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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과판단의 오류문제1 본문

연구자료

인과판단의 오류문제1

진리와 가치를 고루고루 2017. 8. 31. 21: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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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fxx--인과판단의 오류문제1.txt

http://buddhism007.tistory.com/3523

● 이하 글은 단상_조각글 내용을 주제별로 '편집중'인 글입니다.


>>>


논의할 주제로 

손뼉을 치고 소리가 나면 

손을 바라보고 그 손에서 소리를 찾고, 

심지어 소리의 본 정체가 그 손이라고 생각하거나, 


그것도 아니면 

소리 자체에서 그 소리를 얻었다는 식으로 

망상분별을 일으키는 문제를 주제로 잡았다. 



현실에서 눈을 떠 

꽃을 바라보면서 

그것이 꽃이라고 여기면서 

좋다 나쁘라라고 하며 

집착하고 임하는 전도망상 편집증상이 


사실은 위와 같은 판단과정과 

사정이 같다고 보기 때문이다. 


간단히 살피기 어려운 문제인데 

여하튼 문제가 되니 논의를 중지하기도 어렵다고 본다. 




- 이에 대하여 논의를 하는 이유 -


금강경에서 '불설단멸' 이런 구절을 제시하는데, 

이는 단멸 즉 한 번 있다가 없어지면
무한히 없고 그것으로 끝이다라고 보는 입장에 대해 

문제를 지적한 것이다. 


한편, 전도망상을 바탕으로 각 생명이 돌아다니면서 고통을 받는 

3 계 6 도의 상태가 다 문제라고 보지만, 

그 가운데에서 축생 아귀 지옥의 상태가
특히 문제가 심하다고 보게 된다. 


이런 상태는 고통이 심할 뿐만 아니라, 

해탈문에 들어서서 수행에 임하는 것 

자체가 상당히 곤란하다고 보기 때문이다. 


그런데 불설단멸이라는 내용은 

이 상황에서 

지옥 중생이 극심한 고통과 공포를 겪으면서 

죽을 듯 고통을 받고 죽게 된다해도 
그것으로 모든 것이 끝이 나고 

그로 인해 그 생사고통에서 벗어나게 되는 것도 아니고, 



아귀는 아귀대로 평소 쉼없이 갈증을 일으키며 

음식을 갈구하는 가운데 

마침내 음식을 구해 먹게 되면 

그로 인해 목에 불이 타고 

죽을 듯한 고통을 받고 죽는다고 해도 


그로 인해 그런 갈구나 고통을 받고
생사고통을 받는 것이
끝나게 되는 것이 아니라는 

사정도 함께 말하는 것이다. 





가을이 되거나 겨울이 되면 

여름내내 극성을 피우던 파리나 모기가 

하나같이 다 보이지 않고 사라져서 

이제는 더 이상 보지 않아도 되겠다고 여기기도 하지만, 


그러나 여름이 되고 때가 되면 

어디에 숨어 있다가 나오는지 

수많은 벌레들이 모습을 또 나타내는데 

축생의 상태도 마찬가지고 

3 계 6 도의 전반적인 상태가 

다 그와 같은 것이다. 



어떻게 보면 하루살이를 놓고 보면 

인간은 한없이 길고 긴 삶을 산다고
스스로 인정할 만하지만, 


하루살이에 비해서 그렇게 장구하게 살아간다고 해서 

인간이 자신의 죽음의 순간을 두려워하지 않는 것도 아니고 

죽지 않는 것도 아닌데 


더 문제인 것은
살다가 한번 죽음녀 그로 인해 

모든 것이 끝이고 다 없게 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 

오히려 더 심각한 문제인 것이다. 





가끔 수행을 행하고 해탈을 얻어 

생사 고통을 벗어나고
니르바나의 상태에 이르면 

이로 인해서 이제 

그 수행자와 관련해서는 아무 것도 없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그 수행자가 정말 생을 마치면 

더더욱 그렇게 된다. 

이렇게 열반의 의미를 이해하고 대하는 입장이 

가끔 있다. 



그래서 전혀 아무 것도 없는 상태가 되는 것이 

열반을 증득한 아라한이나 부처님이 

맞이하는 상태라고 이해하는 것이다. 


처음에 어느 부분에서
그런 혼동을 일으켰는지 모르는데 


그것은 평소 
죽음은 모든 것이 끝이 나고 없게 되는 것이라고
단순하게 생각하는 이가
수행자가 죽음을 맞이하면 
열반에 들었다고 표현하는 것을 놓고 
자신이 생각하는 죽음의 의미로 
열반의 의미를 이해하는 가운데 
그런 혼동을 일으킨 것이 아닌가 
생각해보게 된다. 


여하튼 그런 입장에서
전도망상 상태를 기준으로 

생멸한다고 보는 현상 일체를 놓고 

그것들이 하나같이 생멸을 떠나 

본래 니르바나[열반]의 상태인 것이라고 선언하는 경우 

그 열반에 대해
그런 이상한 오해를 하고 대하는 경우가 있다고 
보게 된다. 


그런 결과 

부처님이 무량한 겁을 수행해서 

성불하고 그래서 설법을 하고 

이제 열반에 드신다고 하면 

그 상태가 그처럼 이제
완전히 그 부처님과 관련한 것은
아무 것도 없게 된 것이라고 잘못
오해를 하게 된다고 본다. 

그러나 니르바나의 상태가 그런 것이라고 본다면 

수행자는 참 할일없이
쓸데없는 일을 놓고 

그렇게 무리하게 그리고 무량하게 

임하는 것이라고 할 수도 있다. 


그처럼 니르바나의 상태에 대해 

그런 오해를 하는 경우가 있다. 



수행자가 수행을 통해서 얻는 상태는 

전혀 아무 것도 없는 상태가 아니고 
본래는 있고 없음을 모두 떠나는 상태라고 설명해야 할 것이지만, 

이런 상태를 놓고 아무 것도 전혀 없는 것이라고 
오해하는 경우가 있기에 


그런 치우친 견해를 시정하기 위해서
표현상으로는 조금 오해를 불러 일으킬 여지가 있다고 보지만, 
그런 열반의 상태는 
전혀 아무 것도 없는 것이 아니고 

오히려 상-락-아-정의 상태처럼 되는 것이라고 

제시하게 되는 사정도 있다고 본다. 




처음 각 생명이 엉터리로
신발이나 신발에 붙은 껌과 같은 부분을 놓고 

그것을 자신이나 자신의 것이라고 망상분별을 행하면서 

분주히 임한다고 한다면, 

전혀 이유가 없이 그렇게 행하는 것은 아니고 

그런 부분이 사실은 

그렇게 상-락-아-정의 상태로서 

자신이라고 보게 되기에 그런 것이기도 하다. 


즉 자신의 손과 발이 

장갑이나 구두와 달리 자신의 몸이라고 보고 현실에서 

임하는 것은 


사실은 그렇게 그런부분을 

상락아정의 상태이고 그래서
그 부분이 자신이라고 보게끔 홀릴만한 

약간의 사정이 있는 것이라고 보게 된다.

간단히 말하면
늘 눈을 뜨면 보는 것이 자신의 모습이라고 여기는 것이고
그 부분은 자신의 뜻에 따라 움직일 수 있는 부분이라고
여기는 것이고
또 다른 부분은 외부 대상인데 반해 자신의 부분은
이런 것을 대상으로 상대하여 내용을 얻는 주관으로서 자신이라고 여기는 것이고 
그리고 자신은 다른 존재와 달리 깨끗하고 좋은 것이라고 
평소 자신이라고 보는 부분에 대해 
이런 잘못된 망상을 일으킨 다음 
그 부분에 그렇게 집착을 갖고 평소에 임하게 된다는 의미다. 




그래서 그런 내용을 
징검다리나 발판으로 삼아서 


갓난아이부터 청소년 그리고 노년과 

임종직전까지 계속 묶여 끌려 다니는 것이기도 한 것이다. 



그런데 단멸관을 가지면 안 된다는 의미는 
어떤 이가 그렇게 해서 죽는다고
그것으로 전혀 끝이 아니고 

이후에도 또 그런 형태로 계속 단멸없이 

생사고통을 받아 나간다는 내용을 제시하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어떤 한 주체는
도대체 무엇을 놓고
그렇게 계속 사라지지도 않고 무한하게 

그런 생사고통을 받아나가는 것인가하는
문제를 또 잘 살펴야 하는 것이기도 하다. 



그리고 무한하게 이어진다는 측면은 

어떻게 보면 다행이라고 보는 입장도 있지만, 

그 각 순간의 사정은 전혀 그렇지 않은 것이다. 


그것이 아귀가 목에 불이 타는 고통을 느껴도 

죽는다해도 잘 죽지도 않고 고통을 받아나갈 뿐만 아니라,
설령 죽는다해도 계속 그 형태로 나아가고 


지옥 중생이 당장 죽을 것처럼 고통을 느끼고 

의식을 잃고 죽는다고 해도 

역시 그로 인해 고통이 끝이 나지 않고
계속 그렇게 고통의 생사가 이어지게 되는 

안타까운 사정이기도 한 것이다. 



왠만하면 적당이 끝이 나고 없어져야 

수행자나 일반입장이나
속이 편할 것도 같은데 

사정이 그렇지 않기에 

그것이 문제인 것이다. 



그리고 바로 그런 사정으로 

수행자도 무량한 기간 니르바나에 

여여하게 머물면서 

또 수행을 하고 니르바나에 다시 들어 

상락아정의 상태로 임한다고 표현하는 것이기도 하다. 


수행자가 수행을 통해 니르바나의 상태에 이르렀다는 것은 
비유하면 병사가 장군이 된 상태라고 할 만한데 

장군이 되면 

병사가 하는 일을 하지 못하겠는가. 


또 수행자가 처음 보리심을 일으켜 수행에 임해 

무량한 수행을 유희자재하게 행해나가게 되었는데 

성불한 상태가 되면
처음 수행자가 하는 수행은
그 상태에서 전혀 하지 못하게 된다고 할 것인가. 



좁쌀이 한 번 힘을 써 구른다고 할 때
그 순간에 

태양이나 지구도 또 
그처럼 한 번 굴러 돌 수 있는 것이다. 


그래서 어떤 좁쌀이 

생사가 곧 열반임을 관하여 

점점 수행의 방향으로 향해 구르고 


그 좁쌀이 점차 지구가 되거나 태양이 되거나
아예 은하처럼 되면
그 이후로는 

좁쌀과 달리 구르지 못한다고 할 것인가. 


그래서 사실은 그런 사정으로 

어떤 수행자가 수행을 꾸준히 행해
복덕을 쌓는 방향으로 계속 수행을 하고
나아가 부처님이 되면
그로 인해 얻는 복덕이나 수명의 수량은 

헤아리기 힘들 정도로 된다고 제시하는 

사정이 또 있는 것이다. 


그래서 표현상 혼동을 일으킬 여지가 있다고 하더라도 

그냥 차라리 상락아정의 상태라고 

이해하는 것이 적절하다고 제시되는 것이다. 



그런데 현재 논의하고자 하는 논의는 
한 주체가 이와 같은 상태가 되는가 
아니면 좁쌀과 같은 상태가 되는가의 
차이를 낳는 부분이 
바로 이 논의와 깊게 관련이 되기 때문이다. 



>>>



[...]


세상에 잘 풀리지 않는 어려운 문제로 

10 대 불가사의한 일이 있는데 


그 하나가 눈을 뜨면 세상 모습과 자신이라고 보는 모습이 보이고 

눈을 감으면 그것이 사라져 보이지 않는 일이 하나고 



또 그 가운데 하나가 

손을 마주치면 소리가 나는데 

그 소리가 왼손에서 난 것인지 오른 손에서 난 것인지 

아니면 어디에서 난 것인지 알기 힘든 문제라고 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여하튼 손을 마주치면 소리는 난다. 

그래서 참 불가사의 한 현상이라고 본다는 것이다. 


그런 문제를 놓고 

수행자들도 이를 놓고 

연기과정의 비유로 많이 사용하게 된다. 



그런 가운데 심지어 증상이 심한 사람은 

자신이 눈을 떠 모습을 보고 나서 

그 모습이 그 모습을 얻게 한 것이라고 주장하거나, 


소리가 소리를 얻게 한 것이다. 

이런 식으로도 주장하고 나선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렇지 않다면 

어떻게 소리가 나타나게 되고 

모습이 보이게 된 것이라고 할 것인가 하고 

정말 알 수가 없다. 

이렇게 하소연하여서 


그것이 지극히 그처럼 불가사의한 일이라고 

부처님이 사정을 설했다는 것이다. 


나열하자면 그외에도 더 많은 불가사의한 일들이 

있는데 여기서는 위 두 내용에만 

일단 집중하기로 한다. 



뻔히 두 손이 부딪혀 소리가 나는 것을 

지금 보고 

또 나중에 실험해보아도 볼 수 있는데 


그 손이 소리를 내지 않았다면 

무엇이 소리를 내었다고 할 것인가. 


그렇지 않다고 볼 근거나 

그럴 이치가 있는가 .


이렇게 거꾸로 

망상증 환자입장에서 주장을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증상이 심하면 

그 손에 그런 소리가 들어 있었던 것이 

분명하다. 


어떻게 소리가 없는데서 

그런 소리가 나타날리가 있는가하면서 


몇천년을 이어가면서 

손에서 소리를 찾아 탐색 중이라는 

보고도 듣게 된다. 


왜냐하면 망상증상이 단멸되지 않는 관계로 

계속 같은 증상을 상속받아가면서 

이어 진행하는 사정은 


학교에서 과거 지식을 계속 

이어 받아 또 가르치고 또 가르쳐가는 

상황과 별로 다르지 않은 것이다. 


어떤가. 


우리가 눈을 떠서 

세상모습을 볼 때도 마찬가지다. 


눈동자와 대뇌 사이의 신경세포에 

그 화면이 모두 그처럼 맺혀 있고 

눈동자를 통과하는 빛마다 

다 그 화상이 그렇게 맺혀서 

사정이 그렇다


심지어 대뇌 피질에 혈류에도 

그런 화면이 하나하나 맺혀 있는 것으로 

보아야 한다고 주장한다는 것이다. 


이것이 본인의 독단적인 주장이 아니고 

과학계에서 

왜 눈을 뜨면 그런 모습이 그렇게 

보이는가에 대한 설명이다. 


그래서 문제가 심각해진 것이다. 







○ 발톱과 신발의 공통점과 차이점 



일반인과 수행자의 차이에 대해 생각해보게 되는데 


일반적으로 

자신의 모습을 바라보면서 자신이라고 여기고 

산을 바라보면서 그것을 산이라고 하고 

화분에 없던 싹이 나고 꽃이 피어서 

싹과 꽃이 없다가 여기에 생겨났다고 하고 

영희가 저기에서 이리 오고 또 바삐 다른 곳으로 가고 사라져서 

오고 감을 말하는데 


왜 여기에 그런 나나 그런 대상이나 

생멸을 얻을 수 없고 

오고감도 얻을 수 없다고 하는가. 



이런 부분에서부터 차이가 난다고 보게 된다. 



그런데 수행자라고 해서 

현실에서 생활하면서 손과 발을 못 움직이고 

정말 오고 가지도 않고 

식사도 하지 않는가 하면 그렇지는 않다. 




이는 비유하면 

꿈이나 영화가 하나같이 현실이 아니고 

실답지 않다고 여기는 이라고 해서 


살면서 전혀 꿈을 꾸지 않는다거나 

꿈을 꿀 수 없다거나 

영화를 전혀 보지 않거나 

못 본다거나 하는 것이 아닌 것과 

사정이 같다. 




다만 그것을 대하면서 

그것이 사정이 그렇지 않고 

그것은 실답지 않다고 이해하고 

그에 대해 집착을 갖지 않으려 노력하고 

또 그래서 집착을 갖지 않고 



그래서 원래는 그런 내용을 대하면 

그에 바탕해서 이러이러하게 반응하게 되어 있다고 

대부분 보게 되는데 


정작 그에 대해 그런 반응을 보이지 않고 


그래서 번뇌와 생사고통의 덫에 걸려서 

각 세계에서 번뇌에 묶여 번뇌의 사역을 당하고 

또 한편 다른 중생에게 번뇌를 일으켜 사역을 시키면서 

서로 각 고통의 세계에 묶여 끌려 다니지 않는다는 차이가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중생을 제도하는 서원을 가진 수행자도 

결국 생사를 받고 

여기서 태어나서 저기서 죽는 모습은 같아 보이는데 


정작 그 수행자가 그것을 놓고 

자신의 생멸은 이미 다 끝나 얻을 수 없다고 

선언하고 

더 나아가 생사고통의 현실이 곧 니르바나라고 관하면서 

그렇게 임한다는 것이다. 




문수보살님이 저기에서 여기로 와서 

발우를 들고 식사를 하는데 


여기 이 상황을 놓고 

문수보살님은 오고감을 얻을 수 없다고 하고 


또 이 상황에 문수보살님이 

저기에서 이리로 왔다고 제시하면 

이 상황에 2 문수가 있게 된다면서 

그러면 곤란하니 그런 분별을 행하지 말라고 

주의를 주시는 내용이 경전에 보이는데 


이것이 도데체 무슨 이야기인가 

도무지 이해하기 힘든 상태가 되기 쉽다. 




그런데 그것이 바로 

현실에서 무엇을 대하던 

그것의 정확한 정체를 올바로 파악하는가 

아니면 올바로 파악하지 못하고
대충 최면에 걸린 이처럼 대하면서 

임하는가의 차이라고 할 수 있다. 







숲을 다니면서 홀리면 

나뭇잎을 황금이라고 여기고 잔뜩 모아 놓고 

또 나뭇가지를 아름다운 여인이라고 여기면서 

좋다고 하면서 지내는데 


나중에 홀린 상태에서 벗어나 보니 

그것이 하나같이 쓸데없는 나뭇잎과 나뭇가지임을 

보고 허망하게 생각하게 된다는 그런 

이야기가 있다. 



그런데 생각해보면 

현실에서 꾸는 꿈도 그렇고 

영화관에서 보는 영화도 그 성격이 

이와 비슷하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문제는 

꿈이나 영화는 그렇게 실답지 않음을 잘 안다고 보지만, 


그러나 자신이 눈을 뜨고 대하는 현실은 

그와 달리 대단히 실답다고 여기고 

그에 대해 대단히 진지하게 집착하고 임하는 

것이 문제인 것이다. 



그런데 긍정적으로 생각하면 

꿈이나 영화가 실답지 않더라도 

그것이 자신에게 좋음을 늘 준다면 

그리고 그로 인해 아무런 부작용을 받지 않는다면 

그것이 무슨 문제가 있겠는가. 


생각해보면 그렇다. 


실답지 않더라도 

그것이 살면서 좋고 좋음을 마냥 준다면 

실답지 않다고 해서 그것을 굳이 

부정할 이유가 무엇이겠는가. 


그런데 문제는 사정이 그렇지 않다는 점이고 

바로 그 부분에서 모든 문제의 초점이 있는 것이다. 



수행을 하는 이유는 

또 그 부분을 해결하기 위해서 

수행을 하는 것이다. 



공연히 호기심이 생겨서 

이것이 실답다고 할 내용인가 아닌가. 

또 그 본 정체가 무엇인가를 놓고 


그 내용이 궁금하기에 

그것이 진짜가 아니고 

그 본 실재는 얻을 수 없어 공하다 


이런 것을 알아내고 얻기 위해서 

노력하는 경우도 있겠지만, 

그 자체를 목표라고 하기는 곤란하다. 



왜 그런가하면 

자신이 그렇게 보던 보지 않던 

또 그것을 자신이 알던 모르던 

그것을 그렇다고 말을 하던 않던 

원래 그 상태는 그 상태인 것이기 때문이다. 


자신이 그것을 새삼 그렇게 보고 

알고 이해하고 깨닫게 된다고 해서 

그 내용이 그렇게 갑자기 되는 것이 아니고 


원래 그 상태는 그와 관계없이 

그런 것인 것이다. 


그러니 이것을 목표로 한다면 

더 수행을 할 필요도 없다고 할 수 있다. 


수행을 하던 않던 

본래부터 있는 그 상태에 

어떤 차이가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런데 왜 

그런 내용을 깨닫고 이해하는 반야바라밀다를 

깊이 닦아 수행하고 

그런 내용을 밝게 비추어 보는 

수행을 해야 하는가 하면 


본래 그런 상태인데도 

그러한 실답지 않은 내용으로부터 

생사 고통을 받아 나가면서 

고통을 받고 있는 것인데 



그런 상황에서 그런 사정을 깨닫고 

그 사정을 밝게 비추어 봄으로써 

비로소 그에 대해 갖는 집착을 제거하고 

수행을 하게 되고 


그로 인해 

그런 상황에서 고통을 받지 않게 되고 

그 고통의 묶임에서 풀려나서 

생사고통으로부터 벗어나게 되기에 

그렇다고 이해할 수 있다.  



또 단지 그것으로만 그치지 않고 

이를 통해 

어떤 극단적인 상황에서도 

상을 일으켜 집착해 머물지 않음으로써 

그런 고통을 평안히 참고 받아들일 수 있게 되어 

안인을 성취하고 

무생법인을 얻게 되면 


그 이후 온갖 무량한 

방편 지혜를 다 얻고 


심지어 자신의 몸과 세계를 

자신의 뜻대로 변화시킬 수 있는 

여환삼매도 증득하고 


자유자재하게 

시공에 구애받지 않고 

세계를 오가면서 


유희 자재 신통력을 바탕으로 

고통받는 중생을 제도하고 

불국토를 장엄하고 

끝내 법신을 증득하여 성불할 수 있게 되는 

차이가 또 나타나게 된다. 



현실이 꿈이나 영화 자체는 아닌데 

현실이 그처럼 실답지 않다고 지적하는 것은 


그것이 실답지 않은데도  

그런 상태에서 그처럼 

그런 번뇌의 사역을 받아가면서 

고통을 하나하나 받아 나가고 

또 원치 않는데도 

일정한 고통을 받는 세계에 묶이어 지내게 되고 



한 번 책을 보았다해도
책을 덮으면  내용을 다 잊어 먹고 

마치 새로 본 책인것처럼 또 새로 보고 대하게 되는 것처럼 


매 생마다 

새로 디스크를 포맷당하여 

계속 새로 고통을 받아나가게 된다는 것이 

문제인 것이다 




생사를 받고 매 세계에서 살아가는 것이 

같아 보이는데 


한쪽은 매 생사과정이 단절이 되어 

끊긴 상태로 묶여서 받는 분단생사의 형태라면 


수행자는 중생 제도를 위해서 

각 세계에 들어가 생사를 받아 나가기에 

무량한 수행을 계속 잇고 이어나가는 형태의 

변역생사의 형태라는 차이가 있는 것이다. 


그런데 왜 그런 차이가 발생하게 되는가는 

바로 이 현재의 한 단면을 대하는 데에서 

차이가 발생하기 때문이다. 







영화관의 비유를 놓고 비유하면 

그것이 실답지 않은데 

어떤 이가 영화를 보면서 

그 영화 내용에 대단히 집착해서 

영화관에서 소란을 피우고 

관람하는 다른 이에게 고통을 주고 

시설을 파손하고 스크린에 뛰어들어 

찢거나 하는 등으로 문제를 일으키어서 


이후 그가 특별한 영화관에서 

아무리 노력해도 옴짝 달싹할 수 없는 형태로 

수갑이 채워져 

만두만 계속 먹으면서 

쉼없이 공포 영화만 계속 종류별로 

강제로 감상하며 

비명을 지르고 지내도록 

영화관 사장이나 다른 관객들에 의해 

묶여 버려 그렇게 되었다고 비유할 수 있다. 



