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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원을 성취하는 방안 본문

연구자료

소원을 성취하는 방안

진리와 가치를 고루고루 2017. 9. 4. 23: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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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buddhism007.tistory.com/3471

● 이하 글은 단상_조각글 내용을 주제별로 '편집중'인 상태의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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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를 믿는 이 가운데 

1 년에 딱 1 번 절에 가는 경우가 대단히 많다. 

그리고 한 번도 안 가면서 

자신의 종교란에 불교라고 기재하는 경우도 있다. 


본인도 이런 유형에 가깝기는 한데 

숙왕화님에게 물어보니 

자신도 그렇다고 하는데 

올해엔 2 회 정도 갈 것 같다고 한다. 


그래서 왜 그런가 하고 물으니, 

올해엔 부처님에게 불법적인 일을 

청탁할 일이 있어서라고 하는 것이다. 


그래서 불법 예비음모혐의로 

관계 불법 당국에 사전 신고를 해버렸다. 


그런데 

해당 불법 당국의 반응은 

숙왕화님의 자세는 잘 하는 일이라고 하고 


앞으로도 불법이 판치도록 

더욱 더 노력을 해야 한다고 한다. 



이런 이상한 이야기는 
부처님 오신날이라는 

배경과 맥락 때문에 

무사할 수 있지만, 


현실에서는 이는 

곧바로 무간지옥에 입소하는 

중대사유가 되는 것이기도 하다. 



절에서 먹는 밥은 늘 맛있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야채만 늘 저렇게 비벼서 먹으면 

건강해질 것 같은데 


알고보면 야채도 비싸고 

야채로 잘 조리하기도 힘들고 

어려움이 있다. 


[...]



현실에서 

가장 시급한 문제가 무엇으로 생각하는가하면 

각 개인 입장에서 갖는 소원의 성취가 

제일 시급한 문제로 보게 된다. 


그런 소원이 뜻대로 성취가 안 될 때 

각 개인의 삶이 고통으로 느껴지기 시작하는 것이다. 



그런데 수행자 입장에서는 

이런 소원의 성취를 놓고 

망상을 갖고 대하는 입장이 가장 

해결하기 어려운 문제라고 보게 된다. 



그것이 무원무작해탈문을 사이에 놓고 

일반적인 현실과 수행자의 세계의 

차이점이기도 하다. 


그런데 이것을 설명하려면 


왜 진짜라고 할 내용이 없고 

실재에서 실다운 내용을 얻을 수 없다고 반복해 제시하면서 


그러나 현실에서 수많은 수행목표와 

수행방안을 제시하는가에 대해서 

설명하기가 상당히 복잡하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그리고 다시 왜 

그렇게 처음 그런 내용을 본래 

얻을 수 없음을 제시하는 

공 무상 무원무작 해탈문에 들어가서 

생멸이나 오고감을 본래 얻을 수 없음을 깨닫고 나서 


그 이후 다시 무량행문에 들어서서 

중생들의 소원성취와 

중생들의 제도와 무여열반을 위해 

그리고 불국토 장엄과 성불의 서원의 성취를 위해 

또 수행을 해나가야 하는가 하는 것을 

다시 설명하기가 복잡하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소원 성취문제는 

올 새해들어 계속 살핀 주제이기도 한데 

그러나 소원 성취가 문제되지 않는 때가 

현실에 있는가. 

그래서 늘 문제되는 것이라고 본다. 


본인과 종교는 다르지만, 

목사 수습과정에 있는 분이 결혼을 하려는데 

자신은 아직 목사 수습과정 중이라 

자신의 생계도 해결이 잘 안되는 현실적 상태에 있고 

그에 반해 상대는 상당히 세간에서 인기가 드높은 

사로 끝나는 직업을 가진 상태여서 

그래서 신부가 될 쪽 부모로부터 약간의 반대가 

있다는 소식을 들은 적이 있다. 


그래서 당시 본인이 주제넘게 

약간의 방안을 알려주었다. 


그 분이 믿는 하나님에게 

인류를 구원하려는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사업을 

자신이 앞으로 하려는데 

왜 자신이 그 사람과 결혼을 해야만 하는가 


그렇게 결혼한 다음 

하나님 사업과 관련해서  

무엇을 어떻게 하려고 하는가 하는 사정을 

잘 소명해서 제출하고 

기도하면 곧바로 결혼하게 될 것이라고 말해 준 적이 있다. 



본인이 알려준 방안때문에 결혼을 했다고는 보지 않지만, 

여하튼 몇 달 안지나 결혼한다는 소식을 듣기는 했는데 


그러나 하나님의 입장에서 

그렇게 소원을 접수시키는 데 

어떻게 그것을 성취시켜 주지 않겠는가. 


다만 나중에 

하나님 상대로 사기행위를 한 것으로 판명되지 않도록 

초심을 잘 유지하는 것이 대단히 중요하다고 보는데 


이것은 불법의 세계에서도 

사정이 마찬가지라고 본다. 



어떤 소원을 가질 때 

그것이 중생제도와 성불 불국토 장엄 등과 

무슨 관련이 어떻게 있는가를 

머리를 짜내서 잘 접수하면 

그것이 3 일 안에 신속하게 

성취가 되지 않을 이유가 없는 것이다.  



알고보면 

mun 님도 그런 식으로 황제 직위에 오른 것이고 


본인도 그런 식으로 

무한화폐와 무한카드를 소유하게 되고 

우주를 소유하게 된 것이기도 하다. 





본인이 불교를 믿는다면서 

사찰은 사진찍으러 가는 경우가 아니면  

1 년에 많아야 1, 2회 방문하는 형편이라고 

앞에 제시했는데 

자세히 알고보면 또 사정이 다르다. 





본인도 한 때  사찰을 직접 세우고 

싶어한 적이 있었다. 


그 때도 사정이 지금과 마찬가지로 

본인부터 본인 생계를 잘 해결하지 못하는 상태였는데 


그런 상태에서 

왜 사찰을 세우려고 하는가. 

사찰을 세워서 그 상태에서 

무엇을 어떻게 하려고 그러는 것인가. 


이 부분에 대한 내용을 

잘 작성해서 소원 신청서를 접수했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하니까. 

곧바로 그 소원이 성취되어 버린 것이다. 


그래서 전 세계의 사찰은 

모두 곧바로 

본인 소유가 되었을 뿐 아니라, 

사찰이 아닌 영역들마저도  

모두 다 본인 사찰로 된 것이다. 


그런데 이로 인해 

사찰 주지 스님들로부터 

단 한번의 항의를 들어 본 적이 없고 

각 아파트나 공장 소유주들로부터 

왜 아파트나 공장을 

사찰로 용도변경하는가 

이런 항의를 들어 본 적이 없다. 



그런데 알고보면 

이것이 바로 지록위마 시감상의 

효과인 것이다. 

 


그래서 지록위마 시감상 방식은 

잘못 사용하면 

무간지옥행인데 


잘 사용하면 

불국토 사용 티겟을 

곧바로 발부받는 요건이 된다고 

이해할 수 있다. 







여래는 오고감이 없는데 

어떻게 오고가는가. 


그 질문에 대한 답으로는 

다음과 같은 경전 구절이 

대단히 적절한 내용을 제시한다고 본다. 



념(기억)과 혜(지혜)와 행을 도로로 삼고 

지(사마타)와 관(비발사나- 정려, 선정, 삼매수행)을 자동차로 삼아 

그 도로를 오가고 

 

그래서 공 무상 무원 해탈문에 들어서고 

그래서 불국토에서 

공덕의 궁전의 법왕으로 임한다. 


이런 내용이다. 


이것이 바로 

수행자가 자신이 수행에 임하는 현실을 놓고 


실로 그런 것을 얻을 수 없기에 

그런 까닭에 그렇게 칭한다는 

구조의 어구를 사용할만한 부분인 것이다.

[...]


doctr 님이 

누가 황제가 된다해도

해가 뜨는 것을 지게 할 도리도 없고 

지는 해를 뜨게 할 도리가 없어서 

인과관계상 본래 행할 수 없는 일을 

나타나게 할 도리는 없는 것은 

매 마찬가지고 


반면 서 있고자 하는 이를 서게 하고 

앉고자 하는 이를 앉게 하고 

식사하고자 하는 이를 식사하게 하고 

잠자고자 하는 이를 자게 하고 

쉬고자 하는 이를 쉬게 하는 것은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닌가. 


그런 사정을 제시한 적이 있는데 


그런 가운데 

이미 뜨고 있는 해를 보고 뜨라고 하고 

이미 지고 있는 해를 보고 지라고 하고 


서 있는 이를 보고 서 있으라고 하고 

식사하고 있는 이를 보고 식사하라고 하면 


이처럼 무소불위의 힘을 갖고 

세상을 뜻대로 행하는 이가 

어디 있겠는가. 


doctr 님은 그런 가운데 

세계의 조화를 위해서 

세계가 위험한 상태가 되지 않도록 

자신이 늘 위치를 잡아 

균형을 맞추기 위해 노력한다고 하는데 


mun 님과는 또 다른 스타일의 

망상증세라고 할 만하다. 



mun 님은 그렇게 단순하지 않고 

자신의 뜻에 맞지 않는 상대를 

체포해 곧바로 보복 응징 조치를 취하는 가운데 

시정 조치를 하게 하고 

상대가 안인 수행에 임해서 

잘 성취할 수 있도록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doctr 님은 

결국 자신의 마음의 경계를 변화시켜 즐거움을 얻는 

화락천의 상태에 비유할 만하고 


mun 님은 자신의 경계 뿐만 아니라 

외부의 경계까지 변화시켜 즐거움을 얻는 

타화자재천의 상태에 비유할 만하다. 


그런데 또 기본적으로 

망상증상이 심하다는 공통점을 

두 분에게서 발견하게 되는 것이다. 












>>>

어떤 희망을 갖고 노력했는데 

결과가 충격적으로 나왔다고 생각하는 경우가 있다. 


그런데 잘 생각해보면 이 말은 

소원을 성취하기 위해 누군가 노력을 할 때 

대부분 당사자들이 그 결과를 보고 갖는 감정과 

비슷하다고 할 수 있다.


자신이 무언가 희망하고 노력하는데 

자신의 희망과 그대로 일치한 내용을 얻는 경우가 

그렇게 많지는 않은 것이다. 


자신은 A 를 희망하고 노력했는데 

결과는 b 를 얻었다. 

그런 경우가 대부분인 것이다. 


역사적으로 어떤 원치않는 사태 

예를 들어 전쟁이라거나 

나라가 없어진다거나 

큰 재난을 당한다거나 

그런 일도 사정이 같다. 


어느날 갑자기 전쟁이 시작되어서 

그렇게 되버린 것이고 

재난도 갑자기 다리가 무너졌다거나 

빌딩이 붕괴되었다거나 

그런 식이지 

사람들이 예측을 다 미리 한 상태에서 

그 일이 발생했다고 하는 경우는 드문 것이다. 

 


그래서 현실을 놓고 보면 

미래를 미리 다 잘 예측하면서 

살아가는 경우는 대단히 드물고 

대부분 A 를 희망하고 노력했는데 

결과는 b 를 얻었다. 

그런 경우가 대부분인 것이다. 


주식을 투자하던 

사업을 하던 

그런 내용이 대부분이다. 



그런데 그런 경우 

처음 자신이 희망한 a 에 너무 강한 집착을 갖거나 

기대를 갖고 임한다면 

그 b 라는 결과를 대하고 

얼마나 충격과 실망이 크겠는가. 


그래서 월드컵에서 브라질을 응원한 

사람은 독일과 시합해서 브라질이 대패를 당하자 

그만 자살까지 하는 사례도 보고가 되곤 했던 것이다. 


단지 공을 가지고 친선을 위해 노는 것 뿐인데도 

거기에 너무 집착을 하다보면 

자신의 기대와 다른 결과를 놓고 

충격을 받고 그런 일을 행하기도 하는 것이다. 


또 반대로 위와 같은 승부에서 

상대가 너무 강해 전혀 이길 줄 몰랐는데 

거꾸로 기적적으로 이겼다거나 

기타 자신이 도저히 이루기 힘들다고 본 

소원이 성취되었다거나 할 때도 

또 그런 충격을 받기 쉽다. 


심장이 약하면 공포영화를 볼 때는 

특히 조심해야 되는 것이다. 

예측을 하지 않았는데 

갑자기 쿵 하고 무엇이 나타나거나 해서 

사람을 놀라게 하는 경우가 많은 것이다. 


그런데 사실 그렇게 심하게 

집착하지 않는 경우는 

현실의 모습이 이런 식으로 전개되는 것이 

오히려 바람직하다고 할 수도 있다. 


미리 미래의 일을 다 알고 보는 상태에서 

그 내용을 확인하는 입장에서 

매 현실을 대한다면 

어떻게 보면 영화를 두 번 보거나 

소설을 두 번 읽는 그런 상태라고 할 것인데 

그러면 조금은 덜 흥미롭고 덜 재미를 느끼게 되지 않겠는가. 


그런다고 또 미래의 일이 발생하기 전까지는 

그에 대해 미리 전혀 감을 잡을 수 없을 정도로 

아주 깜깜해서 

매 순간 대하는 내용이 다 

미리 예측하지 못한 내용들뿐이라면 

또 얼마나 매 순간 어지럽겠는가. 


그래서 현실은 적절하게 예측도 해보면서 

그러나 막상 결과는 그 예측과는 다른 내용도 

가끔 얻어가면서 

그렇게 지내는 것이 좋다고 보게 된다. 


[...]

사람이 생노병사를 겪는 과정도 그렇고  
자연의 모습도 그렇고 
미리 모든 것을 다 예측하고 
그렇게 예측한 내용만 대하게 되는 것은 
아니라고 보게 된다. 


그런데 여하튼 어떤 a 에 대해 
강한 희망을 갖고 있는데 

그 희망이 자신의 뜻대로 그렇게 성취되던 
되지 않던 언제나 
그로 인해 스트레스를 받지 않고 
걱정도 하지 않게 되고 
늘 어떤 결과를 맞이해도 좋고 좋은 상태가 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자세히 보면 내용이 길게 되지만, 
간단하게 그 결론적 내용만 제시하면 
다음과 같다. 


우선 성취되면 대단히 좋은 뜻 
즉, 
온 생명에게 모두 차별없이 아름답고 가치있고 선하고 좋고 좋은 뜻을 
갖고 임하는 것이 우선 좋은데 

설령 성취가 되지 않아도 
기본적으로 아름답고 가치있고 선하고 
좋고 좋은 상태라거나, 
설령 성취가 되지 않아도 오히려 그보다 
더 좋고 좋은 상태가 성취되면 역시 좋은 것이고 

또 한편 
개인적인 입장에서는 
그렇게 갖는 희망이나 뜻이 
성취가 되지 않아도 좋지만, 되어도 더욱 좋다고 여기고 대하거나, 
성취가 되어도 좋지만, 되지 않아도 더욱 좋다고 여기고 대하면 
어느 경우나 좋다고 말할 수 있다. 


위 문장 자체에 위 경우 
현실에서 어느 경우가 되어도 다 좋다고 
이미 적혀 있지 않은가. 
그러니 그래서 어느 경우나 다 좋게 되는 것이고 

사정이 그렇다는 것을 이해하게 되면 
그렇기 때문에 
그런 매 내용들을 놓고 

이렇게 되면 큰 일이다. 
또 저렇게 되면 대단히 좋다. 
그래서 꼭 그렇게 되어야 한다. 
그리고 그렇게 되지 않게 되면 큰 일이라고 매번 불안해하고 걱정하고 
매순간 조마조마해가며 긴장하거나 초조해하거나 
두려워하거나 하지 않는 상태가 될 수 있는 것이기도 하다. 

그런데 또 무언가를 행할 때 
그렇게 늘 불안해하고 긴장을 하고 
집착을 갖고 임하면 
그것을 정말 원만하게 잘 성취할 수 있는가를 놓고 보면 
오히려 그 반대라는 것도 보게 된다. 

운동선수만 해도 시합에서 그렇게 
긴장하고 꼭 잘해야겠다고 임하는 경우는 
오히려 그 결과가 별로 좋지 않고 

더 나아가 시합 중에 시합에 임하는 매너도 별로 좋다고 
평가받지 못하게 되고 

시합후에도 승패나 그 결과와 관계없이 
그 선수들의 태도에 대해서 
비난을 하게 되는 경우가 많다. 

그런데 그것은 어떤 운동시합만 그런 것이 아니고 
세상의 모든 일이 다 그와 같은 성격을 
갖고 있는 것이다. 


정말 선수들이 열심히 잘 하고 
그래서 결과가 어떻든 
그것을 지켜보는 이들이 모두 
좋다고 칭찬하게 되는 경우는 
그와는 정반대로 각 선수들이나 당사자들이 임할 때 
그렇다고 또 보게 되는 것이다. 


억울하게 판정이 내려져 패배했는데도 
그 선수가 오히려 이긴 이와 함께 기뻐하기도 하고 
격려도 하고 또 이긴 선수는 오히려 상대를 칭찬하고 
겸손해 하고 
또 이로 인해 서로 화목하게 지내는 모습 등은 

앞의 방식으로 선수들이 임할 때는 보기 힘들다고 
보게 되는 것이다. 

그런데 그런 차이를 만들어 내는 기본 원인은 
각 당사자들이 그 희망이나 현실에 대해 
어떤 기본적인 자세로 임하는가에 달려 있다. 

그것이 곧 전도망상과 집착을 갖고 
임하는가 아닌가의 차이이기도 하다. 

꼭 ~ 해야 한다고 집착을 갖고 임하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무언가를 추구해나가게 되고 
그리고 그것이 매 경우 뜻과 같을 수 없으므로 
그 때마다 문제가 발생하게 되는 것이라고 
간단히 사정을 이해할 수 있다. 

현실에서 사건이나 사고로 보고받는 내용은 
그런 사건 사고에 관련된 당사자가 하나같이 
그렇게 임했기에 그렇게 되었다는 사정을 
공통점으로 찾아볼 수 있는 것이기도 하다. 




그래서 어느 경우나 좋고 좋으려면 
그 희망의 내용이나 
그 희망을 대하는 각 당사자의 기본 입장이 
앞에 기술한 형태로 되어야 한다는 것을 
결론으로 제시하게 된다. 

그렇지 않으면 그렇게 되기 힘든 것이다. 


문제는 문장 자체로는 너무 당연한 내용을 
기재해서 그렇다고 보게 되는 내용이지만, 
그 내용처럼 어떻게 현실에서도  
그렇게 만들어 나가는가 하는 것이 
문제일 뿐이다. 



각 당사자가 갖는 소원이 
정말 내용이 좋고 좋게 만드는 것도 
문제지만, 

그 소원이 어떤 내용이던 
그런 희망을 갖는 이는 
그 내용이 좋다고 보고 그런 희망을 갖는 것인데 

어떻게 희망이 성취되지 않은 현실에서도 
그 상태가 단순히 무방하고 괜찮을 뿐 아니라 
오히려 좋다거나 
또는 더 나아가 오히려 성취된 것보다 
더욱 좋고 좋다고 여기면서 임할 수 있는가. 


생각해보면 자체적으로 말이 안 되는 것 같은데 
그런데 그것이 바로 수행의 방안과 직결되는 내용이기도 하고 
사실은 간단하게 성취할 수 있는 내용이기도 하다. 



간단하게 이 내용을 보면 
희망하는 내용은 좋다고 보는 내용이므로 
그것이 성취되는 경우에 좋다고 보는 것은 
너무 당연할 것이다. 


그런데 그런 희망이 
기대와 달리 성취되지 않은 경우에까지 
무엇이 좋다고 할 것인가. 

그런데 사실은 
그 상태가 더 좋다고 볼 내용이 대단히 많은 것이다. 

그래서 구체적으로 각 당사자가 
그것을 볼 수 있게 되면 
그렇게 된다고 할 수 있는 것이다. 

[...]


소원의 성취는 현실에서 

대단히 중요한 문제이고 

매 순간 이것에 초점을 맞추고 삶을 살아가는 것인데 

그런데 삶에서 더 중요한 것은 

바로 위 내용을 취득하여서 

어느 경우나 좋고 좋은 상태 

그리고 더 나아가 매 순간 

아름답고 가치있고 선하고 좋고 좋은 내용을 

성취하고 얻어나가는 것이 더 좋은 것이다. 


[...]



일찍이 좋고 나쁨의 문제에 대해 

MUN 님이 연구주제로 삼고 오래 연구를 진행한 

주제 암파리 화두 

즉 왜 암파리는 수파리를 좋아하고 

수파리는 암파리를 좋아하고 

대변이나 썩은 생선을 좋아하고 

그러나 정작 암파리는 아름다운 여배우나 남배우를 두려워하는가. 


이런 연구주제이기도 한 것이다. 


그래서 암파리 하나를 놓거나 

세상의 그 무엇을 놓고 

극과 극의 반응를 달리 보이는 사례는 

무수하게 찾을 수 있는 것이다. 



그래서 길을 가다가 

다른 이를 만나 대화를 할 때 

자신과 정반대의 견해를 갖는 이를 만나게 되더라도 

너무 놀라면 안 되는 것이다. 



어제 여행을 마치고 연구실로 귀환하는데 

어느 병목지점에서는 차가 너무 달리지 않아서 

자리에 가만히 앉아 있는 것이 

엉덩이까지 아프고 너무 답답해서 

힘들었다. 


그러나 차밖으로 나올 수도 없어서 

새로운 삼매 운동까지 개발했었다. 


여기에 간단히 방안을 소개하기로 한다. 


이것은 사실 현실을 살면서 

무언가 놀랄 만한 일을 경험하여 

전신에 소름이 돋을 때 


그것이 사실은 마음 하나의 변화로  

그렇게 된다는 사실을 이해함으로써 

쉽게 현실에서 성취가능한 내용이기도 하다. 


자리를 일어나 운동을 하거나 팔다리를 펴거나 해서 

운동할 수 없는데 어떻게 운동을 할 수 있는가. 

이것도 사실은 마찬가지다. 


잘 미리 익혀두면 

나중에 마비 상태로 장시간 

누어 지내는 가운데 

일정 부분이 썩어간다거나 하는데도 

다른 이의 도움을 요청할 수 없을 때 

응용할만한 내용이라고 본다. 


그러나 아무리 차에 갇혀 있어도 

마비 상태까지는 아니므로 

그렇게 까지는 할 필요는 없지만, 

여하튼 원리는 같은 것이다. 


발가락이나 손가락을 놓고 

그것이 서로 떨어져 있는데 

그것을 서로 마주 대려고 한다고 마음으로 

생각을 가져보는 것이다. 

그러나 마주대면 합선이 일어나서 

손가락 등이 다 타버리므로 

대면 또 안 되는 것이다. 


엉덩이가 아프면 엉덩이에도 

마음을 집중시켜 그렇게 임하는 것이다. 


조금 더 응용하면 

다라니나 게송을 외우면서 

생각이 안 나거나 또는 아주 잘 나면 

그 부위를 그렇게 태워 버리는 것이다. 


사실 이는 대장경에 

정려 수행의 방안으로 제시되는 내용을 

약간 각색해서 응용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가섭존자는 두타수행의 일인자로서 

석가모니 부처님의 제자들이 

다 열반에 드는데 

석가모니 부처님의 지시에 의해 

열반에 들지 않고 

사바세계에 그대로 두타수행을 하는 가운데 

선정에 든 다음 

56억 년 이후 미륵보살님이 하산하셔서 

부처님이 되어 중생들을 제도하실 때 

미륵부처님을 그런 상태로 만난 다음에 

떠나라고 지시를 받았다는 것이다. 


그래서 경전에도 그 내용이 그렇게 제시되는데 


그런데 상식적으로 말이 안 된다. 

그리고 그렇다면 

지금 현실 어느 장소에서 

그렇게 계신 것인가. 


그리고 정말 그렇다면 어떻게 가섭존자가 

1년도 아니고 10년도 아니고 

그렇게 장구한 세월동안 

그렇게 그 자세로 임할 수 있겠는가. 


이렇게 의문을 가질 만하다. 

그러나 그것은 일반인의 상식적 입장일 뿐이고 

수행자의 입장에서는 

그 사정을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고 보게 된다. 



현실을 놓고 쉽게 이해하려면 

몇 KG 안 되는 물질로도 

인류 전체가 몇 년 사용할 에너지를 다 

얻을 수도 있지만, 

그러나 그 방안을 모르면 

설령 지구를 다 쪼개고 부서도 

단 하루도 제대로 살아갈 도리가 없는 것과 

사정이 마찬가지다. 


그래서 자신의 몸을 하나 놓고도 

그렇게 할 수 있게 변화를 시키는 것이 

곧 수행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너무 차이가 심하면 

지금 다루는 주제처럼 

다 극과 극의 반응을 보이게 되고 

그래서 어떤 경우는 너무 심한 구라라고 

여기기도 하는데 

여하튼 경전의 입장은 그것이 

곧 수행의 내용이라고 제시하는 것이다. 



이런 것은 아니지만, 

여하튼 대장경에서는 

처음 정려 수행을 시작해서 

근본정신이 맑아지게 되고  

그래서 처음 색계에 진입하여 

가이드로 초선양을 만날 때 


마치 우주선이 대기권을 벗어나거나 

들어올 무렵 

심한 대기권과의 마찰과 진동이 일어나게 되듯 

수행자 역시도 전신에 진동이 일어나게 

된다고 제시된다. 


그런데 

결국 차 안에서 차가 나가지 못해 

꼼짝하지 않고 갇혀 있을 때 

이런 수행방안을 응용하면 

곧바로 심신이 상쾌해짐을 경험할 수 있다고 

보는 것이다. 


본인도 엉덩이가 상당히 아픈데 

이것은 몇년전부터 혈액 순환이 전신에 

잘 안 되어서 

연구실 안에서도 오래 앉아 연구하다 보면 

자주 경험하는 일이다. 


그런데 어제 너무 답답해서 

다라니와 경전 제목을 외우면서 

그렇게 임하니까 

발가락 말초혈관까지 잘 피도 통하고 

더 나아가 내장까지도 원할해지는 

것을 경험했던 것이다. 


여하튼 이런 내용도 소개하는 한편 

여기서 이런 내용을 제시하는 사정은 

이와 다른 취지다. 


차가 몇 시간동안 답답하게 나아갈 때는 

그런 상태가 견디게 힘들게 하더니 


그 병목지점을 지나서부터는 

운전을 하는 이가 

너무 심하게 운전을 과속하는 가운데 

깜작 깜작 놀라게 하면서 

브레이크를 잡고는 해서 


자면서 그 때마다 깜작깜작 놀라서 

깨곤 했는데 

병목지점을 지나니 오히려 

차가 굼벵이처럼 갇혀 지내던 순간이 

더 그립게 된다는 것을 여기서 

제시하고자 한 이야기다. 


자다가 왜 깜작 놀라면서 

깨게 되는가. 


죽더라도 자신의 마지막 장면과 

그 사정을 이해하고 

죽어야 하지 않겠는가 

이런 심정으로 

왜 갑자기 브레이크를 잡는가. 

그런 것을 확인해보기 위해서 

또 잠을 깨고 눈을 떠서 상황을 

살펴보게 되기 때문이다. 



이것이 사실은 각 경우마다 

극과 극의 반응을 하게 되는  

한 사례가 또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어서 

여기에 적어 본 것이다. 



그런데 앞의 경우는 

매 경우마다 

굼벵이처럼 가면 굼벵이처럼 가서 고통을 느끼고 

너무 빨리 가면 또 사고 위험성이 증대해서 불안과 고통을 느끼고 

그런 것이라고 할 수도 있다. 


그런데 그 각 경우마다 

또 다른 면을 취하면 

이 경우는 이렇게  수행을 해서 좋고 

또 다른 경우는 또 다르게 수행을 해서 좋은 것이다. 

이런 내용을 여기서 제시하는 것이다. 


[...]

모든 생명이 다 피할 수 없다고 보는 
어려운 문제에 
생노병사 현상이 병목으로 자리잡고 있는 것이다. 

그러니 수행자가 이것을 해결하고자 
수행에 임하는 것인데 
이 문제가 해결되면 
같은 원리로 모든 문제가 그렇게 
다 해결된다고 보는 것이지만, 

그러나 앞 문제가 해결되지 않으면 

다른 문제가 다 해결되어도 
결국 생노병사의 병목지점에서 
그 문제가 해결되지 않아 
결국 마찬가지 상태가 되는 것이고 

사실은 사정이 이렇기에 
바로 이와 관련하여 
나머지 모든 문제도 다 잘 해결이 
안 되게 되는 것이기도 하다. 

알고보면 각 문제가 해결이 잘 안 되는 것은 
바로 병목지점의 문제와 
그것이 모두 그렇게 관련이 
되기 때문이다. 

비유하면 병목지점에서 정체가 되기에 
총 교통 시간을 맞추기 위해서 
나머지 시간에 심한 과속을 하는 것이기도 하고 
그래서 사고가 발생하게 되는 것과 
사정이 비슷한 것이다. 

원래 
수행자가 수행을 통해 생노병사라는 병목지점의 문제를 잘 해결하면 
이로 인해 나머지 삶의 문제도 다 
잘 해결하고 성취할 수 있다고 제시되는 것도 
사실은 그런 사정이다. 


그러나 여하튼 각 문제마다 
그 문제를 해결하는 기본 원리가 같은 것이다. 


그런데 처음 왜 같은 내용을 놓고 
매 주체가 그렇게 극과 극의 
반응을 보이게 되는가 하는 것은 

그 기본사정이 그 각 주체가 
전도몽상과 집착 편집증상을 갖고 
있기에 그렇다라는 것부터 
잘 이해할 필요가 있다. 

어떻게 보면 그렇게 
그런 상태로 태어나 
그렇게 생활해 온 가운데 
자연스럽게 그런 최면 전도몽상 상태에 
묶여 지내게 된 것이 
바로 그 근본 원인이라고 이해해야 하는 것이다. 

그런 사정을 이해하기 위해서 
본인이 가끔 최면술사가 최면을 거는 
내용을 자료로 이용하는데 

왜 같은 내용을 놓고 
어떤 이는 지극하게 호감을 표하고 
어떤 이는 반대로 지극하게 혐오를 표하는가 

알고보면 그 내용에 
그런 것을 얻을 수 없다는 것이 
가장 기본 핵심  사정이고 

그런 상태에서 각 주체가 
그렇게 전도몽상을 일으키고 
집착을 갖고 임한다는 것이 
두번째 기본 사정인 것이다. 

