의 내용으로서
고정 불변된 실체가 있는가가 문제된다.
이처럼 참된 진짜가 있다고 한다면 그것을 $ 라고 표시해보자.
이제 현실에서 어떤 주체가
눈을 떠서 무언가를 보고
그 가운데 일부를 영희나 자신 또는 바위나 나무 등으로 여기는 상황은 다음과 같다.
# => ○ => ■
이에 대해
경전에서는
본 바탕의 실재는 공하다.
그리고 현실에서 그런 내용 일체는 얻을 수 없다고 제시한다.
# [ 공] => ○ [ 상相 ]=> ■ [상想 ]
실상(實相 dharmatā ; dharma-svabhāva) => 상(相 Lakṣaṇa ) => 상(想 Saṃjña)
그런데 이런 상황에서
12 인연론에서는 문제삼는 각 내용의 있고 없음 같고 다름 등을 일체 얻을 수 없다고 제시한다.
이 말의 의미를 잘 이해해야 한다.
우선 현실에서 어떤 주체가 위와 같은 내용을 얻는다.
그런 상황에서 그렇게 얻는 내용을 얻지 못한다고 한 것은 아니다.
여기서 그 현실에 영희나 바위나 자신이나 나무의 유무를 얻을 수 없다고 한 것은
다음 의미다.
처음 기호로 제시한 현실 사정을 잘 살피자.
# [ 공] => ○ [ 상相 ]=> ■ [상想 ]
- 관념분별에 대한 망집 제거
우선 ■ 부분을 잘 보자.
이 상황에서 ■ 내용은 관념내용이다.
그것이 무엇이던 일단 현실에서 그렇게 일으켜 얻었다.
그리고 문제삼는다.
현실에서 ■과 같은 관념분별을 일으킨다.
그래서 현실에 무언가가 있다 없다.
~과 같다 ~과 다르다. 생한다 멸한다.
무엇을 원인으로 생겨난다.
그 결과는 무엇이다.
무엇을 행한다. 온다 간다.
등등으로 분별을 행한다.
그런데 ■ 내용은 # 로 표시한 실재 영역에서 얻을 수 없다.
두번째로, ○ 로 표시한 감각현실 영역에서 얻을 수 없다.
또 하나 현실에서 ■ 과 관련해서 있으리라 추리한 참된 실체 $ 도
이 영역 어디에 없다.
그런데 그런 ■ 내용 일체는 그 분별 영역에서 일으킨 것 뿐이다.
그리고 다른 영역에서는 일체 얻을 수 없다.
따라서 ■ 내용은 마치 침대에서 누어 꾼 바다나 황금꿈과 성격이 같다.
다른 영역에서 얻을 수 없다.
그런데 단지 그런 조건에서 그런 내용을 화합해 일으켜 얻었을 뿐이다.
따라서 이를 실다운 내용으로 여기고 대하는 것은 잘못이다.
=>
따라서 그런 분별은 실답지 않다.
비록 그 내용은 매순간 명료하게 분별을 일으키지만, 그러나 꿈처럼 실답지 않다는 뜻이다.
따라서 집착을 갖고 대하지 않아야 한다.
따라서 그런 분별에 바탕해서 현실에서 집착을 갖고 대하지 않아야 한다.
그리고 그런 망상분별에 바탕해서 업을 행하지 않아야 한다.
=>
그래야 그에 바탕해서 처하게 되는 생사고통을 벗어날 수 있다.
이런 뜻이다.
- 감각현실에 대한 망집 제거
감각현실 ○ 의 경우도 이와 사정이 같다.
○ 내용은 # 로 표시한 실재 영역에서 얻을 수 없다.
두번째 ■ 로 표시한 분별 영역에서도 그런 내용은 얻을 수 없다.
따라서 ○ 내용은 마치 침대에서 누어 꾼 바다나 황금꿈과 성격이 같다.
다른 영역에서 얻을 수 없다.
