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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하 글은 단상_조각글 내용을 주제별로 '편집중'인 상태의 글입니다.
>>>
♥ 손뼉을 치면 소리가 난다고 이해하는 망상과정에 대한 연구
손뼉을 치면 소리가 난다고 망상을 갖는 사정을
살피고자 한다.
이전 조각글에서
감각현실과 관념분별
실재와 감각현실의 관계를 살핀 바 있다.
원래 이 부분을 살피면
손뼉을 치면 소리가 난다 나지 않는다 등을 놓고
더 이상의 논의가 필요없다고 할 수 있는데
그러나 왜 계속해서 논의를 해야 할 필요가 있다고 할 것인가.
일단 이들 각 내용의 관계를 살필 때
어떤 형식으로 각 내용의 관계를 살피는 것이
바람직한가에 대해서
관련 경전에서 일단 형식을 참조해보기로 한다.
조금 복잡하지만, 다음 형식을 잘 살펴보는 것이
논의에 도움이 된다고 본다.
우선 넓은 의미로는 감관을 통해 얻는 모든 종류의 감각현실을 색이라고 칭하고
색수상행식을 말하게 된다.
그러나 일단 현실에서 눈을 뜨고 보는 것을 놓고
색이라는 표현을 이해하기로 하자.
이 때 현실에서 문제되는 어떤 B 가 있다고 할 때
이런 B 를 감각현실과 실재와의 관계에서
그 정체를 파악하기 위해
다음과 같이 문제를 제기하여 검토할 수 있다.
색이 곧 B 인가.
색과 다른 것이 B 인가.
색 가운데 B 가 있는가.
B 가운데 색이 있는가.
색을 여의고(떠나서) B 가 있는가.
+
색의 실재(진여)가 곧 B 인가.
색의 실재(진여)와 다른 것이 B 인가.
색의 실재(진여) 가운데 B 가 있는가.
B 가운데 색의 실재(진여)가 있는가.
색의 실재(진여)를 여의고(떠나서) B 가 있는가.
처음의 문제는
현실에서 문제되는 어떤 것을
감각현실과 관계를 살피는 문제라면
두번째는 그 실재와 관계를 살피는
문제라고 할 수 있다.
현실에서 자신이라고 본다거나
무엇을 놓고 자신의 것이라거나 a 라고 칭하고
문제삼는다면
이것의 정체를 살필 때
일단 그 모두를 위와 같은 형식에 넣어
살펴볼 필요가 있다고 본다.
관련 경전 부분을 찾는데 시간이 걸렸는데
대반야바라밀다경 교계교수품에서
이와 관련된 형식을 찾을 수 있다고 본다.
우선 경전에서
중생제도와 성불을 목표로 수행하는 이상적인 수행자를
나타내는 표현으로
보살마하살이란 표현을 사용하는데
이 보살마하살의 정체가 무엇인가가 문제될 때
기존에 세계를 분류하는 여러 범주의 내용과
그 관계를 위와 같이 살펴봄으로써
그 정체를 분명히 파악할 수 있다고 보게 된다.
그래서
경전에서는 다음과 같이 제시된다.
경전에서도 즉 앞과 같은 형식으로 살펴보는 것이다.
○ [pt op tr] 대반야바라밀다경 초분교계교수품 제 7지3 내용 참조
대반야바라밀다경 초분교계교수품 제 7지3
( 初分教誡教授品第七之三 ~ )
...
이와 같이,
선현아,
모든 보살마하살이 반야바라밀다를 수행하되
마땅히 이름은 거짓으로 시설된 것이요
법도 거짓으로 시설된 것임을
사실대로 깨달아야 하느니라.
또 선현아,
보살마하살이라 한 것을 너는 어떻게 생각하느냐,
곧 색이 보살마하살이냐?"
"아니옵니다, 세존이시여."
....
"색과는 다른 것이 보살마하살이냐?"
"아니옵니다, 세존이시여."
...
"색 가운데에 보살마하살이 있느냐?"
"아니옵니다, 세존이시여."
...
"보살마하살 가운데에 색이 있느냐?"
"아니옵니다, 세존이시여."
...
"색을 여의고 보살마하살이 있느냐?"
"아니옵니다, 세존이시여."
...
...
[중략]
대반야바라밀다경 초분교계교수품 제 7지5
( 初分教誡教授品第七之五~ )
부처님이 선현에게
말씀하셨다.
"장하고
장하도다.
참으로 너의 말대로니라.
선현아,
색 등의 법은 얻을 수 없기 때문에
보살마하살도 얻을 수 없으며,
보살마하살은 얻을 수 없기 때문에
행하는 반야 바라밀다도 얻을 수 없다.
선현아,
모든 보살마하살이 반야바라밀다를 수행할 때에는
의당 이렇게 배워야 하느니라.
또한 선현아.
보살마하살이라고
말한 것은
네 생각에는
어떠하냐,
곧 색〔色〕의 진여(眞如)가 보살마하살이냐?"
"아니옵니다, 세존이시여."
...
"색의 진여와 다른 것이 보살마하살이냐?"
"아니옵니다, 세존이시여."
"색의 진여 가운데에 보살마하살이 있느냐?"
"아니옵니다, 세존이시여."
...
"보살마하살 가운데에 색의 진여가 있느냐?"
"아니옵니다, 세존이시여."
...
"색의 진여를 여의고 보살마하살이 있느냐?"
"아니옵니다, 세존이시여."
...
[ 이하 생략 ]
K0001V01P0106a03L; 初分教誡教授品第七之三
...
K0001V01P0112b08L;
如是善現諸菩薩摩訶薩修行般若波羅蜜多
應如實覺名假法假
復次善現所言菩薩摩訶薩者於意云何
卽色是菩薩摩訶薩不 不也世尊
卽受想行識是菩薩摩訶薩不 不也世尊
異色是菩薩摩訶薩不 不也世尊
異受想行識是菩薩摩訶薩不 不也世尊
色中有菩薩摩訶薩不 不也世尊
受想行識中有菩薩摩訶薩不 不也世尊
菩薩摩訶薩中有色不 不也世尊
菩薩摩訶薩中有受想行識不 不也世尊
離色有菩薩摩訶薩不 不也世尊
離受想行識有菩薩摩訶薩不 不也世尊
...
K0001V01P0123b03L; 初分教誡教授品第七之五
..
K0001V01P0127a19L;
佛告善現
善哉善哉如是如是
如汝所說
善現色等法不可得故 菩薩摩訶薩亦不可得
菩薩摩訶薩不可得故 所行般若波羅蜜多亦不可得
善現 諸菩薩摩訶薩修行般若波羅蜜多時 應如是學
K0001V01P0127b02L;
復次善現 所言菩薩摩訶薩者
於意云何
卽色眞如是菩薩摩訶薩不 不也世尊
卽受想行識眞如是菩薩摩訶薩不 不也世尊
異色眞如是菩薩摩訶薩不 不也世尊
異受想行識眞如是菩薩摩訶薩不 不也世尊
色眞如中有菩薩摩訶薩不 不也世尊
受想行識眞如中有菩薩摩訶薩不 不也世尊
菩薩摩訶薩中有色眞如不 不也世尊
菩薩摩訶薩中有受想行識眞如不 不也世尊
離色眞如有菩薩摩訶薩不 不也世尊
離受想行識眞如有菩薩摩訶薩不 不也世尊
...
○ 또는 다음과 같이 간단한 형식도 있다.
대반야바라밀다경 초분 교방편품 제 50-1 (初分巧方便品第五十之一)
에서 진여(실재)와 마음의 관계에 대해
다음과 같은 형식으로 살피고 있다.
"선현아,
너는 어떻게 생각하느냐?
진여 그대로가 마음이냐?"
"아닙니다, 세존이시여.
아닙니다, 선서시여."
"선현아,
너는 어떻게 생각하느냐?
진여를 여의고 마음이 있느냐?"
"없습니다, 세존이시여.
없습니다, 선서시여."
"선현아,
너는 어떻게 생각하느냐?
마음 그대로가 진여이냐?"
"아닙니다, 세존이시여.
아닙니다, 선서시여."
"선현아,
너는 어떻게 생각하느냐?
마음을 여의고 진여가 있느냐?"
"없습니다, 세존이시여.
없습니다, 선서시여."
K0001V03P0227c03L; 初分巧方便品第五十之一
K0001V03P0248b19L;
佛告善現於意云何 眞如實際爲甚深不 善現答言如是世尊如是善逝
佛告善現於意云何 卽眞如是心不 善現答言不也世尊不也善逝
佛告善現於意云何 離眞如有心不 善現答言不也世尊不也善逝
佛告善現於意云何 卽心是眞如不 善現答言不也世尊不也善逝
佛告善現於意云何 離心有眞如不 善現答言不也世尊不也善逝
...
佛告善現於意云何眞如見眞如不 善現答言不也世尊不也善逝
佛告善現於意云何 ...
또 제 2 분 선현품 제6품-3 에서는
다음과 같은 형식도 제시된다.
앞과 같은 형식이지만,
좀더 간단한 형식이라고 볼 수 있다.
K0001V03P0901a03L; 第二分善現品第六之三
또 선현아,
이른바
보살마하살이란
네 생각엔 어떠냐?
물질이
그대로 보살마하살이겠는가?"
"아닙니다,
세존이시여."
...
"물질을 여의고
보살마하살이 있겠는가?"
"아닙니다,
세존이시여."
...
그때에
부처님께서
존자 선현에게 말씀하셨다.
"너는 어떠한 진리를 보았기에
'색 등의 법이 그대로 보살마하살이 아니며,
색 등의 법을 여의고도
보살마하살이 없다'는 그런 말을 하는가?"
존자 선현이 부처님께 아뢰었다.
"세존이시여,
보리나 살타(薩埵)나 물질 등의 법이나
오히려 끝내 얻을 수 없으니,
성품이 있지 않는 까닭이거늘
하물며 보살마하살이 있겠습니까?
이들은 이미 있지 않은 것이거늘
어떻게 물질 등의 법
그대로가 보살마하살이라거나,
물질 등의 법을 여의고
보살마하살이 있다고 아뢰겠습니까?"
부처님께서
선현에게 말씀하셨다.
"훌륭하구나,
훌륭하구나.
그렇느니라,
그렇느니라.
네 말과 같으니라.
선현아,
보리라거나 살타라거나 물질이라거나 하는 등의 법을
얻을 수 없는 까닭에
보살마하살들도 얻을 수 없나니,
보살마하살들을 얻을 수 없는 까닭에
행하는 반야바라밀다도 얻을 수 없나니,
선현아,
보살마하살들이 반야바라밀다를 수행할 때에는 마땅히
이와 같이 배워야 하느니라.
또 선현아,
이른바
보살마하살이란
네 생각에는 어떠냐?
물질의 진여(眞如)가
그대로 보살마하살이겠는가?"
"아닙니다,
세존이시여."
"느낌·생각·지어감·
의식의 진여가
그대로 보살마하살이겠는가?"
"아닙니다,
세존이시여."
"물질의 진여를 여의고
보살마하살이 있겠는가?"
"아닙니다,
세존이시여."
"느낌·생각·지어감·
의식의 진여를 여의고
보살마하살이 있겠는가?"
"아닙니다,
세존이시여."
...
K0001V03P0889a16L;
復次善現 所言菩薩摩訶薩者於意云何
卽色是菩薩摩訶薩不 不也世尊
卽受想行識是菩薩摩訶薩不 不也世尊
離色有菩薩摩訶薩不 不也世尊
離受想行識有菩薩摩訶薩不 不也世尊
...
( 중략 )
K0001V03P0890a07L;
爾時佛告尊者善現
汝觀何義作如是言
卽色等法非菩薩摩訶薩
離色等法無菩薩摩訶薩耶
時尊者善現白佛言
世尊若菩提若薩埵若色等法尚畢竟不可得性非有故
況有菩薩摩訶薩此旣非有如何可言卽色等法是菩薩摩訶薩
離色等法有菩薩摩訶薩
佛告善現善哉善哉
如是如是如汝所說
善現若菩提若薩埵若色等法不可得故
諸菩薩摩訶薩亦不可得
諸菩薩摩訶薩不可得故
所行般若波羅蜜多亦不可得
善現
諸菩薩摩訶薩修行般若波羅蜜多時
應如是學
復次善現
所言菩薩摩訶薩者於意云何
卽色眞如是菩薩摩訶薩不 不也世尊
卽受想行識眞如是菩薩摩訶薩不 不也世尊
離色眞如有菩薩摩訶薩不 不也世尊
離受想行識眞如有菩薩摩訶薩不 不也世尊
...
(이하 생략)
K0001V03P0890b04L;
● [pt op tr] fr
현실에서 눈을 떠서 감각현실을 마음으로 얻는다.
그리고 무언가를 문제삼을 때는
여하튼 그것을 분별하고 언어표현을 붙여서
이것을 문제삼게 된다.
그것은 본래 분별을 떠나고
언어 표현을 떠난다고 보는
감각현실이나 실재에 대한 논의과정에서도 마찬가지다.
커피맛을 맛본다고 할 때
이 맛을 언어로 그대로 표현할 수 있는가.
또는 커피맛을 보고 생각한 분별내용이 곧
그 커피맛이라고 할 수 있는가.
그렇지 못한 것이다.
더욱이 그런 커피맛을 얻게 한 바탕이 된다고 할
실재 내용도 사정이 같다.
눈을 떠서 무언가 모습을 본다고 할 때
눈을 감으면 그 모습을 보지 못한다.
그렇다고 눈을 감으면 방금 전에 본 모습에 해당한 것이
완전히 사라지고 전혀 없는 것이라고 할 것인가.
그러나 그렇지 않고 무언가가 실재한다고 할 것인가.
그렇다면 그 실재는 무엇인가.
이런 의문을 가질 때
무엇의 실재나 진여를 문제삼게 된다.
그런데 여하튼 그 실재를 직접 얻지 못하는 가운데
이 논의를 할 때는
실재는 분별을 직접하지못하고
언어를 떠난 것인데
일단 언어로 표현을 해야 논의를 할 것이 아닌가.
그래서 감각현실이나 실재를 가리킬 때도
역시 언어로 표현하게 되는 것이다.
이런 경우 그 언어표현은
감각현실이나 실재가
그런 언어표현 그 자체라고 보기에 그렇게 표현하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일단 그렇게 임시로 시설을 하고
그렇게 칭하는 가운데
논의를 하게 되는 사정이 있다.
이런 사정으로 경전에서
무언가를 일정한 언어로 표현하는 경우를
시설(施設)이나 안립(安立) 발기(發起) 또는 가명(假名).이라고
표현하게 된다.
쉽게 말하면
방금 맛본 커피 맛을 그대로 언어로나 분별로 제시할 수 없는데
일단 논의하기 위해 그것을
'커피맛'이라고 표현하는 가운데
논의해보겠다는 그런 내용이다.
인용한 경전부분에서 첫 부분에서
마땅히 이름은 거짓으로 시설된 것이요
법도 거짓으로 시설된 것임을
사실대로 깨달아야 하느니라.
應如實覺名假法假
..
라는 내용은 이런 사정을 먼저 제시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제
지금 손을 마주치면 소리가 난다.
이런 분별을 행한다고 하자.
이런 경우도 마찬가지다.
여기서 일단 '손'이나 '소리'는 한글글자다.
그런데 한글 글자를 지금 논의하기 위해서
논의하는 것인가.
그렇지 않은 것이다.
다시 '손'이나 '소리'의 글자는
눈을 감고도 떠올리게 되는 어떤 생각내용으로서
손이나 소리일 수도 있다.
즉 눈을 감고 손의 내용을 생각한다거나
소리를 생각한다거나 하는 경우도
이 글자가 가리킬 수 있다.
그렇다고 지금
'손'이나 '소리'의 글자로
그런 내용을 논의하기 위해 논의하는가.
물론 관계는 되지만,
일단 논의하고자 하는 주된 대상은
그것이 아닌 것이다.
그러면 무엇인가.
눈을 떴을 때 손이라고 보는 그 부분과
귀로 듣게 되는 감각내용으로서 소리를
지금 '손'과 '소리'라는 글자로 표현하고
이를 논의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당연히 혼동이 일어날 수 있다.
그런데
눈으로 본 그런 모습이나
귀로 들은 소리와 같은 감각현실을
논의할 때
그 감각현실을 떼내 붙여서
논의할 수 있는가.
그렇지는 않은 것이다.
그렇기에 일단 그런 부분을
언어를 통해서
그런 부분은 '손'이고
또 그런 감각현실은 '소리'라고 일단
시설하고 난 다음
논의를 시작한다는 의미다.
그런데 이제 그런 상태에서
무엇이 문제되는 것인가.
그런 감각현실을 놓고서
자신이 일정한 관념분별을 행한 것이다.
눈을 떠서 일정한 모습을 보고
그것을 손이라고 관념분별을 한 것이고
귀로 감각내용에 해당하는 소리를 듣고
그것은 소리라고 관념분별을 행한 것이다.
이 때 그런 감각현실과
그에 대해 행한 관념분별을
구분하고
이 논의에 참여해야 한다.
더 나아가 어떤 것의 정체가 문제될 때는
앞에서 살핀 것처럼
그 실재(진여)는 무엇인가도 또 살펴야 한다.
그런데 이것도 마찬가지다.