그러니 그 사정을 이해하면 
그런 증상이 치유되고 
그 문제를 벗어날 계기도 마련이 된다고 
볼 수 있다. 

그리고 심지어 그런 상태가 되면 
자신이 소원하는 바도 
훨씬 잘 성취할 수 있게도 되는 것이다. 


쉬기 전에 
관련 자료를 찾아서 올리고 
쉬기로 한다. 




서로 모르는 상대에게 깊은 애정을 느끼게 하고 책임은 상대에게 돌리게 되는 최면
- https://www.youtube.com/watch?v=rl8KIGab2hk - 

Two hypnotized guys fall deeply in love at Marc Savard's show! 






가장 섹시한 남성으로 보이게 하는 최면

Hypnotist in Las Vegas is the Sexiest Man Alive! Watch and See!

https://www.youtube.com/watch?v=DUDqgZ_iwrM




가장 혐오스럽게 보이게 하는 최면 

Hypnosis Video - Most Disgusting Man Alive

https://www.youtube.com/watch?v=fpmshRXuYu0







사랑은 지극히 힘든 고난과 공포를 다 극복하게 해준다. 

Want Girls to ALWAYS Love You? Hypnotist Marc Savard Shows You How!

https://www.youtube.com/watch?v=AArKwwGYCIA





잃어도 잃은 것이 없는데 슬퍼하고 얻어도 얻은 것이 없는데 기뻐한다. 

https://www.youtube.com/watch?v=9Mdz_GKZ0X4

Hypnotist Marc Savard makes every volunteer on stage CRY!





최면 걸린 상태에서도 최면걸린 이의 기본 심성을 엿볼 수 있다. - 혁대를 뱀으로 보이게 하는 최면 

Snakes on a Stage! Starring Samuel Jackson and Marc Savard

https://www.youtube.com/watch?v=y6ynovdrJM0




서커스나 마술이나 그리고 최면쇼는 
현실에서 보기 힘든 장면을 보여주는 
재미있는 현상이라고 볼 수 있는데 

사실은 현실이 이와 같다는 사정을 
이를 통해서 잘 이해해야 하는 것이다. 


처음에는 잘 안 되는데 
또 하고 또 하다 보면 
나중에는 어떻게 되는가 

사람들이 보고 다 놀라게 될 정도로 
잘 한다. 
이것이 서커스다. 

그런데 처음에는 잘 안 된다고 보지만, 
그러나 자꾸 노력하고 
외우고 하다보면 
나중에는 아주 잘 되는 것이 
수행이기도 한 것이다. 


그리고 
현상을 나타나게 하는 과정이나  
인과관계는 다른 것인데 
그러나 
마치 A 와 B 가 개입해서 
c 가 나타나게 하는 것처럼 여기게 하는 것이 
마술이라면 

현실에서 사람들이 
번개가 칠 때 
마치 번개가 천둥소리를 낸 것처럼 
이해하게 되고 

손을 마주치면 손뼉소리가 난다면 
자신이 눈으로 본 그 두 손이 
그 소리를 낸 것처럼 이해하는 
현실 과정이 
바로 그런 것과 성격이 같다고 이해해야 하는 것이다. 



그리고 본래 
관중들이 다 보듯 
그 상황에 그런 내용에 해당한 것이 없는데도 
최면에 걸리면 
그런 것이 있다거나 없다고 하면서 
반응을 하는 것이 최면쇼의 내용이라면 

현실에서 
일반적으로 어떤 희망을 놓고 
무엇이 성취되었다거나 
무엇이 성취가 되지 않았다거나 할 때나 
또는 현실이 무엇이라고 생각하는 각 경우에서 

실재나 감각현실에 
그런 내용을 하나도 얻을 수 없는데도 
각 생명이 그런 내용을 대해 그렇게 
생각하고 반응하는 과정 자체도 
이와 성격이 같다고 잘 이해해야 하는 것이다. 

이런 쇼는 쇼고 
한 번 보면 그렇구나 하고 지나치기 쉽고 
나중에는 
서커스 하는 이가 
공중 9 회전을 선보이고 
123 층 빌딩에서 외줄타기 쇼를 보여주고 
123 층 빌딩에서 낙하하는 모습을 보여줘도 
자신은 그 하나도 하지 못하면서 
서커스 하는 이가 그렇게 하면 
그저 그렇다 

서커스 하는 이가 
공중 그네를 타거나 
외줄을 타다가 떨어지면 
그것이 놀라운 일이지만, 
안 떨어지고 잘 하면 
놀라운 일이 아니고 당연한 일이다 
이렇게 덤덤하게 대하기가 쉬운데 

사실 알고 보면 
사정이 하나하나 그렇지 않은 것이고 

그래서 수행과 관련해서는 
이런 하나하나의 내용을 놓고 
깊이 음미할 부분이 많은 것이다. 

그것이 결국 라이터 화두와도 관련이 된다. 

라이터를 
그 부품을 하나하나 직접 만들고 구해서 
조립하여 직접 만들려면 
얼마나 힘든가. 

그렇다고 현실에서 
라이터로 불을 켜서 
담배를 피운다고 
기적이라고 바라보는 이는 
도데체 누가 있는가. 

사정이 다 그런 것이다. 

그래서 이런 두 극과 극의 
내용을 하나 놓고 

수행을 잘 임하는 것이 
대단히 중요하다고 보는 것이다. 


최면쇼를 보면 
관객입장에서는 
최면 걸린 이들이 하는 반응이 
너무 엉뚱하고 우스꽝스러워서 
배를 잡고 구를만 한데 

그것이 최면걸린 이의 입장에서는 
하나같이 진지하게 대하지 않을 도리가 없는 
내용이기도 한 것이다. 


그런데 바로 현실에서 일반적으로 
대하는 상황이 
바로 이와 같다는 것이 
경전에서 제시하고자 하는 핵심 사항이기도 한 것이다. 

그리고 아무리 이론적으로 이해해도 
그처럼 전도몽상과 집착에 묶여 있는 상태에서 
스스로 벗어나오지 않으면 
결국 앞과 마찬가지로 
매 상황마다 우스꽝스러운 반응을 
매우 진지하게 행하면서 임할 도리 외에는 
별로 없는 것이다. 

그리고 이것이 각 생명이 
생사 고통을 각 세계에 묶여 끌려다니면서 
받아나가는 기본 과정이기도 한 것이다. 


글을 적다가 
올린 자료를 보면서 

Beauty is skin deep
이란 구절을 갑자기 떠올리게 되는데 

같은 구절을 두고도 시감상과 해석방식이 
다른 경우가 많다. 

어떤 이는 
아름다움은 피부의 두께에 의해 결정된다. 
라고 해석하기도 하고 

어떤 이는 
아름다움은 피부 깊이 마음의 내용에 있는 것이다. 
라고 해석하기도 하는데 

본인은 이 구절을 그렇게 보는 것은 아니다. 

mun님의 암파리 화두는 
사실은 경전에서 대단히 아름다운 여인으로 소개하는 
암바알리라는 여인을 두고 시작한 것으로 듣고 있다. 

그런데 부처님도 이 암바알리라는 여인이 
수행처를 방문할 때마다 
제자들을 모두 모이게 해서 
수행방안 중 부정관을 재차 가르치면서 
주의를 환기시키는 내용을 경전에서 빈번히 볼 수 있다. 

부정관이란, 
예를 들어 아름다운 여인이란 
알고 보면 움직이는 변기와 같아서 
몸 안에 대변이나 소변 피 고름 땀 
그리고 각종 벌레를 그 안에 담고 
다니는데 
다만 그 겉포장만 아름답게 가죽으로 싸고 
향을 뿌려 다니는 것이다. 

이런 식으로 
자칫 제자들이 탐욕을 일으키고 
그에 집착을 일으켜 접착되기 쉬운 내용을 놓고 
그 안에 숨겨져 있는 더러운 내용들을 관하여 
그 집착을 끊고 수행에 전념할 수 있도록 하는 
수행방안이다. 

그래서 이는 좋다고 보고 집착을 갖는 내용에 
대응해 사용하는 수행방안인데 

그러나 반대로 더럽게 여겨지고 혐오스럽고 
가까이 가면 병이 옳겨올 것 같은 
추한 모습의 병든 노파를 수행자가 대할 때는 
어떻게 임하라고 하는가하면 
사실은 앞과는 반대의 내용을 가지고 
수행에 임하라고 제시하는 것이기도 하다. 
그것은 알고보면 앞의 부정관과는 정반대의 
자비관의 내용이기도 한 것이다. 

알고보면 누구가 옮을까 두려워하는 
그 심한 전염병에 걸린 그 노파는 
관세음보살님의 화신이기도 하고 
장차 부처님이 되실 분이기도 하다. 
그리고 세세생생 자신에게 
젖을 먹여주고 키워주고 
은혜를 베풀어준 어머님이기도 한 것이다. 

이런 식으로 관하고 상대를 대하라고 
가르치는 내용이기도 하다. 

그것도 잘 안 되면 
자신이 죽자살자 좋아했던 
어떤 첫 사랑 애인이 변화한 모습이기도 하다고 
생각하면서 임하는 것도 한 방안이다. 


그래서 이처럼 각 경우마다 
그런 망상에 바탕해 집착증을 일으키고 
문제가 발생할 우려가 있을 때마다. 
이런 증상을 중화시키고 치유할 개별 처방을 
달리 제시하는 것이기도 하다. 

그런데 이렇게 두 극과 극의 처방을 
수행방안으로 제시받는다면 
이 가운데 어떤 내용이 
그 대상의 본 정체이겠는가. 

이것도 퀴즈라면 퀴즈다. 

그래서 근본적으로는 
이런 증상을 일으키게 하는 
무명(어리석음)의 증상을 치유하려면, 

먼저 인과문제부터 잘 살피고 
각 세계의 각 내용의 본 정체를 잘 살피는 
수행이 또 필요한 것이다. 


그런 끝에 
그 정체를 알고 보면 
사실은 그 모든 것의 정체는 
무아 무자성 공하다. 

그래서 
무엇을 a 라고 생각하고 대할 경우 
그런 a 에서는  
실재로는 그런 것을 얻을 수 없다. 
그러나 그런 까닭에 그런 내용을 얻는 것이고 
그것을 또 각기 그처럼 a 라고 칭하는 것이다. 

이런 관계를 
금강경에서 제시하는 것이다. 




그러니 어떤 이가 자신의 소원이 
뜻대로 성취되었다고 하는 상태가 
a 라면 
그 a 는 그의 입장에서는 
다른 b 나 c 등과는 분명 다르고 
그래서 그 a 가 좋다고 하는 것인데 

그 a라고 보는 그 내용에는 
그런 a 에 해당하는 진짜의 내용이 없고 
또 그런 내용을 실로 얻을 수 없다는 사정을 
함께 이해해야 한다. 

그런 가운데 
그 주체는 
b 는 아니고 
a 는 a 라고 보게 되는 것이고 
그래서 a 는 b 와 달리 
그런 뜻이 성취된 상태라고 본다는 의미다. 


그러니 beatuty is skin deep 이란 
어떻게 이 구절을 음미해야 적절한 것인가. 


이렇게 보면 
그 안에 똥 오줌 피 고름이 가득한 것임을 관하는데 
그러나 그런 상태에서도 
그것은 본래 극히 청정한 니르바나이기도 하고 

그래서 그 각각을 다 자비로 대하고 
그 각각을 모두 보리를 얻고 
생사고통에서 해탈과 니르바나를 얻게 하는 것이 
중요한 것이다. 

그래서 
현실에서 좁고 짧고 얕게 관찰하고 임하면 
그 본 정체를 그렇게 보지 못하고 
어리석에 임하게 마련이고 
겉으로 외관만 살짝 보고 
임하면 매번 당황하셨나용 하는 사태에 
처하게 되고 실망하고 고통받게 되는 것이므로 

그와 달리 넓고 길고 깊게 관찰하고 임해야 
그 본 정체를 올바로 관하고 
진정 아름답고 청정한 니르바나에
여여하게 임할 수가 있다고 제시하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아름답고 가치있고 선한 것은 
skin deep 에서 찾아야 한다고 시감상을 하게 되는 것이다. 


[...]

앞에서 

금강경에서 제시된 유명한 구절 


실무고명 

즉비고명 

이런 구절에 해당한 내용을 제시했는데 

그것을 관하고 

왜 수행을 그렇게 하면 

그런 상태에서 무량한 복덕과 지혜를 얻게 된다고 

제시하는가 

도무지 이해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그리고 당장 자신에게 눈앞에 좋다고 보는 내용만 

붙잡고 임하는 것이 대부분의 현실이기도 하다. 


사실 무언가가 잘 성취가 되지 않는 사정은 

그 당사자가 그렇게 임하기에 그런 것이고 

더 나아가 그 당사자만 그렇지 않고 

세계에 임하는 수많은 생명이 다 그렇게 임하기에 

더더욱 그런 것이기도 하다. 


[...]


어떤 이가 보리심을 일으켜서 
서원을 일으켜 임하지 않는다면 
그냥 모든 것을 놓고 
아무 일도 하지 않고 
그냥 쉬는 것이 
그 자신을 위해서도 좋고 
또 온 생명을 위해서도 좋은 것이라고 보아야 한다. 

그러나 또 그 반대로 
보리심을 일으킨 상태는 
또 사정이 그와 반대라고 보게 된다. 


가끔 어떤 노래에서 
그 많은 것을 다 누가 먹지 
이런 의문을 수행주제이자 화두로 던지는 노래를 듣기도 하는데 

그러나 라이터 화두를 놓고 연구하다 보면 
그렇게 만들기 어렵고 힘든 수많은 것들을 
다 누가 그렇게 만들어 내는가 
이런 생각도 하게 되는데 

그 하나하나마다 앞과 같은 사정이 
다 관련되어 있는 것이다. 


그래서 그 성격과 외관이 같다고 보지만, 
그 무량한 좋은 것들을 
누가 다 만들고 다 먹고 하는가 하는 문제를 놓고 

이 문제에 대해 
보리심을 바탕으로 임하면 
어느 경우나 
아무런 문제가 없다고 보고 
오히려 그것을 권장하게 되는데 


그 반대가 되면 
설령 그것이 남이 먹다 남은 
뼈다귀 하나라도 
그것이 큰 문제가 된다고 
보게 되는 것이기도 하다. 




본인이 글에서 최면과 관련한 자료를 
올려 놓았는데 
본인은 최면을 걸지 못하는 입장이지만, 
내용은 쉽게 보게 된다. 

그런데 최면을 남에게 걸지 못해도 
본인이 어떤 이를 평생 
본인을 쉼없이 쫒아다니게 할 방안은 알고 있다. 

실험을 해보자. 

거리에서 어떤 사람이 있는데 
이 사람을 병원에 강제 입원시키려면 
몇 사람이 동원되어야 
그 사람을 병원에 그 뜻과 다르게 
강제 입원시킬 수 있다고 보는가. 

상당히 힘든 것이다. 
적어도 본인은 혼자 그렇게 하지 못한다고 
쉽게 사정을 이해하게 된다. 

그런데 앞과 같이 할 수 있는 것은 
사실은 간단하다. 

전철을 타거나 거리를 걷거나 
만나는 이들은 대부분 
다 선량하고 성인군자의 외관을 갖고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알고보면 이들 하나하나가 
다 동물원에서 뛰쳐 나온 사자를 만나면 
이를 제압할 수 있는 지혜와 능력을 
갖고 있는 것이기도 하다. 

물론 방안을 모르면 
사자에게 쫒기고 잡아 먹힌다고 보지만, 
그러나 인간은 사자를 능가하는 지혜를 
갖고 있기에 그렇게 되지 않는다고 보고 
그 반대가 된다고 보는 것이다. 


전철에 선량하게 앉아 있는 이를 놓고 실험한다면 
그의 생존과 직결되는 무언가를 
놓고 그것을 침해하거나 
그가 가장 집착을 갖고 대하고 
소중하게 여기는 것을 빼앗아 
마구 다른 곳으로 뛰어가면 
그가 온 사력을 다해서 본인을 쫒아 오게 되는 것이다. 

어려운가. 

생존에 필수적인 급소를 가격했다거나 
그런 것이 아니더라도 
단순히 상대의 떨어진 지갑하나만 주어서 
달려도 
자신의 뒤에서 소리치며 자신을 붙잡으려 
상대가 달려오는 그런 모습을 쉽게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래서 실험 내용은 그다지 
어렵지는 않은데 
이런 실험을 함부로 하면 
결국 본인이 어느 지점에서 체포를 당하고 
그리고 그 이후는 어딘가에 묶여서 
남은 생을 보내야 할 것이다. 

그런데 사실은 이것이 
최면에 걸린 상태에서 어떤 이가 
어떤 행동을 하는 과정과 그 사정이 같은 것이다. 

그래서 이런 내용을 
앞과 같은 방식으로 행하지 않고 
달리 행하면 
또 그 반대로 모두가 다 좋고 좋은 상태로 
곧바로 이끌어 들일 수 있다고 보는 것이 
무량행문의 수행 내용이기도 한 것이다. 

그래서 알고 보면 
이들 원리가 다른 것이 아닌 것이다. 


왜 어떤 이가 그냥 평온하게 
성인군자의 외관으로 앉아 있었는가도 
사정이 그와 마찬가지고 

그런 이가 왜 또 갑자기 
소리를 지르면서 
온 힘을 다해서 어느 방향으로 달려 나가는가도 
사정이 그와 마찬가지고 

그러다가 어느 휴양지 쇼무대에서는 
또 없어질래야 없어질 것도 없는 상태에서 
무언가를 잃었다고 울다가 
또 얻을려고 해도 얻을 것도 아무 것도 없는 상태에서 
다시 무언가를 얻었다고 기뻐하는가도 
그 사정이 마찬가지다. 

관객이 보면 배를 붙잡고 
뒹굴면서 웃을 일이라고 보기도 하지만, 
그러나 그 당사자의 입장에서 보면 
그 매 경우 그렇게 하지 않을 도리가 없다는 것이 
바로 그 매 상황이 갖는 성격이기도 한 것이다. 

그리고 이 핵심에 그것을 그렇게 대할 
도리 밖에 없이 
그런 모습을 눈을 뜨면 보게 되고 
그런 모습을 보면 또 그런 생각을 하게 된 
그 주체의 전도망상과 번뇌 집착이 
바로 핵심 원인이라고 제시하는 것이다. 




그 사정을 스스로 잘 이해하지 못하면 
자신이 눈을 떠서 무언가를 볼 때 
그것이 꽃이라고 생각이 된다면 

그렇게 눈을 떠 얻은 그 현실내용이 
그것 그대로가 자신이 생각하는 그런 관념분별 내용인가를 
한번 물어서 답을 얻어보고 

그런 가운데 그러면 
그처럼 생각하는 내용은 
또 그런 감각현실을 떠나 얻는 것인가라고 스스로에게 묻고 
그 답을 한 번 생각해 보는 것이 필요한 것이다. 


그래서 각 종류의 감각현실과 그에 대해 일으키는 관념분별도 
그런 관계에 있지만, 

모든 존재의 본 바탕이라고 할 실재와 
감각현실 및 관념분별의 관계도 
또 그와 같은 관계에 있다는 사실을 
스스로 잘 이해하는 것이 
기본적으로 필요한 것이다.  


다른 이에게 그 사정에 대해 
설명을 해달라고 할 일이 아니고 
스스로 그 사정을 스스로 잘 헤아려 살피면서 
잘 이해할 필요가 있는 것이다. 


그래서 그런 사정을 기본으로 이해하고 
스스로 온 생명을 제한을 두지 않고 차별없이 
모두 청정한 니르바나를 얻게 하고 
성불하고자 하는 보리심을 일으키지 않은 상태에서는 

그 힘든 일들을 모두 쉬고 
그냥 아무것도 안하고 지내는 것이 
다른 모든 경우보다 훨씬 
그 자신을 위해서나 
다른 생명을 위해서나 
모두 바람직하다고 보게 되는 것이다. 

이 내용이 이해가 잘 안 되면 
히틀러를 놓고 생각하는 것이 이해가 쉽다. 

그런 경우는 그냥 
집에서 그림에 열중하거나 
그것도 안한다 하더라도 그것이 
어느 경우나 훨씬 좋다고 보는 것이다. 

그렇지 않은 경우는 
열심히 지혜를 기울여 무언가를 했다고 하는 것은 
결국 장발쟌이나 루팡이나 욱형 등이 무언가를 한 것이어서 
알고보면 자신의 무덤과 고문시설을 
그렇게 열심히 자신이 만들어 내는 수고를 
하는 것이었음을 보게 되는 것이다. 

문제는 그 순간 순간에는 
그 사정을 그렇게 보지 못하기에 
그 접착에서 벗어나오지 못한다는 것이 
그 안타까운 사정이기도 한 것이다. 


그래서 어떤 내용이나 사정이 같기에 
두 입장에서 제각각 다른 내용을 
다 제시할 수 있다. 

쉬면 쉬는 대로 좋고 
하면 하는 대로 좋은 경우가 있는 반면 

쉬면 쉬는 대로 고통스럽고 
하면 하는 대로 고통스러운 경우도 있는 것이다. 




조금 더 이해가 쉽게 설명하면 
항우와 유방이 서로 왕이 되기 위해 경쟁할 때 
항우가 너무 힘이 세서 
유방이 어쩔 수 없이 교통도 불편한 
잔도를 통해 촉나라로 들어가야 할 상황이 있었다고 
전해진다. 

이를 놓고 대부분 불평하고 
유방도 스트레스를 호소했는데 

소씨 장씨 이 양 인물들이 
사정이 그렇지 않고 
그것은 대단히 좋은 일이라고 
유방을 설득해서 
그렇게 촉나라를 향해 들었갔었다고 
전한다. 


역사에서 소씨 장씨는 대단히 유명한데 
과거에도 소진 장의가 서로 친구로서 
서로 정 반대의 내용을 외교 전략으로 제시했던 이들인데 
그러나 서로가 서로를 해치지 않고 
그렇게 서로 돕고 서로 간격을 두면서 
세상에 자신의 뜻을 펼치면서 세상을 풍미했었다고 하는데 

진나라가 멸망할 무렵에는 
또 소하 장량과 같은 인물이 또 그런 역할을 맡아 
뜻을 성취시키고 사라지는 모습을  
보여주었던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왜 같은 상황에서 
같은 내용을 놓고 각기 달리 보는가 

그런데 나중에 놓고 보면 
누구의 판단이 그래도 더 적절했던가. 
이런 것을 잘 살펴볼 의미가 있다고 보는 것이다. 




어제 차를 타고 올라오는데 
처음에는 막히면 막힌대로 고통을 겪고 
너무 빨리 가다가 급 브레이크를 밟아 대면 그 때다마 
고통을 겪었다고 했는데 

알고보면 
이것이 자동차나 사람을 어떤 위치에서 
어떤 위치로 옮겨 놓는 문제를 놓고 
그렇게 각 상황마다 
달리 보고 
때로는 고통을 겪는다고 하소연하기도 하는 것이다. 


그래서 그 각 경우 
다른 부분에 초점을 맞추고 달리 보면 
그것이 모두 수행을 돕는 내용이 된다고 앞에 
일단 제시한 것이다. 

그런데 알고보면 세상의 일이 
다 이런 셩격을 기본으로 갖는 것이다. 

누가 자동차나 그 안의 물건이나 사람을 
어떤 위치에 어떻게 갖다 놓는가가 
중요한 문제일 수도 있다고 할 수도 있지만, 
누가 하던 큰 관게없다고 볼 수도 있는 것이다. 

그러나 또 어떻게 하던 
각 경우마다 고통을 겪을 수도 있고 
또 어떻게 하던 
그 각 경우마다 좋음을 얻고 
더 좋고 좋은 상태를 향해 나아갈 수도 있다고 
여기서 제시하는 것이다. 


만일 어떤 상황이나 어떤 것의 내용이 
C 라고 보고 있을 때 

그 내용이 진짜의 내용이어서 
영원불변한 실체로서 그렇게 C 로 정해진 것이라고 한다면 
사실은 어떤 주체도 
그것을 놓고 그것을 대해 C 라고 분별을 일으킬 도리도 
본래 없는 것이다. 

왜 그럴까. 

그것은 모든 감각현실이나 
관념분별을 
그 주체는 그렇게 일정한 조건에서 
화합을 통해 그 내용을 그렇게 얻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앞 문장을 보면 
그것이 그렇지 않다고 전제가 되어 있으므로 
그런 경우는 그런 C 도 
눈을 떠서 그 모습을 보지도 못하고 
아무리 생각을 하려해도 그 C 란 생각을 일으켜 
얻을 도리도 없는 것이다. 

그러나 본래 그런 진짜는 없고 
그 실재도 공하여 얻을 수 없기에 

사실은 현실에서 a + b => C 의 관계처럼 
각 내용을 얻어나가고 
그런 가운데 C 란 어떤 내용도 얻는 것임을 
이해할 필요가 있는 것이다. 

또 사정이 그렇기에 
그렇게 얻는 C 는 실답지 않다는 것도 
함께 이해해야 하는 것이다. 

그리고 어떤 것의 정체가 무엇인가의 내용도 
그런 사정이지만, 

그것을 놓고 
그것이 좋은 것인가 
나쁜 것인가의 문제도 또 마찬가지인 것이다. 

짜장면을 좋아하고 
물을 마시면 시원해서 좋다고 여기는 이 조차도 

짜장면을 계속 5 그릇을 넘어 강제로 먹게 되면 
짜장면이 지극한 고통을 주는 재료라는 것도 이해하게 되고 
물도 사정이 마찬가지임을 쉽게 이해하게 되는 것이다. 

사막에서 목마를 때 만나는 물은 금보다 좋다고 보지만, 
물고문을 당하는 상황에서는 지극히 고통을 받게 되고 
나중에는 물 소리만 들어도 
놀라고 경기를 일으키게 마련인 것이다. 

그래서 짜장면이나 물이나 그 어떤 것에 
그런 좋음이나 나쁨이 본래 들어 있다고 할 것이 아니고 

각 상황에서 그것을 어떤 측면에서 대하고 
그래서 그 주체의 마음에 어떤 내용을 일으켜 얻는가가 
좋고 나쁨의 문제임을 잘 이해해야 하는 것이다. 


티벳의 달라이 라마가 
중국이 갑자기 침입해 들어와 
나라를 빼앗기고 짜증을 일으킬 때 
본인이 그 당시에도 조언을 해준 내용이 생각이 나는데 

왜 같은 내용을 가지고 그렇게 반응하는가. 

반대로 생각하면 
그 절차나 방법은 조금 문제가 있다고 해도 
원래 티벳이란 나라는 
사람도 적고 산만 있고 살기 힘든 상황인데 
어느날 갑자기 가만히 앉아서 
공짜로 그 넓은 중국 대륙을 
다 자신이 차지하게 되었으니 
거꾸로 생각하면 얼마나 좋다고 할 일인가. 

그러니 티벳인들의 정신적 왕 역할을 하는 달라이라마가 
자신을 따르는 이들을 잘 설득해서 
이후 중국인과 잘 지내고 
동시에 세계 각곳의 중국촌까지 일시에 
다 접수해서 잘 사용하면 더 좋은 것 아닌가. 
이렇게 조언을 했다가 

당시 달라이라마가 그러면 
왜 일본으로부터 독립할 때 
한국인들은 만세부르고 했는가. 
그렇게 되물으면서 
욕만 잔뜩 얻어 받은 일도 있는데 

알고보면 그런 측면도 있다고 볼 수 있는 것 아닌가. 

땅 한평 차지해 사용하려면 
현실적으로 부담해야 할 비용이 얼마인데 
형식이야 어떻든 어느날 사람도 별로 다치지 않는 가운데 
광대한 땅을 공짜로 얻게 되었는데 
왜 그것을 마다하고 스트레스를 받는가. 
그렇게 생각해볼 수도 있는 것 아닌가. 

그리고 나중에 또 지켜보면 
그 힘든 산길도 다 닦고 
그 땅을 지켜주기 위해서 
누가 그렇게 힘든 일을 해주는가. 

예를 들어 인도가 다시 침입해 들어올 때는 
그런 중국인이 아니면 
티벳인이 또 그렇게 해야 될 것 아닌가. 

이렇게 대화를 이어나가다가 
통신이 이후 두절되어서 
더 이상은 대화를 못 나누고 있는데 
여하튼 그 사정을 충분히 이해할 만하다. 


그것이 바로 물은 물로서 같지만, 
어느 상태 어느 상황 어느 조건 
어느 형식에서 어떻게 그 물을 대하는가에 
따라서 그 내용이 다 다른 것이다. 


그래서 물은 같지만, 
하늘은 그 물을 감로수로 보는 것이고 
아귀는 타는 불로 보고 
사람은 그냥 물로 본다지만, 
앞과 같이 사막에서는 금보다 좋은 것이라고 보고 
물고문 당하는 상황에서는 극심한 고통으로 보는 것이고 

그런 사정으로 
원효대사는 
자기전에는 청량한 음료수로 갈증을 해소시켜 준 물로 여겼는데 
깨고 나서 보면 해골 썩은 물로 여기게 되고  

또 같은 물인데 
벌이 먹으면 꿀을 만들어 내는 재료라고 하고 
뱀이 마시면 독을 만들어 내는 재료라고 하는 
내용들이 제시되는 것이다. 

그래서 달라이 라마의 입장도 
그런 입장에서 충분히 이해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사실 수행자라면 
자신이 상황에 접착되어 반응하지 말고 
자신이 그렇게 좋고 좋은 상태로 감상도 하고 
또 더 나아가 이를 바탕으로 
모두가 다 좋고 좋은 상태가 되도록 
능동적으로 그리고 적극적으로 
이끌어나가야 활 필요도 있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수행자가 행하는 
수행의 노력이고 
수행을 통해 얻는 지혜의 힘이기도 한 것이다. 

그러나 자신은 그렇게 행한다지만, 
달라이라마를 상대로 
생존에 직결되는 급소부분을 가격하거나 
생존에 필수적인 것을 모두 빼앗고 
침입해가면서 
달라이라마다라고 해도 도저히 
그렇게 행할 도리밖에 없는 반응을 하게 만들어 놓고 
달라이라마에게 그렇게 행하지 말고 
그와 반대로 모든 것을 좋게 받아들이고 
평안히 안인을 성취하면서 임하라고 하는 것은 
또 지나친 것이다. 


