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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진리와실천
무진등과 수행 본문
sfxx--무진등과-수행.txt.htx
sfxx--무진등과-수행.txt
http://buddhism007.tistory.com/3486
● 이하 글은 단상_조각글 내용을 주제별로 '편집중'인 상태의 글입니다.
[...]
무진등은 하나의 등불이 수천만 개의 등불의 불을
밝게 해도 자신의 등이 그로 인해 줄거나
꺼지지 않는다는 것을 상징하는 표현이다.
[...]
지장보살님도 이 무진등과 관련해
다음과 같은 내용을 제시하는데
그것이 바로 현실의 생사고통과 직결되는
문제이기도 하다.
원래 무간지옥이나 하늘의 상태가
처음에는 하나의 물방울과 같은 좋음과 나쁨에서
시작되었다고 제시하는 것이다.
그런데 현실에서 중생들이 이것을 놓고
어떻게 임하는가에 따라서
그 이후 그 하나의 물방울이 계속 증폭되어
한 방향으로는 무한한 기간 고통을 주고 받는 관계가
나타난 것이고
또 다른 방향은 그 반대의 상태가 나타났다고 제시하는 것이다.
그래서 현실에서도 그 모습이 그런 형태로
양 방향으로 나타나게 되는 것이라고
제시하는 것이다.
무진등의 이론은 수행자가
수행의 내용을 놓고 제시하는 것이지만,
같은 내용은 반대로
무간지옥에서 중생들이 서로 고통을
무한히 주고 받는 관계가 나타나는 내용도
설명하게 되는 내용이기도 한 것이다.
현실을 놓고 보면
무언가 자신이 좋다고 보는 것을 아끼는 입장과
그 반대로 구글처럼 그것을 제공하면서
수익을 거두는 입장이 있는데
현실의 기준만 놓고 보면
구글사가 가장 큰 이익을 거두는 것처럼
보게 된다.
그런데 부처님은 여기에 다음을 추가하는 것이기도 하다.
무엇을 제공하는데 구글처럼 광고 수익도
얻고 어떤 스폰서의 후원도 받을 수 있는데
그런 것을 조건으로 하거나
대가로 받지 않고 그저 좋음을 제공하는 것이
사실은 가장 큰 수익과 복덕을 얻는 것이라고
가르치는 입장인 것이다.
그래서 그 사정을 이해하는 것이
또 수행에 있어서 중요한 부분이기도 한 것이다.
그것이 앞에서 제시된 복전의 내용이기도 한 것이다.
수행자가 세간을 방문할 때
수행자가 수행한 내용을 알려주어서
그런 공양을 제시하는 것이 아니고
그냥 제공할 때 그것이 복의 씨가 된다고
가르친 것이다.
수행자도 마찬가지다.
상대가 자신에게 공양을 제공하기에
그에 대한 대가로 상대에게
어떤 내용을 제시해주는 것이 아니고
그와 관계없이 차별없이 제시해주기에
수행자 역시 수행의 공덕을 쌓는다고 제시하는 것이다.
그래서 이런 유형을 죽 나열해 놓고
보면
좁고 짧고 얕게 관찰하면
처음 무언가 좋은 내용이 있다고 할 때
그것에 집착하여 추구하고
그것을 얻으면 그것을 아끼어 숨기고
또 남에게 제공할 때는 그에 대한
대가를 요구해 받는 것이
자신의 좋음을 늘리고 키우는 것처럼
생각이 되고
그렇게 임하기 마련인 것이다.
그러나 그 경우에서도
널리 좋음을 제공할 방편을 찾아서
구글사처럼 임하면
현실에서 보듯 어마어마한 수익을
거두는 모습도 보는 것이다.
그런데 부처님이 제시하는 방안은
위와 같이 그로 인해 어떤 이익을 당장 받게 되는
내용이 보이지 않는 것이다.