이것도 언어나 관념분별을 떠난 것이지만,
일단 논의를 하려면
명칭을 부여해서 논의를 진행해야 하는 것이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논의하거나 무엇에 대해
그 정체를 설명할 도리 자체가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런 사정을 먼저 이해하고
일단 언어로 인한 혼동을
잘 정리할 필요가 기본적으로 있는 것이다.
>>>
이제 눈을 떠서 무언가를 보고
무언가 귀로 소리를 듣는 가운데
이에 대해 일단 손이나 소리 이런 언어표현으로
가리키고 분별을 행한 것이다.
그러니 자신이 그렇게 생각하고
또 그렇게 감각한 내용에 해당하는
손이나 소리의 정체를
살펴야 하지 않는가.
그런데 우선 이렇게 문제삼을 때
이런 문제를 제기하는 내용은
일단 관념분별의 내용이고 명칭인 것이다.
그러므로 이제 이 관념분별의 내용을 놓고
이것을 앞과 같은 형식으로
다시 그것을 얻게 한 '감각현실'과
또 그것의 본 바탕이 된다고 할
'실재'와의 관계를 살펴야 하는 것이다.
그래서 일단 위 형식으로
질문을 제기하고 검토를 해야 하는 것이다.
선현 수보리 존자는
위 각 질문에
그렇지 않다라고 명료하게 대답하고 있다.
그래서 이 논의가 마쳐지면
손뼉을 치면 소리가 나는가 아닌가에 관련되어서
사실 더 살필 근거도 별로 없다고
보게 되는 것이다.
이미 앞 조각글에서 그 사정을
그렇게 제시한 것이다.
그러나 여기에 만족하지 않는다고 하므로
조금 더 이어서 살피기로 한다.
사정이 그런데도
왜 현실에서는
손을 마주치면 소리가 난다고
망상을 일으키게 되었는가.
이것을 살펴보아야 하는 것이다.
>>>
여하튼 본 논의를 진행하려면
현실에서 생각하는 내용이
일체가 망상분별인 사정을
꿈이나 최면의 상황에 비유해서
설명한 앞 조각글의 내용에 이어서 논의하는 것이 편하므로
앞 조각글 내용을
먼저 살피는 것이 필요하다고 본다.
http://buddhism007.tistory.com/3113#2153 ○ [pt op tr] 복을 얻는 원리
현실에서 손을 마주치니 소리가 난다.
이렇게 이해하는 것을 망상분별이라고 하는 것은
그 사정이
꿈 내용이나
최면 상태에서 생각한 내용을
곧 현실의 내용이나
그 본바탕인 실재의 상황이라고
이해하고 대하는 것과 사정이 같은 것이다.
그래서 이것을 꿈과 최면의 상황을 제시하면서
설명을 한 것이다.
꿈에서 어떤 내용을 얻었다고 할 때
꿈에서 그런 꿈을 꾸지 않았다고 제시하는 것이 아니다.
여기서 무엇을 제시하고자 하는가하면
꿈에서 꾼 내용을
그것이 현실의 내용이라고 이해하면
곤란하다고 제시한 것이다.
최면도 마찬가지다.
양파를 붙잡고 먹으면서
최면에 걸려
그것을 딸기라고 생각한다고 할 때
여기서 최면 걸린이가
무언가를 감각도 하고
그런 생각을 한다는 것을 부정하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그가 그런 감각현실에 대해
그렇게 생각한 내용이 그처럼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
잘못이라고 지적하는 것이다.
이제 현실에서
손을 마주치면 소리가 난다.
그래서 손을 마주치는 것이 원인이고
그로 인해 소리를 결과로 얻는다
이렇게 일반적으로 생각하고
더 나아가 정도가 심한 경우는
그렇게 소리를 손으로부터 얻기에
그 손뼉소리는 알고보면
손에 들어 있었던 것이다.
더 나아가 그 손을 부딪힌 소리의 본 정체는
손이라고 해야 한다.
이런 식으로 주장하는 경우도 있는 것이다.
그런데 여하튼 이런 주장들은
하나같이 망상분별이라고 제시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 사정을 꿈이나 최면의 상황을
비유로 설명한 것이다.
왜 그러한가.
위와 같은 생각을 할 때
그런 생각을 관념분별 영역에서 그처럼 하고 있다거나
또 그런 생각을 하게끔 하는 무언가 감각현실을
그 주체가 얻고 있다는 것을 여기서 부정하는 것이 아니다.
그런데 무엇이 문제라고 지적하는 것인가 하면
그런 생각 내용은
분별 영역에서 행하는 내용인 것이고
감각현실이나
실재 영역에서는 그런 내용을 얻을 수 없는 내용이라는
것을 제시하는 것이다.
사정이 그런데 그렇지 않다고 여기면서
자꾸 자신이 생각한 그런 손이나 소리나
그 생멸이나 그런 인과가
거기에 들어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
문제인 것이다.
그래서 앞의 형식으로 자신이
문제삼는 가장 기본적인 내용부터
정체를 하나하나 확인해 보는 노력이 필요한 것이다.
경전에서는
자신이 문제삼는 어떤 a 는
결국 감각현실이나 실재의 영역과 관련시켜 살필 때
a 이다.
a 아니다.
a 가 있다
a 가 없다.
더 나아가
~ 와 같다.
~ 와 다르다.
등등으로 일체 분별할 수 없는 사정을
제시하고 있는 것이다.
일반적으로
a '이다' 라고 하면 곤란하다고 제시하면
곧바로 그러면
a '아니다'로 가버리게 된다.
그래서
a '아니다'라고 하는 것도 곤란하다고 제시하면
또 곧바로
a '이다'로 가버리게 된다.
있다 없다의 문제도 마찬가지다.
있다를 부정하면 없다를 주장한 것으로 오해하고
없다를 부정하면 있다를 주장한 것으로 오해하는 것이다.
지금 문제는 그 자체가 망상분별이라고 제시하는 것이다.
왜 그러한가하면
이다 아니다 있다 없다. 같다 다르다.
생한다 멸한다. 온다 간다.
이런 것들이 모두 그 자체가 관념분별인 것이다.
지금 그 정체를 파악하고자 하는 내용으로서
감각현실이나 실재는
그런 내용이 해당이 되지 않는 것이다.
그래서 그런 사정을 잘 헤아려야 하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이제 왜
손을 마주치면 소리가 생겨난다.
이렇게 이해하는 것이 엉터리인가도
쉽게 이해할 수가 있다고 본다.
지금 일단 그런 생각을
자신의 관념분별 영역에서는 열심히 한 것은
이해할 수 있다.
그런데 정작 그런 분별로 문제삼는
감각현실이나 실재 영역에서는
그런 내용을 논의할
그 내용 자체를 얻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감각현실을 얻고
일정한 부분을 놓고 자신이 '손'이라고 생각한 것이다.
그리고 그 감각현실 부분을 '손'이라고
표현을 할 수는 있다고 할 것이지만,
문제는 그 감각현실에 그런 내용을 얻을 수 없는 것이다.
이렇게 그 내용을 얻을 수 없는데
무엇의 생겨나고 멸함을 다시 말할 것인가.
더 나아고 있고 없음
없다가 있음 [생겨남]
있다가 없음 [멸함]
등도 역시 관념분별인 것이다.
어떤 감각현실을 얻었다거나 얻지 못한 것은
이해하지만,
정작 그에 대해 생각하는 그런 무언가로서의 a 나
그것이 있고 없음 생하고 멸함 등은
여기에서 얻을 수 없는 것이다.
감각현실에서도 그러하고
그런 존재의 본 바탕이라고 할 실재도
마찬가지인 것이다.
그래서 경전에서
예를 들어 어떤 수행자를 보살이라고 보는 것은
이해하는데
그것은 명칭일 뿐이라고 제시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 명칭으로 가리킨
감각현실이나
실재를 놓고
그런 내용이 있는가 없는가.
이런 것을 살펴보라고 제시한 것이다.
그 영역에서는 ~이다 ~ 아니다.
~와 같다 ~와 다르다 .
~ 이 있다 ~이 없다.
그런 분별을 행할 수 없는 것이다.
그래서 더 논의할 필요가 없다고 보는 것이다.
불교계에서 널리 읽히는 반야심경에서는
이렇게 제시하고 있다.
시제법공상 '불생불멸' 불구부정 부증불감
이렇게 제시되고 있다.
반복해 인용할 내용은 평소에
외어둬야 하는데 아직까지
구절을 외우지 못해서
늘 적고 나면 원문과 다른 내용을 적었는지
확인을 하게 되는데
이런 것은 문제라고 보게 된다.
그래서 경전의 중요부분을 압축한
게송부분은 수행자가 늘 외어야 한다고 하는 것이기도 한데
아직 잘 못 외우고 있다.
복사를 통해 인용을 하기로 한다.
觀自在菩薩 行深般若波羅蜜多時 照見 五蘊皆空 度一切苦厄
관자재보살 행심반야바라밀다시 조견 오온개공 도일체고액
舍利子 色不異空 空不異色 色卽是空 空卽是色 受想行識 亦復如是
사리자 색불이공 공불이색 색즉시공 공즉시색 수상행식 역부여시
舍利子 是諸法空相 不生不滅 不垢不淨 不增不減
사리자 시제법공상 불생불멸 불구부정 부증불감
是故 空中無色 無受想行識 無眼耳鼻舌身意 無色聲香味觸法
시고 공중무색 무수상행식 무안이비설신의 무색성향미촉법
...
여기서 제시하고자 하는 것은
생멸을 부정하고 있는 부분이다.
무엇을 a라고 하고 그것이 중요하다고 문제삼을 때
정작 그 a 는 생멸을 얻을 수 없다고
제시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그것이 어떻게 생겨났는가를
문제삼으면 어떻게 되는가.
이제 처음 소리가 손을 마주쳐서 생겨난 것인가를
다시 살펴보자.
경전에서 생멸을 얻을 수 없다고 불생불멸이라고
제시하고 있는데
소리가 생겨났다고 하고
그것이 어떻게 생겨났는가를
살펴야 할 것인가.
그렇지 않은 것이다.
그런데 현실에서 손을 마주치면
소리가 난다고 여기는 현상은 무엇인가.
그것이 바로 전도몽상 증상인 것이다.
조금 쉬고
그 실재도 그렇지 않고
감각현실에서도 문제삼는 그런 내용을 얻을 수 없는데
왜 자꾸 현실에서는
손을 마주치면 소리를 듣게 된다고
망상을 일으키게 되는가. .
이것을 이해해보기로 한다.
사실 앞에서 그 사정을 설명을 충분히 하기도 한 것이다.
꿈에서 꿈을 꾸는 침대나 베개에는 없는 그런 내용을 꿈을 꾸게 되고
최면이 걸리면 없는 것도 있다고 생각하면서
그렇게 자신이 눈을 뜨고 얻는 감각현실을 대하는 것이다.
이 각 경우가 사정이 그런 것이어서 그런 것이지
이상한 것은 아니다.
현실에서 실재나 감각현실에서 그런 내용을
얻을 수 없는데도
반복해서 자신이나 자신의 것 a 등이 있다고 여기고
그것이 이것 때문에 생겨났다 사라졌다
이런 생각을 하는 것은
전도망상 상태에서 분별을 행하기에 그런 것일 뿐이다.
그 망상상태에서
그런 언어 분별을 통해
본 사정이 그렇지 않음을
제시하고 있는 것이다.
다시 앞에 제시한 경전 구절을 놓고
자신이 문제삼는 것들을 하나하나 대입시켜서
그 관계를 그렇게 살펴볼 필요가 있는 것이다.
그런데 그렇게 그치면
조금 부족하고 서운하다고 여길 수 있는 것이
사실아닌가.
왜 사정이 그런데
자신이나 일반 사람들이 다 같이
손을 마주치면 소리가 난다고 여기게 되고
이것이 오히려 옳은 판단이고
정상이라고 여기면서 살아가는가.
심지어 손으로 손뼉 소리를 들으려면
손을 마추지게 되는가.
이 문제를 또 설명할 필요가 있지 않은가.
그래서 왜 이런 망상증상이
반복해서 발생하는가하는 그 사정
즉 전도망상 분별이 발생하는 그 사정을
조금 쉬었다가 살피기로 한다.
그런데 아직도
자신이 눈으로 무언가를 보면 눈으로 본 그 모습이
귀에서 그로 인해 소리를 낳게 하는가를 놓고
잠깐 prince 님은 반성을 할 필요는 있다고 본다.
그렇지 않은 것이다.
다만 그런 것처럼 자꾸 생각하고
대하는 것 뿐이다.
꿈에서 날개가 꼭 있어야 하늘을 나는 것은 아닌데
그러나 꿈에서도 날개가 생기니까
하늘을 날았다고 할 때
그 날개 때문에 하늘을 날았다고 생각하는 것과
사실은 사정이 비슷한 것이다.
[...]
현실에서 왜
손뼉을 치면 소리가 난다고 생각하게 되는가를
살펴나가기로 한다.
>>>
역시 꿈이나 최면의 비유를 들어서
이 상황의 문제를 이해하는 것이 쉽다고 본다.
꿈에서 황금을 얻거나 잃어벼렸다고 해보자.
꿈이란 사실은 분별 영역(의식)에서 얻는 내용이다.
이를 몽중의식이라고도 표현한다.
이는 꿈이 아무리 생생해서
감각현실을 얻는 것처럼 여길지는 모르지만,
감각현실을 얻는 것이 아니라는 의미다.
이는 최면과 사정이 같은 것을 의미하는 것이기도 하다.
즉 감각현실에서는 없다고 할 내용을
꿈이나 최면에서는 있다라고 생각을 하면서 대하는
상황인 것이다.
그런데 이 상황에서
꿈내용을 얻고 있다거나
최면에 걸려 무엇이 있다고 생각하고 있는 것이다.
이 때 그 꿈과 최면을 기준으로 한다면
그 내용은 그렇게 있는 것이라고 해야 한다.
그리고 최면과 같은 경우
감각현실도 그렇게 얻고 있는 것이다.
이 상황에서 자신이 그런 꿈을 꾸고
최면 상태에서 그런 생각을 했다고 해서
그 내용이 그처럼 감각현실에도 있는
실다운 내용이라고 여기면
어떻게 되는가가 그 다음 문제다.
지금 살피는 문제는
바로 이 부분이다.
자신이 어떤 내용을 생각하는데
그 내용이 다른 영역에서도
그처럼 얻을 수 있는 실다운 내용인가를
문제삼는 것이다.
꿈을 꿀 때 얻는 꿈 내용에서
황금을 보았다고 한다면
이 황금은 꿈 속에서
꿈을 기준으로 하면
그 황금은 그렇게 있다고 할 내용인 것이다.
그런데 그 내용이 실답지 않다고
지적하는 것은
그런 조건을 떠나서는
그런 내용을 다른 영역에서는 얻을 수 없다고
지적하는 것이다.
현실에서 손을 마주치면 소리가 난다라는
내용을 포함해서
현실에서 자신이나 자신의 것과 관련해 행하는 분별을 놓고
그것이 모두 실답지 않은 망상분별이라고
제시하는 것은
바로 이런 의미다.
>>>
그런데 현실에서 어떤 감각현실을 얻고
이렇다 저렇다 생각을 하고
분별을 행할 때
그런 내용이 실다우면 어떻고
실답지 않으면 어떻기에
그것을 문제삼는가.
현실에서 영화나 만화 소설 등을 볼 때
그것이 실답지 않다고 해서
그것을 크게 문제로 삼는가.
그런데 왜 현실에서 어떤 주체가
생각하는 내용이 실다운가 아닌가를 문제삼는가.
그래서 이 문제를 극단적으로 나아가보자.
어떤 이가 포로 수용소에 갇혀서
하루 종일 고문을 당하고 있다고 하자.
단순한 고문이 아니고
손톱도 뽑고 발가락도 자르고
전기충격도 가하고 그러는 극단적인
상황을 가정해보자.
삶에서 이런 현장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다.
앞의 내용은 조금 극단적인 내용이라고 본다면
살면서 태어나고 늙고 병들고 죽는 상황이
다 그런 문제와 관련된다.
그리고 무언가를 간절히 원하는데
그것을 뜻대로 성취하지 못하고
굉장히 싫어하고 원하지 않는 상황을
만나는 것이다.
보통 애별리고 원증회고 구부득고 이런 식으로
제시하는데
자신을 해치려는 원수는 만나기 싫은데
만나서 고통을 당하고
사랑하는 이는 떨어지기 싫은데
어느 순간 헤여져야 하는 상황이 나타나는 것이다.
이미 여러 번 제시한 바 있지만,
본 연구소에서 지내던 인턴연구원이
몇년전 어느 순간 행방불명되어서
다시는 볼 수 없게 되었다는 사실을
조각글에 올린 적이 있는데
아무리 그 인턴연구원을 다시 지금 이 순간
보고 싶다고 해도 볼 수가 없는 것이다.
그래서 이런 가지가지 고통의 상황이
삶의 문제인 것이다.
그것이 실답다고 하던
실답지 않다고 하던
삶에서 일체 이런 고통의 내용이 없다면
그것을 문제삼을 이유도 없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앞에서 극단적으로 예를 든 내용으로서
자신이 묶여서 손가락과 발가락을 톱으로
잘리우는 상황인데
그것이 대단히 생생하고
그 고통도 대단히 심하고
그로 인해 느끼는 불쾌나 억울함 공포 불안
이런 것들도 대단히 심한 것이다.
그래서 이것을 해결하기 위해서
이 논의가 행해지고 있는 것이다.
