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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fx--불국토-여행과-외교문제.txt
http://buddhism007.tistory.com/3543
● 이하 글은 단상_조각글 내용을 주제별로 '편집중'인 상태의 글입니다.
불국토 여행과 외교문제
수행자는 현실에서 수행에 임한다.
그래서 수행자가 수행을 해서
성불을 설령 한다해도
중생이 임하는 세계와 별도로 임하는 것은 아니다.
그런데 그렇게 수행자가 수행을 하면서
세계에 임하면 그 상태는
중생의 상태와 다르다고 하여
중생이 묶여 생사고통을 겪는
지옥 아귀 축생 인간 아수라 하늘과 같은
3 계 6 도의 세계와
명칭을 달리 시설해 붙이는 것 뿐이다.
그래서
4 향 4 과의 수다원 사다함 아나함 아라한이나
독각(연각)이나 대승의 보살이나 부처님의 상태가
다 그러한 것이다.
그런 가운데 수행자가 다른 부처님의 불국토를
방문하고 각 불국토를 장엄하는 활동을 하는 것도
사정이 같다.
[...]
현실에서 무엇을 a 라고 볼 때
그런 감각현실을 얻는 그 상황이나
그 본 바탕의 실재에서
그런 내용은 얻을 수 없는 것이다.
그런데 그렇게 보는 것이다.
그리고 가장 비극적인 상황으로서
어떤 이가 억울한 고통을 당하고
죽임을 당하는 정지화면을 놓고
이것을 살펴보라는 의미다.
사실은 그렇게 보기 힘들지만,
어느 정지화면을 놓고 문제를 살펴도
사정은 그렇다라고 이해하고 깨닫는 것이
사실은 모든 생사고통의 묶임에서
근본적으로 벗어나는 출구이기도 한 것이다.
그것이 실재의 공함을 관하고 벗어나는 공 해탈문
감각현실에서 자신이 관념을 일으키고 나서
그렇게 집착하는 그런 모습(상)은 얻을 도리가
없으니 그런 상을 감각현실에서 취하거나 머물지 않고
벗어나는 무상 해탈문
그리고 자신이 관념영역에서 일으키는
온갖 소원이나 그 소원을 추구하는 노력은
다 그런 바탕에서 일으키고
자신과 다른 관계된 이를 다 함께
모두 생사고통으로 묶어 끌고 가는 근본원인이니
그런 쓸데없는 소원을 제거하고 임하여
이를 벗어나는 무원 무작 해탈문이
바로 그런 해탈문이기도 한 것이다.
그래서 감각을 통해 얻게 되는 하나의 정지화면을 놓고
그 정지화면으로서 그 감각현실이
곧 그대로 자신이 그에 대해 생각하게 되는 그런 내용인가를 묻고
확인해보고
그리고 그런 관념분별을 그런 감각현실을 떠나서 얻는 것인가를
또 묻고 확인하고
그리고 이런 모든 문제의 본 바탕이 된다고 할 실재를
다시 이처럼 놓고
실재가 곧 감각현실인가.
그런 실재를 떠나서 그런 감각현실을 얻는 것인가.
이렇게 각 존재의 관계를 살펴서
공해탈문과 무상해탈문 무원무작해탈문을 찾아서
그 문을 열고 들어가야
비로소 이런 번뇌에 묶여 생사고통을 무한하게
주고 받아나가는 상태에서 벗어난다고 보는 것이다.
현실에 집착하고 문제를 대하는 입장에서는
이는 너무 엉뚱한 방안이라고 보기 쉽지만,
이것이 바로 근본적인 해결방안이기도 한 것이다.
그러나 그것이 안된다면
하나의 정지화면을 놓고
얼마나 다양한 시감상이 다양한 측면에서
가능한 것인가도 다시 검토해 볼 필요가 있다.
한 사람을 놓고 단순하게 그것은 영희나 철수다라고만
보게 되는가.
그렇지 않은 것이다.
그 하나의 정지화면을 놓고 보더라도
그 안에서 무량한 내용을 다 꺼내 헤아릴 수 있는 것이다.
그래서 그 하나하나가 다 그 감각현실과
관련된다는 것을 인식할 필요가 있는 것이다.
[...]
어떤 권총을 갖고 살해사건이 있다고 할 때
권총을 가지고 비난하는 이는 거의 없는 것이다.
