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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진리와실천
불기2564-08-18_섭대승론석-K0595-004 본문
『섭대승론석』
K0595
T1598
제4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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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하 부분은 위 대장경 부분에 대해
참조자료를 붙여 자유롭게 연구하는 내용을 적는 공간입니다.
대장경 열람은 위 부분을 참조해주십시오.
『섭대승론석』
♣0595-004♧
제4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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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기록문화유산 아카이브
攝大乘論釋卷第四
K0595
섭대승론석 제4권
무성보살 지음
현장 한역
강명희 번역
김치온 개역
3. 소지상분(所知相分) ①
【論】이미 알아야 할 의지처[所知依]를 설하였다.
알아야 할 양상[所知相]은 또한 어떻게 보아야만 하는가?1)
이것에는 간략하게 세 가지 종류가 있으니,
첫째는 의타기상(依他起相)이며,
둘째는 변계소집상(遍計所執相)이며,
셋째는 원성실상(圓成實相)이다.
【釋】‘이미 알아야 할 의지처를 설하였다’란
다시 설하지 않겠다는 것이다.
‘이것’이란 곧 알아야 할 양상이다.
‘간략하게 세 가지 종류가 있으니’라는 것은
일체법에는
반드시 마땅히 알아야할 것과
마땅히 끊어야 할 것과
마땅히 증득해야 할 것의 차별이 있기 때문이다.
‘의타기상’이란 말하자면
업과 번뇌와 소취와 능취와 변계의 수념(隨念)’2)은 다른 것에 의지하여 일어나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양상은 어떤 표현에 의해서 알 수 있는가?
말하자면 의타기상이다.
‘변계소집상’이란 영원히 양상이 없는 것을 말한다.
영원히 양상이 없다는 것은 두루 계탁하여 집착한 것[遍計所執]이며,
소취와 능취의 보특가라(補特伽羅)와 법의
유성(有性)의 소상(所相)3)이기 때문이다.
어찌하여 존재하지 않는 것[非有]을 가히 소상(所相)이라고 하는가?
말하자면 이와 같이 분별하기 때문이다.
박가범께서는 다음과 같은 말씀,
즉 “내지 실제로 존재하는 것[實有]을 실제로 존재하는 것이라고 알지 않으며,
내지 존재하지 않는 것을 존재하지 않는 것이라고 알지 않는다.
이와 같이 실제로 있는 것을 실제로 있다고 알고,
실제로 있지 않은 것을 실제로 있지 않은 것이라고 안다”고 설하셨기 때문이다.
‘원성실상’이란 말하자면
저 변계소집의 소취와 능취의 자아와 법의
무성(無性)의 성품이다.
저것4)을 척도[量]로 삼아서 대상[境]의 성품을 알고
저것에 대해서 두루 알아 비로소 요별(了別)할 수 있으면
변계소집은 반드시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서로 어긋남[相違]이 있는 성품이고,
대상[境]이 되는 성품이 아니기 때문이다.
【論】여기에서 의타기상5)이란 무엇인가?
말하자면 아뢰야식을 종자로 하는
허망분별(虛妄分別)에 섭수되는 모든 식이다.
이것은 또한 무엇인가?
말하자면
신식(身識)6)ㆍ신자식(身者識)7)ㆍ수자식(受者識)8),
그 수용되는 식[所受識]9) 과 그 능히 수용하는 식[能受識]10)ㆍ세식(世識)11)ㆍ수식(數識)12)ㆍ처식(處識)13)ㆍ
언설식(言說識)14)ㆍ자타차별식(自他差別識)15)ㆍ선취악취(善趣惡趣)의 생사식(生死識)16)이다.
이 중에서 신식ㆍ신자식ㆍ수자식ㆍ그 수용되는 식ㆍ그 수용하는 식ㆍ세식ㆍ수식ㆍ처식ㆍ언설식은
명언훈습(名言熏習)의 종자에 의해서이다.
자타차별식은 아견훈습(我見熏習)의 종자에 의해서이다.
선취악취의 생사식은 유지훈습(有支熏習)의 종자에 의해서이다.
이 여러 가지 식으로 말미암아 일체 계[三界]와 취[六趣]의 잡염에 섭수된
의타기상의 허망분별이 모두 현현하게 된다.
이와 같이 모든 식은 다 허망분별에 의해 섭수하는 것이며
오직 식[唯識]만을 성품으로 삼는다.
이것은 있는 것이 아니며
진실하지 않은 대상[義]이 현현하는 의지처[所依]이다.
이와 같은 것을 의타기상이라고 이름한다.
여기에서 변계소집상17)은 무엇인가?
말하자면 대상이 없고 오직 식만이 있는 가운데
대상과 흡사하게 현현하는 것이다.
여기에서 원성실상18)이란 무엇인가?
말하자면 곧 저 의타기상에서 대상과 흡사한 양상이
영원히 존재하지 않는 데에 의거하는 성품이다.
【釋】‘말하자면 신식과 신자식과 수자식’이란 뒤에 설명된 것과 같다.
안(眼) 등 여섯 가지의 내계(內界)19)를 성품으로 삼는다.20)
그 상응하는 바대로
안 등의 5식의 소의인 의계(意界)를 신자식이라 이름하고,
제6의식의 소의인 의계를 수자식이라고 이름하는 것이다.
‘그 수용되는 식[所受識]’이란 뒤에서 설명되는 것과 같이,
색 등의 여섯 가지 외계(外界)이다.
‘그 능히 수용하는 식[能受識]’이란
뒤에서 설명되는 것과 같이 곧 6식계(識界)이다.
‘세식’이란 말하자면 3시(時)21)와 흡사하게 영상이 나타나는 것이다.
‘수식’이란 말하자면 하나[一] 등 산수와 흡사하게 영상이 나타나는 것이다.
‘처식’이란 말하자면 마을과 동산 등과 흡사하게 영상이 나타나는 것이다.22)
‘언설식’이란 말하자면 견문각지(見聞覺知)23)의 언설과 흡사하게 영상이 나타나는 것이다.
‘자타차별식’이란 말하자면 신 등의 식이 아(我)와 아소(我所)를 집착하여 상속하고,
아와 아소의 집착을 끊어지지 않게 하는 데에 있어서 타(他)와 타소(他所) 등과 차별이 있기 때문이다.
‘선취악취의 생사식’이란 천ㆍ인 및 나락가(捺落迦)ㆍ방생ㆍ아귀의 생사와 흡사하게 영상이 나타나는 것이다.
‘이 중에서 신식ㆍ 신자식 등 내지 언설식은 즉 명언훈습종자에 의한 것이며’라고 하는 것은,
말하자면 저 신식 등은 모두 명언훈습종자에 의해서
식이 변현하는 것으로써 다른 현상이 없기 때문이다.
또한 ‘자타차별식은 즉 아견훈습종자에 의한 것이며’란,
말하자면 염오의의 아견훈습을 원인으로 삼아 변현한 것이다.
또한 ‘선취악취의 생사식은 즉 유지훈습종자에 의한 것이다’라는 것은
유지훈습을 원인으로 삼아서 변현하는 것이다.
‘이와 같이 모든 식은 다 허망분별에 의해 섭수하는 것이며’라고 하는 것은,
앞에서 설한 바와 같이 신식 등의 여러 가지 식은
소취ㆍ능취의 허망분별에 의해 안립된 것을 그 성품으로 삼는다는 것이다.
‘오직 식만을 성품으로 삼는다’란,
삿된 분별에 의해서 2분(分)24)이 현현할지라도 실제로는 오직 식만이 있다는 것이다.
선 등의 법에서는 비록 삿된 집착이 없을지라도
연기력 때문에 2분이 현현하지만 이것 또한 오직 식일 뿐이다.
‘이것은 있는 것이 아니며 진실하지 않은 대상[義]이 현현하는 의지처[所依]이다’에서,
있는 것이 아니라고 이름하는 것은 소취의 색 등이며,
진실하지 않다고 이름하는 것은 능취의 식 등이다.
이 두 가지는 모두 변계소집이며,
대상[義]이라고 이름하는 것이다.
허망분별에 의해서 섭수되는 여러 가지 식은
바로 이 두 가지가 현현하는 인연이 되기 때문에 ‘의지처’라고 이름한다.
‘이와 같은 것을 의타기상이라고 이름한다’란
위에서 분별한 바와 같이 아뢰야식을 종자로 삼는 등을 모두 설하여
의타기상이라고 이름한다.
‘말하자면 대상이 없고 오직 식만이 있는 가운데
대상과 흡사하게 현현하는 것이다’란
실제로는 소취와 능취의 대상은 없고
오직 허망분별에 의해 섭수된 여러 가지 식만이 있는 가운데에서
두루 계탁하여 취한 것[遍計所取]은 대상과 흡사하게 현현한다는 것이다.
‘말하자면 곧 저 의타기상에서 대상과 흡사한 양상이 영원히 존재하지 않는 데에 의거하는 성품이다’란,
말하자면 연기의 심(心)과 심법(心法)에서 현현되는 영상가운데
횡계(橫計)25)의 양상이 영원히 드러나지 않는
진여실성(眞如實性)이다.
이것을 바로 원성실상이라고 이름하는 것이다.
또한 일체법은 인연으로부터 생기고 오직 식만을 성품으로 삼음을
모두 의타기상이라고 이름함을 마땅히 알아야만 한다.
전도하고 횡계하여 대상과 흡사하게 현현하는 것을
모두 변계소집상이라고 이름함을 마땅히 알아야 한다.
의타기의 상(上)에 변계소집이 영원히 드러나지 않게 되는 진여실성을
모두 원성실상이라고 이름함을 마땅히 알아야 한다.
비유하면 사슴이 갈증을 느껴서 자신의 상속력으로써
물과 흡사한 소취와 능취를 안립하여 삿되게 변계하는 성품과 같은 것을
의타기상이라고 이름함을 마땅히 알아야 한다.
횡계는 실제로 있어서 물과 같은 현상을 현현하는 것을
변계소집상이라고 이름함을 마땅히 알아야 한다.
즉 이와 같이 사슴이 갈증 나는 현상 중에 횡계의 물의 형상26)은
결국에는 그 성품이 없음을 원성실상이라고 이름함을 마땅히 알아야 한다.
또한 변계소집상은 곧 변계소집의 자성(自性)이며,
의타기상은 곧 의타기의 자성이며 또한 분별의 자성이라고도 이름한다.
원성실상은 원성실의 자성이며 또한 법성의 자성이라고도 이름한다.
이와 갈은 세 가지는
즉 마땅히 알아야 할 것과
마땅히 끊어야 할 것과
마땅히 증득해야 할 것이라는 세 가지 법으로써 잘 설명된다.
『대반야바라밀다경(大般若波羅蜜多經)』에서도 또한 설하기를
“부처님께서 자씨에게 말씀하시기를,
만약 이런 저런 행상(行相)의 현상에 대하여 두루 계탁하여
색(色)이라 하고,
수(受)라 하고,
상(想)이라 하고,
행(行)이라 하고,
식 (識)이라 하고 내지 일체 불법의 의지라고 한다.
명상(名想)으로 시설하고 언설로써 두루 계탁하여
모든 색의 자성 내지 일체 불법의 자성이라고 한다면,
이를 변계소집의 색 내지 변계소집의 일체 불법이라고 이름한다.
만약 다시 저 행상의 현상에 대해서
오직 분별 법성만이 있다고 안립하고,
분별을 연(緣)으로 삼아서 모든 희론을 일으키고
짐짓 명상을 세워서 언설을 시설하여
이것을 색이라 한다고 말하며 내지 일체 불법이라 한다고 말한다면,
이를 분별의 색 내지 분별의 일체 불법이라고 이름한다.
모든 여래께서 세상에 출현하시든 세상에 출현하시지 않든 간에
법성은 안립하는 것이고 법계는 안립하는 것이다.
저 변계소집의 색에 의하기 때문에
이 분별의 색은
어느 때나 항상
진여의 성품이며
무자성의 성품이며
법무아의 성품이며
실제의 성품이니,
이를 법성의 색이라고 이름한다.
나아가 저것의 변계소집의 일체 불법에 말미암기 때문에
이 분별의 일체 불법은 어느 때나 늘……이를 법성의 일체 불법이라고 이름한다”고 하였다.
자세한 것은 경에서 설한 것과 같다.
【論】이 중에 신식ㆍ신자식ㆍ수자식은
안계 등의 여섯 가지 내계(內界)임을 알아야 한다.
그 수용되는 식[所受識]은 즉 색계 등의 여섯 가지 외계(外界)임을 알아야 한다.
그 능히 수용하는 식[能受識]은 즉 안식계 등의 여섯 가지 식계(識界)임을 알아야 한다.
그 나머지 여러 가지 식들은 이와 같은 여러 가지 식들의 차별임을 알아야 한다.
【釋】‘이와 같은 여러 가지 식들’이란 말하자면
앞에서 설한 바와 같이
신식[身] 등을 처음으로 하고
능히 수용하는 식[能受識]을 마지막으로 하는 것을 말한다.
‘차별’이라 하는 것은 이와 같은 여러 식에는 차별의 성품이 있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이와 같은 유위(有爲)의 식 중에는
모두 다 과거의 행(行)과 현재의 행과 미래의 행이라는 차별의 성품이 있기 때문에,
이것에 의지하여 3세(世)27)의 영상이 현현하는 식을 건립하는 것이다.
이와 같은 여러 식에는 모두 하나 등28)의 차별의 성품이 있기 때문에,
이것에 의지하여 숫자의 영상이 현현하는 식을 건립하는 것이다.
수용되는 식[所受識]에서는 상ㆍ하 등의 차별의 성품이 있기 때문에,
이것에 의지하여 장소[處]의 영상이 현현하는 식을 건립하는 것이다.
나머지 부류는 마땅히 알아야 한다.
【論】또한 이와 같은 여러 가지 식들은
모두 다 오직 식만이 있을 뿐이고 모두 대상이 없기 때문이다.
이에 대해 어떤 비유로 하여 나타내 보이는가?
꿈 등을 비유로 하여 나타내 보임을 마땅히 알아야 한다.
말하자면 꿈속에서는 모두 그 대상이 없고 홀로 식만이 있는 것과 같다.
갖가지 색ㆍ성ㆍ향ㆍ미ㆍ촉과 집과
숲과 땅과 산 등이 대상과 흡사하게 영상이 나타날지라도
이 중에서는 모두 대상이 존재하지 않는다.
이 비유가 나타내는 것에 의해서
모든 시간과 장소에서 오직 식만이 있다고 마땅히 이에 따라 분명히 알아야 한다.
이와 같은 등의 말에 의해서
또한 마술의 속임,
사슴의 목마름,
그림자와 빛 등의 비유가 있음을 마땅히 알아야 한다.
만약 깨어났을 때에도 모든 시간과 장소에서 모두 꿈 등과 같이 오직 식만이 있다면,
꿈에서 깨어나 곧 꿈에서는 모두 다 식만이 있다고 느끼는 것과 같이,
깨어있을 때에는 어째서 이와 같이 전전하지 않는가?
진실한 지혜의 깨달음이 있을 때 또한 이와 같이 전전한다.
꿈속에 있을 때에는 이러한 깨달음이 전전하지 않지만
꿈에서 깨었을 때에는 이와 같은 깨달음이 곧 전전하는 것과 같이,
이와 같이 아직 진실한 지혜의 깨달음을 얻기 전에는 이와 같은 깨달음이 전전하지 않으나
진실한 지혜의 깨달음을 얻으면 이와 같은 깨달음은 곧바로 전전한다.
【釋】일체는 오직 식만이 있고 모든 대상은 있지 않다는 것을
꿈 등의 비유로써 현시하는 것은
공동으로 성립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꿈과 같다’ 등은 그 문장이 이해하기 쉽기 때문에
번거롭게 거듭 해석할 필요가 없다.
【論】그 진실한 지혜의 깨달음을 아직 얻지 못한 자가 있으면
유식에 대해서 어떻게 미루어 알 수 있겠는가?
경전의 가르침[敎]과 바른 이치[理]에 의거하여 마땅히 미루어 알 수 있다.
여기에서 경전의 가르침이란
『십지경(十地經)』에서 박가범께서
“이와 같은 삼계(三界)는 모두 오직 마음뿐[唯心]이다”라고 설한 것과 같다.
또한 박가범께서 『해심밀경(解深密經)』에서도 이와 같이 설하셨다.
말하자면 저 경전에서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다.
“자씨보살이 세존께 여쭈었다.
‘모든 삼마지29)에서 행하여지는[所行] 저 영상은 이 마음과 다르다고 말해야 합니까,
다르지 않다고 말해야 합니까?’
부처님께서 자씨보살에게 대답하셨다.
‘마땅히 다르지 않다고 말해야 한다.
왜냐하면 저 영상은 오직 식이기 때문이고
나는 식의 인식대상[所緣]은
오직 식이 나타난 것이라고 말하기 때문이다.’
‘세존이시여,
삼마지에서 행해지는 영상이
곧 이 마음과 다르지 않다면
어떻게 이 마음이 다시 이 마음을 취합니까?’
‘자씨여,
어떠한 작은 법[少法]이라도 능히 작은 법을 취할 수 있는 것은 없다.
그렇다면 즉 이 마음이 이와 같이 생길 때에는
즉 이와 같은 영상이 현현함이 있는 것이다.
질(質)을 연으로 삼아서 돌이켜 본질(本質)을 보는 것을 나는 지금 영상을 본다고 말하고,
질(質)을 떠나서 별도로 보이는 영상의 현현함이 있다고 말하는 것과 같다.
이 마음도 또한 그러해서
이와 같이 생길 때 모습[相]과 흡사하면서도
다르게 보이는 영상이 현현한다.’”
곧 이러한 가르침에 의거하여 바른 이치 또한 현현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선정의 마음[定心]에서 관하여 보는 바에 따른
모든 검푸름 등의 알아야 할 바의 영상에는
모든 특별한 검푸름 등의 현상이 없으며
단지 자신의 마음을 볼 뿐이다.
이러한 도리에 의해서 보살은
그 모든 식에 대해서
모두 오직 식만이 있고 경계는 있지 않다고 마땅히 미루어 알아야 한다.
또한 이와 같은 검푸른 모습 등에 대해서는 억지식(憶持識)이 아니다.
왜냐하면 인식대상의 경계가 현전에 머무는 것을 보기 때문이다.
듣고 생각하는 데에서 이루어지는 두 가지 억지식도
또한 과거를 인식대상으로 삼기 때문에,
현현하게 되는 영상은 오직 식만이 성립된다.
이와 같은 비량(比量)에 의해서
보살은 아직 진실한 지혜의 깨달음을 얻지 못하였을지라도
유식에 대해서 마땅히 미루어 알아야만 한다.
【釋】‘경전의 가르침과 바른 이치에 의거하여’란 지교량(至敎量)30)에 말미암고,
비량(比量)31)에 말미암아서
아직 유식(唯識)의 참다운 지혜[眞智]를 증득하지 않았을지라도
오직 식만이 있고 인식대상[境]은 없다는 것을 마땅히 미루어 알아야만 한다는 것이다.
‘『십지경』’이란 즉 저 경에서는 보살의 열 가지 지위[地]의 의미를 잘 설명하고 있다.
