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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진리와실천
불기2564-06-27_마하반야바라밀경-K0003-015 본문
『마하반야바라밀경』
K0003
T0223
제15권
● 한글대장경 해당부분 열람I
● 한글대장경 해당부분 열람II
○ 통합대장경 사이트 안내
○ 해제[있는경우]
● TTS 음성듣기 안내
※ 이하 부분은 위 대장경 부분에 대해
참조자료를 붙여 자유롭게 연구하는 내용을 적는 공간입니다.
대장경 열람은 위 부분을 참조해주십시오.
『마하반야바라밀경』
♣0003-015♧
제15권
♥아래 부분은 현재 작성 및 정리 중인 미완성 상태의 글입니다♥
불교기록문화유산
마하반야바라밀경 제15권
후진 구자국 구마라집 한역
최봉수 번역
김형준 개역
거란본에는 대사기품(大事起品)으로 되어 있음
그때 수보리가 부처님께 말씀드렸다.
“세존이시여,
이 심오한 반야바라밀은 큰 일을 위하여 일어나고,
불가사의한 일을 위하여 일어나며,
일컬을 수 없는 일을 위하여 일어나고,
한량이 있을 수 없는 일을 위하여 일어납니다.
세존이시여,
이 심오한 반야바라밀은 무등등(無等等)인 일을 위하여 일어납니다.”
“참으로 그러하느니라.
나아가 무등등인 일을 위하여 일어난다.
왜냐하면 반야바라밀 가운데
다섯 가지 바라밀이 포함되어 있기 때문이니라.
또한 반야바라밀 가운데에는
내공ㆍ외공 내지 무법유법공이 포함되어 있기 때문이며,
4념처 내지 8성도분이 포함되어 있기 때문이니라.
이 심오한 반야바라밀 가운데에는 부처님의 10력 내지 일체종지가 함수되어 있으니,
비유하건대 마치 관정(灌頂)1)의식을 받은 왕은
나라 안에서 가장 높아서
나라에 많은 일이 있지만 모두 대신들에게 맡기고
국왕은 안락하고 무사하여 자유로운 것과 같으니라.
이와 같이 수보리야,
성문 및 벽지불의 법과 보살법과 불법은
모두가 다 반야바라밀 가운데 있으며,
반야바라밀은 능히 그 일을 성취하느니라.
이러한 까닭에 수보리야,
반야바라밀은 큰 일을 위하여 일어나고,
나아가 무등등인 일을 위하여 일어나느니라.
느낌ㆍ생각ㆍ지어감ㆍ분별을 취하지 않고 집착하지 않는 까닭에 성취하고,
나아가 일체종지를 취하지 않고 집착하지 않는 까닭에 성취하느니라.
수다원의 과위 내지 아라한의 과위와 벽지불도 내지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취하지 않고 집착하지 않는 까닭에
능히 성취하느니라.”◂
“어찌하여 물질을 취하지 않고 물질에 집착하지 않는 까닭에 능히 성취하며,
어찌하여 느낌ㆍ생각ㆍ지어감ㆍ분별 내지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능히 성취하는 것인지요?”◂
“그대는 어떻게 생각하느냐?
만일 이 물질은 취할 수 있고 집착할 수 있다고 보더냐?”
수보리가 부처님께 말씀드렸다.
“그렇게 보지 않습니다,
세존이시여.”
“수보리야,
그대는 어떻게 생각하느냐?
만일 느낌ㆍ생각ㆍ지어감ㆍ분별 내지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수보리가 말씀드렸다.
“그렇게 보지 않습니다,
세존이시여.”
수보리야,
나도 물질이 취할 수 있고 집착할 수 있다고는 보지 않느니라.
그렇게 보지 않는 까닭에 취하지 않으며
취하지 않는 까닭에 집착하지 않느니라.
나는 또한 느낌ㆍ생각ㆍ지어감ㆍ분별 내지 아뇩다라삼먁삼보리와 일체종지까지도
취할 수 있고 집착할 수 있다고는 보지 않으며,
보지 않는 까닭에 취하지 않으며,
취하지 않는 까닭에 집착하지 않느니라.
나는 또한 불법(佛法)과 여래법과 자연인법(自然人法)과 일체지인법이
취하거나 집착할 수 있다고는 보지 않고,
보지 않는 까닭에 취하지 않으며,
취하지 않는 까닭에 집착하지 않느니라.
이러한 까닭에 수보리야,
모든 보살마하살은 물질을 취하지 않고 또한 집착하지 않느니라.
느낌ㆍ생각ㆍ지어감ㆍ분별
내지 부처님의 법과 여래법과 자연인법과 일체지인법도 또한 취하지 않고,
또한 집착하지 않느니라.”◂
그때 욕계와 색계의 모든 천자들이 부처님께 말씀드렸다.
“세존이시여,
이 반야바라밀은 심오해서 보기 어렵고 알기 어렵고,
또한 사유하고 비교하고 유추하여 알 수도 없습니다.
미묘하고 선교(善巧)한 지혜를 갖춘 적멸자만이 알 수 있으며,
이 반야바라밀을 믿을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 보살은
선지식과 서로 따랐고
심오한 반야바라밀을 믿어 능히 이해한다고 아는 것입니다.
세존이시여,
만일 삼천대천국토 가운데의 온갖 중생들로서
모두 수신행(隨信行)ㆍ수법행(隨法行)ㆍ팔종성인(八種性人))ㆍ
수다원ㆍ사다함ㆍ아나함ㆍ아라한 및 벽지불이 되어
지혜의 복덕[智德]과 끊음의 복덕[斷德]을 짓는다 해도,
이 보살이 하루 동안 심오한 반야바라밀을 행하고 인욕하고 사유하고 헤아린 것에는 미치지 못합니다.
왜냐하면 이 수신행ㆍ수법행ㆍ팔종성인ㆍ
수다원ㆍ사다함ㆍ아나함ㆍ아라한 및
벽지불의 지혜의 복덕이나 끊음의 복덕은
바로 보살마하살의 무생법인(無生法忍)이기 때문입니다.”
“참으로 그러하느니라.
모든 천자들아,
곧 보살마하살의 무생법인이니라.◂
모든 천자들아,
만일 선남자ㆍ선여인이 이 심오한 반야바라밀을 들은 뒤
쓰고 받아 지니고 독송하고 설하고 바르게 억념한다면,
이 선남자ㆍ선여인은
성문과 벽지불승을 구하는 선남자ㆍ선여인이 심오한 반야바라밀을 멀리 떠나고
다른 경전을 일 겁이나 일 겁에 조금 못 미치는 동안 익히는 것보다
훨씬 신속히 열반을 얻을 수 있다.
왜냐하면 이 심오한 반야바라밀 가운데에는
가장 묘한 법이 널리 설해지기 때문이니,
이곳이 수신행ㆍ수법행ㆍ팔종성인ㆍ수다원ㆍ사다함ㆍ아나함ㆍ아라한 및 벽지불이 배워야 할 곳이고
보살마하살도 또한 배워야 할 곳이며,
배우고 나서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는 곳이니라.”
이때 욕계와 색계의 모든 천자들이 함께 큰 소리로 말씀드렸다.
“세존이시여,
이 반야바라밀을 마하바라밀이라고 말합니다.
세존이시여,
이 반야바라밀을 불가사의바라밀ㆍ불가칭바라밀ㆍ무유량바라밀ㆍ무등등바라밀이라고 합니다.
수신행과 수법행과 팔종성인은 이 심오한 반야바라밀을 배워서
수다원ㆍ사다함ㆍ아나함ㆍ아라한 및 벽지불이 되고,
이 심오한 반야바라밀을 배워서 보살마하살이 되며,
나아가 이 심오한 반야바라밀 가운데서 배워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습니다.
그렇지만 이 심오한 반야바라밀은 또한 늘지도 않고 줄지도 않습니다.”
이때 욕계와 색계의 모든 천자들은
부처님 발에 이마를 대어 절하고 부처님 주위를 돌고 나서는 떠나갔다.
이곳을 떠난 지 멀지 않아 홀연히 보이지 않게 되었으니
“세존이시여,
이 심오한 반야바라밀을 듣고서 즉시 믿고 이해하는 보살마하살은
어디에서 죽은 뒤 이 세간에 태어났는지요?”◂
부처님께서 수보리에게 말씀하셨다.
“어떤 보살마하살은 이 심오한 반야바라밀을 듣고서 즉시 믿고 이해하며
위축되지 않고 물러나지 않으며
어려워하지 않고 의심하지 않으며
후회하지 않고 환희하고 즐겨 들으며,
듣고 나서는 기억하여 이 심오한 반야바라밀을 멀리 떠나지 않느니라.
혹은 가거나 머물거나 앉거나 누울 때에도 끝내 잊어버리지 않고,
항상 가르침의 스승을 따름이 마치 갓 난 송아지가
그 어미를 떠나지 않는 것과 같으니라.
끝내 가르침의 스승을 멀리 떠나지 않고,
나아가 이 심오한 반야바라밀을 얻어서
입으로 외우고 마음으로 이해하고 바른 견해로 통달한다면
수보리야, 마땅히 알아야 하니,
이 보살은 인도(人道)에서 죽어 다시 이 세간의 사람으로 태어난 것이니라.◂
왜냐하면 이렇게 불도를 구하는 사람은
지난 세상에서도 심오한 반야바라밀을 듣고서 서사해 지니고
공경하고 존중하고 찬탄하고
꽃과 향 내지 깃발이나 일산을 가지고 공양했기 때문이니라.
이러한 인연으로 사람 중에서 목숨을 마친 뒤,
다시 사람으로 태어나 이 심오한 반야바라밀을 듣고서 즉시 믿어 이해하느니라.”
수보리가 부처님께 여쭈었다.
“세존이시여,
만일 어떤 보살마하살이든 이와 같은 공덕을 성취하여
타방(他方)의 국토에서 모든 부처님을 공양하고 그곳에서 목숨을 마친 뒤에는
이 세간에 태어나 심오한 반야바라밀을 듣고 즉시 믿어 이해하고 서사해 지니고
독송하고 바르게 억념하는 이러한 사람이 있는지요?”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있다.
보살은 이와 같이 공덕을 성취하여 타방의 국토에서 모든 부처님을 공양하고
그곳에서 목숨을 마친 뒤
이 세간에 태어나 심오한 반야바라밀을 듣고서 즉시 믿어 이해하고
서사해 지니고 독송하고 바르게 억념하느니라.
왜냐하면 이 보살마하살은
서사해 지니고 독송하며 설하고 바르게 억념하여,
저 세간에서 목숨을 마친 뒤에 이 세간에 태어났기 때문이니라.
마땅히 알아야 하니,
이 사람은 앞의 세상에서 공덕을 성취한 것이니라.◂
또 수보리야,
이 심오한 반야바라밀을 듣고서
이 선근의 인연으로 이 세간에 태어났느니라.◂
또 수보리야,
그 속의 소식[中事]을 묻지 않았기 때문에,
사람으로 태어나서 이 심오한 반야바라밀을 듣고서도
마음에 의심하고 후회함이 있어 깨치기 어려운 것이니라.◂
또 수보리야,
이와 같은 보살은 앞의 세상에서 이 심오한 반야바라밀을 듣기는 해도 묻지 않았기 때문에
지금 계속하여 의심하고 후회하여 깨치기 어렵다는 것을 알아야만 하느니라.
또 수보리야,
만약 어떤 보살이 앞의 세상에서 선나바라밀을 듣기는 했어도 그 안의 일을 묻지 않았다면,
금세에서도 반야바라밀을 들을 때에 묻지 않기 때문에 계속하여 의심하고 후회하느니라.
또 수보리야,
만약 보살이 앞의 세상에서 비리야바라밀을 듣기는 했어도 그 안의 일을 묻지 않았다면,
금세에서도 반야바라밀을 들을 때에 묻지 않기 때문에 계속하여 의심하고 후회하느니라.
또 수보리야,
만약 어떤 보살이 앞의 세상에서 찬제바라밀을 듣기는 했어도 그 안의 일을 묻지 않았다면,
금세에서도 반야바라밀을 들을 때에 묻지 않기 때문에 계속하여 의심하고 후회하느니라.
또 수보리야,
만약 어떤 보살이 앞의 세상에서 시라바라밀을 듣기는 했어도 그 안의 일을 묻지 않았다면,
금세에서도 반야바라밀을 들을 때에 묻지 않기 때문에 계속하여 의심하고 후회하느니라.
또 수보리야,
만약 어떤 보살이 앞의 세상에서 단나바라밀을 듣기는 했어도 그 안의 일을 묻지 않았다면,
금세에서도 반야바라밀을 들을 때에 묻지 않기 때문에 계속하여 의심하고 후회하느니라.
또 수보리야,
보살마하살이 앞의 세상에서 내공 또는 외공 또는 내외공 내지 무법유법공에 대해 듣기는 했어도
그 안의 일을 묻지 않았다면,
사람으로 태어나서 이 심오한 반야바라밀을 듣고도 묻지 않는 까닭에,
계속하여 다시 의심하고 후회하여 깨치기 어려운 것이니라.
