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숨을 마친 지 오래지 않아 니건 친자2)의 모든 제자들은 각각 서로 헐뜯으며 화합하지 않았고 각각 서로 헐뜯으며 화합하지 못할 일만 말했다.
그래서 서로 싸우고서 결박하며 서로 미워하고 다투었다.
“나는 이 법을 아는데 너는 모른다.
너는 어떤 법을 아느냐?
내가 아는 것 만 하냐?
나는 단정한데 너는 단정하지 않다.
나는 법에 맞는데 너는 맞지 않다.
너는 앞에 말해야 할 것을 뒤에 말하고 뒤에 말해야 할 것을 앞에 말한다.
나는 네게 이겼고 너는 나만 못하다.
내가 네게 일을 물으면 너는 대답하지 못하니 나는 이미 너를 항복받았다.
너는 다시 내게 물으라.
만일 네가 움직이면 나는 다시 너를 묶으리라.”
이렇게 서로 교만하고 그저 말싸움에서 이기려고만 하는데 아무도 그들을 꾸짖는 사람이 없었다.
그래서 속가에 남아 있던 니건 친자의 재가 제자들은 이 니건 친자의 모든 제자들을 싫어하고 걱정하였다.
무슨 까닭인가?
그들이 하는 말은 다 나쁜 법(法)과 율(律)로서 그것은 번뇌를 벗어나는 길이 아니요,
바른 깨달음으로 나아가는 것이 아니며,
또한 선서(善逝)의 말씀도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들은 서로를 파괴하여 머무를 곳이 없었고,
의지할 데가 없었으며,
그들이 존경하는 스승도 또한 여래ㆍ무소착ㆍ등정각이 아니었다.
이에 사미 주나는 여름 안거를 마치고 3개월을 지낸 뒤 기운 옷을 챙기고 발우를 가지고 사미촌 북쪽에 있는 시섭화림(尸攝和林)으로 갔다.
사미 주나는 존자 아난이 있는 곳으로 가서 그 발에 절하고 물러나 한쪽에 앉았다.
존자 아난이 물었다.
“현자 주나여,
어디서 오는 길이며 어디서 여름 안거를 지냈느냐?”
사미 주나는 대답하였다.
“존자 아난이시여,
저는 파화에서 오는 길이며 파화에서 여름 안거를 지냈습니다.
존자 아난이시여,
파화에는 친자라는 한 니건이 있었는데 그는 그곳에서 목숨을 마쳤습니다.
그가 목숨을 마친 지 오래지 않아 니건 친자의 모든 제자들은 각각 서로 헐뜯으며 화합하지 않았고 각각 서로 헐뜯으며 화합하지 못할 일에 대해서만 말했습니다.
그래서 서로 싸우고 서로 결박하며 서로 미워하고 서로 다투었습니다.
“나는 이 법을 아는데 너는 알지 못한다.
너는 어떤 법을 아느냐?
내가 아는 것만 하냐?
나는 단정한데 너는 단정하지 않다.
나는 법에 맞는데 너는 법에 맞지 않다.
너는 앞에 말해야 할 것을 뒤에 말하고,
뒤에 말해야 할 것을 앞에 말한다.
나는 네게 이겼고 너는 내게 졌다.
내가 네게 일을 물으면 너는 대답하지 못하니 나는 이미 너를 항복받았다.
너는 다시 내게 물으라.
만일 네가 움직이면 나는 너를 다시 묶으리라.”
이렇게 서로 교만만 부리고 그저 말싸움에서 이기려고만 하는데 아무도 그들을 꾸짖는 사람이 없습니다.
그래서 흰 옷을 입는 니건 친자의 재가 제자들은 모두 이 니건 친자의 모든 제자들을 싫어하고 걱정하고 있습니다.
왜냐 하면 그들이 하는 말은 다 나쁜 법과 율로서 그것은 번뇌를 벗어나는 길이 아니요 바른 깨달음으로 나아가는 것이 아니며 또한 선서의 말씀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서로를 파괴하여 머무를 곳이 없었고 의지할 데가 없었으며,
그들이 존경하는 스승도 또한 여래ㆍ무소착ㆍ등정각이 아니었습니다.”
존자 아난이 이 말을 듣고 곧 말하였다.
“현자 주나여,
이 이야기로 말미암아 부처님을 가서 뵙고 부처님께 여쭐 수 있으리라.
현자 주나여,
이제 함께 부처님께 나아가 세존께 이 일을 자세히 말씀드리자.
혹 이로 말미암아 부처님에게서 다른 법을 들을지도 모르겠구나.”
이에 존자 아난은 사미 주나와 함께 부처님께 나아가 부처님 발에 예배하였다.
존자 아난은 물러나 한쪽에 앉고 사미 주나도 물러나 한쪽에 앉았다.
존자 아난이 아뢰었다.
“세존이시여,
오늘 사미 주나는 저를 찾아와 제 발에 머리를 조아리고 한쪽에 앉았습니다.
저는 그에게 ‘현자 주나여,
너는 어디서 오는 길이며,
어디서 여름 안거를 지냈느냐?’고 물었습니다.
주나는 곧 저에게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존자 아난이시여,
저는 파화에서 오는 길이며 파화에서 여름 안거를 지냈습니다.
존자 아난이시여,
파화에는 친자라는 한 니건이 있었는데 그는 그곳에서 목숨을 마쳤습니다.
그가 목숨을 마친 지 오래지 않아 니건 친자의 모든 제자들은 각각 서로 헐뜯으며 화합하지 않았고 각각 서로 헐뜯으며 화합하지 못할 일만 말했습니다.
그래서 서로 싸우고 서로 결박하며 서로 미워하고 서로 다투었습니다.
〈나는 이 법을 아는데 너는 모른다.
너는 어떤 법을 아느냐?
내가 아는 것만 하냐?
나는 단정한데 너는 단정하지 않다.
나는 법에 맞는데 너는 법에 맞지 않다.
너는 앞에 말해야 할 것을 뒤에 말하고 뒤에 말해야 할 것을 앞에 말한다.
나는 네게 이겼고 너는 내게 졌다.
내가 네게 일을 물으면 너는 대답하지 못하니 나는 이미 너를 항복받았다.
너는 다시 내게 물으라.
만일 네가 움직이면 나는 다시 너를 묶으리라.〉
이렇게 서로 교만만 부리고 그저 말싸움에서 이기려고만 하는데 아무도 그들을 꾸짖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니건 친자의 재가 제자들은 모두 니건 친자의 모든 제자들을 싫어하고 걱정하였습니다.
왜냐 하면 그들이 하는 말은 나쁜 법과 율로서 그것은 번뇌를 벗어나는 길이 아니요,
바른 깨달음으로 나아가는 것이 아니며,
또한 선서의 말씀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서로를 파괴하여 머무를 곳이 없었고 의지할 데가 없었으며 그들이 존경하는 스승도 또한 여래ㆍ무소착ㆍ등정각이 아니었습니다.’
세존이시여,
저는 이 말을 듣자 놀랍고 두려워 온몸의 털이 곤두섰으며 세존께서 돌아가신 뒤에 어떤 비구라도 대중 가운데서 이런 싸움을 일으키지 않았으면 하고 걱정하였습니다.
왜냐 하면 이런 싸움은 많은 사람에게 이익 되지 않고 많은 사람에게 고통을 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도리도 아니요 이익도 아니며 또 안온과 쾌락도 아니요,
나아가 천상과 인간에 이르기까지 지극한 고통과 재앙을 일으킬 것입니다.
세존이시여,
저는 어떤 비구가 세존 앞에 앉아 지극한 마음으로 세존을 존경하고 선서를 잘 보호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세존이시여,
저는 그것을 보고 곧 이렇게 생각했습니다.
‘만일 이 비구가 세존께서 돌아가신 뒤에 대중 가운데서 이런 싸움을 일으키면 그 싸움은 많은 사람에게 이익 되지 않고 많은 사람에게 고통을 줄 것이다.
그것은 도리가 아니요 이익이 아니며 안온과 쾌락도 아니요 나아가 천상과 인간에 이르기까지 지극한 고통과 재앙을 일으킬 것이다.’”
이에 세존께서 물으셨다.
“아난아,
너는 대중 가운데에서 어떤 싸움이 있는 것을 보았기에 그 싸움은 많은 사람에게 이익 되지 못하고 많은 사람에게 고통을 주며 그것은 도리도 아니요 이익도 아니며 안온과 쾌락도 아니요 나아가 천상과 인간에 이르기까지 지극한 고통과 재앙을 일으키는 것이라고 하느냐?”
“세존이시여,
이른바 어떤 싸움은 증상계[增上戒],
증상심[憎上心],
증상관[增上觀]으로 인하여 대중 가운데서 생깁니다.
세존이시여,
이른바 이런 싸움은 많은 사람에게 유익하지 않고 많은 사람에게 고통을 주며 그것은 도리도 아니요 이익도 아니며 안온과 쾌락도 아니요 나아가 천상과 인간에 이르기까지 지극한 고통과 재앙을 일으킬 것입니다.”
■ 세존께서 말씀하셨다.
“아난아,
이른바 증상계ㆍ증상심ㆍ증상관으로 인한 그런 싸움은 매우 드물다.
아난아,
만일 어떤 싸움이 도를 인하고 도의 자취[道迹]를 인해서 대중 가운데서 생기면 아난아,
이른바 그런 싸움은 많은 사람에게 유익하지 못하고 많은 사람에게 고통을 주며 그것은 도리가 아니요 이익도 아니며 안온과 쾌락도 아니다.
■ 아난아,
너는 그 중에서 어떤 두 비구가 각기 다른 소견으로 싸움을 일으키는 것을 볼 것이다.
‘이것은 법이다,
이것은 법이 아니다,
이것은 율이다,
이것은 율이 아니다,
이것은 범하는 것이다,
이것은 범하는 것이 아니다,
가볍다,
무겁다,
참회해야 한다,
참회할 것이 아니다,
조심해야 한다,
조심할 것이 아니다,
남음이 있다,
남음이 없다,
일어난다,
일어나지 않는다.’
아난아,
너의 생각에는 어떠하냐?
4념처(念處)ㆍ4정단(正斷)ㆍ4여의족(如意足)ㆍ5근(根)ㆍ5력(力)ㆍ7각지(覺支)ㆍ8지성도(支聖道) 등 나의 법취를 스스로 알고 스스로 깨닫고 스스로 증득하겠는가?
아난아,
니건(尼揵) 친자는 사실 살운야(薩云若)3)가 아니면서 스스로 살운야라고 일컬었다.
아난아,
만일 니건 친자가 일체를 알고 일체를 보는 자라면 그는 제자들을 위하여 여섯 가지 싸움의 원인[六諍本]을 시설하여 그것을 듣고 그치게 하였을 것이니라.”
이에 존자 아난이 합장하고 부처님을 향해 아뢰었다.
“세존이시여,
지금이 바로 그 때입니다.
선서시여,
지금이 바로 그 때입니다.
■ 만일 세존께서 모든 비구들을 위해 여섯 가지 싸움의 원인[六諍本]을 말씀하신다면
모든 비구들은 세존에게서 그것을 듣고 잘 받아 가질 것입니다.”
세존께서 말씀하셨다.
“아난아,
자세히 듣고 잘 기억하라.
나는 너희들을 위해 자세히 분별하여 설명하리라.”
존자 아난이 아뢰었다.
“예, 분부대로 듣겠습니다.”
■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아난아, 혹 어떤 사람은 1 화를 잘 내어 [瞋惱]
2 원한을 맺는다. [結纏]
아난아, 사람이 화를 잘 내어 원한을 맺으면 그는 스승을 공경하지 않고
법을 보지 못하며
계를 지키지 않는 것이다.
그는 스승을 공경하지 않고 법을 보지 못하며 계를 지키지 않은 뒤에는
곧 대중 가운데서 이러한 싸움을 일으킨다.
이른바 이런 싸움은
많은 사람에게 유익하지 못하고
많은 사람에게 고통만 준다.
그것은 도리가 아니요
이익이 아니며
안온과 쾌락도 아니요
나아가 천상과 인간에 지극한 고통과 재앙을 일으킨다.
아난아,
이러한 싸움을 네가 안팎에서 보아 다하지 않거든
너는 그 싸움을 끊기 위해
빨리 방편을 구해서
지극히 부지런히 공부하여
바른 생각과 바른 지혜로 참고 견디어 물러나지 않게 하라.
아난아,
마치 어떤 사람이 불 때문에 머리가 타고 옷이 타면 빨리 방편을 구해 머리를 구하고 옷을 구하는 것과 같다.
아난아,
이와 같이 만일 네가 싸움을 안팎에서 보아 다하지 않았거든 그 싸움을 끊기 위해 너는 빨리 방편을 구해서 지극히 부지런히 공부하여 바른 생각과 지혜로 참고 견디어 물러나지 않게 하라.
아난아,
네가 다시 안팎에서 보아 이러한 싸움이 다 없어졌거든
너는 그 싸움을 다시 일어나지 않게 하기 위해
그들의 마음을 거듭 보호하며 언제나 방일하지 말라.
그렇게 하면 너는 그 싸움의 뿌리를 끊게 되리라.
아난아,
비유하면 마치 어떤 사람이 불 때문에 머리가 타고 옷이 타면 빨리 방편을 써서 머리를 구하고 옷을 구하는 것과 같다.
이와 같이 너는 싸움을 안팎에서 보아 다 없어졌거든 너는 그 싸움을 다시 일어나지 않게 하기 위해 그들의 마음을 거듭 보호하며 언제나 방일하지 말라.