그런데 단지 그런 조건에서 그런 내용을 화합해 일으켜 얻었을 뿐이다.
따라서 이를 실다운 내용으로 여기고 대하는 것은 잘못이다.
이는 실답지 않다.
비록 그 내용은 매순간 생생하게 얻지만, 그러나 꿈처럼 실답지 않다는 뜻이다.
따라서 집착을 갖고 대하지 않아야 한다.
그런 망상분별과 집착을 갖고 그에 바탕해 업을 행하면 안 된다.
이런 의미다.
그리고 생사고통에서 벗어나려면
그런 망집을 제거하고
과거에 쌓은 업의 장애를 제거하기 위한 수행을 원만히 잘 성취해야 한다.
이런 내용을 제시하는 뜻이다.
- 언어표현을 통한 오해의 제거
12 문론에서 살피고자 하는 주된 내용은 위와 같다.
그리고 이와 관련해 본 바탕의 실재 # 에 대해서 살핀다.
본 바탕에서는 그런 내용을 얻을 수 없다.
그런데 현실에서 그런 내용을 얻는 것 뿐이다.
이런 사정을 이해하기 위함이다.
# [ 공] => ○ [ 상相 ]=> ■ [상想 ]
이런 상황을 놓고 문제되는 ■을 얻을 수 없다고 제시한다.
그것은 앞에서 제시한 의미다.
그런데 이는 이 상황에서
실재#가 전혀 아무 것도 없다고 제시한 것은 아니다.
또 감각현실로서 아무 것도 얻을 수 없다고 제시한 것도 아니다.
그리고 관념영역에서 아무런 분별도 일으키지 못한다고 제시한 것도 아니다.
감각현실은 생생하게 매순간 얻는다.
또 관념분별도 명료하게 일으켜 행한다.
그런데 그 상황에서 각 내용이 다른 영역에 그처럼 얻을 수 없음을 제시한 것이다.
즉 침대에 누어서 생생하게 바다와 황금꿈을 꾸었다.
그런데 그 바다나 황금꿈은 침대에서는 얻을 수 없는 내용이다.
그래서 그런 내용은 얻을 수 없다고 밝힌다.
그래서 아무리 생생하게 꾼 꿈이라고 해도 실답지 않다고 제시한다.
이 관계와 마찬가지다.
그런데 상대가 그 내용을 잘 이해하지 못한다.
그래서 일단 상대의 잘못된 엉터리 주장을 일단 가정적으로 받아들인다.
그리고 그 상대의 주장에 따라서 계속 추론한다.
그런 결과 그 상대 입장에서는 엉터리임이 분명하다고 인정할 결론을 끌어낸다.
그래서 처음 주장이 잘못임을 이해시킨다. [=> 귀류 ]
그러나 그것은 처음 주장과 모순되는 다른 주장을 세우기 위한 것도 아니다.
즉 유란 주장을 처음 위와 같이 깨드린다고 하자.
그런데 이는 유와 모순되는 무를 세우기 위한 것은 아니다.
그래서 주의해야 한다.
이런 형태로 12문론의 내용이 제시된다.
이것을 가정적 항변방식이라고 표현할 수 있다.
그래서 그런 주장을 폐기시키고
반사적으로 앞에 제시한 내용을 이해시키고자 하는 것이다.
◧◧◧ para-end-return ◧◧◧
◈Lab value 불기2555/02/03 |
댓글내용 |
문서정보 ori
http://buddhism007.tistory.com/3247#1500 |
■ 퀴즈
다음에 해당하는 단어?
답 후보
자력회향(自力廻向)
자성(自性)
자수용(自受用)
자연(自然)
자은팔종(慈恩八宗)
자증(自證)
작용(作用)
ॐ मणि पद्मे हूँ
○ [pt op tr]
05gfl--가치_단상_lab_2011_0201.TXT
가치단상_lab_2011_0201~~1231
http://story007.tistory.com/5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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