그것은 수행자가 자신에게 요구하면서 
자신이 알아서 할 일이고 
아무리 수행력이 높은 달라이라마라고 해도 
행하기 힘든 내용을 놓고 

이를 다른 상대에게 함부로 행하면서 
그런 내용을 거꾸로 요구하면 
지극히 곤란한 것이기는 하다. 


그러니 앞에서 전철에서 
다른 이의 소중한 지갑을 훔쳐서 
내달리는 실험을 한다거나 
다른 이가 소중하게 여기는 아이를 
붙잡아 돈을 요구하거나 그런 실험을 
하면 거의 99% 지옥행이 된다는 것을 
수행자가 스스로 알아야 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 경우를 거꾸로 
수행자가 자신의 문제라고 놓고 대할 때는 
또 어떻게 해야 하는가는 
바로 부처님이 경전에서 제시하는 수행방안들이  
그 내용이라고 제시하는 것이기도 하다. 



그래서 그 각 경우 
수행자는 그렇게 수행방향을 취해서 
어느 경우나 모두 좋고 
그리고 그런 바탕에서 더 좋고 좋은 상태로 
나아가라고 부처님이 제시하는 것이다. 

그런데 막상 놓고 보면 
그것이 하나같이 힘든 것이다. 

앞에서 최면에 걸린 이들이 
최면에 그렇게 걸려 있지 않았다면 모르지만, 
그렇게 걸린 상태에서는 
그렇게 이상한 반응을 하나같이 
취하지 않을 도리가 없는 것이기도 한 것이다. 


그래서 여유있을 때 
금강경을 펼치고 

a 는 실로 a 가 아니기에 그런 까닭에 
그것을 a 라고 칭하는 것이다. [즉비고명]

그리고 미래의 마음이나 과거의 마음이나 
모든 마음은 본래 얻을 수 없는 것이다. [심불가득]

그리고 모든 법은 본래 
그렇게 정해진 것이라고 할 수 없다. 
그래서 위없는 깨달음이라고 해도 
그렇게 칭할 정해진 법이 없고 
부처님이 설할 수 있는 법도 
본래 그렇게 정해진 바가 없다는 사정을 
모두 잘 이해하고 

그런 바탕에서 
수행에 정진하면 

본래 제도할 중생을 얻을 수 없는 가운데에서도 
무량한 중생을 제도하고 

본래 보시할 이나 받는 이나 보시할 물건이나 
보시하는 행위도 얻을 수 없지만, 
그렇게 보시를 행해서 

그로써 무량한 복덕과 지혜를 성취하고 
중생도 다 제도하고 불국토를 장엄하고 
성불할 수 있게 된다는 사정을 잘 이해해야 한다고 본다. 

그 가운데 앞에서 
대부분 구라라고 보게 되는 내용들도 
무량행문을 통해 
쉽게 다 성취할 수 있다고 보는 것이다. 

알고보면 현실에서 라이터를 구해 
불을 켜는 것처럼 사실은 쉽게 성취할 수 있는데 

상황이 엉뚱해지면 
몇 천만원을 갖고 있어도 
라이터 하나를 구하기 힘든 상황도 만나게 되는 것이다. 


[...]

앞에서 달라이라마를 놓고 말한 내용은 
그것이 자신의 상황이 아니니까 
편하게 그렇게 이야기하는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는데 

이제 시간이 많이 지난 이 시점에서 
또 다시 이야기를 이어 해보자. 


달라이라마는 왜 달라이라마가 되었는가. 
사실 달라이라마는 수행자로서 
그렇게 달라이라마로 환생을 해서 
그렇게 되었다고 하는 것이다. 


그러니 이 상황이 그렇게 해서 
개선이 안 되면 

이후 생에서 다시 중국에서 
현재의 시진핑과 같은 지위로 
태어나면 되는 것 아니겠는가. 

그리고 그렇게 태어나서 
다시 지금의 문제를 본다면 
또 어떻게 보겠는가. 

그것이 같은 내용을 어떻게 입장따라 
달리 보게 되는가의 문제와 관련되는 내용이기도 하다. 


그런 가운데 그 각 입장에서 
어떻게 그것을 놓고 어떤 반응을 취하는 것이 
가장 좋고 좋은가의 문제와도 
또 이 내용과 곧바로 연결되는 것이다. 


다른 이라면 그런 내용을 놓고 그 사정을 
이해를 잘 하지 못할 수도 있고 
그것이 또 일반적인 대부분의 입장이라고 볼 수도 있지만, 

적어도 달라이라마는 그런 입장이 아니므로 
그 사정을 그렇게 볼 수 있어야 할 것 아닌가. 

그래서 그런 상황에서도 
온 생명을 제한없고 차별없이 좋고 좋은 상태로 
만들려고 할 것인데 

그런 입장에서 굳이 
아무리 현실에서 무언가를 놓고 
나누고 합해보려고 해도 
그렇게 나뉘고 합하여지는 것을 모두 본래 얻을 수 없고 


또 자신이 아무리 a 라고 여기도 대해도 
거기에서는 a 를 얻을 수 없다는 것을 잘 이해하는 입장에서 
굳이 다시 그것을 그렇게 나누고 묶고 
그것이 a 라거나 아니라고 그것을 놓고 
시시비비에 임할 것인가. 


그런데 또 그 상황에서는 그렇게 본다면서 
지금은 또 왜 그렇게 보지 못하는가. 

그리고 알보보면 중국인들의 역사관은  
극히 단순하다. 

중국이란 땅에서 각 순간 누가 살면서 
누가 그 때 그 때 뜻을 성취하는가 그런 것을 
역사의 내용이라고 보고 
그래서 중국에서 그처럼 살아가는 이가 티벳 출신이던 
양자강 출신이던 황하강 주변 출신이던 
그것을 따로 나누지 않는 것이다. 

그러니 달라이라마가 환생해서 
그렇게 되던 
지금 현실에서 그렇게 임하던 
그것이 무슨 문제가 될 것인가. 

그러니 어느 경우에서나 
그 상태에서 더 좋고 더 좋은 
내용이 될 수 있도록 
노력하면 충분한 것 아니겠는가. 

그렇게 다시 통신이 연결되면 
한마디 더 덧붙이고 싶기도 한 부분이다. 




그러나 사실 이런 주제는 
달라이라마님의 입장에서는 대단히 진지하게 
중요하다고 보는 내용을 놓고 
오지랍이 공연히 넓어서 
달라이라마님을 공연히 불쾌하게 만들 일도 되므로 
자제해야 한다고 보고 

그 대신 
앞에서 자동차를 타고 연구실로 돌아 오는 가운데 
본인이 운전하는 이와 겪은 내용을 놓고 
그냥 다시 살펴보기로 하자. 

어차피 누가 운전하던 
그 상황이 그렇게 달라졌겠는가. 
물론 누가 운전하는가에 따라 
매 순간 내용이 완전히 같다고 할 수는 없지만, 
그러나 큰 사고가 없으면 
자동차나 그 안의 물건이나 사람이 
일정한 시각에 이 위치에서 다른 위치로 
이동하는 문제도 그렇게 큰 차이는 있다고 할 수 없는 것이다. 

그래서 답답할 때는 답답해서 문제이고 
지나치게 빨리 몰아서 위험하다고 불안을 느낄 때는 
그래서 문제라고 볼 수도 있지만, 

그렇다고 본인이 운전하는 이와 
자리를 바꿔 본인이 직접 운전대를 잡고 
운전한다고 해서 
그 사정이 크게 달라지는 것은 
아니라고 보는 것이기도 하다. 

그리고 직접 운전하는 입장과 
옆에서 졸면서 가끔 일어나 
왜 이렇게 차가 안 나가고 정지해 있는가. 
또는 왜 갑자기 브레이크를 밟아서 놀라게 하는가 
이렇게 가끔 불평하고 감독하는 입장 가운데 
어느 입장이 더 나은가는 
다 제각각 다른 것이기도 하다. 


그러나 사실 어제 큰 위험을 겪을 뻔 했는데 
그것은 위 문제가 아니고 

본인이 옆 창에서 햇빛이 너무 세게 
들어와서 
운전하는 이의 시야를 방해하는 것 같아서 
창을 가려준다고 
운전하는 이 앞의 블라인드를 대신 내려주려다가 

그것이 운전하는 이의 시야를 막아서 
잠깐 상당히 위험에 처한 순간은 있었다. 

운전하는 이가 얼마나 놀랐으면 
운전하는 데 그렇게 하지 말라고 소리쳤겠는가. 

자신이 알아서 잘 안 보이면 
가리개를 가리고 그럴 텐데 

공연히 본인이 옆에서 도와주려다가 
같이 위험에 처하고 
오늘 글은 장례식장에서 
영혼들이 사용하는 컴퓨터를 놓고 입력할 뻔 했던 것이다. 

그래서 각자 자신이 할 일이나 잘 하고 
공연히 주제 넘게 다른 이의 일에 간섭하면 
오히려 곤란하다고 보게 된다. 


소원이 성취되는가 안 되는가 문제도 같다. 
모든 소원의 성격이 다 마찬가지다. 

자신의 소원이 다 뜻대로 성취되기를 원한다면, 

먼저 왜 그 소원을 그렇게 성취하려고 하는가를 
스스로에게 물어서 그 답을 적고 

또 그 소원이 뜻대로 다 성취된 상태에서 
이후 무엇을 어떻게 하려고 하는 것인가를 
스스로에게 물어서 그 답을 적고 

그 내용 가운데 
지금 당장 자신이 할 수 있는 일부터 
하나하나 찾아서 하면 
그것으로 충분한 것이다. 

모든 문제가 그 성격이 같은 것이다. 

그리고 소원이 빨리 장애없이 성취되려면 
위 문제의 답을 잘 적으면 
그렇게 되는 것이고 

반대로 자신이 소원을 갖지만, 
그 소원의 성취를 빨리 이루기 싫으면 
그 답 내용을 엉뚱하게 적어 내면 되는 것이다. 

그러면 자신만 그 소원의 성취를 바라고 
대부분 그 소원을 성취를 바라지 않고 
힘이 있으면 온갖 수단을 다해 
그것을 막고 장애하고 
성취되어도 그것을 다른 입장에서는 
다시 허물고자 하는 상태가 되는 것이다. 
그러니 그렇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그 반대는 그 반대가 되는 것이다. 


그래서 앞의 답만 잘 적어내고 
그 상태에서 자신이 하고자 하는 일 가운데 
당장 할 수 있는 일만 열심히 하다보면 

3 일이 지나지 않아 
자신이 소원한 바가 
다 성취되는 것을 보는 것이다. 


그래서 mun 님이 곧바로 황제 지위에 
올라 황제로서 하고자 한 내용을 
곧바로 계속 하고 다닌다고 
구라를 자연스럽게 하게 되는 것이고 

또 본인은 본인대로 
무한카드를 제작 발급받아 
본인도 사용하고 다른 이에게도 나눠주고 
그래서 우주를 곧바로 차지하고 맛을 보고 
시간날 때마다 원하는 불국토 여행을 
떠나고자 계획도 세워보게 된다고 
제시하는 것이기도 하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공원도 못 나갈 뿐 아니라 
자신의 집안에서도 
경호원이 옆에 보이지 않으면 
불안해서 하루를 견디기 힘들어 하게 되고 
또 상대하는 이마다 매번 
시시비비를 다투면서 대하게 마련인 것이다. 

왜냐하면 그 누가 다 자신과 
입장과 견해가 같고 이해관계가 다 같을 것인가. 

그런 사정으로 
어느 재벌집안을 보아도 
다 그렇게 부부나 부모형제자식간에 
서로 다투고 임하는 상황을 쉽게 볼 수 있게 되는 것이다. 


그러니 같은 내용을 놓고 
어떻게 시감상 하나를 잘 하는가 못하는가에 
따라 그 사람의 삶의 의미와 
그 이후의 삶의 내용까지 다 좌우된다는 것을 
잘 이해하고 임할 필요가 있는 것이다. 


운전을 하는데 
운전대를 놓고 싸우는 것은 
차 안의 사람을 모두 위험에 처하게 하는 것이다. 
그렇다고 매 순간 차를 같이 타고 가는 이들이 
합의해서 운전해나갈 도리가 있다고 보는가. 


앞에 위험한 물건이 보여서 
무엇이 있으니 조심하라고 옆에서 말하는 것도 
운전하는 이는 보통 싫어하는 것이다. 

사실 운전하는 이도 다 자신처럼 
그것을 보는 것이고 
그런 잔소리를 옆에서 하면 
더 신경이 쓰이고 
어떤 때는 공연히 놀라서 
잘못 반응해서 오히려 사고를 일으킬 수도 있게 되는데 

그런 식으로 운전하는 이 옆에서 
참견을 하면 
대부분 절친한 부부나 친구관계라고 해도 
나중에는 이혼하거나 이를 놓고 
언쟁을 하게 마련이다. 

운전을 맡은 이가 힘들어 보인다고 해서 
음료수를 하나 건네거나 
어깨를 주물려 주고 싶어도 
상황을 보고 
상대 의사를 물어보고 
한다면 몰라도 

자신이 멋대로 음료수를 쑥 건네고 
손을 만지고 그러면 
위험에 처하는 것은 당연하고 

위험해지지 않더라도 
상대가 짜증을 일으킬 만하지 않겠는가. 


그런데 여하튼 
오늘날 누구나 운전면허증을 다 갖고 다니고 
마음만 먹으면 
운전을 각기 다 할 수 있다고 해도 

각 경우에 누가 운전을 하고 
누가 옆에서 졸면서 가끔 놀라 깨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보는가. 

본인은 
본인이 졸면서 가끔 놀라고 
일어나서 다시 
새 다라니를 찾아 외우고 
그런 활동을 하는 것이 
모두에게 좋다고 보는 것이다. 


[...]

각 입장에서 
자신의 뜻과 같이 되면 그래서 좋고 
그렇지 않아도 그런 그런 사정으로 그래서 더 좋고 

그런 가운데 
자신이 왜 정말 그런 것을 원하는가 
그리고 그런 것이 성취되면 그 상태에서 
자신은 무엇을 어떻게 하려고 하는가를 
잘 점검해서 

그 가운데 당장 자신이 할 수 있는 것부터 
하나하나 해가면 그것으로 충분하고 

그렇게 할 때 그 소원도 
바로 3 일 안에 다 성취된다는 사정을 
보게 된다고 제시하는 것이기도 하다. 

어떻게 뜻이 성취가 안 되었는데 
된다고 하는가. 

그래서 그 사정을 그렇게 길게 자세하게 
설명한 것이다. 

C 를 놓고 C 라고 보는 그 정지단면에 
사정이 그렇지 않다는 것부터 
잘 확인하고 

사실 C 가 성취가 된다면 
또 바로 그런 상태에서 그런 사정으로 
그렇게 다른 a 나 b 와는 다르다고 할 
그런 C 도 그렇게 성취가 되게 된다고 
제시하는 것임을 잘 이해할 필요가 있다고 보는 것이다. 


그래서 그런 문제를 놓고 
각 개개인이 검토를 해보야 하는 것이다. 

[...]





>>>



a +  b => C 의 인과관계를 하나 놓고 


C 가 좋은 내용일 때는 

a 나 b 가 제각각 

자신이 없으면 C 가 얻어지지 않음을 제시해서 

그것이 자신의 공이라고 주장하면서 

서로 대립하는데 


반대로 C 가 나쁜 내용일 때는 


a 나 b 가 제각각 

상대 즉 b 나 a 가 그당시 없었으면 그 C 가 나타나지 않음을 제시해서 

그것은 상대의 책임이라고 주장하면서 

또 서로 대립하며 시시비비가 끊이지 않는 사정을 

기존에 제시한 바 있다. 


그런데 각 입장의 주장만 검토해보면 

그 말이 옳다고 볼 만하지 않은가. 


이것이 아전인수의 논리이기도 하고 

책임전가의 논리이기도 한데 


결국 전도몽상 상태에서 

하나의 a +  b => C 의 인과의 관계식을 놓고 

그 때 그 때 

자신에게 유리하게 사용하려고 하기에 

그런 상태가 된다고 제시한 바 있다. 



그런데 이 근원을 살피면 

사실은 그 각각의 

전도몽상과 집착이 모두 공통원인임을 

보게 된다. 






이미 이전 조각글에서 

서커스와 마술 최면의 원리를 설명하면서 

이것이 모두 수행과 관련이 깊다고 제시한 바 있는데 

그것은 또 전도몽상 상태에서 전도몽상이 전개되고 

생사고통을 겪어 나가는 과정과도 관련이 깊은 것이기도 하다. 


그 가운데 

손뼉을 치면 소리가 나는 것을 놓고 

자신이 눈으로 본 손이 부딪히는 그 모습이 

그런 소리를 낸다고 이해하는 것을 

마술사가 보여주는 내용을 놓고 

이들을 서로 원인과 결과라고 관련지어 

이해하는 것과 같은 방식이라고 설명한 바 있다. 



그런데 과학자를 포함해서 

이 내용을 잘 이해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그래서 그 상황에서 눈을 감아도 

소리는 난다고 반대 근거를 제시하는 것이다. 


번개가 천둥소리를 낸다고 이해하거나 

낮이 밤을 만들어 낸다고 이해하거나 하는 것도 

비슷한 내용이다. 





마술은 왜 마술이라고 하는가. 


원래 마술사가 모자에 

짚을 집어 넣고 

나중에 모자에서 

짚은 없어지고 

비둘기가 나타나는 것을 보여준다고 할 때 


마술을 보는 입장에서는 

언뜻 

짚이 변해서 비둘기가 되었다고 이해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을 마술이라고 이해하는 입장은 

비록 그렇게 보이고 그 관계가 그런 것처럼 여겨지지만, 

사실은 그 관계가 그렇지는 않다는 것까지 

동시에 이해하는 가운데 

그것을 관람하는 것이다. 


그런데 정작 어떻게 해서 

모자에서 비둘기가 나오게 되었는가는 

마술사가 친절하게 그 비밀을 설명해주지 않으면 

끝내 잘 모르게 되는 경우도 많다. 

궁금하지만 잘 안 알려주는 것이다 .

알려주면 마술사가 그로 인해 

평가절하당하고 

이후 마술쇼를 재미있게 보는 관객도 

없어진다고 보기 때문이다. 


그런데 사실은 어떻다고 보아야 하는가 

마술사가 비둘기를 모자에서 꺼내보일 때 

비둘기는 짚에서 나온 것이 아니다. 


손에 비둘기를 쥐고 있다가 

모자에 손을 넣어서 짚은 다른 소매에 넣어 제거하고 

손을 펴 보이면 

관객은 모자에서 짚이 변해 비둘기가 된 것처럼 

관계를 이해하면서 

평소에 못 보던 것을 보았다고 하면서 

그 사정은 한편으로 궁금해하면서도 

또 재미있게 구경하게 되는 것이다. 


알고보면 그런 비둘기를 나타나게 한 

원인은 따로 있는데 그것을 숨겨 놓고 


다른 것들이 마치 서로 그런 관계에 있는 것처럼 

선후 관계를 통해 보여주는 것이 

마술이라면 마술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런데 

손을 부딪히면 소리가 난다. 


얼음을 녹이면 물이 된다. 

바닷물에서 소금을 제거하고 물을 얻으려면 

바닷물을 끓이거나 

바닷물을 얼리거나 

바닷물에 투과막을 놓고 압력을 가해 투과시키면 된다. 


소금을 전기 분해하면 나트륨과 염소가 나타난다. 

수소를 산소와 함께 폭발 화합시키면 물이 얻어진다. 



이런 식으로 과학계에서 

다양한 물리 화학적 변화과정을 설명하는데 

알고보면 이것이 바로 

마술의 원리와 그 성격이 같은 것이라고 

여기서 반복해 지적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왜 그런가. 


이미 앞에서 그 사정을 제시한 바 있다. 


반복을 피하고 

그렇게 그런 내용을 반복관찰할 때 

관찰자 자신이 어떤 상황에서 

그 내용을 관찰하고 

그렇게 관찰한 내용들이 어떤 지위 어떤 영역에서 

얻는 내용들인가를 스스로 검토해봄으로써 


왜 이것이 

마술쇼에서 마술사가 보여주는 내용들을  

서로 관계되는 것으로 이해하는 것처럼 

이해하는 것이 되는가를 

잘 검토해보는 것이 필요하다고 본다. 



쉽게 이해하면 

손을 부딪히면 소리가 난다고 할 때 

자신이 눈으로 본 시각적 감각현실은 

관찰자 자신의 마음에 있는 시각정보내용으로서 

이것이 또 다른 마음에 있는 청각정보내용으로서 소리를 

일으키는 것이 아닌 것이다. 


그래서 소리가 나타나는데 

시각 정보가 개입한 것이 아닌데도 

그런데 관찰자는 그것을 서로 관련시키고 있는 것이다. 




어떤 C를 얻을 때 부수적으로 같이 얻어지는 

부대상황이나 

선후 관계로만 내용이 나타나면 

이것이 서로 관련이 있다고 보는 

그런 해석의 하나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런데 여하튼 이 부분을 건너 뛰고 

if 논의에서는 왜 앞과 같은 

비극적이고 고통스런 결과들이 

발생했는가를 검토해서 


그런 것을 제거하기 위해 

방안을 찾아야 한다고 보는 것이다. 



[...]

이미 발생한 일이라서 

그에 대해 if 논의를 하는 것은 

쓸데없는 일이라고 생각하기 쉬운데 


그렇게 단순하게 생각하지 말고 

자꾸 그런 if 논의를 진행해서 

이를 통해서 

무언가 더 좋은 방안은 없는가를 생각해가면서 

문제를 해결할 좋은 방안을 찾아내야 한다고 보는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과거나 옆 집에서 일어난 화재나 사고는 


그대로 자신의 집에서도 

당장 오늘 

과거와 동일한 형태로 

또는 그보다 몇 십배 증폭된 형태로 

반복해 일어나게 마련이라고 보는 것이 

적절한 것이기도 한 것이다. 


그런 입장에서 

옆집이나 과거에 일어난 사건 사고의 내용을 

대략적으로 

앞에 제시한 것이다. 



[...]










>>>

할 수 있음과 하지 않음의 차이 



삼매에 대단히 종류가 많은데 

대반야바라밀다경 반야행상품에는  

건행(建行)삼마지에서  

...

무염착여허공(無染着如虛空)삼마지까지 

나열되고 있다. 


그런데 이름만 제시될 뿐 

구체적 내용을 이 이름만 놓고 

이 삼매와 저 삼매가 어떤 차이가 있는가를 

알아내기는 쉽지 않다고 본다. 



그런데 쉽게 생각해 

발가락을 움직인다고 생각하여 

움직이는 경우와 


책상에서 발을 괘고 

잠을 자면서 

그런 생각이 없이 있다가 

일어나려는 경우는 

무슨 차이가 있다고 볼 것인가. 


본인이 생각하기에 

발가락을 조금씩 움직이면 

그렇게 그 곳을 움직이느라 

그곳까지 피가 돌아서 

그런 상태에서는 자세를 바꾸어도 

발이 저리는 증상을 겪지 않는다. 


그런데 뒤의 경우는 

일어나려면 발이 저리는 경험을 

하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그렇게 생각하고 

활동을 하는데 


이제 그 발가락 마저도 

움직이지 않는 가운데 

그렇게 행하면 

어떤 차이가 있을 것인가. 


발가락을 못 움직이는 것이 아닌데 

움직이지 않으면서 

마음으로만 발가락을 최대로 움직이려고 

생각해 보는 것이다. 


이를 통해 무엇을 말하고자 하는가하면 

이 때 비록 발가락은 움직이지 않아도 

그런 생각을 하게 되면 

몸 안에서 내부적으로 

차이를 느낄 수 있다고 보는 것이다. 


그래서 그런 마음을 기울이는 것과 

그냥 멍한 상태로 있는 것과는 

차이가 있다는 것을 

스스로 확인할 수 있다. 





원래 몸에 피가 돌지 않는 부분은 

그 부분에 통증도 느끼게 되고 

그대로 방치하면 점차 그 부분 세포들이 

점차 죽어가서 각질로 변해가거나 

더 심하면 썩게 되기도 하는데 


그런 순환이 평소 잘 안 되면 


이리저리 몸을 움직이는 운동을 하거나 

아니면 단순히 기계적으로 맛사지를 하거나 

뜨거운 물에 몸을 담구어서 

강제로 피를 돌리거나 

아니면 알콜과 같은 약물을 통해서 

몸안의 피를 순환시키지 않으면 


이후 상당히 몸에 여러 부분이 문제가 

발생하게 됨을 볼 수 있다. 



본인은 건강이나 의료에 관한 

전문가가 아닌데  


운동을 대신해서 

이렇게 하자는 것이라기 보다는 


삼매라는 수행과 

다라니라는 수행을 병행하는 가운데 


자신이 삼매의 힘으로 

자신의 몸이나 외부세계를 

변화시킬 수 있다는 내용을 

설명하기 위해서 

이런 예를 드는 것이다. 



이미 서커스 - 마술 - 최면의 관계를 통해서 

일반인의 전도몽상 증상과 

수행의 관게를 살폈는데 


처음에는 잘 안되어도 꾸준히 노력하면 

처음에는 어렵게 보이는 것들을 

나중에 잘 할 수 있게 되는 것을 서커스와 같다고 하고 


인과관계가 아닌 것을 인과관계에 있는 것처럼 

겉으로 보이게 하는 것을 마술이라 하고 


거기에는 얻을 것이 없는데 

마치 무언가 있다거나 없다고 여기며 

반응하는 증상을 최면이라고 한다면 


이것이 현실의 전도몽상 상태에서의 상황과 

대단히 밀접한 관계가 있다고 보는 것이다. 



무엇인가가 얻을 것이 없는데 

어떻게 하니까. 

전혀 다른 내용이 나온다고 여기고 행하고 

그 인과관계도 깊게 관하지 못한 가운데 

그렇게 자주 하다보니 잘 하게 된다고 하는데 


어느 경우에 

그렇게 무언가를 하다보니 

그로부터 놀라운 에너지가 나오는 것을 

보게 되었다. 


그런데 그런 어떤 경우에 

그로 인해 직전에 있던 모습은  

다 파괴되고 

하나도 찾아 볼 수 없을 정도로 다 날라가버렸다. 


그래서 그것이 어떤 이유로 그렇게 되는가를 놓고 

하나의 결합상태로 하나로 보는 것을 

나누다 보니 

그렇게 질량을 갖는다고 보는 부분이 사라지고 

그렇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두부도 잘라보고 

인형도 쪼개 보고 

책도 반절로 잘라보고 하면서 

또 생체 안에서 이뤄지는 세포 핵분열을 놓고 


이것과 

앞에서 문제삼는 것이 

서로 무슨 차이가 그렇게 있다고 하는지를 

잘 검토해 보아야 한다고 본다. 




그런데 문제는 

그렇게 해서 

자신과 주변의 것을 다 파괴해 사라지게 하고 

날려 보내는 것이 아니고 


자신이 원하는 형태로 이를 통해 

잘 변화시키고 

필요한 내용을 얻어내는 것이 

수행의 목적인 것이다. 




지금은 하려고 해도 

잘 하지 못하는 것이지만, 

그것이 전혀 안 되는 것이 아니다라는 것을 

이해해야 한다고 본다. 


그것이 잘 안되면 

단순히 그것만 잘 안 되는 것이 아니고 

전신이 기능 장애의 상태인 경우가 많다. 



고래가 처음에 바다에서 육지에 올라와 

생활하다가 

꼬리를 떼고 

다시 바다로 갔다는 생물학계에 전하는 전설처럼 


각 생명은 자신이 원하는 형태로 

상황에 맞춰 

잘 바꿀 수 있어야 하는 것이다. 


자신은 늘 어떤 모습이라거나 

어떤 특성을 갖는다는 식으로 

고정관념을 갖지 말고 


훈련을 평소 꾸준히 해서 


나비가 되고 싶을 때는 나비로 

벌이 되고 싶을 때는 벌로 

이렇게 연습을 꾸준히 해야 된다고 보는 

것이다. 







>>>

지금까지 유무 논의의 효용과 함께 

언제나 100 % 성공하는 방안 

그리고 3 해탈문과 관련된 내용을 살폈다. 


현실을 대할 때 마음에서 3 해탈문에 해당하는 

출입구를 세 개 정도를 각 차원에 배치해 놓고 

현실에 임하면 


결국 그것이 법화경에서 말하는 

수행자가 갖춰야 할 

수행자의 방[대자비], 수행자의 옷[안인], 수행자의 자리[공한 실상]이 

구비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렇게 장비가 마련되면 

세상에서 겪는 생사고통과 나쁨은 일체 다 제거되는 한편 

세상에서 좋다고 보는 좋음은 단순한 좋음이 아니라 

좋고 좋고 좋음이 구족되는 상태가 된다고 

그 효용을 간단히 제시할 수 있다. 


왜 좋고 좋고 좋음이라고 여러번 반복하는가 하면 

그것은 단순히 자신에게만 당장 이측면에서만 좋고 

나머지는 아닌 좋음과 구별하고자 하는 의미다. 


온 생명이 제한없고 차별없이 

무한히 오래오래 

두루두루 각 측면이 다 좋고 좋은 상태를 

위와 같은 방안으로 

성취하는데 

그런데 그것이 

생사 고통을 벗어나 청정한 니르바나를 

어느 경우나 잃어버리지 않는 것을 

기본 바탕으로 해서 얻어지는 것을 

제시하는 것이다. 


그래서 이것을 어느 경우나 

100 % 성공하는 방안이라고 해서 

일반적으로 현실에서 희망을 성취해 

성공을 얻고자 하는 방안과 구별해 제시한 것이다. 


앞의 경우를 선택하면 

뒤의 경우를 배제해야 하는 관계가 있는데 

뒤의 경우는 

성공해도 실패, 실패하면 더더욱 실패라고 보는 가운데 

생사고통에 무한히 묶인 가운데 

각 세계를 묶여서 강제 여행을 하게 되는 상태라고 

제시한 것이다. 


결국 그런 상태를 방지하고 그런 상태에서 벗어나게 하고자 

수행자는 수행을 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 과정에서 비록 당장은 아니지만, 

그에 필요한 상태를 뜻한 바와 같이 

쉽게 빨리 잘 즐겁게 성취해내는 상태가 되어야 하는데 


그것은 어떤 이가 어떤 외국어를 배운다면 

처음에는 철자도 모르는 상태지만, 

그러나 일당 기본 목표는 자유롭게 읽고 쓰고 말하고 듣는 상태가 

되는 것을 목표로 임하고 

더 나아가 자신이 원하는 상태를 하나의 성이라고 비유하면 

자신이 어떤 내용을 어떤 형태로 어떻게 말하고 표현할 때 

온 생명이 다 그런 성을 만들어 내기 위하여 

도움을 제공하게 되는가를 잘 파악해서 

꼭 필요한 말만 각 상황에서 그렇게 좋고 좋게 

표현할 수 있게 되는 상태를 

다시 목표로 삼고 

정진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보게 되는 것이다. 


