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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진리와실천

불기2562-11-22_불설오왕경_001 본문

과거조각글/불기2562(2018)

불기2562-11-22_불설오왕경_001

진리와 가치를 고루고루 2018. 11. 22. 13:02



®

불설오왕경(佛說五王經) 

K.863(20-1227),

T.523(14-795) 



● 한글대장경 해당부분 열람I
● 한글대장경 해당부분 열람II
○ 통합대장경 사이트

※ 이하 부분은 위 대장경 부분에 대해
참조자료를 붙여 자유롭게 연구하는 내용을 적는 공간입니다.
대장경 열람은 위 부분을 참조해주십시오.






불설오왕경(佛說五王經) 

K.863(20-1227), 

T.523(14-795) 

실역인명(失譯人名) 

권영대 번역 







○ [pt op tr] sfed--불설오왕경_K0863_T0523 핵심요약





Lab value 불기2562/11/22/목/19:12



mus0fl--Graziella De Michele - Le Pull-Over Blanc.lrc

이전 조각글 들에서
문수사리소설반야바라밀경
그리고 대반야바라밀다경
그리고 대지도론과 
불설관미륵보살상생도솔천경을 계속 이어 살피면서 

현실에서 가장 유치하게 가치판단을 하고
그리고 무엇인가 가장 유치하게 목표를 선택하고 
그래서 또 그런 바탕에서 가장 엉터리로 그 성취방안을 찾고 추구해나가는 것에서부터 시작해서 

그런 현실 생활을 정신없이 진지하게 해나가다가 
어떤 계기로 처음 수행을 시작하게 되고 

그리고 수행을 시작한 다음에는 다시 어떤 단계를 거쳐서 
최종적으로 문수사리소설 반야바라밀경에서 제시하는 내용과 같은 내용을 바탕으로 
무량 행문을 무량겁에 걸쳐 닦아나가면서 
무량한 복덕과 수명과 지혜를 구족해서 성불하는 길에 이르게 되는가.


이런 내용을 하나하나 단계적으로 살피려다가 
너무 서술할 내용이 많아질 것 같아서 
시간만 끌다가 제대로 적지 못했다. 


그런데 벌써 11 월달이 되어서 올해가 다 지나가고 있다. 
그리고 오늘 불설 오왕경이 뽑혀 올려져 있어서 
내용이 대단히 간략해서 살피니 
결국 앞의 문제의 첫 부분과 관련된 내용임을 보게 된다. 



그래서 결국 내용은 간단하지만, 
이 내용을 기초로 
세속에서 망집을 바탕으로
가장 유치한 단계로 무언가 좋음을 집착하고 추구하는 단계에서 
도대체 어떤 계기로 수행을 처음 시작해 진입해 들어갈 수 있게 되는가. 

이 문제를 살피면서 
그 이후 부분을 점차 살펴나가는 것이 적절하다고 보게 된다. 


사실 과거에 이런 기본적인 내용을 어딘가에 
잘 정리해서 서술했다고 보기에 
이런 기본적 내용을
또다시 이곳에서 되풀이할 필요가 없다고도 한편으로 생각하고
이해를 도우려면 여러 사례를 들어 서술해야 할 분량도 상당히 많다고도 보게 되는데 

그런데 현실에서 의외로 이런 문제로 생사고통을 겪어 나가는 상태가 
거의 대부분이다. 

그리고 오히려 이런 기본적 내용이
사실 더 의미가 있다고도 보게 된다. 


일단 기존에 조각글은 별로 적지 못했는데 
해당 부분들 경전 내용들이 중요하다고 보기에 일단 링크를 따로 걸어 본다. 
이것은 본 내용이 이들 경전 내용과 모두 관련되어서 
함께 논의한다는 그런 의미다. 

참고 

sfd8--불교단상_2562_11.txt ☞◆vgyv9655

sfed--문수사리소설반야바라밀경_K0011_T0233.txt ☞승가바라(僧伽婆羅) 한역

http://buddhism007.tistory.com/5251


sfd8--불교단상_2562_11.txt ☞◆vsvd4810
sfed--대반야바라밀다경_K0001_T0220.txt ☞제266권
http://buddhism007.tistory.com/5252

sfd8--불교단상_2562_11.txt ☞◆vhlw1319
sfed--대지도론_K0549_T1509.txt ☞대지도론 제63권
http://buddhism007.tistory.com/5253


sfd8--불교단상_2562_10.txt ☞◆vwbk8331
sfed--불설관미륵보살상생도솔천경_K0194_T0452.txt ☞저거경성(沮渠京聲) 역

일단 쉬기로 한다. 


♥ 잡담 ♥파일 인용부분 표시와 정리문제 

최근에 각 경전의 1 권 분량을 떼어서 살펴나가기로 하고 
경전 본 내용은 경전을 제공하는 사이트에 링크를 걸어 열람하게 하고 
대신 본 페이지에는 경전을 복사해 붙여서 
각 부분에서 살필 내용을 ♣01♧ 이런 표시를 붙여서 표시하고 
한 부분에 모두 모아서 살피기로 했는데 
체계가 조금 혼란스러워서 적어도 11 월달 부분만은 
통일된 형태가 되도록 글을 정리하려다 보니 
시간이 너무 간다. 
그래서 지금부터 그렇게 하고
과거 조각글들은 시간이 나면 그렇게 조금씩 변경시켜나가기로 하고
그런 형태로 무조건 졸속처리를 하기로 했다. 



사실 ♣01♧ 표시의 문제는 
이 표시는 본인이 이곳에서 한다는 점이다. 
이것이 고정되지 않기에 나중에 이 표시를 이용하려면 
또 복잡한 문제가 있게 된다. 
그리고 연구체계를 한번 확보하면 
이곳이 이후 작업에도 계속 적용되고 편해야 한다는 사정 때문에 
처음에 잘 방식을 마련해야 한다고 본다. 

나중에 해당 부분을 재인용하려면
이렇게 인용처리할 정도로 되어야 한다는 의미다. 


sfed--불설오왕경_K0863_T0523.txt ☞♣01♧

http://buddhism007.tistory.com/5254 ☞♣01♧


그런데 지금은 첫 작업이라 과연 그럴까 이런 의문이 많이 든다. 
일단 다른 별 방안이 없으므로 역시 졸속으로 임해야 한다고 본다. 






mus0fl--Etienne Daho - Week-End À Rome.lrc


우선 세속에서 최고정점에 오른 왕들이 
평소 어떤 희망을 갖고 있는가를 제시하는 부분을 
표시해보았다. ♣01♧ 에서 ♣03♧ 까지 그와 같다. 

♣04♧는 그 가운데 보안왕이 제시하는 내용으로서 
세속에 있는 이가 무언가를 계기로 수행에 진입하는 
첫 부분이라고 이해할 수 있다. 

부처님이 이런 중생을 상대로 해서 
맟춤복을 마련해 놓고 이런 중생을 수행으로 진입시키는 
단골 메뉴가 그 다음에 이어진다. 
♣05♧ 부분에서 제시한 생사현실의 고통과 관련된 내용이다. 

생사현실에서 희희낙락하고 지내는 상태에서는 
이 내용이 자신의 일과 관련없다고 여길 수 있는데 
이 내용과 관련이 없는 것은 
현실에서 수행자 외에는 거의 없다고 보아야 한다. 

그것도 수행자가 다 그렇다는 것이 아니고 
수행을 시작해서 일정한 상태가 된 수행자가 그렇다고 해야 한다. 

그래서 이 부분이 현실에서 정신없이 진지하게 
망집에 바탕해서 유치한 내용을 놓고 살아가는 상태에서 
처음 수행으로 진입해 들어가는 부분으로서 
살필 의미가 있다. 

그런데 이미 앞 경전들에서 살폈던 내용은 
다시 여기에서 한참 멀다. 
그래서 이를 서술하기가 상당히 힘든 것이 사실이다. 

처음 수행에 진입할 때는 이런 내용을 제시받았는데 
나중에는 이런 입장에서 대단히 어리둥절하게 여기게 되는 내용들을
제시받게 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 사정을 조금 이해하기 쉽게 설명하면 
어른이 유치원 교실에서 온갖 쓸데없는 오락도구나 
딱지나 구슬 인형을 가지고 서로 정신없이 놀고 
또 다투는 유치원생들의 입장을 놓고 대하는 것과 상황이 비슷하다고 할 수 있다 .

현실에서 대부분 어른들이
이들 유치원생들이 집착하는 것을 놓고 그렇게 생각하지만, 
정작 그 어른들이 나이가 40, 50, 60 
나중에 90, 100  이렇게 해서 죽기 직전까지 자신이 집착하고 대하는 것이 
사실은 유치원생의 입장에 대해 어른이 평가하는 내용과
그 사정이 같다고 경전에서 제시하는 그 사정은 
그 주체가 죽을 때까지도 잘 이해하지 못하고 죽게 되는 경우가 
현실의 대부분이다. 

그리고 그것이 바로 생사현실의 문제다. 

이렇게 내용을 제시하면 
유치원생들이 집착하고 이해하는 내용은 사정이 그렇지만,
왜 몇 십년 각 분야에서 전문지식을 쌓고
그래서 현실에서 대단히 존중받는 각 분야의 내용을 놓고 
그것이 유치원생이 일으킨 망상과 집착과 그 사정이 같다고 하는가라고 
의문을 제시하거나 심지어 분노를 일으킬 수도 있다. 

자신이 대단히 가치를 두고 대하는 어떤 내용을 
유치하다거나, 
또는 완전히 거꾸로 뒤바뀌어서
그 주체를 무량한 기간에 걸쳐 극심한 생사고통을 받게 만드는
근본원인이 되는 망상 분별상태라고 자꾸 경전에서 제시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 사정을 이해하지 못하면 
결국 앞에 비유로 든 상태로 무량하게 
삶을 반복해 나가야 하는 것이 생사현실이다. 

그나마 이 경전에서는 
왕들이 센스가 있어서 
몇 마디 부처님으로부터 말씀을 듣고 
방향을 전환해서 수다원에 이르렀다고 제시되는데 
이것은 대단히 다행스런 한 내용이지만, 
현실에서는 이런 경우가 대단히 희박하다. 
그래서 문제인 것이다. 

그리고 현실의 대부분이 취하는 입장과 
경전에서 제시하는 내용의 간격이 너무 극심해서 
이 사정을 하나하나 제시하고 서술하는 것이 힘든데
그런데 어떡하던 짧게라도 핵심을 추려 제시해야 한다는 것이 
지금 본인이 처한 곤란한 사정이다. 

그러나 조금 쉬면 
또 좋은 방안이 있으리라고 본다. 




mus0fl--Pauline Paris - Buvons La Victoire Mon Sergue.lrc


현실에서 한번 태어나면 죽음을 피할 도리가 없고 
살아가면서 생노병사 구부득고와 같은 고통을 피할 도리도 없다. 
이렇게 보는 것이 일반이다. 

그런데 수행이란 대부분 그렇게 보는 생사를 벗어나고
그런 생사고통의 묶임에서 벗어나는 방안을 제시하는 데 핵심이 있다. 

그래서 어떻게 보면 이런 내용을 제시하는 부처님의 입장은 
스스로 모순이 되는 내용을 제시하는 듯도 보이게 된다. 
일체가 고통이라고 제시하는 한편 
그런 생사고통을 벗어나는 방안을 또 제시하니 
처음 일체가 고통이라고 제시한 내용은 무엇인가. 
이렇게 의문을 갖게 되는 부분이다. 