또 수보리야,
보살마하살이 앞의 세상에서 4념처 내지 8성도분
또는 4선ㆍ4무량심ㆍ4무색정ㆍ5신통 또는 부처님의 10력 내지 일체종지에 대해 듣기는 했어도 그 안의 일을 묻지 않았다면,
사람으로 태어나서 이 심오한 반야바라밀을 듣고도 묻지 않는 까닭에
계속하여 다시 의심하고 후회하여 깨치기 어려운 것이니라.
보살마하살이 앞의 세상에서 심오한 반야바라밀을 듣고 그 안의 일을 물었지만
행하지 않았다면,
몸을 버리고 태어날 때에
이 심오한 반야바라밀을 하루 또는 이틀 또는 사흘 또는 나흘 또는 닷새 동안 듣기까지는
마음이 견고하여 능히 파괴할 자가 없지만
만약 들은 바를 떠나게 되면,
바로 물러나고 잃어버리게 되느니라.◂
왜냐하면 앞의 세상에서 이 심오한 반야바라밀에 대해 그 안의 일을 묻기는 했지만
설한 대로 행하지 않았기 때문이니라.
이 사람은 어떤 때는 들으려고 하고
어떤 때는 들으려고 하지 않는데,
마음이 경솔하고 견고하지 않으며 뜻이 산란하고 고요하지 않느니라.
비유하건대 마치 가벼운 털이 바람을 따라 이리저리 흩날리는 것과 같으니라.
수보리야,
이 보살은 뜻을 일으킨 지가 오래지 않았고 선지식과 서로 따르지 않았으며,
모든 부처님을 많이 공양하지 않았고,
앞의 세상에서 이 심오한 반야바라밀을 서사하지도 않았고 읽지도 않았으며
외우지도 않았고 바르게 억념하지도 않았다.
그리고 반야바라밀을 배우지 않았고
선나바라밀을 배우지 않았으며
비리야바라밀을 배우지 않았고
찬제바라밀을 배우지 않았으며
시라바라밀을 배우지 않았고
단나바라밀을 배우지 않았다.
그리고 내공 내지 무법유법공을 배우지 않았고,
4념처 내지 8성도분을 배우지 않았으며,
4선ㆍ4무량심ㆍ5신통ㆍ부처님의 10력을 배우지 않았고,
나아가 일체종지를 배우지 않았다고 알아야만 하느니라.
이와 같이 수보리야,
처음 대승에 뜻을 일으킨 보살마하살은 믿음이 적고 즐거움이 적은 까닭에
이 심오한 반야바라밀을 쓸 수가 없고,
받아 지니고 독송하며 설하고 바르게 억념할 수가 없느니라.
만약 불도를 구하는 선남자ㆍ선여인이 이 심오한 반야바라밀을
서사하지도 않고,
받아 지니거나
독송하지도 않으며,
설하지도 않고
바르게 억념하지도 않는다면,
또한 심오한 반야바라밀의 가호를 받지 못하고,
나아가 일체종지의 가호를 받지 못하느니라.
이 사람은 또한 설한 대로 심오한 반야바라밀을 행하지 않고,
나아가 일체종지를 행하지 않느니라.
이 사람은 2지(地),
곧 성문의 경지나 혹은 벽지불의 경지에 떨어지고 마느니라.◂
왜냐하면 이 선남자ㆍ선여인은 이 심오한 반야바라밀을 서사하지도 않고
읽지도 않으며 외우지도 않고 설하지도 않으며 바르게 억념하지도 않기 때문이니라.
이 사람도 또한 심오한 반야바라밀의 가호를 받지 못하고 또한 설한 대로 행하지 않느니라.
이러한 까닭에 이 선남자ㆍ선여인은 반드시 두 가지 경지 가운데 한 곳에 떨어지느니라.”
부처님께서 수보리에게 말씀하셨다.
“비유하건대 마치 큰 바다 가운데서 배가 난파되는 것과 같으니라.
배 안에 있었던 사람이 만약 나무토막이나 기물이나 부낭(浮囊)을 잡지 못하고,
시신이라도 잡지 못한다면,
수보리야,
이 사람은 저 기슭에 도달하지 못한 채
바다 속에 빠져 죽는다고 알아야 하느니라.
만약 배가 난파되었을 때에 배 안에 있었던 사람이
나무토막이나 기물이나 부낭,
또는 시신이라도 잡는다면,
이 사람은 결국 빠져 죽지 않고
편안하고 장애 없는 저 기슭에 도달할 수 있다고
알아야 하느니라.◂
불도를 구하는 선남자ㆍ선여인도 또한 이와 같으니,
만약 단지 즐겨 말할 뿐이고,
심오한 반야바라밀을 의지하지 않고
서사하지 않으며
읽지 않고 외우지 않으며
바르게 억념하지 않는다면,
그리고 선나바라밀ㆍ비리야바라밀ㆍ찬제바라밀ㆍ시라바라밀ㆍ단나바라밀을 의지하지 않고,
서사하지 않고 읽지 않으며 외우지 않고 바르게 억념하지 않고,
나아가 일체종지를 의지하지 않고
서사하지 않고 읽지 않고 외우지 않으며 바르게 억념하지 않는다면
수보리야,
마땅히 알아야 하니 이 선남자는 중도에서 지쳐
일체종지에 도달하기 전에
성문이나 벽지불의 경지에서의 증득만 취하게 되느니라.
가령 불도를 구하는 어떤 선남자ㆍ선여인은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위하여 믿음을 지니고
인내를 지니며,
정화된 마음을 지니고
깊은 마음을 지니며,
의욕을 지니고
이해를 지니며,
버림[捨]을 지니고
정진을 지닌다.
그리고 이 사람은 심오한 반야바라밀에 의지하고
서사해 지니고
독송하며
설하고
바르게 억념한다.
이 선남자ㆍ선여인은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위하여
모든 믿음ㆍ인내ㆍ정화된 마음ㆍ깊은 마음ㆍ의욕ㆍ이해ㆍ버림ㆍ정진을 지니는 까닭에,
심오한 반야바라밀의 가호를 받고,
나아가 일체종지의 가호를 받는다.
심오한 반야바라밀에 수호되고 나아가 일체종지에 수호되는 까닭에,
결국 중도에서 지치지 않고
성문이나 벽지불의 경지를 지나서
능히 부처님의 국토를 정화하고
중생의 이익을 성취하며
반드시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느니라.◂
비유하건대 마치 어떤 남자나 여자가 구워지지 않은 질그릇으로 물을 긷는 것과 같으니라.
이 병은 오래지 않아 흩어지고 무너져 버린다고 알아야 하나니,
왜냐하면 이 병은 아직 덜 구워져 있기에
흙으로 돌아가 버리고 말기 때문이니라.
이와 같이 수보리야,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위하는 마음이 있고
믿음이 있으며,
인내가 있고
정화된 마음이 있으며,
깊은 마음이 있고
의욕이 있으며,
이해가 있고 버림이 있으며,
정진이 있다고 해도
반야바라밀이라는 방편의 힘에 수호되지 못하고,
선나바라밀ㆍ비리야바라밀ㆍ찬제바라밀ㆍ시라바라밀ㆍ단나바라밀에 수호되지 못한다면,
그리고 내공 내지 무법유법공과 4념처 내지 8성도분과 부처님의 10력 내지 일체종지에 수호되지 못한다면,
수보리야,
이 사람은 중도에서 지쳐서
성문이나 벽지불의 경지에 떨어져 버린다고 알아야 하느니라.
비유하건대 마치 어떤 남자나 여자가
잘 구워진 질그릇으로 하천이나 우물ㆍ못ㆍ샘에서 물을 긷는 것과 같으니라.
이 병은 물을 안정되게 간직한다고 알아야 하나니,
왜냐하면 이 병은 완전하게 구워져 있기 때문이니라.
이와 같이 수보리야,
선남자ㆍ선여인이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구할 때
모든 믿음ㆍ인내ㆍ정화된 마음ㆍ깊은 마음ㆍ의욕ㆍ이해ㆍ버림ㆍ정진이 있고,
반야바라밀이라는 방편의 힘에 수호되고,
선정ㆍ정진ㆍ인욕ㆍ지계ㆍ보시 또는 내지 일체종지에 수호되는 까닭에 수보리야,
마땅히 알아야 하니 이 사람은 중도에서 지치지 않게 되고,
성문이나 벽지불의 경지를 지나서
능히 부처님의 국토를 정화하고 중생의 이익을 성취하며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게 되느니라.
또 수보리야,
비유하건대 마치 큰 바다에 아직 장비를 갖추지 못한 배가 있는데,
그 위에 바로 재물을 싣는 것과 같으니라.
수보리야,
이 배는 중도에서 파괴되고 침몰하여
사람과 배와 재물이 각각 다른 곳으로 흩어진다고 알아야 하느니라.
곧 이 상인[買客]은 방편의 힘이 없는 까닭에
그 귀중한 보배를 잃게 되는 것이니라.
이와 같이 수보리야,
불도를 구하는 선남자ㆍ선여인이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위하는 마음이 있고,
믿음ㆍ인내ㆍ정화된 마음ㆍ깊은 마음ㆍ의욕ㆍ이해ㆍ버림ㆍ정진이 있다 해도
반야바라밀이라는 방편의 힘에 수호되지 못하고,
나아가 일체종지에 수호되지 못한다고 하면,
이 사람은 중도에서 지치게 되어 크게 진귀한 보배를 잃게 된다고 알아야 하느니라.
크게 진귀한 보배란,
이른바 일체종지이며,
지친다고 함은 성문이나 벽지불의 경지에 떨어지는 것이니라.
또 수보리야,
비유하건대 마치 지혜와 방편이 있는 사람이
해변에서 큰 배에 장치를 갖춘 후에
물속에 밀어 넣고
재물을 싣고는 배에 올라 떠나는 것과 같으니라.
이 배는 중도에서 파괴되거나 침몰하지 않고
틀림없이 안전하게 이르러야 할 곳에 도달하게 된다고 알아야 하느니라.
이와 같이 수보리야,
선남자ㆍ선여인이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위하여
믿음ㆍ인내ㆍ정화된 마음ㆍ깊은 마음ㆍ의욕ㆍ이해ㆍ버림ㆍ정진이 있고,
반야바라밀이라는 방편의 힘에 수호되고,
선정ㆍ정진ㆍ인욕ㆍ지계ㆍ보시 내지 일체종지에 수호된다면,
이 보살은 아뇩다라삼먁삼보리에 도달하게 되고
중도에서 성문이나 벽지불의 경지에 떨어지지 않는다고 알아야 하느니라.
또 수보리야,
비유하건대 마치 어떤 사람이 나이가 120살이나 되어 늙고 노쇠한데다
풍병ㆍ열병ㆍ냉병이 들거나 혹은 그 셋이 한데 몰린 병이 든 것과 같으니라.
수보리야,
그대는 어떻게 생각하느냐?
이 사람은 능히 자리에서 일어날 수 있겠느냐?”
“일어날 수 없겠습니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이 사람을 가령 일으키는 자가 있다면 어떠하겠느냐?”
수보리가 부처님께 말씀드렸다.
“이 사람을 능히 일으킨다 해도
이 노인은 병이 들었기 때문에 멀리 가야 10리나 20리를 가지 못할 것입니다.”
“이와 같이 수보리야,
선남자ㆍ선여인이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위하는 마음이 있고,
믿음ㆍ인내ㆍ정화된 마음ㆍ깊은 마음ㆍ의욕ㆍ이해ㆍ버림ㆍ정진이 있다고 해도,
반야바라밀이라는 방편의 힘에 수호되지 못하고,
나아가 일체종지에 수호되지 못하게 되면,
이 사람은 중도에서 성문이나 벽지불의 경지에 떨어진다고 알아야 하느니라.
왜냐하면 반야바라밀이라는 방편의 힘에 수호되지 못했기 때문이니라.
어떤 사람이 나이가 120살이나 되어 늙고 노쇠한데다
풍병ㆍ열병ㆍ냉병이 들거나 혹은 그 셋이 한데 몰린 병이 들었지만,
이 사람이 일어나서 가고자 하는데
어떤 건강한 두 사람이 각자 겨드랑이를 부축하며 노인에게 말하기를
‘어렵다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가고 싶은 곳까지 우리 두 사람이 부축하여 가되
결코 떠나지 않겠습니다’라며 돕는 것과 같으니라.
이와 같이 수보리야,
만약 선남자ㆍ선여인이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위하되
믿음ㆍ인내ㆍ정화된 마음ㆍ깊은 마음ㆍ의욕ㆍ이해ㆍ버림ㆍ정진이 있고
반야바라밀이라는 방편의 힘에 수호되며 내지 일체종지에 수호된다면,
이 사람은 중도에서 성문이나 벽지불의 경지에 떨어지지 않고
목적한 곳, 이른바 아뇩다라삼먁삼보리에 도달하게 되느니라.”
이때 부처님께서 다시 수보리를 칭찬하며 말씀하셨다.
“참으로 훌륭하구나.수보리야,
그대가 모든 보살마하살을 위하여 부처님에게 이 일을 묻는구나,
수보리야,
만약 불도를 구하는
어떤 선남자ㆍ선여인이 처음으로 뜻을 일으킨 보살 때부터
줄곧 나와 나의 것이라는 마음을 지니고,
보시하고 지계하고 인욕하고 정진하고 선정에 들고 지혜를 행하면서도,
이 선남자ㆍ선여인은 보시를 할 때에 생각하기를 ‘내가 보시하는 주인이고,
내가 이 사람에게 보시하며,
내가 이 물건을 보시한다.