이것이 위 내용과 관련된다. 



prince 님이 여환삼매가 

이치에 맞지 않는 허구적 주장이라고 하는데 

그것도 이와 마찬가지라고 본다. 


당장 자신이 그런 능력은 없지만, 

우선 현실의 각 내용의 정체를 

그 실상과 함께 올바로 관하고 


무생법인을 증득하고 

그리고 무량행문에 들어가는 가운데 

이런 상태가 되는 것이 목표라고 

수행자는 분명히 인식해야 하는 것이다. 


당장 안 된다고 그런 목표까지 허구적이라고 

보면 정말 그런 상태가 되기는 힘들다고 보는 것이다. 



개인적으로 아주 오래 전에 

단기 사찰 수행 코스를 밟은 적이 있는데 

그 당시 지도를 맡은 스님이 

명백하게 이 내용을 제시해주었던 기억이 난다. 


왜 수행을 하는가?

중생을 제도하고 또 불국토를 장엄하고 성불함에 있어서 

필요한 능력과 신통을 구비하기 위해서다. 

당시 신통이란 표현에서  

과연 그런 것이 현실적으로 가능할까 

의구심을 갖고 대하기 마련인데 

사실은 그것이 과학인 것이기도 하다. 


여하튼 어떤 목표를 성취하는 방안은 

그 상태에 대해 따라 기뻐하는 마음을 갖고 

그것의 좋음과 현실상태의 좋음의 격차를 

무한하게 벌리는 것이 우선 기본 방안이라고 본다. 


보통 교육을 담당하는 입장에서는 

이 차이를 당근과 채찍의 차이로 생각하게 되기 쉽다. 

어떤 내용을 잘 익히면 당근을 주는데 

그렇지 못하면 채찍을 가해서 

이 좋고 나쁨의 현격한 차이를 통해서 

상대가 자신이 원하는 방향으로 

신속하게 변화를 하기를 원하는 것이다. 



그런데 교육자는 당근을 제공하는 것은 부담스럽고 

채찍은 비용이 별로 들지 않는다고 여기는 가운데 

채찍만 주로 사용하려는 경향을 갖기 쉽다. 

그러는 가운데 

자신의 뜻대로 자신이 제공하는 당근과 채찍에 

상대가 묶이고 

또 상대가 그 결과의 성취에 집착하는 상태가 되어 

이에 묶여 자신의 뜻과 같이 반응하게 되면  

자신이 마치 전제군주가 된 것처럼 여기고 

자신의 뜻이 그대로 되는 상태에서 

흐뭇해 하기 쉬운 것이다.  


그런데 바로 이것이 

이 당사자들을 또 심각한 생사고통을 증폭시켜 

받아 나가게 만드는 요인인데 

다만 좁고 짧게 얕게 관찰하면 

그 당사자들이 그 문제를 그렇게 보지 못하고 

단기적으로 그런 방안이 성과를 빨리 얻어내게 한다고 

자주 이에 의존하기 쉬운 것이다. 



그래서 이미 앞글에서 

말을 알아 듣지 못하는 상대를 

아주 잘 교육시키는 훌륭한 선생님의 사례를 

소개한 것이기도 하다. 


그 분은 일반적인 교육자가 생각하는 

당근과 채찍이라는 수단에서 

채찍 부분을 빼버린다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이렇게 하나 저렇게 하나 별 차이가 없어서 

상대가 변화하기 힘든데 

그러나 정작 당근과 채찍의 수단을 사용하는 경우에서

갖는 부작용은 다 제거하면서도 

교육성과는 가장 높은 상태가 되니 

그래서 훌륭한 선생님이라고 보는 것이다. 


그런데 구체적인 교육 내용이나 방편은 

그 분이 끊임없이 연구해서 

벽면 하나를 그에 관련된 서적으로 가득채우고 

쉼없이 필기하고 정리하는 모습을 보았지만, 


그 핵심이 무엇인가 하면 

여하튼 상대가 사자던 코끼리던 그 내재적 힘은 대단하고 

다 장차 부처님이 될 상태로서 존중받아야 하지만, 

일단 자신은 상대를 유치원 생 정도의 수준으로 관하고 

사랑의 마음으로 대한다는 것이라고 본다. 


그리고 잘 하면 칭찬을 아낌없이 하고 

좋음을 베풀어 주는 한편 

그렇지 못하는 경우는 단순히 무시하고 외면하는 것만으로서 

이 차이를 만들어 낸다는 것이라고 본다. 


더 세세한 교육방편까지는 

그 분이 운영하는 학교에 개별적으로 등록을 해서 

그 내용을 하나하나 배워야 할 문제라고 보지만, 

여하튼 그 분이 또 개별적으로 

맡아 가르치고 있는 인턴들에 대해서도 

역시 그렇게 따뜻하게 대하는 가운데 

자상하게 자신이 익힌 방안을 모두 전수시키려고 

노력하는 것을 방송을 통해 볼 수 있었다. 


그런데 그 분이 들려주는 비화 가운데 하나는 

자신이 배울 때는 

어떤 분이 좋은 정보가 있는데 

혼자만 살짝 숨겨놓고 그것을 잘 보여주지 않았는데 

여하튼 자신이 그것을 노력해서 

간신히 섭취를 하곤 했다는 일화를 들려주기도 한다. 


그것은 사실은 현실에서 

대부분 이런 경향을 갖고 교육에 임하는 사례가 

대단히 많다는 점도 말하는 것이다. 


그런데 어떤 교육자가 자신 옆에 붙어서 

그렇게 자신을 잘 이끌어 주기를 바라는 것도 좋겠지만, 

자신부터 자신을 그렇게 대하고 

또 자신이 먼저 다른 이를 그렇게 대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본다. 


세상이 좋게 바꿔지는 것은 

가정에서 한 사람이 자신이 다른 이를 대하는 상황에서부터 

그런 변화가 있어야 된다고 보는 것이다. 


누구나 가정에서 그런 위치에 있게 되고 

또 각 사회부분에서 그처럼 다른 이를 대할 상황이 

많은데 

그 자세가 곧 관련된 이들을 

모두 생사고통을 깊게 증폭해 받게 하는 방식인가. 


아니면 그 반대로 서로간에 무량한 복덕과 지혜를 

구족하게 하는 방식인가가 

바로 이 부분에서 그 차이가 나타난다고 보는 것이다. 


그래서 이 부분이 상당히 중요하다고 본다. 



prince 님이 궁금해 하는 

여환삼매의 이론은 

일단 감각현실과 관념 사이에서 행해지는 최면내용부터 

잘 이해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본다. 


여환삼매는 

실재와 감각현실의 관계가 

마치 이런 최면이나 환술과 같은 관계임을 이해하는 가운데 


현실의 모습을 변화시키는 방안이라고 

간단히 이해할 수 있다 .


사정이 그렇기 때문인데 

그러나 그 이론만 그렇게 이해한다고 해서 

오늘 당장 원하는 대로 자신이나 세계의 모습을 

변화시킬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그래서 이와 관련해 라이터 화두를 

또 생각해 보아야 한다고 본다. 


여하튼 이것은 기초적으로 지금까지 

살핀 유무논의와 대단히 밀접하게 관련이 된다. 



요즘 화엄경 아승기품의 게송의 내용을 놓고 

연구중이다. 

첫 부분은 자연과학과 관련된 내용으로 보는데 

점차 수행과 성불 불국토장엄 중생제도 

이런 내용이 짧은 게송에 핵심이 제시된다. 


그래서 이것을 가지고 연구를 하는 것인데 


현재 살피는 14, 15 번째 게송은 다음이다. 


不可言說毛端處,  皆有淨剎不可說,

種種莊嚴不可說,  種種奇妙不可說。


불가언설모단처,  개유정찰불가설,   

종종장엄불가설,  종종기묘불가설。   


  말할 수 없이 많은 터럭 끝마다                                   

  깨끗한 세계들을 말할 수 없고                                    

  가지가지 장엄도 말할 수 없고                                    

  가지가지 기묘함도 말할 수 없네 


於彼一一毛端處,  演不可說諸佛名,

一一名有諸如來,  皆不可說不可說。


어피일일모단처,  연불가설제불명,   

일일명유제여래,  개불가설불가설。   



  저러한 하나하나 터럭 끝마다                                     

  말할 수 없는 부처 이름 말하며                                   

  하나하나 이름 아래 있는 부처님                                 

  모두 말할 수가 없이 말할 수 없네       


출처: http://essay007.tistory.com/800 [선현지복 잡기]


이런 게송을 놓고 

일단 prince 님이 제기하는 문제를 

생각해보게 된다. 


털끝이란 굳이 현미경 카메라를 사용하지 않아도 

눈으로 그것이 대단히 작은 공간임을 

쉽게 보는 것이다. 

왜 하필이면 털끝인가는 그런 사정 때문이다. 


그래서 이는 그에 관련된 자연과학적인 내용과 함께 

또 수행자가 수행을 통해 성취할 상태까지 

제시하는 내용이라고 본다. 


그런데 이 구절의 핵심은 또 명(名)에 있다고 보게 된다. 


이는 금강경에서 제시되는 

실 무 a 고 명 a 

즉 비 a 고 명 a 

이런 형태의 구절이 나타내는 내용과 

깊은 관련을 갖는다고 본다. 

이는 예를 들어 

실상은 상이 아니므로 그런 까닭에 실상이라고 칭한다. 

사다함[일래과(一來果)]은 실로 옴이 없으므로 그런 까닭에 일래과라고 칭한다. 

이런 형태로 제시되는 내용이다. 


그래서 이 내용을 잘 이해하면 

prince 님이 제기하는 문제도 

잘 논의할 수 있다고 보게 된다. 

일단 prince 님이 저 구절을 다 외우면 도움이 된다고 보지만, 

여하튼 이 부분을 좀 쉬었다가 

이어서 살피기로 한다. 


참고로 게송에서 '찰(剎)'이라고 표현된 것은 

일반적으로는 부처님이 관할하는 세계를 뜻하는 단어로 

통상 10 억 세계를 의미하는 삼천대천세계의 의미로 보게 된다. 


그리고 하나의 세계에는 

지옥 아귀 축생계와 인간 아수라 하늘세계 등이 갖추어져 있으므로 

부처님이 관할하는 한 세계는 

결국 10 억 지옥 아귀 축생세계가 통상적으로 있는 상태인 것이다. 


그런데 이런 세계를 털끝과 같이 작은 공간을 놓고 

음미하는 부분이다. 

너무 비상식적이라고 보게 되지 않는가. 


그리고 여기서 '불가설'이란 표현은 

표현 그대로 말할 수가 없다라는 의미도 시적으로 나타내지만

그러나 수학적으로는 

100000...... 이런 식으로 수를 표현할 때 

자리수를 나타내는 0 의 개수가 

7 곱하기 2 의 119 승이 되는 숫자의 단위이기도 하다. 


log10 [ 1 불가설 ] = 7* 2 [119승] 

이런 의미인 것이다. 


그런데 그것이 털 끝과 같은 미세한 공간과 

관련이 된다는 것이니 

또 비상식적인 내용이 아닌가. 


그래서 연구가 필요한 것이다. 




뜻을 잘 성취하는 방안 - 여환삼매 



유무 논의의 효용을 

현실에서 성공에 집착하는 입장에 초점을 맞추면 

결국 무량행문이나 여환삼매의 내용에 

초점을 맞추게 되기 쉽다고 본다. 


그런데 그 바탕은 또 공 무상 해탈문에 

그 바탕이 있는 것이기도 하다. 




[...]

현실에서의 여행과정이든 

또는 수행과정에서 칠각지역에서 떠나는 세계 여행이던 

비자가 중요한 것이다. 


자신이 아무리 자유롭게 돌아다니고 싶어해도 

자신이 어떤 감옥에 붙잡혀 있다거나 

자신이 사는 곳에서 먼저 여행 허가가 발급이 안 된다거나

또는 방문하고자 하는 곳으로부터 

비자가 발급이 안 된다거나하면 

여행 자체가 곤란한 것이다. 


물론 자신이 어디를 여행을 다닐 뜻 자체가 

없는 경우도 있겠지만, 

위와 같은 상태에서는 여행을 다니고자 해도 

다니지 못하는 상태가 되는 것이다. 


이미 다른 불국토를 방문하고자 여행허가를 받으려면 

이 사바세계에서부터 

자신이 어떤 상황에서든 고통을 받지 않고 

평안히 머물 수 있는 무생법인을 증득했는가가 

중요심사대상이 된다는 점을 제시했고 


또 다른 불국토에서 비자를 발급받으려면 

그 불국토를 방문해 성취하고자 하는 내용이 

대자비와 중생제도의 측면에서 어떤 관계가 있는가를 

심사받아야 한다고 보게 된다. 


이것이 결국 어느 세계 어떤 상태라고 해도  

그 기본 바탕은 실상이 공하여 차별이 없다고 하지만, 


그러나 수행자가 수행과정에서 

더 높은 수준으로 향상해 나가는 과정에서 

필요한 내용이기도 하고 

또 각 세계를 뜻과 같이 여행도 다니고 

또 자신이 대하는 세계나 자신의 형체 자체를 

뜻과 같이 변화시키는 데 

필수적인 공통 요건이 된다고 보는 것이다. 



그리고 이 문제를 쉽게 이해하기 위해 

현실에서 자신이 바퀴벌레나 파리 지네가 

자신 옆에 나타날 때 

자신이 이에 대해 평소 어떻게 반응하는가를 놓고 

이 문제를 거꾸로 입장을 바꾸어서 

잘 살피라고 제시한 것이다.


그래서 예를 들어 

자신이 외계를 여행시 

에어리언과 같은 영화처럼 

대우를 받거나 그에 반응하고자 한다면 

바로 그것이 

그런 주체가 여행허가를 받기 힘든 사정이기도 하고 

또 다른 불국토에서는 비자 발급하기 곤란하게 되는 사정이기도 한 것이다.

그것은 그런 경우는 

어느 상태에서나 

피차가 곤란한 상태가 되는 사정을 

여기에서부터 쉽게 보는 것이다. 


그래서 그런 상태에서는 

자신이 칠각지역에서 여행을 떠나려고 하는 경우조차 

그런 여행이 곤란하게 되는 것이기도 하다. 


그리고 그 사정은 

현실에서 예를 들어 

낮에 자신이 작업하는 곳에 

바퀴벌레가 잘 나타나던가를 

먼저 헤아려 보고 

그런데 혹시라도 나타나면 

또 자신은 이에 대해 어떻게 반응하고는 하는가. 

이 문제만 놓고 

생각해보면 

그 사정을 쉽게 이해하는 것이다.


결국 알고보면 

먹고 싸고  놀고 하고 쉬고 자는 활동을 함에 있어서는 

바퀴벌레나 자신이나 별 차이는 없는 것이다. 


그러나 자신이 평소 

바퀴벌레를 대하는 반응이나 자세가 일정한 특징이 있다면 

그것이 또 다른 생명들이 

자신을 대하게 되는 방식의 특징이 된다는 관계를 

각 입장을 바꾸어 놓고 생각해 보는 연습이 

기본적으로 필요한 것이다. 



그리고 

이것이 기본적으로 확보되지 않은 상태는 

어떤 방편지혜를 습득해도 

자신에게조차 좋고 좋음을 주지 않고 

더 나아가 자신과 다른 생명 모두에게 

생사고통을 증폭시켜 받게 만드는 

원인이 됨을 

잘 헤아려야 하는 것이다. 



그러나 

반대로 그것이 확보되면 

그 이후는 일사천리로 나아갈 수 있다고 

또 그 사정을 이해해야 한다.

그렇게 되는 것은 그 사정이 그렇기 때문인 것이다.




쉽게 생각해보자. 

과거에 한 천재가 평생을 다 바쳐서 

곡선의 기울기나 원의 면적을 근사값으로 얻어내는 

방식을 미적분 계산식으로 얻어내거나 

물리적 운동법칙을 발견해냈다고 하자. 

그것이 한 천재가 한 평생 노력해서 얻는 결과인데 

오늘날 일반적인 학생들은 

한 시간 정도면 그 방안을 습득해 내는 것이다. 


그것이 이상한가. 


이것이 라이터 화두의 내용과도 관련이 되는 것이다.


그런데 사정이 그렇지만, 

또 어떤 경우는 다시 수많은 생을 시간을 보내도 

그런 내용이 제공되지 않기도 하고 


또 어떤 경우는 이미 갖고 있어도 

끝내 사라지거나 빼앗기기도 하고 

또는 강제 포맷처리되어서 

이후는 치매 상태나 축생 상태로 임하게 되는 

경우도 있는 것이다. 



그런 사정의 일부는 

부처님 당시 아라한 가운데 

한 게송도 제대로 외우지 못한 

주리반특의 사례에서도 찾을 수 있다. 


당시 아라한도 아닌 아난존자는 

부처님의 설법을 다 기억하고 

심지어 나무에 달린 잎도 척 보고 

그 숫자를 정확히 헤아리는 상태였는데 

정작 아라한인 분이 

그런 상황에 있었다는 것인데 

또 그렇게 된 그 사정도  

경전에 제시되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왜 그렇게 된 것인가가 

문제가 되는데 

부처님은 긍정적인 부분을 다음과 같이 

제시하는 것이다. 


이 아라한이 과거에 반 게송을 

죽기전에 제자에게 전해주었기에 

이렇게 이번 생에 이처럼 아라한을 

성취한 것이라고 제시하는 것이다.


무언가 표현이 다르지 않은가. 


일반적으로 이 사정을 이렇게 생각하게 된다. 


과거에 대단한 학자였던 그가 

죽을 때까지 지식을 제자에게 가르쳐주기를 아끼다가 

죽기 직전에 딱 반 게송부분밖에는 전해주지 '않았기에' 

이번 생에 한 게송도 외우지 '못하게 된 것'이다. 

이렇게 보게 되는 것이다. 


그런데 부처님은 같은 내용을 

그 반대 측면을 제시하고 있는 것이다. 


여하튼 이 가운데 긍정적인 부분에 

더 얻을 바가 많다고 보게 된다. 



두번째 노래에서는 

뜻의 성취방안이란 

이와 같은 것이다라고 하면서 . 

세 부분의 곰과 같은 활동을 버리고 

대신 취하는 세 부분의 내용에 감사를 해야 한다고 

지록위마형 시감상을 하게 되는데 


현실에서 어떤 뜻이 잘 성취되는 과정이 

동영상 내용에서 잘 파악된다고 보게 된다. 


결국은 라이터 화두나 

mun 님의 세트이론의 내용이나 

다 비슷하다고 본다. 


그런데 그것이 곧 유무논의가 갖는 효용이고 

무생법인을 증득하고 여환삼매를 증득하는 

방안에 대한 내용도 제시하고 있다고 보게 된다. 


현실에서 다른 이들이 

도무지 잘 성취하지 못하는데 

쉽게 그것을 성취하는 방안은 


서커스 쇼와 마술 쇼와 최면쇼에 

그 원리가 다 들어있다고 보게 된다. 


알고 보면 그런 것이다. 


서커스 쇼를 하는 이가 

처음에 공중에서 그네를 타지 못했는데 

나중에 공중에서 그네를 타거나 

그릇을 돌린다거나 한다면 

그것은 어떻게 하게 된 것인가.


또 마술사가 나타나 

모자에서 카드를 하나 넣고 

꺼낼 때는 비둘기를 꺼내는 등 

각종 마술쇼를 선보이는 것은 

또 어떻게 그렇게 하는 것인가. 


또 최면쇼를 진행하는 이가 

다른 이를 각 상황마다 

이상하게 반응하게 하는 것은 

또 어떻게 그렇게 하는 것인가.


이런 내용이 다 일정하게 

어떤 상태를 나타나게 하는 

기본 원리를 제시해주는 내용이라고 할 수 있다. 



물론 어떤 이가 이 원리를 이해하고 

정말 그런 쇼를 보여주는 상태가 되기까지에는 

많은 훈련과 노력이 필요하다고 보게는 되지만, 

여하튼 그런 것이 바로 그렇게 

결과를 나타나게 할 수 있는 원리인 것이기도 하다. 




그러나 이 각 과정마다, 

어떤 것의 본 정체를 파악하거나 

어떤 모습이 나타나는 과정에 대해 인과 판단을 함에 있어 

갖기 쉬운 잘못된 판단 오류를 시정하는 것이 

공통적으로 요구된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이 문제를 유무 논의에서 

가장 기본적으로 살핀 것이다.


물론 이런 기초이론만으로 

이런 상태를 곧바로 성취할 수 있다고는 할 수 없다. 


그러나 

적어도 유무 논의에 관련된 기본적 내용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상태에서는 

상당히 지장을 받는 것도 사실이다. 




더 나아가 아무리 그 내용을 잘 이해해도 

쌓아 놓은 업의 장애를 해소시키지 못하여 

각 세계에서 여행을 자유롭게 다니지 못하는 상태로 

묶여 지내야 할 사유가 있다거나 


안인수행을 원만히 성취하지 못하고 

무생법인을 증득하지 못해 

여행허가를 받지 못할 사유가 있다거나 


또는 각 희망을 성취하고자 하는 본 취지와 

희망이 성취된 이후 그 상태에서 하고자 하는 

내용이 중생제도나 자비의 실현에 관계가 없고, 

오로지 

자신의 탐욕과 분노 어리석은 번뇌와 관련될 뿐이어서 

다른 불국토로부터 비자를  발급받기 곤란한 상태에서는 


역시 그런 사정으로 그런 방편의 취득이 

곤란한 사정도 이해해야 한다고 본다. 



즉, 그런 상태에서는 

비록 자신이 홀로 열심히 노력해서 

그런 방편지혜를 취득한다해도 

역시 그로 인해 좋음을 얻기 보다는 

그에 비례해서 자신과 다른 생명에게 

증폭된 생사고통을 겪게 되는 결과가 된다는 

사정을 먼저 잘 이해해야 하는 것이다.


현실에서 전기나 수도 기타 

온갖 것이 사건 사고와 관련되는 부분은 

이런 측면이고 


온갖 문명시설이 그 반대로 

각 생명에게 행복함과 편리함을 제공해주는 

부분은 또 다른 측면과 관련되는 것이다. 




그것이 사막에서의 물이 갖는 의미와 

물고문을 받는 상황에서 물이 갖는 의미처럼 

차이가 있는 것이다. 


이렇게 대강을 제시하면 

이로써 이 내용이 다 제시된 것으로 

이해해야 하는데 


여전히 손바닥을 마주 치면 그로 인해 

소리가 난다고 

이해하고 주장하는 prince 님이 있으므로 

조금 더 설명을 하기는 해야 한다고 본다. 



우선 만일 정말 사정이 그렇다면 

다른 이에게 소리를 들려주려면 

본인이 그 다른 이가 눈으로 내용을 얻는 정신 부분에 

손바닥 모습을 비춰주어야 

그렇게 그가 소리를 듣게 된다고 할 것인가.


그렇지 않은 것이다. 


시각정보가 청각정보를 만들어 내는 원인이 

아니라고 하는 것은 이런 의미다. 



그런데 여기에서 그치지 않고 

prince 님은 

어떤 이가 그런 시각정보를 얻고 

다른 이도 또 그런 시각정보를 얻으려면 

그에 상응한 내용이 

실재에 그처럼 있기에 그런 것이다라고 

주장하고 

그 각 내용을 

그대로 실재에 밀어 넣으려고 하는 것이다. 



즉 현실에서 

시각정보와 청각정보가 

그런 관계가 있다고 여겨지면 


그 내용을 그대로 실재 영역에 밀어 넣은 다음 


그런 실재에 의해 

시각은 시각대로 그런 정보를 얻는 것이고 

청각은 청각대로 그런 정보를 얻고 

그래서 그런 관계성이 있다고 하고 

그것은 자신만 그런 것이 아니라 

다른 이들도 그렇게 해서 

그런 내용을 얻는다고 제시하려는 것이다. 



이런 주장은 일단 

어떤 이가 얻는 시각정보와 청각정보를 

바로 관련시키는 것은 아니고 

실재를 개입시켜 이해하고자 하는 것으로 

모든 것이 엉터리라고 할 수는 없는데 


다만 그 내용이 결국은 

처음에 시각정보와 청각정보를 바로 서로 관련시킨 것과 

마찬가지인 점에서 

문제가 있다고 보게 된다. 



그리고 그런 주장을 하려면 

한 단면에서라도 그 관계를 

그처럼 확립시킨 다음에 

그것을 계속 적용해 나가야 한다고 보는 것이다. 


그런데 그것이 한 단면에서조차 

확립이 안 되는 사정이 있는 것이고 

바로 그렇기에 그 사정을 

유무 논의를 통해 살핀 것이다.




거기에는 물론 prince 님처럼 

그 관계나 그 내용을 망상적으로 

받아들이게 하는 일정한 사정이 있는 것이지만, 


그것은 그렇게 망상을 일으키고 

증폭시키게 하는 사정일 뿐이고 


그처럼 망상을 일으켜 고집하게 만드는 그런 사정이 

곧 그런 망상을 

옳은 내용으로 확립시켜주는 내용은 되지 못하는 것이다. 



그러니 망상 상태에서는 

왜 그런 망상을 자신이 처음에 갖게 되었고 

또 그것을 현실에서 견고하게 고집하고 

유지하게 되게 되는가하는  

그 사정을 이해해서 

그 상태를 벗어나야 하는 것이고 


그런 상태가 되어야 

반대로 앞의 방안들이 원만하게 

성취될 바탕도 함께 마련이 되는 것이라고 

보는 것이다. 



그런데 

자신부터 그런 망상증상이 해소가 안 되고 

자신부터 생사고통에 묶여 있는 상태에서 

다시 여러 사정이 겹쳐 

감옥에 갇혀 지내야 하거나 

여행 허가가 나오지 못하거나 

다른 곳에서 비자가 발급이 되기 곤란한 상태에 있는 어떤 이가 


서커스 쇼나 마술쇼 최면쇼를 익히려 하고 

그런 상태에서 그가 다른 이를 상대로 

전수시켜주려 한다면 그것을 뜻대로 할 수 있겠는가. 


그리고 그렇게 하면 그것이 

그 자신과 상대의 삶에 과연 도움이 되겠는가. 

그렇지 않다고 보는 것이다. 



오히려 그러면 그럴수록 그가 

감옥에 묶여 지내야 할 기간만 

더 늘어날 뿐이라고 

객관적으로 그 사정을 다 보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어떤 뜻이 성취되고 안 되는 차이를 

만들어내는 핵심은 

바로 그 부분에 있는 것이다. 


그래서 유무논의나 망상증상과 

편집증적 집착증세의 해소는 

그 자체만 놓고 보면 

아무 내용도 만들어 주지 않는 

공허한 이론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이 부분이 핵심인 것이다. 




그리고 이 유무논의 과정에서 

금강경의 실무고명 즉비고명의 구절처럼 

그 각각은 이름뿐인데 

어떤 주체가 현실에서 

그 이름을 그처럼 나누고 묶는 과정이 

어떻게 그렇게 전개되는가부터 

잘 이해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본다. 



[...]


요즘 1 % 만 타겟으로 해서 세금을 많이 부담시킨다고 

하는데 1 % 라고 해서 아무렇게 해도 된다고 

할 수는 없다. 


과거 유대인들이 독일인에게는 그런 1 % 였는데 

그것 때문에 요즘도 독일 수상이 매번 반성문을 

발표하곤 하지 않는가. 


다수결이 곧 선이고 정의라고 잘못 판단하면 

국민의 1/3 의 운명을 언제나 나머지 2/3가 

합의하면 마음대로 해도 된다고 생각하기 쉽다. 


그 마음대로의 내용에 

1/3 이 그런 상태를 원하던 원하지 않던 

2/3 가 환호를 하면 

그것으로 다 올바르고 적절하다고 볼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그러면 의견이 서로 다를 때 

어떻게 결정을 해야 되는가. 


그것이 바로 모나게 둥글게 각 경우의 입장을 

서로 바꾸어 가면서 

결국 자신이 이런 각 경우에 확률상 골고루 

입장을 바꾸어 위치하게 된다는 사정을 

미리 잘 판단한 가운데

어느 경우나 좋음을 얻게 될  

적절한 내용이 무언가를 헤아려야 한다고 보는 것이다. 


톰 소여와 톰 아저씨의 상황은 

그래서 상당히 문제가 되는 것이다. 

과거 톰 아저씨를 고통스럽게 한 이가 

지금 톰 아저씨의 채찍을 맞으면서 

공원을 달리고 있다고 해도 

그 톰아저씨가 지금 

별로 시원해지는 것은 아닌 것이다. 


그래서 이 경우도 좋고 저 경우도 좋은 방안이 

무언가를 찾아 매 경우 실천하는 것이 

수행의 방안인 것이다. 


저기에서 사진을 찍고 나오는데 

다리가 간지러워서 혼이 났다. 


이상하지 않은가. 

개미가 문 것인가. 


그런데 여하튼 어떤 생태계에 

들어가면 그 생태계에서는 일단 

그런 다양한 심사나 방어 활동을 하기에 

본인의 신체에 그런 증세가 나타난다고 보게 된다. 


식물이 여름에 치톤피트와 같은 것을 발산한다거나 

하는 것도 그러한 활동이라고 보게 된다. 


그런데 그런 경우 

마구 긁으면 그것이 덧이 난다고 보게 된다. 


간지럽더라도 조금 진득하게 참고 있으면 

오히려 상쾌함도 느끼게 된다고 본다. 


[...]





>>>




사람들이 

몸에 병이 나서 통증을 느끼고 

그리고 시간이 감에 따라 

몸이 늙어가고 

그리고 기관이 허물어지고 

그리고 죽어 사라지는 것을 원하는가.


그리고 자신을 괴롭히는 원수를 만나고 

자신이 좋아하는 사람과는 헤어지고 

자신이 원하고 갈구하는 뜻마다 다 뜻대로 성취되지 않아서 

괴로움을 받기를 원하는 것인가? 


사실은 그렇지 않다. 


