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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진리와실천
개미투자자의 투자이론과 유무논의효용 본문
sfxx--개미투자자의-투자이론과-유무논의효용.txt.htx
sfxx--개미투자자의-투자이론과-유무논의효용.txt
http://buddhism007.tistory.com/3481
● 이하 글은 단상_조각글 내용을 주제별로 '편집중'인 상태의 글입니다.
개미 투자자가 여유자금을 투자해 놓고
마치 전문 투자가처럼 온갖 경제 자료를 옆에 쌓아 놓고 임하면
자신의 생활부터 제대로 하기 힘들고
비록 그렇게 수익을 얻어도
큰 가치있는 결과를 얻기 힘들다고 보게 되는 것이다.
라이터를 현실에서 어떻게 사용하는가.
필요할 때 가게에 가서 사서
필요한 만큼 쓰고
개스가 떨어지면 버리는 것이다.
이 이상 라이터에 관심을 기울이면
이상한 생활이 되는 것이다.
물론 라이터 생산 일을 하는 사업가라면
그것은 다른 문제인데
그렇지 않은데 그렇게 임하면 곤란하다는 의미다.
그래서
개미투자자가 투자하는 방안도
위와 같은 정도에 준하는 정도로만 관심을 가지면 충분한 것이고
그 이상을 넘으면 그로 인해 큰 수익이 생겨도
길게 보아 부작용이 발생하게 된다고 보아야 하는 것이다.
또 모터나 전자제품 등이 사용 중 고장나면
서비스 기사를 불러서 해결하는 것이
제일 좋다고 보아야 한다고 본다.
물론 좁고 짧고 얕게 관찰하면
이것을 모두 자신이 직접 하면
좋지 않겠는가
그렇게 생각하기 쉬운데
그런 경우 푼돈을 절약할 수 있다고 하더라도
최소한 재벌 회장은 못 된다고 보아야 한다.
[...]
이미 개미투자자의 생존이론을 살핀 바 있고
라이터 화두도 소개한 바 있는데
이것이 다 같은 내용을 말하는 것이기도 하다.
개미투자자란 시세 변동이 있는 거래소에서
거래를 할 때
시세를 정확히 예측할 신통력도 없고
시세를 변경시킬 신통력도 없는 이가
그런 신통력을 얻고자 할 생각도 갖지 않고
또 자신이 해야 할 중요한 내용이 따로 있어서
시간과 노력을 들여 이런 신통력을 얻는 것 역시 바람직하지 않다고
보게 되는 가운데
그러나 그 당사자는 어딘가 어느 형태로든
여유 자산을 보관은 해야 하기에
그런 투자를 행하는 입장을 말한다고 본다.
그런 관계로 어떤 투자를 한 경우
이후 그 품목의 시세가 자신의 뜻과 같지 않게
나타나는 것을 이상하다고 생각하면 곤란하다고
기본적으로 제시하게 된다.
주사위를 던져 주사위 번호를 맞추고자 할 때
위와 같은 신통력이 없는 상태에서 주사위를 던져놓고
자신의 뜻과 다른 주사위번호가 매번 나타난다고 해서
그것을 이상하게 생각하는 것과
상황이 같은 것이다.
그런 상태에서 어떻게 개미투자자가
큰 손실을 보지 않고
또 반대로 자신이 원하는 목표를 성취할 수 있는가.
이런 문제를 오래 전에 다룬 것이다.
가장 기본적으로 자신이 뜻하는 것과
다른 결과가 나오는 것을 놓고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아야 하는데
그런 바탕에서 다시 어떤 방편이 있어서
손실도 보지 않고
경우에 따라서는 이를 통해 목표한 수익도 얻고
또 이런 수익이 얻어지면 행하고자 한 자신의 본 목표도 잘 성취할 수 있는가.
이런 내용을 이전에 개미투자자의 생존 방안이라는 제목으로
살폈던 것이다.
핵심은 그런 신통력이 없으니 그런 것을 기대하지 말고
뜻과 다른 결과가 잠시 나타난다고 해서 실망하거나 당황하지도 말고
그리고 가능한 각 상황마다 불확실한 IF 논의를 전개해 나가지 말고
자신이 그 양 최극단을 모두 붙잡아서
이에 대한 대비를 미리 마련해 놓고
그 상태에서 방향을 돌려 나갈 내용을 먼저 확보해 놓은 다음
그래서 목표한 수익이 뜻과 같이 얻어지면
그 상태에서 자신이 하고자 희망한 내용 가운데
당장 할 수 있는 일을 찾아
그것부터 하나하나 하는 것이
투자에 관련해 아무 신통력을 갖고 있지 못하고
그런 것을 기대하지도 않는 개미투자자가
잘 투자를 할 수 있는 방안이라고 제시한 것이기도 하다.
그것은 자신이 투자를 잘 해서 목표를 성취한 상태에서
하고자 희망하는 가치있는 일에 평소 전념하고
가치가 없는 일에 초점을 맞추지 않아야
오히려 그런 신통력을 갖추지 못한 개미투자자가
투자를 잘 하는 상태를 결과적으로 성취할 수 있다고
제시하는 내용이기도 하다.
라이터 화두도 성격이 같다.
라이터란 다양한 의미를 갖는다.
수행자에게 이것은 지혜와 복덕을 가져다 주는 광명과
관련된 내용이지만,
여하튼 현실에서는 불을 켜는 도구를 의미한다.
그런데 이 라이터는 원시시대와는 달리
현실에서는 어느 가게에 들러도 아주 쉽게
저렴하게 구할 수 있다.
그런데 정작 그것을 자신이 직접 부품을 하나하나
만들어서 처음부터 만들어 내려고 하면
도저히 만들기 힘든 것이기도 하다.
그런데 이것을 쉽게 현실에서
구해 사용하는 것은
자신이 그 부품 하나하나를 다 잘 만들어서 그런 것이 아니고
오히려 그런 것을 잘 모르고
제 각각 자신이 행하는 분야에 전념해서
그 내용을 각기 잘 행하기에 그렇게 된 것이라는 사실도
제시해주는 것이다.
그런 가운데 한편 자신이 직접 이것을 다 만들어야 한다면
성취하기 힘든 내용을 여러 이웃이 함께 도와서
그것을 제공해준다는 사실에 대해
감사하는 마음을 갖고 대해야 한다는 사실도
이 라이터 화두는 제시해주는 것이라고 본다.
예를 들어
현재 백업용 8 TB 하드 디스크를 1 달전에 주문하고
그것이 25 억원의 가치를 갖는 것이라고 제시하는데
사실 외국에서 구매하면 가격은 조금 싸도
사용 중에 에러가 발생하면 난감해진다.
그러나 어차피 디스크가 사용중 에러가 발생하면
애프터 서비스를 받아도 난감한 상황에 처하는 것은
마찬가지다.
25 억원의 가치를 갖는다는 것은
8 TB 하드디스크 용량을 대략 A4 용지로 환산해서
그런 평가를 하는 것 뿐이다.
A4 용지가 1 장에 10 원인데
아주 넉넉하게 계산해서 대략 그 정도 가치를 갖는다고
평가한 것 뿐이다.
그러나 A4용지 1장을 대략 1 만 B 파일정도로만 보면
다시 어떻게 계산해야 하는가.
80 억 정도의 가치를 갖는다고 재평가하게 된다.
텍스트로 1 만 BYTE 파일은 프린트하면
1~3 장 정도의 종이를 요구한다고 보는 것이다.
현재처럼 글을 쓰면 3 장이 요구되고
다 붙여쓰고 폰트를 줄이면 1 장도 가능하기에
일정하지는 않다.
그러나 사정이 이렇다고
정말 하드디스크는 80 억에 구입하고
라이터는 5 억원에 구입하고
이런 식으로 하는 이가 있겠는가.
상대가 그렇게 가격을 제시하면
바로 옆 가게로 발걸음을 돌릴 것이다.
그래서 위 가치평가는 단지 개인적으로
사용자가 얻는 효용(=사용자잉여분)을
평가해보는데 사용하는 내용이라고 보게 된다.
그런데 정말 사막에서 물이 필요한데
물이 딱 1 병이라거나,
전 세계적으로 라이터나 하드디스크가 딱
1 개라면 아쉬운 사람이 그런 가격에라도
구매하지 않을 도리가 있겠는가.
그렇게라도 제공해주면 감사하다고
보아야 하지 않겠는가.
그래서 라이터 화두는 그렇게 가치있는 것을
이웃들이 다 함께 노력해서 자신에게
싸게 제공해준다는 사실을 평소에
잘 평가하는 가운데
감사하는 마음으로 살아가야야 한다는 것을
제시하는 한편
수행자는 수행자가 수행을 통해
얻게 되는 복덕자량이나 지혜자량을
또 그와 같은 형태로 중생제도를 위해서
사용해야 한다는 것을
라이터 화두의 내용으로 놓고
생각한다는 의미다.
수행자가 자신의 생계는
옷 세벌, 밥먹는 그릇 하나, 숲 무덤가 나무밑의 주거만으로
해결하고
그 외로 주어지는 모든 것은
다 덤이고 자신의 복이라고 여기고
이것을 대하는 가운데
나머지 것들은 재벌을 포함해
다른 경우에도 결국은 즐거운 맛에 기여하는 부분인데
수행자는 이런 즐거운 맛을 그런 형태로 얻지 않고
수행을 통해서 법락을 얻는 형태로 바꾸어
쉽게 해결한다는 것도 의미하는 것이다.
물론 더 자세히 살피면
어떻게 여분의 자산들이 오직 즐거운 맛에만
기여하는가
다른 이의 생계도 해결하고 여러가지 효용을
갖지 않는가라는 반론도 있을 수 있지만,
이 논의는 한 개인의 문제를 다른 개인으로 옮긴다고 해서
성격이 달라지지 않는다는 점을 통해서
쉽게 해결할 수 있다고 본다.
즉 어떤 이에게 그것이 궁극적으로 생존과
즐거운 맛을 주는 것 밖에 없다면,
그것을 아무리 다른 주체에게 옮기도 또 옮겨도
상황은 마찬가지라는 의미다.
그래서 어떤 자산이 최종적으로 그런 의미밖에
주지 못한다면
그것은 다른 주체에게 옮겨가도
상황이 마찬가지라고 보게 되는 것이고,
또 한편 이것이 그런 의미를 벗어나는 계기는
수행자의 수행을 통해서
그런 것이 가능하게 된다고 보는 것이다.
그것은 앞의 경우는 그 모든 내용이
생사의 범위에 닫혀서
그 모두가 각기 죽음을 맞이하면
그 상태나 또 다른 세계에서 아무런 의미를
갖지 못하는 것인데
수행자가 이 자산을 다른 형태로 수행에 이용할 때
그것이 이런 의미를 벗어나게 된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그런데 여하튼 그런 것을 많이 갖게 되면
삶의 질이 그만큼 높아지는 것이 아닌가 하는 반론도 있는데
그 질이라는 것이 바로 즐거운 맛을
얻는 주체와 그 수와 양과 종류와 기간의 문제인 것이다.
그래서 하나의 자산이나 품목을 놓고 볼 때
다양한 기준에서 평가할 수는 있지만,
여하튼 일반적으로 평가하면
이것이 각 주체에게 최종적으로 생사의 고통을 벗어나게 하고
무량행문을 닦아 나가는 방편의 측면으로 이용되지 못하면
그것이 각 개인에게 최종적으로 가져다 주는 것은
결국 생존해결과 즐거운 맛으로만 나누어진다고
보는 것이 적절한 것이다.
그리고 생존해결과 즐거운 맛은
가장 적은 비용과 노력으로
가장 많고 질 높은 형태를 얻어내는 것이
또 현명한 것이라고 보는 것이다.
이것은 또 다른 화두 거대한 자락도구의 화두를
떠올리게 하는데
노르웨이 스웨덴 핀란드와 같은 국가에서
왕이 되거나 국회의장이 되거나 그 나라에서 제일
돈 많은 부자가 된다고 하는 상황을 놓고
그 상태가 의미하는 바를 음미하는 것을
뜻하는 것이다.
노스핀국가가 작은 국가가 아니고
수행자에게 무시받을 그런 국민들만 사는 국가는
결코 아닌데 왜 이런 비유를 드는가 하면
현재 있는 이 곳에서는
노스핀 국가의 왕이 누구인지 국회의장이 누구인지
그 나라에서 제일 부자가 누구인지 아는 이도 드물고
또 안다해도 별 효용이 없음을 의미하고
더 나아가 역사를 통해서 오래 지켜보아도
그런 상태가 오래 그 이름을 기억해주어야 할
의미나 가치도 없다는 점을 제시하는 것이다.
그런데 그것이 자신의 현실상황과 비교하면
어떤가를 또 생각하게 하는 것이다.
객관적으로 보면 사실은 노스핀 국가의 왕이나 국회의장
그 나라에서 제일 가는 부자들이
자신의 현실 상태보다는 훨씬 나은 것이 사실이 아닌가.
그러니 또 이것을 미루어서
현실에서 자신이 추구하는 것이 갖는 가치가
얼마나 보잘 것 없는 것인가를 깨닫고
빨리 방향 전환을 해야 한다는 것을
제시하는 화두인 것이다.
자락도구가 이처럼 크다고 해서
그를 통해 얻는 생존과 그를 통해 얻는 즐거운 맛이
훨씬 더 가치있게 그 의미가 바뀌는 것이 아님을 의미하고
단지 같은 내용을 얻는데
비용과 시간과 노력만 많이 들인
대단히 어리석은 일이 된다는 것을 여기서 지적하는 것이다.
그런데 아무리 그것이 작더라도
그 의미와 질이 달라지게 되는 계기는
바로 그것이 수행자가 무여열반을 얻고
중생제도를 위해 무량행문을 닦는 일과
관련되는 경우라고 보는 것이다.
그것은 가치저울에서
한쪽에 자신의 심장을 놓고
다른 쪽 저울에 무엇을 올려 놓아야 균형을 이루게 되는가를
가치회계를 통해서 평가해볼 때
그 사정을 잘 파악할 수 있다고 보게 된다.
자신이 이 평가과정에서
앞과 같은 거대한 자락도루를 올려 놓으면
그 쪽이 더 가치가 있다고 평가가 되면
그것을 선택하는 것을 비난할 도리는 없다.
그 경우 자신이 대단히 겸손하거나
대단히 어리석음을 나타내는 것이라고 보게 되지만,
그런 판단에 바탕해 그런 선택을 하는 것이라면
말릴 도리는 없는 것이다.
사실이 그렇지 않고
또한 그 당사자도 나중에 곰곰히
문제되는 것들을 가치저울에 올려 놓고
가치를 비교해보면 그렇지 않다고 스스로 잘 판단하게 된다고 보지만,
그러나 현실 생활 중에 어떤 것에 초점을 맞추고 임하게 되면
그 순간에는 마치 최면 걸린 이가 행하듯,
전도된 즉 거꾸로 뒤집힌 진리판단과 가치판단을 행하면서
그로 인해 자신의 눈도 뽑고 심장도 빼가면서
그처럼 가치가 적은 것을 추구해가는 상태도
현실에서는 수없이 나타나는 것이다.
몇억원 때문에 눈도 뽑히고 다치고 죽었는데
알고보면 그 돈도 얻지도 못하고 그렇게 다치고 죽었다.
이런 사례가 비일비재한 것이다.
그리고 매일 언론을 통해 보고되는 내용이
이런 성격의 사건사고인 것이기도 한 것이다.
예를 들어
돈이 많은 줄 알고 납치해 살해했는데
알고보니 몇 백만원밖에 얻지 못했고
물론 그 돈도 다 결국 차지하지 못한 채
이제 거주지를 교도소로 옮겨서 살아가야 한다는
사례는 대단히 많고 많은 것이다.
그 피해자의 목숨이 자신의 목숨이라고 해도
그렇게 할 것인가라는 생각은
이런 경우 아예 당사자들이 해보지도 않는 생각이라고
보게 되지만,
가치저울의 화두는
바로 자신이 남의 생명이나 남의 두눈을 놓고
평가한 금액이 바로 남들에 의해 평가되는
자신의 생명이나 두 눈의 평가액임을 제시하는 내용이다.
그리고 생명은 차별이 없고
모두 장차 성불할 귀한 존재라는 것도
부처님이 제시하는 내용인 것이다.
그래서 아무리 축생의 상태에 있는 생명에게 보시를 해도
4000 배의 수익을 얻는다고 제시하는 것이고
부처님이나 가난하고 병든 이웃에게 보시하는 것은
모두 차별없이 무량한 수익을 얻는 것이라고
제시하는 사정이 있는 것이다.
그래서 자신이 하찮게 보는 모기 뒷 다리나 모기의 생명을
얼마의 가격으로 평가하는가가
곧 자신의 신체나 생명이
다른 생명들로부터 얼마만한 가치를 갖는 것으로
평가받는 기준이 된다는 사실을
가치저울의 화두가 제시해주는 것이다.
이것이 인과관계상 서로 그렇게 관련되기에
그런 것이기도 하고
이런 내용은 성경에서는
자신이 남에게 대우받고자 하는 내용을
자신이 먼저 남에게 행하라는 형태로
제시되는 원리이기도 한 것이다.
그 관계를 그렇게 보지 못하고
좁고 짧고 얕게 관찰을 하면서
망상분별을 증폭시키는 가운데
자신이 좋아하는 것을 집착을 갖고 추구해 나가기에
대부분 자신이 원하지 않는데도 불구하고
매번 생사고통을 받는 세계에 묶여
삶을 살아가게 된다고
제시하는 것이기도 하다.
그런 가운데 있다 없다의 논의를 살피는데
이것이 위와 같은 결론과 대단히 밀접한 내용이기도 하다.
기본적으로 있다 없다의 논의는
그런 내용을 얻을 수 없고
그에 해당한 진짜는 없다는 것을 제시하는데
그러나 현실은 위와 같이 전개된다.