실답지 않기에 

그런 경우라고 해도 

상대가 조금 사정을 보아주면 괜찮을 것 같은데 

그를 풀어주면 

이후 영화관에서 영화를 관람하는 것이 

대단히 방해받고 

반대로 자신들이 극히 심한 고통을 받게 된다는 입장들이 

대단히 많고 또 힘이 센 것이다. 



사실 그런 요구는 

다른 생명에게 요구할 일이 아니고 

그런 소란을 피운 그가 

다른 이에게 먼저 행했어야 마땅하다고 보는 것인데 


서로 그렇지 않기에 

그것이 문제가 된다고 보는 것이다. 



어차피 실답지 않기에 

이렇거나 저렇거나 아무 관계가 없다고 

평안하게 대할 수도 있는데 


문제는 사정이 그처럼 실답지 않은데도 


하나같이 그렇게 상황을 보지 않고 

또 그렇게 반응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단지 그런 상황에서 

수행자만 예외가 되는 것이다. 


이 어느 경우나 수행자가 

일반입장과 차이가 나타나는 것은 


그 상황마다 그 일체가 

다 실답지 않다는 것을 관하기에 

어느 내용이던 집착을 갖지 않는 것이고 


그래서 그 어느 극단적인 상황에서도 

평안하게 임한다는 것이 첫번째 차이이고 


또 바로 그런 바탕에서 임하기에 

고통과 공포를 받을 

원인을 처음부터 행하지 않는다는 차이가 

두번째 큰 차이인 것이다. 



그리고 두번째 부분이 

곧 현실에서 수행자가 

현실의 정체를 올바로 관하는 가운데 

현실에서 행해 나가는 

수행 방안과 깊게 관련이 되는 것이다. 



###



현실에서 

대부분 좋다고 보고 집착을 갖고 대하고 

그래서 그것을 가지면 심하게 아끼고 

다른 이에게 결코 베풀지 않으려고 하는 무엇이 있다면 

대부분 그것을 놓고 그렇게 반응하는 것이다. 

또 그 반대도 마찬가지다. 


그것은 그 당사자 입장에서는 

그렇게 하는 것이 대단히 자신에게 

좋음을 많이 준다고 보고 그렇게 임하는 것이다. 



그래서 좋음(+)을 준다고 보는 것을 

모두 다 나열해 놓는다고 할 때 


일반적으로 그 좋음(+)을 집착해 추구하고 

그것을 얻으면 그것을 대단히 아끼고 

다른 생명에게 베풀려 하지 않고 


또 그것을 그렇게 추구하는 가운데 

다른 생명이 집착하는 좋음(+)을 

함부로 무시하고 해치고 침해하며 

다른 생명에게 나쁨(-)을 쉼없이 가져다 주고, 


그러다가 다른 상대가 

자신과 같은 상태로 임하는 가운데 

자신에게 조금이라도 나쁨(-)을 주게 되면 

자신은 반대로 그것을 조금도 참지 못하고 

불같이 분노를 일으키고 

미움과 원망을 그 상대에게 오래 깊게 품고 

그 상대에게 그것을 보복하고 해치고자 임하는 것이다. 



현실에서 각 경우마다 

그렇지 않게 행하는 사례가 있다면 

그 만큼 다행이라고 할 것인데 

그런 예외에 해당하는 경우가 거의 드문 것이다. 


그런데 그렇게 되는 것은 

현실에서 대하는 것의 정체를 올바로 관하지 못한 가운데 

그것이 실답다고 여기고 

그에 강하게 집착해서 

그에 접착이 된 상태에서 

각 개별 주체들이 생각하고 말하고 행위해나가게 되기 때문이다. 


그런 상태에서 무엇이 

그런 개인을 묶어 끌고 다니는가는 

예를 들어 

어느 한가한 상태에 놓일 때 

어떤 이가 무엇에 초점을 맞추고 시간을 보내게 되는가를 

검토해 보면 그 사정을 알 수 있다. 


원래는 그 마음에 

우주의 모든 것을 다 담아 놓을 수 있고 


또 그 가운데 가장 가치가 있고 

옳고 좋은 것을 담아 놓을 수 있는데 


그러나 이상하게 

그 많고 많은 내용들에서 

초점을 맞추고 임하는 것들은 

하필이면 바로 위와 같은 내용들에 

초점을 맞추고 그에 접착되어 임하는 것이다 



예를 들어 하루를 놓고 생각해 본다면, 

어떤 이가 어디에 

손과 발이 사슬에 묶여 있는 것은 아니어서 


원한다면 자신이 있는 곳에서 

어떤 생각을 해도 못 할 이유가 없고 

어떤 말을 해도 못 할 이유가 없고

어떤 책을 본다고 해도 못 볼 이유가 없고 

어디를 간다고 하더라도 못 갈 이유가 없다고 

원칙적으로 보게 되는데 


이상하게 하필이면 어떤 이가 

매순간 선택해 행하는 것은 

그런 것들인 것이다. 


예를 들어 어느 한 때 

강을 가도 되고 

산을 가도 되는데 


그러나 어떤 이는 

일정한 곳에 일정한 형태로 반복해서 

그런 생각을 하고 그런 말을 하고 

그런 행위와 자세를 취하면서 현실에 

임한다는 점이다. 


그리고 그 핵심적 특징이 

바로 위와 같은 관계로 되어 있다고 제시하는 것이다. 


또 그렇게 하게 되는 사정은 

그 당사자의 전도망상과 집착증세에 바탕해서 

좁고 짧고 얕게 관찰하고 임할 때 

바로 그런 것이 

자신에게 당장 좋은 것을 가장 많이 얻게 하는 방안이라고 여기고 

그런 내용에 그렇게 접착되어 있기에 

그런 것이기도 하다. 


그래서 원래 그런 방안이 정말 옳다면 

그것이 비록 실답지 않다고 해도 

그로 인해 아무 문제가 없어야 마땅한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사정이 그렇지 않고 

그가 받아나가는 모든 생사 고통의 문제가 

바로 이를 원인으로 얻게 되는 것이므로 

그것이 문제인 것이다. 


그것은 처음 

어떤 생명이 좁고 짧고 얕게 관찰할 때 

당장 자신에게 일정한 면에서 좋음을 준다고 본 내용들은 


넓게 모든 생명에게 제한없고 차별없이 

길고 길게 두루두루 다양한 측면에서 

좋음을 주지 못하는 것이고 


바로 그런 사정 때문에 

그런 내용을 집착해 추구하는 생명들끼리 

서로 얽혀 서로가 행하는 업의 작용 반작용의 관계로 

그렇게 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래서 한 개인이 

어떤 하나의 좋음을 얻기 위해 무언가를 하면 할수록 

그에 비례해서 무량한 나쁨을 되돌려 받는 관계가 

나타난다고 할 수 있다. 



원래 처음 한 단계만 놓고 보면 

하나의 좋음을 집착해서 얻으면 

그로 인해 하나의 나쁨을 돌려 받는다고 해도 

손익차감을 하면 결국 

다른 경우와 똑같은 것 아닌가 

생각하기 쉽다. 


그런데 사정이 그렇지 않은 것이다.  


그 계산도 짧게 보기에 그렇다고 보는 것인데 

그러나 길게 보면 

사정이 그렇지 않은 것이다. 


이를 X 제곱이란 산수 문제를 놓고 간단히 생각해보자. 


처음 X 에 1을 대입해 본 이가 

그 값으로 1 곱하기 1은 1이다 이런 계산값을 얻은 것이다. 


그러니 그냥 1 이나 

그것을 제곱하나 똑같다 

이렇게 쉽게 결론을 내리고 

이후 마구 달려 버린 것이다. 


좁고 짧고 얕게 관찰한다는 것은 

비유하면 이렇게 임하는 것과 사정이 같은 것이다. 



현실을 영화관 상황과 같다고 비유하면 

어떤 영화관 하나만 놓고 판단하면 

어떤 이가 영화가 끝날 때까지 

자신이 좋아하는 것을 마음대로 다 하기 위해 

그 안에서 가장 시끄럽게 임하거나  

소란을 피우더라도 이를 통해  

자신이 좋은 것을 뜻대로 다 마음껏 다 했다면 

그것만 놓고 보면 별 문제가 없고 좋다고 보아야 하는 것이다. 


그런데 그 다음이 문제인 것이다. 


그런데 설령 그렇게 

다른 이들에게 고통을 주었다고 해도 

자신도 한 번 고통을 돌려 받으면 

마찬가지 아닌가. 

이렇게 단순하게 임하려고 하는 것이다. 


그것이 앞의 X 제곱 계산 문제를 

1 하나를 넣어보고 

이것이나 저것이나 마찬가지라고 생각하면서 

단순하게 임하려는 것과 마찬가지 상황인 것이다. 



그런데 대부분 어떻게 되는가 하면 

바로 이런 상태로 

어리석음을 바탕으로 

집착을 일으켜서 임하는 것이 

현실 중생들의 

거의 99.9 % 의 상태인 것이다. 


그러니 그것이 문제인 것이다. 


그래서 지옥 중생을 제도하는 것이 

전문분야인 지장보살님의 입장에서는 


어떤 지옥에 갇혀서 도망나오지도 못하고 

무량한 기간 쉼없이 극심한 고통과 공포를 받으면서 

지내는 상황은 


알고보면 사실은 처음에는 

물방울 하나와 같은 일을 잘못 행하기 때문에 

그렇게 되었다고 진단한다는 것이다. 


그 사정이 바로 

현실의 한 정지화면에서 

앞에 나열한 (+) (-) 를 놓고 

한 주체가 어떻게 반응하고 대하는가 

그 하나의 내용때문에 

그런 결과가 되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것이 앞에 나열한 형태의 내용인 것이다. 



그런데 그와 반대로 

무량한 기간 복덕과 지혜와 수명을 구족하고 

평안하고 즐겁게 지내는 상태 역시도 

사정이 마찬가지라고 하는 것이다. 



그것도 알고보면 사실은 처음에는 

물방울 하나와 같은 것 때문에 그렇게 되었다고 

진단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 사정이 바로 앞과 마찬가지로 

현실의 한 정지화면에서 

앞에 나열한 (+) (-) 를 놓고 

한 주체가 어떻게 반응하고 대하는가 

그 하나의 내용때문에 

그런 결과가 되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이 알고 보면 

하나같이 앞에 제시한 내용과는 

반대의 내용이었다는 것이 그 사정인 것이다. 



그리고 이후 연쇄적으로 이어 나타나는 결과가 

계속 누적되고 이어지는 가운데 


그런 무량한 고통과 공포를 받으면서 

공포 영화만 묶여 관람해야 하는 상태와 


그렇지 않은 반대의 상태가 

그렇게 나타났다고 제시하는 것이다. 



물론 이 어느 경우나 첫 단계만 보면 

처음에 (+)를 잡고 나중에 (-)를 받는 것이나, 


그와는 반대로 

처음에 그 (+)를 베풀어서 당장 (-)를 얻는다고 보고 

나중에 (+)를 기약없는 시점에 돌려 받는 것이나 

알고보면 매마찬가지라고 볼 수도 있다. 


그래서 이는 어떻게 보면 

원숭이 식사와 관련한 

조삼모사의 고사를 

이 대목에서 떠올리게 되기 쉽다. 


아침에 3 개 받고 저녁에 4 개 받는 것이나 

아침에 4 개 받고 저녁에 3 개 받는 것이나 

매 마찬가지아니겠는가 .

단순하게 이렇게 생각하면서 

그리고 또 하나같이 

당장 지금 이 순간에 

자신이 먼저 4 개를 받아야 한다고 

또 대부분 임한다는 것이다. 



사정이 그런 것이다. 


이 경우 첫 부분만 놓고 보면 

이렇다. 


처음 1 이 (+)를 얻기 위해 

2 에게 (-)를 하나 준다. 

그러면 2 는 (-) 를 받고 

나중에 1 에게 (-)를 되갚아 준다. 


그래서 이것만 놓고 보면 

1은 (+)를 하나 받고 

(-) 를 나중에 받더라도 

결국 마찬가지라고 보는데 

일단 확실한 (+) 를 먼저 얻는 것이 

낫다고 본 것이다. 


그런데 두번째 단계부터는 어떻게 되는가. 


자신이 앞에서 2 에게 (-) 를 받았으니 

상대가 자신에게 그렇게 행하게 된 사정은 별도로 하고 

여하튼 이제 그것 때문에 

자신은 2 에게 그에 상응한  (-) 를 되갚아 

되돌려 주어야 한다고 또 임하는 것이다. 



한마디로 

눈에는 눈 

이에는 이 

이런 방식으로 임하는 것이 

보통의 경우인 것이다. 


이후부터는 이들이 서로 관계하면 

대부분 (-) 만 계속 주고 받는 관계가 나타나는 것이다 


그런데 이 과정에서 1 은 매번 

(-) 를 그 상대에게 주는 것이 

곧 자신에게 뭔가 (+)가 된다고 여기는 가운데 

이것과 자신이 받은 (-) 를 계속 

상계처리하면서 대하는 것이다. 


그런데 단순하게 

이 1 과 2 만 놓고 

그 이후 이들간의 작용 반작용의 관계를 

몇 단계를 이어 본다면, 


처음 1 의 안경이 하나 깨지고 난후 

2 의 이빨이 깨지고 ( 1 은 이것을 놓고 좋다고 하고 )

다시 1 은 손이 부러지고 

다시 2 는 집이 불타고  ( 1 은 이것을 놓고 좋다고 하고 )

다시 1 은 다리가 잘라지고 

다시 2 는 눈이 빠지고 ( 1 은 이것을 놓고 좋다고 하고 )

다시 1은 허리가 부러지고 

....


이렇게 되는데 


그것을 다 합치면 

1 은 안경깨지고 손 부러지고 다리 잘라지고 허리 부러지고 ...

이런 내용을 얻게 된 것이다. 


그리고 그것을 놓고 

1은 이로 인해 

2 도 이빨깨지고 집 불타고 눈 빠지고 ... 했으니 

결국 마찬가지다. 

이렇게 본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런데 조금 더 추가하면 


그런 가운데 어느 당사자가 

갑자기 하나 주고 하나 돌려 받는 그런 

관계는 이제 그만하고 

앞으로는 2 배씩으로 매번 주고받자고 하거나 

제곱으로 하자고 제의하면 

또 사정이 달라지는 것이다. 



처음에 한 당사자는 그렇게 임하면 

상대가 포기할 줄 알았는데 

전혀 그렇지 않다는 것이 

여기서 문제인 것이다. 



또 

물건만 수공업에서 대량생산체계로 바꿔 

1 번에 대량 생산해내는 것이 가능한 것이 아니고 


악순환의 관계로 서로가 얽히는 문제도 

대량생산이 쉽게 가능한 것이다. 



예를 들어 

오늘날 

1 이 인터넷에 

○○ 나라 사람들은 다 XXX다 

이런 식으로 비난글을 한번 공표해 올리게 되면 

이런 관계를 단 1 회로 

대량 생산해내는 것이 가능한 것이다. 


그런데 말만 그런 것이 아니고 

마음 속 생각이나 행동도 또 사정이 마찬가지다. 


그래서 앞의 관계는 쉽게 

무량하게 증폭되 나갈 수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 하나하나 관계마다 

앞의 과정이 계속 이어지는 것이다. 


예를 들어 

오늘날 어떤 이상한 약품을 잘못 개발해서 

그로 인해 수만명이 다 신체가 훼손되고 

아이가 죽고 그런 사태를 맞이하는 일이 많은데 

이 경우도 사정이 같다. 


그 가운데 1 당사자가 

상대방이 자신 뿐만 아니라 

수많은 사람을 한 번에 그렇게 고통을 주었으니 

자신은 이런 관계에서 빠지겠다고 임하는 경우는 

거의 없는 것이다. 

나머지도 같다. 


그런데 어떤 한 단면에서 그런 방식으로 

임하는 입장은 

단지 그 한 면에서만 그렇게 임하는 것이 아니고 


문제되는 매 단면마다 꾸준히 그런 경향을 갖고 

임한다는 것도 볼 수 있다. 


한 단면에서 보이는 태도나 자세는 

그 경우만 예외적으로 1 겁에 딱 1 번 

아주 예외적으로 그렇게 행하는 것이 결코 아니고 


오히려 그 입장은 

매 찰나 찰나 어느 경우나 그렇게 

생각하고 말하고 행하면서 

꾸준히 지속적으로 유지한다고 보는 것이 

일반적으로 적절한 것이다. 


담배를 안 피우는 이는 평생 거의 안 피운다고 보지만, 

피우는 이는 거의 평생 만갑

이만갑을 꾸준히 피워나가는 것이고 

나머지 문제도 사정이 마찬가지인 것이다. 



그런 가운데 나중에 

왜 무량한 겁을 두고 

그렇게 고통을 받아나가는 상태가 되는가를 누군가 궁금해하면 


그 첫 출발점을 이해하지 못하는 이에게 

지장보살님이 

물방울 하나로 시작해서 

바다가 된 것이다. 

이렇게 설명하게 되는 것이다. 



그런데 처음에 그런 상황에서 

반대로 행하는 경우는 

또 이와 반대의 관계가 그렇게 

된다고 제시하는 것이기도 하다. 


일일히 2 단계 3 단계 

이어서 설명하는 것은 

여기서는 생략하기로 한다. 


왜냐하면 사실은 

앞의 상황에서 그와 반대되는 방향으로 

행하는 입장은 

그런 것을 미리 계산한 가운데 

그렇게 행하는 것은 

또 아니기 때문이다. 


다만 그것을 죽 이어보면 

결국 이 경우도 한 방울의 물방울로 

바다와 같은 복덕과 지혜를 얻게 된다고 

제시하는 관계를 살필 수 있다고 하는 것 뿐이다. 


그런데 처음 짧게 끊어 보면 

언뜻 이렇게 하나 저렇게 하나  

서로 주고 받은 내용을 그렇게 공제하다 보면 

결국 0 으로 다 마찬가지 아닌가 

이렇게 잘못 생각하는 가운데 


또 그렇게 어느 경우나 다 마찬가지라고 본다면서도  

그러나 매 경우 

하필이면 굳이 

나중에 나쁜 것을 돌려받더라도 

당장 자신이 좋은 것을 먼저 차지하는 방향을 

택한 가운데 

그런 판단과 계산 착오로 인해 

나중에는 무량한 고통을 받는 상태에 

묶인다는 것이다. 


 

차라리 계산을 잘 하지 못하여 

이것이나 저것이나 다 마찬가지라고 '잘못' 생각하였다 해도 

당장 다른 생명을 위한 것을 먼저 자신이 베풀겠다고 임했다거나 


또는 자신이 나중에 상응한 좋음을 돌려받지 못한다해도  

그냥 자신이 손해보겠다고 임했다거나 한다면 

그 결과가 극과 극으로 달라지고 

사실은 그로 인해 무량한 복덕을 받게 된다고 보는데 


그런데 정작 

어떤 국면에서도 그렇게 방향을 바꾸어 

행하는 경우는 극히 드물다는 것이다. 









그래서 

축생과 아귀와 지옥 중생이 생각하고 임하고 행하는 

기본 반응 자세는 

바로 그와 같은 형태로 되어 있는 것이고 


그런 관계로 소질과 적성에 맞게 

그런 중생들이 그런 세계에 모여서 

함께 무량하게 고통을 받고 지내는 상태가 된 것이라고 

지장보살님이 그 사정을 설명하는 것이다. 


현실에서도 병원에가면 수없이 아픈 사람만 보이고 

영화관에 가면 영화보는 이들만 모여 있고 

시장에 가면 물건 파는 사람들만 모여 있고 

도서관에 가면 수험공부하거나 책보는 사람들만 모여 있다고 

보게 되듯 


각 세계에 그런 특성과 그런 자세를 취한 생명들이 

수없이 그렇게 함께 모여 있게 되는 사정을 

그와 같이 설명하는 것이다. 


그래서 실답지는 않다고 하더라도 

그로 인해 본래 뜻한 바처럼 

좋은 내용만 얻고 지내게 된다면 

무슨 문제가 있는가라고 보게 되지만, 


문제는 실답지도 않는 내용을 놓고 

하나같이 진지하게 

매 상황에서 

그런 번뇌에 묶여 고통의 사역을 당하고 

그리고 고통을 받고 공포에 가위 눌려서 

비명을 지르고 신음을 하니 

그것이 바로 문제인 것이다. 



이 상황이 왜 문제인가는 

그렇게 보던 보지 않던 

그 본 사정이 하나같이 실답지 않은데 


그러나 정작 당사자들은 그렇게 보지 못하고 

그에 바탕해 집착을 일으켜서 번뇌에 묶이고 

이후 좁고 짧고 얕게 관찰해나가는 가운데 

매순간 그렇게 반응해나갈 도리 밖에 없다고 보면서 

그렇게 행해나가고 


그런 사정이 원인이 되어 

그런 고통을 무한히 받아나가게 되는 것이 

바로 문제인 것이다. 



쉽게 설명해보자. 


탐욕과 분노 어리석음에 의해 반응하는 유형으로 

현실에서 

빵 하나때문에 감옥에 가 몇십년 생활한 장발쟌과 

현실에서 분노를 느낄 때마다 분노를 참지 못하고 병이나 도구를 들어 상대를 내리치는 욱형과 

또는 투우장에서 투우사가 깃발을 흔드는대로 마구 내달리는 투우장의 황소형들을 

이런 유형의 대표 유형이라고 볼 수 있다. 



원래 그 각 입장에서 그 하나의 단면만 놓고 보면 

그렇게 생각하고 취한 내용들이 

하나같이 그가 좋아하는 내용을 바로 얻게 하고 

또 분노를 바로 해소시키고 통쾌함을 얻게 하는 내용이고 

또 자신이 겪는 고통을 곧바로 해소시키는 방안이라고 

대부분 보게 되는 것이다. 


바둑을 잘 두지 못하는 입장에서는 

이세돌 선수가 어떤 돌을 두면 

상대는 도저히 그에  따라두지 않으면 큰 일난다고 보게 되고 

그래서 하나같이 그에 따라 두게 된다고 보는 것이다. 

그런데 그렇게 하나하나 따라 반응하면서 임하다 보면 

바로 장뱔쟌이나 욱형이나 투우장의 황소가 맞이하는 결과를 

바로 보게 되는 것이다. 


그런데 그런 내용도 사실은 

아주 짧게 관찰한 것이다. 

그런데 그것으로 끝이 아니라는 것이 

바로 더 크고 중대한 문제가 되는 것이다. 


좁고 짧고 얕게 관찰하면 

봄에 씨를 뿌려도 다음 날 씨에서 아무 것도 나타나지 않는다는 

내용을 맞다고 보게 된다. 

 

또 굴뚝으로 매연을 내보내고 

하수도에 독극물을 내 보내도 당장은 자신에게 아무 일도 없다는 것도 

맞다고 보게 된다. 


그런데 사정이 그렇지 않다는 것을 

부처님이 다앙하게 경전에서 말씀해주시는 것이다. 


앞에서 좁고 짧고 얕게 관찰하는 협단천 관찰의 입장에서는 

그 부분만 떼어 짧게 보면 

하나같이 그것이 맞다고 보게 되는 것이다. 

그러니 그런 상태에서 

그렇게 행하게 되는 것은 

그 상태에서 어쩔 도리가 없다고 보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그런 바탕에서 나름 지혜를 발휘해서 

자신의 탐욕과 분노 어리석음을 추구해나가면 

또 하나 문제 형태로 루팡형태가 나타나는 것이다. 


자신이 좋음을 얻고 

다른 생명에게 고통을 주는 행위를 하기는 하는데 

다만 당장 증거를 남기지 않아 잡히지 않고 

그래서 자신이 살아가는 데 있어서 

수사관에 의해 체포되지 않으면 

그것으로 끝이다. 