나는 계를 지키고,
나는 인욕을 닦고,
나는 정진하고,
나는 선정에 들고,
나는 지혜를 닦는다’고 하느니라.
이 선남자ㆍ선여인은
이것이 베푸는 것이고,
이것이 자신이 베푼 것이라고 생각하느니라.
나아가 이것이 지혜라는 것이고,
이것이 나의 지혜라고 생각하느니라.
하지만 단나바라밀 가운데는 이와 같은 분별이 없으니
차안과 피안을 멀리 떠난 것이 단나바라밀의 모습이기 때문이니라.
시라바라밀ㆍ찬제바라밀ㆍ비리야바라밀ㆍ선나바라밀ㆍ반야바라밀 가운데도 이와 같은 분별이 없으니,
왜냐하면 차안과 피안을 멀리 떠난 것이 반야바라밀의 모습이기 때문이니라.
이 사람은 차안을 알지 못하고 피안을 알지 못하며,
이 사람은 단나바라밀을 위하지 않고,
나아가 일체종지의 수호를 받지 못하는 까닭에
성문이나 벽지불의 경지에 떨어지고 살바야에 도달할 수가 없느니라.
수보리야,
무엇이 불도를 구하는 사람에게 방편이 없는 것이겠느냐?
수보리야,
불도를 구하는 사람이 처음으로 뜻을 일으킨 보살 때부터 줄곧 방편이 없고,
보시ㆍ지계ㆍ인욕ㆍ정진ㆍ선정을 행하고 지혜를 닦으면서
그 사람이 이러한 생각을 하느니라.
‘내가 보시하고,
이 사람에게 보시하며,
이 물건을 보시한다.
나는 계를 지키고,
인욕을 닦고,
힘써 정진하고,
선정에 들고,
지혜를 닦으니,
이와 같이 지혜를 닦는다.’
이 사람은 이것이 보시하는 것이고,
이것이 자신이 보시한 것이라고 생각하여
이 보시로 말미암아 스스로 교만해지느니라.
이것이 계라는 것이고,
이 계가 나의 계라고 생각하여,
이 계로 말미암아 스스로 교만해지느니라.
이것이 인내고,
이것이 나의 인내라고 생각하여,
이 인내로 말미암아 스스로 교만해지느니라.
또한 이것이 정진이라는 것이고,
이것이 나의 정진이라고 생각하여,
이 정진으로 말미암아 스스로 교만해지느니라.
이것이 선정이라는 것이고,
이것이 나의 선정이라고 생각하여,
이 선정으로 말미암아 스스로 교만해지느니라.
이것이 지혜라는 것이고,
이것이 나의 지혜라고 생각하여 이 지혜로 말미암아 스스로 교만해지느니라.
하지만 단나바라밀 가운데에 이와 같은 분별이 없으니,
차안과 피안을 멀리 떠난 것이 단나바라밀의 모습이기 때문이니라.
또한 차안과 피안을 멀리 떠난 것이 시라바라밀의 모습이며,
차안과 피안을 멀리 떠난 것이 찬제바라밀의 모습이고,
차안과 피안을 멀리 떠난 것이 비리야바라밀의 모습이며,
차안과 피안을 멀리 떠난 것이 선나바라밀의 모습이며,
차안과 피안을 멀리 떠난 것이 반야바라밀의 모습이기 때문이니라.
왜냐하면 반야바라밀 가운데는 이러한 생각과 분별이 없기 때문이니라.
차안을 알지 못하고 피안을 알지 못하느니라.
이 사람은 단나바라밀에 수호되지 못하고,
나아가 일체종지에 수호되지 못하는 까닭에,
성문도 가운데 떨어지고 혹은 벽지불도 가운데 떨어져서
살바야에 도달할 수가 없느니라.
이와 같이 수보리야,
보살마하살이 반야바라밀이라는 방편의 힘에 수호되지 못하는 까닭에
성문의 경지에 떨어지고,
혹은 벽지불의 경지에 떨어지느니라.
무엇이 보살마하살이 반야바라밀이라는 방편의 힘에 수호되는 까닭에
성문이나 벽지불도에 떨어지지 않고
신속히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는다는 것인가?
수보리야,
보살이 처음부터 줄곧 방편의 힘을 지니고 보시하되,
나와 나의 것이라는 마음 없이 보시하고,
나아가 나와 나의 것이라는 마음 없이 지혜를 닦는다.
이 사람은 ‘나에게 이런 보시가 있으니,
이것이 나의 보시이다’라고 생각하지 않느니라.
이 보시로 말미암아 스스로를 높이지 않으니,
나아가 반야바라밀에서도 이와 같으니라.
이 보살은 자신이 보시를 했다고 생각하지 않고,
자신이 이 사람에게 보시하고,
이 물건을 지니고 보시하였다고 생각하지 않느니라.
자신이 계를 지니고,
이러한 계가 있다고 생각하지 않느니라.
자신이 인욕하고,
이러한 인욕이 있다고 생각하지 않느니라.
자신이 정진하고,
이러한 정진이 있다고 생각하지 않느니라.
자신이 선정에 들고,
이러한 선정이 있다고 생각하지 않느니라.
자신이 지혜를 닦고,
이러한 지혜가 있다고 생각하지 않느니라.
왜냐하면 이 단나바라밀 가운데에 이와 같은 분별이 없기 때문이니라.
차안과 피안을 멀리 떠난 것이 단나바라밀의 모습이니라.
차안과 피안을 멀리 떠난 것이 시라바라밀의 모습이고,
차안과 피안을 멀리 떠난 것이 찬제바라밀의 모습이니라.
차안과 피안을 멀리 떠난 것이 비리야바라밀의 모습이고,
차안과 피안을 멀리 떠난 것이 선나바라밀의 모습이며,
차안과 피안을 멀리 떠난 것이 반야바라밀의 모습이니라.
왜냐하면 반야바라밀 가운데는 이러한 생각과 분별이 없기 때문이니라.
이 보살마하살은 차안을 알고 피안을 아느니라.
이 사람은
단나바라밀에 수호되고
시라바라밀에 수호되고
찬제바라밀에 수호되고
비리야바라밀에 수호되고
선나바라밀에 수호되고
반야바라밀에 수호되며,
나아가 일체종지에 수호되는 까닭에
성문이나 벽지불의 경지에 떨어지지 않고
살바야에 도달하게 되느니라.
이와 같이 해서 수보리야,
보살마하살은 반야바라밀이라는 방편의 힘에 수호되는 까닭에
성문이나 벽지불의 경지에 떨어지지 않고
신속히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느니라.”◂
그때 혜명 수보리가 부처님께 여쭈었다.
“세존이시여,
처음 배우는 보살마하살은
어떻게 반야바라밀ㆍ선나바라밀ㆍ비리야바라밀ㆍ찬제바라밀ㆍ시라바라밀ㆍ단나바라밀을 배워야 하는지요?”
“처음 배우는 보살마하살이 만약 반야바라밀과 선나ㆍ정진ㆍ인욕ㆍ지계ㆍ단나 바라밀을 배우고자 하면,
먼저 이 심오한 반야바라밀을 설하는 선지식을 가까이하고 공양해야 하느니라.◂
이 사람은 이렇게 가르치리라.
‘그대 선남자여,
보시한 것을 모두 아뇩다라삼먁삼보리에 회향하십시오.
선남자여,
지계ㆍ인욕ㆍ정진ㆍ선정ㆍ지혜를 모두 아뇩다라삼먁삼보리에 회향하십시오.
그대여,
물질을 아뇩다라삼먁삼보리로 삼지 말고,
느낌ㆍ생각ㆍ지어감ㆍ분별을 아뇩다라삼먁삼보리로 삼지 마십시오.
단나바라밀을 아뇩다라삼먁삼보리로 삼지 말고,
시라바라밀ㆍ찬제바라밀ㆍ비리야바라밀ㆍ선나바라밀ㆍ반야바라밀을 아뇩다라삼먁삼보리로 삼지 말려,
내공 내지 무법유법공을 아뇩다라삼먁삼보리로 삼지 말며,
4념처ㆍ4정근ㆍ5근ㆍ5력ㆍ7각지ㆍ8성도분을 아뇩다라삼먁삼보리로 삼지 마십시오.
4선ㆍ4무량심ㆍ4무색정ㆍ5신통을 아뇩다라삼먁삼보리로 삼지 말고,
부처님의 10력 내지 18불공법을 아뇩다라삼먁삼보리로 삼지 마십시오.
왜냐하면
물질을 취하지 않으면 바로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고,
느낌ㆍ생각ㆍ지어감ㆍ분별을 취하지 않으면 바로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기 때문입니다.
단나바라밀 내지 반야바라밀을 취하지 않으면 바로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고,
내공 내지 무법유법공과 4념처 내지 18불공법을 취하지 않으면 바로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기 때문입니다.
선남자여,
이 심오한 반야바라밀을 행할 때에 물질을 탐내지 마십시오.
왜냐하면 선남자여,
이 물질은 탐낼 것이 못되기 때문입니다.
느낌ㆍ생각ㆍ지어감ㆍ분별을 탐내지 마십시오.
왜냐하면 느낌ㆍ생각ㆍ지어감ㆍ분별은 탐낼 것이 못되기 때문입니다.
선남자여,
단나바라밀ㆍ시라바라밀ㆍ찬제바라밀ㆍ비리야바라밀ㆍ선나바라밀ㆍ반야바라밀을 탐내지 마십시오.
내공 내지 무법유법공을 탐내지 말며,
4념처 내지 8성도분을 탐내지 말며,
4선ㆍ4무량심ㆍ4무색정ㆍ5신통을 탐내지 말며,
부처님의 10력 내지 일체종지를 탐내지 마십시오.
왜냐하면 일체종지는 탐낼 것이 못되기 때문입니다.
선남자여,
수다원의 과위 내지 아라한의 과위를 탐내지 마십시오.
벽지불도를 탐내지 말며,
보살의 법위를 탐내지 말며,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탐내지 마십시오.
왜냐하면 아뇩다라삼먁삼보리는 탐낼 것이 못되기 때문이며,
왜냐하면 모든 법의 성품은 공하기 때문입니다.’”
“세존이시여,
모든 보살마하살은 능히 어려운 일을 하니,
온갖 성품이 공한 법 가운데에서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구하고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고자 합니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참으로 그러하느니라.
보살마하살은 능히 어려운 일을 하니
온갖 성품이 공한 법 가운데에서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구하고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고자 하느니라.◂
모든 보살마하살은 세간을 안온하게 하기 위하여
아뇩다라삼먁삼보리의 마음을 일으키느니라.
세간을 즐겁게 하기 위하여,
세간을 구제하기 위하여,
세간의 귀의처가 되기 위하여,
세간의 의지처가 되기 위하여,
세간의 섬[洲]이 되기 위하여,
세간의 구경(究竟)의 길이 되기 위하여,
세간의 취(趣)를 위하여
수보리야,
무엇을 보살마하살은 세간을 안온하게 하기 위하여
아뇩다라삼먁삼보리의 마음을 일으킨다고 하는가?
보살마하살은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을 때에 6도(道)에 있는 중생들을 뽑아내어
두려움이 없는 언덕인 열반의 장소에 안전히 이르게 하느니라.◂
수보리야,
이것을 보살마하살은 세간을 안온하게 하기 위하여 아뇩다라삼먁삼보리의 마음을 일으킨다고 하느니라.
무엇을 보살마하살은 세간을 즐겁게 하기 위하여
아뇩다라삼먁삼보리의 마음을 일으킨다고 하는가?
수보리야,
갖가지 근심과 고통과 슬픔과 고뇌의 중생들을 끄집어내어
두려움이 없는 언덕인 열반의 장소에 머물게 하느니라.◂
이것을 보살마하살은 세간을 즐겁게 하기 위하여
아뇩다라삼먁삼보리의 마음을 일으킨다고 하느니라.
무엇을 보살마하살이 세간을 구제하기 위하여
아뇩다라삼먁삼보리의 마음을 일으킨다고 하는가?
보살마하살은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을 때에
생사 중에서 겪는 갖가지 고통에서 중생들을 구제하고
또한 그러한 고통을 단절하게 하기 위하여 법을 설하고,
중생들은 법을 들으면서 3승에 의해 점진적으로 제도되어 해탈을 얻느니라.◂
이것을 보살마하살은 중생을 구제하기 위하여
아뇩다라삼먁삼보리의 마음을 일으킨다고 하느니라.
무엇을 보살마하살이 세간의 귀의처가 되기 위하여
아뇩다라삼먁삼보리의 마음을 일으킨다고 하는가?
보살마하살은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을 때에
나고 늙고 병들고 죽는 모습과 근심ㆍ슬픔ㆍ눈물ㆍ고뇌의 법에서 중생들을 끄집어내어
두려움이 없는 언덕인 열반의 장소에 머물게 하느니라.◂
이것을 보살마하살은 세간의 귀의처가 되기 위하여
아뇩다라삼먁삼보리의 마음을 일으킨다고 하느니라.
무엇을 보살마하살이 세간의 의지처가 되기 위하여
아뇩다라삼먁삼보리의 마음을 일으킨다고 하는가?