그러니 이런 바탕에서
어떻게 현실에서 수행을 해야 하는가가
본 논의의 핵심이기도 한 것이다.
[...]
사실 다른 이들이 누구에겐가 그가 하는
일정한 분야의 일을 잘 해줄 것을 기대하는데
정작 그 당사자가 그 일을 기대한 만큼 잘 하지 못하면
그것은 대단히 큰 문제인 것이다.
그런데 그렇게 되는 사정이
개미투자자자가 자신이 해야 할 일을 팽개치고
전문 펀드 매니저 흉내를 내면서 시세판을 바라보고 하루를 보낸다거나
어떤 이가 사용하던 모터가 고장나면 모터 수리전문 기사인양
온갖 모터 관련 내용을 검색해 찾으며 수리하러 나선다거나 하면서
시간과 정력을 낭비하는 경우가
그렇게 되는 기본 사정이라고 보게 되는 것이다.
아주 특수한 사정
즉 본인처럼 원래부터 그런
연구가 전문이었다거나 (^^)
무량행문에서 자신의 관심분야가 원래 그것이라거나
자신의 생계 해결 방편이 바로 그것이라거나 한다면
또 모르지만,
자극을 받기만 하면
온갖 일에 오지랍 넓게 다 뛰어들면
설령 재주가 10 개라도 그로 인해
굻어 죽게 된다는 전설이
세간에 상당히 설득력있게
전해지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변호사가 tv 선 연결을 직접 할 수 있다거나
의사가 자동차도 수리할 수 있다거나
교수가 프린터도 수리할 수 있다거나 하면
굳이 나쁘다고 할 것은 아니라고 보는데
대충 그런 경우 그 변호사나 의사나 교수는
자신이 원래 하는 분야는 상당히 수준이 낮은
엉터리라고 보아야 하는 것이기도 하다.
원래 최고 전문가는 그런 경우
시계를 달걀로 알고 통에 넣고 끓인다거나
그렇게 임해야
그 분야에서 어떤 결과를 얻어낸다고 보는 것이고
이것은 반드시 그런 전문분야만 그런 것이 아니고
삶의 어느 분야나 마찬가지다.
그것은 또 수행자도 마찬가지다.
수행자가 생사문제를 잘 해결하지 못하고
온갖 잡스런 문제에 관심을 가지면
곤란한 것이다.
그러면 그 수행자가 어떻게 자신의 생사문제를 해결하고
다른 생명도 쉽게 생사문제를 해결할 수 있도록
도움을 줄 수 있겠는가.
앞의 내용이 그대로 적용되는 것이다.
의사가 자동차는 잘 고치는데
정작 수술은 할 때마다 실패해서
환자가족들이 장의사와 매번 곧바로 상담하게 되면
그것이 일을 잘하는 의사라고 할 수 있는가.
그렇기에 라이터 화두를 잘 살피는 가운데
자꾸 자극받는 작은 것에 집착해서
큰 가치를 잃어 버리는 경우가 반복되면
그런 생활 자세를 교정해야 한다고 보는 것이다.
수행자는 그래서 원칙적으로
이런 분야에 관심을 끊고
생존과 건강만 확보되면 수행에 전념하는 것이고
건강이 안 좋으면
기본적으로 가벼운 스트레칭과 운동을 꾸준히 하고
쉴 때마다 삼매에 들어서
죽어가는 말초혈관을 살려내는 활동부터
하나하나 하면서
가장 중요한 건강만 다시 확보하면
또 그런 수행에 임해야 한다고 보는 것이다.
그래서 제 각각 자신의 분야에 전념해야
또 삶의 빈곤문제도 해결되고
여유를 확보할 수 있게 되고
그래야 또 생사를 벗어날 계기도
확보하게 된다고 보게 되는 것이다.
사는 것 자체가 급한 상황에서
어떻게 정려나 삼매 반야 수행을 시작할 도리가 있겠는가.
그런데 그렇게 되지 못한 원인이
바로 이런 사정 때문에
그렇게 되었다는 것부터
잘 확인해야 하는 것이다.
공연히 푼돈 절약하느라고
감전 당하고
모터에서 품어 나오는 물에 샤워하고
이런 활동을 시도하면 곤란하다고 보게 된다.
알고보면 작은 것에 대한 집착이
강해서 그런 것이고
그만큼 전도망상증이 심하기에
그렇다고 보게 되는 것이다.
[...]
이는
집에 불이 났는데
자신이 쇠 막대기에 꽂혀서 도는 상황에 놓여 있다는
극단적인 사례를 들어
있고 없음의 논의가 왜 현실에서
필요한가를 쉽게 설명하고자 한 것이다.
그런데 이런 상황이 왜 발생하는가는
또 앞의 문제와도 깊게 관련이 되어 있다.
이미 앞에 소개한
라이터 화두나
개미 투자자의 생존 이론이나
대형 자락도구 화두 등의 내용을
잘 음미하지 못하고
자신이 초점을 어느 계기로 맞추게 되어 집착하고 붙잡히게 된 내용을
특히 자신의 이익만 극단적으로 추구해 나가면
결국은 이런 상황을 만나게 된다는 것이
여기서 제시하고자 하는 핵심사항인 것이다.
[...]
쉽게 예를 들어
택시를 모는 기사가
택시를 잘 운전해서 손님을 목적지로 안전하게
데려 주어야 하는데
이 택시기사가 운전 중에 길거리를 지나가는
아름다운 아가씨의 뒷 모습에 초점을 맞추거나
핸드폰 게임에 더 관심을 갖는다면
어떻게 된다고 보는가.
그날 목적지에 도착하기 보다는
이후 중환자실에서 손님과 같이 생활하게 되기 쉬운 것이다.
그런데 그 사정이 대부분 경우가
다 마찬가지라고 보아야 하는 것이다.
있다 없다의 논의는
생사고통을 벗어나는 수행이 전문인
수행자가 쉽게 잘 설명을 해야 하는데
문제는 이것을 바로 논의하면
대부분 곧바로 페이지를 닫거나
졸려 하기에
현실문제와 관련시켜서
이것을 논의해야 할 필요성을 본인부터
강하게 갖게 되는 것이다.
있고 없음의 논의를 살피는데
제시한 위와 같은 사례는
현실에서 잘 발생하지 않는다고 보기 쉬운데
물론 상징적으로 위와 같이 표현한 것이지만,
사실은 대단히 많이 발생하는 내용들이다.
그래서 이 문제를 놓고 살피기로 한다.
그런데 그런 문제를 예방하려면
라이터 화두나
개미 투자자의 생존이론이나
대형 자락도구 를 통해
세상에서 함께 살아가는 모든 생명이
다 미래에 성불할
소중한 존재임을 생각하고
평소에 생활하는 부분부분을 놓고
감사하고 만족하는 기본 자세를
갖추는 것이 대단히 필요하다고 본다.
지금 손이 정상이고
혈관이 아직 터지거나 막히지 않았다면
그것도 감사하는 가운데
위와 같은 사태를 놓고
있고 없음의 문제를 깊게
따져 보는 일을 시작해야 하는 것이라고 보는 것이다.
이것이 선후가 뒤바뀌면
별 효용이 없는 논의로 그치기 쉬운 것이다.
무엇이 있고 없음의 논의는
그다지 재미있는 논의는 아니다.
특히 현실에서 자신이 무엇이 있다거나 없다고 생각하고
열심히 살고 있는데
그것이 자신이 돈 상태 즉 전도된 상태에서
망상분별을 일으켜 그렇게 생각하고 살아간다고 제시받으면
상당히 혼란스럽게 여길 수 있다고 본다.
현실 전반을 실답게 보고 잘 살아가고 있는데
논의는 복잡하고
그런 가운데 정상적으로 잘 살아가고 있는 자신을
공연히 돈 사람 취급하니
마음에 그다지 드는 논의도 아니라고 보고
외면하기 쉽다고 본다.
그런데 사실은 돈 상태에서는
그런 논의 자체가 아예 처음부터 보이지 않는 것이
현실이라고 할 수 있다.
현실적으로 이런 내용을 지적하는 경전이
어느날 갑자기 생겨난 것도 아니고
아주 오래전부터 제시되었는데
그러나 현실에서 잠깐도 거기에 관심을 기울일 수가 없고
설령 기울인다고 해도 그 내용을 이해할 수 없는
상태가 거의 대부분이라고 보아야 한다.
쉽게 표현하면 소의 상태가 그런 것이다.
그래서 이런 현실 상황을
소귀에 경읽기 상황이라고 표현한다고
보게 된다.
이런 속담에서 소가 사람에 비해 대단히 크다고 보는데
동물 중에서 가장 덩치가 큰 코끼리를 놓고 생각해보자.
이 코끼리는 초식동물이어서 자체적으로 온순하고
다른 동물을 해치는 것은 아닌데
사자도 함부로 대하지 못하는 동물이다.
그런데 이 코끼리를 자신의 뜻대로 부리는
사육사가 있다고 한다.
태국 같은 곳에서는 그렇게 코끼리를 사역시키면서
무거운 것도 옮기게 한다.
그런데 어떻게 몸도 작은 사람이
그렇게 큰 코끼리를 뜻대로 부리는가.
여기에는 쉽게 표현해
당근과 채찍의 원리가 작용한다고
할 수 있다.
태국의 사육사가 코끼리를 마음대로 부리게 되는
과정에는 처음 코끼리가 세상에 태어나서
얼마 안된 시기에 코끼리를 완전히
자신의 말을 듣도록 훈련하는 기간이 있는 것이다.
이는 결국 사육사가 사자나 곰이나 기타 말이나 소와 같은
동물을 사육하는 원리와 전혀 다르지 않다.
그것이 한마디로 채찍과 당근이라는 원리인 것이다.
그런데 여기에 단점이 있다.
요즘 컴퓨터나 기계를 뜻대로 부리는 입장에 있는 이들이
부딪히는 문제와 같은 문제가 여기에 있는 것이다.
수많은 일을 반복해야 할 때
이를 컴퓨터나 기계가 처리해주는데
문제는 이런 일을 그렇게 처리하고자 할 때
그 컴퓨터나 기계에 일일히 사람이 붙어서
GO STOP TURN PASS 이런 결정을 해주어야 한다는
문제가 뒤따르는 것이다.
컴퓨터 사용자는
사람이 직접 해야 할 수많은 작업을
컴퓨터가 아주 빨리 처리하여 자신을 도와줌을 인정하지만,
그러나 그 컴퓨터 때문에 한시도 쉬지 못하고
컴퓨터에 붙잡혀 있는 경험을 하게 된다고 본다.
컴퓨터를 이용할 때
사무가 자동화되어서 편해졌다지만,
예를 들어 입력창이 열리면 입력을 해주어야 하고
또 계속할까요 멈출까요 이런 메세지가 나타날 때까지
기다려야 하고 그리고 명령을 입력해야 하고
이런 과정 때문에
사용자가 한시도 컴퓨터 모니터 화면에서
시선을 떼기 힘들고
결국 컴퓨터로 일을 하는 사람은
컴퓨터에 접착되어 붙어 있어야 하는 상황이 된다.
그리고 이런 일을 반복하는 가운데
나중에 음미해 보면 컴퓨터가 거꾸로 사람을 붙잡아 놓고
일을 시키는 형국이 되었다고 음미하게 되는 것이다.
게임을 좋아해서 게임을 하는 입장도 마찬가지다.
자신이 버튼을 눌러 케릭터를 움직이고
재미있게 게임을 하는 가운데
거기에 자신이 붙잡혀 제대로 식사하지도 못하고 쉬지도 못하는 가운데
계속 열심히 버튼을 누르는 노동을 하게 된다고
평가되기도 하는 것이다.
이제 태국의 사육사의 상황으로 가보자.
무거운 나무를 옮기는 일을
코끼리가 대신 해주어 편하기는 한데
문제는 그 일을 코끼리가 하는데에는
그 사육사가 늘 같이 있지 않으면
그렇게 일을 시키기가 힘든 것이다.
그러니 결국 코끼리가 일을 하면
사육사도 코끼를 사역시키기 위해
코끼리에 붙어 일정한 일을 해야 한다는 문제가 있는 것이다.
과거에 죄수나 노예를 붙잡아서
성을 쌓거나 도로를 닦는 일을 시킨
이집트나 로마에서도 비슷한 문제가
발생한다고 할 수 있다.
일일히 지시하고 일을 시키면 일을 하는데
상대는 쉼없이 도망가려고 하는 것이어서
일을 시키는 입장이 마냥 편한 것은 아닌 것이다.
MUN 님이 말하는 세트 이론은
처음에 자신이 황제가 되어
그런 방식으로 자신의 뜻을 실현시키고자 할 때
발생하는 어려움을
세트이론으로 해결했다는 내용이기도 하다.
이것이 무슨 내용인가.
앞에서 보는 모든 내용은
코끼리나 사자나 또는
컴퓨터나 기계던 간에
그것을 놓고 무슨 일을 성취시키려면
그 자신이 거기에 붙어
일일히 버튼을 눌러야 하는 한편
그 상대는 이로 인해 고통을 호소하거나
비용을 요구하는 점이 문제인 것이다.
그래서 일은 자신의 뜻대로 성취하지만,
앞과 같은 문제는 제거하는 방안을 찾아 나서게 되었고
그것을 세트이론이라고 제시한다는 것이다.
자동차를 A 지점에서 B 지점으로 옮기는 과정에서
자동차 부품을 하나하나 따로 본다면
이 부품을 다 하나하나 떼어 B 지점으로 옮기고
그 B 지점에서 이를 다시 조립해야 한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그런데 현실에서 그렇게 자동차를 옮기면
어리석다고 하고
단순하게 자동차 열쇠만 꼽고
핸들과 액셀 브레이크를 조작해서
GO STOP TURN PASS 를 하면
자동차 전체를 옮기게 된다고 볼 것이다.
그런데 더 나아가 그런 일도
그렇게 하기를 원하는 이가 할 수 있게 하면
더 간단하다고 보게 된다.
이 경우 자신이 직접 그렇게 운전하지 않고
다른 이에게 운전하게 하려면
앞에서는 그런 일을 하고 싶어하지 않는 노예나 죄수를 붙잡아
그렇게 행하게 하도록 하기 위하여
채찍과 당근의 방안을 사용해
강제하거나
그런 일을 대신 해주는 이에게
일정한 비용을 지불해야 했다는 것이다.
그런데 어떻게 하니까,
앞의 문제가 다 없어지고
그러나 옮기고자 한 자동차는
A 에서 B 지점으로 옮겨지게 되었다고 하는 것이다.
그래서 이렇게 되게 된 과정을
mun 님이 세트이론이라고 표현하여
제시하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그런데 도대체 무엇이 그렇게
결과를 만들어주면서도
일일히 채찍과 당근을 사용하거나
지시하지 않고
그런 결과가 나타나게 되었는가.
이것을 잘 살펴야 한다고 보게 된다.
알고보면 채찍과 당근에 해당하는 내용이 없이는
좋음을 추구하고 싫음을 피하는 어떤 생명도
그런 일을 하려 하지 않고
기계도 일정한 에너지를 공급받지 않으면
그런 일을 하지 못하는 것인데
mun 님의 세트 이론은
그 각각에 그것을 자체적으로 장착시켜서
그렇게 되었다고 제시하는 것이다.
이 현상을 좋다고 보면 좋지만,
그러나 왠지 자신이 돈 상태이기에
그렇게 이용당하고 사역을 당한 것이라고 평가한다면
여기에서 스스로 벗어날 방안을
또 찾아야 하는 것도 사실이다.
간단히 말하면
mun 님의 세트이론은 이런 것이다.
자신이 기름진 땅이 필요한데
일일히 퇴비를 만들어서 뿌리거나
비료를 사서 뿌리기 힘들다.
그래서 지렁이를 수백마리를
자신의 땅에 풀어 놓고
지렁이가 잘 살 수 있도록 환경을 마련해주었다.
그랬더니 나중에 그 땅이 기름지게 되었다.
또는 꿀벌을 치는 이가
꿀을 원하는데 일일히 꿀을 만들기 힘드니
꽃이 많이 있는 숲에 벌집을 지어
벌들이 살게 하니
나중에 벌집에 꿀이 가득차게 되었다.
이런 식으로 세트이론을 설명하는 것이다.
여기서 자신이 원하는 결과를 얻기 위해서
직접 지렁이나 꿀벌이 행하는 일도 하지 않을 뿐 아니라,
지렁이나 꿀벌이 활동하는 매 순간
그렇게 땅을 기름지게 만들거나
꿀을 따오도록
옆에 붙어서 채찍과 당근을 사용하며
일일히 지시를 하지 않아도
그대로 두니 그런 결과를 만들어 내었다고
제시하는 것이다.
이 과정을 잘 살펴보면
아무리 그렇다 해도 처음 무언가
노력하는 일은 있지만,
앞의 방식이 갖는 많은 문제점이 여기에서는
보이지 않는다.
그래서 요즘 mun 님이 황제로서
원하는 것을 다 뜻처럼 이루고
매일 이런 우주세트를 통해서
식사도 잘 해결하고
그리고 자신은 자신의 돈을 들이지 않고
자신이 과거에 황제로 지내던 당시
정말 하고 싶었던 국토 여행을
마음대로 다닌다고 제시하는 것이다.
그런데 그렇게 자신의 뜻대로
우주를 관리하는 황제라고 자부해서
옆에서 어떻게 지내는가를 살펴보면
고시원에서 생계를 해결하는 상태인 것이다.
일단 mun 님도 자신의 자유로운 상상에 의해
자신의 상태를 자유로이 시감상할 수 있다고 하지만,
mun 님의 망상상태가 심각하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mun 님의 이런 망상적 시감상이
어느 정도 음미할 부분도 있다고 보게 된다.
그래서
수많은 이웃의 도움이 없으면
라이터 하나도 편하게 사용할 수 없다는
본인의 라이터 화두가
이 세트이론과 조금 뉘앙스가 다르다고 보지만,
어느 정도 공통적인 내용을
제시하는 측면도 있다고 보게 된다.
