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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구자료

3악도를 벗어나는 방안

진리와 가치를 고루고루 2017. 8. 23. 18:2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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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buddhism007.tistory.com/3470

● 이하 글은 단상_조각글 내용을 주제별로 '편집중'인 상태의 글입니다.



지옥과 아귀 축생 상태로 향해 나아가는 수송열차에서 

긴급하게 탈출하고 

복락을 얻는 방안에 대해서 논의했다. 


그런데 만일 지금 당장 그런 수용소에서 

고통을 받고 있다면 어떻게 하는가. 

역시 같은 방안을 사용하면 된다고 본다. 


현실에서 이런 경우가 가끔 있다. 


자신이 몸이 아파서 병실에 있는데 

문병을 온 가족이나 친지가 

하등 도움이 안 되고 

오히려 더 병을 만들고 사라지는 경우가 있는 것이다. 


자신의 몸이 아파서 힘든데 

면회를 와서 오히려 더 걱정을 안겨주고 가는 

특수한 경우이거나, 

또는 병원비 해결해도 전혀 아무런 도움도 안 주고 

심지어 파인애플 통조림도 주지도 않고 

냉장고를 뒤져서 있는 과일을 다 깍아 먹고 

사라지는 그런 경우가 가끔 있다는 것이다. 



또 하나 사례는 다들 퇴원을 하는데 

공교롭게 남들이 그렇게 퇴원하는 날 

자신의 담당의사가 와서 자신에게는 

상태가 점점 안 좋아진다고 와서 

수술날짜를 상담한다거나 그런 경우도 있다. 


이것은 하나만 놓고 보면 견딜만 한데 

그러나 다른 경우와 비교하면 그 때 

더 불쾌나 고통을 인식하게 되는 그런 경우다. 


어떤 같은 물건을 사서 큰 불만없이 사용하고 있는데 

어느날 친한 사람이 다가와서 얼마에 샀는가 묻는데 

자신은 그런 물건을 1000 원에 샀는데 

왜 그렇게 비싸게 샀는가라고 물으면 

공연히 짜증이 생기는 경우가 많은 것이다. 


그런데 알고보면 이 경우나 저 경우나 

다 자신이 직접 만들어 사용하는 것보다는 

훨씬 싸게 구한 것인데도 

그래도 속이 상하다고 여기는 경우도 있는 것이다. 


이런 것이 다 수행이 얼마나 되었는가 

안 되었는가에 따라 달라지는 일상생활의 애로사항이라고 

할 수 있는데 


그러나 상태가 심한 경우가 있는 것이다. 



그것을 경전에서 거꾸로 매달려 

고문을 받고 있는 상황에서 

위와 같은 경우를 만난다고 하는 사례로 제시하는 것이다. 


실감이 안나면 동네 운동장 철봉에 자신이 

매달려서 한 30 분 있어보면 

그 상황의 심각성을 음미하게 되는 것이다. 


왠만하면 30 분 정도 지나면 내려주어야 하는데 

내려주는 이가 없는 것이다. 


그런 상태에서 가족이나 친한 이들이 방문했는데 

내려주기는 커녕 앞의 사례처럼 

그 상태에 무언가 더 무거운 것을 얹어 놓고 

바삐 사라지는 경우도 있는 것이다. 


더 상태가 심한 것은 같이 옆에 매달려 있던 이들이 

몇몇 있었는데 이들이 어느 순간 풀려나서 

환호를 지르면서 밖으로 나아가는데 

자신은 그 때마다 더 무거운 것을 얹어서 더 있어야 한다고 

통고를 받거나 하면 더 상태가 심각해지는 것이다. 


모자나 옷을 산 가격만 나중에 비교하고 

자신이 비싸게 샀음을 알게 되어도 

속이 상한데 

이런 상태에서 이런 비교를 하고 있으면 

오죽하겠는가. 



그래서 지옥에서 탈출하는 것이 어려운 것은 

지옥 밖에서 생활하는 이들 때문에 어려운 것보다 

지옥에서 혼자만 나가는 것을 싫어하는 

다른 지옥 동료들 때문에 더 힘들다는 것이 

일반적인 평가다. 


이 경우에도 그냥 같이 다 함께 나가자라고 같이 임하면 되는데 

그 상황에서 서로 자신만 나가야 한다거나 

자신만 조금 먼저 나가야 한다는 등으로 

임하는 가운데 그것이 다 함께 실패한다는 

사례가 경전에서 제시되고 있는 것이다. 


그것이 왜 그런가하면 

위와 같은 상태에서 이 문제를 바라보기 때문이다. 

다 같이 급하고 절실하고 이런 가운데 

조금이라도 밀리면 자신은 혼자서 

그렇게 계속 있어야 한다고 여기게 되므로 

더 공포스럽게 되어서 그렇다고 보는 것이다. 



여하튼 자신이나 자신과 친한 어떤 이가 

그처럼 거꾸로 매달려 고통을 받고 있으면 

여기에서 벗어나와야 하는데 


여기에 어려움이 있는 것은 

매달려 있을 때는 3 분도 못 견뎌 하는 이들이 

하나같이 그 상태에서 벗어나면 

거기에 왜 그렇게 매달려 있게 되었는가. 

또 얼마나 고통스러웠는가. 

이런 것을 다 잊어 먹고 

또 그렇게 매달려 있던 상태가 되게 한 

원인을 다시 만들어 나간다는 점이라고 본다. 


그런데 왜 그런가는 그 주체가 

치매 걸린 붕어와 같은 상태로 

매번 상황을 대하기에 그렇게 된다고 제시하게 된다. 


자신은 그런 증상이 없을 것 같지만, 

곰곰히 생각해보면 

그렇게 매번 반복해 겪는 곰곰한 고통들을 

떠올리는데 큰 어려움이 없을 것이다. 


MUN 님이 한국어에 곰곰하다란 표현이 

있는가 물어 보는데 

곰곰히가 있으면 곰곰하다도 있다고 알아야 한다고 본다. 

아름답게가 있으면 아름다운 아름답다란 표현도 있다고 보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그런데 여기서 곰+곰에 깊은 의미가 있다고 보는 것이다. 

곰이 동물 중에서 상당히 똑똑한데 

그러나 곰 취급을 받는 것은 

혼자 자신의 재주만 믿고 임하기에 그렇다고 보는 것이다. 


그래서 곰곰히 생각하고 곰곰한 생각을 바탕으로 

현실에 임해야 문제 상황에 들어가지 않게 되는 것이다. 


곰이 거꾸로 매달려 있다가 풀려나면 

매달려 있던 당시 느끼던 고통을 못 느낀다. 


또 장래 매달려 받을 고통을 못 느낀다. 


그리고 무엇을 하면 그렇게 매번 

그런 고통을 반복해 받는지도 모른다. 

또는 알아도 곧 잊는다. 


이런 증상이 있을 때 

자신은 비록 그런 상태지만, 

주변에 다른 동료 곰들이 어떤 상태에 있고 

어떻게 해서 그렇게 되었나를 잘 곰+곰히 생각하다 보면 

그런 상태를 피할 수 있다라고 제시하고 


또 상태가 그렇기에 

자신은 지금 그런 상태가 아니더라도 

그런 상태에 있는 다른 이를 

또 열심히 구출하면 

반대로 자신이 그런 상태에 처하게 될 때는 

그 반대로 그런 상태로부터 

쉽게 벗어나오게 된다는 관계를 

여기서 제시하는 것이다. 



그리고 여기에 다시 봉타래수행자가 

권유하는 방식을 또 덧붙이게 된다. 



원래 그처럼 거꾸로 매달려 있을 때 

자신이 혼자 힘으로 

이미 제시한 3 해탈문을 통해서 

벗어나오려고 하면 

상당히 힘든 것이다. 


이론상 본 상태가 그렇지 않다고 제시한 것이고 

또 이론상 화면을 두개 겹쳐 놓고 자꾸 대해서 

자신이 생각하는 내용이 그 현실에 그렇게 진짜 있는 것처럼 

착각이 자꾸 들지만, 

사정이 본래 그렇지 않음을 제시해서 

무상 해탈문을 제시한 것이고 


어차피 그런 내용을 그 현실에서 얻어낼 도리가 없지만, 

그러나 앞과 같은 상태에서 무엇이 얻어진다고 보는 그런 내용을  

그런 방식으로 추구하면 

자신과 다른 생명을 모두 극심한 생사고통을 겪게 하는 것이므로 

이를 남김없이 제거하는 한편 


또 같은 내용이더라도 

자비를 바탕으로 그 취지나 방식을 달리해서 추구하면 

무량하게 복덕과 지혜를 얻게 됨을 제시해서

유희 자재 신통력을 갖추고  

무량행문을 닦아 나갈 것을 제시한 것이다. 


이렇게 원리는 간단한데 

정작 수갑이 채워져서 철봉에 거꾸로 묶여 있는 상황에서는 

그것 하나하나가 하나도 제대로 

잘 안된다는 것이 일반적이다. 


그러니 어떡하는가. 


여기에 봉타래 수행자가 권유하는 

방편의 효용이 있는 것이다. 


결국 이 분야의 전문가가 

이런 노력을 행하여 이런 생사고통을 면하는 수행을 하여 

그 공덕을 남김없이 더 나은 상태로 돌려 나아갈려고 할 때 

바로 그 순간을 포착해서 

이제는 별 필요없고 

쓰다 남은 그런 도구나 상태를 얻어 사용하면 

그 문제가 바로 해결된다고 제시하는 것이다. 


현실에서 라이터가 필요해서 

자신이 직접 만들어 사용하려면 힘든 것이 사실이다. 


그런데 누가 담배를 피우는데 

이제 담배는 끊고 

앞으로 열심히 운동이나 해야겠다고 할 때 

바로 이 순간을 포착해서 

라이터 좀 빌려 달라고 하면 

잘 빌려주기도 하지만, 

때로는 아예 가지라고도 하는 것이다. 



그래서 이 원리에 의해서 

우선 자신에게 가장 가까운 가족들이 

위와 같은 고문을 받고 있을 가능성이 높다면 

그 시기를 잘 포착해서 

미리 잘 준비를 해야 한다고 권유하는 것이다. 


그러면 또 어떻게 될 것인가. 


당연히 자신도 이로 인해 편하게 상태가 

바뀌는 것이다. 

이는 현실 상황과 같다. 


자신의 형제나 자식이 상태가 안 좋으면 

그로 인해 그 형제나 자식이 

자신에게 자꾸 여러 부담을 지우게 되어서 

이로 인해 자신도 힘들어지는 것이다. 


어제 어떤 훌륭한 선생님 이야기를 적었는데 

그 방송에서 그 분이 한 10 년간 돈을 모아서 

집을 사려고 준비 중인데 

갑자기 형님이 나타나서 1 달만 빌려달라고 해서 

빌려 주었는데 바로 그 사업이 망해서 

또 그 이후 힘들게 교육 사업에 임했다는 이야기를 

하는 것을 보았다. 


그런데 현실에 그런 사례가 많다. 



그런데 그 반대 사례도 많다. 


재벌 집안은 형제들이 서로 화목하지는 않다고 하더라도 

한 형제가 기업을 처음 일으키면 

나중에 보면 그 형제 가족들이 다 함께 

어떤 회사라도 사장이나 회장이 되어서 

살아가는 것을 쉽게 보는 것이다. 


왜 그런가하면 

대부분 빵이 한 개 두 개 있을 때는 

그 빵이 많으면 많을 수록 좋을 것 처럼 여기다가 


그 빵이 백만개씩 있게 되면 

그 빵을 누가 다 먹지 하면서 

의문을 일으키는 가운데 

그러나 버리기는 아깝다는 생각도 하면서 

그런 가운데 그래도 친한 이들에게 

그것을 나눠주는 그런 형태를 보이기에 

그렇다고 사정을 헤아리는 것이다. 


그런데 여하튼 그러면서도 

또 다른 것을 놓고 다툼을 벌이는 모습도 보이는데 

그런 사정으로 재벌집안은 대부분 

가족 구성원들이 하나같이 다 기업 경영에 

바쁜 상태라고 보게 된다. 



그러나 그 반대 사례도 많다고 지적하는 것이다. 


즉, 연쇄부도 파산 이런 문제는 

친한 이들끼리 연대 보증관계로 활동하다가 

도미노 상태로 같이 다 함께 망하거나 

물에 빠진 가운데 혼자 망하면 힘들다면서 

살기 위해 몸부림을 치는 가운데 

주변에 수영 못하는 사람을 다 함께 끌고 들어가 

다 함께 빠지는 형태라고 할 수 있다. 


가족이 병에 하나 걸리면 

자신만 그렇게 걸려도 안타까운데 

가까운 가족들에게 다 전염을 시키는 활동을 

또 부지런하게 하는 것이다. 


이런 사정이 또 

반대로 말하면 

어떤 이가 다른 이를 편하게 만들어 주면 

이를 통해 거꾸로 

자신이 곧바로 편하게 되는 과보를 

받게 된다는 사정도 제시하는 것이다. 



전문적인 설명을 하면 

지장보살님은 

어떤 이가 다른 이를 위해서 복덕을 쌓으면 

그 뜻은 물론 다른 이를 위한 것이지만, 

복덕 관리 위원회에서는 

그렇게 얻어지는 복덕의 6/7 을 

그대로 여전히 그런 주체에게 귀속시키게 된다고 

제시한다. 



그래서 주변에 거꾸로 매달려 고통을 받는 

이가 있으면 

자신과 관계가 있거나 없거나 따지지 말고 

잘 구해주는 활동을 하는 것이 필요한 것이다. 


이런 경우는 굳이 각종 보험에 들지 않아도 

무사하게 된다고 보지만, 

그렇지 않으면 아무리 보험을 많이 들어도 

별 효과가 없다고 보게 되는 사정이 있는 것이다. 



그처럼 거꾸로 매달려 

고통을 받는 

지옥이나 아귀 또는 축생이 겪는 고통을 

경전에서는 우란분이란 표현을 사용하는데 


그런 고통을 해소하는데는 

그런 활동을 전문적으로 행하고 수행을 하는 

분들이 수행을 마치고 

공덕을 회향할 그 즈음에 

줄을 미리 서서 대기하고 있다가 

바로 올라타면 쉽게 해결된다는 편법을 

널리 제공하고 있는 것이다. 


알면 편하고 

모르면 3 일을 매달려 있더라도 

언젠가는 그처럼 매달리게 되기 쉽다는 

현실 사정을 

잘 파악해야 한다고 본다. 


그리고 그렇게 매달린 상태에서는 

30 분이 지난 시점부터 

이 내용의 중요성을 실감하는데 

정작 그 때는 사실 늦다고 보게 되고 

그래도 여유가 있을 때 

미리미리 상황을 잘 헤아려서 임해야 된다고 본다. 



[...]

연못에 도끼를 빠뜨렸는데 

뻔히 산신령이 자신이 빠뜨린 도끼를 가지고 나왔는데도 

그것이 직전에 본 자신의 도끼와 같은가 다른가를 

어떻게 알아내는가 

이런 퀴즈를 내면 역시 당황하게 된다. 


여기서 문제삼는 것은 감각현실의 내용에서는 

직전 내용도 다음 순간에는 떠올리지 못한다는 사정 때문이다. 


그런데 이것을 현실에서 문제라고 보는 경우는 거의 없고 

오로지 치매 문제만 걱정하는 것이다. 

그런데 알고보면 무상 삼매 해탈문에서는 

바로 이런 측면을 문제로 지적하고 있는 것이다. 


사실은 그렇지 않다. 

그런데 어떻게 현재 빠뜨렸던 도끼가 

지금 보는 도끼와 같은지 다른지를 별 어려움 없이 

판단한다고 스스로 보게 되는가하면 

바로 그런 망상상태에서 계속 분별을 행해나가는 상황에 

있기 때문에 그렇다고 설명하는 것이다. 


그러니 알고보면 그 망상분별이 그런 망상분별을 

계속 행해가는 상태를 지속하게 해주는 토대이기도 한 것이다. 



[...]

어떤 곡을 찾는데 있어서 

너무 많이 검색되어서 

결국 포기하고 다시 확인하고 왔는데 

이후 글자는 글자 자체를 읽기 힘들다. 

그러니 기억이 되겠는가. 


그러나 대강 찾아내는데 

이것은 또 무슨 현상인가. 


만일 앞의 사정을 모르면서 그것이 서로 같은 곡이라고 생각하면 

또 앞의 문제가 연장된다. 


그런데 그 사정을 파악한다고 하면서도 

같은 곡을 또 찾아보겠다고 하는 것은 

무슨 입장인가?


이것이 곧 무원무작삼매 해탈과 함께 

그와 반대로 생사현실에 들어가 무량행문에 임하는 수행자가 

수행에 임하는 입장이기도 한 것이다. 


즉, 자신이 얻는 내용은 자신이 생각하는 그것은 아니고, 

그런 내용을 얻을 수 없음을 이해하지만, 

그러나 바로 그런 사정 때문에 

또 그렇게 행하면 

그런 결과를 얻을 수 있고 성취할 수 있다고 

제시하는 내용이 바로 이 부분인 것이다. 



한 정지단면에서 그 사정이 동시에 

그렇게 제시되는 것이다. 