보살마하살은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을 때에
중생들을 위하여 온갖 법에 의지처가 없는 것을 설하느니라.◂
이것을 보살마하살은 세간의 의지처가 되기 위하여
아뇩다라삼먁삼보리의 마음을 일으킨다고 하느니라.”
“세존이시여,
어찌하여 온갖 법에 의지처가 없는지요?”
“물질은 상속하지 않으니,
이것이 바로 물질에 생함이 없는 것이니라.
물질에 생함이 없다면 곧 물질은 멸하지 않느니라.
그리고 물질이 멸하지 않는다면 곧 물질에 의지처가 없느니라.
느낌ㆍ생각ㆍ지어감ㆍ분별에서 일체종지에 이르기까지 그와 같으니,
수보리야,
이것을 보살마하살은 세간의 의지처가 되기 위하여
아뇩다라삼먁삼보리의 마음을 일으킨다고 하느니라.◂
수보리야,
무엇을 보살마하살은 세간의 구경의 도가 되기 위하여
아뇩다라삼먁삼보리의 마음을 일으킨다고 하는가?
수보리야,
보살마하살은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을 때에 중생들을 위하여 그와 같이 법을 설하느니라.
느낌ㆍ생각ㆍ지어감ㆍ분별에서 일체종지에 이르기까지 구경의 모습도 일체종지가 아니니라.
수보리야,
구경의 모습과 같이 온갖 법의 모습도 또한 그와 같으니라.”◂
수보리가 말씀드렸다.
“세존이시여,
만약 온갖 법의 모습이 구경의 모습과 같다면,
어찌하여 모든 보살마하살은 모두가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겠습니까.
왜냐하면 세존이시여,
물질의 구경의 모습 가운데에 분별이 있을 수 없고,
느낌ㆍ생각ㆍ지어감ㆍ분별의 구경의 모습 가운데서도 분별이 있을 수 없으며,
나아가 일체종지의 구경의 모습 가운데도 분별이 있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이른바 이러한 것이 물질이고,
이러한 것이 느낌ㆍ생각ㆍ지어감ㆍ분별이고,
이러한 것이 일체종지인 것입니다.”
부처님께서 수보리에게 말씀하셨다.
“참으로 그러하느니라.
느낌ㆍ생각ㆍ지어감ㆍ분별 내지 일체종지의 구경의 모습 가운데도
분별이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니라.
이른바 이러한 것이 물질이고,
나아가 이러한 것이 일체종지이니,
수보리야,
이것을 보살마하살의 어려운 일이라고 하느니라.
그와 같이 모든 법이 적멸한 모습을 보면서도
마음에 위축되지 않고 물러서지 않느니라.
왜냐하면 보살마하살은 이러한 생각을 하기 때문이니라.
‘이러한 모든 깊은 법을
나는 마땅히 그와 같이 알아서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어야 하며,
이와 같이 적멸하고 미묘한 법을 중생들을 위하여 설해야 한다.’◂
아뇩다라삼먁삼보리의 마음을 일으킨다고 하느니라.
아뇩다라삼먁삼보리의 마음을 일으킨다고 하는가?
만약 강 또는 하천 또는 큰 바다에서 사방의 물길이 끊어진 곳이 있다면
이것을 일컬어 섬이라 하느니라.
수보리야,
물질도 또한 그와 같이 과거와 미래가 끊어졌고,
느낌ㆍ생각ㆍ지어감ㆍ분별도 과거와 미래가 끊어졌고,
나아가 일체종지도 과거와 미래가 끊어졌느니라.
이렇게 과거와 미래가 끊어진 까닭에 온갖 법도 끊어졌느니라.
수보리야,
이렇게 온갖 법이 과거와 미래가 끊어진 까닭에 이것이 곧 적멸이고,
이것이 곧 묘한 보배이니 이른바 공이고,
얻을 바가 없는 것이며,
갈애가 남김없이 다한 것이고,
애욕을 떠난 열반이니라.◂
만약 보살마하살이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을 때에
중생들을 위하여 적멸의 미묘한 법으로써 설한다면,
수보리야,
이것을 보살마하살은 세간의 섬이 되기 위하여
아뇩다라삼먁삼보리의 마음을 일으킨다고 하느니라.
무엇을 보살마하살이 세간을 이끄는 것이 되기 위하여
아뇩다라삼먁삼보리의 마음을 일으킨다고 하는가?
보살마하살은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을 때에
중생들을 위하여
물질은 생한 일도 없고 멸한 일도 없으며,
더럽지도 않고 청정하지도 않음을 설하고,
느낌ㆍ생각ㆍ지어감ㆍ분별은 생한 일도 없고 멸한 일도 없으며,
더럽지도 않고 청정하지도 않음을 설하느니라.
그리고 12처ㆍ18계ㆍ4념처 내지 8성도분과
4선ㆍ4무량심ㆍ4무색정ㆍ5신통은
생한 일도 없고 멸한 일도 없으며,
더럽지도 않으며,
청정하지도 않음을 설하고,
수다원의 과위 내지 아라한의 과위의 벽지불도는
생한 일도 없고 멸한 일도 없으며,
더럽지도 않고 청정하지도 않음을 설하느니라.
그리고 부처님의 10력 내지 일체종지는 생한 일도 없고 멸한 일도 없으며,
더럽지도 않고 청정하지도 않음을 설하느니라.◂
수보리야,
이것을 보살마하살은 세간을 이끄는 자가 되기 위하여
아뇩다라삼먁삼보리의 마음을 일으킨다고 하느니라.
무엇을 보살마하살은 세간의 취를 위하여
아뇩다라삼먁삼보리의 마음을 일으킨다고 하는가?
보살마하살은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을 때에
중생들을 위하여 물질[色趣]은 공하다고 설하고,
느낌ㆍ생각ㆍ지어감ㆍ분별[識趣]은 공하다고 설하며,
나아가 일체종지[一切種智趣]도 공하다고 설하느니라.
왜냐하면 이 물질의 공한 모양은 취도 아니고 취 아닌 것도 아니기 때문이니라.
느낌ㆍ생각ㆍ지어감ㆍ분별은 취도 아니고 취 아닌 것도 아니라고 설하나니,
보살마하살은 세간의 취를 위하여 아뇩다라삼먁삼보리의 마음을 일으키느니라.◂
온갖 법은 이 취에 불과하기 때문이며,
왜냐하면 공 가운데서는 취와 취 아닌 것을 얻을 수 없기 때문이니라.
수보리야,
온갖 법의 취는 무상(無相)이며
왜냐하면 무상 가운데서는 취와 취 아닌 것을 얻을 수 없기 때문이니라.
수보리야,
온갖 법의 취는 무작(無作)이며
왜냐하면 무작 가운데서는 취와 취 아닌 것을 얻을 수 없기 때문이니라.
수보리야,
온갖 법의 취는 있는 바가 없고[無所有]
나지 않고[無生] 멸하지 않고[不滅]
더럽지 않고[不垢] 깨끗하지 않으며[不淨]
온갖 법은 이 취에 불과하니,
왜냐하면 있는 바가 없고 나지 않고 멸하지 않고
더럽지 않고 깨끗하지 않은 것 가운데서는
취와 취 아닌 것을 얻을 수 없기 때문이니라.
수보리야,
온갖 법의 취는 꿈[夢]이며
온갖 법은 이 취에 불과하니,
왜냐하면 꿈 가운데서는 취와 취 아닌 것을 얻을 수 없기 때문이니라.◂
수보리야,
온갖 법의 취는 환(幻)이고 메아리이고 그림자이고 변화한 것[化]이며
온갖 법은 이 취에 불과하니,
왜냐하면 이 변화물들 가운데서는,
취와 취 아닌 것을 얻을 수 없기 때문이니라.
수보리야,
온갖 법의 취는 무량무변이며
온갖 법은 이 취에 불과하니,
왜냐하면 무량무변인 것 가운데서는,
취와 취 아닌 것을 얻을 수 없기 때문이니라.
수보리야,
온갖 법의 취는 주지도 않고 받지도 않으며
온갖 법은 이 취에 불과하니,
왜냐하면 주지도 않고 받지도 않는 가운데서는,
취와 취 아닌 것을 얻을 수 없기 때문이니라.
수보리야,
온갖 법의 취는 들지도 않고 내려놓지도 않으며[不擧不下]
온갖 법은 이 취에 불과하니,
왜냐하면 들지도 않고 놓지도 않는 가운데서는 취와 취 아닌 것을 얻을 수 없기 때문이니라.
수보리야,
온갖 법의 취는 늘지도 않고 줄지도 않으며[不增不減]
온갖 법은 이 취에 불과하니,
왜냐하면 취와 취 아닌 것을 얻을 수 없기 때문이니라.
수보리야,
온갖 법의 취는 오지도 않고 가지도 않으며[不來不去]
온갖 법은 이 취에 불과하니,
왜냐하면 오지도 않고 가지도 않는 가운데서는,
취와 취 아닌 것을 얻을 수 없기 때문이니라.
수보리야,
온갖 법의 취는 들어가지도 않고 나가지도 않으며,
합하지도 않고 흩어지지도 않으며,
집착도 아니고 단절도 아니며 온갖 법은 이 취에 불과하니,
왜냐하면 집착도 아니고 단절도 아닌 가운데서는
취와 취 아닌 것을 얻을 수 없기 때문이니라.
수보리야,
온갖 법의 취는
나ㆍ중생ㆍ수명ㆍ인간ㆍ일어나는 자ㆍ일어나게 하는 자ㆍ
짓는 자ㆍ짓게 하는 자ㆍ아는 자ㆍ보는 자이며
온갖 법은 이 취에 불과하니라.
왜냐하면 나 내지 아는 자ㆍ보는 자는 본래 얻을 수 없기 때문이니라.
수보리야,
온갖 법의 취는 항상함이 있는[有常] 것이며 온갖 법은 이 취에 불과하니라.
왜냐하면 항상한 것은 끝내 얻을 수 없기 때문이니,
어찌 취와 취 아닌 것이 있겠느냐?
수보리야,
온갖 법의 취는 즐거움[樂]과 청정함[淨]과 나이며
온갖 법은 이 취에 불과하니라.
왜냐하면 즐거움과 청정함과 나라는 것은 끝내 얻을 수 없기 때문이니,
어찌 취와 취 아닌 것이 있겠느냐?
수보리야,
온갖 법의 취는 무상하고 괴롭고 청정하지 않고 무아이며
온갖 법은 이 취에 불과하니라.
왜냐하면 무상함과 괴로움과 청정하지 않음과 무아라는 것은 끝내 얻을 수 없기 때문이니,
어찌 취와 취 아닌 것이 있겠느냐?
수보리야,
온갖 법의 취는 탐내는 일이며
온갖 법은 이 취에 불과하니라.
왜냐하면 탐내는 일은 끝내 얻을 수 없거늘 어찌 취와 취 아닌 것이 있겠느냐?
수보리야,
온갖 법의 취는 성냄과 우치와 사견이며
온갖 법은 이 취에 불과하니라.
왜냐하면 성냄과 우치와 사견은 끝내 얻을 수 없기 때문이니,
어찌 취와 취 아닌 것이 있겠느냐?
수보리야,
온갖 법의 취는 여(如)이며
온갖 법은 이 취에 불과하니,
왜냐하면 여 가운데는 가는 것도 없고 오는 것도 없기 때문이니라.
수보리야,
온갖 법의 취는 법성(法性)ㆍ실제(實際)ㆍ불가사의성(不可思議性)이며
온갖 법은 이 취에 불과하니,
왜냐하면 법성ㆍ실제ㆍ불가사의성 가운데는 취와 취 아닌 것이 없기 때문이니라.
수보리야,
온갖 법의 취는 평등[等]이며
온갖 법은 이 취에 불과하니,
왜냐하면 평등한 가운데서는 취와 취 아닌 것을 얻을 수 없기 때문이니라.
수보리야,
온갖 법의 취는 동요하지 않는 모습[不動相]이며
온갖 법은 이 취에 불과하니,
왜냐하면 동요하지 않는 모습 가운데서는 취와 취 아닌 것을 얻을 수 없기 때문이니라.
수보리야,
온갖 법의 취는 물질[色]이며
온갖 법은 이 취에 불과하니라.
왜냐하면 물질은 끝내 얻을 수 없기 때문이니,
어찌 취와 취 아닌 것이 있겠느냐?
수보리야,
온갖 법의 취는 느낌ㆍ생각ㆍ지어감ㆍ분별이며
온갖 법은 이 취에 불과하니라.
왜냐하면 느낌ㆍ생각ㆍ지어감ㆍ분별은 끝내 얻을 수 없기 때문이니,
어찌 취와 취 아닌 것이 있겠느냐?
12처 또는 18계도 또한 그와 같으니라.
수보리야,
온갖 법의 취는 단나바라밀에로 진행하되,
이 진행은 초과하지 않느니라.
왜냐하면 보시는 끝내 얻을 수 없기 때문이니,
어찌 취와 취 아닌 것이 있겠느냐?
수보리야,
온갖 법의 취는 시라바라밀로 진행하되,
이 진행은 초과하지 않느니라.
왜냐하면 지계는 끝내 얻을 수 없기 때문이니,
어찌 취와 취 아닌 것이 있겠느냐?
수보리야,
온갖 법의 취는 찬제바라밀이며
온갖 법은 이 취에 불과하니라.