그런데 여하튼
이것이 결국 무엇이 있고 없음의 논의와
매우 밀접한 관계를 갖는다고 본다.
앞과 같은 사례를 놓고
그 상황에서 지렁이가 돈 것인가.
mun 님이 돈 것인가의 문제가 제기될 때
이 문제를 판단하려면
결국 있고 없음의 논의를 잘 살피지 않으면
곤란한 것이다.
있고 없음의 논의를 하기 전에
이 논의가 어떤 효용을 갖는가를
살피는 중인데
이미 대강은 살폈지만,
조금 부족한 부분이 있다고 보기에
이것을 계속 살피는 중이다.
앞에서 mun 님이
백백교 교주님이 하산하실 때까지
56 억년간 10 억 세계를 관리하는 방안인
세트이론을 살펴보았다.
그런 측면에서 mun 님이 황제라고 한다면
서울만 해도 현재 8 만 4 천명의 황제가
똑같은 형태로 활동중이라고 보아야 한다.
mun 님과 같은 형태로 현재 활동 중인 분이
정말 서울에만 8 만 4 천 분이 계신 것이다.
그러나 8 만 4 천 분이 외관은 같고
하는 일은 같다고 보지만,
다 mun 님처럼 생각하는 것은 아니라고 본다.
그 중에는 자신은 황제가 아니고
자신은 단지 Knight 로 활동중이라고
생각하는 입장도 있다고 본다.
그런데 수행자도 mun 님의 세트이론과
유사한 형태를 취하는 경우가 많다.
수행자가 수행을 함에 있어서
수행을 방해받는 경우를 종종 만나게 된다고 할 수 있다.
수행자의 수행을 방해하는 일은
보통 파순이 하는 역할이라고 보게 된다.
온 생명을 차별없이 모두 다 좋고 좋게 만들려고
수행하는 수행자로 인해
자신이 피해나 고통을 받는다고 걱정하는 입장은
파순과 같은 상태 외에는 별로 없기 때문이다.
이 때 수행자가 이 파순을 어떻게 하는 것이
가장 좋은가는
그냥 내버려두고
안인을 닦으면서 자신의 수행에 정진하는 것이
그 방안이라고 보통 보게 된다.
그러면 파순이 알아서 스스로
앞과 같이 열심히 우주 세트를 돌리고 관리하면서
임하게 됨을 말하는 것이다.
수행자가 파순을 제도하려면
사실은 파순을 더 도와주어
빨리 그 끝을 만날 수 있도록 해주는 것도 방안인데
수행자가 그런 노력을 포기하고 방치하고
자신의 수행에 전념하면
파순은 파순의 상태를 벗어나지 못하게 되어
파순 입장에서는 가장 안타까운 상태가 되는데
그래서 수행자가 이를 그대로 방치하고 내버려둔다는 것이
사실은 가장 무서운 내용이기도 한 것이다.
부처님이 경전에서 중생들을 제도하기 위해서
같은 내용을 두 번 말하는데
그래도 듣지 않고 쇠고집을 피우고 임하면
어떻게 하는가에 대해서
위와 같은 내용을 제시한 바 있다.
말을 모는 마부가 말을 듣지 않는 말을
죽이듯 부처님도 그런 중생은 죽인다고 제시한 것이다.
그런데 정작 부처님이 중생을 죽이는 행위를 하지 않는데
왜 죽인다고 하는가 물으니
자신이 더 이상 말하지 않고 그 중생을 방치하면
그 중생은 생사를 벗어나지 못하고 죽게 되고
이후 무한한 기간 생사고통을 받아나가게 된다는 사정을
그렇게 표현해 제시한 것이다.
그래서 수행자가 어떤 중생을
외면하고 내버려둔다는 것은
사실은 이런 내용을 의미하는 것이 되어서
상당히 안타까운 상태가 된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말을 해도 듣지 않으면
무슨 방안이 있을 수 있는가.
자발적으로 생사를 벗어나는 수행을 해야
그 수행이 그 의미를 갖는 것인데
말을 해도 듣지를 않으니
다른 방안이 남아 있지 않다는 그런 의미로 보게 된다.
그리고 또 하나 수행자에게도
위와 같은 세트 이론이 또 적용될 부분이 있다고 본다.
이미 수행자에게 봉 노릇을 해주시는 봉 부처님의 사례를
보았는데
아미타 부처님이나 약사여래님과 같은 부처님들이
대표적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도대체 이 부처님들은 왜
그런 봉 노릇을 수행자에게 해주시는 것일까.
그리고 그런 부처님들은
어떻게 그 막대한 비용이나 노력을 감당할 수 있는 것인가.
이런 의문을 가질 수가 있다고 본다.
그런데 여기에는 역시
세트이론과 관련해
다음과 같은 힌트를 찾을 수 있다고 본다.
우선 그런 불국토를 건설하고 운영하는 일을
앞에서 자동차를 A 지점에서 B 지점으로
이동시키는 문제와 성격이 같은 문제로 놓고
살피는 것이다.
만일 앞의 문제에서 그 자동차 부품 하나하나를 다 개별적으로
옮겨야 한다고 보면
하나의 불국토를 건설하고 운영하고자 할 때에도
그런 서원을 가진 수행자가
그 불국토의 건설을 위한 벽돌부터 못까지
하나하나 다 그렇게 만들고 옮겨야
그런 불국토를 이룰 수 있다고 보게 될 것이다.
그런데 이 일을 만개의 도미노가 있을 때
단 하나의 도미노만 쓰러뜨려 모두를 쓰러뜨는 것처럼
대하여 그 방안을 알게 된다면
굳이 그렇게 하지 않아도 된다고 보는 것이다.
앞에서 자동차는 열쇠를 꼽아서
엑셀을 밟고 핸들을 움직이면
그 모두를 원하는 곳으로 움직이게 할 수 있다고
하는 것과 사정이 같다.
그래서 그런 방안을 알면
그것이 그렇게 되지만,
그러나 모른다면 각 부품을 하나씩
다 옮겨야 한다고 보고
온갖 수고를 다 하더라도
정작 뜻과 같이 성취하기는 힘들다고 보게 될 것이다.
그리고 또 하나 수행자의 세트이론과 관련된 힌트는 다음이라고 본다.
아미타 부처님을 예를 들면
아미타 부처님이 극락세계를 건설해서
수많은 세계에서 극락세계에서 수행하기를 원하는
봉타래수행자들을 모집해 수행하게 하는데
이 가운데 대표를
관세음보살님과
대세지보살님이라고 보게 되는 것이다.
그런데 관세음보살님과 대세지보살님이
부처가 되실 때는
아미타부처님의 극락세계를 물방울 하나라고 하면
관세음보살님과 대세지보살님이 만들어내는 불국토의 장엄은
바다와 같다고 비유로 제시되는 것이다.
그래서
결국 극락세계에서 수행하는 그외 수많은 불제자들의 상황도
이에 준해 검토해 볼 필요가 있다고 보는 것이다.
그래서 아미타 부처님이 수행자들의 봉 노릇을 하게 되면,
이들 수행자들이 곧바로 일생보처 보살이 되고
그로 인해 이룩하게 될 불국토의 상태를
모두 미루어 헤아린다면,
이것이 곧 봉 노릇을 처음 하신 아미타 부처님의
세트와 같다고 평가할 수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런 결과를 이루어내는 것이
아미타부처님이 극락세계를 운영하고
수행자의 봉노릇을 하시는 본 취지가 아니겠는가.
이런 생각을 해보는 것이다.
여하튼 수행자는 이런 사정에서
열심히 봉타래 수행자로 임해
수행에 정진해야 한다고 보게 된다.
그리고 만일 그런 봉타래 수행자가 전혀 없게 되면
이런 상황을 가장 안타깝게 여길 분도
역시 수행자의 봉 노릇을 해주시는
부처님이라고 보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수행자가 또 다른 중생을 제도할 때는
다시 이런 관계를 다시 중생과의 관계에서
마찬가지로 재현하게 된다고 보게 된다.
그런데 앞에서
벌꿀의 관계를 놓고 보면
벌치는 아저씨 때문에
벌들이 공연히 힘든 일을 한다고 보고
벌이 좋아하는 꽃을 치우거나
또는 벌이 꽃에 대해 갖는 집착을 버리라고 권유하면
일단 벌치는 아저씨가 가장 예민하게
신경을 쓰게 된다고 보지만,
또 한편 벌 자신부터
그것을 거부하게 된다고 보게 된다.
왜 그런가하면
벌은 처음부터 태어날 때부터
그렇게 꽃을 놓고 애착을 갖고 생활하게끔 된 상태로
삶을 출발하고
그 상태에서 삶을 마치기 때문이라고 볼 수 있다.
그리고 벌집 아저씨가 꿀을 가져가도
살 집도 주고
겨울을 날 수 있도록 설탕도 대신 공급해주기에
벌 역시 벌치는 아저씨를 싫어하는 것도 아니고
오히려 좋아하기도 한다고 보는 것이다
이것은 대부분 축사에서 생활하는
축생과 목동의 관계와 비슷하다고 보게 된다.
목동이 결과적으로 축생을 이용하는 것처럼 보게 되지만,
그러나 목동도 축생의 먹이도 주고
늑대와 외부의 침입으로부터 보호도
열심히 해주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렇게 mun 님이 말하는
세트가 한 번 형성되면
그 상황에서는
이 관계를 스스로 벗어나기가 대단히 어렵다고 보고
그래서 여기에서는 물리현상과 마찬가지로
집착에 의한 작용 반작용의 관계가
거의 99 % 적용되어 그 세트가
그렇게 돌아가게 된다고 보게 되는 사정이
있다고 본다.
그리고 어떤 주체가
이런 세트에서 삶을 시작하는 경우
그 관계는 보통 죽음을 맞이해야
겨우 바뀔 가능성이 보이게 된다고 보게 된다.
즉 이유는 모른다해도
각 생명은 태어날 때부터
눈을 뜨면 그런 모습을 그렇게 보게 된 것인데
어떻게 이 상황에서 벗어날 수 있겠는가.
있고 없음의 논의는
중생들이 이런 사정을 스스로 잘 깨달아서
생사 고통을 벗어날 것을 목표로
비록 제시하는 것이지만,
그러나 현실에서 이 사정을 올바로 관하고
또 그런 바탕에서 올바로 수행해
생사고통을 스스로 벗어나는 것은
사실은 극히 힘든 일이라고 보게 되는
사정도 있는 것이다.
mun 님의 세트이론을 상당히 길게
소개했는데
이는 있고 없음의 논의가
생사고통을 벗어나게 하는 효용을
설명하는데 있어서
의미가 있다고 보는 것이다.
[...]
여하튼 조금 우울할 때는
자신이 미래에 성불하는 존재임도 관하고
다른 중생도 자신처럼 평등하게
미래에 성불하는 미래의 부처님들이라는 것도
관하는 가운데
장차 자신이 세울 불국토는
중생제도를 하기 위에
어떻게 좋은 시설을 꾸밀 것인가를 구상해보는 것도 좋다고 본다.
[...]
부품이 하나만 도착해서 부품을 갈았지만,
효과는 나타나지 않고 있다.
그렇다고 이 부품 하나가
의미가 없는 것인가하면
그렇지는 않다.
그래서 a + b => C 의 관계식을
잘 검토해 볼 필요가 있다고 보게 된다.
이것이 곧 본인의 라이터 화두나
mun 님의 세트 이론을 이해하는 데
필요한 내용이라고 보게 된다.
그런데 여하튼
전 우주가 현실적으로 mun 님에게
매일 짜장면을 공급해주기 위해서
그렇게 움직이는 것은 아닌데
그런 이상한 세트이론을 주장해서
자신이 좋아서 무언가를 하고
싫어서 무언가를 하지 않는 것일 뿐인데
이런 일련의 과정을
마치 mun 님이 세트에 자신을 그렇게 접착시켜 놓아서
그런 일을 그처럼 하게 된 것처럼
생각하게 만드는가.
어떻게 보면 이는 대단히 불쾌한 해석이 아닌가.
그래서 이 문제를 놓고
있고 없음의 논의를 깊이 있게
살펴야 할 필요가 있다고 본다.
사실 mun 님의 세트이론은
mun 님 자신이 외관상 황제가 아닌데도
자신이 실질적으로 황제의 기능을 수행하고 있음을
내세우기 위해서 제시한 이론인데
그러나 이것이 불교에서 말하는
혹업고의 과정을 설명하는 이론과도
공통된 측면이 있다고 보게 된다.
세계가 왜 이렇게 이런 모습을 나타나는가에 대한
이론적 설명에서
업감연기라는 이론이 있는데
그것은 각 중생이 각기 전도망상과 번뇌에 묶여
그렇게 사역을 당하고 있기에
그런 모습이 그렇게 나타난다고 설명하면서
결국 번뇌-업-생사고통의 세계 [혹업고]
관계를 제시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결국 mun 님은
이렇게 이뤄지는 혹업고의 관계로
본래 각 생명이 묶여 돌아가고 있는 우주세트 위에
단지 숫가락만 하나 얹어 놓고
자신이 황제로서 이런 우주세트에서
식사를 제공받는다라고 제시하면
마치 그런 것처럼 여겨지게 되는 것이라고 본다.
그런데 여하튼 이 이론에서 과연
누가 제정신이 아닌 상태로 돌고 있는가가
여기서 문제의 핵심인 것이다.
이 문제를 이해하기 쉽게 하기 위해서
비유를 다시 들어 살펴보기로 하자.
이미 많이 살핀 최면 자료를 또 놓고
생각해보자.
최면자료는 굳이 또 올릴 필요가 없다고 보지만,
시간이 나면 복사해 놓기로 하고
여기서는 바로 설명으로 들어가자.
예를 들어
최면술사가 최면을 걸어
최면에 걸린 다수가 모두
자기 앞에 개가 있다고 여긴다고 하자.
그런데 관객은
그 상황에서 그런 개가 없다고
보고 있는 것이다.
여기서 누구를 기준으로
있고 없음을 살피는 것이
과연 옳은 것인가가 처음에 문제된다.
이 문제는 물론
관객의 입장을 취하는가
아니면 최면에 걸린 이의 입장을 취하는가에
따라 결론이 달라질 것이다.
그런데 이런 비유처럼
불교에서는 현실에서 살아가는 이들이
마치 최면에 걸린 상태처럼
있고 없음에 대해 망상분별을 일으켜 대하는 상태라고
지적하는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최면에 걸린 입장에서는
도저히 자신의 생각이 잘못이라고 생각되지 않고
그리고 관객의 입장도 잘 이해되지 않는 상태인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다음을 다시 생각해보아야 한다.
관객은 관객의 입장에서
관객이 보는 내용만 얻고 있고
최면 걸린 이가 어떤 상태에 놓여 있는가는
직접 잘 모르고
단지 피상적으로만 이를 이해하는 상태라고 할 수 있다 .
왜냐하면 관객 자신은
직접 그런 최면에 걸려 있지 않기 때문이다.
그리고 최면 걸린 이들의 입장도 마찬가지다.
최면 걸린 이들은 자신의 내용만 얻고
정작 관객의 입장으로는 상황을 대하지 못하는 가운데
그 상황에 임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꿈의 비유도 마찬가지다.
꿈에서 보는 황금은
꿈의 상태에서 보는 것이다.
그리고 현실에서는
그런 것이 없는 것이다.
문제는
꿈을 깬 상태에서는 현실만 확인하게 되고
꿈 내용은 막연히 피상적으로 떠올리고
꿈의 상황에는 직접 들어가지는 못하는 것이다.
또 꿈꾸는 상황에서는
역시 꿈 내용만 대하고
그 상태에서 현실내용은 잘 파악하지 못하는 것이다.
이처럼 각 입장에서
각기 다른 측면으로 있고 없음을 문제삼게 되는데
정작 이 두 측면이 서로 분리되어
이것을 다 함께 같이 놓고 살피는 상태에 이르기
힘들다는 것을 일단 여기서 지적하게 된다.
그런데 여하튼 이 두 입장 가운데
무엇이 더 적절한가를 판단하려면
이 두 내용을 같이 얻는다고 가정하는 가운데
이 가운데 어떤 측면이 더 적절한 내용인가를
살펴야 한다고 보는 것이다
현실에서는 이들 내용이 있다고
대부분 판단하는데
이런 것들이 하나같이
진짜가 아니고
그 실재는 얻을 수 없어서
실답지 않다고 제시하여
있고 없음에 대한 판단이 서로 엇갈릴 때도
앞의 상황에 준해서
이를 판단해야 한다고 본다.
왜냐하면
자신이 현실에서 얻는 내용만을 고집하고
이 문제를 살피면
앞의 문제에서
꿈을 꾼 이가 꿈 내용만 붙잡고
있고 없음을 따지거나,
최면 걸린 이가 최면 상태에서 얻은 내용만 붙잡고
있고 없음을 따지는 상태와
비슷하게 되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이런 내용을 직접 얻지 못하고
피상적으로만 이를 관찰하는 관객입장만 기준으로
살피면
또 이 역시 적절하지 않다고 보게 된다.
[...]
라이터화두는
라이터 하나를 사용하는데에도
전 세계가 서로 밀접하게 서로 관련되어서
그런 것을 본인에게 제공해주게 된다는 것을
생각하게 하는 화두다.
이런 라이터 하나도 자신이 직접 일일히
다 부품을 만들고 조립해서 사용해야 한다면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은 거의 없음을 보게 될 것이다.
그래서 이웃의 중요성을 생각하는데
그러나 그 이웃은 당장 자신에게 도움을 주는 그런
이웃만 중요한 것이 아니고
온 생명이 다 그렇게 차별없이 존중받아야 하는
생명임을 인식해야 한다고 본다.
꿀벌이 없어지면 인간이 생존할 수 있을까를
생각하는 가운데
꿀벌이 인간이 얻는 각종 열매를 얻는 과정에
대단히 소중한 역할을 수행함을 이해하고
그 소중함을 생각한다면
사실은 각종 질병의 원인이 되는
세균 바이러스도 사실은 그런 전체적인
관계성에서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고 보아야 한다.