그 권총을 발사한 이가 문제고
또 그렇게 그가 권총을 발사하게 묶어 행하게끔 만들어낸 이가 문제이고
또 그렇게 그 권총을 발사하게끔
그의 마음 안에서 그가 생각한 내용이 문제이고
또 그런 생각을 하게 한
그의 마음 안에 들어 있던
전도망상 증세와 그에 바탕한
탐욕과 분노 어리석음이란 번뇌와 그 집착이 문제인데
알고보면
어느 주체를 놓고보더라도
그의 마음 안에서 이들 내용은
그의 본질이 아니고
그의 마음에 일시적으로
들어와 있는 손님이고 티끌과 같은 내용물인 것 뿐인 것이다.
그래서 그런 마음안에 들어와 있는
그런 손님티끌[객진] 번뇌가 그 모든 불행한 비극적 사건들에 대한
근본원인이고
나아가 그 마음의 주인이 그것을 주인으로 보고
매 순간 임하게 된 근본 무명이 또 근본원인이라고 보게 되는 것이다.
그것을 모두 떠나 보내면
그 본 마음은 그 누구나
다 부처님과 같은 청정하고 밝고 선한 상태이고
또 장차 그런 바탕에서 성불할 미래의 부처님들이라고
보아야 하는 것이다.
그런 상태에서 자신이 가장 혐오하는
바이러스 세균 암세포 기생충이나 곤충이나 해충 등등을 다 포함하고
또는 가장 증오하고 원한을 갖고 미움을 갖고 대하는
다른 상대를 관하고 대할 필요가 있는 것이다.
이것이 엉뚱한가.
그렇지않다.
그렇게 보지 못하면 그 마음은
자신의 집에서는
또 자신의 부모나 형제자매나 자신의 자식을 놓고서도
상대와 이해관계만 조금 달라지면
또 그처럼 상대를 원수로 관하고
상대를 대하게 되기 마련이다.
그렇지 않을 것 같은가.
그렇다면 이성계와 이방원을 보고
세조대왕을 보고
영조대왕을 보고
당태종을 보고
수양제나 수문제를 보고 다 찾아보면
그 사정이 그와 같다는 것을 다 보게 되는 것이다.
그러니 문제는 그런 입장에서는
누구를 짚어서 문제라고 할 것이 아니고
그런 해탈문을 들어가 관하지 못하는
자기 자신에게서부터 그 문제를 찾아야 하는 것이다.
a + b => C 의 관계가
이런 문제마다 자신에게 제시하는 내용이
바로 그것인 것이다.
왜 자신의 문제는 보지 못하고
그것을 모두 남에게 떠넘기는가.
이런 문제제기인 것이다.
[...]
원칙적인 수행방안은 이에 대해
어떻게 제시하는가.
한 단면만 놓고 보면
그 내용을 그렇게 볼 수도 있지만,
알고보면
어떤 피해를 받았다고 하는 입장은
사실은 다른 측면에서
동시에 가해자의 입장에도 놓여 있는 것이다.
일일히 설명하지 않지만,
이런 관계에서 어떤 입장도 자유롭지 않은 것이다.
그리고 그런 문제에 대한
사과나 반성은 다른 이가 강요해서 하는 것은
의미가 없고
스스로 알아서 할 때만 그 의미가 있는 것이다.
그러니 상호 관계에서
다른 상대에게 그런 것을 요구할 필요자체가 없는 것이기도 하다.
그보다는 자신이
한편으로는 가해자의 입장에서
자신이 할 도리로서
과거의 잘못을 참회하는 한편
자신에 의한 피해자를 포함한 온 생명을 차별없이
좋고 좋은 상태로 이끌겠다는 서원을 일으키고
그것이 말뿐이 아님을 보여주기 위해서라도
그 가운데 당장 자신이 할 수 있는 것부터
하나하나 실천해 나가는 것이 자신이 할 일인 것이다.
또 한편 피해자의 입장에서는
그 모든 고통과 수치라고 보는 내용에 대해
상을 제거하고
그래서 아상 인상 중생상 수자상을 제거하고
이에 대해 분노를 일으키지 않고 평안히 참고
상대에 대한 미움과 원망을 버리고
상대를 용서하고 넓은 자비의 마음으로 대하는 가운데
역시 앞과 같은 서원을 일으켜
그것을 실천해 나가는 자세로 전환해야 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런 일도
다른 상대가 어떻게 해야 한다고 요구하거나
그런 것을 조건으로 삼지 않고
그냥 자신이 행해야 하고
또 그것으로 충분한 것이다.
그러면 그 자신이 그런 생사고통을 겪는 업의 장애에서
드디어 자신이 풀려나게 되는 것이다.
성경에서 예수님이
원수를 사랑하라고 가르치는 내용은
그것은 상대방 원수를 위해서 그렇게 하라는 것이 아니고
그 자신을 위해서 그렇게 자신이 행하라는 의미다.