그렇게 하면 너는 그 싸움의 뿌리를 끊게 되리라.
■ 이와 같이 3- 말 끊음[不語]ㆍ맺음[結]ㆍ 아낌[慳]ㆍ 질투[嫉]ㆍ아첨[諂]ㆍ 속임[誑]ㆍ 스스로 부끄러워하지 않음[無慚]ㆍ남에게 부끄러워하지 않음[無愧]ㆍ 나쁜 욕심[惡欲]ㆍ 삿된 소견[邪見] 등 이런 것들은 다 나쁜 성질로서 제어하기 어렵다.
아난아,
만일 어떤 사람이 이러한 나쁜 욕심과 삿된 소견으로 나쁜 성질들을 제어하지 못하면
4 그는 스승을 존경하지 않고, [不敬師]
5 법을 보지 못하며 [不見法] 6 계를 지키지 못한다. [不護戒] ★★
그는 스승을 존경하지 않고 법을 보지 못하며 계를 지키지 못한 뒤에는 곧 대중 가운데서 이러한 싸움을 일으키나니 이러한 싸움은 많은 사람에게 유익하지 못하고 많은 사람에게 고통을 준다.
그것은 도리가 아니요 이익이 아니며 안온과 쾌락도 아니요 나아가 천상과 인간에 이르기까지 지극한 고통과 재앙만 일으키느니라.
■ 아난아,
네가 안팎에서 보아 이러한 싸움이 다하지 않았거든 이 싸움을 끊기 위해 너는 빨리 방편을 구해서 아주 부지런히 공부하여 바른 생각과 바른 지혜로 참고 견디어 물러나지 않게 하라.
아난아,
비유하면 마치 어떤 사람이 불 때문에 머리가 타고 옷이 타면 빨리 방편을 써서 머리를 구하고 옷을 구하는 것과 같다.
아난아,
이와 같이 너는 싸움을 안팎에서 보아 다하지 않았거든 그것을 끊기 위해 너는 빨리 방편을 구해 아주 열심히 공부하여 바른 생각과 바른 지혜로 참고 견디어 물러나지 않게 하라.
■ 아난아,
네가 안팎에서 보아 이러한 싸움이 다 없어졌거든 너는 그 싸움이 다시 일어나지 않게 하기 위해 그들의 마음을 거듭 보호하며 언제나 방일하지 말라.
그렇게 하면 너는 그 싸움의 뿌리를 끊게 되리라.
아난아,
마치 어떤 사람이 불 때문에 머리가 타고 옷이 타면 빨리 방편을 써서 머리를 구하고 옷을 구하는 것과 같다.
이와 같이 네가 안팎에서 보아 싸움이 다 없어졌거든 그것을 다시 일어나지 않게 하기 위해 그들의 마음을 거듭 보호하며 언제나 방일하지 말라.
그렇게 하면 너는 그 싸움의 뿌리를 끊게 되리라.
■ 다시 아난아,
싸움을 그치게 하는 일곱 가지 방법[七止諍] 있다.
첫째는 면전에서 싸움을 그치게 하는 율[面前止諍律]을 주는 것이요,
둘째는 기억하고 있는 것을 말해 주어 싸움을 그치게 하는 율[憶止諍律]을 주는 것이며,
셋째는 제정신일 때 가르쳐 싸움을 그치게 하는 율[不癡止諍律]을 주는 것이요,
넷째는 스스로 잘못을 드러내게 하여 싸움을 그치게 하는 율[自發露止諍律]을 주는 것이며,
다섯째는 그대라 하며 죄를 추궁하여 싸움을 그치게 하는 율[君止諍律]을 주는 것이요,
여섯째는 여기 저기 찾아다니며 의견을 물어 싸움을 그치게 하는 율[展轉止諍律]을 주는 것이며,
일곱째는 똥 닦은 걸레를 버리듯 하여 싸움을 그치게 하는 율[如棄糞掃止諍律]을 주는 것이다.
아난아,
어떤 것이 ‘면전에서 싸움을 그치게 하는 율’을 주는 것이며,
‘면전에서 싸움을 그치게 하는 율’을 의지하여 어떻게 그 싸움을 끊는가?
■ 아난아,
한 사람이 한 사람을
가르치고 나무래서 법률로써 보호하며 스승처럼 가르쳐 면전에서 기뻐하게 한다.
■ 또 한 사람이 두 사람, 한 사람이 많은 사람,
한 사람이 여러 사람을
가르치고 나무래서 법률로써 보호하며 스승처럼 가르쳐 면전에서 기뻐하게 한다.
두 사람이 두 사람을
가르치고 나무래서 법률로써 보호하며 스승처럼 가르쳐 면전에서 기뻐하게 한다.
또 두 사람이 많은 사람,
두 사람이 여러 사람,
두 사람이 한 사람을
가르치고 나무래서 법률로써 보호하며 스승처럼 가르쳐 면전에서 기뻐하게 한다.
많은 사람이 많은 사람을
가르치고 나무래서 법률로써 보호하며 스승처럼 가르쳐 면전에서 기뻐하게 한다.
또 많은 사람이 여러 사람,
많은 사람이 한 사람,
많은 사람이 두 사람을
가르치고 나무래서 법률로써 보호하며 스승처럼 가르쳐 면전에서 기뻐하게 한다.
■ 여러 사람이 여러 사람을 가르치고 나무래서 법률로써 보호하며 스승처럼 가르쳐 면전에서 기뻐하게 한다.
■ 또 여러 사람이 한 사람,
여러 사람이 두 사람,
여러 사람이 많은 사람을 가르치고 나무래서 법률로써 보호하며 스승처럼 가르쳐 면전에서 기뻐하게 한다.
아난아, 이것을 ‘면전에서 싸움을 그치게 하는 율’을 주는 것이라 하며
이렇게 ‘면전에서 싸움을 그치게 하는 율’을 의지하여 그 싸움을 끊는다.
아난아,
어떤 것이 ‘기억하고 있는 것을 말해 주어 싸움을 그치게 하는 율’을 주는 것이며,
‘기억하고 있는 것을 말해 주어 싸움을 그치게 하는 율’을 의지하여 어떻게 그 싸움을 끊는가?
■ 아난아, 만일 어떤 사람이 계를 범하고도 기억하지 못하면,
여러 비구들은 그것을 보고 그에게 이렇게 말해야 한다.
‘너는 일찍이 계를 범하고도 스스로 기억하지 못하는구나.
그대는 마땅히 여러 사람에게서 기억하고 있는 것을 말해 주는 율[憶律]을 구해야 할 것이다.
여러 사람들은 분명 그대에게 기억하고 있는 것을 말해 줄 것이다.’
아난아,
그래서 만일 어느 곳에 여러 사람들이 화합해서 모이면 그 비구는 거기 가서 가사 한 자락을 벗어 메고 신을 벗고 그 속에 들어가 나이와 덕이 많은 비구들 발에 머리를 조아리고 무릎 꿇고 앉아 합장하고는 이렇게 말해야 한다.
‘여러 스님들이여,
제가 일찍이 계를 범하고도 기억하지 못하는 것을 용서하십시오.
저는 지금부터 여러 스님들에게 기억하고 계신 것을 말씀해 주시는 율을 구합니다.
원컨대 여러 스님들께서는 화합하여 저에게 기억하고 계신 것을 말씀해 주십시오.’
아난아,
■ 대중들은 그 비구를 위해 화합하여 모였으니 마땅히 그에게 기억하고 있는 것을 말해 주는 율을 주고 법과 율로써 스승처럼 가르쳐서 면전에서 기뻐하게 한다.
아난아,
이것을 ‘기억하고 있는 것을 말해 주어 싸움을 그치게 하는 율’을 주는 것이라 하며,
이렇게 ‘기억하고 있는 것을 말해 주어 싸움을 그치게 하는 율’을 의지하여 그 싸움을 끊는다.
아난아,
어떤 것이 ‘제정신일 때 가르쳐 싸움을 그치게 하는 율’을 주는 것이며,
‘제정신일 때 가르쳐 싸움을 그치게 하는 율’을 의지하여 어떻게 그 싸움을 끊는가?
아난아,
■ 만일 어떤 사람이 미친 증세가 생겨 마음이 뒤집히고 미친 증세가 생겨 마음이 뒤집힌 뒤에 사문의 법이 아닌 부정한 짓을 많이 저지르고 법다운 행을 따르지 않으며 또 거슬리는 말을 했다고 하자.
뒷날 그가 본심으로 돌아왔을 때 모든 비구들은 그를 보고 말할 것이다.
‘너는 일찍이 미친 증세가 생겨 마음이 뒤집히고 미친 증세가 생겨 마음이 뒤집힌 뒤에는 사문의 법이 아닌 부정한 짓을 많이 저지르고 사문의 법다운 행을 따르지 않았으며 또 거슬리게 말하였다.
그대는 이제 본심으로 돌아왔다.
그대는 마땅히 여러 사람들에게서 제정신일 때 가르쳐 주는 율[不癡律]을 구해야 한다.
여러 사람들은 그대에게 제정신일 때 가르쳐 주는 율을 줄 것이다.’
아난아,
만일 어느 곳에 대중이 화합해서 모이면 그 비구는 거기 가서 가사 한 자락을 벗어 메고 신을 벗고 그 속에 들어가 나이와 덕이 많은 비구들 발에 머리를 조아리고 무릎 꿇고 앉아 합장하고 이렇게 말해야 한다.
‘여러 스님들이여,
저는 일찍이 미친 증세가 생겨 마음이 뒤집혔고 미친 증세가 생겨 마음이 뒤집힌 뒤에는 사문의 법이 아닌 부정한 짓을 많이 저지르고 법다운 행을 따르지 않았으며 거슬리는 말을 하였습니다.
저는 이제 본심으로 돌아왔습니다.
저는 지금 여러 스님들에게 제정신일 때 가르쳐 주는 율을 구합니다.
원컨대 여러 스님들께서는 화합하여 저에게 제정신일 때 가르쳐 주는 율을 주십시오.’
아난아,
대중들은 그 비구를 위해 화합하여 모였으니 마땅히 그에게 제정신일 때 가르쳐 율을 주고 법과 율로써 스승처럼 가르쳐 면전에서 기뻐하게 해야 한다.
아난아,
이것을 ‘제정신일 때 가르쳐 싸움을 그치게 하는 율’을 주는 것이라 하며 이렇게 ‘제정신일 때 가르쳐 싸움을 그치게 하는 율’을 의지하여 그 싸움을 끊는다.
아난아,
어떤 것이 ‘스스로 잘못을 드러내게 하여 싸움을 그치게 하는 율’을 주는 것이며,
‘스스로 잘못을 드러내게 하여 싸움을 그치게 하는 율’을 의지하여 어떻게 그 싸움을 끊는가?
■ 아난아,
만일 어떤 사람이 계를 범했는데 남이 혹은 말하고 혹은 말하지 않으며,
혹은 기억하고 혹은 기억하지 못한다고 하자.
그러면 아난아,
만일 어느 곳에 대중이 화합해서 모이면 그 비구는 거기 가서 가사 한 자락을 벗어 메고 신을 벗고 그 속에 들어가 나이와 덕이 많은 비구들 발에 머리를 조아리고 무릎 꿇고 앉아 합장하고 이렇게 말해야 한다.
‘여러 스님들이여,
제가 이러 이러한 계를 범했사온데 용서하십시오.
저는 이제 여러 큰스님들에게 지극한 마음으로 저의 죄를 드러내 스스로 말하고 보이며 감히 숨기지 않습니다.
보다 더 잘 보호하고 지켜 뒤에 다시는 범하지 않겠습니다.’
아난아,
모든 비구들은 마땅히 그에게 ‘그대는 스스로 범한 줄을 아는가?’고 물어야 하고,
그는 마땅히 ‘저는 진실로 제가 범한 줄을 압니다’라고 대답해야 한다.
대중들은 다시 그에게 ‘보다 더 잘 보호하고 지켜 다시는 범하지 말라’고 말할 것이다.
아난아,
이것을 ‘스스로 잘못을 드러내게 하여 싸움을 그치게 하는 율’을 주는 것이라 하며,
이렇게 ‘스스로 잘못을 드러내게 하여 싸움을 그치게 하는 율’을 의지하여 그 싸움을 끊는 것이다.
아난아,
어떤 것이 ‘그대라 하며 죄를 추궁하여 싸움을 그치게 하는 율’을 주는 것이며,
‘그대라 하며 죄를 추궁하여 싸움을 그치게 하는 율’을 의지하여 어떻게 그 싸움을 끊는가?
아난아,
■ 만일 어떤 사람이 수치를 알지 못하고 보고 들은 것을 뉘우치지 않으며 다른 사람들로부터 나쁜 욕심을 가진 것으로 의심받는다고 하자.
그는 계를 범한 뒤에 어떤 것을 안다고 일컫고 어떤 것을 보았다고 일컫는다.
어떤 것을 안다고 일컬은 뒤에는 어떤 것을 보았다고 일컫고,
어떤 것을 보았다고 일컬은 뒤에는 어떤 것을 안다고 일컫는다.
그는 또 대중 가운데서도 어떤 것을 안다고 일컫고 어떤 것을 보았다고 일컫는데,
어떤 것을 안다고 일컬은 뒤에는 어떤 것을 보았다고 일컫고,
어떤 것을 보았다고 일컬은 뒤에는 어떤 것을 안다고 일컫는다.