어떤 특정 한 부분만 보면 물론
질병을 일으키는 세균이나 바이러스는 없다고 해도
무슨 문제이겠는가하고 생각하게 되지만,
이것이 바로 좁고 짧고 얕은 관찰에 의한 판단인 것이다.
의학계에서는
어떤 질병이 생기면 그 부분을 치료하는 약이나
시술을 많이 행하는데
정작 그 부분은 낫는데 전체 몸이 이상하게 되는
경우가 많다.
가장 대표적인 예가 암을 치유하기 위해
치료를 받으면 머리카락이 빠진다는 현상이
이런 현상을 제시한다고 본다.
물론 의사가 초점을 맞추는 암은
그런 시술로 해결이 된다고 보지만,
그로 인해 다른 부분들이 엉망이 되는 현상이
나타나는 것이다.
종합적인 관찰을 병행하지 않고
미시적으로 접근하면
대부분 그런 부작용을 일으키는 약이나
시술을 문제를 해결하는 처방이라고
과학자들이나 의학자들이 제시하게 된다고 본다.
이미 메르스 바이러스 사건등을 보았는데
메르스만 문제라고 보고 신체의 온 면역기관이
여기에 반응할 때 그로 인해서
신체 각 기관이 이 메르스와의 전투로 인해
황폐화되는 현상이 나타나고
생사의 기로에 서게 되는 현상이 나타나는 것이다.
나와 남을 망상에 바탕해 구분하고
달리 반응하는 상태에서는
이런 경우 뿐 아니라,
땅콩이나 갑각류에 과잉반응하고 알레르기 반응을
일으키는 경우도 많은데
결국 이런 모든 문제를 다 넓고 길고 깊게 관찰해서
이런 부작용을 제거하고
전체적으로 조화롭게 좋은 상태에 이르는 것이
목표이기도 한 것이다.
그런데 좁고 짧고 얕게 관찰하는 가운데
좋음을 추구하는 방안은
대부분 넓고 길고 깊게 관찰하는 가운데
좋고 좋고 좋음을 추구하는 방안과는
정반대의 내용이 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
학교에 전학생이나 신입생이 들어올 때
기존 학생들이 이 학생을 어떻게 대하는가가
대부분 상황에서 문제가 비슷하게 나타난다고 본다.
알고 보면 별 차이가 없는데
무언가 폐쇄적이고 범위를 닫아 놓고
다른 생명을 대하는 자세를 보이는 경향이
많은 것이다.
원산지가 중국이나 태국인데
브라질 열대우림지역에서 팔면 그곳 물건이고
한국에서 팔면 한국물건인가.
서해에 사는 생선을
중국에서 잡으면 중국생선이고
한국에서 잡으면 한국생선인가.
한국에서 보면 서쪽에 있는 바다라서 서해라고 부르는데
중국에서 보면 동쪽에 있는 바다라서 동해가 되므로
중국에서 그 바다를 동해로 같이 부르자고 하면
우리가 동의할 수 있겠는가.
그런데 대부분 이런 형태로
편협하고 좁게 임하는 것이
국내에서는 대부분이다.
그래서 세계에서 같이 함께 존중받고
활동하는데 스스로 장애를 초래하는 경우도 많다.
한국에도 이미 수많은 외국인이 같이 살아가는데
부자 나라에서 오면 존중하고
조금 평균소득이 낮은 나라에서 온 경우는
아무리 그곳에서 학력도 높고
전문 지식을 갖추고 있어도
왠지 자신보다 못할 것 같다는 편견을 갖고
상대를 대하는 경향도 많다고 본게 된다.
도대체 표준 한국인은 언제부터
표준 한국인이었는가.
이런 어려운 문제도 제기하는데
보고에 의하면
아프리카에서 황족으로 지내다가
왕조가 사라져 국내에서 살아가는 상태인데
왕족 평가를 받지 못하고 지내는 경우도
있다는 보고까지 받게 된다.
그러나 과거 어느 곳에서 황족으로 지냈다고
그 사정으로 특별대우하는 것도
이상하지 않은가.
알고보면 그래서 황족이지만,
고시원에서 주거를 해결하면서 생활하는 황제인
mun 님과 같은 상태인데
여기서 말하는 것은
바이러스나 황족이나 모두 똑같이
차별없이 존중해야 한다고 제시하는 것이므로
오해를 해서는 안 된다고 본다.
부처님은 온 생명을 차별없이 대하는데
부처님의 가르침을 따르는 이들도
이런 편견을 갖고 다른 생명을 대하는 경우가
가끔 있는 것이다.
그래서 나와 남을 구분하고
차별하고
작은 범위의 나나 우리를 고집하는 것이
현실에서는 대부분 생사고통을 불러 일으키는
기본 원인이 되는 것이다.
그렇지 않은데 그렇다고 망상을 일으키고
고집하고 그래서 나와 남을 일정한 범위로 나누어
차별하는 자세가
이런 비극을 불러 일으키는 중요한 원인이 되는 것이다.
이것을 극복하지 못하면
자신의 생체 안에서도 똑같은 현상이
나타나는 것이다.
알고보면
자신이 자신의 몸이라고 보는 공간에
다양한 세균이나 미생물이 같이 살고 있는데
여기에서 어떤 것은 자신의 생체이고
어떤 것은 아니라고 보는 것 자체가
기준이 모호한 것이다.
알고보면 자신의 몸은 수조의 생명이 같이 사는 세계이고
그래서 수조의 생명에 의해 빙의된 상태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왜 어떤 순간에 어떤 음식이 먹고 싶은가는
자신의 의사에 의해 정하는 것 같지만,
알고보면 체내에 어떤 기생충이 그런 욕구를
강하게 갖고 있다거나
대장에 있는 세균들이 그런 것을 요구해서
자신이 그것을 찾는 상태라는 것도
학계에서 보고되는 내용이기도 하다.
그리고
인간의 세포를 구성하는 세포 구성요소 가운데
자신의 dna 를 따지고 그러는데
알고보면 세포 안의 미토콘드리아는
자신의 dna 를 갖지 않는 상태라는 것이다.
이것이 라이터 화두와도 밀접한 관계를 갖는
내용이라고 본다.
범위가 좁던 넓던
자신이 고려하는 범위 안에서
온 생명을 차별하지 않는 가운데
이 모든 생명을 다 좋고 좋은 상태로 이끌려고 노력하고
그런 가운데 자신의 몸안에서라도
암세포 정상세포 바이러스 세균 미생물 곤충 등을
차별하지 않고 대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보는 것이다.
마우스 하나 사용할 때마다
세균이 있다고 알콜로 닦고 사용하는 경우도 있는데
그런 입장이라면
매일 자신의 대장을 1 시간마다
알콜이나 락스를 사용해서 관장을 하며
지내야 한다고 보게 되지만,
그러면 그 문제가 어떤 상태를 초래하는지도
곧바로 쉽게 보게 되리라 본다.
물론 이런 바이러스 세균 등으로 문제가
발생하는 경우가 있는데
가장 근본원인은 그 각 생명을 그렇게 반응하게끔
이끄는 자신의 망상분별이 문제인 것이다.
그것은 자신이 몸이라고 보는 부분이
이미 하나의 작은 세계라고 할 수 있는데
그 세계에서는 비록 수많은 생명이 같이 살지만,
그 가운데 자신의 마음이 왕 역할을
하는 상태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 마음이 놀라면
자신의 전 신체에 소름이 돋기도 하고
자신의 마음이 예민하면
자신의 전 신체의 피부가 궤양이 생기기도 하는데
그것은 현실에서 각 개인이 활동할 때
최고 책임자의 의사결정을 기준으로
매 경우 반응자세를 취하는 것과 사정이 같은 것이다.
DHL 검사관이 본인에게 우송되는 물건을
전달 금지결정을 할 때
DHL 검사관이 본인과 감정이 있어서
그런 행위를 일부로 하는 것이 아닌 것과
사정이 같은 것이다.
그래서 자신의 몸 안의 일은
자신이 평소 어떤 자세로 외부 세계를 대하는가 하는 것과
밀접한 관련을 갖는 것이다.
자신이 다른 남과 관계가 좋지 않고
배타적이고 독선적인 가운데
매사 자신과 남을 구분하면서 짜증을 내면서
다른 이를 대하는 경우
자신의 몸 안에서도 똑같은 성격의 현상이
나타나는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닌 것이다.
예를 들어
히틀러가 아리안 인종의 영광을 위해서
열심히 활동한 것이
과연 아리안 인종이 영광스럽게 되는 결과를
만들어 준 것인가. 아니면
자신들 뿐 아니라 다른 이웃에게도
회복해내기 힘든 끔직한 고통을 안겨준 것인가.
이런 문제도
한 사람이 자신의 생체를 놓고
어떻게 대하는가하는 것과 마찬가지 문제라고
보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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좁고 짧고 얕게 관찰한 가운데
좋다고 보는 방안은
대부분 넓고 길고 깊게 관찰하는 가운데
좋고 좋고 좋다고 보는 방안과는
내용이 정반대라는 것을
수행자는 주의해야 한다고 본다.
[...]
부처님이 열반에 들었기에
이제 부처님은 어느 세계에서도 존재하지 않게 되었다.
이렇게 잘못 오해하는 입장이 상당히 많다.
열반의 의미를 생사고통이 본래 없음을 깨닫고
생사고통을 벗어난 상태라고 제시할 때
이것을 죽어서 아무 것도 없게 된 상태라고 이해하는 입장이
있는 것이다.
부처님이 본래 생사를 얻을 수 없다고 제시하면서
그러나 생사가 있다고 보는 입장에서 보기에는
그런 죽음을 맞이한 것처럼 보여서
그것을 놓고 부처님이 열반에 드셨다고 이해하고
그래서 평소 망상상태에서 어떤 이가 죽고나면
그는 이제 더 이상 없다 이렇게 이해하게 되는데
이런 입장에서 부처님의 열반을 대하면
부처님은 죽어서 이제 아무 것도 없게 되었다.
이렇게 이해한다는 것이다.
이것이 망상분별상태에서 생각하는 생사의 문제다.
그런데 부처님은 망상분별 상태에서
이렇게 보게 되는 생사를 놓고
거기에 그런 생사가 본래 없다고 제시한 것이다.
그래서 일반적으로는 부처님이 열반에 든 후
아무것도 없게 된 것이라고 망상을 전개해나가기도 하지만,
부처님은 그런 입장이 본래부터 아니기에
그와 관계없이
상락아정이라고 표현할 상태로
수명이 무량한 상태로 임하는 것이다.
이렇게 이해해야 한다.
그리고 부처님이 되면
처음 수행자가 하는 것을 못하게 되는 것이 아니고
그보다 훨씬 나은 상태가 되는 것이라고 보아야 하는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수행자가 왜 무량한 기간
수행을 해서 부처님이 되고자 하겠는가.
당신 같으면 그렇게 하겠는가.
[...]
바다는 어떤 냇물에서 온 물인가를
놓고 차별하지 않기에
바다가 된 것이다.
이런 내용이 전하는 것이다.
[...]
외계인 수행자는 성불할 수 없고
부처님이 인도에서 가르침을 처음 베풀었다는 사정으로
인도출신 수행자만 성불할 수 있다고
고집할 수도 있는데
사정이 그렇지 않다는 내용을
법화경 묘음보살 품 등에서도
샘플로 제시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 사정으로
부처님은 다 표준적 인간 형태일 것이라고
편견을 갖는 것도
수행자는 주의해야 한다고 본다.
그렇다면 투명체인 약사여래님에게
자신의 병을 고쳐달라고
소원을 접수하는 일도 앞으로는 하지 않아야 한다.
그렇게 자신이 나와 남을 차별하면서 대한다면
사바세계의 중생과는 다른 형태인 약사여래님이
왜 굳이
그처럼 외계인을 차별하는 사바세계의 수행자를
외계 부처님인 약사여래님이 치료를 해주어야 한다고
보겠는가.
사바세계의 수행자들이 대단히 흠모하는
아미타부처님이나 관세음보살님도
사정이 마찬가지다.
물론 그런 사정으로 극락세계에 각 세계에서 수행자들이
도착하면 그런 차별심을 갖지 않도록
복장(몸)의 형태를 통일시키는 취지가 있다고 보지만,
여하튼 천수천안 관세음보살님만 생각해도
너무 기형적이지 않은가.
그런데 왜 어려움이 생길 때마다
수행자들이 관세음보살님에게
부탁을 드리는가.
자신이 도움이 필요할 때는
외계 부처님에게 도움을 요청하면서도
자신이 남을 대할 때는
또 왜 그렇게
순정부품 비순정부품을 따지면서
나와 남을 구분하고
분별심을 일으켜
차별하며 대하려고 하는가.
이런 생각을 하게 되는 것이다.
그렇게 임하면 점점 범위를 좁혀
집착하게 되고 또 한편으로
아주 보잘것 없는 자신의 장점을 믿고 자만심을 일으켜
다른 이를 대하게 되는데
그렇게 되면
스스로 몸 자체도 이와 벌레처럼 작아지게 되고
나중에는 눈에 보이지 않는 형태로
변해간다는 사정도 미리 잘 이해해야 한다고 본다.
스스로 포용심도 없고 자만심만 가득하고
다른 생명을 차별하면
졸아든다.
이것이 경전에서 제시하는
인과관계이기도 한 것이다.
[...]
마음과 관련된 현상을 설명하다보면
그 용어가 무엇을 가리키는가를
서로 보고 만질 수 없는 사정으로
논의에 수많은 혼동이 나타나게 된다.
어떤 이는 a 를 가리키기 위해 '갑'이라고 표현하는데
그러나 그 표현으로 정작 무슨 내용을 가리키는 것인지
서로 알아듣지 못한 가운데
사전만 들고 논의를 행하는 경우가 비일비재하다.
독특한 브라질 커피를 하나 맛보고
이것을 언어표현으로 전달할 때
그 표현만 붙들고
그 커피맛을 알아내려고 논의하는 상황과
비슷하다.
그런데 같이 커피를 마셔도
그 문제가 완전히 해소되는 것은 아니다.
[...]
왜 봉 수행이 필요한가.
봉을 올라타서 봉춤을 추면
대부분 좋아해서인가.
여하튼 봉 수행이 중요한 것은
봉 수행을 하면
대부분 생명이 다 이를 좋아하고
가까이하기에 중요한 것이라고 보는 것이다.
그리고 봉 수행자는 사실은
봉타래( =봉에 올라타 수행하는 수행자)를 위해서
그런 수행을 하는 것이기도 한 것이다.
그래서 봉 부처님의 입장에서는
봉타래 수행자가 대단히 소중한 것이다.
만일 이 봉 부처님에 올라타 편하게
수행하는 봉타래 수행자가 전혀 없다면
가장 안타까움을 느끼는 것이
봉 부처님인 것이다.
어렵게 이야기하면 그렇지만,
현실에서
무엇때문에 자신이 그렇게 힘들게 돈을 벌고
힘들게 일하는가
누군가 물으면
대부분 부모님들은 자신의 자식들 때문에
그런다라고 답하기 쉽다.
사실이 그런 것이다.
알고보면 자신과 별 관계가 없는데
자신이 자신의 자식이라고 보는 이들에 대해서는
마치 봉 부처님이 봉타래 수행자를 대하듯
온갖 것을 무상으로 제공하고
온갖 문제를 다 해결해주려고
헌신적인 자세로 임하는 것이다.
그러다가 나중에 보면
자식에게 버림을 받아
어떤 병원에 강제 수용되거나
공연히 외국 공항에 나가 버림을 받거나
한다는 보고를 받기도 하는데
그러나 그래도 부모는 그런 상황에서도
자신의 자식을 보호해주려고
자세를 취한다는 보고까지 추가로 받게 된다.
봉타래 수행자가 이런 면까지 배우면 곤란하다고
보지만,
여하튼 봉타래 수행자는
봉 수행을 장차 하기 위해서
그런 수행을 취한다는 본 취지를 잘 이해해야 한다고 본다.
그것은 나와 남을 구분하지 않고
널리 온 생명의 봉 노릇을 하는
아미타부처님이나 선명칭길상왕여래님과 약사여래님 같은
봉 부처님이 되기 위해서
봉타래 수행자가 그런 수행을 해나간다는
의미다.
봉이란 단어는 참고로
투자 과정에서는 분봉 시봉 일봉 월봉 년봉
이런 용어와도 관련된다.
봉타래 수행자는 투자도
부처님에 맡기고 편하게 임하는데
정말 투자를 잘 하려면
봉을 관망해서 계산해 임하지 않고
직접 봉이 되어 활동하는 자세가 필요한 것이다.
자신이 직접 봉이 되어
봉을 움직일 수 상태가 아니면
자신의 예측과 매번 다르게
시세가 형성되고 거래가 된다고 해서
실망하거나 노여워하면 안 된다고 본다.
[...]
핵심은 망상분별을 제거하고
나와 남에 대해 갖는 편협한 편견과 고집을 제거해야
자신의 세계가 넓어진다는 것도
확인해야 한다고 본다.
[...]
라이터를 사서 사용할 때는
아주 쉽고 간단해 보이지만,
아무리 둘러 보아도 라이터 파는 가게도 없거나
또는 자신이 어느날 직접 라이터 부품을 하나하나
다 만들어서 라이터를 만들어 보려고 생각하면
도저히 하기 힘든 일임을 관하는
라이터 화두를 떠올리게 한다.
그래서 라이터 화두란, 세상의 그 모든 것을 두고
평소 아무 일 없을 때 지극히 감사함과
가치를 느끼면서 음미하게 하는 중요한 생활 화두라고
보게 된다.
[...]
사실 천체에 어떤 생명이 있다 없다.
또는 어디에 어떤 물건이 있다 없다.
이런 것은 그다지 관심사항이 아닐 수도 있다.