이렇게 짧게 생각하고 

그 상태에 모든 초점을 맞추어서 

온갖 지혜를 발휘하고 

현실에서 

그 부분에서 서커스쇼 출연자나 마술쇼 진행자나 최면쇼 진행자처럼 

자신이 임하면 된다고 여기면서 

행하는 입장이라고 이를 이해할 수 있다. 


문제는 사정이 결코 그렇지 않다는 점이라고 할 수 있다. 



이 사정을 비유하면 

바둑에서 이세돌 선수가 뻔히 바라보고 있는데 

그 앞에서 바둑 한 4 단 정도 두는 이가 

매번 전 재산을 걸고 다른 이와 사기 바둑을 두면서 

임하려는 것과 사정이 같다고 이해할 수 있는 것이다. 



그래서 부처님이 그렇게 

자꾸 좁고 짧고 얕게 관찰하는 가운데 

잔꾀를 발휘하면서 

이를 놓고 자신의 깊은 지혜라고 생각하며 임하려는 

제갈공명이나 루팡 유형의 입장에게 

간단히 

'불설단멸'이라는 구절을 가르쳐 주시는 것이다. 


한마디로 자신이 서커스와 마술과 최면을 총 동원해서 

무언가를 먹고 튀어 달아나면 

그것으로 끝이다. 

그 이후는 아무 것도 없다. 


이렇게 임하기 쉬운데 

사정이 결코 그렇지 않다는 것을 

주의를 주는 내용인 것이다. 


나중에 사람들이 왜 

정화조를 열면 

그 안에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그것을 붙잡고 살아가는 생명이 

수 없이 들어 있는지 모르겠다고 할 때 


그 연유와 사정을 옆에서 친절하게 

나레이터로 설명해주는 경우가 있다면 

바로 그 내용이 그 내용인 것이다. 


지켜보는 이도 때로는 답답하고 

당사자도 연유를 몰라서 답답하게 여길 수 있지만, 


농부가 봄에 씨를 뿌리고 

가을에 열매를 맺을 때 

봄에 뿌린 씨와 열매가 하나같이 모습도 다르고 

관련성도 별로 없어 보이는데 

그러나 봄에 씨를 뿌리면 

가을에 그런 열매가 나타난다고 하는가는 

사정이 그렇기 때문인 것이다. 


비유하면 그런 것이다. 


그리고 수행자는 이것을 놓고 


각 중생이 고통을 받아나가는 내용을 중지하고 

그와는 반대 방향으로  

생각과 말과 행위를 행하면서 


그리고 그 행위마저도 

그 내용에 일반적으로 부여하는 의미와는 

전혀 다른 의미로 대하는 가운데 

그것을 행해 나가는 것이다. 



(+)라고 대부분 보는 것을 놓고 

대부분 집착하고 아끼고 갈구하면서 추구한다고 할 때 


수행자는 그것이 그렇지 않음을 관하고 

그것을 오히려 집착하는 다른 중생에게 베푸는 것인데 


그러나 그런 행위를 하면서 

거기에 그런 보시를 행하는 이나 받는 이나 

보시하는 좋은 물건이나 보시라는 행위가 있다고 보지 않는 것이고 


또 그로 인해 무엇인가가 여기서 자신으로부터 사라지고 

저기서 생한다고도 보지 않는 것이다. 


그래서 그에 일체 망상분별과 집착을 일으키지 않는 가운데 

그러나 행위는 굳이 하필이면 

그런 형태의 행위를 

매 상황에서 그렇게 하는 것이다. 



그리고 수행자는 

그로 인해 앞의 상황과는 달리 

무량한 시간에 걸쳐 무량한 복덕을 받게 되지만, 


정작 수행자는 그런 복덕에 집착해서 

그런 복덕을 목표로 해서 

그런 것을 한 것도 아니어서 

그에 집착되지 않고 

그 무량한 복덕을 받지 않는 것이다. 


그런데도 그렇게 하는 이유가 있다면 

이를 통해서 

중생을 제도하기 위한 것인데 

그 제도도 

역시 마찬가지인 것이다. 


제도할 중생이나 

중생을 제도하는 이나 

수행자 자신이나  

중생을 제도하는 행위나 

그런 것을 일체 얻을 수 없는데 


그것을 잘 관하면서 

정작 매 순간 행하는 행위는 

수많고 많은 내용 가운데 

하필이면 

실답지 않다고 할 다른 중생을 제도하기 위해서 

좋고 좋은 방편으로 

무량한 생사고통을 받아나가는 중생을 제도하는 행위를 

무량하게 행해 나가는 것이다. 



이런 내용이 금강경에 제시되는 핵심 내용인 것이다. 




그래서 수행자가 행할 내용은 

간단히 압축하면 이것이다. 

물론 조금 더 나누면 

그에 필요한 수많은 수행방안들을 나열할 수 있겠지만, 

압축하면 결국 이 내용인 것이다. 


그런데 그렇게 

어떤 이가 임하게 되는 가장 첫 계기는 

자신이 눈을 떠서 대하는 부분을 놓고 

그것을 무엇이라고 생각하는가가 

첫 계기가 되는 것이다. 


그것을 자신이나 자신의 것이라고 보고 

그리고 그것을 좋다고 여기고 집착하여 대하면 

그것이 바로 생사고통을 무한히 받아나가게 되는 

첫 출발 계기가 되는 것이고 


그것을 놓고 

그렁 망상에 홀리지 않고 

그 정체를 올바로 잘 관해서 

뒤집혀진 망상과 그에 바탕한 집착 편집증을 벗어나게 되면 

수행을 시작하는 첫 계기가 되는 것이다. 


그래서 이 부분이 중요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니 

조금 복잡하고 번잡하지만, 

또 이 문제를 놓고 시간을 내서 

자세히 살펴 나가야 하는 것이다. 



문제 자체는 간단하다. 



눈을 떠서 대하니 

모습이 보이고 

그 가운데 이 부분은 자신이고 

저 부분은 꽃이라고 생각된다. 

이것은 좋다. 



그런데 저기 바퀴벌레는 

대단히 혐오스럽다. 


이런 경우 

그 각 내용의 진정한 정체는 무엇인가 


이 퀴즈를 잘 풀어야 하는 것이다. 


위와 같이 결론을 내리고 

그것이 맞다. 

틀림없다. 

확실하다. 

자명하다. 

즉자적으로 확실한 참이 분명하다. 


이렇게 건너 뛰면 

이후 그 상태를 죽 이어 보게 되면 

그런 씨가 열매를 맺을 때부터 

매 순간 그로 인해 고통을 받고 신음하고 비명을 지르게 되는 모습을  

이어 살펴 볼 수 있게 되는 것이다. 




문제는 그렇게 고통을 받게 되는 순간에는 

왜 자신이 그렇게 되었는지도 모르고 

또 그 상황에서 어떻게 해야 

그 묶임을 풀고 벗어나올 지도 모르고 


또 그 이후에는 

마치 책을 덮고 나서 

방금 전에 읽었던 내용을 아무것도 떠올리지 못하는 치매 환자처럼 

또 같은 성격의 내용을 같은 형태 같은 방식으로 

매번 그렇게 생각하고 말하고 행해나가는 

모습을 반복해서 보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처음 물방울 하나로 

그 업을 그렇게 일으켜 행하기 시작한 이는 

자신의 생사고통을 무량하게 

증폭해 받아나가는 길을 

과감히 뛰어 들어 가버리는 것이다. 


그래서 그렇게 님은 

하나 둘 떠나가 버리는 것이다. 



이는 처음 사업을 한 이가 

나중에는 매 순간 

하루도 쉬지 않고 

수조원의 수입을 얻는 상품을 대량 생산해내는 

기업을 운영하면서 살아가는 것과 

그 사정이 비슷하다고 이해할 수 있다. 





여하튼 일체가 무소유 불가득하고 공하다는 것을 

기본적으로 이해할 때는 

이제 '하필이면'이 

다시 논의 주제가 되기 쉽다. 



그것은 어차피 

이것이나 저것이다 다 차별없이 공한데 


그 바탕이라면 

이런들 어떠하고 저런들 어떠하리 

그래서 아무것도 안한들 어떠하고 무엇을 한들 무엇하리

수행을 안하면 어떠하고 

또 이전과 같이 여전히 망상분별과 집착에 바탕해 행하던 일들을 

더 심하게 한들 어떠하리 

심지어 극단적으로 악행만 쉼없이 한들 어떠하리 


이렇게 시를 읊어가는 경우가 있게 된다. 


그리고 그 상태에서 

거꾸로 수행자에게 할 내용이 무량한데 

왜 하필이면 수행방안을 그렇게 행하는가. 

이렇게 거꾸로 되물어 보는 경우가 많다. 



그에 대한 경전의 답은 

반대로 그에게 되묻는 것이다. 


사정이 그런데 왜 하필이면 

그런 수행을 '안하려고' 하는가. 

이렇게 되묻는 것이다. 



그런데 이런 논의가 이어지는 데에는 사정이 있다. 



아무리 일체가 무소유 불가득이고 공함을 이해하고 

현실의 일체가 실답지 않음을 이해해도 

그래도 그 바탕에서 

여전히 자신의 손이나 발이 잘려지는 것은 

대단히 고통스럽다고 여기는 한편, 


다른 생명의 손이나 발이 잘려지는 것은 

그로 인해 자신이 직접 그 고통을 느끼지도 못하기에 

또 아무렇지도 않다고 여기게 되고 


그리고 또 자신이 좋아하던 것은 

여전히 좋다고 보는 한편  


수행의 방안은 하나같이 

당장 그런 좋음을 자신에게 직접 주지 않고 

오히려 손해만 된다고 보면서 임하기에 

그런 입장을 자연스럽게 취하게 되는 것이라고 

그 사정을 이해할 수 있다. 



즉 이론은 이론이지만, 

당장 대하는 내용들에 대해서 

여전히 기존의 전도망상과 집착을 바탕으로 현실을 대하기에 

그런 시를 읊고 임하는 경향이 나타나는 것이다. 



그런데 부처님은 

사정이 상대가 제시하는 것처럼 그와 같아서 

이것이나 저것이나 다 차별없는데 

그런 사정을 이해하는 이가 

왜 하필이면 

자신은 자신대로 무량한 고통을 받고 

다른 중생도 역시 그로 인해 무량한 고통을 

서로 주고 받게 되는 방향으로 임해서 

쓸데없이 스스로 지옥의 공 수행자로 임하려고 하는가. 

이렇게 되묻는 것이다. 


그래서 차별이 없는 가운데 

왜 무량한 복덕과 지혜를 구족하고 

중생을 제도하고 불국토를 장엄하고 

성불하는 것을 하필이면 취하지 않으려고 하는가. 

그것을 오히려 되묻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어차피 차별이 없는데 

왜 하필이면 그런 수행을 행하려고 하는가하고 

의문을 제기하는 입장과 


어차피 차별이 없는데 

그런 수행을 해 무량한 복덕과 지혜를 구족해 얻지 않고 

왜 하필이면 굳이 스스로 지옥의 공 수행자가 되려고 하는가. 

이렇게 의문을 제기하는 입장이 


현실에서 나뉜다고 이해할 수 있다. 




그런데 앞의 입장은 

이른바 공을 잘못 이해하고 

오히려 공에 집착하는 입장 


그리고 수행을 하더라도 

무언가 얻을 것이 있다(유소득)고 여기고 

집착하여 수행하는 경우로서 


그로 인해 곧바로 지옥에 들어가 

지옥의 공수행자가 되게 되는 

악취공견의 입장이라고 표현하게 되는 경우다. 




그런데 처음에 일체가 무소유 불가득 공하다는 

사정을 이해하더라도 

그 바탕에서 그렇게 방향을 취하게 되는 현실사정이 

전혀 없는 것이 아니고 

위와 같이 있는 것이다. 


그것은 담배를 피우는 이는 

어느날 담배가 해롭다고 여기고 

그것을 갑자기 끊게 되더라도 


어느 정도까지는 

그 담배연기가 몸에 배어 있고 

또 그 습성도 남아 있어서 

자꾸 그것을 기회가 되면 

되풀이 할 가능성이 높은 상태로 

남아 있다고 보는 것과 사정이 같다. 



불교용어로 이를 

훈습(熏習)이라고도 표현하기도 하는데 

향이나 연기가 배어 있는 상태라는 의미라고 한다. 


그래서 

이론상으로는 일체가 공하다는 등의 내용을 이해하면 

이를 통해 

곧바로 망상분별과 번뇌와 집착이 끊어지고 

생사고통도 곧바로 단절이 되어야 할 것 같은데 

현실적으로는 그렇지 않은 사정이 

이처럼 또 있다고 보게 되는 것이다. 





현실에서 비유하면 

수없이 악행을 하고 

다른 이에게 고통을 준 이가 

어느날 현실의 그 모든 것이 실답지 않음을 관하고 

그것을 중지하면 


그로 인해 그를 체포하려고 

수사를 하고 추적하던 수사관들이 

일제히 수사도 함께 중단하고 

또 그를 나중에 보더라도 

그는 이전과 달리 범죄를 더이상 범하지 않고 쉬고 있으므로 

체포도 하지 않고 감옥에도 끌고가지 않아야 할 것 같은데 

그러나 현실에서 그렇게 하지 않은 것과 사정이 같다. 


그래서 

어떤 이가 어느날 일체가 공하다는 그런 내용을 깨닫고 이해하고 

과거와 달리  망상도 끊고 

과거와 같은 행위를 중단하였어도 

그것으로 만사가 다 해결된다고 볼 수는 없는 것이다. 


그래서 일체가 무소유이고 불가득 공함을 관하는 것이 

대단히 중요한 수행내용이라고 보게 되지만, 


그러나 설령 그렇다해도 

한 주체가 

무량한 생사를 겪어 오는 과정에서 

무량한 업을 행하고 

그로 인해 업의 장애가 쌓여 있는 상태인데 


그 상태에서 그가 

일체가 공하다라는 것을 관하게 되었다고 해서 

그것만으로 과거의 업의 장애가 모두 한순간에 

다 공중으로 흩어져 버리는 것은 아닌 것이다. 


사정이 그런데도 

그처럼 공함을 관하는 가운데 

다시 이런들 어떠하리 저런들 어떠하리 하면서 

과거생부터 훈습된 행위 반응 자세를 계속 

행해나간다면 

더욱이 그 결과는 달라지지 않는 것이다. 



결국 차별이 없이 공한 가운데 

하필이면 굳이 가지 않아도 될 지옥을 

굳이 자신이 찾아 들어가고 

그래서  

매순간 손과 발이 잘려져 고통을 받아 

수행을 더 하고자 해도 하기도 힘들다고 보게 되는 상태에 

스스로 임하려는 

지옥의 공 수행자가 되게 되는 것 뿐이다. 



그런 상태에서도 

일체가 공하다고 관한다면 

그렇게 보지 못하는 상태와는  

약간은 차이가 있다고는 보지만, 


당장 현실에서 

반야심경의 구절을 한편으로 외우고 

한편으로는 톱이나 커터칼을 잡고 

자신의 손가락을 잘라보면 

그 내용으로 

정말 휙 일체고액을 건너가고 

또 공포도 전혀 없이 

평안하게 니르바나의 상태에 임할 수 있게 되는가를 놓고 

스스로 자신의 수행 수준을 

점검해 보아야 할 필요가 있는 것이다. 



그렇게 일체가 공함을 관하는 것은 

이론상 극심한 고통을 받는 상태에서도 

이를 평안하게 받아들이고 벗어날 수 있게 하기에 

그런 것이기도 하지만, 


그런 고통을 결과로 받지 않게 할 수행을 

어렵게 대하지 않고 

즐겁게 잘 할 수 있는 바탕이 

바로 그런 관을 가질 때 마련되기 때문이기도 한 것이다. 





그래서 사실은 이런 바탕에서 

무소득(얻을 것이 없음)을 방편으로 

수행에 정진해야 하는데 


이 부분에서 그것을 그렇게 이해하지 못하고 


이런들 어떠하리 저런들 어떠하리라는 '하여가'를 수행자가 읊으면서 

그러나 매 경우 하필이면 

수행자가 하지 않아야할 내용만 묘하게 선택해 

제멋대로 행해 나가기에 

그것이 문제가 되는 것이다. 


그것은 

이전상태의 망상분별과 집착에서 

하고 싶어하는 것만 반복해 행하려 하기에 

그런 것이기도 하다. 


그래서 과거에 쌓아 놓은 업의 장애도 해소되지 않고 

또 새로운 업의 장애만 증가되는 것이다. 


그런 경우는 그 이론대로 

벼랑에 매달리고 뜨거운 솥안에서 

이리저리 뛰어다니며 고통을 받는 가운데 

그것이 차별없이 공하다는 것을 관하고 

직접 벗어나와야 할 도리밖에는 없는 것이다. 


그러나 자신이 그런 상태에서 

그렇게 벗어나오는 것이 쉽게 가능하다고 생각한다면, 


당장 커터칼이나 쇠톱을 가지고 

그런 실험을 해보면서 

정말 그런 상황에서 자신이 그럴 수 있는가를 

실험해보는 것이 필요한 것이다.  


그래서 손이나 발톱을 하나 잘라내면서 

평소에 신발 벗는 것과 마찬가지로 

이를 평안하게 여기고 임할 수 있는가를 놓고 

스스로 자신의 상태를 점검해 보아야 하는 것이다. 


사실 자신의 수행상태가 정말 그와 같다면 

그것은 곧 경전에서 제시된 것처럼 

상을 갖지 않아 안인을 성취하고 

무생법인을 자신이 증득한 상태라고 할만한데 


그러나 설령 그렇다해도 

그 상태에서도 여전히 '하필이면'의 문제가 

또 제기되는 것이다. 


즉, 그런 상태인데도 

자신과 다른 중생을 모두 고통에서 벗어나게 하고 

불국토를 장엄하고 성불할 수 있는 방향으로 나아가지 않고 

왜 하필이면 굳이 다른 중생들이 

고통을 무량하게 받게 되는 그런 방향으로 나아가려고 하는가. 

이것을 묻게 되는 것이다. 



물론 그 당사자가 그처럼 된 상태에서는 

이렇든 저렇든 그 자신은 무방하고 

관계가 없다는 것이지만, 

그런데 그 상태에서 

하필이면 그런 방향을 고집해야 할 사정이 무엇인가. 

그것을 되묻게 되는 것이다. 



중생제도나 불국토장엄 성불 등의 

서원의 성취를 위해 

아주 예외적이고 특별한 사정이 있어서 

그런 경우를 제외하고는 

많고 많은 방편 가운데 

그 당사자가 하필이면 

그렇게 해야 할 이치나 사정은 굳이 없는 것이다. 


그러니 결론적으로 부처님은 

금강경에서 

이 두 방면의 내용을 부처님이 가르쳐준대로 

빠지지 말고 그대로 다 해야 한다고 

제시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실상의 정체를 이해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이를 이해하더라도 

이런들 어떠하리라는 하여가를 읊으면서 

수행을 실천해 행하지 않는 것은 

경전에서 제시되는 것처럼 

그로 인해 더 위험한 상황에 곧바로 들어가는 사유가 되므로 

주의해야 한다고 본다. 





그런데 이와는 달리 

처음 단계부터 

일체가 공하다는 사정을 그렇게 이해하지도 못하고 

현실이 모두 실답다고 여긴다면 

그것은 별개 문제라고 할 수 있다. 


즉, 현실에서 

눈을 떠서 보니 

뻔히 꽃이 보이고 

그것이 꽃이라고 생각하게 되고 

생멸이나 생사 현상을 다 보게 되는데 


왜 이것을 무소유 불가득 공하다고 하면서 

하나같이 꿈처럼 실답지 않다고 하는가 

라고 의문을 여전히 갖는다면 

그것은 앞과는 

또 별개 문제가 되는 것이다. 


그러니 그것을 또 해결하기 위해서 

자세히 그 정체를 밝히고 이해하기 위한 

논의를 진행해야 하는 것이다. 



이 문제를 공간을 확보해서 자세히 살펴야 하는데 

여하튼 그것을 이해하더라도 

그 바탕에서 수행을 현실적으로 실천해나가야 

하는 것이 핵심이므로 

이것을 반복해 강조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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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에서 소리가 난다는 망상 현상 



손을 마주치면 소리가 난다고 망상을 일으키고 

심지어 그렇게 듣게 된 소리의 본 정체는 손이라거나 

또는 사정이 그런 것은 손에 본래 그런 소리가 들어 있었기 때문이라거나, 

이런 식으로 망상 분별을 일으켜 

생사고통을 받아나가는 문제를 살피고 있다. 



원래 이를 이전 페이지 조각글에서 설명하려고 했는데 

지면 사정으로 옮겨오게 되었다. 


그런데 이렇게 주제를 제시하고 논의를 하자, 

아니 당연하게 맞는 내용을 

왜 엉터리고 망상분별이라고 하는가 하면서 

거꾸로 비판을 제기하는 입장도 있다. 


이런 경우는 상당히 그 망상증세가 심각한 것을 

이를 통해서 볼 수 있는데 

그러나 망상증 환자가 대다수인 상황에서는 

또 이것을 마땅히 존중해야 하는 것도 사실이다. 



그런데 왜 이렇게 대다수가 

비슷한 망상증을 갖고 있는데 

그것을 문제삼는가에 대해서 먼저 잘 파악해야 한다고 보고 

그 사정을 먼저 살피다보니 

지면이 차서 정작 왜 이것이 전도된(거꾸로 뒤집힌) 망상분별이라고 

하는가에 대해 설명이 되지 않고 

다시 어떻게 그것이 엉터리임을 밝히는가에 대한 내용도 

설명하지 못하고 넘어 오게 되었다. 


그런데 이 논의를 통해서 

그 사정을 잘 이해하고 

현실에서 매 상황에서 취하고 행해나가는 자세와 내용이 

변화가 되지 않으면 

결국 내용은 알지만, 

생사고통에서 벗어나지 못하게 된다. 


그래서 바로 이 사정부터 잘 

이해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보게 된다. 



경전에서 남의 창고안의 곡식만 열심히 세고 

정작 자신의 밭에 씨는 하나도 뿌리지 않는 경우라고 

이 사정을 비유로 드는데 

이 논의도 사정이 같다. 


논의는 복잡하여서 한 번 논의가 되면 

상당히 번잡한 것이 사실인데 

논의를 살피는 가운데 


왜 이 논의를 시작했는지를 모르고 

논의가 다 마쳐진 다음에도 

정작 그 논의를 통해서 얻어야 할 내용이 무언지를 파악하지 못하고 

계속 논의 안에서만 머물고 있는 경우가 

대단히 많은 것이다. 


어떤 수학자가 비슷한 증상으로 

동그란 밭을 네모난 밭과 바꾸려고 

면적 계산을 하기 위해 원주율 값이 필요했다는 것이다. 

이는 직선과 곡선의 복잡한 사정 때문에 빚어진 문제인데 

취지는 곡선을 직선으로 통일시켜 그 길이를 비교해보자. 

이런 것인데 그런 문제에서 원주율을 계산하는 것이 

문제가 되었다는 것이다. 

그런데 알고보면 원주율은 컴퓨터로 계산해도 

무한히 계산한다해도 값이 떨어지지 않아 

늘 근사값에 머물게 되는 사정이 있다. 

왜 그럴까. 간단히 보면 본래 곡선이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한 수학자가 원주율을 계산해나가는 방식을 

통해서 이 값을 계산하기 시작하였는데 

여기에 심취해서 평생 그 값을 계산하고 삶을 

마쳤다는 것이다. 


어떻게 보면 진정한 학자의 자세를 보여준 것 같기도 한데 

문제는 한 인간의 삶이 이렇게 되어서는 안 된다고 보는 것이다. 