각 단면 어디에도 그런 내용을 얻을 수 없는데 


그러나 그것을 합쳐 놓고 대할 때는 

자신이 생각하는 내용이 거기에 있는 것처럼 여기게 되는 상태를

전제로 하면 

또 그런 바탕에서는 

그처럼 원하는 내용을 

그런 수행을 통해 그렇게 성취해내게 된다고 제시하는 내용인 것이다. 


그리고 

그것이 곧 A + B => c 의 인과식이 

자체적으로 포함하여 제시하는 내용이기도 한 것이다. 


위 식에서 그 내용을 다 제시하고 있는 것이다. 

C 란 결과는 앞 부분에서는 얻어지지 않는데 

바로 그런 관계로 그런 내용을 

그렇게 얻게 된다는 사정도 함께 

위 식이 제시한다는 의미다. 


그러니 이 두 측면을 다 함께 잘 파악하고 

각 내용을 다 좋은 형태가 되도록 잘 취해 사용하라고 

무상해탈문과 무원무작해탈문을 제시하는 것이다. 


그래서 무상해탈문을 통해  

기본적으로 이를 통해 번뇌를 제거하고 

또 다른 측면으로 

아상 인상 중생상 수자상을 제거하면 

현실에서 어느 상황에서도 안인을 성취해 

평안하게 임할 수 있고 


무원무작해탈문을 통해 

생사고통을 받게 하는 형태의 분별과 

희망을 다 제거하고 

이런 바탕에서 이후 자비를 바탕으로 

무량한 중생을 이런 생사고통에서 벗어나게 하고자 하는 서원을 

일으켜서 

무량한 기간 생사고통에 물들지 않은 가운데 

그러나 중생이 생사고통을 겪는 생사현실에 들어가 

무량한 방편을 유희자재 신통을 바탕으로 닦아나가고 

복덕과 지혜자량을 구족하고 

불국토를 장엄하고 성불한다는 내용을 

제시하게 되는 것이다. 



이 각 부분의 내용을 표현만 놓고 

서로 모순된다고 여기기 쉬운데 

그 사정이 위와 같은 것이다. 


그것을 얻지 못하기에 

그런 바탕에서 집착을 제거하고 

그렇게 수행을 행하면 

그로 인해 무량한 복덕과 지혜를 얻고 성취하게 된다. 


이런 내용은 

앞 부분은 얻지 못한다고 제시하고 

뒤 부분은 그런 사정으로 무량하게 성취한다고 해서 

서로 모순된다고 여기는 것이지만, 

그것이 곧 A + B => c 의 인과식이 

자체적으로 그 안에 포함해 제시하는 내용이기도 한 것이다. 


이상한가? 


사실 여기서 문제삼는 실재는 

위와 같이 A 라고 표현할 수 있는 내용은 아니지만, 

위 관계에 역시 준하는 것이라고 생각하면 

쉽게 그 관계를 이해할 수 있다고 보는 것이다. 


여하튼 그래서 이런 관계식은 

무상, 고, 무아, 무자성, 본래 청정한 니르바나, 공 

이런 내용을 다 함께 포함해 제시하는 한편 

또 한편 그런 가운데 

수행을 그렇게 행하면 그런 관계로 

그러한 결과를 무량하게 잘 성취해낼 수 있다고 

제시하는 내용이기도 한 것이다. 


>>>


법화경 묘장엄왕본사품에서는 

간략하게 다음 이야기가 나온다. 


당시 왕이고 불교를 믿지 않은 

외도인 묘장엄왕이 

그의 아내이자 자식인 

장엄상보살과 약왕보살 약상보살이 

묘장엄왕을 수행에 진입시키는 내력이 나온다. 


물론 이 법화경에는 아주 간략하게만 

내용이 제시되는데 

여하튼 

이는 정덕부인과 정장 정안과 

나중에 화덕보살이 되는 묘장엄왕과의 

관계 때문에 그렇게 되었다는 것이다. 



즉, 처음에 일정한 일을 계기로 

광조장엄상보살과 약왕 약상보살 세분은 

일찍 생사고통을 벗어나고 보살로서 지내고 있었는데 

그러나 같이 수행을 시작했던 묘장엄왕은 

그 이후 세세생생 왕으로만 지내는 생활을 하고 

정작 생사고통을 벗어나지 못하는 상태로 

장구하게 지냈다는 것이다. 



그런데 또 왜 처음에 

그렇게 되었는가에 대해서는 

또 사정이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 사정을 위 노래가 

메세지로 전함을 들을 수 있다. 


그것은 처음 수행자 4 명이 

숲속에 들어가 같이 수행을 하기로 했었는데 

며칠 지나지 않자 계속 그렇게 임하다가는 

같이 다 굶어 죽게 되는 상태가 된다고 보고 

이 문제를 놓고 고민하고 상의한 결과 

그 가운데 화덕보살이 

자신이 밖에 나가서 남은 3 수행자의 생계를 

해결할 방편을 마련하겠으니 

남은 3 수행자는 수행에 전념 정진하고 

나중에 수행의 결과를 얻으면 

그 후에 자신도 제도를 해달라고 하고 

세간에 나갔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 화덕보살이 세간에 나가서 

생계를 확보하는 활동을 하는 가운데 

어느 때 길을 지나가는 왕의 행렬을 보고 

장차 자신이 저런 상태가 되면 이 일이 쉽게 잘 되겠구나 생각하고 

여하튼 그렇게 해서 3 수행자를 부양을 했다는 것인데 

여하튼 그 인연으로 

그 화덕보살은 세세생생 왕으로만 생활하게 되었는데 

그러나 문제는 수행과는 거리가 점점 멀어지면서 

어느덧 외도를 믿는 상태까지 떨어지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 후 화덕보살의 도움을 받았던 

이 3 수행자가 이런 상황을 보고 

이 왕의 가족이 되어서 이 왕을 제도해내기로 하고 

다시 들어가서 그렇게 되었다는 

그런 내용이 전하는 것이다. 


그런 배경을 이해하면 

생사고통을 벗어나게 하는 문제나 

방편이 서로 어떤 관계가 있어서 

전개되는가 하는 사정도 이해할 수 있다고 본다.
[...]

>>>

병을 돌리면 병에 임하게 된다는 

윤병 임병의 사자성어는 상당히 

중요한 메세지를 전하는데 

이런 각 상황에서 각 주체가 

생사고통이 증폭되는 방향으로 

임하는가. 


아니면 그 반대로 

무량한 복덕과 지혜자량을 

구족하고 서로 증대해 나가는 상태로 

임하는가가 문제되는데 


그 양방향의 경계점에 

윤병 임병의 문제가 제기되는 것이기도 한 것이다. 


그러니 말년 제대를 앞둔 장병의 

마음이 복잡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이 곡을 듣다보니 자연스럽게

그런 시감상을 하게 된다. 


말년 제대를 앞둔 장병은 

정말 감기도 조심하지 않을 도리가 없고 

왠만하면 주변을 안정시키고 

가만히 두는 것이 최상이라고 판단하게 되는 것이다. 


그것은 수행자도 사실은 

세간 일에 대해서 

비슷한 심정이 된다고 본다. 


알고보면 신발에 붙은 껌에 

먼지가 두개 붙어 있는가 

한개 붙어 있는가 그런 문제인데 

공연히 먼지 숫자를 헤아리면서 

시비를 일으킬 필요가 없다고 보는 것이다. 


그런데 그런 사정이 

꼭 그 경우만 그러겠는가. 

평소의 생활의 문제가 다 사정이 마찬가지인 것이다. 


[...]


왜 수행자가 

보정안정정반방원역지의 수행을 해야 한다고 

하겠는가. 

그것이 바로 그런 사정인 것이다. 


알고 보면 그런 것을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닌데 

그러나 또 바로 그런 사정때문에 

그런 수행을 그렇게 하지 않을 이유가 전혀 없는 것이다. 


알고보면 동가 홍상인데 

왜 그렇게 하지 않겠는가. 

다만 그렇게 하지 못하는 사정은 

그 사정을 그렇게 파악하지 못하는 것이 

주된 원인인데 


그러나 부처님이 반야바라밀다 경전 앞부분에 

그 사정을 정확하게 제시해주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수행자 대부분 갖고 있는 

초두와  말두 기억현상때문이라고 본다. 

중간 내용은 잘 모르지만, 

여하튼 처음에 대한 내용이라거나 

마지막에 본 내용은 그래도 

조금 생각이 난다는 이런 현상과 관련된다고 본다. 



그러한 사정으로 

일부로 앞 부분에 핵심적 내용을 붙이고 

또 뒷 부분에 또 다른 핵심적 내용을 붙인 것이라고 

이해하게 되는데 


우선 앞 부분에 

바로 앞과 같은 사정을 정확하게 

제시하고 있는 것이다. 


즉, 왜 얻을 것이 없는데 

하필이면 

그런 보정안정정반방원역지의 수행을 

힘들게 하는가에 대해서 

왜 사정이 그런데 

하필이면 

그렇게 하지 않고 


어차피 차별이 없는데 

굳이 하필이면 자신이나 다른 생명들이 

힘든 지옥 아귀 축생의 상태로 무한히 

임하게 되는 방향으로 행할 필요가 있겠는가. 

이렇게 거꾸로 반문하는 것이다. 



그리고 알고보면 

보시 부터가 

본래 그런 행위를 얻을 수도 없고 

또 그런 사정 때문에 

그것이 자신의 물건을 

자신의 사랑방에서 자신의 안방으로 

하나하나 옮겨 놓는 것처럼 

본래 버림이란 얻을 수 없는 것이기에 

그런 사정을 방편으로 해서 

그 수행을 원만히 성취할 수 있는 것이라는 

내용을 제시하는 것이다. 


 


또 다른 한편으로 경전 끝 부분에서는 

왜 사정이 그렇고 

하나같이 언설로서 표현할 수 없는데도 

그렇게 실질적으로 희론의 성격을 갖게 되는 설법을 

그렇게 하신 것인가에 대해서도 


사정이 그렇기에 

자비심을 바탕으로 

그렇게 행한 사정을 밝히고 계신 것이다. 


결국 

공한 바탕에서 

무상 해탈문에 들어가 안인을 성취하고 

무원문작해탈문에 들어간 다음 다시 자비심을 바탕으로 나와서 

무량행문을 닦아 나가면 

이 모든 문제가 다 잘 해결된다고 제시하는 것이지만, 


정작 윤병 임병의 상황에서는 

하나같이 그것이 다 잘 안된다고 보면서 

제대를 앞둔 장병만 

노파심을 갖고 

잔소리를 반복하게 되는 사정이 또 있는 것이다. 


[...]




앞에 내용을 보충하면서 

장엄상 보살님의 내용을 소개했는데 

이 장엄상 보살님을 주체로 놓고 

이 상황을 한번 거꾸로 헤아려 보기로 하자. 



묘장엄왕이 왕으로 세세생생 지내던 당시 

이 묘장엄왕이 생사고통을 벗어나지 못하는 것을 

안타깝게 여겨 

이 왕의 부인이 되어 제도하고자 

그렇게 장엄상 보살이 임한 것이다. 


그 상황에서 레고 라는 음악을 대입시켜 놓고 

이 상황을 대해보자. 


이런 상황에서는 어떤 의미가 읽히게 되는가하면 

이 장엄상 보살의 입장에서는 

이 묘장엄왕과 관련해서 

처음에 수행을 막 시작할 때 

만나서 그런 인연을 맺었던 기억과 함께 


또 자신들은 이미 약왕보살 약상보살과 함께 

생사고통을 벗어난 상태에 있고 


또 장차 이 묘장엄왕도 화덕보살이 되어야 한다는 

그런 복합적인 고려를 하면서 

묘장엄왕의 왕궁에서 생활을 하는 상태인 것이다. 



그런데 묘장엄왕은 또 그 상황에서 

장엄상 보살을 어떻게 생각하면서 

매 순간 대했겠는가. 


그런 결과 각기 입장 차이가 나타난다고 

보게 되는 것이다. 



그런 결과 

쉽게 생각해보면 

묘장엄왕이 장엄상보살을 자신의 정덕부인으로 대하면서 

침실에 들자고 하는 상황을 놓고 생각하면 


이 장엄상보살은 

이 상황을 이 묘장엄왕이 

한 때 같이 수행처나 병영 등에서 같이 생활하며 

지내던 묘이병임을 다 알고 있는데 


그런데 이 묘이병이 

자신을 잘 몰라보고 

저녁마다 자신과 즐겁게 지내자고 

청하니 어떻게 생각하고 이 상황을 대하게 되겠는가. 


그렇다고 멀리하면 또 이 묘이병을 

현 망상증상에서 벗어나게 하고 

화덕보살로 수행을 해나가게 할 수 없으니 


레고 병장의 심정이 되어서 

복잡한 생각이 들지 않았겠는가. 

그런 생각을 하게 되는 것이다. 


그런 가운데 하나의 상태를 놓고 

각 입장마다 다 제각각 다른 기준으로 

이것을 대하고 해석하니 

얼마나 상황이 복잡하고 어렵다고 할 것인가. 




그런데 여하튼 그런 가운데 

현실에서 생사고통을 벗어날 

비상탈출구인 

공 무상 무원무작해탈문을 잘 찾아내서 

그 안에 들어간 다음 


나올 때는 

법의 공함을 자리로 삼고 

무상삼매를 통해 성취한 안인 인욕을 자신의 옷으로 삼고 

또 

무원무작 삼매해탈을 바탕으로 중생제도와 불국토 장엄 성불을 서원하게 된 

자비를 자신의 방으로 삼아서 

현실에 임하면 된다고 보게 되는 것이다. 



현실에서 이런 상태에서 막 

수행을 대하게 되는 상황은 

군대에서 막 병영생활을 시작하는 상황과 

유사하다고 볼 수도 있다. 

그래서 쉽지는 않은 것이다. 


그리고 그런 상황을 병장의 심정에서만 보게 되면 

왜 그것이 그렇게 어렵게 여기는가하면서 

그 심정을 이해하기 힘들 수 있지만, 

알고보면 병장도 처음에 이병으로 생활을 시작한 

시기가 있었던 것이 아닌가. 


그런 가운데 

처음 수행자가 

그것을 돌파하는 핵심 원리는 


자비와 안인과 보시 등의 수행을 동시에 함께 사용하는 것이고 

그 기본 바탕은 

또 유무 논의에서 살핀 

공, 무상 무원무작해탈문의 내용을 

또 그 바탕으로 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

위 내용이 반야심경의 첫째 두째 구절의 

어떤 부분과 각기 관련될 것인가는 

공 무상 무원무작해탈문의 내용을 

잘 살피면 

곧바로 찾아낼 수 있다고 보게 된다. 


그런데 첫 구절에 관자재보살님의 명호만 

하나 붙잡고 그것만 기억하고 

잘 념하여도 

그것만으로도 또 생사고통을 면하고 

보리를 얻을 수 있다고 법화경에서 제시되고 있고 


수능엄경에서는 또 관자재보살님이 

어떤 방편으로 여환삼매를 층득하여 

매 중생을 제도하기 적절한 형태로 

몸을 변신해 나타날 수 있는가의 내용도 

제시되고 있는데 


이처럼 몸을 자유자재로 

중생의 제도에 적절하게 변신할 수 있는 능력의 유무는 

대단히 중요한 것이기도 하다. 


의사 면허증이 있어도 페인트 칠하는 작업복을 입고 

환자에게 나타나 

수술을 하겠다고 임하면 

환자가 놀라서 사망할 수도 있는 것이다. 


별 차이가 없을 것 같지만, 

환자는 수술을 위해 수술대에 묶인 상태에서 

이 상대가 정말 의사인가 이 문제만 놓고 

골똘히 생각하다가 

결국 그런 상태가 되기 쉽다고 보는 것이다. 



그리고 생사 고통을 벗어나는 다양한 방편에 

이미 봉타래 수행자들이 취하는 

쉽고 빠른 방편을 소개했는데 

법화경에서는 또 

그외에 다양한 방편을 또 제시하고 있는 것이기도 하다. 


먼저 앞에 소개한 묘장엄왕본사품은 

그 내용이 무슨 의미가 있기에 그런 내용이 

경전에 소개되는가 하고 생각할 수 있는데 

이것은 외도라고 해도 

그런 수행자가 되어 장차 성불할 수 있다는 

하나의 대표적인 샘플인 것이다. 


그러니 묘장엄왕도 이런데 

나머지는 말할 나위가 없다 이런 의미로 

이 내용을 잘 생각하고 

자신이 수행에 임하면 된다는 의미다. 




그리고 또 그외에 

차력술과 고행을 주된 수행방편으로 삼아서 

세상의 병을 고치기 위해 

알지도 못하는 수많은 풀과 식물 이런 것을 

섭취하는 수행을 한 분이 있는데 

오늘날 생각해 보면 얼마나 무모한 일인가. 


아욱이 간에 좋다고 하지만, 

아욱을 죽을 정도로 많이 먹으면 죽고 

아욱을 먹기 전에 도라지를 먹고 아욱을 먹으면 또 어떻게 달리 되는가 .