그런데 이것도 수행을 진입한 이후의 문제다. 
처음 생사현실에서 문제는 그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처음 생사현실에서의 문제는 
왕들이 제시하는 희망이나 그 소원의 성취와 
밀접하게 관련되는 내용이 대부분이다. 
그래서 여기서부터 하나하나 살펴야 한다. 

그리고 이 사정을 이해하려면 
다시 앞에서 비유로 든 유치원생들의 현실 사정부터 
차근차근 살펴야 한다. 

자신의 입장에서 지금 당장 좋다고 무언가를 본다. 
그런데 이것이 나중에 그 정반대의 내용을 가져다 준다. 
이런 이상한 일이 어디 있는가. 

이 문제를 처음에 유치원생이 이해를 해야 하는 것이 
현실의 첫 과제다. 

그런데 그 구조가 
현실에서 가장 정점에 있는 왕들의 희망과 
왕들이 추구하는 방식에도 그대로 적용되고 

나중에는 처음에 수행에 진입해
수행목표를 어느 정도 성취했다고 여기는 상태에도
그대로 적용된다는 사정을 또 이해해야 한다. 

앞에서 문수보살님이 등장하는 경전을 제시했는데 
이런 내용을 제시할 때 
문수보살님이 제시하는 내용을 듣고 
당시 500 아라한이 이 내용은 옳지 않다. 
이러면서 자리를 박차고 나가고
그 가운데 400 명은 그래도 나중에 그 내용을 이해하지만, 
그 가운데 100 명은 끝내 이해하지 못하고 이로 인해
나중에 무간지옥에 들어간다는 내용도 다른 경전에서 찾아 볼 수 있다. 

기본 수행의 최정점에 올라
성인의 반열에 이른 상태를 아라한이라고 하고 
또 그 가운데 지혜가 제일인 분이 사리자인데 
나중에 반야심경 등에서 보면 
관자재보살님이 이 사리자를 상대로 
일정한 내용을 다시 제시하는 부분을 볼 수 있다. 

그것은 또 한번 다시 방향을 전환해야 할 
필요가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렇게 자꾸 더 높은 상태로 나아가다 보면 
처음 현실의 내용과 경전에서 제시하는 내용이 갖는 간격의 차이가
너무 극단적으로 벌어지게 되고 
일반적 입장에서는 도무지 이해하기 힘든 상태가 된다는 
문제점이 있다. 

그런데 별 방안이 없다. 
어떤 특별한 사정이 있어서 
이미 해당 내용에 대해 선행학습을 오랜 기간에 걸쳐서 했다는 특수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대부분 하나하나 차근차근 그렇게 각 내용을 살피면서 
점차 망집 상태에서 벗어나와야 하고 
그러면서 점차 수행에 진입하고 
좀 더 높은 수행단계로 옮겨가는
그런 작업을 꾸준히 해야 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 첫부분에 
그래도 어느 정도 세상이 무엇이고
무엇이 좋은지 나쁜지 가릴 줄 알며 말은 할 수 있는 
유치원생부터 이 논의를 시작해야 하는 것이다. 


어떤 유치원생이 자신의 입장에서 
오늘은 아이스크림을 마음껏 먹고 정신없이 
장난감과 놀고 지내는 것이 좋다고 하는데 
그 유치원생 부모가 말하길 
일단 유치원에 가서 글자와 숫자를 배워야 한다. 
이렇게 제시하니 
그것은 재미도 없고 골치가 아프기만 하다. 
이렇게 고집을 피운다고 해보자. 

이것이 첫 문제다. 
왜 지금 어떤 주체가 좋다고 보는 것이 
길게 보면 그렇지 않다고 보게 되는가. 
이 내용을 유치원 시절에 잘 이해해서 
현실에 적응하지 못하면 
이후 삶 전체가 또 엉망이 된다고 
대부분 어른들이 이 사정을 보게 된다. 

그런데 이것부터가 이상한 일이다. 

조금 학술적으로 이 문제를 살피면 
왜 봄에 뿌린 것은 씨인데 
가을이 되어 수확하는 것은 
이 씨와 모습이나 크기나 형태나 성품이 다 다른 열매가 나타나는가. 
이 사정을 처음에 이해하는 것이 쉽지 않다. 

참고로 불교 용어로 이를 이숙인-이숙과의 관계라고 표현해 제시한다. 
이는 현실에서 씨에서 그 모습이 다른 열매가 나타나는 것도 물론 의미하지만, 
생사과정에서 한 주체가
탐욕과 분노를 가지고 업을 행했다고 해서 
다음 생에 예를 들어 돼지와 같은 축생이나 아귀나 지옥세계의 생명으로 
그 모습을 달리 태어나 살아가게 되는가 
이런 생사와 관련된 현상을 이해하는 데 기본적으로 필요한 내용이다. 

그런데 이런 내용이 대단히 간단하고 이해하기 쉽다고 여기면 
경전에 제시되는 아난존자처럼 부처님에게 심한 질책을 당하기 마련이다. 

씨를 뿌리면 가을에 열매를 그렇게 맺는다는 것은 
대단히 이해하기 쉽다고 현실에서 대부분 생각하고 
그런 바탕에서 현실에 떡 임하는데 
사정이 바로 그렇기 때문에 
그 주체들이 하나같이 그런 형태로 대충 그 관계를 이해하고
대충 그런 바탕에서 업을 행하고 
지옥이나 아귀 축생세계에 들어가 그 세계에서 무한하게 묶여 지낸다. 
이렇게 부처님이 제시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부분에서 부처님으로부터 질책을 받는 분이 다른 분이 아니고 
부처님이 설한 경전 내용을 다 잘 기억하고 
나무를 한 번 보면 그 나무에 달린 나뭇잎까지 단번에 셀 수 있었던 
아난 존자인 것이다. 

예를 들어 현실에서 수십자리 숫자를 수없이 나열하고 
계산해보라고 할 때 어떤 이는 단번에 계산해 내는데 
아난 존자가 당시 그런 상태였고, 
아난 존자가 그런 입장에서 
인과의 문제는 대단히 쉬운 내용이라고 제시했다가 
부처님에게 질책을 받았다는 의미다. 

그것은 현실을 살아가는 이들 대부분이 바로 그런 상태로 
대충 현실을 대하고 정신없이 진지하게 임하는 것이 
바로 생사고통을 무한히 되풀이 해 받는 
그 사정이라고 제시하는 내용이다. 


그런데 이 문제를 살피기 이전에 
앞에서 유치원에 가지 않는다고 고집을 피우는 
유치원생 문제부터 먼저 해결해야 한다. 

왜 현실에서 그 경우에 당장 좋다고 보는 것을 포기하고
엉뚱한 내용을 붙잡고 시간을 보내야 한다고 하는가.
그 사정이 왜 그렇다고 보아야 하는가. 
이것부터 먼저 설명해야 한다. 

사실은 답답하다. 
이 사정을 설명하기가 복잡한 한편
상대가 고집하고 그렇게 임하는 사정이 상당히 심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알고보면 수행과 관련된 온갖 문제는 
알고보면 이 문제와 성격이 다 마찬가지다. 

일단 또 쉬어야 한다. 
실질 내용은 별로 제시하지 못하고 
자꾸 쉬니 답답한데 쉬면서 연구를 해야 한다. 



mus0fl--Patrick Bruel - Au Cafe Des Delices.lrc


현실에서 어떤 사정으로 생사를 벗어나는 수행에 진입하는가. 
그리고 그 수행도 또 하필이면 무소득을 방편으로 행하게 되는가. 

이 문제가 의외로 이해하기가 쉽지 않다. 
그래서 일단 그림을 동원하기로 했다. 

선인락과 08pfl--image/선인락과2.png
[img2-03] [그림] 선인락과
08pfl--image/선인락과2.png



세상에서 껌을 평생 씹는 비결이 있다고 전한다. 
껌을 씹다가 그만 씹고 싶으면 그릇에 담아 보관하다가 
다시 껌을 씹고 싶으면 그것을 다시 씹는다는 방안이다. 

그런데 설마 이렇게 해서 껌 하나를 평생 씹는 이가 세상에 있을까 생각하지만, 
거의 대부분 이렇게 살아간다는 놀라운 보고를 듣게 된다. 
생각해보면 놀라운 일이다. 

그런데 자신은 그런 경우가 거의 없는데 
무슨 이야기인가 이렇게 생각하기 쉽다. 
그런데 정말 그런가 생각해보자. 

어떤 화제나 주제를 던져보자. 
그러면 나이가 60 세 먹은 아저씨나 아주머니나 아니면 청년이나 할 것 같이 
10 세 때 있었던 일까지 다 꺼내온다. 

당시 자신이 당했던 억울하거나 고통을 심하게 받았던 일 
또는 무언가 대단히 칭찬을 받았거나 좋았던 일 이런 것을 다시 꺼내와서 
같은 형태로 한번 죽 되살린 다음에 또 어딘가에 집어 넣어 보관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 현상이 그처럼 한 번으로 끝나면 좋은데 
거의 평생동안 그렇게 해왔을 뿐 아니라, 
앞으로도 그렇게 계속 해나간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것이 앞 내용을 의미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런 현상은 심지어 500 생을 살아도 마찬가지다. 
이런 보고를 경전이나 논서를 통해 듣게 된다. 
놀라운 일 아닌가. 
어떤 여인이 원한 때문에 7 생을 반복해서 
다른 이를 괴롭혔다는 내용도 들었는데 
500 생을 걸쳐서 그렇게 서로가 서로를 괴롭혀왔다는 내용은
최근 대비바사론이란 논서에서 보았다. 
그리고 경전에서는 이런 내용이 겁이란 시간 단위로도 확장된다. 

경전에서 이 내용을 다음처럼 제시한다. 
한번 행한 업은 무량겁을 두고 사라지지 않는다. 


그래서 무량겁을 놓고 같은 형태의 껌을 어딘가에 보관했다가 
때가 되면 다시 꺼내 또 그렇게 씹고 또 다시 어딘가에 보관한다. 
이런 형태로 생을 반복해간다. 이런 의미다. 


그런데 그렇게까지는 아니더라도 
1 생에서 거의 평생 이런 복기를 반복하는 사례는 드물지 않고,
대부분 자신의 삶에서 이런 내용을 쉽게 찾아낼 수 있을 것이다. 

남자들끼리만 모이면 무슨 이야기를 한다거나 
여자들끼리만 모이면 무슨 이야기를 한다거나 하는 내용도 
이런 현상과 관련된다. 

그런데 문제는 이런 복기를 행할 때
엉뚱하게 행한다는 것이 이 문제점이다. 

예를 들어 어떤 과거의 좋지 않은 일이 있었다면 
그것을 통해서 그런 일이 반복되지 않도록 방향을 잡고 나아가면 좋은데 
사정이 그렇지 않고 
같은 형태로 같은 성격의 억울한 고통을 받는 성격의 일을 
같은 형태로 반복해 나가는 방향으로 그것을 다시 꺼내 행한다.
이런 문제다. 

이것도 대부분 사정이 비슷하다. 

자신이 이 경우에 해당하지 않고
그렇지 않다면 신고해도 된다. 

이 내용은 이런 이야기다. 
자신이 갑이라는 상대와 나쁜 관계가 있었다. 