자신이 살고 있는 곳과 먼 어떤 나라
예를 들어
스웨덴에 살고 있는 국민이 몇명이 있거나 없거나
자신의 삶에 그것이 무슨 문제가 있는가.
이런 입장이 보통이 아니겠는가.
그래서 어떤 할머니나 할아버지가
오늘 세상을 떠나서 이제는 볼 수 없게 되었다고 해도
그 가족이나 그 자식이 아니면
대부분 별 관심을 갖기 힘든 내용이라고 보게 된다.
그래서 사실 있다 없다를 그런 차원에서
접근하면
공연히 할 일없는 이가 시간이 남아서
그런 논의를 하는가 보다 이렇게 생각하기 쉽다.
그런데 있다 없다의 문제를 살피는
그 내용이
바로 자신이라거나 자신의 생명이라거나
또는 자신이 가장 애착을 갖는 자신의 것
자신의 신체 재산 가족 이런 경우라면
어떤가.
대단히 문제가 되는 것이다.
결론은 그런 것은 없다라는 것이다.
이 결론을 도출하거나
설명하는데에는 상당히 복잡한 논의가 예상되지만,
이미 이 부분에 대해서 대단히 많이 살폈다고도 보게 된다.
그러나 여하튼 다시 잘 정리하기 위해서라도
이 부분을 다시 살펴야 한다고 보게 된다.
문제는 그런 것은 없고
그 실재는 얻을 수 없는데
그러니 어떡하라는 것인가가
현실에서 이 논의가 갖는 효용이라고 할 수 있다.
위 내용은
자신이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자신이나 자신의 것 일체가
그에 해당하는 진짜의 내용이 없다는 것을 제시하고
그리고 실재는 그런 진짜는 없지만,
아무 것도 전혀 없는 것은 아니고
다만 그 내용을 얻을 수 없다는 의미다.
마치 눈을 떠 감각현실을 얻거나
잠을 자면서 꿈을 꿀 때
얻는 감각현실이나 꿈의 내용과 비슷하게
내용이 아무 것도 전혀 없다고 할 것은 아니지만,
정작 그것은 진짜는 아니다는 그런 의미다.
그리고 위 꿈이나 감각현실의 경우는
현실에서 그런 내용을 얻지만,
실재의 경우는 그런 내용을 어떤 주체가
끝내 얻어낼 수 없는 것임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런데 그런 실재는
현실에서 문제삼는 그런 것은 일단 아니고
그런 것을 얻을 수 없는 그 무엇이라는 의미다.
이런 내용이 결국 무아 무자성 공이란
표현이 담고 있는 의미이기도 하다.
이런 상태에서 이것이 현실과 무슨 관계가 있는가가
이 논의의 효용과 직결되는 것이다.
간단히 말하면
현실에서 문제삼는 일체의 문제나 생사고통은
이처럼 본 바탕이라고 할 실재에서는
그런 것을 얻을 수 없고
그에 해당한 진짜의 내용은 없다는 것을 제시하는 것이다.
그래서 이 측면만 강조하면
이 실재는 현실에서 문제삼는 온갖 문제나
생사고통을 얻을 수 없는 상태로서
그래서 청정한 니르바나라고 표현하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또 이 부분만 강조하면
현실에서 온갖 문제가 발생하고
오늘처럼 물이 새고 모터는 고장나고
수리할 기사분을 구하기는 힘들고
이런 상황이 문제가 된다고 보지만,
정작 그 본바탕에서는 이런 문제 자체를
얻을 수 없다고 제시하는 것이다.
이는 최면의 비유와도 같다.
최면에서는
개가 있다가 죽고 다시 살아나고 한다고 하는데
관객의 입장에서 보면
원래 그런 것이 없었다
이런 내용인 것이다.
꿈이나 영화의 비유도 마찬가지다.
꿈이나 영화에서는
외계인이 침입을 해서 지구가 다 불타고
이런다고 하는데
그것은 그 안에서 그런 것이고
그 밖에서는 그런 내용이 없다고 대부분 알듯
현실이 그렇다고 제시하는 측면인 것이다.
그래서 이 부분만 강조하면
수행을 할 필요도 없고
아무 문제가 없는 것처럼 생각할 수도 있는 것이다.
그런데 지금 이 있다 없다의 논의가 된 첫 계기는
사실은 이 영역에서 문제가 있어서 논의된 것은 아닌 것이다.
본래 사실이 그런데
그러나 이상하게
현실에서는 생생하게 각종 문제를 놓고
자신의 희망이 성취되지 않아서 고통도 받고
생노병사의 고통을 겪는 것이
문제인 것이다.
그래서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이들의 정체를 살피는 가운데
위 내용을 파악하고
위 내용을 통해서
현실의 문제를 해결하고자
논의가 된 것이라는 사정부터 잘 이해해야 한다고 본다.
그런데 현실에서
자신이나 자신의 신체 생명에 대해 집착을 갖고 대하는 입장은
그것이 있어서 좋다고 여기고
없어지면 큰 일이라고 보는 가운데
대부분 이것을 문제삼고 있는 것이다.
물론 경우에 따라서는 이 반대의 경우도 있다.
그러나 여하튼 있어서 좋다고 보는 경우는
본래 그것이 없다고
제시하는 내용이 왜 이 문제에 대한
근본적 해결방안인가가 의문이 된다고 할 수 있는 것이다.
즉, 이런 내용은
현실에서 자신과 자신의 것에
강한 집착을 갖고 있는 이가
본래 희망하지 않는 내용을 제시한 것이지.
어떻게 이런 내용이 그에 관련된
현실 문제를 해결하는
기본 바탕이 된다고 할 수 있는가 .
이렇게 생각할 수 있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자신이나 자신의 것이 지금 있다고 여기고
그런 가운데 집착을 갖고
이것이 장차 없어질 것을 두려워하는데
앞의 내용은 그것이 본래 없다고 하는 것이니
어떻게 이것이 그런 문제에 대한
근본 해결책이라고 할 수 있는가.
이런 의문을 갖는다는 점이다.
그런데 이를 꿈의 비유를 놓고 생각해보자.
꿈에서 황금을 얻어서
그것을 계속 보관하고 사용하고 싶고
그것이 없어지면 큰일이라고 꿈에서 생각하고 있는데
어떤 이가 꿈 속에서
다음 내용을 말해준다고 하자.
이것은 꿈이고
꿈에서 황금을 얻는다고 해서
없던 황금이 생기는 일도 없고
없어진다고 해서
있었던 황금이 없어지는 것도 아니다.
이런 내용을 제시해준다고 하자.
꿈과 현실의 관계는 사실은 이런 것이다.
그런데 현실에서 무언가 있다고 집착하고
그로 인해 고통을 받게 하는 내용들 전체가
알고보면 본래 이렇다고 지금 제시하는 것이다.
물론 왜 그렇게 보게 되는가는
이후에 상세하게 살피게 되겠지만,
여하튼 부처님 가르침의 핵심은 이 내용이기도 한 것이다.
그런데 그런 내용이 왜 현실에서
겪는 생사고통을 해결하는 해탈진여문의 열쇠를
제공해주는 것인가를
위와 같은 사정으로 이해하기 힘들다고
볼 수 있다.
어떤 이가
없으면 큰 일이라고 여기는 것을 놓고
그런 것이 본래 없었다고 하는 것이
무슨 해결책이 되는가.
그래서 이 부분을 잘 이해하고
그런 바탕에서
현실에서는 어떻게 해야 한다고
제시하는가를 살피는 것이
본 논의가 갖는 효용에 해당하는 것이라고 본다.
[...]
게임을 테스트 차원에서 해보았는데
여기서 자동차로 각종 사고를 내도 큰 문제가 없다.
그 사고는 게임 안에서의 사고이지
현실의 사고인가.
그러나
있다 없다의 문제를 이렇게 생각하면 그러나 곤란하다고 본다.
있다 없다의 문제의 논의는
현실에서 대단히 심각하다고 보는 그 온갖 문제가
실재 영역에서는 그런 내용 자체를 얻을 수 없고
그것은 진짜 내용도 아니다.
진짜 내용은 없다.
이런 것을 기본적으로 제시하는 것이다
그래서 현실이 갖는 그런 성격을
현실은 생생하고 마치 진짜처럼 여겨지지만,
그러나 꿈과 같고 환영과 같다고 표현하는 것이다.
그러나 현실은 꿈은 아닌 것이다.
그래서 현실에서 정말 게임에서 하듯
각종 사고를 일으키고 돌아다니면
그 상태에서도 문제지만,
그 이후로도 한 번 사고로 한 10 년 정도씩
상당히 오래 고통을 받게 된다고 보아야 한다.
자동차로 사람을 해치고
건물을 파괴하고 돌아다녔는데
그것이 진짜가 아니고 실재가 그런 내용을 얻을 수 없어 공하다.
그래서 아무렇지 않다.
이런 내용을 있다 없다의 논의나
부처님이 제시하는 것이 결코 아닌 것이다.
그러나 여하튼 그것은 본래 그런 것이 없고
실재 영역에서는 전혀 문제되지 않는다고 제시하는 것이다.
그래서 있다 없다의 논의에서는
이 내용이 현실에서 무슨 의미와 효용을 갖는가를
잘 음미할 필요가 있다고 본다.
[...]
있다 없다의 논의가 갖는 효용은
진짜가 없고 [ 무아, 무자성, 무소유 ]
실재에서는 그런 내용을 얻을 수 없다[불가득, 공]라는 결론이
현실에 어떤 내용을 제시하는 것인가에
핵심이 있다고 보게 된다.
우선 진짜가 '없다' 이 부분과
실재는 '얻을 수 없다' 이 부분을 구분할 필요가 있다고 본다.
쉽게 비유해 설명하면 이렇다.
소리는 듣지만 앞을 못보는 장님에게
빨간 자동차의 디자인을 설명한다고 가정해보자.
장님이 아닌 입장에서는
자신이 눈으로 본 내용을
귀에게 설명한다고 가정하면서
이 상황을 생각해보는 것이 필요하다고 본다.
이 때 그 내용이 없다고 할 것은 아닌데
그 장님이 얻는 소리나 기타 내용 가운데
무엇과도 일치하지도 않고
그래서 그 바탕에서는 있다 없다라고
할 도리가 없는 그런 내용이 됨을 이해할 수 있다.
빨간 자동차의 빨간 색이
북소리인가. 그것이 아니면 그것은 어떤 소리인가.
향기로운 냄새인가. 그것이 아니면 그것은 어떤 냄새인가.
매운 맛인가. 그것이 아니면 그것은 어떤 맛인가.
색이 부드러운 촉감인가. 그것이 아니면 그것은 어떤 촉감인가.
이런 질문들이 다 성격이 같다.
그런데 여하튼 장님의 입장을 기준으로 하면
그런 색이나 모습을 끝내 얻지 못하는 것이라고 할 것인데
그렇다고 없다고 하기도 그렇고
그러나 얻지 못하는 상태에서
그 색은 그가 얻는 내용 그 어떤 것에도 해당되는 것도 아닌데
그런 상태에서 무엇이 있다라고도 하기 곤란한 것이다.
또 위 경우는 다른 사람 입장에서는 그렇게 있다고 보지만,
그러나 그 사람 입장에서도 없다고 보는 것은 어떻하겠는가.
그런데 여하튼 실재는 이런 상태에 준하는데
그 실재는 어떤 주체도 그 내용을 직접 얻지 못하기에
위 문제와는 또 다른 성격을 갖는 것이다.
그래서 그 상태를 그렇게 표현하는 것인 것이다.
그런데 진짜가 있는가 없는가 문제는
위 문제와는 또 다른 것이다.
진짜는 다음과 같은 문제에서 비롯된 것이다.
멀리서 보니 저쪽에 금이 있는 것처럼 보인다.
무언가 반짝이는 것이다.
그런데 알고 보니 모래조각이었다.
이런 경험을 보통 하게 된다고 할 수 있다.
어떤 순간에 파악한 내용이
그런 조건에서 그런 상황에서는 A 처럼 얻어지고
여겨지는데
정작 그 조건이 달라지면 그것이 아니다.
이런 경우가 문제되는 것이다.
이 대표가 바로 꿈이다.
잠을 자고 꿈을 꿀 때는 황금이 있었고 분명히 얻었는데
그 황금은 그 꿈을 꾸는 상황에서만 있었다.
이런 의미다.
꿈을 깨면 대부분 그것을 아는 것이다.
문제는 꿈을 꿀 때 그런 내용이 없었다는 것이 아니고
그 내용이 그런 조건에서만 일시적으로 얻어진 것 뿐이어서
그 조건이 제거되면 그런 내용을 얻을 수 없게 된다.
그래서 실망을 하게 되는 것이기도 하다.
영화나 소설 환영 최면 이런 것들도
다 성격이 비슷하다.
일체유위법 여몽환포영
여로역여전 응작여시관
이런 게송이 있는데
그 내용이 바로 이런 사정을 제시하는 것이다.
생멸변화하는 일체의 내용[유위법]이
얻어지지 않는다는 것이 아닌데
그것은 꿈과 같고 환영과 같고 그림자같고
이슬과 같고 번개와 같다.
평소 그런 것인줄 모르고 대했다면
마땅히 앞으로 그렇게 알고 대해야 한다.
이런 내용을 제시하는 게송이다.
평소 그런 것인줄 모르고 대했다는 것은
현실 대부분 사람들이 그런 경우가 대부분이기에
본인이 첨가한 내용이다.
영화관에서 영화를 보면
대부분 사람들은 이 영화가
실답지 않은 것이라고 전제하고 보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어린 초등학교 학생이라거나
성인 가운데에서도 조금
특별한 입장에서 영화를 어떤 기록영화나 다큐멘터리나 사실을 보도하는 뉴스
처럼 대하는 입장에서는
영화를 그렇게 대하지 않고
그것이 곧 사실이라고 여기면서 대하는 경우도 많다.
그래서 한때 본 연구소에서
인턴연구원이 아이어맨 복장을 구해서
활동도 하고 그랬던 사정이 있다고 보게 되는 것이다.
그런데 영화는 그렇다치고
현실이 그와 성격이 같다는 사정을
대부분 그렇게 이해하지 못하고 대하기에
영화관에서 앞에 제시한 초등학생이 대하는 상태가
바로 현실을 놓고 나타나게 된다는 의미다.
그리고 이것이 바로 문제인 것이다.
영화를 보면서
영화 주인공이 나는 것처럼 모습만 보여주는 것이기도 하고
악당에게 붙잡혀 부상을 당해도
그냥 배우가 그렇게 보여주는 것뿐인데도
초등학생이 그 때마다 깊게 환호를 하기도 하고
또는 크게 슬퍼하기도 하고
주인공이 부상을 당했다고 통곡을 하고
그런다면 그것이 초등학생이 영화를 대해 일으키는
부작용 현상이라고 보는 것이다.
그런데 그렇게 부작용을 일으키고 영화를 대하는 초등학생은
그 영화만 그런 것이 아니고
매 영화관 매 영화에서 그런 자세로 임한다는 것이
바로 지금 문제삼고 있는 부분이다.
일체 생멸하는 현상[유위법]은
꿈과 같고 환영과 같고 그림자 같고
이슬과 같고 번개와 같다.
이렇게 표현한 것은
그것이 비록 생생하게 얻어져도
진짜라고 할 것이 아니고
실다운 것이 아니다.
진짜와 비슷해보이지만,
진짜가 갖는 성품을 모두 갖춘 진짜가 아니고
일시적이고 임시적으로
그런 상황에서 그렇게 나타나고 사라지는 것임을
제시하는 것이다.
비슷하지만 아니다 => 사이비(似而非)
이런 의미다.
그런데 전도몽상 상태에서는
또 이 구절을 놓고 달리 음미하기도 한다.
일체 생멸하는 그 모든 것은
꿈처럼 감미롭고
환영과 같이 환상적이고
그림자처럼 늘 함께 하고
이슬과 같이 영롱하고
번개처럼 짜릿하다.
이렇게 음미하기도 하는 것이다.
앞에서 영화를 보면서
매번 흥분하는 초등생 인턴연구원이
이 게송을 대할 때
이런 내용으로 같다라는 표현부분을
음미하는 것이다.
그래서 아무리 있다 없다 논의를
설명해도
그 증상이 잘 치유가 안 되는 것이다.
여기서는 꿈이 갖는 속성이 그렇다는 것을 제시하는 것은
그런 조건에서만 얻을 뿐이라는 속성을
그것이 얻어지지만,
바로 그런 사정 때문에
그것은 사이비나 가짜라고 보고
그렇지 않은 것을 찾는 사정을 제시하는 것이다.
현실에서 바위나 금반지를 보기로 하자.
이 바위나 금반지도 마찬가지다.
바위나 금반지는 최소한
어제 산 고등어 생선과 달리
한 백년은 충분히 그 상태로 있을 것처럼
여겨지지만 그렇지 않다고 여기서 제시하는 것이다.
우선 당장
돗수 있는 색안경을 매번 바꾸어 쓰면서
대하면 그 내용이 그 때마다 다 달라지는 것이다.
그렇다고 자신을 제외하고
그것이 무언가를 따지자면
그것이 무언가의 문제는 그 내용을 얻을 수도 없는 상태가 된다.
그리고 안경을 하나 고정시키고 대한다고 해도
아침에 보는 모습이 다르고
저녁에 보는 모습이 다르고
이 상황에서 대하는 모습이 다르고
그런 것이다.
100 년을 굳이 문제삼지 않아도
오늘 하루도 그렇다는 의미다.
그것은 어느 것이나 그런 것이지
여럼철 생선 가게에 있는 생선이나
폭발하면 형체가 없어지는 폭탄만 그런 것이 아니라는 의미다.
그래서 이런 특성이 아닌 진짜를 찾아 나서는
사정이 있었던 것이다.
왜냐하면 진리나 어떤 것이 참된 정체를
추구하는 입장에서는
사이비에 농락당해서는 안 된다는
절박한 사정이 있었던 것이다.