여기에서는 십지 행상(十地 行相)의 명(名)ㆍ구(句)ㆍ문신(文身)32)을 안립하고
식이 변환하는 것을 취집하여 체로 삼는다.
말하자면 저 성자,
금강장보살33)의 식에 의해 변현된 영상을 증상연으로 삼아서,
듣는 자의 몸속에 있는 식의 영상이
저 법문과 흡사하게 나타나는 것이다.
이와 같이 전전하여 지금에 전래된 것을 설하여
경전의 가르침[敎]이라고 이름하는 것이다.
‘오직 마음뿐[唯心]이다’란
심식은 즉 하나이며
오직 소리[唯聲]라고 하는 소취의 경(境)인 대상을 부정하는 것이다.
저 대상이 없기 때문에 능취 또한 없다.
심법을 부정하는 것은 아니다.
저 대상과 심은 서로 분리되지 않기 때문이다.
만약 심소유법(心所有法)34)이 없다면
심은 예전에 일찍이 전전한 적이 없다고 설하는 것과 같다.
만약 그렇다면 멸진정에는 무슨 까닭에 오직 심만[唯心]이 있는가?
이것은 저 종(宗)의 과실이다.
우리 대승종(大乘宗)에서는 만약 장소[處]에 마음이 있을 경우에는
반드시 선정[定] 또한 심상응법이 있으며,
만약 장소에 심상응법이 없을 경우에는 심도 또한 반드시 없어야 한다.
‘이와 같은 삼계는 모두 오직 마음뿐이다’라는 이 말은
삼계는 오직 식일 뿐이라는 것을 나타낸다.
‘삼계’라고 말하는 것은 욕(欲) 등의 애착의 결박[愛結]과 상응하여 삼계로 떨어져 존재하는 것을 말한다.
이와 같은 ‘오직 식[唯識]’이라는 말은
오직 여러 가지 심과 심법만이 있고
삼계의 횡계(橫計)의 인식대상이 있지 않음을 성립시키는 것이다.
이 말은 진여의 인식대상과 의타의 인식대상을 부정하는 것은 아니다.
말하자면 도제(道諦)에 섭수되는 근본과 후득의 두 가지 인식대상
그것은 사랑함에 집착된 것이 아니며,
다스려져야 할 것이 아니며,
미혹에 혼란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삼계에 포섭되는 것도 아니며,
또한 식을 떠난 것도 아니기 때문에 설명할 필요가 없다.
만약 그렇다면 마땅히 이와 같은 2계(二界)를 설해야만 한다.35)
왜냐하면 경량부에서는
무색계는 오직 심과 심법만이 있다고 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주장은 옳지 않다.
식의 소취(所取)의 대상은 모두 대상이 없기 때문에
단지 색만이 없는 것을 설하여 유식(唯識)이라고 이름하는 것이 아니다.
무엇이 또한 없는가 하면 나머지 허공 등 식의 소취의 대상이다.
경량부의 논사들은 무색계의 여러 가지 심과 십법은
무색의 모습[無色相]이어서 체(體)가 없고 실(實)이 없다고 인정하지만,
소취의 경계인 대상이 현현하는 소의를
아마도 저들은 집착하여 심과 심법이 아니라고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삼계는 오직 식만이 있다고 설하는 것이다.
『해심밀경』에서 밝히는 뜻은 10지(地)에서 해석하는 것과 같다.
‘경(經)’이란 교법을 말한다.
‘삼마지’란 능히 마음으로 하여금
하나의 경계에 머무르게끔 하는 성품으로서 심법을 체로 삼는다.
이 반연하는 경계[所緣境]을 설하여 ‘행하여지는[所行]’이라고 이름한다.
본경(本境)을 ‘질(質)’이라고 이름하고,
저것과 흡사하게 현현하는 것을 ‘영상’이라고 설한다.
‘나는 식의 인식대상은 오직 식이 나타난 것이라고 말하기 때문이다’란
나는 바깥에 있는 식의 반연하는 경계는
오직 안에 있는 식이 현현하는 것이라고 설명한다는 것이다.
즉 이 반연하는 경계는 식을 자성으로 삼는다는 뜻이다.
이와 같은 뜻을 설명하여 식의 반연하는 경계는
오직 식 위에 나타나는 영상으로서 특별한 체가 있는 것이 아니라고 말한다.
‘어떻게 이 마음이 다시 이 마음을 취합니까?’란
즉 자체에서 작용하는 바가 서로 다름을 나타낸 것이다.
‘자씨여,
어떠한 작은 법[少法]이라도 능히 작은 법을 취할 수 있는 것은 없다’란 이것은
앞의 힐난을 풀이해 준 것이다.
왜냐하면 작용이 없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일체의 법은 작용도 작자도 모두 성립되지 않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생길 때’라고 하는 것은
연기의 제법에는 위력이 크기 때문에
즉 하나의 체 위에 두 개의 영상이 생겨도
다시 서로 향하여 상즉하지도 않고 분리되지도 않으며,
모든 심과 심법은 연기력에 의해서
그 성품이 법 그 자체[法爾]이기 때문에 이와 같이 생긴다는 것이다.
‘질(質)을 연으로 삼아서 돌이켜 본질(本質)을 보는 것을……같다’ 등이란,
비유하면 자신의 얼굴 등의 질(質)에 의지하여
거울 등의 속에서 돌이켜 본질(本質)을 보는 것과 같다는 것이다.
미혹의 혼란에 의하기 때문에 ‘나는 영상을 본다’고 말한다.
거울 등의 연(緣)의 위력이 크기 때문에,
비록 다른 영상이 아니지만
다른 영상이 있어서 현현하는 것과 흡사하다.
이 마음 또한 이와 같다.
‘이와 같이 생길 때’ 등이란,
말하자면 심과 심법의 갖가지 억념과 분별 등의 연의 공능이 크기 때문에,
이와 같이 생길 때 비록 다른 삼마지 등에서 행해지는 영상은 있지 않지만
다른 영상이 현현하여 있는 것과 흡사한 것이다.
즉 ‘곧 이러한 가르침에 의거하여 바른 이치 또한 현현하는 것이다’란
말하자면 이 가르침에 또한 겸하여 비량의 도리를 나타낸다는 것이다.
무슨 까닭인가?
‘선정의 마음[定心]에서’ 등이라고 하는 것은
앞에서 서술한 가르침에 특별한 이치가 있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검푸른 모습 등은 마음과 분리되지 않으니
원하고 바라는 것에 따라서 현현하기 때문이다.
비유하면 꿈속에서 검푸름 등을 보는 것과 같다.
‘또한 이와 같은 검푸른 모습 등에 대해서는 억지식(憶持識)이 아니다.’ 등이란,
저 다른 계탁을 할까봐 이와 같은 설명을 하는 것이다.
말하자면 어떤 사람이 다음과 같은 계탁을 한다.
“즉 저 사람은 먼저 희미한 길 등에서 해골 등을 보고
지금 오히려 억지(憶持)에 의해서 삼마지에서 행해지는 영상으로 삼는다.”
이와 같은 계탁을 막기 위해서 ‘또한 이와 같은 검푸름 등에 대해서는 억지식이 아니다.
왜냐하면 인식대상의 경계가 현전에 머무는 것을 보기 때문이다’라고 하는 것이다.
만약 이 인식대상이 곧 옛날에 억지한 것이라면
옛날에 본 그대로 방향과 장소가 결정된다.
옛날에 받아들인 대로 마땅히 그대로 기억해야 한다.
그러나 이와 같지 않다.
닦아서 이루는 지혜[修所成智]는
진현량(眞現量)36)이어서 보이는 경계는 분명하게 현전한다.
억지식에서는 이와 같은 현상이 존재하지 않는다.
만약 이와 같다면 들어서 이루는 것[聞所成]과
사유하여 이루는 것[思所成]의 두 가지 지혜와 상응하는 식은
본래의 현상을 억지한다.
저 두 가지 소행(所行)은 마땅히 식과 분리되어야 한다는 것은 곧 옳지 않다.
왜냐하면 저 들음[聞] 등의 두 가지 억지식으로 말미암아
과거를 연하기 때문이다.
과거는 없기 때문에 인식대상의 영상은 아울러 오직 식일 뿐이다.
비유하면 옛날 자신의 젊었을 때를 기억하는 것과 같다.
그러므로 이 식이 현재 억지하는 것은 또한 오직 식이 있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생각의 대상[所念]은 공(空)이기 때문이다.
관행자(觀行者)가 생각한 것[所想]에서
부정한 해골과 여인의 영상이 현전하는 것과 같다.
‘이와 같은 비량에 의해서’ 등이란 말의 뜻이 분명하므로 거듭 해석할 필요가 없다.]
【論】이와 같이 여러 가지 식들은 꿈 등의 비유와 같다고 설하였다.
즉 이 중에서 안식 등의 식은 유식으로만 성립할 수 있다.
안식 등의 여러 식에서는 이미 물질[色]이 있는데
또한 오직 식만이 있음을 어떻게 보아야 하는가?
이것은 또한 앞에서와 같이 경전의 가르침과 바른 이치에 의해서 알 수 있다.
【釋】‘경전의 가르침’이란 『십지경』과 『해심밀경』을 말한다.
‘바른 이치’란 곧 경전에서 설한바 도리이다.
말하자면 삼마지에서 행해지는 영상과 그리고 꿈 등의 비유는
모두 앞에서 설한 것과 같다.
【論】만약 이와 같은 여러 가지 식 또한 그 자체가 식이라면,
무슨 까닭에 물질의 성품과 흡사하게 현현하는가?
한 부류로서 굳게 머물고 상속하여 전전하고
전도 등의 여러 가지 잡염법의 의지처가 되기 때문이다.
만약 그렇지 않다면
대상이 아닌 것에서 대상이라고 일으키는 전도는 마땅히 존재하지 않아야 한다.
이것이 만약 없다면
번뇌장과 소지장의 두 가지 잡염도 마땅히 존재하지 않아야만 한다.
이것이 만약 없다면
모든 청정법도 또한 존재하지 않아야만 한다.
그러므로 모든 식은 마땅히 이와 같이 전전해야 하는 것이다.
여기에 대한 게송이 있다.
산란한 양상[亂相]과 산란한 자체[亂體]를
마땅히 색식(色識)이라고 인정해야 하고
비색식(非色識)이라고 인정해야 한다네.
만약 없다면 나머지 것도 또한 없다네.
【釋】‘만약 이와 같은 여러 가지 식 또한 그 자체가 식이라면’ 등이란
색식이 굳게 머물고 상속하고 전전하는 원인[因]으로서의 하나의 부류인가를 묻는 것이다.
‘한 부류’란 상사(相似)의 뜻이다.
앞과 뒤가 하나의 부류로서 변화하고 달라지는 것이 없으며,
또한 중간에 끊어짐이 없기 때문에 ‘굳게 머물고’라고 하는 것이다.
즉 이와 같은 것을 설하여 ‘상속하여 전전하는’이라고 하는 것이다.
‘전도 등의 여러 가지 잡염법의 의지처가 되기 때문이다’에서 ‘등’이라 하는 것은
즉 번뇌와 업과 생의 여러 가지 잡염법을 똑같이 취하는 것이다.
안 등의 여러 가지 식은 전도 등의 여러 가지 잡염법의 의지처가 된다.
‘의지처’란 원인[因]의 뜻이다.
‘때문이다’란 반드시 필요하다는 뜻이다.
저 질문의 뜻을 관하여 다음과 같은 대답을 하는 것이다.
말하자면 대상이 아닌 것에 현현하여 안 등의 여러 가지 식이 굳게 머물러서
상속하고 전전하는 하나의 부류와 흡사하게 되는 것이다.
이것에 말미암아 저 전도 등의 법을 일으키는 것이다.
‘만약 그렇지 않다면’이란,
만약 이와 같이 전전하지 않는다면 ‘대상이 아닌 것에 대해서 대상을 일으키는 전도는 마땅히 존재하지 않아야 한다.
만약 전도가 없다면
번뇌장과 소지장의 두 가지 장애의 잡염도 마땅히 존재하지 않아야만 한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인연이 없기 때문이다.
만약 잡염이 없다면 청정 또한 없다.
반드시 잡염을 쉬게 해야 청정이 현현하기 때문이다.
‘
그러므로 모든 식은 마땅히 이와 같이 전전해야 하는 것이다’란
안 등의 여러 가지 식은 마땅히 이와 같이 전전해야 한다는 것이다.
원인의 힘[力]이 없는 모든 법이 생겨날 수 있기 위해서는 힘을 필요로 하는 것이 아닌가.
‘만약 그렇지 않다면’이라 하는 것은 질문에 따라서 대답을 주는 말이기 때문이다.
저것은 필요한 것을 묻는 것이지 인종(因種)을 묻는 것이 아니다.
저것은 특별한 여러 가지 색이 있다고 집착하지 않기 때문에
단지 무엇을 필요로 하는가를 물을 뿐이다.
아뢰야식은 모든 색을 변하여 짓는 것이며,
오직 식만을 짓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이와 같은 대답을 하는 것이다.
‘산란한 양상[亂相]’이란 색과 흡사하게 변현한 식이라고 인정해야 하고,
‘산란한 자체[亂體]’란 색이 아닌 것[非色]이 변현한 식이라고 인정해야 한다.
결론에 수순하는 것은 게송의 법이기 때문에
문장을 뛰어넘어도 그 뜻은 서로 연결된다.
만약 색과 흡사하게 변현되는 원인[因]의 식(識)이 없다면
색이 아닌[非色] 과식(果識)은 마땅히 존재하지 않아야만 한다.
만약 경(境)이 없다면 경을 있게끔 하는 것 또한 없기 때문이다.
【論】무슨 까닭에37) 신식[身]ㆍ신자식[身者]ㆍ수자식(受者識)ㆍ수용되는 식[所受識]ㆍ능히 수용하는 식[能受識]은
모두 몸속에서 함께 있어서[俱有] 화합하며 전전하는가?
능히 원만히 생겨나는 수용이 드러나게 되기 때문이다.
【釋】‘무슨 까닭에 신식[身]’ 등이란 앞에서와 같이 질문하는 것이다.
‘능히 원만히’ 등이란 앞에서와 같이 대답하는 것이다.
이 5식(識)은 모든 몸속에서 구족하지 않음이 없기 때문이다.
만약 수용이 드러나게 되어 한 가지[支]라도 빠트리면 원만하지 않게 된다.
【論】무슨 까닭에 설명한 것과 같은 세식[世] 등의 여러 가지 식은 차별적으로 전전하는가?
아득한 옛적부터[無始時來] 생사는 유전하여 끊임없고,
모든 유정계는 그 수가 한량없으며,
모든 자연계[器世間]의 그 수가 한량없으며,
모든 지어지는 일[所作事]이 전전하여 언설하는 그 수도 한량없으며,
각기 다르게 거두어들여 수용하는 차별의 그 수 또한 한량없으며,
사랑스럽고[愛]ㆍ사랑스럽지 않은[非愛] 모든 업의 과보인 이숙이 수용하는 차별의 그 수 또한 한량없으며,
받게 되는 생사의 갖가지 차별의 그 수 또한 한량없기 때문이다.
【釋】‘무슨 까닭에 설명한 것과 같은 세식 등의 여러 가지 식’ 등이란 앞에서와 같이 질문하는 것이다.
‘등’이 란 수식[數]ㆍ처식[處]ㆍ언설식[言說]ㆍ자타차별식[自他差別]ㆍ
선취(善趣)와 악취(惡趣)의 사생식(死生識)의 여섯 가지 변현식(變現識)을 똑같이 취하는 것이다.
‘아득한 옛적부터……받게 되는 생사의 차별의 그 수 또한 한량없기 때문이다’란,
수의 차례와 같이 세식[世] 등의 식이
반드시 설명해야 하는 결과임을 나타내는 것이다.
【論】또한 어찌하여 이와 같은 여러 가지 식을 안립하여 유식의 성품[唯識性]임을 세울 수 있는가?
간략하게 세 가지 특징[三相]에 의거한다.
첫째는 유식에 의거하니 대상[義]은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둘째는 두 가지의 성품에 의거하니 상이 있는 것[有相識]과 견이 있는[有見識] 두 가지38) 식이 다르기 때문이다.
셋째는 갖가지 것에 의거하니 갖가지 행상이 일어나기 때문이다.
무슨 까닭인가?
이와 같은 모든 식은 대상이 없기 때문에 유식을 세울 수 있으며,
상분[相]과 견분[見]이 있기 때문에 두 가지를 세울 수 있다.
만약 안 등의 식일 경우에는 색 등의 식으로써 상분을 삼고,
안 등의 식으로써 견분을 삼으며 내지 신식의 식으로써 견분을 삼는다.
만약 의식일 경우에는 모든 안식을 최초로 하고
법식(法識)을 최후로 하는 모든 식으로써 상분을 삼고,
의식의 식으로써 견분을 삼는다.
이와 같이 의식에 분별이 있기 때문이며
모든 식과 흡사하게 일어나기 때문이다.
이에 대한 게송이 있다.
오직 식[唯識]과 두 가지와 갖가지에
관행자의 의지[意]는 능히 들어간다네.
오직 마음[唯心]에만 깨달아 들어가기 때문에
저것 또한 능히 항복시켜 여의네.
【釋】‘또한 어찌하여 이와 같은 여러 가지 식을 안립하여’ 등이란,
말하자면 앞의 이치에 의거하여 다시 다른 이치로써 갖가지로 질책하는 것이다.
‘유식에 의거하니’란 대상이 없다는 뜻이다.
그러므로 다음에 설하여 ‘대상[義]은 존재하지 않기 때문’라고 말하는 것이다.
설한 ‘유[唯]’라는 말은 오로지 대상을 부정하는 것이다.
대상이 없다는 도리에 대해서는 일부를 이미 설하였고
그 나머지 일부를 앞으로 설하겠다.
‘두 가지의 성품에 의거하니’란 상분[相]과 견분[見]에 의한다는 것이다.
하나의 식에서 상분이 있고 견분이 있으며,
두 가지 부분은 함께 전변하니
상과 견의 2분(分)은 상즉하지도 않고 서로 떨어지지도 않는다.
안식으로부터 시작하여 내지 신식에 이르기까지 부류에 따라서
각각 달리 변하여 색 등의 갖가지 상(相)의 식이 되는 것을 설하여 상분(相分)이라 이름하고,
안 등의 모든 식이 경계를 요별하여 능히 대상의 끝[義邊]을 보는 것을 설하여 견분(見分)이라고 이름한다.
또한 소취분(所取分)을 상분[相]이라고 이름하고,
능취분(能取分)을 견분[見]이라고 이름하며,
이를 두 가지 성품이라고 이름한다.
‘갖가지 것에 의거하니’라고 하는 것은 갖가지 행상으로 일어나기 때문이다.
하나의 식 중에서 1분(分)은 소취상(所取相)과 흡사하게 변이하고 1분은 능취견(能取見)과 흡사하게 변이하며,
2분(分)은 각기 갖가지 차별적인 행상이 있으나 같은 시간에 일어난다.
만약 어떤 사람이 하나의 식이 같은 시간에 갖가지로 상응하게 된다고 인정하지 않으면 같은 시간에 갖가지 대상[境]을 느낄 수 없다.