그런데 그런 내용을 다시 떠올리면서
갑이나 또 다른 상대와의 관게에서
앞으로 그런 나쁜 상태가 나타나지 않도록 
과거와 방향을 돌려서 달리 해야겠다. 
이렇게 마음을 먹고 자세를 변환시키는 사례는 
현실에서 대단히 드물고 그 반대가 거의 대부분이라는 의미다. 

이런 성향 때문에 개인대 개인도 사정이 비슷하지만, 
국가 대 국가의 관계도 사실은 비슷하게 전개된다. 

그런데 여기서 예외에 속해야 
적어도 다음 생의 관계가 좋아질 수 있다. 
이것을 먼저 제시하게 된다. 


참고로 이런 형태로 복기할 내용이 개인에게 갖추어지면 
그것은 그 개인의 자산이 된다. 
무량겁에 걸쳐서 되풀이해서 얻게 될 나쁨을 
그로 인해서 얻지 않게 됨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그런 사정으로 이처럼 과거에 잘못한 내용이 있다면
그것을 수행자 자신의 자산으로 가져야 한다고 경전에서 제시되지만, 
그런데 유감스럽게 거의 대부분 그렇지 않다. 
그래서 같은 내용이지만, 수행자는 이를 참,괴의 항목에 넣어 
수행자의 일곱가지 재산[7재], 또는 10 개의 다함이 없는 보물 창고[10 무진장] 
이런 곳에 보관하게 되지만, 
일반적인 경우는 그렇지 않다는 의미다. 

과거의 잘못이 참괴의 형태로 보관되면 
그것은 무량겁에 걸쳐서 그런 잘못을 그의 현실에서 발생하지 않게 하고 
제거해내는 역할을 하는 뛰어난 자산이 되는데 반해서 

그렇지 않은 경우는 
그런 과거의 문제점을 아예 기억하지 않고
같은 성격의 일을 매번 새로운 일인 것처럼
무한히 그런 형태로 잘못을 다시 되풀이하게 되거나, 

또는 과거의 잘못을 기억하더라도
참괴의 형태로 보관하지 않기 때문에
그런 과거를 되살리면서
단순히 과거에 받았던 억울함이나 불쾌감을
단순히 다시 매번 되살려 되풀이해 받는 방향으로만 사용하거나, 

또는 자신이 받은 그런 불쾌나 고통에 상응해서 
언젠가는 그런 상대에게 그에 대한 보복을 해서
그런 형태를 다시 한번 되풀이 하고자 하는 형태로 
그것을 보관하고 꺼내는 일을 반복한다는 의미다. 

그리고 이것이
결국 각 주체를 무한한 기간에 걸쳐
3 악도에 묶이게 만드는 업의 장애현상과 관련된다. 







그리고 현실의 문제를 살피기 위해서는  
또 다음 내용을 먼저 확인해 볼 필요가 있다. 

우선 자신이 눈을 떠서 자신의 모습을 바라보자. 
그리고 손을 들어보기도 하고 발로 걸어보기도 해보자. 
그리고 자신이 늘 당연하게 생각하는 
자신이나 현실 내용을 놓고 같은 질문을 해보기로 하자. 
왜 자신의 손에는 이러한 근육과 이런 살과 이런 뼈가 이렇게 되어 있고 
왜 손가락은 또 이런가. 
그리고 다음 문제에 답을 해보자. 
왜 하필이면 많고 많은 생명들 가운데 
자신이 지금 이 상태로 이렇게 태어나서 
이 상황에서 이렇게 살게 되었을까. 
이 문제에 답을 해보기로 하자. 

이는 생물학적 문제를 연구하자는 취지라기 보다는
이런 문제를 먼저 잘 이해하는 것이
현실 문제와 수행의 관계를 이해하는데 단서가 되기 때문에 
살펴보아야 한다. 

그런데 적어도 인간으로 태어나서 생활하는 입장은 
다른 경우에 비해 긍정적인 부분이 대단히 많다. 
예를 들어 자신이 태어날 때 파리를 부모로 해서 파리의 모습으로 지금 살고 있다거나, 
또는 돼지를 부모로 해서 돼지로 태어나서 축사에서 산다거나 이렇다고 가정해보자. 

그 때도 사실은 위 질문을 해보아야 하는데 
과연 파리나 돼지가 그런 질문을 스스로 해보는 경우가 있을지 모르지만, 
사실은 사람도 위와 같은 질문을 스스로 하면서
검토해 보는 경우는 그렇게 많지는 않다. 

단지 그렇게 태어나서 살다보니 
지금 이 순간을 이렇게 맞이하고 있고 
그래서 이런 내용은 너무나 당연하다고 평소 여기면서 
별 의식없이 지내는 한편 
어느 순간 도저히 회복할 수 없는 병이나 사고를 당해 
죽음을 맞이할 때까지 
그렇게 매 순간 주어지는 상황에서
바삐 업을 행하고 임할 뿐이고  
이에 대해 별로 의식하지 않고
이에 대해 의문을 갖고 그 사정을 살펴보지 않는 것이 
오히려 보통이다. 
그런데 사실은 이것이 문제가 된다. 

그리고 이는 현실의 정체나 그런 현실 내용이 그렇게 나타나게 된 인과문제를 
대충 적당하게 관하면서 현실에 임하는 문제현상과 관련된다. 
그렇게 적당히 좁고 짧고 얕게 각 내용을 대하는 바탕에서
업을 행해 나가기에 문제 상황에 반복해 처하게 되는 것이다. 





그 다음 그런 상태에서 인과의 문제를 간단히 살펴보자. 

처음 밭에 씨를 뿌리면 가을에 씨와는
전혀 다른 형태의 열매가 나타난다는 현상을 제시했는데 
이것도 현실에서 대단히 많이 반복해 대하게 되는 내용이어서 
당연하다고 여기게 되지만, 알고보면 이상한 일이다. 

그것이 얼마큼 이상한가하면 
책상위에 벽돌을 놓았더니 거기에서 찐빵이 하나 나타난다 
이런 것처럼 본래는 서로 인과로 관련지어 지는 내용들이
서로간에 대단히 엉뚱하고 이상한 내용이라는 의미다. 

그래서 성격은 이처럼 서로 엉뚱하고 이상한 내용들이 서로 관련되는데 
다만 현실에서 대하는 각 내용이 이상하지 않다고 여기는 것은 
벽돌을 놓으면 찐빵이 나타나는 것을 현실에서 수없이 반복해 대하게 된 뒤부터 
어느 시점 이후로는 그것이 당연한 관계라고 이해하고 받아들이게 되었다는 사정 때문이다. 

그런데 아무리 그렇게 그런 관계를 당연하다고 받아들인다해도 
벽돌을 놓으면 찐빵이 왜 나타나게 되는가 
그 근본 사정이 무엇때문인가를 살피게 되면
역시 답하기 곤란하게 되는 것은 마찬가지다. 

굳이 그 사정을 설명한다면 
벽돌을 놓으면 으레 옆에 찐빵이 나타나기 때문에 그런 것이고 
그렇기 때문에 벽돌을 찐빵이 나타난 원인이라고 본다. 
이렇게 밖에는 현실에서 설명할 수 없다. 

그리고 과학책에서 설명하는 설명 역시  
위 설명과 다른 성격의 설명이라고 할 수 없다. 
물론 표현은 조금 다를 수 있지만, 
위 설명과 그 성격이 다르지 않다. 

물을 전기분해하면 왜 수소와 산소가 나오는가를 놓고
다양한 내용을 덧붙여 설명하게 되지만, 
그러나 알고 보면 그런 조건 그런 상황에서 그렇게 하면  
그런 것이 그렇게 반복해 나타나니까 나타난다. 
이런 설명을 한 것 뿐이라는 의미다. 

그런데 지금 제기하는 문제는 이 내용들의 관계가
사실 이상하지 않은가. 
수소나 산소에서 물의 모습이나 성품이 보이는가. 
그런데 왜 물을 전기분해하면 그런 내용이 나오는가.
이런 의문이다. 

그리고 그것은
처음에 벽돌과 찐빵의 관계처럼
서로 대단히 엉뚱한 내용들이라는 점에서는
그 성격이 하등 다르지 않다. 
그래서 본래는 서로 대단히 엉뚱하다고 볼 내용인데 
그러나 이들 내용이 대단히 그런 관계와 그런 형태로 
반복한다. 그래서 그렇다고 제시한다는 이런 의미다. 


그런데 이것이 바로 현실에서 살피는
온갖 문제와 관련이 된다. 

쉽게 설명하면 자신의 눈으로 
손을 바라보고 
그 손을 부딪히면 
그 상황에서 자신이 보는 손 모습과는 전혀 다른 
손뼉소리를 듣게 된다. 
왜 그런가 이런 문제도 마찬가지다. 

사과를 하나 놓고 두드리고 만지면서 눈으로 그 모습을 보고 
귀로 그 소리를 듣고 
코로 사과 향기를 맡고 
입으로 사과 맛을 보고 
손으로 사과의 촉감을 얻는 상황도 
각 내용의 관계가 마찬가지다. 

사과 모습에서 그 촉감이 보이는가. 
아니면 그 촉감에서 그 사과 모습이 얻어지는가. 

이런 사정을 앞에서 벽돌과 찐빵 이렇게 비유적으로 표현한 것이다. 


한편, 현실에서 상식적인 바탕에서 
선인락과 악인고과 
즉 선을 행하면 즐거운 과보를 받고 
악을 행하면 고통스런 과보를 받는다. 
이런 관계를 제시하게 되는데 
왜 각 내용이 그런 형태로 나타나는가. 

이 사정도 사실은 이들 내용이 서로 대단히 엉뚱해보이기는 하지만, 
현실에서 그렇게 그런 내용이 그런 형태로 무한히 반복하게 된다. 
그래서 그렇게 그 내용들의 관계를 제시할 수 밖에는 없다. 
이런 의미다. 

현실이 왜 이런 형태로 나타나는가에 대해 조금 답답해보이지만,
이렇게 설명할 도리 밖에는 없다는 기본 사정을 살피는 한편, 

그런 바탕에서 현실적으로 좋고 좋음을 많이 얻어내려면  
어떻게 자세를 취하고
어떤 마음을 갖고 어떤 행위를 해나가야 할 것인가를 
다시 이어서 기본적으로 살피게 된다.


그리고 나중에 점차 나아가면 
처음에 제시한 이 기본 바탕을 다시 검토하면서 
그렇게 처음에 이해한 그 기본 바탕이
본래 그렇지 않다는 내용을 다시 제시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사정이 그렇다고 해서 
처음에 제시하게 되는 내용
즉 현실에서 일반적으로 마땅히 해야 한다고 보는 내용이나 방향 자체가
외관상 크게 달라지는 것은 아니다. 

다만 그에 부여하는 의미나 성격이
앞과 같은 사정 때문에 조금 달라지고
그래서 수행자는 이 부분을 잘 이해하고
결국 그런 바탕에서 수행을 좀 더 원만히 잘 성취해야 한다고 제시되는 것이다. 


예를 들어
유치원 선생님이 유치원 생에게
남에게 무언가 좋은 것을 베푸는 것이 좋다고 권하겠는가
아니면 좋아 보이고 욕심이 생기는 것을 친구가 갖고 있는 것을 보게 되면
이를 무조건 빼앗고 가지라고 했겠는가. 

유치원때부터 선생님이 제시해주는 내용은
알고보면 경전에서 부처님이 제시해주는 내용과 크게 다른 것은 아니다. 