어떤 이가 고통을 극히 호소하는데
알고보니 꾀병이고 사이비다.
이러면 왕진을 나온 의사가 허탈하지 않겠는가.
그러니 현실에서 문제삼는 것들이
과연 진짜인가 가짜인가
즉 참된 내용인가
아니면 영화에서 감독이 시나리오를 보고
적당히 이것 저것 좋아하는대로 갖다 붙여서
보여주는 그런 내용인가.
이런 것이 다 문제가 되는 것이다.
그래서 이런 차원에서
이 문제를 탐구할 때
비록 이런 저런 내용이 얻어지고 문제된다고 하지만,
알고보면 다 꿈과 같고 환영과 같은 것들 뿐이어서
그런 진짜는 여기에 하나도 없다고
부처님이 제시해준 것이다.
그런데 아무리 그렇게 제시해도
영화관에서 비명을 지르고
시끄럽게 떠드는 초등학생이 있듯
현실에서 자신이 대하는 것은
실답도 진짜라고 여기면서
과잉 집착 반응을 일으키면서
매 순간 문제 현상을 증폭해 만들어내는
이들이 대단히 많다는 것이
바로 이 문제와 관련이 되는 것이다.
그래서 이것이 강조되는 사정이 있는 것이다.
그런 내용이 그 순간에 그렇게 얻어지지만,
그것은 진짜가 아니다.
그리고 진짜는 어디에도 없다. [무아, 무자성, 승의무자성, 인무아, 법무아]
이것을 있다 없다 논의에서
핵심으로 제시하는 내용이라고 할 수 있다.
그래서 진짜는 어디에도 없다고 제시하지만,
그러나 어떤 내용도 얻지 못한다거나 없다고 하는 것은 아니다.
즉 진짜는 없지만,
현실에서 감각현실도 각 감관별로 얻고
생각도 하고 꿈도 꾸고
소설이나 영화나 만화 내용도
그렇게 있다고 하는 것이기도 하다.
그러나 그것은 그렇게 생생하게 얻어져도
그것은 진짜가 아니고
진짜는 없다라고 제시하는 측면인 것이다.
여기서 진짜는 '없다'와
실재는 그 내용이 전혀 없다고 할 것은 아니지만,
그러나 어떤 주체도 끝내 '얻지 못하고'
그래서 ~이 있다 ~이 없다. ~이다 ~이 아니다.
~와 같다 ~와 다르다 좋다 나쁘다
깨끗하다 더럽다. 등등 모든 2 분법적인 분별을
행할 도리가 없다. [불이법]고 제시하고
그래서 그것을 공하다라고 표현하는 사정이 있는 것이다.
이 실재는
현실에서 얻는 그 일체의 내용이
모두 어떤 주체가 관련해서
그 주체가 그의 마음에서 그 내용을 얻는 것과는 달리
그런 주체와 관계없이 실재하는 본 내용을
찾는 가운데 문제삼는 내용이다.
다 같은 것을 대할 때 다 같은 내용을 얻는다고 여기기 쉽지만,
자신부터
눈이 대할 때
귀가 대할 때
코가 대할 때
혀가 대할 때
몸이 대할 때 다른 내용을 얻듯
각 생명도 그 생명별로
얻는 내용이 다 다른 것이다.
메뚜기는 이런 내용을 얻고
두더쥐는 이런 내용을 얻고
박쥐는 또 이런 내용을 얻는다고 할 때
이런 각 주체와 관계없이
본래 있다고 할 그 본 바탕의 본 정체를 찾을 때
그 실재내용이 무언가를
문제삼게 된다는 의미다.
그런데 그런 실재를 찾을 때
처음 문제에서 어떤 진짜가 있다고 하면
그 진짜를 제시하면 간단한 것이다.
그런데 그런 것이 없고[무아, 무자성]
그러나 전혀 없는 것은 아니기에
일체 아무것도 없다. [무]라고도 표현을 하지 못하고
그러나 어떤 주체가 얻는 그런 내용도 아닌 것이므로
있다[유]라고도 표현을 못하고
그래서 그런 상태를 불가득 공이라고 하고
불이법이라고도 그 상황을 나타내는 사정이 있는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둘이 아니다 이표현을
둘이 아니기에 하나라고 이해하면
그 하나를 위 문제의 답으로 제시하면 간단한 것이다.
또 둘이 아니라는 의미를 셋이나 넷이라고 이해하면
그것도 그렇게 제시하면 될 것이다.
그런데 그런 의미가 아니고
현실에서 행하는 분별은
내용을 나누고 묶는 가운데 어떤 것에 대해 그 의미를 이해하는 상태에서
그런 문제를 삼는데
그런 것을 떠난 상태임을 나타내는 것이다
그리고 지금 문제삼는 것은
각 주체마다 각 감관마다
제각각 다른 내용을 갖고
문제삼으니
그것의 본 정체를 찾는 가운데
어떤 주체와 관계없이 실재하는 내용을
문제삼는 것이다 .
진짜의 유무나
실재의 정체를 문제삼게 된
이 사정을 잘 이해하지 못하면
있다 없다 논의 자체를 이해하기 힘들고
왜 이것이 문제되는 것인지
자체를 이해하기 힘들게 된다고 할 것이다.
그러면 앞에서 설명한
영화관에서 소리지르고 영화를 보고 난 다음
각종 후유증을 겪는 초등학생의 입장과
전혀 다를 바가 없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그런 내용의 본 정체를 살피는 차원인 것이다.
그런데
원래 그 각 내용이 발생하는 단계를 본다면
실재 => 감각현실 => 관념분별 이렇게
발생한다고 생각이 되지만,
정작 실재는 현실에서 어떤 주체도 얻지 못하고
감각현실은 얻어도 그 자체로는 그 내용을 음미하지 못하기에
모든 문제는 관념분별 영역에서 분별을 행하는 가운데
문제삼기 시작한다는 상황에 있는 것이다.
그래서 무엇을 보고 나서
그것이 바위나 꽃이라고 생각이 된다면
그것을 또 언어로 '바위'라고 말하거나 적어가면서
자신과 다른 이가 함께
바위를 꽃과 달리 바위라고 보게 되는 그 바위만의 자체의 성품을 살피면서
그 '바위'의 본 정체를 찾아 나간다는 의미인 것이다.
그 사람이 그 순간에
그런 모습을 보지 못하고
어떤 생각을 하지 못해서가 아니고
그 내용이 과연 자신이
계속 의존해서 이에 바탕해
계획도 세우고 생활할 만한 실다운 내용인가
이런 것을 문제삼는 가운데
그 본 정체를 문제삼는 것이다.
그렇기에 처음
자신이 얻고 문제삼는 내용을 A 라고 한다면
이 상황에서는
그런 본 정체 해당하는 실재를
그 a 와 같은 어떤 것이라고 먼저 추리하고
그 실재의 본 정체나 내용을
찾아나서는 상황이 되는 것이다.
그래서 종종 그렇게 찾는 실재를
같을 여자를 사용해서
진여나 여, 이런 표현으로 나타내는 사정이
있다고 보게 되는 것이다.
그것은 어떤 이가 실재의 정체를 찾아나설 때
처음 현실에서 자신이 문제로 삼는 어떤 것을 놓고
그것을 기초로 해서 거꾸로
실재의 정체를 찾아 나서기 시작한다는
사정 때문에 그렇다고 이해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런데 그 결론이
무아 무자성 공 이런 내용이라고
제시하는 것이다.
이런 논의에서 왜 결론이 그렇게 되는가는
추후에 좀 더 자세히 살피게 되는데
그런 내용이 왜 문제되었는가는
처음 초등생처럼
가짜나 사이비에 휘말려서
삶의 생사고통을 받는 현장에 매번 동참하는 현상을 피하기 위해
현실에서 얻는 각 내용들을
놓고 그 참된 정체가 무언가를
찾는 가운데
이 있고 없음을 살피는 논의가 시작되었다는 것을
잘 이해해야 한다고 보는 것이다.
그래야
현실에서 각종 가짜와 사이비를
생생하게 진짜처럼 얻고 대하는 상황에서
겪는 생사고통의 문제에서
위와 같은 있고 없음의 논의가
어떤 효용을 가져다 주는가를
비로소 이해할 바탕이 마련된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무엇을 어떤 사정으로 있다 없다고 하는지도
이해하지 못한 가운데
현실에서 대하는 내용을
초등학생이 영화를 보는 경우처럼
실답다고 여기면서
대하고 반응하고
꿈과 같다
환영과 같다고
그것이 실답지 않다고 제시하면
그런 현실은 꿈처럼 감미롭다.
환영처럼 환상적이다.
이렇게 이해하고 대하면
나중에 물고문을 당하거나
벼랑에서 쇠못을 향해 떨어지는 상황에서 겪는
고통도 같이 해결하지 못한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지금 꿈처럼 감미로운 것은 감미롭다고 보지만,
그렇게 무언가를 좋다고 보고
집착을 갖고 그에 바탕해
생각하고 말하고 행위하는 것이
곧 그런 생사고통을 겪는 결과를 낳게
된다는 의미인 것이다.
그래서 그것을 해결하려면
있다 없다의 논의에서
위 내용을 잘 이해하고
현실에서 취하는 자세 자체를
근본적으로 변화시켜야 한다는 것을
요구하는 것이다.
기존의 그런 망상과 집착과
그에 바탕해 행하던 행위를 중지하고
그와 반대되는 행위를 통해
쌓아 놓은 업의 장애를 해소하고
수행을 해야
이 바탕에서 정말 좋고 좋은 결과를
얻어내게 된다는 의미다.
즉 영화관에서 소란을 피우고 매 영화관에서
부작용을 일으킨 초등학생이 있다면
그가 영화는 진짜가 아니다라는 것을
잘 깨달아서
앞으로는 영화관에서 영화를 볼 때
취하는 자세자체를 근본적으로 바꾸지 않으면
앞으로는 고문이나 공포 영화만 전문적으로
상영하는 영화관에서
바퀴벌레로 속을 만든 만두만 계속 먹어가면서
영화를 보는 상황에 묶이게 된다는
위험성을 제시하는 것이다.
그리고 위 두 내용이 바로 관련이 된다고
제시하는 것이다.
초등학생은 이것을 다 부정하는 입장인 것이다.
영화는 진짜고
영화는 감미롭고
감미롭게 감상한 그 내용은
나중에 그런 고문을 당하는 내용과 하등 관련이 없다.
이런 식으로 계속 임하는 것이다.
나중에는 소귀에 경읽기 상황에 들어가고 난 후에는
정말 있다 없다의 논의는
정말 소 귀에 경읽기 상태처럼
아무리 옆에서 현실 상황의 사정을 설명한다해도
이해 자체를 할 수 없고
그 상태에 묶이는 상태가 된다는 것을 제시하는 것이고
그렇게 된 데에는
앞의 초등생이 너무 계속 고집을 피우고
또 소란은 소란대로 피우면서
그렇게 매 영화관에서 임했다는 사정이 또 작용해서 그렇다고
이해해야 한다는 의미다.
[...]
있고 없음의 문제에서
진짜라고 할 내용이 없다는 측면[무아, 무자성, 무소유]
그리고
실재는 얻을 수 없고 공하다는 측면[불가득 공]
을 대강 살폈다.
이는 결론이 그렇다는 것이고
왜 그렇게 보아야 하는가는 이후
자세히 논의해야 할 문제다.
그런데 여하튼 이런 결론을 취한다고 하면
현실에서 문제삼는 것을 포함에
이 측면에서는
처음부터 문제될 것이 하나도 없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기도 하다.
예를 들어
현실에서 자신이 좋다고 보는 것을 놓고
그것이 없어지거나 파괴되고 사라지면 큰 일이라고 보고
그것을 놓고 걱정하거나,
또 어떤 경우 그런 상태에
직접 놓여서 생생한 고통을 지금 받고 있고
그래서 다양한 괴로움을 호소하는데
위 내용은 그런 것이
이런 측면에서는 전혀 없고
본래 실재로는 얻을 수 없다고 제시하는 것이다.
그러니 이 측면만 놓고 보면
이 영역에 대해서는
무언가를 해야 할 것도 없고
여기에 무언가를 새로 만들어 넣어야 할 것도
아무 것도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또 심지어 어떤 이가 그렇게 하고 싶어도
그럴 수도 없다는 사실을 제시하는 것이기도 하다.
본래 없는 진짜의 어떤 내용을
노력하면 만들어 낼 수 있다 이런 것을
여기서 제시하는 것이 아니다.
그 사정은 나중에 이 문제를 살필 때
자세히 살피겠지만,
우주에 그런 것 하나라도 만들 도리가 없고
또 그런 것이 있다면
그로 인해 현실에서 문제삼는 그 일체가
성립할 도리도 없다고 제시하는 내용인 것이다.
그리고 이런 내용은 누가 그렇게 파악하던
파악하지 않던 본래 그렇다고 제시하는 내용인 것이다.
그래서 누가 이런 사실을 그렇다고
새삼 이해를 하게 되거나,
이해를 하지 못하거나
본래 상태가 본래 그렇다고 제시하는 측면인 것이다.
여기까지가
있고 없음의 논의를 통해 제시하게 되는 1차적인 결론적 내용인데
바로 이 상태가
현실에서 문제삼는 일체 생사고통은
이 측면 이 영역에서는 본래 그런 내용이 없고
이 부분에 적용되지 않는다는 의미에서
이 상태를 일단 '청정한 니르바나[열반]이라고 표현하게 된다.
즉, 현실에서 없었으면 하는 온갖 것이
이 영역에서는 그렇게 본래 없고
본래 얻어지지 않는 것이다.
그 실재는 무언가 전혀 없는 것은 아니지만,
여하튼 현실에서 문제삼는 그런 것은 아님을
여기서 제시하는 것이다.
이 상태를 일단 이해하기 쉽게 비유로 설명한다면
모래나 바위를 놓고 생각해보면 쉽다고 본다.
모래나 바위는 어떤 감각을 하거나 생각하는 입장이 아닌 것이다.
그래서 이 모래가 영하 100 도가 되던
또는 용광로에 들어가서 용암이 되던
바위에 누가 어떤 이름이나 내용을 새기고
또 누군가 이 바위를 정으로 낱낱이 깨뜨리던
여하튼 그 어떤 상태가 되어도
모래나 바위가 여기에 대해서
극심한 고통을 호소하거나
불안을 호소하거나
공포를 느끼거나 일체 하지 않는다고 보는 것이다.
바위가 되어 보지 않았는데 어떻게 이를 아는가
할 수 있는데
본인은 오늘 손톱을 깍으면서
그것을 조금 알 듯하다고 보게 된다.
손톱을 깍으면서
깍고자 하는 손톱 경계선에서
그 안쪽 부분을 자극하면 상당히 불쾌하고
더 심하면 극심한 고통을 느끼는데
정작 손톱깍기를 대어 끊어 내는 부분은
그런 호소를 일체 하지 않는 것이다.
그리고 그 이후 잘라진 손톱 부분도 마찬가지다.
그런데 여기서 말하는
온갖 존재의 본 바탕이라고 할 실재는
어떤 특정한 주체와 관계없이
즉 어떤 특정한 주체의 감각이나 분별과는 무관하게
원래 있는 그 본 상태를 가리키는 것이므로
현실에서 이를 전제로
어떤 주체가 문제삼게 되는 온갖 고통이나 공포를
다 떠난 상태라고 제시하는 것이다.
그런 고통이나 공포는 그것을 문제삼는
그 주체의 마음 안에 얻는 내용을 바탕으로
그런 것을 문제삼는 상태인 것이고
그 주체를 떠나 본래의 실재는
그런 것과 관계없다는 것을
여기서 제시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 실재는
그 안에 어떤 진짜의 내용은 비록 없다고 하지만,
전혀 아무 것도 없는 것은 아닌 가운데
다만 그처럼 현실에서 문제삼는
모든 생사고통이나 생멸 문제는 얻어지지 않기에
현실에서 겪는 생사고통과 상대적인 관계로
이를 청정한 니르바나라고 표현하는 것이다.
즉 이 실재는 더러움 고통 등을 얻을 수 없는 것이지만,
또한 청정함이나 즐거움도 역시 얻을 수 없는 것이다.
다만 현실에 있는 더러움과 고통은 얻어지지 않는다는 점에서
이와 상대적인 의미에서 이 상태를
'청정한' 니르바나라고 표현하게 된다는 의미다.
그리고 처음 삶에서 생사 고통과 공포가 문제되어
그것이 제거된 상태를 수행 목표로 삼을 때
이런 사정으로 이와 같은 공한 실재의 상태를 얻는 것을
처음 목표점으로 잡게 되는 것도 그런 사정이라고 이해할 수 있다.
그런데 지금 위 내용은
이 실재의 상태는
본래부터 그런 것이고
어떤 노력을 통해서 그 실재의 상태가
그렇게 된다고 제시하는 것이 아닌 것이다.
그래서 이 부분을 잘 정리할 필요가 있다고 본다.
그런 사정으로
이처럼 공한 실재는
현실에서 무엇을 하던 말던
어떤 수행을 하던 않던
본래 그렇게 청정한 니르바나의 상태에 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래서 이 상태만 놓고 생각하면
본래 그 상태가 그렇다는 것이므로
수행자가 이를 놓고서는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 어떤 필요성도 없다고 보게 된다.
그러니 실재만 놓고 살피면
이 실재를 어떻게 변화시키기 위해
수행자가 어떤 수행을 해야 한다거나
더 나아가 현실에서 어떤 행위를 하면 안 된다거나
어떤 행위를 꼭 해야 한다거나
하는 것도 일체 문제되지 않는 것이다.
실재에서 어떤 내용이 얻어져야 그것을
문제삼게 될 것인데
실재는 본래 어떤 주체가 그 내용을
얻고 문제삼을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런데 실재의 영역은 본래 그렇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각 주체가 대하는 현실은 그렇지 않아서
그것이 문제인 것이다.