아난아,
■ 그 비구를 위하기 때문에 대중은 서로 화합해 모여 마땅히 다음과 같이 그대라고 부르며 죄를 추궁하는 율을 주어야 한다.
‘그대는 도가 없고,
그대는 이치가 없으며,
그대는 악하고 착하지 않다.
무슨 까닭인가?
이른바 그대는 계를 범한 뒤에 어떤 것을 안다고 일컫고 한곳을 보았다고 일컬었다.
어떤 것을 안다고 일컬은 뒤에는 어떤 것을 보았다고 일컫고,
어떤 것을 보았다고 일컬은 뒤에는 어떤 것을 안다고 일컬었다.
또 그대는 대중 가운데서도 어떤 것을 안다고 일컫고, 어떤 것을 보았다고 일컬었다.
어떤 것을 안다고 일컬은 뒤에는 어떤 것을 보았다고 일컬었고,
어떤 것을 보았다고 일컬은 뒤에는 어떤 것을 안다고 일컬었기 때문이다.’
아난아.
이것을 ‘그대라 하며 죄를 추궁하여 싸움을 그치게 하는 율’을 주는 것이라 하며,
이렇게 ‘그대라 하며 죄를 추궁하여 싸움을 그치게 하는 율’을 의지하여 그 싸움을 끊는다.
아난아,
어떤 것이 ‘여기 저기 찾아다니며 의견을 물어 싸움을 그치게 하는 율’을 주는 것이며,
‘여기 저기 찾아다니며 의견을 물어 싸움을 그치게 하는 율’을 의지하여 어떻게 그 싸움을 끊는가?
아난아,
■ 어떤 두 비구가 그 사이에 약간 뜻이 달라 싸움을 일으킨다고 하자.
‘이것은 법이다,
이것은 법이 아니다,
이것은 율이다,
이것은 율이 아니다,
이것은 범하는 것이다,
이것은 범하는 것이 아니다,
가볍다,
무겁다,
말해야 한다,
말할 것이 없다,
보호해야 한다,
보호할 것이 없다,
남음이 있다,
남음이 없다,
참회해야 한다,
참회할 것이 없다.’
아난아,
■ 그 비구들은 이 싸움을 외처(猥處)에서 그쳐야 한다.
만일 외처에서 그치면 이 싸움은 그쳤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만일 그것을 외처에서 그치지 못하면 이 싸움은 대중에게 알려야 한다.
만일 대중 속에서 그치면 이 싸움은 그쳤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만일 대중 속에서도 그치지 않으면 아난아,
근처에 머무는 이들 중에 만일 경을 가졌고 율을 가졌으며 모(母)4)를 가진 비구가 있거든 이 비구들은 마땅히 그리로 가서 이 싸우는 일에 대해 말해야 한다.
만일 그리로 가던 길에서 그치면 이 싸움은 그쳤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만일 그리로 가던 길에서도 그치지 않으면 이 싸움은 다시 대중을 향해 말해져야 한다.
만일 대중 앞에서 그치면 이 싸움은 그쳤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만일 대중 앞에서도 그치지 않는다고 하자.
아난아,
만일 경을 가졌고,
율을 가졌으며,
모(母)를 가진 많은 도반과 조력자들이 있다면,
그 비구들은 마땅히 이 싸움을 그치게 하고,
법과 율로써 스승처럼 가르쳐 면전에서 기뻐하게 하여야 한다.
아난아,
이것을 ‘여기 저기 찾아다니며 의견을 물어 싸움을 그치게 하는 율’을 주는 것이라 하며,
이렇게 ‘여기 저기 찾아다니며 의견을 물어 싸움을 그치게 하는 율을 의지하여 그 싸움을 끊는다.
아난아,
어떤 것이 ‘똥 닦은 걸레를 버리듯 하여 싸움을 그치게 하는 율’을 주는 것이며,
‘똥 닦은 걸레를 버리듯 하여 싸움을 그치게 하는 율’을 의지하여 어떻게 그 싸움을 끊는가?
■ 아난아,
만일 어떤 절에서 모든 비구들이 서로 싸우고 미워하며 서로 다투면 아난아, 그 모든 비구들은 두 파로 갈라진다.
두 파로 갈라진 뒤에 만일 한 파 중에 나이와 덕이 가장 많은 비구거나 그 다음 비구,
또는 종주거나 그 다음이 있으면 아난아, 이 비구는 저 비구들에게 이렇게 말해야 한다.
‘여러분, 우리들이 도가 없고 이치가 없었던 것을 용서하십시오.
우리들은 악하고 착하지 못했습니다.
무슨 까닭인가?
우리들은 이 잘 말해진 법과 율에 대한 지극한 믿음으로 출가하여 집 없이 도를 배우는 자들입니다.
그런데 서로 싸우고 서로 미워하며 서로 다투고 있습니다.
여러분,
이 싸움으로 인해 우리들이 계를 범했거든 우리들 자신을 위하고 또 여러분들을 위해 투라자(偸羅柘)5)로 다스리고 가상응(家相應)으로 다스리십시오. 우리들은 이제 여러분에게 지극한 마음으로
스스로 잘못을 드러내어 스스로 말하고 스스로 보이며 감히 숨기지 않습니다.
보다 더 잘 보호하고 지켜 다시는 범하지 않겠습니다.’
■ 아난아,
만일 이 부파 중에서 응하는 비구가 아무도 없으면 아난아, 이 비구는 다시 저 둘째 부파로 가서
나이와 덕이 많은 비구의 발에 머리를 조아리고 무릎을 꿇고 앉아 합장하고 이렇게 말해야 한다.
‘여러 존자시여,
우리들이 도가 없고 이치가 없는 것을 용서하십시오.
우리들은 악하고 착하지 못합니다.
무슨 까닭인가?
우리들은 이 잘 말해진 법과 율에 대해 지극한 믿음으로 출가하여 집 없이 도를 배우는 자들입니다.
그런데 서로 싸우고 서로 미워하며 서로 다투고 있습니다.
여러분,
이 싸움으로 인해 우리들이 계를 범했거든 우리들 자신을 위하고 또 여러분들을 위해 투라자로 다스리고 가상응으로 다스리십시오.
이제 여러 장로들과 존자들께 지극한 마음으로 스스로 잘못을 드러내어 스스로 말하고 스스로 보이며 감히 숨기지 않습니다.
보다 더 잘 보호하고 지켜서 뒤에 다시는 범하지 않겠습니다.’
아난아,
그 비구들은 이 비구에게 ‘현자여, 그대는 스스로 계를 범한 줄을 아는가?’라고 말하고,
이 비구는 응당 ‘실로 스스로 계를 범한 줄을 압니다’라고 대답해야 한다.
■ 그러면 그 비구들은 마땅히 ‘보다 더 잘 보호하고 지켜서 다시는 범하지 말라’고 말해야 한다.
■ 둘째 부파도 또한 이와 같다.
아난아,
이것을 ‘똥 닦은 걸레를 버리듯 하여 싸움을 그치게 하는 율’을 주는 것이라 하며,
■ 이렇게 ‘똥 닦은 걸레를 버리듯 하여 싸움을 그치게 하는 율’을 의지하여 그 싸움을 그친다.
아난아,
나는 이제 너를 위해 6위로법(慰勞法)을 말하리니 자세히 듣고 잘 기억하라.”
존자 아난이 아뢰었다.
“예,
분부 받자와 경청하겠습니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 “어떤 것을 6위로법이라 하는가?
■ 사랑하는 몸의 업으로써 모든 범행인을 대하라.
이 법은 위로법으로서 사랑스런 법이요 즐거운 법이다.
이것은 남을 사랑하게 하고 존중하게 하며 받들게 하고 공경하게 하며 닦게 하고 거둬주게 하여 사문을 얻고 한 마음을 얻게 하며 정진을 얻고 열반을 얻게 한다.
■ 사랑하는 입의 업과 ■ 사랑하는 뜻의 업도 또한 그러하다.
■ 또 만일 법다이 얻은 법의 이익이 있고 자기가 얻은 밥이 발우에 있거든 이러한 이익을 나누어 모든 범행인들에게 베풀어라.
이 법은 위로법으로서 사랑스런 법이요 즐거운 법이다.
이것은 남을 사랑하게 하고 존중하게 하며 받들게 하고 공경하게 하며 닦게 하고 거둬주게 하여 사문을 얻고 한 마음을 얻게 하며 정진을 얻고 열반을 얻게 한다.
■ 또 만일 이지러지지 않고 뚫리지도 않으며,
더러움도 없고 검지도 않으며,
땅과 같아서 남을 따르지 않고 성인이 칭찬하는 바로서 완전하게 갖추어 잘 받아 가진 계가 있거든 이러한 계를 나누어 모든 범행인들에게 베풀어라.
이 법은 위로법으로서 사랑스런 법이요 즐거운 법이다.
이것은 남을 사랑하게 하고 존중하게 하며 받들게 하고 공경하게 하며 닦게 하고 거두어주게 하여 사문을 얻고 한 마음을 얻게 하며 정진을 얻고 열반을 얻게 한다.
■ 또 만일 생사를 벗어나는 거룩한 소견이 있어서 밝게 보고 깊이 통달하여 능히 바로 괴로움을 없앴거든 이러한 소견을 나누어 펴 모든 범행인들에게 베풀어라.
이 법은 위로법으로서 사랑스런 법이요 즐거운 법이다.
이것은 남을 사랑하게 하고 존중하게 하며 받들게 하고 공경하게 하며 닦게 하고 거두어 주게 하여 사문을 얻고 한 마음을 얻게 하며 정진을 얻고 열반을 얻게 한다.
아난아, 내가 말하는 6위로법이란 이 때문에 말한 것이다.
아난아,
■ 만일 너희들이 저 여섯 가지 싸움의 원인을 바로 끊고,
혹 대중 가운데서 싸움이 일어나더라도 이 싸움을 그치게 하는 일곱 가지 방법[七止諍]으로 ‘똥 닦은 걸레를 버리듯 하여 싸움을 그치게 하는 율’로써 그치게 하고,
다시 이 6위로법을 행하면 아난아,
너희들은 내가 세상을 떠난 뒤에도 함께 어울려 화합하고 기뻐하며 싸우지 않을 것이다.
한 마음을 같이 하고 한 가르침을 같이 하며 물과 젖이 하나로 합하듯 쾌락하게 노니는 것이 내가 세상에 있을 때와 같을 것이니라.”
부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시자 존자 아난과 모든 비구들은 부처님 말씀을 듣고 기뻐하며 받들어 행하였다.
이 주나경에 수록된 경문의 글자 수는 4, 230자이다.
197) 우바리경(優婆離經) 제6제5 후송
나는 이와 같이 들었다.
어느 때 부처님께서 첨파국(瞻波國)에 노니실 적에 항가(恒伽)못 기슭에 계셨다.
그 때 존자 우바리(優婆離)는 해질 무렵에 편안한 자리[燕坐:
참선하는 자리]에서 일어나 부처님 계신 곳으로 나아가 부처님 발에 머리를 조아리고 물러나 한쪽에 앉아 여쭈었다.
“세존이시여,
만일 비구들이 서로 화합해 살면서 다른 업을 짓고 다른 업을 말한다면 이것은 법다운 업이며, 율다운 업이 되겠습니까?”
세존께서는 대답하셨다.
“아니니라.
우바리여.”
“세존이시여,
만일 비구들이 서로 화합해 살면서 마땅히 ‘면전에서 가르치는 율[面前律]’을 주어야 할 자에게 ‘기억하고 있는 것을 말해 주는 율[憶律]’을 주고,
마땅히 ‘기억하고 있는 것을 말해 주는 율’을 주어야 할 자에게 ‘면전에서 가르치는 율’을 준다면,
이것은 법다운 업이며, 율다운 업이 되겠습니까?”
“아니니라.
우바리여.”
“세존이시여,
만일 비구들이 서로 화합해 살면서 마땅히 ‘기억하고 있는 것을 말해 주는 율’을 주어야 할 자에게 ‘제정신일 때 가르쳐 주는 율[不癡律]’을 주고,
‘제정신일 때 가르쳐 주는 율’을 주어야 할 자에게 ‘기억하고 있는 것을 말해 주는 율’을 준다면,
이것은 법다운 업이며, 율다운 업이 되겠습니까?”
“아니니라.
우바리여.”
“세존이시여,
만일 비구들이 서로 화합해 살면서 마땅히 ‘제정신일 때 가르쳐 주는 율’을 주어야 할 자에게 ‘스스로 잘못을 드러내게 하는 율[自發露律]’을 주고,
‘마땅히 잘못을 스스로 드러내게 하는 율’을 주어야 할 자에게 ‘제정신일 때 가르쳐 주는 율’을 준다면,
이것은 법다운 업이며 율다운 업이 되겠습니까?”
“아니니라.
우바리여.”
“세존이시여,
만일 비구들이 서로 화합해 살면서 마땅히 ‘스스로 잘못을 드러내게 하는 율’을 주어야 할 자에게 ‘그대라고 부르며 죄를 추궁하는 율[君律]’을 주고,
‘그대라고 부르며 죄를 추궁하는 율’을 주어야 할 자에게 ‘스스로 잘못을 드러내게 하는 율’을 준다면,
이것은 법다운 업이며 율다운 업이 되겠습니까?”
“아니니라.
우바리여.”
“세존이시여,
만일 비구들이 서로 화합해 살면서 마땅히 ‘그대라고 부르며 죄를 추궁하는 율’을 주어야 할 자를 꾸짖고,
마땅히 꾸짖어야 할 자에게 ‘그대라고 부르며 죄를 추궁하는 율’을 준다면,
이것은 법다운 업이며 율다운 업이 되겠습니까?”