그런데 나중에 수행자의 입장에서
조금 다른 내용을 제시받는 부분은 있게 된다. 

예를 들어 현실에서 그런 좋음을 베풀어야 하는 것은 마찬가지인데 
다만, 그 상황에 그런 좋음을 베푸는 그 주체나 그 좋음이나, 
그 상대나 또 그렇게 좋음을 베푸는 행위를 본래 얻을 수 없다는 사정을 잘 이해하고 
그에 대해 상을 취하거나 머물지 않아야 한다.
그리고 바로 그런 바탕에서 
그런 베푸는 행위를 비롯해 수행을 무량하게 잘 해나가야 한다. 
이런 내용이 추가되고
그래서 무소득(얻을 것이 없음)을 방편으로
그렇게 제시하는 각 수행덕목을 그렇게 원만히 잘 성취해야 한다는 
내용들이 덧붙여 제시되는 것뿐이다. 

그래서 조금 복잡한데 
결론적으로 현실에서 취해야 할 내용이 
유치원에서 유치원 선생님이 유치원생에게 알려주는 
내용과 크게 다른 것은 아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처럼 현실에서 마땅히 해야 한다고 보는 내용을 먼저 
자신의 마음안에 확고하게 확립해내는 것 부터가
그렇게 쉬운 것은 아니라는 점이다. 


왜 사정이 그런가. 

자신에게 지금 당장 좋은 것을 유치원 선생님이 하지 말라고 한다고 해서 
본래 그와 반대되는 방향으로 매 순간 행하고자 하는 각 주체의 성향이 
평생을 통해 변경되는 경우가 대단히 드물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다음과 같은 내용을 놓고 보자. 

지금 당장 눈 앞에 대단히 좋아 보이는 것이 있다. 
그것을 자신이 대단히 갖고 싶다.
그런데 그런 상황에서 그것을 갖고 있는 상대를 무시하고
그것을 무조건 집어 들고 달리면 그것을 바로 얻어낼 수 있다. 
사정이 이렇다면 대부분 그렇게 하려고 한다. 

또 반대도 마찬가지다. 
지금 당장 눈 앞에 분노를 일으키게 하는 상황이다. 
그래서 지금 분노를 일으켜서 분노를 터뜨리고
상대를 해쳐서 통쾌함을 얻어내고 싶다. 
이렇다고 해도 대부분 그것을 그렇게 하고자 한다. 

이것은 간단히 말해 
지금 당장 감성적으로 자신이 무언가를 하고 싶어하게 되면 
그것을 무조건 따라서 행하고자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래서 이 현상을 놓고 생각하면 
지킬 박사와 하이드라는 소설의 내용처럼 
자신에게는 늘 둘 이상의 다른 자신이 있는 것처럼 여겨질 수 있다. 


본인도 생활하면서 그런 현상을 자주 느낀다. 

예를 들어 과식하면 비만해지고 건강에 안 좋으니까. 
이런 음식을 지금 섭취하지 말자. 반대로 운동을 하자. 
이렇게 요구를 하게 되는 입장의 자신이 한 순간 분명히 있다. 

그런데 또 어떤 순간에는 이것은 대단히 맛있어 보인다. 
이번만은 예외로 하고 이것을 그냥 먹자. 그리고 운동은 피곤하니까 생략하자. 
이렇게 요구를 하는 입장의 자신도 한 순간 분명히 있다고 느끼게 된다. 

그런데 여하튼 이런 여러 생각을 자신 안에서 오락가락하다가 
어느 한쪽으로 옮겨 머물고 그런 자세로 이후 행해 나가게 된다. 

그리고 현실에서 어떤 것에 집착해 중독현상을 일으켜
어떤 문제가 되는 내용을 반복해 되풀이하는 현실 문제에서
각 개인은 대부분 이런 경향을 갖는다. 
술 담배 도박 이런 것을 포함해서 대부분의 상황이 이와 비슷하다. 


이런 경우 그런 문제 행위를 반복하는 입장도
한편으로는 그런 것을 하지 않아야 한다는 생각을 전혀 하지 않는 것은 아니다. 
다만 그런 생각을 오락가락 행하는 가운데
결과적으로 일정한 방향으로 매번 선택하고 행해 나가게 되는 것 뿐이다.

그래서 이런 상황에서 각 주체는 자신의 안에
성격과 입장이 각기 다른 주체가 여럿 따로 따로 있는 것처럼 여길 수도 있다.

예를 들어 한쪽은 
유치원 선생님이나 부처님이나 기타 성인이 안내해준 내용을 
그대로 따라 행해서 나아가고자 하려는 입장이 있는 반면 
또 한편으로는 매번 그 반대 방향으로
매순간 감성과 충동이 이끄는대로 나아가게끔 하는 입장이
한 주체에 함께 엇갈려 들어 있다는 의미다. 

그런데 이런 자신내부의 갈등 과정에서
이런 문제가 잘 해결되어 매 순간 좀 더 좋은 선택을 잘 할 수 있다면, 

유치원에서 한 번 이런 내용을 제시받은 이후  
그 이후 이것을 다시 놓고 살필 필요는 별로 없었을 것이다. 

그런데 우선 현실에서 그것이 잘 안 되기 때문에 
이후 문제가 복잡해진 것이다. 





쉬는 동안 영화를 여러 편 봤다. 
그것은 지금 적는 내용이 과거에 많이 반복한 내용인데 
또 적어야 하는가 이런 스트레스 상황 때문이기도 했는데 
그런 가운데 영화를 보면서 지금 살피는 주제를 놓고 연구를 한 것이기도 하다. 

하나는 전쟁 영화 
하나는 감옥에서 탈출하는 영화 
하나는 초능력을 각기 갖는 소년 수퍼맨들이 특수 고등학교에서 함께 교육을 받는 영화 
이런 내용들인데 

수행이란 일단
감옥과 같이 생사고통을 심하게 받는 상태로부터 일단 벗어나오고
이후는 그런 생사고통을 겪는 다른 중생을 
무량한 복덕과 수명과 지혜 방편을 구족하고
유희 자재 신통력을 바탕으로 잘 구해낼 수 있게 되도록 노력하는 한편  
또 다른 이들도 그처럼 이끌려고 제시하게 되는 방안들이라고 할 수 있다.

그래서 이들 영화 내용이 이런 부분에서 관련이 된다고 본다. 


우선 감옥에서 탈출하는 영화는 쇼탱크 탈출이라는 나름 유명한 영화인데 
지금까지 처음부터 끝까지 본 적이 없고 
뒷 부분만 몇 번 보아서 이번에는 그간 보지 못했던 첫 부분만 보았다. 

그런데 1950 년대 배경 미국의 감옥인데 
상당히 가혹하게 죄수를 다루는 모습을 영화에서 보게 된다. 
처음에 감옥에 들어가게 된 이가 낯설고 열악한 감옥 상황에 당황해서 
울부짖고 소리를 내자
소란을 피운다고 끌어내서 몽둥이로 때려서 죽이는 내용도 그렇지만,
여하튼 그외에도 상당히 심한 모습을 보게 된다. 

이와 함께 죄수들이 극심한 고통을 받는 영화로는
빠삐용이라는 영화도 함께 생각이 나는데 
상황이 대강 이와 비슷해보인다. 

그리고 영화는 어떤 주인공이 억울하게 그런 감옥에 갇혔다가
교묘하게 그 감옥을 탈출한다는 이야기인데 
이는 아주 불가능한 것은 아니더라도
단지 영화에서 보는 내용일 뿐이고 
현실에서 대단히 희박한 일이라고 보게 된다. 

그리고 영화에서는 주인공이
대단히 억울한 상태로 감옥에 들어간 상황을 전제하지만, 
설령 사정이 그렇거나 그렇지 않거나, 
이런 현실의 전후과정을 죽 이어 놓고 보면 
여하튼 무언가가 잘못 얽히고 현실이 뜻과 달리 전개되어 가는 가운데
각 주체가 그런 상황에 안타깝게 놓이게 되었다는 점을 생각하게 된다. 

이는 그 구체적 사정이 어떻던지
어떤 한 주체가 그러한 상황에 놓이게 되었다는 그 사실 자체가 
종합적으로 바람직한 것은 아니라는 의미다. 

즉, 원래는 그런 전후의 사건이나 그 이후의 일이나 다 함께 없었으면 하는 일인데
그런데 현실에는 사정이 그렇지 않아서
그런 형태의 고통을 주고 받는 내용이 있을 뿐 아니라 
또 현실에서 유사이래 무한히 그런 형태의 내용이 계속 반복되기에 안타깝다. 이런 의미다. 


그래서 이런 문제를 어떻게 해결해야 할 것인가. 
매번 그런 상황에 그렇게 처하는 한편
그렇게 그런 상황에 처하면 영화처럼 교묘하게 탈출하는 것을 그 해결방안이라고 할 것인가.
아니면 다른 방안을 찾아야 하는가. 
이런 문제를 살펴야 한다고 본다. 

그런데 여하튼 이것이 현실에서 처음 살피게되는 
선인락과 악인고과 이런 내용과 깊이 관련된다. 



그리고 이런 관계를 너무 반복해 대해서 
이런 관계는 너무 당연하다고 여기게 되지만, 
사실은 이 관계 역시 그 원인과 결과를 서로 놓고 대조해보면 
처음 제시한 내용 즉, 벽돌에서 찐빵이 나타나는 관계처럼 
그 내용과 성격이 대단히 다르고 엉뚱하지만, 
그런데 생사현실에서는 이런 관계와 이런 형태로
이런 생사고통을 대단히 반복해서 대하게 된다. 

그래서 이런 내용과 그 관계를 이해하는 바탕에서 
각 주체가 현실에서 임하는 자세와 태도를
먼저 일정한 방향으로 변경할 것을 처음 요구받게 된다. 

그런데 그런 내용이 
매순간 어떤 주체가 본래 하고 싶어하는 내용과는  
하나같이 감성적으로 들어맞지 않기에 이 문제를 해결하기가 쉽지 않다. 

그래서 이것이 삶 전반에 걸쳐서 장구하게 문제를 일으키게 된다. 
앞에 그 내용을 반복했다. 

무언가 좋은 것이 보이는 경우 한 주체가 취하는 반응과 
무언가 대단히 싫어서 분노를 일으킬만한 경우 
각 주체가 상황마다 취하게 되는 반응 자세가 있는데 

경전에서나 현실의 유치원 선생님이나 다 함께 마찬가지로
그런 상황에 처할 때 각 주체가 그처럼 취하기 쉬운 그런 반응과 자세를 중지하는 한편
그 반대로 행해야 한다. 이런 내용을 제시하는 것이다. 

그런데 앞과 같은 관계를 이해하고 그런 내용을 제시받아서 
각 주체가 매 순간 그렇게 하려 노력하기는 한다지만, 
대부분 이것이 그렇게 잘 안 된다는 것이 현실 문제다. 

물론 현실에서 대부분 주체가
이런 내용을 잘 행하고 있는 것처럼 외관상 보이고
그래서 현실이 평온한 것으로 이해하게 되지만, 
그러나 그 실질 사정을 알고보면 전혀 사정이 그렇지 않다. 
그리고 이것이 바로 생사현실의 문제임을 경전에서 처음에 제시하고 있다. 