그런데 여기서 그런 문제는 제거하고 

그러나 무량하게 좋고 좋고 좋음만 얻어내는 방안을 

논의하면서 


그렇게 되는 방안은 

우선 서커스나 마술쇼 그리고 최면쇼의 원리와 

사정이 같다고 제시하였다. 


그리고 그 기초 이론은 

이름과 깊은 관련이 있다고 제시한 것이다. 


그것은 

반야바라밀다경에서 제시되는 내용  

..

모든 것은 이름일 뿐이다. 


그리고 금강경 등에서 

즉비a고명a, 또는 실무a고명a  

이런 형태로 제시되는 구절


그리고 화엄경 아승기품의 게송에서 

소개한 내용


일일명유제여래,, 이런 구절에 제시된 내용과 

모두 관련되는 내용이다. 






좋고 좋음을 얻는 방안은 

결국 서커스쇼와 마술쇼와 최면쇼를 하는 방안과 

같다고 적었는데 

샘플 자료가 어느 정도 필요하다고 본다. 



일단 재미를 주는 내용이므로 

감상을 하는 가운데 

여기에 들어 있는 어려운 수학문제의 답도 

찾아낼 필요가 있다고 본다. 


즉 왜 이런 이상한 모습이 나타나게 된 것인가에 

대해 그냥 쇼이니까 ~ 이런 식으로 답하지 말고 

그 답을 한 번 찾아보는 것이다. 


그리고 이런 이상한 현상이 나타나는 과정이 

왜 일반인이 전도몽상 속에서 헤메도는 현실과  

그 사정이 같다고 하게 되는가도 살펴야 하고 


그리고 또 

여기에서 어디에 

생사고통을 벗어나는 해탈문들과 

무량한 서원을 무량한 기간에 걸쳐 성취해나가는 

수행의 원리가 들어 있다고 하는가도 

살펴야 한다고 본다. 



◆001,





○ [pt op tr]Hilarious Hypnosis Voodoo Doll



- 인형에 반응하는 최면 



○ [pt op tr]Hypnosis Gone Wrong - Hypnosis Video



- 최면쇼 중에 최면이 걸리지 않거나 잘못된 경우들 - 



○ [pt op tr]New Best Magic show of Zach King 2017 - Best magic trick ever



- 동영상 포토샵인가. 마술인가.  




○ [pt op tr]BEST Magic Show in the world 2016 - Genius Rubik's Cube Magician America's Got Talent 2016



- 어려운 수학문제와 마술 



○ [pt op tr]chinese acrobat



- 따라 하면 위험한 서커스 




○ [pt op tr]Dancing with lions: Circus show by Ukrainian father and son
New China TV 
Ne



- 말하지 못하는 상대도 이렇게 잘 하게되는 사정 -  




일단 재미를 주는 내용이므로 
재미를 주기 위한 쇼로만 생각하면 
그냥 재미와 즐거움을 주는 내용이지만, 

여기에 현실에서 망상분별을 바탕으로 
무언가를 성취한다고 할 때 
그런 희망을 성취하는 기본 원리가 들어 있다고 보게 된다. 



>>>

앞에서 

서커스와 마술 최면쇼 자료를 보았는데 

인터넷에서 키워드를 넣으면 

유사한 자료를 많이 검색해 살필 수 있다. 


그런데 

현실을 살아가는 입장에서는 

서커스맨이 접시를 동시에 여러개 막대로 돌리는 것을 

보면서 대단하다고 여기기는 하지만, 

현실에서 그렇게 접시를 돌려야 할 필요도 별로 못 느끼게 되고 

다른 사람을 목에 매달고 자전거나 롤러 스케이트를 타야 

할 이유도 별로 못 느낀다. 


다만 직접 하려면 행하기 어려운 내용을 

서커스맨들이 보여주니 놀랍다고 느낄 뿐이다. 

그런데 그것도 한 순간이고 

나중에는 서커스맨이 접시를 수십개 막대에 돌리는 것은 

당연하고 못 돌리면 오히려 이상하다고 여기게 되고는 한다. 


공중 그네를 타면서 서커스맨이 상대를 붙잡거나 

말 위에서 서서 달리거나 하면 놀라는 것이 아니고 

그렇지 못하면 오히려 이상하게 여기는 상태가 된다. 




한편 자신이 원하는 내용이 마술사의 마술처럼 

곧바로 이상하게 성취가 되면 좋겠다고 희망은 하지만, 

현실에서는 그렇게 되는 경우는 별로 없다고 여기기도 하고 

마술이란 단지 눈속임에 불과해서 실답지않은 것이라고 

여기게 된다. 

그러나 현실에서 수없이 이렇게 눈속임에 의해 

사기를 당하는 사례가 또 많은 것도 사실이다. 


전화로 이런 사기를 당해 피해를 보는 금액이 

1년에 몇천억 단위라고 보고가 되고 있고 

투자 과정이나 도박장에서는 전문 마술가 수준인 이들이 

부지런히 활동한다는 것도 현실이다. 


그래서 자신의 눈을 너무 믿고 살아가는 것도 

그렇게 현명한 자세는 아니라고 할 수 있다. 



한편 최면술사가 최면을 걸면 

관객의 입장에서는 없는 것을 있다고 여기고 

또 있다고 보는 것은 없다고 여기면서 

최면걸린 이들이 그에 따라 다양하게 이상한 반응을 하는 것을 

보게 된다. 


그런데 이런 현상이 재미는 있다고 여기지만, 

이것이 자신의 삶과 무슨 관련이 있는지 이해하기 힘들다고 여기게 된다. 

그리고 정작 자신이 그런 상태에서 

태어나서 죽는 순간까지 망상분별을 행하면서 

현실을 살아간다는 것은 잘 의식하지 못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그런데 여기에서 유무논의를 행하는 가운데 

이런 자료를 살피는 것은 

서커스나 마술쇼나 최면쇼를 행하는 이가 되어 

열심히 훈련을 하자. 

이런 내용을 제시하기 위한 것은 아니다. 


다만, 여하튼 이들 쇼는 

일반적으로 성취하기 힘들다고 보는 이상한 현상을 

그렇게 나타내 보이므로 

무엇이 그렇게 만드는가를 살펴볼 필요는 있고 


또 이것이 현실에서 각 생명이 겪는 

생사고통을 어떻게 벗어나고 

또 그런 가운데 어떻게 

무량한 복덕과 지혜를 성취할 수 있는가에 대하여 

많은 참고가 된다고 할 수 있다. 



우선 지금까지 

실재와 감각현실 그리고 관념분별의 관계를 

놓고 있고 없음의 문제를 살폈는데 

그 내용은 

현실에서 자기나 자신의 것에 대해 행하는 판단들이 

망상분별이라는 내용을 제시하는 것이다. 


그것을 이해하는데 

위와 같은 쇼가 그럴듯하게 보이는 

그 사정을 이해하는 것이 도움이 된다고 보는 것이다. 


그래서 자신의 현실의 내용이 

알고보면 서커스나 마술쇼나 최면쇼의 내용과 같아서 

실답지 않다는 사정부터 잘 이해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보는 것이다. 



이와 함께 경전에서 그 일체는 이름뿐이다라고 하는 내용이 

여기에 대해 무엇을 제시하는 내용인가를 

살펴야 한다고 본다. 



우선 경전 내용을 붙여 놓기로 한다. 



K0001V01P0088b17L; 

佛言善現 菩薩摩訶薩但有名謂爲菩薩摩訶薩

般若波羅蜜多亦但有名謂爲般若波羅蜜多

如是二名亦但有名

善現此之三名

不生不滅唯有想等想施設言說

如是假名不在內不在外不在兩閒不可得故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선현아, 

보살마하살은 

다만 이름이 있을 뿐이므로 

보살마하살이라 하고, 

반야바라밀다 또한 이름이 있을 뿐이므로 

반야바라밀다라 하며, 

이러한 두 가지의 이름 또한 이름이 있을 뿐이니라. 


선현아, 

이 세 가지 이름은 

나지도 않고 없어지지도 않거니와 

오직 있다는 생각과 

같다는 생각만으로 

언설(言說)을 만든 것이니, 


이와 같은 상정(想定)된 이름은 

안에도 있지 않고 

밖에도 있지 않고 

두 중간에도 있지 않아서 

얻을 수 없기 때문이니라. 

...


대반야바라밀다경 초분 교계교수품 제 7



K0013V05P0981a12L; 是實相者則是非相是故如來說名實相


세존이시여, 이 실상은 상(相)이 아니므로 

여래께서 실상이라 말씀하십니다.


-- 금강반야바라밀경 



於彼一一毛端處,  演不可說諸佛名,

一一名有諸如來,  皆不可說不可說。

어피일일모단처,  연불가설제불명,   

일일명유제여래,  개불가설불가설。   


  저러한 하나하나 터럭 끝마다                                     

  말할 수 없는 부처 이름 말하며                                   

  하나하나 이름 아래 있는 부처님                                 

  모두 말할 수가 없이 말할 수 없네 

... 


대방광불화엄경 아승기품 제 30                                


이런 내용들을 일단 제시할 수 있다. 


이것이 현실에서 

각 생명이 생사고통을 겪는 사정과 함께 

또 이것을 벗어나 무량한 복덕과 지혜를 얻는 

방안과 깊게 관련이 된다고 여기서 제시하는 것이다. 


앞에서 본 서커스나 마술 최면쇼가 그렇게 

진행될 수 있는 원리도 

이와 관련이 되는데 


그러나 여기서는 그것이 

바로 현실에서 각 생명이 그런 형태로 

지옥과 축생 아귀 세계로 묶여 살아가면서 

생사고통을 겪는 과정임을 제시하는 것이고 


그런 쇼를 보면서 

현실이 그와 같이 전개되는 사정을 잘 파악하고 

기본적으로 

현실에서 겪는 생사고통을 벗어나와야 한다고 

제시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 이후 무량한 수행을 통해 

무량한 복덕과 지혜를 성취할 때도 

이런 사정을 기본바탕으로 놓고 

앞과 같이 그리고 노래에서 제시하는 것처럼 

그렇게 놀라운 훈련을 통해 서커스를 행하고 

마술과 최면쇼와 같이 놀라운 일을 행하는 가운데 

결국은 지옥에 묶여 들어가는 방향으로 임하지 말고 


그와 반대로 대자비의 마음으로 임해서 

여환삼매를 증득하고 

불국토를 장엄하고 성불하는 상태로 나아갈 것을 

제시하는 것이다. 


그래서 위 내용이 도대체 무슨 의미인가를 

서커스 등의 기본자료와 함께 

잘 검토해야 한다고 본다. 


지금 다리가 상당히 아프다. 


유마힐 소설경에서 왜 아픈가라고 묻는 질문에 

그것은 생사를 받았기 때문에 그런 것이라고 

유마힐 거사가 답한 답이 떠오르는데 


여하튼 조금 쉬었다가 이어 나가기로 한다. 



수행자가 행하는 수행은 

결국은 유마힐 소설경에 제시되거나 

반야바라밀다경 등에 제시된 것처럼 


생사고통은 벗어나 

청정한 니르바나를 기본으로 확보한 가운데 


은하계를 머리카락하나만으로 공간을 이동시킨다거나, 

작은 공간에 큰 천체를 다 집어 넣는다거나 

시간과 공간의 장애없이 각 불국토를 오간다거나 

그런 등을 포함하는 내용인데 

이런 내용을 제시하면 

이것을 구라성 이야기로 이해하는 경향이 많은 것이다.



그런데 그것이 진리에 바탕한 내용이라는 것을 

이해하는데 있어서 

앞 내용을 먼저 살피는 것이 필요한 것이다. 


이미 앞에서 

어떤 희망을 놓고 추구하고 성취시키는 것은 

다 같아 보이는데 


왜 현실에서 망상분별과 집착에 바탕해서 

희망을 추구하는 것은 

모두 지옥과 이귀 축생 세계로 들어가는 노력이고 


수행자가 무량한 서원을 추구하는 것은 

그 반대로 생사고통을 벗어나고 

어떤 경우나 100 % 성공하고 

중생을 제도하는 그런 노력인가를 

살폈는데 


여기에서도 그런 내용을 잘 살펴야 한다고 본다. 


아이스크림을 사먹었는데 

이전보다 크기가 1/2 로 줄었는데 

가격은 더 비싸다. 

누가 여기서 서커스와 마술과 최면을 행한 것인가. 


이런 문제는 

생명을 다투는 병원이나 

감옥을 갈 것인가 말것인가를 놓고 치열하게 다투는 법정에서도 

종종 벌어지는 문제다. 


의사나 법관 앞에서 시계줄을 흔드는 경우는 없지만, 

그러나 알고 보면 그 사정이 그렇다는 것도 

이해할 필요가 있다. 


의사가 어떤 약처방을 하는가는 

환자의 상태에 달렸다기 보다는 

제약회사에 달렸다는 보고가 자주 되는데 

이런 현상이 바로 

마술사들이 지옥에 단체로 묶여 들어가는 원인의 하나라고 

지적하는 것이고 


수행자는 수행자대로 

사바세계에 옥돌을 하나 박은 상태에서 

10 억 세계를 관할하려고 노력을 하는 상황인데 

이 두 차이가 어디에서 나타나는가를 

면밀하게 잘 헤아려야 한다고 보는 것이다. 


옥돌이란 여기서 무엇인가 하면 

어떤 재벌기업이 백만평 땅을 사서 

공장이나 놀이시설을 지으려고 하는데 

가운데 구슬만한 땅 하나를 소유하지 못해서 

힘들어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알고보니 그것이 mun 님이 

우주 세트를 돌리는 스위치라고 주장하는 것이다. 


[...]




앞에 제시한 

경전에서 제시된 구문의 구조는 

사실은 그 내용만 그렇다는 것이 아니고 

현실의 일체의 것이 사정이 그와 같다라고 

제시하는 내용인데 


그런 관계로 

자신이 어떤 상태이던 아무렇게나 

이름을 붙이면 그것으로 끝이다. 

또는 일체는 각 이름을 모아 놓은 사전 하나만 

있는 것일 뿐이라고 

잘못 이해하고 

수행이나 현실에 임하려고 하는 경우도 있을 수 있다고 본다. 


왜냐하면 표현을 잘 음미하지 못하면 

그 표현이 그런 내용을 제시하고자 한 것처럼 

오해가 되기도 하기 때문이다. 


그러니 구문을 잘 읽어보아야 한다고 본다. 


대반야바라밀다경에서는 

보살과 반야바라밀다를 제시했는데 

왜 3 이름이라고 이렇게 제시했는가도 

잘 살펴야 한다고 본다. 


>>>


[...]

금강경에 

모습이나 음성으로 여래를 구하는 것은 

삿된 도를 행하는 것이라고 하여 


마치 기독교나 유대교 회교 등에서 말하는 

우상을 배제하는 내용이 제시되는데


그러나 경전에는 또 한편 

불상을 모시고 공양 공경 존중 찬탄하는 것이 

수행자에게 많은 복을 가져다 주는 수행이라고 하는 

내용도 제시된다. 


그것은 심지어 부처님이 만들어낸 

로봇 부처님의 경우도 사정이 그렇다는 내용도 

경전은 제시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또 왜 그런가. 



그것은 위와 같은 두 측면을 모두 

수행자가 다 잘 이해하는 가운데 

수행을 해나가기에 

그런 것이라고 이해할 수 있다. 


그런데 현실에서 눈을 떠서 

위와 같은 상이 보인다고 할 때 

이 모습을 보고 무엇이라고 생각하고 

무엇이라고 이름을 붙이는가 


이것이 지금 논의하는 

소원의 성취과정과 대단히 밀접한 

관련이 있고 

이 관계를 잘 이해해야 한다고 

유무 논의를 하는 것이다. 



그런 가운데 우선, 

그와 같은 모습이 곧 여래라고 생각하는 것은 

삿된 도를 행하는 것이고 엉터리라고 

금강경에서 기본적으로 제시한 것이다. 


그런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또 어떤 사정으로 

어떤 불상을 모시고 

부처님을 생각하고 공양 공경 존중 찬탄하면 

또 복덕을 얻게 된다고 할 것인가. 



그래서 이런 문제를 유무 논의와 관련해서 

살펴 보는 것이 필요하다고 본다. 




지금까지는 그저 유무논의의 결론을 

먼저 제시하고 그런 상태에서

이런 유무논의가 현실에서 갖는 효용을 먼저 살피고 

그것은 곧 생사고통을 제거하고 

현실에서 무량한 복덕과 지혜를 구족하는 것으로 

압축해 제시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것이 곧 유무논의를 행하는 논의 취지이고 

논의 이유이기도 한 것이다. 


즉 왜 그렇게 복잡하게 있고 없음의 문제를 

굳이 따져야 할 필요가 있는가는 

그에 따라 위와 같은 효용을 얻거나 얻지 못하는 차이가 

있기에 그렇다라고 제시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런 효용을 제시하는 것이 

거의 마무리 되었기에 

이제는 다시 유무논의의 세세한 부분을 

살펴나가는 것이 적절하다고 보게 된다. 


[...]
>>>



 






>>>

희덕 여래님의 상이다. 

희덕 여래님의 상을 찾을 때 

무엇을 가지고 찾았는가하면 

본인이 알고 있는 정보는 명호 뿐인 것이다. 


그래서 왠지 희덕이란 명호에 어울리는 느낌을 받게 되는 불상을 

찾은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본인이 희덕여래님이라고 보는 

부분을 사진에서 제시하는 과정을 살펴보기로 하자. 


위에 3 종류의 사진이 있는데 

본인이 위 사진이 희덕여래님이라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다른 사진은 희덕여래님이 아니라고 보는 것이기도 하다. 


여하튼 이 과정에서 

이런 분별을 행하는 과정은 

분별영역에서 무엇인가로 일정한 부분을 나누고 묶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위 사진만 놓고 보면 흰 부분과 하얗지 않은 부분이 

우선 나누어진다고 할 수 있다. 


그래서 이렇게 나누게 되면 

그렇게 나눔은 달리 보면 

그렇게 일정한 부분을 묶었다는 것도 의미하는 것이다. 


그래서 이 현상을 먼저 잘 이해할 필요가 있다. 


본인이 저 사진에서 바깥 흰 부분은 그냥 여백이고 

가운데 모습이 부처님이라고 생각한다는 것은 

그렇게 나누고 묶는 작용이 

마음에서 일어났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래서 희덕여래님은 저런 모습이라고 생각하고 

저와 같은 사진의 일 부분이 바로 희덕여래님이라고 

본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런데 바로 이것이 망상분별의 출발점이기도 하다는 것을 

유무 논의에서 지적하는 것이기도 하다. 


그것이 바로 상(相)과 상(想)의 관계의 문제다. 



앞 경전 내용에서 명이란 표현이 나오는데 

그 명이란 어느 영역과 관련되는 표현인가 하면 

관념분별영역과 관련되고 

상(想)과 관련되는 내용이라고 할 수 있다. 


그래서 위에서 명이라고 제시하는 내용들은 

결국 상(相)과 상(想)의 관계에서 

각 생명이 일으키는 기본적인 망상과 오류를 

시정할 필요성을 제시하는 것이기도 하다. 


그래서 이 과정에서 무엇이 문제인가를 잘 이해해야 한다고 

보는 것이다. 



일단 저 사진의 모습부터 잘 헤아려보자. 


처음 저 모습은 어떤 이가 눈을 떠서 얻는 내용이다. 


그런데 이 내용도 곰곰히 생각하면 

그냥 백지가 아닌 것이다. 


무슨 이야기인가 하면 

오로지 하얀 색만 얻거나 

또는 검은 색만 얻는 가운데 

이런 내용을 놓고 

백지는 여백이고 

어떤 부분은 부처님 모습이라고 분별을 행하는 것은 

아니라는 의미다. 


그래서 비록 감각영역에서는 

어떤 부분이 a 이고 

다른 부분은 b 이고 이런 식으로 

묶고 나누어 관념분별을 일으키는 작용은 행해지지 않지만, 


그래도 기초적으로 각 부분에 대해 

관념영역에서 무언가 

서로 같고 다르다고 분별할 형태로 

내용을 달리 얻고 있다고 보게 된다. 


그래서 사실은 감각내용을 얻는 정신활동도 

식이라고 표현하고 

분별내용을 얻는 정신활동도 

식이라고 표현하게 되는 사정을 이해할 수 있다고 본다. 


식이라는 표현은 표현상 무언가를 서로 나누어 구분해 

무언가를 알아내는 활동이라는 의미를 갖는다고 

보게 되는데 


그런 활동은 물론 분별을 행하는 의식이 가장 

대표적이라고 보지만, 

감각을 맡은 정신도 그런 활동을 하는 것이라고 

보게 된다는 의미다. 


즉 눈을 떴는데 오로지 하얀 색만 얻거나 

전체부분에서 검은 색만 오로지  얻는 상황에서 

어떤 이가 이 부분은 꽃이고 저 부분은 자신의 몸이고 

이런 식으로 분별을 행하는 것은 아닌 것이다. 



그런데 처음 감각은 또 왜 그렇게 얻게 되는가의 

문제도 역시 살펴야 한다. 


그래서 어떤 이가 눈을 뜨면 저런 내용을 얻고 

눈을 감으면 저러한 내용을 얻지 못하는 내용을 놓고 

이것이 무슨 의미인가를 

또 곰곰히 헤아려야 할 필요가 있는 것이다. 


결국 이것이 유무 논의에서 

무엇이 실답게 있는 것이고 

무엇이 진짜이고 

무엇이 환이나 꿈과 같은 성격을 갖고 얻는 내용인가를 

판단하는 유무 문제와 직결되는 내용이 되는 것이다. 



이 부분에서 혼동을 일으켜서 

잘못된 판단을 행한 다음 

집착을 갖고 임하므로 


처음 자료화면에서 

최면술사가 인형을 하나 놓고 

인형을 찌르거나 흔들면 

최면에 걸린 이가 그 인형이 마치 자신이나 되는 것처럼 

일일히 그에 따른 반응을 하는 형태가 

나타난다고 이해하게 되는 것이다. 


객관적으로 관객의 입장에서 이 상황을 볼 때 

그 인형이 그런 최면 걸린 이들과 

무슨 관계가 있다고 할 것인가. 


사실은 없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최면에 걸린 이들이 

최면술사의 최면을 통해서 

그렇게 생각하지 않게 되었다는 점이다. 


그래서 그런 이상한 모습을 

관객에게 선 보이게 되는 것이기도 하다. 


그런데 이것은 최면상황이다. 


그런데 마치 이런 최면상황처럼 

현실에서 생활하는 이들은 

대부분 자신이 보는 감각현실 가운데 

일정한 부분을 다시 자신이라고 분별하는 가운데 

매 순간 그렇게 임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이 전혀 관계가 없는가하면 그렇다고 할 수는 없지만, 

정작 그런 생각을 하고 그런 활동을 하는 

그 각 주체를 놓고 보면 

본질적인 것이 아닌데 

그러나 그 주체가 그렇게 분별하고 

매 순간을 대하므로 

그렇게 된다고 제시하는 것이다.


이것이 각 주체가 그런 망상분별을 갖게끔 되는 

사정이기도 한 것이다. 


그 사정은 이해하지만, 

그러나 올바른 판단이 아님을 

지금 유무 논의에서 제시하는 것이다. 


그러니 기존 현실에서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하던 것을 

정상이고 표준이라고 생각하던 입장에서는 

일단 혼란이 일어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이 가운데 과연 어떤 입장이 옳은가. 

이것이 유무논의의 내용이기도 한 것이다. 


그런 가운데 일반적 입장을 따르면 

최면 걸린이가 인형의 상황에 

반응하면서 행하듯 

현실에서도 그런 형태로 

생사 고통을 받아나가게 된다고 제시한 것이다. 


그러나 그런 망상을 떠나면 

앞과 같은 입장에서는 

어떤 이가 여기서 태어나고 저기서 죽는다고 

여기는 그런 상태를 그대로 놓고 

정작 그 주체는 여기에서 생사를 얻을 수 없다는 것을 

이해하고 평안하게 임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러니 장례식장이나 화장터에서 

일어나는 모습은 하나라고 할 것인데 


망상분별을 기준으로 하면 

여기서 그런 생사가 있는 것이고 


그런 망상분별을 떠난 입장에서는 

여기에 그런 생사를 얻을 수 없다고 관한다는 의미다. 


그래서 앞의 입장은 

부처님도 그렇게 해서 

돌아가시고 열반에 드셨다고 보는 것이고 


뒤의 입장에서는 

무슨 엉뚱한 이야기인가. 

부처님은 표현상 상주한다라고 이해하는 것이 나을 만큼 

성불을 하신 이후 수명이 한량이 없는 상태로 

부처님으로 계시고 활동을 하신다라고 또 보게 되는 것이다. 



그러니 이 두 입장 가운데 

어떤 것을 옳다고 볼 것인가가 문제되는 것이다. 


그러니 앞에서 사진 하나를 놓고 

어떤 부분을 부처님이라고 보고 생각한 과정에 

어떤 문제가 있는가부터 잘 헤아려야 한다고 하는 것이다. 



이미 이 문제를 그간 많이 살폈는데 

여기서 사진의 일정한 부분을 나누고 묶어서 

일정한 부분을 부처님이라고 생각할 때 


이 두가지를 먼저 확인하자. 


그런 내용을 눈을 떠서 얻은 것은 사실이다. 

그리고 그런 내용을 얻고 그에 대해 생각하는 가운데 

그런 생각을 일으킨 것도 사실이다. 


지금 이 가운데에서 무엇이 있고 없음을 따질 때 

결론으로 그런한 내용은 생각이고 이름뿐이라고 

제시할 때 

앞 두 내용을 부정하는 것이 아닌 것이다. 


그러나 위 두 내용을 바탕으로 

엉뚱한 분별을 하는 것은 곤란하다고 

제시하는 것이다. 

그래서 이 부분을 혼동하면 

상과 상의 문제에서 대단히 많은 혼란을 일으키게 되고 

나중에는 실재의 문제 즉 실상의 문제에서도 

또 마찬가지 혼란을 일으키기 쉽다고 보게 된다. 


여하튼 논점이 많은데 

논의를 감각현실과 관념분별에 일단 집중시켜서 

현실에서 왜 망상분별을 일으켜 

생사고통을 받아나가게 되는가부터 

살펴나가기로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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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하튼 여기서 유무 논의를 살피는 것은 

기본적으로 크게 분류해서 

실상(實相) - 상(相) - 상(想)의 관계를 살피는 문제라고도 할 수 있다. 


이 관계를 어떤 이가 쉽게 이해하려면 

처음 자신이 무언가를 볼 때 

자꾸 눈을 감고 뜨고 하면서 

그 때마다 어떤 변화를 그 과정에서 겪는가를 

혼자 잘 검토해보는 것이 필요하다. 


쉽게 말하면 사정이 이렇다. 

눈을 뜨면 무언가 내용을 보게 된다. 

그런데 그 상황에서 눈을 감으면 그런 내용을 못 얻는다. 

이런 것을 먼저 확인하는 것이다. 


그런데 그 과정을 반복하는 가운데 

그렇게 내용을 얻고 

일정 부분은 자신이고 일정부분은 꽃이나 바위라고 생각을 

일으키는 것이다. 


그런데 이 생각은 그런 색깔도 없고 

만져지지도 않는 가운데 

눈을 감아서 그런 모습을 보지 못하는 순간에도 

여전히 마음에서 떠올릴 수 있는 것이다. 


그래서 일단 자신의 마음에서 얻는 이 두 내용을 

구분할 필요가 있는 것이다. 




그리고 또 하나 실상이라고 표현되는 내용이 문제된다. 


그것은 다음 사정 때문이다. 

위 과정에서 자신이 자신의 몸이라고 보는 부분이나 

꽃이나 바위라고 어떤 부분을 생각하고 

그 정체를 확인하고자 할 때 

다음의 문제를 살피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즉 자신이 눈을 뜰때 어떤 모습을 보았고 

눈을 감으면 그 모습을 보지 못하는데 

눈을 감아서 그 모습을 보지 못한다고 해서 

직전에 보았던 그 내용이 이제 아무 것도 없게 되는 것인가. 

이런 의문을 갖게 되는 것이다. 


그러니 자신이 눈을 뜨거나 감거나 관계없이 

즉 자신이나 자신의 주관과 관계없이 

그대로 실재한다고 할 내용은 무엇인가가 문제되는 것이다.


즉 눈을 감아서 어떤 모습을 보지 못해도 

무언가가 그대로 실재한다고 할 것인가. 

그리고 그런 것이 실재한다면 그 내용은 무엇인가가 

어떤 것의 본 정체를 확인하고자 할 때 문제되는 것이다. 


그것이 곧 앞에서 실상이란 표현으로 표현하는 내용인 것이다. 


이와 관련해서 prince 님은 자신이 보거나 생각한 내용을 

그대로 실재영역에 밀어 넣어서 그런 내용이 그렇게 있기에 

자신이 그런 모습도 보고 생각도 하게 된다고 

추리하고 주장하는 것이지만, 과연 그런가가 

실상과 관련해서 논의될 핵심이기도 한 것이다. 


결론은 그렇지 않고 그 실상은 

아무 것도 전혀 없다고 할 것은 아니지만, 

어떤 진짜라고 할 영원불변한 실체는 없는 가운데 [ 무아, 무자성, ]

그것을 한 주체가 얻을 수 없고 

궁극적으로 있다 없다 ~이다 ~ 아니다. 같다 다르다 좋다 나쁘다 

깨끗하다 더럽다 등등의 이분법적인 분별을 행할 수 없고 

그런 사정으로 공하다라고 표현하는 것이다. [불가득 공]


그런데 왜 이런 결론을 제시하는가는 

이후 자세히 살펴야 할 문제인 것이다.

그것은 prince 님과 같은 주장이 왜 잘못이고 

왜 그런 망상분별이 생사고통을 받게 하는 주된 원인인가를 

살피는 문제이기도 한 것이다. 


여하튼 이런 여러 내용에 대해 각각의 입장이 다르기에 

어떤 내용이 잘못인 사정을 제시하면 

그것이 서로 시시비비를 놓고 따지고 비판하는 성격을 

갖는 논의가 되는 것이다. 


그렇다고 이 모든 내용이 다 옳다고 하면서 

생사고통을 같이 받고 지내자고 할 도리는 없지 않은가. 


그래서 부득이 이 유무 논의를 살펴야 하는 것이다. 



그런데 일단 논의가 

주로 실상 - 상 - 상의 관계를 놓고 

어떤 것의 본 정체에 대해 살피는 것이고 

그런 가운데 

이 각 표현이 어떤 의미를 갖는가부터 

혼동을 일으키지 않고 잘 이해해야 한다고 본다. 