그래서 현실에서 그렇게 행하면
그 자신부터 당장 손해를 받고
자신에게는 부담만 된다고 보게 되는데
이것이 어떻게 무량한 복덕을 얻고
공덕을 쌓는 수행이 된다고 하는지
좁고 짧고 얕게 관찰하는 협단천 관찰방식에서는
이해가 되지 않는 내용이 되는 것이다.
그래서 또 현실에서 이렇게 임하는 경우는
거의 드문 것이다.
또 반대로 말하면 그래서
무량한 복덕과 수명을 얻고 누리는 이도
드물게 된다고 보게 되는 것이다.
그런데 그 사정을 이해하는 데 있어서
바로 지금 논의하는
있고 없음의 정체를 올바로 관하는
문제를 살피는 것이 필요한 것이기도 한 것이다.
왜 그런가.
간단히만 그 사정을 제시하면 이렇다.
구글사가 현재 페이지에
동영상도 제공하고
외국어 변역결과도 제공하고
이런 자료를 제공하는데
구글사가 무료로 이용하게 하지만,
구글사는 구글사대로
광고를 제공하는 이들에게
단위당 비용을 받고 이것을 제공하는 입장인 것이다.
알고보면 대형마트에서 제공하는
샘플 음식이나 사정이 같은 것이다.
시식 샘플을 제공할 때 이를 먹는 이에게는 무료로 제공하지만,
그 비용은 제품 비용에 다 포함이
되어서 판매되게 된다는 의미다.
그래서 이들 관계는 결국
장삿꾼이 고객을 상대하는 관계라고
보는 것이다.
이 가운데 서툰 장삿꾼은
샘플 시식 제품마저도 아끼고
그것을 제공하지 않거나
제공하더라도 상대를 차별하면서
불쾌한 형태로 제공하는 입장이라고 한다면
조금 현명한 장삿꾼은
일단 샘플은 차별없이 고객들이 불쾌하거나
불편하지 않게 무료로 정성껏 제공하고
수익은 다른 경로로 얻어내려고 하는
것에서 차이가 있는 것 뿐이다.
그런데 부처님은 바로 이렇기 때문에
장삿꾼이 행하는 이런 행위는
비록 나쁜 일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그것이 복을 받을 만한 선도
되지 못한다고 보고
수행자가 이렇게 임하면 안 된다고
강조하시는 것이다.
부처님이 공양을 받으러 나갈 때
세간에서 부처님의 설법을 듣고 나서
그것이 감사하다고 하여서
공양을 올리게 되는 경우가 가끔 있는데
그런 경우는 부처님께서
그렇게 공양물을 바친 이에게
그 공양물은 그런 사정으로
아무도 먹을 수 없는 독이 되었다고 말씀하시고
그것을 생명이 살지 않는 곳에 갖다 버리라고
요구하시는 모습을
경전에서 대하게 되는 것이다.
부처님이 그냥 조건없이 상대로부터 공양을 받고
또 부처님도 그냥 설법을 하는 것과
결국 결과는 마찬가지인 것처럼 보이는데
왜 이 경우는 그것이 독이 되었다고 하시는가.
이것은 부처님이 그런 공양을 받기 위해서
그런 설법을 하시는 것이 아닌데도
상대가 그 설법을 듣고 그렇게 자신을 이해하고
그런 입장에서 그러한 공양을 제공한 것이기에
결국 그것은
무언가 좋은 물건을 받고
그 대가로 무언가를 건네는 장삿꾼의 입장에서
그렇게 한 것이라고 그 문제점을
지적하는 내용인 것이다.
현실에서 대부분
장삿꾼의 행태로 서로 좋음을 나누고
교환하게 되기에
이를 문제가 없다고 일반적으로 보는 것이지만,
부처님은 그것을 그렇게 보지 않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것은 그 장삿꾼은 반대로 말하면
그런 대가를 지금이던 먼 장래던
얻을 수 없는 경우라면
결코 그런 것을 제공할 뜻이 없는 것임도
의미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가 무언가를 제공하는 경우는
언제나 지금 당장이던 먼 장래던 또는 그 이전이던
그런 댓가를 받았거나 받을 생각으로
그런 계산을 바탕으로
그런 행위를 하는 것임을 의미하는 것이다.