“아니니라.
우바리여.”
“세존이시여,
만일 비구들이 서로 화합해 살면서 마땅히 꾸짖어야 할 자를 아래에 두고,
마땅히 아래에 두어야 할 자를 꾸짖는다면,
이것은 법다운 업이며 율다운 업이 되겠습니까?”
“아니니라.
우바리여.”
“세존이시여,
만일 비구들이 서로 화합해 살면서 마땅히 아래에 두어야 할 자를 위로 올리고,
마땅히 위로 올려야 할 자를 아래에 둔다면,
이것은 법다운 업이며 율다운 업이 되겠습니까?”
“아니니라,
우바리여.”
“세존이시여,
만일 비구들이 서로 화합해 살면서 마땅히 위로 올려야 할 자를 물리치고,
마땅히 물리쳐야 할 자를 위로 올린다면,
이것은 법다운 업이며 율다운 업이 되겠습니까?
“아니니라.
우바리여.”
“세존이시여,
만일 비구들이 서로 화합해 살면서 마땅히 물리쳐야 할 자에게 ‘기억하고 있는 것을 말해 주는 율’을 주고,
마땅히 ‘기억하고 있는 것을 말해 주는 율’을 주어야 할 자를 물리친다면,
이것은 법다운 업이며 율다운 업이 되겠습니까?”
“아니니라.
우바리여.”
“세존이시여,
만일 비구들이 서로 화합해 살면서 마땅히 ‘기억하고 있는 것을 말해 주는 율’을 주어야 할 자를 근본을 좇아 다스리고,
마땅히 근본을 좇아 다스려야 할 자에게 ‘기억하고 있는 것을 말해 주는 율’을 준다면,
이것은 법다운 업이며 율다운 업이 되겠습니까?”
“아니니라.
우바리여.”
“세존이시여,
만일 비구들이 서로 화합해 살면서 마땅히 근본을 좇아 다스려야 할 자를 몰아내고,
마땅히 몰아내야 할 자를 근본을 좇아 다스린다면,
이것은 법다운 업이며 율다운 업이 되겠습니까?”
“아니니라.
우바리여.”
“세존이시여,
만일 비구들이 서로 화합해 살면서 마땅히 몰아내야 할 자에게 교만하지 않음[不慢]6)을 보이게 하고,
마땅히 교만하지 않음을 보이게 해야 할 자를 몰아낸다면,
이것은 법다운 업이며 율다운 업이 되겠습니까?”
“아니니라.
우바리여.”
“세존이시여,
만일 비구들이 서로 화합해 살면서 마땅히 교만하지 않음을 보이게 해야 할 자를 다스리고,
마땅히 다스려야 할 자를 교만하지 않음을 보이게 한다면,
이것은 법다운 업이며 율다운 업이 되겠습니까?”
“아니니라.
우바리여.”
세존께서 말씀하셨다.
“우바리여,
만일 비구들이 서로 화합해 살면서 다른 업을 짓고 다른 업을 말한다면,
이것은 법답지 않은 업이요 율답지 않은 업으로서 대중에게도 또한 죄가 있다.
우바리여,
만일 비구들이 서로 화합해 살면서 마땅히 ‘면전에서 가르치는 율’을 주어야 할 자에게 ‘기억하고 있는 것을 말해 주는 율’을 주고 마땅히 ‘기억하고 있는 것을 말해 주는 율’을 주어야 할 자에게 ‘면전에서 가르치는 율’을 준다면,
이것은 법답지 않은 업이요 율답지 않은 업으로서 대중에게도 또한 죄가 있다.
우바리여,
만일 비구들이 서로 화합해 살면서 마땅히 ‘기억하고 있는 것을 말해 주는 율’을 주어야 할 자에게 ‘제정신일 때 가르쳐 주는 율’을 주고,
마땅히 ‘제정신일 때 가르쳐 주는 율’을 주어야 할 자에게 ‘기억하고 있는 것을 말해 주는 율’을 준다면,
이것은 법답지 않은 업이요 율답지 않은 업으로서 대중에게도 또한 죄가 있다.
우바리여,
만일 비구들이 서로 화합해 살면서 마땅히 ‘제정신일 때 가르쳐 주는 율’을 주어야 할 자에게 ‘스스로 잘못을 드러내게 하는 율’을 주고,
마땅히 ‘스스로 잘못을 드러내게 하는 율’을 주어야 할 자에게 ‘제정신일 때 가르쳐 주는 율’을 준다면 이것은 법답지 않은 업이요 율답지 않은 업으로서 대중에게도 또한 죄가 있느니라.
우바리여,
만일 비구들이 서로 화합해 살면서 마땅히 스스로 잘못을 드러내게 하는 율을 주어야 할 자에게 그대라고 부르며 죄를 추궁하는 율을 주고,
마땅히 그대라고 부르며 죄를 추궁하는 율을 주어야 할 자에게 스스로 잘못을 드러내게 하는 율을 준다면,
이것은 법답지 않은 업이요 율답지 않은 업으로서 대중에게도 또한 죄가 있다.
우바리여,
만일 비구들이 서로 화합해 살면서 마땅히 ‘그대라고 부르며 죄를 추궁하는 율’을 주어야 할 자를 꾸짖고 마땅히 꾸짖어야 할 자에게 ‘그대라고 부르며 죄를 추궁하는 율’을 준다면,
이것은 법답지 않은 업이요 율답지 않은 업으로서 대중에게도 또한 죄가 있다.
우바리여,
만일 비구들이 서로 화합해 살면서 마땅히 꾸짖어야 할 자를 아래에 두고,
마땅히 아래에 두어야 할 자를 꾸짖는다면,
이것은 법답지 않은 업이요 율답지 않은 업으로서 대중에게도 또한 죄가 있다.
우바리여,
만일 비구들이 서로 화합해 살면서 마땅히 아래에 두어야 할 자를 위로 올리고,
마땅히 위로 올려야 할 자를 아래에 둔다면,
이것은 법답지 않은 업이요 율답지 않은 업으로서 대중에게도 또한 죄가 있다.
우바리여,
만일 비구들이 서로 화합해 살면서 마땅히 위로 올려야 할 자를 물리치고,
마땅히 물리쳐야 할 자를 위로 올린다면,
이것은 법답지 않은 업이요 율답지 않은 업으로서 대중에게도 또한 죄가 있느니라.
우바리여,
만일 비구들이 서로 화합해 살면서 마땅히 물리쳐야 할 자에게 ‘기억하고 있는 것을 말해 주는 율’을 주고,
마땅히 ‘기억하고 있는 것을 말해 주는 율’을 주어야 할 자를 물리친다면,
이것은 법답지 않은 업이요 율답지 않은 업으로서 대중에게도 또한 죄가 있다.
우바리여,
만일 비구들이 화합해 살면서 마땅히 ‘기억하고 있는 것을 말해 주는 율’을 주어야 할 자를 근본을 좇아 다스리고 근본을 좇아 다스릴 자에게 ‘기억하고 있는 것을 말해 주는 율’을 준다면,
이것은 법답지 않은 업이요 율답지 않은 업으로서 대중에게도 또한 죄가 있다.
우바리여,
만일 비구들이 화합해 살면서 마땅히 근본을 좇아 다스려야 할 자를 몰아내고,
마땅히 몰아내야 할 자를 근본을 좇아 다스린다면,
이것은 법답지 않은 업이요 율답지 않은 업으로서 대중에게도 또한 죄가 있다.
우바리여,
만일 비구들이 화합해 살면서 마땅히 몰아내야 할 자에게 겸손하고,
마땅히 교만하지 않음을 보이게 해야 할 자를 몰아낸다면,
이것은 법답지 않은 업이요,
율답지 않은 업으로서 대중에게도 또한 죄가 있다.
우바리여,
만일 비구들이 화합해 살면서 마땅히 교만하지 않음을 보이게 해야 할 자를 다스리고,
마땅히 다스려야 할 자를 교만하지 않음을 보이게 한다면 이것은 법답지 않은 업이요 율답지 않은 업으로서 대중에게도 또한 죄가 있느니라.
우바리여,
만일 비구들이 화합해 살면서 자기가 지은 업에 따라 곧 그 업을 말하면,
이것은 법다운 업이요 율다운 업으로서 대중에게도 또한 죄가 없다.
우바리여,
만일 비구들이 서로 화합해 살면서 마땅히 ‘면전에서 가르치는 율’을 주어야 할 자에게는 곧 ‘면전에서 가르치는 율’을 주고,
마땅히 ‘기억하고 있는 것을 말해 주는 율’을 주어야 할 자에게는 곧 ‘기억해야 하고 있는 것을 말해 주는 율’을 주며,
마땅히 ‘제정신일 때 가르쳐 주는 율’을 주어야 할 자에게는 곧 ‘제정신일 때 가르쳐 주는 율’을 주고,
마땅히 ‘스스로 잘못을 드러내게 하는 율’을 주어야 할 자에게는 곧 ‘스스로 잘못을 드러내게 하는 율’을 주며,
마땅히 ‘그대라고 부르며 죄를 추궁하는 율’을 주어야 할 자에게는 마땅히 ‘그대라고 부르며 죄를 추궁하는 율’을 죽고,
마땅히 꾸짖어야 할 자는 꾸짖으며,
마땅히 아래에 두어야 할 자는 곧 아래에 두고,
마땅히 위로 올려야 할 자는 곧 위로 올리며,
마땅히 물리쳐야 할 자는 물리치고,
마땅히 기억할 자는 곧 기억하며,
마땅히 근본을 좇아 다스려야 할 자는 곧 근본을 좇아 다스리고,
몰아내야 할 자는 곧 몰아내며,
마땅히 교만하지 않음을 보이게 해야 할 자에게는 곧 교만하지 않음을 보이게 하고,
마땅히 다스려야 할 자는 곧 다스린다면,
이것은 법다운 업이요 율다운 업으로서 대중에게도 또한 죄가 없느니라.
■ 우바리여,
너는 마땅히 짓는 업에 따라 곧 그 업을 말하는 것을 배워야 한다.
그리고 마땅히 ‘면전에서 가르치는 율’을 줄 자에게는 곧 ‘면전에서 가르치는 율’을 주고,
마땅히 ‘기억하고 있는 것을 말해 주는 율’을 주어야 할 자에게는 곧 ‘기억하고 있는 것을 말해 주는 율’을 주며,
마땅히 ‘제정신일 때 가르쳐 주는 율’을 주어야 할 자에게는 곧 ‘제정신일 때 가르쳐 주는 율’을 주고,
마땅히 ‘스스로 잘못을 드러내게 하는 율’을 주어야 할 자에게는 곧 ‘스스로 잘못을 드러내게 하는 율’을 주며,
마땅히 ‘그대라고 부르며 죄를 추궁하는 율’을 주어야 할 자에게는 곧 ‘그대라고 부르며 죄를 추궁하는 율’을 주고,
마땅히 꾸짖어야 할 자는 곧 꾸짖고,
마땅히 아래에 두어야 할 자는 곧 아래에 두며,
마땅히 위로 올려야 할 자는 곧 위로 올리고,
마땅히 물리쳐야 할 자는 곧 물리치며,
마땅히 기억해야 할 자는 곧 기억하고,
마땅히 근본을 좇아 다스려야 할 자는 곧 근본을 좇아 다스리며,
마땅히 몰아내야 할 자는 곧 몰아내고,
마땅히 교만하지 않음을 보이게 해야 할 자는 곧 교만하지 않음을 보이게 하며,
마땅히 다스려야 할 자는 곧 다스려야 한다.
우바리여,
너는 마땅히 이렇게 배워야 하느니라.”
부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시자 존자 우바리와 모든 비구들은 부처님 말씀을 듣고 기뻐하며 받들어 행하였다.
이 우바리경에 수록된 경문의 글자 수는 1, 561자이다.
198) 조어지경(調御地經) 제7제5 후송
나는 이와 같이 들었다.
어느 때 부처님께서 왕사성에 유행하실 적에 죽림가란다원(竹林迦蘭陀園)에 계셨다.
그 때 사미 아이나화제(阿夷那和提)도 또한 왕사성에 노닐면서 일 없는 곳[無事處:
절]의 선실(禪室)에 있었다.
■ 그 때 왕의 동자[王童子] 기바선나(耆婆先那)는 오후에 천천히 걸어 사미 아이나화제가 있는 곳으로 가서 서로 인사하고 물러나 한쪽에 앉아 말하였다.
“현자 아기사나(阿寄舍那)여,
물을 말이 있는데 들어 주겠습니까?”
“어진 왕동자여,
묻고 싶으면 물으십시오.
제가 듣고 생각해 보겠습니다.”
왕동자가 물었다.
“아기사나여,
비구가 이 법과 율 안에서 방일하지 않고 수행하고 정근하면 한 마음이 된다는 것이 사실입니까?”
“어진 왕동자여,
사실입니다.
비구가 이 법과 율 안에서 방일하지 않고 수행하고 정근하면 한 마음이 됩니다.”
“현자 아기사나여,
그러면 그대가 들은 대로 그대가 외운 대로 ‘비구가 이 법과 율 안에서 방일하지 않고 수행하고 정근하면 한 마음이 된다’는 그대로를 저에게 모두 말해주십시오.”
“어진 왕동자여,
저는 제가 들은 대로 제가 외운 대로 ‘비구가 이 법과 율 안에서 방일하지 않고 수행하고 정근하면 한 마음이 된다’는 그대로를 당신에게 자세히 말할 수 없습니다.