또 그 상태에서 다시 시금치를 먹으면 어떻게 되는가 

이런 것이 다 경우따라 다르고 

어떤 경우는 괜찮은데 

어떤 경우는 또 문제가 달라지는 등 

이 문제가 상당히 어려운 문제인 것이다. 



오늘날 페니실린은 약효가 별로 없는 약이라지만, 

과거에는 만병통치약정도로 취급벋던 시기도 있었는데 

이처럼 이미 시간이 지나니 사정이 달라지는 점도 있지만, 


그 당시에도 토끼를 놓고 임상실험을 한 결과와 

쥐를 놓고 임상실험을 한 결과 등등이 

다 달라서 알 수가 없는데 

다만 사람에게 사용하니 어떤 병에 

효과가 좋다는 것이 나타나서 

널리 사용되었다는 것인데 


그런데 그렇게 널리 사용하다보니 

또 상황이 바뀌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요즘은 어느 항생제도 듣지 않는 

수퍼 박테리아가 문제가 되는데 

이것이 늘 수술을 마친 환자나 

생사가 위험한 상태의 환자들이 

집중적으로 모여 있는 병동에 

만연해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수술이 문제가 아니고 

수술 후에 이런 상태에서 잘 극복하고 

나오는 것이 수술 결과의 성공 실패를 

결정하는 중요한 요소라고 제시되는 상황인 것이다. 


그래서 병을 낫게 하는 인과 문제는 

사실은 이런 측면만 놓고 관찰해도 

대단히 복잡하고 어려운 인과문제를 

살피는 것이 되는 것이다. 



여하튼 이런 문제를 

약왕보살님은 고행과 차력술과 같은 

방편으로 임해서 극복했다는 것이고 


또 묘음보살님과 같은 외계 보살님은 

또 기악공양과 발우 공양을 주로 하여서 

이런 상태가 되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약왕보살은 약왕보살대로 

위와 같이 몸을 자유자재롭게 변신하는 능력을 

삼매를 통해서 얻게 되었다고 하고 


묘음보살님은 묘음보살님대로 

다라니를 통해서 이를 얻게 되었다고 하는데 


이전에 살핀 유마힐소설경에서는 

이와 유사한 불가사의 해탈 신통을 

또 소개하고 있는 것이고 


관세음보살보문품이나 

수능엄경에서는 또 

관자재보살님이 어떤 방편으로 

그런 여환삼매를 얻게 되었는가도 제시하는 가운데 


그렇게 해서 각 보살님이 

어느 형태로나 변화할 수 있는 것이 

그 능력이지만, 그래도 각 보살님들이 

주로 선호하면서 변신하는 형태도 

경전에서 각기 특색이 있는 것으로 

소개하고 있는 것이기도 하다. 



>>>



여하튼 이런 내용은 

단순한 에피소드를 소개하는 것이 아니고 


다라니 수행을 비롯해서 

수행자들이 취하는 다양한 수행방편이나 

경로가 

결국은 모두 성불에 이르게 되는 경로라고 

제시하는 것이기도 하다. 


그래서 상불경보살품에서는 

수행자들이 

모든 중생들이 다 성불할 존재로서 

자신이 다른 수행자를 가볍게 여기지 않는다는 

자세만으로 수행에 임한 상불경보살의 사례를 

대표로 제시하는 것이기도 한데 


그런데 다른 수행자들이 

이런 내용을 대하는 가운데 

오히려 상불경보살님을 무시하고 분노를 갖는 가운데 

그로 인해 아비지옥에서 장구한 세월 

생사 고통을 많은 수행자들이 겪었다는 

사례도 제시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여하튼 이들 수행자들도 

그처럼 끝내 성불한다는 점은 

다르지 않다는 것을 또 이런 사례를 들어 

대표적으로 제시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니 자신의 입장에서 

어떤 수행이 자신에게 적절하고 

효과가 좋다고 보는가를 살펴서 

취사선택을 잘 할 문제라고 보는 것이다. 


성불한다는 점은 차이가 없다지만, 

제바달다와 같은 사례처럼 

수행자 옆에 붙어서 

세세생생 괴롭히고 방해하는 노력만 하는 가운데 

지옥고를 오래 겪어 가면서 

그런 가운데 나중에 수행의 단계로 나아가 

성불하는 방안이 좋다고 할 것인가. 


그외 다라니 수행이나 

보살명호나 부처님 명호를 념하는 것을 

주된 수행방안으로 삼을 것인가. 


등등을 스스로 잘 헤아려서 

방편을 취하면 된다고 

원칙적으로 보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또 

제 각각의 사정이 조금 다르므로 

조금은 상대를 배려해서 

잘 헤아리고 


어제 만난 그 선생님처럼 

자신이 상대의 상황을 잘 파악하지 못한다면 

상대가 비록 외관은 

사자나 코끼리 이런 형태로 보인다 하더라도 

언제나 상대를 유치원생처럼 관하고 

잘 대하고 

선하교 좋은 방편으로 

상대를 생사고통에서 벗어나게 노력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보는 것이다. 

[...]

원래 나이 어린 환자를 상대하는 소아과 의사나 
간호사들은 복장도 아이들이 좋아하는 형태로 
차려 입고 
때로는 토끼 의사선생님인 것처럼도 나타나고 
호랑이 복장을 하고 나타나기도 한다고 할 수 있는데 
이것은 결국 이 두 방안이 보통 
상대를 변화시키는 방안이 된다고 보기에 
그런 것이기도 하다. 


그러나 고객으로부터 비용을 지급받는 입장에서 
사자나 호랑이 복장으로 환자를 대하면 
병원이 유지가 되겠는가. 


그래서 토끼 복장을 하고 환자를 상대하는데 
그러나 요구하는 내용은 
또 그 반대인 경우가 많게 되는 사정도 
있다고 헤아리게 된다. 


그런데 늘 핵심은 어떤 방편으로 
제도하는 것이 효과가 좋은가의 문제이고 
그것은 주로 상대가 어떤 내용에 더 집착하고 
임하는가가 주된 고려대상이 된다고 보는 것이다. 


그리고 어떤 방편의 평가도 
역시 그것이 어떤 취지에서 
어떤 효과를 얻기 위해 그렇게 취하는가가 
주된 핵심이 된다고 보는 것이다. 

[...]






>>>


희망을 성취하는 방안과 유무논의의 관계를 

살피는데 

이것이 전도망상의 문제와 깊이 관련되고 

또 각 생명이 지옥 아귀 축생셰계에 묶여 

생사고통을 받게 되는 과정이 되는 사정을 살피고 있다. 


결국 이것을 피하고 

무량한 복덕과 지혜자량을 얻는 것이 

수행이기도 한데 

이 상호관계를 잘 파악하는 것이 

기본적으로 필요하다고 보는 것이다. 




[...]
현실에서 희망을 추구하는 과정에 

어떤 내용들이 거꾸로 뒤집힌 전도망상 분별인가를 

간략하게 제시했는데 

결론만 간단히 제시해서 간단하지만, 

그 자세한 사정을 살피려면 

또 복잡한 논의가 필요한 것도 사실이다. 


결국 현실에서 희망을 추구하는 과정이 

아귀 세계의 생명이 받는 고통과 같은 형태가 되는 것은 


우선 그 각 주체가 그런 희망을 가진 과정이 

전도몽상 분별과 집착에 바탕한 것이  

근본 원인이고 


그 희망의 내용도 그런 바탕에서 

그 자신의 당장의 어떤 한 측면의 좋음에 이바지할 뿐 


자신이 좋고 남도 좋고 온 생명이 제한없고 차별없이 좋고 

지금도 좋고 나중도 좋고 오래오래 무한히 좋고 

이 측면도 좋고 저 측면도 좋고 두루두루 모든 측면이 좋은 내용이 아닌 내용이기에 

그렇게 좋음을 주지 않는 각 부분이 문제인 것이고 



또 그 희망을 성취하는 방안이 

좋고 좋은 방안이 아니고 

잘못된 방안이어서 

그 결과를 뜻대로 얻지 못할 뿐 아니라, 


다른 생명에게 나쁨을 오래 주는 방안이라는 사정이 

모두 총체적으로 관련되어서 



이것이 그 주체를 이후 

고통을 받는 상태에 오래오래 묶여 지내게 만드는 

원인이 된다고 제시하는 것이다. 





특히 그것이 성취되지 않는 상태에서 

그것을 갈구하는 입장에서 

자신이 집착하는 좋음을 놓고 보면 

그 좋음은 너무나 환상적으로 좋게만 여겨지고 

갈구하게 되는 것이어서 

도대체 왜 그런 좋음을 추구하는 것이 

그렇게 문제가 되는가를 

도무지 파악하지 못하고 임하는 경우가 많다. 


그런데 자신이 그런 상태로 임하는 다른 주체를 보면 

조금 쉽게 그 문제를 살필 수 있게 된다고 할 수 있다. 


이것이 넓고 길고 깊은 광장심 관찰과 

좁고 짧고 얕은 협단천 관찰의 차이라고 할 수 있다.


즉, 

어떤 독에 중독된 환자는 자신의 병을 보지 못하고 

계속 중독된 약을 집착해 찾아 다니는데 

제 3 자는 그 문제를 바로 알아 보게 되는 것과 사정이 같다. 


여하튼 수행이란, 결국 

이런 여러 문제를 다 제거하고 

반대로 좋고 좋은 내용만 가득 채워서 

좋은 형태로 그것을 추구해 성취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기도 한 것이다. 


그래서 이 문제를 또 이어서 살펴나가기로 한다. 



>>>

현실에서 

각 생명이 집착하고 추구하는 쓸데없는 희망과 

수행자가 추구하는 불국토의 장엄과 중생 제도를 향한 서원은 

처음 현실의 정체를 올바로 관하는 데에서 

출발한다고 보게 된다. 


[..]

사실 현실에서 행하는 이런 분별 하나하나가 

다 거꾸로 뒤집힌 상태에서 행하는 분별이어서 

[..]


여하튼 이것이 모두 유무 논의와 관련이 되고 

망상분별과 관련이 되는데 


이런 망상증을 근본치유하지 못한 상태에서 

그래도 조금 상태를 빨리 회복하는 방안은 


그 소원이 어떻던 빨리 소원이 

성취된 상태로 그 상대를 끌고 올라가 버리는 것이다. 

사실은 그것이 그가 자신의 소원을 

소원대로 성취할 때 그로 인해 맞이하는 절벽이기도 한 것이다. 


그래서 그런 상태에서 도대체 

그가 그 이후 무엇을 어떻게 하고 

그래서 무엇을 얻고자 한 것인가를 

스스로 빨리 파악할 수 있게 도와주는 것이 

일단 응급치료 방안이 된다고 보는 것이다. 


그리고 현실적으로 그것이 

그 자신과 많은 생명을 다 함께 

오래오래 생사고통을 받아나가게 하는 원인이 되므로 

그것을 버리게 해야 하는데 


그것은 앞에서 그런 상태에서 그가 

하고자 하고 얻고자 한 것들이 

그것을 포기한 상태에서도 

아주 쉽게 더 빨리 얻어지는 것임을 

스스로 확인하게 하는 것이 좋은 방안이라고 

보는 것이다. 


물론 그런 희망을 왜 추구하면 안 된다고 하는가는 

이미 앞에 제시했다. 


그 희망이 만들어진 바탕이 

그가 전도망상 상태에서 모든 것의 정체를 보고 있다는 

것 부터가 잘못된 내용이고 


그 희망의 성취가 주는 좋음이 하나 있다면 

그 하나의 좋음을 징검다리로 삼아 

그가 얻거나 만들어 내는 나쁨이 

무량하기 때문이다. 


다만 그 희망을 갈구하는 상황에서는 

그가 그에 초점을 맞추어 

마치 최면걸린 이가 그로 인해 눈이 가려져서 

다른 것을 보지 못하듯, 

그런 수많은 문제를 미리 보지 못하는 것 뿐이다. 


그래서 원래는 이런 경우 부정관을 사용하거나, 

또는 무원무작 삼매에 들어 이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고 보지만, 

역시 자신의 희망을 갈구하는 상태에서는 

이 하나하나의 문제를 그렇게 보지 못하고 

접착되어 끌려가는 상황이 되는 것이다. 



그러니 누군가는 그렇게 접착되어 

행해 나가는 이에게 

그 소원이 성취된 상태로 빨리 옮겨 놓고 

자신이 갖는 소원의 성취가 일으키는 문제가 무엇이고 

또 그를 통해 그가 얻고자 한 것이 무언가를 스스로 

보게 해서 

얻고자 한 좋음을 더 쉬운 방편으로 얻게 해주고 

그 문제는 제거한 다음 

그를 중생제도와 불국토 장엄을 향하는 광대무변한 서원을 

일으키게 하고 

그 수행에 진입시키는 방편을 사용하게 된다고 

보는 것이다. 


[...]


전도 망상을 바탕으로 

어떤 이가 소원을 극한으로 추구하면 

손오공처럼 된다고 할 수 있다. 



그것은 또 mun 님의 우주세트를 상당히 

세게 돌린 것을 의미하는 것도 된다. 

그런데 그것이 그 자신 뿐만 아니라 

애매한 텔레토비나 애꿎은 텔레토비에 해당하는 다른 생명까지 

공연히 생사고통을 증폭해 받게 한다는 점이 

문제인 것이다. 


그것이 왜 그렇게 되는가는 

처음 어떤 이가 세계나 자신으로 보는 내용부터가 

거꾸로 뒤집혀진 상태에서 

세계와 자신을 이해하고 

그리고 그 가운데 자신과 자신의 것을 강하게 집착한 가운데 

그가 그런 소원을 일으켜 추구했기에 

그렇다라고 할 수 있다. 


그래서 그 문제를 해결하려면 

그렇게 보게 된 망상을 해결하지 않으면 

안 되는데 


그것은 조금은 환자에게는 어려운 문제다. 

그러니 앞과 같은 방편을 사용하게 된다는 의미다. 


상태가 조금 나아지면 

이제 40 년전의 그 자신의 사진을 하나 제시한 다음 

그 모습과 현재의 모습 사이에 

정신과 육체 그 어떤 부분에서 

공통점이 발견되는가를 물어 보고 

그런 것이  자신인가를 물어보게 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둘 가운데 왜 하나의 

사망신고나 장례식은 치루지 않고 

정신이 돈 손오공처럼 

계속 나아가기만 하려고 하는가를 

또 묻게 되는 것이다. 


[...]

알고보면 그렇게 극한으로 내달은 

손오공은 

돌아버린 곰 노릇만 열심히 한 것이 되고 

보통 사육사만 돈을 벌게 하고 

관객에게 즐거움을 주기도 하지만, 


때로 너무 지나치면 

사육사도 실망하게 되고 

관객도 실망하게 되는 것이기도 하다. 


그리고 이 어느 경우나 

이것이 전도몽상에 바탕해 

일으키는 총체적 생사고통의 문제점인 것이다. 


어느 경우나 이로 인해 

우주 set 가 또 한 번 돌아서 

mun 님이 짜장면을 먹게 되어서 

좋아할 것도 같은데 

그러나 mun 님은 mun 님대로 

짜장면이 아무리 좋아도 

하루에 세그릇 이상 먹기는 힘들다는  

사정을 말하면서 

자신을 위해서 공연히 그렇게 애쓸 필요가 없고 

빨리 망상증 치유를 잘 하기를 바라는 

마음 뿐이라고 한다. 



현실에서 

소원성취를 바라고 

희망을 추구하는 것이 

전도몽상에 의해 

욕계에 묶여 생사고통을 받아 나가는 원인임을 

살피고 

이런 희망 일체를 버려야 하는 사정을 살폈다. 

[...]


>>>


현실에서 각 주체가 추구하는 희망이 

하나같이 쓸모 없고 가치 없는 내용들이어서 

공연히 거대한 자락도구를 추구하는 일과 같아서 

무원무작삼매에 들어 

현실에서 좋다고 보는 희망을 다 제거해야 한다고 제시했지만, 


막상 그렇게 되면 

삶이 시들해지지 않겠는가. 

사실 시들해지기 쉽다고 본다. 


이것은 중독자가 중독을 끊을 때 

금단현상을 겪고 

괴로움이나 무료함을 느끼는 현상과 비슷하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그 이전에 전도망상 상태에서는 

그런 주장 자체를 받아들이지 않게되기쉽고 

또 그 주장을 대하면 속이 뒤집히는 현상이 나타나게 된다고 본다. 


그래서 사실 수행은 

오로지 따분하기만 한 일이라고 

세간에서 외면을 당하기 쉽다고 본다. 


이런 사정이 위 노래에서 메세지로 전하는 

주된 내용이라고 시감상하게 된다. 


결국 수행자가 

참! 예쁘지 삼삼하지 아라바자나 나-자바라아 

라는 수행공식을 놓고 

궁리하고 연구해야 할 필요성이 여기에 있다고 보게 된다. 


그러나 궁리한다고 해서 좋은 생각이 

마구 쏟아져 나오는 것은 아니다. 


[...]


원래 이 문제는 doctr 님의 변덕왕자 변덕공주의 소원성취 문제 

그리고 prince 님의 거북도사의 이야기와 

깊이 관련이 되는 문제라고 본다. 

[...]