그런데 현실에서 보면 대부분 그런 범죄를 행하는 입장이 아닌데 
이것은 너무 심한 것 아닌가 이렇게 생각하기 쉽다. 
그런데 그 실질 사정을 알고보면 전혀 그렇지 않다. 

경전에서는 각 주체가 그 마음에서
근본적으로 그렇게 임하지 않고 있음을 지금 지적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마음에서 그 실질 내용이 그렇게 변경되지 않았으면 
그 외관을 어떻게 취하던 그 결과는 마찬가지여서
하나같이 3 악도 지옥 아귀 축생행이다. 이런 의미다. 

그래서 자신을 놓고 정말 그런가 아닌가를 놓고 검토해 볼 필요가 있다. 

자신은 평소 대단히 좋다고 보는 것을 대할 때 탐욕을 일으키지 않는가.
또 대단히 부당하고 억울하고 불쾌하고 고통스런 일을 당할 때
그런 상황에 그런 내용 자체를 얻을 수 없다고 관하고
상을 일으키지 않고 그래서 분노를 일으키지 않고
상대에 대해 미움과 원망을 일으키지 않고
오히려 상대에 대해 자비와 연민과 동정의 마음을 일으키면서 
이를 평안하게 받아들이고 참을 수 있는가. 

그렇다면 대단히 다행이다. 
이런 경우라면 최소한 하늘행 티겟을 이미 끊어 놓은 상태다. 

문제는 현실에서 매 상황마다
경전에서 제시하는 형태로 그렇게 마음을 갖고
그처럼 임하는 그 비율이
산 전체의 흙과 손바닥에 올려진 흙의 양을 비교하는 것처럼 
그 비율이 대단히 희박하다.
그리고 이런 현실이 바로 생사고통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3 악도에 묶여 들어가는 생사현실의 문제다. 
이 내용을 경전에서 제시하는 것이다. 


그러면 본인은 어떤가. - NO comment 일단 쉬자. 




mus0fl--Florent Pagny - Ma liberté de penser.lrc


내용이 길어지는데 
잘못하면 현실에서 취하는 방안과 관련해
한없이 길어지기 쉽다고 본다. 

이 내용을 빨리 수행분야로 진입해서
살펴가자면 대단히 압축해서 살펴나가야 한다고 보게 된다.


현실은 일단 이렇다. 

선인락과 악인고과는 
선을 행하면 즐거운 과보를 받는다. 
악을 행하면 고통의 과보를 받는다.
이런 내용인데 
이것은 어떻게 생각하면 
고진감래 감진고래의 관계를 제시하는 듯도 하다. 


그런데 이는 차이가 있다. 

고진감래 이런 부분은 
즐거움과 괴로움이 삶을 사는 가운데 번갈아 온다.
이런 정도의 의미다. 


우선 즐거움, 좋음, 선을 놓고 
모두 GOOD 이란 표현으로 함께 묶어 표현하여 
혼동을 일으키는 경우가 많다. 
그런데 이들 각 내용은 관련은 되지만 서로 같은 의미는 아니다. 


만일 선이나 즐거움이 서로 같다면 
'선인락과' 이 부분은 처음 다음과 같이 표현했어야 했을 것이다. 
즐거움을 원인으로 즐거운 과보를 얻는다. (감진감래 ) 

그런데 선을 행하면 즐거운 과보를 얻는다는 내용은 
적어도 위 내용과는 의미가 다르다. 

좋음은 지금 당장 자신에게 이런 측면에서
좋음을 느끼는 경우도 좋음이다. 

그런데 적어도 선은 
자신도 좋고 남도 좋고 온 생명이 차별없고 제한없이 다 좋고 
지금도 좋고 나중도 좋고 오래오래 무한히 좋고 
이 측면도 좋고 저 측면도 좋고 두루두루 모든 측면이 좋은 상태나 
그런 상태를 향해 나아가고 
그런 상태를 얻어내는 원인과 관련되어 
선악을 평가하는 측면이다. 

그래서 좋음이 관련되기는 하지만, 단순한 좋음과는 다르다.
그리고 더욱이 극단적으로 다음 경우와는 더욱 다르다. 

예를 들어 
어떤 한 내용이 
자신에게는 '좋은데' 남에게 나쁘고 다른 생명 대부분에게 나쁘고 
지금은 '좋은데' 나중은 나쁘고 또 오래오래 무한히 나쁘고 
이 측면은 '좋은데' 그러나 다른 측면 대부분은 나쁜 상태이거나 
그리고 그런 상태를 향해 나아가고 
그런 상태를 얻어내는 원인이 되는 경우가 있다.

그리고 이런 경우와 앞의 경우는 대단히 서로 다르다. 
비록 '자신'의 '지금 당장' '이 측면'의 '좋음'을 기준으로 놓고 살피면
위 두 내용이 구분이 잘 안된다고 볼 수도 있지만,
이 두 내용은 대단히 다르다. 


그리고 현실에서 어떤 범죄인이 어떤 행위를 해서 감옥에 갇힌다는 경우는 
그 행위는 대부분 그 범죄를 행한 입장에서는 
대단히 좋음을 많이 준다고 보았기에 
그런 행위를 그 주체가 그렇게 행했다는 사정을 살필 수 있다. 

예를 들어 절도나 사기범이 무언가를 훔치고
상대를 속여 취하는 행위를 한다거나 
강간범이나 폭행범이 강간이나 폭행을 한다는 경우를 놓고 
이 사정을 살피면 마찬가지다. 

그런데 문제는 그 내용을 놓고
그 주체는 비록 그 상황에서 그것을 좋다고 보고 그렇게 열심히 행하지만, 
그 내용에 대해서 그 주체 이외 다른 주체나 
또 그 주체라고 해도 그 순간 이외 다른 순간을 함께 고려하거나 
또 그 측면 이외 다른 측면을 종합적으로 놓고 고려하면
사정이 그렇지 못하기에 그것을 문제로 지적하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선과 즐거움의 과보를 현실에서 관련 짓는 것은
앞과 같이 그 내용이나 성격이 서로 엉뚱하고 다른데
그러나 현실에서 이상하게
어떤 씨를 뿌리면 그에 따라 그와는 모습이나 내용이 다른 어떤 열매가
현실에서 반복해 달리 나타나는[이숙] 것처럼 
일정한 선을 행하면 그에 따라 즐거움의 과보를 받는 관계가 
무한한 기간에 걸쳐 그런 형태로 현실에서 나타난다는 관계를
그처럼 제시하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기본적으로 이와 관련해
선과 락, 악과 고의 개념이 어느 정도 관련되지만,
그 성격이 서로 다르다는 점부터 먼저 잘 이해할 필요가 있다. 

그런데 이것을 혼동하면 
이 내용은 일정한 즐거움을 얻다가
또 시간이 지나면 일정한 괴로움을 얻고 
이런 형태로 삶의 내용이 이어진다라고 단순하게 살피기 쉽다. 

그래서 고진감래 감진고래 이렇게 현실에서 표현하기도 하지만, 
선인락과 악인고과 이런 표현과는 조금 의미가 다른 점도 잘 이해해야 한다. 


한편 이들 내용을 통해 
선인악과나 악인고과나 그 두 내용이 서로 차별된다지만, 
결국 길게 보면 이 두 내용은 어차피 마찬가지라고 잘못된 견해를 취하기 쉽다. 

그래서 선인악과나 악인고과는
한번 고통을 받으면 뒤에 즐거움을 얻고 
또 한번 즐거움을 얻으면 그 뒤에 고통을 받는다는 고진감래 감진고래의 내용이나 
또는 조3모4 나 조4모3 의 관계처럼
아침에는 3 개 받고 저녁에는 4 개 받거나 
아침에 4 개 받고 저녁에 3 개 받는 것과 사정이 같아서 
이들은 모양은 다르지만 결과적으로 합계가 다 함께 7 이 되는 것이어서 
결국 이들은 마찬가지라고 쉽게 이해하기 쉽다. 

그런데 그 사정이 그렇지 않다는 것부터 
처음에 잘 이해해야 한다. 


우선 위와 같은 선인락과는 내용에서 
선을 행하는 것을 고진감래에서 고( 괴로움)와 혼동하는 경우가 많다. 

그 사정은 지금 당장 선을 행하는 것은 
그 주체가 당장 하고 싶어하는 내용과도 다르고 
그래서 자신에게 손해가 되고 힘만 들기에 괴로움을 주는 일이라고 여기면서 
이런 선한 행위는 곧 자신이 괴로움을 받는 행위인데
그런 선한 행위를 하면 그로 인해 반대로 나중에 즐거운 과보를 얻는다라는 의미로
이를 이해하는 경우다. 
그리고 그 반대는 이와 반대라고 이해하는 것이다. 

사정이 그렇지 않지만
그런데 이렇게 선인락과나 악인고과의 관계를 이해하면,
이들 관계는 결국
먼저 괴로움을 받고 나중에 즐거움을 돌려 받는 경우거나
먼저 즐거움을 얻고 나중에 괴로움을 돌려 받는 경우를 의미하는 것이어서 
결국은 서로 마찬가지가 아닌가 이렇게 생각하기 쉽다.

그래서 이를 먼저 살펴야 한다. 
우선 이를 한 단계만 놓고 보면 그럴 듯 해보인다. 

그런데 한 단계 두 단계 세 단계 같은 방식으로 나아가면 
한 쪽은 무량한 복덕을 주고 받는 관계로 나아가는 한편 
한 쪽은 그 반대가 된다. 

그것은 단순한 즐거움과 괴로움을 번갈아 받는 문제가 아니고 
선한 행위 - 즐거움 
악한 행위 - 괴로움 
이런 관계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런 형태로 한 단계 두 단계 세 단계 이렇게 나아가면 
한 쪽은 좋음과 즐거움을 무량하게 증폭시켜 얻는 방향이 되고
한 쪽은 반대로 나쁨과 고통을 무량하게 증폭시켜 얻는 방향이 된다. 
그래서 설령 처음에 선인낙과나 악인고과에서 선악을
즐거움이나 괴로움으로 잘못 이해하더라도, 
선인낙과는 한 번의 작은 괴로움 이후 - 점차 무량한 즐거움을 얻는 방향으로
그 내용이 증폭되게 되고 
악인고과는 한 번의 작은 즐거움에서 출발하지만, 
- 점차 무량한 괴로움을 받는 방향으로 
그 내용이 달리 증폭되어가는 차이가 있다. 

그것은 선인낙과 악인고과가 
단순히 고진감래 감진고래 이런 내용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래서 구별을 잘 해야 한다. 



조금 더 자세하게 보면 이는 다음 차이다. 

선인락과는 
한 주체가 좋음을 다른 주체에게 베푸는 형태다. 
그런 관계로 나중에 좋음을 돌려 받는 과보를 받게 된다는 의미다. 

그래서 이를 반복하면 점차 작은 좋음에서 무량한 좋음을 
주고 받는 상태가 된다. 

반대로 악인고과는 
한 주체가 자신의 좋음을 위해 다른 주체의 좋음을 침해하고 해치는 형태다. 
그런 관계로 나중에 그 자신도 나쁨을 돌려 받는 과보를 받게 된다는 의미다. 

그래서 이를 반복하면
점차 작은 나쁨에서 무량한 나쁨을 주고 받는 상태가 된다. 

이 둘이 이렇게 차이가 극심한데 
첫 단계에서 이 두 내용이 서로 결과적으로 마찬가지라고 잘못 이해하는 그 사정은 
다음 부분을 놓고 그 주체가 착각을 일으키기 때문이다. 