또 그렇게 하면 자신부터 그런 업의 장애로부터
풀려나는 것이고
또 자신이 풀려나면
그로 인해 자신과 관련된 다른 이들도
또 풀려나게 되는 것이다.
그런데 이것을 실천하지 못하면
결국 도리가 없다고 보게 되는 것이다.
그런 경우의 그 결과는 이제
지상의 현실에서 역사에서 다
보여주고 또 스스로 겪어 나가게 되는 것이다.
이것이 이상한가.
이상하면 입장을 바꾸어 놓고
시간을 거슬러 가면서
다른 입장에서 계속 문제되는 내용이
어떤 관계로 그렇게 전개되어 나왔는가를
하나하나 살펴보아야 할 것이다.
자신은 어떤 한 단면만 놓고
그것을 문제삼지만,
그렇게 된 것은 갑자기 그 한 단면이
우연히 그렇게 나타난 것이 아니고
서로 다 그렇게 얽혀 임하면서
각 상황에서 상대를 그렇게 대하게된
연유와 사정이 다 있는 것이다.
자신의 입장에서 도저히 그 사정을
이해하지 못하겠다면
상대의 입장에 잠깐 들어가서
상대가 하는 내용을 들어볼 필요도 있는 것이다.
그것도 하기 힘들면
이 문제를 남의 문제라고 보고
제 3 자 입장에서 살펴보려고 자꾸
노력을 해보는 것도 필요하다.
그런데 각 입장에서는 그것을 행하지 않고
자신의 생각과 자신의 주장만
계속 고집하고 임하는 것이다.
[...]
>>>
재벌은
1 년에 몇조원을 버는데
자신은 생계가 해결이 안 된다고 하면
재벌을 끌어 내려 같이 생계가 안 되는 상태로 만들어서
문제가 해결된다고 볼 이유가 없다.
그래서 좀 마음이 편해진다고 해도
그렇다고 자신의 생계문제가 해결되겠는가.
그러니 그런 것도 문제가 되면
그것을 이렇게 소원을 구성해 임하는 것이다.
일단 자신은 그런 상태가 되는 것이
필요하지 않은가.
그러니까 그것을 당연히 소원에 포함시켜야 되는데
대부분 걸리는 함정이 있다.
그렇게만 소원을 구성해서 접수시키고
매일 임하니까 그렇게 안 되는 것이다.
무엇이 성취가 안 되는 이유가 있다면
그것이 이유인 것이다.
반복해서 제시하지만,
소원을 성취하려면
이웃집 옆사람이던 하나님이던 보살님이던 부처님이던
자신에게 다가와
왜 그 소원을 성취하기를 바라는가.
그 소원을 성취한 상태에서는 무엇을
어떻게 하려고 그 소원을 바라는가.
이런 질문을 한다고 가정하여
그에 대해 답을 잘 작성하는 것이
핵심인 것이다.
[...]
앞 내용으로 샘플을 요구하면
쉽게 이렇게 답을 제시할 수 있다.
자신의 생계해결이 간절하고
더 나아가 세계최고의 부자가 되고 싶다고 할 때
노래에서 힌트를 제공하는데 너 좋고 나좋고 하면서
자신의 꿈을 성취할 방안을 모색하는 것이 첫 단계라면
첫 단계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궁극적으로 좋음을 얻는 주체의 범위를 닫으면
그 부분부터 바로 그로 인해 장애를 만나게 되는 것이다.
그러니까 그런 한계를 두지 않고
차별과 제한을 두지 않는 것이
자신의 소원 성취의 핵심방안인 것이다.
나중에 보면 바이러스나 세균 하나 때문에
자신의 모든 꿈이 성취직전에 무산되거나
기껏 성취한 꿈이 다 허물어지는 사례를 수없이 찾을 수 있는데
왜 그렇게 되는가는 바로 앞 사정 때문에 그런 것이라고
이해하면 쉽다.
그런데 온 생명이 다 함께 부자가 되는 것이
불가능한 것이 아니므로
자신이 부자가 되고자 한다고 하여
남들이 다 가난해져야 한다고
고집을 가질 필요가 없는 것이다.
돈도 안드니까 일단 작성하는 소원신청서 내용만이라도
과감히 인심을 쓰는 자세가 필요한 것이다.
온 생명이 다 제한이 없고 차별없이
모두다 무량하게 생존을 유지하면서
모두 다 제각각 온 우주를 다 차지하고 풍요롭게 되는
상태가 되게 하고 싶다.
이렇게 작성해버리는 것이다.