‘만약 의식일 경우에는 모든 안식을 최초로 하고’ 등이란 말하자면 저 의식은 능히 같은 시간에 모든 대상을 취하는 증상의 세력이 있다는 것이다.
안식을 처음으로 하고 법식(法識)을 마지막으로 하여 안립하는 바의 상은 그것의 상분이다.
즉 이 의식이 대상의 끝[義邊]을 요별하는 것을 설하여 견분이라고 이름한다.
왜냐하면 이 의식은 두루 분별하기 때문이고 모든 식과 흡사하게 일어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의식을 설하여 상분[相]이라 이름하고,
견분[見]이라 이름하며,
또한 갖가지라고 이름하는 것이다.
가타(伽陀)39)에서 유가사들은 능히 유식[唯識]과 두 가지 성품[二性]과 갖가지에 들어가 바깥의 경계를 없앤다.
마침내 능히 취하는 마음을 항복시켜 여의기 때문이다.
소연이 없기 때문에 능연(能緣)의 식도 또한 있을 수 없다.
요별이 없기 때문에 요별하는 자도 없다.
요별이 없어서 요별하는 자가 존재하지 않으면,
경계의 상이 없어서 분별의 현상도 없다.
또한 경계가 있어 능히 분별하는 마음[有境能分別心]이라고도 한다.
만약 출세간심일 경우에는 분별의 능취ㆍ소취를 여읠지라도 안으로 증득한 성스러운 지혜[聖智]의 소의가 있을 경우에는 능연과 소연은 평등한 성품으로 존재한다.
【論】또한 여기에 대해 어떤 한 부류의 논사가 설하기를 “하나의 의식뿐이며 저것들에 의지하고 전전하여 저것들의 이름을 얻으니,
의사업(意思業)을 신업(身業)ㆍ어업(語業)이라고 이름하는 것과 같다”고 한다.
【釋】‘또한 여기에 대해 어떤 한 부류의 논사가 설하기를,
≺하나의 의식뿐이며……≻’ 등이란 여러 논사의 소견의 차별을 나타낸 것이다.
어떤 한 부류의 보리살타(菩提薩埵)는 “오직 하나의 의식성만을 있게끔 하기 위해서 저것들 안(眼) 등을 의지하여 생겨날 때 저것들의 이름을 얻으니,
이른바 안식 내지 의식이다.
이 중에는 특별한 나머지 식의 종류는 없다.
이것은 어떻게 의사업과 같은가?
하나의 의사(意思)가 몸이라는 처소에 있어서 몸을 발동시키면 곧 신업(身業)이라고 이름하고,
말의 처소에 있어서 말을 발동시키면 어업(語業)이라고 이름하며,
의(意)와 상응하면 의업(意業)이라고 이름하는 것과 같이 의식도 또한 이와 같다”고 말한다.
【論】또한 모든 의지처[所依]에서 전전할 때 갖가지 모습에 흡사하게 두 가지 영상이 전전하니,
말하자면 오직 대상의 영상과 분별의 영상이다.
또한 모든 곳에서도 접촉된 영상과 흡사하게 전전한다.
유색계(有色界)에서 즉 이 의식은 몸에 의지하기 때문이다.
마치 나머지 감각기관[色根]이 몸을 의지하는 것과 같다.
【釋】어떤 사람이 말하기를 “만약 그렇다면 이와 같은 의식은 마땅히 분별이 없어야만 한다.
왜냐하면 의지처[所依]가 둔하기 때문이니 마치 안 등의 식과 같다.
무릇 능히 의지하는 것[能依]는 모두 소의를 따르며 염오의가 잡염의 의지가 되는 것과 같이 의식이 모두 전전하는 것 역시 잡염이 된다”고 한다.
이러한 주장을 해결하기 위해서 ‘모든 의지처[所依]에서 전전할 때’ 등이라고 설한다.
‘모든 의지처’라고 하는 것은 안 등을 말한다.
‘의지처가 전전할 때’란 일어날 때를 말하는 것이다.
‘갖가지 모습에 흡사하게 두 가지 영상이 전전하니’란 말하자면 갖가지 소취와 능취의 두 가지 영상과 흡사하게 전전한다는 것이다.
이것을 해석하기 위해서 다음에 다시 ‘말하자면 오직 대상의……’ 등이라고 설명하는 것이다.
오직 하나의 의식이지만 1분(分)은 대상과 흡사한 영상으로 현현하고,
제2분(第二分)에서는 대상에 대해서 분별함으로써 생긴다.
그러므로 분별이 없다는 과실이 존재하지 않는다.
‘또한 모든 곳에서도 접촉된 영상과 흡사하게 전전한다’란,
말하자면 선정[定] 가운데 가볍고 무거운 등의 감촉을 받아들여 분별해서 산란하지 않게 한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저 선정을 따르기 때문이다.
‘유색계에서’란 무색계에서는 그렇지 않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즉 이와 같은 의식은 몸을 의지하기 때문이다.
‘마치 나머지 감각기관[色根]이 몸을 의지하는 것과 같다’는 것은,
마치 나머지 안 등의 모든 감각기관들[有色諸根]과 같이 몸을 의지하기 때문에,
곧 이 몸에 대해서 능히 손해와 이익을 짓게 된다는 것이다.
의식 또한 이와 같다.
유색계에서는 몸을 의지하기 때문에 이 몸에 대해서 받아들이고 분별하여 능히 손해와 이익을 짓는다.
【論】이것에 대한 게송이 있다.
멀리 작용[行]하거나 홀로 작용하거나
몸 없이 동굴 속에서 잠자네.
조절하기 어려운 마음,
즉 이것을 조절하는 것을
나는 진정한 범지(梵志)40)라고 한다네.
【釋】하나의 의식을 설명하는 데에 보리살타는 가르침을 인용하여 증언하는 것이다.
‘멀리 작용[行]하거나’ 등이란 모든 인식의 대상[境]에 두루 놀기 때문에 ‘멀리 작용한다’라고 하는 것이다.
이러한 뜻을 증명하기 위해서 다시 ‘홀로 작용한다’고 설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두 번째는 없기 때문이다.
‘몸 없이’라고 하는 말은 형질(形質)이 없기 때문이다.
‘동굴 속에서 잠자네’라고 하는 것은 안에 머물러 있기 때문이다.
‘이것을 조절한다’고 하는 것은 이와 같은 마음41)에 대해서 자재(自在)하기 때문이다.
‘조절하기 어려운 마음’이란 성품이 사납거나 슬퍼하기 때문이다.
【論】또한 경에서 말씀한 것과 같이 이와 같은 5근(根)이 행해지는 경계를 의식[意]은 각각 능히 수용하며 의식은 저것의 의지처가 된다.
【釋】다시 두 번째 성교(聖敎)를 인용하여 증명을 하는 것이다.
‘이와 같은 5근이 행해지는 경계를 의식은 각각 능히 수용하며’란 이 5근이 행해지는 경계를 오직 의식이 하나하나 각각 달리 능히 영수(領受)한다는 뜻이다.
‘의식은 저것의 의지처가 된다’라고 하는 것은 이것의 증상력으로 말미암아 저것이 생겨나기 때문이다.
【論】또한 말씀한 바와 같이 12처(處) 중에서 6식신(識身)을 설하여 모두 의근의 포섭처[意處]라고 이름한다.
【釋】다시 세 번째 성교를 인용하여 증명을 하는 것이다.
‘6식신을 설하여 모두 의근의 포섭처라고 이름한다’라고 하는 것은 말하자면 의식의 현상을 잘 설명하고 있기 때문이다.
【論】어떤 경우에 아뢰야식의 식을 안립하여 의식(義識)이라고 하지만,
이 경우에서도 나머지 모든 식은 그것의 상분의 식[相識]42)임을 알아야 한다.
또한 의식의 식과 의지처는 그것의 견분의 식[見識]43)이다.
저 상분의 식은 이 견분의 식이 생겨나는 때에 반연의 상[緣相]이 되기 때문에 대상과 흡사하게 현현할 때,
능히 견분의 식이 생겨나는 의지처가 된다.
이와 같은 것을 이름하여 모든 식을 안립하고 유식의 성품[唯識性]이 성립된다고 하는 것이다.
【釋】‘어떤 경우에 아뢰야식의 식을 안립하여 의식이라고 하지만’에서 의(義)란 원인[因]의 뜻이다.
곧 아뢰야식을 안립하여 원인의 식[因識]으로 한다는 것이다.
‘나머지 모든 식’이란 말하자면 신(身) 등의 식이다.
‘그것의 상분의 식’이란 소연의 상을 말한다.
왜냐하면 행해지는 대상[所行]이기 때문이다.
‘또한 의식의 식과 의지처’란 말하자면
여섯 번째 의식과 의지처로서 끊임없는 과거의(過去意)와 염오의(染汚意)를 말한다.
이 두 가지는 능히 잡염을 일으키는 의지처의 성품을 짓기 때문이다.
‘그것의 견분의 식이다’라고 하는 것은 능히 분별하기 때문이다.
‘저 상분의 식은 이 견분의 식이 생겨나는 데에 반연의 상이 되기 때문이다’란
말하자면 아뢰야식이 변한바 다른 모습[異相]은
두 가지로써 견분의 식이 반연의 상을 생기게 하기 때문이다.
‘
대상과 흡사하게 현현할 때’란 말하자면
의식의 견분의 식[意見識]이 대상과 흡사하게 현현하는 때를 말한다.
‘능히 견분의 식이 생겨나는 의지처가 된다’란 말하자면
안 등의 식은 능히 견분의 식이 생겨나는 의지처가 된다는 것이다.
【論】모든 대상[義]은 현전에 분명하게 현현하는 데도 있지 않다고 하는 것은 어떻게 알 수 있는가?
세존께서 다음과 같이 말씀하신 것과 같다.
“모든 보살이 네 가지 법[四法]을 성취하면,
능히 모든 것은 유식뿐이며 모든 대상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따라서 깨달아 들어갈 수 있다.”44)
첫째는 서로 어긋나는 식의 모습에 대한 지혜[相違識相智]45)를 성취한다.
아귀ㆍ방생(傍生) 그리고 모든 천인들이 똑같은 하나의 현상에 대해서 저 인식하는 것에 차별이 있는 것을 보기 때문이다.
둘째로 인식대상이 없는 식을 현전에 가히 얻는다는 것에 대한 지혜[無所緣識現可得智]46)를 성취한다.
마치 과거와 미래와 꿈의 영상 속에서 얻는 바가 있기 때문이다.
셋째는 마땅히 노력[功用]을 떠났어도 전도되지 않아야 한다는 것에 대한 지혜[應離功用無顚倒智]47)를 성취한다.
마치 대상이 있는 것 가운데 능히 대상을 연하는 식이 있는 것과 같이,
마땅히 전도됨이 없어서 노력에 의하지 않고도 진실을 알기 때문이다.
넷째는 세 가지의 뛰어난 지혜에 따라서 전변함이 묘하다는 것에 대한 지혜[三種勝智隨轉妙智]48)를 성취한다.
무엇이 세 가지인가?
첫째는 마음의 자재[心自在]를 얻는 것이니,
모든 보살로서 정려를 얻은 자는 뛰어난 이해의 힘[勝解力]에 따라서 모든 대상이 현현한다.49) 둘째는 사마타를 얻어 법의 관찰[法觀]을 닦는 자는 잠시 작의(作意)할 때 모든 대상이 현현한다.50) 셋째는 이미 무분별지를 얻은 자는 무분별지가 현전할 때 모든 대상은 다 현현하지 않는다.51)
이와 같이 설명한 것처럼 세 가지 뛰어난 지혜에 따라서 전변하는 묘한 지혜와 그리고 앞에서 설한 바와 같은 세 가지 인연에 의해서 모든 대상은 대상이 없다는 도리가 성립된다.
【釋】다시 경(境)이라는 대상이 존재하지 않음을 성립시키기 위해서
그 밖의 가르침과 그 밖의 도리를 인용하여 ‘모든 보살이 네 가지 법을 성취하면’ 등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서로 어긋나는 식의 모습에 대한 지혜[相違識相智]’란
다시 서로 위반하기 때문에 상위라고 이름한다.
상위하는 자의 식을 상위식이라고 이름한다.
이것을 생기게 하는 식의 원인을 설하여 상(相)이라고 이름하는 것이다.
이 상은 오직 내심(內心)이 변한 것이지
바깥의 대상으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대상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요지하는 것을 설하여
‘지(智)’라고 이름하는 것이다.
‘아귀ㆍ방생[傍生] 그리고 모든 천인들이 똑같은’ 등이란
아귀는 자기 업의 변화한 증상력에 말미암아 보는 대상인 강과 하천을 모두 고름과 피로 꽉 차 있는 곳으로 보고,
물고기 등의 방생(傍生)은 곧 집이나 놀며 걸어 다니는 도로로 보고,
천(天)은 갖가지 보배로 장식된 땅으로 보고,
사람은 이곳에 맑고 시원한 물이 있어서 물결이 일고 소용돌이가 친다고 본다.
만약 허공무변처정(虛空無邊處定)에 들어가면,
이곳에서는 오직 허공만을 볼 뿐이다.
하나의 실물에 대해서 서로 어긋남이 있기 때문에
하나의 품류가 아닌 지혜를 생기게 하는 인성(因性)이 되는 것은 도리에 맞지 않는다.
어떻게 이미 고름과 피와 똥오줌이 꽉 차 있는 이 하나의 강하(江河)에 대해서
칼자루를 잡은 사람이 두 언덕에서 지키고 있고,
다시 갖가지 깨끗한 향내가 나는 사택(舍宅)과 청정한 길과,
뭇 보배로 장식된 땅과,
맑고 시원한 아름다운 물결과 소용돌이와,
허공정(虛空定)의 경계가 있는가?
만약 바깥의 사물에는 모두 실성(實性)이 없다고 인정한다면,
모든 것은 다 내심에서 변현하여 모든 현상을 다 이루는 것이다.
다음과 같은 게송에서 설하는 것과 같다.
한 명의 잘 치장한 음녀(婬女)의 몸에 대해서
출가한 이와 욕심에 탐착하는 이와 굶주린 개[餓狗]는
각기 악취 나는 시체,
아름다운 여인,
맛있는 음식이라 하니,
세 가지 분별은 각기 같지 않다네.
‘인식대상이 없는 식을 현전에 가히 얻는다는 것에 대한 지혜[無所緣識現可得智]’란 과거와 미래가 모두 실제로 존재하지 않는 것을 말한다.
이것은 경량부와 함께 인정하여 성취한다.
꿈속의 경계는 실제로 존재하지 않는데 모든 사람은 함께 느낀다.
모든 삼마지에서 행해지는 영상은 이미 존재하지 않으며 또한 억지(憶持)되는 것도 아니라고 설명된다.
물과 거울의 표면 등의 영상이 모두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은 앞에서 이미 설명한 것과 같다.
여기에서는 경계는 없으나 식은 성립될 수 있다.
‘마땅히 노력[功用]을 떠났어도 전도되지 않아야 한다는 것에 대한 지혜[應離功用無顚倒智]’ 부분의 본문은 그 의미가 드러났을지라도 조금 더 부연하겠다.
만약 욕심이 있어서 얻게 되는 대상과 같이 곧 진실이 있다면 마땅히 공들이지 않고도 자연히 해탈할 수 있을 것이다.
왜냐하면 모든 유정은 다 진실을 보기 때문이다.
‘마음의 자재를 얻는 것이니’란 마음을 조절하고 수순하여 능히 짓는 일에 대해서 감능이 있는 것이다.
‘정려를 얻은 자’란 모든 성문과 독각들을 말한다.
이미 청정한 정려심에서 일경성(一境性)을 증득하였거나 정사려(靜思慮)를 즐기는 것을 정려자(靜慮者)라고 이름한다.
‘뛰어난 이해의 힘에 따라서 모든 대상이 현현한다’란,
말하자면 뛰어난 마음의 이해[增上意解]52)의 세력에 따라서 바라는[願樂] 대로 땅 등을 변화시켜 물 등이 되게끔 하고자 하면 모두 다 현현할 수 있다는 것이다.
‘사마타를 얻은’이란 말하자면 이미 사마타정을 증득하고 상속을 윤택하게 하여 마음으로 하여금 정려에 머물게 하는 것이다.
언급한 ‘닦는다’는 것은 공경(空境)과 상응하거나 4성제의 소연과 상응한다는 것이다.
지(止)ㆍ관(觀)이 나란히 움직이기 때문에 상응이라 이름하고 이것과 상응하기 때문에 닦는다고 하는 것이다.
‘법의 관찰[法觀]’이란 말하자면 후득(後得)으로서 계경(契經) 등의 바른 법을 관하는 묘혜(妙慧)이다.
‘잠시 작의할 때 모든 대상이 현현한다’란 말하자면 계경 등의 바른 법의 가르침에 따라서 한 가지 무상 등의 뜻에 대해서 찰나로 속히 멸하는 등의 성품을 작의하고 사유하는 것과 같이,
그와 같이 한 가지 품류가 아닌 경계를 현현하는 것이다.
‘무분별지가 현전할 때 모든 대상은 다 현현하지 않는다’에서 무분별지는 나중에 자세히 해석할 것이다.
대상이 만약 실제로 있다면 이 지혜는 마땅히 없어야 한다.
분별이 있지 않은 데에서 무분별은 성립한다.
대상이 만약 실제로 있는데도 무분별지가 생겨나고 나타나지 않는 것은 맞지 않는 것이다.
이 지혜는 여실하게 경계인 대상을 연하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끊임없이 설명한 도리와 앞에서 설명한 세 가지 인연에 의해서 모든 대상이 다 존재하지 않는다는 도리가 성립되는 것이다.
【論】만약 의타기자성이 실제로 오직 식만이 있어서 대상과 흡사하게 현현하는 의지처라면,
어떻게 의타기가 될 수 있으며 무슨 까닭에 의타기라고 이름하는가?53) 스스로 훈습시킨 종자로부터 생겨나는 것으로서 다른 조건[緣]에 의지하여 일어나기 때문에 의타기라고 이름한다.
생겨난 찰나 이후에는 공능이 없고 자연스럽게 머물기 때문에 의타기라고 이름한다.
【釋】‘어떻게 의타기가 될 수 있으며’란 해석된 법에 대해서 묻는 것이다.
‘무슨 까닭에 의타기라고 이름하는가’란 풀이된 구절을 물어서 해석하지 않은 품을 해석하는 것이다.
나란히 관계되어서 능히 대상을 알 수 있기 때문이다.
나머지 두 가지 자성에 대한 두 가지 질문 또한 이와 같다.
이와 같은 질문들에 의거하여 그에 상당하는 대답을 하는 것이다.
‘스스로 훈습시킨 종자로부터’ 등이란 변계소집의 명언훈습의 종자로부터 생겨난 것을 말한다.
‘스스로의 종자로부터……다른 조건에 의지하여 일어나는 것이기 때문에 의타기라고 이름한다’는 것은 저 자체[體]가 다른 것을 의지하여 생겨나는 것이라고 설명하는 것이다.
‘생겨난 찰나 이후에는 공능이 없고 자연스럽게 머물기 때문에’란 저 자체는 다른 것에 의지하여 머무는 것임을 설명하는 것이다.
이 두 가지 이유에 의해서 의타기라고 이름한다.