처음 문제는 무엇이었는가. 

그것을 놓고 생각하면 

이것이 무엇인가 거꾸로 뒤집혀진 사정이 있음을 이해할 수 있다. 


원래 이 문제는 prince 님에 의해 쉽게 

해법이 제시되고 있다. 


prince 님이 7차 방정식 값을 얻는 방안 

원과 면적이 같은 정사각형의 작도법 

각을 자와 컴파스만으로 3 분 하는 작도법 

이런 것을 다 제시하고 있는데 


prince 님에 의하면 이렇게 문제를 접근하면 

안 된다고 본다는 것이다. 


위 문제는 어떻게 접근하는가. 

그냥 아무렇게 바꾸고 

수확량을 같게 만들거나 

수확량이 달라도 수확량으로 얻는 결과를 같게 하여 

각 수확량으로 받는 수입을 같게하거나 

수입액이 다르면 수입액으로 얻게 되는 효용이나 만족도를 같게 하거나 

이렇게 해야 된다고 본다는 것이다 .


그것은 앞의 수학계산을 

근사값이 아니라 정확하게 맞추어도 

뒤가 문제가 되면 문제가 발생하는데 

뒤가 해결이 되면 

앞의 문제는 문제가 아니라고 본다는 것이다 



만일 그것이 문제이면 

2 의 제곱근이나 

1 을 3 으로 나누는 문제도 

그 수학자에게 근사값이 아닌 정확한 값을 

요구하거나 

심지어 미적분 계산값을 근사값이 아닌 값으로 

요구하거나 하면 

그 사람 일생을 망치게 되니 

주의해야 한다고 제시한다. 


그런데 알고 보면 

왜 그 학자가 그렇게 했는가를 놓고 보면 

그 정신병 진단명이 바로 나오게 된다. 


망상분별 편집증이 바로 그 진단명이 되는 것이다. 


어떻게 보면 단순해 보이지만, 

이 망상분별 편집증을 부처님이 문제로 삼는 것은 

생사과정에서 받는 고통은 모두 

이로부터 발생하기에 그런 것이다. 


그래서 이 증상을 근본적으로 치유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보는 것이다. 


그래서 앞의 문제도 살피는데 

망상분별 편집증세를 치유하기 위해 이 문제를 살피다 보면 

망상분별 편집증 환자는 또 

앞의 학자처럼 임하게 마련이다. 


이 논의를 붙잡고 한없이 나아가는데 

정작 이 논의로 치유하고자 했던 

망상 증상은 치유하지 못하고 

그리고 자신의 밭에서 

수행의 씨앗을 뿌리는 일도 전혀 하지 않고 

오로지 이것만 붙잡고 쉼없이 나아가는 

부작용이 발생하는 것이다. 


이런 증상을 보이는 사례가 많다. 


한마디로 도서관에서 조금 누가 시끄럽게 한다고 

어느 한 학생이 확성기를 들고 와서 

하루 종일 

"제발 친우들이여 

도서관에서는 좀 조용히 지내자."  

이러면서 혼자 도서관에서 계속 

쉼없이 방송을 했다는 경우와 비슷하게 되는 것이다. 



원래 이 문제는 삶을 살아가는 입장에서 

겪게 되는 고통을 제거하기 위해서 

이 내용이 제시된 것이다. 


그런데 이 논의를 하는 가운데 

없던 고통이 오히려 생긴다거나 

정작 논의는 다 마쳤는데 

이 논의를 통해 취해야 한다고 보는 

생사 고통을 제거할 방안을 전혀 

행하지 않고 

계속 이 내용만 붙잡고 

시시비비의 현장에 들어가 임하는 

전문적 시비맨이 되는 경우도 

상당히 많은 것이다. 


사실 이를 위해 이 논의가 상당히 

중요하고 필요한 것만은 사실인데 

그러나 그 자체가 본 목적이 아닌데도 

어느 순간 되버리는 것이다. 


그래서 이 점을 늘 주의해야 한다고 

보게 된다. 



손을 마주치면 소리가 나는 경험을 

현실에서 하지 못하는 이가 있는가. 

전혀 없다고 할 것은 아니지만, 


여하튼 대부분 그렇다고 보는 내용을 

놓고 논의하는 것은 

그것이 전도몽상 편집증상을 

유발시키는 근원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 논의를 살피는데 

이 논의를 통해 

무엇을 얻고자 하는가는 


역시 현실에서 자신이 

금이나 꽃이라고 보거나 

바퀴벌레로 보는 내용을 놓고 

행하는 반응 


즉 전도몽상 편집증에 바탕해 

행하게 마련이라고 보는 반응 

좋다고 보면 탐욕을 일으켜 접착되어 행하는 반응 

나쁘다고 보면 분노를 일으켜 접착되어 행하는 반응 

자신이 대하는 것이 대변인지 금인지 분별을 못하고 

앞처럼 망상분별에 바탕해 엉터리 견해를 일으키고 

이에 집착해서 헤매는 반응 

이런 것을 제거하고 


그래서 망상분별과 집착을 제거하고 

자신을 생사고통에 묶어 사역을 시켜나가는 

번뇌의 묶임으로부터 풀려나 마음의 해탈을 얻고 

실상과 현상을 깊은 지혜 반야바라밀다를 통해 꿰뚫어 관하여 

보리(깨달음)을 얻고 지혜의 해탈을 얻고  


생사현실이 본래 

생멸과 생사고통을 얻을 수 없는 

청정한 니르바나임을  잘 이해하고 관하는 가운데 


이에 바탕해서 

본래 청정한 니르바나에 상응하게 여여하게 

생사현실에 임하는 가운데 


생사고통을 받는 중생을 제도하고 

불국토도 장엄하고 

법신을 증득하여 성불하는 등의 

서원을 잘 성취하는 것이 


본 목적인 것이다. 


사정이 이런데 

이를 위한 기본적 논의에 들어가 

시시비비를 논의하는 논의에 함몰되는 가운데 

오히려 이로 인해 없던 번뇌와 고통을 받고 

오히려 다른 이에게 고통을 주고 

정작 앞과 같은 수행은 하나도 실천해 행하지 못하면 

이것이 문제가 되는 것이다. 


가끔 번뇌를 제거하기 위해 논의한다면서 

다른 이에게 수많은 번뇌를 일으키고 

자신마저 번뇌에 빠지고 

자신이 주장하는 본 내용과 정반대로 

엉뚱하게 현실에서 행하는 경우가 있는데 


실재의 공함의 논의와 관련해서는 

이런 입장을 악취공견이라고 칭하게 되는데 


이는 결국 앞에서 비유로 든 

도서관의 학생과 사정이 같거나 

원형의 밭을 네모난 밭으로 교환하기 위해 

원주율을 계산하다 원주율계산만 평생 행한 어떤 학자의 입장과

사정이 같은 것이다.


그런 경우에는 각기 

그냥 시끄러워도 공부하고 

원형이던 네모난 밭이던 자기 밭이던 남의 밭이던 

열심히 씨뿌리고 물주고 농사를 하거나 하는 것이 

훨씬 나은 것이다. 


수행에서도 마찬가지다. 

소리가 손에서 난다고 하던 

소리에서 소리가 난다고 하던 

아니면 소리가 난다는 일은 본래 없었다고 하던 

여하튼 

당장 이해가 안되는 것은 그냥 부처님의 말씀을 신뢰하고 

보시 정계 안인 정진 정려 반야 방편 원 력 지의 

수행을 당장 하나하나 행하는 것이 

훨씬 낫다고 보게 되는 것이다. 


또 그러다 보면 처음엔 잘 이해가 안 된 내용도 

나중에는 아주 간단하게 이해가 되기도 하는 것이다. 


그런 문제를 관심을 갖지도 않고 

잘 모른다해도 

그런 수행을 열심히 하면 

그런 내용이 필요할 상황에는 

그 상황에 맞추어 prince 님 같은 이가 갑자기 나타나 

아주 쉽게 해법을 제시해주기도 하는 것이다. 


수학이나 컴퓨터 부분에서는 prince 님이 그렇지만, 


수행자의 수행에 있어서는 

반야심경의 내용을 제시해준 

관자재보살과 같은 분이 그런 경우다. 


아무 내용을 모르고 

평생 관자재보살의 명칭만 계속 념하고 외우기만 한다 해도 

이렇게 수행에 임해 정진하면 

이 경우는 앞과 달리 

이를 통해 보리를 얻고 니르바나도 얻게 된다고 보는데 

그것은 사정이 그렇기 때문이다. 


그래서 앞과는 사정이 다른 것이다. 


앞의 경우는 소리만 시끄럽고 

자신만 피곤하고 

원래 의도한 본 취지는 전혀 성취가 안 되는 상태인데 

이 경우는 다른 것이다. 


그러니 논의를 하기는 해야하지만, 

무엇을 강조해야 한다고 보는가하면 

바로 이 내용들인 것이다.  


[...]


○ [pt op tr] 손을 마주치면 소리가 난다고 주장하는 망상증상 



손을 마주치면 소리가 나지 않는가. 

본인도 소리를 손으로 내고 싶으면 

손을 마주친다. 


그런데 왜 여기에서 그런 생멸현상을 얻을 수 없다고 하고 

그렇게 주장하는 것은 

전도된 망상분별이라고 하는가. 


여기에 대해서 이해를 못하겠다거나 

심지어 너무 엉터리 주장을 하니 답답하고 

심지어 그런 생각을 하는 것을 너무나 당연하다고 보는데 

자신을 전도망상 편집증 환자라고 칭하니 심한 억울함을 느끼게 된다. 


이런 경우가 현실에 많다. 



쉽게 보면 아주 간단해 보이고 

위 내용은 아주 당연히 옳은 내용이라고 볼 수도 있지만, 


알고보면 

이 문제가 10 대 세계 불가사의한 퀴즈 문제라고 

제시를 했는데 

그런데도 이를 아주 간단하고 당연한 내용이라고 

보는 것은 

오히려 증상의 심각성을 나타낸다고 보게 된다. 


그런데 사정을 쉽게 이해해보자. 


이전 조각글에서도 이런 논의를 할 때는 

꿈의 비유를 늘 념두에 두고 

논의에 임할 것을 제시한 바 있다. 


꿈에서 황금을 얻었다. 


이 때 그 꿈을 꾼 이가 그런 꿈을 꾼 것을 

부정하는 것이 결코 아니다. 

그런데 그 꿈에서 본 황금을 

현실에서 잠을 잔 침대에서 찾는다거나 

침대에 그 황금이 있다거나 

꿈에서 본 황금의 본 정체는 침대에 있던 베개라거나 하면서 

고집하면서 

그것이 실답다고 여기고 

집착을 갖고 임하는 경우가 문제라고 지적하는 것이다 



그런 입장에서 

꿈에서 '황금을 얻었다'고 주장하는 내용은  

사실은 엉터리라고 제시하는 것이다 .


그런데 이는 그렇다고 

그가 꿈에서 그런 꿈을 꾸었다는 것을 

부정하는 것이 아니다. 


그런데 왜 이것을 강조하는가하면 

꿈에서 꾼 그런 내용이 

그런 사정으로 실답지 않다는 사정을 이해하지 못하고 임하면 

결국 생사과정에서 온갖 고통을 

그로 인해 받아나가기 때문에 그런 것이다. 


그래서 꿈에서 

그런 내용을 꾼 것을 부정하는 것이 아니고 


바로 그 부분을 놓고 

그것이 실다운 내용이 아니라고 강조하면서 

이를 통해서 

그에 대한 집착과 고집을 제거하여 

그로부터 받게 될 생사고통을 제거해 내기 위함이다. 



이는 꿈에서 받는 고통과 

꿈으로부터 받게 될 고통을 제거하는 것이지, 

꿈을 제거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다.  



그래서 

꿈에서 황금을 잃었다고 통곡을 하고 고통을 받는다면 

그 현장에서 그 고통을 제거하는 한편 


다시 

현실에서 수행의 방안을 취하고 임하게 하여  

앞으로 그런 고통을 받는 상태로 들어가지 않도록 

고통의 발생을 방지하고자 

그것을 강조하게 되는 것이다. 






이제 현실에서 

손을 마주치면 소리가 난다. 

없던 소리가 그래서 새로 생겨났다. 


이런 내용도 이와 사정이 마찬가지인 것이다. 


그러므로 이 논의에서도 

앞의 비유를 잘 기억한 다음 

이 논의가 어떤 부분을 지금 초점으로 맞추어 

논의하고 


그 논의를 통해서 

어떤 상태로 현실에서 임해야 함을 강조하는가를 

잘 파악하고 

논의를 살펴야 한다고 하는 것이다 .


그래서 결론적으로 

전도망상 증상을 갖고 있는 이가 

그런 상황에서 


그런 현실을 대하고 그런 생각을 하고 

그렇게 현실을 대해 살아간다는 사실 자체를 

부정하는 것이 아니다. 


그런데 여기서 무엇이 문제라고 제시하는가


이를 다시 되풀이하지 않지만, 

앞의 꿈의 내용을 놓고 

이 논의에서도 조점을 잘 찾고 

초점을 잘 맞추어서 

논의를 살펴야 한다고 보는 것이다. 




[...]

여하튼 세상의 온갖 문제와 

온갖 고통을 다 나열해 

잘 해결해야 하는데 


사실 그렇게 접근하기보다는 

앞의 문제 딱 하나만 잘 해결하고 

그 바탕에서 

수행에 진입해 들어가면 

사실은 그 온갖 문제가 다 해결된다고 보게 된다. 


그런데 온갖 문제를 다 해결하고도 

위 문제를 잘 해결하지 못하면 

다시 문제가 발생하고 

정작 생사고통을 해결하지 못하고 

그대로 묶이게 되는 문제가 발생하는 것이다. 



이것이 10 대 불가사의한 문제 가운데 

또 다른 한 문제와 사실은 성격이 같다. 


즉 왜 눈을 뜨면 세상과 자신의 모습이 보이고 

눈을 감으면 보이지 않게 되는가. 


눈을 감을 때의 상황이 진실인가. 

아니면 눈을 뜨고 대할 때의 상황이 진실인가. 


이런 문제도 마찬가지다. 


그래서 이미 이전 조각글에서 

이 문제에 접근하는 실험 방식을 

간단히 언급했던 것이기도 하다. 




간단히 이 증상을 해결하는 방안을 살피면 

다음이다 .


먼저 문제를 잘 파악하고 

답을 직접 확인하는 것이다. 


그런데 그것이 안 되고 

이를 통해서 그 망상분별 집착증상이 해결이 안되면 

그 다음에는 

이제 상대가 주장하는 것을 놓고 

하나하나 검토하는 방안이다 .


이미 이 뒤의 방안을 소송에서 사용하는 

가정적 항변 또는 if 항변 if 논의라고 표현한 바 있다. 


원래는 처음에 제시한 방안처럼 

직접적으로 이 문제를 놓고 

바로 무소유 불가득 무아 무자성 공이란 

답을 직접 얻으면 되는 것이다. 


그런데 그런 방안으로 

직접 해결이 안 되는 경우가 또 있는 것이다. 

이는 증상이 심한 경우라고 할 수 있다. 



소송에서도 마찬가지다. 


a 란 사실이 있나 없나를 놓고 따지는데 

그 현장에 직접 가서 

그 사정을 살펴보면 된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그 방안으로 안 되는 경우가 

또 있는 것이다. 


그래서 한 당사자가 

원칙적으로 a 가 이러하다고 주장을 하지만, 


상대가 그에 대해 반대하므로 

앞과 같은 주장을 원칙으로 하는 한편 

이와 함께 동시에 

이제 가정적 항변을 시작하게 되는 것이다. 


이는 다음처럼 주장하는 것이다. 


사실은 이러이러해서 상대의 주장이 옳지 않다. 

그런데 만일 상대의 주장이 맞다고 한다면 

이제 이러이러한 문제가 있게 된다. 

그러니 상대 주장은 엉터리가 아닌가. 


이렇게 새로 주장을 덧붙이게 된다는 의미다. 


그런데 여기에서 잘 보면 

'상대의 주장이 맞다면' 이렇게 말을 시작한 것이다. 


이것이 무슨 말인가? 


사실은 그렇지 않은데 

하도 상대가 억지 주장을 계속 하니까. 

그것을 그대로 일단 받아들인다고 하자. 

그렇다면 이런 엄청난 문제가 생긴다. 

어떡할 것인가. 


이렇게 내용을 덧붙여서 

상대가 스스로 그 주장을 폐기하도록 

노력하겠다 이런 의미다. 






현재 눈을 떠 보니 

꽃이 보이고 그래서 그것을 꽃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그런 꽃이 거기에 있고 ....


그런 가운데 손을 마추치니 소리가 난다. 

심지어 촉감도 느껴진다. 


그러니 이 손이 그 소리를 일으키고 

촉감을 얻게 한 것이다. 


그리고 그 소리나 그 촉감은 

이 손에 있었던 것이고 

그것의 본 정체도 이 손이다. 


이런 식으로 계속 상대가 주장하는 것이다. 



글을 쓰면서 노래를 듣는데 

갑자기 '가족에게 거짓말' 

이런 메세지가 노래에서 들린다. 


결국 위와 같은 주장을 하는 이는 

가족에게 엉터리 주장과 

진실에 위배되는 거짓말을 하는 입장이 되는 것이다. 


물론 자신도 그런 망상증상을 일으키고 

전도된 상태로 홀려 있는 상황이어서 그런 것이기는 하지만, 


다른 이에게도 그런  주장을 계속 고집함으로써 

그 증상을 자신에게만 그치지 않고 

다른 이들에까지 그런 전도몽상 증상을 확대시키고 

또 이런 망상에 바탕해 사역을 당하고 

다른 이도 사역을 시키며 

무량하게 생사고통을 함께 받아나가게 되니 

그것이 문제인 것이다. 





그래서 이 경우에도 앞과 같은 

두 방안을 다 사용할 수 있다고 보는 것이다 .


그런데 경전에서는 

주로 앞의 방안을 통해 내용을 제시하는 것이고 


논서들에서는 중론송과 같이 

주로 뒤의 방안을 

보충적으로 사용해 

경전의 내용을 설명하고자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런 기본 방안을 

잘 이해해서 

왜 위와 같이 생각하고 

현실을 대하는 것이 

생사고통을 무량하게 받아나가는 근본 원인이 되는가를 

잘 살피고 


이제 논의 중간이거나 

논의를 마치고 나서는 

그런 망상과 집착을 제거하고 

수행에 진입해 들어가야 하는 것이기도 하다. 


[...]

중론 등의 논의를 논의하다보면 

혹시 이들 내용이 세간에서 확립하고 

내세우는 모든 내용을 다 무너뜨리고 

파괴하는 것은 아닌가. 


이런 오해를 갖기 쉽다. 


그래서 본래 오고 감을 얻을 수 없다고 

제시하는데 

굳이 오지말라고 하고 또 가지도 말라고 하면서 

이상한 주문을 하면서 

걱정을 하는 현상이 나타난다고 본다. 


오고 감을 얻을 수 없음을 제시하면 

현실에서 어디를 오고가는 것 자체가 

불가능하고 

또 그렇게 버스나 전철을 타고 오고 가는 것 

자체가 중단되는 것으로 

오해를 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것은 세간에서의 진리와 

언어를 떠난 초월적 진리 승의제의 관계를 

약간 오해한 사정이 있다고도 보게 된다. 


심지어 혈압이 높아 보인다고 

걱정하는데 


본인도 그런 문제때문에 

논의를 한꺼번에 몰아 논의하지 않고 

쉬면서 무리하지 않고 

논의를 하는 것이다. 


여하튼 이미 꿈의 비유를 통해서 

이 사정을 설명했는데 



꿈에서 황금을 보았다 해도 

그런 꿈은 실답지 않고 

또 그런 황금을 얻을 수 없다고 제시하는 것은 

그러므로 망상분별과 집착을 떠나 잘 임하라는 것이지 


그런 내용을 통해 

그런 꿈이 없었다거나 

이제는 잠잘 때 절대 꿈을 꾸면 안 된다거나 

꿈을 꿀 수 없다는 등을 말하는 것이 아닌 것이다. 


그래서 처음에 

손을 마주치면 소리가 난다는 현상을 거론하며 

이런 분별을 행하면 전도망상증상이 심화된 상태라고 제시할 때 


백과사전 편찬 위원회나 

과학계 등이 

큰 우려를 표하는 것은 이해가 가지만, 

너무 지나친 우려를 갖지 않아도 된다고 보지만, 

그러나 문제가 있기는 하다는 사정을 

잘 파악해야 한다고 본다. 



지나친 우려를 갖지 않아도 되는 것은 

여전히 소리를 내려면 

손을 마주칠 수 있고 

손을 마주치면 소리도 나고 

문제가 별로 없는 것이다. 


다만 이를 놓고 

그것이 실다운 내용이라고만 

여기지 않고 

집착을 갖고 대하지 않으면 되는 것이다. 



그리고 이런 내용을 잘 이해함으로써 


그런 바탕에서 

음악회에서는 손벽을 치고 싶지 않아도 열심히 손벽을 칠 수 있게 되고 

도서관에서는 손벽을 치고 싶어도 또 손벽을 치며 소리를 내지 않게 되고 


자신은 또 다른 이가 

음악회에서 손벽을 치지 않고 

도서관에서 손벽을 열심히 치고 돌아다녀도 

평안히 임하게 될 수 있게 되고 


그리고 이런 내용과 관련해 

현상과 실상을 꿰뚤어 관하는 가운데 

전반적으로 수행을 원만히 성취할 수 

있게 된다는 사정을 말하는 것이다. 


이 내용이 두 손을 마주쳐서 

이제 소리가 나지 않게 만들어 주는 것이 아니고 

그에 대해 그런 생각을 하고 대하는 것도 

역시 부정하지 않는데 


다만 그 내용을 놓고 

그것이 실다운 내용으로 

실재하는 내용이라는 등으로 

분별하고 

집착하는 것만 주의하면 되는 것이다. 




이제 본격적으로 논의를 해나가기로 하자,. 




처음 이 문제를 

정지 화면에서 부터 시작해보자. 


눈을 떴다. 

무언가 모습이 보인다. 


그래서 그 한 부분은 꽃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저것은 꽃이다. 

이렇게 분별을 행하는 것이다. 



여기에 무슨 문제가 있는가. 


역시 마찬가지다. 

그 한 주체가 그렇게 

감각현실을 얻고 


그것을 놓고 이리저리 묶고 나누는 가운데 

어떤 부분이 a 라고 생각하고 

다시 그것을 그렇게 언어로 표현한 것이다. 



이 현상 자체는 그렇게 이뤄지고 있고 

이 자체만 놓고 보면 문제가 아니라고 할 만하다. 




그런데 이미 꿈의 비유를 통해서 

보았지만, 

어디서부터가 전도몽상 증상의 

시작점이라고 보는가하면 


그 내용을 놓고 

이상한 분별을 행하면서 

집착을 갖는 부분부터가 문제인 것이다 .



여기서 무엇이 문제인가하면  

그렇게 그런 감각현실을 대하고 

그것이 꽃이라고 관념분별을 일으키고 나서 


그런 관념분별 내용이 

감각현실에 있다고 주장하고 


다시 그 내용들이 

그 본 바탕인 실재에도 그렇게 있다고 주장하고 


다시 그 내용에는 

진짜라고 할 변치않고 고정된 실체가 그렇게 있다고 주장하고 


그러면서 사정이 그렇기 때문에 

자신이 행한 관념분별이 실다운 내용이라고 주장하고 

이에 강하게 집착하면서 


동시에 그 내용을 가지고 

감각현실 그 부분에 접착되고 

나머지 실재나 다른 내용에 모두 접착되어 

행해 나가는 것들이 문제인 것이다. 