변덕왕자가 어떤 희망을 갖는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지금 짜장면을 먹고 싶다고 하는 것이다. 


그래서 시종들이 그 희망을 성취해주기 위하여 

열심히 짜장면을 만들어서 가져온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 변덕왕자가 짜장면을 만들어 가지고 오면 

그 상태에서는 짜장면에 대한 희망이 사라져 없어진 상태여서 

짜장면을 거들떠 보지도 않고 

또 다른 것을 만들어달라고 요청을 한다는 것이다. 


이들이 왕자나 공주만 아니면 

그냥 무시하겠는데 사정이 그렇지 않아서 

상당히 애를 먹는다는 것이다. 



그런데 거북도사의 처방은 

무엇인가 하니, 


이런 왕자와 공주 때문에 골치아파하는 왕이 

거북도사에게 치유를 요청하자, 


거북도사가 환자로 찾아온 왕자와 공주의 

손과 발을 잘라 버리고 

눈을 멀게 해서 

귀환조치를 한다는 것이다. 


얼마나 놀라운 도사이길레 그런 일을 그렇게 하는가. 



그런데 그 후 1 주일 지난 다음에 

거북도사가 다시 이들을 찾아가 


원래 바라는 그런 희망을 그 상태에서 

성취시켜 주기를 바라는가. 


아니면 손과 발을 다시 갖게 하고 

눈도 뜨게 해주는 것을 원하는가. 


이렇게 물어본다는 것이다. 



그 다음 이야기 끝부분은 

왕자와 공주가 손과 발 그리고 눈을 원해서 

그것을 원상태로 회복해주고 

그리고 원래 원하던 것도 

그렇게 들어주고 떠난다는 것이다. 


별로 대단한 이야기가 아닌데 

여하튼 이런 사정으로 치유 실적이 대단해서 


각기 변덕 왕자나 공주 증세로 골치가 아픈 경우에 

이 거북도사를 찾아 

고액의 치료비를 부담하는 왕들이 많다는 것이다. 



이것이 doctr 님이나 prince 님이 

행복론 편집에서 희망과 관련해 다룬 문제라고 하면 

수행자도 

청정한 니르바나나 해탈 깨달음의 성취와 

세간에서 관심을 갖는 쓸데없는 희망의 성취간에 

이런 복잡한 사정이 있음을 보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원래 100 % 희망이 성취된 상태를 붙잡고 

그 정지단면에 어떤 문제가 있는가를 

간단하게 제시한 것이지만, 


그것은 곧 감각현실과 어떤 관념분별 간에 

본래 그런 유무논의와 관련한 문제가 있다는 것을 

다시 지적하는 것이기도 하다. 


그런데 이것이 또 무슨 문제인가를 살피려면 

조금은 희망의 성취가 불완전한 상태에서 

어떤 것이 더 희망의 성취와 관련해 핵심적인 

문제점이 있다고 보는가를 

보충해서 살펴야 한다고 본다. 


그래서 

앞의 변덕왕자나 공주의 사례처럼 


1 처음에는 a 라는 희망을 가졌는데 

그것이 정작 성취되었다고 보는 현실에서 

그런 희망이 사라져 버려서 그 상태를 좋다고 보지 않게 된 경우 



1  그리고 그런 희망이 성취된 상태라고 보는데 

이제 그 변덕왕자가 의식이 상실되거나 치매 상태가 되어서 

그 현실이 어떤 상태인지 인식을 하지 못하고 분별하지 못하는 상태가 된 경우 



1 그 희망이 성취되지는 않았는데 

어떤 이상한 최면술사가 방문하여 최면을 건 다음 

그 희망은 전혀 실현되지 않은 상태에서 

마치 그 희망이 실현된 것처럼 생각하면서 좋다고 하는 경우 


1 또 하나 원래 그런 희망을 갖고 있지도 않았는데 

매 상황을 대할 때마다 

마치 그것을 자신이 과거 오래전부터 희망한 내용이었던 것처럼 

그것을 자신의 희망이 성취된 상태라고 여기면서 

매번 좋아하는 경우 


이런 식으로 


원래 희망을 갖고 

그리고 그것을 성취하려 노력하고 

그리고 그것이 성취되어서 좋음을 얻는 경우를 놓고 


이와는 조금 다른 경우로 보는 사례들을 

놓고 

전도망상 분별 상태에서 

희망의 성취가 갖는 의미가 

어느 부분에 핵심이 있는가를 

다시 보충적으로 살필 필요가 있다고 보는 것이다. 



그것은 처음 

100 % 성취되었다고 여기는 그 상태 역시 

감각현실에서 그런 내용을 얻을 수 없다. 

그리고 

그 감각현실은 실재의 내용[실상]도 아니다. 

이런 사실을 이미 유무 논의에서 

제시하였기 때문이다. 


그래서 어느 감각현실도 사정이 그런데 

왜 이들 망상분별을 일으킨 이들은 


어떤 감각현실을 놓고는 희망이 성취되었다고 하고 좋아하고 

어떤 감각현실을 그렇지 않다고 여기고 슬퍼하는가. 


이런 문제가 이어지게 되므로 

일단 위와 같은 보충적인 문제들을 놓고 

또 검토를 해보게 되는 것이다. 



원래 명확하게 이것을 판단하려면 

어떤 희망이 100 % 성취된 감각현실이란 

무엇인가부터 확정해야 할 것이다. 


그런데 그렇지 않다는 사정을 

이미 살핀 것이다. 


그래서 답답하게 문제가 이어지는 것이라고 

그 사정을 이해할 수 있다. 


사정이 그렇다는 것을 이해하지만, 

그러나 망상분별 상태에 있는 변덕왕자나 변덕공주를 

기준으로 하면 


그래도 어떤 감각현실은 희망이 성취된 것이라고 

주장하는 것이고 

그것은 또 다른 감각현실은 그렇지 않다고 

달리 주장하는 상태라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러니 수행자가 중생제도를 위해서 

무엇을 성취한다는 것도 

사실은 이런 상태를 기준으로 해서 

그것을 살피지 않으면 

곤란한 것이기도 하다. 


그래서 이 논의가 계속 이어져야 하는 것이다. 


결국 희망이 성취된 상태라는 것은 

실재나 감각현실 어느 부분에서인가 


관념분별과 관련해 

그것을 100 % 만족시키고 일치하거나 상응하는 

그 무엇을 얻을 수 있어야 하는데 


사실은 사정이 그렇지 않다는 것을 

유무논의에서 기본적으로 제시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니 이 문제를 어떻게 접근해서 

그것을 만족시킬 것인가 

이것이 문제가 되는 것이다.



그렇다고 단순히 상대를 최면상태를 통해 

관념영역의 내용만 변화시킨다고 

어떤 희망이 성취되는 것이라고 할 것인가. 


그것도 아니다. 


그래서 역시 감각현실을 

무언가 변화시켜서 

이런 변덕왕자나 변덕공주의 희망을 

충족시켜주어야 하는 문제가 제기되는데 

거기에 답이 있는 듯 하면서도 

상당히 모호한 부분이 있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실재는 공하다는 공 해탈문과 


감각현실은 그런 실재의 실상이 아닌 한편 

또한 관념분별과 같은 내용을 얻을 수도 없다는 

무상해탈문들의 내용이고 


또 그런 상태에서 

생사고통을 받고 

3 악도에서 쉼없이 묶여 지내게 만드는 

그런 쓸데없는 희망은 남김없이 제거해야 한다는 

무원무작해탈문이 제시되는 사정이기도 한데 


그러나 

그런 바탕에서 

수행자가 

복덕과 지혜 자량을 성취하고 

중생을 제도하고 불국토를 장엄하고 

성불한다는 내용도 

이 현실에서 추구해서 원만히 성취해야 할 

내용이기에 

역시 이 문제를 잘 살펴야 한다고 보는 것이다. 


물론 기본적인 답은 

공, 무상, 무원무작해탈문의 내용에서 

이미 제시된 내용이기도 하다. 



그런데 사실은 이 문제가 

현실에서 망상분별 상태에서는 

무언가를 붙잡고 

그렇게 접착된 상태로 

고집을 하고 머물기에 


그에 맞추어서 

수행자가 중생제도를 위한 취지로 

그런 내용을 성취시켜 주는 한편 

그를 통해 

그 안에 장착된 

각 해탈문으로 그 상대가 들어 올 수 있게 

이끄는 작업이라고 이 사정을 이해할 수 있는 것이다. 


[...]


>>>



이미 금강경이나 반야바라밀다경에서 

이름과 관련된 구절을 제시했는데 

설명이 조금 부족한 듯 하다. 


그것은 이 구절들이 

모두 수행자가 수행목표로 하고 

서원의 내용으로 하는 내용과 관련해서 

그 이름과의 관계를 제시하고 있기에 

조금 자세히 살필 필요가 있다고 보게 된다. 



우선 이미 소원 성취과정이나 

실재와 감각현실과 관념분별의 관계에서 


관념으로 a 라고 칭하는 어떤 것은 

그에 해당하는 진짜의 내용은 없고 [ 무아, 무자성 ]

실재에서는 그 내용을 얻을 수 없고 [ 불가득 공 ]


그리고 감각현실에서도 그에 해당한 내용은 얻을 수 없음 [ 무상 ]

을 살핀바 있다. 


그래서 있다고 할 것은 오직 그런 

관념분별과 명칭만 그런 관념분별 영역에 있는 것일 뿐이라는 

내용을 제시하고 있는 것이다. 


반야바라밀다경에서는 

보살이나 

반야바라밀다도 그런 내용을 얻을 수 없고 

이름 뿐이라고 제시하고 


금강반야바라밀경에서도  

수다원 사다함 아나함 아라한 등 

사향사과로 칭하는 수행자 지위도 

또 그렇다. 


그것은 즉 그런 것이 아니고 

실로 없기에 

그런 까닭에 

그렇게 칭한다. [ 즉비 a 고 명 a / 실 무 a  고 명 a ]

이런 구절을 제시하기도 하고 


그리고 

아승기품에서는 

다시 일일명유제여래 이런 내용을 

제시하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이런 내용을 듣고 

어떤 감각현실의 일 부분을 a 라고 가리킨다고 해도 

거기에 a 란 내용을 얻을 수 없고 

그것은 실상이 아니라는 내용을 생각하면, 


수행을 통해 성취한다는 여러 수행목표는 

단지 이름뿐이기에 

오늘 자신이 좋은 이름을 하나 만들어서 


자신을 ●● 아라한 

또는 ○○ 보살마하살 

아니면 아예 ▼▼▼ 여래 

이런 칭호를 하나 정하고 

활동하면 

그것이 곧 아라한도 되고 보살마하살도 되고 

여래도 되는 것 아니겠는가. 


이렇게 생각하기 쉬운 것이다. 


즉, 위 구절들에서 이름뿐이라고 했으니 

이름만 하나 잘 짓고 

그 행세를 하면 마찬가지라고 제시한 것이 

혹시 아닌가. 

이런 생각을 할 수도 있다고 보는 것이다. 


왜냐하면 ●● 아라한이나 

○○ 보살마하살 

▼▼▼ 여래라고 할 때 

그에 따라 

어떤 특정한 얻을 것이 있다면 모르지만, 

그런 것을 얻을 수 없다고 하는 것이니, 

이렇던 저렇던 

무슨 문제가 있겠는가. 

이렇게 이해하기 쉽다는 의미다. 


과연 그런가. 


이렇게 경전 표현을 붙들고 

만일 주장하면 

무엇이라고 답해야 할 것인가. 



일단 여기서 제시하고자 하는 내용은 

그런 것이 아니라고 제시하는 입장인데 

왜 그렇게 보아야 하는가를 

설명할 필요가 있다고 본다. 


[...]

수행을 하고 

수행목표를 성취하고 

아라한이 되거나 

초발심 보살이 되거나 

그 뒤에 무생법인을 증득하고 

불퇴전위나 일생보처 보살이 되고 

성불한다고 할 때 


이들 내용이 다 

실재에서는 그 내용을 얻을 수 없고 

진짜라고 할 내용도 없고 

그런 사정이므로 

그냥 자신이 그 때 그 때 

사전에서 이름만 하나 잘 찾아내서 

이름만 붙이면 되는 문제인가 

이런 문제를 잘 살펴야 한다고 본다. 


만일 그렇다면 참 수행은 쉬운 것이어서 

무량 아승기겁의 수행을 해야 한다고 

제시할 필요도 없기에 

수행자의 부담은 줄어든다고 볼 수 있는데 

과연 그런가가 문제인 것이다. 


그러나 만일 앞처럼 

그런 상태가 되어도 

진짜가 없고 

무언가 얻을 바가 없는 것은 마찬가지라면 


도대체 무엇을 가지고 

어떤 이는 생사고통을 겪는 중생이고 

어떤 이는 생사고통을 벗어난 아라한이고 

어떤 이는 초발심보살이고 

어떤 분은 부처님이고 

이렇게 말할 수 있다는 말인가. 


[...] 




경전에도 수많은 하늘이 있고 
3 계 6 도에 각 세계가 있는데 
예를 들어 인간이 하늘을 올라가는 것은 
산 전체의 흙과 손 안의 흙의 비율처럼 
희박하다는 내용을 제시한다. 


그리고 하늘에도 사천왕천 도리천 야마천 
도솔천 화락천 타화자채천 이런 욕계의 하늘과 
색계의 하늘 무색계의 하늘 등이 있는데 
각 하늘에서 윗 단계의 하늘에 태어나는 것도 
또 그런 비율로 희박하다고 제시한다. 


시험과목은 각 하늘을 존중하고 믿는가. 
또 선한 행위를 했는가가 주된 과목이라는 것이다. 
선한가 여부는 정식으로는 10 선업이라는 시험과목이라고 할 수 있는데 
마음에 탐욕과 분노 어리석음이 어느 정도인가. 
말로 망어 양설 악구 기어와 같은 악업을 짓지 않았는가. 
몸으로 살생 투도 음행과 같은 악업을 짓지 않았는가 
이런 것이 시험과목이 된다는 것이다. 


자신이 어떤 하늘의 주인이라고 할 때 
하늘에 거주할 인원은 제한되어 있는데 
부족한 인원을 보충하려면 
어떤 조건을 요구할 것인가. 
이런 입장에서 생각하면 
이런 시험과목이 필요하다고 볼 것이다. 


그리고 수행자는 또 수행자대로 
각 단계별로 필요한 수행을 원만히 
성취했는가가 역시 문제될 것이다. 


이미 처음 보리심을 일으키고 
중생제도와 성불에 대한 
서원을 장착하면 
그로써 수행자 라이센스를 발급받게 된다고 제시했지만, 


어떤 고통에도 물러나지 않고 안인을 원만히 성취하고 
무생법인을 증득했는가 등으로 
수행자의 수준이 달라짐도 제시했다. 


그것은 그에 따라 방편지혜를 제공해도 
그것이 오로지 중생제도와 성불의 목적을 위해서만 
사용될 것인가 
아니면 이전처럼 다시 물러나서 망상분별과 집착에 바탕해 
자신과 다른 생명을 해치는데 
사용될 것인가를 가르는 경계선이 그것이 
되기 때문이라고 이해할 수 있다. 


그리고 또 일생만 더 수행하면 
곧 성불할 단계의 수행자인가 아닌가도 
문제된다고 할 것인데 
이런 문제가 
모두 이미 앞에서 제시한 문제와 모두 관련이 된다고 본다. 




그런데 이미 앞에서 
어떤 상태도 
진짜라고 할 내용은 없고 
그 실재는 얻을 수 없고 차별없이 공하다는 내용을 
제시했는데 
이것은 바로 이런 내용들에도 똑같이 적용되는 내용인 것이다. 


그래서 도대체 그런 상태에서 
무엇이 이런 구별을 하는 기준이 되는가가 
문제되는 것이다. 


그리고 
이것이 사실은 지금 논의중인 본 문제라고 할 수 있다. 




답안의 핵심은 


진짜는 '없다'라고 제시하면서 
실재는 '얻을 수 없다'라고 제시하고 있고 
다시 풀어 설명하기를 


진짜는 없지만, 
그러나 실재는 전혀 없다고 하는 것은 아니지만, 
어떤 특정한 것이 있다고 할 수 없는 상태다. 
라고 이 내용을 설명하게 된다. 




또 감각현실도 사정이 같다. 
현실에서 눈을 뜨면 얻는 내용을 놓고 말할 때 
그런 내용을 얻는 것이지만, 


다만 거기에 어떤 이가 분별하는 A 와 같은 내용을 
'얻을 수 없다'라고 표현하게 되는 것이다. 


이는 감각현실도 무엇을 있다 없다 이다 아니다 
같다 다르다 등과 같은 분별을 행하기 
곤란한 사정이 그처럼 있기에 그런 것이다. 


그런 가운데 
감각현실에 대해 어느 부분은 A 라고 하고 
다른 부분은 B 라고 할 때 
그런 A 나 B 와 같은 분별 내용은 
감각현실 그 자체가 아니고 


또 감각현실 그 부분 그 자체고 
곧 그런 분별 내용이 아니지만, 


그러나 그런 감각현실을 떠나서 
그런 관념분별을 행하는 것도 아님을 제시한 것이다. 