처음 이런 고통의 문제를 해결하고자 할 때
문제되는 것의 정체를 찾아 나서게 되는 것이다.
지금 손이 잘리고 있다.
그러니 손이 무엇인가를 정확히 파악해보자는
의미다.
그런 현실에선
손이 잘린다는 내용이
실다운가
실답지 않은가와 관계없이
그로 인해 당장 생생하게
고통을 느끼고 있어서 문제인데
역설적으로 현재
그런 내용이 실다운가 실답지 않은가를
살피는 것은
바로 그 고통을 해결하기 위해서
기초적으로 이 논의를 전개하고 있다는 사실을
주의해야 한다.
심심해서 그저 호기심에서
자신이 손이라고 보고
자신이 자신이라고 보는 내용을 놓고
그것이 다른 영역에서도 그처럼 얻어지는
실다운 내용인가를 문제삼고 있는 것이 아닌 것이다.
바로 앞 문제때문에
이것을 살피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이 논의의 결론은 무엇인가.
현실에서 그렇게 생생하게
그런 고통스런 내용을 대하는 것인데
정작, 그 현장에
그런 내용을 얻을 수 없다는 점이다.
그런 내용을 놓고 문제삼는데
그것은 하나같이 실답지 않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이상한가?
생사고통을 놓고
그것이 실답지 않고
그런 것을 얻을 수 없다고 제시하면
대단히 이상할 수도 있지만,
일단 가장 기본적으로 여기서 제시하는 것은
바로 그 내용이다.
본래 그런 생사고통을 얻고
그런 생사고통을 겪는 자신도 실답게 얻을 수 없는데
그러나 망상 상태로 인해
그런 생사가 그렇게 있다고 보면서
현실에 임한다고 지금 지적하는 것이다.
그런데 위 처방이 현실에서 유효하다고
보는가?
아무리 실답지 않고
본래 생사 고통을 얻을 수 없다고 제시해도
현실에서 어딘가에 묶여서
손과 발을 톱으로 잘리우거나
곧 장례식을 치루고 관 속에 들어가야 할 상황이 되면
그 하나하나 생생하게 감각되고 생각되는
내용들을 놓고
그렇게 평안하게 임할 도리가 없는 것이다.
지금 제시하는 것은
아무리 그것이 생생하게 감각되고
그런 내용으로 생각이 된다해도
그것은 하나같이 꿈처럼 실답지 않기에
적어도 원칙적으로는 문제되지 않는다.
이런 것을 기본적으로 제시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아무리 그것이 실답지 않고
본래 얻을 수 없다고 해도
그 감각현실이 생생하고
그에 대해 행하는 분별이 그렇게 얻어지기에
그런 상황에서 도무지 평안하게 임할 도리가
없는 것이다.
더욱이 당사자는 그것으로 끝이고
죽으면 아무 것도 없다고
간단하게 문제를 볼 수도 있지만,
사정을 알고보면 사정이 그럴 도리가 없어서
무한하게 그런 상태가 전개된다고
여기에서 제시하는 것이다.
다만 당사자는 그 사정을 그렇게 파악하지
못하고 있는 것 뿐이다.
비유하면 송아지가 태어나서
어떻게 앞으로 살아갈지를 송아지는 모른다고 해도
매순간 그렇게 소의 형태로 살아가는 동안
그런 형태로 고통을 받고
또 이후에도
그런 식으로 살아가야 하는 상태에
놓여 있는 것이다.
송아지 입장에서 그것을 이해하지 못한다고 해서
매 순간 송아지가 생생하게 감각하고
어떤 분별을 행하면서
지내는 것이 중단되는 것이 아닌 것이다.
그러니 어느 상황에서 고통이 문제될 때
그것을 해결하려면
원칙적으로
그 상황 자체에서는
앞의 내용을 통해
고통에서 벗어나와야 할 필요성이 있는 것이고
더 극단적으로 본다면
그런 상태가 무한히 계속되어도
역시 똑같이 그런 원칙을 통해서
벗어나와야 한다고 보는 것이지만, ,
또 한편으로는 그런 형태로
그런 고통을 받는 관계 자체를
미리 처음부터
벗어나올 필요도 있는 것이다.
그래서 다시 앞의 고문 상황으로
넘어가보자.
우선 원칙적으론 그렇게 해서
벗어나와야 한다고 보지만,
그러나 일단 그것 자체가
대단히 어려운 것이다.
그런 가운데
하필이면
왜 그가 그런 고문을 받고 있게 되어 있는가를
살펴보니 그에 상응한 내용이
있었다는 것을 보게 되는 것이다.
예를 들어 그것만 따로 떼어 보면
그 고통이 갑자기 홀연히
그에게 나타난 것처럼 생각되지만,
사실은 그 앞 상황에서 그가
다른 이를 또 그처럼 고문을 했기에
그렇다고 가정해보자.
그러면 조금 상황이 쉽게 이해가 되지 않는가.
사정이 이렇다면,
이런 경우 그가 먼저 그 상대를 그렇게 고문하지 않았으면
그도 그런 고문대에서
그런 고문을 받지 않았을 것이다.
이렇게 볼 수가 있는 것이다.
그래서 두번째 방안은
그런 상황에 자신이 그런 고통을
받는 상태로 끌려가고 묶이지 않도록
미리부터 노력을 할 필요도 있다고
보는 것이다.
그리고 그 방안은 결국
수행방안인 것이다.
그런데 이 수행방안을 하나하나 살펴보면
역시 그런 수행방안은
당장 현실에서 행하기가 쉽지 않고
곤란하다고 보는 것들이다.
여기에는 두 가지 문제가 있다.
우선 그런 씨를 뿌리면
그런 열매를 맺는 관계를
잘 파악하지 못하기에
그런 업을 쌓은 경우가 하나 있다.
그러니 그 관계를 이해하는 것이
한편으로 필요한 것이다.
또 하나는 씨를 뿌리는 과정을 놓고
앞에서 고문을 당하는 상황에서
그것이 실답지 않다고 해도
그것이 너무 생생하게 얻어져서
그로부터 고통을 받지 않을 수 없다고 하듯,
처음 그런 수행을 하는 과정을 놓고도
이와 마찬가지로 생각하며
그것을 행하지 못하게 된다는 사정이 있다.
예를 들어 보시- 정계-안인이란 기본 수행내용은
좋은 것을 다른 생명에게 베풀고
다른 생명이 집착하는 것을 함부로 침해하지 않고
자신의 좋음을 다른 생명이 침해할 때는
평안히 참는 등의 수행을 의미하는데
이런 수행은
현실에서 당장 행하기 불쾌하고
손해를 받게 되고
고통을 받는다고 여기면서
좀처럼 행하지 않으려고 하는 것이다.
그래서 이 두 부분의 내용이
다 문제인 것이다.
처음 그런 수행을 행하는 것을 고통스럽게 여겨서 행하지 않고
그래서 고통스런 결과를 받게 되는 상황이 되는데
그러나 그 관계를 반복하는 가운데
그 관계를 그렇게 이해하지 못하고
그런 고통을 받는 현장에서는
또 그 상황에서
그것이 실답지 않은 것임을 이해하지 못하고
생생하게 그대로 그 고통을 다 받는 것이
문제인 것이다.
삶에서 대하는 내용이 실답다고 하던
실답지 않다고 하던
이런 내용을 포함해
전혀 고통을 받지 않는다면
그것을 문제삼을 이유가
원칙적으로 없다고 할 수 있는데
그 각 부분에서 모두 다 그렇지 못한 것이다.
그런데 이 각 부분에서
그것이 실답지 않다는 것을 강조하는 것은
바로 이런 고통을
미리 제거하는 수행을 행하게 되는 방안이기도 하고
그리고 그런 고통을 당장 받는 그 현장에서
고통을 제거하는 방안이기도 한 것이고
또 그런 가운데
무한한 시간에 걸쳐서
그렇게 고통을 제거하고
반대로 무한한 기간에 걸쳐
복덕과 지혜를 대신 채워 넣는 기본 바탕이 되기에
이 논의가 대단히 중요한 것이다.
현실에 대하는
자신이나 자신의 것이라고 보는 것들의 본 정체가 무언가에 대해
논의를 하다보면
이 논의를 도대체 처음에 무엇때문에
시작한 것인가를 파악하지 못하고
그저 그 본 정체가 무엇인가가 궁금해서
그것을 알아내고
그래서 그저 지적 호기심을 충족하기 위해서
이 논의를 하는 것으로 오해하는 경우가 있다.
그러나 사정이 그렇지 않은 것이다.
현실에서 사람들이 다 생사고통을 겪는다고 여기는데
그렇게 대부분 보는 이 현실을 놓고
왜 여기에서 그런 내용을 얻을 수 없고
그런 생각을 하는 것은 망상분별이라고 제시하는가는
바로 그런 사정을 올바로 깨달을 때
1차적으로 고통을 당하는 현장에서 직접 고통을 벗어날 수도 있고
또 그런 사정을 잘 관하고 이해하면
수행을 쉽게 원만히 성취하여
현실에서 그런 고통을 받는 업의 장애를 해소하고
그런 고통으로부터 풀려나게 하게 되기에
그런 것이다.
더 나아가 그런 깨달음을 통해서
다른 중생의 생사 고통도 함께 해결해주고
현실에서 불국토도 장엄하고
온갖 복덕과 지헤를 구족하여
성불할 수도 있기에
그런 내용을 제시하는 것이다.
>>>
여하튼 여기까지
어떤 것의 본 정체가 무엇인가를 논의하는 취지를
살폈다.
이런 논의의 취지를 정확히 파악하고
다음 논의를 살펴야 한다고 본다.
처음 손뼉을 치면 소리가 난다는
관계를 놓고 이것이 하나같이
망상분별이라고 제시했다.
그 상황에서
손이나 소리도 얻을 수 없고
그런 것의 생멸도 얻을 수 없다고 제시한 것이다.
그러니 그 소리가 생겨난 원인을
찾는 것 역시
논의할 근거가 없음을 이미 함께 제시한 것이다.
그것이 바로 앞에서 제시한 내용들이다.
현실에서는 그저 그런 감각현실을 얻고
그에 대해 그런 내용이 있다고 여기고 대하는 것인데
여기서 그런 내용은 실답지 않고
그런 내용도 그 영역에서
모두 얻을 수 없는 것임을 제시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니 그에 대한 망상분별과 그에 바탕한
집착을 제거하라고 하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큰 일이 나는 것이 아니고
원칙적으로 그런 생사고통은 얻을 수 없는 것이어서
원칙적으로는 별 문제가 없다.
이것을 여기에서 제시하는 것이다.
다만 수행을 처음 하는 입장에서는
원칙에 입각해
손과 발을 톱으로 잘리우는 그런 상황에서
그렇게 평안하게 임한다는 것은
대단히 힘든 것도 사실이다.
그리고 설령 그렇게 할 수 있다해도
왜 이렇거나 저렇거나 차별이 없이
실답지 않다고 하는 가운데
굳이 그렇게
고통을 생생하게 받는 현장에만
마냥 머물러 임해야 할 이유가 무엇이겠는가.
또 하나 그것으로 끝이라거나
죽으면 끝이라고 쉽게 여기고
아무렇게 행하기 쉬운데
사정이 그렇지 않은 것이다.
실답지는 않고
진짜의 나 자신이라고 할 것은 아니지만,
사정이 또 그렇지 않고
그렇게 실답지 않으면서
무한히 계속되어
수행을 해나가야 할 자신이 또
그렇게 있다는 내용도
함께 제시하는 것이다.
이 내용은 앞에서 본 내용과 사정이 같은 것이다.
꿈이 실답지 않다고 한 것이지만,
꿈은 있다고 하듯,
진짜라고 할 내용이 없고
실답다고 할 내용을 얻을 수 없지만,
그러나 그런 가운데 무한히 수행을 해야 하는
자신은 그렇게 또 있다고 여기서 제시하는 것이다.
꿈이 실답지 않지만,
꿈을 꾸지 않는가.
그것과 사정이 같은 것이다.
그것이 실답고 진짜의 내용이 아니라고 제시하고
집착을 제거할 것을 강조하지만,
그러나 그렇게 진짜의 내용도 없고
실답지 않지만,
그러한 실답지 않다고 하는 현실이 생생하게 얻어지듯
그런 내용은 수행자의 앞에
무한하게 이어진다고
여기서 제시하는 것이다.
그런 가운데 처음
원칙적으로 극복해야 한다고 제시한
그런 고문대의 고통은
무한한 기간에 걸쳐 생사를 반복하며
받아 나가는 것도 가능하지만,
그러나 그 반대의 내용도 또 역시
가능한 것이다.
그러니 왜 하필이면
앞에서 왜 굳이 그런 고통을
스스로 받을 업을 행하고
그런 고통을 받는가의 문제는
무한한 기간을 놓고도 같은 형태로
문제된다.
즉,
왜 하필이면 무한히
무량한 복덕과 지혜를 구족해 얻지 않고
반대로 무한히 생사의 고통을
그렇게 받아나가는 형태로
임해야 할 것인가 하는 것이
또 문제되는 것이다.
그리고 그런 바탕에서
무한한 기간
무량한 복덕과 지혜를 성취하기 위해서는
일단 현실에서 망상에 바탕할 때는
대단히 어렵다고 보는 수행의 정체를 올바로 관해서
수행이 그렇지 않다는 것도 함께 깨닫는 가운데
그 수행을 원만히 성취하는 것이
필요함을 제시하는 것이기도 하다.
그런데
이렇게 제시하면
무언가 이들 내용애
자체적으로는 모순이 있지 않은가.
생각히기 쉽다고 본다.
즉,
앞에서는 자신이나
자신의 손이나 현실에서 생각하는 그 내용들이 하나같이
실답지 않다고 하고
또 손을 마주치면 소리가 나는 관계도
이와 마찬가지라고 제시했는데
여기서는 또 이상하게
수행을 하면
=> 그런 생사고통을 벗어나고 무량한 복덕과 지혜를 성취한다.
이런 관계를 제시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오랫동안 prince 님이
이 문제에 대해
반복해 문제를 제기한 것이기도 하다.
그러므로
앞에서 제시한 내용을 잘 살펴야 한다고
제시하는 것이다.
내용을 대충 살피면 그런 오해를 하기 쉽기 때문이다.
>>>
일단 여기까지 제시하고
왜 현실에서 손을 마주치면 소리가 난다고
망상분별을 행하게 되는가
그 사정을 살펴나가기로 한다.
이전 조각글에서
현실에서 눈을 떠서 자신이라고 보는 내용은
실다운 자신이 아니다.
그런데 그것을 자신이라고 망상분별을 일으키게 되는
사정이 있다고 하여
그 사정을 상-락-아-정에 배당해 제시한 적이 있다.
그래서
현실에서 자신이라고 보는 그 내용을
자신이라고 망상분별하게 되는 그 사정을 자세히 살피면
그로 인해
평소 자신이라고 보는 내용이
실다운 자신이 아니라는 것도 잘 파악할 수 있다고
그 내용을 제시한 것이다.
그런데 반대로 그 사정을 그렇게 잘 파악하지 못하면
바로 그러그러한 사정으로
그런 망상분별을 일으켜서
현실에서 대하는 것처럼
엉뚱한 것을 자신이라고 보고
그에 집착을 갖고 임하여
앞과 같은 고통을 받는 상태에 묶여
끌려 들어가게 되는 것이다.
여기서도 마찬가지다.
현실에서 무언가를 손이라고 보고
무언가를 소리라고 하는 가운데
손을 마주치면 소리가 난다고
망상분별을 일으키게 데에는
일정한 사정이 있다고 제시하는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는
그 사정을 그렇게 자세히 살펴서
본래 사정이 그렇지 않음을 이해하면
이제 그 묶임에서 풀려나게 된다고 제시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이상한 망상분별을 반복해서 행하게 되는
그 근본원인이 무엇인가. 하면
바로 근본 무명(어리석음)과
이에 바탕한 전도몽상분별 증상이 그 원인인 것이다.
그러니 그 사정을 잘 살펴서
그것을 벗어나와야
현실의 생사 고통의 묶임에서 함께 풀려나게 된다고
그 내용을 제시하는 것이다.
[...]
그 사정을 가장 간단하게 살피면,
처음 그런 것을 얻을 수 없는데
그런 것을 대하면서 a 라고 여기고 대하면
그 바탕에서 그런 망상이 줄지어
이어 나오게 된다.
이렇게 간략하게 제시할 수 있다고 본다.
[...]
>>>
아무리 생각해도
손뼉을 마주치면 소리가 난다.
이런 망상증상에 대해서
[...]
이 증상은
꽃을 보면 아무리 보아도 꽃이라고 생각이 되고
산을 보면 아무리 보아도 산이고
강을 보면 아무리 보아도 강이고
하드디스크를 보면 아무리 보아도 하드디스크로 생각된다는
증상과 사정이 같은 증상이다.
그런 증상 때문에 그렇게 관계를 지어
생각을 전개해가는 것이다.
그러나 부처님이 연기를 설하신 것인데
어떻게 그 연기가 실답지 않다고 할 수 있는가.
그것은 너무 지나치지 않는가.
이런 입장도 불교계에서 가질 수 있다고 본다.
그런데 부처님이 그것만 말씀하신 것은 아니다.
