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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ॐ मणि पद्मे हूँ
불교진리와실천
불기2561-08-27_불설성불모반야바라밀다경-K1427-001 본문
『불설성불모반야바라밀다경』
K1427
T0257
성불모반야
● 한글대장경 해당부분 열람I
● 한글대장경 해당부분 열람II
○ 통합대장경 사이트 안내
○ 해제[있는경우]
● TTS 음성듣기 안내
※ 이하 부분은 위 대장경 부분에 대해
참조자료를 붙여 자유롭게 연구하는 내용을 적는 공간입니다.
대장경 열람은 위 부분을 참조해주십시오.
『불설성불모반야바라밀다경』 ♣1427-001♧
성불모반야
Lab value 불기2561/08/27/일/23:35
『불설성불모반야바리밀다경』의 내용은
『반야바라밀다심경』의 내용과 큰 차이가 없다.
『반야바라밀다심경』은 일반적으로 반야심경으로 알려져 있다.
『불설성불모반야바리밀다경』에서
색(色)이 곧 공(空)이요,
공이 곧 색인 까닭에
..
라고 제시한다.
...
『불설성불모반야바라밀다경』 ♣1427-001♧
그런데 여기서 색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색이란 가장 좁게는 우리가 눈을 떠서 볼 때
얻게 되는 그 일체 내용을 가리킨다.
눈을 통해 보고 얻게 되는 내용은
무엇이던 일단 그것은 감각해서 마음에 받아들이는
시각정보이고 색깔이다.
이는 마음으로 얻게 되는 마음안 내용이다.
그런데 넓은 의미의 색은 감각현실 일체를 가리킨다.
그래서
눈을 통해 얻는 시각 감각정보 뿐 아니라,
귀를 통해 얻는 청각정보로서 소리 일체
코를 통해 얻는 후각정보로서 냄새 일체
혀를 통해 얻는 미각정보로서 맛 일체
몸을 통해 얻는 촉각정보로서 촉감 일체를
통틀어서 가리킨다.
좁은 의미의 색,성,향,미,촉이라는
감각정보 일체를 넓게 색이라고 표현한다.
○ 넒은 의미의 색의 정체
감각과정을 통해 얻게 되는 그 일체 내용을 표현상 색이라고 표현한다.
그런데 이러한 감각정보에 대해
현실에서 각 주체는 전도망상을 일으킨다.
그런 상태에서 이들 내용을
자신의 외부 세계나 자신의 몸이라고 잘못 이해한다.
더 나아가 이를 자신의 주관이 대하는 외부 대상으로도 잘못 이해한다.
그리고 자신의 주관적 정신과는 구분되는 것으로 외부 물질이라고 잘못 이해한다.
또 이들 내용은 영희나 철수를 포함해 다수가 대하는 외부의 객관적 실재로 잘못 이해한다.
이런 이해는 모두 전도 망상에 의한 잘못된 판단이다.
감각기관을 통해 얻게 되는 이들 색성향미촉 일체는 마음안 내용이다.
즉, 감각과정을 통해 자신의 정신에 들어온 주관적 내용물이다.
따라서 자신의 외부 세계의 객관적 구성요소나 또는 자신의 몸으로 잘못 이해하면 안 된다.
한편 이는 관념분별작용의 내부 대상은 될 수 있다.
그러나 감각과정에서 대하는 외부 대상은 아니다.
따라서 자신의 감관이 감각과정에서 대하는 외부 대상이라고 잘못 이해하면 안 된다.
한편 이들은 감각을 통해 얻는 마음안 감각현실이다.
그래서 '정신안에 머무는 정신적 내용물'이다.
따라서 이들 내용을 정신과 구분되는 외부의 물질적 요소로 잘못 이해하면 안 된다.
통상 물질이라는 표현은 일반적으로 정신과 상대적으로 구분되는 의미로 주로 사용된다.
예를 들어 물질과 정신 이처럼 사용한다.
그리고 현실에서 감각해 받아들이는 이들 감각정보를 일반적으로 정신과 별개의 내용으로 잘못 이해한다.
그래서 이를 정신과 구분되는 물질로 표현하게 된다.
이런 표현은 이런 잘못된 망집과도 관련된다.
불교의 색이라는 표현을 번역할 때도 이런 배경에서 이를 물질이라고 통상적으로 번역한다.
물론 이를 물질이라고 표현할 수도 있다.
그러나 불교의 본 입장은 이와는 다르다.
표현과 관계없이 이 내용이 실질적으로 어떤 지위에 있는 내용인가를 잘 파악해야 한다.
그리고 혼동을 일으키지 않아야 한다.
한편, 이는 자신의 '정신이 얻어낸 결과물'이다.
이는 각 주체마다 달리 얻는다.
따라서 이들 내용은 객관적 세계나 자신의 몸을 구성하는 실재가 아니다.
○ 색은 마음안 내용임
세속에서 일반인이나 과학자가 이해하는 입장이 있다.
이는 경전과 부처님이 가르치는 입장과 큰 차이가 있다.
경전은 그 일체가 자신의 마음 안의 내용임을 제시한다.
이런 점을 주의할 필요가 있다.
그 차이는 그림을 통해서 이해하면 조금 이해가 쉽다.
[img2]
[그림] 08pfl--image/진리의오류55.jpg
https://buddhism007.tistory.com/228 ☞○ 마음과 색의 의미에 관한 논의
https://thegood007.tistory.com/1172 ☞○ 진리에 관한 수많은 오류와 착각의 문제
03fl--ghpt/r1030.htm ☞○ 진리에 관한 수많은 오류와 착각의 문제
현실에서 어떤 주체가 있다고 하자.
그가 눈을 감고 아무 것도 보지 않는 상태에 있다.
그러다가 눈을 뜨게 되면 모습을 보게 된다.
이 때 얻게 되는 시각정보의 내용을 위 그림처럼 나타낼 수 있다.
눈을 통해 이런 감각현실을 얻었다고 하자.
그런 상태에서 1 은 다시 분별을 행한다.
즉, 이처럼 눈을 뜰 때 얻는 내용 일체를 놓고
다시 각 부분을 묶고 나누며 분별을 행한다.
그런 가운데 어떤 부분은 자신이고 어떤 부분은 세계의 내용이라고 잘못 이해한다.
이 분별 내용은 이 그림에는 그려져 있지 않다.
그러나 그런 일반적 분별을 바탕으로 각 부분이 표시되어 있다.
여기에는 그가 외부 세계의 내용으로 잘못 여기는 내용도 있다.
이를 다른 사람 2 나 3 의 모습
그리고 4 와 같은 꽃을 통해 대강 나타냈다.
한편 위 그림에서 1은 그런 상황에서 1 자신이 스스로 자신으로 잘못 여기고 대하는 몸 부분이다.
현실에서 눈은 눈 자신을 보지 못한다.
또 자신의 눈썹이나 이마나 자신의 등이나 허리를 보지 못한다.
그런 가운데 대강 자신의 몸으로 잘못 여기게 되는 부분을 1 처럼 보게 된다.
그리고 현실에서 이런 부분을 자신이라고 잘못 여기게 된다.
그런 상태로 태어날 때부터 죽을 때까지 살아간다.
이 가운데 자신의 눈은 거울을 통해서가 아니면 직접 보지 못한다.
그러나 촉감을 통해서 간접적으로 그 눈을 파악하게 된다. [ 무견유대 ]
즉 자신이 눈을 뜨고 감는 동작은 촉감을 통해 그 차이를 파악한다.
○ 마음안 내용임을 이해하는 실험
현실에서 어떤 주체가 눈을 떠서
얻는 그 일체의 내용이 사실은 자신의 마음 안에서 얻는 내용이다.
이를 확인할 수 있는 간단한 실험은 이외에도 많다.
자신이 눈을 떠서 사물을 바라볼 때
자신이 돗수가 다른 색안경을 바꿔 써보는 실험도 할 수 있다.
또는 자신의 눈을 손가락등으로 눌러본다거나 하는 실험을 해볼 수 있다.
그런 실험으로 일순간에 그 모든 내용이 바뀌는 결과가 나타난다.
만일 이런 내용이 자신의 마음에 들어와 있는 내용이 아니라고 하자.
그런 경우 이를 설명하기 곤란하다.
자신의 외부 세계가 단지
자신이 돗수가 다른 색안경을 하나 바꿔 쓴다고 해서
그 순간 그 내용이 모두 다 바뀔 이치는 없다.
그것은 자신 마음안 내용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런 실험을 할 때
이와 관계없이 변화를 하지 않고
그대로 계속 유지되는 내용은 따로 얻을 수 없다.
그래서 자신이 평소 대한 것들의 정체를 잘 확인해야 한다.
평소 자신이 눈을 떠 본 내용을 자신의 외부에 있다고 잘못 여기기 쉽다.
○ 그림을 통한 이해
그러나 이들은 자신의 마음 안에 얻어져 있는 내용이다.
그 사정은 그림의 2와 같은 다른 이의 상황을 놓고 이해하면 쉽다.
2 가 눈을 뜨고 감을 때 어떤 변화를 겪는 것을 옆에서 관찰하고 보고를 행하게 하자.
다른 주체는 자신과 유사한 감관을 갖는다.
그래서 눈을 뜨면 무언가가 보이고
눈을 감으면 보이지 않는다고 보고하게 된다.
그런데 옆에서 이것을 관찰하는 입장에서는
그런 변화를 2 가 보고할 때 사실은 별다른 변화를 파악하지 못할 수 있다.
그래서 이는 그처럼 눈을 뜨고 감은 2 내부에서 나타난 변화일 뿐이라고 보게 된다.
그리고 그 변화는 위 그림처럼 2 내부의 5 ^ 와 같은 영역에서 나타난 변화라고 여긴다.
위 그림은 이런 일반적인 생각을 나타낸다.
물론 엄밀히 보면 위 그림처럼 이 관계를 표시하는 것 자체가 잘못이다.
이는 잘못된 판단이다.
이 사정을 간단하게 살피면 다음과 같다.
2 가 거꾸로 1 이 눈을 뜨고 감는 것을 본다고 하자.
이 때 2 가 생각하기를 1이 눈을 떠 보는 내용은
2 자신이 본 1 ^ 와 같은 부분 안에서 머문다고 추리한다고 하자.
이는 엉터리 추리다.
마찬가지로 처음 1이 행한 추리도 잘못이다.
이들 추리는 모두 잘못이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위와 같이 추리하고 이해한다.
일반적으로 그 상황을 위 그림처럼 이해한다.
과학자나 의사나 생물학자나 생리학자들의 보고도 사정이 같다.
현실에서 어떤 이가 어떤 관찰을 하고 학계에 보고한다.
그런 가운데 이들 내용은
자신의 주관이 관계하는 대상 그 자체라고 잘못 여기기 쉽다.
그리고 자신의 마음과는 구분되는 마음 밖의 물질이라고 잘못 여기기 쉽다.
그런데 사실은 그렇지 않음을 잘 확인해야 한다.
이들 내용은 바로 이런 점에서 기본적으로 결함을 갖는다.
사람이 사물을 빛을 통해서 시신경의 원추세포 등이 흥분한다고 한다.
그래서 시각정보를 얻는다고 설명한다.
그런데 이들 내용은 위와 같은 바탕에서 행하는 설명이다.
즉, 위 그림에서 2 가 어떤 내용을 얻을 때
그에 관련되는 것을 위와 같은 형태로 나열해 설명하는 방식이다.
그러나 관찰자 자신이라고 할 1 의 마음에서 얻는 내용을
놓고 그렇게 서로 관련지어 내용을 제시한 것뿐이다.
따라서 기본적으로 오류가 있다.
이런 사정을 먼저 잘 이해해야 한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이해하는 방식에 따라
일단 2 가 얻는 내용은 2 의 마음안 5 ^ 안에 머문다고 그려 나타내고 설명하게 된다.
그림을 살필 때는 이 점을 주의해야 한다.
자신이 손뼉을 마주치면 반복해서 소리를 듣게 된다.
그래서 자신이 얻는 시각정보가 그런 소리라는 청각정보를 얻게 하는 원인이 된다고
잘못 이해하기 쉽다.
그리고 그 관계를 그처럼 서술하기 쉽다.
또 번개가 치는 모습을 보고 나서 천둥소리를 반복해 듣게 된다.
그래서 그런 번개가 천둥소리를 일으키는 원인이라고 잘못 이해하게 된다.
그래서 일반적으로 번개가 천둥소리를 일으킨다고 잘못 서술해 설명한다.
그런데 여하튼 위 경전에서
색이라고 표현하는 내용은
위와 같은 감각정보나 감각현실을 가리킨다.
이 점을 기본적으로 잘 이해해야 한다.
그런데 이런 사정은 눈으로 얻는 시각정보인 색만 그런 것이 아니다.
감관을 통해서 곧바로 얻는다고 보는
색,성, 향, 미, 촉이 모두 공통된 사항이다.
어떤 주체가 얻는 감각정보 내지
감각현실 일체는 그것이 모두 그 주체의 마음에 머무는 내용이다.
그런데 그런 내용은
마음이 마음안의 내용을 대상으로 해서
자신의 감관이 그런 내용을 얻는다고 이해할 것인가가 문제된다.
이 말은 위 그림에서 2 를 놓고 설명한다면 다음과 같다.
2 가 2 의 마음 5 ^ 안에서
4 ^ 와 같은 꽃의 모습을 본다고 하자.
그것은
2가 스스로 자신이라고 보게 되는 2^ 라는 몸의 일부로서 눈과 같은 감각기관이
4^ 와 같은 마음안에 얻어진 꽃의 모습을 대상으로 하여
그 내용을 얻는 것이라고 볼 것인가가 문제된다.
위 그림을 통해 보면 그것은 엉터리 이해임을 쉽게 알 수 있다.
4 ^ 와 같은 꽃의 모습은 2 가 마음에 얻는 내용이다.
결코 2 외부에 있는 어떤 외부 세계의 내용이 아니다.
2 의 감관이 관계하는 2 밖에 있는 외부대상도 아니다.
2 의 정신 밖에 머무는 외부 물질이라고 할 수도 없다.
그래서 이런 이해는 잘못된 것이다.
그런데 현실에서
1 이 자신의 손을 뻗쳐 꽃 4를 만지면서
그 상황에서 어떤 소리를 듣거나 촉감을 느끼거나
냄새를 맡거나 한다고 하자.
그러면
자신의 손은 이런 4 라는 꽃을 대상으로 관계해서
앞과 같은 내용을 얻는다고 잘못 이해하게끔 된다.
이것이 전도망상 분별이다.
그런 망상을 갖는 사정이 있다.
그런 내용을 얻으 상황에서
또 다른 정신에서 그런 소리나 냄새나 맛이나 촉감을 얻는다.
이들은 부대상황의 관계다.
그런데 이런 경험을 반복함으로써
이들을 서로 관련시키게 된다.
그래서 자신이 마음에서 이미 얻은 내용을
감관이 대하는 대상이라고 잘못 이해하게 된다.
이런 잘못된 이해는 한 번 태어나서
삶을 마칠 때까지 쉽게 해소되지 않는다.
이는 그런 각 내용을 각 정신에서 부대상황의 관계로 얻기 때문이다.
삶을 출발하기 이전에 이렇게 각 내용을 얻는 형태로 생명이 형성되었기 때문이다. [3능변]
그리고 이런 관계는 이후 생에도 계속 이런 형태로 반복된다.
그래서 이런 전도망상은
어느 계기를 통해서 올바로 시정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세세생생 무한히 반복하게 된다.
그리고 생사고통을 받아나게 하는 근본원인이 된다.
어떤 이가 4 라는 꽃을 눈을 떠서 보았다고 하자.
이 상황에서 그런 내용이 자신의 정신이 대하는 외부 대상이 아니다.
또 자신의 마음에 얻어진 감각정보로서 마음안 내용물이다.
그런데 이런 바탕에서는 다음 추가 문제를 다시 잘 이해해야 한다.
과학자의 보고도 마찬가지다.
어떤 과학자가 학계에 관찰한 내용을 보고하게 된다.
그런데 이는 사실 과학자가 그의 마음에 얻는 주관적 내용을 보고한 것이다.
그것이 그 과학자의 주관적 정신안에 얻어진 내용일 뿐이라고 하자.
그렇다면 그런 보고는 그 과학자 외에 수많은 사람이 긍정하지 않아야 한다.