【論】만약 변계소집자성은 의타기에 의지하여 실제로는 존재하지 않고 대상과 흡사하게 현현하는 것이라면,
어떻게 변계소집이 될 수 있으며 무슨 까닭에 변계소집이라고 이름하는가?
한량없는 인식작용[行相]은 의식이 두루 계탁하고 전도하여 생겨나는 모습이기 때문에 변계소집이라 이름한다.
자상은 실제로 없을지라도 오직 두루 계탁하여 집착된 것만을 가히 얻을 수 있기 때문에 그러므로 설하여 변계소집이라 이름한다.
【釋】‘의타기에 의지하여’란 말하자면 유식인 의타기성에 의지한다는 것이다.
‘실제로는 존재하지 않고 대상과 흡사하게 현현하는’이란 말하자면 실제로는 체가 없고 단지 그 대상과 흡사한 모습[相貌]만이 현현한다는 것이다.
만약 체가 실제로 없다면 어떻게 대상이라 이름하는가?
이러한 비난을 피하기 위해서 설하기를 ‘대상과 흡사하게 현현하는’이라고 하는 것이다.
말하자면 명언훈습종자에 의해서 비록 실제로는 체가 없지만 대상이 있는 것과 흡사하게 모습이 현현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대상이라고 이름하는 것이다.
환상(幻像) 등과 같이 있는 것과 흡사하게 현현한다.
‘현현한다’고 말하는 것은 명료하게 대상은 없을지라도 있는 것과 흡사하고 명료하게 현전하기 때문에 ‘현현’이라고 이름하는 것이다.
즉 이 대상과 흡사한 것을 저것의 자성으로 삼는 것이다.
자성과 같이 받아들인다는 것이다.
‘한량없는 인식작용’이란 갖가지 아(我)ㆍ법(法)의 경계의 영상이다.
‘의식이 두루 계탁하고’란 즉 의식을 설하여 두루 계탁함[遍計]이라고 이름하는 것이다.
‘전도하여 생겨나는 모습’이란 산란한 식[亂識]의 소취와 능취이다.
대상의 양상이 생겨나는 원인이기 때문이다.
‘변계소집이라고 이름한다’란 말하자면 변계소집의 대상의 양상을 변계소집자성이라 이름한다는 것이다.
‘자상은 실제로 없을지라도 오직 두루 계탁하여 집착된 것만을 가히 얻을 수 있기 때문에’란,
말하자면 실제로는 아(我)와 법(法)이 없는데 오직 두루 계탁하여 집착한 영상인 모습만을 얻을 수 있다는 것이다.
이러하기 때문에 변계소집이라고 이름하는 것이다.
【論】만약 원성실자성은 변계소집의 양상이 영원히 존재하지 않는 것이라고 한다면,
어떻게 원성실이 될 수 있으며 무슨 까닭에 원성실이라고 이름하는가?
변이(變異)가 없는 성품에 말미암기 때문에 원성실이라고 이름한다.
또한 청정한 인식대상의 성품에 말미암기 때문에,
모든 선법의 가장 뛰어난 성품에 말미암기 때문에,
가장 뛰어난 뜻에 의해 원성실이라 이름한다.
【釋】‘변이가 없는 성품에 말미암기 때문에 원성실이라고 이름한다’ 등이라 하는 것은 이 성품은 항상 변이가 없기 때문에,
또한 청정한 인식대상의 성품에 말미암기 때문에,
모든 선법 가운데에서 가장 뛰어난 성품에 말미암기 때문에 원만하게 성취된 진실을 그 성품으로 삼음을 마땅히 알아야 한다는 것이다.
【論】또한 능변계(能遍計)가 있고 소변계(所遍計)가 있을 때 변계소집자성은 마침내 성립되는 것이다.
이 중에서 무엇이 능변계54)이고,
무엇이 소변계55)이며,
무엇이 변계소집자성56)인가?
분별이 있기 때문에 의식이 능변계임을 알아야 한다.
왜냐하면 이 의식은 스스로의 명언훈습을 종자로 삼고,
모든 식의 명언훈습을 종자로 삼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의식의 끝없는 인식작용은 계속 분별하고 널리 모든 것에 대해서 분별하여 헤아리기 때문에 변계라고 이름하는 것이다.
또한 의타기자성을 소변계라고 이름한다.
또한 이와 같은 양상에 의해서 의타기자성으로 하여금 소변계가 되게끔 하면,
여기에서 이를 변계소집자성이라고 이름하는 것이다.
이와 같은 양상에 의해서란 이것과 같은 대상이다.
또한 무엇을 변계라고 하며,
능히 변계하여 계탁한다고 하는가?
어떤 경계를 반연하며,
어떤 모습을 취하며,
어떤 것에 의해서 집착하며,
어떤 것에 의해서 말을 일으키며,
어떤 것에 의해서 말을 설하며,
어떤 곳을 증익하는가?
말하자면 명칭[名]을 반연하여 대상[境]으로 삼고,
의타기자성 가운데에서 저 모습을 취한다.
견해[見]에 의해서 집착하고,
심(尋)57)에 의해서 말을 일으키고,
보고 듣는 등의 네 가지 언설에 의해서 언설을 일으키고,
대상이 없는 곳에서 증익하여 있다고 한다.
이와 같은 변계에 의해서 능히 두루 계탁하는 것이다.
【釋】‘또한 능변계가 있고’ 등이란 변계소집을 분별하고자 하기 때문에 이와 같은 말을 설하는 것이다.
‘분별이 있기 때문에 의식이 능변계임을 알아야 한다’고 하는 것은
현시(顯示)58)와 수념(隨念)59)의 분별이 있어서 잡염의 대상이 되기 때문이다.
‘스스로의 명언훈습을 종자로 삼고’란
아득한 옛적부터 생사의 모든 의식은
희론과 명언으로 훈습된 종자를
이것이 생겨나는 원인으로 삼는다는 것이다.
‘그리고 모든 식의 명언훈습을 종자로 삼는다’란 말하자면
끝없는 색 등의 영상의 식인 명언으로 훈습된 종자를 원인으로 삼으니,
저것60)과 흡사하게 생겨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모든 끝없는 인식작용은 계속하여 분별하는 것이다.
‘또한 의타기자성을 소변계라고 이름한다’란 말하자면
이것의 일부분의 안 등의 모든 모습[相]은 소변계의 업(業)이다.
‘또한 이와 같은 양상에 의해서 의타기자성으로 하여금 소변계가 되게끔 하면
여기에서 이를 변계소집자성이라고 이름하는 것이다’란 말하자면,
이 품류의 반연의 상[緣相]으로 말미암아 이것을 변계소집자성이라고 이름한다는 것이다.
‘이것과 같은 대상이다’란 이와 같은 품류의 반연의 상인 대상이라는 것이다.
‘또한 무엇을 변계라고 하며,
능히 변계하여 계탁한다고 하는가?’란
변계소집자성의 차별을 잘 설명하기 위해서 질문을 만들어 묻는 것이다.
‘명칭을 반연하여 대상으로 삼고’란 말하자면
색(色)ㆍ수(受) 등과 천여(天與)61) 등의 명칭은
대상과 상응하여 모든 변계를 일으키고
달라진 인식작용[行相]을 식이라고 설하는 것이다.
그 명칭은 존재하지 않는 것이 아니다.
명칭이 있어서 능히 그 대상에 대해서 여러 가지 분별을 일으키는 것이다.
‘의타기자성 가운데에서 저 모습을 취한다’란 자상을 집착한다는 뜻이다.
능취상에 의거하여 상(想)이라고 설하는 것이며,
그 소상(所想)과 같이 이 언설을 만드는 것이다.
혹은 의타기자성 가운데에서 안 등이 모습(相)을 취한다.
‘견해에 의해서 집착하고’란 다섯 가지 품류에 의해서 추구하고 계속해서 행하여 모든 집착을 일으킨다는 것이다.
모습[相貌]를 취하고 나서 집착을 일으키기 때문에 이 모습에 대해서 굳게 집착한다는 뜻이다.
견해에 의해서 추구하고 대상에 대해서 결정하여 집착을 일으키고 나서 다른 사람을 위해서 설명하려고 한다.
‘심(尋)에 의해서 말을 일으키고’란 계경에서 “심(尋)에 의해서 사(伺)에 의해서 어언(語言)을 설한다”고 설하는 것과 같다.
심ㆍ사가 없이는 어언을 설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보고 듣는 등의 네 가지 언설에 의해서 언설을 일으키고’란 견문각지(見聞覺知)의 네 가지 언설에 의해서 언설을 일으킨다는 것이다.
뱀과 비슷한 새끼줄 등의 모습을 반연하는 것과 같이,
꼬불꼬불함 등의 갖가지 모습을 취하여 스스로 집착하고 나서 남들로 하여금 알게 하기 위해서,
이와 같이 “나는 이미 뱀을 보았다.
나는 이미 뱀을 보았다”고 말하는 것이다.
이것도 또한 이와 같아서 남들이 이것을 듣고 나서,
다시 증익하여 “실제로 있다”라고 말하는 것이다.
【論】또한 이와 같은 세 가지 자성은 다른 것인가,
다르지 않은 것인가?
마땅히 다른 것도 아니고,
다르지 않은 것도 아니라고 말해야 한다.
말하자면 의타기자성은 다른 부문[異門]에 말미암기 때문에 의타기가 되고,
즉 이 자성은 다른 부문에 말미암기 때문에 변계소집이 되며,
곧 이 자성은 다른 부문에 말미암기 때문에 원성실이 된다.62)
어떠한 다른 부문에 의해서 이 의타기는 의타기가 되는가?
다른 훈습 종자에 의지하여 일어나기 때문이다.
어떠한 다른 부문에 의해서 이 자성은 변계소집이 되는가?
이것은 두루 계탁하는 대상의 모습으로 말미암기 때문에,
또한 이것은 두루 계탁하는 것에 의해서 두루 계탁되어지기 때문이다.
어떠한 다른 부문에 의해서,
이 자성은 원성실이 되는가?
소변계와 같이 결국 그렇게 존재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63)
【釋】‘다른 것도 아니고’라고 하는 것은 말하자면 의타기성과 변계소집은
있음[有]과 있지 않음[非有]에 말미암기 때문이다.
있음을 있다고 바래서 가히 다르다고 말할 수 있으며,
있지 않은 토끼뿔 등은 없다고 바라지 않는 것이다.
‘다르지 않은 것도 아니’라고 하는 것은 있음과 있지 않음이 하나로 성립되지 않기 때문이다.
의타기성과 원성실도 또한 이와 같아서 성품이 청정하지 않고,
성품이 청정하기 때문이다.
지금 다시 다른 부문[異門]의 의취(意趣)에 의지하면 이 세 가지 자성은 어떤 경우에는 한 가지 성품이 되고 어떤 경우에는 다른 성품이 된다.
‘이것은 두루 계탁하는 대상의 모습으로 말미암기 때문에,
또한 이것은 두루 계탁하는 것에 의해서 두루 계탁되어지기 때문이다’란 의타기는 아(我)와 색(色) 등의 변계소집의 의지처[所依止]이기 때문에,
또한 의타기는 아와 색 등이 의식의 변계에 의해서 변계되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의취에 의해서 짐짓 의타기를 변계소집이라 설하는 것이다.
‘소변계와 같이 결국 그렇게 존재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라고 하는 것은 의타기에서 현현하는 것과 같은 것은 결국에는 없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하여 곧 세 가지 자성은 모두 다른 것이 되지 않는다고 설하는 것이다.
또한 다르지 않은 것도 아니니,
관대(觀待)64)가 다르기 때문이다.
훈습된 종자가 생겨나게 되는 의변(義邊)을 관대할 때 의타기가 된다.
즉 이것에 의하면 나머지 두 가지 성품을 성립시킬 수 없다.
변계의 소연을 관대할 때 변계소집이 된다.
즉 이것에 의하면 나머지 두 가지 상을 성립시킬 수 없다.
변계소집이 결국 없는 변(邊)을 관대할 때 원성실이 된다.
즉 이것에 의하면 나머지 두 가지 성품을 성취할 수 없다.
【論】이 세 가지 자성에는 각기 몇 종류가 있는가?
말하자면 의타기에는 약 두 가지가 있으니,
첫째는 다른 것이 훈습하는 종자에 의해서 일어나기 때문이고,
둘째는 다른 잡염과 청정의 성품은 성립되지 않음에 의하기 때문이다.
이 두 가지 의타의 차별에 말미암기 때문에 의타기라고 이름한다.
변계소집에도 또한 두 가지가 있으니,
첫째는 자성의 변계집에 말미암고,
둘째는 차별의 변계집에 말미암는 것이다.
이것에 말미암기 때문에 변계소집이라고 이름한다.
원성실성에도 또한 두 가지가 있으니,
첫째는 자성원성실에 말미암고,
둘째는 청정원성실에 말미암는다.
이것에 말미암기 때문에 원성실이 되는 것이다.
【釋】‘다른 것이 훈습하는 종자에 의해서 일어나기 때문이고’란 인연에 의탁하여 생기게 되기 때문에 의타기라고 이름하는 것이다.
‘다른 잡염과 청정의 성품은 성립되지 않음에 의하기 때문이다’란 분별할 때에는 잡염의 성품이 되고,
분별하지 않을 때에는 청정의 성품이 되기 때문에 두 가지 부분에 의지하여 의타기라고 이름한다.
‘자성의 변계’란 말하자면 모든 안 등이 유법(有法)의 사체(事體)를 집착하여 취하는 것이다.
‘차별의 변계’란 말하자면 항상[常]과 무상(無常) 등의 대상에 대해서 특별한 법의 대상이라고 특별히 집착하여 취한다는 뜻이다.
‘자성원성실’이란 때가 있는 진여[有垢眞如]를 말한다.
‘청정원성실’이란 때를 여읜 진여[離垢眞如]를 말한다.
【論】또한 변계에는 네 가지 종류가 있다.
첫째는 자성의 변계[自性遍計]이고,
둘째는 차별의 변계[差別遍計]이며,
셋째는 유각의 변계[有覺遍計]이고,
넷째는 무각의 변계[無覺遍計]이다.
유각이라 하는 것은 명언(名言)을 잘 아는 것을 말하고,
무각이라 하는 것은 명언(名言)을 잘 알지 못하는 것을 말한다.
【釋】‘명언을 잘 아는 것’이라 하는 것은 자신의 의취(意趣)가 말 앞에서 행하여 이해하고 받아들이는 것이 구족하기 때문에 유각이라고 이름하는 것이다.
이것과 어긋나는 것을 설하여 무각이라고 이름하는 것이다.
【論】이와 같이 변계에는 다시 다섯 가지 종류가 있다.
첫째는 명칭[名]에 의지하여 대상[義]의 자성을 두루 계탁하는 것이니,
“이와 같은 명칭에 이와 같은 대상이 있다”고 말하는 것이다.
둘째는 대상에 의지하여 명칭의 자성을 두루 계탁하는 것이니,
“이와 같은 대상에 이와 같은 명칭이 있다”고 말하는 것이다.
셋째는 명칭에 의지하여 명칭의 자성을 두루 계탁하는 것이니,
말하자면 아직 알지 못하는 대상의 명칭을 두루 계탁하는 것이다.
넷째는 대상에 의지하여 대상의 자성을 두루 계탁하는 것이니,
말하자면 아직 알지 못하는 명칭의 대상을 계탁하는 것이다.
다섯째는 두 가지에 의지하여 두 가지65)의 자성을 두루 계탁하는 것이니,
말하자면 이와 같은 명칭과 이와 같은 대상은 이와 같은 체성이 있다고 두루 계탁하는 것이다.
【釋】‘명칭에 의지하여 명칭의 자성을 두루 계탁하는 것이니’라고 하는 것은,
말하자면 야자주(椰子洲)에 태어나 살고 있는 사람이 ‘소[牛]’라고 하는 소리66)로 설하는 것을 듣고,
그 대상을 알지 못하고 자주 이와 같은 ‘소’라고 하는 소리를 분별하는 것과 같다.
‘대상에 의지하여 대상의 자성을 두루 계탁하는 것이니’란,
말하자면 일찍이 익히지 않은 상(想)과 유상(有想)67)이 다시 서로 상응하여 홀연히 소의 몸을 보고 자주 이와 같은 소의 대상을 분별하는 것이다.
‘두 가지에 의지하여 두 가지 자성을 두루 계탁하는 것이니’란 말하자면 가립(假立)된 능전과 소전68)에 의지하여 두 가지 종류를 분별하는 것이다.
【論】또한 모든 분별을 종합적으로 포함시키면 대략 열 가지 종류가 있다.
첫째는 근본분별(根本分別)이니 아뢰야식을 말하고,
둘째는 반연의 모습의 분별[緣相分別]이니 색 등의 식을 말하고,
셋째는 현현함의 모습의 분별[顯相分別]이니 안식 등의 의지처의 식을 말한다.
넷째는 반연의 모습이 변이함의 분별[緣相變異分別]이니 늙음 등의 변이와 낙수(樂受) 등의 변이와 탐 등의 변이와 핍해(逼害)ㆍ시절의 대사(代謝) 등의 변이와 나락가 등의 여러 윤회세계[趣]의 변이와 욕계 등의 여러 세계[界]의 변이를 말한다.
다섯째는 현현의 모습이 변이함의 분별[顯相變異分別]이니 즉 앞에서 설한 변이와 같은 모든 변이를 말한다.
여섯째는 남이 이끄는 분별[他引分別]이니 정법이 아닌 부류를 듣거나 정법의 부류를 듣고 분별하는 것을 말한다.
일곱째는 진리가 아닌 분별[不如理分別]이니 여러 외도들이 정법이 아닌 부류를 듣고 분별하는 것을 말한다.
여덟째는 진리 그대로의 분별[如理分別]이니 정법 가운데에서 정법의 부류를 듣고 분별하는 것을 말한다.
아홉째는 집착의 분별[執著分別]이니 진리가 아닌 작의(作意)의 부류를 말한다.
즉 살가야견을 근본으로 삼고 62가지 국집된 견해[見趣]와 상응하는 분별이다.
열째는 산란한 움직임의 분별[散動分別]이니 모든 보살의 열 가지 분별을 말한다.
【釋】‘근본분별’이란 아뢰야식을 말한다.
이것은 나머지 분별의 근본이 되며 자성 또한 분별하는 것이기 때문에 근본분별이라고 이름하는 것이다.
‘반연의 모습의 분별’이란 색 등에 이와 같은 반연의 모습이 있다고 분별하는 것을 말한다.
‘현현함의 모습의 분별’이란 안식 등과 함께 의지처의 식을 말하는데 저 인식대상과 흡사한 모습을 현현하기 때문이다.
‘반연의 모습이 변이함의 분별’이란 색 등의 영상이 식과 흡사하게 변이하여 일어나게 되는 분별을 말한다.
‘늙음 등의 변이’란 색 등이 식과 흡사하게 되어 늙음 등의 모습을 일으키는 여러 가지 변이를 말한다.
왜냐하면 내외의 색 등에는 모두 늙음 등의 전변의 모습이 있기 때문이다.
‘등’이란 병들고 죽는 변이를 똑같이 취한다.
‘낙수 등의 변이’란 즐거움의 감수작용으로 말미암기 때문에 몸의 모습이 변이하는 것이다.