일체가 영원하지 않다.[제행무상]
일체가 고통이다. [일체개고]
일체가 무아, 무자성이다. [제법무아]
일체가 열반 적정이다. [열반적정]
일체가 공하다. [일체개공]
그리고 아라한, 연각, 보살, 부처님도 제시하고
그런 상태가 될 수 있는
다양한 수행방안도 역시 말씀을 하신 것이다.
그런데 이런 내용 역시도
또 사정이 그런 것이다.
그래서 단지 연기나 인과의 문제만
특별히 그런 것이 아니라는 사정도 함께
이해할 필요가 있다고 본다.
금강경에서 중생을 얻을 수 없다.
보시하는 이나 받는 이나 보시하는 물건이나
보시하는 행위도 그렇다.
그러나 상에 머물지 않고
무량한 중생을 제도하고
무량한 보시를 행하고
그로 인해 무량한 복덕을 성취한다.
부처님이 수기를 받을 때나
성불하실 때 무언가 얻은 것이
있다고 보는가.
그리고 부처님이 한 마디라도 했다고 보는가.
이런 말씀을 하시는 것이
바로 그런 취지로 말씀을 하시는 것이기도 하다.
그런데 이 내용들이 자체 모순이 되는 것
아닌가 하는 입장이 있는 것이다.
어느 부분에서인가 혼동을 일으키기에
그러한 사정이 있다고 보는데
prince 님이 그간 반복해서
일체 생사현실이 고통이라고 하면서
또 생사 현실이 본래 생멸을 얻을 수 없는 청정한 니르바나다.
이런 서로 모순되는 내용을 함께 제시하는 것도 그렇고
앞에서 제시한 여러 내용들이
그 안에서 앞 부분과 뒷 부분이
자체적으로 모순이 되고 말이 안 된다.
이런 비판을 많이 제기했던 것이다.
본인도 그 때 그 때 답변을 해왔다고 보는데
여하튼 그런 문제가 잘 해결이 되지 않기에
기껏 현실에서 생멸과 생사를 얻을 수 없다고 하는데도
무엇이 무엇을 원인으로 생겨나는가
이런 문제를 제기하기도 하고
오고 가는 이나
오고 감을 얻을 수 없다고 하는데도
언제 어떻게 여기로 왔는가.
나중에 죽으면 언제 어디로 어떻게 떠나는가.
이런 문제를 반복해 제기하는 것이기도 하다.
또 그래서 아무리 이론적으로 내용을 살핀다해도
결국 논의를 마치면
다시 현실에서 바삐 이것은 꽃이고
저것은 산이고 그런 가운데
자신은 바삐 여기서 저기로 오고 가야 하고
그러면서 정신없이 지내게 되기 마련이라고 본다.
그래서 아무리 색불이공 공불이색을
이론적으로 살핀다해도
그것을 통해 평소의 망상증상과 생사고통을
쉽게 벗어나지 못하는 것이 사실이다.
여기서 착각을 일으키는 것은
색불이공 공불이색 이런 내용이
현실에서 그런 오고가는 것을 못하게 하거나
일체개공을 인정하면
그처럼 오고 가는 등의 일체 현실 생활이
없어져버리게 된다고 생각하는 경우라고 할 것이다.
이에 대해 반복해서 제시하지만,
일체가 공하다는 등의 내용은
현실에서 감각현실을 얻거나
또 그에 대해 분별을 행하는 것이
없어진다거나,
그렇게 하면 안 된다거나,
그렇게 할 수 없다거나
그런 것 자체를 얻지 못한다는 등의
내용을 제시하는 것이 아니다.
이미 꿈의 비유를 들어 설명한 것처럼
꿈의 내용이 실답지 않다고 하고
그래서 꿈에 대해 집착을 제거하고 임한다고 해서
꿈을 꾸면 안 된다거나
꿈을 꿀 수 없다거나,
지금까지 꾼 꿈은 사실은 일체 아무 것도 없었던 것이라고
제시하는 것이 아닌 것과 같다.
그런데 꿈이 실답지 않다고 제시하는 것이다.
더 나아가 현실에서는
꿈에서 꾼 그런 내용을 얻을 수 없다고 제시하는 것이다.
그러니 그런 사정을 이해하고 꿈의 내용을
그렇게 대하고
또 그렇게 대하고 자세를 취할 때
그 이후 꿈을 비롯해 그 나머지 영역이 모두
좋고 좋게 변화가 된다.
이런 내용을 지금 제시하고 있는 것이다.
꿈을 놓고 이 내용이 이해가 되었다면
그 꿈을 이제 현실로 놓고
현실에서 생각하는 그런 내용들이
그와 같다고 이해하면 된다고 할 수 있는 것이다.
그래서 현실이 그렇다는 사정을 이해하고
집착을 제거한 가운데
수행에 정진하게 되면
그로 인해 현실에서도 실답지 않지만
그렇게 수행자가 무량한 기간 수행을 해나가는 가운데
무량한 복덕과 지혜도 구족하고
무량한 중생도 제도하고
불국토도 장엄하고 성불할 수 있다고 제시하는 것이다.
그러니 여기서 무엇이 이상한가.
그러나 여전히 이상하다고 하면
조금 더 자세하게 이 내용을 살펴야 한다고 본다.
왜 사정이 그렇고
현실에서 일정한 분별을 행하는데
그런데 왜 그런 망상을 자꾸 일으기게 되고
또 그 분별에서 무엇이 문제라고 하는 것인가 등을
자세히 살펴야 할 필요가 있다고 보는 것이다.
[...]
[...]
[...]
>>>
만화영화 등에서 같은 그림을 반복해 그려야 할 때
배경화면만 바꾸고자 할 때
여러 비닐에 각기 각 그림을 그려 놓고
이를 포개어 놓으면
하나의 그림이 나타나게 된다.
이것이 layer(층)의 개념인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지적하고자 하는 것은
각 비닐에서는 얻을 수 없고 없는 내용인데
각 비닐에 그려진 그림을 합쳐 놓고 보면
어떤 내용이 거기에 있는 것처럼
보인다는 현상을 제시하는 것이다.
실재에도 그런 내용이 없고 얻을 수 없고
감각현실에서도 그렇고
심지어 관념분별 영역에서도 사정이 그런데
이상하게 동시에 이것을 진행할 때는
자신이 생각하는 내용이
그 각각에 그렇게 있는 것처럼
여기게 된다는 것을
비유적으로 나타내기 위해
위 그림들을 제시하는 것이다.
그래서 눈으로 일정한 모습도 보고
동시에 귀로는 일정한 소리도 듣고
그리고 그에 대해
각 부분이 손이고 소리다라고 생각을 하면
이제 그렇게 생각한 손이나 소리가
그 현실에 그렇게 있다고 여기면서
그 관계를 살펴나가는 망상증상이
전개된다는 사정을 제시하는 것이다.
그러니 그 사정을 이해하려면
이 layer 를 각기 분리시킨 다음에
앞과 같은 형식으로 반복해서
물어보면서 검토를 해보아야 한다고
제시한 것이기도 하다.
이 비닐에 그런 내용이 있는데
그렇다고 다른 비닐 층에도 그런 내용이 그렇게 있는가.
그러나 이 비닐 각 내용이 서로 겹쳐져 있는 상황인데
그것이 서로 떨어져 있는 것인가.
이런 식으로 계속 질문을 스스로 하고
살펴볼 것을 제시한 것이다.
>>>
망상이 일어나는 사정을 또 다음 형태로 살펴보자.
격자이론이라고 이름붙여진 것인데
또 사진을 찾아 붙여놓고 살펴보자.
어떤 주체가
눈이나 귀 등등으로 감각현실을 얻을 때
그 감각현실 영역에서는
어떤 부분이 서로 묶이고 나뉘고 하는 사정이
따로 있는 것은 아니며
그 전체가 같이 얻어지는 상황인 것이다.
물론 각 부분이 다 흰색이거나
다 같은 소리인 것은 아닌데
여하튼 전체로 얻어지는 상황인 것이다.
그런데 이 감각현실을 얻고 나서
어떤 이가 각종 분별을 일으키고 나서
그것이 그 감각현실에 그처럼 있다고 하는 망상증상이
어떤 과정으로 일어나는가를
설명하기 위해서
다음과 같이 격자를 놓고 설명을 하고자 하는 것이다.
여기서 격자로 나타내는 내용은 결국
자신이 눈을 떠 얻은 감각현실 전체를 놓고
관념영역에서 그렇게 나누고 묶을
형태라고 보면 된다.
물론 그 감각현실에 이런 격자는 없는 것이다.
그런데 관념분별 영역에서 이렇게 다양하게
묶고 나누는 작용을 행하는 것이다.
그래서 격자가 그렇게 있다고 보고
설명하고자 하는 것이다.
[img2-90]
08pfl--image/grid_00.jpg
[img2-91]
08pfl--image/grid_01.jpg
[img2-91]
08pfl--image/grid_02.jpg
그러나 사정이 그렇게 단순하지 않으므로
다음과 같이 가능한 여러 유형을 놓고
그처럼 각 부분을 격자로 묶고 나누어 제시하면서
그 각각이 각기 A 인가 A, 아니라고 보는가를
문제삼는 것이다.
[img2-93]
08pfl--image/grid_03.jpg
그런 가운데 앞과 같이 각 부분을 묶고 나누면서
A 가 아닌 부분을 검게 칠하다 보면
결국 다음과 같이 된다고 제시하는 것이다.
[img2-94]
08pfl--image/grid_04.jpg
이것이 상대의 엉터리 주장을 일단 받아들이고
그런 바탕이라면 이런 상태가 되는데
이것은 처음 주장과 조화가 되지 않는 내용이 아닌가.
이 문제를 어떻게 할 것인가라고
앞에서 말한 가정적 항변 내지는
if 항변을 제시한 것이다.
여기서 주의할 것은
그렇다고 제시한 것도 아니지만,
앞과 같이 엉터리 주장을 하면
이렇게도 된다. 이런 것을 제시하는 것이다.
>>>
그런데 어떤가.
이렇게 나누고 묶을 때마다
새로 없던 관념이 나타나는 것처럼
여겨지지 않는가.
바로 그것이 사실은
분별이 일어나는 과정인데
또 그것이
그런 감각현실에 그런 분별 내용이 실재한다고 하는
그런 망상분별을 일으키는 과정이기도 한 것이다.
그러니 이것을 우선 기본적으로 잘 살피면서
이제 한 정지단면에서 사정이 그런데
여기서 이 문제를 잘 파악하지 못하면
어떻게 되는가.
이것을 또 살펴나가야 하는 것이다.
그러나 가능하면
처음 이 단계에서
자신이 문제삼는 a 나 b 는
단순히 관념 영역에서 문제삼는 내용이고
명칭일 뿐
그런 내용은 다른 영역에서는 얻을 수 없는
것임을 이해하고
그 망상증상을 그쳐야 하는 것이다.
그리고 다시 꿈과 현실의 관계를
살피고 음미해 볼 필요가 있는 것이다.
그런 생각은 하는 것은 이해하지만,
그 내용은 다른 영역에는 없고
얻을 수 없는 것이기에
실다운 것이 아니고
그래서 그것을 집착하고
그에 바탕해 업을 행해서
다른 layer 층을 엉망으로 만들면
곤란하다는 것을 여기서 제시하는 것이다.
즉,
그런 망상이 진행되는 상태에서는
그렇게 하면 대단히 고통을 생생하게 받는
상황으로 묶여 들어가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러나 처음부터
그렇게 망상이 전개되지 않는 상태에서는
이 어느 경우나
그런 문제를 떠나 있는 것이기도 하다.
그래서
망상이 전개되는 바탕에서는
그 일체가 고통이라고 보게 되는 한편,
그러나 그 일체는 또 본래
그런 문제가 없고
그런 생멸 생사를 얻을 수 없는 상태이므로
그 모두가 본래 청정한 니르바나라고 제시하게 되는 것이기도 하다.
그래서 각 layer 층을 합쳐 놓고
망상분별과 집착을 갖고 대하면
그 일체가 고통이다. => 일체개고
라고 하게 되고
그 각 layer 층을 따로 따로 분리시키고
망상분별과 집착을 제거하고 대하면
그 일체는 본래 적정하고 청정한 니르바나다. -> 열반적정
이라고 제시하게 되는 것이다.
그런데
앞에서 a 가 있고 b 가 있고
그 관계가 어떻고
a 가 나타나는 것은 b 때문이다
이런 주장은
바로 앞과 같은 망상분별의 바탕에서 행하는 것이다.
그래서 태양이 돈다
아니다. 지구가 돈다
아니다 네가 돈다,.
이런 식으로 계속 망상분별이 증폭되어
나가는 사정이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가장 기초적인 하나의
정지단면에서부터
이 문제를 잘 파악해야 하는 것이다.
여기서 먼저 각 영역의 내용을 놓고
이들을 서로 혼동하면 곤란함을
먼저 주의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자칫 이 논의를
어떤 분별을 관념분별을 행하는 영역에서 일으킨 다음
그런 관념분별이 그렇게 있는가 없는가를 놓고
논의하는 희론의 논의로서
오해하는 경우가 있기 때문이다.
지금 논의는 관념분별영역에서
일으킨 어떤 내용 a 가
꿈과는 달리,
다른 영역에서도
그에 해당하는 내용을 실답게 얻을 수 있는 것인가.
그래서 실다운 내용인가를 문제삼고 있는 것이다.
꿈의 비유를 놓고 보면
꿈내용은 꿈 안에서는 생생하지만,
그러나 그런 꿈 내용이
감각현실에도 그처럼 있는 것인가를 문제삼고
그렇지 않기에 꿈을 실답지 않다고 하는 것이다.
그런데
현실에서 얻는 관념분별 내용도
사정이 그와 같고
감각현실도 역시 그와 같다고 여기서
제시하고 있는 것이다.
우선
꿈은 꿈 안에서
관념분별은 관념분별 영역에서
또 감각현실은 감각현실대로 감각현실 영역에서
그처럼 그러하게 있는 것이다.
그리고 이것을 문제삼는 것이 아닌 것이다.
그러나 이 각각은
서로 다른 영역에
그 내용이 그렇게 있는 것이 아닌 것이다.
그래서 그런 의미에서
그런 것은 실답게 있는 것이 아니다.
그런 것은 얻을 수 없고 없는 것이다라고
제시하는 것이다.
그런데 만일 자신이 관념영역에서
그런 생각을 하고 있고
그런 생각을 할 수 있기에
그런 내용이 실답게 있는 것이라고 여긴다면
이 논의는 어떻게 되겠는가.
그것은 넌센스 말장난의 희론에 그치는 것이다.
왜 그런가.
무엇이 없다고 주장을 할 때도
그런 주장을 하기 위해서라도
일단 관념영역에서만은
그런 내용을 생각을 해야 하는 것이다.
'날개가 달려 하늘을 광속으로 나아가는 거북이
이름하여 이른바- 광맹구- 는
현실에 없다고 주장을 하려는 이도
그 주장을 하려면
일단 그런 거북이에 대한 생각을 해야 하는 것이다.
그런데 아무리 없다고 주장해도
그러나 그런 주장을 할 때 이미
그런 주장을 하는 이가
그런 생각을 마음에서 한 것은 분명하지 않은가.
그러니 그런 생각을 하게 되기에 그런 것이 있는 것이라면,
그런 경우마저도 그래서 있다고 해야 하는 것이다.
그런데 정말 이런 차원에서 논의를 시종일관 임하는 경우는
한마디로 그 자체로 실답지 않은
희론에 시종일관하게 된다는 사정을
먼저 이해해야 한다.
그래서 무언가가 있는가 없는가를 따지는 문제는
이런 논의가 아니고
그것이 다른 영역에서도 그처럼 있고 얻어지는 것인가를
놓고 이를 문제삼아 논의한다는 사정부터
명확히 이해하고 임해야 하는 것이다.
그런데 논의하는 가운데 자꾸 혼동을 일으키는 것은
이 모든 영역을 다 언어로 일단 시설해 놓고
그 사정을 그렇게 이해할 수 있도록
설명도 하고 논의도 진행하는 것인데
그처럼 언어로 이 모두를 다 일단 시설해 놓고
관념분별 영역에서 그것을 놓고 논의를 진행한다는 사정에 의해
그 안에서 계속 혼동을 일으키기에 문제가 되는 것이다.
그래서
경전에서 무엇은 있다고 하지만, 그러나
진짜라고 할 실다운 내용은 없고
그 실재는 얻을 수 없고
또 그러나 그처럼
진짜라고 할 내용은 없고(무아, 무자성, 무소유)
실다운 것은 얻을 수 없지만(불가득 공)
그러나 그런 내용은 그런 형태로 또 있고
이런 식으로 계속 제시되면
도대체
무엇이 있는데 또 없다고 하는가.
무엇이 없는데 또 있다고 하는가.
왜 한 입으로 있다 없다를 이렇게
혼동되게 자꾸 제시하면서
있다 없다 이 모두를 떠나야 한다고
제시하는가.
이런 식으로 갈피를 못 잡는 현상이
일어나는 것이다.
처음에 이런 문제 자체를 시정하기 위해
이 논의를 하는 것인데
이 논의 과정에서
그런 혼동을 겪으면
더 문제가 곤란한 것이다.
손을 부딪히면 소리가 난다는 문제도
사정이 위와 같다.
여기서 일단 가장 먼저 확인하고
주의를 해야 하는 부분은
그러그러한 관념분별로서 어떤 생각이
어떤 또 다른 관념분별로서 그런 생각을 일으켰다고
지금 제시하는 논의가 아닌 것이다.