또 그런 입장에서 그는
그런 이익을 받을 곳이면
어디에라도 가는 것이고
또 그렇지 않으면 그는
또 어디에도 가지 않으려는 자세로
평소 늘 임하는 것이다.
현실에서 누구나 이익과 좋음을 추구하는 입장에서
살아가는 것이기에
대부분 그렇게 임하는 것이고
그것이 굳이 나쁜 것이라고 할 수는 없더라도
장삿꾼이 그렇게 거래를 했으면
그것으로 서로 좋음을 교환해서
계산이 마쳐진 것이고
그외로
어떤 복덕을 받을 씨를 뿌리고
장차 그로 인해 받게 될 복덕이
어디에 따로 남았다고 볼 근거가 없는 것이기도 한 것이다.
그런 계산을 하여 임한 이는
그가 얻는 차익이나 수입에서
그가 찾고자 한 것을 찾고
그것을 통해서 얻고자 한 것을 얻으면
그 뿐인 것이다.
그런 내용이 성경에서는
동전에 그려진 케사르의 모습을 놓고
케사르의 것은 케사르에게..
이런 문구로 표현하는 내용이기도 한 것이다.
그것을 얻기 위해 그렇게 했으면
그 동전에서 자신이 얻고자 한 것을 찾을 뿐
그외로 그런 동전이 보이지도 않는 영역에서
그것을 받으려고 꾀하지는 않아야 한다는 의미로 본다.
현실에서 수행을 하기전에
평소 눈으로 본 것에서 자신이 집착하고 대한다면
당장 그 내용이 귀로 대하는 영역에서라도
그것이 바꿔질 수 있는가부터 확인하고
가치의 경중을 잘 헤이라고 따지고 임하는 것이
필요한 것이다.
그것이 본래 그렇게 안 되므로
성경에서도 저축을 지상에서 한 것은
지상 은행에서만 찾으라는 취지로
그런 내용을 제시한 것으로 이해하는데
불교 경전에서도 그런 사정으로
수행자는 그런 것을 가치가 있다고 여기고
집착을 갖지 말고
어느 세계에서나 그 가치를 갖게 되는
수행자의 자산과
수생자의 보물을 따로 제시하는 사정이 있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가장 가치있는 자산은
부처님과 부처님의 가르침과
부처님의 가르침을 수행하는 승가집단이라고
제시한 사정이 있는 것이다.
이런 가치를 놓고
그것을 교환하고 거래하는 문제를
다시 살펴보기로 하자.
어떠한 이가 다이아몬드를 주어서
팔 때 그것을 천만원에 팔던
십억에 팔던 거래를 했으면
그것으로 끝인 것이다.
십억의 가치를 갖는 것인데
천만원에 팔았다고 한다면
그가 실제로 그만한 가치를 갖는 비싼 보석을
싸게 팔아서 그 차익만큼
그가 좋은 일을 한 것이라고 보는 것이 아니고
장삿꾼이 망상분별을 일으켜
탐욕과 집착을 갖고 장사를 하기는 하는데
다만 어리석어서 계산을 잘 하지 못한 것뿐이라고
보는 것 뿐이다.
그리고 수행자는 이렇게 행하면
곤란하다고 제시하는 것이다.
아무리 수행자가 좋은 가르침을
널리 베푼다고 해도
그것이 자신의 명리를 대가로 얻기 위한
계산을 바탕으로 행하는 것이라면
역시 마찬가지가 되는 것이다.
서양에서는 이것을
지식을 파는 소피스트라고 평가하고
비난하는 것인데
그 사정이 마찬가지인 것이다.