어진 왕동자여,
혹 제가 들은 대로 외운 대로 ‘비구가 이 법과 율 안에서 방일하지 않고 수행하고 정근하면 한 마음이 된다’는 그대로를 말하더라도 아마 어진 왕동자는 그것을 알아듣지 못할 것입니다.
그러면 저는 헛수고만 하게 될 것입니다.”
왕동자는 사미에게 말했다.
“현자 아기사나여,
그대는 아직 다른 사람에게 항복 당한 적이 없는데 무슨 생각으로 스스로 물러섭니까?
현자 아기사나여,
그대가 들은 대로 그대가 외운 대로 ‘비구가 이 법과 율 안에서 방일하지 않고 수행하고 정근하면 한 마음이 된다’는 그대로를 저에게 말해 보십시오.
만일 제가 알아들으면 좋고,
만일 제가 알아듣지 못하면 저는 다시는 아무 법도 묻지 않겠습니다.”
이에 사미 아이나화제는 들은 대로 외운 대로 ‘비구가 이 법과 율 안에서 방일하지 않고 수행하고 정근하면 한 마음이 된다’는 그대로를 왕동자 기바선나에게 말하였다.
이에 왕동자 기바선나가 말하였다.
“현자 아기사나여,
설령 비구가 이 법과 율 안에서 방일하지 않고 수행하고 정근한다고 하더라도 한 마음은 끝내 될 수 없습니다.”
왕동자는 이렇게 말하고 곧 자리에서 일어나 하직 인사도 하지 않고 떠나 버렸다.
왕동자 기바선나가 떠난 지 얼마 되지 않아 사미 아이나화제는 부처님 계신 곳에 나아가 머리를 조아려 예배하고 물러나 한쪽에 앉아 왕동자 기바선나와 서로 이야기한 것을 모두 부처님께 아뢰었다.
세존께서 들으시고 곧 사미에게 말씀하셨다.
“아기사나여,
그만두라.
왕동자 기바선나를 어떻게 하겠는가?
그는 욕심을 부리고 욕심에 집착하여 욕애(欲愛)에 먹히고 욕심에 불타고 있다.
따라서 지금으로서는 욕심을 끊고 욕애를 끊고 욕심의 번열을 끊어 욕지(欲知)가 없고 욕견(欲見)이 없으며 욕각(欲覺)이 없는 경지를 이 왕동자는 알려고 하고 보려고 하더라도 끝내 그리 될 수 없느니라.
무슨 까닭인가?
아기사나여,
왕동자 기바선나는 언제나 욕심을 부리기 때문이니라.
아기사나여,
마치 코끼리 길들임ㆍ말 길들임ㆍ소 길들임ㆍ사람 길들임의 네 가지 길들임[四調御]이 있는데,
그 중에는 길들이려 해도 길들일 수 없는 둘과 길들이려 하면 길들일 수 있는 둘이 있는 것과 같다.
아기사나여,
네 뜻에는 어떠하냐?
만일 그 둘이 길들이려 해도 길들일 수 없는 것이라면,
길들이지 않았고,
길들이지 못한 상태에 있으며,
훈련받지 않은 그것이 훈련을 받아들인다는 것은 끝내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그러나 만일 그 둘이 길들이려 하면 길들일 수 있고 잘 길들일 수 있는 것이라면,
길들일 수 있지만 아직 길들이지 못한 상태에 있고 훈련받지 못한 그것이 훈련을 받아들인다는 것은 분명 있을 수 있는 일이니라.
이와 같으니 아기사나여,
그만 두라.
왕동자 기바선나를 어떻게 하겠느냐?
그는 욕심을 부리고 욕심에 집착하며 욕애에 먹히고 욕심에 불타고 있다.
그래서 지금으로서는 욕심을 끊고 욕애를 끊으며 욕심에 불타는 것을 끊어 욕지가 없고 욕견이 없으며 욕각이 없는 경지를 왕동자는 알려고 하고 보려고 하더라도 끝내 그리 될 수 없느니라.
무슨 까닭인가?
아기사나여,
왕동자 기바선나는 언제나 욕심을 부리기 때문이니라.
아기사나여,
마을에서 멀지 않은 곳에 큰 돌산이 있었는데 그 산이 이지러진 데도 없고 뚫린 곳도 없으며 속이 꽉 차 비지 않았고 견고하여 움직이지 않으며 모두 붙어 한 덩이로 되어 있었다.
어떤 두 사람은 그것을 직접 보려고 하였다.
그 중 한 사람은 곧장 산으로 올라갔고 다른 한 사람은 산 아래 머물러 있었다.
돌산 위로 올라간 사람은 돌산 너머 있는 좋고 편편한 땅과 동산ㆍ수풀ㆍ맑은 샘ㆍ꽃이 피어 있는 못ㆍ긴 강과 하수(河水)를 본 뒤에 산 아래 있는 사람에게 말했다.
‘너는 저 산 너머에 있는 좋고 편편한 땅과 동산ㆍ수풀ㆍ맑은 샘ㆍ꽃이 피어 있는 못ㆍ긴 강과 하수가 보이느냐?’
산 밑에 있는 사람이 대답했다.
‘내가 보기에는 그 너머에 좋고 편편한 땅과 동산ㆍ수풀ㆍ맑은 샘ㆍ꽃이 피어 있는 못ㆍ긴 강과 하수가 있을 수 없다.’
이에 돌산 위에 있던 사람은 재빨리 내려와 산 아래 있는 사람을 붙들고 산 위로 얼른 올라가서 물었다.
‘너는 이 산 너머에 있는 좋고 편편한 땅과 동산ㆍ수풀ㆍ맑은 샘ㆍ꽃이 피어 있는 못ㆍ긴 강과 하수가 보이느냐?’
그 사람은 그제서야 비로소 ‘보인다’고 대답했다.
다시 그 사람에게 물었다.
‘네가 아까는 그것이 있을 수 없다고 하다가 지금은 보인다고 하니 무슨 까닭인가?’
■ 그 사람은 대답했다.
‘내가 아까는 산이 가려서 보지 못했다.’
이와 같나니,
아기사나여 그만두라.
왕동자 기바선나를 어떻게 하겠는가?
그는 욕심을 부리고 욕심에 집착하며 욕애에 먹히고 욕심에 불타고 있다.
지금으로서는 욕심을 끊고 욕애를 끊고 욕심의 번열을 끊어 욕지가 없고 욕견이 없으며 욕각이 없는 경지를 왕동자는 알려고 하고 보려고 하더라도 끝내 그리 될 수 없느니라.
아기사나여,
옛날에 찰리족(刹利族)의 정생왕(頂生王)에게 코끼리 잡는 사람이 있었다.
왕은 그에게 ‘너 코끼리 잡는 기술자야,
나를 위해 야생 코끼리를 잡아가지고 와서 내게 알려라’고 했다.
그 때 코끼리 잡는 기술자는 왕의 명령을 받고 곧 왕의 코끼리를 타고 들판의 숲으로 갔다.
그는 들판 숲속에서 큰 야생 코끼리를 보고 그것을 잡아 왕의 코끼리 목에 잡아매었다.
왕의 코끼리는 그 야생 코끼리를 끌고 숲 밖으로 나와 궁으로 갔다.
코끼리 잡는 기술자는 정생왕에게 가서 아뢰었다.
“대왕이시여,
이미 야생 코끼리를 잡아다가 밖에 매어 두었습니다.
왕의 뜻대로 하소서.”
정생왕이 명하였다.
“훌륭한 코끼리 조련사여,
너는 이제 빨리 이 야생 코끼리를 길들이고 항복받아 길이 잘 든 코끼리로 만들어라.
그리고 잘 길들인 뒤에는 곧 내게 와서 알려라.”
이에 훌륭한 코끼리 조련사는 왕의 명령을 받고 아주 큰 막대기를 어깨에 메고 야생 코끼리가 있다는 곳으로 가서 막대기를 땅에 박고 야생 코끼리의 목을 매어 야생을 좋아하는 코끼리의 마음을 억제하고 야생에 대한 욕심을 없애고 야생에 대한 생각에서 생긴 피로를 쉬게 하였다.
그래서 마을을 좋아하게 하고 사람을 따르게 하기 위해 코끼리 조련사는 먼저 음식부터 주었다.
아기사나여,
만일 그 야생 코끼리가 처음부터 코끼리 조련사가 주는 음식을 받아먹으면 그 코끼리 조련사는 곧 이렇게 생각한다.
‘이 야생 코끼리는 반드시 살 것이다.
무슨 까닭인가?
이 큰 야생 코끼리가 처음부터 음식을 받아먹기 때문이다.’
만일 그 야생 코끼리가 처음부터 코끼리 조련사가 주는 음식을 받아먹으면 코끼리 조련사는 부드럽고 상냥한 말로 눕고 일어나며 가고 오며 집고 버리며 굽히고 펴라고 말한다.
만일 그 야생 코끼리가 코끼리 조련사를 따른다면 부드럽고 상냥한 말로 ‘눕고 일어나며 가고 오며 집고 버리며 굽히고 펴라’고 하면 그 말대로 야생 코끼리는 코끼리 조련사가 시키는 대로 따를 것이다.
아기사나여,
만일 그 야생 코끼리가 코끼리 조련사의 명을 따르면 그 코끼리 조련사는 곧 두 앞다리ㆍ두 뒷다리ㆍ두 볼기짝ㆍ두 옆구리ㆍ꼬리ㆍ등ㆍ목ㆍ머리ㆍ귀ㆍ어금니를 결박하고,
또 그 코를 결박한 뒤에 사람을 시켜 갈고리를 가지고 그 머리 위에 타게 한다.
그리고 많은 사람을 시켜 칼ㆍ방패ㆍ긴 창ㆍ양지창ㆍ민눈창ㆍ도끼ㆍ큰 도끼를 가지고 그 앞에 서게 한다.
코끼리 조련사는 손에 칼을 들고 야생 코끼리 앞에서 ‘나는 이제 너를 다루어 움직이지 못하게 하리니 너를 다룰 때 절대로 움직이지 말라’고 말한다.
만일 그 야생 코끼리가 코끼리 조련사가 다루는 대로 움직이지 않는다면,
그 때 그는 앞다리를 들지 않고 또한 뒷다리도 움직이지 않으며,
두 볼기짝ㆍ두 옆구리ㆍ꼬리ㆍ등ㆍ목ㆍ머리ㆍ귀ㆍ어금니 및 코를 모두 움직이지 않는다.
이처럼 야생 코끼리는 코끼리 조련사의 명령을 따라 가만히 있고 움직이지 않느니라.
아기사나여,
만일 그 야생 코끼리가 코끼리 조련사의 명령을 따라 가만히 있고 움직이지 않는다면 그는 그 때에는 칼과 방패ㆍ긴 창ㆍ양지창ㆍ민눈창ㆍ도끼와 큰 고함 소리를 참고,
또 고둥을 불고 북을 치며 종을 치더라도 능히 다 참고 견딘다.
만일 그 야생 코끼리가 그것들을 능히 참고 견딘다면 그는 그 때에는 길들고,
잘 길들고,
제일로 길들고,
최상으로 길들여져서 제일 빠르고 위없이 빨라 왕이 타는 코끼리가 되어 왕의 곡식을 받아먹고 왕의 코끼리라 일컬어진다.
이와 같이 아기사나여,
만일 때로 여래가 세상에 나오면 무소착ㆍ등정각ㆍ명행성위ㆍ선서ㆍ세간해ㆍ무상사ㆍ도법어ㆍ천인사ㆍ불중우라 불린다.
그는 이 세상에서 하늘ㆍ악마ㆍ범천ㆍ사문 범지 등 사람에서 하늘에 이르기까지를 스스로 알고 스스로 깨달으며 스스로 체험하고 성취하여 노닌다.
그의 설법은 처음도 묘하고 중간도 묘하고 마지막도 또한 묘하다.
뜻도 있고 문채도 있으며,
구족하고 청정하여 범행을 나타낸다.
그의 설법을 거사의 아들이 들으면 거사의 아들은 그것을 듣고는 여래의 설법을 믿게 되고 그는 그것을 믿은 뒤에는 수염과 머리를 깎고 가사를 입고 지극한 믿음으로 출가하여 집 없이 도를 배우느니라.
아기사나여,
그 때 거룩한 제자들은 집에서 나와 밖에서 산다.
이 야생 코끼리가 탐욕을 내고 즐기고 집착하는 것은 숲속에서 살기 때문인 것처럼 아기사나여,
이 하늘과 사람이 탐욕을 내고 즐기고 집착하는 것은 빛깔ㆍ소리ㆍ냄새ㆍ맛ㆍ감촉 등 이 5욕 가운데서 살기 때문이다.
■ 여래는 처음으로 그 비구들을 길들일 때 ‘너희들은 마땅히 몸과 목숨을 청정히 보호하고 입과 뜻과 목숨을 청정히 보호하라’고 말한다.
만일 거룩한 제자가 몸과 목숨을 청정히 보호하고 입과 뜻과 목숨을 청정히 보호하면,
여래는 다시 그 비구들을 길들인다.
‘너희들은 마땅히 안 몸[內身]을 몸 그대로 관찰하고 나아가 감각[覺]과 마음[心]과 법(法)에 이르기까지 관찰하되 감각과 마음과 법 그대로 관찰하라.’