그러나 대부분 엇비슷한 내용을 또 각기 얻는다.
그리고 그것을 긍정하게 된다.
그렇게 되는 사정을 다시 이해해야 한다.
그래서 이런 문제가 제기되면 쉽게 다음을 추리하게 된다.
즉 어떤 이가 4 와 같은 꽃을 본다면
비록 그 모습은 그 주체의 마음에서 얻는 주관적 내용이다.
그러나 이 경우
그 주체의 정신 밖에는 그에 상응하는 내용이 그처럼 실재한다고 잘못 여기게 된다.
그래서 어떤 이가 그 자신의 마음에서 얻는 내용이 있다고 하자.
그러면 다른 이들은 다른 이의 마음에 있는 내용을 대상으로 어떤 내용을 얻는 것은 아니다.
각 주체가 얻는 내용은 그 마음 밖에 그에 해당하는 어떤 객관적 실재가 있다고 잘못 여긴다.
사정이 그렇기에 그것을 각 주체가 대상으로
삼아 각기 그런 내용을 얻게 된다고 잘못 추리하게 된다.
이 경우 정말 그런가가 문제된다.
그래서 이를 살펴야 한다.
◧◧◧ para-end-return ◧◧◧
경전에서 색즉시공이라고 표현한다.
그런데 여기서 공은 또 무엇인가.
현실에서 본바탕이 되는 실재가 무언가가 문제된다.
이 경우 그런 실재가 공함을 나타낸다.
그런데 실재가 무언가라는 문제는
다음의 문제의식에서 나온다.
○ 본 바탕의 실재에 대한 추리
자신이 눈을 떠 그런 모습을 보게 될 때
다시 눈을 감으면 그런 모습을 보지 못한다.
실험을 하면 누구나 확인할 수 있다.
그래서 자신이 눈을 떠 꽃의 모습을 보았다고 하자.
이 경우 그것이 자신의 눈이 대하는 대상이 아니라고 하자.
더 나아가 눈을 감으면 그 모습을 보지 못한다고 하자.
그렇다면
눈을 감게 되면 자신이 보았던 그 꽃은
세상에서 완전히 없어진 것인가가 문제된다.
그리고 그와 관련된 것은 아무것도 없다고 할 것인가가 문제된다.
간단히 이를 설명해보자.
어떤 주체가 눈을 떠서 4 라는 꽃의 모습을 얻는다.
그러나 눈을 감으면 그런 모습을 보지 못하게 된다.
이런 일을 일상생활에서 반복해 경험한다.
그런데 자신이 눈을 감거나 감지 않거나 관계없이
자신의 외부에 실재하는 꽃은 없을 것인가.
만일 그런 것이 실재한다면 그 내용은 무엇인가가 문제된다.
그래서 그런 실재하는 꽃은
자신이 눈을 감을 때 아무것도 보지 못하던 그런 상태로서 무엇일 것인가를 추리해보자. .
아니면 눈을 뜰때 보게 되는 그런 모습일 것인가를 추리해보자.
그런데 현실에서 얻는 내용이 알고보면 다 다르다.
그런 가운데 그 어느것도 표준이라고 하기 곤란하다.
그래서 대표라고 할만한 것을 찾아내기 힘들다.
그리고 그 가운데 어느 하나를 표준이나 대표로 정한다고 하자.
그러면 현실에서 일반적으로 얻는 모습은 다 엉터리라고 해야 한다.
그런 경우 실재는 어느 내용에 일치하는가가 문제될 수 있다.
예를 들어 눈을 떠서 모습을 본다고 하자.
촛점이 정확하게 맞은 안경을 쓰고 볼 때와 눈으로 본 모습은 서로 다르다.
또는 새벽이나 저녁에 늦게 보던 희미한 모습과 대낮에 보는 모습은 다르다.
위에서 내러보거나 아래에서 올려본 모습과 정면에서 본 모습은 서로 다르다.
멀리서 보거나 달리면서 지나치며 보던 모습은 1 m 거리에서 정지한 상태에서 본 모습과 다르다.
이렇게 여러 모습이 다르다.
그런데 이 가운데 어떤 모습이 실재와 일치하는가.
이러한 식으로 다양하게 문제를 제기할 수 있다.
이런 문제가 제기될 때
그에 대한 답은 다양하게 제시될 수 있다.
우선 현실에서 생활하는 일반적인 입장을 하나의 입장으로 나열할 수 있다.
그것은 다음과 같다.
○ 1 번째로 다음입장을 생각할 수 있다. [감각현실=실재설]
처음 자신이 눈을 떠서 얻는 내용이 있다면
그것은 곧 자신의 마음 밖에 있는 외부의 내용이다.
그리고 자신의 감관이 대하는 외부 대상이다.
그래서 마음(정신)과는 구분되는 물질과 같다.
현실에서 생활하는 일반적인 입장 대부분은
보통 이렇게 자신이 눈을 떠서 보게 되는 내용을 이해한다.
그래서 이런 입장은 결국 다음과 같다.
감각정보는 자신이 감각하여 마음에 얻은 마음안 내용이다.
그런데 이를 그런 내용을 얻게 한 객관적 실재나 객관적 세계 그 자체로 이해한다.
그리고 그것을 곧 그런 내용을 얻게 한 외부대상이라고 보는 것이다.
앞에서 이것이 잘못된 판단이라고 지적했다.
그런데 일단 이런 입장도 검토대상이 되는 하나의 입장이다.
그러나 이들 내용은 사실은 자신의 마음안 내용이다.
그리고 정신 안 내용이다.
따라서 위와 같은 입장을 취하기는 곤란하다.
우선 이런 마음안 내용은
그 자체가 마음(정신)이 행하는 기능을 하는 마음 자체라고 보기 힘들다.
그렇다고 마음을 떠나 있는 내용도 아니다.
그래서 정신적 내용물로 이것을 취급하게 된다.
거울안에 비추인 어떤 모습으로 책상과 같은 것이 있다고 하자.
이 경우 그 책상모습이 곧 거울의 기능을 하는 것은 아니다.
그렇다고 그 모습이 거울면을 떠나 있는 어떤 것도 아니다.
그래서 이들은 이런 관계에 있다고 제시한다.
그런 상태에서 이런 내용을 마음에 얻게 한
마음 밖에 있는 외부 실재가 무엇인가를 찾는다고 하자.
그런 경우 다음 여러 입장을 생각할 수 있다.
○ 2 번째로 다음입장을 생각할 수 있다. [감각현실=마음=실재투영설]
그러한 실재는 마음안에서 얻는 그런 내용과 일치한다.
그래서 알고보면 마음에서 어떤 내용을 얻을 때
그 내용은 곧 실재와 겹쳐진다.
즉, 그처럼 투영되는 것이다.
이는 눈을 떠 보는 내용이 실재이면서
마음 안 내용이기도 하다는 입장이다.
○ -3 번째로 다음입장을 생각할 수 있다. [감각현실=실재일치설]
그러한 실재는 마음안에서 얻는 그런 내용과 일치한다.
그런데 마음에서 얻는 내용은 일단 그런 실재의 지위에 있는 내용이 아니다.
그런데 그러한 실재는 여하튼 마음에서 얻은 그런 내용과
똑같은 형태의 내용이다.
이는 과학자가
눈으로 물체의 모습을 보는 과정을 다음처럼 이해하는 경우와 같다.
외부의 사물 A => 빛의 파장이 반사되는 내용 B =>
망막에 맺히는 상 C => 시신경이 흥분되는 화학적 생리적 변화 D => 대뇌에서 시각정보를 얻게 되는 모습 E
눈으로 모습을 보게 되는 관계를
이처럼 A => B => C => D =>E 의 관계로 기술하여 보고한다고 하자.
그런데 어떤 이는
A, B, C, D, E 각 내용을 위 과정을 통해서 얻는다.
예를 들어 이들 각 내용은 어떤 주체가 최종적으로 보게 되는 내용[F]들이다.
그래서 이 경우 위 내용은 다음처럼 기술하는 것이다.
즉 F => F => F => F => F
이런 형태로 이해하는 것이 된다.
이외 또 다른 입장도 생각할 수 있다.
○ -4 번째로 다음입장을 생각할 수 있다. [감각현실=실재유사설]
어떤 것의 실재는 마음안에서 얻는 그런 내용과 일치하지 않는다.
같은 내용이 아니다.
그러나 전혀 동떨어진 것이라고 할 수는 없다.
실재는 현실에서 어떤 주체가 마음으로 얻는 내용과
적어도 유사하다.
또는 비례하는 어떤 것이다.
이처럼 이해하는 입장을 생각할 수 있다.
한 주체가 구체적으로 매번 다른 내용을 보게 된다.
그런데 꽃은 꽃이고 바위는 바위라고 구분하게 된다.
그리고 그 상황에서 매 주체가 서로 엇비슷하게 꽃과 바위를 분별한다.
그렇게 되는데에는 그럴만한 사정이 외부 실재에 그렇게 있기에 그런 것이다.
이처럼 추리하는 입장이다.
이런 입장을 취한다고 하자.
그러면 결국 어떤 주체가 어떤 모습을 얻는 관계는
다음 그림에서 2 가 어떤 내용을 얻는 관계처럼 사정을 이해하는 것이 된다.
[img2]
[그림] 08pfl--image/진리의오류55.jpg
https://buddhism007.tistory.com/228 ☞○ 마음과 색의 의미에 관한 논의
https://thegood007.tistory.com/1172 ☞○ 진리에 관한 수많은 오류와 착각의 문제
03fl--ghpt/r1030.htm ☞○ 진리에 관한 수많은 오류와 착각의 문제
위 그림은 2 가 4 ^ 와 같은 내용을 얻는 것을 표현했다.
이 그림은 그 경우 2 외부에 4 ^와 엇비슷하거나 비례하는 4 가 있는 것처럼 그림을 그렸다.
그런데 앞에서 이런 이해가 잘못된 것이라고 지적하였다.
이는 알고보면 위 그림에서 4 는
1 의 입장에서는 1 의 마음에 얻어진 내용이다.
그래서 2 의 감관이 대상으로 삼기 곤란하다.
위 그림에서 1 이 어떤 모습을 볼 때
2 의 마음 안의 4 ^ 와 같은 꽃을 대상으로 삼아서
4 의 모습을 보는 것이 아니다.
이와 사정이 같다.
2가 4 를 대상으로 4 ^ 라는 내용을 얻는 것이라고 생각하한다고 하자.
이는 앞의 경우처럼 잘못된 추리다.
앞에서 이미 이 문제를 보았다.
2 의 입장에서는 1 이 꽃의 모습을 보는 것은 다음처럼 이해할 수 있다.
우선 1 ^ 과 4 ^를 대상으로 삼아서 어떤 내용을 1 ^ 안에서 얻는다.
그래서 1 ^가 얻는 마음안 내용은 2 가 보는 4 ^ 의 내용과 엇비슷하다.
이처럼 추리한다고 하자.
그러면 이는 엉터리 추리다.
그런데 만일 이것을 받아들이고 비례관계를 생각한다고 하자.
그러면 대단히 엉뚱하게 된다.
현실에서 자신이 하늘이나 어떤 건물을 바라본다고 하자.
그런데 이 전체가 자신의 마음에 맺힌 내용이다.
이 경우 그에 해당한 외부 실재는
자신이 본 내용에 비례해 마음 밖에 그처럼 위치하고 있다고 추리해야 한다.
위 그림처럼
2 의 눈과 그의 마음에서 얻는 각 내용의 크기나 형태를 비율을 잡아 이해한다고 하자.
그런 가운데 자신이 하늘을 바라볼 때
그만한 크기에 준하는 자신의 눈동자가
그 하늘을 비춰주는 막 바깥에 그처럼 있다고 이해한다고 하자.
또 그에 비례한 외부사물들도
그런 정신의 막 밖에 그렇게 위치해야 한다고 추리해보자.
그럴 수 있을 지도 모른다.
그런데 무엇을 그런 크기를 측정하는 자로 삼아서
이 비례관계를 파악할 것인가가 의문으로 남는다.
그런데 처음 이런 비례관계나 유사성을 측정하고 판단할 하나의 근거도 직접 얻지 못한다.
즉, 외부 실재의 영역에서는 어떤 내용도 직접 얻지 못한다.
이것이 이 주장의 가장 큰 문제점이다.
그래서 이는 단순한 추리에 그치게 된다.
이제 이와 또 다른 입장을 다음과 같이 생각할 수 있다.
○ - 5 번째로 다음입장을 생각할 수 있다. [감각현실=마음, 실재부존설]
자신의 마음에서 얻는 내용은 자신의 마음안의 내용이다.
그래서 이에 상응한 외부 실재나 대상은 전혀 없는 것이다.
그리고 각 주체의 마음안 내용은
그 마음이 독자적으로 매순간 생성하고 나타내는 것 뿐이다.
마치 마음에 저장된 씨앗이 열매로 나타나는 것과 같다.
'유식무경'이란 표현은 불교내 유식학파를 상징하는 표현이기도 하다.
그런데 '유식무경'이라는 표현을 위와 같은 내용을 의미하는 것으로 이해하기도 한다.
여하튼 이론상 위와 같은 주장도 생각해 볼 수 있다.
그런데 다음 의문이 제기된다.
현실에서 각 주체는 일정한 조건과 상황에서
유사한 조건으로 유사한 내용을 반복해 대하게 된다.
그래서 그렇게 되는 사정을 설명하기 곤란하다.
이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설명할 수도 있다.
각 주체는 비슷한 업을 공통적으로 공유하다.
그에 따라서 그런 결과를 같이 얻는다고 설명할 수도 있다.
그래서 박쥐는 박쥐들끼리 같은 내용을 얻는다.
소는 소끼리 같은 내용을 대한다.
메뚜기는 메뚜기대로 같은 내용을 얻는다.
이는 그런 사정 때문이다.
그래서 사람은 사람들끼리 같은 내용을 얻는 것 뿐이다.
다만 사람은 자신이 얻는 내용을
마치 객관적인 실재의 내용인 것처럼 주장하는 것이다.
이처럼 설명할 수 있다.
또 다음의 입장도 생각할 수 있다.
○ - 6 번째로 다음입장을 생각할 수 있다. [감각현실=마음, 마음내 외부대상부존설=>유식무경]
자신의 마음에서 얻는 내용은 자신의 마음안의 내용이다.
따라서 이 안에는 이런 내용을 얻게 한 외부 실재나 대상은 전혀 없다.
그러나 그렇다고 실재가 전혀 아무것도 없는 것은 아니다.
또 외부 대상이 전혀 없다는 의미도 아니다.
단지 한 주체가 얻는 마음안 내용은
그런 내용을 얻게 한 외부 대상이 아니다.
그것은 오로지 마음안 내용일 뿐이다.
그리고 그 주체가 얻는 내용에는 그런 외부대상은 없다.
그래서 유식무경이란 이런 내용을 나타내는 표현이다.
그리고 이는 그런 마음으로 얻는 내용에 외부대상이 없다는 것일 뿐이다.
한편 이를 대상으로 하여 관념분별을 하는 경우는
이들 내용이 (내부) 대상이 된다.
즉, 유식무경은 외부대상이 없음을 나타내는 것이다.
이런 입장도 제시할 수 있다.
4 와는 비슷해보인다.
그러나 구체적 의미가 상당히 다르다.
어떤 주체가 얻는 내용은 그 일체가 마음안에 머무는 정신적 내용물이다.
따라서 그것은 그런 내용을 얻는 외부대상이 아니다.
그 안에는 그런 외부대상이 없다.
이런 점만을 제시한 것 뿐이다.
그리고 그 마음 밖에 실재나 외부 대상 자체가
전혀 없는 것이라고 하지 않는다.
이런 점에서 차이가 있다.
또 다음의 입장도 생각할 수 있다.
○ - 7 번째로 다음입장을 생각할 수 있다. [감각현실=마음, 실재=불가득공]
어떤 주체가 현실에서 얻는 내용은
일단 실재의 지위에 있는 내용은 아니다.
그리고 실재는 어떤 주체가 끝내 내용을 얻을 수 없다.
각 주체는 마음의 관념분별영역에서 행하는 이분법적인 분별을 행한다.
예를 들어 있다 없다 이다 아니다 ~와 같다 ~과 다르다. 좋다 나쁘다
등등이다.
그런데 그런 2분법으로서는 그것을 표현하고 나타낼 길이 없다.
그래서 언설을 떠난다.