왜냐하면 인욕은 끝내 얻을 수 없기 때문이니,
어찌 취와 취 아닌 것이 있겠느냐?
수보리야,
온갖 법의 취는 비리야바라밀이며
온갖 법은 이 취에 불과하니라.
왜냐하면 정진은 끝내 얻을 수 없기 때문이니,
어찌 취와 취 아닌 것이 있겠느냐?
수보리야,
온갖 법의 취는 선나바라밀이며
온갖 법은 이 취에 불과하니라.
왜냐하면 선정은 끝내 얻을 수 없기 때문이니,
어찌 취와 취 아닌 것이 있겠느냐?
수보리야,
온갖 법의 취는 반야바라밀이며
온갖 법은 이 취에 불과하니라.
왜냐하면 반야는 끝내 얻을 수 없기 때문이니,
어찌 취와 취 아닌 것이 있겠느냐?
수보리야,
온갖 법의 취는 내공이며 온갖 법은 이 취에 불과하니라.
왜냐하면 내공은 끝내 얻을 수 없기 때문이니,
어찌 취와 취 아닌 것이 있겠느냐?
수보리야,
온갖 법의 취는 외공이며 온갖 법은 이 취에 불과하니라.
왜냐하면 외공은 끝내 얻을 수 없기 때문이니,
어찌 취와 취 아닌 것이 있겠느냐?
수보리야,
온갖 법의 취는 내외공이며
온갖 법은 이 취에 불과하니라.
왜냐하면 내외공은 끝내 얻을 수 없기 때문이니,
어찌 취와 취 아닌 것이 있겠느냐?
나아가 온갖 법은 무법유법공이며 온갖 법은 이 취에 불과하니라.
왜냐하면 무법유법공은 끝내 얻을 수 없기 때문이니,
어찌 취와 취 아닌 것이 있겠느냐?
수보리야,
온갖 법의 취는 4념처 내지 8성도분이며
온갖 법은 이 취에 불과하니라.
왜냐하면 4념처 내지 8성도분은 끝내 얻을 수 없기 때문이니,
어찌 취와 취 아닌 것이 있겠느냐?
수보리야,
온갖 법의 취는 부처님의 10력 내지 일체종지이며
온갖 법은 이 취에 불과하니라.
왜냐하면 일체종지 가운데서는 취와 취 아닌 것을 얻을 수 없기 때문이니라.
수보리야,
온갖 법의 취는 수다원의 과위ㆍ사다함의 과위ㆍ아나함의 과위ㆍ아라한의 과위ㆍ벽지불도이며
온갖 법은 이 취에 불과하니라.
왜냐하면 수다원의 과위 내지 벽지불도 가운데서는 취와 취 아닌 것을 얻을 수 없기 때문이니라.
수보리야,
온갖 법의 취는 아뇩다라삼먁삼보리이며
온갖 법은 이 취에 불과하니라.
왜냐하면 아뇩다라삼먁삼보리 가운데서는 취와 취 아닌 것을 얻을 수 없기 때문이니라.
수보리야,
온갖 법의 취는 수다원의 과위 내지 부처님이며
온갖 법은 이 취에 불과하니라.
왜냐하면 수다원 내지 부처님 가운데서는 취와 취 아닌 것을 얻을 수 없기 때문이니라.”
“세존이시여,
이 심오한 반야바라밀을 능히 믿고 이해하는 이가 누구인지요?”
부처님께서 수보리에게 말씀하셨다.
“어떤 보살마하살은
무수한 백천만억의 모든 부처님을 공양하였고 선지식을 따랐느니라.
이러한 무리의 사람들이 능히 이 심오한 반야바라밀을 믿어 이해하리라.”◂
“세존이시여,
능히 이 심오한 반야바라밀을 믿고 이해하는 이는
어떤 성품 또는 어떤 모습 또는 어떤 모양을 하고 있는지요?”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탐욕과 성냄과 어리석음을 끊어서 떠난 것이
그의 성품이고 모습이고 모양이니라.
이러한 보살마하살이 바로 능히 이 심오한 반야바라밀을 믿어 이해하느니라.”◂
“세존이시여,
심오한 반야바라밀을 믿어 이해하는 이 모든 보살마하살은
마땅히 어느 곳으로 나아가야 하는지요?”
부처님께서 수보리에게 말씀하셨다.
“심오한 반야바라밀을 믿고 이해하는 이 보살마하살은
마땅히 일체종지로 나아가야 하느니라.”◂
수보리가 부처님께 말씀드렸다.
“세존이시여,
이 보살마하살이 능히 일체종지로 나아간다면
반야바라밀을 닦는 까닭에
곧 온갖 중생들이 돌아가 귀의할 곳이 됩니다.
세존이시여,
반야바라밀을 닦는 것은 곧 온갖 법을 닦는 것입니다.
그러나 세존이시여,
닦을 곳이 없는 것이 곧 반야바라밀을 닦는 것이니,
닦는 일과 무너뜨리는 수행을 수용하지 않는 것이
반야바라밀을 닦는 것입니다.”
부처님께서 수보리에게 말씀하셨다.
“무슨 법을 무너뜨리는 까닭에
반야바라밀을 무너뜨리는 수행이라고 하더냐?”
“세존이시여,
물질을 무너뜨리는 까닭에 반야바라밀을 무너뜨리는 수행이라고 합니다.
느낌ㆍ생각ㆍ지어감ㆍ분별과 12처ㆍ18계를 무너뜨리는 까닭에 반야바라밀을 무너뜨리는 수행이라고 합니다.
나 또는 아는 자 또는 보는 자를 무너뜨리는 까닭에 반야바라밀을 무너뜨리는 수행이라고 합니다.
세존이시여,
단나바라밀을 무너뜨리는 까닭에 반야바라밀을 무너뜨리는 수행이라고 합니다.
나아가 반야바라밀을 무너뜨리는 까닭에 반야바라밀을 무너뜨리는 수행이라고 합니다.
내공 내지 무법유법공과 4념처 내지 18불공법과 수다원의 과위 내지 일체종지를 무너뜨리는 까닭에
반야바라밀을 무너뜨리는 수행이라고 합니다.”
“참으로 그러하느니라.
물질을 무너뜨리는 까닭에 반야바라밀을 무너뜨리는 수행이라고 하느니라.
나아가 일체종지를 무너뜨리는 까닭에 반야바라밀을 무너뜨리는 수행이라고 하느니라.”◂
“이 심오한 반야바라밀 가운데서 아유월치의 보살마하살을 분명히 알아야 하나니,
만약 보살마하살이 이 심오한 반야바라밀 가운데에 집착하지 않으면 아유월치의 보살이라고 알려지는 것이니라.
선나바라밀 내지 단나바라밀 가운데 집착하지 않고,
4념처 내지 일체종지 가운데에 집착하지 않으면 아유월치의 보살이라고 알아야만 하느니라.
가령 아유월치의 보살마하살은 심오한 반야바라밀을 행할 때에 다른 사람의 말을 가지고 긴요한 것을 삼지 않고,
또한 다른 사람의 가르침을 따라서 행동하지 않느니라.◂
아유월치의 보살마하살은 6바라밀에서 멀리 떠나지 않으며,
아유월치의 보살마하살은 심오한 반야바라밀이 설해지는 것을 들을 때에
마음으로 놀라지 않고 위축되지 않으며 두려워하지 않고 무서워하지 않으며 후회하지 않느니라.
환희하여 즐겨 듣고 받아 지니고 독송하며,
바르게 억념하고 설한 대로 행하느니라.◂
수보리야,
마땅히 알아야 하니 이 보살은 이미 앞의 세상에서
이 심오한 반야바라밀 가운데의 일을 듣고 나서,
받아 지니고 독송하고 바르게 억념한 것이니라.
왜냐하면 이 보살마하살은 큰 위덕이 있는 까닭에
이 심오한 반야바라밀을 듣고
마음으로 놀라지 않고 위축되지 않으며 두려워하지 않고 무서워하지 않으며
후회하지 않고 환희하여 즐겨 들으며,
받아 지니고 독송하며 바르게 억념했기 때문이니라.”
“세존이시여,
만약 보살마하살이 심오한 반야바라밀을 듣고
놀라지 않고 후회하지 않으며 내지 바르게 억념하려면
세존이시여,
이 보살마하살은 어떻게 이 반야바라밀을 행해야만 하는지요?”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일체종지를 수순(隨順)하는 마음으로
이 보살마하살은 마땅히 그와 같이 반야바라밀을 행해야 하느니라.”◂
“세존이시여,
무엇을 일체종지를 수순하는 마음이라고 말하며,
이 보살마하살은 마땅히 그와 같이 반야바라밀을 행해야 한다고 하시는지요?”
“공을 수순하는 이것을 보살마하살이 심오한 반야바라밀을 행한다고 하느니라.
무상과 무작과 무소유와
생하지 않음과 없어지지 않음과
더럽지 않음과 청정하지 않음을 수순하니,
이 보살마하살은 마땅히 그와 같이 반야바라밀을 행해야 하느니라.
또한 꿈ㆍ환ㆍ아지랑이ㆍ메아리ㆍ허깨비 같음을 수순하는 이것이
반야바라밀을 행하는 것이니라.”◂
수보리가 부처님께 여쭈었다.
“부처님께서는 공을 수순하고,
나아가 꿈이나 환과 같은 것을 수순하는 것이
반야바라밀을 행하는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보살마하살은 어떤 법을 행해야 하는지요?
가령 물질ㆍ느낌ㆍ생각ㆍ지어감ㆍ분별 내지 일체종지인지요?”◂
“보살마하살은 물질을 행하지 않고
느낌ㆍ생각ㆍ지어감ㆍ분별을 행하지 않으며,
나아가 일체종지를 행하지 않느니라.
왜냐하면 이 보살이 행하는 곳에는
짓는 법이 없고 파괴되는 법이 없으며,
따라오는 것이 없고 또한 가는 것도 없으며,
머무는 처소도 없기 때문이니라.
이 법은 셀 수도 없고 헤아릴 수도 없으니,
혹은 수가 없고 양이 없느니라.
이 법은 얻을 수가 없으니,
물질로써 얻을 수가 없고,
나아가 일체종지로써 얻을 수가 없느니라.
왜냐하면 물질이 바로 살바야이고 살바야가 바로 물질이기 때문이니라.
나아가 일체종지가 바로 살바야이고 살바야가 바로 일체종지이기 때문이니라.
혹은 물질의 여상(如相) 내지 일체종지의 여상은
모두 하나의 여(如)로서
둘이 없고 다름이 없기 때문이니라.
물질의 여상과 살바야의 여상은 하나의 여로서 둘이 없고 다름이 없으며,
나아가 일체종지도 또한 그와 같은 것이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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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1) 범어로는 abhiṣeka.
왕의 즉위식에서 머리에 물을 뿌리는 의식을 말한다.
○ [pt op t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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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음악공양, 나무불, 나무법, 나무승 mus0fl--MAGIC SYSTEM - Cherie Coco (Feat Soprano).lrc
● 보살의 선행학습의 중요성과 생사
『마하반야바라밀경』 내용을 일반적으로 이해하기 쉽지 않다.
50. 성판품(成辦品)에 다음 내용이 제시된다.
...
...
능히 성취하느니라.”◂
『마하반야바라밀경』 ♣0003-015♧ 50. 성판품(成辦品)
이에 대해 수보리가 다음처럼 의문을 제기한다.
“어찌하여 물질을 취하지 않고 물질에 집착하지 않는 까닭에 능히 성취하며,
어찌하여 느낌ㆍ생각ㆍ지어감ㆍ분별 내지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이에 대해 부처님께서 다음처럼 답을 제시한다.
▸ 수보리야,
취하거나 집착할 수 있다고는 보지 않고,
보지 않는 까닭에 취하지 않으며,
취하지 않는 까닭에 집착하지 않느니라.
이러한 까닭에 수보리야,
모든 보살마하살은 물질을 취하지 않고 또한 집착하지 않느니라.
느낌ㆍ생각ㆍ지어감ㆍ분별
내지 부처님의 법과 여래법과 자연인법과 일체지인법도 또한 취하지 않고,
또한 집착하지 않느니라.”◂
이에 대해 욕계와 색계의 모든 천자들이 부처님께 다음처럼 말씀드린다.
이 반야바라밀은 심오해서 보기 어렵고 알기 어렵고,
또한 사유하고 비교하고 유추하여 알 수도 없습니다.
미묘하고 선교(善巧)한 지혜를 갖춘 적멸자만이 알 수 있으며,
이 반야바라밀을 믿을 수 있습니다.◂
수보리 존자의 질문의 취지는 다음이다.
일체에 취하거나 집착할 만한 것을 얻을 수 없다.
그래서 취하거나 집착하지 않는다고 하자.
그렇다면 생사현실에서 무언가를 취해 성취한다는 일도 얻을 수 없을 것이다.
그런데 그것이 왜 생사현실에서 그런 것을 성취하는 방안이 되는가.
이런 부분으로 보인다.
그런데 부처님은 다만 취할 것과 집착할 것을 얻을 수 없음을 제시한다.
그래서 취하지 않고 집착하지 않는다고 제시한다.
그런데 그런 사정 때문에 어떻게 성취하게 대해서는 자세한 설명이 없다.
그래서 이 부분에 대해 보충을 해 이해해야 한다.