그런데 처음 자신이 최고 부자가 되어 살고 싶다고 해서
소원신청서를 작성하기 시작했는데
그 자신은 어디로 갔는가.
그런데 처음 소원신청서를 작성할 때
온 생명에 제한을 두지 말라고 했던 것이
힌트라면 힌트다.
그런데 이런 식으로 소원신청서를 작성하는 것은
그 사정은 이해하지만,
수행자 입장에서는 이것을 대단히 안타까운
현상으로 보는 것이다.
그것은 경전에서 부처님이나 보살님도
사정이 마찬가지다.
그렇게 되어봤자 아무 필요없다고
보는 것이다.
그것은 문제의 핵심을 잘 모르기에 그런 것이다라고
보는 것이다.
그래서 다시 내용을 추가해야 할 필요가 있는데
하나님이면 하나님
부처님이면 부처님이
무엇때문에 그런 소원을 들어줄 필요가 있다고 보는지를
다시 추가해야 되는 것이다.
그래서 그것을 추가해서
위 내용을 수단으로 그런 상태에 이르게 하겠다고
제시하면 거의 소원 접수가 성공적이 된다고
보게 되는 것이다.
그런데 설마 하나님이나 부처님을 상대로
자신의 답안 작성으로 속일 수 있다고 생각하지 않겠지만,
그런 내용을 자신이 진심으로 원할 때부터
그것이 정식 접수된다고 보아야 하는 것이다.
그래서 불교계에서는
그 모범답안을 늘 기본적으로 제시하고 있는 것이다.
앞에 보충해 넣어야 할 내용의 핵심이
기본적으로 제시되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사실은 문제해결방안이란 지극히 간단한 것이다.
그 핵심은 결국 사홍서원에 제시된 내용이 골격이 되는 것이고
단지 자신의 경우는
자신이 추가한 그런 내용으로
조금 남과 다르게
개성이 있고 그로 인해 독특하고 특색이 있게 된 것뿐이라고
보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그것이 또 그 자신에게는 중요한 것이 사실아닌가.
그래서 알고보면 수행자가 갖는 서원들이란
핵심만 놓고 보면 다 엇비슷한 것도 사실이다.
[...]
여하튼 온갖 소원을 성취할 수 있는
근본 해결방안은 전혀 이해가 안 되고
만족스럽지 않다면
차선책으로는
일단 무언가를 그렇게 하면
뻔히 그 결과의 내용이 보이고
그래서 안 된다고 보게 되는 것들만이라도
그렇게 하지 않는 것이 좋다고
두번째로 방안을 제시하게 된다.
그러나 그런 문제들로 인해
그런 방안을 모두 제외하게 되면
이제 전혀 다른 방안이 안 보인다고 하는데
사실은 그로부터 온갖 방안이 다 보이게 되는 것이기도 하다.
그리고 또 다시 근본적인 방안과 이를 관련시키면
그처럼 방안이라고 보는 것들이 하나같이
본래 그런 내용을 얻을 것이 없다는 사실을 깨닫고
그처럼 얻을 것이 없음을 얻는 것이
곧 수행의 핵심이라고
경전에서 반복해서 제시되고 있는 것이다.
그것은 다음과 같은 사정 때문이다.
예를 들어 자신의 뜻이 100 % 성취되었다거나
또는 지금 자신이 대하는 정지된 단면은
그것이 꽃임이 분명하다고 확신하는 그 상태를 놓고
바로 그런 상태에서
그에 해당하는 내용을 거기에서 얻을 바가 없음을
그렇게 반복해 제시한 것이다.
그러니 그 사정을 이해하면
그로부터 모든 문제가 풀리기 시작하는 것이다.
그런데 다시 여기에 무언가 더 사족을 덧붙인다면
이제 그런 상태를 바탕으로
닦아나가야 할 무량행문의 수행이 제시된다고 보는데
그것은 보너스 차원에서 그 자신보다는
다른 일체 생명을 위해
자신이 닦아나갈 수행방안이기도 한 것이다.
그리고 그것이 곧 보-정-안-정-정-반-방-원-역-지
의 수행방안인 것이다.
이는 앞글자를 떼넨 줄임말이지만,
이것도 자체적으로 시감상하면
좋은 말이 된다고 보니 잘 감상하면 좋다고 보지만,
풀어도 하나하나 좋은 수행방안이 된다고 보는 것이다.
즉 보시-정계-안인-정진-정려-반야-방편-원-력-지의
수행방안이 앞과 같은 바탕에서 행해나갈
내용들인 것이다.
그러니 이런 내용이 아닌 다른 방안을 아무리
살펴도 그것은 그것이
그런 온갖 문제를 해결할 방안이 아니라는 사실을
확인하는 것이 바로 답인 것이다.