그러나 이는 아무것도 전혀 없는 것은 아니다.
그렇다고 현실에서 행하는 어떤 분별로 a 라거나 무엇이 있다라고도
단정할 수 없다.
이렇게 제시하는 입장도 생각할 수 있다.
'색은 곧 공하다'라고 경전에서 간단히 제시한다.
그런데 이런 내용이 모두 이런 문제와 관련이 된다.
색은 각 주체가 현실에서 얻는 감각정보의 하나다.
이런 색의 실재가 무엇인가 하는 문제가 이와 깊게 관련된다.
이것이 '공하다'는 표현과 관련된다.
그 실재가 무엇인가에 대해서
위와 같은 여러 입장을 나열하였다.
이 경우 그 실재에 대한 답을 구체적으로 써넣기 어려운 사정이 있다.
이런 사정을 함께 제시한다.
현실에서 눈으로 색을 보게 된다.
귀로는 소리를 듣게 된다.
또 향기나 맛이나 촉감을 얻게 된다.
다시 그에 대해 그것이라고 관념분별을 행한다.
이런 경우 현실에서 얻는 이들 내용간에도 이와 사정이 유사하다.
즉, 어떤 한 내용을 다른 영역으로 밀어 넣어 보려고 하자.
즉 귀로 듣는 소리를 눈으로 보는 영역에 밀어 넣어 보자.
이 경우 그 내용을 있다 없다고 할 수 없게 된다.
얻지 못하기 때문이다.
이런 사정을 현실 안에서 우선 확인하게 된다.
그리고
자신이 눈으로 본 꽃 모습이
귀로 듣는 어떤 소리와 유사하고 비례관계가 있다고도 할 수 없다.
또 향기나 맛이나 촉감과는 어떤 점에서 유사하고
비례관계가 있다고 할 수도 없다.
관념내용은 눈을 감고도 단지 마음만으로 떠올릴 수 있다.
이들 내용은 이런 관념적 내용과도 마찬가지 문제가 있다.
생각으로 막연히 그려내는 형체나 내용들은
사실은 감각을 통해 얻는 내용이 아니다.
그리고 이들은 그 내용이 서로 공통하거나 일치하지 않는다.
심지어 이들은 각 측면에서 있다 없다라는 기본 판단마저도
서로 상응관계를 확립할 수 없다.
예를 들어 이런 경우가 있다.
어떤 상황에 소리는 들려서 있다고 해야 한다.
그러나 눈으로는 아무 것도 보이지 않는다.
그래서 없다고 해야 한다.
또 반대로 눈으로는 색이 보여서 있다고 해야 한다.
그러나 소리 영역에서는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는다.
그래서 없다고 해야 한다.
이런 경우처럼 이들 내용은 다 사정이 비슷하다.
그래서 최소한의 유무 판단에서조차도
이들은 서로 상응관계를 세우기가 곤란하다.
현실에서 한 주체가 얻는 내용에서도
이들 각 내용은 서로간에 그런 문제점이 파악된다.
그런데 여기에서 문제삼는 실재는
처음부터 어떤 주체와 관계를 떠난 내용을 문제삼는다.
그런데 한 주체는 일정한 조건에서 화합을 통해
내용을 얻는다.
그런데 지금 문제는 그런 조건과 관계를 떠난 내용을 문제삼는다.
그래서 각 주체는 문제삼는 그런 실재의 내용을 끝내 얻어낼 수 없다. [ 불가득 ]
그리고 그런 사정을 공하다라고 표현한다.
이와 같이 제시할 수 있다.
◧◧◧ para-end-return ◧◧◧
어떤 존재의 정체를 살핀다고 하자.
이 경우 문제삼는 또 다른 문제가 있다.
이 문제도 실재의 공함과 함께 관련된다.
꿈을 꿀 때 얻는 꿈 내용은 그 자체로 생생하다.
그러나 그 꿈 내용은
그런 조건에서만 얻는 일시적 내용이다.
또 꿈 내용은 거기에서 기대하는 다른 성품을 얻지도 못한다.
따라서 꿈에서 보게 되는 황금이나 바다 등은 엉터리고 가짜라고 보게 된다.
어떤 것이 어떤 조건에서만 일시적으로 얻는다.
그리고 그로부터 당연히 기대되는 어떤 성품을 얻지 못한다고 하자.
그러면 그런 사정으로 이를 실답지 못하고 가짜라고 보게 된다.
그런데 현실에서 얻는 감각현실이나 관념내용도 그런 성격을 갖는다.
앞에서 이 사정을 제시하였다.
현실에서 눈을 뜨면 ( 그런 조건에서는 )
어떤 꽃의 모습을 보게 된다.
그리고 다시 그것을 꽃이라고 여기게 된다.
그런데 이들 내용도 역시 그런 조건에서만 얻게 된다.
그래서 돗수가 다른 안경을 쓰고 대한다거나
아침에 본다거나 낮에 본다고 하자.
이처럼 달리 대하면 각 상황에서 매번 달라진다.
그리고 이 가운데 그 어느 것도 이들 내용의 대표라고 할 수 없다.
그리고 표준이 될 수 없다.
꿈을 실답지 않고 가짜라고 본다.
꿈은 그런 특성이 있다.
현실에서 한 주체가 감각현실이나 관념내용을 얻는다.
그런데 이들 내용 전반도 그와 성격이 같다.
현실에서 얻는 내용이 가짜라고 하자.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실에서
산은 산이고 물은 물이고 꽃은 꽃이라고
일정하게 구분해 파악하게 된다.
그래서 일정하고 고정된 진짜의 성품이
뼈대를 형성해 본체로 존재하기에 그런 것이라고 추리하게 된다.
즉, 이들은 매 순간 그처럼 일정하지 않다.
그리고 변화한다.
그래도 그래도 이들 각각을 그처럼 분별한다.
이는 다른 것과 그것을 구분하게 하는 실체가 있어서 그렇다고
추리를 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그런 가짜의 내용을 얻게 하는 진짜에 해당하는
영원하고 불변하는 고정된 진짜가 있는 것이 아닌가.
그리고 그런 것이 있다면 그것은 무엇인가를 문제삼게 된다.
이는 실재가 무엇인가 하는 문제와는 별개 문제다.
그리고 그런 내용은 없다는 것이 불교에서는 확립된 입장이다. [무아 무자성]
그리고 이를 무아, 무자성, 인무아, 법무아, 승의 무자성, 무소유
등의 표현으로 나타낸다. [무아, 무자성, 무소유]
○ 실재의 공함과 실체의 없음[무아, 무자성]의 관계
어떤 주체와의 관계를 떠나 실재하는 것이 무엇인가를 찾는다.
이 경우 앞에서 그런 진짜가 있다고 하자.
그렇다면 그런 진짜의 내용을 제시하면 된다.
그런데 사정이 그렇지 않다.
결국 그런 진짜라고 할 내용이 없다
따라서 그런 것을 제시할 수 없다.
실재가 공하다는 것은 이런 사정도 함께 나타낸다.
실재는 아무 것도 전혀 없는 것은 아니다.
그런 가운데 각 주체는 각 내용을 일정한 조건에서 화합관계로 얻는다.
그런 사정상 각 주체는 그 내용을 끝내 얻어낼 수 없다. [불가득]
그래서 그런 실재는 2 분법상의 분별을 떠난다.
그리고 언설을 떠난다.
그리고 그런 상태를 나타내기 위한 방편상
'공'이란 표현으로 그것을 나타내게 된다.
즉, 공이란 표현은 그 상태를 가리켜 표현하기 위한 언어시설(방편)일 뿐이다.
그래서 공이라는 표현은
있다 없다 그 어느 쪽도 나타내지 않는다.
그리고 위와 같은 상태를 단지 언어로 표현하기 위한 방편에 불과하다.
즉 앞과 같은 상태를 가리키기 위한 표현에 그친다.
이는 공이라는 표현에 해당한 어떤 성품이 있다고 제시하는 것이 아니다.
공이라고 표현을 그처럼 잘 이해해야 한다.
이를 잘못 이해하면 혼동이 심해진다.
◧◧◧ para-end-return ◧◧◧
현실에서 각 주체가 감관을 통해 감각한다. [감각현실]
그리고 관념분별을 행한다.
그런 가운데 어떤 주제를 문제삼는다.
그리고 이 일체는 그런 조건에서 A+ B => c 의 관계처럼
마음에서 얻어내는 내용이다.
현실에서 한 주체가 얻는 일체 내용의 사정이 이와 같다.
그래서 각 주체가 얻는 내용 일체는 그런 관계에서 얻는다.
그런 관계를 떠나서 내용을 얻을 수 없다.
여기서 c 는 그런 관계로 그 내용을 얻음을 나타낸다.
그런데 실재는 처음부터 주관의 그런 관계를 떠나 실재하는 내용을 문제삼은 것이다.
따라서 현실에서 얻는 내용은 지금 문제삼는 실재의 지위에 있는 내용은 일단 아니다.
A+ B => c 의 관계식이 이 사정을 나타낸다.
이를 통해서 이 사정을 쉽게 이해할 수 있다.
현실 내용은 어느 것이나 위와 같은 연기(인과) 관계로 얻는다.
그런데 이는 그렇게 얻는 내용 일체는 바로 그런 사정으로
'실재의 지위에 있는 내용이 아님'도 함께 제시한다. [연기즉 공]
처음 각 감관을 통해서 각 주체가 감각정보를 얻는다.
그리고 한 주체가 이를 외부 현실로 잘못 여긴다.
한편 이를 바탕으로 분별을 행한다.
그런 가운데 무언가를 문제삼는다고 하자.
그런데 그 일체는 일단 이런 사정으로
여기서 문제삼는 실재의 지위에 있는 내용이 아니다.
그리고 실재는 또 그런 내용이 아니다.
이런 내용을 연기관계가 기본적으로 제시한다.
현실에서 한 주체가 어떤 내용을 얻는다.
그런데 그 주체와 관계없이 실재하는 내용을 실재라고 한다.
그래서 현실 내용과 실재의 관계는 앞과 같다.
○ 색불이공이라고 제시하는 사정
한편 색불이공 공불이색
색즉시공 공즉시색과 같은 내용이 이어져 제시된다.
이는 다음 사정 때문이다.
한 주체가 얻는 색은
그것이 실재의 지위에 있는 내용이 아니다.
그리고 실재도 그런 것이 아니다.
그러나,
그렇게 한 주체가 얻는 감각정보로서 색은
또 그런 본 바탕이 되는 실재를 떠나서 얻는 것이 아니다.
그리고 본 바탕을 떠나 존재하는 것도 아니다.
그래서 바로 그런 사정으로
색은 곧 실재의 공함과 다르다고 할 수 없다.
또 실재의 공함도 한 주체가 얻는 현실내용과 다르다고 볼 수 없다.
즉, 색과 다르다고 볼 수 없다.
색불이공 색즉시공을 제시하는 기본 사정은
반야심경에서는 생략하고 결론만 제시한다.
그러나 『대반야바라밀다경』에서는
위와 같은 사정으로 이 내용을 제시함을 밝히고있다.
즉 색불이공 공불이색
색즉시공 공즉시색
수상행식 역부여시..
등과 같은 내용이 제시된다.
색은 감각현실로서 한 주체가 얻는 감각정보로서 마음안 내용이다.
공은 그런 내용을 얻게 하는 본 바탕인 실재를 문제삼을 때의 내용이다.
그런데 색은 색이고 공은 공이다.
그래서 색은 공한 실재의 지위에 있는 내용이 아니다.
따라서 색은 공이 아니다.
그리고 또 색은 공함 역시 색이 아니다.
----
그러나 색은 그 색의 실재의 공함과
서로 떨어져 따로 있는 것이 아니다.
한편 한 주체가 분별하는 내용도 사정이 같다.
이 역시 공한 실재와의 관계에서
모두 공한 실재와 떨어져 있는 것이 아니다.
현실에서 각 주체는 얻는 내용 색수상행식은 모두 사정이 이와 같다.
----
그런 사정으로 다음처럼 제시하게 된다.
이들[A]는 모두 공한 실재와 다르지 아니하다.
그리고 공한 실재는 또 그런 A와 다르지 아니하다.
그래서 A는 곧 공한 실재이고
공한 실재는 곧 그런 A다.
이처럼 제시하게 된다.
이런 내용을 본 경전에서는
짧게 핵심만 추려 제시한다.
그래서
색은 공과 다르지 않고
공은 색과 다르지 않고
색은 곧 공이며
공은 곧 색이다라고 표현한다.
그러나 색즉시공과 같은 표현을 또 잘못 이해하면
혼동을 일으킬 수도 있다.
그래서 곧바로 현실에서 얻는 감각현실 등을
그것이 실재의 공함이라고 잘못 이해할 수 있다.
그리고 공함이라는 표현이 자신이 현실에서 얻는 감각현실 자체를
가리킨다고 잘못 이해하기 쉽다.
그래서 색즉시공 공즉시색의 표현을 대해서
곧바로 색 자체가 공을 나타낸다고 잘못 이해하기 쉽다.
또는 감각현실이 곧 실재라고 잘못 이해하기 쉽다.
『대반야바라밀경』에서는 좀 더 자세하게
기본적으로 그런 사정이 아님을 먼저 제시한다.
그리고 그 다음 이들 내용과 실재의 관계를 앞처럼 제시한다.
한편 이들 표현이 그런 내용을 나타내는 것이 아님은
아래 부분에서 쉽게 파악할 수 있다
즉, 반야심경을 비롯해서 본 경전에서도
다시 공한 실재의 사정에 대해 다음 내용을 이어 제시한다.
....
공한 가운데에는
색도 없고,
수․상․행․식도 없으며,
눈․귀․코․혀․몸․뜻도 없고,
기타 일체의 이분법적인 분별을
모두 떠난다.
공은 그런 상태를 나타낸다.
그래서 있고 없음을 문제삼는
양 극단의 두 변을 모두 떠나야 한다.
그런 언설 분별을 떠난 상태를
공이라는 표현이 나타내는 것이다.
그것은 사정이 그렇기 때문이다.
실재는 무엇이 전혀 아무것도 없는 것은 아니다.
다만 한 주체는 마음과 화합하여 내용을 얻는다.
따라서 이런 관계를 떠나 그대로 있다고 할 실재를 끝내 얻을 수 없다. [불가득]
그러나 이분법적으로 분별할 어떤 내용이
적극적으로 있다거나 ~ 이라거나 ~과 같다거나 좋다거나
깨끗하다거나 등등으로 분별할 수 없다. [불이법]
그래서 실재는 그러한 어떤 무엇이다.
그런데 실재의 사정을
언어로 설명하고자 한다고 하자.
그래서 일반적으로 의미를 갖지 않는 '공'이란 표현을 빌려 이를 나타내게 된다.
결국 공이란 표현은 이런 상태를 나타낸다.
○ 유무의 표현을 빌려 공을 나타내는 사정
실재에 대해 공하다고 표현한다.
그런데 이런 설명을 언어를 통해 듣는 상대는
일단 이런 표현의 의미를 바로 이해하지 못한다.
그리고 기본적으로 있음과 없음
또는 ~이다 ~ 아니다 등과 같은 분별을 기본적으로 행한 상태에서 이해한다.
그런 상태에서 이 둘 가운데 하나의 의미로 잘못 혼동해 이해하게 된다.
그런데 경전에서 이런 표현을 사용하는 사정이 있다.
이는 마치 어떤 외국어를 설명할 때와 사정이 같다.
낯선 외국어를 외국어 자체로 설명하면 이해하기 힘들다.
그런데 다른 나라의 말로 설명하기도 곤란하다.
예를 들어 실재가 공하다라는 표현을 하고
공이란 내용을 이해를 돕기 위해 설명한다고 하자.
이 경우 '공'은 '공'이라고 설명할 수도 없다.
공은 유나 무 또는 시나 비 어느 한 측면만에 치우친 상태를
나타내는 표현도 아니다.
그래도 이해를 돕기 위해서는
기존에 사용하던 유무의 표현 가운데
비교적 가까운 표현을 빌려 나타내게 된다.
그런 사정을 이해해야 한다.
○ 실답게 있다는 망집의 제거 [무의 표현]
예를 들어 어떤 이가 현실에서 무엇인가를 실답게 여긴다고 하자.
또는 자신이 현실에서 문제삼는 내용이 곧 그런 실재라고 잘못 이해한다고 하자.