그리고 감각현실도 
예를 들어 눈으로 보는 감각현실을 놓고 살피면 
전체가 하얀 색인 상태를 놓고 
그렇게 부분을 나누어서 
이것은 꽃이고 저것은 바위 라는 식으로 
분별을 행하는 것도 아닌 것이다. 


그래서 이 상호관계를 잘 파악해야 한다고 
제시한 것이다. 


그래서 어떤 a 에 대해서 
이런 사정을 놓고 
그와 같이 분별을 행하는 상태라는 것을 
잘 이해해야 한다고 본다. 




사실 이것이 위 문제에 대한 
논의의 골격이라고 할 수 있다. 










>>>


지금까지 살면서 대단히 좋았던 순간이 어떤 

순간의 어떤 내용이며 

그것이 또 얼마나 오래 지속되었던 것인가를 

한번 생각해보자. 


사실 자신의 삶에 가득하기를 바라는 내용은 

그런 것일지도 모른다. 

그런데 생각해보면 그런 것은 대단히 희소하고 

그렇게 오래 가는 것은 아님을 보게 된다. 


세상에서 만나게 되는 다른 사람들도 사정이 같다. 



이미 세상의 생명들이 제각각 전도몽상 증상을 일으킨 다음 

자신과 자신의 것에 집착하고 

탐욕과 분노 어리석은 번뇌에 묶여 

장발잔이나 투우장의 소처럼 욱하고 돌진하는 형태거나 루팡처럼 교활하게 임하는 

장 욱 팡 모드로 현실에 임하여 

고속으로 지옥과 아귀 축생계의 수용소로 이동 중이라고 

상황을 설명했는데 


하루를 지나고 나서 그 상태가 많이 

바뀐 것인가 생각해보면 

거의 바뀌지 않은 상태임을 확인하게 될 것이다. 


본인이 현재 다람쥐형 생쥐 찬대승이를 보호 중인데 

원래 찬대승이를 관리해야 할 연구원이 따로 있는데 

장기간 자리를 비우고 없는 상태다. 


그리고 

이번 주 중에 한번 집을 청소해줄 것을 

부탁받았는데 집 청소는 본인도 아직 경험이 없다. 

아직은 찬대승이를 손에 쥐고 옮기고 

그런 상태는 아니고 

단지 찬대승이를 대할 때마다 

념불이나 다라니를 외워주거나 

먹이를 주고 불어 음악도 계속 듣게 해주지만, 

이로 인해 무엇이 달라졌는가 하고 지켜보면 

별로 달라지지 않았음을 보게 된다. 



지금까지 올려진 몇몇 노래에서 

반복해 죽어야 바뀌고 바뀌어야 멈춘다라는 

메세지가 들리는데 

사실 사정이 그런 것으로 보게 된다. 


이번 생에서 어떤 노력을 하지만, 

당장 쥐가 갑자기 홀연히 사람으로 변신해서 

수행을 시작한다거나 그런 기대를 하면 

곤란한 것처럼 


세상일도 마찬가지라고 보아야 한다고 본다. 


현실에서 탐욕과 분노 어리석은 번뇌에 묶여서 

장 욱 팡 모드로 임하는 이들이 

어느날 갑자기 모두 부처님이나 예수님같은 

성인이 되어 임한다고 기대하는 것은 

지나친 것이다. 


그래서 오히려 

이들이 죽을 때까지는 변화하지도 않고 

또 그런 성향을 멈추지도 않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그런 기대를 하지 않고 임하는 것이 

훨씬 정신 건강에 도움이 된다고 보게 된다. 


왜냐하면 어떤 변화가 있기를 기대하고 대하면 

기대를 하는 만큼 실망을 갖게 되고 

또 실망이 크면 그에 비례하여 

상대를 원망하는 마음도 갖게 마련이고 

이런 것이 모두 자신이나 다른 생명에게 

좋은 일이 아니라고 보기 때문이다. 



이미 이전 조각글에서 TV에서 방송한 훌륭한 교육자의 내용 

즉, 말을 못하는 상대를 교육시켜서 

훌륭하게 행하도록 변화시키는 교육자분의 이야기를 

적었는데 


그 분이 강조하는 것도 그런 내용이라고 본다. 

상대가 아무리 힘이 센 사자나 호랑이나 곰 같은 상대라고 해도 

말도 알아듣지 못하고 제멋대로 행하려고 하는 

유치원생과 같다고 여기고 

대해야 한다고 제시한 내용이 그것이라고 본다. 


그렇지 않으면 자신이 조금 교육하고 

그대로 행하지 않으면 답답해서 

자신부터 힘이 들어하게 되고 

억지로 무언가를 행하게 하려고 임하게 될 것이 아닌가.

그렇다고 말도 할 수 없는 상대가 

또 잘하게 된다고 볼 수도 없는데 

그런 상태에서 스스로 

얼마나 답답하게 될 것인가. 



소 축사에 가서 경을 읽고 념불을 한 번 하고 

소가 다음날 경전을 외우기를 기대한다거나 

그런 상황과 사정이 마찬가지다. 



그러나 그런 노력들이 정말 

아무 소용이 없는 것은 또 아니라고 보아야 한다. 


다만 수행자가 오늘 하루 씨 뿌리고 

물을 주었다고 해서 

다음날 그 열매가 나타나지 않는다고 

실망하고 우울해하면 

곤란하다고 보는 것이다. 

심지어 사정이 그렇기 때문에 

일체 처음부터 씨도 뿌리지 않고 

물도 전혀 주지 않는다고 하면 

그것이 오히려 문제라고 보는 것이다. 


대부분 그렇게 노력해도 

살아 있을 때 어떤 변화를 보게 된다기 보다는 

변화가 있더라도 죽은 후 또는 

몇 차례 반복해 그런 생사를 겪은 후 

그런 변화가 있게 될 것이라고 

기대하는 정도로 그쳐야 한다고 보게 된다. 


그래서 각 노래에서 그렇게 

죽어야 바뀌고 

바뀌어야 멈추게 된다는 그런 메세지를 

전한 것으로 보게 된다. 



생각해보면 부처님 당시 부처님 제자들 사정도 

비슷하였다고 보게 된다. 


처음 수다원의 지위만 되어도 

현인과 성인의 지위에 올라 상당한 상태가 된 것인데 

그렇다해도 7 번 생사를 반복하는 가운데 

생사고통을 벗어나게 된다고 제시하는 것이다. 


이번 생에 곧바로 생사고통을 벗어난 상태에 이른 

아라한과 비교하면 대략 500 년 정도는 

간격이 있는 상태라고 할 것인데 


왜 수행을 같이 했는데 이런 차이가 있는가는 

이미 앞 글에서도 그 사정을 간략하게 제시한 바 있다. 


구체적으로 보면 

수행을 통해서 생사에 얽혀 묶여 있게 하는 

번뇌나 업의 장애를 제거해야 하는데 

그것이 그 각 주체마다 그 상황이나 정도가 

다 다르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처음에 생사고통의 정체와 그것이 발생하는 인과과정과 원인 

그리고 생사고통을 벗어난 상태와 그렇게 되는 수행방안의 관계

즉 불교용어로 4 성제라는 기본 진리에 대해 잘 파악해야 하는데 


이것은 이런 내용을 파악해서 

자신에게서 제거해야 할 번뇌가 상당히 다양한 형태가 있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래서 그렇게 이런 진리를 올바로 관해서 끊어야 할 번뇌[견도소단혹(見道所斷惑)=견혹(見惑)]으로 

신견(身見)ㆍ변견(邊見)ㆍ사견(邪見)ㆍ견취견(見取見)ㆍ계금취견(戒禁取見)ㆍ

탐(貪)ㆍ진(瞋)ㆍ치(癡)ㆍ만(慢)ㆍ의(疑)

등을 나열하게 된다. 


그리고 이제 또 그런 진리의 내용을 닦고 수행해서 끊어야 할 번뇌로 

세간 사물의 진상을 알지 못하는 데서 생기는 번뇌[수도소단혹(修道所斷之惑)=수혹((修惑)]이   

나열되고 


그외에도 각 생명이 각 상황마다 각각의 소원을 갖고 일으키는 

무량한 번뇌를 해결해야 할 문제[진사혹(티끌과모래와 같은 번뇌)가 있고 


또 그외 모든 생사고통과 번뇌의 근본이라고 할 근본무명 등을 나열하게 된다. 



그래서 

알고 보면 그래서 수행을 통해서 

끊고 제거해야 할 번뇌가 상당히 복잡하게 많고 

그런 각 번뇌를 끊은 정도에 따라서 

그 각 주체의 상태가 달라진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래서 알고보면 상당히 번잡하고 복잡하다고 할 수 있다. 


견도소단혹-견혹은 즉 4 제의 도를 올바로 관함으로써 끊는 번뇌인데 

그 가운데 

신견(身見)ㆍ변견(邊見)ㆍ사견(邪見)ㆍ견취견(見取見)ㆍ계금취견(戒禁取見)은 

이치를 올바로 파악하지 못해 갖는 번뇌로 

그 특성이 예리하게 몸과 마음을 핍박하여 부리는 번뇌여서 

날카로운 이자를 써서 이사(利使) 라고 표현하고 


탐진치만의는 사물의 진상을 알지 못하여 일어나는 정서적 번뇌로, 

그 성질이 둔하므로 둔할 둔자를 사용하여 둔사(鈍使)라고 표현한다. 


이것이 모두 진리를 올바로 관하여 끊어내야 할 번뇌이므로 

견혹[견도소단혹]이라고 표현하는 것이다.  



견해로 갖는 이사(利使)는 

결국 자신이 자신이나 자신의 것으로 보는 것에 대해 잘못된 정체파악으로 일으키는 번뇌=> 신견 

그리고 무엇이 영원하다거나 사라진 후 아주 없게 된다는 상견과 단견을 갖는 번뇌 => 변견 

그리고 인과에 대해 잘못파악하는 번뇌 = 사견 

그리고 가치판단을 통한 목표설정과 그 실현방안에 관련된 잘못된 판단 => 계금취견 

그리고 온갖 엉터리 주장을 내세우고 고집하는 번뇌 => 견취견 

이런 유형의 지적 번뇌라고 할 수 있다. 


이런 번뇌는 올바른 지식을 갖추면 

쉽게 끊어질 수 있다고 보지만, 

그렇지 못한 상태에서는 

또 그로 인해 그 주체가 이에 묶여 사역을 당하고 

다른 생명을 사역시키면서 생사고통을 받는 정도가 

상당히 날카롭고 심하다고 보게 되는 것이다. 


인류 역사만 놓고 보아도 

종교가 다르다거나, 어떤 이념이 다르다고 해서 

전쟁을 일으키고 대량으로 다른 이를 학살한 사례가 

대부분 이런 유형의 번뇌에 의한 것이다. 


독일과 같은 지역을 놓고 살펴본다면 

과거  30 년 전쟁은 비록 같은 신을 믿는다고 하지만, 

그 믿는 방식의 차이를 놓고 구교와 신교가 대립하여 

유럽 각국이 전쟁을 벌였는데 

비록 당시 인구통계가 정확한 것은 아니라고 해도 

여하튼 그로 인해 전쟁이 일어난 독일 지역의 인구가 지역마다 

최대 90% 최소 30 % 정도가 희생되었다고 전해진다. 

여기에는 식량 부족과 열악해진 환경으로 흑사병이 만연하는 사정도 

작용하였다고 한다. 

>>>  2017_0731_1649 ~  http://terms.naver.com/entry.nhn?docId=629689&cid=50766&categoryId=50794

또 이후 살펴보면 1차 대전 2차대전 등의 모습도 

양상이 비슷하고 

인종주의를 내세워서 유대인을 학살한다거나 등등의 내용도  

모두 이런 번뇌와 모두 밀접한 관련을 갖고 

있다고 보게 되는 것이다. 


물론 정서적인 번뇌라고 할 탐욕과 분노 어리석음 등이 

그 바탕에 깔려 있는데 

이것이 날카롭게 그 형태가 나타나는 것은 

이런 지적 번뇌와 결합해서 

그런 모습이 나타난다고 보게 되는 것이다. 

어떤 내용을 놓고 시시비비를 따지면서 

임하는 이들의 상태가 그처럼 사실은 날카로운 것이다. 


사정이 이렇기 때문에 

이것을 하나씩 제거하려 노력하고 

그것이 그렇게 다 제거되어야 

이런 번뇌에 묶여서 사역을 당하고 생사고통을 받는 상태로부터 

벗어나게 되는 것인데 


그것이 각 주체의 수행노력에 따라 

상태가 다 다르기 때문에 

일률적이지 않게 된다고 제시하는 것이다. 



이런 가운데 자신이나 

다른 이가 빨리 생사고통을 벗어나기를 기대하고 

현실을 대하면 대할수록 

더 실망이 많아지고 답답함을 느끼게 되기 쉽다고 본다. 


이런 때는 자신이 중독상태여서 

자신부터 잘 끊지 못하는 것을 놓고 

생각해보는 것이 조금 도움이 된다고 본다. 


담배를 끊지 못한다거나 

술이나 도박을 끊지 못한다거나 하는 경우도 있지만, 

그런 것이 없어도 

대부분 밥은 끊지 못하고 

또 잠자는 것을 끊지 못하는 상태라고 할 수 있는데 

그런 상태를 놓고 

그것이 자신의 의지나 노력만으로 

바로 그 상태에서 벗어날 수 있는가. 

이런 것을 생각하면서 


자신이나 다른 생명에 대해서 

너무 많은 기대를 하면서 조급해 하면 곤란하다고 보게 된다. 


7 번 생사를 반복하는 가운데라도 

생사 고통에서 벗어나는 상태가 되면 

그것만해도 대단하다고 여겨야 하는 것이기도 하다. 


사실은 부처님 옆에서 부처님 시중을 들고 

경전 대부분을 기억해서 후대로 전했다고 하는 

아난 존자도 부처님이 열반에 드실 때까지도 

아라한에 이르지 못하였다고 전하는데 

그 사정이 그런 사정이기도 한 것이다. 


그래서 그것이 쉬운 것이 아닌 사정이 

있다고 보아야 하는 것이다. 


좋음을 얻는 방안을 살피면서 

어떤 소원이 성취된 상태란 무엇을 말하는가를 놓고 

유무논의와 관련해서 이를 살피는데 

이것이 사실은 이런 문제와 깊이 관련되어 있는 것이다. 


그래서 이런 내용을 올바로 관하는 가운데 

무원무작해탈을 성취하지 못하면 

욕계에서 생사고통을 받는 것도 

벗어나기 힘들다고 보는데 

사실 현실적으로 이런 상태에서 벗어나기 힘들다고 보아야 한다.  


그래서 언젠가는 벗어난다고 하고 

또 모든 생명이 다 언젠가는 성불한다고 해도 


현실적으로 어떤 주체에게 어떤 질적인 변화가 나타나는 것을 기대하려면 

그 주체가 정말 죽음을 맞이 한 이후에 

그런 변화를 약간이나마 기대할 수 있다고 보는 것이 

적절하다고 보아야 하는 것이다. 


그런 가운데 설마 혹시나 했는데 

역시나 말로만 듣던 지옥이나 아귀 축생계에서 

자신이 태어나서 그 극심한 상황을 직면하는 가운데 


그래도 조금 수행을 한 것이 있다면 

그것을 계기로 어느 단계에서 멈추고 

벗어나오게 된다고 보는 것이 

안타깝지만, 현실에 적절한 것이다.

[...]


현재 유무논의와 관련해서 

금강경의 즉 비 고 명 또는 실 무 고 명 등과 

관련된 내용을 살피는 중인데 

이는 실재 - 감각현실 - 관념분별의 상호관계에서 

어떤 a 의 유무문제와 

그 상호관계를 정확히 파악하는 문제와 관련된다. 


그리고 이는 현실에서 어떤 이가 

a 를 좋다고 보고 그것을 성취하기를 원할 때 

그런 희망은 관념분별 영역에서 일으켜 갖지만, 

그 희망이 성취된 내용은 감각현실에서 어떤 상태를 구하는 문제이기에 

또 이것이 문제되는 사정이 있다. 


그래서 감각현실의 어느 부분은 

그가 그에 대해 생각하는 어떤 a 를 얻을 수 없는 것이고 

그것은 또 실재의 내용[실상]도 아닌 것임을 관해서 

무상 해탈문을 얻고 


더 나아가 자신이 갖는 그런 희망은 

그 내용이나 그것을 추구하는 방안이 모두 

전도망상에 바탕한 것이고 

또한 좋고 좋음을 얻을 수 있는 내용이나 방안도 아닌 것이어서 

생사고통을 무량하게 받게 만드는 기본 원인이 되므로 

이를 남김없이 제거해야 함을 

무원무작해탈문의 내용으로 제시하게 되는 것이다. 