한글로 표현하면 혼동이 더 일어나는데 

사실 한자어로 매번 표기하는 것이 힘들기도 하지만, 

실상(實相) - 상(相) - 상(想) 이런 형태로 

한자어로 표기한다고 해도 

혼동이 크게 줄어드는 것은 아니다. 


그래서 우선 이런 표현이 갖는 문제부터 

또 살펴야 한다. 


표현은 달리 했다고 하지만, 

우선 위 표현들은 여하튼 언어라는 점에서

같은 것이다. 

그러니 혼동이 발생하는 것은 마찬가지인 

사정이 있는 것이다. 


따라서 논의 과정에서는 이 문제부터 

잘 해결하고 논의에 들어가야 한다고 보게 된다. 


이는 무슨 문제인가. 


이것을 쉽게 다음처럼 생각해보자. 


어떤 이가 아주 독특한 차를 구해서 

그 맛을 맛보고 난 후 

그 맛에 대해서 

다른 이에게 설명하거나 

다른 이와 논의하려고 한다고 해보자. 


이런 경우 당장 다음의 문제를 만나게 된다. 

그 맛을 설명하거나 논의하려고 하는데 

정작 어떤 방식으로 자신이 맛본 그 차맛을 

제시할 수 있는가가 가장 먼저 문제되는 것이다. 


이 글에서 그런 차맛을 논의하려고 한다면 

어떻게 그 차맛을 이 지면에 띄어 놓고 

다른 이가 그 내용을 알 수 있게 할 것인가

이런 문제인 것이다. 


그것이 가능하겠는가. 

그러나 그것이 곤란하다고 

이 논의를 생략하면 

자신이 그 차맛을 다른 이에게 설명하거나 

제시하는 것도 포기해야 하는 것이다. 


그래서 비록 그 차맛 그 자체는 아니지만, 

무언가 이 차맛을 표시해 가리킬 수단을 찾아 나서게 되는 

사정이 있는 것이다. 


그런데 여하튼 차맛도 그렇지만, 

지금 살피고자 하는 

실상 - 상 - 상과 관련해 

어떤 내용이 있고 없음을 논의할 때도 

똑같은 문제가 발생하는 것이다. 


그리고 차맛의 논의는 생략해도 

차맛을 다른 이가 잘 모르는 상태로 그친다고 할 것이지만, 

이 논의는 

각 주체가 매 순간 겪어 나가는 

생사고통을 제거할 수 있는가 

없는가 등과 관련해 대단히 중요한 차이가 있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위와 같은 어려움은 있지만, 

그러나 그 사정을 이해하고 

설명하기 위하여 

일단 언어로 나타낼 수 없는 그 무언가를 

언어로 가리키고 시설하는 것이 

먼저 이뤄지게 되는 사정이 있음을 잘 이해해야 한다. 


그 사정이 앞에서 제시한 

대반야바라밀다경 교계교수품에 

제시되는 내용이기도 한 것이다. 


번역내용은 조금 다른 표현이 되어 있는데 

언어시설이나 가명이란 표현이 바로 

이와 관련된 표현이다. 


이것이 무슨 의미인가 하면 


우선 당장 현실에서 각 주체가 얻는 내용 가운데에서도 

감각하는 가운데 얻는 내용 [감각내용]

즉 어떤 이가 세계나 자신이라고 이해하고 

현실 내용이라고 이해하는 감각현실부터가 

그런 사정을 갖는 것이다. 


어떤 이가 바위가 문제된다고 해서 

논의 과정에서 매번 다른 이에게 

그 바위를 직접 제시하면서 

논의할 수가 없는 것이다. 


감각하는 내용은 그것이 아니고 

본래 그런 언어분별을 행할 도리가 없는 것이다. 


그러나 논의를 위해서는 

일단 그런 부분을 표시하는 언어를 만들어서 

그 부분은 곧 그런 표현이 가리키는 그 무엇이라고 

시설을 한 다음 

그렇게 논의를 하게 된다는 사정이 있는 것이다. 



조금 더 자세하게 말하면 조금 더 복잡하다. 


어떤 이가 차맛을 논의할 때 

그 차를 각 사람에게 다 나누어 주고 

자신이 말하는 ○○ 차라는 것은 이것이다. 

그리고 그 ○○ 차맛은 이 차를 끓여서 얻는 맛을 

가리킨다. 

이렇게 하면 좋겠지만, 

그렇다 해도 사실은 자신이 나타내고자 하는 그 맛을 

다른 이가 그대로 얻게 하기는 곤란한 사정이 있다고 

일단 보는 것이다. 


왜 그런가. 

우선 어떤 이도 자신이 직전에 얻은 감각현실을 

다음 순간에 그대로 재생해 내지 못한다는 문제가 

일단 있다. 


그리고 그 내용은 또 다른 이에게 전할 도리도 없는 것이다. 


또 다른 사정이 있다. 


자신이 어떤 감각을 한다는 것은 

그 상황에 많이 의존하는 것이다. 


그래서 자신이 어떤 차를 똑같이 나누어 다른 이에게 

전달한다고 할 때도 

대단히 어려운 문제가 일어나는 것이다. 


각 주체가 같은 것을 설령 맛보아도 

각 주체가 얻는 맛이 정말 같은가는 알 도리가 없는 것이다. 


심지어 한 순간에 얻는 맛도 

이 부분과 저 부분이 같은지 다른지도 역시 문제가 되면 

또 같은 문제가 되는 것이다. 


여하튼 이런 어려움이 

자신이 현실에서 얻는 감각현실에서부터 

제기되는 것이다. 


그리고 이런 문제는 다시 앞에서 살핀 '실상'의 논의에서는 

더 어려움이 많다고 보게 되는 것이다. 


그렇지만, 그 사정을 이해시키기 위해서는 

비록 언설을 떠난 어떤 내용이더라도 

일단은 언어로 그러그러한 것을 가리킨다고 시설을 하는 가운데 

이 언어를 통해서 논의에 들어가는 사정이 있다는 것부터 

먼저 잘 확인해야 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이 또 각 주체가 

이런 내용을 놓고 망상분별을 일으키게 되고 

고집하고 머물게 되는 사정도 설명하는 것이기도 한 것이다. 


그래서 이 문제를 잘 이해하면 

왜 부처님이 수많은 설법을 하였다고 보는데도 

정작 부처님은 한마디도 설법한 바가 없다고 

제시하는가 하는 사정도 이해할 수가 있다고 보게 된다. 


그것은 현재 논의하고자 하는 내용은 

본래 언어를 떠난 내용으로서 

언어분별을 통한 논의[희론]을 떠난 것이지만, 


그러나 그 사정을 이해하려면 

역시 그런 희론을 통해서 그 사정을 제시할 도리밖에는 

없다는 사정과도 관련되는 것이다. 


비유하면 달을 가리키기 위해서 

손가락을 사용하는 경우와 비슷하다. 


여기서 먼저 주의해야 하는 것은 

이런 의미로 손가락으로 달을 가리키는데 

상대가 그 손가락이 손가락을 나타내는 것으로 

이해하고 대할 때는 

문제가 더 심각해진다는 점이다.  


여기서 손가락으로 가리키는 달은 

비유이기에 그 달 모습을 보기라도 하지만, 

현재 논의하는 내용은 

그렇지도 않기에 더 사정이 어려운 것이다. 


그래서 이 비유를 통해서 

언어로 나타내고 표현하는 내용들이 

도대체 어떤 측면의 어떤 내용인가에 대해  

매 경우 혼동을 일으키면 곤란함을 이해해야 한다.



그런 가운데 

실상 - 상[ 감각현실의 일 부분] - 상 [생각내용]을 

모두 앞과 같이 일단 언어로 표현하고 

이 각각에 대해 논의를 하는 사정이 있는 것이다. 



그리고 

이와 관련해 

각 내용의 본 정체나 있고 없음 

그리고 그 관계에 대해 살피는 

가장 원칙적인 방안은 

앞과 같은 언어 표현이 가리키고자 한 내용을 

일단 자신이 잘 구분한 다음 

그 각각의 관계를 다음 형식을 통해 

검토하는 것이 필요하다. 



일단 다음과 같은 실험을 자신이 행해보기로 하자. 


눈을 뜨고 감는 동작을 반복하는 가운데 

그 때마다 변화가 있고 

눈을 뜨는 순간 얻게 되는 어떤 내용을 

스스로 잘 확보해 놓기로 하자. 


평소 자신이 외부 세계나 자신이라고 보는 내용이 

사실은 이것이다. 

그런 이해가 옳던 그르던 

일단 그런 내용을 자신이 먼저 잘 확보해 두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언어분별이 아니지만, 

일단 그 내용을 감각현실이라거나 상이라는 표현으로 

가리키고 논의한다는 의미다. 



그리고 이에 대해서 생각을 하는 내용은 

그렇게 눈을 감거나 뜨거나 관계없이 

어느 정도 일정하게 유지할 수 있는 어떤 내용이다. 


자신이 눈을 떠서 모습을 볼 때 

어떤 부분은 바위고 어떤 부분은 자신의 몸이라고 

생각한다면 그런 바위나 몸이라는 생각은 

눈을 뜨거나 감거나 관계없이 

어느 정도 계속 생각할 수 있다. 

그래서 이것을 상(想)이라고 또 표현하거나 

관념분별 내용이라고 표현한다는 의미다. 


그런 가운데 이 두 내용이 

서로 어떤 관계에 있는가를 

살피는 것이다. 


그래서 처음에 

이렇게 질문을 제기하고 이것을 검토하는 것이다. 


자신이 눈을 떠 얻는 그 순간의 그 감각현실은 

그 자체가 곧 그런 생각내용인가. 

이런 문제를 검토하는 것이다. 


이는 반대 방향으로 해도 마찬가지라고 할 수 있다. 


자신이 바위나 자신의 몸이 어떻다라고 생각하고 있다면 

그처럼 생각하는 내용 그 자체는 

곧 그런 감각현실인가. 이런 문제를 놓고 

검토를 한다는 의미다. 


그것은 눈을 감아도 생각을 할 수 있다고 할 때 

그런 생각내용을 잘 붙잡아 확보해 놓고 

그런 생각내용에 


그 직전에 자신이 눈을 떠서 보던 어떤 모습이 

그런 내용에 하나라도 들어 있는가부터 

잘 확인해보는 검토가 필요한 것이다. 


그래서 눈을 감은 상태에서도 생각하는 내용은 있는데 

자신이 직전에 눈을 떠 보던 감각현실은 

이런 생각내용과 무슨 관계가 있는가를 

기초적으로 살펴야 하는 것이다. 



그래서 자신이 생각하는 내용에는 

비록 그것이 어떤 감각현실의 일정부분과 관련되는 것이라고는 

스스로 생각하지만, 

정작 그 내용에 그런 감각현실은 없다라는 사실을 

잘 검토해 보아야 하는 것이다. 



그런데 그렇다고 해도 

이 두 내용이 서로 완전히 무관하다고 할 것인가를 

또 검토해 보아야 한다. 


그것은 다음 문제를 다음 형식으로 검토해 보는 것을 의미한다. 


즉 그런 생각내용은 

그런 감각현실과 완전히 무관하게 떨어져서 

일으켜 얻은 것인가. 

이렇게 스스로 문제를 제기하고 

그것을 검토해볼 필요가 있는 것이다. 



현실에서 이런 검토가 갖는 의미는 

현실에서 망상분별을 일으켜 현실을 대하는 경우는 

이 두 내용을 서로 혼동하기도 하고 

또는 어떤 한 내용이 다른 영역에도 그대로 실답게 있다고 

하는 망상을 일으키는 주된 사정이기 때문인 것이다. 


사정이 본래 그렇지 않은데 

이상하게 

이 두 내용을 동시에 얻는 가운데 

현실을 대하면 


자신이 생각하는 내용이 

그대로 자신이 얻는 감각현실에 실답게 있다고 

생각을 하면서 

자신의 생각과 감각현실의 일정부분을 

접착시켜 놓고 자꾸 대하게 된다는 의미다. 


이 현상은 여기에서 그치지 않고 

앞에서 제시한 실상이나 실체의 존부 문제까지도 

그대로 연장시키는 성향이 강한 것이다. 


그리고 그것이 생사고통을 겪게 되는 핵심이자 

근본 원인이 된다고 여기서 제시하는 것이다. 





왜 그런가. 

여기서는 다음만 일단 제시하기로 하자. 



처음 어떤 순간에 

어떤 이가 눈을 떠서 자신의 몸이라고 보는 부분을 놓고 

그것이 자신이라고 여긴다. 

그런데 이것이 일단 문제다. 


그런 가운데 그것을 받아들이면 

자신이 생각하는 자신은 곧 그런 내용이 되는 것이다. 



일단 이것이 앞의 최면 자료에서 

어떤 인형을 놓고 인형을 찌르는데 

자신이 찔리는 것처럼 여기고 

그에 바탕해 반응하게 되는 사정이기도 한 것이다. 



그런 가운데 자신이 어느 순간 자신이라고 본 부분은 

파괴되고 사라진다는 것도 그가 생각하게 된다. 


문제는 이런 생각을 하고 이런 내용을 얻는 본 주체가 

과연 그러한가가 문제다. 


일단 이와 관련해 본 논의에서 제시하는 결론은 

사정이 그렇지 않은데 

현실에서 각 주체는 매 순간 

그렇게 이해하는 가운데 계속 생각하고 말하고 행위해가는 것이고 

그렇게 하다가 그렇게 본 자신이 사라지면 

자신이 그렇게 죽어 없어진다고 

여기면서 임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 본 주체와 그런 내용이 

전혀 무관한 것은 아니더라도 

본래 사정이 그렇지 않음을 제시하는 것이고 


어느 한 단면을 고정시켜 놓고 생각해도 

그런 분별은 잘못된 판단임을 

먼저 확인해야 함을 제시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처럼 감각현실과 관념분별 사이의 관계는 

실상과  - 상 - 상의 관계에서도 

그와 사정이 같은 것이다. 



그래서 이것이 일단 이 유무 논의에서 

처음에 검토해야 할 내용이기도 한 것이다. 


그것은 어떤 이가 눈을 떠 일정한 부분을 

자신이라고 생각하는 경우의 문제인데 

그것은 또 같은 형식으로 

일정한 부분을 다른 사람이라거나 

꽃이라거나 

앞의 사진의 경우처럼 

부처님이라거나 이런 식으로 

생각하는 모든 경우에 

공통된 문제점이기도 한 것이다. 


일단 여기까지 살피고 

조금 길게 쉬고 

그 이후 관련 문제는 또 이어 살펴나가기로 한다. 


그런데 일단 위 문제가 어떤 문제인가를 

제시한다면 다음의 현실 문제가 된다. 


만일 지금 자신이 보는 자신의 모습을 

자신이라고 한다면, 

정말 그렇다면 

자신은 5 년전이나 10 년전이나 심지어 40 년전에도 

그런 형태로 그렇게 자신을 생각했다는 것도 

대부분 의미한다. 


그런데 여기서 40 년전 정도로 놓고 

이 문제를 보면 조금 이해가 쉽다고 할 수 있다. 


40 년전에 그렇게 본 자신이 정말 자신이라면 

지금 이 순간 그런 자신은 

이 현실에서 어디에서도 찾을 수 없는 것이다. 


그런데 왜 그 40 년전의 자신의 

장례식이나 사망신고는 하지 않고 

태연하게 임하고 있는가. 


사실은 이 문제부터 곰곰히 생각해볼 필요가 있는 것이다. 


그러나 그 두 내용이 완연히 다르지만, 

여전히 이 두 지점이나 시간대에 

자신이 계속 있었다고 생각한다면 

도대체 무엇을 근거로 그렇게 생각하는 것인가를 

또 제시해야 할 것이다. 


그래서 일단 앞 생각은 엉터리라는 사실부터 

잘 확인해야 한다. 


그것은 사실은 최면걸린 상태에서 

인형을 자신이라고 여기고 반응하면서 임하거나, 

또는 매일 입는 옷을 자신이라고 생각하면서 

애착을 갖고 대하는 것과 

그 성격이 같아서 엉터리인 망상분별임을 

이해할 필요가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런 주장은 

기존에 일상적으로 생각하면서 생각하던 내용을 기준으로 하면 

대단한 혼동을 일으키는 내용이라고 보게 된다. 


그런데 그것이 

곧 생사고통을 받아나가게 하는 망상분별과 

그런 생사고통을 벗어나게 하는 이해의 

경계점이기도 한 것이다. 



>>>

앞에서 감각현실과 생각 
즉 상-상의 관계를 대강 살폈다. 


그런데 바로 이 부분이 
일단 무상해탈문과 관련이 깊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어떤 감각현실을 얻고 
그에 대해 어떤 부분은 a 나 자신이라고 생각하는 경우 
일단 그 부분은 그런 것을 얻을 수 없다는 내용부터 
잘 확인해야 이 무상해탈문을 쉽게 사용할 수 있다고 할 수 있다. 


조금 더 자세히 제시하면 
그런 감각현실 부분은 그런 a라는 생각내용을 거기에서 
얻을 수도 없고 
그런 부분은 또 앞에서 살핀 실재의 내용의 지위에 있는 것도 
아니다. 
즉 실상이 아니다. 
이런 내용도 함께 이해해야 한다고 본다. 


그런데 현실에서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고 
임하는 경우가 대부분인 것이고 
그래서 생사고통에 그대로 노출된다는 것도 
의미한다. 


그리고 이런 상태는 앞에서 
최면 걸린 상황에서 
인형이 마치 자신과 관련되는 것처럼 여기고 
반응하는 것과 사실은 그 성격이 같은 것이기도 하다. 


그래서 최면상황은 
일정한 감각현실과 - 그에 대해 일으키는 생각. 관념분별과의 
관계와 사정이 같은 것이다. 


그런데 일단 처음에 
제시한 서커스나 마술 최면쇼를 진행하는 내용을 
놓고 생각하면 
현실에서 만일 이것을 다른 목적에 악용한다는 입장에서 보면 
이런 능력을 갖는 것이 
자신의 현실의 목표를 성취하는데 대단히 도움이 된다고 
여기기가 쉽다. 


왜 그런가는 그 사정을 쉽게 생각하면 
어떤 도박사가 
서커스맨이나 마술사나 최면쇼를 진행할 능력을 다 갖추어 
상대를 그처럼 자신의 뜻과 같이 만들면 
자신의 뜻처럼 다 쉽게 성취할 수 있다고 보는 것과 
그 사정이 같다. 


그래서 이런 내용을 곧 
어떤 이가 현실에서 어떤 소원을 가질 때 
자신이 갖추어야 할 내용이라고 보고 현실에 임하기 쉬운데 
문제는 그것이 
바로 그 자신과 다른 생명의 생사고통을 
더욱 증폭시키는 결과를 낳게 된다는 점이다. 




그런데 망상분별을 바탕으로 
좁고 짧고 얕게 관찰하면 
그것을 그렇게 이해하지 못하고 
자신의 당장의 좋음을 성취시키는 좋은 방편이라고 
이를 대하기 쉬운 것이다. 


그리고 이는 위에서 제시한 자료가 
단지 관객의 즐거움에 봉사하는 것과는 
또 다른 측면인 것이다. 


여기서 서커스 마술 최면 자료를 제시하는 것은 
이미 현실이 그와 같은 성격을 이미 갖고 있다는 점을 
제시하기 위한 것이다. 


그리고 이미 현실 자체가 그런 점으로 인해 
망상분별을 바탕으로 생사고통을 무한히 받아나가게 된다는 것이 
문제라고 지적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미 현실이 그런 성격을 갖고 
그런 사정에 있는데 
여기서 위 각 내용은 그것을 더욱 증폭시켜 나가는 형태인 것이다. 


즉 보통의 현실도 그 자체로 생사고통이 문제인데 
앞의 내용은 그 상태에서 한 번 더 그런 형태로 깊게 나아가는 
내용인 것이다. 


다시 말하면 
관객이 눈을 떠서 무엇을 보고 꽃이나 인형이라고 보는 것도 
망상분별이어서 그로 인해 생사고통을 기본적으로 
겪어 나가고 있고 그것이 문제인데 


여기에 최면은 
그 상태에서 다시 한 번 더 깊게 망상을 일으켜서 
이제는 관객이 꽃이나 인형으로 보는 것을 놓고 
그것이 뱀이나 사탕이라거나 또는 자신이라고 생각하게 하여 
반응을 일으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러니 문제가 더 심각해지는 것이다. 


다른 내용도 마찬가지다. 
그 성격이나 원리는 서로 비슷한 점이 있는데 
문제는 그렇게 해서 생사고통의 문제가 해결되는 것이 아니고 
한층 더 깊어지는 상태로 나아간다는 점이 
문제인 것이다. 


쉽게 이 사정을 이해하면 
루팡이 보석을 훔치는데 
교묘한 방편을 사용하는 경우와 사정이 같다. 


보석을 훔치지 않고 
다른 이에게 이익과 즐거움을 주는 목적으로 
지혜를 사용해도 
그것만으로는 그 상대가 생사고통을 벗어나지 못한다고 보므로 
깊은 반야바라밀다의 수행이 필요하다고 제시하는 것인데 


이 루팡은 보석을 훔치는데 
다만 그 방안을 교묘하게 해서 
자신만 당장 체포되지 않으면 
일단 자신의 목표가 이뤄진다고 생각하고 
좁고 짧고 얕게 살피고 
임한다는 것이 바로 문제인 것이다. 


그래서 문제가 해결되고 
그로 인해서 좋음을 길고 오래오래 두루두루 얻고 
유지할 수 있는가 하면 
넓고 길고 깊게 관찰할 때 
그렇지 못함을 여기서 지적하는 것이다. 


그것은 
자신도 좋고 남도 좋고 온 생명이 제한없고 차별없이 좋고 
지금 좋고 나중 좋고 무한히 오래 오래 좋고 
이 측면도 좋고 저 측면도 좋고 두루두루 모두 좋은가의 문제에서 


당장 자신에게 이 측면에서 좋음을 하나 얻고 
나머지는 그렇지 못하다는 것을 제시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 사정 때문에 
그렇게 실답지 않은 좋음을 하나 얻는 일로 인해 
무량한 고통을 자신부터 되돌려 받게 되고 


또 그런 관계로 그런 생사고통이 관련된 주체들간에 
증폭되어 나아가게 된다는 사정을 제시하는 것이다. 


기본적으로 
현실에서 어떤 이가 처음에 태어나 
말도 못하고 자신의 힘으로 걸어다니지도 못했는데 
어느 순간부터는 
말도 잘하고 혼자 걸어다니기도 잘 한다. 
이것은 그 아이의 입장에서는 
서커스 훈련을 받은 것과 사정이 같다고 보는 것이다. 


무엇이 그렇게 그 아이를 변화하게 했는가하면 
그런 내용인 것이다. 


원래 이것부터 엉터리이고 문제라고 지적하는 입장인데 
여기서는 한 걸음 더 나아가 
공연히 절벽에서  줄에 매달려서 나아가거나 
공연히 막대기에 접시를 돌리는 일까지 덧붙여서 
문제가 더 심해진다고 보는 것이다. 


물론 서커스를 해서 생계도 유지하고 
관객도 재미를 얻는 측면이 있는데 
그것이 바로 하나의 좋음으로 
긴 생사고통에 묶여 헤메 다니게 하는 기능을 더 
증폭시킨다고 제시하는 측면인 것이다. 


나머지도 사정이 같다. 


원래 마술쇼의 사정은 이렇다. 


어떤 결과를 관객에게 보이는 것은 
관객이 보는 내용과는 떨어져 있는 것이다. 


두 자료 화면이 다 그런 사정을 나타내고 있다. 
쉽게 표현하면 
모자에 카드를 넣고 비둘기를 꺼낼 때 
카드를 넣는 행위와 비둘기가 나타나는 것은 
사실은 인과 관련이 없다고 보아야 하는 것이다. 


그것은 다른 과정으로 각기 나타나는 것이라고 
보아야 하는 것이다. 
그런데 마술은 
마치 이들 내용이 서로 관련이 되는 것처럼 
마술사가 빠른 동작이나 특수장치를 통해서 
보여주는 활동인 것이다. 


그래서 관객은 어리둥절하게 이를 바라보게 되는 것이다. 
현실적으로 그런 내용에서 그런 결과가 
나올리가 없는데 
마술사는 그런 내용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 마술사가 보여주는 각 내용마다 
어떤 트릭이 들어 있어서 
그렇게 된 것인가를 푸는 것은 
상당히 어려운 문제가 되는 것이다. 


사실은 이것이 마술사가 마술을 보여주는 핵심이라고 할 수 있는데 
어떤 이가 이 트릭을 알아내기도 힘들지만, 
알더라도 그것을 매번 공개하면 
마술사는 마술쇼를 진행하기 곤란한 것이 아닌가. 


여하튼 마술의 사정이 그런 것이다. 


그런데 현실에서 각 주체가 행하는 
각 내용의 정체판단이나 인과 판단이
또 본래 이런 성격을 갖고 이뤄지고 있음을 여기서 지적하는 것이다. 


그것을 이미 손뼉을 치면 소리가 난다고 
이해하는 일반적인 이해가 그런 사정이라고 제시한 것이다. 


그래서 사실은 이것도 마술이나 기적이라면 
마술이고 기적인 것이다. 


손을 바라보자, 
여기에 소리가 보이고 들어 있다고 보는가. 
사실 손과 소리는 
바위와 불처럼 엉뚱한 관계인 것이다. 


그런데 손을 마주치면 매번 소리를 듣는 것이다. 
그래서 이제 그것이 
마술사의 쇼를 자주 보는 이가 
마술사가 모자에 카드 넣으면 
모자에서 다른 엉뚱한 것이 나오는 것이 
오히려 정상이라고 이해하는 상태에 이르게 된다고 
제시하는 것이다. 


그런데 사실은 어떻다고 보아야 하는가가 
현실의 문제인 것이다. 


이미 현실이 이런 엉터리 이해를 하고 있어서 
문제인데 


이제 마술사는 거기에 한술 더떠서 
또 다른 엉뚱한 관계가 있는 것처럼 
자꾸 쇼를 보여주기에 문제인 것이다. 


사정은 이런데 
어떤 이가 도박을 하거나 투자를 행하는 가운데 
다른 이를 상대로 이런 관계를 보여주어서 
이를 통해서 막대한 이익을 거둘 수 있다고 여기고 
이렇게 임하면 어떻게 되겠는가. 


이미 앞에서 살핀 것처럼 
이미 현실에서 엉터리 판단을 해서 
각 주체가 
망상분별에 바탕해서 
자신과 자신의 것을 엉터리로 헤아리고 
그에 집착해서 
탐욕과 분노 어리석음의 번뇌를 일으켜 


때로는 장발쟌 모드로 
때로는 욱하면서 분노를 터뜨리고 나서는 아 으리 형태나 투우장의 소가 행하는 모드로 
때로는 자신의 어리석고 얕은 잔꾀를 지혜라고 여기면서 소원 성취를 추구하는 
제갈량이나 루팡형태로 임하는 가운데 


그것이 서로 얽혀서 
서로에게 많고 깊은 고통을 장구하게 주고 받는 것이 
생사고통의 문제인데 


다시 이 상태에서 한층 더 나아가면 
그 문제가 해결된다고 할 것인가. 
전혀 그렇지 못하고 
그 생사고통만 더 깊어지고 길어지게 된다고 보는 것이다. 


나중에 왜 각 지옥이 
각기 하늘이 복락을 누리는 기간과 비례해서 
그렇게 무한하게 길어지는가 하는 사정도 
알고보면 사정이 이렇기 때문인 것이다. 


간단히 말해 
장발쟌이나 욱, 도는 팡 형의 스타일로 활동하는 이들이 
함께 힘을 모아 은행을 하나 털었다고 할 때 
이들의 관계는 
황야의 7 인의 무법자가 그 이후 서로를 대하는 관계처럼 
되게 마련이다. 


그래서 이 가운데 하나가 원하는 상태를 얻으려면 
나머지는 조금 사라져 주어야 한다고 서로가 서로를 보는 
관게가 쉽게 형성되는 것이다. 


또 반대로 말하면 
어떤 이가 복락을 누리려면 
자신이 머무르는 시공간대에 
그런 장, 욱, 팡 모드의 생명이 같이 머물면 
대단히 곤란하다고 보게 되는 사정이 있게 되는 것이다. 


현실에서 대단한 흉악범이라고 보는 ○○○이나 
대단한 사기범죄자인 ▽▽▽ 등이 
어느날 자신의 옆 방에서 자신과 같이 생활해야 한다면 
자신이 평안하게 하루를 보낼 수 있다고 보기 힘든 것과 
사정이 비슷해진다는 의미다. 


그런데 현실에서 어떤 이가 
자신의 뜻을 아주 교묘하게 잘 성취한다고 보게 되는 
위와 같은 내용이 모두 
그 상태를 한층 더 깊게 나아가게 하는 기능을 한다는 것을 
여기서 주의해야 한다고 제시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미 현실의 기본 바탕이 
그런 성격을 갖고 진행되고 있기에 
이미 기본적으로 각종 생사고통을 겪는데 
거기에서 그 사정을 한 걸음 더 깊게 나아간다고 해서 
그 문제가 해결되는 것은 결코 아니라는 것을 
여기서 주의해야 한다고 제시하는 것이다. 


관객에게 재미를 주기 위한 쇼는 쇼지만, 
여하튼 이들이 본래의 현실문제가 갖는 성격을 이해시키는 
자료가 된다고 보는 것과는 달리 
일단 이런 문제점을 기본적으로 갖는다는 점을 
잘 파악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보고 
이를 덧붙이는 가운데 
쉬기로 한다. 


그래서 삶에서 중요한 것은 
그런 것이 아니라는 것부터 
먼저 스스로 잘 확인해야 한다고 본다. 




문서정보 ori http://buddhism007.tistory.com/3456#1763
08gfl--불교공부_단상_2561_07.txt ☞◆vwit1763 



● [pt op tr] f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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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커스 마술 최면쇼 자료를 첨부했는데 

이 각 과정이 현실 상황과 성격이 같다고 제시하고 

현실이 이미 이런 성격을 갖고 있기에 

이런 사정으로 이미 생사고통을 받는 상태인데 

이들은 한 번 더 그런 방향으로 더 깊이 나아가는 형태임을 살핀 것이다. 



이는 언어분별을 통해 희론을 전개하는 상황과도 유사하다. 