그런데 그처럼 집착을 갖고 임하는것이 전도망상이다.
그리고 그런 망상분별과 집착에 바탕해 업을 행하게 된다.
그리고 생사고통을 받게 된다.
그런 경우 생사고통 현상을 해결해야 한다.
그런 경우 먼저 실재에 자신이 생각하는 것이 그처럼 그대로 있다는 망집을 시정해야 한다.
그래서 실재는 ~ 이다라는 식으로 생각하는 망집을 제거해야 한다.
그런 가운데 집착을 갖고 임하는 자세를 시정해야 한다.
그런 취지에서 무(없다)나 비(아님)나 불(아니다)이라는 부정적인 표현을 통해서 설명하게 된다.
이는 실재의 공함을 설명히기 위한 방편이다.
그래서 어느 정도 실답게 있다는 망집을 제거할 수 있다.
○ 아주 없다는 망집의 제거 [유의 표현]
실재의 공함을 무라고 표현하면 이로 인해 다시 다른 망집을 갖기 쉽다.
즉 실재는 아무 것도 전혀 없다는 망집을 다시 치우쳐 갖게 되기 쉽다.
그래서 이런 경우에는 다시
상,락,아,정 등과 같은 표현을 빌려
실재는 아무 것도 전혀 없는 것이 아님을 다시 밝히게 된다.
그러나 공한 실재를 정확히 표현한다면,
사실은 그런 무(없다)나 불(아니다)이나
유나 상단의 표현은 모두 곤란하다.
결국 유무 시비 분별을 모두 떠나야 한다.
그래서 언어분별을 모두 떠나야 한다.
즉 실재는 언어분별을 행할 수 없는 것이다. [언어도단]
그런 무엇이라고 이해해야 한다.
○ 유무의 극단의 문제
현실과 관련해 어떤 것의 정체를 판단할 때 유무의 극단에 치우치면 안 된다.
유에 치우치면 어떤 것이 참된 진짜 내용으로 있다고 잘못 여긴다.
또 자신이 얻는 내용이 다른 영역에도 그처럼 있는 것이라고 잘못 여긴다.
그래서 이를 실답다고 여기고 집착을 갖게 된다.
그러나 사정이 그렇지 않다. [무아, 무자성, 무소유, 불가득, 공]
한편 실체가 없고, 실재가 공하다고 하여
본 바탕인 실재에 아무 것도 전혀 없는 것은 아니다.
단지 어떤 주체가 그 내용을 직접 얻어낼 수 없는 것 뿐이다.
그리고 현실측면에서는 마음에서 어떤 내용을 화합해 얻어낸다.
어떤 내용을 전혀 얻지 못하는 것도 아니다.
즉 그 성격이 꿈처럼 실답지 않지만,
일정한 조건에서 화합해 얻게 되는 내용은 그처럼 얻는다.
그런 측면에서는 있는 것이다.
그래서 유무의 극단을 떠나야 한다.
한편, 이런 실재의 상태를 이해시키기 위해 동원한
그 모든 표현이나 설명은 세속에서 취하는 방편이다.
즉, 이런 상태를 이해시키기 위해 방편이다.
따라서 그 일체는 종국적으로 희론의 성격을 갖는다.
일반적으로 부처님은 수많은 설법을 행했다고 일반적으로 여긴다.
그러나 그것은 모두 이런 취지에서 이를 이해시키기 위한 내용을 언어로 시설해 설명한 것이다.
즉, 이런 방편을 통해 이런 망집이 잘못임을 깨닫게 하기 위한 것이다.
그리고 생사고통을 벗어나게 하기 위한 것이다.
이는 중생을 제도시키기 위한 자비의 마음에서 방편으로 취한 것이다.
그래서 희론의 성격을 갖는다.
그런 사정으로 사실은 한마디도 설한 바가 없다고 밝히게 된다.
[ 금강경, 대반야바라밀다경 등 참조]
그래서 이런 종합적인 사정을 잘 파악한 가운데
경전 내용을 파악해야 한다.
◧◧◧ para-end-return ◧◧◧
-- 아래에 조각글 작성시 휴식시점에 붙인 노래가사,사진,풍광,예술작품 자료를 편집상 옮겨 붙입니다.--
■ 퀴즈
다음에 해당하는 단어?
자기와 상대한 이의 성질을 선(善)ㆍ악(惡)ㆍ무기(無記)의 3성으로 나누어 정함.
답 후보
● 삼성분별(三性分別)
삼시교판(三時敎判)
삼십삼천(三十三天)
삼악취(三惡趣)
삼인삼과(三因三果)
삼전법륜(三轉法輪)
삼종관법(三種觀法)
〓인바라밀.
답 후보
● 인욕바라밀(忍辱波羅蜜)
일념삼천(一念三千)
일미(一味)
일생보처(一生補處)
일심삼관(一心三觀)
일즉일체(一卽一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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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불설성불모반야바라밀다경_K1427_T0257 [문서정보]- 일일단상키워드
K1427
T0257
성불모반야
● 한글대장경 해당부분 열람I
● 한글대장경 해당부분 열람II
○ 통합대장경 사이트 안내
○ 해제[있는경우]
● TTS 음성듣기 안내
※ 이하 부분은 위 대장경 부분에 대해
참조자료를 붙여 자유롭게 연구하는 내용을 적는 공간입니다.
대장경 열람은 위 부분을 참조해주십시오.
『불설성불모반야바라밀다경』 ♣1427-001♧
성불모반야
♥아래 부분은 현재 작성 및 정리 중인 미완성 상태의
글입니다♥
Lab value 불기2561/08/27/일/23:35
『불설성불모반야바리밀다경』의 내용은
『반야바라밀다심경』의 내용과 큰 차이가 없다.
『반야바라밀다심경』은 일반적으로 반야심경으로 알려져 있다.
● 색즉시공의 색의 의미와 마음의 관계
『불설성불모반야바리밀다경』에서
색(色)이 곧 공(空)이요,
공이 곧 색인 까닭에
..
라고 제시한다.
...
▸ 이른바
색(色)이 곧 공(空)이요,
공이 곧 색인 까닭에
색이 공과 다르지 않고
공이 색과 다름이 없으며,
수(受)․상(想)․행(行)․식(識)도
또한 이와 같습니다. ◂
색(色)이 곧 공(空)이요,
공이 곧 색인 까닭에
색이 공과 다르지 않고
공이 색과 다름이 없으며,
수(受)․상(想)․행(行)․식(識)도
또한 이와 같습니다. ◂
『불설성불모반야바라밀다경』 ♣1427-001♧
그런데 여기서 색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색이란 가장 좁게는 우리가 눈을 떠서 볼 때
얻게 되는 그 일체 내용을 가리킨다.
눈을 통해 보고 얻게 되는 내용은
무엇이던 일단 그것은 감각해서 마음에 받아들이는
시각정보이고 색깔이다.
이는 마음으로 얻게 되는 마음안 내용이다.
그런데 넓은 의미의 색은 감각현실 일체를 가리킨다.
그래서
눈을 통해 얻는 시각 감각정보 뿐 아니라,
귀를 통해 얻는 청각정보로서 소리 일체
코를 통해 얻는 후각정보로서 냄새 일체
혀를 통해 얻는 미각정보로서 맛 일체
몸을 통해 얻는 촉각정보로서 촉감 일체를
통틀어서 가리킨다.
좁은 의미의 색,성,향,미,촉이라는
감각정보 일체를 넓게 색이라고 표현한다.
○ 넒은 의미의 색의 정체
감각과정을 통해 얻게 되는 그 일체 내용을 표현상 색이라고 표현한다.
그런데 이러한 감각정보에 대해
현실에서 각 주체는 전도망상을 일으킨다.
그런 상태에서 이들 내용을
자신의 외부 세계나 자신의 몸이라고 잘못 이해한다.
더 나아가 이를 자신의 주관이 대하는 외부 대상으로도 잘못 이해한다.
그리고 자신의 주관적 정신과는 구분되는 것으로 외부 물질이라고 잘못 이해한다.
또 이들 내용은 영희나 철수를 포함해 다수가 대하는 외부의 객관적 실재로 잘못 이해한다.
이런 이해는 모두 전도 망상에 의한 잘못된 판단이다.
감각기관을 통해 얻게 되는 이들 색성향미촉 일체는 마음안 내용이다.
즉, 감각과정을 통해 자신의 정신에 들어온 주관적 내용물이다.
따라서 자신의 외부 세계의 객관적 구성요소나 또는 자신의 몸으로 잘못 이해하면 안 된다.
한편 이는 관념분별작용의 내부 대상은 될 수 있다.
그러나 감각과정에서 대하는 외부 대상은 아니다.
따라서 자신의 감관이 감각과정에서 대하는 외부 대상이라고 잘못 이해하면 안 된다.
한편 이들은 감각을 통해 얻는 마음안 감각현실이다.
그래서 '정신안에 머무는 정신적 내용물'이다.
따라서 이들 내용을 정신과 구분되는 외부의 물질적 요소로 잘못 이해하면 안 된다.
통상 물질이라는 표현은 일반적으로 정신과 상대적으로 구분되는 의미로 주로 사용된다.
예를 들어 물질과 정신 이처럼 사용한다.
그리고 현실에서 감각해 받아들이는 이들 감각정보를 일반적으로 정신과 별개의 내용으로 잘못 이해한다.
그래서 이를 정신과 구분되는 물질로 표현하게 된다.
이런 표현은 이런 잘못된 망집과도 관련된다.
불교의 색이라는 표현을 번역할 때도 이런 배경에서 이를 물질이라고 통상적으로 번역한다.
물론 이를 물질이라고 표현할 수도 있다.
그러나 불교의 본 입장은 이와는 다르다.
표현과 관계없이 이 내용이 실질적으로 어떤 지위에 있는 내용인가를 잘 파악해야 한다.
그리고 혼동을 일으키지 않아야 한다.
한편, 이는 자신의 '정신이 얻어낸 결과물'이다.
이는 각 주체마다 달리 얻는다.
따라서 이들 내용은 객관적 세계나 자신의 몸을 구성하는 실재가 아니다.
○ 색은 마음안 내용임
세속에서 일반인이나 과학자가 이해하는 입장이 있다.
이는 경전과 부처님이 가르치는 입장과 큰 차이가 있다.
경전은 그 일체가 자신의 마음 안의 내용임을 제시한다.
이런 점을 주의할 필요가 있다.
그 차이는 그림을 통해서 이해하면 조금 이해가 쉽다.
[img2]
[그림] 08pfl--image/진리의오류55.jpg
https://buddhism007.tistory.com/228 ☞○ 마음과 색의 의미에 관한 논의
https://thegood007.tistory.com/1172 ☞○ 진리에 관한 수많은 오류와 착각의 문제
03fl--ghpt/r1030.htm ☞○ 진리에 관한 수많은 오류와 착각의 문제
현실에서 어떤 주체가 있다고 하자.
그가 눈을 감고 아무 것도 보지 않는 상태에 있다.
그러다가 눈을 뜨게 되면 모습을 보게 된다.
이 때 얻게 되는 시각정보의 내용을 위 그림처럼 나타낼 수 있다.
눈을 통해 이런 감각현실을 얻었다고 하자.
그런 상태에서 1 은 다시 분별을 행한다.
즉, 이처럼 눈을 뜰 때 얻는 내용 일체를 놓고
다시 각 부분을 묶고 나누며 분별을 행한다.
그런 가운데 어떤 부분은 자신이고 어떤 부분은 세계의 내용이라고 잘못 이해한다.
이 분별 내용은 이 그림에는 그려져 있지 않다.
그러나 그런 일반적 분별을 바탕으로 각 부분이 표시되어 있다.
여기에는 그가 외부 세계의 내용으로 잘못 여기는 내용도 있다.
이를 다른 사람 2 나 3 의 모습
그리고 4 와 같은 꽃을 통해 대강 나타냈다.
한편 위 그림에서 1은 그런 상황에서 1 자신이 스스로 자신으로 잘못 여기고 대하는 몸 부분이다.
현실에서 눈은 눈 자신을 보지 못한다.
또 자신의 눈썹이나 이마나 자신의 등이나 허리를 보지 못한다.
그런 가운데 대강 자신의 몸으로 잘못 여기게 되는 부분을 1 처럼 보게 된다.
그리고 현실에서 이런 부분을 자신이라고 잘못 여기게 된다.
그런 상태로 태어날 때부터 죽을 때까지 살아간다.
이 가운데 자신의 눈은 거울을 통해서가 아니면 직접 보지 못한다.
그러나 촉감을 통해서 간접적으로 그 눈을 파악하게 된다. [ 무견유대 ]
즉 자신이 눈을 뜨고 감는 동작은 촉감을 통해 그 차이를 파악한다.
○ 마음안 내용임을 이해하는 실험
현실에서 어떤 주체가 눈을 떠서
얻는 그 일체의 내용이 사실은 자신의 마음 안에서 얻는 내용이다.
이를 확인할 수 있는 간단한 실험은 이외에도 많다.
자신이 눈을 떠서 사물을 바라볼 때
자신이 돗수가 다른 색안경을 바꿔 써보는 실험도 할 수 있다.
또는 자신의 눈을 손가락등으로 눌러본다거나 하는 실험을 해볼 수 있다.
그런 실험으로 일순간에 그 모든 내용이 바뀌는 결과가 나타난다.
만일 이런 내용이 자신의 마음에 들어와 있는 내용이 아니라고 하자.
그런 경우 이를 설명하기 곤란하다.
자신의 외부 세계가 단지
자신이 돗수가 다른 색안경을 하나 바꿔 쓴다고 해서
그 순간 그 내용이 모두 다 바뀔 이치는 없다.
그것은 자신 마음안 내용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런 실험을 할 때
이와 관계없이 변화를 하지 않고
그대로 계속 유지되는 내용은 따로 얻을 수 없다.
그래서 자신이 평소 대한 것들의 정체를 잘 확인해야 한다.
평소 자신이 눈을 떠 본 내용을 자신의 외부에 있다고 잘못 여기기 쉽다.
○ 그림을 통한 이해
그러나 이들은 자신의 마음 안에 얻어져 있는 내용이다.
그 사정은 그림의 2와 같은 다른 이의 상황을 놓고 이해하면 쉽다.
2 가 눈을 뜨고 감을 때 어떤 변화를 겪는 것을 옆에서 관찰하고 보고를 행하게 하자.
다른 주체는 자신과 유사한 감관을 갖는다.
그래서 눈을 뜨면 무언가가 보이고
눈을 감으면 보이지 않는다고 보고하게 된다.
그런데 옆에서 이것을 관찰하는 입장에서는
그런 변화를 2 가 보고할 때 사실은 별다른 변화를 파악하지 못할 수 있다.
그래서 이는 그처럼 눈을 뜨고 감은 2 내부에서 나타난 변화일 뿐이라고 보게 된다.
그리고 그 변화는 위 그림처럼 2 내부의 5 ^ 와 같은 영역에서 나타난 변화라고 여긴다.
위 그림은 이런 일반적인 생각을 나타낸다.
물론 엄밀히 보면 위 그림처럼 이 관계를 표시하는 것 자체가 잘못이다.
이는 잘못된 판단이다.
이 사정을 간단하게 살피면 다음과 같다.
2 가 거꾸로 1 이 눈을 뜨고 감는 것을 본다고 하자.
이 때 2 가 생각하기를 1이 눈을 떠 보는 내용은
2 자신이 본 1 ^ 와 같은 부분 안에서 머문다고 추리한다고 하자.
이는 엉터리 추리다.
마찬가지로 처음 1이 행한 추리도 잘못이다.
이들 추리는 모두 잘못이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위와 같이 추리하고 이해한다.
일반적으로 그 상황을 위 그림처럼 이해한다.
과학자나 의사나 생물학자나 생리학자들의 보고도 사정이 같다.
현실에서 어떤 이가 어떤 관찰을 하고 학계에 보고한다.
그런 가운데 이들 내용은
자신의 주관이 관계하는 대상 그 자체라고 잘못 여기기 쉽다.
그리고 자신의 마음과는 구분되는 마음 밖의 물질이라고 잘못 여기기 쉽다.
그런데 사실은 그렇지 않음을 잘 확인해야 한다.
이들 내용은 바로 이런 점에서 기본적으로 결함을 갖는다.
사람이 사물을 빛을 통해서 시신경의 원추세포 등이 흥분한다고 한다.