즉 '손에 대한 생각'이 '소리에 대한 생각내용'을
불러 일으킨다.
이런 논의가 아닌 것이다.
그러나
여하튼 일단 가장 기본적으로
각 논의에서 일단
처음 문제삼는 어떤 a가
어떤 한 단면에서라도
찾아지는가.
이것부터 잘 확인하고
다음 문제를 또 이어서 살피기로 한다.
이 첫 부분에서 그것을 잘 확인하면
사실은 그로 인해 그 이후의
if 논의를 더 복잡하게 전개할 필요도
그다지 없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사정은 그렇지만
그래도 여전히
자신이 눈을 떠 무언가를 보면
여전히 그 꽃은 꽃이고
자신은 자신이고
산은 산이고
그런 가운데
그래도 지구는 돌고 있다거나
지구가 잠깐 쉴 때는 태양이 대신 돌고 있다거나
또는 번개가 치면 역시 천둥소리가 들리고
또 손을 마주치면 역시 소리가 난다고
하는 것이 옳은 것이다.
이런 주장을 혼자 중얼중얼하면서
사라지는 경우가 대단히 많은 것이다.
그래서 또 이에 대해 또
비록 번잡하더라도
이후에 계속 살펴나가야 한다고 보는 것이기도 하다.
>>>
앞에서 하나의 정지 단면을 놓고도
문제삼는 a 는
다른 영역에서 얻을 수 없는 사정을 보았다.
다시 정리하자.
침대와 베개가 있는 감각현실을 바탕으로 한 가운데
잠을 자니 황금꿈을 꾸었다.
이 내용을 다시 살피자.
그러한 감각현실 ~ 그러한 황금의 꿈
이 관계를 놓고
꿈에서 황금을 보았다고
그런 내용이 그 꿈을 꾸었던 그 감각현실에서
실답게 있다고 주장하면 되는가.
그런데 이 비유처럼
실재 ~ 감각현실 ~ 관념분별의
상호관계가 그러하다는 것을
제시한 것이다.
1- 자신이 눈을 뜨거나 말거나 관계없이
그대로 있다고 할 실재와
1 - 자신이 눈을 뜰때 자신의 마음에서 얻게 되는 그러그러한 감각현실
1- 그리고 다시 이를 바탕으로 하여 이 부분은 a 이고 저 부분은 b 이고
이 부분은 자신이고 저 부분은 외부 세상이고
이런 식으로 분별을 일으킬 때
이들 각각의 관계가
침대와 그 침대에서 꾼 꿈의 내용의 관계와 같다고
여기서 제시하는 것이다.
그리고 다시 확인할 것은
그런 감각현실을 그처럼 얻는다는 부분과
그러그러한 관념분별을 일으켜 얻었다는 부분은
그 자체로는 문제가 아닌데
그런 상태에서 꿈과 같은 분별 내용을
그런 감각현실에도 그처럼 있다고 생각하고 집착하거나
더 나아가 그것이 그런 실재에도 그처럼 있다고 집착하거나
더 나아가 그런 내용을 얻게 한 참된 진짜라고 할
영원불변하고 고정된 본체가 있다라고 집착하는 것들이
문제라고 제시하는 것이다.
이것은 하나같이 실답지 않아서
집착을 갖지 않고 대해야 할 내용을 놓고
그것이 다른 영역에서도 그처럼 얻어지고 있는 것이어서
실다운 내용이다라고
망상을 일으키고 머무는 자세를 의미하는 것이다.
왜 이것이 문제인가하면
바로 그런 망상분별에 바탕해
세상에서 문제삼는 온갖 생사고통을 겪게 되기 때문인 것이다.
그리고 그 고통을 해결하기 위해
기본적으로 이 부분부터 잘 파악해야 한다고
반복해 제시하는 것이다.
꿈의 비유를 다시 살펴보자.
꿈은 그렇게 꾼 것이다.
그 꿈을 꾼 상황에 그 침대나 베개에 해당하는 감각현실은
그렇게 있었다고 할 것이다.
지금 꿈이 실답지 않고
그런 꿈 내용은 현실에 없는 것이라고 반복해 제시하는 것은
앞의 사실을 부정하는 것이 아니다.
'현실에 그런 꿈 내용은 없는 것이다'라고 할 때
잠잘 때 꿈꾼 내용이 꿈 안에서 전혀 없다고 부정하는 것도 아니고
또 그처럼, 자면서 꿈을 꿀 당시의 현실을 부정하는 것도 아니다.
이 부분을 잘 파악하고
현실에서 행하는 관념분별이
또한 그와 같다고 제시하면
위 내용에 잘 대입해서
그 의미가 무엇인가를 잘 파악해야 한다고 본다.
현실에서 무언가를 놓고 자신이라고 여기는 것이다.
그래서 처음 무언가가 없다고 하거나 있다고 한 것이다.
그리고 자신이 없다가 있게 되었다고 여기는 것이다.
그리고 자신이 그렇게 있다가 언젠가는 없게 된다고 여기는 것이다.
나머지도 다 마찬가지다.
자신이 현실에서 보는 금괴나 꽃이나 다 마찬가지다.
그래서 없다 + 있다를 합쳐서 '생겨난다'고 하고
있다 + 없다를 합쳐서 '멸한다'고 또 생각하는 것이다.
그래서 자신이 소중하게 생각하는 것의 생멸을
문제삼는 것이다.
처음 자신이나 자신의 것 a 를 소중하다고 보는 입장에서
다시 이것의 생멸이 하나같이
중요하다고 보기 때문이다.
그런데 여기서 처음에 무엇을 제시했는가하면
처음 문제삼는 그것들이
꿈과 같이 실답지 않음을 제시한 것이다.
그러니 원래는 여기서 그쳐야 하는 것이다.
사정이 그런데
a 와 b 가 그렇게 있다거나 없다고 하면서
더 나아가 a 가 생겨나는 것은
b 때문이다 이렇게 나아가면
망상이 증폭되는 단계에 이미 있는 것이다.
그러니 이 상태에서
그렇게 문제삼는 a 나 b 도 다른 영역에서 얻을 수 없고
더 나아가 생멸도 얻을 수 없다고 기본적으로
제시한 것이다.
즉 그런 내용은
감각현실에도 그런 내용을 얻을 수 없고
실재에도 얻을 수 없다.
더욱이 그에 해당한 영원불변한 실체도 없다.
이렇게 제시한 것이다.
그러나 그러그러하게 생생하게 얻는 감각현실이 없다고 한 것도 아니고
그러그러한 감각현실에 대해 일으켜 행한 그런 a b 등과 같은 관념분별이
그 관념분별 영역에서 그렇게 일으켜지지 않고, 없다고 한 것은 아니다.
그러니 이것을 잘 정리할 필요가 있다고 본다.
그러나
그것으로 그 증상이 해소가 되지 않으면,
다시 그런 상대의 주장을 다 받아들인 가운데
if 논의를 진행할 필요가 있다고 보게 된다.
즉 어떤 이가 아무리 그렇게 주장해도
자신이 볼 때
그래도 여전히 손도 있고 소리도 있다.
자신도 있고 자신의 생사도 있다.
이렇게 주장한다면
다시 이것을 놓고 살펴야 하는 것이다.
여기서 잠깐 격자이론을 다시 한번 살펴보자.
[img2-93]
08pfl--image/grid_03.jpg
원래 어떤 감각현실을 얻었다고 하자.
그런 상태에서 그런 감각현실을 배경으로 놓고
관념분별 영역에서
이제 위와 같은 격자를 놓고
이것을 이렇게 저렇게 묶고 나누고 함에 따라
수없이 많은 내용들이 나타나게 된다.
쉽게 비유하여
눈을 떠 방안의 있는 영희를 바라본다고 하자.
이 상황에서
이렇게 나누고 묶으면 영희가 있고
이렇게 나누고 묶으면 영희의 손이 보이고
이렇게 나누고 묶으면 책상이 보이고
이런 식으로 계속 진행할 수 있는 것이다.
처음 이렇게 저렇게 나누고 묶음에 따라
그런 분별 내용을 일으켜 얻게 되는 과정을
불교 전문 용어로는 변계라고 표현한다.
두루두루 헤아리는 작용을 말한다.
그리고 나서 그런 관념분별을 일으켜 가진 상태에서
그 배경화면을 놓고
그 배경화면에도 자신이 일으킨 관념분별에 해당한
내용이 실답게 있다고 여기면서
그에 대해 집착하고
그에 접착하는 현상이 나타나는 것이다.
이 부분이 망상증상에 해당한다고 할 수 있는데
이것을 또 불교전문용어로는 소집이라고 표현한다.
그런데 이는 현실에서 앞 작용과 거의 함께 이뤄지는 작용인 것이다.
그래서 어떤 이가 어떤 감각현실을 얻은 바탕에서
이렇게 저렇게 묶고 나누고 함에 따라
매 경우 관념분별하여
그렇게 일으킨 관념분별을
변계소집상(遍計所執相)이라고 표현하는 사정이 있는 것이다.
눈을 떠 보니 방안의 모습이 보이는데
이렇게 보니 저 부분은 영희이고
저 부분은 책상이고 이렇게 분별하면서
그 각 부분이 그런 내용이라고 집착하게 된다는
현상을 표현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이것이 바로 침대와 침대에서 꾼 꿈 속의 황금과
그 성격이 같다는 것을 앞에서 제시한 것이다.
그리고 그 각 내용을 마음에서
겹쳐서 대하기에
각 비닐에 그림을 그려 놓고
이것을 겹치면
각 비닐에서는 없는 내용이 전체적으로는
있는 것처럼 보이게 되는 현상이 나타나는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다시 강조하는 것은
현실에서 문제삼는 그것들은
각 영역에 그처럼 실다운 내용으로 있는 것은 아니라고 제시하는 것이다.
그런데 동시에 주의할 점은
사정이 그렇지만,
각 영역에 아무 내용이 전혀 없다고 제시하는 것도
역시 아니라는 점이다.
단지 그러그러한 실재에서
그러그러한 감각현실을 화합해 얻고
그에 대해 이렇게 저렇게 묶고 나누어 가면서
이러저러한 관념분별을 일으켜 얻는데
그렇게 각 영역이 그러그러한 상태인 것이다.
그리고 정작 각 영역에는
현실에서 문제삼는 실다운 자신이나 그 생사 고통을 얻을 수 없다고
제시하는 것이다.
그런데 사정이 이러한데도
이 각 내용을 다 합쳐서 대하면
그럼에도 불구하고
집착을 가질만한 자신이 거기에 그렇게 있고
그리고 자신이 겪는 생사고통도 거기에 그렇게 있다.
그렇게 망상을 일으키면서
매 순간 생생하게 생사고통을 받아나가고
무한하게 그것을 이어나간다는 것이 문제인 것이다.
>>>
각 영역은 본래 그러한 내용이 없고 얻어지지 않는데
그러나 묘하게 그런 상태에서 망상을 일으켜 대하면
그런 생사고통이 있다고 여기고 또
그것을 그대로 받아나가는 현상이 나타나는 것이다.
그래서 지금 살피는 문제는
실답지 않지만,
그러나 현실에서 매 순간 생생하게 얻는 그 내용으로
고통을 받는 것이 문제인 것이다.
수행자가 행하는 수행이란
이 생사고통을 해결하고
벗어나기 위해 행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에 좀 더 추가하면
자신도 그럴 뿐만 아니라
같은 생사고통을 겪는 다른 생명을
이 상태에서 벗어나도록 하기 위해
하는 것이기도 한 것이다.
그래서 각 영역에서는 문제삼는 내용을 얻을 수 없는데도
그러나 현실에서는 그러그러한 내용이 그렇게 실답게
있다고 여기고 [ 번뇌 ]
계속 꿈에서 본 내용을 침대에서 찾고
침대를 뒤집어 놓고 하면서 생각하고 말하고 행위하고 자세를 취해 나가면 [ 업]
또 그로 인해 고통을 받게 되는 [ 고통 ]
그 상황을 살펴야 하는 것이다.
그래서 이를 이해하기 위해
먼저 본래의 사정은 그렇지 않은데
왜 현실에서는 계속 그런 망상을 그렇게 일으키고
생사고통을 무한히 받아나가는가.
이것부터 먼저 그 사정을 이해해야 하는 것이다.
이를 위해 격자이론을 다시 살피면
대충 처음에 볼 때는 방안에 영희가 있었는데
다시 숨은 그림 찾기 하듯
다른 형태로 묶고 나누고 살펴보니
이제 다른 내용이 또 있다고 생각된다.
이런 상태가 나타난다.
여기에
1 세밀한 과학자의 입장이 하나 있고
1 또 하나 망상 분별을 전개하는 철학자의 입장이 있고
1 또 하나 감성이 풍부하고 연상작용이 풍부한 시인의 입장이 하나 있고
1 또 하나 현실에서 다른 이들과 조화를 잘 이루지 못하여 정신병원에 수용되어야 할 망상증 환자의 입장이
하나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그들이 각기 분별을 할 때마다.
처음 대강 방안에 영희가 있다고 한 상황에서는
없다고 본 내용이 새로 있다고 하는 것처럼 되는 것을
볼 수 있다.
과학자는 일단 자신이 현미경을 가지고 살피니
영희 피부 안에 각기 별도로 생활하고 움직이는 기생충과 세균이 수없이 많다.
이렇게 일단 발표하는 것이다.
기타 원소와 핵과 전자. 질량과 시간 공간 에너지 이런 것도 다 마찬가지라고 할 수 있다.
여하튼 현실에서 잘 적응해 살아가려면
마땅히 존중하고 경청해야 할 망상상태의 하나인 것은 분명하다.
또 한 입장은
철학자인데
자신이 볼 때 현실에서 이러이러한 생각을 하게 되는데 하면서
자신이 이에 바탕해 이러이러한 추리를 하게 되고
그래서 그런 사정으로 그런 내용이 있어야 마땅하다고 하면서
온갖 사변적 주장을 광활하게 제시하는 입장이 또 있는 것이다.
prince 님이 이 대목에서 바로 연상이 되지만
여하튼 현실에 이런 입장이 많고
그 영향력도 대단히 있기에
또 역시 존중해야 할 망상증상의 하나인 것이 분명하다.
이제 또 하나
방안에 영희가 있는 것 뿐인데
이를 놓고
아름다운 천상에 한 송이 수선화가 피어있네 ~
이런 식으로 시를 읊는 이가 또 있는 것이다.
이 시를 듣고 어디에 수선화가 있다고 하는 것인가.
이렇게 시인에게 시비를 일으키면 역시 곤란하고
이 경우 역시 현실에서 대단히 존중하면서
그 시를 같이 공감하면서 감상을 해야 마땅하다고 보게 되는 것이다.
그런데 또 한 입장이 있다.
상태가 심한 경우인데
방안에 있는 영희는 외계에서 자신을 붙잡으러 온 외계인이다.
알고보면 영화에 나오는 바퀴벌레형태의 외계인인데
피부를 인간처럼 만들어 입고 지금 활동 중이다.
피해야 한다.
이런 주장을 하면서 피해망상증상을 일으키는 경우가 있고
또 어떤 입장은 망상은 망상인데
사정이 그렇지 않고
그 영희가 알고보면 하늘에서 자신을 보호해주기 위해
나타난 천사다. 날개를 숨겨서 내장 안에 감추어 두고 있다.
x- ray 촬영을 하면 갈비뼈 형태로 보인다.
그런데 그 이유는 자신이 우주를 관리하는 황제로서
대단히 중요하기에 그런 것이다.
이런 식으로 횡설수설하면서
즐겁게 보내는 이익- 망상증상(?)도 있는 것이다.
여하튼 다양한 사례를 나열했는데
이 모든 경우
그렇게 문제삼는 감각현실과 관념분별 관계에서부터
그 정체를 잘 파악하고
이 각 경우에 임해야 한다고 기본적으로 제시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런 각 증상을
누구나 현실에서 쉽게 살필 수 있다.
여름에 하늘에 뭉게구름이 있으면
그 구름이 무엇처럼 보이는가.
이런 실험도 사정이 같다.
더 나아가 종이에 잉크나 물감을
아무 생각없이 마구 뿌려 놓고
그것이 무엇처럼 보이는가.
이런 실험도 할 수 있다.
지금 앞에 올려진 노래를 듣고 있는데
이 불어 노래에서
불교를 공부하는데
왜 자신에게 자꾸 쉬라고 하고 하고
관세음보살님의 보타락가섬을 이야기하고
왜 이렇게 상봉을 해서
왜 주다가 뺏고
왜 구박을 하고 하는 것일까.
그런데 알고보면 돈이 되고
돈이 많다.
또 쉬어도 좋지만,
기본적인 내용을 다 이해하고 애써 배운 바탕에서는
무량한 시간을 놓고
관세음보살님과 함께
성불할 때까지 무량하게
즐겁게 잘 성취해나갈 일들이 많다.
이런 메세지를 전할까 이런 생각을 한다면
이것도 역시 앞 실험과 사정이 같다.
그리고 숨은 그림찾기 게임도 마찬가지다.
처음에는 잘 안 보이는데
이렇게 저렇게 묶고 나누어가면서
잘 살피면
정말 영희라고 본 부분에서
모자나 코끼리가 보이기도 하는 것이다.
이상한가.