물론 이런 장삿꾼의 활동이 없으면
현실은 대단히 불편할 것이다.
그러나 장삿꾼이 물건을 건네서
편리한 이익을 주는 것은
그가 선행을 행한 것은 아닌 것이다.
그것을 제공받는 이도
그 댓가로 그만한 것을
또 제공하여 계산이 완료된 것이다.
그러니 어떤 장삿꾼이 그런 거래를 하고 나서
나중에 그 상대를 만나
자신이 그런 좋음을 제공했으니
이제 그에 상응한 좋음을 돌려달라고 요구하면
그 상대는 무엇이라고 말을 하게 될 것인가.
그 상대도 역시 그렇게 말하게 되는 것이다.
자신도 역시 그렇게 했다.
그렇게 거래해서 그 관계는 끝난 것이다.
이렇게 말하게 되지 않겠는가.
사정이 이런데
이들이 서로 자신이 제공한 좋음만 바라보고
자신이 무안가 복의 씨를 뿌리는
선한 일을 했다고 하면
대형마트에서 샘플 음식을
소비자에게 제공하면서
마치 빈곤한 이들을 상대로
아무 대가없이 그런 식품을 제공한 입장처럼
주장하는 것과 무엇이 다르겠는가.
그래서 사정이 그렇지 않다는 것을
부처님이 제시하는 것이다.
그런데 결과는 같다고 하더라도
그 상호관계가
그렇지 않은 바탕에서 그처럼 서로
행한 것이라면
그것은 또 앞과는 정반대가 된다고 제시하는 것이다.
수행자는 수행자대로 무량한 복의 씨를
뿌린 것이고
또 수행자에게 그런 공양을 제공한 입장도
또 그 입장대로 무량한 복의 씨를 뿌린 것이 된다는
내용인 것이다.
어차피 결과가 같다고 본다면
왜 이런 형태를 취하지 않고
상대를 배려해서 소중한 가르침을 제공한 부처님을
장삿꾼 계산으로 대하여
공양물도 독으로 만들고
부처님까지 장삿꾼으로 만들려고 하는가.
이런 지적인 것이다.
만일 거래를 한다면
어떻게 부처님이 무량한 겁에 걸쳐서 수행하여
얻어낸 그 귀중한 내용이
밥 한 그릇으로 얻을 수 있다고 할 것인가.
다이아몬드를 밥 한그릇으로 사는 것도
곤란한데
그것이 가능한 일인가.
부처님을 그런 가르침을 파는 장삿꾼이라고 본다해도
생사고통을 벗어나는 내용을 가르치는 부처님의 설법을
그렇게 가치를 낮게 평가하여
부처님을 대할 수는 없는 것이다.
결국 이런 사정으로 결과는 같아 보이지만,
하나는 독을 주고 받는 관계가 되어버렸다고
부처님이 지적하는 것이고
비록 외관은 같아 보이지만,
서로가 그런 바탕이 아닌 상태에서
설법하고 공양을 받는 것은
그 반대로 서로가 무량한 복덕을 얻고
복덕의 씨를 뿌린 것으로 제시하는 취지인 것이다.
>>>
[...]
현실에서 어떤 문제든 자유로운 입장은
부처님을 놓고 보면 하나도 없다고 해도
지나치지 않다.
그래서 누구나 위와 같은 문제를 제시하면
다 기분이 나쁠 수는 있는 것이다.
본인도 오늘 택배회사에서
메세지가 왔다.
통관절차를 거쳐야 하니
무슨 통관번호를 알려달라고 하는데
본인이 알기로는 세금을 내지 않아도 되는
가격의 하드디스크인데 왜 그러는가.
이런 것을 놓고 한참 대화를 나누었는데
이것이 거래의 문제인 것이다.
그 쪽은 20 억 가치를 갖는 하드디스크를 주는데
만일 그런 상인이 현실에 없다면
그것을 본인이 직접 만들어 사용하려 한다고 하면
20 억 가지고 만들어 낼 수 있겠는가.