그래서 시각정보를 얻는다고 설명한다.
그런데 이들 내용은 위와 같은 바탕에서 행하는 설명이다.
즉, 위 그림에서 2 가 어떤 내용을 얻을 때
그에 관련되는 것을 위와 같은 형태로 나열해 설명하는 방식이다.
그러나 관찰자 자신이라고 할 1 의 마음에서 얻는 내용을
놓고 그렇게 서로 관련지어 내용을 제시한 것뿐이다.
따라서 기본적으로 오류가 있다.
이런 사정을 먼저 잘 이해해야 한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이해하는 방식에 따라
일단 2 가 얻는 내용은 2 의 마음안 5 ^ 안에 머문다고 그려 나타내고 설명하게 된다.
그림을 살필 때는 이 점을 주의해야 한다.
자신이 손뼉을 마주치면 반복해서 소리를 듣게 된다.
그래서 자신이 얻는 시각정보가 그런 소리라는 청각정보를 얻게 하는 원인이 된다고
잘못 이해하기 쉽다.
그리고 그 관계를 그처럼 서술하기 쉽다.
또 번개가 치는 모습을 보고 나서 천둥소리를 반복해 듣게 된다.
그래서 그런 번개가 천둥소리를 일으키는 원인이라고 잘못 이해하게 된다.
그래서 일반적으로 번개가 천둥소리를 일으킨다고 잘못 서술해 설명한다.
그런데 여하튼 위 경전에서
색이라고 표현하는 내용은
위와 같은 감각정보나 감각현실을 가리킨다.
이 점을 기본적으로 잘 이해해야 한다.
그런데 이런 사정은 눈으로 얻는 시각정보인 색만 그런 것이 아니다.
감관을 통해서 곧바로 얻는다고 보는
색,성, 향, 미, 촉이 모두 공통된 사항이다.
어떤 주체가 얻는 감각정보 내지
감각현실 일체는 그것이 모두 그 주체의 마음에 머무는 내용이다.
그런데 그런 내용은
마음이 마음안의 내용을 대상으로 해서
자신의 감관이 그런 내용을 얻는다고 이해할 것인가가 문제된다.
이 말은 위 그림에서 2 를 놓고 설명한다면 다음과 같다.
2 가 2 의 마음 5 ^ 안에서
4 ^ 와 같은 꽃의 모습을 본다고 하자.
그것은
2가 스스로 자신이라고 보게 되는 2^ 라는 몸의 일부로서 눈과 같은 감각기관이
4^ 와 같은 마음안에 얻어진 꽃의 모습을 대상으로 하여
그 내용을 얻는 것이라고 볼 것인가가 문제된다.
위 그림을 통해 보면 그것은 엉터리 이해임을 쉽게 알 수 있다.
4 ^ 와 같은 꽃의 모습은 2 가 마음에 얻는 내용이다.
결코 2 외부에 있는 어떤 외부 세계의 내용이 아니다.
2 의 감관이 관계하는 2 밖에 있는 외부대상도 아니다.
2 의 정신 밖에 머무는 외부 물질이라고 할 수도 없다.
그래서 이런 이해는 잘못된 것이다.
그런데 현실에서
1 이 자신의 손을 뻗쳐 꽃 4를 만지면서
그 상황에서 어떤 소리를 듣거나 촉감을 느끼거나
냄새를 맡거나 한다고 하자.
그러면
자신의 손은 이런 4 라는 꽃을 대상으로 관계해서
앞과 같은 내용을 얻는다고 잘못 이해하게끔 된다.
이것이 전도망상 분별이다.
그런 망상을 갖는 사정이 있다.
그런 내용을 얻으 상황에서
또 다른 정신에서 그런 소리나 냄새나 맛이나 촉감을 얻는다.
이들은 부대상황의 관계다.
그런데 이런 경험을 반복함으로써
이들을 서로 관련시키게 된다.
그래서 자신이 마음에서 이미 얻은 내용을
감관이 대하는 대상이라고 잘못 이해하게 된다.
이런 잘못된 이해는 한 번 태어나서
삶을 마칠 때까지 쉽게 해소되지 않는다.
이는 그런 각 내용을 각 정신에서 부대상황의 관계로 얻기 때문이다.
삶을 출발하기 이전에 이렇게 각 내용을 얻는 형태로 생명이 형성되었기 때문이다. [3능변]
그리고 이런 관계는 이후 생에도 계속 이런 형태로 반복된다.
그래서 이런 전도망상은
어느 계기를 통해서 올바로 시정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세세생생 무한히 반복하게 된다.
그리고 생사고통을 받아나게 하는 근본원인이 된다.
어떤 이가 4 라는 꽃을 눈을 떠서 보았다고 하자.
이 상황에서 그런 내용이 자신의 정신이 대하는 외부 대상이 아니다.
또 자신의 마음에 얻어진 감각정보로서 마음안 내용물이다.
그런데 이런 바탕에서는 다음 추가 문제를 다시 잘 이해해야 한다.
과학자의 보고도 마찬가지다.
어떤 과학자가 학계에 관찰한 내용을 보고하게 된다.
그런데 이는 사실 과학자가 그의 마음에 얻는 주관적 내용을 보고한 것이다.
그것이 그 과학자의 주관적 정신안에 얻어진 내용일 뿐이라고 하자.
그렇다면 그런 보고는 그 과학자 외에 수많은 사람이 긍정하지 않아야 한다.
그러나 대부분 엇비슷한 내용을 또 각기 얻는다.
그리고 그것을 긍정하게 된다.
그렇게 되는 사정을 다시 이해해야 한다.
그래서 이런 문제가 제기되면 쉽게 다음을 추리하게 된다.
즉 어떤 이가 4 와 같은 꽃을 본다면
비록 그 모습은 그 주체의 마음에서 얻는 주관적 내용이다.
그러나 이 경우
그 주체의 정신 밖에는 그에 상응하는 내용이 그처럼 실재한다고 잘못 여기게 된다.
그래서 어떤 이가 그 자신의 마음에서 얻는 내용이 있다고 하자.
그러면 다른 이들은 다른 이의 마음에 있는 내용을 대상으로 어떤 내용을 얻는 것은 아니다.
각 주체가 얻는 내용은 그 마음 밖에 그에 해당하는 어떤 객관적 실재가 있다고 잘못 여긴다.
사정이 그렇기에 그것을 각 주체가 대상으로
삼아 각기 그런 내용을 얻게 된다고 잘못 추리하게 된다.
이 경우 정말 그런가가 문제된다.
그래서 이를 살펴야 한다.
◧◧◧ para-end-return ◧◧◧
● 실재에 대한 다양한 입장과 색즉시공
경전에서 색즉시공이라고 표현한다.
그런데 여기서 공은 또 무엇인가.
현실에서 본바탕이 되는 실재가 무언가가 문제된다.
이 경우 그런 실재가 공함을 나타낸다.
그런데 실재가 무언가라는 문제는
다음의 문제의식에서 나온다.
○ 본 바탕의 실재에 대한 추리
자신이 눈을 떠 그런 모습을 보게 될 때
다시 눈을 감으면 그런 모습을 보지 못한다.
실험을 하면 누구나 확인할 수 있다.
그래서 자신이 눈을 떠 꽃의 모습을 보았다고 하자.
이 경우 그것이 자신의 눈이 대하는 대상이 아니라고 하자.
더 나아가 눈을 감으면 그 모습을 보지 못한다고 하자.
그렇다면
눈을 감게 되면 자신이 보았던 그 꽃은
세상에서 완전히 없어진 것인가가 문제된다.
그리고 그와 관련된 것은 아무것도 없다고 할 것인가가 문제된다.
간단히 이를 설명해보자.
어떤 주체가 눈을 떠서 4 라는 꽃의 모습을 얻는다.
그러나 눈을 감으면 그런 모습을 보지 못하게 된다.
이런 일을 일상생활에서 반복해 경험한다.
그런데 자신이 눈을 감거나 감지 않거나 관계없이
자신의 외부에 실재하는 꽃은 없을 것인가.
만일 그런 것이 실재한다면 그 내용은 무엇인가가 문제된다.
그래서 그런 실재하는 꽃은
자신이 눈을 감을 때 아무것도 보지 못하던 그런 상태로서 무엇일 것인가를 추리해보자. .
아니면 눈을 뜰때 보게 되는 그런 모습일 것인가를 추리해보자.
그런데 현실에서 얻는 내용이 알고보면 다 다르다.
그런 가운데 그 어느것도 표준이라고 하기 곤란하다.
그래서 대표라고 할만한 것을 찾아내기 힘들다.
그리고 그 가운데 어느 하나를 표준이나 대표로 정한다고 하자.
그러면 현실에서 일반적으로 얻는 모습은 다 엉터리라고 해야 한다.
그런 경우 실재는 어느 내용에 일치하는가가 문제될 수 있다.
예를 들어 눈을 떠서 모습을 본다고 하자.
촛점이 정확하게 맞은 안경을 쓰고 볼 때와 눈으로 본 모습은 서로 다르다.
또는 새벽이나 저녁에 늦게 보던 희미한 모습과 대낮에 보는 모습은 다르다.
위에서 내러보거나 아래에서 올려본 모습과 정면에서 본 모습은 서로 다르다.
멀리서 보거나 달리면서 지나치며 보던 모습은 1 m 거리에서 정지한 상태에서 본 모습과 다르다.
이렇게 여러 모습이 다르다.
그런데 이 가운데 어떤 모습이 실재와 일치하는가.
이러한 식으로 다양하게 문제를 제기할 수 있다.
이런 문제가 제기될 때
그에 대한 답은 다양하게 제시될 수 있다.
우선 현실에서 생활하는 일반적인 입장을 하나의 입장으로 나열할 수 있다.
그것은 다음과 같다.
○ 1 번째로 다음입장을 생각할 수 있다. [감각현실=실재설]
처음 자신이 눈을 떠서 얻는 내용이 있다면
그것은 곧 자신의 마음 밖에 있는 외부의 내용이다.
그리고 자신의 감관이 대하는 외부 대상이다.
그래서 마음(정신)과는 구분되는 물질과 같다.
현실에서 생활하는 일반적인 입장 대부분은
보통 이렇게 자신이 눈을 떠서 보게 되는 내용을 이해한다.
그래서 이런 입장은 결국 다음과 같다.
감각정보는 자신이 감각하여 마음에 얻은 마음안 내용이다.
그런데 이를 그런 내용을 얻게 한 객관적 실재나 객관적 세계 그 자체로 이해한다.
그리고 그것을 곧 그런 내용을 얻게 한 외부대상이라고 보는 것이다.
앞에서 이것이 잘못된 판단이라고 지적했다.
그런데 일단 이런 입장도 검토대상이 되는 하나의 입장이다.
그러나 이들 내용은 사실은 자신의 마음안 내용이다.
그리고 정신 안 내용이다.
따라서 위와 같은 입장을 취하기는 곤란하다.
우선 이런 마음안 내용은
그 자체가 마음(정신)이 행하는 기능을 하는 마음 자체라고 보기 힘들다.
그렇다고 마음을 떠나 있는 내용도 아니다.
그래서 정신적 내용물로 이것을 취급하게 된다.
거울안에 비추인 어떤 모습으로 책상과 같은 것이 있다고 하자.
이 경우 그 책상모습이 곧 거울의 기능을 하는 것은 아니다.
그렇다고 그 모습이 거울면을 떠나 있는 어떤 것도 아니다.
그래서 이들은 이런 관계에 있다고 제시한다.
그런 상태에서 이런 내용을 마음에 얻게 한
마음 밖에 있는 외부 실재가 무엇인가를 찾는다고 하자.
그런 경우 다음 여러 입장을 생각할 수 있다.
○ 2 번째로 다음입장을 생각할 수 있다. [감각현실=마음=실재투영설]
그러한 실재는 마음안에서 얻는 그런 내용과 일치한다.
그래서 알고보면 마음에서 어떤 내용을 얻을 때
그 내용은 곧 실재와 겹쳐진다.
즉, 그처럼 투영되는 것이다.
이는 눈을 떠 보는 내용이 실재이면서
마음 안 내용이기도 하다는 입장이다.
○ -3 번째로 다음입장을 생각할 수 있다. [감각현실=실재일치설]
그러한 실재는 마음안에서 얻는 그런 내용과 일치한다.
그런데 마음에서 얻는 내용은 일단 그런 실재의 지위에 있는 내용이 아니다.
그런데 그러한 실재는 여하튼 마음에서 얻은 그런 내용과
똑같은 형태의 내용이다.
이는 과학자가
눈으로 물체의 모습을 보는 과정을 다음처럼 이해하는 경우와 같다.
외부의 사물 A => 빛의 파장이 반사되는 내용 B =>
망막에 맺히는 상 C => 시신경이 흥분되는 화학적 생리적 변화 D => 대뇌에서 시각정보를 얻게 되는 모습 E
눈으로 모습을 보게 되는 관계를
이처럼 A => B => C => D =>E 의 관계로 기술하여 보고한다고 하자.
그런데 어떤 이는
A, B, C, D, E 각 내용을 위 과정을 통해서 얻는다.
예를 들어 이들 각 내용은 어떤 주체가 최종적으로 보게 되는 내용[F]들이다.
그래서 이 경우 위 내용은 다음처럼 기술하는 것이다.
즉 F => F => F => F => F
이런 형태로 이해하는 것이 된다.
이외 또 다른 입장도 생각할 수 있다.
○ -4 번째로 다음입장을 생각할 수 있다. [감각현실=실재유사설]
어떤 것의 실재는 마음안에서 얻는 그런 내용과 일치하지 않는다.
같은 내용이 아니다.
그러나 전혀 동떨어진 것이라고 할 수는 없다.
실재는 현실에서 어떤 주체가 마음으로 얻는 내용과
적어도 유사하다.
또는 비례하는 어떤 것이다.
이처럼 이해하는 입장을 생각할 수 있다.
한 주체가 구체적으로 매번 다른 내용을 보게 된다.
그런데 꽃은 꽃이고 바위는 바위라고 구분하게 된다.
그리고 그 상황에서 매 주체가 서로 엇비슷하게 꽃과 바위를 분별한다.
그렇게 되는데에는 그럴만한 사정이 외부 실재에 그렇게 있기에 그런 것이다.
이처럼 추리하는 입장이다.
이런 입장을 취한다고 하자.
그러면 결국 어떤 주체가 어떤 모습을 얻는 관계는
다음 그림에서 2 가 어떤 내용을 얻는 관계처럼 사정을 이해하는 것이 된다.
[img2]
[그림] 08pfl--image/진리의오류55.jp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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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 그림은 2 가 4 ^ 와 같은 내용을 얻는 것을 표현했다.
이 그림은 그 경우 2 외부에 4 ^와 엇비슷하거나 비례하는 4 가 있는 것처럼 그림을 그렸다.
그런데 앞에서 이런 이해가 잘못된 것이라고 지적하였다.
이는 알고보면 위 그림에서 4 는
1 의 입장에서는 1 의 마음에 얻어진 내용이다.
그래서 2 의 감관이 대상으로 삼기 곤란하다.
위 그림에서 1 이 어떤 모습을 볼 때
2 의 마음 안의 4 ^ 와 같은 꽃을 대상으로 삼아서
4 의 모습을 보는 것이 아니다.
이와 사정이 같다.
2가 4 를 대상으로 4 ^ 라는 내용을 얻는 것이라고 생각하한다고 하자.
이는 앞의 경우처럼 잘못된 추리다.
앞에서 이미 이 문제를 보았다.
2 의 입장에서는 1 이 꽃의 모습을 보는 것은 다음처럼 이해할 수 있다.
우선 1 ^ 과 4 ^를 대상으로 삼아서 어떤 내용을 1 ^ 안에서 얻는다.
그래서 1 ^가 얻는 마음안 내용은 2 가 보는 4 ^ 의 내용과 엇비슷하다.
이처럼 추리한다고 하자.
그러면 이는 엉터리 추리다.
그런데 만일 이것을 받아들이고 비례관계를 생각한다고 하자.
그러면 대단히 엉뚱하게 된다.
현실에서 자신이 하늘이나 어떤 건물을 바라본다고 하자.
그런데 이 전체가 자신의 마음에 맺힌 내용이다.
이 경우 그에 해당한 외부 실재는
자신이 본 내용에 비례해 마음 밖에 그처럼 위치하고 있다고 추리해야 한다.