‘낙’이란 이목구비(耳目口鼻)가 단정하다고 말하는 것과 같으며,
‘등’이란 괴로움의 감수 작용[苦受]과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은 감수 작용[不苦不樂受]을 똑같이 취하는 것이다.
‘탐 등의 변이’란 탐 등으로 말미암아 몸의 모습이 변이하는 것을 말한다.
‘등’이란 성냄[瞋]ㆍ어리석음[癡]ㆍ분(忿) 등을 똑같이 취하는 것이다.
분 등은 추악한 형색 등이라고 설하는 것과 같다.
‘핍해ㆍ시절의 대사 등의 변이’란 죽이고 포박하는 것 등은 몸의 모습 등으로 하여금 변이를 일으키게 함을 말한다.
시절의 대사69)도 또한 내외의 몸과 나무 색깔 등의 형상을 변화시키는 것을 말한다.
추위 등으로 괴로움을 당할 때 몸 등이 변이한다고 설하는 것과 같다.
‘나락가 등의 여러 윤회 세계의 변이’에서 ‘등’이라 하는 것은 모든 괴로운 세계[惡趣]를 똑같이 취하는 것이다.
저곳에 있는 색 등의 변이는 모두 함께 아는 것이다.
‘그리고 욕계 등의 여러 세계[界]의 변이’란 색계를 똑같이 취하는 것이다.
무색계에서는 색 등과 흡사한 영상의 식은 없기 때문이다.
모든 천(天)과 정려(靜慮) 중에서도 또한 유정과 자연계[器世間]라는 색 등의 갖가지 변이가 있다.
마니주[摩尼珠]와 같은 것은 위신력으로 말미암아 갖가지 깨끗하고 묘한 광색을 변이한다.
‘현현의 모습이 변이함의 분별’이란 안 등이 의지하는 근[所依根]으로 말미암기 때문에 색 등과 흡사한 영상을 현현시키는 안 등의 식은 갖가지로 변이한다는 것이다.
즉 여기에 있어서도 모든 분별을 일으키니,
곧 앞에서 설한 바와 같이 늙음 등의 변이는 그 상응하는 바에 따라서 변이를 일으키는 것이다.
왜냐하면 안 등의 근에는 예리함과 둔함이 있고,
식에는 앎과 무지함이 있다고 설하는 것과 같기 때문이다.
무표색(無表色)의 의지처가 변이하는 것과 같이 저것 또한 변이한다.
낙수 등의 변이에 의한 것 또한 이와 같다.
‘낙’이라고 설명하는 것과 같은 것은 마음이 안정하기 때문이며,
‘고’라고 설명하는 것과 같은 것은 마음이 틀어져 움직이기 때문이다.
탐 등의 핍해와 시절의 대사의 변이도 또한 이와 같다.
나락가 등과 욕계 등은 몸에 의지하여 변이하고 식도 또한 변이함을 마땅히 이와 같이 알아야 한다.
무색계 중에서도 또한 감수작용[受] 등이 작용하게 되는 변이가 있어서 모든 식은 분별하는 것이다.
‘남이 이끄는 분별’이란 선하고 악한 벗과 친히 가까이해서 일으키는 것과 바르고 바르지 않은 법을 듣는 것을 원인으로 삼아 분별하는 것을 말한다.
외도의 가비라(迦比羅)70) 등과 정법 중에 모든 소게다(騷揭多)71)의 모든 분별은 진리가 아닌 분별과 진리 그대로의 분별이라고 이름한다.
이와 같은 두 가지 종류는 그 상응하는 바에 따라서 능히 삿된 견해와 바른 견해에 상응하는 두 가지 분별을 낳는다.
살가야견이 원인이 되어 일어나게 되는 62견과 상응하는 분별이다.
즉 『범망경(梵綱經)』72)에서는 전제(前際)ㆍ후제(後際)ㆍ중제(中際)로 분별한다.
말하자면 나는 과거에 일찍이 있는 것인가라고 분별하는 것이다.
이와 같은 분별을 ‘집착의 분별’이라고 이름한다.
‘국집된 견해[見趣]’라고 말하는 것은 품류의 뜻이다.
‘산란한 움직임의 분별[散動分別]’이라고 말하는 것은 산란하여 어지럽게 움직이기 때문에 산동이라고 이름하는 것이다.
이것은 곧 분별이다.
그러므로 설하여 ‘산란한 움직임의 분별’이라고 이름하는 것이다.
이것은 곧 무분별지를 어지럽게 혼란시킨다.
왜냐하면 이것에 의해서 반야바라밀다를 어지럽게 혼란시키기 때문이다.
무분별지는 곧 반야바라밀이다.
‘모든 보살의 열 가지 분별을 말한다’란 모든 보살은 능히 어언(語言)을 발하여 다른 사람을 이끌어서 진리라고 칭할 수 없는 열 가지 분별을 전변한다.
왜냐하면 진리를 체증[證會]해서 만약 곧바로 현전하면 가히 설할 수가 없기 때문이다.
【論】첫째는 비존재 양상의 산란된 움직임[無相散動]이고,
둘째는 존재 양상의 산란된 움직임[有相散動]이며,
셋째는 증익의 산란한 움직임[增益散動]이고,
넷째는 손감의 산란한 움직임[損減散動]이며,
다섯째는 한 성품의 산란한 움직임[一性散動]이고,
여섯째는 다른 성품의 산란한 움직임[異性散動]이며,
일곱째는 자성의 산란한 움직임[自性散動]이고,
여덟째는 차별의 산란한 움직임[差別散動]이다.
아홉째는 명칭[名]과 같이 대상[義]을 취하는 산란한 움직임[如名取義散動],
열째는 대상과 같이 명칭을 취하는 산란한 움직임[如義取名散動]이다.
이러한 열 가지 산란한 움직임을 다스리기 위해서 모든 반야바라밀 중에서 무분별지를 설한다.
이와 같은 다스려지는 것[所治]과 능히 다스리는 것[能治]은 반야바라밀다의 뜻을 모두 포섭하고 있음을 마땅히 알아야 한다.
【釋】모든 『반야바라밀다경』에서는 모두 이와 같은 열 가지 산동의 대치를 설하고 있다.
또한 다음과 같이 설하고 있다.
“세존이시여,
무엇을 보살이 반야바라밀다를 마땅히 행하는 것이라고 합니까?”
“사리자여,
이 보살은 실로 존재하는[實有] 보살이어서 자신을 보살이라고 보지 않는다.
왜냐하면 색의 자성은 공(空)이지만 공에 의하지 않기 때문이다.
색은 공이라서 색이 아니며 색은 공을 여의지 않는다.
색은 곧 공이며 공은 곧 색이다.
왜냐하면 사리자여,
이것은 단지 이름만이 있고 이를 색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이것의 자성은 생겨남도 없고 멸함도 없으며 물듦도 없고 깨끗함도 없다.
짐짓 객(客)의 명칭을 세워서 갖가지 법에 대해서 분별을 일으킨다.
짐짓 객의 명칭을 세워서 그에 따라 언설을 일으킨다.
언설하는 대로,
그렇게 그렇게 집착을 일으키는 것이다.
이와 같이 모든 보살은 보지 않으니,
보지 않기 때문에 집착을 생하지 않는다.
설명한 바와 같이 색에서도 내지 식에서도 또한 이와 같음을 마땅히 알아야 한다.”
이 중에서 ‘비존재 양상의 산란된 움직임’을 다스리기 위해서 저 경전에서 설하여 “실로 존재하는[實有] 보살이라서” 등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말하자면 실로 존재함[實有]의 공을 보살의 체로 삼는다.
‘존재 양상의 산란된 움직임’을 다스리기 위해서,
즉 저 경전에서는 “보살이라고 보지 않는다” 등이라고 말한다.
말하자면 변계소집자성은 영원히 존재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증익의 산란한 움직임’을 다스리기 위해서,
즉 저 경전에서는 “색의 자성은 공이지만” 등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말하자면 즉 변계소집 자성은 영원히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손감의 산란한 움직임’을 다스리기 위해서,
즉 저 경전에서는 “공에 의하지 않기 때문이다” 등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말하자면 저 법성(法性)은 실유(實有)이기 때문이다.
‘한 성품의 산란한 움직임’을 다스리기 위해서,
즉 저 경전에서는 “색은 공이라서 색이 아니며” 등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정(淨)과 부정(不淨)의 경계의 성품은 각기 다르기 때문이다.
‘다른 성품의 산란한 움직임’을 다스리기 위해서,
즉 저 경전에서는 “색은 공을 여의지 않는다” 등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말하자면 변계소집의 색의 자성은 존재하는 것이 아니니,
즉 이것은 공이기 때문이다.
‘자성의 산란한 움직임’을 다스리기 위해서,
즉 저 경전에서는 “이것은 단지 이름만이 있고 이를 색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등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차별의 산란한 움직임’을 다스리기 위해서,
즉 저 경전에서는 “생겨남도 없고 멸함도 없으며” 등이 라고 말하는 것이다.
‘명칭과 같이 대상을 취하는 산란한 움직임’을 다스리기 위해서,
즉 저 경전에서는 “짐짓 객의 명칭을 세워서 갖가지 법에 대해서 분별을 일으킨다” 등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대상과 같이 명칭을 취하는 산란한 움직임’을 다스리기 위해서,
즉 저 경전에서는 “짐짓 객의 명칭을 세워서 그에 따라 언설을 일으킨다.
언설하는 대로,
그대로 그렇게 그렇게 집착을 일으키는 것이다”라고 말하는 것이다.
‘이와 같이 모든 보살은 보지 않으니,
보지 않기 때문에 집착을 생하지 않는다’고 하는 이 뜻을 설명하기 위해서 명칭에서도 대상에서도 여실하게 안다면 허망한 집착은 없다는 말을 하는 것이다.
【論】다른 부문[異門]에 의하면 의타기자성에 세 가지 자성이 있다.
어떻게 세 가지 자성은 차별이 없음이 성립되지 않는가?
만약 다른 부문에 의해서 의타기를 성립시키면,
즉 이것으로 인해서 변계소집과 원성실은 성립될 수 없다.
만약 다른 부문에 의해서 변계소집을 성립시키면,
즉 이것으로 인해 의타기와 원성실은 성립될 수 없다.
만약 다른 부문에 의해서 원성실을 성립시키면,
즉 이것에 의해서 의타기와 변계소집은 성립될 수 없다.
【釋】이것에 대한 뜻은 앞에서 설명한 것과 같으므로 거듭 해석할 필요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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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이하 알아야 할 양상[所知相],
즉 현상계와 본체계의 전개 양상을 의타기상ㆍ변계소집상ㆍ원성실상의 세 가지[三自性]로 분류해서 설명한다.
2)
수념분별을 뜻하며 원래 역본에는 수념을 수합(隨合)으로 기록하고 있으나 이는 잘못된 표기일 것이다.
3)
유위상(有爲相)을 나타내는 작용.
4)
원성실상(圓成實相)을 말한다.
5)
의타기상(依他起相,
paratantra-svabhāva)은 다른 것에 의지해서 생겨나는[依他起] 속성을 지니는 법의 양상이다.
그것은 일체법의 연생(緣生)의 자성,
즉 인연소생법(因緣所生法)이다.
의타기상은 변계소집상처럼 체성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나,
인연소생법이므로 상주실유(常住實有)가 아니고 세속제(世俗諦)에서 그 존재성이 인정된다.
의타기상은 인연소생법이므로 오위백법(五位百法) 가운데 심왕법ㆍ심소법ㆍ색법ㆍ불상응행법의 4위(位) 아흔네 가지 법이 포섭되지만,
식일원론의 입장인 유식학에서 의타기상은 결국 아뢰야식을 기반으로 하는 8식을 가리킨다.
6)
눈[眼根] 등 다섯 가지 감각기관이다.
7)
번뇌에 오염된 식을 말한다.
8)
의근(意根)이다.
9)
응수식(應受識)이라고도 하며,
색식(色識) 등 6식(識)을 말한다.
10)
정수식(正受識)이라고도 하며,
안식 등 6식이다.
11)
생사가 단절하고 상속하는 식을 말한다.
12)
하나 내지 아승기수(阿僧祇數)의 식이다.
13)
자연계[器世間]를 말한다.
14)
감각ㆍ지각 작용[見聞覺知]의 모든 언설에 의한 것이다.
15)
자신과 타신(他身)이 의지하는 차별식을 말한다.
16)
선악양도차별식(善惡兩道差別識)이라고도 하며,
생사의 여러 종류의 차별이다.
17)
변계소집상(parikalpita-svabhāva)에서 변계(遍計)는 이리저리 헤아리고 억측한다[周遍計度]는 뜻이고,
소집(所執)은 두루 계탁함으로써 잘못 보이는 집착된 대상을 가리킨다.
유식학에서는 미혹의 근원을 특히 명칭이나 언설에서 찾는다.
변계소집상은 명칭에 의해 가정적으로 안립된 자성차별이다.
그것은 허망분별에 의해 실체[實我實法]로 착각되고 집착된 것이다.
현상계의 모든 존재는 인연화합으로 생겨난 임시적인 존재[假法]이며 상주불변하는 실체가 없는데도,
범부들은 미혹하여 허망한 견해를 내어서 마음 밖에 실법(實法)이 존재하는 것으로 허망하게 집착한다.
변계소집상은 범부들의 허망한 견해에 의해 인연소생의 가아가법(假我假法) 위에 오인되어진 실아실법에 대한 미혹된 집착이다.
공허한 환상과 같은 것이어서 체성(體性)이 전혀 없다.
18)
원성실상(圓成實相,
pariniṣpanna-svabhāva)은 원만히 성취되어 있는 참다운 성품[圓滿成就眞實性]의 법의 양상이다.
현상계의 모든 법의 본체인 진여이다.
진여는 모든 법에 두루하고[圓],
체성이 상주불변하여 항상 변함없이 성취되어 있으며[成],
모든 법의 진실한 체성이어서 허망한 법이 아니다[實].
그것은 진공묘유(眞空妙有)의 경계이다.
19)
여섯 가지의 내계(內界)란 5근과 7심계(心界)를 말한다.
20)
신식을 설명하는 것이다.
21)
과거ㆍ미래ㆍ현재를 말한다.
22)
즉,
기세간을 말한다.
23)
눈으로 빛을 보고,
귀로 소리를 듣고,
코ㆍ혀ㆍ몸으로 냄새ㆍ맛ㆍ촉감을 감각하고 뜻으로 법을 아는 것이다.
24)
상분(相分)과 견된(見分)을 말한다.
25)
그릇되게 생각하는 것을 말한다.
26)
목마른 사슴이 물을 구해서 아지랑이를 쫓아가는 것을 말한다.
27)
과거ㆍ현재ㆍ미래를 말한다.
28)
‘하나 등’이란 하나,
둘,
셋이라 하는 숫자를 말한다.
29)
『해심밀경』 본문에는 ‘위빠사나 삼마지’로 되어 있다.
30)
성교량(聖敎量)ㆍ정교량(正敎量)ㆍ량(量)이라고도 한다.
불교 논리학의 3량(量) 중의 하나이며 지식의 규준으로서 성인께서 가르치신 문장과 말을 의미한다.
31)
3량(量) 중의 하나로서 진비량(眞比量)이라고도 한다.
우리가 이미 아는 사실을 가지고 아직 알지 못하는 사실을 비교하여 추측하는 것을 말한다.
예를 들면 꿀벌과 나비가 있는 것을 보고 그곳에 꽃이 있을 것이라고 미루어 추측하는 것이다.
32)
근본을 나타내는 것을 명(名)이라 하고,
뜻을 설명하는 것을 구(句)라 하고,
구가 연결된 것을 문(文)이라 한다.
다시 말해 명신ㆍ구신ㆍ문신으로 표현되며,
명신을 모아 구신을 만들고,
구신을 모아 문신을 만드는 것이다.
성교능전(室敎能詮)의 소의가 되는 것이다.
33)
금강장보살은 『십지경」을 설한 사람이다.
34)
심소법(心所法)을 말한다.
35)
욕계(欲界)와 색계(色界) 두 세계만이 오식 심이 있다고 설해야 한다는 것이다.
36)
현량이라고도 한다.
전오식(前五識)에 의해 현상 그대로의 상태를 지각하는 것이다.
37)
이하 제2차별장(差別章)이다.
38)
유상식(有相識)은 상분(相分)을 말하며,
유견식(有見識)은 견분(見分)을 말한다.
39)
범어 gāthā의 음역으로 ‘게송’이나 ‘게’로 번역한다.
좁은 의미로는 운문의 형식을 취한 경문을 말하고 흔히 교설의 끝 부분에 서술된다.
40)
범어 brahmacārin으로서 범사라고도 음사하고 정예(淨裔)ㆍ정행(正行)이라고도 번역한다.
바라문의 생활 가운데 4기(期)가 있는데,
이것은 제1기로서 스승에게 가서 수학하는 기간을 말한다.
이 기간에는 스승에게 가서 훈식(熏食)을 피하고,
몸에 치장하는 것을 금하고,
모든 정욕을 멀리하고,
매일 아침에 나아가 밥을 빌어다가 스승에게 바치고,
스승이 먹고 난 뒤에 자기가 먹는다.
또한 나무를 하고 물을 긷고 스승의 잠자리를 돌보는 등 여러 가지 고행을 하면서 한 마음 한 뜻으로 성지(聖智)에 이르기 위하여 정진한다.
41)
조절하기 어려운 마음을 의미한다.
42)
상분(相分)을 말한다.
심식(心識)이 인식작용을 일으킬 때,
인식할 영상을 마음속에 떠오르게 하여 대상으로 삼는 것을 상분이라고 한다.
43)
견분(見分)을 말한다.
견분은 객관의 형상을 보는 인식작용으로서 상분을 아는 작용이다.
심체(心體)가 전변하여 사물을 아는 공용을 일으켜서 이에 의해 능히 알게 되기 때문에 견분이라고 하는 것이다.
44)
이하 네 가지 지혜를 성취한 보살은 유식무경(唯識無境)의 도리를 깨달을 수 있음을 말한다.
이들 네 가지 내용은 외적인 사물이 존재하지 않음을 이론적으로 증명한다.
45)
인식하는 주체가 각기 다른 것에 의해서 사물을 인식하는 것도 각기 다른 모습으로 인식하는 지혜를 말한다.
46)
실재하지 않는 사물을 인식이 현재 실재하는 대상으로 아는 지혜를 말한다.
47)
의식적인 노력[功用],
즉 수행하지 않고서 오류가 없는 무전도(無顚倒)의 지혜를 얻을 수 있다는 것은 잘못임을 아는 지혜이다.
만일 인식대상이 인식되는 것처럼 실재한다면 범부도 진실을 인식하게 되고,
노력 정진하지 않고도 자연히 해탈할 수 있기 때문이다.
48)
다음 세 가지 지혜를 따라 인식대상이 갖가지 존재로 바뀌는 것을 아는 지혜이다.
49)
자재자(自在者)의 지혜를 따라 바뀌는 것이다.
즉 마음이 자재함을 얻은 보살은 하고자 하는 대로 할 수 있으니,
예를 들면 땅을 물로 변화시킬 수 있다.
50)
관찰자의 지혜를 따라 바뀐다.