이는 모든 존재의 본 바탕이라고 할 실상이 

공하여 그런 내용을 얻을 수 없음을 관하여 

청정한 니르바나를 확인하고 머무는 

공해탈문과 함께 


삼계 육도에서 생사고통을 벗어나고 

해탈을 얻게 하는 수행내용이 되는데 


그러나 한편 이런 상태에서 

법화경에 제시된 것처럼 

다시 수행자가 

공한 실상을 자리로 하고 

무상해탈문을 통해 인욕의 옷을 입고 

대자비를 방으로 해서 중생제도를 위해 

생사현실을 받고 무량행문을 닦는 과정에서는 


각 수행목표 상태를 수행을 통해 

성취하는 과정에서는 

또 무엇을 얻기에 그런 수행과 관련된 

여러 수행목표상태가 나열되는가 하는 문제와 

다시 관련된다. 




이것은 예를 들어 실무고명이나 즉비고명과 같은 구조로 

금강경에서 제시되는 내용


예를 들어 

아라한은 실로 아라한이 아니기에 그런 까닭에 

아라한이라고 칭한다는 그런 구조의 내용에 대해서 


단순히 아라한이라고 칭하는 것은 

실로 아라한이 아닌 까닭에 그렇게 칭한다는 경전의 표현을 

잘못 이해하여 

일체의 모든 상태는 다 실로 아라한이 아닌 것이므로 

세상의 일체는 어떤 것이던 그런 사정으로 

아라한이라고 칭할 수 있다고 

잘못 이해하는 경우가 있다고 보게 된다. 


이는 곧 일체가 다 그 실재가 공하여 차별이 없다고 하는 내용을 

그로 인해 일체가 모두 다 같은 것이라고 제시한 내용으로 

극단적으로 잘못 이해하는 입장과 같은 것이다. 


여하튼 경전의 위 내용은 

어떤 수행목표나 상태를 제시할 때 

그것이 실재나 감각현실에서 그런 내용을 얻을 수는 없음을 제시하는 것이지만, 


그렇다고 아무것도 전혀 없음을 제시하는 것도 아니고 

또 현실에서 아무것이나 놓고 

그 하나하하가 역시 실로 아라한이 아니기에 

그것도 아라한이라고 칭할 수 있다 

이런 형태로 

각 내용을 제시하는 것이 아니라고 보는 것이다. 




그런데 이런 내용을 제시하게 되면 

이런 주장이 

결국 prince 님이 종전에 

실재 - 감각현실 - 관념분별의 유무와 상호관계와 관련해 

제시했던 내용 

즉 something special 이론과 representative 이론과 

같은 내용이 아닌가 하는 비판을 하게 된다고 본다. 


즉 현실에서 어떤 a 라는 내용을 얻는다면 

그에 상응하여 실재나 감각현실에도 

그에 상응한 무언가가 있는 것이고 

실재의 그 무언가는 결국 감각현실에 그 대표로서 그런 감각현실을 

나타나게 하는 것이고 

또 감각현실의 그 무언가는 

분별 영역에서 그에 대한 대표로서 그런 a 라는 내용을 

얻게 하는 것이라는 주장과 

같은 내용이 아닌가 하는 비판을 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런 자신의 주장이 

오히려 이처럼 수행과정에서 어떤 수행노력을 통해 

각 상태를 성취하는 내용을 해명하는데 

더 적절한 내용이라고 본다는 것이다. 



과거에도 이에 대해 살핀 적이 있는데 

만일 prince 님의 something special 이론이 

실재나 감각현실에 전혀 아무 내용이 없는 것이 아니고 

무언가는 있다고 해야 하는데 

그 내용을 분별영역에서 행하는 그런 a 라고 

특정할 수 있는 것이 아닌 그 무엇이라고 

제시하는 입장이라면 

본인도 그런 prince 님의 something special 이론을 

굳이 부정할 필요는 느끼지 못하는 것이다. 


그런 의미의 something special 이론은 

사실 실재의 공함을 설명할 때 

그것이 유무 양변을 떠나서 

있는 것도 아니고 없는 것도 아니어서 

전혀 아무 것도 없는 것은 아니라고 할 것이지만, 

그러나 현실에서 행하는 이분법상의 분별로 

무언가가 있다 없다 ~이다 ~ 아니다 

~와 같다 ~와 다르다 좋다 나쁘다 깨끗하다 더럽다 등등의 

이분법상의 분별을 행할 수 없는 상태라고 설명하게 되는 

내용과 큰 차이가 없다고 보아야 한다. 


그러나 prince 님은 이론은 

그 각각의 영역의 내용을 

서로 상응하는 어떤 것으로 관련지어 이해하려는 

입장이 문제라고 지적하는 것이다. 


○꿈을 실답지 않다고 하는 사정



꿈의 비유를 놓고 생각하면 이 문제를 

이해하기 쉽다고 본다. 



꿈이 실답지 않다고 지적하는 것은 

꿈을 꾸지 않았다거나 

꿈을 꾸는 상황에서 잠을 잔 침대와 같은 상황이 

전혀 없었다는 것을 제시하는 것이 아니다. 


다만 꿈에서 꾼 내용은 꿈에서만 

그런 조건에서 그렇게 생생하게 얻는 내용으로서 

그 꿈 내용을 가지고 

그 꿈을 잠자면서 꾸게 된 현실의 침대에서 

그 내용을 찾아내려고 하면 곤란하다고 제시하는 것이다. 


그러니 꿈에서 바다나 황금꿈을 꾸었다고 

그 내용을 침대에 있는 것이라고 찾아 나서면 

그것이 곤란하다고 지적하는 것이다. 


그러나 꿈은 꿈대로 생생하게 그렇게 꿈꾸는 상태에서 

얻는 것이고 

또 그런 꿈을 꾼 상황이라고 할 방이나 침대는 

또 그런 상태라고 여기서 제시하는 것이다. 



감각현실과 관념분별의 관계도 사정이 같다. 


어떤 이가 감각현실을 대하고 

어느 부분을 놓고 그것이 자신이나 자신의 것이라고 분별할 때 

그런 분별도 일으켜 얻는 것이고 


그리고 그런 상황에서 각 부분이 무언가 서로 다른 내용으로 

얻은 감각현실도 그렇게 생생하게 얻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여기서 그런 관념분별이 실답지 않은 망상분별이고 

그런 내용을 감각현실에서 얻을 수 없다고 지적하는 것은 

그런 내용을 부정하는 것이 아니고, 


그 관념분별 자체가 곧 그 감각현실이 아니고 

또 반대로 그런 감각현실 그 자체가 곧 그런 관념분별이 아님을 지적하는 것이다. 


그래서 어떤 주체가 어떤 감각현실을 대하여 

그 분별 영역에서 이렇게 묶고 저렇게 나누는 가운데 

일정부분은 자신이고 

또 다른 일정부분은 꽃이나 바위라고 분별을 일으키는 것이고 


그런 상황에서 그런 감각현실은 감각현실대로 생생하지만, 


문제는 그런 감각현실 그 부분에 

그런 관념분별과 같은 내용이 있는 것이라고 분별하면 

곤란함을 지적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런 관계는 실재와 감각현실이나 

실재와 관념분별 상호간에서도 마찬가지라고 제시하는 것이다. 



현재 이전 조각글의 내용을 검토하다보니 

말로만 이 내용을 설명하는 가운데 

상당히 이해하기 어렵게 설명이 되어 있다는 것을 보게 된다. 


그래서 과거에 이 사정을 설명하기 위해 

제시한 그림을 다시 붙여 놓고 

이 유무 논의를 설명해 나가는 것이 

조금 더 도움이 된다고 보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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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mg2-02] [그림] 08pfl--image/진리의오류55.jp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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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3fl--ghpt/r1030.htm ☞○ 진리에 관한 수많은 오류와 착각의 문제




이미 앞에서 제시했지만, 

위 그림을 이해하려면 

먼저 혼자 눈을 뜨고 감는 동작을 여러번 하는 가운데 

눈을 감으면 보지 못하다가 

눈을 뜨면 그 순간에 새로 보게 되는 그 내용을 

붙잡아 두는 실험이 필요하다고 보게 된다. 


그래서 눈을 뜨는 순간 

자신이 세상이나 자신의 모습을 보게 된다고 할 때 

그 내용을 저 그림이 나타낸다고 이해하고 

위 그림을 대해야 한다고 보는 것이다. 



그런 가운데 1 이라는 한 주체는 

눈을 뜨면 자신의 몸 일 부분으로서 1 과 같은 부분을 보는 한편 

그외 세상이라고 할 나머지 내용을 저와 같이 

보게 되는 것이다. 


이것이 일단 어떤 주체가 자신의 눈을 통해 

보게 되는 세상과 자신의 내용이기도 한 것이다. 


그 가운데 실험을 위해서 2 와 같은 다른 주체가 

4 라는 꽃을 대하는 가운데 

그 2 는 또 눈을 감고 뜨는 실험을 하고 보고를 하게 하면 

어떤 내용을 보고하는가를 관찰하고 

그 내용을 추리해서 저 그림처럼 표현하게 된다는 것을 

일단 제시한 것이다. 


물론 이런 그림이 나타내는 내용 자체가 

엉터리 추리에 의한 것이어서 

위 그림에서 2 와 같이 표시한 내용은 엉터리임을 

반복해 지적했는데 

그러나 대부분 저와 같이 일단은 생각하고 추리하므로 

그런 형태로 위 그림에 나타낸 것이다. 

그리고 이 사정을 기존에 반복해 설명한 것이다. 



그런데 저 그림처럼 2 가 어떤 내용을 5 ^ 안에서 

얻는다고 파악하면 

2 가 마음에서 파악하는 내용과 

그 외부에 있는 내용이 서로 상응하는 내용인 것처럼 

착각을 일으키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사정이 그렇지 않다는 것을 

매번 주의를 덧붙이게 되는 것이다. 



그런데 일단 위 그림은 다음을 이해하는데는 

도움이 된다고 보는 것이다. 


즉 2 가 눈을 뜨고 감음을 반복하면서 

자신이 겪는 변화를 보고한다고 할 때 


1 이 이 과정을 지켜본다면 

2 가 눈을 뜨고 감음에 따라 어떤 꽃이나 모습이 

보이고 안 보이고 하는 그런 변화는 1 의 입장에서는 파악이 되지 않는데 

그러나 2 는 그런 변화가 있다고 보고하니 


그런 변화내용은 2 의 영역안에서만 일어나는 변화라고 

보게 되고 

그래서 그 내용을 2 의 영역안 즉 5 ^ 안의 변화로 

보게 된다는 사정을 

위 그림으로 나타낸 것 뿐이다. 


그런데 왜 저 그림처럼 그 상황을 

이해하면 안 되는가를 여기서 주의해야 한다고 

매번 이 내용을 소개할 때마다 덧붙이게 되는 것이다. 


그것은 위 그림에 나타낸 것이 

사실은 관찰자 1 의 마음에 있는 내용인 것이 

저 그림의 2 의 상황과 마찬가지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무엇이 여기서 오류의 판단이라고 하는가하면 

입장을 바꾸어서 

2 가 위와 같은 형태로 1을 관찰한다고 할 때 


1 이 얻는 내용은 1 ^ 안에 머문다고 

이해하고 주장하는 것과 같이 

엉터리라고 제시하는 것이다. 


2 가 만일 1 이 눈을 감고 뜨고 함에 따라 

어떤 변화를 경험한다면 

그 내용은 2 가 보는 1 ^ 영역안에서 일어나는 일이라고 

생각하고 주장한다면 


1은 그것이 그렇지 않다는 것을 

위 그림을 통해서 쉽게 이해할 수 있다는 의미다. 



그것과 마찬가지로 

1 이 눈을 떠서 저런 모습을 보는 가운데 

2 를 관찰하면서 

2 가 얻는 어떤 내용은 

저 그림처럼 되는 것이라고 생각하면 

그것도 이와 마찬가지로  

엉터리 추리가 된다고 여기서 제시하는 것이다. 



그런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렇게 그림을 나타내 제시하면 

어떤 것을 이해하기 쉽다고 보기에 

그렇게 표시해 나타내는가 하면 


어떤 주체가 눈을 뜨고 세상이나 자신의 모습을 

보면서 

그것이 곧 외부 세상의 내용이고 

자신의 본 정체라고 이해하는 상황이 

엉터리로 뒤집혀진 판단이라고 함을 

이해하는데 도움이 되기에 

이렇게 나타내는 사정이 있는 것이다. 


여하튼 그림을 통해서 

이런 기본적 이해가 도움이 되면 

다행이지만, 

오히려 더 복잡하다고 보게 되거나 

오히려 또 다른 망상을 증폭시키는 데 이바지하면 

또 곤란한 것이다. 


그래서 현실에서 눈을 떠서 

자신이나 세계의 모습으로 보는 것이 

사실은 그 정체가 무엇이고 


왜 그런 판단이 전도망상분별이라고 하는가를 

위 그림을 통해서 일단 기본적으로 이해해야 한다고 보는 것이다.



그런데 위 그림에서 

일단 각 부분에 대해 

이 1 과 같은 부분은 1 자신이라고 생각하거나 

2 나 3 은 다른 사람이고 

4 는 꽃이라는 등으로 생각할 때 


그런 생각 내용은 이 그림에 

표시되지 않는 것이다. 


즉 그런 관념분별 내용은 

이런 색상도 없고 만져지지도 않는 어떤 것으로 

정신 안에 머무는 또 다른 성격의 내용인 것이다. 


그래서 이 둘을 감각현실과 관념분별로 

구분한 가운데 

이 둘간의 관계를 또 살피는 것이 

지금 논의의 한 부분인 것이다. 


그래서 일단 이 상황을 잘 파악하는 가운데 

도대체 여기서 무엇이 그렇게 

엉터리고 뒤집혀진 판단들이어서 

이로 인해 

본래 얻을 수도 없는 

생사고통을 매 순간 그렇게 받아나가고 

자신이 이런 가운데 

무언가 좋다고 보는 것을 추구하기 위해 노력하는 것 뿐인데 

왜 그런 노력이 자신을 

지옥과 아귀 축생의 세계로 묶여 끌려가게 하는 중이라고 하는 것인가를 

잘 검토해야 하는 것이다. 


일단 조금 복잡해졌으니 

잠깐 쉬면서 이어가기로 한다. 


쉬는 가운데 정리할 것은 

이런 감각현실을 얻는 가운데 

그에 대해 행하는 분별이 엉터리 망상분별이라고 지적하는 것은 

일단 그런 감각현실을 생생하게 또 각 부분이 뚜렷이 구분되는 형태로 얻지 못한다고 

지적하는 것도 아니고 

또 각 부분을 이렇게 저렇게 묶고 나누는 가운데 

그런 분별을 일으키지 못한다거나 해서는 안 된다고 지적하는 것이 아님을 

일단 주의해야 한다. 


문제는 그렇게 일으킨 관념분별과 

감각현실을 '동시에 얻는 가운데' 

자신이 그렇게 일으킨 그 관념분별은 

그런 분별을 일으키게 된  

그런 감각현실 그 부분에 

그렇게 있다고 자꾸 생각하면서 


그런 부분에 접착되어 

그 부분을 그런 내용으로 이해하고 취하고 머물면서 


그에 바탕해서 

생각하고 말하고 행위해가는 것이 

그런 생사고통을 받게 하는 과정임을 

이해해야 한다고 여기서 제시하는 것이다. 




그러니 논의 중에 자꾸 

이 내용들을 서로 혼동하면 곤란한 것이다. 


그리고 이 관계는 

나중에 그 내용을 어떤 주체가 직접 얻지 못하는 

실재와 감각현실의 관계를 살필 때도 

똑같은 형식으로 문제가 되는 것이다. 


그래서 이런 점을 일단 

현실에서 각 주체가 얻을 수 있는 

두 부분의 내용 

즉 감각현실과 분별내용을 통해서 

잘 정리해야 한다고 보는 것이다. 


>>>

prince 님의 something special 이론과 representative 이론은 
다음 그림에서 실재와 감각현실 그리고 관념분별의 관계를 
다음과 같이 이해하는 오류라고 할 수 있다. 


이미 이 내용을 앞에서 지적했는데 
다음 그림에서 관찰자 1 이 
2 가 무엇을 보고 생각하는 내용을 놓고 
1 이 생각하기를 아래 그림처럼 파악하는 오류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08pfl--image/진리의오류55.jpg 
[img2-02] [그림] 08pfl--image/진리의오류55.jp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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즉 2 가 눈을 뜨고 감음에 따라 
그의 마음에서 4^ 라는 꽃모습을 보고 
그에 대해 그 부분을 꽃이라고 생각한다고 할 때 

이렇게 되는 것은 위 그림처럼 
2 의 외부에 그에 상응한 실재하는 꽃이 4 처럼 있기에 
그런 내용을 얻고 
그런 생각을 하게 된다고 추리하는 것이다. 


결국 4 =>  4^ => 그리고 그 부분을 2 가 꽃이라고 생각하는 분별내용
이런 관계를 제시하고 


이것이 곧 prince 님이 말하는 
각 부분의 something special 과 그에 대한 representative 의 관계라고 
이 내용을 제시하는 것이다. 


여기서 무엇이 잘못이라고 지적하는 것인가하면 
2 가 그의 마음에서 1 ^ 라는 주체를 보면서 
1 ^ 가 4 ^ 라는 꽃을 대해서 
얻는 내용은 1 ^ 의 어느 부분( 1^ 의 마음)에 그 내용을 
얻는다고 추리하면서 그 관계를 제시하는 것과 
사정이 마찬가지인 것이다. 