위 그림처럼
2 의 눈과 그의 마음에서 얻는 각 내용의 크기나 형태를 비율을 잡아 이해한다고 하자.
그런 가운데 자신이 하늘을 바라볼 때
그만한 크기에 준하는 자신의 눈동자가
그 하늘을 비춰주는 막 바깥에 그처럼 있다고 이해한다고 하자.
또 그에 비례한 외부사물들도
그런 정신의 막 밖에 그렇게 위치해야 한다고 추리해보자.
그럴 수 있을 지도 모른다.
그런데 무엇을 그런 크기를 측정하는 자로 삼아서
이 비례관계를 파악할 것인가가 의문으로 남는다.
그런데 처음 이런 비례관계나 유사성을 측정하고 판단할 하나의 근거도 직접 얻지 못한다.
즉, 외부 실재의 영역에서는 어떤 내용도 직접 얻지 못한다.
이것이 이 주장의 가장 큰 문제점이다.
그래서 이는 단순한 추리에 그치게 된다.
이제 이와 또 다른 입장을 다음과 같이 생각할 수 있다.
○ - 5 번째로 다음입장을 생각할 수 있다. [감각현실=마음, 실재부존설]
자신의 마음에서 얻는 내용은 자신의 마음안의 내용이다.
그래서 이에 상응한 외부 실재나 대상은 전혀 없는 것이다.
그리고 각 주체의 마음안 내용은
그 마음이 독자적으로 매순간 생성하고 나타내는 것 뿐이다.
마치 마음에 저장된 씨앗이 열매로 나타나는 것과 같다.
'유식무경'이란 표현은 불교내 유식학파를 상징하는 표현이기도 하다.
그런데 '유식무경'이라는 표현을 위와 같은 내용을 의미하는 것으로 이해하기도 한다.
여하튼 이론상 위와 같은 주장도 생각해 볼 수 있다.
그런데 다음 의문이 제기된다.
현실에서 각 주체는 일정한 조건과 상황에서
유사한 조건으로 유사한 내용을 반복해 대하게 된다.
그래서 그렇게 되는 사정을 설명하기 곤란하다.
이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설명할 수도 있다.
각 주체는 비슷한 업을 공통적으로 공유하다.
그에 따라서 그런 결과를 같이 얻는다고 설명할 수도 있다.
그래서 박쥐는 박쥐들끼리 같은 내용을 얻는다.
소는 소끼리 같은 내용을 대한다.
메뚜기는 메뚜기대로 같은 내용을 얻는다.
이는 그런 사정 때문이다.
그래서 사람은 사람들끼리 같은 내용을 얻는 것 뿐이다.
다만 사람은 자신이 얻는 내용을
마치 객관적인 실재의 내용인 것처럼 주장하는 것이다.
이처럼 설명할 수 있다.
또 다음의 입장도 생각할 수 있다.
○ - 6 번째로 다음입장을 생각할 수 있다. [감각현실=마음, 마음내 외부대상부존설=>유식무경]
자신의 마음에서 얻는 내용은 자신의 마음안의 내용이다.
따라서 이 안에는 이런 내용을 얻게 한 외부 실재나 대상은 전혀 없다.
그러나 그렇다고 실재가 전혀 아무것도 없는 것은 아니다.
또 외부 대상이 전혀 없다는 의미도 아니다.
단지 한 주체가 얻는 마음안 내용은
그런 내용을 얻게 한 외부 대상이 아니다.
그것은 오로지 마음안 내용일 뿐이다.
그리고 그 주체가 얻는 내용에는 그런 외부대상은 없다.
그래서 유식무경이란 이런 내용을 나타내는 표현이다.
그리고 이는 그런 마음으로 얻는 내용에 외부대상이 없다는 것일 뿐이다.
한편 이를 대상으로 하여 관념분별을 하는 경우는
이들 내용이 (내부) 대상이 된다.
즉, 유식무경은 외부대상이 없음을 나타내는 것이다.
이런 입장도 제시할 수 있다.
4 와는 비슷해보인다.
그러나 구체적 의미가 상당히 다르다.
어떤 주체가 얻는 내용은 그 일체가 마음안에 머무는 정신적 내용물이다.
따라서 그것은 그런 내용을 얻는 외부대상이 아니다.
그 안에는 그런 외부대상이 없다.
이런 점만을 제시한 것 뿐이다.
그리고 그 마음 밖에 실재나 외부 대상 자체가
전혀 없는 것이라고 하지 않는다.
이런 점에서 차이가 있다.
또 다음의 입장도 생각할 수 있다.
○ - 7 번째로 다음입장을 생각할 수 있다. [감각현실=마음, 실재=불가득공]
어떤 주체가 현실에서 얻는 내용은
일단 실재의 지위에 있는 내용은 아니다.
그리고 실재는 어떤 주체가 끝내 내용을 얻을 수 없다.
각 주체는 마음의 관념분별영역에서 행하는 이분법적인 분별을 행한다.
예를 들어 있다 없다 이다 아니다 ~와 같다 ~과 다르다. 좋다 나쁘다
등등이다.
그런데 그런 2분법으로서는 그것을 표현하고 나타낼 길이 없다.
그래서 언설을 떠난다.
그러나 이는 아무것도 전혀 없는 것은 아니다.
그렇다고 현실에서 행하는 어떤 분별로 a 라거나 무엇이 있다라고도
단정할 수 없다.
이렇게 제시하는 입장도 생각할 수 있다.
'색은 곧 공하다'라고 경전에서 간단히 제시한다.
그런데 이런 내용이 모두 이런 문제와 관련이 된다.
색은 각 주체가 현실에서 얻는 감각정보의 하나다.
이런 색의 실재가 무엇인가 하는 문제가 이와 깊게 관련된다.
이것이 '공하다'는 표현과 관련된다.
그 실재가 무엇인가에 대해서
위와 같은 여러 입장을 나열하였다.
이 경우 그 실재에 대한 답을 구체적으로 써넣기 어려운 사정이 있다.
이런 사정을 함께 제시한다.
현실에서 눈으로 색을 보게 된다.
귀로는 소리를 듣게 된다.
또 향기나 맛이나 촉감을 얻게 된다.
다시 그에 대해 그것이라고 관념분별을 행한다.
이런 경우 현실에서 얻는 이들 내용간에도 이와 사정이 유사하다.
즉, 어떤 한 내용을 다른 영역으로 밀어 넣어 보려고 하자.
즉 귀로 듣는 소리를 눈으로 보는 영역에 밀어 넣어 보자.
이 경우 그 내용을 있다 없다고 할 수 없게 된다.
얻지 못하기 때문이다.
이런 사정을 현실 안에서 우선 확인하게 된다.
그리고
자신이 눈으로 본 꽃 모습이
귀로 듣는 어떤 소리와 유사하고 비례관계가 있다고도 할 수 없다.
또 향기나 맛이나 촉감과는 어떤 점에서 유사하고
비례관계가 있다고 할 수도 없다.
관념내용은 눈을 감고도 단지 마음만으로 떠올릴 수 있다.
이들 내용은 이런 관념적 내용과도 마찬가지 문제가 있다.
생각으로 막연히 그려내는 형체나 내용들은
사실은 감각을 통해 얻는 내용이 아니다.
그리고 이들은 그 내용이 서로 공통하거나 일치하지 않는다.
심지어 이들은 각 측면에서 있다 없다라는 기본 판단마저도
서로 상응관계를 확립할 수 없다.
예를 들어 이런 경우가 있다.
어떤 상황에 소리는 들려서 있다고 해야 한다.
그러나 눈으로는 아무 것도 보이지 않는다.
그래서 없다고 해야 한다.
또 반대로 눈으로는 색이 보여서 있다고 해야 한다.
그러나 소리 영역에서는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는다.
그래서 없다고 해야 한다.
이런 경우처럼 이들 내용은 다 사정이 비슷하다.
그래서 최소한의 유무 판단에서조차도
이들은 서로 상응관계를 세우기가 곤란하다.
현실에서 한 주체가 얻는 내용에서도
이들 각 내용은 서로간에 그런 문제점이 파악된다.
그런데 여기에서 문제삼는 실재는
처음부터 어떤 주체와 관계를 떠난 내용을 문제삼는다.
그런데 한 주체는 일정한 조건에서 화합을 통해
내용을 얻는다.
그런데 지금 문제는 그런 조건과 관계를 떠난 내용을 문제삼는다.
그래서 각 주체는 문제삼는 그런 실재의 내용을 끝내 얻어낼 수 없다. [ 불가득 ]
그리고 그런 사정을 공하다라고 표현한다.
이와 같이 제시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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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실체의 존부 문제
어떤 존재의 정체를 살핀다고 하자.
이 경우 문제삼는 또 다른 문제가 있다.
이 문제도 실재의 공함과 함께 관련된다.
꿈을 꿀 때 얻는 꿈 내용은 그 자체로 생생하다.
그러나 그 꿈 내용은
그런 조건에서만 얻는 일시적 내용이다.
또 꿈 내용은 거기에서 기대하는 다른 성품을 얻지도 못한다.
따라서 꿈에서 보게 되는 황금이나 바다 등은 엉터리고 가짜라고 보게 된다.
어떤 것이 어떤 조건에서만 일시적으로 얻는다.
그리고 그로부터 당연히 기대되는 어떤 성품을 얻지 못한다고 하자.
그러면 그런 사정으로 이를 실답지 못하고 가짜라고 보게 된다.
그런데 현실에서 얻는 감각현실이나 관념내용도 그런 성격을 갖는다.
앞에서 이 사정을 제시하였다.
현실에서 눈을 뜨면 ( 그런 조건에서는 )
어떤 꽃의 모습을 보게 된다.
그리고 다시 그것을 꽃이라고 여기게 된다.
그런데 이들 내용도 역시 그런 조건에서만 얻게 된다.
그래서 돗수가 다른 안경을 쓰고 대한다거나
아침에 본다거나 낮에 본다고 하자.
이처럼 달리 대하면 각 상황에서 매번 달라진다.
그리고 이 가운데 그 어느 것도 이들 내용의 대표라고 할 수 없다.
그리고 표준이 될 수 없다.
꿈을 실답지 않고 가짜라고 본다.
꿈은 그런 특성이 있다.
현실에서 한 주체가 감각현실이나 관념내용을 얻는다.
그런데 이들 내용 전반도 그와 성격이 같다.
현실에서 얻는 내용이 가짜라고 하자.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실에서
산은 산이고 물은 물이고 꽃은 꽃이라고
일정하게 구분해 파악하게 된다.
그래서 일정하고 고정된 진짜의 성품이
뼈대를 형성해 본체로 존재하기에 그런 것이라고 추리하게 된다.
즉, 이들은 매 순간 그처럼 일정하지 않다.
그리고 변화한다.
그래도 그래도 이들 각각을 그처럼 분별한다.
이는 다른 것과 그것을 구분하게 하는 실체가 있어서 그렇다고
추리를 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그런 가짜의 내용을 얻게 하는 진짜에 해당하는
영원하고 불변하는 고정된 진짜가 있는 것이 아닌가.
그리고 그런 것이 있다면 그것은 무엇인가를 문제삼게 된다.
이는 실재가 무엇인가 하는 문제와는 별개 문제다.
그리고 그런 내용은 없다는 것이 불교에서는 확립된 입장이다. [무아 무자성]
그리고 이를 무아, 무자성, 인무아, 법무아, 승의 무자성, 무소유
등의 표현으로 나타낸다. [무아, 무자성, 무소유]
○ 실재의 공함과 실체의 없음[무아, 무자성]의 관계
어떤 주체와의 관계를 떠나 실재하는 것이 무엇인가를 찾는다.
이 경우 앞에서 그런 진짜가 있다고 하자.
그렇다면 그런 진짜의 내용을 제시하면 된다.
그런데 사정이 그렇지 않다.
결국 그런 진짜라고 할 내용이 없다
따라서 그런 것을 제시할 수 없다.
실재가 공하다는 것은 이런 사정도 함께 나타낸다.
실재는 아무 것도 전혀 없는 것은 아니다.
그런 가운데 각 주체는 각 내용을 일정한 조건에서 화합관계로 얻는다.
그런 사정상 각 주체는 그 내용을 끝내 얻어낼 수 없다. [불가득]
그래서 그런 실재는 2 분법상의 분별을 떠난다.
그리고 언설을 떠난다.
그리고 그런 상태를 나타내기 위한 방편상
'공'이란 표현으로 그것을 나타내게 된다.
즉, 공이란 표현은 그 상태를 가리켜 표현하기 위한 언어시설(방편)일 뿐이다.
그래서 공이라는 표현은
있다 없다 그 어느 쪽도 나타내지 않는다.
그리고 위와 같은 상태를 단지 언어로 표현하기 위한 방편에 불과하다.
즉 앞과 같은 상태를 가리키기 위한 표현에 그친다.
이는 공이라는 표현에 해당한 어떤 성품이 있다고 제시하는 것이 아니다.
공이라고 표현을 그처럼 잘 이해해야 한다.
이를 잘못 이해하면 혼동이 심해진다.
◧◧◧ para-end-return ◧◧◧
● 색불이공과 현실과 실재의 관계
현실에서 각 주체가 감관을 통해 감각한다. [감각현실]
그리고 관념분별을 행한다.
그런 가운데 어떤 주제를 문제삼는다.
그리고 이 일체는 그런 조건에서 A+ B => c 의 관계처럼
마음에서 얻어내는 내용이다.
현실에서 한 주체가 얻는 일체 내용의 사정이 이와 같다.
그래서 각 주체가 얻는 내용 일체는 그런 관계에서 얻는다.
그런 관계를 떠나서 내용을 얻을 수 없다.
여기서 c 는 그런 관계로 그 내용을 얻음을 나타낸다.
그런데 실재는 처음부터 주관의 그런 관계를 떠나 실재하는 내용을 문제삼은 것이다.
따라서 현실에서 얻는 내용은 지금 문제삼는 실재의 지위에 있는 내용은 일단 아니다.
A+ B => c 의 관계식이 이 사정을 나타낸다.
이를 통해서 이 사정을 쉽게 이해할 수 있다.
현실 내용은 어느 것이나 위와 같은 연기(인과) 관계로 얻는다.
그런데 이는 그렇게 얻는 내용 일체는 바로 그런 사정으로
'실재의 지위에 있는 내용이 아님'도 함께 제시한다. [연기즉 공]
처음 각 감관을 통해서 각 주체가 감각정보를 얻는다.
그리고 한 주체가 이를 외부 현실로 잘못 여긴다.
한편 이를 바탕으로 분별을 행한다.
그런 가운데 무언가를 문제삼는다고 하자.
그런데 그 일체는 일단 이런 사정으로
여기서 문제삼는 실재의 지위에 있는 내용이 아니다.
그리고 실재는 또 그런 내용이 아니다.
이런 내용을 연기관계가 기본적으로 제시한다.
현실에서 한 주체가 어떤 내용을 얻는다.
그런데 그 주체와 관계없이 실재하는 내용을 실재라고 한다.
그래서 현실 내용과 실재의 관계는 앞과 같다.
○ 색불이공이라고 제시하는 사정
한편 색불이공 공불이색
색즉시공 공즉시색과 같은 내용이 이어져 제시된다.
이는 다음 사정 때문이다.
한 주체가 얻는 색은
그것이 실재의 지위에 있는 내용이 아니다.
그리고 실재도 그런 것이 아니다.
그러나,
그렇게 한 주체가 얻는 감각정보로서 색은
또 그런 본 바탕이 되는 실재를 떠나서 얻는 것이 아니다.
그리고 본 바탕을 떠나 존재하는 것도 아니다.
그래서 바로 그런 사정으로
색은 곧 실재의 공함과 다르다고 할 수 없다.
또 실재의 공함도 한 주체가 얻는 현실내용과 다르다고 볼 수 없다.
즉, 색과 다르다고 볼 수 없다.
색불이공 색즉시공을 제시하는 기본 사정은
반야심경에서는 생략하고 결론만 제시한다.
그러나 『대반야바라밀다경』에서는
위와 같은 사정으로 이 내용을 제시함을 밝히고있다.
즉 색불이공 공불이색
색즉시공 공즉시색
수상행식 역부여시..
등과 같은 내용이 제시된다.
색은 감각현실로서 한 주체가 얻는 감각정보로서 마음안 내용이다.
공은 그런 내용을 얻게 하는 본 바탕인 실재를 문제삼을 때의 내용이다.