■ 만일 거룩한 제자들이 몸을 관찰하기를 몸 그대로 하고 나아가 감각과 마음과 법에 이르기까지 관찰하되 감각과 마음과 법에 대하여 사실 그대로 관찰하면 이 4념처(念處)는 이른바 거룩한 제자들의 마음속에서 그 마음을 결박하여 집을 좋아하는 뜻을 제어하고 집에 대한 욕심을 없애며 집에 대한 생각에서 생기는 피로를 쉬게 한다.
그래서 바른 법을 좋아하게 하고 성인의 계를 닦아 익히게 한다.
아기사나여,
마치 코끼리 조련사가 찰리 정생왕의 명령을 받고는 아주 큰 막대기를 오른쪽 어깨에 메고 야생 코끼리가 있는 곳으로 가서 막대기를 땅에 박고 야생 코끼리 목을 매어 야생을 좋아하는 뜻을 제어하고 야생에 대한 욕심을 없애고 야생의 피로를 쉬게 하여 마을을 좋아하게 하고 사람을 따르게 하는 것과 같다.
이와 같이 아기사나여,
이 4념처는 이른바 거룩한 제자들의 마음속에서 그 마음을 결박하여 집을 좋아하는 뜻을 제어하고 집에 대한 욕심을 없애고 집에 대한 생각에서 생기는 피로를 쉬게 한다.
그래서 바른 법을 좋아하게 하고 성인의 계를 닦아 익히게 한다.
만일 거룩한 제자들이 안 몸을 관찰하되 몸 그대로 관찰하고 나아가 감각과 마음과 법에 이르기까지 관찰하되 감각과 마음과 법에 대하여 사실 그대로 관찰하면 여래는 다시 그 비구들을 길들인다.
‘너희들은 마땅히 안 몸을 관찰하되 몸 그대로를 관찰하여 욕심과 서로 어울리려는 생각을 내지 말고 나아가 감각과 마음과 법에 대하여 관찰하되 감각과 마음과 법에 대하여 사실 그대로 관찰하여 법이 아닌 것과 서로 어울리려는 생각을 내지 말라.’
만일 거룩한 제자가 안 몸을 관찰하되 몸 그대로를 관찰하여 욕심과 서로 어울리려는 생각을 내지 않고 나아가 감각과 마음과 법을 관찰하되 감각과 마음과 법에 대하여 사실 그대로를 관찰하여 법이 아닌 것과 서로 어울리려는 생각을 내지 않는다면 이런 거룩한 제자들은 여래의 가르침을 따르는 것이니라.
아기사나여,
마치 야생 코끼리가 코끼리 조련사의 부드럽고 상냥한 말을 따라 눕고 일어나며 가고 오며 집고 버리며 굽히고 펴고 한다면 이런 야생 코끼리는 코끼리 조련사의 명령을 따르는 것인 것과 같다.
이와 같이 아기사나여,
만일 거룩한 제자들이 안 몸을 관찰하되 몸 그대로를 관찰하여 욕심과 서로 어울리려는 생각을 내지 않고 나아가 감각과 마음과 법을 관찰하되 감각과 마음과 법에 대하여 사실 그대로를 관찰하여 법이 아닌 것과 서로 어울리려는 생각을 내지 않는다면 이런 거룩한 제자들은 곧 여래의 가르침을 따르는 것이니라.
■ 만일 거룩한 제자들이 여래의 가르침을 따르면 여래는 다시 그 비구들을 길들인다.
‘너희들은 마땅히 욕심을 여의고 착하지 않은 악법을 여의며 나아가 제4선을 얻어 성취하여 노닐라.’
만일 거룩한 제자들이 욕심을 여의고 착하지 않은 나쁜 법을 여의며 나아가 제4선을 성취하여 노닐게 되면,
이런 거룩한 제자들은 곧 여래를 따라 머물고 이동하지 않는다.
아기사나여,
마치 야생 코끼리가 코끼리 조련사의 다룸을 좇아 움직이지 않을 때에는 앞다리도 들지 않,
또한 뒷다리도 움직이지 않으며 두 볼기짝ㆍ두 옆구리ㆍ꼬리ㆍ등ㆍ목ㆍ머리ㆍ귀ㆍ어금니 및 코를 모두 움직이지 않는 것과 같다.
이와 같이 아기사나여,
만일 거룩한 제자들이 욕심을 여의고 착하지 않은 나쁜 법을 여의며 나아가 제4선을 얻어 성취하여 노닐게 되면 이런 거룩한 제자들은 곧 여래를 따라 머물고 이동하지 않느니라.
만일 거룩한 제자들이 여래를 따라 머물고 움직이지 않으면 그들은 그 때에는 능히 굶주림과 목마름ㆍ추위ㆍ더위ㆍ모기ㆍ등에ㆍ파리ㆍ벼룩ㆍ바람ㆍ햇볕 따위의 시달림을 참고 욕설과 매질도 능히 참아내며 몸이 모든 병에 걸려 지극히 고통스럽고 심지어는 목숨이 끊어지려 하더라도 그런 어려움을 다 능히 참고 견뎌낸다.
아기사나여,
마치 야생 코끼리가 코끼리 조련사를 따라 가만히 있고 움직이지 않으면 그는 그 때에는 칼과 방패ㆍ긴 창ㆍ양지창ㆍ민눈창ㆍ도끼와 큰 고함 소리 등을 참고,
또 고둥을 불고 북을 치며 종을 치더라도 다 능히 참고 견디는 것과 같다.
이와 같이 아기사나여,
만일 거룩한 제자들이 여래를 따라 머물러 움직이지 않으면 그는 그 때에는 능히 굶주림과 목마름ㆍ추위ㆍ더위ㆍ모기ㆍ등에ㆍ파리ㆍ벼룩ㆍ바람ㆍ햇볕 따위의 시달림을 참고 욕설과 매질도 능히 참아내며 몸이 모든 병에 걸려 지극히 고통스럽고 심지어는 목숨이 끊어지려 하더라도 그런 어려움까지 다 능히 참고 견디느니라.
아기사나여,
만일 거룩한 제자가 여래를 따라 능히 참고 견디면 그는 그 때에는 길들고, 잘 길들고,
제일로 길들고, 최상으로 길들여져서 제일로 쉬고 최상으로 쉬어,
모든 악과 두려움,
어리석음 및 아첨을 버리고 청정하게 티끌을 없애 때가 없고 더러움이 없어 부를 만하고 청할 만하며 공경할 만하고 존중할 만하며 실로 공양할 만하여 모든 하늘과 인간의 좋은 복밭이 된다.
아기사나여,
마치 야생 코끼리가 잘 참아내면 그는 그 때에는 길들고, 잘 길들고,
제일로 길들고, 최상으로 길들여져서,
제일 빠르고 위없이 빨라 왕이 타고 다니는 코끼리가 되어 왕의 곡식을 받아먹고 왕의 코끼리라고 불리는 것과 같다.
이와 같이 아기사나여,
만일 거룩한 제자들이 여래를 따라 잘 참고 견뎌내면 그들은 그 때에는 길들고,
잘 길들고,
제일로 길들고,
최상으로 길들여져서 제일로 쉬고 최상으로 쉬어 모든 악과 두려움,
어리석음 및 아첨을 버리고 청정하게 티끌을 없애 때가 없고 더러움이 없어 부를 만하고 청할 만하며 공경할 만하고 존중할 만하며 실로 공양할 만하여 모든 하늘과 인간의 좋은 복밭이 되느니라.
아기사나여,
어린 야생 코끼리가 길들지 못하고 죽으면 길들지 못하고 죽었다고 말하며,
젊거나 늙은 야생 코끼리도 길들지 못하고 죽으면 길들지 못하고 죽었다고 말한다.
아기사나여,
어린 거룩한 제자가 길들지 못하고 목숨을 마치면 길들지 못하고 목숨을 마쳤다고 말하며,
젊거나 늙은 거룩한 제자도 길들지 못하고 목숨을 마치면 길들지 못하고 목숨을 마쳤다고 말한다.
아기사나여,
어린 야생 코끼리가 잘 길들여졌다가 죽으면 잘 길들여졌는데 죽었다고 말하고 젊거나 늙은 야생 코끼리도 잘 길들여졌다가 죽으면 잘 길들여졌는데 죽었다고 말한다.
아기사나여,
어린 거룩한 제자가 잘 길들여졌다가 목숨을 마치면 잘 길들여졌는데 목숨을 마쳤다고 말하고 젊거나 늙은 거룩한 제자도 잘 길들여졌다가 목숨을 마치면 잘 길들여졌는데 목숨을 마쳤다고 말하느니라.”
부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시자 사미 아이나화제와 모든 비구들은 부처님 말씀을 듣고 기뻐하며 받들어 행하였다.
이 조어지경에 수록된 경문의 글자 수는 2, 891자이다.
『중아함경』 제5권에 수록된 경문의 글자 수는 모두 8, 682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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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이 경의 이역본으로는 송나라 때 시호(施護)가 한역한 『불설식쟁인연경(佛說息諍因緣經)』이 있다.
2 니건친자(尼揵親子;Nigaha nātaputta)는 부처님 시대에 생존했던 자이나교의 중흥조이며 6사외도 중 한 사람이다.
율(律)에서는 논장(論藏) 즉 아비담(阿毘曇)을 모(母)ㆍ본모(本母)ㆍ논본(論本)이라고 한다.
또 마덕륵가(摩德勒迦)ㆍ마다라가(摩多羅迦)로 음역하기도 한다.
5 투라자(偸羅柘, thulavajja)는 중죄(重罪)라는 뜻이다
6 팔리본에는 mānatta 즉 속죄의식(贖罪儀式)이라 하였고,
『사분률(四分律)』에서는 마나타(麽那唾)라 하였다.
이는 6일 밤낮 동안 참회하여 스스로도 기뻐하고 대중을 기쁘게 하는 의식이다.
● [pt op tr] fr
Lab value 불기2564/01/23/목/00:14
● 공감능력 및 인과판단과 계
『중아함경』 16. 대품 제2③ 196) 주나경(周那經) 에서는 싸움을 중지시키는 방안에 대한 내용이 나온다.
싸운다는 것은 서로간에 다른 이를 비난하고 해를 주고 받는다. 이는 하나의 가해와 피해관계지만, 이 하나가 이후 무량한 가해와 피해를 주고받는 관계를 만들어낸다.
세상을 살아가면서 생사고통이 문제된다. 세상에서 나 홀로 고통을 받는 상황에 처할 수도 있다. 혼자 길에 미끄러져 다리가 부러져 고통받는 경우와 같다.
그런데 수많은 생명이 살아가는 세상에는 이보다는 대부분 서로간에 해를 주고 받는 관계에 얽혀 생사고통을 장구하게 증폭시켜 받아나가게 된다.
그래서 그처럼 싸우게 되는 원인을 살펴서 싸움이 발생하지 않도록 그 원인을 제거할 수 있어야 한다. 그리고 한편 발생한 싸움을 멈추어 치유하고 예방할 방안을 잘 살펴야 한다.
서로 다투어 싸우게 되는 원인과 그 해결방안을 경전에서 다음처럼 자세히 제시한다.
■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아난아, 혹 어떤 사람은 1 화를 잘 내어 [瞋惱]
2 원한을 맺는다. [結纏]
■ 이와 같이 3- 말 끊음[不語]ㆍ맺음[結]ㆍ 아낌[慳]ㆍ 질투[嫉]ㆍ아첨[諂]ㆍ 속임[誑]ㆍ 스스로 부끄러워하지 않음[無慚]ㆍ남에게 부끄러워하지 않음[無愧]ㆍ 나쁜 욕심[惡欲]ㆍ 삿된 소견[邪見] 등 이런 것들은 다 나쁜 성질로서 제어하기 어렵다.
아난아,
만일 어떤 사람이 이러한 나쁜 욕심과 삿된 소견으로 나쁜 성질들을 제어하지 못하면
4 그는 스승을 존경하지 않고, [不敬師]
5 법을 보지 못하며 [不見法] 6 계를 지키지 못한다. [不護戒] ★★
그는 스승을 존경하지 않고 법을 보지 못하며 계를 지키지 못한 뒤에는 곧 대중 가운데서 이러한 싸움을 일으키나니 이러한 싸움은 많은 사람에게 유익하지 못하고 많은 사람에게 고통을 준다.
그것은 도리가 아니요 이익이 아니며 안온과 쾌락도 아니요 나아가 천상과 인간에 이르기까지 지극한 고통과 재앙만 일으키느니라.
>>>
■ 다시 아난아,
싸움을 그치게 하는 일곱 가지 방법[七止諍] 있다.
첫째는 면전에서 싸움을 그치게 하는 율[面前止諍律]을 주는 것이요,
둘째는 기억하고 있는 것을 말해 주어 싸움을 그치게 하는 율[憶止諍律]을 주는 것이며,
셋째는 제정신일 때 가르쳐 싸움을 그치게 하는 율[不癡止諍律]을 주는 것이요,
넷째는 스스로 잘못을 드러내게 하여 싸움을 그치게 하는 율[自發露止諍律]을 주는 것이며,
다섯째는 그대라 하며 죄를 추궁하여 싸움을 그치게 하는 율[君止諍律]을 주는 것이요,
여섯째는 여기 저기 찾아다니며 의견을 물어 싸움을 그치게 하는 율[展轉止諍律]을 주는 것이며,
일곱째는 똥 닦은 걸레를 버리듯 하여 싸움을 그치게 하는 율[如棄糞掃止諍律]을 주는 것이다.
>>>
■ “어떤 것을 6위로법이라 하는가?
■ 사랑하는 몸의 업으로써 모든 범행인을 대하라.
>>>
■ 사랑하는 입의 업과 ■ 사랑하는 뜻의 업도 또한 그러하다.