그 내용을 1 이 이 상황에서 저 그림을 놓고 
그것이 대단한 엉터리 추리임을 이해하는데 
문제는 1 이나 2 나 그 상황이 서로 엇비슷하다는 것을 
이해하지 못하고 
임하기에 전반적으로 이 오류가 쉽게 시정이 되지 않는 것이다. 






여하튼 어떤 관찰자 1 이 
눈을 뜨고 감는 가운데 
눈을 뜨는 순간 얻는 내용을 얻을 때 
저 그림처럼 그 내용을 표시하는 것도 
사실은 엉터리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런데 그런 감각현실을 얻고 난 후 
자신이 눈을 감고 그에 대해 생각할 때 
그렇게 행하는 관념분별도 
사실은 위 그림과 비슷한 성격을 갖는 것이기도 하다. 


예를 들어 자신이 눈을 뜨고 본 꽃 모양을 
눈을 감은 상태에서 떠올린다고 해보자. 


그래서 자신은 직전에 본 꽃 모습과 비슷하게 
어떤 윤곽을 잡아서 저 그림의 4 처럼 
생각해낼 수도 있을 것이다. 


문제는 이 상황에서 그런 생각 내용과 
자신이 직전에 눈을 떠 본 감각현실은 
어느 한 부분에도 공통한 점이 없다는 사실이다. 


다만 그가 생각할 때는 
이 두 내용이 무언가 엇비슷한 것이라고 
주관적으로 망상을 일으키고 임한다는 점이다. 


더 나아가 
눈을 뜨고 그런 감각현실을 얻는 가운데 
그런 생각을 행하면 


자신이 행하는 생각 내용이 
곧 그 감각현실에 그렇게 있고 
그런 내용이 곧 그 감각현실인 것이라고 
망상을 일으키고 그에 접착되어서 
임한다는 것이 1 차적 전도망상 증상이라고 
여기서 지적하는 것이다. 


사정이 그렇지 않기에 그렇다고 하는 것인데 
이 내용을 아무리 오래 반복해 설명해도 
prince 님을 비롯해서 대부분 납득해 받아들이지 
못하는 가운데 자신의 망상분별을 고집하면서 
머무는 상태에 있는 것이다. 


그 상태가 그것만으로 그치면 그나마 다행이라고 
할 수 있는데 


그것이 바로 자신이 가장 집착하는 자신과 
자신의 것에 그대로 적용이 된다는 점이다. 


그래서 1 이 눈을 떠서 1 과 같은 모습을 보게 되면 
그 부분이 곧 자신이라고 생각하는 가운데 
이에 접착되어서 
매 순간을 임하고 생각하고 말하고 행위해가는데 


그런데 또 그 내용이 
자신과 자신의 것에 대해 지극히 좋다고 여기는 가운데 
그런 탐욕과 분노와 어리석은 번뇌에 바탕해 
일으킨 희망을 추구하는 것이어서 
그것이 곧 
장, 욱, 팡, 형태의 모드로 
각 경우에 반응하는 것인데 


그것이 자신만 그런 것이 아니고 
전도망상을 일으킨 생명 일체가 대부분 그런 상태에 
있는 것이어서 


그로 인해 자신이 그 가운데 어떤 모드를 취하면
상대도 똑같은 형태로 그 상대에게 그런 모드로서 
대하게 되는 것이어서 
이것이 바로 전도몽상에 바탕한 각 생명이 
그처럼 생사고통을 심하게 받는 
지옥과 아귀 축생 세계에 묶여 임하게 되는 
과정이라고 제시하는 것이다. 


그래서 prince 님이 
갑과 을이 세상에서 하나 밖에 없는 
보석을 놓고 서로 자신이 차지하고자 하면서 
시시비비와 대립관계로 임할 때 
이 문제를 어떻게 해결할 것인가라는 
가치문제에서 가치의 기본 문제를 제시하면 


prince 님은 이 관계에서 또 다른 시시비비의 당사자가 되어 
이 관계를 해결한다고 또 임해야 한다고 
제시하는 것을 볼 수 있는 것이다. 


그것이 자신이 prince 가 아니고 
king 이 된 그 의미라고 제시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 문제를 옆에서 보면 
원래의 시시비비도 문제인데 
prince 님이 다시 개입해서 
1-2-3 의 시시비비를 일으킨 상태가 되는 것 뿐임을 
보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이 어느 한 당사자가 자신의 입장에서 
어떤 논리와 주장을 제시하고 그것을 고집하면 
상대가 그것을 그대로 받아들인 가운데 
그 내용을 바로 그 상대에게 직접 적용하면 
그것이 바로 
그 상대가 
지옥과 아귀 축생 세계의 상태에서 
그런 생사고통을 겪게 되는 
그 과정을 설명하는 내용이 되는 것이다. 




이 내용은 또 생명 거의 대부분이 이런 구조로 
세계에 임하고 살아가기에 
그것이 또 mun 님이 말하는 업감연기의 형태로 
각 생명이 번뇌에 묶여 사역을 당하고 
다른 생명을 그렇게 묶어 사역을 시키는 가운데 
그렇게 우주 set 를 돌려서 
매일 매일 mun님에게 짜장면을 만들어 제공하는 
상황이라고 설명하는 내용이기도 한 것이다. 


prince 님이 1 과 2 가 하나의 보석을 놓고 
서로 차지하기 위해 다투는 이런 상황에서 
1의 소원을 성취시키면 2 가 고통을 당하고 
2 의 소원을 성취시키면 1 이 고통을 당하는 
대립 모순관계를 놓고 
만일 이들이 이런 문제로 서로 시끄럽게 하면 
자신이 이 둘을 다 감옥에 가둔다거나 
그 가운데 피해자는 이미 피해를 보아서 그렇다 치고 
그런 피해를 가한 가해자만 체포해 붙잡아서 감옥에 가둔다거나 
자신이 이런 대립이 일어나지 않도록 
자신이 아예 그 보석을 차지한다거나 하는 식으로 
임하면서 
그것이 자신이 king 이 되어 할 일이라고 생각하면 
그것은 문제에 문제를 덧붙이고 
이미 죽은 시체 위에 가해자의 시체를 더 올려 놓고 
그래서 그 문제가 해결된다고 여기는 상태와 
전혀 다르지 않은 것이다. 


그런데 처음 이 문제가 왜 그렇게 발생하는가 하는 문제는 
앞의 문제부터 하나 따로 떼어 내서 
정지단면을 놓고 한 주체가 그에 대해 
갖는 어떤 소원과 그 소원의 성취과정에 
어떤 전도망상증상이 그런 문제를 일으키는가를 
살피는 가운데 


그렇게 각 주체가 행하게 만드는 
전도망상과 탐욕과 분노 어리석음의 번뇌를 
이 각 주체에서 제거해 내지 못하면 
그 문제는 어떤 방식으로던 해결되기 힘들고 
따라서 이에 관련된 각 주체는 
그렇게 서로 얽혀서 
각기 지옥 아귀 축생의 세계에 묶여 
지낼 도리 밖에 없다고 지적하는 것이다. 


그런데 사실 그렇게 되면 
안타까운 것이 사실 아닌가. 


그래서 이 문제를 계속 지적하는데 
문제는 prince 님부터 
몇 십년간 동일한 주장을 굽히지 않고 
제시한다는데 그 문제의 심각성이 있다고 보는 것이다. 


그래서 각 내용이 
원래 그렇게 접착되어야 할 그런 관계가 아닌데도 
그런 망상을 일으켜서 
그 두 영역의 내용을 접착시켜서 이를 대하는 상태가 되면 
그 생명들은 아무리 그 뜻을 자유자재하게 
성취하는 상태라고 해도 
모두 욕계 안에서 생사를 받아가는 상태라고 제시하는 것이고 


그 가운데 뜻과 달리 매번 
고통을 받는 상태가 특히 문제로서 
그것이 곧 지옥과 아귀 축생과 같은 세계의 생명들이라고 
제시하는 것이고 


그나마 인간은 어중간한 상태로서 
어떻게 보면 아주 좋지도 않고 
나쁘지도 않고 
어느 정도 분별도 행하는 가운데 
어떻게 보면 생사 고통의 해탈이나 
또는 더 좋은 상태인 하늘로 거주처를 옮겨갈 가능성을 갖는 상태로서 
일종의 가석방 상태라고 보는 것이기도 하다. 


그래서 이 상황에서 이 문제를 
근본적으로 잘 해결하지 못하면 
상당히 장기간 또는 무한한 기간에 걸쳐서 
이런 생사고통을 근본적으로 벗어나기 힘들다고 보고 


이 상황을 어떤 눈먼 거북이가 바다에 한 번 떠올를 때 
그 때 이러한 해탈문의 열쇠가 적혀 있는 
구멍난 나무조각을 만나 
그 구멍에 머리를 끼우게 되는 확률과 같다고 
비유해 표현하는 것이기도 한 것이다. 


이름하며 맹구(귀)부목이라는 표현이 그것인데 
전도망상을 일으켜서 
그 바탕에서 엉터리 희망을 일으켜 정신없이 추구해 가는 가운데 
생사고통을 반복해 받는 그 상황에서 
벗어나기 어렵다고 보게 되는 그 사정이 그렇게 있는 것이다. 




이미 앞에 다양한 번뇌의 종류를 제시하고 
이것을 해결해야 그 상황에서 벗어날 수 있다고 제시했는데 
사실 하나하나 쉬운 것이 아니다. 


나중에 백만대군을 통솔하는 장군이 되어서 
현실에 임할 때 
무엇이 가장 상대하기 어려운 적이라고 보게되는가를 
그 장군에게 물으면 


명령만 내리면 다 살해할 수 있다고 보는 
몇 백만의 적군이 아니고 
바로 자신의 마음에 손님으로 자리잡고 있는 가운데 
마치 그것이 자신인 것처럼 행세하면서 
자신을 끝없이 이런 생사현장에서 묶어 사역을 시키고 
다른 생명을 사역시켜나가게 하는 
이런 엉터리 견해들과 
탐욕 분노 어리석음과 같은 번뇌를 
스스로 제거해내는 것이 어렵다고 
제시하게 되는 것이다. 




그런데 같은 내용을 여러번 반복하고 
같은 증상을 반복해 일으키는 
prince 님과 같은 환자를 대하다보면 


환자를 대하는 이마저도 
갑자기 답답해지고 분노를 일으키는 가운데 
역시 자신도 해결하지 못하는 중독증상으로 
도피해서 담배에 불을 붙이면서 
담배가 곧 자신인 것처럼 여기는 가운데 
소신공양을 행하게 되는 사정이 있다고 보는 것이다. 


그런 가운데 또 그렇다고 
이를 그냥 방치하고 내버려두면 
또 곤란하다고 보게 되는 것이어서 
상당히 사정이 어렵다고 보게 되는 것이다. 


그런 가운데 
처음부터 
끝까지 한국어로 그 어려운 사정을 
미리 경고한다고 시감상하게 되는 곡이 생각나는데 
이 곡을 여기에 올리는 것이 좋다고 보게 된다. 


적당히 말을 하면 
적당히 상황을 빨리 파악하고 
생각과 말과 행동 자세를 변화해햐 하는 것인데 


자신과는 전혀 관계없는 내용으로 이를 보고 
태연하게 지옥 아귀 축생 세계의 수용소로 향하는 
가차 위에서 아라리요 노래를 부르고 있으니 
답답한 일이 아닌가. 


가수도 그래서 
적당히 말하면 적당히 알아들어야 함을 강조하는 
알아들엉이란 가수와 
추격을 피해 열심히 도망중이라는 달리다 양이 
이에 관해서 경고 메세지를 노래로 
전하고 있다고 전반적으로 시감상하게 되는것이다. 


아무리 쭈리히로 도망을 가고 
자금을 도피하고 해도 
그렇게 문제가 해결되는 경우는 없음을 
빨리 파악하고 
알아들엉이라는 가수가 경고하는 대로 
빨리 시킨대로 수행을 해야 한다고 
보는 것이다. 


일단 답답하므로 이 노래를 올려 놓고 
또 장시간 쉬기로 한다. 










mus0fl--Dalida & Alain Delon - Paroles, paroles.lrc 




이렇게 해서 지옥과 아귀 축생 세계에 묶여 
지내게 될 때 
그렇게 되는 죄명이 무언가도 
이 노래에서 제시하고 있다. 


자신은 그저 망상을 일으켜서 
그에 바탕해서 열심히 자신이 좋다고 본 것을 
최선을 다해 추구했을 뿐인데 
왜 이런 수용소에 갇혀서 
이런 고통을 받아야 하는가가 
궁금한 경우 
그 답도 마찬가지다. 


어떻게 보면 근본 무명 어리석음에 바탕해서 
그렇게 임한 것 뿐이라고 
정상을 참작할 수도 있는 일이라고 보지만, 
바로 그런 근본 무명이 
가장 큰 문제라고 
경전에서 반복해 지적하고 있는 것이다. 


법정에서는 술이 취해서 잘 몰랐다거나 
미처 그런 관계를 몰랐다거나 하면 
형이 감경되거나 면제된다고 보기도 하지만, 


그러나 부처님은 반대로 그 사정을 제시하는 것이다. 


모르고 절벽에서 앞으로 걸어나가면 
차라리 그래도 사정을 조금 파악하고 걸어나간 경우보다 
훨씬 부상도 심하고 그로 인해 겪는 고통도 길게 된다고 
생사현실의 사정을 지적하고 있는 것이다. 


현실에서 어떤 아이가 
사정을 모르고 차가 쉼없이 다니는 도로에 
자신이 좋아하는 공이 굴러 간다고 해서 
뛰어들었다고 할 때 


그 아이가 그 사정을 몰랐기에 
그 아이가 이후 무사하다고 볼 수 있는가. 
사정이 그 반대인 것이다. 


물론 그렇다고 그런 사고로 불구가 되거나 
이미 사망한 아이에게 그 책임을 물어서 
감옥에 가두는 일은 없겠지만, 
이미 그 자체가 그런 어리석음과 탐욕 분노로 
그 자신이 받게 되는 생사고통의 내용인 것이다. 


그래서 이것을 혼동하지 말고 
그래도 위 노래의 제목이 제시하는 것과 같이 
어느 정도 여유가 있는 가석방 상태에 있을 때 
이 문제를 빨리 정리하고 
스스로 해탈문을 찾아 들어가서 
기본적으로 생사고통의 묶임에서 해탈을 얻는 상태가 되고 
그 이후 문제를 또 살펴야 한다고 보는 것이다. 


parole 란 노래 제목이 
그 제목으로 많은 단서와 힌트를 제공하고 있는 것이다. 


그것이 한편으로는 가석방 상태를 나타내기도 하고 
또 지금 유무 논의에서 핵심적인 주제로 다루고  
망상분별의 전개과정에서도 관련이 깊은 내용으로서 
이름 단어 명(名)이라는 의미도 나타낸다고 
보는 것이다. 




이 증상을 이처럼 근본적으로 해결하지 못하면 
그 다음 보충적인 방안으로 
현실에서 자신이 집착하고 대하는 것들을 
하나하나 나열한 가운데 


그 각각이 어느 정도 지속이 되는가를 놓고 
또 실험을 해볼 필요가 있다. 


방금전에 본 내용이 눈을 감고 나서 
단 한순간이라도 그대로 얻어지는가. 


감각현실이란 그런 것이다. 


그리고 눈으로 얻는 감각현실은 
귀로 대하는 영역에서는 또 얻어지는가. 


그래서 자신이 아무리 애착을 갖고 
그것을 산처럼 쌓아 두고 
금고에 숨겨 놓거나 
쭈리히로 도망을 간다고 해도 


다른 세계에서는 낙엽으로도 
그 존재를 인정받지 못하게 된다는 사정부터 
잘 이해하고 


도대체 가석방 기간에 
어떤 보물을 획득하고 비축해두어야 
이후 각 세계에서 그것을 다 확보하고 
이용할 수 있게 되는가를 
잘 생각해야 하는 것이다. 


성경에서도 비슷한 내용을 제시하여 
재산을 하늘에 비축해 두라고 제시하는 것으로 아는데 
사정이 그런 것이다. 


외국에 이민만 가려고 해도 
사정이 그런데 
각 세계를 그렇게 옮겨 다녀야 하는 상태에서는 
더더욱 그런 사정을 미리 잘 파악하고 
임해야 되는 것이다. 


mun 님이 아무리 우주 set 가 그렇게 
자신을 위해서 돌아도 
자신이 그를 통해서 
얻는 것은 매일 매일 짜장면과 
잠자는 자리와 옷 몇 벌 밖에는 
별로 의미가 없다고 제시하는데 
그런 기본 사정만이라도 정확히 파악하고 임해야 
살아가는 과정에서 곰 취급을 받지 않고 
적어도 사람 취급을 받게 된다는 사정을 
이해해야 는 것이다.  


알고보면 이런 문제가 심각한 것이다. 


물론 가만히 두면 
그런 곰이 애착하고 쌓아 논 것을 
mun 님이 그대로 다 확보하고 
또 사용하게 되는 사정을 보게 되지만, 
그것은 mun님은 적어도 
그처럼 각 세계에 묶여 끌려다니면서 
매번 강제포맷을 당하고 
분단 생사과정을 통해 
생사고통을 받는 상태는 아니라고 
스스로 주장하기에 그렇다고 보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는 
사정이 그렇지 않은 것이다. 