그런데 색은 색이고 공은 공이다.
그래서 색은 공한 실재의 지위에 있는 내용이 아니다.
따라서 색은 공이 아니다.
그리고 또 색은 공함 역시 색이 아니다.
----
그러나 색은 그 색의 실재의 공함과
서로 떨어져 따로 있는 것이 아니다.
한편 한 주체가 분별하는 내용도 사정이 같다.
이 역시 공한 실재와의 관계에서
모두 공한 실재와 떨어져 있는 것이 아니다.
현실에서 각 주체는 얻는 내용 색수상행식은 모두 사정이 이와 같다.
----
그런 사정으로 다음처럼 제시하게 된다.
이들[A]는 모두 공한 실재와 다르지 아니하다.
그리고 공한 실재는 또 그런 A와 다르지 아니하다.
그래서 A는 곧 공한 실재이고
공한 실재는 곧 그런 A다.
이처럼 제시하게 된다.
이런 내용을 본 경전에서는
짧게 핵심만 추려 제시한다.
그래서
색은 공과 다르지 않고
공은 색과 다르지 않고
색은 곧 공이며
공은 곧 색이다라고 표현한다.
그러나 색즉시공과 같은 표현을 또 잘못 이해하면
혼동을 일으킬 수도 있다.
그래서 곧바로 현실에서 얻는 감각현실 등을
그것이 실재의 공함이라고 잘못 이해할 수 있다.
그리고 공함이라는 표현이 자신이 현실에서 얻는 감각현실 자체를
가리킨다고 잘못 이해하기 쉽다.
그래서 색즉시공 공즉시색의 표현을 대해서
곧바로 색 자체가 공을 나타낸다고 잘못 이해하기 쉽다.
또는 감각현실이 곧 실재라고 잘못 이해하기 쉽다.
『대반야바라밀경』에서는 좀 더 자세하게
기본적으로 그런 사정이 아님을 먼저 제시한다.
그리고 그 다음 이들 내용과 실재의 관계를 앞처럼 제시한다.
한편 이들 표현이 그런 내용을 나타내는 것이 아님은
아래 부분에서 쉽게 파악할 수 있다
즉, 반야심경을 비롯해서 본 경전에서도
다시 공한 실재의 사정에 대해 다음 내용을 이어 제시한다.
....
공한 가운데에는
색도 없고,
수․상․행․식도 없으며,
눈․귀․코․혀․몸․뜻도 없고,
...
이와 같은 내용을 덧붙여 제시한다.
처음 공한실재가 곧 색이라고 제시한 공즉시색의 표현을
잘못 이해한다고 하자.
그렇다면 공한 가운데 색도 없고
수․상․행․식도 없다고 제시할 수는 없다.
그러나 경전에서는 공 가운데는 색, 수, 상, 행,식이 없다고 제시한다.
따라서 이를 혼동하지 않아야 한다.
◧◧◧ para-end-return ◧◧◧
경전에서 ~이 '아니다' 또는 ~이 '없다' 등의 표현이 사용될 때
이들 표현이 가리키는 의미를 잘 파악해야 한다.
본래 실재가 무엇인가를 파악하고자 할 때
실재가 공하다라고 표현한다.
이 경우 공이라는 표현의 의미는
2 분법상의 분별을 모두 떠난다.
그래서 A이다라거나 A가 아니다라는 분별도 떠난다.
그리고 A 가 있다 A가 없다라는 분별도 떠난다.
그리고 A 와 같다.A와 다드다라는 분별도 떠난다.이와 같은 내용을 덧붙여 제시한다.
처음 공한실재가 곧 색이라고 제시한 공즉시색의 표현을
잘못 이해한다고 하자.
그렇다면 공한 가운데 색도 없고
수․상․행․식도 없다고 제시할 수는 없다.
그러나 경전에서는 공 가운데는 색, 수, 상, 행,식이 없다고 제시한다.
따라서 이를 혼동하지 않아야 한다.
◧◧◧ para-end-return ◧◧◧
● 공과 유무 2 분법분별
경전에서 ~이 '아니다' 또는 ~이 '없다' 등의 표현이 사용될 때
이들 표현이 가리키는 의미를 잘 파악해야 한다.
본래 실재가 무엇인가를 파악하고자 할 때
실재가 공하다라고 표현한다.
이 경우 공이라는 표현의 의미는
2 분법상의 분별을 모두 떠난다.
그래서 A이다라거나 A가 아니다라는 분별도 떠난다.
그리고 A 가 있다 A가 없다라는 분별도 떠난다.
기타 일체의 이분법적인 분별을
모두 떠난다.
공은 그런 상태를 나타낸다.
그래서 있고 없음을 문제삼는
양 극단의 두 변을 모두 떠나야 한다.
그런 언설 분별을 떠난 상태를
공이라는 표현이 나타내는 것이다.
그것은 사정이 그렇기 때문이다.
실재는 무엇이 전혀 아무것도 없는 것은 아니다.
다만 한 주체는 마음과 화합하여 내용을 얻는다.
따라서 이런 관계를 떠나 그대로 있다고 할 실재를 끝내 얻을 수 없다. [불가득]
그러나 이분법적으로 분별할 어떤 내용이
적극적으로 있다거나 ~ 이라거나 ~과 같다거나 좋다거나
깨끗하다거나 등등으로 분별할 수 없다. [불이법]
그래서 실재는 그러한 어떤 무엇이다.
그런데 실재의 사정을
언어로 설명하고자 한다고 하자.
그래서 일반적으로 의미를 갖지 않는 '공'이란 표현을 빌려 이를 나타내게 된다.
결국 공이란 표현은 이런 상태를 나타낸다.
○ 유무의 표현을 빌려 공을 나타내는 사정
실재에 대해 공하다고 표현한다.
그런데 이런 설명을 언어를 통해 듣는 상대는
일단 이런 표현의 의미를 바로 이해하지 못한다.
그리고 기본적으로 있음과 없음
또는 ~이다 ~ 아니다 등과 같은 분별을 기본적으로 행한 상태에서 이해한다.
그런 상태에서 이 둘 가운데 하나의 의미로 잘못 혼동해 이해하게 된다.
그런데 경전에서 이런 표현을 사용하는 사정이 있다.
이는 마치 어떤 외국어를 설명할 때와 사정이 같다.
낯선 외국어를 외국어 자체로 설명하면 이해하기 힘들다.
그런데 다른 나라의 말로 설명하기도 곤란하다.
예를 들어 실재가 공하다라는 표현을 하고
공이란 내용을 이해를 돕기 위해 설명한다고 하자.
이 경우 '공'은 '공'이라고 설명할 수도 없다.
공은 유나 무 또는 시나 비 어느 한 측면만에 치우친 상태를
나타내는 표현도 아니다.
그래도 이해를 돕기 위해서는
기존에 사용하던 유무의 표현 가운데
비교적 가까운 표현을 빌려 나타내게 된다.
그런 사정을 이해해야 한다.
○ 실답게 있다는 망집의 제거 [무의 표현]
예를 들어 어떤 이가 현실에서 무엇인가를 실답게 여긴다고 하자.
또는 자신이 현실에서 문제삼는 내용이 곧 그런 실재라고 잘못 이해한다고 하자.
그런데 그처럼 집착을 갖고 임하는것이 전도망상이다.
그리고 그런 망상분별과 집착에 바탕해 업을 행하게 된다.
그리고 생사고통을 받게 된다.
그런 경우 생사고통 현상을 해결해야 한다.
그런 경우 먼저 실재에 자신이 생각하는 것이 그처럼 그대로 있다는 망집을 시정해야 한다.
그래서 실재는 ~ 이다라는 식으로 생각하는 망집을 제거해야 한다.
그런 가운데 집착을 갖고 임하는 자세를 시정해야 한다.
그런 취지에서 무(없다)나 비(아님)나 불(아니다)이라는 부정적인 표현을 통해서 설명하게 된다.
이는 실재의 공함을 설명히기 위한 방편이다.
그래서 어느 정도 실답게 있다는 망집을 제거할 수 있다.
○ 아주 없다는 망집의 제거 [유의 표현]
실재의 공함을 무라고 표현하면 이로 인해 다시 다른 망집을 갖기 쉽다.
즉 실재는 아무 것도 전혀 없다는 망집을 다시 치우쳐 갖게 되기 쉽다.
그래서 이런 경우에는 다시
상,락,아,정 등과 같은 표현을 빌려
실재는 아무 것도 전혀 없는 것이 아님을 다시 밝히게 된다.
그러나 공한 실재를 정확히 표현한다면,
사실은 그런 무(없다)나 불(아니다)이나
유나 상단의 표현은 모두 곤란하다.
결국 유무 시비 분별을 모두 떠나야 한다.
그래서 언어분별을 모두 떠나야 한다.
즉 실재는 언어분별을 행할 수 없는 것이다. [언어도단]
그런 무엇이라고 이해해야 한다.
○ 유무의 극단의 문제
현실과 관련해 어떤 것의 정체를 판단할 때 유무의 극단에 치우치면 안 된다.
유에 치우치면 어떤 것이 참된 진짜 내용으로 있다고 잘못 여긴다.
또 자신이 얻는 내용이 다른 영역에도 그처럼 있는 것이라고 잘못 여긴다.
그래서 이를 실답다고 여기고 집착을 갖게 된다.
그러나 사정이 그렇지 않다. [무아, 무자성, 무소유, 불가득, 공]
한편 실체가 없고, 실재가 공하다고 하여
본 바탕인 실재에 아무 것도 전혀 없는 것은 아니다.
단지 어떤 주체가 그 내용을 직접 얻어낼 수 없는 것 뿐이다.
그리고 현실측면에서는 마음에서 어떤 내용을 화합해 얻어낸다.
어떤 내용을 전혀 얻지 못하는 것도 아니다.
즉 그 성격이 꿈처럼 실답지 않지만,
일정한 조건에서 화합해 얻게 되는 내용은 그처럼 얻는다.
그런 측면에서는 있는 것이다.
그래서 유무의 극단을 떠나야 한다.
한편, 이런 실재의 상태를 이해시키기 위해 동원한
그 모든 표현이나 설명은 세속에서 취하는 방편이다.
즉, 이런 상태를 이해시키기 위해 방편이다.
따라서 그 일체는 종국적으로 희론의 성격을 갖는다.
일반적으로 부처님은 수많은 설법을 행했다고 일반적으로 여긴다.
그러나 그것은 모두 이런 취지에서 이를 이해시키기 위한 내용을 언어로 시설해 설명한 것이다.
즉, 이런 방편을 통해 이런 망집이 잘못임을 깨닫게 하기 위한 것이다.
그리고 생사고통을 벗어나게 하기 위한 것이다.
이는 중생을 제도시키기 위한 자비의 마음에서 방편으로 취한 것이다.
그래서 희론의 성격을 갖는다.
그런 사정으로 사실은 한마디도 설한 바가 없다고 밝히게 된다.
[ 금강경, 대반야바라밀다경 등 참조]
그래서 이런 종합적인 사정을 잘 파악한 가운데
경전 내용을 파악해야 한다.
◧◧◧ para-end-return ◧◧◧
◆vvvf8412
◈Lab value 불기2561/08/27 |
○ [▼] ▼mus0fl--M - Est-Ce Que C'est Ca.lrc 옥상에서 쉬는 가운데 노래를 듣게 된다. 가사를 보면 Est ce que c'est ça 로 되어 있다. 그래서 글자를 읽고 노래를 듣는다. 그런데 그 부분에서 그런 말이 들리는가 귀를 기울여도 들리지 않는다. 무언가를 쳐부수어야 한다는 엉뚱한 한국어가 들리기도 한다. 동영상 내용을 보면 시지프스가 연상된다. 세상을 살아가는 이들이 별 의미나 가치가 없는 일에 묶여 있다. 그런데 하나같이 성취하기 힘들다. 그런데도 이에 매달려 평생을 소진한다. 그러다가 사라져간다. 이런 안타까운 모습이 연상된다. 그래서 그런 주제로 시감상을 해본다. 그런 맥락에서 듣다보면 알아듣지 못하던 부분도 달리 들린다. 물론 원래 불어가사의 의미는 아니다. 그러나 가사를 확인해 보면 크게 동떨어진 의미도 아니다.
● 소일거리와 동가홍상 원칙
○ 소일거리- 괴롭고 무익한 시간으로부터 탈피 평소 취미 삼아 행하는 일이 있다. 이는 KILLING TIME 이란 목적을 갖는다. 시간을 죽인다는 의미다. 한자어로는 소일(消日)이라고 표현한다. 시간이 남아 돈다. 그런 가운데 시간과 전투행위를 한다. 시간을 없앨 어떤 수단과 방편을 갖지 못한다고 하자 . 그러면 대단한 괴로움을 얻게 된다. 하루종일 무료하게 있다고 하자. 또는 여기저기 목적없이 다닌다. 그래서 아무런 의미를 얻지 못한다. 그래서 멍한 상태로 대하게 된다. 그러면 이런 상태가 된다. 시간을 보내며 괴로움을 받게 된다. 그런 가운데 자신이 희생당한다. 그래서 일단 시간과의 전투에서 이겨야 한다. 시간을 KILL해 없애며 즐겁게 보낼 적절한 취미나 소일거리를 가져야 한다. 이런 측면은 대단히 중요하다. 예를 들어 블록으로 무언가를 만드는 일에라도 취미를 가져야 한다. 그래서 무언가 자꾸 만들거나 행하며 재미를 느끼며 즐겁게 시간을 보내야 한다. 나이가 많이 들었어도 마찬가지다. 그러면 전혀 소일거리가 없는 경우보다 훨씬 낫다. 시간을 괴롭게 보내는 경우와 비교해보면 이를 쉽게 알 수 있다. ○ 가치의 첨가 줄겁게 보내려면 활동에 재미가 있어야 한다. 그런데 즐겁게 시간을 보내면서도 이왕이면 건강에 도움되는 일이 낫다. 그리고 다른 이웃들과 친밀하게 지낼 수 있는 효과를 얻는 일이 낫다. 더 나아가 의미를 느끼는 일이 낫다. 그리고 더 나아가 어떤 수익도 조금 거둘 수 있다면 더 낫다. 또 이런 각 내용을 더 많이 각기 거둘 수 있다면 더욱 낫다. 시간을 보내고 무언가 활동하는 것은 같다. 그러나 이를 통해서 얻는 것을 되도록 많이 얻어내는 방안을 연구해야 한다. 동가홍상 전략에 의해서 좋은 것을 조금씩 더 붙여 나가는 것이 낫다. 이를 위해 가치평가표를 놓고 매 종목을 잘 검토해야 한다. 생존과 건강을 도움을 주는 일인가. - 위험하고 생존과 건강을 해치는 활동인가. 즐거움과 재미를 주는가. 괴로움과 고통을 주는가. 이웃과 친밀해지는 계기를 마련해주는가. 이웃과 시비와 다툼 갈등을 일으키는 일인가. 이익이 있는가. 오히려 손해가 많은 일인가. 의미가 있고 필요한 일인가. -사회적으로 부정적 의미를 갖는 것인가. 즉, 그런 활동은 아름답고 선하고 가치있는 것을 얻게 하는가. 아니면 반대로 추하고 악하고 쓸모없는 활동인가도 검토해야 한다. 이것이 현실에서 기본적인 평가지표다. 그런데 이것을 충족하더라도 그것만으로는 부족하다. 다시 같은 값이면 그런 활동으로 더 가치있는 무언가를 찾아 얻도록 해야 한다. 이런 가치 항목을 자꾸 추구하다보면 궁극적으로 다음 상태까지 나아가게 된다. 어떤 활동이 이왕이면, 자신도 좋고 남도 좋고 온 생명이 차별없고 제한없이 다 좋아야 한다. 지금도 좋고 나중도 좋고 오래오래 무한하게 좋아야 한다. 이 측면도 좋고 저 측면도 좋고 두루두루 모두 좋아야 한다. 무량행문을 닦아 나가는 수행자는 닦고 익혀야 할 종목이 무량하다. 따라서 이런 가치 점검표를 놓고 하나하나 생각해봐야 한다. 그리고 부정적인 항목에 체크를 해본다. 그래서 스스로 그런 사정을 잘 파악해야 한다. 각 항목이 모두 부정적인 경우는 가장 상태가 안 좋다. 그런데 그런 경우도 많다. 현실에서 소일거리가 없는 경우도 있다. 건강한 활동도 하지 않는다. 생활의 재미도 없다. 심지어 생계해결을 위한 수익도 얻지 못한다. 더 나아가 이웃으로부터 미움을 받는다. 그리고 경제적 손실까지 받는다. 그러나 그렇지 않아도 일부분만 긍정적인 경우는 문제다. 그래서 평소 활동이 어떤 면에서 부족하다고 하자. 그런 경우 어차피 하는 활동이 그런 내용까지 갖도록 연구할 필요가 있다. 그래서 부족한 부분을 보충해야 한다. 그렇지 못하면 평소 습관대로 그냥 임하기 쉽다. 우선 자신이 부족한 것을 무조건 단순히 생각만으로 보충해준다고 하자. 그러면 어떤 것을 보충할 것인가를 생각해본다. 세계적으로 몇천년전에 살다간 이들도 떠올리면서 어떤 점에서 각기 차이가 있는가를 놓고 잘 생각해보아야 한다. 그래서 몇 천년을 이어가도 다 기억하게 될 만큼 가치 있는 것은 무언가도 생각해야 한다. 그런 시나리오를 먼저 구상해본다. 그러면 그런 방안을 찾아내는데 도움이 된다. 소일(消日)거리에서 소일이란 글자를 보면 해를 없앤다는 의미다. 그런데 소라는 글자는 태워 없앤다는 소(燒)와 의미가 통한다. 예를 들어 처음에는 소신공양의 일환으로서 담배처럼 자신을 의미없이 태우며 시간을 없애갈 수 있다. 그런데 이에 그치지 않고 세계의 번뇌나 고통을 모두 다 태워버리는 소일(消日)거리를 만들어 내면 좋다. 그래서 모든 인류나 생명에게 가치있고 아름답고 선한 상태를 성취하면 좋다. ○ 소일거리 활동에 비용을 줄이기 인턴연구원이 요즘 어떤 게임을 한다. 그런데 잘 안 되는 듯하다. 그래서 메모리를 8 기가를 증가시켜야겠다고 한다. 그리고 아예 컴퓨터 전체를 바꾼다고도 한다. 그래서 몇백만원이 든다고 한다. 그래서 차라리 PC 방에서 매일 한 두시간씩 게임을 할 것을 권유했다. 그런데 인턴연구원의 반응은 부정적이다. 수영을 좋아하면 자신의 집에 풀장을 만들어 놓고 수영하고 싶어하기도 한다 . 농구나 테니스를 좋아하면 자신의 집 마당에 농구대와 테니스장을 만들고 그런 운동을 하고 싶어한다. 당구나 탁구를 좋아하면 집 안에 당구대나 탁구대를 설치해놓고 하려는 경향을 갖기 쉽다. 인턴연구원도 그런 심정으로 보인다. 그런데 이런 방식은 비용이 많이 든다. 그러면서도 정작 얻는 효능은 적다. 그래서 말리고 싶다. 그러나 안타깝지만, 그렇게 잘 되지 않는다. 그래서 같은 효용이나 결과를 적은 비용을 들여 성취하는 방안도 잘 살펴 헤아릴 필요가 있다.