그런데 얻는 감각현실은 마찬가지인데
그로부터 생각하는 내용이 얼마나 다양할 수 있는가를 놓고 살핀다면
수행자 입장에서는 이런 상태도 제시할 수 있다.
즉 똑같이 현실을 대하는데
수행자는
념과 혜와 행을 길로 삼고
지와 관의 정려 수행을 자신의 자동차로 삼고
공 무상 무원무작의 해탈문을 문으로 삼아서
그 문에 들어가
무량한 공덕과 지혜를 성취하고
장엄한 불국토에 이른다.
이런 게송을 기본적으로 읊는 가운데
이 안에
영희라고 보게 되는 이가 보이는데
영희는 숫자로는 61이다.
그래서 방안에
다라니 61번째구에 해당하는
마라나라가 있고
반다타가 있고
제 61 품인 다문불이품이 들어 있고
61 번째 게송에 해당하는 내용으로
知其受身不可說, 知其生處不可說,
知其正生不可說, 知其生已不可說,
지기수신불가설, 지기생처불가설,
지기정생불가설, 지기생이불가설,
받는 몸 아는 일도 말할 수 없고
태어나는 처소도 말할 수 없고
바로 남을 아는 일도 말할 수 없고
난 뒤를 아는 일도 말할 수 없네
라는 게송이 관련된다.
그리고 게송 내용을 통해
전생의 영희와 후생의 영희를 보니
알고보니 자신의 채권자이면서 채무자다.
그러나 그렇다고 도망가기 보다는
주변을 모두 성불시켜서
주변에 모두 부처님만 있게 하면
그로 인해 자연스럽게 편하게 되지 않는가.
그러니 이 기회에 영희를
바로 해탈과 니르바나에 이르게 하여
과거의 채무를 더 이상
자신에게 문제삼지 않는 상태로 만들자.
이런 내용을 종합적으로 감상한다면
조금 더 심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런데 일단 여기서 잠깐 쉬고
손을 마주치면 소리가 난다는 이 문제를
다시 보자.
이미 앞에서 손도 있고 소리가 있다고 하고
다시 그것이 없다가 있다(생)
또는 있다가 없다(멸)가 문제되니
이것이 어떻게 된 것인가 생각하다가
손을 마주치는 일이 있어서
그런 소리가 없다가 있게 되었다 . 즉 그렇게 생겨났다.
이렇게 본다고 하는 것이다.
그런데 가장 먼저
손이나 소리 등과 같은 각 내용을 그렇게 분별영역에서 일으켜 얻지만,
그런 분별 내용 가운데 어느 것 하나도
감각현실에서 내용을 얻을 수 없고
실재영역은 더더욱 그렇다. [ 불가득 공 ]
그리고 이 어디에도 이에 해당하는
참되고 진짜라고 할 내용은 없다. [무아, 무자성, 무소유]
이런 내용을 제시하는 것이다.
그리고 더 나아가 알고보면
그런 관념분별도 사실 그 안에 실다운 내용이
없는 단순한 명칭이고 관념일 뿐이다.
그래서 그런 내용을 먼저 제시하는 것이다.
그러나 여기서
그런 분별 내용이 분별 영역에 있음을 부정하거나,
그러그러한 감각현실을 얻을 수 없다고 부정하거나,
또 그러그러한 내용을 얻지 못하는 실재가 전혀 아무것도 없다고
부정하는 것은 아닌 것이다.
그러나 여하튼 사정이 이와 같기에
이들의 관계를 더 살필 바탕 자체가
없는 상태가 되는 것이다.
>>
그런데
아무리 그렇다 해도
그런 a b가 있고
그리고 그런 a b 가 C 를 만들어 내는 관계가 있다고 고집하고 주장을 하면,
다시 그런 내용들이 그렇게 있다고 하는 가운데
그에 바탕해 가정적 항변이나 if 논의를 진행해갈 필요가 있다.
그래서 이제 그런 a + b => C 의 관계가 있다고 하자.
이렇게 시작하는 것이다.
그런데 그런 a + b => C 의 관계가 있다면
바로 그 관계 자체가
다음 내용을 제시하는 것이기도 함을 밝히는 것이다.
즉 그런 a + b => C 의 관계는
우선
C 가 그 앞 단계에는 얻을 수 없는데
그러나 그런 관계로 화합해서 그런 내용을 얻는 것이어서
그 자체로 그 C 가 그렇게 실답지 않는 내용임을 제시하는 것이다.
그래서 그것은 그렇게 C 가 영원하지 않고 무상하다는 것을 제시하는 것이기도 하고
그래서 그것은 그것이 좋으면 좋은대로 나쁘면 나쁜대로
그렇게 고통을 각 경우에 주게 되는 것이고
그리고 그런 사정으로 그 C 에는
그런 것을 나타나게 하는 진짜라고 할 참되고 영원불변한 성품이 없음도 나타내는 것이고
그리고 그런 사정으로 그 C 는
그런 관계를 떠나 실재한다고 할 지위에 있는 내용이 아님도 나타내는 것이고
그래서 알고보면 그 C 는
극히 청정하고 깨끗하고 그런 문제를 본래 얻을 수 없는
청정한 니르바나의 상태임도 나타내는 것이고
그래서 알고보면 그 C 를 얻게 된 그 본 바탕의 실재는
그런 내용을 얻을 수 없고 공함도 나타내는 것이다.
그래서 이런 내용들을
바로 위 a + b => C 의 내용 자체가
제시하고 있다고 제시하는 것이다.
그것이 곧 불교에서 자주 표현하는
연기 즉 공 이런 내용과 관련되는 내용이다.
여기서 a + b => C 라는 관계를 살피면
이미 앞 부분에 C 가 그렇게 없는데
그러그러한 관계로 실답지 않은 C 가 화합해 나타나는 것일 뿐이라고
제시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니 이것은 잠자면 그 잠자는 조건과 상황에서
그런 황금의 꿈을 꾸는 것과 같은 것이라고 제시하는 것이다.
그런 꿈에서는 그 황금이 그렇게 있지만,
그러나 그 꿈 내용은 그렇기에
바로 실답지 않다고 하는 것처럼
현실의 그 일체 내용도 바로 그렇기에
위와 같다고 내용을 제시하게 된다고 하는 것이다.
그래서 부처님이
현실에서 생사가 연기해 나타나는 과정을 제시하는 것은
그런 사정을 잘 관해서
그 사정처럼 근본무명(어리석음)에 바탕해
본래 얻을 수 없는 그런 생사를 얻어나가지 말고
그 사정을 그처럼 잘 관해서
그 무명(어리석음)과 전도망상을 제거하여
생사를 벗어나오라고 제시한 것이다.
그런데 망상을 일으키고 대하는 입장은
이와 같은 a + b => C 의 인과관계(연기)의 내용을 놓고
거꾸로 바로 그런 관계가 제시되기에
따라서 그런 a 나 b나 C 가 모두 그렇게 실답게 있는 것이고
그리고 그런 형태로 그 내용이 나타나는 그 관계마저도
실답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그러니 이 부분을 주의해야 한다고 보는 것이다.
>>>
이제 위 내용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현실에서 감각현실을 얻고
그에 대해 일으키는 관념분별은
그 자체만 놓고 보면 문제가 없다고 할 수 있다.
그것은 꿈도 마찬가지다.
그런데 그렇게 꿈꾼 내용이나
관념분별을 일으킨 내용을 놓고
그것이 다른 영역에도 실답게 있다고 하면서
집착을 갖고 임하면
그것이 문제인 것이다.
그것이 생사고통을 받게 하는 근본원인인 것이다.
그래서 그렇게 생사고통을 받아서 문제인데
정작 문제삼은 그런 생사고통은
본래 각 영역에서 얻을 수 없는 것이기도 한 것이다.
현실에서 얻는 그 모든 내용은
꿈은 아니지만,
그 성격이 꿈과 같은 것이어서
실답지 않은 것이다.
그래서 그런 내용은 하나같이
참된 진짜의 내용이 없고 실답지 않다고 제시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실에서 얻는 그런 감각현실과 관념분별은
매 순간 생생하게 얻어지고
그래서 진짜인 것처럼 그렇게 나타나고 사라진다고
여기게 되는 그런 것이다.
그래서 먼저 이처럼 생생하게 진짜처럼
현실에서 매 순간 얻는 내용을 대하면서,
그것이 하나같이 실답지 않음을 강조하는 것은
현실에서 그에 대해 망상 번뇌와 집착을 갖고 대하는 가운데
그에 바탕해 업을 행하여 받게 되는 생사고통에서
벗어나게 하는 취지인 것이다.
그러나 그런 바탕에서
다시 수행자가
생사현실에 들어가
무량행문의 수행을 닦아 나가는 것은
뒷 부분과 다시 관련된다.
즉 생사현실이
그처럼 실답지 않은 것이지만,
그러나 매 순간 생생하게 얻어지고
진짜인 것처럼 여겨지게 되는 그런 생사현실의 부분에서
그런 수행을 해나간다는 것을
또 제시하는 것이다.
꿈을 놓고 이를 살펴보기로 하자.
현실에서 꿈을 꿀 때
그 꿈이 실답지 않지만,
그러나 꿈에서 꿈 내용을 얻지 못하는 것이 아니다.
그리고 그 상태에서 현실도 그렇게 그런 형태로 있는 것이다.
그런데 여기에서 꿈을 실답다고 여기고
현실에서 꿈을 찾거나
그에 바탕해 행해 나가면 곤란한 것이다.
현실도 마찬가지다.
현실에서 자신과 자신이 소중하다고 보는 것들과
그것이 있다 없다 ~이다 ~아니다를 문제삼지만,
그런 내용은 다른 영역에서 얻을 수 없는 실답지 않은 것이다.
이것을 기본적으로 제시한 것이다.
그래서 이를 통해
그런 망상분별과 집착을 갖고
그에 바탕해 업을 행하고
그래서 생사고통에 묶여 끌려가는 상황을
벗어나라고 제시한 것이다.
그런데 그런 내용이 실답지 않고
그런 내용은 얻을 수 없다고 제시한 것은
그렇다고
실재나
감각현실이나
관념분별의 각 영역에
아무 내용도 전혀 없는 것이라고 제시한 것이 아닌 것이다.
그래서 앞에서 그런 것들이 실답지 않다.
다른 영역에서 그런 내용은 얻을 수 없다고 제시하는 내용과
그러나 각 영역에 그런 내용이 그러그러하게 있다는 내용을
서로 혼동하면 곤란한 것이다.
그래서
진짜라고 할 것은 없고 - 그 내용을 직접 얻지는 못하여 공하다고 표현하지만,
그러나 공한 실재(진여)는 전혀 아무 내용도 없다고 하는 것은 아닌 것이다.
또 실답지는 않고 그것이 실재는 아니지만,
감각현실도 현실에서 대하는 것처럼
매 순간 각 부분이 생생하고
또 각 부분이 선명하게 구분되는 형태로
그리고 매순간 진짜처럼 여겨지는 형태로
감각현실을 그처럼 얻는 것이고
그것이 전혀 없다고 하는 것이 아니다.
또 이에 대해 행하는 관념분별도 마찬가지다.
눈을 감고 생각을 할 때 그 생각에
감각기관을 통해 얻는 감각현실은 들어 있지 않다.
그렇다 해도 이를 통해
각 부분을 이렇게 저렇게 묶고 나누면서
온갖 분별을 하고 명료하게 판단을 행해 나가는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또 실재도 아니고
그 안에 감각현실에서 얻는 그런 내용도 없는 그런 형태의 것이다.
그래서
사정이 그러함을 명료하게 이해한 바탕에서
이들 각 영역의 내용을 놓고
다시 중생제도를 위해서
생사 현실에 들어가서
이들 내용을 좋고 좋게 만들어 나갈 필요도
또 있다는 점을 주의애햐 하는 것이다.
이는 어떻게 하는가.
원래 각 영역의 내용만 놓고 보면
이렇거나 저렇거나 다 청정한 니르바나인 것이고
온갖 차별이나 생사고통이 본래 문제되지 않는다.
그런데 사정이 그런데도
일반적인 망상상태에서
이들을 다 겹쳐 놓고 대하면
그것이 여전히 고통스럽고
견디기 힘든 내용으로 여겨지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좋은가.
앞의 입장에서는 이렇게 되거나 저렇게 되거나
어차피 모두 본래 니르바나의 상태인 것이어서
마찬가지인데
사정이 그렇기에
그 상태에서도
더 좋은 내용이 될 수 있게 하면
당연히 더 좋지 않은가.
그래서 수행자는
앞 부분과 같이 생사를 벗어난 것에
그치지 않고
다시 생사현실에 같이 들어와
중생제도를 위한 수행을 계속 해나가는 사정이 있는 것이다.
그래서 실재- 감각현실 - 관념분별
각 영역의 각 레이어를 다 포개어 놓고 대하면
여전히 a 와 b 가 있고
그래서 C 가 없다가 있게 되어 생겨나고
또 어떤 경우는 있다가 없게 되어 사라진다는 등으로
분별을 행하면서 이들 각 내용을 대하는 생사현실에 들어가서
이제 그 내용을 그 상태에서
좋고 좋게 얻게 되는 형태로 만들어가고자 노력하는 것이다.
그래서 이를 통해
각 생명이 모두 그런 생사고통에서 벗어나게 하도록
그런 수행을 행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 부분이 곧 수행자가 행하는
무량행문의 수행이라고 할 수 있다.
수행자의 무량행문과
수행과 수행목표의 성취의 관계는
앞에서 제시한
a + b => C 의 관계가
다시 적용된다.
처음 a + b => C 의 관계는
그 C 가 이런 사정으로
영원하지 않고 무상한 것이고
그래서 고통을 만들어 내는 것이고
그래서 무아, 무자성이고
그래서 알고보면 이것이 그대로 청정한 니르바나이고
그래서 실재는 공하다는 내용임을 제시하는 내용이라고 하였다.
그래서 이를 통해 우선
그런 사정으로 그것이 실답지 않다는 사정을
이해하고 그에 바탕해
망상분별과 집착을 제거할 것을 제시한 것이다.
그러나 무량행문의 수행에 임하는 상태에서는
이 내용은 이와는 다른 측면에서
다른 방향 다른 의미로 사용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a + b => C 의 관계는 같은데
여기서는 바로 그런 사정으로
'실답지는 않지만',
그러그러한 수행을 닦아나가면
그런 관계로서 그 수행결과를
그렇게 얻어낸다는 것을 제시하기 위해
제시하는 내용이 되는 것이다.
그래서 이를 종합하면
다음과 같다.
우선
a + b => C 의 관계에서
이 각 내용이 하나같이
실재나 감각현실 각 영역에서 얻을 수 없고
그 내용이 실답지 않아 집착을 가질만한 것이 아님을 올바로 관하여
망상분별과 집착을 제거해야 한다.
그리고 그런 상태에서
중생제도를 위해 생사현실에서 들어가 임할 때는
앞과 같은 이해에 상응한 상태로
얻을 것이 없음(무소득)을 방편으로
집착을 갖지 않고
현실에서 수행에 정진해야 한다고 제시하는 것이다.
그래서
망상분별과 집착을 제거하고
현실에서 수행을 정진하면
바로 그
a + b => C 의 관계를 통해서
비록 실답지는 않지만,
그런 수행의 결과가 성취된다고 제시하는 것이다.
즉, 실답다고 볼 수는 없지만,
그러나 각 영역의 레이어 내용을 합치고
그렇게 분별하는 바탕에서는
또 그런 수행을 통해
무량한 복덕과 지혜를 C 라는 결과로 성취하고
또 각 생명을 생사고통에서 벗어나게 제도하고
불국토를 장엄하고 성불하는 그런 C 라는 결과도
그처럼 성취하게 된다고 제시하는 것이다.
현실에서는 a + b => C 의 관계를 대할 때
이 각 내용이나 이 관계가 하나같이
실답게 존재하는 내용이라고 생각하고
이에 집착을 갖고 대하는 가운데
수행방안과는 다른 형태로
추구하고 행위하여
생사고통을 받아나가는 것이라면,
수행자는 이 관계를 모두 그와는
반대의 형태로 대하는 것이기도 하다.
그래서 알고보면
방안에 영희가 있는 현실을 놓고
과학자나 철학자나
의사나
시인이나
망상증환자가 일으키는 생각과 시와 달리
수생자는 수행자대로
또 다른 게송이나 다라니를 외우면서
이 현실을 대하고 들어가 임하는 사정이
있는 것이다.
그러나 사정이 그래도
그런 경전이나 다라니나 다 마찬가지로
본래는 하나의 내용도 얻을 수 없고
뜻이 없고 단지 그런 명칭뿐이다라고
또 제시하는 사정이 있는 것이기도 한 것이다.
핵심은 그래서
그렇게 잘 관하고
수행방안을 실천하고
정진해야 한다는 내용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이렇게
수행을 해서 얻는 그런 결과는
역시 원래 본래 얻을 수 없는 것이기도 한 것이다.
또 사정이 그렇기에
그렇게 수행하면
'실답지는 않지만,'
현실에서 대하는 것처럼
생생하게 얻고 그래서 마치 진짜인 것처럼 여기는 그런 현실내용처럼
그런 내용을 모두 다 뜻과 같이
성취하게 된다고 제시하는 것이다.