즉 처음 한 주체가 좋음을 베풀며 선을 행하는 것은 
알고보면 그 주체의 좋음이 줄어들어 손해를 보는 것이다. => 그래서 나쁨이다. 
이렇게 잘못 이해한다. 
그리고 처음 한 주체가 다른 주체를 해치며 나쁨을 가하는 것은 
알고보면 그 주체가 이익을 얻고 좋음을 얻는 것이다. => 그래서 좋음이다. 
이렇게 잘못 이해하는 것이다. 

그래서 그런 입장에서는 
무량한 좋음을 주고 받는 상태를 놓고 
어떤 주체가 무량한 좋음을 베푸니 그것이 실질적으로 무량한 나쁨이다. 

또 반대로 무량한 나쁨을 주고 받는 상태를 놓고 
다른 상대가 무량한 나쁨을 받으니
그래서 그것이 자신에게는 무량한 좋음이다.
그래서 결과적으로 같다. 이렇게 이해하는 입장이다. 


그래서 과연 그런가를 놓고 잘 생각해야 한다. 
쉽게 생각해서 
자신이 다른 이에게 10 억을 주고 자신은 또 좋은 집을 얻었다는 상태가 하나 있다. 

그런데  
자신이 다른 이를 부상을 입히는 한편 그로 인해 자신의 집은 불탔다. 이런 상태가 또 하나 있다. 

그런데 이 둘이 분명 다른데
앞과 같이 이를 놓고 이해하는 입장은
처음 경우는 그 주체가 10 억을 주어서 손해를 받고 그런 집을 얻었기에 어차피 같고 
뒤의 경우는 자신의 집이 불타서 손해를 받았지만, 상대도 그만한 부상을 입어서 그래서 좋다. 그래서 같다. 
이렇게 이상하게 이해해서 이 둘이 서로 어차피 같다고 이해하려는 입장인 것이다. 

그런데 한번 이렇게 잘못 이해하면
이를 바탕으로 점차 무량하게 그 방향으로 잘못 나아가게 된다. 

그리고 나서 결국 그런 상태에서
자신도 그로 인해 무간 지옥에 갇혀 고통을 극심하게 장구하게 받지만, 
자신의 상대도 자신처럼 고통을 많이 받았다. 그래서 좋다. 그래서 마찬가지다.
이렇게 여기면서 고통을 무량하게 증폭해 받아가는 상태에 처하는 것을 의미한다. 

이는 어떻게 보면 전쟁상황과 비슷하다. 
자신의 집이 폭격을 받고 자신이 부상을 당했는데
그러나 자신을 공격을 한 적도 부상을 당하고 집이 불탔다.
그래서 서로 마찬가지로 고통을 받는데
이 상황에서 상대도 자신이 고통을 받는 만큼 고통을 받으니 그래서 좋다.
그래서 서로 좋음을 주고 받는 것과 알고보면 마찬가지다.
이렇게 이상하게 같다고 여기는 입장이다. 

그래서 결국 이런 방향으로 임하면 
이로 인해 무량하고 극심한 고통을 받는 상태에 처하면서도
이것을 놓고 이 상태가
그와 정반대로 무량한 좋음을 얻는 상태와
서로 마찬가지라고 인정하려는 입장이 되는 것이다. 
 

그런데 설령 그렇다고 한다해도 
그것이 그런 사정으로 다 마찬가지라고 본다면 
그런 바탕에서 왜 첫 경우처럼 무량하게 서로 좋음을 얻는 방향으로
굳이 향해 가지 않는가는 의문이다. 

그런데 앞과 같이 이를 잘못 이해하는 입장에서
그런 방향으로 거의 대부분 이끌려 가게 되는 사정이 있다. 

그것은 각 주체가 지금 당장 자신에게 좋은 내용을 
다른 것보다 우선하면서 그것을 매 순간 먼저 선택하는 경향때문에 발생한다.

즉 각 주체는 어차피 마찬가지라고 이 둘을 보더라도 
매 순간 감성적으로 자신에게 당장 좋음을 준다고 보는 것을 우선적으로 취하는데
그렇게 매순간 그런 내용을 우선하는 경향을 갖고
무한한 기간에 걸쳐 계속 임하기에
그 둘이 마찬가지라고 여기면서도
평생에 걸쳐 뒤 형태만을 선택하고 
첫 경우를 선택하는 경우는 대단히 드물게 된다. 


그리고 그것이 현실에 임하는 대부분이 
어차피 극락과 지옥이 다 마찬가지라고 하면서 
극락에 임하는 경우는 극히 드물고 
거의 대부분 유독 3 악도에만 들어가 임하게 되는 사정이기도 하다. 

즉 사실은 이것과 저것은 차별이 심한데
그는 어차피 이것이나 저것이나 마찬가지라고 잘못 여기는 한편
그런 바탕에서도
지금 당장 매 순간 우선해 선택하는 내용이 무언가 하는 부분에서 
그 내용이 당장 자신에게 좋음을 주는 내용을 늘 우선해 취하기에
그렇게 되는 것이다. 


그런데 사실 이 둘은 어차피 마찬가지인 듯 보이지만, 
사실은 극단적으로 다르다. 

하나는 좋음을 무량하게 증폭시키면서 주고 받으면서
복락을 무량하게 누리는 하늘의 상태이고 

하나는 나쁨을 무량하게 증폭시키면서 주고 받으면서
생사고통을 극심하게 받는 3 악도의 상태인 것이다. 


이를 놓고 그 전후관계를 살피면
결과적으로 마찬가지라고 잘못 이해할 수 있지만,
매 한 순간 한 순간 취하는 그 하나하나 행위의 의미부터 다르고 
또 그로 인해 각 주체가 받는 과보나 처하는 세계나 그 상태도
극단적으로 다른 것이다. 

쉽게 이를 현실에서 이해하면
하나는 평안하고 좋은 집에서 행복하게 지내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불타는 집에서 고통을 받는 상태로 서로 차이가 심한데
그것이 다른 불타고 부상당해서 자신이 좋다고 여기기에 마찬가지라고 하면서
이거싱 서로 같다고 고집하고 상태인 것이다. 

그리고 매순간 각 주체가 우선시해 취하는 이런 방향의 차이가
차별없이 공한 실상을 바탕으로 한 가운데 
무간 지옥과 극락의 차별을 현실에 나타나게 하는 근본 사정이기도 하다. 





그리고 그렇게 되는 사정을 좀더 구체적으로 살피면  
욕계에 처한 중생이 다 일란성 쌍동이와 같은 상태로 
각 주체가 거의 엇비슷하게 좋고 나쁨에 대해 반응하는 가운데 
각 주체간에 가해와 피해를 주고 받으면서
서로 업의 장애로 얽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살피면 다음과 같다. 
배가 고플 때 대부분 음식을 먹고 싶어한다. 
어느 생명이나 이 사정이 다르지 않다.

그리고 모든 생명이 배가 고파
다른 생명을 잡아 먹고 그 배고픔을 해결하고자 임한다고 가정해보자. 

이 때 한 주체가 배가 부르면 
다른 주체는 죽음을 당하게 된다.
각 주체가 좋음을 추구하고 성취하고자 하는 현실에서 
현실 내용은 하나인데 각 주체별로 피해를 본 입장과
피해를 가한 입장이 나뉘는 한편 
이런 바탕에서 업의 장애로 얽히게 된다.

마치 공이 날라가는 상황은 하나인데 
공을 던지는 입장은 이를 던졌다고 여기고 
공 입장에서는 던져졌다고 여기는 것과 마찬가지다. 

그리고 수많은 주체간에 장기간에 걸쳐 다양한 측면에서
이런 가해 피해 관계가 중첩되면서 
결국 각 주체를 생사고통에 묶이게 하는 '업의 장애'를 형성하게 되고 
그래서 각 주체가 그런 생사의 묶임에서 벗어나오지 못하게 된다. 

불교에서 업감연기라는 표현으로 
어떤 주체가 대하는 세상이 

왜 그런 형태가 되는가에 대해 
그가 행한 업 때문이라고 제시한다. 

현실 세계에 왜 바람직하지 않은 지옥이
왜 굳이 그렇게 있게 되는가에 대한 설명도 이와 마찬가지다. 

하나의 상황에서 각 주체마다 좋음과 나쁨을 엇갈려 받는 가운데
어떤 한 주체가 무량하게 복락을 누리고 성취하는 상태는 
반대로 다른 주체가 무량한 고통을 받는 지옥에 처하는 상태가 된다. 
이렇게 그 사정을 종합적으로 헤아려야 한다. 


이 사정을 쉽게 이해해보자. 

무법자 영화에서 보듯, 
다음과 같이 계를 지키지 않으며
제멋대로 행한다고 해보자.

예를 들어 무언가 좋은 것이 있을 때 
이를 대단히 집착하며 아끼고 
필요한 이에게 베풀지 않는다. 

그리고 반대로 무언가 좋음을 얻기 위해  
다른 생명이 집착하는 좋음을 함부로 침해한다. 
예를 들어 무조건 상대를 살해해
상대가 지극히 집착하고 대하는 신체를 자신의 음식으로 취하거나
기타 좋음을 빼앗아 취한다. 

또 반대로 조금만 상대가 불쾌나 고통을 주면
이를 평안히 참지 않고 곧바로 분노를 일으키고
상대를 해친다. 


그래서 어떤 주체가 그 자신의 좋음을 위해 
매 순간 이런 형태로 막무가내로 행하는데
다른 주체는 어떤 힘이나 지혜나 실력의 극심한 차이 때문에 
그것을 전혀 막지 못하고 방치할 도리 밖에 없다고 가정해보자. 

이 경우 그처럼 계를 지키지 않고 행하는 입장에서 보면 
그런 상태가 그에게 최고 좋음을 주는 상태라고 여기게 된다. 

그런데 그 주체외 다른 입장에서는 
그 상태가 가장 고통을 받는 지옥과 같은 상태라고 여기게 된다. 

노예를 함부로 부리는 왕과 노예가 하나의 상황을 놓고 
서로 어떻게 여기게 되는가를 놓고 이해하면 쉽다. 

그런데 반대로 어떤 주체가 이런 상태에서
좋음을 얻고 임하려면 

앞처럼 제멋대로 행하는 무법자는 그러 좋음을 얻는데 
더 이상 장애가 되지 않도록 
감옥에서 갇혀 오래 장구하게 지내야 한다고 보게 된다. 



욕계의 현실을 사실은 이렇다. 

예를 들어 계를 지키고 선업을 열심히 정진해 성취하면 
하늘의 상태에 이르게 되는데 
그런 주체가 하늘에서 장구하게 평안하게 복락을 누리고 잘 지내려면 
반대로 그와 동등한 상태이면서 
계를 무시하고 매번 제멋대로 행하는 주체들은 
그 만큼 지옥에 갇혀야 그것이 비로소 가능하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이것이 곧 
경전이나 논서에서 각 지옥에서 고통을 받는 기간이 
각 하늘이 복락을 누리는 기간과 상응해 비례하여 제시되는
사정이기도 한 것이다. 


그리고 이는 인간세상을 놓고 생각해도 쉽다. 