이 부분이 문제이므로 

이것을 시정해야 한다고 하는 것이지

그렇다고  

처음 그런 감각현실과 관념분별을 행해 얻는 부분이 

문제라고 하는 것은 아니다. 


그런데 현실에서 그런 감각현실을 얻고 

관념분별을 행하는 입장은 

거의 대부분 그렇게 행하고 있는 것이기도 한 것이다. 



그래서 그런 망상증상이 

일으키는 문제가 심각한 것이다. 


꽃을 가지고는 별 문제가 없다고 

보겠지만, 


그것이 자신인 경우는 

대단히 큰 문제가 발생한다. 



이미 신발과 껌의 비유를 들어

이 사정을 설명했는데 


누군가 신발에 붙어 있는 껌을 

자기 자신이라고 망상을 일으키고 

다른 이가 어떤 그 껌을 떼내면 

대단히 분노를 일으키면서 

상대를 발로 차고 

그리고 다시 상대로부터 얻어 맞고 

그러는 가운데 감옥에 들어가는 

이야기를 제시한 적이 있다. 


사실 현실에서 이렇다면 

대단히 이상하고 우스꽝스러우면서 

안타까운 일이다. 


그런데 현실에서 

자신이라고 자신이 여기는 부분이 

사실은 그런 사정과 같다고 여기서 

제시하는 것이다. 


사정이 그렇지 않은데 

그렇다고 보면서 

집착을 갖고 

임하는 것이다. 


그러니 이후 세상의 모든 생사 고통은 

여기에서 비롯되는 것이라고 보는 것이다. 


처음 손을 마주쳐서 소리가 난다. 

눈을 뜨니 꽃 모습이 보여서 그것을 꽃이라고 한다. 


이 내용이 문제라고 지적할 때는 

그것이 별 문제가 아닌 것처럼 여겨지지만, 


같은 형식으로 

자신이 눈을 떠 자신이라고 보는 부분은 '자신이다.'

이렇게 여기고 

이제 그 부분에 대단한 집착을 갖고 임하는 것은 

그 주체의 삶에서 만나는 

고통과 관련된 모든 문제와 관련이 되는 것이다. 


그래서 어떤 주체의 

생사 고통의 문제를 해결하려면 

이 부분을 해결해야 하는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무엇은 문제가 아닌가. 


눈 뜨면 그런 모습을 그렇게 얻는 것이나 

그것을 놓고 

이렇게 저렇게 엉터리이던 아니던 

관념분별을 일으켜 얻는 것 자체는 

큰 문제는 아닌 것이다 .


그런데 그런 상태에서 

자신이 자신이라고 생각한 내용을 놓고 


그것이 감각현실에도 그렇게 있다고 

=> 아상을 취하고 머물고 


그리고 실재에도 그런 내용이 

그렇게 있다거나, 


심지어 자신이 얻는 그 내용이 

곧 실재의 자신이라고 여기거나 


또는 이들이 진짜의 자신이라고 여기거나 

이들에 진짜의 지산이 있다고 여기거나 

'

이런 현상들이 모두 문제가 되는 것이다. 



바로 그런 망상 때문에 

이제 껌을 누가 만지면 

곧바로 분노를 일으키고 일어나고 


자신의 것이라고 보는 

신발이나 일체의 것을 만지면 

또 분노를 일으키고 

그리고 비슷한 증상을 갖는 

상대와 얽혀서 

생사고통을 주고 받아나가게 되는 것이다. 


그러니 이 문제를 근본적으로 시정해야 하는데 

그것이 바로 앞 문제와 다 관련이 되는 것이다. 




그래서 처음 

눈을 떠서 


꽃의 모습을 얻고 있는 순간을 놓고 

그 감각현실을 잘 체포하는 

훈련부터 해야 한다고 보는 것이다. 



그래서 이 논의를 위해서는 

먼저 눈을 감고 뜨는 훈련을 

반복해야 한다고 하는 것이다. 


글로 자꾸 적다보면 

무엇을 지금 가리키는지 

도무지 파악을 못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왜냐하면 기본적으로 

관념분별 = 감각현실 

이처럼 접착된 상태로 현실에 

임하고 있는 것이 대부분이기 때문이다. 


그것이 문제인데 그 상태에서는 

무엇을 놓고 무엇이라고 하는 지부터 

온통 혼동상태로 임하는 것이다. 


그래서 이것부터 잘 확인하지 않으면 

논서면 논서 

경전이면 경전을 대하는대로 

혼란을 겪고 헤메게 마련이라고 보게 된다. 


수보리존자가 부처님에게 

a 는 실로 a 가 아니기에 그런 까닭에 그것을 a 라고 

칭하여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이렇게 말하면 

앞의 상태에서는 이것이 

무엇을 말하는 것인지 도무지 파악하기 힘들다고 

보게 되는 것이다. 


왜냐하면 기본적으로 언어 a 를 놓고 

자신이 대하고 문제삼는 각기 다른 영역의 내용을 다 가리키는데  

그런데 망상분별을 일으켜 이들 각 내용을 

모두 다 접착시켜 놓고 대하고 있는 가운데 



그 언어표현으로는 

도무지 그 가운데 무엇을 가리키는 지 자체를 

분별해내지 못하는 상태에서 

이를 대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일단 

이것부터 실험을 해야 하는 것이다. 


지금 눈을 감았다가 

다시 뜨고 

감았다가 뜨면서 

이를 통해 

변화되는 내용 


뜨면 나타나고 

감으면 사라져 버리는 그 무엇을 

잘 확보해야 한다는 의미다. 


그것을 일단 감각현실이라고 시설해서 칭하는데 

여하튼 그 내용을 잘 스스로 확보해야 하는 것이다 .


문제는 이는 그 내용을 얻는 순간만 가능하고 

다음 순간에는 꺼낼 수 없는 것이다. 

그런데 여하튼 그것이 문제가 되므로 

그것을 잘 확보해야 한다. 


그런데 그런 내용을 놓고 

그 일 부분이 자신이라거나 꽃이라거나 생각을 하고 있는 것이다. 


이 내용도 앞 내용과 잘 구분해서 

또 확보해 놓아야 하는 것이다. 


반복하지만, 

생활하면서 이렇게 감각현실을 얻고 

그에 대해 무슨 분별을 하고 

또 언어로 진술했다고 

그것만으로 곧 지옥에 들어갈 사유가 되는 것은 아니다. 


다만 그 이후가 문제인 것이다. 


그러나 일단 무엇을 감각현실이라고 하고 

무엇을 관념분별이라고 칭한 것인지는 구분을 해야 

논의가 시작된다는 의미다 .


자신이 무언가를 현실에서 얻는데 

앞과 같은 성격의 감각현실을 제외하고 

나머지는 감각현실이 아니라고 할 것이니 

일단 관념분별은 이 부분에서 

찾아보아야 하는 것이다. 


그 나머지가 그렇게 단순한 것은 아니지만, 

일단 눈을 감아도 

자신이 앞 부분에서 

꽃이나 자신이라고 생각했다면 


눈을 감아도 그 모습은 보이지 않지만, 

그 생각은 다시 유지하고 

떠올릴 수 있지 않은가 .


그것을 여기서 문제삼는 것이다. 



그런데 

매일 쉬지 않고 그렇게 

보고 그렇게 생각을 진행하는데 

이것이 무슨 대단한 일인가. 


대단한 일이라고 보는 것이다 .

일단 그 자체가 불가사의한 일이기도 하고 

또 그렇게 쉬지 않고 

망상증상을 유지해 나간다는 자체가 

상당히 문제이기도 한 것이다. 


일단 여기까지 논의에 사용할 기본재료를 확보하고 

쉬기로 한다. 


쉬는 동안 

감각현실을 얻고 

그 일부분에 대해 꽃이라고 했다고 하자. 


그것은 꽃이다. 이렇게 생각한 것이다. 


그런데 일단 이것을 확인하는 것이다. 

초기 전도망상증상을 문제삼는 것이다. 


'그것은 꽃이다'라고 할 수 없다.  =>  

그러면 꽃이 아닌가. 

그것도 아니다. '그것은 꽃이 아니다'라고도 할 수 없다.  =>

그러면 그것은 꽃인가. 


반복 리바이벌 이런 것을 할 수는 없고 

여하튼 


그 감각현실 자체는  

꽃이나 

이다 아니다 등의 

분별을 얻을 수 없고 

떠나야 하는 것이다. 


그래서 그 부분은 

~ 이다라고도 할 수 없고 

~ 아니다라고도 할 수 없다


이것을 먼저 확인해야 한다. 


이 구조가 

나중에 실재와 관련된 논의에서도 

그 꽃이나 자신과 관련해서 

그대로 적용할 수 있다고 볼 수 있다. 


이미 이 구조를 꿈에서도 살핀 바 있다 .


침대에서 황금꿈을 꾼 것이다. 

그리고 침대를 보고 

그 침대가 꿈에서 본 황금이라고 여기면 안 되는 것이다. 


너무 당연하지 않은가. 



다시 비유를 들어보기로 한다. 


컵에 어떤 그림이 그려져 있다고 하자. 

이제 물어보자. 

그 컵이 곧 그 그림인가. 

그런가? 

아닌가? 


애매한 것이다 


그래서 이들은 서로 그런 상태라고만 이야기하는 것이다. 

그 컵에 그림이 있고 그것을 부정하는 것은 아닌데 

컵과 그림의 관계는 그런 상태라고 제시하는 것이다. 


이것을 다음 질문을 천천히 놓고 잘 살펴보기로 하자. 

컵 그자체가 그 그림인가. 

그렇다고 

컵을 떠나서 그 그림이 있는가. 



위과 같은 형식으로 계속 물어보자. 


거울에 모습이 비추인다. 


거울 그자체가 그 모습인가. 

그렇다고 

거울을 떠나서 그 모습을 보는 것인가. 



또 비슷한 형식으로 물어보자. 

종이에 글자가 써 있는 경우도 

마찬가지라고 할 수 있다. 


종이가 그대로 글자인가. 


그렇다고 

종이를 떠나서 글자가 있는가. 


이런 질문은 


종이가 글자라고 하는 것인가. 

아니라고 하는 것인가. 


이런 문제를 생각해보기 위해서 

한번 쉬는 동안 연구해보자는 의미다. 



이제 감각현실과 그에 대하여 생각한 내용을 

놓고 이 문제를 보자. 


감각현실이 그대로 그런 생각내용(관념)인가. 


그렇다고 그런 감각현실을 떠나 

그런 생각을 하게 된 것인가. 


이렇게 놓고 

이 두 내용의 상호관계를 살펴보자는 의미다. 



처음 자신이 어떤 부분을 꽃이나 자기 자신이나 영희 등으로 

생각하고 대했는데 

그처럼 생각한 내용이 

그 부분과 무슨 관련이 있는가를 검토하자는 의미다. 


그리고 이다 아니다의 사정도 이와 같은 것이다 .


그러니 사실은 

그 감각현실에서는 

그런 내용들이나 

이다 아니다. 

있다 없다 

이런 것을 

모두 얻을 수 없는 것이라고 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런 상태로 

그렇게 그 내용을 생생하게 얻은 것 뿐이라고 

제시하는 것이다. 


그리고 관념영역에서 이를 놓고 

이렇게 묶고 저렇게 나누어 가면서 

이 부분은 자신이고 

저 부분은 꽃이고 

저기 영희가 가고 있고 

이런 식으로 생각을 한 것이다. 


여기까지는 문제가 없다고 할 것인데 


그렇게 생각한 내용이 

감각현의에도 그처럼 그대로 있다고 

그 상호 관계를 이해할 때부터 

이들 재료를 가지고 

망상증상을 시작하게 된 것이다. 


그래서 

나중에는 실재의 문제까지 살펴야 하는데 

우선 이 부분부터 당장 주의해야 하는 것이다. 


쉬기로 했는데 

길어졌지만 

일단 문제로 진입해 들어가기 위해서 

쉬더라도 품위있게 쉬어야 한다고 보고 

연구과제를 남기고 쉬는 것이다. 






현실에서 얻는 감각현실과 관념분별을 

앞과 같이 구분한다고 할 때 

현실에서 문제삼게 되는 주된 재료를 

확보했다고 할 수 있다. 


현실에서 얻고 문제삼는 내용 대부분이  

이런 내용이기 때문이다. 


생각해보면 어떤 이가 

커피를 맛보면서 

그것이 맛있는 커피라고 생각하고 마실 때 


자신이 대하는 감각현실이 

그 상황에서 생각하는 커피라는 '관념분별' 자체는 아니라고 해도 


그런 감각현실을 얻고 

그에 대해 그런 생각을 하며 살아가는 것이 

무슨 큰 문제가 있는가. 


살아서 어떤 희망을 갖고 

그것을 실현해가며 살아가는 과정도 이와 마찬가지다. 


관념분별로서 

'만일 자신이 좋다고 보는 어떤 것이 있다면 좋을텐데..' 

라고 생각하며 

그런 것을 얻고자 하는 희망을 갖고 


그에 해당한다고 보는 감각현실을 얻기를 구하고 


그런 감각현실이 얻어지면 

이를 대하여 관념분별을 하여 

희망이 성취되었다고 좋아하고 

그렇지 않으면 성취되지 않았다고 하면서 

살아가는 것인데 

여기에 무슨 문제가 있는가. 


사실 자기자신의 정체나 

삶의 기간을 이렇게 한정하면 


태어나서 사는 동안 

그렇게 감각현실을 얻고 

그렇게 관념분별을 행하면서 

살다가 죽음을 맞이하는 것이기에 

이런 감각현실과 관념분별을 그대로 기준으로 잡고 

설령 이에 집착을 갖고 추구한다고 해도 

여기에 어떤 문제가 있는가 

이렇게 의문을 가질 수 있다고 본다. 



이렇게 단순하게 보면 

삶에서 문제란, 


단순히 자신이 원하는 희망을 

성취하는 과정에서 들이게 되는 고통이나 

그 뜻을 뜻대로 성취하지 못하는 경우 받는 고통 등이 

주된 문제라고 보게 된다. 



그리고 비록 각 생명이 

그렇게 살다가 병들고 죽음을 맞이해서 

그것이 자신에게 고통이나 두려움을 준다고 해도 

그것은 그 자신만 그런 것이 아니고 

그것은 어느 생명이 다 마찬가지가 아닌가. 

이렇게 생각하면서 


그런 가운데 

처음에 제기한 문제

즉 자신이 대하는 자신이나 꽃의 정체가 정확히 

무엇인가 하는 문제가 

왜 삶에서 중요한 문제가 된다고 하는 것인지 

파악하기 힘들게 된다고 본다. 



이 문제를 쉽게 생각해보려면 

다음을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고 본다. 


우선 어떤 이가 

하루 대부분을 잠을 자면서 꿈을 꾸는데 


꿈이 너무 길어서 

꿈 속에서 황금을 얻거나 잃거나 하면서 지냈다고 하자. 


그런데 이제 하루가 다 가기 직전에 깨어나서 

그것이 현실이 아니라 꿈이었음을 이해하는 경우를 

놓고 생각해보기로 하자. 


그런데 이 하루 동안 깨어 있는 기간보다 

꿈꾼 기간이 더 긴 것이다. 


그러니 꿈의 내용이 더 중요한가 

현실에서 대한 내용이 더 중요한가 

이것을 놓고 따진다면 

무엇이라고 보아야 하는가. 


일반적으로 꿈을 꾸는 시간이 짧고 

현실을 대하는 시간이 길어서 

꿈은 실답지 않고 

현실은 꿈과 달리 실답다고 여기게 되는 것이다. 


그런데 앞의 경우에서는 

꿈을 꾼 시간이 더 길고 

현실은 이 보다 더 짧은 것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되는가를 생각해보자는 의미다. 


그 경우는 오히려 

현실보다는 꿈을 더 실다운 것으로 대해야 할 것이다. 


그래서 이렇게 입장이 뒤 바뀐 경우의 문제를 

여기서 잠깐 생각해보아야 할 것이다. 



현재 현실에서 대하는 감각현실이나 

관념분별이 하나같이 실답지 않다고 하고 

실재의 내용이 아니라고 제시하는 것인데 


그러나 만일 어떤 주체가 

현실에서 대하는 형태로 

무한하게 감각을 얻게 되고 

관념분별을 행하게 된다면 

설령 이것이 실재가 아니고 실답다고 하지 않다고 하더라도 

그것을 굳이 문제삼을 이유가 없을 것처럼 여겨진다. 


왜냐하면 현재 뒤바뀌어 감각현실을 얻고 

망상분별을 하더라도 

이 내용이 기준이 되어 무한히 지내고 

그런 내용이 적용이 되지 않는 경우란 

아주 희귀한 짧은 시간에 한정된다면 

굳이 그것을 문제삼을 필요가 없다고 볼 수도 있는 것이다. 



그래서 사람이 삶을 살아가는데 있어서 

자신이 이런 형태로 살아갈 대략 100 년 정도의 기간을 

자신이 살아가는 시간의 전체 기간이라고 보고 

대한다면 

그 100 년간 얻게 되는 그런 감각현실과 

그에 대해 생각하게 되는 분별을 

그대로 기준으로 잡고 

그냥 사는 것도 큰 문제가 없다고 할 수도 있다. 



이것은 다시 말하면 

반대로 그 100 년 동안 

현실과는 전혀 관계없이 

계속 꿈만 꾸면서 지내는 상태라면 

이 경우는 오히려 현실에서 얻는 감각이나 관념보다도 

꿈에서 얻는 내용을 모두 기준으로 잡고 

사는 것이 더 적절하다고 해야 할 것이다. 


심지어 살아가는 100 년간 

어떤 이가 최면술사의 최면에 빠져 

그런 최면에 계속 젖어지낸다고 하는 경우도 

또 사정이 마찬가지일 것이다. 

최면에 의해 매번 양파를 대하면서 

그것이 딸기나 사과라고 여기면서 

먹고 지낸다고 하더라도 

그것을 문제삼을 이유가 별로 없다고 보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이렇게 

처음부터 자신의 정체나 

자신이 살아가는 기간을 닫혀서 뒤집혀 생각하고 

대하는 전제에서는 


자신이 살아가는 동안 

얻게 되는 감각현실과 

그에 대해 생각하는 관념분별이 

실답다고 하던 실답다지 않다고 하던 

그것이 무슨 문제가 된다고 하는 것인가를 

굳이 따질 필요가 없다고 보게 되기 쉽다. 


설령 실답지 않고 실재가 아니라고 해도 

자신이 살아가는 이상 

그런 감각현실을 얻고 

그런 관념분별을 행하면서 살아가는 것이 아닌가. 


그러니 실답지 않다고 해도 

그런 전제에서는 그것을 기준으로 잡고 

살아가는 것이 마땅하다고 보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이 논의는 

본인이 실수한 것임을 솔직히 인정하고 

이만 마치고 


현실에서 얻는 감각현실과 

관념분별이 

비록 실답지 않고 

거꾸로 뒤집혀진 전도망상인 것은 사실이지만, 

더 이상 문제삼지 않기로 하고 

논의를 마치기로 한다. 


만일 이렇게 마친다면 

얼마나 안정적인가. 


그런데 사정이 그렇지 않은 것이다. 


이해를 하기 위해 다음 비유를 들어 보자. 

 

10 억년 가운데 

1 억년의 기간을 놓고 생각해보자. 

10 억년을 직선으로 표시해 놓고 

1 억년을 살필 때 

1 억년은 

1 년쪽에 가까운가. 

10 억년 쪽에 가까운가. 

이런 문제를 일단 놓고 풀어보자. 


1년 < -  - - - - - - - - ->10 억년 

여기에 1 억년은 어느 쪽에 가깝게 표시해야 하는가. 

이런 문제다. 


그래서 앞의 문제를 다시 여기에 

놓고 풀어 보는 것이다. 


1 억년을 꿈을 꾸고 

9 억년 동안은 현실을 대해야 한다면 

무엇을 기준으로 잡고 보내는 것이 

적절한가. 


이렇게 문제가 다시 제기될 수 있는 것이다. 


그런데 숫자나 단위가 다시 바뀌게 될 수도 있는 것이다. 


100 억년은 

1 년과 1000 억년 사이에서 어느 쪽에 가까운가 


또는 

1 겁은 

1 년과 1000 억 겁 사이에서 어느 쪽에 가까운가. 

이런 문제도 같은 문제다. 


그래서 현재 자신의 감각기관을 통해 

얻는 감각현실과 관념분별을 유지하는 

100 년만 놓고 생각하면 

그것을 그대로 기준으로 잡고 

임해도 큰 문제가 없다고 보게 되는데 


그런데 

무한한 시간동안에도 

역시 여전히  

계속 현재 자신이 갖는 감관을 통해 

그런 감각현실을 게속 얻게 된다고 한다면 

또 마찬가지일 것이다. 


그러나 그것이 사정이 그렇지 않다면 

어떻게 되는가를 그 때부터 

고민을 해보아야 하는 것이 된다. 



그래서 이런 입장일 때 

비로소 

자신이 살아 있는 동안은 

계속해서 그처럼 얻게 되리라고 보는 

감각현실이나 

자신이 그에 대해 생각하는 관념분별이 

과연 실다운 것인가를 따질 필요가 있게 된다고 

보게 된다. 


그렇지 않으면 

그것은 별로 논의할 실익이 없는 문제가 되는 것이다. 



그런데 알고보니 

처음에 자신이나 자신의 삶의 기간 부터가 

잘못 뒤집힌 상태에서 

생각한 것이었다는 것이 문제가 되는 것이다. 



이미 본 연구실에 인턴연구원이 

오래전에 갑자기 행방불명되어 사라진 사건을 

언급했는데 

이 문제가 다시 여기에 제기되는 것이다. 


어떻게 기준을 잡으면 

그 인턴연구원은 이제 세상에 존재하지 않기에 

무시해야 하는데 


그러나 또 한편 계속 그 연장선에서 

무언가를 고려해야 한다는 요구도 있는 것이다. 


그런데 왜 그렇게 되는가를 

먼저 잘 살피는 가운데 

자신이 자신에 대해 생각하는 내용부터 

다시 재검토를 해야 하는 문제가 제기되는 것이다. 



처음 눈을 떠 모습을 얻을 때 

그 모습은 한꺼번에 그렇게 얻은 것이다. 


그런데 이상하게 

그 가운데 일정부분은 자신이라고 보고 

나머지는 외부 세계라고 보았던 것이다. 


그리고 살아가는 동안 

그 부분을 계속 자신이라고 여기면서 

살아온 것이다. 


그리고 큰 불편이 없이 살아왔고 

그리고 앞에서 논의한 것도 

바로 이런 자신이 존속하는 기간을 

고려한 것이다. 


그리고 이런 자신이 

얻는 감각현실과 관념분별을 기준으로 

잡고 계속 살아가는 것인데 


앞에서 살핀 것처럼 그렇게만 보면 

그렇게 계속 임한다고 해도 

별 문제가 없다고 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런데 이렇게 임하는 것이 

잠깐 낮에 잠자면서 꾼 꿈의 내용을 

모든 것의 기준으로 잡고 

나머지 무량겁동안 대하게 될 세계에서 

그처럼 엉터리로 살아가려고 하는 것과 같다고 

누가 문제를 제기한다면 어떡하겠는가. 



그래서 이 문제를 그렇게 단순하게 대할 도리가 

없는 것이다. 

그리고 처음부터 

자신이 자신이라고 본 내용부터 붙잡고 

그 정확한 정체를 확인하는 일부터 

다시 시작할 필요가 제기되는 것이다. 


그런데 사실 

이 문제는 본 논의에서 

처음 제기한 문제와 모두 성격이 같다. 


눈을 뜨니 세상 모습이 보이고 

눈을 감으니 그 모습이 사라진다. 