>>>
>>>
대강 현실에서 손뼉을 마주치면 그 때마다
소리를 듣게 되는데
왜 손뼉을 마주치면 소리가 난다고 이해하는 것을
망상분별이라고 하는가 그 사정을
핵심만 뽑아 제시했는데
아무리 그렇다해도
여전히 손도 있고 그런 소리도 있고
손을 마주치면 소리가 나는 관계도 그처럼
실답게 있다고 여기면서
현실을 대하기 마련이다.
그리고 손뼉 소리를 낼 필요가 있으면
여전히 손을 마주칠 도리 밖에는 없다고
여기게 될 것이다.
그러니 앞에서 논의한 것이
현실에서 무슨 소용인가 이렇게
의아하게 여길 수가 있다고 본다.
그래서 계속해서 이에 대해 살펴나가야 한다고 본다.
[...]
레이어(층)이란,
투명비닐과 같은 곳에 여러 그림을 그려 놓고
이 비닐을 모두 합쳐서
하나의 그림이 나타나게 하는 기법에서
각각의 비닐층을 말한다고 할 수 있다.
아래에 이런 방식으로 각 layer 의 다른 그림을 합쳐서
하나의 그림이 나타나게 한 내용을 가지고
실재- 감각현실 - 관념분별의 관계를
비유적으로 설명해보기로 하자.
위 그림은 배경 풍경이다.
이것을 실재라고 비유해보자.
여기서는 이 내용이 여기에 이렇게 그려져 있는데
실재는 사실은 이런 내용을 얻을 수는 없는 것이다.
어떤 이가 눈을 뜨면 모습을 보는데
눈을 감으면 보지 못한다.
그런데 눈을 감으면 모습이 보이지 않는다고 해서
자신이 방금 전에 본 모습이 전혀 없게 되었다고 할 것인가.
아니면 눈을 감어서 모습을 보지 못하더라도
자신이 눈을 감거나 뜨거나 관계없이
무언가가 실재한다고 할 것인가.
그런 것이 실재한다면
그런 본 바탕으로서 실재(진여) 내용은 무엇인가를 문제삼는 것이다.
그런데 한 주체는 어떻게 현실에서 내용을 얻는가.
즉,
눈을 뜨니 => 그 자신의 마음안에서 그런 모습을 얻었다.
이런 형태로 눈이 관련해 그런 내용을 마음에서 얻는 것이다.
그리고 이런 것은 결국 a + b => C 의 관계로
화합해 그런 내용을 얻는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여기서
자신이 눈을 뜨거나 감거나 관계없이 실재하는 내용은 무엇인가를
문제삼을 때는
그런 관계를 떠나서 실재하는 내용을 찾는 것이다.
.
그래서 우선 a + b => C 의 관계로
얻게 되는 C 그 자체는
지금 문제삼는 그런 실재의 지위에 있는 내용이 아닌 것만은
확인하게 되는 것이다.
또한 이런 관계로만 내용을 얻게 되는 주체의 입장에서는
그런 관계를 떠난 실재를
끝내 얻어낼 도리가 없다는 것도 확인하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여기서 찾는 실재(진여)는
그것이 전혀 아무 것도 없다고 할 것은 아니지만,
그것을 끝내 어떤 주체가 얻을 도리가 없고
그래서 무엇이 있다 없다. ~이다 ~ 아니다 ~과 같다 ~과 다르다 등등으로
분별할 도리도 없고
언어로 표현할 도리도 없다고 제시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일단 논의릏 하기 위해
그런 내용을 실재(진여)라고도 표현하고
그 상태를 공하다라고 표현한 가운데
살펴 나가는 것이다.
이런 사정으로 그처럼 언어로 본래 표현하고 분별할 수없는 내용에 대해
일단 명칭을 붙여 그렇게 제시하는 것을
가명, 안립, 발기, 시설, 건립이라고 표현함을 이미 제시했다.
그런데 일단 여기서도
위와 같은 하나의 배경화면을 일단 그런 실재라고
제시해 놓는 것이다.
이제 그런 상태에서 자신이 눈을 뜨니
위와 같은 모습을 얻었다고 가정하자.
눈을 뜨면 자신의 모습의 일부나
다른 외부 사물의 모습을
보게 되는 것이다.
그렇게 눈을 뜨는 순간 마음에서 얻게 되는 내용을
감각현실이라고 또 명칭을 붙이는 것이다.
그런 가운데 또 자신이 생각하기를
자신이 평소 좋아하는 아름다운 여인을 또 생각한다고 하자.
이제 이런 상태에서 이것을 모두 마음에서 얻어
합쳐 놓고 대하면
결국 위와 같은 형태가 되는 것이다.
비유이므로 잘 보아야 하는데
그런 가운데
자신이 생각한 그런 아름다운 여인이
저런 곳에 저와 같이 있다고 여기는 것이다.
그래서 감각현실에도 그런 내용이 그처럼 있고
실재에도 그런 내용이 그처럼 있는 것이어서
그래서 그 내용은 실답다고 여기고
그에 대해 집착을 갖고 임하고
그에 바탕해
또 생각하고 말하고 행위하고 자세를 취하는 등의 업을 행하면
그로 인해 다른 layer 층이 변화가 되고
그것이 그렇게 각 layer 를 합쳐놓고
그런 망상을 전개하는 상태에서는
곧 생사고통을 받아나가는 상태가 되는 것이다.
그래서
번뇌 - 업 - 고 [혹-업-고]
이런 관계가 여기서 제시되는 것이다.
불교전문용어를 빌려 표현하면
변계소집상을 일으켜 이에 집착한 가운데
업을 행하여 의타기상을 변화시키면
그에 의해
지옥 아귀 축생 인간 아수라 하늘이라는
3 계 6 도에서
그런 형태로 생사고통을 받아나가게 된다.
이런 문제를 여기서 지적하는 것이다.
경전에서 해당 부분을 복사 인용하면 다음과 같다.
....
의타기의 자성과 원성실의 자성 위에서
변계소집의 자성을 집착하니,
이러한 인연으로
오는 세상의 의타기의 자성을 일으킨다.
이 인연을 말미암아
번뇌잡염(煩惱雜染)에 물들며,
혹은 업잡염(業雜染)에 물들며,
혹은 생잡염(生雜染)에 물들어
나고 죽는 가운데서
오래도록 헤매고
오래도록 굴러다니며
쉴 사이가 없고,
혹은 나락가(那落迦-지옥)나 방생(傍生-축생)이나 아귀(餓鬼)나
천상이나 아소락(阿素洛)이나 혹은 사람 가운데
태어나 온갖 괴로움을 받는다.
...
그리고 그 원인이
바로 이처럼 각 영역의 내용을 포개어서
하나의 영역에서 얻어진 내용을 가지고
그것이 다른 영역에서도 그처럼 그대로 있고
그래서 그것이 진짜이고 실답다고 여기면서 집착을 갖고
대하는 것이 문제점인 것이다.
그러므로 이것을 시정해야 한다고
제시하는 것이다.
처음 현실을 대할 때 여기에
자신이나 자신의 손이나 소리나 있고
그래서 손을 마주치면 소리가 생긴다.
그래서 생멸이 있다
자신의 생사도 있다 이런 등등으로 분별하는 것은 망상분별이어서
이것을 시정해서 그런 망상분별과 집착을 제거해야 한다고 할 때
그러나 동시에
각 존재 영역 (레이어)에 들어 있는 원 내용은
또 본래 그런 문제가 없는 것임도 함께
잘 관해야 하는 것이기도 하다.
결국 공한 실재(원성실상)은
비록 진짜라고 할 참되고 영원불변하는 본체는 없는 것이지만, [무아, 무자성, 인무아, 법무아, 승의무자성]
그러나 전혀 아무것도 없는 것은 아니며
다만 그 내용을 직접 한 주체가 얻지 못하는 형태로
그러그러하게 '있다'고 할 수 있는 것이기도 하다.
그렇지만, 그 실재는
그것이 모든 존재의 본 바탕이라는 의미에서 실재나 진여라고 표현하지만,
그러나 그 안에 어떤 진짜가 있는 것이 아니어서 [무아, 무자성]
역시 실답게 있다고 할 것이 아닌 것이다.
그러니 이것을 무엇이라고 보는가하면
현실에서 문제삼는 생사고통을 놓고 보면
적어도 그런 것은 얻을 수 없고
그래서 그런 것은 아닌 그 무엇인 것이다.
수행자는 본래 생사고통을 문제삼는 것인데
이 실재라는 영역은 일단 그런 것은 아닌 그 무엇인 것이다.
감각현실의 영역도 사정이 마찬가지다.
현실에서 눈을 뜨면 각 부분을 생생하게 구분되는 색상으로 얻는 것이고
귀로 대하면 소리도 그렇게 생생하게 얻는 것이다.
그래서 그러그러한 내용을 얻는 것인데
그렇지만, 여기서 지적하는 것은
그처럼 얻는 그런 내용은
일단 본 바탕의 실재의 지위에 있는 실재내용도 아닌 것이고
또 한편
그에 대해 각 부분이 무엇무엇이라고 생각하며
그런 것이 거기에 있다고 생각하고 그것을 대하지만,
그러나 그런 내용은 거기에서도 얻을 수 없다고 제시하는 것이다.
그래서 감각현실이란
비록 현실에서 얻는 것처럼 그렇게 생생한 것이지만,
실재의 내용도 아니고
자신이 문제삼는 생사고통을 얻을 수 없는
그러그러한 것일 뿐이다.
또 관념분별의 영역도 사정이 마찬가지다.
한 주체가 감각현실을 얻고 그에 대하여
관념분별을 일으키거나
또는 자체적으로 다른 관념을 대상으로 관념분별을 행하거나
이들 관념분별은 하나같이 실재의 지위에 있는 내용도 아닌 것이고
또 그 안에 감각현실에서 얻는 내용도 없는 상태의 내용들이어서
하나같이 실답지 않은 것이다.
그래서 역시 비록 그 관념분별로
생사 고통이나 이런 저런 것을 모두 분별을 행한다고 하지만,
그 관념분별 내용 자체만 놓고 살피면
이 역시 실다운 성품이 없는 상태의
그러그러한 것들인 것 뿐이다.
그래서 현실에서 생사 고통을 겪고 문제삼을 때
이 각 영역의 내용은
하나같이
전도망상상태에서 문제삼는 그런 생사고통을
실답게 얻을 수 없고 진짜라고 할 내용도 없는
'그러그러한 것'들인 것뿐으로서
본래 고요하고 본래 청정한 니르바나의 상태라고
제시하게 되는 것이다.
그런데 이 각 내용을 다 겹쳐 합쳐 놓고
망상을 일으켜서
그런 내용이 각 영역에 그처럼 실답게 있다고 여기고
집착을 일으켜 대하면
그것은 앞과 같은 관계로 그 상태로 계속
각 세계를 묶여 돌아다니며 생사고통을 받게 하기에
문제라고 제시하는 것이다.
그러니 이 부분이
생사 고통과 니르바나의 경계선인 것이다.
그래서 각 영역 부분을 올바로 관하면
생사고통을 받는 현실에서 벗어나
그 번뇌의 묶임으로 사역을 당하고 고통받는
상태에서 풀려날
해탈의 문이 각기 있는 것이기도 하다.
실재 영역과 관련해서는
모든 존재의 본바탕이라고 할 그런 실재가
그처럼 무아 무자성이어서
진짜가 없고 공하고
현실에서 문제삼는 그런 생사 고통이나 생멸을
일체 얻을 수 없다는 사실을 잘 관함으로써
공해탈문을 찾을 수 있고
감각현실 영역에서는
그에 대해 자신이 생각하는 그런 내용이
그 부분에 본래 얻을 수 없다는 사정을 잘 관함으로써
무상 해탈문을 찾을 수 있고
관념분별 영역에서는
자신이 그런 관념분별을 행하여
만일 좋다고 보는 그런 내용이 있다면
좋을 텐데라고 생각하면서
만들어 내는 온갖 망상속 희망을 제거하고
그에 바탕해 행하는 업도 중지함으로써
앞과 같은 혹(전도망상,번뇌, 집착)-업-고의 관계로
고통을 받는 상태로 묶여 무한히 헤메 다니는 상태에서
벗어나오는 무원무작 해탈문을 찾아낼 수 있는 것이다.
그림이나 사진처리할 때
레이어를 통해 작업하는 방식을
설명한 그림인데
현실에서 각 내용을 얻고 관념분별을 할 때는
곧바로 그 내용을 통해
그 내용이 각 내용에 다 그대로 있는 것이라고
망상을 일으키면서 곧바로 집착해
머물게 되기 마련이다.
그러니 이 각 내용의 정체를 올바로 관하고
각 레이어의 내용을 놓고
잘 검토하면서
이 각 내용을 접착된 상태로
대하지 않는 것이 중요한 것이다.
합쳐 놓고 대하면
실답게 있지 않는 것을
실답게 있다고 대하게 마련인데
그러나 각 영역의 내용은
전혀 내용이 아무 것도 없는 것은 아니지만,
문제삼는 그런 생사고통이 '실다운 형태로' 그렇게 있는 것은 아닌
그러그러한 것인 것이다.
바로 이 측면에서
그 각 영역의 각 내용이
본래 고요하고 극히 청정한 니르바나의 상태라고
제시하는 사정이 있는 것이다.
그것은 또 한편 그 각 내용이
문제삼는 생사고통을 얻을 수 없는 것이기에
청정한 니르바나라고 제시하는 것이고
그것이 참된 진짜의 내용이라고 제시하는 것은
역시 아니다.
그것이 곧 무상 고 무아 무자성 열반적정 공과
관련된 핵심 내용이기도 한 것이다.
그래서 손뼉을 치면 소리가 난다고 이해하는 것은
이런 상태에서 이 각 영역의 내용을
합쳐 놓고 그런 분별을 행하면서
그 내용이 바로 다른 영역에서도
그처럼 실재하고 실답게 있다고
집착하는 가운데 문제삼는 것임을 잘 이해해야 하는 것이다.
그런데 현실에서 살아가는 생명 대부분이
바로 이런 상태에서 무한히
번뇌 망상에 묶여서 사역을 당하고
3 계 6 도를 헤메 돌아다니는 상태에 있기에
수행자도 바로 이런 상태에 들어가
중생제도를 위한 수행을 하는 사정이 있는 것이다.
그래서 결국 수행자는
중생이 행하는 방식으로 임하는 것은 아니지만,
수행자가 현실에서 행하는 수행은
역시 이들 내용을 함께 겹쳐서
있다고 보게 되는 내용을 놓고
그런 수행과 수행목표를 성취한다는 것이 되는 것이다.
본래는 그런 내용을 얻을 수 없고
그런 중생도 얻을 수 없는데
그러나 이상하게
수행자는 그런 가운데 그렇게 관하면서
상을 일으켜 상을 취하고 머물지 않는 가운데
무량한 중생을 제도하고
보시도 행하고
수행을 하고
그래서 무량한 복덕과 지혜를 성취하고 얻는데
정작 그 수행자는 그 복덕에 집착하지 않고
그 복덕을 받지도 않는다.
그러나 여하튼 그렇게해서
무량한 복덕과 지혜를 성취하고
무량한 중생을 제도하고
불국토를 장엄하고
성불하게 된다.
이런 내용은 이상하게 여겨질 지 모르지만,
기본적으로 현실 상황이
위와 같은 구조로 되어 있기에
그런 것이라고 이해할 수 있는 것이다.
현실에서 손뼉을 마주치면 소리가 난다는 관계를
놓고
위와 같이 살폈는데
그것은 현실에서 자기 자신이나 자신의 것으로
여기고 대하는 내용도 사정이 같다.
>>>
존재를 문제삼는 각 영역의 내용이
위와 같다고 할 때
현실에서 문제삼는 생사고통이나 생멸은
본래 실답게 존재하는 것이 아님을
제시한 것이다.
그래서 그 모든 생사현실은
본래는 청정한 니르바나라고 제시하는 것이기도 하다.
생사 즉 열반
이런 내용이나
연기 즉 공
색불이공 공불이색 색즉시공 공즉시색 수상행식 역부여시
이런 내용이 모두 이와 관련되는 것이다.
그런데 그런 사정을 올바로 밝게 비추어 보지 못하면
본래 현실이 청정한 니르바나의 상태인데도 불구하고
그 반대 방향으로
청정한 니르바나 즉 생사고통 현실
즉 열반 즉 생사 => 생사고통
이렇게 취하여 머물게 되는 것이라고 이해할 수 있다.
이는 생사 즉 열반 => 청정한 니르바나
이렇게 취하여 현실에서 여여하게 머무는 것과는
극과 극의 정반대 상태가 되는 것이다.
앞 측면은 그래서 그 생사 일체가 고통이라는 일체개고의
내용이 되고
뒷 측면은 생사현실 일체가 곧 니르바나라고 하는
열반적정의 내용이 되는 것이다.
그래서 반야심경에서 제시하는 것처럼
수행자가 기본적으로
이런 각 존재의 내용을 실상을 꿰뚫어 깊게 관찰하는
지혜인 반야바라밀다 수행을 깊게 행하여
현실의 일체가 곧 그 실재가 공하다는 사정을 잘
관하여야
생사현실에서 받는 일체의 고통과 재난을
쉭하고 벗어나 건너가게 된다고 제시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이 자신의 힘으로 잘 안되면
선배 수행자인 대력보살님인
관자재보살님의 명호를 념하면
또 관자재보살님이 또 그런 수행자를 그 상황과
그 상대에 맞추어 모습을 바꾸어 나타나
도와준다고 경전에 제시되고 있는 것이기도 하다.