즉, 본 상태는 생사고통을 본래 얻을 수 없다고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실을 살아가는 각 생명은
생노병사를 겪고
자신의 소원을 뜻과 같이 성취하지 못하여
그 하나하나 다 고통을 받는 것이 문제인 것이다.
그래서 이 해결을 위해서
있다 없다의 논의가
필요했던 것이고
그런 내용에 대해 그 본바탕과 그 본 정체가
과연 무엇인가의 문제도
살필 필요가 있게 된 것이다.
그러니 문제는 본 바탕이라고 할 실재가 문제가 아니고
실재는 그렇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현실에서 각 생명이 겪는 생사고통을 해결하는 것이
수행자가 본래 수행을 한 취지이고
그런 있다 없다의 문제도 살피게 된
사정인 것이다.
그리고 있다 없다의 논의가 효용을 발휘하는 부분도
본래부터 청정한 니르바나의 상태에서
어떤 차이가 발생한다는 것이 아니고
사정이 그럼에도
온갖 생사고통을 겪는다고 여기는
현실에서 그 효용을 갖는 것이라고
이 사정을 이해할 필요가 있다.
그래서
본래 생사고통이 없고 청정한 니르바나인
실재의 상태를 성취하기 위해서
현실에서 어떤 이가 추가로 해야 할 일은 하나도 없는 것이다.
본래부터 그렇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런 실재의 측면에서는
있다 없다의 논의도 별 효용이 없다고도 할 수 있다.
즉 어떤 이가 현실에서 무엇을 하거나 않거나
또 어떤 이가 실재의 상태가 그렇다는 것을 이해하거나 말거나
그 본 상태가 달리 바뀌는 것도 아니고
그 상태는 이와 관계없이 본래부터 그런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수행자가
어떤 내용을 이해하고
어떤 노력을 하는 것이 의미가 있다고 하는 부분은
본래부터 그런 실재의 영역이 아니고
사정이 그럼에도 생사고통을 겪는 현실 영역에서
그것이 의미를 갖는다고 제시하는 것이다.
그것은 현실에서 그런 이해를 올바로 하고
그에 바탕한 수행을 하면
그로 노력이
'현실에서' 겪는 생사고통을 제거해주고
이런 고통으로부터 벗어나게 하는 차이를
만들어 주기에 이 부분에 효용이 있다고 보는 것이다.
본래부터 생사고통이 없다고 하면서
이런 수행노력이
그런 생사고통을 제거해준다고 제시하는 것은
이상하게 생각할 수 있지만,
그러나 본래부터 그런 것이 없는데도 불구하고
그러나 이상하게
현실에서 각 생명이 생사고통을 망상을 바탕으로 겪어 나가는 상황에서
있고 없음에 대해 올바로 이해하고
그에 바탕해 수행하게 되면
이를 통해서 생사 현실을 겪는 현실 영역에서
그런 고통을 제거해주기에
이 논의가 결과적으로 의미를 갖게 된다는 의미다 .
[...]
게임만 놓고 보면
저 그림처럼 그림 안에
자동차가 보인다고 해서
정말 자동차가 있고
또 그 자동차가 파괴된다고 해서
정말 파괴되는 어떤 자동차가 있겠는가.
그리고 그 일로 인해
어떤 이가 고통을 호소하는 경우가 있겠는가.
그래서 엄격히 보면
본래 이런 그림에 어떤 이가 생각하는 그런 것은 없다고 보고
또 저 그림을 놓고 고통을 겪는 이나 그런 경우 자체가
없다고 보는 것이다.
그런데 어떤 경우는
그것이 게임이고 게임 속 영상인데도
그렇게 고통을 겪고
손해도 보는 경우가 정말 있다고 보게 되는 경우도
있는 것이다.
예를 들어
저런 자동차 아이템을 이용하고 싶은데
그럴려면 자신이 한달간 쉼없이 노력해서
게임안에서 무언가를 벌어들여야 한다거나,
또 파괴되면 이제는 사용하지 못한다거나,
그런 것을 다시 구하려면
그에 상응한 돈이 들어간다거나 하는 등의 경우에는
이런 게임에서의 일도
단순한 문제가 아니라고 보게 될 것이다.
그래서 여기서도 이미 앞에서 영화 내용을 놓고
집착하여 과잉반응하는 초등학생의 경우가
또 제기된다고 보게 된다.
본래 누구나 여기에 그런 내용이 없다고 보는데도
그처럼 집착하고 이것을 대하면
그 하나하나가 문제되는 것이다.
특히 온라인으로 다른 이와 함께 섞여서
게임을 하는 가운데
자신이 게임에서 어떤 자동차를 부딪히고
부수었는데
그것을 놓고 어떤 상대가 앞과 같은 상태로
대하면 그것이 하나하나 다 문제가 되는 것이다.
그래서 채팅창에서 나눈 대화나
게임 안에서 아이템을 뺏거나 하는 것들 때문에
게임하던 이들이
현실에서 따로 그 상대를 만나
해치거나 하는 사건도 보고가 되는 것도
그런 사정이라고 보는 것이다.
그런데 바로 위 내용이
지금 현실에서 무언가를 놓고 문제가 될 때
이 내용의 본 정체를 살피고
있다 없다의 논의를 하는 취지와도
바로 직결되는 문제다 .
명백히 그런 것이 없다고 다 기본적으로
보는 영화나 소설이나 게임을 놓고서도
어떤 경우 그것에 대해 집착을 갖고
대하는 경우에는 그것도 문제가 되는 것이다.
그런데 바로 이런 경우의 문제가
현실에서 겪는 생사고통의 문제와
그 성격이 같다고 여기서 지적하는 것이다.
본래 그런 것이 없고 얻을 수 없는데도
그런 것을 놓고
그에 대해 망상분별을 일으키고 집착을 갖고
그것을 대하는 경우에는
무한한 생사고통을 그처럼 생생하게
매 순간 겪어 나가게 되는데
본래 그런 것을 얻을 수 없는 가운데
현실에서 그런 생사고통을 겪게 되는 그 사정은
현실에서 대부분
그런 내용이 없다고 잘 이해하는 게임이나 영화도
현실에서 그것을 이상하게 집착을 갖고 대하는 어떤 경우에서는
그런 부분에서도 그런 문제가 발생하는 사정과
그 성격이 같다고 제시하는 것이다.
그래서 무엇이 있다 없다의 논의도
본래 그런 것에 해당하는 진짜가 없고
그 실재를 얻을 수 없다고 제시해도
현실에서 생사고통을 겪는 입장에서는
그런 생사고통을 무한히 겪어나가게 되는 것이고
진짜가 없고 실재가 공하기에
현실에서 각 중생이 전도망상을 일으켜 겪는 생사 문제가
아무 문제가 안 되고
해결할 필요가 없다거나
위 사실로 인해 자동으로 원천적으로 해결된다고
제시하는 것이 아니다.
그리고 이 논의는
바로 이 부분에서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전개하는 논의라는 점을 잘 이해해야 한다고 본다.
실재에 대한 논의이지만,
그 효용은 현실에서 망상을 일으키는 상태에서
그 효용이 있다는 의미다.
[...]
반야란 현실에서 행하는
좁고 짧고 얕은 관찰을 통해 피상적인
이해를 하는 얕은 지혜와는 달리
현실의 내용을 그 실상을 꿰뚫어
넓고 길고 깊게 관하고
분별을 떠난 무분별의 지혜를 얻고
현실의 생사를 벗어나게 되는 그런 수행을
의미한다고 제시된다.
여하튼 여기서 반야란 단순한 지혜가 아니고
그런 아주 깊은 지혜를 제시하는 것이다.
그런데 있고 없음의 문제를 살필 때도
이런 자세가 필요하다고 보게 된다.
그런데 여하튼 이 반야바라밀다가
앞과 같은 현실의 생사문제의 해결에 어떤 기능과 효용을 갖는가를
살피기로 하자.
현실에서 일단 무언가를 놓고
그것이 좋은 것이라고 생각한다고 하자.
그처럼 자신이 좋다고 보는 내용 가운데
자신이 가장 집착을 갖는 것이
자신과 자신의 생명, 신체, 재산, 가족
이런 것을 망라해서
자신의 것이라고 보는 것들이 그런 것이다.
그래서 이런 것이 없으면 갖고 싶어하고
또 그것을 얻고 있는 상태에서는
그것을 좋다고 여기면서 대하고 있는 것이고
또 그런 것이 없다거나
없어진다는 것을 놓고
두려워하고
그런 상태에 처하면 고통을 느끼고
괴로움을 호소하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자신이 좋아하는 것이 없다고 할 때
주로 고통을 호소하게 되는데
있고 없음의 논의를 통해
이런 내용이 본래 없고
얻을 수 없다는 [무소유 불가득] 사정을 잘 이해하고 깨닫는 것이
왜 생사고통을 해결해주는 중요한 핵심적 내용인가.
이렇게 의문을 갖기 쉽다고
이미 앞에서 제시했는데
이 문제를 여기서 살피기로 하자.
본래 자신이 현실에서
눈을 떠 무언가를 보고
어떤 부분은 세계이고
어떤 부분은 다른 이의 몸이고
어떤 부분은 자신의 몸이고
이런 식으로 생각을 하고 대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렇게 감각현실을 얻고
분별하는 현실에서
앞과 같이 그 실재가 무엇이고
여기에 그런 내용에 해당하는 진짜가 있는가.
등을 놓고 깊게 생각하고
이들 내용을 실상을 꿰뚫어 있고 없음의
문제를 살피는 활동을
반야바라밀다에 속하는 수행이라고 하는 것이다.
그리고 앞에 제시한 것처럼
어떤 이가 감각을 하는 가운데
마음에 감각현실을 얻고
그것이 무엇이라고 생각하는 그 과정 자체가
하나의 망상분별이라는 것을
스스로 이해하는 것도
이런 반야 지혜의 깨달음의 한 부분이기도 한 것이다.
특히 자신과 자신의 것을 놓고
그로부터 좋은 느낌을 받고
그것이 좋은 것이라고 판단하고
더 나아가 그런 사정 때문에
그런 내용에는 그런 좋음이 있다고 여기는 것도 마찬가지다.
그 역시 엉터리 망상 분별인 것이다.
물을 사막에서 대하면 좋다고 여기게 되지만,
평상시는 그냥 물이고
장마로 피해를 받는 상황에선 별로 안 좋은 것이고
붙잡혀 묶여서 물로 고문을 당하는 상황에서는
지극히 공포를 주는 것이 물인 것이다.
그런데 그 때마다 그런 좋음이나 공포나 고통이
그 물에 있다고 해야 할 것인가.
그런데 매번 그것을 대하고 그런 내용을 얻게 되면
그 당사자는 망상분별을 일으켜
바로 앞과 같은 사정 때문에 자신이 그렇게 얻는 그 내용들이
거기에 있다고 고집을 피우고
주장하고 그에 바탕해서 행위를 해나가는 상태가
되는 것이다.
앞에서 게임이나 영화 만화나 음악 자체에 그런 것이 없는데
이상하게 일정한 망상을 어떤 이가 일으킨 다음에는
그것을 바탕으로 이상한 증상을 일으키는 경우가 있다고 제시했는데
이와 사정이 비슷한 것이다.
그런데 일단
그에 해당하는 진짜의 내용이 없고
그런 것이 본래 얻을 수 없는 것이라는 것을
깨닫고 이해하는 것은
이런 문제상황에 어떤 효용을 갖는 것인가
이것을 다음과 같이 정리해 제시할 수 있다고 본다.
우선 현실에서 좋다고 무언가를 보는 경우는 두번째로 살피고
현실에서 무언가가 고통을 준다고 보는 경우를
먼저 살피기로 하자.
이 경우는 무언가가 있고 그것이 자신에게
고통을 준다고 대하는 것이다.
그런데 자신이 그렇게
어떤 내용을 생생하게 감각하기도 하고
또 거기에 그런 어떤 내용이 있다고 여기고
또 그로부터 고통이 생생하게 겪는 상황에서
그것이 하나같이 실답지 않은 내용이라는 것을
올바로 이해하면
그것은 어떤 공포영화를 실감있게 관람하는데
그것은 비록 생생한 화면이어서
진짜인것첨 여겨지지만
그것은 감독이 만들어낸 내용일 뿐
실다운 내용이 아님을 잘 이해하면
그로부터 초등학생이 일으키는 부작용을 겪지 않게 된다는 것을
여기서 제시하는 것이다.
그런 이해가 그 영화를 보는 상황에서
그것을 보이지 않게 하거나
얻지 못하게 하는 것은 아니지만,
그렇게 생생하게 내용을 얻더라도
그것을 하나같이 평안하게 대하게 되는
차이를 만들어 낸다는 의미다.
두번째는 현실에서 좋다고 보는 내용과 관련된 효용이다.
현실에서 좋다고 보는 내용과 관련해서는
그런 것이 본래 얻을 수 없고
그에 해당하는 것이 없어
실답지 않다고 제시하는 측면은
이처럼 현실에서 얻는 좋음을 감쇄시키고 허망한 것으로
만드는 문제가 있지 않는가.
이렇게 생각할 수도 있다.
그런데 사실은 그렇지 않다.
앞에서도 제시했든
그런 진짜의 내용이 없다거나 실재에 그런 내용을 얻을 수 없다는 사실이
그런 감각현실을 얻지 못하게 한다거나
그런 관념분별을 행하게 하지 못하게 하는 것이 아닌 것이다.
또 꿈이나 영화도 마찬가지다.
그런 내용을 다 생생하게 얻는데
다만 그런 것이 진짜가 아니고 실답지 않다는 것을
관하고 이것을 대하는 경우에는
그에 대해 지나치게 집착하고 그것을 대하지 않은 가운데
그로부터 부작용이 없는 좋음만 취하게 하는 기능을
갖게 된다고 보는 것이다.
그 좋음만 놓고 이를 살피면
좋은 것을 놓고 좋다고 집착하고 대하는 것이
무슨 문제가 있는가 생각하기 쉽지만,
어떤 내용을 얻고
그것을 실답게 여기고
또 그것을 좋다고 보고 집착을 갖고 대하게 되면
그것이 설령 아무리 좋다고 해도
바로 그런 자세 때문에
온갖 생사고통을 그로부터 겪게 되는 현상이
나타나게 되는 것이다.
현실적인 예를 든다면
대부분 사람들이 처음 사랑을 하는 과정에서
그 사랑을 쉽게 잘 성취하지 못하고
어려운 문제에 빠져 들어가는 사정도
좋기에 너무 집착을 갖고 대하기에
그런 상태에 빠진다고 보게 된다.
이는 평소 안타를 잘 친다고 하는 선수가
9 회말 투아웃 상황에 만루 상황에서
안타를 치면 이기겠다고 집착을 갖게 되면
그로 인해 안타를 잘 치게 된다고 보기 보다는
헛 스윙을 하게 된다고 감독이나 코치가
일반적으로 보는 것과 사정이 비슷하다고 보게 된다.
이런 현상은 대부분 무언가를 좋다고 보는 가운데
바로 그런 사정으로 그 대상에 집착할 때
그 집착이 만들어 내는 부작용으로 보는 것이다.
조금 더 쉽게 상황을 설명하면
1 장에 30 억하는 우표가 있다거나
하나에 100 억하는 고려 청자를 갖고 있다고 가정해보자.
이 우표로 우편물을 잘 보낼 수 있겠는가.
또 이 고려청자로 음식을 담아 먹거나
기타 물을 담아서
생활에 편하게 사용한다거나 할 수 있겠는가.
그렇지도 못하게 될 뿐 아니라.
그것이 좋다고 여길수록
그것이 주는 생활의 부작용이 많아지게 된다고
보는 것이다.
일단 도둑이 들어서 가져가면 어떨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면
이를 방지하기 위해서
그것을 보호하고 관리하는 시설이나 노력을
추가로 요구하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무언가를 대단히 좋다고 보는 것이
이후 그 당사자를 정말 좋음을 주는 것이 1 개라면
그와 함께 그를 불편하게 만들고
고통을 가져다 주는 것이 수없이 많다는 것을
여기에서 제시하는 것이다.
그리고 간단히 이 내용을 압축하면
앞과 같은 이런 자세 때문에
사실은 처음에 제시한 고통을 겪는 결과가
만들어진다고 제시하는 것이다.
즉 좋음에 대해서 이런 망상분별과 집착을 갖게 되면
그런 바탕에서는
위와 같은 사정 때문에
생사 고통을 겪게 되는 현상에 노출된다고
이 관계를 제시하는 것이다.
간단히 또 이 사정을 살피면
현실에서 생사고통이 문제된다고 하지만,
현실에서 대부분
자신이 집착을 갖지 않는
먼 나라의 어떤 알지도 못하는 이가
30 년간 계속 병상에서 고통을 겪다가
오늘 죽었다고 보고를 받거나
또는 어떤 이가 지극한 고문을 당하고
비극적인 죽음을 당했다고 해도
그로 인해 아무런 마음의 동요를 느끼지 않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왜 그런가하면 그가 누군지도 모르고
그 당사자가 그에 대해 전혀 이렇거나 저렇거나
집착을 갖고 있지 않기에 그런 차이가 나타나는 것이다.
그러나 위 사례가
자신이 가장 집착을 갖는
자기 자신이라고 여기거나
자신의 가족이라고 여기게 되면
그 때는 이와 전혀 달라지는 것이다.
그것이 그 객관적 사실에 차이가 있는 것도 아니고
본래 그 현실에는 그런 내용도 없고
현실에서 그런 감각현실을 얻고
어떤 생각을 하는 것도 다 엉터리라고 하는 것이지만,
그러나 그런 내용을 놓고
그것에 그런 망상분별을 일으키고
집착을 갖게 되는가
그렇지 않은가에 의해서
위와 같은 차이가 나타난다고 제시하는 것이다.
그래서 위 문제는
서로 밀접하게 관련이 되어 있는 내용이라고 제시하는 것이다.