이 가운데 어떤 것이 과연 진정한 내용인가. 


또 그런 가운데 

손을 부딪히니 소리가 나고 촉감도 느껴지는데 

이것이 왜 그런가. 

소리의 정체는 손인가. 


이런 문제와 모두 다 함께 관련이 된다는 의미다. 




그러나 이미 글이 길어서 

여기서 일단 마치기로 한다. 


자신이 현재 대하는 감각현실과 관념분별이 

온 세계에서 무량한 겁동안 

절대적인 기준이 된다고 보는 경우도 있는데 

이런 경우는 

일단 조금 쉬면서 

다시 점검할 기회가 필요가 있다고 보기 때문이다. 



[...]

좁고 짧고 앝게 관찰하는 협단천 방식에 의하면 

봄에 아무리 밭에 씨를 뿌려도 

그로부터 어떤 다른 차이를 볼 수 없다는 

주장이 옳다고 보게 된다. 


몇 주일이나 며칠만 살다가거나 

한철만 살다가 가는 세균이나 하루살이 기타 곤충의 

입장에서 보면 

자신이 대하는 내용이 전부라고 보고 

그것을 기준으로 살아가는 것을 탓하기 곤란하다. 


그 입장에서는 그것 외에 다른 것을 

고려할 필요가 없다고 보기 때문이다. 


씨를 뿌렸는데 사는 동안 

그로부터 싹 하나 돋는 것을 보지 못한다. 

그 기간만 고려하면 그것이 잘못된 판단이라고 하는 것은 

큰 의미를 갖지 못하는 것이다. 


그래서 가을에 열매를 맺기 위해 

봄철 내내 씨뿌리고 물주고 하면서 

농부가 애쓰는 것을 이해하기 힘든 것이다. 


그런데 미륵보살님은 56 억 년 후에야 

하산을 해서 중생을 제도한다고 하고 

그러기 위해서 지금도 노력 중이라는 것이다. 


당장 100 년만 헤아려도 

장차 무슨 일이 있을지 

어떻게 살아가야 할 지 

잘 예측이 안 되는데 

그런 이야기가 귀에 들어오는가. 

현실적으로 너무 지나친 것 아닌가. 

이렇게 보게 된다. 


그런데 사실은 56 억년은 

상상하기도 힘들정도로 

짧은 시간이라는 입장도 있는 것이다. 


수행자가 보리심을 일으키고 

보통 3 무량 아승기겁을 수행을 행하여 

성취를 한다거나 


처음 수행을 한 지 지금까지 

삼천 진점겁의 시간이 지났다고 제시되는 

법화경의 화성유품과 같은 내용들을 놓고 보면 

그렇다는 것이다. 


그래서 조금 이 문제를 다양한 시각에서 

접근할 필요가 있다고 본다. 


장자가 나비 꿈을 꾸다가 깨고 나서 

나비가 장자가 된 것인가. 

장자가 잠시 나비 꿈을 꾸다가 깬 것인가. 

이런 이야기를 했다고 전하는데 

꿈을 하루 종일 꾸고 나서 깨고 한 순간 정도만 지난 기간만 놓고 본다면 

무엇을 더 실답고 무엇을 더 실답지 않다고 보아야 하는가. 


그런데 이런 비유적 상황은 

현실을 놓고도 똑같은 형태로 문제가 되는 것이다. 



지금부터 논의하게 되는 

내용은 그래서 

만일 현재 현실에서 자신이 고려하는 

삶만 놓고 

그리고 그 동안 얻는 감각현실과 

현실에서 행하는 분별만 고려하는 입장에서는 

그다지 고려할 필요가 없다고 보는 문제로 

생각되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넓고 길고 깊게 관찰하고 

자신과 세계를 대할 경우는 

이 문제가 대단히 중요한 문제가 된다고 보는 것이다. 



글이 길어서 산만하다고 볼 수 있으므로 

대강 앞으로 논의할 내용을 

주제만 나열하고 쉬기로 한다. 


○ 자신의 정신(마음)이 얻는 세계와 자신의 모습과 - 자신의 정신의 관계 


○ 자신이 본 내용의 정체는 무엇인가. 


자신이 얻은 감각현실을 얻게 한 대상은 

그 감각현실 그 자체인가. 


- 눈을 떠 꽃이나 자신의 모습을 보았다면 

이는 그 꽃 모습을 대상으로 그 꽃모습을 얻은 것인가. 

그렇지 않다면 그런 감각현실을 얻게 한 대상은 무엇인가. 


- 자신이 손을 부딪혀 소리를 들었다면 

귀로 들은 그 소리는 그 소리를 대상으로 그 소리를 얻은 것인가. 

이것도 비슷한 성격의 문제다. 


○ 자신이 눈을 떠 어떤 모습을 얻고 

눈을 감으면 그 모습을 얻지 못한다고 할 때 

눈을 감으면 직전에 본 그 모습은 전혀 없게 되는 것인가. 

 

아니면 , 

자신이 눈으로 대하거나 대하지 않거나 그에 관계없이 

그대로 실재한다고 할 내용이 따로 있다고 할 것인가. 

만일 있다면 그 내용은 무엇인가. 



○ 자신이 관계하던 않던 실재한다고 할 실재의 내용은 

자신이 눈을 떠 본 모습과는 어떤 관계인가. 


- 자신이 본 모습이 곧 그런 실재의 내용 그 자체인가. 

- 아니면 자신의 본 모습은 자신이 눈을 뜨는 상황에서 얻는 내용으로서 

그런 실재의 지위에 있는 것은 아니라고 할 것인가. 


만일 자신이 눈을 떠 본 모습이 곧 실재의 내용이 아니라면 

실재의 내용은 

자신이 눈을 떠 얻은 모습과는 어떤 관계에 있는가. 


- 자신이 눈을 떠 본 모습과 그대로 일치하는 내용인가. 

- 일치하지는 않지만, 그와 유사하거나 비례하는 어떤 내용인가. 

- 실재하는 내용은 전혀 아무 것도 없는 것인가. 

- 아무 것도 없는 것은 아니지만, 

단지 그것을 얻지 못하기에 

있다 없다 이다 아니다 ~와 같다 ~와 다르다 등으로 

분별을 행할 수 없다고 할 것인가. 



○ 실재나 감각현실, 관념분별의 내용들 안에 

그런 내용을 나타나게 하는 

진짜라고 할 영원불변하고 고정된 뼈대와 같은 본체(실체)가 

있다고 할 것인가. 


즉 일정한 조건에서 얻는 꿈이나 

눈을 뜨는 상황에서만 얻게 되는 감각현실이나 

자신이 생각을 하는 상황에서만 일으켜 얻는 관념분별이 


모두 그 성격이 그런 조건에서만 임시적으로 화합을 통해 얻는 것으로서 

하나같이 꿈처럼 실답지 않은 성격을 갖는다면 


그처럼 꿈과 같이 실답지 않은 내용에는 

그런 내용을 나타나게 하는 

진짜의 내용

즉, 꿈과는 달리 그런 조건과 관계없이 

어떤 상황에서도 늘 변하지 않고 고정된 진짜의 내용이 있는 것인가. 

그리고 그런 내용들은 이런 진짜의 내용을 기초로 나타나는 것인가. 



○ 현실에서 이런 감각현실이나 관념분별을 얻는 정신은 

어떤 형태로 생성되고 유지되는 것인가. 


정신(마음)이 얻는 감각현실과 

그런 내용을 얻는 정신(마음) 가운데에서 

무엇을 자신의 주체라고 보는 것이 적절한가. 


예를 들어 자신의 정신이 자신의 모습을 얻어 본다면 

그렇게 얻은 자신의 모습과 

그런 모습을 얻은 정신 사이에 어떤 것을 

진정한 자신이라고 보는 것이 적절한가. 


이 문제는 비유한다면 

카메라가 자신의 모습과 카메라를 받치고 있는 삼각대 일부를 

카메라 모니터에 찍어 비추이고 있다면 

이 경우 

모니터에 비추인 카메라모습이 카메라인가. 

아니면 그런 모습을 비추인 카메라가 카메라인가

이런 비유와 같다. 



○ 그런 가운데 

자신이 눈을 떠 보는 모습 가운데 

일부는 자신이라고 생각하고 

그 나머지는 자신이 아니라고 생각하게 되는 근거는 무엇인가. 


이 부분이나 저 부분이나 똑같이 

자신이 눈을 뜨는 순간 얻게 된 모습이라는 것은 같은데 

왜 이 부분은 자신의 모습이고 

나머지는 세계의 모습이라고 생각하게 되는가. 


그 근거는 무엇이고 

그렇게 그 부분을 자신이라고 보는 근거는 정당한가. 


상-락-아-정 (常-樂-我-淨)



상 - 늘 눈을 대할 때마다 자신의 몸 부분은 늘 얻는데 나머지는 매번 달라진다. 

그래서 늘 얻는 그런 부부은 자신이고 

매번 변화한다고 보는 부분은 손님과 같은 것이다. 


락 - 내가 내 몸으로 보는 부분은 내가 뜻을 가지고 움직이고 이동하고자 하면 

그대로 움직이고 이동한다. 

그러나 나머지는 그와는 조금 성격이 다르다. 

그래서 내 뜻대로 되어 내게 즐거움을 주는 부분은 나의 몸이라고 보는 부분이다. 


아 - 내가 내 몸이라고 보는 부분은 감각을 하고 판단을 하는 

정신이 위치한 주관이고 다른 부분은 그 주관이 대하는 대상에 해당하는 부분이다. 

그래서 이 몸 부분은 나이다. 


그래서 나란, 이런 주관이 위치한 색과 그 색에 위치하는 정신과 

정신작용들 - 수- 상- 행 - 식 을 합쳐서 나라고 하는 것이다. 


정 - 그래서 이 나라고 하는 부분은 좋고 깨끗한 것이다. 그래서 이 부분에 대해 

집착을 갖고 대할 만하다. 


대강 이런 근거를 통해서 

자신이 '자신이라고 보는 부분'을 자신이라고 여기게 된다고 이해할 수 있다. 


그런데 과연 이들 근거는 적절한가. 


그러나 만일 현실에서 자신이라고 보는 이런 부분이 자신이 아니라면

수행자가 무량한 기간 수행을 행한다고 할 때 

무엇을 수행자로 보고 수행을 하는 것이고 

또 그것은 왜 앞과 달리 상락아정(常樂我淨)의 상태라고 제시하게 되는가. 


그리고 그것은 원래 

일체가 무상하고 고이며 무아 무자성이고 부정하다고 보는 기본 입장과는 

어떻게 되는가. 


등등의 논의를 이어나갈 필요가 있다고 본다. 



대강 이들 논의는 


문제삼고 찾는 실재를 살필 때 

그 실재는 

현실에서 일정한 관계에서 화합관계로만 감각현실을 얻고 

관념분별을 행하는 

일정한 주체는 본래 얻을 수 없는 것임을 밝히고 


반대로 그렇게 한 주체가 얻는 감각현실이나 관념분별 내용은 

또 그런 관계를 떠나서 그대로 실재한다고 할 실재 내용의 지위에 있는 것은 

아니라고 제시하게 된다. 


그래서 이런 실재를 놓고 

그 실재 자체가 곧 현실에서 얻는 감각현실이나 관념인가를 물을 때 

그렇지 않다라고 제시하고 


또 한편 그런 실재를 떠나서 그런 감각현실이나 관념을 얻는가를 물을 때에도 

그렇지 않다라고 제시하게 된다. 


그리고 실재는 전혀 아무 것도 없는 것은 아니라고 할 것이지만, 

그러나 앞과 같은 일정한 관게에서만 내용을 얻는 주체는 

끝내 그 내용을 직접 얻지 못하고 

있다 없다. ~이다 ~ 아니다 ~와 같다 ~와 다르다 깨끗하다 더럽다 등의 

일체 이분법적인 분별을 행할 수 없고 

언어로 표현할 길이 없는 것이어서 공하다고 표현하여 제시한다.



이것이 찾고자 하는 실재의 내용을 놓고 

현실에서 얻는 감각현실과 관념분별의 관계를 제시하는 

내용이라고 할 수 있다. 


즉 현실에서 무언가 모습을 얻고 

그것을 a 라고 생각하고 표현할 때 

그것들의 실재는 공하다. 

그리고 그런 a 나 그 감각현실은 그 실재의 지위에 있는 내용이 아니다. 


그러나 그런 내용들은 그런 실재를 떠나서 얻는 것도 아니다. 

그런 내용은 그런 실재를 떠나 있는 것은 아니기 때문에 

그런 사정으로 


그런 감각현실은 곧 실재와 다르지 않고 

실재는 감각현실과 다르지 않으며

그런 의미에서 감각현실은 곧 실재이며 

실재는 곧 감각현실이라고 볼 수 있지만, 


그러나 실재에 그런 감각현실이나 관념이 그대로 있다고 할 수는 없다. 


이렇게 이들 상호 관계를 제시하게 된다. 


이는 반야심경에서 


색불이공 공불이색 색즉시공 공즉시색 수상행식역부여시 

..

공중 무색 무수상행식. 


이런 구절이 의미하는 내용과 관련된다. 




그런데 이런 입장과 달리 

현실에서 얻고 관념분별을 행한 내용을 

실재의 내용이라고 주장할 때는 


다시 이미 앞에서 제시한 가정적 항변의 방식을 사용하여 


만일 그렇다고 주장한다면 

어떤 문제가 발생하는가를 

다음과 같은 다양한 형식을 통해 비판을 행하게 된다. 



- 상대가 주장하는 그런 명칭이나 관념분별 내용이나 추론 체계나  형식을 그대로 다 받아들인다고 할 때 


그런 가운데 상대의 주장을 전제로 하면 

스스로 자신이 주장한 내용과 일치하지 않고 모순되는 내용이 필연적으로 

도출된다고 비판하거나, 


상대의 주장을 전제로 할 때 

생각할 수 있는 경우수를 모두 나열해서 살펴보면 

그 각 경우가 다 앞과 같은 형태로 문제가 발생함을 제시하여 비판하거나 



여기서 문제삼는 실재의 내용이란 어떤 것과의 관계를 통해서 얻어지는 것이 아니고 

자체적으로 실재한다고 할 내용인데 

상대가 주장하는 내용은 어떤 다른 것과의 관게를 전제로 하지 않으면 

그것을 세우고 주장할 수 없는 내용이라는 점을 제시해 비판하거나, 


상대가 주장하는 내용은 

감각현실이나 현실에서 얻는 다른 내용에 대해서도 

그것이 적용될 수 없음을 지적함으로써 

사정이 이러한데 어떻게 내용을 얻지 못하는 실재에 적용될 수 있다고 할 것인가라고 

비판하는 방식들을 생각할 수 있다. 


이는 현실적으로 

감각현실을 바탕으로 어떤 관념을 갖게 될 때 

자신이 얻는 감각현실에서도 그런 관념에 해당한 내용을 얻어낼 수 없는데 

어떻게 내용을 얻지 못하는 실재에 그런 내용이 있다고 하겠는가 

이런 비판이라고 할 수 있다. 





다만 이미 앞에서 본 것과 같이 

논의의 초점으로 하는 실재 자체는 

직접 그 내용을 얻을 수 없으므로 

직접 실재의 내용을 얻어 이를 제출하여 

상대의 주장이 잘못이라고 밝힐 도리는 본래 없다. 


그리고 그런 입장에서는 

또 실재가 상대가 주장하는 것과 달리 

이다 아니다 그 어느 형태로 

이러이러하다 또는 이러이러하지 않다라고 

단정해 제시하고자 하는 입장은 아니다. 


다만 상대가 그 가운데 어떤 입장으로든 단정적으로 자신의 

주장이 옳다고 제시할 때 

그렇게 볼 수 없는 근거만 제시하고 비판을 하는 입장일 뿐인 것이다. 

 


그런데 이처럼 상대의 주장을 받아들인 다음 

그것을 귀류논증식을 통해 비판하고자 할 때 


일반적인 귀류논증과 

이 경우가 혼동을 일으킬 여지가 있다. 

그래서 이 문제도 함께 살펴야 한다고 본다. 


상대가  a 이다라고 주장할 때 


만일 그렇다면 그로 인해 -- 상대 주장과 모순되는 b 라는 결론이 도출된다. 

그래서 문제가 된다. 


이렇게 귀류논증을 행하면 


우선 그렇게 문제가 발생하는 원인이 무언가를 찾을 때 


1 비판자가 엉터리 추론을 해서 그렇다. 

1 추론이 옳다면, 비판자가 사용한 추론체계가 엉터리다. 

1 추론체계가 옳다면, 비판자가 그런 전제에서 그런 이상한 결론이 필연적으로 도출된다고 본 관계가 잘못이다. 

1 그런 전제에서 그런 결론이 필연적으로 도출되는 것이 옳다면, => 그런 결론이 도출되게 한 처음 상대의 주장이 잘못이다. 

1 상대의 주장이 잘못이라면, => 상대의 주장이 잘못임과 함께 반대로 '그 주장과 모순되는 주장'을 간접적으로 참이라고 밝힌 것이다. 




이렇게 보게 된다. 


그런데 일반적으로 귀류논증식을 이해하면 

상대의 주장이 잘못이라고 비판하고자 하는 이런 내용을 놓고 

동시에 위 에서 앞 부분에 제시한 내용들고 함께 제시한 것으로 이해하기 쉽다. 


즉 

1 비판자가 귀류논증 과정에서 행한 그런 관념과 추론만은 옳다. 

1 추론에 사용한 추론체계도 옳다. 

1 그런 전제에서 그런 (모순되는) 결론이 필연적으로 도출되는 관계도 옳다. 

1 '상대의 주장이 잘못이다'는 것은 참이다. 

1 그리고 상대의 주장과 '모순되는 주장'이 참임을 이를 통해 간접적으로 제시하는 것이다. 


이런 내용들을 동시에 간접적으로 제시한 것이라고 오해하기 쉬운 것이다. 

그리고 그렇지 않다면 

반대로 상대의 주장을 잘못이라고 비판할 수도 없다고 이해하는 것이다. 



그런데 그렇게 보게 되면 

실재가 공하다는 입장에서 위처럼 비판을 하는 것은 

위와 같은 내용을 통해 

스스로 실재가 공하다고 한 입장과는 자체적으로 모순되는 내용을 

실질적으로 제시한 것처럼 되고 

따라서 이런 비판으로 스스로 실재가 공하지 않다는 사정을 

제시한 것처럼 오해하기 쉽게 된다 


왜냐하면 위와 같은 내용이 실재에서 그처럼 성립하는 것이라면 

그것은 곧 실재가 공하지 않다고 하는 것이 되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렇다고 

위와 같이 비판과정에서 제시한 내용들이 성립하지 않는다고 한다면 

위와 같은 내용들로 상대가 주장한 내용을 잘못이라고 비판할 도리도 

역시 없다고 보게 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렇게 비판하는 입장에 대해 

자신의 전도망상분별을 바탕으로 거꾸로 재비판하게 되기 쉽다. 



그러나 여기서 이 비판을 

그렇게 오해하면 곤란하다고 보는 것은 

다음 사정 때문이다. 


여기서 비판자는 

상대의 주장이 옳지 않다고 원칙적으로 보지만, 


그러나, 상대의 주장이나 추론 체계가 

상대의 주장을 모두 '옳다고 받아들인다면', 

그런 바탕에서 그런 문제가 나타난다고 

가정적 항변방식을 사용한 것 뿐이고 


비판자가 이를 통해 앞과 같은 내용을 제시하기 위해

그런 비판을 한 것은 아니라고 밝히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일반적인 입장에서 

무언가를 간접적으로 증명하기 위해 

사용하는 귀류논증과

이 경우는 차이가 있다고 하는 것이다. 


즉 위 비판에서 '이것은 a 이다'라고 상대가 주장할 때 

이를 귀류논증식으로 부정하는 것은 

비판자가 상대 주장이 문제가 있음을 지적한 것일 뿐이고 

비판자가 이를 통해 

'이것은 a 아닌 것이다' 이런 내용을 

반대로 제시하기 위해 그런 비판을 한 것이 아닌 것이다. 


그래서 이런 부분에서 

주의를 해야 한다고 보게 된다. 



여하튼 이런 추론과정은 


본래 어떤 a 나 관계 자체를 실재한다고 보지 않는 입장에서는 

자체적으로 제시할 도리가 없다고 보게 되지만, 

상대방이 그런 주장을 할 때는 

그것을 받아들여 그 안에서 자체적으로 문제가 발생한다고 

비판하는 내용이 된다. 


이와 함께 

실재의 영역에서나 

감각현실이나 관념 분별이나 

또는 별도의 다른 영역에서라도 


진짜라고 할 영원불변한 본체는 없다고 할 것인가. 

그것이 없다는 것은 무엇을 근거로 제시할 수 있는가. 


이런 문제도 위와 같은 추론과 함께 

살펴야 할 문제라고 본다. 


다만 이 경우도 설령 그런 것이 있다고 받아들여도 

현실에서 변화를 바탕으로 무언가를 행하고 

추구하는 입장에서는 

정작 그는 그처럼 진짜라고 할 내용과 관계될 수 없고 

따라서 그런 것이 있다고 해도 그에게는 그로 인해 얻을 실익이 없기에 

큰 문제는 되지 않는다고 보게 된다. 


이미 일정한 조건에서 화합해 감각을 하고 

관념분별을 행하고 

생멸하는 변화를 통해 무언가를 성취한다고 보는 입장에서는 

그렇게 추구하고 성취하게 되는 내용은 

그 자체가 변화함을 제시한 것이어서 

그 자체로서 이를 영원하고 불변하고 고정된 어떤 

진짜의 내용이라고 할 수 없는 것이다. 


그러니 처음부터 논의 실익이 별로 없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어떤 것이 그처럼 영원불변하고 고정된 어떤 것이 아니라면 

결국 그것은 

역시 꿈과 같이 일정한 조건에서만 얻게 되는 

실답지 않는 내용이라는 점에서는 

그 성격이 질적으로 차이가 없다는 것이 된다. 



그런 가운데 

삶에서 문제삼게 되는 생사 고통이 

진짜라고 할 내용으로 있는가를 문제삼고


또 이들 생사고통은 앞에서 살핀 

실재나 감각현실이나 관념분별의 영역에서 

각기 '얻을 수 있는가.' 


그리고 생사고통은  

'실답게 있다'고 보아야 하는가를 

다시 문제삼아야 한다. 



결국 삶에서 문제삼는 생사고통은 

진짜라고 할 내용이 없는 것이며(무아, 무자성) 

사정이 그렇지 않음을 제시하게 되는 것이다. 




우선 

실재와 감각현실의 관계를 살필 때, 

실재 자체가 문제삼는 감각현실인가라고 문제를 제기할 때 

그렇지 않다라는 것은 


결국 실재가 전혀 없는 것은 아니지만, 

그러나 실재가 곧 감각현실 그 자체는 아니라는 것을 의미한다. 



이는 실재와 관념분별과의 관계도 마찬가지다. 


그래서 현실에서 생사고통을 문제삼을 때 

실재에서는 일단 현실에서 얻고 문제삼는 그런 것을 얻을 수 없고 

일단 그런 것이 아닌 것이라고 보게 되는 것이고 

그래서 실재는 현실에서 문제삼는 그런 생사고통이 아닌 '그 무엇'인 것이다. 


그래서 위와 같은 사정으로 상대적으로 

실재를 청정한 니르바나라고 표현하게 된다. 




그리고 나머지 영역도 

또 이와 같은 입장에서 

그 안에서 실다운 생사고통을 얻을 수 있는 것인가를 

검토해 나가야 한다고 본다. 