예를 들어 다음을 가정해보자. 
어떤 이가 공원에서 의자에 앉아 핸드폰으로 전화를 걸고 있는데 
어떤 무법자가 갑자기 나타났다. 
그런데 그가 자신에게 말하길 
그 공원 의자는 본래 자신의 것이니 일어나고 
자신의 허락없이 그 의자에 함부로 앉은 데 대해
무릎을 꿇고 잘못을 빌고 
사용료와 손해배상료를 자신에게 내라.
그런 의미에서 일단 지금 몸에 지니고 있는  현금을 모두 내야 한다. 
이렇게 요구하는 한편 핸드폰도 빼앗는다. 

그리고 나서 이것으로는 부족하니까
당신 집을 자신이 차지해야 겠다.
그래도 여전히 부족하니 더 받아야 하는데 
받아낼 때까지 당신은 저곳에 갇혀서 열심히 일을 해야하고
그 동안 당신의 부인과 아들이나 딸은 감금해 놓겠다. 
그래도 제대도 돈을 내지 않으면 우선 가족들의 장기를 꺼내서 팔고 
그래도 부족하면 당신의 장기도 빼내겠다.

그런 형태로 막무가내다. 
상황이 이런데도 상대가 자신과는 달리 악당 수퍼맨과 같이
대단히 우월한 상태여서 자신의 힘으로는 도저히 막을 도리가 없다. 


그런데 욕계의 현실을 사실은 이렇다. 
이럴 때 그 무법자 입장에서는 공원의 빈 의자를 하나 놓고 
그 의자에 앉는 이가 나타날 때마다
그렇게 모든 것을 마음대로 취하는데 아무런 장애가 없다면 
그것이 제일 좋은 것이다. 

이 상황이 현실에서
인간이 낚시를 하는 낚시터 상황이나
또는 축사 상황이나 사실은 비슷하다. 

그런데 여하튼 현실에서 이런 무법자가 돌아다니는데도  
이것을 저지하지 못하면 
그 무법자가 그렇게 활동하는 구역은
그 무법자 이외의 사람들에게는 지옥 상황인 것이다. 

그리고 잘 생각해보면 지금 자신이 살아가는 이 곳이
한 때는 그렇게 운영되었다는 점도 잘 떠올려야 한다. 
일단 그렇게 되면 그것은 지옥 상황인 것이고 곤란하다. 

그래서 사회가 평온하고 행복하려면 
일단 앞과 같은 자세를 취하고 현실에 임하던 이들이 
그 자세를 일정하게 수정하거나 
그것이 잘 안 되면 그 자세를 교정할 때까지 
일정하게 제한된 영역에서 갇혀서 지내야 한다고 보게 된다. 

물론 이 경우 어떤 이가
이런 무법자로부터 피해를 이미 받은 경우는
단순히 그렇게 갇혀 지내야 할 뿐 아니라, 
받은 피해에 상응한 고통을 받아나가야 마땅하다고까지 보게 될 것이다. 

그런데 일단 인간 세상에서는 그런 사정으로 
일정한 감옥이 시설되고 운영된다면 
그 감옥에 지내는 기간도 역시 인간의 평균 수명에 준해 정해진다고 볼 수 있다. 

사정이 이렇기에 
욕계에서 일정한 선업을 행해 복락을 누리는 중생이 
하늘에서 일정하게 복락을 누리면서 임하려면 
그와 반대되는 방향으로 계율을 어기고 함부로 행하는 중생은 
상대적으로 그런 주체들이 복락을 누리는 그 정도와 그 기간에 비례해서 
지옥에 갇혀 고통을 받으면서 지내야 하는 상태가 되는 것이다. 

결국 욕계의 현실에 바람직하지 않은 
축생 아귀 지옥과 같은 3 악도가
그렇게 나타나 존재하는 사정은 
사실은 각 중생이 그렇게 좋음을 엇갈려 추구하는 가운데
업의 장애로 서로 얽히고 묶여 있기 때문이고
그래서 이런 사정을 업감연기의 형태로 제시하게 되는 것이다.









● 현실에서 생사를 벗어나는 수행으로 진입하게 되는 기본 사정 

그런데 여하튼 이런 현실에서
고진감래 감진고래의 사정과 함께 
선인낙과 악인고과의 관계를 제시받게 되면 

각 주체는 생사현실 안에서 
이왕이면 좋음과 수익은 가장 크게 얻고자 하면서
그에 들이는 나쁨과 비용은 가장 적게 들이고자 

노력하고 자세를 취하게 되기 마련이다. 




그런데 어떤 주체가 
생사를 벗어나는 수행에는  
어떤 계기로 진입해 들어가게 되는가
이것을 처음에 기본적으로 살펴야 한다.

수행의 출발점은 앞에 제시한 일반적 입장과 크게 다르지 않다. 

즉, 생사현실에서 받게 될 고통은 극히 적도록 줄이거나 아예 제거하고
반대로 얻는 좋음은 극대화하자. 
이런 입장에서 수행을 시작하는 것은 다르지 않다. 


그런데 일반적 입장과 수행자의 입장을 
극단적으로 달라지게 하는 중요한 요인이 따로 있다. 


우선 단멸관과 관련해 
어떤 주체가 이런 좋음을 얻고자 하는 과정에서
그런 좋음을 얻고자 하는 주체가 자신의 삶과 관련해 고려해야 할 기간이나
세계의 형태를 어떻게 잡는가 하는 부분이 첫 문제다. 

두번째는 그런 생사고통을 발생시키는
근본원인을 무엇으로 보는가 하는 문제와 관련된다. 


이는 다음 내용이다.

처음 유치원에 가기 싫어하는 유치원생이 
그냥 하루 종일 아이스크림만 먹고 놀고 싶어할 때 
만일 그 유치원생이 단 하루만 살고 다음날 죽어 없어질 경우라면 
사실은 그 유치원생의 입장이 맞다고 보아야 한다. 
그런데 사정이 그렇지 않다면 그렇지 않다. 

그런데, 생사고통을 해결하는 문제에서 
한 주체가 그런 생사고통을 문제삼고 고려에 넣어야 할 기간은 
일반적으로 보는 대략 100년 200 년 또는 1000 년 이 정도의 기간이 아니고 
무시무종인 상태의 무량한 기간을 놓고 고려해야 하는 문제가 처음에 제시된다.

일반적으로 이런 문제를 자신이 이번 생에 태어나서 죽음을 맞이하는 
한 100 년 정도로 보고 그 정도 범위에서만 손익관계를 잘 따져 임하면 
된다고 보는 한편 
자신이 죽은 이후에는 자신과 관련된 것은 없다고 보는 입장을 
단멸관이라고 한다. 

그런데 그것은 현실에서 자신 스스로 자신의 정체를 
제대로 보지 못하고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에 일으키는 망집현상과 관련된다. 
만일 그런 입장이 맞다면 
현실에서 한 사람이 초등학생에서 어른이 될 때 
그 초등학생 시절 당시 그 초등학생이 자신이라고 본 정신적 육체적 내용은 
이미 모두 사라져서 매장되고 화장된 상태와 차이가 없다고 보아야 한다. 

그런데 그 어른이 된 이는
그 초등학생이 당시 스스로 자신이라고 본 그런 내용들이
어느 순간 다 사라져 없어졌다고 해서 그것을 문제삼지도 않을 뿐 아니라, 
또 한편 그 어른은 어른대로 지금 자신이라고 보는 내용을 붙들고 
그와 똑같은 형태로 그런 내용이 자신이라고 여기는 한편 
또 한편 그런 자신이 없어지는 시점까지만 고려하면 된다고
단멸관을 취하면서 임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도  자신은 한편 그런 자신이 
그런 초등학생의 연장선임을 인정한다. 
그래서 현실에서 이런 사정만 잘 이해하면서 
자신의 정체에 대해 깊게 살피면 
본 사정이 그렇지 않다는 것을 이해할 수 있다. 

즉 어른이 그 시점에서 스스로 자신이라고 여기면서 대하는 내용도 
그 사정이 마찬가지여서 자신이 죽음이라는 현실과 관련해 
그런 내용이 다 사라진다고 해도 
자신과 관련된 내용이 완전히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는 사정을 
먼저 잘 이해해야 하는 것이다. 

지금 자신이라고 보는 내용이 죽어 사라진다고 해서 
그것으로 모든 것이 끝이라고 보는 것은 
이 상황에서 스스로 자신의 정체에 대해서 잘못 보기에 
자신과 관련해 고려해야 할 기간 자체도
그렇게 단멸관을 취하면서 잘못 이해한다고 볼 수 있다. 



또 그런 가운데 한 주체가 고려해야 하는 세계의 종류도 
단순히 욕계 외에도 색계 무색계까지 함께 고려해야 한다. 


이렇게 이 문제를 살피는 기본 전제가 달라진다는 것을 
고려해야 한다. 


한편 생사고통과 그런 생사고통을 겪는 주체의 정체를 
살피면 다음 결론을 얻게 된다. 
이것이 수행자의 입장을 일반 입장과 크게 달라지게 하는 요소가 된다 .

우선 본래 현실에 그런 생사고통이나
그런 생사고통을 받는 주체 자체를 얻을 수 없다.

그런데 그런 생사고통을 받는 것은
결국 그 주체가 근본 무명(어리석음)을 바탕으로
그런 내용이 실답게 있다고 망집을 일으켜서
현실에 임하기에 그런 것이다

따라서 생사고통을 벗어나려면 
그렇게 현실 세계와 자신의 정체를 올바로 관하지 못하는 
근본 무명(어리석음)과 
그에 바탕해 일으킨 망상분별과 집착 
그리고 그에 바탕해 행하는 업을 
제거해야 한다고 제시하게 된다. 

그래서 이런 사정으로 
현실에서 일반적으로 취하는 입장과 
수행자의 방향이 극단적으로 차이가 나게 된다. 

이는 다음의 차이를 의미한다. 

처음 악인고과의 입장은 
현실에서 겪는 고통은 
악업을 행해서 그런 고통을 겪는다라고 제시한 것이다.

그런데 위 입장은 그런 악업을 행하게 되는 것은 
그 주체가 기본적으로 근본 무명(어리석음)에 바탕해서 
현실에서 문제삼는 각 내용이나 그 생멸이나 생사를 
본래 얻을 수 없는데도
그런 내용이 실답다고 있다고 망상분별을 일으키고 
그런 좋음과 나쁨에 집착을 일으켜서
그렇게 업을 행하게 되는 것임을 제시한 것이다. 

그래서 악업 => 고통의 관계에 

근본무명(어리석음) 망상분별, 번뇌, 집착 =>  업 => 생사고통

이런 관계를 제시하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생사고통을 제거하고
생사고통의 묶임에서 벗어나려면 
근본적으로
자신과 세계의 본 정체나 그 관계에 대해 올바로 파악하고 
생사고통을 받는 근본 원인이 되는 무명(어리석음)과 망상분별 집착 증상을
제거해내지 않으면 곤란하다. 

이런 상태에서 이런 생사고통의 묶임에서 벗어나려면 
어떻게 보면 어떤 주체가 
현실에 그런 생사나 그런 고통을 받는 주체를 얻을 수 없다는 그 사정만 
잘 깨닫고 관하면 
그런 생사고통 묶임에서 곧바로 쉭하고 벗어나올 수 있을 것도 같은데
현실적으로 그렇게 되지 못하는 사정이 또 있다.

그것은 그 상황에서 그 주체는 
오랜 기간 이미 대단히 많은 업의 장애를 쌓아
이미 업의 장애에 묶여 있는 상태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생사의 묶임에서 벗어나려면
이런 사정도 사정대로 한편으로 잘 이해하고 관하는 한편 
기존에 자신이 쌓아 놓은 업의 장애를 제거하는 수행을
잘 성취하는 것이 필요하다.