● 거대한 자락도구와 시태희 박사
자신을 기준으로 좋음을 얻어내는 방안이 많다. 좁고 짧고 얕게 살피면 그 가운데 가치가 적은 것을 붙잡고 많은 비용을 들여 추구해가기 쉽다. 그런데 가치를 판단할 때는 늘 넓고 길고 깊게 인과를 관해서 종합적으로 가치를 판단해야 한다. 예를 들어 좋음을 추구할 때 어떤 거대한 수단을 통해 이를 얻어내려는 경우가 있다. 예를 들어 어떤 국가에서 왕노릇을 한다거나 국회의장이 된다거나, 그 나라에서 가장 돈많은 상태가 있다. 이런 사례가 그런 문제를 보여준다. 이는 다른 상태보다는 대단히 좋은 상태다. 운동이 부족해서 건강이 이상하지도 않다. 친하게 지내는 동료나 이웃도 있다. 그래서 쓸쓸하지도 않다. 수익도 있다. 그래서 생계가 곤란한 것도 아니다. 그래서 이들 문제는 해결된 상태다. 그래서 이런 이들은 자신들이 대단히 좋은 상태라고 여긴다. 따라서 이런 상태가 부족한 상태라면 이에 공감하지 않을 것이다. 객관적 사정은 그렇다. 그런데 그것만으로는 무언가 부족하다. 예를 들어 노르웨이나 스웨덴이나 핀란드라는 나라가 형편없는 나라는 아니다. 그 반대다. 복지나 인권 경제수준 면에서 세계적으로 선두를 달린다. 그런데 예를 들어 한국에서 살아가는 어떤 이를 붙잡고 당신이 노르웨이 국왕이 누구인지 아는가. 스웨덴의 국회의장이 현재 누구인지 아는가. 핀란드에서 가장 부자인 사람이 현재 누구인지 아는가. 이렇게 질문을 던진다고 하자. 한국에서 그런 이가 누구인지 아는 이도 있을 수 있다. 그러나 대부분은 모른다. 그런데 한국인이 그런 이들에 대해 잘 모르는 사정이 있다. 한국에서 살아가는 대부분은 이런 이들이 있거나 없거나간에 자신이 살아가는데 별 관계가 없다고 여긴다. 한국에서는 대부분 이들을 알면 무엇하고 모르면 무엇하는가라고 여기게 된다. 이는 좁게 보면 대단히 가치가 있는 것처럼 여겨진다. 그런데 넓게 보면 크게 가치가 그다지 없다. 그래서 그런 현상이 나타난다. 한편, 시간을 놓고 보자. 앞의 경우 지금 당대는 좁은 지역에서 상당히 명망이 있다. 그런데 몇 천년을 지나는 동안 그런 상태로 유지하기는 쉽지 않다. 반면 과거 몇천년을 놓고 살피는 경우에도 어떤 이의 생애를 중요하게 의식하고 그 이름도 기억하고 살아가는 경우가 있다. 한 순간의 외관만 놓고 비교하면 현재 살아가는 이들의 외관 상태가 더 나아 보이기도 한다. 그런데도 그런 차이를 낳는다. 그래서 그런 차이를 만드는 사정을 잘 헤아려야 한다. 이는 현실의 왕이나 정치가나 부자의 상태가 무언가가 부족함을 의미한다. 한편, 진학문제로 고민하는 이들이 주변에 많다. 그런데 의대가 최고 인기라고 한다. 그래서 다들 의대를 지망한다고 한다. 의사가 되면 돈도 많이 벌고 정년 퇴직 걱정도 없이 안정되게 생활할 수 있다. 그리고 여러 측면에서 장점이 많다. 그렇지만, 정작 의사가 되고 아무리 그 의술이 뛰어나도 정작 관련된 이들 외에는 잘 모른다. 또 알거나 모르거나 별 차이가 없다. 세상에 돈많고 실력있고 병을 잘 고치는 의사가 수없이 많다. 그래도 정작 몇 천년을 두고 그 이름을 남길 만한 의사는 잘 찾아지지 않는다. 그래서 의대에 진학하려는 이에게 시태희 박사라는 유명한 박사 이야기를 한 적이 있다. 시태희 박사는 시바이쩌 태레사수녀 희포크라태스 이런 이들의 이름의 첫글자를 떼내 합친 것이다. 이런 이름은 세계 많은 사람이 오래 기억한다. 시태희 박사를 살펴보면 실력이 뛰어난 것 같지도 않다. 또 병을 잘 고친다고 보기도 힘들다. 돈도 별로 없는 것 같다. 심지어 의사 면허증이 없는 경우도 있다. 그러나 세계적으로 오래오래 기억하는 의사는 정작 시태희 박사다. 그래서 현실에서 일반적으로 의술이 뛰어나고 부유하게 살아가는 의사와 몇 천년을 두고 이름을 남기는 시태희 박사는 어느 부분에서 차이가 발생하는가를 살피게 된다. 그래서 이처럼 차이를 만들어 내는 요소를 찾아내야 한다. 그것은 널리 생명을 존중하고 어렵고 병든 이를 헌신적으로 도우려는 마음의 유무에서 비롯된다. 현실에서 어떤 전문자격증을 따고 생활하는 것 자체가 쉽지 않다. 그리고 의사활동을 하는 것 자체가 쉽지 않다. 더 나아가 한 나라의 국왕이나 국회의장이 되는 것도 쉽지 않다. 한 나라 안에서 가장 부유한 상태가 된다는 것도 쉽지 않다. 이들은 하나같이 성취하기 힘든 어려운 일이다. 그래서 대단하다. 그럼에도 넓고 길고 깊게 관찰하면 있거나 없거나 무방하다는 평가를 받는다. 그래서 이런 상태에 다시 무언가를 더 보충해 주어야 한다. 즉 살아가는 삶의 시나리오에 내용을 좀 더 보충해 넣어야 한다. 그래서 시나리오나 소설을 통해서 무언가를 보충해주어야 한다. 그래서 더 좋게 만들어야 한다. ○ 자신과 함께 다른 이를 변화시키기 어떤 상태의 문제를 지적하고 쉽게 비판할 수 있다. 그런데 그런 지적이 있을 때 그런 자세를 근본적으로 변화시키는 경우는 드물다. 그런 일은 다른 이에게 요구할 일이 아니다. 자신의 삶부터 그런 내용을 적용해서 보충해야 한다. 그리고 자신부터 변화하면 그로 인해 다른 이가 어던 좋은 변화를 보이는 경우가 있다. 장발쟌의 사례와 같다. 비록 소설이지만, 그를 체포하고 감옥에서 수형생활을 해서 장발쟌이 변화된 것이 아니다. 그런데 다시 은촛대를 훔친 장발쟌에게 신부는 선물로 준 은쟁반은 왜 함께 가져가지 않았는가하고 챙겨준다. 이런 신부의 태도가 장뱔쟌을 변화시킨다. 자신부터 참회를 하고, 가치판단을 잘하여 좋은 서원을 갖고 실천해가야 한다. 그리고 다른 이에 대해서 참고 포용하고 배려해주어야 한다. 그리고 미움과 원망을 갖지 않고 용서하고 사랑으로 대해야 한다. 그런 경우 이런 변화를 일으킬 가능성이 많아진다. ○ [▼] mus0fl--Veronique Sanson - Comment Croistu Que La.lrc ☎잡담☎ ♥ 잡담 ♥숙왕화님의 심한 운동과 요가 숙왕화님이 나타났다. 오늘 자신이 총 120 kM 를 달리고 왔다고 한다. 정동진이란 곳이 있다. 그런데 이번에 숙왕화님은 정서진이란 곳까지 갔다 왔다 . 그 총 왕복거리가 그렇다고 한다. 가게에서 만난 어떤 분이 심심하면 자신은 자전거를 타고 부산을 왔다 갔다한다고 한다. 그래서 당시 믿기 힘들었다. 그런데 불가능한 일은 아니다. 다만 단지 체력만 요구되는 일은 아니다. 관련 지리 정보도 잘 알아야 한다. 더 나아가 극기 자세가 필요하다. 본인이 과거에 한번 여의도 국회의사당까지 갔다 온 적이 있다. 당시 어지러움을 심하게 느꼈다. 여하튼 상당히 힘들다. 그런데 숙왕화님은 외관상 별 이상이 없어 보인다. 이 부분만 보면 숙왕화님이 굉장히 건강한 것 처럼 보인다. 그러나 숙왕화님도 종합병원다. 목에도 디스크가 있고 손 발에 각종 깊은 흉터가 있다. 그리고 관절도 이상하다고 한다. 무엇보다도 자신이 그런 일을 하는 이유에 대해 명확히 파악하지 못한다. 정신적 문제가 있어 보인다. 본인이 과거에 건강을 위해서 클럽에 들어가 스포츠 활동을 정기적으로 했다. 건강에 도움이 된다. 즐겁고 재미있게 시간을 보내는 데는 좋다. 그런데 앞과 같은 의문이 들어 그만 두게 되었다. 그렇다고 대안이 잘 발견되지는 않는다. 거리를 걸으면서 골프를 치는 종목을 개발한 적이 있다. 그리고 몇 번 해본 적이 있다. 그러나 조금 난이도가 있다. 그런 관계로 운동을 게을리하게 되었다. 그리고 현재는 작은 산 하나 오르는데에도 힘이 들게 되었다. 그래서 같이 간 이들로부터 자꾸 핀잔을 듣게 된다. 이런 점을 시정해 소일거리를 다시 확보해야 한다. 그렇다고 즐겁지도 않고 건강하지도 않으면 더 문제다. 그래서 이런 분야를 새로 개발해 실천해야 한다. 요즘 각 지역 주민센터나 지방자치단체에서 운영하는 프로그램들이 많다. 거의 실비다. 문제는 그런 활동에 투자할 수 있는 정신적 물질적 시간적 경제적 여유가 부족하다. 요가 종목이나 사교댄스, 또는 가벼운 스포츠 종목에 등록해 활동해서 소일거리를 마련해야 한다. 그래서 건강을 정상적으로 만들어야 한다. 그런 사정으로 숙왕화님으로부터 핀잔을 듣는다. 그러나 숙왕화님처럼 활동하는 것만으로 그치면 그것도 문제다. 그러나 시간을 괴롭게 보내고 건강도 나빠지고 경제적인 손해도 받으면 더 문제다. 일단 시간도 즐겁게 보내며 건강을 회복할 활동부터 하나하나 모색해본다. 요가책과 테이프는 오래 전에 구했다. 그런데 외국어를 책과 테이프만으로 혼자 배우면 힘들다. 요가도 비슷하다. 혼자서만 무언가를 하려다 보면 꾸준히 의지를 갖고 활동을 계속 하기 어렵다. 공부는 도서관에 나가 하는 것이 좋다. 마찬가지로 이런 활동도 일정한 곳에 나가 하는 것이 낫다. 다음 주부터 요가를 배워볼까 한다. 클럽에 등록해서 요가를 배울 수도 있다. 그런데 전에 보이던 요가매트가 보이지 않는다. 알아보니 사용하지 않아서 이미 버렸다고 한다. 여하튼 조만간 요가를 배워볼까 한다. 그런데 앞의 가치 평가 항목을 적용해 각 내용을 좋게 만들고 요가는 요가대로 잘 배워야 한다. 그래서 현실에서 잘 활용해나가야 한다. 요가로 검색된 사진을 처리해본다. 그러면서 앞으로의 요가 수련에 대한 계획을 잡아본다. ○ [pt op tr]Helen_Biddle_Griscom_by_Cecilia_Beaux_1893 ♥잡담♥ |
문서정보 ori https://buddhism0077.blogspot.com/2020/06/2561-08-27-k1427-001.html#8412 sfed--불설성불모반야바라밀다경_K1427_T0257.txt ☞성불모반야 sfd8--불교단상_2561_08.txt ☞◆vvvf8412 불기2561-08-27 θθ |
-- 아래에 조각글 작성시 휴식시점에 붙인 노래가사,사진,풍광,예술작품 자료를 편집상 옮겨 붙입니다.--
■ 퀴즈
다음에 해당하는 단어?
자기와 상대한 이의 성질을 선(善)ㆍ악(惡)ㆍ무기(無記)의 3성으로 나누어 정함.
답 후보
● 삼성분별(三性分別)
삼시교판(三時敎判)
삼십삼천(三十三天)
삼악취(三惡趣)
삼인삼과(三因三果)
삼전법륜(三轉法輪)
삼종관법(三種觀法)
〓인바라밀.
답 후보
● 인욕바라밀(忍辱波羅蜜)
일념삼천(一念三千)
일미(一味)
일생보처(一生補處)
일심삼관(一心三觀)
일즉일체(一卽一切)
일체유위(一切有爲)
ॐ मणि पद्मे हूँ
○ [pt op tr]
[오래된 조각글재정리 안내]
☎잡담☎ = 순전한 잡담부분
● = 논의부분
재검토시작 Lab value 2564/05/04/월/13:54 ~~
♥아래 부분은 현재 작성 중인 미완성 상태의 글입니다♥
문단, 표현 재정리 작업중
경전정리 (▽정리중) (▼마침)
논의 (○정리중) (●마침)
조각글 (☆정리중) (★마침)
○ [pt op tr]
● 불설성불모반야바라밀다경_K1427_T0257 [문서정보]- 일일단상키워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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