■ ... 이익을 나누어 모든 범행인들에게 베풀어라.
>>>
■ 또 ...계를 나누어 모든 범행인들에게 베풀어라.
>>>
■ 또 만일 생사를 벗어나는 거룩한 소견이 있어서 ... 이러한 소견을 나누어 펴 모든 범행인들에게 베풀어라.
이 법은 위로법으로서 사랑스런 법이요 즐거운 법이다.
이것은 남을 사랑하게 하고 존중하게 하며 받들게 하고 공경하게 하며 닦게 하고 거두어 주게 하여 사문을 얻고 한 마음을 얻게 하며 정진을 얻고 열반을 얻게 한다.
아난아, 내가 말하는 6위로법이란 이 때문에 말한 것이다.
아난아,
■ 만일 너희들이 저 여섯 가지 싸움의 원인을 바로 끊고,
혹 대중 가운데서 싸움이 일어나더라도 이 싸움을 그치게 하는 일곱 가지 방법[七止諍]으로 ‘똥 닦은 걸레를 버리듯 하여 싸움을 그치게 하는 율’로써 그치게 하고,
다시 이 6위로법을 행하면 아난아,
너희들은 내가 세상을 떠난 뒤에도 함께 어울려 화합하고 기뻐하며 싸우지 않을 것이다.
한 마음을 같이 하고 한 가르침을 같이 하며 물과 젖이 하나로 합하듯 쾌락하게 노니는 것이 내가 세상에 있을 때와 같을 것이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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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를 살펴보면 이는 수행자 집단내에서 다툼이 일어나는 경우를 놓고 그 원인과 해결방안을 제시하는 내용으로 보인다. 그런데 이는 결국 일반 사회에서 일어나는 가해와 피해의 중첩관계를 해결하는 방안에도 준용될 수 있다.
다툼을 없애려면 먼저 서로 다투는 일이 발생하는 원인을 살펴야 한다. 원인을 제거하면 그로 인한 다툼은 더 발생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한번 다툼이 일어난 후에는 단순히 원인을 제거하는 것만으로 발생한 다툼이 해소되기 힘들다.
상처를 내서 피가 흐른다고 하자. 이 때 상처를 내는 일을 더 이상 하지 않으면 그로 인해 피가 흐르는 일은 나타나지 않는다. 그런데 그렇다고 이미 난 상처가 치유되는 것은 아니다. 그래서 원인을 제거하는 한편 이미 난 상처를 치유하는 노력이 뒤 따라야 한다. 그리고 그 상태에서 앞으로 다시 상처가 나지 않도록 할 예방방안을 실천해야 한다. 이 예방방안도 자세히 보면 그 구체적인 경우에 대한 예방방안과 일반적인 예방방안을 생각할 수 있따.
물론 이런 다툼의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는 것은 그 다툼이 일으키는 생사고통의 폐해가 크기 때문이다.
현실을 보면 각 개인은 개인대로 넓게 생명은 다른 생명과 서로 다투고 해친다. 그리고 단체, 조직, 사회, 국가, 인종 이런 형태로 그 다툼이 있다. 그리고 그것이 생사현실의 문제다.
다툼이 표면상 없어도 그 원인이 잠재되어서 진행중인 경우가 많다. 이것이 각 개인에게 번뇌를 일으키고 생사고통을 극심하게 받는 상태로 이끌어가는 동인이다.
수행자가 생사고통의 문제를 해결하고자 할 때 그 근본 방안은 계율을 지키는 것이다.
이 계율은 일반 범부 상태 - 기본 수행상태 - 초발심 수행상태 -불퇴전위- 대력보살 수행자수행상태 - 일생보처보살 - 성불후 상태에 걸쳐 꾸준히 계속 실천되어야 한다.
예를 들어 수행을 성취한 최고상태에 이른 부처님이 되면 이제 이런 계율을 지키지 않고 무시해도 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처음 수행을 하는 상태보다 훨씬 더 잘 지켜야 한다.
일반적으로 욕계내 중생은 서로간에 가해와 피해를 이전투구형태로 주고 받으면서 3 악도에서 생사고통을 장구하게 받아나간다.
기본 수행상태는 이런 상태에서 생사의 묶임에서 벗어나고자 수행을 시작하는 경우다.
초발심수행상태란, 자신이 생사묶임에서 벗어남과 함께 또 한편 다른 중생 일체를 모두 생사묶임에서 벗어나게 해서 다 함께 최상의 상태에 이르게 함을 목표로 수행을 시작하는 경우를 나타낸다.
불퇴전위나 대력보살수행자는 그렇게 수행을 시작한 후 생사현실에서 어떤 극심한 고통이나 억울한 상황에 처해도 더 이상 그 이전 상태로 물러나지 않는 상태가 된 수준 높은 수행단계를 의미한다.
그렇게 되면 이후 중생제도를 위한 무량한 방편을 닦아가며 불국토를 장엄하고 중생을 제도하는 수행을 행할 수 있게 된다.
그 정점에 성불의 상태가 있다. 그래서 이제 불국토에서 중생을 제도해서 생사의 묶임에서 벗어나게 해서 최상의 상태로 이끌게 된다.
이 과정 전반에 계율을 지킨다는 것이 가장 기본이 된다.
즉 기본 수행상태에서만 계율을 지키고 불퇴전위에 이르면 지키지 않고 무시해도 되는 것이 계율이 아니다.
오히려 이전 범부상태에서는 대단히 지키는 것이 힘들다고 여긴 계율을 어렵다고 여기면서 물러나지 않고 잘 지키게 되는 상태가 수준높은 수행 상태가 된다.
종전에 가해와 피해를 주고받으면서 무량한 생사고통을 받는 생사현실의 사정을 가피관계의 중첩이라는 주제로 여러번 살핀 적이 있다.
그래서 생사고통의 문제를 해결하려면 가해와 피해를 중첩해서 무량겁에 걸쳐 장구하게 받아나가는 현상을 잘 해결해야 한다.
그 방안이 곧 계의 항목이다.
계의 항목은 결국 다음 내용이다. 좋음(+)을 아낌없이 베푼다. [보시] 다른 생명이 집착하는 좋음(+, 생명, 신체, 재산, 가족, 명예....)을 함부로 침해하지 않고 나쁨(-)을 가하지 않는다.[정계] 자신이 나쁨(-)을 받을 때 이에 대해 상을 취하지 않고 평안히 참고, 분노를 일으키지 않고 미움 원망을 갖지 않고 보복하지 않는다. [안인] 이런 수행을 꾸준히 행한다. [정진]
또 수행을 함께 행하는 과정에서 서로간에 수행을 방해하지 않고 잘 성취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 규칙이나 일정한 행위 방식이 율의 항목으로 요구된다.
그런데 현실에서 이런 계를 실천하기 힘들어 한다. 그런 결과 가해와 피해가 무량하게 증폭되어 나간다. 그것은 생사현실에서 보듯 국가 대 국가의 전쟁상태까지도 나아간다. 또 사후 3 악도의 생사현실에서 장구하게 생사고통을 받아가게 된다.
이것이 모두 계와 관련된다 .
그런데 한 주체가 이런 다툼의 상황에서 다른 생명을 해치고 고통을 가하게 되는 사정이 있다.
우선 각 주체가 망집을 일으켜 아상을 취하고 그에 집착한다. [번뇌結] 그래서 제각각 자신의 입장에서 당장 자신이 초점을 맞추는 좋음에만 집착하여 추구해간다. [나쁜 욕심惡欲]ㆍ
그러면서 좋음을 얻으면 이를 아끼고 다른 이에게 베풀려 하지 않는다. [아낌慳]ㆍ 그런 가운데 다른 생명과 서로 친근해 하지 않는다. [대화를 끊음不語]
서로 견해를 달리 갖고 서로 잘난척한다. 삿된 소견[邪見] 아만, 서로 상대를 무시하고 차별하고 질시하는 가운데 불쾌를 주고 받는다. [질투嫉]
자신이 좋음을 얻기 위해서는 다른 생명이 집착하는 좋음[생명,신체,재산,가족,명예,지위]도 함부로 침해한다. 그리고 상대를 속인다. 아첨[諂]ㆍ속임[誑] 그리고 견해와 이해관계가 서로 엇갈리게 된다. 예를 들어 자신이 자리나 물건을 차지하면 다른 이가 차지 하지 못한다. 반대로 다른 이가 자리나 물건을 차지하면 또 자신이 차지 하지 못한다. 이런 경우마다 서로 이를 놓고 다투게 된다. 그런 가운데 자신이 침해를 받게 되면 상을 취하고 평안히 참지 못한다. 그래서 심한 불쾌와 고통을 받고 그런 가운데 상대에 대한 미움과 원망을 갖는다. [結纏] 그런 가운데 분노를 일으켜 그 상대에게 해를 가하여 보복한다. [분노 瞋惱]
그래서 서로가 서로에게 가해와 피해를 주고 받는 관계를 증폭시켜 나간다.
한편 이처럼 고통을 주고 받는 사정과 관계를 올바로 살펴 스스로 반성하지 않는다. 그래서 올바른 가치와 규범의식을 갖고 올바로 수행에 임하지 않는다. [無慚]ㆍ[無愧]
한편
각 주체는 감성적으로 당장 자신이 좋음을 얻게될 행위를 본능적으로 추구하며 행할 뿐 그런 행위를 할 때 다른 생명이 받는 고통을 직접 느끼지 못한다. [공감하지 못함]
또 한편 그 행위로부터 장차 과보로 돌려받는 고통을 잘 알지 못한다. [인과의 무지] 그런 사정으로 그런 행위가 당장 자신에게 좋음이나 통쾌함만을 얻을 뿐 그로 인해 고통을 돌려 받지 않게 된다고 여기며 계를 어기게 된다.
어떤 한 주체가 다른 생명에게 고통을 주고 해를 끼치는 경우를 놓고 보자. 예를 들어 자신이 물고기를 잡아 칼로 배를 갈라 회를 먹는다고 해보자.
그런데 그렇게 물고기를 칼로 자를 때 그 상황에서 물고기가 받는 고통을 자신이 직접 느끼게 된다면 그렇게 행하려 하지 않을 것이다. 또 그로 인해 그 순간 또는 한 1,2 분 후에 바로 자신의 손과 발이 잘라지고 고통을 받는다면 또 그렇게 행하지 않으려 할 것이다. 그런 경우 그로 인한 과보를 대부분 쉽게 알기 때문이다. 그리고 곧 그로 인한 고통을 되돌려 받기에 그런 행위를 하지 않으려 하게 될 것이다.
그런데 현실은 그렇지 않다. 예를 들어 한 사람이 다른 이를 욕하고 비난하고 몽둥이를 들어 때린다고 해보자. 이 상황은 하나다.
그런데 여하튼 자신은 그런 상황에서 그렇게 하면 자신의 불쾌나 고통이 해소되고 좋음을 얻게 된다고 여긴다. 그런데 그 상황에서 그 상대는 극심한 불쾌와 고통을 받는다.
이 때 그는 상대가 받는 불쾌나 고통을 직접 느끼지는 못한다. 또 자신이 장차 그로 인해 돌려받는 과보도 잘 모른다. 또 설령 그 과보를 어느 정도 예상해도 그로 인해 받는 고통은 당장 느끼지는 못한다. 결국 그런 사정으로 그런 행위를 감행하게 된다.
그런데 만일 사정이 그렇지 않고 앞과 같다면 크게 달라진다.
따라서 수행자가 계를 지키고 수행함에 있어 다른 생명이 받는 고통을 공감하는 한편, 넓고 길고 깊게 관찰하여 어떤 행위에 어떤 과보가 뒤따른다는 인과를 잘 파악할 필요가 있다.
인과판단과정에서는 좁고 짧고 얕게 관찰한 내용과 넓고 길고 깊게 관찰한 내용이 대부분 극단적으로 반대 내용이 된다.
예를 들어 어떤 농부가 지금 어떤 낟알을 먹으면 지금 당장 배가 부른다.
그런데 그 씨를 땅에 뿌리면 지금은 그 만큼은 먹지 못하게 된다. 마치 버린 것처럼 여겨진다. 그 대신 가을에 열매를 얻게 된다 . 그래서 가을에 벼 한 이삭에 대략 80 개 정도의 낟알이 열린다. 이처럼 씨를 뿌리면 열매를 맺는 시기에 그 과보가 나타난다.
그런데 어떤 농부가 어떤 씨를 대할 때 그 씨를 뿌리면 그로 인해 나중에 호박이 열릴지 콩이 열릴지를 모른다면 지금 그 씨를 뿌려야 할지 않아야 하는지 선택을 행하기 곤란하다.
이 비유처럼 자신이 행하는 행위와 과보의 인과관계를 파악하지 못하면 매 경우 선택을 하기 힘들게 된다. 그리고 단지 자신이 파악하는 범위만 놓고 좋고 나쁨을 따져 행해나가게 된다.
그래서 인과 판단이 이런 선택 판단에 중요하다. 또한 그런 판단시 자신이 고려할 기간도 역시 중요하다.
자신이 화장터에 들어가는 직전까지만 고려하면 된다는 입장이 있다. 그것은 자신이 죽으면 그 이후는 자신과 관련한 것이 없다고 여기는 단멸관에 바탕한다. 그래서 과연 그런가를 먼저 잘 살펴야 한다. 이로 인해 짧게 살피는 입장과 길게 살피는 입장의 차이를 낳는다.
한편 인과판단을 좁게 행하면 당장 자신만 놓고 좋고 나쁨을 따져 선택하게끔 된다.