한편 수보리 존자는 보살의 생사를 묻는다.
이 심오한 반야바라밀을 듣고서 즉시 믿고 이해하는 보살마하살은
어디에서 죽은 뒤 이 세간에 태어났는지요?”◂
그 속의 소식[中事]을 묻지 않았기 때문에,
사람으로 태어나서 이 심오한 반야바라밀을 듣고서도
마음에 의심하고 후회함이 있어 깨치기 어려운 것이니라.◂
아뇩다라삼먁삼보리의 마음을 일으키느니라.
세간을 즐겁게 하기 위하여,
세간을 구제하기 위하여,
세간의 귀의처가 되기 위하여,
세간의 의지처가 되기 위하여,
세간의 섬[洲]이 되기 위하여,
세간의 구경(究竟)의 길이 되기 위하여,
세간의 취(趣)를 위하여
온갖 법은 이 취에 불과하기 때문이며,
왜냐하면 공 가운데서는 취와 취 아닌 것을 얻을 수 없기 때문이니라.
수보리야,
온갖 법의 취는 무상(無相)이며
왜냐하면 무상 가운데서는 취와 취 아닌 것을 얻을 수 없기 때문이니라.
수보리야,
온갖 법의 취는 무작(無作)이며
왜냐하면 무작 가운데서는 취와 취 아닌 것을 얻을 수 없기 때문이니라.
수보리야,
온갖 법의 취는 있는 바가 없고[無所有]
나지 않고[無生] 멸하지 않고[不滅]
더럽지 않고[不垢] 깨끗하지 않으며[不淨]
온갖 법은 이 취에 불과하니,
왜냐하면 있는 바가 없고 나지 않고 멸하지 않고
더럽지 않고 깨끗하지 않은 것 가운데서는
취와 취 아닌 것을 얻을 수 없기 때문이니라.
수보리야,
온갖 법의 취는 꿈[夢]이며
온갖 법은 이 취에 불과하니,
왜냐하면 꿈 가운데서는 취와 취 아닌 것을 얻을 수 없기 때문이니라.◂
모두 반야바라밀다의 이해와 관련된다.
“보살마하살은 물질을 행하지 않고
느낌ㆍ생각ㆍ지어감ㆍ분별을 행하지 않으며,
나아가 일체종지를 행하지 않느니라.
왜냐하면 이 보살이 행하는 곳에는
짓는 법이 없고 파괴되는 법이 없으며,
따라 오는 것이 없고 또한 가는 것도 없으며,
머무는 처소도 없기 때문이니라.
이 법은 셀 수도 없고 헤아릴 수도 없으니,
혹은 수가 없고 양이 없느니라.
이 법은 얻을 수가 없으니,
물질로써 얻을 수가 없고,
나아가 일체종지로써 얻을 수가 없느니라.
가장 쉽게 이해하면 다음처럼 제시할 수 있다.
세상에 부자로 살던 이가 파산하는 경우가 있다.
그런데 이 부자가 파산하는 사정은
그가 가난한 이를 돕기 위하여 자선과 기부를 많이 해서 그런 것이 아니다.
탐욕을 일으켜 가지고 있는 있는 재산을 아낀다.
그리고 더 많은 재산을 얻기 위하여 탐욕을 부리며 추구한다.
그러다가 일이 잘못되어서 그런 상황에 처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집착을 갖고 임하면 오히려 그런 소원이 잘 성취되지 않는다.
그러나 이런 상황에서 집착을 제거하고 임한다고 하자.
그러면 오히려 그런 소원이 더 잘 성취된다.
이런 현상을 일반 현실에서도 볼 수 있다,.
예를 들어 어떤 대학교를 본다고 하자.
이 대학교들은 대단히 많은 건물로 되어 있다.
캠퍼스도 넓다.
만일 수익면에서 본다면 그런 부동산으로 더 큰 수익을 거둘 사업이 많다.
학교시설은 주로 공익에 기여하고 수익성이 그다지 크지는 않다.
그런데 이런 대학교가 시설되고 운영되는 과정도 마찬가지다.
한 사람이 탐욕을 갖고 집착을 가져서 평생 임한다고 하자.
그런 경우 대부분 이런 대학교의 건물 한 동도 자신 이름으로 세우거나 얻지 못한다.
그런데 이런 대학교를 세워 운영하는 입장은 그 사정이 그와 정반대다.
또 다른 사례도 많다.
현실에서 평생을 바쳐도 자신의 병원을 하나 갖고 운영하기 힘들다.
그런데 의사면허도 없는 이가 오직 다른 어려운 이를 돕겠다고 임한다고 하자.
그런 경우엔느 오히려 전세계에 병원을 놓고 운영하게도 된다.
이런 현실 모습이 시사하는 바가 크다.
집착을 가지면 그 뜻대로 많은 자산을 갖고 살아야 할 듯 하다.
그런데 사정이 그렇지 못하다.
오히려 집착을 버리고 임할 때 그 과보가 더 낫다.
이런 사정을 먼저 살피면 경전 내용도 쉽게 이해할 수 있다.
그러나 반야바라밀다경과 관련해 이론상 살펴야 할 내용은 다음이다.
반야바라밀다 경전에서 일체가 무소유 불가득임을 제시한다.
일체가 무아 무자성 공하다. 현실에서 얻을 바가 없음을 강조하다.
그래서 생사현실에 본래 생사나 생멸도 얻을 수 없음을 제시한다.
그런데 한편으로 이런 사정을 잘 꿰뚫어 관해서
생사현실에서 실천할 수행덕목을 나열한다.
그리고 이로 인해 성취할 수행목표상태를 나열한다.
예를 들어 4념처 내지 8성도분
그리고 부처님의 10력 내지 일체종지를 제시한다.
수행을 통해 성취하는 무량한 복덕자량과 지혜자량을 제시한다.
더 나아가 수행자가 이 불국토에서 수행하다가
다른 불국토에 가 수행함도 제시한다.
그래서 이들 내용은 앞 내용과 외관상 서로 모순된 내용으로 여겨진다.
그래서 이론상 이 두 내용의 관계부터 먼저 잘 살펴야 한다.
일체가 무아 무자성 공하다는 내용은
생사현실이 꿈처럼 실답지 않음을 제시하는 내용이다.
침대에 누어 바다나 황금꿈을 꾸었다고 하자.
그런데 그런 꿈 내용은 침대에서는 얻을 수 없다.
그래서 아무리 생생하게 꿈을 꾸었어도 그 꿈을 실답지 않다고 하게 된다.
무아 무자성 공의 내용도 사정이 같다.
현실에서 매 순간 생생하게 일정한 내용을 얻는다.
그리고 일정한 분별을 행한다.
그런데 거기에는 진짜라고 할 참된 실체의 내용도 없다. [무아 무자성, 무소유]
그리고 그런 내용은 본 바탕에서는 얻을 수 없다. [불가득 공]
즉 본 바탕에서 얻을 수 없는 내용을 현실에서 그런 상황에서 그처럼 얻는 것 뿐이다.
따라서 현실내용은 실답지 않다.
그래서 집착을 갖고 취하지 않아야 함을 제시한다.
그런데 이처럼 실답지 않다는 것은
그런 내용을 전혀 얻지 못한다는 뜻은 아니다.
현실에서는 그런 내용을 매순간 생생하게 얻는다.
이는 꿈과 현실의 관계와 같다.
꿈은 실답지 않다.
그러나 그렇다고 꿈을 생생하게 꾸지 못하는 것이 아니다.
그래서 무아 무자성 공은
유무의 극단을 취하면 곤란함을 제시하는 것이다.
유의 극단은 다음이다.
현실에서 무언가를 보거나 얻고 분별을 행한다.
그러면 그런 내용이 참된 진짜로 있다고 잘못 여긴다.
그리고 본 바탕에도 그런 내용이 있기에
자신이 현실에서 그런 내용을 얻게 된다고 잘못 여긴다.
그리고 현실 내용을 실답게 여기고 집착을 일으킨다.
그런 바탕에서 업을 행한다.
그래서 생사고통을 겪게 된다.
이는 유의 극단을 취하는 것이다.
그런 생사고통을 해결하기 위해 경전에서 다음 내용을 제시한다.
우선 진짜에 해당하는 참된 내용은 없음을 제시한다. [무아, 무자성, 무소유]
그리고 본 바탕에서 그런 내용을 얻을 수 없고 공함을 제시한다. [ 불가득 공]
그래서 그런 사정을 먼저 이해해야 한다.
그런데 이렇게 무아 무자성 공을 제시하면
다시 아무 것도 전혀 없는 것으로 잘못 이해하기 쉽다.
그래서 생사현실에서 일체 행할바가 없다고 잘못 여긴다.
또는 이렇게 하나 저렇게 하나 다 마찬가지라고도 잘못 여긴다.
그러나 이는 무의 극단이다.
무아 무자성 공은 그런 내용을 제시하는 것이 아니다.
현실에서 일정한 내용을 얻는다 .
그리고 분별도 행한다.
그런데 그것은 무아 무자성 공한 가운데 얻는 것이다.
따라서 이들은 집착을 가질만한 실다운 내용이 아님을 제시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런 사정을 잘 관하고 수행을 원만히 성취해야 함을 제시한다.
그래서 무아 무자성 공으로 유무의 극단에 치우치면 안 된다.
이를 기호로 쉽게 이해해보자.
어떤 이가 생사현실에서 눈이나 귀로 얻는 감각현실을 ○ 이라고 표시해보자.
그리고 그런 상태에서 그가 분별하는 내용을 ■ 이라고 표시해보자.
한편 그 주체가 관계하지 않아도 그대로 있다고 할 본 바탕을 # 으로 표시해보자.
한편 이들 내용을 일으키는 진짜에 해당하는 참된 실체는 다시 $ 으로 표시해보자.
경전에서 이런 상황에서 생멸이나 생사를 얻을 수 없음을 제시한다.
이는 다음 의미다.
감각현실○ 에는 그런 관념분별■을 얻을 수 없다.
감각현실○ 은 그런 관념분별■ 이 아니다.
한편 실재 #에는 그런 관념분별■ 얻을 수 없다.
실재 #는 그런 관념분별■ 이 아니다.
그런 관념분별 ■ 에는 참된 실체 $ 가 없다.
그런 관념분별 ■ 은 참된 실체 $ 가 아니다.
한편 이들 내용은 감각현실을 놓고도 같은 형태로 제시할 수 있다.
그런 관념분별■에는 그런 감각현실 ○을 얻을 수 없다.
그런 관념분별■은 그런 감각현실 ○이 아니다.
한편,
실재 #에는 그런 감각현실 ○ 을 얻을 수 없다.
실재 #는 그런 관념분별■ 이 아니다.
그런 감각현실 ○ 에는 참된 실체 $ 가 없다.
그런 감각현실 ○ 참된 실체 $ 가 아니다.
이런 내용을 제시한다.
그런데 이 상황에서
실재 # 나 감각현실○ 이나 그런 관념분별■이 전혀 없다는 것은 아니다.
이렇게 이해하면 무의 극단에 잘못 치우친 상태가 된다.
그래서 무아 무자성 공과 '전혀 없음'과 혼동을 일으키면 안 된다.
그래서 무아 무자성 공과 생사현실에서 '무언가를 얻을 수 있음'은 서로 모순된 내용이 아니다.
또 무아 무자성 공과 생사현실에서 수행 목표를 '성취할 수 있음은 서로 모순된 내용이 아니다.
오히려 이들 관계는 다음처럼 제시해야 한다.
본래 무아 무자성 공하다.
그런 사정 때문에
생사현실에서 그러그러한 상태를 얻을 수 있다.
또 성취할 수 있다.
이렇게 제시해야 한다.
그것은 다음의 관계를 의미한다.
만일 무아 무자성 공하지 않다고 하자. '
그래서 무언가 본 바탕에 참된 실체가 있다고 하자.
그렇다면 생사현실에서 보는 내용을 얻거나 성취할 도리가 없다.
이런 관계가 있다.
반대로 생사현실에서 일정한 내용을 얻는다고 하자.
그런 사정 때문에 무아 무자성임도 파악할 수 있게 된다.
그런 관계를 먼저 잘 헤아려 이해해야 한다.
그래야 승의제와 세속제의 관계도 함께 잘 이해할 수 있게 된다.
한편 생사현실에서 어떤 상태를 성취하는 부분에서는
신견의 문제와 넓고 길고 깊은 인과관계를 다시 살펴야 한다.
본 바탕은 무아 무자성 공하다.
그런데 이런 바탕에서 반드시 수행자가 원하는
좋고 좋은 상태만 나타나는 것은 아니다.
본 바탕의 실상은 공하다.
그리고 한 주체가 매순간 얻는 감각현실은 전체로서 하나의 상이다.
그런데 이를 바탕으로 분별 영역에서 무량한 뜻을 일으키게 된다.
분별 영역에서 이렇게 묶고 나누고 하면서 무량한 분별을 행한다.
그런 가운데 분별영역에서 다시 망상분별을 일으킨다.
즉 자신이 일으킨 분별 내용이 다른 영역에도 실답게 있다고 잘못 여긴다.
그리고 집착을 갖는다.
그런 가운데 분별 영역에서 좋음과 나쁨을 분별하고 집착한다.
그리고 분별영역에서 좋음을 묶어 소원을 일으킨다.