본래 언어 분별은 일정한 현실을 가리키기 위해 

언어로 나타낼 수 없는 것을 언어로 나타내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나중에는 순수하게 관념분별 영역에서 약속이나 정의를 통해서 

그런 관념분별 영역 안에서 

자체적으로 가공적인 내용을 전개하는 경우도 있다. 


이것은 그 어느 요소도 

현실과 직접 관련되기 힘든 형태여서 

그 자체로 희론의 성격만을 갖는 것이 된다. 


예를 들어 장기나 오목과 같은 게임도 그런 것이고 

요즘 아이들이 갖고 노는 전자게임도 

그런 내용들은 하나같이 그 안에서는 적용되지만, 그 외로는 적용이 힘든 내용인 것이다. 

수학이나 과학 철학의 영역에서도 

그런 형태로 내용을 전개하는 사례도 대단히 많다. 

제곱하면 음수가 되는 수를 정의하고 

계속 수식을 전개하는 등도 사실은 그 사정이 위와 같다고 이해할 수 있는 것이다. 


그래서 원래 언어 분별이 현실의 어떤 내용을 가리키면서 

그 사정을 파악하기 위해 부득이 취하게 되는 가명[거짓이름]인 것이고 

그런 시설인 것인데 

이들은 여기서 한층 더 나아가는 상태가 되는 것이다. 


그래서 이들은 모두 

원래의 현실 문제를 

더 한층 깊게 만들어 내는 원인이 된다는 점도 

같이 이해할 필요가 있다. 


희론이나 공허한 논의를 일삼다가 

서로 각기 그런 견해를 두고 대립하고 

그로 인해 감정이 상해서 이제 현실에서 서로 상대를 

광범위하게 해치는 활동에 나서는 것도 

사실은 사정이 그런 것이다. 


>>>







처음 현실에서 

전도망상에 바탕해 좁고 짧고 얕게 관찰한 가운데 

자신의 당장의 어떤 한측면의 좋음에 집착해서 

탐욕과 분노 어리석음에 바탕해 어떤 소원을 일으켜 추구하는 것이 

생사고통을 증폭시키는 원인이 된다고 제시하였다. 


그러나 현실에서 수행을 하고 무량한 방편을 닦는 과정은 

또 생사현실에서 그렇게 중생들이 임하는 생사 현실에 수행자가 들어가 

그렇게 수행하며 임한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어서 

 

결국 일정한 부분은 

기존에 소원을 성취할 때 취하는 방안과 

일부분 공통점이 있다고 보게 되고 

결국 이는 어떤 방편이 어떤 취지와 목표로 

행해지는가에 따라 

그 평가가 달라지는 것이라고 이해할 수 있다.  


그래서 앞에서 서커스나 마술 최면이 

현실 상황과 성격이 같다는 점은 


또 반대로 이를 통해 현실이 이미 갖고 있는 그런 성격과 사정을 파악하는데 도움을 주고 

또 현실에서 겪는 생사고통을 벗어날 해탈의 원리도 이를 통해 쉽게 파악하고 

더 나아가 중생제도를 위해 안인과 무생법인을 성취하고 무량행문을 닦고

여환삼매를 증득하는 과정에서도 

도움을 받는 측면도 있다고 보게 된다. 



원칙적으로 보면 

수행은 현실에서 일반적으로 망상분별과 집착에 바탕해 

추구하는 활동이 생사고통을 가져오므로 

이에 대한 망상분별과 집착을 제거하고 

이를 끊는 것을 표준적인 수행방안으로 제시하게 된다. 


그런데 이런 표준적인 방안으로 

수행에 진입하지 못하는 경우가 또 

현실에 대단히 많은 것도 사실이다. 


그래서 결국 이런 상태의 중생도 수행에 진입하게 하려면 

수행자가 그 상태에서 더 노력해서 

방편지혜를 닦아 

다른 중생이 집착하는 부분에 들어가서 

그 상대의 소원을 성취시켜 주고 

이를 통해 그 상대를 수행에 진입시키고 

해탈과 열반을 얻게 하는 것을 

목표로 하는 사정이 있다. 


그래서 외관만 놓고 보면 

이런 방편행을 닦는 수행자의 입장은 

일반의 상태와 구별이 잘 되지 않을 수 있는데 

그것은 중생이 가장 집착을 갖고 대하는 부분에 

수행자도 취지를 달리하여 그 현장에 그렇게 

임하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차이가 있다면 

그 내용을 그 수행자가 어떤 취지로 

그리고 어떤 형태로 임하고 

그에 자신이 집착을 하고 임하는가 아닌가 등으로 

구분할 수 있다고 할 것이다. 


그래서 이런 상태를 비유적으로 표현하여 

연꽃이 더러운 진흙땅에 뿌리를 내리고 

줄기는 더러운 물에 담그고 

꽃은 하늘에 내밀고 있는데 

그 어디에도 물들지 않고 있다는 것에 

비유하는 것이다. 


즉 수행자가 중생제도를 위해 

지옥 아귀 축생 인간 아수라 하늘의 

삼계 육도 생사현실에 임하지만, 

그러나 그에 물들지 않고 

임한다는 것을 이런 상징적인 표현으로 

나타내는 것이다. 




또 원래 실상의 측면을 기준으로 놓고 본다면 

현실에서 표준적인 수행이나 다른 일반적 내용이나  

모두 실상의 측면에서는 본래는 차별이 없고 

그 모두가 청정한 니르바나의 바탕에 있는 것도 사실이다. 



그래서 본래는 언어나  관념분별이나 감각현실도 

그 자체만 놓고 본다면 문제가 있는 것이 아니고 

그 자체도 역시 청정한 니르바나의 상태라고 보는 것이다. 



그리고 본래 청정한 니르바나나 실상도 

사실은 이런 언어 분별을 바탕으로 

그 사정을 이해할 수 있는 것이므로 

이들이 갖는 효용과 기능도 중요한 것이다. 



그런데 현실에서는 전도 망상분별을 일으킨 상태에서 

이런 감각현실과 관념분별을 대하고 

망상분별을 증폭시키고 집착을 일으킨 가운데 

생각과 말과 행위를 해나가 

그로 인해 생사고통을 받게 되는 것이므로 

다만 이런 부분이 시정해야 할 문제라고 지적하는 것이다. 



>>>


그런 가운데 현실에서 

일반인들이 하기 힘든 상태를 성취해내는 듯한 모습을 

보여주는 서커스나 마술 최면쇼가 

어떤 내용을 시사해주는가를 살필 필요가 있다고 본다. 



우선 어떤 이가 마술사의 마술쇼처럼 

어떤 내용을 그렇게 잘 나타나게 하고자 한다고 해보자. 


그러려면 우선 일반인들이 하는 내용도 

기본적으로 잘 해야 하지만, 

다시 어떤 내용이 나타나는 본래의 과정을 

더 잘 이해해야 한다고 할 것이다. 


쉽게 비유해 마술로 도박을 행하는 도박사의 

입장이 되어 이 문제를 보자. 


우선 사기형 마술도박을 하려고 한다면 

원래 표준적인 도박 게임의 룰이나 방식부터 

적어도 남보다는 더 잘 이해하고 잘 하는 상태여야 할 것이다. 


그런데 여기에 덧붙여서 

카드에 특수장치가 되어 있어서 

특수렌즈를 통해 겉장만 보고 

그 카드가 무슨 카드인지 알아낸다거나, 



또는 어떤 다른 이가 카드를 다른 장치를 통해 보고나서 

현장에서 다른 이가 몸짓이나 신호를 할 때 

그 몸짓과 신호만으로 

상대의 카드의 숫자나 그 종류를 파악할 수 있는 상태로 

새로운 언어를 개발해 매스터 한다거나, 


기타 카드의 몇장 정도는 

순서대로 다 외운다거나, 


또는 원하는 순서대로 원하는 위치에 그렇게 카드를 

배열해 넣을 수 있다거나 


또는 카드를 나눠주면서 

각 상황마다 자신이 알고 있는 카드를 뽑아 

원하는 상대에게 보낸다거나 하는 등등의 기술을 

또 익혀야 한다는 것을 말한다. 


이는 사기도박사가 자주 행한다는 여러 사기형 카드 마술의 

한 형태인데 

그 핵심은 상대가 외관만 놓고 살필 때는 

그런 관계를 쉽게 파악할 수 없는데도 

그러나 

그런 결과를 나타나게 하는 원인행위는  

마술을 행하는 도박사가 

그렇게 잘 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고 일반인이 외관으로 보는 내용과 

마술사가 트릭을 통해 행하는 이 두 내용이 

서로 차이가 나므로 

그것을 마술사의 마술이라고 하는 것이다. 




그래서 마술사가 모자에 카드를 넣었는데 

비둘기가 나오는 것은 


비둘기가 나오는 인과과정을 

마술사가 따로 남보다 잘 파악한 가운데 

그것을 잘 행하지만, 

그 과정을 남들이 보이지 않게 숨기는 가운데 


관객에게는 

마치 자신이 모자에 카드를 넣은 행위와 

모자에서 비둘기가 나온 것이 

마치 서로 관련이 있는 것처럼 보이게 한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런데 현실이 마술과 같다는 것은 

일부로 이런 마술사의 마술 트릭을 배워야 한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고, 

현실이 이미 그처럼 되어 있다는 점을 제시하는 것이다.


즉, 

마술을 보고 일반이 이해하는 내용과 

마술사가 그것을 나타나게 하는 과정이 서로 차이가 나듯 


현실에서 어떤 모습이 나타날 때 

이에 대해 일반적으로 이해하는 내용과 

본 사정은 사실은 거리가 있다는 것을 나타내는 것이다. 


즉, 어떤 현실 내용이 나타날 때 

일반인이 그런 내용이 나타나는 관계라고 이해하는 내용은 

사실은 그렇지 않은데 

계속 망상을 바탕으로 그렇다고 이해하면서 

계속 그런 현상을 대해가며 살아가게 되어 있다는 사정을 

의미하는 것이기도 하다. 


그래서 이것을 놓고 

현실이 마술사가 마술쇼를 보여주는 것과 같은 

성격을 갖는 측면이라고 제시한 것이다. 





그러니 수행자가 현실에서 

수행을 잘 하여 중생을 제도하고자 할 때는 


현실이 이런 마술과 같은 성격을 갖는 가운데 

핵심적으로 잘 파악해야 한다는 내용은 다음이다. 


즉, 현실에서 일반적으로 A 가 나타나는 과정이나 

인과관계로 이해하는 내용은 

외관을 피상적으로 관찰할 때 그렇게 보는 내용일 뿐이다. 


그래서 그런 내용에 대해  

그 실상을 올바로 꿰뚫어 잘 관하는 가운데 

그 관계를 넓고 길고 깊게 잘 관찰해서 파악하는 가운데 

중생제도를 위해 필요한 내용을  

뜻과 같이 잘 나타나게 할 수 있는 상태가 되어야 함을 

의미하는 것이다. 


이것이 곧 반야바라밀다의 수행이 갖는 효용과 그 의미이기도 

한 것이다. 


그래서 수행자는 

마술사가 마술쇼를 하듯 

현실에서 마술쇼 트릭을 배워서 속임수를 행하여 

현실에서 임하려고 노력하는 것이 아니고   


이미 현실에서 일반적으로 

망상분별을 바탕으로 피상적으로 이해하는 내용은 

그 본 정체와 그 관계가 다르다는 사정을 

정확히 파악한 가운데 


중생제도를 위한 목적에서 

그런 진리를 올바로 사용하고자 하는 입장인 것이다. 


그런데 이런 수행을 

일반인의 인식을 표준으로 놓고 보면 

수행자가 마치 자신의 인식하는 내용과는 차이가 나는 

다른 방안으로 결과를 성취하는 것으로 이해하고 

이것을 마치 어떤 마술을 통해 속임수를 행하는 것처럼 

보게 된다는 의미다. 


그래서 예를 들어 

관세음보살님이 여환삼매를 증득해서 

모습을 변신해 나타나거나 

세계를 이동시키거나 하는 것은 

눈속임이 아니고 


실상을 정확히 관하고 

현실이 마치 환과 같음을 정확히 파악하여 

중생제도를 위해 나타내게 하는 모습인데 


이미 전도몽상을 일으킨 입장에서는 

현실에서 생각하는 망상적 내용을 

오히려 표준으로 대하고 

이를 마치 마술인것처럼 여기게 되는 것이다. 



즉, 전도망상 상태에서는 

수행자가 실상에 바탕해 현실을 대하는 내용이 

마치 마술사의 트릭처럼 

직접 파악되지 않기에 

이 둘을 혼동해 여기는 것 뿐이다. 


그런데 마술사의 마술과 

수행자가 나타내는 방편은 그 방향이 다른 것이다. 







비유하면 다음과 같다. 


현실에서 일반적으로 눈을 떠서 

자신의 몸을 보고 자신이라고 여기고 

꽃을 보고 그것이 꽃이라고 여길 때 

이것을 전도된 망상분별이라고 하는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어떤 시인이 

자신의 몸을 보고 떨어진 낙엽이라고 시를 쓰거나 

꽃을 보고 시집간 누이와 같다는 등으로 시를 쓴다면 

이는 앞의 전도몽상분별을 바탕으로 

한번 더 망상을 일으켜서 더 깊이 나아간 것이라고 보는 것이다. 


물론 시인이 시를 쓰는 것은 

과학계에 그것이 사실이라고 보고하고자  

그런 시를 쓰는 것은 아니고 

감흥을 읊기위해 그런 것이기는 하지만, 

여하튼 이 경우는 그런 방향이라고 

여기서 지적하는 것이다. 




그런데 수행자는 앞과 같은 상태에서 

다음과 같이 분별을 행하는 것이다. 



즉 현실에서 눈을 떠서 

일정한 모습을 보고 일정한 부분이 

자신이고 일정한 다른 부분은 꽃이라고 생각한다면 


그런 감각현실 부분에 

그런 분별 내용은 얻을 수 없는 것이고 

또 그 감각현실은 실재[실상]의 지위에 있는 내용도 아니고 


그 실재 자체는 또한 얻을 수 없고 

공한 것이라는 것을 이해하고 

그런 바탕에서 

이런 감각현실과 관념분별을 대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래서 원각경 등에서는

이를 어떤 상태라고 비유해 표현하는가 하면 


지금까지 눈에 병이 들어서 

허공에 꽃이 없는데도 

허공에 꽃이 있다고 보던 이가 

어느 순간 자신이 눈병이 걸려서 

그런 허공의 꽃을 보는 상태임을 알게 되는 상태로 

비유하는 것이다. 



그래서 그렇게 자신의 상태를 스스로 알게 되면 

비록 눈병이 여전히 그대로여서 

여전히 허공에 꽃의 모습이 보이기는 하지만, 

그렇다고 과거처럼 

그 허공의 꽃이 정말 있는 꽃이라고 여기고 

집착하면서 그것을 대하지 않게 되는 것이라고 

제시하는 것이다. 





이런 비유는 영화나 만화 소설을 놓고도 

똑같이 적용해 설명할 수 있을 것이다. 


어떤 이가 소설이나 영화 내용을 

실다운 내용이라고 여기고 

때로는 그런 소설이 자신을 모욕한다고 여기고 

이에 반응한다면, 

사실은 한 번 더 깊게 망상상태를 증폭시키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그 상황에서 그것이 만들어낸 영화일 뿐이고 

실다운 것이 아님을 잘 파악한다면 

여전히 그 영화를 보기는 하지만, 

그에 집착하여 일으키는 반응을 하지 않게 되고 

그래서 그로 인한 문제상황에서는 벗어나게 된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런 내용은 

곧 현실의 사정이 곧 이와 같음을 이해시키기 위해 

비유로 드는 내용인 것이다. 


즉, 현실이 바로 이런 영화나 꿈이나 눈병 걸린 상태에서 보는 

허공의 꽃과 그 사정이 같다고 비유한 것이다. 


그래서 다시 현실에서 

일반적으로는 자신의 몸이라고 보는 부분이나 

꽃이라고 보게 되는 부분을 놓고 

수행자는 그에 대해 

일반의 경우와 똑같이 

그런 모습도 보고 

또 그런 생각도 일으켜 갖기는 하지만, 


그러나 이 내용들을 놓고 

정작 거기에 그런 내용은 얻을 수 없다는 사실을 

이해하고 그것을 대한다는 의미다. 


그리고 그 본 정체는 

따로 달리 파악한다는 것도 의미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런 내용 역시 

언어 분별을 떠난 것이기는 하지만, 

그런 사정을 이해하는 가운데 

단지 그 사정을 드러내기 위하여 

이런 언어 분별로 내용을 

제시한다는 상태임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래서 일반적인 전도망상 상태를 기준으로 하면 

자신이나 꽃을 보면서 

이를 낙엽이나 누이로 표현하는 시인의 시나, 

경전에서 제시되는 게송이 

모두 같은 성격이라고 이해하기 쉽지만 

사실은 아닌 것이다. 


즉, 경전에서는 

그런 것을 얻을 수 없고 

이런 내용은 무상하고 고통이고 무아 무자성이고 본래 청정한 니르바나이고 공하다 

라는 내용을 제시하면서 


현실에서 수행자는 

념과 혜와 행을 자신이 다니는 길로 삼고 

지와 관이라는 정려 수행을 자신이 타고 다니는 자동차로 삼고 

공 무상 무원무작을 자신이 출입하는 출입구로 삼아서 

복덕과 지혜 자량과 공덕이 가득한 궁궐에 들어가 머문다고 하거나 


자신이 마음의 밭을 가는 농부라고 표현하거나 하는 등등은 

표현만 놓고 보면 

앞의 시인의 시와 비슷하게 

현실에 들어맞지 않는 엉뚱한 내용을 제시한 것처럼 보이지만, 


그러나 시인의 시나 

일반인이 행하는 전도된 망상분별적 판단과는 정반대로 

경전의 게송은 현실에 대한 올바른 사실과 가치판단을 바탕으로 

내용을 제시하는 것인 것이다. 



그래서 털끝과 같은 미세한 공간에 

헤아릴 수 없는 수많은 부처님과 

세계가 있다고 제시하는 내용은 

그런 차원의 내용인데도 


일반적인 입장에서는 

그 사정을 이해하지 못하므로 

오히려 이것을 시인이 그저 감흥을 읆기 위해 읊은 시나 

상상을 바탕으로 이야기를 지어내 소설을 쓰는 소설가의 소설처럼 

대하고 이해한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런데 정확히 말한다면 

이들은 

현실에서 진리라고 보아야 할 내용을 

정확히 제시하는 것이고 


다만 이를 제시하는 입장에서는 

이들이 기본적으로 언어 분별을 떠나고 

언어로 표현할 수 없는 내용이지만, 

상대가 이해할 수 있도록 

부득이 그런 언어를 시설해서 

그렇게 표현한다는 사정도 

기본적으로 이해하고 

그렇게 언어를 표현하는 것임도 

의미하는 것이다. 


그래서 또 일반 입장과는 다른 것이다. 




이는 마치 마술사가 마술을 하려면 

자신만은 어떤 결과를 나타나게 할 

인과과정을 잘 이해한 가운데 

그런 마술도 그렇게 행하게 된다고 보는 것처럼 



수행자는 중생들이 원하는 상태를 

나타나게 하는 올바른 내용을 위와 같이 잘 파악하고 

한편 언어분별은 그런 내용 자체는 아니지만, 

그러나 그런 언어를 통해서 그런 사정을 나타내고 

성취시키는 것이어서 


이런 성격은 어느 정도 

서로 같다고 제시하는 것이다. 



그래서 또 이를 대하는 입장에서는 

마술사의 마술쇼를 보고 

그 외관이 곧 그런 결과를 나타나게 한 본 내용이라고 

파악하지 않아야 하듯 


언어로 설하는 내용이나 현실을 놓고 

그 언어표현이나 현실에 

어떤 절대적인 내용이 있다고 

집착을 갖고 대하면 

곤란한 것이기도 하다. 


그래서 무상 고 무아 무자성 열반 공 등이라는 

표현을 경전에서 사용하지만, 

그 표현 자체에 다시 분별과 집착을 일으켜 대하면 

이것은 증상이 더 심각해지는 상태가 되는 것이다. 


경전에서 공하다는 표현을 놓고 

이제 실상에 공이 있다거나 

공한 성품이 그렇게 있어서 

그렇게 제시한 것이라고 생각하는 경우가 

바로 그와 같은 사례가 되는 것이다. 



그러나 여하튼 

시인이 시를 쓰는 경우와 

선사나 경전의 게송이 제시하는 표현은 

이런 사정으로 

서로 반대 방향을 향하고 있다는 것도 

잘 이해해야 한다고 본다. 



현실에서 이미 전도망상을 바탕으로 생활하는 상태에서 

마술이 트릭이나 눈속임을 통해 

한번 더 깊이 들어가는 형태라면 


수행은 이미 전도망상이 광범위하게 전개되어 있는 상태에서 

원래의 본 상태로 벗어 나와 

실상을 올바로 파악한 가운데 

현상에 임하는 자세를 의미하는 것이다. 



망상상태를 기준으로 놓고 보면 

이 두 경우가 다 자신의 망상과는 차이가 있기에 

서로 결과적으로 같다고 여기기 쉽지만, 

그 방향이나 취지가 서로 이처럼 다른 것이다. 


>>>




그래서 예를 들어 


어떤 재화나 복덕을 차지하고자 원할 때 

일반적인 입장에서는 

장발쟌 모드나 

투우장의 소처럼 욱 모드를 취하고 돌진하거나 

루팡 모드를 취해 그것을 향해 추구하고 

일시적으로 그것을 얻고 나중에 뺏기고를 반복해 간다면 



이제 서커스나 마술 최면을 이용하는 경우는 

이런 일반적인 경우보다 

한층 더 능숙하게 

그리고 교묘하게 

그리고 상대가 기만을 당한 것을 의식하지 못할 형태로 

뜻을 성취하고자 하는 것이라면, 




수행자는 

그 관계나 정체를 실상을 꿰뚫어 관하는 가운데 

현실에서는 

보정안정 즉 보시-정계-안인-정진 이라는 

계행을 정진하여  

무량한 복덕을 성취하는 상태가 된다는 차이가 있는 것이다. 




어떻게 보면 

수행자가 각 세계에 태어날 때마다 

이미 복덕을 갖추어 

각 불국토에 원하는 대로 태어나 수행한다고 하므로, 

이것 자체가 하나의 마술처럼 여길 수 있는데 


그것은 마술이 아니고 

올바로 진리를  파악하여 

그에 따라 올바른 서원을 일으키고 

올바로 수행을 행하기에 

그렇게 되는 것이라고 이해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현실에서 전도망상 상태에서는 

매번 좁고 짧고 얕게 피상적으로만 관찰하여 

어떠한 씨에서 그런 열매를 맺게 되는가를 

파악하지 못한 가운데 


매번 열매가 나타나면 

그것이 우연히 그리고 홀연히 나타나는 것으로 이해하고 

그것을 대하게 되므로 

매번 세상일이 이상하고 알 수 없다고 여기고 


정작 수행을 통해 증득해야 한다는 

여환삼매와 같은 수행덕목마저도 

엉터리라고 이해하게 되는 것이다. 




>>>



소원을 성취하는 기본 이론에 대해 좀 더 살펴야 한다고 본다. 



쉽게 이 과정을 설명하면 

다음과 같이 설명할 수 있다고 본다. 


어떤 이가 어떤 차를 마시고 싶어한다고 하자. 

이 경우를 먼저 잘 검토해야 한다고 본다. 


이때 그가 마음에서 갖는 희망은 

자신이 좋다고 보는 차를 마음에 그려 놓고 

그것을 마시면 좋을텐데 이런 마음을 갖는 것이다. 


이 현장에 바로 눈 앞에 그 차가 있는 경우도 있지만, 

그것은 꼭 필요한 것은 아니다. 


그래서 이것은 관념영역에서 그런 내용을 

분별을 통해서 일으킨 상태라고 보게 된다. 


여기서 그러한 관념은 

정작 자신이 차를 마실 때 대하는 차나 그 맛과는 성격이 

다르다. 


현실에서 맛 보는 차는 

눈에도 보이고 만져지기도 하는 것이어서 

불교 전문용어로는 넓은 의미의 '색'이란 범주에 포함되는 내용이다. 

이는 각 감관을 통해 얻는 '색성향미촉'을 의미하는 것이기도 하다. 


자세히 살피면 더 복잡하기에 건너뛰지만, 

현실에서 정신과 구분되는 내용으로 물질이라고 관념하고 

이를 외부 세계나 대상의 구성요소로 관념하는 내용이기도 하다. 


더 간단히 말하면 이렇다. 

어떤 이가 눈을 떠서 모습을 본다. 

그런데 그는 그 내용이 곧 그가 대하는 세계이고 외부 대상이라고 

이해하고 받아들이는 것이다. 


특히 자신이 손을 내밀어 어떤 화분을 만진다는 경우 

그 화분은 자신의 외부에 있는 대상이고 

그 손은 자신의 손이라고 보는 것이다. 


그래서 그 손을 대하면 그 화분으로부터 촉감을 얻기에 

그 관계도 그렇게 이해하는 것이다. 


자신이 눈을 떠서 보는 그 모든 내용은 

일단 색깔인 것인데 

결국 자신이 그 가운데 보는 손의 모습과 화분이 서로 맞닿는 순간 

촉감을 얻게 된다. 

이렇게 관계를 파악한다는 의미다. 


그리고 이렇게 보는 모습 가운데 

일부는 또 자신의 몸이고 나머지가 자신이 대하는 세계라고 

이해한다는 의미다. 



현실에서는 이런 판단을 대단히 정상적인 판단이고 옳다고 보게 되는데 

여기에 무엇이 이상하고 잘못된 판단이 있는가. 



현실에서 태어나 죽을 때까지 위와 같은 판단을 하면서 

살아간다고 해도 크게 지장이 없다고 

대부분 보게 될 것이다. 


그런데 바로 이것이 총체적인 전도망상의 내용이고 

이런 판단이 생사고통을 무한히 반복해 받게 하는 

기본 원인이 된다고 반복해 지적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이것이 앞에서 말한 

원각경에서 비유로 든 허공의 꽃과 같은 성격을 

갖는 내용이기도 한 것이다. 


그래서 어느 계기로던 이것이 눈병에 걸려서 

보게 되는 존재하지 않는 허공의 꽃과 같은 내용이라는 것을 이해를 해야 

그런 내용을 계속 얻는 상태에서도 

그런 허공의 꽃과 같은 내용에 스스로 얽매이지 않게 되고 

그래서 그로 인해 받게 되는 생사고통으로부터 벗어날 계기도 

마련하게 된다는 점을 

잘 인식해야 된다고 본다. 



여하튼 여기서 이처럼 어떤 이가 

자신이 살면서 

외부 세계로 이해하는 내용이 있다면 

그것을 하나하나 잘 포착해서 잘 붙잡아 둘 필요가 있다고 보게 된다. 


왜냐하면 지금 유무논의를 통해 살피고 

또 어떤 소원의 성취 방안을 살피는 것은 

모두 이와 관련되는 내용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여기서 먼저 확인해야 하는 것은 

그것은 모두 어떤 주체의 마음안에 들어온 내용이라는 점이다. 


어떤 이가 현실에서 세계의 내용이라고 이해하는 것 가운데 

그런 생각을 하는 이의 마음 안에 머물지 않는 것은 

일단 찾아지지 않는 것이다. 


그리고 그런 색성향미촉을 넓게 한마디로 색이라고 표현하는 

것이다. 


그리고 다시 이에 대해 어떤 부분은 자신이고 

어떤 부분은 꽃이고 

어떤 부분은 바위라고 생각을 한다면 

이런 내용은 색이 아닌 것이다. 


일단 이렇게 그 내용을 구분해야 하는 것이다. 


그리고 처음에 자신이 어떤 차를 마셔야겠다고 생각하는 것은 

관념분별 영역에서 그런 내용을 생각하는 단계인 것이다. 



매일 행하는 일인데 

그것을 설명하고 언어로 기술하자면 조금 복잡하지만, 

이것이 중요한 것이다. 


그 다음 그런 희망을 성취하기 위해 현실에서 노력하는 것은 

앞의 희망을 좀 더 자세하게 그려 내고 

또 그려 내고 하는 활동도 일부 있겠지만, 

그것을 의미한다기 보다는 


앞에서 설명한 감각현실에서 앞의 내용에 상응한 

상태를 얻어내기 위해서 노력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래서 이 관계가 처음에 문제되는 것이다. 


희망은 관념분별로 만들어 내었는데 

희망이 성취된 상태는 어느 영역에서 그것을 구하는가하면 

감각현실의 영역에서 그것을 구한다는 관계가 

처음 문제되는 것이다. 


그런데 전도몽상상태는 이것이 

무슨 문제인가를 잘 이해하기 힘들 수 있다. 


지금 유무 논의를 살피는 것은 

아무리 노력해도 

관념분별에 해당한 내용 자체는 

감각현실 영역에서 구하기 곤란함을 제시한 것이다. 


그런데 현실에서는 

어떤 감각현실 상태는 그런 관념분별에 상응한 상태라고 대하는 것이고 

또 그와 달리 

어떤 감각현실 상태는 그렇지 않다고 대하는 상태인 것이다. 



위 상황에서 차를 구해서 마신다고 희망할 때 

눈에 차가 보이고 그 차를 끓여서 차잔에 차가 담기고 

그것을 마시는 상황이 그런 희망이 성취되는 상태인 것이다. 


또 희망을 성취하는 노력은 그런 상태를 이루기 위해서 

차도 구하고 물도 끓이고 그런 행위를 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래서 희망을 갖는 단계 - 성취하기 위해 추구하고 노력하는 단계 - 그 희망이 성취된 상태 

이 내용을 위처럼 살핀 것이다. 


일반적으로 

매순간 행하는 내용이어서 

별로 이상한 내용도 아니고 

어떤 마술사가 행하는 마술과정을 설명하는 것은 아니지만, 

그러나 여기에 많은 문제도 들어 있고 

또 반대로 생사고통을 벗어나는 해탈문도 들어 있다고 

지금 제시하는 것이다. 


여기에 문제가 무엇인가를 이해하려면 

각 단계에서 무언가가 잘 안 되어서 

조금 불완전한 상태를 놓고 

일일히 비교를 해보면 

조금 그 문제를 파악하기 쉽다고 보게 된다. 