그런데 인과판단을 넓게 행하면 자신이 다른 생명에게 무언가를 행할 때 그로 인해 자신이 어떤 과보를 되돌려받는가도 파악하게 된다. 그래서 장구하게 인과관계를 넓게 관찰해서 예를 들어 물고기의 내장을 칼로 가르면 장차 자신의 내장도 그렇게 칼로 갈려진다는 관계를 파악하게 되면 선택내용이 달라지게 된다.
그래서 좁고 짧고 얕게 관찰하는 협단천 관찰방식에 바탕한 내용과 넓고 길고 깊게 관찰하는 광장심 관찰방식에 바탕한 내용은 서로 극단적으로 반대가 된다.
자신이 입장에서 짧은 기간을 놓고 자신이 초점을 맞추고 집착하는 어떤 한 측면의 좋음을 얻기 위해 찾는 방안과 널리 온 생명을 차별없고 제한없이 무량한 기간에 걸쳐 두루두루 좋음을 얻어내기 위해 찾는 방안은 극단적으로 반대 방향이 된다.
그래서 맛에 탐착한 입장은 물고기를 잡아 배를 갈라 회를 먹는 것도 무방하다고 여긴다. 그 상황에서 자신은 물고기가 받는 고통도 못 느끼고 또 그로 인해 장차 자신이 되돌려 받을 과보 역시 알지 못한다. 또 장차 받을 고통을 당장 느끼지는 못한다.
그래서 이처럼 계를 어기는 행위를 반복 행하게 된다.
그래서 계를 잘 지킬 수 있으려면 계를 지키지 않으면 얻는 과보에 대해 잘 파악해야 한다.
그런데 올바른 수행의 입장에서 보면 이런 인과를 통해 장차 좋은 과보를 받기 위해 그런 계산을 해서 그런 계를 지키는 것은 불완전하다. 이는 여전히 망집에 바탕해 그처럼 계산하고 여전히 그 기본동기는 자신의 이익을 추구하고 장삿꾼처럼 계산해 임하는 입장이기 때문이다.
원래 본래 그런 상황에 그처럼 보호할 내용자체를 얻을 수 없다. 그런데 그런 것이 각 상황에 있다고 여기는 망집이 이들 모든 생사고통의 가장 근본원원이다. 그런 무명 어리석음 망집을 제거하지 못하고 그에 바탕해 업을 행하면 이런 생사고통을 받아나가게 된다. [혹-업-고] 그래서 근본적으로는 이런 무명 어리석음과 망집을 제거해야 한다.
본 바탕의 측면에서는 본래 얻을 것이 없다. 그리고 보호할 내용도 얻을 수 없다. 그런데 그처럼 본 바탕에서는 얻지 못하는 것을 현실에서 얻고 망집을 일으킨 가운데 이런 생사고통을 겪는 것이다. 한편 그런 생사현실에서 벗어나려면 이런 사정을 기본적으로 잘 이해해야 한다. 그런데 그런 사정을 이해하는 것만으로는 곧바로 생사현실을 벗어나기 힘들다.
그래서 그런 상황에서는 생사고통을 미리 예방하는 것을 가장 기본 방안으로 제시하게 된다. 생사고통을 받게 만드는 업을 중단하고 반대로 이미 쌓은 업의 장애를 해소할 수 있는 수행을 행해야 한다. 그리고 이것이 계의 항목이다. 그런 수행을 행하면 이제 3 악도의 생사고통의 묶임에서 벗어나고 더 나아가 그 자신이 3계의 생사의 묶임에서 완전히 풀려 나게 된다. [ 기본 수행의 완성과 아라한 등 4 과의 증득]
그런데 그렇게 되면 그 자신은 생사의 묶임에서 풀려나게 되어도 남은 중생은 그대로 생사에 방치되게 된다.
생사현실에서 한번 망집을 일으키면 업을 행하여 무량겁에 걸쳐 스스로 그 생사고통을 벗어나기 힘들다. 그런 사정 때문에 그런 상태에 묶인 중생에 안타까움을 느끼고 자비심을 일으켜 다시 생사현실에 임하게 된다.
그래서 이 경우는 그런 중생을 생사고통에서 벗어나게 하고 최상의 상태에 이르게 하는 그 자체를 스스로 원하고 좋아하기에 그런 행위를 행하게 된다. [초발심] 즉 이는 무엇인가를 얻기 위해 계산하고 임하는 장삿꾼의 입장과 다르다.
단지 생사현실에 들어가 중생과 눈높이를 맞추고 그런 상태에서 중생을 제도하기 위해 복덕자량과 지혜자량을 갖추는 수행을 행한다.
이 경우 중생을 제도하는데 필요한 복덕자량을 얻는데 필요한 수행은 역시 계의 항목이다.
본래 그런 것을 얻을 수 없다. 그리고 그런 사정을 잘 파악하는 수행자 역시 중생제도를 위해 생사현실에 임하는 사정 때문에 방편상 계의 덕목을 원만히 성취해야만 한다. 그렇지 않으면 중생을 제도하는 데 필요한 복덕자량을 구족할 수 없다. 그래서 자신부터 복덕자량이 없게 되면 자신부터 생사고통을 받고 생사에 묶이게 될 뿐 지혜자량도 구족하기 힘들게 되며 다른 중생을 제도할 수가 없게 된다 .
이 계의 항목은 처음에는 자신을 생사에 묶어놓는 업의 장애를 해소시키지만, 이후는 복덕자량을 쌓게 해주는 수행이 된다. 마치 예금을 계속해가면 처음 부채가 줄어들고 빚이 다 없어지게 되면 자신의 자산이 증가하게 되는 것과 마찬가지다.
그래서 계의 항목은 기본 수행과정이나 그 이후 보살이 보리심을 일으켜 중생제도를 위한 수행을 행하는 과정에서나 다 공통적으로 기본적으로 원만히 성취해야 할 내용이 된다.
한편 수행단계가 높아지면 그런 본 바탕의 측면을 거의 99% 취하여 생사현실에 임해 생사현실의 온갖 차별에 집착하지 않고 상을 취하지 않고 임하게 된다. 그러면 생사현실내 어떤 극한 고통도 평안히 대하고 안인을 성취하고 무생법인을 증득하게 된다. 그렇게 되어 어떤 상황에서도 물러나지 않게 된 불퇴전위에 이르게 된다. 그런 수행자는 중생을 제도함에 있어서 필요한 무량한 방편 지혜를 얻고 중생을 제도함에 있어서 방편에 제한을 받지 않고 두루 사용할 수 있게 된다. 그래서 중생을 제도하기 위해 어떤 방편을 사용하면 그로 인해 자신이 장구하게 극심한 고통을 받게 된다해도 그런 방편까지도 다 제한없이 사용할 수 있게 된다. 그런데 그런 수준이 높은 수행자의 경우도 계를 지켜야 하는 사정은 또 마찬가지다. 그것은 이 방편이나 저 방편이나 중생을 제도함에 있어 차별이 없더라도, 그래도 계를 지키며 제도하는 선교방편을 우선하는 것이 낫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 정점에 있는 부처님과 처음 수행자의 상태를 놓고 보면 계를 더 엄격하게 잘 지키는 것은 오히려 부처님이다. 그런데 부처님은 사실은 오히려 본래 본 바탕에서는 그런 내용을 본래 얻을 수 없음을 누구보다 가장 정확하게 깨닫고 현실에 임하는 상태인 것이다.
따라서 수행수준이 높아져서 본래 생사현실에 그런 내용을 얻을 수 없음[무소유, 무소득, 공]을 잘 파악하게 된다고 해서 계를 지키지 않고 아무렇게 행해도 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그런 사정을 잘 이해하지 못한 가운데 일반현실에서 실천하기 대단히 힘들다고 여기고 대하는 계율을 전혀 어렵게 여기지 않고 평안히 임하게 된 상태가 수준이 높은 상태다. 그래서 그런 경우마다 물러나지 않고 원만히 잘 실천해나가는 상태가 되야 한다.
유치원에 가서 유치원을 교육시키려는 선생님을 놓고 이 사정을 살피면 이해가 쉽다.
유치원생들을 교육시키기 위해서 유치원생과 눈높이를 맞추어서 그 현장에 임하게 된다.
그래서 구슬이나 딱지 등이 별 의미가 없음을 알지만, 그것을 많이 갖고 임해야 그런 유치원생을 이끌어 지도할 수 있다. 그런 가운데 유치원아이는 구슬이나 딱지를 다른 아이에게 결코 주지 않으려 하고 그런 일을 어렵게 여기고 그것을 뺏기면 화를 도저히 참지 못할 수 있다. 그런데 이런 지도를 목적으로 이런 유치원생에 끼어 같이 놀이하는 가운데 구슬이나 딱지를 다른 유치원생이 빼앗아 가거나 잃게 될 수 있다. 그런데 수준이 낮은 선생님이라면 이것을 놓고 대단히 슬퍼하거나 분노를 일으킬 수도 있다. 그러나 정상적인 선생님이라면 그렇지 않다. 유치원생들이 집착하는 좋음을 아낌없이 베풀고 또 자신은 그런 것을 침해하지 않고 상대가 침해해도 전혀 관계없이 평안하게 임하며 꾸준히 임하는 보시, 정계, 안인, 정진 등의 계의 항목은 그런 입장에서 원만하게 성취된다.
따라서 이 비유를 잘 살펴서 생사현실에 임해야 한다. 그래서 중생제도를 위한 복덕자량을 구족하게 하는 계의 항목을 어렵게 여기지 말고 원만히 성취해나가야 한다.
여하튼 다툼이 있게 되면 우선 다양한 방안을 통해서 올바른 가치판단을 행하고 계율내용을 먼저 확립하는 것이 요구된다. 그래서 7지쟁이란 내용이 제시된다. 다음이다.
싸움을 그치게 하는 일곱 가지 방법[七止諍] 있다.
첫째는 면전에서 싸움을 그치게 하는 율[面前止諍律]을 주는 것이요,
둘째는 기억하고 있는 것을 말해 주어 싸움을 그치게 하는 율[憶止諍律]을 주는 것이며,
셋째는 제정신일 때 가르쳐 싸움을 그치게 하는 율[不癡止諍律]을 주는 것이요,
넷째는 스스로 잘못을 드러내게 하여 싸움을 그치게 하는 율[自發露止諍律]을 주는 것이며,
다섯째는 그대라 하며 죄를 추궁하여 싸움을 그치게 하는 율[君止諍律]을 주는 것이요,
여섯째는 여기 저기 찾아다니며 의견을 물어 싸움을 그치게 하는 율[展轉止諍律]을 주는 것이며,
일곱째는 똥 닦은 걸레를 버리듯 하여 싸움을 그치게 하는 율[如棄糞掃止諍律]을 주는 것이다.
이 내용은 이미 확립된 계율과 그것을 위반한 내용을 놓고 다양한 형태로 상대가 그 사정을 확인하게 하는 방안이라고 이해할 수 있다. 계율에 위반하여 다툼을 벌일 때 그 구체적 사정이 다 다르기에 이렇게 7 가지 방안이 제시된 것이다.
그런데 이와 함께 이런 다툼을 중지시키고 예방할 때 기본 자세가 더 중요하다.
그것이 6 위로법(六慰勞法)이란 명칭으로 제시된 내용이다.
■ 사랑하는 몸의 업으로써 모든 범행인을 대하라.
■ 사랑하는 입의 업과
■ 사랑하는 뜻의 업도 또한 그러하다.
■ . 이익을 나누어 모든 범행인들에게 베풀어라.
■ 또 ...계를 나누어 모든 범행인들에게 베풀어라.
■ 또 만일 생사를 벗어나는 거룩한 소견이 있어서 ...
이러한 소견을 나누어 펴 모든 범행인들에게 베풀어라.
기본 자세는 상대를 위하고 상대가 좋게 되게하고자 하는 바탕이어야 한다. 그래서 사랑의 신구의 3 업의 자세를 갖춰 대하고 이익과 계 생사를 벗어나는 올바른 견해를 나누어 주어야 한다고 제시된다. 결국 총체적으로 좋음을 상대에게 베풀어야 한다는 것으로 압축할 수 있다.
○ [pt op tr] 예술작품 사진 공양, 나무불, 나무법, 나무승 Renoir the-pont-des-arts-and-the-institut-de-france-1867
Artist: Pierre-Auguste Renoir https://en.wikipedia.org/wiki/Pierre-Auguste_Renoir Title : the-pont-des-arts-and-the-institut-de-france-1867 Info Permission & Licensing : Wikiart ● [pt op tr] fr
○ [pt op tr] 꽃 공양, 나무불, 나무법, 나무승 2006-10-22Begonia_semperflorens01
Begonia-Semperflorens-Hybrids English: wax begonia, perpetual begonia, bedding begonia Author Wildfeuer Permission & Licensing : Wikipedia ● [pt op tr] fr
○ [pt op tr] 아름다운 사진 공양, 나무불, 나무법, 나무승 Peyto_Lake-Banff_NP-Canada
https://commons.wikimedia.org/wiki/File:Peyto_Lake-Banff_NP-Canada.jpg English: An attraction of Banff National Park in the Canadian province of Alberta:
the turquoise Peyto Lake seen from a viewpoint at Icefields Parkway.
Author Tobias Alt, Tobi 87 Permission & Licensing : Wikipedia
♡수국사(서울)
○ 아름다운 풍경사진 공양, 나무불, 나무법, 나무승 With the image 'Google Earth & Map data: Google, DigitalGlob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