처음에는 이들 내용을 놓고 

생사 고통의 문제를 놓고 문제삼을 때는 

그 내용이 각 영역에 '그처럼 있다고 망상분별을 일으켜' 

이들을 대하는 가운데 그것이 모두 문제가 된 것이라고 한다면 


그런 망상분별과 집착을 떠나서 

이들 각각을 자세하게 살피면 

사정이 그렇지 않음을 여기서 제시하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처음에는 

생사고통현실로 제시한 내용들은 

본래 그런 생사고통을 얻을 수 없고 

생멸을 떠난 니르바나라고 제시되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이를 생사 즉 열반 이라고 표현하는 것이기도 하다. 



그런데 사정이 이렇지만, 

그런 현실을 망상분별과 집착을 갖고 대하는 입장에서는 

이를 뒤바꿔 

본래 청정한 니르바나의 현실을 놓고 

생사고통으로 대하게 된다고 할 수 있는 것이다. 


그래서 이것이 문제가 되므로 

망상분별과 집착을 제거하고  

반야바라밀다를 닦아 

실상과 현실을 올바로 꿰뚫어 관해야 

그런 생사고통을 벗어나게 된다고 제시하는 사정이 있다고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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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속 복잡하게 살펴나가면 

너무 산만하고 

과거에 제시한 내용을 또 다시 되풀이하게 된다고 보고 

각 부분의 골격이 되는 내용을 뽑아 

위와 같이 미리 제시하였다. 



과거에 이미 제시한 내용은  

되도록 중복을 피해 

과거 내용을 복사해 붙이거나 인용처리하기로 하고 


보충이 필요하다고 보는 부분이나 

구체적으로 상세한 내용을 

이후 더 살펴나가기로 한다.  







>>>

손을 마주 치면 소리가 나는 문제를 살폈다. 

그리고 그 소리를 손에 있었다고 찾거나 
또는 귀로 들은 소리는 소리에서 얻었다는 등으로 
망상을 일으키는 문제를 살폈다. 

이는 눈을 뜨면 자신과 세상의 모습이 보이고 
눈을 감으면 그 모습이 모두 사라지는 문제와 함께 

세계 10 대 불가사의한 문제이기도 하다고 소개했는데 
그런데 이 논의가 

자신이 현실에서 받는 고통과 
장차 받게 될 고통에서 벗어나게 하는 

공 무상 무원무작해탈문을 여는 열쇠를 
제공해주기에 의미가 있다고 
제시한 것이다. 

그런데 그와 관련된 논의를 하면서 
정작 왜 손을 마주치면 소리가 난다고 이해하는 것이 
망상인가는 설명을 빠뜨리고 넘어 온 것 같다. 

사실 이 주제를 반복했다고 보는데 
간단히 그 상황을 이해할 수 있는 그림만 
붙이고 넘어가기로 한다. 

08pfl--image/진리의오류55.jpg 
[img2-02] [그림] 08pfl--image/진리의오류55.jpg 
http://buddhism007.tistory.com/228 ☞○ 마음과 색의 의미에 관한 논의 
http://thegood007.tistory.com/1172 ☞○ 진리에 관한 수많은 오류와 착각의 문제 
03fl--ghpt/r1030.htm ☞○ 진리에 관한 수많은 오류와 착각의 문제 



1 이 눈을 떠서 세상을 보게 될 때
상황을 대강 그린 것이다. 

그 상황에서 1 이 2 가 무언가를 보는 과정을 
옆에서 관찰한 내용을 위처럼 나타낸 것이다. 

그래서 1 이 상상하고 추리하기를 
2 과 보는 내용은 2 의 몸 안에 
5^ 처럼 맺힐 것이라고 추리하고 
저렇게 그려 넣은 것이다. 

이것이 엉터리 추리이기는 한데 
일단 1 의 상황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되는 것이다. 


왜냐하면 저렇게 2 의 상황을 놓고 추리한다면 
이를 통해서 

1 이 눈을 떠서 보는 5 의 내용의 의미도 
쉽게 이해할 수도 있다고 보는 것이다. 

결국 2 의 상황은 1의 상황이기도 한 것이다. 


그러니 여기에서 
자신이 4 라는 꽃을 대상으로 그 모습을 보게 되었다고 
생각한다거나, 

자신이 손을 마추치면 
그 손 때문에 소리가 난다고 이해하는 것이 
어디에 문제가 있는가 
이것을 저 그림을 통해서 잘 이해할 필요가 있다고 보는 것이다 


그리고 심지어 1 이 

1 과 같은 부분을 평소에 
자신이라고 여기고 살아가면 
그로 인해 어떤 문제가 있게 되는가도 
함께 생각해야 하는 것이다. 


사실 이 논의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은 
이 부분이다. 


이 상황을 자신이 눈을 뜨고 대할 때는 
잘 확인하지 못하는데 

2 라는 사람을 옆에 놓고 
저런 그림과 같이 추리할 때는 
그 문제가 무엇인가를 쉽게 파악할 수 있다고 
보게 되는 ㄱ서이다. 


그런데 사실은 저 그림과 같이 
추리하는 것도 엉터리인 것이다. 

그래서 알고 보면 상당히 복잡한 문제이기도 한 것이다. 


그래서 평소 눈을 뜨고 감는 운동을 반복하면서 
제 정신을 잘 확보하면서 
실험을 잘해야 한다고 
강조하는데 
대부분 이것을 건너 뛰어서 
망상 해수욕장에서 망상의 바다 속으로 뛰어 들어가 버리는 것이다. 







>>>

손을 마주치면 소리가 난다. 

따라서 손을 마주치는 것은 원인이고 

소리가 나는 것은 결과라고 보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내용인데 

왜 이것을 계속 이어서 

망상증상이라고 제시하는가. 


그런데 왜 직접적인 내용은 제시를 하지 않고 

계속 주변 내용만 늘어 놓는가. 

이런 비판을 받고 있다. 


오래 전에도 이런 이야기를 제시했는데 

정작 왜 계속 이해가 안 된다고 하는지가 

문제이다.

[...]


이미 이 문제가 10 대 불가사의한 문제이고 

이 문제를 해결하지 못해서 

생사 고통에서 벗어나지 못한다고 제시하는데 


손을 마주쳐서 소리가 나고 안나고가 

무슨 생사고통과 관련이 되는가 

이렇게 생각하기 쉬운데 


그러나 그것이 바로 문제라는 것을 

이해하는 것이 필요하다. 



손을 부딪혀 소리가 나는 문제는 
달리 말하면 

자신의 손이 끊어지고 죽어가는 상황에도 적용되는 내용이기도 한 것이다. 


그래서 손에서 지극한 고통을 느끼고 죽음에 

이를 때 여기서 어떻게 생사를 벗어나는가. 

이 문제가 바로 이와 관련이 되는 것이다. 


그런데 그냥 평안하게 죽음을 맞이하고 

또 다음에도 이어지는 생이 있다면 

평안하게 좋은 곳에 태어나서 살아가면 될 것 아닌가. 



그렇다. 그래서 두번째 문제는 

그런 생사고통을 심하게 겪는 상태로 

들어가지 않는 방안을 또 알아내는 것도 

이와 관련된다. 


그런데 이 두 내용이 모두 

위 문제와 관련이 되는 것이다. 


노래를 듣다보니 

가수 하나가 개 되었다고 호소하는데 

노래부르는 여자 가수의 표정도 심상치 않다. 


또 노래에서 그 부처님의 가르침을 


도대체 어디에 쓰는가. 

한편으로 페암에 걸릴 우려를 표명하면서 

슬기롭게 놀아야 할 필요성을 

메시지를 전하는 것으로 듣게 된다. 



사실 한 개인이 가장 관심을 기울이는 것은 

자기자신과 자신의 것이다 .


즉 나와 나의 것에 대해 

관심과 집착을 기울이는 것이다. 


그래서 자신이라고 보는 부분이 죽어서 

없어져 버리는 것 

또 자신의 것이 없어지는 것을 놓고 

대단히 고통스럽게 여기고 

또 두려워하는 것이기도 하다. 


그래서 처음 

눈을 뜨면 세상의 모습이 보이는 것을 놓고 

그 정체를 잘 살펴야 한다고 제시한 것이다. 


그리고 왜 손을 마주치면 소리가 나는가의 

인과 문제도 잘 살펴야 한다고 제시한 것이다. 


눈을 뜨면 보이는 모습과 

손을 마주치면 소리가 나는 인과문제를 

살피는 것은 단순한 문제로 보게 되지만, 


그것이 곧 눈을 뜨면 보게 되는 

자신의 모습이나 자신의 것들과 관련되는 

문제이고 


어떻게 하면 생사고통을 극심하게 

받아나가게 되고 


어떻게 하면 생사고통에서 벗어나는가의 

문제와 바로 직결되는 것이다. 



이 내용은 


고통을 느끼는 상황에서 

곧바로 고통을 벗어나는 해탈문과 관련되기도 하고 


또 한편으로는 그런 생사고통을 

받지 않게 할 

수행과 그 수행으로 얻게 되는 수행결과의 관계도 

제시해주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것을 잘 살펴야 한다고 제시하는 것이다. 




그래서 처음 눈을 떠서 얻게 되는 

감각현실의 정지된 한 단면을 놓고 

일정한 부분을 꽃이라고 보고 

그 부분을 꽃이라고 생각할 때 

그 정체가 무엇인가부터 정확히 잘 이해해야 한다고 

강조하는 것이다. 


꽃을 자신으로 바꾸면 

곧 자신의 문제가 되는 것이다. 



지금껏 강조한 것은 바로 이 부분이다. 

그렇게 일정한 부분을 놓고 

꽃이나 자신이라고 생각하지만, 

그 부분에 그런 내용을 얻을 수 없다고 제시한 것이다. 


현실에서도 사정이 그럴 뿐 아니라. 

실재를 놓고 보아도 사정이 마찬가지다. 


이것을 먼저 강조하는 것이다. 



그런데 어떤가. 

그래도 그 부분은 꽃이고 

자신이라고 본 부분은 자신이라고 

여전히 여겨지지 않는가. 


그것이 문제인 것이다. 

그 상태에서는 

이제 꽃을 대면 촉감도 느끼고 

꽃을 꺽으면 소리도 들리는 가운데 

이것들을 서로 관련시키게 된다. 



사실 자신이 눈으로 본 꽃 모습이 

청각이나 

촉감의 원인이 될 이유는 없는 것이다. 


그러나 일상생활에서 

눈으로 보는 그 모습과 

소리로 듣는 그런 청각이나 

촉감을 서로 관련시키는 것이 일반적이다. 


그런데 처음 그 일정부분을 

손이나 꽃이나 자신이라고 본 것부터를 

처음에 문제삼았다는 것을 잘 념두에 두어야 한다. 


그것이 그렇지 않은데 

그렇게 보면 

여기서부터 문제가 시작되는 것이다. 


이미 if 항변 가정적 항변의 내용을 살폈는데 

여기에서도 비슷한 형식을 사용하게 된다. 



처음에 그런 내용은 감각현실에서 얻을 수 없고 

감각현실은 그저 그렇게 생생한 내용이지만, 

정작 그로부터 일으키는 관념분별 그 자체는 아니라고 

제시했던 것이다. 


그런데 그 부분을 그렇게 보면 

그 상태에서는 그러한 관계로 

계속 내용을 관련시키는 작업이 시작되는 것이다. 


이제 이 상태에서 

현실에서 무언가를 원하면 

그런 관계를 이용하여 그런 내용을 얻으려는 

행위를 해나가게 된다. 


그래서 이 부분은 역시 

a + b => C 이런 형태로 

제시하게 되는 것이다. 


그런데 바로 이것이 

꿈에 대해서 이야기한 내용을 놓고 

음미해야 할 부분이다. 


현실은 꿈과 다르지만, 

꿈과 같이 실답지 않은 성격을 갖는 것이다. 


그래서 현실에서는 그렇게 

각 부분이 a 라거나 b 라거나 하면서 

a + b => C 이런 관계로 

C 가 생겨난다고 

그 관계를 보는데 


문제는 감각현실에서 정작 

a 나 b 나 C 란 내용부터 

얻을 수 없고 


또 생겨난다거나 

무엇이 있다거나 없다거나 

어느 부분이 무엇이다 또는 무엇이 아니다 

라는 분별부터 얻어지지 않는다고 제시하는 것이다. 


그러면 그 감각현실은 무엇인가. 

감각현실은 온통 하나의 단일한 색이나 

하나의 내용은 아닌 것이고 

그렇게 생생한 내용인데 

정작 관념분별을 통해 

분별한 a ,b, C 그런 내용을 얻을 수 없는 

그런 것이다. 


그러니 그것이 무슨 문제인가. 



물론  a, b, C 라는 관념으로 

그 감각현실을 가리키고 

그 관념이 그 감각현실이라고 대하는 입장에서는 

이 말이 무슨 말인지 도무지 이해할 수 없다고 보게 된다. 


자신이 꽃을 보고 있는데 

그것을 꽃이라고 생각하던 생각하지 않던 

여하튼 그에 해당한 감각현실을 얻고 있는 것은 

사실아닌가. 


그러니 그것이 문제라면 문제이고 

좋은 것이라면 좋은 것인데 

왜 그것이 문제가 아니라고 할 것인가. 


이렇게 대하는 것이다. 



그래서 이 부분이 어려운 내용이라고 할 수 있다. 


꽃이 그런 것처럼 

자신도 마찬가지다. 


자신이 자신이라고 보는 부분에서 

지금 다리가 떨어져버렸는데 

그것을 다리라고 하던 

아니라고 하던 

이미 걷기가 힘들어졌고 

그리고 곧 자신이 피를 많이 흘려서 

죽음을 맞이하게 되었는데 


왜 이것이 문제라고 아니라고 할 것인가. 


그런 엉터리 주장이 어디 있는가. 


이렇게 보는 것이다. 


그래서 금강경에서는 

더 심하게 

가리왕이 수행자의 사지를 다 끊고 

고문을 해도 

아상을 갖지 않음으로써 

평안하게 안인을 성취했다고 제시한다는 내용을 

제시하면 

더더욱 이해를 할 수 없다고 보게 된다. 



그런데 

감각현실과 관념분별 사이의 사정이 그럴 뿐 아니라, 

그 내용을 얻게 하는 본 바탕이 

되는 실재에서도 

역시 마찬가지다. 


그리고 계속 자신이라고 보는 부분은 

사실은 

그것이 실다운 자신이라고 할 수 없음을 제시하는 것이다. 



여기까지만 대략 제시하고 

쉬었다가 이후 그 사정을 자세히 살피기로 한다. 




정지된 한 단면에서 

실재와 감각현실과 관념분별의 관계는 다음과 같다. 


감각현실은 실재 그 자체라고 할 수 없다. 

또한 관념분별은 실재 그 자체라고 할 수 없다. 

또한 관념분별은 감각현실 그 자체라고 할 수 없다. 


그래서 어떤 감각현실을 놓고 그것을 자신이라고 생각할 때 


이 감각현실은 실재의 내용도 아니고 

이 감각현실에는 그런 분별도 얻을 수 없는 것이다. 


또 그런 분별은 실재의 내용도 아니고 

감각현실 자체라고도 할 수 없다. 



그런데 자신이 눈을 떠 모습을 볼 때 

세계의 모습과 자신이라고 생각하는 부분을 

함께 동시에 얻게 되는데 


이 가운데 자신이라고 생각하는 부분을 

자신이라고 생각하게 되는 일정한 사정이 있는 것을 

이미 보았다. 



이미 그것을 상-락-아-정의 관계로 보았다. 


늘 눈을 뜰 때마다 그 부분은 파악된다고 여기고 나머지 부분은 그 때 그 때 

달리 변화한다고 생각되고 


자신이 움직이려면 자신의 뜻에 따라 움직이는 부분이 

그 부분이라고 여기고 

그리고 이 부분에 자신의 감관이나 정신이 머문다고 여기고 

그리고 이 부분이 자신이기에 좋고 깨끗하다 

이런 등등으로 그 부분을 자신이라고 여기고 

집착을 갖는 것이다. 


그래서 그 부분을 자신이라고 여기는데 

그런데 정작 그 부분의 정체는 무엇인가. 


그 부분은 실재하는 내용도 아니고 

또 그 부분은 

그에 대해 갖는 관념분별 그 자체도 아닌데 

그러나 그것을 놓고 

앞과 같다고 여기면서 자신이라고 생각하게 되는 것이다. 



이것이 하나같이 잘못된 판단임은 이미 오래 전에 

살폈다. 



4 살 때 모습을 놓고 60 살 된 사람이 생각을 한다고 하자. 


그 모습이나 그 마음에 담긴 내용이나 

하나도 내용이 공통된 것이 없다고 할 수 있다. 


과학계의 보고에 의하면 인체내 물질은 

7 년이면 전체가 다 바뀐다고 제시되는데 

일일히 살펴보지 않아서 확인하기는 힘든데 

매일 식사하고 배설하는 과정이 사실은 

조금씩 물질이 바뀌어지는 과정이라고 이해한다면 

그런 내용을 이해할 수 있다고 본다. 


그러니 현재 자신이라고 보는 부분이 

늘 일정한 내용이라고 생각한 것 자체는 

잘못된 것이다. 




그래서 5 살 때의 모습을 기준으로 하면 

그 어떤 아이는 지금 현재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5 살 때의 아이를 A 라고 만일 부른다면 

지금 60 살 된 어른은 B 라는 다른 인물이라고 보아야 하는 것이다. 



그런데 그 A 라는 아이가 

그 당시 덧셈을 배우지도 않고 글자를 배우지도 않고 

더 나아가 무언가를 좋다고 보면 그에 접착되어 한없이 아끼고 

또 자신이 좋은 것을 얻기 위해서는 다른 생명이 집착하는 것을 함부로 침해해서 해치거나 훔쳐도 된다고 여기고 

더 나아가 자신의 좋음을 누군가 침해하면 

이에 대해 분노를 참지 않고 보복을 해야 한다고 여기고 생활을 계속 해왔다면 


그에 따라 

현재 그런 A 의 뜻과 말과 행위에 의해 

A 와는 전혀 다른 모습의 B 가 그로 인해 

상당히 이상한 상태로 지내고 있다고 보게 된다. 



그런데 만일 A 가 그렇지 않고 이와 반대로 행했다면 

또 그로 인해 A 와 전혀 다른 모습의 B 는 

지금 여러가지 책도 볼 수 있고 

여하튼 앞과는 다른 상태로 지내고 있다고 보게 된다. 



그래서 처음 

그 내용을 A 라고 할 수 없는데 

여하튼 그것을 A 라고 본다면 

그 A 가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하는 것들은 


이제 엉뚱하다고 할 수 있지만, 

A 와는 다른 B 라는  형태의 어떤 생명체가 

그에 따른 결과를 나타내고 있다고 보게 되는 것이다. 


이것이 어떻게 된 일인가. 


이 부분을 잘 이해해야 한다고 본다. 




계속 반복하지만, 


A 이던 B 이던 

그 어느 정지 단면을 놓고 살피더라도 

그 정지단면에 그런 A 나 B 는 얻을 수 없다고 

제시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정지단면의 어떤 부분을 그렇게 A 라고 보고 

그렇게 임하면 

이제 그로 인해 

약간은 엉뚱한 B 가 그러그러한 결과를 받는 관계가 된다고 하고 

B 의 정지단면에서는 또 그 모습을 보게 된다고 한다. 


결국 이것이 삶에서 보는 인과관계의 내용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손을 마주치면 소리가 난다거나 

손을 꽃에 대면 촉감이 느껴진다. 

등과 같은 인과관계도 마찬가지다. 




그런데 여기서 무엇을 말하고 있는가하면 

두 가지를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 가운데 어떤 한 단면에서도 

A 나 B나 또는 자신이라고 볼 것이 없고 

그런 것이 얻어지지 않는다는 사정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우선 실재던 감각현실이던 관념분별이던 

어느 것에도 진짜라고 할 영원불변하고 고정된 실체로서의 

자신이 없는 것이다. ( 무아, 무자성 ) [ 원성실상의 승의무자성 ]  


그리고 자신이라고 생각하는 것에 대한  

실재도 그러한 것이다. 


실재 자체는 이것이던 저것이던 

그 내용이 전혀 없다고 할 것은 아니지만, 

어떤 주체가 그 내용을 끝네 얻을 수 없는 상태인 것이다. 



그리고 각 단면에서 어떤 주체가 얻는 

감각현실은 실재가 아닌 것이다. [ 의타기상의 생무자성] 


더욱이 그 가운데 일 부분을 놓고  자신이라고 여기지만, 

정작 그런 분별 내용 역시 거기에서 얻어지지 않는 것이다. 


자신이라고 생각하는 분별내용에도  

또 그런 감각현실이 들어 있지 않다. [ 변계소집상의 상무자성]



그리고 그런 일정한 감각현실 부분을 

앞과 같은 사정으로 자신이라고 여기고자 한다면, 

그런 자신은 사실은 그런 부분에서  찾으면 곤란한 것이다. 


왜 그런가. 


자신이 자신이라고 생각한느 감각현실 부분은 알고보면 

눈을 뜰 때 자신의 마음이 받아들인 내용물인 것이다. 



그리고 이미 앞에서 보았듯 

5 살때 모습이나 그 이후 15 살 때나 그 이후 이후 

계속 변화해온 모습인 것이다. 


그런데 그 기간을 거치는 동안 

거기에서 변화되지 않은 것이 있다면 


사실은 그 모습이 아니고 

그 모습을 그렇게 매순간 얻어온 자신의 마음이 

그렇다고 이해해야 할 것이다. 






또 자신이 어디론가 움직이겠다고 할 때 

자신의 뜻에 따라 움직이는 부분을 자신이라고 

보는 것도 또 잘못된 생각이다. 


자신이 움직이겠다고 할 때 

같이 움직인 옷이나 신발이 자신인가? 


또 반대로 

버스에 자신이 타고 있을 때 

버스 운전사가 운전하는 대로 

자신이 같이 이동한다고 해서 

자신이 

버스나 버스 운전사 아저씨라고 해야 하는가?   



그런 가운데 또 자신의 몸이라고 생각하는 부분을 잘 관찰하면 

자신의 뜻과 달리 

자신의 몸을 마치 어떤 세계나 집이나 버스처럼 여기고 

제멋대로 그 안에서 살아가는 수많은 미생물들을 생각할 수 있는 것이다. 

이것을 자신이라고 볼 수 있는가. 


이것을 다 자신이라고 본다면 

버스를 몰고 가는 운전사 아저씨가 

승객을 자신이라고 보는 것과 마찬가지다. 



그리고 자신의 몸이라고 보는 부분은 

사실 자신의 뜻대로 되는 것은 아니다. 

예를 들어 자신의 생노병사가 

자신의 뜻에 의해서 그렇게 되는 것인가. 



결국 이런 입장에서 보면 

자신의 몸이라고 보는 부분은 

자신 뜻대로 되는 것도 아니고 


설령 자신의 뜻대로 움직인다고 해도 

이는 버스 운전사 아저씨가 

잠시 버스를 움직이거나 

자신의 신발이 자신의 몸과 같이 붙어 움직이는 상태와 

비슷하다고 여겨야 하는 것이다. 


자신이 살아온 과정을 곰곰히 검토해 보면  알겠지만, 

처음 태어나 거리를 나설 때는 

아장아장 걸어가는 자건거형 운반체를 자신이라고 보고 움직였다면 


나중에는 조금 큰 택시 

나중에는 고물 트럭 

이런 형태처럼 계속 모습을 바꾸면서 

그것을 이동해온 것 뿐인 것이다. 



그런데 매순간 그렇게 그것이 

자신의 뜻에 의해 움직인다고 해서 

그것을 자신이라고 여기면서 

대하는 것 뿐이다. 