무언가를 잘못 있다고 여기고
그것이 좋다고 여기고 집착을 갖는 것은
처음 제시한 지극한 고통의 상황을 열매로 낳은
처음의 씨의 관계에 있다고 제시하는 것이다.
그렇게 처음 망상분별을 일으켜 그 상황을 대하면
그 전제에서
위와 같은 내용은 씨가 되어서
앞에 제시한 것과 같이 생생하게 고통을 얻게 되는
상활을 열매로 얻게 되는 관계에 놓임을 제시하는 것이다.
그래서 이 상태에서부터
그런 망상과 집착을 제거하는 것이
요구되는 사정이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런 망상과 집착을 제거하면
사실은 그로부터 얻을 수 있는 좋음만 남기고
문제로 보는 고통이나 나쁨은 다 제거해 내는
효용을 얻게 된다고 보는 것이다 .
그것은 앞의 사례에서는
고려청자를 평소 잘 사용하는
그릇처럼 효용은 효용대로 얻고
그러나 그로 인해 부담하거나 겪는 온갖
문제는 하나도 겪지 않는 상태가 된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또 하나의 효용이 있다.
어떤 게임이나 영화를 놓고 설명하면
이런 경우를 예를 들 수 있다고 본다.
어떤 이가 이 게임에서
도저히 성취하기 힘들다고 보지만,
자신이 원하는 어떤 것이 있다고 가정해보자.
그런데 그것을 어떻게 성취할 것인가가 문제되는 것이다.
원래 게임에서 어떤 화면 부분을 조작하면
어떤 내용이 실현되지 않는가.
그런데 이 내용을 실상과 관련해 깊게 관한다는 것은
그 관계를 그렇게 피상적으로 보지 않고
대한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게임을 비유로 든다면
화면 모니터에 어떤 그런 관계가 있다고 보지 않고
그런 내용을 나타나게 하는
프로그램의 코드나
그 원리에 그런 내용이 있다고 보고
그것을 통해서 자신이 원하는 것을
성취시켜 나타나게 할 수 있는 경우를 생각할 수 있다.
영화도 마찬가지다.
영화화면에서 앞 장면에서
화살이 날라와 어떤 주인공이 다쳤다고 한다면
그 관계를 영화화면을 놓고 이해하는 입장은
앞처럼 피상적으로 그 관계를 이해하는 입장인 것이다.
이 비유에서 조금 더 깊게 이 관계를 보는 입장은
그것을 그렇게 보지 않고
영화 감독과 그런 장면을 연출하게 한 시나리오 작가 등에
의해 그런 내용이 나타났고
그것은 또 그런 감독이나 작가가 그런 생각을 하게 한
어떤 망상분별이 그 기본 바탕이라고 보는 것과 사정이 같다.
그래서 그런 바탕에서 어떤 화면에 어떤 내용을
나타나게 하는 것은
그런 감독이나 작가가 그 영화를 제작하는 과정에
화면을 바꾸면 된다고 보는 것과 사정이 같다.
이런 비유와 같이
실상을 꿰뚤어 관하는 가운데 현상을 대하는 입장은
일반적으로 성취가 곤란하다거나
도저히 불가능하다고 보는 내용을
그렇지 않다고 관하고 성취시켜 나가게 되는 것이기도 하다.
여하튼 이런 내용을 통해서
있고 없음의 문제를 잘 살피고
현실을 대하게 되면
현실에서 겪는 일체 생사고통에서 벗어나고
또
현실에서 중생제도를 위해서
어떤 서원을 성취한다거나
다른 불국토를 장엄한다거나
또는 온갖 문제를 다 잘 해결하는 가운데
최고의 상태인 부처님과 같은 상태가 된다고 하는 등등을
뜻과 같이 성취할 수 있다고 제시하는 것이다.
그것은 본래 그런 진짜 내용이 없고
그런 내용을 본래 얻을 수 없다는 것을
잘 이해하는 가운데
그러나 현실에서 얻는 내용에서는
그런 것을 그렇게 나타나게 한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재난을 생각하면
전쟁도 있고 기근도 있고
전염병도 있고 다양한 재난을 생각할 수 있는데
이런 사태에 바위가 항의를 하던가.
아니면 물이 항의를 하던가.
결국 이를 대하는 각 생명이
자신의 뜻과 맞지 않은 사태를 만나서
그것을 하나같이 문제라고 보는 것이고
그런 가운데 자신의 생사문제를
가장 큰 문제로 생각하는 것이다.
더욱이 죽은 다음에 아무 것도 없는 것인가.
아니면 있는 것인가.
있다면 좋은 것이 있을 것인가.
아니면 더 나쁜 것이 있을 것인가.
이런 것을 생각해서 그 각각에
따라 다양한 생각을 하게 되는데
여하튼 이런 문제가
한 개인의 생노병사 과정과 관련된
총체적 문제라고 할 수 있다.
경전에서는 이것을
원증회고 애별리고 구부득고 오음성고
생노병사 이런 식으로 나열하는데
여하튼 어떤 현상이던
자신의 뜻과 맞지 않으면 문제고
자신의 뜻과 맞으면 문제가 아니라고 할 것인데
여기서 그 뜻이 무언가가 문제인 것이다.
그래서 이 뜻을 놓고
세계를 음미하면
본래 그런 뜻이 감각현실과 별개의 내용이고
그런 내용을 얻을 수 없는데
그것이 그렇게 있다고
이 둘을 그렇게 관련시켜 대하는 경우
바로 문제라고 할
지옥과 아귀 축생 세계가
나타나게 된다고 이해할 수 있다.
그래서 그런 엉터리 망상이라도 떠나면
그 생명은 그처럼 문제라고 할
지옥 아귀 축생 인간 아수라나 욕계의 하늘에서 벗어나
색계 무색계의 하늘세계로
거주지를 옮긴다고 보는 것이다.
그러나 좀 더 완전해지려면
무엇이 생멸한다고 하는 망상을 완전히 제거해야
된다고 보는 것이다.
그래서 있고 없음의 문제의 해결이 중요한데
현실에서 비만 조금 많이 와서
문제가 생겨도 그것을 재난이라고 하고
날씨가 조금 더워도 재난이고
여하튼 이런 총체적인 고통의 문제를 놓고
지금 연구를 진행해서
이것을 근본적으로 해결할 방안을
찾아서 실천해야 한다고 보는 것이다.
[...]
있고 없음의 문제를 살필 때
그렇게 현실에서 대하는 것이
사실은 그에 해당하는 진짜의 내용이 없고
실재의 내용은 얻을 수 없다고 할 때
그런 상태에서
수행자는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한다는 것인가.
이 부분이 사실은 더 중요한 것이다.
앞의 내용도 이론상 복잡한 측면이 있지만,
정작 그 내용을 잘 안다고 해도
그 상태에서 수행자가 각 경우마다
어떻게 해야 한다는 것인가를 알지 못하고,
안다고 하더라도 그것을 실천해 성취하지 못하면
만사 도로~~ 아미타불 이런 상태가 되는 것이다.
이를 비유하면
창고에 곡식이 많다는 것도 알고
은행에 돈이 많이 있다는 것도 아는데
단지 알 뿐
자신의 곡식은 없고
자신이 저금한 돈은 없는 경우로서
남의 곡식과 남의 예금액만 파악하는 상태라고
종종 비유되는 것이다.
무엇이 있고 없음을 열심히 따지고 잘 파악한들
그것이 무슨 소용이 있는가.
이 부분을 잘 파악하지 못하고
지적호기심이던 연구심이던 발휘하여
평생 열심히 무아 무자성 공을 연구해서 잘 안다고 해도
그에 바탕한 수행의 내용이 없으면
지옥에서 그 이론을 붙들고
지옥의 공수행자로 임하는 것은
별로 차이가 없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회계지식을 잘 아는데
정작 자신의 창고나 은행 예금은 텅텅 비어 있고
부채만 가득해서 노숙생활을 하거나 추위에 떨어야 하는
경우와 비유될 수 있는 상황인 것이다.
그런 내용을 모르는 것도 문제지만
안다고 해도 그에 바탕해 수행이 이뤄지지 않으면
알아서 무엇하는가 하는 문제에 빠지게 되는 것이다.
[...]
자신의 입장만 고집하고
독선적으로 임하면
자신은 모르는데
다른 입장에서 보면
악마의 형태나 특징이 쉽게 파악이 된다고 보는 것이다.
자신이 볼 때 자신이 좋고 옳은 것만
놓고 고집한다는 것이 바로
그런 입장인 것이다.
자신은 이해가 안 되는데
교도소에 수감되는 사람들의 공통점이 우선 그것인 것이다.
강도나 강간범의 경우도
자신의 입장에서는 자신이 좋은 것을
그렇게 고집하고 행한 것 뿐인 것이다.
여기에 무슨 차이가 있는가.
그래서 악마의 정체는
그런 특징으로 쉽게 파악되고
그렇게 생각하고 말하고 행위하고 자세를 취하게 되는
그 근본 바탕을 분석하면
결국 처음 전도망상을 일으켜 전개하고 집착을 갖고 임하는
그 구조가 그것이라고 제시하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전도몽상을 일으키고
증폭시켜 나가는 그 부분에
무엇이 있고 없고를 놓고
판단함에 있어서
엉터리 망상분별을 행한 다음
죽을 때까지 고집하고 임하는 것이
가장 근본된 원인이라고 제시하는 것이다 .
그런데 정작 강도나 강간범 입장에서는
왜 자신이 좋아하는 것을 좋아하는 대로
한 것뿐인데 이것이 문제가 되는가.
이런 것을 잘 이해하지 못하고
계속 그 방향으로 무한히 나아가려고 하는 경우도
가끔 있는 것이다.
그런데 수행자가 일체가 공하다라는 사실을
관하는 바탕에서도
그렇게 나아가려고 하는 경우도 또 있다는 것이
문제라면 문제인 것이다.
그래서 이런 부분을 잘 이해하고
있다 없다의 문제를 잘 정리한 다음
그 바탕에서 어떤 경우에 어떻게 수행을 해야 하는가를
또 잘 정리하고
그런 내용을 현실에서 열심히 정진해 성취해 나가는 것이
곧 수행자의 수행의 내용인 것이다.
또 그렇게 하는 취지는
자신과 모든 생명이 다 함께
올바른 깨달음을 얻고
생사고통에서 모두 벗어나서
청정한 니르바나에 머무는 것이 목표점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
있고 없음의 문제를 그간
상당히 많이 살펴왔는데
유마힐 소설경에 관련된 내용이 제시된다.
참조 유마힐소설경 제3 불제자품 http://buddhism007.tistory.com/3195 ☞법에는 중생이 없으니,
우선 경전 이 부분에 해당 내용이 제시되지만
결론적 내용만 제시될 뿐
정작 왜 그렇게 보아야 하는가에 대해서는
자세한 설명이 제시되지 않고 있다.
[..]
이를 검토해야 하는 사정은
바로 이 부분에서 대부분
삶을 시작하는 단계에서부터
엉터리 전도 망상을 일으킨 다음
그 상태로 계속 살다가 그 상태로
삶을 마치는 과정을 되풀이하는 사정 때문이다.
그래서 어느 계기에서
이 내용을 스스로 검토해
그 망상분별을 제거하지 못하면
결국 그 상황에서 해탈문을 찾아 내지 못하고
전도망상과 번뇌에 접착되어
번뇌의 사역을 당하고
또 다른 생명도 그렇게 번뇌의 사역을 시키면서
생사 고통을 받아나가는 상태로부터
벗어나지 못한다는 것도 의미한다.
그래서 중요한 문제인 것이다.
물론 앞에서는 이렇게 전도망상을 벗어난 상태에서
수행자가 이제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하는가를 다시
살피고 그 내용을 실천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제시한 것이지만,
또 그 전제로 그런 내용을 올바로 관하는 것도
그런 사정으로 중요한 것이다.
한마디로 '행심'- 반야바라밀다 '조견'- 오온개공이
'도'- 일체고액을 하는 전제로서 대단히 필수적인
내용이 된다는 의미다.
조금 쉽게 풀이하면
현상과 실상을 꿰뚫어 관하는 깊은 지혜인 반야 바라밀다수행을
'깊게 행하여'
현상의 존재 일체[오온]이 모두 공하다는 사정을
'밝게 비추어 관하는 것'이
( 그에 바탕해 망상분별과 그에 바탕한 번뇌와 집착을 제거하고 + 수행을 해서 )
생사고통과 일체 고통과 재난을 쉭 하고
'벗어나 건너는 데' 필수적이라는 의미다.
그것이 자체적으로 안 되면
반야심경에서 가장 첫머리에 나오는
관자재보살의 명호만 열심히 외어도
관자재보살님이 자비를 대표하는 대력보살님이기에
그 보살님의 서원에 바탕해서
관자재보살님이 그 수행자를 도와서
그 수행자에 맞추어 모습을 변화해 나타나
그렇게 깨달음[보리]를 얻게 해준다는 내용이
또 제시되고 있다.
또 그것만으로 자신의 소원성취가 부족하다고 여기면
관자재보살님이 제시해주는 방식에 따라서
다라니를 염송하면 또 그 소원도 성취해주고
무량한 겁에 걸쳐 쌓아 놓은
업의 장애
즉 자신이 살아가는데 언제가는 폭발할 시한폭탄이나 지뢰의
놔관도 제거해주고 복덕을 제공해주게 되니
이 다라니 수행을 해도 된다고 보는 것이다.
다만 다라니를 염송할 때는
그냥 다라니만 외어서는 안 되고
경전에 제시한 방식에 따라
먼저 일정한 서원을 일으키고
그에 따라 다라니를 외어야 하는 것을 주의해야 한다고 본다.
약국에서 병이 들어 약을 먹는데
약사가 어떤 방식으로 먹으라고 한 내용을 무시하고
자신 마음대로 한번에 다 털어 입에 넣으면
병이 낫게 되는 것이 아니라고 보듯
일정한 방식에 따라서 다라니도
외우고 수행을 해야 효과가 발휘되는 것이라고 보아야 한다.
사실 그것은 관세음보살님 입장에서는
그런 취지 때문에 그 중생의 소원도 성취시켜 주고
업의 장애도 해소시켜 주는 것인데
정작 그 부분을 빠뜨리고
약만 제공받기를 원하면
그것은 곤란하다고 누구나 보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사실은 반야심경이라는 짧은 경전의
두 구절에 생사고통을 벗어날 기본 원리는
다 들어가 있다고 보게 되는 것이기도 하다.
[...]
시는 현실과는 잘 맞지 않는 엉뚱한 생각이라고 보게 되는데
그래서 만일 if 논의와 밀접한 내용이 그 다음에
전개 되는 사정이 있다고 보게 되는 것이다.
누군가 시를 쓴다면
그것은 논의에서는 if 논의를 시작하는 것과
사정이 같다는 의미다.
이미 그 사정을 밝혔는데
무엇이 없다고 하는 입장에서
논의를 시작하는 것은
그런 입장에서 논의를 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거기에 사용되는 단어나 개념이나
그 문장 형식이나 논리 추론 체계도
이 논자는 제시하고자 하는 바가 없고
그것이 맞다고 보는 바도 없는 것이다.
그러나 상대에 맞추어서
상대가 주장하는 것을 받아들여서
그런 가운데
상대가 일으킨 망상이 망상임을
밝히고자 논의에 들어간다는 그런 입장인 것이다.
그래서 너무 심하게 진지할 필요는 없다고 보지만,
그 사정을 이해하지 않으면
이 견해의 문제가
가장 사람을 해치는 날카로운 칼로 현실에서는
기능하게 된다는 점도 주의해야 한다고 본다.
현실에서 전 세계적으로
대량 학살현상이 일어나는 것은
사실은 이런 날카로운 견해의 번뇌에서 비롯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불교 전문용어로는 이를 이사(利使) - 날카로운 번뇌라고
표현해서 탐욕 분노 어리석음과 같은 번뇌와 구별하기도 한다.
번뇌를 사(使)라고 표현하는 것은
번뇌가 그 생명을 묶어 사역시키고 이 세계 저 세계로
끌고 가는 사정을 나타내는 것으로 보게 된다.
알렉산더 대왕이나 나폴레옹 황제가 어느날 갑자기
이상한 망상을 일으켜서 나아가면
이에 함께 먼 길을 걸어가야 하는 이들이
수없이 생겨나는 것과 같은 현상인 것이다.
그래서 어떤 논의에 임할 때는
이런 문제가 발생하지 않도록
사전 보호 장치를 많이 강구해야 한다고 보게 된다.
[...]
글 취지 자체가
그런 망상이 왜 발생하게 되었고
또 그런 망상이 왜 그 망상을 일으킨 이에게
생사고통을 받도록 사역을 시키는가의 사정을 살피고
또 어떻게 하면 그런 망상 상태에서
그 망상과 그에 바탕한 번뇌와 집착을
제거할 수 있게 되는가에
초점을 맞추고
논의를 해나가고자 하는 것이다.
[...]
어떤 이가 행방불명되어서 찾는데
6 살 때 찍은 사진을 갖고 찾으면
찾아지겠는가.
그런데 그것이 또 자신의 정체가 무엇인가를
스스로 확인하는 과정에서도 문제된다.
자신이 스스로 생각해도 이상하지 않은가.
정신없이 매순간 바삐 살아가서 그렇지
5 살때 자신이 진짜 자신인가
지금의 자신이 진짜 자신인가.
이런 문제가 제기되면 어떻게 해결하는가.
둘다 이다.
둘다 아니다.
이기도 하고 아니기도 하고 오락가락?
그래서 자세히 살피면
사실 자신이라고 여기면서 평소 살아가는 것은
사실은 자신이 아니고
거기에 그런 것은 없다는 것을 잘 확인할 필요가 있는 것이다.
그런데 그것을 자신이라고 여기고 집착을
갖고 살아가는 현실은 다 무엇인가.
그것이 한마디로 간단히 말하면
번뇌에 의한 사역과정인 것이다.
그것을 이해못하면 이해할 때까지
그 사역은 무한히 계속된다고
제시되는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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