그런데 기초적으로 

희망이 100 % 성취되었다고 여기는 어떤 한 현실의 단면을 놓고 

그 상태가 왜 그런 희망이 성취된 상태라고 여기는가 하는 

점을 먼저 살필 필요가 있다고 본다. 


차를 마시고자 한 이가 

차를 대하고 마시는 상황이 바로 그런 문제가 

제기되는 상황인 것이다. 


그 감각현실에서 자신이 바라보는 어떤 부분이나 

맛을 보는 무언가가 차라고 보는 것이다. 


그것은 또 다른 상태는 그것이 아니라고 

보는 것이기도 하다. 



그래서 처음에 이 부분을 반복해 살핀 것이기도 하다. 


어떤 감각현실 -> 차 

다른 감각현실 -> 차 아님 


이렇게 기본적으로 대한다는 점이다. 


[...] 




현실에서 매 순간 희망을 

추구하면서 살아가는 데 

이 과정 전반이 

거꾸로 뒤집힌 전도 망상 분별에 

바탕한 것이어서 

이렇게 임하면 그로 인해 

생사고통에 묶여 생사고통을 무한히 

받아나가게 된다는 사실을 살피는데 


일반적인 인식과 너무 차이가 나서 

일반적인 입장에서는 엉뚱하고 이상한 주장이라고 

여기기 쉽다. 

[...] 


앞에서 현실에서 희망을 일으킨 다음 

이 성취를 추구하는 가운데 

성취하여 좋음을 느끼는 과정을 

희망을 갖는 단계 - 성취하기 위해 추구하고 노력하는 단계 - 그 희망이 성취된 상태 

이렇게 제시했는데 


여기에 어떤 망상분별이 바탕이 되는가를 

살피는 것이 필요하다고 본다. 


그것은 지금 논의하는 유무논의와 

대단히 밀접하다. 


그것은 간단하게 보면 

한 주체가 희망이 자신 나름대로 만족할 정도로 100 % 

성취되었다고 보는 한 현실 단면을 놓고 

검토하는 것이 가장 쉽다고 보게 된다. 


그래서 

자신이 차를 마시고자 하는 희망을 가졌다고 하고 

그 차가 이제 눈앞에 있는 상황을 가정하여 

그 상태가 무슨 상태인가를 검토하는 것이 

필요한 것이다. 


간단히 말해 그것은 

눈을 떠서 보는데 차가 보이고 

그것을 놓고 차라고 생각하는 상태인 것이다. 



우선 여기에 어떤 전도망상분별이 행해지는가는 

앞에서 상황을 기본적으로 설명한 것이다. 


자신이 눈을 떠 보니 차가 보인다. 

그 찻잔을 손으로 튕기니 경쾌한 소리가 들린다. 

그리고 코를 대니 향기가 느껴진다. 

그리고 차를 마시니 향기로운 차맛을 맛볼 수 있다. 

그리고 자신이 손을 내밀어 찻잔에 대니 촉감이 느껴진다. 


이런 상황인 것이다. 


그런 가운데 자신의 몸은 자신이라고 보는 것이고 

그 밖의 나머지 것은 자신을 둘러싼 자신 외부의 세계의 내용이라고 

이해하는 것이다. 


일반적으로 이렇게 이해하는 것인데 

여기에 무엇이 잘못이라고 하는가에 대해 

의아하게 여길 수 있지만, 

바로 이 내용 전체가 뒤집혀진 엉터리 망상분별이라고 

지적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이 자신이 처음에 차를 마시고자 희망을 가질 때는 

얻지 못한 감각현실인데 

그러나 어떤 노력을 해서 그 차를 구하고 

이런 상태가 되면 

이제 이런 상태를 놓고 자신이 가진 희망이 그렇게 뜻과 같이 

성취되었다고 여기는 것이고 

그리고 그 상태에서 만족과 좋음을 얻는다는 것이다. 


그런데 여기에서 처음에 그런 희망을 갖고 

이런 형태로 망상분별에 바탕해서 

희망이 성취된 상태를 추구하는 것으로 인해서 

이 주체가 만나는 세계는 

곧 다른 생명과는 달리 

욕계에 임하는 상태라고 보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바로 이런 구조로 삶을 임하기 때문에 

지옥과 아귀 축생 인간 아수라 하늘이라는 

다양한 세계에서 생사고통을 받아나가게 된다고 

제시하는 것이기도 하다. 


그것은 반대로 말하면 

이런 상태를 벗어나야한다는 것도 의미하는 것이다. 


그래서 이 내용을 잘 살펴야 하는 것이기도 하다. 



이 내용을 스스로 검토하는 과정에서 

가장 필요하고 간단한 실험이 무엇인가 하면 


앞과 같이 자신이 원하는 차를 눈앞에 둔 상태에서 

자꾸 눈을 뜨고 감는 실험을 혼자 해보는 것이 필요하다고 보는 것이다. 


별로 어렵지 않은 실험이다. 


조금 더 추가하면 

그 상태에서 돗수가 다른 색안경을 구해서 

그것을 썼다 벗었다를 반복하는 것도 도움이 된다고 본다. 


또는 손가락으로 자신의 눈을 눌러보는 것도 도움이 된다고 할 수 있다. 


그런 가운데 자신과 비슷한 다른 이를 옆에 놓고 

그가 그런 상황에서 역시 자신처럼 

눈을 감고 뜨고 함에 따라서 어떤 변화를 겪는다고 

보고하는가를 또 검토해보는 것도 도움이 된다. 


앞에서 일반적으로 경험하고 

반복하는 판단들이 

어떤 잘못된 전도 망상분별인가 하는 것을 

이해하려면 위 실험으로 충분하다고 볼 수 있다. 


그래서 기본적으로 위 실험을 하는 가운데 

매 순간 얻는 내용 가운데 변화하는 내용을 

잘 붙잡아서 음미하고 검토하는 노력이 

필요한 것이다. 


그래야 앞에 기술한 내용들이 

어떤 문제가 있는 판단인가를 이해할 수 있는 것이다. 


앞에서 현실에서 어떤 희망을 성취하는 과정이 

서커스와 같은 성격을 갖고 

마술과 같은 성격을 갖고 

최면과도 같은 성격을 갖고 있다고 제시했는데 

그 내용도 이를 통해서 검토할 수 있다고 보는 것이다. 



세계를 3 계 6 도라고 분류해 제시하고  

그 가운데 지옥과 아귀 축생 인간 아수라 하늘의 

세계가 있는 세계를 욕계라고 하고 

다른 세계는 색계 무색계라고 분류하는데 

이들 색계 무색계는 하늘로만 구성된 세계로 

제시하게 된다. 


결국 생사를 받는 세계 가운데 

고통과 공포를 극심하게 받게 되는 상태는 

오로지 욕계에만 있는 내용이기도 한 것이다. 


그런데 그 차이가 바로 위와 같은 

망상분별을 해하면서 

현실에 임하고 

업을 행하는가 아닌가에 따라서 

그런 결과가 나타난다고 지금 제시하는 것이다. 


그러니 이 부분이 사실은 중요한 것이다. 


망상분별이 진행되는 상태에서는 

자신을 이런 세계에서 묶여 돌게 하고 

사역을 시키는 번뇌망상을 인식하지 못하고 

오히려 이 상태가 정상적인 상태이고 

좋음을 주는 것으로 오해하고 

여기에 묶여 있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어떻게 보면 mun 님이 작은 구슬만한 곳에 

자신을 위치하고 

세계라는 set를 돌려서 

매일 짜장면을 하나 얻어 생계를 해결한다고 

이야기하는 것은 

각 생명이 바로 이런 망상과 번뇌에 

묶여서 벗어나지 못한 가운데 

삶을 시작하고 마치는 과정을 반복하는 상태이기에 

그렇다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자신이 현실에서 매일 경험하고 살아가는 이 활동은 

지극히 정상적인데 무엇이 문제라고 하는가를 

그래서 잘 파악하고 


여기에서 기본적으로 무상해탈문과 

무원무작해탈문을 찾아내서 

일단 들어가서 

자신을 생사고통에 묶어 계속 사역을 시키고 

또 다른 생명도 그처럼 묶어 사역을 하게 하는 상태로부터 

풀려나 벗어나야 한다고 제시하는 것이다. 


그것이 곧 해탈의 의미인 것이다. 


그리고 다시 공해탈문을 통해 

본래부터 생사고통과 생멸을 벗어나 있는 

본 바탕의 청정한 니르바나의 내용도 

확인하게 되고 


그 상태에서 다시 

생사고통에 묶여 지내는 중생을 제도하기 위하여 

원래 생사를 받는 현실로 돌아와 

수행을 해나갈 수 있는 바탕이 

마련된다는 내용이다. 


일단 여기까지 살피고 

조금 쉰 다음 이어나가기로 한다. 

앞에서 제시한 실험은 

어려운 것이 아닌데 

자신이 묶인 생사현실의 본 정체가 

무언가를 살피고 

앞과 같이 현실에서 어떤 희망을 추구하는 과정 

전반이 왜 그런 망상분별이고 

또 생사고통을 욕계에서 받아나가게 하는 

근본이 된다고 하는가를 

검토하는 중요한 자료가 되는 것이다. 


매순간 눈을 뜰 때 얻게 되는 내용을 잘 확보하고 


또 눈을 감거나 뜨거나 자신이 희망하고 그려 내는 관념분별 내용도 

잘 확보한 가운데 


그 상황에서 어떤 부분이 문제라고 하는가

어떤 것이 마치 최면걸린 이나 망상증을 갖는 환자가 

생각하는 내용과 사정이 같고 

어떤 식으로 그 내용을 이해하는 것이 

마술사의 마술쇼를 보는 것처럼 이해하는 것인가를 놓고 

그 정체를 잘 검토해야 한다는 의미다. 


[...]

>>>

원래 만리장성을 쌓는 사역장에서 
어떤 이를 구출해내려고 한다면 
당장 그 사역을 시키는 이부터 상당히 이를 
싫어하게 된다. 
그런데 망상을 전개해서 번뇌의 사역을 당하는 상태에서는 
정작 그런 사역을 받는 입장도 
그것을 상당히 꺼려하는 것이 보통이다. 


그래서 이 상태에서 어떤 이를 
생사고통에서 벗어나게 하는 것이 
상당히 어렵다고 보게 된다. 


그 사정을 다음과 같이 생각해보자. 
어떤 축사에서 소를 구출해내려고 한다고 할 때 
당장 축사를 경영하는 목동이 
자신에게 문제를 제기할 것이다. 
그런데 또 한편 축사에서 편하게 지낸다고 여기는 
소도 마찬가지로 본인을 따라 나오려고 
하지 않는 것이다. 


사실 축사에서 소로 태어난 입장은 
처음 그렇게 태어날 때부터 
그런 눈으로 그런 세상을 보고 
그런 상태로 분별을 하면서 
목동이 제공하는 풀도 먹고 그렇게 
생활하는 상황에 있는 것이다. 


그래서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자신에게 그렇게 익숙한 그 모든 것을 
떠나는 것을 오히려 대단히 공포스럽게 
대하게 되는 것도 사실이다. 


그래서 이 상태에서 
매 순간 자신이 눈을 뜨면 정상적이라고 보는 모습과 
또 그것을 놓고 각 부분이 무엇이라고 여기고 
그 가운데 자신이 스스로 자신이라고 생각하는 그런 부분이 
정상이라고 여기게 되는데 


사실은 이것이 뒤집혀진 전도망상분별이라는 것을 
이해해야 
각 해탈문을 찾아 들어가 
비로소 그런 묶임에서 벗어날 수 있는 것이라고 
이 사정을 이해해야 한다. 


그런데 처음에 앞과 같은 희망을 놓고 
추구하는 과정은 
거의 모든 생명이 행하는 내용인데 
여기서 처음에 무원무작해탈문을 들어가지 못하면 
앞에서 말한 
지옥 아귀 축생과 같은 욕계의 고통받는 세계에서 
벗어나지 못한다는 것도 의미하는 것이다. 


그런데 
날짜도 바뀐 상태인데 
길게 이 내용을 살피면 복잡하다고 보게 된다.  


그래서 일단 눈을 뜨고 감는 실험을 하면서 
자신이 대하는 세계의 내용이 무엇이고 
그 본 정체가 무언가를 조용히 검토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보는데 
사실은 위와 같은 세계에 묶이고 난 상태에서는 
그런 검토를 하는 것 자체가 
대단히 곤란한 것이 사실이다. 


한마디로 
소귀에 경읽기 상황이 되는 것이다.


현실에서 쉼없이 망상분별을 일으키고 
그에 바탕해서 어떤 희망을 일으킨 다음 
그것을 정신없이 추구하고 바쁜데 
도대체 언제 한가롭게 그런 것을 놓고 
검토할 수 있다는 것인가.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이렇게 임하는 것이고 


다른 생명은 더더욱 그런 상황이 어려운 것이다. 
절벽에 매달린 가운데 뛰어 내려야 한다거나 
쉼없이 바삐 움직여야만 고통을 면할 수 있는 상태에서 
그런 것을 기대하는 것 자체가 힘이 드는 것이다. 


여하튼 그런 상태에서 조금 여유가 있는 경우는 
다행이라고 할 수 있지만, 
그러나 그렇다해도 
앞의 실험을 하면서 
자신이 대하는 세계의 본 정체가 무엇이고 
어디에 이 생사고통을 벗어날 해탈문이 있는가를 찾아내고 
그 해탈문을 들어가 해탈을 얻고 
청정한 니르바나를 얻는 것이 
쉬운 것만은 아니다. 


그러나 그런 기회가 되면 
일단 칠각지역에 들러서 
다른 세계로 여행을 떠나는 훈련이 조금 필요하다고 보게 된다. 


그것은 반대로 말하면 
자신을 매 순간 번뇌로 묶어 두는 내용에서 
스스로 풀려나서 
다른 세계를 방문해보는 훈련이기도 한 것이다. 


그 방안은 사실은 간단하다. 


전에도 재미있는 Tv 드라마를 볼 때 
그 드라마를 집중해 관람하는데 
도대체 몇 초가 걸리는가 하는 문제를 제기했는데 
정신없이 지내다가 자신이 재미있어 하는 드라마가 
방영되는 것을 보았다면 
그 드라마에 초점을 맟주고 몇초가 있어야 
그 내용에 빨려 드는가 이런 문제다. 


칠각지 역에서 색계나 무색계로 여행을 떠나기 위해서는 
똑바로 자세를 갖추어 앉고 
숨을 쉬면서 숨을 하나 둘 세고 
그렇게 한 시간 앉아서 수행을 해야 되는 것처럼 
생각하기 쉬운데 
사실은 그렇지 않다는 것을 여기서 제시하는 것이다.  


그래서 일단 숨을 세면서 
그 숨을 쉬는 활동에 마음을 모으고 
숨을 세면서 
임하면 곧 색계 여행을 안내하는 초선양을 
만나게 된다고 제시한 것이다. 


경전에 초선양을 만나면 
온 몸이 진동하는 상태가 된다고 하는데 
현실에서 우주선이 대기권을 벗어날 즈음 
일어나는 현상이려니 생각하고 
초선양을 만나 색계를 여행하면 
일단 지극한 이생희락을 얻게 된다고 
제시되는 것이다. 


지금 제시하는 방안은 생사를 벗어나는 
근본 방안은 아니라고 하더라도 
일단 지옥 아귀 축생과 같은 세계가 있는 욕계를 
벗어나 색게에 진입한다는 의미를 갖는 것이다. 


그리고 그 집중을 점점 더 유지해나가면 
무색계로도 진입하는 데 
여하튼 이런 수행이 기본적인 수행방안인 것이다. 


색계와 무색계는 앞과 같은 3 악도의 세계가 있지 않고 
하늘로만 구성되어 있으므로 
수행자가 공포나 고통을 받는 우려도 별로 없는 것이다. 


처음에 지옥세계를 방문하면 놀라지 않을 수 있겠는가. 
현실에서 곤충과 이상한 동물이 있는 
정글이나 아마존 지역에 불시착하면 
김병만 아저씨와 같이 평소에 단련된 분을 제외하고는 
대부분 상당히 고통과 공포를 느끼면서 
지내야 하는 것이 사실이다. 
 
최근에 김병만 아저씨가 고공에서 뛰어내리는 연습을 하다가 
척추를 다쳤다는 보고도 받는데 
그래도 김병만 아저씨이니까 그런 상황에서 
그 정도라고 예상하게 된다. 


여하튼 위와 같은 방안으로 색계부터 
방문하는 훈련이 필요하다고 보는 것이다. 


그런데 그 전에 앞의 실험을 잘 해서 
자신이 평소 세계라고 이해하고 받아들인 내용이 
그 정체가 무엇인가를 잘 먼저 이해하는 것도 
함께 필요하다고 본다. 


이는 
자신이 눈을 뜨고 감는 동작을 반복하면서 
그전까지 자신이 세계라고 이해한 내용은 
이 가운데 무엇인가를 검토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리고 혼자만 실험하지 말고 
자신과 비슷한 다른 이도 실험하게 하고 
그것을 옆에서 관찰하고 
애완견이 있으면 애완견도 그렇게 하는 것을 관찰하고 
메뚜기도 하나 있다고 생각하고 그것을 관찰하고 
이런 가운데 
자신이 평소 세계라고 이해한 내용이 
무언가를 놓고 그 정체부터 잘 확인할 필요가 있는 것이다. 


그리고 자신이 평소 정상이라고 보는 내용이 
사실은 소나 메뚜기가 처음 태어나 
세상을 대하게 된 상황과 사정이 같으니 


앞의 방식을 통해서 일단 
그 상태에서 벗어나 다른 세계를 
살펴보자는 이런 의미다. 


공해탈문을 먼저 얻은 상태라면 
이렇든 저렇든 큰 관계없다는 배짱을 확보하고 
잘 수행에 임하면 된다고 볼 수 있는데 
여하튼 앞의 수행이 이 논의에 
대단히 필요하다고 보는 것이다. 

[...]

>>>

현실이 마술과 같은 상황이라고 제시했는데 
일반적으로 현실에 대해 이해하는 내용과 
본 정체의 사정이 너무 현격하게 차이가 나기에 
그것을 설명하기가 힘이 들어서 그런 것이기도 하다. 


마술은 아니지만, 마술이라면 마술사가 행하는 마술의 트릭을 
설명해내기가 조금 복잡하다고 보듯 


현실도 현실에서 일반인이 행하는 판단이 
왜 엉터리인가를 설명해서 이해시키는 것이 
조금 복잡한 점이 있는 것이다. 


그런데 현실에서 일반인이 자신이 평소 행하던 판단이 
정상이고 옳다고 확신하는 정도가 강하면 강한 만큼 
그것이 엉터리 망상 분별임을 이해시키는 것도 
상당히 힘든 것이 사실이다. 


그래서 앞에서 처음 눈을 뜨고 감는 실험을 
반복해보라고 한 것이기도 하다. 
실험은 간단한데 이 실험이 무슨 의미를 갖는지 
이해하기 힘들어 하는 경우도 있다. 


이것은 간단히 말하면 
자신이 눈을 감을 때는 얻지 못하다가 
눈을 떠서 얻는 내용은 
그 주체의 마음에 얻는 감각내용이라고 
하는 내용을 이해시키기 위한 것이다. 


그리고 그것이 그가 외부세계나 자신이라고 
이해하는 내용이기도 한 것이다. 


외부세계나 자신이 자신의 마음에 들어와 있는 내용이 아닌데 
반대로 말하면 
자신의 마음에 얻어진 손님과 같은 내용을 놓고 
일부는 자신의 외부에 있는 세계의 내용이고 
일부는 자신의 몸이라고 생각하면서 살아간다는 것을 
지적하기 위한 것이다. 


이것이 거꾸로 뒤집힌 가운데 
현실을 살아가고 있다는 내용의 하나다. 


그래서 이 실험을 자신만 행하지 말고 
다른 이나 다른 생명도 관찰하면서 
검토해보라고 한 것이다. 


어떻게 자신이 평소 거꾸로 뒤집힌 상태에서 
생각하고 살아가는가가 이와 관련되는 문제다. 


사실 이 실험은 이후 더 살펴야 할 문제가 많다. 


다른 이가 무언가를 대하고 보는 과정을 관찰해보라고 하면 
전도된 상태에서는 자신도 그런 상태인데 
그것을 이해하지 못하고 또 전도 망상을 전개하기 쉽다. 


즉, 다른 이가 무엇을 보는 과정을 
의사가 환자를 관찰하고 대하듯 
대하고 이해하는 것이다. 


이는 무엇을 말하는가 하면 
어떤 제 3 자가 마치 
관찰자 자신의 마음에 들어온 내용을 
대해서 어떤 내용을 얻는 것처럼 
그 과정을 관찰하고 이해한다는 의미다. 






그래서 이것을 살피려면 조금 더 복잡해진다. 


그런데 돗수가 다른 색안경을 쓰고 벗고 하는 실험은 
다시 다음을 말하기 위한 내용이다. 


자신이 평소 대하는 현실을 
자신의 외부에 있는 세계라고 이해할 때 
이 내용이 그대로 사실은 
자신의 마음에 들어온 내용물이라는 것을 
확인시키는 실험인 것이다. 


자신과 별도로 외부에 있는 사물이라면 
왜 자신이 안경을 하나 바꿔 쓸 때마다 
그 형체나 색을 달리하는가. 
이 문제를 검토해보는 실험인 것이다. 


즉, 
안경을 바꿔 쓸 때 그렇게 
바뀌지 않는 부분이 따로 있는가부터 
확인하고 


자신의 밖에 있는 외부 세계가 
왜 안경 하나로 그렇게 모두 
다 바뀌는가. 


이것을 검토해보라는 의미다. 
정말 그렇다고 보는가. 


그래서 자신이 평소 
자신의 외부에 있는 세계이고 
외부 대상이고 물질이라고 이해한 내용들의 
본 정체가 무엇인지에 대해서 
거꾸로 뒤집힌 상태로 
판단하고 있는 것을 
시정하라고 제시한 내용이다. 


이제 자신이 손을 내밀어 찻잔을 만지고 
소리를 듣고 
냄새를 맡고 
등등의 과정도 
또 마찬가지의 문제가 들어 있다고 
제시하는 것이다. 


그런데 자신이 이런 소리나 냄새나 
맛이나 촉감을 얻는 과정을 
그렇게 이해하는 것이다. 


그러니 이것이 마술사가 보여주는 
장면을 놓고 
그 관계를 이해하는 것과 
사정이 같은 것이다. 


그렇게 자꾸 대하니까. 
자신이 시각으로 얻는 시각정보의 내용이 


마치 청각정보나 후각정보, 미각정보, 촉각정보를 
일으켜 내는 원인인 것처럼 
그렇게 관계를 판단하게 된다는 의미다. 




그래서 이런 내용을 기초로 판단하면 
시각정보를 통해서 
그런 청각정보가 얻어진다거나 
반대로 
청각정보를 통해서 
시각정보가 얻어진다고 해야 하는데 
과연 그런가를 놓고 검토를 해야 하는 것이다. 




그래서 그렇게 볼 수 있는가를 
먼저 묻는 것이고 
사정이 만일 그렇지 않다고 한다면 
이런 내용을 얻는 과정은 과연 무엇인가를 
따로 찾아야 한다는 것을 제시하는 것이다. 




그래서 처음 자신이 눈을 떠서 본 내용에서 
찻잔은 자신이 손이 대하는 외부 대상이라고 생각하고 
또 그 손이나 자신의 몸이 자신이라고 생각한 내용은 
거꾸로 뒤집혀진 엉터리 생각이라고 제시하는 것이다. 


즉, 현실에서 자신과 자신이 대하는 세계라고 
생각하는 내용이 바로 이것들인데 
이 내용자체가 이처럼 뒤집힌  전도 망상분별이라는 것부터 
스스로 잘 확인해야 한다고 제시하는 것이다. 


그래서 자신이 세계로 이해하는 내용은 
그런 사정으로 
그 일체가 자신의 마음에 들어와 있는 내용물이라는 것부터 
확인해야 하는 것이다. 




그 다음 문제는 무엇인가. 


앞과 같은 내용을 제외하고 
자신이 세계라고 하는 내용이 따로 있는가를 
따로 살펴야 하는 것이다. 




자신이 우주도 논의하고 
바다와 대륙도 논의하고 
세계 각곳의 지리도 논의한다고 할 때 
그런 내용 가운데 
자신의 마음에 얻어진 내용말고 
다른 것이 하나라도 있는 것인가부터 
일단 확인하는 것이 필요한 것이다. 


그러나 여기서 자신의 마음과 
자신의 '마음이 얻어내 마음에 머무는 내용물'은 
조금은 구별을 해야 한다고 본다. 


그래서 일단 평소 자신이  
세계라고 이해한 내용들의 정체를 확인한다면 
그런 세계는 어떤 종류가 있는가를 
그 전제에서 또 살펴야 한다고 제시한 것이다. 


그런 상태에서 자신이 
현재 생활하고 있고 
또 앞으로 생활하게 되므로 
그런 세계를 먼저 검토해야 한다고 보는 것이다. 


그런 가운데 일단 
세계를 왜 욕계 색계 무색계로 나누고 
또 왜 욕계에는 
고통을 심하게 받는 지옥과 아귀 축생의 세계가 있다고 하고 
색계 무색계에는 하늘의 세계만 있다는 등으로 제시하는가도 
기본적으로 이해할 필요가 있는 것이다. 


그런데 사실 자신의 희망만 놓고 생각하면 
자신은 늘 좋음을 얻는다고 할 
하늘의 세계에서 살아가면 좋다고 보는 것이지만, 


그렇게 될 원인을 자신이 행하지 않고 
그런 희망만 한다고 해서 
자신의 뜻대로 
하늘에 가 살 수 있다고 할 수는 없는 것이다. 


비유하면 
자신을 체포해 감옥에 묶어 두고자 하는 
수사관들이 수없이 많아서 
자신이 도망을 다니기 바쁜 상태인데 
그런 상태에서 자신은 하늘로 가서 머물기를 
강하게 원한다고 뜻대로 되는 것은 아닌 것이다. 


그러니 현실에서도 사정이 마찬가지다. 


비록 정려 수행을 하면 
색계 무색계를 방문하게 된다고 제시는 하지만, 
앞의 상태를 해소시키지 않으면 
그것도 뜻대로 되는 것이 아닌 것이다. 




쉼없이 도망다녀야 한다거나 
또는 붙잡혀서 쉼없이 고통을 받아야 하는 그런 
상태에서는 
일단 정려 수행을 할 상황 자체가 
주어지지 않기 때문이기도 하고 


설령 그런 상태에서 
정려 수행을 하고자 해도 
기본상태가 그런 상태가 아니면 
역시 마찬가지가 된다고 보는 것이다.


그래서 사실은 
기본적으로 계행에 해당하는 수행 
즉 보시 - 정계 - 안인 - 정진의 수행을 
원만히 성취하지 못하면 


이후의 정려나 반야 지혜를 닦는 수행 자체가 
곤란하다고 보게 되는 것이다. 


이것은 체포당해서 
지옥에서 묶여 지내야 할 어떤 이가 
하늘로 도망을 가고자 하는 것과 마찬가지인데 
비록 그 당사자는 그런 상태를 간절히 원하겠지만, 
그러나 그를 체포해 지옥에 묶어 놓아야 한다고 보는 입장에서는 
결코 그것을 원하지 않는 것이기도 한 것이다. 


그리고 바로 그런 사정이 
목동이 관리하는 소를 
어떤 이가 축사에서 꺼내 들판에 자유롭게 원하는 대로 
살도록 풀어주고자 할 때 
그것을 원하지 않게 되는 사정과 비슷하다고 제시한 것이다. 


욕계에 묶여 살아가는 생명의 상태는 
이런 상태이기에 
업의 장애에 묶여 있는 생명이 스스로 
해탈문을 들어가 해탈을 얻어 내는 것이 
반드시 쉬운 것이 아닌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는 
기본적으로 해탈이 
소뿐만 아니라, 
목동 자신에게도 좋은 상태가 된다는 것을 
목동 자신부터 이해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보는 것이다. 


사실은 사정이 그렇기 때문이다. 


그리고 
또 그런 생사고통에 묶인 입장에서는 
그렇게 묶이게 된 업의 장애부터 
해소시키는 기본적 수행을 
먼저 성취해야 한다고 제시하는 것이다. 


그래서 좋음을 널리 베풀고 
다른 생명의 좋음을 함부로 침해하면서 나쁨을 가하지 않고 
자신이 그런 나쁨을 받을 때는 평안히 참는 
그런 기본적 계행을 닦는 것이 
우선적으로 요구되는 것이다. 


그것이 행해지면 않은 상태에서는 
정려 수행이나 반야 지헤를 닦는 것 자체가 
대단히 곤란하다고 보는 것이다. 




여기에는 기존의 라이터 화두와 함께 
짜장면 화두가 또 필요하다고 보게 된다. 


짜장면 화두란 간단하다. 
짜장면을 먹고 있는데 
젓가락을 든 노숙자가 나타나 젓가락을 
그릇에 담그면서 
같이 먹으려고 한다고 해보자. 
그런데 자신도 사흘 굶어 너무 배가 고프다. 
이것을 먹지 않으면 죽을 것 같다. 
이런 상황에서 
짜장면을 놓고 왜 이 짜장면 하나 때문에 
자신이 지옥과 아귀 축생 세계에 
묶이게 되었는지를 잘 생각하고 


이 짜장면이 주는 좋음의 문제를 
세상의 모든 좋음으로 확대시켜서 
그 사정을 살피는 문제다. 


여하튼 그것이 곧 지금 살피는 
희망을 성취하는 문제와 바로 직결된다. 




그래서 왜 
자신이 좋다고 보는 상태를 희망하고 
그 희망을 추구하고 성취하는 행위가 
자신을 매 순간 지옥과 아귀 축생 세계에 
묶어 두거나 
또는 그런 수용소로 자신을 신속하게 
이송해가는가 하는 사정을 
이를 통해서 파악해야 하는 것이다. 


그 사정을 그렇게 보지 못하고 
짜장면만 계속 추구하면 
안타까운 상태가 되는 것이다. 


결국 이런 사정을 잘 관하고 
무원무작 해탈문에 들어서야 
비로소 그런 증상이 제거될 
계기가 마련된다고 보는 것이다. 


어떤 이가 다리가 다쳤다고 할 때 
다리에 치료는 하는데 
계속 한편으로 또 다른 부분을 
칼로 잘라대는 행위를 계속하면 
그 치료가 되겠는가 
이런 단순한 문제이기도 한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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