이런 형태로 임하면 

나중에는 잘못하면 바퀴벌레나 문어의 몸을 

자신의 뜻에 따라 움직인다고 

또 자신이라고 여길 

가능성이 대단히 높은 것이다. 






현실에서 자신의 몸이라고 보는 부분을 

자신의 정신이나 감관이 머물고 있는 부분이라고 

생각하는 것도 잘못이다. 


눈을 뜨고 어떤 모습을 보았다면 

그것은 그 일체가 정신 안에 들어온 '내용물'인 것이지 

그것이 정신이 대한 대상이라거나 

정신이 머무는 곳이라고 할 수 없는 것이다. 



이는 그림을 놓고 다시 설명하면 

이해가 쉽다고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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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이 눈을 떠서 보게 되는 모습이다. 


이 때 2 를 그냥 놓고 생각해보자. 

2 가 눈을 떠서 보면 

5 ^ 같은 부분에 2가 본 내용이 맺힌다고 가정해보자. 


이 때 2 의 입장에서 

5 ^와 같은 마음이 

2 ^ 같이 2 가 자신의 몸으로 보는 부분 안에 

머물러 있는 것이라고 이해하면 

이치에 맞는가. 


그렇지 않은 것이다. 





또 2 가 본 4 ^ 란 꽃의 모습은 

그 모습을 대상으로 삼아서 그런 모습을 

얻었다고 이해하는 것이 이치에 맞는가. 


그런 가운데 2 가 

2 ^ 를 그런 대상을 상대하는 주관으로서 

자신의 몸이라고 이해하면 또 맞겠는가. 



그렇게 생각하게 되기 쉽지만, 

위 그림을 놓고 

사정이 그렇지 않음을 잘 이해해야 하는 것이다. 




그런데 2 에서 살핀 내용은 

곧 1 의 상황이기도 한 것이다. 


그래서 1 이 본 전체의 모습은 

사실은 1 의 마음안에 맺힌 내용들인 것이다. 




이를 그릇으로 비유해보자. 

그릇에 어떤 떡들이 잔뜩 담겨있는데 

이제 그 그릇이 그릇 안의 떡 안에 담겨 있따고 

생각하는 것이 맞겠는가. 

그렇지 않은 것이다. 



그래서 처음 눈을 떠서 자신의 몸이라고 본 부분에  

자신의 정신이 머물고 있고 

그것이 대상을 대하는 주관이라고 여기면 

잘못인 것이다. 


그래서 자신이 자신이라고 본 부분 외은 것들을 

자신의 밖에 있는 어떤 것들이고 

그리고 자신의 몸 부분이 그것을 대상으로 해서 

각기 어떤 내용을 얻는다고 생각하는 것도 잘못인 것이다. 




그래서 이런 여러 사정으로 

처음 1 이 눈을 떠서 

1 과 같은 부분을 자신이라고 보는 것은 

엉터리 생각인 것이다. 




앞과 같은 사정으로 

외부 대상과 구분되는 어떤 주관을 놓고 

그것을 자신이라고 설정하려면 

1 과 같은 부분을 자신의 몸이며 주관이 위치하는 내용이라고 

이해하면 곤란하고 

이런 내용은 따로 찾아야 하는 것이다. 


그래서 

처음 5 살때 아이와 60 살된 노인 사이에서 

그래도 무엇이 계속 있었던 것인가. 

그래도 무엇이 뜻대로 되는 것이고 

그래도 무엇이 세계를 대해서 내용을 얻는 주관이고 

그래도 무엇이 그나마 깨끗한 것인가를 

따로 찾아야 하는 것이다. 




1 이 눈을 떠서 볼 때 

자신의 몸이라고 보는 부분을 자신이라고 여기는 것은 

전도된 망상 분별에 의한 생각인 것이다. 


그래서 이 부분을 놓고 

자신이라고 생각하면서 

아상을 일으키고 

그에 접착되어 현실에 임하면 곤란한 것이다. 




만일 그렇다면 

왜 5 살 때 자신의 모습이 지금 완전히 사라졌는데 

매번 제사를 지내거나 

기념일을 정해 통곡을 하지 않는가 

스스로 물어보아야 하는 것이다. 


그렇지 않은 것처럼 

지금 자신이라고 보는 부분도 

사정이 마찬가지임을 이해해야 하는 것이다. 


일단 글이 자꾸 길어지므로 

간단히 결론을 내리고 쉬기로 한다. 




여하튼 

감각현실의 어느 정지단면에서든 

일정한 부분을 놓고 그것을 꽃이라고 생각하던 

또는 자신이라고 생각하던 

그 부분에 자신이 생각하는 내용을 얻을 수 없는 것이다. 


그런데 

그 부분을 대하고 자신이 

관념분별영역에서 그런 생각을 일으킨다는 것이 문제다. 


그리고 그렇게 생각을 일으키고 나서 

그 부분에 그런 내용이 있다고 여기는 것이다. 




그런데 다시 

그 부분의 정체에 대해서 제시하면 

그것은 자신의 마음에 얻어진 내용인 것이다. 



그래서 자신의 정신이 관계하거나 관계하지 않거나 

관계없이 그대로 실재하는 지위에 있는 내용이 아닌 것이다. 


그리고 실재는 

그런 관계에서 내용을 얻는 자신은 

끝내 얻을 수 없고 공한 것이다. 


결국 자신이 현실에서 감각해 얻는 감각현실은 

실재의 지위에 있는 내용도 아니고 

그래서 실재가 아닌 것이다. 



그리고 더욱이 이 부분에는 

자신이 생각하는 그런 관념분별 내용도 

얻을 수 없는 것이다. 



그런데 자꾸 혼동을 일으키는 부분은 

자신이 그 감각현실을 대해 

어떤 생각을 일으켰기에 

그런 관념내용이 

그 감각현실이고 

그 감각현실에 그 내용이 있다고 여기는 

이 부분이라고 본다. 


이는 비유하면 

자신이 침대에서 자면서 어떤 황금의 꿈을 꾸었다고 해서 

자꾸 침대를 놓고 

거기에 꿈에서 본 황금이 그처럼 있다고 여기는 것과 

마찬가지다. 


현재 어떤 감각현실을 대하면서 그에 대해 어떤 생각을 하면 

그 부분을 그런 내용이라고 생각하는 것도 

바로 이런 관계인 것이다. 



그래서 

자신이 생각한 그 내용이 곧 그 감각현실인가 하는 질문을 

스스로 반복해보면서 

그 두 내용의 관계를 잘 음미하는 것이 필요한 것이다. 


사정이 그렇지 않음을 

여기서 반복해 제시하는 것이다. 


>>>






여기까지 제시하면 

대강 자신이 자신이라고 생각하는 부분이 

실다운 자신이 아닌 사정을 이해해야 한다고 보는데 

여기에 또 다른 문제를 제기하는 입장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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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그림을 놓고 이 문제를 살펴보자. 


2 라는 사람이 자신의 마음에서 

4^ 나 2^와 같은 모습을 보았다면 

물론 그것을 외부의 꽃이나 자신이라고 여기면 문제다. 


이 내용을 여기서 보았다. 



그러나 그런 모습을 얻을 때는 

위 그림처럼 그 마음 밖에 

그에 상응한 4 나 2 가 실재하는 것 아닌가. 

이렇게 다시 생각하기 쉽다. 


위 그림에서는 사실 그처럼 

그 두 내용을 서로 비슷하게 그려 놓았다. 



그런데 사정이 그렇지 않은 것이다. 



사실 4 나 2 의 모습은 

1 이 본 모습인 것이다. 

그리고 1 은 여기서 2 의 마음 안 내용을 

저 그림처럼 직접 보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1 의 입장에서는 

마치 2의 마음 밖 외부에 있는 

어떤 실재의 내용들을 

자신이 보고 있다고 여길 수 있지만, 

이것이 크게 뒤바뀐 생각인 것이다. 


사실은 

1 자신이 2의 상태와 마찬가지인 것이다. 





그래서 정작 1 의 입장에서는 

4 나 1 과 같은 내용을 얻는데 

그것들은 2 와 마찬가지로 

1 자신의 마음에 있는 내용인 것이다. 


그래서 1 역시도 

그런 내용에 대한 실재의 내용은 

얻지 못하는 것이다. 




또 2 의 입장도 사실은 마찬가지다. 







여기서 일단 

2 의 상황을 그림과 같이 그렸은데 

왜 이렇게 추리하면 이것이 잘못인가부터 

먼저 다시 살펴보자. 


우선 2 가 자신이 본 5 ^ 안의 내용을 놓고 

다음과 같이 생각한다고 하자. 



우선 자신이 본 모습 가운데 1 ^ 가 1이고 

2 ^ 가  2 자신이라고 여긴다고 해보자. 


그런 가운데 

1^ 라는 몸 안에 1 의 정신은 들어 있고 

1^ 라는 사람은 

4^ 라는 1^ 외부에 있는 꽃을 대해서 

그런 내용들은 1 ^ 마음 안에 얻는다고 생각한다고 하자. 


그래서 2가 생각하기를 

자신은 1 ^ 의 마음 밖에 있는 실재의 내용인 

4 ^ 를 얻고 있따고 생각한다고 하자. 


자꾸 숫자만 기재하므로 혼동이 올 수 있지만, 

그림을 보고 잘 파악하는 것이 필요하다. 

그런데 이는 

결국 1 의 상황이나 2 의 상황이나 

상황이 마찬가지임을 제시하는 것이다. 



그런 가운데 위 그림을 보고 잘 생각해보자. 


그러한 2 의 생각을 위 그림을 놓고 

파단해보면 

1 의 입장에서 

그런 판단이 맞다고 보겠는가. 



그렇지 않은 것이다. 



왜 1 이 2 가 본 마음안에서 얻는 1 ^ 와 같은 내용이겠는가. 


그리고 왜  1 이 

2 가 마음에서 얻는 내용 4^와 같은 내용을 대상으로 해서 

어떤 내용을 얻겠는가. 


그리고 왜 1 의 마음이 

2가 본 1 ^ 같은 몸에 머물겠는가. 


그래서 그런 2 의 생각은 하등 이치에 맞지 않는 내용들인 것이다. 


그런데 그와 같이 

1 이 처음 2 에 대해서 그림처럼 추리하고 

그련 놓은 내용도 사실은 잘못인 것이다. 


그런데 2 가 자신이 본 1 ^ 가 1 의 본 정체고 

2 ^ 가  2 자신의 본 정체라고 착각하듯 


1 도 그런 상태인 것이다. 


1 은 자신이 본 1 이 자신이라고 여기고 

또 자신이 보는 2 와 같은 모습이 2 의 본 정체라고 여기면서 

저 그림처럼 추리를 하는 것이다. 


이처럼 1 이나 2 나 서로 같이 전도망상을 일으켜 

서로 임하는 상태이기에 

이것이 서로 문제인 것이다. 





그런데 우선 왜 저렇게 그림을 그려 놓았는가하면 

일반적으로 저와 같이 추리도 하고 

그렇게 놓고 설명하면 

이해가 쉽게 되는 부분도 있다고 보기에  그런 것이기도 하다. 


그런데 사정이 그렇지 않음을 이해하고 이 사정을 대한다면 

각 주체가 어떤 내용을 얻는 과정에 대한 

설명 자체에는 큰 문제는 없다. 


즉 각 주체는 마음 안에서 어떤 내용을 얻지만, 

그 안에 자신이 얻는 대상이 있는 것도 아니고 

또 그 대상을 상대햐는 주관이나 몸이 있는 것도 아니다. 


이는 모두 마음안에 얻어진 내용들인 것이다. 

그리고 그 실재는 각 마음은 얻지 못하는 상태인 것이다. 




사실 위와 같은 상황에서 

1 이 얻은 내용들이 하나같이 

자신의 마음 안에서 얻은 내용이라고는 것을 

확인하는 방안은 

위와 같은 상호 관찰 외에도 많은 방안이 있다. 




자신이 눈을 뜨고 감음을 반복하면서 

자신이 눈을 뜨면 모습을 얻고 

감으면 그 모습이 사라지는 관계를 잘 확인하고 



자신이 눈을 뜰 때 얻는 내용이 

눈을 감은 상태에서는 어떻게 되는 것인가를 

놓고 헤이라는 것이 일단 그 기본이다. 



그런 가운데 자신이 눈을 떠서 모습을 보는 가운데 

왜 정작 자신의 눈이나 이마나 뒷머리는 

보지 못하는가도 생각해봄으로써 

그 내용이 자신의 마음에 들어온 내용임을 

잘 이해해야 한다고 본다. 



그런 가운데 돗수가 다른 색안경을 구해 

썼따 벗었다를 반복해보는 것이다. 

또는 손가락으로 눈동자를 조금 눌러 보아도 된다. 


이때 그에 따라 세상의 모습이 

한꺼번에 다 바뀌는 것을 경험한다면 

어떻게 자신의 외부의 세계 내용이 

그처럼 안경 하나 바꿔 쓴다고 

한꺼번에 다 바뀌는가를 놓고 

스스로 그 내용의 정체가 무엇인가를 

잘 검토해 볼 필요가 있는 것이다. 



그래서 일단 자신이 눈을 떠서 본 내용 일체는 

자신 마음 외부에 별도로 있는 대상이 아니고 

자신의 마음 안에 들어와 았는 내용들임을 

먼저 이해하는 것이 필요한 것이다. 





그 다음 자신의 마음 안에 얻는 내용과 

일치하거나 상응하거나 

이에 유사하고 비레하는 내용이 

마음 밖에 그대로 실재할 것인가를 생각해보는 것이 필요하다. 




그래서 이 문제와 관련해 

자꾸 침대와 꿈에서 꾼 황금의 비유를 

드는 것이다. 


그래서 

자신이 눈을 뜨거나 감거나 관계없이 실재한다고 할 '실재내용'과 

자신이 눈을 뜰 때 화합해서 마음에 얻게 되는 내용의 상호관계를 


'침대' 와 '꿈에서 본 황금'의 관계를 놓고 

잘 음미해 보아야 한다고 제시하는 것이다. 



꿈을 기준으로 하면 

꿈을 깬 현실에도 

그런 황금이 침대에 있고 

그래서 자신이 꿈에서 황금을 꾼 것처럼 여겨지는 것이다. 



그런데 사정이 그렇지 않다고 

현재까지 반복해 제시한 것이다. 



그래서 

잠을 잔 침대  => 꿈에서 본 황금 

감각현실   => 그로부터 일으킨 관념분별 

실재  => 감각현실 


이들이 상호 관계가 모두 

그처럼 되어 있다는 사실을 이해해야 한다고 보는 것이다. 


이는  

감각현실이 실재 그 자체인가. 

그렇다고 

감각현실은 그렇다고 실재를 떠나서 얻은 것인가. 



또 관념분별이 감각현실 그 자체인가. 

그렇다고 감각현실을 떠나서 그 관념분별을 일으킨 것인가. 


꿈에서 본 내용이 잠을 잔 침대 그 자체인가. 

그렇다고 침대를 떠나서 그런 꿈을 꾼 것인가. 


이러한 질문을 잘 검토해보면 

답을 쉽게 얻을 수 있는 것이다. 


사정이 그렇지 않다는 것을 

이로써 잘 이해해야 한다고 보는 것이다. 




그래서 

감각현실에 대해서 

일정부분을 a 라고 생각할 때 


그 a 는 감각현실에도 

그처럼 얻어지지 않고 

실재에서도 그처럼 얻어지지 않는다는 사실을 

잘 이해해야 한다고 본다. 



그래서 현실에서 분별하고 문제삼는 그 어떤 것 

예를 들어 a 나 b 나 C 나 

또 그런 것이 있다 없다. ~ 이다 ~ 아니다 ~와 같다 ~ 와 다르다. 

생한다 멸한다 

이런 모든 분별 내용이 

모두 그와 사정이 같은 것이다. 



이것이 기본이다. 




>>>




그런데 만일 

어떤 정지화면을 놓고 

그 일정부분을 a 라고 여기고 대한다면, 


그 때서부터는 

나중에 또 다른 일정부븐도 그런 형식으로 여기고 대하면서 

그 각각을 관련시키는 판단 작용이 또 나타나게 되는 것이다. 



이 부분에서 수행자가 

초점을 맞춰야 할 중요한 내용은 

수행과 관련한 다음 내용이다. 


어느 감각현실의 단면이던 

그에 대해 생각하는 분별내용과 관련해서 

그런 내용이 그 부분에서 얻을 수 없고 


그 감각현실은 실재도 아니고 

그런 내용은 실재나 감각현실에서나 모두 

있는 바가 없고[무소유] 불가득하다는 사정을 잘 관한 가운데 



그런 상황에서 그것을 무엇이라고 보고 

좋다거나 나쁘다고 여기는 가운데 

집착을 일으켜 일반인이 행하기 마련인 

그런 행위 반응을 중지하고 


좋음은 베풀고 

나쁭은 가하지 않고 

자신이 나쁨을 방을 때는 평안치 참고 임하여 

보시 정계 안인 등의 수행을 행하면 


그 수행자가 그런 상태에서 자신이라고 보는 부분에 

그런 내용은 없고 얻을 수 없는데도 

나중에 결과적으로 

이를 통해 무량한 복덕과 지헤를 구족하게 

된다고 제시하는 것이다. 



이 관계가 이미 앞에서 본 관계 

즉, 

5 살 아이 A 가 구구단을 열심히 익혀서 

산수 계산을 열심히 하면 


60 세 된 노인 B 가 

어떤 수퍼마켓에서 

과거 어떤 A 라는 아이가 

당시 배운 산수 능력으로 

물건 값 계산을 잘 하게 된다고 설명하는 것과 

같은 내용인 것이다. 


물론 일반입장에서는 

이 A 와 B 를 자신이라고 여기고 

계속 대하는 상황인 것이기도 하다. 




그런데 다시 말하건대 

이 두 내용에 그런 내용은 진짜는 없고 

얻을 수 없다고 제시하는 것이다.  


그런데 그 한 단면을 놓고 

그것을 A 라고 볼 때 

그 A 가 이러이러하게 하면 

나중에 그 형식으로 

또 다른 단념을 대한다고 한다면 

이제 B 라는 이는 또 

이러이러한 상태로 그 단면을 

대하는 관계가 나타난다고 할 수 있는 것이다. 


이 각 단면에 그런 A 나 B 가 

있는 바가 없고 얻을 바가 없다는 내용과 

그리고 더 나아가 생멸이나 

A 와 B 사이에 실답다고 할 어떤 관계를 가 

얻을 수 없다고 하는 내용과 


그러나 그 한 단면을 A 라고 본다면, 

그런 바탕에선 

다른 단면도 B 라고 보게 되고 

그리고 A 와 B 사이에는 

A 의 어떠어떠한 행위로 인해 

B 의 어떤 상태가 나타나는 관계가 있다고 제시하는 것이다. 




이 두 내용에서 

좀 혼동이 될 지 모르지만, 


이 두 측면을 잘 이해해서 

수행에 다 함께 사용해야 하는 것이 

수행의 핵심인 것이다. 





즉 중생은 얻을 수 없는데 

그런데 수행자는 하필이면 

무량한 중생을 제도한다고 임하여 

수행하는 것이고 


또 보시하는 이나 보시받는 이나 

보시할 물건이나 

보시하는 행위도 얻을 수 없는데 


그러나 하필이면 

수행자는 

쉼없이 무언가 좋은 것을 찾아 

다른 이에게 베풀려고 

온갖 지혜와 노력을 다 기울이면서 

보시를 행해야 한다. 


이것이 바로 금강경에서 제시하는 내용인 것이다. 



왜 그런가. 

사정이 위와 같아서 그런 것이다.






중생은 자신이 보는 몸이 자신이라고 생각하고 

망상을 갖고 99 % 가 임하고 있는데 

올바로 보면 그것이 아닌 것이다. 


그리고 일반적으로 그런 몸이 

100 년 안에 죽고 허물어지고 끝이라고 보는 것인데 

또 사정이 그렇지 않은 것이다. 



그리고 현실에서 자신의 몸이라고 보는 부분이 

이리저리 끊기고 고문을 당하면 

큰일이다 죽는다. 

그래서 이렇게 죽고 끝이다. 

등등으로 생각하는데 

또 본 사정이 그렇지 않은 것이다. 


이것을 제시하고 있는 것이다. 


그랫거 그 사정을 잘 살피고 헤아려서 


처음에 자신이 자신이라고 보는 부분은 

- 실재도 아니고 

- 실재는 또 그런 내용을 얻을 수도 없고 공하고 


또 자신이 대하는 감각현실은 

또 자신이 생각하는 내용 자체도 아니고 


자신이 생각하는 내용은 

그런 감각현실이 안에 있지도 않으므로 


자신이 자신이라고 생각한 부분을 놓고 

그것이 자신이라고 생각하면서 

그 부분에 대해 아상을 갖고 머물지 않아야 하는 것이다. 


 

그런 가운데 

정작 그런 입장에서 

자신이라고 해야 할 내용은 

또 그런 것이 아니라는 것도 함께 

잘 확인해야 하는 것이다. 



수행자가 상락아정의 상태로 

수행을 한다고 하더라도 

여기에도 진짜라고 할 영원불변한 자신이 없는 것은 다르지 않지만, 


그러나 수행자가 무량한 시간 

수행을 계속 이어간다고 할 때 

그 수행자는 바로 이런 부분에서 

수행을 계속 이어나가는 것이기도 한 것이다. 



그러므로 일반인이 자신이라고 보는 부분과 

수행자가 무량한 시간 동안 수행을 정진한다고 할 때 

그 수행자가 그런 수행을 하는 주체로 보는 내용관느 

어떤 차이가 있는가를 

잘 확인해야 한다고 보는 것이다. 




그리고 이 부분을 놓고 볼 때 

비록 그 하나하나 진짜라고 할 내용도 없고 

실답게 얻을 내용은 없는 것이지만, 


그러나 비록 실답지는 않더라도 

앞에서 제시한 것과 같은 관계가 

그런 바탕에서 나타난다고 제시하는 것이다. 


즉 수행자가 현실에서 그런 

망상분별과 집착을 떠난 상태에서 

그처럼 

보시 정계 안인 정진 정려 반야 등의 수행들을 행해나가면 


그 수행자가 복덕자량과 지혜자량을 받게 되고 

수행을 계속 잘 해 나가게 되지만, 


만일 그렇지 않으면 

축생 아귀 지옥의 중생 몸을 받아 묶여서 

생사고통을 받아 나가는 관계가 된다고 

하는 것이다. 



앞에서는 일반적 입장은 

자신의 몸을 놓고 

그것이 한 생을 걸쳐서 살아가다가 

그 몸이 죽어 없어지면 

그것으로 다 끝이다. 

이렇게 보는 것이지만, 



여기서는 그런 사람의 몸은 사라져도 

사람의 몸에서 행한 생각이나 말과 행한 내용이 

씨가 되어 


다른 세계에서 그런 업을 행하던 당시의 모습과는 전혀 다르고 

약간 엉뚱하다고 할 수 있지만, 

여하튼 그것이 씨가 되어 

엉뚱하게 모습이 변한 이상한 

축생이나 아귀 지옥의 중생이 

그 열매가 되는 고통의 과보를 받아나가는 

관계가 그처럼 있다고 제시하는 것이다. 


그래서 이 두 측면의 내용을 함께 제시하는 것이므로 

이 두 측면을 서로 혼동하거나 

오해하면 곤란한 것이다. 




이 관계에서 

그 관계나 

그 관계를 잇게 되는 한 정지단면에서의 내용이나 

모두 진짜라고 할 내용이 없으며 (무아 무자성 무소유) 

그 실다운 내용은 얻지 못한다고 제시하지만, ( 불가득 공 )


따라서 실답다고 할 수 없지만, 

그런 실답지 않은 내용이 

그런 관계로 나타난다고 

제시하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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