그래서 이런 생사고통에서 벗어나고자
처음 수행에 진입해서 수행하는 과정에서는 
이런 사정을 먼저 이해하는 것이 필요하다. 


그리고 이 부분이
현실에서 일반적으로 좋음을 많이 얻기 위해 취하게 되는 방안과
그 방향이 크게 달라지는 주된 요인이 된다. 


그 이후는 조금 더 쉬고 살피기로 한다. 





mus0fl--Mireille Mathieu - Tout A Change Sous Le Soleil (With Francis Lai).lrc


연구주제가 늘 수행관련한 내용이기에
앞에서 살핀 주제들은 대단히 반복해 살폈던 것도 같은데
막상 다시 핵심을 추려 제시하려고 하니까.
각 부분이 매끄럽지 않고
내용만 길게 되어서 힘들다는 느낌을 받는다.

그런데 여하튼 현실에서 
합리적으로 최대 이익을 가장 적은 비용으로 쉽고 빨리 얻기 위해 
그 방안을 찾는다고 할 때 
그런 같은 바탕에서 
어떤 사정으로 왕이나 현명한 이들이 
생사를 벗어나는 수행에 진입하게 되는가.
그 계기가 되는 사정까지는 일단 살폈다. 


한 주체가 자신과 관련해 고려할 기간을 
처음에 한 100 년 1000 년 이렇게 본 것이 
대단히 좁고 짧고 얕은 관찰을 할 때의 입장이었는데 

이 문제에서 가장 기본적으로 문제삼는
자신이나 세계의 본 정체와 
그런 자신을 놓고 고려할 기간을 정확하게 살피면 
본 사정이 그렇지 않음을 이해하고 
처음의 입장이 잘못임을 이해하게 되므로 
처음 그런 방향이 수정되게 된다는 의미다. 

간단히 보면 그 사정이 그렇다. 

그런데 이후 수행과정에서도 
또 덧붙여 살펴야 할 내용이 많이 추가되는 사정이 있다. 

이것을 또 이어 살펴야 하는데 
우선 글이 너무 길어지니까 부담이 된다. 

그런데 알고보면 이것이 
현실에서 한 주체가 생사고통을 무한히 받아나가던 상태에서 
일단 그 상태를 벗어나고 
이후 무량한 복덕과 수명과 지혜를 구족한 가운데 
불국토를 장엄하고 중생을 제도하고 
성불하는 상태에 이르는 과정과 그 방안을 
전반적으로 핵심을 추려 제시하는 문제와 
사정이 같다는 것을 보게 된다. 

사실 간단한 내용이 아닌데 
이것을 압축해 제시하려고 하니 
힘이 든다. 

어떻게 보면 힘을 내서 
그 이후 내용을 또 제시해야 하는데 
이미 시간이 많이 지나 
다음 조각글이 올려져 있는 상황인데 
이들 내용은 한편으로는 과거에 적었던 조각글 내용을 찾아내서 
링크를 걸어 해결하고
다음 조각글로 넘어가고 싶은 생각도 많다. 

일단 그런 입장을 표명하면서 조금 더 쉬기로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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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설오왕경(佛說五王經) 


실역인명(失譯人名) 

권영대 번역 






♣01♧

또 한 왕이 말했다. 
“나는 언제나 

국왕의 자리를 유지하면서 

말에 안장을 하고 

옷치장하고 

누각과 전당에 오르며, 

관리와 인민들에게 

좌우로 둘러싸여 으스대며 

종치고 북 울리고 길에 드나들면, 

길 가던 사람들이 나를 우러러 보길 원합니다. 

이것이 나의 낙입니다.” 





♣02♧

한 왕은 말하였다. 
“나의 소원은 다릅니다. 

단정하기 짝이 없는 미남․미녀들과 어울려 

같이 놀며 마음껏 즐기는 것이 나의 낙입니다.” 




♣03♧

한 왕은 말하였다. 
“나의 낙은 좀 다릅니다. 

부모님이 늘 계시고 

형제와 처자들이 많으며 

잘 먹고 잘 입으며 

흰 거문고와 깨끗한 옷으로 함께 즐겨 노는 것입니다. 

이것이 나의 낙입니다.” 




♣04♧

“나의 즐거움은 

나지도 아니하고 죽지도 아니하며, 

괴롭지도 않고 번민하지도 않으며, 

주리지도 목마르지도 

춥지도 덥지도 않으며, 

존재하는 것과 죽는 것을 마음대로 하는 것, 

이것이 바로 나의 즐거움이오.” 



♣05♧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그대들은 잘 들으십시오. 

마땅히 그대들을 위해 설명하리다. 


사람이 세상에 살면 

항상 한량없는 온갖 괴로움이 몸을 핍박하는데, 

이제 대략 그대들을 위해 

8 가지 괴로움에 대해 설하리라. 


무엇이 8 가지 괴로움인가. 


나는 괴로움[생고生苦]․

늙는 괴로움[노고老苦]․

앓는 괴로움[병고病苦]․

죽는 괴로움[사고死苦]․

은혜하고 사랑하는 사람과 이별하는 괴로움[은애별고恩愛別苦]․

구하는 것을 얻지 못하는 괴로움[소구부득고所求不得苦]․

원수와 미운 이를 만나는 괴로움[원증회고怨憎會苦]․

근심하고 슬퍼하고 번민하는 괴로움[우비뇌고憂悲惱苦]이니, 

이것이 바로 8 가지 괴로움입니다. 



♣06♧

그때 다섯 왕과 뭇 신하들과 

그곳에 모인 수천만 사람들은 

모든 괴로움의 진리를 설명하심을 듣고 

마음이 열리고 뜻으로 깨달아 

곧 수다원(須陀洹)의 도를 얻고는 

모두 환희하며 돌아갔다. 


네 왕은 함께 보안왕에게 말하였다. 


“대왕은 참으로 큰 방편 보살입니다. 

저희들을 교화하고 인도하여 도과를 얻게 한 것은 

모두 대왕의 은혜입니다. 


저희들은 

본래 궁전을 보면 

마음의 정과 애착을 멀리 여읠 수 없었는데, 

지금 궁전을 보니 더러운 변소를 본 듯 

아무것도 애착할 것이 없습니다.” 


그들은 곧 왕위를 버리고 출가하였으며 

도를 위해 모든 공덕을 닦는 것에 

게을리 하지 아니하였다. 






◆vsul6160

◈Lab value 불기2562/11/22/목/13: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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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잡담 ♥망집을제거한 가치판단


요즘은 경전 내용을 직접 살피기에 
조각글에서 원래 이어서 살피던 주제를 살필 여유가 상대적으로 없다. 

그런데 내용을 살피면서 
다음 문제를 생각하게 된다. 
사실 잡담을 적는 것은 편한데 
경전을 살피는 공간에 그런 잡담을 적기는 좀 곤란하다고 보는 것이다. 

지금 생각하는 문제는 다음이다. 
경전 내용을 복사해 붙이고 각 부분을 살필 때 
그 부분에 바로 이어 붙이면 내용을 나중에 살피기가 힘들다. 

그러나 또 어떤 부분을 살피는지 찾아보기 힘들면 그것도 곤란하다. 
그래서 임시방편으로 
♣01♧ 이런 기호를 사용하기로 했는데 
곰곰히 생각하면 이 방식이 일정한 문제가 있다고 보게 된다. 

우선 이런 표시는 본인이 이들 페이지에서만 사용한다. 
그런데 본인도 일정한 내용을 적을 때 
이 내용을 오직 이런 형태로만 이 경전부분에 붙여서 
살피면 큰 관계가 없다고 보지만, 
그런데 이 내용을 다른 부분에 합쳐서 정리하고자 할 때는 
이렇게 기호를 사용하면 나중에는 
이 내용을 일일히 참조해 살피기가 어렵다는 문제점을 함께 
보게 된다. 

지금 살피는 불설오왕경은 대단히 짧은 경전이기에 
그나마 문제가 별로 없다고 보지만, 
예를 들어 대반야바라밀다경처럼 권수가 많은 경우는 
각 권마다 이런 형태로 붙이면 
나중에 이것을 다른 부분에서 사용하려면 
결국 그 부분이 무슨 부분인가를 파악하기가 힘들게 된다는 점을 
예상하게 된다. 

결국 이런 경우 대반야바라밀다경 제 503 권 ♣05♧ 이런 형태로 
표시하면서 개인적으로 그 부분을 참조해가야 하는 것이 된다. 
또 이 경우는 해당 부분이 그렇게 표시된 형태로 
또 만들어 두어야 한다는 문제가 있다. 

조금 욕심을 내면 이런 경우 ♣056♧ 이런 표시 자체를 
♣503-06♧ 이렇게 일일히 구분해 표시해야 되지 않을까 
생각하게 되는데 
아직 그런 문제로 혼동이 발생하는 것은 아니지만,
결국 이런 문제를 미리 염두에 두어야 한다고 보게 된다. 
각 경전은 경전 이름이나 번호를 통해 특정할 수 있지만, 
이 참조기호가 일정한 기능을 가지려면 
그런 형태까지 되어야 하는 것은 아닐까. 
이런 생각을 하게 되는 것이다. 
그런데 그렇게 하면 너무 복잡하게 표시하는 것은 또 아닌가. 

이런 생각을 하게 된다. 

이런 내용은 오직 개인적인 연구과정의 문제이고 
일종의 잡담인데 조금 적기가 편하다. 

현실에서 수행을 왜 해야 하는가. 
또 왜 그 수행도 무소득을 방편으로 열심히 정진해야 하는가. 
이런 주제를 놓고 
이 내용을 대단히 황당하고 공상적이기까지 하다고 여기면서 
일반적으로 이해하기 쉬운데 
이것을 살피려고 내용을 제시하는 것은 
조금은 골치아프다고 여기게 되는데 
위와 같은 잡담을 늘어 놓으면
물론 재미는 없지만,
조금 편하고 조금 낫다 이런 의미다. 

지금 아이디어가 떠올랐다. 
경전에 각 권이 나눠진 경우는 
그것을 쉽게 표기하는 방안을 연구하는 것이다. 
처음에 권수만 표시하면 이후는 그 표시를 그대로 받아서 
계속 일련번호를 붙여 나가는 방식이다. 

그리고 아직 권수가 1000 권인 경우는 없다고 보므로 
자리수는 세자리로 통일시키는 것이 나을 것 같다. 

그리고 이런 형태로 점차 각 경전 부분을 표시해가면서 
이에 관해 살핀 내용은 또 달리 백업하는 것이 
낫지 않을까 이런 생각도 해보게 된다. 

왜냐하면 아무리 연구 목적이라고 하지만, 
개인적으로 경전을 살필 때 상당히 복잡하게 된다고 보기 때문이다. 
이것도 쉬면서 조금 연구를 해보아야겠다. 







문서정보 ori http://buddhism007.tistory.com/5254#6160
sfed--불설오왕경_K0863_T0523.txt ☞실역인명(失譯人名)
sfd8--불교단상_2562_10.txt ☞◆vsul6160

http://kabc.dongguk.edu/Combine/Index?ccode=01&volcode=K0863001&isimg=1&isorg=1&iskor=1

http://kabc.dongguk.edu/Contents?ctype=01&dcode=K0863001001&tcode=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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