생각을 해보자.
그렇다면 오늘 당장 그런 공장을 만들겠다고
나설 이들이 수도 없을 것이다.
알고보면 20 억을 가지고는 만들 수도 없고
또 그것이 갖는 기능을 보면
20 억 원 분량의 A4 용지보다
훨씬 높은 가치를 갖는 물건인 것이다.
그것을 누가 제공해주는가.
바로 본인이 말한 장삿꾼이 제공해주는 것인 것이다.
얼마나 고마운가.
그런데 위 글에서는 그런 내용을 놓고
부처님 입장에서 그런 거래나 그런 계산에
의해 무언가를 주고 받는 행위는 장사인 것이지
복을 얻는 씨를 뿌리는 수행에 들어간 것은 아님을
제시한 것이다.
이런 지적은 부처님 당시 부처님과 제자들을 위해서
금을 깔아서 땅을 사서 기수급고독원이라는 정사를
부처님에게 기증했던 수달 장자에게도
부처님이 특별히 해주신 내용이기도 한 것이다.
왜 그런가.
대부분 그렇게 생각하기 때문에
그런 주의를 미리 제시해주지 않으면
대부분 그런 문제에 빠지게 되기 때문인 것이다.
그러나 사실은 그런 말이
기분 좋은 말은 아니지 않은가.
세상에 돈 주고 받고 거래하는 일을 수없이 행하고
사실 이를 통해서
상대나 자신이 서로 대단한 이익을 받는 것이 현실인데
왜 그것을 문제로 제시하는가.
앞의 문제도 마찬가지다.
본인이 그런 20 억 이상의 가치를 갖는 물건을 받지만,
그러나 본인이 그것을 놓고
가치를 평가하고 감사하게 여기는 것과는 별도로
상대가 그런 좋은 것을 본인에게 주었으니
그로 인해 무언가 장차 복을 받을 씨를 뿌렸다고 생각한다면
그 부분은 문제라고 보게 되는 것이다.
왜 그런가.
본인도 다른 곳에 투자하면
훨씬 높은 가치를 얻을 수 있는 화폐를
그 상대에게 그 댓가로 이미 지불해 버린 것이다.
그러니 그것은 계산이 되었다고
제시하는 것이다.
이미 그로 인해 본인으로부터 돈을 지불받고
그런 물건을 제공했으면서
다시 그 이외에 또 무언가가 받을 것이 남아 있다고 하면서
무엇을 요구하면 이는 문제가 아닌가.
한 사람이 선생님도 되고
학원 강사도 되고
아버지도 되고 다른 곳에서는 또 다른 이의 아들도 되고 하는 것은 이해하지만,
그러나 하나의 관계에서 장삿꾼의 관계로
거래를 했으면 거래를 한 것이지
이 하나의 거래를 온갖 것에 다 사용할 수는 없는 것이다.
그리고 기본적으로 그 관계가 거래라면
그것은 서로 상호간에 이익을 교환하기 위해서
계산하고 거래한 것이어서
이것을 복을 얻는 씨를 뿌리는 행위나
수행으로 볼 수는 없다고 보아야 하는 것이다.
만일 이것을 평소 오해하고 임하면
아무리 어느 곳에 기부금을 많이 그런 입장에서
지불했다고 해도
하늘이나 불국토에서 비자발급이 거부되는 것은
당연한 이치인 것이다.
그 당사자가 그런 금액을 미리 지불하고
장차 자신이 일정기간 하늘이나 불국토에서
평안하게 지낼 것이라고 기대하고
그런 장삿꾼의 계산으로 그렇게 한 것은
이해하지만,
그런 장삿꾼의 계산에 응해서
비자를 발급해주는 어리석은 하늘이나
불국토의 부처님이나 보살님은 별로 없다고 보아야 하는 것이다.