지관(止觀)을 닦는 유가사(瑜伽師)가 부처님의 교법을 관찰해서 사색할 때,
어떤 대상이 사색하는 대로 갖가지 형상으로 나타난다.
51)
무분별지를 따라 바뀐다.
무분별지가 일어날 때는 어떤 인식대상도 나타나지 않는다.
52)
의해(意解)란 마음에 의한 요해를 말한다.
53)
이하 제3초 분별장이다.
54)
변계소집을 일으키는 분별인 능변계가 어떤 식인가에 대해서 이 논서에서는 의식만을 들었지만,
후대의 『성유식론』 제8권에서는 의식과 제7말나식을 든다.
말나식이 아뢰야식을 대상으로 실아(實我)로 착각하고,
의식이 5온을 대상으로 또한 실아로 착각한다.
55)
소변계(所遍計)는 능변계의 계탁 작용에 의해 실재하는 것으로 집착되어지는 대상,
즉 비슷하게 현현된 자아[似我]와 법[似法]이다.
분별망집은 인연으로 생겨난 존재들을 대상으로 하기 때문에 소변계는 의타기의 법,
즉 5온ㆍ12처ㆍ18계 등의 인연소생법이다.
56)
변계소집상은 소변계가 능변계의 식 위의 상분으로 떠올라 있을 때,
그것이 마음밖에 실재한다고 집착하여,
그 허망한 생각 앞에 나타나는 실아실법(實我實法)의 허망한 모습이다.
57)
심[尋,
vitarka]의 심소는 부정심소(不定心所) 중의 하나이다.
말을 일으키기 전에 심구 사량하는 심리작용으로서,
대상에 대하여 그 뜻과 이치를 대강 심구(尋求)한다.
참고로 말하면 사찰[伺,
vicāra]의 심소가 그 대상을 세밀하게 분별하여 사찰(伺察)한다.
이로써 몸과 마음의 평안이나 불안이 있게 되므로 부정심소라 한다.
58)
계탁분별을 말한다.
즉 널리 과거ㆍ현재ㆍ미래 삼세에 걸쳐 아직 현실로 나타나지 않은 일들을 미루어 상상하는 정신작용을 말한다.
59)
수념분별(隨念分別)을 말하는 것으로 끝없는 과거의 일들을 추억하여 여러 가지로 생각하고 분별하는 제 6식의 작용이다.
60)
색 등의 외경(外境)을 가리킨다.
61)
천수(天授)의 착오로 보여진다.
62)
변계소집자성은 의타기자성의 잡염분이고,
원성실자성은 의타기자성의 청정분이다.
63)
우리는 아득한 옛적부터 의타기의 자성 위에 집착해서 아법(我法)을 분별하고 아법의 모습을 띤 제법(諸法)의 종자를 심식에 훈습시켜 왔기 때문에,
그 습성에 의해 아법에 비슷하게 잡염의 의타기상을 일으킨다.
그 생기된 잡염의 의타기상에 다시 잠재의식에 의해 전도의 집착을 일으키기 때문에,
의타기상과 변계소집상은 다시 서로 연(緣)이 되어 생사에 전전 상속하여 끊어짐이 없다.
청정한 눈을 지닌 사람의 눈에 여러 안질의 증상들을 멀리 여의고 어지러운 경계가 항상 없는 것이 원성실상이다.
64)
대망(待望)한다는 뜻이다.
65)
명칭[名]과 대상[義]을 말한다.
66)
‘소’라고 하는 명칭을 의미한다.
67)
상(想)이라 하는 것은 ‘소’라고 하는 개념이 표상화된 것을 말하고,
유상(有想)이란 이러한 표상을 ‘소’라는 실체로서 느끼는 것이다.
68)
가립(假立)된 능전과 소전에서 능전은 명칭이고 소전은 명칭에 의해서 표현된 의미이기 때문에 능전은 명칭[名]에 해당되고 소전은 대상[義]에 해당된다.
69)
시절의 대사(代謝)라고 하는 것은 춘하추동의 4계절의 변화를 말한다.
70)
범어 Kapila의 음사로 황두(黃頭) 또는 금두(金頭)라고 번역한다.
수론학파(Sāṁkhya)의 개조(開祖)의 이름이다.
71)
범어 sugata의 음사로서 선서(善逝)라고 번역한다.
부처님 10호 중의 하나.
72)
대승의 범망경이 아니라 아함부에 있는 『범망육십이견경(梵網六十二見經)』을 말한다.
이 경에서는 전ㆍ중ㆍ후로 나누어 62견을 설명하고 있다.
○ [pt op t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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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음악공양, 나무불, 나무법, 나무승 mus0fl--Serge Reggiani - Derniere Valse.lrc
● 경전 논서 표현의 '리맵핑'.
대장경에서 경전과 논서를 보면 표현이 나타내는 내용을 이해하기 쉽지 않다.
예를 들어 다음 구절들을 살펴보자.
ᖰ ‘의타기상’이란 말하자면
업과 번뇌와 소취와 능취와 변계의 수념(隨念)’2)은 다른 것에 의지하여 일어나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양상은 어떤 표현에 의해서 알 수 있는가?
말하자면 의타기상이다.
‘변계소집상’이란 영원히 양상이 없는 것을 말한다.
영원히 양상이 없다는 것은 두루 계탁하여 집착한 것[遍計所執]이며,
소취와 능취의 보특가라(補特伽羅)와 법의
유성(有性)의 소상(所相)3)이기 때문이다.
....
【論】여기에서 의타기상5)이란 무엇인가?
말하자면 아뢰야식을 종자로 하는
허망분별(虛妄分別)에 섭수되는 모든 식이다.
이것은 또한 무엇인가?
말하자면
신식(身識)6)ㆍ신자식(身者識)7)ㆍ수자식(受者識)8),
그 수용되는 식[所受識]9) 과 그 능히 수용하는 식[能受識]10)ㆍ
세식(世識)11)ㆍ수식(數識)12)ㆍ처식(處識)13)ㆍ언설식(言說識)14)ㆍ
자타차별식(自他差別識)15)ㆍ선취악취(善趣惡趣)의 생사식(生死識)16)이다.ᖱ
...
이렇게 표현되어 있다.
일단 한자어 이해가 쉽지 않다.
이것을 번역에 책임을 돌리기도 어렵다.
해당 한자어에 해당하는 한글말이 없다.
이런 경우 공연히 한자를 낱글자로 풀어서 번역하면 오히려 더 이해하기 어렵게 되기 쉽다.
그런 말을 한국사람들이 종전에 사용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번역도 힘들다.
신식(身識)6)ㆍ신자식(身者識)7) 표현이 어렵게 느껴진다고 하자.
그렇다고 '몸 알음', '몸 아들 알음' 이렇게 번역하면 더 이해하기 힘들어진다.
그렇지만, 한자어를 아무리 보아도 이 표현이 무엇을 가리키는지 이해하기 어렵다.
그래서 어느정도 불교사전의 용어풀이를 참조할 필요가 있다.
그래서 특수한 불교용어들이 현실의 무엇을 가리키는지를 기본적으로 이해해둘 필요가 있다.
이것을 '맵핑(mapping)', 또는 '리맵핑'이라고 표현해본다.
'맵핑', 또는 '리맵핑' 이런 표현도 어렵다.
맵핑은 맵(map)과 관련된다.
현실에서 보는 지형지물이 있다.
이것을 지도로 표시한다.
여기서 산의 높이는 등고선으로 표시할 수 있다.
온천은 ♨이런 표시로 나타낼 수도 있다.
즉 일정한 기호로 현실의 공간을 표현한다.
그래서 지도를 보려면 지도에서 사용한 각 기호가 나타내는 내용이 무언가를 파악해야 한다.
오늘날 컴퓨터 사용시 입력과정을 편하게 하기 위해 단축키 리맵핑 방안이 있다.
반복해 입력하는 구절을 특수글자에 배당한다.
그러면 이후 그 특수글자를 입력하면 그 구절을 나타내게 한다.
일종의 반복 작업을 단축시키는 매크로 기법과 관련된다.
불교 대장경을 살피면
일반적인 입장에서 이해하기 힘든 표현이 계속 나열된다.
그리고 이 한 표현마다 그 표현이 나타내는 내용을 파악하기 쉽지 않다.
그렇다고 불교 사전에서 하는 식으로 표현 하나하나 풀어서 제시하기 힘들다.
그러면 시간이 더 걸린다.
그래서 특수 표현이 나타나면 시간을 들여서 그 표현의 의미가 무엇인가를 먼저 잘 파악해야 한다.
그러면 이후 이 짧은 표현으로 반복제시할 내용을 짧게 단축시킬 수 있게 된다.
그런데 어떤 표현은 사전에도 나오지 않는 표현인 경우가 있다.
그래서 처음 자신이 한자어만 놓고 자신 나름대로 의미를 찾으려 노력하게 된다.
그런데 대장경을 계속 살피다보면 처음 자신이 이해한 내용이 부적절함을 발견할 수도 있다.
그러면 다시 또 수정해야 한다.
그런 과정을 여러번 거쳐야 한다.
그런데 여기서 각 표현이 나타내고자 하는 내용은
사실은 각 개인이 생사현실과정에서 다 함께 공유하는 내용이다.
일상생활에서 늘 그런 활동을 하고 또 그런 부분을 갖추고 있다.
단지 맵핑이 되지 않아서 각 기호나 표현이 나타내는 내용만 파악하지 못하는 상태일 뿐이다.
눈으로 무언가를 본다고 하자.
대부분 눈으로 쉽게 사물을 본다.
안과의사는 눈의 각 부분의 명칭이나 기능을 자세하게 알 수 있다.
그래서 이를 전문용어로 표현해 제시할 수 있다.
그런데 일반인은 망막과 각막이 무엇을 가리키는지 잘 모를 수도 있다.
그렇지만 일반인이나 의사나 다 눈을 뜨면 사물을 쉽게 본다.
이제 일반인이 필요한 것은 전문용어가 어떤 부분을 가리키는가만 하나하나 이해해가면 된다.
그것이 내용을 좀 더 깊게 이해하는 과정이다.
대장경도 사정이 비슷하다.
그런데 대장경은 위 경우보다 조금 더 사정이 어렵다.
현재 제시하는 내용 가운데 많은 부분이 마음현상과 관련된다.
그런데 마음은 자신부터 눈에 보이지 않는다. 또한 손으로 만질 수도 없다.
다른 이의 마음이나 마음내용도 직접 확인할 수 없다.
한편, 자신이 철수나 영희에게 어떤 마음 내용이나 마음을 곧바로 전달할 수도 없다.
자신이 어떤 감각을 하거나, 생각하거나 느낌을 느끼거나 하는 경우도 사정이 같다.
이런 가운데 이들 마음에 관련된 내용을 일정한 표현으로 나타내고 있다.
그런데 구체적으로 어떤 표현이 자신이 행하는 마음 활동 가운데 어떤 부분을 가리키는가가
문제된다.
이것이 문제될 때 객관적으로 이것을 정확하게 찾아내고 판정하기가 어렵다.
예를 들어 갑은 신식이란 표현이 a 를 가리킨다고 이해한다고 하자.
그리고 을을 b 를 가리킨다고 이해한다고 하자.
그렇다해도 서로간에 서로가 무엇을 가리킨다고 이해하는지부터 서로 파악하기 쉽지 않다.
또 이처럼 입장이 다를 때 그 가운데 어떤 입장이 적절한가도 또 결정하기 쉽지 않다.
그래서 대단히 이해하기 어렵게 된다.
그러나 희망이 있다.
여하튼 대장경의 각 표현은 현실에서 일반인들이 일반적으로 행하는 활동과 관련된다.
그래서 그 내용을 일반인들이 다 함께 갖추고 있다.
다만 지도의 사정처럼 특수기호가 정확하게 무슨 부분을 가리키는가만 문제가 될 뿐이다.
그래서 종전에 이 사정을 설명하기 위해서 어려운 표현을 피하고
단순히 눈을 감고 뜨는 동작부터 하면서
내용을 살핀 것이기도 하다.
첫 문제는 이것이다.
눈을 감으면 안 보인다.
그러다가 눈을 뜨면 무언가를 본다.
이 때 보인 내용이 어느 부분에 위치한다고 하자.
그 부분에서는 그 내용이 나타났다가 사라진다.
그릇이나 거울처럼 상황을 비유적으로 이해해도 된다.
그런 가운데 자신은 일정 부분은 사과이고 일정부분은 책상이라고 분별을 한다고 하자.
이 분별내용은 눈을 감아도 어느 정도 계속 떠올릴 수 있다.
그래서 앞 내용과는 사정이 조금 다르다.
한편 이들 내용은 '자신'의 감각이나 분별활동과 관련된다.
그런데 자신과 관계없이 원래부터 그대로 있다고 할 내용도 추리된다.
그래서 자신과 관계없이 본 바탕에 원래부터 그대로 있다고 할 내용은 무엇인가 이것도 살펴야 한다.
그리고 경전과 논서상에서 어느 표현인가를 이들 가운데 어떤 부분을 가리키고 있다고 하자.
이제 경전과 논서 상에서 전후 맥락을 살펴가면서
자신이 일상에서 늘 쉽게 대하고 행하는 상황을 놓고 맵핑을 해나가야 한다.
그래야 이후 경전 이해과정이 단축되어질 수 있다.
전문용어를 통해 이 과정을 단축해 짧게 표현하고 빨리 쉽게 이해할 수 있게 된다.
이는 컴퓨터에서 사용하는 단축키 기능과 같다.
본인이 다음 주소를 자주 이용한다.
https://buddhism007.tistory.com/entry/
그래서 이를 ent ,l 단축키로 맵핑을 했다.
아뢰야식이란 표현이 무엇을 나타내는지 불교사전 용어 풀이 내용을 참조하고 싶다고 하자.
그러면 ent ,l + 아뢰야식 이렇게 입력하면 된다.
https://buddhism007.tistory.com/entry/아뢰야식
이것을 더 짧게 다음 기호로 표시할 수 있다.
그런데 현재상태에서는 위 페이지에 내용을 아직 올리지 않았다. [ 안된다.]
대신 다음을 이용할 수 있다.
이는 위키백과 사전내용주소를 단축시킨 것이다.
ω아뢰야식
[ 이것은 현재 연결이 된다. ]
일단 주석번호가 붙은 경우는 주석내용부터 잘 참조하면 도움이 된다.
글 문단을 정리하면서 내용을 읽으려고 했다.
그런데 하루에 소화하기에는 분량이 너무 많다.
그런데 한편 여기에서 다루는 주제는 그간 다른 곳에서도 많이 다뤘다.
3유와 3 무의 관계 - 원성실상, 의타기상, 변계소집상, - 승의무자성 생무자성 상무자성
그리고 심 의 식의 시설문제
유식 무경 이런 내용들이 이와 관련된다.
이들 내용이 다음에 조금씩 기술되어 있다.
그리고 아직도 시간나는대로 조금씩 정리중이다.
중복을 피하기 위해서 이 부분에 대부분을 넘긴다.
○ 마음현상에 대한 논의 - 전체 내용
https://buddhism007.tistory.com/4053
https://buddhism007.tistory.com/entry/마음-현상의-이해#gsc.tab=0 [불교진리와실천]
dict-list--editing_text.TX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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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만 내용을 이해하고 앞에서 말한 논서표현과 관련해 리맵핑을 하려면
먼저 자신이 자신의 마음을 놓고 실험을 많이 하면서 스스로 관찰을 행해야 한다.
눈을 뜨고 사과를 하나 놓고 실험을 반복해보아야 한다.
이 사과를 눈을 떠서 잘 본다.
그리고 또 눈을 감는다.
이것을 먼저 많이 반복한다.
옆에 자신이 신뢰하는 철수와 영희를 놓고 같이 실험한다.
그리고 철수와 영희가 보고하는 내용도 잘 듣는다.
그래서 자신이 경험한 앞 내용이 철수와 영희는 어떻게 여기는가를
또 입장을 바꾸어 잘 헤아려야 한다.
그런 가운데 사과에 손을 댄다.
사과를 손으로 두드려 소리를 듣는다.
그리고 냄새를 코로 맡는다.
입을 대어서 사과를 조금 먹으면서 맛을 본다.
손으로 사과를 만지면서 촉감도 느껴본다.
이렇게 얻은 각 내용을 서로 비교해본다.
그리고 다시 이 사과를 손에 쥐어 반으로 나누어 옆에 있는 철수와 영희에게 건네 본다.
이 상황에서 철수와 영희가 무엇을 받는다고 여기는가.
위 논서에서는 이들 내용이 마음 내용이라고 제시한다.
그런데 이 상황에서 과연 철수는 자신의 마음의 한 부분을 받아간 것인가.
자신도 자신의 마음 한 부분을 건넨 것인가.
또 반대로 철수가 다시 사과 일부를 자신에게 건넨다고 하자.
이 경우도 자신이 철수의 마음 일 부분을 받게 된 것인가.
이것을 놓고 유식무경설을 잘 음미해야 한다.
논서에서도 이 점에 관련해 구체적으로 밝히고 있다.
따라서 잘 살펴야 한다.
한편 사과가 현실에서 얻어지는 과정을 놓고 또 잘 살펴야 한다.
그리고 이 내용을 바다와 산과 해와 달을 놓고 또 잘 살펴야 한다.
밤에 불을 놓아 돌리면 원 모양이 보인다.
이 원 모양이 무언가도 이와 관련된다.
그런데 오늘날 안경을 쓰고 안경테를 잡고 돌리면
밤에 달도 그처럼 돌아간다.
이 상황에서 자신이 평소 달이라고 여긴 내용이 무언가를 또 잘 음미해야 한다.
그리고 상황이 이처럼 유식무경으로서 오로지 마음일 뿐인데,
왜 자신과 영희와 철수를 포함해 대다수가
일정한 시간과 장소 그리고 상황에서
일정한 조건이 되면 엇비슷한 내용을 무량하게 반복해 경험하게 되는가를 놓고
그 배경사정을 살펴야 한다.
현실 하나하나가 꿈과 그 성격이 같다.
그런데 이런 점이 꿈과 다른 점이다.
그래서 꿈과 성격이 같으면서도 현실은 꿈과 달리 문제가 심각하다.
위 성격 때문에 대부분 현실 내용을 실답게 여기면서 집착하고 묶이게 된다.
그래서 유식 논서를 대하기 시작했으면 그 배경사정까지 다 파헤쳐 이해해야 한다.
처음에 보이지도 않고 만져지지도 않는 마음을
하나하나 시설하게 되는 배경 사정부터 잘 살펴야 한다.
처음에는 안식이 있는가부터 문제삼아야 한다.
그리고 점차 제 6 식 그리고 제 7 식 그리고 아뢰야식까지 살펴야 한다.
조금 복잡하다.
특히 보이지도 않고 만져지지도 않기에 더 문제가 많다.
원래 보이지 않고 만져지지 않으면 일반적으로는 없다고 하는 상태와 같다.
그런데 그렇지 않다고 하게 되는 그 배경사정부터 하나하나 살펴야 한다.
여하튼 자신이 혼자 실험을 많이 해야 한다.
마음 자체가 위와 같은 성격을 갖기 때문이다.
그런 가운데 논서 표현을 대해야 비로소 맵핑이 조금씩 가능하게 된다.