그러니 그런 식으로 나열하는 방안들이
하나같이 그것을 따라가다 보면
다 해결하기 곤란한 또 다른 문제를
필연적으로 만나게 되는 것은
전혀 이상한 것이 아니다.
그런 사정으로 99 단계를 나아가던
무량하게 나아가던 끝내
그로 인해 얻는 고통을 해결해낼 수 없으므로
그것을 다 폐기하고
예수님은 예수님대로
관세음보살님은 관세음보살님대로
가장 간단하게 결론적인
처방을 제시한 것이다.
그것을 이해하지 못하면
MUN 님과 함께
그것이 끝내 좋은 해결방안이 못된다는 사실
하나만을 정확하게 깨닫고 이해할 수 있을 때까지
무량한 방안을 다 나열하면서
한없이 붙잡고 나아가면서
그 결과와 그 결과의 결과를 놓고 검토해보아야 하는 것이다.
그리고 수행자 입장에서는
그런 쓸데없는 노력을
빨리 생략하면 생략할수록
현명하다고 평가하게 되는 것이기도 한 것이다 .
원수를 사랑하라 이런 결론은
어떤 과정으로 도출된다고 보는가.
처음에 원수는 묶어서 톱으로 자른다.
누가 이런 것을 해결방안이라고
제시한다고 하자.
그런 경우 그 다음은 어떻게 되는가를
또 살펴야 되는 것이다.
그것을 그렇게 단순히 살피지 않고
넓고 길고 깊게 관찰해야 한다고 하는 것은
그런 사정때문이다.
현실에서는 곧바로 그 문제를 보게 된다.
그 자신이 이후 체포되거나 쫒김을 당하게 되는 것이다.
그런 상태에선 쉬어도 쉬는 것이 아니게 되는 것이다.
그것이 문제가 되니
조금 지혜를 발휘하는 루팡과 같은 이가
결과는 발생하는데
자신은 증거도 남기지 않고
빠져 나오는 방안을 찾아 사용하려고 하는 것이다.
다른 이를 해치고 그래서 다른 이가
고통을 받는 결과가 발생하지 않으면
모르는데
그런데 그처럼 다른 생명에게 고통을 주는 내용은 발생하는데
단지 자신이 개입한 사실만 보이지 않게
마술형태로 빼 버리려고 노력한다는 의미다.
그렇게 되겠는가.
그 사실을 누가 제일 잘 아는가 하면
그 당사자가 그 사실을 제일 잘 아는 것이다.
그래서 그 문제가 해결이 되지 않는 것이다.
이런 방식으로 무한히 변증법적으로
정반합의 과정을 거쳐서
기존의 방안의 문제점을 해결하고
나아가서
그 무량한 지점에 가도
여전히 문제가 남는 것이다.
1 번 2 번을 풀고
그것을 바탕으로 무한으로 나아가
그 문제를 그렇게 이해하지 못하면
정말 무한으로 나아가게 된다.
그러나 1, 2, 숫자를 제시할 때
이를 바탕으로 00 무한까지
그렇게 문제가 증폭되어 간다는 사정을
빨리 이해하는 경우는
그것을 다 페기해 던져버리는 것이다.
그것이 곧 무원무작해탈문의
핵심 내용인 것이다.
쓸데없는 전도몽상에 바탕하고
탐욕과 분노 어리석음의 번뇌에 바탕해 만들어 낸
소원은 그 일체가 다 쓸데없는 것이고
자신뿐 아니라 자신과 관계된 생명들을
다 함께 넓고 길고 깊게 고통을 증폭시키는 데
이바지하는 내용들뿐인 것이다.
그러니 그것을 남김없이 제거해야
그런 번뇌에 묶여 생사고통을 받아가는 묶임에서
비로소 풀려날 계기가 마련이 되는 것이다.
그래서 이것이 무원무작해탈문으로 제시되는 것이다.
그리고 그 상태에서
온 생명을 제도하고 불국토를 장엄하고
성불하고자 하는 서원으로
그 내용을 전환해내야
무량행문의 수행이 시작된다고 할 수 있다.
앞 내용과 뒷 내용이 바로 그런 부분에서
차이가 있는데
그런 사정으로 그 내용들이
신속하게 성취가 되게 되는 것이라고
또 사정을 이해할 수 있는 것이다.
이외는 별 방안이 없는 것이어서
그래서 그것이 방안이 아님을 이해하는 것은
어떤 입장에서는 실망을 줄 수 있다고 보지만,
그러나 그런 사정으로
이런 내용들이
대단히 중요한 내용이라고 보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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