반야심경에서
그래서
관자재보살 '행심'반야바라밀다시 '조견' 오온개공 도 일체고액
이 한 내용이 갖는 의미는 대단히 큰 것이다.
본래의 상태가 수행자가 이렇게 관하던
저렇게 관하던 차별이 있다고 할 것이 아니지만,
그러나 그 주체의 입장에서는 그렇게
올바로 관하고 대하는가
아니면 전도된 망상분별을 일으켜
그에 집착되어 임하는가에 따라
실답다고 할 것은 아니지만,
현실에서 생생하게 얻는 내용에서
큰 차이가 있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그것이 수행과 관련해
대단히 중요한 의미를 갖는 것이다.
일반적으로 눈을 떠 자신이 자신이라고 보는
내용은 실다운 자신이 아니고
그것은 매 순간 허물어지고 변화해가는 것으로써
마음에 들어온 그런 손님과 같은 내용이지만,
망상을 일으킨 바탕에서는
바로 그런 것을 놓고
그것이 늘 파악되고 [상]
그것이 자신의 뜻대로 변화시킬 수 있는 자신의 부분이고 [락]
그리고 그것이 외부 세계를 대상으로 삼아 내용을 얻는 주관이고 [아]
그래서 자신이 좋고 깨끗하다고 보고 [정]
그런 부분이 곧 자신이라고
집착을 일으켜 대하는 것인데
그것이 바로 망상 속에서
신발에 붙어 있는 껌조각과 같은 것을 붙들고
자신이라고 여기면서 임하는 상황과 같은 것이다.
그래서 이 부분에 실다운 자신이 없다는 것을
잘 이해하고
아상을 제거하는 것이 수행의 기본인 것이다.
그런데 그런 아상을 제거하고
무아, 무자성, 공을 관하는 주체는
도대체 현실에서 어떤 존재이기에
그렇게 관하고 그런 수행을
무한하게 이어나간다고 제시하는 것인가.
그것은 또 반대로 말하면
그렇게 올바로 관하지 못하고
망상과 집착을 갖고 업을 행하면
지옥 아귀 축생계를 비롯한 3 계 6 도에서
생사고통을 무한히 받으며 묶여 헤메 돌아다닌다는
주체는 또 무엇인가 하는 문제와
사정이 같다.
그런 주체는 자신이 자신의 눈으로 보는 자신의 모습이나
거울을 보고 비춰보는 그런 상에
있는 것이 아니라고 제시하는 것이기도 하다.
자신이 눈을 떠서 세상의 모습을 마음에서 얻게 될 때
그 마음이
그 마음이 얻어낸 모습안에 자리잡고 있는 것이 아닌 것이다.
비유하면 그릇안에 물건을 담을 때
그 그릇이 그 그릇안의 물건에 들어 있는 것이 아닌 것과
사정이 같다.
그래서 이는 현실에서 얻는 내용 일체가
마음 안의 내용이라는 사실 부터 잘 살펴야 한다.
그리고 마음과 마음안에 얻어진 내용은
또 이미 살핀 실재나 감각현실과의 관계처럼
그 관계를 잘 살펴야 하는 것이기도 하다.
눈을 뜨면 마음으로 어떤 모습이나 색깔을 본다고 하면
그 색깔은 마음에 얻고 머무는 내용인 것이다.
그런데 마음 그 자체가 그대로 이런 내용인가?
그렇지 않다고 해서
마음을 떠나서 이런 내용이 있는 것인가.
이런 관계를 잘 살펴야 하는 것이다.
그래서 자신의 마음이 감각현실로 얻어내 내용을 놓고
여기에서 일 부분은 자신이고
나머지는 외부 세계의 내용이라고 분별하는 것부터
잘못된 전도 망상의 한 내용인 것이다.
그리고 더 나아가
마음 가운데에서
시각으로 얻어낸 일부분의 내용이
청각으로 얻어낸 일부분의 내용을 만들어 내고
생겨나게 한 것이다.
이렇게 이해하는 것도 그런 전도망상의 연장선에
있는 분별인 것이다.
그런데 여기에 그렇게 자꾸 분별하게 되는
사정이 나름 있다고 또 제시하는 것이다.
그것은 조금 더 복잡하지만,
그렇게 눈을 떠서 보는 내용을 놓고
그런 분별을 행하는 것에는
그렇게 눈을 떠서 보고
귀로 대하는 내용들이
원래 그런 형태로 얻어지게 된
그 본 사정을 또 살펴야 하는 것이다.
공연히 감각으로 얻는 내용을 놓고
분별을 행하는 정신이 그런 분별을 행하는 것은 아니고
그 이전에 근본정신이 그 이전에 행한
번뇌와 업의 장애로
이번 생에 이번 생명형태로 삶을 시작하는 단계에서
일정한 부분을 자신이라고 집착하면서
정신과 생체를 분화 생성시켰던
그 내용부터 다시 살펴야 하는 문제가 되는 것이다.
결국 그것은 근본정신과
그로부터 파생되어
자신에 대한 망상분별과 집착을 처음 일으켜서 임한
제 7 말나식의 관계부터 살펴야 하는 문제가 되는 것이다.
그러나 여하튼
이런 각 내용은 그렇게 시설을 해서
자세히 또 살펴나가야 할 문제이지만,
여하튼 그 각각의 정체는
실재에서도 불생불멸 불구부정 부증불감인 것이고
현실에서 분별을 할 때도 역시 무시무종 불생불멸의 상태인 것이다.
그래서 결국 수행자나
일반 생명이나
본래는 청정한 니르바나의 상태인데
망상을 일으켜 임하면 무한히 삼계육도에서
생사고통을 겪는다고 할 때
매생마다 매 생의 다른 생명형태로 모습을 취해
그런 고통을 겪고 나가는 것도 바로 그런 문제이고
또 수행자가 그러한 사정을 올바로 관하고
그런 생사현실이 본래 청정한 니르바나임을 관하고
그런 바탕에서 집착을 제거하고
여여하게 무한히 수행하여
무량한 복덕과 지혜를 구족하여
중생을 제도해나간다는 것도
바로 그런 차원의 문제인 것이다.
그러나 현실의 망상을 바탕으로 해서
자신이 자신이라고 평소 보는 모습이 자신이고
또 자신이 남이라고 평소 보는 모습이 남이라면
예를 들어
연구실에서 생활하다.
이미 한 5 년전부터 어느 순간
갑자기 없어져 그 형체를 이제는 도저히 찾아낼 수 없는
어린 인턴연구원도 그런 의미라면
이미 죽어 없어진 것이라고 보아야 하는 것이기도 한 것이다.
https://lh3.googleusercontent.com/-ULEWE_ZC2bI/VZCUgxWQiKI/AAAAAAAAFHo/BmULPV_wSaQ/w1035-h1340-no/DSCN8069-cut.jpg
어느 순간 연구실에서 사리진 인턴연구원으로서
현재는 수색을 포기한 상태인데
그러나
현재 다른 인턴연구원은 계속 게임만 하고
연구실에서 시끄럽게 하고
심지어 본인이 음악을 감상할 때마다
소리 좀 줄여달라고 요청을 해서
가능하다면 현재 인턴연구원을 쫒아내고
이 행방불명된 과거 인턴연구원을
다시 찾아내고 싶은
마음이 간절하기도 하다.
그런데 그렇게 자신이나 남의 정체를 파악하고
대하는 자세가 바로
생사현실에서 자기자신이나 남에 대해서
잘못 망상분별을 일으키고 나서
그에 집착하는 문제인 것이기도 한 것이다.
시작도 끝도 없이 무시무종의 시간대에서
무량하게 수행하는 주체는
그런 것을 떠난 것도 아니지만,
또 그런 것을 의미하는 것도 아닌 것이다.
결국 이 문제도
a 가 무언가하는 문제와 같은 성격을 갖는 문제인 것이다.
그래서 그 a 의 자리에
문제삼는 '자신'을 놓고 그 정체를 살피면
되는 문제이기도 한 것이다.
결국 현재의 인텬연구원은 가끔
저 사진이나 지금 자신이나
같다고 주장하는데
이것이 한편으로는 엉터리 망상분별이면서도
그러나 무언가 근거가 있다고 하는 것은
앞에서 제시한 근본정신과 그 관계를
또 다시 자세히 살펴야 할 문제가 되는 것이기도 한 것이다.
일단 여기까지 살피고
쉬기로 한다.
위에서 제시한 내용 가운데
경전에 관련된 내용을 함께 살피는 것이
훨씬 도움이 된다고 본다.
본인이 아무리 내용을 제시해도
기본적으로 독식(dog-shit)철학가의 궤변적 주장이거나
구라성 발언이라고 보기 쉬운데
그대로 경전 내용을 뽑아 제시하면
불교를 이해하는 입장에서는 일단
적어도 그렇게 보지는 않기 때문이다.
○ [pt op tr] 경전에서 관련 내용
반야바라밀다심경
觀自在菩薩 行深般若波羅蜜多時 照見 五蘊皆空 度一切苦厄
관자재보살 행심반야바라밀다시 조견 오온개공 도일체고액
舍利子 色不異空 空不異色 色卽是空 空卽是色 受想行識 亦復如是
사리자 색불이공 공불이색 색즉시공 공즉시색 수상행식 역부여시
舍利子 是諸法空相 不生不滅 不垢不淨 不增不減
사리자 시제법공상 불생불멸 불구부정 부증불감
是故 空中無色 無受想行識 無眼耳鼻舌身意 無色聲香味觸法
시고 공중무색 무수상행식 무안이비설신의 무색성향미촉법
...
K0154V10P0717c02L; 一切故善男子我依如是三種無自
선남자여,
나는 이러한 세 가지 무자성성의 밀의(密意)에 의지해
일체 법이 모두 자성이 없다고 말하노라.
승의생이여,
마땅히 알라.
나는 상무자성성(相無自性性)의 밀의에 의지해,
일체 법이
생함도 없고
멸함도 없으며
본래 고요하여
자성이 열반이라고
말한다.
무슨 까닭인가?
만일 법의 자상(自相)이 도무지 있는 것이 없으면
곧 생기는 것이 없을 것이요,
생기는 것이 있지 않으면
곧 멸하는 것이 있지 않을 것이요,
생함도 없고
멸함도 없으면
곧 본래 고요할 것이요,
본래 고요하면
곧 자성이 열반이다.
그 가운데는 다시 그로 하여금
열반에 들게 할 것이
아예 조금도
없는 까닭이다.
그러므로
상무자성성의 밀의에 의지해,
일체 법이 생함도 없고
멸함도 없으며
본래 고요하여
자성이 열반이라고
말한다.
선남자여,
나는 또한 법무아(法無我)의 성품으로 나타난 것인
승의무자성성의 밀의에 의지해,
일체 법이
생함도 없고
멸함도 없으며
본래 고요하여
자성이 열반이라고
말한다.
무슨 까닭인가?
법무아의 성품에 의지해 나타난
승의무자성성은
언제나 어느 때나
모든 법의 법성(法性)에 머무는 무위(無爲)이니,
일체 잡염(雜染)과 어울리지 않는 까닭에,
언제나 어느 때나
모든 법의 법성에
머무는 까닭에
무위이다.
무위인 까닭에
생함도 없고
멸함도 없으며
일체 잡염과 어울리지 않는 까닭에
본래 고요하며
자성이 열반이다.
그러므로
나는 법무아의 성품으로 나타난
승의무자성성의 밀의에 의지해,
일체 법이
생함도
없고
멸함도
없으며
본래 고요하여
자성이 열반이라고
하는 것이다.
또 승의생이여,
유정의 세계에서
모든 유정의 무리는
K0154V10P0718a02L; 類別觀遍計所執自性爲自性故亦
따로따로 변계소집(遍計所執)의 자성(自性)을 관찰하여
자성을 삼는 까닭에,
또 그들이 따로
따로 의타기(依他起)의 자성과
원성실(圓成實)의 자성을 관찰하여
자성을 삼는 까닭에
나는 세 가지 무자성성(無自性性)을 세운 것이 아니다.
유정들이
의타기의 자성과
원성실의 자성 위에
변계소집의 자성을 더하는 까닭에
내가 세 가지 무자성성을 세운 것이다.
변계소집자성(遍計所執自性)의 모습에 의지해
모든 유정이 의타기의 자성과
원성실의 자성 가운데
마음대로 말을 일으켜
‘여여하다[如如]’고 하고,
마음대로 말을 일으켜
‘이와 같다[如是]’고 한다.
이처럼 언설(言說)로 훈습하는 마음을 말미암는 까닭에,
언설에 따른 깨달음[隨覺]을 말미암는 까닭에,
언설의 수면(隨眠)을 말미암는 까닭에
의타기의 자성과
원성실의 자성 가운데서
변계소집의 모습을
‘여여하다’고 집착하고
‘이와 같다’고 집착한다.
이처럼
의타기의 자성과 원성실의 자성 위에서
변계소집의 자성을 집착하니,
이러한 인연으로
오는 세상의 의타기의 자성을 일으킨다.
이 인연을 말미암아
번뇌잡염(煩惱雜染)에 물들며,
혹은 업잡염(業雜染)에 물들며,
혹은 생잡염(生雜染)에 물들어
나고 죽는 가운데서
오래도록 헤매고
오래도록 굴러다니며
쉴 사이가 없고,
혹은 나락가(那落迦)나 방생(傍生)이나 아귀(餓鬼)나
천상이나 아소락(阿素洛)이나 혹은 사람 가운데
태어나
온갖 괴로움을 받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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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실에서 눈을 떠 손이라고 생각하는 모습을 보고
또 귀로 소리라고 생각하는 소리를 듣는 가운데
그렇게 생각하는 내용은
감각현실에서나 실재에서 그런 내용을 얻을 수 없다고 하지만,
그러나 왜 여전히 눈을 뜨면 그 부분은 손이라고 생각되고
또 그런 손을 마주치면 소리를 반복해 듣는가.
[...]
그런데 사실 가장 기본적인 설명은
마쳐진 상태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사실 그것만으로도 충분하다고 할 수 있다.
이제 손을 마주치면 소리가 난다고 하는 등으로
엉뚱하게 각 내용을 관련짓는 문제는
또 별개로 자세히 가정적 if 항변 형태로
자세히 살펴야 한다.
[...]
여기에는 우선 다음과 같은 현상이 문제된다.
현실에서 자신이 소중하게 생각하는
인턴연구원이 어느날 더 이상 볼 수 없게 되었음을
알고 행방을 찾아 나선다고 하자.
그래서 어느 유치원에 들어갔는데
개인 사생활이 문제되므로
유치원 선생님이 아이들을 모아 놓고
아이들 다리만 보여주고
그 가운데 인턴연구원에 해당하는 다리가 있는가를
확인하라고 한다고 해보자.
이런 이상한 경우가 현실에 있겠는가만
가끔 군대에서 공연을 할 때
사회자가 군대에 아들을 보낸 어머니를 초청해서
커튼 뒤에 있는 여러 군인들의 소리나
손등만 만져보고 아들을 찾아내게 하는
그런 공연을 본 적이 있는데
그런 상황을 놓고 생각해보면
이해할 수도 있을 것이다.
다리만 보고 인턴연구원을 찾아내거나
손만 보거나 찾아내거나
그런 여러 형태의 실험이 여기서 문제되는 것은
이런 실험이 무언가의 정체를 확인하는 데에 있어서
의미가 있기 때문이다.
사실은 그 안에 찾은 아들이나 인턴연구원이 있다고 해도
이것으로 찾기는 힘들 것이다.
그런데 여기에서 지적하고자 하는 것은
어떤 이던지 그 각 다리를 다 다리라고 본다는 점이다.
또 손은 다 손이라고 본다는 점이다.
이것이 도대체 무슨 문제인가.
한 정지단면을 놓고 살필 때도
그런 현상이 발생하는데
사실은 수많은 다른 사람의 손이나 다리인데
그것을 모두 별 차이가 없는 손이나 다리로
본다는 점이 여기서 지적하고자 하는 한 문제점이다.
원래 사실은 서로 엉뚱하다고 하는
손과 소리를 관련시키는 데에는
바로 이처럼 서로 다른 것을 같은 것이라고
묶어서 관념을 일으키는 작용이 하나 들어 있다는 점이다.
엄격히 보면 이 손과 저 손은 다른 손인데
왜 그것을 같은 손이라고 하는가하면
무엇이라고 답할 것인가.
그런데 사실은 이런 실험에서
엄격히 문제를 삼으면
이 손과 저손이 같은 지 다른지 조차도
분별할 근거나 도리가 없다고 하는 것부터
잘 확인해야 한다.
사정이 그런데
앞과 같이 망상분별을 행하는 입장에서는
매번 똑 같은 형태로
손을 마주치면 매번 같은 손뼉소리를 듣는다고
일단 주장한다는 점이다.
그리고 알고보면
서로 엉뚱한 이 손과 이 소리를 서로 관련시키는 과정에서도
그런 판단이 개입하고 있다는 점이다.
그러나 이미 망상 속에서
감각현실에서 그런 내용을 얻을 수 없는데
그 일정한 부분을 놓고 손이나 소리라고 망상을
일으킨 바탕에서는
이것을 모두 무시하고 그냥 내달리게 마련이다.
그러니 어떡하는가.
수행자도 그런 사정을 이해하고
함께 게속 내달리면서
같이 임하여 그런 중생을 망상속에서
생사고통을 받아 나가는 상태로부터
제도를 해야 하는 것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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