그리고 업을 행한다.
그래서 한편으로 그런 망집에 바탕해 악을 행하기도 한다.
한편 그런 상황에서 그런 망집을 제거하고
집착없이 선을 행하기도 한다.
그런 가운데
무량한 생사고통을 받는 상태도 나타나고
또 반대로 무량한 복덕을 얻는 상태도 나타난다.
이런 가운데 수행자는
우선 생사고통을 심하게 받는 3 악도에서 벗어나야 한다.
그리고 생사의 묶임에서 완전히 스스로 벗어나야 한다.
그리고 나서 다시 중생 제도를 위해 생사현실에 임해야 한다.
그리고 중생과 눈높이를 맞추어야 한다.
그런 가운데 중생을 생사고통을 심하게 받는 상태에서 벗어나게 해야 한다.
그 다음 그 중생을 생사의 묶임에서 완전히 벗어나게 해야 한다.
또 그러기 위해서 수행자는 생사현실에서
무량한 복덕자량과 지혜자량을 갖추어야 한다.
이것이 수행자가 생사현실에서 갖는 기본적인 수행목표가 된다.
그런데 그 방안은 현실에서 무언가 좋음을 얻기 위해
취하는 방안과 대부분 정반대다.
일반적으로 좋음을 취하면 아낀다.
경전에서 이런 현실사정에 대해 단 1 전도 남에게 베풀려고 하지 않는다고 제시한다.
그것은 그 주체가 그것이 자신에게 좋음을 준다고 여기기 때문이다.
그런 가운데 자신의 좋음을 위해서 함부로
다른 생명이 집착하는 것을 함부로 침해한다.
그리고 다른 생명을 해친다.
한 주체가 매일 식사하고 활동하는 과정을 살펴보면 이런 현실을 쉽게 이해할 수 있다.
그러다가 자신이 집착하는 것을 다른 이가 침해하면
불같이 분노를 일으키고 보복을 행한다.
그리고 그 상대를 해치려 하게 된다.
그래서 살아가는 동안 쉼없이 이런 업을 행한다.
그 활동의 취지는 본래 자신이 좋은 상태가 되기를 위해서다.
그런데 생사현실에서 각 주체가 모두 다 이렇게 망집을 바탕으로 임한다.
그런 사정으로 망집에 바탕해 업을 행하면
이들 각 주체가 얽혀서 원래 뜻과는 다른 상태에 묶이게끔 된다.
그것이 생사고통을 극심하게 받는 결과가 된다.
번뇌 - 업 - 고의 관계식이다.
한편 이 관계를 관찰할 때도 일반적으로
대단히 좁고 짧고 얕게 관하게 된다.
그래서 단멸관을 취한다.
그런데 생사현실의 상황이 그렇지 않다.
그래서 한번 행한 업은 무량겁을 두고 사라지지 않는다.
그리고 그 과보를 받게 된다.
따라서 수행자는 이 사정을 먼저 잘 이해해야 한다.
이런 생사현실에서 한 주체는 신견을 바탕으로 업을 행해 나간다.
그런데 생사현실에서 수행자도 이와 유사한 형태로 수행을 해나가게 된다.
예를 들어 수행자가 생사현실에서 보시나 정계 안인 정진 수행을 한다고 하자.
그 경우 그런 수행을 하는 부분은 평소 자신이 자신으로 여기고 대한 그 부분이다.
또 수행자가 앉아서 정려 수행을 한다고 하자.
그 경우에도 마찬가지다.
그런 부분이 앉아서 그런 수행을 한다.
그런데 반야바라밀다를 닦는 수행자와 일반 중생 사이에 차이가 있다.
그래서 생사현실에서 반야바라밀다를 닦는 입장과
중생심의 차이를 먼저 잘 이해해야 한다.
반야바라밀다를 닦는 입장은 경전에 제시되어 있다.
수행자는 앞과 같은 취지 때문에 생사현실에 임한다.
우선 자신부터 생사의 묶임에서 벗어나야 한다.
그리고 다시 다른 중생들을 생사 묶임에서 벗어나게 해야 한다.
그래서 생사현실에 그처럼 임한다.
그리고 그처럼 수행을 한다.
그런데 그 수행에 임할 때
반야바라밀다에 바탕해 수행에 임한다.
그 내용이 경전에 다음처럼 제시된다.
...
“보살마하살은 물질을 행하지 않고
느낌ㆍ생각ㆍ지어감ㆍ분별을 행하지 않으며,
나아가 일체종지를 행하지 않느니라.
왜냐하면 이 보살이 행하는 곳에는
짓는 법이 없고 파괴되는 법이 없으며,
따라 오는 것이 없고 또한 가는 것도 없으며,
머무는 처소도 없기 때문이니라.
이 법은 셀 수도 없고 헤아릴 수도 없으니,
혹은 수가 없고 양이 없느니라.
이 법은 얻을 수가 없으니,
물질로써 얻을 수가 없고,
나아가 일체종지로써 얻을 수가 없느니라.
『마하반야바라밀경』 ♣0003-015♧ 53. 취지품(趣智品)
그렇게 관한다해도 현실에서 눈을 뜨면 일정한 내용이 보인다.
이는 중생과 마찬가지다.
생사현실에 임하는 한 그 사정은 같다.
그런데 수행자는 그 내용에 대해서 중생처럼 망집을 일으켜 대하지 않는다.
앞에서 그 사정을 제시했다.
○ 에는 ■ 을 얻을 수 없다.
#에도 ■ 을 얻을 수 없다.
그런 가운데 현실에서 ○ 과 ■ 을 얻는다.
이런 사정을 기본적으로 잘 이해하고 현실에 임하는 것이다.
그래서 집착하거나 '취'하지 않는다.
그런데 취란 표현에는 취(取 upādāna)와 취(趣gati)와 취(聚skandhaka, 犍度)가 있다.
이들은 서로 다른 의미다.
이들 표현 사이에서 서로 혼동을 일으키기 쉽다.
먼저 취(取 upādāna)는 집착을 갖고 대한다, 탐해서 구한다는 의미다. [ 무명-행-식.....- 육입-애-취-....] [욕취, 견취, 계금취]
번뇌를 뜻하기도 한다. [ 상을 취한다. ]
취(趣gati) 는 중생이 태어나는 세계를 의미한다. [ 5 취, 6 취, 하늘, 아수라, 인간의 선취, 축생, 아귀, 지옥 등의 악취]
중생이 번뇌를 일으킨다. 그에 바탕해 업을 행한다.
그 과보로 테어나는 곳을 취라고 한다.
한편 취(聚skandhaka, 犍度)는 주제별로 모은 것, 쌓아 모인것을 뜻한다. [오취온]
이처럼 의미가 다르다.
따라서 경전에서 사용된 이들 표현을 구분해서 대해야 한다.
그런데 취(取 upādāna)와 취(趣gati)가 서로 관련이 된다.
생사현실에서 망집을 일으켜 취(取 upādāna)하면
그로 인해 악취에 태어나게 되는 관계가 있다.
본래 생사 생멸을 얻을 수 없다.
그리고 본래 그런 생사를 겪는 자신도 얻을 수 없다.
그런데 현실에서 망집을 일으켜 일정부분을 자신으로 여기고 취하게 된다.
이것을 아상을 취한다고 한다.
그러면 이에 바탕해서 본래 얻을 수 없는 생사가 있다고 여기고 임하게 된다.
그런 바탕에서 생사를 겪는다.
그리고 그 망집에 쉼없이 업을 행한다.
그러면 그에 바탕해서 고통과 공포를 극심하게 겪는 상태에 묶이게 된다.
이것이 생사고통의 문제다.
그래서 이를 함께 잘 살펴야 한다.
현실에서 어떤 이가 눈을떠 감각현실을 얻는다.
이것을 앞에서 ○ 으로 표시했다.
이런 감각현실을 얻고 그 주체는 ○ 안에서 일정부분을 자신과 외부세계로 나눈다.
그런 내용이 거기에 있다고 망상분별을 일으킨다.
평소 자신이 눈을 감았다가 뜬다고 하자.
지금 실험을 해도 마찬가지다.
그 상황에서 어떤 내용을 보거나 얻는다.
이 가운데에서 자신으로 여기는 부분은 지극히 적은 부분일 수 있다.
여하튼 그런 부분을 평소 자신으로 여기고 생사현실에 임한다.
그 바탕에서 쉼없이 업을 행한다.
그러다가 사고가 나서 자신의 다리가 부러져 병원에 간다고 하자.
그 경우 병원에 가 누어 있다고 보는 부분도 그런 부분이다.
수행자가 생사현실에 임하여 수행하는 상황도 이와 마찬가지다.
이에 대해 『원각경 』 등에서는 눈병 걸린 이가 보게 되는 허공꽃의 비유를 든다.
눈병이 걸린 이가 눈병 걸린 사실을 스스로 깨달아 알게 되었다고 하자.
그래도 여전히 그런 허공꽃이 보이게 된다.
그러나 이전과 다르다.
그로 인해서 그런 허공꽃이 실답게 있다고 잘못 여기지 않는다.
그리고 그런 망집에 바탕해 업을 행하지도 않는다.
그래서 생사에 묶이지 않게 된다.
그래서 반야바라밀다에 바탕해 수행하고, 생사를 받는 것은 중생과 다르다.
중생은 망집을 일으켜 업을 행한다.
따라서 반야바라밀다에서 색수상행식을 행하지 않는다는
경전의 의미를 잘 파악해야 한다.
현실에서 수행자가 반야바라밀다에 바탕해 보시를 행한다고 하자.
이 경우 망집에 바탕해 베푸는 것과 차이가 있다.
외관상 어떤 이가 보시를 행하는 외관은 차이가 없다.
그런데 반야바라밀다를 행하는 입장에서는 이 상황을 달리 대한다.
그 외관 자체는 차이가 없다.
그래서 보시에 해당하는 행위를 행한다.
그런데 그는 그 상황에 보시하는 주체가 있다고 여기면서 하는 것이 아니다.
또 보시하는 물건이나 받는 이가 있다고 여기는 것도 아니다.
또 보시하는 행위가 있다고 여기는 것도 아니다.
그러면서 보시를 행한다.
이를 상에 머물지 않고 보시를 행한다고 표현한다.
그런데 일반적 입장에서는 의문을 일으키게 된다.
만일 그런 상을 취하지 않는다고 하자.
그리고 그런 상황에 그런 주체나 대상 행위를 얻을 수 없다고 하자.
그렇다면 어떻게 그 상황에서 그런 수행을 행할 수 있는가.
또 그런 수행은 누가 어떻게 행하는 것인가.
그 의문에 대해 이미 앞에 충분히 설명했다.
본래 감각현실 ○ 에 관념분별■ 을 얻을 수 없다.
실재#에도 관념분별■ 을 얻을 수 없다.
그런 가운데 현실에서 ○ 과 ■ 을 얻는다.
이런 사정을 수행자는 기본적으로 잘 이해하고 현실에 임하는 것이다.
그런데 그런 수행자가 그런 생사현실에 그처럼 임하는 사정과 취지가 있다.
우선 생사현실에서 중생들은 망집을 일으켜 임한다.
현실에서 ○ 과 ■ 을 얻는다.
그러면 중생은 ○ 이 곧 ■ 이라고 여긴다.
그리고 ○에 ■ 이 있다고 여긴다.
예를 들어 그 상황에 영희가 어디 있는가라고 묻는다고 하자.
그러면 손가락으로 그가 얻는 감각현실○ 의 한 부분을 가리킨다.
이것이 그 증상을 나타낸다.
그런 가운데 업을 행한다.
물론 그 주체는 자신이 좋음을 많이 얻기 위해 그런 업을 행한다.
그런데 그 결과 과보로 생사고통을 받아나간다.
이것이 생사현실 문제다.
그래서 이런 생사의 묶임에서 벗어나게 하기 위해
그 생사현실에 임하는 것이다.
수행자가 생사현실에 임하는 취지와 사정이 위와 같다.
그런 가운데 수행자는
일단 자신과 다른 중생이 다 함께 생사고통을 받지 않도록 예방을 해야 한다.
또 생사의 묶임에서 벗어나도록 근본적으로 망집을 제거해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우선 인과를 넓고 길고 깊게 보게 해야 한다.
좁게 자신만 고려한다고 하자.
또 당장의 짧은 기간만 고려한다고 하자.
그리고 얕게 자신이 초점을 맞추고 집착하는 면만 고려한다고 하자.
그런 경우 그는 생사과정에서 죽으면 그것으로 모든 것이 끝이라고 잘못 여긴다.
즉 자신이 죽은 다음 자신과 관계되는 일은 없다고 잘못 여긴다.
그런 가운데 좋음을 얻기 위해 업을 행한다고하자.
그러면 그가 원한 좋음과는 정반대로 생사고통을 극심하게 장구히 받는 상태에 처하게 된다.
그래서 생사현실에서 수행자는 중생의 이런 자세를 교정시켜주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생사과정에 대해 갖는 단멸관도 제거해주어야 한다.
이와 관련해서는 일반적으로 갖는 신견이
무엇이 잘못인가를 살펴야 한다.
그리고 현실에서 아상을 취하고 임하는 것이
무엇이 문제인가를 잘 살펴야 한다.