그러니 이 사정을 직시해서 
재빨리 수행에 진입해서 
이 상태에서 벗어날 필요가 있음을 
주의해야 된다고 보는 것이다. 



>>>


"덫에 걸린 상태에서도 고통을 벗어나야 하고 
그러기 전에 덫에 걸리지 않아야 하는데 
그러려면 상을 윤곽을 그려 떼어내려 하지 말고 
생각하는 내용은  아니지만 그러나 생생한 그 무엇을 그렇게 붙잡지 말고 
그것이 무너져도 자신은 큰 관계 없으니 
오히려 다음에 그렇게 이상한 모습을 자신이라고 보게 되지 않도록 
생사고통에 평안하게 임하면서 무량행문을 닦아 나가자. 


이런 새로운 구절을 만들어 보았다. 



[...]


망상증상을 치유하기 위해서 
다음과 같은 키워드 구절이 만들어졌다고 할 수 있다. 


"덫에 걸린 상태에서도 고통을 벗어나야 하고 
그러기 전에 덫에 걸리지 않아야 하는데 
그러려면 상을 윤곽을 그려 떼어내려 하지 말고 
생각하는 내용은  아니지만 그러나 생생한 그 무엇을 그렇게 붙잡지 말고 
그것이 무너져도 자신은 큰 관계 없으니 
오히려 다음에 그렇게 이상한 모습을 자신이라고 보게 되지 않도록 
생사고통에 평안하게 임하면서 무량행문을 닦아 나가자. 

꿈을 마치자 


이것 자체는 기억을 하기 위해서 각 부분의 키워드를 
이어붙인 것으로 중요한 것은 아닌데 
이 문제를 다음과 같이 생각해보자. 




이해를 쉽게 하기 위해 
어떤 상황이나 마찬가지인데 
다음 그림을 붙여 놓고 
감각현실과 분별사이의 문제를 살피기로 하자. 






이런 상황을 어떤 이가 바라보고 있다고 해보자. 


먼저 감각현실과 관념분별 사이에 어떤 문제가 있는가는 
곧 상(相)과 상(想) 사이에 어떤 문제가 있는가를 살피는 문제다. 


눈을 감았다가 뜨니 저러한 모습이 보인다면 
대부분 마음 속에서 저런 모습을 얻는 상태에서 
윤곽 찾기와 같은 형태로 
각 부분을 묶고 나누어 각 부분이 누구고 무엇이고를 
분별하는 작용이 이뤄진다고 할 수 있다. 


결국 이 과정을 간단히 제시하면 
처음 그림과 같이 제시한 형태가 된다고 할 수 있다. 


08pfl--image/진리의오류55.jpg 
[img2-02] [그림] 08pfl--image/진리의오류55.jpg 
http://buddhism007.tistory.com/228 ☞○ 마음과 색의 의미에 관한 논의 
http://thegood007.tistory.com/1172 ☞○ 진리에 관한 수많은 오류와 착각의 문제 
03fl--ghpt/r1030.htm ☞○ 진리에 관한 수많은 오류와 착각의 문제 

 


위 그림처럼 일정부분은 1 자기 자신 
그리고 2 라는 다른 이 
3 이라는 또 다른 사람 
4 라는 꽃 
이런 식으로 각 부분을 나누고 묶어서 
그 각 부분이 무엇이라고 분별하고 생각하게 된다는 의미다. 




그렇게 하는 것 까지는 큰 문제는 없다고도 할 수 있는데 
이렇게 행하는 경우 
대부분 그 다음 망상증상으로 넘어가는 것이다. 


즉 1 이 1 과 같은 부분을 묶어서 
자신이라고 생각을 하게 된다면 


이제 매번 그런 감각현실 부분을 
자신이라고 여기면서 
계속 그에 접착해서 
그 부분이 자신이라고 여기면서 매 순간 대해나가게 된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일상생활에서 그리고 어떤 이가 태어나서 죽는 순간까지 
이렇게 임하는 것이므로 
여기에 무슨 문제가 있는 지를 스스로 파악하기 힘들다고 할 수 있는데 


사실은 이것이 그 한 생 동안 그를 그렇게 
묶어서 사역을 시켜온 근본 원인이기도 하고 
또한 앞으로 그런 형태로 무한하게 자신을 묶어서 
그렇게 각 세계를 묶어 생사고통을 받게 하는 근본 바탕이기도 하다고 
여기서 지적하는 것이다. 


그런데 사실은 어떻다고 여기서 지적하는가 하면 
자신이 자신이라고 보는 그 1 이란 부분은 
사실은 자신이 아니라고 여기서 지적하는 것이다. 


사정이 그런데도 그런 망상을 일으킨 이는 
마치 이전에 최면쇼에서 
어떤 인형을 자신이라고 최면에 걸려 
인형에 무엇을 꼽으면 최면 걸린이가 그에 일정한 반응을 일으키듯 
그렇게 반응해 나간다는 사실을 지적하는 것이다. 


그 최면자료를 인용하려니 벌써 오래전 자료가 되었다. 
ж https://www.youtube.com/watch?v=Vub9pGGfthg
[ -최면과 부두인형 - ]




저주에 사용하는 특수한 인형으로 부둣가에서 사용하는 인형이라는 
명칭이 붙어 있는 것 같다. 
아프리카 VOODOO 교에서 주로 실행하는 최면쇼와 관련이 되어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현실이 이런 최면과 같다는 점을 
앞의 현실 상황을 놓고 
이 문제를 일단 살펴보자. 


어떤 이나 눈을 뜨면 보게 되는 1 과 같은 부분을 놓고 
그것이 자신이라고 여기면서 대하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그 부분을 떼어서 
그 부분이 자신이라고 여길 때 
취하는 아상(我相)인 것이다. 


그 감각현실 부분을 자신이라고 여기며 
그 부분을 마음에서 떼어내 취하면 
그 부분에 아상(我相)을 취하는 것이고 
그것이 나라고 생각하는 생각은 아상(我想)이 되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이 나라는 생각을 일으킨 다음 
그 부분을 주시하면서 
계속 그 부분이 나라고 그렇게 머물고 
생활을 하게 되는 것을 
문제라고 지적하는 것이다. 


그 부분이 
본래의 자신과 전혀 관련이 없다는 것은 아닌데 
사정이 그렇지 않은데도 
자신이 그렇게 거꾸로 뒤집혀서 
자신과 자신의 것이 
그런 것이라고 여기면서 
계속 대한다는 것이 
바로 그런 상태로 계속 생사고통을 받아나가는 
근본 원인인 것이다. 




여기서 자신이라고 보는 부분이 
어느 부분이 잘라 떨어질 상태에 있다고 가정해보자. 
현실에서 이런 상태면 
아무리 수행자라도 비명을 지르지 않을 수 없는 것이 
현실이다. 


그런데 그것이 무슨 현상인가. 
바로 앞에서 제시한 
최면속의 voodoo 현상이라고 지적하는 것이다. 


그 부분을 자신이라고 자신은 여기지만, 
일단 그것은 자신의 마음안에 얻어진 감각내용의 하나인 것이고 
감각현실이고 
거기에는 자신이 생각하는 그런 '자신'도 얻어지지 않는 것이고 


더 나아가 그 부분은 실재의 내용[실상]의지위에 있는 내용도 아니고 
실재의 실상은 그와 관계없이 그런 생멸과 생사를 떠나 
있는 것이라고 앞에서 계속해서 지적해 온 것이다. 




그래서 위 경우에 정말 안타깝게 
그 부분이 다 허물어지고 사라진다고 가정해보자. 


사실은 현실에서 이 부분을 자신이라고 보는 경우 
바로 이런 상태를 대단히 공포스럽게 여기고 
두려워하기도 하고 
또 이렇게 되지 않기 위해서 온갖 노력을 하는 것이기도 함을 
이해할 수 있다. 
수행을 하는 입장이라고 해서 여기에서 
자유로운 것은 아니다. 


그런데 정말 사정이 그렇다면 
그는 40 년전에도 그와 비슷한 상태로 그 현실에 임했고 
20 년 전에도 그와 비슷한 형태로 임했다는 것도 
함께 생각해야 한다. 


그러니 그렇게 임하는 입장이라면 
왜 이 가운데 어떤 하나의 장례식을 치루지 않고 
또 사망신고도 하지 않고 
그렇게 태연하게 임하고 있는가부터 
검토를 해야 하는 것이다. 


이 내용을 제시하면 
망상증상에 있는 이가 거꾸로 이 내용을 듣고 
웃는 것을 볼 수 있다. 
자신이 생각할 때 본인의 주장이 너무 터무니 없어서 
웃음이 나온다는 것이다. 


그런데 본인은 그런 이를 대하면서 
더 문제라고 보는 것이다. 
자신이 놓여 있는 사태의 심각성을 인식을 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여기서 40 년전의 자신과 지금의 자신 
또는 40 년후의 자신의 모습은 
완전히 다르다는 것을 지금 제시하는 것이다. 


그래서 그것을 자신이라고 고집한다면 
이 가운데 어느 하나는 적어도 사망한 상태라고 
보아야 함을 의미하는 것이다.


사정이 그런데도 그는 그것이 우스운 이야기라고 여기고 
왜 그렇게 다른 각 모습을 자신이라고 매번 대하는 지를 
스스로 이해하지 못하는 것이다. 


그래서 여기서 그렇게 서로 다른 내용들을 
하나로 보게 하는 것이 사실은 본래 자신이라고 여겨야 할 
그런 내용이라고 하고 


지금 1 과 같은 부분을 자신이라고 보는 것은 
일단 망상분별에 의한 집착이라고 제시하는 것이다. 


어머니 뱃속에서는 수영까지 하면서 
10 Cm 정도로 지낼 때도 있었다면 
노인이 된 어떤 이가 
이 모습과 이 모습을 다 같은 자신이라고 계속 
생각하면서 지내게 하는 그런 자신은 따로 있는데 


정작 각 순간에 대하는 그 모습은 아니라고 보아야 하는 것이다. 


이 문제를 잘 인식하지 못하고 
거꾸로 이것을 인식하는 것이다. 


이 상황을 수능엄경에서 
자신의 마음의 위치를 찾아내는 문제로 
제시되는데 
그에 관련된 수많은 오류판단을 다 시정한 다음 
최종적으로 얻어야 할 판단은 


일단 현재 자신이 눈을 떠서 1 과 같은 부분을 자신이라고 보고 
정작 그런 모습을 보게 되는 자신의 마음은 
인식하지 못하는 그런 증상 


더 나아가 자신이 자신의 모습이나 세계의 모습을 볼 때 
그 모든 내용이 사실은 자신의 마음에 들어온 
티끌이나 손님과 같은 내용이라는 것을 인식하지 못하고 


이것을 뒤집어서 거꾸로 붙잡고
자신의 마음에 들어온 부두인형과 같은 것을 자신이라고 여기면서 
매순간 임하는 가운데 
점차 점점 모습이 변해가면서 


나중에 완전히 그 부두인형은 없어지고 
상당히 업의 장애가 많은 경우에는 
축사에 들어가서 새로 이상한 축생의 몸을 또 
정신없이 자신이라고 여기면서 계속 임해가는 형태가 
된다. 


최면도 아닌데 매 순간 그렇게 집착하면서 
나아가다 보면 결국은 그렇게 된다는 사실을 
지금 주의를 주고 있는 것이다. 


키워드만 뽑았는데도 너무 길어진다고 본다. 


그런데 


만일 지금 당장 그 1 과 같은 부분이 
어떤 짐승을 잡는 덫에 걸린 상태여서 고통을 당하는 상황에 있다면 


자신이 그렇게 자신으로 보는 상을 놓고 
그것이 그렇지 않다는 사정을 잘 관해서 
아상을 제거해서 
임하여 안인을 성취하고 그 고통을 극복할 수 있다고 일단 제시하는 것이고 




또 다른 한편으로는 
매번 그런 덫에 걸려들게 되는 그런 원인을 만들어 내는 
행위 방식에서 
그 원인 부분을 제거하기 위하여 
이 사정을 잘 관하고 
그런 것이 자신과 자신의 것이 아니라는 사정부터 잘 관하고 
오히려 신경을 기울여야 할 부분은 
지금 당장 자신이라고 보는 그런 부분이 아니고 
오히려 사정이 그렇지 않은데 
매 순간 그런 부분을 자신이라고 여기면서 대하는 가운데 
매 생 지옥이나 아귀 축생의 세계에 그렇게 매번 출연해서 
삶을 묶여 지내는 그런 상태가 되는 것 자체를 
피할 수 있도록 
미리 주의를 해서 
삶의 자세 자체를 
업의 장애를 제거하고 
반대로 복덕과 지혜자량을 얻게 되는 
수행모드로 변화시켜야 한다고 제시하는 것이다. 


결국 그런 상태로 매 생을 시작하게 되는 원인을 
제거하려면 그런 구조로 
자신과 자신의 것에 대해 집착하고 희망을 일으켜 
추구하는 것을 제거해야 한다고 하는 것이다. 


그것이 
무원무작 해탈문의 내용인 것이다. 


그렇게 되면 어떻게 되는 것인가 하면 
비로소 그런 상태로 계속 망상을 일으켜 
생사고통을 받는 상태에서 풀려난다고 하는 것이다. 


마치 부두 인형을 자신이라고 여기면서 
부두인형이 불에 들어가면 자신도 끌려 들어가는 상태에 
있다가 


최면이 풀림으로써 이제 그 부두인형과 
자신은 그런 관계가 아님을 알고 
묶임에서 풀려나는 상태가 된다는 것과 
상황이 비슷한 것이다. 


그러니 이 문제는 
처음 자신이 1 이라는 자신의 모습을 보는 
한 정지단면을 놓고 


왜 그것을 자신이라고 스스로 여기게 되었는가부터 
잘 검토해야 하는 문제이기도 하다. 


그런 1 과 같은 부분을 보고 


여러가지 신경도 쓰고 
옷도 차려입고 씻기도 하고 꾸미기도 하면서 
매 순간 그것이 자신이라고 여기면서 
대하는 전도망상이 전개되는 
그런 사정이 따로 있는 것이다. 


즉 아무 이유없이 공연히 길에 있는 인형을 
붙잡고 그 부분을 자신이라고 여기는 것은 아닌데 
그것이 이번 생을 시작하는 단계에서부터 
그렇게 되어졌다는 사정도 함께 이해해야 하는 것이다. 


그래서 일단 이번 생에서 그렇게 되었으면 
그것이 완전히 풀리는 죽음을 맞이하는 단계까지는 
어쩔 도리는 없다고 일단 보는 것이다. 


다만 그것을 계속 행하거나 
심지어 상태가 심해서 
돼지나 파리 지렁이 이런 형태의 것을 붙잡고 
계속 자신이라고 보면서 임하게 되거나 
지옥의 생명을 놓고 그렇게 묶여 지내면 
정말 곤란하고 
그 상태가 되면 뜻처럼 
일체가 공하다는 내용하나만으로 
쉽게 그 상태로부터 벗어나오지 못한다고 
주의를 주는 것이다. 


감옥에 붙잡힌 이가 그렇게 쉽게 그 감옥을 
벗어나오게 되면 
그렇게 붙잡아 놓은 입장이 편하게 되지 못하기에 
사정이 그렇기도 한 것이다. 


그래서 덫에 걸려서 고통을 받는 상태에서 
직접 벗어나오는 방안과 


미리 그런 덫에 걸려서 고통을 받지 않도록 
미리부터 주의하고 
수행방향으로 돌리는 두 방향의 
해탈문을 평소 잘 익히는 것이 
대단히 필요하다고 지금 제시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 내용을 
거울이던 앞의 그림이던 
정지 단면을 하나 놓고 
여기서 무엇이 잘못된 가운데 
계속 그 상태로 행하면 
그렇게 된다고 제시한 것인가를 곰곰히 
검토해야 된다고 본다. 


일단 키워드 부분들의 정리가 다 안 되었는데 
조금 쉬었다가 이어나가기로 한다. 


여하튼 감각현실[색]과 관념분별의 관계는 
그런 관계가 아닌데 
어느 순간 이것을 동시에 놓고 
접착이 되면 
그런 상태로 욕계라는 세계에 묶여서 
생사를 받아나가는 상태가 된다는 것을 
주의 해야한다고 여기서 제시하는 것이다. 


그렇다고 지금 이 상태를 쉽게 벗어날 수 
있겠는가. 
그것이 뜻과 같지 않다고 제시하지만, 
그러나 방안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어서 
칠각지역에서 세계 여행을 떠나는 연습과 함께 
이런 묶임에서 풀려날 수 있고 
그렇게 묶는 업의 장애를 해소할 수 있는 
많은 수행을 정진해야 한다고 제시하는 것이기도 하다. 


그렇지 않으면 그 묶임에서 풀려나지 못하고 
아무리 일체가 공하다는 것을 이해해도 
그런 이해를 바탕으로 
지옥에 묶여 지옥의 공수행자로 지낼 도리밖에는 
없다고 제시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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