그것은 자신이 그 하늘의 주인이라거나
그 불국토의 주인이라고 입장을 바꾸어 놓고
생각해보면 바로 쉽게 아는 일이기도 한 것이다.
이미 자신이 장삿꾼처럼 그렇게 계산하고 임하는데
자신보다 훨씬 뛰어난 상대가
자신의 그런 계산대로 그런 거래를 하겠는가.
그런데 그것이 거래가 아니고
그런 장삿꾼의 계산에 의한 것이 아니라면
그렇지 않다고 제시하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복의 씨를 뿌리는 수행의 내용인 것이다.
아무것도 갖지 않은 어떤 한 아이가
놀면서 모래를 밥이라고 선물을 해도
그 아이는 그가 가진 것을 전부
공경하는 마음을 갖고 제공한 것이고
아무것도 갖지 못한 할머니가
돈이 없어서 기름 살돈을 빌려서
등불공양을 한 경우도
그 할머니는 자신의 모든 것을 다 그렇게
부처님을 위해서 어떤 댓가를 바라지 않고 공양을 한 것이라고
보는 것이다.
물론 그 당사자의 마음까지 알 길은 없지만,
여하튼 모래나 기름을 바쳐서
그 댓가로 황제가 되기를 원한다거나
불치병을 낫기를 바라면서
그렇게 한 것은 아니고
또 부처님은 특별히 그런 공양을 하지만,
어떤 가난한 이나 병든 이는 자신은
차별하고 무시한다는 입장에서
그렇게 한 것도 아닌 것을
부처님이 아신다는 의미다.
사정이 이렇기에
그런 부분에서는 장삿꾼처럼 이해관계를 잘 따지고
계산을 잘하는 지혜가 필요한 것이 아니라는
메세지도 제시되는 것이다.
무엇이 소중하다고 보는가.
놀보처럼 해서는 안 되고
그 행위를 하기는 하는데
철저히 자신에게 자신이 스스로 최면을 걸어서라도
제비로부터 어떤 댓가를 받기 위해서
제비 다리를 고쳐주는 것이 아니라고 생각하면서
제비 다리 고쳐주는 일은 열심히 해야 하는 것이라고 보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무소득(얻을 것이 없음)을 '방편으로'
그러나 정확하게 복과 지혜를 얻을 방향을 향해서
그런 수행을 행하여야 한다는 내용이
경전에서 제시되는 사정이라고 이해할 수 있다.
본래 얻을 것이 없다. ( 사실이 그렇다. )
+ 그런데 현실에서도 그에 상응하게
얻을 것이 없음을 '방편으로' [ 일부로 그런 마음과 자세를 취해서 ]
+ 정확하게 중생제도와 중생에게 베푸는 보시 행위를
상에 머물거나 취하지 말고 그래서 집착을 갖지 말고
행해야 한다고 제시하는 것이다.
이 두 부분 가운데 하나라도 잘못되면
결국 그 수행은 실패한 것이고
그 수행은 오히려 그 수행자를
더 빨리 지옥에 이끌고 들어가는 방안이 되는 것이라고
경전에 제시되고 있는 것이다.
참고 대반야바라밀경 니리(지옥)품
그것은 이론을 생각하지 말고
원래 처음부터 제비다리를 고쳐줄 생각도 전혀 없고
그런 일도 전혀 하지 않던 놀보의 경우와
그 뒤에 무언가 그렇게 해서 얻을 것이 있음을 보고 난 후
이후 열심히 억지로 제비 다리를 고쳐주려고 한 놀보
이 두 경우의 놀보를 다 놓고 생각하면 되는 것이다.
그리고 그 놀보를 바라보는 입장에서
그 놀보를 평가해서
과연 자신의 호텔에 무료 숙박권과 비자를
발급해줄 필요성을 자신이 느끼는가를
놓고 생각하면 대단히 쉬운 문제인 것이다.
[...]
● [pt op tr] f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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