그리고 수행자가 반야바라밀다를 행하고
수행하는 것과 생사를 받는 것과
어떤 점에서 차이가 발생하는가를 잘 살펴야 한다.
여기에서 다음을 생각해보자.
어떤 이가 평소 스스로 자신으로 여기고 대하는 내용이 있다.
만일 그 상태에서 신견을 달리 취한다고 해보자.
그러면 이 상황이 바로 달라지는가.
이 경우 수행자라고 가정해보자.
그렇다고 달라지는가.
그렇지는 않다.
현실에서 신견을 취하는 사정을 살펴보자.
한 주체가 눈을 떠서 보게 되는 내용을 ○ 이라고 표시해보자.
그는 이 가운데 일부를 자신으로 여기고 대한다.
나머지는 외부 세계의 사물이라고 여기고 대한다.
여기서 자신으로 여기는 일부분을 ▽ 라고 표시해보자.
이 상황에서 그는 ▽ 부분을 자신 ■ 이라고 여긴다.
앞에서 본 망집을 일으킨 상황과 성격이 같다.
그런데 그가 매순간 자신으로 여기고 대하는 ▽ 의 내용을 잘 헤아려 보자.
갓난아이때 부터 소년 청년 장년 노년이 될 때까지
그가 자신으로 여기고 대하는 내용은 쉼없이 변한다.
정신적 내용이나 육체적 내용이나 사정이 같다.
거리에서 100 m 를 달려 가는 그 상황에서도
매 순간 그 모습이나 내용은 다르다.
한편 눈을 떠서 자신으로 여기고 대한 내용은
눈을 감으면 사라진다.
만일 눈을 떠서 자신으로 여긴 내용이 정말 자신이라고 하자.
그렇다면 눈을 감으면 자신이 없어졌다고 해야 한다.
그러나 사정이 그렇지 않다.
설령 눈을 감아 ▽모습을 보지 못해도 자신이 존재하지 않게 되는 것은 아니다.
그런데 망집을 일으킨 가운데
한 주체가 ○ 라는 감각현실을 얻는다.
그리고 그 각 부분에 일정한 관념분별■을 일으킨다고 하자.
그러면 그 상황에서 그 주체는 매 순간 ▽과 같은 부분을
자신으로 잘못 여기면서 임하게 된다.
이렇게 되게끔 하는 배경사정으로서 일정한 기제나 구조가 있다.
그래서 한 주체가 현실에서 이런 아상을 취하지 않는다고 해서
생사가 바뀌기 전까지는 근본적으로 외관상으로는 큰 차이가 없다.
예를 들어 어떤 이가 너무 바빠서
자신의 얼굴이나 손발에 신경쓰지 못하고
모임에 바삐 갔다고 하자.
이 경우 분별 영역에서 잘못된 아상을 취하는 일은 없다고 할 수 있다.
그렇다해도 얼굴이나 손과 발을 떼 놓고 모임에 가게 되지는 않는다.
예를 들어 오늘 너무 바빠서 얼굴을 신경을 쓰지 못했다.
그래서 얼굴을 못 붙이고 왔다는 경우는 없다.
한편 의식을 잃어서 아예 분별을 못하는 상황이라고 하자.
그렇다고 해서 얼굴과 손과 발을 떼 놓고 임하게 되지는 않는다.
그런데 현실에서 이런 신견을 잘못 갖는 배경사정이 있다.
이는 생을 출발하는 단계에서 일으킨 망집이 배경이 된다. [3능변]
그래서 분별기에서 일으키는 신견과
태생적으로 갖고 출발하는 신견[구생기신견]을 구분해야 한다.
이를 다음과 같이 살펴보자.
현실에서 한 주체가 눈을 떠 ○ 라는 감각현실을 얻는다고 하자.
이 경우 통상 자신으로 여기고 대하는 부분 ▽이 있다.
이 부분을 자신으로 여기고 대하는 것이 신견이다.
그리고 아상을 취하는 것이 된다.
이 때 어떤 이가 의식적으로 이 부분과 다른 부분을 자신으로 여긴다고 해보자.
예를 들어 거리의 벽돌을 대하고 자신으로 여긴다고 해보자.
그렇다고 해서 ▽ 부분에서 볼 수 있던 특성이 그 부분에서 얻어지지 않는다.
즉 자신이 움직이자고 할 때 벽돌이 따라 움직이는 것은 아니다.
현실에서 ▽ 부분을 자신으로 여기게 되는데는
생을 출발하는 과정에서 일으킨 제 7 식의 망견이 배경이 된다.
그래서 한 생을 다 마치기 전까지는 이 상태가 계속된다.
그런 가운데 생사현실에서 이런 망상분별을 행하는 것과 하지 않는 것에
큰 차이가 없다고 여기기 쉽다.
그러나 그렇지는 않다.
현실에서 한 주체가 감각현실 ○ 과 관념분별 ■ 을 얻는다고 하자.
그러면 그 상황에서 일정부분 ▽을 자신으로 잘못 여기게 되는 배경 사정이 있다고 했다.
즉 생을 출발하는 과정에서 일으킨 태생적 신견이 배경이 된다.
그 바탕에서는 감각현실 ○ 과 관념분별 ■ 을 얻는 상황에서
▽ 과 같은 부분을 자신으로 여기고 대하게끔 된다.
그런 전제에서는 그렇게 대하게끔 된다.
그런데 이렇게 생각해보자.
만일 제 7 식이 현재처럼 임하지 않고
메뚜기 몸을 자신으로 여겼다고 해보자.
그런 경우에도 ▽을 자신으로 여기고 대하지는 않을 것이다.
메뚜기 입장에서 보게 되는 감각현실과 일으키는 관념분별이 따로 있다.
그 입장에서는 인간과 다른 내용을 얻는다.
그리고 그런 다른 내용을 자신으로 여기고 임하게 된다.
물론 그렇게 되는 기제나 구조 자체는 성격이 같다.
그래서 생사과정에서 이 점이 문제가 된다.
현실에서 망집을 잘못 일으켜 업을 행한다고 하자.
그 경우 차이는 이 부분에서 발생한다.
그래서 수행자가 생사현실에 임해 받는 생사는 변역생사의 형태가 된다.
반대로 중생이 망집을 바탕으로 받는 생사과정은 분단생사의 형태가 된다.
그 가운데 가장 문제되는 상태가
욕계에서 3 악도의 세계로 묶이는 경우다.
생사과정에서 극심한 고통과 공포를 겪는 3 악도에서 임하게 되는 상태가 되면 문제다.
그런데 그렇게 되는 그 과정이 앞과 같다.
현실에서 감각현실 ○ 과 관념분별 ■ 을 얻는다.
그리고 ▽ 부분을 자신으로 여긴다.
이 기제에 바탕해서 망집을 일으켜 업을 행한다.
그런 가운데 그 기제와 구조에 바탕해서 생을 마치면
다음 생에 그런 바탕에서 자신으로 여기고 대하게 되는 ▽ 내용이 달라진다.
즉 축생상태에서는 다시 소나 양 이런 형태를 자신으로 여기고 임하게 된다.
지옥이나 아귀도 사정이 마찬가지다.
한 단면에서도 그 사정이 그렇지 않다.
그런데 그런 망집을 일으켜 업을 행하면
그런 상태에 묶이게 된다.
그래서 이것을 시정해야 한다.
그래서 현실에서 망집을 일으켜 임하는 것과 임하지 않는 것의 차이가 크다.
현실에서 신견을 제거하고 아상을 취하지 않고 임한다고 하자.
그러면 그 주체는 현실에서 무언가를 행하도 다른 취지 다른 바탕에서 행하게 된다.
예를 들어 보시를 행해도 상에 머물지 않고 보시를 행하는 것이 된다.
또 중생을 제도하는 것도 마찬가지다.
얻을 중생이 본래 없음을 이해하면서 중생제도 행위를 하는 것이 된다.
반야바라밀다 경전에서
색수상행식을 행하지 않는다는 표현이 나타내는 내용이 이와 같다.
...
“보살마하살은 물질을 행하지 않고
느낌ㆍ생각ㆍ지어감ㆍ분별을 행하지 않으며,
나아가 일체종지를 행하지 않느니라.
『마하반야바라밀경』 ♣0003-015♧ 53. 취지품(趣智品)
그러나 만일 어떤 수행자가 그 상황에
그런 내용이 있다고 여기면서 임한다고 하자.
또 그에 집착하면서 임한다고 하자.
그러면 그것이 곧 색수상행식을 취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에 머무는 것이다.
그리고 그런 상태에서 행하면 곧 색수상행식 등을 행하는 것이다.
그려면 문제가 발생하게 된다.
이 경우는 생사에 묶이게 된다.
그리고 3 악도에 처하게 된다.
이렇게 되는 과정을 잘 이해해야 한다.
생사현실이 실답지 않다.
그러나 그 안에서 망집을 일으켜 실답게 생사고통을 중생들이 겪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런 생사현실에서 중생을 제도하려면
또 그런 수행이 필요가기 때문이다.
생사현실에서 중생을 제도하려면 수행자부터 생사에 묶이지 않아야 한다.
그리고 수행자부터 복덕자량과 지혜자량을 구족해야 한다.
따라서 그에 필요한 수행을 생사현실에서 원만히 성취해야 한다.
따라서 수행에 임할 때 이런 점을 주의해야 한다.
이런 사정을 종합적으로 잘 이해해야 한다.
한편 생사현실에서 복덕을 얻는 수행은
단순히 생명을 가엾게 여겨 행하는 것이 가장 바람직하다.
그렇지 않으면 믿음을 바탕으로 행하는 것이 낫다.
인과를 잘못 관하면 잘못된 방편을 취하게 된다 .
따라서 이 경우 비록 그 사정의 이해를 돕기 위해서
자세한 내용을 제시하게 된다.
그런데 매생 과보를 받게 되는 과정까지 이해하게 된다고 하자.
그런데 그런 경우에는 이를 미리 고려하고
계산을 바탕으로 수행을 행하게 되기 쉽다.
그런 경우는 장삿꾼의 행위와 성격이 같아진다.
그래서 처음 상태와 같아지지는 않는다.
이런 경우는 얻을 바 없음을 이해하고
방편상 무소득을 방편으로 행해야 원만하게 수행이 성취된다.
이 사정을 쉽게 이해하면 다음과 같다.
흥보가 제비가 다쳐 불쌍하게 여겨 고쳐주었다고 하자.
그래서 복을 받았다.
놀보가 이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래서 놀보도 제비의 다리를 고쳐준다고 하자.
외관은 같아 보인다.
그런데 그렇게 하는 취지와 바탕이 다르다.
흥보는 제비가 불쌍해서 고쳐준 것이다.
그런데 놀보는 이익을 얻고자 한 것이다.
그 수단으로 제비의 다리를 고쳐준 것 뿐이다.
그래서 그 과보도 달라진다.
인과와 과보를 다 알게 되었다고 하자.
그런 상태는 수행도 계산을 바탕으로 임하기 쉽다.
이것을 행하면 이런 과보를 받게 된다.
그래서 이것을 행한다고 하자.
그런 경우는 앞에 든 사례와 마찬가지가 된다.
경전에서 상에 머물지 않고 보시를 행하면 무량한 복덕을 얻는다고 제시한다.
그런데 그렇지 않고 상에 머물러 계산을 바탕으로 그런 수행을 한다고 하자.
그런 경우에는 복덕을 받는다 해도
번뇌를 무량하게 낳는 복덕을 받게 된다. [유루복]
그래서 차이가 발생한다.
하물며 보시를 하지 않는 경우는 더 차이가 있다.
더 나아가 보시와는 정반대로 다른 이의 것을 빼앗거나 해친 경우는
더 정반대로 차이가 발생하게 된다.
따라서 반야경전에서 무소득을 방편으로 집착을 제거하고 수행을 해야 한다고 제시한다.
그렇지 않으면 수행을 원만히 성취하지 못하게 된다.
그 사정이 이와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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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9_1004_174352_can_ar38.jpg ○ [pt op tr] 예술작품 사진 공양, 나무불, 나무법, 나무승 Ernst-Ludwig-Kirchner-life-on-the-alpine-pasture-1 ○ 2020_0606_190116_can.jpg ○ [pt op tr] 꽃 공양, 나무불, 나무법, 나무승 ○ [pt op tr] 아름다운 사진 공양, 나무불, 나무법, 나무승 PLW-Rock-Islands ♥Syria ,Damascus ○ 아름다운 풍경사진 공양, 나무불, 나무법, 나무승 With the image 'Google Earth & Map data: Google, DigitalGlobe' ○상세정보=> https://buddhism007.tistory.com/75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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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문자선물 안내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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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업(口業)과 같음. 3업의 하나. 입으로 말을 하는 업. 이에 표업(表業)ㆍ무표업(無表業)이 있음. 표업은 표시할 수 있는 업이니 입에서 나오는 말. 무표업은 표시할 수 없는 것이란 뜻. 표업의 힘으로 나쁜 짓을 방지하는 것과 같은 세력을 내는 것.
답 후보
● 어업(語業)
업종(業種)
여(如)
여래신(如來身)
여시(如是)
여실불공(如實不空)
여의통(如意通)
ॐ मणि पद्मे हूँ
○ [pt op tr]
○ [pt op tr]
● 마하반야바라밀경_K0003_T0223 [문서정보]- 일일단상키워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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