일반적으로는 증명방법으로 아귀상태를 놓고 증명을 시작하면 어불성설이라고 하게 된다.
또 멸진정을 놓고 증명을 시작하면 또 마찬가지가 된다.
일반적 입장에서는 아귀나 지옥세계 자체가 의문시된다.
그런데 이 내용을 놓고 다른 내용의 증명을 해나가면 곤란하다.
그래서 맵핑 자체가 되기 힘들다.
그래서 어려움이 많다.
여하튼 자신이 자신의 마음을 놓고 스스로 여러번 반추해보면서
살피고 헤아려야 한다.
그래야 논서에서 제시한 표현이 가리키는 내용을 찾아내고 내용을 이해해갈 수 있다.
오늘은 여기까지만 살피고 마친다.
◈Lab value 불기2564/08/18 |
Marie Laforet - Le Vin De L'ete (Summer Wine)
현실에서 사주나 점술, 그리고 별자리점, 카드점 이런 것에 의존하는 경우가 많다. 단순히 일상생활에서 의존하지 않고 대단히 큰 중대사. 그러나 선택에 따라 어떤 결과가 나타날지 모를 경우에 오히려 더 의존한다. 예를 들어 진학문제, 결혼문제, 사업의 향방 결정, 등에 이런 내용을 참조한다. 그런데 이런 경향은 국가 중대사에서도 마찬가지다. 과거에는 전쟁을 해야 하는가 이런 경우에 오히려 더 점술에 의존했다. 한심해 보인다. 그런데 그렇게 되는 사정이 있다. 어떤 선택을 하느냐에 따라 그 차이가 막대하다. 그런데 어떻게 될 지를 잘 모른다. 자신은 잘 모른다. 그래서 이것이나 저것이나 마찬가지라고 여기기 쉽다. 그런 경우 이왕이면 점술적으로 좋다고 하는 방안을 취하겠다. 이런 경우도 있다., 또는 이런 내용이 평소 신통하다고 여긴 경우 문제가 중대할 수록 더 이런 방안에 의존하게 된다. 또 세상사람들이 이런 상태이므로 이것을 이용하기도 한다. 수행자는 어떤가. 수행자도 생사현실에 임해 수행하려면 역시 시간과 장소를 다 따지게끔 된다. 이것도 동가홍상의 원리다. 어차피 모든 것이 다 차별없이 공하다. 그런데 이왕이면 그 가운데 생사현실에서 중생제도나 생사의 묶임을 벗어나는데 도움되고 좋은 것을 택하는 것이 낫다. 그래서 위 내용들도 함께 고려해야 한다. 어차피 이 이름이나 저 이름이나 같다고 하자. 그런데 절이름을 짓는다면 왜 하필이면 악마사 이렇게 지을 필요가 있겠는가. 보리사 이런 이름도 있는데 그런 이름이 낫지 않을 것인가. 그런 이치로 이왕이면 좋은 내용을 취하게 된다. 그러려면 또 대단히 뛰어난 분의 조언을 들어야 한다. 그리고 다음 생에 수행을 할 장소나 시간도 미리 잘 고려해서 그렇게 되도록 노력을 해야 한다.
운명 사주 이런 내용을 처음에 적은 것은 사정이 있다. 오늘 숙왕화님이 운명 예측 프로그램을 얻었다고 한다. 그래서 갑자기 sns 로 묘길상 인턴연구원의 생년월시를 아는가 그리고 기타 본인과 다른 연구원들의 생년월시를 묻는다. 그래서 적었던 것이다. 그런데 쉬면서 노래를 듣다보니 사주를 판명할 때 사용하는 간지 내용이 나온다. 임인년에 무언가 준비를 해야 한다는 듯 들린다. 오래 전에 부처님상 앞에서 음악공양 시설을 만들었었다. 그리고 계속 음악이 들리게 해 놓았다. 그래서 그런지 요즘 매번 경전 공부과정에서 쉴 때마다 그 때 그 때 상황에 들어 맞는 노래가 들리고는 한다. 사주 운명은 비과학적이라고 일반적으로 여긴다. 그런데 다른 과학지식도 사정이 같다. 물을 얼리면 얼음이 된다. 이런 것이 과학법칙이다. 그런데 물을 아무리 보아도 얼음의 모습과 성품이 얻어지지 않는다. 얼음도 마찬가지다. 얼음을 아무리 보아도 그 안에서 물의 모습과 성품이 얻어지지 않는다. 그런데 생사현실에서 어떤 부분을 물이라고 여기고 상을 취한다고 하자. 그런 전제에서는 그 물을 얼리면 그런 얼음을 보게 되는 관계를 수없이 반복하게 된다. 이것이 인과관계다. 또 사정이 이렇기에 현실 내용이 대단히 실답다고 잘못 임하게끔도 된다. 인과관계는 사실은 본 사정이 그렇지 않음을 알려주는 단서다. 즉 이런 관계를 통해서 이들 내용이 실답지 않음을 이해해야 한다. 즉 인과관계를 잘 살펴서 그 각 내용이나 관계자체가 무상함을 이해해야 한다. [무상] 더 나아가 고통과 관련되는 사정도 이해해야 한다. [고] 더 나아가 그 각 내용이 참된 진짜가 아님도 이해해야 한다. [무아, 무자성] 더 나아가 이들 각 내용의 본 바탕은 생사현실의 고통을 얻지 못하는 니르바나 상태임도 이해해야 한다. [열반적정] 더 나아가 이들 각 내용의 본 바탕은 이들 내용을 얻지 못하고 공하다는 사정도 이해해야 한다. [불가득 공] 현실에서 일정부분을 a 라고 여긴다고 취한다고 하자. 마찬가지로 일정부분을 b 라고 여긴다고 취한다고 하자. 그리고 이들 a, b 사이의 관계에서 a + b => C 라는 관계를 현실에서 확립한다고 하자. 그렇다면 이 관계식 자체가 동시에 앞에 나열한 내용을 모두 나타내고 있다. 그것을 잘 음미해야 한다. 그리고 C 는 a ,b 가 있는 상태에서는 없었음을 표시한다. 그것이 곧 C 는 그런 존재로서 무상한 것임을 나타낸다. 그것은 반대로 말하면 C 가 영원한 것이라면 그런 관계가 성립할 수 없음을 나타낸다. 나머지 항목들도 다 마찬가지다. C 가 좋음을 느끼게 하는 상태라고 하자. 그 C 가 위 관계로 얻어진다는 것은 그 과정에 고통이 들어 있다는 사정도 함께 제시한다. C 가 위 관계가 아니면 안 얻어진다. =\> 구부득고 C 가 다른 관계가 되면 무너지고 사라진다. => 괴고 C 가 이런 형태로 나타났다가 사라지고는 한다. => 행고 만일 이런 관계:로 나타나는 C 가 나쁨을 주는 내용이라고 하자 그렇다면 그것은 => '고고'와 관련된다. 나머지 내용도 다 마찬가지다. 그래서 처음 현실에서 a + b => C 라는 관계를 하나 확립하였다면 이를 통해 무상, 고, 무아, 무자성, 공이란 내용을 모두 이해해야 한다. 한편, 이들 내용은 금강경에서는 무유정법이란 내용과 관련된다. 인과관계를 파악할 때 일반적으로 다음과 같은 망집을 갖게 되기 쉽다. 예를 들어 물을 얼리면 얼음이 된다고 하자. 이 내용은 자신 뿐만 아니라, 영희나 철수를 포함해 대다수가 그렇게 그 내용을 관찰하게 된다. 그래서 대다수가 일정한 조건과 일정한 시간 공간 상황에서 일정한 조건으로 비슷한 내용을 무량겁에 걸쳐 반복 경험하게 된다. 경전에서도 이 사정을 그처럼 제시한다. 한번 행한 업은 무량겁을 두고 사라지지 않는다. 그리고 그 과보를 받게 된다. 이런 내용이 위와 관련된다. 그리고 사정이 이렇기에 일반적으로 이들 내용은 대단히 실답다고 잘못 여기게끔 된다. 더 나아가 인과관계를 잘못 대해서 이해하면 또 다음과 같은 잘못된 판단을 행하게끔 된다. 모든 것은 인과에 지배받는다. 어떤 것은 인과가 지배하고 어떤 것은 지배하지 않는 것이 아니다. 사정이 그렇기에 지금 상태에서 미래의 어떤 상태가 나타나는 것은 다 이미 인과률에 의해 정해졌다. 또 사정이 그렇기에 어떤 미래 사태는 운명적이다. 피할 방안이 없다. 지금 자신이 어떤 생각을 하는가부터가 인과관계에 의한 것이다. 과거에 철수를 보지 않았다면 자신이 지금 철수 생각을 하겠는가. 그런데 과거에 철수를 본 것도 또 마찬가지다. 그래서 일체가 다 인과에 묶여 있다. 또 사정이 그렇기에 이 상태에서 벗어날 수가 없다. 그래서 자신이 3 악도의 고통을 받게 되어 있다면 받을 수 밖에 없다. 반대로 자신이 천상에 태어나게 되어 있다면 또 그렇게 될 수 밖에 없다 심지어 아무 노력 없이도 필연적으로 그렇게 되게끔 되어 있다. 심지어 자신이 노력을 하게 되는 것이나 하지 않는 것이나 그것도 인과에 의해 묶여 있다. 심지어, 그런 생각을 어느 순간에 하는 것이나 하지 않는 것도 마찬가지다. 이런 입장을 취하게끔 되기 쉽다. 이것을 숙명론, 운명론, 또는 기계적 인과율에 따른 사전 결정론, 예정설, 등등으로 표현하게 된다. 그런데 이런 입장을 취하는 경우 또 그 자신은 자신 마음대로 행하는 경향을 갖는다. 그렇게 하면서 단지 그것을 위 내용으로 설명하고 해석할 뿐이다. 즉 실컷 자신이 원해서 무언가를 다 한다. 그리고 그렇게 하게 된 사정은 다 운명적이었다라고 여긴다. 그런데 알고보면 이것이 그렇게 잘못된 망집을 바탕으로 그처럼 이해하는 한편 또 그런 경우에는 그렇게 핑계를 대고 말하는 것 뿐이다. 왜냐하면 사실은 원래부터 그 주체는 자신이 원하는 것을 그렇게 하던 입장이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 경우 리맵핑이 필요하다. 현실을 있는 그대로 정확하게 관찰하고 대하는 노력이 요구된다. 인과관계 이론을 잘못 대하고 잘못 이해하면 운명론이나 필연론을 취하기 쉽다. 그것이 인과관계가 갖는 의미라고 잘못 이해하는 것이다. 그러나 사실은 그렇지 않다. 사주나 주역 점술 등도 사정이 마찬가지다. 처음 시간을 천간과 지지로 나누고 음양 오행설에 따라 배분해서 취했다고 하자. 이 이론을 바탕으로 하면 일체가 그런 분류방식으로 재분류된다. 그리고 그 상호관계를 살피면 앞 내용과 사정이 같아질 수 있다. 그리고 이들 내용이 경험과 시행착오를 거쳐서 보완된다. 과학지식과 사정이 마찬가지다. 처음 물은 0 도에서 언다고 파악되었다. 그런데 자세히 관찰하면 경우마다 다르다. 그래서 새 내용이 추가된다. 소금물은 사정이 다르다. 기압이 높거나 낮아도 사정이 다르다. 이런 식이다. 그러나 대충 보면 또 맞다고 여기게끔 된다. 주역과 같은 점술이나 점성술 사주 팔자 이런 것도 그래서 사정이 비슷하다. 그래서 넓은 의미의 인과관계에 해당된다. 'a 가 B 가 된다'고 하는 내용을 다음처럼 볼 경우가 있다. 'a 가 B 가 된다'는 그 과정에서 이 어느 경우에나 빼대로서 A 가 있다. 그래서 그 A 가 앞에서는 a 형태였다가 뒤에는 b 형태로 된다. 이렇게 이해할 경우가 있다. 그런데 이 과정에서 그런 것이 없다고 하자. 그러면 'a 가 B 가 된다'고 하자. 이 내용은 조금 표현을 잘 살펴야 한다. 'a 가 B 가 된다'고 할 때 여기서 a 가 그렇게 되었다고 하기 힘들다. 왜냐하면 B 라는 결과가 나타날 때는 그 상황에 a 는 사라져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 경우는 a 가 있다가 B 가 있게 되었다. 이렇게 표현해야 한다. 갑동이가 있다고 하자. 갑동이가 한 때 국회의원이었다가 국회의장이 되었다고 하자. 그러면 갑동이가 국회의원에서 국회의장이 되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5 대 국회의장은 갑동이였다. 그런데 6 대 국회의장은 을동이가 되었다고 하자. 이 경우 이 사실을 놓고 갑동이가 을동이가 되었다고 하기 힘들다. 그래서 이것부터 잘 살펴야 한다. 물이 얼리면 얼음이 된다는 경우는 어디에 해당되는가. 얼음이 나타날 때 처음 물로 본 내용이 그대로 어딘가에 있는가 이 문제다. 여하튼 인과관계에 대한 이해가 대단히 중요하다. 인과관계를 통해서 자동차도 몰고 다니고 집도 사고 온갖 일을 한다. 그런데 정작 자신이 이번 생에 이런 시간과 장소에 태어나 활동하게 된 첫 배경은 잘 이해하지 못한다. 그리고 그것은 그냥 우연적으로 태어나서 그렇게 시작된 것으로 이해하기 쉽다. 그러다가 죽으면 또 그것으로 자신과 관련된 것은 모든 것이 끝이라고 또 잘못 이해하기 쉽다. 그래서 잘 살펴야 한다. 여하튼 일체를 놓고 무언가 방식으로 분류를 한다고 하자. 세상의 일체는 가지가지다. 그러나 이것을 64 개로 모두 나누어 배당한다고 하자. 그러면 주역이론이 된다. 그 안에서 일체현상을 이해하고 해결해야 한다. 또 그렇게 임하면 그렇게 할 수 있다. 그런데 이를 통해 벗어날 수도 있어야 한다. 만일 벗어날 수 없다면 수행방안은 제시할 수도 없다. 제시할 필요도 없다. 그리고 단지 이렇게만 말해야 한다. 생사에 묶일 입장에 있으면 묶여 고통을 받는다. 그리고 벗어나 니르바나를 얻을 입장이면 벗어난다. 이렇게만 말하고 끝내야 한다. 그리고 생사를 벗어나기 위해 무엇을 어떻게 하라고 제시하기도 곤란하다. 그것도 할 상황이면 하게 되고 못 할 상황이면 아무리 하라고 해도 못한다. 이렇게만 보게 된다. 그런데 사정이 그렇지 않다.
비유하면 다음과 같다. 일체의 것은 흰색 노란색 이 둘도 아닌 것 둘이 섞인 것. 이렇게 분류해 넣을 수도 있다. 그렇게 분류하고 살피면 또 그 나름 그렇게 파악할 수 있다. 앞의 인과관계가 이런 바탕에서 처음 춥발한 것이다. 그런데 이런 내용에서 감미로운 음악은 어떤 것에 해당하는가를 살핀다고 하자. 그러면 여기 어디에도 해당이 되지 않는다. 그렇지만, 억지로 분류해 넣으면 또 넣을 수도 있다. 이것은 비유다. 일반적으로 잘못 이해하는 인과관계 이해도 사정이 이와 같다. 그리고 수행은 그렇게 이해하는 망집을 벗어나는 것이 요구된다. 그래야 생사의 묶임에서 벗어날 수 있다. 경전에 무량겁에 어떤 이가 성불한다는 내용이 제시된다. 이 입장은 앞에 말한 사전 결정성, 필연설, 예정설, 운명론 이런 입장과 비슷하다. 그런데 경전 입장은 그런 입장에서 이런 내용을 제시하는 것이 아니다. 망집을 바탕으로 현실에서 어느 부분에서 상을 취해 그것을 a 라고 여긴다고 하자. 그렇다면 그 전제에서는 그렇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이 생사현실 어느 상황 어느 단면에서도 그런 내용을 본래 얻을 수 없다. 그 사정은 바로 위와 같은 바탕에서 파악하는 인과관계로 재 확인활 수 있다. 인과관계가 확립된다. => 사정이 그렇기에 본래 사정이 그렇지 않음을 이해할 수 있다. 또 반대로 본래 사정이 그렇지 않다고 하자. 그래서 그 각 내용이나 관계가 참된 진짜가 있고 그래서 실다운 내용이라고 하자. => 그렇다면 현실에서 파악하는 그런 내용이나 관계는 파악할 수 없다. 이런 상호관계를 다시 이해해야 한다. 그래서 한편으로는 과거나 미래의 내용이 무량겁에 걸쳐 번뇌 - 업 - 고통의 관계로 이어진다고 제시한다. 또 반대로 깨달음을 구하고 서원을 일으킴 - 수행 - 해탈 니르바나(열반), 생사의 묶임에서 벗어남 이런 관계도 제시된다. 그리고 한번 행한 업은 무량겁을 두고 사라지지 않는다. 과보를 받는다고도 제시한다. 그런데 이 과정 결과 어느 한 단면에도 그런 내용은 얻어지지 않는다. 그래서 여기에서 이 관계를 벗어날 문이 찾아진다. 생사의 묶임에서 벗어날 해탈문이 그래서 실재와 관련해 공해탈문이 시설된다. 또 감각현실과 관련해 무상해탈문이 시설된다. 그리고 관념분별과 관련해 무원 무작 해탈문이 시설된다. 이 해탈문을 통해 벗어나면 위 내용은 본래 얻어지지 않는 내용임을 이해할 수 있다. 비유하면 눈을 통해 보고 있다고 여긴 흰색 노란색 파란색 빨간색 검정색은 소리의 영역에서 본래 일체 얻어지지 않는 내용인 것과 사정이 같다. 이것은 비유다. 반대로 말하면 다양한 소리는 또 눈으로 얻는 영역에서는 본래 얻어지지 않는다. 서로 대단히 엉뚱하다. 이런 관계성을 이해해야 한다. 현실에서는 자신이 대하는 현실 내용에 처음부터 갇히게 된다. 생을 출발할 때부터 자신이 얻는 감각현실에서부터 갇히게 된다. 그것이 시원적으로 절대적인 의미를 준다고 잘못 여기게 된다. 그리고 그 바탕에서 모든 것을 쌓아 올리게 된다. 그러나 본래는 그렇지 않다. 그리고 그렇게 갇힌 상태에서 파악하는 내용을 통해서 본 사정이 그렇지 않음을 거꾸로 이해할 수 있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처음부터 갇혀서 끝내 벗어나지 못한다. 본 바탕의 내용을 그 상테에서 얻지 못한다. 그런 가운데 현실에서 얻는 내용들로 본 바탕의 사정을 헤아리지 못하면 곤란하다. 이는 마치 꿈을 꾸면서 꿈 내용을 통해 꿈 밖의 세계를 헤아리는 것과 같다. 그래서 꿈 안에서 그 꿈 내용이 실답지 않음을 깨달아야 한다. 그래야 꿈안에서 꿈에 갇히지 않게 된다. 이런 비유와 사정이 같다. 현실에서 갇히면 생사의 묶임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계속 그 상태로 무량하게 묶여 돌게 될 뿐이다. 그래서 한편으로는 그런 바탕에서 인과관계의 이해가 필요하기도 하다. 그런데 궁극적으로 이를 통해 망집을 제거하고 생사의 묶임에서 벗어나는 데에도 대단히 필요하다. 쉴 때마다 글 내용과 관련된 내용을 듣게 된다. 오늘 운명을 맞추어보겠다고 숙왕화님이 나서서 글이 시작되었다. 그런데 인과관계에 대해서는 설명할 내용이 많다. 일반적으로 오해하는 내용도 많다. 그래서 글을 적었다. 그런데 숙왕화님을 옹호하는 노래가 다시 들린다. 인과관계에서 필연론 숙명론으로 빠지는 사정만 조금 더 살피고 간단히 마치기로 한다. a 에 b 가 더해져 C로 변화했다고 하자. 이를 a + b => C 로 나타낸다고 하자. 현실에서 이런 식으로 나타날 구체적 사례를 대단히 많이 본다. 그런데 필연론이 의미하는 바는 다음이다. a + b => C 이 과정에서 a + b => D a + b => E a + b => F ..... 등의 다른 경우는 '없다'고 여긴다고 하자. . 그런 경우 a + b => C 가 나타난 것은 그렇게 될 수 밖에; 없어서 그런 것이다. 필연적이다. 이렇게 보게 된다. 그런데 이와 달리 그런 다른 경우들이 '있다'고 하자. 즉 a + b => C 이 과정에서 a + b => D a + b => E a + b => F ..... 이런 경우도 가능하다. 그런데 그런 경우 a + b => C 가 나타났다. 그것은 그렇게 될 수 밖에 없어서 그런 것은 아니다. 우연적이다. 이렇게 보게 된다. 그런데 현실은 어떤가. a + b => C 이 과정에서 각 주체가 보고 얻는 내용은 a + b => C 이것 뿐이다. 그리서 다른 경우가 그 상황에 있는가 없는가는 정할 수 없다. 다른 경우가 있고 없다는 판단은 사실 그 구체적 상황을 놓고 행한 판단이 아니다. 다른 장소 다른 유사 실험실. 이런 것을 놓고 위처럼 제시하는 것뿐이다. 그래서 그 구체적 상황에서는 위 내용은 정할 수 없다. 더 나아가 그 상황에서 a + b => C 라고 본 내용 자체를 얻을 수 없다. a 도 b 도 C 도 얻지 못한다. 그 관계도 얻지 못한다. 그런데 망집을 일으킨 상태에서는 ○ 라는 감각현실을 얻고 그에 대해 묶고 나누어 일정부분에서 a 라는 생각■을 일으킨다. 또 마찬가지로 b 라는 생각■을 일으킨다. 또 마찬가지로 C 라는 생각■을 일으킨다. 그렇게 상을 취한 바탕에서 대하면 a + b => C 라는 관계로 이를 대하게 되는 것 뿐이다. 그런데 여기서 감각현실○ 에는 관념■ 은 얻을 수 없음부터 기초적으로 파악해야 한다. 본 바탕 #에서는 감각현실○ 이나 관념■ 도 함께 사정이 같다. 그래서 얻을 수 없다고 제시한다. 감각현실○ 은 관념■ 이 아니다. 또 관념■은 감각현실○ 이 아니다.
감각현실○ 도 본바탕# 이 아니다. 본 바탕#은 관념■ 이 아니다. 관념■도 본 바탕 # 이 아니다. 그래서 이 관계를 있는 그대로 파악해야 한다. 그러나 공한 실재를 본 바탕#으로 한 가운데 현실에서 각 주체가 감각현실 ○ 도 얻고 관념 ■ 도 그처럼 일으킨 것은 사실이다. 마치 침대에 누어서 꿈 속에서 바다나 황금꿈을 꾼 경우와 같다. 이 경우 현실의 침대도 있고 꿈도 그처럼 생생하게 꾼 것도 사실이다. 그런데 여기서 꿈 속의 바다와 황금은 침대에서 얻을 수 없음을 제시한다. 현실도 마찬가지다. 그래서 이 관계를 있는 그대로 잘 파악해야 망집을 제거할 수 있다. 망집이 제거되면 생사현실의 각 단면에서 생사에서 벗어날 해탈문을 찾아낼 수 있다. 실재#가 공하다. => 현실에서 문제삼는 내용은 본 바탕에서는 얻을 수 없다. => 공해탈문이다. 감각현실 ○ 의 일정부분이 곧 자신이나 영희나 철수, 의자 바위 등으로 여기고 대한다. 현실에서 영희가 어디 있는가? 바위는 무엇인가라고 물으면 보통 손가락으로 일정부분을 가리킨다. 이처럼 일정부분을 그런 것이라고 여기고 취한다. 이것이 상을 취하는 현상이다. 그런데 사실은 그런 것이 아니다. 그런 감각현실 ○ 도 생생하게 얻는다. 또 그런 상황에서 각 부분을 묶고 나누고 헤아리면서 각종 관념■을 일으킨다. 그래서 현실에서 감각현실○ 도 얻고 관념■도 일으킨다. 그래서 이들 내용을 그처럼 얻는다. 그러나 일정한 관념■이 ○ 안에 있는 것은 아니다. 그래서 문수보살님이 어디 있는가라고 물을 때 손가락으로 ○ 의 일정부분을 가리키면 안 된다. 그러면 그렇게 상을 취한 것이다. 그러면 문수보살님이 이렇게 질책을 하게 된다. 만일 그렇다면 그 상황에 2 문수가 있게 된다. 어떡하려고 그러는가. 이렇게 질책하게 된다. 망집을 일으키면 감각현실 ○ 과 관념 ■ 에서부터 그처럼 접착시켜 혼동을 일으키게끔 된다. 이것을 무상해탈문을 통해 시정해야 한다. 그래서 가장 집착을 갖고 대하는 아상, 인상(보특가라상), 중생상 수자상을 제거하고 임해야 한다. 여기서 보특가라는 설명이 조금 필요하다. 앞에 제시한 경전에서도 나온다. 이렇게 보자. 갓난아이때를 생각해보자. 그리고 그 갓난아이가 노인이 되었다고 해보자. 이 갓난아이때 그가 자신으로 여긴 내용이 있다. 그리고 노인이 되어서 그 상황에서 그가 자신으로 여기는 내용이 있다. 이 두 내용은 하나도 일치하지 않는다. 육체적 요소거나 정신적 요소나 다 마찬가지다. 그래서 물이 얼음이 되었다는 경우처럼 된다. 각 단면의 모습과 성품이 자세히 헤아리면 매 경우 다르다. 이를 관통해서 계속 꾸준히 유지되는 A를 찾을 수 없다. 사정이 이렇다. 그렇지만 현실의 누구나 이 갓난아이와 노인을 한 주체라고 여긴다. 거기에는 사정이 있다. 무엇이 되었던 각 순간에 일정 내용을 자신으로 여기고 대하게 하는 일정한 기제가 들어 있다. 일정한 기제에 바탕해서 각 순간에 일정 내용을 스스로 자신으로 여기고 대한다. 그리고 이 기제가 생사를 넘어서 계속 그렇게 작용한다. a => b =>c =>d 이런 형태로 변했다고 하자. 갓난아이 => 청소년 => 장년 => 노인 이런 형태와 같다. 이 때 a => b =>c =>d 는 인과관련성만 가지고 설명하기 힘들다. 인과관련성만 가지고 이야기하면 오히려 다음처럼 자신을 이어가야 한다. 어제 먹은 양배추 햄조각 => 오늘의 자신의 몸 => 3 일후 소대변으로 배출한 내용 어제 읽은 소설책 내용 어제 본 드라마 내용 => 오늘 자신의 마음안 내용 => 3 일후 까맣게 잊어 버린 내용 이것이 사실은 발생적 인과설명에 더 가깝다. 그런데 현실에서 이들 내용을 자신이라고 연결시키지는 않는다. 반대로 그 과정이야 어떻던 매 순간 자신으로 취하는 내용이 따로 있다. 경전에서는 이를 색,수,상,행,식으로 분류해 제시한다. 그런데 매 순간 그런 내용을 자신으로 취하게 하는 기제가 있다. 일정한 상황에서 그 기제에 바탕해 대하면 그러그러한 내용을 자신으로 여기고 대하게 된다. 이런 뜻이다. 즉 망집을 일으키고 난 후 감각하고 분별하는 가운데 임하면 현실에서 눈을 떠 자신으로 여기고 대하는 그런 부분을 자신으로 여기고 대하게끔 된다. 그 기제를 바탕으로 임하면 갓난아이때는 그런 갓난아이 모습을 자신으로 매순간 여기고 임하게 된다. 청소년 때도 장년때도 노인때도 사정이 달라지지 않는다. 즉, 근본정신을 바탕으로 해서 그런 기제로 임하면 매 순간 그렇게 임하게 된다. 그리고 그렇게 매 순간 대하게 된 내용을 이으면 위와 같은 내용들을 자신이라고 죽 이어 붙이게 된다. 그리고 그렇게 해서 생사를 넘어 생을 이어가게 된다. 여기서 각 순간의 모습은 다르지만, 그렇게 이어 붙이게 하는 일정한 주체를 관념하게 된다. 이른바 생사윤회의 주체문제다.ㅏ 이것이 보특가라가 나타내는 내용이다. 한문경전에서 인상이라고 표현하는 내용과 관련된다. 한자에서 인은 남이라는 뜻도 갖는다. 그래서 남이라고 해석하기도 한다. 관계없다. 무상해탈문에서 버려야 할 상은 모든 상이 대상이다. 다만 한 주체가 가장 집찾을 갖게 되는 것을 나열하게 된다. 어떤 이가 자신에 대해 집착하는 만큼 남에 대해서도 집착한다면 남에 대해 상을 취하는 것도 여전히 문제된다. 그래서 영희상도 제거하고 철수상도 제거해야 하는 것은 사정이 같다. 그렇지만, 자신의 집착이 가장 강하다. 다른 나머지에 대해 집착을 다 제거해도 대부분 이 부분에서 갈이 묶인다. 상을 취하고 그렇게 묶이는 것이다. 그래서 이 해결이 핵심이다. 마찬가지로 갓난아이때부터 지금까지 일정한 자신이 있다. 이렇게 여기고 상을 취하면 또 마찬가지가 된다. 아뢰야식이 있어서 생사를 이어서 무한히 이어지는 주체가 있다. 그렇게 여기고 아뢰야식의 설명을 대하면 그런 상태가 되기 쉽다. 그런 상태가 되라고 경전에서 아뢰야식을 제시하는 것이 결코 아니다. 그런데 경전 설명을 대하다 보면 그렇게 되기 쉽다. 그런 생각을 일으키게 하는 내용들이 함께 제시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주의해야 한다. 그것 상들을 제거하면 무상해탈문을 성취하게 된다. 그리고 현실에서 망집에 바탕해 일으키던 희망을 제거해야 한다. 희망은 관념영역에서 조합해서 만들어 낸다. 영희가 갖고 있는 자동차 + 철수가 다니는 직장 + 병쇼가 지닌 인격 + ... 이런 식으로 조합해서 만들어낸다. 그래서 내가 만일 ~~~~ 하게 되면 좋겠는데 이런 생각을 일으킨다. . 그리고 망집에 바탕했기에 그런 희망을 감각현실 ○ 영역에서 얻어내려고 노력을 시작하게 된다. 왜냐하면 손가락으로 희망이 성취된 상태를 가리킬 수 있어야 희망이 성취된 것으로 여기기 때문이다. 앞 증상과 바탕이 같다. 그래서 업을 행한다. 그러면 생사현실에서 문제가 되는 고통의 상황에 처하게 된다. 이 고통을 해결하려면 앞 단계에서 미리 예방해야 한다. 앞 단계에서 이들 해탈문을 통해 망집을 제거하면 그에 바탕해 행하던 업도 제거된다. 그리고 추가로 과거에 쌓아 놓은 업의 장애만 수행으로 제거하면 생사의 묶임에서 벗어나게 된다. 그리고 이후 생사에 묶이게 하는 신견도 제거할 수 있게 된다. 즉 처음 자신이 무언가라고 물을 때 나는 생각한다. 그러므로 존재한다. 이런 식으로 답하기 쉽다. 아니면 거울을 보면서 손가락으로 저 부분이 나라다로 가리키는 증상이 문제다. 또는 내가 움직이려고 할 때 그 뜻에 따라 같이 움직이는 부분들이 곧 나다. 다만 양말과 옷과 신발은 제외한다. 이런 식으로 생각하기 쉽다. 아니면 조금 더 경전과 논서를 대한 경우 근본정신 아뢰야식이 나의 본 정체다. 이렇게 잘못 여기게 된다. 이것이 자신의 정체와 관련해 일으키는 망집현상이다. 신견이라고 표현한다. 그런데 현실에서 일반적으로 이 신견을 바탕으로 임하지 않으면 하루도 생활하기 힘들다. 식사도 하고 잠도 자야 한다. 그것이 모두 신견을 바탕으로 이뤄진다. 자동차를 몰고 다니거나 거리를 거닐 때는 사정이 더 심하다. 그런 신견을 떠나면 바로 사고를 당하게끔 된다. 그런데 사실상 그것이 자신이 아님을 이해해야 한다. 그리고 그 묶임에서 벗어나야 한다. 그런데 현실적으로 대단히 힘들다. 이론적 이해도 어렵다. 그런데 그 이론을 현실에 적용해 실천하기는 더 어렵다. 그러나 수행을 통해 성취되면 아라한과 같은 성인 상태가 된다. 그리고 생사 묶임에서 벗어나게 된다. 그렇지만 현실적으로 이런 상태를 기대하기가 극히 힘들다. 그래서 현실적으로 99% 대부분 경우에서는 예방적으로 먼저 우선 성취해야 할 수행이 있다. 이는 그런 신견을 바탕으로 매 순간 자신으로 여기게 되는 내용을 전제로 한다. 그런 자신이 고통을 받는 상태에 처하고 묶이지 않도록 예방을 먼저 우선해야 한다. 그것은 또 신견을 완전히 제거하기 힘들기 때문이다. 제거하면 좋지만, 현실적으로 그렇지 못하다. 그래서 신견을 바탕으로 해서 자신이 그런 3 악도의 상태에 처하지 않도록 예방해야 한다. 또 중생제도를 위하는 수행자의 경우에서는 이 요구는 마찬가지다. 중생제도는 생사현실에서 행해야 하기 때문이다. 즉 생사현실에 임해 중생과 눈높이를 맞추어서 제도를 해나가야 한다. 그런 사정으로 자신부터 생사현실에 처해 고통을 받는 상태에 묶이지 않아야 한다. 계를 성취하지 못해 자신부터 생사에 묶이게 된다고 하자. 그렇게 되면 다른 중생제도는 멀어진다. 따라서 계의 성취가 우선적으로 필요하다. 그런 가운데 신견 망집을 제거해나가야 한다. 그 수행의 고비가 안인 수행의 성취에 있다. 예를 들어 성삼문이 묶여 고문을 당하는 상황과 같다. 또는 금강경에서 인욕선인이 가리왕에게 사지를 절단당하는 상황과 같다. 이런 상황에서도 상을 취하지 않고 평안하게 임할 수 있는 상태가 되어야 한다. 이것이 신견이 제거된 상태를 의미하는 것이기도 하다. 그러나 현실에서 이렇게 임하는 것이 결코 이론처럼 쉽지 않다. 그래서 신견을 제거한다는 문제는 대단히 힘들다. 그러나 이것을 성취하면 생사현실 일체가 그대로 니르바나의 상태가 된다. [생사 즉 열반 ] 그런 경우 생사현실 일체가 곧 극락이라고 할 수 있다. [ 극락과 지옥이 둘이 아니어서 =>일체가 다 극락같다] 그리고 대단히 수준높은 수행자 단계로 넘어간다. 불퇴전위에 이르고 이어서 무량한 방편지혜를 닦아나갈 수 있다. [무량행문] 그런데 그렇지 못하면 그 정반대 상태가 된다. 그 경우에는 본래 생사고통을 떠난 니르바나에 처해서 거꾸로 여기서 생사고통을 겪어 나가게 된다. [열반=> 생사 ] [열반 즉 생사 ] 그런 경우는 설령 극락에 가서도 온갖 것이 마음에 안 맞아서 고통을 겪게 되기 쉽다. [ 극락과 지옥이 둘이 아니어서 =>일체가 다 지옥같다] 그리고 그런 상태는 약간의 방편 지혜를 성취하게 되어도 곧 빼앗기고 묶이게 된다. 그리고 생사과정마다 강제 포맷처리를 당하게끔 된다. 기억 상실 환자 상태에 준하게 된다. 매 생마다 생을 이어 수행을 이어나갈 수도 없게 된다. 위험하기 때문이다. 이것이 중생이 겪는 분단생사윤회과정이다. 그래서 대부분 자신이 왜 이번 생에 이렇게 임하게 되었는지 그 맥락 차체를 모르고 임하게 된다. 알면 위험하기 때문이다. 그 사정은 또 앞에 제시되고 있다. 안인이 성취되지 않고 망집이 제거되지 않으면 그렇게 된다. 성삼문이 이번 생에 자신을 고문했던 셰조를 만난다. 이런 경우 위험하다. 바람직하지 않다. 안인이 성취되지 않으면 분단 생사에서 벗어나기 힘들다. 그러나 성취되면 모든 것이 수행에 도움이 된다. 그래서 수행자는 서원을 매 생마다 이어 나가게 된다. 변역생사과정을 거처서 생사현실에 임해 매생마다 중생제도를 위한 수행에 임하게 된다. 수행을 성취하지 않고 보리심을 일으켜 서원도 일으키지 않은 경우라고 하자. 그런 경우는 원하는 것과 달리 매 생마다. 업의 장애로 인해서 원치 않는 상태로 강제로 묶이게 된다. 희망과 현실이 제각각이 된다. 그리고 그 희망이 자신을 더욱 고통스럽게 만들게 된다. 그래서 이런 상태를 벗어나야 한다. 숙왕화님이 다음 생을 기획하기 위해 준비중인 듯 하다. 그러나 기본수행부터 잘 성취해야 한다. 그런 경우라면 다음 생을 놓고 서원의 성취를 기획하면서 사주나 작명도 잘 고려해야 한다. 그러나 그렇지 않으면 큰 의미가 없다. |
문서정보 ori
https://buddhism0077.blogspot.com/2020/08/2564-08-18-k0595-004.html#1230 sfed--섭대승론석_K0595_T1598.txt ☞제4권 sfd8--불교단상_2564_08.txt ☞◆vhfp1230 불기2564-08-18 θ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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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大) 3재(災)의 하나. 4겁 중 괴겁(壞劫) 때에 일어나는 큰 풍재(風災). 땅 속의 풍륜(風輪)에서 맹풍이 일어나 제3선천(禪天)까지를 모두 바람으로 날려버린다고 함.
답 후보
● 겁풍(劫風)
결사(結使)
경량부(經量部)
경탑(經塔)
계(界)
계내교(界內敎)
계백(啓白)
ॐ मणि पद्मे हूँ
○ [pt op tr]
○ [pt op tr]
● 섭대승론석_K0595_T1598 [문서정보]- 일일단상키워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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